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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23절) 천 명에서 한 명, 만 명에서 두 명 본문

영성수행 비전/도마복음

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23절) 천 명에서 한 명, 만 명에서 두 명

柏道 2019. 1. 2. 23:14

도   마   복   음


The Gospel of Thomas

 

 

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풀이

또 다른 예수

 

Lambdin Translation

Davies Translation

Patterson and Robinson Translation



23. 천 명에서 한 명, 만 명에서 두 명

깨달음의 어려움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택하려는데,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입니다. 그들이 모두 홀로 설 것입니다.”


Jesus said, "I shall choose you, one out of a thousand, and two out of ten thousand, and they shall stand as a single one."


Jesus said: I will choose one of you out of a thousand and two of you out of ten thousand. They will stand up and they will be alone.


Jesus says:

(1) "I will choose you, one from a thousand and two from ten thousand. 
(2) And they will stand as a single one."

 

여기서는 누구는 택함을 받고 누구는 택함을 받지 못한다는 식의 예정론 같은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천 명 중 한 명”, 심지어 만 명 중 두 명꼴이라니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기보다 더 어려운 셈이 아닌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7:16, 13:2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는 말씀과 같다.

 

힌두교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즉 깨달음의 길jnana marga, 신애信愛의 길bhakti marga, 행함의 길karma marga이다.

 

깨달음의 길jnana marga이란 우주의 실재를 꿰뚫어보는 통찰과 직관과 예지를 통해 해방과 자유에 이른다는 것이고,

신애의 길bhakti marga은 어느 특정한 신이나 신의 현현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믿고 사랑하고 받드는 일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고,

행함의 길karma marga이란 도덕규범이나 규율을 잘 지키거나 남을 위해 희생적인 선행을 많이 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세 가지 구원의 길 모두 자기중심적 자아를 극복함으로써 새 사람이 되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실행하기에 상대적으로 어려운 길과 쉬운 길로 나누기도 한다. 깨달음의 길은 가장 가파르고 어려운 길이라 상근기上根器에 속하는 소수에게만 가능하다고 본다. 일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따르는 길은 신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신애의 길이다.

 

불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있다.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성불하겠다는 선불교의 길을 보통 난행도難行道라고 하고, 아미타불의 원력을 믿고 나무아미타불하며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토종淨土宗의 길을 이행도易行道라고 한다. 물론 참선하는 사람보다 염불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불교의 경우 믿음을 강조하는 불자들이 비록 자기들이 깨침에 이를 수 없지만, 깨침을 강조하는 불자들을 우러러보거나 존경할망정 결코 이단이라 정죄하거나 박해하지 않는 반면, 그리스도교에서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깨침을 얻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이단이라 여길 뿐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정죄하거나 박멸하려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초기에도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스스로깨달아 알라는 깨달음의 길은 그만큼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던 모양이다. 도마복음같은 복음들이 사라진 배경에는 물론 초대 교부 이레네우스 같은 문자주의자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도마복음류의 복음서들을 모두 배격하고 4복음서만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 큰 이유라고 하겠지만, 결국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깨달음에 이르므로 모두 예수님처럼 자유의 사람이 되도록 하라는 도마복음식 기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보다, 예수를 믿고 은혜의 선물로 주는 영생을 얻으라고 강조하는 요한복음의 길을 채택한 사람들이 숫자적으로 더 많았다. 그러기에 요한복음은 정경으로 채택되어 그리스도교의 정통의 가르침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반면 도마복음은 사라지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보면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식의 그리스도교 전통은 신앙의 깊은 차원을 알아볼 기회가 없던 일반인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인기 품목이 되기 어려웠던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옛날에는 비록 상근기를 가지고 태어났어도 교육의 기회가 없어서 이런 난행도같은 것을 접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문맹율이 97% 이상이던 고대 사회에서 누가 옆에서 말해주지 않으면 도마복음의 기별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고대 사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최근까지도 사정은 비슷했다. 한 가지 예로 미국인 리처드 베이커Richard Baker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 보스턴에서 일본 교토京都로 건너가 선사 스즈키 순류木俊降 밑에서 선수행을 하고 선사禪師가 되어 샌프란시스코 선원禪院의 주지가 되었는데, 하루는 도마복음을 전문으로 하는 프린스턴 대학교 일레인 페이젤스 교수와 이야기하게 되었다. 대화를 나누던 그는 어느 순간 제가 도마복음을 미리 알더라면 구태여 불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했다. 도마복음의 가르침이 선불교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런 가르침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한두 세대 전에만 해도 알 길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인터넷 등 대중 매체의 발달로 정보화 시대가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나 필자도 한 세대 전에 태어났으면 그리스도교에 깨달음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지냈을지 모른다. 그야말로 이제는 들을 귀, 알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 요엘서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2:28)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그 후가 오늘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지적영적 환경 속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가물에 콩 나듯이 아니라 가마솥에콩 튀듯이 등장하리라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가톨릭 최고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21세기 그리스도교는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신비주의적이라는 말은 물론 깨달음을 강조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독일의 신학자로서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도로테 죌레Dorthee Soelle도 근래에 펴낸 그의 책 The Silent Cry에서 신비주의 체험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무엇이 아니라 이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서 있을 수 있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른바 신비주의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mysticism'를 주장했다.

 

오늘처럼 정보화된 시대에 교육의 기회도 많고,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특별히 박해받는 일도 사라진 21세기에는 종교가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을 강조하는 신비적 경향성을 띠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그리스도교도 믿음뿐 아니라 깨침도 함께 강조하는 폭넓은 종교로 변해야 하고, 그리하여 무조건 믿어라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에게 아하!”를 연발하며 갈 수 있는 깨침의 길도 열려 있음을 알릴 때가 되지 않았을까.

 

천 명에 한 명이든 천 명에 백 명이든, 깨침을 얻은 사람들은 제16절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홀로서게 된다. 임금에 대한 충절이아 의로움을 위해 죽은 사육신 성삼문마저 독야청청할 수밖에 없었거늘, 영적 눈뜸을 경험한 사람들의 경우는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21세기를 개인적 영성의 시대가 되리라 예견한 신학자나 미래학자의 말처럼, 이런 홀로의 가치를 중시하는 이들이 최근에 와서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고1>

 

각 시대를 통해 수백만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경외해 왔다. 그러나 예수님을 이해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고, 그가 원했던 것을 실천하려 한 사람은 더더욱 소수였다. 그의 말씀은 뒤틀리고 휘어져 무슨 의미로든 마음대로 해석되거나 심지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에게 겁주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을 영웅적 바보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오남용되었다. 예수님은 그가 의도했던 것보다 의도하지 않았던 일로 인해 더욱 큰 영광과 경배를 받으신다. 더할 수 없는 아이러니는 그가 그 당시 세상에서 그렇게도 강력하게 반대했던 일들이 되살아나서 온 세상에 퍼지고 있는데, 그것도 바로 그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Albert Nolan, Jesus Before Christianity: The Gospel of Liberation

 

<참고2>

 

깨달음은 평생에 한 번 오는 일생일대의 대사건일 수 있겠지만, 일회적으로 그치기보다는 매일, 매순간 깨달음의 연속을 맛보며 신나게 사는 삶, 매사에서 죽음과 부활의 연속을 체험하며 사는 삶이 더 현실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옛 편견을 벗고 새로운 빛으로 들어서는 것, 산을 올라가며 점점 널리 전개되는 풍광을 내려다보며 계속적으로 외치는 아하!”경험, 바울이 말하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경험이 모두 깨침의 경험이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출처] 도마복음-제23절|작성자 byuns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