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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도마복음(50 절): 그대들은 빛이노라! 본문

영성수행 비전/도마복음

도마복음(50 절): 그대들은 빛이노라!

柏道 2019. 1. 2. 11:14


도마복음(50 절): 그대들은 빛이노라!                                                               

        
  Jesus said, "If they say to you, 'Where did you come from?', say to them, 'We came from the light, the place where the light came into being on its own accord and established itself and became manifest through their image.' If they say to you, 'Is it you?', say, 'We are its children, we are the elect of the living father.' If they ask you, 'What is the sign of your father in you?', say to them, 'It is movement and repose.'"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 ‘사람들이 당신들은 어디서 왔느냐?’ 고  물으면 '우리는 빛에서 왔으며 빛이 스스로 생겨나기 시작하여 스스로 형성되고 형상으로 나타난 그곳에서 왔노라" 대답하라. 사람들이 '그것이 당신이냐?'고 묻거든 '우리는 그것의 자녀들이며 살아계신 아버지의 택함을 입은 자들이라' 말하라. 

만약 그들이 '당신 안의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사람들에게 말하라 '그것은 움직임과 휴식이라‘ 말하라. “  
 
 
해석 

이 구절은 전형적인 카발라 우주 창조론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카발라는 서양 신비주의 사상의 모태로 알려졌지만 사실 카발라는 동서양 모든 사유체계의 근원이다. 영지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인도 고대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문화와 지역에 따라 다른 언어와 사유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우선 카발라 창조론을 보자.  

시작도 끝도 없고, 공간도 존재도 없는 공(Void, 심연)에서 홀연히 빛이 나타났다. 이 빛은 주변의 공(Void)을 밀어내며 한동안 계속 확장하였고 빛이 확장하는 가운데 조화로운 움직임과 무질서한 빛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확장을 끝낸 빛은 중심에 조화로운 빛, 바깥에 조화롭지 못한 빛(부정)으로 나뉘어져서 존재하였다. 조화로운 빛은 우주 알 또는 모든 것의 근원, 횃불을 든 자, 왕  중의 왕, 호아라고 불리어 졌다. 이것이 바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첫 번째 원인이며 근원적 존재이다. 이 첫 번째  원인인 조화로운 빛은 무질서한 빛을 자신처럼 조화롭게 변형시키기 위하여 첫 번째 빛을 방출하니 여기서 창조가 시작된다. 이 첫 번째 빛은 창조의 숨이며 근원자의 의지이며, 우주의 법칙으로 모든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어 여기로  돌아간다. 




첫 번째 빛은 무질서한 빛(부정)을 밀어내고 창조의 공간을 설정한다. 창조 공간이 생기고  첫 번째 빛에서 순서적으로 9개의 신성 빛이 확장하여 나와 우주 창조를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우주는 상징적으로 10개의 빛(우주를 상징하는 생명나무 10개의 광)으로 구성되었다. 




우주공간에 수많은 행성들이 만들어지자 우주 중심에 있는 영 태양(spiritual sun, 물질태양의 원천, 우리가 보는 물질태양은 영태양의 물질 통로이다)의 문이 열리고 신성한 에너지는  우주로 흘러 들어왔으며 행성들은 물질 태양 주변을 돌고 마침내 우주는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창조의 숨으로 식물과 동물이 탄생하고 모든 것이 뜻대로 작동되자 “왕 중의 왕”, “호아”의 확장인 “우주의식(신)”은 자신을 무수히 많은 빛(영혼)으로 나누어 행성에 나타나 무질서한 빛(부정)을 조화로운 빛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시작하였다. 한동안 뜻대로 우주는 작동하였고 모든 것이 좋았다. 자유의지를 가진 태초 영혼들이 일에 대한 욕심으로 부정(무질서, 부조화한 빛) 속에 너무 깊게 몰입하다가 그만 무질서한 빛 속에 갇히고 말았다. 상징적으로 에덴동산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일로 인간은 신성 힘을 잃고 신 상태에서 추락 하고 말았다. 이후 인간은 윤회를 통하여 다양한 삶을 살아가면서 영적 진화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이것은 원래의 신아(神我)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카발라의 생명나무에 있으니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사다리이다. (김 우타 “소리 없는 소리”)        




이 카바라 창조론이 도마복음 50절과 같다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예수는 카발라의 우주창조론을 말하고 있었다. 공에서 무한 빛이 나오고 우리 영혼은 이 빛에서 나왔던 것이다.  

여기서 공의 개념이 어려울 수 있는데 유한한 마음으로 무한을 설명하려다 보니 일어나는 언어와 개념의 한계이다. 




공의 개념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하여 영지주의 학자인 바실리데스의 우주 창조론을 살펴보자. 

공(空)이란 물질(物質)도 본질(本質)도 아니며 본질의 텅 빔도 아니다. 공은 단순성도 구성의 불가능성도, 개념 없음도, 지각없음도 아니었고 인간도 천사도 신도 아니었다. 인간이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아니었으며 인간의 지각과 개념의 범위 안에 있는 어떤 작용(움직임) 아니었다. 생각 없고 느낌 없고, 결정함도 선택함도, 강요함도, 바램도 없는 존재너머의 신성이 우주를 창조하려고 의지하였을 때(만약 우리가 시간 공간 너머 상태의 ‘시기’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그 ‘때’), 비존재의 상태는 인간의 이해력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우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차원적, 차별적 우주가 아니었고, 이 차별적이고 차원적인 우주는 나중에 존재하게 되었다. 모든 우주의 씨(seed)인 존재너머 신성은 존재너머에서 우주를 창조하였다. 




예수는 우리 안에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증거는 ‘움직임’과 ‘휴식’이라고 말하였다. 

왜 움직임과 휴식이 아버지가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는가?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앞에서 우리는 빛에서 왔고 그 빛은 신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내부에는 신이 존재함은 확실하다. 그런데 그 증거가 움직임과 휴식이라 한다. 그것을 알아보자. 




무에서 빛이 나오고 이 빛에서 무수히 많은 영혼의 빛이 나와 우주 계획에 참여하였다. 우리 각자는 신(神)의 입으로 비유될 수 있다. 무질서를 마셔 이것을 빛으로 소화시키는 것이 영혼의 역할이었다. 이 모든 과정은 움직임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움직임 있으면 정지(휴식)가 있어야한다. 이것은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양이 있으면 음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도 힌두철학에서는 신이 숨을 쉴 때 창조가 일어나고 들이쉴 때 파괴가 일어난다고 말하기도 한다. 




앞에 설명한 카발라에 나오지 않았지만 빛/신의 움직임이 완성될 때(무질서한 빛을 조화로운 빛으로 바꾸는 것) 휴식이 찾아온다. 이것을 카발라에서는 또 다른 창조를 위한 휴식으로 설명한다. 성경에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마지막 날이 나오는데  이것은 또 다른 창조를 위한 휴식기간이다. 하루 일을 끝내고 다음 날 새 일을 시작하는 우리 삶과 다름없다. 




“위와 같이 아래와 같이”라는 유명한 오컬트 구절처럼 위와 아래는 닮았다. 상위 법칙은 아래 법칙에도 적용되고 위에 존재하는 것은 아래에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움직임과 휴식이라는 영적인 아버지 속성은 물질계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낮에 활동하고 밤에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 그 예이고 우리가 숨을 내시기 전에 잠시 멈추는 것도 움직임과 정지의 예이다. 




이처럼 우리는 무한에서 나온 신성한 존재이다. 우리 자신을 신이라 하면 몹시 불경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기독교인에게 두드러진다. 도마복음 50절에서 예수는  우리가 빛에서 나온 신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리가 신이라고 언급한 구절은 이것 말고도 요한복음에도 나와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율법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 하신 기록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요한 10장 33~35절). 

[출처] 도마복음 (50절): 살아 있는 동안 살아있는 분을 모셔라! |작성자 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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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어디서 왔느냐고 묻거든

새로운 정체성의 발견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거든 그들에게 말하십시오. ‘우리는 빛에서, 빛이 스스로 생겨나, 확고히 되고, 그들의 형상으로 나타나게 된 그곳에서 왔다.’라고. 그들이 여러분에게 그것이 너희냐?’하고 묻거든 이렇게 말하십시오. ‘우리는 그 [빛의] 자녀들로서, 살아 계신 아버지의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그들이 여러분에게 너희 속에 있는 너희 아버지를 입증할 증거가 무엇이냐?’하고 묻거든 그들에게 말하십시오. ‘그것은 움직임과 쉼이라고.”


Jesus said, "If they say to you, 'Where did you come from?', say to them, 'We came from the light, the place where the light came into being on its own accord and established itself and became manifest through their image.' If they say to you, 'Is it you?', say, 'We are its children, we are the elect of the living father.' If they ask you, 'What is the sign of your father in you?', say to them, 'It is movement and repose.'"


50a Jesus said: If they ask you "Where are you from?" reply to them "We have come from the place where light is produced from itself. It came and revealed itself in their image."
50b. If they ask you "Are you it?" reply to them, "We are his sons. We are chosen ones of the living father."
50c. If they ask you "What is the sign within you of your father?" reply to them, "It is movement. It is rest."


Jesus says:

(1) If they say to you: ‘Where do you come from?’ (then) say to them: ‘We have come from the light, the place where the light has come into being by itself, has established [itself] and has appeared in their image.’ 
(2) If they say to you: ‘Is it you?’ (then) say: ‘We are his children, and we are the elect of the living Father.’ 
(3) If they ask you: ‘What is the sign of your Father among you?’ (then) say to them: ‘It is movement and repose.’"

 

이것은 도마복음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도록 하기 위한 간단한 교리문답 형식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또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도마복음식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거나, 심지어 그런 신앙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보면, 그런 사람들이 힐난조로 물어볼 때 자기들은 빛에서 온 사람들, 빛의 근원에서 나온 사람들, 빛의 자녀요, 아버지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임을 분명하고 당당하게 밝히라는 이야기다. 빛이 그들의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할 때 그들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문법적으로 모호하다.

 

그러나 이 절을 역사적 맥락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단순히 믿음의 단계를 지나 사물의 형상을 꿰뚫어보는 깨달음의 단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로 세례를 준 세례 요한의 세례는 오로지 첫 단계에 불과하므로 이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세례 요한 스스로도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3:11, 3:16) 세례를 주리라고 예언했는데, 바로 이런 세례를 받아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로 세례를 받았을 때는 하느님을 창조주나 심판자로 믿고 우리 스스로를 하느님의 종으로 여기고 살았지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면 이제 하느님을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보게 되고 자기들을 하느님의 자녀이며 상속자”(4:7)로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질투하고 진노하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새로운 하느님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성령과 불로 받는 제2의 세례를 아폴루트로시시apolutrosis라 불렀는데, 이는 노예가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는 것과 같은 놓임이나 해방’, ‘해탈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제2의 세례를 받는 방법은 일률적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었다. 세례를 주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형식을 취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은 세례를 받기 전 일종의 세례문답 같은 것이 선행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때 물어보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어디서 왔는가?”하는 것이었다. 도마복음 제50절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디서 왔는가 묻거든 빛에서 왔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 연상되는 것이 있다. 선불교 전통에서 중국 선종禪宗의 육조六祖 혜능慧能(638~731)이 오조 홍인弘忍을 찾아갔을 때 홍인은 그에게 어디서 왔고 무엇을 구하는가?”하고 물었다. 혜능이 자기는 영남 신주에서 깨침을 구하고자 왔다고 했다. 홍인은, 영남 사람이면 오랑캐들인데 어찌 깨침을 얻을 수 있겠는가 했다. 이에 혜능이 한 대답이 유명하다. “사람에게는 비록 남북이 따로 있겠지만 불성에는 남북이 따로 없습니다. 제가 오랑캐의 몸으로는 스님과 같지 않겠지만 불성으로는 어찌 차별이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이 절에서도 우리 속에 있는 빛, 혹은 우리의 근원인 빛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도마복음의 여러 곳(11, 24, 33, 61, 77, 83)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빛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우리 속에 있는 빛’, ‘모든 것 위에 있는 빛’, ‘빛을 비추라는 등에 언급하고 있는 데 비해 여기서는 우리가 빛에서 왔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하는 등, 우리의 근원이요 바탕으로서의 빛을 강조하고 있다. 빛에 대해서는 제77절 풀이에서 다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 안에 있는 아버지의 증거가 움직임과 쉼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에 대해서는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구약 창세기에서 태초에 하느님의 영이 물 위에 움직이고”(1:2), 엿새 동안 창조 사업을 다 마치신 다음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2:2)라고 했는데, 이런 원초적 움직임과 쉼이 바로 하느님의 내재하심의 증거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둘째, 더욱 근본적인 것은 본래 움직임이 없던 근원으로서의 궁극 존재가 움직여 만물이 생기게 되고, 이 만물이 다시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 움직임이 없는 쉼의 상태에 이른다고 하는 이 엄청난 우주의 순환 원칙이 신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는 말로 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좀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풀면, 내 속에 영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깊은 평강과 쉼을 느끼는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임재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말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움직임과 쉼을 각각 우주창생론적cosmogonical존재론적ontological개인 심리적psychological측면으로 본 셈이다. 어느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까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몫일 수밖에 없다.

[출처] 도마복음 제50절|작성자 byuns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