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16사 溢嚴(일엄)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4
무리하지 않고
주신 만큼 의욕과 보람으로
내게 주신 사명이요, 축복이라
여기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16번 째 걸음, 성 2體 4用 正心(정심)의
네번째 쓰임 溢嚴(일엄)에 대한 말씀이다
誠 2體 4用 (성 2체 4용)
제 16사 溢嚴(일엄)
溢水盈而遇也(일수영이우야)요
嚴正大之氣色也(엄정대지기색야)라
天含秋意(천함추의)에
肅氣溢于世界(숙기일우세계)하고
人包正心(인포정심)에
嚴氣一于動作(엄기일우동작)하여
威如神龍(위여신룡)하고
形似喬嶽(형사교악)이니라
'일(溢)이란 물이 가득참을 말하고
엄(嚴)은 큰 바름의 나타남이라
하늘이 가을추수(심판)의 뜻을 머금으면
엄숙한 기운이 세상에 넘치게 되고
사람이 바른 마음을 품으면
엄위로운 기상이 움직임마다 일어나니
그 위엄이 하늘의 용과 같고
그 형상은 높이 솟은 산과 같다'
이 말씀 앞에서는 숙연해진다.
엄숙한 기운이 전반에 깃들어 있는데
그 위엄과 영광의 힘이 깊이 느껴진다.
공의의 하나님의 속성, 가을 추수시 휘두르는 낫,
오행 중 금의 기운이다.
악한 자에게는 두려운 심판의 소식이요,
하나님께 속한 자에게는 소망과 인내의
강한 빛줄기다.
우주에는 사랑과 함께 정의가
한 축을 이룬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사랑이 우주의 본질이지만
거기까지는 우리 머리로 따라갈 수 없다.
인간은 사랑을 오해하기 쉽다.
그저 용서하고, 품고, 도와주고 하는
따뜻함과 부드러움만 사랑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또한 무지와 두려움에서 나온 미혹이다.
'천지불인'
사실 끊고, 심판하여 죽이는 것도 사랑에 속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머리가 혼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를 정의, 혹은 공의라는 이름으로 따로 부른다.
가을 추수가 없으면
봄의 씨뿌림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처럼
공의가 없으면 사랑도 온전해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두려움과 죄책감에 빠져 있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공의의 심판을 무서워하고 싫어한다.
그런 하나님을 피하고 싶어하고
그런 이치를 모면하려고 갖은 수를 다 써보기도 한다.
그러나 공의는 그런 목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위엄과 힘을
우리와 나누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다.
우주만물을 정의로 통치하는 맛,
그 훌륭한 맛을 우리에게도
맛보이시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잘 생각해 보라.
우리의 본성에 그 정의감이 있다.
옳다고 믿고, 바른 길이라고 확신할 때
우리의 기상은 어떤가?
그 위엄과 권세가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한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
심지어 천상의 존재들, 신과 신장들이라도
두렵지 않다.
하나님이 주신 바른 마음을 가질 때는
심지어 하나님과 독대하여 따질 수도 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그런 멋을 체험했다.
그는 감히 여호와를 책망하기까지 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려 할 때
의인과 악인을 함께 죽이는 것이 부당하다고 맞서며
감히 이렇게 대 들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세기 18:25)
캬... 멋지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말하며,
하나님보고 잘해야 된다고 충고를 한다.
그 앞 22절을 보면 분명히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라고 하여
당시 아브라함이 말한 대상은 여호와였다.
유대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모세도 하나님께 대어 들고, 막고 한 일이 있다.
엘리야나 바울 등도 그랬고,
예수는 오히려 자기 몸을 희생함을 통해
아버지를 항복시키기까지 했다.
예수를 믿기만 해도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려 하시면
예수가 막아서서 이렇게 변호할 것이다.
'아버지, 내가 이들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들에게 죄를
물으시려 합니까? 그건 천부당만부당 합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의 강력한 힘이다.
그런데 이 효력을 받으려면
그만한 배짱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비록 죄가 많고
부족하여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시고 약속하신 독생자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죄를
물으시고, 심판을 행하시려 하신다면
이건 계약 위반이요, 반칙입니다'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제껏 버틴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나님을 향해 당당할 수 있어야
이게 진짜 하나님을 경외함이요,
그의 약속을 믿는 자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에게
이런 당당함과 멋을 보고 싶어하실지 모른다.
바로 이것이 수준 높은 정의다.
바울이 이를 발견하고 쓴 것이 로마서요,
당당하게 외친 것이 '이신칭의'의 복음이다.
율법이 정죄하고, 양심이 우리를 가책한다.
왜냐하면 공의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그 공의의 심판과 형벌을
벗어나는 길은 착하게 산다거나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시도를 하는 자를
어리석고 교만하다고 한다.
공의의 심판을 벗어나는 길은
한 길 뿐이다.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근원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 버리면 된다.
믿든지, 아니면 깨달아 알든지
나뉜 상태를 벗어나 근원으로 돌아가 버리면
심판도, 형벌도 없다.
그런데 그것이 심심하고 재미없어서
둘로 나뉘어 존재하게 된 것이 세상이다.
따뜻한 것도 좋지만,
차가운 것도 멋지다.
남을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품는 것도 아름답지만,
불의에 대해 추상같은 호령을 내리고
단호하게 칼로 베어버리는 모습도
통쾌하고 멋있다.
몇 달 전에 내가 직접 심판을 시행해 본 적이 있다.
내가 직접 사서 내 손으로 키운
뿔 닭(호로새)들을 내 손으로
직접 처형을 했다.
이녀석들이 하는 짓거리가 아무리 봐주고
이해하려 해도 너무 악했다.
알 하나 못낳는 녀석들이 약한 닭들을
늘 괴롭히고 저희들끼리 싸우고 시기하는데
생긴 꼴만큼이나 악했다.
참다 참다 결국은 소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직접 공기총을 들고 처형을 했다.
물론 생명을 죽이는 일이라 내키지 않았지만
공의를 시행하는 준엄함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잘 거두어 묻어 주었다.
그러나 마음에 찜찜하거나 거리낌이 없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멋있다.
내게도 그런 단호함과 준엄함이 있었다니...
하나님은 바로 이 기분, 이 영광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싶어 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발등을 찍지
않도록 먼저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둘로 갈라진 마음은 우리를 보호하지 못한다.
본성,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해야 만이 주저함 없이 그런 공의를 행할 수 있고,
짜릿하고 통쾌한 멋을 유감없이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에게 인내와 소망을
품게 해 주는 큰 힘이다.
앞선 우리의 선배들이 그 혹독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그런 수동적인 차원에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본성을 의지하여
자책이나 두려움 없이 엄위롭고 단호한
정의를 시행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가장 강력한 정의실현이
용서하고 대신 희생하는 예수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너무 이상적일 필요는 없다.
단호하게 불의에 대해서 책망하고
항거하며, 추호도 흔들림 없는 기상을
나타내며 살라.
그래야 자기도 멋있고,
남들에게도 멋있으며,
하나님 아버지가 멋있게 보신다.
찌질하게 빌빌대지 말고 멋지게 좀 살다 가자.
참, 혹시나 해서 덧붙인다.
기독교인들은 용을 마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오해다.
동양에서 용은 하나님의 상징동물이다.
생긴 모습이 무서운 것은 엄위로움과
강함을 나타내기 위함이지 흉측함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성경의 마귀로 상징되는 용은
사실 이무기로 봐야 한다.
옛 뱀, 리워야단, 꼬불꼬불한 뱀은
모두 치사하게 사람을 꼬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한
이무기 정도로 봐야지
그에게 신령한 동물인 용으로 번역한 것은
서양인들의 무지의 소치다.
우리가 그들에게 교정을 해 주어야 한다.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24
무리하지 않고
주신 만큼 의욕과 보람으로
내게 주신 사명이요, 축복이라
여기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16번 째 걸음, 성 2體 4用 正心(정심)의
네번째 쓰임 溢嚴(일엄)에 대한 말씀이다
誠 2體 4用 (성 2체 4용)
제 16사 溢嚴(일엄)
溢水盈而遇也(일수영이우야)요
嚴正大之氣色也(엄정대지기색야)라
天含秋意(천함추의)에
肅氣溢于世界(숙기일우세계)하고
人包正心(인포정심)에
嚴氣一于動作(엄기일우동작)하여
威如神龍(위여신룡)하고
形似喬嶽(형사교악)이니라
'일(溢)이란 물이 가득참을 말하고
엄(嚴)은 큰 바름의 나타남이라
하늘이 가을추수(심판)의 뜻을 머금으면
엄숙한 기운이 세상에 넘치게 되고
사람이 바른 마음을 품으면
엄위로운 기상이 움직임마다 일어나니
그 위엄이 하늘의 용과 같고
그 형상은 높이 솟은 산과 같다'
이 말씀 앞에서는 숙연해진다.
엄숙한 기운이 전반에 깃들어 있는데
그 위엄과 영광의 힘이 깊이 느껴진다.
공의의 하나님의 속성, 가을 추수시 휘두르는 낫,
오행 중 금의 기운이다.
악한 자에게는 두려운 심판의 소식이요,
하나님께 속한 자에게는 소망과 인내의
강한 빛줄기다.
우주에는 사랑과 함께 정의가
한 축을 이룬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사랑이 우주의 본질이지만
거기까지는 우리 머리로 따라갈 수 없다.
인간은 사랑을 오해하기 쉽다.
그저 용서하고, 품고, 도와주고 하는
따뜻함과 부드러움만 사랑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또한 무지와 두려움에서 나온 미혹이다.
'천지불인'
사실 끊고, 심판하여 죽이는 것도 사랑에 속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머리가 혼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를 정의, 혹은 공의라는 이름으로 따로 부른다.
가을 추수가 없으면
봄의 씨뿌림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처럼
공의가 없으면 사랑도 온전해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두려움과 죄책감에 빠져 있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공의의 심판을 무서워하고 싫어한다.
그런 하나님을 피하고 싶어하고
그런 이치를 모면하려고 갖은 수를 다 써보기도 한다.
그러나 공의는 그런 목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위엄과 힘을
우리와 나누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다.
우주만물을 정의로 통치하는 맛,
그 훌륭한 맛을 우리에게도
맛보이시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잘 생각해 보라.
우리의 본성에 그 정의감이 있다.
옳다고 믿고, 바른 길이라고 확신할 때
우리의 기상은 어떤가?
그 위엄과 권세가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한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
심지어 천상의 존재들, 신과 신장들이라도
두렵지 않다.
하나님이 주신 바른 마음을 가질 때는
심지어 하나님과 독대하여 따질 수도 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그런 멋을 체험했다.
그는 감히 여호와를 책망하기까지 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려 할 때
의인과 악인을 함께 죽이는 것이 부당하다고 맞서며
감히 이렇게 대 들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세기 18:25)
캬... 멋지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말하며,
하나님보고 잘해야 된다고 충고를 한다.
그 앞 22절을 보면 분명히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라고 하여
당시 아브라함이 말한 대상은 여호와였다.
유대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모세도 하나님께 대어 들고, 막고 한 일이 있다.
엘리야나 바울 등도 그랬고,
예수는 오히려 자기 몸을 희생함을 통해
아버지를 항복시키기까지 했다.
예수를 믿기만 해도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려 하시면
예수가 막아서서 이렇게 변호할 것이다.
'아버지, 내가 이들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들에게 죄를
물으시려 합니까? 그건 천부당만부당 합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의 강력한 힘이다.
그런데 이 효력을 받으려면
그만한 배짱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비록 죄가 많고
부족하여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시고 약속하신 독생자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죄를
물으시고, 심판을 행하시려 하신다면
이건 계약 위반이요, 반칙입니다'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제껏 버틴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나님을 향해 당당할 수 있어야
이게 진짜 하나님을 경외함이요,
그의 약속을 믿는 자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에게
이런 당당함과 멋을 보고 싶어하실지 모른다.
바로 이것이 수준 높은 정의다.
바울이 이를 발견하고 쓴 것이 로마서요,
당당하게 외친 것이 '이신칭의'의 복음이다.
율법이 정죄하고, 양심이 우리를 가책한다.
왜냐하면 공의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그 공의의 심판과 형벌을
벗어나는 길은 착하게 산다거나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시도를 하는 자를
어리석고 교만하다고 한다.
공의의 심판을 벗어나는 길은
한 길 뿐이다.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근원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 버리면 된다.
믿든지, 아니면 깨달아 알든지
나뉜 상태를 벗어나 근원으로 돌아가 버리면
심판도, 형벌도 없다.
그런데 그것이 심심하고 재미없어서
둘로 나뉘어 존재하게 된 것이 세상이다.
따뜻한 것도 좋지만,
차가운 것도 멋지다.
남을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품는 것도 아름답지만,
불의에 대해 추상같은 호령을 내리고
단호하게 칼로 베어버리는 모습도
통쾌하고 멋있다.
몇 달 전에 내가 직접 심판을 시행해 본 적이 있다.
내가 직접 사서 내 손으로 키운
뿔 닭(호로새)들을 내 손으로
직접 처형을 했다.
이녀석들이 하는 짓거리가 아무리 봐주고
이해하려 해도 너무 악했다.
알 하나 못낳는 녀석들이 약한 닭들을
늘 괴롭히고 저희들끼리 싸우고 시기하는데
생긴 꼴만큼이나 악했다.
참다 참다 결국은 소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직접 공기총을 들고 처형을 했다.
물론 생명을 죽이는 일이라 내키지 않았지만
공의를 시행하는 준엄함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잘 거두어 묻어 주었다.
그러나 마음에 찜찜하거나 거리낌이 없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멋있다.
내게도 그런 단호함과 준엄함이 있었다니...
하나님은 바로 이 기분, 이 영광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싶어 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발등을 찍지
않도록 먼저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둘로 갈라진 마음은 우리를 보호하지 못한다.
본성,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해야 만이 주저함 없이 그런 공의를 행할 수 있고,
짜릿하고 통쾌한 멋을 유감없이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에게 인내와 소망을
품게 해 주는 큰 힘이다.
앞선 우리의 선배들이 그 혹독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그런 수동적인 차원에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본성을 의지하여
자책이나 두려움 없이 엄위롭고 단호한
정의를 시행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가장 강력한 정의실현이
용서하고 대신 희생하는 예수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너무 이상적일 필요는 없다.
단호하게 불의에 대해서 책망하고
항거하며, 추호도 흔들림 없는 기상을
나타내며 살라.
그래야 자기도 멋있고,
남들에게도 멋있으며,
하나님 아버지가 멋있게 보신다.
찌질하게 빌빌대지 말고 멋지게 좀 살다 가자.
참, 혹시나 해서 덧붙인다.
기독교인들은 용을 마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오해다.
동양에서 용은 하나님의 상징동물이다.
생긴 모습이 무서운 것은 엄위로움과
강함을 나타내기 위함이지 흉측함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성경의 마귀로 상징되는 용은
사실 이무기로 봐야 한다.
옛 뱀, 리워야단, 꼬불꼬불한 뱀은
모두 치사하게 사람을 꼬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한
이무기 정도로 봐야지
그에게 신령한 동물인 용으로 번역한 것은
서양인들의 무지의 소치다.
우리가 그들에게 교정을 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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