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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3 본문

영성수행 비전/도마복음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3

柏道 2018. 12. 9. 13:44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3

 

  

 

10.평화, 그리고 불과 검과 전쟁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을 분열시키고 

불과 검과 전쟁을 주러 왔음을 알지 못한다.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살고 있다면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반대할 것이며 

두 사람은 세 사람을 반대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할 것이며 

아들은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홀로 서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눈으로 보지 못한 것, 

귀로 듣지 못한 것, 

손으로 만져보지 못한 것,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예수는 매우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

 

는 먼저 많은 것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로, 만일 모든 사람들이 거의

 

죽어 있는 상태라면 평화는 가능하다, 거기에 전쟁이나 갈등은 없을 테지만

 

삶 또한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묘지의 침묵과도 같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가치가 없다, 차라리

 

전쟁이 있는 게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이 있으면 그대들은 생기와

 

활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른 유형의 평화가 있다, 그대가 자기 존재 내면에 중심을 둔 생기와 활

 

력을 가질 때 완전히 다른 차원의 평화가 존재한다, 그것은 그대가 자기 자

 

신을 알았을 때, 그대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불꽃이 타올라 그대가 어둠 속

 

에 있지 않을 때 찾아오는 평화이다.

 

 

거기에는 넘치는 생명력과 깊은 침묵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죽음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묘지의 침묵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그대가 이해해야 하는 예수의 역설이다, 전쟁은 나쁜 것이고

 

미움도 나쁜 것이다, 그것들은 세상의 악마이며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질병

 

은 나쁜 것이고 건강은 좋은 것이다, 질병은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죽은 자

 

는 결코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죽은 몸은 부패할 수 있지만 병들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이해하지 못한

 

다면 그대의 노력은 하나의 죽은 세계를 만드는 것이 된다, 거기엔 전쟁과

 

질병과 그리고 미움은 없을 것이지만 또한 생명도 없다.

 

 

예수는 그와 같은 형태의 평화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형태의 평

 

화는 쓸모가 없다, 오히려 전쟁이 있는 지금의 세상이 더 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애써왔지만 그들의 자세란 단지 소극적인 것이다.

 

 

그들은 "만일 전쟁이 그친다면 모든 것은 좋아질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보통 사람들만의

 

생각이 아니다.

 

 

버트란트 러셀 같은 매우 위대한 철학자들도 "만일 전쟁이 그친다면 모든

 

것은 좋아질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소극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이

 

아니라 인간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그대의 내면에 전쟁이 없다면 그것은 외부에서 벌어질 것이다, 만일

 

그대가 그대 내면의 전쟁에서 싸워 승리한다면 바깥의 전쟁은 그칠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인도에서는 마하비라를 '정복자' '위대한 정복자' 즉, 진나(the jinna)라고

 

불렀다, 진나라는 말은 정복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와도 싸운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그가 누구를 정복했다는 말인가?

 

 

그는 절대로 폭력을 믿지 않았고 절대로 전쟁을 믿지 않았으며 절대로 싸움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사람 마하비라를 위대한 정복자라고 부르

 

는가? 이것은 그의 본명이 아니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비르다만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어떤 현상이 있었던

 

것인가?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정복했다, 일단 그대가 자기 자신을 정복한다

 

면 다른 사람과의 싸움은 즉시 그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의 싸움이란

 

단지 내면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면 오직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불편함으로

 

고통을 겪든지 아니면 그것을 누군가에게 투영하는 것이다.

 

 

그대가 내적으로 긴장되어 있을 때 그대는 이미 누군가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구실은 무엇이라도 좋다, 그 구실이 부당할지라도 그대는 그대의

 

고용인이든 아내든 아이들이든, 누구에게나 덤벼들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가진 내적 갈등과 불편함을 어떻게 해소하는가? 그대는 다

 

른 것에다 그 책임을 돌리고 그것을 통해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대는

 

지금 화를 낼 수 있고 그대의 분노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그대를 이완시키고 기분을 전환시켜 줄 것이다, 물론 일시적인 것이야, 왜냐

 

하면 내부는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쌓일 것이며 다시 이전 상태로 머무르게 된다, 내일이면 다시

 

분노와 미움은 쌓일 것이며 그대는 그것을 누군가에게 투사해야만 한다.

 

 

그대가 남과 싸우는 것은 그대는 계속 자신의 내면에 쓰레기를 쌓아 올리

 

고 있고 또 그것을 내다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정복한 사람, 자

 

아 정복자는 내적 갈등이 없다, 전쟁은 끝났다, 그는 내적으로 하나이다, 거

 

기에 둘은 없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갈등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사람은 다른 누구하고도 싸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인 갈등을 피하는 것은 마음의 속임수이다, 왜냐하면 내적

 

인 갈등은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

 

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대를 비롯한 모든 개개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선한 사람이라고 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이라는 것은 이런 이미지 없이 살기란 어렵다.

 

 

정신분석의들은 환상이란 삶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대가

 

깨달음에 이르지 않는 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상이 필요하다, 만일 그

 

대가 스스로를 아주 추하고 사악하고 악마와 같다고 생각하고---사실 이것

 

이 진실이다---그 이미지를 내면에 간직한다면 그대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

 

을 것이다.

 

 

그대는 모든 자신감을 상실할 것이며 사랑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로 인해 자기

 

혐오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것이며 다른 사람

 

을 바라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대는 심한 열등감과 자신이 아주 나쁘고 사악한 존재라는 느낌을 가질 것이

 

며 결국 그것으로 인해 죽음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그대를 자살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진실이다, 자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11.삶 속에서 지름길이란 없다, 오직 환상만이 지름길이다

 

 

 

 

이러한 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악마의 사람이 아니라 신성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며 길고 험한 길이다, 많은 것을 행해야만 악마는 신성이 된다, 그

 

것은 신성이 될 수 있다!

 

 

그대는 아마 악마(devil)라는 단어의 어원을 모를 것이다, 그것은 신성(divine)

 

이란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왔다, 악마와 신성이라는 단어는 모두 데바(deva)

 

라고 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왔다.

 

 

악마는 신성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성이 악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능성

 

은 충분히 있다, 그들은 한 에너지의 반대 극이다, 시거나 쓴맛으로 변한 에너

 

지는 다시 단맛으로 변할 수 있다, 어떤 내적인 변형이 필요하며 내적인 연금

 

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길고 힘든 일이다, 그리고 마음이란 언제나 장애물이 가장 작은

 

지름길을 찾는다, 그래서 마음은 말하기를 '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가?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그냥 믿어버리면 될 것을'.

 

 

이것은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그대가 선하

 

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대 자신은 아름답고 성스러우며 아무도 그대

 

자신과 같지 않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마저도

 

그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

 

 

만일 환상들이 그대에게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줄 수 있다면 진리가 실현

 

되었을 때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그대는 상상할 수 있다.

 

 

그대는 선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그 환상조차도 그대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힘있게 설 수 있게 하고 그대에게 자신감을 주는 것이다, 그대는 환상과 함께

 

거의 중심에 있게 된다, 그리고 환상 속에서 생겨난 그 중심이 바로 에고이

 

다.

 

 

그대가 정말로 중심에 있게 될 때 그것이 자기(self)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실현되었을 때에만 일어난다, 그대 내면의 에너지가 변형되었을 때

 

가장 낮은 것이 가장 높은 것으로, 땅의 것이 하늘의 것으로 변형되는 것이

 

다, 악마가 신성으로 되고 그대 자신은 영광의 빛을 발한다, 그 씨앗은 싹을

 

틔워 피어나고 겨자씨는 한 그루 큰 나무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긴 과정이다, 기다리는 용기가 필요하며 지름길로

 

가는 유혹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삶 속에서 지름길이란 없다, 오직 환

 

상만이 지름길이다, 삶이란 힘든 것이다, 왜냐하면 힘든 노력을 통해서만 그

 

대는 성장하기 때문이다.

 

 

성장은 결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대는 그것을 값싸게 얻을 수 없다,

 

값싼 것은 어느 것도 그대가 성장하도록 돕지 못한다, 고통은 그대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 그 노력, 그 애씀, 그 긴 여정은 그대를 날카롭게 하고 성장

 

하게 하고 경험하게 해주며 성숙하게 한다.

 

 

지름길을 통해서 어떻게 그대가 성장할 수 있겠는가? 한 가지 가능성은 있다,

 

지금은 동물들에게 실험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인간에게도 사용될 것이다, 그

 

한 가지 가능성이란 그대가 호르몬 주사를 맞는 것이다.

 

 

열 살 된 어린이가 호르몬을 맞으면 스무 살의 청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가 십 년을 살아야 얻을 수 있는 그 성숙함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

 

하는가? 그 노력, 성욕통제의 필요, 사랑의 갈망, 자유롭게 살고자 하지만

 

통제해야 하고, 방황하고자 하지만 중심을 가져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움직이고 사랑으로 고통받고 또 무엇인가 배우고자

 

하는,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없을 것이다, 스무 살로 보이는 이 남자는

 

실제로는 열 살인 것이다, 호르몬을 통해서 그대는 오직 몸을 부풀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동물이나 과일 그리고 나무에게 행해지고 있다, 나무

 

에 주사를 놓으면 자연적으로는 삼 년 내에 꽃 피울 나무가 일 년 새에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핀 꽃은 무언가가 부족할 것이다, 그것을 알기

 

란 어렵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 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꽃은 무언가 결함이 있다, 그 꽃은 강요당했고 지내야 할 계절을

 

지내지 못했다, 과일은 빨리 익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일은 제대로 성숙

 

하지 못한다, 그들은 무언가 부족하다, 그들은 인위적인 것이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는다, 기억하라, 마음은 언제나 서두른다, 자연은 절대

 

로 서두르지 않는다, 자연은 기다리고 기다리며 그것은 영원하다, 거기에는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 삶이란 계속되고 또 계속되며 그것은 영원하다.

 

 

그러나 마음에게 있어서 시간은 짧다, 그래서 마음은 '시간은 돈이다'라고

 

말한다, 삶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삶은 '경험하라!'라고 말한다.

 

 

삶은 기다린다, 기다릴 수 있다, 마음은 기다릴 수 없다,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삶에 있어서 죽음이란 없다, 그러나 마음에는 죽음이 있

 

는 것이다, 마음은 언제나 지름길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리고 지름길을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은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대 자신이 곧 그대가 바랬던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그대는 신경

 

성 질환에 걸리게 된다, 정신병원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나폴레옹, 알렉산더 또는 그 누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것을 믿으며 또 그렇게 행동한다.

 

 

나는 정신병 치료를 받고 있는 어떤 남자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자기가 위대한 나폴레옹이라고 생각했다, 삼사 년에 걸친 치료와 정신분석

 

후에 정신과 의사는 생각했다. '자, 이제 그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의사는 말했다. "이제 당신은 정상이니 집에 돌아가도 좋소"라고 그러

 

자 그 남자가 말하기를 "집이라고? 궁전이라고 말하라." 그는 여전히 나폴

 

레옹이었다 만일 그대가 나폴레옹이 되었다면 그 병을 치료하기란 매우 어

 

렵다, 왜냐하면 비록 치료를 받아서 좋아진다 해도 상실감이 찾아오는 결과

 

가 생기기 때문이다.

 

 

어느 장군이 항상 술에 취해 있는 대위를 발견하고 그를 잡아들였다, 그

 

대위는 선한 사람이었다, 술꾼들은 거의 언제나 선한 사람들이다, 단지 지름

 

길을 택할 따름이지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장군이 말했다. "자네는 좋은 사람이고 나는 자네를 높이 평가하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네를 사랑하네, 그런데 자네는 쓸데없이 자신을 낭비

 

하고 있다네, 만일 자네가 술을 끊는다면 자네는 곧 대령이 될 수 있을걸세."

 

 

대위는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술 취해

 

있는 동안에는 나는 벌써 장군이 되어 있는 걸요, 그래서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겁니다, 만일 맨 정신으로 있으면 나는 오직 대위일 뿐이지만 술 취해 있을

 

때에는 늘 장군이라 이겁니다!"

 

 

마음은 지름길을 찾고 환상은 그 지름길이다, 마야(maya.힌두교에서 '환상

 

을 뜻하는 말)는 가장 쉽고 가장 싸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실제는 어렵고

 

힘들다, 불을 통과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그대가 더 많은 불 속의 시련을 통과할수록 그대는 더욱 단련되고 더욱 가치

 

있게 된다, 그대의 신성은 시장에서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흥정할 수 없으며 그대는 신성을 위해 그대의 전 생애를 지불

 

해야 한다, 신성의 획득은 그대의 전 생애를 걸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대가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그것이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가 좋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나쁘다고 생각하며 싸움은 외부에서 일어

 

난다, 그러나 만일 그대 자신을 직시한다면 그 싸움은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그대는 자기 자신이 나쁘다는 것을 알며 그대보다 더 악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그대 자신이 전적으로

 

나쁘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무언가가 일어난다, 내면의 싸움, 하나의 내부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면의 충돌을 통해서---그것은 하나의 기법이다, 기억하라, 그것

 

은 수세기에 걸쳐 사용되어 온 위대한 기법들 중의 하나이다, 만일 그대에게

 

내면의 충돌이 있다면 그대는 통합될 것이다---.만일 거기에 내면의 충돌이

 

있다면 그때 그 충돌하고 있는 것들을 넘어선, 하나의 새로운 중심인 그

 

충돌을 지켜보는 자가 생겨난다.

 

 

만일 거기에 내면의 충돌이 있다면 에너지들이 나타나고 그대의 전 존재는

 

혼란속에 있게 된다, 혼돈이 만들어지며 그 혼돈으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존재

 

가 태어난다.

 

 

어떤 새로운 탄생이든지 혼돈이 필요하다, 이 우주 전체는 혼돈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대가 진정 다시 태어나기 전에 혼돈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말한 전쟁이다.

 

 

그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대에게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그대가 받기를 원하는

 

그런 값싼 평화를 주러 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자, 이제 그의 말을 이해해

 

보도록 하자.

 

 

 

12.위안받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면 그대는 잘못 들어왔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을 분열시키고

 

불과 검과 전쟁을 주러 왔음을 알지 못한다.

 

 

그대가 예수와 같은 스승을 찾아서 올 때 그대는 평화를 구하러 온다, 그

 

러나 그대는 사람을 잘못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현재의 그

 

대 상태로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설령 누군가 그대에게 평화를 준

 

다 해도 그것은 그대에게 죽음이 될 것이다.

 

 

지금의 상태 그대로 평화를 얻는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것은

 

그대가 무엇인가를 성취하기도 전에 그것을 위한 노력을 중지해 버렸음을

 

의미할 것이다, 현재 그대의 상태에서 누군가가 그대를 침묵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본래의 자기(Self)를 성취하지 못한 것이며 그대는 단지 현재의 상태

 

속에서 위안받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짓 스승과 진정한 스승을

 

알아내는 방법이다.

 

 

거짓 스승은 하나의 위안이며 그는 그대의 현재 상태에서 평화를 준다,

 

그는 그대의 변화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진정시켜 주는

 

사람이다, 그는 단지 수면제 같은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가 그에게

 

오면 그는 그대에게 위안을 준다.

 

 

그러나 그대가 진정한 스승에게 온다면--여기에 그 기준이 있다, 그대가

 

가진 평화는 어떤 것이든 파괴될 것이다, 그대가 가진 편안함은 어떤 것이든

 

무너져버릴 것이다, 진정한 스승은 더 많은 혼란과 갈등을 만들 것이다, 그

 

는 그대에게 위안을 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대의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위안들은 독약이다,

 

그는 그대가 성장하도록 도울 것이다, 성장은 어려운 것이다, 그대는 많은

 

어려움을 통과해야만 한다, 여러 번 그대는 이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대를 유령처럼 따라

 

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위안은 그 목표가 아니다, 스승은 그대에게 거짓 평화를 줄 수가 없다,

 

스승은 그대에게 성장을 가져다줄 것이며 그 성장으로부터 어느 날 그대는 꽃

 

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꽃 피어남은 진정한 평화와 진정한 침묵이 될

 

것이다, 위안은 거짓이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가지고 나에게 찾아오는데 나는 그들이 왜 오는지

 

를 안다, 그들은 위안받기를 원한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나는 많은 어려움 속에 있습니다, 나의 마음은 평화롭지 못하고 많은 긴장

 

속에 있습니다, 저를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제가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저

 

를 축복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만일 이 사람을 평화롭게 만들어준다면 그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은 전혀 변화되지 못한다, 절대로,

 

그것은 잘못된 길이다, 비록 어떤 진정한 스승이 그대에게 위안을 준다 해도

 

그 위안은 마치 고기 잡는 그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대는 그 위안 안에 잡힐

 

것이며 그는 점차로 혼돈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대는 그 혼돈을 통과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그대 상태로는 그대

 

는 완전히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만일 누군가가 그대를 위안

 

한다면 그 사람은 그대의 적이다, 그와 함께 할 때 그대는 시간과 삶과 그리

 

고 에너지를 잃을 것이며 결국 그 위안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 모든 위안들은 증발해 버릴 것이다.

 

 

아들을 잃은 노인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 "나를 위로해 주십

 

시오!"

 

나는 말했다.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위로 받고자 왔습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 당신은 그 때문에 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상카라차리야를 찾아갔었는데 그는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는 '걱정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네 아들은 높은 천국에서

 

다시 태어난다!'라고 말했습니다."

 

 

나 역시 그의 아들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정치

 

가였다, 정치가들은 모두 지옥으로 간다, 그들은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

 

더구나 그는 성공한 정치가였으며 주지사까지 지냈었다, 모든 정치적 술수

 

를 가졌었고 모든 정치적 야망을 가진 인물이었다, 어떻게 그가 천국에 갈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노인 역시 정치가였다, 근본적으로 이 노인은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상심한 것이 아니었다, 근본적인 것은 그의 야망이 죽었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아들을 통해서 그는 끝없는 자신의 야망을 성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이를 먹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끊임없이 일하는 데 바쳤다,

 

그러나 그는 좀 바보스러웠고 술수를 잘 부리지 못했으며 조금은 순진했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자신의 생애를 그 일을 위해 희생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그럴듯한 직위에도 오르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그래서 그는 아들에게 자신의

 

야망을 걸었다, 그리고 아들은 그 야망을 성취해 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아들이 죽은 것이다, 그의 모든 야망이 죽은 것이다.

 

 

내가 그에게 "이것이 바로 당신이 그렇게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이유인

 

거요, 그것은 당신 아들 때문이 아니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매우 혼란스러

 

워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위안을 받으러 왔는데 당신은 나에게 더 큰 고통을 주는

 

군요,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것은 모두 사실처럼 들리는군요, 어쩌면 내가

 

슬퍼하는 것은 아들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야망이 상처를 받았기 때문일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심한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지금 너무 고통스럽

 

습니다, 나의 아들이 죽었는데 당신은 나에게 너무 가혹하게 말합니다, 나는

 

마하트마에게 갔었고 상카라차리야에게 갔었고 또 구루에게도 갔었는데 그들

 

은 모두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걱정하지 말라, 영혼은 영원한 것이며 아무도 죽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 아들의 영혼은 보통 사람들과 달라서 더 높은 하늘에 이를 것이

 

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안이다, 만일 이 노인이 이런 위안의 말들을 계속해서 듣는

 

다면 그는 아주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야망을 직시할 수 있

 

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그의 문제이다.

 

 

모든 야망이란 무가치하고 공허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들이 아무리 그 야망

 

을 위해 애써 노력하고 일해도 죽음이 모든 것을 앗아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와 만날 수도 있었다, 그는 그것을 꿰뚫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 오는 것을 중지했다, 그는 자주 나에게

 

왔었는데 그 이후로는 완전히 발길을 끊었다, 그는 자기를 위안해 줄 다른

 

사람들을 찾아간 것이다.

 

 

그대들은 위안받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잘못 들

 

어왔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을 분열시키고

 

불과 검과 전쟁을 주러 왔음을 알지 못한다.

 

 

 

13.기독교는 그의 말을 문자 그대로 취했고 요점을 놓쳤다

 

 

 

 

예수와 같은 사람이 올 때마다 세상은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를 반대

 

하는 사람들로 즉시 분열이 되었다, 그대는 예수에게 무관심한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다, 예수 같은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세상은 즉시 분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를 반대하게 된다, 그러나 무

 

관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에게 무관심하기란 불가능하다, 만일 그대가

 

예수의 말을 듣고 그를 보았다면 즉시 그대들은 나뉘어진다, 그를 사랑하든지

 

아니면 그를 미워하든지.

 

 

그의 편에 서든지 아니면 그를 반대하든지, 그를 따르든지 아니며 그를 반대할

 

일을 시작하든지 둘 중의 하나로 분열이 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왜냐하면 예수와 같은 인물은 그토록 위대한 하

 

나의 현샹이며 그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저 너머의 세계

 

로부터 무언가를 이 세상에 가지고 왔다, 저 너머의 세계를 두려워하는 사람

 

들은 즉시 적대자들로 되는데 그것이 그들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씨앗을 갈망해 왔던 사람들, 저 너머의 세계를 찾고

 

그리워하고 동경해 왔던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자석과 같은 힘을 가진 카리스

 

마적 인물이 되어 그에 대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이 사람을 여러

 

생에 걸쳐 기다려왔던 것이다.

 

 

즉시 세상은 분열된다, 그대가 예수 편에 서든지 아니면 그를 반대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된다, 거기에 다른 선택이란 없다.

 

 

그대는 무관심할 수 없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아"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중앙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예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를 미워하지도 않고 그 중심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중심에 설 수 없다, 그대는 어느

 

한쪽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대는 우익이 되든지 좌익이 될 것이며, 이쪽이

 

되든지 또는 저쪽이 될 것이다.

 

 

그는 각 개인들 속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 그리고 이 세상에 위대한

 

혼란을 만들어냈다, 모든 것들이 충돌하게 되었고 위대한 전쟁이 시작되었

 

다, 예수가 온 이래로 세상이 평화로운 적이 없었다.

 

 

예수는 하나의 종교를 창조했다, 그는 세상 속에 무언가를 가져왔는데 그것

 

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런 갈등과 분열을 만들었다, 그는 역사의

 

초점이 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기원 전과 기원 후로 부르는 이유이다,

 

예수는 역사의 초점이 된 것이다.

 

 

예수와 더불어 역사와 시간은 분할되었다, 그는 그 경계에 서 있다, 기원

 

전과 기원 후는 마치 서로 다른 질을 가진 시간처럼 분리되었다.

 

 

예수와 함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의 자세, 인간 정신을 향해 접근하는

 

예수의 방식은 붓다 또는 노자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그 궁극의 목표는

 

하나이고 궁극적으로 꽃 피어날 때 결국 같은 것이 되겠지만 예수의 접근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그는 독특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투쟁을 통해서 성장은 이루어진다고 말

 

하고 있다, 싸움을 통해서 내면의 중심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 전쟁을 통

 

해서 평화는 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그의 말을 해석하

 

지 말라.

 

 

그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의 비유이다, 기독교는 그의 말을 문자

 

그대로 취했고 요점을 놓쳤다, 그래서 크리스찬들은 손에 칼을 잡았고

 

쓸데없이 수백만의 사람들을 죽였다.

 

 

왜냐하면 예수의 말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의

 

교회는 전쟁을 하는 교회, 십자군이 되었다, 크리스찬들은 모하메드교도들과

 

힌두교도들, 그리고 불교도들과 싸웠다, 그들은 어디에서든지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핵심을 놓친 것이다.

 

 

예수는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가 말한 것은 이 세상의 검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세계의 검을 가져왔다, 이 검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상징

 

이다, 그대는 그 검에 의해 둘로 잘라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대 안에서 땅과

 

하늘이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과 하늘 나라, 그들은 그대의 내면에서 만나고 있다, 그대의 한

 

부분은 진흙과 먼지에 속하고 또 한 부분은 신성에 속한다, 그대가 바로

 

만남의 지점이며 예수는 그대를 조각내기 위해 검을 가져왔다, 그 검으로

 

그대를 자를 때 세상에 속하는 것은 땅으로 떨어지고 신성에 속하는 것들은

 

신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대는 무엇이 땅에 속하는 것인지 아무런 구별도 할 수 없다, 그대가 배

 

고플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이 배고프다고 생각하는가? 예수는 말한다, "아니

 

다, 내 검으로 그것을 잘라보아라!"

 

 

배고픔은 육체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배고픔은 육체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의식에는 배고픔이란 없다, 육체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의식이 배고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오래된 <판차 탄트라,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진 우화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큰 숲에 우연히 불이 났다, 두 사람이 거기에 있었는데 한 사람

 

은 장님이었고 또 한 사람은 앉은뱅이였다, 그 앉은뱅이는 걸을 수가 없었

 

고 뛸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볼 수는 있었다.

 

 

그리고 장님은 걷고 뛸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협정을

 

맺었다, 장님은 앉은뱅이를 그의 어깨 위에 태웠다, 그래서 앉은뱅이는 앞을

 

볼 수 있었고 장님은 앉은뱅이의 지시대로 걸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

 

이 된 것이다, 그들은 불타는 숲 속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이것은 그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그대 안에서 무엇이 일

 

어나는지를 말해 준다, 그대의 한 부분은 배고픔을 느낀다, 그러나 그 부분

 

은 볼 눈이 없기 때문에 배고픔을 알지 못한다.

 

 

그대의 육신은 배고픔을 느낀다, 그대의 육신은 성적인 욕망을 느낀다,

 

그대의 육신은 목마름을 느끼며 그대의 육신은 편안하고 싶어한다, 이 모든

 

욕구들은 몸의 일이다, 그리고 오직 그대의 의식만이 그것을 본다, 그대의

 

자기(Self)는 단지 그것을 보는 하나의 목격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협정을 맺었다, 왜나하면 육신 없이 의식은 걸을 수 없고

 

움직일 수 없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식 없이 육신은

 

배가 고픈지 목이 마른지 육신이 요구하는 것들을 알아차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말한 검의 의미는 이 협정의 의미를 잘 깨닫고 그 둘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땅에 속하는 것은 땅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을 충족시켜라,

 

하지만 그것에 빠지지는 말아라.

 

 

만일 그대가 배고프다면 육신이 배가 고픈 것이다, 그것을 잘 알아 배고픔을

 

충족시켜라, 그러나 그것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

 

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먹고 또 먹는다, 그리고는 어느 날 먹는 것에 대해 좌절을

 

겪고 이번에는 단식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 둘 다 사로잡힌 결과이다, 너무

 

많이 먹는 것과 너무 많은 단식은 둘 다 좋지 않은 것이다, 올바른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누가 그 균형을 잡아줄 것인가? 그대는 그 둘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땅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땅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을 완전히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말한 검의 의미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이 세상을 분열시키고

 

불과 검과 전쟁을 주러 왔다.

 

 

 

14.하나의 깊은 내면의 투쟁이 필요하다,

 

 

 

왜 불인가? 불은 매우 오래된 회교의 상징이며 또한 아주 오래된 힌두교

 

의 상징이기도 하다, 힌두교에서는 항상 내면의 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들은 내면의 불을 열을 의미하는 '탑(tap)'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대의 불이 타오르도록 내면의 불을 붙이는 것을 '야그나(yagna)'

 

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내면의 불을 붙이기 위한 기법들이 몇 가지 있다,

 

지금 그것은 이미 꺼져 있고 재에 덮여 있다, 그 불씨는 재발견되어 다시

 

커져야 한다.

 

 

그것을 다시 불 붙이는 데에는 더 많은 노력이 들겠지만 그 불은 다시 타올

 

라야 한다, 내면의 불이 완전히 타오르게 될 때 돌연 그대는 변형된다, 왜냐

 

하면 불 없이 변형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에 열을 가하면 물은 어떤 특정한

 

온도, 백 도가 되면 증발을 하고 수증기가 된다, 그 전체의 질이 변화하는 것

 

이다.

 

 

물이 수증기로 변하고 그 전체의 질이 변화하는 것을 관찰해 본 일이 있는

 

가? 그것이 물이었을 때는 항상 아래쪽으로 흐른다, 위쪽으로 흐를 수가 없

 

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백 도가 되었을 때 물은 증발하고 그 전체의

 

질이 변화한다, 수증기는 위를 향해 퍼져나가지 절대로 아래쪽으로 내려가

 

지 않는다, 모든 차원이 변화하고 그것은 열을 통해서 일어난다.

 

 

그대가 화학자의 실험실에 간다면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만일 거기

 

에서 불을 치워버린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변

 

형, 모든 새로운 변화 그리고 모든 변이는 불을 통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이 없다면 그대는 무엇이겠는가? 그대가 살아 있을 때 그대는 무

 

엇을 하는가? 그대가 숨을 쉴 때 그 숨은 그대에게 무엇을 하는가? 그대는

 

산소를 들이마시는데 산소란 불을 붙이는 연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가 달리기를 할 때 더 많은 불이 필요하게 되며 그대는 더 깊이 숨을

 

쉬게 된다, 그대가 휴식을 취할 때는 적은 양의 불이 필요하게 되며 그대의

 

숨도 얕아지게 되는데 그것은 산소가 많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소는 불을 타게하는 연료이다, 불은 산소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산소는 타기 때문이다, 그대는 불이다, 음식을 통하여, 공기를 통하여, 물을

 

통하여 순간순간마다 그대의 내부에서는 불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이 너무

 

많을 때 그대는 그것을 풀어놓아야만 한다.

 

 

동물들이 성적인 충동을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열내고 있다'라고 표현한다,

 

그 말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성적 충동은 일종의 열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흡수할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불이 타오를 때 그것은 분출되어야 하며

 

섹스는 하나의 출구이다.

 

 

기억하라, 더운 지방의 사람들이 추운 지방의 사람들보다 더욱 성적이다,

 

성에 관한 초기의 책들은 모두 더운 나라에서 나왔다, 바트사야나(Vatsayana)

 

의 <카마수트라>, 코카 판티트(Koka pandit)의 <코카샤스트라>, 이 두 권의

 

책이 처음으로 나왔다.

 

 

동양에서는 프로이드보다 삼천 년 전에 이미 프로이드 학파가 있었던 셈이다,

 

서양에서 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추운 나라

 

에서 사는 사람들은 강한 성욕을 불러일으켜 주는 몸 속의 불이 충분하지가

 

않다.

 

 

서양에서는 겨우 지난 삼사 세기 전부터 성이 아주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그 나라들이 기후는 춥지만 난방시설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추위를 덜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

 

몸속의 그 불은 끊임없이 추위와 싸워야만 한다.

 

 

동양에서는 인구가 계속 증가해도 그것을 막기가 어려운 반면 서양에서는

 

그런 인구 폭발 문제가 많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소련 우주 비행사들이 처음으로 달에 도착했

 

을 때 그들은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거기에 세 명의 중국인들이 걷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놀라고 말았다.

 

 

소련인들이 그들을 보고 말했다. "아니 당신들이 우리보다 먼저 도착했단

 

말인가? 그리고 당신들은 어떤 기술이나 과학, 어떤 수단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여기를 왔단 말인가? 당신들은 기적을 일으킨 것인가,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었는가?"

 

 

중국인들이 대답했다, "기적 같은 건 없다, 단지 간단한 산수인데 우리 국

 

민 전체가 한 사람씩 어깨에 올라서서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중국인

 

들은 도달할 수 있다, 인도인들도 도달할 수 있다, 그들이 맘만 먹는다면 어

 

디에도 이를 수 있다!

 

 

성은 하나의 열 현상이며 하나의 불 현상이다, 그 불이 활활 타오를 때마

 

다 그대는 더 성적인 느낌을 가질 것이며, 그 불이 그렇게 많이 타오르지 않

 

을 때 성적인 느낌은 덜할 것이다, 육체에 있어서의 성적인 변형이든 영적인

 

변형이든 그대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모두 불에 의한 것이다.

 

 

예수는 에세네 파라고 불리는 밀교 공동체에서 훈련을 받았었는데 그 단체는

 

내면의 불을 만들어내는 많은 방법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불은 단순히

 

그대가 아는 그런 불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불인 것이다.

 

 

만일 이 불이 어떤 특정한 단계에까지 오를 수 있다면......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그 불을 방출시키지 않고 어떤 특정한 온도에까지 이를 수 있을 때 가능

 

한데, 바로 이 때문에 이 불을 사용하는 모든 종교들이 섹스에 반대하는 것

 

이다.

 

 

만일 섹스를 통해서 이 불이 방출되어 버린다면 그 불은 어떤 특정한 온도에

 

이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섹스가 그 불의 배출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출구를 막아서 불이 새어나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백 도

 

까지 이르게 된다.

 

 

어느 특정한 온도에 이르면 갑자기 변형이 일어난다, 영혼과 몸이 분리된다,

 

그 검이 쓰여진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그대 안에서 무엇이 땅이고 무엇이 하늘

 

인지를 알게 된다, 그러면 그대는 무엇이 그대의 부모로부터 온 것이고 무엇

 

이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 불과 검과 전쟁을......

 

 

하나의 깊은 내면의 투쟁이 필요하다, 그 투쟁에 있어 무기력해져서는 안

 

된다, 완전한 휴식이 오기 전까지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대는 싸워야만 하며 갈등과 마찰을 만들어내야 한다.

 

 

마찰이란 말은 내면의 전쟁에 대한 알맞은 용어이다, 구제프는 마찰을 통해서

 

실험했다, 그는 몸 안에서 마찰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지금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겠지만 그대는 이것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어느 날 그대는 자신의 몸이 수많은 에너지의 층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에게 마찰이 없다면 그대는 단지 표면적인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만일 많은 마찰이 일어난다면 그 표면의 층은 끝이 나고 이제 두

 

번째 층의 에너지가 작용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위해 이 방법을 시도해 보라; 언제나 밤 열시에 잠자리에 든다고

 

하자, 밤 열시만 되면 그대에게는 졸음이 밀려든다-그러나 잠들어서는 안

 

된다, 수피교도들은 자주 이 방법을 사용했으며 예수 역시 밤을 지새는 이

 

방법을 사용했다.

 

 

밤새도록 그는 잠을 자지 않았다, 광야에서 사십 일 밤과 낮을 그는 자지 않았

 

다, 그는 자지 않고 언덕에 홀로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만일

 

그대가 밤 열시에 잠들지 않으면 얼마 동안 매우 무기력해지고 계속해서 졸음

 

이 엄습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밀려오는 졸음과 저항해서 싸운다면 하나의

 

마찰이 만들어지며 그대는 둘이 된다.

 

 

하나는 잠들기를 원하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잠들고 싶어하지 않는 자이다,

 

이제 거기에 그 두 부분들 사이에 싸움이 있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양보하지

 

않고 열심히 싸워 이긴다면 돌연히 그대는 모든 졸음이 물러가고 이제껏 아침

 

에 느껴보지 못했던 활기가 찾아옴을 느낄 것이다.

 

 

갑자기 잠은 모두 달아나고 그대는 상쾌해지며 비록 잠들고 싶다 해도 이제는

 

어려워질 것이다, 무엇이 일어났는가? 잠들고 싶어하는 부분과 잠들고 싶어하

 

지 않는 그 두 개의 부분이 마찰을 일으켜서 에너지가 창조된 것이다.

 

 

에너지는 언제나 마찰을 통해서 생겨난다, 모든 과학은 마찰을 일으키는

 

것에 의존한다, 마찰은 에너지를 창조한다, 모든 발전기는 단지 어떤 둘 사

 

이에 싸움을 만들어내기 위한 마찰 테크닉인 것이다.

 

 

그대는 하나의 전쟁을 만든다, 그대의 몸은 잠들고 싶어하지만 그대의 의식

 

은 잠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마찰이 바로 거기에 있으며,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에너지가 창조된다.

 

 

만일 그대가 굴복한다면 아주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난다, 그대가 굴복하

 

면 육신이 승리하는 것이고 의식은 패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방법을 시도할 때는 오직 굴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해야 하며 그렇

 

지 못하면 안 하는 편이 낫다.

 

 

이런 마찰 방법들은 위험하다, 만일 그대가 이 방법들을 시도한다면 그대는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자신감을

 

잃게 된다, 그대의 의식은 점점 더 약해져 갈 것이며 육신은 점점 더 강해져

 

갈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여러 번 지게 된다면 이길 가능성은 점점 더

 

작아진다.

 

 

일단 그대가 이런 마찰 방법들을 사용하게 될 때는 확실하게 이길 수 있도

 

록 하라, 그 전쟁에서 그대는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대가 승

 

리하면 하나의 다른 에너지 층을 획득하게 된다.

 

 

그대가 이기면 다른 부분에 있던 에너지가 그대에게 흡수되어 그대가 더욱

 

강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모든 싸움은 그대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며 마침내는 육신의 모든 에너지가 그대의 자기(self)에 의해서

 

흡수되는 순간까지 이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