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II. <천부경> 역리구조 본문
II. <천부경> 역리구조
1. 천부역의 복원
1) 주역
현대에 이르러 동도학은 신과학(新科學)의 탐구대상으로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서양에서 발전한 과학이, 서양문명의 뿌리가 되어온 실재론(實在論)을 부정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 [불확정성 원리]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그 이전의 물질관(物質觀)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각하는 방법]을 필요로하게 되었다고 역설한다.
즉 서양문명 자체 내에는 자연의 속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낱말도, 논리도 없다는 것이 신과학을 내세우는 일부 과학자들의 반성이다. 그 결과 동도학에서 수천년에 걸쳐 "자연의 참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만물은 고정불변의 실재가 아니라 서로 의존해서 생멸하는 허상일 뿐이다"라고 가르쳐 온 사실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가르침으로 불교의 색즉시공(色卽是空) 사상과, 역학의 음양사상 및 도교의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길(道可道 非常道)]등이 주목받게 되었다. 실제로 역학의 팔괘론을 물리학에 적용시켜 얻어진 대칭이론은 물리학의 최첨단 이론으로 자리잡은지 오래이고, 유전자이론이나 인공지능과 팔괘의 유사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와같이 새롭게 조명되는 동도학이 풍류의 하위체계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여러번에 걸쳐 강조한 사실이다. 따라서 동도학의 재조명은 곧 풍류의 재조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풍류의 출발점은 <천부경>이다. 결국 동도학의 재조명은 불가피하게 <천부경>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중요한 <천부경>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동도학의 분야는 역학이다. 이사실은 <천부경> 수리부 해설의 최종결론으로 제시된 바이다. 여기서 이점을 새삼스럽게 강조하는 이유는, 이제부터는 역학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역학의 대명사는 [주역(周易)]이다. [주역]에는 두가지 뜻이 있는데, 그 하나는 역학(易學)이요, 다른 하나는 <주역>이다. 이 두가지 뜻의 차이는 [주(周)]라는 글자의 해석에서 생겨난다. [周]를 [두루 . 둘레]로 풀면 원만자재(圓滿自在)의 뜻이되어, 모든 사물에 두루 적용되는 원둘레처럼 순환하는 역(易)이 된다.
이와 반대로 [周]를 [주나라]로 풀면 주왕조의 창시자인 문왕(文王) 희창(姬昌)이 [유리]라는 곳에서 64괘의 384효를 해석하고, 공자가 십익(十翼)을 지어 철학적 체계를 갖추었다는 <주역경(周易經)>을 뜻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작아보이는 차이가 실제로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그 차이는 역학의 범위에서 나타난다. 즉, <주역경>으로 풀이할 경우에는 유교에서 다루어 온 복서역(卜薯易)과 의리역(義理易)에 한정된다. 그러나 [周]를 [원둘레]로 풀게되면, 유학자(儒學者)들이 멀리했던 점술명리학과 한의학의 내용까지를 모두 포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周]를 [두루 . 둘레]로 푼다. 여기서의 [두루 . 둘레]는 앞의 "오칠일묘연"에서 설명된 뫼비우스 고리를 뜻하는 것이다. 즉 사상 . 오행 . 팔괘 . 구궁을 모두 종합한 구궁도가 나타내고자 하는 자연법칙을 탐구하는 학문을 역학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주역]이 <천부경>의 하위체계라고 말하는 것이요, 이렇게 정해둘 경우에는 <주역(주역경)>은 이 [주역]의 한 분야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된다. 그리고 [주역]의 나머지 한 분야를 정리한 책이 <황제내경>이 된다. 결국 <주역>의 팔괘음양론과 <황제내경>의 삼원오행론이 하나로 묶이는 종합체계가 <천부경>의 하위체계인 [주역]인 것이다.
2) 천부역
앞에서 설명한 <주역(경)>이 아닌 [주역], 즉 만사만물에 두루 적용되는 역학을 달리 [천부역(天符易)]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주역]이라는 말이 <주역(경)>을 뜻하는 말로 너무나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두가지 뜻을 구별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되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넓은 뜻의 [주역]을 천부역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역학의 올바른 부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주역]을 천부역으로 바꿔 부르는 것은, [주역]이 <천부경>의 진리에서 파생된 한 분야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려는 뜻이다. <천부경>에서는 역학 이외에도, 문리부에서 신령학이 따로 파생되어 나온다.
역학과 신령학은 다르다고 말하자니 같은 점이 너무 많고, 또 같다고 말하자니 한 데 묶어 말할 수 없는 요소가 너무나 많은 미묘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둘은 분명히 구별될 요소가 있고, 그 차이점은 여기서 설명되는 천부역과 뒤에서 설명될 신령학의 내용을 모두 읽어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아무튼 천부역은 <천부경>의 하위체계이며, 그 전승자들도 사서삼경을 달달 외우기에 급급했던 유학자들이 아니라 풍각장이(風角匠夷)로 일컬어진 동이인들이었다. 풍각장이들이 각술(角術)로 비전해 온 풍류의 수리철학이 천부역이었던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역학이 의원(醫員) . 점술인(점術人; 日者) . 무당 . 장인(匠人) . 예인(藝人)들에 의해 보존되고 전승되어 왔음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유교적 정치사상을 채택한 동아시아 제국에서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된 특수계층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경제를 운영하고, 국방을 책임지며, 예술을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신과학이 동도학에서 배우고자 하는 것은 봉건적 군주정치제도가 결코 아니며, 자기들이 제대로 발음하지도 못하는 율시(律詩)나 절구(絶句)도 아니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는 자연과의 조화를 달성한 동양정신문화의 저력(底力)일 뿐이다. 그것도 한계에 도달한 과학문명을 올바로 지도해 줄 수 있는, 과학보다 뛰어난 정신문화인 것이다.
그 저력은 바로 [풍류]이다. 수천년 동안 고분의 지하암실에 묻혀 녹슬고 곰팡내에 찌든 풍류의 흔적을, 최첨단 과학장비인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힘겹게 찾아온 이유가 사실은 여기에 있었다. 따라서 신과학이 결국 도달할 곳은 여기, <천부경>의 진리이다.
그 황홀한 진리의 하늘에 가장 먼저 들어설 사람들은 한겨레일 수밖에 없다. 한겨레가 주도하는 21세기는 꿈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인 것이다.
2. 천부역의 삼한체계
천부역은 <주역(경)>의 내용에 국한되지 않는 방대한 내용을 포괄하게 된다. <주역>의 내용인 팔괘음양론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 별도의 체계로 알려져 왔던 삼원오행론 까지도 종합한 역학이 천부역이므로,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이해하기가 쉽다.
근래에 동도학 중에서 가장 활발히 연구되는 분야가 역학일 것이다. 그 연구성과들은 여러 분야의 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연구되고 있고, 아직도 집대성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고 본다. 그런만큼 여기서 그 연구성과들을 소개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글쓴이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주역>을 연구하는 김석진 선생의 홍역학회의 활동과, <정역>을 연구하는 이정호 선생의 업적이 돋보이며, 이 분들의 연구를 과학과 연결시키려는 젊은 학자들의 활동에도 기대를 걸만 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서 설명하려는 천부역은 연구의 출발점과 범위가 지금까지의 역학연구의 흐름과는 완전히 다르다. 역학계의 연구경향은 이미 성립해 있는 기본체계를 전제로하고, 그 체계 속의 내용들 간의 상호관계를 연구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천부역은 그런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고, 그런 체계가 성립할 수 있는 원리적 근거를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천부역은 앞으로 역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연구분야에 관계없이 한 번은 보고 넘어가야 할 내용을 다루려고 하는 것이다. 글쓴이는 <천부경>을 연구하면서 <천부경>의 수리가 역학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밝히기 위해 한때 철학관까지 차려 생계를 해결하면서까지 공부를 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와있는 그 어떤 역학도 글쓴이의 의문을 해결해 주지 못하던 중, 옛날의 바둑판이 가로 세로 각 아홉줄로 되어 있었다는 어떤 바둑책의 내용을 보고서 역학의 원형을 복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내용이 여기서 설명하려는 내용이다.
그런만큼 이 책의 내용은 지금까지의 어떤 역학이론에서도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역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분야에 관계없이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천부경>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역학의 체계는 다음과 같다.
이 체계는 글쓴이가 천부역의 분야들을 <천부경> 해설과 연결시키기 위해 독자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분화론과 변화론은 여기서 다시 세분되어야 하고, 중심본체론은 신령학과 연결시켜 이기론(理氣論) 및 성리학까지 연구범위를 넓혀야 하는 등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역학의 특수한 분야는 활발히 연구되고 있으되 종합체계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현실정에서, 많은 것을 욕심낼 수는 없는 형편이다. 특히 <천부경>과 역학의 접합은 이 책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분야인 만큼, 많은 내용을 다루기보다는 기본적인 내용을 정확히 이해시키기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3. 중심본체론
가. 사람과 역
1) 사람과 천지
역학은 천지자연에 대한 학문이다. 그런데 역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자신과 천지를 따로 떼어 생각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천지(우주)와 자기자신이 분리할 수 없는 혼연일체라는 사상이 역학의 모든분야에서 강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천지가 하나라는 사실을 납득시킬만한 설명은 <주역>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요즘 인기를 끌고있는 신과학 분야에서도 사람과 우주를 분리할 수 없다는 사상은 하나의 구호일 뿐이며, 사람과 우주가 어째서 하나인지에 대한 어떤 합의도 도출된 적이 없다. 과학의 경우 그 이유는 [물질세계는 과학이 해명할 수 있지만, 인간의 정신세계는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데카르트적 이분법이 아직도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데카르트 사상의 배후에는, 신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까지도 직접적으로 말하기를 꺼리는 한 구절이 숨어있다. 그 구절은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성경 . 창세기>의 첫구절이다.
이 구절은 과학이 반쪽짜리로 나뉘어 발전하게 만든 굴레일 뿐만아니라, 서양철학 전체의 넘을 수 없는 굴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생각은 비단 기독교에만 있는 굴레가 아니라, 동양의 여러 종교에서도 빠짐없이 발견되는, [인류문명 전체의 굴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굴레를 벗어난 가르침도 드물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 고대사상의 경우에는 <노자>의 "저절로 그러함(自然)", 불교의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一切唯心造)"가 있고, 현대사상으로는 강증산 선생의 "사람이 없으면 천지도 없다(無人이면 無天地)"와, 천도교의 창교자인 손병희 선생의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해설하려는 천부역의 중심본체론은 바로 이 "하느님이 창조한 천지"를 새롭게 해석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이 경우 가장 먼저 밝혀 두어야 할 사실은,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하느님은 부정될 존재가 아니라 재조명될 존재이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이 사실에 토를 달 자격이 없고, 달아서도 안된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은 분명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하느님이 창조한 천지는 하느님 자신이다.]
그 어느 신학자나 철학자도 바로 이 사실을 밝히지 못했던 것이다. 종교간의 싸움이 그치지 않는 이유도 따지고보면 바로 이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창세기>의 하느님을 <천부경>으로 해석하면, 하느님은 스스로를 창조하시고, 본심의 빛으로 스스로를 되비추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스스로를 나누시는, 창조의 다섯마당을 베푸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되비춤]은 '한'의 현시론에서 자세히 설명되거니와, 아무튼 창조의 절정은 제6일, 즉 여섯째 마당이다.
이 여섯째 마당에서 하느님은 스스로의 내면에서 스스로를 다시 창조하신다. 창조된 천지가 모두 자기자신이지만, 그 속에서 다시 스스로를 인식하고 관리할 자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아기 자기]인 아담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과정은 객관적 사실이어도 좋고, <성서> 기록자의 주관적 내면성찰의 결론이었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를 비롯한 모든 천지창조의 신화들이 사람이 스스로의 정체성(正體性)으로 자각한 것을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런 관점이 중심본체론이 우주를 이해하는 기본입장이기도 하다.
2) 사람과 역
역학은 사람이 알아낸 우주의 존재변화원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알아낸 진리]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거의 무시되는 사항이다.
그러나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우리들의 진리는 우리들이 만든 진리인 것이다. }
근대 이후의 과학적 입장은 주관의 불확실성을 강조하면서 객관적 사실만을 진리라고 주장해 왔고, 소립자 물리학에서 불확정성 원리가 공인받기 전까지는 이 입장이 근대학문의 대전제였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신과학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인간의 인식능력을 전제로 하지않는 객관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식능력을 전제한다는 말은, 아무리 객관세계라도 인간에게 인식되는 것인 이상 주관이 배제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서양에서는 이런 발상 자체가 생소한 것이지만, 동도학에서는 이것이 당연한 전제이다. 불교의 경우에는 2,000여년 전부터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는 사상이 확립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중시하는 이런 전통은 동도학에 공통된 현상으로 나타난다.
역학의 경우에는 이런 입장을 부정하지는 않되, 명시하지도 않고 있다. 역학이 이 입장을 명시했더라면, 동양사상이 좀 더 일찍 각광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때늦은 감은 있지만, <천부경>의 참모습을 밝히고 역학을 중흥시켜 새 문명의 토대로 삼기 위해서는, 이 철학적 주제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역학에만 적용되는 인식론을 따로 전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는 인간의 지각이 성립하는 원리를 '한'의 현시론이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고, 그 내용은 당연히 역학이라는 사고체계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식론을 먼저 알고 싶은 사람은 '한'의 자연론과 '한'의 현시론을 연결시켜 읽으면 글쓴이의 인식론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천부역의 인간론과 인식론은 사람이 중심이 되고, 사람의 인식이 본체로 설정된다. 바로 이 뜻을 나타내는 말이 이 단원의 주제인 중심본체론인 것이다.
3) 중심본체론
중심본체(中心本體)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내기 위해 고른 말이다.
그 첫째는 인심본체(人心本體)의 뜻이다. <천부경>에서 "인중천지일"이라 하였으니, [중]이 [인]으로 바뀔 수 있다. 결국 우주의 본체가 사람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둘째는 [중]으로서의 마음이 우주의 본체가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의 [중]은 의미가 깊다. 즉 음양묘합 또는 황금비례로서의 [중]을 말하는 것이며, 음양의 분할과 매개 . 통합의 기준을 뜻하는 것이다. 이 [중]이 생명의 본질이며, 궁극적 진리라 하겠다.
셋째는 중심과 본체를 묶어 부르기 위한 이름이다. 중심은 앞의 첫째와 둘째 뜻을 묶은 것이며, 본체는 역학의 연구대상이자 천부역 해설의 주제인 우주 그 자체이다. 결국 사람과 우주를 통합하는 최고궁극의 진리존재인 마음을 부르는 이름이 중심본체이다.
이렇게 되면 그 내용이 '한'풀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저절로 드러난다. 다만 이책의 '한'풀이에서 다루지 않은 몇가지 내용을 다루기 위해 이 중심본체론을 둔 것이다.
아무튼 위의 경우 중 어떤 경우에도 탐구의 주안점은 본체에 두어지고, 중심은 그 본체의 핵심의미에 해당한다. 역학에서 이 본체를 나타내는 말에는 태극 . 황극 . 무극의 세가지가 있다. 이 세가지가 여기서 말하는 중심에 해당하며, 이는 중심본체가 세가지 의미로 분석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 삼극을 '한'의 현시론에서 설명되는 내용들과 연결시키므로서, 역학에서의 인간론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무극(無極)은 '한'의 자연론에서 말하는 '한'이다. '한'의 자연론에서 '한'의 별칭으로 들었던 [도(道) . 공(空) . 천(天) . 신(神)]등이 모두 무극의 딴 이름이 된다. 그리고 이것들이 <천부경>에서의 [본심(本心)]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태극(太極)은 <천부경> 본체부의 해설대상이었던 [본체(本體)]이다. 즉 [나]가 인식한 '한'인 [한나]로서의 [하나(一)]가 이 태극인 것이다. 그리고 이단계에서는 [나]와 '한'이 구별되지 않는 혼연일체이다. 다만 통일체로서의 [절대유(絶對有)]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태극이다.
여기서 [절대유]라 하는 것은 [없음(無)]도 포괄하는 것이다. [없다는 상태가 있다]는 말에서의 [있다]가 [절대유]이다. 결국 태극은 뒤의 '한'의 현시론에서 말하는 [앎(識)] 그 자체이다. '한'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도록 알아진 '한'이요, [나]를 [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지능(知能)]이다.
황극(皇極)은 마음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중성, 즉 [가늠]이다. 이 [가늠]에 의해 있고 없음이 나뉘고, 이 [가늠]이 있기 때문에 있음과 없음이 다시 통합될 수 있다. 태극의 앎 중에서 가장 무극의 절대성에 가까운 본능이 황극으로서의 가늠이라 하겠다.
무극 . 태극 . 황극의 구별은 마음의 가장 깊은 영역을 분석한 것이며, 그래서 알쏭달쏭한 면이 많다. 사실상 이 개념들은 뚜렷이 구별하기가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런데도 역학에서 이 세가지 개념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세가지 개념이 심층의식의 가장 미묘한 활동을 나타내기 위해 개발된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무극 . 태극 . 황극이 마음의 미묘한 활동을 나타내기 위한 개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각각의 개념을 명확히 분석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불교 유식학파(唯識學派)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주만물이 본질적으로는 심의식(心意識)의 표현에 불과하다. 또 현대 물리학의 불확정성원리도 이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이 입장은 [심의식]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풍류의 입장에서는 '한'의 자연론과 현시론에서, [마음]을 주관과 객관을 통합하는 만물의 동일 근원으로 이해하므로서 유식학의 입장을 수용한다. 이 입장을 통해 철학의 인식론이 역학의 삼극론에 통합되는 것이다.
무극 . 태극 . 황극이 본체로 설정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본체(本體)라는 말 속에 담겨있다. 본체는 [뿌리(本)]와 [몸(體)]을 합친 말이다. [몸의 뿌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뿌리의 속성을 생각해 보자.
뿌리를 잘라내면 나무는 죽는다. 나무를 베어 내어도 뿌리를 남겨두면, 그 뿌리에서 새로 움이 터서 나무가 되살아난다. 즉 뿌리는 나무의 생명력의 원천이다. 나무의 몸통과 가지와 잎과 꽃이 모두 뿌리에 의존해서 생존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뿌리는 땅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면서 생명을 낳고 유지하는 뿌리의 속성, 여기에 중점을 둔 것이 동양적 존재론의 우수함이다. 서양철학은 생명의 근원을 [신(神)]에게서 찾으면 되었고,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을 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본체론이 발전하지 못했다. 달리 말한다면 서양적 본체론은 신학인 셈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여기서 설명되는 본체론은, 서구에서 근대이후에 발전한 철학이나 과학에 결여된 부분인, [신성(神性)]에 대한 해설이기도 하다. 신성(神性)은 보통 [불가지(不可知)]하고 [불가지(不可至)]한 것, 즉 알수도 없고 도달할 수도 없는 것으로 말해진다.
그러나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해명이 없다. 그 사실에 의심을 품는 것 부터가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강압적 권위를 내세우는 신앙은 십중팔구가 사기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신성은 해명될 수 있어야 한다. 알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그 이유만이라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설명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원효대사가 가르친대로 "나무아미타불"만 염송(念訟)하면 극락에 갈 수 있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으면, 지금 사람들 중에 누가 무식하게 "나무아미타불"만 외우고 앉아 있겠는가? 지금 인류의 심성이 황폐화된 이유도 여기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풍류에서는 이런 강압적인 권위는 없다. 동이족들은 초월적 권위를 누렸으나, 그 권위는 <천부경>의 진리에 의해 뒷받침되는 합리적인 권위였다. 동이족들이 스스로 신을 자처했던 것은, 그들이 실제로 자기자신 속에 있는 신을 발견하고, 그 신과 합일하여 신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한'의 자연론과 '한'의 현시론의 주제이다.
여기서는 사람과 신이 하나라는 사실이 역학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는 셈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중심본체론이 따로 필요한 것이다.
나. 무극
무극은 '한'이다. 따라서 무극은 '한'의 현시론에서 설명될 [마음(心)]이기도 하다.
이런 뜻의 마음에 대해서는, 당(唐)나라 때의 유명한 선승(禪僧)인 남천(南泉) 스님의 "평상심이 바로 도이다(平常心是道)"라는 구절이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그의 제자인 조주(趙州)로부터 "불도(佛道)란 어떤 도입니까? "라는 물음을 받고 답한 것이라 한다.
불교의 선종(禪宗)에서는 득도(得道)의 경지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많은 선문답(禪問答)이 있는데, 여기에 소개한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 중에서 이 문답을 고른 것은 이 문답이 [마음]과 [도]를 연결시켜 주고있기 때문이다.
앞에 설명한 '한'의 자연론에서, '한'은 불리는 이름에 관계없이 [의식이 소멸된 자리에서 드러나는 초월적 절대진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는 의식(사고작용)까지도 소멸되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고 설명했었다. 바로 이 '한'을 남천스님은 [평상심]이라고 부른 것이다.
평상심은 보통 때의 마음을 말한다. 무슨 특별한 상태에 있는 마음이 아니다. 이것이 절대진리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정말로 탁월한 깨달음이다. 평상심이 도가 되는 것과 같은 원리로 현상세계가 곧 진리세계가 된다. 평상심이 도가 되는 원리란, [평상심 중에서 확인된 평상심이 도가 된다]는 원리를 말한 것이다.
아무튼 평상심(平常心)도 [심(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마음이 곧 도이다(心是道)]로 바꿀수 있다. 이제 여기서 얻어진 결론을 <노자>의 첫 문장에 대입해 보자. <노자> 첫 구절은 "道可道非常道(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올바른 도가 아니다)"이다. 여기서 [道]대신 [心]을 넣으면, "心可心非常心(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은 올바른 마음이 아니다)"이 된다. 여기서 [도]와 [마음]이 하나가 된다.
다른 주제를 다루면서 이런 짓을 한다면 무간지옥에 떨어질 일이지만, <천부경>을 해설하기 위해서라면 이런 짓을 해도 된다. <천부경>은 이들 가르침의 뿌리로서, 동도학의 모든 분야가 <천부경>의 해설이므로 서로 융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사실을 갑자기 내세우는 이유는, 이렇게 하므로서 <노자(도덕경)> [42장]의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으며, 셋에서 만물이 나온다)"는 구절의 맨 첫글자만 [心]으로 바꾸어 주면, <천부경>과 <노자>를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천부경>의 수리를 낳아 운영하는 주체는 문리부에 나오는 [본심(本心)]이다. 이 본심이 [도(道)]가 되면, <노자>는 그대로 <천부경> 해설서가 된다.
<노자>의 [도]는 <주역>에 나오는 [도], 즉 "한 번 음이되고 한 번 양이되는 움직임을 말하는 도(一陰一陽之謂道)"와 정확히 같은 것이다. 유도와 불도는 음양사상을 통해 이미 실질적으로는 통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여기에 [도]와 [마음]을 같은 것으로 보면, 불도까지도 융합된다. 이렇게 되면 동도학의 최고진리들이 모두 마음과 연결될 근거가 마련되는 셈이다.
즉,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자연]이 곧 무극이요, 마음이요, 도이다. 따라서 무극이 태극을 거쳐 사상 . 팔괘로 구조화하는 과정과, 마음이 자기중심성을 드러내어 자타의 분리를 일으키고 다시 중심을 잡아 통합하는 과정이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무극에 대한 별도의 해설은 필요하지 않으며, 앞에서 설명된 '한'의 자연론이 그대로 무극의 해설을 겸하게 된다.
그러나 무극은 마음의 모든 측면을 망라한 '한마음'이고, 마음이 자기중심성을 드러낸 다음부터는 [황극(皇極)]이라는 다른 개념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
다. 황극
1) 참마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무극을 이해한다면, 황극(皇極)은 [참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참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본심본태양"에서의 [태양]에서 나오는 [빛]이다. "본심본태양"에서 [본심]은 곧 [본태양]이라는 관계가 성립하므로, 결국 [마음]이 [태양]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마음이 무극이므로, 태양은 곧 무극이 된다. 무극에서 나오는 최초의 기준이 황극이므로, 이 황극은 태양에서 나오는 최초의 기준중성인 빛이 되는 것이다.
[皇極]의 글자뜻을 살펴보면, [皇]은 [태양신]을 나타내는 글자이고, [極]은 [용마루, 또는 북극성]이다. 그러므로 두 글자를 합치면 태양신의 집이 된다. 북극성은 천문학에서 천제의 자리라고 말한다. 천제가 태양신이므로 결국 북극성은 태양신의 집으로 생각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상당히 합리적인 것이니,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남쪽을 거쳐 서쪽으로 지므로, 밤에는 서쪽에서 북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양신의 하늘집은 북극성이지만, 땅위의 집은 신전이다. 고대에 태양신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따라서 신전은 사람들의 모든 행위의 절대적 기준이었다. 즉 하늘에서의 북극성의 역할을 땅에서는 신전이 담당했다는 말이다. [極]의 [임금자리]라는 뜻은 이런 의미를 담고있는 경우이다.
그런데 황극의 인간적인 의미는 [태양신]의 [빛]에서 찾아진다. 빛으로 나타나는 최초의 자기중심성이 황극인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의 하느님이 자기자신인 천지를 창조한 다음에 맨 처음 말한 "빛이 있으라"하여 생겨난 {빛}이 바로 황극으로 이해된다.
현대물리학이 300년동안 자신의 내면을 되짚어 찾아낸 상대성이론의 [빛]은, 외부세계의 출발점인 바로 그 이유에 의해 내면세계의 출발점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은 빛을 매개로하여 자기자신과 환경을 인식한다. 이 사실은 생리학에서 이미 밝혀놓은 사실이다.
빛의 꼴바꿈 중에서 우리가 가장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은 전기(電氣)이다.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현상 중에 나타나는 전기적 현상은 번개이다. 따라서 번개(벼락)를 최고신의 무기라고 말하는 신화와 전설들은, 고대인들이 자연을 아주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실례인 것이다. <주역>에서 "하느님이 우뢰에서 나온다(帝出乎震)"고 말하는 것도, 빛과 전기의 상호관계를 말한 것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전기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는 존재는 사람이다. 사람의 모든 감각은 신경세포가 연결된 신경섬유를 통해 전달되는데, 신경섬유는 음성과 양성, 즉 단절과 연속이라는 두가지 전기부호를 이용하여 색깔 . 소리 . 맛 . 냄새 . 촉감이라는 감각을 만들어낸다.
최근에 이르러 개발된 인공지능 기계인 컴퓨터도 끊어짐과 이어짐이라는 단순한 전기부호만으로 운영되고 있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소위 육식(六識)이 모두 전기작용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다.
음전기와 양전기가 만나면 빛이 만들어진다. 번개나 여러 가지 방전현상이 모두 이런 것이다. 그리고 마음도 바로 이렇게 만들어지는 빛이다. 이 과정을 거꾸로 생각하면, 빛이 나뉘어 음전기와 양전기가 된다. 우리들의 마음이 음과 양으로 나뉘어 이 세상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천부경>이 말하는 "인중천지일"의 천지창조론인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빛이며, 감각이 전기력에 의해 운영된다는 등의 말이, 감각이 단순한 전기부호라는 말은 아니다. 음과 양은 상대적 성질을 가지는 모든 자연현상의 상대적 성질을 나타내는 대명사이며, 빛은 음과 양이 만나서 하나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즉 빛과 전기의 관계가 마음과 감각의 관계와 같다는 뜻일 뿐이다.
감각을 극복하고 빛으로 되돌아간 자리에서 겪어지는 마음이 [참마음]이다. 태초의 빛이 마음임을 확인한 것이 참마음인 것이다. 이 참마음은 너무나 중대한 인간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그 참마음이 천지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성서>의 천지창조 과정을 되짚어 올라가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우리들 자신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우리 자신들과 분리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환경과 우리들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차이점도 있다. 이 차이점을 알려는 노력에서 철학과 과학이 싹트고 성장해왔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내면을 성찰해보면, 즉 외부의 사물로 향하는 호기심을 자신의 내면으로 되돌려 자신을 탐구해보면, 자연과 나 모두를 있게한 공통근원이 발견된다.
그 근원을 발견한 후에는 자신의 의미가 전혀 새롭게 이해되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의 분신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성서>의 창조론은 이 의미를 기록한 것이며, 결국 <성서>의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한 자기자신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빛이 음과 양을 나누어서 현실세계를 창조하는 기준의 역할로 이해된 것이 [황극]이다. 역학에서 현실세계의 뿌리는 태극이다. 다시말해 현실세계는 태극의 변화과정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황극이 현실세계를 창조한다는 말은 황극이 태극을 창조한다는 말이 된다.
지금까지의 역학에서는 황극을, 현실세계를 운영하는 균형과 조화의 측면이라고 말해왔다. 그리고 그 황극은 태극이 음양을 이용하여 오행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순수정기(중성기운)라고 말한다.
그러나 천부역은 황극이 무극에서 생겨난 첫 번째 중성이라고 본다. 무극인 마음이 스스로를 규정하면 자기중심성이라는 황극이 되고, 황극이 스스로를 인식하면 태극이 된다는 뜻이다.
이와같은 천부역의 황극개념은 전통역학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것이지만, 아직도 논란이 끝나지 않은 삼극(무극 . 태극 . 황극) 개념을 명확히 하므로서 많은 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2) 중심
황극을 이렇게 이해하면 기존 역학에서 태극의 범위가 크게 축소되는 결과를 낳는다. 즉 태극에는 본체의 뜻만 남고, 중심의 뜻은 황극으로 넘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구궁도의 중앙수인 오황극의 의미와도 일치한다. 즉 태극도의 중심점이 오황극이 되는 것이다. 태극과 황극을 이렇게 볼 때, 복희팔괘도는 음양통합의 태극도가 되고, 문왕팔괘는 음양이 중심에 의해 운영되는 삼원역(三元易)이 되는 것이다. 이때의 [삼원역]이란 음양중 삼원을 완비한 역이라는 뜻이다.
역학을 <천부경>과 연관시키는 천부역에서는 천지인 삼극을 역학의 삼극인 무극 . 태극 . 황극에 연결시켜 주는 것이 합리적이다. 무극 . 태극 . 황극이 천지인 삼극과 동격으로 간주되면, 음양중 삼원은 그 하위체계로 부속되어야 한다.
<천부경>의 진리가 전체는 개체에 반영되고 개체가 전체를 규정하는 홀로그램적 체계이므로, 이런 구별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구별해 주는 것이 역학의 체계적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는만큼, 중심본체론을 삼한의 체계로 독립시키는 것이 역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태극은 <주역>에서의 "양의를 낳는 태극(易有太極 是生兩儀)"으로 한정되고, 주렴계(周廉溪)가 말한 "태극의 근원인 무극(無極而太極)"은 그의 의도대로 태극의 초월적 측면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그리고 황극은 현실세계(태극)를 경험하면서 초월세계(무극)를 감통(感通)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 황극으로서의 마음이 하는 일은 태극을 음양분할하여 음양의 현실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즉 상대성을 만드는 창조주가 바로 사람의 마음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대립되는 두 요소를 하나로 묶어 인식할 수 있고, 그 두 요소를 유지하는 조화를 발견할 수 있으며, 두 요소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전통역학의 삼극개념
① 삼극의 유래
역학의 삼극은 무극 . 태극 . 황극이다. <천부경>에서는 삼극이 천 . 지 . 인이지만, 역학에서는 <천부경>의 삼극(천지인)이 삼재(三才)로 불린다.
따라서 역학의 삼극이라고 말하면 본래의 삼극인 천지인과 구별되는 무극 . 태극 . 황극이 된다. 앞으로는 이 원칙에 따라 천 . 지 . 인은 삼극으로, 무극 . 태극 . 황극은 역학의 삼극으로 용어를 통일 시키고자 한다.
이 역학의 삼극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개념이다. 역학의 삼극개념이 형성되는 과정과 그 의미를 간단히 요약하면, 여기서 설명한 천부역의 입장과 대조하여 확실한 개념정리를 할 수 있겠다.
역학의 삼극 중에서 가장 먼저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황극이다. 황극은, <서경>의 기록에 의하면 은(殷)나라가 멸망할 때 기자(箕子)가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에게 갖다 바쳤다는, 홍범구주의 다섯 번째 강목(綱目)인 "건용황극(建用皇極)"으로 등장한다.
홍범구주(洪範九疇)는 일종의 정치 지침서라 할수 있는데, 그 시원이 분명치 않다. 한대(漢代)의 <예문지(藝文誌)>에는 "하(夏)나라의 우왕(禹王)이 홍수를 보성할 때 얻은 하도낙서가 홍범"이라고 한다. 또 <단군세기>에는 "단군왕검께서 태자 부루를 시켜 우(虞) 사공(司公)에게 오행치수의 법을 전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들은 홍범구주가 <천부경>의 하위체계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왕이 단주(丹朱)임을 풍류대도에서 밝혔고, [우 사공]이란 순임금이니 양쪽의 기록이 일치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홍범구주는 삼한조선의 정치 지침서였음이 분명하다.
홍범구주가 오행팔괘를 종합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홍범의 황극은 여기서 설명하는 천부역의 황극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무극인 하느님과 태극인 백성을 연결시키는 중심의 역할을 황극인 왕이 담당한 것이다.
그러나 <주역>에는 황극이란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계사전에서 단 한 번 태극이 등장할 뿐이다. 이 사실은 주나라 이후에는 천부역의 종합체계가 상실되고, 황극은 군왕의 지위를 상징하는 용어로만 쓰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다가 소강절(蘇康節)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서 역학에 다시 등장하고, 김일부 선생의 <정역(正易)>에서 일(一)태극과 십(十)무극을 합하여(十 + 一 ⇒ 土) 중앙에 자리잡은 [五土]가 황극이라고 하여, 오행치수의 법으로 쓰이던 때의 모습을 회복하고 있다. 여기서 본모습을 회복하였다는 말은, 오행을 역학에 도입하고 황극의 중화(조화)기능을 복원시켰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태극은 <주역>에 딱 한 번 등장하는데, 이때까지는 양의(兩儀), 즉 태음과 태양의 모체(母體)라는 뜻만을 담고 있다. 그러다가 주렴계(周廉溪)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감괘와 이괘를 붙여놓은 모양으로 그려지며, 이 감괘와 이괘가 오행의 수와 화에 해당한다는 뜻으로 오행과 연결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태극은 양동성(陽動性)과 음정성(陰靜性)이 오묘하게 결합되어 오행을 낳는 뿌리로 이해되며, 또 태극을 여덟 구역으로 나누면 팔괘가 된다. 한동석 선생은 도가에서 전해지는 고태극도(古太極圖)를 팔등분하면 복희팔괘도가 나온다는 사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태극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주렴계 이후 역학계의 공통된 관점이라 하겠다.
태극을 음양의 결합방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음양이 나뉘기 이전의 상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인간 정신의 본능적 버릇인 것 같다. 아무튼 주렴계도 이런 견해를 "무극이면서 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구절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역학에 등장하는 최초의 [무극]인 듯 하다.
한동석 선생은 이 태극도의 맨 위에 그려진 동그라미를 무극으로 보았고, 그 무극이 감괘와 리괘를 맞붙여 놓은 태극형상의 가운데 빈 동그라미로 나타난다고 한다.
태극의 본동성(本動性) 속에 숨어있는 본정성(本靜性)이 무극이라는 뜻을 [무극이면서 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말로 나타낸 셈이다. 여기서 본동성이란 다른 존재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본성에 따라 제힘으로 움직여지는 성질이다. 본정성은 태극의 본동성이 무극의 정성(靜性)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이 무극 또한 김일부 선생의 정역에 와서 제자리를 잡게된다. 정역은 무극을 십수(十數)에 배당하고, 태극을 일수(一數)에 배당하여, 십무극이 체(體)가 되고 일태극이 용(用)이 되어 우주가 존재 . 변화한다고 본다.
이 무극과 태극이 결국은 하나가 되는 원리를 오황극에서 찾는데, 그 수단이 바로 다섯 손가락이다. 엄지 손가락부터 굽혀가면서 [하나, 둘 ......]로 세어나가면 엄지가 굽혀지면서 하나가 되고, 다시 펴질 때 열이 된다.
새끼 손가락이 굽혀지면서 다섯이 되고, 펴지면서 여섯이 되므로, 오황극은 실제로는 육황극과 같은자리가 되어 체용일체(體用一體)를 이룬다. "무극이 태극(無極而太極)"의 십상수(十象數)가 그 내실은 다섯 손가락의 굴신(屈伸)에 불과하므로, 무극과 태극을 합하여 오토(五土)가 된다고 한다.
한동석 선생은 이와같은 정역의 무극 . 태극 . 황극론을 평하여 "무극과 태극에 대한 최종결정을 지은 것이 바로 일부였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것을 천부역의 입장에서 다시 평가한다면, 정역에 이르러 중심본체론의 삼한체계가 비로소 재건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정역의 무극 . 태극 . 황극의 종합체계에 상수원리적 해석을 붙인 사람이 한동석 선생인데, 여기에 와서 역학의 삼극이 우주변화의 과정 속에서 이해된다.
② 변화과정에서의 삼극
한동석 선생은 중성(中性)으로서의 토(土)를 두가지로 나눈다. 분열과정에서 일어나는 모순을 조화하면서 발전을 선도하는 미완성의 토인 축 . 진토(丑 . 辰土)와, 통일과정에서 모순을 조절하면서 통일을 매개하는 완성된 토인 술 . 미토(戌 . 未土)의 구별이 그것이다.
축토와 진토는 자수(子水)의 응집력을 흡수하여 습토(濕土)를 이루어 인 . 묘목(寅 . 卯木)이 자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면서, 한편으로는 수기의 응집력을 약화시켜 씨앗이 껍질을 뚫고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에비해 미토와 술토는 오화(午火)의 분산력을 굴절시켜 신 . 유금(申 . 酉金)의 열매를 성숙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중에서 가장 먼저, 미토가 천간의 기토(己土)의 자리에 배정되는 무극의 자리를 차지한다. 무극은 미토의 통일작용의 근원력이라 할 수 있으며, 미토에 배정되어 있으나 미토 그 자체는 아니고, 오화와 미토의 사이에서 분열의 극한상태를 통합의 시초단계로 연결해주는 매개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무극이 [동질적인 분파작용]을 일으켜 미토의 작용을 매개로 음도(통일) 세력권을 형성하여, 그 끝에 이르면 술오토(戌五土)라는 공(空)을 이루는데 이것이 태극이다. 수렴(收斂) 통일(統一)이 극한에 이르러 무화(無化)한 것을 공(空)이라 하는 것이다. 이 태극은 일면은 토로서 통일매개성을 나타내면서, 일면으로는 수가 되어 분산의 원동력이 된다.
여기서 [동질적인 분파작용]을 간단히 소개하자. 우주는 유무(有無)의 화합체이므로, 유에서 무로, 다시 무에서 유로 끊임없이 변전(變轉)한다.
유에서 무로 가는 과정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으니, 분산을 계속하여 끝까지 분산해버리는 것과, 수축을 계속하여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무에서 유로 가는 과정도 마찬가지로서, 무한분열을 했던 것이 수축하면서 생겨나는 과정과 무한축소된 것이 다시 부풀어 오르는 두 방향이 있다.
이 둘은 모두 우주자연이 스스로 존재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우리가 다르게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 즉 본질적으로는 분열과 통합의 큰 주기(週期) 위의 두 단계를, 우리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분열의 끝에서 생겨나는 통합의 첫 갈래도 본질적으로는 분열과 같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다른 길이라는 뜻을 [동질적인 분파작용]이라 한 것이다.
태극인 술오공(戌五空)이 일태극수(一太極水)를 거쳐, 축 . 진토(丑 . 辰土)의 분산주도력을 따라 분열하여 극한에 이른 것을 황극이라고 한다.
황극은 목 . 화의 분열에서 생겨나는 모순을 조화시키면서 분열을 주도하는데, 자신이 나타나는 곳은 무극과 같은 곳이 된다. 즉 목기나 화기가 드러나는 곳에서는 이면에 숨어 있다가, 화기가 무한분열하여 없어진 곳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극은 무극 그 자체는 아니지만 무극을 창조하는 직접적인 주재자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한동석 선생은 이런 생각을 중심축으로 삼아 음양 . 오행 . 팔괘를 종합하는 역학이론을 모색하였는데, 약간의 혼란은 발견되지만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고 하겠다.
여기서 해설하는 천부역은 그런 혼란을 해결하거나 선생의 연구를 심화시킨 것이 아니라, 방향을 전환하여 <천부경>이라는 전혀 다른 진리체계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무극 . 태극 . 황극론을 전개한 셈이 된다. 그리고 그 초점도 기존의 역학이론과는 달리, 객관적 우주가 아닌 마음의 작용원리에 맞추므로서 역학의 새로운 근거를 모색한 것이다.
따라서 역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천부역의 무극 . 태극 . 황극론은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제에 새로운 문제를 추가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작업을 거쳐야만 역학이 주관과 객관을 통합하는 완전한 진리체계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이다.
라. 태극
1) 간추림
태극은 역학의 출발점인 동시에 귀결점이다. 태극의 비중이 큰 만큼, 태극이라는 말의 뜻도 여러 가지로 나뉘어 있고, 그 때문에 태극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역학자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역학의 출발점인 태극에 대한 이해부족은 역학을 어렵고 까다로운 학문으로 만들고, 그 결과 <주역 . 계사전>에서 말하는 네가지 도(道)인 말씀(言; 철학) . 그릇(器; 과학) . 점(筮; 예언) . 움직임(動; 절도 . 윤리)을 종합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저력을 배양하지 못하게 한다.
태극을 우주질서로 이해한 유학자들은 철학과 윤리에 얽매여 활력을 상실하고 현실을 소홀히 하였으며, 태극을 신령으로 이해한 일반 민중은 점괘의존적 운수관에 굴종했던 것이 우리나라의 역학문화이다.
기도(器道)는 현대과학에 의해 원자구조 . 컴퓨터 . 유전정보 등 자연과학 전반의 기본법칙을 이루고 있음이 밝혀졌지만 유생과 민중 모두에게 버림받았고, 그 때문에 과학발전의 주도권을 서양에 넘겨주어 이 문제많은 현대문명사회를 초래하였다.
다가오는 시대에 한겨레가 세계를 지도하기 위해서는, 영어과외를 시킬 것이 아니라 <주역>과외를 시켜야 한다. <주역>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그 시대 그 자리에 맞는 그릇을 만들어 쓸 수 있는 인재가 배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역>을 배우기 위해서는 <주역>의 상부구조인 <천부경>의 진리가 담겨있는 우리말을 더 깊이 공부해야 한다. 그러므로서 우리들의 문화 곳곳에 살아숨쉬고 있는 역학의 진리를 발굴하여 활용할 수 있게된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역학에서 말하는 태극의 개념을 지금 시대에 맞도록 새롭게 해석 . 정리하여, 역학을 올바로 이해하여 활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기로 하자.
2) 태극의 개념
기존의 역학에서 태극의 뜻은 첫째, [우주만물의 시원(始原)이 되는 형이상학적 본체]이다. 이를 달리 [천지가 아직 열리지 않고 혼돈한 상태로 있던 때, 즉 천지와 음양이 나누어지기 이전]이라고 한다.
천지와 음양이 여기서 나왔으므로 우주만물의 시원이요, 이 뜻을 <주역 . 계사전>에서는 "역에 태극이 있어 여기서 양의(兩儀)가 나온다(易有太極 是生兩儀)"라고 말하고 있다.
천지와 음양이라는 현상계의 가장 기본적인 형상마저도 나타나지 않은 어떤 상태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본체라고 하며, 이것을 <주자전서(朱子全書)>에서는 "{태극도설}에서 주자(周敦 )가 저 태극을 무극(無極)이라 칭한 것은, 그것이 차지하는 장소도 없고 형상도 없기 때문이며, 물(物)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하여 물이 존재한 후에 서지 않는 일은 없다하고, 음양의 밖에 존재하여 음양의 속을 돌지않는 일은 없다고 해서, 전체를 관통하여 무(無)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태극의 뜻은 이책에서는 무극으로 독립시킨 개념이다.
태극의 둘째 뜻은 [음양을 통합하는 한편 분산을 매개하는 특수한 중성]이다. 그냥 중성이 아니라 특수한 중성이라고 말한 이유는, 태극의 고유한 의미인 만물의 시원적 본체라는 측면을 전제한 중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다시말해 만물의 공통근원이기 때문에 만물이 태극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힘이 태극에 있고, 그 힘이 변형되어 나타난 중성이 태극의 중성인 것이다. 이런 중성을 본체중성이라고 한다. 이 중성은 이책에서의 황극과 비슷하다.
태극의 셋째 뜻은 복희팔괘가 그려내는 도형의 모양이다. 복희팔괘에 붙여진 번호 순서대로 줄로 이어주면 왼쪽으로 누운 [S]자 모양이 된다. 그것을 다시 무극을 상징하는 동그라미 속에 넣어 그리면 태극의 형상이 된다. 이 뜻은 이책 천부역에서도 고유의 개념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위에 설명한 태극의 세가지 뜻은 역학에서 사용되는 태극이란 말의 뜻을 모두 담고 있다. 다만 태극이 너무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에 이런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다 보니 어렵고 복잡한 말들이 필요했었고, 그러다보니 태극의 개념을 파악하기가 더 어려워졌던 것이다.
그런데 태극의 개념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태극의 의미가 더 분명해지고, 그 이전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많은 내용이 새로 밝혀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런 내용들은 천부역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므로, 여기서는 그 중 중요한 내용들을 간추려 소개하고자 한다.
3) 태극의 도학적 의미
① 태극과 본체
태극과 본체는 같은 뜻으로 이해된다. 이 경우 본체는 존재와 변화의 시원이 되는 존재, 만물의 동일한 근원이라는 뜻이 된다.
이 본체는 이미 말한대로 형이상학적 개념으로서 현실적인 존재는 아니다. 그리고 형이상학의 탐구대상이 정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본체와 정신의 본질이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태극은 인간의 주관적 정신능력과 객관적 현상사물의 동일근원이 된다.
물론 형이상학의 대상이 모두 정신적인 것이냐는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 핵심을 따진다면 정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물이란 없을 것이므로, 본체론의 주제는 정신이 될 수밖에 없다.
천부역 체계에서 태극과 본체의 의미는 [한나], 즉 인식하므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제한된 자연이다. 즉 초월인식과 현실인식의 양쪽에 의해 모두 인식되는 주객관 통합의 실체이다. <천부경> 삼한부의 "一始無始一"에서 ['한'은 시작없는 하나이다]라고 할 때의 [하나]가 태극인 것이다.
이 [하나]로서의 [본체]는 동도학에서 최고궁극의 진리체와 짝을 이루는 현상계의 근원으로 말해지는 것들이다. 이를 하나씩 살펴보자.
② 태극과 도
태극은 <노자>에서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아 셋에서 만물이 나온다"고 할 때의 [하나]에 해당한다. 즉 도(道) 그 자체는 아니되 현실의 근원으로 이해된 도라고 말할 수는 있다는 뜻이다.
③ 태극과 공
태극은 불교에서 궁극적 진리체를 뜻하는 공(空)과 같다. 불교에서 공은 최고궁극의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폐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공을 궁극의 진리라고 말할 때에는 공이라는 개념 조차도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공이라고 이름 붙여지고, 생각되어질 수도 있는 공이라면 불경(佛經)들에서 말하는 공은 아니다. 공이라고 말해진 [공], 그것이 태극에 해당한다.
④ 태극과 오행체
태극을 복희팔괘로 그려지는 태극형상으로 이해할 때에는 천부역에서 말하는 오행체이다. 즉 태극의 형상적 측면은 복희팔괘이고, 그것은 오행체를 변형시켜 나타낸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도형은 홀로그램의 원리와 프랙탈 원리를 종합한 [무내외성] 또는 [부분 전체 동일성]을 띤 자연모형이 된다. 즉 자연의 원형(原形)이 태극형상인 것이다. 이런 자연모형이 가능한 이유는 클라인 원통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클라인 원통의 구멍 주변에늘어선 팔괘가 구멍의 안쪽을 규정하고 있는지, 아니면 구멍의 바깥쪽을 규정하고 있는지를 구별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사물이라는 것이 클라인 원통의 구멍, 그 중에서도 벽에 의해 막혀 있다고 착각된 구멍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팔괘가 만물의 동일한 모습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이 오행체로 변형될 수 있는 이유도 간단하다. 클라인 원통이라는 것도 결국 이 오행체를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행체의 상생로와 상극로를 구별하여 그려보면, 오행체가 클라인 원통보다 더 오묘한 점이 있는 그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행체의 그림은 천부역에서 여러번 사용되지만, 이 그림은 여기에만 소개되니 잘 익혀두기 바란다. 특히 천부역에서 오행체에 팔괘가 배치되는 그림이 있는데, 그때 이 그림을 같이 보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그림의 의미는 두 부분으로 분리할 수 있는 별개의 영역이, 오행으로 이름붙여진 다섯 개의 결절점에 의해 오묘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상생로와 상극로를 분리해내려 하면 사면체의 모습이 유지되지 않는다.
결국 이 그림에서 어느 것이 안이고, 어느 것이 밖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 우리가 현상사물에서 어떤 부분 까지가 양이고, 어떤 부분 까지가 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이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⑤ 태극과 중
태극은 중(中)이다. 중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는데, 음양미분의 본체성을 의미하는 본체중성은 태극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본체중성에서 음양을 통합하는 통합중성, 음양을 매개하는 매개중성, 음양을 조절하는 조절중성 등이 파생된다. 따라서 태극을 중이라고 말할 때의 [중]은 본체로서의 중성존재로 이해된다고 하겠다.
⑥ 태극과 혼돈
혼돈(混沌)은 여러 가지 점에서 태극이다. 도학적 의미로서의 혼돈은 "천지가 아직 개벽하기 전에 원기가 아직 나누어지지 않고 엉기어있는 모습"이다.
이 뜻이 태극의 풀이와 꼭 같은 것임을 알 수 있고, 결국 혼돈은 태극의 형상을 중시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이 혼돈은 도학적 의미보다는 현실적 의미를 알아보는 것이 더 편리하다.
⑦ 태극과 수(水)
한동석 선생은 저서인 <우주변화의 원리>에서 태극을 본체수(본체로서의 水)라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과정적 측면에 중점을 두어, 우주변화를 십이지지(十二地支)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십무극인 미토(未土)가 신유금(申酉金)의 단계를 거쳐, 술오토(戌五土)에서 응축의 극한상태에 도달하여 공화(空化)하여 술오공(戌五空)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태극의 핵(核)이라고 한다. 이 공에서 일자수(一子水)가 생겨나는데 이것이 바로 태극으로서의 본체라는 것이다. 결국 태극과 태극의 핵을 다시 구별하는 것이며, 태극의 뿌리인 무극과 공(空)을 본질적으로같은 것이라고 본것이라 하겠다.
선생의 견해는 우주변화에 대한 탁견이기는 하지만, <천부경>의 수리체계가 밝혀진 상태에서는 여러 가지 보완할 요소가 발견된다.
이 단락의 주제와 관련된 부분만 보더라도, 기존의 역학에서 태극과 오행은 같은 등급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오행은 태극을 전체로 보았을 때 그 부분들이 작용하는 모습인데, 그것이 같은 [一]자로 표현되어 있다고하여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천부경>의 수리체계로 보면 태극은 '한'과 같이 단 하나의 숫자만이 홀로 있는 것이고, 오행으로 나뉘는 자연수 이전에도 삼극의 여섯 수가 따로 있다. 또 오행 십수 이후에도 다시 삼십수가 있어서 복잡한 중층구조를 이루고 있으니, 같은 [一]이라도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여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태극과 수(水)가 전혀 무관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태극은 북극으로 볼 수 있는 요소가 많으며, 이렇게 볼 때에는 태극과 오행의 수가 같아진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수(水)를 [1]과 [6]이 합해진 [7]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7]은 자연형인 동그라미를 의미하는 것이다.
[7]은 신수(神數)로서, 북두칠성을 나타낸다. 북두칠성의 형상은 태극의 경계선과 흡사하다. 그리고 북두칠성의 일곱 별은 하나의 원을 둘러싼 같은 크기의 여섯 동그라미로 이해된다. 이 북두칠성이 있는 북쪽이 [水]로 상징되므로, 이 경우에는 태극과 수가 동일시 될 수 있는 것이다.
4) 태극의 현실적 의미
① 간추림
태극이라는 개념은 다른 도학적 개념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서 도출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철학적 사유란 현실을 토대로 진행되는 것이며, 어떤 형이상학적 개념도 현실적인 사물을 이해하기 위한 논리의 일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태극이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사물이 반드시 현실 속에 있을 것이고, 그런 사물들에 태극의 개념을 적용시키면 태극과 보다 친숙해질 수 있다.
현실에서 태극의 개념과 연결되는 사물은 무수히 많다. 주자(朱子)가 "모든 사물에 태극이 있다"고 말한 것은, 우리 주변의 사물들이 모두 태극으로 이해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 중에서도 몇가지 자연현상은 태극의 개념적 요소와 형상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유교적 정치이념이 동양을 지배하는 동안 역학도 추상적 의리역에 치중하면서 현실적인 의미를 소홀히 하였으나, 역학의 본질은 자연과 인간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도학이므로 자연현상을 설명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런 자연현상들 중 몇가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② 태극과 혼돈
태극의 현실적 의미의 대표적 위상은 혼돈(混沌), 즉 소용돌이 모양이 차지한다. 이 소용돌이 모양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모양이며, 그런만큼 진리의 표상에 가장 가까운 모양이라 할 수 있다.
소용돌이보다 더 흔한 모양인 [참(充滿)]과 [빔(空)]이 자연의 가장 원초적 모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자연의 본질에 가까울수록 현상계에 흔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 혼돈의 비중은 과학이 발달할수록 더 크게 부각되고 있다. 우리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의 모습이나 우리 태양계의 모습, 인공위성에서 내려다 본 북극 상공의 대기(大氣)의 흐름이나, 원자폭탄의 위력을 능가하는 태풍의 중심부분 등이 뚜렷한 소용돌이 모양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③ 태극과 은하계
태극도는 한편으로는 하도(河圖)이기도 하다. 하도에서 음양이 서로 안고 안긴 모습에서 태극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하도를 만들 때 용마를 보고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용마가 실제로는 천문(天文), 즉 하늘의 별자리임은 이미 설명하였다.
우리들이 보는 밤하늘은 작게는 태양계이고, 크게는 은하계이다. 최근에 와서는 망원경이 발달하여 은하계 너머의 다른 은하를 보기도 하지만, 인류가 지난 수천년 동안 보아왔던 밤하늘은 은하계 내부의 성간공간(星間空間)이 한계였던 것이다.
은하계의 모습이 태극과 연관된다는 사실은 앞에서 태극도를 가야고분에서 출토된 파형동기와 관련시켜 설명할 때 밝힌 사실이다.
그리고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면서 [기]의 개념을 도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은하수는 자세히 보면 작은 별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마치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연기 또는 김(氣) 처럼 보이기도 한다. 은하수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고대인들이 그것을 하늘의 물로 보았다면, 은하수의 기가 뭉쳐 구름이 되어 비를 뿌리고, 그 빗물이 모여서 만물을 구성한다는 우주관을 충분히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④ 태극과 태양
태극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해석되므로서 태양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한다. 태양이 소용돌이가 된다는 말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태양의 자전축 위쪽에서 본다면 분명히 소용돌이치는 불덩이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태양의 범위는 현대과학에 의하면 혹성들까지 포함하는 태양계 전체이다. 우리들이 보는 밤하늘도 실제로는 태양의 거죽인 것이다. 태양의 거죽에 포착된 다른 항성들의 빛이 우리가 보는 별빛인 것이다. 태양의 영향력은 의외로 커서 별들로부터 오는 빛이 담고있는 많은 정보를 왜곡시키고 있고, 왜곡되지 않은 정보를 얻기위해 과학자들은 우주탐사선을 명왕성 바깥 쪽에까지 보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태양의 범위가 혹성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면, 태양이 소용돌이라는 사실을 더 확연히 알 수 있게 된다. 즉 태양의 불덩이는 태양이라는 소용돌이의 중심이 되고, 혹성들은 소용돌이의 팔들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은하계와 태양계가 닮은 꼴임을 알 수 있고, 이 때 태양은 지구의 근원이 되고, 은하계는 태양의 근원이 된다.
이런 관계에서 태극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관념이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역학이 얼마나 합리적인 학문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태극이 추상적인 관념론이 아닌 현실적인 자연과학의 일종이라는 사실도 확인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