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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47사 大孝(대효)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47사 大孝(대효)

柏道 2019. 3. 13. 14:14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55
 
성의 마지막 줄기인 6체까지 왔다.
366사 중 47사이니 약 1/8정도 온 것이다.
꼭 느낌이 산티아고 순례길 걷는 느낌이다.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800km와
8리가 연결되고, 각 리마다 주로 5,6개의
줄기가 있는데 매일 약 5-6시간씩 걷는다.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기간도 약 35일이니 하루 10구절씩
묵상하면 된다. 가서도 연구를
계속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모르겠다.
이제 誠의 6번 째 줄기 6체로 넘어간다.
6체의 주제는 효에 대한 것이다.

誠 6體 (성 6체) 제 47사 大孝(대효)
여기에는 7가지 쓰임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安衷(안충) : 부모 마음을 편안하게 함
2. 鎻憂(쇄우) : 부모의 근심을 막음
3. 順志(순지) : 부모의 뜻에 순종함
4. 養體(양체) : 부모의 건강을 돌봄
5. 養口(양구) : 부모의 식사를 돌봄
6. 迅命(신명) : 부모의 명령에 빠름
7. 忘形(망형) : 내 몸을 잊음 
 
먼저, 6체의 주제인 大孝(대효)부터
풀이를 시작한다. 
 
大孝者(대효자)는
至孝也(지효야)라
一人之孝(일인지효)가
能感一國之人(능감일국지인)하고
又能感天下之人(우능감천하지인)하나니
非天下之至誠(비천하지지성)이면
焉能至此(언능지차)리요
人感則天亦感之(인감역천역감지)니라 
 
'대효란 지극한 효성을 말하느니라
한 사람의 효가
능히 온 나라 사람을 감동하게 하고
나아가 능히 천하의 모든 사람을
감동하게 하느니라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리요
사람이 감동하면
하늘 또한 감동하느니라' 
 
오늘날과 잘 어울리지 않는 말씀 같다.
지금 이 시대에 '효'라니...
대가족 제도가 해체된지 오래고,
생존경쟁에다가 요즘에는 자식들 뒷바라지만 해도
힘겹기 그지 없는데 거기다 노부모까지
정성껏 모시라는 말을 하면 도대체 어쩌자는 건가?
솔직히 나 같은 경우 20년 이상을
타국에 나와 살다보니 부모형제에 대한
마음이 아련해진 느낌이다.
그래서 늘 한국에 있는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있다.
특히 어머니 살아계실 때는 매주 전화로
안부를 묻고 했는데 어머니 돌아가시니
모든 연결고리가 약해져 버렸다.
그래서 '효'에 대한 말만 나오면 마음이 무겁다.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 상황에 맞지 않는 가르침이니
구식으로 폐기를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말씀을 토대로 현 세태를 비판하며
다시 옛 가르침으로 돌아오라고 해야 할 것인가?
상당히 곤란한 질문이요 도전이다.
계속 하늘에 대한 정성을 말하더니
갑자기 부모에 대한 효로 내려오니 당황스럽다.
하지만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제대로 그 본질적 의미를 찾고,
오늘날 적용가능한 말씀으로 풀이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부모를 섬기는 것,
이 둘은 사실 둘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보이는 땅의 부모를 섬기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함을 성경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결론을 '효도'로 내리는
것은 본질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
아무리 효도가 중요해도 효도는 결과로 나타나야지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일 효도가 목적이 되면
모든 진리는 결국 인간간의 윤리와 도덕차원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렇게 나가면 자칫 하나님을
인간을 위한 존재로 오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말과,
인간이 우주와 역사의 중심이다는 말은 의미가 다르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능력과 사랑이
흘러 넘쳐 인간에게로 부여되는 것이지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고,
인간의 행복이 하나님의 뜻인양 오해하게 되면
마냥 교만해지고, 질서가 뒤집어지고 만다.
따라서 말씀이 효도를 강조하고,
부부의 도리, 부모 자식관계 등에 대해
중한 지침을 내린다고 해서
인간중심으로 가게 되면 그것이 또
자아가 미혹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는 보이는 하나님이다.
기원도 그렇고, 보호와 양육, 가르침 모든 부분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자녀는 부모를 하나님처럼 생각하지 않으면
그 모든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그런 차원에서 효도가 강조될수록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더 잘 함양되고
발전할 기회가 생긴다.
그래서 어릴 때 효도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이제 성장하여 젊은이가 되었을 때는
효도의 적용이 달라진다.
사실 이 때는 부모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즉 다른 교육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어릴 때 처럼 무조건 순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모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거니와
하나님에 대한 의식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금 교회가 이러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교인들의 의식수준이 많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냥 믿으라'는 식이다.
그러면서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무시하고
지시하려고 하니 반발이 거센 것이 당연하다.
그러면 또 '어른들을 몰라본다. 권위를 무시한다'고
젊은이들을 비난하는데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 자녀가 좀 성장했을 때
최대한 자유를 허용하며, 스스로 깨닫고
자립하여 하나님 자녀다운 모습을 갖추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있으시기 때문에
스스로 급하거나 불안하실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인간 부모는 그렇지 않다.
먼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의 뜻을 따라 자녀를 대해야 하는데
자기 불안, 자기 욕심에 입각하여
자녀의 인격까지 침해하니 거기서 효도를
기대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이 시기에 자녀들에게 요구되는 효도는 무엇일까?
듣는 것이다.
머리가 좀 컸다고 다 아는체 하고
부모의 말을 무시하고 반박하면
그것은 아주 위험한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아무리 제가 똑똑하고 더 아는 것 같아도
인생의 경륜과 경험은 무시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녀는 성장했어도
부모에 대한 공경심을 잃지 않고
그 은덕을 생각하며 성심으로 섬겨야 한다.
이런 증거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 자녀가 하나님을 알고 섬기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효를 강조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비록 자기 자녀들을 키우고 양육하는 일에
바빴어도 자녀가 이제 성장한 만큼
부모가 연로하여 돌봄이 필요하니
그리로 방향을 옮겨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연약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늙고, 병들고, 약한 상황에 있는
자를 정성껏 돌보는 것이 하늘의 뜻이며,
그 중에서도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노부모를 우선적으로 잘 살피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효도는 어릴 때나 성장했을 때나
변함없이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