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4 본문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4
15.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은 마지막 내면의 전쟁이었고 위대한 마찰이었다
구제프는 아주 심오하게,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아주 위험한 방법으로
이 마찰 기법들을 사용했다, 그가 늙었을 때, 죽기 바로 몇 년 전에 그는 아
주 위험한 자동차 사고를 일어나게 했다, 그것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그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다.
구제프의 생애 중에 우연한 사고란 없었다, 그는 깨어 있는 사람인지라
거기에 사고가 날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그는 사고가 일어나도록 할 수는
있다, 또는 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는데, 그는 실제로 사고를 하나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언제나 과속으로 차를 몰았는데 그의 생애에서 단 한 건의 사고도 내
지 않았었다, 그는 또한 매우 위험하게 운전을 했다, 그의 차에 동승한 사람
은 누구든지 어떤 순간이든 삶과 죽음의 문턱에 있어야 했다, 운전할 때 그
는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교통법규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이리저리 되는 대로 차를 몰았으며 최대 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니
어떤 순간에도 사고는 가능했다, 그러나 사고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그가 퐁텡블로에 있는 그의 아쉬람에서 파리로 갈 때 누군
가가 물었다, "언제 돌아오실 건가요?" 그가 말했다, "만일 내가 생각한 것이
모두 일어난다면, 저녁에, 그렇지 않으면 말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가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있었다, 그 사고는 너무도 심하고 위험한 것이어서
의사는 거기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차 전체가 조각나고
찌그러졌다.
그러나 구제프는 발견되었다, 그의 몸은 육십 군데의 골절상을 입었고 거의 죽
은 거나 같았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고 그의 차에
서 멀리 떨어진 나무 아래 누워 있었다.
사고 직후, 그는 그 나무 그늘 아래로 걸어갔으며 거기에서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로 누워 있었던 것이다, 그는 완전한 의식 상태에서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절대로 자기에게 마취 주사를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그는 완전한
의식 상태로 남아 있길 원한 것이다.
이것은 구제프가 그의 몸으로 창조해 낸 마찰 중 가장 위대한 것이었다,
그의 몸은 죽음의 문턱에 있었다, 그가 이 모든 상황을 만들었으며, 그는 완
전히 깨어 있는 상태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그는 철저하게 깨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중심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는 그의 의식 안에서 중심이 되었다,
--지상의 층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탈것으로 되었고 그는 그것
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했던 말의 의미이다.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을 분열 시키고
불과 검과 전쟁을 주러 왔음을 알지 못한다.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살고 있다면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반대할 것이며
두 사람은 세 사람을 반대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할 것이며
아들은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홀로 서 있을 것이다.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살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다, 그대의 몸
안에는 "다섯 식구가 살고 있다"--다섯 감각들, 다섯 인드리아가 살고 있다,
실제로 깊이 들어가보면 그대는 다섯 개의 몸을 가지고 있다, 각 감각들은
자기만의 중심을 가지고 있으며 각 감각들은 자기만의 지시대로 그대를 움직
이게 한다.
눈은 말하기를, "저 아름다운 것을 보라", 손은 말하기를 "만져봐, 너무 아름
답다", 눈은 만지는 것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 손은 아름다운 사람, 아름
다운 몸, 그리고 아름다운 나무를 보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다.
모든 다섯 개의 감각들은 각기 분리된 중심들을 가지고 존재하며 그대의
마음은 단지 하나의 조정자이다, 마음은 이 다섯 개의 감각들 사이에서 끊임
없이 조정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대가 나를 보고 또 내 말을 들을 때, 그대는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이다,
눈은 절대로 듣지 못하며 귀는 절대로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대가 보고
듣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결론지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대
는 결론 내릴 수 있겠는가?
마음이 끊임없이 조정을 한다, 마음은 하나의 컴퓨터이다, 눈이 보는 것은
무엇이든지, 귀가 듣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은 그것들을 결합해서 그대에게
결론을 주는 것이다.
구제프가 사용하고 예수가 사용했던 그 마찰의 기법...... 예수 생애의 속
비밀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마치 구제프처럼 십자가에서 죽는 일을 꾸몄으며, 십자가에서의 죽음
은 그가 연출한 하나의 드라마였다는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하겠지
만 예수와 같은 사람은 강제적으로 죽일 수 없다, 그는 아주 쉽게 도망칠 수
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체포되리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루살렘 또는 그 나라로부터 멀리 달아날 수 있었다, 그것은 전혀 문
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으로 왔다, 예수 자신이 이 모든 일을
연출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유다는 배반한 것이 아니라 친구로서 그가
잡히도록 도왔다, 모든 일들이 그에 의해서 계획되었고 실연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은 마지막 내면의 전쟁이었고 위대한 마찰이었다,
죽어가면서도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땅의 것이 땅으로 떨어질
때에, 완전한 분리가 일어났을 때에 그는 땅의 것과 자신을 전혀 동일시하지
않았다.
구제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하나의 드라마였고, 실제로 십자가 사건
을 만든 사람은 본디오 빌라도나 대제사장 또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예수 자
신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모든 것은 예수가 만들어낸 것이며 너무도 아름답게 이루어내서, 정확히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오늘날까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십자가 형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
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종교이다, 그대 자신의 십자가 형을 만드는 것이다,
십자가로 간다는 것은 죽음이 있는 마찰의 절정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말한다.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살고 있다면.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반대할 것이며
두 사람은 세 사람을 반대할 것이다.
하나의 마찰이 만들어져야 한다, 다섯 감각들은 싸워야 하며 그 싸움은 의
식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싸우지만 그 싸움은 의식 속에 있지 않
다, 지금 그대는 무의식 속에 있고 싸움은 계속된다.
눈은 끊임없이 귀와 싸우고 귀는 끊임없이 눈과 싸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쟁자들이기 때문이다.
앞 못 보는 사람이 보는 사람보다 더 잘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관찰해 본
일이 있는가? 그것은 장님들이 뛰어난 음악가나 가수가 되는 이유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들은 소리와 리듬을 듣는 능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귀는 더 예민하기 때문이다, 왜? 왜냐하면 눈은 더 이상 경쟁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이 사용했던 에너지를 이제 귀가 사용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쟁자 관계가 아니다.
그대의 눈은 그대의 팔십 퍼센트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다른 네 개의 감각
들을 위해 오직 이십 퍼센트만 남긴다, 그래서 네 개의 감각들은 굶주려 있
다, 그들은 끊임없이 싸운다, 눈은 최고의 권위, 독재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
그대는 눈을 통해서 살며 다른 감각들은 완전히 죽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냄새를 맡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 감각이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
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심지어는 자신들이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눈이 코의 에너지를 전부 착취하고 있는 것인데 코가 눈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착취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냄새를 맡는 감각을 가지지만 점차로
그것을 잃어간다, 왜냐하면 눈이 끊임없이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이
다, 눈은 그대 존재의 중심이 되어버렸는데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16.하나는 붓다와 예수의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야나크와 나의 방법이다
마찰의 기법들은 감각들의 대립을 이용한다, 그 중에는 수행자가 몇 달 동
안 눈을 감은 채로 지내는 기법이 있다, 그러면 에너지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대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만일 그대가 눈을 감은 채로 몇 달 동안 있을
수 있다면 그대는 에너지가 끊임없이 귀와 코를 향하여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대의 냄새 맡는 감각이 회복되어 냄새를 맡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다른
감각을 살리기 위해 어느 감각 하나를 완전히 차단하는 기법들을 사용하는
종파들이 있어왔다, 하나의 싸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석 달간
귀를 막은 채 전혀 듣지 않고 보기만 한다면 그대는 거기에 끊임없이 에너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감각들 사이의 싸움을 볼 수 있다면 그대는 분리되어
진다, 그대는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눈이 아니며, 더 이상
귀가 아니며, 더 이상 손이 아니며, 그리고 더 이상 몸이 아닌 것이다.
그대는 하나의 목격자이다, 그 싸움은 몸 안에서 계속되며 그대는 그것을 지켜
보는 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말한 그 비유의 의미, 아주 깊은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살고 있다면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반대할 것이며
두 사람은 세 사람을 반대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할 것이며
아들은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홀로 서 있을 것이다.
한 집에 다섯 식구가 사는데 셋은 둘을 반대할 것이며 둘은 셋을 반대할
것이다라는 이 비유는 다른 의미에서도 진실이다, 가족 중에 종교적인 사람
이 있으면 마찰이 생기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한 가정에 있어서 종교적인 사
람은 가장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종교적인 것 이외에는 모두 참아내고 허용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는
제외이다, 왜냐하면 일단 그대가 종교적이 되면 그대는 자기 자신과 육신을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육신과 관련을 가진다, 그대의 육신 때문에 그대의 아버지는 어
디까지나 그대의 아버지다, 그대가 만일 육신이 그대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아버지와 연결이 된다, 그러나 그대가 육신은 그대가 아니다라는 사
실을 알게 된다면 아버지는 누구이겠는가?
어떻게 그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어머니는 그대의 육신을 낳았지
그대 자신을 낳은 것은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육신과 그대 자신을 너무 동일
시하고 있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대를 낳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과 육신을 동일시하지 않을 때, 그 동일시하던 관념이 깨어지면
그대 어머니는 누구란 말인가? 그녀는 그대 자신을 낳은 것이 아니라 오직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대의 육신만을 낳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그대에게 생명을 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또 하나의 죽음을 준 것이다, 아버지도 그대에게 생명을 준 것이 아니다,
그는 그대에게 또 하나의 죽음의 가능성을 준 것이다. 그대가 육신과 그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게 되면 그대는 가족으로부터 분리된다, 그대는 뿌리가
뽑힌 존재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그대가 창녀에게 간다면 가족은 그것을 용납할 수 있다,
그것은 괜찮다, 잘못된 것은 없다, 오히려 그대는 더욱더 그대 자신과 육신
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대가 알코올 중독자, 술주정뱅이가 된다 해도 좋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 자신과 육신을 더욱더 동일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
다, 이것으로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명상가가 된다면, 만일 그대가 산야신이 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그러면 문제가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그대는 뿌리가 뽑힌 존재
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가족은 그대에게 더 이상 힘을 쓸 수가 없다,
그대는 더 이상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세속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말한다, "아버지는 아들과 맞설 것이며 아들은 아버지와
맞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분리하고, 분열시키고,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려고
왔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대는 붓다를 경배할 수 있다, 그러나 붓다의 아버지에
게 물어보라, 그는 붓다를 반대한다, 붓다의 친척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붓다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붓다는 이미 그들의 영역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
다, 그뿐만 아니라 붓다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가족과 사회의 힘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 단위이다, 그대가 사회 영역을 벗어
날 때 그대는 가족의 영역을 벗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대에게 가족
을 미워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핵심이 아니다.
또 그대가 가족과 대립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것 역시 핵심이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일어난다, 한번 그대가 그대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그대 앞에 존재했던 모든 것은 산산히 흩어지고 거기에 혼돈이 일어
날 것이다.
자, 그러니 그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은 그대를 잡아 끌 것이며, 그대
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무엇을 해
야 하는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옛날 방법인데 그들로부터 달아나고 그들에
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는 방법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것은 더 이상 사
용할 방법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과 함께 살면서 배우가 되는 방법이다, 그들에게 그대가
넘어서 있다는 것을 눈치 챌 기회를 주지 말라, 움직여 나가라! 그것을 그대
의 내면 여행으로 만들라, 그러나 바깥의 모든 형식들을 지켜라, 그대의
아버지와 그대의 어머니를 존경하고 좋은 배우가 되라.
옛날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따를 수가 없다, 그것은 이 세상이 종교적으로
되지 못했던 이유이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회를 벗어날 수 있겠는
가? 그들이 사회를 벗어난다 해도 사회는 그들을 돌봐주어야만 한다, 붓다
가 세상에 있었을 때, 또는 마하비라나 예수가 세상에 있었을 때 수천의 사
람들이 그들의 가족을 떠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오직 수천의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수백만의 사람들은 뒤에 남아서
그들을 돌봐주어야 했다, 만일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면 이 세계 전체는
종교적으로 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좋은 방법도 아니다, 그것은
더 아름다운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방법이란 좋은 배우가
되는 것이다.
산야신은 반드시 좋은 배우가 되어야 한다, 내가 의미하는 좋은 배우란 그
대가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도 형식은 계속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깊이 들
어가보면 그대는 뿌리가 뽑혀 있지만, 그대는 자신이 뿌리 없는 존재라는 사
실의 어떤 암시도 남에게 주지 않아야 한다.
만일 암시를 준다면 그들은 그대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말라, 그대 혼자 내면의 여행을 하고 바깥으로는
형식을 지켜나가라, 그들은 형식 안에서 살기 때문에 행복해 할 것이다.
그들은 바깥에서 살아가며 그대의 내면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대 내면의
존경에는 흥미가 없다, 그대의 연극으로 충분하다.
이것들이 두 가지 방법이다, 하나는 붓다와 예수의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야나크와 나의 방법이다, 어디든 그대가 있는 곳에 머물러 있으라, 그대가
변화하고 있고 종교적으로 되어간다는 사실을 외부에 드러내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말썽을 일으킬 수가 있고 그대는 아직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투쟁을 만들지 말고 내면에서 그것을 만들라, 내면의 투쟁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필요한 성장과 성숙을 가져다 줄 것이다.
17.그대는 여기로 올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여기에 온다면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할 것이며
아들은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홀로 서 있을 것이다.
'홀로'라는 단어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대가 종교적으로 될 때, 그대는
혼자가 된다, 그대에게 사회라는 것은 없다, 그대는 혼자이다, 그대가 혼자
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대에게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위대한 변형이
다.
왜냐하면 마음은 혼자라는 것을 두려워하며 의지하고 기댈 누군가를 원하기
때문이다, 홀로 있을 때 그대는 조바심한다, 어떤 두려움이 그대를 감싼다,
홀로......? 그러면 즉시 그대는 사회를 향해, 클럽으로 회의장소로, 집회로,
교회로, 어딘가 군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그대가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을 느낄 수 있고 그대 자신을 군중 속에서 잊어
버릴 수 있는 어딘가로 그대는 달려간다, 그것이 군중이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게 된 이유이다, 경기장이나 영화관에 가보라, 거기 있는 군중들은 이제
혼자가 아니며 마음을 놓을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홀로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가장 높은 절정
에 이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잃지
않는다, 그는 더욱더 정신을 차리고 더욱더 깨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는 진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 진실이란, 모든 사람은 혼자이며 거기에 어떤 공존의 가능성도 없다는 것
이다, 그대의 의식은 하나의 홀로 서 있는 봉우리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
이며 쓸데없이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에베레스트가 산들로 군집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면 그 전체의 아름
다움은 사라진다, 에베레스트가 아름답고 사람들에게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은
그것이 홀로 우뚝 솟아 있는 봉우리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사람은 에베레스트와 같다, 그는 홀로 우뚝 서 있는 하나의 봉우리가
되며, 그렇게 살며, 그것을 즐긴다, 그것은 그가 사회 속에서 활동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오직 그만이 사랑할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오직 그만이 세상
속에서 활동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오직 그 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 어떻게 그대가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는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어떤 마약과 같은 것이 되지는 않
으며 그 속에서 자기를 잃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베풀 수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나누어줄 수 있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그대에게 줄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
그의 자각이 그의 가장 깊은 내면의 정점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그 성소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 아무도 거기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무도 거기
에 들어올 수 없다.
내면의 가장 깊은 정수에서 그대의 존재는 혼자이다.
홀로 있음의 순수함, 그리고 홀로 있음의 아름다움......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대는 두려움을 가진다, 그대는 사회 속에서 살았
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회 속에서 태어났다, 사회를 통하여 그대는 성장했
다, 그대 역시 혼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러므로 단
며칠 동안만이라도 그대의 고독 속에 머물고 그대의 홀로 있음을 느끼는 것
은 아름답다.
그런 다음 시장으로 가보라, 그러나 그대의 홀로 있음을 동반해야 한다, 거기
에서 자기를 잃지 않아야 한다, 자각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사회 속으로
움직여가라, 군중들 속으로 가라, 그러나 홀로 남아 있으라, 그대가 원하면
군중들 속에서도 그대는 홀로일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홀로 있는 중임에도 그대는 군중들 속에 있을 수 있다, 히말
라야에 가서 거기에 앉아 시장바닥을 생각해 보라, 그러면 거기에서도 그대는
군중 속에 있는 것이다.
주네이드(Junnaid,수피교도의 한 사람)가 그의 스승을 찾아왔을 때에 그
런 일이 일어났다, 그는 혼자서 왔고 스승은 사원 안에 앉아 있었다, 주네이
드가 사원에 들어갔을 때 홀로 앉아 있던 스승이 말했다, "주네이드, 사람들
과 같이 오지 말고 혼자서 오라!" 그래서 주네이드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왜냐하면 그는 누군가가 자기와 함께 온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승은 웃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뒤돌아보지 말고
내면을 보아라."
그러자 주네이드는 그의 눈을 감았고 스승이 옳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의 아내를 떠났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그의 아
이들을 떠나왔지만 그의 생각은 여전히 그들에게 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전송을 해준 그의 친구도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있었다.
스승이 말했다. "나가라, 그리고 혼자서 와라,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너에게 내가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주네이드는 그 사람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일 년 동안 사원 밖에
서 기다려야 했다, 일 년이 지난 후에 스승은 그를 불렀다, "자, 주네이드야,
이제 너는 준비가 되었으니 들어오라, 이제 너는 홀로이니 대화가 가능하
다."
그대는 군중들을 대동할 수 있다, 또한 그대는 군중들 속에 있으면서도 여
전히 혼자일 수 있다, 이렇게 해보라,--다음번에 그대가 시장의 많은 인파
속에 있을 때, 그저 혼자임을 느껴보라, 그대는 실제로 혼자이고 그것을 느끼
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그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대
는 혼자가 되는 것이다.
그대는 홀로 존재하는 자가 된다, 예수는 그대를 홀로 존재하는 자로 만들기
위해, 홀로 서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눈으로 보지 못한 것.
귀로 듣지 못한 것.
손으로 만져보지 못한 것.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그대의 눈은 바깥은 볼 수 있지만 내면은 볼 수가 없다, 방법이 없다, 그
대의 귀는 바깥을 들을 수 있지만 내면은 들을 수 없다, 그럴 방법이 없다,
모든 감각들은 외부를 향하고 있다, 내면을 향하는 감각은 하나도 없다, 그
러므로 모든 감각들이 그 기능을 정지할 때 그대는 돌연 내면에 있다, 안으
로 들어가는 감각은 없는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줄 것이다," 그러
나 먼저 홀로 존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홀로 존재하는 자, 그리고 이것이
내가 말하는 산야신의 의미이다.
먼저 산야신이 되어라, 먼저 그대가 혼자라는 것을 깨달으라, 그리고 이 혼자
라는 것에 대해 편안함을 가져라, 두려워하지 말라, 오히려 그것을 즐겨라,
그 침묵과 그 순수와 그 순진한 아름다움을 보아라, 거기엔 어떤 더러움도
침입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성소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원히 순수하게
남아 있다, 그것은 처녀지이다, 아무도 거기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대의 처녀성은 그대의 내면에 숨어 있다, 하나의 홀로 존재하는 자, 산
야신이 되어라, 자, 예수는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줄 것이다."
그대가 홀로 존재하는 자, 완전한 혼자가 될 때, 돌연히 그대는 눈이 보지
못한 것, 귀가 듣지 못한 것, 그리고 손이 만져보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된다.
그대는 어떻게 그대 자신을 만질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대의 몸을 만질 수
있지만 그것이 그대 자신은 아니다, 손은 내면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그대의 의식을 만질 수가 없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마지막 구절은 지상의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영혼은 그대의 마음마저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대의 마음은 내면의 아주 깊은 곳에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대의 영혼에 관
한 한, 마음 또한 외부에 있지 내면에 있지 않은 것이다.
손은 외부에 있다, 눈도 외부에 있다, 그리고 마음 역시 바깥에, 외부의 것으
로 존재한다, 마음은 내면의 가장 깊은 정수가 아닌 것이다, 배고픔은 그대의
몸 속에서 일어나고 사랑은 그대의 마음속에서 일어나지만 기도는 그렇지 않다.
기도는 더욱 깊다, 기도는 마음보다 더 깊은 것이다, 배고픔은 하나의 육체적
인 요구이다, 사랑은 마음의 요구이다, 하느님은 마음마저도 넘는 하나의 초월
적인 요구이다, 사람은 머리를 초월해야 하며 마음 또한 초월해야만 한다,
사람은 모든 외부의 것들을 초월하여 중심만이 남아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은 건 신이다, 머릿속에서 과학과 철학이 떠오른다, 마음속에서
예술과 시가 떠오른다, --그러나 종교는 그렇지 않다, 종교는 더 깊은 층,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가장 깊은 곳, 마음마저도 아닌, 그대의 중심에서 떠오
르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그것은 초월하고, 초월하고 또 초월해서 존재한다, 그대는 그것을 잡을 수
없고, 그대는 그것을 들을 수 없으며, 그대는 그것을 볼 수 없고, 그대는 그
것을 느끼지도 못한다.
여기서 예수는 마음의 길을 걷고 있는 신비주의자들마저 초월하고 있다, 세
가지 유형의 신비주의자들이 있다, 첫번째는 머리의 신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신학과 철학의 관점에서 말한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거기엔 어떤 증거도 없다, 아니면 모든 것이 증거이다, 그러나 거기에 어떤
증거도 필요하지 않으며 그대는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을 증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증거들은 논쟁이 될 수 있으며, 모든 증거들은 잘못된 것으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마음의 신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사랑을, 사랑받는 이를, 신
을, 크리슈나를 이야기한다, 그들은 노래로 말하며 시의 언어로 말한다, 그
들은 낭만적이다, 그들의 탐구는 머리의 신비주의자들보다는 더 깊지만 아
직 충분히 깊지는 않다.
예수는 말한다, "나는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거기는 신학도 도달하지 못하고 시도 엿볼 수 없으며 논리나 사랑
도 멈추어버린다, "나는 사람의 가슴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이것은 가장 깊고 가장 심오한 가능성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 가능성을 열
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기독교는 그 둘레를 신학으로 엮
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머리로 하는 일이 되었다, 그것은 마음으로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머리로 하는 일이 된 것이다.
기독교는 위대한 신학자들을 만들어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
a Theologica>을 보라, 그것은 수백 권에 이르는 신학 서적이다, 그러나 그들
은 예수를 놓쳤다, 예수는 머릿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머리
지향적인 신학자들 때문에 이들보다 조금 더 깊은 마음의 신비주의자들이
교회로부터 추방을 당했다.
에크하르트와 프란시스 같은 사람들이 추방당했다, 그들은 마음으로 말하고
사랑으로 말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바보로, 미친 사람으로, 또는 이단
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예수를 놓쳤다, 예수는 머리 지향적도 아니고 가슴 지향
적도 아니다, 그는 전혀 지향적이지 않다, 그는 모든 지향적인 것들을 버리
고, 모든 외부의 것들을 버리고, 오직 존재의 맥박이 있는, 오직 그대 자신만
이 존재하는 내면의 가장 깊은 정수로 오라고 말한다.
그대는 여기로 올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여기에 온다면, 모든 신비가
드러나고 모든 문들이 열린다, 그러나 그 문 앞에서조차 그대는 놓칠 수 있다,
만일 그대가 머리 지향적으로 머문다면, 그대는 그 문 앞에서 이론에 빠진 채
서 있게 될 것이다, 또는 시상(詩想)에 빠진 채 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시와 노래를 ?조리면서.
물라 나스루딘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말했다. "나는 매우 혼란에 빠
져 있습니다,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나는 어떤 문 앞
에 서서 그 문을 밀고 밀고 또 미는 똑같은 꿈을 매일 밤 꾸고 있습니다, 그
문에는 어떤 표시가 있는데 나는 끝없이 그 문을 밀고 있습니다, 매일 밤 마
다 나는 땀에 젖어 깨어나지만 그 문은 결코 열리지가 않습니다."
정신과 의사는 그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적기 시작했다, 삼십 분쯤 이야
기를 들은 후 의사가 물었다, "자, 나스루딘, 이제 그 문에 있는 표시가 무엇
인지, 무어라고 쓰여 있는지 말해 보시오."
나스루딘이 말했다. "'당기시오'라고 쓰여 있었어요."
만일 문에 '당기시오'라고 쓰여 있으면 그 문을 계속 밀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똑같은 꿈을 계속해서 꾸게 될 것이며 그대는 그 문을 끝없이
밀고 있을 것이다.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다, 단지 문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바라보아라, 예수는
그 문에 쓰여 있는 것은 머리가 아니오 마음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 둘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라, 이론이나 지성의 희생물이 되지 말고, 감정이나 감
상의 희생물도 되지말고, 그것을 초월하라, 머리는 육신에 속한 것이며 마음
역시 육신에 속한 것이다, 그 둘 다를 초월하라, 초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한 존재이다, 그대는 거기에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에는 어떤 속성도 없다, 단순한 '존재'란 디야나(dhyana), 바로 명상
인 것이다, 그것이 문에 쓰여 있다.
그대가 단순한 하나의 존재일 때 홀연히 그 문은 열린다,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이 없이, 그대를 둘러싼 어떤 구름도 없이, 구름이 말끔히 걷혔을 때, 불
꽃 둘레에 어떤 연기도 없고 단지 불꽃만이 타오를 때, 그대는 그 문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18.기적 중의 기적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한가운데 서 있었고
나의 육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었다.
나는 그들이 모두 취해 있음을.
그들 가운데 아무도 목말라하는 자가
없음을 보았다.
나의 영혼은 사람의 아들들로 인하여 슬퍼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의 눈이 멀어
그들이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왔다가 다시 빈손으로
떠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은 취해 있지만
술에서 깨어나면 그들은 회개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육신이 영혼을 위해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그러나 만일 영혼이 육신을 위해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이 커다란 부(富)가
이런 가난 속에 거주하는지 경이로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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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나 붓다 또는 깨달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대들이 모두 취해 있
음을 발견할 것이다, 취해 있음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대가
기민하지 않고 깨어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대들은 단순히 자신이 기민
하고 깨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대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잠자고 있
다.
구제프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수천 마리의 양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양들이 울 밖으로 나가서 길을 잃고는 들짐승들에게 희생당
하는 것 때문에 늘 근심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현자에게 자문을 구했고 그 현자는 양 지키는 개를 두라고 제안
하였다, 그래서 그는 양을 지키는 개를 백 마리 두었다, 개들은 양이 울을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만일 울을 벗어나는 양이 있으면 그 양을
죽였다.
한번 양을 죽이기 시작하자 개들은 양을 죽이는 데 점점 중독이 되고 말았
다, 오히려 개들이 양에게 위험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현
자를 찾아가서 말했다. "위험해졌습니다, 양을 보호하는 개들이 이제는 양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대들의 정치가들을 보라, 그들은 보호자
들이다, 그들은 경비견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일단 권력을 쥐면 그들은 죽이기
시작한다.
현자가 말했다. "한 가지 길밖에 없으니 내가 직접 가겠소." 그래서 그는
양떼 있는 곳으로 갔고 양들에게 최면을 걸고 말하기를 "그대들은 깨어 있고
기민하며 완전히 자유이다, 이제 그대들의 주인은 없다." 그러자 양들은 최
면 상태에 있게 되었으며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제는 울타리가 감옥이 아니며 자기들 스스로가 주인이라고 믿었
기 때문이었다.
설사 어떤 양이 주인에 의해 살해된다 해도 양들은 "이것은 그의 운명이지 나의
운명은 아니다, 아무도 나를 죽일 수 없다, 나에게는 불멸의 자아가 있고 나는
완전한 자유이다, 그러므로 도망칠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양 지키는 개들이 필요하지 않았고 양들은 최면에 걸려 반쯤 잠든 상태에서
살아가므로 양 주인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바로 이것은 예수가 보는, 그리고 내가 보는 그대들의 상태이다, 그러
나 아무도 그대들을 최면에 걸지 않았다, --이것은 자기 최면이다, 그대들은
양들에게 최면을 건 현자이며 동시에 최면에 걸린 양 그 둘 다이다, 그대들은
자신들에게 최면을 건 것이다.
자기 최면을 거는 데는 방법이 있다, 만일 그대가 어느 한 가지만 끊임없
이 생각한다면 그대는 그것에 의해 최면에 걸리게 된다, 그대가 어떤 한 가
지 것만 계속해서 바라본다 해도 그대는 최면에 걸리게 된다, 그대가 어떤
한 가지 것에 곰곰이 생각해도 그대는 최면에 걸리게 된다.
어느 프랑스 시인이 미국에 갔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가 뉴욕을 구
경하던 중에 안내인이 그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데리고 갔다, 시인
은 놀란 표정으로 그 빌딩을 거듭거듭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 빌딩은 나에
게 섹스를 연상시켜 주는군."
안내인은 당황했다, 그는 여러 유형의 반응들을 들었지만 이번은 좀 특별
했다, 여태껏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바라보고 그것이 섹스를 연상시킨
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물어보았다, "괜찮으시다면
이 건물이 왜 당신에게 섹스를 연상시키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 프랑스인이 말했다. "모든 것이 그래!"
만일 그대가 끊임없이 섹스를 생각한다면 그대는 최면에 걸리게 되고, 모
든 것이 그대에게는 섹스로 보인다, 비록 그대가 사원에 들어간다 해도 그
사원은 그대에게 섹스를 연상시켜 준다, 어디를 가든지 그렇다.
그대는 그대의 마음을 가지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그대 둘레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섹스에 최면이 걸려 있고, 어떤 이는 돈에
최면이 걸려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권력에 최면이 걸려 있다.
모든 사람들이 최면에 걸려 있다, 그리고 아무도 그대에게 최면을 걸지 않았다,
그대 스스로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으며 그것은 그대가 한 일이다, 그러나 그대
는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그대가 최면술사이며 동시에 양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다.
"나는 최면술사이며 동시에 최면에 걸린 양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일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때 변형의 최초의 불꽃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제 그대는 다시 이전처럼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최면 상태를 벗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전환점이 찾아왔고 어떤 자각이 그대에게 들어
온 것이다.
그대에게는 여러 가지 최면의 대상들이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이 그대의 최
면 대상인지, 어느 것이 가장 매력적인 것인지, 어느 것이 그대의 초점으로
되어 있는지 찾아내라.
그리고 그것에 의해 그대가 어떻게 최면에 걸려 있는지 자세히 바라보라,
반복하는 것이 최면을 거는 방법이다, 어느 것이든 끊임없이 바라보거나 또는
그것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최면술사에게 간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는 잠이
든다, 잠이 든다, 잠이 든다, 잠이 든다, 잠이 든다." 그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할 것이며 그대는 이내 잠들게 될 것이다,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단지 어떤 것을 반복했을 뿐이다, 반복해서 듣고, 듣고, 또 들어라,
그러면 그대는 잠이 들 것이다. ---그대 스스로 최면에 걸린 것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그대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고 이것은 사
회에 의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정치선전의 수단은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치가들은 어떤 것을 계속
해서 반복한다, 그대들이 그것을 듣는지 듣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은 계속해서 그것을 반복한다.
듣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을 계속 반복한다면, 점차로
그대는 확신이 들게 되고 설득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대로 논리적으로,
또는 합리적인 말로 그대와 논쟁하지 않는다, 단지 반복을 통하여 그대는
최면에 걸리는 것이다.
19.온 세상이 몽유병 상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히틀러는 국민들에게 독일의 불행과 쇠퇴는 유태인들 때문이라고 수없이
반복했다, "유태인들만 전멸되면 문제될 것이 없다, 너희는 모든 세계의
주인이며 너희는 특별한 종족이다, 너희는 정복자로서 여기에 왔다, 너희는
우두머리 민족이다."
처음에는 그의 친구들조차 그것을 믿지 않았으며 히틀러 자신도 처음에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도 명백한 거짓말이었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그가 계속할수록 사람들은 차츰차츰 그것을 믿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최면에 걸린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 최면당했을 때, 히틀러 자신 또한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진리가 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으로 최면당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것을 믿을 때는 거기에 무엇인가 진리가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자 그의 친구들이 그것을 믿기 시작했고, 그것은 하나의 집단 최면이 되었
으며, 독일 전체가 그 속으로 매몰된 것이다.
가장 지성적인 민족 중의 하나가 너무도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이다, 왜인
가? 독일 국민들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것은 바로 반복되는
정치선전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그의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거짓이 진실로 변
화하는 간단한 과정에 대해서 적어놓았다, "단지 그것을 반복하기만 해라."
그는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알았다, 만일 그대가 어떤 특정한 것을 계속해
서 반복한다면 - 그대가 담배를 피우고, 매일 계속해서 피운다면 - 그것은
하나의 최면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담배는 건강에 전혀 쓸모없고, 해
로우며, 바보스럽고,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속수무책이다,
자기 최면에 걸려버렸기 때문이다.
물라 나스루딘의 아내가 담배에 대해서 반대하는 기사를 그에게 읽어주고
있었다, 암이나 결핵, 또는 다른 질병들이 흡연을 통해서 생길 가능성이 많
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말한 내용이었다, 그가 그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그만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웃기는 얘기라구, 잘 들어, 나는 죽을 때까지
담배를 필 작정이야!"
실제로, 그대가 한번 최면에 걸리면 그것은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죽음이
라고 해서 별 차이는 없다, 그 다음의 생에서도 그대는 같은 것을 다시 시작
한다, 그 다음의 생은 전생이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것
은 매우 연속적이다.
그러므로 한 아이가 태어날 때, 그는 실제로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는 매우
오래된 옛날 옛적의 사람이다, 그는 그의 모든 옛날의 업과 모든 윤회와 그리
고 조건 들을 함께 가지고 온다, 그는 늙은 노인으로서 시작한다, 그는 이미
자신의 최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업이란 무엇인가? 카르마 이론의 의미는 무엇인가? 카르마는 자기 최면의 한
방법이다, 만일 그대가 어떤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한다면 그대는 그것에 의해
최면에 걸리게 된다, 그러면 그 행동, 그 카르마는 주인이 되며 그대는 단지
노예이다.
섹스를 통해서 그대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얻은 적이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그저 하나의 반복이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오랫동안 반복
해 왔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중지한다면 무언가 잃은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대가 계속한다 해도 얻은 것은 없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을 계속한다 해도 얻는 것이 없다면 그것을 그만두어도 잃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왜 그대는 무엇인가를 잃은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오래된 습관, 윤회, 자기 조건, 카르마 때문이다, 그대는 그것을
전생에서 수없이 반복해 왔으며, 그것에 의해 최면에 걸린 것이다, 이제 그대는
그것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강제적인 탐닉이 된 것이다.
계속해서 과식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과식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
며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는 끊임없이 병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그
는 여전히 먹기 위해 식탁에 앉는다, 어쩔 도리가 없다, 그것은 강압적이다,
이 강압적이란 말은 무엇인가? 그는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해왔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서 최면이 걸려 있다는 것이다, 그는 취해 있는 것이다.
물라 나스루딘이 하루는 너무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거의 새벽 세시경이
었다, 그는 문을 두드렸고 그의 아내는 매우 화가 나서 나왔다, 물라가 말했
다, "잠깐만, 먼저 나에게 설명할 기회를 줘, 그리고 나서 시작하라구, 친구
가 너무 아파서 그 친구 곁에 있었어."
그의 아내가 말했다. "그럴듯한 이야기군요, 그러면 그 친구 이름을 말해
봐요."
물라 나스루딘은 생각을 짜내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 친구
는 너무 아파서 말할 수조차 없었어!"
머리란, 취해 있으면 변명거리를 찾겠지만 모든 변명은 거짓이다, 그것은
마치 "그 친구는 너무 아파서 말할 수조차 없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섹스에 대한 구실과 담배 피는 것에 대한 변명을 찾을 것이며 육욕에
대한 핑계와 권력에 대한 구실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변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진실은 그것이 강제적이라는 것, 자신이 그것에 사로잡혀 있으
며 최면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취해 있으며 정신 없이 잠들
어 있다, 그대가 깨어 있지 않으면 그대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
차릴 수 없게 된다, 온 세상이 몽유병 상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것이 바
로 세상이 이처럼 비참하고, 폭력이 난무하고,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다.
그것은 불필요한 것들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잠들어 있고 취해
있는 사람들은 아무런 책임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예수
에게 와서 어떻게 해야 이러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예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 자신이 깨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너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정신 없이 잠들어 있
는 사람이 그의 꿈이라도 바꿀 수 있단 말이냐?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같은 질문을 가지고 구제프를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서 예수를 대표하는 가장 적합한 인물은 바티칸의 교황이 아니고 구제프이
다, 구제프야말로 예수를 대표하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가 행한 마찰의 방법을 믿었고 실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유형의 십자가를 만들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매달리게 하여 자기
십자가에서 변형을 경험하게 했다.
구제프 역시, "그대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만일 그대가 깨어 있지 않다면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단순
히 그대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런 믿음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 이제 이 경전을 보자, 이 말들은 모두 매우 심오하고, 깊으며, 중요하
다, 그리고 그대의 길을 안내하는 등불이 될 수 있다, 이 말들을 잘 기억하
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한 가운데 서 있었고
나의 육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었다.
나는 그들이 모두 취해 있음을,
그리고 그들 가운데 아무도 목말라 하는 자가
없음을 보았다.
예수는 결코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들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저잣거리로 들어갔고 군
중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창녀, 노동자, 농부, 그리고 어부들과 이야기했다.
그는 세상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바로 여기에, 그대들 한가운데 머물러 있었
다, 그는 세상을 등진 그 누구보다도 세상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예수의 메시
지가 그렇게도 힘을 가지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하비라의 메시지는 결코 그런 힘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거의
전 세계의 반을 개종시켰다, 왜일까? 왜냐하면 그는 세상 속에 머물렀으며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과 더불어 움직였으며,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어떻게 잠들
어 있고 취해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깨어나게 할 방법
과 수단들을 찾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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