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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9事 淨室(정실)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參佺戒經),8理, 제 9事 淨室(정실)

柏道 2019. 2. 12. 23:31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16
 
보석캐러 또 간다.
제 9事, 그러니까 성 1體 7用,
이번에는 淨室(정실)이다. 
 
誠 1體 7用 (성 1체 7용)
제 9事 淨室(정실) 
 
淨室者(정실자)는
尊奉天神之處也(존봉천신지처야)라
卜陟乾禁葷穢(복척건금훈예)하며
絶暄譁勿繁式(절훤화물번식)하고
器具不在重寶(기구부재중보)요
質潔是要(질결시요)니라 
 
'정실(淨室), 즉 정결한 곳은
하나님을 높이 받들어 모시는
처소를 말하느니라
높고 습기가 없는 곳으로 택하고
나쁜 냄새와 더러운 곳은 금해야 하며
시끄러움도 피해야 하느니라
의식도 지나치게 번거롭게 하지 말 것이며
예식에 쓰는 기구는
값비싼 것으로 하지말고
소박하고 깨끗한 것으로 할 것이니라' 
 
출애굽기 후반과 레위기를
요약한 느낌이다.
추상적인 영적차원은
반드시 구체적인 물질세계에 반영되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보편적인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물질세계이다.
영적세계를 말하면서 물질세계를 무시하거나
물질세계에 치중하여 영적세계를 소홀히 하면
둘 다 치우친 것이다.
앞에서 중도에 대해 설명했는데
가장 영적인 것은 물질세계에서 나타나고
가장 물질적인 것은 영적세계로 승화하게
되어 있는 이치가 중도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은
보이는 우주만물을 통해 드러나고,
보이는 물질세계의 근원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귀결됨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현상은
진리의 속성이 아니다.
거기서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고
어리석은 고통이 발생한다.
그런 차원에서 구체적인 예배 처소에
대한 계시는 합당할 뿐 아니라
거룩하고 아름답다.
성숙한 의식은 우리 몸이 성전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거룩하고
정결한 예배처이기 때문에
외형적인 장소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이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온전한 이해 속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를 시중이라 하는데 '때에 맞는 중도'가
참된 중도이다.
바울도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면서 이를 영적인 예배라 했다.
따라서 성령의 전인 우리 몸과
우리의 몸이 활동하는 물질적 장소는
결코 무시해서 안된다.
장소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이고
예배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 장소도
하나님과 사람에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숙한 사람에게도
외형적 건물이나 장소가 중요한데
환경에 영향을 크게 받는 어린수준의
의식에 있는 자들에게는 몸과 의복,
그리고 예배처소에 대한 규례는
더욱 중요하다.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밝고 맑고 깨끗한 영이시므로
우리 몸과 거주하는 집, 예배처소
모두 이런 속성에 부합하도록 해야한다.
매일 정결하게 몸을 씻고,
깨끗한 의복으로 갈아 입으며
항상 자세와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편하다고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는 것은
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지나친 격식을 차리는 것과
몸단장에 시간을 많이 쓰는 것은 그 또한
치우친 증거이므로 마찬가지 금해야 한다.
때와 장소, 사람을 잘 분별하여
적절한 몸가짐을 해야 하듯이
특별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의 몸가짐과
처소가 어때야 할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본문의 설명은 단순한 건물 예배처소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이미 성령께서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삼고
계시기 때문에 우선 적용할 것은 몸이요,
다음이 집이나 건물이다.
높고 건조한 곳은 일차로 우리 머리를 의미하여
맑고 깨끗한 정신을 가질 것을 뜻한다.
세상일로 분주하여 정신이 산만하고
근심과 불안으로 머리가 무거운 상태는
하나님을 예배할 몸과 마음 자세가 아니다.
마찬가지 건물도 높고 건조하며
조용하고 맑은 환경이 좋다.
그래서 교회나 사찰, 성당의 위치는
항상 특별했다.

예배처소를 중시히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의 증거이다.

만일 예배 장소가 낮고 습하며
탁한 공기와 어두움과 추함이 있다면
누가 거기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그런 차원에서 지하실이나
요란하고 시끄러운 상가 등지에
예배장소를 마구잡이로 정하는 행위는
합당치 못하다.
재정이 부족하다거나 영혼 구원이 목적이니
장소는 상관없다는 그런 태도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격과 질을 크게 떨어뜨렸다.
붉은 십자가로 홍수를 이룬 도시를 보면서
거기서 영광과 존귀에 높이 들려계신
하나님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교회지도자들이 참전계경만
제대로 읽었더라도 이런 추태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화려하고 높은 건물로
성전을 삼아 하나님이 거하시도록 해야겠다는
마음도 같이 어리석다.
어찌 하늘을 보좌로, 땅을 발등상 삼고
계신 분을 건물에 가두려 하는가?
그런 건축과 화려함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음을 진리는 폭로한다.
그래서 헤롯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예수는 허물라고 했고, 곧 허물어져 돌 위에
돌하나 남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인간은 참 치우치기를 잘한다.
항상 경계하여 조심해야 한다.
예배 의식도 너무 요란하고
복잡하면 영적 예배의 중심이 흩어지기 쉽다.
또한 화려하고 값비싼 장식이나
기구를 사용하는 것도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야단스런 몸치장이나 의복도
스스로와 남에게 불편을 끼쳐 예배의
본질을 흐리기 쉽다.
외형과 내면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영적인 수준은 물질차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며,
복잡하지 않아도 깊은 것이 높은 수준이다.
무엇보다 영적인 기운이 건물에
풍성하게 깃들게 되면
그 장소 자체가 향기를 내고 빛을 발한다.
그래서 먼저는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들이고, 다음이 그러한 자들이 모여
함께 예배하는 깨끗하고 단정한 장소다.
자신의 몸과 의복, 그리고 예배장소를
진지하게 돌아보라.
거기에 하나님 경외의 증거가 있다.



푸른 오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