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과 자아의식
(Space, Time and Self)
E. 노먼 피어슨 / 임길영 역
역자의 머리말
앞서 출판(出版)한「신지학 입문」"대사(大使)의 발 밑에 엎드려", "실천적 오컬티즘(實踐法)" 등에서는 오컬트(Occult)공부의 요령, 마음가짐이 잘 쓰여져 있습니다. 또「신지학의 열쇠」를 발간한 동기와 그 구성을 보면 H. P. 블라바츠키(H. P. Bravasky) 여사가 쓴 거작「씨크릿 독트린, Secret Doctrin」을 발행한 후 많은 문의가 있어 일년 후 H. P. 블라바츠키 여사가 초보자를 위하여 신지학을 알기쉽게 문답식으로 풀어 설명한 신지학의 열쇠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발간한「신지학의 제1원리」는 투시력의 대가 진 아라자다사(Jin Arajadasa)씨가 특유한 투시적 감각에서 얻어낸 많은 사실을 신지학도들의 요망에 부응하고자 흥미롭게 쓴 책을 우리나라에서도 신지학의 기초 정립을 위해 출간 했었습니다.
이번에 출간하는 시공과 자아(意識)는 원명이 '시간과 공간과 자아'(Space, Time and Self ; 저자 E. Norman Pearson)로써 이 책은 육신을 가지고 화신하여 이승에 와서 진실된 삶을 잘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3대 착각(錯覺)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3대 착각을 어떻게 올바르게 인식해야만 하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또한 현대감각과 지식에 잘 맞게 관련지어 저술하므로써 이해하기가 매우 쉽게 되어 있습니다.
착각을 극복한다는 것을 해탈(解脫)을 바라 볼 수가 있는 것으로 요즘 우리 나라의 사회상은 도덕성을 가지고 교의를 가르쳐야할 성직자가 허위의 교리를 퍼뜨리고 종말론이 나오고, 집단 자살의 비극의 소용돌이가 사회전반을 휩쓸고 있는 등 물질만능의 세상이 되었으며, 도덕은 땅에 떨어져서 부모를 살해하는 자식이 나올 정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신지학의 가르침(진리)을 배워서 올바른 진리를 이해하게 된다면 도덕성 회복은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역자는 이 책을 고등학생의 교재로 하여 도덕교육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위정 당국에 묻고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학도가 되여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는데 힘을 다해서 비아(非我)에서 탈출하겠다고 온 국민이 노력한다면, 이미 우리 나라는 21세기 사람의 모습을 갖춘 국가로 모든 여러 국가의 선망의 대상으로 되여 있을 것입니다. 즉, 윤리ㆍ도덕을 갖춘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을 출판하는데 편집, 자금지원, 인쇄, 타자, 제본, 번역 등 많은 조언과 협력을 해주신 관계가 있는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95년 임 길 영
목 차
역자의 머리말
제1강 서문
머리말
제2강 실재와의 착각
제1장 의식(Consciousness)
제2장 의식의 세계(The World of Consciousness)
제3장 인간의 삼위일체三位一體(The Human Trinity)
제4장 3대 착각錯覺(The Three Great Illusions)
제5장 생의 경륜經綸(The Plan Life)
제3강 공간이라 말하는 착각
제1장 현현(顯現)의 장場(The Field of Manifestation)
제2장 무한(無限)에서 인간으로(From Infinity to Humanity)
제3장 물질의 성질(The Nature Matter)
제4장 물질과 초물질
제5장 우주의 생성(生成)
제4강 시간이라 말하는 착각(연속으로서의)
제1장 3가지의 분출噴出(The Three Outpourings)
제2장 생명과 형체와의 역진화(The Involution of Life and Form)
제3장 생명과 형태와의 진화(The Evolution of Life and Form)
제4장 분신영(모나드)과 항구원자(恒久原子)
제5장 군혼群魂(Group Soul)
제6장 개별화個別化(Individualization)
제7장 인간과 그의 제체諸體(The Self and Bodies)
제8장 "엘리멘탈 에센스"와 "엘리멘탈" 왕국
제5강 자아(自我)라 말하는 착각
제1장 영(靈), 혼(魂), 식심(識心)의 생성(生成)
제2장 바뀌어 태어난다(輪廻)
제3장 탄생의 신비
제4장 우리들의 세월
제5장 옮겨가는(移行)것과 그 후의 인생
제6장 카르마 즉 기회의 법칙
제6강 착각의 극복
제1장 해탈(解脫)을 바라보고
제2장 완성을 이루는 3가지의 길
제7강 진실을 바라본다
제1장 세 개의 루합(樓閤)
제2장 무한(無限)을 향하여
번역을 끝내고
제1강 서문
그대, 영지(英知)를 얻게 될 것을 바란다면 겸허하여야 하리라. 그대 영지를 자기의 약탕속의 것으로 하게 했다면 더욱 겸허하여라. 어떤 곳에서 흘러드는 것과 하쳔을 받아들이는 커다란 바다처럼 되라. 커다란 바다 조용하면서 움직임 없고 하천에서 들어오는 것은 못느낀다. 구경(究境)의 해달의 길은「나」속에 있는 것일세
H.P. 블라바츠키 침묵의 소리 중에서
머리말
사실이란 것은 소설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흥미있고 재미있다고 한다. 이런 말을 종종 쓰는데 과연 그러할까? 이 말에 의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의 가능한 많은 경로에서 얻어진 지구에 관한 자료가 역사처럼 확실하며 극적(劇的)이면서도, 이 말이 틀림이 없다고 증명해 주는 예는 다른 어느 것과도 비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들이 상상을 초월하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세상살이에서 생겨난 일들을 요술 거울로 들여다본다고 가정하여 보자. 유사(有史) 이전의 어둠 속에서 생겨나는 일들이 우리들의 눈 앞에 나타나 전개된다면 그 양상 앞에 우리 모두는 압도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잠시도 멈춤이 없이 흐르는 시간! 정지함이 없이 변화하는 모양, 그것은 다음에서 다음으로 계속 이어진다. 생명은 벌거벗은(몸의 形) 세계에서 생명이 약동하는 세계로 바뀌어진다. 그들은 바닷물 속에서 파도에 휩쓸려 나와서, 육지를 기어오르고 공중으로 날아간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원시인이 등장하고, 그들은 곧 그 환경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고 차츰 그것을 개량하여 그 기구(器具)의 범위를 넓혀간다. 의복을 만들고 불을 지피며 집을 세우고 먹을 것을 스스로가 만들어낸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연이 자기에게 주어진 많은 제약에서 벗어난다. 시간은 흐르고 그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그들이 정복해낸 것은 감소시킴 없이 한층 더 나아져간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그것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미지의 것을 추구하는데 몰두해왔다. 거의 공상에 가까운 꿈을 그리며 쉴새 없이 샘솟는 에너지를 가지고 꿈에서 본 것을 인간은 미래에 실현하려고 모든 힘과 재능을 발휘했다. 인간은 숲 속이나 정글의 깊숙한 곳을 정복하고 일곱 개의 바다에 돛대를 단 배를 띄우고 최고봉의 산을 등반한다.
여러 가지 놀랄만한 기구와 기묘한 것을 인출해 내고, 풍성한 아이디어(idea)로 화학의 친화력(親和力)과 원자구조 영역에까지 미지의 신비를 확대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지구를 감싸는 하늘의 신비를 벗기는데 도전하고 있다. 그들은 쉬는 것을 모르며 탐구(探究)는 그들을 더 힘차게 몰아 붙여서 태양계의 극한까지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그들은 쉬지 않고 더욱 앞으로 나아가 광막하고 거대한 우리들의 섬 우주를 넘어서 외 우주의 여러 은하계에 어설프게나마 집요하게 달라붙어서 [무한의 열매]에 대해 알기 위해,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는 것으로 되어있는 깊숙한 곳을 향해 정진해 간다. 과거라고 말하는 커다란 항아리 속에서, 돌연 물질의 승리를 표현하고 있는 화염(火焰)으로 오늘이라는 세계가 출현하게 되었다.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구,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하여 새로운 방법과 기구, 미증유(未曾有)의 새로운 힘을, 지금의 인간은 자기 것으로 해야 한다.
생활양식은 완전히 변해졌고, 옛 목표는 부서지고, 옛 표준은 버려졌고 지금의 우리들은 새로운 시대 안에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꿈에서도 보지 못한 진보와 계몽의 높은 곳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거의 무한의 기회에 직명하고 있는 시대임을 말해준다.
인간이 먼 옛날 동굴 속에서 살고, 야성의 털을 갖고 있는 코끼리 등을 사로잡으며, 먹을 것을 찾아 들판을 떠돌아다니면서 수탈(收奪)을 일삼는 시대에서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가야할 길은 아직도 먼 저편에 있다. 인간은 육체를 편하게 하기 위해 어지간히 많은 것을 해냈다. 그러나 영적으로 그들(人間)이 극복해낸 것은 아주 적다. 그와 반대로 범(犯)한 잘못이 많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영적 미발달과 많은 잘못 때문에 우리들은 지금까지 고통을 받아 왔으며, 그들의 생활 지식으로는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 까지는 아직 오지 모하였다.
따라서 힘과 약속과 풍요가 있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불안의 눈이 먼 저쪽 지평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오는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빛이 찾아오는 징조는 없을까?" 하고 열심히 모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들을 열심히 원하여 왔던 것을 인간들이 지금에 와서야 눈을 돌려 자기자신이 신의 바깥쪽이 아닌, 안쪽을 보게 되었고, 거기에서 "인간의 혼이란 무엇인가?" 하는 비밀을 배우려고 했다. 왜 인간은 태어났는가? 왜 인간은 죽지 않으면 안되는가? 이 생애가 끝나면 망각의 침묵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것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들인데 왜 무엇 때문에 70성상 동안 어려운 길을 거쳐야 되는가? 정말로, 우주의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신이라는 것이 사실 존재하는가? 인간은 영원한 의혹에 쌓여 지내면서 그저 신앙 정도로 만족하며 자위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렇지 않고 그(神)를 알아낼 수 있는가.
인간이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이렇게 말하는 뜻은, 자연의 헤아릴 수 없이 여러 가지 많은 비밀 속으로 지금의 시점까지 인간이 찾아 들어왔고, 지구의 저쪽에 버티고 있는(여러 개의 세계) 경계(境界)점에 이르고 인간의 둘레에서 현출(顯出)해가면서 거대한 경륜(經綸)을 전개시키고 있는 신(그것은 지혜, 즉 대수학자, 대 설계자, 대 건축가이다)이 실존(實存)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고 또한 납득이 가는 증거를 감히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씩 하나씩 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과학지식은 여러 가지 일반원칙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과학에 대한 기사나, 과학의 진보에 관한 통속적인 해석이 신문이나 잡지책에 실리고 있으며, 라디오나 텔레비전과 같은 매스컴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것들이 가정에 보내지고 있다. 도덕과 영적 문제에 있어서 여러 종교가 도우며 지도를 하고 있다. 이들 종교의 가르침이 좀 더 진실한 것을 받아 들였었다면 세상은 더욱 살기 좋은 세계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종교가 탐구하는 마음(mind) 및 지적(知的)인 면을 살펴보면, 말라 비틀어 굶주리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종교의 가르침이 이성(理性)이라는 법정(法廷)에서는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인정할 사람은 또한 많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정당함을 나타내고, 따라서 또한 과학적인 발견과 일치하는 지식의 샘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거의 알려지지도 않고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식의 원천은 몇몇 세계에 걸쳐서 존재하고 그것은 처음에는 신비주의자들의 전수자(initiator, 특수한 비전을 받은 사람)만이 독점하여 왔고, 또 그들만이 독점하여 준비해 전해왔다. 또한 적격인 제자들만이 전수 받았으며, 서기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절충 신지학파의 시조(始祖)인 암모니우스(Ammonius) 사아케스(신지학 열쇠책 창조)에 의하여 신지학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플라톤(Plato), 플로티누스(Plotinus), 시몬(Simon), 마구스(Magus), 파라켈수스(Paracelsus), 브루노(Bruno) 등이 이 가르침의 대부분을 넓히는데 힘써왔다. 그러나 완전한 해설은 러시아 귀족출신 블라바츠키(H. P. Blavatsky)여사의 불후의 대작 '시크릿 독트린'(Secret Doctrine, 1888초판)에 의하여 논리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신지학은 살아있는 인생(人生)에서 풀지 못하는 신비(複數)를 풀어내는데 있어서 신지학은 많은 공헌(복수)을 하고 있고, 우리들은 그 안에서 그것들을 같이 생각해 가는 것이며, 전문적인 연구분야로 옮겨가기 이전인, 이제부터 연구를 하는 데에 신지학의 주된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분(복수)을 조사할 수 있는 정도에 이루어졌을 때 부분과 여타 부분의 상호관계 또는 부분과 전체와의 관계가 한 층 명백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고 간단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에 관하여 지나라자다사씨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있다. "이것이 신지학의 전부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신지학의 교과서는 없다. 왜냐하면 신지학은 이름 그대로 신의 영지이고, 우주의 여러 법칙의 설명이고, 신과 인간과 자연에 관한 수천 수만의 신비가 우리들 눈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어서들 와서 조사해 보라" 하면서 우리들에게 손짓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광대한 전경을 한 사람의 여행자가 그 눈으로 볼 수 있는 부분만을 잡을 수 있을 뿐, 그 전경을 전부 써 보려 한다면, 그 자신의 마인드(mind) 또는 한 장면 속에서 자기가 감득(感得)한 것 이외에는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인 것이다.
신지학에서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를 손꼽는 것을 제일 큰 원인으로 한다. 즉, 무한의 실재(實在)이고, 모든 나타나 있는 것들의 본원(원뿌리)이다. 그와 같은 근본인(根本因)에서 2개의 근본적이면서 상반(相反)한 극(極)이 생기는데, 그것을 영(靈)과 질료(質料)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 쌍방 양쪽의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미래에 나타나는 장면(顯)이 되며, 원래 하나이던 것이 두개로 나눠졌기 때문에 상반하는 양극 사이의 긴장은 항상 재결합하려고 하는 경향에서 나타나게 된다. 이것들이 재결합 또는 합일(合一)이 생겼을 때 '의식'이라는 새로운 현상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이란 것은 어느 정도 실재(實在)의 성질을 끼게 된다. 사실(事實)은 그것을 실재의 부분적 표현 내지 반영(反映)인 것이다.
이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세 개의 분출(憤出), 말하자면 창조활동의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흐름이 나온다. 그 중 제1분출에서는 농도(濃度)가 서로 틀린 질료 일곱 개가 서로간에 침투(浸透)하여 섞여서 생긴 질료(質料)가 일곱 개로 된다. 따라서 지구는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가 아니고, 일곱 개의 동심(同心)의 천체(天體)이며, 그 안에서 가장 농밀(濃密)한 것만 우리들의 육체에 감각에서만 인지(認知)될 수 있을 뿐이다.
물질계층(階層)을 통하여 스스로 표현하고 있는 신의 생명 에너지, 더 올라가면 아스트랄계층(감정, 욕망계층이라 말한다). 즉 물질계층의 보다 더 정묘(精妙)한 계층들을 통할 때는 감정과 욕망의 질료이고, 멘탈계층 지적(知的)계층을 경유할 때 상념(想念) 또는 생각, 사고, 사상이라 말한다. 아스트랄계층보다 더욱 더 정묘한 세계에 이르게되면 여러 가지 꼴의 영적 현현(顯現)이 된다.
제2분출이라는 것은 모든 계층(階層)의 질료를 생명으로 활성화 시킨다. 이리하여 다종다양(多種多樣)한 생명 형체(形體)가 생긴다. 처음에는 단세포(單細胞)로 된 생명이 생기고, 얼마동안의 세월이 흘러가면 지금처럼 놀라울 정도의 복잡 다기(多岐)한 고도의 유기체로 진화하여 간다.
제3분출이라는 것은 앞에서 단세포의 형체 진화가 인체(人體) 정도까지 이루어졌을 때 발생 분출한다. 인체「체내에서 살고있는 사람 ; 다음에 설명이 나오지만 신의 분영(分靈), 모나드(monad)이다」에 주어지는 것이 된다.
이 시점에서 처음으로 전 피조물(被造物)에 있어서의 최대의 승리, 즉 자기 안에 신의 모든 가능성을 가진 것, 신의 성스러움을 따라 만들어낸 신성하고 스스로 의식할 수 있는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그 후에 인간은 "선(善)과 악(惡)의 지혜가 들어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서" 길고 긴 진화의 여정(旅程)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연유에서 얻어낸 체험(體驗)에 의하여, 그의 성스러운 여러 가지의 힘은 잠재(潛在)된 상태에서부터 전면(全面) 활동으로 개발되어 간다. 이와 같이 성스러운 힘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스러운 분신영(分神靈, 모나드)야 말로 우리들 각자의 안에 있는 궁극(窮極)의 실재(實在)인 것이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존재 속에 나누어져 태어나, 인간의 형체 속에서 개별화(個別化)되어 여러 가지 농도의 질료로 이루어진 체(體, 복수)를 통해 자기가 생존해 가는 여러 세계에서 의식을 매체(媒體)로 하여 유년기를 거쳐서 노년기에 해당하는 각자의 성장 단계를 체험하여 간다. 그러므로 이 물질 세계에서의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진정한 인간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분신영인 셈이다.
여러 정묘한 체(體, body)로 연결되어 있고, 그러한 정묘체(精妙體)안에서 생겨나는 여러 잡다한 감정이나 상념의 영적 충동이 육체를 통하여 물질계에 표현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 외견상으로는 물질계 안에서 기능(機能)을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앞에 말한 복합체(複合體)를 써서 여러 계층(界層)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 등과 접촉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의 물질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각 매체는 매체들 모두 전체의 공동 중심목표인 영인(眞我)으로 진화하는데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지상(地上)에서 단 한번(一回)의 짧은 체류(生存)만으로서 진화에 필요한 요건들이 충분하게 공헌을 해낸다고는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다. 그 때문에 인간 육체 속에서 생활하기 위한 출현(出現)과 그것으로부터 철수(撤收)하는 것을 몇 차례씩 순환(循環)하는 과정을 밟을 수 밖에 도리가 없다. 즉, 윤회(輪廻)를 말하는 것이다.
어느 육체가 일생(一生)의 경험을 얻기 위해 가지는 시간을 다 써버리면, 그의 육체화(化身 ; 육체를 얻어 태어난다. 또는 출현하는 것)는 죽음(死)으로 철수하여 원래의 원소(元素)로 되돌아오고 그는 아스트랄체 안에 머무르면서 생활하게 된다.
그는 당분간 아스트랄계의 의식을 가진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공간(空間)의 이동은 필요 없다. 왜냐하면 아스트랄체 의식으로 바뀌어져 있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아스트랄계에서의 생활상태는 물질계에서 화신해 살고 있을 때의 그의 감정의 질(행위)여하에 따라 출발전부터 양식이 틀리는 것이 된다. 그러나 아스트랄계층에서는, 벌써 물질계(육체)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의 모습(꼴)은 육체를 아직 쓰고 있는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된다. 얼마동안이 지난 후 그 안에서 일(機能)을 수행하게 된다. 아스트랄계층과 닮은 상태가 많은 이곳 멘탈계층에서 체류(生存)하면서 다음을 준비하며 생활한다. 육체, 아스트랄체, 멘탈체 등 어느 체든 간에 생(生)과 죽음(死)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층 더 고급의 제체(諸體)에서는 그렇지 않다. 멘탈체를 벗어나면 인간의 영체인 코절체(causal body) 안에서 삶을 계속한다. 여기에서는 육(肉)의 옷을 입고 있었을 때에 가졌던 고상한 사상, 상념이나 성원(誠願)의 많고, 적은 것에 비례(比例)한 생의 충실한 도를 평가받게 된다. 생(生)의 국면을 말할 것 같으면, 그 자신의 과거세(過去世)의 몇 차례의 생(人生)을 회고할 수가 있게 되고 성공과 실패, 선하게 살아 온 것과 악하게 살아 온 것을 분별하여 볼 수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조금씩 성격과 품성(品性)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러고 보면 더한 층의 약진을 위해 다시 화신(化身)해서 태어나는 길을 찾아서 진화시켜야 하는 것을 일생이라고 말하며, 사슬 안에 또 한 개의 환(環)을 만들어 내려고 그는 지구에 내려와 새로운 생(生)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는 생활을 하게된다.
그는 긴 여행이 되는 진화의 사다리의 가장 아래쪽에 발을 딛고, 각 주기(생과 사)때마다 조금씩 배워 한칸씩 사다리를 올라간다. 그의 여러 갈래의 욕심은 차츰 깨끗(淨化)해지고 마인드는 강해져 가며 이상은 높아져 간다. 그의 가슴 속 마음에는 우리들이 사랑이라 말하는 눈이 생기고 깨끗하고 순백한 의지의 힘이 차츰 나타난다. 또 중간의 동화기「영계휴식 ; 화육(化肉)과 화육 사이의 기간」에 그 모든 노력은 궁극점을 향하여 가까워져 간다. 즉 다음 윤회를 기다리고 있는 기간.
인간이 노력하는 것에는 모두 자연의 법칙(복수)이 따라와서 일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카르마의 법칙(law of Karma) 즉 조정의 법칙이다. 이것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수준에 따라서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키고 있어 우주의 궁극의 법칙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어떠한 결과가 있었다면 그에 앞서 원인이 없이는 생겨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또 어떠한 원인은 언젠가 그 결과가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것은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거나 간에 진실이고 사실인 것이다.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거의 오늘의 모습은, 과거에 읬어서 그의 생각과 행동이 가져온 결과이며 그러므로 그의 오늘은 미래의 그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아직까지 신의 노여움을 받고 희생당한 일이 없으며 그 자신의 이기적인 방종(放縱)때문에 아래로 내리는 것 혹은 그 자신의 신성(神性)의 소명(召命)에 잘 순종하여 위로 올라가는 것은 자기자신의 운명을 계속적으로 하나의 실(絲)로서 하나씩 하나씩 짜집기하여 간다.
카르마의 법칙은 카르마(業報行爲)의 종자(種子)를 뿌려가면서 쉴사이 없이 일을 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잘 살펴보면 인간의 상념은 그의 성격을 만들고, 욕망은 그의 기회를 주고, 행위는 환경을 결정지어주어, 인간 자신은 그 안으로 싫다, 좋다 할 것 없이 말려들어 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것이 명백하다." 라고 느끼고 "바꾸어서 다시 태어난다."는 법칙을 받아들인다면 인류에게는 미래가 매우 밝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단순한 인간이지만 언젠가는 초인으로 되는 것이 확실하며, 이것은 당연하고도 또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여러 가지 노력하고 있는 현재의 노력의 결과는 당연히 초극(超克)되어야 하고 초극이 성취되었을 때 현재의 인간들이 행하고 있는 범위를 아주 엄어서, 경험과 힘의 경역(境域)의 복수(複數)가 되는 곳으로 인간은 옮겨 살고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영역에 도달한(至高) 어른들은 그 곳에서의 존재자로서 실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고대나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러한 어른들은 일반에서는 대성(大聖) 또는 영지(英知)의 대사라고 존중(尊重)하고 있으며, 그 전체를 말할 적에 대성백색동포단(大聖白色同胞團)이라고 하며, 이 세상에 있는 몇몇 대종교(大倧敎)의 개조(開祖)는 이러한 어른들 안에서 출현된 것이다.
약간의 예외를 빼고는 현재의 과학적인 발견이 끊임없이 확대하여가는 인간 탐구의 여러 분야에서 신지학의 견해에 대한 그 지지가 점점 높아가고 있다.
또한 신지학의 편에서는 그 감추어져 있는 지식을 제공하여 목적과 계획을 시사(示唆)하고 모든 사실에 빛을 주어, 생명계의 안에서 그것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位置)나 위상(位相)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원자의 성질과 구조에 관한 과학의 연구는 질료「물질계층 및 정묘(精妙)계층을 구성하고 있는 소재(素材)」의 침투성(浸透性)에 대하여 "신지학이 말하고 있는 것은 마인드(識心)의 산물(産物)이라고 말하는 신지학의 설(說)은 기본적으로 옳은 것이다."라고 증명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현상은 자연의 어느 계층에서도 재현된다. 고대의 가르침을 근년(近年)에 와서 겨우 획득해낸 지식으로 빛을 맞추어, 장래에 어느 방면에서 발전 되어갈 것인가를 시사하는 수도 있다.
새로이 바뀌어 태어난다는 가르침(그것이 사실이란 것을 알아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ㅡ즉, 인간은 과거세상(過去世)의 많은 생(生)에서 얻은 과실(果實)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이승(지금 세상)에서 그의 새로운 필요나 요구에 응할 수 있도록 완숙(完熟)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가르침ㅡ은 아이들의 교욱 문제에 놀라운 공헌을 하는 것이다.
진정, 효과적인 교육제도는 바뀌어서 태어나는 혼(魂)으로부터 과거세 때 이미 발달시켰던 여러 가지의 힘과 특질을 끌어내는 방법(복수)을 써서, 그 아이의 창조력 발현(發現)에 방해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고정(固定)된 생각과 방법들을 그 아이에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교육은 기본적 전제(前提)가 이것으로 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하여야 한다.
신지학이 제공하는 개념의 기본적 특질을 본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과학의 모든 분야와 예술의 모든 양식에 적용할 수 있다. 독단(獨斷)이나 신조(信條)로부터 해방시키는 이상적인 종교철학을 제공 한다. 그것은 또 불사(不死)의 과학적인 설명을 제공하고 만인 만생이 모두 원래 한 동포란 것을 자연에 있어서 사실이란 것을 선명(宣明)하게 해준다.
눈을 감고 이상마을(理想鄕, 유토피아)을 그리며, 아직까지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힘(복수)과 싸우며, 아직도 자신을 통제(統制)하고 있는 인간이 자기자신의 안에 감추어져 있는 세계, 영적 체험의 세계를 깊숙이 그리고 진지하게 연구함으로써 거기에서 생의 기운(氣運)을 배우고, 그의 커 가는 힘과의 이해해낸 것을 인류의 구제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오늘날의 지고(脂膏)의 요구이다.
과학은 여러 가지의 기적을 연출하고 있으나 맹인(盲人)이 볼 수 있도록 하고, 절뚝발이가 걸어다니게 하는 것이, 여러 가지의 소리를 내면서 세상으로 떠돌아다니는 큰 마신(大魔神)이 과학은 아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들은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과학은 자연이 일(機能)하고 있는 것을 시찰(視察)하고 분류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연의 일하는 양상이 인간의식에 영향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환경과 자극을 제공하고, 자연은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연출 한다. 그래서 자연은 신의 현현(顯現)인 것이다.
신지학은 생(生)의 여러 가지 미로(迷路)를 확실하게, 무사히 그리고 쉽게 빠져나가게 하여주는 사상체계(思想體系)는 아니다. 그것을 탐구하려고 하는 혼(마인드)에서 얻어낸 답(答)으로서 안에 감추어진 진리를 찾아내고 그 진리를 풀어 가는데 필요한 지침을 준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고대의 경전인 침묵의 소리에는 교훈이 있다. 종교가(家)들이 영구(永久)하는 것만으로도 궁극적(窮極的)인 것에 합일(合一)로 이루게 하려고 노력한다면 이상상(理想像)의 뒤에 감추어져 있는 여러 가지 힘을 체험하지 못하고서는 그 자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자기가 그러하지 못하고서도 종교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느껴야한다.
이 책 안에 저자는 고대의 영지(英知)의 무(無) 속에 과거지의 가르침에서 약간이나마 현대의 독자에게 받아들이도록 설명을 시도하였고, 또 이러한 가르침을 전혀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해가 간다면 과학의 많은 새로운 발견에도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데 노력하였다.
여기에 제시하는 신지학의 해석은 대부분이 저자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어쩔 도리가 없으며 그 책임은 적전으로 저자에게 있다. 그렇지만 신지학의 가르침(복수)중에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그 생애를 이 분야(分野)의 연구와 탐구에 바친 많은 위대한 사상가들이 지는 것이다. 신지학의 어느 국면은 도상(圖相) 이상으로 모질게 다루는 것은 그 부분이 생(生)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주요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국면에서 배운 적이 있는 사람은 결코 어구나 말의 표현이 잘못된 것을 알아낼 수가 있으나, 이러한 신지학의 예비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마음에 혼란시키는 것이 있다는 걱정도 있어, 양해를 얻고자 한다.
"한폭의 그림은 천만가지 말에 비견한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 책 안에 도해(圖解)를 넣어서 이해를 더하게끔 노력하였다.
이 책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인지(人智)를 절(絶)한 바닥(低 ; 밑)의 넓고 커다란 것을 포용하게끔, 시초부터 큰 기우(氣宇)를 키워서 확대해 있어주기 바란다. 대우주의 장막한 전 영역은 우리들의 상상의 한계를 넘어 훨씬 저쪽의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전개되고 있다. 우리들은 그 거대한 것에서의 한 조각만을 겨우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진리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들의 마음은 지상의 존재라고 하는 단순한 영역을 떠나, 먼 저쪽으로까지 신장(伸張)하고 확대하는 것은 이 책에 제시하고 있는 사상 안에는 혹시 선정적에 가깝다고 생각할만한 것이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그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여 버린다면 그것은 이 책의 집필의 목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그저 그러한 이유로 그것을 거부하여서는 안된다.
원자(原子)는 매초에 몇 십억 주파의 파동을 내고 있는 것을 믿기 어렵다. 그러나 과학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령 저자가 진리라고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신비성의 한계를 이탈한다고 생각되는 것이라도 말해야 한다고 느낀 것이면 저자는 과감히 그것을 말하고 쓴다. 그러나 그 때마다 발표의 이유를 명백히 하고, 또한 진리를 습득하는 것을 청원하는 인사들 중에 헤아릴 수 있는 작은 수의 사람일지라도, 명예를 바라지 않는 인간에만 이해가 되어주는 한 신지학 전체에 저자가 파악해낸 것이 한 고지를 차지(占)하는데 그쳤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어 가는 동안에 장엄하고 거대한 천구(天球)의 움직임의 빠른것과 찬란한 선물을 인간에게 남기고 가는 매력에 사로잡히고 얼마후 사라져 버리는 마음의 안식을 잠시 맛보고 지상의 사물(事物)과 생활의 긴장이나 중압(重壓)등에서 다소나마 해방감을 얻고 세상살이가 시야(視野)로부터 차츰 후퇴하여 갈수록 의식은 더욱 더 높은 경역(境域), 진리 및 전미(全美)만의 세계, 지적 성취와 그리고 영적 지각이란 헤아려낼 수 없는 권역(圈域)으로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게 되기를 저자는 진지하게 원하고 있다.
인도 마드라스市 에이데야루에서
by E. Norman Pearson
제2강 실재와의 착각
보자, 잔잔한 물결위에 투영된 달처럼, 알라야는 작은것들에나 큰것들에나 가장 미세한 원자들에게도 투영되지만 모든 이의 마음에는 이르지 못한다. 슬프도다. 모든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 비존재에 대한 깨달음, 진리의 깨달음에 이르는 귀중한 해택을 누릴 사람이 너무나 적으니
H.P. 블라바츠키 침묵의 소리 중에서
제1장 의식(Consciousness)
역사가의 지적에 의하면, 인간이 진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최근에 와서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진화(進化)라고 말하는 빛은 자연에서의 다종다양(多種多樣)한 일들이 계시의 빛을 받기 이전까지는 인류는 대부분은 세계란 것은 인간과 인간이하의 생물들과 같이 삶을 살고 고통받으면서, 결국에는 죽어 가는 것으로, 별다른 차이나 변화가 없는 한 종류의 시설물(施設物)이 한 곳에 같이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해왔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서 변화와 진보라는 것이 차츰 사실로서 밝혀지고, 하나의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요소(要素)로서 각광(脚光)을 얻음으로써 연구와 설명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여러 가지의 사물이나 또한 생겨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진보라는 꼴이 확실히 모습을 나타내고 그 뒤쪽(背後)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커다란 구동력(驅動力)이 움직이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하지만 불행하게도 이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는 여전히 그들의 연구분야에 이러한 사실(구동력) 즉, 신이란 관념을 배제하고, 자연의 여러 가지의 경이(驚異)로움의 배후에 있으면서 창조하고 지휘하는 영지자(英智者)의 존재를 빼놓고 설명하려고 하는 쓸모 없는 노력을 계속해가고 있다.
인간의 여러 가지 창조노력이 인간의 조그마한 분야에 해당되는 것 즉,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은 모두가 인간의 마인드(혼, 識心)가 창조하고 지휘하는 행위에서 나오고, 또 그 지도(指導)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주라고 하는 큰 분야(分野)로 되면 과학자들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 때문에 과학자들에게 있어서 의식이란 그것은 여전히 신비(神秘)이고 그러한 태도를 지속하는 한(限) 신비로 남고 계속될 것이다.
하오니, 새로운 발견이 있을 적마다 그들의 주장은 차츰 약해지고 있다. 과학기자(記者)들은 물리학자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것, 그 이상의 지금보다 더 심각한 여러 문제가 나오면 신의 신앙에 의지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런 소신(所信)으로 논문을 쓰고 있으며, 그러한 논문이 해마다 그 수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신지학 쪽으로 본다면 사정은 대단히 틀리다.
신지학개념에는 하나의 제일 큰인(大因)을 말하자면 하나의 무한(無限)인 실재(實在)를 근본원리로 설정(設定)하고 만상(萬象)은 이것에서 나온다는 근원(根源)으로 삼고 있다. 있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근본인(根本因)에서 나온 두개의 기본적이고 또 상반(相反)하는 극(極) 즉, 영(靈)과 질료(質料)가 생긴다. 이 양극(兩極) 사이에 하나의 관계가 성립되며, 그것은 미래의 현상(現象)의 장(場)인 것이다.
그것은 양극(兩極)의 두개의 상반하는 사이의 긴장(緊張)이며, 두개로 분리(分離) 되어졌기 때문에 재합일(再合一)하려고 하는 경향(傾向)을 띄게 된다. 이런 재합일이 생길 때, 말하자면 의식(意識)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意識)은 실재(實在)의 성질을 받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이 실재의 부분적 표현이나 반영(反映)으로서 나타낸 것이다.
이상 말한 바와 같이, 어느 계층(界層) 또는 세계일지라도, 의식은 그 계층 또는 세계의 실재(實在)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한줄기의 빛이 유리를 지나가는(通過) 것 같이, 각각의 색으로 된 것을 지나고 나면, 원래의 백색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색은 같은 광선으로 특정한 유리를 지나가는 것, 말하자면 그 특정의 유리가 전도(傳導)해내는 특정한 파장(波長)을 나타낸다.
그것은 물론 보는쪽의 색을 감응(感應)하는 능력의 정도에 의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추상(抽象)으로 표현한다면 분리된 영과 질료와의 합일(合一)이 거듭되는 것이 많을수록 으식은 확대되고 따라서 조건이 붙어져 있는 의식은 양 반대 극(極 ; 영과 질료) 사이의 합일의 횟수가 끊임없이 증대해 갈수록 발달하고 성장되어서 끝내는 보편의식(普遍意識)과 하나로 되어 버린다는 것을 실제 몸으로 체험하지 않고서도 예언할 수 있다.
H. P. 블라바츠키는 그의 저서 시크릿 독트린(Secret Doctrine, 秘經)에서 "우리들의 의식이 어느 계층에서나 움지이며 일하고 있어도, 그 계층에 속하고 있는 것들과 우리들은 함께 당분간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유일의 실재인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당분간(當分間)이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시적인 상태란 의미이다. 그 글 안에 동계층(同界層)에서의 행위(일하는 것)는 우리들, 즉 아(我)를 자신의 육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즉, 진아(眞我)가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여기서 틀린 것임을 알린다. H. P. 불라바츠키는 계속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위로 발달하여 감에 따라 지금까지 거쳐온 여러 단계 속의 그림자(복수)를 실재(복수)라고 잘못 생각해 온 것같이, 위로 혼(魂)이 진보함에있어 차츰 눈을 뜨게 되는 것의 연속(連續)이며, 한발짝씩 전진할 때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실재에 들어 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실은 우리들이 절대의식(絶對意識)에 도달하고, 우리들의 의식이 절대의식과 융합(融合)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들은 환각(幻覺)이 만들어낸 망상(妄想)으로부터 탈각(脫却)한 것을 알게 된다."
위의 말이 깊이 느껴지는 바가 있다면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것들의 무한(無限)한 것들을 유한(有限)한 것으로 둘러싸려고 애를 쓰는 꼴인데, 이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불가능한 일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릳르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정도의 대자연의 움직임과 일하는 것을 관찰(觀察)함으로써, 우리들의 직감능력을 자극시켜 어느 정도까지는 해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자연의 여러 갈래의 가지가지 법칙은 궁극에 이르러서는 하나이고, 보잘 것 없는 것에서부터 망막(茫漠)한 대우주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수준에 미치고 있으며 다시 말하면 비존재에서 현상(現象)이 나타나는 것이 오면서 사고(思考)를 하는 마인드(識心)로서는 파악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과 비슷한 것이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다. 가령 전기(電氣)의 정체(正體), 그 실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렇지만 어디든지 전기는 있다. 전기 그 자체는 관찰의 대상으로, 전기가 생겨난 결과를 통하여서만이 알고 있을 뿐 그 밖에는 모른다. 현현(顯現)하지 않는 실재(實在)와 똑같이 전기의 실체는 전기에너지의 여러 국면의 배후에 현현하지 않고서 존재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사실을 위 [그림 2의 A]에서 표시하고 있다. [그림 2의 B] 무한에서도 같은 원리가 우주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림 2의 C]에서 상반하는 양극 사이에 전등으로 양극이 부분적으로 재결합이 되고 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순식간에 어두운 곳에 빛(光)이 생긴다. 우리들 가정에 있는 전선은 표면에서는 보이지 않고 "스위치" 자체는 빛을 내지 못한다. 그러나 재결합을 위한 경로(채널)인 전구를 달아서 지금까지 떨어져 있는 것을 같이 하여 주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들은 전기 그것이 어떤 성질인지는 모르지만, 전기가 다른 것들에 미치는 결과에 의하여 전기에 관한 것들을 배울 수가 있다.
대자연이라고 하는 커다란 광장에서도 똑같이 영과 질료는 양쪽이 모두 숨어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무한"이라는 것을잘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의식의 매체가 만들어지면 모든 생물은 어느 정도 이와 같은 질료가 다시 같이되어서 (합하여) 다양한 의식 상태가 생기고, 그것에 의하여 우리들은 아주 가냘프게나마 실재를 문틈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제2장 의식의 세계(The World of Consciousness)
이상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만, 이번에는 실제로 우리들 자신의 안에 것과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관련시켜 지금까지의 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그렇게 해서 정말로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면 우리들의 인생관 전체를 개혁(改革)하고, 지금까지 도저히 해결이 되지 못한 것을 풀 수가 있고 많은 숨어 있는 어려운 문제의 실마리가 풀어져 나오는 열쇠가 될 수 있으며, 또한 어느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렇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결코 물질(복수)이나 장소(場所)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의 세계 우리들의 의식의 세계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세계는 우리들이 창조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영과 물질로부터 받는 충격(衝擊)에 반응(反應)해서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은 지금까지 배워온 대로 실재의 반영이므로 이 세계는 실재의 성질을 어느 정도 띄고 있다. 물질 세계는 감관(感官)의 인상(印象)에 반응해서 우리들의 속에서 생기는 것이다. 예로서, 음(音)은 어느 범위의 파동이 공기, 그 외의 다른 매체에 의해 전해져서 고막(鼓膜)으르 치면, 그것은 임파액(淋巴液)의 파동으로 바뀌고 다음에는 가냘픈 전기적 충격이 되어, 마지막 뇌를 거쳐 의식에 전하여진, 결과가 생겨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물질적 충격이 형(形)을 바꾸어 음(音)이 되는 현상이 우리들의 의식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주파수를 가진 전자파(電磁波)는 눈에 영향을 주어 최후의 의식에 도달하고 거기서 빛이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들의 다른 모든 감관(感官)의 인상에 해당하게 된다. 우리들의 물질 세계는 실에 있어서 이와 같은 감관의 인상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물질 세계는 우리들의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아주 똑같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텔레비전 수상기 세트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주파수가 틀린 불가시(不可視) 불가촉(不可觸)의 파동이 "에테르(ether)"을 통하여 방송되면, 그것은 우리들 옆을, 그것보다도 우리들 속 안을 아무 장해없이 통과(通過)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텔레비전 세트의 채널이 그것을 맞춰보면 그 파장은 잡히고 빛(光)이라는 짧은 파장(복수)으로 바뀌어, 그의 여러 가지 변화가 그림화상(畫像)으로 되어 스크린에 나타나는 것이다.
다른 파동도 똑같이 음(音)이라고 말하는 긴 파동(복수)으로 바뀌고 음악, 소리, 그 외의 효과로 되어 "스피커"에서 나온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둘레에서 볼 수 있는 비슷한 일들이 자연이 일하고 있는 높은 영역(領域)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텔레비전 세트는 실제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장경(場景, 신)의 모의상(模擬像 ; 불안전하기는 하지만 아주 멋진 보람있는 사본)을 만들어 냈다. 진짜와 보이는 것의 사이에의 공간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한 파동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신비의 파동이 수상 세트 안에서는 빛과 음이 되여 준 것이다.
모든 있는(존재) 것들이라 하는 것들의 배후에 실재(實在)로부터 신비에 가려져 있는 파동이 오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들 신지학에서는 영과 질료라는 이름을 붙여 쓰고 있는 것이다. 부활(賦活)되어 살아있는 텔레비전 수상 세트가 되어있는 인체(人體) 안에서도 파동이 반응하여 의식이 생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이 현현(顯現)이 없는 것이라 말하는 실재의 모의상(模擬像, 人體)은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직관심(直觀心)에 의하여 인식해낼 수 있는 사본(寫本)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
과거 수백 년동안 세계의 사상가들은 물질은 파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파괴할 수가 없으니 영원히 존속한다는 즉, 유일의 실재이다 라는 논리였던 것이다. 의식과 상념이란 것은 무슨 물건들의 꼴에 따라 단순한 우연이나 또는, 부수적인 나타냄에 불과하다고 보아왔던 것이다. 그러던 19세기말에 이르러서 과학사상에 심한 변화(복수)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보어(Bohr), 플랑크(Planck), 머리간(Mollmkan), 마이컬슨(Michelson), 진스(Jeans), 아인슈타인(Einstein) 등등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해냈기 때문에, 낡은 옛 사상가들의 생각은 바른 것이 못되며, 그와 같은 생각은 우리들의 생명관(生命觀)에서 아주 배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무슈 진스경(Jeans. 卿)은 우주는 한 주(一柱)의 수학적 사고자의 상념이고, 무한의 과거라고 말한 정도가 아닌 어느 시기에 창조 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느 종말(終末)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견해를 발표하였다.
약 4백년 전에 자루타노 프루노는 "신의 사고 행위는 우주의 실질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B.C약 4세기경에 위대한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이와 같이 썼다. "달콤하다(甘), 쓰다(苦), 춥다(寒), 따뜻하다(溫) 그리고 모든 색(色) 등, 이러한 것 모두가 견해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실재(實在)하는 것은 아니다." 아일랜드인으로서 훌륭한 철학자 "조지 파그레이"는 그의 다양한 설득력 있는 어느 글 안에 "모든 하늘의 성가대(聖歌隊)와 땅의 조성, 한마디로 줄여서 말한다면, 세계의 거대한 결합으로 구성을 이루고 있는 모든 물체는 모두가 마인드(識心)외에는 어떠한 실재(實在)가 없다. 즉 우리들에 의하여 실제(實在)로 지각(知覺)되지 않는 한, 즉 우리들 마음 속에 존재하지 않는 한, 혹은 달리 창조된 영의 마인드속에 존재하지 않는 한, 그것들은 아주 존재하지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떤 구원(久遠)의 영의 마인드속에 존재하거나일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오늘의 넓어진 지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할 것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보다도 일반적으로 더 인정하게 되었으며, 우리들의 둘레와 내면의 세계(복수)를 바른 이해로 향하게 하는데, 제1호로서 우리들 앞에서 차츰 설득력을 증가시키며 닥쳐온다. 옛 사상가들이 가진 기계적 우주(機械的宇宙)는 몰락하고, 보다 위대한, 보다 경탄하게 할 우주가 빠른 속도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음 장에서 초물질적 질료의 위상(位相)을 고구(考究)할 때 더 폭넓은 의미를 줄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이러한 사실이 수면과 꿈이란 문제 연구나, 육체사후(死後)의 영인(靈人)의 존속에 대한 아주 새로운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지금으로서는 미지의 세계(복수)가 다른 사항이 밝혀짐으로써 현실로써 손으로 느끼고 쓰여질 수 있게 될 수 있으며, 혹은, 그렇게 된다는 것을 언제인가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제3장 인간의 삼위일체三位一體(The Human Trinity)
기독교의 성서에서는 인간은 신의 모습과 닮게 만들어졌다고 말을 하고 있다. 또 힌두교의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안에 스리 크리슈나(Shri Krishna)의 다음 말이 실려있다.
"나는 나(神我)이다. 모든 것에 존재하는 것들이 가슴(마음, 하트)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와 꼭같이 이 세상에서 훌륭한 몇몇 종교에서는 인간은 영적 존재이고, 그 성스러운 창조주의 성질을 이어 받았다고 말하는 점은 똑같이 일치를 보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들은 신과 인간사이에 더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것을 더 연구 노력할 때인 것이다. 그렇게 하고 보면 우리들이 얼마나 밀접하게 "신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또한 원 뿌리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인간과 "모나드"(眞我, 神性의 種子)는 신 되시는 어른분의 몸 속에 뿌리가 박혀 있으며, 또한 신 자신의 의식에서 출발해 나오는 것이다. 때문에 신은 삼위일체이며 인간 역시 삼위일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림 5]는 인간과 신에 관한 관계를 표시한 것이다. 인간의 분신영(모나드)이 신의 의식에서 나온 것을 알 수 있고, 인간의 삼위일체가 신의 삼위일체의 반영(反映)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또한 이 문제를 일상적 경험의 관점(觀點)에서, 심리학자의 내공방법(內攻方法)을 써서,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의식의 내용과 기능을 분석함으로써 알아낼 수(Approach) 있다. 그러면 잠시동안 주위에서 들려오는 음이나 사물에 주의력을 빼앗기지 말고 외부의 모든 것을 피하면서 가만히 앉아서 감정과 정신의 "밸런스(balance)"를 유지하는 데만 노력을 기울이면서 마음은 차분함 속에, 매우 민감(敏感)해지도록 힘쓰자. 그리고 당신의 의식이 일하고 있는 것을 차츰 자각(自覺)하도록 나누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즉 당신은
1. 사물에 관하여는 ㅡ 당신의 주위에 있는 물질 세계에 관해서.
2. 의식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는 ㅡ 지금의 자극(刺戟)하고 있는 것에서 온 것에서 또는 그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에서 생겨나는 의식상태의 변화에 관하여.
3. 자아(自我)에 관하여는 ㅡ 당신의 속에서, 자신을 자기가 되게끔 해주고 있는 것, 다른 존재와는 틀린 다른 존재에 대하여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당신의 의식은 위 세 가지 성질을 식별(識別)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이 문제를 지금은 아래쪽(低級)에서 바라보면서 알아내려(Approach)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위쪽(高級)에서 내려보면서 알아내려고 접근(Approach)했을 때 더 쉽게 위에서 생각했던 방법과 꼭 같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다.
제4장 3대착각錯覺(The Three Great Illusions)
"본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以不如一見)이란 격언이 예로부터 우리들에게 있었으나 현대에 있어서는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다. 오늘에 와서는 오히려 보이는 것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바른 것으로 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진실에 있어서 모두가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영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물질적인 것에서도 우리들은 유리를 통하여 뽀얗게 본다는 정도이다.
이 세상 지구는 평탄하게 보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다. 태양은 천공(天空)을 가로질러가며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것은 지구가 그 축(軸)을 중심으로 자전(自轉)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인 것이다. 우리들이 밤하늘에 많은 별을 보고 있지만 그 실은 우리들이 보고 있는 위치(位置)에 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수백 만리 혹은 더 이상으로 멀리 별의 위치를 이동한 후인데, 우리들은 이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가지고 말한다면 상당히 딱딱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과학의 증언(證言)에 의하면 육체에 포함되어 있는 진짜 딱딱한 질료는 가정에서 재봉할 때 끼우는 손가락이 "골무"안에 들어갈 정도의 양이라고 말한다. 한 물 컵 속에 젓가락을 넣어보면 굽어보이지만 실은 굽어진 것이 아니다.
미국의 워싱톤 콜롬비아 구에 있는 국립아카데미의 건물에는 포오칼트 축자(軸子, Foucault Pendulum)란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긴 철사 줄과 그 끝에 매단 무거운 금속구(球)로 되어있다. 또 그 밑에는 수평의 다이얼이 놓여져서 마치 시계의 문자판처럼 24신간의 눈금이 만들어져 놓여있는데 구(球)는 그 위를 왔다갔다 일정하게 흔들리고 있다.시간이 흐르면서 구는 시간을 식별하도록 흔들리는 방향을 바꾸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 다이얼 및 건물과 지구전체가, 구의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 구는 시종 같은 방향(同一方向)으로 흔들림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그림 6]은 다이얼의 문자판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하여 단순하게 그렸다. 그림처럼 다이얼은 진정(眞正) 북극 또는 남극에 두어야 비로소 정확한 것이다. 그런데 워싱톤 콜럼비아의 구(球)에서는 1일(日)의 주기(週期)가 38시간 강(強)이 된다. 이것을 수식(數式)으로 표시하면, 회전주기=24시간/Sine = 24/.6285 = 38.4가 된다. 과학의 가르침에 의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일 입방 인치(一立方 inch)안에는 500,000,000,000,000,000,000 개의 분자가 포함되어 있고, 그 분자들은 각각 급속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4만 2천분의 1인치만 움직여도 옆에 있는 다른 분자들과 충돌하고, 매초(秒)에 50억회나, 방향전회(方向轉回)를 하고 있다고 한다. 분자도 작은 것이지만 원자는 더욱 작다.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과학자들은, 원자는 궁극의 분할 불가능한 물질단위(單位)라고 생각해 왔지만, 실은 그러한 고체(固體)는 결코 아니며, 한 개의 중심 핵과 비교(比較)적으로 대단히 떨어져서 그 둘레를 회전하고 있는 한 개 또는 그 이상의 전자(電子)들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이 명확하여 졌다. 그래서 과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에 의하면, 우리들 주위에 보이는 고체는 보기에는 가장 현실적인 것들이지만, 그것은 보기에만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신화(神話)인 것이다. 사실은 아닌 것이 하나의 착각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를 말하자면 한이 없다.
감각기관(感覺器官)이란 것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지금은 잘 인식되고 있다. 촉각, 미각, 후각 등은 겨우 우리들의 육체적 물질적 행복감에 도움을 주는, 정보를 주는 역활 밖에 못한다. 우리들의 청각기관(聽覺器官)은 일초(秒)동안에 16회부터 3만 2천회에 이르는 진동을 11"옥타브"를 감당하지만 동물, 초류, 곤충 중에서는 인간의 귀(耳)가 반응해내는 한계(限界)를 훨씬 넘어서, 음(音)을 들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자연은 그들에게 인간이 취급할 수 없는, 아주 알아낼 수 없는 커다란 체험을 갖게끔 짜놓은 것일지 모른다. 오늘까지 알려진 빛의 파동은 60 또는 그 이상의 "옥타브"에 이르고 있지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중에 겨우 일(1) 단위의 "옥타브"뿐이다. 거기에다 우리들의 환경에 관한 지식은 다른 어느 감각능력보다도 시력에 의지하고 있다. 우리들의 지식은 단편적(斷片的)인 것이지만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세계는 경탄에 꽉 차있는 세계이다. 그 이모저모의 미(美)와 경이는 굳이 부정하려고 하는 무리들을 빼고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장엄한 경륜 그것도 새로운 발견이 될 때마다 그 신비를 더해가는 경륜이 전개(展開)하고 있는 것을 계시(啓示)하여 주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착각의 세계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치 않다는 것은 아니고, 그의 실상(實相)을 모른다는 말이다. 인간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세계는, 신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세계와는 똑같은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실재(實在)는 무한이고, 현현(顯現)이 없는 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제약(制約) 그리고 현현하고 있는 세계는 착각의 세계이다. 그렇다고 하여 현현하지 않는 것을 정의불능(定義不能)의 무(無)라는 잘못에 빠져서는 안된다. 오히려 정의불능의 일체(一切)인 것이다. 모든 현현(顯現)은 제약을 받고서 성립 되어 있다. 한 개의 사물은 그것을 다른 사물과 별개의 것으로 한다는 제약(制約) 아래 존재할 수 있다. 하나의 태양계이거나, 혹은 하나의 우주 같은 망막한 것이라 할지라도, 공간 속에 있는 한정된 것이라는 데는 차이가 없다. 무한이라는 것, 스스로가 현현하지 않는 것(이것이 궁극의 절대자이다)이라는 것은, 모든 반대가 사물을 생기게 하고, 존재시키고 때가 되면 그것들 모두를 흡수(吸收)하고 용융(鎔融) 시켜버리는 것 그것이다. 이제서야 우리들은 한 발 한 발 다가와서 일련(一連)의 사고의 정점(頂点)에 다다르고, 생명을 이해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주요한 열쇠를 얻어내는 데까지 왔다.
[그림 7]을 보자. 앞 [그림 5]를 닮아 있지만 좀 더 보충한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이러한 3개의 국면을 일으킨다. 의식이라는 것이 외쪽인 물질적인 사물을 취급하면, 그것은 공간에 존재하는 물건이란 착각의 올가미에 걸린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물건은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다. 모든 물체에는 넓게 퍼진 것과 차원(次元)이란 것이 있다고 우리들은 말한다. 말하자면 크기와 형(形)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크기(Size)는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고, 큰 것 혹은 작은 공간을 점(占)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물체가 큰 것이라든가,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즈"는 상대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며, 다른 물체와 비교함으로써 처음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손으로 잡힐 수 있는 정도의 돌(石)은 작은 것이지만 개미에게는 커다란 것으로 보일 것이다. 지구는 거대하다.ㅡ이것은 우리들에게 거대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태양은 백만 개의 지구를 그 안에 넣어도 여유가 있다. 그러므로 태양에 비한다면 지구는 작다. 어떤 물체이거나 그 자체로서는 큰 것도 아니며, 작은 것도 아니다. 크고 작은 것은 관찰(觀察)하는 사람, 또는 비교하여 보는 다른 물체의 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
의식을 의식자체에서 조사하여 본다고 하면 그것은 시간이란 착각의 함정에 들어간다. 의식은 의식 그 자신이 차츰차츰 전개(展開)해 나가며, 성장하는 것을 느끼고, 어떤 일이 생겨난 것은 그 이전에 생겨난 일부터 계속 이어져서 생기고 있다고 하는 식으로 의식한다. 시간의 길이는 똑같지만 환경이 바뀌어져 있으면 시간의 길이는 같은 것인데도 그것을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의 반작용에서 큰 차이가 생긴다.
의식을 영(靈)쪽으로 돌리고 보면 그것을 자아(自我)라고 말하는 착각의 함정에 들어가 있다. 그것은 자아를 다른 모든 자아들과는 다른 자아라고 보는 것(생각하는 것이다)이다. 그것은 처음에는 육체를 자아라고 생각한다. 따로따로(個別)로 생각하는 것을 자아라고 말하는 착각에서 극복해내는 것은 참으로 우리들 앞에 놓여있는 가장 어려운 난제의 작업이며, 그것과 더불어 진아(眞我)를 발견하기까지는 초극(超克)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될 계단이 많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것으로 해서 [그림 7]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인생에는 우리들이 부딪치고 넘어서지 않으면 안되는 착각이 3개가 있다. 즉, (넓게 퍼져가는것으로서의) 공간이란 착각, (연속으로서의) 시간이란 착각, (개별 존재로서의) 자아란 착각인 것이다.
제5장 생의 경륜經綸(The Plan Life)
앞장에서 말한 생각 방법에 의하면, 생(生)에 관한 설계(設計)전체는 공간, 시간, 자아라고 말하고 있는 기본적인 착각의 초극(超克)에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과거를 뒤돌아본다면 그 초극을 어떻게 한 발짝 한 발작씩 열고 들어섰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간(넓게 퍼져감으로서의)이라고 하는 착각에 대항하여 싸워 이기자면, 질료(質料)의 수많은 현현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을 계속하여야 한다. 그것은 과학이 몇 세기에 걸쳐서 행하고 있고, 물질에 관한 착각을 극복하고 더불어 더욱 커다란 진보를 하여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식의 길(道)이다. 우리들은 물건의 실상(實相)을 볼 줄 아는 공부를 하여야 되지, 눈에 보이는 꼴을 그대로인줄 알고 믿어 만족하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짜를 알아내는 길을 감으로서 우리들의 세계(진짜는 자연전체)를 속속들이 알게 되고 끝에는 "큰 사이즈"와 차원(次元)이라는 착각을 극복해내고 무한(無限)으로 된 공간을 배워야 한다. 시간(연속으로서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성(理性)의 길에 순종하면서, 생의 경륜을 모두 수득(修得)하여야 한다. 철학자들은 긴 연륜동안 이것들을 실행하고 있으며, 그 노력의 덕분에 시간이란 압정(壓政)을 추방(빠져 나온다)하고 있으며, 진실한 참모습이 문틈 사이지만 볼 수가 있고, 차츰 우리들의 앞에 나타나고 있다. 끝내는 우리들은 구원(久遠)의 지금(오늘)이라는 신비의 "베일"을 벗겨내고 영원이라고 하는 시간을 깨닫는 것이다. (따로 따로의 존재자로서의) "자아"(自我)란 착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귀의(歸依), 헌신(獻身)의 길을 지나(通過)가지 않으면 안된다. 과거의 위대한 스승들은 영성(靈性)의 법칙(복수)을 밝히고, 사람들을 이 세상(世上)에서 어린 시절부터 길(道)을 따르도록 인도하기 위하여 종교를 창설한 것이다. 영에 속하는 것(복수)을 발달시켜, 안(內)쪽인 성스러운 말(소리)을 개발하여 감으로서 차츰 우리들은 자아가 전일(全一, unit)인 것을 이해하는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 光耀, 빛이 나른다)에 이르게 되고, 거기서 비로소 모든 생명이 하나(一)였다는 것을, 자아가 하나의 일체(一體)인 것을, 그리고 그 하나 하나가 유일 실재(唯一實在)의 한 면(面, 꼴)인 것을 수득(修得) 즉, 알아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의식은 신의 의식과 유합하고, 그래서 인간의 "모나드(分神靈)"는 진화를 완성완료하는 것으로 된다.
제3강 공간이라 말하는 착각
자연과 협력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룰지어다. 그러면 자연은 그대를 그 창조자들 중의 하나로 여기고 순응하리라 그리고 자연은 그대 앞에 그 비밀의 방들의 문을 활짝열고 그대 눈앞에 그 순결한 미답의 가슴 속 깊이 숨겨져 있는 보물들을 드러내 보이리라.
H.P. 블라바츠키 침묵의 소리 중에서
제1장 현현(顯現)의 장場(The Field of Manifestation)
무엇이든지 간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공간을 차지(占)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 인간들이 육(肉)을 지닌 몸을 가지고 존재해 있는 한 우리들 자신에게도 해당되며, 그리고 우리들 주위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다.
생(生)의 경륜을 이해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우리들은 자신의 위치에 관하여 어느 때나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들은 공간과 사물이라 말하는 환경에 대한 우리들과의 관계의 진상(眞相) 및 그 환경이란 것의 실태를 인간의 마인드를 통하여 바라볼 수 있는 한 이해를 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보고 느껴온 몇 백년 동안에 인간의 지식의 지평선(땅)을 서서히, 그리고 착실하게 뒤쪽으로 밀쳐 내면서 쌓아 왔다. 그렇게 얻어낸 지식은 우주를 차츰 큰 것으로 확대해왔으며, 그 크고 장엄(莊嚴)함을 문틈사이에서라도 엿볼 수 있게 된 지금의 사람들에 있어서는 아주 감동적인 것이다.
망막한 우주의 모습이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고 있다. 이 거대하면서도 장엄한 것 앞에서 최대한도의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넓혀가지 않으면 안된다. "프란시스 베이콘(Francis Bacon)"은 이것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우주를 우리들 자신의 한도내로 좁혀(狹)서는 안된다. 그것이 지금까지 잘못된 루습(陋習)이었다. 역(逆)으로 우리들의 이해를 넓혀 커다란 것으로 만들고 발견을 거듭하는 동안에 새로운 우주상(像)을 만들어 가야한다."
이 영지(英知)에서 나온 말을 우리들은 가슴깊이 새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생존하는 이 지구에 관하여 지금부터 이 책으로 학습해 나가는데 있어서 지구가 광대한 계(系) "조직(Scheme)"의 일부이고, 그 계 "구성(Scheme)"은 먼 저쪽의 지평처럼 끊임없이 우리들이 알 수 없도록 물러났다가는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다가오곤 해서는 무언(無言)중에 우리들에게 더 분발하라고 격려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생의 경륜은 수많은 커다란 경이(驚異)들이 일상생활 안에서나 조그만 잡동사니 일 안에서도 쉽게 계시를 받아낼 수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유폐(幽閉)되어 있고, 사슬이 채어져있는 상상의 제약(制約)이란 틀 안에서, 공간의 거대한 것을 지각해 내거나, 그의 신비하기 짝이 없는 깊숙한 곳을 이해해내려고 바라는 것은 나무 위에 앉아서 고기(魚)를 잡아보겠다는 어리석은 것과 같다. 새로운 발견에 의하여 새로운 우주상을 받아들이려면 마음을 넓게 펼치고 큰 것으로 되어야 한다. 기분이 좋은 안락하고 평범하기를 바라는 것을 떨쳐 버리고, 우리들의 마음이 아무것에도 구속당하지 말아야하고, 결연하게 또 대담하게 유유히 더 높은 곳으로 날아 올라가게 하여야 한다.
간단하지만 이 책에서 연구를 진행하여 가는데 있어서 우리들이 상상할 수조차 어려운 큰 "사이즈(Size)"(복수)와 아주 이해할 수 없고 생각해낼 수조차 없는 머나 먼 거리를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성공을 얻어낼 수는 없더라도 이해해내려고 하는 노력은 그것의 거대한 경륜을 파악하게끔 하는데 필요한 마음을 조정하는데 확실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먼 옛날의 우리들의 사부님들의 노력은 후세에 이르러 놀랄만한 발달의 기초를 쌓아올려 주었는데, 여기에는 많은 여러 가지 기묘(奇妙)한 상상적 생각들이 있었다.
앞의 [그림 9]는 "바빌로니아인의 세계관(觀)"이다. 고대 바빌로니아인(人)의 세계는 평탄(平坦), 중공(中空)으로 되고, 외경(畏敬)의 념(念)을 가지게 하는 것으로 충만하여 있었다. 땅(地平) 아래는 대심연(大深淵)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몇 줄기의 기묘한 어두움의 강이 있고 몇 개의 샘이 바다와 육지로 물을 품어 올리고 있다. 그 아래 계(下界)는 육체를 벗어난 영들이 사는 집이 있고, 쉬오올(Sheol, 저승) 즉, 영원에 관한 추궁을 붇는 고통의 장(場)이다. 위 쪽의 밝은 데는 지구의 네 구석에 바람을 보관하는 창고, 공기와 구름이 위에 보이고, 비와 서리의 창고가 적당한 곳에 있어 아래 있는 지구(땅)로 내리도록 되어 있다. 최고천(最高天)에서 기쁨과 낙(樂)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을 위하여 영원한 지복의 상급천(上級天)(복수)이 있고, 태양은 낮에 천공(天空)을 가로질러서 운반되고, 밤 동안에 그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다음 날 아침 다시 지구에 일광을 비춰주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후, 좀더 진보한 학설이 나와서 [평탄의 지구]설은 시들어 갔다. "밀레쿠스(Miletus, 고대에 크게 융성했던 에게해 연안 이오니아의 옛도읍, B. C 494년 페르시아에 멸망함)의 탈레스(Thales, B. C 640?-546? 그리스의 철인으로 7현인의 하나, 물을 만물의 근원이라 함)"는 처음으로 지구는 구형(球形)이고 공간에 고정(固定)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후에 작은 수의 [방황하는 별들]이 지구와 똑같은 혹성이라고 인정하였다.
그 후가 "프토레미(Ptolemy, 프톨레마이오스, Claudius Ptolemaeus, B. C 151-127. 그리스 출신의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천동설을 주장함)"는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하여 주전원(周轉圓, Epicy-cles)이라고 하는 가정(假定)을 두고, 천체는 주기적 운동을 하는 일련(一連)의 수정(水晶, Crystal Sphere) 천구(天球)로서 지구둘레를 회전하고 있다고 하는 가설을 세우고, 그 때까지의 단순한 틀린 설을 바로잡으려고 하였다. 이것이 프토레미의 태양계설(Ptolemaic System)이었던 것이다. 피타고라스(Pythagores, 그리스의 철학자, 수학자, 종교개혁자)가 B. C 6세기에 지구가 태양을 공전(公轉)하고 있다고 선언하기까지는 이 프토레미설(說)이 1400년동안 부동의 지지(支持)를 받아왔다.
16세기에 들어와서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holas Copernicus, 1473-1543 폴란드의 천문학자)"가 태양은 정지해 있고, 지구 및 여러 혹성이 그 둘레를 공전하고 있다고 거의 반박의 여지가 없는 증명을 해 보였다.
그렇지만 이 생각은 태양이 매일같이 동에서 서로 움직이고 있다는 감관상(感官上) 느끼게 되는 압도적인 증거에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때까지의 옛 생각에서 좀처럼 무너지는 일없이 계속되던 중,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으로부터 50년이 지난 후인 갈릴레오(Galileo)가 처음으로 조잡한 망원경이지만 천공을 관찰하고 나서야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바른 것이라고 실지로 보게 되었다. [그림 10의 B]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오늘에는 별들이 태양의 둘레를 회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만,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태양을 포함하여 여러 별들의 진정한 성질을 알게 되었고, 그 때까지의 우주는 그때까지 꿈에서조차 본 적이 없었던 정도로, 말하자면 우리들 앞에 갑자기 팽창해 나타난 회기적인 일이다.
태양계 [그림 10의 C] 9개의 혹성과 그들의 위성(衛星) 및 수백의 소혹성「小惑星-직경 4마일부터 400마일에 이르는 혹성과 닮은 작은 물체이고, 먼 과거에 있어서 어느 혹성이 분해되어 흩어진 잔해라고 일부의 사람들은 생각한다」을 포함한 것이라고 모두들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태양의 직경은 865,380 마일이며, 태양계에서는 가장 큰 것이고 동태양계(同太陽系)의 혹성을 지배하는 천체의 일원("member")이고, 이들 전 혹성을 위하여 열과 빛을 생산하고 있다.
지구는 극에서 극까지가 약 8,000마일이고, 용적(容積)은 말할 것 없이 태양이 훨씬 크고, 태양 안에는 지구 크기 정도의 천체 100만개가 들어갈 정도로 크다. 여기에 또 조금도 미치지 않는 불가사의한 것은 태양에 비한다면 혹성들이 너무 작은 것이고, 태양과 혹성간의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지구는 태양에서 약 9,300만 마일 떨어져 있고, 가장 먼 명왕성은 약 40억 망일 떨어져 있다. 숫자가 너무 큰 것이라 우리들에게 수긍이 잘 가지 않는다. 그래서 축소를 하여 우리들이 이해하기 쉬운 숫자로 보완하였다. 그림에서 태양을 직경 3인치의 공(球) 정도로 했을 때 혹성(복수)을 그 비율로 축척(縮尺)히볼 것 같으면 그림의 점(点) 정도가 되는 것이다. 거리를 정확히 따져본다면 이 종이의 650장이나 되는 긴 것이라도 표시할 수가 없다. 여기서 3인치(7.6cm)의 공(태양)이 떠 있다고 하면 9피트 떨어져서 한 개의 종자가 있는데 그것이 수성(水星)이며, 16피트 떨어져 있는 종자는 금성(金星)이 된다. 우리들의 태양과 그의 혹성들처럼 거리와 공간을 비교하면 위의 [그림 10]처럼 아주 작은 것들이 공통의 한 중심(一中心)에서 발(發)하는 힘(복수)에 의하여 통제되고, 정확하고 올바른 규칙의 운동을 하는 것이다. 완전한 한 체계(一體系)를 구성한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믿을 수 없을 정도가 아니고 그것은 진실(眞實)이 아니다! 아주 물질적인 관점(觀點)에서 본다면 위 도표의 도상(圖像)이란 것은 슬플 정도의 불완전한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앞으로 신지학의 가르침을 배워나가면 명백해진다. 그런데 태양계 가족은 그의 양극의 끝에서 끝까지의 경계사이가 약간의 타원형으로 된 70억 마일의 공간을 점(占)하고 있다. 이 정도의 공간이지만 지금으로부터 연구해 가는 거리에 비해본다면 거의 무의미에 가까운 짧은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림 12]를 살펴보자. 좌에서 우로 혹성 지구와 태양계가 그려져 있다. 우리들의 태양은 다른 항성(恒星, 빛을 발산하고 있는 별)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들이 알아두어야할 것은 이러한 별(星)들이 전체(全體)로서의 섬우주(銀河) 혹은 은하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혹성들처럼 이들 섬우주(銀河)들도 역시 공통(共通)의 한 중심(一中心)으로부터 나오는 힘(복수)에 의하여 통제되어 둘레를 회전(公轉)하고 있다. 우리들의 은하(우리들의 태양계가 속한 것에는 1천억이나 되는 별이 있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고, 이러한 은하라고 하는 것들이 우리들의 은하(태양이 속한) 외에 수천 개의 섬우주(은하)가 성능이 좋은 망원경에 의하여 관찰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도 많은 섬우주(은하)는 공간에 서서(靜止)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론가 흐르고 떠서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 역시 공통(共通)의 한 중심의 둘레를 공전하고 있는 초은하(超銀河)라고 말해야하는 것으로 완전한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천문학은 증언하고 있다.
이와 같이 거대(巨大)한 것들 앞에서 "크기(Size)"나 "거리" 등을 계산하는 단위로 지금가지 써온 "마일" 정도로는 꺼먹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너무도 단위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천문학에서는 척도(尺度)의 단위로서 광년(光年)을 쓰고 있다. 한 줄기의 광선(光線)이 일년을 걸려서 도달할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광선(빛)은 매초(秒)에 186,000 마일(약 30만Km)의 속도로서 날아간다. 지금까지(1957년 현재) 발견된 가장 먼 별인 "퀘이사(, 항성 모양의 천체)"라는 별까지의 거리가 80억광년에서 90억 광년이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실태 속에 있는 인간들은 더욱 더 많은 것을, 더 큰 분야를 정복하여 보겠다고 보잘것없는 가냘픈 욕심으로 돌진을 계속하고 있다. 도표 12의 그림을 보도록 하자. 육체적으로는 인간의 신장은 6피트이다. 그림 속에 인간의 위쪽(上)은 지금까지의 탐구에서 얻어낸 것, 즉, 인간의 지식의 창고에 추가(追加)시켜 온 것을 크기나, 거리 중에서 그의 약간만을 표시하였다. 이 그림을 근거로 지금까지 알고 있는 크기ㅡ지구, 태양, 은하ㅡ를 뇌속에 그려본다. 그림 속의 인간상(像) 아래쪽(下)에 인간이 지금까지 직접 혹은 간접으로 관찰하고 계측한 것 중에 인간 자신보다 작은 것을 몇 가지ㅡ혈액세포, 바이러스, 원자, 원자핵ㅡ을 그려 넣는다. 1인치의 1초분의 1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미소한 원자핵(核)으로부터 차츰 큰 것으로 거슬러 올라와서 오늘까지의 시점에 관찰되고 있는 가장 먼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마음은 지칠 줄 모르고 쉴 사이 없이 돌진, 관찰, 그리고 분류하여 왔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몸이라 말하고 있는 6피트 남짓한 살아있는 기계(器械)속에,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 그것들을 해결해 주는 열쇠가 되어주는 여러 가지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는데 그는 그것을 소홀히 보고 지나쳐왔다. 그리고 그의 직접 또는 먼 환경을 형성하고 있는 최소부터 최대의 물상(物像)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자연의 법칙이 움직이며, 일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알고 있으면서도, 자연법칙이 영(靈)에 관한 것에서도 인간 안에 잠재하고 있는 신성(神性)에 차츰 눈을 뜨게 한 것에서도 똑같이 해당된다는 이치를 깨닫는 사람은, 아직도 매우 근소한 것이다. 하지만 똑같이 알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은 엄연한 것이다.
제2장 무한(無限)에서 인간으로(From Infinity to Humanity)
우리들은 지금까지는 천공(天空)이라고 말하는 거대한 반형 극장(半形劇場)을 바른 밑거름으로 삼아서 조사하고 그의 끊임없이 넓은 것을 간간이 틈 사이로 보면서, 어디에서나 질서(秩序)와 법칙이 뚜렷하게 있음을 보아왔다.
현대의 천문학자가 날카로운 관찰 및 완벽한 기술을 가지고 공간의 끝없는 깊은 곳을 끊임없이 연구를 거듭하여, 지금까지 인간들의 마음에서만 그려본 여하한 것보다도 훨씬 넓고 웅대한 우주에 관한 지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하여준 덕분에 전존재(全存在)의 장대하면서 장엄한 전 경륜이 인간의 어떠한 상상으로서도 미칠 수 없는 기묘한 것이었다고 밝혀졌다. 거기에다 또한 별들ㅡ우리들의 태양처럼 되어있는 태양(항성)(복수)ㅡ은 유한의 생명주기(週期)를 반복한다는 것도 알았다. 별들은 태어나서 성숙(成熟)하고 죽는다. 공간은 비어(空)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 먼지와 가스로 된 큰 괴(大塊)(복수), 말하자면 멀고 또 먼 과거에 소멸(消滅) 되었던 태양들의 찌꺼기「언젠가는 어차피 그것이 재료가 되어 새로운 태양들이 다시 구성되어 재 출현할 찌꺼기」로서 꽉 차있는 대 집괴(大集塊)(복수)로서 메우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직접 관찰의 한계를 좀 넘어서 외사법(外捨法)에 호소하여, 적당한 추리라고 생각되는 방법을 쓰면, 우리들의 태양은 그의 둘레를 돌고 있는 혹성 일가(一家)를 거느리고 있으므로 다른 어느 시기에 가서 다른 태양들, 그것도 거대한 수에 이르는 태양들, 또한 그의 일생(一生)동안에 혹성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추정하여도 당연한 것이 된다. 더욱 더 지구는 무수(無數)한 생명형태를 만들어 낸 것이 사실인 이상, 그렇다면 다른 혹성들도 어느 시기(時期)에는 적어도 지구와 비슷한 결과를 만들어 내지 않겠는가? 우리들의 태양은 보통 정도의 태양이며, 더 큰 태양(항성) 혹은 더 작은 태양이나, 더 젊은 태양, 더 늙은 태양들이 있는 것이다. 지구도 아주 보통 정도의 혹성이고 다른 혹성들에 비하면 크기가 평균 정도이다.
어떤 조그만 예외(복수)는 있다고 하여도 오늘날까지 알려져 있는 모든 천체는 같은 화학원소가 존재하며 똑같은 인력(引力)의 법칙이 모든 곳에서 일(作用)하고 있다. 빛은 어디서나 있는 현상이고 우리들이 이 조그만 혹성(지구)만이 선별(選別)된 특별한 틀린 결과를 가지게 만들어 냈다는 특정 조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다른 어느 혹성에는 생물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그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觀點)에서 본다면 전 우주는, 그의 존재의 모든 국면(局面)에 있어서 맥동하는 생명이 꽉 차있고, 진화는 지구라고 하는 한계에 부딪치고 있는 속된 과제를 하는 한도(限度)를 훨씬 넘어서, 밖으로 또는 위 쪽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규모(規模)야말로 참으로 장대(壯大)한 것이나, 신지학의 빛에 의하여 이것을 배우게 되면 일체의 제약(制約)에서 탈락(脫落)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서로간 맥락(脈絡)이 없었던 모든 부분에서 합하여 연결을 가지게 되어 정연한 하나(一)의 전체(全體)로 되어질 뿐 아니라, 전체를 뚫고 지나가는 경륜의 장대함에 호연(浩然)하면서 법열(法悅)로 바뀌어, 지금까지 얻은 지식에다 한 수를 더하여 경륜의 숭고한 목적이 계시되어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복수)까지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지학을 배우고 있는 동안에 우리 자신이 어느 새에 외적 현상이라 말하고 있는 하나의 겹피(복수)를 넘어서,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실재(實在)에 참열(參列)하고 있는 느낌이 온다. 배워갈수록 생명있고 무한의 우주의 존재,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생명과 지혜가 있는 것들이 한(限)없이 위로 위로 올라가서 상계(上界)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 곳은 최고의 낙(樂)의 음(音)이, 우리들 청력(聽力)의 범위를 벗어나, 저쪽을 지나가서 침묵 속에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이는 느낌을 가지기 시작한다.
법칙, 질서, 목적이 있는 것에는 끝내 영광과 힘이 차츰 더하여지는 신들과 보다 더 위대한 신들을 알게 되고, 그리고 모두 좋은 것만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 이 땅(이승)의 세상에서는 인간이 자신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의 힘(복수)을 알아내려고 처음에는 달라붙어서 노력하지만, 눈을 뜨기 시작하면 그 힘(복수)의 진가(복수)를 모르고 이기적으로 악용(惡用)한다.
그곳(저쪽)은 보기에도 공허(空虛)한 것이지만, 그 실은 생명이 꽉 차있는 무한(無限)한 공간(복수)에 관하여 "로드가타마 불타(佛陀, Lord Gautama Buddha)"의 말을 빌리면 "의(意)에 옮기는 힘"이 있고, "그의 율법(律法)만이 영속(永續)한다"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태양계를 창조하고 통치하고 계시는 분을 신이라 한다. 위대한 존재분「신지학 문헌에는 로고스(司神, Logos) 및 그 존재분과, 우리들의 관계에 관하여 이미 상당히 많은 논(論)을 하여왔다.」
이제 우리들은 우리들의 의식을 넓혀서, 태양계의 한계를 넘어 될 수 있는 한 천체 전부 즉, 은하우주, 초은하 우주, 더욱 그 앞에 있는 것들을 받아 넣는 데까지 왔는데 이번에는 더욱 한 발짝 더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 한 발짝은 이미 알고 있는 모든 물질계에 현현하고 있는 것과 그 안에서 삶을 계속하고 있는 생명을 묶어서 하나의 질서 있는 계(조직,) 그것도 그 포용성을 끝없이 확대하여 똑같은 목적을 그의 모든 부분에 불어(맛) 넣어서 활동시키는 계(系, Scheme)로 한 것이라야 한다. 앞에 첫머리에 우리들은, 그의 스스로는 현현하지 않는 실재(實在)에서 삼위일체의 현현이 발생한 것으로 배워왔다. 이 삼위일체가 전체(全體) 우주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림 5]에서 태양신의 세 가지의 성질을 배우고, 태양신의 삼위일체는 앞에 말한 궁극(窮極)의 "삼위일체"보다는 훨씬 아래쪽 수준의 사본을 그린 것이다. 이들 둘 사이에는 수많은 단계가 있는 것인데 그 정확한 수를 알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우리들의 태양계의 로고스(司神, Logos)는, 마치 우리들이 태양로고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관계를 보다 큰 존재 분에 대해서 태양이 가지고 계시며, 신지학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대대손손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지식으로서 본다면, 우리들은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그 위대한 존재 분은 은하계 주재신(主宰神)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은하계의 우주 주재신은 섬우주(은하우주)안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여러 태양계(항성 약 1천억 년)의 진화를 다루고 계신다. 또 그와 같은 것이 그 위에는 더욱더 위로 차례대로 있는 것이다.
창조의 전범위(全範圍)에 걸쳐서 그의 모든 단계마다 지혜에 의한 영도(靈道)가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한다. 우리들 내면(안쪽)의 신성(神性)이 낮은 개현(開顯) 상태로서는, 이와 같은 고원(高遠)한 개념을 충분히 이해해내지 못하는 생각이 일웅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배우면 배울수록 자연의 법칙은 하나(一)이고, 우리들 일상의 체험중에서 직면하는 간단한 것들이 실상에서는 최대의 우주법칙(복수)의 반영(反映)인 것을 더욱더 느껴지게 하여 주는 것이다.
크기(Size)라는 것은 필경에는 하나의 착각이다. 그것을 보는 것에 따른 실재성과, 저것과 이것 사이에는 우리들이 행하는 여러 비교(秘敎), 그실은 우리들 의식의 움직임에 대한 제약(制約)의 정도가 가져다 주는 차이에 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제약이 아주 없는, 또는 틀린 상태에 놓여 있는 존재자에게 있어서의 가치는 아주 틀린 것이 되는 것이다.
비경(秘經)에서 H. P. 블라바츠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신들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천체로부터 원자에 이르기까지, 별들로부터 한 개의 양초에 이르기까지, 태양보다 훨씬 못하는 천한 유기물에서 나오는 생명열에 이르기까지 형체와 존재라는 세계는 한 개의 거대한 사슬(鋂)인 것이다. 그의 고리(環)에는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유비(類比)의 법칙은 우주문제에 대한 첫째의 열쇠가 된다. 이것들의 서로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서로간에 감추어져 있는 관계를 통일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이 인간과 신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복수)를 이해하는데 부딪치게 되는 많은 어려움은, 둘 사이의 성질의 받아들이는 방법이 불완전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인간은 고생하면서 전지하고, 자기도 모르고 있는 안에 감추어져 있는 힘(복수)에 의하여, 앞으로 채찍질 받는 것이다. 신들이 만들어낸 천지(天地)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것이 때때로 막연해 지는 것이다. 대단히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들이나,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 몇 차례인지 헤아릴 수 없이 닥치면서 언제나 끝장이 올지 모르는 좌절은, 그 이유를 오늘의 입장에서는 설명할 수가 없지만 정상(頂上)을 바라보고, 위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바위(岩)뿐이 난간의 끝일지 모른다. 우리들이 최고의 심경(心境)에 있는 순간에, 신이란 여사 여서한 존재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그 위대한 것보다도 더 도저히 측정해낼 수 없는 더욱더 위대한 신, 태양계 주재신 마저도 앞으로, 위로 더욱더 진화 하려고 현재의 활동을 통하여 보다 고귀한 높은 곳(복수)으로 향해 항상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C. W. 리드비터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신조(信條)안에 이렇게 쓰고 있다. "더 이상이 없는 정도의 높은 수준(복수)이 되면 그 때에는 영광과 힘과의 차이는 모두가 우리들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는 것으로 되지만, 그러나 우리들 3대(大) 로고스(司神)와 한 태양계의 로고스(司神) 사이의 차이가 어느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으나, 어렴풋이 알 정도로 이해할 수가 있고, 따라서 부주의로 인해서 함정(陷穽)에 잘 떨어지는 학도의 실수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자와 우리들의 태양 로고스와의 간격은 우리들이 파악할 수 있는 이상으로 큰 차이라 말하지만 우리들이 오늘까지 신의 속성(屬性)으로서 알아온 최고의 거룩한 성질 전부, 즉 사랑, 영지(英智), 힘(力), 인내(忍耐), 자비, 전지(全知), 전능(全能), 편재(偏在) 이것들 모두 및 그 이상의 많은 것을 태양 로고스(司神)가 완전 겸비(兼備)하고 계실 거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와 같은 태양사신(司神)안에서 우리들은 살고, 움직이며, 그 본질을 가지고 있다."
제3장 물질의 성질(The Nature Matter)
우리들은 물질이란 것들에 둘러 싸여져 있다. 발바닥 밑에 있는 문지에서부터 천공의 태양, 달, 별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향에는 헤아릴 수 없는 종류의 물체가 있다. 몇 세기동안 사람들은 그렇게 다양한 사물들이 어떻게 생겨났을까?에 관하여 생각하여 왔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느 기초가 되는 원소가 있음으로 어떤 종류의 것이든, 모든 물질들을 거기서 발생시킨 것이다.
1천년 전에 그리스인은 그러한 원소가 있다고 말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훌륭한 철학자였던 "데모크리토스(Democritus)"는 어떠한 물건이라도 분할(分割)을 계속하여가면, 더 이상 분할할 수가 없는 극한의 입자(粒子)에 이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것을 "아토모스(Atomos)"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그 말은 절단불능이란 말을 의미하였고,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시대의 사상가들은 오늘날에 있어서 말하고 있는 "아톰(Atom, 원자)"은 너무나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고, 압축할 수도 없으며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 말하였다.
"데모크리토스"는 "아토모스(Atomos)"에는 3가지의 특수한 형이 있다고 추량(推量)하였다. 그는 딱딱한 물질은 거칠고, 무거운 원자들이 결합한 결과일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같은 시대의 다른 철학자들도 그것에 동의하였던 것이다.
또한, 원자에는, 갈고리 같은 것이 붙어있어서, 흔들리면 닮은 원자끼리 갈고리가 닫혀서 상당히 노력하지 않으면 떨어질 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형의 원자는 매끄럽고, 서로가 그 위로 자유스럽게 미끄러져, 물 같은 액체를 낸다. 셋째 번 것은 매끄럽고 가벼워서, 쉽게 공중으로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공기나 가스를 만든다고 말하였다. 그리스인들의 궁극의 입자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바른 것이었으나, 그 입자를 생각하는 방법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과학의 생각하는 방법에서 중대한 진화의 변화가 있었다고 말하였다.
어느 저묭한 과학자는 1890년대에 물리학 분야에 있어서는 주요한 법칙(복수)은 모두 발견되었으며, 이전에 행하였던 실험을 반복하여 거의 정해져 있는 사실(복수)을 조금 개량하는 것 외에는 거의 할 일이 남은 것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며, 극단적으로 당돌한 짓이었나, 하는 것을 19세기의 종말이 오기 전에 벌써 물질의 성질에 과한 새 발견(복수)이 되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은 옛 세기적 개념은 거의 전면적으로 붕괴가 되었고,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알리고 인간의 마음은 새로운 높을 곳(복수)으로, 재빠르게 옮기게 된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는 원자는, 모든 물질의 형을 만들어내는 원료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원자가 고체라는 생각은 아주 버렸다.
원자에 과한 학문은 아주 어려워졌으며 그 구조를, 그림도표를 통해 정확히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수식(數式)에 의존하지 아니하고서는 믿기 어렵게 됐다. 위 도표는 단순한 원자 2개의 구조를 좀 쉽게 알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기본적으로 모든 원자는 한 개의 중핵(中核)과 그 둘레를 무섭게 빠른 속도로 원 또는 타원의 궤도(軌道)를 그리면서 회전하는 한 개 또는 그 이상의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도표에 있는 것은 원자 중에서 가장 단순한 수소원자이다. 이 원자의 전자는 한 개뿐이지만, 다른 원자 안에는 100개까지, 혹은 100을 약간 넘은 수의 전자를 가지고 있다. 좀 더 복잡한 원자가 되면 여러 가지 전자궤도를 가지고 있어 원자가 다른 원자들과 화합물이 되는 것은 바깥쪽 궤도상의 전자 수에 따라 정하여진다. [그림 15]에는 2개의 안쪽 궤도에 있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어떠한 원자라도, 제2궤도의 전자가, 필요한 수는 전부 8개이고, 모든 원자가 전자(복수)를 더하여도 가장 밖에 있는 궤도를 채우느냐, 또는 전자(복수)를 잃(失)느냐에 따라 그 궤도를 벗어나는 것으로, 산소원자는 도표처럼 2개의 수소원자와 간단하게 결합한다. 그러면 양쪽 원자는, 그 원래의 성질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생명을 띄게 된다.
이 경우는 한 분자(分子)의 물이 된다. 이와 같은 분자의 수가 1000의 7승이란 0을 21개 가지는 한 단위이다. 원자가 확실하게 맺어진 분자를 형성할 경우, 원자는 여러 가지 정렬(整列) 방법을 선택함으로서 명확한 구조가 된다. 이와 같은 것으로는 결정체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그림 15]는 암염(岩鹽)이라는, 결정체의 원자배열(配列)을 나타낸 것이다. 14개의 나트륨원자와 13개의 염소가, 굳게 결합하여 결정을 이루고 있다. [그림 15]의 선(線)은 원자가 가지고 있는 힘(복수)의 방향을 표시한 것이다.
자연의 음파(音波)를 이용하여 기하학 모양을 형성해 내는 방법을 틈 사이로 보는 것은 아주 매력 있는 것이며 "차라도뉴"의 [음판]이 이것을 보여준다.
[그림 16]의 A를 보도록 하자. 이 음판은 딱딱한 진주제로써 적당한 받침대 위에 놓고 강성(剛性)을 주고 있다. 이 판 위에 모래(砂)를 조금 뿌리고 [그림 16의 A] 끝에 "파요린"의 활(弓)을 대고 당기면, 음이 나오는 동시에 모래가 저절로 혼자서 정열을 하는 데, 명확히 기하학 모양을 그리며, 그형은 상당히 복잡한 것들 [그림 16의 B]이 많다. 음의 율을 바꾸어 보면 지금의 모양이 무너지고 새 모양으로 변하여 온다. [그림 16의 C]
간단하지만 이와 같은 조그만 예로써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이 쓰고 있는 것이 흔하게 있는 일들이지만 그것이 결코 쉽게 흔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알게끔 라여주는데 도움이 될 줄 안다. 여가가 있으면 흔해빠진 흙을 한 주먹 집어서 주의 싶게 그것을 들여다 보라. 왜냐하면 당신은 그 한 주먹의 흙보다 더 놀랄만한 것을 당신 수중으로 넣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모든 금, 은, 동, 기석, 세상에서 경탄하고 남을만한 건축물, 멋진 기계류 등 모두가 그 뿌리를 말할 것 같으면 땅속 깊숙한 곳에서 출현한 것이며, 그것은 진정 눈이 휘둥그레지는 기적의 연속이었다.
만약 우리들이 한 입의 먼지의 구조 속으로 쑥 들어가서 볼 수 있게 된다 가정한다면 그 먼지의 신비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할런지 모른다. 질서와 정열함에 놀라고, 또한 모든 원자의 핵 안에서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의 방향(course)을 바꾸어 놓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잘 조정(control)하지 못하면 인류를 절멸(絶滅)시킬 수 있는 힘이 잠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상으로 모든 물질은 결정과 분자 및 원자까지 분해가 되는 것을 알았다. 본 장에 쓰고 있는 도표는 몇 가지의 직선과 곡선뿐이며, 그것으로 물질의 꼴(복수)을 바르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한 장의 종이에 쓰여져 있는 간단한 "심벌"만으로 장중한 교향악(交響樂)의 감(感)을 전할 수 없는 것처럼, 지금까지 보아온 전자는 입자라고 말하여도 되고 파동(복수)의 한 "시스템(System)"이란 말로 표현(설명)하여도 좋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거나 꼭같이 진리인 것이다라고 말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실제에 있어서는 양쪽의 성질을 가진 어떤 것들인 것이다.
그리고 전자, 원자 및 분자란 것들을 모두가 한결같이 어떤 형이든 파동을 만들어 낸다. 어느 저자가 말하기를 "물질은 그칠 줄 모르는 '리듬'이라 말하는 편이 가장 알맞다!"
과학자는 물질의 성질을 깊이 탐구하여, 물질의 원질이란 것은 파동의 "시스템"인 것을 발견하고,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의 세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음과 색, 산림이나 강, 산, 향기 좋은 꽃들, 우리들이 보면서, 스쳐 가는 모든 것들, 그리고 하늘의 성가대(聖歌隊)의 땅과의 조도(調度)는, 이러한 다종다양한 파동에 대한 우리들의 의식 안에 주어지는 반응이라고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설을 지지하고 있다. 우리들이 형성해 내는 심상(心象)의 명료성, 가촉성, 실재성은 신의 의식 안에 있는 진짜의 실재의 반영인 것이다. 이러한 일 절의 것들이 가능하다는 것은 우리들이 "신의 모습에 닮게 만들어져 있다"에 연유하기 때문이며, 결론적으로 우리들이 신에서부터 떨어져 있게 된 것은 먼 곳인 흙에서 "창조"를 해내는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확실하고 정확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들이 자연의 법칙의 새로운 것을 틈 사시에서 볼 때마다, 세계에 관하여 새로운 사실을 획득할 때마다, 그것이 우리들을 진실한 것으로 인도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들은 지금에 와서 하나의 생명 없는 물질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으로 힘차게 달리는 거대한 한 혹성이라 말하는 대집괴로부터 아래로 아래로 내려와서 한 입의 분자와 그 분자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라고 말하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스쳐볼 수도 없는 극미(極微)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물질의 생생함과 활력 있고, 박동 하는 신의 생명에 꽉 찬 것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림자의 세계에 머무르면서 불완전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착각(그림자)의 세상에서 나오지 못했지만, 아직까지도 미지(未知)로 되어있는 것들 속에서는 가늘한 것이지만 진입(進入)해 들어가면 궁극을 달성하는 날을 바라보면서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어느 때에 이르러서 알게 될 것이다.
제4장 물질과 초물질
우리들은 여기서 또 한번 우리들의 세계를 넓히는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번에는 보통의 감각이 경계를 넘는 것이다. 보통 우리들의 육체는 특정하게 전문화된 감수세포의 영역이 있고, 이를 크게 나누어보면 다음의 5가지의 종류가 된다.
1. 본다 ---------------- 시각(視角)
2. 듣는다 -------------- 청각(聽覺)
3. 맡는다 -------------- 후각(嗅覺)
4. 스친다 -------------- 촉각(觸覺)
5. 맛을 본다 ----------- 미각(味覺)
이러한 창문(窓)을 혼의 창문이라 말하고 있지만, 그 하나 하나가 감추어진 영인(靈人)이 물질세계를 의식하기 위하여, 열려있는 문(門)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들의 전문영역(領域), 즉 이러한 감관을 통하여 외부에서 온 자극에 반응하면서 의식을 일으키게 되고, 시각상(像) 그 밖에 다른 인상이 마음속에 세겨지게 된다. 그렇지만 인간이 지금까지 배워온 지식 중에, 보조수단의 도움없이 감관(感官)만을 통하여 얻어낸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된다.
감관의 면(面)에서 말하자면, 인간은 많은 점에서 하급동물보다 못하다. 곤충이나, 조류, 동물 중에는 인간보다 시력, 청력, 후각에 있어서 앞서있는 것이 있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감각반응은 완전한 것에서 좀 멀리 떨어져있다. 다음 도표에는 무수히 많은 파동 안에서 70 "옥타브스(Octaves)"만이 그려져 있다. 하나의 지푸라기 또는 다른 것으로 1분간에 2주파수의 정도로 진동시키면 첫째 옥타브스가 생긴다. 이것은 4, 8, 16 등 주파가 배로 증가하면 "옥타브스"는 하나씩 증가되며, 제5옥타브스에 이르면 1초에 32주파수, 35주파수, 35피트의 파장이 되면서 낮은 음이 사람의 귀에 들려온다. 주파수는 증가하면서 짧아질수록 음의 초자는 높아가며, 16옥타브스에 이르면 1초 동안의 파동률은 65536이고, 파장이 약 1/3인치를 넘어서게 되면 음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음이 소멸된 것이 아니고, 파동은 여전히 우리들의 고막을 두들기고 있지만 이막(耳膜)이 음파를 안의 의식으로 운반(전)할 수가 없게 되어서 들리지 않는 것뿐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초음파(Ultrasound)]의 영역(域)이다. 이러한 파동이 얼마나 현실적(Real)인 것인가 하는 것은 그것을 들을 수 있는 동물이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가령, 이 초음파를 이용하여 뜨거운 물을 끓이거나, 유리에 구멍(穴)을 내기도 하고, 기계의 조그만 부분을 청소하기도 하고, 이빨을 갈고, 다이아몬드를 자르고, 살균도 한다. 도표에 있는 것처럼 이러한 초음파(공기 또는 공기보다 조밀한 매체 안에 생긴다)의 영역을 지나서면 간접적으로밖에는 알아낼 수가 없는 전자파(電磁波)라고 하는 음파가 50옥타브스에 이르게 되면 파동은 더욱더 짧아져간다. 49옥타브스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우리들의 눈에 반응하며 볼 수가 있게 된다. 이것이 가시광선(可視光線)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가시광선의 파장은 적, 황, 록, 청, 남(藍)에서 인간 시력의 한계인 흙색(草色)으로 옮겨가면서 파장은 1인치의 1/36,000부터 1인치의 1/72,000인치로 짧아(줄어)지게 된다. 근색을 넘어서면 이미 인간의 눈에는 반응할 수 없게 되지만, 즉 보이지 않지만 "카메라"에는 보인다. [그림 18]은 똑같은 것의 사본이다. 왼쪽 그림은 연필로 쓴 것을 잉크로 문질러 보통광선으로 본 것이다. 오른쪽 그림은 위의 것을 특수필름을 사용하여 적외선(우리들에게는 어두운 것)으로 촬영한 것으로 문질러 지운 문자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적외선으로 촬영한 사진은 인간이 가진 눈으로서는 볼 수 없는 부분을 볼 수 있게 해주고있다.
위의 사실로서 보통 공기를 전도수단(電鍍手段)으로 하고 파동(波動)은 약20옥타브이지만, 그 중에서 인간의 청각이 잡을 수 있는 것은 11옥타브 정도이고, 현재 알고 있는 전자파(電磁波)의 50 또는 그 이상의 옥타브 중에서 겨우 인간은 한(1) 옥타브(可視光) 범위내의 가시광(可視光) 밖에 되지 않고, 인간은 그 범위 내에 있는 것만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외의 옥타브는 다른 간접적(間接的)인 방법, 관찰대상에게 미치는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야 알 수 있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세계에 대한 심상(心象)을 형성해 나가는데 있어서, 시각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우리들의 감각이 발달(진화)하여 지금의 것과 미지(未知)의 전자파까지 모두를 "커버"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들에게 계시하여 주는 것은 놀라운 것들이며, 상상해 보지도 않고서 지나쳐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감각기관을 연구하다보면 앞의 그림이 말하여 주듯이 몇 가지의 대단히 흥미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촉각은 제일 처음에 고체(固體) 물질에 관계하는 것으로 실제로 스쳐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각은 액체의 물질에 접하므로 써 비로소 생긴다. 후각에 의하여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은 가스형태로 되어 있어야 한다. 대상에서 나오는 가스는 농후한 것이라면 실제로 그것과 접촉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질은 고체, 액체, 기체로 구성된 것이며, 이 세 가지의 감관(感官)은 육체로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원시상태의 인간들은 이 세 가지의 감관에 의하여 그 식물을 먹을 수 있는 것인지 못 먹을 것인지의 판단을 하며, 또한 공기 안에서 생명에 위험한 유독가스가 있나 없나를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은 기온이나 육체상의 욕구를 충족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여러 가지 물질의 성질을 어느 정도 해득할 수가 있었다.
우리들은 지금에 와서야 감관에 이들처럼 의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감관은 우리들의 복지에 대단히 중대한 것이다. 그러나 청각에 있어서는 우리들에게 아주 새로운 것, 우리들에게 물질적 복지 이상의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인도되게 해준다. 우리들의 청력(聽力)은 제어(制御)된 음을 만들어내는 힘과의 밀접한 조정을 거쳐서 발달하여 온 것이며, "컨트롤"된 음은 차츰 고쳐져서 지금에 와서는 우리들이 서로의 의사소통에 쓰여지고 있는, 놀라운 정도의 복잡한 의미를 갖는 언어 "시스템"으로 되어있다.
이 방법 때문에 인간이 말하는 힘이 생기기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도저히 극복해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왔던 몇 가지의 어려운 벽을 뚫고 넘어섰다. 오늘날에는 우리들의 가장 깊숙한 마음속의 감정이나, 생각을 서로 교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렇지 못하였다면, 우리들은 침묵의 고독이라 말하는 것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벽 뒤에 영구히 숨겨져 있는 그대로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지금은 의사나 감정의 교환에는 일부러 상대방이나, 대상을 가리키거나, 만져보면서 접근할 필요가 없어졌고 그 뿐만 아니라 대단히 먼 곳에서 일어난 음을 의식래내는 것이 가능해졌다.
빛(光)은, 과학에 의하면, 비물질적 매개 안에서는 파동 혹은 "포톤(Photons)"이라는 "에너지(Energy)"의 입자(粒子)의 연속이라고 되어 있다. 처음의 세 가지의 감각은 주로 육체의 복지를 위하여 일하고, 다음 감각은 진심(Mind)의 발달에 기여하여주고, 여기에서 생각하면 연구하는 시각의 영향법위를 더 위로 넓혀서 인간의 영적 복지에 공헌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자연의 매력과, 날마다 나타나는 그 묘한 아름다움에, 환락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시각에 의하여 우리들은 지구의 경계(境界)(복수)조차 뚫고 넘어 자유로이 높이 오르고, 광막한 최고천(最高天)에서의 수 많은 장엄함 안에서 자신을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대자연은 우리들을 위하여 교묘하게 만들어준 "혼의 창문(복수)"을 써서, 물질보다 농밀한 보다 무거운 상태를 거쳐서, 보다 정묘한, 보다 치밀한 구조의 상태 안으로 차례로 옮겨가면서, 차츰 우리들은 물질세계의 제약을 초월하고 있다. 언제 이 곳에 왔는지도 모르게 진화하여 저 편에 버티고 있는 위대한 것(복수)에 접톡하고 있게 되어진다.
육체가 일하는 것은 육체만의 특정한 요구에 한정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듣는 것, 보는 것은 마음과 혼을 앙양(昻揚) 시키는 체험에 우리들을 인도할 수도 있고, 또 평상시에 인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이차에 우리들은 확실히 알아두어야 한다.
신지학의 개념에 의하면 빛은 에텔(물질이지만 가스보다 희박한 상태) 안에 있어서의 파동이다. 후자(에텔)는 통상, 광파(光波)의 급속한 진동을 운반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 질료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광관(光觀)은 "마이첼슨, 몰에이(Michelson and Morley)"씨가 행한 실험이나, "아인슈타인(Einstein)"이 창설한 상대론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려면 연구가 더 한층 양자에 관하여 행해져야만 하며, 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에텔"보다 더 정묘한 것이 실은 세 개 있고, 그것이 초에텔(Superetheric), 아원자(Subatomic), 원자(Atomic)라고 말하는 희박한 상태의 것이고, 모두가 질료(량)에 속한다. 인간은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여 물질적, 정신적, 영적 진화의 길을 더욱 높은 힘(복수)이 점점 활발하게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고, 인간은 점점 감각기관ㅡ장문ㅡ을 발달시켜서, 그것에 의하여 그는 의식적으로 이러한 고차원(高次元)적인 힘에 접촉할 수 있게 되면서, 그렇게 함으로써 물질세계에 관한 인간의 지식과 이해란 것은 거대한 진보를 해내게 될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신지학은 물질에는 일곱 개의 상태가 있고, 그것에 접촉하기 위해서 인간은 지금까지 다섯 개의 감각기관 즉, 다섯 개의 지각역(域)을 발달시켜 왔지만, 남은 감각기관 능력은 원래의 진화과정에 발달하여감으로써 우리들에게 초감각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학습에서 지금까지 우리들이 물질이라고 말하는 일곱 개의 아상태(亞狀態)란 것이 정말로 무엇인가 라는 것을 생각하며 연구하여 왔다. 이것은 어떠한 연구대상에 있어서도, 그 대상의 범위를 결코 한정(限定)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하나의 교훈(敎訓)으로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자연안에는 미지의 것들이 너무나 거대하게 있고, 우리들이 종말에 이를 때까지는 우리들의 지식을 무한이라는 것 안에 확대시켜 뻗어 나가도록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물질은 일곱 개의 부차(副次) 종류 안에서 우리들은 많은 종류의 물질적 힘을 표현시키는 매체에 관하여 지금부터 공부하여 가지만, 우리들의 주위에는 물질계에서의 표현한도를 훨씬 넘어서 넓어지는 힘(복수)이 있다. 인간은 부활(賦活)된 단순한 육체 이상의 것이 있는 것이다. 그는 다종다양하며, 복잡 다기한 기분이나 감정의 힘을 표현한다. 그것을 자신의 안에서 만즐어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그런것을 표현할 때 그 힘을 받는 수도 있다. 그것은 말이란 언어의 수단을 두고서 오는 것만이 아니다. 가령 사랑이나 노여움의 느낌을 받는 것이고, 사랑이나 노여움이 표현되었다고 하여, 그것을 정신적 개념으로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감정은 하나의 힘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힘으로 하여 전달을 위해서는 전문화된 질료를 필요로 하고, 또 사실은 그것을 가지고 있다.
이 질량은 [그림 20]에서 표시하고 있는 것처럼 "아스트랄 질료"라고 말한다. 이보다 더 높은 힘(Force), 즉 사고의 힘이 있다. 원리는 앞에 있는 경우와 아주 같다.
무엇이든지 여러 가지 일을 명확 하고 강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에게 정신적으로 자극하는 것이 되며 그와 같은 사람에게 가까이 있으면, 자신의 생각까지도 명확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멘탈 질료라는 것이 있어, 그것이 사고, 상념의 파(波)를 전하는 것인데 이 "멘탈"질료에의 감응은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보통 행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나 의지에도 또한 똑같은 힘이 있다. 그 힘은 강하며, 우리들의 그날 가날 생활 조건 안에서 언제나 어느 역할을 해내고 있다.
위의 [그림 20]은 질료의 모든 상태를 표시한 것으로 알기 쉽게하기 위하여 농밀도에 따라 한 칸씩 그린 것이다. 하지만 실은 전부가 서로간에 침투하고 있는 것을 명심하면 된다. 그것들의 개개의 상태는 각각 또는 일곱 개의 상태로 나누어져 앞서 말한 물질세계의 똑같은 상태에 대응하고 있다.
모든 질료는 실은 파동이며, 의식에 영향을 준다. 때로는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들 여러 가지 상태의 질료는 서로간에 간섭을 하지 않는 이치와 같다. 그것은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파장이 서로간에 간섭히지 않는 이치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이 쓰고 있는 의식의 매체의 성질에 의하여 눈에 보이는 것,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세계에 의하여 둘러 쌓여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미현(未顯)의 것, 이들 질료의 일곱 개의 상태 안에서 발현(發顯)을 하는 실제의 과정을, 인간이 현재의 발달정도로서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지성의 힘을 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또 한번 우리들 주위의 단순한 사물 안에서의 자연법칙이 움직임(일하는)에서, 우리들이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힌트"를 발견할 수가 있다.
아이작 뉴튼(Newton)경은 1672년에 행한 유명한 실험에서, 지금에 와서는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는 유리의 "프리즘(Prism)"을 써서 백광(白光)을 그의 구성요소(要素)인 일곱 색으로 분리하였다.
한줄기의 백광선이 삼면(三面)의 유리를 통과하면 [그림 21]에서 표시한 것처럼 반대쪽으로 빠져 나오면서 적, 동, 황, 록, 청, 남, 자색의 색대로 나누어진다. 시각기관을 통하여 우리들이 알게 되는 것은 모든 이러한 광선의 흡수 또는 반영하여 색의 세계를 생겨나게 하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만약에 순수한 백광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면 우리들은 유령(Ghost)의 세계(세상)에 살고 있거나, 또는 세계(세상)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층(層, Level)마다 제약이 있게 된다. 이것에는 최고의 층(Level)에서도 마찬가지다. 유일, 불현(不顯)의 실재는 성 삼위일체를 통하여 일하며, 질료의 일곱 개의 기본상태를 생기게 하고, 그것들이 여러 가지로 맞추어져서 조합되어서 유정(Inanimate), 비정(Animate), 인간(Human), 신(Divine) 등 모든 것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림 21의 B]
여기서 설명하는 방법을 바꾸어 보는 것도 이해를 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질료는 다종다양의 상태로서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유일, 궁극의 "라이프(Life)"의 원자로부터 나온 여러 가지의 서로 틀린 조합에서 된 것들이다. 생명 또한 다종다양한 방법으로 그 자신을 나타낸 것이나 그 나타냄이 아무리 틀리게 되어도 그 배후에 있는 유일의 생명이 있는 것이다. 도표의 좌측에는 우리들의 생명과 특히 연관이 있는 다섯 개의 질료의 상태를 그린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런 매체(복수)를 가지고 있으나 이러한 재질(才質)은 모두가 육체 안에 침투해 있고, 각각의 매체를 통하여 각각의 질료에 적합한 힘(복수)을 나타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아트마"질료 안에서는 의지의 힘을 나타내고, "부디"질료는 사랑의 힘을 표현하는 곳이 되고, "멘탈"질료는 초상화 및 구상화(具象化)하는 힘을 전하는 통로이다.
감정은 "아스트랄"질료 안에서 표현되고, 모든 생명력은 육체 안에서 특수화되어져서 육체에 의하여 쓰여진다. 이들의 서로 틀린 농도로 된 질료는 서로 틀린 방법에서 배열(配列)되어 있으므로, 필요한 주파수로 진동함으로써 생명의 각각의 국면(局面)을 표현하는 것이다.
또 한번 도표의 도움으로 설명하여 보자면, 전력(電力)이란 것은 사용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결과가 생겨나도록 할 수 있다. 만약 우리들이 여러 가지 재료나 부품을 가지고, 적당히 조립시켜서 적절한 형과 내부구조를 가진 전기모터를 만들고, 거기에 전기를 통하게 하면 전기가 생겨난다. 이 힘은 가령 의지의 세계(그의 지배적 특징의 힘)을 상징(象徵)한다.그렇지만 같은 재료로서 이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안배하면 전자석(電磁石)이 되어서 강한 인력(引力)을 생기게 한다.
이 인력(引力)이란 것은 "부디계(Buddhic World)(界)" 즉, 사랑의 세계의 지배적 특징이다. 그 다음으로 구조를 바꾸어보면 이번에는 전자컴퓨터가 되어, 수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된다. 이것은 추상(抽象) 사고를 상징한다고 말하여도 좋을 것이다.
전류(電流)를 전동선반(電動旋盤)에 연결시키면, 구체적인 사물을 만들어 낸다. 이 구상(具象)의 창조가 낮은 "멘탈"세계, 구상적 사고의 세계 기조(基調)인 것이다. 전열기(電熱器)는 온화하고 따뜻함을 만들어 안락하며 기분 좋은 정감(情感) 즉, 아스트랄 세계의 효과가 생겨난다. 또 전구(電球)는 중요한 시각(視覺)에 필요한 빛을 생겨나게 한다.
이와 같이 일하는 전류는, 그것을 통과하는 장치가 바뀌면, 그 결과는 틀린 것이 되며, 그 틀린 부분이 아주 폭(幅)이 넓을 것이다. 이러한 이치와 같이 유일(唯一)의 생명은 여러 가지 꼴의 질료로 된 구조를 경유하면서, 그 현상(現象)의 형태는 아주 바뀐 모습으로 되어서 나온다.
위의 말이 이해가 간다면 그와 같은 원리(복수)가 지구에서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물질계에 있어서 지구의 출현(出現)과 태양계 혹성군(群)내에서 지구의 위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배워서 알고 있는 질료의 상태를 조합해 보면서 지구 자체를 조사하여 보기로 하자.
[그림 23]의 중심의 검은 부분은 물질혹성(惑星)을 나타내고, 그 주위의 수 마일(Mile)로 공간에 버텨있는 부분에는, 희박한 질료로 된 여러 권역(域)이 있으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기권(氣圈)이라고 하는 가스상(狀)이 되고, 그것보다 더 희박한 것이 성층권(成層圈), 그리고 특수한 상태의 전리층(電離層)이다.
거기서 더 공간으로 넓어져, 거의 달(月)의 궤도까지 펼쳐 있는 것이 아스트랄 역(域)이라고 신지학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물질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아스트랄 질료로 되어있는 권역(圈域)이며, 아스트랄권과 지구에도 침투하고 있다. 그것보다 더 큰 것이 멘탈권역으로, 아스트랄 권역보다 훨씬 저 쪽으로 펼쳐있고 아스트랄 권 및 지구에 침투하여 있다. 이것보다 더 정묘한 권역(부디(Buddhic), 아트마(Atmic), 모나드(Monadic), 성권(聖圈, Divine))이 되면 사태(事態)는 확 바뀌어 버린다. 즉, 이들 권역에서는 따로 따로 된 구조(構造)라고 말하는 것이 없이, 태양계는 그 중심부터 제일 밖 혹은 왼측(左側)의 혹성궤도인 저쪽에 있는 망막한 연변(沿邊)에 이르기까지 단 하나의 내적인, 유기적(有機的)인 괴(塊)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몇 가지 다른 방법을 취하여 보자. 이 방법에서 알게 되는 것은 태양계에 관한 개념이 차츰 혼(魂)을 흔들리게 하는 밑바닥 부분이 되고, 태양계 안에 어느 곳에서도「텅텅 비어있는 공간」이란 것이 없다는 것, 그리고 어디든지 목적을 가진 활기에 찬 생명이 존재해 있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신의 생명은 어디서든지 있고, 통(通)한 육체감관(感官)을 가지고서는 반응을 얻을 수 없는 정묘한 권역(복수)에서는, 신의 생명은 물질의 지구상의 몇 층배(層倍)로 강하게 나타나고, 장엄(Gloria)한 것이다.
[그림 24]는 태양계의 물질 혹성을 나타낸 것이다. 검은 구(球)는 혹성으로서 각각의 혹성 이름이 쓰여져 있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혹성 9개 외에 2개의 혹성이 더 있다. 그 중 하나가 "발칸"이고 수성의 안쪽에 궤도가 있으므로 수성보다는 태양에 가까운 것이다.
또 한 개의 혹성은 아직 이름이 붙어있지 않다. 여기에서는 X로 하였다. 그의 궤도는 명왕성의 바깥쪽에 있다. 감추어진 특수한 탐사에 의하면 이 두개의 별세계는 현실에 존재하고 있으며, 언제인가 망원경에서 발견될 것이다. 이들 혹성에는 모두 아스트랄 권, 멘탈 권이 있으며, 어느 것이고 간에 물질 혹성을 둘러싸고, 또한 그것에 침투하고 있으나, 동시에 더 고급의 질료(량)를, 좀 더 고급의 질료상태를 형성하고 있는 더 정묘한 소재(素材, 복체) 전체 안에 말하자면 저려져(積) 있고, 차츰 멀리 뻗어서 가장 외측(外側)은 X를 넘어서 끝내는 태양계의 경계(境界)「원의(原義)에서는 "넘어 지나가서는 안되는 환(環)"」이라고 정하여져 있는 신계(神界)의 경계(境界)에 이르고 있다. 이런 정묘한 질료가 연속되고 있는 집괴(集塊)안에서 각각 아스트랄 권(圈)과 멘탈 권을 가지고 있는 물질 혹성들은 한 개의 중추(中樞)이고, 그 안으로 태양으로부터 "힘"이 끊임없이 흘러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의 혹성은 끊임없이 자전(自轉)과 공전을 하면서 태양계 전체의 격렬한 움직임에 기여(寄與)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림 25]는 완전한 상징도(象徵圖)이지만, 서로들 침투하여 섞여 있는 천체세계를 한번 그려본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검은 삼각형으로 나타내고 있는 물질전체는 서로가 최대한도로 떨어져 있으나, 그 아래 변(邊)의 아스트랄 권과 멘탈 권에서는 다른 천체의 아스트랄 권과 멘탈 권으로 차츰 가까워지는 거리에 있지만, 아직은 하나로 되지못하고 있으나, 4개의 높은 권역(圈域) 즉, 부디, 아트마, 모나드, 및 신성(神聖)권은 태양계 전역에 걸쳐 공통이라는 사실이다. [그림 26]은 [그림 25]안에 질료의 농도에 맞추어 밝고 어두움을 가감(加減)하여 표시하였다. 우리들이 보통 생각하기에는, 이와 같은 질료의 상태는 실체(實體)가 없는 세계같이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물질세계보다 훨씬 훌륭한 생명과 능력의 영역인 것이다.
화학반응에 의하여 해방되어 가는 힘(복수)이나, 원자의 표면에서의 전자의 변화에서 생겨나오는 전기효과는, "무한"이라고 말하여도 좋을 정도로 조그마한 원자핵(核) 안에 있는 힘(복수)에 비한다면 아주 작다. 그에 비하여 높은 차원의 세계(복수)의 더 정묘한 질료에서 생겨나는 힘(복수)은, 물질계에서 나오는 어떤 힘보다도 훨씬 큰 것이다. 태양계 안에는 7종의 형의 질료가 있으면서 계층을 이루면서 서로간에 침투하고 섞어져 있지만, 각 아층(各亞層)의 질료는 그것보다도 더 농밀한 아층의 질료보다는 훨씬 넓게 퍼져서 결국에 원자 아층에 으르러서는 우주 크기의 넓이로 퍼져있는 것으로 위의 그림에서는 그것을 그려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림 24, 25]에서는 태양이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은 그 정도 크기 그림으로는 태양과 태양계 자체와의 관계를 그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태양은 너무나도 위대한 나머지, 그 위대함을 묘사(描寫)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 태양이 신의 심장(Heart)이라고 말한다면 좀 진실에 가깝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태양으로부터 그의 별세계 전체에 힘이 흘러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우리들은 물질우주만을 생각하여 왔지만 실은 비물질(非物質) 혹성(복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가지 농도의 초물질 질료만으로 이루어져있고, 그의 수는 태양계 혹성의 총수보다 많다. 이것을 연구하려면 위(上)에서 내려다 보(觀)는 것, 즉 태양사신(司神)부터 시작하여 신지학에서 잘 말하고 있는 제3국면이라 말하는 창조활동의 시작에서부터 보아(觀)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림 21의 B]로 돌아가서, 그 그림은 백광선의 "프리즘"을 통과하면 7색으로 확산되는데, 그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성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일한 것으로7가지의 기본적인 농도의 질료가 발생한다는 것을 상징(象徵)하고 있다.
[그림 26]의 그림과 같은 방법으로, 신이 별도의 일하는 것을 그려볼 수가 있다. 신이 별도로 일을 한다는 것은, 신의 의식에서 7주(柱)의 강대한 신들이 발생하고, 이 분들은 미래의 진화활동에 있어서, 태양신의 대표들인 것이다. 이 분들에 관하여서는 이 세상에서 많은 성전(聖典)이나, 성스러운 문헌 안에 쓰여져 있다. 예로, 힌두교에서는 이분들을 "7프라쟈파티(Prajapatis)" 창조주로,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s)에서는 "7아멘샤스펜타스(Amensha Spentas)" 불멸의 성자라고 말하며, 이집트에서는 "신비의 7신", 유태교에서는 "7세피로트(Sephiroth)", 기독교의 성서에는 "신의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고 말하고 있고, 신지학에서는 "7혹성 연쇄사신(로고스)"이라는 술어를 쓰고 있다.
또 태양계의 궁극 지배자를 표현하는데, 간간이 사신(司神), 로고스이란 말을 쓴다. 그렇지만 신이란 말은 많은 영적(靈的)인 것인데 하늘의 계시를 연상시키므로 여기서 쓰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신이란 것은 미움, 질투, 노여움, 불의, 등 성스러운 존재의 속성과는 아주 양립(兩立) 할 수 없는 것으로 연상하기가 쉽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이러한 모순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것보다는 "신"에 관하여 모든 것에 아름다운 개념을 깊게 가지고, 넓게 도움이 되어주는 어떠한 사상의 본장(本章)을 가져주면 좋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신의 존재 분들에 대한 위대함과 영광에 가깝게 가려고 하는 사람은 영리하지 못한 것이 된다.
지금 생겨나고 있으며, 또한 우리들도 그것에 참가하고 있는 진화라는 끝없는 거대한 사업에는, 그에 비례하는 조직도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무수한 실시계획에 종사하고 있는 몇 개 집단과 위계(位階)가 있는 고급의 영이 실존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배우고 알아야 한다. 또 보기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텅텅 비어있는 공간이란 착각에서 였다는 것을 배우고 알아야 한다. 공간은 텅 비어 있는 것도 무음(無音)도 아니다.
우리들의 둘레에 있는 신비와 위대함이 보이지 않고, 들려오지도 않는 것은 우리들의 눈과 귀가 시원찮고 뚱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신비, 그 위대한 것은 지금도 실존하고 있다. 이것을 여기에서 확인하여 보자. 아직까지 본적이 없이 매료당하는 영묘한 색채(色彩),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황홀, 망아(忘我)하는 천상의 음률을 갖는 맥동하는 음······, 등은 지금도 실존하고 있다. 그리고 어디서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른들이 일을 하고 계신다. 서양의 성서에는 그 어른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즉 천사, 대천사, 좌천사, 주천사, 권천사, 힘천사, 능천사, 지천사, 직천사라고 말하는 어른들이다. 동양에서는 성전에 아이티야스(Aityas), 비아우스(Viaus), 디야나(Dhyana), 붓다스(Buddas), 디얀(Dhyan), 초한(Chohans), 이외의 많은 어른들의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분들은 신의 경륜을 실시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복수)에서 많은 위계(位階)와 집단으로서 일하고 있는 분들 중에서 극히 작은 수의 어른들이다. 전투에 투입된 군대(軍隊)의 배후에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작전이나 양식을 공급하는 조직이 있는 것처럼, 진화하여 가는 우주의 이러한 거대한 경륜에는 그의 성공에 필요불가결한 보이지 않는 일꾼(Worker)이 계신다. 이것은 결코 공상(空想)이 아니다. 그렇다고 상상도 아니다. 확실하고 명백한 상식이다.
이러한 말을 써서 기록해둔 선현(先賢)들은, 지금의 우리들보다 자연과 더 친(親)하게 지내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분들에게 말을 건네주는 "안에서 나온 소리"는 오늘에 이르러서는 거의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말하는 까닭은 밖(外)에서의 소리가 너무도 끈질기고, 조용히 유계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는 사람이 희소하고 드물게 되었기 때문이다.
7혹성 연쇄사신(司神)은 신의 대리자이며, 신 자신의 속에 있는 일곱 가지의 경락(經絡)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분들을 통하여 태양 사신(Logos)의 생명과 힘(, 복수)이 별세계(복수)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분들은 태양사신의 많은 일들의 "에이전트"이고, 각각 특정의 일들을 하여서 태양사신의 성업(聖業)에 공헌하고 계신다. 구극신(駒隙神)과 이 분들과의 관계는 말로써 설명하는 것은 불완전한 방법이고, 인간이 이것을 말로 표현하여 본다고 하면 이 어른들은 모든 것, 있는 것의 주인(主人)이 되는 어른 구극신)과의 별개가 되는 존재인 것처럼 보이고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모든 신비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신비는 1과 3, 그리고 7 즉 보기에는 따로 따로(側面)이지만, 실은 완전히 서로 조화하고 있는, 진정한 하나로 된 것이며, 구극신이 완전한 전 포용적(全包容的)인 존재를 말하는 일곱개의 국면(局面)이 된다. 이것이 지고(至高)의 사실인 것이다. 이러한 사신 어른(로고스)들은 각각 하나의 혹성(연쇄)의 지배신이다. 위의 그림은 우리들의 지구와 연결되어 있는 계(系)를 그린 것이다.
7개의 혹성 중에 3개만이 농밀한 물질천체(物質天體)이다. 혹성A는 2개의 천구(天球)에서 이루어지고 서로 침투하고, 고급의 질료, 즉 신성(神聖), 모나드, 아트마, 부디 및 멘탈(抽象, 具象) 질료로 이루어져 있다. 보다 더 농밀한 질료는 포함 되어 있지 않다. 혹성B의 구조도 A와 닮을 것이나 아스트랄 질료로 된 천구가 하나 더불어 있다. 혹성C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화성(火星), 혹성D는 우리들의 지구, 그리고 혹성E는 수성(水星)이다. 혹성F 및 G는 혹성B, A와 구성이 같다. 이 7혹성으로 하나가 완결(完結)한 연쇄를 형성하는 것이다. 다음에서 우리들은, 이들 천구를 차례로 돌고 있는 생명파(복수)의 신비를 탐구하게 되지만, 바뀌어 태어나는 법칙이, 인간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존재하는 모든 수준(水準)에서 일하고(적용)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음에는 [그림 28]에 설명하듯이 이러한 연쇄가 태양계 안에 7개 있으며, 각 연쇄는 하나의 혹성 연쇄사신(로고스)의 관할 밑에 있는 것을 배운다.
각 사진은 각각 독특한 기조(基調)를 가지고 있다. 상징적으로 말한다면 꼭 태양의 "스펙타클"처럼, 각 사신(司神)은 각각 다른 많은 색조(色調)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도 좋다. [그림 21의A참조]
이 어른들의 일하는 것은 자신의 관할 안에 있는 연쇄 내에 한정(限定)된 것이 아니고, 다른 연쇄에도 들어가서 서로 어울려서 자유스럽게 일을 하기 때문에, 그 그림을 보면 혹성연쇄의 구성은 전부가 전부 꼭같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구연쇄와 해왕성 연쇄에는 물질혹성을 3개씩 가지고 있으나, 다른 혹성연쇄(복수)에는 하나 밖에 없다. 다른 것에도 틀린(복수)점이 있으나, 여기서 이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어떤 설(복수)에서는, 혹성연쇄에서 3개가 더 있어 합계 10이란 설을 내세우고 있기도 한다.
이 건에 관하여서는 의견이 나누어져 있지만, 문제의 연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물질 혹성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거기에 지금까지 확실하게 해오던 일반원칙(복수)에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이 3개의 연쇄 문제는 끝맺는다. 이 건을 자세히 소개한 목적은 물질적 대상에 한정하고 있는 물질 과학자의 연구에서 계시된 부적당한 우주구성론(그것은 방대하다는 연구의 결과이고, 그것은 그 나름으로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키지만)과 비교하여 훨씬 먼 과거부터 연민하게 전하여져 오는 고대영지의 기록(복수)에서 그 지식을 뽑아낸 신지학이 제시하고 있는, 태양계의 장대한 도상(圖像)에 관하여 약간의 개념을 독자의 마음속에 눈뜨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직경 반(半) "마일"의 원을 그려서 [그림 10 참조] 그 안에 물체와(복수), 거기에서 생명을 현현해 낼 수 있는 유일의 영역(복수)의 한 개의 작은 공과 겨우 완두콩(豆) 크기의 작은 물체뿐이었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중심에서부터 전 원주(全圓周)에 걸쳐서 모든 부분에서 불어내는 생명을 띄우고, 약동하고 있는 질료로 된 하나의 거대한 집괴(마수)로서의 일대전주(一大全周) 혹은 일대권역(一大圈域)이라 말할 전체상(全體像)에, 그 장(場)을 옮겨놓은 것이다.
제5장 우주의 생성(生成)
인간은 로마신화에서 나오는 출입문과 대문을 지키는 수호신인 "야누스"(머리의 앞과 뒤 양쪽에 얼굴을 가지고 있다.)처럼, 뒤는 과거, 앞은 미래라는 두 가지 방향을 쳐다(見)보면서, 그 과거와 미래의 시계(視界)에 가려져 있는 면사포(面紗布)를 찢어 없애려고 하고 있다. 그 (인간)는 이 생존이라고 말하는 큰 "드라마(Drama)"가 언제 시작되었고, 언제 끝장이 오는가, 말을 하지만 정말 끝날 때가 과연 있을 것인가? 라고 본능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인생이란 것은 다수(多數)의 조그마한 시작과 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미 끝이란 것이 모두 작은 시작에서부터 끝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었기에, 그 어느 쪽에서도 마지막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도깨비의 불에 쫓아가는 것과 같은 꼴이며, 헛수고만 하고 있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건, 마지막에서의, 구극(究極)의 것은 우리들의 이해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에서 본다면 만물의 시작(始作)은 우리들의 추구(追究)에서 몸을 돌려 피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태양계에 관하여서는 그 시작에 거슬러 올라가서 그의 출현한 모습을 어떤 관(觀)을 가지고 볼 수가 있다. 지구의 역사에 관해서 암석이나, 방사능 물질의 변화, 침전암 층에 남아있는 화석의 연구에 의하여 많은 지식을 얻었다. 천체현상의 관찰은, 태양계 가족이 형성된 초기의 상태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여 주었다.
과거의 여러 가지 계시에서 나온 고대의 영지는 천지창조의 일들이 안(內)쪽에서 나온 것으로 쓰여져 있다. 말하자면 제일 처음에는 단순한 화학원소(복수)의 화합물(복수)들이 눈에 보이게 되고, 과학기구를 써서 관찰이나, 분석의 대상이 되기 이전에는 그 실에 있어 불가시(不可視)의 정묘한 세계(복수)에서, 심하게 그리고 긴 세월 동안에 걸쳐서 일(복수)을 해왔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질료의 초물질 상태라는 것이 소개된 덕분에 태양계에 관한 우리들의 개념은 많이 넓어졌다. 초물질의 혹성과 7주(株)의 혹성연쇄사신 어른들이 존재하고 계시다는 것을 논(論)하여 왔다. 여기서 처음으로 우리들은 소위 천지창조의 기원을 생각하는 데까지 왔다.
여기서 말하는 천지창조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서, 갑자기 무엇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비 현현과 잠재의 상태에서 현현과 활동의 상태로 바뀌어 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물질원자는 보통의 상태에서는 전기적인 중성(中性)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원자핵 안의 양전기는 전자 안의 음전기에 의하여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전지의 취득(取得) 또는 상실(喪失)이 일어나서 이 상태가 무너지면 양(陽) 또는 음(陰)의 전기상태로 됨으로써 전기현상이 생긴다. 말하자면 미 현현이란 것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앞의 [그림 13]에서 본, 태양사신이 은하 주재신(銀河主宰神)의 의식 속에서 미 현현의 상태이던 것이 현현하게 되면, 그 때에는 거기에는 분화된 영과 질료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어느 쪽이던 우리들이 의식을 가지고서는 인식해낼 수 없는 상태의 것이며, 우리들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근본이 되는 영이고, 근본이 되는 질료가 되고, 태양사신이 그것들에 붙어 일을 해냄으로서 태양계를 출현시키는 것으로 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은 태양 사신이 그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태양사신 스스로가 창조 과정의 장(場)이 되는 근본 질료가 되는 것이다. 태양사신은 그 안에 태양사신의 창조 에너지(복수)를 불어 넣어 주는 것이다. 이 기초질료는 "코일론(Koilon)" 안에 거품(泡, 복수)으로서 존재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거품이란 것은 신계(神界)의 원자(복수)를 말한다.
이러한 원자가 여러 모양으로 모여서 화합하여, 신계(神界, 아디계)의 아층(亞層, 복수)이 되고, 더욱 더 아래쪽의 농밀한 계층에 내려와서 그 곳에서의 알맞는 원자나, 분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림 29]의 제 1단계를 살펴보자. 태양신은 이러한 거품에서 일을 시작하여 하나 하나의 거품에 그의 성스러운 "에너지"를 스며들게 한다. 그렇게 하고 보면 그것은 말로 표현해낼 수 없는 강렬한 "에너지"가 되어 부활(賦活)되는 것이다. [그림 22]에서, 인간의 진화의 장(場)이 되는 5개의 세계(계층)안에 각각 힘(복수)을, 앞에서 말한바있는 전기장치방식을 빌어서 설명한 적이 있다. 그 장치는 전부가 꼭같이 본선에서, 내보내는 꼭같은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이 가정(假定)의 예를 빌어서 말을 계속하면, 도시에 전기 "에너지"를 제공하는데 쓰는 거대한 발전기를 신계(아디계)에 놓았다고 하자. 이 발전소에서 전선에 의하여 전류가 몇 천만의 가정이나 공장에 보내져서 많은 목적에 쓰여진다.
이와 꼭같이, 신계에서도 모든 종류의 모든 힘의 원뿌리가 있고, 거기에서 이런 힘은 전 혹성체계에 골고루 배분되는 것이다. 도시(都市)로의 전력공급의 경우 전압(電壓)은 수요에 따라 여러 가지 수준으로 변압(變壓)되어진다. 이와 꼭같이 각 세계의 원자는 위쪽의 정묘의 세계에서부터 아래쪽의 보다 농밀한 세계로 내려올수록, 그 힘은 자꾸 줄어든다.
신계에서는 원자는 화합(化合)하는 경우가 없고 자유이다. 그림의 제2단계에서는 궁극원자 49개가 모나드계의 하나의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원자들이 뭉쳐서, 둘둘 말하 올리면서 나선 꼴을 하고 있는 것 몇 각 나선마다 7개의 궁극원자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의 원자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말하자면 단순히 공식을 이용한 것, 또는 수학의 방정식을 쓰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과학자들은 물질원자의 실제의 상태나, 형(形)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과학에 관해서는 전연 문외한이 되어 있는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너무도 뚝 떨어져있는 영역의 실정을, 문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어떻게 해낼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문틈사이로 보는 정도는 우리들은 할 수가 있다. 그것에 관하여 유물론(唯物論)을 가지고 끌어내려 보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문틈에서 보는 정도밖에 되지 않아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림 제3탄을 살펴보면 아트마계의 원자는 꼭같은 과정으로 만들어져서 각 나선(螺旋)은 제2탄의 모나드계의 "코일론" 가지고 만즐어졌다. 제3탕에 그려져 있는 나선 중 첫 번째 하나가 다른 나선을 대표하여 그 과정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정(行程)이 계속적으로 행하여져, 하나의 세계(계층)의 하나의 나선은 그림의 안에서 그 위의 세계(계층)의 것들인, 7개의 나선에서 기본이 되어 나온 것이다. (7 × 7 = 49) 이 설명은 잘 기억하여 두어야 하겠다. 이와 같이하여서 보다 농밀한 세계로 내려온 원자 안에 있는 신의 "에너지"가 되어있는 거품의 수는 49제곱 씩 즉, 49; 2,401; 117,649; 5,764,801; 등등의 제곱으로 증가하여 간다. 이상은 모두 물질원자의 연구를 위해서 먼저 말하여 두는 것으로, 아마 다른 무엇보다도, 큰 것 즉, 차원(次元)이라고 생각하고있는 공간이 완전히 착각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表示) 있는 것이다. 외냐하면, 신지학도가 보고 있는 것, 그리고 또한, 초감각 능력을 발달시킨 사람들이 실제로 관찰해낸, 구조의 놀라운 사실들로 되어 있는 사실의 설명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게 된다면, 신이 다양하게 현현해 있는 안(內面)에 신의 전존재는 이 커다란 태양계 우주 안에, 모든 원자에 의하여 막연히 상승되고 있다고 말하거나, 그 안에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 아니고, 모든 원자 안에 실존(實存)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문틈으로 보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물질 원자 안에서의 7개의 나선은 저급의 아스트랄계에서 만들어져 있을 뿐 아니라, [그림 30]에서 표시하고 있는 것처럼 심장 같은 꼴을 하고 있는 것에 10의 나선이 병행(竝行)하여 감아져 있다.
거기에는 주요한 나선이 3개 있으며, 그림에 있는 좀 굴은 선이 그것이다. 그것은 원자의 둘레를 돌아서 중핵 안에 있는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태양사신의 삼위일체 즉, 3개의 국면을 거쳐서 태양사신부터 직접 오는 힘(복수)을 통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그 외에 7개의 부분나선이 있고, 그림에서 엷은 선으로 표시하였으며, 원자의 외직을 주회(周回)하고 중심으로 통하여 돌아간다. 그 하나 하나가, 7혹성 연쇄사신 중에 1주(柱)에서 나오는 힘에 의하여 부활(復活)되고 있다. 신의 "에너지"로서 충력된 거품의 수는, 물질원자의 경우, 138,000,000,000(130억) 이상이 된다!
과학자들은 원자의 구조를 탐구하기 시작할 때, 그것이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라는 것을 발견해낸 것도 당연하다고 말하면 당연할 것이다. 이것은 그 이전에는 물질이 딱딱하여 파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을, 현대의 과학자들이 연구해서, 원자는 결코 물건이 아니다 라는 선언(宣言)과 아주 일치(一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위의 도표의 물질원자는 물리학자가 말하는 원자는 아니다. [그림 19]에서는 물질의 종류의 부차(副次) 상태가 그려져 있지만, 그 중에서의 최고 [시초원자) 상태가 되는 것을 신지학의 견지에서 연구하고 있는 원자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리학자가 말하는 원자는 신지학적 견지에서 말하면 뿌리가 되는 원자는 아니다. 그것은 물질의 1단위(單位)이고 진정한, 궁극원자(아누, Anu, 산스크리트어)의 여러 종의 화합(化合)에서 이루어진 100 또는 그 이상의 원소를 몰아 형성한다. 비교(秘敎)의 연구자가 설명하는 원자와 과학이 말하는 원자와의 정확한 상관 관계는, 아직 정확한 정도(차이)를 알고 있지 못하지만, 양자 서로가 연구를 거듭하여 가면, 양자를 연결시키는 환(環, Link)이 끝내는 명확하게 되는 것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그리고, 과학자가 연구하고 있는 원자는 "에너지"의 양자(量子, 에너지의 조그만 다발)로서 방출한다고 생각하는 것 및 빛(光, Photons ; 계측 가능한 양의 빛의 단위)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사실을 갖고 본다면, 원자를 개개의 거품 즉, 신의 개개의 "에너지"에서 이루어진다는 신지학의 개념을, 과학자들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이러한 현상이나, 그외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맞추어지는 열쇠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하자면, 그것은, 물리학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제약(制約, 복수)이 허무한 것임을 알고, 신의 만상(萬象)의 배후에 있으면서 창조하고, 통괄해 가는, 지혜와 힘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로 마지막의 답을 내는 것이 되지못하고, 마지막의 답은 훨씬 저 쪽에 있다고 할지라도, 현재로 보기에는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장벽(복수)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을, 의식상태의 발달을 기달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의식은 상대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절대적인 것을 쌓아서 넣지 못하는 이상 우리들이 자연의 여러 가지의 경이(驚異)에 들어설수록, 우리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의 논리적인 가정(假定)은 그와 같은 경이는, 우리들이 관착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사실에 알맞은 어느 위대한 지자(智者)가 태어나서만 해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이런 명백한 추론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이것은 오늘과 같은 성과를 훨씬 넘어서, 한층 더 풍요하고 생산적인 여러 분야로 자신을 가지고 과학자들이 전진해갈 수 있는 확실한 하나의 기반을, 과학에서부터 빼앗아버리는 것이 되고마는 것이다.
다음 서로가 침투(浸透)하고 있는 각 계층의 원자의 구성이 끝나면, 분자의 결합이 뒤에 따르고, 이러한 물질계층에서의 일들이 수백 수천 만년의 긴 세월동안 계속되며, "윌리엄 크룩스"경이 몇 년 전에 제창하고 그 후속자들이 발전시킨, 화학원소의 진화가 천천히 행하여 왔던 것이다.
여기서 천지창조는, 태양신이 은하 우주신의 의식 속에서, 미현현의 상태로부터 나와, 그의 일할 수 있는 영역을 정하고, 공간의 거품(Bubble)속에, 그 성스러운 "에너지"를 불어넣어서 시작이 되었을 때에, 정말로 시작이 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물질원자(복수)가 출현하고, 그것들이 결합하고 화학원소가 되는 과정이 시작되었을 때는, 물질세계에 있어서의 창조가 "시작"한 것이다. 그 때부터 과학과 신지학이 설명하는 것이 같은 것이나, 틀린 점도 있다. 그것은 과학은 아직도 신의 창조와 생성(生成)에 있어서 하나의 요인이라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고, 무엇인가 외적인 힘을 가지고 온 사태를 설명하려고 아는 것에 대하여, 신지학에서는 그것을 원자 자체를 출현시킨 창조주에 돌리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의 "프렛. L. 윗풀" 박사의 지도에 따라서 오늘의 천문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다대(多大), 입념(入念)인 연구에서 기초하고 있는 먼지 구름의 가설에 동의하고 있다. 공간에 떠돌고 있는 희박한 먼지의 구름이, 태양(복수)이나 혹성(복수)의 탄생의 땅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몇 천억년 동안에 그것이 모이고, 응고(凝固)하여, 차례로 농밀한 무리로 나누어져 새로운 상태가 만들어졌다.
이 과정이 진행하면서 인력이 괴(塊)를 응축시키고, 열과 빛이 발생하고 다음에 나선(螺旋)운동이 생기고, 거대한 질료의 륜(, 링크)이 공간에 남아, 그의 중심부는 더욱 수축되고, 미래의 태양이 된다고 말한다.
또한 원시혹성(복수)은 중심을 향하여 소용돌이쳐 형으로 나가면서, 그 속도가 떨어져 갈수록, 그 속도와 괴(塊)의 크기에 따라서, 자연의 궤도가 정하여져 가고 끝내는 지금의 우리들이 대략 알고 있는 태양계가 출현하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신지학은 과학의 설명 중에서 주된 요점은 인정하고 증명도 한다. 그러나 신지학은 신이 시포에, 정묘한 상호침투의 세계(복수)동안에 나선운동을 일으키고, 정묘한 질료상태로부터 농밀한 질료상태의 나선운동이 주어짐으로써, 끝내는 영향을 주는 것이다. 최초의 선전시킨 충격의 성운상(星雲狀) 집단의 물질질료에 전해준 것을, 신지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괴(塊), 즉 바람이 불어오면 호수나 바다에, 공기보다도 농밀한 질료, 즉 호수 물과 바다 물에 영향을 주는, 말하자면 파도를 일으키는 것과 약간 닮은 것이다 고 강조한다. 우리들이 지금에서는, 고대의 영지가 명백했던 태양계의 장대함 그리고 태양계가 출현한 방법이나 과정을 어느 정도 보아왔다. 태양계는 전체로서의 신의 장엄한 체이고, 그 중심이 태양이고, 생명과 힘을 숨을 불어내고 있다고 생각하여도 좋다. 태양을 볼 적에 그 영광이 너무 커서 눈에 무엇을 가리지 않으면 안될 정도이다. 그만큼 신비의 태양이지만, 실은 우리들은, 다른 더욱이 위대한 신비를, 그 가장 낮은 또한 가장 제약받는 꼴로서 보고 있으면서, 거기에다 이것 저것 생각하는 정도이다. 즉, 좀더 높은 계층(복수)에서는, 태양의 영광이란 것을 도저히 그리고 모든 묘사를 써서도 당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스트랄 세계, 만탤세계, 영(코절)세계의 힘(복수)을 배분하고, 고급의 생명형체(복수)를 마치 아침 이슬을 공간으로 끌어올리는 것처럼 그들의 영적 끝점(Goal)을 향하여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빛에 의하여 완전히 둘러 싸여있는 이상, 태양의 존재를 결코 부정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신의 창조의 경이와 신비를 여러 모든 면에서 볼 수가 있는 이상, 신의 존재를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제4강 시간이라 말하는 착각(연속으로서의)
더욱더 강한 인내심을 가질지어라. 그대의 그림자는 이내 소명하지만, 그대의 내면에 있는 것은 영원히 살리라. 그대의 내면에 있는 것은 곧 지혜 자체이기 때문에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라, 그것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에도 존재하며 미래에도 삶의 끝이 없는 자아이니라.
H.P. 블라바츠키 침묵의 소리 중에서
제1장 3가지의 분출噴出(The Three Outpourings)
우리들 인간들은 도저히 알아 낼 수 없고 상상조차 불가능한 그 거대한 자연의 속안의 영역(복수)위에 넓게 덮고 있는 장막(帳幕)의 한 쪽 끝을 조금 들어 망양(茫洋)하게 펼쳐있는 저쪽을 잠깐 쳐다보았다.
그것은 잠깐 본 정도이지만, 그에 관하여 더욱더 노력을 계속하다보면 우주(宇宙)에는 경륜(經綸, 플랜)이 실존(實存)하고 있다고 말하는 확고한 확신을 얻어내는데 눈을 뜨게 하는 하나의 계시를 줄 것이다.
왜냐하면 공간은 보기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고 텅비어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것은 우리들이 공간의 부분에는 어떠한 형(形)을 하고 뭇은 전개(展開)단계에 있다. 신의 현현(顯現, 복수)으로 꽉 차있다는 사실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듣지 못해서 생겨나는 착각이였음을 이제서야 우리들은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창조의 물질적 국면(局面)만 보는데 급급했다. 말하자면 창조의 목적이 태양계의 하나의 태양과 그것에 따르고 있는 혹성들 그리고 그 혹성군(群)이 거느리는 각 가지의 농도에 따라 짙은 것, 엷은 것 등의 여러 형태를 한 초물질의 질료를 만들어 내는 것만 캄구하는 것에만 일해왔다.
이번에는 창조에 따른 숫한 작업분야에 있어서, 나타났다가 물러가버린 지금까지의 수많은 지난날의 생존자들에 관하여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행위(行爲)의 구극의 목적이란 것이 실은 성스러운 어른들 [신(神) 자신을 닮은 사본]을 무수히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잠재상태에서 나와서, 많은 세월(幾刧)을 걸쳐오는 동안에 끝내는 완성의 극(極)에 도달하는, 즉 신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1주(柱)의 신은, 처음부터 신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처음부터 신으로서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단순한 자동인형(自動人形)이고, 행위 하려고 만들어졌다면, 행위를 하고, 선(善)인 것으로서 만들어졌다면 선일 뿐인 것이다. 이 말은 신을 욕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신에게로 돌아간다는 뜻을 알리려고 숭앙의 마음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지혜를 가지고 이와 같은 심원한 사항(복수)를 통찰한다면, 마치 나무나 꽃이 종자(種子)안에 잠재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안에 잠재하고 있는 신의 힘(복수)을 품고 출발점에 서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는 안된다.
그는 적어도 생각해낼 수 있는 한의 모든 방법으로 실험을 당하고, 그것을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그는 모든 곤란을 넘고 넘어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전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모든 힘과 지식과 사랑을 발달시키고, 그 자신의 성스러움을 완성하므로서, 실제의 신 그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에는 노력이 하는 부단(不斷)의 상승하고야 말겠다는, 여러 가지의 노력이라고 말하고 있는 길(복수)을 획득해내고, 정복하고, 끝없이 확대해 가는 의식의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가서, 끝내는 인류의 영역을 빠져나와, 그리고 더욱더 위로 앞으로 나아가서, 스스로의 선택과 노력에 의한, 완전한 신격(神格)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생(生)의 경륜에는 숫한 국면이 있으며, 그것에 의하여 인간의 영적 힘(복수)이 자극되어서 성장하고, 그러므로써 완성의 길을 걷게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쯤에서 이것에 관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신을 삼위일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앞에서 말했다. 우리들이 여기까지 배워오면서, 전개하여 가는 진화의 과정을 이해하여 가는데, 이 삼위일체가 바로 기본적이라는 것을 약간 알게 되었다. 여러 종교중에는 이 삼위일체의 깊은 의미에 관하여, 안에서 나온 가르침을, 지금까지 잘 보전하고 있는 것도 있고, 그 안(內)에서의 열쇠를 잊어버리고, 그저 삼위일체의 기원(起源)만을 증명하는 외형(外形)만 남아있는 종교도 있다. 몇몇 종교의 삼위일체를 도표로서 표시하여 보았다. 다른 종교에서도 삼위일체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제외시켰다.
기독교의 경우, 단적(端的)으로 말한다면 교회의 지도자들의 삼위일체를 받아들이는 방법이 틀린 것이다.
이 심원(深遠)하고, 또한 경탄할 사실(三位一體)을, 부(父)되는 신, 그것도 큰 인간의 형을 한 하나의 인격신(人格神)이고, 그것이 만약 같은 인간이라고 한다면 누구엔가 아주 신랄하게 비난을 퍼붓는 생각 방법, 격정, 행위를 가지는 주(主)라고 말하게 되는 관념으로 타락(墮落)시키고 말았다. 깊은 지식이 계명 하는 장중한 창조주상(像)에 비하면, 교회 지도자들의 신상(神像)은 무엇이라 할까, 신이라 할 수 없는, 있을 수 없는 상(像)이 되고 말았다.
몇몇의 비교(秘敎)에서는 어느 정도 신의 상징적인 이름(복수)을 붙여서 여러 가지 비의(秘儀)를 가르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진실의 최대의 것이, 신에 의한 창조가 업(業)되는 3가지의 성질인 것이다.
생명의 큰 "드라마"는 3막(幕)으로서 연출되고, 그 "드라마"가 상당히 진행된 후 3막이 동시에 무대를 점하게 된다. 그것은 3개의 분출ㅡ성(聖)삼위일체에서 나온다. 3가지의 창조 행위이며, 각 행위는 그 삼위일체의 각 국면에서 나온다ㅡ이라고 말하는 행위인 것이다. 3가지의 분출은, 각각 2중의 효과를 생기게 한다.
제1의 창조 분출 행위는 에너지(질료)를 창조한다. 이것은 앞장에서 배운 것이다. 그것은 농도가 질서 정연한 7가지의 기본적인 질료를 만들어내고, 질료의 진화를 일으킨다. 제2의 분출의 기조(基調)는 생명(형태) 즉, 끊임 없이 증대하며, 확대하여가서 의식의 매체로 되는 생물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으로, 생물학적 진화, 즉 살아있는 형체(복수)의 진화가 시작된다. 제3의 창조 분출 행위는 영(혼)과 7가지의 분광선을 현현시킨다. 그 결과가 영적 진화인 것이다. 이것에 관하여서는 다음에 자세히 연구하기로 한다. 이상의 3종류의 창조를 마음속에 언제나 명확히 구분해 두어야 한다. 많은 함정을 피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 3가지 진화가 따로따로의 흐름이 아니고 (왜냐, 신의 경륜은 하나이고, 이 3가지 진화가 서로들 섞여서 함하여 뭉쳐 나오기 때문이다.) 일하는(움직임) 것이 틀리는 것 뿐이며, 이점에 관하여 학도 여러분이 혼동하고, 헛갈려서는 곤란하니 주의하여야 한다.
에너지는 특수한 현상(現象)이고, 언제나 질료와 관여한다. 질료가 에너지에 의하여 입혼(入魂)되고 있는 것처럼, 생물학상의 형체는 그 안에 생명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을 형체에서 끌어 나오게 하면, 형체는 붕괴되고, 원초의 구성소재로 돌아가 버린다. 형체는 화학적으로 전에 있었던 것과 같으나, 실제에서는 기본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그 형체에는 벌써 이전의 의식의 힘(복수)은 없는 것이다. 생명은 좀더 정묘한 질료로 된 형체를 점(占)하고 싶어서 물러간 것뿐이다. 과학자에게 생명은 수수께끼이다. 그것은 과학자는, 물질보다 더 정묘한 질료에서 이루어져 있는 몇 개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따라서, 생명이 물질에서 이루어졌던 형체에서 떠났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설명 못하는 것이다. 생과 죽음은 과학에 있어서는 꼭같이 알 수가 없는 신비이다. 이해로 인도해주는 문을 여는 열쇠를, 과학은 불행하게도 아직 못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세계에 투입하는 기기(器機)들이, 급속하게 많이 발달하여 가고 있으므로, 그의 발견은 그렇게 멀지 않을 것이다. 영도 또한 질료의 의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그 의복이 바로 [혼]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보아왔다. [혼]은 영적 세계(복수)의 정묘하게 만들어진 매체이고, 영적 힘(복수)에 특히 잘 감응(感應) 한다. 에너지(질료), 생명(형태), 영(혼), 이 세가지상(三相)은 태양신에서 나온, 근본적인 분화이며, 일체(一切)의 생물은 이것에서 생겨나오는 것이다.
제2장 생명과 형체와의 역진화(The Involution of Life and Form)
1874년 영국의 "벨파스트(Belfast, 북아일랜드에 있는 항구도시)"에서 당시의 영국협회 회장인 "틴들(John tyhndall, 1820-1893, 영국의 물리학자)" 교수(敎授)는 동협회의 집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지금까지 고통과 모욕을 당하여, 덮여져 있던 물질 속에는, 모든 형체의 약속과 힘, 그리고 생명의 특질이 있다. 그 연설이 있고부터 2, 30년 지난 후에 그의 후계자가 되는 "크룩스(Sir. William Crookes, 1832-1919, 영국의 과학자)"경은 위의 의견을 뒤집어서, 같은 집회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생명 안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형체의 힘이 있다. 이 두 가지의 의견은 긴 세월동안 많은 논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서로 상반하는 견해차이의 대표적인 것이다. 어느 학파에서는 원자 안에 있다고 알고 있는 힘(복수), 그 원자가 결합하여 살아있는 세포(細胞)를 창조하고 있다고, 세포들은 많은 복잡한 집합을 이루고, 그것이 의식을 갖는 존재들의 체(體)를 형성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질료 안에는 이렇게 말하는 모든 것을 해내는 힘, 거기에 장차 더 훌륭한 힘이 되는 것이 있다고 이 학파(學派)는 주장하고 있다. 다른 반대파는 생명이야말로 실재(實在)이고, 질료는 생명의 힘을 위하여 타고 다니는 물건 같은 것이며, 생명을 움직이도록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영쪽은 모두 자기의 설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꼭같이 엷은 논리를 진행시킨 것이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의 우리들의 연구해온 빛에 맞추어 보면, 이 양자의 견해는 바른 것이고, 또한 동시에 또 틀린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느 견해이건 진리의 큰 요소를 포함하고는 있으나 불완전한 것이다. 에너지와 질료는 따로따로의 것이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란 것을 지금에 와서는 실증이 가능한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는 한 장의 종이 앞과 뒤, 혹은 전기의 상반하는 극과 같은 것이다. 이런 것은 생명과 형체에서도 해당하는 말이다. 거기에다 양자의 견해는 양쪽 모두 생명-형체 및 에너지-질료의 틀린 차이를 알지 못하고 있다. 후자는 운동이라는 결과가 생기고, 전자는 살아있는체, 말하자면 의식이 타고 다니는 기구를 형성하는 것이다. 운동은 의식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본적인 필수품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다른 일대(一對)의 상반하는 것(복수)을 배우도록 하자. 이것을 알게 되면, 앞에 말한 두 가지의 견해 사이에 나오는 고난을 쉽게 해결할 것이다. 우리들은 진화에 관하여 여러가지 말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반대가 되는 역진화에 대하여서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하여두지 않으면 안된다. 즉, 질료 자체의 안에는, 무한(無限)이라고까지 생각되는 양적(量的) 및 질적으로 발전, 확대하는 힘이 있는 이상, 그 힘은 어디선가, 언젠가, 시작했을 때, 그 힘은 거기 질료 그 안에 잠재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고, 그 힘을 끌어내는데는, 단지 시간과 적당한 조건이 필요하였을 뿐이다.
[그림 29]에는 서로가 침투해 섞여있는 세계(복수)가 구성하는데 필요한 재료가 만들어져 감에 따라, 차츰 농밀해져 가는 것을 단계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신의 힘(복수)이 단계마다 차츰 압축 당하여 각 계층의 원저구조 속으로 들어가서, 끝내는 가장 농밀한 물질 원자까지 밀치고 마는 것을 보아왔다.
신의 힘이 질료 속으로 들어가는 이 과정(過程)이 역진화(逆進化)인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물질원자의 핵심을 탐구할수록 그 안에 놀랄만한 힘이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질료가 그 힘을 창조해낸 것은 아니다. 힘과 그 물질적 의복은 동시에 존재해 들어갔다. 양쪽은 어느 것이고 상대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과 형체와의 관계에서도 이와 꼭같은 것이다. 이 양자는 2개가 아니고 1인 것이다. 양자는 짝이 되어 꼭같이 들어가는 것이라, 진화가 시작되기 전에 실은 역진화의 과정이 먼저 행하여지고 있었다.
앞서 [그림 34]에서 서로 침투하고 있는 물질, 아스트랄 질료, 멘탈 질료에서 이루어진 세계를 약시(略示)하고 있다.
이것보다 더 위쪽의 영적 세계(복수)는 우리들의 경험에서 너무나 멀리 동떨어진 것이라, 거기에서의 형체를 만들어내는 일에 관하여서는 그다지 잘 알지는 못하고 있다. 우리들은 단지, 생명이 높은 "멘탈"세계에 출현하게 되는 때부터 시작하는 것뿐이다. 이 제2분출의 시초의 단계의 목적은, 이들 세계의 질료의 특질이 주어지는 것, 즉 이들 단계의 목적은, 이들 세계의 질료의 특질이 주어지는 것, 즉 이들 질료가 훗날에 내부와 외부로부터 자극이나 충동에 감응해내는 생체(生體)가 이루어지도록, 이들 질료에다 신의 창조성이란 것을 국면에 골고루 꽉차게 메우는 것이다. 이렇게 일을 시작하게 한 멘탈세계 및 아스트랄 세계의 질료를, "엘리멘탈 에센스(Elemental Essence)"라고 말한다. (그림 36참조)
이것은 원래 제1 분출 동안에 창조된 최초의 소재(素材)인 것이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서로가 당겨, 결합해서 분자가 되었고, 신의 생명의 국면이 침투해서, 의식을 가지는 형체로 되는 성질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체 안에는 에너지(질료)뿐만 아니고, 생명(형체)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3개의 세계의 "엘리멘탈 에센스"는 더욱더 결합을 거듭하여, 지금까지의 것 보다 더 큰, 조직된 형이 되고 이것을 엘리멘탈 왕국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고위 멘탈 세계에서도 제1 엘리멘탈 왕국이라 말하며 저위 멘탈 세계 및 아스트랄에서는 각각 제2, 제3의 "엘리멘탈 왕국"이라 말한다. 이것들은 일시적인 존재이며, 의식의 매체(멘탈체와 아스트랄체)를 형성하지만, 개체(個體)로서는 지속성은 없다. 이들은, 끊임없이 형성과 재형성을 반복하면서, 그 모양은 마치 해변의 파도가 불어났다 밀려가는 것처럼 되었다가, 혹은 또 바람부는대로 하늘에 떠돌아가면서 어떤 형을 만들었다가는 또 다른 형을 만들었다가하는 구름들의 그 모습과 비슷한 것이다. 생물로 바뀌어진 존 더 높은 세계, 특히 고위 멘탈 세계의 "엘리멘탈 에센스"인 경우는 그 양상이 물질세계에서 불처럼 가지각색으로 변화하는 모습, 가령 온도에 따라 색이 바뀌고, 정다운 따뜻함을 주는 열과 빛을 내기도 하고, 때로는 힘으로 불태워버리는 그칠 줄 모르는 힘을 보이기도하고, 그런가하면, 압도하는 것 같은 위험을 가지고 불타는 듯한, 천변만화의 각양각색의 생물처럼, 빛에 기형(奇形)을 내는 것과 닮은 것이다.
보통생활을 하면서 보내는 인간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전문적이고 현실 적에 있어서 소득이나 이익에서 현실적 가치가 없어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높은 차원의 체(복수)들이 이러한 질료로서 만들어져 있는 이상, 이것은 우리들에게는 밀접라면서 또한, 끝없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 성질을 알게 됨으로서 우리들은, 멘탈체, 아스트랄체라는 우리들의 용구(매체)를 개선(改善)하여, 유용한 것으로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엘리멘탈 에센스"의 움짐익을 알면 자아의 통제에 실제로 도움이 되고, 육체의 건강에도 연결된다.
다시 [그림 34]를 보자. 생명의 파(波)는 아스트랄계에서 물질계로 옮긴 후에 여기서 농밀한 행동영역에 말려 들어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주목하게 만드는 것은 그림 안에 나와있는 2개의 움직임의 흐름이다. 그 중에 하나는 세포 안에서 끝나고 있는 것이다. 세포는, 모든 생물이 형성되는 기초인 것이다. 말하자면, 한 장의 연와(煉瓦)와 같은 것이다. 또 하나의 흐름은 결정(結晶)으로 끝나고 있다. 제2의 분출이 홀연(忽然)히 흘러 들어가는 시점은 여기라고 정하여져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제1 분출에 차츰 영향을 주면서 차례대로, 주된 요인으로 되는 것 같다. 여러 가지의 모든 질료는 원자로 되어간다는 사실을 앞에서 말한 바 있다. [그림 30]은 감추어진 연구에 의한 원자의 도상(圖像)이다. 화학자가 말하는 원자는 물질세계의 미립자분야(微粒子分野)에 속하는 것이라고, 비교(秘敎)의 견지를 정확히 설명해주고 있다. [그림 15]의 수소원자와 산소원자를 어림으로 그린 것이지만, 양자가 화합과 동시에 보일까 말까하는 정도의 작은 양의 물(그 수는 100만개가 한 방울의 빗물이 된다!)이 된다고 약시하고 있다.
[그림 35]는 화합원자간 상호의 차이가 생기는 이유를 표시하고 있는 복합도이다. 그림 중앙의 검은 점은 원자핵을 표시한 것이다. 그 바로 아래, 안쪽에 ① 백색의 원이 있고 그 옆에 H의 문자가 붙어있다. 이것은 수소(水素) 원자가 한 개의 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림 오른쪽란에 1번은 수소로 되어 있다. 원자핵의 위쪽 ② 그것의 오른쪽 옆에 "He" 문자가 붙어있다. 그리고 오른쪽 표에서는 2번은 "헬륨"이고, 헬륨에는 전자 2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숫자는 전자의 수를 말하고 전자가 하나씩 불어날 때마다 (핵 안에 양자도 전기적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하여 같이 불어난다) 다른 틀린 원자가 생기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딱딱한 질료인 탄소(炭素)에는 6개의 전자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하나를 더해주면 질소(窒素)가스가 된다. 이와 같은 원소가 현재는 10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다음 단계는, 이들에 2개의 분출이 작동한다. 즉, 원자가 화합(化合)하여 분자(分子)가 되고, 더욱이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주위에서 잘 볼 수 있는, 많은 원소와 화합물(化合物)로서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이 시점에서, 제2 분출이 물질계에 들어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제1 분출의 것과 겹쳐져서 있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원자영역내에 있어서의 보조의 일이고, 마치 온도의 변화처럼 여러 가지 원소의 형성에 필요한 조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 물질구성 요소가 조금이라도 변화를 하면서, 생겨나 있는 질료 외의 눈에 보이고 있던 특징들이 대단히 바뀌어버린다. 태양사신이 직면하는 문제 지고의 경지에 이르고 있는 태양신이라 할지라도 그 나름대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된다. 창조해낸 원자를 어떻게 해서 더 큰 집합체로 만들어서 그것이 환경에 대하여 한층 민감해져서, 생명을 더 풍요하게 표현시킬 수 있나 하는 것이 문제로 된다. 기독교의 복음서에 다음과 같이 예수가 말한 것이 있다. 「두사람 또는 세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으면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대의 안에 있으리」라는 신비적인 말이 있다. 이것은 존재라는 여러 가지 국면에 해당하는 진리인 것이다. 구리들은 이것이 정신적이거나 또는 영적이거나의 진리인 것을 알고 있다. 예수는 [그림 33]에 표시하고 있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중에 제2를 말한 것이다. 두사람 세사람의 친구가 친목과 조화의 정신에서 서로 만나고, 유의의(有意義)의 사안을 가지고 의견을 교환하면 유익한 것이 생긴다. 조화와 이해의 강한 뭉치가 생겨서, 그것은 환희와 이익을 체험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교우(交友)에 버금가는 큰 환희를 가져다주는 것은 흔하게 있는 일들이다. 불과 몇 명의 사람이 신의 이름으로 영적 성원(誠願)을 불태우면서 모여진다면 그것이 진정한 계시체험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신은 그 안에 임재(臨在)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원자나 분자처럼, 아주 미소한 정도의 것들조차, 둘 또는 세개의 원소가 어떤 연유로서 결합을 해서, 그 시점부터 일체가 되어 일을 하게 되면, 어떠한 일이 정말로 생겨난다! 즉 생명이 나타난다. 의식이 출현한다. 제2 분출의 현현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그림 36]은 그간의 여러 가지의 사정을 단순한 표로 표시하고 있다. 우리들은 수소와 산소가 하나로 되어 물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 유황의 1원자, 산소의 3원자를 더 보태면 황산이라는 극약이 된다. 탄소원자 2, 수소원자 6, 산소원자 1을 보태여 일체가 되어 일을 하면, "알콜"이 된다. 이와 같은 낮은 경역(境域)에서 관찰되는 생명이 일하는 것을 (이것을 우리들은 화학반응이라 말한 것으로 설명한 바 있다.) "애니 베산트" 박사는 그의 저서 의식의 연구에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화학원소는 확실하게 서로 끌어당기고, 그의 화학적 결합관계는, 다른 짝이 들어감으로써 끊임없이 부서지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 어느 한 쪽은, 원래의 짝보다도, 그 전에 결합한 상대의 한 쪽에서 강한 상성(相性)을 느낀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은염(銀鹽)을 구성하고 서로가 성실했던 짝은 만약 염산(鹽酸)이라는, 다른 짝이 그의 평화스런 가정에 들어가면, 돌연 서로가 부실(不實)로 되어 버린다. 은(銀)은 염소에 딸려 들어가서 자신의 배우자로 삼고, 그 전의 상대방보다 더 좋은 사이가 되어 염화은(鹽化銀)이라는 새세대를 만들어내고, 버림받은 수소(水素)는 그 자신이 버린 옛 상대와 결합한다."
너무 공상적인 것 같은가? 그렇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아주 미세한 살아있는 것 사이에는, 이와 같은 것이 거의 무한(無限)으로 반복해서 행하여지고 있다. 그들 안에는 의식이 있으며,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언제나 조화와 안정을 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림 36]의 몇 배의 더 많은 예를 들어 설명할 수가 있으나, 이 그림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화합은 차츰 복잡하게 되고 있는 것이며, "헤모글로빈(Hemoglobin, HB, 血色素)에 이르러서는 아주 많은 것들이 타소 712, 수소 1,129, 철 1, 유황 2, 산소 425가 화합하여 1단위(1單位)로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면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복잡한 것이 원형질이다. 원형질은 모든 생물을 형성하는 원시의 질료이다. 원형질(原形質)의 발달과 세포생명의 시작이, 이 지구라고 말하는 혹성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세기(世紀)에 획을 긋고, 여기에서 생명은, 긴 상승(上昇)을 확연하게 시작한 것이다. 이 상승의 끝점은 머나먼 저쪽에 유방(幽方)인 먼 미래 안에,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원형질은 도표에서 설명한 것처럼, 16의 원소가 화합하여 한 단위로서 일을 하고 있다. 구성원자의 수를 들추어 그 수를 헤아릴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헤아려 낼 수 있는 정확한 방법이 아직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전문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원형질이 많이 있다.
헤모글로빈(血色素)의 원형질의 경우, 몇 천이나 되는 미세한 부품과 정확한 화합을 지키면서 하나로 되어 일하지 않으며 안되는 것을 알았다면, 이와 같은 피조물을 생기게 하는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를 조금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다음에는 유기(有機) 질량에 대하여 좀더 연구를 해가자면, 결정(結晶)의 발달에 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든 고체(固體)는 많은 X광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하지만 거의 전부 결정구조로 되어있다. 생명은 "원소(Elemental)"왕국에서 광물(鑛物)왕국으로 옮겨져서 그 딱딱함이 절정에 이른다. 질량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형체 중에서, 금속이 가장 조밀하고 무겁다, 그렇지만 그 금속 안에서도 생명이 검출되고, 물론 초기의 단계이지만, 의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되고 있다. "캘커타(Calcutta, 인도 최대의 도시)"의 인도인 과학자 "보우스(V. C Bose)"교수는 50년전(지금은 100년)에 이것을 실제 증명하였다.
이 교수는 일연의 훌륭한 실험을 걸쳐서 1901년에 그 결과를 왕립협회(王立協會)에 보고하였다. 그는 특별제작의 기구를 써서, 금속에게 행한 기계적인 자극에 대한 전기적 반응을, 회전하는 "드럼(Drum)"에 기록하고, 다음에 금속 대신으로 근육(筋肉)을 써서 실험을 반복하였다. 어느 실험에서도, 주석(朱錫, Tin)의 반응은 근육의 반응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다른 금속에도 써보았지만, 반응의 회복에 필요한 시간에서만 좀 틀림이 있었다. [그림 36 B]에 보면 은(銀)은 "쇼크"를 반복하여준 결과 주석(朱錫)에 완전한 또는 불완전한 파상풍(破傷風)과 닮은 상태가 생기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와 꼭같이 "쇼크"를 근육(筋肉)에 주었던 결과가 나왔다. [그림 36 C]는 금속(金屬)에 처음 독(毒)을 묻혀서 그것을 소생(蘇生) 시킬 수 있는 증거이다.
금속은 또 피로(被虜)한 징조도 나타낸다. 이 피로한 현상은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여 긴장시키면, 피로 한다는 정도는 금속제품의 제조업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부우스"교수는 야체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교수는 야채를 지쳐버리게 맥빠지게 하거나, 흥분시킬 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우리들은 제2분출 즉, 생명(형체)의 분출이 물질세계에 출현하는 것인데, 과학자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으며, 현미경이나 시험관 기타 기구를 써서, 그 일하고 있는 모습을 관찰한다는 것이 된다. 이상의 것은 대충, 껍질을 단쳔적으로 설명한 것에 불과하며, 더 자세한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매료(魅了)되고 말 것이다.
광물계에 이르러서 진보는 아래끝 점에 도달한다. 말하자면, 역진화와 진화의 "밸런스"가 잡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이란 조밀한 물질 속에서조차 참으로 탁월한 숙련사라고 말할만한 정도의, 창조주의 마음이 쓰여져 있는 증거를 엿볼 수가 있다. 결정이라 말하는, 결정의 모두가 명확한 기하학적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무아경(트랜스), 히마타야 밀학(密學)에 의하면, 물질원자는 그 7개의 나선(螺旋)에, 7혹성 연쇄사신(可神)들의 전부의 특수화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보아왔다. 각 원자마다 이러한 힘중에 어느 것이 작용(영향)하고 있고 원자에는 실지로 7개의 기본적인 "스타일"이 있고, 그것을 조합시키는 방법에서나 발전과정의 차이에 의하여 무수한 부(副) "스타일"이 생긴다. 그러므로 결정이라는 농밀한 의집체(擬集體)에는, 실지로 7개의 기본이 되는 "스타일"이 있고, 그 각 "스타일"마다 무수한 "부스타일"로 나뉘어진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 있고,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이 7가지 구분은 [그림 38]처럼 그의 기하학적 형상(形狀), 축(軸)의 수, 각(角) 및 능선(稜線)의 관계를 가지고서 분류하게 된다. 즉 입방정계(立方晶系), 정방정계(正方晶系), 사방정계(四方晶系), 단사방정계(單斜方晶系), 삼사방정계(三斜方晶系), 육방정계(六方晶系), 삼방정계(三方晶系)이다. 그림의 예는 각 기본구조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변종 중에서 하나의 예로 표시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볼 수 없는 현현에서부터 볼 수 있는 현현"에 이르기까지 일을 하고 있는 대자연의 깊고 숨어있는 진리(복수)의 작은 것이지만 문틈으로 보여주었다. 결정은 그 형을 긴 세월동안 갖추어 보지(保持)하지만, 그래도 성장, 성숙, 패태의 시기는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제2의 생명의 파(波)의 역진화의 화살은 이제 완료하였다. 생명은 차례로 조밀하여져 가는 물질 체를 점유하게 되고, 이제는 가장 조밀한 질료 속에 있으며, 앞으로 이를 계속 점유할 것이다.
물질계의 의식은 이 광물왕국에서 시작하고, 광물이라고 말하는 형체 안에 있는 물질원자는, 이것들을 눈뜨게 하여 감응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렇게 함으로서 영과 물질(질료)사이에 연결을 만들어 낼 수가 있고, 그것이 의식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광물왕국의 소재(질료, 복수)는 가장 격렬한 충격에 직면하게 되어 있다. 태양은 옛 과거의 형성과정에 있었을 때 성운상태나, 더 앞이 되는 그 이전의 상태에서는 극미(極微)의 원자의 미립자는 아마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못하는 열과 그 외의 상태에 괴로움을 당했었다. 그리고 더 큰 괴(塊)가 되면, 물질질료는 지구의 내부의 지표에서 압력, 성열, 냉한, 하산폭발 등, 대자연의 격렬한 노여움, 그리고 부드럽고 따뜻한 미풍, 차가운 물도 경험하게 된다.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이 차츰으로 물질질료를 눈뜨게 하고, 환경을 차례로 의식시키고, 안에 있던 생명이 가냘프게나마 반응하게 된다. 물론 인간 또한 알게 모르게 그것을 도와준다. 가령 그의 땅에서 광석을 캐서, 불타는 가마 속으로 넣고 백열이 되도록 열을 준 후에 냉수 속으로 넣어버린다. 그것을 이번에는 작게 자르고 "드릴"로 뚫고 "망치"로 두드리고 "리베트"를 박는다. 거기에 또 여러 가지 가공이라는 긴장을 주어서, 거기에 가령 인간의 대건축이란 견고함을 유지하는 형을 만든다. 혹은 그것을 엔진 안에 증기의 압력이나 돌연의 팽창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이하여서 인간은 무수한 방법으로 인간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광물 계에 도전하는 것처럼 일한다. 이와 같은 식으로 인간은 가장 조밀한 형체 속에 유폐 되어 있는 생명을 진화라고 말하는 긴 상승을 시작하게 하고, 물질질료를 좀 더 감수성이 있는 용구로 하기 위해 필요한 강한 자극을 주는 것을 도와주는 일을 대자연에 대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다.
제3장 생명과 형태와의 진화(The Evolution of Life and Form)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좀 바꾸어진다. 그것은 마치 지금까지 해상을 항해하고 있다가, 육지가 보이는 데까지 온 것 같은 것이다. 아주 진귀한 것이나 새로운 풍경을 보고 지금까지의 것과 틀린 방법으로 여행을 계속하는 것이 된다. 먼 산 기슭까지 여러 개의 논이나 벌판을 지나서 가게 된다. 산에 도달하면 그곳에서 또 이야기는 바뀐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들이 물질혹성(지구)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3대 사건 중에 제2의 사건에 지금 가까운 곳에 와있기 때문이다. 제1의 사건은 우주공간의 어두운 성운(星雲)안에서 지구가 탄생한 것이고, 제2의 사건은 생명이 처음으로 지구의 표면으로 출현한 것이다. 원시생명에 관하여 제일 처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새로운 물이 고인 물구덩이(저수지)가 지표면의 해면에 출현한 것이다. 현미경으로서도 잘 보이지 않는 녹조(綠藻)라고 하는 식물생명이다. 그것은 화석으로서 지금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수백만년이 지난 지금에도 거의 변화하지 않고 살아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복잡함이 더하여지고, 다음에서 다음으로 언제 끝내는 것도 없는 무대에 나오게 되는 생물들의 연구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들의 생물학자는 원형질과 세포라고 말하는 놀랄 만큼 작은 것에 대하여, 그들에게 마음을 기울여 주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지구상에서 생명의 전개에 관하여, 좀 더 명확한 통찰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에 생물학자가 쓰는 현미경 대신에 직감력을 움직여서, 가지가지의 숨겨져 있는, 세계 중에, 또 하나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 세계의 사물을 보는 것으로, 창조주의 마음을 통찰하고, 거기서 새로운 계시를 얻어낼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앞에서 원형질은 일체(一切)의 생물이 만들어지는 근원적인 소재(素材)인 것을 보았다. 고대의 영지에 의하면 멘탈계와 아스트랄계에서 제2 "분출"의 파도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그 중에 하나는 이미 말한 각 계의 "엘리멘탈 에센스"를 생기게 하고, 다른 파도는 그 "엘리멘탈 에센스"에서 "엘리멘탈 왕국"의 여러 가지 형태를 생기게 하였다. 엘리멘탈 에센스는 특히 그것에 쓰기 위하여 준비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모든 여러 가지의 신비를 문틈 사이로 보고 감동하였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내부에서 행하여지는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끝내는 물질계에 나온 현상화 하는(이것이 그러한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인식하지는 못하였을 것이지만) 신비를 문틈으로 보고 마음에서 매료되었지만, 여기에서도 꼭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 정묘계(복수)에서 보아온 것과 꼭같은 창조의 일들이, 원형질과 원형질의 그 후의 발달과 사이 안에서만 전개해 나가기 때문이다. 원형질은 제4 엘리멘탈 에센스라고 말하여도 무방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또한 감수능력이 있는 살아있는 것이 이번에는 물질계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고 살아있는 질료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하였지만, 원자와 분자가 결합하여 더욱더 복잡한 단체(單體)를 형성하여 끝내는 원형질이 된다[그림 37, 38 참조]는 도리인 것이나, 이는 제 2생명의 파가 어떻게 해서 차츰 제1 분출에 가담함으로서 주요인(主要因)이 되어지는가를 알 수가 있게 된다. 이것은 제2의 생명파의 파도능줄이 되는 것이다.
최초의 원형질이 발달하여 세포가 되어 출현했을 때는, 제2의 생명파의 제2의 파도능줄이 보이게 되고, 이 혹성에 있어서의 생명의 진화는 시작한 것이다. 앞의 설명으로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세포는 감각하는 생물의 형성하는 살아있는 연와(煉瓦)이다.
세포의 가장 간단한 정의(定義)는 하나의 중핵을 포함한 원형질의 한 개의 뭉치이다. 그것은 떨어져서 벽을 쌓고, 중심체(세포분열시 나타난다)로 되어있는 것으로, 2개의 흥미 있는 조그만 것을 가지고 있다.
세포에는 다음과 같은 특질이 있다.
(1) 신진대사(新陳代謝) : 주위에서 적당한 식량을 선택하여 취하고, 그것을 화학적인 변화를 시켜서, 자기수요에 적합시키고, 자기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
(2) 성 장 : 어느 한도 내에서 그 크기를 불릴 수가 있다.
(3) 재생산 : 보통은 분열로서 그 자신을 재생산할 수 있다.
(4) 율동성(律動性) : 재생산, 신진대사 등에 몇 개의 주기(週期)가 있다.
(5) 흥분(興奮) : 외부 및 내부에서의 자극에 반응할 수가 있다.
(6) 적합(適合) : 환경의 여러 조건에 적을 할 수가 있다.
세포벽은 외부에서 오는 무서운 유해(有害)한 것의 영향을 못 받도록 내부를 보호하고, 식량의 흡수 및 노폐물의 배출을 규제한다. 대부분의 세포는 유사(有絲)분열이란 방법으로 증식한다. 이와 같은 것은, 지금까지 현미경에서 보여준 놀라운 경이의 하나인 것을, 생물학자들이 한결같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고도로 복잡한 것들이 차례로 질서정연하게 연속으로 일어나면서 모든 단계가 질서와 정확함을 지니면서 조정되는 것에 있다. 세포는 그의 휴지(休止) 단계가 끝나면 중심체(복수)가 떨어져, 그 둘레에 방사선상이 생기며, 그 내부의 생산력(복수)이 분연히 분기하는 신비를 보게 되지만, 이것에 관하여 아직 충분히 이해하는데 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얼마가 지난 후 소섬유의 한 클럽이 나타나서, 유사분열방수라는 것을 만든다. 그 안에서 또한 상반하는 자극(刺戟) 같은 움직임을 하는 2개의 중심체 사이에, 주로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데, 그 유사분열방수가 고도로 자화(磁化)된 영역이란 것은 명백하다. 중심체 안에서는 정묘한 막이 두터워지기 시작한다. [그림 38의 B] 중심체(복수)는 떨어지기를 계속하고 [그림 38의 C] 방사선과 소섬유가 한 층 더 현저하여진다. 중심체내의 망은 지쳐져서 염색체라고 말하는 일정수(一定數)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핵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모든 종의 세포는 각각 독자적인 수의 염색체를 가지고, 각 세포는 각각 독자의 염색체를 정확히 만들어 낸다. 그림에는 염색체가 4개로 되어있으나, 그것은 변화를 알아보기 쉽게 하기 위해서이고, 대부분의 세포는 그 이상의 염색체를 만들고 있으며, 인체의 염색체의 수는 언제나 46으로 정하여져 있다.
다음 단계에서는 중심체를 세포의 상반하는 쪽에 있고 염색체는 그 중앙으로 위치하고 있다. [그림 38의 D] 다음에는 각 염색체는 가로로 분열하여 각각 완전한 꼭같은 염색체를 낳고, 2개가 한 조로 된다. [그림 38의 E] 그 뒤에는 서로 반대쪽으로 이동하여 염색체는 배가 된다. [그림 38의 F] 이 이동이 끝나면 세포벽이 생기면서 염색체(복수)는 더욱 확산하여 [그림 38의 G] 끝내는 분열행정이 완결한다. [그림 38의 H]
앞에 하나였던 세포가 금방 두개가 되고 처음 세포와 꼭같은 것으로 되는데 짧은 시간(약30분)이 필요하고, 그것이 직경이 겨우 1인치의 100분의 1의 영역 내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해낸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한다. 이 미소한 살아있는 것 안에 지상의 최우수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자의 탐구조차 거부하는 움직임(일)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여 본다면, 오른쪽 세포이상으로 고급의 많은 세포에서 일어나는 형체(복수)가 얼마나 창조의 신비가 있는가 알 것이다. 거기에 각 세포가 그 움직임을 전문화하여, 이러한 세포가 이번에는 전체를 위하여 협동하고 일하는(움직임) 모습을 생각한다면 신비한 것이고, 원뿌리는 더욱더 명백하여져 갈 것이다. 여기에 이번에는 생명과 형체가 물질계에 나란히 발현(發現)하는 꼴을, 즉 제2의 분출의 현현을 지나가는 식으로 대략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면 이와 같은 사상(事相)의 기록을 조사하는데 있어 대자연은 많은 장수를 필요로 하는 사서(史書)를 주는 꼴로, 우리들은 도와주고 있다. 그 장(책)이란 것은 말하자면 암석(岩石)이고, 그것은 화석(化石)을 말한다. 화석에는 때(時)가 응고시켜서, 사람들은 독해(讀解)시키려고, 그의 고(복수)에 놓아두었다. 이와 같은 내용에 관하여 지금의 사람들은 잘 알도록 되어있다. 세계의 박물관에는 유사이전의 동물, 조류, 어류, 수목 그 외의 형체의 화석이 복원 되어 그 당시의 자연환경을 여실하게 조성한 배경 속에 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시물은 많은 나라의 많은 연구자들이나 일꾼들의 헌신적이고, 훌륭한 해석에 이르기까지 노력을, 자연스럽게 방증하여 준다. 이 사람들의 수고하여준 덕택에, 거대한 경륜의 진행을 우리들은 눈으로 쉽게 볼 수가 있어, 그것으로 얻은 지식으로 우리들은 생의 경륜을 한층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생명이 지나온 길고, 어려운 길, 성공을 위하여 많은 고생, 노력과 싶래에 어울린 여러 것들, 그러나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다음의 성공과 연결된다. 이와 같은 노력의 집적 등에 대하여 이해를 통하여, 우리들은 생명의 "레벨"에서, 또한 우리들의 시대에 나타나 있는 생명이 해낸 모습에서, 절실하게 알 수가 있다. 생명의 시작을 알아내려면, 아주 먼 과거의 깊은 구석진 곳(복수)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면 거기에는 몇 개의 큰 강이 있었고, 바다나 대양(大洋)으로 흘러들어, 그와 더불어 육지에서 씻겨져 나온, 대량의 침전물(沈澱物)을 운반하여 왔다. 이러한 강은 많은 생물의 사해(死骸)나 기타의 것, 가령 가까운 수목에서 물 속으로 떨어진 나뭇잎이나, 가지, 여러 가지 뼈, 때로는 목이 타서 물을 찾아왔다가 강변의 늪에 빠져 죽어버린 사람의 완전한 해골 등이 흘러 내려왔다. 이와 같은 것이 강상에 쌓여져서, 시대에서 시대로 끝없이 계속 흐르는 속에 불어나서 대량의 침전물 속에 깊이 파묻히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서 침전물은 암이 되고 묻혔던 생명체는 화학변화에 의하여 화석이 되고, 그리고 계속 시간은 더 흘러갔으며, 지표(地表)는 수역(水域)이 되고, 해상(海上)은 마른 육지로 변하였다. 실제로, 과거 지난날의 망망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이와 같은 변화는 여러 번 있었고, 같은 지역에 몇 개의 지층이 겹쳐졌다. 지질학자는 이와 같은 암석이나 그 안에 화석을 열심히 조사한 결과, 생명이 차례로 전개하여 가는 단계와, 수많은 변화가 생긴 시기 등 비교적 정확한 도상을 구성해 내고 있다. 이와 같은 전체상의 구성상, 지구의 역사를 지질시대(복수)로 나누고, 각 시대는 수백 만년의 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몇백 만년, 몇 천만년이란 어림잡아 큰 숫자로서는 비교가 어렵고 해서 [그림 39] 안에다 이러한 기간의 길이를 할애하여 포시하기로 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시계의 문자판으로 겹쳐서 표시하였다. 이 방법으로 보면, 시간의 비교적인 길이가 한눈으로 알 수가 있다. [그림 40]은 20억년 전의 지구상의 정황(情況)의 약도이다.
이 [그림 40]의 목적은 지금까지 경과한 시간이 얼마나 거대한가, 또 그리고 살아온 변화가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어느 정도라도 이해시키고, 그 사실을 눈뜨게 하는데 있다. [그림 40]의 생물들의 출현과 소멸, 계속 생겨난 것들과 눈과 마음으로 쫓아서, 따라가면서 [그림 39]에서 그간 경과한 것이 얼마나 망망한 시간의 길이인가를 마음에 간직하기로 하자.
만약, 어떤 관찰자가 있었다고 한다면 8억년에 걸치는 시생대(始生代)의 전기간을 지구에서 관찰하였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살아있는 것들의 징조를 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식물, 동물, 기타 어떠한 생명형체는 이 기간 중에 육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는 바다에서는 극미(極微)한 생명이 존재하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들의 사이에는 활발한 삶이 행하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생대(原生代)에 들어서면서, 해변의 주변이나, 능선이나, 내륙의 암석사이에는 새로운 물의 저수지 안에서, 청록색의 떠있는 찌꺼기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조(藻)였다. [그림 40의 A]
이 미소한 식물은 하나 하나를 현미경만이 볼 수 있는 크기였지만 그것이 많이 모여 넓은 구역을 차지하면서 육안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해저(海底)에서는 원시적인 식물이 발달하고 있었다. 작은 벌레 같은 것이 눈에 비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 두개의 시대의 합계는 14억 5천만년 [그림 38]의 8시간 24분 동안 계속되었고, 결국 지질시대 전체의 거의 4분의 3을 점하였는데 눈에 가까스로 보일만한 생명 같은 생명은 거의 생겨나지 않았다. 생긴 것은 "약간의 원시적인 수산식물과 소수의 거품" 정도였다. 고생대(古生代)가 되면서 움직임의 속도가 어느 정도 빨라져서 생명은 육지(陸地)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그림 40의 B] 이 시대가 3억 5천만년 천천히 이 시대가 3억 5천만년 [그림 39]로 보는 2시간 계속되지만 수서(水棲)의 무척추동물이 발생하였다. 원시의 고기도 출현하고, 육상의 식물이, 다음에 양서동물(兩棲動物)이 나왔다. 이 시대에 출현한 생물의 예를 들면, 히도데, 가다쓰므리, 산호충, 삼엽충, 사소리 등의 정도이고, 이 시대 끝머리에 가까워지면서 "세이모리아"가 출현하지만, 이것은 후에 파충류의 선조이다.
1억 4천만년 [그림 39]에서 1시간 20분 계속된 중생대(中生代)의 특징은 거대한 파충류의 출현이다. 이 생물은 처음엔 작았는데 그 동안 발달하여 놀라운 정도로 큰 것이 되었다. 그 한예로 "수데코사우르스"는 알은 바다 안에서 기어다니는 것이 그려져 있는데, 이 동물은 거대한 체중 때문에 대부분이 물 속에서 지냈다고 한다. 체장은 100피트, 또는 그 이상이고, 체중은 거의 같은 톤수(100)에 이르고 있을 것이다.
검용은 투구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걸음걸이는 전함(戰艦)을 닮았고, 검용은 두개의 뇌, 하나는 꼬리에, 하나는 뇌에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이 시대는 야자수에 꽅들이 피는 나무들이 나왔지만, 이 시대는 기묘한 시대였으며, 자연은 지구로 하여금, 체중이 크기를 계속 증가시켜 생물들이 살 수 있는 집을 만들어 주려고 결심했던 것처럼, 수억 년에 걸쳐서 지표의 전 육지에다 거대한 식물류를 번성(繁盛)시킨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것은 자연이 정한 길은 아니었다. 이와 같은 광대한 생물은 긴 기간에 지구의 주인이 되었지만, 돌연 사멸(死滅)해 버리고, 신생대(新生代) [그림 40의 D]가 와서 [그림 39]에서 12시 2분전, 새로운 생물을 보개 되었다. 포유류(哺乳類)는 급속히 지구상으로 퍼져가는 스타일의 생명이 되었다. 그것은 아주 빠른 템포로 지구 모든 부분으로 퍼져, 그의 진보와 변화는 전 시대를 훨씬 능가하였다. 앞의 것은 체중이 큰 것인데 후자는 기민함과 계가 많고, 훌륭한 뇌력(腦力)과 적응 노력으로 온통 땅을 누비고 다녔다. 이러한 것이 수백 만년에 걸쳐서 이와 같은 진보를 계속하였다.
그 후 다른 변화가 생겼다. 즉 [그림 39]에서 말한다면 1분 30초전 정도에서 인간의 생명이 무태(舞台)에 등장하고 그 후 이러한 큰 "드라마"는 새로운, 거기에 큰 전회(轉回)를 하기 시작하였다. 2분전에 포유체계가 시작한 정도였는데 이 지구에 모든 시대 중에서 최대의 승리, 즉 인체가 만들어졌다. 원형질이 최초의 세포를 만들고 거기에 그치지 않았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긴 기간의 세월동안, 원형질은 놀라운 정도의 많은 종류와 수의 생물을 생겨나게 만들어왔다. 지구는 태양의 둘레를 끊임없이 계속 돌아서 한 주기마다 생명 진화의 단계를 조금씩 높여 왔다. 천천히, 유유히, 위로위로, 시행착오와 성공을 거듭 반복하면서 무수한 변화를 거치면서 중복한 형체는 오늘의 발달(복수)을 보게 한 것이다. 자신 주위에 전개하고 모든 쪽(側)에서 밀어오는 생명의 신비(복수)를 경탄(驚歎)하지 않는 자는 모든 신비 중에서도 지고의 성과(成果)가 되는 것이 인체 속에서 살고 있으나, 실은 그 자에게는 죽어있는 것이다.
제4장 분신영(모나드)과 항구원자(恒久原子)
앞장에서 우리들은 생명이 지구사에 있어, 한 개의 단세포에서 시작하여 인간이 되기까지의 역사를 회고하였습니다만, 실은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거기에 역시 내막(內幕)이 있다. 그것을 모르면 외측(外側)에 즉, 육체에 관해서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과학의 주장에 의하면 생물의 진화는 어미들의 유전자의 우연한 변화에 의하여 생겨나며, 그 변성(變姓)은, 환경에 대한 맹목적인 반동이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종(種)보다는 적자(適者)였든 종에 속하든 개체가 살아 남았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지만 대자연은 맹목적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연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태양계의 진화라고 하는 도저히 추정할 수 없는 거대한 작업은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태양계내의 모든 면에 일하며, 견고하여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는 법칙(복수)을 세울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존재 분의 그 경탄할만한 장치를 해서, 그저 제멋대로 되어가게 내버려두고 보고 있지 않는다.
이 어른이 피조물(被造物)의 하나인 인간을 확실한 항해를 하게끔, 모든 필요한 일체를 완비하도록, 위대한 지혜를 가진 어른이 소홀히 하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 창조주는 생체(生體)안에 감춰져 있는 여러 가지 힘을 나오게끔 하기 위하여, 환경을 이용하거나, 또는 생명현현의 수준을 올리기 위해, 유전의 변성(變姓)을 이용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제멋대로는 아닌 것이다. 그것이 시종일관으로 인도(引導)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외부의 상태에서 "스위치"를 넣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에 응하여져서 형체자신의 안에서 힘이 나온 것이며, 그 힘은 시초부터 형체 안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신지학이 제공하는 가르침을 생각하며, 그것이 과연 지금까지 회고 하여온 외부(外部)의 생겨난 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배경이 될 수가 있겠는가를 조사하여 보자. 지금부터 제시하는 새로운 생각방법을 보면, 이것은 아마 기묘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암석(복수)위에 생명에 의하여 쓰여진 기록(앞에 말한 자서전)처럼, 기묘하고 놀라운 말의 줄거리가 그 외에 또 있겠는가.
이 긴 세월에 걸쳐서 생명은 왜 그와 같은 고생을 하면서 위로 위로 올라 왔을까. 여러모로 인간보다 앞질러 행해졌던 여러 왕국(엘리멘탈, 광물, 식물, 동물계)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그들은 자연의 섭리(攝理)안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는 것인가, 모든 종(種)의 어린 것들이, 가르침이 없는데도 그 종(種)이 스스로 되어 가는 성질을 아는 것은 본능 때문이라 말하지만, 그 본능이라는 놀라운 힘이 무엇인가.
지금부터 학습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이런것, 기타 많은 의문을 확실하게 풀고 명백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어떠한 설이라도 그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또한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라고 직관적으로 인식이 올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우리들은 이것들을 하나 하나 눈에 보이는 사실(복수)과 맞춰보고, 이렇게 함으로서 계획과 목적이 명백해지고, 그것이 없다면 무질서, 불확실, 불충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간단한 열쇠를 써서, 깊이 닫혀있는 것을 자물쇠를 열고, 꽉차지 못한 것을 꽉차게해서 더 한층 계몽에 이르게 되는 길이 열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모든 인간은 안에있는 진정한 인간(자아) 즉, 분신영(모나드)이다 라는 것을 알았다. 나야말로 자아이다 라고 하는 것은 많은 분야에서 인정받아 보려고, 의식 속에서 애를 쓰고 있다. 이것을 정신을 바짝차리고 분석해 가면 "가짜"였던 것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낼 수가 있다. 우리들에게 감성(感性), 상념(想念), 상상(想像), 희망(希望), 나아가서 육체까지도 안에 있는 실재(實在)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어내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밖에서, 즉 공간에서 나오는 소리를 조용히, 침묵 속에서 아주 성실하게 안쪽으로 받아들여 끈질긴 탐사(探査)를 계속해나가면, 끝내는 실아(實我, 自我)를 발견해낼 수가 있다. 그 모든 의혹은 구름처럼 흩어지고, 안개처럼 걷히면서 없어질 것이다.
분신영(모나드)은 신의 한 단편(一斷片), 신성(神性)의 한 종자(種子)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자연은, 정말로 많은 종류와 여러 형태를 현현하고 있지만, 그 모두는 유일 극구에 도달하기 위하여 삶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잠재하고 있는 신(분신영)은, 그의 모든 힘을 완전하게 발현(發現)시킬 수 있는 현실의 신이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전하여주는 몇 가지 서로 틀린 움직임(일)은, 제2의 생명의 파고(波高)가 고위 멘탈계에 출현하기 이전에 시작한 것이고, 앞에서 배운 바 있는 역진화 및 진화는 동시에 전개하여 왔다.
분신영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매체(媒體)가 반드시 있어야 했었다. 그것이 있어야만 농밀한 각층의 세계와 접촉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준비단계로서, 이러한 세계의 원자에는 각각 한 개씩의 분신영(모나드)가 들어가서 붙게 되고, 부착상태는 긴 세월동안 계속한다. 원자 그 자체는 의식매체가 아니지만, 큰 힘의 중추(中樞)가 되어, 그 둘레에는 앞에 말한 매체(아스트랄체, 멘탈체, 코절체 등)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원자의 잠재력이 발달하여, 매체로서 일하기에 적합하게 되기 이전에, 원자는 먼저 준비로서, 많은 조정을 거쳐야 한다. 원자가 거대한 힘의 중추라는 생각을 이해시키는 것이 옛날에는 어려운 것이었으나, 지금은 아주 보편적인 지식이 되고 있다. 현재에는 우리들도, 원자의 크기를 생각하지 않고, 그 안에 숨어있는 힘을 생각하여야 하고 그것을 알고 있다. 거기에, 농밀한 세계(복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물질적인 제약(制約)이 차츰 감(減)하여지고 원자의 힘은 상대적으로 증대하여, 성스러운 에너지가 보다 많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 [그림 41]에서 3각은 여기에서는, 분신영을 나타낸 것이며, 3가지 국면이 외부로 나타내는 모양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며, 이 3가지 국면의 진정한 특질을 적절하게 표현하는데 써먹을 말은 "산스크리트"어 이외에서는 찾아낼 수가 없으므로, 일응 의지, 사랑, 지식이란 말로서 신지학에서는 쓰기로 하고 있다. 이것에 관하여서는 어차피 공부가 진행되면 명백하게 알게 될 것이다.
분신영은 아트마 원자의 중핵으로서, 그 둘레에 "아트마"질료를 끌어당겨서 아트마 질료로 된, 아트마체를 만들고, 그것이 아트마계에 있어서 의식과, 그 표현의 매체가 되는 것이다. 아트마 질료라는 것은 의지의 힘(복수)을 전하기 위하여 특히 만들어진 질료이다. 각각 한 세계 아래로 내려와서 붓디 원자나, 고위 멘탈원자의 경우에도, 위의 것과 같은 과정을 거치는데, 분신영은 붓디계에 쓰는 붓디체, 고위 멘탈계용으로는 고위 멘탈체(코절체라고도 한다)를 가지고 있게 된다. 이 3개의 연결을 보통, 고위 3개조, (신지학대요5권)에서 말하는 고위3복합, 즉 아트마, 붓디, 마나스라고도 말한다. 이것은 3개의 가장 낮은 세계, 즉 가장 농밀한 질료로 되어 있는 세계, 하위 멘탈, 아스트랄, 물질계에서는 중핵이 되는 원자이다. 실은 하위 멘탈중핵은 이미 원자가 아니고, 분자이며, 멘탈계의 제4층의 요소(要素)이지만 편의상 항구원자(恒久原子)라는 말을 보통 쓰고 있다.
이들의 3개는 대단히 농밀한 영역이고, 의식의 매체는 발달을 해간다. 이것은 하위 멘탈체, 아스트랄체, 물질(육체)체이다. 이와 같은 매체를 쓰게 됨으로서, 분신영은 사고나, 감정이나, 행위의 힘을 표현할 수 있게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상위(고위) 3개조 것들의 반영(反映)이 되는 것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의지와 사랑과 지식이란 것은 진인(眞人)의 특질이지만, 사고, 느낌, 행위는 명확하게 일과성(一過性)에서 생겨난 일이 되고, 보통 환경사이에서 생기는 특정한 필요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설명하지만 사고는 지식(3)을 발달시키고, 감정(5)은 사랑(2)을 발달시키고, 행위는 의지(1)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들은 무슨 일에 관하여 생각하면, 그렇게 해보겠다고 바라게 되며, 그것을 행위로 옮겨서 비로소 의지가 발현하고, 그 실현에 필요한 "다이나믹"한 힘이 나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상생활의 일시적인 순간의 시간에 일까지도 모두가 우리들은 분신영의 성스러운 특질을 발달시키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일응 발달하면 결코 없어지는 경우는 없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신영은 서로를 침투하고 있는 각 세계에 강력한 중추(中樞), 즉 원자핵을 획득하고, 그 둘레에는 미래의 각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중핵의 존재가 인정되고, 그 기능이 이해되면,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한 지금까지의 우리들의 생각방법이 반드시 개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가령 유전(遺傳) 문제에도 깊은 관련이 있고, 잠재심의 많은 신비에서도 커다란 빛을 가져다주게 될 것이다. 진화의 문제에서도 또한 직접 관계가 있다.
제5장 군혼群魂(Group Soul)
자연의 전 인간왕국(前 人間王國)인 엘리멘탈, 광물, 식물, 동물, 인간계에 있어서 본능(本能)을 나타내는 방식은, 언제나 매혹될 정도로 흥미가 있고, 인간보다 낮은 생명의 형체에 친근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본능이란 생각방법을 아주 할인(割引)해서 하나의 기능(技能)으로 취급하며, 그 대신으로 실험실에서의 실험을 근거로한 기계적인 설명으로 한다. 즉, 본능이라고 말하는 현저한 능력(복수)을 유전으로 받은 신경양식(神經樣式)의 성숙(成熟)에 의하여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본능이라고 말하는 단순한 한마디를, 아주 애매한 말 줄기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런 나름으로 조금 좋아졌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한 것이다.
과연, 본능은 신경양식인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명확한 유전 받은 것으로 완전한 본능으로 나타낼 때까지는, 육체인 기구가 성숙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본능이 나타나는 것은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능에 관해서는 성숙이 대단히 빠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능력으로서 본능을 나타내는 기구 "메커니즘"을 충분히 알았다 하더라도, 그러면 어떻게 해서 본능자체(즉, "신경양식"자체)가 발달하였는지에 관한 문제가 여전히 남게 되고, 해결을 필요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본능이 우연히 생긴 것이라 말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에 부딪쳐서 패배한 것을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다.
본능의 문제에서는 지금까지의 여러 가지 해명과 노력이 있음에도, 설명할 수 없는 면이 너무 많다. 가령 "제비"에 관해서다! "제비"가 매년 몇천 마일을 남쪽으로 날고, 그가 태어난 장소로 되돌아 온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새들 자신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온 본능적 지식이란 것 외에는, 새들의 이와 같은 놀라운 재간에 대하여 오늘까지 무엇 하나, 만족할 수 있는 설명을 한 것은 없다.
계절 따라 옮기는 새들의 다리에 "고리"를 달아서 실험을 하면 북의 "스코틀랜드"의 고지(高地)에서 남 "아프리카"까지 정기적으로 옮겨 날으며, 그리고 "아프리카"대륙 상공에서 지중해, 스페인, 프랑스, 잉글랜드의 상공을 횡단하여 전에 출발했던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 증명되었다.
폭포수의 물을 타고 거꾸로 올라와서 자신이 선택한 장소에 도착하는 물고기의 본능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것들이다. 또 하나 아주 특별한 예는 간혹 생기는 일이지만 "스칸디나비아"의 산 속에서 살고 있는 "플레밍고"라고 하는 작은 계(설치류(齧齒類), 포유류의 한 목, 다람쥐, 쥐, 비버 등이 있음) 종류의 동물이 있다. 정한 기간없이, 또 기간과 기간사이가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플레밍고"의 수가 과잉이 되면, 그들은 낮은 땅으로 내려와서 장장 수마일에 걸쳐서 일직선으로 줄을 서서, 벌판을 넘어서 바다에 이른다. 거기까지 몇 년이 걸릴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아주 하나의 마음을 공유(共有)하는 것처럼 행진을 계속하여, 결국 바다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을 때 물 속으로 들어가서 모두 익사(溺死)하고 만다. 거미 또한 그러하다. 한 마리의 거미가 하나의 왕국을 구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고, "스코틀랜드"의 "브루스"왕은 와신상담의 실물교육을 했다고 말한다.
물론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있지만, "거미"들이 현재의 수많은 기술자들 중에서도 아주 탁월한 것 중의 하나인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거미"의 집에는 강철보다 강한 장력(張力)이 있다. 한줄, 한줄 눈에 보이는 실(絲)은 몇줄기로된 아주 정묘한 실로 뭉쳐져서 한 가닥의 실로 보인다.
집을 만들어 내는 "디자인"은 매우 진보한 것이고, 실제로 조립하기 전에 발판을 만들 때, 일을 시작할 때, 아주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공(空)의 열쇠"를 쓴다. 먼저 한 점을 정하면 한 줄기의 실을 뽑아내어서, 그것이 바람을 타고서 먼 나뭇가지의 물체에 착 달라 붙는다.
그리고 끈을 단단히 당겨서 펼치고, 이후부터 건축작업을 시작하며, 일을 진행하면서 재미있는 재간을 많이 보여준다. 그 그물 속에 말하자면 전화 "시스템"이 연결되어, 먹을 것이 걸리면 금방 그 소식을 받고 현장에 급행하고, 먹이가 큰 것이라 취급이 위험하면, 먹이의 수촉을 열곱, 스무 곱으로 그물을 감아 버린다. 그래도 저항을 계속하면 먹이의 체내에 독을 주사하여, 아슬아슬한 이 투쟁도 "거미"의 결정적 승리로 끝내고 만다. 이것을 해내고 나서 "거미"는 다시 기술자의 계략을 써서 식량을 저장하는 곳으로 옮긴다. "거미"는 속임수의 명수로서 색을 환경에 맞추도록 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말하겠다. 그것은 연충(蟲), 지렁이 거머리 등의 꿈틀거리며 기어다니는 벌레)중에서 대단히 저급인 것이고, 길이가 겨우 8분의 1인치이고, 프랑스의 몇 곳 해변에서 대량으로 발견된다.
썰물일 때 몇 곳에 검은 녹색이 크게 펼쳐져 있다. 그 수는 수백만, 수천만 마리인데, 전체가 하나처럼 행동을 한다. 그 전부가 꼭같이 한시에 알(卵)을 낳고, 생겨난 것은 같이 성숙한다. 햇빛이 쬐는 곳에서 꼼짝 않고 있다가,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간섭하면, 꼭 마법을 쓰는 것처럼 없어진다. 그것은 그 순간에 동시에 모래 속으로 숨어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다른 행동에도 여러 가지로 일체가 되어 행동하지만 보통의 환경 외에서도 그와 같다. 이 생물을 실험실에 가지고 와서 물체의 구조를 조사해 본 결과 대단히 특이한 특징이 있어 그 움직임과 반응은, 많은 외부에서의 자극에 대한 자동적인 신경의 반응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만한 답이 될 수는 없다. 그 말은, 그와 같은 능력이 어떻게 해서 왜 발달하였나, 하는 것은 조금도 알지를 못하였다. 8분의 1인치가 될까말까하는 작은 생명체가, 원래 그와 같이 만들어졌을까, 그렇지 않고, 이와 같은 복잡한 반작용의 전부를 자신이 생각해내서, 여러번 해보는 동안에 자동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인가? 혹은 또 그와 같은 거대한 수에 이르는 생명현현의 배후에는 일대(一大) "마인드"가 있어, 인간으로서는 아직 알아낼 도리가 없는 어느 계획을 행하고 있는 것일까? 앞에 말한 바있는 전인간왕국 안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그 군의식(群意識)에 관하여, "하데이"교수는 1949년 가을에 영국협회에서 새의 무리들이 꼭 한 마리처럼 집단 비행을 하는 것은, 전체가 하나의 집합심(集合心)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시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텔레파시"가 움직이는 무리의 운명을 형성하고, 무리의 행동을 "컨트롤"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박사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 설은 고대의 영지(英知)가 제공하는 가르침과 합치한 것이다. 거기에 또 이설은 불가시(不可視)의 세계(복수)에 어떤 장치가 달려있고, 그 장치가 존재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에서의 관찰에 의하여 증명할 수가 있다.
한 사람의 인간이 인간계에 새롭게 태어나는 생물학적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발달해 가는 태아(胎兒)는, 어머니의 태내에서 신세를 지면서, 영양분이 주어지고 보호받는다. 그 준비기간이 끝나면 태아는 태어나서 독립의 존재가 시작된다. 그것과 꼭같이 태아에 해당하는 저위 3개조는, 모태(母胎)에 해당하는 것으로 군혼(群魂)의 요소로서, 긴 사전의 준비기간을 거쳐야하는 것이고, 그 후에 독립의 존재로서 출생하고, 인간의 혼이 생겼을 때, 분신영과의 직접 관련이 시작하는 것으로 된다. 다음에 "애니 베산트" 여사(신지학 협회 제2대회장)의 저서 의식의 연구(76p)를 인용하여 보자.
"나는 광물, 식물, 동물의 경과하는 진화의 산전기(産前期)를 비교하여 보았다. 그 유사(類似)는 정확하다. 태아가 어머니의 생명의 흐름에 의하여 키워지는 것처럼, 군혼의 보호막이 그 안에서 생명을 키우고, 환원(還元)하여 모여온 체험을 받아서, 보호막내의 저위 3개조에 배분한다. 순환하는 생명의 부모는 생명이다. 고로 유목(幼木)이나 어린 동물은 아직 독립의 생활을 할 수 있게끔 준비되지 못하고 영양을 부모로부터 받아내야만 되는 것이다."
군혼이란 것은 앞에 말한 모나드의 에센스에서 이루어지는 포막(包膜)을 뜻한다. 그것을 통하여 신의 생명에 특수화된 힘(복수)이 흐르고 있다. 인도라도, 지켜주는 포막으로서, 그것은 무수의 하위 3개조를 포함하고 있다. 이들의 저위 3개조는 여러 가지로 외부와 접촉하고, 그 안에 잠재하고 있는 힘(복수)을 깨우쳐서, 장차 그 둘레에 의식의 형체를 형성하는데 적합한 중핵(中核)이 될 수 있도록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나드 에센스라고 하는 술어는, 앞에 말한 제2의 생명의 파가 일을 해서 서로 침투하고 있는 세계의 최고아층의 원자질료를 말한다. 하위 "멘탈"계층의 최고 아층은 실제에 있어서는 원자가 아니지만, 역시 모나드 에센스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엘리멘탈 에센스"는, 고위 "멘탈"계층과 하위 "멘탈"계층과의 최고 아층(亞層)의 원자질료를 뺀, 그 이하의 계층인 낮은 질료 즉 분자질료로 된 것이다. 그러면, 저위 멘탈계층에서 7개의 군혼이 나타난다. 각 군혼은 각각 태양사신(司神)의 안에 있는 7개의 각각 창조중추인 7주(柱)의 혹성연쇄사신[그림 26]에서 나온다. 이들 군혼은 이 저위 "멘탈"계층의 "모나드 에센스"로서 된 한 개의 포막(包膜)에 의하여 형성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무수의 3개조가 참투하고 있고, 그 "멘탈" 항구원자(복수)는 부활(賦活)되어 민감해진다.
얼마간의 긴 시간이 경과하고, 군혼은 둘째 번의 포막을 받는다. 이것은 아스트랄 "모나드 에센스"로 된 것으로 전법과 꼭같이, "아스트랄" 중핵의 조정이 일어난다.
그리고 다음에 일할 장소는 물질계이다. 여기에는 [그림 43]처럼 광물, 식물, 동물이라는 3개의 기본적인 형으로된 군혼이 있다. 광물 군혼은 3번째의 포막을 획득한다. 그것은 물질 "모나드 에센스"로 되어있다. 식물군혼의 포막은 2중이고, 물질에서 된 포막은 소멸한다.
동물군혼의 포막은 단층(單層)이고, 하위 "멘탈"세계에 속한다. 각 군혼 중에 유달리 광물군혼 안에는 3개조가 많이 생긴다. 이 광물군혼안에는 하위 "켄탈" 항구원자와 "아스트랄" 항구원자가 포막에 의하여 보호되어 그 안에 가만히 머물러 있지만, 물질항구원자는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어서 자력적(磁力的)으로는, 서로들 뿌리(本源)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많은 광물체 안에 산재(散在)하고 있다. 이 광물군혼 안의 3개조들은 앞에서 배운 것처럼 광물자체가 받게 되는 대단한 충격을 말하자면 서로 나누어 받는다. 따라서 군혼중에는 개개의 항구원자의 모든 체험을 전체 항구원자가 받게 되는 것이다.
가령 한조(一組)의 원자를 북극권에 두면, 끊임없이 눈과 얼음과 얼어붙을 것같은 매서운 바람에서 자극만을 받을 것이다.
다른 한 조의 원자는 열대의 광물 층에 가서, 지금까지 계속 작열(灼熱)의 체험을 하는 것으로 된다. 양조의 항구원자가 받는 충격의 심한 격차는 결국 [그림 44의 B와 C]에 나타낸 분열을 일으킨다. 다음에 두 번째의 분열이 생기고, 그 결과는 [그림 43의 D, E, F, G]의 상태로 된다. 다른 상태는 [그림 43의 1-12]처럼 많은 분열을 일으킨다. 이렇게 군혼은 그 수가 불어나고, 그것과 반비례하여, 각 군혼의 3개조는 줄어간다. 3개조는 어느 클럽이거나, 그 물질 항국원자가 어느 선까지는 발달하고, 그 진동력은 광물이라는 형체의 제약(복수)안에 머무르고 있어서는, 그 이상 발달이 불가능하여지며, 그래서 동(同)물질 항구원자는 군혼안으로 끌려들어오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물질의 포막은 사라지고, 그 질료의 약간부분이 [그림 42의 A]에 있는 것처럼 각3개조의 에텔체를 형성하는데 이용당하게 된다.
그렇게 되고 보면 항구원자는 식물왕국의 여러 형체 안으로 옮겨 진다. 여기에서는 광물왕국때 이상의 경험이 기다리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물질적인 반응뿐만이 아니고, 거기에 더하여 감정과 욕망의 씨앗이 생기고, 그것이 "아스트랄" 항구원자로 각인(刻印)되어, 아스트랄 항구원자는 그것에 의하여 말하자면, 눈을 뜨게 되어 의식적 반응을 하게 된다. [그림 43의 B]광물왕국에 있을 때 조차 "아스트랄" 항구원자가 자극 받아서 미미한 조그만 반응을 일으키는 때가 있었을런지 모르는데, 지금 막 시작하고 있는 새로운 주기에서는 욕망과 감정을, 전개하여가는 경륜 안에서는 명확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군혼안에 있는 3개조 전체의 촛점을 물질계로부터 "아스트랄"계로 옮겨간다.
군혼은 앞에서와 같이 계속 분열하고 또 재분열을 해나간다. 이러한 체험은 처음에는 가장 원시적 "스타일"의 식물생명 안에서 얻게 된다. 그것이 차츰 진화의 단계를 올라가서 끝에는 대단한 위험과 힘이 있는 견(떡갈나무)안이나 하늘 높이 치솟은 장중한 삼(세계 최대의 거목)안에서, 혹은 사방의 공기를 정화하는 향기를 내는 솔나무, 그 외에 아름다운 꽃들을 피게 하는 나무 안에서의 정점(頂點)에 이른다. 그 어느 것에서 체험하느냐는 그 나무가 처음 7개의 군혼중에 어디 것에 속하고 있었느냐에 따라서 정하여지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다음의 분열은 모두가 최초의 7군혼의 한개인 부차적(副次的)인 말하자면 아종의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식물왕국에서의 모든 체험이 얻어지면, 이미 말한 과정이 반복된다. 즉 왼쪽의 "아스트랄" 포막이 붕괴되고, 그 구성재료의 많은 것이 지금까지 싸여있던, 각 "아스트랄" 항구원자용의 가장 첫번이 되는 최초의 "아스트랄"체를 형성하는 것에 쓰게 된다. 이제는 하위 "멘탈", 모나드 에센스로서 된 포막안으로 쌓여있던, 3개조는 동물왕국의 체 안에 놓여지고, 아주 새로운 생존(生存)을 시작하며, 지금까지의 어느 체험보다도 넓고 풍부한 기회가 주어진다. [그림 43의 C] 그러하지만 전이(轉移)는 가장 원시적인 동물형체안에서 되는 것이 아니고, 조금 높은 진화단계의 동물에서 행하여진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많은 수의 것들이 겹쳐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식물이라도 아름다운 나무는, 원시동물에 비해 훨씬 앞에 진전하고 있는 것도 있고, 원래 발달정도에 있어서는 상당히 폭(幅)이 있는 것이니, 항구원자(3개조)는 어디든지 전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켄탈" 항구원자가 안에 잠재력을 눈뜨게 하기 위하여 초점의 중심이 저위 "멘탈" 계;층에 있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조건이 여러개 생기고, 연구대상도 자세히 추구하자면, 당연히 그것이 복잡하며 여러 갈래로 되지 않을 수 없다. 광물계;에서는, 물리적인 체험이 괴(塊)안에서 얻어졌지만, 거기에는 개개(個個)의 형체란 것은 없었다. 있었다고 한다면, 광물계안에서 진화의 우두머리에 가까운, 작은 수의 귀석(貴石) 정도의 것들이었다.
식물생명이 되면, 성장의 힘과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정된 범위 내에서 이동하는 힘을 얻고 있기 때문에 그 물질형체는 반 정도만 독립한 것이다. 동물계가 되면 각각의 형체는 모두 개개의 존재가 된다. 거기다가, 물질 형체가 죽어 없어진 후에도 독립의 존재가 계속할 수가 있게 된다. 그것은 여기 이르러서 "아스트랄"체가 발달하여, 그의 동반자였던 물질체로부터 이탈하여도 "아스트랄"계 안에서 독립하여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바뀌어 태어나는 주기, 그것도 빠른 주기로 도와주고 있다. 그 말은 육체의 죽음 다음에 "아스트랄"계에서 짧은 기간동안 머무르고, 그후에는 각3개조는 전면적으로 군혼속으로 되돌아와서, 여기서 기간 조정을 받고나서, 그 다음에는 진화가 약간 더 높은 동물체 안에 태어난다. 이렇게 해서 차츰 "멘탈"체가 시작되어 간다. 그것이 어느 점까지 발달하면, 고급의 동물의 경우, 그 동물자체의 행동에서 "멘탈"체의 존재를 느껴 알 수 있도록 되어간다.
군혼은 몇 회의 분열을 반복하여, 끝내는 하위 "모나드 에센스"로 된 보호막만으로 쌓여져 있는, 단 하나의 3개조가 이루어졌을 때 동물의 진화는 그 정상에 이른 것이다. 이 하위 3개조는 부활이 되어, 감수성이 높아져서 고위 3개조를 위해 용구(用具)가 될 수 있는 준비가 끝난 것으로, 이제 신인(神人, 分身靈) 자신에 직접 부착할 수 있는 데까지 왔다. 항구원자는 또다시, 그 주위에서 장차의 각 매체를 형성하는 자력중추로서 쓰인다. 그러면 이번에는 지금까지 설명하여온 여러 과정을 간단하게 복습하면서, 내부현현과 외부현현이 공통의 양식에 적합한 꼴을 보기로 하자. [그림 41]에서 우리들은 바다나 물이 고인 물구덩이에 떠있는 간단한 거품에서 시작하여 위로위로 올라와서 언제 끝날 줄 모르는 것에 적응해가면서, 발전을 거듭해 끝내는 놀랍고 또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인체에 도달할 때까지의, 진화해 가는 형체의 긴 역사를 생각해 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를 여기서 일일이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초기의 진화단계에서, 뽑아내서 만든 그림으로 변화를 대략 알아내는데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다. [그림 44의 A]는 단세포 식물(Gloetbeco)의 약도이다. 이 체는 등질(等質)의 원형질에서 이루어진 단세포(單細胞)이고, 이렇다할 조직은 없다. [그림 44의 B]는 다음 단세포(單細胞)의 그림이지만, 이것은 한 발짝 전진하고 있고, 내부조직도 여러 부분에서 전문화하고 있다는 증후가 있다. [그림 44의 C]는 Ulothrix라고 말하는 다세포(多細胞)의 식물이고, 몇 개의 세포로서 되어있고, 각 세포는 서로간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보통은 포자(胞子, Spowes)를 발달시키는 것으로 재생하지만, 포자가 살아남을 수 없을 것같은 특정한 환경 속으로 양쪽을 배출하여 여기서 양쪽이 결합하여 새로운 개체가 된다.
[그림 44의 D, E, F]는 초기의 동물생활에 있어서 3개의 진보단계를 나타낸 것이다. 최초의 유명한 "아미파"이고, 단 한 개의 세포로 되어있다. 그 다음이 Volvx라고 말하는 다수세포(多數細胞)의 무리이고, 그저 무리를 만들고 있을 뿐, 통일된 구조는 되지못하였다. 제3의 "구라게"가 되면 동물진화에 있어서 주된 제1보가 시작되고, 즉 신경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촉각을 "컨트롤"하는 근육과 연결하는 신경환(神經環)의 하나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해서 한 칸 한 칸씩, 개량을 거듭하여 차츰 생명의 사다리를 올라간다. 이것은 대자연의, 그 무수한 살아있는 것들에 일을 하여서, 그칠 줄 모르는 완전한 현현을 향하여 채찍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살아있는 것들이 진보향상 하지만, 진짜로 중요한 것은 의식의 진화이고 지금도 진행하고 있다.
[그림 45]에 그려져 있는 2개의 삼각형에는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향해있다. 수직선은 착각인 시간을 수평선은 의식의 전개를 나타낸 것이다. 광물계의 의식은 점으로 나타내고, 식물이 되어서는 의식의 정도가 조금 짧은 선으로 표시하였다. 동물은 더 큰 의식으로 긴 선을, 인간의식은 굵은 선으로 표시하였다. 이 굵은 선이 최저의 물질과 최고의 영의 사이의 가장 중앙의 선인 것에 주목하여 주면 좋겠다. 그로부터 아래는 집괴(集塊) 의식이 있을 뿐, 군혼들이 공유(共有)하고 있다. 이 집괴의식의 위에 자아의식이 들어서, 여기서 모나드 즉, 신인(神人)과 저위 3개조가 연결, 이 3개조에 의하여 신인은 몇 회 바뀌어 태어나는 사이에 많은 체를 형성하고, 그것에 의하여 여러 가지의 체험을 거듭하고 그것에 잠재하고 있는 성스러운 힘(복수)을 눈뜨게 하여주는 것이다. 아래로 내려가면 개개별별이라고 생각을 가지는 것이 극단을 이루고, 의식은 한 점으로 한정되는 꼴이고, 위로 올라오면 의식은 모든 것까지 확대하여 전일(全一)이 된다.
이것을 잘 알 수 있게 되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많은 것이 구름이 흩어지는 것처럼 없어질 것이다. 인간 이전의 제왕국의 목적은 이제 확실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신의 특수화한 힘을 끊임없이 흘러드는 "모나드 에센스"에서 만들어진 포막을 갖는 군혼, 살아있는 것들은 독립의 존재가 되기 위하여 초기의 삶을 지휘하고, 기르고, 인도해 가는 군혼이야말로, 우리들이 말하는 본능이며, 어느 높은 지위에서도 방해를 받지 않는 본능의 정체(正體)인 것이다.
그것은 새들이 계절 따라 집단적으로 이동해 가는 것이나, 밀봉의 통일된 집단생활이나, 개미들의 놀라운 생활조직, "프랑스"의 해변, 조그만 벌레의 무리가 한 마리의 벌레처럼 행동하는 동작, 제비가 전에 떠나갔다가,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오는 이유를 본능에서 설명하여 준다.
광물, 식물, 동물 왕국에 볼 수 있는 본능이 2개의 근원에서 온다는 것도 명백하여진다. 제일의 근원은, 보호포막 안에서의 신의 생명이다. 이 군혼의 의식 안에 군혼이 진화하여가는 과정에서 생각이 나타나서 그렇게 해서야 군혼들에게 그 목적하는 것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하는 본능적인 충동을 심어주는 것이다. 제2의 근원은 수없이 많은 세대에 걸쳐서 반복되면서 그 모두에게 공유하게 되고, 즉 3개조의 체험인 것이다. 제일 근원은 가령 고대의 Eohippus(말의 선조)안에, 변이(變異)하는 유전자가 신이 상념으로 해낸 유형(類型)에 따르도록, 환경과 습관을 골라서, 본능적 충동을 심어준 것이고, 그 결과가 오늘의 아름답고, 기품이 있는 말(馬)이 된 것이다. 제2근원은 앞에보다도 부차적(副次的)인 많은 생각방법의 유형(類形, 바탕)을 확인하고, 그것을 처음부터 본능적 습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본능은, 열심히 훈령을 계속함으로 어느 정도까지 수정할 수 있는 것은 흥미 있고, 또한 주목하여야 될 것이다.
고대의 영지를 우리들은 배워갈수록, 그 빛은 지금까지의 생의 어두운 부분(복수)을 비추어서 차츰 밝게 해준다. 불가식의 현미경 세계부터 중세대(中世代)의 거괴(巨塊)에서 거대한 디노사우르(공룡의 일종)에 이르기까지, 더욱이 또 조그만 재치, 우매한 것, 잔인한 것, 유화한 것, 걷는 것, 날으는 것, 헤엄치는 것, 자연에 생생히 살아있는 것, 모든 있는 것들 전체를 과거거나, 닥쳐올 미래의 날에도, 이 유일(唯一) 광대한 진화계의 부분이고, 그 세목에 이르러서는 무한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소정의 목적을 향하여 삶을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낮은 생명형체(복수)라 할지라도 어김없이 미래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일대기계장치(一大機械裝置)의 하나의 작은 부분품 같은 것이고, 작은 것이 없고는 큰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생명이 그 시초의 원시적 첫발을 내딛지 않았다면, 오늘의 희망에 찬 징조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주에는 유일공통의 경륜과 유일 공통의 생명의 완성이란 것이 실존하고 전피조물은 그것을 향하여 일제히 의식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을 우리들이 확실히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들 모두를 우리들이 이해할 수가 있게 되면, 우리들은 만물, 만생이 실에 있어서 일체이다는 장엄한 진리상을 얻어낼 수가 있다. 우리들은 전술한 것과 같은 준비과정, 즉 우리들 각자의 안에 있는 내(我)가 물질계에 출생하는 것, 그리함으로서 성취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 가능케 해준 준비과정을, 하급의 여러 왕국 안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이 목적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하고, 우리들의 장래, 초인의 진화의 길에 옮겨서 나아갈때, 미래의 인류의 출생하는 방법이 되는 것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제6장 개별화個別化(Individualization)
그러먼 우리들은 이번에는, 어느 정도로 지적(知的)인 면이 파악되었는데, 많은 시간동안 조용하고도 깊은 명상(瞑想)을 하고 있어도 직관(直觀)을 할 수가 없다. 또 하나는 그 곳, 깊숙한 생명의 신비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그 실현을 위하여 무수한 긴 세월동안에 걸쳐 협력을 하면서 애를 쓴 것으로 말하고 있는 대사건 즉, 인간의 혼의 탄생이다.
그것은 지구사(地球史)의 전개에 있어서 셋째 번의 현저한 성과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신인(성스러운 인간)에 대해, 그 신성을 현현할 수 있는 세계로 여행한다는데 적합하게 타고 갈 수 있는 차(乘車)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물론 여행한다는 것은 의식 안에서의 일이지만, 이 표현은 순수하게 상징적 의미라는 것을 이해해야겠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신이 보호하는 생명의 흐름 안에서 첫째 건(件)이 생기고, 전개하고, 그때까지만 해도 하위3개조를 신이 직접 "컨트롤"하고 있던 것을 그치고, 그 다음에 모나드가 받아서 오늘까지 발달해 가는 중이며 그것도 어디까지 간다고 정해진 것 없는, 증대만 해 가는, 이 모든 행위의 배후에서 인도하는 손을 잡아온 것이, 교체(交替)할 때가 온 것이다.
[그림 46]에서 말하자면 개별화(개인화)의 이 단계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변화를 알기 쉽게 표시하였다. [그림 44의 A]는 개별화가 되기 직전의 그룹혼의 상태이다. 신의 힘은 하위 "멘탈 모나드 에센스"로된 포막(包膜)을 통하여 흘러들어가서, 그 안에 3개조의 한 조를 지키고 자라나고 있다. 그러나 이 3개조가 최고의 발달상태에 이르면, 포막은 붕괴되기 시작하고, 그 분자의 몇 개가 다음 만탈계층의 질료 속으로 융합된다. 그러면 그 질료는 그 계층의 항구적인 핵심(이것을 "마나스"라고 말한다)쪽으로 당겨져서 그 결과 상위 3개조와 하위 3개조 사이에, 그 합인 6개의 원자핵에, 명확한 "링크연결"이 형성되어, 이제는 전체가 하나로 된다. 그리하여 모나드는 성장을 전개해 가는 경륜의 다음단계의 준비가 이제야 완료한 것이다. 이 도해가 [그림 46의 C]이다. 여기서, 이 단계와 연관이 있는 [그림 45]를 되돌아보자. [그림 45]의 오른끝에는 동물, 식물, 인간왕국으로부터 3줄기의 선이 아래로 내려져 있다. 이것은, 자연의 각 왕국은 진화의 상승고상에서, 그 삶의 초점을 위로, 행한 것이지만, 언제까지나 하위의 농밀한 세계와는 연결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들의 각 세계간에 의식을 연결해서 통일된 의식의 표현을 하는 것이 의식의 전개되어갈수록 현저해진다. [그림 46의 C]는 인간육체와 영혼과의 장지의 윤곽이다.
그는 [그림 46]의 각 체의 "스페이스(넓이)"를 잡는 것은, 보통의 상태에 관해서는 아주 무시하여도 좋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이와 같은 그림은 대의(大義)를 파악하는 것에 있고, 사실을 표현한 것이 아니므로, 고표는 마치 지도(地圖)와 같은 것이고, 실제로 나오는 상태는 "심플"로서 표시한 것이니, "심플"의 뜻을 알면 헷갈릴 필요는 없다. 이와 같은 설명을 해서, 분신영을 삼각형으로 상징하지만, 그것은 분신영이 삼각형처럼 3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항구중추(원자)위에 표시하고 있지만, 무엇이나 전부 함께 해버리면,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 질료의 농담(濃淡)의 질서를 표시하는데는, 보통 상하에 겹쳐서 그리지만, 물론 그것은 편의상이고 실제에는 서로 침투하고 있는 것이고, 그림에서 표시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정묘한 체제 [그림 46의 C]의 중심부(에텔체와 육체 "심플")의 둘레에, 중심부에서 떨어져 그린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정묘체의 중심의 육체보다 바깥쪽에 퍼져있지만 동시에 또 육체에 침투하고 있다.
제7장 인간과 그의 제체諸體(The Self and Bodies)
인간은 하나의 육체만이 아니고, 그 이상의 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생각은, 처음 한동안 기묘하고 망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현대의 지식은 옛시대에 비하여 깊고 넓게 퍼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유물주의의 정신풍토안에서 사육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현실보다 훨씬 떨어진, 막연한 몽환(夢幻)의 세계에 불과한 것이라고 요즘에 와서도 제쳐놓아 버린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들은, 인간이 몇 개의 체를 가지고 있는 사실을 알아낼 필요가 없고, 무엇인가 이 물질세계를 넘어 보겠다는 필요성도 없을 것이고, 해부실(解剖室)밖으로 멀리 드나들 필요가 없고, 그렇다고 육체와 그 각 부분의 기능에 관하여 전문가 외에는 누구와도 상의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여기 이 물질세계에서 이미 몇 개의 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체는, 인간의 여러 가지의 요구에 응하기에 아직 불충분한 것이다. 그 까닭은, 서로가 잘 알고 있듯이, 현대의 세계의 대진보는 인간이 기계, 기구 등 많은 보조 수단을 만들고, 그것으로 인간이 가진 손의 효용을 확대하고, 더 빠른 속도로 보통 시야의 한도를 훨씬 넘어서 우주공간을 관찰하고, 역으로도 미세한 것을 들여다보는 것이 가능하여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육체가 일하는 것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마음에서 나오는 발명능력을 이용하여 인간능력을 확대하고, 대자연이 인간에게 부과한 많은 제약(制約)을 타파할 수가 있다. 우리들은 쉽게 간단하면서,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사실(복수)을 알아낼 수 있어 이 연구에 대단히 도움이 되는 결론을 끌어낼 수가 있다.
첫째, 인간의 체란 것은 무엇인가? 화학자의 시점(視點)에서 말한다면 육체란 어떤 대단히 높은, 특수한 방법으로 결합된 화학성분의 집합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이 집합체를 실험실에서 분석한 적이 있다. 이 집합체를 기본적인 단편(斷片)으로 쪼개본 뒤, 약 20 종류의 원소(주로 산소)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산소 다음으로 많은 것이 탄소, 수소, 질소, 칼륨, 철, 마느네슘, 실리콘, 아연, 비소, 취소, 코발트, 동, 요오드 등이 미량이지만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도표의 성분표와는 약간 틀린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 아래와 같다. 이것은 앞에 것보다 과학적이지 못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사실이다.
설탕 ------------- 커피 백 잔을 달게 할 정도의 분량
석회 ------------- 조그만 새집에 석회도료를 칠할 정도의 분량
철 --------------- 1인치의 못을 만들어낼 정도의 분량
마그네슘 --------- 반 타스의 섬광사진을 찍을 분량
칼슘 ------------- 착탄용의 대포로 폭발시킬 정도의 분량
유황 ------------- 개의 몸에 있는 벌레를 구충할 분량
인 --------------- 20함의 석양을 만들 수 있는 분량
지방 ------------- 1타스의 비누를 만들 수 있는 분량
물 --------------- 아이가 목욕할 정도의 분량
이상은 돈으로 환산하면 약 1달러 가령, 이것들의 화학성분을 끌어내어 천가지의 틀린 방법으로 혼홥을 하여보아도, 그 안에서 무슨 생각이 생겨나겠는가? 생겨날리가 없다. 혼합한 것을 이번에는 몸체, 사지, 머리 등의 인간의 형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도, 그것에서 생각하는 것, 움직이는 것, 훌륭한 사안이나,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가? 하지 못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유리나 동이나 철을 조립하여, "텔레비전" 수상기라는 복잡한 구조로 할 수가 있다. 그러면 그 수상기가 말하고, 노래하고, 동작할 수 있을까?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만들어 보면, 그것은 불가시(보이지 않는)의 파동에 의하여 음과 동작이 "스크린" 속에서 재현한다.
이와 꼭같이, 그러나 훨씬 규모가 큰 것이, 신의 몇천 만년, 몇억 만년의 노력으로, 인체가 조립이 된 것이다. 인체는 정묘한 계층(복수)의 특질(복수)을 생겨나게 할 수 없지만 (동 계층의 질료는 생명의 보다 더 고급의 표현의 전용인 것이다). 볼 수가 없는 불가시(不可視)의 영인간(靈人間)에는 응할 수가 있고 또한 사실로서 응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세계 안에서 영인간의 고급의 특징을 내면서 표현 한다. "에너지"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감추고 있는 것이 없는데도, 한 무리의 과학원소를 조립하면, 어떻게 해서 생각하는 힘과 사랑하는 힘이 홀연히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그와 같이 조립을 하면, 사고나 사랑이라 말하는 고급의 국면을 표현할 수가 있는 매체(媒體)가 되는 것이 분명하여진다. 화학자로부터 이번에는 해부(解剖)학자나 생리학자로 바꾸어 보면, 이 사람들 나름대로, 대단히 흥미있는 말들을 가지고 있다. 인체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여러 책이 출판된 덕분으로, 우리들은 이 방면의 지식은 날마다 풍부하게 되어가고 있지만 그러나 불가측(不可測)의 신비는 여전히 거절하고 있다. 지금까지 획득해낸 지식의 집적(集積)안에는 어느 한가지의 현저한 사실이 있다. 그 의미는 당연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명백하여져야하는데 아직 반에게는 잘 인식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체는 하나가 아니고, 복수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림 48]은 이 사실을 표현하였다. 육체는 꼭 미궁(迷宮)처럼, 많은 부분에서 적어도 7개의 체가 확실히 구분될 수 있다. 즉 골격체(1), 근육체(2), 신경체(3), 순환체(4), 임파체(5), 관체(6), 피부체(7)이다.
더 깊이 연구하면 다른 체의 존재도 알 수 있게 되겠지만, 당면한 진리를 알려면 또 우리들의 육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실은 몇개의 체이고, 각각 서로 침투하고 얽매어 있고, 이러한 체 전체는 건전하게, 각각의 특수한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을 명백히 하는데는 이것으로 족하다.
지일먼저 우리들이 주목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골격체(1)이다. 이것은 206의 부분으로 되어있고, 딱딱하지만 필요불가결한 연결점이나, 연결장치와 조립되어,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되어, 마치 공학(工學器官肺) 디자인의 승리인 것이다. 중량에 비하여, 배는 가장 우수한 강철보다 강하다. 두개골은 속에 있는 뇌에 있어서는 아주 좋은 보호함이 되고, 배골은 26의 척추관절로 되어 관절과 관절 사이에, "쇼크"를 흡수하는 "판트"를 두고, 척추란 대단히 중요한 신경의 통로를 수납하고 있다. 교묘하게 디자인된 조골의 구조는 안에 심장, 췌장 그 외의 기관(器官)을 지키고 있고, 거기에다 그 힘은 안전을 확보하면서 호흡에 필요한 폐(肺)의 확장과 수축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서 체 전체가 대단히 강하고, 각 부분은 그 몇 배의 중량을 지탱할 수가 있다. 가령 경골(목뼈)은 3,600파운드의 중량을 지탱할 수가 있고, 이것은 보통의 "프로모션"의 사람의 힘의 약 30배이다.
뼈안의 "에센스"는 매분에 1억 8천만개, 매일 2천 6백억의 적혈구를 생산한다. 뼈의 표면은 보기에는 매끄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은 많은 조그만 구멍이 둘레에 있고, 그 안에 정맥, 동맥, 임파나 신경이 통하여 연한 안쪽으로 퍼져있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것이 골격체이고, 다른 여러 체를 지탱해준다. 그것이 없으면 다른 체는 아무 것도 쓸모가 없다. 거기에 또, 안에 다른 제체의 부분이 들어가서 있는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러나 골격자체는 자발적으로는 움직일 수가 없다.
이번에는, 다음의 근육체(2)를 보자. 이 근육체의 주된 목적은, 뼈와 그 밖의 부분을 움직이는 일이다. 이것은 수의(隨意), 불수의라는 두 종류의 주된 형의 근육이 있기 때문에 2중의 일을 한다. 전자는 생명이 말하여 주듯이, 여러 가지의 운동을 일으키고 있지만, 그것은 마음(마인드)의 지휘하에 있다. 후자는 전신의 내부의 일, 가령 심장의 고동, 폐의 일, 식물의 소화관 안에 보내는 것, 그 외에 많은 일을 "컨트롤"한다. 어떻게 해서 하나의 손가락이 올라가는가? 어떻게 해서 하나의 다리가 땅에서 올라가는가? 이것에 관해서는 오늘에도 충분히 알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과정이다(좀더 배워가면 통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골격체와 근육체의 조합으로 연결부분을 모두 안정시키고, 근육은 각각 적당한 장소에 고정시켰다고 하자. 이것으로 운동의 기구는 다 된 것이지만, 실재에는 아무런 운동도 할 수가 없다.
여기서, 통제하는 사령(司令)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육체의 모든 곳에 명령이나 정보를 급송하는 전화선이 필요하다. 이것에도 두개의 계통이 있을음 안다. 더 세분하면 실은 몇 개가 되지만, 그것은 약해버리고, 두개의 주된 신경계통이라 말하는 중안(뇌배수) 신경계통과 교감신경 계통이다. 후자는 잠재의식의 일하는 것을 "컨트롤" 한다. 앞에 말한 제체 중에 가장 주요한 것을 하나만 뽑으라면, 아마 이 체가 그것에 해당될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전문화한 타는 것이 된다. 이 체를 통하여 감관에서 주는 인상을 전부 받아낸다.
만약 우리들이 전화 교환국 안에 들어가면 그 무수한 전선으로 구분되어 몇 개의 송수신기가 질서정연하게 작동하는 것을 보면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의 체내의 "전화시스템"은 지금까지 건조한 최대의 전화국보다 무한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한 것이다. 현대(본서 초판의 1957년)의 "컴퓨터" 즉 전자두뇌 안에 120억 이상의 신경세포가 있고, 체내의 신경길이는 수천 "마일"이 된다. 그러면 이것을 모두 연결해서 합하고, 가능한 행위역을 연결해서, 몸체의 구석구석까지 "메시지"를 전광의 빠른 속도로 언제, 어느 때이고 보내게 하여보자. 행위의 기구나 "메시지"를 전하는 선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대도, 막상 필요한 행위는 전혀 생겨나지 않는다. 전선 안에 전류가 흐르지 않는 한 전화교환국 안에는 아무 움직임도 생기지 않는다.
여기까지 조립해온 인간은, 아직까지 완전한 것과는 먼 것이다. 틀림없이 뼈, 근육, 신경을 갖추었다. 그러나 "메시지"를 보내기 전에 신경에 채워줄 힘이 있어야 한다. 또 그전에 이러한 몸체를 언제든지 효율 좋은 유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신에 피를 운반하고, 각 세포에 영양을 주고, 노폐물을 운반하여 버리는 순환(4)에 관하여 공부하여 보자. 이것은 양자간에 있으면서 양자간을 연결하고 있는 모세관(毛細管)이라는 미세한 관이고, 놀라울 정도로 작고, 그 대부분은 육안으로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순환계 전체의 길이는 6만 마일이 되고, 지구 둘레의 약 2배반이나 되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몇 조억의 세포의 요구를 충당시켜 주어야 하고, 세포마다 그 요구하는 것에 따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중앙의 "본부장" 즉, 심장은 매일 육체에 합계 4천 "갤론"(갤론 3,785리터)의 혈액을 보내고, 보통 생존기간내 최후의 고동(鼓動)까지는 2천 5백억 회의 박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아주 흥미 있는 것을 E. H 프락트 박사는 그의 저서 "복합인간" 안에 취급한 다음 사실에 주의를 촉구하고 있다. 즉, 만약에 복합인간이 순환계를 다른 분에서 떼내서 따로 할 수 있다면, 그 일부는 눈에 보이고, 그 일부는 차츰 정묘하여져서 결국 보이지 않게 되어서, 순환 체는 후광(後光)에 싸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또 다른 임파체(5)는 보통 잘 알려져 있지만, 몸의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역시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순환체에 밀접한 관련하고 있고, 큰 것은 동맥과 정맥에 따라서 펼쳐있고, 작은 것은 모세관에 관련하고 있다. 순환체와 같이, 육체의 모든 부분에 침투하고 있지만, 혈액이 아니고 임파(淋巴, Lymph 척추동물의 체액의 한가지로 피와 같이 몸 안을 돌면서 영양소와 면역항체를 운반함)를 운반하는 점에서 틀린 것이다. 그것은 육체의 하수도라고 말하여도 좋다. 육체의 모든 부분의 모세관에서 조직 내로 심어드러나오는 임파를, 말하자면 쓸어 몰아서 심장 가까이 정맥의 흐름 안에 되돌려 준다.
다음체는 편의상으로 관체(管體)라고 부른다. 그것은은 입(口)에서 시작하여 위(胃)에 이르고, 거기서 소장, 대장에 이르는 긴 관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후두기관, 기관지라 말하는 기도(氣道)도 관체안에 포함된다. 이러한 관은 다른 체보다 넓지는 않지만, 그 분기(分岐)와 효과는 체내의 어디서든지 느낀다. 첫째, 식물이 흡수하여 동화에 대비하고, 둘째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는 호흡장치가 혈액에 산소를 공급하고, 또한 노폐물을 공중으로 배출하고 있다.
끝으로 피부체(7)이다. 마지막에 설명하게된 이유는 이상의 여러 체를 몰아싸서 일체로 하고, 동시에 외형을 완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체는 다른 체들에 외부침입과 여러 가지의 외계로부터 간섭을 지키는데 극히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육체의 변이성(變異性)을 잘 나타낸다. 즉 피부는 몇 개의 층으로 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오래된 헌 소제는 밖의 층으로 밀어 올리고, 미세한 편린(片鱗)이 되어 공중으로 방출된다. 피부체는 그 전 층을 포함하여 2년에 한번씩 아주 경신되는 것으로 계측(計測)되고 있다.
그러면 골격도 있고, 근육도 있고, 신경도 준비되어 있다. 거기에 동맥, 정맥, 임파, 소화기관, 호흡기관이 있고, 피부가 그것을 전부 둘러싸고 있다. 보기에는 완전한 인간이다. 그러나 보는 대로 진짜가 못된다. 볼 수 있는 인간일 뿐 그것으로 끝난다. 왜냐하면, 이것에는 자동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력(無力)이다. 죽어 있는 것이다. 있는 것은 그저 어떤 비상한 교묘한 방법으로 조립된 화학원소의 집합뿐이다. 무엇하나 생동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활력이나 지혜도 없고, 거기에 인간이란 종속(從屬)안에 간혹 볼 수 있는 정말로, 아름답고, 영적인 특질의 것들도 없다. 뇌는 있어도 생각할 수가 없다. 근육이 있어도 움직일 수가 없다. 신경계통이 있지만 "메시지" 하나도 통하게 되지 않는다. 물론 심장은 있으나 고동을 하지 않고, 입술이나 혀(舌)가 있지만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육체이지만 인간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것은 기계이다. 그러나 운전자가 없는 기계이다.
과학은 물질에 초물질적 특질(복수)이나, 힘을 부여하려고 한다. 물론 물질, 그 모든 원자가 존재하고 있다. 화학적으로는 그것은 완전하다. 그러나 고급의 속성은 모두 빠져있다. 물질 안에는 어떻게하여 그와 같은 고급의 것이 수납되겠는가, 수납될리가 없다. 이와 같은 유물적으로 보는 것, 생각하는 방법은 결국에는 해답을 거부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하는 것뿐이다. 신지학은 농도의 일정한 질서 있는 초물질(그것은 오직 앞에 말한 힘(복수)만에 의해서다)이라고 가르치며, 과학이 부딪쳐서 조그만 길목에 서 빠져나오게 해주는 논리적인 알기 쉽게 해답을 주는 것이다.
이 우주에는 아주 물질적인 이상의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있다. 과학은 지금까지로는 불가시의 것에 대하여 그 속으로 아직 그렇게 깊숙한 곳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신지학으로 바꾸어 육체와 협동하여 일하고 있는 정묘체에 대하여 배우고자 한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인간이 물질로서 된 몇 가지의 체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아왔다. 각 체는 전체에 대하여 독특한, 특수한 공헌을 하고 있다. 그러한 체는 서로가 침투해 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림 48]의 각 체처럼 따로따로 멀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따로 그린 것은 단순히 "샘플"이고, 보는 쪽, 생각하는 쪽을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 육체에는 눈에 보이는 부분이 있고,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 한 눈에 보이는 부분은 육안에 시력의 연장(현미경이나 망원경)에 의하여 보이게 되는 것을 배우고 있다. 이상은 모두 지금부터 생각해 가려고 하는 정묘한 체에도 해당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정묘체를 편의상 따로따로 취급할 필요가 있지만, 실은 전부가 서로간에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하나의 체가 전체에 대하여 특정한 공헌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는 아주 과학적으로 관찰되어 있고, 다른 제체에 대하여서도 실험의 결과 그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재료를 입수할 수가 있다. 지금부터 배우는 다음의 체를 빼고는, 다른 제체는 보통의 시력으로서는 보이지 않는다. 순환체를 다른 제체에서 떼어내면 일종의 후광에 싸여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정묘체도 육체의 둘레에서 후광처럼 보이는 것이다. 육체의 불가시의 부분도 현미경을 쓰면 보이는 것처럼, 불가시의 초물질체는 진화의 과정을 단축하여 초물질세계에 투입(投入)하는 초감각기관을 발달시킨 사람들은 볼 수가 있으며, 사실 보아오고 있다. 인간의 초물질체에 관하여 이와같은 사실은, 실은 육체에 해당하는 사실의 논리적인 연장이라고 말하여도, 이와 같은 사실이 논리적 추론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실이란 것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언제나 이성(理性)에 의하여 시험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성에 의하여 그것을 "테스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은 우리들이 연구하는 것은 "에텔체" 일명 활력체이다. 그것은 육체가 되는 일가와 침투를 해서 합하여, 육체의 둘레에서 어느 거리까지 "오라"로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림 49] 안쪽의 "오라"는 장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육체의 둘레에서 1인치 전후에서 끝나고 있다. 이 체는 육체 "시스템"의 화력원으로서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하고, 그것을 신경을 통하여 육체전체에 확산시킨다. 이 에텔체는 전기와도 관계가 있는 힘(복수)과 에너지를 보급하고, 신경계통 자체를 포함하여 육체전체의 활력을 유지하는데 기여한다. 육체의 화학적인 신진대사는 제일에는 조직, 열, 근육의 수축을 유지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육체 전체의 반응과 활력(동물과 식물이 틀린 연유에도 이 두가지다)을 유지하는 것은, 그 이상의 어떤[무엇]이 필요하다. 그것을 제공하는 것이 에텔체인 것이다. 그것은 조직이나, 신경 속에 전기발생과 움직임을 통하여 화학적 행로(行路)와 연결이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들의 활력은 주로 태양에서 오는 것이고, 에텔체 안에 전문기관을 통하여 에텔체 속에 흡수된다.
C. W. 리드비터(Leadbeter)는 그의 저서 "눈에보이는 인간과 보이지 않는 인간(Man, Visible and Invisible)"에서 이 에텔체의 외견(外見)을 말하고 있다.
활력 즉 프라나(Prana, 태양으로부터 방사된다)는 에텔체 안에 흡수되고, 부활 활동이 끝나면, 피부의 구멍에서 똑바로 밖으로 방사되지만, 그는 그것을 청색이 들어있는 백색이고, 호(鎬) 모양을 하고 있는(주름이 있는 백색)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약 60년 후에 런던의 성마리아 병원의 월터 B. 킬너(Walter B. Kilner)박사의 "인간 오라"라는 표제의 저서 안에 말하고 있다.
진찰하기 위하여 오라(명백히 에텔체)를 이용한 관찰결과의 생각을 맞추어보면 흥미 깊을 것이다. 이 에텔체를 보는 능력은 "디시아닌"(Dicyanin)의 "알콜" 용액으로 만든 "슬라이드(Slide)"를 사용한 것으로서 개발되었다. 이것에 가능한 것은, 에텔질료까지는 물질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그래서 물질계의 법칙에 따르기 때문이다. 동 "킬너" 박사의 그 책 안에 내부 오라(리드비터는 건강 오라)에 언급하는 데서 그것이 호 모양을 하고 있다고 꼭같이 말을 하였다. 그 책의 저자 "킬너" 박사가 제작한 "스크린"을 여러 차례 쓸 기회가 있었는데 틀림없이 그 "스크린"으로 에텔체를 볼 수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에텔체는 "차크라(Chakras)"라고 말하는 힘의 중추 즉, 에텔기관이 몇 개 있다. 이 "차크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수세기에 걸쳐서 알려졌으며, 동양의 많은 비밀의 서적, 특히 힌두교의 성전에 그 서술이 나와있다.
[그림 49] 안에 6개를 표시하였다. 이들 "차크라"는 척추 안에 있는 신경중추의 에텔부분에서 나오고, 원요형안에서 끝나고 있다(나팔꽃과 닮음). 그 하나 하나가 심한 움직임의 중추인 것이다. 그 중에 2개는 특히 육체에 걸쳐서 있지만, 다른 것은 주로 정묘체에 연결하고 있으며, 그 힘은 뒤에 설명한대로, 농밀한 물질(육체) 안에서 표현한다. 그림에는 없지만, 어느 중추는 육체의 동안에 척추의 기저(基底)의 약간 위에 있으며, "쿤달리니(Kundalini)"라 말하는 힘(지구의 안쪽에서 나오며 육체의 기관에 생명을 준다)을 흡수하는 것을 전문으로 한다. 그 힘은 지금까지 과학에서는 미지(未知)이다.
제2의 중추는 비장의 약간 위에 있고, 태양으로부터 활력, 즉 "프라나"를 흡수하는 것을 전문으로 한다. 이 중추 안에서 "프라나"가 분할 되어서 육체의 여러 가지 부분에 배분되고, 많은 신경중추의 부활을 시키고 육체의 신경에 에텔의 흐름을 생기게 한다. 다른 중추(다음에 본다)는 정묘체에서 오는 여러 가지의 힘을 육체를 통하여 표현하는 연결장치이다. 이와 같은 활력체를 제체에 주게 되면, 신경은 살아서, 육체의 전화시스템을 작동한다. 이제 우리들은 운동하는 육체기구와, 그 운동이 만들어내는 활력을 손에 넣었다.
이제는 뇌(腦)가 육체의 모든 부분에 "메시지"를 보낼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거기에 활력 이상의 것이 또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이해도 없이 그저 움직이는 자동인형이 아니고, 인간은 훨씬 위대한 것이다. 인간은 느낄 수가 있으며, 생각하고, 희망하며, 사랑하고, 영적인 청원이라는 성역(聖域)에 접하려고 하는 회심(回心)하는 것을 해낼 수가 있다. 행동은, 이와 같은 훌륭한 큰 것들 전부의 최후의 산물인 것이다. 자동인형은 그저 움직이고,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 여기서 자동인형과 인간의 틀린 점이 있는 것이다.
더 앞으로 나가보자. 우리들의 육체의 장치(매커니즘)와, 그 생명과 움직임에 주고 있는 에텔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정(情)도 없고, 감각도 없다. 물론 감각기관은 있다. 그러나 그것을 쓸 수가 없다. 꽃들의 아름다운 향을 모르고 솔 나무에서 나오는 향기가 가져다주는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을 모른다. 입술, 혀, 그리고 성대(聲帶)를 가지고 있으나, 한마디의 말을 낼 수는 없다. 양눈에서 각각 뇌까지 펼쳐있는 50만개의 신경섬유와 강막(綱膜)에서 광선에 의하여 운반되어 온 인상(그것은 전기 인파로 변한다)을 받아들이는 수백 만개의 원주상체(圓柱狀體)와 원추상체(圓錐狀體)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양눈에 비치는 영광(복수)에 대한 의식이 없다. 양귀는 음을 "캐취"하는 태세이고, 고막과 침골(砧骨)(대자연이 만들어낸 놀라운 장치)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파동은 기다리고 있는 기구에 도달할 뿐, 그것의 선율(旋律)을 감미한 음계(音階)로 전환하고 그것에 감응하며 황홀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무것도 못한다. 이 부족한 것을 갖추도록 신지학은 우리들을 물질권의 저쪽으로 안내하고, 우리들을 지금까지 조립하여온 인간의 의식의 매체로서의 인간에게, 거기에다 3개의 매체를 더하여 우리들이 말하는 인간을 완전한 것으로 하려고 한다. 그림은 우리들에게 "아스트랄체", "멘탈체", "코절체"의 3개의 매체를 보게끔 인도한다. 이 그림판은 앞에 말한 눈에 보이는 인간과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전장(全張)크기의 칼라 도판의 단색 사본이다. 이와 같은 초물질체에 대응하는 3개의 질서 있는 질료에 대하여는 이미 설명한 [그림 20]에 있다. 원서에는 이러한 고위체의 특질을 색채로 표시하고 있지만, 이 특질자체가 실은 깊은 연구의 주제이고, 그 도표의 원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원시인의 아스트랄체 안에 적갈색(赤褐色)의 폭넓은 색대(色帶)가 있지만 그것은 색욕을 나타내고, 둔한 비색(緋色)은 노여움(怒)을 표시하고, 다른 둔한 탁한 색은 기타의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특징을 나타낸다.
이 아스트랄체는 명백히 조직을 세우고 있지 않으므로 멋대로 되어있다. 평균적 인간은 아스트랄체의 조직도 잘 되어있고, 따라서 색체의 배치도 전자보다도 질서가 있다. 고도로 발달한 사람이 되면 상황은 아주 좋고, 머리둘레에 있는 큰 황색은 감정과 욕망을 마음으로 "컨트롤"하고 있는 것이 나타난다. 원시인의 멘탈(마인드)체를 잘 보면 거의 발달하지 못한 것을 안다. 가장 머리끝에 약간 황대가 있는 것으로 약간의 정신능력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고도로 발달한 사람에서는 진보한 정신능력이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이 색채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세련되고, 정묘하며, 그의 지성을 나타내는 황색을 대단히 확실하고, 실제로 영안(靈眼)으로 이것을 보면 더욱 아름답다. 코절체(영체)는 그에 상응하는 진보를 나타내고 있다. 코절체의 진화의 초기에는 불쾌한 색채(복수)같은 것은 없다. 그 이유는 코절체에는 원래부터 나쁜 특질이 없고, 그저 좋은 특질을 비워있는 것 뿐이다. 이 비어있는 상태가 진화하여 가면서 흔하게 아량을 매워가는 것이, 불충분하지만 도관에 표시한 대로이다. 진보한 사람의 코절체에 대하여 "리드비터"는 이렇게 쓰고 있다.
코절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정묘한 질료로 되어, 정교 또한 영묘는 매우 활발하고, 살아있는 불을 가지고 맥동하고, 진화가 되어가면서 선 색채의 빛나는 구(球)가 되고, 그 높은 파동은 그 표면 위에서, 옮겨져가는 색채(지구에서 알지 못하고 있는 색채)는 파도 같이 되어있다. 찬란하면서 유화의 그 영광(靈光) 모두를 지면에 옮겨내어 보려고 하는 것은 공연한 헛수고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화가(畫家)는 어떠한 화필(畫筆)을 가지고도 그려낼 수 없는 것을 전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가령 가장 졍묘한 화상이라도, 세상사를 넘어서 실상(實相)과 거리가 멀다하여도, 그것은 우리들이 개념을 쌓아올리는데는 우리들의 상상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인용문처럼, 이와 같은 정묘한 제체의 실상을 미미한 표현으로 하는 정도 이상을 명백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제체 중에서 가장 매력이 적은 아스트랄체조차, 이 물질계에 있어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어떤 것 보다도 활기차고, 약동하며, 생명이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채들은 아름다울뿐 아니라, 모두들 높은 발달단계에 있으면서, 방사(放射)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생생하면서 약동하는 무지개를 이루고 있는데, 움직이지 않는 그림으로 담아보겠다고 하는 것은 누구도 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아직 희귀하게, 순간 정지하였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 그 모습을 바꾸고, 숨어있는 힘(복수)을 새로운 면을 나타내며, 마음속으로 끝없이 스쳐 지나는가 하고 보면, 어떠한 의도(意圖)를 거느리고 와서, 감정이나 상념과 함께, 홀연 나타나는데 그 극적인 꼴에 놀라고 만다. 그러나 코절체가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의 불변(不變)의 강한 사광은 다른 제체의 것보다 강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세상살이에 있을 수 있는 장려(壯麗)한 것으로 된다.
색채란 것도, 그것은 정묘한 질료 안에서의 색채였지 우리들이 이 세상, 물질계에서 알고 있는 색에 대응하고, 그것에 조화는 하지만, 색채의 표현의 매개라 되는 질료에 있어서는 그 색상(色相)이 하나(1) "옥타브", 혹은 그 이상 높은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림의 도움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인간의 매체의 현실성, 각 체의 정묘한 정도에서 한단 떨어지는 계층에 속하는 체 보다는 많은 힘이 가득하고, 색채의 힘에서도 많은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되어 지금은 코절체에서 삶을 하는 인간이 출현하고, 코절체를 통하여 그가 지금까지 발달시켜 온 여러 가지의 영적인 힘을 발현(發現)하는 데 이르렀다. 이것이 "크리스챤"이 말하는 혼이다.
신지학의 문헌에서는 자주 에고(Ego)라고 말한다. 이 영체 또는 코절체는 인간의 현재의 진화상태에서는, 고위의 사고력과 동시에, 적당한 "채널"을 통하여 의지와 사랑과 힘을 나타낸다. 그것은 또 그의 인간으로서, 보통의 진화기간을 통하여 얻어진 지식의 보물단지인 것이다. 물질세계에 태어나는 데의 "멘탈"체를 가지며, 그것을 가지고, 사고하고, 정보를 모으고, 그것을 분석하고, 자신의 창조력(복수)을 표현한다. 더욱더 그는 감각하고, 욕망을 가지는 매체가 되는 "아스트랄체"를 가지며, 마지막으로 전적으로 행위(行爲)하는 것에 쓰게 되는 용구인 육체를 소유하기에 이른다. 이것을 세계에 감응(感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체를 모두 써가면서 성장한다. 육체는 그 여러 종의 기능을 이용하는 것으로 성장하지만, 고위(高位)의 체 또한 그렇다. 이러한 체는 그것을 혹사하는가, 일하게 하는가, 그대로 방치하는가에 따라서, 그의 특질이나 반응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역으로 낮아지기도 한다. 물질계에서의 그 효과는 우리들이 잘 알고 있다. [그림 51]에는 어떤 감정이 "아스트랄체"에 미치는 효과를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은 앞의 것에서 다시 뽑은 것이다.
위 [그림 51의 A]는 우울할 적에 "아스트랄체"가 받는 영향을 나타내었다. "아스트랄체"의 둘레에는 퉁한 회색대가 생기기 시작하며, 그대로 가면 "아스트랄체"는 침울한 옥사(獄舍)로 변하고 만다. 그림에서 극단의 예가 되는 것을 들면, 다른 색은 거의 지워지고, 인간 자신은 그 "아스트랄체"의 사실상의 수인(囚人)으로 되어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상태가 좋아지고, 그는 평상시의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스트랄체"는 똑바로 원상태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일단 심하게 생겨나면, 그것에 대응한다.
"아스트랄"계층의 회색(灰色)의 질료는 "아스트랄체" 안으로 끌려 들어가서, 그곳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고 그같은 상태에서는 우울증이 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그림 51의 B, C]의 예에서도 해당하는 것이다. 공포의 효과는, 우울의 효과와 닮은 것이 있다. 이 경우는 조금씩 나쁘게 되어 가는 것이 아니고, 회색의 행선을 심하게 진동시켜서, 평상시의 색채는 거의 없어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공포가 수습되면, 거의 원래의 것으로 차져 평상시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착란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반응하는 질료가 "아스트랄" 안으로 끌려숨어들어가서, 조금씩 공포를 더 잘 느끼게 된다. 노여움 또한 "아스트랄체" 안에서는 대동란을 일으키는 심한 감정이다. [그림 51의 C]는 심한 노여움의 발작의 결과를 표시하고 있다. 몇 개의 검은 소용돌이, 그것에 붉은 색의 생생한 평상시의 아스트랄체의 색은 걷혀버리고, 아스트랄체 뿐만이 아니라 육체까지(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국 감정은 육체를 통하여 표현되기 때문에) 해를 준다. 이와 같이 살인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사람은 지금까지 몇 회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노여움의 발작을 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아스트랄체"가 이와 같은 심한 악의와 증오(憎惡)를 폭발시킬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와 같은 위험한 것에 잘 주의하고, 노기(怒氣)가 강하여져서, 그것에 패하기 전에, 그리고 또 대자연의 가혹한 배상방법이 개입하기 전에, 사태를 극복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림 안에 설명도 있지만, 노여움, 의기소침하거나, 또는 공포하거나 하는 것은 영인인 자신이 아니다 하는 마음가짐에 특히 주의하여야 한다.
그때는 영인(靈人)인 자신은 "아스트랄체"의 "컨트롤"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그 때문에 "아스트랄체"는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멋대로 반응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들의 의식의 상태를 주의 깊게 분석하여 보면, 실은 숨어있는, 안에서 나는, 소리 진아(眞我)의 소리라는 것이 있으며, "아스트랄체"의 심한 반동을 넘어서 그 소리를 들어보려고 하는 보람도 없이, 힘을 얻지 못하고 "아스트랄체"는 "컨트롤"하여 원위치로 돌아가서 평균상태가 되어 보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그러한 것이다.
이번에는 좀 밝은 쪽으로 보자. [그림 51의 D]는 "코절체"내의 진아가, 그 순애의 면을 나타나는 경우에 "아스트랄체"에 주는 효과는 [그림 51의 E]에서 심한 헌신(獻身)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한 면에 장미색을 띄우고 있다. 애정은 반드시 이 색채를 띄고 있다. 후자는 헌신의 색채인 청이 들어있다. 이 어느 때에서도, 파동하고 있는 평행선(平行線)의 감정은 심한 집중상태를 나타내지만 소용돌이는, 감정의 대상에 대하여 진아에서 사랑이나, 헌신의 정이 분출하고 있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그림 51의 A, B, C]에 나타난 것처럼,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와는 대조적으로 [그림 51의 D, E]에는 진아가 "아스트랄체"를 통하여 직접으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인 것에 주의하여 볼 것이다.
체내에 있어서 이와 같은 효과는, 체의 "레벨"과 질을 향상시키고, 다음에 기회 있을 때마다, 진아의 여러 가지의 아름다움을 점점 발현(發現)하기 쉽게 하는 것이다. "아스트랄체"는 많은 면에서, 위로 끌어올려지기도 하고, 역으로 밑으로 끌어내려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거나, 그 사람의 현재의 발달정도가, 좋거나 나쁘거나, 그 사람의 밟고 지나온 과거의 모든 노력의 대차대조표인 것이다. 다행히, 최고의 감정이나, 상념에 관여하는 정묘한 질료 안에서 쓰여진 노력을, 더 조잡한 질료안에서 해냈던 같은 노력보다는 많은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꼭, 지상에 공기 속에서 걸어다니는데 쓰여진 에너지의 양은, 같은 양의 에너지로서 바다밑 해수(海水)안의 그와 같은 경우에 비해보면 훨씬 장거리를 걷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해서, 진아와 제체는 인생살이의 길을 전진하여, 세월이 흘러가면서, 각체는 차츰 개선되어 간다. 그러면, 인간의 정묘체(복수)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소개했으니, 여기서 한발 전진하여 "차크라"에 관하여, 지금까지의 정보에 근거하여 연구하기로 하자. "차크라"는 몸체의 건강면에 있어서나 인간의 의식의 진화에 있어서나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각 "차크라"는 몸체 안에서 이중(二重)의 일을 한다. 하나는 생명과 에너지를 흡수하고, 하나는 변압기(變壓器)로서 일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몸체 안에서 발생한 생명력(복수)의 강도가 바뀌어서 농밀한 매체(육체)를 통하여 표현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전기에너지가 하나의 "포텐셜(電位)"에서 다른 "포텐셜"로 변압되는 것과 아주 꼭 같은 것이다.
다음 [그림 52의 B]는 이런 의미의 변압기에 잘 쓰고 있는 기호로 표시하였다. 공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가령 중기기용의 전압은 250볼트이고, 또 그 이상이라고 한다면, 일반가정에서는 120볼트(미국의 경우)까지 내려서 보낸다. 저 전압용의 기기(機器)는 직접 고압전기로 흘러보내면, 당장 손해가 생기고, 끝내는 못쓰게 될 것이다. [그림 29]를 다시 보면 "아스트랄체"의 감정의 결과는 육체 안에서 재현(强度)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물질원자는 그 속에 다른 계층 질료 전부를 내포해 있으며, 따라서 제약받고 있는 범위 안이기는 하지만, 이들 계층의 생명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물질원자는 독특한 입장에 있는 것을 당장 알 수가 있다. "차크라"라는 것은 여러 종류의 영적 "에너지"나 감정에너지 등의 힘의 강도(强度)를 물질에 감응시킬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표현할 수 있을 정도까지 아래로 내리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모든 고위의 체와 그것보다 더 낮은 즉, 농밀한 의식의 매체와의 관계에도 해당하는 것이다. 이 사실에서 본다면 물질세계에는 초물질세계에도 맞춰지는 열쇠가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들은 느낀다.
왜냐하면, 동일한 법칙이 어떤 계층에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52의 A]는 이러한 힘의 중추(차크라)와 그것들이 "에텔체" 안에서 일하고 있는 순서를 열거하고 있다. 처음 두개의 "차크라"는 주로 육체에 관계해서 육체의 건강과 힘을 주고 있으며, 제3, 4의 "차크라"는 "아스트랄체"내에서 생기게 되는 감정의 힘을 육체에 의한 표현으로 바꾸어 준다. 제5, 6의 "차크라"는 인간 자신의 영적 힘을, 육체의 의식 속에 가져다준다. 이들의 "차크라"는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같이 "에텔체"의 표면을 볼 것 같으면, 얼핏 보아서 나팔꽃의 덩굴과 닮아 있으나, [그림 52의 C]의 그림처럼 자동차 바퀴 모양을 한 꽃 보다는 크게 퍼져있다. 차바퀴처럼 퍼진 것과, 꽃의 형을 한 꽃잎의 수는 "차크라"에 따라 틀린다. 각 "차크라" 안에는 흐름이 생기면서 감아 돌아 올려서, 잎사귀를 상하로 서로 싸여져서, 전체로서는 가운데가 오목한 요(凹)자 모양 동그란 밑바닥을 한 모양을 하고 있다. 육체는 우리들이 섭취하는 식물이나 수분 외에 실은 우리들의 둘레에 있는 에텔권에서 오는 힘을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힘 중에서 그 하나는 지구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는 쿤달리니라 말하고, 또 하나는 태양에서 온다. 이것은 프라나라 말하고 다른 하나는 활력을 준다. 그 어느 쪽도 과학에서는 알지 못하고 있지만 프라나 쪽은, 그 존재를 어설프게 느끼고 있는 과학자도 몇 명 있는 것 같다. 쿤달리니가 나타나는 식에서 몇 가지의 수준이 있지만,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중 가장 낮고, 가장 농밀한 것이다.
그것은 농밀체(육체)의 구조에 영향을 주어, 건강과 정력을 가져다준다. 땅속에 구멍을 파는 사람이나, 농부나, 조원업자 등 흙을 가까이하고 있는 사람들은, 흙이 주는 행복감을 잘 알고 있다. 그 힘은 척추 및 가까이에 있는, 근본 "차크라"에 의하여 흡수되어, 에텔체의 표면에 나온다. [그림 52의 A] 흡수와 내부작용이 있은 후, "쿤달리니"는 척추를 타고 상승하여, 신경전체에 퍼져서, 혈액의 흐름과 성기에도 일을 한다. 그 근본 "차크라"는 또 비장에서도 특수한 스타일의 에너지를 받아서 "쿤달리니"의 흐름에 따라 재분배하며, 그 당사자가 보다 높은 수준까지 발달했을 때는, 고도의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한편, "프라나"는 직접 태양에서 온다. 그것은 모든 생명현상을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힘이다. 물질세계에 나타나는, 그것은 7개의 궁극물질원자(산스크리트어에서는 아누Anu)에서 이루어진 특히 밝은 소립자(素粒子)를 쓰고 있다. 이것을 활력소구(活力小球)라고 말한다. 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 활력소구를 보고 있다. 날씨가 맑고 좋은 날에 태양을 바로 보지 않고 청공(靑空)을 보면, 조그만 밝은 입자가 대기 속에 대단히 빠르게 움직이며 돌고 있는 것을 간단히 볼 수 있다. 이것이 활력소구인 것이다.
이 활력소구안에 "프라나"는 비장중추(비장 가까이에 있다)에 흡수되어, 그 안에서 특수한 7개의 상이한 흐름으로 분화한다. 이 7개의 흐름은 7개의 궁극분자(활력소구의 형성에 참가한다)에서 생긴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에텔체내에서 일곱 개의 틀린 색이 되며, "스펙터클(Spectacle)"의 7색의 대단히 닮은 것이다. [그림 52의 A]처럼, 췌장 "차크라"는 목의 중추에 특수한 "프라나"의 2개의 흐름에 의하여 보내고 있다. 이 색은 청과 동이지만, 도중에 서로 합하여 하나의 흐름으로 되어 목의 "차크라"로 들어간다. 뒤에 2개는 감정색과 등(橙)색으로 근중추(척추정중추)에 가지만 역시 도중에서 합류하여 하나의 흐름이 되어 근중추에 들어간다. 제5번은 황색으로 심장중추에 가서, 제6번째의 배꼽중추로 가지만, 이것은 녹색을 띤다. 제7번째는 파란색으로 신경 전체에 배분된다. 근중추(根中樞)에는 4개의 폭(幅, 바퀴)이 비장중추에는 7개의 폭이 있다. [그림 52의 A1, 2]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2개의 중추의 주된 일은, 농밀한 육체에 생명과 활력을 주는 것이고, 그것은 기권(氣圈)에서 체내로 흡수되고, 비장중추는 [그림 52의 C]에 표시하고 있다. 다음의 2개의 중추는 하나의 변압기처럼, 그것에 의하여 감정의 힘이 육체에 재현되고, 배꼽중추[그림 52의 A3]은, 노여움, 공포, 빈욕, 무엇같이 낮은 원시적인 "아스트랄" 감정을 취급한다. 이와 같은 감정을 우리들은 태양총(太陽叢)의 위쪽(배꼽) 안에서 실제로 느끼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랑, 헌신, 동정, 같은 고급의 감정은, 심장중추[그림 52의 A4]가 변압기 꼴이 되어, 일함으로써 나타난다. 이와 같은 감정이, 육체 안에 들어가서 나타날 때, 이 "차크라"가 일하는 것을 느끼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배꼽 "차크라"에는 10의 폭이, 심장 "차크라"에는 12의 폭이 있다. 목중추는 [그림 52의 A5]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체적인 상념을 육체 뇌와 연결하는 것으로서, "멘탈체"의 일을 육체를 통하여 표현한다. 이 중추는 특히 발성기관과 구체적인 사고를 육체를 통하여 표현하는 기관(器官)으로서의 언어중추로서 부활한다. 동중추의 폭은 16개이다.
각 중추의 폭의 수는, 근중추의 4에서 목중추(인후)의 16까지 차츰 불어간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다음에 미간(眉間) "차크라"[그림 52의 A6]가 되면, 지금까지 보아온 다른 "차크라" 전부와는 명백히 어떤 점에서 틀린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 폭의 수에 있어서도 96이나 된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지금까지 죽음을 면할 수가 없게되 있는 여러 체를 통과하여, 불사(不死)인 것이 되어있는 것은 이와 같은 많은 화육사이에서 줄곧 진인과 같이 영속(永續)하는 코절체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보면, 이 사상(事象)에 관해 긍정이 가는 것이다. 거기에다 두정(蠹政) "차크라" [그림 52의 A7]에 이르러서는 그 수(폭)는 껑충 뛰어 960개가 되고, 중심의 송이 12개를 더하면 총수 972개에 이르게 된다. 이 "차크라"는 최고의 영적 "인스피레이션"의 변성(變姓)으로서, 육체의 의식 안에, 그것 또한 영적 행동의 "가이드"로서 역할을 하는 중추인 것이다. 이 중 2개의 "차크라"는 뇌의 안에 있는 뇌하수체와 송과선과의 에텔부분으로 연결되어 있다.
"쿤달리니"와 "프라나"란 것은, 육체의 복지와 육체의 생명이 일하는데 필요한 것이지만, "아스트랄체"와 "멘탈체"에서 "차크라"(복수)를 통하여 체내에 들어오는 여러 힘이 없으면, 기능을 해낼 수가 없다. 이러한 힘을 끌어올리고, 그 불가시(不可視)의 유지력을 빼앗아 버린다면, 육체는 죽음인 것이 된다.
그러나 진짜의 진인(眞人)이 되어 있으려면, 영적 힘도 그곳에 있어야 한다. 이 사실이야말로, 인간과 인간 이하의 종과의 사이에 아주 명백한 틀린 것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진화의 행정(行程)에 있어서 최대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은, 이 고위 "멘탈" 계층(階層) 및 "코절체" 계층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개의 중추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그의 중요성은 더 보태어져 갈 것이다. "쿤달리니"가 고도의 잔재력(복수)을 전개하고, 척추로 상승하여 전 중추를 자극하여 이들의 중추의 활동을 높이고, 더욱 상승하여 미간 및 두정 "차크라" 안에서, 더욱더 아주 깊숙하고도 미묘한 효과를 생겨나게 해서, 진인에게, 육체 의식을 갖은 그대로에서, 지금까지 이루어낸 모든 것을 훨씬 넘어선 영적 사상(靈的事象)을 발현하는 힘이 주어질 때가 머지 않아서 찾아 올 것이다. "차크라"는 각 체 안에 있고, 중심을 꼭잡고 있으나, 정묘체(복수)는 육체보다는 큰 것이라, 그 가장 바깥쪽 부분은 육체보다 훨씬 크게 퍼져있다. 각 "차크라"들은 서로 닮은 것 같이 일하고 있지만, 매체 그 자체의 성질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각 "차크라"의 힘은 변압기이며, 인접면의 유도(감응)에 따라 변압 현상을 생기게 한다. 그것은 꼭, 변압기의 "코일"이 실제에는 접촉하지 않았는데 공간을 넘어서 전류를 유도하는 것과 아주 꼭 같다.
이와 같이해서 물질세계에 있어서, 인간의 몇 개의 매체는 말하자면, 하나로 용접되고, 의식의 체에서 체로 옮겨질 때, 변이(變異)나 제약이 있지만, 인간은 그 육체 안에 있으면서 다른 약간의 매체가 "커버"되는 식역(識逆, 의식이 일하는 범위)을 전부 표현하는 것이 될 수가 있다. 인간 성질에 관한 많은 심원한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여기서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느껴지는 것만을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잠깐동안 말하자면, 가시(可視), 가촉(可觸)의 증거가 되는 몇 가지를 조사해서, 과연 그것이 다소나마 비판적 분석에 견디어 낼 수 있는 가를 보기로 해보자.
육체가 객관적인 존재로 있고, 상당히 영속성(永續性)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을 일단 인정해주어야 한다. 우리들의 감관이 알리는 바에 의하면 육체는 오늘도 내일도 같은 것이고, 상당한 년수가 흘러서 처음으로 첨천히 변화에 가까이 다가가서, 차츰차츰 그 청춘의 윤택을 잃어 가는 것이다. 우리들의 감관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알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육체는 매일매일 꼭같지 않다. 그 정도가 아니고 한순간 한순간 변화하고 있다. 이 사실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추구하여 논리적인 결론을 내는 데까지 아직 되지 못 했다. 아는 바와 같이 육체는 몇 조억의 세포로 구성되고, 이들의 세포의 하나 하나가 전문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잡아(먹은)넣은 식물에 의하여 키워져서, 체내의 화학적 반응에 의하여 조정되어, 세포 생활의 수요에 적합하도록 되어있다. 세포의 조그만 생명들은 이와 같이해서 유지되고 있다. 그들은 성장하고, 증식하고, 그리고 죽어간다. 그러므로 육체는 안정한 존재인 것이 아니고, 순간마다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53의 A] 시포가 생겨나면, 같은 수의 세포가 죽고, 피부의 구멍(孔)에서, 또한 토하는 숨에서, 그리고 전신에서 배출되고 있다. 각 세대마다 체내에서는 끊임없이 세포의 탄생과 사멸이 반복되고, 들어가는 것, 나오는 것, 연합(連合)과 분리가 반복된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우리들의 복잡한 생활을 살면서,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들의 고난을 극복하고, 정신적으로 거기에 영적으로 "테스트" 당하면서, 시험을 받고 있는 동안, 육체의 세포는 태어나고, 그리고 또 죽어간다. 그 결과 7년 이내에는 육체를 만들고 있는 옛 세포들은 없어지고 만다. 말하자면 육체의 재료는 완전히 변화하였고, 새로운 세포가 바뀌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육체는 7년전의 육체와 같지 않다. 그렇게 본다면 육체는 없어졌는데, 우리들 자신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으니, 우리들의 육체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림 53의 A]를 보면 느끼는 것처럼, 육체는 부단(不斷)히 변화하는 세포의 집괴(集塊)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동일(同一)한 것이고 불변(不變)인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라고 말하는 존재가 육체라고 하여, 이 생각을 끝까지 추구하여 간다면, 우리들의 선조는 결국 채소나 쌀집, 식료품의 선반에 깨끗이 진열되어 있는 쌀, 콩, 미수가루 기타 작은 식료품이 들어있는 박스의 식품이나, 진열되어 있는 바구니의 야채로 끝이 맺어질 것이다. 물론 그렇게 바보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이 지적에서는 부정할 수가 없다. 거기에 우리들이 지금 체내에 가지고 있는 원자 안에는 반드시 먼 옛날에 죽은 선조의 육체의 일부였던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원자라도 우리들이 태어나기 이전의 동물들의 것도 있는 것으로 된다. 진인이라는 볼 수 없는 주인공은 일시적인 손님이고, 거기에 지상에서는 보통의 생존기간에 몇 회라고 할 수 없는 아주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무수의 조그만 생명체(세포)를 잠시동안이라도 내장(內臟)하는 한 공간에 불과하고, 결코 항구적인 존재가 아닌 육체를, 진정한 실재(實在) 즉, 진인이라고 믿는 것, 그리고 또 불안정한 잠깐 동안 볼 것 없는 불확실한 육체라는 구조물이 영적 존재(육체와 비한다면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앞에서 말한 일체의 변화 속을, 생에서 죽음까지 일관(一貫)하여 동일성과 의식과의 연결을 지키고 있는 존재)를 출현시킨다고 믿는 것은 진실의 불합리이고, 바보 같은 것이다. 끝내는 죽음이 오고 다시는 말하지 못하고, 육체의 기능이 끝났을 때 육체에 존재하고 있는 질료는 모두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므로 떠나간 것은 물질이 아닌 그 이상의 비물질이고, 한편에 남아있는 질료는 그 자체에서는 육신을 움직일 수가 없으므로 나가버린 것 그것이야말로 죽기 전까지 시체를 움직였던 요인이다.
얼마 전까지 우리들은, 육체에 관하여 현재처럼 진보한 지식이 없어서 우리들이 지금 자세히 말하고 있는 사실은 아직 알고 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육체에 관하여 이와 같은 찬미할만한 일을 해낸 사람들이 자기자신이 발견한 사항의 중요성을 부정해버리는 것은 아주 기묘한 것이다. 그러면, 이 영인은 언제 끝날지 모르게 계속된 변화 중에서도 자기 동일성을 언제나 유지할 뿐 아니라, 죽음을 면할 수가 없는 그 육체에게 여러 가지 명령을 내리고, 아울러 동시에 육체에게 급식까지 시키는 천재(天才)인 것이다.
그가 없으면 육체가 말라죽는 것은 틀림없다. "헉슬리(Huxley)"씨는 인간의 체를 분수(噴水, 그림 53의 B]에 비유했다. 분수는 전체의 외형은 언제나 같지만, 그 부분은 불과 수초동안이라도 같지 않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조사하여보자. 하나는 물질의, 또 하나는 영의, 주요한 성질을 조사하여 보는 것이다.
[그림 54]를 보면, 한 개의 세포와 한 사람의 인간과의 능력을 비교하기 쉽게 나란히 표시하고 있다. 한 개의 세포[그림 54의 A]는 산소를 마시고, 식물에서 원형질을 만들고, 환경에서 필요한 화학원소를 뽑아내어, 다른 세포들과 협력하여 놀랄만한 육체구조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인간은 그 중에서 어느 하나도 된 것이 없다. 인간[그림 54의 B]은 산소흡입에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 오히려 끝없이 지혜를 흡수한다. 식물에서 전문화한 원형질을 만드는 대신에 그가 획득한 지식과 맞부딪치는 많은 경험을 보다 나은 영지로 발달시킨다.
그의 환경에 대한 관심은, 화학적인 선택과 거부와의 과정(복수)에 있는 것을 하지 않고, 환경의 선택과 환경에 대하는 그의 정신적 또는 감정적인 반작용의 통제로 바뀌어진다. 밤에는 환경을 받아서 체내에 적응시키는 대신에, 마음과 감정을 조정함으로써 그와 같은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서 최대한도의 안락과 행복한 생활을 해 보려고 노력한다. 육체구조의 조그만 것까지 개량하는 것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언제인가 전 인류가 영적으로 서로 조화하여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려고, 사회제도나 종교제도를 차츰 발전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말한 인간과 그 여러 체에 관하여 신지학에서 배우고 제시하여온 사상은, 직접의 관착에 의하여 알게 된 사실이라고 몇몇 어른들이 말을 해왔다.
우리들은 그 정도의 수준까지 자신의 의식을 확대할 수는 없을는지 모르지만, 그와 같은 사상을 받아들여서, 신이 인류에게 내려보내는 최대의 하사품인 "이성의 빛"으로서 그것을 분석할 수가 있다.
동떨어져서 그것을, 사랑과 미움, 용기와 공포, "인스피레이션"과 "테이퍼레이션"이라 말하는 인간의 일체의 표현이, 그것이 또 수십억년에 걸쳐서 한발 한발씩 발달하고, 성취에 성취를 거듭하여 차례로 우주 그 자체를 정복해 가는 우연의, 무한의 반복만으로 거기에 또 20의 단순한 원소에서 생긴 것이라 주장(主張)하는(그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갖는 사람들 자신의, 그 단순한 원소에서 겨우 하나 둘 정도의 종류의 에너지 이상의 아무것도 해방할 수 없이 지금까지 성공한 일이 없다) 물질주의자들의 사상과 비교할 수가 있다.
제8장 "엘리멘탈 에센스"와 "엘리멘탈" 왕국
"엘리멘탈" 수질(髓質, 에센스)이란 것은 고위(高位) 및 저위(低位) "멘탈계층"과 아스트랄 계층(階層)에 살아있는 질료를 말하는 것이다. 각 계층의 질량은, 신의 창조 "에너지"의 첫 번째 분출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그 후에 두 번째 분출에 의하여 일을 받아서, 여러 가지 살아있는 형(形)을 만들고 있다. 이것이 "엘리멘탈" 수질(에센스)이다. 이런 "엘리멘탈 에센스"를 가지고, 이 3개의 계층(階層)[고위멘탈, 저위멘탈, 아스트랄계층]의 삶의 일체를 만들었다. 이 "에센스"에 대하여 C. W. 리드비터의 내면에 있는 생명 (제2권 113p)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엘리멘탈 에센스에 의한 진화는, 모든 가능한 파동율에 감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끝내는 이 "에센스"의 모든 원자가 언제, 어느 때고, 어떤 파동율에도 응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다."
"에센스"는 각 계층의 질료의 각 "레벨"의 분자 안에 존재하고 또한 이미 말한 바 있는 7종의 기본적 형의 원자와 거기에 또한 무수한 단계의 아원자들에 의하여 수식(修飾) 되어있기 때문에, 각 계층에 일하게끔 되어서, 그 결과 여러 종류 여러꼴(형태)의 생물이 형성(形成)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계층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앞에 말한 두 가지의 형(形) 내지 "클럽"의 살아있는 것들인데,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서로 반작용을 일으키며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이런 것을 모르고 있으면 우리들의 체내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의 기본적 충동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역으로 진상을 알게 되면 우리들이 이익이 되도록 대처할 수 있다. 그러면 첫째 "그룹(群)"은 "엘리멘탈"왕국의 많은 형체 즉, "엘리멘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가 있다.(제2장 찹조) 그들은 자신의 형체를 만들어내는 소재(素材)가 되어버린다. 더 낮은, 다 조잡한, 더 오래가는 질료를 끊임없이 구하려고, 보다 조밀(稠密)한 질료로 역진화를 하는 것이다. 앞에서 공부한대로, 생명은 제3의 "아스트랄 엘리멘탈"왕국부터 광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역진화의 최저점이 되는 것이다. [그림 52]
이점이 기점이 되어 앞으로, 생명의 진화가 시작되고, 그림에서 표시하고 있는 대로, 정묘한 여러 계층 안에서 위로 위로 올라간다. 그것이 얼마후 제2의 "클럽"내지 제2의 형(形) 즉, 인간의 아스트랄체, 멘탈체, 코절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되고, 낮은 차원(次元)에서는 식물이나 동물의 정묘체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묘체는 여러 가지 종류의 "엘리멘탈 에센스"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이점은 "엘리멘탈"왕국에 있는 한 멘버인 "엘리멘탈"들과 같다.
그렇지만 그들과 틀린 인간의 체는 진화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림 52] "엘리멘탈" 형체는 역진화 해가면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아스트랄체", "멘탈체"등 속에는 여러 종의 색이나, 좋은 것, 나쁜 것, 곁붙어서 체내로 당겨들어 종류가 틀린 스타일의 "엘리멘탈 에센스"의 색이란 것을 알려야 한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감정이나 상념은 그 내용에 응하면서, 어느 정도 체를 높이거나 낮춘다. 그러나 체내에 있는 생명진화 선상에 있는 상태이므로, 일반적으로 체는 시간이 흐를수록 좋아지는 것이다.
멘탈계층과 아스트랄계층에 존재하는 이런 2개의 "클럽" 사이의 관계에서, 자기통제라고 말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자기통제라는 말은 다음에서 알게 되지만 적합한 표현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我)인 우리들이 아를 통제해내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절확히 말하면 자기통제가 아니고, 체의 통제이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무의 하나는 우리들 제체의 통제를 발달시키는 것이다. "엘리멘탈"은 살아있는 것으로 아주 골치거리인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신의 체(體)를 잘 다루어서, 언제든지 우리들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림 11]에 있는 것을, 우리들은 우울이나, 공포, 노여움이 외부환경에서의 자극에 대하는 "아스트랄체"의 반응은 아가 통제하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에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태는 일시적인 것이지만, 각각의 체의 상태를 조금씩 바꾸고 만다. 가령, 격한 감정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것에 대응하는 저급의 성질의 "엘리멘탈 에센스"가 "아스트랄" 체내로 끌어넣고, 끌어넣은 질료중에는 약각은 배출하지 않고서, "아스트랄"체내에 남아있다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 문제가 생긴다. 그와 같은 감정의 격발을 두번 다시 일으키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도 종종 감정의 격발에 희생을 당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이 저자는 "엘리멘탈"이 일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 의문에 대한 답이다. 만약 우리들은 자신의 체의 [컨트롤]을 하지 않으며, 종종 가까이 있던 엘리멘탈 형체에 의하여 자신의 체가 지배당하는 때가 있을 수 있고, 또 대부분은 지배당하고 만다. [그림 56]. "엘리멘탈"은 인간의 체내에 집을 만들고, 다른 살아있는 것들이 생각해낼 수 없을 정도로 인체를 자극해서 폭발시키거나, 또 깊은 수렁에 빠트리는 것으로 그의 수명을 길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외부의 환경이나 사정에 대하는 반동으로서, "아스트랄체"내에서 일어나는 노여움의 폭발, 우울의 발작, 타격에 대한 반격, 손해를 받던 것에 대한 저주, 이것은 모두 자아가 그 체의 움직임을 통제하지 못한 것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가 되면 체는 모두를 열어서 "엘리멘탈"을 끌어넣게 된다. 감정은 처음의 폭발의 몇 배로 격화시키고, 원래 그와 같은 원시적인 격정의 파동을 좋아하는 "엘리멘탈" 자체의, 잔인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 되고만다. 이와 같은 사태는 우리들에게는 몸소 느낀 적이 몇 차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자신과 싸워온 적이 모두에게 체험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이런 사태를 우리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닌 것을 명시(明示)하는 것이며, 우리들은 그 정체(正體)를 모르지만, 우리들의 안에 있는 이분자(異分子) 실은 "엘리멘탈" 생명은, 우리들이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싸워온 그것에 대하여 광희(狂喜)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또, 하나 잘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들의 낮은 제체는 그 체를 구성하고 있는 소재에 관한 한에는 불안정한 것이다. 이 사실은 육체에 대하여 [그림 53]에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림 55]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사실은 "아스트랄체"와 "멘탈체"에서도 같이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실은 개선의 가능성이 있는, 그것은, 우리들의 선택과 정화에 의하여 이러한 체의 건강, 강인한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우리들의 의식과 행위를 기구로하여 써서 가치를 끝없이 증대시킬 수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육체가 그 노폐물을 갱신하기 위하여, 식물과 물을 취급하는 것처럼, "아스트랄체"와 "멘탈체"도 꼭같이 "엘리멘탈 에센스"(멘탈계층과 아스트랄계층에서의 유기물이라고 볼 수 있음)를 끊임없이 취하고 있다. 그와 같이해서, 인격은 순미(醇美)로 되고, 감정은 청순으로 되어서, 정신이 맑고 깨끗해진다면, 그에 따라 "아스트랄체", "멘탈체"는 개선되어서 그 표현을 하기 위해 고상한 "스타일"의 질료를 끌어당긴다. 이러한 상태로 바꾸면, 저급의 소재는 배출당하는 것이다. 그 역의 경우도 진리인 것이다. 이와 같이해서, 여러 체들은 어느 상태에는 좋은 편에, 어느 때는 나쁜 편에 수시로 변화해가며 있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큰 문제이고,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주 먼 거리의 문제이지만 그 깊숙한 밑바닥에는 몇 가지의 원리를 알게 되면, 자기 자신에 적응하는 방법을 생각해낼 수가 있다. 인간의 정신이나, 감정의 이상이나, 정신병자나 신경증 환자들의 대부분은 인간계와 엘리멘탈계와의 관계를 알게 되면 설명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도 계명할 면이 있으나, 그것은 바꾸어 태어나는 것을 배우는 단계에서 생각하고 연구하기로 하자.
이상의 고찰은 [그림 56]에서는 다른 면으로 전개하여진다.
우리들의 몸체는 많은 움직임을 많은 점에서 자동적인 것이다. 감각 "노이론(神經單位)"을 자극시키면 금방 반응이 일어난다. 손이 우연히 불에 스치면, 유의식심(有意識心)이 명령도 하지 않았는데 근육이 수축하여, 잽싸게 손을 끌어들이는 것이 그 한 예이다.
그와 같은 일련(一連)의 운동이 신경경로에 따라서 일어나는 도리를 표시한 것이 [그림 56의 A]이다. 이것에는 3종의 "노이론"이 관련하고 있다. 감각 "노이론"은 신경 "임파루스"를 피부에서 관념 연합 "노이론"에 전하고, 거기에서 직접 기동신경(起動神經)으로 전하여져서, 기동신경단위는 필요한 근육운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거기에는 의식적인 "컨트롤"은 전혀 개입하고 있지 않다. 이들 신경은 서로간에 접촉하고 있지 않는데 신경자극은 그 뜸을 넘어서 그의 반응은 거의 순간적인 것이다. 다른 자극은 이것과 또 종류가 틀리다. [그림 56의 3] 이 종의 자극은 육체의 신경단위(노이론, 복수)와 신경중추(복수)와 통하여 "아스트랄체"안에 들어가서 감정을 눈뜨게 한다. 그 결과로서 생기는 감정의 상태는 이번에는 역의 과정을 거쳐서, 육체의 기동신경 단위를 부활시켜, 최후에 육체의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만약에 이 작용과 반작용과의 의미가 바른 감정으로 통제를 결하기에 생기는 것이라면, 그 때에는 "엘리멘탈"의 개입을 부르게 되어, 결과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더욱이 또다른 종류의 자극은 "아스트랄체"를 통하여 "멘탈체"에 들어가서 [그림 56의 2], 거기서 반응을 일으키고 좋거나 나쁘거나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작용과 반작용과의 유일완전(唯一完全), 또 유효한 회로는 지각(知覺)신경의 지극이 "아스트랄체"와 "멘탈체"를 거쳐서 고급 "멘탈계층"의 "코절체"안에 살고 있는 아(我)에 이르고, 아(我)가 그 체를 통하여 고려(考慮)가 들어있는 반응을 나타낼 뿐이다. [그림 56의 1] 자신의 모든 행위의 배경에 있는 동력으로서, 또한 자신에 봉사하며 일하는 제체(諸體)의 주인으로서 자각을 가지고, 자신의 집단중심에서 일하는 것을 배웠을 때, 비로소 그는 진보의 길을 빠르게 전진하는 것이 된다.
* * * * *
제4강에서 우리들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되는 진화의 장(場)을 조사하고, 지구의 생성(生成)과, 그 후에 오는 큰 것(즉, 個人化)을 위한 준비 및 추사(追査)하여 왔다. 한없이 미소(微小)한 것과 한없이 거대(巨大)한 것을 보아 왔다. 그리고 차원의 제약을 받은 것으로 또한 큰 것이라고 하는 물건을 재보는 것으로서 공간이라는 착각을 약간 문틈으로 보아왔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의 의식안 이외는 대(大), 소(小)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 4강에서 우리들은 막막한 시간을 넘어서 인체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서, 몇억 만년의 옛날 볼모의 지구의, 지구의 수역의 표면에 거품으로서 떠있던 최초의 원자 세포 군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들은 또 1초 동안에 몇 억회나 진동을 반복하는 물질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우리들은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 안에서 무한(無限)에서 무한으로 건너왔다. 여기서 또 우리들은, 인간이 공부하는 도구로서 계직(計織)에 시간을 한정하는 것이, 또다른 착각을 생기게 한다. 왜냐하면 긴 것, 짧은 것, 어느 것이고 그것은 의식의 착각에 있는 편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문틈으로 잠깐 보았다. 우리들은 인간이 등장할 때까지의 지구의 감동적인 일들이 생겨난 역사를 거슬러 왔다. 신아(神我)가 여러 가지의 매체와의 접촉을 이루어내고, 이제는 영적 진화가 생명의 "드라마"로 연출하고 있는 무대속의 중앙을 점하였다. 우리들은 숫한 산과 벌판을 행진하여 겨우 산기슭에 다다른 것이다.
제5강 자아(自我)라 말하는 착각
방심한 탓에 마라의 현혹에 뿌리치지 못하는 자는 그의 노예가 지상으로 되돌아 가리라. 수도자여, 지혜의 방을 통해 지복(至福)의 계곡에 들어서고 싶거든 그대의 안식을 방해하는 무서운 이설의 대해 그대의 모든 지각의 문을 굳게 닫아야 하느니라.
H.P. 블라바츠키 침묵의 소리 중에서
제1장 영(靈), 혼(魂), 식심(識心)의 생성(生成)
분신영(分神靈)들이 그의 하급 매체(복수)안에 들어가는 것을 제3의 분출이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신의 영적국면(靈的局面)만으로 오다가, 세계의 역사에 있어서의 제3의 일이 생겨나는 것은 하나의 뚜렷한 획이 그어지는 것이다. 제1의 분출에서 원(뿌리), 재료를 준비하고, 그것에 의하여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 제2의 분출에서는 이러한 원(뿌리), 재료를 써서 탁월하고 놀라운 미(美)가 들어있는 살아있는 형체(形體)를 만들어 낸다. 여기에 이르러 안이 되는 심혼(心魂)과 연결되는 장치(링크)를 가진 것이 생겼을 때 제3의 분출은 죽지 않는(不可死) 신아(神我)를 죽어야하는(可死) 제체(諸體)안에 삶을 허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 각자 안(속)에 있는 구극의 의식이야말로 그 명증은 어떤 것이 되어있던, 진짜의 인간이란 것을 지금 시점에 확실하게 지각(知覺)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영구한 아(我)인 것이다. 수다한 곤란과 미망(迷妄)과 싸워 승리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언제나 이 유일(唯一)의 기본사실에 자각(自覺)하고 명심해 있어야만 한다.
옛 고대의 성전의 성구(聖句)를 인용하면 나의 아(我)는 그의 아(我)이다. 그의 아(我)야말로 나의 아(我)이다(I am that self, That self is I). 이 사실을 상징적(象徵的)으로 나타낸 것이 [그림 57]이다. 중심(中心)의 존재가 아(我)이고, 그의 둘레가 아(我)의 몸체이다. 각 체는 아의 기구이고, 그것에 의해 아는 여러 가지의 세계를 의식하게 되는 것이며, 동시에 또 그것은 아의 여러 가지의 힘을 표현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아는 'I am'이라는 구(句)로 말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표현이야말로 아라 말하는 존재의 정수(에센스, 精氣)이기 때문이다.
아는 아의 몸체에 싸여있다. 또한 하나하나의 체가 살아있는 것들이고 그들 자신의 나름대로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체의 전부의 집합의식이 아의 의식 안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아가 자기자신의 아로써 표현하려고 하면, 각 체의 의식 및 행위를 자신부터 떼어서 따로따로 객관적으로 정사(精査)해서, 그의 진상을 알아보지 않으면 안된다. 아는 아트마체, 부디체, 코절체를 지금도 가지고 있고(혹은, 그의 고도의 진화의 행정(行程) 안에 가지는 것이 된다), 그것을 통하여 아의 의지와 사랑과 지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현재의 수준에서는 이러한 힘은 주로 "코절체"를 통하여 표현하는데 맞추고 있다. 아는 "멘탈체", "아스트랄체" 육체를 가지고서, 그것을 사역(使役)시킴으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하는 것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3가지의 체는 반드시 죽는 것이고, 몇 번씩이나 생사를 반복한다. "아트마체", "부디체", "코절체"는 불멸(不滅)이다. 그리고 아의 의지, 사랑, 지식이라고 말하는 3가지의 기본적 특질에서의 힘은, 이들 불멸(영구)의 체(복수)가 다음에서 다음으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의 체험을 통하여 눈을 뜨게 된다.
[그림 57]의 오른쪽 아래의 단선에 따르면 생각하는 것이 지식의 획득이라는 결과가 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감정은 차츰 사랑을 불러 깨닫게 하고, 육체의 체험과 행위란 것은 어렵기는 하지만 고난을 무릅쓰고 싸워 이겨서, 아의 여러 가지의 힘을 육체의 행동을 나타나게 하는 의지의 함을 불러낸다. 그러므로 옮겨가는 상념, 지나간 감정, 여러 꼴(Type)의 육체행동, 이것들 모두는 왔다가는 또 가고, 영속하지 않지만 언제인가 지식, 사랑, 의지라는 성스러운 힘을 불어내고, 그것이 한번 내(眞我)것이 되면 두번 다시 잊어버리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아는 원래부터 신성(神性)이었고, 신성인 아는 새로이 힘을 더한다는 것은 없는 것이다. 어떠한 외적인 행위도 아(眞我)는 어떤 힘(복수)을 더 보태는 일은 없다. 그것들의 힘은 원래부터 잠재하고 있던 신성(神性)에서 나온 것 뿐이다.
"스리 크리슈나"의 말을 빌리면 아는 모두 있는 것, 모두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아"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들이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체들(諸體)이 이번에는 자기자신을 아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이야말로, 자기의 본성을 알려고 노력하는 인간이 부딪치게 되는 최대 고난의 하나인 것이다. 그는 육체의 충동을 자기자신의 충동이라고 느끼는, 잘못된 감을 가진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충동에서 구분을 세우고, 진짜와 가짜를 식별하는 것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많은 사람들은 육체가 아라고 알고 있다. 그들은 탄생이 자신의 시작이고,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그들도 지금의 우리들 같이 천지창조의 수다한 신비를 알고 있으면서, 여사한 신비(인간)의 창시자가 그의 최대의 성과가 되는 인간을, 여사하게 해서 사멸시킬 정도의 이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해 버린다는 것은 아무리해도 기묘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한편에서는 다른 몇몇 사람들은 감정이 아라고 되어있다. 이들은 욕망이나 감정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외에도 "마인드" 안에서 살아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사람들에게는 "마인드"가 구극의 실제이다. 그러나 이상의 것 외에 더 미묘한 착각이 있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성과 사랑과 의지의 힘이 실재이고, 모두가 그 둘레를 돌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의 힘(복수)이엇고, 사역(使役)되는 것들이다. 때문에 그것은 아는 아니다. 그것들의 하나하나가 한 개의 자아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때로는 놀라울 정도의 정묘한 것(복수)을 갖추고, 보기에는 영지(英智)와 미(美)까지도 갖춘 것으로 보이지만 자아로서 그의 존재는, 자타(自他)의 따로 때로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아는 아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깨달음이 자신의 진수(眞髓)에 있어서 또한 현실에 있어서 유일 아야말로 모든 인간의 안에 숨어있는 실재(實在)인 것을 파악시켜준다. 다시 한번 [그림 57]을 보면, 그림의 오른쪽 아래의 위에 포시하고 있는 점선 외에 왼쪽 위에도 같은 점선이 있고,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아의 안에는, 그 많은 지나간 경험 속에서 얻어진 여러 가지의 힘과 특질이, 언제나 보다 조밀한 계층(복수)의 창조행위를 위해, 또한 모든 새로운 경험의 선이냐, 악이냐를 발판으로 하는 배경으로서 언제나 이용된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체험에는 "아스트랄체", "멘탈체"의 어느 것에서인가 혹은 쌍방이 합쳐져서 [그림 56의 B 2~3] 반동을 일으키는 일이 간혹 생긴다. 이런 경우에는 아와의 접촉이 거의, 혹은 전연 행해지지 않고 있다. 접촉이 있었다고 한다면 아 안에는, 원래 "아스트랄체"나 "멘탈체"에는 금생(今生)에 있었던 체험결과 뿐만이 아니고, 많은 과거생(過去生)에 걸쳐서의 체험결과가 얻어진 것이 자리하고 있으므로, 더 현명하고, 그리고 더 깊숙한 조언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의 소리는, 물질세계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 사이에 말하는 경우가 있으며, 우리들은 이것을 양심(良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일상에서는 그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끊임없이 명상을 실습하는 것은, 인류 앞에 놓여진 최대의 기회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와 그의 하급의 매체(복수)사이에 통로를 넓혀주고 고급 3개조인 원대한 큰 힘(복수)을 이들 저급매체를 통하여 나타내는 것을 가능케 하며, 그리하여 물질계에 있어서 그 사람의 생활을 하마는 꼴에서 아주 번모시키는 것이 되어간다. 이와 같은 것을 완전히 해낸 사람들만이 나와 나의 신과 하나가 된다는 말(예수의 성언)과 같은 진실을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대의 비학(秘學)에 있는 것은 그 주역서(註譯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은 우주의 어디에 있든지, 최고의 영과 최저의 물질과의 "마인드(識心)"에 의해서 결합된 존재이다.
[그림 45]를 보면 이 설이 우리들이 배워온 인간구조와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림의 중심상(像)이 되어있는 큰 +자의 오른쪽은 진리가 상징되어 있다. 기독교의 "심벌"을 신봉하는 사람이면 그것이 물질이라는 자에 걸려있는 영 이라는 상징임을 알고 보아야 한다. 군혼(群魂)이라 말하는 집괴(集塊)의식의 대신으로, 인간 안에서 자아의식을 지금에는 볼 수가 있다. 그것은 신아(神我)가 그 의식의 매체(복수)에 내려와서, 그것을 통하여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되기 이전의 왕국으로부터 진화하여 온 것이고, 고등 포유동물에서 인간으로 출현하였다라고 흔히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생각의 잘못에서 생긴 것이다. 인간은 원래 영적인 존재였으며, 영적 세계에서 내려(天降)진 것이다. 저급 3개조 (그것은 "멘탈", "아스트랄", "물질" 계층(階層)이라고 말하는 3개의 하급계층에 접촉하기 위하여, 3개의 항구중추(항구원자)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이미 배워 알고 있다) 인간의 매체가 되는 것을 조성하는 뿌리가 되는 원래의 일(처음 생긴 일)을 위해 군혼 속에서 긴 세월을 보내면서 준비하여 왔다. 이 사실 때문에 앞에 말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되고만 것이 틀림없다. 그때를 분신영(모나드)은 [그림 58] 안에 2개의 3개조 사이에의 수직의 점선에 표시하고 있는데, 그 하급 3개조와는 아무런 의식적인 연결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도표에는 3개의 항구원자핵(복수)이 관, 식, 동물왕국의 군혼들의 경험에 참가함에 따라 그 핵(복수)속의 원래의 힘이 차츰 눈이 떠져가는 것을 그려놓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 인간이 이와 같은 왕국을 거쳐서 진화하여 왔다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진화하여 온 것은 우리들의 매체이고, 우리들의 인간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급의 왕국(복수)은 인체가 진화시키는데 고움을 준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의 인체(라고 말하는 것)안에 살고 있지만, 우리들 자신은 그 체인 것이 아니고, 체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우리들의 부분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얼마동안의 사이에, 대략 평균 각 1200년 중에 약 70년간 쓰는 용구에 불과하다. 거기에 매일 24시간 중에 8시간의 수면 중에는 육체에서 이탈하고 있으며, 그것 25년을 뺀다면 우리들 진짜의 생애는 1200년 중에 우리들의 육체가 점하는 것은 45년 정도의 작은 기간동안이다.
[그림 58의 A]에서 보면 분신영의 고급 3개조를 통하여 아래쪽을 내려오고, 즉 질료 속에서 역진화 해나가고, 그 사이에 앞에 말한 일들이 있었으며, 즉 각 매체는 진화가 행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개인화(個人化)가 생기면(열어지면) 두개의 과정(고급 3개와 하급 3개)은 연결되어 하나가 되고, 인간은 아래의 계층 전체와 접촉하기 위하여, 또 그의 체험에서 그 안에 잠을 자고 있는 성스러운 힘(복수)을 눈뜨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매체 전부를 끝내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분신영은 이미 설명한 바 있는, 7주(柱)의 혹성연쇄사신(司神)(제4장 참조)을 걸쳐서 현상(現象)계에 출현하는 것으로, 7개의 기본적 "스타일"로 나누어진다. 그것을 물질계에서는, 대략적으로 분류해 본다면 지배자, 교사, 자선자, 예술가, 과학자, 독신(篤信)가, 기능자로 말하는 것이 좋겠다. 이 분류는 때때로 7개의 분광선(分光線)[그림 33 참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와 같이 멘탈계층에 있는 7종(종)의 원시군혼(군혼)도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일한 근원으로 되는 것이다. 이 7개의 형은 더욱 더 많은 "스타일"로 세분되지만 그 독자성의 원시형을 유지하고 있고,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동물진화의 정상에 이른 포유동물 대략 개, 고양이, 코끼리, 말 등이다. 개인화의 영역(領域)에 이르면, 각 분광선에 속하는 분신영도, 그 하급 3개조와도 합쳐진다. 이 하급 3개조는 그것에 대응하는 "스타일"의 군혼들 중에서 장래(將來)에 쓸 것에 대비하여 조정되어 온 것이다.
[그림 59의 A]를 보면, 인간이란 것과 그들 물질체(육체)와 틀린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아는 영이고, 또한 체는 물질이다. 아는 생명-형성이 되고, 체는 형태-형성이 된다. 아는 영의 법칙에 따르고, 육체는 물질의 법칙에 따른다.
아는 조밀(稠密)한 세계 속에서 차츰 바꾸어 태어나면서 성장해 간다. 체(몸체)는 유전의 법칙을 통하여 성장한다. 이 양자는 "마인드(의식의 마음)"에 의하여 연결되고 하나가 된다. 양자의 그 성질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지만, 서로가 돕는 것으로 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는 세포생명의 형성한 형체 안에서 삶을 하면서 진화해 가며, 체내에 취한 식물(植物)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는 형체의 질료는, 양자가 연합해서 진화해 가는 것이다. 이 사실은 "아스트랄체"나 "멘탈체"에도 해당된다. 즉, 동체에 의하여 흡수되어 그 후에 배출되는 "엘리멘탈 에센스"는, 그 과정을 통하여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분신영은 지금에야 질료의 세계(복수)라고 말하는 착각(복수)안으로 날아 뛰어든 것이다. 이러한 착각이 그에게는 말하자면 도전해서, 그의 성스러운 원래 것이 내재(內在)해 있는 힘을 눈뜨게 해서 그로 인하여 긑에는 그러한 착각을 극복해냄으로서, 그는 이 세계에서 탈출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 질료 안에서의 길고 먼 여행을 시작해서, 탄생이라는 관문을 거쳐서 생(生)이란 것을 감미하고 [그림 59의 B], 죽음에 의하여 죽음의 저쪽에 존재해 있는 생(生)을 배우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는 태어나서, 살고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라고 말하는 인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제체에서 생겨나는 일이고, 그 스스로는, 그 체(복수)가 살아 있거나, 죽거나, 잠을 자거나, 눈을 뜨고 있거나 그것에는 관계하지 않고, 변함없이 존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먼 옛날, 분신영은 태양사신(로고스)의 의식 속에서 시작하였다. 지금은 그의 잠재하고 있는 신성을 발현(發顯)해서 그 성스러운 힘과 완전성을 확대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제2장 바뀌어 태어난다(輪廻)
하나의 사상으로 인하여 인생관이 완전히 변혁(變革)되는 것은 바뀌어 태어난다는 사상을 빼고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승에서의 70년이란 짧은 생애동안에 생존의 전체상의 의식이 일하고 있는 것을 실지로 느껴지는 것이며, 뒤로는 지나온 과거의 원경(遠景)이, 앞으로는 먼 미래로 향해서 결국은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많은 업적의 끝에, 최후의 노력에서 왕관을 얻는 영광의 불꽃이 숨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신지학(복수)은 수백 만년의 옛 인류가 황량한 세계 속에서 발판을 얻어보려고 한 초기의 역사 안에 발을 들여놓고 연구하였다. 그것은 당시의 경이의 찬 역사들을 풍부하게 그리고 자세히 알아내었다.
그 시절의 용감한 개척자들은 가혹한 대자연과 맞부딪치며, 자손이 되는 우리들을 위하여 길을 내는 그 위업에 분투 않는 자가 없었다. 현대의 많은 대업적도 그 뿌리는 처음시작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원시적인 석기와 철기는 오늘(1957년 저술) 우리들이 쓰고 있는 정밀한 강철기재(器材)의 선구(先驅)였다. 급속히 세상을 하나로 용접하고 있는 현대의 교통 운송 수단은 옛날의 인간들이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데 썼던 우마차에서 시작되었다. 봉화(烽火)라는 간단한 신호에서 지구의 구석구석까지 "뉴스"를 거의 사건 발생과 동시에 전하는 "라디오, 텔레비전"으로 발달한 것이다.
이와 같은 아주 오래된 생명의 이야기나 전설을 우리들의 먼 옛 선조의 업적이라 생각하고 매료되어 왔던 것이었다면, 그것이 실제에 있어서 우리들의 선조들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 흥미, 관심은 얼마나 깊어질 것인가. 그것은 실제있어서 우리들 자신과 우리들의 과거들의 모험 그리고 이야기들인 것이다. 그렇다. 역사의 밤이 밝아올 때, 우리들은 "맘모스"나 "마수도돈"이라 말하는 털이 많은 코끼리를 닮은 것들과 싸운 것이다. 벌판을 헤매고, 동굴에서 살고, 무슨 까닭인지도 모르면서 자연의 맹위(猛威)와 싸워왔다. 여러 종족 안에서 태어나 살았고, 또한 죽었었고, 수렵도 하고, 싸움이나 전투를 하면서 가족을 부양하였던 것이다. 조금씩 자식도 생겨나고, 생활조건도 차츰 개선되어 갔다. 세기에서 세기로 때는 흐르고, 우리들의 진화라는 사다리를 낮은 곳에서부터 위로 올라와서, 조금씩 지식을 얻고 생활조건도 개선되었고 세기(世紀)에서 세기로 때(시간)는 흘러가서 진화의 사다리는 차츰 선남선녀(善男善女)로 되어가면서 이승에 우리들은 증거로 남겨졌다. 그렇게 해온 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이었다. 바뀌어 태어나서는 또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종속들이 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들은 한발 전진해 보아야 하겠다. 우리들은 과거에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을 알면, 앞으로 한발 나가서 미래에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을, 다가오는 세상은 무엇이던지 창조되는 신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고 과거에도 살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또 살게 될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미래의 형성에 참가하고 있는 우리들은 미래에 있어 그 세계에 살게 될 것이다.
어떤 종교(복수), 그 중 기독교는 인간의 혼(魂)은 태어날 때 만들어져 죽게 되면 어딘가 먼 곳으로 가서 좋은 보답을 받거나, 나쁜 벌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과학은 보통 인간의 도덕적 및 영적 특질을 유전에 의하여 양친으로부터 전하여 진다고 하는 견해를 가진다. 성격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화학적 화합(化學的 化合)의 산물(産物)이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의 연속을 일체(一切) 부정하고 그 대신 개인이 발달시킨 새로운 특질은 모두 인류 안으로 끌어들인다고 가정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개인으로서 격려하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래는 훨씬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것같이 느끼고, 어떻게 되었거나 그 개인에게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바뀌어 태어난다는 것이다라고 알게 되면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연결되어 하나이다라고 하는 견해가 나온다. 거기에서 희망이나 행동에서의 의욕과 지식의 우물을 깊숙이 바라보아야 하겠다는 결의 등이 생긴다. 왜냐하면 그가 획득한 것은 영구히 그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바뀌어 태어난다는 것은 지난날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16세기 중엽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것을 금한 후 구미에서는 잃어버리고 만 가르침이다. 지난날 전 세계가 받아들이고 있었던 빛나는 지적계보(知的系譜)에 대하여 영국의 심리학자인 "E. D. 워커(Walker)" 박사는 그의 저서『바뀌어 태어난다(Rider & Co. London, W. I. P. 3-7)』안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지난날 전 문명세계는 바뀌어 태어난다(輪廻)는 가르침을 믿고 그 가르침 안에는 인생이라 말하는 가책 없는 "스핀스(Sphinx)"가 모든 인생 행로에 던져준다. 인간은 저급(低級)과 운명이라 말하는 어려운 의문에 대하여 완전한 해답을 찾아냈다. 그러나 동서로 나뉘어진 인류 중 서쪽의 인류는 물질적으로는 세계를 지배하였지만 그의 속죄(贖罪)로서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유물(遺物)철학을 얻어내고 말았다.
바뀌어 태어나는 것은 구미를 통하여 일반적으로 거부당하고 있지만, 과거는 물론 현재도 대부분의 인류에 의하여 무제한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역사의 여명(黎明)부터 그것은 인류의 대부분이 흔들릴 수 없는 확신으로 믿어왔다. 그것을 강력한 동방 제 국민을 오랫동안 지배했고, 아무리 과대하게 평가하여도 지나치다 할 수 없는 그 장대한 "이집트" 고대문명은 바뀌어 태어난다는 가르침에서 그 기본적 진리가 다듬어 세워져서 그것을 귀중한 비밀로써 "피타고라스(Pythagoras, 그리스의 철학자, 수학자, 종교개혁자)",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그리스의 철학자, 정치가)", "플라톤(Platon)", "버질(Virgil)", "오비드(Ovid)"에게 가르치고, 그들은 또 그것을 "그리스"와 "이태리"로 넓혔다. "스코투스(Scotus)", "칸트(Kant)", "쉐링(Schling)", "라이프니쯔(Leibnitz)", "쇼펜하우어(Schopenhauer)", 그리고 젊은 "피치터(Fichte)"같은 대단히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철학자들은 바뀌어 태어난다는 것을 지지하였다. "조르다노(Giordano)", "브루노(Bruno)", "허더(Herder)", "렛싱(Lessing)", "괴테(Goethe)"등의 고상한 조화의 천재들도 그것을 지지하였다. "프람마리온(Flammarion)", "피기어(Figuier)", "브레우스터(Brewster)" 과학자들도 창도(唱導)했다. "줄리우스(Julius)", "머럴(Muller)", "도너(Dorner)", "엘네스티(Ernesti)", "루켓(Ruckert)", "에드워드(Edward)", "비처(Beecher)"같은 고도의 직감력을 가진 신학 지도자들에 있어서도 그 지지 견해는 명백했다. 대부분의 신비가들은 그 안에 속한다. 말할필요도 없이 "소크라테스(Socrates)"부터 "에머슨(Emerson)"에 이르는 긴 계열을 접하는 플라톤 학파들은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는다. 시인들의 거의 전부가 그 가르침을 믿는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 버마인,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타타르인, 티벳인, 동인도인 등 몇십 억의 많은 인류를 지배하고, 줄어드는 것 같은 기운이 조금도 없다. 전 동양에 걸쳐 그것은 위대한 중심사상이다.
그것은 단순한 무지몽매한 대중의 미신이 아니다. 그것은 힌두교의 주요한 원리 그들의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에 의한 전 전적(全典籍)의 기초가 되어있다. 여러 시대의 존경할 권위자들에 의하여 유지되고 처음에서부터 세계의 사상의 태반을 지배하고 모든 대종교의 제자들에 의하여 무엇인가의 모양형으로 믿어져 왔다. 이런 고대에서부터 내려온 철학은, 진정 참으로 깊은 존경과 연구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커다란 존재를 고무해주는 어떠한 중대한 현실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뀌어 태어난다는 것이 인류만의 것으로 어떤 특수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주기적 진화의 법칙으로 모든 것들의 자연 전체에 걸쳐서 생겨나는 일들이다. 그것을 인간에게만 적용하기에, 앞서 그의 광범위한 생(生)에 걸쳐서 나타나는 모양을 약간 조사하여 보기로 하자.
[그림 60]은 2장의 사진의 사본이다. 한 장은 죽음 후의 사진이고 또 한 장은 생명의 시작의 사진이다. 2개 모두 그 무대는 우주공간이다. 좌측의 카니성운(星雲)은 어느 별의 폭발이 남아있는 꼴이다. 이 별은 900년 이상 그 이전인 1054년 7월 4일에 갑자기 "확"타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1초 동안에 680마일씩 넓게 펼쳐나가고 있다. 그것은 지금(1957년)까지 끝에서 끝까지 60억조 마일이 된다. 언제인가 오른쪽에 있는 거대한 흑색의 괴(塊)처럼 될 것이다. 이 별은 흑색성운(星雲)이라고 말하며, 마두(馬頭)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이와 같은 흑운들은 우주의 먼지(鹿)의 거대한 덩어리이고 그 안에서 그것을 원료로하여 새로운 별이 태어난다고 하는 증거는 천문학자들의 재료에는 많이 있다. 생명이 죽음에서부터 생기는 증거는 우주의 깊숙한 곳에서 나오고 있다. 그것은 꼭 고대 "헤리오보수"(태양의 마을)에서 불사조(不死鳥)가 그 자신의 사체(死體)의 재(灰) 속에서 일어나서 또다시 청춘과 아름다움을 되찾았다는 신화를 방불케 한다. 그러면 다시 그림 28을 보자. 여기에는 7종(種)의 혹성연쇄(惑星連鎖)가 그려져 있다.
태양계에는 7개의 연쇄(連鎖)가 있으며, 각 연쇄는 7개의 천체(天體)로 되어있다. 설명을 더 보충하면 각 연쇄는 7회 바뀌어 태어나면서 차츰 보다 더 농밀한 질료를 쓰고 또 벗어버리고 하는 것이다. 즉 희박한 천체로부터 차츰 농밀한 천체가 되고, 언제인가 소멸된다.
[그림 61]에는 각 천체가 역시 7회 바뀌어 태어난다는 모양을 그려 놓았다.
이 한(一) 연쇄(連鎖)가 7회에 걸쳐 바뀌어 태어나는 전 기간을 일진화계(一進化系)라고 말한다. 처음부터 4회까지 바꾸어 태어난 꼴은 그때마다 한 연쇄에서 더 농밀한 질료를 향하여 한 계단씩 아래로 내려간다. 말하자면 제1연쇄에서는 가장 농밀한 질료는, 제일 아래 것이 멘탈 질료였지만 제4환(環), 즉 제4회 때의 바뀌어 나기에서는 가장 농밀한 질료의 단계(시기)에 이르게 되어 3개의 물질을 갖춘 천체가 되어 있는 것이 마지막 바뀌어 태어나는 때가 되면 처음 바뀌어 태어날 때마다 각 천구를 지나면서, 7회에 걸쳐 진화하고, 그 후 각 천구(天球)는 혹성 연쇄 로고스에 의하여 파괴되며, 다시 부활(賦活)되고, 제형성된 다음에, 한 단계 아래(낮은) 또는 한 단계 높은 연쇄로서 바뀌어 태어난다. 그림의 각 난의 천구는, 말하자면 그 아래쪽의 천구보다는 언제나 고급의 질료를 가지고 있다는 이치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우주에 펼쳐있는 공간 안에서도, 천체(天體)(복수)들 역시 바뀌어 태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계 우주 안에서의 혹성 로고스 되는 존재들 또한 이러한 주기적 전개(展開)의 법칙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레벨'의 자연현상에서는 이런 주기를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들의 태양은 하늘의 강(江)이라 말하는 은하(銀河)를 형성하고 있는 몇천의 태양 중의 하나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은하(銀河) 역시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안에 있는 천체들은 공통으로 중심이 되고 있는 어느 것의 둘레를 거대한 궤도를 그리며 돌고 있다. 우리들의 태양은 은하 안을 2억년 걸려서 한바퀴(一周)돌아간다고 추측되고 있다[그림 62의 A] 지구는 태양의 둘레를 1년 걸려서 회전하고 있다[그림 62의 B] 달은 24일을 걸려서 지구를 돌고 있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계절(季節)의 주기[그림 62의 C]는 매년 확실하게 여러 가지의 변화를 다음 다음으로 펼쳐본다[그림 62의 D] 24시간마다 지구는 그 축(軸) 중심으로 돌아서 낮과 밤(주기)을 가져다준다[그림 62의 D] 이러한 주기는 이외에도 많이 있으며, 주기 동안에는 심장의 고동(鼓動)처럼 변함없이 계속된다. 이와 같은 것은 경륜(플랜)이 여러 "레벨"에서 진행되고 있는 징조(徵兆)라고 생각하게 한다. 지구의 땅에서도 많은 자연의 주기가 관찰된다.
[그림 63]은 물의 주기를 그리고 있다. 물은 태양이 일해주므로써(영향) 호수에서 증발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구름이 된다. 구름의 온도가 포화상태가 되면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와서 흙으로 스며들고, 땅속에서 호수로 돌아오고, 이와 같은 것이 반복된다. 이 과정 동안에 식물은 그의 성장에 필요한 귀중한 물을 얻고 시간이 흘러서 끝내 식물 안에 생명이 전개하고 차츰 보다 높은 생명체로서 현현하는 것이다.
[그림 64]는 탄소의 회전으로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자연은 식물계와 동물계를 만들고 쌍방이 서로 의존하는 방법을 그려놓았다. 녹색(綠色)의 식물은 일광을 흡수해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이상의 많은 식물을 만들어 간다. 동물은 녹색(綠色)의 식물을 먹는 것으로, 먹고나서 열을 발생시킨다. 식물은 에너지를 흡수하고 동물은 행동이라는 형의 에너지를 쓰고 있는 동안에 식물은 동물에게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산소를 내고, 동물은 식물의 생명에 필요한 이산화탄소(二酸化炭素)를 낸다. 이와 같이하여 식물과 동물들은 각각의 왕국의 진화의 길을 걸어가면서 서로 돕고 있으며 양자사이에는 끊임없는 주기적인 교환이 행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기의 생각하는 방법을 한 단 올라가 보면 [그림 64]의 보통과는 좀 틀린 관점에서 분류한 자연의 기본적 세 왕국이 된다.
각각은 신의 하나의 국면에서 나온다. 즉 광물계, 동물계, 그리고 영적세계인 것이다. 마지막의 영적 세계는 이제 막 물질계에 나타난 때이다. 이것 외에 과도적인 왕국이 있다. 그것은 식물계와 인간계이다. 과도적이란 것은 이 2개가 다른 2개의 왕국사이에서 과도적인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식물은 지상에서 묻혀버린 광물계, 말하자면 무기계(無機界)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 줄기 및 가지는 위의 유기계(有機界)에서 생겨서 나와 있다. 그것은 땅에서 "미네랄"을, 하늘에서 일광을 흡수해서 광합성과정(光合成過程)에 의하여 한 왕국의 소재(素材)를 다른 왕국의 소재에 즉 무기를 우기로 바꾸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그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의 주기 안을 지나고 있다.
인간은 육체라고 말하는 형(形)에서 동물계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높이에 있어서는 영적 세계에 투입(投入)해서 육체라고 하는 동물체에서 얻은 여러 경험을 종(種)의 정신적 및 영적 힘으로 바꾸어 가고 있다. 이것 또한 주기적 과정, 인간의 경우는 바뀌어 태어난다는 주기적 과정을 몇 회나 통과한다. 식물은 겨울이 오면 죽은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그저 표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 속으로 철수하고 있을 뿐이며, 봄이 되면 다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인간의 육체는 임종(臨終)때에 버려져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혼은 새로운 육체를 쓰고, 지상으로 와서 다시 "한 라운드"를 활동하기 위하여,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2개의 주기는 [그림 63]의 쌍방사이에서 일하고 있는 주기와 같이 끝없이 일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뀌어 태어나는 법칙이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주기적 성장은 아무것도 기묘하거나 이상스러운 것이 아니고, 자연의 질서로서 논리적으로 적합한 것이다.
인간이 바뀌어 태어난다는 것은 기본적인 줄거리로서는 단순한 과정이며 알기 쉬운 것이다. 인간은 영적체(코절체)가 있고, 개별화와 동시에 시작한 진화의 여행을 계속하여 결국에는 인간으로서 완성의 영역(領域)에 이르게 된다. 이 영적체(코절체)를 통하여 일하고 있는 신아(神我)를 기독교 용어로 혼(魂)이라 말한다.
바뀌어 태어나는 과정(過程)(자세한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안에서 혹은 멘탈체(2) 아스트랄체(3) 물질체(육체, 4)를 얻어간다. 화육(化肉)의 끝나는(臨終)곳에서 육체만이 죽는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이번에는 가장 농밀한 육체로서는 아스트랄체가 남아있고, 육체를 통하여서 일하고 있는 활력들은 아스트랄체를 통하여 일을 하게 되는 것이 되고 그 때문에 아스트랄체는 생기가 나고, 자아의식을 갖는 존재상태가 된다. 그렇게 되니 인간이란 존재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아스트랄체로 옮겨지고 아스트랄체는 인간의 매체(媒體)로 되어 그는 어느 정도의 기간 어느 상태로서 아스트랄계층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 기간이나 상태란 것은 그의 죽음 직전의 감정이나 상념을 가지고 있는 꼴에 의하여 정하여 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으로 후에 인간은 멘탈체(2)로 옮겨져서 그 수명이 끝나면 혼(1A)은 그때에는 아스트랄체나 육체 등에서 받아오던 여러 제약(制約)을 받지 않고 영적 세계(상위 멘탈계층)안에 들어가서 통상(通常)의 세계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주기(週期)안에서의 기간동안에는 혼은 그의 여러 면의 영적 힘을 그전보다 많이 전개(展開)하며, 그의 영적 진화의 길을 한발 전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해서 인간은 많은 화육(化肉)을 거쳐서 영적으로 성장함으로써 처음부터 주어져 쌓여져 있던 능력(복수)들의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밖으로 언제나 전개를 해 나가는 것이다. [그림 66]에서도 바뀌어 태어난다는 것이 자연의 모든 일하는 것을 조화시키고 있는 모양(相)을 그린 것이다. 진화의 사다리를 올라가는데 있어서는, 인간은 처음 원시상태로부터 시작하여 보통의 상태로 좀 더 교양 있는 상태, 진보한 상태, 영적 상태로 나아간다. 이와 같은 외견(外見)은 물론 혼의 성장이 물질형태에 반영하고 있는 꼴이다. 이것은 꽃이 피는 것에 비교할 수가 있다. [그림 66]은 이와 같은 인간의 발달단계를 꽃봉오리에서 활짝 핀 꽃의 성장단계로서 설명하는 것으로 그린 것이다. 꽃봉오리는 원래의 보기보다는 훨씬 큰 것을 감추고 있으며, 그 안에는 미래의 전미(全美)를 태어나게 하는 모든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 인간 역시 그와 똑같은 것이다. 원시인(原始人) 속에는 볼 것 같으면 그것에 성자(聖者)나, 천재(天才)의 편린(片鱗)조차 없다. 그러나 실은 육이란 주벽(周壁)의 안에는 위대한 것이 뭉쳐져 있는 것이며, 그 위대한 것은 단계를 거쳐오면서 풀어져 나와 나타나며, 끝내는 완전한 영적 인간이 되어서 정점(頂点)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한 그루의 나무를 관찰해서 그것이 성장하고 여러 단계를 거쳐서 꽃잎 피는 것을 볼 수 있듯이, 모든 나무들의 그 꽃 피는 것을 기다려 보면, 우리들은 그와 같이 되어서 꽃이 핀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게 된다. 이와 똑같이 우리들의 둘레에는 영적 성장에서 여러 가지의 단계(段階)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것은 바뀌어 태어난다는 것만이 인류가 전개해 가는 전상(全像)속에는 실은 법칙과 질서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을 표시해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물질계에서 보내는 시간은 보통 생(生)이라 말한다. 그리고 우리들이 정묘계에서 기능(機能)하는 기간을 생과 생의 사이라고 본다. 그의 가치에서도 불확실한 대기기간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전면적으로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각은 바뀌어 태어난다는데 관한 전체상(全體像)을 대단히 엉뚱하게 해석해 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서구에서는 주로 기독교 신학 때문에 생과 죽음이란 말의 의미가 정반대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들이 생이라고 말하고 있는 체험은 죽음으로의 가장 가깝게 갈 수 있는 길이다. 인간은 (구체적으로 인간의 혼은) 죽음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라고 하는 옷을 입으면 그는 생존에 있어서 최대의 제약(制約)을 받아야한다. 그러나 이 물질적, 육체적인 제약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는 확실히 파악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물질이나 육체에 따르는 여러 가지의 곤란이나 좌절(挫折)이 물질계에서 그가 체류하는 동안 최대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있으므로 해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함으로써 그의 잠자고 있던 사고력과 영지(英知)가 끌려나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생은 말하자면 실(實)은 사(死)인 것이다. 왜냐하면 혼(魂)은 이승에서 몸체 안에 묻혀져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죽음(死)은 해방이 되는 때이고, 혼은 그 속박(束縛)의 수가(囚家)로부터 풀려나와서 아스트랄계층에서 보다 큰 자유와 미가 있는 속으로 상승(上昇)하는 것이며, 그것이 진정한 탄생(誕生)인 것이다.
우리들의 참된 생활은 그의 거의 대부분의 초물질세계들 속에서 보내게 되어있다. [그림 67] 중앙은 시계의 문자판의 약도이다. 12시간 안에 각 1시간을 백년으로 친다면 합계 1200년이 한 생명주기의 평균이 된다. 이 전시간 중에 인간은 물질세계에서 약 70년을 보내는 것 뿐이고, 전시간의 17의 1에 해당한다. 2개의 바늘(針)의 검은 부분은 인간이 지상방문의 짧은 동안을 나타낸다. 아래 끝에 10의 완전한 생명주기를 옆으로 길게 표시하고 그 중에서 물질계기(界期)는 검은 선으로 표시했다. 왼쪽 끝의 검은 장사각(長四角)은 비교하여 보기 쉽게 10의 주기 중에 지상에서 보내는 기간 전체의 합계이다. 이러한 검은 칠의 폭(幅)은 그림의 3분의 2로 축소하여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들이 매일 24시간 중에 8시간은 수면하고 있으며, 그 동안에 육체에서 혼이 빠져 나와서 아스트랄 계층 안에서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계에서의 생존은 그만큼 엄해서 육체 안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그 제약이 어려워서 잠시동안 육체에서 빠져나와 휴양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제약이 많은 지상(地上)을 인간이 짧은 시간 방문하는 것은 생(生)이 아니고, 입육(入肉)이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인간이 육(肉)의 체(體)에 잠겨져서 닫혀있는 기간이다. [그림 61]에 볼 것 같으면 이 문제의 다른 면을 볼 수가 있다. 즉, 한 혹성 연쇄의 7회의 생을 거치는 전 기간 중에 49의 천체가 만들어진다. 그 중에 겨우 5개만 물질로 된 천체인 것이다.
지구의 소속하는 연쇄는 화살표로 표시하고 있는 것처럼 그 생애의 중간을 겨우 지닌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지금 물질계에 있어서 현상화(現象化)의 아주 중간, 즉 물질성의 극지에 있는 것이다. 물질체 안에서의 화신(化身)은 곤란이 따른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진보는 경탄할 정도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래서 살아간다는 즐거움은 크고, 생의 여러 가지의 제약의 속에서도 진보의 길은 또한 복의 길로 될 수가 있다.고뇌의 인(因)은 잘못이 된다. 높은 차원의 세계에 도달하는 기쁨은 이승의 어떤 즐거움이나 기쁨을 훨씬 능가한 것이다.
제3장 탄생의 신비
생각해 볼 것 같으면 자연이 우리들 앞에 전개(展開)해 가고 있는 일들 중에 그 흥미와 매력에 있어서 탄생이란 신비와 경이(驚異)보다 나은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탄생은 하나의 기적일 뿐 아니라, 기적의 연속(連續)으로 되어있다. 우리들의 연구가 육체의 성질에서 정묘체(복수)와의 영적인 연결점까지 미치게 되면서 기적이란 것은 더욱 더 깊숙이 심화되어 그 의의(意義) 또한 점점 쌓여져 가는 것이다.
과학은 탄생의 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을 획득하였다. 현미경이 아니고서는 볼 수가 없는 크기의 어버이들의 2개의 세포가 일정(一定)의 양식(樣式)에 따라서 정연(整然)하게 세포증식을 다음에서 다음으로 계속해 나가서 얼마 후 유기체(有機體)로서의 형체를 가지는 것을 시작하고, 그 이후의 발달하여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새로운 인체(人體)로 되어 가는 것을 느끼고 알게끔 하여준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태아(胎兒)가 그 성장 처음의 시작에서는 하급의 동물들과 닮은 단계를 통과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 사실은 인간이 하나의 고급인 동물일 뿐이고, 현재의 고등동물로서의 지위(地位)는 우연이거나 또는 환경의 자극 받는 것에서 도달한 증거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환경설(環境說)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항을 설명하지 못하고 방치(放置)해 버린 것이다. 아주 미소(微小)하고, 또한 무력(無力)한, 거의 감각이 없는, 어른의 소형 "모델"인 태아가 어떻게 해서 짧은 햇수(年數)동안에 지적(知的)이나 또한 영적인 남자 혹은 여자로 될 수가 있느냐를 명백히 설명해내어야 하는 것을 과학자는 아직까지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다. 대자연이 넓다고 하지만, 앞의 현상(現象)에 다다라서는 인간을 빼고는 설명을 해낼 수 있는 정도는 다른 것에서 찾을 수 없으며, 전무(全無)한 것이다. 작고 어린 시절일 때는 어떤 종류의 동물보다 진보가 늦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인간의 아이는 이해를 해낼 수 없는 빠른 속도(tempo)로 동물들을 앞질러가며, 여기에 동물들로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경지(境地)까지 진화해 간다. 이것은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에서는 없는 도덕성과 영성(靈性)이 바로 그것이다.
시험기구(器具)를 사용한다해도 과학에서는 찾아내지 못하는 어느 사실들이 있고, 그것은 세포생활을 알아내는 것에서도, 화학반응의 법칙들을 알아내는 것에서도 중요하고 중대한 것이다. 그것은 이러하다. 과연, 인체는 그의 탄생 전에는 하등동물과 닮은 단계를 통과하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의 한 면에 있어서는 하급의 왕국에 그의 조(祖)를 가지며, 태아(육체)는 하급왕국에 있어서 조(祖)와 같은 성장을 계속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태아는, 다른 어떠한 피조물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생기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간의 혼(마나스)이 그의 물질적인 집이 되는 몸체에 입육(入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앞에 말했지만 과학의 기계기구로서는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감추어져 있는 탐구(秘敎)에 의하여 발견해 낼 수 있고, 그리고 발견되어 왔다. 이것은 어떤 편견(偏見)에 사로집히는 경우가 없는 고상한 영적인 상태(복수)들을 분석해 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을 알게 되어서 지식이 된다.
동물은 태어나서도 동물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 이미 동물이 아니다. 두 다리의 포유동물로 분류되고 있는 이 육체를 점유(占有)하고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혼(魂)인 것이다. 얼마간 후에 어른이 되는, 아이들 일 때에 놀라운 정도의 여러 가지의 변화에 관하여 만족을 할 수 있는 설명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몸체 속으로 혼이 찾아 들어왔다고 하는 것 뿐이다. 우리들이 이제부터 작은 아이들을 볼(觀)적에는 자기 외에도 누구인가 이 "아이"를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려고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때때로 계속 우리들이 생각에 잠기고 느낌이 들어오고, 깊숙이 생각하도록 하는, 또한 그런 깊은 신비에 돌입하도록끔 하는지를 알아낼 수가 없는 자, 그것이 즉, 살아있는 형체(肉體)를 이전부터 많은 시대(時代) 동안 주거로 삼아 살아온 영적 실체(實體) 그 자체였다.
신생아를 볼(觀) 적에 우리들은 육체 탄생의 신비뿐 아니고 어느 때에서도 최대의 경이와 하나가 되는 일련(一連)의 영적, 정신적, 또한 육체적으로 생겨나는 것의 완성, 즉 말하자면 의식이 있는 형체 속에서의 최고의 영과 최저의 물질과의 합일(合一)을 보고(觀)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고 배워온 바와 같이 두개의 진화의 흐름이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합일(合一, 體)하여 서로 도움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서로라는 것은 영적인간과 인체인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한번 내면계(內面界)를 살펴보자. 이 큰일을 예정(豫定)하고 진행해 왔던 볼 수 없는(不可視)것의 준비(복수)들을 살펴보자. 만약 우리들이 코절체를 조사할 수가 있었다고 가정(假定)하면, 그 안에 특수한 활력을 표시한 코절의 체 안의 심장의 영역[그림 68]에서 황금의 빛이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이 심장에는 3개의 항구원자(恒久原子)로서 된 저위(低位) 3개조가 조용히 머무르고 있으며, 새로운 화육(化肉)으로의 호출(呼出)을 기다리고 있다. 호출을 당하면 이들 항구원자가 쌓여져 있는 생명의 망(, 황금의 누에고치)의 형(形)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땅이 열리기 시작하면 원자는 새로운 생명에서 부들부들 떤다. 세 개 중에 먼저 멘탈 항구원자가 활기 띠고 일을 시작하며, 그 둘레에는 자력에 의하여 하위 멘탈질료로 된 껍데기 집[그림 68의 1]을 끌어당긴다. 끌어당겨온 이 질료는 파동의 발달과 성질(性質)에 있어서 원자 자신 속에 있는 힘(복수)들에 일치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헐렁하고 단단한 점이 없는 뭉치(塊)이지만 탄생하면 조성(組成)되어 있는 멘탈체가 되고, 하위의 제체(아스트랄체, 육체)의 필요로 하는 사안(事案)인 멘탈체를 자극시켜, 그의 생각하는 힘(복수)들을 동원할수록 멘탈체의 능력(복수)은 확대해간다.
그래서 이 멘탈의 껍데기의 집이 완성되면, 이번에는 아스트랄 원자가 활력이 생기면서 그의 음색(音色)[그림 68의 2]이 나온다. 그러면 멘탈체의 발달정도에 상응하는 아스트랄 질료가 멘탈 원자 때와 같은 아스트랄 원자를 끌어당긴다. 이 아스트랄의 껍데기의 집은 육체의식의 부르는 것에 응하면서 차츰 발달해서 아스트랄체가 되는 것이다.
이상의 2개의 현상에서 계속해서 이번에는 육체 항구원자가 호출되어 나와 일을 시작하며[그림 68의 3], 새로운 활력체(에텔체)를 형성하는데, 소재(素材)가 되는 에텔질료를 끌어당긴다. 그러나 농밀한 육체의 경우에는 그의 특수한 성질상 지금까지와는 틀린 방법이 도입된다. 즉 쌍어버이(兩親)의 등장이다. [그림 68의 4]에서는 영적 인간과 새 육체와의 사이의 최초의 접촉을 그리(猫)고 있다. 배우자)고등생물의 난자와 정자에 해당)라고 말하는 양친의 생식세포(+)와 (-)가 수태할 때 결합한 집합체(2개의 배우자의 결합한 세포가 분열해서 생긴 개체)가 된다. 이런 이원세포에 의하여 다른 모든 세포들이 증식(增殖)해 간다. 이 결합 속에 육체항구원자가 자리를 잡으며, 다음에 말하는 방법으로 이 새로운 육체의 유전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임신기간이 계속[그림[그림 68의 5]되고 최후의 탄생[그림 68의 6]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되어서 항구원자는 각 계층에서 힘의 강력한 중추(中樞)이고 그의 둘레에 형성된 새로운 체의 소재를 모우는 수단인 것이다.
[그림 69]는 더욱 한발 나아가서 어느 대단히 중요한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우리들은 무엇인가의 체험을 할 때마다 2개의 결과, 즉 그 하나는 영적 결과 또 하나는 물질적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자아는 여러 체를 통하여 얻어낸 체험 전부를 "에센스(精髓)"의 성격으로서 가지게 된다. 한편으로, 항구원자들 쪽은 같은 체험의 "에센스"를 파동력(복수)으로 가지고 있다. 우리들이 새로이 화신(化身)할 때마다 과거세(過去世)에서의 발달시킨 혼의 성격(복수)과 힘(복수)을 금생에 가지고 올뿐 아니라 멘탈체, 아스트랄체, 육체도 과거세의 노력에 비례하는 특질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면 육체 항구원자가 유전에 영향하는 방법을 조사해 보기로 하자 [그림 38]에 보면 한 세포가 분열하여 2개의 세포로 되는 꼴을 나타낸다. [그림 38의 c]에서는 염색체라고 말하고 있는 실(絲)같은 모양이 그려져 있고, 그것에서 계속된 그림은 각 염색체가 바르게 종(縱)으로 나누어지고, 각각의 반쪽(半)이 각 반대편으로 옮겨가고, 거기서 분열(分裂)해서 두개의 새로운 세포로 되어 가는 꼴이 그려져 있다. 체세포는 이러한 양식에 따르지만, 생식세포의 경우는「축소분열」이라고 말하는 과정이 새로이 가담한다. 즉 세포분열할 때 여자 쪽이 되는 각 세포는 시초에 일체(一體)의 염색체 중에서 반쪽(半)만을 받아들인다. 이와 같은 과정이 남성세포와 여성세포간의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난성 세포의 경우, 새 세포의 반(半)은 앞에서 말하고 있는 X염색체를 가지고, 남은 반(半)의 새 세포는 Y염색체를 가짐다. 그것이 성별을 결정하고 전자의 X는 여성이 되며, 후자 Y는 남성이 된다. 수정이 일어나면 부친과 모친은 서로서로 한 개의 생식세포를 제공하여 합하는 것이다. 각 생식세포는 필요 염색체수(染色體數)의 반쪽만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암수, 남녀 양쪽 생식세포가 하나로 되었을 때 비로소 종(種), 말하자면 인간 또는 동물의 형성에 필요로 하는 정확한 수(數)가 구비된 것으로 된다.
과학의 가르침에 의하면 염색체는 유전자와 같이 마치 한 줄의 실에 매달려 있는 구슬(珠)같은 미세(微細)한 것이며, 유전(遺傳)을 운반하는 손인 것이다.
[그림 70의 A]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2줄기의 실처럼 보이는 염색체의 약도이다(원서의 초판은 1957년, 제2판은 1964년이므로 근년(近年)에 눈부시게 발달한 DNA, RNA등의 발견을 보완해서 읽어주면 좋겠다-역주) 이들의 살아있는 입자들의 조화에 의하여 새로운 육체의 새로운 특징이 생긴다. 그것은 진정 이러한 조화에서 여러 가지 종자(種子)가 그 안에 있어서 그것이 육체의 전구조의 특징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느낀다. 대략 불필요한 미세부분은 빼고 큰 윤곽만 설명한 것으로 하면 이상의 것이 유전의 줄거리가 된다.
이상과 같은 경이로운 줄거리를 과학은 우리들에게 밝혀주었는데 이것이 기계처럼 일을 해내고 성별(性別)을 결정하고, 우전자의 어미(母)가 되는 각본(脚本)에서 뽑아내는 것은 아주 우연으로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신의 지고(至高)의 피조물인 인간의 성격을, 신이 주사위를 던져서 정하는 것 같은 불확실한 것으로 해버리는 것을 우리들은 잠깐만이라도 믿어서는 안된다. 결단코 아니다.
이러한 견해를 신지학은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신지학은 인간의 고도의 제 능력의 기원이 아스트랄체, 멘탈체, 코절체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체는 과거세(過去世)부터 넘어온 것이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과거세의 노력과 일치하는 항구원자(恒久原子)의 둘레에서 형성되는 과정을 앞에서 보아왔던 것이다. 이번에는 육체항구원자가 유전(遺傳)에 미치는 방법에 대하여 알아내는 열쇠를 손에 넣어야 한다. 즉 육체항구원자는 육체에 직접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유전자에는 영향을 주어서 과거의 업적(복수)에 상응하는 체를 형성하는 유전자를 선택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림 70의 A] 그것은 또한 적당한 남성생식세포를 선택하여 자손의 성별을 결정할 수가 있고 그것이 또한 예정되어 있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된다.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신지학은 우연설과 바꾸고 논리적이고 이미 알려진 여러 사실과 일치하고 공평, 정의에 따른 또한 진실이 우러 나오는 것에서, 학설로 말할 수 없는, 경륜이야말로 신지학이 제시하고 있는 진실인 것이다.
원자력의 사용 개시 이후 방사능의 유전자 특히 인류의 유전자에 미치는 효과를 결정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 집중적으로 행하여지게 되고, 지금에는 이 방법으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원자가 유전자, 그것이 유전에 영향하는 힘(복수)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비교(秘敎)학도들이 말하는 원자(그것은 화학원자보다 더욱 더 정묘한 것이고, 그러므로 더욱 활력인 것이다)도 또한 유전자에 영향을 준다.
거기에 이 경우 "컨트롤"하면서 또한 의도적(意圖的)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주 사리에 맞는 것이 아닌가.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원자에 관하여 과학이 지금까지 발견해 온 놀랄만한 사실의 하나는 원자는 일초(一秒)동안에 몇십 억에 이르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진동수의 파동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재차 우리들은 이와 같은 알려진 사실이 항구원자의 파동에 관하여 비교학도(秘敎學徒)가 말하고 있는 것과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파동은 좀 더 강력한 다른 파동의 "옥타브"의 일부(一部)에 불과한 것이다. 과학의 기기(機器)는 아직 그것을 기록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림 70의 B]는 보통의 인간의 수태에 필요한 3개의 요소, 즉 양친의 2세포와 항구원자를 약시(略示)하고 있다. 그 결과가 앞에서 본 접합자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 안에는 활성화된 유전자들이 그 역할을 당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가 둘로, 둘이 넷으로 하는 모양으로 분열해 간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한 달이 지나면 조그만 심장이 맥(脈)을 치기 시작하고, 두 달이 지나면 육체의 전반적 구조가 확실해진다. 5개월 후에는 완전히 구비된 120억의 신경세포를 가지게 되고, 탄생할 무렵에는 세포의 수는 2000억을 헤아리고, 그 모두가 전문적으로 일한다.
그것 모두가 단 한 개의 세포에서 생겨나며, 각 세포가 같은 유전의 조합(組合)으로 전하여져 간다. 그렇지만 육체나 초 육체 등의 제체가 같이 성장해 가면서, 고위(高位)의 여러 제체는 농밀한 육체에게 영향을 주어, 나이가 많아질수록 변화를 생기게 한다.
신지학의 기본적 가르침은 먼 옛적부터 오늘까지 연면(連綿)히 계속되고 있지만 현대물리학의 여러 발견은 신지학이 설명한 가르침을 결국은 해설하는 결과가 되고 있고, 그리고 또한 현대사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쉽게 해 주고 있다. 과학이 해명해 준 탄생 및 탄생전후의 인체의 성장이란 감동적인 일을, 여기에 덧붙여주는 신지학의 선명하게 말하는 육체와 영이라는 결합의 신비는 인간의 의식 속에 깊이 감명을 심어주고도 남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도(學徒)에게 그 자신의 존재의 신비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을 배우고 신이 해내고 있는 일들의 크나큰 업(業)에 생각을 해 보았을 때, 내면(內面)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성정(性情)에 심어들면서 느껴지는 것은 누구라도 외경(畏敬)과 겸양을 가지고 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뀌어 태어나는 것과 유전과의 상대적(相對的)인 장점에 관하여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를 교환하여 왔다. 우리들은 그 쌍방의 가치에 대하여 많은 정통(精通)하고, 바르게 이것을 이해해서 양자사이에는 아무런 알력(軋轢)도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림 71의 A]는 유전이 인간의 체의 진화를 위해, [그림 71의 B]는 바뀌어 태어나는 것이 인간자신의 진화를 위해 대자연의 경륜인 것을 표시하고 있다. 이 쌍방을 유전이나 바뀌어 태어난다는 한쪽만으로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문제점이 표출된다.
[그림 71의 A]를 볼 것 같으면, 2개의 생애와 2개의 추정이 약시(略示)되어 있다. B는 그 유전내용(복수)을 A로부터 받아서 그 안에서 뽑아낸 것을 C에 전하고, C는 같은 과정을 다음의 생애까지 계속한다. 그러나 유전의 전이(轉移)는 그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체험을 얻을 이전에, 초기의 연대(年代)에 둔다. 그러므로 양친이 만들어낸, 혹은 발달시킨 특질(복수)이 성장해 가는 인류의식 속에 유지하도록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은 죽는다. 죽음과 동시에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생애의 대부분의 경험의 가치는 그와 더불어 죽는다. 그렇지만 그의 자손이 태어나기 전에 얻은 체험이면 어떤 종류의 유전에서인가에 의하여 자손에 전하여 진다. 즉 새로이 탄생하는 육체에 들어오는 혼은 과거세에 있어서 발달시켜온 제 능력을 탄생때 가지고 와서 임종 때까지의 여러 가지 체험의 가치를 미래까지, 즉 다음의 화신(바뀌어 태어난다)까지 넘겨 가는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의 유전이라 말하는 물질적인 주기와 바뀌어 태어난다고 하는 영적 주기(周期)안에서 그의 "골인"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손실, 어떤 우연, 어떤 낭비도 없고, 자연법의 틀리는 일이 없이 일하는 곳에서 길의 여러 가지 단계(段階)를 인간은 올라가는 것이다.
제4장 우리들의 세월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 성구(聖句)는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곳까지 우리들은 배워졌다. 우리들이 육(肉)속에 유(留)하고 지나는 한해 한해는 간난신고(艱難辛苦)의 한해 한해이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이 또한 최대의 기회의 때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어떻게든지 피하려고 하는 곤란(困難) 그것이 실은 성공이라고 하는 계단의 정상(頂上)으로 우리들을 인도해 가는 계단이 되는 것이다. 인생의 엄한 타격이나, 보기에는 잔혹한 운명의 손이 우리들 앞을 가로막는다. 안에(內面)있는 인간에게「더욱더 노력하라」고 도전(挑戰)하기 위해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모두가 멀쩡하게 변장(變裝)한 축복의 천사인 것이다. 화육(化肉)하는 때마다 전변(轉變)은 불어오기 마련이다. 유이기는 청춘으로, 청충은 성숙으로, 성숙은 닥쳐오는 늙은이로 그 지위를 양보한다. 각 연령마다 인간은 그 연령의 독특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인간 일생의 여러 가지의 생겨난 일을 대략적으로 분석해보면, 연령에는 더 나누어야 될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일반에서는 아직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육체의 존속 년수를 10으로 구분할 수가 있지만 그의 한 구분(區分)은 약 7년간이다[그림 72]. 그 중의 5개의 구분의 사이에 고위(高位)의 정묘체(복수)와 육체의 연결이 차츰 만들어져 간다. 그것은 첫째 활력체, 즉 에텔체에서 시작하여 최고의 의지체 "아트마"에 이른다. 이 이루어진 점에서 혼과 육체와의 일체(一體)상태는 보통 완결한다. 그러면 이 점(点)부터 이후에는 혼은 물질세계의 지배에서 이탈을 시작하고, 고차원의 일들에 차츰 많은 집중을 하는 것으로 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화육(化肉)의 전반은 학습의 시기이다. 힌두교에서 말하고 있는 Pravritti Marga(往道)이란 것이 이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후반은 시련의 기간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래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알게 되겠지만 그 동안에 혼(魂)이 습득해 온 것을 시험받고, 원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힌두교가 말하는 Nirvutti Marga(環道)인 것이다.
[그림 72]는 그간의 사정을 기본원리로 표시하였지만 다음의 도표로 나가기 전에 이것은 꼭 이해해 두어야 한다. 지금부터 이 장(章)에서 말하는 개략(槪略)이나, 이제부터 설명하는 상태는 모두가 평균적, 말하자면 보통의 체험이고, 각 상태의 길이(期間)와 중심점에서는 그 당사자의 육체, 감정, 마인드, 영의 발달 정도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특히 덧붙여 말한다.
또, 기간과 기간사이에는 확실한 경계선이란 것이 없고, 오히려 서서히 옮겨 바뀌어 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경계를 확실히 알게되는 수도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발표해 온 기본원리(복수)를 자세히 공부하기로 하자. 다시 한번 [그림 58]을 보자. 그러면 아가 그 의식의 몇 개의 매체 속에 있으며, 그들의 매체를 통하여 의지, 사랑, 이성의 힘을 나타내고, 많은 생(생애)동안에 획득한 지식을 저축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또 그러한 매체를 통하여 아(我)를 생각하며, 느끼고 행위를 한다.
[그림 73]의 내용은 [그림 57]과 대체로 같지만 그림을 편의상 반원으로 하였다. 혼은 육체 탄생 때는 육체와 완전히 연결된 것은 아니다. 고급의 체는 육체와는 서서히 연결되어 간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7년마다 기조(基調)가 변(變)하여 가는 것은 이 여러체 사이에 의사소통이 순서에 따라 차례로 완전(完全)에 가까워져 가기 때문이다. 그것을 하나 하나씩 보면서 각 고급 체가 이와 같이 차츰 접촉을 넓혀감으로서 형이하(形而下)의 생활(이승의 육체)에 풍(豊)하여져 가는 모양에 주목하여 보자.
탄생에서 7세까지는 육체생활의 유지에 필요한 에텔체와의 연결을 발달시키고, 척추저(脊椎低) "차크라(chakra)"와 비장"차크라"는 육체에서 오는 충동에 응하여 성장해 간다. "쿤달리니(kundalini)"와 "프라나(prana)"가 흡수(吸收)한 것을 육체에 생명과 에너지를 준다. 이 시기에는 이 생애 전체를 위하여 육체의 건강과 힘과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긴장을 주지 않아야 하고, 여러 기회가 생기면 옥외의 공기와 일광이 있는데서 건강한 운동을 시켜야 한다. 간단한 초기교육을 할 때에도 그 때문에 옥외에서 놀고, 운동하는데 지장 없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유아기에는 아이들이 자신의 장래의 일을 잠재의식 속에 예견한다. 자신의 미래의 상태나 생길 일을 놀고 있는 형에서 각색한다. 여자아이는 부엌일의 놀이를 하면서 인형(人形)에게 상상의 밥을 먹이거나 상상의 생긴 일을 주절거리고, 어머니가 되어 행동한다. 남아는 완구도 기차 같은 것을 가지고 상상(복수)의 승객이나 화물을 운반한다. 또 건축물 완구를 가지고 다리(橋)를 가설하거나 상상의 공사를 하기 위해 조립을 한다. 이와 같이 무의식층 중 눈을 뜨고 "마인드"는 미래를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초기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렇다고 교육이 너무 지나쳐서 강제적이 되면 못쓴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이 자기 것을 하지 못하며 전적으로 어버이에 따르고 의존한다. 성장해가면서 의존은 차츰 덜하게 되고 어버이의 현명한 지도나 보살핌의 책임이 줄어들고 아이가 성숙해서 그의 혼(魂)이 그의 매체(肉)를 다룰 수 있고 그의 모든 사고(思考)나 행위를 책임질 때까지 계속된다.
7세부터 14세까지는 아스트랄체와 육체와의 결이 강하여지고, 배꼽"차크라"와 심장"차크라"는 충분한 발달을 해낸다. 이 시기의 특징은 감정의 성장이다. 이 시기에는 주로 아이들이 감정을 통하여 그는 호소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호소가 이성(理性)에 반(反)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시기는 정신적 성장보다는 정조(情操)의 발당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교육제도를 보면 이와 같은 지도가 아주 없다고 할 정도로 결여(缺如)되고 있기 때문에 장차 어른이 되어서 자신의 감정을 통제해내지 못해 긴 세월을 허비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아스트랄체는 항구원자(恒久原子)로서 언제나 활발한 영향과 육체로부터 나오는 자극에 응하여 좋아져 가고 있지만 아직 초기의 단계에 불과하다. 아스트랄체는 이 시기는 본인의 육체생활에 차츰 조금씩 그의 힘을 덧붙여주고 있다. 아스트랄체가 발달해 갈수록 감정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르게 끌고 가는 것이 장래의 잘못됨을 막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시기는 가장 이상적인 사랑과 헌신에 관한 가르침이 있는 종교가, 대단한 가치를 가지는 시기이다. 고대(古代)전설이나, 신화, 모험담, 여행담 등은 아이들에게 감동을 주어 분발시킨다. 그림, 무용, 음악, 연극 등 예술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양친의 사랑과 이상적인 가정생활이 아이들 감정의 고양과 정화를 조장하여 준다. 이 시기의 끝 무렵이 되면 아스트랄체와의 접촉이 깊어가면서 육체에 변화가 생겨나고 성(性)의 성숙(成熟)이 따른다. 만약 차츰 성장해 가는 감정이 고급의 길목으로 바르게 인도되면 이 시기에 잘못된 문제가 생기는 일이 없이 이 아이의 성정(性情)은 '마인드'가 지배적 요소(要素)가 되는 다음 시기에 있어서 강하게 빛나고 지적 발달이 좋은 열매가 될 것이다.
14세부터 21세까지는 지금부터 전개해 가는 육생(肉生)에서는 "마인드(知的識心)"가 리드한다. 이 시기에는 인후(咽喉)와 이마의 중추(차크라)가 특히 부활(賦活)해져서 일을 하게 된다. 이 시기의 기조(基調)는 기본적으로 정신능력의 급속한 발달이며, 즉 학습이 있는 것이다. 이 시기는 확실히 말하자면 사실(복수)의 습득에 힘을 써야 하지만 또 그 이상으로 분석(分析)적 사고력과 추리력을 발달시키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인드"와 체의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있으며 "마인드"는 육체에, 육체는 "마인드(知的識心)"에 서로간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바 있지만 감정의 질에 있어서 "밸런스"가 잘 잡혀있고, 그것이 강하면 앞의 말한 지적발달에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이 된다.
[그림 73]에서 보면 "마인드"에는 구체적인 일을 하는 부분과 추상적(抽象的)인 일을 하는 부분이 있으며, 이 시기에는 양쪽 모두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를 거치는 동안에 사고와 직관이라는 고위정신(高位精神)이 상당한 성장을 해 일할 수 있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주요한 점은 이 시기는 혼 자신과의 통상의 연결이 이루어지는 때임으로 따라서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면 인간은 그의 하위(下位)의 여러체(하급멘탈, 아스트랄, 물질)를 완전히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와 같은 조건을 실현(實現)하는 것은 드문(稀)것임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까지 발달시켜 온 능력이 미치는 한 "컨트롤"은 하고 있는 것이다. 21세에 이르면 감정은 가장 고상한 영역에 이르고, "마인드"(복수)는 실용적인 개념적인 수준까지는 발달하였다. 육생(肉生)은 다음 국면이 전개(복수)하는데 있어서 이 2개가 어떤 주요한 역할을 해내게 될 것이고 또 해내어야 한다.
21세에서 28세까지는 [그림 73]에서 표시하고 있는 대로 부디(Buddhi)(愛)가 물질계에 강하게 나타나오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이때에 결혼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알맞은 말하자면 자연의 시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결혼이라는 것은 남성인 아(我)와 여성인 아(我)사이에 영적 세계(복수)에 있어서 생겨나는 최고 그리고 가장 신실(眞實)한 합일(合一)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결혼은 영적으로 된 것부터 물질적으로 된 것까지 전 성질이 참가하는 커다란 비의체험(秘義體驗)이 이루어지는 것이라야 한다. 따로 따로의 아(我)라 말하는 제약(복수)을 넘어서, 일시적이라도, 적어도 가족끼리 만이라도, 오늘날에 존재해 있는 여러 벽을 타파하고, 여러 존재 중에서 유일(唯一)의 공통의 생명을 인정할 수가 있게 되었다면, 모두를 통틀어 똑같이(圴一) 나누어 합친다면, 살아있는 모든 것의 진정의 기쁨을 담(울타리) 사이로라도 바라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상적인 합일(유니온)은 결혼의 모든 측면(側面)을 영화(靈化)해서, 높은 차원으로 맺어서 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구체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된다. 균형(均衡)잡힌 정조(情操)와 지적발달과 아울러 영적 합일은 완전하고 풍부한 결혼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결혼이라면 순수한 물질적인 것에서도 배우자는 자기중심의 행동은 아마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남편은 가족이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처는 가족전원이 모두 재미있게 지낼 수 있도록 가정을 관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사랑에 눈을 뜨고, 적극적인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상적인 방향이 욕망을 누릴 것이다.
28세부터 35세까지는 영의 다른 국면(局面)인 의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의지를 자신(自信)을 가지고 나타내어야 한다. 결혼의 책임(복수)을 지기 위해서는 부(富)를 생겨나게 하는 행위(복수)를 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것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의지(意志)라고 하는 구동력(驅動力)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혼생활의 여러 가지의 경제적인 필요에 직면해서 남편은 뭇 경제적 행위에 골몰하고, 처도 그에 못지않은 정도의 노력이 요구된다. 그것은 가정관리나 아이들 돌보기,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일 등 거의 끝없는 일은 조금도 남편에 못지않은 의지력이 발휘되어야 한다. 이것과 같은 것으로 혼의 물질 속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심리의 전문가들은 35세가 통계상 인간은 물질적, 물리적으로 최대의 업적을 올리는 연령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것이 못된다. 35세는 육생(肉生)의 전환점이다. 즉 밖(外)으로 향하던 길(往道)이 여기서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 여기서 시작한다. 앞에 시대에 심은 종자가 지금 거두어들이는 시절이 되는 것이다. 앞에 갖추어 둔 원재료가 지금 완성품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를 통과해 가면서 그는 성공, 실패 어느 쪽인가 정하여지고, 그래서 그의 진가를 나타낸 성공이란, 각 시기의 특징인 여러 종류의 힘이 통합(統合)되어 해를 넘겨 풍부하게 하는 꼴이다. 이와 같이해서 최후까지 혼의 특질(복수)은 물질계에서 빛을 내고 쉴새없이 높은 곳으로 상승해서 끝내는 시계(視界)에서 사라진다. 사라진다는 것은 육체의 존재를 끝내고 사람이 물질계에서 자기자신의 표현하는 수단이 없어진 것에 불과한 것이다. 실패하면 그 사람은 노경에는 전 육생 중 가장 아름다운 가장 매력적인 것이 될 것을 그렇게 되지못해서 가련한 바람직하지 못한 꼴이 된다.
여기서 대단히 중대한 것을 하나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인류의 대부분으로부터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다음에서 다음으로 끝없이 여러 가지 일(트러블)이 생겨나면서 노경(老境)을 대단히 어둡게 해버리는 것이다. [그림 56]을 뒤돌아보자, 우리들의 아스트랄체(유체)와 멘탈체에 대하여 여러 엘리멘탈들에 의하여 유해(有害)한 영향을 받게 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때 설명한 것처럼, 우리들이 자신의 체(복수)를 "컨트롤"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엘리멘탈"들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나쁜 짓을 한다[그림 52]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엘리멘탈"들은 언제나 거세고, 보다 심한 파동을 구(求)하고 있는 것임으로, 인체(그것은 다른 어떤 체 어느 것 보다 용량이 크다)는 그들에게는 이상적인 삶의 집(家)이고, 들어와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지배력을 큰 것으로 하려고 노력한다. 이 사실을 알면, 현명한 사람은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고, 그 침입자들을 몰아내야 한다. "엘리멘탈"들의 숙주(, 인간)가 되어버린 인간은 육체생활에서 만년(晩年)을 소용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 자제(自制)가 그것을 막는 열쇠이다.
35세부터 42게까지는 의지의 계속 기간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自信)을 여기서는 자제(自制)로써 결실을 꽃피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림 74]에서 표시한 대로 인간은 물질적 영위에 가장 활발하게 참가하고, 가장 깊이 골몰하는 최성기(最盛期)는 28세에서 42세까지의 사이가 되는 것이다. 아마 늙으막에 가서는 그가 이기(利己)목적을 위해 돈을 모으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광범위한 분야(복수)에 도움이 된 것으로 했나, 그 선택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42세에서 49세까지는 다시 "부디"(사랑)의 시기로써 결혼의 시련이 찾아온다. 이 시기는 사랑의 성질을 크게 확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혼이라고 말하는 신성함과 진실에서는 여전히 변함없이 유지되지만, 그보다 더 큰 것, 그리고 넓은 사랑, 즉 영계의 진(眞)의 부디(사랑)의 반영(反映)인 불편(不偏)이고, 모든 만인(萬人)에 주는 사랑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아무런 과보(果報)를 구하지 않고 모든 것에 쏟아 넣어야 하는 것이다. 있는 것 계시는 어른을 담 넘어로 보았을는지 모르며, 혹은 아주 고상한 행위(복수)에로 인간을 고무하는 이상상(理想像)이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결혼이라는 합일(合一)을 강하게 하고, 진정한 반려(伴侶)라고 하는 새로운 감정 또한 화려하게 꽃을 피워 나가야 한다. 이때쯤은 결혼에 있어서의 육체적인 매력은 후퇴한다. 합일(合一)이 육체나 물질세계의 것에 머무르고 말면, 더 폭이 넓은 의식상태를 이해(理解)못하게 되어 버린다면 실패는 틀림없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육체적 물질적 충동쪽으로 가고 욕망과 색욕을 구(求)하고, 타락한 생활에서는 "엘리멘탈"들은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결과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49세부터 56세까지는 정신의 성숙과 시련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지식이 증류(蒸溜)되어서 영지(英知)로 되는 기간이다. 학습이나 수집하는 것이 줄고 사실을 음미해 가면서 숙고가 증가한다. 이전보다 길고 또한 깊숙이 숙고한다. 정신은 넓게, 깊게, 평정하게 해가는 노력이 나오고 그러므로 정치가, 현명한 교도자나 조언자가 되어 가는 시기이다. 그렇지만 완고한 확신이 생기고, 자신의 입장을 지탱하기 위해 자신의 지론에 도전하는 것 같은 생각방법은 단호히 인정하지 않는다. 새로운 견해, 생각방법에 대해서는 마음의 문이 차츰 잠겨간다. 그는 정신의 발달이 멈추고, 안락의자에 앉은 꼴이 시작된 것이다.
56세부터 63세까지는 감정은 시련과 시험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이 기간 중에 감정은 평형(平衡)을 얻어두어야 한다. 감정의 질은 원숙해져서 살기 위한 삶에의 깊은 연민(憐憫)으로 되어서는 않되는 것이다. 자신 아닌 다른 것들에 깊은 정감(情感)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현명한 조언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다함께 깊이 느끼고, 이해할 수가 있게 된다. 사려가 풍부한 친구가 되는 시기이다. 단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품위에서 나오는 사랑과 믿음직스러운 분위기가 속에 숨어있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시기에의 적응을 못하고 실패하면 바람직하지 못한 노령이 전개되기 시작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의 표출이 눈에 띄게 된다. 지난날의 아름다운 인격은 뺏기고, 아주 약(弱)해져서 부분적인 빙의(憑依)를 부르고, 불행한 결과(복수)로 되는 것이다.
최후의 63세에서 70세까지의 기간은 육체의 활력(이 기초는 육생(肉生)이 시작하는 처음에 둔다)의 시험이 시작된다. 이 연령이 되면 사람은 사업활동에서 은퇴하고, 내성젓인 명상생활을 많이 해야 한다. 최초의 7년간에는 활력체(에텔체)는 육체에의 연결을 진행시켰지만, 지금은 이 연결을 끊는 때가 다가오고 있다. 유아기는 그 미래를 상상에 의한 놀이로써 무의식 중에 예견하였지만, 그의 종말이 이제 가까워지고 있는 이상, 그는 이 시기에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회고해서 반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까지의 해마다의 기대(期待)는, 이제부터 해마다의 총괄(總括)하는데 그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 속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과거를 현재에 가지고 와서 이승에서 일어난 일에 깊이 생각을 해서 그 안에서 육체로서의 존재하던 것부터 아스트랄(유계)계로 옮겨가는데 대비하여 가치 있는 것을 모두 뽑아내는 것이여야 한다. 이와 같이해서 인간은 자기자신을 갖춘 후에 다음의 세계에 들어가면 그 세계가 제공하는 한층 더 진보의 기회를 똑바로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이승에서의 환혼을 목적을 가졌던 행위로써 채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제5장 옮겨가는(移行)것과 그 후의 인생
죽음은 하나의 신비(神祕)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예로부터 많은 제단(祭壇)을 쌓아올리고, 여러 가지의 신들의 상(像)을 세웠다. 나라마다 죽음에 관하여 여러 가지 미신에 둘러싸여 무서운 것으로 생각하여 왔다. 과학은 죽음 앞에 서 있으면서도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패자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생명은 영원하다. 죽음은 보는 대로 현실이면서도 진리는 아니다 하는 것이 이러한 예(例)이다. 이런 말로서 희망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지구상의 위대한 정신들을 가진 어른들은 불사(不死)라고 말하며 항상 사실을 알고 있었고, 어떤 사람이던지 중대한 순간에는 이 사실이 계시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 하나의 일은 틀림이 없는 확실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 볼 수가 있으나, 망(亡)해서 끝난다고 할 수가 없다. 비존재(非存在)를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것은 불멸(不滅)이란 생각에 연유케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만약 우리들이 하위의 제체에서 따라오게 되어있는 공포와 의혹에서 마음의 작종(鐯綜)(복수)과 감정의 동란(動亂)이라 하는 거센 바다 속에서, 의식을 바꾸고 우리들 자신의 안으로 집중시킨다면, 우리들은 자신이 유일아(唯一我)와 같은 하나이고, 결코 소멸해 버리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외부환경의 영향 같은 것은 전혀 받지 않는 영원의 존재로서 계속하고 있는 것을 안다. 그렇게되면, 우리들은 죽음에 연결되어 있는 생각은 전부 마음에서 쫓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죽지 않는다. 죽을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육체에서는 어짜피 떠난다. 그러나 그것으로 혼은 해방이 되고, 보다 정묘한 계층(복수)에서 보다 더 큰 생활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고 육(肉)이라고 하는 옥사(獄舍) 그리고 물질세계의 어둠에서 나와 "아스트랄" 세계로 옮겨가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착각은 모든 인간의 성질(性質)에 관한 지식의 결여(缺如)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들이 육체를 자기자신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면 죽음은 해결불능의 신비를 가져다 줄 뿐, 우리의 육체라고 하는 존재는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우리들이 비웃는 신기루(蜃氣樓), 말하자면 아침마다 새로운 속임수를 가지고 나와 보이는 신기루의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육체 속 안에서 조용히 속삭여주는 소리는 걷혀버리고, 하나의 희망도 사라져 버린 "탄탈루스(Tantalus, 제우스의 아들 ; 신들의 비밀을 누설한 벌로 지옥의 물이 목까지 차서 갈증으로 물을 먹으려고 하면 물이 없어져 버리고 해서 고통받았다고 말하는 그리스 신화)"의 물에 닮은 보잘것 없는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제시한 반증(反證)은 이와 같은 큰 잘못을 범할 수 없도록 여러분에게 깨끗이 불식해 주었을 것이다.
수년 전에 저자는 뉴욕의 한 높은 건물 옥상에서 70층 아래의 요란하고 복잡한 거리의 정경을 내려와 보고 있은 적이 있다. 그때 나 자신이 어떤 혹성에서 온, 지구의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門外漢)이라고 상상을 해보았다. 눈 아래에는 많은 조그만 것이 움직이며 돌아가고 있었다. 이 조그만 움직이는 것들은 사람들과 자동차, 동력차라고 말하는 것들이다. 그것을 위에서 볼 적에 자력으로 움직이고, 자신이 자기자신을 자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교통신호가 녹색이 되면 그들 피조물은 움직이고, 붉은 것이 되면 섰다. 아무리 보아도 서로가 상대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자신의 진행권이 방해될 뻔하면 요란한 경적소리를 낸다. 꼭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살아있으면서 생각을 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잘 살펴보니 조그만 것 하나가 돌아가는 것에 서게 되니 좀더 작은 형(사람)이 안에서 나오면서 사태는 완전히 바뀌었다. 이것으로 다음의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저기에서 지휘하는 힘이 없어지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기계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자신의 움직임을 지시하는 힘이 없고, 결단을 내릴 수도 없고, 주위를 의식하는 것을 전혀 못하는 물질로서 된 부품의 집합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 가정을 물질계의 인간으로 비교할 수가 없을까. 즉 인간의 몸체는 살아있는 기계이고, 거기보인 지혜의 체가 아니고, 몸의 안에 살고 있는 아에서 끌어낸 것이 되고, 그 움직임을 지휘하고 통제하는 아가 없으면 그것은 무력, 무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에드윈 아놀드 경(卿)"의 유명한 번역으로 된 "바가바드 기타「인도의 일대서사시(一大敍事詩) "마하바라타" 안에 "주의 노래" 스리 크리슈나의 가르침 안에 스리 크리슈나(인도의 비슈누신의 가장 유명한 화신. 히타이트인의 구세주이며 가장 인기가 있는 신. 기독교의 예수의 전설이 크리슈나의 그것과 정확히 닮아있다.)는 다음과 같이 유시(諭示)해 있다.」
"영은 태어난 적이 전혀 없었으며, 영은 죽은 적도 전혀 없었다. 때(시간)는 처음부터 있지 않았고, 끝과 시작이란 꿈인 것이다. 불생, 불사, 불변이며, 영은 영원이며, 영의 지붕이 죽은 것처럼 보였어도 죽음(死)은 현재까지 영에게 스쳐본 적도 없다. 영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은 그 쓰여져 온 옷을 거두어 넣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나, 오늘 이것을 입으리라"고, 그리하여 이 육(肉)의 옷을 영은 가볍게 입고, 새 집을 인수하려고 지나간다. 진리탐구자의 마음속에는 다음의 의문이 나올 것이다. "그것이 정말이라면 그렇다면 벗어버린 육체의 사람은 어디 있을까?" 당연한 의문이다. 실은 정답은 이미 그 의문 안에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죽은 자는 여기 우리들의 주위에 언제나 있다. "아스트랄" 세계라고 하는 정묘한 경역(境域)에서 살고 있다. 이 "아스트랄"의 세계는 우리들 둘레를 둘러싸고 있는 데,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지각기관(器官)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 뿐이다. 사후(死後)의 세계를 지적으로 이해를 방해하는 것에 또 하나의 장애는 우리들이 호흡하고 있는 공기보다도, 눈에 안 보이는 정묘한 질료로 된 세계가 어떻게 우리들의 지금의 세계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현실의" "촉(觸)할 수가" 있는 존재가 될 수 있겠는가고 하는 의문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2강 제2장 의식의 세계의 [그림 3, 4]에서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거기에는 우리들이 이 물질세계의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실은 외부로부터 나와서 물질세계에 이루고있는 무수한 파동에 우리들의 감각기관이 감응하는 결과, 우리들 자신의 의식 안에서 만들어진 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는 사실을 약시(略示)하고 있다.
이것과 같은 사정이 "아스트랄" 세계에서도 해당되는 것이다. [그림 74]의 텔레비전은 채널 2로써 방영하고 있는 A국의 채널에 맞추고 있고, 그 결과는 수상세트의 "스크린"에 어느 상이 나타나 있다. 이 영상은 현실(실제)의 나타남이며, 그 화상(畫像)은 주로 "세트" 그 자체와 원상(原像)을 충실히 재현하는 힘에 의존하고 있다. 원상과 영상과의 사이에는 그저 무음(無音), 불가시(不可視)의 "에텔"파가 있을 뿐이다. 그 외의 파동들도 수상세트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나, 이 "텔레비전 세트"에는 아무런 효과는 없는 것이다. 세트가 이러한 파동에 동조(同調)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B국에서 오는 채널 2에 "스위치"를 바꾸면 아주 틀린 영상이 생긴다. 그것은 세트 쪽에 묵은 변화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고, 그저 다른 파동을 받도록 동조를 변하게 한 것 뿐이다.
[그림 75]를 보면 이 사실이 고스란히 우리들 자신에도 해당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육체의 "텔레비전 세트"에 닮아있지만(그것보다 육체의 5관은 정묘하게 조합된 것으로 5 즉 1로 되어 있으니, "텔레비전 세트"와 비교할 수가 없는 정묘의 극치이다.) 천연(天然)의 "스페크톨"이 있는 범위에 감응한다. "채널" 1에 동조하면 아는 물질세계를 의식하고, 그와 꼭같이 "아스트랄"세계(채널 2)의 파동으로 "멘탈"체는 멘탈세계(채널 3)의 파동에 감응한다. 우리들이 실제로 자기자신의 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세계 안에 삶을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면 아가 그 육체를 쓰고 있을 때, 우리들은 물질세계에 동조(同調)해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 사이에서는 이 세계의 여러 일들이 모두가 실재처럼 보이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유체가 없으면 또는 없어지는 이전에 이상한 사정이 안에서 생겨난 것과, 수면 중에 있었다고 한다면, 아는 "아스트랄"체에 동조해서 그 안에서 살고 있으며, 그 사이에는 "아스트랄"세계가 실재가 되어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스트랄"세계는 물질보다는 더 정묘하고, 그만큼 물질계보다는 한층 정묘한 소재로써 되어 있으므로 물질세계와 똑같지 않고, 물질세계보다는 한층 더 현실적이고 한층 촉(觸)할 수가 있는 존재이고, 한층 살아있다는 것이 된다. 이와 똑같은 사실이 "아스트랄"체의 경우보다는 "멘탈"체에 이르면 훨씬 광범위하게 해당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뜻은 "아스트랄"체의 수명이 다 되어서 쓸모 없게 되면, 혼은 역시 거기에서 이탈해서 "멘탈"체 안으로 옮겨가서 "멘탈"세계에서 일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단 한단씩 정묘해져 가면서 혼(魂)은 더욱더 표현의 자유를 얻고, 점점 활발하게 더 한층 생생(生生)하게 되고, 이전보다도 한 발짝 더 실재에 가까운 것으로 되어 가는 것이다.
물질세계에서 "아스트랄('유계'세계에 옮겨가는 조건에는 사람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생긴다. 단, 옮겨지는 데는 그 자체에서는 아무런 고통이 따르지 않고, 보통 우리들이 체험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이루어진다. 자연사(死)의 경우, "아스트랄"쪽에서 눈뜨는 것이 마치 깊은 수면에서 잠을 깨는 것처럼 쉬우면서 또한 에너지에 충만하고 있는 가벼운 느낌이다.
육체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에 "아스트랄"체는 활발하게 일을 해서 육생(肉生) 중의 전 활동에서 감정과 욕망의 색을 첨가하고 있다. 그 때의 질과 양에 비례해서 "아스트랄"체가 형성된다. 인간의 "아스트랄"환경이란 것은 그의 "아스트랄"체의 발달에 상응하기 때문에 그의 지난날의 감정의 소재(所在)가 어디에 많고 작고에 응(應)한 곳(세계)에 삶을 하게 된다. 고상하거나 비겁 비열했거나, 순수했거나, 불순했거나, 그 자신이 뿌린 씨앗 그대로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고 보니 우리들은 유계(아스트랄)에서 차츰 눈에 띄게 되어 가면서 만나게 되는 실제의 상태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는 점까지 왔다. 여기서 대단히 흥미 있는 몇 가지의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좌우간 우리들은 놀라운 세계에 있으므로, 그 세계에서는 옛 친구들, 앞서 타계(他界)한 친구들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정도의 확신을 가져도 좋다. 타계한 그들은 이승에 있었을 때에 비하면 크게 변한 것이 없으며, 망령(亡靈, ghost)은 그들 자신들이 생각한 것보다 조금 늙어 보이거나 혹은 젊게 보일지 모르지만 지상(이승)생활시대보다 훨씬 활기가 있어 보인다. 우리들의 환경의 성질은 주로 우리들의 감정생활 전체의 "레벨"여하에 달렸지만 지금 막 끝낸 물질생활의 환경과 아주 같은(단, 아스트랄 질료로 된 것)환경인 것이 보통이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자신의 환경에 대하여 전보다 좀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되고,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게 된다. 마치 이승에 있을 때처럼, 그 동안에 "아스트랄"세계에서의 생활에 익숙하여진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 세계가 반짝이며 빛나는 세계이고, 그것이 물질의 경우처럼 반사광(反射光)에 의하여 보는 것보다 그 자체의 빛에서 보고 있는 것을 차츰 알게 된다. 그 중에서 놀라운 광경은 자연의 풍광(風光)의 웅대함과 그 외형이 물질계에 있을 때처럼 일정불변(一定不變)이 아니고, 끊임없이 그 윤곽이 변하고, 때가 흐르면서 매력에 찬 새로운 미(美)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라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을 알고, 지금까지 잘못 알고 생(生)이라 말하고 있는 것 안에서 우리들이 소중하게 해 온 것이 모두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우리들의 마음가짐에 따라서는 죽음은 상상 이상의 "스릴"이 있는 멋진 체험을 차례로 시켜준다. 거기에 대자연(그 안에는 신(神)만이 가진 마음의 일을 엿볼 수 있다.)은 이 저승(來世)이 어떤 것인가를 앞질러 조금 맛보게 하여준다. 즉 우리들이 매일 밤 수면 중에 육체에서 빠져 나와서, 이 세계를 찾아왔다 하는 것으로 우리들의 꿈속에는 이 세계에서 생긴 일의 단편적(斷片的)인 기억이었던 경우가 간혹 있다.
[그림 74]에서 우리들은 물질계에서 생애가 10의 시기로 구분되어 있는 것, 각 시기와 인간과의 제체(諸體)의 모든 면에 있어서의 발달과의 관계를 보아왔다.
[그림 76]의 사후(死後)의 생활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관계를 표시했다. 그러나 양쪽의 사이에는 틀린 점이 있다. 즉 현재의 인간의 진화상태에서는 "아스트랄"계에서 지내는 시간과 그 후 "멘탈"계에서 지내는 기간에는, 육체생활의 사이에 획득한 경험의 결과를 소화, 흡수하는 것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아스트랄"세계를 통과하는 중요한 목적은 "과거의 육생(肉生)이 노출시킨 바람직하지 못한 특질들을 제거하고, 욕정을 정화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그러므로 "아스트랄"세계는 정제의 기간이라고 말한다. 다음의 "멘탈"계에서의 생활의 기초는, 모든 체험을 동화하여 아 속에 잠재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성스러운 특질과 힘을 눈뜨게 하는데 있다.
[그림 76]은 탄생에서 타계(죽음)까지의 육생기를 취급한 [그림 73]의 계속이 되는 점이다. 이 그림은 7개의 시기를 표시하고 있다. "아스트랄"계층의 질료는 아스트랄 계층 나름의 고태(古態)에서 원자태(原子態)에 이르기까지 7개의 종류로 나뉘어져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중에 어느 것이 특히 더 많은가에 따라 7개의 시기로 나뉘어 진다. "아스트랄"생활 중에 이 시기를 하나하나 지나가지만 그것은 어느 점에서는 육체 생활기에 닮아있고, 한 시기는 다른 한 시기에 미묘하게 융합되어 흘러든다. 그러나 육체 체험과는 반대이고, 반드시 1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며, 그 사람의 감정의 일반적인 발달레벨에 상응하는 시기부터 시작한다. (가령, 육체의 단련은 갑자기 중급에서나 고급의 수준에서 시작하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초보(1)에서 시작하여야 하지만 "아스트랄"계에서는 지상(이승)생활 중에 고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여기서는 곧바로 높은 생활에 들어간다-역자주)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스트랄"생활은 육체생활보다 넓은 자유가 있다. 과거의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욕망은 아스트랄 경험이라는 가열된 솥 안에서 타서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높은 세계(복수)로 확대되어 가는 기쁨(복수)들은 우리들의 육체 생존 중에 생긴 어떠한 기쁨도 다루지 못한 훨씬 멋진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구분되어진 순번으로 조사해 가기로 하자. 후에 나오겠지만, 아스트랄계의 구역 안에는 극도로 불유쾨한 점이 있고, 놀랍고 공포스러운 것이 있다. 이 구역을 통과하는 것은 인류 안에서 최악의 자만이 한정된 것이다. 그렇다 하여도 그것이 그들의 악행에 대한 벌이라는 이유는 아니다. 이것을 확실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와 같은 저급의 구역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맛보는 체험은 그들 자신을 격정의 불 속에 두는 것으로 그의 "아스트랄"체로부터 농밀한 "아스트랄" 질료를 빼내고, 저급의 욕망을 될 수 있는 대로 씻어 깨끗이 하기 위한 것이다. 거기서는 그의 둘레에는 그 자신과 비슷한 품행이 좋지 못한 자들이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그가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본문에 길게 삽입되어있는 인용문은 애니 베산트 박사(Dr. Annie Besant, 국제신지학협회 제2대 총재)의 저서 고대의 지혜(英智) 안에 카마로카(死後域)에 관한 장에서 전기한 것이다. 카마로카(kamaloka ; 욕망계)의 제 일권(圈)에 관하여 베산트 여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들이 몸부림 칠 정도의 욕망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는 소재(질료)는 여기에 있다. 여기는 사실상 최저 "집단"의 구역이며, 모든 무서운 것이 육안으로부터 감추어져서 무섭게 벗겨져 나와서 펼쳐져 있다. "아스트랄"계에는 성격이 형으로 되어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지나친 격정에 꽉 차있는 인간은 자신의 격정을 모두 보게 된다. 가령 짐승 같은 욕심은 아스트랄체를 짐승의 형으로 되게 한다 ······."
이와 같은 상태 안을 지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최악의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있는 지옥(地獄)이라고 하는 것은 이 구역에서 생긴 말이 틀림없을 것이다. 거기에 인력의 법칙은 이러한 각계에서도 적용되므로 최하위 아층(亞層)의 무거운 아스트랄 질료는 사실 지각(地殼) 안에 집적(集積)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들의 밑에 있는 것이다. 지옥은 밑(下)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 사실에서 유래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현재 신지학으로서 홍보해가고 있는 가르침은 지난 과거의 세계 중의 대종교(복수)들이 한결같이 가르침을 한 것이며, 그의 현재의 교설(敎說)은 이들의 대종교 자체가 거의 잊어버리고 숨어있는 외적 상징에 불과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확신하고 있으며, 앞에서 언급한 사실(복수)들은 다른 사실(복수)과 서로 맞아떨어져, 그 확신은 강한 지지의 힘이 되어있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는 신의 나라의 여러 가지 신비를 가르쳐 주었지만 일반의 대중에게는 상징적인 말을 한 것 뿐이 다고 확실히 말하고 있다.
제2권(圈)은 물질지구와 그것에 연결된 모든 물체의 "아스트랄"체의 세계이다. 보통사람들은 여기서 그의 "아스트랄"생활을 시작한다. 즉 그들의 "아스트랄"체의 특징적 성질 때문에 그것에 상응하는 이 권역이 그들의 의식이 일하는 층(層)이고, 그 안에서 그들은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들이라는 것은, "일상생활의 여러가지일(쇄사, 鎖事)에 쫓겨다니는 사람들, 하급의 성정에 지배당하는 사람들, 또 여러 가지 욕정에 불타고, 물질적 육체적 쾌락을 뒤쫓다가 죽은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불만족 불안으로 침착하지 못하고,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이 강한 것에 비례하여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고뇌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그만 영력을 얻은 영매(靈媒)들을 통하여 지상 친구들과 교신하려고 하기 때문에, 보다 좋은 권역(복수)들에의 출발이 늦어져 있다.
제3권(圈)은 제2권 보다 조금 좋아지고 있다. 여기서 거주하는 사람은 이승에서의 체험에 그다지 강한 미련은 없으나, 역시 "이승에서의 자극에는 감응이 쉽고, 이승의 일에 조금씩은 관심이 있고, 이승에서의 부름(복수)에 의하여 다시 이승에 눈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서 "아스트랄"생활이 시작된다.
제4권(圈)은 이제는 이승의 미련이 거의 없어지고, 보다 높은 사물에서의 소환(召喚)이 들리는 상태의 자리이다. "아스트랄"체내의 하급인 "아스트랄"질료는 거의 마멸(磨滅)해 있고, 정묘한 질료만이 남고, 그것에 의하여 그는 지금에 이르러 보다 높고, 보다 아름다운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게 되어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더 진보한 스타일의 혼들로서, 그들은 이승에서의 시절의 관심사와 행동에서 몸에 배어있기는 하여도 그가 가지는 의지는 뒤쪽이 아니고, 오히려 앞을 향하고 있으며, 만에 하나 지상에서 생긴 일 때문에 억지로 불려 가는 일이 생기지 않는 한, 그다지 늦어짐이 없이 앞으로 나간다.
이 권역을 [그림 76]에서 정죄계(연옥, 煉獄)로 쓰여 있지만, 그것은 그가 앞으로 나아가느냐, 그렇지 못하고 뒤로 후퇴하느냐의 양자택일에 직면하는 분기점에 있으며, 그리고 보다 높은 생활이 그의 의식 속에 깜박이고 있는 것이다.
제5권(圈)은 새로운 특징이 포함되어진다. "아스트랄"물체의 빛은 지금까지 차츰 증대되어 왔지만 이 권에서는 그것이 더욱 현저히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는 전세계의 통속적(通俗的)종교가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서 그려져 있는 하늘(天)이 존재한다 ······. 진실의(眞實義)를 죽어버린 형해(形骸)로 화(化)한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남녀의 갈망이 문자대로 차여져서, 세계의 성전들의 단순한 껍데기를 빨고 자라난 그들의 상상력에 의하여, "아스트랄"질료(質料) 안에서 무의식 속에서 그들이 꿈에 그려본 금전옥루(金殿玉樓)를 만들고 있다."
제6권은 좀더 세련되어 있고, 더 진보한 스타일의 혼들이 그의 신앙이나 문자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고, 그 기질(氣質)에서도 창조적, 예술적인 혼들이 모여있다.
"그의 환경은 "카마로카"(욕정계, 아스트랄계)에서는 최선인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창조력에 따른 상념이 이 계의 빛을 내는 질료의 아름다운 풍경,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해변, 구름을 끼고 있는 산들, 풍요한 멋을 주는 들판, 그 외 지상(이승)에 제사하여준 최선의 풍경과 비교해서 더 좋으면 좋았지 손색이 없는 뜬 구름 같은 동화의 아름다운 경지로 바뀌어진다...... 그들은 현재의 권역을 지나서 더욱더 높은 상태로 옮겨가는 것을 열심히 하고 있다."
마지막의 제7의 최고권은 하급성정(性情)을 대부분을 제거한 사람들, 말하자면 정신적인 연구에 순수한 기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된다.
"무엇인가 지적연구에 열심히 종사하고, 지식에로 고쳐질 수 없는 갈망을 품고, 육체를 버린 사람들이 피곤함을 모르고, 묵묵히 그 목적을 추구하고 있지만, 그들의 연구는 물질적 방법에 의존하고 있어 제약(制約)을 받고 있다."
이상은 "아스트랄"세계를 통과하는 혼의 진보를 마무리해서 언급한 것이다. "아스트랄"세계에서 혼이 직면하는 여러 종, 여러 가지의 변화에 생각할 것이 있다. 이승의 인류 중에는 최악의 자만이 최저권의 고통에 정화(淨化)가 필요한 것이지만 그의 그들에게도 때가 이르면, 해방이 되어 그들의 성정 중에 선량한 부분(복수)을, 더 높은 권역(복수)에서 발현(發現)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2권의 사람들의 수는 대단히 작은 것이지만 소심한 찌그러진 것 때문에 모처럼의 기회를 여기서 낭비하지만, 그들도 그 앞날에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류의 대부분은 틀림없이 제3권에서 "아스트랄"생활에 눈이 뜨고 얼마 후 [앞으로 전진하라]고 하는 소환(召喚)을 바라보게된다. 이승의 인간으로서 완전한 선인, 완전한 악인이라는 것은 한사람도 없다. 이승의 인간은 모두가 선과 악의 양면이 다분히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극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수의 사람뿐이다. 우리들의 몸체 안에 있는 저급인 여러 요소는 물질생활, 육체생활 동안에 활발히 일하는 능력이 떨어지면서 보다 고급의 힘이 해방을 얻어서 나타나게 되어 가는 것이다. "아스트랄"생활에 직면해가고 있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신지학의 가치는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과찬이 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부터 앞에서 오는 것을 만나게 되는 큰 사물(事物)을 신지학에 의하여 배우고 알게 되면서, 그것에 비하면 다른 것, 큰 매력 못 느끼는 사물에 매혹되는 경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아스트랄"계에 있으면서도 "멘탈"계의 생활에 관하여 이론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실용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에 우연히 우리들이 잘못해서 "멘탈"왕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들을 "아스트랄"체내로 끌어왔다고 하면, 그들(아스트랄)은 잘되었다고 하고, 아스트랄체 안에 농밀한, 가장 조잡한 질료를 전부 아스트랄체의 표면에 끌어당겨 표면을 굳게 해 버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고급 "아스트랄"의 힘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고, 그러므로 그들은 "아스트랄"체내에서 마음대로 지내는 시간(즉, 그들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하는 것이다. 보통 하급의 "스타일"의 질료에서 활성화된다.
고급의 "스타일"의 질료는 같은 등급의 고급이 하는 것에는 응하지만, 하급질료가 배제될 때까지는 정묘한 감정의 힘은 충분히 표현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의지를 강하게 불러내면 "엘리멘탈"과 같이 욕을 당하게 된다.
얼마간 후에 "아스트랄" 생활이 끝나고, 그 목적들이 이루어지면, 말하자면, 순수한 금속에서 불순물이 분리되고, 그 금속은 더 앞으로 보내져서 더 고상한 형(멘탈)으로서 만들어질 때가 온다. "아스트랄"계에서의 모든 경험의 결과를 새로운 파동력으로하여 침묵 속에, 또한 틀림이 없이 수장(收藏)한 항구원자는 활동정지의 상태로 심어들지만, 그것은 다음에 바뀌어 태어나는 것에 대비해서 새로운 보다 좋은 체를 만드는 소재를 모으려고 다음의 소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끊기고, 찢어진 아스트랄체는 아스트랄 사해(死骸)가 되고, 인간은 "멘탈"체 속으로 옮겨서 "멘탈"계 안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는 이 새로운 세계의 사태가 지금까지의 화신(化神)의 주기동안에 만난 어떠한 상태와 아주 딴판인 것을 느끼게 된다. 즉, 상념은 창조를 동반하고, 그의 명상적 사고와 창조적 사고, 즉, 조상과 구상을 선별해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것이다. 이 멘탈 세계로 옮겨지는 것에 대해서 베산트 박사는 앞머리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혼은 가수(假睡)에서 계속되는 의식상태에 닮은 짧은 무의식 속에 잠겨서 그 환경을 의식 못하지만 얼마 후 눈이 뜨면 아주 심하게 큰 것으로 밑바닥을 알아낼 수 없는 꿈속에서조차 본적이 없는 지복감(至福感), 하늘의 정복(淨複)에 차서 있다. 아주 연한 "멜로디"가 그의 둘레에 들려오고, 아주 연한 색조들이 그가 눈을 뜨는 양눈에 가볍게 인사한다. 공기까지도 마치 색과 음인 것처럼 느껴지며, 전존재가 빛과 화음으로 차서 있다. 얼마 후 황금색의 안개 속에서 지상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아주 편하게 나타나고, 그 아름다움은 영묘(靈妙)로서, 그들은 더 고상하고, 더 아름다운 감정을 나타내고 있고, 하급세계(복수)들의 여러 가지 갈등이나, 걱정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가 없다." 천계(天界)에 해당하는 통칙(通則)에 대하여 이 책의 이곳 저곳에서 말하고 있는 기초적 문헌만으로 천계의 상태를 이해하는 것은 이미 직관력에 눈이 띄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쉬운 길이 아닌 것이다. 이 물질세계에서는 인간을 만드는 것은 모두가 첫째 마음 속에서 시작한다고 우리들은 알고 있다. 가령, 화가는 그가 그리려고 하는 그림에 대하여 우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그리고 입수할 수 있는 조잡한 용구류로 그의 생각을 "캔버스"의 위에 그려내려고 한다. "엔지니어"는 구조물을 "디자인"해서 그것을 교량이나 기계 등으로서 물질화하기 전에 먼저 상상 속에서 그것을 축조하여 본다. 그 실제의 완성까지의 행정이야 말로 길고 아주 힘든 것이다. 하여튼, 이 세계의 물질은 사고의 파장에 직접 감응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그런데 "아스트랄"세계에서는 우리들은 의지력을 써서 동 세계의 재료(질료)를 마음먹은 대로 형(形)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 "멘탈"세계가 되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들이 우리들의 지식과 힘에 따라서 좋거나 나쁘거나 빈약한 것이 되거나 풍요한 것이 되거나, 즉시 멘탈 질료 안에서 형으로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짐작할 수가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데봐챤(이 세상에 부르는 이름)에서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그대로 형(形)이 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사람들이 물질계에 있으면 언제나 마음속에 상당히 관심을 갖고 있던 것들에 지금 자신이 있는 "멘탈"세계에서 둘러 쌓여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친한 친구를 생각하면 그는 벌써 자신의 곁에 서 있다. 옆에 있는 것 뿐 아니고 그와 사랑과 친교를 가져볼 수 있다. 그들의 훌륭한 특질이 전부, 그것도 그가 과거에 알고 있었던 것 이상으로 멋지게되어 느낄 수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멘탈"세계에서는 모든 바람직하지 못한 성정(性情)은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아있으며, 생명의 맥은 뛰고 있다. 육체 생체(生體)의 수많은 제약 속에 매몰되어있는 우리들의 친구들은 아직 지상에 살아있는데, "멘탈"계의 그와(또 다른 많은 사람들과도)같이 있는 것이나, 그 친구들의 좋은 성정(性情)만이 나타나고, 나쁜 것은 아주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주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와 같은 것이 처음에는 그와 같은 일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있을리 없다라는 것은 다른 것에서도 많이 있었으므로 우리들의「마인드」가 성장해 가면서 이해하는 것을 기다려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한번 "텔레비전 세트"의 가령(假令)으로 뒤돌아 가보자. 저자는 지난날 어느 때에 면담 담당자와 같이 "텔레비전 스튜디오"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그때 우리들은 지금부터 8만 호의 가정에 전부 동시에 방영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저자의 모습과 소리가 한번에 8만개 소에서 충실하게 재현된 것이다. 이 정도의 사실은 정묘세계에서 신비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경이를 훨씬 넘어 비교가 안되며, 인간은 신의 알(卵)이다고 말하는 사고(思考)방법 안에 포함되어 있는 위대한 사물들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 겨우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이다. 인간이 만든 텔레비전 방송국을 통하여 한사람의 인간이 수천의 장소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그 모습과 소리를 들을 수가 있을 정도 이상으로 같은 현상이 훨씬 높은 계층(界層)에 일어나고, 혼은 지금의 "텔레비전"에서 하고 있는 지상에서의 친구들을 만들어낸 상념형태(想念形態)안에 나타나게 하는 것이 아니될 수가 있겠는가, 우리들의 지상에서 보고 있는 친구들이란 것은 그 친구의 참된 모습(혼)이 아니고, 육체인 것이다. 그리고 혼은 그의 조그만 부분만 육체를 통하여 표현하는 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에 하급의 제체(아스트랄체, 육체)는 "데봐챤"에서의 현현과는 관계를 갖지 못하므로 바람직하지 못한 성질(이것은 하급 제체의 생명이었고, 혼의 생명은 아니다.)을 나타내지 않는다. 인간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각양각색의 천국, 황금의 거리, 진주의 문, 즐거운 경기장, 기타 그가 육체생활을 할 깨에 바라고 미련을 가지고 그렇게 되어 보았으면, 가져보았으면 하던 모든 것이 그의 앞에 홀연 하게 출현한다. 그를 괴롭게, 고통스럽게, 슬프게 한 것은 단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거기에는 최선이며, 최고의 것들만 있을 뿐이고, 그것을 제약하여 주는 것은 그의 이해력뿐이다.
"데봐챤(Divine)"은 대략 2개로 나뉘어진다. 말하자면 하급 "멘탈"세계와 고급 "멘탈"세계이다. 혼은 아스트랄 세계에서처럼 각 아층(亞層)을 차례로 지나서 앞을 나가는 것이 아니고, 먼저 자신의 통상적으로 맞는 "레벨"이 하급 또는 고급의 "멘탈"세계에 들어가서 시간(때)의 경과와 더불어 처음에 하위의 계층, 다음에는 고위의 계층 안에서 의식을 확대해 가는 것이다. 천계생활의 기초가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체험을 동화(同化)시키고 재능이나, 능력으로서 [아] 안에 잠을 자고 있는 신의 여러 특질을 보다 많이 눈을 뜨게 했느냐가 다음의 생에 있어서의 그것을 발휘하는 것이 된다.
"데봐챤, 즉 천계생활은 지복의 세계,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는 환희의 세계이다. 그러나 천계는 그 이상의 것, 그리고 빈곤한 자를 위한 휴식 이상의 것인 것이다. 그것은 조잡한 질료와 괴노같은 것에 뱅해받지 않고, "하트"와 사랑을 발달시키는 땅, 지상의 가혹한 전쟁터에 나가는 것에 대비해서 무기(복수)들을 만드는 땅, 미래를 보증 받는 땅인 것이다."
하급 "멘탈"세계에서 혼은 멘탈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멘탈"체 역시 얼마 후에 죽고, 인(人)은 "코절체"안에 남으며, 하위의 세계들의 어느 매체(媒體)에 방해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스트랄"세계나 "멘탈"세계의 앞에서 설명하여온 상태 안에서 지내온 시간은 사람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있다. 거기에 경과한 것처럼 보이는 시간은 실제의 사건들의 진행(이것은, 우리들이 시간을 재는 근거이다)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 말은 이 영역에서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착각이 물질계보다 확실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스트랄"계의 최저권에서 지낸 짧은 시간이 영원으로 보이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더 높은 영역이 되면 찬미 노래에서 말하는 "그대의 눈에 비치는 1천년은 한 저녁때(석양)와 같다."하는 것과 같은 사실로서 되는 것이다.
여하튼 간에 혼은 이와 같이해서 육체의 여러 체험이 흡수를 완료한다. 혼은 지금까지 높은 차원의 몇 세계에서 경탄할만한 생을 살아왔다. 이 생은 큰 일로 충만 되어 있다. 만약 그가 진보의 길을 기쁨과 용기로서 자발적으로 걸어온 것이었다면, 이 생은 더욱 더 그의 의식을 확대해 가는 즐거운 시간에 차서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고통을 견디면서 있다면, 그 고통은 그를 위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최고 천(天, 제 7권)에서는 혼은 그의 많은 화신(化身)을 회고하면서 그 잘못(복수)과 성취에서 노력을 보게 되고, 그리고 그의 생에서 얻은 신성(복수)을 더욱더 많이 발휘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끝으로 다시 한번 "베산트"박사의 저서에서 인용하여 보기로 하자.
"죽음은 혼을 일부 해방하고, 그의 몇 개의 사슬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에서 해방된다. 하나의 변화에 불과하다. 죽음이란, 이승의 모든 미망(迷妄), 착각이 가장 심한 것들이다. 사(死)는 없다. 생명의 상태의 변화가 있는 것뿐이다. 생명은 연속한다. 자르지 못한다. 자를 수가 없는 것이다. 불생(不生 ; 영원, 불멸, 언제나)으로서 그를 싸고 있는 체들은 망하지만 그것은 불멸이다." 끝내 또다시 화신(化身)하는 시기가 다가와서 [그림 68]에 그린 것이 다시 생긴다.
하위의 제체를 형성할 때의 핵(복수)은 순서대로 부활(賦活)되어, 얼마동안 후에 육체의 여러 가지 제약(制約)은 혼의 둘레에 모여온다. 그러면 다시 혼은 지상(이승)(복수)의 문제와 시합을 하게 된다. 씨를 뿌리고 다시 거두어들이고, 그의 새롭게 얻은 힘(복수)의 육생이란 엄한 불 속에서 실험을 당하는 것이다.
[그림 78]에서는 인간의 생애 안에서 여행을 상징하고 있는 차륜과 영권과 물질권과의 안에 공평히 일하는 자연의 법칙이 그려져 있다. 이 경우, 상징으로된 차륜은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각(殼, 새알, 자아) 아래쪽은 물질계, 위는 초물질계(복수)로 한다. 각(새알)은 의식의 매체(복수)안에서 아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림 77의 A]는 차륜의 3개의 기본부분이 되는 각(새알), 복(輻), 외륜(外輪)의 그림이다. 차륜이 땅위로 전진함에 따라 그 가장 밖의 부분은 시종 움직이고 있고, 밖의 축(복수)은 어느 점이고 진행방향으로 끊임없이 둥글둥글 바뀌고 있다. 그러나 각 아의 상징은 그 진행방향이 일직선으로 나가고 있다. [그림 77의 B] 우리들은 [그림 77의 C] 안에 차륜처럼 한번에 몇 방향으로 무리하게 움직여지고 있다라고 생각해 보면, 곤혹을 당하는 것이 몇 번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보기에 있는 것이고, 어느 시점에서도 뒤로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움직이는 [그림 77의 D]처럼 되어서 파곡선(擺曲線, cycloid curve)이라 말하는 곡선을 그리는 것이다. 만약 물질세계에서 시작하는 체험이 X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물질계에 돌진하여 거기서 현실의 체험으로 나타나서 거기에서 묻어 서서, 화신(化身)의 끝에서는 고차원세계(복수)에 흡수되어, 그의 정수가 과거세(過去世)에서 얻은 힘을 더하여 준다. 그것은 다음의 생(生)을 시험 당하기 위해 돌아온다. 우리들이 육체생활보다 더 높은 것, 보다 더 고상한 것으로 하면 할수록 우리들의 차륜은 그만큼 빨리 "골인"을 향하여 나아간다. 그러나 신의 경륜은 참으로 절묘하기 짝이 없고, 모든 체험은 그의 고귀, 저열(低劣)함에 상관하지 않고, 모두가 변성(變性)되어서 하나(1)의 힘이 되도록 되어있다. 고급의 체험을 기쁨을 통하여, 저급의 체험은 고뇌를 통하여, [그림 67]처럼 파곡선은 인간의 물질세계와의 접촉은 짧게, 높은 세계(복수)에서의 체류는 길게 하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다.
제6장 카르마 즉 기회의 법칙
카르마(Karma)라는 것은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 ; Sanskrit)이고, 원래는 행위(行爲)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전문적으로는 물질계와 초물질계와의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모든 영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자연의 기본적 법칙을 말한다. 그것에는 2개의 국면이 있고, 그 하나는 바로 결과로 나타나는 것, 또 하나는 결과가 느리게 나타나는 방법인 것이다.
바로 반응의 나타남을 하는 "카르마"는 천재적 과학자 "아이작 뉴튼(Sir Issac Newton, 1642~1727, 만유인력, 미적분 발견)경의 유명한 제 3 운동법칙을 인용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즉 모든 작용은 똑같은 또한 역으로 반작용이 따른다. 이것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물질현상이 "에너지"에 해당하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도 해당한다.
이것에 대해서 실제로 인간들이 잊어버리는 일이 없이 마음속에 명심하고 있지 않으면 안될 가장 중요한 사실의 하나인 것이다. [그림 78의 A]는 그간의 사정을 표시해주고 있다.
이 설명으로서 운동의 제3법칙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하면 좋을 것이다. 외적의 물질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행위는 모두가 내적 영적 세계에 있어서의 동등 또한 역의 반작용을 따르게 한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친절이나, 또 불친절이나, 작은 것이나 혹은 큰 것이나 행위를 하면, 그것은 우리들의 "아스트랄체""멘탈체" 또는 "코절체"의 어느 것 안에서 동시에 반작용이 따르게 된다.
만약 우리들이 누구인가에 노하면, 상대에는 아무런 상해를 주지 못할지 몰라도 우리들 자신의 "아스트랄"체는 곧바로 해를 받는다. 만약에 사람을 속이면 그 속인 효과가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행위자체가 우리들의 "멘탈"체를 확실히 상하게 한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혹은 생생하게 살아가도록 순수한 사랑을 주면 그것은 "코절체"의 확대를 가져다주고, 우리들은 즉시 한층 더 좋아질 것이다. [그림 78의 B]에서 약시하고 있는 것같이 우리들은 매일 행하고 있는 좋은 행위나, 나쁜 행위가 우리들의 정신과 감정의 표현을 좌우하고, 그것을 통합한 것으로 하여 성격이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그러나 또 우리들의 이와 같은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카르마"의 법칙의 두 번째의 국면(局面)인 것이다. 이것이 "바울(St. Paul)"의 "갈라디아서(Epistle to the Galatians, VI:7)"안에 있다. "속임수는 쓰지 말라. 신을 속일 수는 없다. 사람은 뿌린 것은 그 누구이든지 거두어 들여야 하는 것이다."라고 잘 표현되어 있다. 그렇지만 거두어 들인 것을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때때로 아주 늦추어져서, 다음의 또는 그 후의 화신(化身)까지 연장되는 것이 있다. 그건 꼭 땅속에 뿌린 종자가 그날로 즉시 나오지 않고, 상당히 지나서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고타마 붓다는 이 법칙에 대하여 강하게 말하였다.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경은 그의 시 "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이란 책 안에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성전의 말은 좋다. 동포들이여,
개인의 생은 전세의 결과이니라
지나간 잘못은 비세와 고뇌를 가져다주고,
지나간 선은 지복을 낳는다.
그대가 뿌린 것은 그대가 거두어 들인다.
저쪽의 벌판을 보라!
고마는 고마로서 소맥은 소맥이니라!
침묵과 어두움을 알았다.
인간의 운명은 그와 같이 생긴다.
자기가 뿌린 씨는 거두어들이라고 그가 온다.
고마, 소맥, 지나간 태생에 있어서 얼마나 버리는가.
얼마의 잡초와 독물이 그와 떨어진 땅을 상하게 한다.
그대 만약 바르게 일하면,
그런 것들은 뿌리가 끊어지고,
그곳에서 건전한 종자가 심어지고,
땅을 살찌우고,
장애없이 깨끗이 된다.
수확이 풍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서 살인자의 칼은 자신을 찌르고,
부정한 재판은 그 스스로 변호인을 잃는다.
거짓의 혓바닥은 그 허언을 재주고,
숨어든 도둑과 약탈자는 훔친다.
돌고 돌아 그 대가를 받을 뿐이다.
이와 같은 것이 법칙이며,
그것은 의(義)를 움직이고,
몇 사람은 그것을 피하지만 이것을 서(止)게 할 수 없다.
그것이 "하트(茫)"의 사랑이다.
그것이 끝이 오면 달콤한 평안과 완성이다.
복종하라!
이와 같은 것이지만 이 법칙의 큰 줄기로서는 간단하다. 뿌린 것은 뿌린 자가 거두어들인다. 녹두를 심어놓고, 포도가 생겨나는 것을 기대하지 말라, 대맥을 뿌리고, 소맥이 수확될 리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뿌리면, 그 자신 안에 고통을 뿌리는 것이다. 그것이 어느 때 어떻게 나오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단 하나의 확신이 있다. 그것은 신은 속일 수가 없다를 거두어들이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인과(因果)의 인(因)들이 훨씬 단순하다는 것은 좀처럼 없으며, 좌우간 복잡한 것이다. 인(因)이 되는 새로운 충동은 때때로 처음의 충동을 수정하지만, 혹은 장부에서 묻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법칙 그 자체는 언제나 바꿔지는 일이 없고, 그 일은 또한 결코 틀린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정확 불변의 법칙의 존재가 아주 까다로워서 처음에는 무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한 사람은 마치 자신이 숙명에 걸려 넘어져 자신의 과거의 잘못 때문에 덮어 씌워진 피할 수 없는 죄와 언제나 만나는 느낌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그 법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카르마는 우리들의 희망과 격려를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우리들의 희망과 결려를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기회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운명의 울타리 속에 잡혀있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법칙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법칙 덕분에 우리들은 뿌린 것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과 자연과의 차이점은 우리들이 확실히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동료로부터 이유없이 손해를 받는 경우가 있다. 인간은 인생의 과업을 무료로 배우는 행위자이고, 때로는 잘못을 범하고, 그것을 후에 바로잡아야 할 경우가 있다. 그러나 자연은 잘못을 범하지 않고, 우리들 자신의 과거에 있어서 필요하다는 길을 우리들은 던져져서 같은 과거에 있어서 필요로 하는 기쁨과 고통을 가지고 우리들을 찾아오는 것뿐이다. 그것은 보복이나 벌은 아니다.
그것은 잘못을 바르게, 약한 것을 강하게 만드는 경륜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카르마"는 모든 잘못에 대하여 그것을 교정해 주는 환경을 제공하고, 모든 의로움에 대하여 더욱이 큰 달성을 가져다 줄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기독교 복음서 안에 예수를 보고 그 제자가 "태어나면서 맹인인 사람을 보고 누구의 죄입니까, 본인의 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부모의 죄 입니까?라고 물었다. 당시의 유태인들 사이에는 바뀌어 태어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고, 폭넓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이 놀라운 것일지 모르겠으나, 만약 이 사람이 과거의 행위 때문에 이와 같은 꼴을 당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의 행위는 태어나면서 맹인인 이상 전세에 있어서 범한 것이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바뀌어 태어난다는 것을 제자가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당시에는 제자들이 죄와 벌이라고 말하는 생각에 아직 사로잡혀 있었던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선생(예수)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이 자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고, 그의 부모도 또한 그렇다. 신이 일하시는 것이 그에게 나타난 것 때문이다."(요한 9장 1-3절) 다른 번역에 의하면 답은 이렇게 되어있다. "---그래도 법칙을 채우기 위해서이다." 양쪽의 번역이란, 그 의미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같다. 즉, 신의 법칙(복수)이란 신의 일하는 나타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죄와 벌이란 생각방법을 거부하고, 그렇게 된 것은 신이 일하는 것이 나타나서 즉 그 맹인 안에 일하고 있다.
우리들은 그것이 카르마라는 것을 안다. 카르마 법칙의 나타냄이라 선언한 것이다. 전세에 있어서 성격상의 약점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주는 것이 된다. 그의 현재의 상태는 그 잘못의 결과인 것이다. 그것은 죄를 범한 것으로 벌이된 것이 아니다. 신이 그 자식들의 잘못 때문에 그를 벌을 준다는 생각은 우리들의 마음에서 영구히 떨쳐버려야 한다. 노여움은 인간의 약점이고, 신의 속성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죄를 용서한다고 하는 것에 관한 우리들의 갈등(복수)을 영구히 추방하고 보자" "인간은 잘못을 범하고, 신은 용서한다"고 하는 옛말이 있다. 물론 신은 성스러운 분이며, 그러므로 신은 언제나 용서한다고 확신하여도 좋을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그와 같은 식으로 생각한다면, 신은 용서한다고 말하는 자체가 신의 성질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데서 출발하고 있다. 신의 사랑을 충분히 의식하게 되어 그 결과 과연 그러하나, 신은 그저 그 성스러운 사랑을 신의 피조물인 우리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라고 깨닫는 쪽이 훨씬 좋을 것이다.
신은 그의 사랑 때문에 우리들 자신의 행위의 과실을 그것이 고통이거나, 기쁨이거나,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거두어들이도록 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그 분이 "카르마"라는 것으로 자비 깊은 법칙아래서 전진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것은 벌이 아니다. 용서하는 것도, 용서하지 않는 것도 없다.
[그림 79의 A]를 보자. 먼저 (1)에서 시작하자. 어느 잔혹한 행위가 범하여 졌다. 그것은 물질세계 안에서 진행하는 인(因)이 되는 것이다. 그 직접의 결과는 앞에서 본 행위자의 "아스트랄"체에 상해한다. 한편, 잔혹한 행위를 당한 희생자에게도 끼친 고통이 생긴다. 이러한 결과는 모두 법칙에 의하여 저울질된다. 그 사람이 물질계에서 "아스트랄"계로 옮긴 후, 그는 "아스트랄"체내의 상한 것이 그의 고통이 되는 것이다. 후에, 그는 "코절체"안에 그 사태를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반성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자세히 회고하여 그 비(非)를 느낀다. 여기서, 친절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배우고, 이 일이 아 속에 (3) 신의 특질인 사랑을 지금까지 이상으로 눈뜨게 된다. 이 새로운 힘은 실지로 시험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화신 동안에 그는 그 자신이 고통받기도 하고,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4) 그 때에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들의 고통스러운 것을 경감하여 주면, 그의 채무는 변제되고, 잘못은 바르게 되고, 자연과의 저울질은 맞는 것으로 회복된다. 어떠한 악이거나 선에서 생긴 것이다. 고통스러운 희생을 지불하였지만 [그림 79의 B]는 다른 상태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선의 행위의 과보가 수확되는 것까지의 과정의 추적이다. 인(因)은 친절의 행위이다. (1) 그것은 지금까지 본대로 "아스트랄체"가 똑바로 확대한다는 결과가 생긴다. "아스트랄"세계에서 행복은 증진된다. (2) "코절체"에서 (3) 당시의 생긴 일을 회고하고, 그것과 친절 정신은 더욱 크게 되고 사랑이라고 말하는 신의 힘이 더욱 전개되는 것으로 된다. 이것도 시험을 받아야하기 때문에 다음의 화신에서 그는 전세(前世)시절 이상으로 친절한 행위를 해야할 때를 만나고, (4) 그가 새로이 획득한 영적 힘에 소기(所期)의 새로운 놓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나 시험 당한다. 이 경우 선에서 보다 나은 선이 생겨난 기반이 여기에서는 기쁨인 것이다.
어떤 세계에 있어서도 인간의 생활은 복잡하며, 인간은 특정한 "카르마"를 저울질하는데 필요한 종류의 또한 그 "카르마"의 저울에 맞는 환경에 어떻게 하여야 본인의 것으로 되는가에 있어서 불가사의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 정도의 것이며, 지금이라도 형이하(形而下)의 세계에서, 현대의 라디오에서 콘트롤기기가 해내고 있다. 방사하는 파장은 아주 조금 틀릴 뿐인데, 광법위에 걸쳐서 여러 가지 실용적인 면에서 놀라운 정도의 다종다양한 반응이 일어난다. 인간은 타인과는 아주 별개의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각자 특유의 파장(그의 자체에 포함되어 있는 많은 파장 전부가 복잡한 파장)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호감, 싫다라는 형으로 그 사실을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카르마"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의 오라의 방사에 따라서 그가 필요로 하는 환경에 끌려가게 된다.
하나의 예를 보자. 육지에 끊임없이 부딪혀오는 바다의 파도는 어느 장소에서는 강으로 들어가고, 어느 장소에서는 해변 모서리를 만들어 해변을 돌출 시킨다. 그러므로 해양선의 모양은 그의 형, 큰 것에서 여러 꼴로 되어있다. 파도가 오늘도 내일도 부딪혀오고 해변의 윤곽은 변화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차례로 부딪혀 온 파도가 어느 곳에서는 작용을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작용을 덜하기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 파도가 의식적으로 항구를 만들고, 동굴을 파내고, 한편으로는 높은 곳은 특별대우를 해서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파도는 자연의 그대로의 힘에 응해서 해변을 치고, 그 뒤에 있는 충돌을 반복하고 있는 것뿐이다. 결과를 좌우하고 있는 것은 육지의 강한 것과 약한 것뿐이다.
이것은 꼭 여러 힘의 깊숙한 내면의 세계(복수)에서 우리들에 부딪히고, 우리들 자신의 강한 것과 약한 것에 따라서 그 파도에 응하는 그와 같은 "카르마"의 법칙이 행하여지는 것이다.
[그림 79]의 안에 "카르마"의 법칙이 우리들에게 기회(복수)를 가져다주는 것은 그 충동이 언제나 행동을 향하고 있고, 행동이 실지로 일어날 때까지 "카르마"는 저울질되어 있지 않고 있는데, 특히 주목해 주어야 한다. 만약 우리들이 고통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 직면하여 자신이 그 사람에 대하여 친절한 기분이 되어있는 것을 느꼈다고 해서 기뻐해도 큰 가치는 없다. 그 고뇌가 제거되도록 행동하여야 한다. 만약 우리들의 "카르마"가 고통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라도, 단순히 그것을 견딘다만으로는 결코 부채를 변제하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그 고뇌의 상태를 될 수 있는 대로 분석해서 그 결과를 알아내어야 한다. 그의 고통에는 우리들 이상의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한층 끌어당기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들만이 그 사람들에 필요한 동정과 이해를 가지고, 그 사람들을 도와줄 수가 있을는지 모른다. 혹은, 우리들의 인생사에 너무 순수하기 때문에 지금, 안쪽의 세계(복수)의 침묵으로 대면(對面)하고, 바라거나 바라지 않거나, 보다 높은 사물에 대하여 명상하고, 그래서 육체에 대한 혼의 연결이 강화될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들의 고뇌의 배후에는 이와 같이되는 많은 원인이 있는 것이다. 안을 살펴서 원인을 알고 재화액난의 바다에 대하여 싸우고 반항하는 것으로 그것을 무찔러 없앤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들은 "카르마"의 채무를 이행하고 균형을 회복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하여 가시(可視), 불가시(不可視)의 전 자연이 오늘도 그리고 언제나 영원과 연결되어 진화해 가는 생명의 거대한 일대 체계를 구성하고, 그 인과(因果)의 기본법칙에 의하여, 모든 부분이 다른 모든 부분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운명은 우연한 벌은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틀림없이 뿌린 대로 정확히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거룩한 경륜은 단순하며, 길은 밝은 것이다. 시간이라 말하는 말소불능의 기록 위에 우리들의 미래의 달성(복수)이야기를 쓰는 기록은 그 펜이 우리들의 손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제6강 착각의 극복
영혼의 눈이 뜨이기 위해서는 먼저 내면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며, 육체의 눈은 모든 착각을 볼 수 없게 되어야 하도다 ... 영혼이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찰흙으로 빚으려 하는 도자기의 형상이 먼저 도공의 정신과 일체가 되듯이, 영혼은 먼저 침묵의 음성과 일체가 되어야 하도다.
H.P. 블라바츠키 침묵의 소리 중에서
제1장 해탈(解脫)을 바라보고
어떤 문제라도 그 해결을 향해서 얻을 수 있는 제일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름은 그 문제를 확실히 또한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바른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일 수가 있다. 인간은 각 세대(世代)마다 독특한 곤란을 안고, 그것과 직면해 왔으며, 아마 이후에도 많은 세월에 걸쳐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전이 과거 그 해결에 고생한 인류를 괴롭게 한 이상으로 거기에 인류가 살아남아서 위험한 순간까지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복수)에 의하여 위협 당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싶으면, 그 다음에 2개의 문제가 생겨나고, 더욱이 매서운 강한 또 집요한 욕구가(복수) 인류의 재간에 달라 붙어서 그 해결을 강압해오고 있다. 또 긴급한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의 수도 불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의 문제는 기본적인 것이고, 또한 전세계에 걸쳐있는 것이다. 거기에 또 이러한 문제는 표면적이거나, 지방적인 것이 아니고, 국제적인 정치관계나 경제관계의 무대 위에 뿐만 아니고, 인간 안에 즉 인간의 정심(精心) 및 육체의 구성 안에도 있는 것이다.
세계 안에 병원에, 육체에 병든 사람이 충만하고, 형무소는 도덕적으로 병든 사람들로 들끓고, 정신병원은 정신이나 감정이 병든 사람들로 꽉 차서 넘친다. 전염병은 지금은 나라에서 나라로 넘어 하나의 전염병을 극복했는가 하면, 두 번째의 것은 거기에 전자보보다 더 악성의 전염병이 생긴다.
일시적인 유화제는 인간의 부조(不調)와 국제간의 부조를 고쳐주고, 교정하는데 실패했다고 하는 것이 거짓이 없는 명백한 실정이다. 부분적인 답으로서는 불충분하다. 치료제는 근본적인 원인까지 깊이 해내지 못한다. 고통은 반감하지만, 근치(根治)되지 않는다. 억만장자가 생기고 그만큼 가난한 사람이 생기면 그 나라는 번영된 것이 아니다. 인류의 고뇌의 밑바닥에 있는 진정한 원인의 추궁을 당장 시작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사태가 더 이상 나빠지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비극을 불러들일 수 있다. 그것에 어떤 과지 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본적 생각방법(복수)뿐이다. 악의 그 근원을 끊어야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지학의 가르침에 의한 하나의 기본적인 생각방법을 말하겠다. 즉, 생의 모든 문제는 역사의 시작에 있어서 인류 앞에 씌어진 3개의 착각에서 생기는 것을, 그것은 태양계 안에서는 전지, 전능, 편재(偏在)하신 태양사신(司神)이 그 자신 위에 3개의 제약이 가하여지고, 그것이 3개의 최초의 착각 즉, ① 공간, 즉 자원(복수)으로서 공간 안에 물체가 존재한다는 것, ② 생기는 일(복수)이 계속 생김으로서 시간과, ③ 개개 따로 따로의 것처럼 존재하므로서의 아(我) 이것으로 비추어져 왔다.
우리들은 이 중에서 ①쪽은 과학이나, 지식의 발달에 의하여 극복해 가고 있고, 그 덕택에 물질세계를 알고, 육체의 성질을 알게 되었다. ②쪽은 사고력, 직감, 영지의 힘을 발달시킴으로써 극복해 가고 있고, 바른 삶을 추진한다. 만족이 가는 철학을 형성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이 ③쪽이며, 아는 다른 아들과는 별개의 것이다라고 하는 생각방법이 넓게 퍼져서 모든 생명은 유일대생명(唯一大生命)속에서의 "하나"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극복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들의 이와 같은 단순한 사실과 의미도 거기에서 파생하는 당연한 귀결전체(歸結全體)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면, 이러한 3개의 착각을 우리들은 모든 곤란이나, 갈등의 뿌리가 되어있고, 우리들은 이것들을 차츰 극복해 갈수록 조그만 곤란이나 갈등은 점점 사라져 갈 것이다. "예수"의 말을 인용하면 "그대들은 우선 신의 나라에 그의 의(義)를 구하라, 그렇게 되면 그대들 편에 서리라"(마태 6장 33절)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기본적 문제를 다루어 보자. 그 외의 문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착각은 바른 지식에 의하여서만이 국복되기 때문이다. 육체의 고통을 자기최면으로 부정하고, 아픔을 정지시켜도, 육체의 환부가 고쳐지는 것은 아니다. 빈곤(貧困)을 자선이란 외투(外套)로 덮어보아도 경제적 병고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법률을 위반한 범인을 감옥에 집어넣어도 그 사람들의 도덕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전체의 국민을 수소폭탄으로 지구상에서 말살시키는 것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갔어도, 항구평화를 보증하는 모든 국민에게 공정하게 하는 전세계를 행복으로 한 발짝이라도 가깝게 할 수는 없다. 모든 잘못된 일, 무너져 가는 사회의 벽들을 여러 곳 땜질하여 모아도 인류의 병환이 고쳐질 수는 없는 것이다. 먼저 건축물의 청사진을 잘 조사하여, 기초와 상부구조의 모든 것을 걸쳐서 잘 검사하고, 원인적인 잘못된 곳을 완전 수리함으로써 비로소 그 건물의 붕괴에서 구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지나서, 서쪽으로 진다고 하는 착각에서 우리들이 이제 해방되었다고 말해보아도, 우리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많은 착각에 또 다른 착각 하나가 더해지는 것에 불과하다. 해방 즉 해탈은 우리들이 사실에 대하여 배우고,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들이 획득한 지식의 빛 속에서만 처음으로 착각의 착각다운 연유가 확실히 밝혀지는 것이다. 인생체험을 쌓는 것을 거부하고, 산 속에 은둔해서 인생에 필경(畢竟)하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라고, 이론적 신념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착각이 불식은 되지 않고 새로운 것, 말하자면 좀더 미묘한 착각과 마주앉게되는, 바꿔지는 것 뿐이다.
우리들의 인생이 직면하고, 사람을 미궁으로 넣어두는 매력과 틀리게 보이게 하는 속에 차려져서 있으면서, 그 있는 그대로의 꼴을 알아내고 간파해서, 그 실재의 것과 닮은 것을 알아내고, 보기와는 틀린다고, 부정하는 것으로 학습을 거듭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우리들은 착각 미망의 극복자로 서게 되고, 진정한 해탈의 감미를 진정으로 감각으로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앞장에서 우리들은 약간의 사실을 검토해 왔지만, 그것을 당면의 문제 즉 착각 극복법의 연구에 적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이란 서로 다른 현상이 아니고, 모든 형이하(形而下)에서 생겨나는 일 안에 같이 관계하고 있는 것으로서는, 과학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는 제3의 요인이 항상 관계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오늘날까지는 아직 충분히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제3의 요인이라고 하는 것은 즉 [아]인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인식하게 되는 것은 그렇게 먼 훗날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지식의 모두가 여러 가지 현상이 인간의 의식에 영향하고 있는 한에서는, 그런 현상이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과 감관(感官)에 의한 지각이 완전(完全)에는 상당히 먼 것이다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형이하(형으로 된 것)에서 생긴 일에 있어서는 우리들의 지식들도 또한 그와 같이 불완전한 것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그리고 또 많은 과학자들이 깨달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불완전(不完全)인 이상 그것은 착각이다. 즉 그것은 진짜가 아닌데, 진짜처럼 보고 있는, 어느 것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의 목적은 이성과 직관을 행사하여 지식을 획득하고, 뚜렷이 보게 됨으로써 시간과 공간과 아라고 말하는 착각을 극복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림 80]을 보자.
잠시동안을 S. F(과학소설)작가들이 되어 보기로 하자.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에는 사실을 따르는 것으로 한다. 그림의 최하 쪽에는 알기 쉽게 하기 위하여, 지구가 3개의 위치에 놓여져 있다. 우상 쪽에는 태양이 있다. 그러면, 1995년에 한대의 비행기가 시속 100마일의 순항속도로서 지구를 이륙하였다. 목적지는 93,000,000마일 저쪽의 태양이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조종사는 107년간 날으는 것을 계속하여야 한다. 도착하였을 때는 2102년이다.
그러므로 여행으로서는, 태양은 지구에서 107년의 항공여행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순항속도가 600마일을 내는 제트기로 같은 시각에 지구를 출발하였다면, 편도(片道) 불과 18년으로 2013년에는 태양에 도착할 것이다. 비행에 소요된 시간이 짧아질수록 태양은 그만큼 우리들에 가까이 보인다. 그러나, 그 제트기보다도 훨씬 빠른 것이 있다. 빛인 것이다. 빛은 일초동안에 18만 6천마일이라는 놀라운 스피드로서 공간을 통과한다. 그러므로 광선은 지구와 태양과의 사이를 8분만에 비행한다.
즉, 광선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태양에서 지구까지 불과 8분간의 거리라는 계산이 된다. 시간 공간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은 풀어볼 수 없을 정도로 어기고 썩어져가고 있으며, 여행속도는 빨라져 있으므로 우리들의 세계는 차츰 조그맣게 되어 수세기 전에는 미증유(未曾有)라고 생각하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보통으로 생각한다. 이제는 제트기로서 "런던"에서 "뉴욕"까지 날고, "뉴욕"에 도착하여 보면, 시계의 바늘은 런던에서의 출발시간보다 빠른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공간과 시간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의식에 착각이란 외투를 덮어씌운다. 빛은 초속 18만 6천 마일을 날며, 태양에서 지구에 도달하는데 8분간 걸린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태양의 진정한 모습을 결코 볼 수는 없으며, 8분전의 모습밖에는 보지 못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면 이번에는 별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면, 이 착각은 더욱 현저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들은 지금 천공을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하여 본다. 그러면 몇천의 반짝이는 빛의 점들이 보인다. 그 하나 하나가 한 개의 태양인 것이다. 천공에서 가장 밝은 천랑성이라 말하는 "시리우스"를 선출하여 보았다. 우리들에게서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는 별의 하나이고, 불과 50,000,000,000,000마일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 정도의 위치는 천문학자들에게는 대단한 것이 못된다. 이 공간을 지나는 것은 9광년의 세월이 걸린다. 우리들의 눈에 들어오는 광선은 벌써 9년전에 "시리우스(Sirius)"별에서 출발한 빛으로 그때부터 계속 공간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시리우스"의 별은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장소에는 없다는 것이고, 그 별은 몇백 마일을 이동한 지점에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림 81의 A]의 검은 실선은 천공에 있어서 "시리우스"별이 보이는 점을 표시하고, 점선은 진짜 있는 장소를 표시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의 주위에 보이는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지금 보고 있는 별은 묵은 별이거나 보고 있는 장소에는 위치를 하고 있지 않다. 어느 별이고, 모두가 보이는 위치에서 훨씬 멀리 이동한 다른 위치에 이동한 상태에 있는 것이고, 그의 현재 위치는 우리들에게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천공상의 모두가 착각인 것이다. 보이는 것은 진실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속에야말로 진실이 있다는 것을 고쳐서 알게 될 것이다.
더욱이 또한 거리가 너무나 멀리 떨어져 그 빛이 우리들에게 도달하는데, 너무도 긴 세월을 보내서 최초의 원시인이 땅위에서 걷기 시작할 훨씬 이전에 그 별은 소멸하여 버린 것인데, 우리들은 그것을 지금 보고 있으며, 앞으로 몇 천년 후에 겨우 그 별이 소멸된 것을 이 땅의 사람들이 알게 된다고 하는 별들이나, 성운이 많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또 역으로 말하면 별들이나 성운이 우주의 공간 안에서 이미 발생하여 존재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알리는 빛은 우리들에게 알려주려고 날고 있으나, 도달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세월이 지나고 그때서야 우리들이 알게 되는 것이 무수히 많은 것이다.
[그림 81의 B]는 이 사실의 적용방법을 표현한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놀라울 정도로 큰 거품(泡)을 만들어서 그것을 지구표면에서 6조 마일 떨어진 저쪽 창공에 있게해서 거기에 우리들이 있다고 하고, 또 우리들의 시력이 완전하다고 가정해서, 거기서 지구를 내려다본다면, 펼쳐지고 있는 지구상에서의 생겨나는 일들은 일년전의 일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관찰을 가능케 하는 지구상의 연력(年歷)이 1990년이라면, 상공의 우리들에게는 1989년이란 것이 된다. 12조마일 저쪽에서는 1988년이란 것이 된다. 그 해에 시작되는 지구상의 생겨나는 일이 우리들의 눈앞에 생겨나는 것이므로 이하는 꼭 같은 것이 된다. 우리들이 지구에서 일광년씩 멀리가면, 연력(年歷)은 일년 후로 되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만약에, 우리들이 마법을 써서 일천광년 공간으로 이동하여, 강력한 배율(倍率)의 망원경을 손에 넣어서 바라본다면, 우리들은 십세기 이전(以前)의 지구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소용돌이, 황막한 원시의 지구모습이나, 권모술수로 보내면서 부와 권력을 수중에 넣어보려고 하는 야심가들의 싸움이 우리들 눈앞에 다시 재연(再演)될 것이다.
이상의 생각을 더욱 확장해 가면, 막막한 공간의 어느 저쪽에는 지구상의 모든 지대의 모든 생겨난 일의 기록이 있을 것이다. 이 이론을 빌려 말한다면, 우리들의 머리 속의 혼란을 더욱 완벽에 가까운 것으로 하기 위하여, 또 한번 가정을 하여 보자.
만약에 우리들이 광속을 넘어선 스피드로서 외 우주로 향하여 이동한다고 하면, 지상에서 모든 일어나는 일들이 역으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즉 결과가 원인에 앞서 행하여진다는 것이다. 사람은 뒤쪽으로 걷고, 태양은 서쪽에서 올라와서 동쪽으로 지고, 비는 위로 내리고, 석양이 차츰 낮으로 되고, 아침이 되어 그리고 전날의 밤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가면 우리들의 시간과 공간이라 말하는 신비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시간과 공간이라 말하는 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이 더 확실하게 밝아지고, 시간과 공간이라 말하는 현상(現像)을 이성(理性)이라고 하는 빛 속에서 해석하여야 한다는 필요가 점점 커질 것이다.
지금부터 이 두개의 것을 따로따로 분리해서 분석하여 보자. 공간에는 3개의 차원(次元)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인 것이 명백하다. 공간에는 차원(次元)같은 것은 없다. 차원이란 말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차원이란 것은 크기를 측정하기 위해 편의상 인간이 발달시킨 수학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그림 82의 C]는 차원이라 말하는 수학개념을 어느 정도 그려본 것이다. [그림 82의 A]는 점이 펼쳐져서 선(1차원)이 되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선(線)은 선 자체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방향으로 펼쳐져 [그림 82의 B]의 면(面)이 된다. 면(面)이 그 사신이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방향으로 펼쳐져 입체[그림 82의 C] 즉 3차원이 된다. 그러나 4개 그것보다 더 위의 차원이 있고, 입체는 그 자체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방향으로 펼쳐져서 4차원체가 되고, 많은 현저한 성질을 띄우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의 사람들은 차원을 헤아리기 위하여 만든 최초의 조건자체가 3개 이상을 나누는 것이 성립불능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圓)의 3등분했을 때는 그와 꼭같은 제한 상태가 생기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그림 82의 D]. 이 경우 원에는 3분의 3 이상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처음에 그와 같은 제한을 하였기 때문이다. 또 차원은 3개 이상은 없다. 차원을 헤아리는 방법자체의 성질 그것이 그와 같은 제한을 해 버린 것이다. 이 건(件)에 대하여서는 다음에 다시 차원인 것들의 착각성에 대하여 논하기로 하자.
[그림 83]을 보면 큰 것에 대한 착각, 공간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착각에 자신도 모르게 주의를 끌게 한다. 우리들은 벼룩이 작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무한으로 작다고 말해도 좋은 원자에 비하면, 그것은 대단히 큰 것이다. 그러나 풍선기구에 비하면 벼룩은 작다. 풍선기구는 큰 것이다. 그 풍선도 공간에 떠있는 거대한 물체인 지구에 비하면 대단히 작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우리들의 큰 것에 대한 개념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지구일지라도 목성에 비하면 매우 작은 것이다. 이번에는 목성을 태양에 비하면 작은 것이고, 태양은 지구크기의 혹성을 100만개 수용할 수가 있다. 우리들에게는 이와 같이 큰 태양을 거대하고 장엄한 것이지만 큰 붉은 별 "안타레스(Antares ; 전갈좌의 주성(主星), 적색의 1등성)에서 보면, 조그만 하게 뭉쳐있는 것이다. 거의 보잘 것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안타레스"는 우리들의 태양계의 일대중심인 태양의 2700만 배나 되고, 태양을 "안타레스" 옆에다 두면, 너무 작아서 잘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에 작다거나 크다거나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크다, 작다는 의식적으로 또는 잠재의식 속에 다른 것과 비교하고 있는 의식 안에 만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코끼리에 비하면 고양이는 작다. 그러나 모기에 대해서는 거대한 것이다. 여기서 공간과 시간에 관한 착각을 약간 모아서 비교하여 맞추어 좀더 명백히 해보자.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이것을 심리적으로, 또한 수학적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비교하기 위하여 의식 안에서 만들어져낸 들린 다른 상태를 의미하는데 불과하다는 것은 지금까지 보아온 그대로이다. 크다, 작다에는 아무런 실재성은 없다. 같은 것이면서 똑같이 큰 것이 되기도 하고, 작은 것이 되기도 한다. "물건"의 수학적인 측정은 길이와 폭과 두께로서 계산된다. 수학적 크기는 작은 것, 큰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잡아 당겨서 빠뜨리면 선(線)이 되는 것과 같이 선은 면(面)을 면은 입방(立方)체 같은 삼차원체를 생기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은 잘 주의해야 할 것이다. 선(一次元) 면(二次元) 입방체(立方體)는 모두가 점(点)부터 시작하고, 점에는 위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점에는 퍼져가는 것이나 차원 같은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점이란 하나의 생각하는 방법(아이디어)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물건(thing)이 아니다. 그것은 비물(非物, nothing)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차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가 희박한 것이다. 왜냐하면 0(zero)에게 최고수를 곱하여도, 답은 여전히 0(zero)이기 때문이다. 수학상의 점은, 어느 방향으로도 뻗쳐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점은 위치(位置)라고 말하는 생각(아이디어)뿐이고, 큰 정도 말하자면 차원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빼서 뻗쳐지는 물(物)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길이(長) 두께(厚) 폭(幅)이란, 우주 창조의 새벽에, 대자연의 기본적 삼위일체의 반영(反映)으로 생겨난 질료의 3개 특질 혹은 특징(徵)인 것이다. 그래서, 삼차원 이상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신장과 방향에 있어서 무수의 조합(組合)은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아무튼 만들 수 있는 최소의 점은, 어떠한 방향으로도 잡아당겨서 뻗쳐볼 수가 있는 물건으로서 존재하겠다면, 이미 3차원 안에 존재하고 있어야 하는 이치가 된다. 쉽게 설명하면, 이 문장 끝의 구점(句点)은, 삼차원 안에 존재한 것이다. 이것은 잉크의 길이 두께(厚)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 선(線)이란 삼차원 안에 물질적으로 창조(創造)된 것이 아니고서는, 하나의 생각(아이디어)에 불과하다. 단순히 삼차원 중에서 하나가 너무 호장(護張)되어 있는 것 뿐이다. 면(面) 역시 삼차원 안에 표현되지 않는 한(限)(이런 경우 두개의 차원(二次元)이 세 개째의 차원보다 큰 것이다) 역시 관념(觀念)의 세계인 것이다. 세 개의 차원(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은 모든 현상(現象)으로서의 존재에 필요한 것이다. "씨크릿 독트린(秘敎)" 제1권 271p 안에 H. P 블라바츠키 여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들이 지금 생각하며 연구해가는 자연의 발달 행로는 2, 3, 4차원 공간의 속성(屬性)에 관하여 억측하는 것을 확신하게 해주고 동시에 그것을 믿(信)느냐를 묻는 것이 될 것이다 ……. 맨 처음에 공간 그것 자신을 어느 방향에서도 계측(計測)할 수 있는 것이다고 한 천박한 불합리성은 별로 큰 문제가 안된다. 공간은 어느 방향에서도 계측가능하다고 하는 낯익은 문구는 공간에 있어서 질료의 제 4차원이라 말하는 얄미운 어구(語句)의 약어에 불과하다." 그러나 앞에서의 부언(附言)으로서는 그것이 확실한 표현이 되지 못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진화가 되어 나가는 동안,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특종을 만나게 되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즐겨 쓰고 있는 것은, 실제로 세 개의 차원보다 그 수를 많이쓴다. …… 이렇게 해서, 어떤 대담한 사상가들은 물질이 물질을 통과하는 것과 무한(無限)의 긴 끈을 몇 개 맺은 눈이 생긴다. (심령현상-역주)고 설명하기 위해 제 4차원이라는 것을 빌어 쓰는데, 그의 사고(思考)의 결함은 물질의 여섯번째의 특징인 것이다. 세 개의 차원은 실은 물질의 유일의 속성 내지 특징ㅡ말하자면, 펼쳐가는 것ㅡ에 속한다. 그렇지만 일반상식으로는, 어떤 상태에 있는 물건에는 길이, 폭, 두께 같은 세 개 차원의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서 생각(아이디어)에 반감(反感)을 가진다 ……. 그렇지만, 이와 같이 말하는 쪽은 해가 뜬다(日出), 해가진다는 낯익은 일을 말하는 것보다 훨씬 부정확하다. [그림 85의 D]에는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년대시간(年代時間) 즉 물리시간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월(月)시간, 년(年)을 계(計)하는 수단이다. 년대시간은 수학상의 크기와 같고, 인간이 보내는 장치로 계산한다. 신문에 보도된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리면, "물리시간은 사태(事態)의 년대기적(記的) 순서를 아는 것 뿐이고, 과거, 현재, 미래 모두의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한편, 심리시간[그림 85의 B]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개로 나누어져 심리적인 크기대로 꼭같이, 인간의 착각인 것이다 하는 증거는, 우리들이 이미 약간씩 보아왔다. 이와 같은 것은, 시간을 연속으로 해서 생각했을 때, 시간에도 해당하는 것을 이번에는 보아 보자. 우리들이 알고 있는 과거는 지나가버렸다. 우리들이 아는 미래라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유일의 실재(實在)로서 우리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현재뿐이다. 사실, 우리들의 경험은 모두 현재안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변화해가는 환경속에서 나아가고 있으니, 현재는 우리들과 같이 있다. 그러나, 현재를 시간으로 해서 계산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계측한 시간을 현재에 맞추어 해당시킬 수가 없다. 현재란, 실재에 있어서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고 있는 미래와의 사이에 임시로 설치한 분할선에 불과하다. 그 자체에는 아무런 지속(持續)이란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점(点)과 같이 현재라고 말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 역설적(逆說的)이지만, 그(현재)는 결코 우리들에서 떨어져 갈 수 없고, 우리들이 시간과 직접으로 접촉해내는 유일의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들이 과거를 현재안으로 불러옴으로서, 이것만이 과거를 알아낼 수가 있고, 미래는 지금 예측하는 것으로만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씨크릿 독트린(秘敎)"에 인용해보면 H. P 블라바츠키 여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제1권 68-69p)
"시간은 우리들이 영원의 지속안으로 여행해갈때 우리들의 의식 상태(복수)의 계속에 의하여 생기는 착각인 것이다. 착각을 생기게 하는 뿌리가 되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으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 현재한 영원한 지속안에, 우리들이 미래라고 말하는 것들, 과거라고 부르는 것들에서 분할하는 한 개의 수학적 선(線)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편재해 있는 것을 가지고 공간이라 말하는 개념은 이미 공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점(点)위에 세워져 있고, 생겨나는 일의 연속으로서의 시간이라 말하는 개념은 시간 안에 존재해 있지 않다. 현재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으로 우리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분석하고, 이성을 활용함으로써, 이 두개의 개념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그 속에 살고 있는 우주에 관한 지식을 좀더 획득해가면서, 우리들은 공간의 차원이라 말하는 제약(制約)을 갖지 않고 무한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간다. 우리들이 이런 생(生)철학을 확대해서, 대 경륜의 미(美)와 신비가 점점 계시(啓示)됨으로서, 우리들은 시간을 생겨난 일의 연속으로서가 아니고, 영원이라고 이해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제 3의, 그리고 최대의 착각, 즉 따로따로 개개인의 자아라고 말하는 착각과 맞붙여 보아야 하겠다.
공간을 차원으로 하는 착각은 지식을 얻어서 극복할 수가 있다. 시간을 연속이라 하는 착각은 이성(理性)을 활용함으로서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자아(自我)를 다른 자아(肉體)와 분리(分離)해서 다른 것으로 하는 착각의 극복(克服)은 조용한 명상등으로 속세의 여러 일들에서 마음을 쓰지 않고, 자신의 직관(直觀)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않고 자유롭게 내면의 영(靈)과 접촉함으로서 비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과학은 자아에 관해서 귀를 기울여야할 가치(價値)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있다. 자아라는 것은,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군의 특수한 조합에서 생긴 한 다발의 기능과 속성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 전통적인 과학의 견해로 되어있다. 바꾸어 말하면, 전체는 그의 부분의 합계보다도 크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신지학으로서는 말할 것이 너무 많이 있음으로, 이 건에 관해서는 신지학의 가르침의 본질적인 특징은 도표 86에 그려져 있다. 그림의 바깥쪽 검은 부분의 삼각형은 육체 인간의 "샘플"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은 자기자신의 육체에 한정해 있으므로 다른 자아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의식이 차츰 높은 "레벨"로 올라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져서 끝내 "붓디 레벨"에 이르면, 신의 의식의 레벨에서의 기능을 할 수가 있고, 다른 사람 전체와 서로 조화된 접촉을 하게되고, 더욱 나아가 태양사신(司神)의 의식안으로 모든 것들과 유합해서, 거기서는 자아는 일체(一體)라고 말하는 정상(正像)이 펼쳐진다. 지금와서는 편역자(遍歷者, 求道者)는 마음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와 나의 부(父)와는 일체(一體)이다라는, 이와 같은 숭고한 경지는, 보통사람에게 있어서는 저쪽 먼 하늘에 있으며,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상의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일단 받아들여도, 인생의 현실의 욕구(복수)와 매일매일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려운 문제(복수)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인간이 자승자박의 사슬로부터 해방할려면 획득해야할 기초적 지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앞으로도 권력을, 토지(土地를, 재화(財貨)를 내 것으로 하기 위해, 여전히 고역을 치를 것이다. 그러한 끝에는 겨우 그와 같은 것이 허망한 것이고, 물질세계가 가로등 속으로 달리는 불빛 같은 환영(幻影)이고, 보기만 번질한 구경거리고, 거기에 한가지 물건도 자신의 것으로 할 수가 없다 하는 기본적 사물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그는 아마 획득할 수 있는 것의 유일한 것은 언제나 접근하면 맞아주는 내면의 성격과 힘 뿐일 것이다. 시간은 실재의 에센스(精髓)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생기는 연속은 보기와는 틀리고, 인간은 구원(久遠)한 것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같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인간을 개인적으로는 주인과 소사, 고용자와 피고용자, 지식인이라는 것으로서(집단적으로는 국민과 국민 사이에) 전자가 후자를 거느리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인간은, 자아가 착각인 것을, 그리고 모든 신의 의식속에서는 영적으로는 일체인 것을 알게 될 때까지는 여전히 개(個) 이(耳)를 영화한 다른 모든 이(복수)의 상위(上位)에 두고, 자기 자신의 선업(복수)가지고 자기 자신을 다른 개아(個我)보다 훌륭하다고 자신이 뽐(誇)내고 자랑할 것이다.
제2장 완성을 이루는 3가지의 길
19세기 후기의 수십 년에 과학이 이루어 놓은 장족의 진보에 관하여 이미 이 책에서 말한 바 있다. 이때, 수세기에 걸쳐서 알려진 물질세계가 돌연 사라지고 훨씬 크고, 보다 신비한 새로운 세계가 이것을 바꾸어 나왔다. 이 신세계는 자기자신의 모양 꼴을 몇 개쯤 계시(, 복수)하여 주었으며, 더불어 그 이상의 계시를 하여 주었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 덮여져있는 보자기를 벗기는데 공헌한 사람들이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그러한 것이 더욱더 위대한 계시(啓示)에의 실을 열었고, 그 계시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더욱 높은 영역과 죽음이란 변화의 저쪽에 있는 우리들의 존재의 상태를 유용(有用)한 지식으로서 찾아온 것이다.
심리학은 이제야 초심리학, 소위 심령체험의 과학적 연구의 성장을 신중하게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이 감각에 의한 지각의 작용을 관찰하고, 분석하면서 초심리학은 똑같이 초감각적 지각 즉, 통상의 지각경로를 거치지 않고, "마인드"를 찾아다 주는 지식을 연구하고 있다. 심리학자가 진지하게 주목하는 것은 변함없이 거부하고 있는 이상현상(異常現象)을 초심리 학자들은 한없는 인내와 집념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가령 "싸이코기네시스(Psychokinesis, 마인드에 의한 물질에의 직접영향)", "텔레기네시스(Telekinesis, 영매의 심령현상에 의한 물체를 이동시키는 것)", 상념전달(텔레파시, Telepathy), 예지(豫知), 과거지(過去知), "싸이코메트리(Psychometry, 정신측정학, 물체에 붙어있는 여러 정보의 영시(靈視))", 그 외에 관한 현상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에서 인간생활에 관하여 새로운 전망이 열려져 가고 있으며, 그것을 실험이나, 수학적 방법에 의하여 증명할 수가 있게 되고, 미래의 신세계에 커다란 공헌을 할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미지의 세계의 연구는 초심리학 보다는 신지학의 편이 훨씬 깊이 들어가면서 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연구의 성질상으로 통계나 자격(資格)으로 호소하는 방법으로 증명하는 것이 될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들은 기복이 심한 비탈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올라가자면 새로운 교통수단을 써야하는 것이다. 영감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마음을 새로운 높이(복수)에 올라서서 영적 시각에 눈을 뜨게 해야하는 것이다. 이성은 직감으로 발달해서 지식은 확대해져서 영지(英智)가 되고, 단순한 감성(感性)은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둘레소리에는 보다 작게 내서, 조용히 유(幽)에서 오는 소리는 보다 많이 크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생의 모든 목적은 미망(迷妄)이나, 착각의 극복에 있으며, 미망이나 착각을 초극(超克)으로 해냄으로서, 실재(實在)를 충분히 또한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도록 추진시키기 위해, 필자는 약간의 노력을 이 책 안에 쏟아 부었다.
영인 우리들은 물질이란 착각 속에 필연적으로 빠지게 됨으로, 그래야만 물질 자체의 허상의 겉치례에 매료되는 것을 극복해 냄으로서, 자기자신의 실상(實相)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원래 불사(不死)인 우리들은 죽음이라는 착각에 봉착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런 속임수의 가면(假面)을 벗어 던질 수 있어야 자신이 불사(不死)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원래 죄가 없는 자들인 우리들은, 죄(罪)와 치(恥) 또는 비행(非行)안으로 던져져서, 그 모든 것에서 초극(超克)함으로서 비로소 자신이 영인(靈人)인 것을 알게 된다. 원래 무시간(無時間)인 우리들은, 영원을 알게 되려면, 신간의 명령에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된다. 원래 신(神)과 일체(一體)인 우리들은, 신과의 일체임을 자각(自覺)해 내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자기자신을 도달시켜 보려고 한다면, 따로따로 서로 다른 존재라는 착각 속으로 들어가서 체험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의 화육(化肉)의 신비에 관한 사실을 배우고, 우리들의 실상(實相), 즉 육(肉)속에 화생(化生)한 신(神)인 것을,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힘으로 깨닫고, 우리들이 이승의 노예로 만들고 있는 여러 가지의 힘을 초극(超克)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물(事物)이 실은 허가불실(虛假不實)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가 미궁(迷宮)이었다. 그것들에 묶여 있었던 의지였다. 이 지상(이승)에 있어서 우리들이 유(留)하는 목적은, 해탈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미궁, 이와 같은 착각, 앞에서 말했지만, 3개의 주된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그러므로 세계와 인간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동안에, 3개의 주된 학습 코스가 자연스럽게 발달해서, 착각이 생겨나게 한 사슬에서 벗어나서 해탈을 얻어내는 것은 놀라운 것이 되지 못한다. 그 3개의 코스라는 것은,
(1) 과학 : 이것에 의하여 인간은 지식을 발달시키고, 물질이라고 말하는 착각에서의 해탈을 얻는다.
(2) 철학 : 이것에 의하여 인간은 사고(思考)하는 힘을 발달시켜서, 끝내 시간이라는 착각과 생(生)의 유위전변(有爲轉變)의 사슬에서 벗어나와 해탈의 길로 인도된다.
(3) 종교) : 이것에 의하여 인간은 그의 귀의(歸依), 헌신(獻身)의 성질을 발달시켜서, 끝내는 따로따로 서로 다른 존재이다라는 착각에서 극복할 수가 있고, 모든 것에 존재해 있는 것들의 생명은, 실은 하나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애니 베산트(Dr. Annie Besant)박사는 그의 저서 세 개의 길(The Three Paths)안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1-2P)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자들은 3개의 길을 추구하여 왔다. 사람은 그 중에 어느 것이든 간에 추구할 수가 있으며, 추구함으로서 해탈을 얻어낼 수가 있다. 길은 3가지가 있다. 그러나 어느 의미에서는 3개는 하나이다. 방법에서는 틀리고 있으나, 목적은 동일하다. 그의 외적조건(外的條件)은 다르지만, 모두 "하나인 아"로 인도되어간다. ··· 그것은 같은 골인으로 목표로 한다. 이 3가지의 길(인도철학에서는 3개의 "마르카 ; Marga") 즉, "카르마(Karma) 즉, 행위(行爲)의 길, 즈나나(Jnana) 즉 영지의 길, "박티(Bhakti)" 즉 귀의(歸依), 헌신(獻身)의 길 마지막 끝에서 융합(融合)하여, 하나가 되어 어느 것이든 간에 다른 특질을 갖게 되며 어느 것이고 말하자면, 다른 2개안에 들어가서, 3가지의 특징을 융합시켜서 하나가 된다. ··· 어느 길이거나 여행을 하면 좋다. 행위거나, 혹은 영지거나, 혹은 귀의, 헌신이거나 사람은 유일아(唯一我)를 희구하고 있는 것이고, 길을 구(求)하는 자는 확실하게, 반드시 유일아(唯一我)를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 모두는 아(我)의 하나였었고, 3가지의 길은 모두가 "골인"에서는 꼭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쓰여져 있는 내용에서, 고대와 현대를 연결한 것을 구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행위(行爲)를 위해 필요한 지식을 얻는 과학은 행위길(行爲道)에 이르고, 사고력과 직관을 발달시키는 철학은 지식도(知識道)에 인도되고, 종교는 안에 있는 것을 체험의 세계로 발전했을 때 귀의헌신도(歸依獻身道)로 인도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3가지의 길은 그저 외쪽(外面)에서만 배워서는 결코 해탈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자신의 안(內面)에 있는 체험이라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보통의 학도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을 훨씬 넘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높은 단계(복수)에 인도되어 거기에서 빛을 보게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림 86]을 보자. 이 그림이 제시하는 것에는 심원(深遠)한 것이나, 그 표현수법은 너무 빈약한 것이다. 거기에 말(언어)이란 것이 어느 정도의 묵은 사상, 바꾸어 말하면 족자를 자극시켜서 보다 더 깊은 이해로 향하도록 하는 사상을 전하는 정도 이상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평안하게 안정시켜 직관과 자재(自在)를 일하게 해서 안과 밖의 양쪽을 연구하는 것은 유익한 것이다. 진리의 탐구자는 여러 가지의 선입관을 마음에서 베어버리고 높은 차원의 사물에로 마음을 열어보면, 의식은 끊임없이 얽히고, 합해지기를 거듭하면서 속세사(俗世事)에서 해방되어, 설사 조금씩이지만, 확대되어지는 만큼 성장해서, 원래 사람들에게 주어진 제약(制約)(복수)으로 뒤돌아 가는 경우는 없어진다. 거기에 정숙한 장소를 얻게 된다면, 그때에는 직관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지금부터 안내해 가는 주제는 "마인드(識心)"의 높은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理性)의 벽을 넘는다. 이것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직관이 말하여 주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물질세계(복수)에 속하고, 의식의 개념층(槪念層)에도 속하지만 일반의 체험역(體驗域)을 넘어 있는 것이다." 태양계 안에는 진공(眞空)이란 것은 없으며, 태양계는 진화하여 가는 생명과 형체와의 일대괴(一大塊)라는 사실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자주 말한 적이 있다. 우리들의 혹성, 지구의 여러 종(種)의 질료층(質料層)사이에는 이와 비슷한 일체관계(一體關係)가 있다. 지구의 물질계, 아스트랄계, 멘탈계는 실상(實相)인 신성(神性)의 현현을 차츰 더 향상시켜 가는데 협력하면서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모든 발달정도에 따른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므로, 인간의 (능력으로서) 천재(天才)는 물질계에서부터 높은 차원의 세계(복수)에 옮겨져서도 계속되고, 각각의 세계에서의 그가 이렇게 활동한 징조를 남기는 것이 명확하다. 특히 아스트랄 세계에서는 훌륭한 학습 센터(복수)가 있고, 이승의 시대에서 생활은 동포의 교육과 향상에 몸바친 사람들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 사정(事情)은 내용 면에서 틀린 것이나, 전반적인 윤곽에는 같은 것이다. 학과는 틀리고, 또 초등교육의 필요가 있는 사람도 약간 있으나, 이 가르침은 인류 진화의 추진에 좀 더 공헌하는 사물에 관계하고 있다.
이승 시대에서 생의 진실을 가장 최고의 관심사로 하고 있던 사람들을 위해서 고등학문의 강좌가 있다. 여기에는 죽음후의 "아스트랄"계로 옮겨온 사람들에 대하여 또 거기에는 아주 진보해서 "아스트랄체"에서도 필요한 정도까지 발달했으며, 아직도 물질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들은, 육체의 수면 중에 이탈하여, 학습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심원한 수업이 행하여진다.
이와 같은 신비적인 학습 센터를 "H. P. 블라바츠키"는 그의 작은 저서「침묵의 소리」안에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124P-127P)
"오! 지쳐있는 도역자(道歷者)여, 3개의 누합(樓閤)에서 그대의 노고는 끝나는 대로 인도되리라. 오! "마라"(유혹의 차신)의 종복자요, 3루합, 3상태를 거쳐 제 4의 상태에 더 나아가, 거기서 7의 세계, 영원의 편안한 세계로 그대를 데리고 갈 것이다. 그대가 만약 그 이름을 알고 싶다면, 듣고서 깨달아라, 제1의 루합의 이름은 무지(無知, Avidya)이다. 그것은 그대가 빛을 보게 되는 루합, 그대가 살면서 또 죽지 않는 루합이다. 제2의 루합은 학습의 루합이다. 그 안에서는 그대의 혼(魂)은 생생한 꽃들을 보게 될 것이다. 제 3의 루합의 이름은 영지(英智)이다. 거기의 저쪽 변에는 "악사라"(Aksara) 즉, 불멸의 전지(全知)의 샘의 끝없는 파도는 펼쳐져 간다."
이상은 대단히 중요하며, 신비적인 요소가 많은 말이며, 그 진실을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것은 바른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바른 해석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것이 인류진화의 전 역사를 포함하는 것 이상, 큰 도상(圖像)의 일부분「절정(絶頂)부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진화의 역사의 말을 그림 설명정도 대강 복습하는 정도로 하자. 여기 3개의 루합의 가르침은 우리들의 건축물의 초석(礎石)으로 하자. 그렇게 하면 견인불굴(堅忍不屈)의 탐구자에게는 주어진 탐구의 길에서 도움이 되고, 수많은 신비 속으로 조금은 투입(投入)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음장의 기초가 된다.
제7강 진실을 바라본다
그대 자신이 곧 '길'이 되지 않고서는 그대는 '길'을 여행할 수 없느니라. 연꽃이 가슴을 열고 아침해를 마시듯, 그대 영혼으로 하여금 모든 고통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도록 할지어다. 고통받고 있는 자가 흘리는 고통의 눈물이 맹렬한 햇살에 의해 마르기 전에 그대가 직접 그 눈물 한방울 한방울이 그대의 마음에 떨어져 거기 머물러 있게 하고, 그 눈물의 원인이 된 고통이 없어지기 전에는 절대 그 눈물을 닦아내지 말지어다.
H.P. 블라바츠키 침묵의 소리 중에서
제1장 세 개의 루합(樓閤)
앞 장에서 말한 바 있는 침묵의 소리는 "H. P. 블라바츠키" 여사가 대단히 오래된 옛 원서에서 번역한 것이다. 그것은 동양의 신비학도들(비교들)이 몇 백년동안 쓰고 있는 금잠(金箴)의 서라고 하는 고서(古書)에서 발췌한 문구(文句)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기원(起源)이나 오래된 정도는 그만두고, 그 안에 넘쳐 흐르는 가르침의 그것에 가치가 있고, 오늘에도 진지한 학도가 있다면, 조용히 명상할 때 그러한 가르침에 관해서 심사숙고 해가면, 자신의 내면에서, 직감(直感)의 반응을 일으켜서 울려퍼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외의 방법으로 이 책에 참여해 보겠다는 것은 소득 없는 어리석은 짓이다. 또 앞에서 말한 세 개의 루합에서 말하고 있는 문장은, 이 책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큰 문언(文言)의 하나이고, 인간이 이승에서의 편역(遍歷)의 시작, 편역을 끝내고, 초인(超人)으로서의 진화가 시작할 때까지의 진화에 대한 하나의 열쇠를 쥐고 있다.
수년전, 스위스의 물리학자 "샤를 에두아르 기욤"은, 인간은 모든 현상(現象)을 자기자신의 관찰수준에서 생각하는 것이나, 만약 동일현상을 다른 수순에서 관찰한다고 하면, 아주 틀린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고 지적했다. 가령 우리들이 어떤 운동을 직선형(直線形)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직접체험에 관한 한(限)에서 만의 것이고, 말하자면, 지구(地球)에 관한 것에 한해서, 진실인 것이다. 태양계의 관점(觀点)에서 본다면, 그런 운동은 직선형은 아닌 것이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운동은 지축(地軸)을 중심으로 해서 회전(回轉)과 태양을 돌아가는 공전(公轉)과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한개(脚)의 의자(椅子)는 고정(固定)인 것이고, 어느 목적 때문에 만들어져, 또한 쓰고 있다. 그러나 현미경을 가지고 관찰 한다면 의자(椅子)는 아주 형(形)을 가지는 것이 없고 거기에 있는 것은 무노(無盧) 몇 억만의 분자와, 보이는 것은 허공으로 느끼는 대권역(大圈域)(복수)뿐일 것이다.
관찰 "레벨"를 더욱 아래로 내려서 보면,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달려들어오는 반짝이는 원자(原子)를 보면서, 우주에 의하여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이 둘러 쌓여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의 관점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이중에는 어느 것도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어느 쪽이고 전일(하나인 전체)의 부분이며, 전일은 그러한 한정된 방면의 어느 것보다도 더 위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3개의 류합도 몇 개의 "레벨"에서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 결과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관찰의 "레벨"에 따라서 틀리기 때문이다.
인류의 일반적 사람들은 생의 안에 경륜이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해서 인간은 신성이라는 사실과, 그의 내면의 신이 언제나 그의 뿌리와의 합일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화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는 활동,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은 이와 같은 보이지 않는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고(복수)설령 그 사실을 모른다고 부인해도 그것에 따르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있다.
그가 가는 길은 때로는 주춤거리며, 가야 할 길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어도 걸음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은 내면에서의 인도(引導)의 증거는 인간의 여러 가지의 노력사이에서 3개의 뚜렷한 학습경로가 되어 나온다. 이것을 인간 자신은 그 의미를 모르고 있지만, 3대 착각의 극복 하게끔 착실하게 인간을 인도해서 완전에 이르는 3개의 통로를 걸어가도록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3개의 통로란 것은 즉, 과학, 철학, 종교라 할 수 있다.
[그림 87]을 보자. 이 그림은 지금까지 연구해 왔던 생의 경륜의 윤곽을 표시하고 있다. 이 그림의 아래쪽에는 3개의 루합인 (1)무지 (2)학습 (3)영지의 루합이 그려져 있다.
이 3개의 루합은 전경륜을 상징하고 있다. 그림의 위쪽에는 현상(現象)에 있어서의 신성(神性)의 세 개 국면(局面)을 표시하고 있고, 세 국면이란 신성(神性)에 제약(制約)당하고 있는 꼴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① 질료(質料) ② 의식③ 영 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더해서 3개의 커다란 착각(錯覺), 다시 말해 (1) 공간(넓은 것으로) (2) 시간(계속적인 것으로) (3) 아(我, 자신만이 따로 존재)를 생각하도록끔 생기게 한다.
앞에서 말했지만 삶의 전부가 이러한 착각을 극복해야 하는 필요성을 지니고 그 둘레를 맴돌고 있는 것이 된다.
착각의 극복의 제1보(步)는 의식의 발달에 있다. '베산트'박사(신지학협회 제2대 회장)는 의식에는 3개의 위상(位相)이 있다고 했다. 즉 [그림 87]에 있는 것처럼 (1) 아가 비아를 자신이라고 생각을 각는다. (2) 아가 자기자신의 아인 것을 비아속에서 깨닫게 된다. (3) 아가 비아ㆍ육체에서 빠져 나온다고 설명하는 3개의 위상(位相)이다.
이와 같은 3개의 단계는 의식의 초기의 행위이고 그림 87을 살펴보면 3개의 누합(樓閤)과의 관계를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설명해 영(靈)은 아를 생(生)질료는 현상세계(現象世界)에서, 비아(非我)를 생겨나게 했다.(질료는 육체의 물질이 된다) 의식이 생겨나게끔할려면 아는 먼저 비아를 자신이라고 생각을 가지도록 함으로서 비로서 가능하다는 중요한 사실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 자신은 언제까지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또한 중요한 것이다. 그런 착각상태에 있는 동안에 아는 비아가 아니고 아란 것을 깨닫고 빠른 시간안에 비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상의 것은 모든 의식(意識)들의 행위의 걸어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한 이것은 인간의 진화 전체의 설명이기도 하다. 의식(意識)의 무수(無數)한 것들의 행위의 기록인 것이다. 처음 한때에는 인간들이 자신을 비아, 말하자면 물질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은 무지(無知)의 루합안에 있으며, 그는 자신을 물질(육체)라고 믿고 속세(俗世)에서 빠지기 쉬운 많은 쾌락(快樂)을 즐긴다. 차츰 지식을 얻어서 사고력을 가지는 것을 배운다. 다시 말해 상징적 표현으로 설명하면 학습의 루합으로 옮기고 자기자신을 아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마지막에 오성(悟性 ; Understanding)에 의하여 영지(英智)의 루합으로 인도된다. 여기서 아는 비아에서 벗어나고 영지는 그를 위대한 광요(光耀) 즉 신과 사람은 하나인 것이다라고 깨달음에 이른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진화의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기를, 아버지의 집에서 나와 먼 나라로 여행하는, 방랑(放浪)하는 자식으로 비유해서 설명했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들은 아를 자기의 비아인 것으로 잘못 알고 영(靈)이 물질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들어서 지내게 된다.
방랑아는 먼 나라에서 머슴살이를 하게 되고 가축(家畜)의 먹는 것들까지 돌봐야 하는 어려운 처지까지 되어 고생하다가 드디어 아버지의 집에서 그를 다시 받아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이야기처럼 영(靈)은 동물왕국에 속해있는 육체를 취하고 육체를 통한 경험으로 깨달아 차츰 자신이 비아가 아닌 아, 성스러운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되어간다. 그래서 방랑아는 고향집으로 돌아가는데 아는 비아에서 빠져나와 다시 아버지와 하나인 일체(一體)가 된다.
(1) 과학 (2) 철학 (3) 종교 우리들 인간은 외계(外界)에서 얻은 지식으로 무의식 중에 이 세 개의 경로(經路)를 찾아가며 이 세 개의 경로에 의해서 (1) 공간 (2) 시간 (3) 아 [그림 87]에 나오는 착각에서 온 것을 알고 느끼게 된다.
물질세계에 관한 과학적 지식의 획득에 의하여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가 비아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물질적 존재로서 착각에 서있다는 것이 밝혀져 나아가도록 되어 있다. 이 관찰의 "레벨"에서 말한다면 과학의 연구는 무지(無知)의 루합의 한 현상(現象)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루합은 무지를 극복해서 지식을 얻는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생(生)의 철학을 확인함으로써 여러 사실이 생겨난 그 밑바닥에 있는 원인에 대하여 어떤 지식을 획득해서 거기에서 사고력을 발휘하는 노력에 따라 인간은 차츰 영지(英智)를 획득하고 아는 스스로가 비아가 아니고 아이다라는 것을 알아낸다.
이 "레벨"일 때는 그의 행위가 학습 루합에 와서 속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인간은 종교를 통하여 인간은 하나밖에 없는 신에서 나온 신의 자식이란 생각으로 인도 되어 나 자신은 나 혼자만의 육체 아라는 것을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여 아직 실제 현실로 되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에서는 아는 비아에서 차츰 멀어져 간다. 이 "레벨"이면 종교의 외형은 영지의 루합의 한 현상인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는 밖에서의 신조(信條)에서 내면의 깨달음과 영적 환상으로 되었을 때 그것으로 인하여 미래의 문이 열려져 가는 큰 전망(展望)으로 인도되어 가기 때문이다.
다시 [그림 87]에 돌아와서, 3개의 극복방법은 자연스럽게 3개가 일체에의 길로 인도되고 앞에서의 원리는 더 높은 '레벨'에서 뒤에서도 반복되면서 더욱 높은 "레벨"이 되어보면 모든 것들의 행위는 목적에 들어가 있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인 것으로 눈에 들어온다.
학도는 이제 본격적인 탐구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지식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기쁨만이 아니고 아의 해방을 위하여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지상(地上)의 사물(事物)에서는 이제 만족을 얻을 것이 없고,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이 없다.
이러한 것들은 영원한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소용없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높은 차원으로 행하고, 보다 커다란 지평(地平)의 어떤 것, 이들이 그를 하여금 더욱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멈출 수 없는 어떤 것에 느낌을 주고 있다. 3개의 길에 있어서는 과학, 철학, 종교는 올라가서 더 높은 계층(階層)에서 일하며 그것은 내면의 의식의 성장이 되어서 나타나며 물리적 업적이 아니고 더욱 폭이 넓은 개념의 경역(境域)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이르러서 우리들은 겨우 3개의 루랍의 상징(象徵)으로서가 아니고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데까지 왔다. 이 3개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계 전체에 걸쳐서 인도해 주는 손은 진정 있다고 하는 것을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결과,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에는 한 발짝마다 인도하는 손이 있다는 것을 독자 분들은 느꼈을 것이다. 과거가 그러했다면 역시 미래에도 똑같이 그러하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더욱이 적은 수(數)의 희망자들을 위해 그와 같은 가르침이나 스승은 현재에도 빛을 문틈사이로 보내고 있다. 열원(熱願)하는 혼(魂)들을 위해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물질세계의 언어(말)는 높은 차원의 세계에서의 정묘한 상태를 충분히 표현할 수가 없어서 위대한 개념도 이미 알려져 있는 유사(類似)한 사물로 한정할 수밖에 없으나 이것을 받아 공부해 보겠다는 사람들에게 깊은 지식을 주기 위한 시설로서 세 개의 루합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의 의미에서 현실의 존재로 되어지는 것이지만 그의 구성(構成)에 있어서는 물질적인 것이라고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직관적인 상상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앞에 소개한 3개의 누합을 묘사에 따른 해설은 여기서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제1루합ㅡ그대가 만약 제1의 루합을 쉽게 지나는 것을 원한다면 그대의 마음에, 그 속에서 불타는 색욕(色慾)의 불을 그대의 생명의 밝은 빛으로 오인(誤認)해서는 안된다.
제2루합ㅡ그대가 만약 제2루합을 쉽게 지나는 것을 원한다면 마비(痲痺)를 가져다주는 꽃들의 향기를 흡입하지 말라ㅡ현자(賢者)(복수)는 오관(五官)의 쾌락을 느끼는 땅에 머무르지 말 것이고, 현자(복수)는 미망(迷妄)의 달콤한 속삭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 것이고ㅡ이러한 루합의 부실(不實)한 아름다움은 위험스럽고, 그대가 오직 시보(試補)기간에서나 필요했던 것들이다.
제3루합ㅡ아마 대부분이 그림자라는 것은 모든 것의 구석구석까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진리의 빛이 반짝이며 왔을 때 영광(榮光)을 퇴색시킨다.ㅡ영지의 루합에 있어서는 그대를 낳게(産)하는 자를 찾아라.ㅡ그대 만약 영지 루합을 지나서 지복(至福)의 계곡에 이르는 것을 원한다면 제자야, 그 대외의 비아를 믿고 있는 자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큰 이단(異端)에서 그대의 오관을 굳게 닫아두라.
이상의 해설로 보는 바와 같이 무지의 루합에서 배우는 과제(복수)는 물질세계에 관한 것이고, 여러 가지 매혹과 유혹이 꽉 차서, 구도자(求道者)로 하여금 길에서 벗어나도록 하려고 하는 것으로 되어있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도(成道)를 바라는 사람들은 무지(無智)의 상태에서 이 루합에 가까이 가는데, 그의 무지란 것이 인간의 육체의 생존 초기 어린시절의 특징으로 된 무지(無知)가 아니고 오히려 성인만이 받아들이는 높은 급의 가르침(복수)에 관한 무지(無智)인 것이다.
구도자는 그의 오늘까지 얻은 지식은 모두가 큰 지식을 얻기 위한 준비에 불과하고, 그의 준비가 완성되면 그 큰 지식은 언제인가 그에게 계시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다시 말해 천국에 들어가려면 진리탐구자는 어린 아이처럼 되라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성훈(聖訓)에 나와있다.
학습의 루합, 별명(別名)[욕망-마나스]은 높은 차원에의 가르침의 주된 "테마"이다. 욕망-마나스란 현실의 세계에서 욕망, 감정과 낮은 즉, 분석적(分析的)인 마인드(識心)와의 사이에 통유(通有)하는 밀접한 관계를 말한다. 평균적 인간의 형이하(形而下)의 생활은 거의가 욕망-마인드의 둘레를 맴돌고 있다.
이 루합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우리들은 인생에서 여러 가지 꽃을 만나게 되는데 그의 한폭의 꽃마다 그 아래에는 뱀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마인드(識心)를 가지는 것이 인간의 현저한 특징인 것인데, 그와 같은 마인드를 움직여서 얻어낸 지적(知的) 성공에 만족한 나머지 그것에 빠져 헤매어서는 안된다고 이를 환기시키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사상가들의 많은 수는 학습의 루합에서 여러 가지 "레벨"의 분야에서 매몰 당하기 쉽다. 그것은 그림자로서의 지식의 확득만이 그 사람에게는 유일의 목표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는 지식과 같은 수준의 강한 독을 가진 죽음의 사자가 구렁텅이에 찾아 들어와 그 이상의 진보를 방해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모든 지식을 동화(同化)시켜야 한다. 그렇게 해내면 지식은 꽃이 피어나면서 원숙한 영지로 된다. 뱀은 언제나 영지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영지의 류합에 있어서는 최고의 정신세계(복수, 멘탈)과 "원인"세계(복수)에 우리들이 접촉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전에 있었던 모든 경험을 초월해서 구도자는 제자가 되고, 스승 혹은 대사를 만나게 될 가능성이 생긴다. 지상에서는 미지(未知)의 수많은 영광이 지금 그의 앞에 열리고, 그를 받아들이게 된 경역(복수)은 육지(陸)를 떠난 광채는 맑고, 이전에 늘 보아왔던 빛은 어둠과 같다.
제1류합 안에서는 구도자는 물질적 존재가 제시하는 착각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제2류합에서는 시간 계속이어져 나오는 새로운 현상들이 그의 눈 앞에 제시하는 착각(복수)을 하나씩 극복해 가는 것이 된다. 영지의 류합에서는 그는 "커다랗게 걸리적 거리는 따로따로의 존재의 이단(異端), 무지"라고 말하는 착각에 초극(超克)해낸 아는, 모든 다른 아들과 하나가 되는 것을 배워서 얻어내야 한다. 이상은 거대한 과제의 윤곽을 요약해서 말했는데, 이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무엇인가 내면의 지식이 없으면 생의 전체의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발생(복수)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모르고는 그저 혼란스러운 것으로 보게 되지만, 실은 마치 지구가 공간을 이동하고 있는 것과 꼭같이 정확하게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정연히 통일되어 있는 일대경륜인 것이다. 우리들은 많은 착각을 시현(示現)해주고 있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고 있으며, 그러한 착각에서 아직 탈출하지 못하고 있지만 직관(直觀)에 의하여 그 많은 거짓을 알아내고, 뿌리칠 수가 있고, 또한 차츰 그의 비밀(복수)을 뚫고 실재(實在)에로 더욱 접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제2장 무한(無限)을 향하여
우리들(신지학도)은 상상에 의하여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는 자매혹성들과 같이 공간이라 말하는 검은 안개 속에서 출현하는 것을 보아왔다. 생명이 해면에 떠있는 찌꺼기들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무량각(無量却) 이전인 원시·미개하면서 쓸모가 없는 존재로서 출현한 것도 보았다. 또한 그것들이 서로 싸우면서 성장하고, 패자와 승자의 기록 속에서 몇 시대(代)에 걸쳐서 전개되는 모습을 보고, 그 장대(壯大)함이 거의 앞도당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역사는 인간이 창작한 것이 결코 아니다. 세계에서의 생겨나는 일들(복수)의 무대(舞臺)에서 진리라고 하는 일광이 그 빛을 비추어 주기 시작하면, 가공(架空)의 만들어낸 이야기(fiction)에서 말하는 것처럼 램프의 빛은 흐려져서 아주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미래(未來)로 바꿔서, 미래를 보아가기로 해보자!
지나간 먼 옛날의 수많은 신비속에, 아주 보잘것없을 정도이지만, 들어가 볼 수가 있었으니, 우리들은 다가올 미래에 대하여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의 영지(英智)가 제시해 주고 있는 가르침을 작은 것이지만 배워서 알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미래를 추구해 나가면, 그 달성하는 것들(복수)은, 현대과학이 이룩해 낸 수많은 기적(奇跡)들이, 마치 동굴인간시절에 그리하였던 것처럼(상상 못한 것), 오늘의 보통인간들로서 가지고 있는 생각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깊숙한 바닥(低)에 있는 것들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측(豫測)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조용히 서있지 않으며, 진보가 번갈아 가면서, 계속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광막(廣漠)한 것들의 속에서 실제로 관여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오늘까지는 위대한 것들 안에 돌입(突入)해 왔지만, 언제 어느 날에 그 자신이 도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길목에 있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그 자신의 현재의 지점에서나 분야에서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곳일지라도.
신의 알(卵)로서의 인간의 미래는 한정이 없으며, 오늘날 확대해 나가고 있는 지혜는 인간의 이해력을 가지고 해쳐간다면 언제 어느날 그의 것으로 된다는 것을 장엄하면서 장대(壯大)하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그에게 비추어 알게끔 해 주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문틈 사이로 본, 느낌으로도, 우리들은 현대가 필요로 하는 사물과 우리들 앞에 주어져서 해내야 할 일이 얼마나 중하고 큰 것인가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말한 3대 착각 안에는 우리들 문제(복수)들을 명확히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꼴로서, 그의 윤곽이 나오고, 동시에 그 해결 방법을 표시하고 있다는 기본적 사실(복수)들을 우리들은 이미 발견했었다.
신지학은 생(生)의 기초까지 파고들어가 있으므로 인간이 삶을 해 가는데 있어 모든 부분에서 도움이 된다. 세상의 여러 나라 국민들이 모든 생명은 일체(一體)인 것을, 모든 인간들은 동포인 것을, 전 인류(全人類)가 노력하면서 미래로 향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 간다면 서로가 협력해 평화 속에서 서로 도우면서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 부정을 행하면 천망(天網)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는 것을, 언제인가 "카르마(Karma)의 법칙"이란 것이 평형(平衡)의 회복하도록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고용자와 피고용자는 서로 조화하면서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같이 일을 해 갈 수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 있는 대종교(복수)의 근원(뿌리)은 하나이고, 그의 이름들은 틀리지만, 그 실상은 같은 하나의 신을 숭앙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승의 대종교(복수)는 인류의 향상과 복지를 위하여, 어느 나라에서도 다함께 일을 해 나가게 될 것이다.
신지학은 모든 종교에 대하여, 혼(魂)의 입장에서는 영감(inspiration)이고, 거기에 지식(마인드)도 받아들이고, 합리화된 신의 개념을 제공한다. 물리학자에 대해서는 자연의 법칙이란 신의 의지(意志)를 나타낸 것이라는 것을 제시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물리학자는 자신이 해가고 있는 일이 아주 새롭고 드문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신지학은 의식(意識) 자신을 설명하고, 육체보다도 더 정묘(精妙)한 여러 체가 같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서 심리학자의 가장 곤란한 것으로 여기는 문제(問題)를 풀어 밝혀낼 수 있게 할 수가 있다.
천문학자에 대해서는 신들보다 더 위대한 신들, 여러 가지의 태양계, 은하계 거기에 불가측(不可測)의 공간(空間)에 거의 무한대라 할 수 있는 끝이 없는 곳까지 지배자의 역할에 관하여 이야기해 줌으로서, 그들의 연구를 계발(啓發)시키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未知) 것에 깊숙이 탐구(探究)하게 그들을 고무시키고 그들을 높일 수가 있다.
지학자(地學者)의 눈앞에서 신의 창조(創造)를 전개(展開)하고 있는 것을 시현(示現)하고 있는 것을 알게 해 줄 수 있다. 정치가(政治家)에 대해서는 모든 인간 안에서 공통(共通) 유일(唯一)의 신(神)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가 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감동(感動)해서 모든 국민들의 향상을 위해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박물학(博物學)의 학도에게는 군혼(群魂)의 본능(本能)과 전(前) 인간계(엘리멘탈, 광물, 식물, 동물계)의목적에 관해 이야기하고, 살았던 것과 살고 있는 것과 연결하고 있는 것이 유일의 플랜(經綸)의 전개를 하고 있는 생명의 사다리인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교육자에 대해서는 바뀌어 태어나는 혼(魂)은 과거세상에서의 발달시킨 재능과 성격을 가지고 다시 온다는 것을 알리고 교육이란 것은 금생(今生)의 새로운 매체를 전세(前世)부터의 혼(魂)에 잘 따르도록 하는 것을 조정(調整)하고 그 결과 혼이 지금 새로운 물질체에 들어가서 과거세의 것들과 틀린 생(生)의 상태를 바르게 연결토록 해주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
부친과 모친에게는 그의 눈앞에 있는 놀랄만한 기회(機會)를 이야기하고 아이들의 혼은 그의 여러 체의 성숙해 가면서 완전히 자신의 매체를 컨트롤(調節)할 수 있을 때까지의 아이들의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 해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신지학은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하는 가능성과 끝이없는 미래를 열 수가 있는 것이다. 신지학을 알게되면 이 세상에 보통으로 여겨졌던 일들이 특별히 좋은 것들이 되기도 하고, 단순한 일로 여겼던 위대한 것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인간은 자동인형(自動人形)이 아니며, 인간은 장기(將棋)판 안에 있는 포, 졸도 아니고, 인간은 그저 예배나 올리고, 희망하는 정도로 살고 마는 아무런 보람이 없는 가련하고 비참한 피조물(被造物)이 아닌 것을 우리들은 느끼며 알게된다. 우리들은 장대한(壯大) 경륜(經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며 성스러운 것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해낼 수 없는 것은 천상천하(天上天下)에 하나도 없으며, 전지전능(全知全能)한 것이다.
학문의 많은 분야(分野)에서 신지학은 더욱 더 많은 것을 내세울 수가 있다.
인간이 가장 큰 관심사로 하는 것은 육체의 활력과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들의 건강상태는 이상(異狀)이 발생된다. 내과나 외과의 부분에서 빛나는 업적은 있지만 인간의 현재 건강상태는 지구상의 무수한 외과의 및 내과의들 그리고 병원의 스텝 측의 끝없는 노력에 의하여 겨우 유지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태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장래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재면의 지체가 실존하고 있는 것 그리고 상념(想念)과 감정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해서 우리들이 세균이나 약제의 치료분야(分野)에 대하여 열심히 시험연구하는 것처럼, 이 부분을 끈기 있게 연구하지 않는 한 더 이상의 상태의 교정은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병을 다루는데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가장 필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으로 병을 방지(防止)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멘탈체, 아스트랄체, 육체는 대단히 밀접한 연결을 가지고 서로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 중 어느 한쪽이 부조(不調)가 오면 다른 쪽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건강에도 결정적 영향을 가져다준다.
[그림 88]을 주의 깊게 보면 그림의 중앙에 있는 인간은 "코절체"이고 그 둘레에 세 개의 하위(下位)매체(媒體), 즉 멘탈, 아스트랄, 육체가 있다. 앞서 말한바 있는 "코절체" 안에 있는 아(我)는 자신의 의지, 사랑, 지식으로서 표현한다. 의지는 멘탈체 안에서는 결의로 나타나며, 아스트랄체 안에 와서는 충동으로, 육체 안에 와서는 활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랑은 이들의 체(體, body) 안에서는 각각 구도심(求道心), 감정, 감각으로 나타낸다. 지식은 상념(想念), 혹은 사상(思想), 욕망, 행동으로 되어져서 나타낸다. 우리들은 상념과 감정의 힘을 발휘하여, 멘탈체와 아스트랄체 안에서 끊임없이 사랑의 감정과 마음의 감정을 만들어 내며, 잔자는 건설하고 후자는 파괴한다.
그 효과는 3개의 체 모두에서 느껴진다. 교만, 배타, 해의(害意), 편견 등 타인에게 상해나 고통을 주는 상념이나 감정은 멘탈체, 아스트랄체의 안에서 생긴 것으로서, 그것은 반드시 외부에 그 부체(副體)가 되는 육체에도 해로운 결과를 가져다준다. 만약 이러한 나쁜 상념이나 나쁜 감정을 억압(抑壓)하고 보면 그것은 멘탈체나 아스트랄체에 억류되어, 서서히 붕괴해 가면서, 끝에는 그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써 육체 속에서 유독의 분비물을 발생시키도록 되어간다. 이러한 독물(毒物)은 당연히 배제되어야 하며, 배제되어서 나온 것이 병(病)인 것이다. 병은 육체를 정화(淨化)하는 자연의 방법의 하나인 것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그 과도한 감정에 대하여 안전판(安全瓣)을 주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가령 숨을 쉬는 것이 그러하다. 숨(䭒), 즉 말하자면 폐(肺)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에 의하여 독을 배제시키는 장치가 되어있다. 공포, 노여움 혹은 즐거운 흥분조차 파도의 감정은 모두 강하지 않는 한, 깊은 호흡으로 잘 유인해 밖으로 낸다. 또한 심한 긴장 때문에 숨은 일시적이지만 완전히 멈추고 만다. 깊은 호흡은 축적해 있는 독소를 육체에서 제거해 준다. 이와 같은 상념과 감정은 육체의 건강이나 질환 혹은 보다 높은 제체의 상태에 큼 공헌의 요인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지금까지 누누이 말한 바 있는 정묘한 제체의 그 존재가 아직 일반에게 인정을 못 받고 있다. 그 때문에 이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필요한 의료교육을 받고 실무에 종사하면서, 병리학적 및 초감각적 상태를 주의 깊게 연속적으로 관찰하는 기회에 접하는 아주 적은 수의 사람을 빼면, 그 방면에서는 실재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어느 종(種)의 감정(感情)이 육체에 영향을 주는 사실은 지금은 폭넓게 인정하는 정도가 되었다. 노여움이 혈액을 압축하는 것도 알려지고 있고, 공포나 노여움이 타액(唾液)에서 독을 분비한다. 우리들의 육체기구 전체와 그 움직임 모두가 안에서 오는 상념, 감정, 욕망의 외적(外的)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이, 언제인가 이해하게 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그와 같은 연구는 현대의학을 높은 경지에 끌어올려 놓게 될 것이다(역자).
이와 같이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섭취하는 먹는 것, 마시는 것과 호흡하는 공기와 운동인 것을 말할 수가 있다. 과도하게 조금 먹는 것과 과도하게 많이 먹는 것, 좋지 않은 것을 먹는 것은 당연히 육체에 이상이 온다.
육체는 화학적으로 바른 균형(밸런스)이 유지되어 있어야 한다. 감정을 가진 동물로서 생명을 유지하며 건강하다는 사실에 유의하여 주어야 하겠다.
이상의 것 외에서도 생의 신비를 신지학에서는 많이 설명하고 있다. "엘리멘탈(elemental)"의 생활이나, 천사(天使), 즉 데봐왕국(deva kingdom)에 대하여서는 이 책에서 약각만 말했을 뿐이다. 아스트랄계에서는 인간의 형체 외에 다른 데봐들이 생명의 형체도 대단히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천사(天使)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으며, 거의 이 세상의 종교서적에 나와 있다. 이들은 여러 가지 많은 방법으로 자연의 여러 가지 힘을 써먹고 있으며, 여러 가지 집단과 계급이 있다.
인간이 이승에서 훌륭한 삶을 해 왔다면 죽은 후에 천사가 된다고 일부의 사람들이 생각해오고 있지만 그것은 아주 잘못 생각하는 것이며 틀린 것이다.
인간의 진화의 흐름과 천사의 진화의 흐름은 아주 별개의 것이며, 유일신의 경륜 안에서 행하는 각각의 역할이나, 기능에서도 틀린 것으로 되어있다. 인간의 항구원자(혼)는 천사(天使)의 협력을 얻어서 모태(母胎)속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수태(受胎)할 때 부(父)의 적당한 생식세포가 난자(卵子)에 끌려가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우연한 것으로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천사계에 있는 낮은 "맴버(member)"들(자연영)의 움직임은 식물이나 꽃에게도 관계하는데 어느 점에서는 모든 생물에 관계하고 있다. 고위 천사들은 넓은 분야에 걸쳐서 고도의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다. 고위 "멘탈"계층에는 물질계의 모든 물질적 형태의 원형(原型)이 있다. 그것은 물질 안에서 완성되어야 할 생물형체(生物形態)의, 신(神)의 마음속에만 있는, 원시 "이데아" 혹은 원시 상념상태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진화의 개념과 신지학에서 말하는 진화와의 차이는 이 원시형태의 유뮤(有無)에 있다. [그림 89]는 신지학의 진화개념의 배후에 있는 원리를 간단히 그려본 것이다. 3각(1), 원(2)과 4각(3)이란 신만이 가지는 마음속에 있는 원형(原型)을 간단히 그려본 것이다. 이러한 형성(形成)을 다른 천사들이 거들어 주어서 얼마 후 물질적 형체로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같은 형체는 차츰 농밀도가 높아 가는 질료 안에서 조금씩 모습을 재생해 가지만, 물질계에서의 최초의 작품은, 원형 가령 [그림 89(1)의 A]보다 훨씬 못한 떨어지는 것이다. 원형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여러 가지 변이(變異)를 인도하기도 하고, 환경, 기타의 경륜(經綸)에 적당한 수단을 선택하는 등으로 해서, 원형에 가까워지는 개선이 서서히 행하여져서 [그림 89(1)의 B], 끝내는 물질이 반응할 수 있는 한(限) 정도의 완전한 형태[그림 89(1)의 C]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림 89(2)의 A, B, C]와 [그림 89(3)의 A, B, C]의 경우에서도 또한 이와 꼭같다. 형태가 변화하는 것은 결코 우연의 변이에 의한 것이 아니고, 단순한 전자생존에 의한 것도 아니고, 앞에 말한 것처럼 가능한 원형처럼 되게끔 인도되어 가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가서 비로소 살아 남을 수 있느냐는 시련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태양사신(司神)의 수준(레벨)에서도, 사신(로고스, 司神)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巨大)한 문제들이 있으며, 더욱 위대한 일을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것을 진화의 지나온 길을 보면 설명된다. 이와 같이해서 인간은 미래의 면(面)을 접하게 된다. 미래란 것은 즉, 인간이고, 인간이란 "알렉산더 포프(Alecander Pope)"가 말하는 세상의 영광, 웃음의 풀 그리고 수수께끼인 것이다.
그(인간)는 앞을 바라보고 서 있다. 자기자신의 힘의 정도를 모르고, 모든 힘들이 그 원질(原質)속에 집중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약한 것으로 생각하고 활동하며, 자기의 신성(神性)을 잊어버린 신으로서, 자신을 비아(非我)라고 생각하고 있는 아(我)는 진정한 고향의 집 천계(天界) 안에 여러 형태의 영광이 있는 것인데도, 자신은 이승(땅)에 속해 있다고 믿고 있는 자들에게 "칼리 로터(Carlyle Wrote)"가 다음과 같이 쓴 것이 있다.
"그는 땅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별들과 같이하고 있다. 그가 욕심 내는 것, 바라는 것들은 천하고 아주 작은 것들이다. 그렇지만 장대(壯大)하면서 빛이 나는 목적과 불멸의 혼구(欣求)에 의하여, 여러 하늘나라를 돌고 돌아 영원 속에서 소요(逍遙)하는 상념(想念)에 의하여, 높이 올려져서, 끝내는 혼(我)에 따르게 된다. 여기 작은 혹성의 겉띠(外殼)에 서있는 소인(小人)이지만, 그들의 원대(遠大)한 영은 밖으로 퍼져서 무한(無限)에 이르게 되고, 무한한 것에서만이 편안함을 느꺼지는 것을 안다."
지난 17세기에 쓰여진 불멸의 고전(古典) "천로역정(天路歷程, Pilgrim's progress, 1895년 영국의 선교사 게일이 한글로 번역)" 안에 "존 버넌(John Bunyan)"은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있는 먼지와 볏짚(稾)을 끌어 모으고 있는 자를 가르쳐서 아주 높은 상징적인 말로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천한 일에 열중한 나머지 황금의 관(冠)을 주려고 그의 머리(頭上) 위를 돌아 나르며 애쓰고 있는 천사를 느끼지 못하는구나." 이 묘사는, 오늘날의 인류를 너무 잘 표현하고 있다. 오늘의 인류는 재물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세속생활의 유혹에 빠져서, 영적 달성으로 갈 수 있는 황금의 기회를 보지 못하고, 높은 곳에서 소리치는 소명(召命)고함을, 끝내 들을(聞)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때인가 이와 같은 상태는 변해서, 사람들은 결국 빛을 볼 수가 있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는 과학을 이승의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방기(放棄)한다거나, 이성(理性)을 움직여 일하는 것들이 어두움 속에 왕자가 인류를 혼란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해 발명한 것이라고 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신(神)들을 숭앙하며 신에게 생을 바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학문분야를 배우는 사람들은 지식만을 위해 지식을 얻어 내려고 하는 욕망, 현인 · 도사 · 선사 등의 자랑스러운 말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고, 우쭐대고 싶어서 영지(英智)를 얻고자 하는 욕망, 혹은 자아(自我)만이 구원이나 해탈을 얻어보자고 하는 욕망을 모조리 정화(淨化)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의 연구해 낸 것이 그에게는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차츰, 지식의 길이 된다. 모든 것들 안에 감추어져 있는 목적을 문툼으로 보아왔으며, 구극자(究極者)와의 합일(合一)이 되도록 스스로 선택한 길을 나아가면, 얼마 후 철학과 종교, 즉 이성(異性)과 귀의(歸依)와의 필요를 통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말한 바 있는 3가지 길을 융합(融合)한 하나가 될 것이다.
철학자는 논리(論理)의 추궁에 의하여, 인간사회의 모든 면(面)에서 분석과 종합(綜合)에 의하여 그 노력을 계속해서, 얼마 후 생(生)의 이해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생각이나 말로 하는 것에서 떨치고 나와, 물질의 법칙(복수)의 사실을 인정하고, 종교체험에서 나온 여러 꼴 및 모습을 분석해 가노라면 이 3개의 길을 맺어서 하나로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철학의 길을 계속 거슬러 올라간다면 다른 2개의 길과 만나게 되고, 유일아(唯一我)와 합일(合一)을 이루어 낼 것이다.
교회의 의식에 봉사하는 사람들, 제단(祭壇)이나 신전에서 예배하는 사람들, 신상(神像)이나 진리의 상징(象徵)앞에서 참니하면서 머리를 숙이는 사람들, 위대한 종교의 교사를 자기가 찾고 있는 탁월한 이상(理想)으로 삼는 사람들이, 종교란 것은 외면(外面)에 있는 형식이 아니고, 내면(內面)에 있는 진리의 깨달음과 실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인생의 목적이 다른 사람(우상)의 덕(德)에 의하여, 어떤 모양의 해탈이나 구원을 얻어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교의(敎義)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자기자신의 영적 발달을 성취(成就)해 나는데 있음을 알아냄으로서 귀의(歸依) · 헌신(獻身)의 길을 발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지(理智)를 알게 된 사람들이 [귀의 · 헌신]의 길을 봉행(奉行)한다면 그들은 안(內)에 빛이나 그것을 실지로 도움이 되도록 인생철학을 바꾸어, 여러 가지 영적 가치를 진보해 가는 과학 지식과 맺어지도록 해서야만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구원이 된다) 그 때 비로소 그들은 모든 있는 것 모두가, 유일의 원뿌리에서 온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처음에는 알게 모르게 지나오다 차츰 양 눈을 크게 뜨고, 생명의 골인 점을 향하여 행진하여가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3가지의 기초적인 배움이란 것이 기본적 가치가 되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면 예술(藝術)은 어떠한 것이겠는가. 예술이란 이 길에 전부가 들어가 있는 것이며, 도달한 진리의 내면수준의 것을 외면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진정한 예술가는 귀의 · 헌신자의 하늘의 계시(inspiration) 및 철학자의 영지 그리고 과학자의 지혜를 모두 가져야 한다.
예술이란 것은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 방법(아트)인 것이다. 방안 청소, 방안에 가구, 적합한 배치에도, 연필을 깎는 것, 말하는 것 안에는 예술이 들어있는 것이다. 무용, 음악, 조각, 건축, 그림은 예술을 특수화시킨 모양이고, 그의 배후에는 과학과 철학과 종교가 있으며, 거기에서 구체적인 작품이 솟구쳐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술은 생(生)과의 관계에 있어서, 선(善)이면서, 미(美)이면서, 성실(誠實)인 것이다.
이승의 사물(事物)이 탐구자를 끌어당기는 힘을 잃고, 진리의 탐구가 그 길의 사람의 생활에서 지배적인 요소(要素)로 되어갈수록, 그들은 자신 곳에 깊은 의식이 층(層)으로 된 몇 개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차츰 열려져 가고 있는 것을 점점 느낌이 온다.
이것은 혼이 전개를 해 가는 여러 갈래의 힘의 긴 시간에 걸친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서곡을 알린다. 그는 지금까지의 인생행로를 통하여 맑은 날이나, 비바람 치는 날이나, 고통스러울 때나, 편안했을 때나, 한 발짝 인도 되어 왔던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이 깨달음이 새롭게 경탄할 만한 체험으로 꽃봉오리를 내밀고 있다. 영지(英智)를 누합(樓閤)에서 그가 확고한 결의와 그의 깊숙한 가슴(하트)안에 신과 사람과의 사랑을 지니고 오직 앞만 보고 나아간다면 그는 자신의 대스승을 만나게 될 것이다.
완전한 인간이 실존(實存)한다는 것을 여기서 설명하여 두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 분들은 위대한 혼(魂)으로서 엄청난 노력과 일심불란(一心不亂)한 탐구에 끝에 다른 사람들을 훨씬 앞질러 갔으며, 훨씬 후대(後代)의 소스의 사람들이 열심히 탐구하고 있는 것들을 이미 성취해 냈고 그 분들은 합일(合一)에 도달해 계시는 것이다.
이 위대한 분들은 인간으로서 완전한 상태를 이루어 냈는데도, 이승에서의 경쟁이나 고뇌를 훨씬 넘어선 활동분야가 되는 초인(超人)으로서의 진화의 길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인류가 있는 곳(이승) 맞추어 있으면서 진리를 공부하고자 애를 쓰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더 진화의 걸음걸이를 해내는데 더 높은 수준의 가르침을 주어서 그 자들로 하여금 진화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 분들을 영지(英智)의 대스승(大師) 또는 성사(聖師, 아데프트)라고 경칭(敬稱)하고 있다.
대스승의 성질이나 활동을 이해하려면, 보통 이승(地上)생활에는 받아야 되는 제약(制約)(복수)을 벗어날 수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 대스승 되시는 분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들처럼 육체 안에 유폐(幽閉)당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이 분들은 육체가 필요할 경우에는 자유자재로 쓰고 필요가 없을 때는 자재(自在)로 육체에서 이탈하고 한다.
대스승은 그의 영적 성장에 있어서는 우리들을 훨씬 능가하고 있는 고로, 그의 가까이에 모시면 우리들은 가장 가까운 친구보다 몇 배 따르고 싶고, 또한 정말 이해가 깊은, 위대한 형들이라고 알게 된다. 그의 힘과 영지(英智)는 꼭 우리들의 전 존재를 꿰뚫고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든다. 우리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무되고 높아져서 해내고 말겠다고 결의에 꽉 찬다.
제자로서 충분하다고 느껴졌을 때는 대스승은 또 제자로서 받아들이는 준비를 해두고 계신다. 어느 대스승은 또 제자로서 받아들이는 준비를 해두고 계신다. 어느 대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스승을 만나게 되려면 "제자(弟子) 스스로가 제자의 세상에서 나와서 우리들의 세계로 들어오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앞에 말한 바 있는 3개의 누합(樓閤)의 설명 안에 우리들은 다음의 말을 상기해 보고 싶다. "영지의 누합 안에서 그대를 태어나게 해주는 자를 구하라, 등등" 영지의 누합이야 말로 대스승을 만날 수 있는 유일 · 진실의 장소인 것이다.
대사의 얼굴 모습을 뵙게 될 수 있다고, 물질세계에 있으면서 가능하다고 기대하는 사람이 있지만, 물질세계에서는 대스승과 접촉하는 것은 대스승과 우리들 사이에 3개의 웰 즉 3개의 저위(低位)의 체(육체, 아스트랄체, 멘탈체)란 웰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삶의 세계가 아니고 대스승의 세계(코절계층 혹은 부디 계층)에서나, 대스승을 만나지 않으면 안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림 90]을 보자. 아래쪽이 인간의 과거의 육체 성장 단계를 설명해 주고 있다. 위쪽은 영적(저승) 인간의 미래에 지나가는 단계를 표시하고 있다.
제자(弟子)의 길에는 몇 개의 단계가 있으며, 그 첫째 1단계는 시보(試補) 다음은 인용(認容) 그 다음 차례에서는 더 친밀한 대스승의 지식의 단계이고, 여기서 제자가 흘러 들어간다고 말하며, 이후에는, 그의 성공은 확실한 것이 된다.
이쯤 와서는 제1비전(이니쉬에이션)이 이루어지고, 다음부터 순서대로의 제 2, 3, 4비전(秘傳)을 받게 된다. 각 비전(秘傳)을 받을 때 의식(意識)은 확대되어 가고, 제5비전에 이르러서는 "이니쉬에이트(initiate)"는 초인(adeft, 아데프트)의 열(列)에 오르고 대스승(聖師)이 되는 것이다.
"이니쉬에이션(initiation)"이란 것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1) 의식(意識)의 확대(擴大) · 고양(高揚) (2) 대스승들의 성스러운 조직의 일원(同胞團)에 든다 (3) 극히 특수한 비전의 전수(傳受 ; 생각대로 창조가 가능하다) 기타, "이니쉬에이션(initiation)"을 받는 분을 "이니쉬에이트(initiate)", 가르침을 내리시는 분을 "이니쉬에이터(initiator)"라 한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종교에 있는 풍부한 옛 기록에 보면, 많은 책에서, 혼의 높은 길(生)에 관하여 쓰여져 있다. 이들의 책에서는 인간들이 지상(땅)에 묶어두는 족쇄에서 인간이 어떤 방법으로 한발짝 한발짝 해탈(解脫)해 갔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비전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크리슈나무르티"가 쓴 "대사의 발밑에 엎드려"(신지학 입문에 합본으로 책이 나와 있다) 안에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식별
2. 무욕
3. 6개의 행위 : ① 마음의 자세 ② 행위의 자세 ③ 관용
④ 쾌활성 ⑤ 일심집중 ⑥ 자신(自信)
4. 사랑
대스승(超人)들은 대동포단(大同胞團)이란 것이 있으며, 대백색성회(大白色聖會)라고 말을 하기도 하는데 세계(우주)의 은밀한 통치의 일을 관장(管掌)한다. 이런 분들은 보이지 않고, 알 수가 없으면서도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며, 이승의 모든 국민들에게 강대(强大)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대스승이라 말하는 분들은 학도(공부)를 거느리고 계시는 분들을 말하는 것이며, 그의 수(數)는 동포단 전체의 수보다는 훨씬 적은 수(數)이다. 이런 위대한 분들의 생활은 우리들의 생활과는 대단히 틀리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가령, 의사소통의 방법 기타에 있어서, 우리들처럼 제약을 받지 않고 계신다. 그리고 육체의 면에서 말하자면, 그분들은 몇 개의 서로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으며, 어떤 특정한 일을 하려고 할 때 그 필요에 따라 육체를 쓰게 된다. 일을 하실 때는 거의 대부분 높은 세계(生, 복수)에서 행하는 것이다.
물질우주의 수많은 영광은 더 높은 진화의 길을 가고 있는 분들의 눈에 전개되는 영광(복수)은 무한(無限)에서 보면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無智)속에서 첫발을 내밀기 시작한 이후, 기나긴 곤란의 길을 올라온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전진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함으로서 물질적 사물이 물러갈수록 영의 사물의 힘과 미(美)가 증가해 온다.
어느 날에서인가 우리들도 성사(聖師)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고 더욱 더 그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초인간(超人間)이 되어서, 그리고 끝내는 말로서 표현을 해낼 수가 없는 영광의 불꽃 속에 드려서 우리들의 원줄기(本源)와 재합일(再合一)하게 될 것이다. 인류는 신의 속에 융합(融合)하는 것이다. 크나큰 업(業)은 이로서 끝내고, 인간은 여기에서 한주(一柱)의 신(神)이 되는 것이다.
이것과 같은 것이 신의 경륭인 것이다. 이것이 끝인 것과 동시에 시작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공간은, 보다 더 광대한 분야(복수)안에는 더 강대한 정복(복수)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과학을 보자면 지금가지 과학은 그의 발견(복수)의 의미도 모르고 선두를 걸어왔다. 고대의 영지는 신, 즉 태양신과 합일(合一)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인간의 개념이라고 말하는 [웰(덮어)] 저쪽에 존재하고 있는 위대한 신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천문학자는 그의 마법의 기구를 써서 은하(銀河)나, 초은하(全銀河)를 벌거벗기고, 그래서 신들의 존재를 맞기를 앞에서 말한 영적 사실의 물질적 물증을 제시하고 있다(그림 11 참조). 그림 13은 이러한 거대한 구축(構築)은, 각각 태양수준, 은하수준, 초은하 수준의 신을 모시고 있다는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몇 백만에 이르는 인류가 태양수준에 있는 모든 힘, 지식 그리고 모든 영지를 획득해내서 신과 합일(合一)을 이르면, 이 끝이 되고 시작이 되어 다시금 부(父)의 가슴 속에서 나와 출발하는 그 힘은 각각 새 태양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새로운 은하(銀河)가 생겨나고, 우리들의 신에 의하여 통치되고, 이 어른은 은하 로고스(銀河司神)가 되고, 은하계 우주 전체의 진화를 인도하여 가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해서 신의 경륜은 전개되고, 언제나 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움직임을 계속하며, 끝내는 말하고 싶은 무한(無限)이라는 것에 도착하는 것이다.
이상 우리들은 훨씬 먼 미래 속에 과감히 들어가서 닥쳐올 커다란 생겨날 일(복수)을 문틈 사이로나마 보고 온 것이다. 우리들은 지금은 낮은 계역(界域)에서 싸움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골인"이라는 것은 우리들 안에 있는 힘(복수)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마음을 가다듬고, 앞으로 착실히 전진해 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인간은 몇 대(代)에 걸쳐서 만들어 쌓아올린 문명이라는 집이, 실은 모래 위의 누각(沙上樓閣)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느끼게 되었다. 몇 차례 비가 내리고, 홍수가 찾아와서, 집이 무너져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처럼 매력을 느끼게 해준 금, 은 같은 것도 신의 다리 밑에 있는 흙이었던 것이고, 그것이 지금 이승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원래 영적 성장을 위하여 만들어져 있는 세계 안에, 인간은 그것에 알맞은 물질적 척도(尺度)를 설치한 이상, 영속(永續)한다는 것은 만무한 것이다. 그렇다고 무서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살아남을 가치가 없는 것만이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것이 무너지는 것은 새로운 것에 그 장소를 양보하기 위해서고, 새로운 것은 보다 더 좋은, 더 강한, 더 아름다운 것일 것이다. 때로는 번개가 치고, 비바람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 없을 때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햇빛이 좋고, 미풍이 불고, 아름다운 꽃들의 향이 풍기고, 그 미의 아름다움에 이끌려서 잠시 서서 그 미를 감상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지구의 검은 밤을 지나쳐, 우리들은 앞으로 나아가서, 여러 가지의 높이의 극의 이른 사람들이 저편에서 큰 일들에 대하여 말을 주고받고 계신다. 벌써 땅 위에는 새벽의 가냘픈 빛줄기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나먼 저편의 미래에 있어서는 우리들은 무한, 영원, 전일(全一)을 모두 배워 끝내고, 이 3개를 유일실재(唯一實在)속에서 융합(融合)시켰을 때, 부모의 집에 다시 돌아왔을 때, 지고(至高)의 신비가 계시되고, 우리들은 깨달음(悟了)을 완성할 것이다라고, 위대한 성사(聖師)분들은 말씀하셨다.
그 부모의 신의 집에서 우리들은 실로 아직까지 만난 적이 없었던 것들을, 어느 신비적인 방법을 가지고 우리들은 느끼고 알게 할 것이다. 집을 나왔다고만 생각하였을 뿐이었었다. 그것이 미궁(迷宮)이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모두가 형제자매이고, 유일주(唯一柱)의 아버지 되는 신의 자식 아이들이였던 것이다. 긴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은 것이다. 그것은 잘못이었다. 마지막의 승리 속에서, 조건반응(條件反應)을 해온 우리들의 의식이 절대의식에 융합해서 최후의 착각을 초극(超克)해 냈을 때 우리들은 언제나 그리고 또 한발짝마다 그 위대한 어른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또한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번역을 끝내고
이 책을 출판함으로서 신지학의 입문자를 위한 책은 신지학 입문, 신지학의 열쇠, 신지학의 제 1원리와 함께 모두 4권의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신지학의 바다 등 초보자를 위한 책이 더 많이 있으나 신지학 한국지부에서는 이것으로 초보자를 위한 책은 매듭짓고, 한 차원 높은 전문적인 성질을 학도(독자) 여러분에게 내보내고자 몇 권 책을 또 편집중입니다.
이 책은 저자가 동양의 영지(英智)와 서구의 과학의 논리를 집어넣어서 현대의 지식과 관련시키면서 알기 쉽게 잘 풀어간 근대의 젋은이에게 신지학을 이해시키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역자는 저자를 만나 보고자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3년 전에 입숙하셔서 기회를 놓쳤습니다. 저자는 스리랑카 출신으로 불교 승려로 있다가 신지학으로 바꾸어서 신지학 탐구로서 많은 진리를 계시 받은 어른으로서 책에 나오는 그림은 인용(引用)한 것을 제외 하고는 저자의 자작품인 것입니다.
신지학은 독특한 용어(梵語)등이 최소한도로 이 책에 쓰여져 있으며 용어는 친숙해져야만 앞으로 방대한 신지학 문헌을 접하는데 학도 여러분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이 책의 취지인 신지학을 바로 이해하시고 공명한다면 더욱 더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는 도식(圖式)을 넣어 설명함으로써 독자가 착각된 생각을 극복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노력을 보임으로써 읽어 가는 동안에 독자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의문시 되고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부분이나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부분을 거의 해소 시켜 줄 것으로 역자는 확신합니다.
우리들 인간의 존재는 우주전체와 상관관계로 맺어져 있음을 알고, 이 책을 읽고 자신의 혼에 공명(共鳴)을 느끼게 되었다면 지금까지 자신의 사고나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이끌어 줄 것입니다.
위의 4가지 책을 이해 한다면 신지학도의 초보적인 기초는 이룩하게 된다고 역자는 생각합니다. 또한, 여러 독자가 신지의 진리를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가면 여러분의 금생(今生)이나 이어지는 다음의 생에도 꽃이피고 윤택한 결실이 있을것을 믿어 의심치 않을 것 입니다.
1995년 임 길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