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애니 베산트] 고대의 지혜 The Ancient Wisdom 본문
[애니 베산트] 고대의 지혜 The Ancient Wisdom
고대의 지혜
애니 베산트 / 황미영 옮김
일러두기
-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의 번역의 저본은 애니 베전트의 1897년 저작『The Ancient Wisdom』을 따른다.
- 이 책에 나오는 '신지학'이라는 말은 모든 종교와 철학 속에 동일하게 흐르는 가르침이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 그 '하나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가리킨다. 즉, 수많은 종교와 철학, 윤리 사상 속에서 같은 패턴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가르침'이 있고, 그 가르침을 '신의 지혜(고대의 지혜)'라고 부른다.
- 저자가 헌사를 바친 'H.P. 블라바츠키(Helena Petrovna Blavatsky)'는 러시아 제국의 철학자이자 신비주의 사상가로서 모든 종교에 흐르는 하나의 근원적 진리가 있다고 하여, 1875년에는 올코트(H. S. Olcott, 1832~1907)의 협력을 얻어서 미국의 뉴욕에서 신지학 협회(神智學 協會)를 설립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20세기의 신비주의적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헬레나 블라바츠키는 1831년 8월 12일에 태어나 1891년 5월 8일에 사망했다. 본명은 옐레나 페트로브나 폰 한(러시아어 : Елена Петровна фон Хан)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초자연현상을 영시(靈視)했고, 스무 살이 될 무렵 당시 최고의 영매로서 유럽, 미국, 이집트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또한 비교 종교학, 민속학, 박물학을 연구하고, 티베트밀교, 카발라, 이집트 마술의 행법을 통해서 타고난 오컬트 능력을 개발하는 데 노력했다고 알려져 잇다. 특히 그녀는 광물, 식물, 동물, 인간에게서 영적 여러 존재에까지 이르는 우주적 통일성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려고 시도했다. 이 사상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기에 걸쳐서 유럽이나 미국의 그리스도교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또한 헬레나 블라바츠키는 1882년 인도의 아디야르로 가서 인도, 중국, 일본의 종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각지의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헬레나 블라바츠키의 학설에 심취하여 그녀에 이어 1907년, 신지학협회 2대 회장을 맡았던 이 책의 저자 애니 베전트도 영국 노동운동과 인도국민회의파의 지도자로서 간디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내게 빛을 보여준 H. P. 블라바츠키에게 감사와 숭배와 사랑을 담아 |
머리말
이 책의 목적은 신지학에서 전하는 가르침의 핵심을 일반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쉽게, 그리고 많은 지식을 쌓는 데 탄탄한 기반이 될 수 있도록 매우 충실하게. 그리고 이 책이 H. P. 블라바츠키의 심오한 저작으로 안내하는 입문서이자 그 저작들의 탐색을 위한 편리한 디딤돌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고대의 지혜'를 조금이라도 배운 이들은 그 가르침이 자신의 삶에 가져다주는 깨달음, 평화, 기쁨, 힘을 안다. 이 책을 세상에 내보내며 바라는 점이 있다면, 이 책을 통해 몇 사람이라도 그 가르침을 배우고 그 가치를 직접 증명하는 것이다.
1897년 8월
애니 베전트
목 차 머리말 들어가는 말 |
들어가는 말
올바른 행동에는 올바른 생각이 필요하고 올바른 삶에는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고대 산스크리트 이름 브라마 비드야(Brahma Vidya: '최고의 지식'이라는 뜻ㅡ옮긴이 주)로 불리기도 하고 현대 그리스식 이름 '테오소피아(Theosophia)'로 불리기도 하는 '신의 지혜'는 타당한 철학인 동시에 모든 것을 받아 들이는 종교이자 윤리로서 이 세상에 나왔다.
어떤 이는 '기독교 경전'을 일컬어 어린 아이도 헤치고 걸어 다닐 수 있는 얕은 여울과 거인도 헤엄칠 수 있는 심연이 공존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신지학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신지학에서 전하는 가르침 중 일부는 너무나 단순하고 실용적이어서 평균 수준의 지능만 되어도 얼마든지 이해하고 따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가르침은 너무나 고귀하고 심오해서 가장 뛰어난 사람도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워 애만 쓰다가 지쳐서 주저앉고 만다.
이 책에서는 독자들에게 신지학을 단순하고도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한다. 세상에 대한 일관된 개념을 세울 수 있도록 신지학의 일반 원칙과 진리를 전달하고, 그 원칙과 진리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세한 내용도 설명할 것이다.
비록 입문하는 사람을 위한 책이지만, 난해한 저작에서나 기대할 수 있는 충만한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입문용 책도 그 주제에 대한 명확한 기본 개념 정도는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더 많은 독서를 통해 보충하고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책을 통해 대략적인 개념을 잡은 사람은 이후에 탐구를 통해 상세한 내용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위대한 종교를 살펴보면 모두 공통적인 종교적ㆍ윤리적ㆍ철학적 개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도 막상 이 사실을 설명하려들면 논쟁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종교란 상상을 통해 일구어지는 인간의 무지라는 토양 위에서 자라났으며, 투박한 형태의 애니미즘과 물신숭배를 조금씩 정교하게 다듬은 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종교 간의 유사성은 보편적인 자연 현상을 불완전하게 관찰하고 비현실적으로 설명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며, 어떤 종교에서는 태양과 별에 대한 숭배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고, 또 어떤 종교에서는 똑같이 남근 숭배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또한 두려움, 욕망, 무지, 호기심으로 미개해진 사람들이 자연의 힘을 인격화했으며, 사제들이 그 공포와 희망, 어렴풋한 공상, 혼란스러운 질문들을 이용했다고도 주장한다. 근거 없는 믿음이 경전으로 변하고 상징이 사실로 변질되었으며, 모든 종교가 비슷한 토대를 갖고 있기에 그 결과물도 비슷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교신화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장이다.
한편, 평범한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쏟아지는 증거들 앞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한다. 종교들 간의 유사성을 부인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희미하게 궁금증이 인다. 모든 인간의 간절한 희망과 고귀한 상상이 정말로 미개한 공상과 혼란스러운 무지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걸까?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와 순교자, 영웅들이 단지 천문학적 사실을 신봉하고 야만인들의 음란함을 감춰주기 위해 살고, 일하고, 고통 받다가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았단 말인가?
세계 종교들이 비슷한 특성을 갖는 이유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 있다. 본원적 가르침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위대한 영적 스승들로 이루어진 형제단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스승들은 여러 차례의 진화를 통해 그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로서 어린 아이와 같은 이 세상 인류를 가르치고 인도하면서 종교의 기본 진리를 사람들의 독특한 개성에 가장 잘 맞는 형태로 바꾸어 각 민족과 나라에 전해 주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들이 모두 그 형제단의 일원이며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여러 회원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또한 도움을 준 회원들은 창시자보다 지위가 낮거나 갓 입문한 이들, 또는 다양한 단계에 속하는 제자들로서 영적 통찰력과 철학적 지식이 뛰어나고 윤리적 지혜가 누구보다 순수한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새롭게 탄생한 국가들을 이끌면서 정치 조직을 부여하고 법을 시행했을 뿐 아니라 왕으로서 그 국가들을 다스리고 철학자가 되어 사람들을 가르치고 사제가 되어 사람들을 인도했다. 고대의 모든 국가들은 그런 위대한 인간, 반신반인, 영웅들을 그리워하면서 문학, 건축, 법전에 그들의 자취를 남겨 놓았다.
보편적인 전통과 아직까지 살아남은 경전, 지금은 대부분 페허가 되어버린 선사시대의 유적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상 그런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런 증거들 외에도 무지한 이들이라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다른 증거들도 무수히 존재한다. 동양의 신성한 책들은 그 저자들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 이후나 현대의 인물 중에서 그 저자들의 영적으로 숭고한 종교 사상, 지적으로 탁월한 철학, 폭넓고 순수한 윤리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는 이가 누구란 말인가? 그 책들 속에 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가르침, 겉모습은 다를지라도 실체는 동일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책들을 교리의 핵심 기본체라 불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는 그 기본체에 '신의 지혜'라는 이름을 붙여 그리스어로 티오소피(theosophy : 신지학)라 부른다.
모든 종교의 원천이자 근간이 되는 신지학은 그 어느 종교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종교를 정화하는 동시에, 정도를 벗어나 무지와 세력을 키워가는 미신으로 인해 해롭게 느껴지는 많은 것들의 소중한 내적 의미를 드러낸다. 하지만 신지학은 각각의 종교 안에서 신지학 고유의 가치를 인정하고 옹호하며 숨은 지혜를 꺼내보이고자 한다. 신지학을 믿는다고 해서 기독교나 불교, 힌두교에 대한 신앙을 거둘 필요는 없다.
신지학을 믿으면 자신의 신앙에 대한 통찰력이 더 깊어지고 영적 진리를 더 확실하게 파악하며 신성한 가르침을 더 폭넓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오래전 여러 종교를 탄생시켰던 신지학이 현대에 와서는 그 종교들을 정당화하고 옹호한다. 모든 종교는 신지학이라는 바위에서 잘려나간 조각이며, 신지학이라는 구덩이에서 파헤쳐진 흙이다. 신지학은 지적 비판이라는 법정에서 인간의 마음속 가장 깊은 갈망과 감정을 정당화하고, 인간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확인시켜주며 우리의 신앙을 고결하게 만들어 돌려준다.
이 말의 진실성은 세계의 다양한 경전을 연구할수록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엄청난 자료 중에 몇 가지만 있어도 사실을 밝혀내고 더 많은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이들을 인도하기에 충분하다. 종교의 중요한 영적 진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영원하고 무한하며 인지할 수 없지만 실재하는 하나의 '존재'.
- '그 존재'로부터 현현하며 단일성에서 이원성으로, 이원성에서 삼위일체로 펼쳐지는 신.
- 그렇게 현현한 '삼위일체'로부터 나타나며 우주의 질서를 안내하는 여러 영적 지성.
- 그렇게 현현한 신을 반영하기에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이며 내적 '자아'와 실제 '자아'가 영원하고 우주의 '자아'와 하나가 되는 인간.
- 여러 번의 환생을 통한 인간의 진화. 인간을 진화로 이끄는 것은 욕망이며, 인간은 지식과 희생을 통해 진화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 결과 숨어있던 인간의 신성이 힘을 발휘하게 된다.
중국의 고대 문명은 이제 화석이 되어버렸지만 오래전 그곳에는 위대한 '네 번째 민족'의 네 번째 분파 튜란족으로 가득했다. 그 튜란족은 잃어버린 대륙 아틀란티스에 거주했으며 그 후손들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중국에서는 이후에 네 번째 민족의 마지막 분파인 몽골족의 인구가 불어났고 그 결과 우리가 고대의 전통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전통은 '다섯 번째 민족'과 아리안 족이 인도에 정착하기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 '본원적 가르침'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평온과 평화의 정신을 전하는 중국의 경전『청정경(淸靜經)』(노자의『도덕경』가운데 정수를 뽑아놓은 경전으로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도사였던 갈현의 저서에 실려 있다ㅡ편집자 주)에서 우리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고대 경전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영국 선교사 제임스 레그(James Legge)는 자신의 번역서1에 다음과 같은 소개글을 실었다.
- 이 저술은 중국 오나라의 도사 갈현(葛玄) 덕분에 가능했다. 전설은 그가 '불멸'의 상태에 도달했다고 전하는데 이것은 통설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그는 기적을 행한 인물로도, 음주벽이 심한 그 나름의 괴짜였다고도 알려져 있다. 한번은 조난을 당했는데 옷이 전혀 젖지 않은 채로 물 아래에서 나타나 물 위를 마음대로 걸어 다녔다고 한다. 화창한 어느 날 마침내 그는 하늘로 올라갔다. 이 모든 이야기는 후대에 꾸며낸 상상의 산물로 보아도 무방 할 것이다.
다양한 단계의 입문자들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계속 화자되고 있는데 꼭 '상상의 산물'로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책에 대해 갈현이 직접 설명한 부분이다.
- 나는 이 경(經)을 일만 번 낭송하고서야 진정한 도를 얻었다. 이 경은 천인(天人)들이 익히는 것이라 하찮은 사람들에게는 아직 전해지지 않았다. 내가 옛적 동화제군(東華帝君)께 받고 동화제군은 금궐제군(金闕帝君)께 받고 금궐제군은 서왕모(西王母)께 받았다.
여기서 '금궐제군'이란 아틀란티스의 톨텍제국을 지배했던 입문자들에게 붙여진 호칭이었다. 이는 튜란족이 톨텍족에게서 떨어져 나올 때『청정경』이 그곳에서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생각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것은『청정경』에서 '도(道)'를 다룬 부분이다. '도'란 '길'을 의미하며 고대 튜란과 몽골 종교에서는 '하나의 실재'를 '도'로 지칭했다.
- 대도(大道)는 형태가 없으나 천지를 낳아 기르고, 감정이 없으나 해와 달을 운행케 하며, 이름이 없으나 만물을 낳아 자라게 하나니.(1장 1절)
이 '대도'는 단일체로 현현한 신이지만 이원성을 갖는다.
- 무릇 도라는 것은 맑기도 하고 탁하기도 하며 움직이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다. 하늘은 맑고 땅은 탁하며 하늘은 움직이고 땅은 고요하며 남자는 맑고 여자는 탁하며 남자는 움직이고 여자는 고요하다. 맑은 것은 내려오고 탁한 것은 밖으로 흘러 고로 만물이 생겨난다.(1장 2절)
이 구절이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자연을 활동적이고 수용적인 존재로 묘사했다는 점, 그리고 후대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분, 즉 생성자인 '영(靈)'과 양육자인 '물질' 사이의 차이를 명확하게 드러냈다는 점이다.『도덕경(道德經)』에서는 미현현한 존재와 현현한 존재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가르친다.
- 억누를 수 있는 도(道)는 오래토록 불변하는 도가 아니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오래토록 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으니 천지의 창조주고 이름이 있으니 만물의 모체로다. ··· 양상은 다르나 사실은 같은 것이며 상황이 달라지면서 다른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 둘을 신비라 칭한다.(1장 1~4, 7~8절)
카발라(유대교 오컬트ㅡ옮긴이 주)를 배우다보면 거기에서도 역시 '신성한 이름' 중 하나인 '숨겨진 신비'를 듣게 된다. 다시『도덕경』으로 돌아가 보자.
- 규정되지 않았으나 완전한 무엇이 천지가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다. 고요하고 형태가 없는 그것은 홀로 있으되 변함이 없고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었으나 고갈되지 않았으니 만물의 모체라 할 수 있겠다. 그 이름을 알 수 없으니 '도'라고 지칭하겠다. 굳이 이름을 붙여 '대(大)'라 하겠다. 대, 그것은 끊임없이 흐르며 지난다. 지나니 멀어지고 멀어지니 돌아온다.(25장 1~6절)
힌두교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는, 하나의 나아가고 다시 돌아온다는 개념을 여기에서도 보게 되니 흥미롭기 그지없다. 다음 또한 친숙한 구절이다.
- 하늘 아래 만물은 존재하며 이름을 가진 그것에서 나고 그 존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름이 없는 그것에서 난다.(40장 3~4절)
우주는 미현현자가 될 수도 있는데 이 미현현자는 이원성과 삼위일체의 근원이 되는 유일자를 탄생시킨다.
- 도(道)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으며 셋은 만물(萬物)을 낳는다. 만물은 자신이 나온 음(陰)을 떠나 자신이 모습을 드러낼 양(陽)을 향해 가지만 허공의 숨결이 이들을 조화롭게 한다.(42장 1~2절)
여기서 '허공의 숨결' 대신 '공간의 숨결'이 더 적절한 번역일 것 같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터 나오고 그것은 모든 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 대도(大道)로다! 좌에서도 우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이 없나니. ··· 만물(萬物)에 옷을 입히면서도 주(主) 노릇을 하려 하지 않으니 가장 작은 것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 있겠다. 만물이 근본으로 돌아와 사라지지만 만물을 지배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가장 큰 것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 있겠다.(34장 1,3~5절)
장자(기원전 4세기)는 고대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도'에서 탄생하는 영적 지성을 얘기했다.
- 자기 안에 뿌리와 근본을 가진 그것은 천지가 있기 전 오랜 옛날부터 엄연히 존재했나니. 그것에서 영이라는 신비로운 존재가 나왔고 그것에서 신이라는 신비로운 존재도 나왔노라.(『장자』내편, 대종사, 6장 7절)
이런 영적 지성의 이름이 여럿 나오는데 그 존재들이 중국의 종교에서 대단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으므로 다시 인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레그의 설명에 따르면, 도교에서는 인간 내부에 영혼과 정신, 육체가 모두 있다고 보아 인간을 삼위일체로 여긴다. 인간은 유일자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청정경』의 가르침에서도 이런 구분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 무릇 사람의 영혼은 맑음을 좋아하나 정신이 그것을 어지럽히고 사람의 정신은 고요함을 좋아하나 욕심이 이를 흔들리게 하나니 항상 그 욕심을 능히 쫓아내고 정신을 스스로 고요히 한다면, 탁한 정신은 걸러져 맑아지며 영혼도 스스로 맑아질 것이다. 영혼을 맑게 하지 못한 때문이니, 능히 욕심을 쫓아 보낸 사람의 인으로 그 정신을 보면 정신에는 그 정신이 없고, 밖으로 형상을 보면 형상에는 진짜 그 형상이 없으며, 멀찍이 그 물체를 보면 물체에도 그 물체가 없는 것이니.(1장 3~4절)
그러고는 '완전한 고요함의 상태'에 이르는 단계를 설명한 후 다음과 같이 묻는다.
- 그곳이 어디든 고요한 상태에 있다면 욕심이 어찌 생기겠는가? 욕심이 더 이상 생기지 않을 때 진정한 고요함이 있나니. 이 진정한 고요함은 변치 않는 성품을 얻어 외부 물체에 어김없이 응한다. 진정하고 변치 않는 성품은 자연을 소유하나니. 변치 않는 응답과 변치 않는 고요함 속에 변치 않는 맑음과 고요가 있다. 이 절대적 맑음을 가진 이가 점점 진정한 도(의 영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니.(1장 5절)
여기서 덧붙인 '영감'이라는 단어는 의미를 분명히 밝히기보다 의미를 흐리는 쪽에 가깝다. 도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도교의 전체 사상이나 다른 경전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도교에서는 욕망을 떨쳐내는 것을 매우 중요시한다.『청정경』의 어느 논평가는 도를 이해하려면 절대적으로 맑아야 한다고 말한다.
- 이 절대적 맑음에 도달하는 데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욕망을 떨쳐내는 것이다. 이는『청정경』에서 강조하는 실용적 교훈이다.
『도덕경』에서는 또 이렇게 말한다.
- 그 깊은 신비를 소리 내면 항상 무욕(無慾)으로 보일 것이고 늘 유욕(有慾)이면 그 껍데기만 보인다.(1장 3절)
환생의 경우 그 주요 개념을 당연시하거나 그 주체가 동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함을 암시하는 구절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하지만 환생은 생각보다 사람들에게 그리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듯하다.『장자』에서도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진기하고도 지혜로운 일화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죽어가는 남자에게 친구가 말했다.
- "창조주는 진실로 위대하구나! 또 그분께서 자네를 무엇으로 만들 것인가?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자네를 쥐의 간 아니면 벌레의 다리로 만드시려나?" 자래가 말했다. "부모가 동서남북 어디로 가도록 명하더라도 자식은 그저 그 명을 따라야 한다네. ··· 지금 여기 대장장이가 있어 쇠붙이를 녹여 주물로 만든다고 해보세. 쇠붙이가 용광로에서 튀어 올라 '나는 반드시 막야(鏌鎁)와 같은 명검이 되겠다'고 한다면 그 위대한 창조자는 이상한 쇠붙이라고 생각할 것이네. 이제 자궁이라는 틀에서 형체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그 형체가 '나는 꼭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면 그 창조자는 이상한 형체라고 생각할 것이네. 천지를 커다란 용광로로 삼고 창조자를 위대한 조물주로 삼았으니 우리가 가지 못할 곳이 어디겠는가? 조용히 잠들었다가 태어나고, 죽은 후에 고요하게 깨어날 뿐이네."(『장자』내편 대종사, 6장 12절)
다섯 번째 민족, 아리안 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아리안 족의 가장 오래되고 위대한 종교 브라만교(고대 인도에서『베다』경전을 근거로 성립된 종교로서 힌두교의 전신ㅡ옮긴이 주)에서도 같은 가르침을 발견한다.『찬도기야 우파니샤드』는 영원한 존재를 '둘도 없는 유일자'라고 칭하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 나는 우주를 위해 많아지리라!(6장 2편 3절)
지고의 로고스(보편적 법칙과 분별 및 이성을 뜻함ㅡ옮긴이 주)인 브라만은 존재, 의식, 지복의 삼위적 존재이다.
- 이것(브라만)에서 생명이, 정신이, 모든 감각이, 에테르가, 공기가, 불이, 물이, 모든 것을 지탱하는 흙이 생겨난다.(『문다카 우파니샤드』2장 1편 3절)
힌두교 경전보다 신성에 대해 더 웅장하게 설명한 경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 설명은 이미 잘 알려져 있기에 간략하게만 인용해도 충분할 것이다. 다음은 그 웅장한 설명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움직이고 숨 쉬고 눈을 감은 모든 것이 비밀스러운 곳에서 현현하여 가까이 움직이며 이 위대한 동굴에서 휴식을 취하노니, 숭앙받고자 한다면 이를 알아라, 존재와 비존재, 모든 생명체의 앎을 뛰어넘어 가장 뛰어난 것을, 빛나는 것을, 세계와 그 안의 생명체들이 자리 잡은 미묘한 것보다 더 미묘한 것을, 이것이 바로 불멸의 브라만임을, 그리고 생명과 목소리와 정신임을. ··· 황금의 가장 높은 돌담 속에 티끌도 부분도 없는 브라만이 있나니. 그것은 빛 중의 순수(純粹)한 빛, 자아를 아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것이다. ··· 불사(不死)의 브라만이 동에도 앞에도 뒤에도 좌로도 우로도 위로 아래로 모든 곳에 있다. 이 브리만이 진정 모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이다.(『문다카 우파니샤드』2장 2편 1~2, 10, 12절)
- 우주를 넘어서는, 지고의 존재, 위대한 존재, 몸에 따라 모든 것에 감춰진 존재, 전체 우주의 유일한 숨결, 그를 아는 인간은 죽지 않는 주(主) 브라만, 나는 강력한 영, 어둠을 넘어서 빛나는 태양을 아네. ··· 나는 빛이 바래지 않는 존재, 고대의 존재, 모든 것의 혼, 본성에 따라 어디에나 존재하는 존재, 브라만을 아는 이들이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존재, 그들이 영원하다고 말하는 존재를 아노라.(『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3장 7~8, 21절)
- 어둠이 없을 때 낮도 없고 밤도 없으며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노라. 멸할 수 없고 싸비트리의 숭앙을 받으며 고대의 지혜를 탄생시킨 오직 쉬바만이 홀로 존재한다. 그는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가운데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니. 무한한 영광이라는 이름의 그에게 형상은 없도다. 그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누구도 그를 눈에 담지 못하노라. 가슴에 머무는 그를 가슴으로 정신으로 아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니.(『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4장 18~20절)
내면의 자아(self) 안에 있는 인간이 우주의 자아를 가진 인간 ㅡ "내가 그것이다" ㅡ 이라는 개념은 모든 힌두교 사상에 깊이 스며들어 있어서 인간은 '브라만의 신성한 마을'2, '아홉 개의 문이 있는 마을'3, '심장의 구멍 속에 머무는 신'4으로 일컬어지곤 한다.
- 증명할 수 없으며, 영원하고 티끌이 없으며, 에테르보다 높고 태어나지 않은 존재, 위대하고도 영원한 혼을 한 가지 방법으로 볼 수가 있으니. ··· 이 위대하고도 태어나지 않은 혼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 속에 지적 혼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도다. 그는 자기 안에서 잠자고 만물의 정복자이자 만물의 지배자이며 만물의 제왕이시니. 그것은 선행에 의해 늘어나지도 악행에 의해 줄어들지도 않노라. 그것은 만물의 지배자이자 모든 존재의 제왕이자 모든 존재의 보호자이며, 여러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다리이자 제방이로다.(『브리하다라냐카 우파니샤드』4장 4편 20, 22절)
신이 우주를 진화시키는 존재로 여겨질 때 그 삼위적 존재는 쉬바, 비슈누, 브라흐마(이상은 힌두교의 3대 신으로 쉬바는 파괴 및 재생의 신, 비슈누는 유지와 자애의 신, 브라흐마는 창조의 신ㅡ옮긴이 주)로, 또는 물 아래 잠자고 있는 비슈누, 그에게서 뻗어 나오는 연꽃, 연꽃 안에 앉아 있는 브라흐마로 아주 분명하게 묘사된다.
인간도 이처럼 삼위적이다.『문다카 우파니샤드』에서는 자아가 육체(physical), 미묘체(subtle body), 멘탈체(mental body)의 영향을 받으면 모든 것에서 빠져나와 '이원성'이 없는 유일자가 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트리무르키(삼위일체)에게서 여러 신이 생겨나 우주를 운영하는 존재와 연결되는데, 이에 대해서는『브리하다라냐카 우파니샤드』에 나와 있다.
- 그를 흠모하라. 신들이여. 그를 따라 날이 지나고 해가 지나노니. 빛 중의 빛, 불사의 생명.(4장 4편 16절)
브라만교에서도 환생에 대해 가르친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브라만교의 삶에 대한 철학 전체가 여러 번의 탄생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혼의 순례를 중심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책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인간은 욕망 때문에 이 변화의 수레바퀴에 얽매이게 되며 따라서 지식과 헌신, 그리고 욕망의 파괴를 통해 그 수레바퀴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신을 아는 혼은 해방된다."5 "앎으로 정화된 지성은 그를 본다."6 "헌신과 연결된 앎은 브라만이 머무는 곳을 찾는다."7 "브라만을 아는 누구든 브라만이 된다."8 "욕망이 그치면 죽을 운명의 존재도 불사가 되고 브라만을 얻는다."9
현존하는 북방불교는 고대의 신앙에 더 가까운 반면, 남방불교는 유일한 존재로부터 논리적 삼위일체가 나와서 고대 신앙의 근원이 되었다는 입장을 포기한 둣하다. 로고스는 세 가지 모습으로 현현한다. 첫 번째 모습은 아미타불(한없는 빛)이고 두 번째는 관음보살(아발로키테쉬바라) 또는 연화수보살(파드마파니)이다. 세 번째는 "브라흐마에 해당하며, 창조적 지혜를 상징"(아이텔의『산스크리트-중국어 사전』에서 해당 단어 참조)하는 문수보살이다. 한편, 중국 불교에는 로고스를 초월하는 '태초의 존재'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네팔 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을 탄생시킨 본초불(아디붓다)이 있다고 믿는다. 아이텔은 연화수보살이 연민어린 신의 섭리를 대표하며 쉬바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불교의 삼위일체 중 환생을 담당하는 연화수보살은 오히려 비슈누에 가까운 개념인 것 같다. 연화수보살은 연꽃(불과 물, 혹은 우주의 근본 요소인 영(靈)과 물질)을 떠받침으로써 비슈누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환생과 카르마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근본 원리이기에, 굳이 그 개념들에 대해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환생과 카르마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살펴볼만하다. 또 부처는 힌두교도였고 힌두교도들을 대상으로 가르침을 전했으므로 부처의 가르침 속에서 브라만교 교리가 당연시되었다는 점도 언급해두는 것이 좋겠다. 부처는 정화와 개혁을 주장하긴 했지만 우상을 파괴하라고 외치지는 않았다. 또한 부처가 반대한 것은 고대의 지혜에 속하는 근본 진리가 아니라 무지로 인해 후대에 덧붙여진 교리였다.
- 잘 배운 법칙에 따라 걷는 이들은 건너기 힘든 탄생과 죽음의 거대한 바다를 건너 반대쪽 해안에 도달하나니.(『우다나바르가』29장 37절)
욕망은 인간을 옭아매므로 반드시 버려야만 한다.
- 축복받은 분이 말씀하시니 욕망의 족쇄에 얽매인 이는 그 족쇄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도다. 욕망이 선사하는 행복을 좋아하지 않는 한결같은 이들이 그 욕망을 떨치고 (열반으로) 향하노라. ··· 인간의 욕망이 한결같이 지속되는 일은 없으니 욕망은 그것을 경험하는 이들 안에서 영원하지 않다. 그렇다면 너희는 지속되지 않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죽음이 머무르지 않는 곳에 머무르라.(『우다나바르가』2장 6, 8절)
- (속세의) 재산과 죄악에 대한 욕망을 버린 이, 육체의 눈의 굴레에 대한 욕망을 떨쳐낸 이, 욕망을 뿌리째 뽑아버린 이가 바로 브라마나(바라문)이도다.(『우다나바르가』33장 68절)
그리고 브라마나는 '변치 않는 육체를 가진'10 인간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 자신이 예전에 머물던 곳(존재)을 알기에 천국과 지옥을 인지하며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방법을 찾은 현자.(『우다나바르가』33장 55절)
구약성서를 보면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강조되지 않는다. 반면, 이원성은 분명히 드러나며 여기사 말하는 신은 유일한 미현현자가 아닌 로고스이다.
- 내가 주(主)이니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을 만들고 어둠을 창조하며, 평화를 만들고 악을 창조하나니, 나는 이 모든 것을 행하는 주이니라.(이사야서 45장 6~7절)
그러나 유대계 신학자 필론의 로고스 교리는 매우 명확한데 이는 제4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셨으니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도다.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 그에게 말미암지 않고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도다.(요한복음 1장 1, 3절)
카발라에서는 제1세피로트(케테르), 제3세피로트(비나), 제7세피로트(네쳐)와 그 밖의 많은 것들에 대한 교리를 있는 그대로 가르친다.
- 고대인 중 고대인, 미지의 존재 중 미지의 존재는 형태를 갖는 동시에 아무런 형태도 갖지 않노라. 우주는 그 존재가 가진 형태를 통해 유지되노라. 그러면서도 그 존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기에 아무런 형태를 갖고 있지 않도다. 그 존재가 최초로 이 형태를 갖게 되었을 때(케테르, 왕관, 첫 번째 로고스) 그로부터 아홉 개의 찬란한 빛(지혜와 목소리가 케테르와 함께 삼중체를 만든 후 일곱 개의 하위 세피로트를 형성)이 나아가도록 하였노라. ··· 그것은 고대인 중의 고대인, 신비 중의 신비, 미지의 존재 중 미지의 존재이도다. 그것은 그것에 속하는 형태를 가지는데 이는 그것이 무엇보다 옛사람으로, 고대인 중의 고대인으로, 미지의 존재 중 가장 미지의 존재로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니라.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그 형태를 유지하는 한 계속 미지의 존재로 남느니라.(아이작 마이어(Isaac Myer)의『카발라(Qabbalah)』에서『조하르(Zohar: 카발라의 경전ㅡ옮긴이 주)』를 인용한 부분, pp.274, 275)
마이어는 그 '형태'가 '모든 고대인 중의 고대인', 즉 아인 소프(Ain Soph : 카발라에서 말하는 무한한 존재이자 그 자신이 전부인 존재ㅡ옮긴이 주)는 아니라고 지적한다.
다시 그의『카발라』로 돌아가 보자.
- 세 개의 빛이 하나로 합쳐져 신성한 높은 곳에 있어 토라(모세오경을 적은 두루마리ㅡ옮긴이 주)의 근간을 이루며 모든 것으로 통하는 문을 여노라. ··· 와서 보라! 말슴의 신비를. 이 빛들은 세 단계로서 각각 홀로 존재하지만 결국은 하나이며 하나로 묶여 있어 서로 떨어지지 않노라. ··· 셋은 하나에서 나오며 하나는 셋 안에 존재하고 둘 사이에 힘이 있어 둘이 하나를 키우고 하나가 여럿을 키우니 결국 모두가 하나이니라.(마이어의『카발라』, pp.373, 375, 376)
히브리인들이 여러 신 ㅡ "주여, 신 가운데 주와 같은 이 누구입니까"11 ㅡ 과 많은 보좌관들('신의 아들', '주의 천사')에 대한 교리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조하르』에서는 우주의 시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 태초에 모든 존재에 앞서 왕의 의지가 있었으니 모든 존재는 이 의지에서 나와 존재하게 되었도다. 의지는 숨어 있다가 사분면(신성한 티트락티스)의 지대하고도 눈부신 빛 속에서 현현하게 되는 모든 것들의 형태를 그리고 새겼노라.(마이어의『카발라』, pp.194~195)
신성이 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환생의 경우, 영혼이 땅에 내려오기 전에 신의 생각 속에 존재한다고 한다. 시험을 당하는 중에도 영혼이 순수함을 유지한다면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듯하다. 마이어의『카발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모든 영혼은 순환을 맞이하지만 인간은 신성한 자가 뜻하는 방식을 알지 못하나니. 인간에게 축복을! 인간은 이 세상에 오기 전에도,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언제나 자신에 대해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지 알지 못하노라.(마이어의『카발라』, pp.198)
이러한 믿음은 엘리야가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과 엘리야가 세례 요한으로 돌아왔다는 믿음이 보여주듯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잘 나타나 있다.
잠깐 이집트로 가보면 우리는 태곳적 이집트 신화에서 라, 오시리스-이시스(이원적인 두 번째 로고스), 호루스로 이루어진 삼위일체를 발견한다. 아몬 라에게 바치는 위대한 찬가는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 신들이 자신을 낳은 이의 영혼을 칭송하고 주 앞에서 절하며 ··· 말하노라. 신들의 의식적인 아버지들의 무의식적인 아버지로부터 나온 모든 이에게 평화를 ··· 존재를 창조하신 주여, 저희는 당신에게서 나온 영혼들을 흠모합니다. 저희의 아버지이신 당신, 오, 알 수 없는 당신. 저희는 당신에게서 내려와 저희 안에 사는 모든 신-영혼을 숭배하며 당신을 맞이합니다.(『시크릿 독트린』3권 p.486에서 인용)
여기서 '신들의 의식적인 아버지들'은 로고스이고 '무의식적인 아버지'는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유한한 것보다 결코 덜 무의식적이지 않고 무한하게 더 무의식적인 유일한 존재를 말한다.『(이집트) 사자의 서』에서는 인간의 영혼이 환생하면서 순례의 길을 떠나 궁극적으로 로고스와 하나가 된다는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유명한 '아니의 파피루스'에도 다른 종교 경전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많이 등장한다. 지하세계로의 여행, 자신의 몸으로 다시 들어가리라는 예상(이집트인들이 생각했던 환생의 형태), 로고스와의 일체화 등.
- 사이스 오시리스 아니가 낭송하노니, 나는 위대한 유일자, 위대한 유일자의 아들입니다. 나는 불, 불의 아들입니다. ··· 나는 나 자신을 하나로 결합했고 나 자신을 온전하고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젊어졌으니 나는 영원의 주(主) 오시리스입니다.(『사자의 서』43장 1, 3절
피에레트(Pierret)가 쓴『사자의 서』교정본에는 충격적인 구절이 나온다.
- 나는 수백만 년 동안 머물 곳을 준비한, 신비로운 이름의 존재입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내 심장은 내가 지상에서 존재히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 어머니에게서 받은 내 심장은 나의 탈바꿈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pp.113, 114)
조로아스터교에서도 '유일한 존재'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끝없는 공간'의 모습을 한 로고스, 즉 창조자 아후라 마즈다에게서 태어난다.
- 전지전능하고 가장 높으며 선하고 그 무엇보다 훌륭한 빛의 종교는 아후라 마즈다가 머무는 곳이니라.('분다히스',『동양의 성서』5권 3편)
조로아스터교의 가장 중요한 전례 '야스나'에서는 아후라 마즈다에게 가장 먼저 경의를 표한다.
- 창조주이시며 환희 빛나시고 영광이신 분, 가장 위대하시고 가장 좋으신 분, 가장 아름답고 가장 확고하시며 가장 현명하신 분, 육체가 가장 완벽하시고 온당한 질서에 따라 가장 과오 없이 목적을 이루시는 분, 우리의 마음을 올바르게 인도하시는 분, 기쁨을 주는 은총을 멀리까지 보내시는 분,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빚으신 분, 우리를 키우시고 보호하신 분, 영혼이 가장 너그러우신 분,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합니다.(『동양의 성서』31권 pp.195~196)
아후라 마즈다를 찬양한 후에는 아메샤 스펜타(아후라 마즈다의 여섯 천사장ㅡ옮긴이 주)와 다른 신들을 경배하지만 여기서는 현현한 지고의 신 로고스를 삼위일체로 여기지 않는다. 히브리인들과 마찬가지로 대중 신앙 속에서도 이런 근본적인 진리는 보이지 않았다. 비록 후대에 대중 신앙 속에서 사라지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초기의 가르침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하우그 박사(Dr. Haug)의『파시 교도에 대한 에세이(Essays on the Parsis)』(웨스트 박사(Dr. West)가 번역, 트뤼브너(Trubner)의 동양 시리즈 중 5권에 해당)를 보면 아후라 마즈다는 지고의 존재이며 그로부터 다음의 것들이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 서로 다르지만 하나가 되어 물질세계와 영혼세계를 만들어낸 태고의 씨앗 두 개.(pp.303)
이 두 씨앗은 쌍둥이로 불리었고 모든 곳에, 비단 아후라 마즈다 뿐 아니라 인간 안에도 있다. 하나는 실제를 낳고 다른 하나는 비실재를 낳으며 이 둘은 이후에 조로아스터교에서 서로 대립하는 선과 악의 영이 된다. 초기 가르침에서 이 둘은 이원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제2의 로고스를 이루었다.
'선'과 '악'은 그저 빛과 어둠이자 영혼과 물질, 우주의 근원적인 '쌍둥이'이며 유일자에게서 나온 둘에 불과하다.
하우그 박사는 후기의 교리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것이 바로 신성한 존재의 두 부분을 이루는 두 개의 창조적 영혼에 대한 조로아스터교의 초기 관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위대한 창조주에 대한 이런 교리는 바뀌고 타락하여 오해와 그릇된 해석을 낳았다. 스펜타 마이뉴('좋은 영')는 아후라 마즈다의 이름으로 여겨진 반면, 앙그라 마이뉴('나쁜 영')는 아후라 마즈다와 완전히 분리되어 아후라 마즈다와 끊임없이 대적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선과 악의 이원론이 탄생한 것이다.(p.205)
이러한 하우그 박사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바로『아후나 바이티 가타스(조로아스터교 경전 아베스타에 남아 있는 조로아스터의 송가ㅡ옮긴이 주)』를 비롯하여 대천사가 조로아스터에게 건네주었다는 송가들이다.
- 태초에 쌍둥이인 두 영(靈)이 있어 둘은 기이한 행동을 보였나니, 이 둘이 바로 선과 악이로다. ··· 이 두 영이 하나가 되어 최초의 물질을 창조했으니 바로 실재와 비실재이니라. ··· 그리하여 이 생명을 구하고자 아르마이티(조로아스터교의 여신으로 경건, 긍휼, 사랑을 상징ㅡ옮긴이 주)가 부와 선,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오셧나니. 영원히 살아계시는 아르마이티께서 물질세계를 창조하셨도다. ··· 가장 훌륭한 존재들, 선하고 진실되고 지혜로운 신들이 아름답게 계시니 모든 완벽한 것이 모여들도다.('야스나' 3, 4, 7, 10절: 하우그 박사의 번역본 pp.149~151)
여기서도 세 로고스를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로고스는 지고의 생명 아후라 마즈다, 둘째는 아후라 마즈다에게서 나온 쌍둥이, 셋째는 우주의 창조자이자 정신인 아르마이티12이다. 이후에 미트라(고대 아리아인의 남신으로 빛, 진실, 맹약을 지배한다고 여겨짐ㅡ옮긴이 주)가 등장하면서 대중 신앙 속에서는 초기의 진리가 어느 정도 흐려진다. 미트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전해진다.
- 아후라 마즈다에 의해 창조되어 이 움직이는 세상 모두를 굽어 살피시는 분. 잠도 자지 않고 언제나 깨어 있어 아후라 마즈다의 창조물을 지키시는 분.(『동양의 성서』18권 '미히르 야스트' 27장)
미트라는 하늘의 빛으로 아후라 마즈다보다 낮은 하위신이었고 바루나는 하늘 그 자체로서 위대한 지배 지성 중 하나였다. 이 지배 지성 중에서 가장 높은 이들이 여섯 명의 아메샤 스펜타인데 이들을 이끄는 것이 바로 아후라 마즈다의 선한 생각, 즉 보후마나이다.
- 창조된 물질 전부를 책임지는 존재(『동양의 성서』5권 p.10 주석)
이제까지 나온 이 책의 번역본에서는 환생이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요즘 파시 교도들도 환생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인간 안의 영(靈)이 불꽃이 되어 불길이 되었다가 지고의 불과 하나가 된다는 관념은 발견된다. 이 관념을 따르자면 인간은 진화를 위해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우리가 조로아스터교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먼저『칼데아 성서』와 관련 글을 복구해야 할 것이다. 조로아스터교가『칼데아 성서』에 진정한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서쪽으로 이동해 그리스로 가면 우리는 영국의 저술가 G. R. S. 미드(Mead)가『오르페우스(Orpheus)』에서 풍부한 자료와 함께 설명한 오르페우스 밀교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유일한 존재에게 주어진 이름은 '형언할 수 없고 누구도 알 수 없는 어둠'이었다.
- 오르페우스 신학에 따르면 모든 것은 하나의 엄청난 원칙으로부터 탄생한다. 그 원칙은 완벽하게 형언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우둔하고도 빈곤한 인간의 관념을 통해 그 원칙에 이름을 붙인다. 이집트인들의 경건한 언어로 '누구도 알 수 없는 어둠'이라 부르는데 이것을 묵상하다보면 모든 앎이 무지로 바뀐다.(토마스 테일러(Thomas Taylor),『오르페우스』p.93에서 인용)
이로부터 '태고의 3개조'라 불리는 보편적 선, 보편적 영혼, 보편적 정신이 나오는데 이는 역시 로고스 삼위일체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미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지성을 가진 자에게 현현하는 첫 번째 3개조는 단지 현현할 수 없는 자의 그림자나 대채자일 뿐이다. 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것은 절대적 본질인 선(善), 스스로 움직이는 본질인 영혼(세계 영혼), 분리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본질인 지성(정신)이다.(『오르페우스』p.94)
영광이 쇠퇴하는 가운데 이후 3개조들은 첫 번째 3개조의 특징을 잃지 않고 계속 이어져 결국 인간에까지 이르게 된다.
- 인간은 자신 안에 우주의 합과 실체를 가지고 있다. ··· "인간과 신은 하나의 종족이다."(피타고라스 학설의 신봉자였던 핀다로스, 클레멘스(Clemens)가『스트롬(Strom)』5권 p.709에서 인용) ··· 그러므로 인간을 우주 또는 큰 세계와 구분하기 위해 소우주 또는 작은 세계라 불렀다.(『오르페우스』p.271)
인간은 누스(진정한 정신), 로고스(이성적인 부분), 알로고스(비이성적인 부분)를 가지고 있다. 이 중 로고스와 알로고스는 이후에 다시 3개조를 형성하여 보다 정교한 7중 구조를 나타낸다. 인간은 육체와 미묘체, 영광체(靈光體)라는 세 가지 매개체(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 영광체는 '코잘체(causal body)' 또는 혼의 업보 껍데기를 말하며 그 안에는 그 혼의 운명, 다시 말해 과거의 인과관계로 인해 생긴 모든 씨앗이 저장되어 있다. 이 코잘체는 '혼줄'이며 다음 생으로 환생할 때 전해지는 '몸'이다.(『오르페우스』p.284)
환생에 대해서는 이렇게 전한다.
- 모든 땅에서 신비를 추종하는 이들 모두와 함께 오르페우스교도들은 환생을 믿었다.(『오르페우스』p.292)
미드는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증거를 제시하면서 플라톤, 엠페도클레스, 피타고라스 등 많은 학자들이 환생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인간은 오직 미덕을 통해서만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테일러는『플로티노스 선집』의 주석에서 다마스키오스의 말을 인용해 유일자를 초월하는 유일자, 즉 미현현한 존재에 대한 플라톤의 가르침에 대해 적었다.
- 아마도 플라톤은 우리가 유일자를 매개로 하여 지금 얘기하고 있는, 유일자를 초월하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에게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플라톤이 다른 것들을 제거하여 유일자에게로 인도하는 것과 똑같이 유일자를 제거하여 유일자를 초월하는 유일자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 유일자를 초월하는 존재는 가장 완벽한 침묵 속에서 찬양될 것이다. ··· 유일자는 다른 누구도 없이 홀로 존재하고자 하지만 유일자를 초월하는 미지의 존재는 전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그를 알지도 모르지도 않음을 인정하지만 그 존재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유일자는 이 정도로 어두워져있다. 엄청난 원리에 가까워져, 만일 그것이 적법하다면, 진정한 신비의 침묵이 감도는 가장 신성한 곳이 머문다. ··· 첫 번째 존재는 유일자와 모든 것의 위에 있고 유일자나 모든 것보다도 더 단순하다.(pp.341~343)
피타고라스학파, 플라톤학파, 신플라톤학파는 힌두교나 불교의 사상과 맞닿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서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독일의 인도학자 가르베(Garbe)는 저서『상키야 철학』에서 여려 공통점들을 제시했는데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우파니샤드와 엘레아학파의 이론에서 등장하는 유일자의 교리가 너무나 비슷하다는 ㅡ 더 정확하게 말하면 똑같다는 ㅡ 사실이다. 엘레아학파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그리스 철학자 크세노파네스가 말한 신과 우주의 단일성과 유일자의 불변성도 그렇고, 실재란 태어나지도 않았고 파괴할 수도 없으며 어디에나 존재하는 유일자에 의해서만 가능한 반면, 여러 개로 존재하면서 쉽게 변하는 것은 모두 외형일 뿐이며, 존재와 사고(思考)는 같은 것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도 그렇다.
이런 교리들은 우파니샤드에 근원을 둔 베단타 철학뿐 아니라 우파니샤드의 핵심 내용과도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앞선 탈레스의 관점, 즉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에서 나왔다는 주장은 우주가 물로부터 탄생했다는 바이디카 교리와 신기하게도 비슷하다. 이후에 아낙시만드로스는 영원하고 무한하며 규정되지 않은 실체가 모든 것의 근간이 되어, 그 실체로부터 모든 유한한 실체가 나왔다가 다시 돌아간다고 보았다.
이런 주장은 상키아학파의 근본 원리, 즉 '프라크리티'라는 근본 물질이 우주의 모든 물질이 진화하는 시발점이 된다는 논리와 동일하다. 또한 '모든 것은 흐른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유명한 경구도, 모든 것은 프라크리티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의 끊임없는 활동 속에서 계속 변하고 있다는 상키야학파의 대표적 관점을 잘 보여준다. 엠페도클레스도 상키야학파의 주장과 사실상 다를 바 없는 환생과 진화의 이론을 내세운다. 게다가 이미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의 이론은 상키야학파의 특징적인 교리와 더욱 일치한다.
아나크사고라스와 데모크리토스도 몇 가지 측면에서 상키야학파의 이론과 매우 흡사한데 특히 신의 본성과 위치에 대한 데모크리토스의 관점이 그렇다. 세부적으로 들어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몇몇 부분에서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이론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는 것은 피타고라스의 가르침과 주장이다. 이는 피타고라스가 전통에 따라 직접 인도를 찾아가 철학을 배웠다는 사실로 설명이 가능하다.
후대에 이르면 상키야학파와 불교만의 독특한 개념이 그노시스 사상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가르베가 p.97에서 인용한 라슨(Lassen)의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영(靈)과 빛을 확실하게 구분하지만 빛이 실체가 없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빛에 대한 입장은 그노시스파의 입장과 상당히 가깝다. 이 관점에서는 빛이 물질로 현현한 영이라고 본다. 따라서 빛의 옷을 입은 지상은 물질과 관계를 맺게 되고 그 관계 속에서 빛은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 희미해져버리기도 한다. 이런 경우 지성은 결국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로 빠지게 된다. 최고의 지성은 빛도 아니고 빛이 아닌 것도 아니며 어둠도 아니고 어둠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모든 표현은 빛과 지성의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빛은 처음에는 이런 관계에서 자유로웠다가 나중에 지성을 둘러싸면서 지성과 물질과의 관계를 조정하게 된다. 그 결과 불교에서는 최고의 지성이 빛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보며 이런 측면에서 불교와 그노시즘(Gnosticism: 영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靈知主義)'라고도 함ㅡ옮긴이 주) 사이에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가르베는 앞에서 언급한 특징이 그노시즘과 불교보다는 그노시즘과 상키야학파 사이에서 더 많이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빛과 영의 관계에 대한 그노시즘과 상키야학파의 이러한 관점이 후대의 불교 사상에 더 가까운데다, 불교 사상의 핵심이나 주요 특징에 해당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상키야학파에서는 영이 빛이라는 점을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가르친다. 그리고 이후로 가면 신플라톤학파의 저자들이 상키야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로고스나 말씀에 대한 교리는 비록 상키야학파에 뿌리를 두고 있지는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인도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인도의 경우 바치(신성한 말씀)에 대한 개념이 브라만교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노시즘, 신플라톤학파와 같은 시대에 발생한 기독교로 넘어가면 이제는 우리에게 친숙해진 여러 기본 교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삼위적 로고스는 삼위일체로, 첫 번째 로고스는 모든 생명의 원천인 성부, 이중적인 두 번째 로고스는 성자 혹은 그리스도, 세 번째 로고스는 혼란의 바다에 대한 생각으로 세상을 만들어낸 창조적 정신 혹은 성령으로 나타난다.
그 다음으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일곱 영'13과 수많은 대천사와 천사이다. 모든 것의 근원이자 종착지인 유일한 존재에 대해서는 설명이 거의 없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박사들은 불가해한 신성, 즉 이해할 수 없고 무한하기에 유일하고 부분이 없는 존재가 있다고 상정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14 만들어졌기에 본질적으로 영, 혼, 몸15의 삼중적 구조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머무는 처소'16이자 '하나님의 신전'17이며 '성령의 신전'18이다. 이런 구절들은 힌두교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지 않다. 환생에 대한 교리를 명시적으로 가르치지는 않지만, 신약성서에서는 당연하게 여기는 부분도 있다.
예수가 세례 요한에 대해 얘기하면서 '오기로 한'19 엘리야라고 선언한 부분과 말라기의 말을 인용하여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20라고 말한 부분이 그 예다.
또한 메시아보다 먼저 오는 엘리야에 대해 질문을 받은 예수는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21고 답한다. 또한 제자들이 태어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은 죄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이냐고 물었을 때, 태어나기 전부터 죄가 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특별한 경우에만 맹인이 되는 것이라고 한정지은 예수의 대답22에서도 환생의 개념을 당연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3장 12절에 나오는 놀라운 구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는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몇몇 기독교 성직자들의 글에서도 환생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훌륭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영혼의 선재(先在)를 가르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우주에 대한 개념, 그리고 몸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와 보다 고차원적인 세계에서 자유를 누린 이들의 경험이 여러 종교 사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에 못지않게 놀라운 것은 도덕적 가르침 또한 비슷하다는 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런 태곳적 가르침이 지정된 관리인들에게 맡겨졌고 이 관리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직접 가르치는 학파와 자신들의 교리를 공부하는 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러 학파의 도덕적 가르침,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규율, 제자들이 도달하게 되는 정신적ㆍ영적 상태를 연구해 보면, 이런 학파들 간의 동일성과 그 계율 간의 동일성은 더욱 두드러진다.『도덕경』에서는 학자들의 유형을 신랄하게 구분해놓았다.
- 최고층의 힉자는 도를 들으면 열심히 행한다. 중간층의 학자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한다. 최하층의 학자는 도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동양의 성서』에서『도덕경』41장 1절을 인용)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도 발견할 수 있다.
- 현자는 자기를 가장 마지막에 두지만 가장 앞에서 보이고, 자기를 낯설게 대하지만 그 자기가 보존되노라. 그가 뜻을 이루는 것은 그 뜻이 자기를 위함이 아니기 때문 아닌가?(7장 2절)
-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니 빛나고, 자기가 옳다고 하지 않으니 두드러지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니 남에게 인정받고, 자족하지 않으니 우월해지도다. 세상에 그와 겨룰 자가 없는 것은 그가 겨루려 하지 않기 때문이니.(22장 2절)
- 죄는 야망을 허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화는 족함을 모르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허물은 가지려는 욕심보다 더한 것이 없도다.(46장 2절)
- 나에게 선한 자에게 나는 선하고, 나에게 선하지 않은 자에게도 나는 선하도다. 그러므로 모두가 선해지나니. 나에게 진실한 자에게 나는 진실하고, 나에게 진실하지 않은 자에게도 나는 선하도다. 그러므로 모두가 진실해지나니.(49장 2절)
- 자기 안에 도의 본성을 후하게 품은 자는 갓난아기와 같도다. 독이 있는 벌도 그를 쏘지 않고 사나운 맹수도 그를 붙잡지 않으며 사나운 날짐승도 그를 덮치지 않나니.(55장 1절)
- 나는 세 가지 보배가 있어 귀하게 여기고 굳게 지키노라. 첫째는 자애이고 둘째는 검소함이고 셋째는 남들을 앞서려 하지 않음이다. ··· 자애란 전쟁에서도 이기고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도다. 하늘이 자애로운 자를 구할 때 그 자애가 그를 보호할 것이니.(67장 2, 4절)
힌두교도 중에서도 특별 교육을 받을만한 자질을 갖춘 일부 학자는 지도자로부터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올바른 삶에 대한 일반적인 규칙은『마누법전』,『우파니샤드』,『마하바라타』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도 찾을 수 있다.
- 진실을 말하고 듣기 좋게 말하며 듣기에 좋지 않더라도 진실만을 말하되, 듣기에 좋더라도 진실이 아닌 것은 말하지 말라. 이것이 영원한 법칙이다.(『마누법전』4장 138절)
- 어떤 생명체에게도 고통을 주지 말고 차곡차곡 공덕을 쌓게 하라.(4장 238절)
- 창조물에 아주 작은 위험도 가하지 않는 재생자는 육신에서 해방된 후 위험할 것이 없다.(6장 40절)
- 거친 말을 참아내고, 어느 누구도 모욕하지 않으며, 결국은 소멸할 자신의 육체를 적으로 만들지 말라. 화난 자에게 화로 대응하지 말며, 저주의 말에는 축복으로 대응하라.(6장 47~48절)
- 애욕과 공포와 분노에서 벗어나 나를 생각하고 나를 의지하며 지혜의 불 속에서 정화를 이룬 많은 이들이 나의 존재 속에 이르렀노라.(『바가바드 기타』4장 10절)
- 지고의 환희는 마나스가 평화롭고 애욕이 가라앉았으며 죄가 없고 브라만의 성품을 가진 이 요기를 위한 것이니.(6장 27절)
- 어느 존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으며 친절하고 자비로우며 일체의 산 물건에 대해 악의를 품는 일이 없고, 그저 우애하고 자비스러우며, 애착도 이기심도 없으며, 즐거움과 고통이 조화를 이루며, 용서하고 항상 만족스러우며, 자신을 제어하고 조화를 이루며, 결의가 있으며, 마나스와 붓디를 내게 바치는 이. 나에게 헌신하는 이. 나는 그를 소중히 여기노라.(12장 13~14절)
불교로 가보면 부처와 함께 했던 아라한들에게 부처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문헌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 현명한 이는 성실과 미덕, 순수를 통해 어떤 홍수에도 잠기지 않는 섬이 되나니.(『우다나바르가』4장 5절)
- 이 세상에서 현명한 이는 믿음과 지혜를 고수하며 이 믿음과 지혜가 그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로다. 그런 이는 다른 모든 재물을 멀리하노라.(10장 9절)
- 악의를 가진 이에게 악의를 품는 이는 결코 순수할 수 없지만, 악의를 품지 않는 이는 미워하는 이들의 마음을 달래노라. 미움은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오나 현자는 미움을 알지 못하나니.(13장 12절)
- 화를 내지 않음으로써 화를 이기고 선으로써 악을 이기며 관대함으로써 탐욕을 이기고 진실로써 거짓을 이기라.(20장 18절)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아후라 마즈다를 찬미하도록 가르친다.
- 공정한 것, 순수한 것, 멸하지 않는 것, 빛나는 것, 이 모든 것은 선하도다. 우리는 선한 영을 숭앙하고 선한 왕국을 숭앙하며 선한 법과 선한 지혜를 숭앙하노라.(야스나 37장)
- 순수한 만족과 축복, 성실과 지혜가 이렇게 머물도록 하소서.(야스나 59장)
- 순수는 최고의 선이도다. 행복, 행복은 그분이시며 순수 중에서도 최고의 순수이니라.(아솀 보후)
- 모든 선한 생각, 말, 일은 알면서 하는 것이니라. 모든 악한 생각, 말, 일은 알지 못하고 하는 것이니라.(미스파 쿠마타) - 둔지브호이 잠셋지 메도라의『고대 이란과 조로아스터의 도덕』중 '아베스타'에서
히브리인들에게는 '예언자 학파'와 카발라가 있었는데, 우리는 대중 경전에서 히브리인들이 널리 받아들였던 도덕적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
- 주의 언덕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신성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깨끗한 손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로다. 혼을 헛된 곳으로 올리지 않고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은 이로다.(시편 24장 3~4절)
- 주께서 내게 구하시는 것은 정의롭게 행동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너의 하나님과 걸어가는 것 아니겠느냐?(미가서 6장 8절)
- 내가 선택한 금식은 이것이 아니더냐? 사악의 결박을 풀어 주고, 무거운 짐을 내려주며, 탄압 받는 자를 자유롭게 하여 모든 멍에를 푸는 것 아니겠느냐?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고 내쫓긴 가난한 자를 집으로 데려가는 것 아니겠느냐? 헐벗은 자를 보면 덮어주고 네 살을 감추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이사야서 58장 6~7절)
기독교의 스승(예수)은 제자들에게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전하며23 말했다.
-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도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도 말라.(마태복음 7장 6절)
일반 대중을 위한 가르침은 산상수훈에서 전한 팔복과 다음의 교리를 참고하면 되겠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이게 저주를 퍼부은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고, 너희를 박해하고 악의에 차서 이용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마태복음 5장 44, 48절)
- 자기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 자는 목숨을 구하리라.(10장 39절)
-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천국에서 가장 위대한 자이니라.(18장 4절)
-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오랜 고통과 자비와 선함과 믿음과 온순함과 절제이니 이런 것을 금하는 법은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장 22~23절)
-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니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나 하나님을 아는 이들이니.(요한1서 4장 7절)
피타고라스학파와 신플라톤학파는 그리스의 전통을 따랐다. 그러나 우리는 피타고라스가 인도에서 어느 정도의 깨달음을 얻었던 반면, 플라톤은 이집트에서 공부하면서 그곳의 학파들을 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고대 그리스학파에 대한 정보는 다른 학파에 비해 문헌을 통해 가장 정확하게 전해진 편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제자들에게 5년간의 수련기간 동안 3단계를 거치며 익히는 내부 교리뿐만 아니라 외부의 규율도 철저히 지키도록 했다.(자세한 내용은 미드의『오르페우스』pp.263 이하 참조) 여기서 외부의 규율이란 다음과 같다.
- 우리는 신에게 우리를 온전히 맡겨야 하나니. 기도할 때는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이 아닌 신의 지혜에 따르며 옿고 적절한 것을 주시리라는 온전한 확신을 가지되 특별한 이득을 바라지 말아야 하노라.(디오도로스 9장 41절)
- 사람은 미덕을 통해서만 은총에 도달하나니 이는 이성적인 존재만의 특권이로다.(히포다무스,『행복(De Felicitate)』2장, 오렐리,『고대 그리스의 금언과 윤리(Opusc. Grcecor. Sent, et Moral.)』2장 284절)
- 사람은 본질적으로 선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으나 진실된 교리를 배우면 그리될 수 있도다.(히포다무스) 가장 신성한 의무는 효도이니라. "신께서는 자신의 삶을 지으신 분을 숭배하는 이에게 축복을 내리시나니." 팜펠루스가 말하였다.(『부모(De Parentibus)』, 오렐리,『고대 그리스의 금언과 윤리』2장 345절)
-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는 것은 모든 죄 중 최악이니라, 플라톤의 어머니로 알려진 페릭티오네가 일렀다.(『고대 그리스의 금언과 윤리』p.350)
- 피타고라스의 모든 글은 뛰어나게 깔끔하고 섬세하도다.(욀리안,『다양한 역사(Hist. Var.)』14장 19절
- 순결과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단연 순수함이니라. 어느 곳이나 위대한 스승은 순결과 절제를 권하도다. 하지만 이 스승들은 결혼한 이들이 각자의 삶을 살기에 앞서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경건한 삶과 성스러운 과학의 계승을 이어가기에 유리한 조건에서 아이가 탄생하도록 하기 위함이니라.(암블리코스,『피타고라스의 삶』, 히에로클레스『설교』45장 14절
- 이는 굉장히 흥미로운데, 위대한 인도 법전『마나바 다르마 샤스트라』에도 똑같은 규율이 있기 때문이다 ··· 간통은 가장 무거운 벌을 받았다.(암블리코스,『피타고라스의 삶』)
- 또한 남편은 아내를 매우 예의바르게 대하도록 하였노라. 그는 '신 앞에서' 아내를 동반자로 맞아들이지 않았던가?(『바이에른학파의 비망록(Mem. de I'Acad, de Baviire)』7장 109절에서 라스카울크스(Lascaulx)『그리스인의 결혼의 역사(Zur Geschichte der Ehe bei den Griechen)』참조)
- 결혼은 동물적 결합이 아니라 영적 인연이다. 따라서 아내는 남편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해야 하고 모든 것에서 헌신하고 복종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인이 우리에게 보여준 가장 뛰어난 여성상이 피타고라스학파에서 만들어졌고 남성상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고대의 작가들은 이런 규율을 통해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가장 순수할 뿐만 아니라 소박한 예절과 섬세함을 갖추고 진지한 활동을 추구하는 탁월한 기질의 모범상을 양산해낼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기독교 작가들조차도 이 점을 인정했다.(저스틴, 20장 4절 참조) ··· 정의라는 개념이 학파의 모든 회원들의 행동을 지배한 한편, 그 회원들은 서로간의 관계에서 가장 엄격하게 인내와 연민을 지켰다. 폴루스(『설교』8장 p.232)의 가르침처럼 정의는 모든 미덕의 기본 원칙이었다. 정의는 영혼 내의 평화와 균형을 유지하고 모든 공동체에서 질서의 모체이며 남편과 아내 사이의 화합, 그리고 주인과 하인 사이의 사안을 가능하게 한다.
- 피타고라스학파에 속한 이는 그가 하는 말이 계약이다. 그리고 사람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히폴리투스『철학자들』6장) (이상 미드의『오르페우스』pp.263~267)
신플라톤학파에서는 미덕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다루었으며 도덕성과 영적 발전을 분명히 구분했다. 이는 '노력은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신이 되기 위한 것이다'24라는 플로티누스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장 낮은 단계는 인간의 행위를 완벽하게 하는 '정치적 미덕'(육체적ㆍ윤리적 미덕은 이보다 낮음), 즉 비이성적인 본성을 통제하고 장식하는 이성을 습득하여 죄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이보다 높은 미덕으로는 이성에만 관계하고 윤회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는 카타르시스적 미덕, 영혼을 고양하여 그보다 더 우월한 본성과 맞닿게 하는 이론적 미덕, 혼에게 진정한 존재에 대해 알려주는 패러다임적 미덕이 있다.
- 따라서 실용적인 미덕에 따라 활동하는 이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카타르시스적 미덕에 따라 활동하는 이는 악마 같은 사람인 동시에 선한 악마25이다. 지적 미덕에 따라서만 활동하는 이는 신이다. 그러나 패러다임적 미덕에 따라 활동하는 이는 신들의 아버지다.('지적 신중함'에 대한 주석, pp.325~332)
제자들은 다양한 연습을 통해 자신의 몸에서 벗어나고 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배웠다. 갈풀에서 줄기를 뽑아내듯 단호하게 자기 안의 인간을 몸에서 떼어내야 했다.26 힌두교에서 말하는 '광체(光體)' 혹은 '빛나는 육체'도 신플라톤학파에서 말하는 영광체와 같은 것이다. 사람은 이 육체에서 떠올라 자아를 찾게 된다.
- 눈으로도, 언어로도, 다른 감각(신)으로도, 금욕을 통해서도, 종교의식을 통해서도, 고요한 지혜를 통해서도 잡을 수 없나니, 명상 중인 부분이 없는 유일자는 오직 순수한 본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도다. 이 미묘한 자아는 다섯 겹의 생명이 잠자고 있는 정신을 통해 일려지느니라. 모든 생명체의 정신은 이런 생명들로 가득하며 이 안에서 정화되어 자기를 드러내나니.(『문다카 우파니샤드』3장 1편 8~9절)
그런 후에 인간은 분리되어도 '세계가 멈추지 않는' 곳에 혼자 들어갈 수 있다. 미드는 테일러의『플로티노스 선집』을 소개하면서 플로티노스의 말을 인용해 힌두교에서 말하는 투리야의 세계를 설명 한다.
- 그들은 모든 것을, 탄생이 함께하는 것들이 아니라 본질이 함께하는 것들로 본다. 그리고 다른 이들 안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모든 것은 그 속이 비치며 그 무엇도 어둡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이 모두에게 내면과 전체가 똑독히 보인다. 빛은 모든 곳에서 빛과 만나는데, 이는 모든 것이 그 안에 모든 것을 품고 있고 다른 것 안에서도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모든 곳에 있고 모든 것이 모든 것이다. 각기의 것도 모든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그 장려함이 무한하다. 그곳의 모든 것은 위대하다. 작은 것조차도 위대하기 때문이다. 그곳은 태양도 모든 별이다. 또한 각기의 별도 태양이며 모든 별이다. 각기의 것 안에서 서로 다른 특성이 두드러지지만 동시에 각기의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보인다. 그곳은 움직임도 순수하다. 움직임이 다른 움직이는 자의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p.73)
그곳은 설명할 수 없다. 보통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직 눈이 열린 자들만이 그 설명을 기록할 수 있다.
세계의 여러 종교가 얼마나 비슷한가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책 한 권을 채울 수 있을지 모른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위의 설명만으로도 신지학을 배우는 이들에게 안내자의 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신지학은 이제까지 세상에 알려진 고대의 지혜의 세계를 새롭고도 풍성하게 전해준다. 위에서 말한 종교 간의 유사성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 것인데 그 근원이 바로 위대한 '백색 형제단'이다
이들은 서열을 이루는 초인들로서 인류의 진화를 지켜보고 인도하는 역할을 하며, 이제까지 진리를 원상태로 보존해왔고, 가끔 필요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진리를 다시 들려준다. 그들은 우리를 도와주러 다른 세상에서, 초기 인류로부터 이곳에 왔고 우리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진화한 존재들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이 탐색을 마치고 나면 지금보다 더 이해하기 쉬워질 것이다. 이 초인들이 초기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인류의 발전에 힘입은 부분이 많다. 그 초인들은 지금도 열성적인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길을 보여주고 발걸음을 인도한다. 사랑과 헌신,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봉사할 목적으로 배우겠다는 사심 없는 바랑으로 그들을 찾는 이들은 지금도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초인들은 지금도 고대의 규율을 실천하면서 고대의 신비를 벗긴다. 백색 형제단의 입구를 받치는 두 기둥은 사랑과 지혜이다. 그 좁은 입구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어깨에서 욕망과 이기심이라는 짐을 내려놓은 이들뿐이다.
우리 앞에는 힘든 과제가 놓여있다. 우리는 물질계에서 시작하여 조금씩 위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진화와 그 목적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 로고스는 모든 것을 개념으로서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 모든 힘, 모든 형태, 그리고 이후에 실재하는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될 모든 것들을 말이다.
로고스는 자신이 활기를 불어넣고 싶은 현현의 원을 그리고 자신이 그 우주의 생명이 되도록 한다. 먼저 다양한 밀도의 단층이 등장하다가 일곱 개의 거대한 영역이 나타나는 것이 보인다. 에너지의 가운데에서 서로 분리되어 소용돌이치는 물질들이 나타난다. 그러다가 분리와 응집의 과정이 끝나면 가장 중요한 태양이 보인다. 로고스의 물리적 상징이다.
그리고 각각이 일곱 개의 행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일곱 개의 행성계가 보인다. 우리 행성이 속한 행성계로 시야를 좁혀보면 생명의 파도가 세 가지 엘리멘탈계,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 인간계 등의 자연계를 형성하면서 행성을 휩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시야를 조금 더 좁혀서 우리 행성과 그 주변으로 가보면 인간이 진화하는 모습이, 여러 생을 거치며 자의식을 키워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어느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춰보면 그가 성장하는 모습이, 각각의 생애가 세 가지 요소로 나뉘어 있는 모습이, 그 각각의 요소가 모든 생애와 연결되어 있고 그 뒤에서 자신이 뿌린 것을 거두는 모습이 보인다.
모든 생애에서는 자신이 수확한 것을 거두기 전에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법칙에 따라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경험을 더해가며 생을 거듭하면서 위로 올라간다. 각각의 생애에서 인간은 순수, 헌신, 지적 능력,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한 단계씩 올라간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제 스승이 된 이들이 서 있는 곳에 서게 된다. 스승에게 진 빚을 어린 형제들에게 갚을 준비를 하고서.
1장
물질계
앞에서 우리는 우주의 근원이 현현한 신성한 존재이고 이 존재에 고대의 지혜의 현대적 형태로서 '로고스' 혹은 '말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이름은 그리스 철학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침묵에서 나타나는 말씀, 음성, 세계를 존재케 하는 소리 등 고대의 사상을 충분히 잘 표현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물질계에서 마주치는 질료들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영-물질(spirit-matter)의 진화를 추적해야 한다.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잠재력은 진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물질계의 영-물질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화의 전체 과정은 내부에서 바깥으로 스스로 펼쳐지며 외부에 있는 지적 존재의 도움을 받는다. 이 지적 존재들은 진화를 늦출 수도 빠르게 할 수도 있지만, 질료 안에 내재하는 역량을 넘어설 수는 없다. 따라서 세계가 형성되는 초기 단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자세히 설명하려다보면 이 책과 같은 입문서에서 다루는 범위를 넘어서게 될 테니, 대략적인 요약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유일한 존재의 심연에서, 모든 사고(思考)와 언어를 초월하는 유일자에게서 나온 로고스는 자기 자신에게 한계를 부여하고 자신의 존재 범위를 스스로 정함으로써 현현한 신이 된다. 따라서 로고스의 활동이 어떤 영역으로 제한되는가를 추적하다보면 로고스의 우주가 어떤 곳인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그 영역 안에서 우주는 태어나고 진화하고 죽는다. 우주는 로고스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를 갖는다. 우주의 물질은 로고스의 발산(發散)이며 우주의 힘과 에너지는 로고스의 생명의 흐름이다. 모든 곳에 만연하고 끊임없이 지속되며 진화하는 모든 원자 속에 로고스가 있다. 로고스는 우주의 원천이자 끝이고, 원인이자 목적이며, 중심이자 주변이다.
우주는 로고스를 인정된 토대로 하여 형성되고, 로고스를 원으로 둘러싸며, 로고스 안에서 숨 쉰다. 로고스는 모든 것 안에 있고 모든 것은 로고스 안에 있다. 이것이 고대의 지혜를 익힌 현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현현한 세계의 시작이다.
그 현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로고스는 삼위적 형태로 스스로 펼쳐진다. 첫 번째 로고스는 모든 존재의 뿌리다. 첫 번째 로고스로부터 나타나는 두 번째 로고스는 생명과 형태라는 두 가지 측면, 즉 원초적 이원성을 현현하게 하고 생명-형태, 영-물질, 긍정-부정, 능동-수동, 세계의 아버지-어머니 등 자연의 두 극단을 만들어내며, 그 두 극단 사이에서 우주의 거미줄이 쳐진다.
그 다음 세 번째 로고스는 모든 것이 원형(元型)으로 존재하는 보편적 정신이자 존재의 근원, 에너지가 솟아나오는 원천, 탄생 후 우주가 진화하는 동안 하위 물질로 정교하게 다듬어질 모든 원형을 저장하는 보고(寶庫)이다. 이런 원형은 과거의 우주가 낳은 열매로서 현재를 위한 씨앗으로 전해진 것이다.
우주의 현상적 영과 물질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존재이나 영과 물질의 뿌리는 영원하다. 지혜를 얻은 어떤 이는 그 물질의 뿌리27 혹은 근원 물질이 로고스의 눈에는 보이는데 그 모습이 고대에 지고의 브라만28으로 불리었던 유일한 존재에게 씌워진 베일로 보인다고 하였다.
로고스는 현현하기 위해 이 베일을 쓰고 이 베일을 이용해 자신의 활동에 스스로 한계를 부여한다. 이로부터 로고스는 자신의 우주에 속한 물질을 정교하게 다듬고 스스로 알리고 인도하며 통제하는 생명이 된다.29
우주의 상위 계에 속하는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계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소용돌이치는 로고스의 에너지는 근원 물질 안의 공간에 구멍을 파는데, 이 근원 물질로 이루어진 얇은 막으로 둘러싸인 이 생명의 소용돌이가 바로 원초적 원자이다.
이들이 서로 합쳐져 우주 전체로 퍼져나가서 최상위 일곱 번째 계의 영-물질을 구성하는 소부류를 이룬다. 여섯 번째 계는 일곱 번째 계에서 가장 조악한 여러 집합 안에 소용돌이를 만드는 수없이 많은 원초적 원자들 중 일부로 이루어진다. 일곱 번째 계의 가장 조악한 조합에서 나왔으며, 벽이 나선형 모양의 여러 가닥으로 이루어진 이 원초적 원자는 여섯 번째 계의 영-물질, 혹은 원자 중에서 가장 미세한 단위가 된다.
이런 여섯 번째 계의 원자들이 끝없이 여러 조합을 이루어 여섯 번째 계의 영-물질을 구성하는 소부류들을 만든다. 여섯 번째 계의 원자들은 해당 계의 가장 조악한 집합 안에 소용돌이를 만들고 이런 가장 조악한 집합들을 벽으로 삼아 다섯 번째 계의 영-물질, 혹은 원자 중에서 가장 미세한 원자가 된다. 이번에도 이 다섯 번째 계의 원자들이 여러 조합을 이루어 해당 계의 영-물질을 구성하는 소부류를 만든다.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되어 네 번째, 세 번째, 두 번째, 첫 번째 계의 영-물질을 구성하게 된다. 구성 요소인 질료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계들이 우주의 위대한 일곱 영역이다. 우리가 속한 물질계의 영-물질이 어떻게 바뀌는지 파악하면 이 일곱 영역에 대해서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30
'영-물질'이라는 단어는 의도적인 표현이다. '죽은' 물질 따위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물질은 살아 있고 입자는 아무리 작아도 생명이다.
과학에서도 '물질 없이는 힘이 없고 힘이 없이는 물질도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영과 물질은 분리할 수 없는 한 쌍으로 연결되어 우주의 전 생애에 걸쳐 지속되며 그 무엇도 이들을 떼어놓을 수 없다.
물질은 형태이고 생명을 나타내지 않는 형태는 없다. 영은 생명이며 형태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 생명은 없다. 지고의 주(主), 로고스조차도 현현하는 동안 우주라는 형태를 취하며 이는 원자 단위까지 이어진다.
로고스의 생명은 이렇게 얽혀서 모든 입자 안에서 혼을 불어넣는 힘으로 작용하고, 모든 계의 영-물질 안에서 여러 겹을 이룬다. 그 결과 각 계의 질료들은 해당 계를 포함하여 그보다 높은 모든 계의 모든 형태-가능성과 힘-가능성을 숨기고 있거나 휴면 상태로 보유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진화가 일어나게 되며, 가장 낮은 수준의 입자도 숨은 잠재력을 갖게 되어, 그 잠재력이 실제 힘으로 바뀔 때에 그 입자는 최상위 존재의 형태를 띠기에 적합한 상태가 된다.
사실 진화란 한 문장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즉, 진화란 휴면 상태의 잠재력이 실제 힘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진화의 두 번째 거대한 파도는 형태의 진화이고, 세 번째 거대한 파도는 자의식의 진화이다.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다. 진화의 이 세 가지 흐름은 인류와 연관 지어 구분할 수 있다. 질료를 만들고 집을 짓고 그 집에 거주할 존재를 성장시키는 것이 앞에서 언급한 영-물질의 진화, 형태의 진화, 자의식의 진화에 해당한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이 이 개념을 이해하고 염두해 둔다면 여러 사실들이 만들어 내는 복잡한 미로를 수월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세계가 존재하고 우리의 몸이 속한 물질계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물질계에 속한 질료를 살펴보면 그 질료가 너무나 다양하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리고 광물과 식물, 동물 등 우리 주변의 물체들이 너무나 다른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구성 성분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깜짝 놀라게 된다. 딱딱하거나 부드럽고, 투명하거나 불투명하고, 잘 부러지거나 잘 늘어나고, 맛이 쓰거나 달고, 쾌적하거나 역겹고, 색깔이 있거나 없는 다양한 구성 성분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 근본적인 구분법에 따라 물질의 세 가지 소부류가 탄생한다.
물질은 고체이거나 액체, 기체인 것이다. 질료를 좀 더 살펴보면 이런 고체와 액체, 기체가 화학에서 '원소'라고 부르는, 보다 단순한 성분들의 조합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원소들은 각각의 특성을 변화시키지 않고 고체, 액체, 기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산소라는 화학 원소는 나무의 구성 성분인 동시에 다른 원소와 결합하여 고체인 나무 섬유를 형성하게 된다. 산소는 다른 원소와 더불어 수액 내에 존재하면서 물과 같은 액체의 조합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그 안에서 기체로 존재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산소는 세 가지 상태로 존재한다. 또한, 순수한 산소는 기체에서 액체로, 액체에서 고체로 변화하면서도 계속 순수한 산소로 남아있거나 다른 원소와 함께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물질계의 물질이 고체, 액체, 기체라는 세 가지 소부류 혹은 상태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더 살펴보면 우리는 네 번째 상태 에테르(ether)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조금 더 파고 들어가면 이 에테르가 고체, 액체, 기체 상태처럼 명확하게 정의된 네 가지 상태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산소를 예로 들어보자. 산소는 기체 상태에서 액체나 고체 상태로 내려갈 수 있는 것처럼 기체 상태에서 네 가지 에테르 상태로 올라갈 수도 있다. 이 네 가지 에테르 상태 중 마지막은 궁극의 물리적 원자로 구성되는데 이 원자는 물질계에서 해당 물질을 모두 빼내어 다음 상위 계에 집어넣는 분해 작용을 한다. 별도로 덧붙인 그림을 보면 기체 상태와 네 가지 에테르 상태에 있는 세 종류의 기체가 있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궁극의 물리적 원자들이 모두 같은 구조를 지니며 '원소'의 다양성은 이 궁극의 물리적 원자가 결합하는 방식이 다양하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수소, 산소, 질소 등 화학 원소가 기체 상태에서 에테르 상태의 세 가지 중단 단계를 거쳐,
물질계 내 물질의 네 번째 또는 원자 상태로 분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
(자세한 내용은 <루시퍼(Lucifer)> 17권 216 페이지 참조) :
<루시퍼>는 헬레나 블라바츠키사 펴낸 잡지. 애니 베전트가 공동 편집자였다고 한다ㅡ옮긴이 주.
그러므로 물질계 영-물질의 일곱 번째 소부류는 동질적인 원자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여섯 번째 소부류는 이러한 원자들이 이루는 상당히 단순한 이질적 조합으로 구성되며 이 각각의 조합은 하나의 단위로 움직인다.
다섯 번째 소부류는 보다 복잡한 조합으로 이루어지고 네 번째 소부류는 조금 더 복잡한 조합으로 구성되지만 이 모든 경우에도 각각의 조합은 하나의 단위로 행동한다.
세 번째 소부류는 더 복잡한 조합으로 이루어지는데 화학자들은 이를 기체 원자 혹은 기체 '원소'로 간주한다. 이 소부류에 속하는 조합 중 상당수가 이미 산소, 수소, 질소, 염소 등 특별한 이름을 부여받았으며 새로운 조합이 발견되면 역시 이름을 부여받는다.
두 번째 소부류는 액체 상태의 여러 조합으로 구성되는데 브롬과 같은 원소 혹은 물이나 알코올과 같은 조합이 속한다. 첫 번째 부류는 모두 고체로 구성되며 요오드, 금, 납 등의 원소나 나무, 돌, 초크 등의 화합물이 이 부류에 속한다.
신지학을 탐색하는 이들은 물질계를 모델로 삼아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계의 영-물질이 갖는 여러 소부류를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신지학에서 말하는 계는 영-물질이 존재하는 영역으로서 그 영역 내의 모든 조합은 특정한 원자 집합에서 발생한다. 이 원자들은 비슷한 구성을 취하는 단위이며 이 원자들의 생명은 여러 막 속에 숨겨져 있는 로고스의 생명이다.
이때 막의 개수는 어떤 계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이 원자들의 형태는 고체 혹은 바로 상위 계에서 물질의 최하위 부류에 속하는 형태를 띤다. 따라서 계라는 것은 형이상학적 개념인 동시에 자연의 한 부류이다.
지금까지 우리 천체에서 첫 번째 혹은 최하위 계 중 우리가 속한 부류에서 영-물질의 진화가 우리의 물질세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살펴보았다.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시간 동안 질료는 계속 만들어져왔고 이는 영-물질의 진화의 흐름을 이루었다.
우리가 사는 행성의 질료 속에서 현재의 결과물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물질계에 거주하는 생명체들을 연구하기 시작하면 형태의 진화, 즉 이런 질료로 유기체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발견하게 된다.
질료의 진화가 충분히 진행되었을 때 로고스로부터 나온 두 번째 생명의 파도는 형태가 진화하도록 자극했다. 그리고 로고스는 자신의 우주를 조직하는 힘31이 되었고 '건설자'32라는 이름 수많은 실체는 그 우주 안에서 영-물질의 여러 조합으로 형태를 만든다. 각각의 형태 속에 머무르는 로고스의 생명은 그 형태의 중심 에너지이자 그 형태를 지배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에너지이다.
여기서 상위 계에서 형태를 어떻게 만드는지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모든 형태는 로고스의 정신 안에서 개념으로 존재하며 이 형태들은 두 번째 생명의 파도 속에서 건설자들을 인도하기 위한 모형으로서 밖으로 내던져졌다는 정도로 말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세 번째와 두 번째 계에서 초기의 영-물질 조합은 단위로 활동하기 위해 조직된 형체를 취하기가 편리하고 유기체의 형체가 만들어졌을 때 안정성이 점차 커지도록 설계된다.
이 과정은 소위 세 가지 엘리멘탈계 내의 세 번째와 두 번째 계에서 진행되었다. 이 엘리멘탈계 안에서 형성된 물질의 조합은 일반적으로 '엘리멘탈 에센스(elemental essence)'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에센스가 한데 모여 형태라는 틀을 갖추게 되었고, 그 형태들은 잠시 기다리고 있다가 흩어졌다. 밖으로 던져진 생명 또는 모나드는 이 엘리멘탈계를 거치며 진화했고 때가 되어 물질계에 도달했다.
모나드는 물질계에서 에테르를 모두 모아 얇은 막의 형체 안에 담기 시작했다. 그 형체 안에서 생명-흐름이 노닐었고 밀도가 더 높은 질료가 그 형체로 만들어지면서 첫 번째 광물을 형성했다.
이 광물 안을 들여다보면 결정체를 다룬 책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숫자와 기하학적 선들이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선들 위에 형태가 세워지는데 그 형태들은 모든 광물 안에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충분한 증거를 제공한다. 물론 '좁은 공간 속에 갇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금속에 피로 현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금속도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이다.
하지만 현재 오컬트 교리에서는 앞에서 말한, 생명이 금속과 관계를 맺게 되는 과정을 알기에 금속을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정도로 말해두면 충분할 것 같다. 형태는 다수의 광물을 통해 상당히 안정된 상태에 이르렀고, 진화하는 모나드는 식물계에서 더 유연해진 형태를 정교하게 다듬어 이 유연성을 유기체의 안정성과 결합했다.
이런 특성은 동물계에서 보다 조화롭게 표현되어 인간 안에서 균형의 절정에 다다랐다. 인간의 육체는 가장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는 성분들로 구성되어 적응성이 뛰어난 반면 가장 다채로운 조건에서도 전면 분해에 저항하는 중심 결합력에 의해 하나로 뭉쳐진다.
인간의 육체는 두 부류로 나뉜다. 그 중 하나는 물질계의 하위 세 단계, 즉 고체, 액체, 기체 상태의 구성 성분들로 이루어진 조밀체(dense body)이다. 나머지는 보라색과 회색 또는 파란색과 회색의 중간 정도 되는 색깔을 띠고 상위 네 단계의 질료로 구성되어 조밀체 속으로 스며든 에텔복체(etheric double)이다.
육체의 일반적인 기능은 물질계에서 접촉해오면 내부에 알리고, 그 육체에 살고 있는 의식적 실체가 정교하게 다듬어낸 지식의 원료가 되는 질료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육체의 에텔복체는 태양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생명-흐름을 더 조밀한 입자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매개자의 의무도 갖는다.
태양은 우리천체를 위해 엄청난 양의 전자기력과 생명력을 저장하고 있어서 생기를 주는 에너지 줄기를 마구 쏟아낸다. 이 에너지 줄기를 모든 광물, 식물, 동물, 인간의 에텔복체가 흡수하여 각 실체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생명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다.33
에텔복체는 생명 에너지를 빨아들인 후 분해하여 자신의 육체에게 나눠준다. 건강 상태가 매우 좋은 경우 육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생명 에너지가 변환되어 남는 생명 에너지는 빛으로 발산되는데, 이것을 약한 육체가 받아들여 이용한다고 한다.
건강 오라(health aura)라고 부르는 것은 에텔복체의 한 부분으로서 육체의 표면 전체에서 몇 인치 정도 뻗어 나와 구체(具體)의 반경(半徑)처럼 사방을 행해 빛나는 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건강 오라는 활력이 건강점(point of health) 아래로 떨어지면 늘어졌다가 활력이 다시 차오르면 원래대로 빛을 낸다. 최면술사가 약자들에게 활력을 주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내뿜는 것도 에텔복체가 만들어내는 이 활력 에너지다.
물론 최면술사들이 이 활력 에너지에 매우 희귀한 종류의 에너지 흐름을 섞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최면술사가 너무 오래 작업에 매달린 나머지 지치면 활력 에너지는 고갈되고 만다.
인간의 육체는 그 육체를 구성하기 위해 물질계에서 가져온 질료의 종류에 따라 질감이 거칠기도 하고 미세하기도 하다. 물질의 각 소부류에서는 더 미세하거나 더 거친 질료가 나온다. 도살업자의몸과 교양 있는 학생의 몸을 비교해보라. 두 몸은 모두 내부에 고체를 포함하지만 그 고체는 질이 다르다.
거친 몸은 다듬어 미세하게 만들 수 있고 미세하게 다듬어진 몸도 거칠어질 수 있다. 몸은 끊임없이 변한다. 각각의 입자는 생명이고 그 생명들은 자유롭게 오간다. 생명은 자신에게 맞는 몸에 끌려가고 맞지 않는 몸에서는 쫓겨난다. 모든 것은 주기적인 진동 속에서 살아가면서 조화를 추구하며 불협화음을 만나면 쫓겨난다.
순수한 몸은 거친 입자를 밀어내는데, 이는 이 입자들의 진동 속도가 그 몸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거친 몸은 거친 입자들과 같은 속도로 진동하기 때문에 그런 입자들을 끌어당긴다.
그러므로 몸은 진동 속도가 바뀌면 새로운 리듬에 맞추지 못하는 구성 성분들을 조금씩 내보낸 후, 속도를 맞출 수 있는 새로운 구성 성분들을 외부 자연에서 가져와 그 자리를 채운다. 자연은 진동하는 모든 종류의 질료를 제공하고 각각의 몸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질료를 선택한다.
처음 인간의 몸을 만들 때 이런 선택을 한 것은 형태의 모나드였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이 자의식을 가진 실체로서 몸을 형성하는 과정을 직접 관장한다. 인간은 사고(思考)를 통해 자신의 음악의 으뜸음을 두드리고, 자신의 육체 및 다른 여러 몸에서 나타나는 지속적인 변화 속에서 가장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리듬을 설정한다.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 순수한 음식으로 자신의 육체를 만드는 법을 배워서 자신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조절한다. 인간은 '순수한 음식, 순수한 정신, 그리고 신에 대한 변함없는 기억'이라는 정화(淨化)의 격언에 따라 사는 법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물질계에 사는 최상의 생명체로서 물질계의 로고스를 대리하며, 자신의 힘이 미치는 한도 내에서 물질계의 질서와 평화, 선치(善治)에 대리 책임을 진다. 이 의무를 이행하려면 위의 세 가지 필수 요건을 반드시 만족시켜야 한다.
물질계의 모든 소부류에서 온 원소들로 구성된 육체는 물질계에서 나온 모든 종류의 인상을 받아들여 응답하기에 적합하다. 육체는 가장 단순하고 미숙한 것들과 가장 먼저 접촉한다.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육체 안의 생명력이 퍼져나가면서 그 자극에 반응을 보이는 진동 속으로 육체의 분자들을 빠뜨리는데, 이때 온몸에서는 무언가와 닿았다는 느낌과 인식이 일어난다.
감각 기관이 특정한 진동을 받아들이도록 발달하면서 물질계의 의식적 실체를 위한 미래의 매개체로서 육체의 가치는 커진다. 육체가 더 많은 인상에 응답할 수 있게 되면 유용성도 더 커진다. 육체가 응답할 수 있는 것들만이 의식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진동이 울리고 있다. 이런 진동은 우리의 육체가 받아들일 수도 함께 진동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지식에서 나온 물질적 본성에 따라 고동친다.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 절묘한 소리, 미묘한 신비가 육체라는 우리의 감옥벽을 두드리지만, 우리의 주의를 끌지 못한 채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미풍에 반응하는 에올리언 하프처럼 자연 속의 모든 울림에 반응하는 완벽한 몸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몸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진동을 매우 복잡한 신경계의 일부인 육체의 중추로 보낸다. 조밀한 구성 성분의 모든 진동에는 에테르 진동이 따르는데 이 에테르 진동도 비슷한 방식으로 에텔복체가 받아들여 해당 중추로 전달한다. 조밀한 물질에서 나오는 진동은 대부분 화학 물질이나 열, 다른 형태의 물리적 에너지로 바뀐다.
에테르 진동은 전자기 반응을 일으켜 아스트랄체(astral body)에게 진동을 전달한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 아스트랄체 안에서 진동은 정신에 도달한다. 이렇게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는 때때로 육체의 주(主)라고 불리기도 하며 육체 안에서 왕좌를 차지하는 의식적 실체에 가닿는다.
정보의 이동 경로가 발달하고 실질적인 기능을 하게 되면서 의식적 실체는 그 경로를 통해 사고에 공급되는 질료만큼 성장한다. 하지만 인간은 발달 수준이 너무 낮아서 에텔복체가 조밀체와 무관하게 자신이 받아들인 인상을 인간에게 주기적으로 전달하지도 인간의 뇌에 그 인상을 각인시키지도 못한다.
가끔은 에텔복체가 이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때 우리는 가장 낮은 형태의 투시력을 갖게 된다. 물체들의 에텔복체는 물론이고 에테르체(etheric body)를 가장 낮은 수준의 외피로서 갖고 있는 사물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이야기하겠지만 인간은 육체와 아스트랄체, 에테르체 등 다양한 매개체 속에서 살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상위 단계로 진화함에 따라 의식이 가장 낮은 수준의 매개체, 즉 조밀체를 가장 먼저 통제하고 정당화한다는 사실이다.
육체의 두뇌는 ㅡ 발달이 덜 된 인간의 경우 ㅡ 물질계에서 다른 무엇보다 효과적으로 생명을 깨울 수 있는 의식의 도구이다. 두뇌는 더 미세한 매개체보다 잠재력은 떨어지지만 실재성(實在性)은 더 크다.
인간은 먼저 육체 안에서 자신을 '나'로 인식한 후에 다른 곳에서 자신을 찾는다. 일반적인 인간보다 훨씬 더 발달한 인간이라고 해도 물질적 유기체로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물질계에서 의식은 물질적 매개체의 능력만큼만 현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밀체와 에테르체는 일반적으로 지구에 사는 동안에는 분리되지 않는다. 화음을 울렸을 때 한 악기의 낮은 음과 높은 음이 동시에 울리듯 조밀체와 에테르체는 보통 둘이서 같이 기능한다. 그러나 별개의 활동을 조율해서 함께 수행하기도 한다. 건강이 나쁘거나 신경이 흥분한 상태에서는 에텔복체가 이례적으로 조밀체에게 밀려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조밀체는 밀려난 에테르 물질의 양에 따라 의식이 아주 둔해지거나 넋을 잃기도 한다. 마취약을 섭취하면 에텔복체의 상당 부분이 끌려나오기 때문에 의식이 조밀체와 영향을 주고 받지 못하게 되어 의사소통이 힘들어진다.
몸이 비정상적으로 조직된 사람들, 즉 영매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에테르체와 조밀체가 쉽게 빠져나가는데 에텔복체가 밀려나면 '물현화(materialization)'의 물질적 토대가 마련된다.
잠에 빠졌을 때 의식이 깨어있는 시간 동안 사용하던 육체에서 빠져나가도 조밀체와 에테르체는 남는다. 그렇지만 이 둘은 물질계에서 꿈을 꾸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기능한다. 깨어있는 동안 경험한 인상은 몸이 자동으로 복제한다. 이때 육체의 두뇌와 에테르 두뇌를 채우는 앞뒤가 맞지 않는 그림 조각이나 진동 등은 서로를 거칠게 떠밀거나 아주 그로테스크한 조합을 이룬다.
외부에서 온 진동도 육체의 두뇌와 에테르 두뇌에 영향을 미치며, 깨어있는 동안 만들어진 조합은 해당 육체의 두뇌 및 에테르 두뇌와 성질이 비슷한 아스트랄계에서 온 흐름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활동을 시작하기도 한다. 깨어있을 때의 생각이 얼마나 순수한가에 따라 꿈속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즉흥적으로 구성되기도 하고 외부의 모습을 반영하기도 한다.
'죽음'이라고 불리는 단계에 이르면 의식이 탈출하면서 에텔복체를 조밀체에서 끌어낸다.
에텔복체와 조밀체를 연결하던 자석 같은 끈은 완전히 끊어지고 의식은 이 에테르 외피에 쌓인 채 몇 시간을 지낸다.
이때 의식은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이들에게 아주 둔하고도 말이 없는 상태로 뿌연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유령이다. 의식적 실체가 의식을 버린 후에도 의식은 조밀체가 묻혀 있는 무덤 위를 떠돌다가 시간이 흐르면 천천히 분해된다.
다시 태어날 때가 되었을 때 에텔복체는 조밀체보다 먼저 만들어진다. 조밀체는 출산 전 발달 단계에서 에텔복체를 그대로 모방한다. 이 에텔복체와 조밀체는 의식적 실체가 지구에 사는 동안 맞닥뜨리게 될 한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주제는 9장에서 카르마를 다룰 때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2장
아스트랄계
아스트랄계는 물질계 다음에 있는 우주의 영역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 '다음'이라는 단어를 써도 된다면 말이다. 아스트랄계를 물질계와 비교하면 생명은 더 활력이 넘치고 형태는 더 유연하다. 아스트랄계의 영-물질은 물질계에 속한 모든 단계의 영-물질보다 훨씬 더 활력이 넘치고 미세하다.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궁극의 물질 원자는 가장 희귀한 물질 에테를를 구성하는 성분으로서 가장 조악한 아스트랄 물질의 수많은 집합이 구 모양의 벽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적절하지 않다. 우주의 여려계가 동심원으로 배열되어 하나의 원이 끝나는 곳에서 다음 원이 시작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계들은 서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의 차이로 구분되며 서로 관통하는 동심원이다. 공기가 물을 투과하는 것처럼 에테르는 가장 밀도가 높은 고체도 투과한다. 마찬가지로 아스트랄 물질도 물질계의 모든 물질을 투과한다.
아스트랄계는 우리 위에도, 우리 아래에도, 우리 주변 모든 곳에도, 우리 안에도 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지만 그것은 실체도 없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며, 지각할 수도 없다. 육체라는 감옥이 우리를 아스트랄계로부터 차단하고 있고, 물질 입자들이 너무 조잡해서 아스트랄 물질이 이 물질 입자들을 진동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아스트랄계의 일반적인 측면들을 다룰 것이다. 인간 실체가 지상에서 천상34으로 향하는 길에 통과하는 아스트랄계의 특별한 조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기로 한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던 물질계와 마찬가지로 아스트랄계의 영-물질도 일곱 종류의 소부류로 존재한다. 아스트랄계에도 수없이 많은 조합이 있어서 아스트랄 고체, 아스트랄 액체, 아스트랄 기체, 아스트랄 에테르를 형성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물질 형태는 물질계와 비교할 때 빛이 나고 반투명하다.
그래서 '아스트랄' 혹은 '별이 반짝이는' 등의 별칭을 얻었는데 이 별칭은 전체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크지만 너무 많이 사용되고 있어서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스트랄 영-물질의 소부류에는 따로 이름이 붙여지지 않아서 속세의 이름을 이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항은 두 가지다. 첫째, 물질계의 물체가 물질계 물질의 조합이듯이, 아스트랄계의 물체도 아스트랄계 물질의 조합이라는 것이다. 둘째, 아스트랄계는 대부분 물질계 물체를 아스트랄계식으로 복제한 것들로 이루어졌기에 아스트랄계의 경치가 물질계의 모습과 상당히 닮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스트랄계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어서 탐색을 갓 시작한 이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이 투명해서 앞이 보이듯 뒤도 보이고 밖이 보이듯 속도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스트랄계 물체들이 반투명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스트랄계의 시감각이 갖는 특성 ㅡ 의식은 지구에 갇혀 있을 때보다 미세한 아스트랄 물질의 방해를 덜 받는다 ㅡ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물체를 제대로 보려면 먼저 물체를 경험해야 한다. 아스트랄계 시감각이 발달했지만 그 감각을 제대로 사용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인상을 받아들여 경악스러운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게 느껴지는 아스트랄계의 또 다른 특징은 형태의 윤곽이 아주 빨리 바뀐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특히 형태가 지상의 모체(matrix)와 연결이 끊겼을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스트랄 실체는 정말 놀라운 속도로 외양 전체를 바꾼다. 사고가 자극을 일으킬 때마다 아스트랄 물질은 어떤 형태를 취하는데 생명력이 이 형태를 재빨리 바꾸어 새로운 모습을 띠게 하는 것이다.
형태의 진화 과정에서 위대한 생명-파도가 아스트랄계를 통과하여 아래로 향하면서, 아스트랄계에서 세 번째 엘리멘탈계를 이루는 동안 모나드는 그 주변으로 아스트랄 물질의 조합들을 끌어당겼다.
이때 '엘리멘탈 에센스'라 불리는 이 조합들은 특유의 활력을 갖게 되어 사고의 진동에 자극이 생길 때마다 그에 반응하고 새로운 형태를 취하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
이 엘리멘탈 에센스는 아스트랄계의 각각의 소부류에서 수백 가지 종류로 존재한다. 마치 여기서는 공기가 눈에 보일 뿐 아니라 ㅡ 실제로 엄청난 열 아래에서 떨리는 파도 속에서는 공기가 보이기도 한다 ㅡ 자개(自槪)처럼 색깔이 바뀌는 가운데 끊임없이 굽이치는 듯 하다.
엘리멘탈 에센스의 이 방대한 대기(大氣)는 사고, 감정, 욕망이 일으키는 진동에 항상 응답하고 있으며 끓는 물의 거품처럼 사고, 감정, 욕망이 한꺼번에 몰려들면 소요(騷擾)에 빠진다.35
형태가 얼마나 지속되느냐는 그 형태를 낳은 자극의 강도에 따라 달라지는 반면, 형태의 윤곽이 얼마나 뚜렷한가는 사고의 정확성에 따라 달라진다. 또 형태의 색깔은 사고의 성격 ㅡ 지적, 헌신적, 열정적 등 ㅡ 에 따라 바뀐다.
발달이 미숙한 정신은 주로 모호하고 산만한 사고를 하는데 이런 사고가 아스트랄계에 도달하면 그 주변으로 엘리멘탈 에센스의 엉성한 구름이 모여든다. 그런 사고들은 주위를 떠다니다가 비슷한 성질의 다른 구름 쪽으로 여기저기 끌려간다.
그런 다음에는 그 사고를 끌어당기는 자력(磁力) ㅡ 선하든 악하든 상관없이 ㅡ 을 가진 사람의 아스트랄체 주변에 매달려 있다가 한참 후에 다시 흩어져 엘리멘탈 에센스의 전체 대기 중 일부를 형성한다.
이런 사고들은 개별적 존재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혼을 불어넣는 생명으로서 사고와 엘리멘탈 에센스의 몸을 가진 살아있는 실체이다. 그래서 이런 실체들은 인공적(artificial) 엘리멘탈 혹은 사고-형태라고 부른다.
명확하고 정확한 사고는 자신만의 확실한 형체와 선명하고 깔끔한 윤곽을 가지며 끝도 없이 다양한 무늬를 선보인다. 이런 사고의 형체를 결정하는 것은 사고에 의해 발생하는 진동이다. 물질계에서 소리가 진동을 낳고 그 진동이 형상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음성-형상'은 '사고-형상'과 아주 비슷하다.
자연은 무한한 다양성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아주 보수적인 원칙을 가지고 있어서 그 안에서는 계가 바뀌어도 작동 방식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확하게 정의된 인공적 엘리멘탈은 명확하지 않은 엘리멘탈보다 더 길고 활동적인 삶을 살면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이들의 아스트랄체에 (그리고 아스트랄체를 통해 그들의 정신에)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인공적 엘리멘탈은 자기 안에 자신과 비슷한 진동을 일으킨다. 그 결과 사고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정신에서 정신으로 퍼져나간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고는 그 사고를 하는 주체가 가닿고 싶어 하는 사람을 향할 수 있고, 사고의 효력은 그 사고를 하는 주체의 의지와 정신력에 따라 결정된다.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 감정이나 욕망이 만들어낸 인공적 엘리멘탈은 사고가 만들어낸 인공적 엘리멘탈보다 더 활기차고 명확하다. 따라서 불같이 화를 내면 윤곽이 아주 뚜렷하면서도 강력한 붉은 빛이 나타나고, 화가 지속되면 빨갛고 날카로우면서도 위험하고 가시가 돋쳐 해를 끼칠 수도 있는 엘리멘탈이 만들어진다.
사랑은 그 성질에 따라 형태의 색깔과 무늬가 보이는 아름다움에서 차이가 난다. 색조도 강한 진홍색에서부터 장미의 절묘하고도 부드러운 빛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해질 무렵이나 동틀 무렵의 옅은 붉은 빛과 비슷한 색조를 띠기도 하고, 구름 모양이나 다정다감하면서도 강력하게 방어하는 형체를 보이기도 한다. 어머니의 사랑을 담은 기도는 천사-형태가 되어 아들 주변을 맴돌면서 아들의 사고가 끌어당길지도 모르는 악한 영향력이 아들을 비껴가게 한다.
인공적 엘리멘탈의 특징을 하나 들자면, 이 인공적 엘리멘탈이 특정한 누군가를 대상으로 한 의지의 지시에 따를 때는 이 엘리멘탈을 창조한 이의 의지를 실천하고자 하는 그 하나의 충동이 이 엘리멘탈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것이다.
보호의 임무를 맡은 엘리멘탈은 그 보호 대상의 주변을 맴돌면서 그곳에서 가장 저항력이 약한 끈을 찾듯이 악을 막아내거나 선을 끌어들일 기회를 노린다. 이 과정은 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맹목적인 충동에 이끌리는 것이다.
따라서 악한 사고가 생기를 불어넣은 엘리멘탈은 목표물 주위를 맴돌면서 해를 끼칠 기회를 찾는다. 그렇지만 악한 충동이든 선한 충동이든 상관없이 생기가 생겨난 엘리멘탈은 그 목표물의 아스트랄체 안에 자신과 비슷한 것, 즉 자신의 진동에 맞추어 응답하여 자신을 그 아스트랄체에 들러붙게 해주는 것이 없다면 어떤 인상도 만들지 못한다.
그 아스트랄체 안에 자신과 같은 종류의 물질이 하나도 없다면, 본성에 따라 그 목표물에게서 떨어져 나와 그 목표물을 찾아온 경로 ㅡ 자신이 남긴, 자성을 띠는 자취 ㅡ 로 되돌아온다.
그런 다음 튀어나올 때의 힘과 비례하는 힘으로 자신을 창조한 이에게 서둘러 돌아간다. 따라서 끔찍한 혐오를 담은 생각은 목표물에 부딪치지 못해 그 생각의 주인을 죽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좋은 생각은 그만한 가치가 없는 이에게 가닿더라도 그 생각을 내보낸 이에 대한 축복으로 되돌아온다고 한다.
아스트랄계는 아주 조금만 이애해도 올바른 생각을 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자극제의 역할을 한다. 또한 우리가 아스트랄계에 풀어놓는 이러한 사고나 감정, 욕망에 대해 큰 책임감을 느끼도록 한다. 아스트랄계를 가득 메우는 생각 중에는 먹잇감을 약탈하여 찢어발기고 걸신들린 듯 먹는 식의 내용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이런 그릇된 사고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신지학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악을 몰아내는 역할도 하고 있는데, 이런 신지학에서 가르치는 주제 중 하나는 인간들에게 보다 건전한 행동 원칙을 제시하고 지상에서는 결과밖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일에 대해 그 원인이 무엇인지 보다 이성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신지학 교리 중에서 사고-형태 혹은 인공적 엘리멘탈의 형성과 방향에 대한 윤리적 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인간은 신지학을 통해 자신의 정신이 자신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의 사고가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이 인간 세상에 천사와 악마를 끊임없이 내보내고 있다는 것을, 자신도 그 세상의 창조와 그 세상이 미치는 영향에 일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그 원리를 배우고 그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인도해야 한다.
우리가 인공적 엘리멘탈을 하나씩 따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덩어리로 생각한다면, 인공적 엘리멘탈이 민족이나 인종 감정에 미치는 영향과 정신의 편견과 선입견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어떤 개념을 상징하는 엘리멘탈로 가득 찬 대기에 둘러싸여 성장한다. 민족적 편견, 모든 문제를 바라보는 민족적 시각, 민족적 감정과 사고 등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똑같은 개념도 인도 사람, 영국 사람, 스페인 사람, 러시아 사람에게 다르게 보인다. 어떤 사람에게는 쉬운 개념이 다른 사람에게는 대단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호감이 가는 풍습이 다른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반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속한 국가의 대기, 즉 우리를 직접적으로 둘러싸는 아스트랄계의 대기에 지배당한다. 같은 틀에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는 다른 이들의 생각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우리에게서 같은 주파수의 진동을 끌어낸다.
또한 우리가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부분은 강화하고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약화시킨다. 우리를 상대로 아스트랄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 끝없는 활동은 우리에게 민족적 각인을 새기고 정신 에너지가 흘러가는 통로를 만든다.
자고 있을 때나 깨어있을 때나 이 흐름은 계속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가 그 활동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효과는 더욱 커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나서기보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성향을 갖고 있는 까닭에, 자신에게 다가온 사고를 아무 생각 없이 재생산하고, 그 결과 민족의 대기는 지속적으로 강력해진다.
사람이 아스트랄계의 영향력에 민감해지기 시작하면 가끔식 설명할 수 없는,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두려움에 휩싸이곤 한다. 그 두려움은 엄청난 힘으로 그 사람을 덮친다. 저항해보아도 그 두려움은 느껴지기 마련인데 아마도 그 사람은 그 두려움을 피하고 싶을 것이다. 이런 공포,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불편한 두려움, 무언가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나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어느 정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이런 느낌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는 자연 엘리멘탈계를 움직이는, 그 사람에 대한 어떤 적개심이다. 물질계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져 아스트랄계에서 반응하는 파괴적인 대리자들 때문인 것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원인이 있으니 바로 인간의 정신에서 힘을 얻는 비우호적인 인공적 엘리멘탈이 너무나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증오와 질투, 복수와 비통, 의심과 불만의 생각들은 떼를 지어 밖으로 나가, 생명력 전체가 이런 감정들로 가득한 인공적 엘리멘탈로 아스트랄계를 채운다. 무지한 자가 외양이나 태도가 낯설고 생경한 이들을 향해 쏟아내는 막연한 불신과 의심도 마찬가지다.
외부인들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과 무례한 경멸은 많은 지역에서 다른 나라에 사는 이들에게까지 확대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아스트랄계에 악영향을 미친다.
우리 사이에서도 이런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기에, 아스트랄계에서 맹목적으로 적대적인 무리가 만들어진다. 그러면 우리의 아스트랄체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 두려움은 감지되기는 하지만 이해받지 못하는 적대적인 진동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인공적 엘리멘탈 계층 바깥의 아스트랄계는 여러 존재들이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죽음을 맞아 육체를 잃어버린 인간 실체들을 모두 제외해도 그렇다. (지금은 일단 제외하자.) 자연적 일리멘탈 혹은 자연-영도 아주 많은데 이들은 에테르의 엘리멘탈, 불의 엘리멘탈, 공기의 엘리멘탈, 물의 엘리멘탈, 흙의 엘리멘탈 등 크게 다섯 계층으로 나뉜다.
이 중 불, 공기, 물, 흙의 엘리멘탈에는 중세 오컬트에서 살라만더(Salamander), 실프(Sylph), 운디네(Undine), 놈(Gnome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물론 일곱 계층을 완성하려면 두 계층이 더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우리의 관심 밖이다. 아직 현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질적 엘리멘탈 또는 흙, 물, 공기, 불, 에테르 등 원소들의 피조물도 있는데 이들은 각자 자신의 원소와 관련된 활동을 수행하는 데 관여한다. 이들은 또한 이 여러 분야에서 싱성한 에너지가 흘러가는 경로가 되며, 각각의 분야를 지배하는 법칙을 직접 드러내는 생명체이다.
각 부류의 선두에는 위대한 존재이자 강력한 우두머리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원소 계층이 관리하고 에너지를 제공하는 자연 부문 전체를 지도하고 안내하는 지성이다.
따라서 불의 신 아그니(Agni)는 우주의 모든 계에서 불의 현현을 담당하는 위대한 영적 실체이고 수많은 불-엘리멘탈을 통해 불의 영역을 관리한다. 이들의 특성을 이해하거나 이들의 통제 방식을 파악하면 소위 기적이나 마술을 만들어낼 수 있다.
마술의 결과물이든 '영'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일이든 상관없이 이런 현상들은 가끔 언론에 보도되기도 한다. 작고한 홈(Home) 씨도 그런 경우였는데, 그는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빨갛게 달아오른 석탄을 태연하게 손가락으로 끄집어낸 다음 전혀 손상되지 않은 손으로 그 석탄을 쥘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공중부양(눈에 보이는 지지대가 없는데도 무거운 몸을 공중에 띄움)과 물 위를 걷는 행위는 각각 공기와 물의 엘리멘탈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물론 다른 방법을 동원하는 경우가 더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런 원소들이 인체에 들어오고 그 사람의 본성에 따라 그 중 어떤 원소가 지배권을 장악하면 인간은 이 엘리멘탈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때 그 사람에게 가장 우호적인 엘리멘탈은 그 사람 안에서 가장 우세한 원소의 엘리멘탈이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가 자주 주목을 받곤 하는데 사람들은 그 결과가 '행운' 때문이라고 여긴다. 사람은 식물을 자라게 하거나 불을 붙이거나 지하수를 발견하게 하는 등의 '행운의 패'를 가지고 있다.
자연은 늘 불가사의한 힘으로 우리를 뒤흔들지만, 우리는 자연이 보내는 암시를 재빨리 알아채지 못한다. 예전부터 진실은 격언이나 우화에 숨어 있었지만, 우리는 그런 모든 '미신'을 넘어섰다.
아스트랄계에서는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 인간계에서 형태를 만드는 일에 관여하는 자연-영(약간 부정확한 이름이 붙은 엘리멘탈)도 찾아볼 수 있다. 광물을 만드는 자연-영, 식물에 생기 에너지를 불어넣는 자연-영, 분자 단위로 동물들의 몸을 형성하는 자연-영 등이 그것이다.
이 자연-영들은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광물과 식물, 동물의 아스트랄체를 만드는 데 참여한다. 이들이 바로 각종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요정과 난쟁이, 즉 각 나라의 민속 문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은 인간'들이다.
이들은 매력적이지만 무책임하기도 한 자연의 아이들로서, 과학은 이 아이들을 무정하게 탁아소로 유배 보냈다. 그러나 나중에 현명한 과학자들이 나타나면 이 아이들의 수준에 맞는 자연 질서 속에서 이 아이들을 대신할 것이다.
이제 그들의 존재를 믿는 이들은 시인과 오컬티스트들뿐이다. 시인은 천재적인 직관으로, 오컬티스트들은 내적 감각을 훈련하여 얻은 시감각으로 그들의 존재를 안다.
그런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시인과 오컬티스트들, 그 중 특히 오컬티스트들을 비웃는다. 하지만 상관없다. 지혜는 그 결과를 통해 옳음이 밝혀질 것이므로.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에 있는 여러 형태의 에텔복체 속에서 생명-흐름이 움직이면 그 형태를 구성하는 원자와 분자 구조를 결정하는 아스트랄 물질이 오랜 잠에서 깨어난다.
그러면 아스트랄 물질은 그 광물들 속에서 아주 제한적으로 진동하기 시작하고 형태의 모나드는 특유의 조직력을 발휘하여 아스트랄계로부터 질료들을 끌어당긴다.
자연-영은 이 질료들을 헐겁게 구성된 덩어리, 즉 광물 아스트랄체로 만든다. 식물계에서는 아스트랄체가 조금 더 탄탄한 구성을 갖게 되어 아스트랄체 특유의 '느낌'이 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식물은 아스트랄체의 활동성이 커지면 행복과 불쾌라는 흐릿하고도 널리 알려진 감각이 감지된다. 식물들은 어렴풋하게나마 공기와 비, 햇빛을 즐기고 공기, 비, 햇빛을 더듬더듬 칮는 한편 유해한 환경은 피하려고 한다.
빛을 좋아하는 식물도 있고 어둠을 좋아하는 식물도 있다. 자극이 오면 반응을 보이면서 외부 환경에 적응하는데 어떤 식물은 닿았을 때 솔직한 느낌을 드러내기도 한다.
동물계에서는 아스트랄체가 더욱 발달하여 동물계의 상위 구성원들과 함께 일정한 조직에 속하게 되어, 육체가 죽은 뒤에 한동안 한데 모여 지내다가 아스트랄계에서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동물과 인간의 아스트랄체를 만드는 데 관여하는 자연-영에게는 '욕망-엘리멘탈'이라는 특별한 이름이 붙었다. 이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 온갖 종류의 욕망이고, 이 엘리멘탈들은 동물과 인간의 아스트랄체로 거듭 변신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종류와 비슷한 각종 엘리멘탈 에세스를 이용해 동물의 아스트랄체를 이룬다. 그 결과 동물의 아스트랄체는 서로 얽혀 하나로 작동하는 감각의 중추와 열정적인 각종 활동의 중추를 얻게 된다.
이런 중추들은 조밀체의 기관(器官)이 받아들여 에테르체 기관이 아스트랄체로 보낸 자극을 받으면 기능을 시작한다. 해당 동물은 아스트랄 중추에 자극이 도달하고 나서야 즐거움이나 고통을 느낀다.
돌은 아무리 때려도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돌도 조밀체와 에테르체 분자로 구성되지만 돌의 아스트랄체는 제대로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물을 때리면 통증을 느낀다. 동물은 감각의 아스트랄 중추가 있고 욕망-엘리멘탈이 그 동물의 본성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엘리멘탈이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새롭게 고찰해보면서 아스트랄계에는 어떤 존재들이 사는지 알아본 다음 보다 복잡한 아스트랄 형태에 대해 살펴보자.
앞에서 말했듯이 동물의 욕망체 혹은 아스트랄체도 죽음으로 인해 육체가 소멸되고 나면, 아스트랄계에서 잠깐이기는 하지만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문명화'된 나라에서는 이런 동물의 아스트랄체가 앞에서 말한 일반적인 적개심을 강화한다. 도살장에서 혹은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동물을 체계적으로 도살하는 탓에 매년 수없이 많은 동물들이 공포와 두려움, 인간을 기피하는 마음이 가득 찬 상태로 아스트랄계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평화롭고 조용한 죽음을 맞도록 허락된 생명체도 극소수 있기는 하지만, 샐해당한 생명체들이 워낙 많아서 눈에 띄지도 않는다. 살해당한 생명체들이 만들어 내는 기류로부터 아스트랄계의 영향력은 인간과 동물들에게 비처럼 쏟아진다.
이 영향력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거리가 더 멀어지도록 할 뿐 아니라 동물에게는 '본능적인' 불신과 두려움을, 인간에게는 상대를 잔혹하게 해치고자 하는 욕망을 심어준다.
최근 들어 이러한 감정은 더욱 강해졌다. 냉정한 인간들이 생체 해부라 불리는 과학적 고문 방식을 고안해냈기 때문이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이런 야만 행위 때문에 동물들이 가해자인 인간에 대해 일종의 반응을 일으킴에 따라 아스트랄계에는 새로운 공포가 등장했고 인간과 인간의 '불쌍한 친척'을 가르는 깊은 틈은 점점 벌어졌다.
아스트랄계의 정상적인 주민이라 부를 수 있는 생명체들 외에도 아스트랄계를 지나가는 여행자가 있다. 이들은 자신의 일 때문에 아스트랄계로 향하게 되는데 이들에 대해 잠깐 얘기하고 넘어가자. 이 여행자들 중에는 우리가 사는 지상에서 오는 이들도 있고 더 고귀한 영역에서 방문하는 이들도 있다.
지상에서 오는 이들 중 상당수는 다양한 단계의 입문자들로서 '위대한 백색 롯지' ㅡ 히말라야 혹은 티벳 형제단으로 불림 ㅡ 에 속하는 이들도 있고, 백색에서부터 모든 회색 계열의 색상을 거쳐 흑색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각기 다른 오컬트 롯지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모두 육체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로서, 자기 마음대로 육체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의식을 가지고 아스트랄체 속에서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들은 모든 단계의 지식과 미덕을 갖추고 있으며, 유익하면서도 해롭고, 강하면서도 약하며, 부드러운 동시에 포악하다. 아직 어려서 입문자는 아니지만, 아스트랄체의 사용법을 배우면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따라 선한 일이나 악한 일에 가담하는 이들도 있다.
그 다음으로 다양한 발달 단계의 영매들이 있는데, 이들 중에는 기민한 영매도 있고, 꿈을 꾸는 듯 혼란스러워 하는 영매도 있다. 이들은 육체가 잠을 자거나 무아지경에 빠져있는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외부 환경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생각에 빠진 채 아스트랄 껍질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바짝 오므린 상태로 떠다니는 수많은 아스트랄체 속에는 의식 있는 실체가 살고 있는데, 이들의 육체는 잠에 빠진 상태다.
곧 얘기하겠지만, 육체가 잠에 빠진면 아스트랄체 안의 의식이 빠져나와 아스트랄계로 간다. 하지만 아스트랄체가 충분히 발달해서 육체와 상관없이 제 역할을 할 때까지는 주변을 의식하지 못한다.
아스트랄계에서 가끔 눈에 띄는 존재 중에는 죽음을 이미 통과하여 대스승의 지침에 따라 즉시 환생하려고 기다리는 제자도 있다. 이 제자는 당연히 온전한 의식을 갖춘 상태이고 자다가 육체에서 빠져나온 다른 제자들처럼 움직인다.
특정 단계에서는 제자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환생하기도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아스트랄계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적절한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환생 도중에 있는 인간도 아스트랄계를 지나간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이들은 아스트랄계의 일상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의 열정적이고도 감각적인 여러 활동 때문에 이런 인간들과 잘 맞는 욕망-엘리멘탈은 이들 주변에 모여들어 지구에서의 다음 생을 위해 새로운 아스트랄체를 만드는 작업을 도와준다.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인간의 아스트랄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살펴보고 그 특성과 구성, 아스트랄계와의 관계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발달이 덜 된 인간의 아스트랄체, 일반적인 인간의 아스트랄체, 영적으로 발달한 인간의 아스트랄체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발달이 덜 된 인간의 아스트랄체는 흐릿하고, 구성이 헐거우며 아스트랄 영-물질로 이루어졌으나 윤곽이 흐릿한 덩어리다. 아스트랄계의 모든 소부류에서 온 질료 ㅡ 아스트랄 물질과 엘리멘탈 에센스 ㅡ 를 포함하고 있으나 하위 계에서 온 물질이 훨씬 많다. 그래서 질감이 조밀하고 거칠 뿐 아니라 열정이나 욕구와 관련된 모든 자극에 반응하기에 적합하다.
진동 속도에 따라 달라지는 색깔은 칙칙하고 우중충하고 탁해서 갈색, 칙칙한 빨간색, 거무튀튀한 녹색 등이 주를 이룬다. 이런 아스트랄체를 통해 빛이 아른거리거나 여러 색깔의 빛이 빠르게 깜빡이는 일은 없지만, 다양한 열정은 육중한 파도로, 아니면 결렬할 때는 섬광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성욕은 우중충한 진홍색의 파도를 내보내거나 현란한 빨간색의 섬광을 일으킨다.
발달이 덜 된 인간의 아스트랄체는 육체보다 더 큰데 지금 이 경우에는 사방으로 25에서 30센티미터 정도 더 크다. 감각 기관의 중추는 확실하게 표시가 나고 외부에서 신호가 오면 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활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생명-줄기가 느리게 움직인다.
이 단계의 아스트랄체는 물질계나 멘탈계에서 자극이 오지 않으면 나른한 상태에 빠져 주변에 무관심해진다.36 내부 의식이 아닌 외부에서 활동을 촉발하는 것은 미발달 상태의 존재가 보이는 한결같은 특징이다. 돌이 움직이려면 밀어야 하고, 식물이 움직이려면 빛과 수분으로 끌어당겨야 하며, 동물이 움직이려면 허기가 지도록 해야 한다. 발달이 덜 된 인간도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마음을 조금이라도 성장하게 해야만 행동을 시작한다.
아스트랄 감각의 독자적 기능과 관련이 있는 고차원적인 활동의 중추37는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 단계의 인간이 진화하려면 온갖 종류의 격렬한 감각 활동이 필요하기 때문에 본성을 깨우고 자극하여 활동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인간을 깨워서 행동하게 하려면 즐거움이든 고통이든 외부 세계에서 심한 충격이 가해져야 한다. 감각 활동이 다양하고 격렬해질수록 인간은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되어 성장에 도움이 된다. 이 단계에서 감각 활동의 질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양과 활력이 중요한 요건이 된다.
이런 인간의 도덕성은 열정에서 시작된다. 아내나 자식, 친구와의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이기심을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면 상위 단계로 올라가는 첫 걸음이 된다.
이때 아스트랄체의 미세한 물질에 진동을 일으키거나 적절한 엘리멘탈 에센스를 더 많이 끌어당기는 방식을 통해 상위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 아스트랄체는 열정과 욕구, 욕망과 감정이 아른거리는 가운데 끊임없이 질료를 바꾼다.
좋은 아스트랄체는 모두 미세한 부분을 더 강화하고 조악한 구성 성분을 일부 털어내며, 미세한 질료를 끌어들이고 발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는 유익한 엘리멘탈을 주변으로 끌어 모은다. 나쁜 아스트랄체는 정반대의 행동을 한다. 조악한 부분을 강화하고 미세한 구성 성분을 몰아내며, 조악한 성분을 더 끌어들이고 발달을 거스르는 데 도움을 주는 엘리멘탈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ㆍ지적 힘은 아직 발달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어서, 아스트랄체를 구성하고 바꾸는 작업의 대부분은 그 인간이 직접 주도한다기보다 다른 이들이 그를 위해 대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그 작업은 인간 자신의 의지보다는 외부 환경에 좌우된다.
방금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 내부에서 발동을 걸어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기보다는 외부에서 발동이 걸려 아스트랄체를 통해 움직이는데, 이것이 바로 하위 발달 단계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욕망 ㅡ 외부에서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는 힘 ㅡ 에 따라 움직이는 대신 자신의 의지와 에너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은 상당한 발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잠을 자는 동안 아스트랄체는 의식을 다른 것으로 덮어버리고 육체에서 빠져나와 조밀체와 에테르체를 잠에 맡긴다. 이 단계에서 의식은 아스트랄체 안에서 깨어있지 않은 상태다. 의식이 육체에 머무는 동안 자극을 주었던 강한 접촉이 없기 때문이다. 아스트랄체에 영향을 주는 것은 조악한 엘리멘탈뿐이다.
이 엘리멘탈은 아스트랄체 안에 진동을 일으켜 그 진동이 에테르체의 뇌와 조밀체의 뇌로 반사되도록 하여 동물적 쾌락을 제공하는 꿈을 꾸게 한다. 아스트랄체는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멀리 가지 못하고 육체 바로 위에서 떠다닌다.
도덕과 지적 능력이 평균 정도인 인간의 경우 아스트랄체는 방금 설명한 인간들에 비해 상당한 발전을 보인다. 크기는 더 크고 질료는 질적 측면에서 더 균형을 이루며 더 희귀한 질료로 구성되기에 전체적으로 빛이 난다. 또한 더 높은 수준의 정서가 표현되는 가운데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잔파도가 넘실거린다.
발달 단계가 낮은 인간들은 윤곽이 모호하고 계속 바뀌지만, 평균 수준의 인간들은 뚜렷하고 명확한 윤곽을 가지면서 주인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구조가 뚜렷하고 인정적이어서 내면의 인간에게 알맞은 매개체가 되어가는 단계다.
몸은 언제라도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적합한 상태일 뿐 아니라 육체와 분리된 채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 유연성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윤곽에 변형을 일으키는 압력이 사라졌을 때 되돌아갈 일정한 형태는 아직 갖추지 못했다. 지속적으로 활동하기에 쉬지 않고 진동하면서 끊임없이 변하는 다양한 색깔을 선보인다. 아직 제 기능을 하지는 못하는 '바퀴'도 또렷하게 보인다.38 육체를 통해 접촉해 오는 모든 것에 재빨리 반응하며 내부의 의식적 실체에서부터 비처럼 쏟아지는 여러 영향에 휩쓸린다.
이 단계의 아스트랄체는 기억과 상상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행동을 시작하며 육체의 움직임에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활동을 촉발하기도 한다. 정화 과정은 앞서 설명한 단계와 동일하게 진행된다. 하위 단계의 구성 성분에 대해 적대적인 진동을 만들어내어 그 구성 성분들을 쫓아내고 더 미세한 질료들을 그 자리로 끌어들이는 식이다.
하지만 이 단계의 인간은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발달했기 때문에 아스트랄체 형성 과정의 거의 전부를 자신이 직접 통제할 수 있다. 외부 자연에서 오는 자극에 영향 받는 대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추론하고 판단하여 저항하거나 굴복하기 때문이다.
이 단계의 인간은 올바른 사고를 통해 아스트랄체에 빠르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그 자신도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다.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 그 작동 방식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사물을 보기 위해 빛의 법칙을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이 잠들면 발달 단계가 높은 이 아스트랄체는 평소처럼 육체에서 빠져나오지만 앞의 단계처럼 육체에 매이는 일은 절대로 없다. 아스트랄체는 아스트랄계를 배회하면서 아스트랄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떠다닌다.
이때 아스트랄체 안에 있는 의식은 잠들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속 이미지와 활동을 즐긴다. 이 의식은 아직 움직임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아스트랄체를 통해 받아들인 인상을 마음속 이미지로 변환할 수는 있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몸 밖에 나와 있을 때에도 지식을 습득한 다음, 그 지식을 뇌에 생생한 꿈이나 환상으로 각인하거나, 이런 식으로 기억과 연결하는 대신 그대로 통과시켜 뇌-의식에 저장한다.
영적으로 발달한 인간의 아스트랄체는 아스트랄 물질의 각 소부류에서 가장 미세한 입자들로 구성된다. 이때 각 소부류에서는 상위 단계의 입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양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이 아스트랄체는 광채와 색깔이 매우 아름답고, 정화된 정신이 지상으로 쏟아낸 자극에 따라 지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색채를 뽐낸다. 불의 바퀴는 이제 이름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 소용돌이치는 이 바퀴들의 움직임은 더 높은 단계의 감각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린다.
이런 아스트랄체는 말 그대로 의식의 매개체이다. 진화를 거치면서 모든 신체 기관이 생기를 얻었고 주인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스트랄체 속의 인간이 육체에서 빠져나와도 의식은 끊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무거운 육체를 털어내고 그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아스트랄계 안에서 어디든 아주 빠르게 이동할 수 있고 더 이상 지상의 여러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의 몸은 의지에 응답하며 사고를 반영하고 따른다.
따라서 인류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엄청나게 많아지고, 미덕과 선행에 인도에 따라 자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아스트랄체에 조잡한 입자가 없기 때문에 하위 단계의 욕망의 대상이 자극해 와도 응답할 수 없고, 그 욕망의 대상도 인간을 끌어당길 수 없다는 듯 피해가게 된다.
이 단계의 인간은 상위 단계의 감정에만 응답하여 온뭄이 진동한다. 사랑은 헌신으로 바뀌었으며 에너지는 인내의 통제를 받는다. 부드럽고 고요하며 평화롭고 모든 힘을 갖추고 있으나 동요의 흔적이 없는 인간에게 "모든 시디스(Siddhi, 초능력이라는 뜻ㅡ옮긴이 주)는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39
아스트랄체는 의식과 육체의 뇌를 갈라놓는 깊은 틈 위로 다리를 놓는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감각기관이 받아들여 조밀체와 아스트랄체의 중추로 전달한 자극은 그곳을 지나, 해당하는 아스트랄체의 중추로 전해진다.
여기에서 엘리멘탈 에센스는 그 자극을 감정으로 바꾼 다음 내면의 인간에게 의식의 대상으로 보여주고, 아스트랄 진동은 멘탈체의 질료 속에서 그 감정에 맞는 진동을 찾아 깨운다.40 이렇게 영-물질의 미세함이 서서히 조금식 변하면서 지상의 물체가 보내는 무거운 충격이 의식적 실체에게 전달될 수 있다.
또한 사고가 만들어내는 진동도 같은 다리를 따라 육체의 뇌에 도달하여 멘탈체의 진동에 맞는 육체의 진동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의식이 외부의 인상을 받아들이고 인상을 외부로 내보내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아스트랄체는 주로 이러한 진동의 귾임없는 이동을 통해 발달한다. 이런 흐름은 내부와 외부에서 아스트랄체에 작용하여 아스트랄체의 구조를 진화시키고 전반적인 성장을 돕는다. 아스트랄체는 이런 식으로 크기가 커지고 질감이 미세해지며, 윤곽이 뚜렷해지고 내부적으로도 체계를 갖추게 된다.
이렇게 의식에 반응하도록 훈련된 아스트랄체는 점차 독립적인 매개체로서 제 기능을 다할 뿐만 아니라, 아스트랄계에서 직접 전달받은 진동을 의식으로 정확하게 전달하기에 적합한 상태가 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에는 물리적 충격으로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외부의 어떤 현상을 통해 금방 확인되는 인상이 외부에서 들어와 의식으로 전달되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런 인상은 아스트랄체에 곧바로 도달해 의식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머지않아 사실로 드러나는 예감의 성격을 띠는 경우도 많다. 여러 상황에 따라 단계는 크게 달라지겠지만 인간이 상당히 진화하면 육체와 아스트랄체 사이에, 그리고 아스트랄체와 멘탈체 사이에 연결로가 생겨서 의식이 끊어지지 않고 여러 상태를 오가며 활동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의식이 여러 계 사이를 오가는 동안 무의식의 시간이 끼어들어 기억이 중간에 끊어지기도 하지만, 발달 단계가 높은 사람은 그런 일이 없다.
이 단계의 인간은 의식이 육체 안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도 아스트랄체의 감각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지식이 이동하는 길이 넓어져 깨어있는 의식이 한층 풍요로워진다. 믿음의 문제였던 것들은 지식의 문제가 되고, 보이지 않는 세계의 하위 영역에 대한 신지학적 가르침이 얼마나 정확한지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을 어떤 '본질'로 분해하면, 예를 들어 생명을 현현하는 방식으로 분해하면, 인간의 하위 본질 네 가지, '하위 사중체'는 아스트랄계와 물질계에서 활동한다고 한다. 네 번째 본질은 카마(kama), 즉 욕망이며 아스트랄체에서 현현하고 아스트랄체의 영향을 받는 생명체다. 카마의 특징을 들자면,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감각으로든 복잡한 형태의 감정으로든 그 사이의 어떤 단계로든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이다. 이는 한 마디로 욕망을 말하며 개성아(personal self)에게 쾌락을 주느냐 고통을 주느냐에 따라, 어떤 대상에 대해 매력이나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세 번째 본질은 프라나(Prana), 즉 생명체를 지탱하는 생명력이다. 두 번째 본질은 에텔복체이고 첫 번째 본질은 조밀체이다. 프라나, 에텔복체, 조밀체는 물질계에서 활동한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후기에 이들을 다시 분류하면서 기본 본질의 등급에서 프라나와 조밀육체를 제외했다. 프라나는 보편적 생명이며, 조밀육체는 에테르체에 지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는 질료를 에테르 틀에 넣어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면 유일한 생명, 유일한 자기(self)라는 철학적 개념이 생기는데 이 유일한 생명은 인간으로 현현하면서, 자신이 생명력을 부여하는 여러 종류의 몸이 갖는 여러 조건에 따라 다양하면서도 일시적인 차이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자신은 중심에서 같은 상태로 머물면서 그 몸 안의 물질이 무엇이냐에 따라 외부로 다른 양상을 내보인다.
육체에서 드러나는 양상은 에너지를 븍돋우고 통제력과 조정력을 발휘하는 프라나이다. 아스트랄체에서 드러나는 양상은 느끼고 즐기고 고통 받는 카마이다. 상위 계로 넘어가면 다른 양상을 볼 수 있겠지만 기본 개념은 모두 동일하다. 제대로 파악하면 이렇게 복잡하게 뒤얽힌 세상에서 안내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신지학의 또 다른 근본 개념인 것이다.
3장
카말로카
카말로카는 '욕망'이 머무는 장소'라는 뜻으로,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아스트랄계의 일부다. 아스트랄계와 별개의 장소로 분리되지는 않지만, 그곳에 속하는 실체들의 의식이 갖는 여러 조건에 의해 구분이 되기는 한다.41 이곳에 속하는 인간들은 죽음을 맞아 육체를 잃어버린 이들로서 인간 그 자체, 정확하게는 인간혼에게 마련된 행복하고도 평화로운 삶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정화를 위한 변화를 겪어야 한다.42
이 영역을 설명할 때는 다양한 지옥, 연옥, 중간 상태의 조건들이 동원된다. 모든 위대한 종교에서는 이런 곳들을 일컬어 인간이 몸에서 벗어난 후 '천국'에 이르기 전에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고문이 끝없이 이어진다거나 얄팍한 일부 광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지와 증오, 두려움으로 가득한 악몽 같은 곳은 아니다. 하지만 정화를 위한 일시적 고통은 분명 존재하는데 인간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 저지른 일들을 본인이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잘못된 행동이 이 세상에 가져오는 결과만큼이나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과정이다. 우리는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고 모든 씨앗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자라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서 인간의 도덕적ㆍ정신적 본성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한 세계에서 다음 세계로 이동하여 상태가 변하면 육체는 사라지지만 인간은 그 이전의 상태 그대로 남는다.
카말로카의 특징은 아스트랄계의 모든 소부류에서 나타나는 특징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카말로카에 있는 일곱 영역을 가장 낮은 단계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올라가면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영역부터 일곱 번째 영역이라고 부르면 될 것 같다.43
우리는 앞에서 이미 아스트랄계의 각 소부류에서 나온 질료가 아스트랄체를 구성한다는 것을 배웠다. 잠시 후에 설명하겠지만, 바로 이런 질료들의 독특한 재배치를 통해 어떤 영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다른 영역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구분하는 것이다. 물론 같은 영역에 속하는 이들끼리는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아스트랄계의 각 소부류에 해당하는 이 영역들은 밀도에서 차이를 보이며 카말로카 실체가 어떤 영역에 소속되고 제약 받는가는 그 실체가 갖는 외부 형태의 밀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물질의 차이는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의 이동을 막는 장애물이 된다. 한 영역에 머무는 사람들은 그 외의 다른 영역에 속한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다. 이것은 심해에 사는 물고기가 독수리와 대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의 삶에는 꼭 필요한 환경이 다른 사람의 삶에는 파괴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육체가 죽음으로 종말을 맞으면 에테르체는 남아있는 본질들 ㅡ 조밀체를 제외한 전체 인간 ㅡ 과 더불어 프라나를 가지고 '육체라는 임시 거처(외부의 몸을 일컫는 표현)'에서 빠져나온다. 밖을 향하는 모든 생명-에너지는 안으로 끌려들어가 프라나의 부름 아래 모이게 되고 육체의 감각 기관들이 차츰 둔감해지면 비로소 이 생명-에너지가 떠났음을 알게 된다. 이 감각 기관들은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은 물리적으로 완전한 상태로 남아 늘 해왔던 대로 행동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 기관들을 통해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고 맛을 느꼈던 '내면의 통치자'가 떠나고 나면, 이 기관들은 살아있기는 하지만 인지할 능력이 없는 물질의 총체에 불과하다. 몸을 지배하던 주(主)는 보랏빛 회색의 에테르체에 싸인 채, 과거의 삶이 만들어내는 파노라마를 지켜보며 서서히 멀어진다. 죽음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 파노라마는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모두 완전하다.
이런 삶의 그림 속에는 사는 동안 일어났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들어있다. 성공 혹은 좌절로 끝난 야망, 온갖 실패, 사랑, 증오도 보인다. 인생 전체를 이끌었던 주요 성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인생을 지배했던 사고가 제 모습을 드러내며 혼 앞에 깊이 각인된다.
그리하여 죽은 후에 어느 곳에서 상당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인지가 드러난다. 인간이 자신의 삶과 직면하고 과거의 입술을 통해 미래의 모습을 엿듣는 그 순간은 장엄하기 그지없다. 아주 짧은 순간동안 그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삶의 목적을 인식하며 그 법칙이 강력하고 정의로우며 선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다음 조밀체와 에테르체를 연결했던 자성을 띤 끈은 끊어지고, 평생 함께한 동지들은 흩어지며,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는 평화로운 무의식 속으로 빠져든다.
죽어가는 육체 주변으로 모여드는 모든 존재들은 조용하고 경건한 태도를 취한다. 장엄한 침묵을 실천하며 죽어가는 그 인간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큰 소리로 울거나 한탄하면 그 혼이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상실에 대한 비통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이기적이면서도 무례한 것이다. 망자를 데려간 정적은 그를 돕고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종교의 가르침은 현명한 것이었다. 그 기도는 평온함을 유지해주고 망자에게 도움이 되는 비(非)이기적인 염원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또한 애정 어린 모든 생각처럼 망자를 보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죽은 후 몇 시간 ㅡ 보통은 36시간 이내 ㅡ 동안 인간은 에테르체에서 빠져나오고, 에테르체는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시체로 남겨진다고 한다. 에테르체는 조밀체 주변에 남아 운명을 같이 한다.
조밀체가 땅 속에 묻히면 에텔복체는 무덤 위를 떠돌다가 서서히 해체된다. 교회 묘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불쾌한 느낌은 이렇게 썩어가는 에테르 시체 때문인 경우가 많다. 시체를 불에 태우면 에텔복체는 자신의 둥지, 즉 물리적 인력의 중추를 잃어버려 아주 빨리 분해된다. 이는 시체를 처리할 때 매장보다 화장을 선호하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다.
인간이 에텔복체에서 빠져나오면 프라나에서도 빠져나오게 된다. 그러면 프라나는 생명의 위대한 저장소로 돌아가고 인간은 카말로카로 갈 준비가 된 상태로 아스트랄체가 재구성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데 필요한 정화의 변화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44
지상에서 고체, 액체, 기체, 에테르가 섞여 육체가 만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아스트랄 물질들이 섞여 아스트랄체가 형성된다. 죽은 후에 아스트랄체의 구성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은 이러한 질료들이 각각의 밀도에 따라 분리되어 일련의 동심원 겁데기로 바뀐다는 의미다.
가장 미세한 질료들이 중심으로 가고 가장 밀도가 높은 질료들이 밖으로 간다. 각각의 겁데기는 아스트랄계의 어느 한 소부류에서 온 질료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아스트랄체는 일곱 겹이 겹쳐진 하나의 집합 또는 아스트랄 물질을 일곱 개의 껍데기로 둘러싼 형태가 된다. 인간이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며, 인간은 이 껍데기를 깨고 나올 때에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제 지상에 사는 동안 아스트랄체가 정화되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볼 차례다.
인간은 카말로카의 각 소부류를 덮고 있는 물질의 껍데기가 충분히 분해되어 다음 단계로 탈출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소부류에 속해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각 물질 안에서 그의 의식이 어느 정도까지 노력했느냐에 따라, 어떤 특정 영역에서 깨어나 의식을 갖게 될지 아니면 '장밋빛 꿈에 싸인 채' 기계적 해체 과정에 필요한 시간 동안 붙들려 무의식 상태로 그 영역을 통과할지가 결정된다.
영적으로 발달한 인간, 다시 말해 아스트랄 물질의 각 소부류에서 가장 미세한 등급의 구성 성분으로만 아스트랄체가 이루어진 인간은 카말로카를 지체 없이 통과한다. 이 과정에서 아스트랄체는 아주 신속하게 해체된다. 이런 인간은 자신의 목적지까지 계속 나아가는 데 그 목적지는 그가 진화의 어느 지점까지 이르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인간 중에서도 순수하고 절제된 삶을 살아온 덕분에 지상의 모든 것들에게 짐이 되지 않았던 인간은 약간 느려진 속도로 카말로카를 날아서 통과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평화로운 꿈을 꾸고 주변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멘탈체는 아스트랄 껍데기로부터 차례로 풀려나 천상의 장소에 도달하고서야 깨어난다. 발달 수준이 더 낮은 인간들은 하위 영역에서 빠져나온 후에 깨어나 지상에서 사는 동안 의식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영역에서 의식을 되찾는다.
익숙한 충격을 받으면 의식이 깨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충격을 육체의 도움 없이 아스트랄체로부터 직접 받게 된다. 동물의 열정으로 살았던 이들은 자신에게 맞는 영역에서 깨어난다. 말 그대로 각자가 '자신의 장소'로 가는 것이다.
사고나 자살, 살인 등 어떤 식으로든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물질계의 삶에서 급작스럽게 빠져나온 이들은 질병이나 노화로 생명-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해 떠나온 사람과는 다른 상황을 맞게 된다. 갑작스럽게 죽은 이들이 순수하고 영적인 삶을 살았다면 특별한 보호를 받아 잠에 빠지듯 평화롭게 수명을 마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의식이 깨어있는 채로 아스트랄체의 가장 바깥층과 연결된 영역에 계속 남아 있게 된다. 이때 지상에서의 마지막 장면에 한동안 매여 있기도 하고 육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도 한다. 이들은 지상의 삶이라는 거미집이 모두 지어진 후에야 카말로카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고, 아스트랄계와 물질계를 모두 생생하게 의식한다.
블라바츠키 여사의 한 스승의 말에 따르면, 살인을 저질러 처형된 어떤 남자는 카말로카에서 자신의 살인 현장과 그 후의 사건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자신의 극악무도한 행동을 끝없이 반복할 뿐만 아니라 체포되고 처형되던 공포를 되풀이해서 겪는다고 한다.
자살한 이들은 죽기에 앞서 느꼈던 절망과 두려움을 의지와 상관없이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자살이라는 행위와 죽음과 사투를 벌였던 시간을 무시무시할 정도로 끈질기게 겪고 또 겪는다.
끔찍한 공포를 느끼며 불길에서 탈출하려고 미친 듯 애쓰다가 결국 죽음을 맞은 한 여자는 거대한 열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 탓에, 닷새가 지난 후에도 자신이 계속 불길 속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달래려는 모든 노력을 거부하고 필사적인 분투를 계속했다.
또 어떤 여자는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거친 폭풍우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물길에 휩쓸려 죽음을 맞았다. 그녀의 마음은 평온과 사랑으로 가득했고 살아있는 듯한 행복한 환영 속에서 남편과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며 죽음의 반대편에서 평화롭게 잠들었다.
이렇게 특이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고로 인한 죽음은 본인이 저지른 심각한 잘못45에서 비롯된 불이익이 따른다. 지상 세계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카말로카의 하위 영역에서 완전한 의식을 갖게 되면 여러 불편과 위험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이루었던 모든 계획과 관심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주변의 사람들과 물체들의 존재를 의식한다. 그리고 그의 열정과 감정이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모든 일을 시도하고 그 일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열망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그를 몰아붙인다.
그러나 그는 활동을 가능하게 했던 익숙한 장기(臟器)를 모두 잃은 채 지상에 묶여있다. 그가 유일하게 바라는 평화를 얻으려면 단호하게 지상 세계를 떠나 고차원적인 것들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도와주고 안내하는 의무를 가진 아스트랄계의 일꾼46들이 힘을 보탠다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고통 받는 이들이 활동하지 못하는 무력한 상태를 참지 못하고 민감한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경우도 많다. 민감한 이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 지상에서의 여러 일에 다시 한 번 관여하려는 것이다.
때로는 편리한 매개자들을 사로잡아서 자기 목적을 위해 다른 이들의 몸을 이용하려고 하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 미래에 해결해야 할 많은 책임이 생긴다. 따라서 영국의 교회에서도 오컬트와 상관없이 '주여, 전쟁과 살인, 갑작스러운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쳤다.
이제 카말로카의 여러 영역을 하나씩 살펴보고 인간이 물질계에서 사는 동안 키워온 욕망이 이 중간 상태 속에 만들어내는 여러 상황에 대해 알아보자. 어떤 특정 '껍데기' 안에 있는 에너지의 양은, 지상에 사는 동안 그 껍데기를 구성하는 물질 속으로 보낸 에너지의 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가장 낮은 수준의 열정이 활발하게 움직였다면, 가장 조악한 물질이 강한 에너지를 얻고 그 양도 상대적으로 많아진다. 이 원칙은 카말로카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기에 인간은 지상에 사는 동안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상당히 합리적인 판단, 즉 자신이 죽음의 바로 반대편에서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첫 번째이자 최하위 영역은 힌두교와 불교 경전에서 다양한 종류의 '지옥'으로 묘사한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비로 인간은 이런 상태 중 하나에 진입해도 자신을 그곳에 이르게 한 열정과 비도덕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열정과 욕망은 그의 성격 중 일부로 남아서 처음에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가, 그가 물질계에서 환생할 때 다시 튀어나와 그의 열정적인 본성을 형성한다.47
그 사람이 카말로카의 최하위 영역에 머무는 이유는 그 영역에 속하는 물질의 감정체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물질의 상당 부분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그 물질로 구성된 껍데기가 충분히 해체되어 그가 다음 단계의 영역과 접촉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영역에 붙잡혀 있게 된다.
이 영역의 대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음울하고 무겁고 따분하고 우울하다. 선(善)과 가장 반대되는 모든 영향력으로 진동하는 듯 보이는데 실제로 이런 영향력을 쏟아내는 것은 악한 열정 때문에 무시무시한 이곳에 이르게 된 사람이다. 우리가 몸서리치는 모든 욕망과 감정이 자신을 드러낼 질료를 찾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실제로 이곳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든 공포가 소름끼치는 나신(裸身)으로 가두행진을 하는 곳이다.
이런 불쾌함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아스트랄계에서는 인격이 형태로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악한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은 그 악한 열정 전체가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짐승 같은 욕구를 가진 사람은 아스트랄체가 짐승의 형태를 띠며, 잔혹한 인간의 혼은 그에 걸맞은 불쾌한 인간 동물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아스트랄계에서는 그 누구도 위선자가 될 수 없고 고결해 보이는 외피로 더러운 생각을 가질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 어떻든 외부 형태와 겉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이 고결하면 아름다운 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본성이 더러우면 소름끼치는 불쾌함으로 나타난다.
온 세상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부처와 같은 스승들이 이런 지옥의 모습을 끔찍한 비유를 동원해 생생한 언어로 묘사한 것이 요즘 독자들에게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도 하다. 사람들은 모든 혼이 일단 물질계의 무겁고도 유연하지 않은 물질에서 벗어나면 본연의 모습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잊기 때문이다. 퇴락하고 정신 나간 악당이 자신의 얼굴을 역겹게 바꾸어 버리는 일은 지상에서도 일어난다. 그렇다면 유연한 아스트랄 물질이 그런 범죄자의 욕망이 보내는 자극에 따라 형태를 만드는 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런 사람은 온갖 섬뜩한 면모를 드러내며 무시무시한 형태의 외피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이 최하위 영역의 인구 ㅡ 인구라는 단어를 써도 된다면 ㅡ 는 인간쓰레기, 살인자, 악당, 모든 유형의 폭력적인 범죄자, 주정뱅이, 난봉꾼, 최악의 인간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일부러 계속 잔혹하게 행동한 후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과 사악한 욕구에 사로잡힌 사람을 제외하면 이곳에는 주변 환경을 자각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진 이가 아무도 없다.
모든 면에서 이런 사람들보다 낫지만, 한동안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존재로 자살한 사람들이 있다. 이 자살자들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지상에서 치러야 하는 대가를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피하고자 했으나, 그 결과 자신의 위치가 더 악화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모든 자살자들이 여기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자살의 동기는 아주 다양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후 그에 따른 결과를 회피하고자 자살한 사람만 이 경우에 해당한다.
암울한 주변 환경과 혐오스러운 동료들을 제외하면 이곳의 모든 인간은 자신의 불행을 스스로 창조한다. 육체라는 껍질이 사라졌다는 점만 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이 인간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열정을 본연의 섬뜩하고도 잔혹한 모습 그대로 드러낸다. 만족되지 않은 포악한 욕구로 가득하고, 육체의 여러 장기가 사라져 더 이상 물질적 탐닉을 즐길 수 없게 되자 이에 대한 열망과 복수, 증오로 끓어오르게 된 이곳의 사람들은 이 암울한 영역 전체를 여기저기 배회한다.
격분하여 약탈하기도 하고, 사창가와 화려한 술집 등 지상에서 악이 판치는 장소로 몰려가기도 하며, 자기 안의 존재에게 수치스럽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기도 하고, 그 존재를 사로잡아 극단적인 악행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이런 여러 장소에서 느껴지는 구역질나는 기운은 사악한 열정과 더러운 욕망으로 악취를 풍기며 여전히 지상에 묶여 있는 아스트랄 실체들에게서 주로 나오는 것이다.
아주 순수하고 고귀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영매들이 주로 특별한 공격 대상이 된다. 약한 영매들은 육체를 빼앗긴 혼들이 일시적으로 거주할 곳을 찾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몸을 빼앗기는 경우가 많다. 이런 영매들은 몸을 빼앗긴 후 더 약해지고 이 혼들에게 사로잡혀 무절제하고 광기어린 행동을 하기도 한다.
처형당한 살인자들은 공포로 격분하고 복수하겠다는 뜨거운 증오심에 휩싸인 채 다시 범죄를 저지르거나 마음속으로 끔찍한 결과를 그리면서 흉포한 사고-형태로 가득한 기운으로 주변을 채운다.
복수심이나 폭력적인 계획을 품은 사람이라면 아무에게나 다가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행동을 실제로 저지르도록 충동질한다. 때로는 자기가 죽인 희생자에게 끊임없이 쫓기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천천히 그러나 끈질기게 괴롭히는 그 희생자로부터 벗어나려고 죽어라 기를 쓰지만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살해당한 이는 아주 비열한 부류가 아니라면 무의식에 잠겨 있는데, 이렇게 무의식 상태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계적으로 가해자를 쫓는 그의 행동은 더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카말로카에는 생체 해부자의 지옥도 존재한다. 잔혹성이라는 성질이 가장 조악한 질료와 아스트랄 물질의 가장 불쾌한 조합을 아스트랄체 속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생체 해부자는 자신에게 생체 해부를 당한 이들의 형태가 운집한 가운데 그 속에서 살아간다.
이 희생자들은 떨리는 몸으로 신음하면서 울부짖는데(이들에게 에너지를 불어넣는 것은 동물의 혼이 아니라 엘리멘탈 생명이다) 이들의 맥박을 뛰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을 괴롭힌 자에 대한 증오이다. 이 생체 해부자는 그 모든 공포를 의식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주기적으로 가장 끔직한 실험을 반복하며 지상에서 몸에 밴 습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속 자학하게 된다.
이 끔찍한 영역에 대해 기억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여기서는 외부에서 임의로 벌을 내리는 일이 없지만 각자가 만들어낸 원인이 필연적인 결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런 악한 이들은 물질계에서 사악한 충동에 굴복하여 이런 충동에 반응하여 혼자서도 진동할 수 있는 질료로 아스트랄체를 만들었다. 이렇게 본인이 직접 만든 아스트랄체는 혼의 감옥이 되는데, 이 감옥이 허물어진 후에야 그 혼은 빠져나갈 수 있다. 불쾌하고 술에 찌든 육체 속에 살아야 하는 주정뱅이는 어쩔 수 없이 그만큼 불쾌한 아스트랄체 속에서 살아야 한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세계의 법칙이고, 그 누구도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상에서 살면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아스트랄 방사물로 주위의 기운을 악취로 진동하게 만들었던 사람은 아스트랄체도 역겹고 끔찍하다. 하지만 지상의 인간들은 아스트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추한 모습을 대체로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의 이런 불행한 형제들을 생각할 때 이들의 고통은 일시적일 뿐이고 혼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교훈을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기분이 나아질지도 모른다. 우리의 불행한 형제들은 자신이 무시했던 그 자연 법칙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압박을 받으면서 이런 법칙의 존재 그리고 삶과 행동 속에서 그 법칙을 무시했을 때 겪게 되는 불행을 배운다.
그들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 배우려 하지 않았던 이런 교훈들은 욕정과 욕망의 급류에 휩쓸려 사라졌다가 이곳에서 다시 나타나 그들을 압박한다. 그리고 모든 악이 뿌리 뽑히고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때까지, 이 교훈들은 이후의 삶에서도 계속 그들을 압박할 것이다. 자연의 교훈은 모질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자애롭다. 이 자연의 교훈이 결국 혼의 진화를 안내하고 불멸을 얻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제 좀 더 유쾌한 영역으로 넘어가보자. 아스트랄계의 두 번째 영역은 물질계를 아스트랄계에 똑같이 복제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물체와 많은 사람들의 아스트랄체가 주로 아스트랄계의 이 영역에 속하는 물질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역은 아스트랄계의 다른 영역보다 물질계와 더 밀접하게 닿아있다.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이곳에 어느 정도 머물게 되는데 이 중 상당수는 이때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이들은 사소하고도 하찮은 삶의 목표에만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 쓸데없는 것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 낮은 수준의 본성에 지배당한 사람들, 물질적 쾌락에 대한 욕구가 여전히 활발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은 사람들이다.
삶을 주로 이런 방향으로 이끌어 물질적 자극에 쉽게 반응하는 질료로 아스트랄체를 구성했기에, 이들은 물질적 매력이 넘치는 영역의 아스트랄체에게 붙잡혀있다.
이들은 대부분 불만으로 가득하고 불안하고 침착하지 못하며 어느 정도 고통을 받는다. 이 고통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얼마나 만족시키지 못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이들은 이런 이유로 긍정적인 고통을 겪느라 지상에서의 열망이 소진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지상과 소통하려고 애쓰느라 쓸데없이 오래 머물게 되는 이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영매를 통해 자신이 관심을 갖는 대상과 얽히기도 하는데, 이 영매들은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도록 빌려주었다가 결국 그 육체를 잃게 된다. 대중을 상대로 한 강령회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싸구려 여인숙과 작은 가게에서 오가는 험담과 진부한 도덕률 등은 대부분 이런 영매의 입에게서 나온다.
이렇게 지상에 얽매인 혼들은 일반적으로 지적 수준이 낮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혼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이들이 육체 안에 있을 때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에도 관심이 없지만, 이들이 이곳에서 의사소통하는 내용에도 관심이 없다. 또한 이들은 지상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지할수록 긍정적이어서 아스트랄계 전체가 자신이 속한 아주 제한된 영역과 동일하다고 여긴다. 자신이 사는 시골 마을의 수다소리가 세상의 속삭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영역의 사람들은 마음속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은 뒤에도 자신을 괴롭히는 지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친구에게 연락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들은 자기 모습을 드러내거나 꿈을 통해 친구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려주려고 하다가, 실패하면 쿵쿵거리는 등 여러 소음을 내어 짜증을 유발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소음을 내는 것은 관심을 끌려는 직접적인 행동이거나 쉬지 않고 부단히 애쓴 탓에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행동이다. 그런 경우에 반응력이 뛰어난 사람이 실의에 빠진 실체와 소통하여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자 하는 것은 자선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실체는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불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혼은 이 영역에 머무는 동안 자발적으로 지상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는 않지만 아주 쉽게 지상의 일에 관심을 빼앗긴다. 이들에게 이런 몹쓸 짓을 하는 것은 지상에 남겨진 친구들인데, 망자의 죽음을 너무나 비통해하거나 망자가 사랑했던 존재를 열망하는 경우다.
이런 열망 때문에 생겨나는 사고-형태들은 그 혼의 주위로 몰려들어 혼이 평화롭게 잠들어 있기라도 하면 잠을 깨우고, 이미 의식이 있는 상태라면 난폭하게 그 혼의 생각을 지상으로 돌려놓기 일쑤다. 특히 이 경우에는 지상의 친구들이 본의 아니게 이기적인 행동을 해서 죽은 이에게 나중에 후회하게 될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이미 죽은 이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신성한 법에 따르고 지나친 슬픔과 반항심에서 나오는 비탄을 자제하라고 이르는 종교 계율에 더 집착하게 된다.
카말로카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영역은 두 번째 영역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서 두 번째 영역을 에테르로 똑같이 구현한 영역이라고 설명해도 무방할 것 같다. 네 번째 영역이 세 번째 영역보다 더 정제되기는 했지만, 이 세 영역의 일반적인 특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영역에서는 발달 단계가 다소 높은 혼들이 발견되는데 이들은 지상에서 흥미를 가졌던 활동에 따라 만들어진 외피에 싸여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대체로 과거가 아닌 미래로 향한다. 어쩔 수 없이 지상에서의 문제를 다시 떠올려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들은 지체하지 않고 이곳을 통과한다.
하지만 이들도 여전히 지상의 자극에 휘둘리기 쉬워서 지상의 일에 대한 관심이 약해지다가도 아래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면 다시 관심을 쏟기도 한다. 학식이 있고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물질계에서 사는 동안 세계 문제에 주로 관심을 갖는데, 이들 상당수는 이 세 번째와 네 번째 영역에서 의식이 있는 상태로 지내면서 영매를 통해 소통을 하거나 드물게는 직접 소통하려 하기도 한다.
이들이 말하는 내용은 당연히 두 번째 영역에서 흘러나온다고 알려진 내용보다 고차원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비해 더 가치 있는 특성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카말로카에서는 영적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카말로카의 다섯 번째 영역은 여러 새로운 특징을 보인다. 이곳은 어둠 속에서도 독특한 빛을 발하며 환히 빛나고 있어서, 지상의 둔탁한 빛깔에만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이유로 이 계 전체에 아스트랄(astral: '별의'라는 의미ㅡ옮긴이 주) 혹은 스타리(starry: '별이 총총한'이라는 의미ㅡ옮긴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세계적으로 널리 신봉되는 여러 종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천국'이라는 장소가 구체화된 곳이 바로 이 영역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행복한 사냥터, 고대 북유럽인들이 믿었던 발할라(Valhalla), 이슬람교도들이 말하는 미녀로 가득한 천당, 기독교도들이 꿈꾸는 보석과 황금으로 장식된 새 예루살렘, 물질주의적 개혁가들이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공회당으로 가득한 천국. 이 모두가 이 영역에 자리하고 있다. 지상에서 '생명을 죽이는 문서(율법)'에 절박하게 매달렸던 남자와 여자들은 이곳에서 문자 그대로 자신의 갈망을 만족시키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기도 모르게 세계 여러 경전에 나오는 껍질만을 가져와 자신이 꿈꾸었던 구름 궁전을 아스트랄 물질 속에 창조해낸다.
가장 미숙한 신앙도 이곳에서는 잠깐이나마 꿈나라를 실현한다. 또한 모든 신앙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가장 물질주의적인 천국에서 구원 받아 보겠다는 이기적인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자신이 믿었던 바로 그 조건으로 둘러싸인 적절한 안식처, 자신의 눈에는 좋아 보이는 안식처를 이곳에서 찾는다.
독실하고 자애롭지만 참견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이기심을 버리고 인류의 미덕을 키우기 위해 애쓰기보다 자신이 열광하는 것을 실행에 옮기고 주변 동료들에게 강요하는 데 더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자기만족을 위해 소년원, 은신처, 학교를 세우는 식이다.
이들은 또한 고상하게 겸손한 척 하면서 친해진 비굴한 영매로부터 도움을 받아 아스트랄 손가락으로 지상의 파이를 찔러보면서 큰 기쁨을 느낀다. 아스트랄 교회, 아스트랄 학교, 아스트랄 주택을 지어 자신이 탐냈던 물질주의적 천국을 그대로 재현해낸다. 뿐만 아니라 예리한 눈을 가진 이에게는 불완전하고 심지어 안타깝게도 그로테스크해 보이는 건물에 대해 이들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힘을 모아 공동체를 세우는데, 이 공동체는 지상의 공동체들이 그렇듯 큰 차이를 보인다. 이들은 지상세계로 마음이 끌리면 주로 같은 신앙을 믿거나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찾는다. 이는 물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친밀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카말로카에도 언어의 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언어의 장벽은 심령술 단체들이 받는 메시지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이 영역의 혼이 가장 크게 관심을 갖는 부분은 현세와 내세 사이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영매의 '영적 인도자'들은 주로 이 영역이나 다음 영역에서 오는 이들이다.
이 영역에 머무는 존재들은 자신들 앞에 더 높은 단계의 삶을 살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이 놓여있다는 사실과, 자신이 조만간 지상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세계로 떠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카말로카의 여섯 번째 영역은 다섯 번째 영역과 비슷하지만 보다 정제된 모습이다. 이곳에는 발달 수준이 더 높은 혼들이 주로 거주하는데 이들은 육체에 머무는 동안 정신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담고 있었던 아스트랄 외피가 닳아버린 상태다. 이들이 이 영역에 머무는 이유는 예술인이나 지성인으로 사는 동안 이기적인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재능을 팔아 세련되고 정교한 방식으로 욕망-본성을 만족시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의 주변 환경은 카말로카 내에서 최고 수준이다. 이들은 창의적 사고를 통해 자신이 잠시 머무는 이곳에서 쉽게 발견되는 빛나는 질료를 이용해 빼어난 풍경과 잔물결 이는 바다, 눈 덮인 산과 풍요로운 들판 등 지상에서 가장 고상한 풍경과 비교해도 동화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놓는다.
여기서도 광신도들은 발견되지만 바로 아래 영역의 광신도보다는 발달 수준이 약간 더 높고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 이들은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 더 높은 상태에 이르기를 열망한다.
카말로카의 최상위 영역인 일곱 번째 영역을 구성하는 이들은 거의 모두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남자와 여자다. 이들은 지상에 사는 동안 눈에 띄게 물질적인 것을 추구했거나 육체 속의 수준 낮은 정신이 지식을 습득하는 방식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능력이 확장되었는데도 예전 방식을 고집하는 이들이다.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Charles Lamb)은 천국에서 지식을 습득할 때 자신이 사랑하는 책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이상한 직관 과정'을 통해야 한다는 것을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많은 학생들은 말 그대로 아스트랄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 동안 ㅡ 블라바츠키 여사에 따르면 때로는 여러 세기 동안 이르기도 한다 ㅡ 머물면서 자기가 가장 관심있는 주제의 책들을 열심히 숙독하며 자신의 운명에 전적으로 만족한다.
지적 탐구의 한 부분에서 강렬한 느낌을 받아 아직 습득하지 못한 지식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상태에서 육체를 벗어던진 사람들은 이곳에서도 불굴의 끈기를 잃지 않고 목표를 추구하는데, 물질계에서의 공부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속박을 당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 앞에 놓인, 상위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계속 회의를 품고서 사실상 두 번째 죽음 ㅡ 혼이 천국에서 상위 단계의 생명으로 태어나기 전 무의식 상태에 빠지는 것 ㅡ 을 맞는다는 생각에 몸을 사리는 경우도 많다.
정치인과 과학자들은 이 영역에 한동안 지내면서 하위 세계에서의 삶에 시간이 갈리기도 한다. 자신들이 큰 역할을 담당했던 사회운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하고, 결실을 이루기도 전에 죽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단하게 된 계획을 아스트랄계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상에 사는 동안 자애로운 사랑이나 지적 열망,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는 어떤 존재를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아스트랄체라는 끈이 마침내 끊어지는 때가 온다. 이때 혼은 주변을 의식하지 못하는 잠깐의 무의식에 빠진다.
이 무의식은 육체에서 벗어난 후에 겪는 무의식과 비슷한데, 이를 깨우는 것은 강렬하고 엄청나며 깊이를 알 수 없고 이제껏 꿈도 꿔보지 못한 더 없는 행복감, 천국에서 느끼는 환희, 그 혼이 원래 가진 본성의 세계가 주는 지복(至福)이다.
그 혼은 저급하고 비도덕적인 열정과 하찮고 부정직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보다 고차원적인 본성이 어렴풋이 빛나고 때때로 보다 순수한 영역에서 빛이 들어와 부서지기도 했다. 이 모든 씨앗은 수확의 때가 오면 익어야 하고 아무리 보잘 것 없고 수가 적더라도 결실을 맺어야 한다. 인간은 죽음을 거친 후 수확을 거두어 그 결실을 먹고 흡수한다.48
아스트랄 시체로 불리기도 하는, 세상을 떠난 실체의 '껍데기'는 앞에서 설명한 일곱 가지의 동심원 형태의 껍데기 조각으로 구성되고 그 혼에 남아잇는 자력(磁力)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각 껍데기는 흩어진 상태의 조각만 남을 때까지 차례로 해체된다.
이 껍데기들은 남은 껍데기들끼리 끌어당기는 자력에 의해 뭉쳐있다가 하나둘씩 흩어진 조각 상태가 되어 일곱 번째 혹은 가장 안쪽의 껍데기에 다다른 후, 그마저 해체되면 인간은 껍데기에서 빠져나오고 그 잔재만 남는다.
그러면 껍데기는 카말로카 세계에서 정처 없이 떠돌며 자기도 모르게 익숙한 진동을 힘없이 되풀이한다. 남아있던 자력마저 조금씩 흩어지면 더 쇠락한 상태에 빠져 마침내 완전히 해체되고 그 질료들은 아스트랄 물질의 보편적 덩어리로 되돌아간다. 이는 육체가 물질계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껍데기는 아스트랄 기류가 흘러가는 대로 떠다니다가 너무 멀리까지 가지 않으면 지상에서 구체화된 혼이 갖고 있는 자력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들여 어느 정도까지는 활동을 되찾기도 한다. 껍데기는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자력을 발아들인 후 환영에 불과한 에너지의 외형을 띠고 익숙한 진동을 더욱 격렬하게 반복한다.
이런 진동은 세상을 떠난 혼과 지상에 남은 친구와 친척들이 공유하는 생각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게 에너지를 갖게 된 껍데기는 소통을 담당한 지성으로서 제 역할을 훌륭히 해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익숙한 생각을 자동으로 반복한다는 점, 독창성이 전혀 없다는 점, 물질계에서 갖고 있지 않았던 지식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등에서 아스트랄 시감각을 사용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혼은 어리석고 사려 깊지 못한 친구 때문에 발달이 지체되기도 하지만, 현명하고 적절한 노력이 그 과정에서 도움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창시자의 신비로운 지혜의 흔적을 보존하는 모든 종교에서는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이른다. 의식(儀式)과 함께 진행되는 이런 기도는 어떤 지식, 사랑, 의지력이 그 기도에 생명력을 불어넣느냐에 따라 유용할 때도 있다.
또한 이런 기도가 의존하는 것은 우주를 만들고 고치고 유지하는 진동의 보편적 진리다. 이런 진동은 사람들이 내뱉는 소리에 의해 형성되는데, 그 말 속에 담긴 생각에 따라 뚜렷한 형태가 만들어지면 아스트랄 물질은 그 형태를 띠게 된다. 이때 진동은 카말로카 실체를 향해 나아가면서 아스트랄체에 부딪히며 해체를 재촉한다.
오컬트 지식이 쇠퇴하면서 이런 의식은 그 힘이 점점 약해져서 마침내 유용성이 거의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을 가진 인간들이 여전히 이런 의식을 가끔씩 행하는 경우가 있어서 이런 기회를 통해 의식의 정당한 영향력이 드러나기도 한다.
또한 모든 사람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생각을 보내거나, 그들이 카말로카 세계를 통과해 어서 진화를 계속하고 아스트랄계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기원함으로써 도움을 줄 수 있다. 죽은 이가 이렇게 수호천사 역할을 하는 사고-형태의 애정 어린 보살핌 없이 외로운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기쁨을 향해 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4장
멘탈계
멘탈계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고하는 의식의 영역이다. 정신이 뇌를 통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계의 영-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세계다. 이 세계는 실제 인간의 세계다.
'인간(man)'이라는 말은 '생각하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man'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인간'은 결국 '생각하는 존재'라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인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지성'이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정신(mind)'이라는 단어는 지적 의식 그 자체 외에도 그 의식이 진동을 통해 신체적 뇌에 미치는 영향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 지적 의식을 하나의 실체, 즉 생각이 말이 아닌 영상의 형태를 띠면서 생명이 진동으로 나타나는 존재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 개별적 존재는 마나스, 즉 사고자(thinker)49이고, 물질의 옷을 입은 자기(self)이며, 멘탈계의 상위 영역의 조건 안에서 활동한다. 또한 뇌와 신경계에 진동을 일으킴으로써 물질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생명의 떨림이 전해오면 이 진동은 공감 어린 진동을 통해 응답하지만, 진동을 이루는 질료가 조악하기 때문에 진동의 일부만을 아주 불완전하게 복제할 수 있을 뿐이다.
과학을 통해 아주 다양한 에테르 진동의 존재, 즉 태양광 스펙트럼이 밝혀졌지만 정해진 한계 내에서만 진동하기 때문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물질적 사고-장치, 즉 뇌와 신경계도 이와 마찬가지로 사고자가 그만의 세계 속에서 만들어내는 매우 다양한 멘탈 진동 중 일부만을 사고할 수 있다. 가장 수용력이 높은 뇌는 우리가 위대한 지력(혹은 지능)이라 부르는 수준까지 반응한다.
예외적으로 수용력이 높은 뇌는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수준까지 반응한다. 예외적으로 수용력이 낮은 뇌는 우리가 백치라고 부르는 수준까지만 반응한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자신의 뇌로 수백만의 사고-파장을 보내지만, 질료의 밀도 때문에 뇌는 반응하지 못한다. 그리고 소위 정신력은 뇌의 민감도와 비례한다. 그렇지만 사고자를 알아보기 전에 멘탈계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멘탈계는 아스트랄계 다음에 위치하며, 이 둘은 질료의 차이로만 구분된다. 아스트랄계가 물질계와 구분되는 방식과 마찬가지다. 사실 멘탈계와 아스트랄계를 비교하다보면 아스트랄계와 물질계를 비교할 때 했던 이야기들을 반복하는 느낌이 든다.
멘탈계의 생명은 아스트랄계보다 활동적이고 그 형태는 더 유연하다. 멘탈계의 영-물질은 아스트랄계의 어떤 물질보다도 더 활기차고 미세하다. 아스트랄 물질의 궁극의 원자는 아스트랄계를 둘러싼 세계에 비해 아주 조악한 멘탈 물질의 집합체를 수없이 많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아스트랄 원자가 분해되면 조악한 멘탈 물질이 무리를 지어 방출된다. 이런 상황에서 멘탈계의 생명-힘은 활동성이 엄청나게 커지기 때문에 이 생명-힘에 의해 움직이는 무리는 훨씬 줄어든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멘탈 물질은 쉬지 않고 끝없이 움직이면서 생명의 떨림이 전해져 올 때마다 형태를 바꾸고 매번 달라지는 움직임에 주저 없이 몸을 맡긴다. 소위 '정신 질료' 때문에 아스트랄 영-물질은 서투르고 무거우며 윤기가 없어 보인다. 물론 물질계의 영-물질과 비교하면 우아한 빛을 발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비유를 통해 설명하면 우리의 고향이기도 한 이 초자연적 영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비록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타지에 몸이 묶여 외부인의 시선으로 그 영역을 볼 수 밖에 없지만 말이다.
하위 두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멘탈계 영-물질의 소부류도 일곱개다. 그리고 역시 이 소부류도 복잡한 정도는 다르지만 수없이 많은 조합으로 이루어져 멘탈계의 고체, 액체, 기체, 에테르체가 탄생한다. 정신 질료 중 가장 많은 형태가 '고체'라고 하면 아주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다른 멘탈 질료와 비교할 때 고체가 많이 모여 있고 물질의 상태를 기반으로 설명하는 단어 외에는 다른 단어가 없으므로 더 좋은 단어가 생기기 전까지는 고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일단은 이 멘탈계도 일반적인 자연법칙 ㅡ 우리 지구는 일곱이라는 수를 기반으로 한다 ㅡ 을 따른다는 사실, 물질의 일곱 소부류의 밀도가 물질계의 고체, 액체, 기체. 에테르보다 상대적으로 낮다는 사실, 일곱 번째 혹은 최상위 소부류가 궁극의 멘탈 원자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정도만 이해하면 충분할 것 같다.
이 일곱 영역은 '무형'과 '유형'이라는 비효율적이고도 난해한 별칭으로 분류된다.50 첫째, 둘째, 셋째, 넷째의 하위 네 영역은 '유형'의 영역이고,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상위 세 영역은 '무형'에 속한다. 이러한 분류는 꼭 필요하다. 각 영역을 구분하는 특징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곧 분명히 알게 되겠지만 이 각 영역은 의식 속에서 그 정신 내의 여러 영역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런 특징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자면, 하위 네 영역에서는 의식의 진동이 형태, 즉 영상이나 이미지를 낳고 모든 사고가 살아있는 형체로 나타나는 반면, 상위 세 영역에서는 물론 의식이 진동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그 진동을 살아있는 강력한 에너지의 흐름으로 내보낸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이 에너지는 멘탈계에 머무는 동안 독특한 영상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 에너지는 여러 하위 영역으로 흘러가면서 어떤 공통적인 조건으로 연결되는 다양한 형태를 강화한다. 여기서 표현하고자 하는 개념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비유료 추상적 사고와 구체적 사고를 들 수 있겠다.
삼각형에 대한 추상적 개념은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세 각의 합이 180도이고 세 개의 직선 안에 포함되는 평면 도형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조건은 있지만 형태는 없는 이런 개념이 하위 세계로 가면 아주 다양한 도형으로 나타난다. 직삼각형, 이등변 삼각형, 부등변 삼각형 등 크기와 색깔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삼각형의 조건을 만족한다.
실재하는 삼각형의 경우 각각 자기만의 정해진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 두 영역에서 의식이 보이는 행동의 차이를 명쾌하게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은 영상의 상징이고 뇌의 하위 정신의 활동 영역에 속하며 전적으로 이러한 활동에 기초를 두기 때문이다. 반면 '무형'의 영역은 순수 이성의 영역이어서 언어라는 좁은 한계에 구속받지 않는다.
멘탈계는 자연 속 보편 정신을 반영한다. 우리의 작은 세계 안에서 이 영역은 우주의 위대한 정신의 영역에 해당한다.51 현재 유형적 진화의 과정 속에 있는 모든 원형적 개념은 멘탈계의 상위 영역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원형적 개념들은 멘탈계의 하위 영역에서 잇따라 형태를 갖추면서 아스트랄계와 물질계에서 적절하게 복제된다. 멘탈계의 질료는 사고의 진동이 오면 서로 결합하여 사고가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조합을 탄생시킨다.
철의 형태를 바꾸어 땅을 파는 삽 또는 목을 베는 칼로 만들 수 있듯이, 정신 질료도 도움을 주거나 해를 입히는 사고-형태로 바뀔 수 있다. 사고자의 진동하는 생명이 그 주변의 질료에 형태를 부여하고 그 사고자의 자유 의지에 따라 그의 작품도 바뀐다. 이 영역에서는 사고와 행동, 의지와 행위가 아니다. 영-물질은 그 생명의 충성스러운 하인이 되어 모든 창조적 움직임에 순응한다.
이런 진동은 멘탈계의 물질을 사고-형태로 바꾸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달라지는 절묘한 색깔들을 신속하면서도 미묘하게 만들어낸다. 이 색깔들은 자개의 무지개빛처럼 다양한 음영의 파도를 이루면서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까지 에테르화되고 환해져서 모든 형태를 압도하고 휩쓸어 버린다. 그리하여 각 형태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오묘한 색깔들이 잔물결을 일으키며 조화를 이루는데, 이 색깔 중에는 지상에 아직 알려지지도 않은 색깔도 많다.
생명과 움직임으로 가득한 이 오묘한 물질의 여러 조합이 보여주는 뛰어난 아름다움과 광채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그것을 본 사람은 누구나 힌도교도든 불교도든 기독교도든 상관없이 황홀한 언어로 그 눈부신 아름다움을 칭송하지만, 결국에는 말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털어놓는다. 아무리 말솜씨를 부려 칭찬해보아도 말이라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퇴색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사고-형태는 멘탈계에서 기능하는 생물체들 사이에서 당연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곳의 사고-형태는 앞서 아스트랄계에서 본 사고-형태와 비슷하다. 둘의 차이라면 멘탈계의 사고-형태가 아스트랄계의 사고-형태에 비해 더 빛나고, 더 밝은 색을 띠며, 더 강하고 더 지속적이며, 더 활기가 넘친다는 것이다.
고차원적인 지적 특질이 보다 분명해지면 이 형태들은 윤곽이 아주 선명해지고, 기하학적 도형들이 뛰어난 완벽성을 보이며, 어둠 속의 빛도 더없이 맑아진다.
그러나 인류의 현재 단계에서는 당연히 색이 탁하고 모양이 일정치 않은 사고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정신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아름답고도 예술적인 사고와 마주치는 일도 있다.
꿈같은 환상 속에서 자신의 이상을 발견하여 작품에 담아낸 화가들이 지상에서는 따분한 색깔의 물감밖에 구할 수 없어서 커져가는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없다고 한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런 사고-형태는 멘탈계의 엘리멘탈 에센스로 만들어지는데 사고의 진동은 이 엘리멘탈 에센스에 적절한 형태를 부여하고 사고는 이 형태에게 지식을 전하는 생명이다.
멘탈계에도 '인공적 엘리멘탈'이 있는데, 이들은 아스트랄계에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창조된다. 2장에서 언급했던 인공적 엘리멘탈의 탄생과 중요성은 멘탈계의 인공적 엘리멘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단, 멘탈계에서는 인공적 엘리멘탈을 창조하는 이들에게 이 영역에 걸맞게 힘과 영속성이 더 뛰어난 인공적 엘리멘탈을 창조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멘탈계의 엘리멘탈 에센스를 만드는 것은 아스트랄계에 진입하기 직전 하강 단계에 있는 모나드다.
그리고 이 엘리멘탈 에센스는 멘탈계의 하위 네 영역에 존재하는 두 번째 엘리멘탈계를 구성한다. 멘탈계의 상위 세 영역, 즉 무형의 영역은 첫 번째 엘리멘탈계를 구성한다. 멘탈계의 상위 세 영역, 즉 무형의 영역은 첫 번째 엘리멘탈계가 점유하고 있는데, 사고는 이곳의 엘리멘탈 에센스를 일정한 형태 속으로 던져 넣는 대신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각양각색의 물줄기와 살아 번쩍이는 불의 향연 속으로 던져 넣는다.. 이를 통해 엘리멘탈 에센스는 말하자면 처음으로 연합 작전(combined action)을 배우게 되지만, 아직은 형태의 명확한 한계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멘탈계의 상위 영역과 하위 영역에는 모두 수없이 많은 지성이 존재한다. 이 지성들의 가장 낮은 수준의 몸은 야광 물질과 멘탈계의 엘리멘탈 에센스로 만들어진다. 이들은 또한 자연 질서를 인도하며 앞에서 말한 여러 하위 실체를 내려다보고, 여러 위계 서열 속에서 일곱 원소의 위대한 지배자에게 복종하는 빛나는 존재들52이다.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이들은 방대한 지식과 엄청난 권능, 화려한 외관의 소유자이자 천상의 색깔이 변주를 선보이는 무지개처럼 환하게 반짝이는 다양한 빛깔의 존재다. 황제와 같이 위풍당당한 풍채와 고요한 에너지가 체화(體化)한 존재이자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다.
위대한 기독교 선지자가 강력한 천사를 설명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의 머리 위로는 무지개가 있고, 그의 얼굴은 태양과도 같았으며, 그의 발은 불기둥과 같았다."53
목소리는 '물소리'와도 같았고 천체의 음악에서 나오는 메아리와도 같았다. 이 지성들은 자연 질서를 안내하고 아스트랄계의 방대한 엘리멘탈 집단들을 통치한다. 그 결과 이들의 지배를 받는 집단들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규칙성과 정확성으로 자연의 여러 과정을 쉴 새 없이 수행하게 된다.
하위 멘탈계에서는 육체에서 잠시 벗어나 멘탈체54 속에서 제 역할에 여념이 없는 제자들을 보게 된다. 몸이 깊은 잠에 휩싸여 있을 때 진정한 인간, 즉 사고자가 몸에서 빠져나와 이 상위 영역에서 무게의 속박을 받지 않고 제 일을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이 사고자는 몸 안에 갇혀 있을 때보다 더 효율적이면서도 신속하게 인간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거나 도움이 될 만한 생각을 제안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을 돕거나 위로한다. 인간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기에 보다 완벽한 답을 줄 수 있다. 따라서 힘들어하는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이 사고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자 기쁨이다.
이때 도움을 받는 이들은 자신의 짐을 덜어주는 강인한 팔이나 자신의 고통 속에 어떤 위안이 있는지, 속삭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보이지도 않고 인식할 수도 없는 이 사고자는 적에게도 친구에게 하듯 기쁜 마음으로 자유롭게 도움을 주면서 상위 영역의 위대한 조력자로부터 쏟아지는 유익한 힘을 개인들에게 나누어준다.
이곳에서도 대스승들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 가끔 눈에 띤다. 하지만 이 대스승들이 주로 머무르는 곳은 멘탈계의 '무형' 영역 중에서도 최상위 단계다. 이 외에 다른 위대한 존재들도 하위 영역에서 현현해야 하는 연민어린 사명을 띠고 가끔씩 이곳에 온다.
멘탈계에서 의식을 가지고 제 기능을 수행하는 지성들은 인간이든 아니든 혹은 몸 안에 있든 아니든 사실상 동시에 의사소통을 한다. 이 의사소통이 '사고의 속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공간의 벽도 여기서는 아무것도 가르지 못한다. 어떤 혼이든 다른 이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만 하면 그에게 가닿을 수 있다.
의사소통은 이렇게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혼들이 진화에서 같은 단계에 있기만 하다면 의사소통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어떤 말도 교감을 제한하거나 방해하지 않고 사고 전체가 이 지성에서 저 지성으로 휙 하고 움직인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서로가 상대편이 인지한 사고를 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혼 사이에서 실제로 벽이 되는 것은 진화의 차이다. 진화 수준이 낮은 혼은 진화 단계가 높은 혼을 볼 때 자신이 반응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한계는 진화 단계가 높은 혼만이 느낄 수 있다. 진화 단계가 낮은 혼은 자신 안에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혼의 진화 단계가 높을수록 주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현실에 더 가까워진다.
하지만 멘탈계에도 환상이라는 장막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비록 그 장막이 아스트랄계나 물질계보다 훨씬 적고 얇기는 하지만 말이다. 각각의 혼은 자기만의 멘탈 대기(大氣)를 가지고 있다. 인상은 모두 이 대기를 거쳐서 나오기 때문에 항상 왜곡되고 어떤 색깔을 띤다. 그 대기가 맑고 순수할수록, 그리고 그 대기에 인성(人性)의 색깔이 덜 입혀질수록 그 대기에 생길 수 있는 환상은 적어진다.
멘탈계의 상위 세 영역은 사고자 자신이 거주하는 곳으로서 사고자는 진화의 단계에 따라 이 세 곳 중 어느 한 곳에 머문다. 진화의 다양한 단계에 속하는 많은 이들이 최하위 영역에서 지내는 반면, 매우 지적인 혼들 중에서도 비교적 소수만이 두 번째 영역에 머문다. 사고자는 ㅡ 멘탈계에 더 어울리는 표현을 사용하자면 ㅡ 자신 안에 두 번째 영역의 미세한 물질이 많아져서 변화가 필요할 때 이곳으로 올라간다.
물론 실제로 '올라가거나 장소를 이동하는 일'은 없지만 사고자는 이 미세한 물질의 진동을 받아들여 응답한다. 그러고는 힘을 내보내어 희귀한 입자를 진동 속에 던져 넣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진화의 단계가 올라가는 것은 실제로 장소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상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아스트랄계, 멘탈계, 붓디계, 열반계 뿐만 아니라 지고의 신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더 높은 세계 등 모든 세계는 우리 주위에 있다. 그런 세계를 찼겠다고 난리를 칠 필요는 없다.
그 세계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디고 수용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 세계들을 수백만 킬로미터의 공간보다 더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과 우리를 자극하여 진동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만 의식한다. 우리의 반응력이 향상되고 더 미세한 물질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면 보다 미세한 세계와 접촉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올라간다는 것은 우리가 더 미세한 질료로 옷을 짜서 그 옷을 통해 더 미세한 세계의 아주 다른 것들까지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또한 이런 옷 안에 자리하고 있는 자아 속에서 신성한 힘들이 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하면서 보다 미세한 생명의 전율을 내보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고자는 이제 자신이 도달해있는 그 단계에서 주변을 온전히 의식하면서도 과거의 기억을 온전하게 지닌다.자신이 하위 세계와 접촉할 때 걸치는 여러 몸들에 대해 알기에 그 몸들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거나 방향을 인도할 수 있다. 어려움과 장애물 ㅡ 경솔했던 과거의 삶이 낳은 결과물 ㅡ 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 자신의 여러 몸이 임무에 잘 대비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불어 넣어준다.
의식 수준이 낮은 이들에게는 이 사고자의 지시가 제멋대로이고 행동을 강요하며 거만하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힘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멘탈체나 아스트랄체의 흐린 눈에는 그런 지시를 내리는 이유가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훌륭한 일을 한 위인들은 자신의 내면에 사기를 북돋아주면서도 무언가를 강제하는 실력자가 있음을 의식하고 그 내용을 종종 기록으로 남겼다. 그 위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사실 그 실력자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진정한 인간으로 행동한 것이다. 그리고 내면의 인간이라 할 수 있는 사고자는 개인의 매개체로서 적절한 기능을 수행하는 여러 몸들을 통해 의식적으로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화가 진행되면 모든 이들이 이런 상위 실력자가 된다.
멘탈계 상위 영역 중 세 번째 단계에는 대스승과 그들의 제자인 입문자, 몸 안에 이 영역의 물질을 많이 담고 있는 사고자들의 자아(ego)가 살고 있다. 대스승들은 아주 미세한 정신적 힘을 담고 있는 이 영역에서 인류에게 유익한 일들을 수행한다. 고귀한 아이디어, 영감을 주는 생각, 헌신적인 포부, 인간에게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들을 쏟아 붓는 식이다.
이곳의 모든 힘은 사방으로 빛줄기를 쏘아 보내는데 가장 고귀하고 순수한 혼들이 이런 유익한 영향을 가장 쉽게 포착한다. 자연의 비밀을 참을성 있게 탐색하는 이에게는 새로운 발견이 번쩍 나타나고, 위대한 음악가의 귀에는 새로운 멜로디가 들려오며, 고결한 철학자의 머리에는 오랫동안 탐구해온 문제에 대한 해답이 떠오르고, 지치지 않고 활동하는 자선가의 가슴 속에는 희망과 사랑의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오른다.
그러나 인간은 "그 생각이 떠올랐어", "그 아이디어가 생각났어". "어느 순간 번쩍 그걸 발견했어"라고 말하며 육체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내면의 자신은 알고 있는 진실을 무의식적으로 증언하면서도 자신이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사고자, 그리고 지상의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사고자의 몸에 대해 알아보자. 멘탈계의 하위 네 개 영역에서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의식의 몸, 즉 멘탈체는 이러한 영역의 물질이 이루는 여러 조합으로 형성된다. 이 장의 뒷부분에서 설명할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사고자, 개체, 인간의 혼은 몸을 갖게 되면 먼저 자신이 가진 에너지의 일부를 진동에 실어서 발산한다. 이 진동은 그가 속한 세계의 하위 네 개 영역에서 온 물질을 그의 주변으로 끌어당겨 그 물질로 그를 감싼다.
진동이 어떤 물질을 끌어당기는가는 진동의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미세한 물질은 빠른 진동에 응답하면서 그 자극에 따라 형태를 취한다. 이와 비슷하게 조악한 물질은 느린 진동에 반응한다. 현악기의 현이 무게와 장력이 비슷한 현에서 나는 음 ㅡ 예를 들어 진동수 ㅡ 에는 공명하지만 무게와 장력이 다른 현에서 나오는 음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듯이 물질도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진동에 응답하는 것이다.
사고자가 주변으로 끌어당기는 멘탈체는 그가 내보내는 진동에 따라 그 특성이 달라진다. 이 멘탈체는 하위 정신, 하위 마나스라고 부른다. 멘탈계의 하위 영역에서 온 물질에 감싸인 채 일을 하는 동안 그 물질의 영향을 받는 사고자이기 때문이다.
사고자의 에너지는 너무나 미세해서 이 물질을 옮기지 못하고, 너무나 빨라서 멘탈체의 반응을 끌어낼 수 없기에 그 멘탈체를 통해 제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다. 따라서 사고자는 자신을 표현할 때 그 멘탈체에 의해 제한되고 그 멘탈체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그 멘탈체에 의해 구속받는다.
사고자가 인간의 모습으로 사는 동안 그가 갇히게 되는 여러 감옥 중에 첫 번째가 바로 이 멘탈체이다. 사고자의 에너지가 그 멘탈체 안에서 움직이는 동안 사고자는 자신의 상위 세계로부터 차단된다. 그의 관심은 밖으로 향하는 에너지에게 가있고, 그의 생명은 에너지와 함께 멘탈체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멘탈체는 의복, 외피, 매개체라고도 불리는데, 사고자는 멘탈체 자체가 아니며 하위 멘탈계에서 자신을 최대한 표현하기 위해 멘탈체를 형성하고 이용한다는 의미가 통하기만 하면 어떤 표현이든 상관없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항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사고자의 에너지는 바깥으로 퍼져나가며 그 주위로 그의 아스트랄체 뿐만 아니라 아스트랄계의 조악한 물질까지 끌어당긴다는 점이다. 둘째, 사고자가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동안 하위 멘탈 물질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에너지는 그 멘탈 물질로 인해 아스트랄 물질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느린 진동으로 쉽게 변하기 때문에, 멘탈체와 아스트랄체가 지속적으로 함께 진동하면서 서로 아주 밀접하게 얽히게 된다는 점이다. 셋째, 멘탈체를 구성하는 물질이 조악할수록 멘탈체와 아스트랄체는 더 친밀해져서 따로는 둘이 같은 부류에 속하기도 하고 심지어 하나로 간주되기도 한다는 점이다.55 나중에 '환생'을 탐색해보다보면, 이 사실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이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한 과정에서 어떤 종류의 멘탈체를 만드는가는 그가 도달한 진화 단계에 따라 결정된다. 아스트랄체에 대해 배울 때와 마찬가지로 발달 수준이 낮은 인간의 멘탈체, 일반적인 인간의 멘탈체, 영적으로 발달한 인간의 멘탈체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발달 수준이 낮은 인간의 멘탈체는 인지하기가 힘들다. 주로 멘탈계의 최하위 영역에서 온 탓에 제대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소량의 멘탈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런 멘탈 물질이 이 부류를 대표한다. 이는 거의 모든 하위 몸에서 나타나는 특징인데, 감각 기관을 통해 물질계의 물체와 접촉하여 생겨난 아스트랄 폭풍이 하위 몸에 약한 진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멘탈체는 이러한 아스트랄 진동으로부터 자극 받을 때를 제외하면 거의 조용한 상태를 유지한다, 아스트랄 진동이 오더라도 그에 대한 반응은 느리다. 내부에서 일정한 활동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독특한 반응을 유발하려면 외부에서 자극이 와야 한다.
그 자극이 강렬할수록 그 인간의 진화에는 더 유익하다. 반응으로 나타나는 각각의 진동이 멘탈체의 초기 발달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요란한 기쁨, 화, 분노, 고통, 공포 등 이런 모든 열정이 아스트랄체 안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면 그 결과 멘탈체에 희미한 진동이 발생한다. 멘탈 의식이 활동을 시작하도록 자극하는 이러한 진동은 멘탈체가 차츰 외부에서 온 인상에 고유의 특징을 부여하도록 한다. 멘탈체와 아스트랄체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 둘은 하나의 몸처럼 행동한다고 앞에서 얘기한 바 있다.
그러나 정신적 능력이 활동을 시작하면 아스트랄 열정이 동물적인 특성으로만 작용할 때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던 어떤 힘과 특징이 그 아스트랄 열정에 추가된다. 멘탈체에게 전해지는 인상은 아스트랄체에게 전해지는 인상보다 더 영구적이어서 멘탈체는 의식적으로 그 인상을 복제하게 된다. 기억과 상상 기관(器官)이 바로 이 지점부터 나타나고 상상 기관은 점차 제 모습을 찾는다.
외부 세계에서 온 영상은 멘탈체 물질을 만들어내고, 그 질료를 이용해 그 영상과 비슷한 형상으로 빚어낸다. 감각의 접촉으로 탄생한 이런 영상이 그 주변으로 가장 조악한 멘탈 물질을 끌어당기면 의식은 점차 힘이 강해져 이런 영상을 복제하기 시작하고, 그 결과 행동이 내부에서 촉발되도록 자극하는 영상들을 축적하게 된다.
이런 과정은 즐거움을 주었던 진동을 외부 기관을 통해 다시 경험하면서도 고통을 야기하는 진동을 피하고 싶은 바람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면 멘탈체는 아스트랄체를 자극하여 동물 안에서 물리적 자극을 받아 깨어날 때까지 잠들어 있는 욕망을 아스트랄체 안에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발달 수준이 낮은 인간은 감각적 만족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성향을 보인다. 이는 하위 동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으로서 하위 동물에게서는 보기 힘든 욕정, 잔혹성, 타산적 행동 등이 종종 이들의 추구 대상이 된다.
감각 능력에 의존하는 정신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하면, 인간은 어떤 동물보다도 훨씬 더 위험하면서도 야만적인 짐숭이 된다. 멘탈 영-물질에 내재하는 힘이 강하고 미묘할수록 열정-특성은 동물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에너지와 매서운 성격을 띠게 된다.
하지만 이런 매우 극단적인 성향은 스스로 초래한 고난을 통해 교정되기 마련이고, 그런 성향의 결과로 겪게 되는 경험은 의식을 이용해 상상력의 활동 무대가 되는 새로운 영상을 준비한다.
이 새로운 영상들은 의식을 자극하여 외부 세계에서 아스트랄체를 통해 의식으로 도달하는 여러 진동에 저항하고 자유 의지를 행사해 열정에 무제한적 자유를 부여하는 대신 열정을 저지한다. 이런 저항적 진동은 멘탈체 안에서 생겨나 정신 질료의 미세한 조합을 멘탈체로 끌어들이는 한편, 아스트랄체 안에서 형성된 열정에 반응해 진동하는 조악한 조합을 멘탈체로부터 몰아낸다.
이렇게 열정-영상이 만들어낸 진동과 과거 경험을 창의적으로 복제하여 형성되는 진동 사이의 힘겨루기를 통해 멘탈체는 성장하고 일정한 조직을 형성하기 시작할 뿐 아니라 보다 능동적으로 외부 활동을 개시한다. 지상에서의 삶은 경험을 쌓는 데 치중하는 데 반해, 다음 장에 자세히 소개되는 것처럼 중간 단계의 삶은 그 경험들을 소화하는 데 집중한다. 그 결과 사고자는 지상으로 다시 돌아올 때마다 멘탈체의 형체를 갖추는 능력이 점점 커져있다.
따라서 발달 단계가 낮은 인간은 정신이 열정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보통 수준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 사람의 정신은 열정과 정신력이 전쟁을 벌이는 전쟁터이며, 둘의 힘이 엇비슷하기에 그 전쟁의 승패는 매번 엇갈린다. 하지만 이 단계의 인간도 점차 낮은 단계의 본성을 뛰어넘어 조금씩 통찰력을 얻게 된다.
보통 수준의 인간은 멘탈체의 크기가 훨씬 크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제대로 구성을 갖추고 있으며 멘탈계의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영역에서 온 물질이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쯤에서 멘탈체의 형성 및 수정 과정을 지배하는 일반적인 법칙을 살펴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물론 앞에서 알아본 아스트랄계와 물질계의 하위 영역을 지배하는 법칙과 다르지 않지만 말이다. 계속 연습을 하면 나아지지만 연습하지 않으면 퇴화되어 결국은 사라지는 법이다.
멘탈체에 진동이 형성될 때마다 그 멘탈체의 구성 성분에 변화가 생긴다. 진동의 영향을 받은 부분에서 그 진동과 공명하지 못하는 물질은 밖으로 내던져지고 사실상 한계가 없는 주변의 저장소에서 가져온 적합한 질료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진동이 자주 반복될수록 그 진동의 영향을 받는 부분은 더 발달한다.
따라서 멘탈 에너지를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제한하면 멘탈체에 상처가 생긴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힘의 방향을 잘못 설정하면 멘탈체의 발달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이런 힘이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부분은 지나치게 발달하고, 똑같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힘이 작용하지 않는 다른 부분은 발달이 지체된다. 그러므로 균형 잡힌 전면적 발달을 목표로 삼아야 하며, 이는 침착하게 자신을 분석하고 목적을 위한 수단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에도 필요한 부분이다.
이런 법칙을 알면 익숙한 특정 경험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고 발달의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다.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거나 도덕성을 높이고자 변화를 도모할 때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때로는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노력을 포기하기도 한다. 새로운 정신적 작업을 시작할 때에도 멘탈체가 반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선다.
특정한 방식으로 진동하는 데 길들여진 질료는 새로운 진동에 적응하지 못한다. 초기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멘탈체에 진동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해 좌절했지만, 그런 공명의 사전 준비에는 필요한 힘의 진동을 내보내는 과정이다. 그런 진동은 오래된 불량 질료를 멘탈체에서 털어내 버리고 공명할 수 있는 질료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아무런 진전도 의식하지 못한다. 단지 노력이 헛되었다는 좌절과 막연한 저항만을 의식한다. 하지만 그가 노력을 계속하면 새롭게 끌어들인 질료가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하면서 보다 나은 결과가 나타난다.
마침내 오래된 질료들이 모두 쫓겨나고 새로운 질료들이 제 기능을 하면서 별 노력 없이도 성공하게 되고 목표도 이루어진다. 중요한 시점은 초기 단계다. 자연의 다른 모든 법칙처럼 자신의 일에서도 이런 법칙이 통한다고 믿고 끈질기게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알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보통 수준의 인간은 이런 식으로 계속 노력하면서, 낮은 수준의 본성이 유혹해 와도 계속 저항하면 그 유혹이 결국 자신에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리라는 사실과, 이는 자신이 낮은 수준의 본성이 유혹했을 때 공명할 수 있는 질료를 멘탈체에서 쫓아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쁜 마음으로 깨닫게 된다.
영적으로 발달한 인간은 조악한 조합이 멘탈체에서 모두 제거되어 있다. 따라서 감각의 대상은 멘탈체나 그와 연결된 아스트랄체에서 자신의 진동에 공명하는 질료를 찾지 못한다. 멘탈체에 포함된 것은 멘탈계의 하위 네 개 영역 각각에 속하는 미세한 조합뿐이다.
이들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영역의 질료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영역의 질료가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 수준의 멘탈체는 지성들이 하는 고차원적 작업, 고차원적 예술의 미묘한 접촉, 고귀한 감정의 순수한 떨림에 반응한다. 이 멘탈체는 그 안에 있는 사고자가 멘탈계의 하위 영역이나 아스트랄계 혹은 물질계에서보다 자신을 더 충만하게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멘탈체의 질료는 훨씬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여 진동할 수 있고, 고귀한 영역에서 온 진동은 멘탈체가 고결하고도 미세한 구성을 갖추도록 한다. 이 멘탈체는 멘탈계의 하위 영역에서 표현 가능한 사고자의 모든 진동을 복제할 채비를 빠르게 마치고 하위 멘탈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완벽한 매개체로 성장한다.
멘탈체의 성질을 명확하게 이해하면 현대 교육은 크게 달라져 교육이 지금보다 사고자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환생과 카르마를 공부하고 나면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멘탈체의 일반적 특징은 사고자가 과거에 지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멘탈체는 멘탈계에서 구성되고 멘탈체의 질료는 사고자가 과거의 경험을 통해 내면에 쌓은 여러 특질에 따라 결정된다.
교육이 할 수 잇는 역할은 사고자가 이미 갖고 있는 유용한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외부 자극을 제공하고, 유용하지 않은 능력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돕는 것뿐이다. 정신을 여러 사실로 가득 채우는 대신 이렇게 타고난 능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목표다.
기억력을 별도의 능력으로 계발할 필요도 없다. 기억은 집중 ㅡ 즉, 공부하는 주제에 마음을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것 ㅡ 그리고 주제와 정신 사이의 자연적 친화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주제가 마음에 든다면, 즉 정신이 그 주제에 대한 재능이 있다면, 충분히 집중만 해도 얼마든지 기억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육은 꾸준히 집중하고 그 집중을 유지하는 습관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추고, 학생의 타고난 능력에 따라 방향을 달리해야 한다.
이제 멘탈계의 '무형'의 영역으로 들어가 보자. 이 영역은 인간이 환생하는 동안 진정한 고향이 되는 곳이자 아기의 혼으로, 유아의 자아로, 초기의 개체성으로 순수하게 인간적인 진화를 시작할 때 태어나는 곳이다.56
이 자아, 즉 사고자의 윤곽은 타원형이어서 블라바츠키 여사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내내 계속 걸치고 있어야 하는 이 마나스의 몸을 오릭 에그(Auric Egg: 오라 달걀. 흔히 '아우라'라고 부르는 '오라'와 타원형의 달걀을 합친 말ㅡ옮긴이 주)라고 부른다.
멘탈계 세 개 영역의 물질로 형성되는 멘탈체는 처음부터 매우 정교하고도 미세해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미묘한 막과 같다. 멘탈체는 발달하면서 천상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갖춘 환한 물체, 즉 '빛나는 존재'가 된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57
이 사고자란 무엇인가? 사고자는 앞에서 말했듯이 신성한 자기이며, 멘탈계 '무형' 영역의 질료로 만들어진 이 미묘한 몸의 제약을 받으며 개별화되는 존재다.58 이 물질 ㅡ 자기(self)의 광선, 혹은 우주의 유일한 빛과 생명이 내보내는 살아있는 빛줄기 주변에서 온 물질 ㅡ 은 외부 세계에서 이 광선을 그 근원으로부터 차단하며, 막처럼 얇은 자신의 껍질 안에 그 광선을 집어넣어 그 광선을 '하나의 개체'로 만든다.
이 생명은 로고스의 생명이지만 그 생명의 모든 힘은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 모든 것은 잠재력을 가진 어린 싹으로 그 안에 들어있다. 마치 나무가 씨앗 안에서 아주 작은 싹으로 숨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씨앗은 인간의 생명이라는 흙 속에 떨어져 기쁨의 햇빛과 눈물의 비를 맞으면, 그 잠재된 힘이 재빨리 활동에 들어가 우리가 경험이라고 부르는 생명-흙의 즙을 먹고 자란다. 마침내 그 싹은 씨앗을 키워내는 아버지를 형상화한 커다란 나무로 성장한다. 인간의 진화는 사고자의 진화를 의미한다. 사고자가 하위 멘탈계와 아스트랄계, 물질계의 몸을 갖게 되고, 지상과 아스트랄계, 하워 멘탈계를 거치는 동안 그 몸을 입으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동하면서 이번 삶을 사는 동안 일정한 단계에 이를 때마다 그 옷들을 하나씩 벗어던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에서도 각 세계에서 그 몸들을 사용하면서 모은 열매는 절대로 자기 자신 안에 쌓아두지 않는다. 처음에는 지상에 태어난 아기의 몸처럼 거의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삶을 이어가는 동안 계속 거의 잠에 빠져있었다.
그러다가 외부에서 그에게 전해온 어떤 경험을 통해 그 안에 잠자고 있던 힘의 일부가 깨어나 활동을 시작했고 그는 자신의 삶의 방향에서 점점 더 큰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성인이 된 그는 자신의 삶을 직접 이끌어나가면서 미래의 운명에 있어서도 점점 더 큰 지배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신성한 의식과 더불어 사고자를 형성하는 영구적인 몸은 극도로 느린 속도로 성장한다. 이 몸은 원인체(혹은 코잘체)라고 불린다. 사고자는 자신의 내부에 모든 경험의 결과물을 쌓아두는데, 이런 결과물이 미래의 삶을 결정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동안 걸치는 여러 몸 중에서 영구적인 것은 원인체뿐이다.
멘탈체와 아스트랄체, 육체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마다 재구성 된다. 멘탈체와 아스트랄체, 육체가 차례로 사라질 때면 사는 동안 수확한 것을 상위 단계의 몸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모든 수확물은 결국 이 영구적인 몸 안에 저장된다. 사고자는 다시 인간의 몸을 취할 때 각 계에서 이런 수확물로 이루어진 자신의 에너지를 내보내어 자신의 과거와 맞는 새로운 몸을 하나씩 주위로 끌어들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원인체는 성장이 매우 느리다. 그 원인체를 구성하는 매우 미세한 물질 속에서 표현 가능한 진동에만 공명할 수 있고, 그 결과 그 진동을 엮어서 자신의 존재의 질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진화 초기 단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열정은 원인체의 성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 못한다. 사고자는 원인체의 진동 속에서 복제할 수 있는 경험만을 내부에 저장한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멘탈계에 속해야 하고 지적이나 도덕적으로 매우 고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인체의 미세한 물질이 공명하지 못한다.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사고자가 이 고귀한 원인체의 성장에 적합한 물질을 일상생활을 통해 얼마나 조금밖에 제공하지 못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진화가 더뎌지고 진전이 별로 없는 것이다.
사고자는 각 삶에서 자신의 더 많은 부분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진화가 더 빨리 진행될 수 있다. 악행을 계속 서슴치 않으면 원인체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어서 단지 성장이 지체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인체에 해를 끼치게 된다.
그런 식으로 오랜 시간이 흐를 경우 원인체는 선한 기운이 만들어내는 진동에 반응하는 능력을 잃어버려서 악행을 중단한 이후에도 상당 시간 동안 성장이 지체된다. 원인체에 직접적으로 손상을 가하려면 매우 지적이고 정제된 악이 필요하다.
이 악은 세계의 다양한 경전에 '영적인 악'으로 소개되어있다. 다행히도 이런 악은 영적인 선만큼이나 매우 드물어서 오른쪽 경로를 따르든 왼쪽 경로59를 따르든 매우 진보된 존재들 사이에서만 발견 된다.
사고자 혹은 영원한 인간이 머무는 곳은 멘탈계의 '무형'의 영역 중 최하위 단계인 다섯 반째 영역이다. 인간의 상당수가 이곳에 머물지만 삶의 유아 단계에 속해 있기에 깨어있는 이는 드물다. 사고자의 의식은 천천히 발달한다. 그의 에너지가 하위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경험을 수집하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사고자의 에너지가 보물과 같은 삶의 수확물을 안고 사고자에게 돌아올 때에도 그 에너지를 머금고 있다. 이 영원한 인간, 혹은 개체환된 자기는 입는 모든 몸 안에서 활동하는 행위자이다.
몸과 정신에게 '나'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이 영원한 인간의 존재인데, 이 '나'는 자의식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가장 활발하게 에너지를 내보내는 상태에서 자신이 취하고 있는 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인간에게 '나'는 육체이자 욕망-본성이다. 그런 인간은 육체와 욕망-본성에서 즐거움을 얻고 육체와 욕망-본성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의 삶이 육체와 욕망-본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학자에게 '나'는 정신이다. 그의 즐거움은 공부에 있고 그의 삶은 공부에 집중되어있기 때문이다. 영적 철학의 관념적 고지(高地)에 올라 과거의 삶에 대한 기억과 미래의 탄생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이 영원한 인간을 '나'로 느낄 수 있는 이는 거의 드물다.
우리가 손가락을 베었을 때 실제로 통증을 느끼는 부분은 피가 흐르는 지점이 아니라 뇌에서 통증을 담당하는 부위이고, 그 통증은 상상을 통해 뇌 밖으로 나가 상처를 입은 지점에서 느껴지는 것이라고 생리학자들은 말한다.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그 통증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통증은 상상을 통해 손가락에 상처를 낸 그 물체와 접촉한 지점으로 옮겨진다. 절단된 사지나 사지가 있었던 자리에서 통증을 느끼는 것도 같은 원리다.
'나' 혹은 내면의 인간도 이와 비슷하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외피, 즉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지점에서 고통과 기쁨을 느끼며 그 외피가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 이런 느낌이 착각에 불과하고, 자신은 외피 안에서 행동하고 경험하는 유일한 존재임을 깨닫지 못한 채.
이제 이런 관점에서 상위 정신과 하위 정신, 그리고 그들이 뇌에서 하는 작용 사이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정신, 마나스, 사고자는 하나이며 원인체 안의 자기다. 수없이 많은 에너지의 원천이자 수없이 많은 종류의 진동의 원천이다. 정신은 자신으로부터 이런 에너지와 진동을 밖으로 내보낸다. 이 에너지와 진동 중 가장 미세하고 섬세한 것들은 원인체의 물질 속에 표현된다. 원인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이런 에너지와 진동에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다.
이렇게 가장 미세하고 섬세한 에너지와 진동은 우리가 '순수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한다. 순수 이성은 추상적 사고를 하며 직관을 통해 지식을 습득한다. 순수 이성의 '본성은 지식'이며 진리를 발견하는 순간 자신과 일치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덜 미세한 진동은 밖으로 나가 하위 멘탈계의 물질을 끌어당기는 데 이런 진동이 바로 하위 마나스 혹은 하위 정신으로서 조밀한 물질 안에 표현된 상위 정신의 조악한 에너지다. 또한 이성과 판단, 상상, 비교 등의 정신적 능력으로 구성된,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 하위 마나스 혹은 하위 정신이다. 하위 정신은 논리를 통해 구체적인 사고를 한다. 하위 정신은 주장하고 판단하며 추론한다. 에테르 뇌에서 아스트랄 물질을 통해 활동하고 그런 만큼 조밀한 육체의 뇌에서도 활동하는 이런 진동은 그 안에서 자신을 복제한 무겁고도 느린 진동을 형성한다.
이런 진동이 무겁고 느린 이유는 무거운 물질을 옮기느라 에너지가 신속성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진동이 희박한 매체 안에서 시작되어 조밀한 매체로 이동할 때 이렇게 반응이 무력해지는 현상은 물리학을 배우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공기 중에서 종을 치면 또렷한 소리를 내며 울린다. 수소 속에서 종을 쳐서 수소의 진동이 공기의 파동을 형성하도록 하면 그 소리는 아주 희미하다. 정신이 보내는 빠르고도 미세한 진동에 반응하는 뇌도 이처럼 무력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의식'으로 알고 있는 것의 정체다.
이 '의식'의 정신적 작용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사고자가 의식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자신이 키운 경험의 수확물을 거두어들일 수 잇기 때문이다. 의식이 열정의 지배를 받으면 제멋대로 날뛰기 때문에 사고자는 성장하지도 발달하지도 못한다. 의식이 외부 세계와 관계있는 정신 활동에만 치중하면 사고자의 하위 에너지만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고자가 의식에 삶의 진정한 목표를 각인시킬 수 있을 때에만 의식도 사고자의 상위 에너지를 불러일으키고, 성장시키는 것들을 끌어 모으는 매우 가치 있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사고자는 진화할수록 자신의 내재된 힘뿐만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가 하위 세계에서 하는 활동과 이런 에너지가 사고자 주변으로 끌어들인 몸들을 더 많이 의식하게 된다. 마침내 사고자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인도하면서 그 몸들에 영향을 미치려 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인상이 도덕을 다룰 때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르고, 지성에게 깨달음을 줄 때는 '번쩍이는 직관'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인상이 지속되어 일반적인 것이 되면 우리는 그 집합체를 '천재성'이라 부른다. 사고자가 얼마나 진화했는지는 그가 자신의 하위 몸들을 얼마나 잘 통제하는가, 그의 하위 몸들이 사고자의 영향력에 얼마나 민감한가, 그 하위 몸들이 사고자의 성장에 얼마나 많이 기여하는가로 판단할 수 잇다. 이런 진화를 앞당기고자 하는 이들은 하위 정신과 도덕성을 신중하게 훈련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는 방식을 택한다.
세속적이지 않은 주제에 대해 조용히 지속적으로 그리고 순차적으로 사고하는 습관, 명상하는 습관, 공부하는 습관은 정신체를 발달시켜 보다 나은 도구로 만든다. 추상적 사고를 하려는 노력도 유용하다. 하위 정신을 상위 정신 쪽으로 끌어 올리고 하위 멘탈계의 가장 미세한 물질 속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 혹은 이와 유사한 방식을 통해 모든 존재가 높은 수준의 진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다보면 다음 단계에 보다 빨리 도달할 수 있다.
아주 작은 노력이라도 그냥 사라지는 법은 없으며, 반드시 그에 대한 결과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모여서 내부로 전해진 모든 기부금은 미래에 사용할 목적으로 원인체의 보물창고에 저장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더디고 자꾸 중단되더라도 진화는 영원히 앞을 향해 나아가며, 모든 혼 안에서 계속 펼쳐지는 신성한 삶은 서서히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다.
5장
데바찬
데바찬이라는 단어는 천국을 뜻하는 신지학 용어로서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빛나는 땅' 혹은 '신들의 땅'60이다. 멘탈계 중에서도 특별한 보호를 받는 이 영역은 인간의 진화를 감독하는 위대한 영적 지성들의 행동을 통해 모든 슬픔과 악이 배제되는 곳이다. 이곳에 머무는 이들은 육체와 아스트랄체를 벗어 던지고 카말로카에서의 체류를 마친 인간들이다.
데바찬에서의 삶은 두 단계로 구성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멘탈계의 하위 네 개 영역을 거치는데, 이때 사고자는 여전히 멘탈체의 옷을 입고, 멘탈체의 영향을 받으며, 자신이 방금 떠나온 지상에서 사는 동안 모은 질료들을 흡수한다. 두 번째 단계는 '무형'의 세계에서 보내게 되는데, 이때 사고자는 멘탈체에서 벗어나 자신이 습득한 자의식과 지식의 최대치 안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게 된다.
데바찬에서 지내는 총 시간은 그 혼이 지상에 사는 동안 모아서 이곳의 삶을 위해 가져온 질료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데바찬에서 소비하고 소화하기 위한 열매의 수확물을 구성하는 것은 지상에서 살면서 만들어낸 모든 순수한 사고와 감정들, 모든 지적이고도 도덕적인 노력과 열망들, 인류에 봉사하기 위한 유용한 작업과 계획의 모든 기억들, 다시 말해 정신적 능력과 도덕적 능력으로 변환될 수 있기에 혼의 진화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이다. 아무리 미약했다고 해도, 아무리 잠깐 동안이었다고 해도, 그런 것들은 어느 하나도 그냥 버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동물적인 열정은 데바찬에 발을 디딜 수 없다. 이런 열정을 표현할 수 있는 질료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삶에서 저지른 모든 악행도 마찬가지다. 물론 악행이 선행보다 훨씬 많고 악행 때문에 얼마 안 되는 선행의 수확물을 모두 거두는 것조차 힘들겠지만 말이다.
수확물이 아주 적으면 데바찬에서의 삶이 아주 짧아지기도 하지만, 가장 타락한 이라고 해도 옳은 것에 대한 갈망이나 친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데바찬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곳에서 선행의 씨앗이 부드러운 싹을 만들어내고 선행의 불꽃이 온화한 바람을 타고 작은 불길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들이 주로 천국에 마음을 쏟고 천국에서 지복을 누릴 목적으로 삶의 방향을 결정했던 과거에는 데바찬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주 길었다. 어떤 경우에는 수천 년에 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인간들이 지상의 일에 훨씬 더 집중하고 사고의 방향을 고차원적 삶으로 향하는 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데바찬에서 보내는 시간도 짧아지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멘탈계의 상위 영역과 하위 영역61에서 보내는 시간은 멘탈계와 원인체에서 각기 만들어지는 사고의 양에 비례한다.
개성아/개인적 자기(personal self)에 속하는 모든 사고, 그 개성아/개인적 자기의 모든 야망, 관심사, 사랑, 희망, 두려움과 함께 조금 전 닫혀버린 삶에 속하는 모든 사고, 이 모든 것의 열매가 데바찬에 있으며 그 형태도 발견된다. 상위 정신, 관념적 영역, 비인격적 사고에 속하는 것들은 '무형'의 데바찬 영역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고귀한 영역에 들어와 빨리 빠져나가려고만 한다.
어떤 이들은 데바찬에서 지내는 동안 이 '무형'의 영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소수지만 이 영역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자세한 설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데바찬에서의 삶을 규정짓는 몇가지 주요 개념부터 알아보자. 데바찬에서의 삶은 물질계에서의 삶과 너무나 달라서 그 생소함으로 인해 설명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기 쉽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입고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정신적 삶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 결과 몸에서 벗어난 정신적 삶에 대한 영상을 보여주면, 현실감각을 모두 잃고 꿈속 세계로 들어온 것처럼 느끼곤 한다.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정신적 삶이 감각적 삶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생생하며 현실에 가깝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보고 만지고 듣고 맛보고 상대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데바찬에서 접촉하는 모든 것에 비해 현실로부터 두 걸음 더 떨어져있다.
데바찬에서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상에서 보는 모든 것은 착각이라는 베일로 두 겹 둘러싸여있다. 우리가 지상에서 갖고 있는 현실 감각은 전적으로 착각이다. 사물이나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가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우리 감각에 남기는 인상과, 우리의 이성이 이런 인상의 집합체로부터 끌어내는 결론인데 이 결론은 틀릴 때가 더 많다. 한 사람에 대한 여러 사람의 생각,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아버지, 친한 친구, 여자친구, 직장에서의 경쟁자, 불구대천의 적,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그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가져와 하나씩 늘어놓으면 그 생각들이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지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이들은 제각각 자신의 마음속에 만들어진 그에 대한 인상을 말할 것이다.
드러나 그 베일을 모두 꿰뚫고 그 인간 전체를 간파하는 눈에는 그들이 내놓은 인상들이 그 인간의 실재와 얼마나 거리가 먼지 잘 보인다.
우리가 친구 하나하나를 아는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남기는 인상을 통해서인데 이런 인상은 우리의 수용 능력에 따라 제약을 받는다. 어떤 아이에게 고귀한 목적과 훌륭한 목표를 가진 위대한 정치인 아버지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 아이에게 국가의 운명을 수호하는 그 정치인은 그저 재미있는 놀이친구이거나 이야기꾼일 뿐이다. 우리는 환영 속에 살고 있지만, 현실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서 나름 만족을 느낀다. 데바찬에서도 우리는 환영에 들러싸이게 된다. 물론 앞에서 말한 대로 현실에 두 걸음 더 가깝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우리는 지상에서와 비슷한 현실감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정도 만족을 느낀다.
접촉이 보다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하위 천국에서도, 비록 지상에 비하면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지상에서의 환영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이런 천국도 위대한 진화 계획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진정한 자기를 찾을 때까지는 자신만의 비현실을 통해 환영에 혹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지상에서 현실감을 느끼는 한편, 데바찬을 공부할 때 비현실감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환영에 휩싸인 채 지상에서의 삶을 안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반면, 데바찬을 공부하는 동안은 마야(maya: 현상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 혹은 환영(幻影)을 의미ㅡ옮긴이 주)라는 베일을 벗어던지고 데바찬을 바깥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데바찬의 경우 지상과 그 과정이 정반대다. 데바찬에 있는 이들은 이곳에서의 삶이 진짜 삶이라고 느끼고, 지상에서의 삶이 명백한 착각과 오해로 가득 차 있다고 여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들은 천상 세계를 비판하는 물질계의 사람들보다 진실에 더 가까이 가있다.
사고자로 넘어가보면, 사고자는 데바찬에서 멘탈체만 걸친 채 힘을 자유롭게 발휘한다. 그는 이런 힘들이 가진 창의적 본성을 보여주지만 지상에 있는 우리로서는 그 방식이나 정도를 알아보기 힘들다. 지상의 화가, 조각가, 음악가는 절묘한 아름다움을 꿈꾸며 정신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비전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들이 지상의 조악한 질료 안에서 그 비전을 실현하고자 해도 그 질료들은 정신적 창작에는 적합하지 않다.
대리석은 저항력이 너무 커서 완벽한 형태를 만들 수가 없고 물감은 너무 탁해서 완벽한 색갈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형태가 즉각적으로 복제된다. 천상계의 희귀하고 미세한 물질은 정신 질료인 동시에 열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정신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이며 멘탈 진동이 울릴 때마다 형태를 갖추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주 현실적인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천국을 직접 만든다. 또한 그의 정신이 얼마나 풍요롭고 에너지로 가득한가에 따라 그 주변의 아름다움도 무한하게 커진다. 혼이 힘을 키우면 그의 천국도 더욱 미세하고 절묘해진다.
천국의 모든 한계는 자신이 만드는 것이며, 혼이 넓어지고 깊어질수록 천국도 넓어지고 깊어진다. 혼이 나약하고 이기적이며 편협하고 발달 수준이 낮은 동안에는 그의 천국도 이런 하찮은 특성을 띤다. 하지만 이런 특성은 언제나 그 혼 안에서 끌어낼 수 있는 최상이다. 그 최상이 아무리 하찮다 해도 말이다.
인간이 진화하면 데바찬에서의 삶도 더 완전하고 풍요로우면서도 현실에 더 가까워진다. 진화 단계가 높은 혼들은 서로서로 더 가깝게 접촉하면서 더 넓고 깊게 소통한다.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얇고 미약하고 밋밋하고 편협한 지상의 삶은, 오직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만 살아남는 데바찬에서도 상대적으로 얇고 미약하고 밋밋하고 편협한 삶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자신의 현 상태를 넘어선 것을 가질 수 없으며 뿌리는 대로 거두기 때문이다.
"속지 말라. 신은 속지 않는다. 인간이 무엇을 심든" 더 많이도 적지도 않게 "그만큼 거둘 것이다".(갈라디아서 6장 7절ㅡ옮긴이 주) 우리의 태만과 탐욕은 씨도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고자 하지만,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이 우주에서 자애로우며 정의로운 선법(善法)은 각자가 일한 만큼 정확한 대가를 돌려준다.
우리가 친구에 대해 만드는 정신적 인상이나 정신적 영상은 데바찬에서도 우리를 지배한다 각각의 혼 주변으로 그 혼이 살아있는 동안 사랑했던 이들이 모여든다. 가슴속에 살아있는 사랑했던 이들의 모든 영상이 천국에서 그 혼과 함께하는 살아있는 동반자가 되어 결코 변하지 않는다. 천국에서도 지상에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는 지상에서 우리의 감각에 와 닿았던 친구의 겉모습을 정신의 창조력을 동원해 데바찬의 정신-질료를 가지고 형태로 만든다. 지상에서 정신적 영상으로 존재했던 것이 ㅡ 사실 우리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것은 지상에 있었다 ㅡ 데바찬에서는 살아있는 정신-질료로 만든 하나의 실재하는 형태로서 우리의 정신적 대기 속에 머문다.
지상에서 흐릿하고 꿈같았던 것이 데바찬에서는 아주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렇다면 혼과 혼의 진정한 교감은 어떨까? 혼들 간의 교감은 지상에서보다 밀접하고도 가까우면서 진심을 담은 채 이루어진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멘탈계에는 혼과 혼 사이에 장벽이 없기 때문이다.
데바찬의 혼-교감의 실재는 우리 안의 혼-생명의 실재와 정확하게 비례한다. 친구에 대한 멘탈 영상은 우리가 직접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친구의 형태는 우리가 알고 사랑했던 그 모습이다. 친구의 혼은 그 형태를 통해 우리의 혼을 향해 숨을 내쉰다. 그의 혼과 우리의 혼이 공전하며 울릴 정도로.
하지만 우리가 지상에서 알던 사람들이 육체나 아스트랄체로만 연결된 사람이었다면, 혹은 그 사람들과 우리가 내면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면, 우리는 데바찬에서 그들과 닿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적은 당연히 우리의 데바찬에 발을 디디지 못한다. 데바찬에서는 정신과 마음의 공감과 조화만이 인간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과 정신이 분리된다는 것은 천상에서의 삶도 분리됨을 의미한다. 마음과 정신보다 낮은 단계에 있는 것은 데바찬에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진화가 우리보다 훨씬 앞선 사람들의 경우, 우리는 그들에게 응답할 수 있는 만큼만 그들과 접촉할 수 있다. 그들은 존재 범위가 너무나 넓어서 우리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지만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존재 범위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 위대한 존재들은 우리의 천상 생활을 도울 수 있으며 실제로도 돕는다.
우리가 이제 알아볼 조건 하에서 우리가 그들만큼 성장하도록,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수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면 공간이나 시간의 구분은 사라지고 공감의 부재, 마음과 정신의 불일치로 인한 구분이 생긴다.
천국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은 물론 존경하는 이들과 함께한다. 우리 능력의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그들과 교감한다. 만약 우리가 그들보다 더 진화한 상태라면 그들의 한계 내에서 교감한다. 우리는 지상에서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온전하게 간직한 채 지상에서 우리가 사랑했던 형태를 한 그들을 만난다.
천국은 지상의 모든 꽃봉오리가 꽃을 피우는 곳이고, 상처 입고 나약한 지상의 사랑이 아름다움과 힘으로 확장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교감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말이나 생각의 오해가 생겨날 틈이 없다. 모든 이는 친구가 만들어내는 생각을 그대로 혹은 자신이 반응할 수 있는 만큼 보게 된다.
천상 세계인 데바찬은 지복의 세계이자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의 세계다. 하지만 데바찬은 이 정도의 표현으로는 부족한 곳이며 지친 이들을 위한 휴식처를 훨씬 능가하는 곳이다. 데바찬에서는 방금 전 끝난 삶을 사는 동안 사고자가 겪은 정신적ㆍ도덕적 경험 중에 가치 있는 것이 모두 걸러져 되새겨진 후 분명한 정신적ㆍ도덕적 능력으로, 그리고 다음에 환생할 때 가지고 태어날 힘으로 서서히 변환된다. 과거에 대한 실제 기억을 멘탈체에 집어넣지는 않는다. 멘탈체는 때가 되면 해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그 시간을 통과하고 견뎌낸 사고자 자신의 내면에만 존재한다. 그렇지만 과거 경험의 실체는 정신 능력 속으로 포함된다. 따라서 인간이 어느 한 주제를 깊이 연구했다면 그 연구의 결과로 그가 다른 생애에서 그 주제를 처음 접할 때 그 주제를 익히고 터득하는 특별한 능력이 만들어진다. 그는 그런 연구에 특히 적합한 소질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고 아주 쉽게 그런 소질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생각했던 모든 것은 데바찬에서 활용된다. 지상에서 가졌던 모든 열망은 힘으로 바뀌고, 좌절된 노력은 능력과 실력으로 바뀐다. 분투와 패배는 승리의 도구를 만들기 위한 질료로 되살아나고, 슬픔과 실수는 올바른 방향의 현명한 자유 의지를 구성하기 위한 귀중한 금속이 되어 반짝거리며 빛난다. 과거에 성취할 수 있는 능력과 기량이 부족하여 미처 성취하지 못한 계획은 데바찬에서 사고를 통해 단계별로 구상을 마치고 실행에 옮겨진다.
그리고 차후에, 예를 들어 똑똑하고 성실한 학생이 천재로 환생하거나 독실한 신자가 성인(聖人)으로 다시 태어날 때, 지상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필요한 능력과 기량은 정신 능력으로 개발된다.
그렇다면 데바찬에서의 삶은 결코 꿈이 아니며, 목적 없이 빈둥거리는 도원경(桃源境)이 아니다. 데바찬은 거친 물질이나 사소한 걱정 때문에 방해받는 일 없이 정신과 마음이 발달하는 곳이자, 지상에서의 치열한 전쟁을 위해 무기를 준비하는 곳이며, 미래의 발전이 보장되는 곳이다.
멘탈체를 입은 사고자는 지상에서 거둔 열매를 다 먹은 후에 멘탈체를 벗어버리고 홀가분하게 자기가 머물러야 할 장소에서 지낸다. 하위 단계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는 모든 정신적 능력은 원인체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때 열정적 삶이 아스트랄 껍질을 벗고 카말로카에서 해체될 때 멘탈체로 빨려 들어갔던 그 싹들도 함께 간다. 그런 다음 이런 정신적 능력은 한동안 원인체 안에서 동면 상태에 들어간다. 이 힘들은 현현할 질료가 없어서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62
진정한 인간이 입는 임시 외피 중 마지막 외피인 멘탈체는 해체되고 멘탈체의 질료는 멘탈계의 일반 물질로 되돌아간다. 이 질료는 사고자가 마침내 지상으로 내려가 윤회할 때 멘탈계로 끌려온 것이다. 따라서 이제 끝나버린 삶으로부터 흡수한 모든 것을 담은 보물창고인 원인체만 홀로 남는다. 사고자는 비로소 한 차례의 기나긴 순례를 마치고 자신의 고향에서 한동안 머물게 된다.
사고자의 의식의 상태는 그가 진화에서 어느 지점까지 도달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삶의 초기 단계에서는 하위 세계에서 자신의 도구를 잃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무의식에 둘러싸여 잠만 자게 된다. 그의 생명은 내부에서 부드럽게 고동치며, 이미 닫혀 버린 지상에서의 경험의 결과 중에서도 그의 실체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들을 소화 한다.
그러나 주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식도 없는 상태다. 사고자가 발달하면서 그의 삶에서 이 시기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데바찬에서 존재하는 시간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더 커진다. 사고자는 자의식을 갖게 되고 따라서 주변 ㅡ 비자기(not-self) ㅡ 도 의식하게 된다. 그의 기억은 눈앞에 삶의 파노라마를 펼쳐놓으며 과거의 시간으로 뻗어나간다.
사고자는 삶의 경험 중 마지막 경험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온 원인들을 보고 가장 최근의 생애에서 자신이 발생시킨 원인들을 연구한다. 이미 끝나 버린 인생의 장(章)에서 가장 고결하고 고귀했던 모든 것을 소화해서 원인체의 옷감 속에 넣는다. 사고자는 내면의 활동을 통해 발달하면서 원인체 안의 질료를 편성한다. 또한 그 시점에 몸 안에 있든 몸 밖에 있든 관계없이 위대한 혼들과 직접 접촉하여 교감을 즐기며 그들의 무르익은 지혜와 오랜 경험으로부터 배움을 얻는다.
이후에 이어지는 데바찬의 삶은 더 풍성하고 더 심오하다. 수용 능력이 커져가면서 지식은 더 풍성한 흐름을 이루어 그의 안으로 흘러든다. 법칙의 작동 원리와 진화 과정의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배우며 매번 더 커진 지식과 함께 지상으로 돌아온다. 힘도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되어 삶의 목표에 대한 비전은 보다 명확해지고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은 더 평탄해진다.
아무리 진화 수준이 낮다 해도 모든 사고자에게는 명확한 비전이 보이는 순간이 온다. 그가 하위 세계의 삶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바로 그때다. 잠시 동안 자신의 과거가 보이고, 과거에서 발생해 미래로 이어지는 원인들도 보인다. 다음 생애를 보여주는 개괄적인 지도도 그의 앞에 펼쳐진다.
그런 다음 하위 물질로 이루어진 구름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시야를 가로막고, 하위 정신의 힘이 깨어나면서 또 다른 생애 주기가 시작된다. 깨어난 힘은 진동을 보내 하위 멘탈계의 질료를 주변으로 끌어 모아 삶의 역사를 여는 새로운 장을 위해 새로운 멘탈체를 형성한다. 이 부분은 뒤에서 환생을 다룰 때 더 자세히 소개하겠다.
앞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아스트랄체를 벗어버리고는 잠에 빠져있는 혼에 대해 얘기했다.63 카말로카에서 빠져나와 데바찬으로, 연옥에서 빠져나와 천국으로 갈 준비를 마치고 잠들어 있던 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 헤아릴 수 없는 지복, 이해를 넘어서는 평화를 느끼고 잠에서 깨어난다.
아주 부드러운 멜로디가 주위로 울려 퍼지고 아주 부드러운 빛깔이 잠에서 깨어나는 눈을 맞이하며 대기는 음악이자 색깔인 듯 보인다. 존재 전체가 빛과 조화로 넘친다. 이때 금빛 안개를 뚫고 지상에서 사랑했던 얼굴들이 감미롭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에테르화되어 고결하고 사랑스러운 감정을 표현하는 아름다움으로 변했고 하위 세계의 말썽과 열정 때문에 훼손되지도 않았다. 그렇게 깨어나는 순간의 지복을, 천상 세계가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의 영광을 누가 말해줄 수 있을까?
이제 데바찬의 일곱 영역이 어떤 곳인지 자세히 알아볼 차례다. 이 중 하위 네 영역은 유형의 세계, 모든 사고가 형태로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세계라는 점을 기억하자. 이 유형의 세계는 인성의 세계로서 모든 혼은 자신의 정신 속으로 들어와 순수한 정신 질료로 표현될 수 있는 만큼의 과거의 삶으로 둘러싸여 있다.
첫 번째 영역이자 최하위 영역은 가장 진화 수준이 낮은 혼들이 모이는 천국으로서 이 혼들이 지상에서 보이는 최상의 감정은 가족과 친구에 대한 제한적이지만 진실하고 때로는 이기심을 뛰어넘는 사랑이다. 아니면 이 혼들이 지상에서 만난, 자신보다 더 순수하고 나은 사람에 대해 느낀 사랑이 담긴 존경심, 혹은 더 고차원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바람, 혹은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확장하고 샆다는 일시적인 열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곳에는 그 혼들의 능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질료가 별로 없어서 그들의 삶은 아주 조금씩만 진화한다.
그들은 가족에 대한 애정이 커지고 조금 넓어져서, 얼마 후 다시 태어날 때에는 어느 정도 발전된 감정적 본성을 갖게 되며, 고차원적인 이상을 인식하고 그에 반응하는 성향이 커지게 된다. 이 영역의 혼들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을 마음껏 즐긴다.
그들의 운명의 잔은 아직 작지만 그 잔은 가장자리까지 지복으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천국의 모든 것을 누린다. 천국의 순수성과 조화가 아직 발달하지 못한 그들의 능력을 자극하고 일깨워 활동에 들어가도록 한다. 또한 내면의 동요가 시작되는데 이는 새싹이 현현하기 전에 먼저 거쳐야 할 과정이다.
데바찬의 삶을 이루는 다음 영역은 종교 신앙을 가진 남자와 여자 둘로 이루어진다. 지상에 사는 동안 이들의 가슴은 이름이나 형태와 상관없이 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형태는 편협했을지 모르지만 그 가슴은 열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런 혼들은 이곳에서 자신이 사랑하고 숭배했던 대상을 찾는다. 또한 지상에서 정신을 통해 만들어낸 신성(神聖)이라는 관념을 이곳에서 만난다. 자신의 사나운 꿈보다 더 깨끗하고 신성한 데바찬 물질의 빛나는 영광 안에서. 신성한 존재는 자신의 숭배자가 갖는 지적 한계를 충족시키는 정도까지만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숭배자가 어떤 형태로 신성한 존재를 사랑하고 숭배했든, 신성한 존재는 자신을 갈망하는 숭배자의 눈에 그 형태의 모습을 보여주고 달콤한 화답의 사랑을 숭배자에게 쏟아 붓는다. 이곳의 혼들은 종교적 황홀경에 푹 빠져들어 자신의 독실한 신앙이 지상에서 추구했던 형태로 그 유일한 존재를 숭배하고, 신앙심의 황홀감에 몰입하여 자신이 경애하는 그 대상과 교감을 나눈다.
천국에서는 신성한 존재가 친숙한 형태의 베일을 쓰고 있기에 그 누구도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혼들은 신성한 존재와의 교감을 햇빛으로 받으며 순수와 경건 속에서 성장하면서 이런 특질이 더욱 강화된 상태로 지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들이 데바찬에서 보내는 시간이 모두 이렇게 경건한 황홀경으로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가슴과 정신이 가지고 있는 다른 특질을 성장시킬 기회도 충분히 많기 때문이다.
세 번째 영역으로 가면 지상에서 인류의 헌신적인 종으로 살았으며 인간을 위해 여러 활동을 하는 형태로 자신의 사랑을 신에게 바친 고결하고 성실한 이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이곳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방향으로 유용한 힘을 기르고 지혜를 키움으로써, 자신의 선행에 대해 보상을 받는다. 자선가의 정신 앞에는 보다 폭넓은 선행을 베풀기 위한 계획들이 펼쳐지고, 그 자선가는 마치 건축가처럼 지상에서 살게 될 다음 생애에서 자신이 세울 미래의 건물을 설계한다.
그는 행동에 옮길 여러 계획을 발전시키고, 마치 창조의 신처럼 때가 무르익었을 때, 조악한 물질 속에서 현현하게 될 자신의 선행의 우주를 계획한다. 이타적인 사랑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선천적 자질로 갖추고 지상에서 환생하게 될 이러한 혼들은 몇 세기 후에 위대한 자선가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모든 천국 중에서 가장 다른 성격을 띠는 곳이 아마도 이 네 번째 영역일 것이다. 이곳은 가장 진화한 혼들이 형태의 세계에서 표현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의 힘과 능력을 발휘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예술과 문학의 거장들이 자신이 가진 모든 형태와 색깔과 조화의 힘을 발휘하고, 지상으로 되돌아가 다시 태어날 때 갖추게 될 위대한 능력을 쌓는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하고 고결한 음악이 지상에서 가장 뛰어난 하모니의 제왕으로부터 나와 울려 퍼진다. 마치 청각 장애에서 벗어난 베토벤이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에 자신의 제왕적 혼을 쏟아 붓고, 상위 세계에서 하모니를 가져와 천국의 이곳저곳에 그 선율을 실어 보내어 천상 세계를 더욱 아름다운 음악으로 감싸는 것 같다.
여기에서는 그림과 조각의 대가들이 새로운 빛깔과 꿈에도 생각지 못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새로운 곡선을 익히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포부는 컸으나 이루지 못한 이들, 열망을 힘으로 바꾸고 꿈을 능력으로 바꾸는 이들도 눈에 띄는데, 다음 생에서는 그 힘과 능력이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 자연을 연구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이 자연의 숨은 비밀을 찾아내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미묘하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체계가 감춰진 모든 메커니즘과 더불어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다. 나중에 그들은 위대한 '발견자'로서 자연의 신비를 정확한 직관으로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지고 지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천국에는 심오한 지식을 간직한 학생들도 보인다. 스승을 찾아 다녔거나, 스승을 찾고자 열망하여 인류의 위대한 영적 스승 중 누군가가 알려준 모든 것을 꾸준히 익혔던 열렬하고도 경건한 학생들이다. 그 학생들의 열망과 열매가 이곳에 있고, 그들이 찾아 헤맺으나, 찾지 못했던 스승들이 이제 여기에서 그들을 가르친다. 그 열렬한 혼들은 천상의 지혜를 들이마신다.
그들이 스승의 발아래 앉아있는 동안 성장과 진화는 빨라진다. 그들은 스승이자 빛을 가져오는 사람으로서 지상에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스승이라는 높은 지위가 점처럼 찍혀 있을 것이다.
지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미묘한 원리를 알지 못하고, 이 네 번째 천국에 이르기 위해 준비한다. 어떤 천재적인 인물에 대한 이야기나, 어떤 진화한 혼의 가르침 앞에서 지성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고 경배하는 인물과 자신 사이에 일종의 고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며, 천상 세계에서는 그 혼의 고리가 모습을 드러내어 그 고리에 연결된 혼들을 교감으로 이끌게 된다.
태양이 여러 방에 햇빛을 쏟아 부으면 각각의 방은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햇빛을 담는다. 천상 세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이 위대한 혼들은 제자들이 자신에 대해 만들어낸 수많은 정신적 이미지 속으로 비춰 들어가 그 영상을 생명으로, 자신의 정수(精髓)로 채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제각기 가르침을 전해줄 스승을 갖게 되는 한편, 스승의 도움이 아닌 다른 것은 차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소비하기 위해 지상에서 모아둔 질료와 비례하는 기간만큼 이 유형의 천상 세계에 머문다. 마지막 생에서 쌓은 모든 선행은 그 열매를 맺고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결과를 얻게 된다.
그런 후에는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모든 것이 고갈되어 즐거움의 잔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빠져나가고 천상의 축제에서 먹었던 마지막 부스러기까지 사라지면, 능력으로 변환되어 영구적인 가치를 갖는 모든 것이 원인체 안에 모이게 된다.
사고자는 데바찬 세계의 하위 단계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사용했으나 이제 해제되고 있는 몸을 떨쳐버린다. 이 멘탈체에서 벗어난 사고자는 자신의 수확물 가운데 무언가가 상위 영역에서 적절한 질료를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세계 속에서 지낸다.
아주 많은 수의 혼이 잠깐 동안 무형 세계의 최하위 단계를 스쳐가면서 그곳을 일시적인 피난처로 삼는다. 하위 단계의 매개체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혼들은 너무나 미숙해서 그곳에서 독자적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멘탈체가 빠져나가 해체되면 무의식 상태가 된다.
그런 다음 잠깐 동안 깨어나 의식을 찾게 되는데, 이때 기억이 스쳐지나가면서 그들의 과거를 비추면 의미심장한 원인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예지력이 스쳐지나가면서 그들의 미래를 비추면 다음 생애에서 나타날 결과를 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무형의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까지다. 늘 그렇듯이 이곳에서도 뿌린 대로 거두기 때문이다. 그 고귀한 영역에 아무것도 뿌리지 않은 이가 어떻게 무언가를 거둘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많은 영혼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 심오한 사고와 고귀한 삶을 통해 씨를 많이 뿌렸고, 그로 인한 수확물은 무형의 천상 세계 세 곳 중 가장 낮은 이 다섯 번째 데바찬 영역에 속하게 된다. 그들은 육체와 열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온 것에 대해 큰 보상을 받는다.
하위 세계의 외피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인간의 진정한 삶과 혼 자체의 고결한 존재를 경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눈으로 진리를 배우고 모든 유형의 물체가 결과로 나타나게끔 하는 근본 원인들을 보며, 하위 세계에서는 사소하고도 별 관련 없는 온갖 것들로 특징지어지는 존재의 본질적 통일성을 연구한다.
따라서 이 혼들은 법칙에 대한 깊은 지식을 습득하고 아주 앞뒤가 맞지 않는 듯 보이는 결과 속에서도 그 법칙이 변함없이 작동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여기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살펴보고 자신이 발생시킨 원인들을 조심스럽게 파헤친다. 그 원인들의 상호작용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물을 살펴보고 그 원인들이 미래의 삶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게 된다.
여섯 번째 천국에는 보다 진화한 혼들이 있다. 그들은 지상에 사는 동안 일시적인 쇼에는 별로 끌리지 않고,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보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데 쏟았다. 그들의 과거는 베일에 싸여 있지 않으며 그들의 기억은 완벽하고 끊긴 곳이 없다.
그들은 장애물의 역할을 하는 힘은 상쇄하고, 좋은 기능을 하는 힘은 강화하는 에너지를 다음 생에 투입하고자 계획을 세운다. 또한 또렷한 기억 덕분에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행동을 피해야 하는지 확실하고도 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들은 이런 자유 의지를 다음 생에서 취하게 될 하위 매개체에 각인시킬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특정 종류의 악행은 뿌리 깊은 본성이라고 느끼는 대신, 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특정 종류의 선행은 도저히 거부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요구가 되어 행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된다. 이런 혼들은 비도덕적인 삶이 불가능한, 고귀하고도 고결한 세계에 태어나기에 태어난 아기는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인류의 선구자임이 드러난다.
이 여섯 번째 천국에 도달한 인간은 창의적으로 활동하는 신성한 정신의 방대한 보물이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게 되어, 하위 세계에서 서서히 진화하고 있는 모든 형태의 원형을 탐구할 수 있다. 이곳에서 인간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신성한 지혜의 바다에 몸을 담그고, 이런 원형에서 벗어나 있기에 발생하는 문제나 인간의 불완전한 눈에는 악으로 보이는 부분적 선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한다.
이렇게 시야가 넓어지면 각종 현상은 그에 걸맞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인간은 신성한 길이 옳은 이유를 알게 되어, 하위 세계의 진화를 위한 신성한 길은 이제 더 이상 이해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깊이 고민했던 지상의 문제와 그의 열성적인 지력으로도 해답을 찾지 못했던 문제들은 현상이라는 베일을 꿰뚫어보고, 그 사슬을 완성시키는 연결 고리를 볼 수 있는 통찰력 덕분에 이곳에서 해결 된다.
혼은 이곳에서 인류 안에서 진화한 지상의 위대한 혼들과 함께하면서 완전한 교감을 나누고, 지상에서 살았던 과거의 구속에서 벗어나 끝도 없고 중단도 없으며 영원히 현재인 삶을 즐긴다. 우리가 '강력한 사자(死者)'라고 일컫는 이들이 이곳에서는 빛나는 삶을 사는 이들이다. 혼은 그들의 존재가 주는 환희를 즐기고, 그들의 강렬한 하모니로 인해 자신의 활기찬 본성이 그들의 음조에 맞춰지면서, 점점 그들과 닮아간다.
그러나 대스승과 입문자들의 고향인 일곱 번째 천국은 더 고귀하고도 멋지게 빛난다. 지상에 사는 동안 입문이라는 문, 다시 말해 끝이 없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64을 통과하지 않는 혼은 이곳에 머무르지 못한다. 지상으로 흘러 내려가는 가장 강한 지적ㆍ도덕적 진동은 이 세계에서 시작되어 활력을 북돋우는 고귀한 에너지의 흐름을 향해 쏟아진다. 세계의 지적 생명력은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천재들이 이곳에서 순수한 영감을 받는다. 이곳에 머무르는 혼들에게는 자신이 그 시점에 하위의 매개체와 연결되어 있느냐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고귀한 자의식과 주변 존재와의 교감을 즐길 뿐이다.
몸을 취하고 있을 때 자신의 하위 매개체를 자신이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의식으로 채울 것인가의 문제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내어줄 수도 있고 담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자유 의지는 로고스의 의지와 함께하는 위대한 존재의 의지, 다시 말해 세계의 이익을 추구하는 의지를 점점 따르게 된다.
이곳에서는 아직 최종의 해방에 다다르지 못한 모든 이들 ㅡ 즉, 아직 대스승이 되지 못한 이들 ㅡ 의 개별성65을 나타내는 마지막 흔적이 사라지고 있는데, 그 흔적들이 마침내 사라지면 그 의지는 세계를 인도하는 의지와 더욱 조화로운 관계를 이룬다.
인간이 죽음이라고 부르는 변화를 맞은 뒤 때가 되면 하나 쯤은 거치게 되는 '일곱 천국'이 어떤 곳인지 대략적으로 알아 보았다. 죽음은 혼을 옭아맨 무거운 사슬을 풀어주어 그 혼에게 부분적 해방을 가져다주는 변화일 뿐이다.
죽음은 더 넓은 삶 속으로의 탄생이자, 지상에서의 짧은 유배 생활을 마치고 혼의 진정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귀향이며, 감옥에서 높고 자유로운 세계로의 이동이다.
죽음은 지상에 존재하는 여러 착각 중에 가장 위대하다.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삶의 조건에 생기는 변화일 뿐이다. 삶은 지속적이고 끊어짐이 없으며 끊을 수도 없는 것이다.
'태어나지도 않았고 영원하며 아주 오래되었지만 변함없이 지속되는' 생명은 그것을 감싸고 있는 몸이 사라진다고 해서 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항아리 하나가 깨진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몸이 산산조각 난다고 해서 혼이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66
물질계, 아스트랄계, 멘탈계는 혼이 계속 반복해서 순례하는 세 가지 세계다. 인간의 삶의 바퀴는 이 세 가지 세계에서 돌고, 혼은 진화하는 동안 줄곧 이 바퀴에 얽매인 채 이 바퀴에 이끌려 이 각각의 세계를 차례로 찾게 된다.
이제 혼의 전체 생애, 다시 말해 혼의 삶을 구성하는 생애의 집합을 추적하고 인성(personality: 신지학에서 말하는 인성이란 인간의 저급한 부분으로 개체성이 사용하는 베일이다ㅡ옮긴이 주)과 개체성(individuality: 신지학에서 말하는 개체성이란 인간 안의 영적이고 지적이며 불멸하는 부분이다ㅡ옮긴이 주)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할 차례다.
혼은 데바찬의 무형 세계에서 체류가 끝나면 멘탈계의 유형 세계에서 활동하는 에너지를 내보냄으로써 새로운 생애를 시작한다. 이런 에너지는 이전 생애를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밖으로 향하는 이 에너지는 하위 멘탈계 네 곳의 물질로부터 자신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질료를 주변으로 끌어 모아 다음의 탄생을 위해 새로운 멘탈체를 만든다.
이런 멘탈 에너지의 진동은 욕망-본성에 속하는 에너지를 자극하고 이렇게 자극받은 에너지는 진동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진동은 깨어나 고동치면서 자신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질료를 아스트랄계의 물질로부터 끌어당기고 이런 질료들은 앞으로 맞이할 환생을 위해 새로운 아스트랄체를 형성한다.
그 결과 사고자는 멘탈체와 아스트랄체라는 외피를 걸치게 되고, 이 외피들은 과거에 삶의 여러 단계를 통해 진화한 여러 능력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사고자는 나중에 설명할 어떤 힘67에 이끌려서 적합한 육체를 제공할 가족에게 인도되고 아스트랄체를 통해 그 육체와 연결된다.
멘탈체는 태아기를 거치는 동안 하위 매개체들과 관계를 맺는데, 이 관계는 아동기 내내 더 밀접해진다. 그러다가 7년째가 되면 진화 단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사고자와 완전히 연결된다.
그 이후부터 사고자는 충분히 발달한 자신의 매개체들을 약간씩 통제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우리가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이 권고나 경고를 보내는 사고자의 목소리다. 사고자는 모든 상황에서 이러한 매개체들을 통해 경험을 수집하며, 지상에서의 삶이 지속되는 동안 그렇게 수집한 경험을 자신만의 적당한 매개체, 즉 그 경험이 속하는 세계의 몸속에 저장한다.
지상에서의 생활이 끝나면 육체는 떨어져나가고, 물질계와 접촉하는 사고자의 능력도 육체와 함께 사라진다. 그 결과 사고자의 에너지는 아스트랄계와 멘탈계에 국한된다.
적당한 때가 되면 아스트랄체도 쇠퇴하여 사고자의 생명 활동은 멘탈계에 한정되고 아스트랄 능력은 한데 모여 사고자의 내부에 잠재적 에너지로 따로 저장된다.
또 다시 적당한 때가 되어 사고자가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작업을 마무리하면, 멘탈체도 해체되고 가지고 있던 에너지도 사고자 내부에 잠재적 상태로 저장된다. 사고자는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의 고향인 무형의 데바찬 세계로 들어간다.
그런 다음 사고자가 세 가지 세상에서 살면서 경험한 모든 것들은 미래에 대비한 능력과 힘으로 변환되어 그 자신의 내부에 저장되고 사고자는 순례를 다시 시작하여 보다 커진 힘과 지식을 가지고 또 다른 삶 속으로 발을 내디딘다.
인성은 사고자가 물질계, 아스트랄계, 하위 멘탈계에서 에너지를 발휘할 때 매개로 삼는 일시적인 매개체, 그리고 그 매개체와 연결된 모든 활동으로 구성된다. 이런 매개체와 활동은 세 가지 하위 몸에 새겨진 인상이 만들어내는 기억의 고리를 통해 하나로 합쳐지고, 사고자가 자신과 자신의 매개체를 스스로 동일시함으로써 독자적인 '나'가 형성된다.
진화의 하위 단계에서는 이 '나'가 육체와 아스트랄체 속에 있는데, 그 안에서 엄청난 활동을 보이다가 이후에는 멘탈체 안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일시적인 느낌, 욕망, 열정을 가진 인성은 자신의 안에 있는 사고자로부터 모든 에너지를 끌어 모아 유사-독립적인 실체를 형성한다.
하위 세계에 속하는 인성의 특질은 '몸속 거주자'의 영구적인 이익과 직접적으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아서 충돌이 일어나곤 하는데, 그 충돌은 어떨 때는 일시적인 쾌락의 승리로, 또 어떨 때는 영구적인 이익의 승리로 끝이 난다. 인성의 생명은 사고자가 새로운 멘탈체를 만들 때 시작되어, 그 멘탈체가 데바찬의 유형 세계에서 삶을 마감하고 해체될 때까지 지속된다.
개체성은 이 모든 인성을 나뭇잎으로 매달고 인간의 삶이 봄, 여름, 가을을 지내는 동안 지속되는 불멸의 나무 사고자로 구성된다. 그 나뭇잎들이 받아들여 수용하는 모든 것은 나뭇잎의 잎맥을 통해 빠르게 흐르는 수액에 영양분을 제공한다. 가을이 되면 수액은 나무의 몸통 속으로 물러나고 메마른 나뭇잎은 땅에 떨어져 소멸한다. 영원히 사는 것은 사고자뿐이다.
그는 '때가 절대로 오지 않는' 인간이자『바가바드 기타』에도 나오는 것처럼, 인간이 새로운 옷을 걸치고 낡은 옷을 벗어던지듯 몸을 걸쳤다가 벗어던지는 영원한 젊은이다. 각각의 인성은 불멸의 배우가 연기하는 새로운 배역이고, 그 배우는 삶이라는 무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오간다.
이 삶이라는 드라마에서 그는 먼저 살았던 이들의 자식, 앞으로 올 이들의 아버지라는 배역을 맡게 된다. 그 결과 그 드라마는 끊이지 않는 역사이자, 연이어 여러 역할을 맡는 그 배우의 역사가 된다.
사고자가 인류 진화의 초기 단계를 거치는 동안 그의 삶은, 우리가 탐색한 세 가지 세계에 한정된다. 그러나 그가 보다 고귀한 영역에 발을 내딛어 환생이 지나간 과거로 변하는 시간은 언젠가 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탄생과 죽음의 수레바퀴가 도는 동안 인간은 이 세 가지 세계에 속하는 욕망에 얽매이고, 그의 삶은 이 세 가지 영역에서 이어진다.
이제 앞으로 우리가 알아볼 세계는 유용하다거나 이해하기 쉽다고 말하기 힘든 곳이다. 그렇다고 해도 '고대의 지혜'에 대한 윤곽을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6장
붓디계와 아트마계
우리는 앞에서 인간이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자의식이 있는 실체, 즉 사고자이며 하위 멘찰계와 아스트랄계, 물질계에 속하는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제는 사고자의 가장 내부에 있는 자기(Self)이자 사고자의 진화의 근원이 되는 영의 가장 내부에 있는 자기(Self)이자 사고자의 진화의 근원이 되는 영(靈)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로고스에서 나오는 광선으로서 자신의 본질적 존재와 함께하는 이 신성한 영은 로고스의 세 가지 본성을 갖는다. 인간의 진화란 이러한 세 가지 본성이 점진적으로 현현하는 과정이자, 이 본성들이 잠재적 상태에서 활동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이므로 인간의 진화는 우주의 진화의 축소판이다. 따라서 인간은 소우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우주가 대우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의 거울이자 신의 형상 혹은 투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라는 오래된 격언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내재하는 신성(神聖)은 인간의 최종적 승리를 보장하며, 진화를 가능하면서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드는 숨은 동기이자 모든 장애물과 어려움을 천천히 극복하도록 하고 위를 향해 오르도록 하는 힘이다.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ㅡ옮긴이 주)가 '정의를 향하도록 하는, 우리 자신이 아닌 어떤 힘'이라는 표현을 쓸 때 막연하게나마 감지했던 것도 바로 이 존재였다.
하지만 그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 가장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자기 ㅡ 우리의 개별적 자기가 아니라 우리의 자기68 ㅡ 이기 때문이다.
이 자기는 유일자이기에 모나드69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우리는 이 모나드가 로고스의 날숨의 생명으로서, 모든 신성한 힘과 특성을 어린 싹의 형태로 혹은 잠재적 상태로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힘은 모나드가 내던져진 우주의 물체들과 접촉하면서 발생한 충격으로 인해 현현하게 된다. 이때 생겨난 마찰은 자극을 받는 생명으로부터 반응 진동을 일으키고, 생명의 에너지는 하나씩 잔재적 상태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한다.
인간 모나드 ㅡ 구분을 위해 이렇게 부른다 ㅡ 는 앞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신의 완벽한 형상으로서 신성의 세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진화하는 동안 이 세 가지 측면이 차례로 개발된다. 이 측면들은 우주, 존재, 지복, 지성을 통해 현현하는 신성한 생명의 위대한 세 가지 특징이며, 세 로고스는 현현의 한계 안에서 최대한 완벽하게 이 특성들을 드러낸다.
인간의 경우 이런 측면들은 지성, 지복, 존재와 같이 역순으로 개발된다. 여기서 '존재'는 신성한 힘의 현현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인간의 진화를 배우면서 숨겨진 신성의 세 번째 측면이 발달하는 과정, 즉 의식이 지성으로 발달하는 과정을 보았다.
사고자이자 인간의 혼인 마나스는 보편 정신의 형상이자 세 번째 로고스의 형상이고, 사고자는 하위 세 영역에서 기나긴 순례를 하는 동안 이 세 번째 측면, 즉 인간 내부에 있는 신성의 지적인 측면을 진화시키는 데 집중한다. 이런 진화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신성한 에너지들은 인간 내부에서 활발하게 힘을 키우기 보다는 그 인간, 즉 그의 생명의 숨은 근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그 에너지들은 현현하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내부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힘들이 현현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은 더디게 진행된다. 이 힘들은 지성의 진동 에너지가 점점 커지면 우리가 잠복 상태라 부르는 미현현한 생명으로부터 깨어난다. 그리고 지복-측면은 처음으로 진동을 내보내기 시작한다. 현현한 생명의 희미한 진동이 전해지는 것이다. 이 지복-측면은 신지학 용어로 '붓디'라고 부르는 데 지혜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되었다. 붓디는 우리 우주의 네 번째 계, 혹은 불계(붓디계)에 속한다.
이 불계에는 여전히 이원성이 존재하지만 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그 개념을 말로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이란 이원성과 분리가 항상 연결되어 있는 하위 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개념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붓디는 각자가 자기 자신인 상태로서 그 명확성과 생생한 강렬함은 하위 계에서는 도저히 근접할 수 없다. 또한 각자가 스스로 나머지 모두를 포함한다고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분리되지도 분리할 수도 없어서 나머지 모두와 함께한다고 느끼는 상태다.70
지상에서 가장 비슷한 상태를 찾는다면 순수하고 강렬한 사랑으로 하나가 된 두 사람 사이의 상태를 들 수 있다. 그 사랑은 둘을 하나로 느끼게 하여, 하나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살도록 하며, 그 어떤 장벽도 차이도, 내 것과 네 것도, 분리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71
인간이 자신들끼리의 결합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 하고, 욕망의 대상이 무엇이든 그 대상을 추구하는 것은 불계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메아리 때문이다. 완벽한 고립은 불행이다.
모든 것이 없는 상태, 모든 것이 박탈된 상태는 외로운 그 개인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극심한 고독 속에서, 허공에 매달린 채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되어 그 분리된 자기 속에 갇히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공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와 반대되는 것은 결합이며 완벽한 결합은 완벽한 지복이다.
자기의 이런 지복-측면이 진동을 내보내기 시작하면 이 진동은 하위 계에서 그랬듯이 그 진동이 활동하는 계의 물질을 주변으로 끌어 들이고, 그 결과 붓디체 혹은 보다 적절한 용어72로 지복체가 서서히 만들어진다. 이 찬란한 형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인간이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순수하고 비이기적이며 모든 것을 수용하고 베푸는 사랑, 자신을 이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 즉 편파적이지도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 사랑을 키우는 것뿐이다.
이렇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 모든 것을 내어주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은 신성한 특질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다. 순수한 사랑은 우주를 존재하게 만들었고, 우주를 유지하며 우주를 완벽과 지복으로 이끈다. 그리고 인간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에게 차별을 두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사랑을 쏟아낼 때마다, 분리의 한계를 던져버리고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과 함께하는 존재로 인식하면서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신성의 지복-측면을 개발하고 사고자가 이후에 자리하게 될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기쁨의 몸을 준비하는 셈이다.
이 몸은 위대한 기독교도이자 입문자였던 성 바오로가 말했던 '손으로 만들지 않은, 천국에서 영원한 집'이기도 하다. 성 바오로는 모든 미덕 중에서도 자선과 순수한 사랑을 최고로 꼽았다. 순수한 사랑을 통해서만 지상의 인간이 그 찬란한 주거지를 만드는 데 제 몫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불교에서는 '분리'를 대단한 이단적 행위'라고 불렀으며, 힌두교의 목표 또한 '결합'이다. 해방은 우리를 갈라놓는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이기심은 근본적인 악이며, 이 악을 종식시키면 모든 고통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다섯 번째 계인 열반계는 우리 안의 신이 가장 고차원적인 인간의 양상을 보이는 곳으로서, 이 양상을 신지학 용어로 아트마 혹은 자기라고 한다. 이곳은 순수한 존재의 계이자 신성한 힘이 우리의 다섯 세계에서 가장 완전하게 현현하는 곳이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계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의 빛 속에 숨겨져 있다.
이 아트마 혹은 열반의 의식, 다섯 번째 계의 삶에 속하는 의식은 고귀한 존재들, 즉 인간 진화의 한 주기를 마치고 대스승이라 불리는 인류의 첫 열매들에 의해 얻어진다. 이들은 개체성의 본질을 비분리와 결합하는 문제를 자기 자신 안에서 해결하고 불멸의 지성이 되어 완벽한 지혜와 지복, 힘 안에서 살아간다.
인간 모나드가 로고스로부터 나오는 것은 마치 가느다란 빛 한 줄기가 반짝거리는 아트마의 바다로부터 떨어져 나와, 붓디 물질로 된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나머지 다른 것들과 분리되고, 여기에서 불꽃이 일어나 멘탈계의 무형 단계에 속하는 물질로 이루어진 달걀과 비슷한 포장 안에 갇히게 되는 것과 같다. '그 불꽃은 포하트(Fohat)의 가장 가느다란 줄기에 의지해 불길에 매달려있다."
진화가 진행되면서 이 빛나는 달걀은 점점 커지고 오팔 색을 띠게 되고 그 가느다란 빛줄기는 점점 더 넓은 통로가 되어 점점 더 많은 아트마 생명이 그 통로를 통해 쏟아지게 된다. 마침내 불길이 불길과 합쳐지듯 아트마 생명은 가느다란 빛줄기와 합쳐지고 그 둘은 다시 빛나는 달걀과 합쳐져 분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계에서의 진화는 인류의 미래 시간에 속하지만, 빠른 진화라는 힘든 길을 택한 이들은 바로 이 순간에도 그 길을 걷고 있을지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뒷부분에서 설명하겠다.73 그 길에서는 지복체가 빠르게 진화하고 인간은 그 고귀한 영역을 의식하기 시작하여 분리라는 장벽이 없어질 때 생겨나는 지복과 지적 한계를 초월할 때 흘러드는 지혜를 알게 된다. 그러면 혼을 하위 세계에 묶어두는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열반계에서 완성되는 자유를 처음으로 맛보게 된다.
열반계의 의식은 소멸의 정반대 상태다. 감각과 정신의 삶만 아는 이들은 그 존재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고 강렬하다. 희미한 양초 불빛이 정오의 화려한 태양과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듯이, 열반계 의식 또한 지상에 묶인 의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상의 의식의 한계가 사라졌기 때문에 열반계 의식도 소멸되었다고 보는 것은, 희미한 양초 불빛밖에 알지 못하는 인간이 심지가 기름에 잠기지 않으면 빛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열반계는 열반을 누리며 그 찬란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과거의 세계 여러 경전에서 이미 입증하였다. 또한 완벽한 인류로 향하는 고귀한 사다리를 오른 이들, 아직 지상과 닿아있지만 흔들림 없이 그 사다리를 한 단씩 오르고 있는 이들도 열반계의 존재를 입증한다.
열반계에는 과거의 우주에서 인간으로서의 진화를 이미 달성하고 로고스가 스스로 현현하여 이 우주를 존재하도록 했을 때 로고스와 함께 나타난 강력한 존재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세계를 다스리는 정부에서 활동하는 로고스의 장관들로서 로고스의 의지를 완벽하게 대리한다. 우리가 하위 계에서 보았던 신과 하위 보좌관들로 구성된 모든 위계 구조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주(主)는 바로 이곳에 주소를 두고 있다. 열반계는 우주의 중심이고, 이곳에서 모든 생명의 흐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모든 것의 생명인 위대한 숨결이 생겨나고, 우주가 그 기한을 다했을 때 그 위대한 숨결은 이곳으로 끌려온다. 오컬티스트들이 갈망하는 신의 환영이 이곳에 있고 드러나지 않은 영광, 지고의 목표도 이곳에 있다.
인류의 형제애, 아니 모든 존재의 형제애는 영적 세계, 즉 아트마계와 붓디계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영적 세계에만 합일이 있고 영적 세계에만 완벽한 공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적 능력은 인간 내부에 있는 분리의 본질이어서 '나'를 '나'가 아닌 존재와 구분하고 자신을 의식하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존재가 자신의 밖에 있고 이질적이라고 여긴다.
이 본질은 전투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본질이며 세상은 지성계 이후부터 충돌 장면을 보여준다. 그 충돌은 지력이 그 안에 섞여있을수록 더 결렬해진다. 심지어 열정-본성도 욕망이라는 느낌에 의해 생겨나서 자신과 욕망의 대상 사이에 서 있는 무언가를 발견할 때만 자발적인 전투성을 띤다.
그런 열정-본성은 정신이 활동하라고 부추기면 더 공격적으로 변한다. 미래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준비하려고 애쓰며 자연의 저장고에서 더 많은 것을 가져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력은 자발적으로 전투적이어서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 본성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분리의 뿌리, 즉 끊임없이 인간 사이의 분열을 일으키는 원천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불계에 이르면 즉시 합일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우리가 다른 모든 광선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하나의 광선에서 한 걸음 떨어져 모든 광선을 똑같이 내보내는 햇빛 속으로 발을 디디는 것과 같다. 햇빛으로 뒤덮인 채 그 빛을 솓아내며 햇빛 속에 서있는 존재는 광선과 광선 사이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이 광선을 저 광선만큼이나 수월하게 쏟아낼 것이다.
불계에 의식적으로 도달한 인간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이 이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형제애를 느끼면서 도움을 원하는 이가 누구든 자신을 쏟아 부어 정확하게 필요한 만큼만 정신적, 도덕적, 아스트랄적, 물질적 도움을 준다.
그는 모든 존재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존재의 것이기도 하다고 느끼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것이기 보다 그들의 것이라고 느낀다. 자신이 가진 것을 그들이 더 필요로 하고 그들이 더 약하다고 생각히기 때문이다.
이는 한 가족 중에서 연배가 높은 형제가 여러 부담을 떠안고 고통과 빈곤으로부터 동생들을 지켜주는 상황과도 같다. 형제애를 가진 영에게 나약함이란 도움과 애틋한 보호를 부르는 것이지 억압의 기회가 아니다.
여러 종교의 위대한 창시자들은 이러한 수준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더 높은 지점까지 다다랐기 때문에, 언제나 연민이 넘치고 다정한 모습으로 인간의 물질적 요구와 내면의 요구를 만족시키며, 모든 인간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살폈다.
이 내면의 합일에 대한 의식, 모든 존재 안에 똑같이 존재하는 유일한 자기에 대한 인식은 형제애를 가능하게 하는 탄탄한 하나의 토대가 된다. 이것을 제외한 나머지 토대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또한 이런 인식을 갖게 되면 각기 다른 인간과 비인간이 도달한 진화의 딘계가 주로 우리가 나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한참 후에야 진화라는 여정을 시작했다.
각자가 내부에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은 같을지라도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힘과 능력을 펼쳐보였다. 이는 그들이 젊은 형제들에 비해 진화 과정을 더 오래 거쳤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한 진화 단계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발달 단계가 낮은 아기 혼을 탓하고 깔보는 것은 아직 꽃을 피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씨앗을 탓하고 깔보는 것, 이작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이유로 새싹을 탓하고 깔보는 것,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기를 탓하고 깔보는 것과 같다.
우리가 아직 신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탓하지는 않는다. 때가 되면 우리의 연배 높은 형제들이 서 있는 곳에 우리도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처럼 되지 못한 어린 혼을 왜 비난해야 하는가? '형제애'라는 단어는 피의 동질성과 발달의 차이를 내포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 단어는 우주의 모든 생명체간의 연결성 ㅡ 본질적 삶의 동일성과 그 삶이 현현하는 과정에서 도달한 단계의 차이 ㅡ 을 나태낸다.
우리는 근원, 진화 방법, 목표가 같지만 나이와 위상에는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는 다정하고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고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한 인간이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친형제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해주는가를 보면, 그가 유일한 생명을 공유하는 이들 각각에게 얼마만큼의 빚을 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인간은 인종, 계급, 나라가 다르다는 이유로 형제들에게 배척당한다. 현명한 인간은 사랑으로써 이러한 사소한 차이를 넘어서서, 하나의 근원에서 탄생한 모든 이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여긴다.
이런 형제애를 머리로 인식하고 현실 속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고차원적 본성을 자극하기에 신지학 협회에서는 이를 하나의 의무적 목표, 즉 모든 회원이 입회 때 꼭 받아들여야 하는 하나의 '신조'로 삼았다. 형제애를 조금이라도 실천하면 마음이 정화되고 시력이 밝아진다. 형제애를 완벽하게 실천하면 모든 분리의 얼룩이 사라지고, 자기(self)의 순수한 빛이 티 하나 없는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처럼 우리를 빛나게 할 것이다.
인간이 이런 형제애를 무시하든 부인하든 관계없이 이런 형제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무시한다고 해도 자연의 법칙은 바뀌지 않으며, 변함없고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행진은 털끝만큼도 달라지지 않는다. 자연의 법칙은 반대하는 이들을 짓밟고 그 법칙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낸다.
그러므로 어느 국가도 형제단을 모욕하고서는 버틸 수 없고, 어느 문명도 형제단에 반하는 토대 위에 세워져서는 지속될 수 없다. 우리는 형제단을 새롭게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업적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삶이 형제단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불계를 모호하고 비현실적인 세계로 보는 이들에게는 불계가 그보다 하위에 있는 모든 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과, 하위 세계에서 불계의 힘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모든 것들이 그 힘에 의해 산산조각 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다. 이 우주는 영적 힘이 자신을 드러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적 힘은 모든 곳에 널리 퍼져 안내하고 창조하는 에너지이며,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에너지이다.
따라서 영적 합일체인 형제단은 외부의 어떤 단체보다도 훨씬 더 실재적이다. 형제단은 형태가 아니라 생명체이며 '현명하고도 다정하게 모든 것을 명령한다.' 형제단은 시기에 맞게 수많은 형태를 취하기도 하지만 그 생명은 하나다. 그 형제단의 존재를 보는 이들은 행복해져서 스스로 형제단의 살아있는 힘의 통로가 된다.
지금까지 인간을 구성하는 구성 성분들이 각각 속하는 영역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들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복잡한 전체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인간 모나드는 아트마-붓디-마나스이며 가끔은 인간의 영, 역적 혼, 혼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셋이 자기의 여러 측면에 불과하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이 세 측면은 개별적으로 연이어 현현하지만, 이들의 실질적 합일성 때문에 혼은 영적 혼과 하나가 되어 영적 혼에 개체성이라는 귀중한 본질이 생겨나며, 이렇게 개체화된 영적 혼은 영과 하나가 되어 영적 혼에 색채를 부여한다. (개체성으로 인한 색채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된다는 말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영적 혼이 로고스의 다른 모든 광선 및 로고스 자신과 갖는 본질적 합일성은 손상되지 않는다.
이 세 가지 측면은 인간의 일곱 번째, 여섯 번째, 다섯 번째 본질을 형성하고 그 본질들을 제한하거나 감싸는 질료, 즉 그 본질들이 현현하여 활동하도록 하는 질료는 우주의 다섯 번째 영역(열반계), 네 번째 영역(불계), 세 번째 영역(멘탈계)으로부터 각각 얻는다. 다섯 번째 본질은 이에 그치지 않고 멘탈계의 하위 몸을 가져와 현상 세계와 접촉하고자 한다. 그 결과 네 번째 본질, 즉 두 번째 계인 아스트랄계에 속하는 욕망-본성 혹은 카마와 뒤얽히게 된다.
첫 번째 영역인 물질계로 내려가면 세 번째, 두 번째, 첫 번째 본질을 만나게 된다. 바로 특화된 생명 혹은 프라나, 매개체인 에텔복체, 물질계의 조악한 질료와 접촉하는 조밀체이다. 우리는 앞에서 프라나가 '본질'로 간주되지 않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욕망과 멘탈체는 서로 뒤얽혀 카마-마나스로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순수한 지력은 상위 마나스, 욕망이 빠진 정신은 하위 마나스라 불린다.
인간을 바라보는 가장 편리한 개념은 아마도 영원한 하나의 생명과 그 생명이 작동하는 다양한 형태, 그 생명 에너지가 다양하게 현현하는 조건과 관련된 여려 사실들을 가장 엄밀하게 나타내는 개념일 것이다.
이런 개념을 취할 때 우리는 자기를 유일한 생명이자 모든 에너지의 원천으로, 그 여러 형태를 붓디체, 원인체, 멘탈체, 아스트랄체, 육체(에테르체와 조밀체)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동일한 개념을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을 표로 작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본질 | 생명 | 형태 | ||
아트마. 영 | 아트마 |
| ||
붓디. 영적 혼 | 지복체 | |||
상위 마나스 | 인간 혼 | 원인체 | ||
하위 마나스 | 멘탈체 | |||
카마. 동물 혼 | 아스트랄체 | |||
링가 샤리라(Linga Sharira)74 |
| 에텔복체 | ||
스툴라 샤리라(Sthula Sharira) | 조밀체 |
이 표를 보면 이름만 다를 뿐 여섯 번째, 다섯 번째, 네 번째, 세 번째 '본질'은 붓디체, 원인체, 멘탈체, 아스트랄체 안에서 활동하는 아트마이고, 두 번째와 첫 번째 '본질'은 하위 몸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름을 갑자기 바꾸면 신지학을 배우는 이들이 혼란을 느끼기 쉽다. 존경받는 우리의 스승 블라바츠키 여사가 당시의 명명법이 혼란스럽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큰 불만을 표현하시고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에게 그 방식을 개선해달라고 하셨기에 기술(記述)적이면서도 단순하고 사실을 잘 반영하는 위의 이름들을 채택하였다.
이제까지 배운 인간의 다양하고 미묘한 여러 몸은 모두 합쳐져 흔히 인간의 '오라'라고 불리는 것을 형성한다. 이 기운은 달걀 형태의 빛나는 구름 모양을 하고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조밀체가 있는데, 그 외양 때문에 단지 구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흔히 '오라'라고 불리는 것은 미묘한 몸들의 여러 부위가 조밀체의 표면 너머까지 뻗어나간 것이다. 각 몸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자신보다 더 조악한 것들을 관통하며 발달 단계에 따라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각각의 몸에서 조밀체의 표면과 겹치는 모든 부분은 오라라고 불린다.
따라서 오라는 에텔복체, 욕망체, 멘탈체, 원인체,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아트마의 광채가 비추는 붓디체가 겹쳐지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오라는 둔탁하고 거칠고 우중충할 때도 있지만 크기와 빛, 색깔이 놀랍도록 눈부실 때도 있다. 오라를 전적으로 결정하는 요인은 그 인간이 도달한 진화 단계, 그의 여러 몸의 발달 상태, 그가 진화시킨 도덕적ㆍ정신적 특질이다.
인간의 변화무쌍한 열정과 욕망, 사고는 오라 안에 형태, 색깔, 빛으로 적혀 있어서 만약 인간에게 그런 글을 읽을 수 있는 눈이 있다면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오라 안에는 특질 뿐 아니라 일시적인 변화도 각인되어 있어서, 우리가 '육체라고 부르는 가면' 안에서 속임수란 있을 수 없다. 오라가 커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은 그 인간이 진화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표시이고, 사고자와 그의 매개체들이 성장하고 정화되었음을 알려준다.
7장
환생
이제 고대의 지혜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환생에 대해 알아볼 때가 되었다. 환생을 보편적인 법칙으로 간주하고 그런 다음 인간 혼이 환생하는 특별한 사례를 살펴본다면, 환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더 명확해지고 자연 질서에도 더 부합 할 것이다. 이 특별한 사례는 자연 질서 속에서 차지하는 원래 자리에서 벗어난 것으로 그 질서에서 이탈한 파편으로 간주되어 나쁜 인상을 준다.
모든 진화는 진화하는 생명이 진화하는 도중에 형태를 하나씩 바꿔가면서 그런 형태를 통해 얻은 경험을 자신의 내부에 저장하는 과정인데, 인간 혼의 환생은 진화에 새로운 법칙을 소개한다기보다는 보편적인 법칙을 약간 조정하여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생명의 개체화에 따라 필요해지는 여러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프카디오 헌(Lafcadio Hearn: 영국 출신으로 일본에 귀화한 작가. 일본 이름은 고이즈미 야쿠모ㅡ옮긴이 주)75은 영혼 선재(先在)라는 개념이 서구의 과학적 사고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면서 이 점을 잘 지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진화의 교리를 받아들이면 사고의 오래된 형태가 허물어졌다. 낡아빠진 교리를 대신하기 위한 새로운 개념이 여기저기서 생겨났다. 우리는 지금 일반적인 지식 운동이 동양 철학과 이상하게 유사한 방향으로 흐르는 장관을 보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이례적으로 빠르면서도 다양하게 이루어진 과학의 발전은 과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그만큼 이례적인 지식 발전을 촉발할 수도 있었다. 가장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유기체들이 가장 저차원적이고 단순한 유기체로부터 발달했다는 사실, 생명의 유일한 물질적 토대가 생명 세계 전체의 본질이라는 사실, 동물과 식물을 분리하는 선을 그을 수 없다는 사실, 생명과 비생명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라는 사실, 물질도 정신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들지만 물질과 정신 모두 동일한 미지의 실재 하나가 다양하게 현현한 것이라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은 새로운 철학에서는 이미 진부해진 이야기다. 신학에서 물리적 진화를 이론으로 처음 인정한 이후 물리적 진화에 대한 인정을 영원히 지연시킬 수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낡은 교리가 인간이 과거를 고찰하지 못하도록 세운 장벽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과학적인 심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선재라는 개념이 이론의 영역을 벗어나 사실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 개념은 우주의 신비에 대한 불교의 설명이 다른 설명만큼이나 그럴 듯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작고한 헉슬리(Huxley) 교수도 '매우 성급한 사상가를 제외하면 누구도' 본질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이유로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진화에 대한 교리처럼 환생에 대한 교리도 실재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진화에 대한 교리도 유추를 통해 얻은 위대한 주장이 제공할 수 있는 지지를 요구할 수 있다.(『진화와 윤리』,p.61 1894년 판)76
형태의 모나드, 아트마-붓디에 대해 알아보자. 로고스가 내쉰 숨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모나드에는 모든 신성한 힘이 숨어있지만,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그 힘들은 잠재적 상태에 있어서 현현하지도 작동하지도 않는다. 그 힘들은 외부의 충격을 받으면 서서히 깨어나는데, 이 모나드에게 전해오는 진동에 응답하여 진동하는 것이 생명의 기본적 본성이다. 모나드 안에는 모든 진동의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어떤 진동이든 모나드와 접촉하면 이에 응답하는 모나드의 진동의 힘을 깨우게 된다.
이런 식으로 힘들이 하나씩 잠재적 상태에서 깨어나 활동 상태77로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진화의 비밀이 있다. 환경이 살아있는 생명체 ㅡ 모든 존재는 살아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ㅡ 의 형태에 작용하고 이런 작용이 그 생명을 감싸고 있는 형태로부터 그 안의 생명인 모나드로 전달되면서 모나드에서 시작하여 형태를 통해 밖으로 퍼져나가는 응답의 진동을 일으킨 다음, 그 생명의 입자를 진동 속에 던져 넣고 그 입자들을 재배치하여 처음의 충격에 부합하는 혹은 약간 조정된 형태로 만들어낸다.
이것이 환경과 유기체 간의 작용과 반작용으로서 모든 생물학자들은 이를 인정해왔고 그 중 일부는 이 원리가 진화를 기계적으로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 생물학자들은 이런 작용과 반작용을 끈기 있고도 신중하게 관찰하였지만 유기체가 자극에 반응하는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고대의 지혜가 모든 형태의 중심에 있는 자기, 즉 자연 속 모든 운동의 숨은 원인에 주목함으로써 진화의 비밀을 밝혀내야 한다.
생명은 외부 세계에서 와 닿는 모든 진동에 반응할 수 있고, 실제 반응은 외부의 힘이 그 생명에 가하는 작용에 의해 서서히 유도된다는 이 기본 개념을 이해했다면 그 다음으로 이해해야 할 개념은 생명과 형태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형태는 자신으로부터 파생된 다른 형태에게 자신의 특성을 전달하고, 이 다른 형태는 떨어져 나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고유의 실체의 일부가 된다. 분열하거나 싹을 틔우거나 세균을 내보내거나 모체의 자궁 속에 자손을 키움으로써 물질적 지속성이 유지되고 모든 새로운 형태는 이전 형태에서 파생되어 자신의 특성을 복제한다.
과학에서는 이런 사실들을 유전 법칙이라고 부르는데 형태의 전달에 대한 이런 관찰 결과는 주목할 가치가 있으며, 현상 세계 속에서 자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법칙은 부모가 제공한 질료로 육체를 형성하는 과정에만 적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연의 숨은 작동 원리, 즉 형태와 함께 존재해야 하는 생명의 작동 원리는 이제까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물리적인 관찰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격차를 메울 수 있는 방법은 고대의 지혜를 가르치는 방법뿐이다.
또한, 초물질적인 관찰 능력을 발휘했던 옛날 사람들이 물려준 이 고대의 지혜는 각자의 학파에서 끈기 있게 공부하는 사람들 모두가 조금씩 검증해 나가고 있다.
형태에도 지속성이 있지만 생명에도 지속성이 있다. 생명의 지속성이란 연이어 만들어지는 형태를 통해 자극을 받으면 잠재 상태였던 에너지가 점점 활동성을 띠게 되고, 형태라는 외피를 통해 습득한 경험을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형태가 사라지면 생명은 경험에 의해 증가된 에너지 속에 그 경험의 기록을 담고 있다가, 예전 형태에서 파생된 새로운 형태 안에 자신을 쏟아 부어 축적된 경험을 계속 간직하는 것이다. 예전 형태를 취할 때는 그 형태를 통해 활동했고 새롭게 깨어난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그 형태를 개조했다.
그 형태는 자신의 실체 속에 깃들어 있는 이런 개조의 결과를 우리가 자손이라고 부르는,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간 일부에게 전한다. 그리고 그 자손은 그 실체의 일부이므로 그 실체의 특성을 갖게 된다. 생명은 그 자손에게 자신의 깨어있는 모든 힘과 자기 자신을 쏟아부어 자손에게 더욱 완전한 형태를 부여한다. 이런 과정은 계속 반복 된다.
현대 과학은 고등 생물의 진화에서 유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점을, 정신적ㆍ도덕적 자질은 부모에게서 자손으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을, 자질이 고차원적일수록 이 사실이 더욱 명백하기에 천재의 자식이 멍청하기도 하고 평범한 부모에게서 천재가 태어나기도 한다는 점을 보다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정신적ㆍ도덕적 자질이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연속적인 토대가 있어야만 이런 자질들이 커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유전이라는 분야에서 질서정연한 지속성이 아니라 변덕스럽고 원인도 찾을 수 없는 결과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과학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하지만 고대의 지혜는 이런 지속적인 토대가 모나드라는 사실, 모나드가 모든 결과의 저장소이자 힘의 활동성이 점점 커지는 동안 축적한 모든 경험의 저장소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이 두 가지 원리 ㅡ 모나드의 잠재력이 힘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과 생명과 형태는 지속성을 갖는다는 원리 ㅡ 를 제대로 파악했다면 그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자세히 알아볼 차례다. 우리는 현대 과학이 풀지 못하는 여러 복잡한 문제뿐만 아니라, 자선가와 현자들이 마주치게 되는 자아 성찰적 문제를 그 원리가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모나드가 형태의 진화 단계 중 가장 초기, 즉 멘탈계의 무형 단계에서 오는 진동에 처음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모나드가 희미한 반응 진동을 내보내면 멘탈계의 물질 중 일부가 주변으로 모여들고, 이로써 앞에서 언급한78 첫 번째 엘리멘탈계의 점진적 진화가 시작된다. 모나드의 위대한 기본 유형은 최초의 세 가지 유형79에서 파생된 일곱 가지로서 태양 스픽트럼의 일곱 가지 색깔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일곱 유형은 제각각 고유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데, 이 특색은 진화가 진행되는 내내 지속되면서 그 특색이 생기를 불어넣는 모든 생물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제 이 일곱 유형의 세분화 과정이 시작되어 계속 이어지면서 개인이 만들어진다. 밖으로 향하는 모나드의 초기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흐름은 ㅡ 하나의 유형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나머지 여섯 유형도 원칙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ㅡ 형태-생명이 짧지만, 그 흐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은 그 흐름의 원천이자 원인이 되는 모나드 안에서 반응성이 커진 생명에 의해 모습이 드러난다.
이 반응적 생명은 서로 곧잘 불협화음을 이루는 여러 진동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모나드 내에서는 분리되려는 성향이 생겨나서 조화롭게 진동하는 힘들은 서로 뭉쳐 일치된 행동을 보인다. 그러다가 주요 특징은 비슷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는 다양한 하위 모나드(이런 별명을 붙여도 괜찮다면)가 같은 색깔의 여러 색조처럼 형성된다.
이런 하위 모나드는 멘탈계의 하위 영역에서 온 진동에 의해 두 번째 엘리멘탈계의 모나드가 되어 멘탈계의 유형 영역에 속하게 된다. 이런 과정이 계속되면서 모나드는 반응력이 더 커지고, 각각의 모나드는 수많은 형태에 영감을 불어넣는 생명이 된다. 모나드는 이런 여러 형태를 통해 진동을 받아들이고, 이런 형태가 해체되면 새로운 형태에 끊임없이 생기를 부여한다. 세분화 과정도 앞에서 설명한 원인에서 시작되어 계속 이어진다.
따라서 각 모나드는 계속 형태를 바꿔가며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이 활기를 불어넣은 형태를 통해 얻은 모든 결과를 깨어난 힘으로서 자신의 내부에 저장한다. 이런 모나드를 형태 집단의 혼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진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형태는 더 많은 특징을 드러낸다. 그 특징은 형태를 통해 현현한 모나드 집단-혼의 힘이 된다.
이 두 번째 엘리멘탈계의 수많은 하위 모나드는 진화의 과정에서 이제 아스트랄 물질의 진동에 반응하기 시작하는 단계에 도달하여 아스트랄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세 번째 엘리멘탈계의 모나드가 되어 멘탈계에서 이미 거친 모든 과정을 이 거친 세상에서 되풀이한다. 모나드 집단-혼의 수도 점점 많아져 세부적인 면에서 점점 더 차이를 보인다. 특화된 성질이 점점 두드러지면서 각각의 집단-혼이 생기를 부여하는 형태의 수는 점점 줄어든다.
여기서 한 마디 덧붙이면, 로고스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생명의 줄기는 상위 단계에 새로운 형태의 모나드를 공급하여 진화가 계속 진행되도록 한다. 진화 단계가 높은 모나드가 하위 영역에서 형태를 갖게 되면, 그 모나드의 자리는 상위 영역에 새롭게 등장한 모나드가 차지하게 된다.
모나드의 진화는 이렇게 아스트랄계에서 계속 반복되는 모나드 혹은 모나드 집단-혼의 이런 환생 과정에 따라 진행되어 모나드가 물질계에서 온 진동에 반응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이어진다.
각 계의 궁극의 원자는 한 단계 높은 계의 가장 조악한 물질로 이루어진 구 모양의 벽을 갖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모나드가 각 계에서 오는 진동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파악하기가 더 쉬워진다.
첫 번째 엘리멘탈계에서 모나드는 그 계를 구성하는 물질의 가장 조악한 형태를 통해서 바로 아래 영역의 물질로부터 온 진동에 응답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멘탈계의 가장 조악한 질료로 이루어진 형태였던 물질 막 안에서 모나드는 아스트랄 원자 물질의 진동을 쉽게 받아들이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가장 조악한 아스트랄 물질의 형태로 체화되면 구형의 벽이 가장 거친 아스트랄 질료로 이루어진 물질 에테르의 진동에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그 모나드는 물질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나드, 더 정확하게는 모든 모나드 집단-혼은 물질계에서 막과 같은 물질 형태, 즉 물질계의 미래의 조밀한 광물이 갖는 에텔복체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자연-영이 조밀한 물질 질료를 만들어 이런 막 같은 물질 형태 속에 집어넣으면 진화하는 생명이 담기는 가장 단단한 매개체이자, 그 생명이 갖는 힘을 가장 적게 드러나게 하는 매개체로서 모든 종류의 광물이 만들어진다. 모든 모나드 집단-혼은 제각각 다른 광물로 자신을 드러내며, 각각의 모나드 집단-혼은 형태를 취하는 고유의 광물이 있다. 특화의 과정이 이제 높은 단계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런 모나드 집단-혼을 통틀어 광물 모나드 혹은 광물계에서 체화하는 모나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점부터는 모나드의 깨어난 에너지가 진화에서 보다 능동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모나드의 에너지는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하면 어느 정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방법을 찾으면서, 자신을 가두고 있는 형태에 대해 독특한 형상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광물이라는 외피에 비해 활동성이 너무 커지면 식물계의 보다 유연한 형태가 현현하기 시작하고, 자연-영은 물질계에서 이런 진화가 일어나는 내내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광물계에서는 이미 형태가 명확한 구조를 갖추려는 성향이 나타나 성장의 진행 방향80이 결정된다.
이제부터 이러한 성향이 형태의 형성 과정 모두를 지배하게 되며 이 성향은 또한 모든 관찰자들이 익숙하게 느끼는, 자연물의 아름다운 대칭의 원인이 된다.
식물계의 모나드 집단-혼은 점점 빠른 속도로 분화되고 세분화된 결과 훨씬 더 다양한 진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고, 이 보이지 않는 세분화로 인해 여러 과(科), 속(屬), 종(種)이 진화한다. 속은 그 속의 모나드 집단-혼과 더불어 아주 다양한 환경에 놓이게 되면 ㅡ 즉, 그 속과 연결된 형태가 아주 다른 진동을 받아들일 때 ㅡ 모나드 안에서는 세분화하려는 새로운 성향이 나타나 다양한 종이 진화하게 되고 각 종은 고유의 모나드 집단-혼을 갖게 된다. 자연-영이 종의 분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이 아무런 자극이나 방해를 받지 않을 때는 진화가 더디게 진행된다.
하지만 인간이 진화하여 인위적인 경작을 시작하면서 특정 무리의 힘은 활동을 촉진하고, 다른 무리의 힘은 막으려하면 이 분화 과정은 상당히 빨리 진행되고 종(種) 간의 차이는 쉽게 진화한다. 모나드 집단-혼에 실제로 분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형태도 유사한 영향을 받아 분리하려는 성향이 다시 사라진다. 하지만 이런 분화가 완료되면 새로운 종도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 자손을 내보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식물계에서 더 오래 지낸 유기체 중에는 개성의 요소가 현현하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유기체가 안정성을 찾으면 이런 개체성의 전조가 나타나는 것이다. 수십 년을 살아온 나무의 경우, 비슷한 환경이 반복되다보면 비슷한 진동이 생겨나기에 계절은 해마다 다시 돌아오고 그로 인해 내부의 움직임도 계속되어 수액이 올라가고 나뭇잎이 생겨난다.
동시에 바람과 햇볕과 비 ㅡ 이 모든 것은 규칙적으로 순환하는 외부의 영향에 해당한다 ㅡ 의 작용으로 모나드 집단-혼에도 반응 진동이 일어나고, 이런 일들이 연속적으로 반복하여 발생함에 따라 한가지 일이 반복되면 그에 이어 자주 반복되는 다음 일을 어렴풋하게나마 예상할 수 있게 된다.
자연은 어떤 특성도 어느 날 갑자기 진화시키는 법이 없다. 이런 주기적 변화는 이후에 기억과 예상으로 남게 될 것들을 처음으로 어렴풋이 알려주는 징조가 된다.
식물계에서는 감각의 전조라 할 수 있는 것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고등식물에서 서구의 심리학자들이 쾌감과 불쾌감의 '광범위한' 감각81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진화한다. 모나드가 이 계에서 온 진동에 반응할 수 있으며, 가장 강한 진동과 가장 거친 물질 형태에 가장 가깝게 연결된 진동이 가장 먼저 느껴진다.
햇볕, 그리고 햇볕이 없을 때의 추위도 마침내 모나드의 의식에 각인되고, 희미한 진동 속에 던져진 모나드의 아스트랄 막은 약간 광범위한 감각을 깨운다. 비와 가뭄은 모나드 형태의 기계적 구성, 그리고 혼을 불어넣는 모나드에게 진동을 전달하는 힘에 영향을 미치는 데 이 둘은 서로 반대를 이루는 또 다른 한 상이다.
이런 반대상들의 활동은 차이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여 모든 감각, 그리고 그 다음에는 모든 사고의 뿌리가 된다. 그러므로 식물계의 모나드 집단-혼은 반복적으로 식물로 환생하면서 진화하다가 마침내 가장 고등한 식물에게 혼을 불어넣는 집단-혼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채비를 마친다.
이 단계에서 모나드 집단-혼은 동물계에 진입한다. 이곳에서 집단-혼은 육체와 아스트랄 속에서 매우 독특한 개성을 서서히 키워 나간다. 동물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서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식물이 경험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며, 이런 다양한 환경은 여기서도 분화를 촉진한다.
하지만 동일한 종 혹은 아종(亞種)의 여러 야생 동물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모나드 집단-혼은 아주 다양한 진동을 받아들이지만, 그 진동이 대체로 끊임없이 반복되고, 같은 집단 내의 모든 혼이 같은 진동을 받기 때문에 분화가 더디다.
이런 진동은 육체와 아스트랄체의 발달을 돕고 모나드 집단-혼은 육체와 아스트랄체를 통해 많은 경험을 습득한다. 그 집단에 속한 어느 혼의 형태가 사라지면 그 형태를 통해 쌓은 경험은 모나드 집단-혼에 누적되는데 이렇게 쌓인 경험이 모나드 집단-혼에 특성을 부여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모나드 집단-혼의 생명이 조금 커지면 그 집단을 구성하는 모든 형태 속에 쏟아 부어지고 형태가 사라진 혼의 모든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경험은 계속 반복되고 모나드 집단-혼 안에 저장되었다가 '누적된 유전 경험'이 새로운 형태 안에서 본능으로 나타나게 된다.
수없이 많은 새들이 매의 먹이가 되었고 방금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는 천적의 접근에 몸을 웅크린다. 이런 새와 병아리로 현현한 생명은 그 위험을 알고 있으며, 선천적 본능은 그 앎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동물을 수많은 습관적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훌륭한 본능이 형성되는 한편, 미처 대비하지 못한 새로운 위험이 나타나면 동물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동물이 인간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면서 모나드 집단-혼의 진화는 엄청나게 빨라진다. 체화되는 생명은 집에서 기르는 식물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과 비슷한 원인들로부터 더욱 쉽게 세분화된다. 개성도 진화하여 점점 더 강하게 부각된다.
초기 단계에서는 군체의 양상을 띤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야생생물의 무리 전체가 하나의 개성에 따라 움직이듯 행동하기에 공동의 혼이 그 형태들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면 야생생물의 무리도 외부 세계에서 오는 진동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코끼리, 말, 고양이, 개 등 고등동물이 가축으로 사육되면 개체화된 개성을 보인다. 일례로, 두 마리의 개가 같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아주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모나드 집단-혼은 완전히 개체화되는 지점에 서서히 가까워지면서 체화되는 형태의 수가 줄어든다. 욕망체 혹은 카마 매개체가 상당히 발달하여 육체가 죽은 후에도 얼마 동안 없어지지 않고 지속되면서 카말로카에서 독자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마침내 모나드 집단-혼이 생기를 불어넣는 형태의 수가 줄어 하나가 되면 그 집단-혼은 단일한 형태에 연이어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런 조건이 인간의 환생과 유일하게 다른 점은 원인체와 멘탈체는 있지만 마나스가 없다는 것이다. 모나드 집단-혼이 가지고 내려온 멘탈 물질이 멘탈계의 진동에 반응하기 시작하면, 그 동물은 로고스 생명의 세 번째 위대한 분출을 받을 준비가 된다. 육체가 인간 모나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인간 모나드는 앞에서 본 것처럼 본질적으로 세 가지 양상을 띤다. 그리고 각 양상은 영, 영적 혼, 인간 혼, 즉 아트마, 붓디, 마나스의 지배를 받는다.
진화가 진행되는 영겁의 시간 동안 높은 차원을 향해 진화하는 형태의 모나드는 점진적인 성장을 통해 마나스를 펼쳐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의 인간계에서도 현재의 동물계에서도 자연은 그런 과정을 걸어오지 않았다. 집이 준비되자 세입자는 그 집에 갇혔다. 붓디 속에 자신을 감춘 아트마 생명은 금색 빛줄기가 되어 존재의 상위계에서 내려왔다.
모나드의 세 번째 양상인 마나스가 멘탈계 무형 세계의 상위 단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가운데, 형태 속에서 아직 새싹이나 다름없는 마나스가 열매를 맺었고, 이런 결합을 통해 배아기의 원인체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영의 개체화이며, 영이 형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며, 원인체 속에 들어가 있는 이 영이 혼이자 개체이자 실제 인간이다. 그 혼의 본질은 영원하고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지만, 하나의 개체로서 시간 안에 들어온 그의 탄생은 유한하다.
더 나아가 이렇게 분출된 생명은 진화중인 형태에 다가가는데, 직접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중재자를 통해서 다가간다. 수용점에 도달한 인류, 정신의 아들82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존재들은 배아기의 혼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아트마-붓디-마나스의 모나드 활기를 인간에게 쏟아 붓는다.
이러한 위대한 존재 중 일부는 아직 유아기에 불과한 인류의 안내자이자 스승이 되기 위해 실제로 인간의 형상으로 태어났다. 이런 정신의 아들들은 다른 세계에서 자신의 지적 진화를 완성한 후 인류의 진화를 돕겠다는 목적으로 더 어린 세계인 지구로 왔다. 사실 그들은 우리 인류 대부분의 영적 아버지인 것이다.
훨씬 낮은 단계의 다른 지성들, 즉 과거에 다른 세계에서 진화한 인간들은 방금 위에서 설명한 유아기의 혼을 받아들인 인종의 후손들로 체화되었다. 이 인종이 진화하면서 인간의 육체도 발달했고, 진화를 계속 이어가려고 체화될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혼들은 그 후손들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고대의 기록에서는 이렇게 부분적으로 진화한 혼들도 정신의 아들이라 부르고 있다. 비록 발달 수준이 낮기는 하지만 이들에게도 정신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혼들을 인류 대부분의 유아기 혼 그리고 위대한 스승들의 성숙한 혼과 구분하여 어린이 혼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이런 어린이 혼은 지성이 진화했다는 이유로 고대의 지도층, 즉 사고력이 뛰어난 계층을 형성했고, 그 결과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어 그 당시 발달 수준이 낮은 대다수의 인간들을 지배했다.
그렇게 이 세상에는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인 능력에서 큰 차이가 생기게 되었고, 그 결과 가장 진화한 인종과 가장 덜 진화한 인종으로 나뉘게 되었다. 또한 단일한 인종 내에서도 고귀한 철학적 사고를 하는 이들과 그 나라에서 가장 타락하여 야생동물과도 같은 인간들로 나뉘게 되었다.
이런 차이는 진화 단계, 혼의 나이의 차이일 뿐이어서 지구 역사를 통틀어 늘 존재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에서도 고귀한 지성과 천박한 무지가 나란히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의 오컬트 기록을 살펴보면 인류의 초기 상태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런 사실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물론 어떤 이들은 필요 이상으로 행운을 누리고 어떤 이들은 필요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말이다.
고귀한 혼도 비록 이전 세상에서이긴 하지만 아동기와 유아기를 거쳤다. 그 고귀한 혼은 지금 다른 혼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듯이 그 이전 세상에서는 다른 혼보다 낮은 위치에 있었다.
가장 낮은 위치의 혼은 가장 높은 위치의 혼들이 지금 서 있는 곳으로 기어 올라갈 테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혼도 고귀한 혼이 현재 진화해서 차지하는 자리를 언젠가는 차지할 것이다. 상황이 불공평해 보이는 것은 우리가 이 세계를 진화라는 맥락에서 떼어내어 조상도 후손도 없는 곳에 따로 놓고 보기 때문이다.
불평등이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의 무지 때문이다. 자연의 방식은 공평하고 자연은 자신의 모든 자녀가 유아기, 아동기, 성인기를 거치도록 한다. 우리가 어리석은 판단으로 모든 혼이 같은 시기에 같은 진화 단계에 위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불공평해!'라고 외친다면 그것은 자연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혼의 진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배아기 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동물-인간이 그 혼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지점 말이다. 오해를 막기 위해 이제부터는 인간 안에 두 모나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기서 두 모나드란 인간의 육체를 만들었던 모나드와 그 육체 안으로 들어가 인간의 혼을 최하 단계의 양상으로 갖게 된 모나드를 말한다.
블라바츠키 여사의 비유를 빌자면, 태양의 두 광선이 셔터의 구멍 한 개를 통과하면 둘이었다가 하나로 합쳐져 한 개의 광선만이 생겨나듯이 지고의 태양, 즉 우주의 신성한 주에게서 나오는 광선도 결국 하나로 합쳐진다.
두 번째 광선은 인간의 육체로 들어가면 첫 번째 광선과 합쳐져 새로운 에너지와 광채를 더할 뿐이다. 인간 모나드는 하나의 단일체로서 그 모나드가 도착한, 신성한 생명을 가진 인간 안에서 더 높은 단계의 힘을 펼쳐 보일 막중한 임무에 착수한다.
초기에 배아기의 혼, 즉 사고자는 배아기 멘탈체가 형태 모나드와 함께 따라왔으나 아직 체계를 갖추어 작동하지 못하는 정신-질료 껍데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정신-질료 껍데기는 멘탈체의 싹에 불과하며 원인체의 싹에 붙어있다. 강한 욕망-본성은 많은 경우에 혼과 더불어 의지를 가지고 있어 자신의 열정과 욕구로 향하는 길을 전력질주하면서 통제되지 않는 동물적 본능이 만들어내는 모든 분노의 물결과 충돌한다.
높은 단계에 도달한 이들이 첫눈에 보기에는 혼의 이런 초기 생활이 혐오스러울지 모르지만 정신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이 꼭 필요하다. 무언가를 사고할 때에는 우선 차이를 인정하고, 모든 것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단계가 필수적이다. 또한 아직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는 혼에게 이런 인식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격렬하게 대조적인 것들과 부딪히도록 해야 한다.
시끌벅적한 쾌락과 참담한 고통을 연달아 겪어봄으로써 그 차이를 파악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차이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일깨워질 때까지 외부 세계는 욕망-본성을 통해 혼을 가격한다. 이런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고 나면 비로소 인식이 자리를 잡는다. 각각의 삶을 통해 얻는 작은 것들은 앞에서 얘기했듯이 사고자에 의해 저장되기 때문에 진화는 더디게 진행된다.
사고(思考)라는 것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진화는 정말 느리게 진행된다. 그 결과 멘탈체의 체계를 갖추는 일에서도 성과가 거의 없다. 많은 인식이 정신적 이미지로 내부에 저장될 때까지는 내부로부터 시작되는 정신 활동의 토대가 될 만한 질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이런 정신적 이미지가 두 개, 세 개 모여서 아주 기초적인 것이라도 그런 영상으로부터 추론이 이루어지고 나면 정신 활동이 시작된다. 이런 추론은 논리의 출발점이자 인간의 지성이 발달시키거나 소화한 논리 체계의 싹이 된다. 처음에 이런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쾌락을 늘리고 고통을 줄이고자 작동하는 욕망-본성이다. 그러나 이런 욕망-본성의 작용은 멘탈체의 활동을 증가시키고 멘탈체가 더욱 쉽게 제 기능을 하도록 자극하게 된다.
유아기의 인간이 이 시기에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옳고 그름도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옳은 것은 신성한 의지에 부합하고, 혼의 진화를 도우며, 인간의 고차원적 본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저차원적 본성을 훈련하고 정복하는 것들이다.
그른 것은 진화를 지연시키고, 배워야 할 교훈을 배운 후에도 낮은 단계에 계속 머물도록 하며, 저차원적 본성이 고차원적 본성을 지배하여 인간 진화의 최종 지점인 신이 아니라 진화를 통해 벗어나야 하는 짐승과 같아지도록 하는 것들이다.
인간은 무엇이 옳은가를 알기 전에 먼저 패턴(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런 배움은 바깥 세계에서 인간을 유혹하는 모든 것을 따라가 본 후 좋든 나쁘든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기쁨이 그 패턴(법칙)과 조화를 이루는지, 아니면 충돌하는지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해하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서 맛있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유아기의 인간이 어떻게 자연 법칙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지 알아보자. 음식을 처음 먹으면 먼저 허기가 채워지고 미각이 만족을 느낀다. 이 경험에서는 오직 쾌락만이 남는다. 그의 행동이 자연 법칙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다른 경우에 쾌락을 증가시키기 위해 과식을 하면 결과적으로 고통을 받게 된다. 자연 법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쾌락을 주는 상황이 도를 지나쳐서 고통으로 변하는 이런 경험은 초기 지성에게는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그는 욕망에 이끌려 반복적으로 도를 넘어서게 되고 그럴 때마다 고통스러운 결과를 경험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절제라는 덕목을 배우게 된다.
다시 말해, 물리 법칙을 따르는 범위 내에서 신체 활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조건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조건을 따라야만 신체적 쾌락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인체의 여러 기관을 통해 규칙적으로 비슷한 경험이 쏟아져 들어온다.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욕망은 자연 법칙에 따르느냐 거스르느냐에 따라 쾌락을 안겨주기도 하고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리고 경험이 많아지면서 그의 행보를 인도하고 그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인간이 새로 태어날 때마다 이런 경험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 태어날 때마다 약간 증가된 정신적 능력과 계속 누적되는 저장고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초기에는 정신 활동도 초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진화가 매우 느리다고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인간이 죽음을 맞아 육체를 떠나면 카말로카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짧은 시간이지만 데바찬에서 깨지 않고 계속 잠을 잔다.
이때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활동적인 천상의 삶을 마주할 만큼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사소한 정신적 경험을 무의식 상태에서 소화하게 된다.
하지만 원인체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머무르며, 그의 여러 자질을 그대로 간직하고서 그 자질들을 더 발전시켜 지상에서 다음에 태어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진화의 초기 단계에서 모나드 집단-혼이 담당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인간 안의 원인체다.
원인체는 영구적인 실체로서 어떤 경우에도 진화를 가능하게 한다. 원인체가 없다면 능력으로 드러나는 정신적ㆍ도덕적 경험이 누적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물리적 플라스마(plasm: 고도로 이온화된 기체ㅡ옮긴이 주)가 지속성을 띠지 않으면 인종이나 가족의 특성으로 드러나는 물리적 경험도 누적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가 없이 갑자기 나타나 존재하게 된 혼이라는 개념은 이렇다 할 정신적ㆍ도덕적 특징이 없어서 가족도 친척도 없이 어딘가에서 갑자기 나타나 인종적ㆍ혈연적 특성만 보이는 아기라는 개념만큼이나 말이 안 된다.
그런 인간도 그의 육체도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며, 로고스의 직접적인 창조력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때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보이는 것들과의 유사성을 통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영상 혹은 투영에 불과하다.
플라스마가 지속성을 갖지 않으면 물질적 특성이 진화할 방법이 없다. 지성이 지속성을 갖지 않으면 정신적ㆍ도덕적 자질이 진화할 방법이 없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지속성이 없으면 진화는 첫 단계에서 멈출 것이고, 세상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우주가 아니라 무한하고 고립된 시작의 혼돈 상태가 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은 이런 초기에 개인을 둘러싼 환경에 따라 개인의 진화 유형이나 특징이 큰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혼이 자신의 모든 힘을 개발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힘이 개발되는 순서는 그 혼의 주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기후, 자연적 풍요와 빈곤, 산이나 들 또는 내륙 삼림이나 해변에 사는 생명체 등을 비롯해 수많은 요인이 작용하여 어떤 정신적 에너지가 활동하도록 할 것인지 결정한다.
극도의 어려움이나 자연과의 끝없는 사투를 경험하는 이는 열대섬에서 충족하게 진화한 이들과는 아주 다른 힘을 개발할 것이다. 하지만 두 종류의 힘은 모두 필요하다. 혼은 자연의 모든 영역을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나이의 혼이라 해도 진화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어떤 혼이 다른 혼보다 더 발전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이는 관찰자가 그 혼의 '실용적'인 능력과 '사색적'인 능력 중 어느 것을 더 높이 평가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즉, 외부로 향하는 활동적 에너지를 높이 평가하는지, 아니면 조용히 내부로 향하는 사색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지에 따라 그 혼의 진화 정도를 다르게 추정하는 것이다. 진화를 마치고 완전해진 혼은 이 모든 능력을 다 갖추고 있지만, 진화 과정에 있는 혼은 이런 능력을 차례로 개발해야 한다. 이로써 인간들 사이에서 엄청난 다양성이 발견되도록 하는 또 다른 원인이 생겨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인간의 진화는 개별적이다. 하나의 모나드 집단-혼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집단에서는 모두 같은 본능을 보인다. 경험을 담는 그릇이 바로 그 모나드 집단-혼이고, 그 집단-혼이 자신에게 의존하는 모든 형태 안에 생명을 쏟아 붓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만의 육체를 한 번에 하나씩 갖기 마련이고, 모든 경험을 담는 그릇인 원인체는 그 하나의 육체에만 생명을 쏟아 부으므로, 다른 육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육체와 연결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인간 개개인 간의 차이가 별개의 존재이나 밀접하게 연결된 동물 간의 차이보다 크다.
그 결과 인간의 자질이 어떻게 진화하는지 연구하려면 인간 전체가 아닌 개개인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이러한 연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은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월한지 설명하지도 못하고, 샹카라(Shankaracharya: 9세기 인도 철학자ㅡ옮긴이 주)나 피타고라스의 지적 진화 또는 부처나 그리스도의 도덕적 진화를 추적하지도 못한다.
이제 환생에 작용하는 여러 요인에 대해 알아보자. 환생이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느끼는 어려움 ㅡ 가령 기억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의문 ㅡ 을 설명하려면 이 요인들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는 인간이 육체적 죽음, 카말로카, 데바찬을 차례로 통과하는 과정에서 육체, 아스트랄체, 멘탈체 등 자신의 다양한 몸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 몸들은 모두 해체되고 그 입자들은 여러 계의 질료들과 뒤섞인다. 인간과 그의 육체와의 연결은 완전히 끊어지고 종결된다. 하지만 아스트랄체와 멘탈체는 그 인간과 사고자에게 지상에서의 활동을 통해 습득한 능력과 자질의 싹을 넘겨준다.
이런 싹은 원인체에 저장되어 그가 다음에 입게 될 아스트랄체와 멘탈체의 씨앗이 된다. 이 단계가 되면 오직 그 인간, 자신의 수확물을 집으로 가져와 자신 안으로 모두 흡수될 때까지 그 수확물을 먹고 사는 노동자만 남겨진다. 그러다가 새로운 삶의 새벽이 시작되면 밤이 올 때까지 다시 노동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정신의 싹에 생명을 불어넣으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며, 그 싹은 그 인간의 정신 단계를 정확하게 나타내고, 그의 정신적 능력을 장기(臟器)로서 표현하는 멘탈체가 성장을 마칠 때까지 하위 멘탈계의 질료를 끌어당긴다. 과거의 경험은 이 새로운 몸에 정신적 이미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적 이미지는 예전의 정신체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졌고 오직 그 본질, 능력에 남긴 결과만이 남기 때문이다.
정신적 이미지는 정신의 양식이자 정신이 능력을 개발할 때 필요로 하는 질료로서, 새로운 몸 안에서 능력으로 다시 모습을 나타내고 질료를 결정하며 장기를 형성했다. 인간, 혹은 사고자가 하위 멘탈계에서의 다음 삶을 위해 새로운 몸을 걸치고 나면, 아스트랄 싹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아스트랄계에서의 삶을 위한 새로운 아스트랄체를 마련한다.
이때 그의 욕망-본성이 정확하게 드러나고, 씨앗이 그 부모격인 나무를 복제하듯이 과거에 진화된 여러 자질도 충실하게 복제된다. 따라서 인간은 다음 생을 위한 채비를 완벽하게 갖게 되고, 고유의 지속적인 형태라 할 수 있고 이전 생에서 다음 생으로 그대로 전달되는 원인체에 남는 것은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기억뿐이다.
한편, 그의 자질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육체를 제공하려는 외부 활동도 진행된다. 그는 과거의 삶에서 다른 인간들과 유대관계를 맺기도 하고 빚을 지기도 했다. 이런 유대관계나 빚 중 일부는 그가 어디서 어떤 가족에게 태어날 것인지를 결정한다.83
그는 다른 이들에게 행복을 주기도 하고 불행을 주기도 했는데, 이것이 그의 다음 생의 조건을 결정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그의 욕망-본성은 잘 훈련되었을 수도 있고, 훈련이 되지 않아 막무가내일 수도 있는데, 이 요인은 새로운 몸의 유전 과정에 관여한다.
그가 예술적 자질과 같은 어떤 정신 능력을 키웠다면 이 요인도 감안이 된다. 신경기관이 민감하고 촉각이 예민해야 하는 분야에서는 유전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이런 식으로 끝없이 다양한 요인이 존재한다. 그는 분명히 여러 모순되는 특징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중 일부만이 어느 하나의 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이와 동시에 표현되기에 적합한 능력도 선택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은 강력한 영적 지성84으로서 때로는 '카르마의 주(主)'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고와 욕망, 행동에 의해 지속적으로 유발되는 원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감독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든 인간이 자아낸 운명의 실을 쥐고 있어서 인간이 환생할 때면 그의 과거에 의해 결정된 환경, 즉 그가 과거의 삶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환경으로 그를 인도한다.
인종, 국가, 가족도 이렇게 결정되고 육체의 틀이라고 할 수 있는 것 ㅡ 인간의 자질을 표현하기에 적합하고 그가 유발한 원인을 파악하기에도 적합한 ㅡ 도 이 위대한 존재들에게서 주어진다. 그리고 인간의 에텔복체는 카르마의 주의 사고가 원동력이 되어 엘리멘탈의 작용을 통해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형성된다. 조밀체는 분자 하나하나를 통해 에텔복체를 그대로 모방해 에텔복체 안에 만들어지고 이때 제공된 질료 속에서 모든 것은 유전의 지배를 받는다.
또한 주변 사람들, 특히 계속 곁을 지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고와 열정이 엘리멘탈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다시 체화되는 그 인간과 과거에 유대관계를 맺었던 이들은 그가 지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물리적 조건에 영향을 미친다.
아주 초기 단계에서 새로운 아스트랄체는 새로운 에텔복체와 연결되어 에텔복체의 형성에 큰 영행력을 발휘한다. 멘탈체도 아스트랄체를 통해 신겅기관을 만들어 미래에 자신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도구가 되도록 준비한다. 출산 전에 이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아이의 뇌를 통해 정신적ㆍ도덕적 자질의 정도와 균형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런 영향력은 출산 후에도 계속된다. 뇌와 신경계가 만들어지고 이들이 아스트랄체와 멘탈체와 관계를 맺는 과정은 일곱 살까지 계속된다. 일곱 살이 되면 인간과 그의 육체 사이의 연결이 완성되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는 육체를 키운다기보다 육체를 통해 활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사고자의 의식은 물질계보다는 아스트랄계에 더 오래 머무른다. 이는 어린 아이들이 보여주는 초자연적 능력을 통해서도 종종 확인된다.
아이들은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친구나 동화 속 풍경을 보기도 하고, 어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기도 하며, 아스트랄계에서 오는 근사하고 미묘한 환상을 접하기도 한다. 사고자가 육체를 통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면 이런 현상은 일반적으로 사라진다. 꿈을 꾸던 아이는 평범한 소년이나 소녀가 되어, 자식이 괴상한 행동을 보이는 원인이 무엇인지 몰라 당혹스러워 하던 부모를 안심시킨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적어도 약간은 이런 괴상한 습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야기를 지어낸다고 혼나거나 조롱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에게 환상을 감추는 법을 재빨리 배운다.
만약 부모가 자식의 뇌를 볼 수 있다면, 물질계와 아스트랄계의 진동이 아이들도 도저히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 진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가끔은 상위 세계에서 오는 아주 유연한 진동을 받아들여 천상의 아름다움이나 영웅적인 업적에 대한 환상으로 내보내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 부모는 아이들이 스스로 의식하는 묘한 느낌을 붙잡아두려고 힘들게 생소한 단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혼란스러워 하며 지껄이는 말들을 더 잘 참아주고 더 잘 반응해줄 수 있을 것이다. 환생을 믿고 이해하면 어린 시절에 겪는 가장 애처로운 고생을 덜어줄 수 있다.
다시 말해, 새로운 몸을 통제하고 가장 조밀한 몸과 완전히 연결되면서도 미묘한 진동을 조밀체에 전달할 수 있도록 희귀한 느낌을 각인하는 능력을 잃지 않으려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분투하는 혼의 고생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이다.
8장
환생 (계속)
사고자가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번 환생하면서 하위 세 개 세상을 통과하는 동안 그의 의식이 어떤 단계를 거쳐 진화하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사고자가 진화할 때 그런 여러 단계를 경험하는 여러 삶이 필요한 이유를 확실하게 알면 신중한 사람들도 환생의 진실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단계 중 첫 단계는 모든 경험이 감각적이어서 정신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는 접촉했을 때 쾌감이 느껴지는 대상이 있는가 하면 고통이 느껴지는 대상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뿐이다. 이런 대상들은 정신적 이미지를 형성하고 그 영상들은 쾌락을 주는 대상이 없을 때 그런 대상을 찾기 위한 자극제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기억과 정신적 진취성의 싹이 나타난다. 이렇게 외부 세계가 대략적으로나마 먼저 쾌락과 고통으로 나누어지면 앞에서 언급했던, 감각 활동의 양이 쾌락과 고통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복잡한 문제가 따라온다.
진화의 이 단계에서 기억은 수명이 매우 짧다. 다시 말해 정신적 이미지가 금방 사라진다. 영아기의 사고자는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서라도 과거로부터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외부에서 온 진동을 따르거나 기껏해야 욕구와 열정의 충동질에 따라 만족을 갈망하는 정도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즉각적인 만족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던져버린다. 순간의 욕구가 다른 모든 고려 사항보다 앞선다.
이 배아기 상태에 있는 인간 혼에 대한 사례는 여행을 다룬 책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진화 단계가 가장 낮은 미개인의 정신 상태를 연구해서 우리 중에서도 아주 평균적인 사람의 정신 상태와 비교해 보면 누구라도 여러 삶을 살아야 하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낄 것이다.
도덕적 역량도 정신적 역량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선과 악의 개념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진화하지 못한 정신에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 조차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찰스 다윈이 그 유명한 호주 미개인의 사례에서 보여주었듯이 진화 단계가 낮은 정신에게는 좋은 것과 쾌감을 주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 찰스 다윈이 예로 든 호주 미개인은 배가 고프면 먹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생명체를 창으로 찔렀는데 어쩌다보니 그 생명체가 그의 아내였다.
어떤 유럽인이 그에게 어떻게 그런 사악한 행동을 할 수 있느냐고 항의 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그 미개인은 아내를 잡아먹는 것이 아주 나쁜 행동이라는 비난을 통해 그 낯선 유럽인이 아내가 음란하거나 소화가 안 되는 존재라고 여긴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식사를 마치고 배를 두드리며 평화로운 미소를 짓고 만족스럽다는 듯 "아내가 아주 맛있네."라고 선언하더니 평정을 되찾았다.
이 남자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사이의 도덕적 거리가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라. 몸이 진화하듯이 혼도 진화하거나, 혹은 혼의 영역에는 끊임없는 기적과 비정상적인 피조물이 존재하거나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이 이 배아기의 정신 상태에서 점차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신보다 진화가 훨씬 앞선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지배와 통제를 받는 방법과 아무 도움 없이 혼자 천천히 가는 방법이다. 후자를 택할 경우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을 가야 한다. 모범 사례나 훈련 없이 외부 물체의 변화하는 진동과 자신처럼 진화하지 못한 다른 인간들과의 마찰에 내맡겨져서 내부의 에너지가 아주 서서히 깨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은 직접적인 가르침과 모범 사례와 훈련을 받는 방법을 통해 진화해왔다.
일반적인 인간들이 사고자를 존재하게 하는 불꽃을 받아들엿을 때 스승으로 체화한 위대한 정신의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 덜 위대한 정신의 아들도 진화의 여러 단계에서 연이어 나타나 위를 향해 나아가는 인류의 물마루와 같은 존재로 체화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배운 바 있다. 위대한 스승의 은혜로운 영향력 아래에서 이런 이들이 진화 단계가 낮은 이들을 지배하고 올바르게 사는 법에 대한 기초적인 규칙 ㅡ 초기에는 아주 기초적인 규칙 ㅡ 을 강제적으로 따르게 함으로써 배아기 혼들의 정신적ㆍ도덕적 발전을 상당히 앞당겼다.
다른 기록은 차치하고 오래전에 사라진 여러 문명의 어마어마한 잔해 ㅡ 당시 영아기 단계였던 인류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훌륭한 공학 기술과 지적 구상을 보여준다 ㅡ 만 보더라도 훌륭한 기획력과 훌륭한 실행력의 소유자들이 지구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충분히 증명된다.
의식의 진화 초기 단계로 다시 돌아가 보자. 감각이 정신을 온전히 지배했고 아주 초기의 정신적 노력을 자극하는 것은 욕망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인간은 천천히 그리고 어설프게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을 세우는 단계로 진입했다. 그는 어떤 정신적 이미지들 사이에 분명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가 사라졌을 때 항상 그 뒤를 따랐던 다른 것이 나타날 것이라 예측하기 시작했다.
추론을 하고 이런 추론에 따라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욕망을 만족시킨 결과로 고통이 나타난다는 그의 머릿속 연관성을 거듭해서 발견하면 욕망의 격렬한 충동질에 따를지 말지 가끔씩 주저하기 시작했다.
이런 행동은 규칙을 말로 표현하여 압박했을 때 한결 빨리 나타났다. 어떤 만족은 취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규칙을 어기면 고통을 받게 된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기쁨을 주는 대상을 손에 넣었는데 그 기쁨 뒤에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런 가르침은 예고하지 않은 ㅡ 따라서 그에게는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 ㅡ 일이 우연히 일어났을 때와 비교할 때 그의 마음속에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그 결과 기억과 욕망 사이에서 충돌이 끝없이 발생했고 그 충돌에 의해 정신은 더욱 활동성을 띠게 되어 더 활발하게 기능하게 되었다. 사실 그 충돌은 위대한 두 번째 단계로의 이행을 의미했다.
여기서 의지의 싹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욕망과 의지는 인간의 행동을 이끈다. 심지어 의지란 여러 욕망들 간의 경쟁에서 승리한 욕망이라고 정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불완전하고 피상적인 시각이어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욕망은 사고자의 에너지가 밖으로 향하는 것으로서 외부 대상이 끌어당기는 힘에 따라 그 방향이 결정된다. 의지도 사고자의 에너지가 밖으로 향하는 것이지만, 그 방향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추리하여 얻어낸 결론이나 사고자 자신의 직관에 따라 결정된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욕망은 밖에서 인도하는 것이고 의지는 안에서 인도하는 것이다. 인간의 진화가 처음 시작되는 단계에서는 욕망이 전적으로 지배권을 갖고 인간을 이쪽으로 저쪽으로 몰아댄다. 진화의 중간 단계에서는 욕망과 의지가 끊임없이 충돌하는데 욕망이 이길 때도 있고 의지가 이길 대도 있다.
진화의 마지막 딘계에 이르면, 욕망은 죽어서 사라지고 의지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지배권을 행사한다. 사고자가 충분히 진화해서 모든 것을 직접 볼 수 있을 때까지 의지는 이성을 통해 사고자의 안내를 받는다. 이성은 비축된 정신적 이미지 ㅡ 경험 ㅡ 를 통해서만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데 그 비축물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의지는 계속 잘못된 행동을 지시한다. 이런 잘못된 행동에서 흘러나오는 고통은 정신적 이미지의 비축량을 늘리기 때문에 이성은 결론을 끌어내는 근거가 되는 비축물을 더 많이 갖게 된다. 이렇게 진화가 이루어지고 지혜가 탄생하는 것이다.
욕망은 의지와 종종 뒤섞이기 때문에 내부에서 결정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하위 본성을 주는 대상을 갈망하는 과정에서 촉발되는 경우도 많다. 욕망과 의지는 공공연하게 충돌하는 대신 욕망이 의지의 흐름 속에 미묘하게 스며들어 의지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인성의 욕망은 공개된 경기장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복자를 상대로 음모를 꾸며 힘으로 얻지 못한 것을 간교한 속임수를 통해 얻는다. 하위 정신의 능력이 빠르게 진화하는 이 위대한 두 번째 단계 내내 발생하는 감각의 지배와 이성의 지배 사이의 충돌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인류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이런 충돌을 끝내는 동시에 의지의 자유를 보존하는 것이다. 또한 그 의지가 최상의 결과를 내도록 하면서도 그 최상을 선택의 문제로 남겨두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에는 최상이 선택될 것이다.
하지만 그 최상이 자발적인 자유 의지를 통해 실현될 때는 그것이 꼭 필요하다는 확신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강제적인 법이 필요하다는 확신은 자신의 방향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수많은 의지로부터 와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알기만 하면 간단하다. 물론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도저히 조정할 수 없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해답은 바로 인간이 자신의 모든 행동을 마음대로 선택하도록 하되 모든 행동이 팰연적인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욕망의 대상을 그에게 제시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갖도록 하되, 기쁨을 주는 것이든 슬픔을 주는 것이든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곧 그는 결과적으로 고통을 주는 대상은 자유롭게 거부하고, 대상을 소유한 결과 슬픔을 맛보게 되는 경험을 하고 나면 더는 그 대상을 욕망하지 않게 된다.
쾌락은 손에 쥐고 고통은 피하려고 기를 쓰도록 놔두어도 법칙이라는 여러 돌 사이에서 계속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수업은 필요한 만큼 여러 번에 걸쳐 계속 반복된다. 환생은 배움이 느린 사람에게 필요한 여러 번의 삶을 제공한다.
고통을 가져다주는 대상에 대한 욕망은 서서히 죽어가고, 그 대상이 온갖 매력을 발산하며 유혹해 와도, 결국은 강요가 아닌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거부할 것이다. 그 대상은 이제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미 그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이 갈수록 선택은 더욱 법칙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잘못된 길은 많지만 진실의 길은 하나다."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길은 모두 통행이 많고 결국에는 모두 고통으로 끝난다고 밝혀졌지만, 진실의 길을 가겠다는 선택은 앎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 하위 세계는 법칙의 강제에 따라 조화롭게 돌아간다. 인간 세계는 의지가 서로 충돌하면서 법칙에 대항하고 서로 싸우는 혼돈의 세계다.
이곳에서 머지않아 고귀한 합일체, 자발적 복종의 조화로운 선택, 앎과 불복종의 결과에 대한 기억에 근거하기에 자발적이고 안정적이어서,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복종이 진화하게 된다. 무지하고 경험이 부족한 인간은 항상 파멸의 위험 속에 있겠지만, 경험을 통해 선과 악을 구분하는 신은 언제나 변함없이 선을 선택한다.
도덕의 영역에서 의지는 일반적으로 양심이라 불린다. 의지는 다른 영역에서 겪는 어려움을 이 영역에서도 겪게 된다. 여러 번 반복되었기에 그 결과가 이성이나 사고자 자신에게 익숙한 행동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는 양심이 재빨리 단호하게 나선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고 경험해보지 못한 문제가 발생하면 양심은 확신을 가지고 나설 수가 없어서 이성이 보내준 답을 머뭇거리며 제시하게 된다.
이때 이성은 석연치 않은 추론을 끌어내고 사고자는 자신의 경험이 지금 발생한 상황과 같은 맥락인지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양심도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가 많다. 즉, 이성이나 직관으로부터 명확한 방향을 지시 받지 못한 의지가 잘못된 행동을 지시하는 것이다. 외부 세계의 영향이나 친구, 가족, 공동체, 국가 등 다른 이들의 사고-형태85가 미치는 영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이 고유의 기운을 가지고 정신을 둘러싼 후 그 안으로 침투하여 모든 것의 겉모습을 왜곡시키고 모든 것의 균형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영향을 받은 이성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차분한 판단을 내리는 것조차 어려울 때가 많고 왜곡을 일삼는 매개자를 통해 자신의 질료를 들여다보기에 그릇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도덕적 능력은 대체로 사고자의 유아기에 나타나는 동물적이고 이기적인 애정의 자극을 받아 진화한다. 도덕 법칙을 확립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은 이성이며, 자연의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파악하여 인간의 행동이 신성한 의지와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 하지만 외부의 힘이 강제하지 않을 경우, 이 법칙을 따르려는 충동은 사랑에 뿌리를 두며 인간 내부의 숨은 신성은 자신을 쏟아내어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그 사고자 안에서 도덕성이 생겨나는 것은 처음으로 사랑을 통해 아내, 자식, 친구 등 사랑하는 이에게 이로운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때이다. 이는 하위 본성을 처음으로 정복하는 것이고, 하위 본성을 완전히 예속시켜 도덕적 완성을 성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하위 오컬트에서처럼 애정이 사라지거나 약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불순하고 천박한 애정도 도덕적 진화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냉정하고 스스로 고립된 사람들은 이런 가능성에서 차단된다. 사랑을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사랑을 정화하는 것이 더 쉽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스승들은 바리새인(율법을 엄격히 따르던 고대 유대인ㅡ옮긴이 주)이나 율법학자보다 '죄인'들이 천국에 더 가가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의식의 세 번째 위대한 단계에서는 상위 지적 능력이 발달한다. 정신은 더 이상 감각을 통해 얻은 정신적 이미지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구체적인 대상에 대해 사고하지 않으며, 이것과 저것을 구분 짓는 여러 특징에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대상의 차이에 집중함으로써 그들 간의 차이를 구분하는 법을 확실하게 배운 사고자는, 이제 여러 대상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별로 대상을 분류하고 그 대상들을 연결하기 시작한다. 공통적인 특징을 끌어내어 추상화하고 그 특성을 가진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을 분리한다.
이런 식으로 동일성과 다양성을 인식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이는 이후에 여러 대상의 근원을 형성하는 유일한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 내딛는 한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고자는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을 분류하고, 종합하는 능력을 키우고, 분석하고 구성하는 법을 배운다. 사고자는 곧 한 걸음 더 나아가 공통의 특징을 그 특징을 나타내는 모든 대상으로부터 분리하여 하나의 개념으로 인식한다.
그 결과 구체적인 대상의 이미지보다 더 높은 차원의 정신적 이미지를 구성한다. 이 정신적 이미지는 형태 세계에서 현상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멘탈계의 상위 단계에 존재하면서 사고자의 활동에 필요한 질료를 제공하는 하나의 개념을 표현한다.
하위 정신은 이성을 통해 추상적 개념에 접근하고, 그 과정에서 고귀한 비상(飛上)을 이루어 무형 세계의 문턱에 가닿은 후, 그 너머의 세계를 흐릿하게나마 보게 된다. 사고자는 이런 개념들을 눈으로 보고 늘 그 가운데에서 살아간다. 추상적 추론의 힘이 개발되어 실제로 사용되면 사고자는 자신의 세계 안에서 힘을 발휘하고 자신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런 사람들은 감각적인 삶이나 외부의 관찰에 신경 쓰지 않을 뿐더러, 외부 대상의 이미지에 정신을 집중하지도 않는다. 이들의 힘은 내부로 향하며 더 이상 만족을 찾아 바깥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내부에 차분히 머무르면서 철학적 문제나 삶과 사고의 보다 깊은 측면에 몰두하고, 결과에 연연하면서 자신을 괴롭히기보다는 원인을 이해하려 하며, 외부 자연의 모든 다양성의 근원이 되는 유일한 존재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유일한 존재를 볼 수 있는 의식의 네 번째 단계에서 의식은 지성들이 세워놓은 장벽을 뛰어넘어 세상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자신의 안에서 자신의 일부로 바라보며 자신을 로고스의 광선으로, 따라서 유일한 존재와 함께하는 존재로 여긴다.
그렇다면 사고자는 어디에 있는가?
사고자는 의식이 되었다. 영적 혼이 하위 매개체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반면, 사고자는 그 매개체를 사용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온전하고 의식적인 삶을 위해 그 매개체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이제 의무적인 환생은 끝나고 인간은 죽음을 넘어선다. 진정으로 불멸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는 "신의 성전에 있는 기둥이 되었으니 다시는 나가지 않게 된다."
이 부분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의식의 매개체가 연이어 활동에 들어가는 과정, 즉 인간 혼의 조화로운 도구로서 그 매개체들을 하나씩 활동에 투입하는 과정을 파악해야 한다.
사고자가 독자적인 삶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멘탈체, 아스트랄체, 에텔복체, 조밀체라는 막으로 싸여 있었다는 것을 앞에서 배웠다. 이런 막들은 그의 생명력이 바깥으로 진동하도록 하는 매개물을 형성 한다. 우리는 이것을 '의식의 다리'라고 부른다. 사고자에게서 나오는 모든 진동은 이 다리를 따라 조밀체에 도달하고 외부 세계에서 오는 모든 진동도 이 다리를 따라 그에게 도달한다.
하지만 이런 여러 몸을 연결된 전체의 일부로서 활용하는 것은 이 각각의 몸이 자신보다 낮은 단계의 몸과는 상관없는 별개의 매개체로서 활동하도록 차례로 생명을 부여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매개체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최하위의 매개체, 즉 조밀한 육체는 제일 먼저 조화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뇌와 신경계는 정교해지고 가능한 모든 진동에 미묘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초기에 조밀체는 거친 물질로 구성되기에 받아들일 수 있는 진동의 법위가 지극히 제한적이고, 정신을 표현하는 신체 기관은 가장 느린 진동에만 반응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외부 세계에서 질료가 자신과 유사한 물체가 보내오는 진동에는 당연히 훨씬 빨리 반응한다.
조밀체가 의식의 매개체로서 활동을 시작하려면 내부에서 시작되는 진동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 속도는 하위 본성과 상위 본성이 얼마나 협력하는가, 그리고 내면의 지도자를 위해 얼마나 충직하게 복종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아주 많은 생애를 거친 하위 본성은 자신이 혼을 위해 존재하고, 자신의 모든 가치가 혼을 얼마나 도울 수 있는가에 달려 있으며, 혼과 하나가 될 때에만 불멸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 후에는 진화도 급물살을 탄다. 이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진화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하위 본성을 충족시키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다. 이는 사고자의 에너지를 불러내기 위한 필수적 예비 단계이기는 하지만, 조밀체를 의식의 매개체로 만들기 위해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직접적인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의 생명이 멘탈체에 중심을 두고 사고가 감각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정신적 힘은 뇌와 신경계를 통해 발휘되며, 조악한 질료들을 자신에게 보내지는 사고-진동과 조화를 이루어 진동할 수 있는 섬세한 질료에게 하나씩 자리를 내준다. 뇌의 구성 성분은 점점 섬세해지고 뇌의 표면에는 사고-진동에 반응하는 신경 물질의 막이 커지면서 복잡한 주름이 생겨 결과적으로 뇌의 용량도 증가한다. 신경계는 보다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정신 활동으로 인한 모든 진동에 더욱 민감하면서도 활력 있게 반응하게 된다.
조밀체가 혼의 도구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협력도 더욱 활기를 띤다. 인성을 신중하게 스스로를 훈련시키고 자신의 일시적인 만족보다는 불멸의 상태에 도달한 개체의 지속적인 이익을 더 중시하기 시작한다. 낮은 차원의 쾌락을 추구하느라 보내는 시간을 정신적 능력을 진화시키는 데 쏟는다.
매일 진지한 학습을 위해 시간을 투자한다. 뇌는 외부로부터 오는 진동이 아닌 내부에서 나오는 진동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연속적인 사고에 응답하도록 훈련 받으며 과거의 인상으로 만들어진, 쓸모도 없고 앞뒤가 맞지도 않는 이미지들을 뱉어내지 말라고 배운다. 주인이 원하지 않을 때는 가만히 쉬도록, 진동을 먼저 일으키지 말고 응답하도록86 배운다.
또한, 물질 질료를 뇌에 공급하는 음식도 신중하고 차별적으로 다루게 된다. 동물의 살과 피, 술 등의 거친 음식은 먹지 않고 순수한 음식으로 순수한 몸을 만든다. 하위 진동이 자신에게 반응할 수 있는 질료를 점차 찾지 못하게 되어, 육체는 사고의 모든 진동에 미묘하게 반응하고 사고자가 밖으로 내보내는 진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전적으로 의식의 매개체가 되어 간다.
에텔복체는 조밀체의 구성 성분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에텔복체의 정화와 활동 과정을 따로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에텔복체는 의식의 매개체로 활동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조밀체와는 공명하며 활동한다. 에텔복체가 사고나 죽음으로 조밀체와 분리되면 내부에서 발생하는 진동에 아주 약하게 반응하게 된다.
사실 에텔복체의 기능은 정신적 의식의 매개체가 아닌 프라나의 매개체, 즉 특화된 생명-힘의 매개체로 활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에텔복체가 생명-흐름을 전달하는 조밀한 입자와 떨어지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
아스트랄체는 의식의 매개체 중에서 두 번째로 생기를 얻는다. 우리는 아스트랄체가 활동하기 위해 체계를 갖추는 동안 겪게 되는 여러 변화를 앞에서 배웠다.87
아스트랄체가 체계를 완전히 갖추면, 그 안에 갇혀서 활동하다가 잠자는 동안 육체에서 빠져나와 아스트랄계를 떠도는 의식이 소위 꿈-의식이라고 불리는 것을 형성하는 아스트랄 물체의 인상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감각을 통해 아스트랄 물체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받아들인 인상과 이런 인상을 발생시키는 물체를 연관 짓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지한 것들은 처음에는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이는 정신이 새로운 아기의 육체를 통해 인지할 때와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지의 결과물은 이런저런 경험을 활용해 수정해야 한다. 사고자는 이 미묘한 매개체를 통해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힘, 그리고 아스트랄 요소를 통제하고 아스트랄계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서서히 발견하기 시작한다.
사고자가 이런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고자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아스트랄계에서 더 많은 경험을 쌓은 이들로부터 가르침과 도움을 받는다. 사고자는 이 새로운 의식의 매개체를 스스로 완전히 제어할 수 있게 되고, 지상에서의 삶처럼 아스트랄계에서의 삶에도 자연스럽게 익숙해진다.
의식의 세 번째 매개체인 멘탈체는 스승이 직접 지시를 내리지 않은 독자적인 활동을 위해 생기를 얻는 일이 거의 없다. 멘탈체는 인간 진화의 현재 단계에서 그 제자가 살고 있는 삶 안에서 기능한다.88
앞에서 보았듯이 멘탈체는 멘탈계에서 독자적인 기능89을 하기 위해 체계가 재정비되는데, 이때도 역시 사고자의 전적인 통제를 받기에 앞서 경험과 훈련이 필요하다. 의식의 세 매개체 모두에 공통으로 해당되지만, 조밀체에 대해서는 누구나 기억하는데 멘탈체에 대해서는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에 조밀체보다는 멘탈체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사실이 하나 있다.
그 사실은 바로 이 세 매개체가 진화하고 진화 단계가 높아질수록 진동을 받아들이고, 그에 반응하는 능력도 커진다는 것이다. 같은 색상이라 해도 훈련되지 않은 눈보다 훈련된 눈에 얼마나 더 많은 색조가 보이는가. 훈련되지 않은 귀가 하나의 기본음밖에 듣지 못할 때 훈련된 귀는 얼마나 많은 배음(倍音)을 듣는가.
육체적 감각이 예민해지면 세상은 더욱 충만하게 다가온다. 농부는 고랑과 쟁기만을 의식하지만 교양 있는 이는 울타리의 꽃과 가볍게 떨리는 사시나무, 종달새가 부르는 황홀한 멜로디, 서로 붙어 있는 나무를 통해 들리는 작은 날갯짓 소리, 곱슬곱슬한 고사리 이파리 아래에서 토끼가 털 다듬는 모습, 너도밤나무 줄기를 오가며 다람쥐가 노니는 모습, 자연의 생명체들이 우아하게 움직이는 모습, 들판과 숲에서 나는 향기, 구름 낀 하늘의 장관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 무언가를 쫓는 빛과 언덕 위의 그림자까지도 의식한다.
농부와 교양인 모두 눈이 있고 뇌가 있지만, 관찰하는 능력과 인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에는 차이가 있다. 이는 다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스트랄체와 멘탈체가 의식의 개별적 매개체로서 기능하기 시작할 때는 반응 능력이 농부의 수준이어서 이상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들로 가득한 아스트랄계와 멘탈계의 일부만이 의식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아스트랄체와 멘탈체는 빠르게 진화하면서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주변 환경에 대한 보다 정확한 상(像)을 의식에게 전달 한다.
여기서도 기억할 것이 있다. 바로 우리가 아는 것이 자연이 갖는 힘의 전부가 아니며, 물질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스트랄계와 멘탈계에서도 우리는 아직 어린 아이어서 파도가 실어다준 조개껍데기나 줍고 있지만, 거대한 바다 속에 숨어 있는 보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멘탈체가 활동을 시작하고 난 후 적당한 때가 되면, 원인체라는 의식의 매개체도 활동을 시작해 끝없는 과거와 머나먼 미래를 오가면서 인간에게 놀라운 의식의 상태를 열어준다. 이때 사고자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여 몸의 안과 밖에서 오랫동안 이어온 여러 삶을 통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추적할 뿐 아니라, 지상에서의 과거 속을 마음대로 배회하면서 세상의 경험으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얻기도 하고, 진화를 이끄는 숨은 법칙과 자연의 가슴 속에 숨겨진 삶의 깊은 비밀을 배우기도 한다.
사고자는 그 고귀한 의식의 매개체 안에서 베일에 가려진 이시스(Isis: 고대 이집트의 풍요의 여신ㅡ옮긴이 주)를 만나기도 하고 그녀의 얼굴을 가린 베일의 한 쪽 끝을 들추기도 한다. 그곳에서는 이시스의 번개 같은 시선에 눈이 멀지 않고도 그녀의 눈을 볼 수 있고,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광채 속에서 더 이상 속수무책으로 고통에 시달리지 않는 진심어린 연민의 마음으로 세상의 슬픔과 끝의 원인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인체를 의식의 매개체로 사용하면서 눈을 크게 뜨고 선법(善法)의 영광을 바라보는 이들은 힘과 고요함과 지혜를 얻는다.
붓디체가 의식의 매개체로 활동하기 시작하면 인간은 비(非)분리의 지복에 들어가고, 자신이 모든 것과 합일되었음을 생생하게 깨닫는다. 원인체 안에서 의식을 지배하는 요소는 지식과 지혜이듯이 붓디체 안에서 의식을 지배하는 요소는 지복과 사랑이다. 지혜의 고요함이 원인체의 주된 특징을 이루는 반면, 지치지 않고 붓디체를 향해 흐르는 것은 애정 어린 연민이다. 여기에 아트마의 기능을 규정하는 신과 같이 침착한 힘이 더해지면 인간은 신성이라는 왕관을 쓰게 되고, 신인(神人)은 힘과 지혜와 사랑의 풍요 속에서 현현하게 된다.
상위 매개체에 속하는 의식 중에서 하위 매개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일부를 하위 매개체에서 전해준다고 해서, 그 매개체들이 연이어 곧바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환경이나 직업에 따라 개인별로 아주 큰 차이가 나타난다.
육체보다 높은 단계에 있는 매개체들의 이런 활동은 견습 제자의 신분90에 도달하고 나서야 시작되며, 그 후에 의무에서 벗어날지 여부는 시간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제자, 그리고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세계에 봉사하는 데에만 힘을 쏟으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상위 의식의 지식을 하위 의식에게도 알려줄지 여부는 대체로 그 제자가 어떤 일을 하는가에 달려있다.
상위 계에 있는 제자는 자신의 의식의 매개체를 전부 활용해야 한다. 그가 맡은 일은 그 매개체들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한 지식을 그 일과 아무 상관없는 육체에게 전달할 것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전달할지 말지는 둘 중 하나를 선택했을 때 물질계에서 그가 하는 일의 효율을 높이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상위 의식이 육체에게 반응 진동을 일으키도록 강요하면 육체는 진화의 현 단계에서는 큰 압박을 받게 된다. 외부 환경이 아주 우호적이지 않으면 이 압박은 신경 장애나 과민증을 일으켜 해를 끼치게 된다. 따라서 의식의 상위 매개체가 온전하게 활동하는 이들과 가장 중요한 일이 몸 밖에서 이루어지는 이들의 대부분은 인간들이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곳과는 거리를 두고 지낸다. 상위 계에서 활용하는 지식을 육체의 의식 속으로 던져 넣어서 민감한 육체를 거칠고 떠들썩한 일상생활로부터 보호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육체 안에 상위 의식의 진동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 사항이 있다. 가장 먼저 순수한 음식과 순수한 사랑을 통해 육체를 거친 질료로부터 정화해야 한다. 열정을 완전히 통제하고, 성질과 정신이 외부 생활의 우여곡절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항상 평온하고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고귀한 주제에 대해 조용히 명상하고 감각적인 대상과 그 대상으로부터 생겨나는 정신적 이미지에게 마음을 두지 않으며, 보다 고차원적인 것들에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서두르는 습관을 버리되 특히 뇌가 항상 일하면서 이 주제 저 주제로 떠돌아다니며 정신이 가만히 쉬지 못하고 걸핏하면 흥분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상위 세계에 속하는 것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하위 세계의 물체들이 매력을 잃어 정신은 사랑하는 친구와의 우정과도 같이 만족스럽게 그 상위 세계의 것들 안에 머물게 된다. 사실 이런 준비사항은 '몸'에서 '혼'을 의식적으로 분리할 때 필요한 준비사항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나는 이 준비사항들에 대해 다른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 우주의 지혜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극도로 자제하는 법을 연습하고, 정신 상태를 차분하고 고요하게 만들고, 생활이 깨끗하고 사고가 순수하며 몸은 철저히 혼에 복종하고 정신은 고귀하고 고결한 주제로 가득하도록 훈련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키우고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을 습관으로 삼으며,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나 쾌락을 주는 대상에 무관심해야 한다. 용기와 착실, 헌신을 키워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대체로 말로만 떠드는 종교와 윤리를 실제로 삶에 적용해야 한다. 연습을 통해 정신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법을 배워서 짧은 시간 동안 한 가지 줄기의 생각에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게 되면, 매일 어렵거나 추상적인 주제 혹은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고결한 대상에 집중하는 연습을 함으로써 더 엄격한 훈련에 돌입해야 한다. 이렇게 집중한다는 것은 정신을 하나의 점에 확실하게 고정하여 정신이 떠돌아다니거나 외부 물체, 감각 활동, 정신 활동의 방해에 넘어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은 고양시켜 지칠 줄 모르는 끈기와 고정불변의 상태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관심이 외부 세계와 몸으로부터 벗어나 감각은 차분해지지만, 정신은 내부에서 끌어낸 모든 에너지로 활기가 넘치고 정신은 도달할 수 있는 사고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정신을 비교적 쉽게 통제할 수 있게 되면 한 걸음 더 나아갈 준비가 갖춰지고, 한계를 넘어서서 강하지만 차분한 의지와 노력으로 육체의 뇌 안에서 활동하는 동안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사고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런 노력 속에서 정신은 한층 높은 단계에 진입하여 상위 의식과 하나가 되고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런 상태가 되면 잠을 자거나 꿈을 꾼다는 느낌도 없고, 의식을 잃는 일도 없다. 몸에서 벗어나 있는 인간은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는 실제로 육체에서 더나온 것은 아니지만 '빛의 몸속에' 있는 자신의 거친 몸을 빠져나왔다. 이 빛의 몸은 그의 아주 작은 생각에도 복종하고, 그의 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아름답고도 완벽한 도구로 복무한다. 이 안에서 그는 미묘한 세상으로부터 자유롭지만 새로운 상황에서 성실하게 일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오랫동안 조심스럽게 훈련해야 한다.
- 몸에서 자유로워지는 다른 방법이 있다. 완전히 몰입하여 헌신하거나 위대한 스승이 제자에세 알려주는 특별한 방법을 통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 무엇이든 목표는 같다. 온전한 의식 속에서 혼이 자유로워져 인간의 육체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의 새로운 환경을 살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혼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몸으로 돌아와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혼은 뇌-정신에 인상을 새겨서 몸 안에 있는 동안 자신이 격은 경험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게 된다.91
앞에서 설명한 주요 개념을 파악한 사람들은 이런 개념들이 그 자체로 환생의 사실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라고 느낄 것이다. '혼의 진화'라는 구절에 내포된 광범위한 진화가 실제로 이루어지려면 환생이 필요하다.
혼이란 특정 물질의 진동의 총합일 뿐이라는 물질주의적 개념을 잠시 보류해 둔다면, 환생을 대신하여 진화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혼이 새로 만들어지는데, 그 혼에는 선하거나 악한 성향이 각인되어 있고, 창조하는 이의 기분에 따라 재능이나 우둔함이 부여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슬람교에서 말하듯 인간의 운명은 태어날 때 그의 목 둘레에 걸려 있다.
인간의 운명이란 성격과 주변 환경에 의해 결정되며, 새롭게 태어나 세상으로 내던져진 혼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자신에게 각인된 성격에 따라 행복이나 불행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가장 불쾌한 형태의 숙명론이 환생의 대안이 되는 것이다. 이 대안 대로라면 우리는 인간이란 서서히 진화하는 존재여서 오늘의 잔인한 미개인도 때가 되면 가장 고결한 성인과 영웅으로 진화하고 세상 속에는 현명하게 기획하고 감독한 성장의 과정이 존재한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그 대신 세상이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지각 있는 존재들이 만들어 내는 혼돈이라고, 정의나 자비라고는 없는 외부의 의지가 행복이나 불행, 지식이나 무지, 미덕이나 악덕, 부유함이나 빈곤, 재능이나 어리석음 등을 자기 멋대로 부여한 결과 ㅡ 비이성적이고 무의미한 아수라장 ㅡ 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혼돈은 우주의 고차원적인 일부이며, 진화가 저차원적이고 단순한 형태에서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형태로 진행된다는 법칙, 그리고 조화와 아름다움을 위해 '올바름을 지향하는' 법칙이 그 우주의 하위 영역에서 질서정연하고 아름답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미개인의 혼이 살아서 진화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고, 그 미개인이 현재의 영아기에 영원히 머무르지는 않지만 죽음 후에도 그는 다른 세계에서 진화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혼-진화의 원칙이 인정되지만 진화가 어디에서 일어나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지상의 모든 혼이 진화에서 같은 단계에 있다면 혼이 영아기를 벗어나 진화하기 위해 이후의 다른 세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훨씬 많이 진화했고 고귀한 정신적ㆍ도덕적 자질을 갖춘 혼들이 존재한다.
추론을 해보려면 그 혼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다른 세상에서 진화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러면 지구가 진화가 덜 된 혼이나 진화 단계가 높은 혼 모두에게 적합한 다양한 조건을 제공하는데, 왜 각 혼들이 진화의 각 단계에서 지구를 한 번씩만 방문하는지, 왜 각기 다른 단계에서 진화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똑같이 제공할 수 있고 지구와도 비슷한 다른 세상에서 그 혼들의 나머지 단계가 이루어져야 하는지 궁금해진다.
고대의 지혜는 혼이 여러 세상을 지나면서 진화한다고, 이런 각각의 세상에서 가능한 진화를 마칠 때까지 그 세상에서 태어남을 반복한다고 가르친다.
그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세상들은 하나의 진화 사슬을 형성하고, 각 세상은 진화의 특정 단계를 위한 장(場)의 역할을 한다. 지금 이 세상은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 인간계가 진화하기에 적합한 장이기에 집단적 혹은 개별적 환생은 이 네 개의 계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이후의 진화는 다른 세계에서 이루어지는데, 신성한 질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워야 하는 교훈을 익혀서 익숙해질 때까지 다음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연구하다보면 환생이라는 동일한 목표로 우리를 인도하는 사조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들이 보이는 엄청난 차이가 각 혼이 진화하며 거쳐 온 과거를 암시한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이미 배운 바 있다. 또한 이런 차이가 단일한 종에 속하는 인간들의 개별적 진화와 하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나드 집단-혼의 진화를 구분한다는 사실도 설명한 바 있다.
외적으로 모두 인간으로 인식될 수 있는 인간의 육체가 비교적 작은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은 정신적ㆍ도덕적 능력에서 최하위 단계의 미개인과 고귀한 인간이 큰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과 대조를 이룬다. 미개인들도 신체적 발달이 뛰어나고 두뇌 안에 내용물이 많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은 철학자나 성인의 정신과 얼마나 큰 차이를 나타내는가!
뛰어난 정신적ㆍ도덕적 능력이 문명 생활을 통해 누적된 결과라고 가정해보자. 이는 과거의 지적 거인이 현재의 가장 유능한 사람보다 우수하다는 사실, 그리고 요즘에는 그 누구도 역사 속 성인들의 도덕적 태도에 근접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또한 천재성에는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다는 사실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천재성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지, 서서히 발전하는 어떤 가문의 절정기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천재성은 그 자체로 후손을 두지 못하는 성질이 있어서 아이가 천재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해도, 그 아이는 천재성을 가진 이의 신체가 만들어낸 아이이지 정신이 만들어낸 아이가 아니다.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음악 천재는 대체로 음악 가문에서 태어난다. 그런 천재성이 현현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신경 조직이 필요한데 신경 조직은 유전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가문에서 천재에게 몸을 제공했지만,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몇 세대 만에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멘델스존의 후손으로서 조상과 동등한 위치까지 오른 이들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스튜어트 왕가와 부르봉 왕가의 신체적 특성처럼 천재성이 아버지에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환생을 제외하면 어떤 근거로 '천재 아기'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나중에 커서 토머스 영 박사가 된 아이를 예로 들어보자. 영 박사는 '빛의 파동설'을 발견했지만 그의 위대함은 아직도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두 살의 나이에 "상당히 유창하게" 글을 읽었고, 네 살도 되기 전에 성경을 두 번이나 완독했다. 일곱 살에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선생님과 함께『교사의 보조(Tutor's Assistant: 수학 교재ㅡ옮긴이 주)』를 절반도 공부하기 전에 이미 그 내용을 다 이해했다. 몇 년 후 학교에 다니면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수학, 회계,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터득한 뒤 방향을 바꾸어 망원경을 만들고 동양 문학에 푹 빠졌다.
열네 살에는 한 살 반 어린 소년과 함께 가정교사에게 배우려고 했으나, 교사가 제대로 도착하지 못해 영 박사가 그 소년을 가르쳤다.92
윌리엄 로언 해밀턴(William Rowan Hamilton) 경은 이보다 더 조숙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세 살도 채 되지 않아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일곱 살의 나이에 더블린 트리니티 컬리지의 선임 연구원이 그를 가리켜 연구원이 되려는 여러 후보들보다도 언어에 대한 지식이 탁월하다고 했을 정도였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는 최소한 12개 언어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쌓은 상태였다. 이 13개 언어에는 고전 및 현대 유럽 언어 외에도 페르시아어, 아랍어, 산스크리트어, 힌두스타니어, 그리고 심지어 말레이어가지 포함되었다. ··· 열네 살이 되었을 때는 마침 더블린을 방문 중이었던 페르시아 대사에게 초대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페르시아 대사는 페르시아어로 그런 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사람이 영국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해밀턴 경의 한 친척은 "그가 여섯 살 때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고는 작은 수레를 향해 명랑하게 달려가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열두 살 때는 당시 더블린을 방문하여 대중 앞에서 실력을 뽐내던 미국의 '인간 계산기' 콜번(Colburn)과 만났는데 콜번과의 대결에서 이길 때도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열여덟 살이었던 1823년에는 브린클리(Brinkley) 박사(아일랜드의 천문학자)가 그를 일컬어 "이 청년이 시대 최고의 수학자가 될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는 이미 최고의 수학자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대학에서 보여준 성과는 아마 유례가 없을 것이다. 성적이 평균 이상 되는 여러 경쟁자들 중에서도 그는 모든 과목과 시험에서 일등이었다."93
이런 소년들과 반쯤 멍청한, 아니면 보통의 아이들을 비교해보라. 이렇게 유리한 능력을 가지고 시작한 소년들이 사조의 선구자가 되는지 주목하고 그런 혼들에게 과거가 있는지 물어보라.
가족끼리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일반적으로 유전 법칙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같은 가족 내에서도 정신적ㆍ도덕적 특성의 차이는 꾸준히 발견되며 이에 대한 설명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환생은 가족 간의 이런 유사성을 설명할 때, 태어나는 혼이 유전에 따라 그의 특성을 포현하기에 적합한 몸을 제공하는 가족에게 인도 된다는 사실을 든다. 그리고 정신적ㆍ도덕적 특성이 개인에게 덧붙여져 가족 간에도 차이가 생긴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과거에 만들어진 유대관계 때문에 다른 개인 혹은 가족과 긴밀한 관계를 이루며 태어나게 된다고 말한다.94
"쌍둥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다면, 쌍둥이가 유아기 때는 어머니나 간호사의 예리한 눈에도 구별이 안 될 때가 많지만, 인생 후반기로 가면 마나스가 육체에 큰 영향을 미친 상태이기 때문에 육체에 변화가 생겨 그 유사성이 줄어들고 성격의 차이도 유동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신체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성격이 다르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인과관계가 만났음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특정한 지식을 소화하는 데 있어 같은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발견된다는 사실은 환생의 존재를 알려주는 또 다른 신호다. 진리를 보면 단번에 파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주의 깊게 지켜본 후에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 다른 진리를 제시하면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첫 번째 사람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을 두 번째 사람이 파악하는 것이다.
"두 학생이 신지학에 매력을 느끼고 공부하기 시작한다. 한 해가 끝날 무렵 한 명은 주요 개념에 익숙해져서 그 개념들을 적용할 수 있지만, 나머지 한 명은 여전히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다. 앞의 학생은 각각의 법칙을 접할 때마다 익숙하다고 느끼지만 뒤의 학생은 새롭고 이해가 어렵고 낯설다고 느낀다. 환생을 믿는 사람은 그 가르침이 앞의 학생에게는 새롭지 않은 것이고, 뒤의 학생에게는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빨리 익히는 것은 기억하기 때문이고 그는 단지 과거의 지식을 되살리고 있는 것 뿐이다. 반면, 배움이 느린 것은 자신의 경험 속에 이런 자연의 진리가 들어있지 않아서 난생 처음 배우려고 하니 고생스러운 것이다."
평범한 직관도 역시 "현생에서는 처음 접하지만 과거에는 익숙했던 사실을 인식하는 것에 불과하다."95 이 또한 그 사람이 과거에 다녔던 길을 알려주는 또 다른 표지판이다.
환생이라는 교리를 받아들일 때 많은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 중 가장 큰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들도 현재의 몸을 입고 살았던 현재 삶에서도 많은 부분을 이미 잊어버렸다는 사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은 희미하고 아기였을 때의 기억은 아예 없다는 사실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다.
이들이 알아야 할 것은 일상적 의식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버린 과거의 사건들이 기억이라는 어두운 동굴에 숨겨져 있을 뿐, 질병이나 최면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아기 때에만 들어보았던 언어를 다시 말하는 일도 있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건들이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 의식 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잊혀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부분이 깨어있는 의식의 제한된 시야에서 벗어나 있을 뿐이다.
이 깨어있는 의식은 가장 제한적인 형태의 의식이고,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식하는 유일한 의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현생에 대한 기억도 일부는 이 깨어있는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곳으로 끌려들어 갔다가, 뇌가 과민해져서 이제까지 부딪혀 와도 무시했던 진동에 응답할 수 있게 되면 다시 나타난다.
육체의 의식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저장되어 있던 과거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이런 기억은 생이 바뀌는 동안에도 홀로 계속 남아있는 사고자와 함께한다. 사고자는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기억을 담은 책 한 권 전체를 가지고 있다. 책 안에 기록된 모든 경험을 거쳐 온 유일한 '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고자는 과거의 기억을 육체에 각인할 수 있다. 육체가 충분히 정화되어 신속하고 미묘한 진동에 응답할 수 있게 되는 순간, 그 육체를 입은 인간도 저장된 과거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기억의 어려움은 망각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위 매개체인 육체가 주인의 전생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억의 어려움은 현재의 몸이 현재 환경에, 그리고 혼이 말을 전할 수 있는 미묘한 진동에 응답하지 못하는 상황에 흡수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과거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현재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미묘한 세계에서 오는 인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몸을 정화하고 순화해야 한다.
하지만 육체가 필요한 수준의 민감성을 갖추게 된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한다. 이들에게 환생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니라 개인적 지식의 문제다.
이들은 전생에 대한 기억이 쏟아져 들어올 때, 그리고 현재의 친구들이 아주 오래전 친구임을 알게 되어 오래된 기억이 현재의 유대관계를 강화해줄 때, 짧은 현재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를 알고 있다. 뒤로 드리워진 기나긴 추억과 어우러질 때, 그리고 옛 사랑이 현재의 사랑으로 다시 나타날 때 삶은 안정적이면서도 고귀해진다.
삶에서 겪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한 죽음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죽음은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변화이며 몸과 몸은 갈라놓을 수 있지만, 친구와 친구는 갈라놓지 못하는 여행과도 같다. 현재의 관계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황금 사슬의 일부다. 이런 관계가 앞으로도 지속되어 끊어지지 않는 황금 사슬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보다 기쁘고 안정된 마음으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
우리는 가끔 최근의 과거를 기억하는 아이들을 발견한다. 대체로 그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죽어서 거의 곧바로 다시 태어난 아이들이다. 서양의 경우 동양보다 그런 사례가 드물다. 서양에서는 그런 아이가 처음으로 내뱉는 말을 믿지 않기에, 아이는 자신의 기억에 대해 곧 확신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환생에 대한 믿음이 거의 일반적인 동양의 경우, 아이가 기억하는 내용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그런 기회를 통해 기억은 진실로 입증된다.
기억과 관련하여 다시 한 번 살펴볼 중요한 사항이 또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은 사고자에게만 남아있지만, 능력 속에 구현된 이런 사건의 결과는 하위 세계의 인간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만약 이런 과거 사건들이 전부 육체의 뇌 속으로 던져졌는데 상당량의 경험이 정리되지 않은 채 순서도 없이 뒤죽박죽이라면, 인간은 과거의 결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현재에 도움이 되도록 활용할 수도 없다.
이런 경우 두 가지 행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성질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과거의 사실들 중에서 몇 가지를 골라서 그 결과를 따져보고 지칠 정도로 한참동안 살펴본 후에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 결론은 중요한 일부 요인을 간과한 나머지 효과가 떨어질 테고, 그나마도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수백 번의 생을 거치며 겪은 사소하거나 중요한 모든 사건은 신속한 결정이 필요한 긴급한 상황에서 참고하려고 하면, 체계도 없고 혼란스러운 덩어리로 보일 것이다. 자연은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훨씬 효율적인 계획을 세웠으니, 바로 사고자에게 그런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맡기고 멘탈체가 오랫동안 몸 없이도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모든 사건들은 비교를 위해 표로 만들어지고 그 결과는 분류된다. 그런 다음 그 결과는 능력으로 구현되고, 이 능력은 사고자의 다음 멘탈체를 형성한다. 이런 식으로 확장되고 개선된 능력은 바로 사용할 수 있으며, 과거의 결과가 능력 안에 있기 때문에 그 결과에 부합하는 결정을 지체 없이 내릴 수 있게 된다.
명확하고 재빠른 통찰력과 신속한 판단력은 활용할 수 있도록 효율적인 형태로 만들어놓은 과거 경험의 결과에 불과하다. 이런 통찰력과 판단력은 소화하지 못한 경험들의 덩어리보다 더 유용한 도구임에 틀림없다. 소화하지 못한 경험들의 덩어리는 그 안에서 적당한 것들을 골라 비교한 후, 선택의 상황이 올 때마다 추론의 과정을 거쳐야만 유용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여려 경우를 살펴보았지만, 삶이 지적으로 진화하고 불의와 학대가 무력한 인간을 괴롭히지 않게 하려면 결국 환생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된다. 인간은 환생을 통해 존엄해지고 불멸의 존재가 되어 신성하고 영광스러운 결말을 향해 진화한다.
환생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특성이나 행동, 운명 따위에는 관심도 없이 끊임없이 변하는 주변 환경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지푸라기일 뿐이다.
환생이 가능하다면, 인간은 현재의 진화 단계가 아무리 낮더라도 두려움 없이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 그는 지금 신성으로 향하는 사다리를 오르고 있고, 정상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환생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이 미래에 진화할 것이며, 미래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과거가 없는 생명체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시간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거품에 불과한 존재인데 말이다.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세상에 던져져 이유도 대가도 없이 선하거나 악한 자질을 부여받아 그 자질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에게 미래라는 것이 있다면, 그 미래도 현재만큼이나 고립되고 아무 원인이나 관계가 없지 않겠는가?
환생에 대한 믿음을 버린 현대 사회는 신에게서 정의를 박탈했고 인간에게서 안정을 빼앗았다. 인간은 운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그러나 변함없는 법칙에 의지할 때 얻을 수 있는 강인함과 존엄성은 이미 그에게서 떠나버리고, 그는 배가 다닐 수도 없는 삶이라는 바다 위에 던져져 무기력하게 떠 다니고 있다.
9장
카르마
앞에서는 환생을 통해 혼의 진화를 따라가 보았다. 이제 재탄생의 원리이자 위대한 인과법칙, '카르마'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카르마는 산스크리트어로서 원래는 '행동'을 의미한다. 모든 행동은 이전의 원인들에서 흘러나오는 결과이고, 각각의 결과가 미래의 결과의 원인이 되기에 원인과 결과라는 이 개념은 행동이라는 개념의 핵심을 이룬다.
따라서 카르마 혹은 행동이라는 단어는 인과관계, 즉 모든 인간 활동을 구성하는 원인과 결과가 끊어지지 않고 연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관계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을 두고 "이건 내 카르마야" 혹은 "이 사건은 과거의 내가 일으킨 원인의 결과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삶은 어느 하나도 고립되어 있지 않다. 삶은 개인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도록 하는 삶의 총합 속에서 앞선 모든 삶의 자식이자 이후 모든 삶의 부모이다.
'우연'이나 '우발' 같은 것은 없다. 모든 사건은 그에 앞서는 원인, 그리고 이후에 발생하는 결과와 연결되어 있다. 모든 사고, 행동, 환경은 인과적으로 과거와 연결되어 있으며 인과적으로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무지로 인해 과거와 미래를 모두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건은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처럼, 즉 우연인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런 겉모습은 망상에 불과하며 전적으로 우리의 앎이 부족한 탓이다. 물질계의 우주를 알지 못하는 미개인이 어떤 사건을 두고 원인이 없다고 여기고, 미지의 물질계 법칙의 결과를 '기적'이라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 법칙과 정신 법칙을 모르는 많은 이들이 도덕이나 정신과 관련된 사건을 두고 원인이 없다고 여기고, 미지의 도덕 법칙과 정신 법칙의 결과를 행운 또는 불운이라고 여긴다.
이제까지 막연하게나마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했던 세상에 만고불변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처음에는 무력감 또는 도덕적ㆍ정신적 마비에 가까운 상태에 빠지기 쉽다. 인간은 냉혹한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듯 보이고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은 철학적 언사로만 여겨지기 때문이다.
미개인이 물리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어 지적 충격을 받으면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곧 몸의 움직임과 외부 자연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만고불변의 법칙에 따라 이루어짐을 알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 법칙은 단지 모든 것을 작동하는 상황을 규정할 뿐 실재 작동 방식을 지시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배우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항상 자유롭지만, 외부 활동이 일어나도록 하는 상황으로 인해 외부 활동의 제약을 받는다. 미개인은 또한 자연 법칙에 무지하거나 알면서도 저항하면 상황이 자신을 지배하여 각고의 노력을 항상 무산시키지만, 자연 법칙을 이해하고 그 방향을 알고 그 힘을 가늠하면 자신이 상황을 지배하여 상황이 자신의 하인이자 조력자가 된다는 사실도 배우게 된다.
사실, 과학은 물질계에서만 가능하다. 과학 법칙이 만고불변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자연 법칙이라는 것이 없다면 과학도 있을 수 없다.
연구자가 여러 번의 실험을 한 후 그 결과로부터 자연의 작동 원리를 깨닫게 된다. 이 작동 원리를 아는 그는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산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를 얻는 데 실패하면 자신이 필요한 어떤 조건을 누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지식이 불완전할 수도 있고 계산을 잘못 했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검토하여 접근 방식을 수정하고 다시 계산을 한다.
이때 그에게는 질문을 제대로 던지면 자연이 변함없이 정확한 답을 주리라는 침착하고도 절대적인 확신이 있다. 수소와 산소의 결합으로 오늘은 물이 생겼다가 내일은 청산이 생기는 일은 없고, 불이 오늘은 뜨거웠다가 내일은 얼어버릴 만큼 차가워지는 일도 없다. 물이 오늘은 액체였다가 내일은 고체가 된다면 이는 주변 조건이 변했기 때문이며, 원래의 조건으로 돌아간다면 원래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자연 법칙에 대해 새로운 정보가 밝혀질 때마다 새로운 제약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힘이 생긴다. 자연의 이 모든 에너지는 연구자가 이해하는 만큼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이 나온 것이다. 지식에 정확하게 비례해서 이런 힘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힘을 선택하고, 그 힘들 간의 균형을 맞추고 목표에 방해가 되는 반대 에너지를 상쇄함으로써 결과를 미리 계산하고 예정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원인을 이해하고 조작하면 결과를 예상할 수 있기에, 자연의 엄격한 법칙이 처음에는 인간의 행동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여도 그 법칙을 잘 이용하면 무한하게 다양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각각의 힘은 완벽하게 경직되어 있어도 그 힘들의 결합물은 완벽하게 유동적일 수 있다. 모든 종류의 힘들이 모든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런 힘은 모두 계산이 가능하기에 선택할 수가 있고 그렇게 선택한 힘들을 원하는 결과를 내도록 결합시킬 수 있다. 목표가 결정되었다면 서로 결합하여 원인으로 작용하는 힘들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추기만 하면 그 목표는 틀림없이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기억할 것은 사건을 일으키고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무지한 인간은 무력하게 비틀거리면서 만고불변의 법칙에 도전하지만 항상 실패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식을 갖춘 인간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예측, 유도, 예방, 조정하여 결국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을 얻게 된다. 이는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연 법칙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자연의 힘에 휘둘리는 장난감이자 노예지만, 후자는 자연의 주인으로서 자연의 에너지를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물질계에서 통하는 법칙은 역시 법칙의 지배를 받는 도덕과 정신의 영역에서도 통한다. 도덕과 정신의 세계에서도 무지한 이는 노예이고 현자는 군주다. 이곳에서도 결코 침범할 수 없는 만고불변의 법칙이 처음에는 인간을 무력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흔들림 없는 전진과 미래의 명확한 방향의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이 법칙의 지배를 받는 영역에 속할 때에만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 영역은 지식이 혼의 과학을 수립하고 인간에게 자신의 미래 ㅡ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환경에 놓일 것인가 ㅡ 를 결정할 힘을 주는 곳이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위협적인 개념으로 느껴졌던 카르마는 제대로 알고 나면, 고무적이고 희망을 주며 의욕을 불어넣는 힘이 될 수 있다.
카르마는 인과관계의 법칙이자 원인과 결과에 대한 법칙이다. 기독교 입문자 성바울도 이에 대해 "자신을 속이지 말라. 신은 속지 않으시나니. 사람은 무엇이든 심는 대로 거두느니라."96라며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인간은 자신이 활동하는 모든 계에 끊임없이 힘을 내보낸다. 이런 힘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그 자체로 과거 활동이 낳은 결과이며, 인간이 거주하는 모든 세계에서 유발하는 원인이다. 그 힘들은 본인과 다른 이들에게 어떤 정해진 결과를 가져온다. 이 원인들은 활동 영역 전체의 중심이 되는 인간에게서 발산되므로 그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결과는 그 인간의 책임이다.
자석이 그 강도에 따라 크고 작은 힘이 작용하는 영역, 즉 '자기장'을 갖듯이 모든 인간도 자신이 방출하는 힘이 활동하는 영역, 즉 영향력의 장(場)을 갖는다. 그리고 이런 힘들은 곡선을 그리며 활동하면서 그 힘을 내보낸 인간에게로, 원래의 발생 지점으로 되돌아간다.
카르마라는 주제는 매우 복잡하므로, 세분하여 하나씩 다루도록 하겠다.
인간은 평상시에 세 종류의 에너지를 내보내는데 각각의 에너지는 인간이 살고 있는 세 영역에 속한다. 멘탈계의 멘탈 에너지는 우리가 사고라고 부르는 원인을 낳고, 아스트랄계의 욕망 에너지는 우리가 욕망이라 부르는 원인을 낳으며, 이 욕망의 원인이 불러일으키며 물질계에서 작용하는 물질 에너지는 우리가 행동이라고 부르는 원인을 낳는다.
이 각각의 원인들이 우리가 만들어내는 당혹스러우면서도 복잡한 여러 결합, 그리고 '카르마'라는 총합체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따져보고자 한다면, 이 원인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이 원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의 종류를 이해해야 한다.
인간이 다른 이들보다 더 빠르게 진화하여 상위 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면 상위 힘들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지금은 이 부분은 제외하고, 세 가지 세계에서 진화의 주기를 천천히 밟아가는 일반적인 인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보자.
이 세 종류의 에너지를 살펴볼 때는 그 에너지들을 만들어낸 인간에게 미치는 결과와 그 인간의 영향권 안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 미치는 결과를 구분해야 한다.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찌해 볼 수도 없는 혼란의 구덩이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힘이 자신이 속한 계에서 작용하고 그 강도에 비례하여 하위 계에서 반응한다는 사실, 그 힘이 만들어진 계에 따라 특징이 부여되고 하위 계에서 반응하는 과정에서 본래 특질에 따라 미세하거나 조악한 질료의 진동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활동을 만들어내는 동기가 그 힘이 속하는 계를 결정한다.
이제 현생에서 무르익은(ripe) 카르마와 인격 카르마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무르익은 카르마란 필연적인 사건으로 모습을 드러낼 채비를 끝낸 카르마이고, 인격 카르마란 성향이라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런 성향은 누적된 경험의 결과이며, 과거에 그 성향을 만들어낸 힘(자아)에 의해 현생에서도 바뀔 수 있다. 이외에도 지금 만들어지고 있어서 미래의 사건과 인격을 낳는 카르마도 있다.97
또한 인간은 자신의 카르마를 만드는 한편, 그 카르마를 통해 다른 이들과 연결되어 가족, 국가, 인종 등 다양한 집단의 일원이 되고, 이 각각의 집단이 갖는 집단적 카르마를 공유한다는 사실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카르마 공부는 꽤 복잡한 작업이지만 일단 위에서 설명한 그 주요 작동 원리만 제대로 알면, 카르마의 일반적영향에 대한 일관된 개념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기에 세부적인 내용은 기회가 될 때마다 느긋하게 익히면 된다.
세부 내용에 대한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인간이 각자 자신의 카르마를 만들어내기에, 그 결과 자신의 역량은 물론이고 한계도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또한 인간은 항상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역량과 한계 안에서 활동하지만, 여전히 그 자신이면서도 살아있는 혼이기 때문에 자신의 역량을 강화 혹은 약화할 수 있고, 자신의 한계를 확대 혹은 축소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을 구속하는 사슬은 그가 직접 묶은 것이기에,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도 더욱 세게 묶는 것도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이 사는 집은 그가 직접 지은 것이기에 집을 개량하는 것도, 낡아가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아니면, 다시 짓는 것도 그의 의지에 달린 일이다. 우리는 언제나 말랑말랑한 점토 속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에 형태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형태가 결정되면 그 점토는 강철처럼 단단해져서 우리가 정한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히토파데샤(Hitopadesha: 산스크리트어로 된 인도의 설화집ㅡ옮긴이 주)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보라! 점토가 마르면 강철로 변하지만, 점토로 형상을 만드는 것은 도공이다. 오늘은 운명이 주인이지만, 어제는 인간이 주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제가 낳은 결과 때문에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다.
이제 카르마를 공부할 때 기본이 되는 세 종류의 원인에 대해 차례로 알아보자.
세 가지 종류의 원인과 원인이 그 창조자 및 주변인들에게 미치는 결과, 첫 번째 종류의 에너지는 우리의 사고로 구성된다. 사고는 인간의 카르마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요인이다. 사고 안에서 자기(self)의 에너지는 멘탈 물질로 기능하는데, 미세한 멘탈 물질은 개별적 매개체를 형성하고 심지어 조악한 멘탈 물질도 자의식의 모든 진동에 재빠르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고, 즉 사고자의 즉각적인 활동이라고 부르는 진동은 정신-질료의 형태 혹은 정신 이미지를 낳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런 정신 이미지는 멘탈체를 형성하고 그 형상을 결정한다. 모든 사고는 이 멘탈체를 바꾸어놓는데 연속으로 이어지는 각 생애에서 정신적 능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전 생의 사고 활동이다.
사고력이나 정신적 능력이 없는 인간은 꾸준히 사고를 반복하여 그런 능력을 키워내지 않은 것이다. 한편, 그렇게 만들어낸 정신적 이미지는 절대로 잃어버리는 일이 없이 능력을 만들기 위한 질료로 계속 존재하고 정신적 이미지의 각 집합은 능력으로 변하는데, 그 능력은 추가적인 사고 활동이 일어나거나 같은 종류의 정신적 이미지를 만들어낼 때마다 강력해진다.
이런 법칙을 아는 인간은 자신의 갖고 싶은 정신적 특성을 서서히 직접 만들어낼 수 있고, 이 작업은 벽돌공이 벽돌로 벽을 세울 때처럼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죽음도 그의 작업을 중단하지는 못하며, 그가 몸이라는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정신적 이미지를 우리가 능력이라고 부르는 특정 기관(器官) 안에 불어넣는 작업을 더욱 용이하게 해준다.
그는 물질계에서 다시 태어날 때 이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며, 새로운 육체의 뇌는 그 일부가 이 능력을 가진 기관의 역할을 하도록 형태가 만들어진다. 이 방식에 대해서는 곧 설명하겠다. 이 모든 능력들이 힘을 합쳐 지상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한 멘탈체를 형성하고, 그의 뇌와 신경계는 이 멘탈체가 물질계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형태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어떤 생에서 창조된 정신적 이미지는 다른 생에서 정신적 특성과 성향으로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이유가『우파니샤드』의 한 구절에 적혀있다.
"인간은 생각의 생명체이다. 이 생에서 생각하는 것이 바로 다음 생에서의 그의 모습이다."98
이것이 바로 카르마의 법칙이며, 이 법칙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적 특성을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이다. 잘 만들어진 정신적 특성은 이롭고 도움이 되겠지만, 잘못 만들어진 정신적 특성은 피해와 비난의 대상이 된다. 정신적 특성은 개인의 카르마가 그 특성을 민들어낸 그 개인에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얘기한 바로 그 인간은 자신의 사고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의 멘탈체를 형성하는 이 정신적 이미지들이 진동을 만들어내어, 자신을 이차적인 형태로 복제해내기 때문이다. 욕망과 뒤섞인 이런 정신적 이미지들은 주로 아스트랄 물질을 취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문헌99에서 이런 이차적인 사고-형태를 아스트랄-멘탈 이미지라고 칭한 바 있다.
이런 형태는 자신을 창조한 이를 떠나 거의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이때 자신의 창조자와는 단단히 끈을 계속 유지한다. 이런 형태는 또한 다른 이들과 접촉하며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런 식으로 다른 이들과 자신 사이에 카르마로 연결된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이후의 삶에서 좋든 나쁘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도 이렇게 맺어진 끈이다. 우리를 친척과 친구, 적으로 둘러싸는 것도 이 끈이고, 삶의 여정에서 도움을 주는 이들과 방해가 되는 이들, 득이 되는 이들과 해가 되는 이들, 이번 생에서 잘해준 것도 없는데 우리를 사랑해주는 이들과 이번 생에서 미움 받을 만한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미워하는 이들을 만나게 하는 것도 바로 이 끈이다.
이런 결과를 연구하다보면 우리는 위대한 법칙 하나를 깨닫게 된다. 우리의 사고가 우리의 정신적ㆍ도덕적 특성을 결정하는 한편,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미래의 동료를 결정한다는 법칙 말이다.
두 번째 종류의 에너지는 우리의 욕망, 즉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외부 세계의 대상에 대한 갈망으로 구성된다. 정신적 요소는 인간의 욕망 속으로 언제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정신적 이미지'라는 표현에 욕망을 포함시켜도 무방할 것 같다. 물론 욕망은 주로 아스트랄 물질로 자신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말이다.
욕망은 자신의 창조자에게 작용하여 욕망체 혹은 아스트랄체를 형성하고, 창조자가 죽음을 맞이한 후 카말로카로 들어갈 때 그의 운명의 방향을 정하며, 다음 생에서 그의 아스트랄체의 특성을 결정한다. 욕망이 술에 취한 상태거나 짐승과 같이 잔인하거나 지저분하면, 선천적인 질병이나 각종 뇌질환의 원인이 되어 간질, 강경증(强勁症), 온갖 신경질환을 야기하며, 신체적 기형, 극단적인 경우에는 흉측한 기형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비정상적이거나 지나친 식욕은 아스트랄계에 연결고리를 만드는데, 이 연결고리는 이런 식욕의 형상을 한 아스트랄체를 입은 자아를 이런 식욕을 갖고 있는 동물의 아스트랄체에 묶어 두어 환생이 늦어지게 만든다. 이런 운명에서 벗어나는 경우에는 짐승 같은 식욕의 형상을 한 아스트랄체가 태중에 있는 아기의 육체에 자신의 특성을 각인하여 가끔식 세상에 등장하는, 인간이지만 인간 같지 않기도 한 골치 아픈 아이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욕망은 대상에 집착하여 외부로 향하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환경으로 인간을 이끈다. 지상의 것에 대한 욕망은 혼을 외부 세계와 연결하여 옥망의 대상을 가장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곳으로 인간을 인도하기에 인간은 욕망에 따라 탄생한다100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욕망은 다시 태어날 곳을 결정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아스트랄-멘탈 이미지는 사고에 의해 생겨난 정신적 이미지처럼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아스트랄-멘탈 이미지도 우리를 다른 혼들과 연결해주는데, 그 연결이 애증이라는 가장 강력한 끈으로 이루어질 때도 있다. 인간 진화의 현 단계에서는 평범한 인간의 경우 일반적으로 사고보다 욕망이 강하고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은 다음 생에서의 주변 환경을 결정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게 되고, 인간 자신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끈으로 연결된 사람들을 다음 생에 투입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지독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한 사고를 방출하여 그 진동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 결과 마침내 살인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고를 방출한 사람과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물질계에서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카르마로 연결되어 있다.
사고의 창조자가 살인자의 범죄에 일조하는 식으로 저지른 악행은, 다음 생에서 그 살인자가 고통을 가할 때 피해를 입는 것으로 돌아온다. 천천벽력 같은 일들은 억울하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사실은 그건 원인의 결과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혼은 이런 과정을 통해 교훈을 얻는 반면, 하위 의식은 부당하다는 느낌에 몸부림친다.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데 당하는 것만큼 인간을 억울하게 만드는 일도 없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카르마의 법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작용하는 욕망이 욕망-본성을 낳고, 그 욕망-본성을 통해 다음 생에서의 육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욕망은 다음에 태어날 장소를 결정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다음 생에서 함께할 동료들을 우리 주변으로 끌어들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 번째 종류의 에너지는 물질계에서 행동으로 나타나며,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많은 카르마를 만들어내지만, 정작 내면의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 이 에너지는 과거의 사고와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이며, 이런 에너지에 해당하는 카르마는 대부분 에너지가 발생하는 중간에 소진되어 버린다.
이 에너지가 내면의 인간에게 미치는 간접적인 영향은 그가 이 에너지에 의해 새로운 사고와 욕망 혹은 감정으로 이동하는 정도에 비례하지만,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힘은 행동 자체가 아니라 이런 사고와 욕망에 있다.
어떤 행동이 자주 반복되면 외부 세계에서 자아를 표현하는 데 제약이 되는 몸의 습관이 만들어진다. 그렇지만 이런 습관은 몸과 함께 사라지기 때문에 행동의 카르마가 혼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경우 그 카르마는 한 번의 생 안에서 끝난다. 하지만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 즉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행복과 불행 그리고 이로 인한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행동은 그 영향력을 통해 우리를 다른 이들과 연결하기에 미래의 동료를 결정하는 제3의 요인이지만, 인간을 제외한 환경을 결정할 때에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개략적으로 볼 때, 탄생 이후 우리를 둘러싸는 물리적 환경이 호의적이냐 비호의적이냐는, 우리가 과거에 행동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퍼뜨렸느냐 불행을 퍼뜨렸느냐에 달려있다. 물질계에서 행동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안겨준 물리적 결과가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다음 생에서 그 행위자에게 좋은 환경 혹은 나쁜 환경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 행위자가 재산, 시간, 노력 등을 희생하여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었다면, 이 행동은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물리적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호의적인 물리적 환경을 그에게 돌려준다. 반대로 그 행위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물리적 불행을 안겨주었다면 이 행동은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물리적 고통을 겪는 비참한 물리적 환경을 그에게 돌려준다.
이 두 경우에서 동기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카르마의 법칙은 적용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법칙을 하나 깨닫게 된다.
"모든 힘은 그 고유의 계에서 작용한다."
인간이 물질계에서 다른 이들을 위해 행복의 씨앗을 심는다면 물질계에서 자신이 행복을 누리기에 호의적인 환경을 거두게 되며, 그 씨앗을 뿌린 동기는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웃의 농사를 망칠 작정으로 밀의 씨앗을 뿌린다 해도, 이 나쁜 동기 때문에 밀이 민들레로 자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동기는 정신적 혹은 아스트랄적 힘이어서 그 동기가 의지에서 나오느냐 아니면 욕망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도덕적ㆍ정신적 특성에서 반응하느냐 욕망-본성에서 반응하느냐가 결정된다. 어떤 행동을 통해 물리적 행복을 발생시키는 것은 물리적 힘이기 때문에 물질계에서 작동한다.
- 인간은 물질계에서 행동을 통해 이웃에게 영향을 미치고, 주변에 행복을 퍼뜨리거나 고통을 야기하여 인간 복지의 총합을 늘리거나 줄인다. 이러한 행복의 증가 혹은 감소는 좋은 동기, 나쁜 동기, 뒤섞인 동기 등 아주 다른 동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은 순전히 자비심에서 혹은 동료들에게 행복을 주고 싶다는 바람에서 즐거움을 주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그런 선한 동기에서 어느 동네에 공원을 하나 지어준 다음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해주고, 다른 어떤 사람은 과시하기 위해 혹은 사회적인 명예를 안겨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끌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슷한 행동을 하고(가령, 공원을 지어줌으로써 어떤 지위를 살 수도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반쯤은 이기적이고 반쯤은 이타적인, 뒤섞인 동기에서 공원을 지어준다고 해보자. 이 각각의 동기는 이 세 사람이 미래에 다시 태어났을 때 각각의 인격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격이 더 나아질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으며, 큰 변화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안겨준 행동의 결과가 그런 행동의 동기에 의해 좌우되지는 않는다. 무엇 때문에 그런 선물을 주었든 관계없이 사람들은 그 공원을 똑같이 즐긴다. 그리고 공원을 지어준 사람의 행동 때문에 생긴 이 즐거움으로 인해 그 사람은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자연으로부터 받아야 할 빚, 다시 말해 자연이 그에게 정확하게 되돌려주어야 할 빚이 생긴다. 그는 커다란 물리적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편안하거나 호화로운 환경을 선서받게 된다. 물리적 재산을 희생했기에 그에 합당한 보상, 즉 그의 행동에 대해 카르마 법칙이 되돌려주는 결과물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권리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이용하고 자신의 재산과 주변 환경에서 어느 정도의 행복을 끌어내는지는 그의 인격에 달려있다. 따라서 여기서도 역시 행동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진다. 각각의 씨앗은 자기에게 적합한 수확물을 낳는다.101
카르마의 법칙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행복을 퍼드린 행동에 합당한 결과를 내어주며, 대신 나쁜 동기를 고려해 나쁜 인격을 부여한다. 그 결과, 그는 재산이 많아도 계속 불만과 불행을 겪게 된다.
좋은 사람이 좋은 동기에서 행동했지만, 실수로 물리적 불행을 가져왔다면 그도 물리적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물리적 불행을 초래했기 때문에 물리적 환경에서 불행을 겪게 된다.
하지만 그의 선한 동기는 그의 인격을 향상시켜 자신의 내부에서 영원한 행복을 끌어낼 수 있게 하고, 불행을 겪는 중에도 인내심과 만족을 유지하게 된다. 우리 주변에서 보이는 여러 현상에 이런 원칙을 적용하면 많은 수수께끼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동기와 행동이 이런 결과들을 가져오는 이유는 각각의 힘은 자신이 생겨난 계의 특성을 갖기에 상위 계일수록 그 힘이 더욱 강력하고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기는 행동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선한 의도였으나 실수로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은 행동은, 나쁜 동기였으나 선택을 잘하여 좋은 결과를 맞이한 행동보다 그 행동을 한 사람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인격에 따른 반응이라 할 수 있는 동기는 기나긴 일련의 결과를 낳는다. 인격이 좋아지거나 나빠지면 그 인격의 인도를 받는 미래의 모든 행동도 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이에게 미치는 결과에 따라 행위자에게 물리적 행복이나 불행을 가져오는 행동은 그 자체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힘이 없고, 그 결과 속에서 다 소진된다.
의무처럼 보이는 것들끼리 상충되어 어떤 길이 맞는지 몰라 당황스러울 때 카르마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성과 판단을 최대한 이용해 최선의 길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는 특히 동기에 집중하여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정화하고자 한다.
그런 다음에 아무 두려움 없이 행동한다. 그런데 만약 그 행동이 잘못된 결과를 낳았다면, 그 실수를 미래에 유용하게 사용할 교훈으로 여기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의 고귀한 동기 덕분에 미래의 인격은 이미 고귀해졌다.
힘은 그 힘이 만들어진 계에 속한다는 이 일반적인 원칙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질계의 대상을 얻겠다는 동기를 가지고 작용하는 힘은 물질계에서 활동하며 행위자를 물질계에 귀속시킨다. 힘이 데바찬의 목적을 이루고자 할 때는 데바찬계에서 작용하여 행위자를 데바찬계에 귀속시킨다. 신성한 봉사 외에 다른 동기가 없다면 영계에서 놓여난 힘은 그 행위자를 어느 곳에도 귀속시키지 않는다. 그 행위자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 종류의 카르마. 무르익은 카르마는 결과를 거둘 준비가 되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카르마다. 과거의 모든 카르마 중에는 일정량이 정해져있어서 한 번의 생 안의 정해진 한계 내에서 소진되는 카르마가 있다.
또 어떤 카르마는 너무나 앞뒤가 맞지 않아서 한 개의 육체 안에서는 해결되지 못해 여러 유형의 몸을 통해서만 표현이 가능한 것도 있다. 다른 혼에 대해 빚을 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 이 모든 혼이 동시에 체화되지는 않는다. 특정한 나라나 사회적 지위 안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카르마도 있고, 같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른 카르마가 완전히 다른 환경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인간의 전체 카르마 중에서 주어진 어느 생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일부뿐이며, 이 일부를 선택하는 것은 나중에 설명할 카르마의 위대한 주(主)이다. 카르마의 위대한 주는 함께 처리할 수 있는 원인들의 집합을 소진시키기에 적절한 가족, 국가, 장소, 몸에서 체화하도록 혼을 안내한다.
이런 원인들의 총합은 특정한 생의 수명을 정하고, 그 몸에 인격과 힘과 한계를 부여하며, 그의 주위에 친척과 친구, 적을 배치하여 그와 의무 관계에 있으며 그가 살고 있는 동안 지상에 태어난 혼들이 그와 접촉하도록 한다.
또한 그가 태어난 사회적 조건이 갖는 장점과 단점을 두드러지게 하고, 그가 활동할 때 활용해야 하는 뇌와 신경계의 조직을 형성하여 그가 드러낼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를 선택하며, 그가 사회생활 속에서 고난과 기쁨을 겪도록 하는 동시에 한 번의 생에서 같이 해결될 수 있는 여러 원인을 하나로 모은다. 이 모든 것이 '무르익은 카르마'이며, 이 카르마는 뛰어난 점성술사가 만들어 놓은 별자리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모든 것은 과거의 그가 했던 선택들이 결정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진 빚을 최대한 갚아야 한다.
새로운 생애 동안 혼이 걸치는 육체, 아스트랄체, 멘탈체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과거의 직접적인 산물이며, 이 무르익은 카르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형성한다. 이 세 가지 몸은 모든 면에서 혼을 제약하고, 그의 과거는 그에게 불리한 판단을 내리면서 그의 반대편에 서서 그가 스스로 만든 한계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을 기쁘게 받아들여서 개선하려고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종류의 무르익은 카르마로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불가피한 행동의 카르마다. 모든 행동은 일련의 사고가 최종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것을 화학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다. 같은 종류의 사고를 계속 더하면 포화 용액이 된다.
그러다가 다른 사고 ㅡ 혹은 외부에서 온 진동 ㅡ 를 더하면 용액 전체가 고체, 즉 그 여러 사고를 표현하는 행동으로 변한다. 우리가 복수 따위의 동일한 종류의 사고를 끈질기게 반복하면 마침내 포화 지점에 도달한다. 그러다가 어떤 충격이 오면 이 모든 사고들이 행동으로 변해 범죄가 발생한다.
다른 예를 들자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겠다는 생각을 끈질기게 반복하여 포화 지점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때 기회라는 자극이 우리를 건드리면, 그 생각들은 영웅적 행위의 형태로 결정화(結晶化)된다.
인간이 이런 무르익은 카르마를 가지고 있을 때, 행동으로 변할 채비를 마친 그런 사고의 덩어리를 처음으로 건드리는 진동은 그가 새롭게 갖게 된 자유 의지와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 그 행동을 저지르게 한다. 생각을 해보기 위해 행동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신을 자극하는 첫 번째 진동이 행동을 유발하는 것이다. 균형점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다가 아주 작은 자극이라도 받으면 행동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경악하거나, 자기헌신이라는 숭고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 한다. 그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됐어"라고 말한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너무 자주 했기 때문에 그 행동이 불가피해졌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겠다고 여러 번에 걸쳐 결심하면 마침내 그의 의지가 돌이킬 수 없이 정해져버려서 그런 행동을 언제 할 것인가는 기회의 문제가 된다.
그가 생각을 할 수만 있다면 선택의 자유는 아직 남아있다. 예전 생각과 반대되는 새로운 생각을 하고, 그렇게 반대되는 생각을 반복함으로써 예전의 생각을 서서히 사라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극에 대한 혼의 반응이 행동이 될 때 선택의 힘은 소진되어 버린다.
바로 여기에 강제와 자유 의지라는 해묵은 문제가 있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행사하여 점차 자신에게 강제적 상황을 만들어내고, 이 두 극단의 사이에 자유 의지와 강제의 모든 조합이 있으며, 이 조합들이 우리가 의식하는 내부의 싸움을 유발한다. 우리는 자유 의지의 인도에 따라 어떤 목적을 가진 행동을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습관을 만든다.
그러면 그 습관은 제약이 되고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 행동을 하게 된다. 이렇게 말하면 습관이란 나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반대의 사고를 통해 그 습관을 없애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 반대의 사고에 여러 번 빠지고 나면 그 새로운 사고-흐름이 물줄기로 변하고, 우리는 온전한 자유를 되찾는 듯하지만 결국은 서서히 또 다른 족쇄를 만들고 만다.
따라서 예전의 사고-형태는 계속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사고 능력을 제한하면서 개인적 혹은 국가적 편견의 형태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제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자신이 얼마나 족쇄에 묶여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그 족쇄에 속박 당한 채 묵묵히 가던 길을 계속 간다.
반면, 자신의 본성에 대한 진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자유로워진다. 우리의 뇌와 신경계의 구성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특징적인 강제적 상황 중 하나다.
과거의 사고로 인해 이런 강제적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 강제적 상황은 지금도 우리를 제약하고 우리는 종종 그런 상황을 짜증스럽게 느낀다. 이런 상황은 서서히 개선될 수 있다. 우리의 한계도 확장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무르익은 카르마의 또 다른 형태로는 과거의 사악한 사고가 인간의 주변에 사악한 습관의 층을 만들어, 그를 구속하고 사악하게 살도록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행동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대로 과거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결과이며 여러 번의 삶을 거치는 동안 발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오랫동안 미루어져온 것이다.
혼은 계속 성장하면서 고귀한 자질을 키워왔다. 그러나 과거의 사악한 습관이 만든 이 층이 어떤 생에서 우연한 기회에 발현하면 이로 인해 혼은 자신이 키워온 고귀한 자질을 드러낼 수 없게 된다. 부화할 준비를 마친 병아리처럼 그 혼은 자신을 가두는 껍데기 안에 숨어 있게 되고, 외부에는 껍데기만 보일 뿐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그 카르마가 소멸되고 우연인 듯 보이는 어떤 사건 ㅡ 이는 위대한 스승, 책, 강의에서 사용하는 단어다 ㅡ 이 일어나 그 껍데기를 부수면 혼이 밖으로 나와 자유로워진다.
이런 경우는 갑짝스러우면서도 드물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전향'에 해당되며, '신성한 은총의 기적'이라고도 불린다. 카르마를 아는 이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이해가능하고 법칙에 들어맞는 일이다.
카르마가 누적되어 인격으로 나타나면 무르익은 카르마와는 달리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이런 카르마는 강하거나 약한 성향들의 집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향이 강하거나 약한 것은 그 성향을 만들었던 사고-힘에 의해 결정되며, 이런 성향들은 조화를 이루거나 반대되는 새로운 사고-힘의 물결이 밀려오면 더 강해지기도 하고 더 약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의 내부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성향이 보이면 그것들을 없애려고 시도한다. 이때 욕망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와 압도하면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결국에는 무너진다 해도 그 유혹에 오래 저항할수록 그 유혹을 극복하는 시점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그렇게 매번 실패하더라도 그 시도는 성공을 위한 한 걸음이다. 저항이 에너지를 조금씩 갉아먹어 나중에는 남는 에너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는 카르마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집단 카르마. 카르마라는 측면에서 한 집단의 사람들을 생각해 볼 때, 카르마가 그 집단의 각 구성원에게 미치는 힘은 개인의 카르마에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하나의 점에 여러 개의 힘이 작용하면 그 점은 그 여러 힘 중 어느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힘들이 합쳐진 결과의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와 같이 한 집단의 카르마도 그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들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힘들이 모여 나타나는 결과물이다.
그리고 모든 개인은 그 결과물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개인의 카르마는 자아를 가족에게로 인도하는데, 그 카르마는 이미 이전의 삶에서 그 가족을 구성하는 다른 자아 중 일부와 그를 긴밀하게 연결하는 끈을 만들어놓은 상태다.
그 가족은 할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아 부유하다. 그런데 아이 없이 죽은 것으로 생각했던 할아버지의 첫째 아들에게 자식이 있었고, 그 사람이 상속자를 자칭하며 나타난다. 재산은 그 상속자에게 넘어가고 이 가족의 아버지는 엄청난 빚을 지게 된다.
이 자아는 과거에 이 상속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과거의 삶에서 이 가족의 아버지가 이 상속자에게 큰 빚을 졌기 때문에 이런 끔직한 결과가 나타났고, 자아는 아버지의 행동으로 인해 이런 고통과 마주하게 되어 결국 가족 카르마에 얽히게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아니면 자아가 과거에 무언가를 잘못했는데 그것이 가족 카르마로 인한 고통으로 상쇄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가족 카르마에 엮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가 '예상치 못한상황' 덕분에 그 카르마에서 풀려날 수도 있다. 가령 어떤 자애로운 사람이 그를 입양하여 교육시키고픈 충동을 느껴서 그를 그런 불행한 상황에서 구해주는 식인데, 이때 그 자애로운 사람은 과거에 그에게 진 빚이 있는 것이다.
이런 관계가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는 상황으로 기차 사고, 조난 사고, 홍수, 태풍 등이 있다. 기차가 망가지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 운전사나 차장, 철도 관리자, 제조업체, 철도회사 직원의 행동이 유발한 참사다. 그들 중 누군가가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여, 그에 대한 불만과 분노의 생각들을 무리지어 내보낸 것이다.
누적된 카르마 속에 ㅡ 꼭 무르익은 카르마일 필요는 없다 ㅡ 갑자기 단축된 생명에 대한 빚이 있는 사람들은 이 사고에 연루되어 빚을 갚게 된다. 또한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려고 했으나, 과거에 그런 빚이 없는 사람들은 천우신조로 기차 시간에 늦어서 사고를 피하게 된다.
인간은 집단 카르마로 인해 그가 속한 나라가 전쟁을 치르느라 발생하는 여러 고난에 빠지기도 한다. 이때도 과거의 빚을 갚을 수 있는데, 그것이 반드시 당시 삶의 무르익은 카르마 때문은 아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부당한 고통은 받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의 빚을 갚을 수 있는 예상치 못한 기회가 생긴다면 빚을 갚아 없애는 것이 좋다.
'카르마의 주'는 위대한 영적 지성으로 카르마에 대한 기록을 보관하고, 카르마 법칙의 복잡한 작동 방식을 조정한다.
불라바츠키 여사는『시크릿 독트린』에서 이들을 카르마 기록자인 리피카(Lipika), 마하라자(Maharaja),102 그리고 이들의 주인으로 설명한 바 있다. 이들은 "카르마의 지상 집행인"103이라고도 한다.
리피카는 모든 사람의 카르마 기록을 알고 있고 전지적 지혜를 통해 그 기록의 여러 부분을 선택하고 조합해서 한 생애를 계획하는 이들이다. 리피카는 환생하는 혼이 어떤 육체의 옷을 입을 것인지 알려주고, 마하라자는 이를 받아서 구체적인 모형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들보다 열등한 집행자들 중 하나가 이 구체적인 모형을 복제한다. 이렇게 복제된 것이 에텔복체이자 조밀체의 모체이며, 그 질료를 어머니로부터 가져오기에 신체적 유전 법칙을 따르게 된다. 인종, 국가, 부모는 새로 태어나는 자아의 육체에 적합한 질료와 어린 시절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기준으로 선택된다.
가족의 유전적 특성에 따라 일정한 유형이 정해지는 동시에 여러 질료의 조합으로 인한 개인적 특성도 나타나게 된다. 유전병이나 신경계의 유전적 민감성 등을 살펴보면 물질계 질료가 특정한 방식으로 조합되어 전달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멘탈체와 아스트랄체 안에서 특정한 기질을 진화시킨 자아는 그 기질을 표현하기 위해 특별한 신체적 특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이런 조건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부모에게로 인도된다.
따라서 음악 방면에서 예술적 능력이 뛰어난 자아는 음악인 가족의 육체를 빌려 태어날 것이다. 이때 에텔복체와 조밀체의 질료는 그의 요구에 부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질 것이고, 유전되는 신경계는 그의 능력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섬세한 기관을 갖추게 될 것이다. 매우 사악한 자아는 음탕하고 포악한 가정으로 인도될 것이다.
이 가족의 몸은 그의 멘탈체와 아스트랄체에서 오는 진동에 반응할 수 있도록 가장 조악한 조합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아스트랄체와 하위 정신이 자아를 극단으로 몰고 간 결과, 술 같은 것에 중독된 경우라면 그런 극단적인 성향 때문에 신경계가 약해진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나 술에 중독된 부모에게서 병에 걸린 질료로 만들어진 육체를 제공받게 될 것이다.
카르마의 주는 목적에 맞추어 방식을 조정해가면서 자아를 안내하고 항상 정의를 실천한다. 자아는 능력과 욕망아라는 카르마적 소지품을 간직한 채 그 소지품에 가장 적합한 육체를 부여받는다.
혼은 빚을 모두 갚고 개인적 카르마를 모두 떨쳐버릴 때까지 지상으로 계속 되돌아가야 한다. 각 삶에서는 사고와 욕망이 새로운 카르마를 만들어낸다. 이 두 가지 원칙을 생각해볼 때 질문 하나가 마음 속에 떠오른다.
'이렇게 계속 새로워지는 굴레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가? 혼은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이제는 '카르마를 끝내는 방법'에 대해 알아볼 때가 되었다.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카르마 내의 연결 요소다. 혼의 에너지가 외부로 향하면 에너지를 어떤 대상과 연결시키고, 이러한 연결로 인해 혼은 욕망의 대상과 하나가 되어, 그 대상과 진정으로 연결될 수 있는 곳으로 끌려가게 된다. 혼은 대상과 연결되어 있는 이상 그 대상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 좋은 카르마도 나쁜 카르마만큼이나 혼을 대상과 연결한다. 지상의 대상에 대한 욕망이든 데바찬의 대상에 대한 욕망이든, 욕망은 그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곳으로 혼을 끌고 가기 때문이다.
행동을 촉발하는 것은 욕망이다. 행동을 하는 목적은 그 행동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욕망하는 무언가를 그 행동을 통해 얻고자 함이고 그 결과를 누리고자 함이며, 엄밀하게 말하면, 그 결과물을 음미하고자 함이다.
인간이 일을 하는 이유는 땅을 파거나 건물을 짓거나 천을 짜고 싶어서가 아니라, 땅을 파거나 건물을 짓거나 천을 짠 결과 돈이나 상품의 형태로 결과물을 얻고 싶어서다. 변호사가 변호를 하는 이유는 맡은 사건의 지루한 상세내용을 알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재산과 명예와 지위를 얻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인간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한다. 그 노동의 원동력은 그 노동이 그들에게 가져다주는 결과물이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다. 행동의 결과물에 대한 욕망은 그들을 활동하게 하고, 그 결과물이 주는 즐거움은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욕망은 카르마에서 연결을 발생시키는 요소이고, 혼이 지상에서나 천상에서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게 되면 세 가지 세계에서 돌아가는 환생의 수레바퀴와 혼을 연결하는 끈이 끊어진다. 행동 자체는 혼을 잡아둘 힘이 없다. 행동은 완료되는 순간 과거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물에 대해 끝없이 새로워지는 욕망이 혼으로 하여금 새로운 활동에 나서도록 하기에 새로운 사슬이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욕망의 부추김에 넘어가 끊임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욕망은 나태와 게으름, 관성104을 이겨내고 인간이 행동하여 경험을 만들어내도록 하기 때문이다.
풀밭에서 한가하게 졸고 있는 미개인의 경우, 배고픔이나 음식에 대한 욕망이 부추길 때 행동에 나서고,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인내심, 기량, 참을성을 발휘한다. 따라서 그도 정신적 자질을 개발하지만 배고픔이 만족되면 다시 꾸벅거리며 조는 동물의 상태로 침잠한다.
정신적 자질은 순전히 욕망의 유도에 따라 진화되었고 명예나 사후 명성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위력을 발휘했다. 인간은 신성에 다다를 때까지 욕망의 부추김이 필요하다. 그리고 상위 세계로 올라갈수록 그 욕망들은 더 순수해지고 이기심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은 인간이 환생하도록 하며, 인간은 환생에서 벗어나려면 그 욕망들을 파괴해야 한다.
해방을 갈망하기 시작한 인간은 '행동의 결과에 대해 욕심내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이 말은 어떤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바람을 자기 내부에서 서서히 없애야 한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 대상을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그 대상이 없어도 만족하는 습관을 갖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그 대상을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게 되고,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의무라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등한시하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한다. 그 일의 결과에 대해 무관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의무에 관심을 쏟고 성실하게 이행하려고 스스로 훈련한다. 그렇지만 그 상태에서도 그 의무로 인해 생기는 결과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 단계를 완벽하게 수행하여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욕망하거나 혐오하지 않게 되면 카르마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상이나 데바찬계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게 된 그는 지상에도 데바찬계에도 이끌리지 않는다. 그 두 세계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와 두 세계 간의 모든 연결고리는 끊어진다. 새로운 카르마의 생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개인의 카르마는 이런 식으로 중단된다.
하지만 혼은 새로운 카르마를 만드는 것을 중단해야 할 뿐 아니라, 오래된 카르마도 제거해야 한다. 이 오래된 사슬은 서서히 닳아 없어지거나 의도적으로 끊어내야 한다. 의도적으로 카르마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식견이 필요하다. 과거를 돌아보고 과거에 발생하여 현재 결과를 내고 있는 원인들을 볼 수 있는 식견 말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여러 전생을 되돌아보다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어떤 사건에 대한 원인을 발견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이 원인이라는 것이 자신을 다치게 한 일 때문에 갖게 된 증오에 대한 생각이며, 그 원인으로 인해 가해자가 1년 후에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새로운 원인을 만들어 내어 과거에 생겨난 원인과 뒤섞이도록 할 수 있다. 또한 사랑과 호의에 대해 열심히 생각함으로써 과거의 원인들을 상쇄시키고, 과거의 원인들이 필연적 결과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그 필연적 결과는 차례가 되었을 때 새로운 카르마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과거에서 나온 힘과 크기는 같지만 방향은 반대인 힘을 내보내어 과거의 힘을 상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식견을 통해 카르마를 불태울 수 있다. 현생에서 만들어져 보통의 경우 미래의 생에서 발현되는 카르마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멈출 수 있다.
과거에 다른 혼에게 진 빚이나 의무, 잘못된 행동 때문에 방해를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식견을 이용해 이 세계에서든 나머지 두 세계에서든 그 혼들을 찾아 그들에게 봉사할 기회를 찾아야 한다. 그가 카르마 빚을 진 혼 중에 이번 생에 태어난 혼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혼을 찾아 빚을 갚음으로써 그냥 놔두면 그를 다시 환생하도록 하거나, 미래의 삶에서 방해가 될 끈으로부터 풀려나야 한다.
오컬티스트들이 하는 이상하고도 황당한 일련의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식견이 있는 오컬티스트가 어떤 사람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제3자나 못마땅한 사람이 보기에는 그 사람이 이 오컬티스트와 교제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이때 그 오컬티스트는 가만히 놔두면 자신의 진화를 방해하거나 지체시킬 카르마적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생을 돌아볼 수 있는 정도의 식견이 없는 사람도 현생에서 만들어낸 여러 원인을 소진시킬 수 있다. 먼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고, 자신이 어디에서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질렀는지, 혹은 누군가가 어디에서 자신에게 잘못을 저질렀는지 확인한다.
첫 번째의 경우에는 사랑과 봉사에 대한 생각을 쏟아내고, 물질계에서라도 가능하다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봉사하여 카르마를 상쇄한다. 두 번째 경우에는 용서와 호의를 생각으로 내보낸다. 그러면 카르마의 채무가 사라져 해방의 날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
악에도 선으로 응하라는 모든 위대한 종교적 스승의 계율에 복종하는 독실한 사람들은 현생에서 만들어져 미래에 결과를 맺게 될 카르마를 소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증오의 끈을 맺지 않겠다고 거부하면서, 끈질기게 모든 증오의 힘을 사랑의 힘으로 상쇄시킨다면, 아무도 이들과 증오의 끈을 맺을 수 없다. 어떤 혼이 모든 방향으로 사랑과 연민을 발산한다면 증오에 대한 생각은 그 무엇과도 연결될 수 없다.
"이 세상의 왕이 올 것이나 나와는 관계할 것이 없도다."(요한복음 14장 30절ㅡ옮긴이 주)
모든 위대한 스승은 이 법칙과 이 법칙에 기초한 계율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율을 숭배하여 그들의 가르침에 복종하는 이들은 그 법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자세하게 알지 못해도 그 법칙에 따라 복을 받는다. 무지한 사람도 과학자가 알려준 지침을 충실하게 실행하면 그 원리를 모르더라도 자연 법칙에 따라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물질계를 넘어서는 세계에서도 이 원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공부 할 시간이 없어서 전문가들이 알려주는 일상생활의 규칙을 억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카르마 빚을 갚게 된다.
모든 농사꾼과 노동자가 환생과 카르마를 당연하게 여기는 나라에서는 불가피한 여러 문제도 조용히 받아들이는 성향이 있어서 결국 일상생활에 대해서도 침착하고 만족스러운 태도를 갖게 된다. 엄청난 불운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이나 이웃을 욕하는 대신 자신의 고통이 과거의 실수나 잘못된 행동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여긴다. 체념하듯 불운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이용한다.
그 결과 카르마의 법칙을 모르는 사람들은 걱정과 불안으로 전전긍긍하면서 이미 심각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지만, 카르마의 법칙을 아는 이는 그런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난다. 그는 미래의 생이 자신의 노력에 달려있으며, 자신이 선한 씨앗을 부린다면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카르마의 법칙이 미래에는 틀림없이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임을 깨닫는다.
따라서 삶에 대한 철학적 시각과 인내심이 커지면 사회 안정과 전반적인 만족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된다. 가난하고 무지한 이들은 심오한 형이상학을 자세히 공부하지 않아도 이런 단순한 원리 ㅡ 모든 사람이 몇 번씩 환생하고 이전의 생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는 원리 ㅡ 는 제대로 이해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환생은 해가 뜨고 지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고 불가피한 것이다. 환생은 자연의 섭리 중 일부이며, 환생에 대해 불평하거나 저항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신지학이 이런 고대의 진리를 서구의 정신 속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되돌려 놓으면, 이 진리는 모든 기독교 국가의 모든 사회 계급 안에서 서서히 빛을 발하면서 삶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과거가 가져오는 결과를 받아들이도록 해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삶이란 알 수 없는 것이고 불공평하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짜증스럽고도 무력한 느낌에 기인하는 끝없는 불만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불만이 있던 자리에 깨달음을 얻은 지력과 카르마 법칙에 대한 식견에서 생겨난 조용한 강인함과 인내심이 들어설 것이다.
이런 조용한 강인함과 인내심은, 자신이 다음 생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활동을 통해 보여주는 특징이기도 하다.
10장
희생의 법칙
카르마의 법칙을 익힌 후에는 자연스럽게 희생의 법칙을 공부하게 된다. 어느 대스승도 희생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 카르마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세상에 필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로고스는 우주가 발현되도록 자기희생이라는 행동을 통해 현현했고, 우주는 희생을 통해 유지되며 인간은 희생을 통해 완성에 도달한다.105
그러므로 고대의 지혜로부터 탄생한 모든 종교는 희생을 중요하게 가르치며, 오컬트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 중 일부는 희생의 법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로고스의 희생에 대해 조금이라도 파악하고 나면, 희생이란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일반적인 통념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희생의 본질은 바로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생명을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쏟아 붓는 것이다.
따라서 희생하는 이의 본성 속에 불화가 있을 때, 다시 말해 주는 것을 기뻐하는 상위 본성과 붙잡아 쥐고 있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는 하위 본성 사이에 불화가 있을 때만 고통이 발생한다. 고통이라는 요소가 나타나는 이유는 오직 불화 때문이며, 지고의 완성인 로고스 안에서는 어떤 불화도 일어날 수 없다.
유일자는 존재의 완벽한 화음이자 하나의 음에 모두 맞추어진 무한하고 아름다운 선율의 화합이며, 그 안에서 생명과 지혜, 지복이 합쳐져 '존재'라는 하나의 으뜸음이 된다.
로고스의 희생은 현현하기 위해 자신의 무한한 생명을 자발적으로 제한한다는 데에 있다. 상징을 이용해 표현하자면, 모든 곳이 중심이고 주변은 아무 데도 없는 무한한 빛의 바다에서 살아있는 빛의 아주 둥근 구, 즉 로고스가 나타나는데 그 구의 표면은 현현하고자 자기 자신을 제한하는 그의 의지이자 그 안에서 우주가 형체를 갖추도록 자기 자신을 에워싸는 장막106이다.
희생의 목적이 되는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의 미래의 존재는 오직 로고스의 '사고' 안에 있다. 그것을 틴생시키는 것도 이후에 여러 삶을 부여하는 것고 로고스이다. 로고스의 생명의 불꽃과 로고스의 이미지로 진화하는 능력을 부여받은 다양한 형체가 현현하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형체를 갖춘 신의 자발적인 희생이 없었다면 '부분이 없는 브라만' 안에서 다양성은 탄생할 수 없었다.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존재의 탄생을 낳은 최초의 희생은 행동(카르마)이라 부른다"고 전한다.107 자존(自存)이라는 완벽한 지복의 휴식 상태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한 것은 언제나 로고스의 희생으로 인정받았다. 이 희생은 우주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 계속된다. 로고스의 생명은 모든 분리된 '생명'의 유일한 버팀목이고, 로고스는 자신의 생명을 자신이 탄생시키는 수많은 각각의 형체 안에 묶어두기에 각각의 형체 안에 내재하는 제약과 한계를 갖는다.
이 무한한 주(主)는 언제라도 이 많은 형체 중 어느 하나로부터 갑자기 튀어나와 은총으로 우주를 가득 채울 수 있다. 그러나 각 형체가 로고스처럼 경계 없는 힘의 독립적인 중심이 되려면, 숭고한 인내와 느리고도 점진적인 확장을 통해서만 위로 올라갈 수 있다.
따라서 로고스는 자신을 형체 안에 가두면서 완성이 이루어질 때까지 모든 비완성을 품는다. 그리고 그의 피조물은 그와 함께 하는 이와 그를 닮았지만 기억은 자신 고유의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스의 생명을 형체에 쏟아 붓는 것은 원(原)희생의 일부이며 그 안에는 자식들을 독립된 생명으로 내보내는 불멸의 아버지의 지복이 들어 있다.
또한 이 독립된 생명체들이 각자 결코 사라지지 않는 정체성을 진화시키고 자신만의 음과 다른 이들의 음이 어우러지게 하여, 지복과 지성과 생명의 영원한 노래는 점점 더 커진다. 바로 이것이 희생의 본질이다. 핵심적인 개념 속에 다른 요소들이 섞인다 해도 변하지 않는 본질이다.
희생이란 자발적으로 생명을 쏟아내어 다른 이들이 그 생명을 나눠 가진 뒤 혼자 설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이 생명 안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성한 기쁨의 한 가지 표현방식에 불과하다. 행위자의 능력을 표현하는 활동을 할 때는 항상 기쁨이 따른다.
새는 노래를 부르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고 그 노래가 주는 황홀감에 몸을 떤다. 화가는 천재적 작품을 창조하고 자신의 생각을 형체로 표현하는 데에서 기쁨을 느낀다. 신성한 생명의 본질적 활동은 베푸는 것이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더 높은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존재가 활동한다면 ㅡ 그리고 현현한 생명이 활동적인 움직임이라면 ㅡ 그 존재가 자신을 쏟아 내야 한다.
따라서 영의 상징은 베푸는 것이다. 영은 모든 형체로 나타나서 활동하는 신성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물질의 본질적 활동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생명의 진동을 받아들여 형태로 만들어지고, 생명의 진동을 받아들여 그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생명의 진동이 오지 않으면 형태는 조각나버린다. 물질의 모든 활동은 이렇게 받아들이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물질은 받아들임으로써만 하나의 형태로서 지속될 수 있다.
따라서 물질은 항상 자신의 것을 움켜쥐고 들러붙고 붙잡으려 한다. 형체가 오래 유지되려면 움켜쥐고 놓지 않는 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질은 가능한 모든 것을 자기 내부로 끌어들이려 하고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가는 모든 조각을 붙잡으로 한다. 물질은 붙잡고 붙드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고, 붙잡은 것을 내놓는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희생은 고통'이라는 등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신성한 생명은 베푸는 활동을 통해 기쁨을 얻고, 형태로 체화된 상태에서도 베푸는 활동으로 인해 그 형태가 소멸되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형태란 일시적인 표현 방식이자 개별적인 성장을 위한 방편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형태는 자신의 생명력이 쏟아져 나가는 것을 느끼면 분노에 가득 차 울부짖으면서, 붙잡으려 애쓰고 결국 밖을 향한 생명력의 흐름을 저지한다. 희생은 형태가 자신의 것이라 우기는 생명 에너지를 약화 시키거나, 심지어 그 에너지가 완전히 빠져나가게 하여 형태가 소멸하도록 놔두는 것이다.
형태의 하위 세계에서는 이것이 인식 가능한 희생의 한 단면일 뿐이며, 형태는 자신이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있음을 알고 두려움과 괴로움으로 울부짖는다. 형태로 인해 눈이 멀어버린 인간이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러 왔으니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기쁨에 겨워 외치며, 자신을 내어주는 자유로운 생명이 아니라 괴로움에 빠진 형태를 희생과 동일시하는 것도 당연하다.
또한, 상위 본성과 하위 본성을 의식하고 있으나, 자신의 자의식을 상위 본성보다는 하위 본성과 종종 동일시하는 인간이 하위 본성인 형태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상위 의지에 굴복하여 고통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며 체념하듯 경건하게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희생이라고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인간이 형태가 아닌 생명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까지는 희생 안에서 고통이라는 요소를 제거할 수 없다. 그러나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실체 안에는 고통이 자리 잡을 곳이 없다. 형태는 생명의 완벽한 매개체로서 이미 정해진 합의에 따라 받아들이거나 항복하기 때문이다.
힘겨운 몸부림이 멈추면 고통도 멈춘다. 고통은 불화, 마찰, 적대적인 움직임에서 생겨나고, 자연 전체가 완벽한 조화 속에서 작동하면 고통을 일으키는 조건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생의 법칙은 우주의 생명진화의 법칙이다. 우리는 진화라는 사다리의 모든 단계에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생명은 상위 형태를 탄생시키기 위해 자신을 쏟아 붓고, 그 생명을 담았던 형태는 소멸한다.
소멸하는 형태만 보는 사람들은 자연이 거대한 납골당이라고 생각 한다. 반면, 불멸의 혼이 형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위 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상위 세계로 올라가는 생명에게서 흘러나오는 즐거운 탄생의 노래를 듣는다.
광물계의 모나드는 식물을 탄생시키고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형태를 깨뜨림으로써 진화한다. 광물이 분해되는 것은 그 광물로부터 식물-형태가 만들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식물은 흙으로부터 영양 성분을 끌어 모아 분해한 후 자신의 구성 요소로 포함시킨다.
광물 형태가 소멸하는 것은 식물-형태가 성장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광물계에 각인된 이 희생의 법칙은 생명과 형태의 진화 법칙이다. 생명은 앞으로 나아가고 모나드는 진화하여 식물계를 탄생시킨다. 하위 형태가 소멸해야 상위 형태가 탄생하고 유지되는 것이다.
식물계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반복된다. 동물 형태가 태어나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 식물-형태가 희생하기 때문이다. 모든 곳의 풀, 곡물, 나무가 동물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소멸한다. 풀, 곡물, 나무의 조직이 분해되고, 이들을 구성했던 광물은 동물에게 흡수되어 그 동물의 몸을 구성한다. 희생의 법칙은 식물계에도 각인되어 있다. 형태가 소멸하는 대신 생명은 진화한다. 모나드는 진화하여 동물계를 만들어내고, 식물이 제물로 바쳐진 결과 동물 형태가 생겨나고 유지된다.
지금까지 고통이라는 개념은 희생이라는 개념과 큰 연관 관계가 없었다. 앞에서 배웠다시피 식물의 아스트랄체는 제대로 조직되어 있지 않아서 쾌락이나 고통이라는 극심한 감각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희생의 법칙이 동물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면, 형태가 분해될 때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연 세계에서 한 동물이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될 때 일정량의 고통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각 사례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쨌든 고통이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이 동물의 진화를 돕는 과정에서 고통의 양을 크게 늘렸고, 육식 동물의 포식 본능을 약화시키기보다 강화시켰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본능을 심은 것은 인간이 아니다. 물론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 본능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또한 인간과 아무 상관이 없는 진화 과정에서 수없이 다양한 동물이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히면서 광물계나 식물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형태가 다른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희생되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인간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계속되었고, 그 투쟁을 통해 생명과 형태의 진화가 빨라졌다.
그러는 동안 형태가 파괴될 때 동반되는 고통은 모든 형태의 일시성, 그리고 소멸하는 형태와 지속되는 생명의 차이를 진화하는 모나드에게 각인시키는 기나긴 작업에 착수했다.
인간의 하위 본성도 하위 세계와 같은 희생의 법칙에 따라 진화했다. 하지만 인간 모나드를 낳은 신성한 생명이 밖으로 쏟아지면서 희생의 법칙이 생명의 법칙으로 작동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인간 안에서 의지와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주도하는 에너지가 발달하면서, 이 새롭고 본질적인 힘을 무력화하지 않는 이상 하위 세계를 진화의 길로 몰아넣었던 식의 강요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광물이나 식물, 동물에게는 희생의 법칙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생명의 법칙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법칙은 외부로부터 부과되었으며, 그들이 벗어날 수 없는 강제에 따라 그들의 성장을 강요했다. 그러나 인간은 분별력과 자의식이 있는 지성의 성장에 필요한 선택의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의문이 생겨났다.
"인간은 고통을 꺼리는 민감한 유기체이고 지각 있는 형체가 분해되면 고통이 따르기 마련인데, 어떻게 선택의 자유를 가진 인간이 희생의 법칙을 따르겠다고 선택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인간이 영겁의 시간 동안 여러 경험을 하면서 결국 희생의 법칙이란 근본적인 생명의 법칙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인간이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혼자 애쓴 것은 아니다. 신성한 스승들이 인간의 유아기에 인간의 곁을 지켰고,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희생의 법칙을 분명하게 가르치면서 인간의 초기 지성을 훈련시킬 때 이용했던 여러 종교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 속에 그 법칙을 포함시켰다.
이 아동기의 혼들에게 가장 갖고 싶은 대상 또는 형태 안의 생명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대상을 아무 대가없이 포기해야 한다고 어느 날 갑자기 요구했다면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이 혼들은 자발적 자기희생이라는 경지에 조금씩 가까워지도록 인도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그들이 고립된 개체가 아니고 커다란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 그리고 그들의 생명이 위와 아래에 있는 다른 생명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물질계에서의 그들의 생명은 흙이나 식물과 같은 하위 생명의 도움을 받아 유지되었기에, 그들은 이런 것들을 섭취했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갚아야 하는 빚을 지게 되었다. 다른 존재가 희생한 생명 위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차례가 되면 다른 생명을 위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 다른 존재들이 그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듯이 그들도 또 다른 존재에게 영양분을 공급해야 한다.
물질계의 자연을 인도하는 아스트랄 실체의 활동으로 생산된 과일을 먹는 그들은 적당한 재물을 찾아서 소진된 힘을 보충해야 한다. 따라서 여러 종교에서 항상 가르쳤듯이, 이러한 힘 혹은 물질계의 질서를 이끄는 이러한 지성에게 바칠 제물이 필요했다.
불이 조밀체를 재빨리 분해하면 불에 탄 제물의 에테르 입자는 에테르로 되돌아간다. 그 결과 아스트랄 입자도 자유로워져 지상의 풍요와 식물의 성장에 관여하는 아스트랄 실체에게 흡수된다. 따라서 생산의 수레바퀴는 계속 돌아가고, 인간은 자신이 앞으로 계속 갚아야 할 빚을 자연에게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속에 의무감이 심어졌고 그 의무감은 점점 커져갔다. 자신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자연에게 빚을 졌다는 의무감이 그의 사고에도 각인되었다.
이 의무감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빚을 갚는다는 생각, 그리고 계속 풍요롭게 살고 싶은 바람을 이루기 위해 빚을 갚는다는 생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단계의 인간은 첫 가르침을 받는 아동기의 혼에 지나지 않았으며, 생명들이 서로 의지하고 있고 각각의 생명이 다른 생명의 희생에 의지하고 있다는 이 가르침은 인간이 성장하는 데에 매우 중요했다. 그는 아직 베푸는 행동이 주는 신성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형태가 자신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어떤 존재를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은 마음부터 먼저 극복해야 했다. 희생이란 중요한 무언가에 대한 포기, 의무감에 못 이긴 포기, 계속 풍요롭게 살고 싶은 욕망과 동일시되었다.
그 다음의 가르침을 통해 희생에 대한 보상은 물질계 너머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일단 물질적 소유물을 희생하면 물질적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물질적 소유물을 희생하면 천상이나 죽음의 반대편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인간이 희생했을 때 받는 보상은 고차원적인 것이었고, 그는 비교적 일시적인 것을 희생하여 비교적 영원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분별력 있는 지식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형태는 물질계의 대상에 집착하는 대신 천상의 즐거움에 집착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든 대중 종교에서 현자들이 이런 교육적인 과정에 의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현자들은 너무나 현명하기에 아동기의 혼들이 보상도 없는 영웅적 행동을 하거나 만족을 느낄 것이라 기대하지 않고,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서 거침없이 비난을 쏟아내는 그 혼들을 달랜 후 하위 본성을 행한 가시밭길로 천천히 인도했다.
인간은 점점 육체를 종속시키도록, 그들의 본성에는 부담이 되기도 하는 종교 의식을 매일 규칙적으로 수행하여 태만을 이겨내도록, 쓸모가 있게 활동을 조정하도록 배웠다. 또한 형태를 정복하여 생명에 복종하도록 하며 몸이 정신의 요구에 복종하여 선하고 자비로운 활동을 하도록 훈련받았다.
물론 이때에도 정신은 천상에서 보상을 누리고 싶다는 욕망의 지배를 주로 받는다. 인간은 자신의 다양한 의무를 인식하고, 조상에 대한 복종과 존경이라는 순종적 희생에 몸을 맡기며, 예의바르게 자비를 베풀고 모두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인도인과 페르시아인, 중국인들도 받았다고 한다.
인간은 서서히 높은 수준의 영웅적 행위와 자기희생을 진화시키도록 배웠다. 이는 신앙을 부인하거나 교리를 배반하는 대신, 자신의 몸을 기꺼이 고문과 죽음에 내맡긴 여러 순교자의 예에서도 나타난다. 진정 그들은 물질적 형태의 희생에 대한 보상으로 천상에서의 '영예로운 왕관'을 원했다. 그러나 물질적 형태에 대한 집착을 극복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실존하는 세계로 만들어,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다음 단계를 마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있다. 일단 의무김이 확실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세상에서 받게 되는 보상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더 높은 것을 위해 더 낮은 것을 희생하는 것이 옳다고 느껴져야 한다. 전체의 일부로서 어떤 빚을 지고 있는지 인식하고,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존재했던 형태가 이제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움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껴져야 한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인간은 희생의 법칙을 자연의 법칙으로 인식하고 자발적으로 그 법칙의 일부가 되기 시작한다. 또한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형태와 자기 자신을 개념적으로 분리하고, 진화하는 생명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그는 점차 형태의 모든 활동에 무관심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활동들이 '반드시 행해야 할 의무'일 때는 예외였다. 그리고 모든 활동이 세상에 빚진 생명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되 결과에 대한 욕망 때문에 그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앞에서 얘기했던 지점, 즉 그를 세 가지 세상에 집착하도록 하는 카르마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지점에 도달했고, 존재의 진화가 자신에게 어떤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의 바퀴는 돌아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바퀴를 계속 돌렸다.
그러나 희생의 법칙을 완전히 깨달은 인간은 의무가 의무로 혹은 '빚을 졌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멘탈계를 초월하여 더 높은 붓디계로 진입한다. 붓디계는 모든 자기가 하나로 느껴지고, 모든 활동이 별개의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에게 유용해지기 위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희생의 법칙이 진실하고 정의롭다고 머리로 인식하는 대신, 그 법칙을 즐거운 특권으로 느끼는 곳은 이 붓디계뿐이다.
붓디계에서 인간은 생명이 하나라는 사실, 로고스의 사랑이 자유롭게 쏟아져 나오듯이 생명도 영원히 흘러나온다는 사실, 별개로 존재하는 생명은 기껏해야 가난하고 비열한 존재이며, 그것도 아주 배은망덕한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 이곳에서는 마음 전부가 사랑과 숭배의 강력한 파도가 되어 로고스를 향해 솟아오르고, 로고스의 생명과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통로가 되기 위해 아주 기꺼이 자신을 포기한다.
로고스의 빛을 전달하고, 로고스의 연민을 알리며, 로고스의 세계에서 일하는 것만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삶으로 여겨진다. 인간의 진화를 앞당기고, 선법에 따르며, 세상의 무거은 짐을 일부라도 덜어주는 것이 주(主)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겨진다.
인간은 오직 붓디계에서만 세상의 구원자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그곳에서는 모두의 자기와 하나가 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류와 하나가 된 그의 힘과 사랑, 생명은 모든 개별적 자기에게로 흘러 들어 간다. 그는 영적인 힘이 되었고, 그의 생명을 세상에 쏟아 부음으로써 세상에는 더 많은 영적 에너지가 존재하게 된다. 물질계, 아스트랄계, 멘탈계에서 사용한 힘들이 이제는 희생이라는 하나의 행동 안에 모두 모여 영적인 에너지로 바뀐 다음 영적 생명으로 세상에 쏟아진다.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 에너지를 어느 계에서 자유롭게 놓아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동기다. 인간의 동기가 물질적 대상을 얻는 데에 있다면, 자유로워진 에너지는 물질계에서만 활동한다. 인간이 아스트랄 대상을 욕망한다면 그의 에너지는 아스트랄계에서 자유로워진다. 인간이 정신적 즐거움을 추구한다면 그의 에너지는 멘탈계에서 작동한다.
하지만 만약 인간이 자신을 희생하여 로고스의 통로가 된다면, 그의 에너지는 영계에서 자유로워지고 영적인 힘이 갖는 잠재력과 매서움을 발휘하면서 모든 곳에서 활약한다. 그런 인간에게 행동과 반응은 같은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시에 모든 것을 하며, 모든 것을 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높은 것과 낮은 것, 큰 것과 작은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는 채움이 필요한 곳은 어디나 채운다. 로고스는 모든 곳에서 그리고 모든 행동 안에서 다르지 않다. 그는 어떤 형태 속으로도 흘러들어갈 수 있고, 어떤 길로도 갈 수 있으며, 선택이나 차이를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그의 생명은 희생을 통해 로고스의 생명과 하나가 되었고, 그는 모든 것 안에서 신을 보고 신 안에서 모든 것을 본다.
그렇다면 장소나 형태가 어떻게 그에게 차이를 드러낼 수 있겠는가? 그는 더 이상 형태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자의식이 있는 생명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갖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지만 모든 것이 그에게로 흘러 들어간다. 그의 삶은 지복이다. 다시없는 행복인 주와 함께있기 때문이다. 형태를 이용하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으니 '그의 고통은 끝난 것이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희생의 법칙과 자신을 결부시킬 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멋진 가능성을 알고 있는 이들은, 희미한 윤곽만 보이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훨씬 전부터 그 자발적인 결부를 시작하고자 한다. 다른 심오한 영적 진리와 마찬가지로 희생의 법칙도 일상생활에 적용하면 매우 실용적이다.
그 법칙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 법칙에 따를 것인지 망설이지 않는다. 인간이 희생을 실천하겠다고 작정하면 하루하루를 희생이라는 행동으로 여는 자기 훈련을 하게 된다. 그 날 해야 할 일이 시작되기 전에 자신에게 생명을 나누어주신 그분께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그가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자신의 모든 힘과 능력을 자신의 주(主)에게 바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일상생활 속의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행동이 희생이 된다. 결과를 위해서도 아니고 의무이기 때문도 아니며, 그 순간에 자신의 주에게 봉사하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은 주의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즐거움, 고난, 불안, 성공, 실패는 모두 봉사의 길을 알려주는 신호로 여겨 환영한다.
즐거움, 고난, 불안, 성공, 실패가 다가올 때마다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제물로 바친다. 그리고 그것이 떠나갈 때마다 기쁘게 놓아 준다. 떠나간다는 것은 주가 더 이상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힘과 능력이 있다면 그 어떤 힘과 능력이라도 기꺼이 주를 위해 사용한다. 그러다가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를 행복하고 침착하게 받아들인다. 힘과 능력이 없어지면 내어주지 못한다. 과거의 원인으로부터 발생했으나. 아직 소진되지 않은 고통조차도 기쁘게 받아들이면 자발적 희생으로 변할 수 있다. 그 고통을 원하여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은 그 고통을 영적인 힘으로 바꾸어 하나의 선물로 바치게 된다.
모든 인간의 삶에는 희생의 법칙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무수히 많이 있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붙잡아 이용하면 모든 인간의 삶은 하나의 힘과 능력이 된다. 개어있는 의식을 전혀 확장시키지 못하는 인간은 영적 세계에서 노동자가 되고, 그가 자유롭게 풀어놓은 에너지는 하위 세계로 쏟아진다.
몸속에 갇혀 있는 하위 의식 속에서 자신을 내려놓으면, 진정한 자기인 모나드의 작은 붓디로부터 생명의 반응 진동을 불러내어 모나드가 영적 자아가 되는 시기를 앞당긴다.
이 영적 자아는 자력으로 움직이며 자신의 모든 매개체를 지배하면서, 해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각각의 매개체를 마음대로 이용한다. 희생의 법칙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법 외에는, 진화를 빠르게 진행시키고 모나드 안에 잠재되어 있는 모든 힘과 능력을 빨리 끌어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
따라서 어느 대스승은 희생의 법칙을 '인간을 위한 진화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이 책에서 다루는 어떤 내용보다도 더 근원적이고 신비로운 이 법칙은 평생 희생하며 꾸준히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그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고요함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있고, '침묵의 소리'를 통해서만 소리 낼 수 있는 가르침이 있는 법이다. 이런 가르침 중에서도 더욱 심오한 진리는 '희생의 법칙'에 뿌리를 두고 있다.
11장
인간의 진보
어떤 이는 이미 올랐고, 어떤 이는 지금도 오르고 있는 이 오르막길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상상력을 동원해 그 길을 훑어보면, 그 기나긴 여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지쳐서 움찔하기 쉽다. 가장 미개한 이의 배아기 혼에서부터 신성한 인간의, 해방을 맞아 승리를 만끽하는 완벽해진 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의 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다른 이 안에서 표현되는 모든 것을 이미 그 안에 가지고 있는데, 그런 차이는 진화 단계의 차이일 뿐이라는 사실, 어떤 이는 진화의 시작 단계에 있지만 다른 이는 그 오르막길의 끝에 이미 다다랐다는 사실은 잘 믿기지 않는다.
어떤 이는 아래에 동물, 식물, 광물, 엘리멘탈 에센스 등 인간 이하의 존재가 길게 늘어서 있고, 또 어떤 이는 위로 초한(chohan: 산스크리트로 '주(主)'라는 의미ㅡ옮긴이 주), 마누스(Manus: 인도 전설에 따르면 인류의 조상으로 법의 제정자. 인간에게 형태를 부여하는 임무를 가짐ㅡ옮긴이 주), 붓다, 건설자, 리피카 등의 초인들이 끝없이 늘어서있다. 이 대단한 존재들은 워낙 많아서 수를 세거나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울 정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다 거대한 삶 속의 한 단계를 들여다보면, 인간계 내부의 많은 계단은 하나의 좁은 영역으로 줄어든다. 그리고 인간의 진보는 엘리멘탈 에센스에서 현현한 신으로 이어지는 여러 삶의 진화 속에서 하나의 작은 과정일 뿐이다.
우리는 감각의 삶에서부터 사고의 삶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진화 단계를 거치면서 배아기 혼으로 등장해 영적으로 발전한 상태에 도달하는 인간의 진보를 살펴보았다. 인간이 세 가지 세계에서 탄생과 죽음의 과정을 거치는 것도, 각 세계가 그에게 결과물을 건네주고 진보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보았다.
이제는 인간 진화의 마지막 몇 단계에 들어서는 그를 따라가 볼 차례다. 인류의 대다수는 미래에 이 단계를 맞이하겠지만, 가장 먼저 태어난 자녀들은 이미 그 단계들을 거치기도 했고 현재 그 단계를 지나고 있는 이도 있다.
이 단계들을 크게 두 개의 제목 아래 분류하면 하나는 '견습의 길'이라 할 수 있고, 나머지는 '실제의 길' 혹은 '제자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이 두 가지 경로를 순서대로 살펴보겠다.
지적ㆍ도덕적ㆍ영적 본성이 진화함에 따라 인간은 인간의 삶의 목적에 대해 점점 더 의식하게 되고, 자기가 직접 그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열망도 점점 더 커진다. 지상의 즐거움을 반복적으로 갈망하고 충만한 열정을 만끽하다가 권태를 느끼게 된 인간은, 점차 지상에서의 선물이 일시적이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는다.
그는 무언가를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서 실제로 그것을 손에 넣고 즐기다가, 결국에는 그것에 질린 나머지 불쾌감까지 느끼는 일을 여러 번 겪고 나서야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등을 돌린다. 지쳐버린 혼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라며 한숨을 내쉰다.
"모든 것이 헛되고 성가시다.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이나 소유했지만 그 안에서 결국 찾은 것은 실망뿐이다. 이런 즐거움은 상상 속의 색깔과 무지개 빛깔을 띤 개울의 물거품처럼 환상에 불과해서 만지면 바로 터진다. 나는 현실을 원한다. 그림자는 충분히 보았다. 나는 영원하고 진실한 것을 갈망한다. 나를 둘러싼 온갖 제약, 이렇게 모든 것이 변화하는 가운데 나를 죄수로 가둬둔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자유를 향한 혼의 첫 번째 외침은 이 지상이 모든 시인이 꿈꾸었던 모든 것이라 해도, 모든 악이 씻겨 나간다 해도, 모든 슬픔이 끝난다 해도, 모든 기쁨이 커진다 해도, 모든 아름다움이 자라난다 해도, 모든 것이 완벽의 지점에 도달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지상 세계가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고 욕망의 공허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다.
지상은 그에게 감옥이 되었다. 감옥을 아무리 예쁘게 장식한다 해도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벽 밖의 자유롭고 제약 없는 공기다. 그렇다고 천국이 지상보다 더 매력적인 것도 아니다. 그는 천국도 지긋지긋하다. 천국에서의 기쁨도 그에게는 매력이 되지 못하고, 천국에서의 지적ㆍ감정적 환희도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다.
그런 환희도 결국에는 감각적 접촉처럼 '잠깐 왔다가 가는' 것으로서 한계가 있고 일시적이며 만족을 주지 못한다. 그는 변하는 것들에 지쳤다. 그런 마음 때문에 해방을 부르짖는다.
처음에는 지상과 천국 모두 소용없다는 이런 깨달음이 의식 속에서 가끔씩 언뜻 스쳐가는 정도다. 외부 세계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서 그 세계가 주는 허황되고 화려한 기쁨이 혼을 만족으로 밀어 넣는다. 고귀한 작업과 이타적인 성취, 순수한 사고와 고결한 행동으로 가득 찬 상태로 여러 생을 지내고 나서야 현상적인 모든 것들이 덧없다는 깨달음이 영구적인 태도로 자리 잡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가 되었든 결국 혼은 지상과 천국이 자신의 요구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 두 세계와 결별한다. 그리고 일시적인 것과의 단호한 결별, 영원한 것에 가닿고 싶다는 단호한 의지는 '견습의 길'로 들어서는 관문이 된다. 혼은 진화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내려와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쪽을 택한다. 이는 지상과 천상의 삶에서 벗어나 더 높은 곳에 있는 자유에 가닿겠다는 결의에서 나온 결정이다.
견습의 길에 들어선 인간이 이루어야 할 것은 전적으로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대스승과 대면하기에' 적합한 정도까지 자신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의 대스승'이라는 말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지상에는 우리 인종에 속하면서 인간 진화를 이미 마친 존재들, 그리고 형제단을 구성하거나 우리의 발전을 인도하고 앞당긴다고 알려진 위대한 존재들이 있다.
이 위대한 존재들, 즉 대스승들은 인간과 초인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제자가 될 만한 조건을 갖춘 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인다. 대스승들의 목표는 받아들인 제자들의 진화를 앞당기고, 그들이 위대한 형제단에 참여해 인간을 위한 영예로운 선행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대스승들은 항상 인간들을 지켜보면서 혹시 덕행을 실천하거나, 인간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인 일을 하거나, 지적인 노력을 통해 인류에게 봉사하거나, 온 마음으로 헌신하고 독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간직함으로써 다른 인간들보다 앞서가거나, 인류 전체가 받는 것보다 훨씬 많은 영적 도움을 받을 자격을 갖춘 이가 있는지 찾는다.
어떤 개인이 인간의 진화를 받으려면 특별한 수용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대스승들은 인간의 진화를 돕는 영적 에너지를 나누어 주는 존재인데, 하나의 혼이 더 빨리 성장하도록 이런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에만 허락된다. 그 혼에게 빨리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어서 인류의 조력자가 되기에 적합하여 자신이 받은 도움을 인류에게 되돌려줄 수 있을 때에만 허락되는 것이다.
인간이 종교나 철학을 통해 자신이 받는 도움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의 노력으로 인간 진화의 최전방까지 도달하면, 그리고 사랑과 도움을 베풀고 자기보다 남을 우선시하는 성품을 보여주면, 인류를 지켜보는 수호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받게 되어 힘을 시험하고 직관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여러 기회가 주어진다.
그가 이런 기회를 잘 활용하면 추가적으로 도움을 받아 진정한 삶을 잠깐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다가 일상적 존재의 불만스럽고 비현실적인 성질이 혼을 조금씩 짓눌러 앞에서 말한 결과, 즉 자유를 갈망하고 견습의 길에 이르는 결과를 맞게 된다.
혼이 견습의 길에 들어서면 제자로서 견습 과정을 시작하게 된다. 어떤 대스승은 그를 직접 보살피면서 그를 진화의 고속도로에서 걸어 나온 인간으로 인정하고, 해방으로 향하는 가파르고 좁은 길에서 그를 인도할 스승을 찾아준다. 그 스승은 견습의 길로 가는 길목에서 그 혼을 기다린다. 초보 제자는 스승을 알지 못하지만, 스승은 제자를 알고 그의 노력을 지켜보며 발걸음을 인도하고 진화에 가장 적합한 상황으로 안내한다.
그러는 동안 스승은 어머니의 부드러운 배려심과 완벽한 통찰력에서 탄생한 지혜가 담긴 눈길로 제자를 지켜본다. 그 길은 외롭고 어두워 보이기에 어린 제자는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형제보다 가까운 친구'가 항상 근처에 있고, 감각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도움의 손길이 늘 곁에 있다.
견습 과정에 있는 제자가 반드시 습득해야 하는 네 가지 자격이 있다. 이 자격은 위대한 형제단이 지혜를 모아 완전한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 자격들을 완벽하게 갖출 필요는 없지만, 그런 자격을 추구하고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입문이 가능하다.
첫 번째 자격은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머리를 통한 이러한 구분이 어느 정도 가능한 상태이고, 바로 이 때문에 그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구분은 점차 선명해지면서 그의 머릿속에서 명료하게 정의되어, 그는 자신을 묶고 있는 족쇄로부터 서서히 해방된다.
두 번째 자격은 외부의 것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 무관심은 실재와 비실재를 구분하고 외부의 것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제자는 삶에서 모든 재미를 앗아가 버린 그 권태가 실재하지 않는 것에서 만족을 찾는 도중에 끊임없이 발생하는 실망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직 실재만이 그를 만족시킬 수 있는데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또한 모든 형태는 실재하지 않고 안정적이지 않으며 생명의 진동에 따라 항상 변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유일한 생명, 여러 겹의 베일 아래에 가려져 있는데도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생명을 제외하면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이런 분별력은 외부의 모든 것들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 빠르게 변하는 상황 속에 제자를 던져 넣는 방법을 통해 얻어진다. 제자의 삶은 일반적으로 폭풍우와 고난의 연속이다. 이는 보통의 경우라면 세 가지 세계에서 여러 삶을 살면서 진화했을 자질들이 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보다 빨리 완벽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제자는 기쁨과 슬픔, 평화와 소란, 휴식과 중노동 사이를 빠르게 오간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실재하지 않는 형태를 보고, 그 모든 것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생명을 느끼는 법을 배운다. 그는 그렇게 오고 가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에 점점 무관심 해지고, 그의 눈길은 항상 존재하며 변하지 않는 실재에 점점 머물게 된다.
그는 통찰력과 안정을 얻는 동시에 세 번째 자격을 키우는 데 힘 쓴다. 세 번째 자격이란 견습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그에게 요구되는 여섯 가지 속성이다. 이 속성들을 완벽하게 갖출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각각의 일부는 갖추고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첫째, 끊임없이 들썩이고 제멋대로 구는 정신의 자손이자 바람과 같아서 억제하기가 힘든108 사고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명상과 집중을 매일 연습하다보면 서서히 이 정신적 반란군을 길들일 수 있게 되어 견습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제자는 이제 에너지를 집중하여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이 빠르게 성장함에 따라 사고력도 엄청나게 커지는데, 그렇게 커지는 힘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경우 다른 이들과 자기 자신에게 위험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기적이고 야심으로 똘똘 뭉친 이들에게 창의적인 사고력을 밑기느니, 차라리 아이에게 다이너마이트를 장난감으로 쥐어주는 편이 낫다.
둘째, 어린 제자는 안으로 향하는 자제력과 더불어 밖으로 향하는 자제력도 키워야 하고, 사고를 통제하는 것만큼이나 말과 행동도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 정신이 혼에게 복종하듯이 하위 본성도 정신에게 복종한다. 바깥 세상에서 그 제자가 얼마나 쓸모 있는가는 겉으로 보이는 그의 삶이 얼마나 순수하고 고귀한 본보기를 마련하느냐에 달려있다.
마찬가지로 그가 내면의 세상에서 얼마나 쓸모 있느냐는 그의 사고가 얼마나 견실하고 강한가에 달려있다. 일을 잘해도 인간 활동의 이 하부에서 부주의하면 망치기 십상이다. 따라서 제자는 모든 면에서 이상적인 완벽을 추구하도록 요구받는다. 이는 견습의 길을 가는 동안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거나 적에게 모욕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단계에서는 무언가에 완벽하도록 요구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명한 제자는 자신이 아무리 잘해도 이상(理想)에서 멀리 떨어져 잇다는 사실을 알기에 완벽을 기하려 노력한다.
셋째, 온전한 제자가 되려는 이들은 관용이라는 숭고하고도 원대한 미덕을 자신 안에 쌓고자 한다. 모든 사람과 모든 존재 형태를 있는 그대로 차분하게 받아들이되,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에 가까워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유일한 생명이 수없이 많은 제한적 형태를 띤다는 사실과, 그 각각의 형태에 맞는 나름의 시간과 장소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그 생명이 갖는 각각의 제한적 표현 방식을 받아들이되, 그것을 다른 무언가로 변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을 설계하고 인도하는 지혜를 숭배하고 불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불완전한 부분들을 맑고 침착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천천히 배운다. 하위 본성의 지배를 받는 탓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정뱅이는 성자가 그렇듯 자신이 속한 단계에서 열심히 노력하며 지상 학교에서의 마지막 수업을 마친다.
주정뱅이나 성자가 수행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다. 주정뱅이는 유치원 단계에서 실물 교육을 받는 중이고, 성자는 대학을 졸업할 준비가 된 상태일 뿐이다. 주정뱅이와 성자 모두 자신의 나이와 장소에 적합한 상태에 있으며, 자신에게 맞는 장소에서 도움과 지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컬트에서 '관용'이라고 부르는 수업 중 하나다.
넷째, 인내심을 키워야 한다. 인내심이란 모든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견디고, 아무것에도 분개하지 않으며, 목표를 행해 흔들림 없이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다. 법칙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그에게 도달할 수 없으며, 그는 법칙이란 좋은 것임을 알고 있다. 또한 정상으로 곧장 오를 수 있는 험난한 산길이 잘 닦인 구불구불한 고속도로만큼 발에 편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과거의 삶에서 누적된 모든 카르마적 빚을 몇 번의 짧은 생에서 갚고 있으며, 그 빚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이 빠져있는 그 고난을 통해 다섯 번째 속성을 키우게 되는데 바로 믿음이다.
자신의 대스승에 대한 믿음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 고요하고도 강한 확신이다. 그는 지혜와 사랑, 대스승의 능력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단지 말로만 신성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복종시킬 수 잇는 신성이 자신의 안에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앞의 다섯 가지 속성을 얻고자 애쓰다보면 따로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마지막 여섯 번째 속성이자 정신적 필요조건, 즉 균형이 어느 정도 자라난다. 견습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가 섰다는 것 자체가 상위 본성이 열리고 있고, 외부 세계가 낮은 위치로 확실하게 밀려나고 있다는 신호다.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 덕분에 혼을 감각의 세계에 묶어두는 나머지 끈도 플리기 시작한다. 혼이 하위 대상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으면 이 대상들이 잡아당기는 힘도 조금씩 소진되기 때문이다. 이 대상들은 "몸 안의 금욕적 거주자"109를 외면하고 머지않아 이 균형을 방해하는 힘을 모두 잃고 만다.
그 결과 제자는 그런 대상들 사이에서 방해받지 않고, 그 중 어느것도 추구하거나 거부하지 않으면서 옮겨가는 법을 배운다. 또한 온갖 정신적 고민 가운데에서, 정신적 기쁨과 정신적 고통이 오가는 가운데에서 균형을 배운다. 또한, 앞에서 말한 바 있는, 대스승의 지속적인 보살핌 아래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겪게 되는 빠른 변화를 통해서도 균형을 배운다.
이 여섯 가지 속성이 어느 정도 갖춰진 견습 제자에게 필요한 것은 네 번째 자격, 바로 해방을 향한 깊고도 강렬한 갈망이자 자신의 완성을 약속하는 신과의 합일을 향한 혼의 동경이다. 이 자격이 갖춰지면 그는 제자의 길을 갈 준비가 완료된다. 해방을 향한 갈망은 일단 분명하게 드러난 후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그런 갈망을 느낀 혼은 지상의 분수로는 결코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
지상의 분수에서 내뿜는 물을 한 모금 마셔보면 맛이 밍밍하고 싱거워서 진정한 생명의 물에 대한 갈망이 점점 깊어질 뿐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입문을 위한 준비'를 마친 것이다. 지상의 삶이 보여주는 여러 흥미로운 관심거리와 그의 사이를 갈라놓는 물줄기 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된 것이다.
이때 그가 지상에서 관심을 두는 문제는 대스승을 따르고 인류의 진화를 앞당기도록 돕는 것뿐이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분리의 삶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인류의 제단 위에 올려놓고, 공동의 선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제물로 바친다.110
산스크리트어(힌두교도들이 사용) | 팔리어(불교도들이 사용) |
1, 비베카(Viveka): 실재와 비실재를 구별하는 분별력 | 1. 마노드바라바자나(Manodvara- vajjana): 정신의 문을 여는 것, 지상의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확신 |
2. 바이라캬(Vairagva): 실재하지 않고 일시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 | 2. 파리캄마(Parikamma): 행동에 대한 준비, 행동의 결과에 대한 무관심 |
3. 샤트삼파티(Shatsampatti) - 샤마(Shama): 사고의 통제 - 다마(Dama): 행동의 통제 - 우파라티(Uparati): 관용 - 티틱샤(Titiksha): 인내 - 슈라다(Shraddha): 믿음 - 사마다나(Samadhana): 균형 | 3. 우파차로(Upacharo): 관심 혹은 행동, 힌두교와 동일한 이름으로 분류 |
4. 무묵샤(Mumuksha): 해방에 대한 욕망 | 4. 아누로마(Anuloma): 자연적 순서 혹은 연속, 다른 세 가지를 갖추면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 |
이 네 가지를 갖추면 아디카리(Ad- hikari)의 상태가 된다. | 이 네 가지를 갖추면 고트라부(Go- trabhu)의 상태가 된다. |
이 네 가지 자격을 갖기 위해 진화하는 동안 견습 제자는 다른 여러 방면에서도 발전을 이룬다. 대스승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는데 그 가르침은 주로 몸이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전해진다. 잘 조직된 아스트랄체를 입고 있는 혼은 의식의 매개체인 그 몸에 익숙해지면 대스승에게 이끌려 여러 설명과 영적 깨달음을 얻는다.
명상 훈련도 받게 되는데, 육체 밖에서 이루어지는 이 효율적인 실천 방식을 통해 많은 상위 능력이 활기를 띠고 실제로 발현된다. 이런 명상을 하는 동안에는 존재의 상위 영역에 도달해 멘탈계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는 점점 커지는 능력을 인간을 위해 사용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육체가 잠든 시간에는 대체로 아스트랄계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죽음을 통해 그곳에 온 혼들을 돕고 사고의 희생자들을 위로하며, 자신보다 배움이 부족한 혼들을 가르치고 도움이 필요한 혼에게 수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도움을 준다. 그 결과 대스승의 자비로운 활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한 명의 조력자로서 숭고한 형제단의 활동에 미약하게나마 참여하게 된다.
제자는 견습의 길을 가는 도중이나 그 이후에 인간의 진보를 앞당기는 '포기'를 행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는다. '데바찬을 포기'하도록 허락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물질계에서 해방되었을 때 그를 기다리는 천상의 공간에서 누릴 수 있는 영예로운 삶, 중간 단계의 아루파 세계에서 대스승과 함께 숭고한 기쁨과 순수한 지혜와 사랑 속에서 지낼 수 있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고귀하고도 헌신적으로 살아온 덕분에 얻은 이 열매를 포기하면 데바찬에서 사용하기로 되어 있던 영적 힘이 자유롭게 풀려나 세상 전체를 위해 사용할 수 잇게 된다. 그리고 그는 아스트랄계에서 머물면서 머지않아 지상에서 다시 태어날 때를 기다린다.
그의 대스승은 그의 환생을 선택하고 관장하면서, 그 제자가 세상에 도움이 되면서도 스스로 발전하고 맡은 일을 잘 해나갈 수 있는 조건에서 다시 태어나도록 인도한다.
이 제자는 이미 모든 개인적 관심이 신성한 과업에 종속되는 단계에 도달했다. 이 단계에서 그의 의지는 어느 곳에 있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 열심히 봉사하는 것에 집중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신뢰하는 이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맡기고, 맡은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곳이 어디든 기꺼이 받아들이며, 인류의 진화를 돕는 영예로운 과업에서 자신의 몫을 다한다.
그런 혼이 깃든 아이가 태어나는 가족은 참으로 축복받은 것이다. 대스승이 항상 그 혼과 함께하고 언제나 지켜보고 인도하며, 그 혼이 하위 매개체를 빨리 통제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가끔은 제자가 발달이 덜 된 자아의 육체로서 영아기와 초기 아동기를 지난 몸으로 환생하는 경우가 있다.
자아가 지상에 와서 짧은 생애 동안, 가령 15에서 20년 정도 머문 후 성인이 되는 시점에 몸을 떠날 때가 있는데, 이때 몸은 초기 훈련을 마치고 혼의 효과적인 매개체로 빠르게 자리 잡아가는 중이다. 그런 몸이 아주 좋은 상태에 있고 적절한 환생 시기를 기다리는 제자가 있다면, 대스승은 원래 주인인 자아가 그 몸을 점유하는 동안 계속 지켜본다.
때가 되었을 때 그 몸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그 자아가 생을 마친 뒤 몸에서 벗어나 데바찬으로 가기 위해 카말로카로 향하면, 그 자아가 벗어놓은 몸은 기다리고 있던 제자의 소유물이 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세입자가 버려진 그 집에 들어가면 죽은 듯 보였던 몸이 되살아난다. 이런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지만, 오컬티스트들에게는 제법 알려져 있어서 오컬트 문헌에서는 이런 사례가 가끔 발견된다.
환생의 과정이 정상적이든 비정상적이든 상관없이 혼의 발전과 제자의 발전은 계속되고, 마침내 앞에서 말했던 입문의 준비를 마치는 시기가 찾아온다. 그는 제자로 확실하게 인정을 받아 입문이라는 관문을 통해 제자의 길에 오르게 된다.
이 길은 각기 다른 네 단계로 구성되며, 각 단계에 진입할 때마다 기초적인 지도를 받게 된다. 이 지도를 받으면 해당 단계에 속하는 '지식의 열쇠'를 주는 의식의 확장을 겪는다. 이 지식의 열쇠는 힘의 열쇠이기도 하다. 자연의 모든 세계에서는 지식이야말로 힘이기 때문이다.
제자의 길에 들어선 제자는 '집 없는 사람'111이 된다. 더 이상 지상을 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지상에 주소도 없으며, 대스승을 모실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환영하기 때문이다. 제자의 길에서 이 단계에 있을 때 전진을 방해하는 세 가지 요인이 잇다. 이것들을 전문 용어로 '족쇄'라 부르는데 제자는 이 족쇄들을 제거해야 한다.
이제 그가 한시라도 빨리 완벽해지고자 한다면, 인격의 결점을 모두 없애고 자신의 조건에 맞는 과업을 완전히 수행해야 한다. 두 번째 입문으로 넘어가기 전에 제자가 자신의 팔다리에서 떼어내야 하는 세 가지 족쇄는 개인적 자기(self)에 대한 환상, 의심, 미신이다.
제자는 개인적 자기를 의식 속에서 환상으로 느끼고, 그 환상이 혼에게 실제로 다가오려는 힘을 영원히 떨쳐내야 한다. 자신과 모든 것을 하나로 느끼고, 모든 것은 그의 안에서 살아 숨 쉬며 그는 모든 것 안에서 살아 숨 쉬어야 한다. 의심은 버리되 그냥 부수는 것이 아니라 앎을 통해 버려야 한다. 환생과 카르마와 대스승의 존재를 사실로 인식해야 한다.
이들을 지적인 필요에 의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확인한 자연 속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이들에 대한 의심이 다시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인간이 실재를 알고 자연의 질서에 부합하는 의식과 예식의 장소를 알게 되면 미신은 절로 사라진다. 모든 수단을 사용할 줄 알게 되고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법을 배운다.
제자가 이런 족쇄를 모두 끊으면 ㅡ 이 작업을 마치는 데 여러 생애가 걸릴 수도 있고 한 생애의 일부만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ㅡ 두 번째 입문 단계가 새로운 '지식의 열쇠'와 더 넓은 지평을 가지고 그를 기다린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지상에서의 의무적인 삶의 기간이 빠르게 줄어드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단계에 다다르면 현생이나 다음 생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 입문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112
이 단계에서 제자는 미묘체에 속하는 내면의 능력을 전부 발휘해야 한다. 존재의 상위 영역에서 봉사하려면 그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능력을 이미 개발했다면 이 단계는 매우 짧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죽음의 관문을 한 번 더 거쳐야 세 번째 입문을 시작하여 '백조', 혹은 최고천(最高天)으로 솟아오르는 개별적 존재, 혹은 수많은 전설에 등장하는 경이로운 생명의 새가 될 준비가 끝난다.113
제자의 길에서 세 번째 단계에 이르면, 제자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족쇄, 즉 욕망과 혐오감을 벗어던진다. 그는 모든 것 안에서 유일한 자기를 보며, 이제 좋든 나쁘든 외부의 장막이 눈을 가리는 일은 없다. 그는 모든 것을 공평한 눈으로 바라본다. 제자의 길을 가는 동안 소중히 여겼던 관용의 작은 싹이 이제 활짝 피어나 그 부드러운 품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감싸는 사랑이 된다.
그는 '모든 생명체의 친구'이자 모든 것이 살아있는 세계에서 '살았있는 모든 것의 연인'이다. 신성한 사랑의 살아있는 구현체인 그는 재빨리 네 번째 입문으로 넘어간다.
이 단계는 제자의 길에서 마지막 단계로서 제자는 '개별적 존재' 혹은 가치 있는 자 혹은 덕망 있는 자114를 넘어서게 된다. 여기서 그는 의지대로 머무르며 미약하나마 아직도 그를 얽어매면서 해방을 막는 마지막 미세한 족쇄를 벗어던진다. 또한 형태를 갖는 생명에 집착하는 모든 것을 떨쳐낸 다음 형태가 없는 생명에 대한 모든 갈망을 떨쳐낸다.
이 모든 것은 사슬이고 그는 사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는 세 가지 세계를 이동하겠지만 그 세상들의 어느 작은 조각 하나도 그를 붙잡지 못한다. '무형 세계'의 화려함도 유형 세계115의 찬란함도 그를 잡아끌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성과 중에서도 가장 대단한 성과로서 스스로를 다른 존재와 별개로 인식하는 '나-만들기' 능력,116 즉 분리라는 마지막 족쇄를 벗어던진다.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합일의 세계, 즉 모든 것의 자기가 일려져 있고 하나로 인식되는 붓디계에 계속 머무르기 때문이다. 혼과 함께 탄생한 이 능력은 개체성의 핵심으로서, 그 안의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이 모나드 안으로 편입될 때까지 계속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해방의 문턱 위에 떨어져 대단히 귀중한 결과를 모나드에게 남긴다. 그 결과란 너무나 순수하고 미세해서 하나가 되었다는 의식에 전혀 손상을 입히지 않는 개별적 자의식이다.
이제는 물결치는 접촉에 반응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쉽게 떨어져 나가고, 제자는 그 어느 것도 방해할 수 없는 불변의 평화라는 찬란한 옷을 입고 서있게 된다. '나-만들기' 능력을 떨쳐낸 결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흐릴 수 있는 마지막 구름이 영적 시야에서 사라지고, 합일의 깨달음 속에서 무지117 ㅡ 모든 분리를 탄생시키는 한계 ㅡ 가 떨어져 나가고 인간은 완벽하고 자유로워진다.
마침내 제자의 길이 끝났다. 제자의 길의 끝은 열반의 문턱이다. 그 길의 마지막 단계를 통과하는 동안 몸에서 벗어나는 데 익숙해진 제자는 놀라운 의식 상태로 접어든다. 이제 열반의 문턱을 지나면 열반의 의식이 그의 일상적 의식이 된다. 열반은 해방된 자기의 고향이기 때문이다.118
제자는 인간의 진보를 모두 마치고 인류가 이를 수 있는 한계까지 도달했다. 그의 위로는 강력한 존재들이 줄지어 있는데 그들은 초인들이다. 육체의 책형은 모두 끝났고 해방의 시간이 왔다.
승리를 알리는 "끝났다!"라는 외침이 정복자의 입술에서 울려나온다. 보라! 그는 문턱을 지나 빛의 열반 속으로 사라졌고, 지구의 또 다른 아들은 즉음을 정복했다.
이 천상의 빛이 가리고 있는 신비 중 우리가 모르는 것은 없다. 우리는 희미하게 느낀다. 지고의 자기를 찾았음을, 그리고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하나임을. 기나긴 탐색은 끝나고 가슴 속 갈증은 영원히 풀리고 그는 마침내 주(主)의 기쁨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땅은 자식을 잃고 인류는 승리를 거둔 아들을 잃은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그는 빛의 가슴으로부터 나와 열반의 문턱에 다시 선다. 그 자신이 빛의 구현체인 듯 보이며 누구보다도 영예로운, 현현한 신의 아들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은 땅을 향하고, 눈은 방화하는 인간의 아들들에 대한 신성한 연민으로 환히 빛나며, 그의 형제들은 아직 세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양치기 없는 양처럼 흩어져있는 그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다. 위대한 포기의 위엄을 몸에 두르고, 완벽한 지혜의 힘과 '끝없는 생명의 힘'으로 찬란한 그는 인류를 축복하고 인도하고자 지상으로 돌아온다. 지혜의 대스승이자 왕과 같은 스승, 신성한 인간으로.
이렇게 지상으로 돌아온 대스승은 제자의 길을 걸어올 때보다 더 강력해진 힘으로 인류를 위한 봉사에 헌신한다. 자신을 다 바쳐 인간을 돕고, 자신이 가진 모든 숭고한 힘을 세상의 진화를 앞당기는 데에 사용한다. 자신이 제자였던 시절에 진 빚을 그 길에 오르려는 사람들에게 갚는다. 그가 인도와 도움과 가르침을 받았듯이, 그들에게 인도와 도움과 가르침을 준다.
인간의 진보는 이와 같이 가장 낮은 미개한 단계에서부터 신성한 인간의 단계까지 이어진다. 그런 목적을 향해 오르는 인류는 그런 영광을 얻게 되리라.
12장
코스모스 건설
진화의 현 단계에서는 우리 지구가 작은 역할을 하고 있는 거대한 우주 계획 중에서 일부 사항만 대략적으로 지적하는 것 외에는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여기서 '코스모스(kosmos)'란 우리의 관점에서는 그 자체로 완전해 보이며, 하나의 로고스에서 나와 로고스의 생명력으로 유지되는 계(系)를 말한다.
우리 태양계도 이런 계 중 하나이고, 태양은 우주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로고스의 가장 저차원적 현현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형태가 로고스의 현현체이지만, 태양은 생명을 주고 활기를 북돋우며, 모든 것에 스며들어 모든 것을 통제하며 규제하고 조정하는 중심적 힘이다.
오컬트에서는 수리야(Surya: 태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눈에 보이는 상으로서의 태양은 첫 번째 상태 혹은 일곱 번째 상태 중 가장 낮은 상태, 보편적 존재의 최고의 상태, 순수한 것 중에 가장 순수한 것, 한 번도 현현하지 않았던 사트(Sat: 존재성)가 가장 먼저 현현한 숨이다. 중심에 있는 물리적 혹은 실재적 태양들은 본질적으로 숨의 첫 번째 본질 중 최하위 상태다.119 즉, 로고스의 '육체' 중 최하위 상태다.
모든 물리적 힘과 에너지는 태양계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주(主)라 할 수 있는 태양이 쏟아낸 생명이 변형된 상태일 뿐이다. 따라서 고대의 여러 종교에서는 태양이 지고의 신을 상징하는 존재, 다시 말해 무지한 자들의 오해를 살 여지가 가장 적은 상징이었다.
신지학자 알프레드 시네트(Alfred Sinnett) 씨는 이렇게 말한다.
- 태양계는 우리 인류가 발달시킬 수 있는 최고의 존재가 연구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포함하는 자연의 영역이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분명히 느낀다. 태양계 전체도 코스모스라는 대양의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지만, 그 안에서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우리의 의식이 보기에는 그 한 방울도 대양이라고. 또한 우리는 지금으로서는 그 대양의 근원과 구성을 막연하고 어슴푸레하게나마 밝혀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개념들은 어슴푸레할지는 몰라도 우리의 진화가 진행되는 하위 행성들을 태양계 안에서 적절한 곳에 위치하도록 하고, 우리 행성계 전체의 상대적 규모를 이해하도록 하며, 우리가 현재 활동하는 세계와 우리 인간이 관심을 갖는 진화의 각 시기를 파악하도록 해준다.120
아무리 막연하다 해도 우리와 전체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하면, 우리가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지 파악할 수 없다. 자신의 의무적인 세계 안에서 일하며 폭넓은 경험을 하다가 부름을 받은 후 그 영역에서 활동하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광범위한 계획이 필요하다고 느끼면서 위로 높이 올라가 진화의 전체를 내려다보는 것에서 지적 즐거움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이런 필요성을 인식하고 만족시키고자, 인류의 영적 수호자들이 오컬티스트의 관점에서 코스모스에 대해 참으로 뛰어난 설명을 내놓았다. 영적 수호자들의 제자이자 메신저인 블라바츠키 여사가 쓴『시크릿 독트린』은 고대의 지혜를 배우며 이 세상의 진화의 하위 단계를 탐색하고 파악하는 이들에게 보다 큰 깨달음을 안겨줄 것이다.
우리는 로고스의 등장이 우리 코스모스의 탄생 시점을 알려준다고 알고 있다. 로고스가 현현할 때 모든 것이 그를 따라 현현하며 그의 현현으로 이 모든 것이 현현한다.121
로고스는 과거의 코스모스의 열매, 즉 이제 건설될 우주에서 그의 동료이자 대리인이 될 강력한 영적 지성을 데리고 나타난다. 이 중에서도 가장 높은 것이 로고이(Logoi)라고도 불리는 '일곱 영'이다. 각자의 자리에 있는 그 일곱 영은 코스모스의 서로 다른 부문에서 중심을 차지하기 때문에 로고스는 전체의 중심이다. 앞에서 언급한 '일곱 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 태양 안의 일곱 존재는 모체-본질의 기반에 내재한 힘으로부터 다른 모습으로 스스로 태어나는 일곱 명의 성스러운 존재다. ··· 그들을 모든 태양 안의 의식적 존재로 만드는 에너지는 비슈누(Vishnu)라고도 불리는 절대성의 숨이다. 우리는 그것을 현현한 유일한 생명이라고 부르며, 그 자체로 절대적 존재의 상(像)이다.
이 '현현한 유일한 생명'이 로고스, 즉 현현한 신이다.
우리의 코스모스는 이런 일차적 분류에서 일곱 가지 성격을 띤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분류를 이어가다보면 이 일곱 종류가 반복된다. 이 2단계의 일곱 로고스 각각의 아래에는 로고스 왕국의 지배층을 형성하는 지성 계층이 있다.
그 중에는 로고스 왕국의 카르마와 그 왕국 안의 모든 실체에 대한 기록을 담당하는 리피카가 있다. 또한 카르마 법칙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지휘하는 마하라자 혹은 데바라자(Devarajas)도 있다. 보편 정신 속 로고스의 보물 창고 안에 있다가 로고스에서 일곱 영쪽으로 이동하는 관념을 본떠서 모든 형태를 만드는 다양한 건설자들도 있다.
이 일곱 영은 지고의 명령을 받아 자신의 영역을 설계하면서 모든 것에 영감을 불어넣는 동시에 고유의 색깔을 칠한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태양계를 구성하는 이 일곱 영역을 '일곱 라야 센터(laya center: 멘탈체와 원인체 사이에 있는 중간접촉점ㅡ옮긴이 주)'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일곱 라야 센터는 일곱 영점(零點)이다. 여기서 '영'이라는 용어는 화학에서 말하는 '영(0)'과 같은 의미로서, 밀교에서 차이를 계산하는 척도가 시작되는 지점을 나타낸다. 이 일곱 라야 센터로부터 우리 태양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구분이 시작된다. 우리는 밀교를 통해 이 일곱 라야 센터를 넘어서서 생명과 빛의 '일곱 아들', 혹은 밀교를 비롯한 모든 철학에서 말하는 일곱 로고이에 대한 형이상학적 윤곽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할 수 있다.122
이 영역은 엄청난 행성 진화의 장으로서 그 안에서 금성과 같은 물리적 행성의 삶의 여러 단계가 펼쳐지며, 그 물리적 행성은 그 여러 단계가 일시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혼돈을 피하기 위해 이 영역의 진화자와 통치자를 행성 로고스라고 부르자.
행성 로고스는 중앙의 로고스 자신이 쏟아낸 태양계의 물질로부터 필요한 조악한 질료를 끌어당긴 후 자신의 생명-에너지를 통해 정교하게 다듬는다. 따라서 각각의 행성 로고스는 공동의 저장고에서 가져온 자신의 영역의 물질을 전문적으로 다루게 된다.123
로고스의 왕국을 구성하는 일곱 계에서 원자 상태는 전체 태양계 중 하위 계의 물질과 동일하기 때문에 그 전체에서 연속성이 나타난다. 블라바츠키 여사가 말한 것처럼 원자는 "모든 행성에서 조합 등가물"을 변화시켜 원자 자체는 모두 동일하지만 그 조합은 달라진다. 블라바츠키 여사의 말을 들어보자.
- 우리 행성의 원소뿐만 아니라 태양계 안의 자매 행성들의 원소들도 그 조합은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코스모스의 원소가 태양계의 한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 각 원자는 존재의 일곱 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124 이 일곱 계는 위대한 각각의 계를 구성하는 하위 계이다.
행성 로고스는 진화하는 영역의 하위 세 개의 계 위에 일곱 개의 세계를 세운다. 편의상 그 일곱 세계를 A, B, C, D, E, F, G 라고 부르자. 이들은『드잔의 서』스탄차 6장에서 말하는 '서로를 탄생시키며 회전하는 일곱 개의 작은 바퀴'이다.
- 그는 그것들을 낡은 바퀴와 닮은 모양으로 만들어 결코 소멸하지 않는 중심 위에 올려놓는다.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이 중심이 소멸하지 않는 것은 각각의 바퀴가 다음 바퀴를 탄생시킬 뿐 아니라 동일한 중심에서 환생하기 때문이다.
이 일곱 세계는 타원의 둥근 호 위에 세 개의 쌍을 두고, 가장 아래 부분의 가운데에 중간 세계를 두는 식으로 배치할 수 있다. 첫 번째와 일곱 번째인 A와 G세계는 멘탈계의 아루파 단계에, 두 번째와 여섯 번째인 B와 F세계는 루파 단계에, 세 번째와 다섯 번째인 C와 E세계는 아스트랄계에, 네 번째인 D세계는 물질계에 배치하는 것이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이 일곱 세계가 "유형 세계의 하위 네 계에 배치되었다"125고 표현했다. 여기서 하위 네 계란 물질계와 아스트랄계, 그리고 멘탈계의 두 하위 영역(루파와 아루파)을 말한다.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126
아루파 | |||
루파 | |||
아스트랄계 | |||
물질계 |
이런 배치 방식은 매우 일반적이지만 진화의 특정 단계에서 바뀌기도 한다. 이 일곱 세계는 행성 고리 혹은 체인을 형성하고 ㅡ 우리가 잠깐 동안 이 행성 체인을 하나의 전체, 가령 하나의 실체, 행성의 생명 혹은 개인으로 간주한다면 ㅡ 이 체인은 진화하는 동안 서로 다른 일곱 단계를 거친다.
일곱 세계는 그 전체가 행성체를 형성하고 이 행성체는 행성의 생애 동안 일곱 번 분해되었다가 다시 형성된다. 행성 체인은 일곱 개의 구현체를 갖는데, 하나 안에서 얻은 결과는 다음으로 전달된다.
- 이런 세계의 체인 하나하나는 다른 죽은 하위 체인의 자손이자 창작품, 말하자면 그 죽은 체인이 환생한 것이다.127
이러한 일곱 번의 체화128 과정이 '행성 진화', 즉 행성 로고스의 영역을 구성한다. 일곱 행성 로고스가 존재하듯이 이 행성 진화 중 서로 다른 일곱이 태양계를 구성한다.129 오컬트에서는 일곱 로고스가 유일한 존재로부터 나오고 일곱 세계 각각이 갖는 일곱 개의 연속적인 체인이 나타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하나의 빛에서 일곱 빛이 나오고, 일곱 빛 각각으로부터 일곱 곱하기 일곱의 빛이 나온다.130
체인이 채화되는 시간, 즉 만반타라로 다시 돌아가면 이 또한 일곱 단계로 다시 구분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행성 로고스에게서 나온 생명의 물결이 체인 주변으로 보내지면 이 위대한 생명-물결 중 일곱 개가 하나의 만반타라를 완성하는데 이때 이 일곱 개의 생명-물결을 각각 '라운드(round)'라고 한다.
따라서 각 세계는 한 번의 만반타라 동안 일곱 번의 활동 시기를 가지며 이 각각의 시기는 진화하는 생명의 장(場)이 된다.
하나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그 세계가 활동하는 동안 인류의 일곱 근원 인종이 서로 의존 관계에 있는 다른 여섯 비인간계와 더불어 그 위에서 진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일곱 계는 진화의 모든 단계에서 형태를 포함하고 그 앞으로 상위 세계들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하나의 세계에 속해 진화하는 여러 형태는 이전 세계의 활동 기간이 끝나면 다음 세계로 이동하면서 성장을 계속하며, 그 라운드가 끝날 때까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이동한다.
그 형태들은 여러 번의 라운드를 거치며 일곱 라운드나 만반타라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길을 계속 간다. 그러고는 자신이 속한 행성계의 환생이 끝나고 행성 로고스가 그 행성 진화의 결과를 취합할 때까지 여러 번의 만반타라를 거치며 위로 올라간다. 우리가 이 진화 과정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거대한 전체 중에서 핵심적인 사항만이 스승들을 통해 알려졌을 뿐이다.
행성 진화 과정에서 우리의 세계가 무대가 되는 단계에 있을 때에도 우리는 일곱 세계가 처음 두 만반타라를 거치는 동안 이루어지는 진화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세 번째 만반타라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라고는 지금 우리의 달이 된 세계가 행성계에서 D세계였다는 정도뿐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행성계의 연속적인 환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다 분명하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달의 체인을 형성했던 일곱 세계는 적절한 때에 일곱 단계의 진화 과정을 통과했다. 생명-파도, 즉 행성 로고스의 숨이 그 체인 주변을 일곱 번 휩쓸면서 차례로 각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는 마치 로고스가 자신의 왕국을 이끄는 동안 A세계에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였다가 진화가 특정한 지점까지 진행되었을 때, 그 세계에 수많은 형태를 차례로 존재하게 하여 그 모든 형태들이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도록 한 것 같다.
로고스가 B세계로 관심을 돌리면 A세계는 서서히 평화로운 잠에 빠져들었다. 그 결과 생명-파도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이동하다가 G세계가 진화를 끝냄으로써 주기의 한 라운드가 종료되었다. 그 후에는 휴식의 시기131가 뒤따랐고 이 기간 동안에는 외부의 진화 활동이 멈추었다.
이 기간이 끝나면 외부의 진화 활동이 다시 개시되어 두 번째 라운드가 시작되는데 시작 지점은 예전처럼 A세계다. 이런 과정이 여섯 번 반복되지만 마지막 일곱 번째 라운드에 도달하면 변화가 생긴다. 일곱 번의 생애를 마친 A세계가 점점 분해되고 결코 소멸하지 않는 라야 중심 상태가 시작되는 것이다.
다음 만반타라가 시작되면 새로운 A세계는 진화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마치 새로운 몸을 입은 것처럼 이전의 A행성의 '본질(prin-ciple)'들이 자리를 차지한다. 이 표현은 첫 번째 만반타라의 A세계와 두 번째 만반타라의 A세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사용한 것일 뿐 그 관계의 본성은 숨겨져 있다.
달의 만반타라 중 D세계와 지구의 만반타라 중 D세계가 이루는 관계에 대해서는 조금 더 많은 것이 알려져 있다. 일프레드 시네트 씨는 자신의 저서『우리가 속한 계』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얼마 안 되는 사실을 요약해 놓았다.
- 새로운 지구 성운(星雲)이 어떤 중심의 주변으로 만들어졌다. 그 중심이 죽어가는 행성과 이루는 관계는 지구의 중심과 달의 중심이 현재 서로 이루는 관계와 같았다. 그러나 성운의 상태에 있는 이런 물질의 집합체는 지구의 고체가 현재 차지하는 것보다 훨씬 큰 부피를 차지했다. 그것은 그 오래된 행성을 뜨겁게 끌어안기 위해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새로운 성운의 온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온도보다도 훨씬 높은 듯 보이는데, 그 덕분에 오래된 행성의 표면이 다시 뜨거워져서 모든 대기와 물과 그 행성 위의 증발성 물질이 기체 상태가 되어 새로운 성운의 중심에 만들어진 새로운 인력(引力) 중심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오래된 행성의 공기와 바다가 이런 식으로 새로운 행성의 구성 성분으로 이용되었고, 그 결과 현 상태의 달은 건조하고 눈부신 덩어리로서 구름도 없고 생명체가 거주할 수도 없으며, 어떤 물리적 존재가 거주하기에도 적절하지 않다. 현재의 만반타라가 거의 끝나가는 일곱 번째 라운드에 달의 분해가 완료될 것이며, 달이 지금도 가지고 있는 물질은 분해되어 유성의 먼지가 될 것이다.132
블라바츠키 여사가 상급 학생들에게 말로 전한 가르침을 기록한『시크릿 독트린』3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우리 세계의 진화 초기에는 달이 지금보다 지구에 훨씬 더 가까웠고 크기도 더 컸다. 이후 달은 우리로부터 거리도 멀어졌고 크기도 많이 줄었다. (달이 자신의 모든 본질을 지구에게 준 것이다.) ··· 일곱 번째 라운드에 새로운 달이 나타나고 우리의 달은 마침내 분해되어 사라질 것이다.133
달의 만반타라 동안 진화가 진행되면서 일곱 계급의 존재를 만들어 내는데 이들을 아버지 혹은 피트리(Pitri)라고 부른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들이 지상의 만반타라의 존재를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이들은『시크릿 독트린』에 나오는 달의 피트리다. 이들보다 더 발달했으며 태양 피트리 혹은 인간 혹은 하위 디야니(Dhyani)라는 다양한 명칭을 가진 계급이 두 개 더 있다.
이들은 발달 수준이 매우 높아서 지상 진화의 초기에 진화를 시작했지만,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조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두 계급 중 더 높은 계급은 개체화되었고 동물과 비슷한 존재, 즉 배아기의 혼을 가진 생명체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그들이 원인체를 발달시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머지 계급은 형태가 만들어지려 하고 있었다. 달의 피트리, 즉 첫 번째 계급은 형태가 만들어지기 위한 초기 상태여서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두 번째와 세 번째 계급은 카마의 원리만 발전시킨 상태였다. 달의 피트리의 일곱 계급은 이후의 발달을 위해 달의 체인이 지상에 건네준 것으로서 행성계의 네 번째 환생이다.
이때 첫 번째 계급 안에는 정신 본질이, 두 번째와 세 번째 계급에는 카마 본질이, 네 번째 계급에는 새싹 단계의 본질이, 이보다 더욱 발달 수준이 낮은 다섯 번째 단계에는 새싹 단계에 근접하는 본질이,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계급에는 감지할 수도 없는 본질이 존재했다. 이런 실체들이 모나드로 지구 사슬에 들어와 엘리멘탈 에센스 그리고 건설자들이 만든 형태에 혼을 부여했다.134
나는『시크릿 독트린』에서 사용한 명명법을 채택하겠다. 시네트 여사와 스콧-엘리엇 씨가 '달의 피트리'에 대해 작성한 귀중한 문서를 보면 세 번째와 네 번째 라운드에 체화하는 블라바츠키 여사의 '하위 디야니'는 달의 피트리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계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시네트 여사와 스콧-엘리엇 씨의 세 번째와 네 번째 계급이 블라바츠키 여사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계급이 되는 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명명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이런 명명법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다.
나는 블라바츠키 여사의 명명법을 따르지만, 신지학협회 런던 롯지(지부)의 학생들과 런던 록지의 회보를 읽은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첫 번째 계급이 그들이 말하는 세 번째 계급에 해당하고, 그 이후 계급도 그런 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건설자'는 수많은 지성, 즉 각 계에서 형태를 실제로 만드는 일을 하며 졸업한 의식과 능력의 존재의 계급을 포함하는 명칭이다. 상위 건설자는 지시하고 통제하는 반면, 하위 건설자는 제공받은 모형을 본떠서 질료를 빚는다. 그리고 이제 행성 체인의 연속적인 세계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A세계는 원형적인 세계로서 그곳에서 형태의 모형이 만들어져 그 라운드 동안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최상위 건설자는 행성 로고스의 정신으로부터 원형적인 관념을 가져와 해당 라운드에 맞는 원형적 형태를 빚는 아루파 단계의 건설자들을 안내한다. B세계에서는 이런 형태들을 하위 등급의 건설자들이 멘탈 물질을 이용한 다양한 형체로 복제하고, 그 형태들은 조밀한 물질이 스며드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각기 다른 길을 따라 서서히 진화한다.
그러면 아스트랄 물질로 된 건설자들이 그 작업을 이어받아 C세계에서 더 정교한 아스트랄 형태를 만든다. 아스트랄 물질로 가능한 수준까지 형태가 진화하여 D세계의 건설자들이 물질계에서 형태 만드는 작업을 이어받아 최하위 물질을 적절한 형태로 만들어내면, 그 형테들은 가장 조밀하고 완전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중간 지점에서부터 진화의 본성이 어느 정도 변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가장 주목했던 부분은 형태를 만드는 것이었다. 위를 향해 올라가는 호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그 형태를 진화하는 생명의 매개체로 이용하는 것이다.
D세계와 E, F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진화의 후반부에서 의식은 처음에는 물질계에서, 그 다음에는 아스트랄계와 하위 멘탈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이때 아래로 내려가는 호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형태에 대응하는 형태를 통해 드러낸다.
내려가는 호에서 모나드는 진화하는 형태에 최대한 자신을 각인시키고, 이런 각인은 인상이나 직관 등으로 모호하게 나타난다. 위로 올라가는 호에서 모나드는 내면의 통치자로서 형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G세계에서 해당 라운드는 완성되고 모나드는 A세계의 원형적 형태 안에 거주하면서 그것을 매개체로 이용한다.
이 모든 단계에서 달의 피트리는 형태의 혼으로 활동하면서 그 형태를 뒤덮고 있다가 이후에는 그 안에서 살게 되었다. 처음 세 라운드 동안 가장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은 첫 번째 계급의 피트리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계급의 피트리는 첫 번째 계급의 피트리가 만들어 놓은 형태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첫 번째 계급의 피트리는 형태에 혼을 잠시 불어넣어 준비해두고 다음 단계로 이동하면서 두 번째와 세 번째 계급의 피트리가 그 형태 안에 거주하도록 남겨둔다. 첫 번째 라운드가 끝날 무렵 광물계의 원형적 형태는 다음 라운드로 넘어가 정교하게 다듬어지다가, 네 번째 라운드 중간에 가장 조밀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불'은 이 첫 번째 라운드의 '원소'이다.
첫 번째 계급의 피트리는 두 번째 라운드에서도 인간 진화를 이어나가면서 오늘날 인간의 태아가 하위 단계와 접촉하듯이 하위 단계만 접촉한다. 두 번째 계급의 피트리는 그 라운드가 끝날 즈음 초기 인간 단계에 도달했다. 이 라운드에서 이루어야 할 가장 큰 과업은 식물의 원형적 형태를 다음 라운드로 넘겨 다섯 번째 라운드에서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라운드의 '원소'는 '공기'다.
세 번째 라운드에서 첫 번째 계급의 피트리는 인간의 형태를 갖게 된다. 물론 그 몸은 젤리와 비슷하고 거대하지만, D세계에서는 충분히 조밀해져 똑바로 서기 시작한다. 외형은 유인원과 비슷하고 짧고 뻣뻣한 털로 뒤덮여 있다. 세 번째 계급의 피트리는 인간 초기 단계에 도달한다.
두 번째 계급의 태양 피트리는 이번 라운드에서 처음으로 D세계에 등장하여 인간 진화를 이끈다. 동물의 원형적 형태는 다음 라운드로 넘겨져 여섯 번째 라운드가 끝날 무렵에는 완벽하게 다듬어진다. 이 라운드의 특징적 '원소'는 '물'이다.
지상의 만반타라를 구성하는 일곱 라운드 중 중간에 해당하는 네 번째 라운드의 특징은 인류의 원형적 형태를 A세계로 가져온다는 것이다. 앞의 라운드가 각각 동물과 식물, 광물과 관련되었던 것처럼 이번 라운드는 인간과 관련이 있다.
일곱 번째 라운드에 이르러서야 이런 형태가 인간에 의해 완전히 실현되지만, 인간 형태의 여러 가능성은 네 번째 라운드의 원형에서도 나타난다. 가장 조밀하고 가장 많은 질료인 '흙'이 이번 라운드의 '원소'이다.
첫 번째 계급의 태양 피트리는 활동을 시작한 초기 단계 중 이 라운드에서 D세계 주변을 배회한다. 하지만 첫 번째 계급의 태양 피트리가 분명하게 체화되는 것은 세 번째 인종의 한가운데에 있는 행성 로고스로부터 생명이 세 번째로 크게 쏟아져 나온 이후이다. 그러고 나서야 그 인종이 발달하면서 그 수가 서서히 증가하고, 많은 수가 초기 네 번째 인종으로 체화된다.
우리 지구, 즉 D세계 위에서 인류가 진화하면서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지속적인 일곱 가지 다양성이 매우 특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세 번째 라운드에 이미 인간의 일곱 인종이 등장했고, 네 번째 라운드에서는 C세계에서 이 근본적인 구분이 매우 뚜렷해져서 일곱 인종은 각각의 아인종(亞人種)과 더불어 진화했다.
D세계에서 인류는 서로 다른 일곱 지점에서, 다시 말해 "일곱 인종이 각자 자신의 구역에서"135 첫 번째 인종 ㅡ 주로 근원 인종이라 불림 ㅡ 과 함께 시작된다.
이 일곱 유형은 연속적인 방식이 아니라 함께 나란히 첫 번째 근원 인종을 구성하고 각각의 유형은 다시 아인종을 갖는다. 젤리와 비슷하고 확실한 형태가 없는 생명체인 첫 번째 근원 인종으로부터 보다 일관성 있는 형태를 가진 두 번째 근원 인종이 진화한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근원 인종으로부터 유인원과 비슷한 생명체인 세 번째 근원 인종이 진화해 어설프고 거대한 인간이 된다. 레무리안(Lemurian)이라고 부르는 이 세 번째 근원 인종이 진화하는 도중에 진화가 훨씬 앞선 다른 행성계, 아마도 금성에서 훨씬 더 진화한 인류가 지구로 온다.
이들은 찬란하게 빛나는 존재로 빛나는 모습 때문에 '불의 아들'이라고도 불리며, 정신의 아들136 중에서도 고결한 계층이다. 이들은 어린 인류의 신성한 스승으로 지상에 머물면서 일부는 원인체를 형성하는 모나드 생명의 불꽃을 동물-인간에게 세 번째로 쏟아 붓는 통로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달의 피트리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세 번째 계급은 개체화되어 인류의 대다수를 구성한다.
태양 피트리의 두 계급은 이미 개체화되어 ㅡ 첫 번째 계급은 달의 체인을 떠나기 전에, 그리고 두 번째 계급은 이후에 ㅡ 정신의 아들의 하위 두 계층을 형성한다. 두 번째 계급은 중간 지점에서 세 번째 인종으로 체화하며, 첫 번째 계급은 이후에 대부분 네 번째 인종 아틀란티안(Atlantean)으로 나타난다.
이제 인간의 진화를 주도하는 다섯 번째 아리안(Aryan) 인종은 아틀란티안의 다섯 번째 아인종으로부터 진화했으며, 그 중 가장 유망한 가문은 중앙아시아에 따로 분리되었다. 이 새로운 인종 유형은 마누(Manu)라고 불리는 위대한 존재의 직접적인 감독 아래에서 진화했다.
중앙아시아에서 나타난 첫 번째 아인종은 인도와 히말라야 남부에 정착했고 승려, 무사, 상인, 노예137의 네 계층을 이루며 거대한 인도 반도에서 지배적인 인종이 되어, 당시 인도 반도에 거주하고 있던 네 번째와 세 번째 인종의 국가를 정복했다.
일곱 번째 인종의 일곱 본째 라운드가 끝나면, 즉 지상의 만반타라가 끝나면, 우리의 체인은 생명의 열매를 그 후계자에게 넘겨줄 것이다. 이 열매는 완벽해진 신성한 인간, 붓다, 마누스, 초한, 대스승으로서 이들은 행성 로고스의 지도를 받으면서, 진화가 덜 된 수많은 실체와 함께 진화하도록 안내하는 임무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진화가 덜 된 실체들은 의식의 여러 단계에 있으며, 신성한 가능성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물질적 경험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우리 체인의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만반타라는 네 번째 만반타라가 끝난 이후 여전히 미래의 자궁 안에 들어 있다.
행성 로고스는 진화의 모든 열매를 자신 안에 모아두고 자신의 자식들과 함께 휴식과 지복의 기간을 갖게 될 것이다. 그 높은 상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화의 현 단계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영광을 꿈꿀 것인가.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빛나는 영이 '주의 기쁨 안으로 들어가' 그의 안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자신의 눈앞에서 끝도 없이 다양한 숭고한 생명과 사랑, 높고도 깊은 능력과 기쁨이 유일한 존재처럼 어떤 한계도 없이, 유일자처럼 지치지 않고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모든 존재에게 평화를.
http://blog.daum.net/santinilaya/15219552
1. 『동양의 성서(The Sacred Books of the East)』40권
2. 『문다카 우파니샤드』2장 2편 7절
3.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3장 18절
4.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4장 17절
5.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1장 8절
6. 『문다카 우파니샤드』3장 1편 8절
7. 『문다카 우파니샤드』3장 2편 4절
8. 『문다카 우파니샤드』3장 2편 9절
9. 『카타 우파니샤드』6장 14절
10. 『우다나바르가』33장 41절
11. 출애굽기 15장 11절
12. 아르아미티는 처음에는 지혜이자 지혜의 여신이었다. 나중에는 창조주로서 땅과 동일시되어 땅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다.
13. 요한게시록 4장 5절
14. 창세기 1장 26~27절
15.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16. 에베소서 2장 22절
17. 고린도전서 3장 16절
18. 고린도전서 6장 19절
19. 마태복음 11장 14절
20. 말라기 4장 5절
21. 마태복음 17장 12절
22. 요한복음 9장 1~13절
23. 마태복음 13장 10~17절
24. 토마스 테일러의 1895년도 번역본『플로티노스 선집(Works of Plotinus)』p.11
25. 소크라테스가 말한 다이몬(daimon)에 해당하는 선한 영적 지성
26. 『카타 우파니샤드』6장 17절
27. 물라프라크리티(Mulaprakriti)
28. 파라브라만(Parabrahman)
29. 이러한 이유로 로고스는 동양의 일부 경전에서 '마야의 주(主)'로, 마야 혹은 환영으로 불리며 형태의 원리가 된다. 형태는 본래 일시적이고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환영으로 간주되며, 형태의 베일 아래에서 자신을 드러내어 실재가 되는 생명이다.
30. 개념을 더 명확하게 잡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이 있다. 다섯 번째 계의 원자를 아트마(Atma)로, 네 번째 계의 원자를 붓디-물질(Buddhi-matter)로, 세 번째 계의 원자를 붓디-물질과 마나스-물질(Manas-matter)이 감싸고 있는 아트마로, 두 번째 계의 원자를 붓디-물질과 마나스-물질, 카마-물질(Kama-matter)이 감싸고 있는 아트마로, 가장 낮은 계의 원자를 붓디-물질과 마나스-물질, 카마-물질, 스툴라-물질(Sthula-matter)이 감싸고 있는 아트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각각의 경우에 가장 바깥층에만 활동성이 있다. 안쪽 층들은 진화의 상승기가 왔을 때 활동하기 위해 준비를 마친 상태로 휴면 상태에 있다.
31. 행동이 분리되지 않는 아트마-붓디, 따라서 모나드로 일컬어진다. 모든 형태는 생명을 지배하는 아트마-붓디를 가지고 있다.
32. 일부는 고귀한 영적 지성이지만 이 이름은 '건설하는 자연-영'까지 포함한다. 이 주제는 12장에서 다룬다.
33. 적절한 때가 되었을 때 그 생명은 프라나(Prana)라고 불리게 되며 모든 생명체의 생명-숨결이 된다. 프라나는 보편적 생명을 일컫는 이름일 뿐이지만, 각 실체는 프라나를 받아들이고 프라나는 자신의 분리된 생명을 지원한다.
34. 행복한 상태 혹은 밝은 상태를 의미하는 데바찬은 하늘을 지칭하는 신지학 용어다. 욕망의 상태 카말로카는 아스트랄계에서 경험하는 중간 단계의 삶의 상태에 붙여진 이름이다.
35. C. W. 리드비터(Leadbeater)의『아스트랄계』p.52
36. 타마스(tamas)적 속성, 즉 어둡고 타성적인 속성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7. 일곱 차크라(chakra) 혹은 일곱 개의 바퀴. 빙글빙글 도는 모습에서 따온 이름으로 살아있는 불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보이는 바퀴의 모습을 닮았다.
38. 여기서 라자스 구나(rajasic guna: 라자스 기질, 여기서 '라자스'는 산스크리트어로 변화, 운동, 활력을 가리킨다ㅡ옮긴이 주), 즉 활동성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39. 여기서는 사트와 구나(sattva guna), 즉 지복과 순수의 특질이 지배적이다. 시디는 초물질적인 힘이다.
40. 4장 참조.
41. 힌두교도들은 이 상태를 '프레타로카(Pretaloka)'라고 부르는데 '프레타(Preta)'가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프레타는 육체를 잃어버렸지만, 남아있는 동물적 본성의 방해를 받는 인간을 뜻한다. 하지만 이 상태가 계속되는 것은 아니어서 동물적 본성이 해체되고 나면 그 본성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
42. 혼이란 인간 지성으로 인간 내부의 신성한 영과 그 인간의 하위 개성을 연결한다. 진화에 따라 발달 과정을 거치는 것은 자아, 개인, '나'이다. 신지학 용어로는 마나스(Manas) 혹은 사고자이다. 정신은 이 마나스의 에너지로서 육체의 뇌, 아스트랄체와 멘탈체의 한계 안에서 활동한다.
43. 이 영역들을 일컬을 때 가장 높은 단계를 첫 번째, 가장 낮은 단계를 일곱 번째라고 지칭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어느 족에서부터 시작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계와 본질을 지칭할 때의 순서와 일치하도록 가장 낮은 단계에서 올라가는 방식을 취한다.
44. 이러한 변화를 거치면 힌두교도들이 '야타나(Yatana)'라고 부르는 고통의 몸이 만들어진다. 아주 사악한 인간의 경우 아스트랄체 안에서 굉장히 조악한 물질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드루밤(Dhruvam) 혹은 강한 몸이 만들어진다.
45. 꼭 현생에서 저지른 잘못일 필요는 없다. 인과법칙에 대해서는 9장 카르마에서 설명할 것이다.
46. 이 일꾼들은 인류를 인도하고 돕는 위대한 스승들의 제자로서 도움이 필요한 혼을 돕는 특별한 의무를 진다.
47. 7장 참조.
48. 5장 참조.
49. 영어로 '멘탈계'라 부르는 마나스계는 마나스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 영역의 정신 활동과 육체 내의 정신 활동과 구분하기 위해 이 영역을 순(純)정신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50. 무형은 아루파(arupa), 유형은 루파(rupa). 루파는 형태, 모양, 몸을 뜻한다.
51. 세 번째 로고스 혹은 신성한 창조 지성 마하트(mahat)는 힌두교의 브라흐마이자 북방 불교의 문수보살, 기독교의 성령에 해당한다.
52. 힌두교와 불교의 아루파(arupa)와 루파 데바스(rupa devas), 조로아스터교의 '하늘과 당의 주',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대천사와 천사에 해당한다.
53. 계시록 10장 1절
54. 멘탈계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할 때는 보통 마야비 루파(mayavi rupa) 혹은 환영체라고 부른다.
55. 이런 이유로 신지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정신이 욕망-특성 안에서 그리고 욕망-특성과 함께 작동하며, 동물적 특성과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의 카마-마나스(kama-manas)라는 말을 사용한다. 베단타 철학에서는 정신과 욕망을 같이 분류하여 자아란 마노-마야코샤(mano-mayakosha), 즉 하위 정신, 감정, 열정으로 이루어진 외피라고 말한다. 유렵의 심리학자들은 '정신'을 세 부류로 나눈 뒤 '느낌'이 그 중 하나라고 말하며 '느낌'에는 감정과 감각이 있다고 믿는다.
56. 7~8장 참조.
57. 신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아우고에이데스(Augoeides)이자 바울이 말한 영체에 해당한다.
58. 베단타 철학의 구분에 따르면 비그야나마야코샤(Vignyanamayakosha) 즉, 차별적 지식의 외피 속에서 활동하는 자시(self)에 해당한다.
59. 오른쪽 경로는 신성한 성인(成人)의 상태, 즉 초인의 상태로 향하는 길이다. 왼쪽 경로도 초인의 상태로 향하는 길이기는 하지만, 이 상태는 진화의 진행을 방해하고 개인의 이기적인 결말로 귀결된다. 오른쪽 경로는 백색 경로, 왼쪽 경로는 흑색 경로라 불리기도 한다.
60. '신들의 장소'라는 의미의 '데바스탄(Devasthan)'이 이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이다. 힌두교의 스바르가(Svarga), 불교의 수카바티(Sukhavati),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그리고 유물론적 성향이 낮은 이슬람교도들이 말하는 천국이다.
61. 전문 용어로 아루파 데바찬(Arupa Devachan)과 루파 데바찬(rupa Devachan)이라고 한다. 멘탈계의 아루파 단계와 루파 단계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62. 여기서 현명한 학생이라면 우주의 주기가 끝난 후 의식을 지속하는 문제에 대해 유익한 제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쉬바라(Ishvara: 인격신이자 최고신ㅡ옮긴이 주)를 사고자의 자리에 놓고 한 생애를 통해 얻은 열매라 할 수 ㅜ있는 능력이 우주의 열매인 인간의 삶을 나타낸다고 하자. 그러면 우주 사이의 중간 휴식 시간 동안 의식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대략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63. 3장 참조.
64. 11장 참조. 입문자는 진화의 일반적인 진로 밖으로 나와 완전한 인간으로 향하는 잛고도 가파른 길을 걷게 된다.
65. 아함카라(Ahamkara), 즉 원리를 만드는 '나'는 자의식이 진화하는 데 필요하지만 임무가 끝나면 영향력을 잃는다.
66. 『바가바타 푸리나(힌두교 경전 중 하나ㅡ옮긴이 주)』에 비슷한 비유가 나온다.
67. 7장 참조.
68. 아트마(Atma), 즉 파라마트마(Paramatma)의 반영
69. 영-물질의 모나드인 아트마이든 형태의 모나드인 아트마-붓디이든 인간의 모나드인 아트마-붓디-마나스이든 상관없이 모나드라고 부른다. 각각의 경우에 모나드는 하나의 단위이고 하나의 단위로서 활동한다. 그 단위의 얼굴이 하나이든 둘이든 셋이든 상관없다.
70. 독자는「들어가는 말」로 다시 돌아가 플로티노스가 이 상태에 대해 설명한 부분, 즉 "그들은 모든 것을~"로 시작하는 부분을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각기의 것도 모든 것이다."와 "각기의 것 안에서 서로 다른 특성이 두드러지지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71. 신성한 사랑의 지복은 힌두교의『바가바드 푸라나』히브리교과 기독교의『솔로몬의 노래』등 여러 경전에서 남편과 아내의 근본적인 사랑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수피(Sufi)교도를 비롯한 여러 오컬티스트들이 말하는 사랑이기도 하다.
72. 베단타 철학의 아난다마야코샤(Anandamayakosha) 혹은 지복-외피. 태양의 몸, 태양체라고도 하는데, 우파니샤드와 다른 문헌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73. 11장 참조.
74. 링가 샤리라는 원래 에텔복체의 이름이었으므로, 힌두 철학의 링가 샤리라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스툴라 샤리라는 조밀체를 가리키는 산스크리트어 이름이다.
75. 헌은 이 교리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부적절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의 실제 관점은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주제를 다룬 매우 흥미로운 장에서 그는 '자아'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실제 자아와 환상 속 자아의 구분을 계속 염두에 두지 않는 독자는 내용을 오해할 수도 있다.
76. 『마음』라프카디오 헌, pp.237-239 (런던, 1896)
77. 물리학자들은 정적 상태에서 운동 상태로 들어간다고 말할 것이다.
78. 4장 참조.
79.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세 로고스와 불의 태곳적 일곱 아들이 생각날 것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보좌 앞의 일곱 영',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마즈다와 일곱 아멘샤스펜타에 해당한다.
80. 형태를 결정하는 성장의 축. 이 축은 결정(結晶)의 형태로 나타난다.
81. '광범위한' 감각은 유기체 속에 퍼져있는 감각으로서 어떤 한 부분에서만 특별히 느겨지는 감각은 아니다. '극심한' 감각의 반대이다.
82. 마나사-푸트라(Manasa-putra)는 전문 용어로서 정신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이다.
83. 이 외에도 새로운 삶의 외부 환경을 결정하는 다른 요인들은 9장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84. 블라바츠키 여사가『시크릿 독트린』에서 사용한 표현. 이들은 리피카(Lipika), 카르마 기록의 과리자, 그리고 리피카의 명령을 실제로 수행하도록 지시하는 마하라자(Maharajas)에 해당한다.
85. 2장 참조.
86. 이 단계가 달성되었다는 징조 중 하나는 자는 동안 육체의 뇌가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만들어내어 혼란스럽게 뒤섞여있던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뇌가 적절한 통제를 받으면 이런 꿈은 거의 꾸지 않게 된다.
87. 2장 참조.
88. 11장 참조.
89. 4장 참조.
90. 11장 참조.
91. "죽은 후의 삶의 상태"『19세기(Nineteenth Century)』, 1896년 11월
92. 『토머스 영 박사의 삶(Life of Dr. Thomas)』피콕(Peacock) D.D.
93. 『노스 브리티쉬 리뷰(North British Review)』1866년 9월
94. 9장 참조.
95. 『환생(Reincarnation)』애니 베전트, p.67
96. 갈라디아서 6장 7절
97. 프라라브다(Prarabdha: 이미 시작되어 이번 생에서 소진될 카르마), 성향으로 나타나는 산치타(Sanchita: 누적된 카르마), 크리야마나(Kriyamana: 만들어지고 있는 카르마)라는 구분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98. 『찬도기야 우파니샤드』4장 14편 1절
99. 『카르마』p.25 (신지학 매뉴얼, 4번)
100.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4장 4편 507절
101. 『카르마』pp.50-51
102. 마하데바(Mahadevas) 혹은 힌두교의 챠투르데바(Chaturdevas)
103. 『시크릿 독트린』pp.153-157
104. 타마스 기질(tamasic guna)에서는 이런 성질들이 우세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성질들이 우세한 동안 인간은 진화의 세 단계 중 가장 낮은 단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105. 힌두교도라면 '새벽은 희생 안에 있다'는『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의 첫 구절을 기억할 것이다. 조로아스터교도라면 아후라 마즈다가 희생이라는 행동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도들은 죽임을 당한 양ㅡ로고스의 상징ㅡ을 떠올릴 것이다.
106. 이것은 로고스의 자기제어 능력이자 드의 마야이며 모든 형체가 생겨나도록 하는 제한의 원칙이다. 로고스의 생명은 '영'으로 그의 마야는 '물질'로 나타나는데, 이 둘은 현현하는 동안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107. 『바가바드 기타』8장 3절
108. 『바가바드 기타』6장 34절
109. 『바가바드 기타』2장 59절
110. 이 각 자격의 명칭을 산스크리트와 팔리어로 익혀두면 심도 있는 다른 책을 읽을 때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111. 힌두교에서는 이 단계를 파라브라자카(Parivrajaka)의 단계 혹은 방랑자의 단계라고 부른다. 불교에서는 '개울에 도달한 자'라는 의미로 스로타파티(Srotapatti)의 단계라고 부른다. 제자가 이런 호칭을 부여받는 것은 첫 번째 입문을 마치고 두 번째 입문을 하기 전이다.
112. 제자의 길에서 두 번째 단계에 있는 이를 힌두교에서는 쿠티차카(Kutichaka)라고 부르는데, 오두막을 세우는 사람 또는 평화의 장소에 도달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불교에서는 사크리다가민(Sakridagamin)이라고 부르며, 딱 한 번 더 태어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113. 힌두교에서는 이를 '나'를 초월한 파라마함사(Paramahamsa)라고 부르고, 불교에서는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듯의 아르하트(Arhat)라고 부른다.
114. 힌두교에서는 '내가 그것'임을 깨닫는 자라는 의미의 함사(Hamsa)라고 부르고, 불교에서는 더 이상 탄생하지 않는 자라는 의미로 아나함(Anagamin)이라 부른다.
115. 4장 참조.
116. 자부심은 다른 존재와 구분되는 '나'가 가장 미묘하게 현현한 것이므로 아함카라(Ahamkara)라고 부르며, 보다 일반적으로는 마나(Mana) 혹은 자부심이라고 한다.
117. 아비디야(Avidya) 혹은 12연기 중 첫 번째 항목으로서 분리된 세계를 만들고, 해방을 이루었을 때 떨어져나가는 처음과 마지막 환상.
118. 힌두교에서는 '해방된 생명'이라는 뜻의 지반묵타(Jivanmukta), 불교에서는 '더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아세카(Asekha)라고 부른다.
119. 『시크릿 독트린』1권 p.309
120. 『우리가 속한 계(The System to Which We Belong)』p.4
121. 『문다카 우파니샤드』2장 2편 10절
122. 『시크릿 독트린』1권 p.162
123. 1장의 물질계 중 물질의 진화에 대해 다룬 부분 참조.
124. 『시크릿 독트린』1권 pp.166 & 174
125. 『시크릿 독트린』1권 p.176
126. 『시크릿 독트린』p.221 참조. 원형적 세계는 행성 로고스의 정신 속에 존재했던 것과 같은 세계는 아니지만 첫 모형이다.
127. 『시크릿 독트린』1권 p.176
128. 전문용어로 만반타라(Manvantara)라고 한다.
129. 알프레드 시네트 씨는 이를 "진화의 일곱 계획"이라고 부른다.
130. 『시크릿 독트린』1권 p.147
131. 전문용어로 프랄라야(Pralaya)라고 한다.
132. 『우리가 속한 계』p.19
133. 『시크릿 독트린』p.562
134. 블라바츠키 여사는『시크릿 독트린』에서 시네트 여사가 첫 번째와 두 번째 피트리라고 불렀던 존재를 '달 체인에서 온 모나드'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대신 그들을 '인간'과 '디얀 초한(Dhyan Chohan)'으로 분리한다. 1권 pp.197, 211 참조.
135. 『드잔의 서』13,『시크릿 독트린』2권
136. 마나사푸트라(Manasaputra). 자의식이 있는 지성으로 이루어진 이 광범위한 하이어라키는 많은 계층을 포함한다.
137. 브라만(Brahmanas), 크샤트리아(Kshattryas), 바이샤(Vaishyas), 슈드라(Shudras)
'영성수행 비전 > 신지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H. P. 블라바츠키] 신지학의 열쇠 (0) | 2018.10.07 |
---|---|
[C. 지나라자다사] 신지학 비교(秘敎) 첫걸음 (0) | 2018.10.07 |
신지학 기본원리 (0) | 2018.10.07 |
[신지학회] 다양한 오컬트 주제 (0) | 2018.10.07 |
신지학 [앨리스 A. 베일리] 에텔체에 대한 가르침 (0) | 2018.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