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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수행 비전/신지학

[H. P. 블라바츠키] 실천적 오컬티즘

柏道 2018. 10. 7. 23:58

신지학

[H. P. 블라바츠키] 실천적 오컬티


H. P. 블라바츠키 / 임길영 역



서 문

블라바츠키여사의 작품은 고대인들의 거대한 지식을 집약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더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의 기초인 "신성한 과학"을 순서 있게 우리들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태고의 이 과학은 지난날의 과거 세계 어느 곳 할 것 없이 널리 퍼져 있었으나, '주기적인 진화 현상'의 변화 때문에, 지금은 서구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동양에는 다행히 그 맥이 이어져서 신성한 과학은 지금도 존재해서 실천되고 있으며, 인도에서는 "굽타 비디야(Gupta Vidya)", 즉 "비밀의 과학" 혹은 "숨겨진 지혜"라고 말해오고 있다.
이런 기초적 개념을 블라바츠키 여사는 19세기의 지식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굽타 비디야"에 해당하는 적절한 역어(譯語)를 찾는데 대단히 많은 어려움을 겪었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이시스 언베일드(Isis Unveiled)" 등의 초기의 작품에서 그것을 "마술(Magic)" 혹은 "오컬티즘(Occultism)"이라고 말했지만, 마술이란 말이 '요술'이나 '마법' 혹은 '의식적 마술'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음으로, 후일의 작품에는 잘 쓰지 않았다. "비교(祕敎: Esotericism)"나 "신성한 과학(The sacred science)" 등 다른 역어(譯語)를 쓰는 경우가 있었으나, 결국에는 "오컬티즘"은 말이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소지가 있었음에도, 당시의 서구의 독자들에게는 가장 낯익은 말이었기에 그 말을 채용하였다.
그러나 적의를 가지고 있는 무리들이 나쁜 방향으로 선전해 오컬티즘이라는 말은 근래에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 새로운 적절한 말이 나와야 한다고 신지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블라바츠키 여사가 말하고 있는 "오컬티즘"이란 것은 어떤 '심령현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막연하게 가르치(指)는 현대의 '오컬트'와는 전혀 다른 차이가 있는 의미의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오컬티즘은, 인류발생과 꼭 같은 정도의 옛날의 "과학중의 과학"이며, 인간의 지고의 성취를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 신성한 과학은 근대 과학과 마찬가지로 보편적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 엄밀한 방법을 쓰고 있는 것임으로 과학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기구를 쓰거나 교육 및 동기(動機) 등을 말하는 면에 있어서는 신성한 과학과 세속적인 근대과학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물리적인 관찰을 하기 위해서 근대 과학은 여러 가지 장치에 의존하지만, 신성한 과학은 물리적, 및 비물리적인 관찰을 하는데 있어서는, 주로 깨끗이 정화된 인간의 마음의 인식력에 의존하는 것이다.「한 사람의 관찰은 옛날의 몇 대(代) 동안 선배들이 관찰했던 사실과 맞추어 보아서 진정(眞正)한 것인가 확증을 얻는다.」최고의 연구 도구가 되는 이와 같은 정화된 마음을 길러 내는데는, 지금의 기억력이나 경쟁력을 기르는 근대 교육법과는 틀린, 불요 불굴의 의지의 트레이닝(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이 훈련은 신성한 과학에 정통해 계시는, 스승의 지도 아래서 행해지는 것임으로, "제자도(Chelaship)"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자도의 주요한 목적은, 제자의 마음에서 일절의 이기심(에고이즘)을 뺀 애타(愛他)의 정신을 기르는 것이다. 애타심은 신성한 과학의 "알파"와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제자도를 지원하는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수련을 거쳐가면서 깨끗해져 가는 것으로, 수년 동안의 견습이란 기간을 잘 견디어낸 지망자는 처음으로 비전(Initiation)"을 받아 내어, 제자(弟子)로서 처음으로 자격을 받아 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멀고 먼 옛날부터 신성한 과학은 전통을 지켜온 국제적인 조직이 있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이것을 간단히 말해서「동포단(Brotherhood)」이라 했다. 석존(釋尊), 예수, 플라톤, 크리슈나 등 역대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자들과 철학자들은 이러한 비밀결사(祕密結社) "동포단"의 한사람들이다. 모든 종교와 철학은 이러한 지혜의 커다란 나무의 한가지에 불과하다. 동포단의 지도자들인「천사(天使)1 어른」은 훌륭한 미덕과 신통력을 가지고 계시므로, 신성한 과학의 훈련을 받지 못한 투시 능력자들에 의하여 신이나 천사(天使)로 잘못 이해하게 되지만, 그들은 육체 또는 정묘체[응신(應身)]를 지닌 틀림이 없는 인간인 것이다.
천사(天使) 어른들을 인도에서는 "리쉬"나 "마하트마"라 부르고, 불교의 "보살"과 도교(道敎)의 "성선(聖仙)"에 해당된다. 불교에서의 동포단 전체의 상징은 "관음(觀音)"이라고 한다. 관음처럼 즉 동포단은 여러 가지 방법과 형태로서 인류를 도와준다. 이런 활동은 진화의 주기에 따라 바꾸어지고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주기에 따라 변화무쌍한 진동 주파수는 바뀌어져 새로운 형태를 낳게 한다. 옛날의 동포단은 터놓고 일을 하는 시대가 있었으나, 현재 그런 일은 비밀 속에 행해지고 있다. 또 동포단은 블라바츠키 여사 같은 분을 "사자(使者)"로 내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원칙적으로 동포단의 일원은 자신이 그러하다고 결코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러한 것을 가능한 감추려고 한다. 이러함에, 신지학 협회를 포함해서, 동포단을 대표하는 단체라는 것은 없으며, 표출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이 천사이거나, 천사 어른이 지도해 준다고 공언하는 단체나 개인은 예외 없이 모두가 속임수인 소위 가짜인 것이다.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제자도의 길을 밟아 가는 것은 매우 까다롭고 힘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구시대와 신시대의 세력이 서로 싸우는 과도기임으로, 오컬티즘의 길로 가깝게 접근해 보려는 생각을 가진 자는 더욱더 격렬한 유혹과 곤란에 빠져드는 어려움에 직면한다.「주기적으로 돌아오는 투쟁에서 많은 사람들은 암흑시대의 세력에 이식(餌食)이 되었으며, 세계는 지금 많은 망상에 빠져들고 있다. 이와 같은 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커다란 희생을 지불하지 않고도, 쉽고 아주 간단하게 황금의 문에 도달해서 오컬티즘의 입구를 들어가거나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이 책 제1부의 2「오컬트의 길과 오컬트 기술」에서) 인스턴트(즉석) 행복을 얻어낼 수 있다고 간판을 내걸고 있는 단체 및 소위 스승들, 유체이탈(幽体離脱)이나 "차크라" 행법 등을 가르치는 저자(著者) 및 출판사는 병을 얻거나, 정신이상, 빙의(憑依), 절망, 자살에 이르는 길로 탐구자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실천적 오컬티즘은 인간과 우주의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길인 것이며, 우리들 현대인에 있어서는 완전한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에, 대단히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길을 걸어서 성공한 HPB(블라바츠키)는 우리들이 직면해 헤매게 되는 위험함을 잘 이해하고서, 자비와 자신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성실하게 어드바이스(충고)를 해주고 있다. 그녀는 솔직 명랑하게 말함으로써, 더 많은 설명을 할 필요는 없지만, 현대의 탐구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하게 중요한 점을 모아 본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오컬티즘의 실천은 취미나 오락이 아니라는 것이고, 오히려 인간에게 있어서는 가장 해내기 어려운 성취인 것이다. 현대 문명의 교육법과 가치관은 오컬티즘의 원리에 반(反)하고 있음으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대에는 더욱더 어려움이 있다.
(2) 따라서 "오컬트" 이론의 연구에서 "오컬트" 실천으로 옮기기 앞서서, 정신적, 도덕적, 육체적인 준비가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또한 "성(性)" 에너지를 완전히 컨트롤하는 순결함은, 길에 들어가는 데 필수 조건임을 덧붙인다.

(3) 애타심(愛他心)과 무사무욕(無私無慾)은 길을 닦어 가는데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진정한 "오컬티스트"의 목적은 자기 자신의 발달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게 되어야 하는 것이고, 전문적인 지식과 신통력은 이러한 애타적인 노력에서 온 부산물(副産物)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 두어야 한다. 길에 들어가겠다고 한 동기란 것이 조금이라도 이기적인 것들과 관련해 있는 것이었다면, 설사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은 것도 결국에는 흑마술(黑魔術)이라는 서글픈 사도(邪道)의 길로 떨어지고 만다.

(4) 자기 자신이 반드시 사회에서 이루어 내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외면한 채(버리고) "오컬티즘"의 길에 들어가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하는 것이다.

(5) 실천적 오컬티즘은 신뢰할 수 있는 스승 밑에서밖에 행(가르침)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그런 기회를 좀처럼 얻어낼 수가 없다. 물론, 스승 자신이 조예(造詣)가 깊고, 고결한 어른이라야 한다. 진정한 스승이나 단체가 있다고 하면 어떠한 꼴로서도, 실천적 오컬티즘의 지도를 파는 일을 하지 않는다.

(6) 영매(靈媒)의 길과 "오컬티즘"의 제자의 길은 그 방법과 결과에서 정반대(正反對)인 것이다. 강령술(降靈術)과 연결하는데서의 영매와 그 찬동자들은 수동적으로 되는 것이지만, "오컬티즘"은 최고의 주관적인 적극성과 사려 깊은 조심성을 제자에게 요구한다.

(7) 오컬티즘의 엄격한 필수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집념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오컬트 행법과 실천에 접촉(觸)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낫다.

이 책은 오컬티즘에 관한 블라바츠키 여사의 논문을 3부로 나뉜다. 제1부는 기초적인 논문이다. 제2부는 비교(祕敎)부문이라 말하는 실천적 "오컬티즘"을 진지하게 열심히 연구하는 신지학도의 클럽에의 가르침에서 발췌한 것이다. 제3부는 블라바츠키와 다른 신지학도들의 대화를 기초한 논문을 싣고 있다. 보다 좋은 이해를 하게끔 각 부(部)에 머리말을 썼다. 제3부 끝에 간단한 용어해설을 덧붙였다.

블라바츠키는 오컬트재적입의 길을 열어준 사람으로서의 깊은 책임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오컬트의 참된 길, 진정한 목적을 알리고, 그의 위험한 함정을 확실하게 지적해 주었다. 이러한 경고를 대수롭게 생각해 버리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블라바츠키의 가르침은 전체(全体·우주)로해서 인간의 미지(未知)의 가능성을 긍정(肯定)하고 눈부신 새시대의 필연성에 관해서 확신을 전하는 것이다.

제자도의 엄격한 조건을 채울 수가 있는 것이 가능한 사람은, 헤아릴 수 있을 만큼 극히 적은 소수인 것이다. 그렇지만 오컬티스트가 되지 않고서도 오컬티즘의 목적, 인류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예로, 메즈머리즘, 기공(氣功)같은「오컬트 기술」을 배워서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가 있다. 자기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거의의 학도(學徒)는 오컬트의 실천을 다음 차례의 생애로 미루어 버리고, 현재의 이승에서는 그 준비에만 집중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실천적인 오컬티즘을 얻어 보겠다고 도전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서도 있었던 것이다. HPB는 각 세기의 후반 25년간에,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동포단"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말했다. 독자가 어느 길을 선택하든지 우리들은 성공과 안전을 빌어 주는 것이다.

 
목 차
서문
제1부 실천적 오컬티즘의 기본
1. 실천적 오컬티즘
2. 오컬트의 길과 오컬트 기술
3. 일상생활을 위한 실천상의 제안
4. 질의 응답
5. 마술(오컬트)의 십원칙(十原則)
6. 커다란 패러독스(PARADOX)
7. 오컬트 격언(格言)
8. 자각
9. 의지와 욕망
10. 정화된 욕망
11. 영적 진보
제2부「비교(秘敎)의 가르침」에서
1. 비교부문의 율(律)
2. 비교부문의 초기 서약
3. 비교부문-입회하기 전에
4. H.P.B로부터 비교부문의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
5. 모든 비교학자에게 경고
6. [옴 마니 파드메 훔)과 대우주와 소우주의 상응(相應)
7. 요약(要約)
8. 필요한 비밀주의에 관해서
9. 일심집중(一心集中)의 행법(行法)에 관해서
제3부 오컬티즘의 대화편
1. 아스트랄체에 관한 대화
2. 꿈 - 블라바츠키 롯지 강의록에서
3. 첼라(Chela)
4. 첼라는 영매인가?
역자의 말
 

제1부

실천적 오컬티즘의 기본


1887년에 블라바츠키 여사가 런던으로 옮겨서「루시퍼(Lucifer)」지(誌)를 시작할 무렵, 서구의 분위기는 오컬티즘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심령현상이나 오컬트 이론의 연구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서 실천해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증가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블라바츠키는 이러한 분위기에 부응해서,「루시퍼」지에〈실천적 오컬티즘(1부)〉과〈오컬티즘과 오컬트 기술(2부)〉이라는 논문에서 신성한 과학의 가능성과 조건을 확실히 제시했다. 여사의 사후(死後), 그의 제자들은 앞의 두 논문에〈일상생활을 위한 실천적 제안(3부)〉을 추가시켜서「실천적 오컬티즘」이라는 단행본의 책을 출판했다.〈일상생활을 위한 실천적 제안〉은 블라바츠키 여사의 원작이 아니고, "바가바드 기타"나 "루시퍼"등에서 인용문을 초록(抄錄)한 것이다. 오컬트 실천에 관한 논문은 신지학도들로부터 센세이션을 일으켜서 블라바츠키 여사는 "질의(응답대화편3부)"이라는 형태로 두 사람의 탐구자들의 물음에 답하였다. (3부 1과 2) 이 책에서는 같은 종류의 화제의 질의 응답(1부 4)을 같이 묶었다.

물론 블라바츠키는 앞에 말한 논문에서 처음으로 "오컬티즘"을 취급한 것은 아니다. 그녀의 시초의 대작인「이시스 언베일드」의 요약은 오컬티즘을 "마술(Magic)"이라고 말하고, 그의 기초적인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5) 그 문장에 불라바츠키는 오컬티즘의 기술적인 면뿐만 아니고, 어떻게 해서 무시무욕의 생활을 보내면 좋은가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비추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블라바츠키 문집의 가장 심원(深遠)한 논문으로 헤아려지는 것이다.「커다란 패러독스(6)」와, 같은 무렵에 쓴 소논문(7, 8, 9, 10)의 테마이다. 더불어 앞선 시기에 나온「영적 진보(11)」도 제목처럼 정신적인 전개의 길을 알려주는 기초적인 논문인 것이다.



1. 실천적 오컬티즘


오컬티즘의 실천적인 지도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으로 다음 사항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a) 이론적 오컬티즘과 실천적 오컬티즘, 즉「신지학」과「오컬트 과학(Occult Science)」이라고 말하는 것의 본질적인 차이.
(b) 실천적 오컬티즘 연구에 따른 어려움.

신지학도가 되는 것은 쉽다. 보통 정도의 지적 능력과 철학적 소질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신지학도가 될 수가 있다. 또한 청순하고 비이기적인 생활을 하며, 자신이 도움 받는 것보다 이웃 사람들을 돕는 것에 더 기쁨을 느끼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즐거움을 희생하려고 하며, 이익을 얻으려고 생각하지 않고, 진리, 선, 지혜를 그 자체로 존중하는 사람은 신지학도이다.

그렇지만 선과 악을 바르게 식별하는 것과 같이, 무엇을 하면 도움이 되는가를 알아내는 길, 심지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서도 자신이 바라는 대로 선행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어내는 실천적 오컬티즘의 길로 들어가는 것은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제자가 알아두어야 할 중대한 사실이 하나 있다. 즉 스승은 제자를 위해 거의 무한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공공연하게 혹은 비밀리에 가르침을 주는 동양의 "구루"에서부터, 신성 과학의 기본을 제자들에게 전하는 서구의 몇 안 되는 "카발리스트"들에 이르기까지ㅡ서구의 스승들은 자신들이 불러들이는 위험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ㅡ스승들은 모두 똑같이 이러한 신성한 법칙에 따르고 있다.

스승이 진정한 가르침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심령적, 멘탈적, 물리적인 어떤 힘이든지 그 힘을 제자에게 주게 되는 순간부터, 그 제자가 비전(秘傳)을 받아서 대사(大師)가 되어서 자기 자신의 제자들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게 되기까지, 오컬트 과학에서는 제자의 모든 죄(罪)ㅡ여기서 "죄"라는 것은 나쁜 것을 행한 것뿐만 아니라 해야할 것을 하지 못한 것도 포함하고 있다ㅡ에 대한 책임을 스승이 맡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정교에서는 대단히 중요하게 실행되고 있지만 구교(舊敎)에서는 거의 반정도 사라졌고 개신교에서는 완전히 끊어져 버린 불가사의한 법칙이 있다. 이 법칙은 그리스도교 초기에 시작되었고, 앞서 말한 사제(師弟) 관계의 신성한 법칙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신성한 법칙의 상징이며 표현이기도 하다. 이 법칙에 의하면, 한 아이의 후원자가 되는 교부모(敎父母) 사이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신성하다. 교부모들은 새로이 세례를 받은 아이가 선과 악을 알고 책임질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날까지, 그 아이의 모든 죄의 책임을 떠맡게 된다.2(세례를 받는 아이는 '비전'을 받은 것처럼 기름을 부어 깨끗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의 신비이다.) 이러한 사유로 스승들이 왜 오컬티즘에 관해서 단단히 침묵을 지키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제자들이 자신의 적성을 증명하고 대사와 제자 양쪽의 안전에 필요한 특성들을 개발하도록 하기 위해서, 왜 7년이라는 세월의 견습기간을 가지도록 했는지 분명하게 수긍이 갈 것이다.

오컬티즘은 마술이 아니다. 주술을 배우거나, 보통의 에너지보다는 정묘하지만 여전히 물질적인 자연의 여러 에너지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비교적 쉽다. 인간 속에 있는 "동물혼"의 여러 능력들은 쉽게 일깨워 진다. 사랑, 미움, 정욕 등과 같은 격한 감정에 의해서 일깨워지는 에너지는 쉽게 개발될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흑마술 혹은 사술(Sorcery)이다. 왜냐하면 힘을 사용하는 것이 해로운 흑마술이 되는가 혹은 유익한 백마술이 되는가는 순전히 동기에만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 힘을 사용하는 자의 마음속에 아주 미세한 정도의 이기적인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면, 영적인 힘을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의도하는 바가 완전히 순수한 것이 아니면, 영적인 힘은 '심령적인' 힘으로 바뀌고, 아스트랄계에서 작용하게 되어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비이기적인 관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나, 이기적이며 복수심이 강한 사람들이나 모두 다 동물혼의 능력과 에너지를 사용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영의 여러 가지 능력과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아주 완전하게 깨끗한 사람들뿐이다.--그리고 이것이 바로 신성한 마술이다.

그렇다면 "신성한 지혜"의 제자가 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은 무엇인가? 다음 조건들을 충실하게 여러 해 동안 엄격하게 지키고 실행해가지 않으면, 실천적 오컬티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다. 깊은 물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구도 수영을 할 수가 없다. 또 날개가 성장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 앞에 공간이 있어서 자신을 그 공중에 맡길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새도 날을 수가 없다. 양날의 검을 사용하려는 사람은 그 검을 처음 사용할 때, 자신이 다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또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다치게 되는 것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칼날이 서있지 않은 무딘 칼의 완전한 숙달자가 되어야만 한다.

신성한 마술이 흑마술로 바뀌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즉 신성한 지혜의 연구를 안전하게 추구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들에 대해서 개략적인 개념을 전하기 위해서, 동양의 여러 스승들에게 주어진 "비밀의 규칙"들 안에서 몇 가지만 인용해 보겠다. 다음 몇 개의 규칙들은 많은 규칙들에서 발췌한 것으로, 하나씩 그것들 뒤의 괄호 속에 설명을 붙여 보겠다.


(1) 가르침을 받을 장소는 정신을 분산시키지 않고, "좋은 영향력(자기(磁氣))"을 방출하는 물체들이 많은 곳이어야 한다. 다섯 개의 신성한 오색이 하나의 원 속에 모여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 장소는 공중에 떠돌고 있는 어떠한 유해한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라야 한다.

〔그 장소는 다른 목적으로 써서는 안된다. "신성한 오색"이란 어떤 특정한 형태로 배열되어 있는 무지개의 오색이다. 그 색들의 자력은 대단히 강하다. "유해한 영향"이란 불화, 싸움, 사고, 병, 나쁜 감정 등에 의한 방해를 뜻한다. 싸움이나 격정은 즉각 그 장소의 분위기, 즉 아스트랄 빛에 인상을 주게 되고, "대기 속에서 떠돌아" 다닌다. 이 첫 번째 조건을 지키기 쉬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지키기 어려운 것들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 것이다.〕

 

(2) 제자가 "마주 보고" 공부하는 것을 허락 받기 전에, 다른 제자들로 선발된 동료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력을 체득해야한다. 이 경우 동료들의 수는 반드시 홀수여야 한다.

"마주 보고"라는 것은 이 경우에, 혼자서 즉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서' 라는 뜻으로, 그 때 제자는 자기 자신의 진아(眞我)와 마주보고 또는 자신의 스승(구루)과 마주 보고서 가르침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 때가 되서야 비로소 자신이 지닌 지식을 어떻게 응용해 왔는가에 따라서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가르침을 받게 된다. 이것은 가르침의 전기간 중에서 끝 무렵에 일어난다.〕  

(3) 스승이 "라무린"의 성어(聲語)를 제자에게 전하기 전에 혹은 제자가 "듀부제드(Dubjed)"를 준비하도록 허락하기 전에, 제자의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어 모든 것들, 특히 자신의 「다른 자아들」과 평화로운 사이가 되어 있는지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혜의 말씀과 선법(善法)의 말씀이 흩어지게 되어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

"라무린"이란 '쯔온카파'가 지은 실천적인 교훈의 저작으로,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종교적, 현교적인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비교적(秘敎的)인 목적을 위해서 쓰여졌다. 「"듀부제드"를 준비한다」라는 것은 거울이나 수정같이 투시를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비품들을 준비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자아들"이란 동료 제자들을 말한다. 제자들 사이에 최고의 조화가 없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스승은 제자들의 양과 음의 요소들을 신중하게 조정하면서, 제자들 자기적, 전기적 성질에 따라 구별해서 선별한다.〕

 

(4) 공부를 하는 동안에 제자들은 한 손에 있는 다섯 손가락처럼 통일을 이루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동료중의 한 사람이 다치게 되면, 다른 사람 모두가 다치게 된다는 사실을 스승은 제자들이 마음속 깊숙이 간직하도록 인상을 주어야 한다. 만약 한 사람의 기쁜 일이 다른 동료들의 가슴에 반향을 일으키지 않으면, 요구하고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므로, 배움을 계속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기적(磁氣的)인 조건을 고려하여 제자들을 선택하더라도, 이 같은 일은 좀처럼 잘 일어나지 않는다.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가능성 있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기질 때문에 혹은 동료들과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해서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

 

(5) 동료 제자들은 비나의 현(絃)처럼 구루에 의해서 조율되어야 한다. 각 현은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전체적으로 조화의 음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제자들은 하나가 되어 구루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소리를 낼 수 있는 건반처럼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제자들의 마음은 지혜의 조화를 향해서 열리게 될 것이고, 신지(神智)는 제자들 모두를 뚫고 나가는 지식으로서 진동하게 되어, 주재(主宰)하고 있는 신들(수호천사, 수호신)에게 즐겁고, 제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지혜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인상이 찍혀질 것이고, 법칙의 조화가 결코 깨지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6) "시디스"ㅡ오컬트 힘ㅡ에 이르는 지식을 얻고자 희망하는 자는 이 세상과 인생의 모든 허영을 버려야만 한다.  


(7) 「나는 가장 뛰어나다.」라든가 혹은 「나는 동료들보다 더 신성하고, 스승이나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서 더 신임을 받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자는 제자의 길을 그만 두어야 한다. 제자는 어떤 생물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가져서는 안되며, 그것을 그의 마음으로부터 쫓아내고, 자신의 생각들을 계속해서 가슴속에 고정시켜야만 한다. 그래서 자신과 대자연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을 마음속에 가득 채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할 수가 없다.

 

(8) 제자는 외계(육신 및 생활환경)에 살아있는 것들에서 오는 영향ㅡ살아있는 것들에서 오는 자기적(磁氣的) 방사(放射)ㅡ을 조심해야 한다. 따라서 내적인 본성에서는 모든 것들과 하나이지만, 자신의 신체는 모든 외부적 영향으로부터 분리시키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식기(食器)를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이나 동물과의 신체적인 접촉을 해서는 안된다.

「애완 동물도 허락할 수 없다. 심지어 어떤 나무나 식물을 만지는 것도 금하고 있다. 제자는 오컬트 공부의 목적을 위해 자기자신의 분위기를 개별화(個別化)하기 위해서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만 살아가야 한다.」

 

(9) 제자의 마음은 대자연의 보편적인 진리 외에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마음이 무뎌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마음의 가르침"이 "눈의 가르침"ㅡ즉 텅 빈 현교적 의식ㅡ으로 되고 만다.3


(10) 제자는 그 종류가 어떻든 간에 생명을 가지고 있는 동물을 음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또 포도주나 다른 종류의 술 혹은 아편 등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이 같은 것들은 부주의한 사람에게 달라 붇는 '라마임', 즉 악령(惡靈)과 같기 때문에, 제자의 이해력을 삼켜버린다.

「포도주 및 다른 여러 가지 술에는 제조 과정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자기(磁氣)가 쉽게 포함될 수 있고, 그 자기는 매우 지속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동물의 고기는 그 동물의 심령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11) 모든 사람들에 대한 호의와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망각, 명상, 금욕, 도덕적 의무의 준수, 고운 생각, 선행, 친절한 말씨 등은 지식을 획득하고 고급의 지혜를 받도록 준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12) 제자는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규칙들을 준수했을 때만, 때가 무르익으면 '아라한'의 '시디스'를 얻게 되게 되고, 차츰 차츰 "보편적인 전체"와 하나가 되는 성장을 기대 할 수 있다.

여기에 있는 12의 규칙들은 73개의 규칙들에서 발췌한 것이다. 73개 규칙 모두를 여기에 열거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서구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규칙들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겨우 12개의 규칙만으로도 제자의 길을 갈 수 있는가를 충분히 보여준다.4

서구, 특히 영국의 교육은 경쟁과 투쟁의 원리가 넘치고 있다. 다른 아이들보다 더 빨리 배우고, 자신의 동료들을 추월해서,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같은 또래들보다 앞설 것을 부추긴다. 그것이 지나쳐서 "친선경쟁"이라고 잘못 표현되고, 일상 생활의 모든 일에서 경쟁심을 기르도록 촉진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생각을 갖도록 교육받은 서구 사람들에게, 자신의 동료들에 대해서 "한 손에 있는 다섯 손가락처럼" 느끼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또한 같은 동료들은 자기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동정이나 감사에서 그가 직접 선택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스승에 의해서 아주 다른 근거로 선택되어 진다. 그리고 제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먼저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거나 반감을 가지는 것 등의 모든 감정을 마음속에서 없애 버려야 할 정도로 강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서구인들이 이것을 성실하게 시도해 볼 준비가 되어 있을까?

게다가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과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가장 소중한 사람의 손까지도 잡지 말라는 규칙 등이 있다. 이 규칙이 애정이나 호감에 대한 서구인들의 개념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하고 지독하다고 생각되지 않을까! 또 자기 자신의 진보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 말라는 것이 너무 지나친 정도로 이기적이라고 서구인들은 말할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도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다음 생까지 미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상상적인 비 이기심 속에서 착각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비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의 자기 기만에 불과하고, 정서주의나 감정 혹은 비실재적인 삶의 잡동사니들ㅡ소위 "예의"라는 것ㅡ은 진리가 요구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조건들을 "외적"인 요소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들은 대단히 중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들은 별개라 해도, 서구의 제자들이 여기서 요구하고 있는 조화에 자신들을 어떻게 맞출 수 있을까? 서구에서는 자기 중심의 개성이 대단히 강하게 자라 있어서, 회원들 서로간에 미워하고 질투하지 않는 예술 학파는 하나도 없다. "전문적인" 반목과 질투는 이젠 속담처럼 되었다. 사람들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소위 "예의"같은 것조차도 미움이나 질투의 악마를 감추어 보려는 가면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동양에서는 "만물 비분리"의 정신이, 서구의 경쟁심처럼,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주입되어진다. 개인적인 야심, 개인적인 감정 및 욕망을 강하게 자라도록 부추기지 않는다.

원래 마음의 토양(土壤)이 좋으면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해서, 저급아가 고급아에 따르는 습관이 강하게 뿌리를 내린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다. 서구인들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들에 대해서 좋다 싫다하는 것은 행위의 방향을 주는 원리이다. 심지어 그것을 자신들의 생활의 법칙으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을 때에도, 서구인들은 좋다 싫다에 따라서 행동한다.

신지학 협회에서는 별로 배운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1888년 2월호의 「도(Path)」라는 잡지에 나온 논문을 명심해 주면 좋겠다.--《각 단계에서의 진정한 열쇠는 구도자 자신이다.》5 "지혜의 시작"은 "신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지혜 그 자체인 자아에 대한 지식이다.

위에서 말한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기 시작한 오컬티즘을 공부하는 제자에게, 오컬트 지혜를 구하러 온 모든 사름들에게 '델파이 신탁'에서 준 답이 얼마나 멋지고, 깊은 진실을 나타내고 있는가! 그 말은 현명한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계속 반복된 말이다.--"인간 이여, 그대 자신을 알라."



2. 오컬티즘과 오컬트의 기술


나 종종 들어왔지만 오늘까지 믿지 않았었다.
힘이 센 마법의 주술에 의해 대자연의 법칙을 부정(不正)한 목적으로 왜곡하는 자 있다고... 


- 밀턴 -

 

이 달 들어서 온 몇 통의 편지에서 보아도 지난달의 논문인 "실천적 오컬티즘"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편지들은 다음의 두 가지 결론을 충분히 증명해 준다.


(a) 오컬티즘과 마술을 믿는ㅡ두 개는 대단히 틀린 것이지만ㅡ교양이 있으며 사려 깊은 사람들이 근대 유물론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있다.

(b) 많은 신지학도를 포함해서, 이 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은 오컬티즘의 본질에 대해서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 일반적으로 오컬티즘과 "흑마술"을 포함하는 오컬트 과학을 혼동하고 있다.

오컬티즘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여러 힘이나 그 힘들을 얻기 위하여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에 관해서 사람들의 설명은 상상만큼이나 다종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오컬티즘의 대사(大師)만 있으면 얼마후 "자노니(Zanoni)"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수에즈 운하를 건너서 인도로 가기만 하면, "로저 베이컨"이나 혹은 심지어 "생 제르맹 백작" 처럼 걸출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한다. 또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마그래이브(Margrave)'를 그들의 이상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그가 그것을 위해 자신의 혼이라는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곤 한다. 또 삼도(三途) 강의 엷은 암흑에서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을 통해서 망령을 불러내는 '엔돌'의 무녀(巫女)를 오컬티즘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으며, 또 이런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완전한 '초인'이 된 것으로 알고, 그렇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 '엘리파스 레비'가 조롱하듯 만들어낸 규칙에 의하면, "의식적 마술"은 옛날 아라한들 철학의 상상의 '분신'이다. 간단히 말해서 오컬티즘에서 표출하는 '프리즘'은 그 철학에 정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만큼 다양하며, 여러 가지 색깔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지혜와 힘을 얻으려고 생각하는 지원자들에게 분명한 진실을 알려주면, 그들이 매우 성내지 않을까? 너무 늦기 전에 많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유용할 뿐만 아니라 이젠 필요하게 되었다. 이 진실을 단지 몇 마디로 말할 수가 있다: 서구에서 자신을 "오컬티스트"라고 말하며,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수백 명이나 있지만, 그들 중에 자신이 통달하려고 노력하는 오컬트 과학의 본질에 대하여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몇 명밖에 안된다.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들 대부분은 흑마술로 가는 고속도로 위에 있다. 그들이 이 말에 대해서 항의하기 전에, 그들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혼돈(混沌)의 상태에서 질서를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먼저 오컬티즘과 오컬트 과학이 갖는 진정한 관계 및 둘 사이의 차이를 배우게 해야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여전히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 때는 화를 내도 좋다.

한편, 눈부신 태양과 촛불이 다르듯이, 또는 '절대적이며 원인 없는 불가지(不可知)의 일체'의 반영인 불변불사(不變不死)의 인간의 영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육체와 다른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오컬티즘과 다른 여러 비밀 과학들 사이의 차이를 배우게 해야 한다.

고도의 문명을 이룬 서구 사회에서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사상에 눈을 뜸과 동시에 근대에 맞는 언어와 말들이 만들어졌다. 이런 일은 어느 나라 말이든 다 같은 과정을 겪는다. 세속적인 재화(財貨)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이기주의라는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사상과 개념들이 물질주의화 되면 될수록, 정신적인 것들에 대해서 토론해 보기도 전에 "미신"이라고 암묵적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 필요성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말들을 마음속에 담아 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속임수"와 동의어가 되어 버린 "마술", 아주 어리석은 무지를 나타내는 말이 되어버린 "사술", 중세의 바보 같은 배화 철학자들과 제이콥 보엠 그리고 성 마틴 신자들의 유감스로운 유물인 "오컬티즘" 등은, 모두가 손기술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표현들이라고 생각되어져 왔다. 이런 말들은 모두가 경멸하는 용어들이며, 암흑의 중세 시대와 그 이전 이교도(異敎徒) 시대의 더러운 찌꺼기를 언급할 때만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졌다. 따라서 그런 평범하지 않은 능력들 사이의 차이나 혹은 그런 능력을 습득하도록 이끄는 제과학들 사이의 차이를 동양의 언어, 특히 산스크리트어처럼 매끄럽게 정의하거나, 미묘한 뜻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이 서구의 영어에는 없다. "Miracle(기적)"과 "enchantment(마법 혹은 마법에 걸린 상태)"라는 말을 듣거나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전달되는가? 그리스도 교도는 "자연의 법칙을 깬다" 하더라도 모세를 통해서 신이 하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기적을 굳게 믿고 있지만, 파라호의 마술사들이 행한 마법은 조소하거나 악마의 짓이라고 말한다.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 교도들은 오컬티즘을 악마와 연결시키지만, 믿음이 약한 불신자들은 모세나 마술사 및 오컬티스트들을 비웃고, 그런 "미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조차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 차이를 보여주는 말이 없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즉, 빛과 그림자를 표현할 말이나, 진실한 것과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러운 것 사이의 경계선을 그어주는 적절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하는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러운 것은 인간, 신 혹은 악마가 "자연의 법칙들을 깨는 것"을 가르친다고 하는 신학적인 해석들이다. 반면에 숭고하고 진실한 것이란, "자연의 법칙들에 따라" 모세나 마술사들이 행한 과학적인 기적들로, 그들은 그 시대의 "왕립 학술원"이었던 사원(寺院)에서 그 지혜와 진정한 오컬티즘을 배웠다. "오컬티즘"이라는 말은 분명히 오해를 일으키는 말이다. 그것은 "비밀의 지식"이라는 "굽타-비디야"라는 복합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에 관한 지식인가? 몇몇 산스크리트 용어를 보면, 그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양한 종류의 비전 지식 혹은 비전 과학에 붙여진 많은 명칭들 중에서 네 가지가 있다. 이것들은 심지어 현교적 성전인 "푸라나"에도 나오는 것이다.

(1) 야즈나-비디야6
ㅡ 어떤 종교적인 의식들을 행함으로서 대자연계에서 깨어난 오컬트적인 힘에 관한 지식.

(2) 마하-비디야
ㅡ "위대한 지식"이란 뜻으로, 카발리스트들의 마술이나 탄트라 숭배의 마술로, 최악의 경우에는 주술을 나타낼 때도 있다.

(3) 구히야-비디야
ㅡ '음(音)'(에테르) 속에 있는 신비적인 힘들에 대한 지식이다. 따라서 만트라ㅡ노래를 부르는 기원이나 주문ㅡ안에 잠재해 있는 신비한 힘에 관한 지식이며, 사용되는 리듬이나 멜로디에 따라 다르며, 대자연의 힘과 그 상호 관계의 지식에 근거한 마법이다.

(4) 아트마-비디야
ㅡ 동양학자들에 의해서 단순히 "혼에 대한 지식" 혹은 "진정한 지혜"로 번역되 쓰여지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의 아트마-비디야만이 "도의 길잡이"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현명하고 비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신지학도가 추구해야할 오컬티즘이다. 다른 모든 것은 모두가 "오컬트 과학"의 분야들에 불과하다. 그와 같은 기술은 광물, 식물, 동물과 같은 대 자연의 왕국에 있는 모든 사물의 궁극적인 본질에 대한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기술로, 비록 그 본질이 보이지는 않더라도, 또는 그것이 과학의 이해를 벗어난 것일지라도, 물질적인 영역에 속해있는 것들에 대한 지식이다. 연금술, 점성학, 오컬트 생리학, 수상술(手相術) 등은 대자연 속에 존재하며, 근대과학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기술들의 비밀을 많이 발견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쉬바의 눈"이라 상징되고, 그 밖의 나라 등에서는 "천리안" 등으로 불려지는 "투시력"은 메즈머리즘의 사생아인 최면술도 아니며, 그러한 기술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아트마-비디야'를 제외한 모든 다른 것들에 통달하면, 좋든 싫든 결과를 얻어 낼 수는 있다. 그러나 '아트마-비디야'는 그러한 것들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아트마-비디야'는 다른 모든 분야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때로는 그 기술들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한 목적을 위해서 불순물을 없애고, 이기적인 동기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한 후에 그 같은 기술들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도 사전에 커다란 준비를 하지 않고도, 심지어 금욕적인 생활방식을 따르지 않고도, 위에서 말한 한 두 가지 혹은 모든 "오컬트 기술"들을 배울 수가 있다. 심지어 어떤 고귀한 도덕적 기준 없이도 배울 수가 있다. 그러나 물론 도덕적인 기준 없이 배울 경우에는 십중 팔구는 상당한 주술사가 되고, 흑마술로 곤두박질해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뭐 중요한가? "부두교"나 "둑파"의 주술사들은 먹고 마시고, 그들의 악마적인 기술에 의해 희생된 무수한 희생자들에 대해서 즐거워한다. 마찬가지로 온후한 신사들인 생체 해부학자들과 의학박사의 칭호를 가진 최면술사들도 똑같다. 그들 사이에 유일한 차이는 부두교와 둑파는 의식적인데 반해, '챠코트-리셋'같은 사람들은 무의식적인 주술사라는 것이다.

이처럼 양쪽 모두 흑마술에서의 노력과 성취의 결실을 수확해야만 하기 때문에, 서구의 의사들이 흑마술에서 얻어지는 이익과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다면, 벌이나 명성도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시 말해서 이런 학파들에서 실행되고 있는 최면술이나 생체해부는 순전한 주술이다. 단 부두교나 둑파에서 가지고 있는 지식을 그들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챠코트-리셋같은 사람들이 50년 동안 제아무리 열심히 연구하고 실험적인 관찰을 하더라도 얻어낼 수가 없는 지식이다. 마법의 성질을 이해하건 이해하지 못하건, 마법을 장난으로 하려고 하며, 제자들에게 주어진 규칙들이 너무나 엄해서 아트마-비디야 혹은 오컬티즘을 단념한 사람들을 아트마-비디야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비록 그들이 다음 10생 동안 부두교와 둑파의 주술사가 되더라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아마도 오컬트에 왠지 모르게 끌리면서, 그들이 열망하는 것의 진정한 성질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번뇌를 떨쳐버릴 수도 없고, 진정한 무사무욕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에 아마도 가장 흥미를 가질 것이다.

이와 같이 받아들여질 수가 없는 상호 모순적인 충동들에 의해 갈팡질팡하는 불행한 사람들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너무나 자주 말해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조금만 관찰해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가 있는 일이다. 일단 사람의 마음속에서 오컬티즘에 대한 욕망이 눈뜨게 되면,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안식이나 의지할 곳이 없으며, 마음의 평화에 대한 희망이 있을 수가 없다. 그는 억누를 수 없는 끝없는 불안에 휩싸여 거칠고 황량한 공간으로 내몰려진다. 그의 마음은 격정과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가 "황금의 문"을 통과하도록 허용치 않는다. 그는 평범한 생활에서 안락 혹은 평안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면 그는 필연적으로 마법이나 흑마술로 빠져서, 수많은 생(生) 동안 끔찍한 카르마를 쌓아야 하는가? 그가 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은 없는가?

또 다른 길이 있다고 우리들은 대답한다. 자신이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이상의 높은 성취를 바라지 않을 것이며, 자신에게는 너무 무거워서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하트마", "붓다" 혹은 위대한 성인이 되어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철학이나 "혼의 과학"을 연구하면, 어떤 초인적인 힘 없이도 인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아라한이 가지는 힘인 "시디스"는 그런 훈련에 필요로 하는 무서운 자기 희생을 감수하고, 규칙들을 빈틈없이 엄밀하게 지켜서 완전히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진정한 오컬티즘 혹은 신지학은 생각나 행동에서,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자신을 버리는 "위대한 자기부인(自己否認)"이라는 것을 똑바로 알고, 이것을 항상 마음에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오컬티즘은 애타주의이며, 그것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타산적인 계산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가 그 일을 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 살아가게 된다." 견습기간 초기에는 많은 것들을 용서받는다. 그러나 그가 "받아들여지자마자", 제자의 개성(저급아)은 사라져야 하고, 그는 단지 대자연 속에서 일하는 선한 힘이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그에게는 두 개의 길이 확실하게 나타나며, 중간에 휴식할 수 있는 길도 없다. 제자는 많은 환생과 데바챤에서의 휴식 없이, 마하트마(아라한 혹은 보디삿트바)의 상태에 이르는 황금의 사다리를 열심히 한 계단씩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첫 단을 잘못 내딛어 '둑파'들의 길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이런 모든 것들은 알려지지 않았거나 완전히 도외시되고 있다. 준비 단계에 있는 지원자들이 바라는 조용한 진화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에게서 기묘한 생각들이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사로잡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이상한 외부의 영향력에 의해 사고력이 많이 뒤틀려 버린 지망자들은 자신의 동물적인 욕망을 충분히 승화해 고양시킬 수가 있으며, 분노, 힘 그리고 불 같이 타오르는 그의 격렬한 힘이 내면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그런 에너지가 가슴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있는 더 높은 성스러운 목적으로 향할 때까지, 즉 그들의 확장되지 않고 축적된 힘 덕분에 혼의 지성소(至聖所)에 들어가서 고급아 앞에 서게 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의 가슴속에 저장해서 닫아 둘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 때문에 지망자들은 그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격정 및 번뇌 등과 싸우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것들을 죽여 없애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강력한 의지로 강렬한 불꽃을 누르고, 그들의 본성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해서, 그 불꽃이 얇은 재 밑에서 연기가 나도록 한다. 그들은 잡아둔 여우를 풀어주고 싶지 않아서 오히려 그 여우에게 잡아먹히는 스파르타의 소년처럼, 고통을 선택해서 받는 것과 같다. 오! 환영에 속아서 진실을 분별하지 못하는 가련한 자들이여!

정욕을 죽이지 못하고 마음속에 일시적으로 억제해 두고, 그것을 승화시켜 깨끗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마치 땀과 기름투성이인 한 무리의 만취한 굴뚝 청소부들이 깨끗한 흰 커튼이 쳐져있는 성소(聖所)에 갇혀서, 그것을 더럽혀서 더러운 누더기로 변화시키는 대신에 그 성소의 지배자로 바뀌어, 그 성소만큼이나 순결하게 되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차라리 수도원의 깨끗한 분위기 속에 갇혀 있는 12 마리의 스컹크가 향냄새로 가득 찬 것을 방출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어떤가? 인간 정신의 기묘한 착각이 아닐 수가 없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의논해 보자.

우리들 인간 혼의 지성소에 있는 대아는 고급아 혹은 영이다. 이런 신성한 영의 의식은 살아있는 동안은 육체에 유폐(幽閉)되어 있으며, 마나스(마인드)에 기초를 두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마나스는 인간혼ㅡ영의 매체인 '영적인 혼'ㅡ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혼은 최고의 형태로는 신성한 사랑, 영적 열망 및 의지력 등의 복합체이지만, 저급의 형태로는 욕망의 매체와 결합함으로서 생겨난 동물적인 욕망과 세속적인 격정 등의 복합체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인간혼은 이성적 고급 성질이 정복하려고 하는 동물적인 본성과 내면의 동물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할 때마다 이끌리는 신성한 본성 사이의 연결고리이며 매개체이다. 내면의 동물은 본능적인 "동물혼"으로, 무분별한 광신자들에 의하면, 그들의 가슴속에 잡아 가두어 죽이지 않고 누그러뜨릴 수 있는 그런 격정들의 온상이다. 그들은 아직도 동물적인 하수구 속에 있는 흙탕물을 수정처럼 맑고 깨끗한 생명의 물로 바꾸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한 격정들을 인간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은 채 가두어둘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사랑과 정욕이라는 격정적인 감정들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그 감정들이 태어난 곳인 바로 그 동물혼 속에서 그대로 살도록하고 있다. 비록 옆에 사는 이웃처럼 그러한 격정들에게 오염되더라도, "인간혼"의 고급 및 저급 부분은 다 같이 그러한 격정들을 거부한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듯이, "고급 자아" 혹은 "영"은 그러한 감정을 동화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의 저급 성질과 고급 자아의 유일한 연결고리이며 매개체인 '마나스'만이 고통을 받는 것이며, 어느 순간 깨어나서 물질의 심연 속으로 사라질지 모를 그러한 격정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끌려갈 위험에 쳐해 있는 것도 바로 '마나스'이다. 마음속의 지성소가 준비되어 있더라도, 동물적인 정욕이 지성소에 단지 있는 것만으로도 인간혼의 조화가 깨지는 데, 하물며 최고의 본질인 신성한 조화와 어떻게 동조할 수 있을까? 혼이 격정의 혼란과 육체적 감각 속에서 생겨나는 세속적 욕망들, 심지어 "아스트랄 인간"의 욕망들로 물들어 괴로움을 당할 때,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승리를 쟁취해 낼 수 있을까?

왜냐하면 이 "아스트랄 인간"ㅡ인간이나 동물 모두에게 있는 그림자 같은 복체ㅡ은 신성한 자아의 친구가 아니라, 육체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아스트랄 본질은 마나스의 저급 의식인 '인격아'와 육체의 연결고리이며, 불사(不死)의 생명의 매개체가 아니라, 일시적인 생명의 매체이다. 인간에 의해서 투영된 그림자처럼, 아스트랄은 노예처럼 그 사람의 움직임과 충동을 기계적으로 그리고 맹종적으로 따라 다닌다. 그러므로 영에게로 올라가려 하지 않고, 물질에게로 기울어진다. 격정의 힘이 완전히 죽고, 불굴의 의지라는 증류기 속에서 완전히 부셔져 절멸되었을 때, 육체의 모든 정욕과 갈망이 다 죽고, 인격아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 결과 "아스트랄 본질"이 '영점(零點)'까지 줄어들 때만, "고급아"와의 합일이 일어날 수 있다. 여전히 살아 있지만 더 이상 갈망하는 이기적인 개성이 아닌 정복당한 저급아 만을 반영할 때, 그때 휘황찬란한 "오고에이데스", 즉 신성한 자아는 인간 실체의 양극(兩極)ㅡ정화된 물질의 인간과 원래부터 항상 순수한 영적 혼ㅡ과 의식적인 조화 속에서 진동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노시스 파의 신비가들이 말하는 "크리스토스"인 「스승-대아」 앞에 서서, 원초의 「그것」과 섞여지고, 「그것」속으로 융합되어 하나가 된다.7

그렇다면 인간의 일상적인 생각들과 매순간 순간의 생각들이 세속적인 것들, 소유욕과 권력욕, 갈망, 야망 그리고 아무리 영예스러운 것이라도 여전히 세속적인 임무들에 얽매여 있다면, 오컬티즘이라는 "좁은 문"을 어떻게 들어가는 것이 가능할까? 심지어 인간의 애정 중에서 가장 비이기적인 부인과 가족에 대한 사랑조차도 진정한 오컬티즘의 장애물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신성한 사랑이나 부인에 대한 남편의 사랑을 예로 보면, 심지어 이러한 감정들을 가장 밑바닥까지 분석해서 완전히 걸러내면, 거기에는 여전히 이기심이 있으며, 자기 중심적인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 한순간의 거리낌도 없이 자기 자식의 생명을 건지는 대가로 수백, 수천 명의 생명을 희생시키지 않으려는 어머니가 있을까? 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보다는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깨지 않으려는 진정한 남편 혹은 연인이 있을까?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우리들은 똑같이 말을 할 것이다. 인간적인 애정의 방식이라는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신성한 보편적 인류애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가득 차있는데, 어떻게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인류라는 "거대한 고아"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나 관심이 몇 퍼센트나 남아 있을 것인가? 그리고 자기 자신의 특권을 부여받을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혼 속에서, "조용하고 작은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가 있겠는가? 인류 전체의 바램이 혼에 인상을 주거나 혹은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여유가 어느 정도 남아 있겠는가? 그러나 '보편적인 마음'의 지혜에 의해서 혜택을 받고자하는 사람은 인종, 피부색, 종교, 혹은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인류 전체를 통해서 '우주 마인드'로 가야 한다. 한 사람의 인간이 작은 자신의 아(我)를 "보편적 대아" 속으로 융합하도록 이끌 수 있는 것은 '애타주의'이지, 제아무리 숭고한 생각을 가졌다고 해도 자기중심주의는 아니다. 진정한 오컬티즘의 제자가 신성한 지혜, 즉 신지(神智)를 얻고자 한다면, 그 자신을 바로 이러한 인류에 봉사하는 애타적인 일에 헌신시켜야 한다.

구도자는 세속적인 생활과 오컬티즘의 생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두 가지 생활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해 보았자 소용없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두 명의 주인을 섬길 수 없으며, 동시에 두 명의 주인을 만족시켜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의 육체와 고급혼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으며, 어느 쪽의 권리도 침해하지 않은 채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의무와 보편적 의무를 동시에 행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작고 조용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자식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흘려버리거나, 혹은 자식들의 바램에만 귀를 기울이고 인류의 울부짖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아야 한다. 이론적 오컬티즘이 아닌 실천적 오컬티즘을 추구하고자 하는 결혼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생활은 끊임없는 격렬한 투쟁의 연속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사람은 언제나 인류에 대한 초월적인 신성한 사랑의 목소리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개인 중심의 세속적인 사랑의 목소리에 따를 것인가, 망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자신은 두 가지 의무 중 어느 것 하나에 실패하거나, 아니면 두 가지 의무에 다 실패 할지도 모른다. 이것보다 더 악화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오컬티즘의 길을 가겠다고 맹세한 후에 세속적인 사랑이나 색욕에 깊이 빠지는 사람은 누구든지 반드시 즉각적인 결과를 느끼게 된다.--즉 불가항력적으로 초월적인 신성한 상태에서 저급의 물질계로 끌려 내려질 것이다. 육체적인 자기 만족 혹은 심지어 정신적인 자기 만족은 영적인 통찰력을 그 즉시 잃어버리게 만든다. 대아(大我)의 목소리와 욕정의 목소리, 혹은 심지어 '둑파'의 목소리를 더 이상 구별조차 할 수 없게 되며, 정도(正道)와 사도(邪道)를 구별할 수 없게 되고, 건전한 도덕과 단순한 궤변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사해(死海)의 열매"는 가장 신비적이며 찬란한 모습을 띄지만, 입술에 대면 재로 변하고, 마음속에서 고통으로 변한다.

"깊이는 점점 더 깊어지고, 어둠은 더욱더 어두워지고

지혜는 우매함으로, 순결은 죄로,

환희는 고통으로, 희망은 절망으로"

한번 잘못된 생각에서 저지른 실수를 하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더 깊은 수렁 속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비록 흑마술인가 백마술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실천자의 의도에 달려있지만,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행한 흑마술의 결과들은 반드시 나쁜 카르마를 만들어 내게 된다. 흑마술이란 다른 사람에게 끼친 악한 영향력으로 그 결과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거나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게 하는 것이다. 카르마는 잔잔한 생명의 물 속으로 던져진 무거운 돌이다. 그것은 거의 무한대로 퍼져 나가며, 점점 더 넓어져 가는 파문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인들은 필연적으로 결과를 불러내며, 그리고 이 결과들은 「응보의 법칙」에 의해서 나타나게 된다.

사람들은 어떤 행위들의 성질이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러한 행위들을 저지르는 것을 억제만 한다면, 많은 나쁜 카르마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힘이나 능력 이상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길 기대하지 않는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마술사들"이 있는데, 그들은 일련의 환생 및 장구한 세월 동안 고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경험을 쌓아서, 선천적인 권리를 획득한 신비가들과 오컬티스트들이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말하자면 욕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세속적인 그 어떤 불(火)도 그들의 감각이나 욕망에 불을 지필 수는 없다. 인류의 거대한 절규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인간의 소리도 그들 혼 속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들만이 성공을 확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아주 적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개인 중심의 덧없는 정서라는 수화물을 가지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오컬티즘이라는 좁은 문을 지나 갈 수가 있다. 그들은 저급의 개성이라는 느낌을 없앴으며, 따라서 "아스트랄" 동물을 마비시킴으로서, "좁은 황금의 문"이 그들 앞에 활짝 열린다. 전생과 현생에서 범한 죄의 짐을 여러 생 동안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 문은 열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아주 조심스럽게 나아가지 않으면, 지혜의 황금의 문은 "파멸로 이르는" 넓은 문과 길로 변할 것이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저급 성질을 억제하는 "아트마-비디야"의 자비로운 영향력없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행한 오컬트 기술의 문이다. 우리는 "칼리-유가"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 치명적인 영향력은 동양에서 보다 서양에서 수 천 배나 강하다.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투쟁에서 많은 사람들은 암흑시대의 세력에 의해 쉽게 먹이가 되고 있으며, 이 세계는 많은 망상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이런 망상들 중에 하나가 어떤 큰 희생을 지불하지 않고 "황금의 문"에 도달해서, 오컬티즘의 입구를 비교적 쉽게 넘어설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욕과 개인적인 이기심에 의해 고무된 대부분의 신지학도들이 꾸는 꿈이지만, 그들이 부러워하는 목표로 그들을 이끌 수 있는 것은 권력욕이나 자기 본위의 그런 감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다고 믿어지고 있는 사람이 말한 것처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그 길은 가시밭길이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문은 진실로 좁기 때문에 예비적인 곤란에 대해서 몇 마디만 듣고서도 서구의 구도자들은 놀라서 주춤하고 몸을 떨며 움추린다.

그들이 여기서 멈춰 서서 약한 상태에서 더 이상은 시도를 하지 않도록 체념케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좁은 문에서 등을 돌렸는데도 오컬트에 대한 욕망에 이끌려 환영의 빛이 빛나고 있는 넓고 더욱 더 매혹적인 불가사의한 황금의 문 쪽으로 한 발짝이라도 발을 들여놓는다면, 아 가련하도다! 그것은 흑마술인 '둑파'들 상태로 이르는 길이다. 그들은 얼마 후 길을 잃고 지옥에 내려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 숙명의 길 입구에 서 '단테'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읖조렸다:8

"슬픔의 나라로 가고자 하는 자, 나를 거쳐가거라. 영원의 고뇌를 만나고자 하는 자, 나를 거쳐가거라. 파멸한 사람들 사이에 끼고자 하는 자, 나를 거쳐가거라."



3. 일상 생활을 위한 실천적 제안


서 문


다음 논문에 인용된 글들은 원래는 출판을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허술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독자들이 좋다고 생각한 것들을 발췌해서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그들이 읽은 책들에 대한 인상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으므로 실질적인 가치를 갖게 되리라는 기대에서 처음에는 "신지학 탐구"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그 중에서 독자들 마음에 호소하는 본질적인 내용을 작은 공간에 모아 보았다.

매일 아침 읽고, 하루 동안 그 읽은 내용에 따라 생활하려고 노력하고, 여유 시간에 그것에 대해서 명상해 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I


일찍 일어나라. 깨어나자마자 침대 속에서 반 정도는 깨어있는 채로, 반 정도는 꿈꾸면서 게으르게 누워있지 말고 바로 일어나라. 그리고 나서 모든 인류가 영적으로 재생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라. 진리로 향하는 길 위에서 힘겹게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대의 기원에 의해서 용기를 갖고, 더욱더 열심히 성공적으로 잘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라. 그리고 그대가 힘을 얻어 감각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기를 기원하라. 그대의 마음 앞에 삼매 속에 있는 그대의 대아(스승)의 모습을 그려라. 그 모습을 그대 앞에 고정시키고, 모든 세밀한 점까지 다 그려내라. 존경심을 가지고 대아에 관해 생각하라. 그리고 부작위(不作爲)적인 실수와 작위(作爲)적인 실수들을 모두 용서하여 주도록 기원하라. 이것은 마음의 집중을 촉진하고 그대의 마음을 정화하고 그리고 더욱더 많은 것들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는 그대의 성격의 단점들에 대해서 반성해라: 그 단점들과 단점들이 그대에게 주는 일시적인 향락들을 완전하게 깨달아라. 그런 다음 그 결점들에게 굴복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굳게 결의하라. 이러한 자기분석과 그대 자신의 양심이라는 심판 앞에 자신을 내놓는 것은, 지금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그대의 영적인 진보를 촉진시킨다.

그대가 목욕을 할 때나, 운동을 할 때, 항상 그대의 도덕적인 부정(不淨)과 육체적인 부정(不淨)들 모두가 씻겨져 내려가도록 그대의 의지를 발휘하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다음의 규칙들을 준수하라.


1) 그대의 의무로서 해야만 할 일을 하라. 즉, 불필요한 일은 어떤 것이든 하지 말아라.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것이 그대가 해야할 의무인가 아닌가 생각해 보아라.

2) 불필요한 말은 결코 하지 마라. 그대가 입에 담기 전에 그대의 말이 가져다 줄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라. 친구 때문에 그대의 신조를 깨뜨려서는 결코 안 된다.

3) 불필요한 생각이나 잡념이 그대의 정신을 사로잡도록 해서는 결코 안된다.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어렵다. 그대의 마음을 처음부터 공허 상태로 만들어 내는 것을 행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신의 결점을 분석하거나 "완전한 분들"에 대한 생각으로 그대의 마음을 채움으로서 악념(惡念)이나 잡념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써라.

4)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그대의 의지를 활용해서 먹는 음식이 잘 소화되어 그대의 영적인 열망과 조화를 이루는 몸을 만들어 사악한 욕망이나 생각들을 일으키지 않도록 그대의 의지로 훈련하라.

배가 고플 때만 식사를 하고, 갈증이 날 때만 마시며, 그렇지 않을 때는 결코 마시거나 먹지 마라. 어떤 특별한 요리가 그대의 미각을 당기게 했다면, 그 갈망을 만족시키려고 쉽게 유혹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대가 그 음식에서 얻는 쾌락은 먹기 전이나 먹은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리고 그것은 당장의 일시적인 쾌락을 주지만, 많이 먹으면 고통으로 변하며, 음식은 혀에만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명심하라. 만약 그대가 그것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거나, 그것의 유혹에 그대 자신이 넘어가도록 놓아둔다면, 그대는 그것을 얻으려고 야비스러운 일등 그 어떤 것이든 하게 되어, 수치를 모르는 인간으로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명심하라.

반면에 그대에게 영원한 지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다른 것이 있는 데도, 그대가 모든 애착을 일시적인 것에 집중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대는 육체도 아니고 감각도 아니며, 이런 것들이 지탱하는 쾌락이나 고통은 그대에게 결코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모든 다른 유혹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추론으로 계속 실습하라. 그리고 그대가 종종 실패하더라도, 그대는 더 확실한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너무 많이 책을 읽지 마라. 만약 그대가 10분 동안 책을 읽었다면, 그 내용을 10시간 동안 깊이 숙고하라. 그대 자신이 고독 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습관화하라. 그리고 그대 자신의 생각에만 잠겨있는 것을 또한 습관이 되도록 하라.

그대 자신 주위에 있는 그 누구도 그대를 도와줄 수 없다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모든 것들에 대한 그대의 애착을 서서히 떨쳐 버려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침에 일어나서 행했던 기원을 되풀이하여라. 하루 동안의 행동들을 돌이켜 반성해보아라. 그래서 어느 면에서 실패했는가를 알아내 내일 또다시 실패하지 않도록 단단히 결심하라.9


II


자기 지식을 추구하려는 올바른 동기란 지식과 관계된 것이지, 자아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각이란 지식이기 때문에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지, 자아와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지식을 획득하는 데 필수적인 요건은 순수한 사랑이다. 순수한 사랑을 위하여 지식을 추구하라. 그러면 결국에는 그 노력 덕택에 자기 지식을 획득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학도(學徒)가 점점 조바심을 낸다는 사실은 그가 순수한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상을 위해서 일 한다는 명확한 증거로, 진실로 순수한 사랑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대승리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10

우리들 각자에 내재하고 있는 "신"ㅡ즉 사랑과 진리, 정의와 지혜, 선과 힘의 대령(大靈)ㅡ만이 우리들의 진실 되고 영원하며 유일한 사랑이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의지처이며, 반석처럼 확고하게 서 있기 때문에 영원히 신뢰할 수 있는 우리들의 유일한 믿음이고, 비록 모든 다른 것들이 사라져 없어진다 해도 최후까지 힘이 되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우리의 나쁜 카르마가 모두 소진해서 없어지고, 신성한 "구세주"가 우리의 혼 속에서 그 자신의 실재를 나타내 보일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불평하지 않고 기다리면서 획득해야만 하는 유일한 목표인 것이다.

학도가 통과해서 들어가는 문은 "만족"이라는 문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만든 그 법칙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신' 그 자신은 그 '법칙' 자체이기 때문에, 신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은 오지 않는다.11 만약 우리가 진화의 흐름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러면 우리들의 환경은 우리들에게 아주 적절하다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어떤 행위를 하다가 실패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크리슈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그 "침착함"을 어떤 다른 방법으로는 배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들의 모든 계획들이 성공했다면, 그러면 성공과 실패의 어떤 대조를 우리들이 알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들이 무지하게 짠 계획들이 모두 잘못 세워졌을지도 모르지만, 친절하게도 대자연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계획들을 이루어내도록 허락해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계획에 대해서 어떤 힐책을 받지는 않지만, 성취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카르마적인 과실을 얻게 될 것이다. 혹시 그대가 실패한 것에 대해 낙담이라도 했다면, 그러면 바로 그 만큼 그대의 상념의 힘은 약화되는 것이다. 인간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여전히 대의명분을 위해 일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환경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어떤 혐오감을 그대의 마음으로부터 없애버리길 그대에게 바란다. 만약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모두가 그대의 고급아가 진실로 바라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러면 그것은 그대의 상념을 강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반사적으로 그대의 몸에도 영향을 줄 것이고, 그대의 몸은 더욱 더 강해질 것이다.12

행동해야 할 때가 왔을 때 현명하게 행동하는 것, 휴식해야 할 때는 인내 있게 기다리는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인생사의 고해(苦海)와 조화를 이루게 만든다. 그의 배후에는 대자연과 우주의 법칙이 있고, 진리와 자비를 가르치는 길을 알리는 빛으로서, 그는 회천(回天)의 위업(偉業)을 달성할 수가 있다. 이런 법칙에 무지하면, 한편으로는 극단적으로 내달아 열광할 때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우울함과 절망의 때가 온다. 이와 같이 인간은 인생의 부침(浮沈)에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 희생자가 되고 만다.13
길을 가고자 하는 자들이여,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성공하지 못하듯이, 인내를 가져라.

축적된 에너지가 소진해 버리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다른 형태로 전환되거나 또는 다른 운동 방식으로 변환되어야 한다. 그것은 영원히 정지 상태로 있으면서 존속할 수는 없다. 우리가 자제할 수 없는 욕망에 대항해서 저항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축적된 에너지가 다른 통로로 인도되지 않으면, 그 에너지는 강해져서 의지보다도 이성보다도 더 강해지게 될 것이다. 그 에너지를 통제하기 위해서 그대는 보다 높은 고급의 방향으로 그 에너지를 인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저속한 것에 대한 애착을 보다 높은 고귀한 어떤 것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킴으로써 변화시킬 수가 있다. 그리고 악덕은 그 목적을 바꿈으로서 미덕으로 변화될 수 있다. 격정은 맹목적이지만, 그것은 이끌리는 대로 간다. 그리고 본능보다는 이성이 그것을 이끄는데는 더 안전한 안내자이다. 쌓여있던 노여움(혹은 애욕)은 그 격정을 쏟아 부을 대상을 찾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에너지를 품고 있는 사람은 파멸적인 폭발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태풍이 지나간 후에는 고요가 찾아온다. 옛사람들에 의하면, "자연은 공허를 싫어한다."고 했다. 우리는 격정을 파괴하거나 절멸시킬 수도 없다. 그것을 쫓아버리면 또 다른 엘리멘탈의 영향력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어떤 것과 바꾸어 놓지 않고서는 저급의 것들을 파괴하려고 노력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저급의 영향력들을 고급의 것으로, 악덕을 미덕으로, 미신을 지식으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III


자신의 시력과 청력을 '보이지 않고 소리가 없는 것'에 집중하는 것만이 욕망과 보상에 대한 애착 및 갈망의 비참함 등을 고치는 치료제라는 것을 배워라.14

인간은 자신에게 내재하고 있는 진보를 향한 잠재능력을 믿어야만 한다. 인간은 자신보다 위대한 성질을 무서워 말아야 하며, 또 자신보다 저급의 물질적인 성질에 의해서 주춤거리거나 이끌려 가서는 안된다.15

고난으로 의기소침해서는 안되며, 게다가 자포자기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모든 과거사가 보여준다. 고난이 없었다면, 이 세계에 있는 많은 경이로운 문명들은 없었을 것이다.16

자신의 길을 선택한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한발 앞으로 내딛으려는 힘이다. 어디서 이런 힘을 찾을 수 있을까? 주위를 돌아다보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힘을 어디서 발견하는 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 힘의 근원은 충심에서 우러나온 확신이다.17

절제하라. 왜냐하면 그대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절제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절제하는 것이다.18

자기 자신과 싸우고 그리고 그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인식할 때만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19

"악에 저항하지 마라." 즉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불유쾌한 것들에 대해서 불평을 하거나 성을 내지 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동안에 그대 자신을 잊어 버려라. 사람들이 그대에게 욕설을 퍼붓고, 박해하고, 학대한다 해도, 왜 저항하는가? 저항하면 그 보다 더 큰 악을 불러일으킨다.20

어떤 일이던지 목전에 당면한 과제는 추상적인 의미에서 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 일이 중요한가 중요하지 않은가를 생각해 보아서는 안된다.21

악을 고치는 최선의 치료법은 억압이 아니고, 욕망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을 끊임없이 신성한 것들에 몰두하게 함으로써 이것을 가장 잘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자제하기 어려운 감각의 대상들에 대해서 상상하거나 정신을 몰두하게 되면, 고급아에 대한 지식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22

우리들 자신의 본능의 기질은 너무나 야비하고, 교만하고, 의기 양양하며, 자기 자신의 욕구들이나 판단, 의견들로 가득 차 있어서, 만약 유혹들을 자제하지 못하면, 돌이킬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을 알고 겸허해지도록 유혹 당하고 시험받는다. 가장 위험한 유혹은 유혹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라. 그러므로 유혹이 그대에게 급습해 오면 기뻐해라.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으로 알고, 인내와 끈기와 충실을 가지고 그것을 참아내라.23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지만, 그대가 성취해야만 하는 어떤 책임이 신에 의해서 그대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느껴라. 신 자체를 원해야지, 신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원해서는 안된다.24 그 어떤 일이든 해야할 일이 있다면 그것을 해야 하지만, 그 행위의 열매를 즐기기 위해서 그 일을 해서는 안된다.25 만약 모든 행위들이 행위자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그 행위들을 단지 해야만 하기 때문에ㅡ즉, 행위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에ㅡ행한다면, 우리들 속에 있는 '자기 본위의 저급아'의 개성은 점점 더 약해져서 끝내는 정지해 버릴 것이다. 그러면 진아를 나타내는 지식이 찬란하게 그 광채를 발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정한 목표가 즐거움이나 고통 때문에 흔들려서는 안된다.26 대사(大師)가 그대를 선택해서 그 분 옆으로 오라고 부르실 때까지, 인류와 함께 있어라. 인류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서 사심 없이 일해라. 이것만이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27

지식은 쓰면 쓸수록 늘어난다.--즉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더욱 더 많이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진리의 탐구자여, 어린 아이 같은 믿음과 '입문한 자'와 같은 굳은 의지를 가지고, 인생항로에서 자기 자신을 위로할 방법이 없는 자에게 그대가 지니고 있는 축적된 지식을 주어라.28

개인의 권리들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생각은 개성이라 말하는 독사(毒蛇)의 독성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제자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제자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비판 혹은 비난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결코 안되며, 자기 변호나 자기 변명을 하기 위해서 목청을 높여서도 안된다.29

그 어떤 사람도 그대의 적이 아니며, 그대의 친구도 아니다. 모두가 그대의 스승들이다.30 이제는 세속적이든 영적이든,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일해서는 안된다. 정의로운 신의 의지인 우주의 존재 법칙을 성취하기 위해서 일해야 한다.31


IV


현재 속에서도 살지 말고, 미래 속에서도 살지 마라. 영원 속에서만 살아야 한다. 악이라는 거대한 잡초는 영원 속에서는 꽃을 피울 수가 없다. 존재에 묻은 얼룩은 영원한 생각의 바로 그 공기 속에서 씻겨진다.32 마음의 순결은 "영지(靈智)"를 얻어 내는 필요조건이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주요한 방법이 있다. 첫째, 모든 나쁜 악념(惡念)을 끊임없이 쫓아버려라. 둘째, 어떠한 경우에도 평정한 마음을 유지해서, 그 어떤 일이 생겨도 동요하거나 짜증을 내지 마라. 이러한 두 가지 정화법은 헌신(獻身)과 자비(慈悲)에 의해서 가장 잘 고무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깨끗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게으르게 가만히 앉아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으면 안된다. 모든 사람들이 큰 뜻을 품고, 바르고 열심히 일하도록 해라. 그러나 열심히 일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올바른 방법으로 일해야만 한다. 바로 그 올바른 방법의 첫 걸음은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33

분노를 느끼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불필요하게 꾸짖을 때마다, 마음은 정화를 필요로 한다. 아첨을 목적으로 어떤 일이나 말을 했을 경우나 불성실한 말과 행동으로 누군가를 속였을 때도 마음을 정화해야 한다.34

구제를 원하는 사람들은 욕정, 분노, 탐욕을 피해야 하며, 용감하게 성전에 순종하고, 영적인 철학의 연구와 실제 생활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인내를 길러야 한다.35

이기적인 생각에 이끌리는 사람은 개인적인 생각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천국을 바라지 않고 현재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만족하는 사람은 이미 천국에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욕망이 없다는 것은 자유스럽고 행복하다는 것이며, "천국"이란 다름 아닌 자유와 행복이 존재하는 상태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보상을 바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선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 보상을 획득하지 못하면 행복하지 못하며, 그리고 비록 그가 기대하는 보상을 획득했을지라도, 보상을 획득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행복은 거기서 끝나 버리고 만다. 해야 할 미완성의 일이 있는 한, 영원한 행복과 평안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의무의 완수는 그 자체로 보상이 따르게 되어 있다.36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자, 악덕이나 어리석은 짓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자만하는 자, 자기 자신을 현명하다고 믿고 어느 면에서도 자기 동료들보다 우수하다고 믿고 있는 자는, 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될 수 없다. 천국의 왕국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어린 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미덕과 지혜는 숭고한 것들이나, 그것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분리의식과 교만을 가지게 되면, 그 미덕과 지혜는 더 정묘한 형태로 재현해 나온 저급아의 뱀들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과 감정들을 희생하는 것이 여려 규칙들 중에서 제일 첫째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서는 흔들릴 수가 없는 평정을 얻는 것"이다. 지금 곧 바로 그대의 선한 의지들을 실행에 옮겨라. 그리고 단 하나라도 실행하지 않은 채 단지 의도로서만 남겨 두어서는 안된다. 우리들의 유일의 진실한 행로는 행위에서 얻어진 보상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의 가치를 위해 행위 하는 것이다. 결과를 바라는 마음에 자극 받아 행동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또한 태만에 빠져서도 안된다.

믿음37을 통해서 마음은 격정과 어리석음으로부터 정화된다. 바로 그것에서 육체에 대한 지배가 오게 되며, 최후에는 감각들을 정복하게 된다.38

깨달음을 성취한 성인들의 특징은, 첫째 그는 모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며, "진아(眞我)" 혹은 "지고(至高)의 영"만이 지복이며 다른 모든 것은 고통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둘째 그에게 일어나는 것이 그 어떤 일이든 그것에 대해서 집착이나 반감을 갖고 있지 않으며, 속 좁은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는다. 끝으로 오관(五官)을 정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두 번째의 특성을 몸에 지니지 못하면 위선과 영적인 자만을 생기게 하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으며 유해(有害)한 것이다. 또한 첫 번째 특성을 체득하지 못하면 두 번째 특성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39

애타주의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 자신보다 가난하거나 약한 사람과 마지막 남은 한 조각40의 빵까지도 나누어 먹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 인종이나 국적 혹은 종교가 무엇이든 간에 그의 형제를 도와주지 않으며 인간의 고통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 무고한 사람이 비난받는 것을 듣고도 마치 자신을 변호하듯이 그를 변호하지 않는 사람, 이런 모든 사람들은 '신지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V


신의 명령에 기초를 둔 명백한 삶의 의무들을 포기하는 사람은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의무들을 다하지 않으면 무슨 나쁜 일이 그에게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이나, 그 의무를 달성하면 그가 가는 길에서 어려움들이 없어지지 않나 생각하면서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도 결국에는 결과를 바라고 행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의무는 그저 신에 의해서 명령된 것이기 때문에 행해야 한다. 언제인가 신은 그 의무를 버릴 것을 명령할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침착하지 못한 성질이 평온해지지 않는 동안의 행위의 모든 열매들을 신에게 바치고 일을 하며, 올바르게 일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신의 덕분이라 생각하며 일해야 한다. 인간의 진실한 생명은 지고의 영과 하나로 융합하여 휴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은 우리가 행한 어떤 행위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며, 또한 전적으로 우리와는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재이며 "진리"이다. 이와 같이 진리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의 비존재를 깨닫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새로운 의식이며, 인간의 자유(해탈)는 인간의 행위와는 관계가 없다. 우리가 하는 행위에 따라 우리들 자신이 제한된 존재라는 한계를 무기력하나마 뛰어넘을 수 있다는 이해를 증진시킬 때만이 행위들은 유용한 것이다. 이 깨달음의 단계를 지나고 나면, 그 다음부터 행위들은 도움이라기 보다는 장애가 된다.

신의 명령에 복종하며 일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일할 수 있는 힘은 신의 선물이지 인간의 자의식적인 본성의 한 부분이 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행위의 필요성에서 해방된다. 그러면 순수한 마음은 진리로 채워지고 스스로가 신과의 동일성임을 인식하게 된다. 모든 행위들은 "자연(본성)의 세 가지 특질들"41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혼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어떤 행동을 자신이 진정으로 행위하고 있다는 생각을 먼저 없애버려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의 모든 행위를 '헌신'에 두고 행해야 한다. 즉, 모든 행위를 자기 자신이 아닌, "지고자(至高者)"에게 바쳐야 한다. 자기 자신을 신격화해서 희생을 받는 신으로 하든가, 아니면 다른 진정한 신ㅡ이쉬바라ㅡ에게 헌신하던가 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모든 행위와 대망(大望)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할 것인가 아니면 "일체자"인 신을 위해서 행할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동기의 중요성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놀랄만한 용감한 행위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를 하거나,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영적인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이것이 단순히 자신이 구원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행한 것이라면, 그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위 하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에게 희생을 바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는 행위들을 하는 행위자가 아니라, 단지 행위의 목격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일체자에게 헌신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육체 속에 있기 때문에 의심들이 솟아오르고, 그 의심들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의심들이 떠오르는 것은 그가 무엇인가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지식의 검(劍)에 의하여" 의심을 쫓아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어떤 의심에 대하여 적절한 해답을 얻으면, 그는 그 만큼 의심을 쫓아버리는 것이 된다. 모든 의심은 저급의 성질에서 오는 것이며, 결코 고급의 성질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점점 더 헌신적으로 되어 갈수록 자신의 "삿트바(Sattva)"42 즉, 선한 본성 속에 내재하는 지식을 한층 더 분명하게 알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완전한 헌신을 할 수 있는 사람 혹은 지속적으로 헌신을 수양하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그 자신 속에서 저절로 솟구쳐 나오는 영적인 지식을 발견하게 된다." 또 "의혹에 차있는 마음을 가진 자는 이승에서든 저승(데바 세계)에서든 즐거움을 맛볼 수가 없으며, 궁극의 아름다움도 즐길 수가 없다." 이 말의 의미는 만약 우리들 속에 고급자아가 있다면, 비록 우리들이 태만하고 의심이 깊어도, 그 고급자아는 지식의 부족함을 이겨내고 인류전체라는 시냇물과 같이 우리들을 궁극의 지복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43

진정한 기원이란 모든 성스러운 것들에 대한 명상이고, 성스러운 것들의 영향력이 더욱 더 강해져서 우리의 삶이 한층 더 고상해지기를 명상하는 것이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성스러운 것들을 우리들 자신과 일상 생활 및 행위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명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스러운 것에 관한 어떤 지식이 우리들에게 틀림없이 주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이 더욱더 강해지도록 생활을 보다 고상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강한 소원을 간직하면서 행하여야 한다. 이런 모든 생각들이 모든 만물이 생겨나게 한 "지고의 신성한 본질"에 대한 의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44

영적인 수양은 일심 집중을 통해서 이루어져 간다. 일심 집중은 매일 매일 그리고 매 순간에 집중을 흩어지게 하는 일없이 계속하지 못하면 헛수고하는 것이다. 명상이란 "활동적이며 외향적인 생각의 정지"라고 정의되어 진다. 일심 집중은 어떤 특정의 목적을 향해서 모든 삶을 기울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헌신적인 어머니는 무엇 보다도 자신의 아이의 관심사들과 그 관심사들에서 파생된 모든 것들에 대하여 살피는 사람이지, 하루종일 앉아서 아이들의 관심사들 중의 한 가지 면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생각(상념)이란 것은 자생력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에 하나의 생각을 꾸준히 품고 있으면, 그 생각에 의해서 채색되고, 그 생각과 관계된 모든 것들이 마음속에서 떠오르게 된다. 그래서 신비가는 일심 집중된 명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 여기에 이것을 말해주는 크리슈나의 말이 있다.

"끊임없이 나에 대해서 생각하라. 나에게만 의지하라. 그러면 그대는 틀림없이 나에게 오게 될 것이다."
인생은 위대한 스승이다. 인생은 혼의 대현현이다. 그리고 혼은 "지고자"가 현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방법들은 선한 것이고, 모든 것들은 "헌신"이라고 말하는 대목표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헌신이란 행동 속에 있는 성공이다."라고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말한다. 심령적 능력45들은 법칙을 명백하게 해주는 것임으로 얻어지면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가치를 과대평가해서도 안되며, 그 위험을 무시해서도 안된다. 그 능력에 의지하는 자는 마치 자만과 승리에 취한 사람과 같다. 왜냐하면 그는 정상을 향해서 오르기 시작한 산기슭의 한 모퉁이에 도달한 것이기 때문이다.46


VI


인간은 자기 자신의 외부에 있는 힘에 의해서는 구제될 수 없다는 것은 영원한 법칙이다. 이것이 가능했다면 벌써 오래 전에 대사(大使)가 지구를 방문해서 천상의 진리를 설명해주고, 영적인 성질의 능력들을 나타냄으로써 무지한 인간의 의식에 수많은 사실들을 증명했었을 것이다.47

죄에는 육체로서 범한 죄가 있듯이,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범한 죄도 있다. 어떤 연유에서든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자, 앙갚음을 좋아하는 자, 모욕당하면 용서하지 않으려는 자는 비록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살인적인 정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거짓된 교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어떤 조직에서 명하는 대로 자신의 양심을 눌러 부셔버리는 자는 자기 자신의 신성한 혼을 모독하는 것이며, 비록 어떤 서약(誓約)을 한 적이 없다해도 쓸데없이 신의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혼을 하였든 하지 않았든, 감각의 쾌락을 바라고 그것에 동조하는 자가 진짜 간음자(姦淫者)이다.

그의 동료들로부터 그가 현명하게 줄 수 있는 것인 빛, 선, 도움 등을 빼앗고, 자신의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 그리고 물질적인 것들을 쌓기 위해서 사는 자가 진짜 도적(盜賊)이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로부터 비방이나 다른 허위 진술 등에 의해서 평판(評判)이라는 소유물을 훔치는 자 역시 도둑놈이며, 가장 악질적인 것 중에 하나이다.48

만약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호의를 가지게 된다면, 삶의 가치와 이 삶 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대단히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49

사고력(상념)을 개발하라. 그대 혼의 전력을 집중하여 모든 잡념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려라. 감각적 생활의 비현실성과 "내면 세계의 평화"를 나타내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한다. 낯이나 밤이나 자신의 주위와 자기 자신의 비현실성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나쁜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은 태만하고 무관심한 생각보다는 해(害)가 덜된다. 왜냐하면 나쁜 생각에 대해서 그대는 항상 경계하고 있고 그것들과 싸워서 정복하겠다고 굳게 결심했기 때문에, 이 굳은 결심이 의지력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쓸데없는 생각은 단지 주의력을 산만하게 하고 에너지를 낭비시키기만 한다. 그대가 싸워서 넘어야 할 첫 번째 근본적인 대망상(大妄想)은 '그대 자신이 육체다.'라는 착각이다. 이 육체를 그대가 잠시동안 머물러 있어야 할 집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해라. 그러면 그대들의 육체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격정(激情)을 하나씩 없애는 방향으로 사고력을 개발하면서 자신의 본성 속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는 결점들을 정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라. 첫 번째 노력 후에 그대는 그대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공허감과 허탈감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이것을 영적인 지복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알리는 부드러운 서광으로 여겨라. 슬픔은 악이 아니다. 불평하지 마라. 고통이나 장애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 그대가 그것들을 잘 다룰 수만 있다면 그대의 일을 도와주는 자연의 신비적인 노력이다. 제자다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상황들을 관찰하라.50

모든 불평은 진보의 법칙에 대한 반란이다. 피해야 할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고통이다. 과거는 바꿀 수도, 수정할 수도 없다. 현재의 경험에 속한 것은 회피할 수도 없으며, 또한 회피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회피해야 할 것은 미래에 대한 공포 혹은 불안한 예감들이며, 자기 자신과 타인들에게 현재 혹은 미래에 고통을 줄 수 있는 모든 행위나 충동 등도 피해야 한다.51


VII


자신이 끊임없이 열망하고 있는 높은 이상과 그 이상을 본받아서 자신의 생각, 감정 및 삶을 형성하겠다는 그런 이상만큼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만약 그가 방만하지 않은 채 그 높은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신의 목표에 점점 더 가까워 질 것이다. 그러나 노력 없이 이 정도까지 도달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그가 진정한 진보를 이루고 있다고 의식한다면, 자기 자신을 자만이나 독선으로 채우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의 이상이 높고, 그 이상을 향한 진보가 진실이라면, 그는 거만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겸손하고 공손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한층 더 깊은 진보의 가능성과 그 사람 앞에 열려있는 더욱 높은 세계에 대한 생각은 그의 열성을 꺾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의 자만은 틀림없이 죽여 없앨 것이다. 권태를 없애고 무관심을 열의로 바꾸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인간의 삶의 드넓은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다. 인생의 사명이 명백해지고, 인생의 놀라운 기회들이 있다는 것을 일단 인식하게 되면, 인생은 인생 자체를 위해서 살아갈 가치가 있게 된다. 이런 고급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며 확실한 방법은 생각 속에서든 생활 속에서든 애타주의의 원리를 기르는 것이다. 저급아에 제한을 받고, 이기주의의 원리에 따라 모든 것을 재는 그런 시야의 폭은 실제로 좁다. 왜냐하면 혼이 스스로 이런 것을 제한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떤 높은 이상에 대한 생각이나 혹은 생명의 고급계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진보의 조건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으며 다행이 인생의 환경이나 조건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한 고지에서 다른 더 높은 고지로 진보할 수 있는 기회와 인생의 분명한 목적 완수를 위해 자연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다.52

만약 인생의 목적이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 대해 자기 만족을 하고 안락하게 지내는 것에 있으며, 또한 그 물질적인 위안이 가능한 최고의 행복한 상태를 준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저차원의 것'들을 '고차원의 것'들이라고 혼동하는 것이며, 환영을 진리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물질적인 생활방식은 우리들 신체의 물질적인 구성에서 나온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는 "지구 위에서 기어다니는 구더기"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모든 열망들은 땅(세속)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진화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면, 바로 그것에 의해서 우리는 덜 물질적이 되고, 더욱더 정묘해져 아주 다른 문명의 질서가 확립될 것이다. 필수 불가결한 필수품처럼 보이는 것들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의식을 생각의 속도로 지구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보낼 수 있다면, 현재와 같은 통신 방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물질 속으로 더욱더 깊이 빠져 들어갈수록, 안락을 위해서 더욱더 많은 물질적인 것들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인간 속에 내재하고 있는 본질적이며 강력한 신은 비물질적이며, 물질들이 가지고 있는 제한과는 관계가 없다.

인생에서 진실한 필수품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순전히 우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르다. 철도, 선박 등은 현재의 우리에게 필수품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것들에 대해 전혀 모른 채 행복하게 살아왔다. 어떤 사람에게는 많은 궁전들이 필수 불가결한 것처럼 보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동차가, 한편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담배 파이프가 필수품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모든 필수품들은 단지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것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들은 인간을 기분 좋은 상태로 만들었으며, 그들을 계속해서 그 상태에 있도록 유혹해서, 더 높은 고급세계를 바라지 않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인간이 앞으로 나아가는 발전을 막고 있다. 만약 우리가 진실로 영적 진보를 원한다면,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필수품이 되지 말아야 한다. 다름 아닌 저급의 삶의 쾌락을 확대하고자 하는 갈망과 그런 생각에 사고력을 낭비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 보다 높은 고급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다.53



4. 질의 응답


(가) [실천적 오컬티즘]에 대하여

​"실천적 오컬티즘"이라는 대단히 흥미 있는 논문에서는, 스승은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할 때부터 제자가 비전(秘傳​Initiation)을 받고 천사(天使)가 되어서 자신의 제자들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가 있게 될 때까지, 오컬트 과학에 관해서 일체의 죄의 책임은 천사께서 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몇 세기 동안 "개인주의"의 물에 젖어 있는 서구인들의 마음으로서는, 이러한 법칙의 정의(正義)를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서 그러한 진실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 법칙을 올바르게 직관(直觀)은 하지만, 이론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자는 더러 있을 것임으로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편집자의 답:​ 아주 논리적인 이유는 다음의 사실인 것이다. 즉, 일반적인 생활의 경우에, 어버이나 보모, 가정교사나 학교 선생 등은 아이들의 미래에 형성할 윤리감이나 습관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도벽(盜癖)의 기술을 어버이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불쌍한 아이에게는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가 없고, 오히려 도둑 행위를 하도록 가르쳐준, 그 아이의 마음에 인상을 준 자(者)들이 그런 중대한 결과를 인수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논리의 정의는 없는 것입니다. 서구 사람들의 마음이 "개인주의의 물에 젖어있다."고 해도, 이런 이치를 이해 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과의 세계"로 되어있는 이승에서는, 이성이 열려있지 않은 아이에게 인상 받기 쉬운 마음의 형성에의 영향을 준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행해진 작위범(作爲犯), 부작위범 및 어린 시절에 받은 교육이 후일에 생겨날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면, "영적 구루(스승)"은 더욱더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구루는 제자의 손을 끌고서 전혀 모르는 미지(未知)의 세계를 소개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강하게 일을 해가고 있는 원인(原因)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것은 카르마의 활동과 매체 그리고 힘이라 말하는 아주 가느다란 것이지만, 끊어지는 경우가 없는 실(絲)인 것이며, 성스러운 마인드의 영역에서는 카르마 바로 그것입니다. 동기가 선한 가치가 있는 활동이라 하더라도, 나쁜 결과를 낳게 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일단 초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의 세계를 깨닫게 되었다면 활동의 결과를 알지 못했다고 자기 변명을 할 수는 없는 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런 신비한 행위이거나, 전혀 계획성이 없는 행위였거나, 모든 행위 앞에 전개될 두 가지의 길을 예견해서, 일 하는 경우나 하지 않는 경우, 두 경우에서 오는 결과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이와 같은 원칙에 따라 활동하지만, 무지로 인하여 자신의 투시력과 식별력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동안에, 위험한 영역으로 데리고 들어간 길 안내는 제자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 가망이 없는 것인가?

「루시퍼」​4월호에서 오컬트 연구의 필수 조건에 관해서 읽어보고, 이 잡지의 독자들은 오컬티스트가 되는 것을 단념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수도원 외에, 이와 같은 조건을 충족시키는 장소는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허락해 주면 나는 장차 의사가 되겠다는 예정을 가지고 있지만, 이 경우 제 8 조건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을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의사로서 성공하기 위해 오컬티즘을 연구하는 것이 특히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공"이라는 뜻은 의사뿐 아니라, 이 관계자 전원에 있어서 성공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게 해 주셔서「루시퍼」에 답을 게재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즉, 영국에서도 오컬티즘을 연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끝으로 덧붙이지 않고는 안될 일은 과학적인 저널로 해서「루시퍼」를 평가하고,「그리스도를 따라서」와 같이 종교 생활의 안내책으로 귀하의 책을 존중합니다.

데이비드 그라이톤

편집자의 답 : 의견은 너무 비관적입니다. 갑자기 단번에 높은 수준의 오컬티즘의 길로 들어가지 말고, 오컬트 과학의 여러 가지 분야를 연구하신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라이톤씨의 경우는 특히 그렇습니다. 장래 의사가 되었을 때, 약초나 광물이나 자연계의 다른 것들의 치료 효과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오컬티즘이나 테오파니아(Theophania)의 심리학이나 형이상학에 관한 지식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파탄잘리의 "요가 경(經)과 타라카 라자 요가"의 명상법을 몸에 지니는 것보다, 파라켈수스와 헬몬트 저작물을 공부해서 이해하는 편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컬티즘(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오컬티즘의 여러 가지 과학 분야나 기술)을 연구하려고 생각한다면,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디에서도 연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심한 이기주의가 자리잡고 있어서, 저급의 자기(磁氣) 때문에 사람의 영성이 자유로이 나타나지 못함으로, 고독한 상태에서 연구하는 쪽이 앞으로 훨씬 나아지는 효과를 얻을 것이다.

(다) 두, 세 가지 질문


신지학에 관한 질문을 받아 주고 있는 것을 알고, 두 세 가지의 질문을 하겠습니다. 그것에 대해 답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문 (1) 과학에서 알려져 있는 9 혹성과 신지학에서 말하는 7 혹성은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는 것입니까?

답) 씨크릿 독트린의 몇 곳에서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역주. 예를 들면 SD 1의 575 페이지.)

문 (2) ​일을 하지 않고 생활을 꾸려갈 정도의 재산가가 아닌데 어떻게 제자의 길에 들어가서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루시퍼」책에 쓰여져 있는 최초의 규칙에 따르자면 책을 쓰는 것만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외의 어떤 작업을 가져서도 일을 해가면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사다리의 첫 계단조차 오를 수가 없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초인이 되어 보겠다는 사람은 대망을 이루어 내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몇년간 고생을 해내야 하는 자기 희생을 해야하는 것이라고 한다는 말입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신지학 원리의 입장에서 말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신분이 낮은 자들 쪽이, 바르게 완성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답) 제자의 길은 생계 수단 같은 것은 일절 관계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혼은 육체나 환경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고립(孤立)시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제자의 길이란 엄한 규칙에 따른 물질계에서의 생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시초의 견습 기간에 있어서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난「루시퍼」책에서 말한 규칙은 나중 단계, 말하자면, 신통력이나 통찰력을 계발하는, 실제의 오컬트 훈련에 해당하는 사항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규칙은 모든 지망자가 될 수 있는 한 지켜야 하는 생활양식을 알려준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생활양식은, 모두가 열망하는 목적의 실현을 도와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컬티즘이란 "내면의 인간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면의 인간을 강하게 해서, 육체와 환경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끝내는 (역으로) 육체와 환경을 지배하는 것으로 되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의 길에서 시초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주로, 절대적인 무사무욕의 정신과 진리에의 헌신인 것이다. 그 다음에, 자각과 자제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성질)은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가지며, 엄한 생활의 율(律)을 지키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문 (3) 여성이 완전한 초인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까? 가령, 길(수련)에서 피할 수가 없는 고난을 만나서도, 육체적으로 견디어 낼 수가 있었다면, 여성의 영적 성질과 지적 능력은 초인이 되는 것을 가능케 합니까? 이승에서 대단히 어려운 일을 당한 프레다의 예로, 여성은 초인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표시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과 모든 지혜를 포함하는 신은, 남성이면 달성 할 수 있는 고급의 지혜를 몸에 지니는 수단과 가능성을 (사랑은 신의 남성 원리, 지혜는 여성 원리임으로), 그런 지혜를 대표하고 있는 여성, 즉 인류의 반이 되는 여성에게 주지 않는다면, 불공평하고 이상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루시퍼」에서 이것에 관해 설명할 수 있기를 기대 하겠습니다.     ---- C. S. 스톡 호무

답) '프레다'는 흑마술사였으므로, 대단히 지독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그녀는 도구파의 영왕으로 뼈의 골수까지 이기적이고, 권력욕에 가득 차있어서, 모든 것들을 희생시키려고 했습니다. (프레다는 '메이베르 콜린스'의 소설「꽃과 실」의 주인공)

고위의 초인이 되는 가능성은, 여성, 남성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서구의 여성들이 이런 가능성의 실현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어린 시절의 교육과 여성을 남성보다 낮은 것으로 보는 사회적인 편견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나라들에서는 주로 유태의 성서에 기초를 가진 것이며 이런 편견은 커다란 저주이고, 남성들은 그것을 잘 이용해온 것이다.

(라) 투고란의 질의 응답

문) ​뉴욕의 어느 한사람의 투고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약「루시퍼」책의 편집자들이 다음의 것을 설명해 주시면, 편집자들이 추진하고 있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베푸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신지학자 중 오컬티스트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가족애나 어버이, 처, 아이들, 친구 등에 대한 애정이라고 말하는 이승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의무를 버릴 필요가 있습니까?

​어느 신지학 관계의 출판물에서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입니다. 이와 같은 필수 조건이 정말 당신들의 율(律)에 있는 것입니까? 같은 것이 신약성서에도 있습니다. "나보다도 아버지 또는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는 걸맞지 않는 것이다. 나보다도 자식이나 딸을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는 걸맞진 않는 것이다" 등이 마태 복음(10장 37절)에 있습니다. 신지학의 천사(天使) 어른들도 이와 꼭 같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빛의 탐구에서    - LMC -

​답) ​이것은 대단히 오래된 옛 문제였으며, 또 시초에 신지학에 대한 적의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신지학에 대해 비난한 오래된 것입니다. 하여튼 이 답은 확실히 "아니다"입니다. 이와 같은 허위와 중상을 넣어서 널리 퍼지게 하려는, 대 실패를 범하는 신지학적인 출판물 등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조건으로 받아들인 신지학도는 한 사람도 없으며, 하물며 "신지학의 천사 어른들"의 제자ㅡ즉 구루의 첼라ㅡ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망자는 많지만 "선발된 자는 적다." 결혼해서 처나 자식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반드시 이행해야 된다고 말해 주어 이 하나의 이유 때문에 거부당하는 지망자가 수십명 있었습니다. 부모를 버리라고 말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대망이 아무리 크고 성실한 것이라도, 지식에의 갈망 또는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생활을 자신에게만 의지해 오고 있는 어버이를 버리는 자가 무슨 과학 중의 과학을 배우려하며, 성스러운 천사의 가까이 가려는 것은 적절치 못한 것이다.

결혼한 첼라(제자)로 받아들여진 두 가지 의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라도 첼라는 바라문의 남자이며 힌두교의 풍습에 따라 그의 '처'는 아직 어린 '아이'였습니다. 그 두 사람은 첼라라고 말하기보다는, 아이들간의 결혼과 예속을 없애버리려는 풍습의 개혁가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의견은, 먼 옛날 인도의 풍습에 따라, 길로 들어가기 전에, 부인의 승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투고자는 아마 신지학과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혹은 오컬티즘과 성서의 문자 그대로의 가르침을 혼동한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제(司祭)가 되기 위해 "부모와 처와 자식을 버려라", '실직(實直)한 사나이와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모두 포기하는 것이 신과 그리스도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행위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로마 교회에서 뿐입니다. 그리고​「누가에 의한 복음서」에는 다음의 무서운 말이 예수에 의해 말해지고 있습니다. 즉 "누구든지 부, 모, 처, 자, 형제, 자매, 거기에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나에게 오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14장 26절) 성(聖) 히에로 니무스는 어느 책에서 말하기를 "만약 그대가 가출하는 것을 못하게 방해하려고 해서, 아버지가 같은 이불에서 잠을 자거나, 어머니가 그대가 젓을 먹었든 젓 가슴을 보이거든, 부(父)의 체를 밟아 죽이고, 모(母)의 가슴을 밟아 버리라! 그리고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그대를 부르고 있는 주(主)에게로 달려가라!"

따라서, 신지학이나 그의 천사들에 대하여 그와 같은 지독한 비난의 출처는 확실히, 신지학 간행물이 아니고, 필경 반 그리스도교쪽의 잡지나, 또는 대단히 도그마적인 그리스도 교지(敎誌)였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협회는 천사 어른들의 가르침을 딱딱하게 모아서 주장한 일이 없습니다. 협회는 될 수 있는 한 천사 어른들에 의하여 지적해 주신 길을 나아가라고 한 것이지만, 몇 가지의 점에 있어서 매우 힘겨운 이런 일을 잘못 실습하거나 했다면, 그것은 신지학이나 천사어른들의 탓이 아니고, 인간의 성질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의 길의 율이 많은 산스크리트어나 티벳어의 책에 쓰여져 있다. [기우데이]​의 4권의 [우파 산수(제자들)의 법]에 관한 장에 의하면, 보통의 '첼라'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1) 손색없는 건강,54 (2) 정신 및 육체상의 완벽한 청결함, (3) 무사무욕의 목적, 보편적인 자비, 모든 생물에의 보살핌, (4) 정직함과 카르마의 법칙에 대한 확고한 신념, (5) 진리를 지지하기 위해 생명에 위협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는 용기, (6) 자신은 현현한 신성한 아트마(영)의 매체인 것이다고 말하는 직관(直觀), (7) 보잘 것 없는 일인 객관적 세계의 모든 것들을 올바르게 평가 해가면서, 그것에 대하여 냉정하면서 무관심해야 할 것, (8) 양친으로부터 제자의 길에 들어가는 허가와 축복을 받을 것,55 (9) 독신 생활과, 어떠한 의무에도 속박되지 않을 것.」

끝머리 두 개(8, 9)의 율이 특히 엄하게 시행됩니다. 어버이에 대하여 불경의 행위를 하거나, 부정(不正)하게 처(妻)를 버렸다는 것을 알았을 경우에는, 재가(在家 또는 在)를 받은 첼라라도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이상의 설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의무를 게을리 한 것이거나, 무엇인가 다른 이유로 실패한 첼라가, 자신의 실패를 천사어른의 가르침의 탓으로 넘겨보려는 케이스에 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가련한 약한 인간은, 자신의 과오를 자인할 만한 용기가 없고, 또 자신의 실패를 세상에 스스로 인정할 정도의 고결함이 좀처럼 드물기 때문이고, 언제나 자신의 죄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씌우고자 합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자들을 불쌍하게 생각해, 카르마 즉 응보의 법칙에 맡겨 두는 것입니다. 적에게 승리하는 것은 이런 약자가 아니고, 파라베이 저서의 지혜 있는 시​(詩)[기라-다루쟈니야] (11의 32)에 그려져 나온 것이다.

"체내에 솟구쳐 올라오는 적은 극복하기 어려운

번뇌이다.

용맹스럽게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 적을 파괴해 승리한 자는

세계의 정복자와 같은 것이다."​


5. 마술(오컬트)의 십원칙(十原則)

여기서 마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후기 저작에서는 오컬티즘으로 되어 있다. 범어(梵語)로는 "굽타비디야"이다. (역자)


(1)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영구, 불변, 언제나 활동하는 법칙의 결과들인 것이다. 외견상 기적은, 대단히 박학(博學)하지만, 지혜를 얻지 못했던 WB가핀다 박사가 "충분히 확증된 자연의 법칙"이라 말하고 있는 것들은 대립(對立)하는 에너지가 일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신과 비슷한 많은 사람들처럼 가핀다 박사는, 지난날에는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의 과학에서는 알지 못하고 있는 법칙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2) 자연은 삼위일체이다. 즉,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자연과 객관적 자연에 에너지를 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형, 내제하는 자연과 그의 생명원리가 있다. 이런 두개의 위에는 영이 있다. 영은 모든 에너지의 원천인 것이고, 이것만이 영원이며, 파괴당하는 일이 없는 것들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자연계와 그 눈으로서는 보이지 않는 원형은 끝이 없이 변화를 하지만, 영은 변화하지 않는다.


(3) 인간도 삼위일체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객관적인 육체가 있고, 활력을 주고 있는 진정한 인간, 즉 아스트랄 존재(혼)가 있다. 이 두 개는 제3의 것들인 즉 지배자인 불사의 영에 의하여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빛을 주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은 스스로를 그 영에 녹아들어 가게만 하면, 불사의 존재로 된다.


(4) 과학으로서 마술은, 이와 같은 원리의 지식인 것이고, 또 개인(개체)이 육체로서 있는 동안에, 영의 전지, 전능과, 자연력을 지배하는 영의 힘을 얻게 할 방법에 관한 지식인 것이다. 기술로서의 마술은, 이러한 지식들을 실제로 응용해 나아가는 일이다.


(5) 고대의 지식을 잘못 오용하게 되면, 흑마술(sorcery)이 되어 버리고, 선행에 써먹으면, 진정한 마술, 즉 지혜로 된다.


(6) 영매(靈媒)의 길은 초인의 길의 반대인 것이다. 영매는 외부(육체밖의 네거티브)의 영향력을 받는 수동적인 도구라 말하며, 초인은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또한 모든 저급 에너지를 지배하고 써먹을 수가 있는 것이다.


(7) 이미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미래)도 있는 모든 것들은, "아스트랄 빛(Astral Light)"이라고 말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복수의 기록판에 그 기록이 있으며, 비전(秘傳)을 받은 초인(아데프트)은 자신의 영이 지니고 있는 시력을 써서, 이미 지난날에 알려져 있었던 것과, 또 알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알아낼 수가 있다.


(8) 인종(人種)이라고 말하는 것은, 피부색, 체격, 그 외의 외부적 특색이 있는 것과 같이, 영적으로 내려 주는 것들에도 역시 각각 차이를 가지고 있다. 어떤 민족은 고급의 투시력이 자연스럽게 발달하는 경향이 강하고, 다른 민족에게는 영매 성질이 강한 것이 있다. 또 다른 어떤 국민은 마법에 몰두해서, 그 방법의 비밀을 간직해 대대손손 전해간다. 그런 결과, 광범위한 물질적 현상(現象)을 일으키는 수를 해낼 수가 있다.


(9) 마술에서 한가지의 기술은, 외부의 인간(육체)으로부터 내면 인간(아스트랄 형체)을, 고의로, 의식적으로 뽑아 버리는 일이 있다. 어떤 영매의 경우에는, 뽑아 버리는 일이 생겨나지만, 무의식적이였으며, 고의는 아니다. 영매가 이와 같이 되어 버리고 보면, 몸체는 심하거나 덜 심하거나 차이는 있지만, 강직증적(強直症的)으로 된다. 그러나 초인의 경우는, 아스트랄 형체가 없어진 것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육체감각이 확실해 있으며, 생각에 잠겨 있는 것 정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헤매고 있는 아스트랄 형체의 움직임에는, 시간, 공간은 아무런 장해가 되지 않는다. 오컬트 과학에 숙달해 있는 마술사는, 자신의 육체를 사라지게 해서, 외견상 자신이 선택한 형체를 취해, 그렇게 보이게 할 수가 있다. 또 아스트랄 형체의 여러 가지의 형으로, 사람들에 보이게 하는 짓을 할 수가 있다. 어느 경우에도, 이와 같은 것은 모든 목격자가 동시에 체험한다. 메즈머리즘에 의한 환각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최면술사의 저항 할 수가 없는 의지에 의하여 사람의 의식에 인상을 받게 한, 마음속의 환상(幻像)에 불과 하지만, 이 환각은 현실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목격자는 자기 자신이 진짜를 보았다고 대단히 열심히 말을 퍼트린다.


아스트랄 형체는 어디에도 갈 수가 있고, 어떤 장해물에도 침투할 수 있고, 육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갈 수가 있지만, 육체는 일반사회 수송 수단으로만이 이동할 수가 있다. 규정된 자기적 조건하에서는 육체가 공중으로 떠올라 갈 수가 있을지라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데는 보통의 이동 방법에 의지할 도리밖에 없다.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는 것들은 어느 경우, 어느 조건하에서는 분해해, 벽을 빠져 나와 다시 결합시킬 수가 있으나, 살아있는 동물 유기체로서는 그와 같은 짓이 안 된다.


이것은 스웨덴보그 파의 가르침이기는 하지만, 고대의 과학은 혼이 살아 있는 몸체를 버리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 우리들 생활의 여러 장면에서, 매일 이와 같은 살아있는 사체를 만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참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움, 슬픔, 절망, 병으로 인한 심한 발작, 과도한 정욕 등의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 것이다. 비어있는 사체에, 숙련된 마술사나 '엘리멘터리'라고 말하는 지옥의 인간 혼이 들어가거나,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엘리멘탈이 들어가는 일이 있기도 하다. 물론 백마술사인 초인은 똑같은 일을 할 수가 있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중요한 목적을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생기지 않는 한, 초인은 불순한 사람의 체에 들어가서 자신을 더럽히는 일은 결코 하지 않기 때문이다. 광기(狂氣)의 경우, 광인의 이스트랄 존재는 반정도 마비해 있고, 울렁거리고 있어, 지나가는 어떤 종류의 영이라도 영향을 받는 경우가 있고, 아스트랄 존재는 영구히 육체를 버리고, 육체의 흠협귀 같은 것에 잡히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흡혈귀는 붕괴하게되는 막바지에 이루고 있으며, 절망적인 급박한 사안에서 이승에 따라 붙어, 사람의 육체를 통하여 관능적 쾌락이라도 잠시동안만이라도 즐겨 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10) 마술의 기초는 자력과 전기의 특성, 상관 관계, 가능성에 정통한 실용지식이다. 특히 필요한 것은, 동물계 및 인간 안에, 그리고 동물과 인간에 대한 자력과 전기의 작용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많은 광물에는, 천연 자석과 같은 불가사의한 오컬트 성질이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정밀과학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들이지만, 마술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꼭 알고 있어야 하는 것들이다. 식물에서도 불가사의한 성질은 놀라울 정도의 것이 많이 있다. 서구의 과학이 몽견초(夢見草)나 마법의 허브의 비밀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뿐이다. 말할 필요 없이, 아편이나 하쉬쉬 같은 것들의 효과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이와 같은 몇 가지의 예 만으로서도, 인간 조직의 육체적 영향은 일시적으로 정신착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뎃사리아와 에헤이오스의 부인들, 사파지오스의 비의(秘儀)를 행했던 여고승들의 성소가 파괴되어버렸다고 해서, 식물에 관해서 그녀들의 비밀 지식이 없어져 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치다. 그런 지식은 지금까지도 보호되어오고 있으므로 소마(Soma)의 성질을 알고 있는 자는 다른 식물의 특성도 알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마술은 영적 지혜인 것이다. 자연은 마술사의 물질적인 편의 한패인 것이고, 제자이며, 종이기도 하다. 하나의 생명원리가 만물에 편만해 있고, 완성해낸 인간의 의지는 이것을 지배할 수 있다. 초인은 식물, 동물의 '자연의 에너지'를 법외(法外)에서 자극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은 실험은, 자연의 과거를 방해하지 않고, 촉진하는 것이다. 즉, 생명력이 더 강력히 작용하게 조건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초인은 초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감각을 지배하고, 육체 및 아스트랄의 제체(諸體)의 상태를 변하게 할 수 있다. 초인은 또 마음대로 엘리멘탈을 지배해, 써먹을 수도 있다. 초인은, 살아있는 사람, 죽은 사람, 모든 인간의 불사(不死)의 영만은 지배하지를 못한다. 불사의 영은 모두가, 신의 에센스의 불꽃인 것이며, 어떠한 외부의 영향에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6. 커다란 패러독스(PARADOX)

역설(패러독스)로서 일들을 이야기해 가는 것은, 오컬티즘에 잇어서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인 것이다. 패러독스(역설)는 일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가, 진리 즉 인생의 외관의 뒤에 있는 현실을 말로써 표현하려는 시도에서 빼놓을 수가 없는 것들이다.


역설이란, 말뿐만이 아니라, 활동, 인생의 삶의 방법 그것이기 때문이다. 오컬티즘의 패러독스(역설)는, 입으로 이야기하는 것뿐만 아니고, 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다. 여기야말로 위험한 함정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지 않으면 길을 닦을 수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모른 채, 머리 속에는 길을 닦는 생각에 열중한 나머지 잘못된 함정으로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다.


하나의 놀랄만한 패러독스는, 길에 들어선 학도(學徒) 앞에 막아서거나, 길이 굽어질 때마다 새로운 불가사의한 형을 취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학도는 아마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율(律)과 지도를 바라고 길에 들어갔을 것이다. 생명의 알파와 오메가는 시작과 끝에서는 무시무욕인 것을 학도는 배운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기자신의 일에 대해 일절 의식하지 않을 때만이 진리와 실재가 있는 그대로 모습이 자신의 열심인 마음 앞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는 진실성을 절실하게 느낀다.


학도는, 무사무욕이 오컬티즘의 유일의 법칙인 것이고, 인생의 과학(사이언스) 예술의 양편인 것이고, 자신이 이루어내려고 하는 목적지에의 안내자라는 것이 다는 것을 배운다. 이 제자는 열정이 불타오르며, 자신(自信)을 갖고 당당하게 오컬티즘의 산길로 나아간다. 그렇게 되고 보니, 몸체를 잊고 무한자에의 동경에 넘치는 정열의 비약을 갖는것이, 실제의 생활과 의식의 외적인 레벨에 나타난다. 그러하지만, 스승들은 그것을 그다지 장려하지 않는 것을 서서히 스스로 알게 되어 간다. 스승들은, 설령 제자의 열의를 둔하게 해버리려는 짓은 아니지만, 몸체를 극복해서만 지배를 할 수가 있다고 말하는  처음에의 절대 필요로 하고있는 대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제자는,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머리 속의 생각에 빠져 버리거나, 체(體)및 외적인 행위나 인격아를 잊어서, 진정한 자유가 있는 영역에 이르는, "상상의 세계"에서 살아 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승에서 행해내야 할 일을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주의력과 조심스러움을 가져야하는 외적 세계로 향하도록 해야 함과 동시에, 자제심을 잃어버리거나 또 체와 마음과 두뇌에 대한 '컨트롤'을 무디게 해서는 안 된다. 얼굴의 각 부분의 표정을 억제하고, 하나 하나의 근육의 움직임을 지배하고, 무의식이 풀어지는 것을 억제할 수 있는 것들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마음 그리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일들이야말로, 공부가 되고 좋은 관찰의 대상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소한 일」이나,「잠깐의 부주의로 잊어버리는 일」이나「말을 잘못한 것」혹은「기억이 틀린 것」과 보통 있는 것으로 팽개쳐 둘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그러한 것의 잘못을 더욱 더 의식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못하면 제자가 저지른 잘못은 제자가 들어 마시는 공기를 독(毒)하게 해서, 숨쉬는 것을 고통스럽게 한다. 제자는, 고통스러운 싸움의 마지막 목적지인 커다란 자유의 세계를 잃어버려, 그 세계와 접촉 안 되는 것으로 느낀다. 매 시간마다, 자기라고 말하는 것이 짠맛에 꽉 절여버리는 것이 되어, 제자는 절망적인 싸움 때문에 비관하고 만다. 또, 내면의 소리 때문에 마음의 어둠은 더 깊어만 간다. 그 소리는 계속 속삭인다.「아를 잊어라. 자신 중심이 되지 않도록 마음을 써라. 영적인 이기심이라 말하는 커다란 독초가 마음속에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또 주의하라.


제자는, 소리에서 오는 말을 진실이라고 느끼며, 마음속으로 감격한다. 매일 매시간 격렬하게 싸우는 전투는, 자기 중심이 재앙인 것을, 고통을 생겨나게 만든 뿌리다라는 가르침을 섬기고서, 그의 혼은 자유를 절망한다.


이와 같은 것에서 제자는 의혹에서 고통받는다. 자신의 '하트(heart)'의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같은 것들을 스승들이 일러주어, 제자는 스승들을 신뢰한다. 그러나, 지금은 모순된 말을 한다. 내면의 소리는, 인류를 위한 봉사에 몸을 바치고 '아'를 잊어버리라고 명령한다. 한편, 봉사를 지도해 주실 것을 제자가 바랬던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먼저 체 외적인 자신을 극복해야 된다고 했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가 제자는 언제나 의식하고 있다. 자신이라고 말하는 여러 개의 머리를 가졌었던 큰뱀의 하나의 목을 비틀고 나면, 그 대신 아홉 개의 새로운 머리의 목이 생겨난다.


처음에는 내면의 소리와 스승의 말씀 사이에서 흔들려 움직여서, 마음을 한곳으로 정할 수가 없었으나 차츰 다음의 것을 알게되어, 그렇게 하는 것은 보람이 없는 일인 것을 알게 된다. 즉, 내적 공간을 구하느라, 외적인 자신을 내버려둔 때문에, 일시적으로 느껴졌던 자유와 가벼웠던 기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둔해져서 무엇인가에 의해 갑자기 '쇼크'를 받게 되면, 험한 고갯길을 데굴데굴 굴러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제자는 절망적으로 되어, '자기'라고 말하는 교활한 뱀(虵)이란 것이 덤벼들어 목을 비틀어 죽이려고 하지만, 언제나 매끌매끌 움직이는 거대한 자신의 몸(뱀)을 잡지를 못하는데, 그의 비늘에서 빛이 반짝이며 나와, 사람을 속여서 걸려들게 해 유혹하는 환(幻)의 눈이 부셔져, 재기하는 혼란의 싸움 속에 말려들어 간다.


고투(苦鬪)는 매일 매일, 제자에게로 몰아닥쳐 오며, 끝내 "제자의 온세계"를 마셔버리고, 다른 모든 것들을 의식에서 물러서게 해 떨쳐버리고 만다. 제자는, 마음을 압도하는 것 같은 '패러독스(역설)'에 직면한다. 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활하는 과정 중에서 해결을 실천해 가야 하는 것이다.


조용한 명상을 할 때, 잡념과 욕망, 감각의 소용돌이와 마음의 환영(幻影)으로부터 도망칠 수가 있는 하나의 침묵의 공간이 자신의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의식을 '하트'의 깊숙한 안쪽 오지를 향하게 함으로써, 침묵의 공간에 이르게 될 수가 있다. 처음에는 어둡고 컴컴하며 조용한 곳이 아니면 이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침묵의 필요성을 자기가 충분히 느껴 큰 것이 되면, 제자는 자기와의 싸움터의 한복판에서도 쉽게 침묵을 찾아서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제자는 외적인 자신, 즉 육체를 놓쳐서는 안 된다. 싸움이 격해져 가면, 그때는 침묵의 요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하지만 싸움을 잃어버리거나, 그것으로 자신이 승리한 것으로 생각해 버리거나 해서는 안 된다. 승리는 내면의 요새 안에서만이 아니고, 외면에서도 침묵에 이르게 되었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제자는 침묵의 안에서 싸움을 해나갈 수 있는 것으로 시초의 커다란 '패러독스'를 해결한다.


그러나 제자는 아직 '패러독스'를 면할 수가 없다. 시초에 자신의 안으로 물러섰을 때는, 제자는 자신의 마음의 폭풍우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가지게 된 것뿐이다. 자신은 이미 저급의 여러 힘을 극복하겠다고 맹세했지만, 격한 감정과 갑자기 생겨나는 욕망을 억눌러 버리려고 싸울 때, 그러한 힘은 얼마나 강대한 것인가를 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침묵의 곳 외에, 자기 자신이 어느 것이겠느냐고 말하면, 폭풍우의 여러 힘에 닮은 것이라고 제자는 느낀다. 자신의 조그만 힘이 어떻게 해서 자연계의 이러한 동물적인 폭력꾼들과 싸울 수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아마 직접 답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해결을 찾아낼 수가 있는 길은 가상의 이야기로 해서 표시할 수가 있을 것이다. 호흡을 할 때, 일정한 양의 공기를 폐속으로 마시고, 그것을 가지고, 하늘의 강풍을 작은 '케이스'로 삼고 흉내낼 수가 있다. 우리들은 자연계의 아주 허술하기 짝이 없는 흉내만 낼 수가 있는 것이고, 종이를 접어서 만든 배를 뒤집는 정도의,「'데이갓푸' 안의 대폭풍우」를 만들어 보는 것이 고작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보면, 우리들은「이것이 나의 숨으로 이것이 일어나게 된 일이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은 큰바람을 향해서 숨을 뿜어 내봤자 별 수가 없는 것이고, 하물며 무역풍을 폐 속에서 일으키게 하는 것은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天)의 여러 힘들은 우리들 안에 있는 것이다. 세계의 에너지를 인도해 가는「유지자(有知者)」들의 본질은 우리들의 본질과 융합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러한 일들을 깨닫고, 외적의 자기를 잊어버리기만 한다면, 폭풍의 그것들이란 것은 우리들의 손안에서 마음먹기에 따라 이리저리 할 수 있게 된다.


이상의 일들은 인생에 해당하는 것이다. 인간이 외적인 자신에 집착하거나, 임시 숙소인 육체를 버리고 난 연후에 얻게 되는 체에 집착해 있는 동안에, 폐에 꽉 차있는 숨으로 대풍(바람)을 불어 내보려고 시도하고 있는 꼴이다. 그것은 무리한 노력인 것이다. 인생의 큰바람은 어차피 그 사람을 불어날려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안에서의 태도를 바꾸어, 자신의 체나 욕망, 감정, 두뇌는 자신이 아니고, 자신이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 다고 하는 신념에 따라, 체나 감정 등을 자연계의 일부라고 해서 취급(마음)하면, 존재의 대조류와 일체가 되어, 자기를 잊어버리고 마는, 안전하며 평화로운 곳에 이르게 될 수가 있다.


7. 오컬트 격언(格言)

​마술은 오컬티즘의 기구의 하나이지만, '오컬티즘'은 마술이 아니다. 사이킥 능력과 지적 능력은 '오컬티즘'의 산기슭이지만, 그러한 능력의 획득은 '오컬티즘'이 아니다. 또 '오컬티즘'은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의미에서의「행복의 추구」도 아니다. 왜냐하면, '오컬티즘'의 첫 걸음은 자기 희생인 것이고, 두 번째 걸음은 '자기 부인(自己否認)' 방기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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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전체를 위해서 개체의 희생에서 만들어 낸다. 생체의 여러 세포는 전체의 완성을 위해서 자기희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못하면, 병이나 죽음이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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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티즘은' 생명의 과학인 것이고, 바른 생활의 아드(방법)인 것이다.


8. 자각

​자각(self-knowledge)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첫 단계는, 자신의 무지함을 깊이 의식해야 하는데 있다. 즉, 자신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 속아넘어가고 있다고 마음속의 밑바닥까지 절실하게 동감해야 하는 것이다.


제2의 필수 조건은 자각이라 말하는, 직관에 의한 절대인 확실한 지식이, 노력에 의해서 획득해낼 수 있는 것들이라고 깊숙이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지식을 획득해보겠고 직면(맞부딪쳐)하게 되었다고 하는 흔들림 없는 결심은, 제3의 조건에서 가장 간요(肝要)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은「자기 의식」은, 일반적으로「자기 분석」이라 말하고 있는 것에 의해, 얻어내지 못하는 것들이다. 또 사리에 맞지도 않는 궁색한 이론이나 뇌 작용에 의해서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의식이 인간의 신성한 본질에 눈을 뜨게 되는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을 얻어내는 것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지배하거나 미래를 예지(豫智)하거나 하는 것들보다도 훨씬 위대한 성취인 것이다.



9. 의지와 욕망

​우리들이 의식계에 있어서, 의지를 가진 것은 인간뿐인 것이다. 의지야말로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동물에는 본능적인 욕망만이 일을 하고 있다.


가장 넓은 의미에 있어서, 욕망은 우주의 유일한 창조력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욕망은 의지와 구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사람이 단순히 인간으로 있는 동안은, 이런 형의 욕망을 결코 알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의지-욕망을 반대 것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의지란, 인간의 신성한 부분, 즉 인간의 내면에 있는 신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들이며, 욕망은 동물로서의 생활의 원동력이 된다.


대부분 인간은 욕망이 의지로 바뀌어, 욕망 안에서, 욕망을 통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높은 단계를 성취해 보겠다고 생각하는 자는, 의지와 욕망을 분명히 나누어서, 의지를 지배자로 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불안정하며, 언제나 옮겨 변해 있지만, 의지는 흔들리는 일없이 부동이기 때문이다.


의지와 욕망은 어느 것이고 절대적인 창조자로서의, 인간 그리고 사람의 환경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의지는 고의(故意)로 창조하는 것에 비해, 욕망은 맹목적, 또한 무의식으로 창조를 한다. 따라서 인간은, 빛의 자식임을 의지에 의하여, 성스러운 것들을 보여(象)서 자신을 창조하지 않는 한, 자신을 욕망의 인상(이미지)으로서 오게 하는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이 되고 만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과제가 주어져 있다. 말하자면, 의지를 불러 일으켜서, 극기에 의해 의지를 일하게 해서 강하게 만들어서, 몸체를 지배하는 절대 군주로 하는 동시에, 욕망을 정화시킨다고 말하는 이중의 일을 한다. 지식과 의지야말로, 이 정화를 수행하기 위한 기구인 것이다.



10. 정화된 욕망

​욕망의 대상(對象)은 순수한 추상적인 것들이 되어서, 욕망에「아」라고 말하는 요소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일절 없어져 버렸을 때, 그때를 욕망이 정화되었다고 비로써 말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청정에의 첫 발은,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을 말살해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것들은, 다른 존재와 분리해 버린 인격아 만이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둘째 발은 권력, 지식, 사랑, 행복, 명성과 같은 추상적인 것들도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만 두어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그러한 일들의 바램은 이기주의에 불과한 것이기 대문이다.


인생, 그것들이 이런 것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사해(死海)의 능금은 입안에서는 재로 변하는 것처럼, 이러한 욕망의 대상은, 얻어낸 순간에 환멸과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적인 진리를 경험에 의해서 배우게 되지만, 무한 안에서만이 만족을 얻을 수가 있다고 말하는 긍정적인 진리는 직관적인 인식에 의하여 깨닫는 것이다. 의지로 일하게 해서 이런 확신은 의식의 안에서 사실로 되어, 마지막에 모든 욕망은 영원자에게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11. 영적 진보


​이 길은 어디까지고 굽이굽이 오르는 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길의 끝까지

하루길 일정에 꼬박 밤까지 걷는 것입니까?

아침부터 밤까지요, 나의 친구야.

- 크리스티아ㆍ로제티의 시묘(詩描)「오르는 길」-


'크리스티아ㆍ로제티'의 유명한 시는, 보다 높은 영적인 것들에 이르는 길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인생과 대략 같은 것들이다. 각 시대의 '비전(秘傳)적인' 가르침은, 각 시대에, 전시대의 가르침들에 옷감이나 색이 틀린 것에 새 옷으로 바꾸어 입는, 여러 가지 표현에서 차이가 있지만 하나의 것에 관해서는, 별별의 가르침 속에는 완전하게 하나로 일치해 있다. 즉 "영적 발달의 길"이라고 말하는 점에 관해서이다. 현대나 옛날이나 똑같이, 제자를 구속한다는 절대로 굽혀질 수 없는 률(律)이 하나(한가지)만 있다. 하급 성질은 고급 성질에 완전히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규율(規律)'이다.「베다」와「우파니샤드」부터 최근 발행예정인「도의 광(光)(Light on the Path)」에 이르기까지, 여러 민족이나 여러 종교의 성전을 찾아보아도, 인간이 진정한 영적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고난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하나의 길밖에 보이지 않는다. 모든 종교와 모든 철학은, 현재 이르는 대주기의 시초에 혹성영이 인류에게 준「유일의 지혜」의 최초의 가르침의 변형에 불과한 것임으로, 같은 것들을 가르치는 것은 조금도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초인', 즉 정진한 발달을 해낸 인간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우리들은 언제나 가르침을 받고 있다. 따라서, '초인'이 되는 경로는, 진화를 통하여 서서히 성장을 해 가는 것이고, 그것이 심하거나 덜 심하거나 차이는 있어도 고통이 따르게 마련인 것이다.

우리들의 고통의 주된 원인은 영구적이 아닌 것들의 안에서, 영구적인 것들을 늘 찾고 구하는데 있다. 절대로 확실한 이승의 유일한 특성이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말하는 것에 있으므로, 우리들이 영구적인 것들을 찾아 구해보려고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치 불변의 것들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처럼 행동을 한다. 우리들은 영구적인 것들을 꽉 잡았다고 생각했을 순간에, 그것은 우리들의 손안에서 변해버리고 말며, 그리고 고통이 생겨난다.

성장이라 말하는 개념에는 붕괴라 말하는 개념이 포함해 있는 것이다. 언제나 내면의 존재는 틈이 보이면, 그것을 속박하는 좁은 껍질을 부셔서 앞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붕괴에는 반드시, 육체적인 고통은 아니고 정신적인 고통이 따른다.

​생애중 내내 줄곧 그러하다. 지금 막 돌아온 고난이야말로, 있을 수 있는 모든 고난 중에서도 가장 쓰리고 쓴 것이라 아무리 해서도 가장 견딜 수가 없는 것들이라고 우리들은 느껴진다. 그러나 좀더 시야를 넓혀서 보면, 우리들은 이와 같은 고난을 통해서 자기를 싸고 있는 껍질의 가장 약한 곳에 구멍을 내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일연(一連) 이상증가의 종합적인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성장을 얻어내려면, 전면적이고 또한, 어디서나 똑같은 '페이스'로서 진보를 이루어져 나가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처음에 머리(뇌), 그 뒤에 손이나 다리가 이루어진다는 것 같은 꼴이 아니고, 아이들의 몸체가 성장해 가는 것처럼 잘 느껴지지 않는 동안에 모든 부분에서 균형 있게 바른 성장을 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각 부분을 모두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마음을 압도하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것이 한가지 한가지가, 무시당한 부분의 확대에 의해서 일어나서, 다른 부분을 집중적으로 길러내면 그의 확대는 더욱 어려움을 안겨주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악이란, 지나친 고뇌의 결과인 것들이 많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너무 많은 것을 꾸미(企)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현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필요 이상의 무리한 것을 해서, 미래 생에서 정산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카르마를 만들어 낸다.

이와 같은 악의 가장 미묘한 형은, 보수를 얻으려고 하는 기대와 욕망인 것이다. 알지 못하는 모르는 사이에 보수에 대한 희망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고, 자신이 노력한 모든 것을 허무한 것으로 쏟아버리고 마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보수욕이 삶의 안에서 일을 하게 되면, 고뇌나 의심이나 공포나 절망, 즉 실패가 따라 오게 마련이다.

영적 지혜를 열망하는 자의 목적은 더 높은 존재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열망자는, 모든 면에서 지금보다 완전한 새로운 인간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는 생물들의 진화 단계가 진전되어 갈수록 능력 또한 증가하는 것과 똑같이, 탐구자가 더 높은 세계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면, 가능성과 능력의 범위가 강해진 진보에 상응하는 증가가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초인'들이, 종종 말해져온 신통력을 체득한다. 그러나 마음에 유의해둘 점은 인간평상시의 능력이 이승에서의 존재에서 자연스러운 것처럼, '초인'의 신통력은 보다 높은 진화 단계의 세계에 알맞은 자연스러운 것들이라고 하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초인이 되는 일은, 인간을 철저하게 바뀌어 버리는 근본적인 과정은 아니고, 말하자면, 일종의​「바로 잡아 세운다」는 것처럼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더불어 말하면, 멋대로 정해놓은 한 조의 '률'을 세세한 것까지를 잘 지킨다고 말하고는 확실한 훈련의 코스를 거친 사람은, 신통력을 차례로 몸에 지니게 되어, 그리고 어느 일정 수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한사람을「초인」이라고 부르게 된다고 하는 생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은, 초인이 되기 위해 제일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초능력」의 개발이라고 생각을 지니고 있다. 특히 투시력이나, 육체를 떠나 먼 곳까지 간다(유체이탈)고 말하고 있는 그런 능력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 개인의 이익을 위해, 그와 같은 능력을 획득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들은 아무 것도 말한 것이 없다. 그들은, 순수하도록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같은 비중에서 비난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결과를 원인과 뒤바꾸어서, 신통력의 획득이야말로 영적 진보에의 유일한 길이라고 마음속의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신지학 협회를 이런 방면의 지식을 얻어내는데, 가장 편리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협회는 일종의 '오컬트 아카데미'인 것이고, 기적을 행하는 자들을 길러내기 위한 기관을 갖추고 있는 단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생각에 반대하는 주장이나, 경고가 반복해서 제창되는 데도 불구하고, 그 생각의 잘못을 근절할 수가 없을 정도로, 깊숙이 마음속에 빠져버린 회원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이전에 협회의 목적에 대하여 가르쳐진 진실한 의미를 모르는 것이며, 협회는 영능력의 양성소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대단히 귀찮게 불평을 토한다.

신지학 협회는 초능력 개발에의 새롭고 쉬운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창립된 것은 아니다는 사실이다. 협회의 유일한 사명(使命)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인류의 대부분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가 버리고 만 "진리의 횃불"을 다시 새롭게 피어 올리는 것과, 좋은 종자에서 씨눈이 나오게 하려는 토양(土壤)이 협회인 것이다. 즉 유일한 전원의 흙인 것이다. 또한 "인류의 동포단"을 조직함으로써, 그 진리를 살려 가는 것에 그 사명이 있다. 확실하게 협회는, 그러한 영향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영적인 성장을 촉진하고 싶지만, 그 방법은 고대 성자들의 것이며, 그 가르침은 가장 오래된 비교(秘敎)에 속하는 것들이다. 협회는 엉터리 치료법, 특히 치료사는 결코 처방을 쓰지 않는 것처럼, 극약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건에 관해서, 모든 영적 지식을 구하고 있는 모든 회원 및 다른 사람들에게, 초능력 개발의 쉬운 방법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선물ㅡ산스크리트어에서 '라우키카(laukika)', 현세적인 것들​ㅡ은 기계적인 행법(行法)에 의하여 비교적 손에 넣기 쉽지만, 신경의 자극이 소진되면, 곧 사라져 버리고 만다. 진정한 투시자(초인)의 상태 그대로 진정한 사이킥의 진전(로-고-다라, 초속세적인것들)이 붙어지기 마련이지만, 일단 그것을 이루어 내면, 사라져 없어지는 일이 결코 없는 것이다.

신지학 협회는 심령연구의 문제에 대하여 일반 사람들의 흥미를 돋구어 내었으나, 협회 창립이후, 이와 같은 흥미의 파고를 타고 초능력 개발의 쉬운 방법을 간판 삼아서, 많은 회원을 유인해 보려고 하는 단체가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여기, 인도에서는, 여러 가지 종류의 가짜 수행자들이 옛날부터 잘 알려져 있었지만, 인도에서나 구미에서도 요즘에는 새로운 위험이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단체의 지도자를 보면, 자기 기만의 몽상가가 있는가 하면, 고의로 다른 사람들을 속이려는 자도 있는데, 원하옵건데, 그런 자들의 공수표의 반짝이는 것에 눈이 어두워, 그 쪽으로 끌려가는 사람이 협회의 회원들 안에는 없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주의와 항의(抗議)가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리기 위해, 베나레스로부터 온 편지에 동봉한 광고를 언급해야겠다. 이 광고를 발행한 자칭 마하트마는 "영어 또는 인도어의 어느 쪽이거나 정통한 남녀 8인"을 모집하고 있다. 광고의 끝머리에 "수행과 지도료에 대하여 더 자세히 문의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송료와 신청편지를 "마하트마"의 주소로 보내 주십시오."라고 쓰여 있다.​

또 지난해 영국에서 발행된 "신성한 피만다(Divine Pymander)"​의 재판(再版)이 우리들의 테이블 위에 있다. 그 책 안에「인도의 마하트마들이 자유롭게 고급의 지혜를 내려 주신다고 하는, 기대에 배신당한 신지학자들」의 문장이 실려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신지학자들은, 이름을 편집자에게 알리도록 권유하고 있다. 그렇게 알아도 "단기간에 견습을 마치고", 오컬트 동포단에 입단을 허가해 주고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주저 없이 자유를 가르쳐 준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묘한 것은 그 책에서 "헤르메스"는 그 단체의 방침과 모순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8) 이것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들의 선조들은 이 길을 걸어 왔고, 지고의 선(善)에 이를 수가 있었다. 이 길은 아름답고 평탄하지만, 혼이 육체 속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나가기 힘든 길이다. ··· (88)일반보통 사람들을 피하라. 그렇게 하면, 속물은 무지함에 미지(未知)를 겁먹고, 도를 넘지 않게 된다.」확실히 우리들이 "요가 비디야'에의 가까운 길을 권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한 신지 학자들이 있으나,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이 아니고, 그들 자신의 탓이다. 또 다른 회원은 더 실제적인 것을 해주었으면 하고 있다. 그런데, 대단히 흥미 있는 것은, 이런 사람일수록, 협회를 위해 거의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사람들이며, 더 큰소리 치고 실제적인 것을 요구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과 메즈머리즘으로 향하고 있는 회원은 왜, 최면술(메즈머리즘)의 연구를 더 진지하게 하지 않는가? 최면술은, 오컬트 과학의 열쇠라고 부른 일이 있었다. 게다가, 최면술을 할 수 있는 자는, 인류에게 도움을 주는 독특한 기회가 주어진다는 이점도 있다. 봄베이 지부는 최면술에 의해 치료를 행하는 동시에 호미오파시(homeopathy) 요법의 시약소를 세워서 성공했던 것이다. 인도의 의학을 더 확실한 토대를 만들어 내는 공헌(貢獻)을 하고, 거기에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의 일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된다.


봄베이 지부 외에도, 이 방면에서 훌륭한 일을 해낸 다른 지부도 있지만, 지금까지 시도한 것보다 훨씬 다른 많은 일들이 있다. 협회 활동의 다른 부분에 관해서도 같은 많을 할 수가 있다. 협회 각 지부의 회원들이 지혜를 모아서, 협회가 선언한 목적을 촉진하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단계를 취할 것인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회원들은 좀더 깊이 생각을 하지 않고, 신지학의 책이나 모조리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협회의 적극적인 일에는 진정 공헌하지 않는 케이스는 너무도 많은 것이 되어 있다. 인도나 다른 나라에서 신지학 협회가 선을 위해서 하나의 힘이 되기 위해서, 각 회원은 그런 목적에 적극적인 협력을 해서 공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어떤 것들인가를 처음에 생각하고, 그 일을 열심히 실천하는 마음가짐을 각 회원에 부탁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바른 생각은 좋은 것이지만, 활동으로까지 연결해 내지 못하는 생각은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진리와 보편적 동포단을 위해 아무 것도 해내지 못할 회원은 단 한사람도 있을 리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실천하는 것은 회원 자신의 의지 여하에 달려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협회는 초인을 알(卵)을 부화시켜 기르는 양성소는 아니다. 협회의 연구의 여러 문제에 관해서 지도를 해주기 위해, 여러 지부에 "스승들"을 파견하는 것도 아니다. 각국 지부는 자신들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 문제에 관한 책을 손에 넣을 수가 있으니, 그런 지식은 한사람 한사람의 회원에 의하여 각기 응용되어야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간다면 독립심과 추진력이 자라날 것이다. 필히 이 방침에 따라 전진해 가도록 각 지부에 권하고 싶다. 지부로 파견되는 강사가 실험 심리학이나 투시력(마법의 거울을 본다거나, 미래의 일을 예견하는 등)의 실천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원하는 소리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 생각에는, 개인의 발달이 가치 있는 것이고, 오르막길로 가고 있는 회원의 진보를 도와주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실험은 회원 자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이 시도를 하도록 해갈 것을 회원들에 절실히 권하는 것이다.



제2부
「비교(秘敎)의 가르침」에서
​1888년은 신지학운동의 역사에 있어서의 중요한 해였다. '씨크릿독트린'이 출판되기도 하고, 신지학 협회의 비교부분의 창립으로 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이 부분은 '오컬티스트'들의 그룹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미래 생에서 실천적 오컬티즘이 할 수 있도록, 이승에서는 순수한 생활을 하겠다는 열망으로 진지한 신지학도들의 비밀 결사였었다. '블라바츠키'가 이 부분에 주어진 가르침은 비밀을 지키겠다고 서약을 한 것이었으나 블라바츠키 여사의 사후, 어느 제자들이 서약을 파하고 모두 공개했다. 근년에 이르러서 이런 "비교 부분의 가르침"은 그것과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되었고 '블라바츠키 문집'에도 나와 있다.

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그의 작은 일부뿐이지만, 주로 이 부분의 '률'이나 초심자에게 '어드바이스'와 경고인 것이다.{옴, 마니, 피드메, 훔}(六)은 태아의 구조를 분석해서, '오컬티즘'의 하나의 기본적 원리가 되는 "상응(相應) 법칙"을 예증 해주고 있다.

1. 비교부문의 율(律)
​(가) 서언(序言)

서약에 서명한 사람이 주어진 가르침이나 그의 결과를, 완전하게, 또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생각되거나, 비교부문에서 요구되는 의무를 다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서약을 취소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하는 것이 이 서언(序言)의 하나의 목적인 것이다. 비교 부분에서의 의무를 서약한 사람의 가정의 의무를 방해하거나 침해하는 일은 없다고 하는 것을 더불어 말할 필요가 있다. 한편, 비교부분의 회원은 누구라도, 사회생활에서 행해지고 있는 습관을 어느 부분에서 그만 두어야 하거나, 또 몇 가지의 금욕(禁慾)적인 규칙을 생활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다음의 글을 읽어보고, 비교 부분에서 탈퇴(脫退)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취지를 써서, 제출하면 명부에서 이름을 빼고, 서약을 취소 할 수가 있다. 이 탈퇴신청은 이 편지를 받은 후 3주간 이내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구 회원들은 직접, '호란드, 파크란스타운, 로드 17의 H.P.BLAVATSKY'에게로 미국의 회원은 뉴욕 사서함 2659의 윌리암.Q.졋지에게 보내 주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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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교 부분의 단계는 견습의 단계인 것이고, 그의 일반적인 목적은 실천적 '오컬티즘', 즉, '라자 요가'를 배우기 위해, 학도에게 준비를 갖추도록 해, 능력을 길러 주는 것에 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몇 가지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학도에게 물질적 현상(現象)이 일어나는 일들을 가르치는 일은 없으며, 어떠한 것들이라도 마술적인 능력을 발달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 선천적(태어나면서)으로 이와 같은 능력을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진정한 자기]의 지식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인체 안에서의 정신 생리학적 과정의 지식의 모든 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해내고, 또, 자기의 낮은 편의 욕망 및 인격아(人格我)의 모두를 자제(自制)할 수가 있을 정도로 이루어낼 때까지는, 그와 같은 능력을 써먹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비교부분의 진정한 부문의 장(長)은, 어느 천사(天使)어른인 것이다. H.P.블라바츠키는 이부문을 위해서 천사어른의 대변을 해주는 자이다. 이 천사는 신지학 문헌에 나오는 '아데프트'들의 한 분이며, 신지학 협회의 창립에 관계하셨던 어른이다. 이 부분의 각 회원께서,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들면 H.P.블라바츠키를 통해, 지금까지 보다 더 가깝게, 이 어른의 감화와 배려 아래로 데려다 주게 할 수 잇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학도이던 간에, 아데프트 중에 어느 분인가 물어볼 필요는 없다. 그와 같은 짓은 실제에서는 중요한 것이 될 수 없고, 학도께서는 비밀을 누설할 가능성을 하나 더 만들 필요가 없다. 이것이 동양의 법칙이라고 말하는 것이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가르침이나 도움을 받을 경우에는, 각자가 받을만한 가치만큼만 받는 것이며, 그 이상 받을 수는 없다. 이 단체 그리고 이러한 인간관계에서는, 흥정 같은 것이 없다. 모두가 개인의 가치여하에 따른 것이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도 어떤 것들을 받을 수가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을 정하는 힘이나 지식은, 회원의 누구에게도 없다. 이것을 알고 계시는 분에게 매겨져야 하는 것이다. 어느 사람들에게 명백히 치우쳐 있는 배려나, 그 결과로서 뚜렸한 진보는, 보편적 동포단을 위한 것이거나, 인류를 높이기 위해서도 그런 사람들이 행하는 일들이나 최선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오는 것이다.

자신의 힘 이상의 것을 해보려고 구하는 사람은 없으며, 그러한 짓을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각자에게 자신의 능력과 힘의 범위내의 일을 하도록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개개인의 회원에 대한 이 부분에서의 일의 가치는 전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에 의한다.

(1) 가르침에 동화(同化)해서,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해버리는 개인의 힘.

(2) 이 지식을 구(습득해 보겠다)하는 동기가 비이기적인 것에서 나왔어야 한다. 말하자면, 인류를 위해 봉사(일) 하겠다는 결의를 해서 이 부분에 들어 온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을 얻어내 보겠다고 하는 욕망만 가지고 들어온 것이냐 아니냐에 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에서 모든 회원은 경고를 듣고, 자신의 동기가 무엇이었는가 스스로 생각해 조사토록 해라. 왜냐, 이 부분에 들어온 사람들 모두에게, 어떤 결과가 이어지면서 계속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쯤에, 지원자들은 이 비교 부분이 만들어진 이유와, 이 부분에서 무엇을 성취하려 하고 있는 것인지 배우게되면 좋을 것이다.
 
신지학협회가 창립되고서부터 14년째가 되는 시점에 와있는 것이다. 현교적으로서 실리적 차원에서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멋진 결과를 얻어 낸 것이 말할 수 있지만, 협회가 창립될 당시 목적의 중요한 모든 점, 모두에 관해서는 결정적인 실패였었다. 그래서 신지학협회는 보편적 동포단으로해서, 또 여러 우애(友愛)단체의 하나로 해서도 말하는 것은 버젓했을 뿐, 그의 명칭은 가면(假面), 아니 그 정도가 아니고, 거짓의, 가짜에 불과한 협회와 같은 동열(同列)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1984년에 공연하게 시작한 적들의 음모에 의하여, 협회는 자연스러운 진보를 방해 당하고, 거의 괴멸에 가까운 처지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품위를 떨어뜨렸다고 변명으로 통할 수는 없는 처지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도, 모든 외부에서의 공격과 모략에 저항하는 것이 가능했을 뿐 아니라, 더구나 도와 줄만한 가치가 있다면 언제든지 도와주려고 하고 계시는 어른들이 회원들의 모두에게 주도록 해있는 도움을, 좀더 커다랗게 더 광범위하게, 더 구체화 할 수가 있을 만큼의 결속(結束)이, 우리들의 신지학 협회의 동료들 사이에는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바로 의문을 품고, 절망했지만, 그때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신성한 운동을 위해서 일을 해주는 사람들은 정말 몇몇 적은 수였다. 적(敵)의 공격 덕분에, 협회는 그의 외부적인 진보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신중하게 되었지만, 협회의 진정한 내부 상태는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회원들의 영적 수양의 노력은 아직까지도 위(上)에서부터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고 있지만, 동료간의 결속만이 이런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권리를 그들에게 줄 수가 있는 것이다. 목적과 신념이 완전히 일치 해 있지 않고, 또 인종, 종교, 피부색을 구별하지 않는 보편적 동포애라고 말하는 기본"률"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단체에는, 천사어른은 거의 도움을 줄 수가 없는 처지인 것이다. 또 많은 회원들이 가장 추악하고, 더불어 대단히 비신지학적인 태도로, 다른 회원을 견재하거나 욕을 하고 몰아붙이는 등으로 지내고 있는, 회원이 많이 있어 협회에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런 사유로 협회에서는 선별해서 모아서 일하도록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 일반적으로 신지학 협회의 창립당시의 선(線)으로 되돌릴 수 잇는 것은, 용감한 혼(魂)을 지니고있는 자들로 선발된 클럽, 진정한 영적진보와 혼의 지혜를 갈망하고 있는 신념(信念)이 확고한 얼마 되지 않는 남녀뿐이다. 현교적 협회를 구(救)해서, 통일과 조화 속에서만이 자신의 강한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을 협회에 깨우치게 해주는 것은 비교부분 뿐이다. 비교부분이란, 모든 회원이 설령 서로간에 모르는 사이일지라도, 서로를 위해 일하며, 즉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되는 그룹인 것이다. 적지만, 몇 안 되는 사람들의 사이에 동포애적 결합을 증진하는 것으로, 신지학협회 전체의 미래의 성장을 바른 방향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에 도와주는 것이, 이 부분의 목적이다.

협회가 설립된 것은, 이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시초의 서약하지 않은 회원조차 발달한 지식을 얻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협회의 진정한 통일의 결여(缺如)가 명백해졌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공통 목적과 우애적인 마음가짐과 이 비교부분의 회원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미래의 위험에서 협회를 구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이해 못하고, 서약에 서명한 사람은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을 바꾸어, 이 목적 실행에 몸을 바치려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철회하도록 마음으로써 권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만이, 대지식을 '마스터'해야하고, 자신과 같은 인간동지에게 봉사를 하기 위해서만이 능력을 얻어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실천적인 애타(愛他)와 고상한 삶의 멋진 훌륭한 표본을 보았으면, 신지학 관계의 사람들은 모두, 활동으로 나갈 것이며, 자신의 앞에 있는 표본을 보고 따라 행하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비교부분은, 전 협회의 구제를 위해 취해지고 만들어진 것이며, 그의 과정은 제1단계부터 회원에게는 뼈가 부서지는 고통의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일단 많은 장애를 극복하기만 하면, 그 배후에는 커다란 보답이 있다.

자기 통제를 목적으로 해, 자신 내면의 아(자기-我)와 성질의 일하는 것을 지켜 보고싶다고 생각하는 자는, 내면의 아(我)와 성질을 비교(比較)검토해서 이해해 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혼의 신비에 관해서 진실 전부를 배우려면, 먼저 일반적으로 인간의 '가슴'의 신비를 통찰(洞察)하도록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오컬트적 내관(內觀)의 힘이, 만약 자아의 범위를 넘지 않고 있으며, 자아의 영역내에서 제한을 너무 많이 받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개별적 사례(事例)를 조사하더라도, 확실하게 세워져 있는 원칙을 기초로 해서 조사하지 않으면, 영구(永久)이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 그대로 되고말 것이다. 고급계에서는 우리들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으로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각자의 성질은 다른 사람의 성질에 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 반드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결심이 강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전혀 생각의 가짐 없이 마법의 재주를 배웠거나 [오컬트의 훈련]을 몸에 지니겠다고 하는 목적에서 이 부분에 참가한 사람들은, 반드시 실망에 빠질 것이다. 인위적(人爲的)으로 발달시키는 상당한 정도의 능력은, 흑마술(黒魔術)로서의 노력의 대가로 얻어내는 경우가 있겠지만, 그 외에는 비이기적으로 일해가는 것에서 온 성과이다. 말하자면, 상대가 좋거나 나쁘거나 개의치 않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최고의 보답으로 주어진다. 인격아(저급)를 잊어버릴 것,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타(愛他)야 말로, 이승에서나 저승에서[성백(聖白) 아데프트]가 될 사람들의 훈련의 시초인 것이고 더불어 빼놓을 수가 없는 필수 조건인 것이다.

만약 이 부분의 회원이, 앞서 말한 것 모두를 승지(承知)하고 있으면서, 그러함에도 더 자기자신을 위해 지식을 구하고, 초능력을 얻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장차, 나쁜 흑마 '아데프트'이거나 좋은 백마 '아데프트'이거나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설령 그 자가 자신의 동기를 숨겨 보려고 해도 알려져 버린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해도 도리가 없는 반동이 일어날 것이다.

만약 끊임없이 열심히 일해, 그 열의가 식어버리는 일 없이, 약해지는 일이 없으면, 주어진 가르침을 동화(同化)하는 능력이 태어날 때부터 자질이 부족했어도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정당한 곳에 알려져서 생각도 못했던 때에 행운과 도움이 주어진다. 이것은 엄격히 그 사람의 가치(價値)에 따른 것이다.

더불어 이와 같은 대단히 귀중한 선물을 얻는 기간은 제한되어 있는 것을 모든 회원에게 알려준다. 이 필자는 나이가 먹었고, 그녀의 수명은 멀지않아 끝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언제, 어느 순간, 저승으로 가게 될지 모르는 나이가 되었다. 설령, 좀더 가지가 있고, 더 박학(博學)한 누구인가 그녀를 대신해서 일을 해 줄 수가 있다고 해도, 이 세기의 마지막의 때, 즉, 1899년 12월 31일까지는 앞으로 12년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날까지도 각 세기의 끝의 25년 동안은 세계에 주어진 기회에서 도움을 얻어내지를 못한 사람들, 사이킥 및 영적 진보의 어느 점까지 이루지 못했든, 즉 '아데프트'의 길이라 말하는 과정(사이클)의 새로운 출발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이미 습득한 지식의 '레벨' 이상의 진보는 하지 못할 것이다. 동양의 지혜의 천사 어른들은 그의 시기 이후는, 서구에서나 미국에서나 어느 곳이든 몸(身)을 나타내거나, 누군가에 보내져오는 것을 하지는 않는다. 게으름뱅이들은 1975(100년후)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하며, 진보의 모든 기회는 마감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법칙인 것이다. 우리들은 암흑시대인 '칼리 유가' 때문이다. 이 시초의 주기의 5000년이 1897년에 끝났지만, 그의 구속은 큰 것이라 거의 극복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이 비교부문과 천사어른들의 관계에 관해서, 역설(逆說)이지만, 천사 어른은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승에서 회원과 개인적으로 연락할 수가 있을지, 연락을 하지 않을지는 알 수가 없다. 물질계에서 현상(現象) 또는 다른 방법으로, 천사로부터 직접 명령이나 전달을 받겠다고 끊임없이 바라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 실망할 것이다. 천사 어른은 그 자신의 힘을 입증하거나, 누군가를 테스트해 보려고 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어느 회원은 어떤 종(種)의 위기가 닥쳐왔을 때, 천사가 자신에게 개인적인 말을 해 주시거나, 그의 위기를 면하게 해 주실 거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지만, 반드시 그러한 외부적인 것에 개입을 천사가 할 것이라고 하는 정당한 이유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각 회원이 한번 이와 같은 천사 어른의 존재를 믿는다면, 천사어른의 성질이나, 힘이 어떤 것인가 이해하려고 하는 몸가짐과 천사 어른을 존경하고, 가능한데까지 천사어른 가까이 접근해, 그 어른의 명령에 목숨을 바쳐온 '구루(스승)'와 의식적인 교류(交流)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자기자신의 마음을 열(閱)도록 힘을 쓴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이것은 천사 어른이 계시는 영적세계로 자신이 올라감으로 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신이 있는 쪽으로 천사를 끌어내려 보려고 해서 되는것이 아니다]

영적 생활의 진보는 내면(안)에서부터 오는 것이므로, 회원들은 H.P.B 이외를 통해서 전달을 받으려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H.P.B를 통해서 이외의 도움 및 가르침이나 계명은 존재의 내적인 세계로부터 오는 것임으로, 이미 말한바와 같이 받아들이는데 충분한 것으로 여겨졌다면, 언제든지 주어질 것이다.

이것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주어지는 가르침을 쉽게 받아드릴 수 있게 끔, 마음가짐이 필요하고, 이것이 직관(直觀)의 능력을 발달시키는 것으로 된다. 이 면(面)에서의 회원들의 의무는, 스승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말해오고 있는 것과, 글에 쓰여져 있는 것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맞지 않는다고, 논쟁을 하거나 또는 일반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상이나 철학에서도 명백히 반(反)해 있다고 반론을 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천적 비교 과학은 아주 독특한 것들인 것이다. 학도가 이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스승의 진정한 뜻을 알아내기 위해, 학도는 자신의 지적능력과 사이킥능력의 모두를, 주어진 가르침을 조사하는 일에 활용해야 할 것이다. 학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배웠거나 실행하려고 하고있는 동안은, 유전이나 교육, 환경, 다른 스승으로부터 얻은 바 있는 모든 사고로부터 가능한만큼 자신의 마음을 개방시키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다른 모든 사상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로 되어서야 한다. 그렇게 하고 보면 가르침의 내면에서 의미를 외부의 말과는 별개의 차이가 있는  것을 자신 스스로에 인상을 심게된다. 그러하지 못하면, 비교문제의 훌륭한 저작을 썼지만 '오컬티즘'의 사상을 '오컬트'의 진리보다는 근대과학 쪽으로 조화시킨 어느 사람들의 견해처럼 되어서, 선입관(先入觀)에다, 자신의 생각이 채색(물들게)될 위험이 끊임없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또, 가르침이 가능한 학도를 위한 것으로 되려면, 서구 문명에서 생겨난 대략 줄거리를 훑어보는 껍질뿐인 부주의(不注意)한 사고 습관을 버리고, 전체(全體)로서의 가르침에, 또 가르침의 한마디 한마디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 절대 필요한 것이다. 이 목적에서는, 학도는 가르침을 생각하는 것으로 해 노력 할 뿐 아니라, 자신들이 해야 할 모든 삶에서 의무와 일들을 끊임없이 주의깊게, 마음에 집중시키는 습관을 갖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학도는 영적인 지식을 배우고, 그의 획득에 모든 바램을 집중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그런 방향으로 향하도록 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하기 위해,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 볼 뿐 아니라,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생각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학도들은 특별한 테스트나 시련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 테스트나 시련은 일상생활에서 생겨나는 일이나, 동료들과의 관계사이에서 찾아 들어오는 것이다. 특별한 테스트는 일반적으로는 주어지지 않지만, 이 가르침에 학도가 가까이 접근하는 태도조차도 테스트인 것이고, 시련인 것이다. 천사 어른께서는, 무엇인가 어려운 일을 처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만 가지고 학도를 판단, 판별하시지는 않는 것이다. 실제적인 자기 개발과 진보를 해 가고 있는가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다.

이 부분에 들어서면, 학도는 자기 자신의 성질의 면(面)을 향해 보기 시작하며, 자신의 열망이 강한 정도에 따라, 어려움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이 어려움은 생리적, 지적, 도덕적, 사이킥적, 차원(次元)인 것이고, 혹은 생활의 여러 가지의 사정 안에서 나타난다. 서약에 서명해서, 그 조항의 어느 것 하나만이라도 지키는 것에 실패하면, 그 실패는 시초의 시련에서 낙제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실패는 거기부터 더 앞쪽에, 진지한 노력을 거듭해 간다면 패배는 아닌 것이다.
(나) 비교 부분의 규칙(規則)

다음 문장에서 남성이란 대명사는 여성에게도 해당되며, 단수는 복수로 바꾸어 넣어도 좋다.

(1) 신지학도이거나 아니거나, 다른 사람의 소문에 의한 사실 무근의 비난은 삼가해야 한다. 또 다른 사람의 과실에 대하여 관용을 신지학 영역 안에서는 물론, 외부에서도 널리 실천 해야한다.

(2) 다른 사람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말이나 고집 같은 짓의 반복은 피하여야 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범죄나 사회악이나 나쁜 제도는, 추상적인 의미에서 비판하는 것은 모든 회원의 의무인 것이다. 더불어 모든 회원은 모든 형으로서 공염불, 위선, 부정과 싸우는 것이다.

(3) 동료의 신지학도에 대하여 명예를 손상시키는 중상의 언행을 들었을 때, 항의하지 않고 듣고 있어서는 안 된다. 단, 그의 비난이 근거가 있을 경우는 침묵을 지킬 것이다.

(4) 이 부문(비교)에 있다고 하는 것을 자만해서는 안 된다.

(5) 어떤 회원이라도 다른 회원이 이 부문이서의 지위를 알아보려고 해서는 안되고, 또, 별도인 신지학도가 이 부문의 회원들이 어떠한가를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회원들은 동료를 알아보려고 해서, 서로 합의한 말(언어)을 쓸 수는 있으나, 절대로 호기심이나 말상대가 비교부문의 회원인가 아닌가를 알고 싶어서 그러한 말로 써먹어서는 안 된다.

(6) 만약, 회원인 것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생각이라면, 알려지지 않게 해 있을 수가 있다. 또 다른 사람이 회원으로서 인식되는 것을 꺼리는 것을 모르는 사이에 알게 되었을 경우, 그 사람의 기분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그런 말을 흘려서도 안 된다.

(7) 어느 회원이 자기는 천사로부터 편지나 통신을 받았다고 잘라서 말했을 경우, 그 말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발표하도록, 명을 받았을 경우는 괜찮지만, 명을 받지 못했을 경우, 그 사람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가, 알지 못하고있는가를 막론하고, 사실상, 가르침으로부터의 소득은 얻어낼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짓이 여러 번 반복하게되면, 무분별한 위반자를 추방할 수 있는 권리가 이 부문의 장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주어진다. 내용의 전부나 일부를 알리도록 지시되어 있는 것을 천사로부터 온 편지나 통신을 회원이 받았을 경우에, 반드시 발표를 하기 전에 서구의 사람이면 H.P.B에게 연락해야 한다. 또 미국인의 경우는 H.P.B에게 회송(回送)하기 위해 W.Q.졋지에게 보내 주어야 한다. 왜냐면, 속임수를 쓰는 것이 쉽게 할 수가 있고 많은 경험이 없으면, 회원들은 이와 같은 교류(交流)의 진위(眞僞)를 잡아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8) 어떠한 경우에서도, H.P.B나 W.Q 졋지, 또는 비교부문의 다른 회원에게, 또 다른 회원에 대해서 어떤 비난이나 잘못을 알아주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 이 규칙은, 천사어른께서 어떤 잘못이나, 죄도 불문에 붙여져, 용서해, 너그럽게 봐주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만, 다른 어떤 부문보다도 이 부문에서만은 회원들은 다른 회원이나 신지학도의 행위를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현교 부분의 롯지에서는 부장과 이사가 모든 회원에게 잘못을 따지지만 비교부문에서는 각 회원은 자신의 '카르마'와 천사어른만이 문제를 판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9) 자신이 지니지 못한 '사이킥'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과시하거나, 자신이 개발해낸 능력을 자만(自慢)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시기하거나, 질투, 허영(虛榮)은 진보를 방해하는 잠시라도 뜸을 줄 수 없는 강력한 적인 것이다. 오랜 경험에서 알게된 일들을, 특히 초심자(初心者)의 사이에서는, 자신의 '사이킥' 능력을 자만하거나, 자랑하고 싶어하고, 이런 힘에 관해 다른 사람들을 현혹시켜 주의를 끌게 함으로서 반드시 말해도 좋을 정도로, 시기, 질투, 허영 등의 결점(缺點)을 키워주는 원인이 되고, 만약, 이미 결점이 있으면, 그것을 증폭시키는 결과로 된다.

(10) 따라서 어느 회원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특히, 동료 회원에게는, 자신은 어느 정도 진보했다거나, 어느 정도로 위어른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오고있다고 말해서는 안되며 자신의 진도 등에 관해서 말을 흘려서도 안 된다. 같은 취미와 성질의 학도들이 훈련을 서로 돕기 위해 '클럽'을 만들어 보고 싶은 경우에는 H.P.B로부터 허가를 구하며 또, 충고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클럽을 만들어 보겠다는 가부에 관한 판단은 서둘러서는 안 된다. 두 사람 이상의 회원이 진정한 친구의 정으로 맺어졌어도, 만약 비교지식도 없이 '클럽'을 만들면, 그들의 자기적(磁氣的) 특이성과 상태에서, 정반대였을 경우, 오컬트 세계에서는, 친구의 정은 미움으로 변해지는 경우도 있다.

(11) 자신의 일에서의 용무나 사회적인 관계의 관리, 인생에서의 보통으로 생겨나는 일 등에 대해, 명령이나 지도를 원해서는 안되고 자기자신을 위해서거나, 다른 사람의 경우이거나, 병의 치료에 대한 지시를 원해서는 안 된다. 주어진 가르침에 관한 질문만이 받아들여지고, 답이 주어진다.

(12) 질문할 일이 생겼을 때, 자신으로 하여금 그의 답을 알아내기 위해, 모든 면에서 깊숙이 생각해 보도록 회원에게 요구하고 있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호기심에서의 질문을 해서는 안되고, 의구심을 품어보기 위해, 또 찾(求)고 있는 정보를 자신이 얻기 위해, 모든 보통의 방법을 전부 써본 끝이 아니고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직관력은 진보하지 않으며, 독립독행(獨立獨行)을 배울 수가 없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이 부문의 두 가지 주된 목적은 무(無)의 것으로 되어 버릴 것이다. '아데프트'는 자신의 노력에서, 자신의 힘을 스스로 발달시켜서, '아데프트'가 되는 것이지 '아데프트' 자신 외의 누구에게부터 그의 일을 대신해 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아데프트는 자신이 노력해서 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구루' 즉, 지도자의 임무는, 제자의 진보를 조정해 주는 것이지, 제자를 끌어올리거나, 억지로 진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13) 모든 종류의 '와인' '술' '알콜음료' 마취성 또는 도취(陶醉)성의 약을 먹는 것을 엄중히 금하고 있다. 술을 먹거나 약을 먹거나 하면 모든 진보는 방해를 당하고, 스승이 노력한 것이나, 제자의 자신의 노력도 소용없는 것으로 되어버린다. 이와 같은 것의 모두가 뇌와 특히 제3의 눈, 즉 송과선(松果腺)[씨크릿 독트린 제2권 288P(4줄)이후 참조]에 직접 유해한 작용을 한다. 동양에서는 [쉬바의 눈]이라고 말하고있는 제3의 눈의 전개를 절대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14) 담배는 너무 많은 양을 피우지 않는다면 금해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담배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물이나, 빵이라도, 무엇이든 간에 너무 지나치면 유해한 것이다.

(15) 식사에 관해서. 육식을 금지하고 있지 않지만, 야채 생선으로 건강을 유지 할 수가 있다면, 그런 식사를 권한다. 육식은 성욕 성질을 높이며, 소유(所有)욕을 강하게 한다. 따라서, 저급 성질의 거칠은 것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 한층 어렵고 불리하다.

(16) 각 회원은 가르침 받은 것을 명상해보거나 자기 반성이나 자학 자습을 위해, 적어도 낮이나 밤에 45분 정도의 시간은 잡아 두어야 한다. 만약, 가능한 것이라면, 이것을 위해 선택한 장소는 누구도 써먹지 못하도록 하고, 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한 장소를 준비했으면, 무리를 하지 않아도 좋다.

(17) 일반적으로 천사 어른의 존재에 관해서 의문을 품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무지(無知)한 결과에서 오는 경우가 많으며,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에 떠 올라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적으로 천사어른의 주의를 끌어당기는데 방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제자는 자신에게로 천사어른의 감화를 끌어당기는 일을 못하게 된다. 비교부문의 회원의 성질에 관해서 의심하는 것도 진보에 장애가 된다. 간단히 말해서, 악(惡)의가 있는 느낌, 특히 신분에 관계없이, 다양한 사람들에게의 적의(敵意), 시기, 원망, 저주 같은 것은 학도의 길에서는 특별한 방해가 되는 상태를 만들어 내고, 모든 종류의 진보를 방해한다. 보수를 얻어내겠다고 하는 욕망을 지워버리는 것은 학도의 진보에 도움을 준다.

(18) 비교부문의 회원은 '프리메이슨'과 비밀 공제(共濟)조합에는 만약 희망한다면 참가할 수가 있지만, 신비 연구 또는 '오컬트' 훈련을 목적으로, 다른 어떠한 단체, 협회 조직에 속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러한 단체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프리메이슨'의 회원들이 그의 비밀을 신지학도들로부터 지키는 것처럼, 이 부문의 비밀을 '프리메이슨'으로부터 주의 깊게 지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규칙은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명백한 것이다.

(19) 이 부문의 '회원'은 모두를 참고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책이나 잡지를 구입해 가지고 있도록 되어 있다. 가르침을 받고있는 동안 늘 다음의 책이나 잡지의 내용에 접하게 되는데, 제자들을 위해 그런 것을 발췌해 준비해두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특별한 학파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형이상학(形而上學)에 관한 저작과 논문을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의 책과 신지학의 잡지는 특히 읽어서 주의해야 할 것들이다.

씨크릿 독트린
바가바드 기타
길의 빛(도의 광(光))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쎄우스 후스트(잡지)
루시퍼(잡지)
길(道)(잡지)

이 규칙은 이와 같은 책이나 잡지를 강제적으로 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저자가 발췌를 인용해서, 이미 인쇄되어 있는 것들을 설명을 반복할 시간이 없다. 이 분야에서 이미 많은 책이 출판되어 있고, 그 내용의 요점들을 종종 말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원이 실제로 위의 책을 손에 넣을 수 없다면,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내어 사람들에게 책이나 자료를 복사해 가지도록 할 것을 기대한다. 여기서 책을 살 수 없는 정도의 가난하다고 구실을 삼는다면 다른 악(惡)과 꼭 같이 학도의 진보에는 유해한 것이다.

(20) [진정한 견습(見習)생의 신분의 시초의 '테스트'는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헌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회원들의 서약 1조와 5조에 따르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지학은 생활에서의 살아가는데 있어 힘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사회적인 일이거나, 개인적인 일이거나, 모든 인간관계 안에 신지학을 응용해야 하는 것이다. [아데프트'들에 의하여 선포(宣布)되었던 가르침은, 전체로서 유일의 진실한 것임으로, '아데프트'들이 주어지는 준비가 되어있는 증거에 지탱(의지)해 간다면, 다른 모든 진리와 똑같이 궁극적인 승리를 얻는 것이 틀림없다. 이 가르침의 학설은, 고급지식을 가진 사람에 있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정밀 과학이 주는 증거에서 끌어져서, 확인 된 직접적인 추리에서 그의 가르침을 뒷받침해 가면서, 서서히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이 가르침에는 도덕률(道德律) 즉 진실함, 깨끗함, 자기 부정, 자선(慈善) 등의 개념을 통하여 실제의 생활에 영향을 주기 위해, 우리들은 신지학의 지식으로 설득해 널리 알려야 하는 것이다. 열반을 이루어 낸다는 것은 확고한 결심이 필요한 것이지만, 결국, 고상한 것으로 미화(美化)된 자기 본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신지학이란, 개인 중심으로 된 열반의 성취라고 말하는 개인적인 목적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우리들 인간이 가능한 많은 동료들을 손에 손을 잡고 다함께 이런 가르침에 의하여 이익을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자기 희생으로써 탐구해 나누어 가지게 되어야 한다.]56

(21) 그러므로, 이 비교부문의 회원은, 신지학 협회의 현교 부문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가능한 더 많은 '에너지'를 신지학(현교) 쪽의 일에 힘을 다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교사는 될 수가 없지만 각자는 신지학의 가르침을 충분히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설령, 신지학의 가르침을 실제로 넓이지 못하더라도, 부외자(部外者)의 잘못된 인상을 바로 잡아 줌으로서 신지학의 일을 효과적으로 돕는 것이 됨으로 회원 누구나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협회의 큰 목적은 추구하는 이와 같은 회원들의 노력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옆쪽에서 비판만 일삼아 방해 할 것이 아니고, 모든 노력이 서로에게 격려가 되어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도와 주어야 한다. 설령 그 도와준 것이 환경의 탓으로, 단지 말로만 원기를 준 것으로 되는 꼴로 제한을 당했어도 그렇게 행해야 하는 것이다. 단 하나의 정해진 행동 계획을 자기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맞추어 보려고 해 회원의 안목에서는 너무도 적절하지 못하다고 보일지라도, 성실하게 신지학에 기초를 둔 일은,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필요하다고 하면, 다른 기적을 만들 것이다.


2. 비교 부문(部門)의 초기 서약
​(1) 신지학을 생활 안에서의 살아있는 요소(要素)로 하겠다고 서약한다.

(2) 세상 사람들에게, 신지학운동과 그의 지도자들, 및 참가자들을 공공연하게 지지(支持)한다고 하는 것을 서약한다.

(3) 신지학도 동지에 대하여 욕하는 것을 들었을 때 반드시 항의하고, 또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

(4) 자신의 저급(낮은) 성질과는 끊임없이 싸워 갈 것, 다른 사람의 약점을 너그럽게 보는 것을 서약한다.

(5) 다른 사람을 도와 주기도하고 가르쳐 주기도 할 수 있도록, 공부나 다른 방법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을 서약한다.

(6) 가능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간과 돈과 일을 바쳐서 운동을 지켜가는 받침대가 될 것을 서약한다. 자기의 고급아의 이름을 걸고 이상의 것을 서약한다.

3. 비교부문 - 입회하기 전에
​[만약 서약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서약을 하지 말라. 그러나, 일단 약속했으면, 어떤 일이었어도, 생명을 걸고서도 그것을 완수하라.]

비교부분에 입회해 [서약]을 지킬 것을 서명하고 그외 부문 본부에 보냈다고 해서 커다란 성공을 얻어낸다고 정해진 것은 없으며, 또 서약은 각 학도를 '아데프트'나 마술사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서약은, 모든 진리의 잠재력이 포함되어 있는 씨(種), 완성을 이룬 제7근본인종에의 유산(遺産)으로 되는, 진보의 씨눈인 것이다. 진리를 보관하는 어른들께서 몇가지 종(씨앗)을 나에게 위탁했기에, 씨눈이 나오고 성장 할 가능성이 있다고 느껴지는 곳에, 씨를 뿌리는 것은 나의 의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씨를 뿌린다고 하는 비유는 다시 새로운 실현(實現)을 해서, 이 새로운 실현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여러 가지 나오는 것이다. 좋은 땅의 흙 속으로 떨어진 씨앗은 몇 백 배의 열매를 맺어내고, 길바닥에 떨어지거나 해서 돌(石)처럼 굳어있는 마음속에 떨어진 것이나, 인간의 번뇌라 말하는 헛들어진 사이로 떨어져버린 다른 씨앗(種)들의 헛수고를 충분히 매워 줄 것이다. 미래의 수확을 위해서 가장 적절한 밭(田)을 선택해서 씨앗을 뿌리는 것이, 손의 의무인 것이다.

선택의 능력이 있고, 없는 것이 실패와 관계가 있는 것이며, 실패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씨앗을 뿌렸든 손은 책임을 묻게 마련이지만, 자신에서의 씨앗을 구해서는 그것을 얻어 낸 사람들이 고급아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면 보람과 벌의 '카르마'를 받게 된다.

(가) 드쟌의 학파의 [훈련의 서(책)]에서

(1) 열심인 제자에게 스승은 부모를 대신하는 어버이가 된다. 부와 모는 육체와 육체의 능력이나, 생명이나, 형(形)을 주지만, 스승은, 영원의 지혜를 획득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게 되면 내면의 능력이 열(閱)어지게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2) 제자로서는, 동료의 제자, 한사람 한사람이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이고, 자신의 일부가 된다.57 고 말하는 것은, 함께 제자의 길을 오르면서 친숙한 사이가 되기 때문에, 흥미와 열망이 공통해져 있게 되고, 각각의 행복은 서로간 실로 싸여져 연결되어 얼켜져있는 것으로 되어, 각자의 진보는, 동료의 지성과 도덕과 행동에 의하여 조장(助長)되기도 하고, 방해 당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3) 한 분의 현재 제자 사이에서 동료가 퇴보(退步)하거나 탈선하게 되면, 현재 제자들 사이의 공감적 관계 및 사제간의 '사이킥 에너지'의 흐름을 통해서, 확실해져 있는 올바른 자들에게 반드시 영향을 준다.

(4) 탈주자(脫走者)는 재앙이다. 탈주자의 혼에 영향을 주어, 마음의 눈에는 탈주로 두 개의 악 중에 작은 쪽으로 보이는 곳까지 가버린 자는 재앙이다. 마음을 녹일 것처럼 격렬한 시련의 일을 견디어내, 떠있는 찌꺼기만을 태워 버리게 할 수가 있는 자는, 항아리 안에 들어 있는 황금 같은 것이다. 떠있는 찌꺼기를 제자의 길에서 있는 항아리 속으로 던져버리면, 현재 제자를 더럽게 한 자는 '카르마'의 활동에 의하여 저주 당하게 될 것이다. 현재 제자에게는, 또 진리라고 말하고 있는 생명의 흐름으로 자신들을 자라나게 해 가르쳐 주시는 머리(뇌)와 심장의 경우로 얘기해 본다고 하면, 제자들은 하나의 몸체(体)의 수족(手足) 같은 것이다.

(5) 수족(手足)은 자신이 속해 있는 체의 머리와 심장이 손상을 받지 않도록 지켜주고 있는 것처럼, 제자들은 자신이 속하는 체(이 경우, 신지학 또는 신의 지혜)의 머리와 심장이 상처를 입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나) 한 분의 천사(天使)의 편지에서

수족이 그 몸의 머리와, 심장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 제자들은, 특권이라 말할[머리]와 영적인 성장이라 말할[심장]을 품고 있는 신지학의 과학을 대표하는 자신의 스승들을 지켜야 되지 않겠는가? 성전(聖典)에 말하기를

[적이 어버이의 체에 오물을 던졌는데, 오물을 닦아내려고 하지 않는 자식은, 어버이를 사랑하고 있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존경하지도 않는다. 박해를 받고있는 자나, 도와 줄만한 것이 못되는 자를 지켜 주지 않는 사람, 배고파 구걸하는 자에게 자신이 먹으려고 한 사람은, 목이 말라서 갈증을 호소하는 자를 위해 자신의 우물에서 물을 떠다 주지 않는 사람이, 인간의 형을 갓춰, 태어나는 것은 아직 이르다.]

눈앞의 진리를 보라. 깨끗한 생활, 열려있는 마음, 순수한 하트, 열심인 지성, '베일'을 벗겨낸 영적 인식력, 현재 제자들에의 동포애, 충고와 지도를 얌전하게 주고받는 마음가짐, 스승 어른의 충실한 의무감, 일단 진리에 신뢰를 두어 스승께서 진리에 정통해 계신다고 확신한다면, 그의 진리의 명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따르는 것, 용기를 내서 아(我)가 몸에의 부당을 참고 견디어 내는 것, 겁을 먹지 않는 신념을 탄언(誕言)하는 것, 부당한 공격을 당한 자를 지켜주려고 용감하게 싸울 것, 비밀의 과학 '구프다, 베티아'에 그려져 나와 있는 인류 진보와 완성의 이상(理想)을 늘 볼 것..... 이러한 것들은 [황금의 계단]인 것이며, 학도는 그의 계단을 하나 하나 오르는 성스러운 지혜의 사원(寺院)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다.

(다) 비교 부문의 가르침의 제3부에서

선과 악은 상대적인 것들인 것이며,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의하여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우리들이 [인류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이라고 말하는 대다수의 일반인은 많은 경우에서, 책임능력을 못 갖춘다. 무지(아비디야, 無明)였기에 범하게 된 죄에는, 도덕상의 책임 즉 '카르마'가 아니고, 육체적인 책임밖에 없다. 예를 들면, 백치(白痴)나, 아이들이나, 야만인 등, 죄란 비(非)인 것을 분별할 만큼 힘을 갖지 못한 자의 경우는 그러하다. 그러나 고급아(자신의)에게 서약을 한, 당신들의 경우에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일단 고급아라고 말하는 신성한 것들을 증인으로 세운 것이 되면, 범죄를 범하면 반드시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 고급아의 지도 아래 몸을 두는 것이 되어서, 찬란한 빛이, 자신의 마음 깊숙한 오지를 비추어 구석구석까지 살펴서 찾(求)는다. 또, 자신의 동기에 주의를 기울여, 자신의 행동을 정밀하게 살펴서, 자신의 계정(定)의 전부를 기장(記帳)해 줄 것을 '카르마'라고 말하는 신성한 정의(正義)를 의식적으로 불러서 구한다. 이것은, 태아가 태어나게되는 것처럼 취소되지 않는 이치이다. 무리하게 '아비디야'(무지)와 무책임의 모채로 돌아가는 것이 절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문에서 물러나거나 서약을 철회한다고 해도 소용없다. 이 땅의 끝까지 도망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도, 눈이 핑핑 돌아가는 사회 생활의 소란 속으로 몸을 잊어 보려고 해도, 고급아의 빛은 당신을 찾아내어, 하나 씩 하나 씩 당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비추어 본다. 당신들이 서약하고 있는 것은, 이 가련한 H.P.B에 대한 것이었다고 우둔하게, 생각하고 있는 자가 지금도 있을지?

H.P.B는 기껏해야, 당신들 중에서 열심인 자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현재처럼 마음으로 우러나는 호의(好意)를 보내며, 더 분발 노력해서 좋은 결과를 얻어 지도록 기원하는 것 외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절망해서는 안 된다. 노력하고 더욱 더 노력해 보라. 만약 실패한 것에 굴하지 않고 용기 있게 새로 일어나서 도전해 계속하면, 스무(20회)번을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돌이킬 수 없는 해는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상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다음의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설령, 무지한 자가 한 짓은 너그럽게 봐주는 비행(非行)도, 비교학도가 했을 경우, 가차없이 '카르마'에 의하여 계정에 기록된다고 하는 것, 고급아의 연결하기 위해, 하나 하나의 선행(善行)은, 선(善)을 생겨나게 하는 가능성을 백 배 증가시킨다는 것도 진실인 것이다.

4. H.P.B로부터 비교부문의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
​(가) 비교 학자들에게

거​울을 보면 자신의 얼굴의 결점을 알고 느끼는 것처럼, 진보한 비교 학자들의 반짝거리는 상(像)을 예로 설명해 알아듣게 해준 것뿐인데 당신들 중에서도 가장 열심인 자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결점을 알아차리게 해준 것이 되고 말았다. 비교 부문에서 가장 우수한 회원의 몇 사람은, 이와 같은 발견에서 대단한 충격을 받고, 일찌감치 관계를 끊고 [길]에서부터 뛰쳐나가 버리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의 것들을 충분히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만약 앞서 그려져 있는 비교학자의 이상상(理想像)을 이미 구현(具現)해 낸 자가 한 사람이라고 자신들 안에 나왔다고 한다면, 나는 얼마 후에, 그 사람한테 스승의 자리를 넘겨주어야 하는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내가 그와 같은 이상상의 여러 가지의 훌륭한 좋은 점 모두를 지닌 것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너무도 얼굴이 두꺼운 일이기 때문이다. 천사 어른들이란 각각의 기질(氣質)에 따라, 여러 가지 단계에서[초월적 미덕 쟛지]를 몸에 지니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 어른을 스승으로 모셔도 우리들의 존경을 받을 만 한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전심(全心)을 기울여 천사 어른을 따르고 섬기면, 그의 모범을 따라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성실한 자들이요, 사표를 거두어 드려라, 당신들은 천사의 편지에 나와있는 이상상에 눈이 감기고 두려움부터 가져, 자기(아)의 불완전함을 통감한 나머지 퇴회(退會)하려고 했지만, 그 방침은 잘못이었다. 이것은 용기의 반대인 것이다. 진보라는 것은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는 것이며, 하나 하나의 전지이란 것은 영웅적인 노력 끝에 이루어 낼 수가 있었던 것을 이해 해주면 좋겠다. 물러나는 것은, 절망과 좌절의 증거이다. [혼이 처음으로 지고의 해탈의 꿈을 가지고, 출발했어도 그의 일생동안 만으로는 '하루핫트'를 이루어내지 못한다.](침묵의 소리 2부) 이 말을 읽어보고 마음에 머물게 하라. 제자는 싸움에서 쓰러졌어도 허무하게 죽는 것은 아니다. 최후의 전투에서 그에게 죽음을 당한, 적은 다음의 미래생에 오지 못하며, 그의 미래생의 적이 되는 경우가 없다. (침묵의 소리) 극복해 낸 번뇌는, 죽음을 당한 맹호처럼, 이미 사람에게 덤벼들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절망에 빠지지 말고, 바램을 가져라. 매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고급아와 조화를 해서 하루를 보내도록 노력하라. [노력]이야 말로, 스승들이 각 제자에게 가르치는 [싸움의 소리]인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을 당신들에게 기대하고는 있지 않다. 최선을 다하는 자는, 사람이 구하라는 것들을 얻어 낼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붓다(석가모니)조차도 죄가 많은 범인(凡人)으로 지내는 것을 그만두고, 성불로의 첫 발짝을 내딛어 시작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깜짝 놀란 것으로 해서 비교학자로부터의 몇 통의 편지에서의 확실한 질문의 답(答)으로 해서, 당신들 중에는, 이승에서의 성취(成就)라는 완전한 이상을 달성해 낼 수 있는 자는, 아마 한 사람도 없지만, 팔정도(八正道)에 발을 들어 놓을 수는 있다고 나는 말한다. 당신들은 파라밀다(波羅蜜多)를 어려운 것이라고 겁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은 쉽게 '하이잔트아' 왕처럼 선자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인내력을 몸에 지니게 되고, 친절해져서, 일들을 직접 실행에 옳길 수 있다. 천사 어른의 편지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16의 '파라밀다'는 승려나, 요가, 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그것을 향해 노력해야 할 모범인 것이다. 그리고 한꺼번에 모두를 달성해 낸 승려나 요가나, 찰라나, 마하트마도 없다. 성인(聖人)뿐 아니라 죄인도 당연하게 길로 들어 갈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을 [침묵의 소리]에서 강조되어 있다. [격력한 전투에 참가하는 전사는 설령, 신병(新兵)일지라도, 전투의 장으로 나아가겠다는 권리를 거절 당할 수는 없다.](침묵의 소리-제2부) [침묵의 소리]를 반드시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다. 천사(天使)의 특별한 명령으로 당신들을 위해 쓴 것이며, 당신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이미 당신들이 하고싶어하는 모든 질문에의 답이 나와있다. 동포애를 가지고 H.P.B......

5. 모든 비교학자에게 경고
오컬티즘에는 과거 수 천년 동안의 경험에 의하여 확증된 불가사의한 법칙이 있다. 신지학 협회가 생긴 후 지난 15년 동안, 거의 예외 없이, 모든 경우에서 이 법칙의 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말하자면, 누구인가「견습」자로서 서약하면 똑바로 어떤 오컬트 결과가 생겨난다. 먼저, 그 사람의 마음에 잠재해있는 모든 것들이 외면(밖으로)으로 표출되 나오게 되는 것이다. 결점, 습성, 특성 등 억제되어 왔던 욕망, 좋은 점, 나쁜 점,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정쩡한 것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밝혀지는 것이다. 선조들의 유전 탓인지, 카르마 탓인지, 어느 사람이 잘난척 한다던가, 호색가, 야심자였거나, 설령, 지금까지, 어떻게 되었던간 악덕이 잘도 숨겨져 억눌려 있었던 것이, 반듯이 나타날 것이다. 이런 것은 억눌려 볼 수가 없어 앞면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경향을 모두 박멸하는 것은, 전보다 백 배로 더 격렬하게 싸워서 이겨야 한다. 이의 한편, 만약 어느 사람은 선량하며 관대하고, 청결하며, 절제하는 성격이고, 혹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잠재하는 숨겨진 미덕이 있으면, 그것도 앞에 결점과 똑같이 억누르지 못하고 그 동안에 나타내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기에 성인처럼 보이는 것이 싫어서 가면을 덮어쓴 문명인은, 비열한 것이나 고상한 것이든, 자신의 본성을 숨길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오컬트의 영역에서는 불변의 법칙인 것이다. 지원자가 열심이며 성실하다면 그럴수록, 또 서약의 힘과 중요한 것을 깊이 있게 느끼면 느낄수록, 법칙의 작용은 활발해져 뚜렷해져 온다. 여사한 것이라, 비교부분의 회원들은 이 경고를 받아들여서 유의하는 것이 좋다. 비교적인 지도를 시작하기 석달전부터 장래가 촉망한 지원자 몇 사람이, 수치스럽게 중간에서 실패해버렸다.

「그대 자신을 알라」말한 고대의 오컬트 금언(金言)을 알지 못하고 있는 회원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엔파이"신탁(神託)의 그외 현명한 타이르는 충고의 참된 의의(意義)를 잡은 사람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극히 적은 소수일 것이다. 당신들은 자신의 육체의 가계(家系)는 알고 있지만, 당신으로 하여금, 지금 이 순간처럼 되겠끔 해온 "아스트랄적, 사이킥적, 영적"인 유전의 연결되는 사슬의 환을 모조리 조사 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급자아와 일체가 되어 보겠다고 바램을 써서 보내오는 사람들의 편지는 많지만, 고급자아와 유일 보편적 대아(大我)와의 맺음을 하는 불변(不變)의 옭아매는 방법에 관해서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실천적인 것들이거나 순수한 철학적인 것이던 간에, 오컬티즘의 어떠한 목적을 품고 있어도 그와 같은 지식은 절대 필요한 것들이다. 따라서 비교의 지도는 먼저 모든 방면에서 나오는 것을 인간과 여러 세계와 연결해 가는 설명부터 시작해 보자. 즉 절대적, 원형적, 영적, 마나크, 사이킥, 아스트랄, 엘리멘탈이라고 말하는 여러 세계의 상호관계의 설명인 것이다. 그러나, 원형계, 영적계, 마나스계라고 말하고 있는 고급 세계에 스쳐(촉)지기 전에, 카발라에서는 '말쿠트'에 해당하는 제7계, 즉 저급의 '프라크리티'가 되는 이승(지상계)와 그 바로 위에 있는 여러 세계와의 관계에 정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체(人體)에는, 이와 같은 높은 세계와 직접관계가 있는 것을 인식한다면, 육체의 모든 부분이나 기관(器官)이 특별한 기능 및 환경에 순응하도록 분화(分化)하거나 변형(變形)해, 즉, 특수화 해 있으므로, 당연히 예외 없는 인간의 유기체의 각 부분에 촉(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진리와 자연의 눈으로 본다면 어느 기관이 다른 기관보다 더 고상한 것이고, 혹은 비열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고대의 사람들은, 우리들의 비밀이나 부끄러운 곳을 연상(連想)케 하는 기관을 가장 신성한 것으로 봤다. 왜냐하면 생식기는 창조적인 중핵이고, 우주의 창조적인 여러 힘들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교학도들은 다음의 것을 유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지난한 때에는 신성시 해온 원초적 기능을 부끄러운 짓으로 잘 못 썼거나, 위선에서 생겨난 상품(上品)인 것처럼 했든 습관을 버리고, 자연과 진리의 정신을 지닌 것은 모든 것들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비교의 길을 공부해 보려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다.

6. [옴 마니 파드메 훔)과 대우주와 소우주의 상응(相應)
​제5근본인종의 자식인, '아리아'인의 '아데프트'는 [옴]이라는 말을 한다. 그는 이 말을 인간에의 인사, 비인간존재에의 기원이나 주문(呪文)의 처음과 끝머리에서 말한다.

제4근본인종이었던 '두우란'어족(語族)의 '아데프트'는 [옴 마니]라고 중얼거리고, 조금 사이를 두어서 [파드메 훔]라고 말을 덧불였었다.

이 유명한 기원을 동양학자는 [오! 연화(蓮華) 안의 보석이요]하는 말의 뜻으로 해역(譯)하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이다. 문자 그대로라면, '옴'은 신에게 바친다는 말이고 '파드메'는 [연화 속], '마니'는 [보석]이긴 하지만, 말 자체의 뜻이나 상징적 뜻이나, 그의 역(譯)으로는 정확히 표현이 되있지 않는 것이다.

이 가장 신성한 동양의 말에서는 낱말 하나하나에 일정한 결과가 생겨나게 하는 비밀의 잠재력이 있을 뿐 아니라, 이 기원(祈願)의 말 전체에는 일곱 게의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일곱 개의 서로 다른 결과를 생겨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일곱개의 의미와 결과란, 그 말 전체와 그 안의 각 음절(音節)을 불렀을 때의 높고 낮음의 억양에 따른 것들이다. 여러 가지의 '리듬'으로 부르는 데에 따라, 문자의 숫자(數字)상의 가치가 불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수(數)란 형체의 기초에 있고, 수란 것은 음(音)을 인도해 나오게 한다는 것을 학도는 잘 기억해 두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현현(顯現) 우주의 뿌리에는 수(數)가 있는 것이다. 조화가 이루어진 비율과 수란 것은, 같은 질의 질료(質料)가 시초의 분화를 이질(異質)의 것으로 하는 여러 원소에로 이루게 해준다. 그래서, 수란 대자연의 조형(造形)의 손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모든 원소 및 그의 아원소(亞元素)의 기본적 본질로 상응하는 수가 있는 것이다. 현현해 있는 자연의 '오컬트'면에서의 그의 수에 의한 상호작용과 기능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되면, 상응의 법칙에 의해서 대우주생명의 최대의 신비를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우주생명에 이르기 위해서는, 당신들은 소우주에서부터 우선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자면, 소우주로 되어 있는 인간(인체)의 것들을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물질과학이 행하고 있는 것처럼 귀납적(歸納的)이고, 개개의 사실에서부터 일반적인 법칙으로 밟아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러나, 같이함께 여러 가지 음의 짜임새(조합)를 분석해서 이해하는 것은, 주음(主音)을 알지 못하고서는 안되기 때문에, 우리들은 '플라톤'이 했던 방법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 방법은, 먼저 만물을 전체로 보고 그리고 일반 원리로부터 개개의 것들에로 내려가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로서는 유일한 정밀과학에서 어느 수학으로 다루고 있는 방법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을 연구해야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들 인간이 잠깐 동안만이라도 우주와 떨어지게 해버린다면, 즉, 만약 우주 일부와 인간과를 분리하거나, 또는 모든 철학에는 '아담 카드몬'이나 그것에 해당하는 것으로 상징되어버린 우주[천상의 인간]과 인간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들로 본다고 한다면, 흑마술에 빠져들거나, 우리들이 시도(試圖)하는 것은 분명한 실패로 돌아가 버리거나, 어느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옴 마니 파드메 훔]라고 하는 신비적인 언어는 [오! 연화 안의 보석이요] 같은 거의 무의미한 말이 아니고, 바르게 이해를 한다면, 우주와 인간 사이에서 분리할 수 없는 통일성을 뜻하고 잇다. 이 말에는 일곱 가지의 차이가 있는 말을 하는 방법이 있으며, 생각과 행위의 일곱 개의 계층(界層)에서의, 일곱 개의 틀리는 응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느 면에서든지 조사해 보아서도 [옴 마니 파드메 훔]은 [아(我)는 있어야(存) 있는(有) 자](출(出)이집트 기(記) 3장 14절), 또는 [아(我)는 거룩한 몸 안에 있으며, 거룩하신 몸은 아(我) 안에 계시는 것이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와 같이 결합해, 이와 같은 밀접한 통일을 이룩해내면, 선량하며 청정(淸淨)한 인간은 신이 된다.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이 말을 부르면, 피하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의식적인 경우는, 만약 '이니시에이트'였다면 (물론, 오른손의 길의 '아데프트'에만) 자비 깊은 흐름이나 보호의 흐름의 방향을 줄 수가 있느느 것이고, 개인은 물론이고, 국민전체에게도 은혜를 주고, 보호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무의식의 경우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선인(善人)이었다면,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 방패가 되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어떻게 해서, 또, 왜 그렇게 되는 것인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것에는 먼저, 음의 안에, 따르는 말이나 문자 안에 실제로 수와 수의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표시 할 필요가 있다. [옴 마니 파드메 훔]라고 하는 말은, 천사가 이 말을 입에 담으면, 거의 무한의 힘이 나온다. 일반의 인간이 불러봐도 상당한 가능성이 있는 것임으로, 말의 힘을 예로 한 것이다. 이것을 읽는 당신들 모두는 잘 유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을 장난 삼아 써먹거나, 또는 화가 났을 때, 불러봐서는 안된다. 그와 같은 짓을 하면 당신 자신이 그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될런지 모르는 일이며 ㅡ 또 더 나쁜 것으로서는, 당신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위험에 봉착하게 할는지 모른다.

일생, 동양사상의 표면에 스치는 것에 불과한 범속(凡俗)의 동양학자는, [옴 마니 파드메 훔]은, 티벳에서는 가장 강력한 6 음절의 주문(呪文)인 것이고, '티벳'의 관음(觀音)인 '파드메 파니'에 의하여, 중앙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전해 졌다고 전해 오는 것을, 비웃고 미신(迷信)으로 웃어넘긴다.

그러나 실제로 '파드메 파니'란 누구인가? 각자가 어느 정도 준비가 갖추어 졌을 때는(공부가 상당한 정도) 자신이 '파드메 파니'를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파드메 파니' '크리슈나' '붓다' '그리스도' 등 자신의 신성아(神聖我)에, 어떤 이름을 붙였어도, 각자의 내면에는, 그의 [연화 속의 보석]이 있다. 그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현교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고(至高)의 붓다가 되는 아미타여래는, 인간으로 창조될 때, 오른쪽 눈에서 '장미색'의 광선이 발사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의 광선에서 하나의 음(音)이 나와서, '파드메 파니' 보살이 되었다. 그러자 여래(如來)의 왼쪽 눈에서 청색 광선이 흘러나오는 것을 허락 받았다. 그것은 중생(衆生)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는 힘을 가진 두 사람의 처녀 '토르마'로 화신(化身)하도록 되었다. 그리고서 아미타여래는 [옴 마니 파드메 훔](나는 연화 속의 진주이다. 나는 그 안에 류(留)할 것이다.)고 말하는 짜임새(조합)를 불어내면서, 그것을 똑바로 인간 안에 살도록 붙어두게 되었다. 그러자 '파드메 파니', 즉, [연화 안에 있는 자]는, 인류에게 자신의 마음 속에 '파드메 파니'의 존재를 느끼게 해서, 인류를 윤회전생(輪生)의 고통에서 구제해낼 때까지는, 쉬지 않고 일을 할 것을 서약했다. 칼파가 끝날 때까지는 이 일을 해내겠다고 맹세해 만약, 실패하면, 자신의 머리를 산산조각을 내달라고 덧붙였다. '칼파'는 끝났지만, 인류는 그런 냉한 죄 많은 마음 안에 '파드메 파니'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파드메 파니'는 머리가 산산조각으로 깨어져서, 일 천 개의 조각 조각으로 부서졌다. 자비(慈悲)에 의해, 여래(如來)는 그 조각들을 세 개(3)의 흰머리(頭)와 일곱 개(7)의 여러 색의 머리(頭), 즉 열 개(10)의 머리로 고쳐서 만들어 졌다. 그 말 이후, 인간은 완전한 수(數) 즉, 십(十)으로 된 것이다.

이 우화(寓話)에는, 음과 색, 수의 힘을 교묘하게 집어넣은 것으로, 진정한 비교적 의미가 덮어져 숨어 잇는 것이다. 문외한(門外漢)에게는 이 우화는 무의미한 창조 신화의 하나로 생각하겠지만, 실은 신성, 영적이고, 물리적 및 마법적인 의미를 포함했다. 아미타(무색 즉 백광)로부터 '프리즘'의 일곱개의 색이 태어난다. 일곱(7)색의 하나 하나는 수학의 안에 기하학은 특히 건축에 관계가 있으며, 또 일반 원리로 나아간다. 우주 발생론에도 관계가 있듯이, 대우주와 그것의 상(象)으로 해서 만들어진 소우주 인간을 '상징'하는 '피타고라스'의 4개조 '테트락티스'도 또 십(十)의 점 혹은 십(十)의 '요도'로 나누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자연계 그것이 이런 일을 행(行)하고 있다.


이런 일을 입증하기 위해, 대우주와 소우주 사이의 완전한 상응을 나타낼(표시) 수 있는 것처럼, 몇가지 설명을 필요로 한다.
비교과학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말하자면, (a) 인간은 영적 및 물질적 본질에 있어, 절대적 본질 및 자연 안의 신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과, (b) 자연계의 창조적 '에너지'에 있는 잠쟈력이 인간 속에도 있다 하는 것을 표시한다고 하는 것이다. 비교과학을 연구해 보겠다고 생각하는 학도에 있어, 색과 음과 수의 사이의 상응(相應)에 관하는, 완전한 지식이, 먼저, 필요불가결(必要不可結)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극동의 신성한 말 [옴 마니 파드메 훔]은 학도에게 여러 가지 특성과 기능의 상응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설명을 할 경우, 현대에서는 [천한 것들]​이라 생각되는 이야기를 스쳐가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인데, 이와 같은 것들에 관해서 많은 신비를 '외경(畏敬)의 념(念)을 가지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대의 아이들]은 이 공부를 당장 그만 두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특히 첫 머리에서 나는, 인체의 가장 비밀스러운 것으로 하고 있는 기관(器官)과 기능(機能)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까닭이었다. 그런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어떤 사람은 험악(險惡)이나, 수치스러운 기분을 느끼거나, 불손한 웃음을 웃는다.
이와 같은 기분을 간직함으로 해서, '기루히야' 이후, 상징학이나 종교에 관한 저술을 한 저작자는 대대(代代)로, 모두의 자연스러운 상징이나 표현을 자신의 불결한 생각의 수준(레벨)까지 끌어내려서, 기독교를 포함 모든 종교는 성기숭배(性器崇拜)라고 하는 소인(燒印)을 찍어 왔었다. 확실히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시대 이후, 현교(顯敎)는 점점 타락해서, 끝내는 심벌을 완전히 욕되게 오염된 성(性) 숭배의 무지한 짓들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오컬티스트'는 소위 인격신과 그리스도교, 비그리스도교의 양쪽을 포함한 모든 종파의 현교적인 의식과중주의(儀式過重主義)적인 숭배와 다른 것을 혐오하며, 경멸한다. 그렇지만 '플라톤'시대만 해도 그와 같은 일이 없었다. 훨씬 지난 후에, 인간의 생각을 정화​(淨化)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던 비의(秘儀)가 최종적으로 탄압(彈壓)받고, 진정한 '히에로폰트(천사)'들이 박해 당하면서, '탄트라'의 성숭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성한 진리는 머리에서 잊혀져 가면서, 의식적, 무의식적인 흑마술이 날개치게 되었다.
어떤 '오컬티스트'들은 정신적인 상징을 육체적으로 해석하는 현교의 교회나, 어느 '심벌'에서도 성적인 것만을 찾아내는 유물론자들에 대하여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들이 결론을 막아, 서둘러, 역시 오컬트 과학의 기초에는 성적인 것들 외에는 없다는 생각을 갖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해, 나는 이상의 설명을 했다. 남자나, 여자나 육체적인 면이나, 육체와 관계하는 칼의 칼집이라는 점에서는 역시 고급의 동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육체의 각 부분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학도가 알고 있는 말을 써야만 하는 것이다. 현대 인류의 생각에서는, 어느 육체기관은 불결한 행위를 연상시킨다고 하지만, 각 기관은 제7계층인 물질계에서 제7의 완전한 물질적인 기능을 당하는 것 외에는 더 높은 여섯의 활동계층에서 여섯(六)가지의 기능을 완수하기 위해 진화해 발달해왔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인 것이다. 이것은 아래의 설명을 하는 서문으로써 충분한 것으로 생각한다.
[파드마 파니]의 우화(寓話)에서, 연화 안에 보석(즉 영적아)은 암컷, 숫컷, 동체(하나인체)로 된 인간 '심벌'인 것이다.​ 이미 말한 바 있는 3, 4, 7에서의 외에, 단원(單元)인 인간을 총 종합하는 십(十)이라 말하는 수(數)는, 이 '심벌'로 눈에 띠는 뚜렷한 것이다. '오컬티즘'의 학도의 진보는, 다종다양한 짜임새(조합)로 나타나는 수(數)의 의미와 잠재력과 음(또는 말)이나 색, 즉, 운동율(물질과학에서 말하는 바이브레이션)과 수(數)와의 상응에 관해서 완전한 지식과 이해 정도의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시초의 말 '옴'은 또는 아움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옴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사람을 속이는 '프라인트'인 것이다. 말하자면 [옴 마니 파드메 훔]은 육음절(六音節)이 아니고 칠음절의 구(句)인 것이다. 즉, 첫 번째의 '옴'의 음절은 바른 발음에서는 충인 것이고 그의 본질에 있어서는 3충의 아-움인 것이다. 그것은 유일한 절대자로부터 나타낸 것이 아니고, 절대자 속에 영구(永久)히 숨어 있는, 시초의 삼위일체의 분화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형이상(形而上)의 세계에 있어서의 사(四) 즉, '테트락티스'로서 '상징'되어 잇는 것이다. 그것은 단원(單元) 광선 즉 '아트마'인 것이다.

인간 안에 최고의 영(靈)은 '아트마'인 것이고, 그것은 '붓디'와 '마나스'에 맺어져서, 고급의 3개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3개조는 네 개의 저급인간 본질과 함께, 마치, 난백(卵白)과 껍질 안의 노른자(미래의 태아)처럼 '오라'로 쌓여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세계에서의 보다 더 높은 존재의 관점(觀點)에서는, 각자의 인간은, 밝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빛이 반짝이는 장원형(長圓形)의 구체 모양으로 보이는 것이다.

'코스모스'와 세계와 혹성영의 탄생과, 죄와 지구의 아이들의 탄생 등의 사이에 완전한 상응관계를 표시하려면, 좀더 확실한 묘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생리학에 정통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더 잘 이해할 것이다. [비슈누 프라나]나 다른 [프라나]를 읽어 본 사람은 일곱 개의 계층에 쌓여져 있는 세계의 난(卵), '히란야 가르바'의 안의 '프라프마'의 탄생이라 말하는, 현교적 우화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칠계(七界)는 형체와 물질의 세계에서는 7개와 14개의 '로카'로 된다. 칠(七)과 십사(十四)라고 하는 수는 필요에 응해져서 재현을 하는 것이다.

비밀의 분석을 공표를 하지 않고서, 인도인들은 태고 때부터, 우주의 모체 및 태양의 모체를 여성의 자궁으로 불러왔었다. 우주의 모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그의 자궁은 메루의 산처럼 커다란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거대한 대양(大洋)이 그의 구부러진 것에 들어가서, 대륙, 바다, 산(山)들, 별, 혹성, 신(神)들, 악마, 인류가 그의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우주 전체는 야자(椰子)의 열매를 닮은 것이다. 야자열매의 안은 과육(果肉)으로 꽉 채워져 있고, 바깥쪽은 껍데기와 표피로 덮여져 있다. 여러 가지의 [프라나]는 우주의 자궁이 [메루의 산처럼 광대]하다고 말하고 또, [메루의 산은 그의 양막(羊膜)인 것이고, 다른 산들은 융모막(絨毛膜)이 있었다]라고 [비슈누 프라나]에서는 덧붙였다. (비슈누 프라나 1권 2장)

이와 똑같은 이치로 인간은, 모의 자궁에서 태어난다. 현교의 전설(傳說)에는, '프라프마'는 안쪽(內)이 칠(七)층, 외쪽(外)도 칠층이 있는 세계의 난(卵)이 싸여져 있는 것처럼, 인간의 태아도 그러하다. 계층(階層)의 순번(順番)을 안에서 헤아릴 것인가, 밖에서부터 헤아릴 것인가로 말하는 데 있다.

비교의 우주 발생론이 내부 7층, 외부 7층으로 헤아리는 것처럼, 생리학은 우주모체의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옮겨 사본(寫本)하는 짓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자궁의 알맹이(중신)를 일곱(七)으로 헤아린다.
자궁의 알맹이 즉 중신(中身)은 다음과 같다.

(1) 태아
(2) 태아의 둘레에 있는 양수
(3) 양막(羊膜) 태아에서 나온 막으로, 액체를 포함
(4) 배꼽의 시작의 소낭, 씨눈에 영양을 보내주고, 키우는 역할
(5) 요막(尿膜) 또는 요낭, (3)과 (7)[양막과 융모막]의 사이(6)속에 퍼져있는 닫혀진 보태형을 하고 있고, 태아로부터 돌출해있다. 후에 태반으로 분화되어서, 태아에게 영양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6) (3)과 (7)사이에의 강소(腔所)에서 단백질의 액체로서 꽉 채워져 있다.
(7) 융모막 즉 외측(外側)의 층(層)이다.
앞에 그림(圖)의 설명

(1) 태아
(2) 태아가 떠 있는 양수
(3) 양막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눈막의 하나로서 양수가 들어 있다.
(4) 배꼽낭 즉 난황낭에서 초기의 씨눈의 영양원이 되는 난황(卵黃)이 들어있다.
(5) 요막(요낭)에서 태아의 끝머리에 나와있는 소낭, 수정란의 내부 안으로 퍼져간다.
(6) 수정란의 외직의 층과 양막의 사이의 비어있는 곳에서 그의 안에는 배꼽낭과 요막이 들어 있다.
(7) 융모막 즉 의사양막(疑似羊膜)에서, 수정란의 외직의 층으로 만들어져 있다.

제 1도(그림)는 양막과 융모막이 충분히 인식하기 전의 수정란의 모습. 요막(5)도 발달의 시초의 단계이다.
제 2도는 요막이 틈 사이로 펼쳐있고, 난황낭은 상당히 축소해 있다. (3)의 양막을 형성하는 돌출부.
제 3도에서는 난황낭은 더욱 축소해 있다. 요낭은 융모막의 벽으로 향해 완전히 양막과 융모막(외사약막)의 사이의 강소(腔所)에 펼쳐있다. 융모막의 분지(分地)한 융모조직의 자궁의 점액질의 엷은 막에 붙어서간다. 더 후에서는 그 점액질막은 태반이 된다.

이러한 [일곱 개의 대륙(大陸)은 각각, 우주의 칠계(七界)의 각각의 원형에 상응해, 이 원형에 따라서 칠계(七界)의 각각이 형성된다. 또 우주의 칠(七)계는 물질의 칠(七)상태 및 자연계의 감각적, 기능적인 다른 모든 힘에 상응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대자연의 자궁과 인간의 여성의 자궁의 일곱 개의 상응점을 개관(槪觀)을 나타내 보자.

 

 

 

우주의 경우


(1) [우주의 씨(종자)]라고 말하는 수학적인 점 즉 '라이프니스'의 모나드, 그것은 호도같은 열매 속에 떡갈나무가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전우주(全宇宙)가 그 종자에 포함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끝이 없는 동질(同質)의 질료, 즉 공간의 표면에 생겨 겹쳐있는 거품인 것이다. 시초의 단계에서의 분화라고 말하는 거품인 것이고, '오르푸스'교(敎)의 난(卵) 또는 '프라프마'의 난의 기원(起源)인 것이다. 그것은 점성학 및 천문학에서는 태양에 해당한다.

(2) 우리들의 태양계의 생명력이고, 태양으로부터 발산된다.


(a) 고급계에 관하는 경우는 '아-카-샤'라고 말한다.


(b) 십(十)인의 신들, 즉, 십(十)의 태양신에서 나온다. 십(十)은 [완전수]인 것이다. 이것들을 '테이씨' 즉, 십방(十方)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에서 공간 그리고 공간 속으로 퍼져가는 '에너지'인 것이다. 세 개는, 태양의 제칠(七)본질 '아트마'에 포함되어 있으며, 일곱 개는 태양에 의해 발산된 광선.


(3) 공간의 에텔. 외부적인 면에서는 태양을 덮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가삭성(可削性)의 껍질인 것이다. 고급계에서는 이것을 전우주인 것이다. 진화해가고 있는 질료의 제3분화로서, '프라크리티'로 되어가고 있는 '물라프라크리티'인 것이다.


(a) 비교에서는 현현해 있는 '마하트' 즉 세계의 지성 또는 혼에 상응한다.


(4) '에텔'의 별처럼 된 부분, 근대 과학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에텔'의 실질적인 부분.


(a) '오컬트' 및 '카발라'의 비의(秘儀)에서는 '엘리멘탈'로 대표되어 있다.


(b) 물리적 천문학에서는 유성(流星), 혜성(彗星), 모든 종류의 불규칙인 면에서 현상(現相)적인 천체에 의해 대표된다.


(5) 태양에 뿌리가 있는 '에텔' 안의 생명력의 흐름. 지구상 및 다른 혹성상의 모든 것들을 길러 내기 위해, 그의 '에텔'(우주체의 혈액)의 생명 원리가 지나가는 관(管). 그의 생명 본질에 의하여 광물은 성입해서 특수화 되고, 식물을 자라게 하며, 동물이나 인간에게는 생명이 주어진다.


(6) 사이킥적과 물질적, 이중의 방사. 그의 방사는 [우주의 종자씨]로부터 방사되어서, 태양계 및 모든 혹성과 함께 전우주로 퍼져 진다. '오컬티즘'에서는 위쪽편은 신성한 '아스트랄'광, 아래부분의 것은, 물질적 '아스트랄'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7) 각 항성(恒星)체의 바깥쪽의 껍질, 즉 세계란의 껍질. 우리들의 태양계의 영역(Sphere), 지구 및 모든 인간과 동물의 영역. 별의 공간에서는 '에텔' 그것이지만, 지상계에서는 공기인 것이고, 그것도 역시 일곱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a) 시초의 잠재적 세계소재(素材)는 '만반타라'의 동안에, 항구적인 구체(球體)가 된다.

우주의 경우

 

 

 



 

우주의 경우

우주의 경우

 

 

 

인간의 경우


(1) 이승의 태아. 그 안에 미래의 인간과 그의 모든 가능성이 포함시켜져 있다. 인간 조직의 일연(一連)의 본질에서는, 그것은 '아트마' 즉 초영적(超靈的) 본질인 것이다. 이와 꼭같이, 물질 태양계에서는 태양인 것이다.



(2) 양수는 태아로부터 분비(分泌)된다.



(a) 물질의 세계에서는 '프라나'라고 말한다. (프라나는 실제에서는 보편적인 생명원리)


(b) 그의 뿌리는 보편적인 하나 하나(1)인 생명, 즉, '지바트마'이며, 인간의 심장 및 일곱 개의 태양광선(칠인의 신들)이 통할(統轄) 하는 '붓디'에서 나온.





(3) 양막(羊膜) 즉 양수(羊水)를 안에 담고 태아를 쌓고 있는 막이다. 인간의 탄생후에는 말하자면 자기(磁氣). 생기(生氣) '오라'의 제3층(層)이 된다.

 


(4) 배꼽낭. 과학에서는 이것이 태아를 양성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나, 오컬트 과학은, 침투성(浸透性)에 의해 어머니와는 무관계인 우주적 영향을 갖어준다고 주장한다.


(a) 성장한 인간의 경우, 위에서의 '엘리멘탈'은 '카마'를 기르는 손이되어 '카마'를 다룬다.


(b) 육체 인간의 정욕과 감정, 인간성의 도덕적 흐르는 유성(流星)과 혜성(彗星).


(5) 요막, 요낭(尿膜, 尿囊). 양막(羊膜)과 융모막(絨毛膜)의 사이에 퍼지는 태아부터 나온 돌출물, 어머니로부터 태아에게로 영양을 유도해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생명의 본질 즉 '프라나' 또는 '쉬-바'에 상응한다.


(6) 요막은 2층(層)으로 나누어 진다. 양막과 융모막의 사이에 비어있는 곳에는 요막과 단백질 액을 포함. (자궁의 중신(中身)은 그의 우주적 원형과 정신적인 직접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물질계에서는 흑마술에 사용되는 강력한 것임으로 불결이다고 본다.


(7) 융모막. 투명대(透明帶) 또는 포배벽(胞胚壁) 소낭이라고 말하는 구상(球狀)의 것들. 박막(薄膜)의 내층에, 육체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된다. 외부(또는 외배엽)는 인간의 표피(表皮)를 만든다. 안이 되는 것들(내배엽)은 근육, 뼈등을 만든다. 또 인간의 피부는 칠층(七層)으로 이루어져 있다.

(a) 일차(一次)융모는, 항구적 융모막으로 된다.

 

 

 



인종의 진화에도 자연계나 인간 진화와 같은 순서가 있다. 이 태반이 가지는 동물인간은 제3근본인종에서의 양성(兩性)으로 분리된 후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생리적 발달의 한 점에서는, 태반은 자궁내에서 3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써 충분하게 형성되며, 기능을 영위 할 수가 있게 된다.

인격신이라 말하는 개념처럼 인간이 제멋대로 생각해 만들어 낸 것은 버려야 한다. 지금 당장 버려라, 그리고 무한의 대자연의 모든 것들의 속 밑바닥에 깔려있는 순수하며, 신성(神聖)한 것들에 확신(確信)을 가지자. [베다]에서는 그의 신성한 것들을 [닷트], 즉 "그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불가지(不可知)한 뿌리 없는 뿌리에 붙여진 [말]인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답을 한다고 하면, 다음의 비교 문답의 일곱(7)가지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답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1) 문 : 영원한 절대자란 무엇인가?
     답 : 그것.
(2) 문 : 우주는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끔 되었는가?
     답 : 그것을 통해서.
(3) 문 : '프랄라야'로 돌아갈 때, 우주는 어떻게 되며, 무엇이 되는가?
     답 : 그것에.
(4) 문 : 명(命)을 지닌 모든 것들, 상상상(想像上)의 [명이 없는 것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답 : 그것.
(5) 문 : 우주를 형성하는 실체(實體)는 무엇인가?
     답 : 그것.
(6) 문 : 우주에는 무엇이 녹아들어 있었는가, 그리고 지금부터 무엇에 반복해 녹여 들어가는 것인가?
     답 : 그것에.
(7) 문 : 그러면 그것은 우주 형성의 동력인(動力因)이기도 하고, 질료인(質料因)이기도 한 것인가?
     답 : 그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있을 것인가.

대우주나 소우주(작은 범위로 해서 태양계 또는 지구라고 하는 말의 뜻도 된다)도 다함께 십(十)인 것인데, 왜 인간은 일곱의 본질로 나누어지는 것입니까? 완전수(完全數)의 십(十)을, 두 개로 나누어지는 이유를 고개는 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것이다 십(十)이 완전수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초영적과 물질적 양편에 힘은 십(十)인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즉 상상할 수 없는 주관적인 계(界)에서는 세(三)개이고 객관적인 계(界)에서는 일곱(七)이다. 나는 지금 두 개의 반대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길 바란다. 말하자면,

(a) 근원적(根源的) 삼각형. 이것은 저급 7계에서의 최고의 것들[천상의 인간]에 스스로를 반영(反映)시키기가 무섭게 바로 사라져 버리며, [침묵과 암흑]으로 되돌아간다.

(b) 원형으로 되어지는 '아스트랄' 인간. 그의 '모나드'는 '대봐찬'이라 말하는 의식적인 사이에 끼어진 세 개조로, 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삼각형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전적(완전히)으로 지상계에 속하는 인간은, 말하자면 거꾸로 물질우주로 그려져 나온다. 즉, 창조적 개념 구성과 형성능력의 주관적 가능성이 있는 위쪽편의 삼각형은, 육체인간의 경우에는 일곱(七) 조의 아래로 옮겨진다. 이와 같은 원형(原形)의 세계에서의 개념적, 원형적인 가능성만을 포함해 있는 열(十)중에서의 세(三)개는,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잠재력으로서만, 존재해 있는 것이며, 실제로는 하나(一)인 것이다. 형성(形成)적 창조의 힘은 '로고스' 즉 일곱 개의 힘 혹은 광선(光線)의 총합체의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똑바로 신성한 사중체(四重體), '테트락티스'가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인간의 안에서 반복 되풀이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는, 저급인 육체 삼각형은 여성적 한 사람(一者)과 합친(함께) 남, 여로 되어 창조자 또는 생식자가 되는 것이다. 더 낮은 계, 동물계에서도 같은 것이다. 진정으로, 위의 신비(神秘)는 아래도 신비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쪽(上)의 최고의 것들과, 저급의 가장 동물적인 것들과는, 서로간의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7. 요약(要約)
​앞에서 서술한 것들을 요약해 보자.

(1) 각 인간은 자신의 신(神)의 화신(化身)인 것이다. '이니시에이트'였던 '예수'의 말을 빌려서, 인간은 [하늘(天)에 계시는 아버지(父)]와 일체인 것이다. 지상인간과 똑같이 천상의 신들은 엄청난 수(數)에 이르지만, 실제, 이 같은 신들은 하나(一)인 것이다. 왜냐하면, 활동기가 끝나고, 저물어 가는 태양의 빛처럼, 어버이가 되는 태양 즉, 무현현(無顯現)의 '로고스'에게로 끌려 되돌아가 마지막에는, 무현현의 '로고스'까지도 다함께 유일한 절대자한테 유합해 버린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부(父)들]을, 개인이나, 집단이거나 [인격신(人格神)]을 가지고 부를 수가 있는 것이 온당하겠는가? 오컬티즘은 이것에 답하노라...... 결코, 불러서는 안 된다. 평균적(平均的)인 인간이 자신의 [아버지(父)]에 대해서 알아낼 수가 있는 것은, 자기를 통해서 자신의 안에의 자기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천상의 부(父)]의 혼(魂)이 인간으로(유합전의 상태) 화신하고 있다. 동물적인 육체로 해서 화신(化身)해 있는 동안에 신성(神聖)한 개성으로 동화(同化)하는데 성공한다면, 이 혼을 자기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천상의 부(父)의 영(靈)에게 기원을 들어 (소원을 들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절대자에게 말을 걸어서 답을 얻어낸다고 하는 기대를 하는 것은 무리한 짓이다. 가능성에 찬 말에는, 힘이 채워진 실제의 행위가 따라있지 않는다면, 우리들 기원이나 소원은 헛수고인 것이다. 다시 말해, 내면의 신이, 바깥 세계에서 일을 해서, 소위 외부의 세력으로 하려면, 우리들 자신을 둘러 쌓고있는 '오라'를 아주 깨끗해진 신성한 것들로 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이니시에이트'나, 성자나 신에게 몸을 바치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신의 도움으로, 대단히 어려울 때, 우둔한 짓인 [기적]이란 말로서 쓰여져 있는 것을 행해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가 있지만, 내면의 신을 외계에서 일을 하게 만든 것은 그 사람 자기의 짓에 불과한 것인 것이다.

(2) '아-움' 또는 '옴'이라고 하는 말은, 위편(上)의 삼각형에 상응하는 것이나, 마음이 깨끗한 성자(聖者)가 그 말을 써먹을 경우, 혹성상의 공간(planetory spaces)이나 '엘리멘탈'(세계)에 있는 고급아 아닌 세력들을 끌어내거나, 불러일으키도록 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안에 있는 [부(父)] 즉 고급아를 불러일으킬 수도 잇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 정도로, 선량한 사람이 그 말을 써먹어 쓸 경우는, 그 사람이 안에 있는 '아-움'에게 일심(一心)으로 명상을 해서, 말로서 절(絶)하는, 그런 영광에게로 완전하게 집중을 할 수가 있게 낸다면 그러하다고 말하겠다. 그렇지만, 무엇인가 넓게 영향을 주게되는 죄(罪)를 범하고서 '아-움'을 부르는 자는 재앙이 온다. 왜냐하면, 그때에 그 사람이 그 말을 불러주지 않았으면, 그 사람 둘레를 쌓고 있던 신성한 포대 속으로 심어 들어 갈 수가 없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악령)이나, 에너지가 그들 자신의 때묻은 [빛의 구체]로 끌어 들어오게 하는 것으로 된다. 열심히 배우겠다고 하는 '에소테릭 스쿨'의 회원들은 모두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또 아침에 눈을 뜨면, 똑바로 이 신성한 부름을 행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그의 바른 '부름'을 하는 방법에 관해서, 지도를 EST(신지학 협회의 비교 부문)의 역원으로부터 배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움'은 [아멘]의 원형인 것이다. '아멘'은 원래에서 '히브리어'가 아니고, [할렐루야]와 똑같이, '유태인'과 '그리스인'이 이에 '가르티아'인으로부터 전해 받아 빌어 써먹은 것이다.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에서 발굴(發掘)해낸, 호(壺)이나 배(杯)에는, 추문의 말이 조각되어 있는데, '할렐루야'라고 말하는 어(語)가 반복되 나오는 것이 많이 있다. '아멘'은 그러하다는 [으레이]이나 [진정으로]라는 뜻이 아니고, 먼 옛날에는 '아-움'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태교의 '단나'들(이니시에이트들)은, '아리아'인의 '아데프트'들이 '아-움'을 쓰고 잇는 것처럼 똑같은 이유로 '아-멘'을 썼으며 같은 좋은 결과를 얻고 썼다. '히브리어'의 '아멘'(Amen), 의 수의 값은 91이고 ''예호바'(YHVH)의 수의 값은 26과58 '아도나이'(Adonai)의 수의 값은 65로 합계 91인 것이다. '예호바'와 '아도나이'의 양쪽 모두가, 우리들의 내면에 있는 무성(無性)의 [주]의 존재를 단언(斷言)하고 있는 말들이다.

(3) 비교 과학에 의하면, 눈에 보이는 물질계의 하나 하나의 음(音)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그것에 상응하는 음을 깨어나게 해서, 자연계의 '오컬트'의 면에서는, 어느 '에너지'를 불러내 자극해 활동시키는 것이다. 거기에다, 각각의 음은, 색과 수{수(數)는 영적, 시이킥적, 물질적 힘인 것이다}에 또 다른 계층(界層)의 감각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모두가, 이미 전개하고 있는 원소에 영향을 끼쳐서, 지상계까지 울려 퍼져, 이승의 대기(大氣)안에 무리를 이룬 생명들을 활동시킨다.

여사함으로 고독하나 조용한 [사방(私房)에서 마음속 깊숙이「부(父)」로 향해 있는 침묵의 것들 외는, 기원을 하는 짓은 덕을 얻는 것보다 해를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 내고 있는 강한 힘의 결과를 전혀 알지 못하면서 기원을 하기 때문이다. 기원이란 [침묵하는 동안에 자기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가 부르지 않으면, 좋은 결과가 생겨나도록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런 경우, 이미 기원이 아니며, 명령인 것이다. '예수'는, 왜 공개(公開)의 예배당(교회)에 가는 것을 금지 시켰다고 말해오는 것인가? 거기에서 기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가 위선자(僞善者)이거나, 거짓말쟁이들이고, 기원을 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라는 것을 즐기는 거짓 신자(信者)들만 모인 곳이다고 하는 뜻에서는 아니었다. '예수'가 그러한 말씀을 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똑같은 이유로 숙련된 오컬티스트는, 거기에 있는 사람들과 공감(共感)하지 않는 한,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에 가거나, 교회에 가거나, 강령술의 모임에 출석하는 짓들을 제자들에게 금지시킨다.

잡담(雜談)을 피할 수가 없는 초심자(初心者)에게, 한가지 '어드바이스'를 줄 수 있다. 미신적이라고 생각될런지 모르지만, 오컬트적인 지식이 없는 경우는, 충분히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일주일간의 칠일은 칠요(七曜)일이라고 말하는 천체에, 친근한 이름으로 불러지고 있지만, 유능한 천문(별)학자가 알고있듯이, 칠일의 순서와 칠요의 순서는 일치해 있지 않다. 실제는, 인도인과 이집트인은 일일(一日)을 사등분(四等分)으로 나누어 각 부문이 하나의 혹성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실천적인 마술에 의해 확증(確證)했었다. 그리고 '티온 갓씨우스'가 주장한 바처럼, 각각의 요일은 그의 시초의 부분을 지배하고 보호하는 혹성을 닮은 이름을 붙였다. 공개의 장소에 떠돌고 있는 무리에서[대기의 정(情)] 즉, '엘리멘탈'들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학도는 그때를 다루어줄 수 있는 혹성의 색인 옥석의 반지를 끼거나, 또는 그의 혹성에 상응하는 금속제를 몸에 지니는 편이 좋다. 그러나, 속임수를 갖지 않는 양심과, 인류에 도움을 줄려고 하는 확고한 결의는 가장 좋은 보호를 얻어 낼 수가 있는 것들이다.

역주: 여기서 말하는 [혹성]이란 해(日)와 달(月)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다섯 혹성, 즉 칠요. H.P.B에 의하면 해(日)와 달(月)은 [비밀의 혹성]의 대표작인 것이다. [비교부문의 가르침]에서는 칠요와 색과 금속의 상응은 다음과 같다.


천체와 요일시간에 상응에 대해 一日을 0시부터 시작한다고 하면, 다음과 같다.


보석과 천체의 상응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8. 필요한 비밀주의에 관해서
​학도들은 질문을 많이 해 온다. [에소테릭 부디즘]이나 [씨크릿 독트린] 등에서 신지학 가르침의 중요 부분이 공개되어 있는데, 왜 작은 세세한 부분들에 관해서 그와 같은 비밀주의를 요구하는 것입니까?

오컬티즘에 의하면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a) 진리의 전체는 대단히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무차별(無差別)로 가르칠 수가 없다. (b) 현교체계에서의 [잃어버린 환(環)이나 세부적인 것에 관한 지식은, 속인(俗人)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혹성령]이란, 이 '마하-만반타라'동안에 이미 우주에서는 육체적 화신을 하지 안게 된 최고의 상태의 '쿠마라'들의 것이지만, 새로운 인종이 시작 할 때마다, 또 소주기와 대주기가 동시에 끝날 무렵에, '아반타라'로서 이승에 나타난다. 혹성영들이 주기의 처음에, 인류에게 계시한 진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은 점점 동물적으로 되어 감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계시는 사라져 간다. 이 천사어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주고 있는 영원의 진리를 어린 인류의 가삭성(可削性)의 마음에 인상(印象)을 주게 하는데 필요한 시간이상으로 인간과 함께 있지는 못 했지만, 가르침의 본질은, 잠재적으로만, 인간의 마음에 생생하게 불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최초기의 계시에 관해서 완전한 지식을, 소수의 선발된 사람들은 언제나 가지고 있었고,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데프트'들은 대대로 그들 지식을 전해 내리고 있었다. 천사 어른의 [오컬트 입문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후세에 이르러 영원의 진리가 완전히 없어지거나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이렇게 해서 전달된다.] 혹성령의 사명(使命)은 진리의 주음(主音)을 울려 퍼지도록 하는 것에 있다. 혹성령은 끊겨져버리는 일이 없이 주기의 끝날 무렵까지 계속 되도록 주음의 진동에 방향(方向)을 잡아 놓고서는 다음 혹성 '만반타라'까지 모습이 사라지게 된다. 지식의 사다리의 제일 높은 계단에 있거나, 가장 낮은 계단에 있거나, 비교의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 사명은 모두가 같은 것이다. [위에처럼, 아래도 그러하다]인 것이다. 나는 단체로서의 학도들 사이에, 여러 가지 비교 진리의 주음을 울려 퍼지도록 명을 받은 것뿐이다. 비교의 영역에서 동료의 학도보다도 [길(道)]로 나아가서 자신을 높이는 당신들 중에 어느 자들은, 앞에 말한 [선발된 사람들]이 옛날에 한 것처럼, 또 지금도 비교부문의 모체인 동포단에서 선발된 자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최후의 곳까지 상세한 설명을 얻어서, 자신이 배운 일들의 궁극적인 열쇠를 받는다. 그러나, 천사어른(볼 것 없는 내가 아니고)에 의하여 열쇠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판단을 하시게 될 때까지는, 누구이거나 그런 특권이 주어질 것이라고 기대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방침의 진정한 이유를 알고 샆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금 설명하겠다. 그러나 모두가 이미 나와 같이 알고 잇는 것을 상세히 설명해도 별 의미가 없다. 비교부문을 창립한 시초부터 조금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생긴 일들로 충분히 알리고 있다. 수 백 명의 남녀로 된 우리들 단체에서 많은 자들은, 서약이라는 것이 무서울 정도의 신성한 것이라는 것을 의식 못하고 단순한 형식적 구속에 불과 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고급아와 면을 대하였을 때에, 인격아를 완전히 무시 해 버려야 한다라는 것을 잊어버리거나, 행동으로 연결되지 못하면, 자신의 말씨나 표명에는 효과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은 인간의 성질 것에 불과하다고 해서 그대로 넘어 갈 수 있어, 이 부문에서는 천사로부터 계속하도록 새로운 허락을 얻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일과 별도로, 현재의 주기, 그것들의 성질에는, 일종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니르마-나카야'라고 말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자들은 여러 인종이나 국민을 지켜주고 계시다. 그렇지만, 그런 어른들이 인류의 문명화한 부분을 얼마나 주의 깊게 보호하고 계시더라도, 집단적 '카르마'를 위해, 인류가 먼 옛날부터 '니르마-나카야'들에 반대 해 온 [그림자의 동포단](육체로 화신해 있는 자도 있고, 하지 않고 있는 자도 있다)의 영향을 대단히 크게 받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상태는, 시초의 '칼리 유가'주기가 끝나는 1897년 후에도, 몇 년은 지속 될 것이다. 왜냐하면, 끝이 다가오고 있는 작은 어두운 주기가 간혹 커다란 새 주기에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사 어른은 그것을 방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동포단은 그것을 주어져서는 안 되는,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의 두뇌에 일을 해서, 무서운 비밀이 발혀내고 마는 일이 때때로 있었다. 왜냐하면, 혹성영이 발동한 원시적 진리의 진동은, 어느 특별한 유기체를 지닌 사람의 마음 안에서, 서양철학이 [본유관념(本有觀念)]이라 말하며 오컬티즘을 [천재의 번개]라고 말하고 있는 것들로 해서 나타내기 때문이다. 영원의 진리에 기초를 둔, 그와 같은 개념을 불러일으킨다고 하면 조심성이 깊은 세력자들은, 그것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도록 수단을 강구하는 길 밖에 없다. 미국에서 '필라델피아' 시(市)의 '죤.W.가리'와 '파피트'박사와 [피티니아 애야아가]라는 가명을 쓴 '파람 파트러'의 동료라고 말하는 세 사람이 그의 예(例)이다. 세 사람 모두, 멀지않아 흑마술로 향하는 경향이 있고, 완전히 추악한 목적을 가지고, 고의로 마법에 빠져드는 자도 있다.

분화한 질료로서 이루어진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라고 하는 두 국면이 있다. 이 두 가지 성질이 실용으로 연결된다면, 밝은 면을 활용, 어두운 면은 남용으로 이른다. 어떤 사람이 식물학자가 되어서도, 보기에는, 이런 것이 다른 인간들에게는 위험한 일은 없다. 그러나 물건의 '에센스'에 정통해 있는 많은 약제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이 그와 같은 '에센스'는 고쳐 낼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무해의 람에서 청산과 같은 맹독에 이르기까지, 어린아이의 타액(唾液)부터 '인도고포'의 독액까지 약제의 어떤 성분이나 어떤 독이나 양편의 역할을 다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의학을 전공하고 다루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러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컬티즘'의 칠계(七界)는 말 할 것이 없고, 과학의 삼계(三界)에 속하는 모든 물질의 특성의 [그림자의 면]을 발견하는 것을 허가 받은 박학한 약제사는 현재 있을까? 자연계의 비약(秘藥)의 영역에 들어가서 물건의 오지에 있는 '에센스'와 그의 기초적인 상응관계를 깊숙이 이해 한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최종적으로 빛(光)의 동포가 되거나, 혹은 암(闇)의 동포가 되거나 '오컬티스트'의 실천상의 진정한 '이니시에이트'가 되는 것은 이 지식뿐이다. 다시 말해 '메데이치'가(家)의 독이나, '보르자'가(家)의 독의 한 성분이었다는 것이다. 알지 못한 사이에 일을 해 흔적을 남기지 않는 독의 '에센스'는, 자연계에서는 가장 강력한 독약이다. 만약 인간에게 접근 할 수 있는 여러 세계에 있어서의 그의 독의 칠(七)단계의 효과를 잘 알고 있는 자가 그것을 주의 깊게 사용한다면, 세계의 모든 인간을 고칠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그의 결과는 물론, 사용자가 빛(光)의 동포인가 그림자의 동포인가에 있다. 빛의 동포의 선행을 더 많이 하고 싶어 하나, 이종적, 국민적, 개인적인 '카르마'로 방해 당하고있다. 한편의 그림자의 동포의 악마적인 일은 [보호의 방벽]을 만드는 인간이라 말하는 [돌(石)]의 협력에 의하여 방해받게 된다. * [침묵의 소리(제3부 96과 주 참조]

특별한 [분말]이나 [철인(哲人)의 돌(石)]이나 [불로 불사의 선약]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인 것이다. 불노불사의 선약(仙藥)은 세계 안에 모든 꽃에, 모든 돌이나 광물에 잠재하고 있다. 그것은 항상 보다 더 높은 진화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에센스'인 것이다. 선(善) 그것이나 악(惡) 그것이 없다는 것처럼 [불사의 선약(仙藥)]이나 [사(死)의 선약]이나 독(毒) 그것들도 없고, 모든 것이 똑같이 보편적인 '에센스'에 포함되어 있다. 여러 가지 결과나 작용은 그의 '에센스'에 포함되어 있다. 여러 가지 결과나 작용은 그의 '에센스'의 분화의 정도아 단계라고 말할 여러 가지 상호 관계가 있다. '에센스'의 밝은 면은 명(命), 건강, 행복, 성스러운 평화를 생겨나게 해, 그의 어두운 면에서는 죽음, 병, 고(苦), 불화를 가져온다. 가장 지독한 독약에 관해 알게 되면, 이런 일을 이해한다. 어느 독을 많이 마셨어도 아무런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데, 그 약은 똑같은 적은 양을 마셔도 그 자리에서 죽고 마는 경우도 있다. 또 거의 같은 정도의 작은 양이라도, 어떤 것과 혼합되어 변화를 일으켜서, 치료효과를 가지는 것이 된다. 그 분화의 정도는 일곱(7)개 있고 작용의 단계도 일곱(7)개 있다. 각자의 분화의 효과가 유익한 것인가, 유해한 것인가를 어느 체계(시스템)에서 취하느냐 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단계를 '마스터'한 사람은, 실천적: '아데프트'가 되는 길을 상당히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멘탈 사이언티스트]이거나 [크리스찬 사이언티스트]이거나 [심령치료사]의 거의가 제 멋대로 환자(患者)에게 일을 걸어보는 실정임으로, 아마,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그의 결과를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신흥종교는, '인도의 요가'들의 예(例)에서 '힌트'를 얻었지만, '요가'의 실천을 공부하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여러 가지의 대단한 것을 알고 잇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거기에다 불 정확한 것을 설명하는 책들을 읽어 본 경험만으로, 지도를 받는 것도 없고 앞을 보지도 않고 부정과 긍정이라 말하고 있는 치료법으로 쫓아간다. 그래서 득보다는 해를 주는 쪽이 많다. 어느 사람들이 그와 같은 방법으로 좋은 효과를 얻는 것은, 그 사람의 태어나면서 가진 선천적 자기(磁氣)와 치료력 덕분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와 같은 생득(生得)의 힘은 그것이 없을 경우에 많은 해를 가져주는 것을 사라 없어지게 한다. 나는 말한다 ㅡ 주의하라. '사단'과 '대천사'는 쌍둥이 뿐 아니라, 하나의 체,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신은 역으로 바꿔말해 마(魔)인 것이다]

9. 일심집중(一心集中)의 행법(行法)에 관해서

비교부문의 회원의 몇 사람은 일심집중의 행법은 유익한 것인가 물어온다. 나는 답한다. 내면의 인간과 '파라미터'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저급아에 대하여 진정한 일심집중과 명상을 의식적이고, 거기에 주의 깊게 행한다면 멋진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진정한 명상에 관해서 표면적으로 굽어져 있는 지식밖에 갖지 못하면서 [요가를 위해 좌선(坐禪)을 한다]은 거의 예외 없이 비참한 결과를 생겨나게 한다. 십중팔구, 학도는 영매(靈媒)적인 능력을 개발하거나, 긴 시간을 소득 없는 헛 명상이나, 그런 이론을 싫어하게 되던가 어느 쪽일 것이다. 우리들은 [첼라(견습중인 자)의 일상 생활의 계정의 기록장에 가입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실천, 즉 자신의 저급아와 그 분야를 면밀히 조사한다고 말하는 실천을 행해야 한다. 그것을 넘어서 [명상]이라 말하는 위험한 실험에 들어 가기 전에, 적어도 다음의 것들을 해둘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마술]의 두 가지의 면(면), 백(백)=신성한 것과 흑(흑)=악마적인 것들과의 차이점을 잘 이해하고, 경험은 없고, 또, 위험을 지적해 주시는 스승도 없이는 [요가를 위해 좌선을 한다] 것에서 언제나, 자신은 종종 끊어져서 신성한 영역을 빠져 나와 악마적인 흑마술에 빠져 들어가 있지 않나, 하는 것을 자신이 확인하는 것을 해야 한다. 이 차이점을 배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베일없이 덮어져 있지 않는 비교적 진리는, 결코 책에서나 잡지(雜誌) 같은 것에 공개된 출판물에는 요령 같은 것이 나오는 경우가 없다는 사실을 잘 기억해 두면 좋다.
'탄트라'의 경전(경전)을 비교의 관점에서 읽어보면, 최고의 '오컬트' 서(書)와 같은 지혜가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스승이 없이 공부해 실천에 응용해 본다면, 정신적 및 생리적인 분야(分野)에서 여러 가지 현상이 생겨날지 모른다. 그러나 '탄트라'의 문자 그대로 '율'과 습관을 받아 들여서, 이기적인 동기를 품고, 그것에 쓰여져 있는 전례(典禮)대로 행하면, 지독한 경우를 만나게 된다. 전례가 깨끗한 마음에서, 그리고 또한 헌신(獻身)을 위해서 만이 무사(無私)헌신을 가지고 행하였어도, 결과는 아무 것도 없거나, 혹은, 행한 사람의 진보를 늦추는 결과만 생기는 것뿐이다. 그럼으로, 세속적인 이익이나 복수(復讐)를 하기 위해, 또는 야심을 실현하려고 초능력 개발을 구(求)하는 자는 재앙인 것이다. 고급 본질이 저급 본질에서 분리해, '붓디, 마나스'는 '탄트라' 행자(行者)​의 인격아에서 바로 끊어져 버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마술을 오락삼아 해오고 있는 사람에게 무서운 '카르마'적 결과인 것이다.
악덕은 구미의 쪽에 훨씬 많이 심어 들어가 있는데, 서구의 나라들과 똑같이 인도나 중국 등의 동양의 나라에서도, 혼이 없는 남녀를 종종 만난다. 선조들의 훌륭했던 지혜를 잊어버​리고, 흑마술에 빠지는 동양 사람들은 이와 같은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때에 가서 이야기하자. 지금 당신들에게는 이 경고(警告)를 받아들여서, 그런 위험을 알아두어야 하는 것만을 덧붙여두자.
 
제3부
오컬티즘의 대화편
​블라바츠키 여사는 공개 강연을 하지 않았지만, 대화(對話)는 참으로 잘 하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녀가 지도해 온 블라바츠키 롯지에서 질의문답식으로 행해진 결과, 후일에 "신지학협회 블라바츠키 롯지 강의록"으로 발간되었다. "씨크릿 독트린"에 관한 강의록은 지금 출판을 서두르고 있는 한국 롯지의 씨크릿 독트린 1권(우주발생론)의 후미에 전부 번역되어 있지만, "꿈"에 관한 나머지 부분은 '오컬티즘'의 실천에 직접 관계가 있음으로 여기에 포함시켰다. 또 '블라바츠키'여사와 '마벨 콜린즈' 두 분 사이에 나누어진 "아스트랄체에 관한 대화"도 '오컬트'연구의 입장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아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1. 아스트랄체에 관한 대화
​M.C: 여러 가지 종류의 유령, 생령(生靈), 망령 등, 영에 관해서 사람들은 대단히 혼동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을 확실하게 설명해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여러 가지 종류의 복체(複體)가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H.P.B: 우리들의 '오컬트' 철학에서는 넓은 뜻으로 3종(三種)의 복체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에게 적절한 "그림자"라고 말하고 있는 복체가 있습니다. 그의 둘레에 태아 즉, 미래 인간의 육체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임산부의 상상이나, 아이들의 육체에 영향을 주는 사고(事故)는 '아스트랄체'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아스트랄체'와 육체는 양쪽 모두, '마인드'의 활동을 하게 되며, '아트마' [쉽게 말해서 혼 안에 있음]가 깨어나기 전에 있는 사실입니다. '마인드'의 활동과 '아트마'가 깨어나는 것은 아이들이 7세 때이며, 그와 동시에 의식적인 유정(有情)의 것들에 속(屬)하는 책임도 지게되는 것입니다. 이 복체는 인간과 같이 태어나고, 인간과 같이 죽으며,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육체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지내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비록 육체보다 좀더 오래 살아 있지만, 사체(死體)와 보조를 맞추어서 붕괴합니다. 어떤 특별한 대기(大氣)상태일 동안에, 무덤가에서 죽은 사람이 빛을 내는 모습이 살아있는 사람이 목격되는 것은 그것이 바로 복체인 것입니다. 복체의 물질적인 면에서 말한다면, 살아 있는 동안은 인간의 생명적 복체를 취하고, 죽은 후에 부패해 가는 체에서 나오는 기체(氣體)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체의 기원(起源)과 본질에 관해 말한다면, 그 이상의 것들이 있습니다. 이 복체는 일반적으로 '링가 샤리라'라고 말하는 것이지만, 나는 좀 편리하게 이해하게끔, "프로틴(Protean)"ㅡ변환자재체(變幻自在體)라든가ㅡ혹은 "플라스틱체(Plastic Body)" 가삭체(可削體)라고 부르기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M.C: 왜 변환자재체 혹은 플라스틱체인 것입니까?
H.P.B: 모든 형체를 취할 수가 있는 것은 '변환자재'인 것이다. 가령, 민간 전승(傳承)에 의하면, 양사마법(羊飼魔法)을 써서 낭(늑대) 즉, 늑대의 모습으로 바뀌는 늑대 인간이 되지만, 이 이야기는 아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한가지 예로, "작은 캐비넷 안에 있는 영매" 자신의 플라스틱체(可削體)가 심령현상에서는 죽은 할머니나, 영계의 "존킹(John King)" 어른 등의 역할을 연출합니다. 그렇지 않는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죽은 자의 천사(天使)들"이 나타날 때, 영매(靈媒)가 황홀 상태에 빠져 있거나, 아니거나, 언제나 그 영매의 손의 길이 보다는 먼 곳까지 나오지 않는 것은 왜, 무슨 까닭일까요? 나는 이런 종(種)의 현상에는 외부에서의 영향은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실제에서는 외부의 영향은 거의 없고, 강령술(降靈術) 모임에 나타나는 죽은 사람의 모습은 언제나 영매의 아스트랄체가 즉, 변환자재체인 것이다라고 단언합니다.
M.C: 그런 '아스트랄'체는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H.P.B: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한 것처럼, 육체와 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서도 원형의 상태로 존재해 있는 것입니다.
M.C: 둘째 종류의 복체는 어떤 것입니까?
H.P.B: 둘째는 사고체(Thought Body), 또는 오히려 몽상체(Dream Body)입니다. 이것은 '오컬티스트'들 사이에서는 '마야비 루파(Mayavi Tupa)' 또는 환영체(幻影体)(Illusion body)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 상(像)은 생각과 동물적 감정이나 욕망의 매체이며, 이승에서 관계하는 최저의 마인드와 카마의 욕망만의 본질을 양쪽부터 동시에 그의 요소를 끌어오는 생각과 동물적 욕정의 도구입니다. 이것은 잠재적으로는 이원(二元)이고, 죽은 후 동양에서 '부트(Bhut)' 즉 '카마 루파(Kama rupa)'라고 말하고 있는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신지학도들에는 '유령(Spook)'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M.C: 그러면 세번째 것은 무엇입니까?

H.P.B: 세 번째 것은 동양에서는 "코절체(Causal body)"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는 것으로 '진짜 자아'입니다. '트랜스 히말라야' 학파에서는 "카르마체(Karmic body)"라고 부르지만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카르마' 즉 행위는 끊임없는 재생이나, 윤회를 만들어 내는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나드'도 아니며, 순수한 '마나스'도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데바챤'의 '모나드'와 '마나스'에 영속적으로 맺어져 있는 것으로, 그의 복합체인 것이다.
 
​M.C: 그러면 복체도 세 개가 있는 것이지요?

H.P.B: 만약, 기독교나 다른 종교의 삼위일체를 "삼신(三神)"이라고 따로 따로 말을 한다고 하면, 세 개의 복체가 있는 것이 되지만, 사실은 세 개의 양상(樣相) 혹은 국면으로서 나타나는 일체(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가장 물질적인 부분은 육체와 같이 사라 없어져가고, 중간의 것(카마루파)은 육체보다는 좀더 오래 동안 살게 되며, 그림자의 나라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지만 일시적 존재물입니다. 끝의 것은 '만반타라'가 끝나기 전에 열반으로 들어가 있지 않는한, '만반타라' 동안 줄곧 제3의 복체는 불사입니다.

​M.C: 당신은 '마야비 루파'를 몽상체 '카마 루파'를 유령체(幽靈體)로 부를 것을 제안하고 계신데, 그 두개는 어떻게 틀린지 말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말해 주시겠습니까?

H.P.B: 이미 말한 것들에 덧붙여서 다음과 같이 답하겠습니다. "생각의 힘", 즉 '마야비 루파' 또는 '환영체'의 '멘탈'적인 면은 죽음 후에, 코잘체, 즉 의식적이며 사고력을 가진 자아(自我)와 완전히 일체가 되어 버립니다. 동물적 요소, 즉 몽상체의 '욕망의 힘'은, 생전(生前), 살아야 하겠다, 살겠다고 하는 악착같은 욕망을 통하여, 모았던 것들을 죽음 후 흡수(吸收)합니다. 말하자면, 육체를 점유(占有)해서 살아 있었던 동안에, 이승에서의 행위와 생각의 모든 인상(印象)과 같이 모든 아스트랄의 생명력을 흡수해서, 유령, 카마 루파가 되는 것입니다. 신지학도는, 죽은 다음에, 고급 마나스는 모나드와 합일(合一)이 데봐챤으로 옮겨가고, 한편 저급 마나스, 즉 동물적 마인드의 찌꺼기는 유령을 형성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 유령에는 생기(生氣)는 있지만, 영매(靈媒)의 흐름에 끌려 들어가, 말하자면 영매의 대리물로 될 때를 제외하고서는 거의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M.C: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것이 전부입니까?

H.P.B: 현재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의 복체에 관해서, 무엇인가 알고 싶습니까?

​M.C: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복체'나 '도플갱어'(생령)를 믿고 있습니다. 복체의 가장 단순한 것들은 죽은 직후, 또는 죽음의 찰나에, 가장 친한 친구에게 죽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마야비 루파'입니까?

H.P.B: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어가고 있는 사람의 생각에 의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M.C: 그것은 무의식입니까?

H.P.B: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마야비 루파'를 보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며, 또 자신이 그와 같이 나타내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무의식입니다. 보통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죽음의 순간에, 정말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거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강하게 생각하면, 그 사람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각은 구체적인 형(形)으로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복체 "그림자"는 거울에 비춰지는 모습처럼 해서, 그 사람의 정확한 사본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하는 짓, 심지어 생각 속에서 하는 짓조차, 그대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죽을 때 입고 있던 옷을 복체가 입고 있는 경우를 자주 볼 수가 있으며, 나타난 모습이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의 얼굴 표정조차도 재현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목욕을 하고 있는 사람의 복체를 보았다면 그것도 물에 젖어 있는 것은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사(溺死)한 사람이 친구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경우, 그의 모습을 물에 젖어 있는 모습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타나는 원인의 정 반대로 되어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 특정한 사람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특정한 사람이 너무나 민감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는 생령이 나온 사람의 동정이나 마음이, 육체적으로나 혹은 '사이킥'적으로도, 대단히 격렬한 경우, 그의 생각의 강한 정도에 따라 모습이 만들어집니다. 그 때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A라고 하고, 복체를 보게 되는 사람을 B라고 합시다. 사랑, 미움, 무서움 그런 짓 때문에, B는 A의 이미지(인상)가 사이킥 기억에 대단히 강한 인상을 받고있어서, 알지 못하고 있어도 또한 느끼지도 않고 있는데, 실제, 두 사람 사이에서 인력과 척력(斥力)이라 말하는 자기적인 관계가 확립되는 것입니다. A가 죽으면, B의 내면의 인간의 제6감 즉 '사이킥'적, 영적 지성(知性)이 A의 변화를 느껴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변화의 순간에 A의 모습을 자신(B)의 육안(肉眼) 앞에 투사(投射)시킴으로써, 똑바로 자신의 육체 인간이 감각(感覺)에 알려주는 것입니다. 다른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간절히 만나보고 샆어할 때도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친구에게는 동정이라는 전선(電線)을 따라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전송되어, 구체적인 모습이라는 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령연구회59가 대단히 우쭐해 하겠지만 역시 막연하게 "텔레파시적 충격"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M.C: 지금 말씀하신 것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복체의 출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인의 감정이나 욕구에 반대한 짓을 복체가 하는 경우는 어떤 것입니까?

H.P.B: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복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방금 죽었거나, 아직 건강하거나 혹은 건강하지 못하면서 살아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의 뇌 속에 이런 작용의 기음(基音)이 소리나지 않으면, 복체는 그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다른 '멘탈' 화상(畫像)을 만들기 전에 일초 동안은 아스트랄파에 자신의 인격아를 객관화하기에 일초동안이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 일초라는 시간은 형을 주는데 충분한 시간인 것입니다. 마치 일초 사이에 시진기의 감광판에 얼굴 '이미지'를 인상시킬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때에는 마치 바람이 나무에서 떨어진 마른 낙엽을 바람에 말아 올려 날려 버리는 것처럼, 주위의 여러 힘들을 제멋대로 투사(投射)되어 있는 형체를 잡아채거나 생각을 비추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M.C: 만약, 복체가 그 복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습성에 맞지 않는 생각을, 가령, 다른 대륙에 있는 친구에게, 확실한 말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나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던 예를 알고 있습니다.

H.P.B: 그것은 복체를 가진 자에 만들어진 상(像)이 "혼의 껍질(Shell)"에 의해 잡혀서, 써먹어지는 경우에 일어납니다. 마치 강령술의 모임에서, 참석자들의 기억이나 '오라'속에서 조차 무의식으로 남아 있을지 모르는 사자(死者)의 상이, '엘리멘탈'이나 그의 혼의 껍질에 잡혀서, 모여있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끔 당하거나, 그 모임의 여러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의 말에 따라 행동하게 되어 버리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더구나, 당신이 말한 예에서는 하나의 연결 고리, 말하자면, 전선이 두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이 전선은 사이킥적 공오(共嗚)라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으로서 생각은 즉각 전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경우에서도 그의 특정한 생각이,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주요한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점에서 상대와 관계가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와 같은 모습의 전달하는 흔하게 많이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이 됩니다.

M.C: 이것은 대단히 쉽게 느껴지는 생각이 되지만, 왜 하필 어떤 예외적인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입니까?
H.P.B: 왜냐하면 상상력의 가삭력(可削力)이 일반의 사람들보다 어떤 사람들의 편이 훨씬 강한 것입니다. '마인드'는 잠재적으로는 이원적(二元的)입니다. 물질적이고 초물질적입니다. '마인드'의 높은 부분은 영적혼 즉, 붓디와 연결되어 있고, 저급 부분은 동물혼, 즉 '카마' 본질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인드'의 고급 능력을 가지고는 생각을 해 본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급 능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수인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류의 보통 사람들보다는 설사 높은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더 전진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일상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그의 고급 세계 수준에서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특이성은 마음의 어느 본질에서 사고를 행하고 있는 가에 따라 결정되며, 또, 과거 생에서의 능력과 때로는 육체의 유전에서도 그러한 것이 정해지는 일도 있습니다. 뇌의 형이상적 부분에서 이축(이축)해 있는 물질주의자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을 고양시키려고 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이유인 것이며, 또 자연스럽게 고상하며 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에는 평범한 속악(俗惡)한 생각의 수준까지 내려가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낙천주의와 염세주의도 대부분 마음의 어느 본질에서 생각하고 있는가 말하는 일에 의합니다.

​M.C: 그러나 고급 '마인드'에서 생각한다고 말하는 습성을 발달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자신의 생활을 바꾸어, 자기 자신을 높여 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 아닙니까? 생각의 이런 습성을 기를 수가 있는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H.P.B: 확실히 그러한 생각을 발달시킬 수가 있지만, 매우 큰 어려움을 넘어 가야하고, 확고부동한 결의를 반복하지 않는 자기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천부(天賦)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괴물'이나 새끼돼지와 함께 있는 어미돼지의 시(詩)처럼 아름다운 것들이라고 보게 되는데, 또 다른 사람은 가장 고상한 것들 안에서 가장 낮은 물질적인 면만을 감지(感知)하고, "천구(Spheres)의 음악"을 비웃고 조소하며, 가장 숭고한 개념이나 철학을 업신여기는 것은 왜 그럴까요? 이 차이는 고급계에서나 저급계에서나 아스트랄 뇌(腦)ㅡ'성(聖) 마틴'이 쓴 뜻ㅡ에서 생각할 것인가, 육체 뇌를 가지고 생각할 것인가의 고급계 혹은 저급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마인드'의 내적 힘에 달려 있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대단히 우수한 지적 힘은 영적인 개념의 증거는 되지 않고, 오히려 장해가 되는 경우가 때때로 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들을 예로 보게 되면, 그런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와 같은 지식인을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가엾게 여기는 것뿐입니다.

​M.C: 고급계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으로 더 완벽하며 가능성이 있는 상이나, 객관적인 형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H.P.B: 반드시 그와 같은 사람만 아니고, 일반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러합니다. 가장 쓸모 없는 것은, 생각을 고급계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물 덕분에, 즉 자신의 상상력으로 형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삭력(可削力)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어떤 생각이라도, 그의 생각은 보통의 사람의 생각보다는 훨씬 강할 것이라, 그의 강한 정도에 의하여, 창조력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과학은 생각이란 '에너지'인 것이라고 말하는 사실은 부동(不動)의 것들로 했습니다. 이 '에너지'가 생각의 '프로세스'로 일을 하면, 주위에 있는 '아스트랄' 영역의 원자들을 혼란시킵니다. 이미 말한 바 있듯이, 태양광선이 '렌즈'에 대해서 갖는 것과 같이, '아스트랄'영역에 형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뇌의 '에너지'로부터 생각해 나오는 어느 마음이든 싫든 좋든 형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M.C: 그 형체는 완전 무의식인 것들입니까?

H.P.B: '아데프트'의 창조물이 아닌 이상, 완전히 무의식적입니다. 아데프트는 목적을 가지고서 창조물에 의식을 주고, 혹은 오히려 의식적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의지와 지성을 생각에 불어넣어 보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생각에 대하여, 더욱 더 조심성이 깊어갈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초인과 보통 인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마음에 유념해야 합니다. 아데프트는 자재(自在)로 '마야비 루파'를 써먹을 수가 있으나, 보통 사람은 극히 드문 경우 외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마야비 루파'는 특별한 경우에 써먹기 위해서 만들어진 환영체(幻影體)임으로, 즉 '환영'이라고 말하는 이름으로 불려집니다. '마야비 루파'에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만큼만 '아데프트'의 '마인드'가 불어넣어져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단순히 마음의 상을 만드는 것뿐이며, 그 '이미지'의 특성과 힘은, 그때, 그 사람에게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M.C: 그러면 아데프트의 모습이, 그 육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나타나는 경우, 예로서「아이샷구수씨(氏)」에 등장하는 '라무라루'가 나타났던 경우 단순한 '이미지'에 불과한 것입니까?

H.P.B: 바로 그렇습니다. 그것은 걸어 다니는 생각입니다.

M.C: 그렇다면, 아데프트는 거의 동시에 여러 곳에 나타나는 것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H.P.B: 그렇습니다. 육체는 '로마'에 있으면서, 동시에 두 곳에서 볼 수 있었던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처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출현에는 고급 본질은 물론이고, 초인의 아스트랄 본질조차 모두 불어넣어져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M.C: 그렇다면 상상력과 '사이킥' 능력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자신의 마음에 주의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겠군요?
H.P.B: 그렇습니다. 생각은 각각, 자신이 생각한 활동을 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본 뜬 형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투시가는 어떻게 해서 사람의 '오라'를 보고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볼 수가 있겠습니까? 투시가가 보는 것은, 그 사람이 차례로 행동하고 있는 생각이 움직이며 깃든 그림처럼 파노라마를 보는 것입니다. '당신은 인간은 생각 때문에 벌을 받는가?" 어떤가를 물었습니다. 모든 생각 때문에 벌받는다 말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생각들은 유산으로(사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쁜 소원을 지닌 사람이 '둑파(dugpa)', 즉 흑마술의 고위 아데프트인 경우에는, '카르마'는 지연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그 생각은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뿐입니다.

​M.C: 그런 나쁜 소원을 가진 사람이 '둑파'가 아니고 대단히 강렬한 의지가 있다면, 다른 사람의 죽음을 일으키게 할 수 있습니까?

H.P.B: 그런 나쁜 사람은 "악마의 눈"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악마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알지도 못한 사이에 일을 하는 상상력의 막대한 가삭력이 지닌 것이라, 그 힘이 무의식적으로 나쁜 목적에 악용해 버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악마의 눈"의 힘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모든 종류의 불행이나 사고의 가능성을 생겨나게 하는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매우 강력한 상념의 가상력(假想力)으로, 그 흐름 속으로 들어간 사람 누구라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마의 눈을 가진 자ㅡ젯타토레(jettatore)ㅡ는 상상력이 풍부할 필요가 없으며, 나쁜 의도나 나쁜 소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살인이나 사형 집행, 재난 등과 같은 선정적(煽情的)인 장면을 목격하거나, 책으로 읽는 것을 천성적으로 좋아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눈이 미래의 희생자를 만나게 되는 순간에, 이와 같은 것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흐름은 만들어졌으며, 마치 길가에 떨어져 기회만 생기면 씨눈을 내려고 하는 씨앗처럼, 적당한 토양을 찾게되면 곧바로 활동하는 이러한 흐름은 그 사람의 눈빛에 잔재해 있는 것입니다.

​M.C: 당신이 말한 "조용한" 생각은 어떤 생각입니까? 그 같은 소원이나 생각은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입니까?

H.P.B: 되돌아옵니다. 벽을 뚫고 나가지 못하는 공이 그 공을 던진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것처럼 되돌아옵니다. 이런 일은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거나, '규칙'을 지키지 않는 둑파나 마법사들에 조차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따라야 할 규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분히 진보해서 흔들림이 적은, 완전한 "흑마술사"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게 하는 정도의 힘을 가졌기 때문에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M.C: 당신이 '규칙'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오컬티즘에 흥미를 가진 사람 모두가 알고 샆어하는 것을 물어봄으로써, 이 대화를 끝맺고 싶습니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을 올바르게 통제하기를 원하는 사람, 즉 '오컬티즘'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대하여 기본적인 중요한 제언(提言)을 하신다면 어떤 것이겠습니까?

H.P.B: 오컬티즘의 시초에 가장 중요한 첫발을 자신의 생각과 '아이디어'들을 자신의 가삭력(可削力)에 어떻게 적응시키느냐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M.C: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됩니까?

H.P.B: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쁜 '카르마'를 만들고 있을지 모르는 것들을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완전하게 자기자신의 능력을 알고 나서부터가 아니면 오컬티즘서에, 들어가서 안되고, 접촉조차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과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미루어 맞추어 가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천적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오컬티즘'의 철학을 깊이 배움으로서 앞의 것의 일이 가능하는지 하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못하면, 흑마술에 빠져드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확실한 것입니다.



2. 꿈 - 블라바츠키 롯지 강의록에서


문 :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 활동하는 "본질"이 어떤 것들입니까?

답 : 보통의 꿈은 의미가 없는 환영(幻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고, 진정한 꿈과 구별해야 합니다. 보통의 꿈을 꾸는 동안 활동하고 있는 본질은 '카마(Kama)'입니다. '카마'란 인격아의 자리이며, '마나스'의 잠자는 기억들이 깨어나서 혼란스럽게 활동하는 욕망의 자리입니다.


문 : "저급 마나스"란 무엇입니까?

: 그것은 보통 "동물 혼"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카발리스트들이 말하는 '네페쉬(Nephesh)'입니다. 저급 마나스란 고급 마나스 혹은 '영구 자아(permanent Ego)'에서 발산해 나오는 광선이며, 인간의 정신을 형성하는 "본질"입니다. 동물들도 꿈을 꾸기 때문에, 동물들의 경우 저급 마나스는 본능입니다. '카마'와 '동물 혼'의 복합적인 움직임은 순전히 기계적입니다. '카마'와 '동물혼' 속에 활동하고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본능입니다. 수면 중에 '카마'와 '저급마나스'는 여러 신경 중추로부터 기계적인 전기 쇼크를 받거나 보냅니다. 뇌는 그런 충격에 거의 인상을 받지 않고, 순서에 관계없이 그 충격들을 저장합니다. 눈을 떠서 깨어나 보면 이같은 인상들은 근저에 본질적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은 덧없는 그림자처럼 차츰 퇴색되어 갑니다. 충분하게 강한 인상를 받기만 하면, 뇌의 기억 작용은 그 인상들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들의 기억작용은 깨어나는 순간에 뇌가 받은 허술하고 뒤틀어진 인상만을 겨우 기록 할 정도입니다. 근대 생리학이나 생물학에서 '꿈'의 이러한 면에 대해서는 충분히 관찰되어졌고, 올바르게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이 꿈꾸는 것처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과학에서 아직 미개척지는 진정한 꿈과 고급 자아의 경험들입니다. 고급 자아의 경험도 꿈이라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꿈이라고 말한다면, 다른 수면중의 "비젼"을 꿈이라 말하지 않고 다른 명칭으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

 

문 : 보통의 꿈과 고급자아의 경험과는 어떻게 틀린 것입니까?

답 : 만약 육체와는 독립적이며 죽어야 할 사람 속에 있는 불멸의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꿈의 성질과 기능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수면 중에 독립적인 사고력이 없는 육체라고 말하는 생기(生氣)를 가지고 있는 형체만이 남아 있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ㅡ물론 이 말은 사실이다ㅡ주제가 더욱더 이해하기 어려워지게 됩니다. 우리들 속에 숨어있는 고급자아(Higher Ego) 혹은 영구 자아의 존재를 인정한다면ㅡ자아를 우리들이 고급아(Higher Self)라고 말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ㅡ일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공상으로 받아들여지며,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진정으로 '내면의 인간'의 삶과 경험의 책에서 찢어진 페이지이며, 깨어나는 순간에 우리들의 육체적 기억에 의해서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지만 왜곡되어져 끊어진 약간의 기억만이 남아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 기억은 내면의 인간이 완전히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그 내면의 인간이 목격한 생각이나 사실과 행했던 행위의 작은 부분의 인상들을 기계적으로 잡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자아는 물질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때마다, 즉 육체 인간이 잠을 자는 동안에 육체라고 말하는 감옥 안에 있으면서, 자아 자체의 별개의 삶를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아야말로 '행위자'이고, '진정한 인간'이며, 인간의 '진실한 자아'입니다. 그러나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 육체 인간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며, 아무 의식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인간(육체), 즉 뇌와 사고 기관(器官)을 가지고 있는 인격아는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으나 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아를 죄수로 그리고 육체적 인격아를 '죄수의 간수'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만약 간수가 잠에 빠져들면, 죄수는 도망치거나 혹은 적어도 감옥 벽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간수가 반쯤 잠이 든 상태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흘끗 흘끗 창을 통해서 창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일종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처럼, 죄수를 간간히 볼 수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간수는 자신이 관할하고 있는 죄수의 진짜의 행위, 특히 생각에 관해서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문 : 자아의 생각이 인격아에게 인상을 주지 않습니까?

답 : 수면중에는 결코 없습니다. 진정한 자아는 보잘 것 없는, 일시적인 인격아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깨어나 있을 때에는 고급 자아의 생각과 '목소리'는 간수, 즉 육체 인간에게 미치는 경우도 있고, 미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급 자아의 생각과 목소리는 양심의 소리이지만, 육체 인간이 자고 있는 동안에, 그것은 "황야에서의 외침"과 같습니다. '진정한 인간', 즉 불사의 '개성'의 생각 속에서, 과거와 미래의 화상(化像)이나 '비젼'은 현재의 화상이나 '비젼'과 똑같이 현실적입니다. 또한 진정한 인간의 생각은 우리들의 생각, 말하자면 우리들의 뇌기능에서 생기는 주관적인 화상과 같은 것이 아니고, 그것은 살아 있는 행위이며 현재의 사실입니다. 생각이 구체적인 사물이었을 때에, 또 인간이 그것들을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던 옛날에도 똑같이 진정한 인간의 마음은 현실 그것입니다. 그 당시에 왜 표현할 필요가 없었던가 하면, 마음은 '크리야-샥티(Kriya-Sakti)'의 힘에 의하여 즉시 활동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크리야-샥티'란 생각하는 것을 그 자리에서 즉시 눈에 보이는 형체로 바꾸는 신비력이며, 현재 시각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우리들에게 객관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제 3 인종의 '인간'에게 있어서 그러한 형체들은 아주 객관적이었습니다.

 

문 : 그렇다면 때때로 이와 같은 자아가 생각하는 단편들이 조금일지라도 우리의 육체적인 기억으로 전해지는 것을 비교(秘敎) 철학에서는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답 : 그와 같은 것들은 모두가 수면 중에 있는 뇌에 반영입니다. 마치 텐트 속에 있는 사람이 깨어나서 텐트 벽에 비치는 그림자들을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깨어난 사람은 자신의 꿈에서 여러 가지들을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며, 또 정말 자신이 무엇을 경험한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의 꿈은 그가 어설프게 보아온 진정한 자아의 '생각-행동'인 것입니다. 이 사람이 완전히 눈을 뜨고 깨어나게 되면, 기억은 더욱더 왜곡되어져서 수면자를 깨어나도록 한 자극의 영향을 받아 육체 뇌로부터 투사된 '이미지'와 합쳐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연상(聯想)의 힘에 의해서 이러한 회상(回想)은 연속적인 일련의 생각들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문 : 오래 전에 일어났던 것들을 밤 동안에 자아가 어떻게 행할 수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꿈은 주관적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답 : 꿈꾸는 상태 그 자체가 깨어 있는 우리들과 깨어있는 동안에 경험하는 이 세계에서 주관적일 때, 어떻게 꿈들이 자아에게 주관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행위가 객관적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꿈을 꾸는 자, 즉 자아에게 있어서 자아 자신의 세계에 있는 것들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문 : 꿈속에서 일하고 있는 감각은 무엇입니까?


답 : 수면자의 감각은 이따금 쇼크를 받아, 기계적으로 행동(生)하게 합니다. 수면자가 듣고 보고하는 것들은,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자아의 생각의 굽어져 나온 반영입니다. 자아는, 대단히 영적이며, 고급인 본질 '붓디' 및 '아트마'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고급 본질은 물질 세계에서는 전혀 활동하지 않고 있으며, 고급 자아 즉, 고급 마나스 그것들은 육체인간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적어도 휴지 상태인 것입니다. 물질주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의 경우는, 특히 더욱 그렇게 되어 버립니다. 자아가 물질에 의해 대단한 속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영적 능력이 휴지 상태로 되어 있고, 설령 그 사람이 죄를 범해도, 또, 설령 그 죄로 인하여 자아가 미래에서 저급 마나스와 재결합했을 때, 그 죄 때문에 다 함께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있게 된다고 해서, 자아는 그 사람의 행위에 모든 주의를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에 말한 것처럼, 우리들이 '양심'이라 말하고 있는 것들은, 이 자아가 육체 인간에게 투사된 인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격아, 즉 저급 혼(저급 마나스)이 고급 의식(자아)과 결합하면 할수록, 자아는 죽어야 하는 조건을 가진 육체인간의 삶에 더 강력히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 : 그러하면 이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고급 자아'를 말하는 것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그것은 붓디의 빛에 의하여 밝혀진 고급 마나스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나이다."고 말하는 자의식(自意識)의 본질(원리)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화신(化身)에서 다음 차례 화신으로 옮겨가는 "카라나 샤리라(Karana Sarira)", 즉 '불사의 인간'입니다.


​문 : 진정한 꿈의 상태의 것들이 쓰여지는 "기록표"「기억의 타블렛」은 깨어있는 생활에서 뽑아 기억하는 "기록표"와는 서로 다른 것입니까?


답 : 꿈은 실제로 육체가 수면하고 있는 동안 자아가 행한 행위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꿈은 꿈들 자체 세계에 기록되고, 그들 세계에 상응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꿈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어렴풋이 깨어있는 때 자아의 세계의 사실들을 생각해 내고 있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꿈을 꾸었다하는 기억이 전혀 없는데, 후의 낮 동안, 꿈의 기억이 불시에 떠올라 오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누구에게나 때때로 생기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느낌이나 냄새라든가, 종종 들어 온 음으로서, 긴 세월 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전에 겪었던 광경이나 경험 또는 사람들을 돌연 생각해내는 것을 말합니다. "밤의 행동자" 즉, 자아가 보았거나 했던 일이나 생각을 무엇인가를, 그 당시에 육체의 뇌에 인상을 주었던것이, 어떤 육체적 상태나 방해 때문에, 깨어있는 동안에는 기억으로 나지 않았습니다. 이 인상은 뇌 속에서 적당한 세포나 신경 중추에 기억되어 졌지만, 무엇인가 우연의 상태에 의해, 필요한 충동이 주어질 때까지 말하자면 발화(發火)하지 않는 것입니다. 충동이 주어지면, 뇌는 깨어있는 사람의 의식적 기억에 그의 인상을 즉시 전합니다. 필요한 조건이 채워지기 무섭게, 그 중추는 활동하게 되며, 이전에 방해되어 일어나지 못했던 일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문 : 이 과정이 어떻게 해서 행해지는 것입니까?


답 : 육체의 뇌와 내면의 인간과의 사이에는, 밤이나 낮이나 늘 정보를 교환하는 일종의 의식적인 전신이 있습니다. 뇌는 육체적에서도 초육체적으로 대단히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고, 한장 한장 껍질을 벗겨 낼 수 있는 나무껍질 같은 것입니다. 각 층은 다른 모든 층과 틀리며, 각각, 특별한 일과 기능 및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 : 꿈을 꾸고 있을 때의 기억이나 상상은 깨어 있는 의식의 기억이나 상상과는 어떻게 틀린 것입니까?


답 : 수면 중엔, 꿈을 꾸고 있는 자가 잠을 자고 있으므로 물론, 육체적 기억이나 상상은 수동적입니다. 그 사람의 뇌는 잠자고 기억도 잠자고 있으며, 모든 기능이 잠을 자며, 휴지(休止)하고 있습니다. 앞에 말한 대로 뇌나 기억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자극을 받았을 때뿐입니다. 이처럼 수면자의 의식은 활동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내면의 인간, 즉 진짜의 자아는, 육체의 수면 중에는 독립해서 일을 합니다. 단지, 오컬티즘의 생리학에 정통(精通)해 있지 못하면 우리들 중의 누구라도 그의 일하고 있는 성질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문 : 아스트랄 광(光)과 '아카샤'는, 기억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답 : 아스트랄 광은 동물 인간의 "기억의 타블렛(판)"이고, '아카샤'는 영적 자아의 '기억판'입니다. 육체 인간의 활동처럼, 자아의 꿈도 모두 기록됩니다. 둘 다 모두 원인에 따른 작용이고, 결과를 생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꿈"이란 단순히 진짜의 자아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일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물론 어딘가에 기록될 것입니다. "루시퍼"의 "카르마의 비젼"을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자아가 주인공(主人公)의 방관자로 되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는 묘사에 관해서 생각을 해 본다면, 아마 무엇인가 느낌이 오고, 알게 되어 갈 것입니다.


​문 : 아스트랄 광이란 실체가 무엇입니까?


답 : 비교 철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아카샤'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의 '우주 관념'의 구성이고, '아스트랄' 광은 아카샤의 찌꺼기에 불과합니다. 아스트랄 광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말한다면 '아카샤'의 인광성(燐光性)의 방사인 것이고, 또한 아카샤와 인간의 사고 능력과의 사이의 매개물입니다. 이러한 아스트랄 광을 오염시켜서, 모든 인간적, 특히 사이킥적 악덕의 창고로 만들어 버리는 것들은 바로 인간의 사고 능력입니다. 그 기원(起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방사로해서의 아스트랄 광은 아주 청정(淸淨)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스트랄 광은 이승의 영역에 가까워지려고 낮게 항하(내려온다)하면 할수록 분화해서, 그 결과, 그 구성 자체가 부정(不淨)한 깨끗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 거기에다 인간은 상당한 오염을 일으켜서, 그 자신이 받았을 때보다는 아스트랄 광의 질이 훨씬 더 나쁘게 돌려보냅니다.


​문 : '아스트랄 광'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꿈에 관한한 아스트랄 광의 작용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답 : 물질계에서의 분화(分化)는 무한입니다. 우주 관념, 구성, 또는 만약 상신이 좋아한다면 '마하트'라고 말하겠습니다만, 이것은 여러 이질적인 세계에, 그의 동질인 방사를 내보냅니다. 이 방사는 아스트랄 광을 통해서 인간 혹은 인격아의 마인드에 이르게 됩니다.


​문 :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은 저급 '마나스'를 통해, 고급 '마나스'로부터 직접 섬광(閃光)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또 고급 '마나스'는 신성한 개념, 구성의 청정(淸淨)한 방사, 즉 인간으로 화신하는 '마나사 푸트라'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개성있는 '마나사 푸트라', 즉 '쿠마라'들은 신성한 개념 구성의 직접의 방사입니다. "개성의 가짐"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수의 화신의 결과로서 생겨납니다. 분화라고 말하는 의미에서의 말하는 것이 됩니다. 말하자면, '쿠마라'들은 우주 관념 구성의 집합체이고, 우리들의 세계에서, 즉 우리들의 관념에서 말을 하면 '마하트'입니다. 마찬가지로, '디한 쵸한'들은 전체로 해서는, 이 세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말씀" 즉, "로고스"입니다. 만약에 인격아(저급 마나스)ㅡ육체에 묶여진 마인드ㅡ가 자신의 고급 자아만으로써 영감과 빛이 주어졌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거의 죄(罪)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고, 아스트랄 광의 망(網)의 눈매에 걸려서, 인격아는 태어나게 해준 어버이인 자아(Egos)로부터 점점 떨어져 가는 것입니다. '엘리파스 레비'가 설명한 아스트랄 광에 관해서 잘 읽어보고 공부하십시오. 그는 아스트랄 광을, '사탄'인 것이고 '큰 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스트랄 광은 너무나 문자 그대로 받아 들여져서 일종의 제2의 하늘을 말하는 뜻으로 청공(靑空)이란 뜻으로 이해되어져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하나, 지금까지 있어왔고, 또 현재에 있고, 그리고 미래에도 있게 될 무수한 이미지의 모두가 거기에 인상(印象)을 남기게되는 이 '상상에서의 공간'은 불행하게도 실제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령 '사이킥'적인 경향이 있는 것이라면ㅡ그러면 전혀 '사이킥'적이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ㅡ아스트랄 광은 그런 사람의 안에서, 또 사람에 있어서는 유혹하는 악마가 되어, 그것은 또 가장 악질적인 행위의 불을 붙이는 "악마의 천사(evil angel)"역을 하는 것이 됩니다. 아스트랄 광은 심지어 잠자고 있는 사람의 뇌에, '비전'ㅡ여기서의 '비전'을 꿈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ㅡ의 인상에 남겨서, 수면 중의 사람의 의지에까지도, 일을 해결하려 들게 합니다. 이와 같이 심어진, 씨눈은 그 사람이 깨어났을 때, 실현(열매)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문 : 꿈에 관해서, 의지가 연출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답 : 외면(부)의 사람의 의지, 즉, 우리들의 의지행위는 물론, 꿈을 꾸고 있는, 동안 정지(靜止)해 있고 활동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그의 활동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멈추고 있는 의지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기계적인 방법으로 두 개 이상의 "원질"의 결합을 시킴으로서, 일종의 상호작용을 만드는 사이에서 있을 어떤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후에, 여러 본질이 깨어났을 때, 조그만 마찰이나, 단 하나의 부조화가 생기지 않고 완전한 조화 속에서 일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마술의 속임수의 하나이며, 좋은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을 때는 오컬티스트의 훈련의 하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육체적으로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의식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의지, 또는 다른 사람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그 사람의 의지에 일을 할 수 있는 의지를 갖기 위해서는 "길"에서 상당한 진보를 이루어 내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령 그 사람의 꿈을 통제해서 그가 깨어났을 때 그의 행위를 통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문 : 우리들은 인간은 자신의 모든 "원질"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의미입니까?


답 : 어떤 '아데프트'ㅡ혹은 '초인'이라고 불림ㅡ가 그것에 성공했을 때, 그는 "지반묵타(Jivanmukta)"가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사실상, 이승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 자유자재로 삼매(三昧)에 들어 갈 수 있는 "해탈자(Nirvanee)"가 되는 것입니다. '아데프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원질"의 수(수)에 따라 분류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의지라고 말하고 있는 자리(자)는 있으며, 고급 자아는 죄를 짊어져 있든 인격아ㅡ육체의 저급 자아ㅡ로부터 빠져 나오면 신성하고 청정한 것입니다.


​문 : 꿈속에서 '카르마'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인도'에서는 사람은 깨어 있을 때나 꿈을 꾸고 있는 상태에서나, 자신이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한 상벌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답 : 인도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은 아주 순수한 선조들의 전통을 계속 계승해서 기억해 왔기 때문입니다. 인도인들은 "내면의 자아"가 진짜 "나"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다른 세계에 분명히 살고 행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외면적인 생활은 이 자아에게 있어서 "하나의 꿈"이고, 내면적인 생활 즉, 우리들이 꿈의 세계라고 부르는 곳의 삶이야말로, 자아에 있어서는 진실한 것들인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은ㅡ물론 세속적인 사람들은ㅡ가르치는 것이지만, 카르마는 관대하며, 물질 생활 속에 있는 허위의 인격에 대해서도 보수를 주는 것과 같이 꿈속에서는 진정한 인간에게도 보답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 : 진정한 인간과 인격아는 '카르마'적으로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 : 육체적 동물사람은 개나 쥐처럼, 책임을 질 수가 없습니다. 육체적 형체를 갖췄던 육체의 죽음으로 모두가 끝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나"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 '즉' 사고력을 가진 저급의 인격을 방사해, 인격아는, 육체를 다루고 있는 인형처럼 살아 있는 동안에, 연출하고, 음에서 조종합니다. 따라서 다음의 화신(化身)했을 때에는 잡역부인 인격아와 같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문 : 그러면 고급 및, 저급 마나스는 같은 것들이 아닙니까?


답 : 그렇습니다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대신비인 것입니다. 고급 마나스, 즉 고급 마나스는, 본질적으로 신성하며 따라서 청정합니다. 어떤 더러운 것도 날 오염시킬 수는 없습니다. 또 엄밀히 말해, 어떤 벌(罰)도 자아에게는 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급 자아는 저급 자아의 고의로의 범죄에 전혀 가담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 합니다. 그러나 '마나스'는 이중(二重)이며 살아 있는 동안은 고급 자아와 저급 자아와는 별개의 것들인 것이지만, "어버이와 자식"은 하나인 것이고, 어버이인 자아는 재결합하는 것으로, 저급 혼의 좋은 행위나 나쁜 행위나 모두, 묶어서 어버이인 고급 자아(혼)에 맺어져 인상을 주기 때문에, 쌍방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고급 자아는 무실이고 오점이 없이 깨끗하다 할지라도 저급아가 범한 악행의 벌을 미래의 후신에서 새 저급아와 다같이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속죄의 고의는 전부 오래된 비교의 가르침으로 근거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고급 자아는 이승에서 활동하는 형(型), 인격아의 원형(元型)입니다.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것은 좀더 구체적인 수준에 생기는 이야기에 나오는 "비스바카르만(Visvakarman)"의 옛날 베다 이야기와 같은 것들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해주시는 "아버지 신(Father God)"인 비스바카르만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어른으로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정령(精靈) '브후바나'의 아들로서 태어나서, 스스로를 스스로 희생으로 바치고 있습니다. 인도 철학에서 고급 자아의 신비적인 명칭은 인도 철학에서 '크쉐트라즈나', 즉 '화신한 영'이며, '크쉐트라' 즉 몸체를 알고 있는 것들로서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들입니다. 그 어원(語源)을 조사해 보십시오. 그 안에 '아자(aja)', 즉 '처음 태어난 자'이며 또 '자양(羊)'이라고 말하는 언어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시사적(時事的)인 것으로, '자양(羊)'으로 상징되어있는 "장자(長子)"는 "신인(God Man)"의 크리스트 "최초로 태어난 자" 혹은 크리스트 크쉐트라즈나"의 원형(原形) 발생 전과 발생 후의 전개에 관해서는 '마나사 푸트라', 즉 '화신하는 자아'가 자발적으로 또한 의도적인 미래의 인격아들의 모든 죄의 무거운 짐을 인수받는 것을 표시하고 잇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수난자(受難者)는, 자기 희생을 하는 자아의 일시적인 외의(外衣)인, A씨나 B씨 같은 것의 인격아는 아니고, 우리들 안에 숨은 무실(無實)의 '크리스토스' 바로 그것이다는 것을 쉽게 알 것입니다. 따라서 삼 자(者)로 해서 일자(者)이고 일자로 해서 삼자인 영구아(Eternal Self) 즉, 자아(Ego)는 마차(馬車)를 모는 "마부"라고, 신비가의 인도인은 말합니다. 인격아는 일시적인 승객이며 '말'은 인간의 동물적 욕망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것을 말한다면, 우리들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귀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안면의 '크리스토스'를 십자가에 '걸고있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꿈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문 : 모든 예언적인 꿈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강력한 투시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까?


답 : 진정 실현되는 예언적인 꿈을 꾸는 사람들의 경우, 일반의 사람들보다, 육체의 뇌와 기억이 고급 자아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서로 공명(共鳴)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자아(Ego Self)에는, 그다지 예언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 보다는 중요한 것을 육체와 그의 기억에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능력이 많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접촉하는 유일한 신은, 영, 혼, 마인드(혹은 의식)라고 말하는 자기 자신의 신인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 두십시오. 그리고 영, 혼, 마인드의 세 개는 일체(一體)입니다. 그러나 식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잡초를 말라죽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시 살기(화신) 위해서는 죽어서야만 하는 것이라고 성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들이 향상되기 위해서는, 파괴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보지(保持)하는 것, 창조하는 것, 파괴하는 것의 세 가지의 힘은, 인간 안에 있는 신성한 불꽃의 세 가지 면(面)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문 : '아데프트'들도 꿈을 꿉니까?


답 : 진보한 아데프트들은, 꿈을 꾸지 않습니다. '아데프트'란, 자신의 육체를 포함해서 네 가지의 저급 원질을 지배해낸 사람임으로, 육체를 생각대로 하게 놓아두지 않습니다. 수면 중에는 저급아를 마비시키고 있는 것으로써 충분히 자유스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꿈이란 것은 환영입니다. 초인은 다른 환영을 좇아 내버렸는데 꿈을 꿀까요? 초인은 수면 중에는, 다른 더 진실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문 : 꿈을 꾼 일이 없었던 사람도 있을까요?


답 :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런 사람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다 꿈을 꾸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깨어나면서 꿈은 급히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뇌의 신경절(神經節)의 수용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영적이지 않은 사람들과 상상적 능력의 훈련하지 않는 사람들, 또한 육체 노동에 지쳐버렸기 때문에 휴식중에 신경절이 기계적으로 작동 않는 사람들은, 꿈을 꾼다 해도 거의 일관성이 없는 꿈을 꿉니다.


​문 : 사람의 꿈과 동물의 꿈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답 : 꿈을 꾸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들도 다 똑같습니다. 최고의 포유류에서부터 가장 작은 새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곤충조차도 그러합니다. 육체의 뇌나 그것에 근사한 기관(器官)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꿈을 꾸게 마련입니다. 크건 작건 동물은 모두, 어느 정도의 육체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이 감각들이 수면 중에는 둔하게 되지만, 기억은 말하자면 아직 기계적인 작동을 하고 있어서, 과거의 기분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개나 말이나 소가 꿈을 꾼다는 것은 우리들 모두 알고 있습니다. '카나리아'도 꿈을 꿉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꿈들은 단순히 생리학적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잠 속으로 들어 가려는 뇌는, 마치 종종 한순간에 타오르는, 마지막의 불꽃의 상태와 같습니다. 꿈은 '드라이든'이 말했듯이 "공상이 만들어 내는 막간의 극"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꿈은 소화불량이나, 깨어있는 동안 활동하고 있는 뇌에 강한 인상을 준, 어떤 생각이나 생긴 일에 의해 자극을 받은 생리학적인 것들만을 말할 수 있는 것뿐입니다.


​문 : 그러면, 잠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답 :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생리학에서의 설명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오컬티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즉 수면은 신경중추, 특히 뇌의 지각 신경절의 피로인 것이고 정기적이고 규칙적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신경은 더 이상 이 물질계에서 일치하지 않게 되며, 이승에서의 일을 했던 것처럼, 다른 계 또는 다른 '우파디(Upadi)'에서 힘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초에, '스바푸나(Svapna)' 즉, ,꿈을 꾸는 상태가 옵니다. 다음에 '슈슙티(Shushupti)'라고 말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그렇게 됐으면 여기서, 우리들의 감각은 모두가 이중(二重)이고, 사고자(思考者)가 활기가 있는 의식 세계에 따라서 일을 한다고 말하는 것을 명심해 기억해 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육체의 잠을 자는 것은 사고자는 여러 가지의 다른 세계에서 일을 하기 위한 최대의 기회를 갖게 됩니다. 동시에 잠을 자는 것은 여러 감각이 '스바푸나'와 '슈슙티'의 상태에서 '자그라타(Jagrata)' 즉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회복해, 재기(再起)하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라자 요가'에 의하면, '뚜리야(Turya)'가 최고의 상태입니다. 마치 열기로 인해 지쳐버린 사람이 차가운 물로서 원기를 얻는 것처럼, 생명의 흐름의 하나인 상태에서 지쳐버린 사람은, 다른 상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면은, 생명의 해가 비추고 있는 계곡 속에 있는 그늘진 피난처 같은 것입니다. 깨어 있는 상태의 생명력이 육체에게는 감당하기 너무 강렬해서, 깨어있는 상태로부터 잠자는 상태로 바뀌게 하는 것은 생명 흐름의 힘을 단절시켜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잠기(수면)가 찾아오는 것으로 표시가 됩니다. 수면으로 원기를 막 회복한 사람의 '오라'와 지금 막 잠에 들어가려고 하는 다른 사람의 '오라'를 비교해 줄 것을, 훌륭한 투시가에게 설명해 주도록 부탁해 보십시오. 원기를 회복한 사람은 금색, 청색, 분홍색 등의 '쾨스미갈'한 생명 흐름의 파장 속에 둘러 쌓여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파장'은 생명의 전파(電波)입니다. 잠 속으로 막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진한 황금 오렌지 색의 안개 속에 있습니다. 그 안개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는, 거의 믿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고 불규칙하게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즉 이 사람에는 생명 에너지가 너무 염색이 많아져가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이 사람의 육체 기관이 감당하기에는 강해서 그 본질의 그림자처럼 부분에다 휴식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부분이란 것이 꿈, 즉 육체적 수면인 것이고 의식의 여러 상태의 하나(一)입니다.


​문 : 꿈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 : 그것은 그 용어에 따른 의미에 의한 것입니다. 당신은 깨어 있거나 잠을 자거나 "비젼을 꿈꾸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아스트랄 광을 의지의 힘으로 컵이나 금속 용기 그릇에 모아서, 보려고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그 용기 속의 어느 점을 고정해서 집중하여 보고 있노라면, 그 사람이 어느 정도 민감하면, 깨어 있을 때의 '비젼' 즉, 꿈이 생겨납니다. 아스트랄 광 속의 반영(反映)은, 눈을 감으면 잘 보입니다. 수면 중에는 훨씬 더 확실해집니다. 시력은 명랑한 상태부터 반투명으로 되고, 보통의 유기적 의식 상태에서 한층 확실해진 초월적인 의식 상태로 올라가게 됩니다.


​문 : 꿈은 주로 어떤 원인에 의해서 입니까?


답 : 우리들이 알고 있듯이, 꿈의 종류는 많이 있습니다. "소화 불량에 의한 꿈"은 별개로 하고, 뇌의 꿈, 기억의 꿈, 기계적 '비젼'이나 의식적 '비젼'이 있습니다. 경고나 예언의 꿈에는 내면의 자아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와 같은 꿈은 두 명의 살아 있는 사람들의 뇌 또한 그 사람들의 자아에 의한 협력에 의한 일이 때때로 있으며, 이 협력은 의식적인 경우, 무의식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문 : 그러면 꿈을 꾸는 자는 무엇입니까?


답 : 일반적으로 말해서, 기억의 자리가 되는 인격아의 육체 뇌수(腦髓)입니다. 육체뇌의 꺼져 가고 있는 불씨에서 갑자기 타오르는 것처럼 반짝이며, 꿈이라 말하는 불꽃을 내보냅니다. 수면자의 기억은 칠현(七弦)의 에올리안 하프ㅡ그냥 두면 저절로 울리는 하프ㅡ와 같습니다. 또 그 사람의 정신 상태는 그 현(弦) 위를 부는 바람이라고 표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곱 종류의 정신 기능의 하나를 수면자가 잠들기 전에 경험했지만, 그의 활동에 상응하는 금(琴)의 현(弦)이 금은 거의 계의 정도의 울려 퍼지게 됩니다. 바람은 부드러운 것이라면 영향밖에 받지 않을 것이다. 만약 태풍의 '허리케인'이었다면, 진동은 그 만큼 강하게 될 것입니다. 인격아(人格我)가 고급 본질에 속해서 고급계의 '베일'을 옆구리에 끌어당기기만 했다면, 만사는 잘되어 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격아가 물질적인 동물과 같은 성질이 되었다면, 아마도 꿈은 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는, 설사 고급계로부터 "바람"의 숨을 때때로 기억해 냈다고 하더라도, 영적 자아의 직접적인 작용에 의하여 인상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소뇌의 감각 신경절을 통해서 인상을 받기 때문에, 많이 굽어져 뒤틀린 부조화(不調和)의 화상이나 음을 받게 되고, '데봐챤'의 '비전'조차도, 악몽이나 기괴한 만화처럼 보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꿈을 꾸는 자는 무엇입니까?"라고 하는 질문에의 간단한 답은 없습니다. 잊어버리고, 어떠한 원질이 꿈속에서 주로 된 원동력인 것인가, 그리고 꿈을 생각해 낼 수 있는가, 마는가는 아주 개개인의 나름인 것입니다.


​문 : 꿈속에서 보기에는 객관성이 진짜로 객관적인 것들입니까? 아니면 주관적인 것들입니까?


답 : 만약 그 객관성이 '보이어'의 것들이라 인정한다면, 물론 주관적입니다. 이 질문은 오히려 '누구에 있어서, 또 무엇에 있어서, 꿈속의 화상이나 표현이 객관적인 것인가, 주관적인 것이었는거를 해야 될 것입니다. 육체적 인간, 즉 꿈을 꾸고 있는 자에 있어, 눈을 감고 마음속에서, 혹은 마음을 통해서 보는 것들은 모두가, 틀림없이 주관적입니다. 그러나 수면자의 내부에 "보고 있는 손"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물질적 감각에서 보면 그의 보고 있는 손 자체는 주관적이지만, 보고 있는 손의, 자기 자신에 있어서의 또, 자신이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있어서도 모두가 객관적이듯이, 보고 있는 손이 보는 모든 것들은 객관적입니다. 아마도 유물론자는 웃으며, 우리들 한 사람의 인간을 여러 가지 것들을 포함한 나라의 무리를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것이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컬티즘에서는 육체인간은 한사람이지만, 사고자(思考者) 인간은 존재의 일곱 개의 서로 다른 상태 또는 의식의 일곱 계(界)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 있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또 이와 같은 상태나 계(界)를 위해서, 항구(恒久) 자아ㅡ허위의 인격아가 아니고ㅡ에는 다른 별도의 감각 능력의 별도의 '셋트'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 : 그와 같이 서로 다른 별개의 감각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답 : 그와 같은 상태를 잘 알고 있는 아데프트나 높은 훈련을 마친 '첼라'가 아니면 구별하지 못합니다. 생물학이나 생리학 같은 과학이나 모슬리, 베인 및 스펜서 학파 등의 심리학에서 조차도 이 문제를 손대지 않고 있습니다. 과학은 의지, 감각, 지성, 본능에 관해서 가르치며,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신경중추를 통해서 나타나며, 그 중추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뇌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행해지는 특별한 동인(動因), 즉, 물질을 혈관이나 섬유 조직 등이라고 과학은 말하며, 신경절 중추의 운동중추, 감각중추 교감신경으로 나누어서, 서로의 관계를 설명하지만, 지성 그 자체 또는 정신과 그 기능의 신비적 작용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의식적으로 알게 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상념의 세계에서 몇 개 부분으로 되어 있는 복합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고하는 인간 자아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테우스'처럼 여러 가지의 형을 취하여 항상 변화하고 있는 실재일 뿐만 아니고, 말하자면, 마인드 세계 혹은 꿈의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두 개 이상의 신체로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반의 입구까지 우리들을 따라 붙어 괴롭히는 환영의 세계에서의 자아는, '아인 소프'가 '아인 소프'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의 대화를 계속해 자기 자신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관하여,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인도 철학에서 말하지만, "조하르"에 나와있는 "불가해(不可解)한 신"의 신비입니다. 이것은 카발라나, '푸라나', 베단타파의 형이상학이나 기독교의 신격(Godhead)과 삼위일체에서도 같습니다. 인간은 대우주를 반영하느느 소우주입니다. 지구상의 신은 자연계의 신의 상(상)으로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아의 보편 의식은, 말하자면 '허위의 자아'인 인격아의 자기 의식보다 백만 배 이상 초월해 있습니다.


​문 : 수면 중, '무의식적 뇌작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육체 뇌의 기계적인 '프로세스'입니까? 아니면 진짜 자아의 의식적인 작용인것으로 보통 의식에 인상을 주게 하는 것으로써 단순히 그 결과밖에 않는다고 하는 말입니까?


답 : 뒤편 말이 맞는 것입니다. 뇌가 무의식적으로 일하고 있는 동안에 생긴 것들을 우리들이 깨어나 있는 소위 의식적인 상태에서 기억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명백히 말로서도 모순입니다.


​문 : 자연계의 산들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수면중 뚜렷하게 산을 보거나, 산의 특징들을 표시할 수가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 있는 것입니까?


답 : 아마도 그 사람들은 산의 그림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 중에 누구인가 또는 어떤 것 이전에 산을 본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 : 꿈꾸고 있는 사람이 어떤 것을 얻어내려고 언제까지 쫓아 보았지만 결코 얻어내지 못하는 꿈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의 꿈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답 : 육체아와 그의 기억이 아무리 노력해서도 진정한 자아가 하는 짓을 알 수가 없게 잡혀 매여져 있음으로 그와 같은 꿈을 꾸는 것입니다. 꿈을 꾸는 자는 자아의 하는 일을 흐릿하게 엿보는 것뿐입니다. 자아가 하는 일은 육체인간한테는 꿈을 꾸게 해주는 것이지만, 육체인간은 그런 꿈을 계속해서 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체인간과 진정한 자아와의 관계는, 중얼거리는 마음병의 섬망(譫妄)상태에서 회복한 환자와 병중에 옆에서 그를 간호해 준 간호사와 비유되는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간호사가 병자를 간호하고 지키며 일하는 것처럼, 진짜 자아는 의식적으로 인간의 내외에서 일을 합니다. 그러나 병상을 떠난 후의 환자나,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 자나 모두 끈어지고 꿈을 꾼 단편이나 부분만을 생각해 낼 뿐 그 외에 아무 것도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문 : 수면과 죽음은 어떻게 틀린 것입니까?


답 : 확실히 둘은 닮은 점이 있지만, 대단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수면중에는, 약하기는 하겠지만, 인간의 저급 마인드와 고급 마인드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심하게 그의 광선이 굽어 구부려져있어도, 고급 마인드는 많거나 적거나 저급 마인드에게 반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육체가 죽음을 당하면, 환영의 체, 즉, '마야비 루파'는 '카마 루파' 즉 동물 혼이 되어서 제멋대로 놀게 됩니다. 인간과 유령의 사이에는, 조야(粗野)에서는 세속적인 동물적이지만 조잡한 사람과 주위의 환경의 분수를 모르고 사물을 분별 못할 정도로 만취가 된 사람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과 유령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떻거나 바꾸어 말하면, 캄캄한 방에 가두어져 있는 사람과 아무리 흐릿한 약한 빛이라도 어떻거나 불빛이 있는 방안에 있는 사람과 사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저급 본질은 야수(野獸)처럼 된 것들이고, 고급 마나스는 어느 정도 그런 야수를 길들여서 복종시킨 '이성적 인간'입니다. 그러나 일단 동물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주인으로부터 떠나 자유스럽게 되면,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그를 보지 않게 되어 버리면 똑바로 옛 삶의 터전인 정글로 찾아 갑니다. 그렇지만 동물이 원래의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지만, 사람의 저급 본질 즉 유령은 즉각적으로 원래 상태로 돌아가 버린, 그러한 것이라, 다시 설명한다면 고급의 세 개조가 '데봐챤'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저급의 네 개조는 원래의 형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즉, 죽음(死)이라 말하는 대변화에 의하여 한층 편해져버린 순전히 동물적 본능을 염색한 본질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문 :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 "링가 샤리라" 즉, 가삭성 플라스틱체(plastic body)는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답 : 고급 마나스 속에 생겨난 어떠한 강력한 욕구(慾求)에 의해 투사당하지 않으면, 가삭력(可削力)은 육체와 같이 자고 있습니다. 꿈에서는 이 체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고, 아주 수동적이며, 고급의 여러 본질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들을 알게 모르게 반수면 상태에서 목격하고 있습니다.


​문 : 어떤 상태에서 생령(生靈)으로써의 '링가 샤리라'는 보이는 것입니까?


답 : 보이는 사람 또한 보는 사람이 병에 들었거나, 대단히 격한 감정을 내었을 경우에, 때때로 보입니다. 병든 사람은 특히 죽음 직전에 꿈이나 '비젼' 속에서 사랑하고 있음으로 끊임없이 항상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본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깨어 있지만, 그때에 상대가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을 강력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인 경우도 그러합니다.


​문 : 마술사는, 꿈을 꾸고 있는 이와 같은 신체들을 불러와서, 그것과 어울릴 수가 있습니까?


답 : 흑마술에서는 잠자고 있는 사람의 "영"을 불러내는 것은 흔하게 있는 일입니다. 마술사는 그때,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비밀을 그 "영"으로부터 배울 수가 있으며, 수면자는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와 같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마야비 루파'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불러내면 살아 있는 사람의 기억속에 남아서 선명하게 보전되어 있어서 그것을 생생한 꿈으로 기억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면 '링가 샤리라'를 불러 낼 수는 있습니다만, 이것은 이야기할 수도 없고 정보를 줄 수도 없습니다. 거디에다 '링가 샤리라'를 무리하게 육체에서 분리시켜 수면자를 죽게 할 가능성이 언제나 있습니다. 많은 수면 중에 일어난 돌연사는 이러한 원인에서 생긴 것이지만, 세속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문 : 꿈을 꾸고 있는 사람과 '카마 로카'의 혼 껍질과는 관계가 있습니까?


답 : '카마 로카'의 혼 껍데기의 꿈을 꾸는 사람은, 아마 악몽을 꾸거나, 그 사람의 영매가 되어 있거나, 심지어 깨어 있는 동안에도 자기 자신을 매우 수동적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자신의 고급 자아조차, 그 사람을 보호해 줄 수가 없게 된 경우는, 이렇게 되어 끌려서 따라 붙은 "유령"에 사로잡혀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매성질 때문에 잠을 자고 있거나 '트랜스' 상태가 되어 있는 사람을 고급아가 도와 주거나, 경고조차 전연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수동성은 저급 본질과 고급 본질의 연결 고리를 마비시킵니다. 어떤 고급의 '영' 육체로부터 이탈하지는 않았지만, 이승을 초월한 영과 접촉할 목적에서, 자신이 수동적으로 되어 있는 동안에, 고급아와의 모든 연결이 끊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개인적인 의지를 유지할 수 있는 영매의 예는 거의 없는 것입니다.


​문 : 꿈을 꾸고 있는 자는 '데바챤'에서의 존재물과 공명(共鳴)할 수가 있습니까?


답 : 데바챤에 있는 존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수면 중에 꿈이나 '비젼'을 보는 것과 트랜스 상태로 되어야 합니다. 데봐챤에 있는 자는, 우리들의 계(界)로 내려 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야말로 오히려 우리들의 내면의 자아가, 데바챤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문 : 수면 중에 말술을 먹는 주정뱅이의 정신 상태는 어떠한 것들입니까?


답 : 진짜의 수면이 아니고, 앞뒤 불각(不覺)의 무감각 상태입니다. 그것에는 육체적 휴식이 없고, 불면보다도 더 나쁜 것이고, 불면은 똑같이 빠르게 주정뱅이를 죽게 만듭니다. 이와 같이 무감각이 되는 동안은 깨어 있어 취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렇지만, 뇌 속에서는 모든 것이 빙빙 돌아가고 있어서, 상상의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소용돌이 치고있는 무섭고 기괴한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문 : 악몽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폐결핵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는 사람의 꿈이 종종 즐거운 것들인 것은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답 : 악몽의 원인은 생리인 것에 불과합니다. 악몽은 호흡이 고통스럽거나 호흡 장애에서 생깁니다. 호흡 장애는 항상 압박감 같은 것을 일으키고 재해(災害)가 닥쳐 온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폐병의 사람의 경우는 환자는 날로 물질체로부터 떨어져,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투시력이 강해지기 때문에, 꿈이 즐거워집니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육체는 소모가 되어버리고, 육체 인간의 뇌와 고급 자아 사이의 장해물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문 : 꿈꾸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좋은 일입니까?


답 : 투시력이 진보하는 것은 "꿈꾼다"고 말하는 힘을 개발합니다.


​문 : 꿈을 해독하는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예를 들면, 꿈을 다룬 책에 나와 있는 해석같이 어떤 판단막입니다.


답 : 투시력과 해석자의 영적인 직관 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들 각각의 육체가 서로 다르듯이 꿈을 꾸는 자아는 모두가 서로 다릅니다. 우주의 모든 것들에는 상징으로 해서 물질계에서의 그 뜻을 푸는 데는 일곱 개의 열쇠가 있다고 합니다. 고급의 여러 세계에서는 얼마나 많은 열쇠가 있어야하겠습니까?


​문 : 꿈을 분류(分類)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답 : 꿈을 대충잡아서 일곱 개로 분류할 수가 있고, 그 하나 하나를 더욱더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려고 합니다.


(1) 예언적인 꿈인 것은 고급 자아에 의하여 인상이 주어진 꿈으로, 일반적으로 단순하며 명백합니다. 소리를 듣거나, 미래에 생길 일을 예견합니다.


(2) 우의적(寓意的)인 꿈, 또는 뇌에 의하여 포착되면서, 공상력에 의해 굽어져서 실재를 흐릿하게 엿본 것들, 이와 같은 꿈들은 어설프게 본 것으로 일반적으로서 일부만이 맞을 뿐입니다.


(3) 선하든 악하든 아데프트나 최면술사나, 자신의 의지를 우리들에게 의지대로 조정하는데 강한 마음을 가진 자가 상념으로 보내진 꿈.


(4) 회고적인 꿈, 과거생에서 생긴 일에 대한 회상(回想)의 꿈.


(5) 자기 자신으로서는 인상을 받아 넣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경고하는 꿈.

 

(6) 혼란스러운 꿈 (앞서 설명하고 있다.)


(7) 소화나 근심 걱정 같은 외적인 원인에 의한 단순한 공상이나 혼동스러운 꿈, 인상의 꿈.



3. 첼라(Chela)
첼라(제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첼라에게 결점은 있는가? 첼라와 첼라가 아닌 사람과는 어떤 점에서 틀린가? 첼라가 말하는 말은 모두가 절대의 진실로 받아 들여도 되는가?

많은 사람들이 첼라에 관해서 매우 터무니없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거나, 그런 반응이 나타나서 앞서와 같은 질문이 나왔다.

'첼라'라는 단어는 단순히 "제자"라 말하는 뜻인데, 신지학 문헌에서는 독특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으며, '신'이라는 말처럼, 십인 십색의 서로 틀린 정의를 가지게 되었다. 어떤 사람의 생각에는, 사람이 첼라가 되면, 얼마 후에는 우리들 보통 사람들과는 틀린 단계에 이르게 되어, 첼라가 가끔 말한 한마디 한마디가 "성좌선언(聖座宣言)"이라고 쓰여지고, 그 정도면 보통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권리가 허용되지 않게 된다. 말할 것들이, 개인적인 책임에서 첼라가 말한 의견에 불과하다고 알았을 때, 이것을 들은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추궁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생각을 확실히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 종류와 위층(位層)에 계시는 '마하트마'들이 있는 것처럼, 다양한 종류와 위층(位層)의 첼라들이 있다. 실제로 더욱 더 높은 '마하트마' 어른들이 첼라로 있는 '마하트마'들도 계신다. 그러나 제자의 길이라고 말하는 불안한 여로(旅路)에 막 들어선 첼라와 '마하트마'이면서도, 위대한 첼라와는 한순간이라도 차이를 혼동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진정한 '첼라'가 "아직 나타나 있지 않고 있는 길"에 들어선 가련한 사람인 것이다. 크리슈나가 말한 것처럼, 그 것은 "모든 길 중에서도 가장 험난한 길인 것이다."

첼라는 언제나 '구루'를 대변을 하는 자가 아니고, 오히려 첼라가 아닌 보통사람보다 세상안에서 고독한 것이다. 첼라의 길이란 사방팔방에 둘러 쌓인 위험이 있는 그대로 그려내어 보호해 준다면, 그 길로 들어선, 많은 구도자들은 기겁을 하여 뒤로 나가자빠질 것이다. 첼라의 길은 계속해 가르쳐 주시는 스승의 부드러운 지도 아래 '오컬티즘' 전공의 문학사호를 얻기 위해 시험을 치르고, 구루로 받아들여주는 쉬운, 것들이 아니다. 그런 간단한 것을 고사하고, 병사들이 애워싸고 지키고 있는 성(城) 안으로 무리하게 떠밀려 들어가 그때부터 싸워서 이겨서 살 것인가, 패배해서 죽을 것인가 말하는 격렬한 싸움을 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구루'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구루'가 받아 들여야 할 가치가 있느냐, 또 제자로써 달라고 신청해서도 안 된다. 한 분의 "마하트마"께서 다음과 같은 말을 쓰고 계신다: "자신이 첼라로서 받아주도록 우리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 첼라라는 신분이 자연스럽게 찾아들 때까지 기다려라."

또, 사람이 첼라로서 받아 들여졌다고 해서 단순히 '구루'의 도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첼라가 된 사람은 그 전과 똑같이, 보통 사람처럼 이야기를 한다. 천사(天使)께서 첼라의 자기(磁氣)를 매체로 해서 실제로 편지를 보내 왔을때만, 주위의 사람들은, 첼라를 통해서 천사(天使)의 메시지가 왔다하는 말을 할 수가 있다.

어떤 작가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제자가 깊숙한 진리나 대단히 아름다운 말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러나 그러할 때, '구루'가 첼라를 통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을 가져서도 안 된다. 만약 좋은 생각의 종자(種子)가 첼라의 마음속에 있었다면, '구루'의 감화력이라고 말하는 부드러운 '비(雨)'로부터 윤택함을 얻어, 돌연 싹이 트여, 홀연히 때에 알맞지 않은 빨간 꽃이 피어나게 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스승의 목소리와는 틀리다. 사실, 천사(天使)가 첼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경우는 좀처럼 없는 일이다.

첼라의 능력은, 그런 진보 단계에 따라 다르다. 만약 첼라에게 '신통력'이 있다고 한다면, 아주 드물게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것을 써먹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하물며,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자만하는 짓은 절대로 안된다. 따라서, 단순한 초심자는 보통의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보고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첼라에게 주어진 '골인'은 정신적인 능력의 획득에서가 아니다. 첼라의 주요한 과제는, 우리들의 불사(不死)의 부분인 "진정한 인간(the real man)"을 덮어 감추고 있는 두터운 베일, 즉 강한 개성(인격감)을 걷어내는데 있는 것이다. 이런 자기본위의 기분이 남아있는 동안은, 오컬티즘의 문 앞에 멈추어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분명히 감상주의(感傷主義)는 첼라에게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는 기구가 아니다. 첼라의 일은 감당하나 힘들고, 길은 돌투성이로, 목적지는 멀다. 단지 감상적으로 되어가서는 전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되어간다. 절벽 끝으로 몸을 던져버리거나, 히말라야 연봉의 불어닥치는 혹한(酷寒)과 맞붙어 싸워 자신의 용기를 보이라고 천사(天使)의 명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그런 것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천사(天使) 어른은, 그와 같이 사람에게 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첼라 자신이 감상주의에 빠져들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일반의 사람들도 첼라에 관하여 생각을 할 때, 첼라의 행위나 말의 모두를 감상주의라고 말하는 거짓의 '베일'을 던져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는 좀더 식별력을 가지고 첼라에 관해 생각해 보자.


4. 첼라는 영매인가?
​법학박사 '죤 오길버'의 "임페리얼 사전"의 최신판에 의하면,「영매란 다른 존재의 행위가 동물 자기(磁氣)에 의해 현현되어서 전달되어지는 매개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 또는 영의 현현이 일어나는 매개라고 주장되어 온 사람, 말하자면, 사자(死者)의 영과 어울리는 짓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일이다.」

오컬티스트는 '사자(死者)의 영이 내려와서 우리들과 교신할 수 없다는 것으로 알고 있으므로, 보통 받아들여지고 있는 의미에서의 "사자(死者)의 영"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만약 임페리얼 사전의 편집자가 오컬티스트였다한다면, 앞의 "동물 자기에 의해"라는 표현은 아마 수정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연유에서도, 우리들은 여기서 "영매"라고 말하는 말의 정의(定義)의 처음 부문만을 취급해 보자. 말하자면,《영매란, 다른 존재의 행위가 현현되어 전달되어지는 매개체라고 말하는 사람》인 것이다. 여기에 다음의 말을 덧붙이고 싶다. 마른 존재의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에서의 일하는 의지에 의해서"

다른 사람의 동물 자기 또는, 그의 자기(磁氣)를 보내고있는 의지의 일하는데서 많든 적든 영향을 받지 않는 인간을, 이 지상(지구상)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극히 어렵다. 부하로부터 사랑을 받는 장군이 최전선에서 말을 타고 달리면, 병사들은 모두 "영매"가 된다. 그들은 열광해서 타오르고, 흥분해서 무서움을 잊고 장군의 뒤를 따라 달려가, 죽음과 맞붙어 상대쪽 부대를 공격한다. 같은 공통된 충동이 그들 모두에게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병사는 각각 다른 사람의 "영매"가 되어, 겁쟁이 같은 자도 용기가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전혀 영매가 아니고, 따라서 유행성 또는 풍토병의 정신적 영향에 무감각한 사람만이 예외인 것이며 자신의 독립성을 주장해서, 싸움터에서 도망쳐 버릴 것이다.

신앙 부흥운동의 선교사가 설교 단상에 올라가면, 그가 말하는 것이 처음부터 순서가 맞았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 것들뿐인데도, 그의 몸 움직임이나 탄식을 섞은 소리의 인상 등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적어도 여성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데, 충분히 충격적이다. 심지어, 그가 풍채가 훌륭한 웅변가이면, "조소(嘲笑)하기 위해서 왔다"한 회의가들 조차도 감동을 받아 "그 자리에 남아 기도"를 할 것이다. 사람들이 극장에 들어가면, 그것이 '팬터마임'이었거나, 비극이었거나, 극을 연출하는 인물에 따라 눈물을 흘리고, 배를 잡고 웃기나 하는 것이다. 바보를 제외하고, 정서에 따라 행위가 어떤 방법에서 영향을 받고, 그것에 의해서, "다른 사람의 행위가 현현되어 전달되는 매개"로 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따라서 모든 남녀 노소가 영매인 것이며, 영매가 아닌 사람은 괴물인 것이고, 자연이 만들어낸 기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인류의 동료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명백히 앞의 정의(定義)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영매"를 나타내는 것에서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좀더 말을 덧붙여서, "영매란, 다른 존재의 행위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으로 일하는 그 행위에 의하여 이상한 정도까지 나타나서, 전달 되고있고 매개로 되어 있다고 말해지고 있는 사람"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우리들이 정상인과 이상한 사람의 경계선을 어디에 그어야 하는 것에 따라, 영매의 수가 감소할 것인가, 누가 영매인 것이고 누가 영매가 아닌가를 정하는 것은, 여기서 정기(正氣)가 끝나서, 어디서 광기(狂氣)가 시작하고있는가를 말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각각 누구나 조금씩 이상한 점이 있는 것이고, 그것에는 약간의 "영매성", 즉 생각해 본적이 없는 불의의 먹어드는 원인이 되는 어떤 것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조금 변했어도 진정 정신이 돌았다고 말할 수가 없으며, 조금의 영매성이 있는 일반 사람들을 "영매"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미치광이인가 아닌가에 관해서 의견이 다른 것처럼, 사람의 영매성에 대해서도 의견은 각양각색이다. 실생활 하는데 있어서, 어떤 사람이 대단히 동떨어져 있는 품행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 와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별하지 못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일을 정리해 나갈 수 없을 정도의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그 사람을 미치광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같은 원칙을 "영매"에게도 적용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를 지배하는 힘을 잃어버리고, 이제 와서는 자기 자신의 행위를 정하는 힘이나 의지를 가지지 못하게 될 정도까지 다른 존재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 이와 같은 사람만이 영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의 지배력을 그와 같이 포기하는 것은 능동적일런지 모르겠고, 혹은 수동적일런지도 모른다. 의식적일는지 알 수 없고, 무의식적일런지도 알 수 없다. 또 본인의 의사에 의한 것일런지, 본의가 아닐 수도 있을런지 모르겠다. 또, 앞에서 말한 영매에 미치는 존재의 성질에 따라 틀리다.

어떤 사람은 의식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다른 존재에게 복종시켜, 그에 따른 존재의 노예가 되는 수도 있다. 그 다른 존재라고 하는 것이 인간이었다고 한다면, 그 영매는 그 사람의 충실한 하인 노릇을 하게 되어, 선한 목적, 또는 악한 목적을 위해서 그 사람의 심부름꾼이 될지도 모른다. 다른 존재라고 말한 것이, 어떤 '특정한 생각'의 말을 하고 있는 경우인 때도 있다. 말하자면, 사랑, 탐욕, 미움이나 질투 혹은 묵은 감정 등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그 생각의 강한 정도와 영매에 남겨져 있는 자기 지배력의 총량의 정도의 여하에 있다. 다른 존재란 것이 엘리멘탈 혹은 엘리멘터리인 경우도 있고, 가련한 영매는 간질환자나, 정신병자나 혹은 범죄자가 된다. 그 사람 자신의 고급원질(Higher Principle) 그 사람의 고급본질만의 것이나 또는 그것이 보편영의 본질의 또 하나의 광선과 일치하고 있는 것인지, 어느 것 일인 경우도 있다. 이 때의, '영매'의 경우는 위대한 천재, 저술가, 시인, 예술가, 음악가, 발명가 등이 된다. 또한 다른 존재가 '마하트마'라고 불려지는 위대한 존재의 한 사람인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 의식적이며 자발적인 영매는 '첼라'라고 부른다.

그리고, 태어나서부터 한번도 "영매"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있는데도 강한 영매인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사람의 행위는, 주위에 있는 가시, 불가시의 것들로부터 많거나 적거나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 사람은 "엘리멘터리"나 "엘리멘탈"이라는 말의 의미도 알지 못하는데, 그것들의 먹이가 되어 있는 수도 있으며, 그 결과, 도둑이나 살인마나 폭행자나 술고래가 되어 버릴지 모른다. 그리고 잘 증명되어 있듯이, 범죄는 때때로 전염성의 것들이다. 또는 어떤 사람이,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그 사람의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른 행위를 하거나, 불가시의 영향에 의해, 어려운 것을 성취해 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거짓말쟁이가, 어떤 불가시의 영향을 받아, 한번 진실을 이야기하게끔 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은 대단히 마음이 약한 사람인데, 무슨 큰 사건이 생겼을 때 갑자기 영웅적인 행위를 하는 경우가 있다. 좀도둑으로 방랑하는 신세인 사람인데, 갑자기 관대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는 등 여러 가지인 것이다.

더불어, 영매가, 영향을 주는 뿌리, 더 명확히 말하자면 자신을 통해서 행동을 전달하고 있는 존재의 성질을 알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기 자신의 제7원질(Principle)의 영향 아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나 성자들과 통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세익스피어'의 "지적광선(Intellectual Ray)"과 일치해있어 '세익스피어'의 시(詩)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그런 생각만으로는 그의 시가 좋아지거나 나빠지거나 하지 않는다. 어느 초인의 영향을 받아서 위대한 과학서를 쓰고 있지만, 그의 영감의 뿌리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자신을 통해서 쓰고 있는 것은 '페러데이'나 '베이컨'경(경)의 "영(靈)"이라고 생각해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그런 일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그 사람은, 줄곧 "첼라"로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것들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영매 성질을 일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지배력을 거의 완전히 버리는 것이고, 그 결과 선인가 악인가 구별은,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써먹고 있으며, 어떤 목적에서 행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더불어 또 이런 이용과 목적은, 영매가 자신의 지력(知力)과 육체의 힘의 보호권을, 잠시동안, 자발적으로 또는 본의 아니게 포기해 양도하는 존재의 성질에 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심신(心身)의 힘을 어떤 미지의 존재의 영향에다 무분별하게 맡겨 버리는 사람은, 의심할 것도 없이 "변해 버린"것이고, 정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자신의 돈과 귀중품을 빌려 달라고 말하는 전혀 알지 못하는 방랑자에게 맡기는 사람이 정상은 아닌 것과 꼭 같은 것이다. 비교적 적은 수이지만, 우리들은 때때로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보통은 그런 사람들은 백치(白痴)처럼 힐끗 힐끗 다른 사람을 보는 데, 자신의 망상을 광신적으로 해서 무지에 집착하는 것으로 그런 행위로 알 수가 있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사람들을 비난할 것이 아니고, 불쌍히 여기고, 만약 가능하다면 그들을 조정해서, 위험성에 관해 가르쳐 주어야 한다. 첼라는, 자신이 알고 있고, 거기에 그의 동기의 순수함, 목적의 진지함, 지력과 지혜의 힘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 천사(天使)라고 말하는 훌륭한 존재에게서, 당분간의 사이지만, 의식적인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지적 능력을 빌려주는 것이지만, 그와 같은 제자를, 저속적(低俗的)인 의미에서 나온 "영매"라고 생각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는 독자들은 앞에서 말한 것들을 잘 생각해 본 연후에,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역자의 말

​이 책은 블라바츠키 여사가 남긴 글 중에서 "오컬트"에 관한 것을 롯지의 집회에서 말한 것을 소책자와 기타의 논문 등을 모아서 한 권의 단행본으로 만든 것으로, 오컬티스트들에게는 매우 귀중한 책이며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본 협회에서 블라바츠키 여사의 거작 "씨크릿 독트린"의 출판을 이해하지 못해 어느 의사가 사이킥적 영적능력의 한 부분을 알아서 그것을 응용하여 치료를 행함으로써, 매스컴을 통해 보도된 이후, 연일 본 협회에 많은 문의가 쇄도하게 되어서 오류를 범하는 신비추종자가 다수 발생할 것이 우려되고, 또한 왜곡된 흐름이 만연해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런 현상을 방치한다는 것은 대단히 혼탁한 결과가 오컬트 과학에 초래될 것이 명약관화하므로, 이 점을 염려하여 서둘러 이 책을 펴내기로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신비주의를 추구해 가고 있는 사람이나 흥미를 가지고 오컬티즘을 공부해 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인식과 경고를 겸하여 이 책을 서둘러 출간하였습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정을 충분히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마디로 잘라서 말씀드린다면, 오컬트 과학은 아무나 탐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중팔구 흑마술적인 길로 빠져 들어가는 함정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출판하여 시중 서점에서 판매중인 신지학에 관한 여러 서적중 '침묵의 음성'과 '신지학 입문'을 참고하여 보시도록 권장합니다. 또한 앞으로 발간될 "씨크릿 독트린"은 독자 여러분에게 더욱더 많은 지식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이킥 에너지는 우주 창조와 거의 동시에 생겨난 에너지로서 자기성(磁氣性)을 가진 것으로, 전 우주에 편만해 있으며 최하급 층에 속하는 지구, 즉 인간세계에서는 여러 가지 물질에 고루 침투해 있고, 지구의 만물 형성에 큰 역할을 하여온 에너지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인간의 체내로 들어온 사이킥 에너지를 소위 '기(氣)'라고 하고 별별 말을 만들어 전파하고 있습니다. 오컬트 과학의 공부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변환성의 사이킥 능력의 한가지 면을 쉽게 얻어 낼 수 있으며 원하는 사람의 재질에 따라 능력이 주어지곤 합니다. 또한 그와 같은 능력을 받은 사람에게 동조하는 자나 혹은 그를 따르는 자는 더욱더 쉽게 그런 능력의 한 면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과학적 이성을 가지고서는 검증이나 접촉하기에는 불가한 유일신(唯一神)이 내려주는 사랑의 발로입니다. 인간은 그의 유일신과 동일한 것이며 빛을 가진 신의 한줄기 빛에 속한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시공과 자아" 참조) 따라서 신의 위대한 경륜을 각자 의식하고 이에 상응하는 지혜를 가져야 하며, 진리의 암시적인 가르침을 올바르게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사이킥 능력'이란 수만 종류나 되며, 우주에 편만(遍滿)해 있는 사이킥 에너지의 활용에서 오는 사실입니다. 오컬트 과학을 탐구하려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면이 주어지는 것뿐이며, 이것을 오컬티스트들은 똑바로 인식하고 있으며, 광대 무한한 대 우주안에 있는 무수한 사이킥 능력 중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대 우주의 영원성에 비유로서 설명하자면, 그것은 해뜨는 아침 풀잎에 매달린 한방울의 이슬에 불과한 정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무슨 대단한 능력인 것처럼 착각해서 자만으로 가득차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스스로가 냉철한 이성과 성스러운 지혜로 자아의 감각의 실재를 이곳에 모아 보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지혜롭고 영리한 오컬티스트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쉽게 지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길에 관하여 전혀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는 무지한 일반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그와 같은 능력을 영성훈련을 통해 언제든지 지득(知得)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은 얻어낼 수 없는 불가능한 능력이라고 잘못 생각해, 하나의 미미한 오컬트적인 기능에 감탄한 나머지 그 능력을 보유한 자의 신비력에 매혹되어 막연한 존경이 끝내는 광신으로 변질되어, 그런 능력의 소지자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교만과 자기도취에 빠져버리도록 도와주는 결과가 되며, 그 결과 그로하여금 더욱더 흑마술사의 유혹속으로 빠져 들어가도록 재앙을 자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런 자는 자만과 교만과 독선적 사고로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로 위장하고, 추종자를 만들어 내어 사회 곳곳에 신흥 종교가 우후죽순처럼 정착하고 확대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관하여 사이비 종교의 허(虛)와 실(實)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설명하겠습니다만, 최근 일본에서 커다란 사이비 종교로 문제가 되었던 '옴'교가 지금은 사법의 심판을 받는 중이라는 것을 독자들께서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책 안에 '옴'의 음향에 관해서 상당히 구체적인 설명이 있는데, 그 내용을 역자가 넣어 두기로 하였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를 독자들은 알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특정집단이나 이기심에 차 있는 사람의 욕심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에 발생해서, '옴'의 음향을 응용하는 새로운 종교가 생거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더없이 위대하고 지고한 신의 지혜를 이 기회에 밝혀서 올바른 인식을 주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어둠을 밝히는 마음으로 이렇게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오컬티스트'로서 조그만 사이킥 능력을 보유한 사람이면, 우선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그와 같은 능력이 어떤 경로로 자신에게 생겨나도록 한 것인지, 어떻게 해야 이런 신의 지혜를 더 깊이 접할 수 있는가, 유일한 대령(大靈)이 내려주신 것이 분명한가, 본능적인 성질에 속하는가 등을 명확히 알아내야겠다는 신념으로 연구와 관찰에 몰두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단편적인 지식이지만 영원의 전체적 진리를 얻어내는 데 길목 역할을 한다는 인식과 그것을 형이상학적으로 풀어보겠다는 의지와 인내를 가지고 의식의 차원을 높여가겠다는 공부 방법이, 사이킥 능력의 힘을 발전시키는 것이며, 그것을 계기로 해서 신으로부터 한가지 능력을 전수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점점 방향을 못잡고 흑마술로 빠져서 끝내는 폐령(廢靈)의 길을 걷지 않도록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 속에는 시사적인 내용이 풍부하므로 통속적이고 추상적인 소설을 읽듯이 보시지 말고, 교과서라는 개념으로 읽어가면서 지각이나 감각을 통해서 느낌을 주거나, 혹은 이 부분을 노력하면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확대시켜 나가는 방편으로 계발하고, 반복해서 일어 마음속 깊이 인상을 남김으로써 의식화해 가면 유익할 것입니다. '오컬트' 과학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일반 독자들께서는 이 책이 주는 오컬티즘을 이해하고, 신비적이니 기적이니 하는 것은 없는 것이며, 지금까지 독자 자신의 무지(無知)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뿐입니다. 보편적으로 우주에 충만해 있는 에너지의 작용이라고 간단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길을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가능한 것이며, 또 언젠가는 그 길을 가야할 것이며, 조금만 노력해보면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인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대우주의 무한함과 영원 그것이 참된 우주의 본체이고 진리이며, 이것을 삶의 철학으로 되새겨서 자신이 감명 받았던 사항은 반드시 마음속에 각인시켜 두면 내세 생활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는 이치를 분명히 알기를 바랍니다.

역자 임길영(한국 국제 신지학협회 명예회장) 

1.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사(天使)와는 다르다. 여기서는 대스승 혹은 하늘의 스승을 말한다. - 역자주
2.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준 어버이와의 관계는 그리스 졍교회에서는 대단히 신성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래서 교부(敎父)와 교모(敎母) 사이에서의 결혼은 근친상간(近親相姦)이라고 보아 왔으며, 불법이라 해서 법률에 의하여 결혼이 무효로 되어있다. 또 교부와 교모의 자식들 사이의 결혼도 엄금시키고 있다.
3. "침묵의 소리(The Voice of the Silence)" 제2부 참조. - 역자주
4. 모든 제자들, 심지어 일반적인 제자들도 그들이 첫 번째 비전(秘傳)을 받기 전까지는 '우파사카'라고 불려지며, 그들이 제1비전을 받았을 때부터는 '라누 우파사카'라고 불려진다. 그 비전을 받는 날까지 라마승원에 속한 사람들과 그 승원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재자제자(在]ㆍ한 제자ㆍaymen)"라고 불려진다.
5. 「도(Path)」의 2권 11월호 1888년 2월호 330페이지. "윌리엄 졋지'는「바가바드 기타」제2장을 분석해서 비전을 주는 지구의 시초의 학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학교는 비밀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자연의 질서 그것들에 기초로 이루어져 있고, 지도자가 모두 진정한 천사어른이며, 진정한 열쇠를 가지지 못하면 깊숙한 안쪽인 곳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단계에서는 진정한 진짜 열쇠는 구도자 자신이다. 구도자는 실제로, 그의 표시로 열쇠가 되기까지, 다음의 단계로 올라갈 수가 없다. 이와 같이해서, 학교전체 뿐만 아니라, 각 단계에서도 초대 못받은 자는 들어갈 수가 없도록 스스로가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비전의 학교'라고 말하는 것은 일정한 장소에 있는 시설, 혹은 학파는 아니고, 천사어른의 동포단, 빛(光)의 "하이어라키" 그것이다. 역주 B·치루고후)
6. 브라만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즈나란 영원히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지고의 일자(一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야즈나는 이 일자(一者) 안에 시작이 없는 때(無始·무시)부터 잔재해 있었다. 그것은 야가스(Yagas) 혹은 희생을 바치는 비의(秘儀)를 가르치는, 리그베다 안에 이르는 세 개의 신성과학인 "트라이 비디야(Trai Vidya)"의 열쇠이다. 야즈나는 항상 비가시적인 것으로서 언제나 존재한다. 발전기의 속에 있는 전기의 잠재력의 힘과 같아서, 전기를 끌어 내오기 위해서는 적당한 기구만 작동시키면 된다. 야즈나는 '아하바니야(Ahavaniya)'오헌물을 타오는 희생의 불로부터 하늘까지 확장되어 사다리 혹은 다리를 형성해서 희생자가 신들이나 영들의 세계와 교신할 수 있으며, 심지어 살아있는 동안 그 세계로 올라갈 수 있다고 여겨진다." ㅡ '마틴 호그역의 아이타레이야 브라흐마나'에서 ㅡ "이 야즈나는 일종에 아카샤의 형태들 중에 하나다. 비전을 받은 승려가 정신적으로 발음해서 불러내는 신비의 말은 의지의 힘을 통해서 충격을 받은 '잃어버린 언어(Lost Word)'이다." ㅡ 이시스 언베일드 1권 서문 ㅡ
7. 한 사람의 인간 속에는 세 개의 자아(Ego)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육체, 혼 그리고 영으로 구성되어 있는 심위일체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이며, 분명히 그의 육체는 아니다. 바로 이 육체가 일시적인 인간의 옷, 즉 소유물인 것이다. 세 개의 자아들이란 인간이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 모습인데, 아스트랄계, 지성적 혹은 싸이킥계, 그리고 영계라 말하는 세가지 상태에서의 인간의 세 가지 면이다.
8. 「신곡」지옥편, 제3곡
9. Theosophist, 1889년 8월호 647페이지.
10. Theosophist, 1889년 8월호 663페이지.
11. Theosophical Siftings, No. 8, 2권, 6페이지, '하트만'.
12. Path, 1889년 8월 131페이지.
13. Path, 1889년 6월 107페이지.
14. "도의 광(빛)(Light on the Path)"의 카르마(Karma) 참조.
15. "도의 광(빛)" 주석 참조.
16. "황금의 문들을 통해서(Through the Gates of Gold)", 69페이지.
17. "황금의 문들을 통해서", 87페이지.
18. "도의 광(빛)"
19. "황금의 문들을 통해서", 118페이지.
20. Path, 1887년, 8월, 151페이지.
21. Lucifer, 1888년, 2월 478페이지.
22. "바가바드 기타", 60페이지.(모든 인용문들은 '모히니(Mohini)'가 번역한 것에서 발췌했다.)
23. 몰리노스(Molinos)의 "영적 안내(Spiritual Guide)"
24. 바가바드 기타, 182페이지.
25. 바가바드 기타, 서론.
26. "도의 광(光)", 주석.
27. Path, 1886년 12월 279페이지.
28. Path, 1886년 12월 280페이지.
29. Lucifer, 1883년 1월 832페이지.
30. "도의 광(光)"
31. 바가바드 기타, 서론.
32. "도의 광(光)"
33. Theosophist, 1888년 10월 44페이지.
34. 바가바드 기타, 325페이지.
35. 바가바드 기타, 240페이지.
36. Magic, 서론 34페이지, 하트만.
37. 즉, 지식. 이것은 친절과 무사무욕의 마음의 실행하는 것에서 생긴다.
38. 바가바드 기타, 95페이지.
39. 바가바드 기타, 61페이지.
40. 넓은 의미로도 받아들여야 한다. 즉, 그 한 조각은 영적 지식 등을 포함한다.
41. 상키야 철학에서는 세 가지 구나(guna) -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
42. 삿트바는 선함(goodness)을 의미한다.
43. Path, 1889년 7월 109페이지.
44. Path, 1889년 8월 159페이지.
45. 영어로는 "psychic powers"로 되어 있는데, 우리말에는 적적한 말이 없어서 "싸이킥 능력"으로 번역하였다. - 역주
46. Path, 1889년 7월 111페이지.
47. Spirit of the Testament, 508페이지.
48. Spirit of the Testament, 513페이지.
49. Theosophist, 1889년 7월 590페이지.
50. Theosophical Siftings, No. 3, 2권, 1889년.
51. 파탄잘리의 "요가금언(Yoga Aphorisms)"
52. "인간(Man)", J. Buck. 106페이지.
53. 마술(Magic), 하트만, 61페이지.
54. 이 규율은 완벽해야 한다. "사원의 첼라들"에게만 해당된다.
55. 양친 중 한분이 안계시는 경우에는 한분의 허락만으로 된다.
56. (역주) 이 인용문은 '마하 초한'의 편지 즉 천사 어른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편지라고 생각되는 것에서 인용한 것이다.
57. 이와 같이 생생하게 살아가는 것과 완전하게 조화하라, 한 사람의 스승의 지도를 받고 있는 제자들은 서로 간에 사랑을 나누고, 한 사람의 어머니의 자식들이 서로간에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을 사랑 할 수 있도록 되라. (침묵의 소리 제3부)
58. 유태인이 만들어 낸 YHVH는 '쟈-하바'(jah havah) 즉 지상계의 남녀를 의미하지만, 지금의 '예호바'의 뜻으로 되어있고, 실제로 문자대로 [존재를 주는 것]과 [명을 받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역주: 히브리어 문자의 수의 값과 예호바 의미에 관해서, [씨크릿 독트린]의 우주 발생론 상권 보유(2)에 잘 나타내어져 있다.
59. 심령연구회(Psychical Research Society)를 "유령연구회(Spookical Research Society)"라는 비꼬는 의미에서 사용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