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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6 본문

영성수행 비전/도마복음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6

柏道 2018. 12. 9. 13:58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6

 

 

  

25.그대는 단지 폐허이며 그 허물어짐은 나날이 더해 간다

 

 

지금 그들은 취해 있지만,

 

술에서 깨어나면 그들은 회개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육신이 영혼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그러나 만일 영혼이 육신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이 커다란 부富가

 

이런 가난 속에 거주하는지 경이로움을 느낀다.

 

 

칼 마르크스는 이것을 놓쳤다, 만일 그가 예수의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지 의심스럽다,

 

예수는 말한다, "육신이 영혼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모든 종교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 의미는 육신이 영혼으로부터 나왔고 물질은 정신으로부터 나왔음을 뜻한다, 의식이 그 근원이며

 

세계는 단지 하나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낮은 차원의 것이 높은 차원의 것에서 나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그림은 이 화가가 그린 것인데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 화가는 이 그림으로부터 생겨났다고 만한다면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그것이 이미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정신이 물질로부터 생길 수 있겠는가? 그것이 이미

 

그 씨앗 속에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는 어쨌든 둘 다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음의 세번째 말은 가장 놀라운 기적이다.

 

 

나는 어떻게 이 커다란 부가

 

이런 가난 속에 거주하는지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대는 가난하며 거지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늘 갈망하고 더 많이 주어지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망은 구걸하는 것이며 갈망하는 마음은 거지의 마음이다, 그대가 황제라 할지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대는 단지 큰 거지, 거대한 거지일 뿐, 그것이 전부이다, 그대는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 델리 근처의 작은 마을에 살았던 이슬람 신비주의자 파리드에게 있었다,

 

당시의 황제 악바르는 파리드의 신봉자였다, 파리드는 가난한 탁발승이었는데 악바르는 파리드에게

 

자주 찾아가곤 했다.

 

 

황제가 파리드에게 자주 들른다는 사실을 안 마을 사람들은 어느 날 파리드에게 몰려가서 말했다,

 

"악바르가 당신에게 오면 우리를 위해 부탁 좀 해주십시오, 적어도 학교 하나와 병원 하나 정도는 필요합니다,

 

황제 스스로 당신을 찾아올 정도이니 당신의 말만으로도 그 정도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가난했고 교육받지도 못했으며 병원도 없었다, 그래서 파리드는 말했다,

 

"좋다, 그러나 나는 무엇을 부탁하는 데 소질이 없는 사람이다, 더구나 오랫동안 남에게 무엇을

 

부탁해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대들이 그렇게 말하니 내가 직접 황제를 만나러 가겠다."

 

그리고 그는 황제를 만나러 길을 떠났다.

 

 

아침에 그는 궁전에 도착했다, 황제가 그의 신봉자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으므로 그는 즉시

 

궁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악바르는 그가 만든 작은 신전 안에 있었다, 그는 거기에서 기도하곤 했는데

 

마침 그는 그 신전에서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파리드는 기도가 끝나면 부탁하려고

 

그의 등뒤에 서 있었다.

 

 

악바르는 파리드가 자기 뒤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기도를 계속했고 기도의 끝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능하신 신이여, 나의 왕국을 더욱 위대하게 해주시고 더 많은 부를 누리게 하소서."

 

 

파리드는 이 말을 듣고 돌아서서 신전을 걸어나왔다, 악바르가 기도를 끝내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파리드가 막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소리쳤다, "어떻게 여기엘 오신 겁니까?

 

그리고 왜 그냥 가시는 겁니까?"

 

 

파리드가 말했다, "나는 황제를 만나러 왔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한 사람의 거지를 보았다,

 

내가 그대에게 무엇을 부탁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그대가 신에게 무언가를 청한다면 나 역시

 

신에게 직접 청해야 한다, 중재자가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악바르여, 나는 그대를 황제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악바르는 이 이야기를 그의 자서전에서 언급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무엇을 손에 넣든지 사람이란 차이가 없다, 인간의 마음이란 계속해서 더욱더

 

무언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것을 모든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 커다란 부가--신성한 존재의,

 

신에 속하는 위대한 부가--이런 가난 속에 거주하는지 경이로움을 느낀다."

 

 

삶 전체를 통해서 끊임없이 구걸하고, 취해 있고, 잠들어 사는 사람들...

 

추한 것들을 구걸하고 추한 것 때문에 싸움을 하며, 병들어 있고 더러운 것에 탐닉하는 사람들... 그런데 신은 그의 신전을 거기에 만들었다.

 

 

신은 자신의 거처를 거기에 두었다, 신은 그대 안에 거하는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이것은 도대체 불가능하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모든 기적 중의 기적이다! 그 이상한 기적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붓다나 예수 같은 이들이 갖는 슬픔이었다, 그들이 그대들을 바라보면, 그대들은 내면에 신의 나라를 소유하고 있는 황제들임에도, 가치없는 것들을 구걸하며 그대들의 시간과 삶과 에너지와 기회들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라! 그대가 지금까지 해온 것을 바라보아라, 그것은 정말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그대가 그러한 짓을 해왔다는 사실조차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엉망으로 보일 것이다.

 

 

그대가 살아온 삶을 바라보아라, 그대 자신에게 해온 것을 한번 살펴보아라, 그대는 단지 폐허이며 그 허물어짐은 나날이 더해 간다, 결국 그대는 완전히 폐허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구걸하는 마음속에, 그대의 구걸하는 마음속에, 거기에 왕이, 지고의 존재가 살고 있다,

 

이것이 기적이다!

 

 

예수는 그것을 강하게 느꼈다, 그의 슬픔은 너무도 컸다, 그는 웃을 수가 없었다, 웃는다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바로 그대들 때문에 그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도 슬펐다. 그래서 그대들을 위한 방법들을 고안해 냈다, 그대의 마음을 여는, 그대들을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도록 하는,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는 열쇠를 만든 것이다.

 

 

이 말들과 함께 하라, 그리고 이 핵심의 말을 기억하라-- 회개하라! 회개 한다는 것이 그 열쇠임을 깨닫는다면, 그것은 그대의 모든 과거를 깨끗하게 해줄 것이다, 돌연 그대는 새로워지고 다시 순결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새로워질 때, 신은 거기에 있다, 왜냐하면 신은 그대의 새로움, 순결함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26.생각을 버려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잃을까에 대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생각을 버려라.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주님께서는 언제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이며

 

언제 우리가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부끄러움 없이 너희의 옷을 벗어

 

너희의 발 아래 던지고,

 

마치 어린아이들이 하듯

 

그것을 발로 밟는다면

 

그때 너희는 살아 있는 이의 아들을 보리라,

 

그리고 너희에게는 두려움이 없으리라.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고 자신이 바

 

라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원래의 얼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

 

라 채색이 된 가짜의 얼굴로 살아간다.

 

 

그대가 태어났을 때 그대는 자기 본인의 얼굴을 가졌다, 아무도 그것을 방해

 

하거나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조만간 사회는 그 얼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

 

한다, 사회는 그대의 타고난 본래의 자연스러운 얼굴을 숨기게 하고 여러 상황들에 맞는 많은 얼굴들을 그대에게 준다, 하나의 얼굴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바뀔 때마다 그대는 여러 가면의 얼굴들이 필요하게 된다, 아침부

 

터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대는 수천의 얼굴들을 사용한다,

 

권력 있는 자가 그대에게 걸어올 때 그대는 가면을 바꾼다, 한 걸인이 그대

 

를 향해서 접근해 올 때 그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모든 시간, 순간순

 

간마다 그대의 얼굴은 변화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늘 민감하게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너무 기계적인

 

것이어서 그대가 의식하지 않아도 스스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인이

 

그대의 방에 들어온다면 그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대는 마치

 

그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가 있지도 않은 것처럼, 아무도 방에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상관이 방에 들어온다면 그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웃음을 띠고

 

마치 신이라도 들어오는 것처럼 그를 맞이할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대의 얼굴을 관찰해 보라, 거울 속에 있는 그대 얼굴

 

을 보면서 그대가 변화시킬 수 있는 많은 얼굴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 거울

 

을 보면서 그대가 아내에게 다가갈 때의 얼굴 표정을 지어보라, 그대가 연인

 

에게 갈 때의 얼굴을 만들어 보라.

 

 

그대의 탐욕스러운 얼굴 표정과 화가 났을 때의 표정을 지어보라, 성욕을

 

느낄 때의 표정을 만들어보라, 불만스러울 때, 좌절했을 때의 표정을 만들어

 

보라, 자세히 관찰해 보라, 그러면 그대는 자신이 한 사람이 아니라 군중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 수많은 얼굴들이 정말 자기에게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거울은 하나의 커다란 축복이 될 수도 있다, 그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변화하는 얼굴을 바라보며 명상을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대의 인생 전부가 얼마나 허위인가를 엿보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얼굴들 중 어느 하나도 그대의 진정한 얼굴은 아닌 것이다.

 

 

선禪에서는 그대 본래의 얼굴을 찾는 것이 가장 심오한 명상의 하나로

 

되어 있다, 그 얼굴은 그대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며 그대가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하나의 얼굴이다, 왜냐하면 그 많은 얼굴들을 그

 

대가 다 가지고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얼굴들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그리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술수 이며 그대 주위를 둘러싼 갑옷과 같은 것이다, 이 얼굴들을 모두 버려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그대는 예수를 볼 수 있다, 그대의 본래 얼굴을 볼 때 그것은 예수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대 본래의 얼굴일 뿐이다, 붓다는 그대 본래의 얼굴일 뿐이다,

 

붓다는 그대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예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모

 

든 허위를 벗어버리고 어떤 변화나 수정도 없이 그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

 

왔을 때 그대는 예수이다.

 

 

예수의 큰 영광이 그대 안에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목수 요셉의 아들인 인간 예수가 아니다, 신적인 영광으로, 돌연 그대 자신이 예수가 된다, 그리고 오직 같은 것이 같은 것을 알아볼 수 있다.

 

 

이 법칙을 항상 기억하라, 오직 그대가 예수와 같을 때 그대는 예수를 알아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대가 그대 자신의 내면의 존재를 느낄 때 그대는 다른 사람의 내면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빛은 빛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빛이 어둠을 인식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어떻게 어둠이 빛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대가 거짓된 인간이라면

 

그대는 진짜 인간을 알아볼 수 없다, 그리고 예수는 가장 진실한,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인간이었다.

 

 

그는 거짓이 없었고 아주 순수했다, 그대의 말, 그대의 몸짓, 그대 삶의 모든

 

것들이 거짓 투성이라면 어떻게 예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대의 모든 허위를 완전히 벗어버릴 때 그대는 내면의 예수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대의 내면에서 인식하는 것이 우선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식은 오직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다른 길은 없다.

 

 

유태의 가장 오래된 금언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그대가 하느님을 발견

 

했을 때에만 그대는 하느님을 찾기 시작한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그대가 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신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대의 내면에서 그를 발견하라, 그대 안에서 그를 자각하라, 오직 그런 후에

 

야 신을 찾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실은 신을 찾을 필요가

 

없다, 신을 찾기 시작할 때와 그 마지막은 같은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 첫걸

 

음이 곧 마지막 걸음이 될 것이다.

 

 

그대와 신 사이에는 오직 한 걸음만이 존재한다, 길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두 걸음도 필요하지 않다, 그냥 한 걸음뿐이다, 그대 스스로 짐진 모든 허위

 

들을 던져버려라, 빌려온 모든 가면들을 벗어던져버려라.

 

 

그러나 왜 우리는 수많은 얼굴들을 지니고 다녀야 하는가? 왜 그것들이

 

필요하며 왜 버리기를 두려워하는가? 그 모든 이유들을 이해해야만 하며 오

 

직 그럴 때에만 이 말들은 그대에게 확실해질 것이다.

 

 

그 첫번째 이유는 이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사랑한 적이 결코 없었

 

다, 그렇지 않다면 그 가면들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미워

 

한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면 그대는 얼굴을 숨길 것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데 어떻게 그대의 얼굴을 남에게 드러낼 수 있겠는가? 무엇 때문에 그대는 자신을 미워하게 되었는가? 사회가 가진 모든 조건들은 그대에게 그대 자신에 대한 증오와 비난과 죄책감을 형성시켜 놓는다.

 

 

종교 단체들이 존재해 왔고 성직자들이 존재해 왔으며 사회가 존재한다, 그러

 

한 모든 종류의 착취 형태들은 바로 그대가 그대 자신을 혐오한다는 기본 씨앗 위에 존재한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혐오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대는 성직자들에게 가는가?

 

 

그럴 필요가 무엇인가? 그대 자신을 혐오할 때 그대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대 자신을 미워할 때 그대는 어떤 도움의 필요를 느낀다, 그대를 변화시켜주고, 다시 사랑을 일깨워주고, 그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대들의 부모는 말한다, "너는 잘못된 짓을 하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되고

 

저래서도 안 된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대에게 말한다, "그런 짓은 하지 마라,

 

저런 짓은 하지 마라!"

 

 

 

27.그대는 옷을 몸에만 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걸쳤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어린아이가 해변에서 모래를 가지고 놀고 싶어했

 

다,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안돼, 젖은 모래를 가지고 놀면 옷을 다 버린

 

다,“ 그래서 아이는 그냥 물가로 가기를 원하자 엄마가 말했다, ”절대로 안

 

돼! 거기는 미끄러운 곳인데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니!“

 

 

이번에 그 아이는 그 근처를 뛰어다니고 싶어 했다, 또 엄마가 말했다,

 

“안돼! 너는 사람들 속에서 길을 잃을지도 몰라.” 그러자 아이는 아이스크림 장수가 가까이 있는 것을 보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가 말했다. “안돼, 그런 걸 먹으면 목구멍에 병이 나고 건강에 해로워요,” 그리고 엄마는 가까이에 서 있던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렇게 병적인 아이를 본 일이 있으세요?”

 

 

아이는 정상이다, 엄마가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것이다, 모래를 가지고 놀

 

고 물가에 가고 싶어 하고, 주변을 뛰어다니고 싶어 하는 것은 병적인 증세가 아니다, 그러나 노이로제에 걸린 마음은 언제나 “안돼!”라고 말한다.

 

 

노이로제에 걸린 마음은 “그래!”라고 말할 수 없다, 노이로제에 걸린 마음은 자기 자신에게 자유를 허용할 수가 없다, 그러니 어떻게 그런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자유를 허락할 수 있겠는가? 이 엄마가 바로 그렇다.

 

 

그리고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그와 같은 것이다, 기억하라, 그대들이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될 때 그대들 역시 똑같다는 것을, 자유는 말살되고

 

아이는 자기가 잘못된 것으로 주입되어 차츰차츰 노이로제에 걸리게 된다,

 

무엇을 하고 있든지 듣는 대답은 안 된다는 것뿐이다.

 

 

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한 아이가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아이에게 물었다, “오늘 학교에서 무얼 배웠니?”

 

아이가 대답했다, “처음으로 나는 내 이름이 ‘안돼’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

 

어요, 나는 늘 내 이름이 ‘안돼’인 줄만 알았어요. 언제나 ‘그건 안돼, 그리가면 안돼, 그렇게 하면 안돼‘라는 말만 들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이 정말 ‘안돼’인 줄로 생각했죠, 그런데 오늘 학교에서 내 이름이 ‘안돼’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어요.”

 

 

만일 그대가 노이로제에 걸려 있고 사회 전체가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면,

 

거기에는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노이로제의 연쇄 반응이 존

 

재한다, 그것은 계속되는 것이며, 지금까지 노이로제가 없는 세대나 노이로

 

제가 없는 사회가 있었던 적이 없다.

 

 

오직 가끔 몇몇의 개인만이 그 감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

 

나 그 감옥은 너무나 크고 기초가 튼튼한 것이어서 그런 일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그 체제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과거 전체가 그것을 받쳐주고 있어서, 한 아이가 태어나 노이로제 없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미쳐

 

있으며 그들은 아이가 자기들처럼 되기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이

 

의 자유를 말살할 것이며 아이에게 “나는 잘못되었다, 나는 항상 잘못되었

 

다“라고 하는 의식을 심어줄 것이다.

 

 

그것은 자기 비난, 자기 혐오감을 만들게 되고 그대는 그대 자신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억하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미워하면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미워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 근원에 독이 있다면 그 독은 그대

 

의 모든 인간관계에 퍼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첫 번째 것의 논리적 귀결이 되는 두 번째 것을 기억하라, 그대가 그

 

대 자신을 미워한다면 어떻게 누군가가 그대를 사랑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

 

겠는가?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데 그 누가 그대를 사랑하겠는가? 그러므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무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대는 알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대를 사랑하려고 해도 그대는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상대방이 틀림없이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계속 의심한다, 그러니 어떻

 

게 누군가가 그대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대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다.

 

 

설혹 어떤 사람이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그대는 그것을 의심과 회의적인 눈을 가지고 바라본다, 그대는 믿지 않을 것이며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과 수단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증명되면

 

모든 것이 옳았다고 그대는 안심을 한다.

 

 

이러한 자기혐오가 바로 모든 거짓 얼굴들의 기초가 된다, 그대는 숨기

 

시작한다, 옷은 기후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작

 

은 이유일 뿐이다, 옷은 육체를, 성욕을 숨기기 위해서, 그대 속에 있는 동물

 

을 숨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적인 것이 삶이다.

 

 

그대 안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동물 같은 것이다, 그대의 머리만 제외

 

하고 모든 것이 다 동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머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감춰져야 하는 것이다, 오직 머리만이 생각하므로 그것은 동물적이지 않다,

 

그래서 머리는 허용되었다, 만일 그대의 몸 전부를 잘라내고 머리만 남긴다

 

면 아마도 사회는 매우 행복해 할 것이다.

 

 

사회는 바로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실험은 성공적으로 진행되

 

고 있다, 육체를 잘라내고 정신만이 그 기능을 계속하게 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두뇌는 단지 기계장치의 도움만으로도 기능을 계속한다.

 

 

인공 심장이 고동치면서 혈액 순환 장치로 피를 흐르게 하여 뇌 속으로

 

피를 순환시키는 것이다, 그럼 뇌는 육체 없이 존재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많은 실험을 해오고 있으며 지금 그들은 도대체 육체가 없는 뇌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아마도 뇌는 꿈을 꾸고 있거나, 사색을

 

하거나, 어떤 체계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실험에 최근 몇 년 동안 겨우 성공을 했지만, 사회는

 

다른 방법으로 그와 같은 실험에 성공을 거두어오고 있다, 즉 그대의 몸 전

 

부를 그대의 의식으로부터 잘라내고 오직 그대의 머리만을 인정하는 것이

 

다.

 

 

만일 갑자기 그대가 머리 없는 그대의 몸을 보게 된다면 그것을 자기의 몸으

 

로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것을 본 일이 없다, 목욕탕에서서조차

 

그대는 자신의 몸을 보지 않는다, 옷으로만 몸을 너무 치장해 왔다, 그대는

 

옷을 몸에만 걸치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마음에도 걸치는 것이다.

 

 

어린 학생 둘이 높은 담 옆을 지나가다가, 문득 담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

 

어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들은 작은 구멍 하나를 발견했지만 그것은 자

 

기들 키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그래서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어깨 위에 올

 

라서서 그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와, 굉장해! 많은 사람들

 

이 모여서 놀고 있는데 모두 옷을 벗었어, 아마 나체 클럽인가 봐!“

 

 

밑에 있던 아이가 흥분해서 말했다, “자세히 좀 말해 봐! 그 사람들이 여

 

자야, 아니면 남자야?“

 

 

어깨 위에 올라서 있던 아이가 말했다. “모르겠어, 전부 옷을 벗고 있어서

 

알 수가 없어.”

 

 

남자는 옷차림으로 그가 남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여자 역시 옷차림으

 

로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아이의 말이 옳다, 그 아이는 말했

 

다, “옷을 벗고 있으니 구별을 할 수가 없다.” 옷은 신분을 말해 준다,

 

바로 이것이 그대가 왕과 같이 옷을 입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런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만일 보통 사람이 왕과 똑같은 옷을 입는다면

 

그가 온전할 수 있겠는가? 왕은 특별한 존재이어야 하므로 그 누구도 왕처럼

 

입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옷이 존재를 증명해 준다, 그리고 옷은 너무 강하게 그대에게 작용하고 있

 

어서 꿈속에서조차 그대는 자신이 발가벗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대

 

는 꿈에서도 늘 옷을 입고 있다, 옷이 그대의 무의식 속에 깊이 침투해 있는

 

것이다.

 

 

꿈이란 하나의 무의식 현상이다, 적어도 꿈속에서만은 본래의 그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대는 꿈속에서조차 본래의 그대가 아니다, 가면과 허위의

 

얼굴들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허위들이 존재하고, 이러한 거짓 개성들이 존재하는 것은 그대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에 그 근원이 있다, 그대는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한

 

다, 아무도 그대의 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의 참모습을 사

 

람들이 안다면 누가 관대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것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것을 이해해 줄 수 있겠는가? 그대는 두려움을 갖는다, 그래서 그대

 

는 배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한 말의 근본이다.

 

 

 

 

 

28.삶에 있어서 우회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입을까에 대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생각을 버려라.

 

 

얼굴에 대하여, 옷에 대하여, 그리고 허위의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

 

라, 그대 본인의 모습으로 남아 있으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

 

여라, 어려울 것이다, 매우 어려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생각

 

하기만 해도 갑자기 그대는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감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대들을 가르쳐온 선생

 

들로부터 온 것이며, 사실 이들 선생들은 삶의 가장 해로운 독소이다, 그들

 

은 선생이 아니라 차라리 그대의 적이다.

 

 

그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이것은 동물이나 하는 짓이고 저것도 동물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너희는 사람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너희 안에 동물적인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결코

 

동물과 반대되는 무엇이 아니다, 인간이란 가장 뛰어난 동물이다.

 

 

동물과 대립되는 무엇이 아니라 가장 높은 최정상의 동물이다, 만일 그대가

 

인간이 가진 동물적인 면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그대에게 있는 삶의 원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늘 허위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대가 이성과 성 행위를 할 때 동물성을 부정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의 성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동양에서 여자들의

 

99퍼센트가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대들은 놀랄 것이

 

다.

 

 

그것은 서양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지금은 변하고 있는 중이다, 99

 

퍼센트의 여자들이 성적인 환희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여자들

 

에게는 허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들에게는 약간의 동물적인 행위가

 

허용이 되지만 여자들에게는 전혀 허용이 되지 않는다.

 

 

성 행위를 하는 동안 여자들은 거의 죽은 사람처럼 굳어 있어야 한다,

 

여자들은 어떤 감정의 표현도 보여서는 안 되며 성을 즐기고 있음을 나타

 

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오직 나쁜 여자들만이 성을 즐기는 것으로 인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녀는 성을 즐겨도 되지만 아내는 안 된다, 만일 아내가 성을 즐기고 환희

 

에 빠져든다면 남편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이렇게 생각한다, “이 여자는

 

아주 좋지 않다, 천사처럼 행동해야 하는데 마치 동물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천사가 아닌데도 천사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허위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그 여자는 그저 죽은 시체처럼 아무 감정 없이 누워 있어야 한다.

 

 

감정(emotion)이란 단어에 대해서 아는가? 그것은 운동(movement), 동

 

작(motion)과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그대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

 

그대의 전 존재가 움직인다.

 

 

떨림이 있고 맥박은 뛰며 생동감을 갖는다, 그것은 야성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생동감 있는 야성은 허용이 되지를 않는다, 그녀는 죽은 시체처럼 누워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녀는 좋은 여자이다, 동물성을 초월한 여자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성을 부정하여 그것을 동물적인 것으로 치부한다면 그대는 그것을 숨겨야만 할 것이다.

 

 

수년 전에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장난감 제조업자가 소송을 당

 

해 그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사건은 이런 것이었다, 그 완구 제조업

 

자는 남녀의 성기가 달린 인형을 만들었다, 얼굴을 가진 소녀라면 성기가 있

 

어야 한다, 얼굴을 가진 소년 역시 마찬가지로 성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성기가 달린 인형을 만들었다고 소송을 당한 것이다, 그는 인형

 

생산을 중단해야만 했다, 그는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었지만 법원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사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인형은 다른 모든 것은 다 갖추고 있는데 왜 성기가 없는가? 아이들이 사

 

실을 모르고 있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거짓된 얼굴을 만드는 것이

 

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인형에 대해서 왜 그렇게도 화를 내는가? 인형은

 

인형일 뿐이다.

 

 

그러나 성직자와 종교인들, 소위 선행을 일삼는 사람들은 흥분한 나머지

 

인형 제조업자를 법정으로 끌고 갔다, 사실 그가 만든 인형은 아름다운 것

 

이었다, 하나의 역사적인 물건이었다, 인간의 몸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몸 전체를 알아야만 한다, 왜 그것을 숨기고 없애야 하는가?

 

 

어떤 두려움, 동물성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대는

 

동물이며 그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그대는 그것을 초월할 수는 있지만 부정

 

할 수는 없다, 부정한다는 것의 의미는 단 하나이다. 만일 그대가 그 사실을

 

부정한다면 그대는 거짓된 얼굴을 가지게 된다, 그대는 허위의 가면을 쓰게

 

될 것이며 그대의 고결함도 단지 하나의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가 그것을 초월한다면 그대의 고결함은 진실한 것이 된다, 그러나 초

 

월의 의미는 그것을 수용하는 것을 뜻한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그 속에 빠

 

져들지 않고 그것을 통과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을 통과해 그 위에 서는 것

 

이다, 그리고 부정한다는 것은 그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것

 

을 통과하지 않고 옆길로 우회해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삶에 있어서 우회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만일 그대가 그것을 피해서 간다

 

면 그대는 항상 미성숙하고 유치한 상태로 남을 것이다, 절대로 성장하지 못

 

할 것이다, 삶이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오직 그럴 때 그대는 성장한다.

 

 

그대가 성을 초월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그러나 그 초월의 순간은 앎을 통해서가 아니고 경험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그 순간은 의식의 심화와 사랑을

 

통해서 오는 것이지 부정과 억압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입을까에 대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생각을 버려라.

 

 

아무것도 입지 말라, 나는 벌거숭이가 되어 거리를 다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걸치지 말라, 단지 그대 자신이 되어라! 삶이 그대

 

를 어떻게 만들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겨라, 그것을 환영하고

 

그것을 축하하라.

 

 

그대가 무엇이든 간에 그대를 만든 신에게 감사하라, 거부하지 말라, 그대가

 

그대 안에 있는 무엇이라도 거부한다면 그것은 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신은

 

창조자이다, 신은 그런 식으로 그대를 창조했던 것이다.

 

 

물론 신은 그대보다 잘 알고 있다, 그대가 자기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부정

 

할 때 그대는 창조주에 부정하는 것이며, 그대는 우주와 존재 자체의 결정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우둔하고 멍청한 짓이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

 

들이 존경을 받고 있다.

 

 

예수는 너희가 무엇을 입을까에 대해서 근심하지 말라고 했다, 자연스럽

 

게 삶을 살아나가라, 삶에 반응하라, 그러나 삶의 흐름과 그대 사이에 어떤

 

허위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생각 없이 살아라, 생각이란 깊숙한 곳에 있는 가면이

 

기 때문이다, 그대가 한 여성에게 갈 때 그대는 마음속으로 무엇을 말할 것

 

인지 생각을 한다, “당신을 사랑해” 또는 “당신 같은 사람은 세상에 없어”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연습해 둔다.

 

 

이렇게 그대가 미리 연습한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사랑하고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사랑 스스로가 말할 것이고, 사랑 자체가

 

흐를 것이며, 저절로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꽃은 저절로 피어날

 

것이다, 연습은 필요하지 않다.

 

 

한번은 마트 트웨인이 훌륭한 연설을 마치고 강연장에서 걸어나오고 있을

 

때 그의 친구가 이렇게 물었다, “연설은 어땠나? 자네 스스로도 자네 연설이 마음에 들었나?”

 

 

마크 트웨인이 말했다, “어떤 연설을 말하는 건가? 내가 준비한 연설이 있었고, 내가 한 연설이 있었고, 또 내가 하고 싶었던 연설이 있었다네, 그 중에서 어떤 연설을 말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그대들의 모든 인생이다, 그대는 무엇을 준비한다, 그런데 실

 

제로는 무언가 다른 것을 행한다, 그리고 내심으로는 또 무언가 완전히 다른

 

것을 행하기를 원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이렇게 많은 분열들이 일어나는

 

가?

 

 

이것은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사람에게는 오직 단 하나,

 

주의 깊게 깨어 있는 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대가 준비하는 이유는 주의

 

깊게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의심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을까? 혹시 실패라도 한다면?” 그대는 두려움에 떤다, 이것 때문에 그대는 허위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입을까에 대하여 생각을 버려라.”

 

 

 

 

29.아담과 이브는 자기 자신들에 의해서 유혹을 받았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주님께서는 언제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이며

 

언제 우리가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부끄러움 없이 너희의 옷을 벗어

 

너희의 발아래 던지고,

 

마치 어린아이들이 하듯

 

그것을 발로 밟는다면

 

그때 너희는 살아 있는 이의 아들을 보리라,

 

그리고 너희에게는 두려움이 없으리라.

 

 

이 말 하나하나를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제자들이 물었다, “주님께서는

 

언제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입니까?“ 예수는 그의 모든 영광을 드러내며 거

 

거에 있었다, 그는 제자들 앞에 현존해 있었다, 그들은 예수 자신에게 묻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언제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입니까?” 그들은 마치 예수

 

가 자신을 숨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붓다도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가 숲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마

 

른 잎들이 떨어지고 있었고 길 위에는 낙엽이 쌓여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를

 

내며 뒹굴고 있었다, 그때 아난다가 붓다에게 물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

 

다, 제자들 중 몇 사람은 훨씬 앞서 걸어가고 있었고 나머지는 뒤에 처져서

 

오고 있었다, 붓다 가까이에는 아난다 혼자뿐이었다.

 

 

"한 가지 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우리

 

에게 드러내 보이고 계십니까? 아니면 무언가 우리에게 숨기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까?”

 

 

붓다가 말했다, “나의 손은 펼쳐져 있다, 깨달은 자는 주먹을 쥐지 않는

 

다, 있는 그대로의 이 숲을 보아라, 숨기는 것이 없다, 나는 이 숲처럼 열려

 

있다, 깨달은 자는 주먹이 없다,“

 

 

그리고 나서 붓다는 낙엽 몇 잎을 집어 손 안에 넣고 주먹을 쥔 다음 말했

 

다, “지금 나의 주먹은 닫혀 있다, 너는 그 낙엽을 볼 수 없다,” 자기의 지식에 욕심을 가진 사람들, 자기가 가진 지식을 나누려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주먹을 쥐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붓다는 손을 폈다, 낙엽들이 그의 손에서 떨어졌고 그가 말했다,

 

“깨달은 자의 손은 주먹과 같지 않다, 그는 열려 있다, 나는 모든 것을 드러

 

내었다, 만일 무언가 감추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너 자신 때문이지 나

 

때문이 아니다.“

 

 

예수는 거기에 현존해 있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묻는다, “주님께서는 언

 

제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입니까?“ 그는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언제 우리

 

가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까?“ 그들은 마치 예수가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니다, 예수는 숨기고 있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제자들이 열려 있지 않다, 그들은 닫혀 있다, 그들의 눈은 열려 있지 않다,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이 숨기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숨겨져 있지 않다, 그대들이 닫혀 있는 것이다, 진리는 어느 곳에

 

서나, 어느 순간이나 드러나 있다, 진리는 그 자체의 본질상 숨겨질 수 없다,

 

오직 거짓만이 자신을 숨기려고 한다, 진리는 아니다, 오직 허위만이 비밀을

 

가진다, 진리는 언제나 펼쳐진 손과 같다, 그것은 절대로 주먹 쥔 손이 아니

 

다, 그러나 그대는 닫혀 있다.

 

 

문제는 그대에게 있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가 부끄러움 없이 너희의 옷

 

을 벗어......“ 그대는 옷을 벗을 수 있지만 여전히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알

 

몸은 순진무구한 알몸이 아니다, 부끄러움은 교활함이다.

 

 

기독교에서 부끄러움은 원죄이다, 그대들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들어

 

서 알고 있다, 도대체 어떤 순간에 원죄가 생긴 것인가? 정확히 어느 시점에

 

원죄가 생겼는지를 찾는 연구가 진행되어 왔었다.

 

 

지식의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그들은 유혹에 넘어갔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언가가 금지될 때 유혹이 찾아온다, 마음이란

 

그렇게 작용한다, 그런데 마음은 또 다른 술수를 가지고 있다.

 

 

마음은 그대를 유혹하지만, 마음은 또 언제나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무언가 금지된 것이 있을 때 마음은 그것에 흥미를 느낀다, 금지된

 

것은 하나의 초대가 된다, 마음은 그것을 파헤쳐 알고 싶어 한다.

 

 

아담과 이브는 자기 자신들에 의해서 유혹을 받았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

 

었다, 그러나 성서는 마귀, 사탄이 그들을 유혹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시키려는 마음의 술수이다, 그리고 마귀는 하나의

 

희생양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 마귀란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는 마음의 술

 

수에 불과한 것이다.

 

 

그대가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마귀가 나를 유혹한 것이지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 마귀가 나를 설득했고 유혹했으므로 그가 죄인이지 나는 아니라고 생각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혹은 금지된 것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거기에는 마음의 속임수가 있다,

 

이 이야기는 아름답다.

 

 

하느님이 말했다,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지 말라!” 만일 그들에게 믿

 

음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 나무를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다, 그들은 생각했다, “왜? 도대체 왜 하느님은 그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것인가? 그리고 그 나무는 지식의 나무가 아닌가?“

 

 

마음은 틀림없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만일 네가 그것을 먹으면

 

너는 신처럼 될 것이다, 너는 아는 자가 될 것이다, 그는 질투심 때문에 너에게 따먹지 말라고 금지한 것이다, 그는 네가 신처럼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금지한 것이다, 그 열매를 따먹으면 너는 아는 자가 될 것이며 모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마귀가 그들을 유혹했다고 말한다, 하느님이 그것을 금지한 것은 질투와 두려움 때문이다, 이것은 아담과 이브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이 그들을 유혹했다, 마음이 바로 악마이다, 그 악마는 뱀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데 뱀은 교활함을 나타내는 가장 오래된 상징이다, 마음

 

이란 뱀을 말하며 마음은 가장 교활한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악마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그리고 또한 아담은 그 책임을 이브 에게 돌렸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가 유혹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항상 여자들을 비난해 왔다.

 

 

세상의 모든 경전들은 여자가 유혹자라고 말한다,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여

 

여자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

 

들이 계속해서 여자를 비난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마음의 방식이다.

 

 

이브는 뱀 때문이라고 말하고 아담은 이브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만

 

일 마귀, 뱀에게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느님 때문이다, 애

 

당초 왜 그것을 금지했단 말인가? 사실 그것이 모든 문제를 만들었다, 금지

 

하지만 않았다면, 수백만 그루의 나무들이 있는 에덴 동산은 너무도 커서 아

 

담과 이브는 결코 지식의 나무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금지했기 때문에

 

그들은 지식의 나무를 알게 되었고 동산에 있는 다른 것에는 흥미를 잃게 되

 

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지식의 나무에 집중되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과실

 

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아름답고 수많은 차원의 의미가 그 주변에 있다, 그것

 

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비유담이 지니는 아름다움

 

이다.

 

 

그들은 그 열매를 따먹었고 그들은 즉시 자신들이 알몸인 것에 대해서 부끄

 

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어디에서 그 죄가 생겼을까?

 

 

하느님에게 불순종했기 때문인가? 그대가 만일 바티칸의 교황에게 묻는다면

 

그는 “하느님에게 불순종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제

 

들은 언제나 그대들이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만일 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지식의 열매를 따

 

먹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 문제들이 일

 

어난다, 어린아이들이 순진무구한 것은 그들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무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은 나무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추해 보이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언제나 근심과 걱정, 그리고 꿈과

 

몽상의 짐을 진 채 긴장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많은 짐을 지고 있으

 

며 신이 내려준 모든 은총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실존주의 철학

 

자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지식의 나무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좀더 깊이 접근하고 있는 심리학자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부끄러움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낄 때 그대는 자신

 

을 미워하기 시작할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낄 때 그대는 자신을 거부할 것이

 

다, 그것은 지식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쉽게 알몸으로 돌아다닌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대는 아이들에게 알몸으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강요 해서 점차로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든다, 그들은 많은 것을 알게 될 수록 더욱더 자기 자신을 숨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