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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도마복음(67 절): 자기 자신을 알라! 본문

영성수행 비전/도마복음

도마복음(67 절): 자기 자신을 알라!

柏道 2019. 1. 2. 11:49



도마복음(67 절): 자기 자신을 알라!

    

Jesus said, "If one who knows the all still feels a personal deficiency, he is completely deficient."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것을 알되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니라."  
   

해석 

도마복음 3절에 "너희가 네 자신을 알게 되면 너희는 알려질 것이요 살아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자신임을 깨닫게 되리라. 그러나 자신을 모른다면 빈곤 가운데 사는 것이며 빈곤 그 자체이니라."라는 구절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붓다, 예수, 소크라테스 등과 같은 현자들은 하나같이 “자기 자신을 알라”고 한다. 모든 것의 출발점은 자신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 세상의 어떤 명예, 학위, 부귀도 관중 없이 혼자 돌아가는 영사기 필름처럼 의미 없는 것이다. 매일 신에게 기도하고 십일조에다 감사 헌금을 하고 성경말씀을 따르고 열심히 전도까지 해도 자기 자신을 모르면 하늘나라에 결코 갈 수 없음이다.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기독인들이 많다. 그러나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일관되게 내면에 천국이 있고 자기 자신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하느님 자녀임을 알게 된다고 한다. 더 나아가 우리 모두는 빛에서 나온 존재라고 말한다. 예수는 자신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을 하는 대신 자신처럼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하였다(도마복음 55절).  
  

예수가 말하는 십자가는 무엇일까? 그것은 여러 의미가 숨어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라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진리 전파에 같이 나서자는 말이다. 또 다른 중요한 하나는 자신의 업(운명)을 극복하여 깨달아서 십자가가 되라는 말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선 십자가에 숨어 있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이 십자가를 자신들의 상징(4세기 초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십자가가 기독교 예술 전면에 등장하였고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승인, 영광, 생명, 평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임)으로 사용하기 오래전에 이집트나 인도 등 여러 나라에서 생식이나 장수 등의 상징으로 사용되어왔다. 불교의 스와스티카[만(卍)자]도 십자가의 또 다른 형태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십자가는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고대 신비 십자가 상징을 자신의 것으로 차용한 것뿐이다.   
 
 
깨달음과 관련된 것이 유대 신비 가르침인 카발라의 십자가 상징이다. 카발라에 의하면 이 우주는 4계(영계, 멘탈계, 아스트럴계, 물질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 인간은 욕망과 부정에 빠져 물질계(우리가 사는)너머 상위의 계와 접촉할 수 없다고 한다.  
 

이 4계를 극복하고 균형 상태에 도달할 때 우리는 전체(무한자)에게 돌아가서 하나가 된다고 한다. 십자가를 구성하는 동서남북 4개의 점은 4개의 세계를 의미하며 십자가 중심은 모든 것이 나온 원천, 무한자를 상징한다. 그래서 십자가는 완성을 의미하며 깨달음의 상징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주의식(신)과 합일을 상징한 사건이었다. 상징적으로  우리 모두는 십자가가 되어야 한다. 예수가 말하는 십자가는 작게는 자신의 십자가를 걸머지고 크게는 인류의 깨달음을 위한 봉사의 십자가를 걸머져야 함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처럼 사람들이 그토록 찾는 구원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자신을 아는 것에서 온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될 때는 신이 무엇이며, 우주가 무엇인지, 신과 자신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게 되며 십자가가 되어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붓다가 35세에 깨달음을 얻고 80세까지 법을 설한 것도 우리 자신이 붓다임을 알라는 것이었고 예수가 우리에게 전한 복음도 하느님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으니 우리 자신을 알면 신을 알게 된다는 말이었다. 자신을 알라는 지극히 평범한 말에 우주와 바꿀 수 없는 진리가 숨어있음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근본적인 질문, “당신은 누구인가?”에 답을 할 수 있는가? 부모가 지어준 이름과 몸뚱이를 자신이라 주장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태어나 자라오면서 축적한 모든 기억과 경험, 지식의 합체를 자신이라 주장하는 사람은 많다. 그런 것이 자아라면 엄청난 정보를 보관하고 자료를 인식하고 적절한 답을 주는  컴퓨터도 자아가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자아는 생각 너머 침묵 속에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을 지켜보는 자(Watcher) 즉 참나(眞我)이다. 이 참 모습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명상을 하고 마음을 닦고 자기성찰을 하는 것이다.

[출처] 도마복음(67 절): 자기 자신을 알라! | 작성자 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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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자기를 모르면

나를 아는 앎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도 자기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Jesus said, "If one who knows the all still feels a personal deficiency, he is completely deficient."


Jesus said: one who knows everything else but who does not know himself knows nothing. (NOTE alternatives)


Jesus says:

"Whoever knows all, if he is lacking one thing, he is (already) lacking everything."

 

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공관복음에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다(16:26, 8:36, 9:25). 바울은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전13:2)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기 목숨이나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아는 앎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 말은 사실 소크라테스를 통해 많이 알려진 델포이 신전의 신탁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앎에는 두 가지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앎과 자기 스스로를 아는 앎이 그것이다. 누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을까마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해 많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은 좋은 일일 수 있다. 바로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이나 정보를 말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런 일반적 앎을 넘어서서 사물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통찰이나 직관 같은 앎이 있다. 초월적인 혜안慧眼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혜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둘째 종류의 특수한 앎을 가지기 위해서는 첫째 종류의 일반적인 앎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일반적 앎을 기초로 하여 굳어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손상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인습적 지식을 알음알이혹은 분별지分別智라고 하여 위험시한다. 불교뿐만 아니라 도덕경47장에도 문 밖에 나가지 않고도”, 심지어창으로 내다보지 않고도알 수 있는 앎을 추구하라고 하고,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덜 알게되니 조심하라고 했다. 곧이어 48장에서도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이지만,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일손日損의 길이라고 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일상적 지식을 쌓느라 부산하게 쏘다닐 것이 아니라, 고요히 앉아 깊은 내면적 성찰을 통해 나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것, 본래의 나를 깨닫는 것이라는 뜻이다. 특히 요즘 같은 정보의 홍수 시대에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가 금방 한물간obsolete’‘지식knowledge’, 이른바 ‘obsoledge’가 되어 폐기처분해야 할 것으로 변하는 마당에 그런 것에 연연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앎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앎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잘못 아는 앎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앎이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알고 있으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앎을 두고 중세 신비주의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박학한 무지docta ignorantia라고 했다. 소크라테스가 자기도 무지하고 아테네 사람들도 무지하지만 자기와 아테네 사람들과의 차이는,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 반해, 자기는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무지가 바로 박학한 무지인 셈이다.

[출처] 도마복음 제67절|작성자 byuns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