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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우신 그 이름 예수(9) 본문
놀라우신 그 이름 예수(9)
E.W.케년
제 6 장 인간과 기적(2)
기독교는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적이셨고, 기적이십니다.
성경은 기적의 책입니다.
기독교에서 초자연적인 것을 제거하면, 이는 한낱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적은 인간의 갈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행하는 자는, 그것이 참이든 거짓이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나 정치인 보다 많은 회중을 모을 것입니다.
기적에 대한 이러한 애착은 무지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갈구입니다.
교육은 기적을 향한 인간 내면의 열망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교육이 자연 법칙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을 드러내고,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인간의 전적인 의존을 나타낼수록
그 열망은 더욱 강렬해 집니다.
기적을 부인하는 것이 위대한 학문이나 경건함,
또는 예리한 지성의 표시는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기적을 믿습니다.
성경은 기적들과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것은 자연계 안에서 발생한 초자연적인 영역에 관한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구약 역사의 모든 중요한 인물들은
기적을 행하는 자들이었거나, 또는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기적들을 일으키신 자들이었습니다.
요셉을 감옥에서 애굽의 총리로 높이신 일은 기적이었습니다.
애굽의 속박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것은 애굽을 근본부터 흔드는
일련의 기적들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것과 광야 생활 40년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볼 수 없었던 일련의 기적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의 목적은 애굽의 죽은 신들로부터 이스라엘을 분리시키고,
그들이 아브라함의 살아계신 하나님께 경배하도록
결속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주의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동안에만 유대주의 였습니다.
기적들이 끝났을 때,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에 빠졌고,
깜짝 놀랄만한 일련의 기적들이 나타나야
그들은 다시 하나님과의 교제로 돌아 왔습니다.
지면에 여유가 있다면, 가나안 정복의 기적들과 열왕기의 기적들
및 다니엘서에 기록된 4가지의 위대한 기적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그들의 나라로 돌려 보내진 것, 우상 숭배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던 것,
한 나라의 노예였다가 자유롭게 된 선례를 확립한 것,
그리고 승인 하에 그들의 나라로 보내졌을 뿐 아니라 도시와 성전 재건
및 예배를 위한 자금까지 받은 일
(이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 확실하고도 분명한 기적입니다)을
연구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예님께서 그분의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그것은 기적의 사역이었습니다.
교회가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 그것은 기적의 사역이었습니다.
겸손한 갈릴리 예수님을 높였던 오순절 이후의
모든 부흥은 기적들의 부흥이었습니다.
교회는 위대한 철학 선생들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리스도의 새로운 비전을 가졌던 겸손한 평신도들로 말미암아
퇴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분명한 성령님의 임재를 갈망합니다.
무미건조한 모임은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하지만,
말씀이 계시되거나, 영혼이 구원 되거나, 병자가 낫거나,
성령 충만함을 받는 일들로 풍성한 축복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 예배는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성령님의 부으심은 언제나 공동체에 자극을 줍니다.
보통 사람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것을 갈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기 원하고,
보이지 않는 역사를 경험하는 경이로움을 느끼기를 사모합니다.
인간은 기적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기적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그 기적의 요소가 인간 안에 있습니다.
인간은 기적을 행하기를 갈망하고, 초자연적인 환경에서 살기를 갈망합니다.
인간 안에 있는 이 기적의 요소는 인간을 발명가요,
탐험가요, 수사관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실험을 거듭하여 화학과
전기와 항공을 정복하게 했습니다.
이 요소는 우리에게 현대 문명을 구성하는 비행기, 잠수함, 라디오,
무선통신 및 다른 모든 장치와 발명품과 발견들을 주었습니다.
기적의 영역은 인간 본성의 영역입니다.
창조에 의하여 인간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죄는 인간을 기적의 영역에서 퇴위시켰으나,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은
예전의 자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낮선 믿음의 삶의 원리들을 붙잡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운 싸움이었습니다.
죄는 우리를 애쓰는 자(workers)로 만들었지만,
은혜는 우리를 믿는 자(trusters)로 만들었습니다.
태초에는 인간의 영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했을 때, 그의 생각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영을 퇴위시켰고, 지성을 왕위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영을 통치 자리로 회복시켰고,
인간이 영의 지배를 인식하게 되면,
애쓰지 않아도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더 이상 투쟁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자연스런 삶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영역은 인간의 정상적인 본향입니다.
그곳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일상적으로 교제하고,
기적을 행하시는 기적의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믿게 되며, 믿음을 행사한다는 의식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가장 고차원적인 믿음을 행사하는 그런 경지에 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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