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三一神誥(삼일신고) 풀이 34 -중요 본문

천지인 공부/삼일신고

三一神誥(삼일신고) 풀이 34 -중요

柏道 2019. 3. 13. 04:11

性通功完(성통공완)을 꿈꾸며...
三一神誥(삼일신고) 풀이 34 
 
삼도(三途)의 감, 식, 촉(感, 息, 觸)...
거기서 파생된 18가지 경계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삶 그 자체다.
마음은 쉴 새 없이 다양한 감정들을 일으키고,
호흡과 음식을 통해 들어오는 기운, 즉 에너지들은
끊임없이 장기와 신경계, 순환계 등을 통해
우리의 상태를 조절하며,
보고, 듣고, 만짐 등의 접촉을 통하여 우리의 몸이
살아있음을 아는 것이 우리의 삶인데
이들이 삼망에 이르게 하는 미혹이라니
누가 이 말을 받아 들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진지하게 정말 그러한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먼저, 우리의 마음이 일으키는 감정...
대표적으로 기쁨과 두려움, 슬픔, 성냄, 탐욕, 싫어함
6가지를 들었는데 이를 한 번 분석해 보자.
보통 우리가 익히 들은 감정은 유교에서 말하는
喜怒哀樂愛惡欲 /희노애락애오욕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
혹 喜怒哀懼愛惡欲 /희노애구애오옥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심/예기)
7가지 인데 여기서는 6가지로 조금 그 분류가 다르다.
7가지 감정 중에는 긍정적 감정이 셋(기쁨, 즐거움, 사랑)
혹은 둘(기쁨, 사랑)인 반면 여기서는
한가지(기쁨) 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부정적이다.
그런 면에서는 불교와 맥이 더 잘 통한다.
불교에서는 喜怒憂懼愛憎欲 /희노우구애증욕
(기쁨, 노여움, 근심, 두려움, 애착, 증오, 욕심)
말하여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감정은 기쁨 하나 뿐이다.
불교는 사랑도 집착으로 보아 부정적으로 본다.

그런데 전통 유학에서는 이 7가지 감정을
'성'으로 보았다.
이 7가지 감정은 본성으로 어떻게 할 수 없고
오직 잘 조절하고 다스려서 성인군자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 유교의 입장이다.
그런데 삼일신고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 6가지, 혹 7가지 감정은 삼망중 마음에
속하는 것으로 멈추어야 할 것으로 강조한다(止感).
그렇게 보는 이유를 설명하기를
감정은 선악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악이 혼잡하게 섞여서 일어나기 때문에
비록 삼진의 본성에 의지하기는 하지만
이는 삼망의 마음으로 분류하여 멈출 것으로 설명한다.
삼일신고의 분석이 더 깊고 분명하다.

우리의 마음이 일으키는 감정을 살펴보면
거의 90%이상이 부정적인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의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라.
즐거움과 웃음의 표정은 그야말로 간혹 나타나고
늘 심각하거나 불안, 찌프린 표정에다
분노와 미움, 두려움, 근심이 드러난다.
좋다고 여겨지는 아주 희소한 감정 때문에
대부분을 부정적인 상태로 사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그래서 삼일신고에서는 이 감정들을 멈추라고 한다.
그리고 이 감정들이 멈추게 되면
성, 즉 우리의 본성이 나타나게 되는데
거기에는 선함만 있지 악함이 없기 때문에
가장 높은 지혜를 가진 자들이 이와 통한다고 하였다.

이게 바로 성통인데
여기서 사실 모든 것이 결판이 난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이 감정을 멈출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실천 불가능한 지혜라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를 불가능하다고 호소한다.
아무리 생각을 멈추려 해도, 감정을 통제하려 해도
안된다는 것이다.
생각은 제 멋대로 떠오르고, 감정도 순간순간 발동하니
도무지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마음대로'하려니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이 마음의 작용이요, 본질인데
마음을 이용하여 이를 통제하려 드니 안되는 것이다.
율법은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불가능함이 더 드러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예나 오늘이나 같은 소리를 반복한다.
법을 지켜야 한다, 착하게 살아야 하고,
마음을 바로 먹어야 한다...
걱정하지 말라, 힘을 내라...
들어보면 다 좋고 옳은 소리 같은데
모두 허망한 말들일 뿐이다.
마음을 닦아서, 마음을 훈련해서
평안을 얻고, 안정을 찾는다고?
경허 스님이 그런 자의 어리석음을
'기왓장 갈아서 거울 만들려는 것과 같다'고 했다.
유대교와 유교가 같이 여기서 주저 앉는다.
율법을 지켜서, 수양을 해서
마음을 고치고 완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삼일신고는 복음과 맥이 통한다.
오직 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은
성경의 '성령' 혹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우리의 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과 같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생명이요, 선물이다.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다.
반대다. 마음의 활동을 중단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명상이다.

두가지 명상 방법이 있는데
불교식으로 하면 '자기 생각과 감정을 지켜보기'
비파사나 명상법이 그 하나요,

기독교식은 '자기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 또는 성령'에 집중하는
집중 명상법이다.

둘의 우열을 가릴 필요가 없다.
본질은 같다.

자기를 지켜보는 자가 바로 참 자아요,
성령 안에 있는 깨어난 영이며,
하나님이시니 용어가지고 따지는 것은
또 다시 삼망에 빠지는 것이다.
자기를 지켜 보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여
자신의 존재를 잊게 되면
모든 감정이 멈추고 성이 드러나며, 하나님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선만 있고, 악은 전혀 없다.
아니 선과 악의 구별조차 없는
근원으로 들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