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42사 待天(대천)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50
감탄과 흥분이 점점 가라 앉고
진지해 짐을 느낀다.
말씀이 귀에 음악같고
입에 꿀 같다고 편하도 쉽다는 말이 아니다.
자아가 착각을 일으켜 듣기에 좋고,
이해가 된다고 그것을 자기 수준이라
여기면 심한 낭패를 만나게 되어 있다.
듣기 좋으면 고통을 감수하고
행하여 자기 것으로 삼으라는 말이지
보고 들어 즐기라는 의미가 아니다.
정성에 대한 공부를 재미있다고 하니
테스트가 바로 내려온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낭만이 아니다.
듣고 보는 자들에게는 멋있고
아름다와 보일지 모르나 정작 현장에
있게 되면 끔찍한 고통과 좌절의 연속이다.
안 가봐도 아는 것이
해병대 장교후보생 훈련 시절,
약 3개월 그런 기간을 지내 봤기 때문이다.
당시 정말 고생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당시 매일 아침 새힘이
내려오는 체험을 했다.
그 때는 무엇이 그랬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겠다. 산티아고 순례의 관건은
짐이 가볍고, 신발을 잘 선택하고,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것에 있지 않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말씀이 나를 붙들고, 빛을 비추어 인도하며,
마음과 몸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데 있다
그러니까 벌써부터 순례는 시작했고,
그 장소와 환경만 바꾸고,
몸의 동작만 다르게 할 뿐이다.
말씀의 빛을 더 강하게 체험할 기대를 한다.
이번 순례길의 의미가 주어졌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신을 찾고, 인생의 의미를 찾고 하는
차원은 지났다. 이번에 기대하고,
추구하는 것은 내 일생을 끌고 다닌
두려움과의 직면이요, 싸움이다.
두려움 때문에 비굴과 거짓, 낙담 등이
나의 삶에 잔뜩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으로 두려움을
정복하고 돌아올 것이다.
산티아고 길을 십자군도 걸었고,
왕과 장군들도 그 길을 걸었다 한다.
특히 나폴레옹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그 길로 정복에 나섰다니
제대로 기회가 왔다.
내게 용사다운 용기가 필요하다.
서론이 길었다.
감동 오는 대로 가다 보면 이렇다.
말씀으로 간다.
이번에는 제 42事 誠의 5체 중
다섯번째 쓰임(5체 5용) 待天(대천)에
대한 말씀이다.
誠 5體 5用 (성 5체 5용)
제 42사 待天(대천)
待天者(대천자)는
待天必有感應於(대천필유감응어)
至誠之人也(지성지인야)라
無待天之深則(무대천지심즉)
無信天之誠(무신천지성)이니
待之無限而(대지무한이)
誠亦無限(성역무한)하여
雖經感應(수경감응)이라도
自不已信天之誠也(자불이신천지성야)니라
'하늘을 기다린다 함은
정성이 지극한 자에게는 하늘의 감응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하늘을 믿는
정성이 없다는 것이니라
기다림도 한이 없고
정성 또한 끝이 없어야 하니
비록 감응이 지나간 후에라도
스스로 하늘을 믿는 정성을
중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때로 말씀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랬다, 저랬다 모순을 보이는 까닭이다.
앞에서는 바라는 바가 없어야 참 정성이라고 해 놓고
여기서는 기대하는 마음이 약하면
정성이 없다고 말씀한다.
얼핏 헷갈리고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둘은 모순이나 상치된 말씀이 아니다.
알고 보면 쉽게 정리가 된다.
멀리서 보면 두 줄이 교차되고, 얽힌 것 같으나
가까이서 보면 정확하게 제 길로 가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다.
관점의 차이가 이런 역설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앞에서 바라는 바가 없어야 한다,
그것 조차 잊어야 한다고 한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그래야 한다는 입장이다.
무엇이든지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정성을
흐리게 한다면 다 방해가 된다는 것이고,
참된 정성에 헌신하지 못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돌처럼 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하여
추구해야 할 대상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다림과 기대함'은
관점이 다르다.
나는 하나님께 집중하지만, 하나님은 반대로
나에게 집중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만 집중하라는 말씀의 목적이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기계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금물이다. 거기에는 진정한 마음이 들어있지 않음으로
무의미할 뿐 아니라 그런 정성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된다.
유대인들이 그런 책망을 받았다.
'입으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러니 헛되이 하나님을 섬긴다.
마음 없는 수고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욕심장이로 대하는 큰 죄가 된다.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50
감탄과 흥분이 점점 가라 앉고
진지해 짐을 느낀다.
말씀이 귀에 음악같고
입에 꿀 같다고 편하도 쉽다는 말이 아니다.
자아가 착각을 일으켜 듣기에 좋고,
이해가 된다고 그것을 자기 수준이라
여기면 심한 낭패를 만나게 되어 있다.
듣기 좋으면 고통을 감수하고
행하여 자기 것으로 삼으라는 말이지
보고 들어 즐기라는 의미가 아니다.
정성에 대한 공부를 재미있다고 하니
테스트가 바로 내려온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낭만이 아니다.
듣고 보는 자들에게는 멋있고
아름다와 보일지 모르나 정작 현장에
있게 되면 끔찍한 고통과 좌절의 연속이다.
안 가봐도 아는 것이
해병대 장교후보생 훈련 시절,
약 3개월 그런 기간을 지내 봤기 때문이다.
당시 정말 고생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당시 매일 아침 새힘이
내려오는 체험을 했다.
그 때는 무엇이 그랬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겠다. 산티아고 순례의 관건은
짐이 가볍고, 신발을 잘 선택하고,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것에 있지 않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말씀이 나를 붙들고, 빛을 비추어 인도하며,
마음과 몸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데 있다
그러니까 벌써부터 순례는 시작했고,
그 장소와 환경만 바꾸고,
몸의 동작만 다르게 할 뿐이다.
말씀의 빛을 더 강하게 체험할 기대를 한다.
이번 순례길의 의미가 주어졌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신을 찾고, 인생의 의미를 찾고 하는
차원은 지났다. 이번에 기대하고,
추구하는 것은 내 일생을 끌고 다닌
두려움과의 직면이요, 싸움이다.
두려움 때문에 비굴과 거짓, 낙담 등이
나의 삶에 잔뜩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으로 두려움을
정복하고 돌아올 것이다.
산티아고 길을 십자군도 걸었고,
왕과 장군들도 그 길을 걸었다 한다.
특히 나폴레옹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그 길로 정복에 나섰다니
제대로 기회가 왔다.
내게 용사다운 용기가 필요하다.
서론이 길었다.
감동 오는 대로 가다 보면 이렇다.
말씀으로 간다.
이번에는 제 42事 誠의 5체 중
다섯번째 쓰임(5체 5용) 待天(대천)에
대한 말씀이다.
誠 5體 5用 (성 5체 5용)
제 42사 待天(대천)
待天者(대천자)는
待天必有感應於(대천필유감응어)
至誠之人也(지성지인야)라
無待天之深則(무대천지심즉)
無信天之誠(무신천지성)이니
待之無限而(대지무한이)
誠亦無限(성역무한)하여
雖經感應(수경감응)이라도
自不已信天之誠也(자불이신천지성야)니라
'하늘을 기다린다 함은
정성이 지극한 자에게는 하늘의 감응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하늘을 믿는
정성이 없다는 것이니라
기다림도 한이 없고
정성 또한 끝이 없어야 하니
비록 감응이 지나간 후에라도
스스로 하늘을 믿는 정성을
중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때로 말씀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랬다, 저랬다 모순을 보이는 까닭이다.
앞에서는 바라는 바가 없어야 참 정성이라고 해 놓고
여기서는 기대하는 마음이 약하면
정성이 없다고 말씀한다.
얼핏 헷갈리고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둘은 모순이나 상치된 말씀이 아니다.
알고 보면 쉽게 정리가 된다.
멀리서 보면 두 줄이 교차되고, 얽힌 것 같으나
가까이서 보면 정확하게 제 길로 가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다.
관점의 차이가 이런 역설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앞에서 바라는 바가 없어야 한다,
그것 조차 잊어야 한다고 한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그래야 한다는 입장이다.
무엇이든지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정성을
흐리게 한다면 다 방해가 된다는 것이고,
참된 정성에 헌신하지 못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돌처럼 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하여
추구해야 할 대상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다림과 기대함'은
관점이 다르다.
나는 하나님께 집중하지만, 하나님은 반대로
나에게 집중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만 집중하라는 말씀의 목적이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기계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금물이다. 거기에는 진정한 마음이 들어있지 않음으로
무의미할 뿐 아니라 그런 정성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된다.
유대인들이 그런 책망을 받았다.
'입으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러니 헛되이 하나님을 섬긴다.
마음 없는 수고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욕심장이로 대하는 큰 죄가 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의 행복과 영광을 위해
요구하시기도 하고, 때로 빼앗으시기도 하며
환란과 평안을 교차하여 주신다.
모든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참 행복과 최고의 영광이 온다는 것을 깨닫고
다 줄테니 더 가까이 오라는 데 있다.
그래서 오늘 말씀처럼 '하늘을 기대하는 마음'은
필수적이다.
성경에도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고 하여 이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기대가 약한 자는 믿음이 약한 것이요,
믿음이 약한 것은 온 마음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다림도 끝이 없고, 정성도 끝이 없어야 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가야 하는가 하면
그렇게 기다리는 감응이 왔다가
지나간 후에라도 또 기다리는 그런 경지까지 가야한다.
그러니까 이번 리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그 다음날 부터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는
운동선수 같이 하라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의 목적지인
콤포스텔라 성당까지 가서 경배를 드린 후
많은 사람들이 또 다시 땅끝 까지 100km를
더 걷는다.
모름지기 정성과 기다림은 끝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만나도 또 더 큰 은혜를 기다리는 자세...
그런 차원에서 '더 주세요, 더, 더...'하는
기도와 요구는 이기적인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원한 기쁨의 제공자심을
믿는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이다.
기대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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