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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1 본문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1
이 책은 예수의 도마 복음서를 오쇼 라즈니쉬가 강의한 내용이다, 신약 성서 속에 들어 있는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복음서를 4 복음서라고 부르고, 성서에 들어 있지 않은 이 도마 복음서는 제5의 복음서라고도 불린다.
1945년 이집트의 나그함마디(Nag Hammadi)에서 콥트어로 된 영지주의(靈知主義)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문서들 가운데 도마 복음서가 들어 있어 학계의 비상한 시선을 끌었다. 이 복음서는 1959년 학자들의 공동번역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모두 114편으로 되어 있으며, 그중에는 성서에 있는 4 복음서에 나오는 내용과 유사한 것들도 있다.
학자들은 도마 복음이 쓰인 시기를 AD 150년경에서 3세기 이내로 추정한다, 4복음서가 쓰인 시기를 살펴보면, 마르코 복음이 가장 먼저 쓰였으며 그 연대를 대략 AD 70년경으로 보고, 나머지 복음서들은 그보다 훨씬 후인 AD 80년에서 100년으로 보나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
도마 복음서에는 두 가지 전승 층이 있는데 하나는 영지주의 전승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 그리스도교 전승이다, 그러나 도마 복음 속에는 4 복음서와 완전히 똑같은 내용은 없다. 신약성서 속에는 ‘기록되지 않은 예수의 말씀’을 시사한 곳이 있다, 특히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께서는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많이 행하셨다.”라는 구절이 있다.
요컨대 4 복음서 외에도 기록 문자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고 도마 복음서가 그 중 하나로 발견된 셈이다, 3, 4세기 교부들, 특히 히폴리투스, 오리게네스, 에우세비우스 등이 이 도마복음서에 대해서 언급한 일이 있으나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도마 복음서에는 예수의 말씀만 기록되어 있고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다, 이것은 영지주의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들은 영적인 것, 도(道)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도마 복음서에는 예수를 ‘살아 있는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은 4 복음서가 예수를 ‘부활하신 주’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하여 영지주의 학파가 사용하는 예수의 대명사격이다.
도마 복음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도마인지, 아니면 요한복음 20장 24절에 나오는 ‘쌍둥이라 불리는 도마’인지, 또는 도마라는 이름을 가진 제3의 인물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단지 도마 복음 본서의 서두에 있는 “도마가 예수로부터 받은 비밀의 말씀을 기록하였다.”라는 내용 때문에 도마 복음서로 이름이 붙은 것이다.
오쇼는 이 책을 통해서 도마 복음서야말로 신약성서에 있는 그 어떤 복음서보다도 예수의 말을 가장 실제에 가깝게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신학자들이 행한 예수와 복음서에 관한 연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오쇼처럼 명쾌한 해답을 주지는 못했다.
예수와 복음서에 관련된 그 모든 신학 서적들에는 명확한 해답이 없다, 보수신학자들은 보수주의적인 견해에서, 민중 신학자들은 민중사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지식과 세상의 관점으로 예수를 이해하고 복음서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오쇼의 예수에 대한 해석은 명쾌하다, 어느 신학자도 오쇼의 성서 해석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 역시 신학을 했고 사제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복음서가 주는 의문점들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였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그 모든 의문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아니 해결이라기보다는 완전한 이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예수가 인도에 온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옳다, 예수가 한 이야기 중 많은 부분은 유대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고 인도의 고대 경전, 베다나 우파니샤드, 혹은 베단타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쇼는 예수의 이야기들을 깨달은 이의 눈으로 꿰뚫고 있다, 예수가 한 말의 핵심을 그 근원에서부터 관통하고 있다, 예수가 2천 년 전에 타올랐던 불이라면, 오쇼는 2천 년 후인 현재에 타오르는 불이다.
그 두 불길이 이 책에서 만나 함께 어울려 춤추고 있다,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불꽃처럼 터져 나오는 진리의 불똥들이 우리에게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그 불똥은 진리를 구하는 이들에게 옮겨져 다시 타오를 것이다.
추신; 이 글을 번역한 이는 박노근이라는 분입니다. 제 생각과는 다른 점이 있지만 역자의 소개문을 그대로 옮깁니다.
보도자료
신약성서 속에 들어 있는, 예수의 가르침을 담은 4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 복음--외에, 제5의 복음서라고 불리는 「도마 복음」을 인도의 구도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가 해석한 책 《도마 복음》 강의(원제:The Mustard Seed)》가 「도서출판 예문」에서 출간되었다.「도마 복음」은 이른바 정통 기독교 사상에 위배되는 요소를 담고 있어 2,000년 동안 성경 정본에 포함되지 못한 채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서만 비밀스럽게 전해져 내려오던 금서로서 1945년 이집트의 나그하마디에서 발견되었다.
「도마 복음」은 발견 당시 상형 문자와 그리스 문자를 겸용한 콥트어로 씌어져 있었다.「도마 복음」의 저자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예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인 도마인지, 아니면 요한 복음 20장 24절에 나오는 '쌍둥이라 불리는 도마'인지, 또는 도마라는 이름을 가진 제3의 인물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단지 「도마 복음」 본서의 서두에 있는 "도마가 예수로부터 받은 비밀의 말씀을 기록하였다"라는 내용 때문에 '도마 복음'으로 불리게 되었다.
프랑스의 학자 필립 드 슈아레는 이 「도마 복음」의 연구를 통해 불교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을 밝혀 다른 복음서에 대한 기존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기독교 성립 과정 자체에 대한 의문점을 푸는 열쇠를 제공함으로써 유럽 종교계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신약성서의 성립에 관한 문헌적 고증이 빈번히 행해지고 카톨릭교회의 권력체제와 지배구조에 대한 비판이 되는 수많은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다.
「도마 복음」의 존재는 예수의 사상이 불교사상, 그 중에서도 법화경의 불성내재론(佛性內在論)과 흡사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권위적이고 율법적인 유태교의 토양에서는 이런 사상이 발생할 여지가 없으므로, 불교의 법화경 사상이 실크 로드를 거쳐 이스라엘까지 전해졌거나, 아니면 예수 자신이 인도, 티벳에서 배워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도마 복음 강의》는 이러한 성서 해석의 새로운 가능성을 라즈니쉬 자신의 날카로운 안목과 사상으로 정련, 구체화하고 심화시켜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의 근원을 진단하고 치유의 이정표를 제시한 책이다. 라즈니쉬는 「도마 복음」 이야말로 신약성서에 있는 그 어떤 복음서보다도 예수의 말을 가장 실제에 가깝게 기록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예수가 기독교 역사의 중심을 이룬 33살 이전에 인도의 밀교 집단에서 제자로서 훈련을 받았을 것이며 이때 인도 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종래의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33살 이전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도마 복음 강의》는 하나의 비유이며 '진리를 가리키는 표지'이며 '우화'요 '시(詩)'이므로 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예수의 말을 라즈니쉬 특유의 동어 반복과 모순어법, 인도의 고대 경전, 베다나 우파니샤드, 불교와 기독교 경전 등에서 끌어온 다양한 설화들 속에 용해시킴으로써 독자들의 감성에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독특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도마 복음 강의》의 전면을 관류하는 것은, 엄격하고 권위적인 절대신(유일신)을 상정하여 인간과 신(창조주)을 영원히 별개의 존재로 간주하는 기존의 정통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의 제기다. 라즈니쉬는 세상의 종교를 세 가지--"신은 자신의 내부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불교, 자이나교)과 "신은 자신의 외부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힌두교, 유태교, 이슬람교)--로 나눌 수 있다면 기독교는 그 둘의 차원 높은 종합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자신의 외부에 있는 전 존재계의 축복,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예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다.--"만일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안다면, 너희는 알려질 것이고 너희가 살아계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에서는 이 구절을 이단시한다.) 라즈니쉬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기독교에 대한 종래의 잘못된 시각은 예수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라즈니쉬는 「도마 복음」에 담겨 있는 예수의 말들의 행간을 더듬고 구절구절을 음미하면서 이러한 확신을 완성시킨다. 다음 인용구는 이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왕국은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너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열매 맺게 한다면, 너희가 한 것이 너희를 구할 것이다" 라즈니쉬는 여기에서 왕국(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즉 스스로 신이 된다는 것은, 깨달음을 통해 에고(ego)를 버리고 '진정한 자신(self)'에 이르는 것이라고 역설하며 그 깨달음의 과정에 깊숙이 천착한다.
그는 「도마 복음」에 들어 있는 예수의 말의 의미를,
신성(神性)으로의 '내버려둠(Let go)'과
'내맡김(surrender, 歸依)',
자기 내면으로의 침잠과 명상을 통한 새로운 탄생의 가르침으로 빚어낸다.
이때 신성이란 먼 곳 어디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힘이 아니라 예수나 붓다나 마하비라와 같은 깨달은 자, 혹은 스승이며 '진정한 자기'에 이르기 위해 통과해야 할 다리이다.
그는 깨달은 자를 불〔火〕에 비유함으로써 존재의 완전한 연소를 통한 자기 회복을 구가하는 '변형의 과학'(라즈니쉬 자신의 표현이다)을 창조한다.이 때문에 라즈니쉬는 얄팍한 선행이나 금욕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며 사람들을 거짓된 위안의 울타리 속에 가두어 두는 제도로서의 종교, 계율로서의 종교를 비판한다. 그는 행위의 변화와 같은 부분적인 수정이 아니라--"구두쇠가 기부자로 바뀌었다면 돈에 대한 욕망이 적극적인 형태에서 소극적인 형태로 변한 것일 뿐, 욕망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존재 자체의 전면적인 변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종래의 기독교가 이단시했던 예수의 그 이상한 말--"너희가 금식을 행하면 너희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자선을 하면 너희는 너희 영혼을 사악하게 할 것이다"--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된다.존재의 변형, 정체성의 위기와 관련된 문제는 《도마 복음 강의》가 유난히도 생생하게 가차없이 현대인의 폐부를 찌르는 근거이기도 하다. 라즈니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깃든 인간 욕망의 허구성을 전면에 드러내고 현대인의 혼돈과 고독과 불안 심리를 날카롭게 해부한다.
라즈니쉬는 끊임없이 가면을 쓰고 치장하여 에고의 성곽을 쌓아감으로써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딜레마(제3장:"너희는 무엇을 입을까에 대하여 생각을 버려라"), 헤어날 수 없는 습관의 최면에 걸려 수백만번의 생에서 똑같은 행위를 되풀이하는 인간의 미망(불교의 業, 힌두교의 카르마 karma),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물질의 욕망에 매몰되어 신의 초대를 끝없이 거절하고 미래로 연기하는 인간이 상인적(商人的) 속성을 섬뜩하리만치 강하게 부각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 존재의 고유한 가치, 모든 조건과 상황으로부터 놓여난 순수한 인간 존재, 존재 자체의 오롯한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실존적 물음의 추를 무겁게 드리운다.
1.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
이 책은 예수의 도마 복음서를 오쇼 라즈니쉬가 강의한 내용이다, 신약 성서 속에 들어있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를 4복음서라고 부르고, 성서에 들어 있지 않은 이 도마 복음서는 제5의 복음서라고도 불린다. 1945년 이집트의 나그하마디(Nag Hammadi)에서 콥트어로 된 영지주의 (靈知主義)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문서들 가운데 도마 복음서가 들어 있어 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끌었다.
이 복음서는 1959년 학자들의 공동번역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모두 114편으로 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성서에 있는 4복음서에 나오는 내용과 유사한 것들도 있다.학자들은 도마 복음이 쓰여진 시기를 AD 150년경에서 3세기 이내로 추정 한다, 4복음서가 쓰여진 시기를 살펴보면, 마가 복음이 가장 먼저 쓰였졌으며 그 연대를 대략 AD 70년에서 100년으로 보고 있고, 나머지 복음서들 은 그보다 훨씬 후인 AD 100년에서 150년으로 보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
도마 복음서에는 두 가지 전승 층이 있는데 하나는 영지주의 전승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 그리스도교 전승이다, 그러나 도마 복음속에는 4복음서 와 완전히 똑같은 내용은 없다. 신약성서 속에는 '기록되지 않은 예수의 말씀'을 시사한 곳이 있다,특히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께서는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많이 행하셨다"라는 구절이 있다. 요컨대 4복음서 외에도 기록 문자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고 도마 복음서가 그 중 하나로 발견된 셈이다, 3, 4세기의 교부들, 특히 히폴리투스, 오리게네스, 에우세비우스 등이 이 도마복음서에 대해서 언급한 일이 있으나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도마 복음서에는 예수의 말씀만 기록되어 있고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다, 이것은 영지주의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들은 영적인 것, 도(道)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도마 복음서에는 예수를 '살아 있는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은 4복음서가 예수를 '부활하신 주'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하여 영지주의 학파가 사용하는 예수의 대명사격이다.
도마 복음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도마인지, 아니면 요한복음 20장 24절에 나오는 '쌍둥이라 불리는 도마'인지, 또는 도마라는 이름을 가진 제3의 인물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단지 도마 복음 본서의 서두에 있는 "도마가 예수로부터 받은 비밀의 말씀을 기록하였다"라는 내용 때문에 도마 복음서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오쇼는 이 책을 통해서 도마 복음서야말로 신약성서에 있는 그 어떤 복음서보다도 예수의 말을 가장 실제에 가깝게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신학자들이 행한 예수와 복음서에 관한 연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오쇼처럼 명쾌한 해답을 주지는 못했다.
예수와 복음서에 관련된 그 모든 신학 서적들에는 명확한 해답이 없다, 보수신학자들은 보수주의적인 견해에서,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사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지식과 세상적인 관점으로 예수를 이해 하고 복음서를 해석하기 때문이다.오쇼의 예수에 대한 해석은 명쾌하다, 어느 신학자도 오쇼의 성서 해석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역시 신학을 했고 사제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복음서가 주는 의문점들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였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그 모든 의문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아니 해결 이라기 보다는 완전한 이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예수가 인도에 온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옳다, 예수가 한 이야기들 중 많은 부분들은 유대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고 인도의 고대 경전, 베다 나 우파니샤드, 혹은 베단타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쇼는 예수의 이야기들을 깨달은 이의 눈으로 꿰뚫고 있다, 예수가 한 말의 핵심을 그 근원에서부터 관통하고 있다, 예수가 2천 년 전에 타올랐 던 불이라면, 오쇼는 2천 년 후인 현재에 타오르고 있는 불이다.
그 두 불길이 이 책에서 만나 함께 어울려 춤추고 있다, 그리고 그 불길속에서 불꽃처럼 터져나오는 진리의 불똥들이 우리에게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그 불똥은 진리를 구하는 이들에게 옮겨져 다시 타오를 것이다.
푸나에서
박 노근
2.환자는 건강을 위해서 오지 않는다, 환자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올 뿐이다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하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마치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한 알의 겨자씨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름진 땅에 떨어지면 한 그루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온갖 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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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계는 많이 변했으며 잘못되어 있다, 모든 차원에서 깊은 인간 관계는 사라져버렸다, 아내는 이제 더 이상 아내가 아니라 여자친구에 지나지 않는다, 남편 또한 남편이 아니라 남자친구일 뿐이다. 친구 관계는 좋은 것이긴 하나, 거기에 더 이상 깊은 만남은 없다, 결혼이란 깊은 만남 속에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그대 자신을 깊은 강물 속에 내맡기는 것이다.
그대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면 그대는 강의 얕은 곳에 머무르게 된다,그대 스스로를 내맡기지 않으면 그대는 결코 도약할 수가 없다, 그대는 그 표면 위에 떠다닐 수 있다, 그러나 그 깊은 곳들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물론 깊은 곳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위험할 수밖에 없다, 왜냐 하면 표면에서의 그대는 더욱 능률적이기 때문이다, 표면에서의 그대는 마치 자동인형처럼 일할 수 있고 깨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그대는 더욱 깨어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깊은 곳에서는 어느 순간 죽음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서 두려움은 모든 인간 관계 속에서 얕고 천박한 것들을 창조해 냈다, 인간 관계는 유치해졌다,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는 재미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그대 자신이나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지는 못한다. 여자친구와 더불어 그대는 성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사랑은 자라지 않는다, 사랑은 깊은 뿌리를 필요로 한다, 성은 표면에서도 가능 하겠지만 그것은 그저 동물적이며 생리적인 것이다, 만일 성이 깊은 사랑의 한 부분이라면 성은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성이 깊은 사랑의 부분이 아니라면 성은 가장 추한 것이 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영적인 만남이 없기 때문에 가장 추한 것이다, 그저 서로를 만지고 헤어진다, 만난 것은 오직 육체일 뿐 너와 내가 아니다, 모든 인간 관계가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 가장 위대한 관계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가장 위대한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다, 만일 그대가 한 스승과 제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러한 관계의 차원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아내는 여자친구로 남편은 남자친구로 그 관계가 변했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에 존재했던 관계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그 관계는 전혀 상반되는 관계인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처럼 되었다.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는 병리학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환자는 진리를 구하러 오는 것이 아니며 건강을 구하러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건강(health)이란 단어는 매우 의미가 깊다, 그것은 전체성(whole- ness)을 의미하고 신성(holiness)을 의미하며 자기 존재 내면의 깊은 치유를 의미한다.
환자는 건강을 위해서 오지 않는다, 만일 그가 건강을 위해서 온다면 그는 제자일 수밖에 없다, 환자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온다, 그 자세는 전적으로 소극적인 것이다, 그는 단순히 다시 정상인으로 돌아오기를 주변으로부터 강요받아 의사에게 오는 것이다. 그저 다시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오는 것이다, 그는 사회에 적응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재조정이 필요하며 정신과 의사는 그가 다시 적응 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무엇에 적응하기 위해서인가? 그것은 이토록 완전히 병들어 있는 이 사회와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이다.
그대들이 말하고 있는 정상인들이란 다름 아닌 정상적인 병, 정상적인 광기, 또는 정상적인 정신 이상을 가진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 역시 정신 이상자이며 사회와 문화가 허용하는 영역 안에서 미쳐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주 그 영역을 벗어나는 짓을 한다면 그는 병든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병들어 있는 그 사회 전체는 말한다, 이 사람은 병들었다고, 그러면 그 영역에 존재하는 정신과 의사는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도록, 군중 속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는 스승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자는 제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배우러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혼란 상태에 있으며 그 혼란 상태를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의 노력은 오직 적응을 위한 것이지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정신과 의사는 스승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서양에서 그들이 스승 행세를 하고 또 머지않아 동양에서도 그런 상황이 온다 해도 그들은 결코 스승이 될 수 없다, 그 자신 스스로가 병든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람들을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 그것은 좋다, 어떤 면에서 한 병든 사람이 다른 병든 사람을 도울 수는 있다, 그러나 병든 자가 다른 병든 자에게 완전함을 가져다줄 수는 없다, 한 광인이 다른 광인에게 그 광기를 극복하도록 도울 수는 없는 것이다. 프로이드나 융, 그리고 아들러 학파의 정신분석의들도 완전히 병들어 있다, 평범한 정신분석의뿐만이 아니라 그들 중 뛰어나다고 하는 이들조차 병리적인 환자들이다, 이제 그대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예를 들겠다.
프로이드는 누군가가 무엇이든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몸을 떨곤 했다, 두 번이나 그는 기절하여 의자에서 굴러떨어진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이집트의 미라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였고, 또 한 번은 역시 융이 죽음과 시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프로이드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면서 바닥에 쓰러졌으며 기절하여 의식을 잃고 말았다.
프로이드에게 죽음이 그토록 두려운 것이었다면 그의 제자들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죽음이 왜 그토록 공포의 대상이었을까? 그대는 한 깨달은 자, 붓다가 죽음을 두려워하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깨달은 자라고 할 수 없다. 융은 로마에 있는 바티칸 궁을 방문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었다, 특별히 그는 바티칸 궁에 있는 도서관을 방문하고 싶어했는데 그곳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종교들의 가장 희귀한 극비 문헌들을 소장하고 있는 최고의 도서관이다.
그러나 그는 차표를 사러 갈 때마다 몸을 떨곤 했다, 그저 로마에 가는 것뿐인데...... 그는 차표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결코 가지 않았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국에는 "아니야, 나는 갈 수가 없어"라고 결정한 것이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정신분석 학자인 그가 로마로 가는 것을 왜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로마가 종교들의 상징이며 대표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융이라는 사람은 그의 마음 둘레에 하나의 철학을 만들어 놓고 있었는데 그 철학이 무너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낙타가 히말라야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낙타가 히말라야 가까이에 이를 때 그는 처음으로 그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 라는 알게 되기 때문이다, 융이 만들어놓은 모든 철학은 유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그토록 방대하고 우주적인 체계들을 창조해 냈지만 그 모든 체계들이 지금 붕괴되고 있다, 그가 로마 행을 그토록 두려워한 것은 과거가 창조한 모든 위대한 체계들의 붕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대들의 작은 체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대가 닦고 치장해 놓은 그 작은 구석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대의 철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3.나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다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
위대했던 철학들이 무너져버리고 한낱 먼지로 변해 버렸다, 로마에 가보라, 무엇이 일어났는지 보라, 아테네에 가보라, 그리고 무엇이 일어났는지 보라. 그 모든 것들이 먼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위대한 체계들이 이제는 먼지로 변해 버렸고 모든 사상들은 결국 쓸모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사상이란 한낱 인간이 창조해 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직 사고가 없는 상태에서만 그대는 신성을 알게 된다, 사고를 통해 서 그대는 영원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사고는 시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고는 영원의 것일 수가 없다, 철학이나 사상 체계는 영원할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이 융의 두려움이었다.
융은 적어도 네 번이나 다섯 번쯤 로마행 예약을 했었고 또 그것을 취소 하였다, 이 융이라는 사람은 가장 위대한 정신분석 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로마에 가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했다면 그의 제자들은 어떠했을까? 그대들은 두렵지 않다 해도 그것은 그대가 융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그대가 융만큼 의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에 가면 그의 머리가 뒤집혀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위대한 사상 체계들의 폐허를 보는 순간, 전율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함께 "나의 체계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에게는 무슨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그를 사로잡을 것이다.
그는 떨면서 집으로 돌아왔고, 그리고 그의 회상록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마침내 나는 그 모든 계획을 포기했다, 나는 로마에 가지 않을 것이다." 같은 일이 프로이드에게도 여러 번 일어났다, 그 역시 로마에 가려고 시도 했었다, 그것을 단순히 우연으로 여길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 역시 로마 행을 두려워했다, 왜? 프로이드 역시 그대처럼 화를 내는 인간이다, 프로이드 역시 그대처럼 성적인 인간이었다. 그도 그대처럼 죽음을 두려워했고 그대처럼 신경질적이었다, 그렇다면 차이는 무엇인가? 어쩌면 그가 그대보다 더 지성적인 인간이었고 천재적이었거나 또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인간이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에 관한 한, 가장 심오한 정수에 관한 한은 그도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장님에 불과했다.
그렇다, 정신의학은 종교가 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훌륭한 병원이 될 수는 있겠으나 사원이 될 수는 없다, 불가능하다, 병들고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정신과 의사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는 스승이 아니고 환자는 제자가 아니다, 만일 그대가 환자로서 스승에게 온다면 그대가 얻을 것은 없다, 왜냐하면 스승은 정신분석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와서 말한다, "나는 이러저러한 정신적인 불안과 신경증 증세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말한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나는 그대의 불안을 치료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대 자신을 치료할 것이다, 나는 그대의 질병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그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뿐 이다, 병이란 바깥에 있는 것이지 그대 존재가 있는 곳에 병은 없다." 일단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될 때 모든 질병은 사라진다, 그대는 지금까지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을 피해 왔고 그대 자신을 숨겨 왔기 때문에 그 병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는 자기의 본 모습을 보고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근본적인 만남을 피해 왔다.
왜 그대 자신을 보는 것을 원치 않는가? 그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정녕 그대가 그대 자신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대는 제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가 자기 자신과 얼굴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스승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승은 오직 그대가 그대 자신과 얼굴을 마주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 왜 그대는 그렇게도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과거의 어느 곳에서부터 무언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많은 것들이 강요된다, 아이는 훈련되어져야 한다, 아이는 사회와 부모들이 허용하지 않는 많은 부분들을 지니게 되는데 그것들은 거부되고 억압되어진다.
오직 아이의 일부분만이 허용이 되고 인정되는 것이다, 아이는 허용되지 않는 자기 존재의 많은 부분들을 부정해야만 한다, 아이는 자신이 부정해야 하는 부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것들이 자신에게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억압이라는 것이며 사회 전체가 이 억압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아이의 가장 큰 부분은 억압되어야 하며 그것은 어둠 속에 완전히 던져지게 된다, 그러나 그 억압된 부분은 그 스스로를 주장하며 반란과 반동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은 빛 가운데로 나오기를 원하지만 그대는 계속 그것을 억눌러야 한다, 그리하여 그대는 그대 자신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억눌렀던 부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 다, 그것은 다시 찾아올 것이고 그렇게 그대의 내면에 존재할 것이다, 그 무의식의 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만일 그대가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면 그대는 그 무의식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가 부정했던 모든 것들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대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이다. 한 아이가 가진 모든 부분들이 전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이 두려움 은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회는 한 아이의 전부를 받아들이지 않은채로 존재한다,
그리고 아이의 존재 전체를 받아들이는 사회는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억압은 많든 적든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는 자신의 얼굴과 마주 대해야 하는 이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그대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에 대한 분별을 잊는 바로 그날 그대는 제자가 된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가를 잊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존재 전부를 드러내어놓는 바로 그날 그대는 비로소 한 사람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스승이란 한 사람의 산파에 불과하다, 그는 그대가 거듭나고 새로 태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면 스승과 제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가? 제자는 스승을 신뢰해야 한다, 의심해서는 안 된다, 만일 제자가 의심을 갖는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놓을 수가 없다, 그대가 누군가를 의심할 때 그대는 움츠리게 되고 자신을 확장시킬 수 없다. 한 낯선 사람에게 그대가 의심을 가질 때 그대는 스스로를 닫는다, 그 낯선 사람이 그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대는 그대 자신을 열 수가 없다, 그대는 그 사람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는다, 그대는 자신을 방어해야 하고 마음에 무장을 해야 한다.
스승과 함께 있을 때, 그대는 그 무장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대는 그대의 연인 앞에서도 조금은 무장을 한다,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조차 그대는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승과 함께 할 때 그 열어놓음은 완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만일 그대가 아주 조금이라도 움츠린다면 거기에 더 이상 스승과 제자 관계는 없다, 전적인 신뢰가 필요하다, 오직 그럴 때 비밀들이 드러나게 되며 열쇠가 그대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 자신을 숨길 때, 그것은 그대가 스승과 싸움을 한다는 의미이며 그땐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싸움은 스승과 함께 하는 열쇠가 아니다, '내맡김(歸依)'이 열쇠이다, 그리고 이 내맡김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많은 것들이 그것을 부추겨왔다, 지난 3~4세기 동안에 인간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이 되도록 배웠다, 항복이 아니라 투쟁을, 복종이 아니라 반란을 하도록 배워왔다, 신뢰가 아니라 의심을 하도록 배워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과학이 의심을 통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과학이란 깊은 회의주의이다, 그것은 신뢰를 통해서 일하지 않는다, 그것은 논리와 주장 그리고 의심을 통해서 일한다, 그대가 더욱 의심할수록 그대는 더욱 과학적으로 된다, 그것은 종교적인 길과는 정반대의 길이다.
4.종교는 더 큰 기적을 이루었지만 그 기적들은 눈으로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
종교는 신뢰를 통해서 일한다, 그대가 더욱 신뢰할수록 그대는 더욱 종교적으로 된다, 과학은 기적을 만들어냈고 그러한 기적들은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종교는 더 큰 기적들을 이루었지만 그 기적들은 눈으로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어느 깨달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대가 무엇을 느낄 수 있겠는가? 무엇을 볼 수 있겠는가? 깨달은 이는 눈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눈으로 보기에 그는 단순히 하나의 육체에 불과하다, 육안으로 보기에 그는 그저 그대와 마찬가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육안으로 보기에 그는 늙어갈 것이며 어느 날 죽게 될 것이다.
영혼의 눈으로 보면 그에게 죽음은 없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없다, 그대에게는 그 미지의 깊은 중심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신뢰를 가진 눈만이 점차로 그것을 느낄 수 있으며 민감 하게 되어갈 것이다. 그대가 신뢰할 때 그것은 두 눈을 감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이 맹목적인 것처럼 신뢰 역시 맹목적이다, 아니 신뢰는 사랑보다 맹목적이다.
그대가 두 눈을 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의 내적인 변형이 일어난다, 그대가 밖으로 향하는 두 눈을 감아버릴 때, 그 눈을 통해 나아가는 에너지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그 에너지는 안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에너지는 눈으로부터 밖의 대상물을 향해 흐를 수가 없다, 그것은 방향 전환을 하게 된다, 역행을 하는 것이다. 에너지는 움직여야만 한다, 에너지는 정체되어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대가 한 출구를 닫는다면 그 에너지는 다른 출구를 찾기 시작한다, 양쪽 눈을 감았을 때, 두 눈을 통해 흐르던 에너지는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하나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에너지는 그대 안에 있는 제3의 눈을 타격한다.
제3의 눈은 어떤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두 눈을 통해 외부의 대상물을 향해 흐르던 에너지가 방향을 바꾸어 그 근원을 향해 다시 돌아오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제3의 눈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세상을 보는 제3의 방법이 된다. 오직 이 제3의 눈을 통해서 깨달은 이를 볼 수 있다, 오직 이 제3의 눈을 통해서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이 제3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 면 예수가 그대 곁에 있을지라도 그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렇게 놓쳐버렸다.
고향에서 사람들은 예수를 단지 목수 요셉의 아들로 생각했다, 아무도, 아무도 이 사람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리지를 못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목수의 아들이 아니었고 하느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내적인 현상이다. 예수가 "나는 신의 아들이며 나의 아버지는 하늘에 있다"라고 선언하였을 때 사람들은 비웃으며 "너는 미쳤거나 바보이거나 아니면 아주 교활한 사람이다, 어떻게 목수의 아들이 갑자기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길이 있다.
육체로부터는 오직 육체만이 태어난다, 내면의 참된 자아는 육체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며 신성의 것이다, 그러나 먼저 그대는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대는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 예수를 이해하기란 아주 미묘한 일이다, 그대는 하나의 대단한 훈련을 거쳐야만 한다, 그것은 마치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일 그대가 생전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을 접하게 된다면 그대는 "무슨 음악이 이래?"라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것은 아주 미묘한 것이어서 긴 훈련이 필요하다.
여러 해 동안의 듣는 훈련이 있어야 하고 그런 후에야 그대의 귀는 그 미묘한 음감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클래식 음악과 견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보통 때 들었던 음악, 말하자면 영화음악 같은 것은 전혀 음악이 아니며 단순한 소음에 불과하고 유치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대의 귀는 훈련되지 않은 채 그런 소음과 더불어 살면서 그것을 음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에 관한 한 그대는 매우 귀족적인 귀가 필요하다. 듣는 훈련이 필요하며, 훈련을 거듭할수록 그 미묘한 음을 더 잘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 앞에서 클래식 음악은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는 우주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존재 속에 어떤 움직임도 없이, 생각의 어떤 동요도 없이 그렇게 침묵해야만 한다, 오직 그러할 때에 그대는 예수를 들을 수 있고 예수를 이해할 수 있으며 예수를 알 수가 있다.
예수는 거듭 반복해서 이렇게 말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나를 이해할 수 있다, 눈 있는 자는 보라! 내가 여기에 있다." 왜 예수는 이 말을 거듭 되풀이해서 말해야 했을까? "눈 있는 자는 보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왜? 그의 이야기는 오직 제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를 이해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 했다, 그 소수의 무리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배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학의 교수들이 아니었으며, 박사 또한 철학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보통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부이고 농부였으며, 제화공이었고 창녀였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왜 그런 사람들이 예수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평범한 사람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평범한 사람에게 는 소위 특별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서는 사라져버린 그 어떤 특별한 것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겸손과 신뢰이다. 그대가 지적인 훈련을 많이 받을수록 믿음의 가능성은 작아지며 그대가 지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을 때 믿음의 가능성은 더욱 커지게 된다, 농부에게 는 믿음이 있다, 그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밭에 씨를 뿌리고 때가 되면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날 것을 믿는다.
씨들은 싹을 틔울 것이다, 농부는 기다리며 기도한다, 제때에 뿌려진 씨앗들은 때가 되면 자라날 것이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린다, 그는 나무와 식물들과 강물과 그리고 산과 더불어 살아간다, 거기에 의심할 필요가 없다, 나무는 속이지 않는다. 그대는 나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할 필요가 없다, 산도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 산은 정치가도 범죄자도 아니다, 그대는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할 필요가 없다, 어떤 방어 수단도 마련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그것들에게 그대 자신을 열어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대가 산에 오를 때 황홀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산으로부터? 아니다, 그것은 산에서는 그대가 자신의 무장을 버려도 되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한 그루의 나무에게 걸어갈 때 그대는 돌연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그 아름다운 느낌은 나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와 함께 있을 때 그대는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집에서 쉬는 것처럼 편안할 수 있는 것이다. 꽃은 갑자기 그대를 공격하지 않는다, 나무는 도둑이 될 수 없다, 그대에게서 무엇을 훔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산에 오를 때, 바다에 갈 때, 나무에게 갈 때, 그리고 숲으로 갈 때 그대는 자신을 방어했던 내면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더 깊다, 산업화나 기계화나 기술 발달이 덜 되어 있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일수록 더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뉴욕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이유이다, 거의 불가능하다. 예수를 믿는 광신자들은 거기에서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들 광신자들은 정신병자이며 예수는 단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다, 절대로 그대는 예수가 거기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비록 예수가 뉴욕에서 태어난다 해도 아무도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비록 예수가 거기에 있다 해도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기술 공학과 과학이 없는 시대에 태어났으며 목수의 아들이었다, 그는 전 생애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소박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그들은 신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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