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 -2 본문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 -2
5.이것을 기억하라, 예수는 깊은 믿음의 시대에 살았다
어느 이른 아침, 예수는 호수가로 왔다, 태양이 아직 수평선 위로 떠오르
지 않았을 때였다, 거기에서 두 명의 어부가 막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으
려고 하던 중이었다, 그때 예수가 걸어와서 그들에게 말했다.
"보라! 그대들은 왜 그대들의 삶을 헛되이 낭비하고 있는가? 나는 그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 수 있다, 왜 그대들은 그대들의 에너지를 쓸데없이 고기
잡는 데 쓰고 있는가? 내가 그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 사람
낚는 어부, 오라, 나를 따르라!"
만일 그대가 사무실이나 또는 상점에 앉아 있을 때 예수가 와서 그렇게 말
했다면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가 주세요! 나는 바쁜 사람이오, 내
시간을 뺏지 말아요!"
그러나 그 두 명의 어부는 예수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의심 없이 예수를 바라
보았다, 태양은 떠오르고 있었고 이 사람, 예수는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호수보다 더 깊었고 그에게서 나오는 광휘는 태양보다 더 위대
했다,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단 하나의 의문도 없었다, "낯선 이여, 당신은 누
구십니까?" 하고 묻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같은
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를 전혀 본 적이 없었고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의 부름, 그의 초대만으로 충분했다, 그들은
그 초대를 들었다, 그들은 예수를 바라보았고 진실함을 느꼈으며 그리고 그
를 따랐다.
그들이 막 마을을 벗어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뛰어와서 두 어부에게 "어
디들 가는 거요? 당신들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셨소, 돌아들 와요!" 하고
소리쳤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저희가 집에 가서 돌아가신 부친 장례를 치르
고 다시 와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가 대답했다, "죽은 사람 일로
근심하지 말라, 마을에는 죽어 있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묻을 것이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 죽은 자의 일로 마음을 쓰지 말라."
그리고 그 두 어부는 예수를 따랐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들은 예수를
듣고 보았던 것이다.
예수가 말했던 의미, 그것은 옳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가 죽었을 때 그는 그저 죽은 것이다, 그곳에 갈
필요는 없다, 그리고 마을에는 죽어 있는 상태에 있는 자들이 충분히 있다,
그들이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를 것이다.
그들이 너희 아버지를 묻을 것이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따랐고 되돌아가지 않았다,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믿음이란 뒤돌
아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이란 되돌아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의심 있는 마음은 언제나 되돌아본다, 언제나 다른 수단을 생각하고 언제
나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생각하며, 언제나 자신이 한 일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한다, 되돌아갈까? 아니면 이 미친 사람을 따라가야 하나? 누가 알겠는
가? 아무도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하느님의 아들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 사람은
그저 우리의 모습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어부들은 예수를 따라갔다.
만일 그대가 예수와 같은 사람을 따른다면 머지않아 그에게 전염될 것이
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 그러면 곧 그대는 그가 하느
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하여 그대 역
시 하느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 그대는 믿음을 가져
야 한다, 만일 처음부터 의심을 갖는다면 문은 닫히는 것이다.
이러한 스승과 제자 관계는 지난 3세기에 걸쳐 과학의 성공으로 인해 사
라져버렸다, 과학은 그렇게도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과학은 기적들
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과학이 만들어낸 기적들이란 물론 쓸모 없는 것들이
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의 행복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만일 기적을 통해 행복이 증대되지 않는다면 그런 기적은 쓸모 없는 것이다.
오히려 행복은 감소되었다, 기술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욱 편리해지
지만 행복은 감소한다, 이러한 것이 바로 과학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기계
장치에 의해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지만 그대를 필요로 하는 일은 적어진
다.
그리고 그대를 필요로 하는 일이 적어질수록 그대는 점점 자신이 쓸모 없고
무의미하며 하찮은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머지않아 컴퓨터가 그대를 대신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대는 전혀 필요치 않은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컴퓨
터가 모든 일을 해줄 것이기 때문에 그대는 어디론가 사라져 자살할 수도
있다.
행복이란 자기 존재의 필요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누군가 그대를 필요로
할 때 그대는 행복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대는 자신의 존재가 의미 있음을
느끼게 되며 삶에 대해서도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필요한 존
재이며 그대 없이는 모든 일들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그대가 없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모든 일은
그대 없이 잘되어갈 것이다, 기계가 그대보다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저 방해물일 뿐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물건일 뿐이다.
오늘날 인간은 가장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가 되었다, 해마다 모든 것들이
신형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새 모델의 포드 자동차든지 모든 것이 새 모델로
나온다, 오직 인간만이 구형의 모델로 남는다, 수많은 새로운 물건들 중에서
오직 그대만이 구형이다.
현대인들의 마음은 끊임없이 무의미함을 느낀다, 아무도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조차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사회복지 부서에서 그들을 보살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늙은 부모들
도 그대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나 사회 단체의 양로원이 그들을 보살
펴줄 것이다.
누가 그대를 필요로 하겠는가? 이제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신
은 단지 쓸모 없는 짐이라는 것을 느낄 때, 그대가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지나간 시절에 그대는 필요한 존재였다.
유대의 신비주의자 중에서 힐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믿음이 강했고
신앙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 중에 하느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직 나만 당신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당신 역시 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만일
나 힐렐이 없다면 누가 기도하겠습니까? 누가 당신을 우러러보겠습니까? 나
만이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내게는 당신이 필
요하지만 당신 또한 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주 전체가 그리고 하느님까지 그대를 필요로 했을 때 그대는 중요한 의
미를 가졌다, 어떤 향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아무도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대는 쉽게 방치될 수 있고 그대는 아무것도 아니다, 과학 기술은
안락함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대를 방치된 상태로 만들었다.
과학 기술은 그대에게 보다 나은 집들을 제공했지만 보다 나은 인간들을
만들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보다 나은 인간들에 관한 한은 어떤 다른 차원이
필요한데 그 차원이란 기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차원이란 의식의
차원이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과학은 붓다나 예수와 같은 사람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과학은 붓다
와 같은 사람이 살기에는 불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는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왜 요즘은 붓다나 티르탕카르나 예수 같은 인물들이 나타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것은 바로 그대들 때문이다, 그대들이 그런 단순하고 또 그렇게도 순수한
사람이 존재하기에는 점점 불가능한 사회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사람이 사회 속에 존재한다 해도 그대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세상 속에 깨달은 이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알아보는 것이 어렵지
그들은 분명히 거기에 있다, 그대는 매일 사무실에 나가면서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믿음은 사라져버렸다, 이것을 기억하라, 예수는 깊은 믿음의 시대에 살았
다, 그의 모든 영광, 그의 모든 의미는 그런 믿음의 차원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예수가 말한 이 작은 이야기로 들어가자
6.그대가 삶을 무어라 부르든지 간에 그것은 천천히 퍼지는 하나의 독이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하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은 질문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호기심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논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질문은 순수했다, 질문이 순수했을 때만
예수는 그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다, 질문이 순수한 경우를 그대는 아는가?
만일 그대가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면 그 질문은 순수한 것이 아니다, 그대
는 묻는다, "하느님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대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 그
대는 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는 단지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 나에
게 오는 것이다.
또는, 그대는 거기에 신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대는 단지 내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나에게 오는 것이다, 만일 이미 대답이 있다면 그
질문은 속임수이며 순수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질문은 예수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예수는 오직 순수한 질문에만 대답하기 때문이다.
제자가 질문할 때 그 제자의 마음속에 대답은 없다, 그는 모른다, 그는 단
순히 몰라서 질문하는 것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그대가 무언가를 질문할
때, 잘 기억해 두라, 그대가 이미 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묻는 것인가? 또는
그대의 지식을 통해서 묻는 것인가?
그렇다면 거기에 더 이상의 만남은 없다, 내가 그 질문에 대답한다 해도 그
답은 그대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 답을 받아들이기에 그대는 충분히
비어 있지 않다, 그 답이 이미 그대에게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미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두 가지 타입의 질문이 있다, 하나는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논쟁만이 가능한 것으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무지로부터 묻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을 잘 안다, 그대가 모른다는 것
을 알고 물을 때 그대는 제자가 된다.
이제 그것은 논쟁이 되지 않는다, 그대는 단지 목이 말랐고 물을 청하는 것
이다, 그대는 배가 고팠고 음식을 청하는 것이다, 그대는 모른다, 그래서
질문한다, 그대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제자는 자기가 모르는 것을
질문한다, 그대가 모를 때 그대는 겸손하다, 그대가 알고 있을 때 그대는
이기주의적이 되며 예수는 이기주의자들에게 말할 수가 없다.
제자들이 물었다.
(제자들이란 자기들이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는 끊임없이 하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그것은 많은 문제를 야
기시켰다, 그 용어가 문제였는데 나라, 왕국이란 단어는 정치적인 용어로서
정치가들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그가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정치가들이 "이 사람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왕국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또 자기가 그 왕국의 왕이라고 말한다,
이 사람은 정부를 몰아낼 혁명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이 사람은 자기 왕국
을 세우려 하고 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 총독, 관리, 그리고 제사장들은 모두 예수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리
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기 때문에 예수는 영향력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변형되었으며 불꽃이 되었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내면에 무언가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사제들과 총독 본디오 빌라도, 헤롯 왕, 그리고 모든 지배자들--정치
가와 성직자 들--은 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는 위험스런 인물로
보였다, 그는 이렇게 오해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항상 오해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문제는 그가 세상적인 언
어를 사용한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다른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
들이 쓰는 언어로 말해야만 한다, 거기에 다른 용어란 없으며 사람들은 이미
그 용어들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그 의미들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것이
다.
그는 단순히 하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와 하느님 나라(the kingdom of God), 그러나 '나라' 그 단어가
위험한 것이다, '나라'라는 용어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인 암시를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 세상의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혁명가였다, 혁명의 대
가, 그러나 그것은 내면의 세계를 말함이었다, 그는 내면의 왕국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나 제자들조차도 그가 이야기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대가 어느 스승에게로 갈 때 거기에는 두 가지 다른 차원의 만남이 존재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늘과 땅의 끝이 만나는 것이다, 만일 그대에게
신뢰가 있다면 그대는 하늘 속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신뢰가 없다면
그대는 땅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만일 그대에게 신뢰가 있다면 그대는 날개를 펴서 날 수 있다, 그러나 신뢰
가 없다면 그대는 땅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은 그대에게 위험을
가져온다, 하늘 나라란 무엇인가? 어떤 형태의 나라를 말하는 것인가? 그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예수는 거듭 설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을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부자가 될 것이요, 꼴찌
가 첫째가 될 것이다." 그는 마치 노자처럼 말했으며 그는 노자와 같은 사람
이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 그는 가장 겸손한 자가 가장
중요한 자가 될 것이며,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부유하게 될 것이며, 소외받
은 자가 그 나라에서는 인정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것
이다, 그것은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대가 소리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 가까이에 서 있을 때 강물에 비친
그대의 모습을 보라, 그것은 반대로 되어 있다, 반사된 모습은 언제나 거꾸
로 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실제로 우리는 거꾸로 되어 있으며 만일 우리가
똑바로 되려고 한다면 모든 것을 바르게 놓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
이 거꾸로 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떤 혼돈의 상태가 필요해지는 것이
다.
붓다는 거지가 되었다, 거지, 이 세상의 꼴찌, 그는 왕이었다, 그러나 하
느님 나라는 꼴찌에 속하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의 왕국을 떠났다, 왜냐하
면 이 세상의 나라는 단지 쓸모 없고 의미가 없는 짐이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짐을 나르고 있으나 그것은 자양분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를 파괴
시킨다, 그것은 하나의 독이며 아주 천천히 스며드는 독이어서 그대는 그것을
느낄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한 친구가 그의 곁을 지나다
가 말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것은 아주 천천히 퍼지는 독이야."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괜찮아, 나는 바쁘지 않으니까."
그대가 삶을 무어라 부르든지 간에 그것은 천천히 퍼지는 하나의 독이다,
왜냐하면 삶이란 결국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를 죽인다, 그
외에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그대는 바쁘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
다고 해서 그 독의 질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한다.
그대가 바쁘지 않다면 그것은 아주 천천히 퍼질런지도,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그대를 죽일 것이다, 이 세상 나라는 죽음에 속해 있다, 그러나 하늘 나라는
영원한 생명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준비가 된
자들은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에게 넘치는 생명을 줄 것이다."
7. 붓다란 무엇인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예수가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는 목이 말랐고 그래서 그는 우물가
로 왔다, 거기에는 한 여인이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었는데 예수가 그 여인
에게 말했다. "나는 목이 마르다, 나에게 마실 물을 조금만 달라."
그 여인이 말했다. "저는 아주 천한 계급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물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가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나에게 물을 달라, 그러면 나도 너에게 나
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을 주겠다, 네가 그 물을 한 번 마시면 너는 다시는 목
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묻고 있다, "하늘 나라는 무엇과 같은 것입니까? 우리
가 모르는 미지의 것은 '무엇과 같은'이라는 용어로서만 설명이 될 수 있다,
신화란 이러한 것이다, 신화학은 그대가 모르는 것, 그대의 정신 상태로는
알 수 없는 것을 그대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을 통해서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신화란 그대가 아는 용어들을 통해 미지의 것을 표현하여 그대가 지금 어디
에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하늘 나라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불가
능하다, 그대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것을 설명할 어떤 방법도 없
다, 무엇을 말하더라도 틀릴 것이다, 진리는 말로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나 노자, 그리고 붓다가 그들의 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만일 진리가 말해질 수 없는 것이라면 그들이 한 것은 무엇인
가?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그대들이 아는 어떤 상징들을 통하여 설명
하려고 노력했다, 그대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해 그 미지의 것을 설명하려
노력했다. 비유들, 신화들, 이야기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들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신화를 분석, 해부하려고 시도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말한다, "이것은 신화이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분
석하고 해부하며 신화에 수술을 가한다, 그리고 말한다, "이것은 신화이지
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도 신화가 역사라고 말한 사람은 없다, 그리고 신화는 해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이정표에
화살표가 있고 그 화살표 곁에 '델리'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데, 그대가 그
이정표를 분해하고 화살표와 글자에서 화학적으로 잉크를 분석하여 모든 것을
해체하고는, "어떤 바보가 만든 것인지...... 여기에는 '델리'가 없어!"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신화는 이정표이며 화살표는 미지의 것을 향해 있다, 그것은 목적지가 아
니며 단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하늘 나라가 무
엇과 같은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묻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하늘 나라가 무엇인가 하고 물을 수는 없다, 그 질문의 성격을 잘 보라,
우리가 하늘 나라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너무 무리한 질문이 된다, 우리는
어느 쪽의 답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무엇과 같은지... 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그 의미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을 통해 어떤 표지판을 만들어주시면 우리는
잠깐이나마 그 실체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장님이 빛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다, 그대가 눈먼
장님일 때, 어떻게 빛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묻는 것은
답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것은 대답할 수 없다, 눈이 있을 때만 빛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빛은 무엇과 같은지요?"라고 물어야 한다, 그 의미는 "장님
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것을 설명해 주십시오"라는 것이다.
모든 우화들은 장님의 언어로 표현된 진리이다, 모든 신화들은 장님의 언
어로 치장된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해부하지 말라, 거기에서 아무것
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그저 표지판일 뿐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것을 신뢰한다면 그 표지판들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 된다,
일본의 어느 절에는 불상이 없다, 사람들은 절 안에 들어가서 묻는다, "불상
은 어디에 있습니까?" 거기에 불상은 없다, 그러나 대좌 위에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 하나가 있다.
그것이 바로 부처이다, 그 절의 중은 말할 것이다, "이것이 부처입니다,"
사실 그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고 있다, 그 중이 그것을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나는 모른다, 붓다란 무엇인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제자들은 하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를 묻고 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
십시오, 우화로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같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로 말해 주십시오, 우리는 경험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잠깐이나마 그
실체를 엿볼 수 있도록 무엇인가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마치 모든 씨앗들 중에서 가장 작은
한 알의 겨자씨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름진 땅에 떨어지면
한 그루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온갖 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예수는 이 겨자씨의 비유를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이다, 하느님은 눈으로 볼 수가 없고
가장 작은 것보다도 더욱 작다, 그러니 어떻게 그를 가리킬 수가 있겠는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경계선상에 있는 것이 겨자씨이다, 가장 작은 것...... 그
경계를 넘어서 있는 것을 그대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계
를 넘어서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겨자씨는 바로 그 경계선상에 있는 씨앗
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볼 수 있으나 그것은 너무도 작다, 그대가 그 경계를 넘어선다
면 그대는 극미한 세계로 들어간다, 그 세계는 가장 작은 세계보다 더 작다,
이 겨자씨는 그 경계선상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 겨자씨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일 뿐만 아니라, 또
한 매우 신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일단 그것이 자라나면 가장 큰 식물이 된다, 그것은 역설적이다, 씨앗은 가장
작지만 그 식물은 가장 크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지만 우주는 잘 보인다,
우주는 식물이며 나무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씨앗이다, 하느님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우주는 분명히 나타나 있다.
만일 그대가 한 알의 씨앗을 쪼개어본다 해도 거기에서 나무를 발견할 수
는 없다, 그대는 그것을 분해할 수 있지만 거기에 숨어 있는 어떤 나무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나무는 없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 씨앗
안에 커다란 나무가 숨겨져 있다고 말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가들이 항상 하는 일들이다.
그대는 이 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것을 실험실로 가져가
그것을 분해해서 어디에 그 아름다움이 있는지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들은
꽃의 화학적 성분이나 다른 성분들을 가려낼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분해하고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병 속에 그 꽃의 다른 조각들을 분리해 넣고 표시를 해둘 것이다,
그러나 어떤 병에서도 꽃의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다, 절대로, 그러면 그들
은 실험실에서 나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 환상을 본 것임에 틀림
없다, 당신이 꿈을 꾸었거나...... 거기에 아름다움은 없다, 우리가 그 꽃
전부를 완전히 해부했는데도 아름다움은 없었다."
8. 나는 기다리고 기도할 것이며 사랑을 하고 희망을 가질 것이다
사물들 중에는 그 전체적인 면을 보아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대는
그것들을 해부할 수 없다, 그 전체는 각각의 부분들보다 위대하다, 이것이
문제이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하나의 기본적인 문제이다.
진리는 부분들이 합쳐진 것보다 더 위대하다, 진리는 단지 부분들의 합계가
아니라 그 부분들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 하나의 멜로디는 그 소리들이나
그 음계들의 합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 더 위대한 것이다.
필요한 모든 음계들이 만날 때 하나의 화음이 창조된다, 개개의 음계들 속에
는 없는 하나의 화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이야기한다, 그대는
나의 말들을 분해할 수 있다, 나의 단어들은 모두 사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그대는 사전 속에서 나를 찾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대는 이렇게 말한
다, "모든 단어들이 이 사전에 있다, 그러니 뭐가 문제인가?"
이와 같은 일이 언젠가 마크 트웨인이 친구인 신부의 설교를 들으러 갔을
때 일어났다, 그 친구는 여러 번 마크 트웨인에게 자기 설교를 들으러 와달
라고 청했었다, 그는 가장 뛰어난 설교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적인 웅변가였으며 아주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 그가 설교를 할
때마다 교회는 청중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은 결코 그의 설교를
들으러 가지 않았다, 그 친구는 마크 트웨인이 "오케이, 이번 주일에 가겠다"
라고 말할 때까지 거듭해서 설득했다.
그 신부는 최선을 다하여 설교 준비를 했다, 그의 마음속에 온갖 아름다운
말들을 준비했다, 마크 트웨인이 오기 때문이었다, 마크 트웨인은 맨 앞줄에
앉았고 신부는 지금까지 해온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설교를 했다, 그는 자
신의 설교에 온 힘을 쏟았으며 설교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것은 하나의 교
향곡이었고 한 편의 서사시였다.
그러나 그는 점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마크 트웨인이 자
리에서 죽은 듯이 앉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도 감동하는 기
색이 없었다, 청중들은 어려 번 박수를 쳤고 황홀해 했지만 마크 트웨인은
그저 자리에 앉아서 좋고 싫고의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는 무관심하게 앉아 있었다, 무관심이란 부정적인 것보다 더 가혹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어떤 것에 대해서 반대할 때 적어도 그대는 그것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게 된다, 그대가 반대한다면 그것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무관심하다면 그대는 "이것은 전혀 쓸모 없으며 반대할
가치조차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설교가 끝난 후 마크 트웨인은 그 신부와
함께 차를 타고 돌아왔다, 신부는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고 그들은 침묵한
채로 앉아 있었다, 마크 트웨인이 막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신부가 말했다,
"자네는 내 설교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군."
마크 트웨인이 대답했다, "자네 설교에 새로운 것이라곤 전혀 없었어, 우
리 집에 책이 한 권 있는데 자네는 그것을 베꼈더군, 오늘 설교는 빌려온 것
이며 자네는 나를 속일 수 없네, 자네는 교회에 있던 바보들을 속일 수는 있
으나 나는 글줄이나 아는 사람일세, 우연히도 나는 어젯밤에 그 책을 읽었다
네."
신부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
야? 나는 설교를 어떤 것에서도 베끼지 않았네, 절대로 그렇지 않아!"
마트 트웨인이 말했다. "자네가 말한 모든 단어들이 거기에 있어, 내일 내
가 그 책을 보내겠네." 다음날이 되었고 그는 신부에게 큰 사전 한 권을 보
내왔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자네는 여기에서 그 모든 단어들을 찾을 수 있
네!"
이것이 바로 분석가의 마음이다, 그는 즉석에서 시를 죽일 수 있다, 그는
그것을 단지 단어들이 연결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말과 말 사이를
보지 못한다, 그는 행간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시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거기에 있는 것이며 황홀경과 신과 그리고 모든 중요한 의미들
은 언제나 말과 말 사이, 그 행간들에 있는 것이다.
겨자씨는 가장 작은 것이며 가장 큰 것을 담고 있다, 그대는 하느님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가장 작기 때문이다, 겨자씨처럼, 그러나 그대는 우
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우주가 있다면 틀림없이 그 씨앗도 있어야 한
다, 씨앗 없이 어떻게 한 그루 나무가 서 있겠는가?
씨앗 없이 나무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그것을 보는지 못 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우주가 어떤 궁극적 원인 어떤 근원 없이 존재할 수 있겠
는가? 갠지스강이 어떤 근원 없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 광대한 우주, 그대
는 그토록 광대할 어떤 근원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우주는 그토록 광대할 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어떤 조화가, 어떤 우주적인
교향곡이, 그렇게도 훌륭한 우주적인 세계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혼돈
이 아니다, 수많은 질서들이 그 속에 있으며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틀림없이 어떤 씨앗이 있다, 그러나 그 씨앗은 매우 작다, 겨자씨보다 더
작다, 겨자씨는 그것을 가리키기 위한 하나의 비유로 사용된 것이다, 질문을
했던 어부와 농부들 그리고 농장지기들은 그 겨자씨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
었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그것을 분해하면 그대는 놓친다, 그대가 종교를 분해한다면 그대
는 놓치고 만다, 그것은 분해하지 않고 직접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볼 수 없다.
거기에 믿음을 사용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씨앗 속에서 나무를 볼 수 없
지만 그대는 씨앗을 땅 속에 심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할 일이다, 그는 말할 것이다, "자, 이것이 씨앗이다, 나는 이것이 나무가 될
것임을 믿는다, 나는 적당한 토양을 찾아내어 이것을 심을 것이고 이 씨앗이
자랄 수 있도록 돌볼 것이다, 나는 기다리고 기도할 것이며 사랑을 하고 희
망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꿈을 꿀 것이다......"
그밖에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대는 씨앗을 뿌리고 기다리
며 꿈을 꾸고, 희망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갑자기 어느 날 아침
그대가 깨어 일어났을 때, 그 씨앗은 새로운 것으로 변해 있고 새싹이 대지
로부터 솟아오르고 있다, 이제 그 씨앗은 더 이상 씨앗이 아니다, 그것은 나
무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 알의 씨앗이 나무가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 역시 이 비유의
일부분이다, 그 씨앗은 죽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 씨앗은 한 그루 나무가
되는 것이다, 신은 우주 속에서 죽었다, 그는 외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
다, 그는 우주 속에 있으며 그 안으로 녹아들었다.
이것이 바로 그대가 신을 발견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대는 히말라야나 메카
그리고 카쉬, 그 밖에 그대가 원하는 어느 곳이든 갈 수 있지만 어느 곳에서
도 신을 찾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은 바로 여기에, 마치 씨앗이 이제는
나무 전체에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씨앗을 찾을 수 없다, 씨앗은 나무 속에서 죽었으며 이제 나무가
되었다, 신은 우주 속에서, 지금 실재하는 것 속에서 죽었으며 우주 그 자체가
되었다.
신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마치 목수가 무언가를 만들고
나서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
다, 그는 한 알의 씨앗과 같은 것이다.
나무는 한 알의 씨앗으로부터 자라나지만 그 씨앗은 나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대는 오직 그 나무가 사라질 때에 신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9.죽을 준비를 하라, 그것만이 다시 태어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힌두교에서는 신은 창조의 처음과 마지막 때에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맨 처음, 세상이 생겨나지 않았을 때, 그 씨앗은 거기에 있지만, 그대는 거기
에 없기 때문에 신을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이 우주라는 나무의 부분이며 그 나무의 잎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신은 모든 세상이 사라지는 때, 그 나무가 늙어 죽게 되는 때인
프랄라야(pralaya)안에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나무들에게서
일어난다, 나무가 늙어갈 때 나무는 새로운 씨앗들을 갖는다, 수백만의
씨앗들을.
세계의 마지막 때인 프랄라야에서 그대는 수백만의 신들을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거기에 없을 것이며 이것이 문제이다, 신을 발견
하는 오직 하나의 방법이 있다, 만일 그대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모든 나
뭇잎 하나하나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만이 오직 그대가 신을 볼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그대가 어떤 특별한 이미지인 크리슈나 혹은 라마 같은 신을 찾는다
면 그대는 신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 역시 하나의 나뭇잎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아름답고 더욱 싱싱하며 더욱 푸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의 존재를 깨달았으며 신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는 마치 한 알의 겨자씨와 같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수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의 비유가 가지는 아름다
움이다, 비유는 결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씨앗 한 알이 죽었을 때 거기에 우주가 있다, 씨앗 한 알이 죽었을 때 거기에
나무가 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다, 여기에 바로 하늘 나라가 있는
것이다, 그대가 만일 다른 곳에서 그것을 찾는다면 헛된 수고를 하는 것이다.
그대가 하느님 나라를 보기 원한다면 그대 역시 한 알의 씨앗처럼 죽어
야 한다, 그러면 돌연 나무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전의 그대는 더 이상 없
고 신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여전히 거기에 있고 신이 거기에 있지 않다면 그대는 절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씨앗이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사라졌을 때 신이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실재로 신을 만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없을 때 신은 거기에 있다, 그대의 손이 텅 비었을 때 신이 거기에
있다, 그대가 무(無)일 때 신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하나의 역설
을 돌아보자, 씨앗은 나무를 담고 있지만 그 씨앗은 또한 그 나무를 죽일 수
있다.
만일 씨앗이 이기적이라면, 만일 씨앗이 "나는 충분하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만일 씨앗이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 씨앗 자체는 감옥이 될 것
이다, 알맞은 흙 속에 심어지기도 전에 그 나무를 보호하던 씨앗 껍질은
감옥이 된다, 그러면 나무는 씨앗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대들은 마치 감옥이 되어버린 씨앗과 같다, 붓다나 예수 같은 사람들은
감옥이 아닌 씨앗이다, 씨앗 껍질은 죽어 없어지고 그들은 이제 거대한 나무
가 되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마치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한 알의 겨자씨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름진 땅에 떨어지면
한 그루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온갖 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그것이 기름진 땅에 떨어지면...... 적합한 토양이 필요하다, 그저 씨앗이
죽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대라는 씨앗이 돌 위에서도 죽을 수 있지만
그것은 나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죽음일 뿐이다.
그대는 적당한 대지의 적합한 토양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제자 정신의
의미이다, 그것은 하나의 훈련이다, 제자가 되는 것은 하나의 훈련이다, 그것
은 적합한 땅, 기름진 땅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씨앗이 거기에 있으니 적합한 땅을 찾아야 한다, 그대 안에 나무가 있다, 스승
은 단지 그대를 경작하고, 잡초를 뽑아내주고, 그대를 쓸 만한 땅으로 만들어
줄 뿐이다, 스승은 그 땅에 기름을 주어 기름지게 만들 수 있다, 스승은
정원사이다.
그대는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여전히 정원사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씨앗을 아무 곳에나 던질 것이다, 씨앗은 시멘트 바닥에 떨어질지도
모르며 그 씨앗은 거기에서 죽을 것이다, 또는 씨앗은 길 위에 떨어져 오가
는 사람들의 발에 밟혀 죽을 것이다.
그대가 죽을 때 그대를 보살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보라, 아이가 태어날 때
산파가 필요하다, 산파의 도움 없이 아이를 낳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산파가 필요한 것은 그 출산의 순간이 매우 미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가 태어나는 순간이 더 위대하다, 그대 안에서 신이 탄생하는
순간이 더 위대하다, 모든 출생들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
스승이란 단지 산파에 불과하다, 스승이 없다면 많은 일들이 발생할 수 있
다, 유산할 수도 있으며 아이는 태어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스승은 그
대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 왜냐하면 새싹은 매우 미묘하고 연약해서 어
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신뢰한다면--신뢰는 실제로 필요
한 것이다, 거기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대가 의심한다면 그대는 움츠러들
것이고 그러면 씨앗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그대가 신뢰한다면
씨앗은 죽을 것이다.
씨앗은 나무를 알 수 없는데 그것이 문제이다, 씨앗은 확신을 갖고자 한다,
"내가 죽는다면 나는 나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어떻게 그 씨앗을
확신시킬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믿음의 불합리성이다, 믿음은 부조리한 것이다, 하지만 그대
는 확신하고 싶어한다, 그대가 산야신이 될 수 있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으며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그러나 씨앗이 죽었을 때 그것은 정말로
나무가 되어 있을까?
무엇이 그것을 보증할 것인가? 누가 그것을 보증할 수 있으며 어떻게 증명
받을 수 있겠는가? 가령 그 보증을 받는다 해도 보증을 받은 씨앗 당사자는
거기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보증이 씨앗에게 "네가 죽고 나면 너는
나무가 될 것이다"라고 증명할 수 있겠는가?
절대로 보증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신앙이 불합리한 이유이다, 신앙의 의미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다---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 도저히 믿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대는 그것을 믿는다, 씨앗은 깊은 믿음 속에서
죽고 나무가 태어난다, 그러나 적합하고 기름진 땅이 필요하다, 온전한 제자
정신이란 오로지 기름진 땅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한 그루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온갖 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그리고 그대의 나무가 실재로 성장하여 한 그루 붓다 나무가 되었을 때 수
많은 제자들이 찾아와 그곳에 둥지를 튼다, 예수의 그늘 아래 수많은 새들이
둥지를 튼다, 붓다의 그늘 아래 온갖 새들이 보금자리를 갖는다.
가장 깊은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붓다 나무와 예수 나무에 보금자리를
갖고 거기에서 고동치는 미지의 세계를 느낀다, 거기에서 그들은 믿음을 가지
고, 거기에서 그들은 그 미지의 세계를 이해하며, 거기에서 그들은 도약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 나라는 한 알의 겨자씨 같은 것이다.
그대 자신이 하늘 나라이며 그대는 한 알의 겨자씨와도 같다, 죽을 준비를
하라, 그대의 죽음을 준비하라! 물론 거기에는 떨림과 공포와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도약하기란 쉽지 않다, 그대는 수없이 되돌아올 것이며, 수없이 그
가장자리까지 갔다가 물러서고 도망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의 심연이 있기 때문이다, 씨앗은 오직 그 심연만을
알고 나무는 알 수 없다, 씨앗이 새순으로 피어나는 나무를 목격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도저히 없다, 씨앗은 그 미지의 세계를 믿고 죽어야 한다, 그러면
씨앗은 새싹으로 피어날 것이다.
그대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것은 일어난다, 가라, 그리고 밭에 씨
를 뿌려라, 나무가 자랐을 때 다시 땅을 파고 씨앗이 어디에 있는지 보라, 그
것은 사라졌을 것이다, 씨앗은 거기에 없을 것이다, 가라, 그리고 붓다 안을
파보아라, 예수 안을 파보아라, 그대는 그 사람, 그 씨앗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더 이상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목수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온 그 씨앗과 감옥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나무는 절대로 보이는 세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오는 것이다.
예수를 보라, 이제 씨앗은 거기에 없다, 거기엔 오직 신만이 있다, 죽을 준
비를 하라, 그러면 그대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대의 마음과 몸, 에고와
자기 동일시를 버려라, 돌연 그대는 그대의 내면에서 무엇인가 자라나고 있
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하나의 자궁이 되었고 그대는 임신하였다.
그리고 영적인 것을 임신한다는 것은 창조의 절정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
것을 통해 그대 자신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는 위대한 그림이나 또는
위대한 조각을 창조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 자신을 창조했을 때, 그대 스스로 그대 자신을 창조했을 때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기름진 땅에 떨어지면
죽을 준비를 하라! 그러나 도약을 준비하기에 앞서, 먼저 기름진 땅이 되
라, 제자가 되라, 배우는 자가 되라, 겸손한 자가 되라, 마치 그대 자신이 없
는 것처럼 되라, 실제로 그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준
비하고 마치 그대 자신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라, 그러면......
그것은 한 그루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온갖 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그것은 언제나 그래왔다, 그대들은 내 가까이에 있다, 나의 씨는 죽었다,
이것이 그대들이 내 곁에 있는 이유이다, 그대들이 여기에 있는 것은 그대들 때문이 아니다, 그대들이 여기에 와 있는 것은 나 때문이다.
그러나 '나 때문'이라는 말도 적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거기에 '나'가 없기
때문이다, 씨앗은 사라져버렸고 그것은 이제 한 그루 나무로 존재한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나를 통하여 그대 스스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일은 다 된 것이다.
하늘 나라는 마치 한 알의 겨자씨 같은 것이다.
그대는 씨앗이며 그 나라의 가능성이다, 죽을 준비를 하라, 그것만이 다시 태어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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