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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김흥호 목사님의 글 (스승)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김흥호 목사님의 글 (스승)

柏道 2019. 3. 1. 21:56


김흥호 목사님의 글 (스승)

 

​스승

 

 

오늘은 ‘스승’이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스승이란 말은 선생이라는 말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선 학생과 선생을 구별한다면 학생은 배우는 사람이요, 선생은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모두 지식에 관계되는 말인데, 학생은 지식을 많이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선생은 또 지식이 많아서 그들에게 나눠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스승이라고 할 때 제자는 지식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도덕적인 선행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제자는 자기의 문제를 풀어가는 믿음하고만 상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스승도 지식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도덕적인 선행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스승이란 한마디로 자기를 이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박사학위를 얻었거나 대학을 졸업했다든가 하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세계적인 성현을 생각해 볼 때에도 소크라테스가 대학을 졸업했다는 일은 없습니다.

 

 

요새는 대학을 졸업 못해서 야단들이지만 우리가 진짜로 존경하는 사람들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공자도 제자들이 “선생님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지요?”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로 꿰뚫은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옛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구슬이 한 알이건, 두 알이건 그것을 꿰는 실이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영어 단어는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꿰지 못하면 외국 사람과 만났을 때 영어를 한마디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자란 어린애들은 아는 단어가 몇 개 안 되지만 그것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나 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어를 실로 꿰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조금 알아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실로 꿰뚫은 사람입니다.

 

 

“나는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로 꿰뚫은 사람이다”라고 말한 공자, 그분이야말로 도가 통한 자유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일이관지一以寬之라고 하는데, 스승은 지식인이나 도덕인이 아니라 일이관지한 자유인입니다. 자유인이란 자기를 이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스승이란 자기를 이긴 사람입니다. ...

 

 

논어에는 극기복례克己復禮, 살신성인殺身成仁을 인이라고 합니다.

 

인자는 자기를 이긴 사람입니다.

 

스승은 자기를 이긴 사람이지,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도 많이 안 사람이 아닙니다.

 

많이 안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이긴 사람입니다.

 

자기를 이긴 사람이 되려면 결국은 자기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이기기 위해서는 알아야 합니다.

 

영어로 안다는 말도 노우(know)이고, 부정한다는 말도 노우(no)인데 자기를 부정한다는 말은 자기를 이긴다는 말입니다.

 

 

싸움에서 적을 알지 못하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도 자기를 알지 못하면 이기지 못합니다.

 

자기를 아는 것은 곧 자기를 이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느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자각이요, 자기를 이기는 지혜입니다.

 

 

지혜는, ‘자기를 이기는 자기를 아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무엇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을 모르는 자기를 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한 차원 높아진 것입니다.

 

 

‘무엇’은 자연이고, ‘무엇을 모르는 무엇’은 인생입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인생을 아는 것입니다.

 

물론 자연을 아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아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어쨌거나 자연이든 인생이든 진짜로 아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안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해가 지구를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해를 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가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해를 돈다고 했다가 브루노(Giordano Bruno)는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를 알기도 어렵지만 진짜 아는 것을 말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에는 박해가 따르는 법입니다.

 

 

우리가 과학을 확실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공부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과학이란 진리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가설 위에 세워진 것이라 합니다.

 

 

이 말은 거짓말 위에 섰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식이 부족하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지금은 이것이 진리라고 알고 있지만 조금 있으면 다른 것이 진리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옳던 뉴턴의 법칙이 지금에 와서는 틀려 아인슈타인의 법칙이 옳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과학은 확실한 지식 같지만 확실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하나에다 하나를 더하면 둘이라는 것처럼 확실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에다 하나를 더하면 둘이다”라고 수학선생이 설명했을 때 에디슨은 “선생님, 저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해서 퇴학을 당했습니다.

 

 

에디슨의 어머니가 에디슨에게 “너 같은 천재가 왜 그걸 모르느냐”고 물어 보니,

 

에디슨이 “하나는 하나밖에 없다고 해서 하나일 텐데 어디 또 하나가 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모세의 십계명에 보면 제1조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나밖에 무엇이 있다면 우상이지 하나님이 아니다”란 말이 있습니다.

 

에디슨 생각으로는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지 둘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으니까 하나인데 어디 또 하나가 있어서 더해 줄 수 있는가를 에디슨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에다 하나를 더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식을 따져 보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허무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일 확실한 것이 있다면 내가 모른다는 것 하나만이 확실한 것입니다.

 

 

사람은 진짜를 알기 전에는 가짜를 진짜로 착각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붓글씨를 배우는데 진짜 글씨를 배워보니까 지금까지 내가 써 온 모든 글씨가, 글씨가 아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참을 알고 나서야 지금까지 내가 알아왔던 것이 다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몰랐던 것을 알았다는 말은 벌써 참을 알고서 하는 말입니다.

 

 

참을 알고 보니 지금까지 안 것은 다 거짓이었다는 것입니다.

 

중세기의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수십 권을 썼는데 그것은 중세기 최고의 책입니다. 그가 그것을 다 끝내지 못했을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 세계 제일의 신학과 성서학자였는데 예수를 만나고 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신학과 성경이 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 그는 더 쓸 용기를 잃었습니다.

 

우리도 아퀴나스처럼 그리스도를 만나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모든 지식이 다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 진짜를 아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았을까. 자기를 안 것입니다.

 

자기를 알고 보니 자기가 알던 모든 것이 다 거짓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안 바울이 자기가 안 것을 분토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스승은 참을 안 사람입니다.

 

참을 안 사람이 깬 사람입니다.

 

참을 안 사람은 자기를 이긴 사람입니다.

 

자기를 이긴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산, 큰 사람이 철이 든 사람이요, 철이 든 사람이 산 사람입니다.

 

스승은 한마디로 큰 사람이요, 깬 사람이요, 산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일까. 그리스도는 깬 사람이요, 큰 사람이요, 산 사람입니다.

 

스승이라는 글자는 ‘스’ 자와 ‘승’ 자가 합친 것인데, ‘스’자는 스스로 자自 자이고 ‘승’ 자는 이길 승勝 자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이긴 사람은 깬 사람이고, 큰 사람이고, 산 사람입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해야 할 일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깬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큰 사람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산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와서 할 일이 있다면 깬 사람, 큰 사람, 산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깬 사람이라 할 때 나는 깨끗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더럽다면 깼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큰 사람이라고 할 때는 역시 싸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이나 싸우지 어른은 싸우지 않습니다.

 

싸우지 않고 하나로 될 수 있는 백성, 이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조 5백 년의 사색당파처럼 부끄러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역시 큰 사람이 못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산 사람은 썩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정부패는 썩은 사람, 죽은 사람 때문에 일어납니다.

 

사람이 죽어야 썩지, 산 사람이 어떻게 썩겠습니까.

 

 

부정부패라는 말이 없어져야 이 나라가 삽니다.

 

부정부패라는 말이 있는 동안에는 이 나라가 살았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누가 돈을 갖다 줘도 스스로 받지 않는, 그런 시대가 와야 합니다.

 

 

우리는 살았다. 우리는 깼다. 우리는 크다.

 

땅덩어리야 크건 작건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깨야 하고, 커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나라를 만드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나는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옛날부터 스승을 언제나 산山에다 비유했습니다.

 

산이라는 것은 참 재미있습니다.

 

산山, 자기는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꾸 올라오게 만듭니다.

 

 

그것이 산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스승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자꾸자꾸 자라게 합니다.

 

학생들에게 자꾸 가르쳐서 조금이라도 더 알게 하는 것이 선생이지만

 

하나도 가르치지 않고 학생들로 하여금 혼자서 공부하게 하는 것도 스승입니다....

 

 

사람이 되면 사람은 저절로 따라 옵니다.

 

산이 있으면 사람은 혼자 올라옵니다.

 

 

그 존재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저절로 남을 오르게 합니다.

 

자기를 이긴 사람은 남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이겼기 때문에 남을 이기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위자연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 존재입니다.

 

 

자기를 이긴 사람은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산처럼 높은 경지에 서 있으면 되는 것 입니다.

 

 

스승은 산이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