관리 메뉴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61사 無親(무친)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61사 無親(무친)

柏道 2019. 3. 16. 07:39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72 
 
무언가 깊은 보람을 느끼며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당장 이익은 없고,
알아주는 사람은 없어도
천명에 응하여 묵묵히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보니 뿌듯하고 대견하다.
그 일에 잘 쓰임을 받는 뇌와 눈, 손
그리고 모든 지체가 함께 영광을 누린다.
이제 다른 일로 바쁠 나이가 아니다.
스스로 격려하며 나아간다.

이번에는 제 61事 信 1團 義 중에서
다섯번째 부분(1團 5部) 에 대한 말씀이다.
 
信 1 團 5 部 (신 1 단 5 부)
제 61사 無親(무친) 
 
親親屬及親近也(친친속급친근야)라
義無昵親斥疎(의무닐친척소)니
義則雖疎心合(의즉수소심합)하고
不義則雖親必棄(불의즉수친필기)니라 
 
'친(親)이란 친족과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이라
의는 친하다고 가까이하고
친하지 않다고 물리치지 않느니라
의로운 일에는 비록 친하지 않아도
반드시 화합하고
의로운 일이 아니면 비록 친하더라도
반드시 버려야 하느니라' 
 
참 아름다운 말씀들이다.
꿀과 송이꿀 보다 달고,
금 곧 정금보다 귀하다는 시편 기자의 감동을
같이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의에 대한 말씀...
의는 우리 본성이 너무나 좋아하는 속성이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뜻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함에도

스스로 미혹에 빠져 다른 것이 즐거워하는
자신을 발견하면 그게 밉고, 부끄럽고,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뭇잎으로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리려고 하지만 곧 말라 부스러질 뿐이다.
가죽 옷을 지어 입히는 은혜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쓴 모습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그 모습을 회복하는 길은 진리로 새롭게 되어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길 밖에 없다.

이미 거룩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래야 마땅하고, 그럴 수 있다.
'무친' 즉 '친함이 없음'은 '불친' 즉 '친하지 아니함'과
다른 의미다.
친함이 없다는 것은 친함을 초월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까 친하고, 멀고의 구별을
따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무언가 분명한 기준과
원칙이 있어야만 이런 일이 일어난다.
단순히 초월하기만 바란다면
그 또한 '무친'과 친함이 되기 때문에
다시 어긋난다.

수행과 참선, 명상 등의 위험이 여기에 있다.
모든 욕망으로부터 오는 번뇌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그 벗어나려는 것 또한 욕망이 된다.
그 욕망까지 벗어나려면 그 욕망을 벗어나려는
욕망이 또 욕망이 되고....
이렇게 한이 없이 걸려든다.

그래서 진정한 깨달음은
 깨달았다는 의식도 없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럼 그 '깨달았다는 의식어야 한다는 의식'은 또 뭔가?
마음을 비운다, 해탈하여 벗어난다는 말들은
사실은 결과요 열매로 나타난 상태이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욕망의 초월은 진리에 집중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나님이 보이면 모든 것은 사라진다.
마치 빛이 나타나면 어두움은 자동적으로 사라지는 것 같이...

따라서 욕망을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진리로 채우려고 해야 한다.
본문에서도 목표는 '무친'이 아니다.
무친은 의에 집중할 때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가르치면 답답하다.
의를 따르면 차별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의는 나의 기분이나 상태를 따지지 않는다.
오직 하늘의 뜻, 하나님의 진리가 초점이다.
따라서 그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나의 감정과 기분, 이익 등은 다 뒤로 물리게 되어 있다.
의로운 일이면 그 일을 위하여서는
누구라도 화합할 수 있다.
반대로 의로운 일이 아니라면 아무리 친해도 버린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는 보이는 압력,
보이지 않는 눈치가 너무 강하고 많다.
그래서 의로운 일임을 알고도 두려워서
소속한 조직을 따르고, 영웅을 추종하며,
사상과 교리를 옹호한다.
반대로 의로운 일이 아님에도 마찬가지
두려움 때문에 그 일을 선택하고 산다.
강한 속박과 압력이 있는 가운데서
의를 선택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어렵다.
그로 인해 돌아올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고통과 피해를
감당하는 것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의를 버리게 되면
결국 자신은 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
작은 일부터 선택과 결단을 잘 내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몸에 배도록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그 외에 다른 길이 어디 있을까?
이미 불의의 길을 가고 있는 중에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 본들,
잠시 거리끼는 마음 해결하려는 얄팍한 시도
밖에 더 되겠는가?
그런 자들의 기도와 기도 시간을 보라.
열정도 없고 시간도 짧다.
기도할 면목이 없기 때문이다.

의를 선택한 자의 기도는 뜨겁고 간절하다.
의를 선택함으로 올 손해와 고통때문에
두려움에 흔들리는 마음을 잡으려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찾고 매달리는 것이다.
그러한 자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
하나님의 확신이 그 마음에 닿게 되고
천하에 두려움이 없어지게 된다.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런 기도를 했다.
두려움과 번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의를 구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다.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질 정도로...
흔들리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을 땀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평화로왔고,
덤덤하게 십자가로 나아갔다.
예수의 힘은 겟세마네에서 왔다.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고, 그 뜻에 대한 자신의
선택을 확신함으로 그는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종교인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의와는 전혀 상관 없다.
욕심과 두려움으로 거저 도와달라고 졸라대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분위기 따라, 성격 따라 제법 열심을 내는 것 같으나
그들의 기도를 보라.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다.
의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먹고 마시는 일, 입고 자고 하는 생존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 조차도 뒤로 밀린다.
이게 우리가 우리 삶에서 발견해야 할
하나님 자녀의 아름다움이요 영광이다.
입에서 이런 저런 핑계가 나오고,
불순종에 대한 변명이 많은 사람은
오늘 말씀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단호하게 자르는 것이 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