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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20사 斥情(척정)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20사 斥情(척정)

柏道 2019. 2. 16. 07:47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8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는다.
이번에는 제 20사 성 2體 8用,
그러니까 正心(정심)의 여덟번째 쓰임
斥情(척정)에 대한 말씀이다. 
 
誠 2體 8用 (성 2체 8용)
제 20사 斥情(척정) 
 
斥却也(척각야)요
情情慾也(정정욕야)라
有喜怒則(유희노즉)
不得正心(부득정심)하고
有好惡則(유호오즉)
不得正心(부득정심)하며
求逸樂則(구일락즉)
不得正心(부득정심)하고
厭貧賤則(염빈천즉)
不得正心(부득정심)하나니
慾正心(욕정심)이면
先斥情慾(선척정욕)이니라 
 
'척(斥)은 물리침이요
정(情)은 정욕이라
기쁨과 노여움이 있은즉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고
좋음과 싫음이 있은즉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며
안일과 즐거움을 구해도
올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고
가난함과 천함을 싫어해도
올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느니라
올바른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정욕을 물리쳐야 하느니라' 
 
바로 이런 말씀이 어렵다.
대개 경전을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가
이런 식의 요구 때문이다.
먼저 무엇을 해야 된다고 하는데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거나
그러기가 너무 어려운 요구들이다.
세상이 다 안일함과 즐거움을 추구하고 사는데
그런 마음도 다 버리고,
누구나 다 가난함과 천시받음을 싫어하는데
그러면 안된다니 도대체 누가 이런 말씀을
좋아하겠는가?
감정만 해도 그렇다.
모든 인간이 기쁨과 분노의 감정,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등을 다 가지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감정들을
부정하고 다 물리치라는 것인가?
도대체 사람을 보고 살라는 건가, 죽으라는 건가?하며
반발이 생기게 되어 있다.
성경을 봐도 그렇고,
불경을 봐도, 다른 종교의 경전을 봐도
다 이런 식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전을 거부한다.
반면 바로 이런 가르침이 참된 진리라고 하여
열심히, 정말 목숨을 다하여
지키려 애를 쓰는 사람들도 소수지만 있다.
그래서 남 다른 경지에 이른 자들도 있다.
옛날 바리새인들이 그랬고,
오늘날 아미쉬 마을 사람들이나
불교사찰이나 기도원에 들어가
수행과 금식기도 등을 하는 사람들,
심지어 동굴에서, 설산에서,
광야 등지에서 세상을 멀리하고
정욕을 끊기 위해 무지하게 애를 쓰는 사람들도
제법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노력들도
헛되다는 것이 이미 2000년 전,
아니 그 이전에 판명이 난 상황이다.
그래봐야 안된다는 것이다.
되는 것 같지만 절대로 안된다.
그 허상을 폭로한 것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같은 책이며,
요즘 줄줄이 터져 나오는 성직자들의
타락과 부패한 소식들이다.
바로 이런 문제로 가장 고민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바울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도 그랬다.
아무리 노력하고 몸부림쳐도
도무지 물리칠 수 없는 정욕, 감정...
이 때문에 절망하고 또 절망한 경험을
아주 처절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감정을 물리치라니,
즐거움을 배척하라니,
가난과 멸시를 싫어하면 안된다니
도대체 이런 사람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란 말인가?
특히 문제는 본능적으로 주어진
성적인 욕구의 문제이다.
대개 '정욕'하면 이런 성적 욕구가 떠오른다.
예수도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한 자요, 율법을 범한 자란다.
심지어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도 살인이요,
미련한 놈이라고 욕을 하면 지옥을 간단다.
도대체 왜 이런 되지도 않은 말들을 했을까?
어느 경전을 펴 봐도 이런 류의
가르침들이 가득하니 누가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다 보니 대개 이런 입장을 취한다.
'경전의 말씀들은 다 옳고 좋은 말씀들이지만
우리같은 범인들은 지키고 따를 수 없는
너무 어렵고 힘든 계율들이다.
특별한 사람들, 성직자나 도인들이나
가능할지 모르나 우리는 이렇게 못산다'
하고는 위탁 대리자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성직자들의 계층이 생겨났고,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명예와 권세를 누린다.
그러다가 실체가 폭로되고,
위선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실망하게 되고
종교로부터 떠나는 빌미를 삼는다.
참 어렵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견우와 직녀 꼴 난다.
경전의 말씀들은 높고 멀리 있어
바라만 볼 뿐 다가갈 수 없다.
과연 오작교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나도 이런 고민을 많이 한 사람 중 하나요,
나름 몸부림도 심하게 쳐 본 경험이 있는지라
이 문제를 풀려고 애를 써 왔다.
그러는 중에 깨달음이 왔다.
그리고 검증을 해 보니 효과가 크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답이 '역설'이라는 점이다.
역설(paradox)은 모순되어 보이나
본질은 진리라는 의미이다.
분명히 모순되어 보인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들 말도 안된다는
반응이 나오게 되어 있다.
이단 소리도 듣게 되고, 사기꾼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어차피 여기에 답이 없다면
저기에 있을 것이니 가 보았다.
그랬더니 어둠으로 갔는데, 거기 빛이 있었다.
예수의 말씀이나, 오늘 본 말씀이나
사실은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분명히 나타난 표현은 '하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역설이라고 말한 것을 적용하면
오히려 이 말씀은 '해 봐라, 해도 안된다'는
의미가 정답이다.
아니 분명히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요'
'먼저 정욕을 물리쳐야 바른 마음을 얻는다'고
했는데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 싶을 거다.
만일 그런 반응을 하고 있는 수준이라면
좀 더, 많이 노력을 해 봐야 한다.
한 번 해보라. 정말 목숨걸고 금식하고,
수행하고 몸부림을 있는대로 한 번 쳐보라.
어떤 사람은 성기를 잘라버린 사람도 있다는데
거기까지는 몰라도 여한 없이
노력을 한 번 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이 답이 나온다.
'해도 안된다'는 답 말이다.
어떤 목사님은 40일 금식기도까지 했더니
딱 2주간 효과가 있더란다. 겨우 2주 말이다.
사실 2주나 간 것도 대단하다.
데카메론에 나오는 수도사들은
즉시 유혹에 넘어가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럼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되는데
왜 우리보고 하라고 그러는가? 하면
이런 답이 있다.
'안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참 기가 막히다. 
누구 약올리나 하며 화딱지가 날 정도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이제 재미있는 말장난이 시작된다.
못알아 듣겠으면 그냥 넘어가면 된다.
경전의 이런류의 말씀은 이렇게 풀린다.
정욕은 없앨 수도 없고,
감정을 제어할 수도 없으니
그럴려고 하지 말고 정욕과 감정을 긍정하라.
부정하는 만큼 더 매이게 되니
차라리 긍정하고 수용하라.
그러기에는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존심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항복해야 한다.
나는 절대 안되니 포기하겠다라고...
이럴 때 놀라운 현상이 일어난다.
노력하는 자아가 항복하고,
우리의 본성, 신성이라 해도 좋고
영이라 해도 좋은 본성이 정체를 드러낸다.
삼일신고에서 공부한 것처럼
우리의 본성, 영에는 그런 구분이 없다.
이원론이 초월되면서 이이상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 하는 분별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경지를 보고 감정을 물리친 상태,
정욕을 극복한 상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감정과 정욕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따라 사는 것도 아니다.
아예 그런 구분이 없어진다.
신성으로 들어가면, 깨달음에 이르면
바로 이런 경지가 체험되는 것이다.
집착도 없고 정죄도 없다.
판단자도 없고, 판단 받는 자도 없다.
그래서 기뻐하면서도 기쁨이라는 감정에 매이지 않고,
본노 하면서도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좋고 싫은 것에 자유로와지고
아무 것에도 거리낌이나 막힘이 없다.
이를 해탈이라 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했다.
이 수준에 이르게 되면
그 때부터 다 재미있어진다.
둘로 나뉜 것도 재미있고,
셋이나 열, 만가지로 나누며
무한하게 분리 시켜도 재미있다.
그래서 우주는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무한하게 퍼졌으며,
때가 되면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게 작정되어 있다.
그러니 뭐가 문제인가?
알고 보니 애초에 그런 분리가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