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H. P. 블라바츠키] 신지학의 열쇠 본문
[H. P. 블라바츠키] 신지학의 열쇠
(The Key to Theosophy)
H. P. 블라바츠키 / 임길영 역
머릿말
'H. P. 블라바츠키'의「신지학의 열쇠」에 대한 오랜동안의 요구에, 이 저서가 적당한 가치로서 상당한 세월을 두고 유지할 수 있으며, 이 판은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을 이 중판은 재 일판의 충실한 복제로서, 매수도 같다. 인쇄의 오자와 몇 개의 문법적인 누락만을 정정하였다. 중요한 인용(引用)과 참고문은 상당수의 원전(原典)을 찾아서 점검하였다. 이와같이 주의깊게 일을 하여 주신 분은 'H. P. 블라바츠키'의 '문집'에 유능하며 헌신적인 편집인이신 '보리스 드지르코프 씨와 또「씨크릿 독트린(The Secret Doctrine)」요약판의 편집자의 한 사람인 '그린스마스 한후러이쓰'씨가 수고해 주셨다.
「신지학의 열쇠」는 신지학도에게는 대단히 귀중한 책이다.「씨크릿 독트린」보다 일년 후인 1889년에 출판 되었으며, H.P.B께서 쓰신 것들 중에 신지학의 입문서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적절하지 못한 부분도 있으나, 저자가 쓴 것이라 그대로 두었다. 그것은 유익한 역사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초판은, 런던의 '블라바츠키 롯지'의 명예회원에 선출되어 있던 '에드워드 하카'라고 하는 미국 인의 덕택으로 출판되었다. 1889년 7월 19일 힌덴부르크에서 써 보낸, H.P.B의 미발표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이때 그녀는 힌덴부르크에서「침묵의 소리」를 쓰고 있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당신이 보내주신 돈으로「신지학의 열쇠」를 출판할 수가 있었습니다. 책이 나오면, 당신의 친절에 감사하는 뜻에서 특별히 당신을 위하여 제본한 책을 한 권 보내겠습니다. ··· 만약 당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책은 결코 출판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목 차
머릿말
서문
제1장 신지학 및 신지학 협회 명칭의 의미
신지학이란?
신지학협회의 방침
지혜의 종교는 어느시대에서나 비교(秘敎)
신지학은 불교가 아니다
제2장 현교적(顯敎的) 신지학과 비교적(秘敎的) 신지학
근대 신지학 협회의 다른 것과 틀린점
신지학도와 신지학 협회 회원(會員)
신지학과 비교(秘敎)의 차이점
신지학과 심령주의의 차이점
신지학은 왜 받아들여지는가?
제3장 신지학 협회의 활동체계
협회의 목적
인간 공통의 기원(起源)
기타의 목적
서약의 신성함에 대하여
제4장 신지학 협회와 신지학의 관계
자기 수양에 대하여
추상적(抽象的)인 것과 구체적인 것
제5장 신지학의 기본적 가르침
신과 기도에 대하여
기도는 필요한가?
기도는 자신(自信)을 없앤다
인간 혼의 뿌리에 대하여
위의 것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
제6장 자연과 인간에 대한 신지학의 가르침
모든 것들의 통일
진화와 환영(幻影)
지구의 7중(七重) 구조에 대하여
인간의 7중 성질
신지학의 분류법
혼과 영의 구별
그리스의 가르침
제7장 죽음후의 다양한 모습들
육체적 인간 및 영적 인간
영원한 상벌과 열반에 대하여
인간의 여러가지 본질에 대하여
제8장 윤회(輪廻)
신지학의 가르침에서 기억이란 것은?
왜 과거세(過去世)를 기억못하는가?
개성과 인격에 대하여
자아의 상벌(賞罰)에 대하여
제9장 '카마로카'와 '데봐챤'
저급 제원리의 운영에 대하여
신지학은 무엇때문에 순수한 영혼들의 귀환을 믿지 않는가?
오온(五온)에 대하여
사후와 출생전의 의식
절멸(絶滅)이란 무엇인가?
확실한 것에 대한 확실한 말
제10장 사고(思考)원리의 성질에 대하여
자아의 신비
'마나스의' 복잡성
신지학의 교의는 요한복음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제11장 윤회의 신비에 대하여
주기적 재생(再生)
'카르마'라는 것은?
'알고 있는 분들'이란?
신앙과 지식, 맹신과 합리적 신앙의 차이
제12장 실천적 신지학에 대하여
의무
신지학 협회와 정치 개혁과의 관계
자기 희생에 대하여
자선(慈善)에 대하여
모든 사람을 위한 신지학
회원들은 어떻게 하여 협회를 돕는가?
신지학도로서 하지 못하는 것
제13장 신지학 협회에 대한 오해
신지학과 금욕주의
신지학과 결혼
신지학과 교육
왜, 신지학 협회에 대하여 그처럼 많은 편견이 있는가
신지학 협회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제14장 신지학의 마하트마(초인)들
그들은 '빛의 영들'인가, 또는 '암흑의 영들'인가?
신성한 이름과 말을 잘못 쓰는 것
결론: 신지학 협회의 미래
번역을 끝내고
서 문
이 책의 목적은 제목「신지학의 열쇠」에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으므로,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이 책은 완전하거나 철저한 신지학의 교과서가 아니고, 더 깊은 연구로 들어가기 위한 '입문의 열쇠'에 불과하다. 이 책은 '지혜의 종교'의 넓은 개략을 말하고, 그 기본적 원리를 설명한다. 동시에, 구미의 생소한 일반 연구자들이 제기한 여러 가지 반론에 답하여, 잘 알지 못하는 개념을 가급적 간단한 형태로, 그리고 명료한 말로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독자가 지적 노력을 하지 않고 신지학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기대다. 그러나, 아직도 언어가 아닌 사고에 애매한 점이 남아있는 것은, 혼란 때문이 아니라 그 사고의 깊이 때문이라고 본다. 지적으로 태만하거나, 우둔한 사람에게는, 신지학이 수수께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영적인 세계에서나 지적인 세계에서나, 사람은 각기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되어야 한다. 필자가 독자 대신 생각할 수는 없으며, 만약 그와 같은 대리사고가 가능하다면, 독자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신지학협회와 그 사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이런 해설자의 필요성을 느껴왔다. 그리하여, 이 책은 신지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 어리둥절하고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문용어에 능통할 수 있도록 정보를 공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 책에서는 사후(死後)의 생명에 관한, 심령주의적으로 뒤엉킨 진위해설(眞僞解說)을 바로잡기 위하여 상당한 힘을 들였으며, 심령현상(心靈現象)의 진실한 성질을 제시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이에 앞서 유사한 해설들에 대한 그들의 반론은, 필자의 충실한 노력에 대단한 분노를 느끼게 했다. 심령주의자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진실한 것보다는 즐거운 것을 믿으려 하며, 환상을 깨우치려고 하는 사람에 대하여 화를 낸다. 지난 세월 동안, 신지학은 모든 심령주의적 독화살의 표적이 되어 왔다. 절반진리(半眞理)를 가진자들은, 자만(自慢)하고 있는 자신을 전혀모르면서 전진리(全眞理)의 소유자에게 적의(敵意)를 느끼는 것 같다. 바른 주장을 전혀 할 수 없는 자일수록, 보다 더 심한 적의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술중에, 여러가지 제안이나, 질문을 보내주시고, 그외에도 도와주신 많은 신지학도에게 마음으로 감사 드리는 바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도움들은 이 책을 더욱 유익한 것이 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을 도와 주신 분들에게는 가장 좋은 보수(報酬)가 될 것이다.
H. P. Blavatsky
제1장 신지학 및 신지학 협회 명칭의 의미
신지학이란?
문 : 신지학(Theosophy)과 그 교의(敎義)는 새로운 유행의 종교라고 말하는데 사실입니까?
답 : 신지학은 종교가 아닙니다. 신성(神聖)한 지식, 또는 신성한 과학입니다.
문 : 신지학이라고 말하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신성한 지혜의 학문' 테오소피아(Theosophia), 즉 신들의 지혜입니다. 테오소(Theoso)란 말은 그리스 말의〈신神〉이라는 뜻으로, 신성한 존재라는 말이며, 보통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의미의 신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번역하여 말하는 '신의 지혜'가 아니고, '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성한 지혜'입니다. 신지학이란 용어는 몇 천 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문 : 그 명칭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답 : 필알레데이안(Philaletheian), 즉 '진리의 애호자'라고 불리던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들에게서 나왔습니다. 희랍어의 필(Phil)은 '사랑', 그리고 알레데이아(aletheia)는 '진리'를 뜻합니다. 신지학이란 명칭은, 3세기에 절충 신지학 체계(Ecloctic theosophial system)를 세운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as)와 그의 제자들1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문 : 그 학파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 첫째의 목적은, 그 제자들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어떤 위대한 도덕적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때 이래(以來) 신지학 협회에서는 "진리보다 더 나은 종교는 없다."를 표어로 채택했습니다. 절충 신지학파2 창시자의 주된 목적은, 이 학파의 현대 계승자인 신지학협회의 세 가지 목적의 하나, 즉 영원의 진리를 기반으로 하는 일반적인 윤리체계하에 모든 종교ㆍ국민을 조화시키는 것입니다.
문 : 그와 같은 것이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는 것과, 세계의 모든 종교가 단 하나의 진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가 있습니까?
답 : 종교의 비교연구와 분석에 의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지혜'와 '종교'가 일체(一體)였습니다. 원시종교철학의 동일성은, 원시(原始)종교의 창시자들이 종교적 체제를 확립하기 전에 모두 같은 교의를 배웠다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모든 옛 종교는 그것 보다 이전에 단 하나의 신지학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를 열기 위한 열쇠는 모든 것을 열 수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올바른 열쇠가 아닙니다. (절충 철학).
신지학협회의 방침
문 : 암모니우스의 시대에는 수종의 대종교가 있었으며, 이집트나 팔레스타인만 해도 많은 종파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여 이와 같은 종교 및 종파들이 조화를 이루도록 할 수가 있었습니까?
답 : 지금 우리들이 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했습니다. 신플라톤과는 큰 단체로서 여러 가지의 종교철학자에 속해 있었습니다. 우리들 신학도들도 그와 같았습니다. 당시 아리스토부르스(Aristobulus)라고 하는 유태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의「윤리학」을 모세의 법전 비의를 나타낸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또, 필로 유대우스(Philo Judaeus)는, 피타고라스의 철학을 플라톤철학 및 모세의 5서와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조세푸스(Josephus)는, 카르멜(Carmel)의 엘세네파가 이집트의 세라피우티(치료가들 ; Therapeutee)의 모방자이며, 신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기독교의 모든 종파, 가장 말단에 이르기까지 그 계통을 제시할 수가 있습니다. 조그마한 파는 큰 가지(枝)에서 뻗어나온 작은 가지(枝)이나, 작은 가지나, 큰 가지나, 모두가 지혜의 종교라고 하는 큰 나무 줄기(幹)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암모니우스'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이교도와 기독교, 유태인의 우상 예배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법의를 입었으나,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같은 진리를 사진, 공동의 어머니3의 아이들에 불과하다는 것에 생각이 이르도록하여, 그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그만두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지학의 목적입니다.
문 : '알렉산더'의 고대 신지학도들이 그와 같았다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답 : 무수한 유명 저술가들이 그 근거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 모쉐임(Mosheim)4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암모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즉, "대중의 종교는 서로 많은 철학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잘난 척 하거나, 미신, 거짓말, 위선 때문에 차차 타락하여, 애매한 운명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더러운 찌꺼기를 깨끗이 씻고 철학원리를 설명하여, 종교 원래 목적인 청정한 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또, 기독교의 근본은 고대인의 지혜를 가진 완전한 상태로 돌아가고, 재건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넓게 퍼져있는 미신을 없애고, 여러 가지 세속적인 종교에 있는 갖가지 종류의 틀린 것을 바로 잡고, 근절하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와일더저, 동서 5P) 이것이야말로 현대 신지학도가 말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위대한 진리애호자(암모니우스)는 두 사람의 신부 클레멘트(Clement)와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그리고 모든 교양있는 유태 교회의 랍비(Rabbi)들, 플라톤학파와 글로브(Grove)파 등으로부터, 그가 추구하던 일에 대하여 지지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와 공통된 교의를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며 그를 추종하는 우리는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수모(受侮)와 박해(迫害)를 당하고 있습니다. 1500년전의 사람들은 계몽이 되어 있는 금세기의 사람들 보다 훨씬 더 관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것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문 : 암모니우스는 그의 이론(異論)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가르치고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격려와 지지를 받은 것이 아닙니까?
답 :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는 기독교도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결코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모세임(Mosheim)은 암모니우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지 고대 헤르메스(Hermes)ㅡ행복, 학문, 발명의 신ㅡ의 뜻에 따라 교시했을 뿐이고, 플라톤과 피타고라스도 이미 그것을 알았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그들의 철학을 엮어나갔습니다. 요한 복음 서두에서 같은 내용을 발견한 그는, 예수의 목적이 위대한 지혜의 교의를 원시적 순수상태로 복원하는 것이라는, 매우 적절한 생각을 했습니다. 성서의 해설이나 신들의 이야기는 진리를 설명하는 비유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부인해야 할 일을 알리기 위한 우화(寓話)라고 그(암모니우스)는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하여「에딘버러 백과사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가 우수한 인간이며, 신의 친구임을 알고 있었으며, 예수의 목적은 신들의 숭배를 완전히 그만두는 것이 아니고, 그저 옛 종교를 정화하려는 것이었음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와일더저, 동서 5p, 8-9p)
지혜의 종교는 어느시대에서나 비교(秘敎)
문 : 암모니우스는 아무 것도 쓴 것이 없는데, 그의 가르침이 그와 같다고 확신 할 수가 있습니까?
답 : 불타, 피타고라스, 공자나 오르페우스, 소크라테스, 예수도 쓴 것은 문헌상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역사적인 인물이었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전부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암모니우스의 제자들{그 중에 오리겐과 해레니우스가 포함됨}은 여러 논문을 쓰고 그의 윤리학을 설명하였습니다. 확실히 그 논문은 사도가 쓴 것보다 더 하지는 않을지라도, 역사적 가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ㅡ오리겐, 플로티누스 및 롱기누스(Longinus) ; 유명한 제노비아 여왕의 고문이었다ㅡ은 필라레테이안 체계(Philaletheian system)에 관한 부피있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사회적으로 공언한 신념만이 알려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학파는 현교적(顯敎的)인 것과 비교적(秘敎的) 교훈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입니다.
문 : 지혜의 종교라고 바르게 불리는 것이 비교적(秘敎的)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서 오늘 날까지 그 교의가 전해져 왔습니까?
답 : 지혜의 종교는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지식의 궁극(窮極)의 말이며, 주의 깊게 간수 되어왔습니다. 그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신지학도 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현대의 신지학도에게까지 전해 왔으며, 모든 다른 종교나 철학에도 파급된 것입니다.
문 : 어디서, 누구에 의하여 간수 되어왔습니까?
답 : 모든 나라에서 비전(秘傳)을 받은 사람, 진리의 탐구자, 그 제자들 사이에서 간수 되어왔습니다. 간수 되어온 것들은 이와 같은 문제를 언제나 가장 소중하게 취급하였으며, 탐구를 가장 게을리 하지 않은 곳은 인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등이었습니다.
문 : 그 가르침이 비교적이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답 : 가장 좋은 증거는, 모든 고대의 종교적, 오히려 철학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교의가, 비교적(秘敎的) 비밀교훈과 세속적 예배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옛날 사람들의 비의가 어느 나라에서도 대비의(大秘儀), 즉 비밀의 비의와 소비의(小秘儀), 즉 알려져있는 비의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가령, 그리스의 에루시니아(Elusinia)라고 하는 제전과 같은 것입니다. 이집트의 사모트레이스(Samothrace)의 제자들이나 고대 인도의 비전을 받은 바라문부터 후세 헤브라이의 '랍비(Rabbi)'들에 이르기까지, 모독(우리는 천기누설)이라 겁을 먹고, 진짜의 신앙은 비밀로 하였습니다. 유태교의 '랍비'들은 자신들의 세속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메르카바(Mercabah), 즉 '외부적인 육체', '타고 다니는 것', 즉 '감추어진 혼(魂)이 들어있는 보자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혼은 '랍비'들의 최고의 비밀 지식이었습니다. 어떤 고대 국가도 그 승려를 통하여 진정한 철학적, 비밀을 일반에게 전해주지 않았고, 일반에게는 껍데기만이 주어져왔습니다. 북방불교에는 대승과 소승이 있으며, 마하야나라는 비교와, 히나야마라는 현교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누구나 이처럼 비밀로 하는 것을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양의 무리에게 풀을 주지 않고 식물학의 학위 논문을 주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신비적 직감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관한 지식"이라고 말하고, 그 지식을 서약한 제자에게만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와 같은 지성적 식물을 소화하여 만족을 느낄 수가 있는 자들이며, 그는 제자들에게 그와 같은 것에 대해 침묵과 비밀을 지키도록 서약을 받았습니다. 비교의 문학이나 비밀 암호는 고대 이집트 승려들의 문자에서 발달한 것이며, 옛날에는 성문법학자나, 비전을 받은 이집트의 승려 이외에는 비밀로 되어 있었습니다. 암모니우스 사카스의 전기에 의하면, 심히 초보적 지식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사람 이외에 자신의 고급 지식을 흘려서는 안된다고 제자들에게 선서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초기의 기독교나 그노시스(Gnostics)파, 심지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비유로서 일반 사람에게 말하였으며, 진정한 의미는 제자들에게만 설명한 것이 아닌가요? 그리스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대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일러 주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서만 말해주노라" (마가복음 4장 11절) 또 와일더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유데아와 카르멜의 에세네파도 그외 같은 구별을 하여 신봉자의 초심자, 형제, 성취자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동서 7p) 성취자란 것은 비전을 받은 사람들이며, 이와 같은 예는 어느 나라에서든 있었을 것입니다.
문 : '비밀의 지혜'는 연구만으로서 달성할 수가 있습니까? 백과사전에 의한 신지학의 정의는 웹스터(Webster)의 사전에 나와 있는 것과 거의 같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신, 그리고 지성영과의 영교로, 그 결과는 물리적, 화학적, 과정에 의한 초인적 지식을 얻는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事實)입니까?
답 : 틀린 것입니다. 어떤 사전 편찬자라도,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물리적이나 화학적 과정으로 초인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웹스터가 형이상학적, 연금술적 과정이라고 말했다면, 거의 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대로 말이라면 바보같은 말입니다. 고대 신지학도는 현대의 신지학도와 마찬가지로, 무한한 것을 유한자가 알 수가 없고, 즉 유한아(我)는 무한을 느낄 수가 없으나, 더 높은 영적 자아는 '무아의 형태(State of esctasy)'에서 신성한 본질과 영교할 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상태는 최면술과 같은 "물리적, 화학적 수단"으로서는 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 :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답 : 플로티누스는 진정한 무아(Esctasy)를 "유한한 의식에서 마음을 해방시켜 무한과 일체가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최고의 상태나 영속하는 것이 아니고 극히 작은 수의 사람들만이 달성할 수 있다고, 와일더 박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며, 인도에서 '삼매'라고 말하고 있는 상태와 같은 것입니다. 이 삼매는, 요가 행자들이 육체적으로 음식을 엄격히 절제하고, 정신적으로는 마음을 정화하고 높이는데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인내에 의하여 실천되고 있습니다. 명상은 침묵의 기원입니다. 또,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혼의, 신을 향한 열렬한 희구이며, 보통 기원자가 말하는 것처럼 특별한 소원이 잘 되도록 비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을 원하는 것이며 우주적인 선(善)에의 염원입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그 선(善)의 그 일부가 됬습니다. 가장 큰 선의 본질에서, 우리들 모두가 태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신들이 그대들의 눈에서 구름을 흩어버리고, 신들의 몸에서 나오는 빛으로 볼 수 있는 힘이 그대들에게 주어질 때까지, 신들 앞에서 침묵을 지켜라, 그대들은 좋아 보이는 것을 보지 말고 본질적인 선을 보라.5
문 : 그렇다면 신지학은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 새로 고안(考案)된 체계입니까?
답 : 무지한 사람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신지학은 비록 명칭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그 교훈과 윤리는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것이며,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입니다.
문 : 그러면, 신지학이 왜 구미 각국의 국민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가장 교양이 있고 진보된 인종 속에서 신지학이 잠겨져 있는 학문이 되어온 까닭은 무슨 연유였습니까?
답 : 옛날에, 우리 보다 더 개화되고 영적으로 더 진보된 나라들이 있었다고 우리들은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학문을 일부러 연구하지 않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교양있는 아테네인들에게 성바오로가 말한 대로 입니다. 즉,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감각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오랜동안 독단과 의식주의 사문자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긴 세월 동안 진정한 영적 통찰력과 영적 흥미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이유는, 정통의 신지학은 언제나 비밀을 지켜왔다는 사실입니다.
문 : 그러한 비밀의 형태가 있었다는 것은 당신이 입증했으나, 그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 그 이유는 첫째, 이웃 사람들이나 가까운 친척에게 손해를 주고 개인적 욕망을 언제나 충족하려고 하는 일반인들의 비뚤어진 이기주의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결코 신성한 비밀을 줄 수는 없습니다. 둘째는, 그런 사람들이 신성한 지식에 때를 묻히지 않고 길이 보존한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숭고한 진리나 상징을 곡해하고, 영적인 일들을 차츰 의인적, 구체적, 조잡한 상상으로 변형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의 관념을 왜소화하고 우상화하는 것이 두번째 원인입니다.
신지학은 불교가 아니다
문 : 당신은 자주 '비교불교'를 말하는데, 그러면 당신들은 전부 불교의 신자입니까?
답 : 음악가의 '모두가 바그너(Wagner)의 숭배자가 아닌 것과 같이, 우리들 전부가 불교도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도이나, 우리들 중에는 힌두교도나 바라문 교도의 사람이 훨씬 많고, 불교도로 개종한 사람보다 기독교도 집에서 태어난 구라파 사람이나 미국 사람인 쪽이 많습니다. '시넷트'씨의 걸작「비교불교」(Esoteric Buddhism)라고 하는 책 이름에서 진정한 의미를 곡해함으로써 이러한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부디즘(Buddhism)이라 하는 말의 철자안에, 'd자'를 두 개가 아닌 하나로 해야 합니다. 부디즘(Buddhism)은, 석가의 종교철학의 '부디즘(Buddhism)'이 아니고, 그저 지혜교(보타, 부디, 지력, 지혜)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신지학은 지혜의 종교입니다.
문 : '카필라성'의 왕자에 의하여 창시된 불교 '붓디즘'이 신지학의 동의어라고 말하는 '지혜교' 붓디즘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 : 천국의 비의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의 비밀의 가르침과, 교회 및 종파의 후세 의식주의와 독단적 신학과의 차이와 똑같은 것입니다. 불타(Buddtha)는 보타(Bodha), 즉 '이해, 지혜에 의하여 개명된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지혜는, 석가가 선택하여 아라한에게만 준 비교적인 가르침의 뿌리, 또는 가지가 되었습니다.
문 : 그러나 어떤 동양학자들은 불타가 비교를 가르쳐주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답 : 그들은, 대자연에는 과학자에게도 감추어져 있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필자는 불타와 그의 제자 '아난다'와의 대화에서 그것을 증명해 보겠습니다. 불타의 비교적인 가르침은 고대 '바라문'의 '굽타 비디야(Gupta Vidya)', 즉 비밀의 지식일 뿐이며, 이런 비밀지식에 이르는 열쇠를(아주 드문 예외를 빼고는) 현대의 후계자들은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비디야(Vidya)는 오늘날, 북방불교 대승파(Mahayana)의 내적인 가르침으로 변하였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동양학을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는 것처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엣킨스(Edkins)의「중국의 불교」특히 "현교파와 비교학파의 장"을 읽어 보시고, 이 문제에 대하여 고대의 세계로부터 전해져 있는 증거와 비교하여 보십시오.
문 : 그렇지만, 신지학의 윤리와 불타의 가르침과는 같은 것이 아닙니까?
답 :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들 윤리는 지혜의 종교혼이며, 말하자면 모든 나라의 비전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의 특성입니다. 그러나 불타는 일반 사람에게 이와 같은 고귀한 윤리를 구체적으로 가르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윤리를, 자신의 공개적 가르침을 기초로 하고 '본질'로 한 것입니다. 여기서 현교적 불교와 다른 모든 종교와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의식주의와 독단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겸하고 있으나, 불교에서는 언제나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윤리이기 때문입니다. 신지학의 윤리와 불교의 윤리가 거의 같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문 : 신지학과 불교에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까?
답 : 신지학과 현대불교와의 한 가지 큰 차이는, 북방불교가 대표하는 현교 불교가 다음 것을 아주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A) 신의 존재 (B) 의식적인 사후의 생활, 또는 인간의 안에 개성을 지속해 가는 자아의식, 적어도 지금 가장 순수한 형의 현교불교라고 생각하고 있는 샴(Siamese)교파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불타의, 일반에게 대한 가르침만으로 말한다면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석가가 바른대로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에 설명합니다. 그러나 불타의 서거 후 불타의 비전을 받은 아라한들이 은퇴해간 나라들에서 생긴 북방불교의 제파는 지금 신지학설이 말하고 있는 것을 모두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신지학설에는 비전에 대한 지식의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북방불교의 열렬한 정통파적 사상 때문에 진리가 얼마나 사문자(死文字)의 희생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문자(死文字)가 됐어도 다른 어떤 교회나 종교의 가르침 보다도 불교는 장대하고 고상하며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신지학은 불교가 아닙니다.
제2장 현교적(顯敎的) 신지학과 비교적(秘敎的) 신지학
근대 신지학 협회의 다른 것과 틀린점
문 : 그러면 신지학설은 불교의 부흥도 아니고, 또, 신플라톤 신지학을 그대로 옮긴 것을 전부 배우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서는, 미극 시카고의 거년(1889년 4월) 신지학회의에서 J. D. 벅(J. D. Buck)의「신지학」에 대하여 쓴 논문에서 인용하는 것이 제일 좋은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존경하는 친구, 벅 박사처럼 신지학의 참다운 본질(Real essence)을 표현하고 이해하신 열기있는 신지학도는 없습니다. 신지학협회는 신지학설을 넓히고 신지학적인 삶을 장려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입니다. 현재의 신지학협회는 이와 같은 성질의 협회로서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필라델피아」협회의「신지학의 사록」Theosophical transactions of philadelphian society)이라고 하는 책을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1897년 런던에서 발행된 것이며 다음과 같은 이름의 책도 가지고 있습니다.「신지학입문 그리스도 비의의 과학」(Introduction to theosoph or the science of the mystery of christ)이 그것인데, 그 내용은 신, 자연, 창조물에 대하여 물적, 영적인 생명의 모든 실제적인 힘의 철학을 포함하고, 가장 탁월한 청정함, 신성함, 복음적 완전함에 이르는 실천적 지침(Guide)입니다. 또, 신성한 안목(眼目, Divine vision) 및 성스러운 천사와 같은 기술, 능력, 기타 재생의 특권 달성을 말하고 있으며, 1855년에 런던에서 출판되었습니다. 다음은 그 책에 쓰여진 머릿말입니다. "대학, 전문학교, 기독교의 학생들에게, 모든 형의 형이상학, 역학, 자연과학의 교수들에게, 일반 교육에 종사하는 남녀나 기본적, 정통적 신앙을 가진 남녀에게, 이신(理紳)론자들, 아리우스파의 사람들(아리우스는 4세기초의 알렉산더 때의 신학자로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였다) 유니타리안 교도들(삼위일체를 인정 않는다.) 스웨덴보그 신봉자들(Swedenborgians), 기타 불완전한 근거없는 교파의 신자들, 합리주의자들, 모든 종류의 회의론자들에게, 옳은 마음을 가진 계명(啓明)한(Just minded and enlightened) 회교도들, 유태 교도들, 동양의 가부장적 종교인에게, 그리고 특히 교양이 없는 사람들에게나 지적인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에게 이 신지학입문의 책을, 말하자면 모든 일들의 기초가되고 신비의 과학을 가장 겸허하게 애정을 받쳐 헌정하는 것입니다." "다음 해(1886년)에「신지학집록」(Theosophical Miscellanies)이라고 하는 600장의 다른 책(다이아몬드체, 도야올타보 판)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도서관 및 대학에 무료배부하기 위하여 500만부만 발행되었습니다. 이런 초기의 여러 가지 운동은 대단히 경건하고 열렬하며, 때묻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교회내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 저작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표현을 쓴 전통적인 형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명한 기독교도 윌리엄 로우(Churchman William Law)의 여러저서에서처럼 그 저작자들은 대단한 경건함과 열성으로 다른 기독교서보다 일반독자들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기독교 성전(聖典)의 깊은 의미를 설명하고 원래의 취지를 추론하고 있으며 신지학적 삶을 예증(例證)하고 전개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작은 얼마 가지 않아 잊어 버리게 되고, 지금은 일반에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성직자를 개준(改俊)시키고 순수한 경건함을 일깨워 주려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이단(異端)이라는 한 마디는 그러한 책을 지금의 유토피아적 책들과 함께 매장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종교개혁 때 로이크린(John Reucklin)은 루터(Martin Luther)의 친구였으나, 그와 같은 시도를 하여 같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정통파 기독교들은 계명 된다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들 개혁자들은, 마치 페스투스(Festus)가 바울(Paul)에게 말한 것처럼, 너무 많이 배우면 미치고, 너무 깊이 알면 위험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필자들의 습성이나 교양 때문에, 그리고 세속적 권력에 의한 종교적 제약 때문에, 웅장한 해설을 거쳐 문제의 핵심에 도달했던 이들 저작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지학적이며, 인간자신의 성질과 영혼의 더높은 생활에 대하여 알려주기에 가장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현재의 신지학 운동은 때때로, 기독교를 불교로 개종시키는 시도(試圖)라고 말해지고 있으나, 그것은 이단(異端)이란 말이 그 공포와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나, 다소 신지학을 이해하고 그와 같은 가르침을 자신들의 생활에 지침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교리는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사회나 시대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모든 인간의 혼이 태어나면서 가진 특권입니다. 정통사상과 같은 것은 개인의 성질과 필요에 의하여, 또 그 사람의 다양한 경험에 따라서 각 개인에 의해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것으로 신지학을 새로운 종교로 상상하고 그 교의와 의식을 알아내려고하는 사람들이 헛수고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지학의 교의는 진리에 대한 충성이며, 그 의식은 진리를 활용함으로써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보편적(普遍的) 형제애(Universal Brotherhood)라고 하는 원칙이 일반에게 여하히 이해되지 않고 있는지, 그리고 그 초월적인 중요성이 얼마나 인식되지 않고 있는지, 하는 것은 신지학에 관한 여러 가지 상반된 의견이나 허구적인 설명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간단히 개설하기는 불충분하지만, 지금까지 말한대로 신지학 협회는 인류의 본질적인 형제애(Brotherhood)라고 하는 하나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조직된 것입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형제애를 신조와 생활의 기반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교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이 동시에 불가(不可)한 것처럼 생각하고, 이 협회가 불교적이며, 반기독교적이라고 맹공격을 당해왔습니다. 신지학은 또한 이 세상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 또는 새로운 이름으로 가장한 옛 신비주의라고 불려져 왔습니다. 애타주의(愛他主義)의 원칙이나 본질적 형제애에 기초를 두고, 그것을 지지하기 위하여 결합한 많은 협회가 여러가지 명칭을 가지고 설립 된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협회가 신지학적이라고 말하며, 현재 신지학 협회의 명칭을 걸고 있는 협회와 같은 원칙과 목적을 가지고 잇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협회들이 모두, 본질적인 교의는 같으나 지엽적(枝葉的)인 사항에는 자의적(恣意的)인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적인 것을 빠뜨려 버렸거나, 무시해서 지엽적인 것에 끌려 들어간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질문에 대해서는 가장 존경받고 열렬한 신지학도 이상으로 더 명백하고 깊이 있는 답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문 : 불교윤리학 이외 귀하는 어떤 가르침을 믿습니까?
답 : 어떤것도 따르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종교를 갖지도 않고 특정철학을 지지하지도 않습니다. 특히 고수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각 종교나 철학에서 발견한 좋은 점들을 취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한번 다른 옛 가르침과 같이 신지학은 현교부문과 비교부문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 : 그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답 : 신지학협회의 회원은 일반적으로 협회의 3가지 목적중 어느 하나, 혹은 그 이상에 공명하여 실행하려고 한다면 어떤 종교나 철학을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 자유입니다. 이 협회는 형제애(Brotherhood)란 생각을 이론적이 아닌 실천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박애적, 과학적인 단체입니다. 회원들은 기독교도이거나, 회교도이거나, 유태교도, 바리새인, 불교도, 바라문, 심령주의자, 유물론자일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회원이라도 박애주의자이거나 학자 즉, 아리안(Aryan)이나, 기타 옛 문헌의 탐구자 또는 심령적인 문제의 연구자라야 합니다. 말하자면 될 수 있는대로 협회의 목적에 작은 힘이 되고, 한 가지라도 실행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원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소수회원, 무소속 회원6으로 성립되어 있는 현교부문의 과반수 회원의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사실상 신지학도가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협회에 입회하면 회원이 되지만, 만물중에 신성한 적합성이 있다는 감각을 갖지 못한 사람이거나, 자기류(自己流)로 신지학을 이해못하는 사람은 신지학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류라는 것은 종파적, 이기적 방법이란 의미입니다. 이런 경우 "행동이 훌륭한 사람은 훌륭하더라"라는 격언이 있지만 "신지학도는 신지학을 실행하는 사람이다."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신지학도와 신지학 협회 회원(會員)
문 : 그것은 내가 알기로는 보통 회원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지학의 비교적 연구를 하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 사람들이 진정한 신지학도입니까?
답 : 신지학도라는 것은 자신이 그렇다고 하는 것을 증명할 때까지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클럽에 들어가서 가능한한 엄격히 비교(Occult) 단체의 규칙을 실행할 것을 서약합니다. 그것은 제일 먼저 자신의 인격을 아주 버리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말하자면 서약한 회원은 완전히 애타주의자가 되어, 결코 자기 자신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비교부문의 동료들과 어울리고, 동포의 행복을 생각하며 자기 자신의 허영이나, 교만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비밀의 가르침이 자신에게 무엇이든지 금욕의 생활을 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업무를 지면서 극기의 엄격한 도덕적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지학협회에는 신성한 신지학도가 몇명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지학협회와 영적인 클럽 이외에는 신지학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상으로 신지학협회의 보통 회원들 속에는 확실히 더 많은 진정한 신지학도가 있는 것입니다.
문 : 그러면 소위 신지학협회에 입회하면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입회하는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답 : 비교적 가르침 즉, 지혜로운 종교의 진정한 교의를 얻는다는 이익, 그리고 또 진정한 목적을 실행한다면 상호부조와 같은 동정에서 나오는 많은 도움을 받는다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합도 힘이며 조화입니다. 잘 조절되어 동시에 행하는 노력은 놀라운 것을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존재한 이래 모든 협회, 공동체의 비결이었습니다.
문 : 그러나 상식이 있고, 일사전념(一事專念)하는 인간, 불요불굴의 에너지와 인내력이 있는 사람이 혼자서 노력해 비교도(秘敎徒, Occultist) 혹은 사도(使徒, Adeft)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은 만의 하나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연금술(Alchemy)이나 중세의 신지학을 평이한 말로 설명한 비교주의(秘敎主義), 혹은 신의 기적(Theurgy)에 관한 서적이 오늘 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상징입니다. 비유로 되어 있으며, 그것을 해독할 열쇠가 서방에서는 수세기간 망실되어 있습니다. 읽거나, 배우려고 해도 바른 의미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무의식적 흑마술(黑魔術)에 빠져들어가던가, 가장 무방비한 상태이므로 영매같은 것이 될 큰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승으로부터 비전을 받지 않는 사람은 혼자서는 위험한 연구를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자신들의 주위를 둘러보십시요. 문명사회의 3분의 2는 신지학이나 비교(Occultism)나, 심령학이나, 카발라(Kabala)에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조소(嘲笑) 합니다. 나머지 3분의 1은 가장 이질적이며 그것과는 반대의 문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혹자는 신비주의를 믿고 초자연론까지 믿으며, 개인 마음대로 믿고 있습니다. 다른 자들은 카발라나 심령현상(Psychism), 최면술, 심령주의 등 무언가를 믿으며, 신비주의의 연구에 독력(獨力)으로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하는 일들이 최고의 지식행사이며, 완벽한 사도(Adeft)라고 문외한(門外漢)들에게 주장하지만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기본적인 비교(Occult) 원칙에 찬동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구미에서는 접근하기 쉬운 '신비주의(Occultism)'의 현교적인 가르침에 속하는 일정법칙과 체계를 가진 유일한 분파인 진정한 점성술 조차도 잘 알려져 있지 않는 형편이고, 진정한 비교주의(Occultism)라는 것이 어떤 뜻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대의 지혜가 카발라(Kabala)나 유태의 조하르(Zohar)라는 책에만 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각각 유태교의 랍비적 방법의 사문자에 따라 독자적인 방법으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다른 자들은 스웨덴보그(Swedenborg)나 뵈메(Boehme)를 최고지(最高智)의 구극적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최면술을 고대 마법의 대비결이라고 봅니다. 자기들의 학설을 실행으로 옮긴 사람들은 모두가 무지한 탓으로 흑마술(黑魔術)에 급속히 휩쓸려 들어갑니다. 그들은 진실과 허위를 식별하는 시험법이나 표준이 없으므로 흑마술(黑魔術)에서 면한다면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문 : 신지학협회의 영적 클럽은 진정한 비전을 받은 사람이나, 비밀지혜의 대사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고 생각해도 됩니까?
답 : 직접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대사님을 개인적으로 만날 필요는 없습니다. 몇 년 동안 대사님의 지도 아래서 배우고, 자신의 평생을 대사님에게 봉사한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대사님의 교훈을 받게 된다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훈을 받은 사람이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에게 지식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토막의 진정한 지식은 소화를 하지 못함으로서 오해를 일으키는 많은 학식보다 더 좋습니다. 1온스의 금은 일톤(一吨)의 먼지 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문 : 그러나 그 1온스가 순금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답 : 나무는 과실의 나쁨에서 분별되고, 체계는 그 결과에 따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됩니다. 만일 역사상의 어떤 비교학도가 동료나 지도받을 대사없이 사카스(Ammonius Saccus) 또는 플로티누스(Plotinus) 같은 성스러운 사도가 되었거나, 영매도 되지 않고 자아 도취된 이상심리도 되지 않고, 속임수도 쓰지 않으며 성 제르메인(St. Germain)이 해낸 이적(異跡)을 행했다는 것을 우리들의 반대자들이 증명해 보인다면, 그때에는 우리들이 틀렸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는 신지학도는 신성과학의 전통에서 전해지는 이미 시험된 자연법칙에 따르고자 합니다. 거의 연금술(Alchemy)이나 비교(Occultism)에 근접한 화학이나 물리학에서 위대한 발명을 한 신비가들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천재의 힘으로 지금 잃어버린 '신비의 말'의 알파벳(Alphabet)을 전부는 아니지만 재발견하고, 헤브라이어의 권철(卷鐵)을 정확하게 잃어낼 수 있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또 대자연의 감추어진 비밀을 놀라운 탁견(卓見)으로 잡아 낸 투시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모두 전문가입니다. 한 사람은 이론적 발명가였고 또 한 사람은 헤브라이 사람으로서 카발라신도(Sectarian Kabalist)였고, 세번째 사람은 자기 자신의 특수한 과학이나 종교 외에도 모두를 부정하는 근대적 스웨덴보그(Swedenborg)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전세계, 또는 한 나라 혹은 자기 자신에게 조차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과의(醫)나 외과의(醫)를 배우는 영국의과대학에서 몇 사람의 치료사를 제외하면, 자신의 과학인술만으로 인류를 살린 사람은 없습니다. 주문에 의하지 않고 약초에 의하여 놀라운 치료를 해낸 옛날의 칼디스(Chaldees)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기후조건이나, 환경 아래서도 병인을 고치고, 죽은 자를 소생시킨 타이아나(Thana)의 아폴로니우스(Apdolionius)와 같은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구미에서 약초로서 병을 고치는 전문가가 몇 사람 있는 것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아폴로니우스와 같은 사람, 죽음에서 살리는 요가 비밀이 지금도 아시아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 : 그와 같은 치료의 달인을 만드는 것이 신지학의 목적입니까?
답 : 신지학의 목적은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큰 목적은 인간의 도덕적, 육체적, 모든 형태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육체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보다 도덕적 고통을 덜어주는 편이 훨씬 필요한 것이라 믿습니다. 신지학윤리의 가르침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만약 육체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한다면 혼의 정화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고의 경우를 제외하면, 병은 모두가 유전적인 것입니다. 이기적 목적이나, 개인적 야심, 교만, 허영의 만족을 위하여 비교(Occultism)를 배운다면 결코 진정한 곳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고통 받는 인류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또 비교철학의 한 부문만을 배운다고 비교도(Occultist)가 될 수는 없습니다. 통달(通達, Master)하지 못할지라도 전부를 배워야 합니다.
문 : 그러면 비전적 과학을 배우는 사람에게만 이런 중요 목적의 달성을 위한 도움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원한다면 모두 평회원(Lay member)에게도 일반적 가르침을 받을 권리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위 활동요원(Working member)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대략 신지학의 게으름뱅이로써 그대로 지내고 싶어합니다. 만약 현교와 비교를 구분하는 한계, 즉 맹목적인 마술과 의식적 마술을 구분하는 한계를 범하지만 않는다면, 신지학협회에서는 개인적 연구를 장려한다는 것을 알아두기 바랍니다.
신지학과 비교(秘敎)의 차이점
문 : 귀하는 신지학과 비교(Occultism)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같은 것입니까?
답 : 절대 같지 않습니다. 협회의 회원이거나 아니거나 전연 비교도(Occultist)가 아니더라도 진정으로 좋은 신지학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지학도가 아니고서는 진정한 비교도(Occultist)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신지학도가 아니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흑마술사 밖에 될 수 없습니다.
문 : 어떤 뜻입니까?
답 : 진정한 신지학도는 가장 고상한 도덕적 이념을 실천해야 하며, 전인류의 화합을 실현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앞에서 말했습니다. 만약 비교도가 이와 같은 것을 모두 이행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이기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이 사람이 보통 사람 보다 더 실제적인 힘을 얻었다면, 이 사람은 세계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통 사람 보다 훨씬 위험한 적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문 : 그러면 비교도(徒)란 다른 사람 보다 많은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것 뿐입니까?
답 : 만약 그 사람이 이름만이 아닌 실행력이 있고, 진정으로 박학한 비교도(Occultist)라면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비전과학(Occult Science)이란 것은 백과사전에 쓰여져 있는 것과 같이 "연금술(Alchemy), 마술, 사령(死靈)과의 고통에 의한 점쟁이나, 점성술과 같은 비전적 특성이나, 초능력의 가상적인 작용이나, 영향에 관계가 있는 중세기의 상상적 과학이 아닙니다. 비전과학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극히 위험한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비전과학은 자연사물에 숨겨진 잠재력을 가르치고, 어떤 '인간에게 잠재하고 있는' 감추어져 있는 힘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줍니다. 그리하여 무시한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이익을 그에게 안겨 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일반화되어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어 있는 최면술은 이 점을 설명하기에 좋은 보기입니다. 최면술의 힘은 아주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그것은 '메스머리즘(Mesmerism)'이 뿌리가 되어있습니다. 지금의 유능한 최면술사는 인간을 자신도 모르게 바보로 만들어 버리고, 죄를 범하도록 하고, 최면술사의 대리인으로 만들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의 모든 일을 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파렴치한 사람의 손에 의하여 운용된다면 무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비교(Occultism)의 조그만 부분의 하나에 불과한 것임을 명심해 주기 바랍니다.
문 : 그러나 최고의 교양을 갖춘 박학(博學)한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은 비전과학, 마법, 마술을 옛날의 무지에서 오는 미신의 유물이라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답 : 그러한 귀하의 말은 두 가지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들 중의 '가장 교양있는 박학'한 사람들은 기독교나, 기타 모든 종교를 무지와 미신의 유물이라 생각합니다. 여하간 지금 세상은 최면술을 믿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들은 가장 교양있는 사람들이면서 신지학이나 심령현상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나 맹목적 광신자를 제외하면 그 사람들 가운데 누가 성서에 쓰여져 있는 기적을 믿으려 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차이가 생기는 점입니다. 성스러운 기적을 포함한 초자연적인 것을 믿는 매우 선량하고 순수한 신지학도들이 있으나 비교도들은 아무도 그런 것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교도들은 자연의 숨겨진 작용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과학적 신지학을 실행합니다. 그러나 비교(Occultism)의 지식을 갖지 않고 이상(Abnormal)한 능력을 훈련하는 신지학도는 영매라고 하는 위험한 형태로 기울어질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신지학을 지키고,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윤리를 지키면서 그런 능력을 훈련하는 사람은 암흑 속에서도 열심이고 진지하기 때문에 맹목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지학도이거나 심령주의자거나 가령 메스메리즘(Mesmerism), 또는 물리적 현상을 일으키는 비밀 등 비전과학의 어느 한 부문이라도 수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같은 능력이 나오는 원리를 지식으로서 충분히 철학적으로 소화가 되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태풍 속에 바다로 나가 있는 조각배와 같은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지학과 심령주의의 차이점
문 : 그러면 당신은 심령주의를 믿지 않습니까?
답 : 심령주의자들이 무엇인가 이상한 현상이 보이는 것을 심령주의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전연 심령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심령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현상들이 모두 망자(亡者)의 혼에 의하여 일어나며,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친척이 죽은 영이 행하는 것으로, 이 영들은 자기가 사랑한 사람들과 연결하기 위해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점을 확실히 부정합니다. 사자의 영은 다음에 말하겠으나 아주 드문 예외적인 경우이외에는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우리들은 주장합니다. 또 아주 주관적인 방법에 의한 것 이외에 영은 인간과 통신할 수가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은 육신이 없는 인간의 유령일 뿐입니다. 그러나 심령적(Psychic)으로 말하자면 '영적' 심령주의('Spiritual' Spiritualism)는 의심할 여지없이 굳게 믿습니다.
문 : 영적 현상도 부정하는 것입니까?
답 : 의식적인 사기극이 아니라면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 : 그러면 심령현상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답 :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그와 같은 현상의 원인은 심령주의자가 믿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소위 '물질화현상'(Materializations)의 등장인물은 보통(Usually) 영매나, 거기에 있는 누구인가의 '아스트랄체'(Astral body) 즉 복체(複體)입니다. '아스트랄체'는 석판(石板)에 글자를 나타내거나(Slate Writing) 유명한 영매식 현상 등을 만들어내거나, 작동시키는 힘이 됩니다.
문 : 귀하는 보통(普通)이라고 말하는데 보통이 아닌 기타의 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그것은 현상의 성질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때는'아스트랄 잔여'(Astral remains) 즉, 사라져 버린 인물들의 '카마로카' 껍질('Kamalokic' Shell)일 수도 있고, 어떤 때에는 4대정령(Elementals)일 수도 있습니다. 영(Spirit)이란 말은 다양하고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영이란 말로 심령주의자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는 정말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에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물리적 현상이 갱생하는 자아(Reincarnating ego), 영적이고 불사하는 개별성(Spiritual and immortal individuality)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가설에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는 의식적 개별성이 물질화 할 수는 없고, 그 자체의 '멘탈 데봐챠닉'(Mental devachanic)의 영역으로부터 지상의 객관성으로 돌아올 수도 없습니다.
문 : 그러나 영혼들(Spirits)로부터 받은 많은 통신은 지능을 나타내고 있을 뿐 아니라 영매가 모르는 사실의 지식, 그리고 때로는 연구자나 방청자의 마음에 의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답 : 귀하가 말씀하시는 그 지능과 지식이 반드시 영(Spirit)의 것이며,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혼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증거도 될 것이 없습니다. 몽유병자는 음악이나 수학을 배운 적이 없는데 망아(忘我, Trance)의 상태에서 작곡을 하기도 하고, 시를 쓰기도 하며 수학 문제를 풀어보이는 예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를 내면 지적인 답을 하고, 때로는 눈을 뜨고 있을 때 전혀 모르는 히브리어나, 라틴어와 같은 말을 하는 예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와같은 것은 깊이 잠든 상태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을 귀하는 영(Spirit)이 한 것이라 주장할 수 있습니까?
문 :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까?
답 :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단언합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성의 불꽃(Divine spark)은 우주대영(Universal Spirit)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므로 우리들의 영적 아(我)(Spiritual self), 즉 영적 자신은 실제적으로 전지(全知, Comniscient)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물질(物質)이라는 방해물 때문에 그 지식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방해물을 많이 제거할수록 즉 육체가 무력해질수록 안에 있는 아(我)(inner self) : (자신)는 그 차원에서 더 많은 것을 나타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가 무력하여진다는 것은 깊은 수면이나 깊은 망아(忘我, Trance 三昧), 또는 병을 앓고 있을 경우에는 육체의 독자적 활동과 의식이 무력화 해짐을 말합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부정할 수 없는 지성과 지식을 나타낸 더 높은 질서(秩序, Higher order)의 놀라운 현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더 낮은 질서(Lower order), 현상 즉 이러한 물리적 현상이나 보통 영의 평범한 말에 대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만 설명을 하려고 해도 현재 허용하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지면과 시간이 필요하므로 보류합니다. 우리들은 심령주의자들의 신념에 대해 다른 신앙들과 같이 간섭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을 입증하는 의무(Onus probandi)는 영(Spirit)을 믿는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이 순간 더 높은 부류의 현상은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을 통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하는 한편 심령주의자의 지도자들과 그들 중 가장 박식하고 교양있는 사람들은 누구 보다 더 먼저 모든 현상이 영혼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들은 앞으로 차츰 진리견해를 인정하게 될 것이나 그때까지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생각을 그들에게 수락시킬 권리도 의사도 없습니다. 순수한 이상심령(Psychic)과 심령적 현상(Spiritual manufestations)의 경우에도 그럴 생각은 더욱 없으며, 우리는 살아있는 인간의 영과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의 영과 상호 통신을 믿습니다.
문 : 그것은 당신이 심령주의의 철학을 전부 부정한다는 말입니까?
답 : 심령주의자들의 미세한 학설을 '철학'이라 한다면 부정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심령주의자는 철학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지성있는 열렬한 변호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령주의의 근본적이고 반박할 수 없는 유일한 진리, 즉 그러한 현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나 지성에 통제당하는 영매를 통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헉슬리(Huxley big toe) 학파'의 맹목적인 유물주의자 외에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심령주의의 철학에 대하여「Light」(光)라고 하는 잡지의 유능한 편집자가 심령주의와 그 철학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소개합니다. 심령주의자 중에는 엠 에이 옥슨(M.A. Oxen)보다 더 똑똑하고 더 헌신적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많지 않은 철학적 심령주의자 중의 한 사람인 옥슨(Oxen)은 심령주의의 무조직성과 맹목적이고 완고한 신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므로 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교적 무의미한 다른 모든 지식에 비하면 우리들은 훌륭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지식과 내세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비난하려고 한다면 보통 심령주의자는 화를 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약한 손을 뻗어서 암흑의 미래를 더듬어 찾으려고 하는데 그는 해도를 가지고 선행을 알고 있는 것 같이 당당히 걸어갑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경건한 희망에만 마음을 두고 원래부터 주어진 신앙에 만족하고 있는데 대하여 그는 사람들이 단순히 믿고 있으며 자신은 자신의 풍부한 지식으로 희미한 신조를 더 확고히 구조해 나갈 수 있다고 자만합니다." 또 그는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기대하는 것에 대해서도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바라고 있는 것을 나는 엄밀한 과학적 방법으로 체험적인 증명을 할 수 있습니다. 옛날의 신앙은 쇠퇴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그만 두고 헤어지십시요. 낡은 신앙에는 진리도 있으나 허위도 있습니다. 논증된 사실이란 확실한 기초위에서 세워져야 비로소 당신의 상부구조는 견고하게 됩니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늙은 신앙은 모두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붕괴시키는 신앙은 그만 두십시요". 실제, 이러한 자신에 넘치는 사람과 만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극히 이상하고 아주 기가 막혀 버릴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논거에 대단한 확신이 있으므로 자신이 경험한 사실에 대한 다른 사람의 해석을 논증하기에 곤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선래의 지혜가 자신이 옳게 입증했다고 생각하며, 그런 지혜의 연구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같은 패거리의 심령주의자들과도 의견이 맞지 않습니다. 남편과 같이 교회를 세운 나이 많은 스코틀랜드 부인의 말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그들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그들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그녀는 가지고 있으나 남편 제미(Jarmie)는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부인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심령주의자는 무수한 분파로 갈라지고, 또 부분으로 갈라져서 그것이 또 세분되어 있어 서로가 머리를 흔들고 서로가 상대를 의심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결합은 힘이 되고 분열은 약해지고 실패하는 것이라는 인간의 집단적인 경험은 견고한 것이고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협력하여 훈련하고 단련하면 오합지졸의 군대가 되며, 그들 각자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생활에서 조직은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고 이익과 발전의 성공을 가져다 줍니다. 방법의 결여, 무계획, 닥치는 대로 하는 일, 계속적 에너지 훈련이 없는 노력 등은 실패가 뻔한 것입니다. 인간성의 목소리는 이 진리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심령주의자는 이것을 받아들여 결론에 따라서 행동하겠습니까?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령학도는 조직하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이웃사람에게 골치거리가 됩니다. (「Light」.1889년 6월 22일자에서)
문 : 신지학협회는 원래 심령주의를 부수고 인간 개성의 존속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나는 들었는데요?
답 : 그것은 잘못 들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념은 모두 불사(不死)의 개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인격과 개별성(Indivisuality)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구미의 심리학자들은 이 두 가지를 명백히 구별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동양철학을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이 차이를 아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신지학과 심령주의의 분기점(分岐點)의 기반이 됩니다. 비록 일부의 심령주의자들은 적의를 한층 우리들에게 가질런지 모르겠으나 나는 여기서 말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심령주의라고 말하는 이름의 세계가 지금 일반 사람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 같은 단순한 초월적 유물론에 불과한 것이나, 참되고 순수한 심령주의란 것은 신지학이라는 것입니다.
문 : 당신이 생각하는 것을 좀 더 확실히 설명하십시요.
답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지학의 가르침은 '영'과 물질의 동일성을 주장하며, '영'은 잠재적인 물질이며, 물질은 결정화(結晶化)한 '영'에 불과힙니다. (예로서 얼음은 고체화한 수증기라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물의 큰 뿌리는 영원인 상태의 '영'이 아니고 말하자면 초월(超越) '영'(Meta spirit : 눈에 보이는 고형(固形)의 물질은 그것이 주기적으로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이므로 '영'이라는 용어(Term)는 진정한 개별성(True Indivisuality)에만 적용할 수 있다고 우리는 주장합니다.
문 : 그렇다면 이 '진정한 개별성'과 우리들 모두가 의식하고 있는 나(I) 또는 자아(ego)란 말은 구별될 수 있습니까?
답 :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이전에 우리는 당신이 말하는 나(I) 또는 자아(ego)의 뜻에 대하여 먼저 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들은 나는 나이다라고 하는 자아의식의 단순한 사실, 단순한 느낌과 나는 스미스이다 라든가 브라운 부인이다라고 하는 복잡한 생각을 구별합니다. 우리들은 같은 자아(ego)가 자주 태어난다는 즉 윤회를 믿고 있으므로 이런 구별은 전사상의 기본적인 축(軸)이 되는 것입니다. '스미스'씨라는 말은 기억이라는 실(糸)에 꿰어진 일상생활 경험의 긴 연속을 뜻하며 '스미스'씨라는 것이 스미스씨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귀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험들은 진정한 나(I) 또는 자아(ego)가 아니며, '스미스씨' 자신에게도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일상 경험의 대부분을 잊어버리고 남아 있는 경험의 기억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만 그에게 자아의식을 느끼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신지학도는 이 경험의 다발(東)(bundle)ㅡ이것을 위인격(偉人格)(유한하고 사라지기 쉽기 때문에)이라고 한다ㅡ과 '나는 나'라는 느낌이 울어나는 인간만의 요소(Element in man)를 구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나'(I am I)이며 우리가 말하는 참다운 개별성(True Indivisuality)입니다. 이 자아(ego) 혹은 개별성은 마치 배우와 같이 인생이란 무대의 여러 부분에서 연기를 합니다. 하나의 자아(ego)가 이 세상에 새롭게 태어날 때마다 그것을 극장 무대의 하루밤이라고 생각합시다. 그 배우 즉 자아는 어느 밤에는 '맥베스'(Macbeth)로서, 다음의 밤에는 '샤록크'(Shylock)가 되며, 그 다음 밤에는 '로미오'(Romeo) 그 다음 넷째 밤에는 '햄릿(Hamlet)이나 '리어왕'(King Lear)으로 분장하여 나타나서 끝내는 화신의 전주기를 끝마치는 것입니다. 자아(Ego)는 요정(妖精) '에리엘'(ariel)ㅡ('셰익스피어'의 '템패스트'(Tempest) 나오는 공기의 정(精)ㅡ이나 ('퍽'(PUCLE) 셰익스피어 한 여름밤의 꿈에 나오는 장난꾸러기 소녀요정)으로서 생명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다음에 병사나 식모같은 단역을 맡고, 그리하여 세류를 말하는 역할에 올라가고, 주역을 하고, 간혹 중요하지 않은 역할도 하다가 끝내는 마술사 '프로스페로'(Prospero)를 맡고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문 : 알았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자아(Ego)는 죽은 후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배우가 만약에 자신의 개별성을 보유하고 있다면 이전에 연기를 한 무대에 돌아오고 싶으면 자유스럽게 돌아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답 : 그것을 우리들은 부정합니다. 이 세상에 그와 같은 귀환은 죽은 다음에 순수한 최고의 행복의 상태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교제한 다른 사람의 과실이나 자신의 환경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였기 때문에, 인생이란 무거운 짐을 다시 져야 하기에 앞서 최고의 행복에는 못미쳐도 완전한 휴식과 정온(靜穩)을 받을 권리가 확실히 주어져 있습니다. ※ 이것은 후에 자세히 말하겠습니다.7
신지학은 왜 받아들여지는가?
문 : 어느 정도 알겠지만, 신지학의 가르침은 심령주의나 현대 종교적인 생각보다 아주 복잡하며, 형이상학적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지지하여 일으킨 신지학체계가 이러한 흥미와 적의를 일으키게 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답 : 그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다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원인은 있으나 첫째로 현재 과학교사 사이에 넓게 퍼져 있는 조잡한 유물론에서 반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둘째, 여러 가지 기독교회의 인공적 신학에 대한 불만과 나날이 늘어나는 교파나 그들간의 반목에 대한 불만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조가 분명히 자가당착이고 상호모순이며 실증되지 않은 일은 진실일 수 없다는 인식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째, 이들에 대한 이와 같은 당연한 불신은 그 종교들이 도덕을 보지(保持)하지 못하고 사회와 일반 민중을 정화하는 일에 완전하게 실패했기 때문에 가중되어 갈 뿐입니다. 넷째로, 과학적이며 단순한 추측이 아닌 철학적 종교적 체계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일반 민중들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그러한 체계는 근대신앙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간 옛날의 가르침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신념일 것입니다.
문 : 그러면 이 체계가 어떻게 하여 지금에 와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답 : 그저 때가 익었기(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거나, 또 어디에 감추어 두더라도,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아주 많은 학도가 단호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적어도 그 진리의 어느 부분을 공개하기로 이 체계의 보관자들은 허락했던 것입니다. 만약 신지학협회가 생기는 것이 20~30년만 늦었더라면 지금쯤은 문명국가의 반쯤은 유물론자가 되고 남은 반은 신인동형론자(神人同形說者)나 현상론자(現象論者, Phenomenalists)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문 : 신지학을 어떤 계시라고 생각해야 합니까?
답 :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더 높은 초월적, 적어도 초인간적 존재에서 내리는 새로운, 직접적 계시라고 하는 의미에서도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오랜 옛 진리를 알지 못한 사람들이나 그와 같은 옛 지식이 있었으며 그것이 오늘까지 보지(保持)되어 왔다는 것조차 모르던 사람들에게 그 오래된 옛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을 뿐입니다.
문 : 당신은 박해(persecution)를 받았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진리가 신지학에서 표명되는 것이라면 왜 그러한 반대를 만나거나, 일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까?
답 : 이것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사람들이 혁신(innovations)이라는 것에 증오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기주의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며 방해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만약 가장 큰 진리가 아주 작은 위안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이기주의는 그 가장 큰 진리보다 편하고 고충이 없는 거짓쪽을 택하며, 바로 앞에 이익과 보수를 얻을 수 없는 경우에 지능타성(知能惰性)의 힘(Power of mental inertia)은 강한 것입니다. 현대는 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물질적입니다. 더구나 신지학의 가르침은 친숙하지 않다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교의가 너무도 심원하며 그 교의에 어떤 부분을 여러 종파가 가장 소중하게 여겨온 인간들이 즐기는 것, 즉 세속적 신앙의 핵에 파고 들어가 있는 것과 정면으로 반대됩니다. 그에 더하여 영적 클럽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대단한 개인적 노력과 완전 청정된 생활을 강요당하며, 그리고 아주 비이기적인 율(律)에 관심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왜 신지학이 지금까지 완만하게 성장 해 오고 있는가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지학은 본질적으로 보면, 고통받는 사람들, 인생의 흙탕물 속에서 구제될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철학같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적, 도덕적인 체계의 역사를 보더라도 새로히 어떤 낯선 고장에 소개된다면 반계몽주의나 이기주의가 나서서 모든 방해를 하며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실로 '혁명자의 관은 형극(荊棘)의 관'입니다. 아주 오래된 나쁜 인습을 부셔버린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각오해야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 : 지금까지는 모두 신지학의 윤리 및 철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신지학 협회의 목적, 규칙에 대하여 일반적인 생각을 가르쳐 주십시오.
답 : 그것은 아무 비밀로 된 것이 없습니다. 질문하면 정확하게 답하겠습니다.
문 : 당신들은 선서를 하고 누설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듣고 있습니다.
답 : 신비적, 비교적인 부분 뿐입니다.
문 : 어떤 회원은 탈퇴하면 선서를 지키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과연 그런가요?
답 : 그것은 그런 사람들의 신의감이 결여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어찌하여 그들이 옳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뉴욕의 우리들 신지학 기관지「도」(道)는 그와 같은 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어떤 병사가 선약이나 규칙을 위반하여 재판을 받고 군대에서 추방되었다고 하자, 자신이 자초한 재판과 전부터 확실히 알고 있던 처벌을 노엽게 여겨 그 병사는 전의 상관에게 보복으로 스파이나 배신자가 되어 적에게 정보를 흘리고, 자신이 벌을 받았으므로 군대에 충절의 서약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다"고 하면, 그 사람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비겁자라고 말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문 :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답 : 그것은 그런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좋다면 이 문제는 후에 말하기로 합시다.8
제3장 신지학 협회의 활동체계
협회의 목적
문 : 신지학협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 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1) 인종, 피부 색, 신앙의 차별을 하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 동료애의 핵을 만드는 것.
2) '아리안'(Aryan) 및 다른 성전의 연구, 세계의 종교 및 과학의 연구를 증진하며 고대 아시아의 문헌 즉 바라문 불교 및 배화교가 가진 철학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것.
3) 모든 면에서 자연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를 탐구하고, 또 특히 인간 안에 잠재된 심리적 및 영적인 여러 힘을 연구하는 것이 광의로 언명한 신지학의 세 가지 주요 목적입니다.
문 : 협회의 목적에 대하여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답 : 세 가지의 목적을 각각 필요에 따라 여러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문 : 그러면 처음 것부터 시작합시다. 매우 다양화되어 있는 종교, 습관, 신앙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종들 속에서 동료애라고 하는 감정을 추진하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답 : 귀하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한 가지 더 추가 하겠습니다. 바리새교도와 유태인의 두 종족 외에도 서로 다른 국가의 국민들이 대립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 내부에서도 서로 반목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문명화된 기독교국 사이에 가장 현저합니다. 그러므로 협회의 첫째 목적이 귀하에게는 유토피아(Utopia)로 보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문 :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답 :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지만 보편적 동포애를 현재의 유토피아로 생각하는 원인을 제거해야 할 필요에 대해서는 많은 할 말이 있습니다.
문 : 당신은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 : 첫째, 인간본성이 가지고 있는 이기주의 입니다. 이 이기주의가 근절되지 않고 장려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하는 현대의 종교 교육에 의하여 잔인하게 저항도 못할 기분으로 날로 강해지고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정의나 부정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유태의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완전히 오도되었습니다. 예수가 타인을 사랑하라고 한 모든 애타주의가 단순한 강단에서의 설교제목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세의 성서에서 말하는 실제적 이기주의 격언에 반대한 '그리스도'의 좋은 설교는 사라지고 '모세'의 격언은 구미 여러 국민의 가장 깊숙한 생활 속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는 당신들 법칙의 제1조가 되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나는 두려움없이 공공연히 기독교의 교의나 기타 가르침의 타락을 근절할 수 있는 것은 신지학 뿐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 공통의 기원(起源)
문 : 어떻게 근절하려는 것입니까?
답 : 다음과 같은 논리적, 철학적, 형이상학적 및 과학적 근거에 의합니다.
말하자면,
1) 인간은 모두 영적, 육체적으로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지학의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2) 인류는 본질적으로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고 그 본질은 신이나 대자연이나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무한한 것이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유일한 것입니다. 따라서 한 국가, 한 개인에게 영향을 주면 다른 국가들이나 모든 개인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연못에 돌을 던지면 그것으로 머지않아 그 못 안에 있는 물이 한 방울도 남지 않고 움직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문 :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닌 범신론적 개념인 것 같습니다.
답 : 귀하의 오해는 그 점에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적인 것이 아닌 순수한 기독교적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성서 국민은 그런 생각을 무시하려고 합니다.
문 : 그것은 덮어 놓고 하는 부당한 비난입니다. 그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증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답 :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바로 손앞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서로가 사랑하라", "그대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한다면 무엇을 보답으로 얻겠는가?" 세리(稅吏)9에게도 그렇게 해야 되지 않느냐? 형제들끼리만 인사를 나눈다면 무엇이 좋겠느냐, 이방인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 그리고 창세기 9장 25절에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저주 있으리(Cursed be Canaan)! 그대들은 하인들의 하인이 되어 그 형제의 종이 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도 성서주의자(聖書主義者)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가르침보다 모세의 법칙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구약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그들의 정욕, 정복욕, 병합욕 등을 부채질하여 그들이 열등하다고하는 인종들에게 그런 욕구를 발휘하도록 합니다. 창세기의 이런 극악무도한 흐름에 따라 어떤 범죄가 저질러졌을까요? 불충분하지만 역사만이 어느 정도 말해주고 있습니다.10
문 : 귀하는 우리들의 육체적 기원이 같다는 것을 과학에서 증명하고 영적 기원은 지혜의 종교에서 증명했다고 말했는데, 진화론자들이 대단한 우애(友愛)를 표시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답 :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유물적 체계의 결함을 지적하며 우리 신지학의 정당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영혼 즉 성스러운 본질을 가지지 못한 물질은 인간심(Human heart)에게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지학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참답고 불구(不拘)인 인간의 영과 혼의 동일성은 이미 증명되고 우리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려 우리를 참다운 자애와 형제적 선의의 먼 여정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문 : 그러나 인간 공통의 기원을 신지학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답 : 객관적 및 주관적인 모든 자연의 근원, 또 그외에 보이고 안 보이는 우주의 모든 근원은 지금이나, 과거나, 미래에서, 유일한 본질이며 거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어 그것으로 돌아간다고 가르쳐 줌으로써 설명합니다. 이것은 '베단타'(Vedantin)파와 불교에서만 완전히 설명하고 있는 '아리안' 철학입니다. 이런 목적을 말하고 여러 가지 실천적 방법으로 모든 나라에 비종파적 교육을 넓혀가는 것이 신지학도의 의무입니다.
문 : 이것 외에 신지학협회의 회원이 해야할 성문화된 규칙이 있습니까? 물질계에서 말입니다.
답 : 국가간에 우애적인 마음을 눈뜨게 하기 위해 우리들은 조언이나 정보로서, 그리고 모든 훌륭한 개인이나 협회와의 협력을 통하여 유익한 기술이나 생산물의 국제적 교환을 도와야 합니다. 여기에는 협회나 그 협회 회원이나 협력적 봉사에 대하여 이익이나 커미션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야 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에드워드 벨라미'(Esward Bellamy)의 훌륭한 저서「돌아보건데」(Looking Backwards) 안에 쓰여져 있는 협회의 조직은 보편적 동포애의 완전한 현실의 위대한 첫걸음이 되는 신지학적 생각을 성공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의 묘사가 완벽하지는 않으나 그것은 이기주의가 살아서 사람들의 마음(Heart) 속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단결과 상호동포애의 마음에서 극복되어 왔으며 거기에 쓰여진 인생체계는 이기주의를 만들어 내고 기르는 원인을 최소한도로 줄여가고 있습니다.
문 : 그러면 신지학도로서 귀하는 그와 같은 이상을 실현하는데 관여하고 있습니까?
답 : 물론입니다. 우리들은 행동으로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벨라미'의 책이 출판된 이후, 미국에서 일어난 민족주의자의 클럽이나 회합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그와 같은 클럽이나 회합이 많아져 가고 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그렇게 되어 갈 것입니다. 이와 같은 클럽이나 회합은 처음에 신지학도가 시작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인 보스톤(Boston)의 민족주의클럽의 회장과 비서는 신지학도이고, 역원의 다수가 신지학협회의 회원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클럽이나 회합과 지금 형성되고 있는 조직에 신지학과 신지학협회의 영향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제일 기본적인 원칙으로서 신지학의 가르침인 인류의 동포애를 제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원칙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동포애라고 하는 원리는 인간의 성질과 동물성질의 차이를 나타내는, 세계진보를 결정하는 하나의 영원한 진리입니다. 이 이상으로 신지학적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직 충분하지 못합니다. 이와 함께 필요한 것은 인류의 근원이 하나라면 여러 종교에 나타나 있는 진리 또한 하나라야 한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 유태교는 제외한다. 카발라(Kabala)에서도 그와 같은 진리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문 : 이러한 종교의 공통적인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귀하의 설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리적, 육체적 차원에서 이 동포애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습니까?
답 : 첫째로 형이상학 차원의 진리는 물질계에서도 진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종교적 차이 이상의 증오와 분쟁의 근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종파나 다른 종파가 자기들만이 절대적 진리의 유일한 소유자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쪽은 아주 무지의 무리들이나, 악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됩니다. 여하한 종교도 완전한 진리를 가진 것은 없으므로 서로 보완해야 하고, 완전한 진리는 모든 생각을 종합해야 비로소 발견될 것입니다. 그런 후 각 종교인의 허위적인 부분을 제거해 줌으로써 사람들이 참된 것을 한 번 알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종교간의 참된 동포애가 이룩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가 물질세계에서도 반드시 적용되어야 합니다.
문 : 좀 더 설명해 주십시오.
답 : 예를 들어봅시다. 식물은 뿌리, 줄기, 많은 가지, 잎사귀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류도 전체로 보면 영적 뿌리에서 나와 있는 줄기와 같은 것입니다. 줄기가 식물의 통일체가 되어 있는 것 같이 줄기를 해한다면 가지나 뿌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류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문 : 그러나 잎이나 뿌리를 해하여도 식물 전체의 해는 되지 않습니다.
답 : 그렇다고 해서 한 사람을 해하는 것이 인류 전체의 해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물질과학에서도 식물에게 작은 상처를 주면 원래의 성장과 발달의 전과정에 영향을 준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므로 귀하의 생각은 틀린 것이며 이와 같은 분석은 완전합니다. 사람의 손가락에 작은 절상을 입혀도 몸 전체를 고통스럽게 하고 신경조직 전체에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을 귀하가 간과한다면 나는 귀하가 다음 사항에 유념하도록 촉구하는 바입니다. 즉 인류와 마찬가지로 식물이나 동물에도 똑같이 작용하고 있는 다른 영적 법칙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귀하는 식물이나 동물에게 그와 같은 법칙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있는 것을 부정할지도 모릅니다.
문 : 어떤 법칙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답 : 그 법칙을 우리들 신지학도는 '카르마'의 법칙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비교(Occultism)를 공부하지 않으면 이 말의 의미를 귀하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의논은 '카르마'의 법칙에서 추론(推論)한 것이 아니고, 사실을 식물에서 생긴일을 분석하여보는 것으로 생각을 넓히고 '카르마'의 생각을 보편적으로 응용해 보십시오. 그러면 진정한 철학에서는 모든 육체적인 행위에는 도덕적이며 영속적 결과가 있다고 하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육체적 상해를 가했다고 합시다. 귀하는 그 사람의 고통이 결코 그 옆 사람들에게 넓게 퍼져 간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런지 모르겠으며, 또 하물며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것이 곧 넓게 퍼진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인간을 해하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오랜동안에 인류 전체에 해를 준다는 것이 자명한 진리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타나 예수와 같은 위대한 개혁자들이 설교한 모든 동포애적 마음은 지상에서 느낄 수가 없습니다.
기타의 목적
문 : 제2의 목적을 실행하시는 방법을 설명해 주십시오.
답 : '마드라스'의 '아디야르'(Adayar, Madras)에 있는 신지학협회본부의 도서관에 그리고 지부의 회원들에 의하여 그 지방의 도서관에 세계의 종교에 관한 좋은 저작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수집하는 것입니다. 또 여러 가지의 고대철학, 전통, 전설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가치있는 원전이나, 그의 발췌, 해석 및 여러 가지 부문에 정통하고 있는 사람들의 구술 등을 번역하거나 출판한다는 것은 실제적인 방법이며, 그러한 정보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문 : 그러면 인간의 잠재하는 영적, 또는 심령적인 힘을 개방한다고하는 제3의 목적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답 : 강연이나 개인적 강론을 할 수 없는 곳에서는 출판물이라는 수단으로 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들의 업무는 인간 속에 그 사람의 영적 직감을 유지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불합리한 성질을 충분히 연구하여 증명한 다음 종교적, 과학적, 또는 사회적 모든 형의 편견, 특히 종파주의, 또는 기적, 기타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신앙과 같은 미신에 반대하거나, 그것을 저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자연의 모든 법칙과 지식을 얻는데 노력하고 그것을 넓히는 것입니다. 현재와 같은 맹신이나 맹목적 권위에 의한, 미신적 신앙이 아니고, 자연의 진정한 지식에 의한 근대인이 조금도 이해하고 있지 않은 법칙, 소위 비교(Occult) 과학의 연구를 장려하는 것입니다. 통속적인 민간전승이나 전설, 어떤 기발한 것이라도 잘 조사해 보면 오랫동안 망각되었던 중요한 자연비밀의 발견에 다다를 수가 있을런지 모릅니다. 따라서 신지학협회는 과학적, 철학적, 관찰의 분야를 넓혀서 이런 탐구의 선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서약의 신성함에 대하여
문 : 신지학협회에서 실행하는 윤리체계가 있습니까?
답 : 지키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갖추어진 명백한 윤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위대한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집성한 세계 윤리의 순전한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공자', '조로아스터'(Zoroaster), '노자', '바가바드기타'(Bhagavad Gita) '석존' 및 '나사렛(Nazareth) 예수'의 가르침, '피타고라스'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그들 학파의 가르침이나 '힐렐'(Hillel B.C 1세기경의 파라사이파의 대학자)과 그 학파의 교훈 등에 나타나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문 : 협회의 회원들은 이와 같은 가르침을 실행하고 있습니까? 회원들 사이에 큰 의견의 차이로 분쟁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답 : 그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개혁(현재와 같은 형태)이 새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개혁되어야할 사람들은 전과 같이 죄짓는 성질의 같은 남자와 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회원들은 소수이나, 다수는 협회와 자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 하고자 하는 얌전한 기질의 좋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임무는 각 회원의 지적, 도덕적, 영적, 자기개선을 장려하며 격려하는데 있고 실패한 사람을 책하거나 궁지로 몰아 넣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들은 누구에게나 입회를 거절할 권리는 없으며, 특히 비교부문의 경우 들어오는 사람은 '새로 태어난다는 것으로" 들어 옵니다. 그러나 명예와 불사의 자아에게 성스럽게 서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입자로서 그 '신생' 후에 전과 같은 부도덕한 단점을 게속 유지하고 여전히 그러한 것들에 탐닉(耽溺)하고 있다면, 그때는 퇴회를 요청해야 합니다. 또 퇴회(退會)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추방해야 하며 그런 경우에는 대단한 엄한 규칙이 있습니다.
문 : 그 규칙을 몇 가지 예를 들어주기 바랍니다.
답 : 우선 현교부문이나 비교부문의 어느 회원도 자기의 개인적인 의견을 다른 회원들에게 강요할 권리가 없습니다. 협회의 여하한 역원(役員)도 말이나, 행동으로 종교적 부문, 철학적 부문 기타부문11에 대하여 적의나 편향적인 공언을 하는 것은 합법적이 못됩니다. 자기의 종교적 신념의 본질적 장점을 공평한 세계에 판단해 주도록 개진(開陳)할 권리는 만인에게 있습니다. 협회와 여하한 역원이라도, 역원의 자격으로서 자기 자신의 종파적 견해나 신념을 설교할 권리는 없습니다. 단 그 집회가 자신과 같은 종교의 신도 모임일 때는 별문제입니다. 적절한 경고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칙을 위반하는 자는 정직(停職) 또는 제명 됩니다. 이것은 협회의 전체에 대한 반역입니다. 지금 비교부문이라 말하고있는 내적 부문에 관해서는 1880년부터 다음 규칙이 정해져서 채택되어왔습니다. "제부문(지금의 고급단계)의 회원으로부터 전수받은 여하한 지식이라도 이기적으로 쓸 수 없다. 이 규칙을 위반하는 자는 제명의 벌을 받는다." 그러나 지금은 이와 같은 지식을 전수받기 전에 비교부문의 입회자들은 그것을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 또 허가없이 그것을 누설하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서약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문 : 그러나 그 부문에서 추방되거나 사임한 사람은 자신이 배운 것을 밝히거나, 자신이 서약한 조항을 파하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답 : 아닙니다. 그 사람의 제명이나, 취소는 스승에게 복종한다는 의무나, 협회업무의 적극적 역할에서 해방된 것에 불과하며 비밀을 지키겠다는 신성한 서약을 취소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 : 그러나 그것이 실천이 되겠습니까?
답 : 물론입니다. 약간이라도 명예심 있는 남녀라면 자신의 명예라는 말을 걸고, 하물며 안에 있는 '신'인 자신의 고급아에게 서약한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은 죽을 때까지 구속력이 있습니다. 설사 부문이나 협회에서 떠났다고 하더라도 명예 있는 남녀는 자신의 서약을 한 단체를 공격하거나 상처를 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문 : 그러나 그것은 너무 지나친 생각이 아닙니까?
답 : 현재와 같이 낮은 기준의 도덕에서 본다면 그럴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정도 구속을 하지 않으면 대체로 서약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만약 자신이 서약한 모든 업무를 아무 때나 멋대로 벗어던진다면 누가 비밀의 지식을 가르쳐 주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은 서약에 진정 구속하는 힘이 전연 없다면 인간들 사이에 무슨 안전이나 신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 말을 믿으십시오. 응보의 법칙(카르마)은 곧 파약한 사람을 징계할 것이며, 이 물질계에서 조차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의 경멸을 당장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뉴욕 롯지가 발행한「패스」(Pathㆍ통로라는 뜻)에 다음과 같이 적절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일단 서약하면 그것은 도덕적, 비교적, 양면으로 영원한 구속이 됩니다. 한 번 파기하여 죄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재파기할 정당한 이유는 되지 못하며, 그렇게 하는 한 '카르마' 법칙의 강력한 봉(棒 ; Lever)이 우리들에게 작용할 것입니다."(Path 1889년 7월호에서)
제4장 신지학 협회와 신지학의 관계
자기 수양에 대하여
문 : 그렇다면 도덕적 수양이 신지학협회에서 주장하는 주된 일입니까?
답 : 바로 그렇습니다. 진정한 신지학도가 되고 싶으면 신지학도로서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문 : 만일 그러시다면, 전에 제가 말한 바와 같이 어떤 회원들의 행동은 이상할 정도로 이런 기본적인 규칙에 위반되고 있지 않습니까?
답 : 참으로 그렇습니다. 기독교도라고 자칭하면서 악마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신지학의 회원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협회의 규정이나 규칙 때문이 아니고 인간의 성질 때문입니다. 이는 현교적인 지부에서 조차 회원들은 신지학에 의하여 규정된 생활을 할 것을 '고급아(高級我)'에게 서약합니다. 그들은 매일 또는 인생의 모든 순간을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신성아(神性我)'의 지도에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진정한 신지학도는 '바른 몸가짐, 겸허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문 : 그것은 어떤 뜻입니까?
답 : 그것은 자기 자아를 모든 자아를 위해 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을 어느 참다운 박애주의자가「신지학도(Theosophist)」라는 책에서 표명한 말을 인용하여 대신하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첫째,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다음은 자기 성질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정직하게 계산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열심히 노력한다면 자신의 나쁜 성질을 보완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몇 사람이 이와 같은 노력을 합니까? 모두 자기 자신의 발달을 위해서는 의욕적으로 하고 있으나, 다른 사람의 진보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같은 필자의 말을 또 인용하면 "사람들은 오랜동안 속아 왔고 놀림을 받아왔다. 그들은 자신의 우상(偶像)을 부셔버리고, 허위를 배척하고, 자신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 아니 이것은 너무 지나친 말입니다. 자신을 위해 일하는 자는 숫제 일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려면 다른 사람을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옆집 정원에 사랑의 꽃을 심을 때마다 더러운 잡초가 자기집 정원에서 사라지고, 인류라고 하는 신들의 정원에 장미꽃이 필 것입니다. 모든 성전, 모든 종교에는 이와 같은 것이 확실하게 쓰여져 있으나 속이 검은 사람들은 이 진리를 틀리게 해석하고, 결국에는 연약하게 물질화시켜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새로운 계시는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는 자기 자신에게 계시해야 합니다. 일단 인간의 불사영(不死靈)이 자신의 몸안에 있는 사원(寺院)을 점유하고, 환전입자(換錢䈎者)와 같은 모든 더러운 것들을 쫓아 낸다면 자기 자신의 신성한 인간성을 자신이 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한 몸의 한 뜻이 되어 있으면 자신이 '사원의 건설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니까요.
문 : 그것이야말로 순수한 애타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답 : 그렇습니다. 만약 신지학협회의 회원 10명 중에 단 한사람이라도 이것을 실행한다면 협회는 실로 우수한 단체가 될 것입니다. 국외자 중에는 신지학과 신지학협회 및 그 이상과 그와 같은 불완전한 현실과의 본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매체 즉, 인간의 몸 여러 가지 죄나, 결정을 신성한 빛을 비추어 주는 순수한 영에게 부과(賦課)하도록 합니다. 이것은 육체나 영에 있어서 부당한 일일까요? 강한 장애에 부딪칠 그런 것을 좋은 이상으로 차츰 개선하려고 하고, 그런 이상을 넓혀 가려고 하는 협회에 대하여 그들은 비난의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조직, 특히 구교와 기독교 국가가 실패한 일을 신지학협회가 이루어보려고 한다고 생각해 협회를 중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상을 유지하고 싶어서 반대합니다. 그 현상이란 것은 퇴폐기의 로마제국과 같은 위선자나, 수치자나, 죄많은 인간들이 높은 신분을 점하고 있었던 상태입니다. 여하간 공평한 심성(心性)을 가진 사람은 다음의 것들을 잘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즉 가능한 최대의 노력을 하는 사람은 상대적인 세계에서 가장 많이, 즉 성대한 사람만큼의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하며 자명한 이치로서 주인의 돈을 받은 하인들의 이야기로 입증된 복음자의 공리이기도 합니다. 즉 2 달란트(talent, 고대 헤브라이의 화폐 단위)를 받아 그것을 두배로 만든 하인은, 5 달란트를 받아 장사를 했던 동료하인과 같은 보수를 받았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능력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문 : 우리들은 신지학을 판단하는데 그런 구체적인 일만을 보기 때문에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일을 그렇게 쉽게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답 :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신지학협회만을 예외로 생각합니까? 자선(慈善)은 정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까운 곳에, 즉 기독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당신은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 법칙 조차도 '산상(山上)의 교훈'(Sermon on the Mount)의 정신을 실행하지 못하고, 심지어 사문화(死文化)하였다 하여 '산상교훈'을 비난하고 조소(嘲笑)합니까? 만약 귀하가 기독교도라고 자칭한다면 법정, 국회, 군대, 기타 모든곳에서 선서를 그만 두고 '퀘이커'(Quaker) 교도처럼 일절의 서약을 하지 마십시요, 만약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겠다고 하여, 귀하가 상의(上衣)를 앗아가겠다고 하는 자에게는 외투까지 주고 오른쪽 뺨을 때리는 자에게는 왼쪽 뺨을 내주어야 한다면 법정 같은 것은 있을 필요가 없으니 없애버리십시요. "악에 저항하지 말라. 그대는 적을 사랑하라. 그대를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라. 그대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어라." 왜냐하면 "만약 이와 같은 최소의 교훈도 지키지 못하면서 이와 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도 최하의 자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리라." 그리고 '바보같은 놈'이라고 말하는 자는 "지옥불의 재난을 만난 것이다." 또 만약 다음 귀하가 재판을 받고 싶지 않으면 왜 귀하는 신지학협회를 재판하려고 하십니까? 신지학 및 신지학협회 사이에는 차이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똑바로 기독교의 조직과 그 본질에 대해서도 같이 비난하고 좀더 엄하게 비난해야 할 것입니다.
문 : 왜 더 엄하게 해야 합니까?
답 : 신지학 운동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단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것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수정하고, 협회 안에 있는 악을 근절하려고 하고 있으며, 또 지도자들이 쓴 법칙이나 세칙(細則)은 신지학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도라고 자칭하는 국민이나 국가의 입법자나 교회는 이와 반대입니다. 신지학협회의 회원은 가장 나쁜 자라도 보통의 기독교도보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신지학도들이 진정한 신지학적인 생활을 해 가는데 이러한 어려운 일을 경험하는 것은 그들과 같은 세대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구미의 신지학도는 모두가 전에 기독교도이고, 교회나 사회적 습관, 자국(自國)의 모순(矛盾)에 차있는 법칙과 궤변 속에서 태어났고 자라 왔습니다. 그들은 신지학도, 그 보다 신지학협회의 회원이 되기 전에 그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추상적 이상과 그 매체와의 사이에 대단히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친 점은 없을 것입니다.
추상적(抽象的)인 것과 구체적인 것
문 : 그러한 차이점을 좀 더 설명해 주십시요.
답 : 협회란 곳은 대단한 이질(異質)로 된 남녀로 구성되어 있는 큰 단체입니다. 신지학은 추상적인 의미에서 우주의 기원이라는 지혜와 지식의 집적(集積)인 신성한 지혜, 즉 영원한 선이라고 말하는 동질체(同質體)입니다. 구체적인 의미에서도 이 세상에서 자연이 인간에게 준 지혜와 지식의 총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느 회원들은 인생에서 신지학을 실현하려고, 말하자면 구체화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회원들은 실천하려고 하지 않고 알려고만 할 뿐입니다. 또 다른 어느 회원들은 호기심이나 간단한 흥미만으로, 또는 자기 친구의 누구인가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협회에 들어왔을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다면 아무런 권리도 없으면서 신지학도란 이름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표준으로 어떻게 신지학체계를 판단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들의 귀를 번거롭게 하는 자칭 시인(詩人)들만으로 그의 시(詩)나, 그 사상을 평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협회는 그 추상적인 동기에서만이 신지학의 구체적 표현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불완전이나 약한 것이 그 단체에 전부 표현되어 있는 한, 협회는 결코 신지학의 구체적 매체(媒體)라고 자칭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협회는 기독교회의 끝없는 모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큰 잘못을 반복할 것입니다. 동양의 비유에 의하면 신지학은 보편적인 진리, 사랑, 지혜 등을 지상으로 반영하고 있는 무한대해(無限大海)입니다. 이에 대하여 신지학협회는 그 반영(反映) 중에 보이는 거품에 불과합니다. 신지학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신성한 성질이며, 협회는 그 신성한 부모곁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인간의 성질입니다. 결국 신지학은 영원불변한 태양이며, 우리 협회의 진리는 태양의 인력안에서 언제나 회전하고 있는 혹성이 되기 위하여 하나의 궤도에 안착(安着)하려고 하는 잘 보이지 않는 혜성(彗星)입니다. 협회는 신지학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 영원한 진리를 배워, 거기에 동화하여 그 높은 이상을 향해 올라가고자 하는 사람을 도와주기 위하여 설립된 것입니다.
문 : 신지학협회는 협회자체의 주의나 학설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답 :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협회를 지지한다거나, 가르쳐준다거나 하는 협회자체의 지혜가 없습니다. 협회는 역사적인 아울러 유사이전(有史以前)의 위대한 성자, 예언자들이 말했던 모든 진리를 간직한 창고(倉庫)에 불과합니다. 적어도 얻을 수 있는 한 많은 진리를 간직한 창고입니다. 그러므로 협회는 인류의 위대한 교사들의 말 속에 있습니다. 진리를 다소간 세계에 뿌려주는 통로(通路)에 불과합니다.
문 : 그와 같은 진리에는 협회 이외에서는 접할 수 없습니까? 모든 기독교교회에서도 그와 같은 말들을 하고 있는데······.
답 : 천만의 말씀입니다. 위대한 선각자들ㅡ참다운 '신의 아들들'ㅡ의 부정(否定)할 수 없는 그러한 지혜가 고립된 개인에게도 주어진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스승의 지도없이 이루어진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종자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스승이 되자 이와 같은 가르침의 보편성을 자기 자신의 종파적 독단의 좁은 형(形) 속에 가두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스승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한 사람의 선발된 스승의 가르침만을 채택하고, 거기에 따르기만 했습니다. 또 잘 알려진 '산상교훈'의 경우처럼 선발된 스승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긴 했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종교에서나 진정한 진리의 단편이 있기는 하나 그 진리를 확대한 인간공상(空想)인 '파노라마'로 바꾸려고 초점을 맞추어 온 것입니다.
문 : 그러나 신지학은 종교가 아니라고 하던데요?
답 : 확실히 종교는 아닙니다. 신지학은 모든 종교, 절대적 진리의 본질이므로 그 한 방울이야말로 모든 교의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한 번 비유한다면 이승에서의 신지학은 백색광선(白色光線)의 분광(分光)과 같은 것으로 모든 종교는 프리즘(Prism)으로 분리된 일곱 색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각각 특별한 색을 가진 광선은 모두가 다른 색의 것을 무시하고, 그것을 허위라고 저주하면서 자기가 제일이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야말로 백색광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이단이라 하고, 자기 자신에 모든 것의 색을 맞추라 하고, 다른 것에 대해 명령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말하는 진리의 태양은 인간이 인식하는 수평성에서 점점 높이 올라오고 있으며, 모든 색광은 차례로 색이 사라지고, 다시 백색광으로 흡수됩니다. 인류는 그때서야 이제 인공적인 구별에서 고통받는 일 없이 영원한 진리의 깨끗하고 맑은, 무색의 햇빛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지(Theosophia)입니다.
문 : 그러면 큰 종교는 모두 신지학에서 나온 것이며 신지학에 동화하는 것으로 세계는 대환영(大幻影)과 오류(誤謬)의 저주(詛呪)에서 구해진다고 귀하는 주장하는 것입니까?
답 :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신지학협회는 조그만 종자에 물을 주어서 키워간다면 드디어 신의 지혜와 지식이 열리는 나무가 되고,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나무에 접목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인류의 대종교와 철학을 배우고, 또 그들을 편견 없는 냉정한 마음으로 비교해 보아야만 사람들은 진리에 도달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들의 여러 가지 일치점을 발견하고 그것에 주목하게 됨으로써 그런 결과를 성취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연구하거나 아는 사람에게 배워 우리가 그 내적 깊은 뜻을 알게 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며, 그런 후에라야 그런 내용에 자연의 위대한 진리가 표현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 : 황금 시대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귀하가 말한 것은 언제인가, 미래에 실현될 황금 시대로 말합니까? 그 실현은 언제쯤이 되겠습니까?
답 : 인류 전체가 그런 필요를 느낄때까지는 되지 않습니다. 페르시아(Persia)의「자비단 키라드」(Javidan Khirad ; 도덕적 가르침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습니다. "진리는 두 종이있다. 한 가지는 명백하고 자명한 진리이고, 또 한 가지는 끊임없이 새로운 논증과 입증을 요구하는 것이다." 후자의 진리가 보편적(普遍的)으로 분명해지는 때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아직은 불분명(不分明)하기 때문에 궤변이나 임의적 논의(任意的 論議)로 왜곡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종류의 진리가 다시 한번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문 : 그러면 이와 같은 진리의 필요함을 느낀 소수의 사람들은 무엇인가 명확한 것을 믿겠다고 결심한 것이 틀림없겠지요? 협회에는 그런 자세의 교의가 없으므로 회원은 모두가 자신의 좋은 것을 선택하여 받아들이고 그것을 믿을 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지학협회는 옛날 바벨탑과 같이 신앙의 혼잡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협회의 공동의 신앙은 없습니까?
답 : 협회에 그 자체의 강령이나 교의가 없다고 하는 것은, 회원은 특별한 교의나 신앙을 받아들일 의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단체 전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협회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두 개의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내적인 부문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물론 독특한 철학, 혹은ㅡ만일 귀하가 그렇게 말하기 좋아한다면ㅡ그들 자체의 종교적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 : 그것을 들려주십시요.
답 : 우리는 그것을 별로 비밀로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수년 전에 나온 비전 비교「테오소피스트(Theosophist)와 비전불교(Esoteric Buddhism)」등, 같은 책에 그 개략(槪略)이 있으며,「비밀교의」(Secret Doctrine)에는 더욱 상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제5장 신지학의 기본적 가르침
신과 기도에 대하여
문 :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답 : 그것은 당신이 말씀하시는 신(神)의 의미에 따라서 다릅니다.
문 : 기독교의 신, 예수의 부(父)이며 창조주인, 말하자면 모세가 성서에 말하고 있는 신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답 : 그와 같은 신은 우리들은 믿지 않습니다. 인격신이나 신인동형설(神人同形說)의 초우주적인 신의 개념을 우리들은 거부(Reject)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거대한 그림자에 불과하며 기껏해야 인간도 아닙니다. 신학에서의 신은 헤아릴 수 없는 모순과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우리들은 주장하며,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런 신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문 : 괜찮으시다면 그 이유를 말해 주십시요.
답 : 많이 있으나 여기서 전부 유의(留意)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은 말해 봅시다. 신자들은 그 신을 무한(無限), 절대자(絶對者)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문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답 : 그러면 만약 무한, 즉 무제한이며 특히 절대자라 한다면 어떻게 해서 신이 형체(形體)를 가지며, 어떤 창조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형체에는 제한이 따르며,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창조를 하려면 신은 생각을 하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절대자가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한정되고, 유한하며, 조건이 붙어있는 것과 절대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철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부조리합니다. 헤브라이(Hebrew)의 '카발라'(Kabalah)조차 이와 같은 생각을 거부하고, 유일한 것, 즉 절대적, 신성본질 '아인 소프'12라고 하는 무한의 통일체라고 하고 있습니다. 창조하려면 창조주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절대자에게는 이것은 불가능하므로, 무한의 원리는 간접적 방법으로 진화(창조가 아니다)의 원인이 되는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간접적인 방법이란 '세피로스'(Sephiroth) 자체의 유출(Emanation)을 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불합리로써, '카발라' 번역자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13
문 : '카발라' 학도로서 '여호와'(Jehovah) 또는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 ; 헤브라이어로 신을 나타내는 사문자(四文字))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답 : 그 사람들의 신앙이나 불신이 자명한 사실(Self evident fact)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으므로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믿는 것은 자유입니다. 제스이트 사람들(Jesuits)은 2 + 2는 반드시 4가 아닐 수도 있고, 이러한 그들의 궤변(詭辯)으로 신의 의사에 따라서는 2 X 2 = 5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까?
문 : 그러면 당신들은 무신론자입니까?
답 :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신론자라고 하는 명칭이 신인동형설(神人同形說)의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무신론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보편적인 신성한 원리, 그것에서 모든 것이 나오고, 존재의 대주기의 끝에는 모든 것이 흡수되는 만물의 근원을 믿습니다.
문 : 그것은 오랜 옛날의 범신론적 주장(Claim of Pantheism)입니다. 만약 당신이 범신론자라면 이신론자(理神論者)일 수 없으며 이신론자가 아니라면 무신론자로서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답 :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범신론이란 용어도 많은 불합리한 용어중의 하나이며, 그 진정하고 원초적인 의미는 맹목적인 편견과 일방적인 견해 때문에 왜곡되어 왔습니다. 귀하가 범신론이라고 하는 이 복합어의 기독교적 어원학(語源學 ; Etymology)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이 용어가 '모두'라고 하는 의미의 'pan'과 신이라는 듯의 'Theoso'라고 하는 말로 형성된 것을 인정하고, 이것이 자연계의 돌이나 나무가 하나의 신, 또는 한 주(柱)의 신이라고 말하는 의미로 생각하고, 가르친다면 귀하가 옳은 것이고, 범신론자에게 그들의 합당한 명칭 이외에 물신숭배자(物神崇拜者 ; Fetish worshipper)라는 이름을 붙여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같이 비교적으로 범신론이란 말의 어원을 탐구하면 귀하의 주장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문 : 그러면 당신은 범신론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답 : 귀하에게 제가 질문하게 해 주십시요. 혹은, 자연(Nature)을 귀하는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문 : 자연이란 것은 우리 주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합한 총계이며, 물질세계, '만물' 또는 우주에서의 원인과 결과의 집적(集積)이라고 생각합니다.
답 : 그러므로 자연은 이미 알고 있는 원인과 결과의 의인화(擬人化)된 것의 총계이고 질서(秩序)이며, 지성이 있는 창조주 또 창조주들과 전연 관계가 없는 모든 것의 유한한 활동이나 에너지의 총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귀하의 백과사전에 있는 것과 같이 하나의 별개의 힘(Single and separate force)으로 생각하는 것입니까?
문 : 네, 그렇습니다.
답 : 우리는 이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자연(우리는 이것을 일시적 환상으로 생각한다)을 고려해 넣지 않으며, 판(pan)이라는 말을 라틴어의 Natura(nasci에서 유래하여 출생을 뜻함)에서 유래한 자연(Nature)의 뜻으로 쓰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신성(Deity)을 말할 때 자연(Nature)과 동일시하는 이유는 그들의 동년배(同年輩)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영구하며, 창조되지 않은 자연을 말하는 것이지, 당신들이 뜻하는 스쳐가는 그림자와 유한한 비현실(非現實)의 집적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찬송작자(讚頌作者)들이 눈에 보이는 하늘이나 천당(Heaven)을 신의 옥좌(玉座 ; God's Throne)라 하고, 우리의 흙으로 된 지구를 신의 족대(足臺)라고 말하든 말든 내버려 둡니다. 우리들의 신성(Our deity)은 천국이나 특정한 나무, 건물이나 산에도 없습니다. 신성은 눈에 보이는 우주, 눈에 안 보이는 우주의 모든 원자 속의 어디에나 존재하고 계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원자, 분할할 수 있는 모든 분자 속에 또 위나, 그 둘레에도, 존재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승적 진화의 강하적 진화(Evolution and Involution)의 신비적인 힘이며, 편재(偏在) 전능하며, 전지적(全知的) 창조 잠재력(Ornniscient creative pot entiality)이기 때문입니다.
문 : 전지(全知 ; Omniscience)라는 것은 생각하는 어떤 것(Something that thinks)의 특권입니다. 당신들의 절대자(Your absoluteness)에게는 생각하는 힘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답 : 우리는 절대자에게 생각하는 힘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제한을 받으며 조건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귀하는 철학에서 절대적 무의식은 절대의식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군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절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 : 그렇다면 귀하의 절대자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답 : 아니요. 그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절대자는 절대사고 그 자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또 같은 이유로 절대자는 하나의 존재(A Being)가 아니고, 절대존재(Absolute existence)인 유(有 ; Be nese)이므로 존재도 하지 않습니다. '케테르 말쿠트'(Kether Malchut)에 있는 '가비롤'(Solomon ben Jehudah Gabirol)의 훌륭한 카발라(Kabalah ; 유대신비철학)시를 읽어보면 당신은 이해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이다. 모든 수의 근원인 하나이지만 계수의 요소인 하나는 아니다. 왜냐하면 단일성(Unity)은 증가, 변화, 형체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이며 당신의 단일성의 신비중에서 인간의 현자는 길을 잃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로서 당신의 단일성은 결코 감소하지 않고 확대되지도 않으며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당신은 하나로서 나의 생각으로 그대를 제한하거나 정의를 내릴 수 없습니다. 당신이 있지만(Thou art) 하나의 존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멸(生滅)하는 자(Mortals)의 지혜나 이해로는 당신의 존재를 알 수 없고 어디에, 어떻게, 무엇 때문에 있는지 등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들의 신성(Deity)은 영원하며, 끊임없이 진화하고 창조하지 않는 우주의 건설자입니다. 우주 자체는 절대자 자신의 본질(Essence)이 전개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들의 신은 원주(圓周)가 없는 구체(球體)로서 존재하고 있는 다른 모든 것들, 즉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속성을 포괄하는 하나의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 속성(屬性)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 자신입니다. 그것은 현현(顯現)한 자에게 충력(衝力 ; Impulse)을 주는 영원한 법칙이고, 결코 현현하지 않는 중의 불변 법칙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현기(Manifesting period)가 언제나 되어가고 있는(Ever becomming) 절대법(Absolute law)이기 때문입니다.
문 : 전번에 귀하 쪽의 회원 한 사람이 보편적 신성(Universal Deity)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므로 고결한 것 속이나 치욕 속에도 있고, 따라서 나의 담배재나 모든 원자의 안에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너무 지나친 모독(冒瀆 ; Rank blaphemy)이 되지 않습니까?
답 : 단순한 논리는 모독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주 중의 어떤 하나의 수학적 점이나,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점하고 있는 물질의 한 분자에서 편재하는 원리(Omnip resent Principle)를 제외해야 한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무한이라고 주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도는 필요한가?
문 : 귀하는 기도를 믿습니까? 또 기도할 때가 있습니까?
답 : 아니요, 우리들은 말로 떠들지 않고 행동으로 합니다.
문 : 귀하들은 절대원리에 대해서도 기도하지 않습니까?
답 : 왜 그것에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들은 바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순수한 곤상(坤象 ; Pure abst raction)에 기도를 하며 시간을 보낼 정도의 여유가 없습니다. 불가지(不可知)한 것(The Unknowable)은 그 자체내의 부분끼리만 서로 관계를 가질 수가 있으나 분명한 관계는 가질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주의 존재나 현상은 서로 작용하는 형태나 그 법칙에 의한 것이지 기도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문 : 귀하는 기도의 효과를 전연 믿지 않습니까?
답 : 만일 당신이 말하는 기도가 유태인이 시작하고 바리새인이 퍼뜨린 미지의 신을 상대로 한 외향적(外向的) 탄원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처럼 많은 말을 늘어놓고 외면적으로 반복하는 그런 기도의 효과를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문 : 다른 기도가 있습니까?
답 : 있고 말고요. 우리들은 그러한 것을 의지의 기도(Will prayer)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탄원이라기 보다 내적 명령입니다.
문 : 그러면 누구에게 기도하는 것입니까?
답 : 비교적 의미의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Our father in heaven)입니다.
문 : 그것은 신학에서 말하는 신과 다릅니까?
답 : 전연 다릅니다. 비교학도(Occultist)나, 신지학도는 감추어져 있는 그의 아버지(His father)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6절을 읽어 보시고 이해하여 보십시요.) 우주외(宇宙外) 유한의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자신 안에 있는 아버지(Father)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문 : 그러면 귀하는 인간을 하나의 신(A God)으로 생각하는 것입니까?
답 : 하나의 신이 아니고 神(God and not a God)이라 말하십시요. 우리들이 말하는 것은 내적 인간(Inner man)이 우리들이 지각(知覺)할 수 있는 유일한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 외에 다른 어떤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신이 보편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무한의 원리라는 우리의 근본원리를 인정한다면 인간만을 신이 침투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말하는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Father in heaven)는 우리의 마음과 영적 의식으로 우리 속에서 느끼는 신성본질(Deific essence)이며,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 두뇌나 환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신인동형설의 신개념(神槪念)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대들은 모르느냐, 그대들이 신의 사원(寺院 ; Temple)이며 절대신의 정신(Spirit)이 그대들 안에서 살고 계시는 것을 모르느냐?14 그러나 누구라도 우리 속의 본질을 인격시(人格視 ; Anthro pomorp hise)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어떤 신지학도가 인간적 진실(Human truth)이 아닌 신성한 진리를 받는다면, 이 숨어있는 신(God in secret)이 유한한 인간이나 무한한 본질(Infinite essence)의 말을 듣는다거나, 그들과 형태가 다르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All are one)이기 때문입니다. 또, 바로 앞에 언급(言及)한 바와 같이, 기도는 탄원(歎願)이 되여서 아니되고, 기원은 오히려 신비(神祕)입니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절대영(Absolute spirit)에 동화될 수 없는, 유한하고 조건이 붙은 사고(思考), 혹은 욕망이 영적 의지 및 그 의지(The will)로 변화하는 신비한 과정(過程)이며, 그러한 과정을 '영적 변질(Spiritual transmutation)'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간절한 열망은, 기원을 '철학자의 돌(石)' 즉 연(鉛)을 금으로 변질시키는 것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유일하고 동질인 본질(Essence), 즉 우리들의 '의지의 기도'는 우리들의 소원에 따라서 결과가 생겨나는 활동적, 창조적 힘(Force)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全書) 3장 16절 신지학 문헌에서 인간 안의 '크리스토스'의 원리(Christos principle)에 대한 모순되는 서술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제6본질(Buddhi)이라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제7본질(Atma)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기독교도인 신지학도가 이와 같은 표현을 쓰고 싶다면 옛날 지혜종교의 상징의 유추(類推)에 따라 그 표현을 철학적으로 바르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크리스토스'(Christos)는 세 고급원리(Three higher principle) 중의 하나일 뿐 아니라 세 가지 모두가 삼위일체(Trinity)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이 삼위일체는 성령, 성부, 성자를 나타내며 추상적인 영에 상당합니다. '크리슈나'(Krishna)와 '크리스트'(Christ)는 그 현현한 삼면에서 철학적으로 같은 원리(Principle)입니다. '바가바드 기타'(Bhagavadgita)에서 '크리슈나'(Krishna)는 '아트만(Atman), 추상적 영 '크세트라그나'(Kshetragna), 더 높거나 재화신(再化身)하는 자아(Reincarnating Ego) 및 우주적 자신(Universal Self)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명칭들은 모두 우주에서 인간으로 전변(轉變)되는 경우(When fransferred from the universe to man)이며 아트마(Atma), 부디(Buddhi) 및 마나스(Manas)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문 : 기도하는 것이 물리적 결과를 가져다주는 비교적 과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의지력은 살아있는 힘이 됩니다. 그러나 저급의 인격체, 즉 육체인간의 욕망을 분쇄(粉碎)하지 않고서 '아트마 부디'의 빛(Atma Buddhi Light)이 스며들어있는 고급아(Higher spiritual ego)에게 "자기 생각대로 되어 주기를 바라며, 나 자신 때문이 아니다." 등을 부르면서 이기적인 부정(不淨)의 목적에서 의지의 힘을 과장시켜 내 보내는 비교학도(Occultist)나 신지학도에게는 재난이 올 것입니다. 이것은 흑마술이며, 죽음의 행위이고, 영적 마법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이 모든 것이 기독교도의 정치가나 장군들의 기분에 들어서, 특히 장군들은 서로 죽이는 싸움을 위해 군대를 보낼 때 이와 같은 기원을 합니다. 양군이 모두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약간씩 이런 마술에 걸려, 같은 만군(滿軍)의 '주'(Lord of Hosts)에게 서로 상대방의 목을 벨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문 : '베리시아인'을 격파하고 '시리아인'이나 '모아부'인을 죽이는 것을 도와달라고 '다비드(David)'가 만군의 주에게 기원하니까 "주는 다비드(David)가 어디에 있어도 지켜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서에 있는 대로 따릅니다.
답 : 그렇겠지요. 그러나 당신들은 자신을 '이스라엘'인이나 '유대'인이 아닌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기 좋아하는데 왜, '그리스도'가 말한 것에 따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는 분명히 당신들에게 '옛날의 그들'(Thern of old times)이나, '모세'의 법(Mosaic law)을 따르지 말고 자기가 말하는대로 하라고 명하였고, 칼로써 죽이는 사람은 칼에 맞아 죽는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의 기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그것을 입으로만 기도하고, 자만합니다만 진정한 비교학도만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기도에서 당신들은 아무 뜻 없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말하지만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들에게 "적을 사랑하라" 그리고 "당신을 미워하는 자에게 잘 해주라"고 말했습니다. 당신들에게 적을 죽이고 그들에게 승리할 수 있도록 당신들의 아버지(Father)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준 사람은 분명히 '나자렛'(Nazareth)의 유순한 예언자(Meek prophet)가 아닙니다. 이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기도'를 우리들이 배척하는 이유입니다.
문 : 그러나 모든 나라와 국민들이 신이나 신들에게 기도하고 예배하여 왔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당신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악마나 해를 주는 '영'을 모시고, 기분을 맞추어 왔으나, 그것이 기도의 효과가 있다고 믿는 보편성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답 : 기도는 기독교도가 말하는 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는 사실로 설명됩니다. 기도는 탄원이나 소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옛날에는 주문(呪文 ; Incautation)이나 악령소환(惡靈呼出 ; Invocation) 등 의미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만트라'(Mantra), 즉 힌두교도들의 음율적으로 읊조리는 기도에는 틀림없이 그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브라만'(Brahmins)들이 자기들이 보통 '데바'(Deva)를 신들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기도는 축복입니다만(서로의 파멸을 동시에 기도하는 두 곳의 적대 군대와 같이) 주문이나 저주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히 이기적이어서 일하는 대신 일용(日用)할 양식(Daily bread)이 주어지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가 나이고, 자신만을 위해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원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합니다. 이와 같은 기도는 그 결과에 있어 두 가지 해가 있습니다. ① 인간의 자신감을 없앤다. ②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것 보다 더 지독한 이기심을 가지게 한다. 우리들 신지학도는 '보이지 않지만 계시는 것이 분명한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일하고, 영교하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급령(Higher soul)이 보편적 본질과 융화하는 지복(至福)의 황홀한 순간(Moments of esstatic bliss), 생시에는 삼매, 사후에는 열반(Nirvana)이라고 하는 것에 매혹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신들이나 성자나 천사 등 창조된 유한의 존재 같은 것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상 설명한 이유로서 우리들은 절대자에게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쓸모없고 무익한 기도는 대신하지 않고, 가치있고 좋은 일들을 생겨나게 하는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
문 : 기독교도들은 그것을 교만이나 모독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이 틀렸습니까?
답 : 아주 틀렸습니다. 설사 무조건적인 자와 조건적인 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자 혹은 무한자가 멍청하고 이기적으로 기도하는 자에게 귀를 기울일 것으로 믿고, 사악한 교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바로 기독교도들입니다. 또 전지전능의 신에게 입으로 말하는 기도가 아니면 자기가 할 일을 모른다고 가르치는 것은 사실상 신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비교적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에 대하여 '불타'나 '예수'도 확증하고 있습니다. 불타는 말씀하셨습니다. "힘없는 신들에게 구하거나 기도하지 말고 차라리 행동하여라. 왜냐하면 암흑이 밝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침묵에게 구하지 말라, 침묵은 말하거나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대들이 나의 이름(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원하는 것은 내가 모두 할 것이다."(요한복음 14장 13절) 이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의 인용문은 우리들이 의논에 반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크리스토스'(Christos)는 "아트마ㅡ부디ㅡ마나스"(Atma Buddhi Manas), 진짜의 자아(self)가 되므로 이것이 뜻하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위의 인용문을 비교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즉, 우리들이 인정하고, 기도해야 할 유일한 신, 혹은 차라리 우리와 함께 행동해야할 신은 우리의 몸이 그의 신전(神殿)이고 그 속에 거주하시는 신의 '영'(Spirit of God)이라는 뜻입니다.
기도는 자신(自信)을 없앤다
문 :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이 기도하였고 기도를 권하지 않았습니까?
답 :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 기도란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시는 '아버지'와의 영교(Communion)란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예수가 보편적 신성(Universal deity)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예수가 바로 신 자신(Very god himself)이 기도하고, 신의 의지와 예수 자신의 의지가 다른 것으로 되니 참으로 우습고 불합리한 것입니다.
문 : 또 하나 토론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잘 말하는 것인데 "나는 자신의 힘으로 정욕이나 단점을 극복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원하면 힘을 주고, 그리스도의 힘으로 그런 것을 극복하고 이긴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답 : 그렇고 말고요.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우주신이고 기원하고 있는 사람과 독립한 다른 것이라면 물론 '전능의 신'은 모든 것이 가능하고 또 그것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원한 사람이 극복하고 달성한 것에 어떤 칭찬할 일(Ment)이나 정의가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거짓 극복자는 기도 같은 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 보수를 맡을 수 있습니까? 보통 사람인 당신일지라도 당신이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가 사과나무 밑에 앉아서 자기가 할일을 당신이 해 주도록 기도만 하고 있는데 그 노동자의 일을 당신이 대신한다면 그 노동자에게 일일의 임금을 지불하겠습니까? 모든 인간이 일생을 도덕적 태타(怠惰)에서 지내고,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일들이나 의무를 신에게나, 사람들에게나, 다른 것들에게 넘겨버린다는 생각은 우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품성을 가장 떨어뜨리는 것이 됩니다.
문 :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인간의 생존경쟁에서는 인격적 구세주에게 도움을 청하고 힘을 빌리겠다는 생각은 근대 기독교의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관적으로 이와 같은 신앙이 효과적이란 것은 틀림없습니다. 즉, 믿는 사람은 도움을 받고 힘을 얻었다고 느끼는 것이 확실합니다.
답 : 위대한 '부정파(否定派)'15(The greet Deniers)인 기독교도와 정신과학자(Mental scientist) 중의 일부 환자가 때때로 치유(治癒)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또 최면술, 암시, 영매 등도 때때로 같은 결과를 나타냅니다. 당신은 성공하는 경우만을 생각하고 그것에 맞추어서 말하는데 그 10배의 실패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광신적인 기독교들의 맹신에도 불구하고 실패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문 : 그러나 완전히 성공한 경우를 당신은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신지학도는 자신의 정욕감이나 이기주의를 제어(制御)하는 힘을 어디서 찾는 것입니까?
답 : 자신의 고급아(Higher self), 신성한 영, 자신 안에 계시는 신에게서, 또 자신의 '카르마'(Karma)에서 찾습니다. 나무는 그 과실에서 알 수가 있으며, 원인의 성질은 결과에서 알게 된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거듭 말해야 합니까? 신이나,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정욕을 이기고, 착해진다고 당신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물어보겠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고 덕이 있으며, 결백한 사람들이 기독교와 불교 즉, 기독교의 나라와 이교도라고 하는 다른 나라들에서 어느 쪽이 많다고 생각합니까? 통계는 그에 대하여 답을 주고 있으며 우리들의 주장을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세이론' 및 '인도'의 거년 국세조사(國勢調査)에서 기독교도, 회교도, 힌두교, 구아혼혈, 불교도들이 범한 범죄의 비교표에 의하면, 각교도별로 무작위 추출법으로 이백만명 단위로 몇 년 동안 경범죄까지 망라하여 본 결과 불교도가 4라고 하면 기독교도가 범한 죄의 비율은 놀랍게 15가 됩니다. (Lucifer 1888년 4월 2권 147항 논문 "불교에 관한 기독교도의 강연" 참조) 어떤 자명한 동양학자나 역사학자나 또 '비간데트 승정'(Bishoap bigandet)이나, '헉'(Abbe Huc)으로부터 '윌리암 헌터' 경(Sir William Hunter), 그외의 공평한 관리에 이르기까지 불교국을 여행한 사람이라면,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으로서 불교도의 미덕에 칭찬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짜 (불교도가 되어있는 태국, 불교신자는 제외)는 신이나 이 세상 외의 미래의 보상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승려나 평신도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아 기도합시다"고 말하면 대체로 "누구에게 무엇을 기도하는가?"라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문 :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 무신론자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미덕을 사랑하고, 미덕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불교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줍니다. 다른 사람들의 종교는 존경하고 자기 자신의 종교에 진실하라. 그러나 교회의 기독교는 다른 국민들의 신은 모두가 악마라고 비난하고, 비기독교도는 영원한 지옥에 간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문 : 불교의 승려들도 같은 주장이 아닐까요?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법구(法句)에 있는 다음의 현명한 훈계를 대단히 열심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학문이 있거나, 없거나 자기를 높게 보고 다른 사람을 우습게 보는 자는 촛대(燭)를 가진 봉사(眞人)와 같은 것이어서 자신의 눈을 안 보이게 하며, 다른 사람을 비친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혼의 뿌리에 대하여
문 : 그러면 혼과 영이 인간에게 주어져(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그렇다면 영(靈)은 어디서 왔습니까?
답 : 우주영(Universal soul)으로부터 왔습니다. 확실히 말해 둘 것은 인격신에 의하여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해파리의 습기(濕氣)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바다 속에서 숨쉬며 살다가 녹으면 다시 물로 되돌아갑니다. 물에도 생명이 있고 호흡하며, 생존하는 것입니다.
문 : 그러면 당신은 혼이 신에 의하여 인간에게 주어졌다거나 불어 넣어진 것이라는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입니까?
답 :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영'(Soul)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Living Soul) 혹은 '네페쉬'(Nephesh)는 신(우리가 말하는 자연, 불변의 법칙)이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부여한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사고하는 '영'(Thinking soul)이나 마음(Mind)이 아니며, 불사의 정신(Immotal Spirit)은 더욱 아니다."
문 : 그렇다면 다시 물어봅시다. 인간에게 이상적 인간혼과 불사의 정신을 주는 것은 신입니까?
답 : 나는 또 당신의 질문방법에 반대합니다. 우리들은 인격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그런 신이 인간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의논의 편의상 새롭게 생겨나는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새로운 혼을 만든다고 하는 위험한 일을 신이 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그런 신에게는 지혜나 선견이 없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신을 자비, 정의, 공평, 전지하다고 말하는 주장과 우리들이 말하는 앞의 가정과의 일치점이 나올 수 없고, 다른 여러 가지 모순 등은 신학적 독단 때문에 매일같이 그리고 시간마다 부딪쳐야 하는 치명적인 암초가 되는 것입니다.
문 :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무슨 모순이란 뜻입니까?
답 : 요전에 유명한 선교사이며 세이론 사람인 불교승려가 나의 앞에서 기독교의 선교사에게 해답불가한 논의를 제기한 것이 생각납니다. 그 선교사는 결코, 무지한 것이 아니고 사전에 공개토론을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토론은 '콜롬보' 근처에서 있었으며, 선교사는 승려 '마가티봐티'(Magattivati)에게, 기독교의 신이 '이교도'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를 말해 달라고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는 노상 하는 버릇처럼 차선(次善 ; Second best)으로 기록에 남는 의논으로 지고 말았습니다.
문 : 어떤 꼴로 졌습니까?
답 : 그것은 이렇습니다. 불교승려는 신부에게 먼저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기독교의 신은 모세에게 십계를 내렸는데, 그것을 인간들에게만 지키게 하고 신 자신은 파계하려고 한 것인가요?" 선교사는 이 추론에 분개하고 부정했습니다. 그러자 승려가 말하길, "신의 십계에는 어떤 예외도 없고 어떤 혼(魂)이라도 신의 의지가 없으면 탄생할 수 없다는 말인가요?"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은 간음을 금한다는데 그와 같은 경로에서 생겨나는 아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신이고 당신의 말대로라면 그런 아이에게 혼을 주는 것도 신입니다. 그렇다면 범죄나, 간음에서 생기는 몇 백만의 아이들은 당신들의 신들이 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는 것인가요? 또 당신의 신은 자신의 법칙을 파하는 것을 금하고 벌하면서 매일 매일 그와 같은 아이들의 혼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해도 좋은가요? 가장 간단한 논리로 말하자면 당신들의 신은 그 죄의 공범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신의 도움이나 개입이 없으면 그와같은 아이들이 생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죄를 범한 양친 뿐만이 아니고 죄도 없는 아이까지 신 자신이 한 일 때문에 벌을 받게 된다면 대체로 정의가 있는 것입니까? 선교사는 시계를 보고 갑자기 너무 늦어 더 이상 지체 못하겠으니 의논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문 : 이와 같이 설명 못하는 문제들은 모두가 신비이며, 우리들 종교에서는 신의 비교를 알려고 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는 것을 귀하는 잊어버리셨습니까?
답 : 아닙니다.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모순되고 논리에 틀린 것을 부정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믿는 것을 당신들에게 같이 믿어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당신들의 질문에 답할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말하는 '신비'에는 우리들은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위의 것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
문 : 불교에서는 혼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답 : 그것은 현교적, 대중적인 불교인가 비교적인가에 따라 다릅니다. 현교적인 가르침은 '불교교의 문답(佛敎敎義問答)'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잇습니다. "혼이라는 것은 무지한 자들이 허위의 개념을 표현하는데 쓰는 말로 생각된다. 만약 만물이 변화한다면 인간도 변화할 것이며, 인간의 모든 물질적인 부분(육신)도 변화해야 한다. 변화하는 것에는 영구성이 없으므로, 변화하는 것들에 불사의 존속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간단명료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각각 승계되는 재생(Rebirth)의 새 인격(Personality)이 전생의 오온(五蘊 ; Skandhas) 혹은 이전 인격의 집적(集積)인가라는 문제에 부딪치고, 그래서 이 새로운 오온(五蘊)의 집적이 이전의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새로운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새로운 것이나, 어느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 인생의 와중에서 오온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나 인격에 관해서는 40세의 사람 A,B씨는 18세의 청년 A,B군과 동일인물이다. 그러나 자체는 끊임없는 소모의 회복으로 변하고 마음과 성격의 변화 때문에 이 사람은 별개의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연로해지면 이전의 인생 단계에서의 생각과 행위의 결과로서 상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재생한 새로운 존재는 같은 인격은 분명히 아닌 것이나, 전의 것과 같은 개성이며, 그것이 변한 형체, 즉 오온 외 새 집적을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며 전(前) 생애에서의 행위와 생각의 결과를 당연히 받게 된다." 이것은 난해한 형이상학으로서 평범하게 혼의 불신(Disbelief in Soul)에 대하여 어떤 방법으로든, 표현하지 않고 있습니다.
문 : 비교적 불교(에소테릭 부디즘)에서는 이와 같은 것을 무엇인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답 :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비교적 불교, 즉 비밀의 지혜와 현교적 불교, 즉 석가의 종교철학 두 갈래에 모두 속하기 때문입니다.
문 : 그러나 대부분의 불교도는 혼의 불사성을 믿지 않는다고 우리는 분명히 들었습니다.
답 : 가령, 당신이 혼이란 말로써 인격아(Personal ego), 즉 생명혼(Nephesh ; 네페쉬)을 뜻하고 있다면 우리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런 박학하신 불교도는 모두 개성 즉 신성한 혼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 불교도들은 판단의 잘못에서 온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이런 점에서 틀린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자면 지옥의 파멸이나, 지옥의 불에 대하여 후세의 복음서 편자들의 신학적인 개서(改書)나, 예수의 말을 잘못 이해해서 일으킨 착오와 같은 것입니다. '불타'나 '그리스도'는 자신은 아무 것도 쓴 것이 없으나, 두 분이 모두 우화(寓話)로서 말하거나 '은어(隱語)'를 썼습니다. 그것은 모든 진자(眞字)의 비전을 받은 사람들이 해온 것이며, 앞으로도 긴 세월 동안 그렇게 계속 될 것입니다. 두 종교성전에는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문제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고 있으며, '불타'의 기록이나 '그리스도'의 기록에도 너무나 현교적으로 흩어져서 더러워지고, 그 사문자(死文字)의 의미는 둘다 상당히 중점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문 : '불타'의 가르침이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바른 이해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불타'나, '그리스도'나 같은 목적에서 설득하였습니다. 두분의 개혁자는 같은 열렬한 박애주의자이며 실천적 애타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고상하고 가장 풍위있는 유형의 틀림없는 사회 제일주의, 즉 끝까지 자기특성을 다하여 설파하셨습니다. "내가 사람의 불행과 고통을 구할 수 있다면 온 세계의 죄를 내 몸으로 받겠다"고 불타는 말하고 더우기 "내가 구할 수 있다면 한 사람도 울리지 않으리라"고 묘소에 버려진 상복 걸친 거지 왕자 석가는 부르짓었습니다. "모든 노동하는 자, 큰 짐을 지고 있는 자, 나에게 오라, 내가 그대들을 쉬게(휴식)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은 잠자리가 없는 불쌍한 사람에게 예수가 한 말이었습니다. 두 분의 가르침은 인류에 대한 무한의 사랑이며, 자비이며, 자기방기(自己放棄)이며, 불쌍한 대중에게 대한 자비였습니다. 두 분 모두 부(富)에 대해 같이 경멸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소유권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두 분의 바램(望)은 만인에게 신성한 비의(Inifiation)를 누설하지 않고,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무지한 사람들과 길을 잘못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주고,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들에게 지탱할 수 있는 진리를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분 개혁자들의 목적은 후세 추종자의 지나친 열망으로 인하여 왜곡되었습니다. 대스승들의 말은 잘못 해석이 되고 잘못 설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결과를 보십시요.
문 : 그러나 모든 동양철학자들과 '불타'의 승려들이 모두 그렇게 말한다면 '불타'는 혼의 불사성을 부인한 것이 틀림없지 않습니까?
답 : '아라한'(阿羅漢)들은 대스승인 석가의 방침에 잘 따르고 있었으나, 그후의 승려들은 대부분 기독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함께 비전을 전수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대비교적 진리(大秘敎的 眞理)가 사라져갔습니다. 그 증거의 하나로서 세이론(스리랑카)에 존재하고 있는 두 개의 종파 중 '샴'(Siamese)파는 죽음을 개인 인격의 절멸이라고 보는 것이며, 다른 한 파는 신지학과 같은 주장인 열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 : 그러면 왜 불교와 기독교는 지금에 와서 그런 신앙의 정반대를 대표하고 있습니까?
답 : 두 분이 설교할 때의 상황이 똑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는 '바라문'(Brahmins)이 자신들의 훌륭한 지식을 빼앗기지 않으려 '바라문' 계급 외는 그 지식을 알려주지 않고, 몇 백만의 사람을 우상숭배(偶像)와 물신숭배(物神)에 가까운 미신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불타'는 그때 무지에서 생겨나는 무수한 불건전한 공상과 광신적 미신에 치명적 타격을 주어야 했습니다. 신들에게 원해도 듣지 않고, 관심을 기울여 주지도 않은 사람들, 그리고 정신적 절망 속에서 살고, 죽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그러한 무지의 믿음보다는 철학적 무신론 쪽이 나을 것입니다. '불타'는 태어나면서부터 진리를 가르쳐 주기에 앞서 이런 미신의 소용돌이를 막고 잘못된 것을 근절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의를 무지한 대중의 것이 아니고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느끼게 하고, 그들에게는 바꾸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3절 및 11절에 나오는 것과 같은 이유로 '불타'는 모두를 가르쳐 주지 못하고, 결국 대단히 조심스럽게 많은 것을 비밀로 했습니다. '불타'는 승려 '봐챠코타'(Vacchagotta)에게까지도 인간 안에 자아가 있는가 없는가 말해 주기를 거절했고, 답해 줄 것을 강요하니까 고귀한 분(불타)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16
제6장 자연과 인간에 대한 신지학의 가르침
모든 것들의 통일
문 : 신ㆍ영ㆍ인간이 어떤것인가 하는 당신의 의견은 잘 들었으나, 신지학의 가르침에서는 그들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답 : 그 세 가지(신ㆍ영ㆍ인간) 것들은 우주와 우주 속에 있는 만물들과 같이 그 기원이나, 그 영원성에서 앞에서 말한 미지의 신의 본질이나 절대적 통일체와 같은 일체입니다. 우리들 신지학도는 우주 창조라고 말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우주는 주기적으로, 연속적으로 아주 머나 먼 긴 지속기간에 걸쳐 주기적(週期的)인 일정 시간간격으로 주관(主觀)상태로부터 객관(客觀)적 상태가 나타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문 : 그것에 대해 더 상세히 설명해 주십시요.
답 : 정확한 이해와 비교(比較)를 위해 먼저 태양력의 1년을, 그리고 다음으로 밤낮이 각각 육개월씩 되는 북극의 양반년(兩半年)을 들어봅시다. 그리고 이제 가능하다면 태양력의 365일 대신, 영원(Eternity)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요. 태양을 우주라고 생각하고 6개월씩인 북극의 182일식이 아닌 182의 무한년으로 계속되는 낮과 밤으로 생각(想像)하기로 합시다. 매일 아침 해가 주관적이고 대척적(對蹠的, Antipodal)인 공간으로부터 해가 객관적인 수평선상에 떠오르는 것과 같이 우주(The Universe), 대척적(Antipodal)인 주관세계로부터 객관의 세계로 주기적으로 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주기(Cycle of Life)입니다. 태양이 수평선에 들어가서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우주도 '우주의 밤'이 되면 주기적으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인도 사람들은 이와 같은 교차(交叉)를 브라흐마(梵)의 주야(Days and Nights of Brahma) 또는 '만반타라'(Manvantara)의 때와 '프랄라야'(Pralaya ; 붕괴)의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미인들은 우주의 낮과 밤이라고 말합니다. 서구인들이 이것을 우주일(宇宙日)과 우주야(宇宙夜)라고 불러도 무난할 것입니다. 밤일 때에는 만물은 모두 하나가 됩니다. (All is in All). 모든 원자는 모두가 동질의 것으로 융해됩니다.
진화와 환영(幻影)
문 : 그러나, 그때마다 우주를 창조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답 : 누구도 창조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그와 같은 경과를 진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이전의 철학자들과 동양학자들은 이것을 발산(發散 ; Emanation)17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비교학도(Occultist)와 신지학도는 이것만을 무한한 공간중에서 주기적으로 반영되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실체(實體 ; Universal and eternal reality)라고 생각합니다. 당신들이 객관적이고 물질적 우주인 현재의 세계의 반영(反映)을 우리는 일시적 환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원한 것만이 실재(Eternal is real) 입니다.
문 : 그런 점에서는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환영이군요.
답 : 이리저리 변하는 인격 즉, 오늘은 A, 내일은 B가 되기도하는 우리는 환영(幻影)입니다. 북극의 빛, '오로라'의 불의의 섬광(閃光)은 당신이 보고 있는 동안 정말로 보이지만 당신은 그것을 실재(Reality)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로라'를 만들어 내는 원인이 불변(不變)이며 영원한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실재(Reality)이며, 눈에 보이는 빛을 옮겨가는 것은 환영에 불과한 것입니다.
문 : 어떻게 해서 우주라고 하는 환영이 생기는 것인가, 어떻게 해서 현재라는 의식이 훨씬 이전에 있던 무의식에서 나타나는지 저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답 : 그것은 우리들의 유한한 의식에서만 무의식입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에 보면 "빛(光)은 암흑에서 비춘다. 그러나 암흑은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구절은 암흑으로 되어 있는 절대광(絶對光)은 환영적 물질광(物質光)인 암흑을 비추어 준다. 암흑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고 바꾸어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절대광은 절대, 불변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방사(Racliation)에 의한 것이나, 발산에 의한 것이나, (말로 논쟁할 필요는 없다) 우주는 같은 질의 주관상태에 현현의 제1계(第一界)로 옮겨가며 현현의 제1계에는 칠계(七界)가 있는 것으로 우리는 배웠습니다. 각계는 우리의 계(Plane)에 이르기까지 점차 농밀화하고 물질화하며, 이 계는 우리가 과학에 의하여 그 물질적 구성을 이해(理解)하여 대략 알고있는 이 세계가 태양계 혹은 '수이제네리스'(Suigeneris)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 : '수이제네리스'(Suigeneris)라는 것은 어떤 것을 뜻하는 것입니까?
답 : 이것은 '그것만에 독특하다'는 라틴어입니다. 말하자면 일정 불변한 것이나 우리들의 태양계, (우주의 몇 백만의 다른 태양계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우리들의 지구조차도 다른 모든 성좌들과는 서로 상이한 자체의 현현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다른 혹성에도 살고 있는 자가 있다고 말하며 만약 그것이 사람이라면, 그리고 사고력이 있는 것이라면 그들도 우리들과 같은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시인, 화가, 조각가들은 천사들조차 아름다운 사람으로 묘사하며 거기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잘못된 환상이라고 우리들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작은 지구상에서도 식물군, 동물군, 인류의 다종다양(多種多樣)한 것이 있고, 해조류(海藻類)부터 레바논(Labanon)의 세다(Cedar ; 송삼과(松杉科) 수목)에 이르기까지, 또 해파리(Jelly fish)로부터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부쉬멘(Bushman), 흑인(Negro) 및 아폴로(Apollo)로 그려진 인종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의 종류가 존재하며, 우주나 혹성의 조건이 변화한다면 아주 다른 식물군, 동물군, 인류가 그 결과로서 생겨날 것은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법칙 아래 있는 태양계의 모든 혹성에서조차 우리들의 세계와는 전연 다른 존재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여타 태양계의 외부적인 자연은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물질과학에서 판단하고 있는 것 같이 다른 별들이나 세계의 것을 우리들 자신의 척도로 판단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문 : 그것을 어떤 자료에 의해 그렇게 단정하는 것입니까?
답 : 일반적 과학은 결코 증거로서 인정하지 않지만, 이와 같은 사실을 입증 해 온 수많은 투시자들(Seers)의 거듭된 증언(Testimony)에 의한 것입니다. 맹목적인 육체에 구속되지 않는 육체적 및 영적 감각에 의한 이 사람들의 영적 비전(Vision), 즉 진실의 탐험은 하나 하나가 체계적으로 검토되고 다른 것과 비교되며, 그 성질이 세분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합의와 집단적인 경험에 의하여 확인되지 못한 것은 배제된 반면, 여러 시대의 상위한 풍토에서 무수하고 끊임없는 관찰을 통해 계속 더 확증을 얻을 수 있었던 것만이 확증된 진리로서 기록되었습니다. 정신, 영적 과학의 학자 및 학도들이 쓰는 방법은 자연과학자 및 물리학자들이 쓰는 방법과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연구 분야는 두 가지 상이한 계(Two different planes)에 있고, 우리들의 연구 용구(硏究 用具)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쓰는 용구가 더 신뢰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학자나 박물학자가 쓰는 증류기나 축전기 및 현미경은 고장을 일으킬 수 있고 천문학자의 망원경이나 측시 기구는 파손될 수 있으나 우리들의 기록 기구는 일기나 기타 요인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문 : 그래서 당신들은 그것을 맹신(Implicit faith) 힙니까?
답 : 신앙(Faith)이라는 말은 신지학 사전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식을 토대로 관찰과 경험에 근거를 두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지학과 물질과학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즉 물질과학의 관찰과 경험은 그것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수 만큼 많은 가설을 세우는데 비해 우리들이 말하는 지식에서는 부정을 할 수 없고, 충분히 또한 절대적으로 증명된 사실만이 지식으로 추가되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들은 하나의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신념이나 두 가지 가설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문 : 그러한 논거에서 당신들은 비전적(秘傳的) 불교에 볼 수 있는 이상한 학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그와 같은 학설은 세부적인 면에서 조금 부정확할 수 있고 보통학도에 의한 학설은 오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당연한 사실(Facts in nature)로서 어떤 과학적 가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것입니다.
지구의 7중(七重) 구조에 대하여
문 : 귀하는 지구가 몇 개의 지구로 된 연쇄구성 중의 일부라고 말씀하셨는데?
답 :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섯 개의 지구는 우리들의 지구와 같은 객관적인 계층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 : 그것은 엄청나게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까?
답 : 아니요, 우리들의 육안은 혹성이나 더 먼 곳에 있는 별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이들 여섯 개의 지구는 우리들의 육체적 지각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물질적 존재계의 외측에 있기 때문에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물질적 밀도나 무게 및 조직이 우리들의 지구나 기타 우리들이 알고 있는 혹성과 다를 뿐 아니라, 말하자면 전연 틀린 공간의 층(Clayer of space)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육체감각으로 인식하거나 느낄 수 없는 층입니다. 또 층(Layer)이라 말하는 것은 하나의 층위에 또 다른 층이 놓여져 있는 지층과 같은 것으로 상상하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상이 또 다른 오해를 낳을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층이라 말하는 그 성질은 이지적(理知的 ; Mental)이거나 육체적인 우리의 인상 각성시(覺醒時), 인지(認知)에 내포될 수 없는 무한공간의 계(界)를 의미합니다. 이를 우주 속의 7기본계(基本界 ; 혹은 층)의 각계(各界)ㅡ물론(勿論) 전체적으로는 록(Lock)의 정의에 의한 순수공간이지 우리의 유한공간이 아니다ㅡ는 그 자체의 객관적과 주관적을 가지고 있고, 그 자체의 시공이 있으며 그 자체의 의식과 여러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든 것은 근대적 사고 방식으로 훈련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문 : 별개의 감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인간계에는 당신이 말하는 것을 예증할만한 것이 없습니까? 지금 당신이 말한 여러 가지의 감각, 공간과, 각각 지각력에 대하여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개념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답 : 없습니다.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학에 반대하는 수단이나 기회를 주는 것 뿐입니다. 꿈속에서는 우리들이 다른 감각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다른 차원(Different plane)에서 느끼고, 말도 하며, 듣고, 일도 합니다. 꿈에 의한 우리들의 의식상태의 변화는 우리들의 생각으로서는 몇 년 동안에 걸쳐서 활동하고, 일어나는 일들을 한순간 속에서 상상적인 마음으로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꿈속에서는 우리들의 지적 작용이 대단히 빠르면서 다른 모든 것의 기능이 완전하고 자연스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들이 아주 다른 세계(世界)에 있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신지학의 철학에서는 자연계에 일곱 개의 기본적인 힘(force) 및 생존의 칠계가 있는 것과 같이 사람이 살고, 생각하며, 기억하고, 자신의 존재를 알 수가 있는 일곱 개의 의식상태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것들을 여기서 열거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을 알고 싶다면 동양의 형이상학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니 각성시와 꿈꿀 때의 두 가지 상태에서 박학(博學)한 철학자로부터 가난한 교육 받지 못한 미개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보통 사람은 이와같은 상태의 차이가 있다는 훌륭한 증거를 알 수 있습니다.
문 : 그렇다면 꿈의 상태에 대하여 생물학과 생리학의 유명한 설명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답 : 믿지 않습니다. 동양의 지혜의 가르침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하며 당신들의 심령학자의 가설조차 믿지 않습니다. 대우주에 관한 우주칠계의 존재, 우주의식의 칠상태(七狀態)가 있다고 믿지만 제4계에서 끝냅니다. 그 이상은 확실히 알아낼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하지만 소우주(인간)에 관해서는 자유로히 인간의 칠상태, 칠원리(七原理)를 연구합니다.
문 : 어떻게 칠상태나 칠원리를 설명합니까?
답 : 첫째, 인간 안에는 두 개의 다른것이 있습니다. 즉,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생각하는 인간과 생각하는 것을 될수있는 대로 동화하면서 기록하는 인간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두 개의 다른 성질로 나누어집니다. 즉, 세 가지 원리(principle), 혹은 세 가지 양상(樣相)으로 구성되어 있는 상부(上部) 즉, 육체적, 영적 존재와 네 가지 원리로 구성되어 있는 하부(下部) 즉, 육체적 4부구성(quaternary)이며, 모두가 일곱 원리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7중 성질
문 : 그것은 우리들 기독교에서 영, 혼, 육체를 가진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 : 틀립니다. 이것은 옛날 플라톤파의 분류법입니다. 플라톤은 비전을 전수받은 사람(Initiate)이었으므로, 금지(禁止)된 세밀한 것은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교의에 정통한 사람은 플라톤의 다양한 혼과 영의 조합(組合 ; Combination) 중에서 그 일곱 가지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을 두개의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는 절대적(우주적인)과 같은 본질로 되어 있는 영원한 것. 또 하나는 작은 '창조된' 신들(Minor 'created' Gods)에서 구성요소들이 유래된, 사멸(死滅)하는 것(Mortal and corruptible)입니다. 그는 인간이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고 설명합니다.18 (1) 죽어야 할 체(몸), (2) 죽지 않는 원리, (3) 별개의 사멸하는 종류의 혼, 이들은 우리가 각각 육체인간, 영적 혼 또는 영, 동물혼(지성, Nous)과 심령(Psuche)이라고 말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또 한 사람의 비교전수자(Initiate) 바울(Paul)이 채택한 분류법이기도 합니다. 그(Paul)는 부패하여야 하는 '아스트랄' 혼 또는 '아스트랄' 체 안에 심어지는 육체와 부패하지 않는 실질 속에서 자라나는 영체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도 이것을 확인하고 야곱 3장 1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급혼의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고 이 세상(육체적, 악마적······ 그리스어 원전 참조)의 것이며, 다른 '지혜'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플라톤' 및 '피타고라스'도 세 가지 원리만을 논하고 있으나 그들이 그 세 가지를 여러 가지로 조합한 속에서 일곱 가지 기능이 있다고 한 것을 신지학의 가르침과 비교해보면 이와 같은 것은 아주 명백해집니다. 다음에 그 일곱 가지 면을 두 개의 표로 나타내 봅시다.
신지학의 분류법
A. 저급의 4부 구성
저 급 의 4 부 구 성 | 범어(梵語) | 현교(通俗)적 의미 | 설명 |
(1) 루파(Rupa) 또는 스툴라 샤리라(Sthula Sarira) | (1) 육체 | (1) 살아있는 동안에는 모든 다른 원리의 매체 | |
(2) 프라나(Prana) | (2) 생명 즉, 생동의 원리 | (2) 1, 3, 4와 저급 마나스(Lower Manas)의 기능에만 필요하며 저급 마나스는 육체적 두뇌의 범위내의 모든 일들을 포함 한다. | |
(3) 링가 샤리라(Linga Sharira) | (3) 아스트랄체 | (3) 복체(複體), 유령체 | |
(4) 카마 루파(Kama rupa) | (4) 동물적 욕망과 정일(Passion) | (4) 이것은 동물인간으로써의 중심이며, 여기가 사멸하는 인간과 사후의 실재(實在)와의 경계선이다. |
B. 고급의 불멸의 3부 구성
고 급 의 불 멸 의 3 부 구 성 | (5) 마나스(Manas) 마나스의 기능에는 두개의 본질이 있다. | (5) 마음(Mind) 지력(知力) 이것은 인간의 고급심으로서 그 빛 즉, 방사는 살아있는 동안 사멸하는 인간과 모나드(Monad)를 이어주고 있다. | (5) 인간의 미래 상태 및 카르마적 운명은 마나스가 동물적 욕망의 좌(座)가 되는 '카마 루파'로서 추락하거나, 영적 자아(Spiritual ego) 부디(Buddhi)로 올라가며 따른다. 후자의 경우 '마나스(心)'의 개인적 영적 열망의 고급의식은 부디(Buddhi)를 동화하여 부디(Buddhi)에 흡수되고 자아를 형성한다. 자아는 제파적 지복(提婆的 至福, Devachaic bliss)에 들어간다. |
(6) 부디(Buddhi) | (6) 영적 혼 | ||
(7) 아트마(Atma) | (7) 영(靈) | (7) 그 방사(Radiation)와 같이 절대령과 일체이다. |
그러면 '플라톤'은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그(Platon)는 내부인간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불변이며 언제나 같은 것으로 신과 같은 실질로서 만들어졌고, 또 하나는 사멸하는 것으로,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 두 부분은 신지학에서 말하는 고급 3부구성과 저급 4부구성입니다. (표 참조)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혼(Psuche)이 '누스'(Nous) 즉, 신성한 영 또는 신성한 실질19에 부합되면 혼은 모든 것이 잘 되어 바르고 적절하게 갈 수가 있으나, '아노이아'(Anoia), 즉 우둔하며 비이성적인 물질혼에 집착한다면 만사(萬事)는 잘 되지 못합니다. 이상으로 '마나스', 보통 말하는 혼에는 두 가지 면이 있는 것을 알 것입니다. '아노이아' (즉, 앞에 말한 '카마 루파', 비전적 불교의 동물혼)에 집착한다면 인간혼(육체)에 관한 한 아주 절멸에 봉착합니다. '나우스'(Atma Buddhi)에 연결될 수 있다면 불사불멸의 자아에 흡입되고 이전에 존재하였던 인격(육체)에 관한 그의 영적 의미는 불사가 됩니다.
혼과 영의 구별
문 : 일부의 강령술사들이나 프랑스의 심령주의자들에게 비난받고 있는 것과 같이 정말 당신은 모든 인격의 절멸(絶滅)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까?
답 : 아니요, 그러나 이 이중성(신성자아(神性自我), Divine Ego)의 개체성(個體性 ; Individuality)과 인간동물의 인격의 문제에는 우리가 이미 설명하고 부정한 강령술회장(降靈術會場)에 불사의 자아(自我)가 '물질화한 영'으로서 출현할 가능성은 없다고 부정하기 때문에 우리의 반대자들이 무의미한 비난을 시작한 것입니다.
문 : '푸시케'(psuche)가 '아노이아'(Anoia)에 붙으면 전적 절멸(Entire annihli ation)에 이른다고 당신은 지금 말씀하셨는데, 플라톤이나 당신은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답 : 인격의식이 절멸한다고 하는 것은 좀처럼 없는 예외적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거의 불변하는 법은 인격이 자아의 개별적인 불사의식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용화(洛化)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변형(Transformation) 혹은 신성변모(神性變貌 ; Divine transfiguation)이며, 저급 네개조(四個組)만이 절멸한다는 것입니다.
문 : 육체의 인간 즉 일시적 인격, 인간의 그림자인 아스트랄체, 동물적 본능, 그리고 육체적 생명이라는 것이 영적 혼과 같이 살아서 영원히 되는 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까?
답 : 당연히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육체의 죽음과 같이 또는 죽은 얼마 후에 없어집니다. 끝내는 그것은 아주 깨끗이 붕괴되고 시야에서 사라져 전체가 소멸되고 맙니다.
문 : 그러면 당신은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까?
답 : 아주 부정합니다. 고대인들의 고대(古代) 비교철학을 믿는 우리들이 어떻게 해서 이집트 및 그리스의 '그노시스파'의 현교(顯敎)계통에서 유래한 후세 기독교신학의 비철학적 추론을 받아 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문 : 이집트인은 자연령을 존경하고, 양파까지 신이라 하였습니다. 힌두교도들은 오늘날까지도 우상숭배자이고, 배화교도는 태양을 숭배하여 왔습니다. 가장 훌륭한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몽상가였거나, 유물주의자였고, 플라톤이나 데모크리투스(Democritus)는 그 예입니다. 그리고 철학은 기독교신학에 비할 수 없습니다.
답 : 근대 기독교나, 근대과학의 교의 문답집에는 그렇게 쓰여 있을지 모르나 편견(偏見)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집트인은 오직 유일한 자(One only one)를 '누우스'(Nous)로서 숭앙하고 있습니다. '아낙사고라스'(Anaxagoras)가 그의 표현으로 '누우스 오토크라데스'(Nous auiokpains), 즉 자체의 힘을 가진 마음(心) 혹은 영(The mind or spirit self potent)을 '누우스'(Nous)라고 명명(命名)한 것은 바로 이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것은 선도(先導)하는 동력, 만물을 처음으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에게는 '누우스'가 신이고, '로고스'는 신의 발산인 인간입니다. '누우스'는 우주에 있어서나 인간에 있어서 영이고, '로고스'는 우주에 있어서나, '아스트랄'체에서 영의 발산이며 육체는 동물일 뿐입니다. 우리들의 외적인 힘은 현상(現像)을 감지하며 '누우스'(Nous)만이 순수사유(純粹思惟)의 대상, 즉 물자체(物自體 ; Noumena)를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로고스' 즉, 본체 뿐입니다. 그 본질은 불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 '로고스'는 영원의 자아(Ego)이며, 윤회하고, 영구히 삶을 계속합니다. 그러므로 외면의 그림자, 원천이 되는 신성 발산의 일시적인 옷에 불과한 육체가 마지막의 심판(죽음)의 날에 부패하지 않는 상태로 높아지는 것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문 : 당신은 인간의 영적 및 심령적 구조의 구분법은 생각해 냈다는 비난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플라톤이 말했다고 믿고 있으나 철학자는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답 : 그래도 나는 그런 견해를 지지합니다. 플라톤 이외에 피타고라스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20 피타고라스는 혼은 세 가지 요소 즉, '누우스'(영), '프렌'(Phren ; 마음), '더모스'(생명. 식(息)), 즉 '카발라'학의 '네페쉬'로서 구성되어 있는 자동단위(自動單位 ; Self-moving Linit-monad)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신지학의 '아트마', '부디'(Atma-Buddhi), 즉 고급영(혼), '마나스'(Ego ; 자아)와 '마나스'의 저급 반영(反映)과 결합된 '카마 루파'에 각각 상응(相應)하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혼(Soul)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들은 영, 영적 혼, 혹은 '아트마'(Atma)의 매체로서의 '부디'(Buddhi)ㅡ플라톤이 말하는 '아가톤' 또는 최고신ㅡ라고 말합니다. 피타고라스 및 다른 사람들이 '프렌' 및 '더모스'를 인간이나, 동물이 공유한다고 말하고 있는 사실을 보더라도 이 경우에는 '마나스'의 저급 반영(본능)과 '카마 루파'(동물적인 활동적 정욕)를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및 플라톤이 피타고라스의 단서(端緖)를 받아들여 따르고 있으므로 이들 다섯 가지 즉, '아트마'(신 ; 즉, Atma), '프쉬케'(넓은 의미에서 혼), '노우스(영즉 ; Mind), '프렌'(육체적 마음(心) ; Mind), '더모스'(카마 루파 즉, 정욕)에 신비파의 '에이도론'(Eidolon) 즉, 그림자 같은 형체가 되는 복체의 육체를 더하면 피타고라스 및 플라톤이 생각하는 양식은 신지학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쉽게 알아낼 것입니다. 이집트인까지도 칠분법(七分法)을 지키고 있습니다. 죽을 때 혼은 앞으로(후에) 놓아두고 갈 것과 가지고 갈 것을 구분하기 위하여 일곱 개의 방(房), 즉 일곱 개의 원리를 통해야 한다고 이집트인들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가르침과 고대인이 말하고 있는 가르침은 단 하나 틀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의 가르침을 누설(漏泄)하면 죄를 받아서 죽는다는 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라고 고대인의 가르침은 대요만을 가르쳐온데 대하여, 신지학도의 가르침은 파고들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들은 법칙이 허락하는 한 그것을 세상에 가르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가르침에도 말해서는 안 되는 큰 문제가 여러 개 있습니다. 그것은 비교철학을 연구하고 침묵의 서약을 한 사람들만이 알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가르침
문 : 우리에게는 그리스어, 라틴어, 범어 및 헤브라이어 계통의 훌륭한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번역한 것에서 당신이 말하는 것에 대한 실마리를 어디서나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답 : 당신들이 말하고 있는 번역자들은 박학하면서도 철학자들, 특히 그리스의 철학자를 신비적 저작가로 보지 않고, 애매한 저작가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서 푸르타크(Plutarch)를 들어봅시다. 인간 본질에 대하여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읽어 보십시요. 그가 쓴 문장 그대로 해석되어 형이상학적 미신(迷信)이나 무지의 소지라고 했습니다. 적절한 예를 들어봅시다. '푸르타크'가 말하기를' "인간은 복합체이나 단 두 개의 부분으로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이해력이 혼의 일부라고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혼이 육체의 일부라고 하는 사람들(즉, 삼부구조(構造)) 부분은 없어지고 죽어야할 4부구조(四部構造)만이라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틀린 것이다. 혼은 육체보다 높고 신성한 것인 것처럼 이해력(Nous)은 혼보다 나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혼(프쉬케), 이해력(누우스)의 결합이 이성이 되고 혼과 체(더모스, 동물혼)가 결합하면 정욕이 된다. 이 결합의 하나는 고락의 시작, 또는 고(苦)와 락(樂)의 본질이며 또 하나는 덕과 악의 시작 또는 그 본질이다. 이들 세 가지 부분이 결합하고 함께 뭉쳐 지구에게는 체(體)를, 달(月)에게는 혼(魂)을, 그리고 태양에게는 인간세대의 이해력을 주었다" 이 최후의 문장은 완전히 비유적(比喩的)이므로, 상응에 관한 비교과학에 정통하고 있어서, 어떤 혹성이 어떤 본질과 관계가 맺어 있는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해될 것입니다. '푸르타크'는 인간의 본질을 세 개로 나누어, 체(Body)를 물질조직과 '아스트랄' 그림자(形 ; Shadow) 및 숨(호흡)과의 합성물, 즉 지구에서 나와 지구로 돌아오는 3부구조의 저급부분으로 하고 있습니다. 달(月)에서 나와 달의 영향을 받는 것은 중간의 원리이며, 본능적 혼 즉, 제2의 부분이며21 그리고 혼의 더 높은 부분, 그 영적 혼은 그 자체에 '아트마'와 '마나스'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최고신 '아카손'을 나타내는 태양의 직접방사(放射)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푸르타크) 다음과 같이 말하는 데에서 더욱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죽으면 처음에는 인간의 세 본질이 두 본질로 되고, 다음의 죽음에서는 나머지 두 본질에서 다시 한 본질을 뽑아낸다. 처음의 죽음은 '데메터'(Demeter) 그리스신화, 농가, 풍요의 여신, 로마신화의 케레스(Ceres)의 영역과 지배하에 들어간다. 지금까지 아테네인은 죽은 사람을 '데메터'(Demeter)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 죽음은 달(月), 즉 페르세폰(Persephone), 로마신화, 지옥의 여왕, 그리스신화의 푸로세폰(Persehone) 영역에서 행해진다."(同著) 귀하는 여기에서 신지학의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생존 중에 7중의 존재이며 사후 '카마 로카'(Kamaloka)에서 5개 조가 되고 '데봐챤'(Devachan)에서 자아, 영혼, 의식의 3중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분리는 처음 '푸르타크'가 말하는 '하데스(Hades ; 명계(冥界)의 지배자)의 초지(草地)'가 되는 카마 로카에서 이루어지고 다음은 '데봐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나 이것은 신성한 비의(秘儀) 사이에 행해지는 일들의 한 부분입니다. 이런 전(全) 죽음의 과정을 비전전수의 후보자가 거칠 때 영광의 영이 부활하는 것을 우리는 신비의 이름으로 의식(意識 ; Consciousness)이라고 합니다. '푸르타크'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것을 뜻합니다. "처음 죽을 때 이 지상의 헤르메스(Hermes)가 안내자가 되나 다음 죽음은 천상의 헤르메스가 안내자가 된다. 지상의 죽음은 갑자기 독력으로 혼을 몸에서 뽑아낸다. 그러나 '프로세르피나'(명부의 여왕)는 조용하게 오랜 동안에 결쳐 혼에서 이해력(識)을 끌어낸다. 이 때문에 '모노게네스'(Monogenes) 즉, 명부(冥府)의 여왕에 의해 분리된 인간 즉, 좋은 부분은 혼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번의 죽음은 자연적으로 생긴다. 몸에서 분리된 모든 혼은 이해력(Mint)이 있거나 없거나 모두 같지는 않더라도 당분간 지구와 달(月) 사이의 영역(Kamaloka)에 떠돌아다녀야 할 운명(후아툼, Fatum, 카르마)이 정해져 있다. 부정했거나 몸 가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거기서 저지른 죄 때문에 고생하지만 선량하며 덕이 있는 사람들은 정화되어 육체와의 접촉에서 전염되어 있던 전염병을 모두 깨끗하게 할 때까지 공기가 가장 좋은 곳에서 머무르고 있다. 그곳은 명부의 초지라고 불리는 곳으로 전부터 정해져 있는 시간동안 그곳에 머물고 있어야 한다. 다음에는 마치 방랑의 순례에서 돌아온 것 같이 혹은 장기 추방에서 귀향한 것 같이 주로 신성한 비의의 '이니쉬에이션'을 받은 사람들이 받는 것과 같은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 기쁨은 걱정스럽던 일, 숭배하던 것, 각자의 정당하면서 독특한 희망 등이 합한 것들이다. 이것은 열반의 지복(至福)이다." 어떤 신지학도라도 '데봐챤'의 이지적 기쁨을 더 이상 평이(平易)하게 비교적인 언어로 묘사하기는 어렵습니다. '데봐챤'(Devachan)에는 모든 사람에게 그 둘레에 자신의 의식으로 만들어낸 낙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지학도들이 빠져드는 일반적인 과오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인간은 7중이며, 다음에는 5중, 다음에는 3중으로 된다고 하여 일곱 개, 다섯 개, 세 개의 실체로 되어 있다거나 어떤 신지학도가 잘 표현한 것처럼, 양파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죽음에 임하여 소산(消散)하는 육체, 생명, '아스트랄'적 '에이도론'(Eidolon)을 뺀 원리들은 그저 의식의 양상과 상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생명의 주기 동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사(不死)하는 진인(眞人 ; Real man) 하나뿐이며, 이것이 '마나스'(Manas), 심인(心人 ; The mind man) 또는 육신화한 의식(Embodied consciousness)입니다. 물질이 없는 마음(Mind)과 의식의 활동가능성을 부정하는 유물론자들의 의견은 우리들의 경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그들 의논(議論)의 정당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물어보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소위 절대의식 혹은 신성(Dkeity)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것은 영원히 보이지 않고 불가지(不可知)이나, 그래도 보편적 영질(靈質 ; Spiritual matter)이고 완전 무한이어서 인간의 유한개념으로는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영질(Spiritual)의 가장 낮은 현현의 일편(一片)이며, 의식적 자아(Conscious ego)가 만들어내는 자신의 천국이며, 바보들의 낙원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지복의 상태(State of bliss)입니다.22
문 : 그러면 '데봐챤'(Devachan)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문자대로 말하면 '신들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이며, 정신적 지복의 상태입니다. 철학적으로는 가장 선명한 꿈이지만 꿈보다 훨씬 선명하고 진실한 정신적 상태입니다. 말하자면 대부분 사람들의 사후의 상태입니다.23
제7장 죽음후의 다양한 모습들
육체적 인간 및 영적 인간
문 : 당신이 불사성(Immortality of the soul)을 믿는다는 말을 듣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답 : 그런 혼이 아니라(Not of the soul), 성스러운 혼(Divine spirit) 혹은 차라리 화신하는 자아(Reincarnating ego)의 불사를 믿는 것입니다.
문 : 혼과 신성한 혼과 화신하는 자아는 어떻게 다릅니까?
답 : 신지학은 철학적으로는 대단히 다릅니다만 이것은 매우 해설하기가 어렵고 심원한 문제이므로 경솔하게 다루기 어렵습니다. 이것들을 따로 따로 분석해 본 후에 함께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처음에 혼(Spirit)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혼(Spirit), 예수가 말한 "감추어져 있는 부(父)", 즉 '아트만'(Atman)은 어떤 사람의 개인적인 특성이 아니라 체나 형체가 없는 신성한 본질(Essence)이며 무게가 없고, 보이지 않으며, 나누어 볼 수도 없는 것으로 불교도들이 말하는 열반(Nirvana)과 같이,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멸자(死滅者 ; Mortal)에게 그늘을 드리울 뿐입니다(Overshadow) 즉, 불멸자에게 들어가 전신에 퍼지며 그 매체인 '부디'(Buddhi)를 통하여 그 빛을 직접 발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혼의 이성적인 부분(Rationa part)24이 인간에게 아주 들어가버리는 것은 결코 아니며, 그 비이성적인 영적 혼(Irrational spiritual soul) 즉, 부디(Buddhi)25를 통해 다소 그림자(影)를 드리우는(Overshadow)것이라고 옛날의 철학자들이 은밀하게 주장한 것은 모두 이와 같은 뜻이었습니다.
문 : 신성한 혼이 아닌 '동물혼'만이 비이성적이라는 인상을 받아왔었는데요"
답 : 미분화(未分化)이기 때문에 소극적, 즉 수동적인 비이성적인 것과 너무나 활동적, 적극적이기 때문에 비이성적인 것과의 차이를 당신은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란 화학적, 물리적인 힘의 상호작용과 같이 영적인 힘의 상호작용이기도 하며 우리가 이 원리(Principle)라고 말하는 것에 의하여 가능(可能 ; Function)하게 됩니다.
문 :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책들을 읽어 보았는데 옛날 철학자들의 생각과 중세기 카발라학자(Kabalist)들의 생각과는 어느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대단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답 : 중세기 '카발라'들과 우리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의 신플라톤 및 동양의 가르침과 같이 영(Atma)은 결코 실체적으로(Thtypstatically ; 위계적(位階的)으로) 인간에게 강하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내적 인간(Inner man ; 아스트랄 원리의 혼적 및 영적인 복합체(複合體))에게 다소, 그의 빛을 쏟아주는(Shower)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발라' 학도들은 인간혼(Human spirit)이 빛의 큰 바다(Ocean of light), 보편 영혼(Universal spirit)에서 떨어져나와 인간의 혼 속에 들어가서 일생 동안 그 '아스트랄 캡슐'(Astral capsule) 속에 갇혀 있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기독교적 '카발라' 학도들은 지금도 그와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인동형론이나 성서의 교의(Biblical dotnrines)에서 해방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문 :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 우리들은 '아스트랄 캡슐'(Astral capsule) 속에 혼(spirit), 즉 '아트마'의 빛이 있다고 인정할 뿐입니다. 인간과 영은 통일을 향하여 상승함으로써 불사성(不死性)을 쟁취해야 한다고 우리들은 주장 합니다. 만약 그와 같은 상승이 성공한다면 결국은 일체(一體)로 맺어져서 말하자면 흡수되고 말 것입니다. 죽음 후의 인간의 개별화(個別化)는 혼(spirit)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영(Soul)이나 체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인격(personality)이라는 말은 비록 보통 이해하고 있는 의미라 할지라도 우리들 사후의 본질(Immotal essence)이라는 말에 맞추어 본다면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사의 '본질' 자체는 개별화를 가진 자아인 것은 틀림없으며, 불사영원인 것입니다. 아이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혼과 인격영을 연결하는 빛나는 실(絲)이 난폭하게도 끊어져 육체를 잊어버린 실체(Entity)가 인격영으로부터 절연당하고 육체에는 조그만 인상(印象)도 남겨 놓지 않는 인격혼이 절멸되었다는 것은 긴 윤회 동안 차례 차례로 죄를 거듭하여 범하여 온 돌이킬 수 없는 흑마술사나 죄인들의 경우뿐입니다. 만약에 저급 '마나스' 즉, 인격 '마나스'와 개별적으로 화신(化身)하는 자아(Individual reincarnating ego)와의 통합이 살아있는 동안에 달성되지 못한다면 인격 '마나스'는 저급동물과 같은 운명을 지니고 차츰 '에텔'(ether)로서 그 개성이 절멸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때도 자아는 여전히 개별의 존재입니다. 그와 같이 특별히 정말 가치없고 무익한 인생을 보낸다면 혼적 자아(Spiritual ego)는 다음에는 이상화된 인격으로서 '데봐챤' 상태를 잊어버리고 혹성 혼(Planetary spirit)이 되어 당분간 자유를 누린 후에 곧 다시 태어납니다.
문 :「아이시스 언베일드」(Isis unveiled)에는 이와 같은 혹성혼들이나 천사들 즉 '이교도들의 신이나, 기독교도의 천사들은 결코 지구상의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답 :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혹성혼'들은 아니고 어느 류(類)의 좀더 높은 곳에 있는 혹성혼(惑星魂)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구(혹성)에서는 인간이 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전에 세계에서 해탈한 영들로서 그 때문에 이 지구에 다시 인간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 혼(Spirit)은 모두가 다음의 더 높은 '마하만반타라'(Mahamanvantara ; 대현현기)에는 말하자면 지금의 대시대(Great Age)와 '브라마프랄라야'(Brahma pralaya; 숫자 16자리 정도의 긴 서기)가 끝난 후에는 다시 새로 태어날 것입니다. 동양철학에서 인류는 인체 안에 갇혀 있는 '혼들'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당신도 들었을 것입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동물은 여러원리(Principle)가 잠재적으로 불어넣어져(吹) 있고, 인간은 실제로 그것이 불어넣어져(吹) 있는 것입니다. (비전교의 2권 구절참조) 이제 그 차이를 알겠습니까?
문 : 그러나, 이런 한정(Specialization)은 먼 옛날부터 형이상학자들의 어려운 문제(問題)였습니다.
답 : 그렇습니다. 불교철학의 비교부분은 모두가 이런 신비적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있고, 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밖에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박학한 근대 학자들의 대부분은 그것을 잘못 해석해 왔습니다. 형이상학자들 역시 결과와 원인을 자주 혼동하기 쉽습니다. 혼으로써 불사의 생명을 획득한 자아는 지상에서의 모든 환생(還生 ; Rebirth) 동안에 같은 내적 아(我 ; Inner self)로서, 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전생의 '스미스'나 '브라운'씨 라야 한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아의 개성이 없어져 버린다고 하는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스트랄' 영과 인간의 이 세상체(世上體)는 어두운 저승에서 승화(昇華)된(Sublirnated) 요소의 우주적 대해(大海)에 흡수되어 (그리고 그 사람의 인격아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가치가 없다면) 이전의 인격아(Last personal ego)를 느끼지 못할지라도 신성한 자아만은, 비록 이 신성한 자아발산(自我發散)이라는 이 세상 경험이 가치가 없는 매체(육체)에서 분리되는 순간에 완전히 말살(抹殺) 된다고 할지라도 같은 불변의 실체(Entity)로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문 : '오리겐'(Origen)이나 '시네시우스'(Synesius) 및 기타 준기독교(準基督敎)와 '준 플라톤학파'들의 가르침 같이 만약 그 혼(The spirit) 즉, 영의 신성한 부분이 옛날부터 개별적인 것으로 존재해 왔다면 또, 형이상학적으로 영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면, 어째서 영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인간이 무엇을 하거나 자아의 개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깨끗한 인생을 보내거나, 동물적인 인생을 보내거나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답 : 당신이 말한 바와 같은 그 교의는 그러한 결과가 남을 대신한 속죄(贖罪)만큼이나 해로운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 모두가 불사(不死)라고 하는 허위의 관념과 속죄의 교의가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에 알려졌었다면 그 보급으로 인하여 인류는 더 좋은 발전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이나 로크리스의 티메우스(Timaeus of Locris)나, 옛날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인간의 영을 보편적 세계영에서 나왔다고 했고 가르침에 의하면 세계영은 '에텔'(Aether) 즉 부(父)가 되는 '제우스'(PaterㅡZeus)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원리는 '피타고라스'파의 '모나스' 혹은 우리들이 말하는 '아트마-부디'(Atma-Buddhi)의 순수한 본질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트마ㆍ부디ㆍ문디'(Atma, Buddhi, Mundi, 세계의 혼)는 '모나스'의 효과(効果), 말하자면 주관적 혹은 오히려 주관적 방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 혼이 되는 개성, 즉 재화신(再化身)하는 혼적 자아(Reincarnating spiritual ego)도, '부디'(Buddhi)ㅡ즉, 혼적 영(Spiritual soul)도 이전부터 있었던(Pre-existent)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혼은 확실한 실체로서 즉, 개별화한 것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대하여 영은 이전부터 있었던 호흡(Pre-exiting breath)으로서 지성적 전체의 지력(知力)이 없는(Unscient) 부분으로서 존재해 있었습니다. 양쪽 모두 원래 영원한 빛의 대양(Eternal ocean of light)에서 형성된 것이나 배화철학자들, 즉 중세의 신지학도가 말한 바와 같이 불(火) 속에는 보이는 혼도 있고 보이지 않는 혼도 있습니다. 그들은 수혼(獸魂 ; Anima bruta)과 신혼(神魂 ; Anima divin)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기원전 5세기의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그리스 철학자)는 인간과 동물은 모두 2개의 혼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혼을 이성적 혼(Nous)이라고 말하고 또 하나의 혼은 동물혼(Psyche)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들 철학자에 의하면 이성적 혼은 세계혼의 내부에서 동물혼은 외부에서 나옵니다.
문 : 영, 즉 인간의 생각하는 영(Human thinking soul), 혹은 당신이 자아라고 말하는 것은 물질입니까?
답 : 물질은 아닙니다만 분명히 의심할 것 없는 질료(質料)입니다. 만약 원초(原初)라는 형용사를 앞에 붙였다면 물질(Matter)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물질은 영과 같이 서로 영원하며, 우리들 눈에 보이거나, 촉(觸)할 수도 있거나 나누어 볼 수 있는 물질이 아니라 그 물질은 순정(純正)의 극치(Extreme sublimation) 입니다. 순수혼(Pues spirit)은 앞으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비영(非靈 ; No-spirit)이며 말하자면 완전한 전체(Absolute all)입니다. 인간은 이런 원초의 영ㆍ물질에서 진화한 것이며, 초ㆍ전ㆍ영(超ㆍ全ㆍ靈 ; Meca-spirit)으로부터 농밀한 물질에 이르기까지 여러 원리(Principle)가 정연(整然)하게 진보하는 계재(階梯)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적 인간(inner man)을 불사라고 생각하며, 또 혼적 실재이면서 동시에 죽어야하는 인간이라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문 : 그러면 무엇 때문에 당신은 신(神)의 그와 같은 실재를 믿지 않습니까?
답 : 무한이며 무조건인 것은 형(形)을 가질 수가 없고, 하나의 실재로서는 있을 수 없으며 편재(偏在)이고, 어떤 동양철학의 어떤 경우에나, 실체라고 명명(命名)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실재'는 불사인 것이나, 구극(究極)의 본질만이 불사인 것이고 개인의 형체가 불사인 것은 아닙니다. 즉, 그 주기의 최후 시점에서 원초의 성질(Primordial matare)에 흡수되고, 실재라는 이름을 잃어버리고 혼(Spirit)이 됩니다. 신체의 형체로서의 불사성은(Immortality as aform) 실재의 생명주기 즉, 대현현기에 한정된 것이며, 그 후에는 우주혼(우주주인)과 일체가 되어 그때에는 별개의 실재로서는 있지 않습니다.(존재하지 않는다) 인격혼(Personal soul)ㅡ우리로서는 혼적 자아(Spiritual ego)를 보유하는 의식의 불꽃(Spark), 지난 번 화신했을 때의 개인적 '나(I)'라고 하는 관념(Idea)을 뜻함ㅡ은 별개의 분명한 추억으로 대현현기(Devachanic period)에만 계속 유지됩니다. 그 후에는 년말(年末)에 일년 속에 어느 하루가 그것이 지나면 인격혼은 마치 년말의 기억 속에 그해 몇 날의 추억이 들어 있는 것과 같이 무수한 자아의 화신(Incarnations of ego) 중의 하나로 추억될 것입니다. 당신은 신을 무한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유한한 조건들에 결부시키려고 합니다. '아트마' 즉 '부디 마나스'(Buddhi-Manas)에 의하여 확실하게 결합된 것만이 불사입니다. 인간의 혼(Soul) 그 자아는 불사영원도 아니고 신성(Divine)하지도 않습니다.「조하르」(Zohar)라고 하는 '카발라' 고전에(1장 65~66p)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습니다. "영(Soul)이 이 세상에 보내지면 그 자신을 이 세상에서 유지하기 위하여 이 세상 옷을 입고, 그래야 해를 입지 않고, 거울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빛나는 옷(Shining garment)을 받으며, 이 빛은 빛의 주(Lord of light)로부터 비치는 것이다." 그리고「조하르」(Zohar)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영이 '신성한 키스'를 받지 못하거나, 영이 그 근원인 질료(Substance from which she ernanated) 즉 혼(Spirit)과 재결합되지 못하면 지복의 집으로 되는 것이 어렵다"(돌아갈 수 없다.) 모든 혼은 2원(元)이며 그리고 영(Soul) 그것은 여성원리이나 혼(Spirit)은 남성원리입니다. 혼으로부터 절연(絶緣)될 정도로 타락(墮落)되어 있지 않는 한 육체에 갇혀(閉)있을 동안의 인간은 삼위일체(Trinity)입니다. "육신의 세속적 혼인은 그녀의 성스러운 남편(혼)보다 더 좋아하는 영에게 화가 있을 지어다"라고 연금술저작(鍊金術著作)「열쇠의 서」에 쓰여져있습니다. 그런 인격(Personality)은 불멸하는 자아기억의 명판(銘板 ; Tablet)에 기록될 것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참으로 두렵습니다.
문 : 가령 신이 인간에게 인격영을 불어넣어(吹)주지 않더라도 극서이 신과 같은 질료(質料)라고 당신 자신이 말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그 영은 불사가 될 수 없습니까?
답 : 질료뿐 아니라 물질의 모든 원자나 어떤 작은 단위도 그 본질은 불멸이 아니지만 개별적의식에서는 불멸입니다. 불사성(Immortality)은 사람의 끊임이 없는 의식뿐이며, 개인적 의식은 인격자체보다는 오래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개인적 의식은 대현현기(Devachan)까지 유지될 수가 있고, 그후에는 먼저 개별의식에게 흡수되고 다음에 보편의식에게 흡수됩니다. 어찌하여 유태의 경전(經典)을 왜 그렇게 혼란하게 했는가는 당신들의 신학자들에게 물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구약성서 최초의 5권(Pentateuch) 특히, 창세기의 작자(作者)들은 신이 '아담'에게 불어 넣은(吹) '네페쉬'(Nephesh)(창세기 2장)가 결코 불사의 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발견하려면 성서를 잘 읽어 보십시요. 몇 가지 예를 봅시다. "신은 움직이는 모든 '네페쉬'(Nephesh)를 만들고" 창세기 1장 21절의 '네페쉬'는 동물을 말하며 동서(同書) 2장 7절에는 "그리고 사람은 네페쉬(Nephesh)가 되었다." 했는데 여기서는 생령(生靈 ; Iring soul)을 뜻합니다. 그러고 보면 여기서 '네페쉬'(Nephesh)라는 말은, 불사의 인간과 사멸하는 동물에게 차별없이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대들의 '네페쉬'를 내가 필요로 하며 모든 짐승의 손으로 모든 사람의 손으로 내가 그것을 필요로 한다"(동서 9장 5절) "도망쳐서 '네페쉬'를 구하라."(도망쳐서 그대의 생명을 구하라고 해석 됨) (동서 19장 17절) 영어판에는 "이것을 죽이지 말자"(동서 37장 21절)로 되어 있고, 히브리어의 원전(Text)에는 "그의 '네페쉬'를 죽이지 말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레위기(레위記 ; Leviticus)에는 "네페쉬는 네페쉬(Nephesh for nephesh)"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헤브라이'어에서는 문자 그대로 "사람의 네페쉬를 죽이는 자는···"로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4장 17절) 또 18장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습니다. "짐승의 '네페쉬'를 죽이는 자는 짐승의 것으로 짐승을 보상하여야 한다" 그러나 원서에는 "네페쉬를 가지고 네페쉬를 보상하라"로 되어 있습니다. 불사의 것을 어떻게 인간이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두세스(Sadducees) 사람들이 영의 불사성을 왜 부정하는지 설명하는 것이며, 또 여하간에 비전을 받지 못한 '모세' 교의(敎儀) 유태인들이 혼의 존속을 전혀 믿지 않는 또 하나의 증거도 됩니다.
영원한 상벌과 열반에 대하여
문 : 천국과 지옥이라는 기독교의 교의, 혹은 정통파의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세(來世)의 상벌을 당신은 믿고 있는지 아닌지 물어 볼 필요는 없겠군요?
답 : 당신들의 문답시에 기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우리들은 완전히 부인합니다. 하여간에 그 상벌이 계속된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응보의 법칙(Law of retribution)과 이 법칙이 지배하는 절대적인 정의와 지혜, 혹은 '카르마'(Karma)를 굳게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구한 상과 영구한 벌이 있는 잔혹하고 비철학적인 신앙의 수락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우리들은 호레이스(Horace)(로마서 시인 기원전 65-8)와 같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법을 정하자 우리의 분노를 억제할 수 있도록, 그리고 과실과 균형있는 고통으로 처벌하도록, 그러나 회초리 하나만으로 다스릴 수 있는 자를 너무 심하게 다루지 말도록 하자."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법칙이며, 공평한 것입니다. 지혜와 사랑과 자비의 권화(權化)인 당신들의 신은 죽어야하는 인간보다 지혜(智慧)나 사랑이나, 자비의 속성(屬性)이 덜한 것으로 믿어도 되겠습니까?
문 : 이 교의(敎義)를 거부하시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답 : 우리가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윤회(輪廻)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혼(魂)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에 반대합니다. 인간은 모두 다른 자아(Ego)와 동시대에 태어난 어떤 자아의 운반체이며, 그 매체라고 우리들은 믿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자아는 같은 본질에서 구성되어 본질적으로 같고, 보편적인 무한자아(Universal infinite ego)로부터 원초적으로 발산되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보편적인 무한자아를 '로고스'(Logos 즉, 제2현현신)라 하였고 우리들은 현현(顯現)한 신성한 원칙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주심(Universal mind), 혹은 영(Universal soul)과 같으며 많은 유신론자가 믿고 있는 것처럼 신인동형설의 우주외적(外的)인 인격신은 아닙니다. 제발, 혼동하지 말아 주십시요.
문 : 그러나, 현현한 원리(Manifested principle)를 일단 받아들였다면 모든 혼도 이전에, 그와 같이 창조되었으므로, 새로운 인간혼도 모두 그런 원리에 의하여 창조된다고 믿어도 지장이 없지 않겠습니까?
답 : 지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인격적인 것은 자신의 마음에 든다고하여 창조하거나 계획을 세우거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기적인 현현에서 불변인 보편적인 법칙(Universal Law)이기 위해서는 생명주기의 초(初)마다 그 본질을 발산하고 현현하지만, 창조 후 불과(不過) 수년 후에 후회할 인간들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우리들이 신성한 법칙을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사랑, 지혜, 공평한 것이여야 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조화, 논리, 정의의 원칙이어야 합니다. 신이 인간의 짧은 인생을 위해 그 영이 부유하고 행복한 인류를 움직이거나 아무런 죄과없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혹한 운명의 고통을 받을 영에 관계없이 모든 영을 창조한다고 하면 그것은 신이라기 보다 지각없는 악마일 것입니다. (후에 "자아의 죄에 대하여" 참조) '모세'의 성서 신자인 '유태' 철학자들조차 결코 그러한 생각은 가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도 우리와 같이 윤회를 믿었습니다.
문 : 그 증거를 예로 들 수가 있습니까?
답 : 물론입니다. 필로 주데우스(Philo Judaeus)는 수면(睡眠)에 관하여(Le Somaiis) 1장 22절에서 "공중에는 영(Soul)으로 꽉 차 있다. 지구에 가장 가까운 영들은 죽어야할 체에 붙기 위하여 내려오며 그 몸 안에서 살아갈 것을 바라며, 다른 몸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조하르」(Johar)라는 책에는 영이 신에게 자유를 탄원하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우주의 주인이여! 이 세상에서는 나는 여노예(女奴隸)로서 여러 종류의 탄압을 받게 될" (조하르 제2권 96P) 운명의 심연성을, 영구불변의 법칙은 신의 답에서 단언되고 있습니다. "그대의 의지에 반하여 그대는 태아가 되었고, 그대의 의지에 반하여 그대는 태어났다."(미시나 필크 아부트 Mishna Aboth 4권 29항) 대조적으로 밝음을 나타내는 어두운 곳이 있어야만 빛을 알 수가 있고, 생의 혜택을 나타내는 악(Evil)이 없으면 선(善)이 선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덕성도 유혹의 무서운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이득(Merit)이 없습니다. 감추어져 있는 신 외에는 영원하며 불변한 것은 없습니다. 유한한 것은 처음이 있으며 또한 끝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하간에 변화하지 않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유한한 것은 진화하거나 퇴보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불사성을 주는 혼과의 재결합을 갈망하는 영은 오직 지복과 영원한 휴식장으로 나아가기 위해, 주기적인 윤회를 거쳐서 스스로가 정화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휴식장을「조하르」에서는 '사랑의 궁전'이라 말하고, 힌두교에서는 '모크사'(Moksha)라 하며 그노시스 교도(Gnostics)들은 영원한 빛의 '푸레로마'(The pleroma of eternal light)라 하고, 불교에서는 '열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모두가 일시적인 것이며 영구불변인 것은 아닙니다.
문 : 그렇지만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들 중에는 윤회에 대하여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답 : 자신이 있는 곳에 머무르게 해 달라고 허락을 청한 혼은 전부터 있었던 전존재(前存在 ; Pre-existent)인 것이 분명하고 그때에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조하르」라는(3권 61항) 좋은 증거가 있습니다. 윤회하는 자아 즉, 이성적 영(Last personality) 전생의 인격을 아주 소멸하지 않으면 안되는 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聖)한 자ㅡ의 이름의 축복을 받아서ㅡ의 하늘에서 떨어져나온 모든 영은 태어났을 적에 심연(深淵)에 몸을 던져 다시 한번 이 세상에 내려오기를 예기하고 있다." 성한 자라는 것은 이 경우에 비교적으로 '아트만'(Atman) 혹은, '아트마ㆍ부디'(Atma-Buddhi)를 뜻합니다.
문 : 열반이 천국이나 파라다이스(Paradise)와 동의어로 쓰이고 있는 것은 매우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유명한 동양학자들은 모두 열반을 절멸(絶滅 ; Danninilation)과 동의(同義 ; Synonyrn)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답 : 열반을 인격과 분화한 물질에 관하여 문자 그대로 무로 귀(歸)한다고 하면 좋으나 다른 것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윤회 및 인간의 삼위일체에 관한 우리들의 생각은 초기 기독교의 많은 교부(敎父 ; Christian father)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오해는 신약성서의 번역자와 옛 철학혼설이 혼과 영을 혼동한 것에서 온 것입니다. 불타나, 플로티누스(Plotinus)나 기타 많은 비전체험가들이 자신들의 혼이 전면적인 소멸을 갈망했다고, 지금도 비난받고 있는 이유의 하나는 혼과 영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신에 귀의한다든가 보편영과 재결합'이란 것은 근대적 생각에 의하면 '무에 귀의한다'고 하는 것이 됩니다. 물론, 인격영은 자신보다 더 순수한 본질과 불사의 혼과의 영구한 결부가 이루어질 때까지 분해한 분자로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천국(Kingdom of Heaven)의 기초를 만들어낸 사도행전이나, 여러 서간(書簡)의 번역자들 및 정의의 나라에 기초라고 하는 불교경전(Buddhist sutra of the eoundation of the kingdom of righteousness)의 근대 해설자들은 기독교의 위대한 사도 '바울'의 의미나 인도의 위대한 개혁자 불타가 말한 의미를 혼동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의 번역자들은 '폭스코스'(Fuxckos ; 영)란 말을 애매하게해버림으로써 성서의 독자들은 누구나 이 말이 영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혼과 영을 혼동하고 있으므로 독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곡해된 의미밖에 알지 못합니다. 또, 불교의 해설자들은 불교 사종 선정(四種 禪定)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과 운동을 주는 빛의 성질을 가진 혼을 비실체(非實體 ; Non-entity)로 해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고 피타고라스파의 철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 이성적 능력의 한 가지인 기억력을 가진 짐승(獸)의 민감한 혼이 죽어서 무가 되겠는가?라고 비교학도(Occultist)들은 말합니다. 불교철학에서 "무로 귀한다."라는 것은 그것이 어떤 형체이거나, 어떤 형체를 닮은 것이거나, 질료의 분상이라는 의미밖에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체를 가진 것은 모두 일시적인 것이며, 사실은 환영(幻影)이기 때문입니다. 영원에서는 아무리 긴 기간이라도 일순과 같은 것입니다. 형체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형체를 본 것을 자각(自覺)하기 전에 그것은 번개불 같이 지나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혼적 존재는 물질, 즉 질료(質料)와 형체의 모든 분자로부터 영구히 떨어져나와서 다시 혼적 호흡(魂的 呼吸 ; spiritual breath)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영구불변의 열반에 들어갑니다. 열반은 생명의 주기와 같이 길고, 진정으로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 안에 존재하는 호흡(Breath)은 무(無)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형체로서, 외형으로서 윤곽으로서의 그것은 모두 무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완전혼(Absolute spirit)으로서 그대로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이것 자체가 존재성(存在性 ; Be-ness)이기 때문입니다. 영이라는 것을 혼이라고 말하는 경우 "우주적 본질에 흡입된다."고 말하는 것은 '결합한다'(Union with)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결코 무로 귀(歸)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무에 귀한다(Annihilation)는 것은 영원한 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문 :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 때문에 무에 귀한다(Annihilation)라는 교의를 가르쳐주는 자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도 인간의 영은 원초의 원소(原素)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답 : 그러나 당신은 내가 영(Soul)이란 말의 여러 가지 다른 의미와 그 차이를 말하고 혼(Spirit)이란 말이 지금까지 막연하게 해석되어 왔다고 말한 것을 잊어버렸군요. 우리들은 동물혼, 인간혼, 영적혼 등으로 말하며, 그들을 구별합니다. 예를 들면 플라톤은 우리들이 '부디'(Buddhi)라고 말하는 것을 이성적 혼(Rational soul)이라 말하고 그것에 혼적(Spiritual)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윤회하는 자아(Reincarnating ego), 즉 '마나스'(Manas)라고 말하는 것을 그는 혼 또는 '누우스'(Nous) 등으로 말하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우리들은 혼이란 용어(Term spirit)를 독립하여 어떤 조건이 없는 '아트마'(Atma)에게만 적용하고 있습니다. 피타고라스(Pythagouras)는 자아(Ego), 즉 '누우스'(Nous)가 신과 더불어 영원하다(Eternal with deity)라고 우리 고대의 교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즉 영은 다양한 단계를 지나 신성하고 우월한 상태(Divine excelience)에 이르는데 대하여 '더모스'(Thumas ; 동물영)는 프런(Phren) 즉 저급파 '마나스' 조차 제거(除去)하고 지상으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플라톤은 또, 영(Buddhi)을 "그 자체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영을 모든 것 중에서 제일 오래된 것이며 운동의 시작이라고 덧붙여 말하여 '아트마ㆍ부디'(AtmaㆍBuddhi)를 영(Soul)이라 말하고 '마나스'를 혼이라 말합니다만 우리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혼은 체보다 앞서 생긴 것으로 체는 후생(後生)이고 2차적이며 그 본성에 따라 지배 영에게 지배당한다." "만물을 관장하는 영은 사방으로 움직이며 만물을 관장하듯이 천국(Heaven)도 다스린다." 그러므로 영은 천(天) 지(地) 해(海)의 모든 것들을 그의 운동에 따라 지도(Lead)한다. 그 운동의 이름을 들어보면 의지를 가지는 것, 생각하는 것, 예상하는 것, 진과 위(僞)의 판단을 내리는 것, 기쁜 것, 슬픈 것, 신뢰, 공포, 미운 것, 사랑의 상태에 있는 것 등 이것들과 관련이 있는 모든 원초적 운동을 더힌 것이다. 영은 여신이므로 누우스(Nous), 즉 남신(혼)의 협력자로서 만사를 바르고 행복으로 다스린다. 그러나 누우스(Nous)가 아닌 아노이아(Annoia)와 결합한다면 모두가 반대로 작용한다."(법칙 10장 896ㅡ7P) 위 문장에서는 불교의 경전과 마찬가지로 부정(Negative)을 본질적 존재(Essential existence)로서 취급하고 있습니다. 무(無)에 귀(歸)하는 것(Annihilation)도 비슷한 석의(釋義 ; Exegesis)가 됩니다. 적극적인 상태는 본질적인 것이지만 그러한 현현(Such mainfestation)은 아닙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혼은 열반에 들어가 객관적 존재가 없어지고 주관적인 것으로서 지속됩니다. 객관적 마음(Objective mind)에는 이것이 절대 무(Nothing)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주관적(Subjective mind)에서 (No-thing) 비물(非物)은 즉 감각에 나타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상태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도의 열반(Nirvana)이란 것은 영(Soul)이 아닌 혼에 있어서 개별적 불사의 확인의 의미가 되며, 비록 모든 신들과 같이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질료로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형체적 개성을 가진 것으로서는 유한한 발산입니다.
문 : 아직 확실히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인가 예를들어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 물론 이것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고 특히 기독교회의 정통적(正統的)인 관념하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 원리들(All the human principles)의 분리된 기능들을 철저히 연구하지 않으면, 또한 사후 이들의 상태를 알지 않으면 우리가 동양철학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여러가지 본질에 대하여
문 : 당신이 말하는 내적 인간(Inner man)의 구조(構造)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을 들었으나 저로서는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답 : 물론, 이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들의 참다운 자아(Real ego)의 원리들(Principle)을 여러 가지 면으로 바르게 이해하고 구별하기는 곤혹스러울 것입니다. 여러 갈래의 동양학파에 따라 이러한 본질을 헤아려내는 방법이 많이 틀리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흐름의 밑바닥에는 같은 근본적인 가르침의 기층(Substratum)이 있습니다.
문 : 가령 예를 들면 '베단타파'(Vedantins)말입니까? '베단타파'는 당신들의 일곱 가지 본질(本質)을 다섯으로 나누고 있지 않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나는 그것으로 박학한 '베단타' 학자와 의논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들은 상당한 이유가 있어서 그와 같이 나누었을 것이라고 나 개인은 생각합니다. 그들은 인간은 여러 가지 정신적인 면으로 구성되여 있는 혼적 복합체(Spiritual aggregate)에 불과하며 육체는 보잘 것없는 환영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다루는 것은 '베단타 철학'뿐만이 아니고 '노자'는 도덕경에서 다섯 가지 원리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베단타파'와 같이 두 가지 원리 즉, 혼(Atma)과 육체를 빼고 더구나 육체에 대해서는 사해(死骸 ; cadaver)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라카 라자 요가'(Taraka Raja Yoga)파가 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에서는 사실상 세 가지 원리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들이 말하는 '스투로파디'(Sthulopadi)ㅡ눈을 뜬 의식 상태의 육신ㅡ그들의 '숙슈모파디'(Sukshmopadi)ㅡ같은 육신의 '스바푸나'(Svapna), 즉 꿈꾸고 있는 상태ㅡ및 그들의 '카라노파디'(Karanopadhi) 혹은 '코잘체'(Causal body) 또는 하나의 신화에서 다른 화신으로 이행하는 상태 등은 모두가 두 가지 면이 있으므로, 모두 합하여 여섯 가지가 됩니다. 거기에 인간 안의 사후 요소인 '아트마'(Atma), 즉 비인격적인 신성 원리를 첨가한다면 같은 일곱 가지가 됩니다.(더 확실한 설명은 S.D. 권 157항 참조) 그들은 자신들의 분류법을 지지하면 되고, 우리들은 우리의 분류법을 지지합니다.
문 : 그 분류법은 신비적 기독교에서 육체, 혼, 영으로 나누는 것과 거의 같다고 생각되는데요?
답 : 똑같습니다. 우리들은 육체를 생명력이 있는 복합체의 매체(Vehicle of vital double)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고, 생명력 복합체는 생명 즉, '프라나'의 매체라고 생각하며 '카마 루파'(Kama rupa, 동물혼)는 고급심(Higher mind)과 저급심(Lower mind)의 매체로 생각하면 이것으로 여섯 가지 본질이 되고 거기에 유일 불사의 영을 전체 위에 더 보태 줄 수가 있습니다. 비교(Occultism)에서는 우리들의 의식 상태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인간에게 새로운 면이 더 첨사되고 만약 그 새로운 면이 우세하게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자아(Living and acting ego)의 일부가 되면 그 특별한 상태의 인간과 다른 상태의 인간과를 구별하는 특별한 명칭을 붙여야 한다고 합니다.
문 :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바로 그 점입니다.
답 : 인간은 어떤 의식 상태에 행동하고 있는 자신의 지력, 정신적 상태에 따라 엄밀하게 행동한다는 대체적인 의미를 이해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더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물주의의 시대이므로 우리들이 설명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이 세상의 존재를 세 가지 주요 면으로 나누어 보십시다. 인간을 순수한 동물로 보지 않는 한 세 가지 면 이하로 나누어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선 인간의 객관적인 육체를 들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그의 생각하는 원리(Thinking principle)ㅡ이것은 동물의 본능적 요소(Instinctual element)보다 약간 높을 뿐이다.ㅡ혹은 활기찬 의식적 영(Vital conscious soul), 그리고 인간을 동물에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먼 높은 곳에 올려놓는 것, 즉 인간의 이성적 영(Reasoning soul), 혹은 혼(Spirit)을 들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세 가지 대표적인 실체를 비교(Occultism)의 가르침에 따라 세분해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첫째, 절대자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혼(魂 ; Spirit), 말하자면 불가분의 전체(완전한 것, 전체인 것) 즉, '아트마'(Atma)입니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위치를 정하거나 제한할 수 없으므로 그저 영원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는 또한 물질이나 질료의 우주에서 가장 작은 기하학적 즉, 수학적인 점 속에서 조차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므로 바로 말하면 '인간'의 본질이라고 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껏해야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입장에서 인간 '모나드'와 그 매체인 매체 인간이 일생 동안만 차지하는 공간의 한 점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이 점은 인간 자신과 같이 상상(想像)의 것이며 실제로는(Inveality) '망영' 즉, '마야'(Maya)입니다. 그러나 인생이라고 하는 일시적 망각(Fit of tllusiom) 동안은 다른 인격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에게도 현실적인 것이며, 설사 아무도 우리 것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 자신의 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지성으로 더 잘 인지(認知)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비의(Occultism)의 연구를 시도했을 때 인간 신비의 A, B, C를 풀어보기 위하여 비의에서는 이 제7의 원리(This seventh principle)를 여섯 가지 원리의 총합체라고 말하며 이것을 혼적 영(Spiritual soul) 즉, '부디'(Buddhi)의 매체(Vehicle)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한 혼적 영은 신비를 감추고 있으며 그 신비는 절대로 취소할 수 없는 서약을 한 제자와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제자들 외에는 결코 누구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신비를 가르쳐 준다면 혼란은 작아질 것이나 이것은 복체(One's double ; 자신과 똑같은 것)를 의식적으로 마음대로 투사(投射)하는 힘과 직접 관계가 있어 이러한 능력은 "지게스의 반지(Ring of Gyges)"26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그런 기능의 소유자에게는 대단히 치명적이므로 그 신비는 주의 깊게 간직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 원리(principles)에 대하여 다시 말을 계속합시다. 이 신성한 영 혹은, '부디'는 혼의 매체(Vehicle of the spirit)입니다. '부디'와 혼은 일체로서 비인격적이며 아무런 속성이 없습니다.(이 물질계에서는) 두 가지 혼적 원리(Spiritual principles)를 이룹니다. 다음에 인간영인 '마나스' 혹은 '멘쓰'(라틴어로 정신 또는 마음)를 이야기 합시다. 인간의 이지(理知 ; Intelligence)는 적어도 두 가지라는 것에 동의하겠지요, 가령 고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저급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즉, 지성적, 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동물적인 마음은 아니더라도 우둔하고 욕심많은 물질적인 사람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문 : 그러면 왜 인간을 두 가지 원리(principles)라고 말하거나 또는 두 가지 면으로 말하지 않습니까?
답 : 인간은 누구나 이와 같은 두 가지 원리를 가지고 있고 한쪽은 다른 한쪽보다 활동적입니다. 또한 한쪽이 우세하였을 적에 다른 한쪽은 성장이 둔화되고, 말하자면 마비(痲痺)되고 맙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들이 '마나스'의 두 개의 원리 또는 두 가지 측면(側面)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고급 '마나스'와 저급 '마나스'입니다. 고급 '마나스'라는 것은 영적 혼(부디)를 향하여 당겨지는 사고력 있는, 의식 있는 자아입니다. 저급 '마나스'는 '마나스'의 본능적 본질로서 동물적 욕망과 정욕의 자리에 있는 '카마'(Kama)에 이끌려 갑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네 가지 원리의 정당성을 설명했습니다. 남은 세 가지 중의 하나는 우리들의 변환 자재혼(變換自在魂 ; Protean soul) 또는 가소성혼(可塑性魂 ; Plasitic soul)이라고 하는 복체(Double)로서 이것은 두번째의 생명본질의 모체입니다. 세번째는 육체(Physical body)로 물론 생리학자나, 생물학자는 이와 같은 본질을 인정하지 않고 이런 의미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 중에 누구나가 현재, 변환자재(變換自在魂)의 복체의 육체적 매체가 되어 있는 비장(脾臟)의 기능이나 앞서 말한 욕망의 자리가 되는 인간의 오른쪽에 있는 기관의 기능을 이해 못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이해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소량의 모래를 포함한 각질(角質)의 내분비선(內分泌線)이 말하고 있는 송과선(松果腺)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송과선(松果腺)은 진실로 인간의 최고이며 가장 신성한 의식의 자리(座)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일곱 가지 원리를 발명한 것도 아니고 우리들이 쉽게 입증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철학 체계에서의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으로 명백히 알 수가 있습니다.
문 : 그러면 당신이 믿는 재화신(Reincarnation)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인간 안에 있는 영구원리(永久原理)인 혼적 사고를 하는 자아(自我) 즉 '마나스의 좌'(Seat of manas)입니다. 개성있는 인간 즉, 신성한 인간은 '아트마'가 아니고 이중 '모나드'라고 생각하고 있는 '아트마ㆍ붓디'도 아니고 '마나스'입니다. 왜냐하면 '아트마'(Atman)는 보편적 전체(全 ; Universal all)이고, 그의 매체(媒體)이며, 그것을 개별(Individuality)과 연결하는 '부디'(Buddhi)와의 결합에 의해서만 인간의 고급아(Higher self)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코잘체'(Causal Body; 제5와 제6 원리의 결합)라고 불리는 '부디-마나스'(Buddhi-Manas)이며 이것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격과 연결하는 의식(Consciousness)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Soul)이란 총칭적인 말이고, 인간의 영에는 세 가지 면이 있습니다. 즉, 이 세상 것인 동물혼, 제2는 인간영 제3은 혼적 영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들은 세 개의 면이 있는 하나의 영입니다. 그러면 영의 제1면은 사후에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제2의 면(Nous 혹은 Manas)은 만일 더러움(汚)을 타지 않고 남는다면 그 신성한 '본질(Divine essence)'은 남습니다. 제3의 면은 불사인 고급 '마나스'를 동화(同化)함으로써 의식으로 신성해 집니다. 그러나 이것을 명백히 하려면 먼저 재화신(Reincarnation)에 대하여 좀 더 말해야 합니다.
문 : 당신의 적이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는 것이 이 교의이므로 잘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 : 심령주의자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알고 있습니다. 광지(光誌)에 그들이 힘들여 쓴 바보같은 반대론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중에 어떤자는 대단히 둔감하며 악질이므로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중에 한사람은 최근 시넷트씨의 강연(Mr. Sinnett's lecture)에서 두 가지 것을 들고 나와 반박(反駁)하고, 광지(光誌)에 편지의 형식으로 엄하게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 두 개의 문장에 중대한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초기에 다시 태어나는 것은 '카르마'에서 복잡한 원인(Karmic complication)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또 "진화를 관장하는 신성한 정의의 지복의 일에서는 우연이란 것은 없다." 이러한 대단한 사상가는 아이들 머리 위에 떨어져 내려오는 돌(石)을 막으려고 손을 내밀면 중력의 법칙에 반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8장 윤회(輪廻)
신지학의 가르침에서 기억이란 것은?
문 : 윤회를 합리적인 증거를 내세워 설명한다는 것은 당신들이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의심하는 것에 관하여 확실한 근거가 있는 증거를 단 하나라도 예를 들어서 말할 수 있는 신지학도는 없었습니다. 첫째,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전생에 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누구였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은 윤회설에 상반되는 것입니다.
답 : 당신의 논법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전생의 기억상실(Loss of memory)을 든다는 점에서 옛날의 반대론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기억 상실이 우리들의 이론을 무효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의 대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여튼 그런 반대론은 궁극적인 해결을 얻을 수 없습니다.
문 : 당신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답 : 나의 설명은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첫째, 근대 최고 심리학자들은 마음(Mind)의 성질을 설명하는데 대단히 무능합니다. 둘째로, 그들이 마음의 잠재적 가능성(Potentialities)과 더 높은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Complete ignorance)을 고려한다면 이런 윤화 반대론은 사실(Prima facie)과 상황증거(Circumstantcial evidence)에서 도출(導出)한 선결론(先結論 ; Conlusion priori)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인정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기억'(記憶)이란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문 : 내가 생각하는 것은 보통 생각하는 그대로입니다. 즉, 앞에 생각한 것들, 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지식을 기억하며 그것을 지속하는 마음의 능력입니다.
답 : 그것에 보통으로 인정하고 있는 기억의 세 가지 형태(Three accepted form of memory)에는 서로 대단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당신의 정의에 첨가해 주십시요. 일반적으로 말하는 기억 이외에도 기억(記憶), 상기(想起), 회상(回想)이 있습니다. 이들의 차이점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기억(Memory)은 일반적인 명칭임을 유의하십시오.
문 : 그러나 그것은 모두 동의어에 불과합니다.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여간 철학적으로는 틀린 것입니다. 기억이란 사고하는 존재의 선천적 능력이므로 동물에게도 있습니다. 태어나면서의 능력은, 주로 객관적 사물이나 우리들 오관(五官)의 활동으로 암시 받는 생각과의 연상(連想)에 의하여 과거의 인상을 재현하는 능력에 불과합니다. 기억은 전적으로 우리 육체의 뇌에 건전하고 정상적인 기능일 뿐입니다. 기억력(Remembrance)과 상기(Recollection)는 기억의 속성이며 보조물입니다. 그러나 회상(Reminiscence)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근대 심리학자는 회상을 기억력과 상기의 중간 즉,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내는 의식적 과정(Conscious)이지만 상기(想起)의 특색(特色)이 되는 특정한 일에 대한 충분하고 다방면에 걸친 관계를 결(缺)한 것."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루크(Look)는 상기(Recollection)와 기억력(Remembrance)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아이디어가 외부 감각에 대한 비슷한 사물(Like object)의 작용없이도 다시 떠오른다면(Recur) 그것은 기억력(Remembrance)입니다. 만약 마음이 생각을 더듬어서 고통과 노력 끝에 그것이 또 한번 보인다면 상기(想起 ; Recollection)입니다. 그러나 루크(Look) 조차 회상에 대해서는 명백한 정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회상은 우리들 육체적 기억력의 능력이나 속성이 아니고 우리들의 육체 뇌와는 상관없는 직감적 지각(Intuitional perc-eption)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들의 영적 자아에는 언제나 있는 지식으로써 언제든지 부르면 나오는 비정상의 것들, 모든 것들이 이상(異常)하게 되는(Regarded as abbrormal) 모든 비젼(Vision)을 포함한 지각입니다. 그 비젼에는 천재에 의하여 암시받은 회상에서부터 열병이나 광기(狂氣)에서 말하는 '헛소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포함되며 과학에서는 우리들의 공상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교(秘敎 ; Occultism)와 신지학에서는 회상(回想 ; Remin-iscence)을 아주 다른 견해로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는 기억은 육체적이고 없어지기 쉬운 것이며, 뇌의 생리학적 상태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억술(Mnemonics)로, 교사들의 근본적 주장이고, 근대 심리학 연구에서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잇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회상(回想 ; Reminiscence)을 혼의 기억(Memory of soul)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하거나 못하거나, 자신이 이전에 살아 있었고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을 확신케 해주는 것은 바로 이 기억입니다. 워즈워스(Wordsworth)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잇습니다. "우리들의 탄생은 한때의 잠자는 것과 망각에 불과하다. 우리들과 같이 떠오르는(Rises with us) '영'(Soul), 우리들 생명의 별은 어디인가 져서 넘어가는 머나 먼 저쪽에서 왔도다." 불사의 암시 송(不死의 暗示頌)에서
문 : 만일 이런 종류의 기억이 당신의 말대로 시(詩)나, 이상한 공상(空想)을 기초로 한 당신들 교의에 의한 것이라면 아주 소수의 사람들밖에 납득시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답 : 나는 공상(空想)이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보통 심리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 이와 같은 회상을 환각이나 공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그와 같이 그런 학문적 결론을 달가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비젼이나 그 보다 더욱 오랜 기억에 비추어 볼 때 비정상(Not abnormal)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W. 나이트(Knight) 교수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 찬성합니다. "전생에서 행한 행위가 기억에 없다는 이유로 우리들이 전생을 살아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정적인 논증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공정한 생각을 가진 우리의 반대론자(Opponent)들은 버틀러(Butler)가「플라톤 철학강의」(Lectures on Platonic Phicosophy)에서 한 다음 말에 동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전생을 터무니 없는 것(Extravagance)으로 우리들 인간이 느끼는 것은 유물적, 또는 반유물적 편견에 그 비밀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인간들은 올림피오도루스(Olympiodorus)27가 말한바와 같이 기억이 단순한 공상(Phantasy)이며 가장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지지합니다. 암모니우스사카스(Ammonias Saccas)는 예언(Prognistication)이나 미래에 대한 예견에 직접 반대하는 인간의 유일한 재능(Faculty)은 기억(Memory)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억(Memory)과 마음(Mind), 즉 생각(Thinking)은 별개의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억은 기록기계로써 대단히 고장나기 쉬운 등록기이지만 생각(Dthouehts)은 영원하며 소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특정 사물이나 사람들의 존재를 우리들이 믿지 못하겠습니까? 줄리어스 씨저(Julius Caeser)를 만난 과거 사람들의 공통 증언으로 그가 옛날에 살았었다고 하는 충분한 보증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왜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심령(Psychic) 감각에 대한 같은 증언(Sametestimony)을 고려하지 않습니까?
문 :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이들의 구별이 너무 까다롭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답 : 차라리 대부분의 물질주의라고 말하십시요, 그 사람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보통 인생의 짧은 기간 동안에 기억이란 것은 아주 박약하여 평생 동안의 여러 가지 일들의 전부를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매우 중요한 일들이라도 과거와 관련된 생각에서 회상해 내거나, 또는 다른 일로 인하여 생각해 내지 못하면 우리들의 추억 속에서 잠자고 있는 것이 수두룩 합니다. 특히 이것은 노인들에게 많고 나이 먹은 사람들은 언제나 희미한 회상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적, 영적 원리에 대하여 우리들이 알고 있다면 우리들의 기억에(前生 ; Precedent life)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니며 오하려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왜 과거세(過去世)를 기억못하는가?
문 : 당신은 일곱 가지의 원리 개요를 가르쳐 주셨는데 전생의 기억을 완전히 상실한 것과 그와 같은 원리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답 : 간단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육체적(Physical)이라 말하는 제원리(Principles)는 다른 명칭28으로 불려지고 있으나, 거기에 대해서는 과학에서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들 원리는 죽음 후, 그 구성요소대로 분해되어 기억은 뇌와 같이 붕괴하고 마는 것입니다. 소멸한 인격의 그 소멸한 기억은 자아(自我)의 다음 윤회에서는 아무 것도 기억하거나 기록되어 있지 못합니다. 기록하는 것도 되지 않습니다. 재화신(Reincarnation)하면 그 자아는 새로운 육체, 새로운 뇌, 새로운 기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새로운 기억에게 기록되지 않은 것을 생각해 내도록 기대하는 것은 살인자가 입지 않았던 옷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살인자가 입었던 옷의 혈액을 찾는 것과 같이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조사해야할 상의는 깨끗한 것이 아니라 범죄를 행할 때 입고 있는 상의라야 할 것입니다. 그 상의가 불타고 없다면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문 : 어떻게 되였거나 범죄가 자행(恣行)된 일이라든가(Circumstantial) "깨끗한 상의(上衣)의 사람"이 전생에 살았다고 하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해서 확실히 알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답 : 물질적으로 경과된 것을 확인할 수가 없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증거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상황 증거(Circumstantial evidence)와 같은 것은 있습니다. 우리들의 현명한 법률은 상황증거(狀況證據)를 인정하고 실제로 그것을 신뢰하고 남을 지경입니다. 윤회와 과거세(過去世)의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소멸하기 쉬운 기억이 아니고 진정한 영구아(永久我)와 자기자신을 조화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문 :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와 같은 것과 조화가 될 수 있을까요?
답 : 만약 사람들, 특히 가장 박학(博學)한 사람들이 중력, 에텔, 힘 과학이 아닌 것, 추상 및 실용가설(Working hypothesis)등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냄새 나지도 않고, 만질 수 없으며, 맛볼 수도 없는 것을 믿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같은 원리에 대하여 훨씬 논리적이고 중요한 '실용가설'인 인간의 영구아(永久我)를 왜 믿지 못하겠습니까?
문 : 결국, 그 신비적인 영원한 본질은 무엇입니까? 누구나 잘 알 수 있게 설명해 주십시요.
답 : 재화신하는 자아(The egewhich reincarnates)는 인격아가 아니고 개별적이며 불사(不死)인 '나'입니다. 말하자면 '아트마ㆍ부디'적(Atma-Buddnic) '모나드'의 매체입니다. 이것은 '데봐챤'(Devachan)에서 보상받고 이 세상에서 죄를 받으며 그것은 모든 화신(Incarnation)에 따르는 '칸다스'(Skandhas) 즉, 속성의 반영일 뿐입니다.29 불교에서는 오온(五蘊), 즉, 다섯가지 속성(屬性)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루파(색, 혹은 형체), 즉, 물질적 특성입니다. 우에다 베다나(Vedana)는 감각, 산나(Sanna ; 想) 추상적 사상, 삼스카라(Samskhara) 즉, 정신적인 경향, 우인나나(Vinnana), 즉, 지력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으로 형성되어 있고 이것에 의하여 존재를 의식하고, 이것을 통하여 자신의 주위 세계와 화합합니다.
문 : 오온(五蘊 ; Skandhas)이란 무엇입니까?
답 : 지금 말한 그대로 '속성'입니다. 그 안에는 기억도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아주 미소한 향(香)만 남기고 시든 꽃과 같이 사라집니다. 이 문제에 직접 언급하고 있는 H.S.올코트(H.S.Olcott)의 불교문답30에서 일절(一節)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이 문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변화되어 있어도 자신의 젊은 시절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 왜 과거의 출생에서 현세의 출생으로 전생의 기억을 현재의 생애에 가지고 못오는 것일까? 그 이유는 기억이 오온은 새로 태어난 존재와 더불어 변화하며 그 특정존재(特定存在)의 기록인 기억은 발전한다. 그러나 모든 과거생의 기록이나 기억은 잔재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싯다르타(Siddharta) 왕자가 불타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전생애 전부를 하나하나 보았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쟌나(Jnana ; 禪)상태에 이른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전생(前生)을 전부 회고하여 거슬러 올라가 본다." 이것은 다음의 것으로 당신에게 증명합니다. 즉, 인격의 불후(不朽)의 특정 예로써 애(愛), 미덕, 자선과 같은 것은 불사(不死)의 영구아(眞我)와 결합하고 말하자면 지난 날 살아왔던 사람은 신성한 면이 되는 불변의 '이미지'를 영구아는 그려냅니다. 그 사람의 물질적 오온은 가장 강렬한 '카르마'적 결과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나, 이것은 번개의 섬광(閃光)처럼 꺼져 없어지기 쉬운 것이어서 새로운 인격의 새로운 뇌에 인상을 줄 수는 없으나 윤회하는 영구아의 자의식(自意識)을 손상시키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문 : 영(Soul)과 자아(Ego)는 동일하다고 당신은 말했는데 태어날 때마다 살아 남은 것은 영의 기억뿐이며 인격(Personality)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답 :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빈틈없는 완전한 유물론자로서 영적 광선이 들어갈 수 있는 몸이 없는 성질이 아닌 이상, 인격은 무엇인가 윤회하는 영구아(Permanent self) 즉, 혼적 자아(Spiritual ego)31에 영원의 인상을 남기는 것입니다.「사후 및 출생 후의의식」참조) 오온(五蘊)을 가진 인격아는 새로운 탄생 때마다 언제나 바뀌어갑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격은 하룻밤 배우(진짜의 자아 ; Ego)가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과거의 수많은 생애에서의 육체적인 면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의 자아는 수많은 생애를 살아왔고 그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문 : 그러면 참다운(Real)인간, 즉 혼적 인간은 자신의 새로운 인격인 '나'(I)에게 이런 지식의 인상(印象)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었입니까?
답 : 가난한 농사꾼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소녀가 삼매 상태(三昧狀態)이거나, 몽유병(夢遊病)의 상태에서 헤브리어를 말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다가 정상상태로 되돌아았을 때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은 왜 그런 걸까요? 지금의 심리학자가 아닌 옛날의 심리학자들은 모두 혼적 자아는 인격 자아가 마비되었을 때만 활동한다고 말합니다. 인간 안의 혼적 아(Spiritual I)는 전지(全知)하고 모든 지식을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아 자신의 환경적 산물이고 육체적 기억의 노예입니다. 만약 혼적 자아가 어떤 노력도 없이 스스로 현현(顯現)할 수 있다면 그때에는 이 세상에 인간은 없고 우리들 모두가 신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문 : 그렇지만 예외가 있어 전생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답 :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누가 믿습니까? 그와 같이 민감한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망각을 보는 '히스테리'라든가 정신나간 광신자라든가 멍청한 것 등으로 근대 물질주의자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문제에 대한 책 특히 신지학협회원인 'E.D 워커(E.D.Walker)의「재화신~잃어버린 진리의 연구」(Reinca-Nation, a study of forgotten truth)를 일어보도록 하십시요. 이 유능한 저자는 상당히 문제가 되는 것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증거를 이 책 안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영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영(Soul)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영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 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것을 유물론자에게 거꾸로 물어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젖먹이 시절에 어떠했으며 무엇을 기억합니까? 태어나서 일년 반이나 이년 안의 당신의 생활을 생각해 낼 수 있고, 하던 행동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낼 수가 있습니까? 살아 있었다는 것조차 생각해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도리(道理)인데 어린아이(젖먹이)였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까? 재화신하는 자아 말하자면 개별성(Individuality)은 '데봐챤'(Deva-chan)에 있는 동안 과거의 지상 생활 즉, 인격의 경험 본질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며, 육체 경험 전체는 잠재 상태로 가지고 있습니다. 요약한다면 혼적인 공식(Spiritual formalae)이 되어 버립니다. 또 새로 태어난다는 이생(二生)의 기간이 천년에서 천오백년이 되고 그 동안에 육체 의식은 일을 할 수 있는 기관(器官)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순수한 육체적인 기억에서는 전생의 것을 생각해 낼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이유가 명백해집니다.
문 : 당신은 혼적 자아(Spiritual ego)는 전지(全知)라고 말했습니다. 귀하가 말한 '데봐챤'(Devachan)일 때, 인간의 자랑인 전지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답 : 그 동안 그것은 잠재하여 가능성(可能性)이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부디 마나스'(Buddhi-Manas)의 복합체인 혼적 자아(Ego)는 고급아(Higher self)가 아닙니다. 고급아(高級我)는 우주영 즉, 우주심(Universal mind)과 일체이므로 그것만이 전지한 것입니다. 둘째, '데봐챤'(Devachan)은 방금 떠나온 지상 생활의 이상화된 연속이며, 응보를 얻는 조정 기간이며, 인생에서 받은 부당한 학대나 고통에 대한 보상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데봐챤'(Devachan)은 잠재적인 전지의 기간에 불과합니다. 자아가 우주심혼(Universal mind soul)에 몰입하는 열반에 들어가 있을 때는 실지로 전지(全知)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상한 상태와 몸안에서 생리적 변화가 생겨서 물질의 속박에서 자아가 해방되는 경우의 지상생활 동안에는 다시 준전지(準全知)가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 있는 몽유병자나 외국 말을 할 수 있거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소녀 등의 이야기는 적절한 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두 가지 사실에 대한 의학적 설명이 진실성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몇년전에 두 소녀 중 한 소녀가 큰소리로 '헤브라이어'로 책읽는 것을 주인이 되는 목사가 들었으며, 또한 소녀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한 음악가가 야외에서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주심(Universal mind)과 같은 성질이 되는 전지(全知)가 들어가지 못하였다면 두 소녀는 모두가 완전하게 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더높은 원리(Higher principle), 오온(Skandhas)에 작용하여 그것을 활동 시켰습니다. 다른 경우에는 인격이 마비되어 개별성(Individuality)이 그 자체를 현현(顯現)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경우를 혼동하지 말아 주십시요.
개성과 인격에 대하여
문 : 그러면 개별성과 인격은 어떻게 틀린 것입니까? 나는 아직 전혀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 차이(差異)야말로, 당신이 우리들의 마음에 좋은 인상을 심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답 : 나는 언제나 잘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은 그와 같은 진실을 이해하는 것보다 정통 종교가 가르쳐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있을 수 없는 것들을 존경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통인 것으로 세상에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개념을 잘 이해하려면 첫째, 인간의 원리가 두 가지 조(組)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즉, 혼적 제본질, 말하자면 불사(不死)의 자아에 속하는 것과 물질적 원리, 즉 그 자아는 언제나 변화하는 제체(諸體), 혹은 일련(一連)의 인격을 만들어 내는 원리입니다. 그것에 알맞는 명칭을 주기로 설명하자면 ① 아트마 즉 '고급아'는 당신의 '영'도 아니고 나의 '영'도 아닌 일광(日光)과 같이 만인에게 비춰 줍니다. 이것은 모든 곳에 확산되어 있고 태양의 광선이 태양에서 분리(分離)될 수 없는 것처럼 '아트마'는 그 유일하고 절대인 초혼(招魂 ; Meta-Spirit)으로부터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② '부디'(혼적 영)는 '아트마'의 매체에 불과합니다. 신성한 2부조(二部組 ; Divine Duad), 즉 이중의 원리가 어떤 의식에 동화되어 그 의식을 반영하지 않으면 '아트마'와 '부디'는 각기 떨어져 있거나 둘이 결합되어 있어도 인간의 몸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땅 속에 매장되어 있는 화강암(花崗巖)의 괴(塊)에는 태양과 그의 광선이 아무 소용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트마'는 '카르마'의 최고면이고 즉 그의 하나의 면에서 '카르마'를 일하도록 하는 것이며 '부디'는 물질계에서는 무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식, 즉 마음은 ③ '마나스'32이고, '마나스'(Manas)는 아함카라(Ahamkara) 즉 '아(I)'의 개념 혹은 자아성(Ego-Ship)이 반영된 형(形)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아트마'와 '부디'가 불가분으로 결합되어 있는 경우에는 혼적 자아(Spiritual Ego)라고 불리며, 또한 '타이자시'(Taijasi; 빛나는 것)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참다움의 개별성(Real individuality), 즉 신성한 인간입니다. 바로 이 자아(自我 ; Ego)ㅡ원래, 무감각한 인간 형태로 화신하였으나 무의식이므로 자체내에 있는 이중 모나드(Dual monad)가 자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을 모르고 있음ㅡ가 인간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것을 참다운 인간(Real man)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자아 즉 '코잘체'(Causal Body)가 모든 인격 '카르마'에 그늘(影)을 드리워(Overshadow) 그것이 화신하도록 힘을 가합니다. 그리고 이 자아(Ego)가 모든 새로운 체, 또는 인격을 통하여 혹은 그 안에서 범한 모든 죄의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체와 인격은 재화신(再化身)의 긴 연속 동안 참다운 개인(True individual)을 감추는, 상변(常變)하는 가면(假面)에 불과합니다.
문 : 그러면 그것이 공평한 것인가요? 왜 자아는 잊어버리고 만 행위의 결과에까지 죄(罪)를 받아야 합니까?
답 : 자아가 행한 것을 잊어버리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어제 한 일을 기억하고 있듯이 자아는 자신의 잘못을 기억합니다. 전생애(前生涯)의 인격적 행위를 '몸'이라고 말하는 물질 복합체의 기억에서 생각해 내지 못한다고 하여 참다운 자아(Real ego)도 그 행위를 잊어버렸을까요? 이것은 과일을 훔쳤기 때문에 매를 맞아야 할 소년이 신고 있는 새 장화(長靴)는 그 소년의 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처벌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 : 그러면 영의 의식이나 기억력과 인간의 의식이나 기억력 사이에는 연락 방법이 없습니까?
답 :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현대 심리학자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직감 즉, '양심의 소리', '영감' 막연하면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회상 등은 만약 이와 같은 연락이 없으면 무엇에 의한 것이라 생각합니까? 적어도 많은 교양있는 사람들은 그의 논평(Comment)에서 그가 얼마나 직감적(直感的 ; In tuitional)인가를 나타낸 '콜러리지'(Coleridge) 만큼 훌륭한 영적 인식력을 가지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생각은 불멸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의견을 들어 봅니다. "만약에 지적 능력(기억의 돌연한 부활)을 더욱 포괄적으로 나타내려면, 그것이 적당한 다른 조직체(Organization)가 필요할 뿐이다. 즉 모든 인간영, 과거의 존재 앞에 과거의 경험을 이끌어 내게 하려면 이 세상의 몸(體) 대신에 하늘의 몸(體)이 필요하다." 이 하늘의 몸(Body celestial)야말로 우리들이 말하는 마나스적 자아입니다.
자아의 상벌(賞罰)에 대하여
문 : 자아(Ego)는 이 세상 어떤 사람의 생애로 화신(化身)하더라도 결코 죽은 후에 죄를 받지 않는다고 귀하는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답 :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 결코 받지 않습니다만, 여기서는 그와 같은 경우에 대하여 말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처벌의 성질이 당신들의 신학 개념에서 벌(罰)의 성질로서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과는 전연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 : 그러나 만약 전생(前生)에서 범한 실수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죄를 받는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있어서나 저 세상에 가도 상을 받는 것은 자아라야 하겠습니다.
답 :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 외의 어떤 죄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혼적 자아(自我)가 알고 있는 유일한 상태는 순수지복(Unalloyed bliss) 뿐이기 때문입니다.
문 : 그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답 : 객관적 세계, 물질의 세계에서 범한 범죄는 순수한 주관적 세계에서 벌을 받을 수가 없다는 이치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옥이나 천국같은 곳은 믿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지옥의 불길이나 죽지 않는 구더기가 있다는 것이나, '예루살렘'이 있다는 등의 말은 믿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믿고 있는 것은 확실한 꿈을 꾸고 있을 때와 같은 죽음 후의 상태 즉 정신 상태입니다. 우리들은 절대적인 사랑, 정의, 자비 등 불변(不變)의 법칙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 화신하고 있는 자아들33은 그전의 '카르마'적 죄의 비참한 결과가 어떤 것이라할지라도 인간 즉, 혼적 실체(實體)의 외부적인 물질적, 주기적 형체(形體)는 자신의 탄생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정도로나 책임을 공평하게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겠다고 부탁할 수가 없고, 생명이 주어지는 양친을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환경적 피해자이고, 자신의 힘으로 조절(Control)할 수가 없는 아이들입니다. 만약 사람의 죄를 하나씩 하나씩 공평(公平)하게 조사해 간다면 십중팔구는 죄인이라기보다 죄의 피해를 받는 쪽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생은 아주 무정한 장난이며, 폭풍우 속을 항해하는 배며,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을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인생의 존재이유(存在理由)를 찾아내려고 많은 헛수고를 해 왔습니다. 그 열쇠를 잡아 본 사람은 동양의 성자(聖者) 이외에 없습니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는 인생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걸어다니는 그림자, 가련한 광대, 무대(舞臺)에서는 큰 소리 치고 기세 당당하나 그후 아무 소식을 들을 수가 없고, 인생은 광기의 소용돌이에 꽉 차 있는 백치(白痴)의 이야기 줄거리며, 아무 의미가 없다. ······"(맥베드(McBeth) 5장 5막) 개별적 부분은 그렇지 않으나, 인생의 연속된 줄거리 그 전체에는 대단한 중요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유에서나 거의 모든 개별적 인생은 그것이 모두 전개되면 비애입니다. 가련하고 무기력(無氣力)한 인간이 썩어가는 나무조각처럼, 인생의 난파(難波)에 던져진 후 만약 그 사람이 약하기 때문에 파도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끝나면 영원한 지옥에서 벌을 받거나 또는 일시적이나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우리가 믿어야 하겠습니까? 결코 믿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큰 죄를 범한 사람이나 작은 죄를 범한 사람이나 선악(善惡), 유죄, 무죄에 관계 없이 한 번 육체 생활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된, 지쳐버린 '마누'(Manu ; 생각하는 자아)는 절대적인 휴식과 지복의 기간에 들어갈 권리를 얻습니다. 단순히 자비롭기 보다 틀림없이 현명한 법은 화신(化身)한 자아에게 이 세상에서 전생(前生)의 모든 죄에 대하여 '카르마'적인 벌을 부하(負荷)한 것과 같이 이번에는 육체를 벗어버린 실체(實體)에게 긴 정신적인 휴식을 주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의 인격으로서 전생에서 일어났던 모든 슬픈 일들이나 조그만한 고통스러운 생각까지도 아주 잊어버리도록 해주고 영의 기억 속에는 지복이나 행복했던 일만이 남게 됩니다. 우리들의 몸은 정말 '망각의 강'(River of leth)이라고 한 '플로티누스'(Plotinus)의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빠진 영은 모든 일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의 세상 몸이 망각의 강(River of leth)인 것처럼 '데봐챤'(Devachan)의 우리 하늘체(Celestial body)도 그러한 것입니다.
문 : 그러면 살인이나 여러 가지 형태의 신 또는 인간적 법칙을 범한 사람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답 :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우리들의 철학에는 가장 엄격한 '칼빈'(Calvinist)파 처럼 엄한 벌의 가르침이 잇습니다만, 그런 것보다 훨씬 이성적이며 절대적 정의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어떤 행위나 죄 많은 생각까지도 벌을 받지 않고 지나는 것은 없습니다. 생각은 행위보다 엄하게 벌합니다. 생각은 행위보다 더 나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34 우리들은 '카르마'라고 하는 응보(應報)의 실수 없는 법칙을 믿고 있습니다. 이 법칙은 원인과 그에 대한 피할 수 없는 결과를 자연적 연쇄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문 : 어떻게 어디서 그 법칙이 일어납니까?
답 : "일하는 사람은 그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복음서는 말하고 있으며 선악 어느 것일지라도 모든 행위는 많은 자식을 낳는 어미가 된다고 아주 옛날의 현자(賢者)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생각해 보십시요. 그러면 모든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카르마'35는 개별적인 인생고통에서 벗어나온 '영'(Soul)에게 충분한 휴식과 100배가 되는 대상(代償)을 주고 다음에 그 자아(Ego)가 다시 화신할 때까지 오온(五蘊)의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데봐챤'의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서 자아는 새로이 탄생해 나옵니다. 지금 막 휴식에서 깨어난 자아의 미래 운명이 공평한 응보(應報)의 저울 속에서 떨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자아는 다시 한번 활동하는 '카르마'의 법칙에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전생(前生)의 죄가 벌로 다스려지는 것은 이 자아를 위해 이미 준비되어 있는 재생(再生)에서 입니다. 새로운 인생은 신비하기 짝이 없고 용서없으며, 거기에 판결의 공정함과 현명하고 절대적으로 틀림이 없는 법칙에 따라서 준비되는 것입니다. 자아가 던져지는 곳은 연극 무대에서 처음 불꽃이 훨훨 타고, 뿔이 나고, 연극 무대에서처럼 꼬리가 붙어있는 바보같은 악마들이 있는 상상의 지옥이 아니라, 자신이 범한 죄와 모든 나쁜 생각과 행위를 사죄해야 하는 바로 이 세상입니다. 씨는 뿌린대로 거두어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윤회는 직접 간접으로 자아의 과거(전세) 인격(人格)의 손으로 무의식적으로 고통을 준 다른 자아들을 지금 재생한 자아 주위에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 자아들은 인과응보의 여신에 의하여 옛것과 영원한 자아를 감춘 채 새로운 인격으로서 재화신(再化身)한 자아 주변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문 : 이와 같은 새로운 인격들이 자신들의 범죄와 죄의 피해를 느낄 수가 없다면 당신의 말처럼 공정하다고 할 수가 있을까요?
답 : 사람이 도난당한 상의를 자기 것임을 알고 그것을 입고 있는 도둑으로부터 빼앗아서 갈기갈기 찢어버리면 도난당한 사람 자신이 자기의 물건을 공평하게 취급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새로운 인격은 색, 형, 질 등 특징이 있는 새로운 한 벌의 옷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입고 있는 참다운 인간(Real man)은 옛날과 같은 도둑놈입니다. 인격을 통하여 고통받는 것은 개별성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운명의 배분이 대단히 불공평하게 생각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 때문입니다. 왜 보기에는 죄가 없는데 많은 선한 사람이 평생동안 고통받고, 대도시의 빈민굴에서 끼니를 못 먹는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운명에서도 버림받고 사람들에게도 버림을 받아야 합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빈민굴에서 태어나는데 어떤 사람은 궁전에서 태어나게 됩니까? 가장 사악한 사람들이 귀족이나 부자로 태어나는데, 그 사람 중에 귀족이나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느껴지는 사람은 아주 드물며 거지로 태어나 있으나 그 사람의 내심은 가장 고상한 사람임이 틀림없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이런 것에 대하여 더 적절한 이유를 당신들의 근대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우리들에게 충분히 설명해 준다면 당신들은 윤회론을 반대할 권리가 있습니다. 시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은 진리 중의 진리를 희미하게나마 깨닫고 있습니다. '쉘리'(Shelley), '셰익스피어'(Shakespeare)가 출생(가문)의 무가치(Worthlessness of bith)에 대하여 쓴 것을 보면 윤회에 관하여 생각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의 다음 말을 생각해 보십시요. "왜 나의 출생이 내가 향상하려고 하는 정신을 눌러 버리려고 하느냐? 만물은 때에 지배되는 것이 아닌가? 뿌리는 왕가에서 나왔지만 지금 세상에는 거지가 된 자가 많다. 또한 지금의 많은 왕족들은 선조(Fathers)들이 옛날 천민이었다······." '선조'라고 하는 말을 자아(Ego)로 바꾸어 보십시요. 그러면 진실(Truth)을 알 것입니다.
제9장 '카마로카'와 '데봐챤'
저급 제원리의 운영에 대하여
문 : 당신은 '카마로카'(Kamaloka)라는 말을 하시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답 : 인간이 죽으면 그 저급의 3원리(三原理) 즉, 육체, 생명, 생명의 매체(媒體)로서 살아 있는 인간의 복체(複體; 아스트랄체)는 영구히 그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고 나면 나머지 4원리(四原理)로 중심적 원리인 동물 혼 '카마루파'(Kamarupa) 또는 저급 '마나스'에 동화(同化)된 것과 고급 3원리(三原理 ; Triad)가 이 '카마로카'에 들어갑니다. '카마로카'(Kamaloka)는 성계(星界)의 장소(Astral locality)이고, 스콜라 신학에서의 지옥의 변토(邊土 ; Limbus)이며, 고대인들의 지옥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단지 상대적 의미의 장소(Locality in a relative sense)일 뿐입니다. 그것은 일정한 영역이나 경계(境界)가 없으며 주관적 공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의 오감(五感)을 넘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하고 있으며, 동물을 포함한 살아있던 모든 것들의 '아스트랄' 유령(幽靈)이 두번째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 '카마로카'입니다. 동물들의 경우에는 마지막으로 '아스트랄' 분자(分子)가 붕괴(崩壞)하고 아주 소실되면서 '카마로카'시대가 도래(到來)합니다. 인간의 영인 경우에는 '아트마'ㆍ'부디'ㆍ'마나스'의 3부조(三部組)가 저급 제원리(諸原理), 말하자면 이전 인격의 반영에서 분리되어 '데바챤' 상태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제2의 죽음이 시작됩니다.
문 :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답 : 그리고, '카마루파'(카마로카와 혼동해서는 안된다.)의 유령(幽靈)은 정보(情報)를 주는 사고의 힘(고급 마나스)과 마나스의 저급면(Lower aspect) 즉 동물지성도 없어, 더 이상 고급심(Higher mind)으로부터 빛을 받을 수 없으며, 작용 할 육체의 뇌도 없으니, 붕괴되어 버립니다.
문 : 어떤 식으로 붕괴하는 것입니까?
답 : 뇌의 특정부분을 생체해부자(生體解剖者)들이 제거했을 때의 개구리와 같은 상태가 되어 최저급(最低級) 동물의 차원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저급 '마나스'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급 '마나스'는 고급 '마나스'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 : 강령술(降靈術)의 회합에서 영매(靈媒)를 통해 나타나는 비실체(非實體)가 바로 이런 것들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비실체(非實體 ; True nonentity)는 추리력(推理力)이나 숙려(熟慮)하는 힘이란 점에서 하나의 실체입니다. 가령, 그 실체란 것이 대단히 '아스트랄'적이고 유동적이라 할지라도 자력적, 무의식적으로 영매에 유인되므로 말하자면 영매(靈媒)의 대리가 되어 일시적이나마 영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유령(幽靈), 즉 '카마루파'(Kama rupa)는 해파리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해파리는 그 본영(本領)내, 즉 해수(海水) 안에(영매의 특이성이 있는 오라)있는 동안 희박(稀薄)한 젤라틴(Gelatine)상을 하고 있으나 물 속에서 나와서 손바닥이나, 모래밭에 두었을 적에는 특히 일광에 비치면 그 자리에서 녹아 버립니다. 영매의 후광(後光 ; Aura)안에서는 유령은 일종의 대리적 생명을 가지고 있고, 영매의 뇌나,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뇌를 통하여 추리하거나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너무 옆길로 나가서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므로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윤회의 문제에 관하여 얘기합시다.
문 : 윤회는 어떻게 됩니까? 화신하는 자아는 어느 정도까지 '데봐챤'의 상태로 머물러 있습니까?
답 : 그것은 그 이전 생애의 혼성(魂性)의 정도(程度 ; Degree of spirituality)와 공죄여하(功罪如何)에 따른다고 배웠습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대체로 1000년부터 1500년입니다.
문 : 그러나 그 자아는 왜 나타나서 심령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인간과 연락을 하지 않습니까? 죽은 어머니가 이 세상에 두고 간 아이들과 연락하거나, 죽은 남편이 처와 연락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어떻게 된것입니까? 그것은 대단히 위안이 되는 신앙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그 신앙을 버리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답 : 어느 정도 위안이 될지는 모르나 그들이 '가공(架空)의 일(Fiction)' 보다 진리를 더 좋아하지 않는 이상 구태여 그 신앙을 버리게 하지는 않습니다. 심령주의자들에게는 우리 교의가 마음에 들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믿고 가르치는 것은 그들이 설교하는 것에 비한다면 반정도(半程度)도 이기적이거나 잔혹하지도 않습니다.
문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어디가 이기적이라는 것입니까?
답 : 혼 즉, 그들이 말하는 진짜의 '인격'이 돌아온다는 교의입니다. 왜 이기적인가 좀 말해봅시다. 만일 '데봐챤'(Devachan)이 당신들이 말하는 천국이고 '지복과 대단한 축복의 자리'라고 한다면 그곳에서는 당연히 슬픔이나 고통의 그림자를 경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사람들의 눈에서 "신이 모든 눈물을 씻어준다"고 약속하고 있는 많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사자(死者)의 연혼들'이 돌아올 수가 있어 지상세계에서 특히 자신들의 집에서 진행되는 일을 본다면 그 영들은 지복(至福)하다고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신지학은 무엇때문에 순수한 영혼들의 귀환을 믿지 않는가?
문 : 무슨 의미입니까? 이 세상을 보는 것이 왜, 그들의 지복을 방해하는 것이 됩니까?
답 : 단순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어머니가 자신이 사랑하는 어린아이들을 고아로 두고, 또는 자식과 함께 남편을 두고 죽었다고 합시다. 죽은 어머니의 혼(Spirit) 즉, 자아(개성)는 생존 중에 가지고 있었던 인격아(人格我)의 고상한 애정 즉, 아이들에 대한 사랑, 고통받은 사람에 대한 연민(憐憫) 등으로 '데봐챤'에 있는 기간 중 꽉차 있으면 지복(至福)이 되겠습니까? 이 세상과 완전히 떨어져서야 축복이 있고 세상에 두고 온 모든 슬픔을 아주 모르는 것이라야 한다고 우리들은 말합니다. 반대로 심령주의자들(Spiritualists)은 "영들은 육체를 가지고 있을 때 보다 더 인간을 잘 볼 수 있다"고 하여 살아있을 때보다 더 많이 아이들이나 남편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고 말합니다. '데봐챤'에 있는 자(Devachanee)들은 세상을 떠나지도 않았고, 죽음이라는 것은 전혀 없다는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후(死後) 영혼적 의식은, 그녀가 아이들과 사랑하던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느낀다거나 그녀의 육신을 떠난 상태와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 간격이나 연결은 없다고 우리들은 말합니다. 심령주의자들은 이점을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들의 교의에 의하면 불행한 사람은 죽어서도 슬픔에서 해방되지 않습니다. 슬픔이나 고통스런 인생의 술잔을 모두 마셔야 됩니다. 그리고 죽은 입장에서는 무엇이든 잘 보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간에 남아있는 것을 모두 마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에는 생명을 바쳐서 남편의 슬픔을 덜어주겠다고 생각해 그녀는 이제 죽어서 남편의 완전한 무력(無力), 절망을 우울하게 보고, 자신(그녀)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며 흘리는 남편의 눈물을 뜨겁게 명심하게 된다고 합시다. 그것보다 더 나쁜 경우는 남편의 눈물이 너무 일찍 마르고, 아이들의 아버지(男便)가 다른 곳으로 사랑을 옮겨 자신(그녀)에게 주던 사랑을 다른 여자에게 주고 있으며, 자신의 아이들에게 관심도 없는 여자에게 아이들이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는 꼴을 보며, 설사 학대하지는 않더라도 어린아이들에게 태만한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심령주의 교의에 의하면 "불사(不死)하는 생명으로의 조용한 부동(浮動)이 이행 과정(移行 過程)이 없는 돌연한 정신적인 고통의 새길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빛의 기」(Banner of light)라고 하는 미국 심령주의자(心靈主義者)들의 노련(老鍊)한 기관지에는 사자들이 매우 행복해하는 것을 말하는 "남겨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라는 메세지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경우의 지복은 최대의 저주가 될 것이고, 기독교의 지옥은 거기에 비하면 좋은 곳이라고 위안(慰安)이 될 것입니다!
문 : 당신들의 이론은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것을 피합니까? 영의 전지설과 지상에서는 완맹(完盲 ; Blindness)이라고 하는 설은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
답 : 그것이 사랑과 자비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본질적으로는 전지입니다만 '데봐챤'에 있는 동안에 언제나 그전의 인격을 반영하고 잇습니다. 살아있는 인격의 마음(Heart)이 언제나 말해 주는 모든 추상적인 것, 즉 사랑이나, 자비나 진, 선, 미에의 사랑같은 불구(不拘), 영원한 속성의 이상적인 정화(精華)는 사후, 자아에 집착(執着)하여 '데봐챤'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당분간 그 자아는 이 세상에 살아 있었을 때 인간의 이상적인 반영이나 전지(全知)는 아닙니다. 만약 전지(全知)라면 자아는 우리들이 말하는 '데봐챤'이라고 하는 상태에 전혀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문 :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 만약 신지학 철학에 준한 정확한 답을 구한다면 형(形)이나 색(色)이나 제한이 없는 영원한 진리 이외에는 모든 것들이 환상(Illusion, Maya)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마야의 베일(Veil of maya) 저쪽에 몸을 둔 사람은 최고의 '대오자'(大悟者)들이나, 선각자(lnitiaates)들이며, 이런 사람들은 '데봐챤'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보통 사멸(死滅)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데봐챤'의 지복이 완전한 것입니다. 그 상태(데봐챤)는 과거 화신중(육신생활)의 고통과 슬픔같은 것을 모두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데봐챤'에 있는 자들은 전생과 내생(來生) 사이에의 중간 지대이고, 이 세상에서 이루어 보지 못한 열망하던 것들이 모두 주어지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사랑하던 사람들과 어울려서 지내게 됩니다. 이들은 영의 갈망(Soul yearnong)을 모두 성취합니다. 이와 같이 몇 세기 동안이나 지상 생활에서 고통의 보답이 되는 순수한 행복된 존재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멋있는 지복의 일들로 꽉차 있고, 방해 받는 것이 없는 바다 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문 : 그것은 단순한 망상(妄想)을 지나친 정신 나간 환각이 아니요!
답 : 당신 입장에서는 그럴런지 모르겠으나 철학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이 세상에서의 생활 모두가 이와 같은 망상에 꽉 차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바보같은 이 세상 천국에서 몇 년을 같이 생활한 남녀를 본 적이 없습니까? 당신은 우연하게도 어떤 남편에 대한 부정을 알았기 때문에, 그 남편을 아끼고 사랑하며 자신도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고 있는 그녀에게 사실대로 알려줘서, 그녀의 아름다운 꿈을 깨고 마음에 상처를 안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와 같은 망상(妄想), 만약 당신이 환각이라고 말하면 환각이라도 좋으나, 그것은 자연의 자비로운 법칙이며 엄격한 정의임에 불과합니다. 여하간 이것은 날개가 달린 천사가 황금 하프(Harp)를 가졌다는 천국 이야기 보다 훨씬 매력적입니다. "살아 있는 혼이 자주 천국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익숙하게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승정(僧正)이나 예언자를 찾고, 사도(使徒)들에 인사하고 순교자(殉敎者)들을 찬미한다."고 말하는 다짐(Assurance)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더 경건한 심정으로 보일런지 모르겠으나, 그야말로 훨씬 기만적인 환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어머니들의 불후(不朽)의 사랑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비해 '천국의 예루살렘'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물들은 어딘가 의심스러운 성질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심령 주의자의 공허(空虛)한 교령(交靈)에서 위안을 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보석점의 쇼 윈도우(Show window)처럼 길거리에 보석을 깔아 둔 '신예루살렘'쪽을 믿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의 부모 형제자매의 이지적이고 의식있는 영이 '상하(常夏)의 나라(Summerland)'에서 지복을 찾는다고 하는 생각ㅡ(약간 자연스럽기는 하나 신예루살렘의 묘사처럼 어리석다.)ㅡ만으로도 그 사람의 망자(亡者)에 대한 존경심을 없애기는 충분합니다. 순수한 혼(Pure spirit)은 가장 사랑하던 사람들과, 사망으로 인하여 헤어지고 그들의 악행이나 과오 및 배반, 더구나 고생을 별수 없이 목격하며, 도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면 이거야말로 미친 사람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 : 당신의 설법에는 무엇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해석한 것은 본적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답 : 정말 그렇습니다. 그와 같이 상상해 온 사람은 인과응보적 정의 감각을 결(缺)한 철저한 이기주의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들은 앞서갔던 사람들과 같이 있으며, 그들이 살아있던 때보다는 훨씬 더 그들에게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부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데봐챤'에 있는 사람들(Devachanee)이라는 환상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순수하고 신성한 사랑은 인간심(人間心 ; Humanheart)의 꽃일 뿐 아니라 영혼 속에 뿌리가 내려져 있습니다. 혼적이며 성스러운 사랑은 불사(不死)이며 이와 같은 영혼적 애정으로 서로가 사랑해온 사람들에게 '카르마'는 언제인가 그들을 또 한번 같은 가족으로 화신(化身)하도록 합니다. 이것을 당신들은 또 환영(幻影)이라고 말할 것이나, 묘지(墓地)를 초월한 사랑은 살아있는 자에게 반응을 나타내는 마술적인 신성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상하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어머니의 자아(Ego)는 아이들을 지상에서의 현실과 같이 가까이 보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며, 그 사랑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느껴집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꿈이나, 하늘이 도와주는 것 같은 보호나, 피난같은 여러 가지 사건에도 때때로 나타납니다. 사랑은 강한 방패이며 시공(時空)에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주 이기적 또는 물질적 관계를 제외하면 인간관계에서는 모두 이 '데봐챤'의「어머니」와 같은 것입니다. 다른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의 분석은 시사(示唆)하는 바가 있습니다.
문 : 그러면 어떤 경우에도 살아있는 사람과 육체를 떠난 영과의 교류는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답 : 아닙니다. 한 가지 경우, 아니 두 가지 예외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죽은 후 수일간이며 자아가 '데봐챤' 상태에 들어 가기 전입니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혼이 객관적(인간 물질계)으로 돌아와서 살아있는 사람이 많은 이득을 얻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 예외라는 것은 죽어가던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이 세상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강한 욕구가 고급의식을 잠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별성(Individuality) 즉, 교류한 혼(Spirit that communicated)입니다. 죽은 후 그 혼은 망연한 상태가 되어 소위 '데봐챤' 이전(Pre devachanic)의 무의식으로 바로 들어갑니다. 제2의 예외는 '닐마나카야'(Nirmanakaya)의 경우입니다.
문 : 그 경우는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닐마나카야'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답 : '닐마나카야'(Nirmanakaya)라는 것은 열반과 주기적인 휴식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얻었으나, 인류라는 이 세상에 남겨 둔 사람들을 가련하게 생각해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신 분들을 말하는 명칭입니다. '데봐챤'은 우리들 의식의 환각, 말하자면 '행복한 꿈'으로서 열반에 적절한 사람은 이 세상의 환영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나 필요성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입니다. 이와 같은 초인, 성자 또는 어떤 명칭으로 불러도 좋으나 이런 분들은 인류가 무지 때문에 불행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 받고 있는데, 지복(至福)속에서 편안하게 있는 것은 이기적인 행위가 된다고 믿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 세상에 '영'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겠다고 결심합니다. 이분들은 물질체는 벗어 던지고 있으나 우리 세계에서 '아스트랄' 생활(Astral life in our sphere)을 하더라도 기타의 모든 원리(Alltheir primciples)와 함께 이 세상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아주 적은 수의 선발된 사람들과 교류를 하지만 보통의 영매들과는 결코 하지 않습니다.
문 : 북방불교의 가르침에서는 '닐마나카야'라고 하는 말은 불타가 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의 모습이나 몸(體)에 붙이는 것이라고, 독일, 기타 나라의 책에서 읽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답 : 그렇습니다. 다만 동양학자들이 이 지상의 체(Terrestrial)를 완전히 '아스트랄'적, 주관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객관적, 육체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혼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문 : 그러면 '닐마나카야'는 우리들 세상에 어떤 좋은 일을 해 주고 있습니까?
답 : 개인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카르마"에 관여할 권리를 못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선을 위해서는 인간들에게 충고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유익한 일을 합니다.
문 : 과학이나 근대심리학에서 조차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과학이나 심리학에서는 육체의 뇌가 없어지면 지성(知性)으로 조금도 살아날 수 없다고 하는데 이것에 답할 수가 있습니까?
답 : 답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M.A. 옥슨'(M.A.Oxen)이 말한 것으로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지성은 육체의 죽음 후에 영속한다. 그것은 뇌에 한한 문제가 아니고 ······ 우리들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하여 인간영의 불멸성을 제의(提議)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영의 참된 모습 69항)
문 : 'M.A.옥슨'(M.A.Oxen)은 심령주의자가 아닙니까?
답 : 그렇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진짜 심령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소한 문제에 관해서는 찬성 못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점을 제외하면 그 사람만큼 비교(Occult) 진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심령학자도 없습니다. "충분한 지식을 갖추지 않고 비교(Occult)를 휘둘러대는 저능한 사람들의 외면적(外面的) 위험"에 대해 그는 끊임없이 우리들과 똑같은 경고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동의 못하는 것은 "영은 어떠한 것이냐'(Spirit identity)라고 하는 문제 뿐입니다. 그외에는 나 개인으로서는 거의 그와 같은 의견이며, 1884년 7월의 연설에서 그가 제시한 세 가지 제안(Proposition)을 나는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그의 의견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저명한 심령주의자가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문 : 그 세 가지 제안(提案)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 ① 몸(體)의 육체 생명과 부합(符合)하는 독립한 생명이 있다는 것 ② (1)의 사실에 필연적인 결과로서 이 생명은 육체 생명보다 오랫동안 존속한다는 것(그것을 '데봐챤' 동안에 존재한다고 우리들은 말합니다.) ③ 이와 같이 죽은 후 상태의 존재들과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에 교류가 있다는 것. 심령주의자들과 우리들의 의견 차이는 모두가 이와 같이 기본적인 주장의 사소한 2차적인 면에 의한 것입니다. 모두가 영과 혼, 즉, 개성과 인격을 보는 견해 차이입니다. 심령주의자들은 이 두 가지를 하나로 혼동하는데 대하여, 우리들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앞에서 설명한 예들을 제외하고 영은 지상으로 돌아오지 않지만 동물혼은 돌아오는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오온(五蘊)으로 다시 말을 돌이켜 봅시다.
문 :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가장 깨끗한 오온의 본질(Essence)은 자아에 붙어서 오랫동안 살면서 영의 천사로서 '데봐챤'에서의 경험에 가해져 갑니다. 두 번의 생애 동안 행동 장소에서 사라져서 '카르마'의 결과로 다음 화신(육체 시대)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물질적 오온(五蘊)과 이기적인 인격적 동기에 관계하는 속성입니다. 따라서 영은 '데봐챤'을 떠나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답 : 대략 그렇습니다. 응보의 법칙인 '카르마'는 '데봐챤'에서 가장 높은 영적인 것에 보상을 하고 다시 세상에서 높은 진보와 그 진보에 알맞는 몸을 주는 것이며, 반드시 또 다시 자아에게 알맞는 육체를 준다는 사실을 가미한다면 당신이 말한 것과 거의 같습니다.
오온(五온)에 대하여
문 : 육체(肉體)의 죽음 후, 다른 것, 즉 인격이 낮은 사람의 제온(諸蘊)은 어떻게 됩니까? 아주 없어지는 것입니까?
답 : 소멸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소멸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에게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비교(Occult)의 신비일 것입니다. 인격이 쓰고 있는 재료로서는 소멸하지만 '카르마'의 효과로서 지상계 대기 중에 부유(浮游)하는 미생물 같은 상태로 남아 자아의 새로운 인격이 화신하면 혼처럼 따라 붙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 : 그것은 대단히 어려워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답 : 일단 자세히 알게 되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논리(論理), 일관성, 사상의 깊이, 신성한 자비(慈悲)와 공평하다는 점에서 이 세상에서는 이 윤회라는 교의(Doctrine of reincarnation)에 비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씩 화신(化身)하는 자아 즉, 신성한 혼(soul)의 끊임없는 진보를 믿고, 밖에서 안으로, 물질에 혼으로의 진화를 믿어야 하는 것이며 각 단계에서는 신성한 원리와의 절대적 합일(合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힘에서 더욱 큰 힘으로, 하나의 계(界)에 대한 아름다움의 완성에서 다른 세계에서 더 멋진 아름다움의 완성으로, 각 주기에 새로운 영광과 새로운 지식과 힘을 더하여 나가는 것, 이와 같은 것이 모든 자아들의 운명이며 이러한 자아는 각계의 화신으로서 자기 자신을 구하는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문 : 기독교에서도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진보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답 : 그렇습니다만 그것에 다른 것을 더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적적인 구세주의 도움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교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모두가 지옥으로 떨어져 버리는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와 신지학과의 틀린 점입니다. 기독교는 혼적 자아(Spiritual ego)가 저급아(低級我)로서 내려가는 것을 믿게 합니다. 신지학은 자기 자신을 '크리스토스'(Christos) 즉, '부디' 상태(Buddhi state)로 높이는 노력의 필요성을 마음에 넣어 주도록 합니다.
문 : 그러나 높이는 것을 실패할 경우에는 의식이 절멸한다고 가르치면 형이상학을 모르는 사람들의 의견으로서는 '나'는 절멸(Annihilation of self)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답 : 문자 그대로 몸의 부활을 믿고 육체의 모든 골(骨), 모든 혈관이나 원자가 최후 심판의 날에 육체적으로 하늘로 올라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지(見地)에서는 그러한 것입니다. 만약 불사의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소멸하는 몸과 유한적(有限的)인 제특성(諸特性)이라고 아직 귀하가 주장한다면 우리들은 서로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당신들은 모든 자아의 존재를 지상의 일생으로 한정해 버리고, 푸라나(Purana; 고대인도 성시집(聖詩集))의 사문자(死文字)에 나오는 주정뱅이 '인타라'(因陀羅 ㅡ ; 힌두교의 뇌(雷)ㆍ우ㆍ전쟁신)를 성스러운 것이라 하고, 잔혹(殘酷)한 모로크(Moloch ; 어린이를 희생으로 받는 셈족의 신 ; 세상에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을 일으키는 신)ㅡ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실을 잊지 못하고 주장한다면 우리들은 가급적 빨리 이야기를 끝맺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 : 그러면 이제 오온(五蘊)의 문제는 알았다 치고 죽음 후에 살아 남는 의식의 문제로 돌아갑시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점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지식보다 '데봐챤'에서 더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됩니까?
답 : 어떤 의미에서는 더 많은 지식을 얻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생전에 좋아하고, 노력하던 능력이 가령, 음악이나 그림이나 시(特)같은 추상적이며 이상적인 것에 관계가 있으면 발달시킬 수가 있습니다. '데봐챤'은 지상생활(地上生活)을 이상화(理想化)한 주관적인 연속(Continuation)에 불과한 것입니다.
문 : 그러나 만일 '데봐챤'에서 영이 물질에서 해방되어 있다면 왜 전지(全知)는 되지 않습니까?
답 :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자아는 그 이전 화신(육신)의 기억과 결합괴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한 것을 잘 생각하면서 모든 사실과 연관해 본다면 '데봐챤' 상태는 전지의 상태가 아니고 지금 막 끝난 인격생활의 초월적 계속이라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데봐챤'의 생활은 육신 생활에서 혼의 고통을 덜어주는 휴식입니다.
문 : 그러나 과학적 유물론자들은 인간은 죽은 후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또 인체는 단순한 구성 요소로 붕괴되는 것 뿐이며, 우리들이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관적 작용의 부산물로서 증기와 같이 사라져 버리는 일반적인 자의식에 불과하다고 단언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상한 마음의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답 :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자의식(自意識)이 육체와 같이 끝난다고 말한다면, 그 경우는 그들의 무의식적인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 자신이 말한 것에 확신을 가지면 죽음 후에 그들은 의식이 있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어떤 규칙에도 예외가 간혹 있으니 말입니다.36
사후와 출생전의 의식
문 : 만약 인간의 자의식이 반드시 죽음후에 살아 남는다면 왜 예외가 있습니까?
답 : 영계의 근본적 원칙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의 규칙과 맹목 그대로 있고 싶은 사람들의 규칙이 있습니다.
문 : 정말 그렇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태양을 보지 못한다고 하여 태양의 존재를 부정하는 맹인의 착각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후에 그 사람의 영적 눈은 반드시 보도록 강요할 것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뜻이겠지요?
답 : 그 사람은 강요당하지도 않고 아무 것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성장을 방해 당했으므로 죽은 후 발달할 수가 없어서 맹목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가 보는 것이 틀림없다고, 당신은 확실히 나와 틀린 견해를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영'에서 '영', 불꽃에서 불꽃, 즉 '아트마'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아트마'를 인간영 즉 '마나스'(Manas)와 혼동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질문 요점은 완전한 유물주의자의 경우, 사후의 자기 의식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가능한가 어떤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가능합니다. 사후(死後)의 기간 즉, 죽음과 다음 생과의 중간 기간을 단순한 이행(移行 ; Transitory) 상태라고 하는 신지의 비교(秘敎)를 굳게 믿는다면, 인생이라는 환영적 연극의 막간이 1년 계속되거나 만년 계속되거나 사후 상태의 기본적 법칙에는 아무런 위반이 없고, 유물론자의 경우는 기절(氣絶)한 사람의 상태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 : 그렇지만 귀하는 죽음 후의 상태의 기본적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여 그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답 : 역시 나는 예외가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계속에 관한 혼적 법칙은 정말 참다운 것에만 적용되는 것입니다.「문다카 우파니샤드」(Mundakya Upanishad)와「베단타 사라」(Vedanta Sara)를 읽어서 이해한다면 이것에 대하여 모든 것을 대단히 확실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유물론자가 죽음 후에 자의식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가 없는 이유를 확실히 이해하려면 우리들의 '부디'와 '마나스'의 이원성을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마나스'의 저급 면은 이 세상 마음의 좌(座)이므로 그 마음의 증거에 기초로 하여서는 한 우주의 인식 이상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혼적 인식(Spiritual vision)을 줄 수가 업ㅅ다는 것입니다. 동양학파(Eastern school)의 가르침에 의하면 '부디'와 '마나스'(自我) 혹은 '이스와라'와 '프라그나'37의 차이는 실제에 있어 삼림(森林)과 그 나무, 호수와 그 물의 차이와 같고, 이것은 '문다카'(Mundakya)가르침과도 같습니다. 나무에 생기가 없이 그 하나가 쓰러져 없어지거나 백 개의 나무가 쓰러지더라도 삼림(森林)인 것은 변함이 없이 삼림일 것입니다.
문 : 그러나 제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이 비유(比喩)에서 '부디'는 삼림이고 '마나스ㆍ타이자시'38는 나무들입니다. 만일 부디가 불사(不死)라면 그와 비슷한 마나스 '타이자시'가 어떻게 새로운 화신(化身)의 날까지 의식을 완전히 잃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답 : 귀하는 전체의 추상적 표현과 그 형체의 우연적 변화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것입니다. 만일 '부디'ㆍ'마나스'가 무조건 불사(不死)라할지라도 저급 '마나스'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두십시요. 단순한 속성이나 저급 마나스에 불과한 '타이자시'에 대해서는 더우기 불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나스'나 '타이자시'는 '부디' 즉, 신성한 영과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나스'의 낮은 양상은 이 세상에 있던 인격의 조건이 붙어있는 속성이며, '타이자시'는 '부디'의 빛이 반영(反映)되고 있는 '마나스'에 불과합니다.
문 : 우리들이 본체(Noumenon; 순수사유의 대상)와 현상(Phenomenon),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마나스' 즉, 인간영에 한하여 '타이자시'의 빛은 시간 문제가 된다고 되풀이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불사성과 사후의 의식은 모두 인간의 이 세상에서 뿌려둔 씨앗의 과실을 저승에서 거두는 것입니다.
문 : 육체가 죽은 다음 만약 나의 자아가 점점 무의식의 상태에 빠진다면 나의 과거, 이승에서의 죄는 어디서 벌을 받게 되나요?
답 : 우리들의 철학은 '카르마'의 죄가 다음의 화신(육체)에서 비로소 자아에 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후의 자아는 과거 이승에서의 견디기 어려운 '부당한 고통'39에 대한 보상(휴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물론자는 죽음 후에는 아무 보상도 없고 조복과 휴식의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카르마'는 이승의 자아의 자식이고, 영적 '나'의 모든 생각과 동기의 결과이며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객관적 인격이란 나무에서 작용하는 과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카르마'는 또한 아주 인자한 어머니와 같아서 전세(前世)의, 상처를 새로운 인생에서 이 자아(自我)에 고통을 주기 이전에 치료해주기도 합니다. 만일 전생에서 지은 죄의 직접적 결과가 아니라면, 인생에서 정신적 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면, 또는 반대로 실제 생활에서 약간의 기억도 없어 어떤 처벌은 부당하며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것만으로도 그의 사후 존재는 영의 충분한 위안과 휴식 및 지복을 누리기에 타당한 것입니다. 죽음은 언제나 구조자(救助者), 구원자이며 친구로서 혼적아에게 찾아와 주는 것입니다. 유물론자일지라도 악인이 아니면 새로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에 아이들의 평온하고 조용한 잠자는 모습처럼, 혹은 확실하지 않은 환상으로 가득한 꿈처럼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적 일반 사람의 경우에는 살아 있을 때와 같은 생생한 꿈을 꾸는 상태 혹은 현실적인 지복과 비젼으로 꽉 차있는 상태가 됩니다.
문 : 그렇다면 인격 인간은 자아가 저지른 '카르마'의 죄가 무엇이있는지도 모르고 고통을 언제나 받아야 합니까?
답 :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죽는 순간에는 설사 돌연한 죽음에 임했다할지라도 자신이 지금까지 벌려온 인생의 모든 일들의 자세한 것까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일순간에 그의 인격은 개성과 일체가 되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아와 일체(一體)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 살아있는 동안 일어났던 모든 원인을 전부 연결해 보기에 충분합니다. 그 사람은 아부나 자기 기만으로 꾸미지 않은 자기 자신을 보고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이 떠나야할 무대(인간 생활)를 구경꾼의 입장에서 내려다보고 자신의 인생을 읽어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여러 가지 고통 모두가 정당한 것이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 : 그것은 누구에게나 생기는 것입니까?
답 : 예외는 없습니다. 극히 선량하며 성스러운 사람은 자신이 떠나가는 인생뿐만 아니라, 지금 막 끝내려는 인생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원인을 일으키게된 과거의 여러 세(世)를 본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모든 고통과 정의를 인정합니다.
문 : 다시 태어나기 전에도 이와 같은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답 :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자신이 보낸 인생을 추상(追想)하는 것처럼, 지상(地上)으로 재생(다시 태어날 때)하는 순간에 자아(自我)는 '데봐챤'의 상태에서 깨어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비젼'를 보고 그렇게 인도되는 원인을 모두 깨닫게 됩니다. 그는 그런 일들을 인정하고 미래를 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아가 '데봐챤'과 재생의 사이에서 '마나스'적 의식을 전적으로 다시 얻는 기간이고,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처음으로 물질로 하강(下降)하여 육신의 인간으로 화신(化身)하던 때의 신으로 화하는 짧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황금의 실'에 꿰어진 모든 '진주'를 보고 빠짐없이 전부를 똑독히 관찰합니다.
절멸(絶滅)이란 무엇인가?
문 : 어떤 신지학도들이 자신의 생애 모두를 연결하는 '황금의 실'(糸 ; Golden thread)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 : 힌두교의 성전에서는 주기적으로 화신(化身)하는 것을 '수트라트마'(Sutratma)라고 말합니다. '수트라트마'란 문자 그대로 계혼(系魂 ; Thread soul)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부디'와 결합한 '마나스'이고 윤회하는 자아와 동의어(同義語)로서 우리들 모든 전생의 모든 마나스적 회상(回想)을 흡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마치 실(糸)에 꿰어진 진주들처럼 한 가닥의 실에 긴 인간 생애의 연속이 꿰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우파니샤드(Upanishad)에서는 이와 같이 반복되는 재생을 수면(睡眠)과 각성(覺醒)의 사이에서 주기적으로 진동하면서 움직이고 있는 인간의 생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문 : 그것은 너무나 불학실한 설명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다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지만 그 인간의 영과 몸은 전 날의 것과 같은 사람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화신은 할 때마다 신체나 성이나 인격이 모두 바뀌어질 뿐 아니라 지적 및 심리적 능력까지도 바뀝니다. 그러므로 앞에 언급한 비유는 바른 설명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인간은 어제 한 일들을 모두 확실히 기억할뿐 아니라 그 이전의 어떤 날 심지어 몇 개월이나 몇 년 전의 것도 기억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누구나 전생의 일들이나 전생에 관계되는 사실들을 아무 것도 기억 못 합니다. ······ 어제 밤 꿈에서 본 일들을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잊어버리는 일은 있습니다만, 그러나 내가 잠을 자고 있었고, 잠을 자고 있을 때 틀림없이 살아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는 순간까지 과거세에 대하여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해 낼 수가 없다는 사실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요? 이것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답 : 어떤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에 과거세(生)를 생각해 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불타들이나 선각자(Initiates)들입니다. 이것을 '요가'에서는 삼마 삼부다(Samma Sambuddha)라고 하며 과거세(過去世)의 자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문 : 그러나 '삼마 삼부다'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들 보통 인간은 어떻게 이러한 비유를 할 수 있습니까?
답 : 연구를 더 해 수면(睡眠)의 세 가지 종류와 그 특성을 더욱 더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수면은 짐승에게나 인간에게도 일반적으로 불변하는 법칙이지만 수면에는 다른 종류가 있고 꿈이나 비전(Vision)에는 더욱 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문 :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다른 문제를 안겨줍니다. 유물론자로 돌아가 봅시다. 유물론자는 물론 꿈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불사를 부정하고 자신의 개성이 살아남는 것을 부정합니다.
답 : 그 유물론자는 알지 못하면서 옳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영의 불멸성에 관하여 내적 인지력이나 신념을 가지지 않은 사람의 경우 영은 '부디 타이자시'가 될 수 없으며 '마나스' 그대로 남습니다. 그리고 '마나스'만으로서는 불사(不死)가 될 수 없습니다. 저승에서 의식적으로 살고 싶다면 먼저 이승에 살아있는 동안 죽음 후의 생명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밀과학(秘密科學)의 이들 두 가지 금언(Two aphorisms of secret science)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철학의 사후 의식과 영의 불멸성(不滅性)이 성립되었습니다. 자아(自我)는 언제나 그의 공죄(功罪)에 따라서 보답을 받습니다. 육체가 완전히 잠을 깬 의식의 시기, 또는 혼탁한 꿈의 상태, 혹은 절멸과 구별할 수 없는 아주 꿈이 없는 수면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수면의 세 가지 종류입니다. 만약 생리학자들이 꿈이나 비전(Vision)의 원인이 각성시(覺醒時)의 무의식으로 준비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면 왜 사후의 꿈에서도 같은 이유를 인정할 수가 없을까요? 반복해서 말하지만 죽음이란 잠을 자는 것입니다. 사후, 영의 혼적, 눈 앞에서 우리들 자신이 배우고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구성한 '프로그램'에 따라 연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만들어낸 바른 신념이나 환영의 실현입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각자가 만든 완전한 바보낙원(Perfect fools paradise)에서 감리교(Methodist) 신자는 '감리교' 신자가 되고 '회교도'는 '회교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애라는 나무'의 죽은 후의 과실입니다. 의식의 불멸성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나 불신이 이미 존재하는 무조건적인 현실 그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독립된 개별적 존재의 속성으로서의 불사성에 대한 신념, 혹은 불신이 그들 실체(實體)에 적용될 때 다른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문 " 조금씩 알겠습니다. 유물론자는 자신의 오감(五感)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것, 혹은 부적절(不適切)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오감(五感)으로 입수한 데이타(Date)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과학적 추리에 의하지 않는 것은 믿지 않고 모든 영적 현상에 반대하고, 이 세상의 인생을 유일한 의식적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경우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정말 그렇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개인적 자아를 잃어(失)버리고 새로이 눈을 뜰 때까지 꿈이 없는 잠을 잡니다. 그런 말씀이지요?
답 : 대체로 그렇습니다. 지상과 영적이라는 두 종류의 의식이 있다고 하는 보편적인 가르침을 잘 염두해 두십시요, 영적 의식은 영원불변이고 불사(不死)인 모나드(Monad)가 그 안에 거주하고 있으므로 현실(우리 인간은 가재(假在)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육체로 화신하는 자아는 전생과는 판이한 옷을 입고 있으며 혼적 원형(魂的 原型 ; Spiritual prototype) 외에는 이전의 흔적이 조금도 남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변화되어 있습니다.
문 : 어째서 그렇게 됩니까? 지상의 의식(이승)을 가진 '내(I)'가 유물론자처럼 당분간이 아니고 아주 아무 형적(形跡)도 없이 사라진다는 말입니까?
답 : 신지학의 가르침에 의하면 완전히 없어집니다. 다만 '모나드'와 한 원리만이 순수하며 혼적인 불멸의 본질이 되어 영원성과 일체가 됩니다. 그러나 지독한 유물론자의 경우는 인격아(人格我)에 '부디'가 반영된 적이 없으므로 끝내는 그의 인격의 단 한분자(一分子)라도 영원으로 운반해 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의 영적 나(Spiritual I)는 불사이나 그것은 당신의 현재 '나'에서 불사에 알맞는 것 즉, 죽음에 의하여 거둬들인 '꽃의 향'만이 '영원'으로 운반되어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 : 그러면 이승에서의 나(Terrestrial I)라고 하는 꽃은 어떻게 됩니까?
답 : 그 꽃은 하나의 뿌리 즉, 부디의 아이들로서 어머니가 되는 꽃밭인 '수트라트마'에 핀 과거의 꽃과 지금부터 피게 될 모든 꽃처럼 먼지(Dust)로 돌아갈 것입니다. 당신의 현재 나(Your present I)는, 당신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내 앞에 앉아있는 몸이 아니고 내가 말하는 '마나스 수트라트마'(Manas Sutratma)도 아니며 '수트라트마 부디'입니다.
문 : 그러면 왜 사후의 생명은 불사, 무한, 현실이며 이 세상의 인생은 단순한 유영이나 환영이라고 말하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인생에 비하여 저 세상의 것은 얼마나 넓고 큰 것이라 하더라도 사후의 생명에도 역시 제한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답 : 아주 확실한 말을 하셨습니다. 인간의 혼적 자아는 생과 사(死)의 시간 사이에서 시계추(時計錘)와 같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 이 세상의 생명과 영적 생명의 기간을 구별하는 기간에는 한도가 있고 또 영원의 각 단계 즉, 수면과 각성의 사이와 환영과 현실 사이에는 많은 단계와 시작과 끝이 있다고 할지라도 오직 혼적 순례(魂的 巡禮)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후생명의 시간 동안, 육체가 해체되어 오직 진실(Truth)만을 대하고, 지상 존재의 일시적인 신기루(蜃氣樓)는 대하지 않는 기간(期間), 우리가 '재생의 반복'이라고 하는 순례의 기간만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유일의 현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 간격(Interal)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아는 방해를 받지 않고 줄곳 자신을 완성해 가면서 옆길을 걷는 일이 없이 마지막 변형에의 길을 비록 느리게나마 자아가 목표에 이르게 되어 신성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시간 간격이나 단계에 자아는 방해를 받지 않고 최후의 결과에 이르는데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아(自我)가 신성한 자아가 되려면 제한을 받는 기간(육신의 윤회)없이는 결코 궁극의 종점에 이르게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자아 또는 개별성(Individuality)에 대하여 배우로 비유하였고, 그의 수많고 다양한 화신을 그의 연기로서 설명했습니다. 이와 같은 역할이나 의상을 당신은 자신의 개성이라 말하겠습니까? 그러한 배우와 마찬가지로 자아는 파라니르바나(Paranirvana)의 입구에 이를 때까지 자신에게는 불쾌한 일일지 모르나 많은 역할을 필요한 주기 동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벌(蜂)이 꽃에서 꿀(蜜)을 모으며 남은 것은 다른 벌레(虫)의 식물(食物)로서 남겨두는 것처럼 우리들이 '수트라트마' 혹은 자아(Ego)라고 말하는 혼적 개별성도 각 인생의 '정화'를 모으는 것입니다. '카르마'가 화신하도록 강요하는 이 세상 인격들에서, 혼적 특성과 자의식의 감로(甘露 ; Nectar)만 채집하여 이것을 하나의 총합체에 통일하고, 그 유충에서 영광스런 디안 초한(Dhyan Chohan)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아가 아무 것도 채취(採取)할 수가 없는 이 세상의 인격은 그만큼 나쁘며 그런 인격은 확실히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살아 남을 수가 없습니다.
문 : 그렇다면 이 세상 인격의 불사는 조건이 붙어 있군요. 그러면 불사 그것은 무조건은 아니라는 뜻입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사성(不死性)은 존재하지 않는 것(Non-existent)에 해당될 수가 없습니다. '사트(Sat)'로서 존재하는 것, 혼은 '사트'에서 발산된, 모든 것에는 불사와 영원성이 절대적인 것입니다. 물질은 혼의 반대의 극이면서 이 두 개는 하나입니다. 이런 모든 것의 본질, 즉 영ㆍ힘(力)ㆍ물질이라고 말하는 삼위일체는 무시(無始)인 것과 같이 무종(無終)입니다. 그러나 이런 삼위일체가 화신중 얻은 형체 그 외형은 확실히 우리들의 개인적 개념의 환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열반과 우주 생명만이 진실이라고 말하고 이승의 생명이나 그 인격이나, 또 그외 '데봐챤'에서의 존재까지도 환영 영역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문 : 그러면 왜 '수면(睡眠)을 현실이라 말하고 각성(覺醒)을 환영(幻影)이라고 말합니까?
답 : 수면과 각성이란 것은 그저 그 문제를 이해하기 쉽게 하는 비유일 뿐이며 현세적 개념의 견지(見地)에서도 이것은 매우 타당한 것입니다.
문 : 만약 미래의 생이 정의에 기초하고 또, 우리들의 모든 이 세상에서의 고통에 대상(代償)하는 보수에 기초가 있다면, 유물론자의 경우 그 사람들은 대부분이 정직하고 자비로운 사람인데 왜 그 사람들의 인격은 시든 꽃의 찌꺼기로서 남아있는 것과 같은 꼴이 되는지 아직 나는 모르겠습니다.
답 :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불신심(不信心)의 유물론자일지라도 혼적 개성을 영구히 잃어버릴(失)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은 유물론자의 경우 의식의 전부 혹은 일부분이 소실한다는 것으로 그 사람 인격의 의식적 유물은 남지 않습니다.
문 : 그것은 절멸이 아닙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긴 기차여행을 할 때 죽은 것처럼 잠을 자면 여러 역을 모르는 동안에 지나가 버리고, 조금도 기억 못하고 의식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역에서 눈을 뜨고 여로를 끝냅니다. 말하자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 역을 그대로 지나쳐 버리는 여행을 계속합니다. 세 종류의 수면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꿈이 없이 자는 것, 혼탁한 꿈을 꾸며 자는 것, 또 하나의 꿈은 가장 현실적이어서 잠을 자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꿈이 아주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런 세번째 잠을 믿는다면 왜 꿈없이 자는 상태를 믿을 수가 없겠습니까? 저승에서의 인생은 인간이 믿고 기대한 그대로가 되는 것입니다. 내세(來世)를 예기 못한 사람은 이생(二生)의 사이를 절멸(絶滅)같이 절대적인 '공백'이 됩니다. 이것은 바로 내가 말한 '프로그램'의 실행이며 유물론자가 만든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유물론자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자신을 위한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자신의 불신심(不信心) 때문에 전세계(全世界)에 대하여 아주 무관심하며, 이기적이며, 악한 '이기주의자'는 죽음에 임하여 인격을 영원히 없앨 수밨에 없습니다. 이런 인격은 주위의 세계를 걸칠 수 있는 동정의 끈이 없고, 따라서 '수트라트마'에 걸어줄 것이 없어서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대로 인격과 '수트라트마'를 연결한 줄이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유물론자에게는 '데봐챤'이 없으므로 '수트라트마'가 즉시 재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심(不信心)일 뿐이고 다른 잘못이 없는 유물론자는 하나의 역을 지날 때까지 잠을 자고 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유물론자는 영원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영원의 생명에서 자신이 하루 혹은 하나의 역을 지나쳐 버린 것을 후회할 때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문 : 그렇지만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라든가 또 한번 영원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이 바르지 않습니까?
답 : 그것이 좋다면 그렇게 말해도 좋습니다. 탄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산(死産)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의 실패입니다. 뿐만 아니라 물질 생명에 대한 서구인의 관념은 '살고 있다'(Living), '존재하고 있다'(Being)는 등으로 고정되어 존재의 순수한 주관적 상태에 적용할 수가 도저히 없습니다. 극서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저서를 읽어주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의 혼란을 확실하게 설명 못 하는 몇몇 철학자들은 별개로 하더라도, 생과 사에 대한 서구의 관념은 대단히 좁아 한쪽으로 치우친 지독한 유물주의가 되었고, 다른 한쪽에는 심령주의자들이 '상하(常夏)의 나라'로 꾸며낸 일층 물질적인 미래의 개념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상하(常夏)의 나라'에서는 인간의 혼을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며, 결혼도 해 마치 모하메트(Mohammed)가 말한 천국같이 매우 육욕적(肉慾的)인 생활을 하며 철학적으로는 더욱 보잘 것 없는 상태입니다. 교육을 받지 않은 기독교 신자의 일반적인 생각은 이것에 비하여 더 물질적입니다. 수족을 자른 천사나, 놋쇠 나팔, 금의 견금(堅琴), 물질적인 지옥의 불, 등 기독교의 천국이란 것은 크리스마스 때의 무언극같습니다. 귀하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좁은 개념 때문입니다. 동양의 철학자들이 사후의 생활을 수면중의 비전(Vision)으로 말하는 것은 육체를 떠난 혼의 생활이 어떤 꿈속에서와 같이 생생한 현실성을 가지고는 있으나, 이승에서의 생명처럼 농밀한 객관적 형체(肉體)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것에 대한 확실한 말
문 : 인간 원리의 각 기능에 대하여 우리들의 생각이 이와 같이 이해를 잘못하고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구분된 각 원리의 기능에 관한 일정한 용어가 없는 데서 오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답 :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혼란은 모두가 그런 데서 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리(原理)에 대하여 설명하고 의논하는데 우리들은 범어(梵語)를 쓰지만, 신지학도를 위하여 영어에 해당되는 말을 만들지 않는다는 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이런 혼란을 교정해 가야 합니다.
문 : 이 이상의 혼란을 페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지학에 대한 저자는 누구나 지금까지 같은 원리에 같은 명칭을 붙이는 일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답 : 그러나 혼란은 실제보다는 그렇게 심한 것이 아닙니다. 몇 사람의 신지학도가 인간의 원리에 대한 몇 가지 논문에 놀라움을 나타내고 비판해왔기에 알아본즉 세 가지 원리를 구별하지 않고 영(Soul)이란 말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한 것외에 큰 잘못은 없었습니다. 첫째는 신지학의 저자 중 제일 확실한 해설자인 A.P. 시네트(A.P.Sinnett)씨가 '고급아'(高級我)에 대하여 몇 가지 알기 쉽게 훌륭한 논문을 내놓고 있습니다.(신지학협회 '런던롯지'의 의사록 No 7. 1885년 10월 참조) 그는 영(Soul)이란 말을 일반적인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의 참다운 말뜻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여기에 몇 절을 인용하여 그 문제에 대한 그가 쓴 것 모두가 얼마나 명백하며 알기 쉬운가를 귀하에에 보여주겠습니다······. "인간의 영은 일단 인간 개별(그는 이것을 '윤회하는 자아'또는 인간혼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을 말한다면 코잘체)로서 진화된 흐름에 들어가면, 물질 존재와 영적인 상태와의 기간을 번갈아가면서 지나간다. 인간의 영은 하나의 계(界) 또는 하나의 층, 즉 자연의 한 상태에서 '카르마'적 신화력(神化力)의 지도 아래서 다른 계(界)로 옮겨간다. 즉, '카르마'가 앞질러 정해둔 인생으로 화신하여 살고 환경의 여러 가지 제한 속에서 진보하고 기회를 활용하기도 하고 악용하기도 해 새로운 '카르마'를 만들고 육체 생명을 끝내고, '카마 로카'(Kama loka)라고 하는 중간상태를 거쳐서 혼적 상태(데봐챤)로 돌아간다. 그리고 휴식하고 원기를 회복하고, 지상 즉, 육체적 존재 중에 얻은 인생의 경험을 우주에서의 진보로서 자신의 본질에 차차 흡수되는 것이다. 거기서 이런 생각을 하는 편에서는 이 문제를 잘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부차적인 추론(推論)을 암시했을 것이다. "예컨데 다음과 같다. '카마 로카'에서 '데봐챤'상태로 의식을 옮기는 것은 당연히 단계적이다.40 실(實)을 말하면 여러 가지 영적 상태를 나누는 엄중한 선(線)은 없다. 거기서 살아있는 사람의 심령(Psychic)능력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영적인 세계와 물질계와는 물질적 이론이 암시하는 것 같이 서로가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자연의 모든 상태는 동시에 우리들의 주위에 있고 서로 다른 인지 기능에 호소하는 등등······ '심령'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육체적 존속기간 중 초육체적 의식과 어느 정도의 연결이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능력이 주어져 있지 않으나, 우리 모두는 수면 현상이나 특히 몽유병이나, '최면술'의 현상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오관(五官)에 아무 관계없이 의식 상태에 들어가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혼은 말하자면 물질의 큰 바다에서 그저 표류(漂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확실히 언제인가 자신이 흘러서 나온 해변에 돌아가는 흥미나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화신의 과정인 물질계와 영계에 교호(交互)하며 존재하는 것들이라고 말하나, 영(Soul)은 하나의 존재상태에서 다른 상태에로 그대로 들어가는 완전한 존재라고 상상하는 경우에 화신의 과정이 충분히 묘사되지 못했습니다. 화신이란 영에서 발산하는 방사물 때문에 자연의 물질계에서 생기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 가장 이 과정을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사이에 줄곧 혼적 영역은 영의 적절한 서식처(棲息處)가 될 것이며 영은 결코 완전히 그곳을 떠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영구히 혼계에 살고 있는 영의 물질화하지 못한 부분을 고급아(高級我 ; Higher self)41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겠습니다. ※ 고급아(Higher self)란 것은 "아트마' 즉, 보펀적이며 유일한「나」의 분리할 수 없는 광선(光線)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안에 있는 신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위에 있는 신입니다. 자신의 내적 자아(Inner ego)를 고급아로써 채우는 일에 성공한 자는 행운의 정상(頂上)에 있습니다! ※ 혼적 신성 자아(The spiritual aivine ego)란 것은 마음의 원리인 '마나스'와 밀접하게 결합한 혼적영(Spiritual soul), 즉 '부디'이며, 그렇지 않고는 '부디'는 자아가 될 수 없고 단순히 '아트마'의 매체에 불과합니다. 내적(The inner) 자아 즉, 고급자아(Higher ego)란 것은 '부디'와는 독립된 '마나스' 즉, 소위 제 5 원리입니다. 마음의 원리는 부디와 일체(一體)가 되었을 때 비로소 혼적 자아가 됩니다. 유물론자가 어떤 지적 능력이 있어도 이와 같은 자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영속적 개별성(永續的 個別性 ; Permanent individuality) 즉, '윤회하는 자아'입니다. ※ 저급자아(低級自我 ; Lower ego) 즉, 인격자아(人格自我 ; Personal ego)란 것은 동물적 본능, 정욕, 욕망 등의 저급아와 결합하고 있는 육체 인간입니다. 이것은 '가재인간(假在人間 ; False personality)'이라 말하며 육체 및 육체의 영체 즉, 복체를 통하여 활동하고 있는 카마 루파(Kama rupa)와 결합한 저급 '마나스'로 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원리(Remainning principle) 프라나(Prana) 즉, 생기(生氣)는 엄밀하게 말하면 보편적 생명(生命) 및 유일한 아로서 '아트마'의 방사하는 힘, 즉, 에너지이고, 현현하고 있기 때문에 저위(低位)이고, 오히려 물질적인 면입니다. '프라나' 즉, 생기(生氣)는 객관적 우주에 골고루 퍼져 있고, 또 살아 있는 인간에는 절대 필요한 요인이며 위급을 구하는 신(Deus exmachina)이기 때문에 '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 : 이러한 분류법은 조합(組合)하기에 훨씬 간단하여 다른 방법보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은 너무 형이상학적 입니다.
답 : 신지학자나 국외자들도 모두 찬성한다면, 반드시 문제가 훨씬 알기 쉽게 될 것입니다.
제10장 사고(思考)원리의 성질에 대하여
자아의 신비
문 : 조금전 당신이 '불교문답'에서 인용하신 것에 모순이 있습니다. 기억을 포함한 오온(五蘊)은 새로운 화신을 할 때마다 바뀐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온에서 나온다고 하는 과거의 생존 반영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살아남는다는 것이 나에게는 확실히 이해되지 않으므로 좀 더 설명해 주십시오. 무엇이 살아서 남는 것입니까? 과거 생의 '반영'입니까? 혹은 오온(五蘊)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똑같다는 자아(自我) 즉, '마나스'입니까?
답 : 윤회하는 원리 즉, 우리들이 신성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생명주기 동안 불멸이라고 설명한 것뿐입니다. 사고하는 실체로서 또 에텔과 같은 형태(Form)로서도 불멸입니다. 그 반영(The 'reflection')은 단지 '데봐챤' 기간중에 혼화(魂化)한 기억(Spiritualized remembrance)일 뿐이며 이 기억은 A씨 또는 B부인이었다는 이전(以前) 인격의 기억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중 자아(Ego)는 자신이고 인격아라고 생각합니다. '데봐챤'에서는 이승 생활의 계속에 불과하며 말하자면 끊임없는 연속 중에서 지금은 과거가 되어버린 존재에서 순간적인 짧은 행복의 절정(絶頂)에 있는 곳이 '데봐챤'이고, 만약 그 인생의 무엇을 남기고 싶던 자아는 그 인생에서 인격 의식과 동일한 것이었어야 합니다.
문 : 그러면 자아는 신정한 성질이면서 정신적으로는 얼빠진 상태, 또는 일시적인 광기(狂氣)의 상태로서, 두 번(육신, 데봐챤)의 화신 중간에 그와 같은 것으로 세월을 보낸다는 것입니까?
답 :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유일한 실재 외에는 전우주 속에서 어떤 것이라도 환영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이것을 광기라고 보지 않으며, 이승 인생의 연속으로 당연히 오게 되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매우 다양한 경험들, 즉 여러 가지로 매일 바뀌어가는 생각, 정서 및 의견 등의 다발(東)입니다. 젊었을 때 우리들은 어떤 이상적인 인물을 열심히 흠모하고 따르며 그런 사람들처럼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면 우리들의 젊은 감정의 신선함은 사라져 침착해지면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환상적이었던 행동을 자성(自省)하고 웃습니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우리에게는 마음속의 현상적인 인물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同一視)하던 시절이 있었으며 그 이상적인 인격에 탐익(耽溺)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50세의 사람을 20세 때의 그 사람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인간(Inner man)은 같지만 밖에 살아있는 인격은 아주 변화하였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인간의 정신적인 변화를 광기라고 말하겠습니까?
문 : 당신은 그런 변화를 무엇이라 말합니까? 특히 내적 인간(Inner man)의 영속성과 인격의 사라져간 성질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답 :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교의가 있으므로 거기에 의하면 설명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 실마리는 심(心 ; Mind)의 이중 의식과 이지적 원리의 이중성에 있습니다. 혼적 의식, 즉 '부디'의 빛(光線)에 비추어진 '마나스'적인 마음이 있으며 이것은 추상적인 것을 주관적으로 인식해 버립니다. 그리고 정을 가진 의식 즉, 육체의 뇌나 감각과 분리할 수 없는 저급 '마나스'의 빛(光線)이 있습니다. 이같은 의식은 뇌와 육체 감각에 종속(從屬)해 있고 또 그것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결국에는 뇌와 육체 감각이 없어지면 같이 사라져버리고 죽어야 합니다. 그 뿌리가 영 안에 있는 혼적 의식은 영구히 살아남아 있으므로 그것을 불사(不死)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모두가 사라져 없어지는 환영(幻影)에 속해 있습니다.
문 : 이 경우 환영이란 정말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 그것은 고급아(Higher self)에 관한 평논물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시네트(Sinnet)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들이 교려하고 있는 고급아(高級我)와 저급아(低級我)의 아이디어 상호 교환의 이론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승을 환영적 현상의 세계라고 말하는 사상과 대단히 잘 조화되고 있다. 자연계 안의 혼적 세계는 이와 반대로 본체의 세계, 즉 현실(Reality)의 세계이다." 불멸의 영이 뿌리박고 있는 자연의 영역은 잠시 핀 꽃(일시적인 꽃)이 시들어 말라 죽고 새 꽃이 나오게 하기 위하여 에너지의 힘을 회복하는 그런 세계보다 좀더 현실성(Reality)의 세계입니다. 보통 감각에는 꽃만 보이고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고 감지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꽃을 상상해 봅시다. 뿌리라고 하는 것이, 다른 세계에 있을 것이라고 느끼는 철학자들은 앞에 말한 꽃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경향이 있을 것입니다. 즉, "꽃은 진정한 식물이 아닙니다. 꽃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단순한 일시적, 환영적 현상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인격의 생애라고 하는 일시적이며, 사라져가는 꽃을 피게 하는 이 세상은 참다운 영원의 세계가 아니고, 의식의 뿌리를 찾아 볼 수 있는 세계야말로 참다운 것입니다. 뿌리라는 것은 환영을 초월한 영원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문 : 뿌리가 영원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답 : 이 뿌리는 생각하는 실체(Entity) 즉, 화신하는 자아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천사, 혼 또는 힘으로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우리들의 감각에 인지되는 것 중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에서 직접 자라는 것 혹은 그 뿌리에 붙어 잇는 것만이 불사(不死)의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뿌리가 불어넣어 주는 인격의 모든 고상(高尙)한 마음, 생각, 열망 그리고 이 뿌리가 이끌고 진행하는 모든 일은 영원한 것이 될 것입니다. 육체적 의식은 정을 가지고 있는 저급원리(저급 마나스)의 반영에 의하여 비추어진 '카마 루파' 즉, 동물적 본능의 성질이므로 인간령이며 마땅히 사라져야 합니다. 육체가 마비되거나 수면(睡眠)되었을 때에 활동하는 것은 고급의 의식(Higher consciousness)입니다. 우리들의 기억은 자동적이므로 이와 같은 활동의 경험에서 아주 빈약하거나 부정확하게 기록되며 전혀 인상을 받지 못하는 것도 많습니다.
문 : 당신은 '마나스'를 '누우스(Nous)' 즉, 하나의 신(A god)이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화중에는 너무 약하여 육체에게 정복 당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답 : 똑같은 질문으로 당신에게 반문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신(神)중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유일하게 살아있는 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신께서 하늘에 있거나, 이 세상에 화신하고 있는 동안, 자신에게나 자신의 모든 창조물에게도 악(즉, 악마)이 이길 수 있도록 보고만 있을 정도로 약한 것은 어떻게 된 연유입니까? 당신은 여기에 반드시 다음의 답을 하겠지요. "이것은 신비이며, 우리들은 신의 신비를 감각(感覺)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종교철학에서는 그것을 금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만약 신께서 화신(Avatar)으로서 내려오는 이외에는, 신성한 본질은 내려오면서 동물적 성질에 꽉 차있는 물질에 의하여 속박되고 마비당할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이질(異質 ; Heterogoneiy)은 환영인 이승에서 원질(Homogeneity)보다 강세이고, 원리는 그 근본원리 즉, 원초의 것과 질이 비슷하면 비슷할수록 이승에 나타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신적이고, 신성한 힘은 모든 인간 속에 잠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혼적으로 보는 눈이 넓으면 넓을수록, 안에 있는 신의 힘은 강세를 더합니다. 그러나 그 신을 느끼는 사람들은 유감스럽게도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이란 개념은 선입관으로서, 어린아이들 때부터 반복적으로 들어온 가르침과, 선입관 때문에 우리들의 생각 속에 묶여져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철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당신들에게 대단히 어려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 : 우리들의 신이란 우리들의 자아를 말하는 것입니까?
답 :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의 신(A God)은 보편적인 신이 아니라 신성한 불(火)이라고 하는 큰 바다에서 튀어나온 하나의 불꽃에 불과합니다. 안에 있는 우리들의 신 즉, 숨어 계시는 우리들의 아버지는 우리들이 말하는 고급아(Higher self) 즉, '아트마'입니다. 우리들의 화신하는 자아(Incarnating ego)는, 하나의 알려지지 않은 원리(One unknown principle)에서 나온 모든 원초적 발산(All the primeval emanations)이 그렇듯이, 하나의 신(A God)이 그 근원입니다. 그러나 자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기 동안 계속적으로 화신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즉, 물질로 하강해야 하므로 지금은 자유롭고 행복한 신이 아니라 잃은 것을 되찾아야 하는 길에 서 있는 고달픈 순례자(巡禮者)입니다.「아이시스 언베일드」(3권593P)의 내적 인간(Inner man)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반복하면 더 충분한 답이 될 것입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인류는 보통, 개인적 육체(인간) 속에 개인적 혼적 실체(Spiritual entity)가 있다는 것을 믿어왔습니다. 이 내적 혼체(This inner entity)는 그 극치(Crown)에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다소간의 신성(Divine)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적 실체와 신성의 결합이 가까와지면 가까와질수록 인간의 운명은 평온해지고 외적(肉身) 상태는 위험스럽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신념은 편견도 아니고 미신도 아니며, 혼적으로 된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에 근접해 가고 있다는 것이 끊임없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향적 인간 감각에는 주관적이라 하더라도 내적 자아에게는 완전한 객관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옛날 사람들은 우리들의 행위에 대하여 의지의 작용에 영향을 주는 외적 및 내적 조건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숙명론(宿命論)에는 반대(反對)했습니다. 왜냐하면, 숙명론은 더욱 맹목적인 힘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운명(또는 카르마)은 믿었습니다. 카르마는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이 마치 거미가 집을 만들어 가는 것처럼 자신의 둘레에 실(糸)로 한 가닥 한 가닥씩 운명을 엮어(직조) 나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운명은 수호의 천사 혹은 우리들과 더욱 친절한 '아스트랄 육체 인간'(Astral inner man)이 인도해갑니다. 또 외적인 육체 인간(또는 인격이라 말함)에 따라 다니는 것은 악마같은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가 모두 인간을 인도하는 것인데 그중 어느 한쪽이 승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은 처음부터 무서운 응보와 용서없는 법칙이 충실하게, 그 싸움의 변동방향(變動方向)을 지켜보면서 간섭하거나, 지원(支援)하고 적절히 싸우도록 작용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닥의 실이(糸) 엮어지면 사람은 자신이 엮은 그물(網)에 걸리고 맙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만든 운명의 제국(帝國)에 자신이 완전히 지배되어 있음을 그때 알게 됩니다. 이러한 운명은 인간을 부동의 바위(岩)에 붙은 빈 조개껍질처럼 고착(固着)시키거나, 또는 자기 자신의 행위에서 생긴 풍선을 타고 하나의 깃털(羽毛)처럼 멀리 멀리 날라가 버리도록 할 것입니다. 인간의 운명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즉, 인간은 말하는 껍질이나 '로보트(肉體)'가 아니고 이것이 진정한 자아의 운명입니다. 물질의 정복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그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마나스의' 복잡성
문 : 그러면 당신은 '마나스'의 본질적인 성질과 육체인간의 오온(五蘊)과의 관계에 대해 무엇인가 나에게 말해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답 : '마나스'의 본질은 신비적이고 변환자재(變幻自在)하고 이해를 초월하여 다른 여러 원리들과의 관계는 그늘에 가려져 있어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고 설명하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마나스'는 하나의 '원리'이고 하나의 주기를 지내야 할 운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 화신의 하나 하나에 '마나스'는 책임이 있고 그 하나 하나를 위하여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모두 당혹스러운 것이어서 모순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두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구라파에서도 몇 백명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아를 전체로서 뿐 아니라 그의 여러 가지 면(面)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우선 간단하게 이 자아에 대한 계도(系圖)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 : 부탁합니다.
답 : 본질적인 성질은 신성하나 전체(All), 일체가 될 정도로 순수하지는 못한 하늘의 존재(Celestial Being) 즉, '영'(그 명칭는 무엇이든 간에)이라는 것을 상상(想像)하여 보십시오. 그 혼이 '체'와 통일(합한다)한다는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에 타당할 정도로 그의 성질을 정화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혼의 목표에 도달하려면,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는 우주에서 모든 경험이나 감정을 개별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말하자면 영적인 면이나 육체적인 면으로 경험(經驗)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인간 세계에서 모든 경험을 하기 전에, 인간보다 더 낮은 모든 계의 경험을 거치고 생명의 계단을 하나씩 밝고 올라가서 차차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나스'는 본질적으로 사고(Thought)이고 따라서 그 복수형으로 말한다면 마나사 푸트라(Manasa putra) 즉 우주심의 자식(The sons of the universal mind)들을 말합니다. 이런 개별화된 사고(Thought)가 우리들 신지학도들이 말하는 인간의 참다움이며, 육(肉)과 골(骨)의 용기에 갇히어 사고(思考)하는 실체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물질이 아닌 혼적 실체(魂的 實體)이고 이와 같은 실체가 화신하여 인류라 말하는 동물자료의 뭉치(塊)에 혼(魂)을 불어넣어 준 자아들이고, 이것들을 마나사(Manasa) 즉, 마음들(Minds)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단 갇히거나 화신하면 그들의 본질은 이중으로 되어 버립니다. 즉 개별적 실체라고 생각되는 영원하며, 신성한 마음(Mind)의 이 광선(光線)은 이중의 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a) 자아가 생겨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성격인 하늘(天)을 열망하는 마음, 즉 고급 '마나스'와 (b) 인간의 뇌의 우수성 때문에 이성화(異質化)된 인간적 성질의 사고 즉, 동물적 인지(認知)입니다. (b)는 카마(Kama)로 향하는 저급인 '마나스'입니다. (a)의 고급 '마나스'는 '부디'로 향하며, 저급 '마나스'는 격정과 동물적 욕망의 좌(座)로 떨어져 내려갑니다. '데봐챤'에서는 동물적 욕망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고, 하나가 되어 정신적 지복에 들어가는 신성한 삼위일체와 연합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자아(Ego) 즉 마나스적 실체는 저급 속성들이 저지른 죄악의 책임을 집니다. 이것을 마치 부모가 자기 아이들이 책임을 질 수 없는 동안 그 아이들의 과실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과 같습니다.
문 : 그 아이들이란 것은 인격을 말합니까?
답 :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인격은 육체와 같이 죽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죽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몸(The body)이란 것은 A씨나, B부인의 객관적인 상징일 뿐이고, 물질적인 오온(五蘊)과 같이 소멸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에 A씨일 때나, B부인일 때의 경험중에 영적인 것이나 고상한 열망, 불멸의 애정이나 비이기적인 성질은 모두 '데봐챤'동안에 자아와 결합되어 있고, 자아는 자신이 지금 시야(視野)에서 사라진 그 물질적인 실재의 혼적 부분입니다. 그 배우(마나스)는 지금, 물질계의 무대에서 자신(마나스)이 연출한 역할에 대단히 심취(心醉)되어 있으므로 '데봐챤'의 밤 동안에 그런 꿈을 꾸면서 다른 역의 연기를 하기 위한 인생의 무대로 돌아갈 때가지 계속해서 그런 비젼(Vision)을 보게 됩니다.
문 : 그러나 당신의 말대로, 사고하는 인간과 같이 오래되었다고 하는 이 교의(Doctrine)를 기독교 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답 : 당신은 잘못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도 이런 교의(敎義)가 있습니다. 다만 신학에는 이것 이외(以外)에도 여러 교의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잘못 인식했을 뿐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자아를 우리들의 혼을 보살피기 위하여 신께서 탄생에 임하여 주시는 천사라고 합니다. 신학 이론에 의하면 가련하고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영은 범한 죄의 책임을 그 '천사'에게 부하(負荷)하지 않고 모든 육체와 마음의 죄 등에 대하여 벌을 받게 됩니다. 물질이 아닌 신의 입김(Breath)이고 신의 충실한 피조물(被造物)인 영이 어처구니 없는 지적 사기(詐欺)에 의하며, 언제까지나 물질적 지옥에서 화형(火刑)을 받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한편 영을 지켜야 할 '천사'는 자신의 흰 날개를 접고 조금 눈물을 흘려 그 날개를 적시고(눈물) 무사히 도망쳐 버립니다. 이러한 천사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들을 다스리고', 신께서 보내 준 '자비의 사자들'입니까! 승정(僧正 ; Bishop mant)은 천사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 충족(充足)시키며 구제의 후계자를 위하여 선을 행하며 우리가 죄를 범하면 슬퍼하고 우리가 회개하면 기뻐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만약 전 세계의 승정(僧正)들에게 영이 무엇이고, 그 기능이 무엇이냐고 명확한 정의(正義)를 구한다면 그들은 기독교 정통 신앙의 음영(陰影)을 내보일 수 없기 때문에 그 정의(正義)를 내리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신지학의 교의는 요한복음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문 : 기독교 신자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할 것입니다. 정통파의 교의는 완미(頑迷)한 죄인이나 유물론자에게 현실적인 지옥에서 지독한 고통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에는 마지막 순간에 회개의 기회를 준다고 합니다. 거기에 정통파(正統派)는 절멸 즉, 인격의 상실은 가르치지 않으니 모두 같은 것이 아닙니까?
답 : 설사, 교회는 우리들의 가르침을 조금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예수'는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보다 '그리스도'를 더 존중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것이 됩니다.
문 '그리스도'는 그와 같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까?
답 : 가르쳐 주셨습니다. 박학한 비교학자나 '카발라' 학자들조차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할 것입니다. 당신이 사문자(死文字)들을 잊어버리고, 비교정신을 충실하게 지킨다면 '그리스도' 혹은「요한 복음」에서 인격의 절멸이나 윤회를 기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의 1절부터 6절까지를 잘 생각해 보십시요. 그 구절은 인간의 상부삼부조(上部三部組 ; Upper friad in man)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트마'는 농부이고, 혼적자아 즉, 부디(크리스트 의식)는 포도나무입니다. 그리고 동물적 활력이 있는 영 즉, 인격은 그 '가지(枝)'입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여 이를 깨끗이 하시느니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나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맺나니, 나를 떠나는 너희가 아무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 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자아, 우리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가지(枝)를 불태운다고 말하는 것을 떨어진 죄인은 지옥의 불에서 태운다고 말하는 의미라고 신학에서 강조합니다만 우리들은 지옥의 불을 믿지 않습니다. 농부는 '아트마'를 말하는 것이고, 무한이며 비인격적인 원리의 상징(Symbol)이라고 말하고 또 포도나무는 혼적 영 즉, 크리스토스로 생각하며, 가지(枝)는 새로운 화신의 것들을 말한다고 합니다. 신비의식 중에 포도나무를 심은 것은 사제 즉, 신부입니다. 각 상징에는 일곱 개의 열쇠가 있습니다. '프레로마'(신이 계시는 곳)를 나타내는 자는 언제나 '부(父)'라고 말합니다.
문 : 그렇지만 이와 같은 임의의 해석을 어떤 증거가 있어서 하시는 것입니까?
답 : 그것이 바른 것이고,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은, 보편적인 상징학이 보증하고 있습니다. 헬마스(Hermas)42는 '신'을 "포도 밭에 만든 사람" 즉, 인류를 창조한 사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카발라(Kabala)에서는 신을 '노인중의 노인' 또는 '긴 얼굴'을 포도밭에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포도밭은 인류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나무는 생명이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왕이 되는 메시아'의 혼은 세상이 생길 때부터 하늘의 포도주 속에서 옷을 씻고 있다고 표시하고 있습니다.43 왕이 되는 구세주는 하늘의 포도주(酒) 즉, '부디'(Buddhi)에서 그의 옷, 즉, 재생중인 인격을 씻어서(洗) 깨끗이 하는 자아입니다. 아담(Adam) 즉, A-Dam(아담은 피(血)입니다. 육체의 생명(네헨 즉, 혼)은 피 속에 있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 그리고 아담 카드몬은 유일의 신의 자식 노아도 포도를 심었습니다. 그의 포도밭은 미래 인간의 온상(溫床)을 나타낸 비유였습니다. 똑같은 비유는 '나자레' 파의 성전에도 있습니다. 그것에 의하면 일곱 그루의 포도나무가 심어져 있고, 그것은 7인의 구세주 즉, 불타를 가진 7인종을 나타내며, 그 포도나무는 유카발 지보(Iukabar Zivo)와 현호(Ferho)에서 나와 라바(Rafba)가 물을 줍니다. (나사렛의 성전 3권 60-61P) 축복받은 자들은 빛에서 살고, 있는 자들의 사이에 올라가서 생명의 주(主)이며 최초의 포도나무가 있는 이아발 지보(Iavar Zivo)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나사렛의 성전 2권 2-81P) 이와 같은 '카발라' 학의 비유는 당연히 요한 복음(15장 1절)에서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7중 분류법을 무시(無視)하는 철학에 따른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성질 안에 자아 즉, 생각하는 인간은 '로고스' 또는 혼과 영의 자식이라 말하고 있는 것만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나스'는 왕과 여왕(비교적으로는 아트마와 부디)의 양자이다."고 비교서적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마나스'는 '플라톤'에 의하면 '신인(神人)'이고, 물질의 구체를 위해 공간안(또는 생명주기의 계속 동안)에서 스스로 십자가에 달렸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마나스'가 계속 바퀴를 돌리는 것처럼 화신을 하며 나아가서 인류의 완성으로 길을 내고 저급인 형체가 높은 진보를 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마나스는 스스로 진보시키고 한 생애(生涯)라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모든 물질적 성질의 진보를 돕습니다. 때로는 '마나스'가 인격의 하나를 잃어버리는 매우 드문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설사 그 인격아(人格我)에는 아주 혼성(魂性)의 불꽃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도 '마나스'는 개인적인 진보를 도와줍니다.
문 : 그러면 만약 자아가 제(諸)인격이 범한 죄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그 인격의 하나의 책임, 또는 완전한 절멸에도 책임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답 : 그런 비참한 운명이 되도록 아무 것도 해주지 않은 경우 외에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마나스'가 모든 노력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양심의 소리가 되는 '마나스'의 소리(충동)가 물질의 벽을 침투(浸透)할 수 없었다면 그 물질재료는 불완전한 성질 때문에 자연계의 다른 실패와 같은 운명이 됩니다. 자아가 '데봐챤'에서 머물 수 없다면 더구나 조금도 머물러 있을 수 없이 바로 화신해야 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죄(카르마)를 만든 것이 됩니다.
문 : 혼, 말하자면 당신이 인격이라고 부르는 것을 잃어버릴(失) 수가 있다는 가르침은 '스웨덴보그'(Swedenborg)로 혼적 사(死)라고 말하며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으나, 기독교도와 심령주의자의 이상적 이론과는 반대입니다. 그들은 결코 그런 교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답 : 설사, 그들이 진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자연의 사실을 바꿔 놓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또, 때때로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수도 있습니다.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은 즉, 도덕적, 지적, 육체적, 심령적, 혼적인 것은 평형과 조화라는 완전한 법칙 밑에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Iss unveiled 1권 318-19P 참조) 제천체(諸天體)의 조화된 회전의 원심력(遠心力)이 없으면 구성력은 나타날 수가 없고 모든 형체와 그 진보는 자연계의 이런 이중의 힘에 의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혼(즉, 부디)은 원심적인 에너지이고, 영(즉, 마나스)은 구심적인 에너지입니다. 하나의 결과를 생기게 하려면 이 두 가지 힘이 완전한 통일과 조화 상태를 이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세상 영(마나스)의 구심적인 운동을 중단시키거나 방해를 한다면, 혹은 그 혼에게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부담을 주거나 또는 '데봐챤' 상태에 적합하지 못한 물질의 무거운 짐을 지게 하여 방해를 하고, 그 진보를 저지한다면 전체의 조화는 깨지고 말 것입니다. 인격의 생명 또는 차라리 인격의 이상적 반영은 이러한 두 가지의 힘을 유지함으로써 비로소 계속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힘은 인격적 재생 즉 인격적 생명으로서 '부디'와 '마나스'가 밀접한 결합을 해야 이루어집니다. 조금이라도 조화가 어긋나 인격적 생명에 손상이 가해지고 또 도저히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면 두 개의 힘은 죽음의 순간에 분리되어 버립니다. 짧은 시간(A brief interval)에 인격형(人格形 ; Personal formㅡ평등하게 Kama rupa 또는 Mayavi rupa라고 함)의 혼적 정화는 자아를 따라 데봐챤으로 들어가 그 인격적 색채를 영구한 개별성에게 넘겨주고, 그 자체는 '카마로카'(Kamaloka)에 잔류하여 서서히 절멸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매우 까다롭고 지엄한 순간이 도래하는 것은 아주 타락(墮落)하고 비혼적(非魂的)이며 구제불능인 사악한 자가 사망한 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살아있는 동안에 내적 아(Inner self ; Manas)의 '마나스' 자체와 신성한 부디의 빛나는 광선의 인격을 결합시켜 보겠다는 최대의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으로 끝나거나, 또 만약에 이 광선이 육체의 뇌 껍데기가 점점 두꺼워져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하면 한 번 몸에서 해방된 혼적 자아 즉, '마나스'는 인격의 정묘(精妙)한 유물(遺物)에서 아주 분리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격 즉 '카마루파'(kama rupa)는 현세적(現世的)인 것에 이끌려 우리가 '카마로카'(Kamaloka)라고 하는 명부(冥府)로 들어가 거기서 머무르게 됩니다. 이들 인격의 유물은 '예수'가 말하는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말라죽는 가지(枝)입니다. 그러나 절멸은 결코 순간적이 아니어서 때로는 몇 세기나 걸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격은 다른 훨씬 행복했던 자아의 유물과 함께 남아 껍데기(殼)와 엘리멘터리(Elementaryㅡ타락한 자의 육체에서 분리된 영)가 됩니다.「이시스 언베일드」의 책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들 이중의 '혼들'(Spirits) 즉 껍데기와 엘리멘탈은 물질화(Materialisations)라는 혼적인 무대에서 지도적 연기자(Leading Stars)들 입니다. 새로 태어나는 인격이 이러한 두 종의 혼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따라서, 이처럼 친애하는 사망자재위(dear departed ones)들은 거의 대부분 윤회를 모르기 때문에 심령주의자들은 오해를 합니다.
문 : 그러나,「아이시스 언베일드」(Isis Unveiled)의 저자는 윤회에 반대했다고 비난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답 : 그 책에 쓰여있는 것을 오해한 사람들이 비난한 것입니다. 그 책을 쓸 당시에는 영국이나 미국의 심령주의자들은 윤회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 책에서 윤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프랑스의 강신술자(降神術者)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들의 이론은 비철학적이며 바보같은 것이나, 동양에서의 교훈은 논리적이며 자명한 진리입니다. 알란 카덱(Allan Kardec) 학파는 임의적으로 즉각적 윤회를 믿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죽은 아버지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딸이 되어 태어난다는 등 말도 안돼는 이론을 내세웁니다. 그들의 설(說)에는 '데봐챤'이나 '카르마'도 없고 연속적인 재생을 뒷받침하는 철학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불교 및 힌두교에서는 1000년에서 1600년의 긴 기간을 두고 '카르마'에 따라 윤회한다는 근본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아이시스」의 저자가 어떻게 반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문 : 그렇다면 강신술자들(Spiritists)과 심령주의자들(Spiritualist)의 이론에 귀하는 전적으로 반대한다는 것입니까?
답 : 전적은 아닙니다만 각각의 근본적인 신념에 관해서만은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들의 '영'이 말하는 것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양자는 우리가 그들과 합의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합의하지 못합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프랑스의 유령(幽靈)들이 그 교의를 부정하고 비난하는 것을 들어보면 프랑스의 영들이나 영국의 영들은 서로 자신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은 심령주의자, 강신술자와 더불어 '영'들이 어느 정도 지성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하는 것은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교훈에서는 '영'들이 다양한 종류인데 대하여 우리의 반대자인 그들은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영'들 밖에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식에 의하면 그들은 대부분 '카마 로카'의 껍데기입니다.
문 : 당신은 그와 같은 영들에 대하여 대단히 엄격하게 구분하려고 합니다. 육체를 떠난 영들에게 대단히 엄격하게 말합니다. 육체를 떠난 영들 즉, '사자의 영들'의 물질화나, 강령회(降靈會)에서의 접촉을 믿지 않는 당신의 견해와 이유는 이미 잘 들었습니다. 또 한 가지 사실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요. 어떤 신지학도는 영매나, 영들과의 교류가 매우 위험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어떤 연유입니까? 무엇인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답 : 그들에게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을 가지고 있는 네 개의 높은 (마나스, 부디, 모나드, 아트마) 것들 외에, 반의식의 껍데기에서 모든 종류의 아주 의식이 없는 어디서 얻어낸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는, 도깨비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완전히 접촉이 되고 부정할 수 없는 자들을 50년 이상이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 이와 같은 강신술(降神術)의 모임은 왜 위험한 것인지 예를 들어 주십시요.
답 : 예를 든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어떤 원인에서건 생긴 결과에서 판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금세기에 들어와서 미국에 다시 나타난 지난 50년 간의 심령주의 역사를 돌아봅시다. 그러한 심령주의자가 그런 신앙자들에게 이익을 주었는가, 해를 주었는가를 자신이 판단해 보십시요, 아무쪼록 오해하지 마십시요. 나는 진정 심령주의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심령주의의 이름을 내세운 근대적인 운동과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발명해낸 소위 철할이란 것에 반대합니다.
문 : 당신은 그 현상(現象)을 전혀 믿지 않습니까?
답 : 내가 전력을 다하여 그 현상에 반대하는 것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서 그 현상(現象)을 알고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고의의 사기(詐欺)로서 된 경우를 빼고는, 당신이나 내가 살아있다는 것과 같은 진리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만 나는 육체적인 현상만을 말하는 것이고 정신적인 현상이나 심령적 현상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합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높은 영이나, 혹성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보호까지 받으면서 오랫동안 생활해 온 고상하고 깨끗하며 선량한 사람들을 내가 개인적으로 몇 사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성이 있는 분들은 강령술(降靈術)의 회합에 나타나는 존 킹(John King)이나 에네스츠(Ernests)의 행동을 할 유형의 어른은 아닙니다. 이런 어른들은 아주 드물게 사람들을 지도하거나 통제(統制)하거나 하지만, 그 사람의 과거(카르마적 과거)에 의하여 자력적으로 끌어당겨져서 하는 예외적인 경우뿐입니다. 그러한 어른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강령술의 회합에 앉혀 두는 것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습니다. 강령술의 회합은 영매가 평생 동안 노예가 되어 선과 악, 또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여러 가지의 '도깨비'의 군상들을 불러들이는 문을 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영적 신비주의는 품위있고 신성한 것입니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이와 같은 속임수를 쓰는 영매의 일이나 도깨비들을 모아 두는 일이며, 영매라는 것은 2세기 전에 마녀나 마법사가 행한 현상과 같은 것으로 그들은 그 때문에 벌을 받았습니다.「그란빌(Glanvil)」기타 저자의 마법에 관한 책을 읽어 보십시요. 그렇게 하면 19세기의 심령주의의 물질 현상과 닮은 것이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거의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문 : 심령주의는 마법이며 그 이상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답 : 의식적이든 아니든 사자를 이와 같이 취급(取扱)하는 것은 '네크로맨시'(necromancy; 사령(死靈)과의 동정에 의한 점쟁이)로서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모세'보다 훨씬 이전의 시대이고, 이와 같이 사자(死者)를 불러낸다는 것은, 모든 지적인 국민은 죄가 많은 잔혹한 것으로 생각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혼의 휴식을 방해하고 보다 높은 상태로 진화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먼 옛날부터 인류가 모아온 지혜는 이와 같은 것을 대단히 비난해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지난 15년간 필설(筆舌)로 반복해온 말을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소위 일부의 '영'이란 것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며, 그저 앵무새처럼 영매나, 다른 사람들 뇌 속에서 본 것을 반복하고 있을뿐이고, 그외의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악으로 인도해갈 뿐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자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알란 카덱'(Allan Kardec) 파의 심령 써클에 들어가 보십시오. 거기에서는 '영'들의 윤회를 주장하고, '로마' 구교도와 같은 화법으로 말합니다. 이번에는 영국이나, 미국의 친애하는 '사망제위'(死亡諸位 ; dear departed ones)를 보십시요, 그들은 철두철미하게 윤회를 부정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자를 비난하며, 신교(新敎)의 견해를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가장 좋고, 그리고 가장 강력한 영매는 모두 몸이나, 정신의 건강을 해치고 있습니다. 헛소리를 하며 광인이 되어 정신병원에서 죽은 '찰스 포스터'(Charles Foster)의 슬픈 종말이나, 간질병의 '슐레이드'(Slade)나 지금 같은 병을 얻어서 고생하는 영국의 가장 훌륭한 영매 '에그린톤'(Eglinton)의 상태를 생각해 보십시요. 'D. D. 홈'의 생애를 되돌아 보십시요. 이 사람은 마음 속으로 심술이 꽉 차 있었고 심령(Psychic)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에 대하여 결코 좋은 말을 한 적이 없으며, 끝까지 자신 이외의 영매를 지독하게 중상하였습니다. 심령주의의 이와 같은 열광가(熱狂家)는, 말하자면 영과의 교류에 의하여 생긴 무서운 척추병으로 몇 년을 고통받고 결국은 병으로 죽었습니다. 또 가련한 '워싱톤 어빙 승정'(Washington Ivying Bishop)의 슬픈 운명을 생각해 보십시요. 나는 '뉴욕'에 있을 때 그를 알게 되었고 그때 그는 14세로서 명백한 영매였습니다. 가련한 그 사람은 '혼'에게 몰래 접근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대단히 박학하며 과학적으로 우둔한 자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무의식의 근육활동'으로 세례하고 닥치는 대로 행하였습니다. "사자(死者)에게 매질하지 말라" 그의 마지막은 슬픈 것이였습니다. 진짜 영매란 증거로서, '처음에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징조가 간질의 발작이며, 그는 열심히 그것을 감추었습니다. 검시가 행해졌을 때 그는 죽어있었는지 혹은 혼수상태였는지, 누가 알 수 있었을까요? '로이터' 통신에 의하면 그의 친척들은 그가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끝으로 노숙한(Veteran) 영매들, 근대 심령주의의 원조들인 폭스 자매(Fox sisters)를 보십시요. '천사들'과 40년 이상을 교류한 끝에 천사들은 '폭스' 자매를 불치의 주정뱅이로 만들었습니다. 자매는 지금 공개 강연에서 자신들의 평생의 일과 철학이 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영들이 그것들을 가르쳐 주었을까요?
문 : 그렇다면, 당신의 추론이 바른 것일까요?
답 : 어떤 발성악(發聲樂)의 가장 우수한 생도들이 목구멍을 혹사하여 못쓰게 만들었다면, 당신은 어떤 주장을 하겠습니까? 교수법이 나빴었다고 생각하겠지요. 심령주의의 경우도 우수한 영매가 같은 운명에 희생이 되어버렸다면, 나의 추론은 바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흥미를 가진 사람은 그 교훈을, 나무를 그 과실에 의하여 판단하고, 그 교훈을 어떤 종류의 것인가 잘 생각하도록 우리들은 말합니다. 우리들 신지학도는, 심령주의자들을 언제나 우리들 자신과 같이 신비적 경향을 가진 형제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들은 언제나 우리들을 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심령주의 보다는 오랜 철학이 있으므로 그들을 도와주고 경고하려고 했습니다만, 그들은 모든 힘을 다하여 우리에게 욕을 하고 우리들의 동기를 비난하는 것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우수한 영국의 심령주의자들은 자신의 신념을 진지하게 논할 경우 우리들이 말한대로 하고 있습니다. M.A. 옥슨(M. A. Oxen)은 다음과 같이 진리를 말했습니다.44 "심령주의자들은 너무나 외부적 영들이 이 세상에 개입하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또 화신하고 있는 영들의 힘을 무시해 버린다." 이것을 보면 거의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왜, 우리들에게 그렇게 욕설을 할까요? 앞으로 우리들은 심령주의와는 아무 관계도 하지 않을 것 입니다. 그러면 다시 윤회 이야기로 되돌아갑시다.
제11장 윤회의 신비에 대하여
주기적 재생(再生)
문 : 그렇다면, 우리들은 모두 과거 몇 차례씩이나 이승에 화신하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와 같은 것이 계속 된다는 말씀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명주기(Life cycle) 또는 다른 말로 의식적 생명주기(周期)는 사멸하는 동물인간(動物人間)이 양성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시작해서 제7회생(第七回生)의 제7 근본 인종을 인류의 마지막 세대로 막을 내리고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제 4 회생(回生 ; round)의 현재 사람들을 제5 근본 인종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볼 때 그 주기가 얼마나 긴 것인가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 : 그리고 우리들이 화신할 때는 언제나 새로운 인격을 가지는 것입니까?
답 : 물론입니다. 이 생명주기 즉, 화신의 주기는 인간의 생애에 비교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봅니다. 인간의 생애는 각각 활동하는 낮과 활동하지 않고 잠자는 밤이 교차됩니다. 이와 같이 화신의 주기에는 활동적인 생애가 있고, '데봐챤'의 휴식이 따르는 것입니다.
문 : 일반적으로 윤회라고 정의(定義)하고 있는 것은 이 탄생의 연속입니까?
답 : 그대로입니다. 궁극적인 완성과 활동의 기간과 같은 길이의 마지막 휴식을 향해서 무수한 자아들이 활동의 기간과 같은 길이의 마지막 휴식을 향해서 무수한 자아들이 영속적인 진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은 몇 십 차례의 탄생(화신)을 통하여 가능한 것입니다.
문 : 그러한 많은 화신의 특수한 성질이나 그의 지속의 길이를 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응보의 정의라고 하는 보편적 법칙, 즉, '카르마'입니다.
문 : 그것은 이성적인 법칙입니까?
답 : 인간의 여러 몸체에 따른 배열의 법칙, 그외에 모든 자연의 법칙을 맹목적인 힘이나 기계적인 법칙이라 말하는 유물론자에게 '카르마'는 우연의 법칙에 불과하겠지요. 우리들로서는 비인격적이며 실체가 아닌 '카르마'의 법칙은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법칙입니다. 이성적이라든가 그외의 어떤 형용사로도 그 법칙을 묘사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카르마'의 법칙 안에 모든 결과를 알리는 지력이 있는가, 어떤가, 하고 당신이 질문한다면 나는 모르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결과를 정의하고 우리들 가르침에 있어서는 그 결과에 대하여 어떻게 믿고 있느냐고 물어온다면 몇 천년 동안의 경험에 의하여 그 결과가 절대적이며 틀림없이 공평한 지력이였다고 답하겠습니다. '카르마'는 그 결과를 통하여 인간의 불공평과 자연의 모든 실패를 틀림없이 배상하고 악행에는 엄한 조정자이면서 공평하게 상(賞)을 주고 죄를 주기도 하는 응보의 법칙입니다. 가장 엄밀한 뜻으로 '카르마'는 어느 누구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도 흥정하지 않으며 또한 기도를 한다고 해서 도와준다거나, 달라고 해서 준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두 '카르마'를 믿는 힌두교도와 불교도의 공통된 신념입니다.
문 : '카르마'에 관해서 기독교는 힌두교나 불교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도는 '카르마'의 가르침을 믿을지 나는 의심스럽습니다.
답 :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인만'(Inman)씨는 몇 년 전 그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기독교도는 만약 교회가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공포한다면 이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도는 불타의 진정한 가르침에 결합되는 정당한 이유에 상반되는 것은 아무 것도 믿지 않습니다. 불교도는 미래의 화신에서 현생(現生)의 나쁜 짓이나, 생각 하나 하나에 대한 적절하며 정당한 벌을 받아 자신이 행(行)한 사람에게 상응한 대상(代償)을 한 후가 아니면, 자신들의 죄를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문 : 어디서 그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답 : 대부분 불교의 경전에 쓰여져 잇습니다.「법륜(法輪 ; Wheel of the Law)」이란 책의 7항에 다음과 같은 신지학적인 교의가 쓰여져 있습니다. "모든 행위, 말, 생각에는 결과가 있고 그 결과는 언제인가 현재 또는 미래에 나타난다고 불교도는 믿는다. 나쁜 행위는 나쁜 결과가 생긴다. 좋은 행위는 좋은 결과가 생긴다. 즉, 이 세상에서 잘 해야 미래의 천국(데봐챤)에서 좋은 결과가 생긴다."
문 : 기독교는 같은 것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답 : 아닙니다. 그들은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고 믿습니다. 만약 무실(無實)한 피해자가 되는 '그리스도'의 피, 즉 인류의 속죄(贖罪)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제공한 '피'를 믿는다고 한다면 모든 인간의 죄는 용서받는다고 그들은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설사 인격적 절대자나, 무한자(無限者)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화신하여 용서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믿고 있는 것은 엄격하며 공평한 정의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카르마'라고 표현하는 불가지(알 수가 없는)의 우주적 신성, 틀릴 것이 없고 틀릴 수가 없는 그리고 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히 정을 주지도 않는 절대 공평한 힘입니다. 그 힘은 크든 작든 그 원인에 대하여 필연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태복음 7장 2절)라고 하는 '예수'의 이 말을 바른 것이라 인정함으로 서로의 죄에 대하여 동정이나, 용서나, 자비를 강하게 권하지는 않습니다. 악에 저항하지 말라, 선을 가지고 악에 보상하라고 말하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고 '카르마'의 법칙에는 용서가 없다는 견지에서 행한 설법입니다. 인간이 '카르마'의 법칙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제재(制裁)를 가한다는 것은 좌우간 모독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법칙은 방지적(防止的) 의미로서 사용할 수 있으나 형벌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카르마'를 믿고 있으면서도 복수하거나, 받은 위해(危害)를 용서하지 못하고 선으로서 악에 보답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죄인이며 자신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카르마'는 자신을 해(害)한 사람을 반드시 벌하기 때문에 그 죄를 대법(大法)에 위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조그만 힘으로 적에게 그 이상의 벌을 가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적에게 미래의 보상을 주는 것이 되고 자신에게 벌을 초래하는 것이 됩니다. 틀린 적이 없는 조정자 '카르마'는 화신할 때마다 그 다음 화신의 성질에 영향을 주고 전생의 공과(功過)의 총계에 의하여 그 미래의 화신을 결정합니다.
문 : 그러면 우리들 인간의 과거를 현재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까?
답 : 이승은 과거세(過去世)의 죄를 보상하는 것이므로 아주 적절하게 되어 있다고 밖에 추측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선각자나, 위대한 선지자(先知者)들을 제외하면 우리들 보통 사람은 과거의 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데이타(Data) 부족으로 노인의 청년시대가 어떤 것이었는지 조차 알 수 없습니다. 같은 이유로서 단순히 어떤 사람의 생활을 보고 그 사람의 과거세가 어떻다는 판정을 할 수는 없습니다.
'카르마'라는 것은?
문 : '카르마'는 무엇입니까?
답 :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카르마'라는 것은 우주의 구극법(究極法)이고 대자연에 편재(偏在)하는 모든 법칙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카르마'는 물질계, 이지계(理知界), 영혼계 등에서 원인과 결과를 조정하는 어김 없는 법칙입니다. 원인이란 것은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말하자면 우주적인 변동에서 당신의 손놀림에 이르기까지 어떤 결과를 반드시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오이의 줄기에서 가지가 열리지 않는 것처럼, '카르마'는 원인을 만든 사람에게 결과가 돌아가도록, 원인에 대한 결과를 하나씩 현명하고 공평하게 조정하는, 눈에 보이지 않고, 알 수도 없는 법칙입니다. '카르마' 자체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작용은 감지할 수 있습니다.
문 : 그러면 '카르마'란 것은 '절대자'이고 불가지(不可知)한 것이지만 인생 문제를 설명하는 데는,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답 : 그 반대입니다. '카르마' 자체와 그 본질을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들은 '카르마'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알고 있고 정확하게 그 작용 방법을 설명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카르마'에 대하여 궁극적(窮極的)인 원인을 모르고 있는 것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근대철학에서 어떤 것이나 궁극(窮極)의 원인은 '불가지(不可知)'라고 전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문 : 좀 더 실재적인 인류의 요구에 대한 해결책에 관해서 신지학은 어떻게 말합니까? 소위 '하급계층'에 펼쳐 있는 무서운 고통과 심한 빈곤에 대하여 신지학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답 : 요는, 사회에서의 계급차별 생활에 있어서 성차별, 또 자본가의 노동자의 불공평한 분배 등 이와 같은 큰 사회 악의 모두는 우리들이 간결하니 바르게 '카르마'라고 명명한 것에 의한 것입니다.
문 :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무분별한 고통이 내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전부가 그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타당한 개인적 '카르마'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답 : 그렇습니다. 각자의 생활 환경이나 독특한 상태는 전생에서 그 사람이 만들어낸 '카르마'의 대가에 불과하다고 증명할 정도로 확실하게 단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원자는 그 원자가 속하고 있는, 전체를 지배하는 일반 법칙에 따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카르마' 법칙의 한층 넓은 뜻에 이르게 됩니다. 개인의 '카르마' 집적(集積)은 그 개인이 속해 있는 나라의 '카르마'가 되고 또 국민의 '카르마' 총계는 세계의 '카르마'가 된다고 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겠습니까? 당신들이 말하고 잇는 해악(害惡)은 지정한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한 국민의 것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보편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카르마'의 법칙이 정당하고 공평하다고 하는 논점은 인류가 이와 같이 넓게 서로가 의존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문 : 그렇다면 '카르마'의 법칙은 반드시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법칙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답 :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카르마'는 전반적인 활동이 없으면 세계의 생명이나 진보된 힘의 균형을 재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인류의 상호의존은 소위 분배적 '카르마'가 원인이며 집단적 고통과 그것을 구한다고 하는 큰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도 '카르마'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신지학도들 사이에서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잘못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적은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그 일부로 되어 있는 전체를 반드시 높이게 된다는 것이 비교(秘敎)의 법칙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죄를 범하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죄의 결과로 고통을 받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또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진실로 자기만이라고 할 수가 있는 분리(Separatenedss)라는 것은 없습니다. 생명의 법칙에서 허용되는 이기적 상태로의 가장 가까운 접근은 인간의 의도(意圖) 즉, 동기에 있습니다.
문 : 분배적 '카르마', 즉 국민적 '카르마'를 집합시키고 농축하여 장기간의 고통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고 정당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답 : 일반적인 규칙으로서, 또 우리가 속한 시대의 조건으로 정해진 제한 범위 안에서는 '카르마'의 법칙을 단축한다거나 늦추어지게 한다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빠르게 하거나 더디게 하는 가능성에는 아직 손을 댈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국민적인 고통에의 한 면(面)에 대해 다음의 말을 들어 보십시요. 그리고 개인적, 상대적, 분배적인 '카르마'의 작용을 인정하고, 이와 같은 해롭고 나쁜 것을 여러 각도 및 방법으로 수정하면 전반적인 구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자문해 보십시요. 내가 당신에게 읽어 주려고 하는 것은 자신을 극복하고,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한 여성의 어깨에 지고 있기에는 벅찰 정도의 '국민적 카르마'의 무거운 짐을 지고 인류에게 봉사하겠다고 결심한 한 여성이 국민적 구세주로서 쓴 글입니다. 다음의 것은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은 언제나 말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저 때때로 우리들이 너무 시끄럽게 하기 때문에 자연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마을에서 나와서 잠시 동안 어머니가 되시는 자연의 손에 몸을 던지면 아주 마음이 안정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태양이 저물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햄스테드 히스(Hampstead Heath)에서의 저녁을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눈부신 태양이 산 너머로 가버린 세상에는 어떤 고통과 슬픔이 있을 것입니다. ······ 어느 부인이 어제 논밭에서 피는 꽃을 한 바구니 가지고 와서 주고 갔습니다. '런던'의 동쪽에 있는 나의 가난한 동료들이 나보다 이것을 받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 화이트 체플(White chapel)의 대단히 가난한 학교에 그 꽃을 가지고 갔습니다. 핏기 없는 창백한 아이들의 얼굴이 얼마나 맑고 깨끗하게 빛났는지 당신이 와서 같이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나는 몇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저녁밥을 먹이고 돈을 지불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습니다. 그 가계는 아주 혼잡하고 사람들이 들끓는 뒷골목에 있었습니다. 생선, 고기 외에 다른 식료품(食料品)의 악취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곳 화이트 체플(White chapel)의 태양은 정화하는 것이 아니고 부패시키는 것입니다. 이 식당은 모든 악취의 전형(典型)이었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기파이', 가슴을 메스껍게 하는 음식물이며, 파리떼, 이곳은 참으로 마왕(魔王)의 제단(祭壇) 그것입니다! 밥찌꺼기를 얻어 먹으려고 하는 어린아이들은 즐비해 있었으며,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한 어린이가 영양있는 식사로서 벚꽃의 씨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나는 전신을 떨었습니다. 신경이 곤두선 채 서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지진이 삼켜버리거나 모든 기억을 없애는 정화의 강에 뛰어들어서 새로운 것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 이외에 '런던'이 어느 한 곳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나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계속 '햄스테드 히스'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만약 무엇인가를 바치고 이 사람들을 구할 힘을 얻을 수가 있다면 어떤 희생을 감수해도 아깝지 않겠다고,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변화시킬 수가 있을까? 지금의 상태로서는 그들을 어떤 환경에서도 그들의 썩어가는 일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희망이 없는 불행한 생활은 나의 단장(斷腸)의 아픔이 있을 뿐입니다. 짐승과 같은 생활이야말로 그 불행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 뿌리이기도 합니다. 또 그것은 반얀(Banyan)의 나무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가지(枝)가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눈을 뜹니다. 이와 같은 느낌과 '햄스테드 히스'의 평화로운 광경(光景)과는 너무나 대조적이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이런 가련한 사람들이 형제이고 자매인 우리들의 '화이트 체플'을 구하는 힘을 얻으려고 '햄스테드 히스'를 쓸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조소자(嘲笑者)들에게 알리기에는 너무나 존귀하고 유명한 이름의 '싸인'이 되어 있었다.]
문 : 그것은 슬프고 아름다운 편지입니다. 그 편지는 당신이 상대적, 분배적 '카르마'라고 말하는 것의 무서운 작용인 고통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신이나 그와 같은 일반적인 재해가 없이는 도움을 똑바로 얻을 수 있는 가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답 : 모든 사람이 돈이나, 노동이나 고상한 생각이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공익에 기여한다고 하면 그때에는 비로소 국민적 '카르마'의 균형이 잡힐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자연에서 오는 것 이상의 생명이 지성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나 이유가 우리들에게는 없습니다. 응보(應報)의 '카르마'는 이런 불공평한 압박의 원인을 찾아내면서 또 최선의 노력으로 힘의 평형을 재조정하고, 당신이 이렇게 모아져 있는 불행에서의 유일하게 피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물질적 재해(災害)보다도 천배(千倍)나 비참한 영속적인 나쁜 도덕적 재해에서 사람들을 구(救)하는 것은 인종이나 국민의 구세주들인 영웅적 혼에게 기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문 : 그러면 '카르마'의 이런 법칙이란 대략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요.
답 : 다음에 충분히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연못(池)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돌(石)을 물에 던지면 파문이 생깁니다. 그 파문은 앞뒤로 흔들리며 움직입니다. 이것이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에너지' 분산의 법칙입니다. 힘의 원리에 의하여 그 파도는 조용해지고 물은 고요한 평온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와 같이 어느 계의 작용에서도 모두가 우주의 균형잡힌 조화에 방해를 일으켜 생긴 진동은 그의 영역이 한정되어 있다면, 그 한계까지 가서 평형(平衡)으로 돌아올 때까지 앞뒤로 진동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방해는 어느 특정한 점에서 시작되므로 그 방해를 일으킨 원점으로 돌아오면 평형은 비로소 잡히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나 생각 등의 결과는 모두 그것이 생긴 것과 같은 힘으로 반응하는 이치라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문 :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한은, 그 법칙에는 도덕적인 성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작용과 반작용이라고 말하는 단순한 물리적 법칙 같은 것으로 나는 생각합니다.
답 : 그렇게 말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선과 악, 정(正)이나 사(邪)를 인간이 만들어 낸 독단적인 법률이나 또한 인격 신이 인간에게 과하는 법칙으로 생각해 버리는 습관이 구라파인에게는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 신지학도는 '선'과 '조화' 그리고 '악'과 '불화'는 동의어라고 말합니다. 거기에 모든 고통은 조화가 결여된 결과이고, 조화를 해하는 유일의 무서운 원인은 어떤 형이거나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카르마'는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 성질에 관계없이 그 행위의 실제 결과에 원인을 돌립니다.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자신의 정당한 댓가를 받게 되어 있으므로 자신이 만들어낸 고통을 보상해야 합니다. 그와 똑같이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준 행복이나 조화가 있다면, 그 결과인 과실은 기쁨으로 거둬들이는 것입니다. '카르마'에 대하여 바른 생각을 가진 신지학도들이 쓴 책이나 논문에서 당신이 도움이 된다고 하는 부분을 인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문 : 당신들의 책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지 않으니 그렇게 해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답 : 그것은 우리들의 교의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므로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기독교 신자가 쓴 다음과 같은 반론이 나왔습니다. ㅡ "일단 신지학의 가르침이 바른 것이라고 인정하고, 또 인간은 자기 자신의 구세주가 되어야 하고 자신과 싸워서 이기고, 자신의 혼의 해방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이중성 안에 악을 정복해야 한다는 것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자각(自覺)시켜(자아를 안다) 어느 정도 악(惡)으로부터 개정(改定)한 후에 인간은 무엇을 해야 좋은가? 또 어떻게 한 사람이 해방(解放) 즉, 자신이 범한 모든 악을 소산(消散)할 수가 있을까?" ㅡ 이것에 대하여 J. H. 코넬리(J.H. Conelly)씨는 "신지학의 기계차를 신학의 궤도(軌道) 위에서 달리게 한다는 것은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고 말한 것은 아주 적절한 답이였습니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의 책임(責任)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신지학 개념에 없습니다. 신지학의 신조에는 잘못한 자를 적절히 처벌하거나, 그의 잘못된 행동으로 흐트러진 우주의 균형을 그가 회복시키지 않는 한, 용서받을 수 없거나 '이미 범한 악을 사라져 없애는 것'등은 없습니다. 악(惡)을 자기 자신이 저질렀다면, 그리고 그 결과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게 된다면 그 보상은 다른 아무도 아닌 그 자신이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각(자아를 알고)해서 어느 정도 악(惡)에서 개심(改心)하겠다'고 하는 상태는 자신의 행위가 악이었으며,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알게된 상태입니다. 이런 인식을 하면 개인적 책임감을 불가피(不可避)하게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책임감을 깊이 느끼는 때야말로 기독교의 대신속죄(代身贖罪 ; Vicavious atonement)라는 교의를 받아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뉘우치고(悔) 개심하라고 가르치긴 하나, 회개처럼 쉬운 것은 없습니다. 자신이 범한 죄악을 알고 그것때문에 고민하다가 끝내 후회하는 경향은 마음이 약한 인간의 공통 성질입니다. 그 후회하는 기분을 분석해 본다면 우리들 인간이 후회하는 것은 죄악(罪惡) 그 자체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이기적 생각을 달성하려고 하는 수단으로서 죄악을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죄의 무거운 짐을 '십자가 밑에' 던져 버린다고 하는 말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것이 될지라도 신지학도는 좋은 것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죄를 범한 자가 자신의 죄악을 알게 된 것만으로 어떻게, 왜 용서를 받을 수 있나, 또 자신의 과거 악을 소멸할 수가 있나, 신지학도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죄를 범한 사람이 회개하고 장차 바르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인과 관계가 되는 보편적 법칙이 그 사람에게 작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악에 의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고통을 준 것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신지학도는 죄없는 사람에게 주어진 악의 결과를 자아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죄인뿐이 아니고 그 피해자의 일도 생각합니다. 악은 우주를 지배하는 조화의 법칙을 위반했으며, 그 죄는 그 법칙의 위반자 자신이 받아야 하는 법입니다. "이제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무엇인가 더 나쁜 일이 당신의 신변(身邊)에서 생길지 모르겠으니"(요한 복음서)라고 예수는 경고하였고, "당신 자신을 구하시요. 사람은 자신이 뿌린 것을 거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갈라디아인에게의 편지 6장 7절)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보다 훨씬 이전에 푸라나(Purana)라고 하는 성전에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거두어야 합니다."라고 한 것을 매우 훌륭하게 비유한 표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카르마'법칙의 원리입니다. '시네트'(Sinnet)는 그의 저서,「비교적 불교」(Esoteric buddhism)에서의 '카르마'란 것은 윤리적인 인과율(因果律)이라고 했습니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카르마'의 뜻을 '응보의 법칙'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더 좋습니다. '카르마'란 것은 신비적이지만 우리를 무위(無爲)의 길로 인도하며 표식(標識)없이 우리의 죄를 벌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카르마'는 악을 틀림없이 충분히 벌하는 것처럼 선에게도 보답합니다. '카르마'는 모든 활동, 생각, 말, 행위의 결과이며, 사람들은 그것에 의하여 자기 자신의 인생과 경험을 만들어 냅니다. 동양의 철학은 어린아이가 생겨날 때마다 새로운 혼이 만들어진다는 사상을 부정합니다. 동양철학은 연속적으로 바꾸어 태어나면서 많은 인격의 동화작용을 통하여 더욱 더 완전한 진화를 하고 성장해 가는 한정된 수의 '모나드'의 존재를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격은 '카르마'의 소산이며, 인간 '모나드'가 언제인가 그의 원천인 절대적 신성으로 돌아가는 것은 '카르마'와 '윤회'에 의한 것입니다. ㅡ 'E.D. 워커'(E.D. walker)는 그의 저서「윤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ㅡ 간단히 '카르마'의 교의에는 우리들이 전생의 행위에서 오늘의 자기 자신을 만들고, 오늘의 행위에 의하여 내세를 만들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만드는 이외에 운명이란 것은 없습니다. 구제나 죄의 선고나, 자기 자신이 초래한 것입니다. '카르마'는 틀린 행위에 피난처를 제공하지 않고 순수한 사내다움을 요하며, 악한 성질의 사람들을 대신해 보상이나, 소용없는 기도나, 용서, 임종(臨終)의 개심 등, 쉬운 종교적 교조 같은 것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정의의 영역에서 죄와벌은 같은 일로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행위와 그 결과 사이에는 진정한 구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 우리를, 이 세상 인생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카르마' 즉, 우리들의 옛 행위입니다. 혼의 거처는 그 '카르마'에 따라 바뀝니다. 그리고 그 '카르마'는 언제나 변화하고 있으므로 하나의 상태로 오랫동안 지속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행위가 물질적, 이기적인 동기에 지배되고 있는 한, 그 행위의 결과는 육체 대신으로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아주 비이기적인 사람만 이 물질생활의 인력(引力)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마지막 목표입니다.(p299-303) 또, 이 필자 '워커'씨는「비의」(Secret Doctrine)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카르마를 믿는 사람들은 운명을 믿어야 합니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모든 인간은 거미가 집을 만드는 것처럼 자신의 둘레에 한 가닥 한 가닥의 실로서 운명을 짜(織) 나갑니다. 그리고 그 운명은 우리 밖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형(Invisible prototype)의 하늘의 목소리(Heavenly voice), 혹은 우리들과 가장 친근한 '아스트랄' 혹은 내적 인간(Astral or inner man)이 어디엔가 안내해 줍니다. 후자(아스트랄, 내적 인간)는 인간이라 하는 육체를 가진 존재에 달라붙는 악마와 같은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이것들은 둘 다 외향적 인간에게 유혹을 하는 것이며, 그 중의 어느 하나가 우세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투쟁(鬪爭)에 처음부터 응보의 매섭고, 용서함이 없는 법칙이 개입하여 충실하게 그 투쟁(鬪爭)의 변동을 지켜보면서 간섭하고, 적절한 활동을 합니다. 마지막의 실(糸)이, 짜여져서(織) 사람이 자신의 행위의 그물에 걸려 감기면 그 사람은 자신이 만들어낸 운명의 범위에 자신이 지배(支配)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 비교도나 철학자는 신의 섭리(Providence)를 선량하다던가 잔혹하다고 말하지 않고 신을 '카르마 네멘스'(인과응보의 여신)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선인(善人)은 이승에서 뿐이 아니고 내세(來世)까지도 지켜지고, 또 악행을 하는 자는 7생까지 벌한다고 말합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조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무한세계의 가장 작은 원자 하나까지 동요(動搖)시켜서, 그 결과로써 조화가 되돌아오도록 작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카르마'의 유일한 명령은 '영'의 세계와 같이 물질의 세계에도 절대적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영원 불변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수(報酬)를 주거나 죄를 내리는 것은 '카르마'가 아니고, 우리들의 자연과 같이 자연을 통해, 또 자연에 따르면서 활동하여 그의 조화의 기반이 되어있는 여러 법칙을 잘 지키느냐, 또는 그것을 파하느냐에 따라 자기 자신이 보상을 받기도 하고 죄를 받기도 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이 다투지 않고 통일된 조화에서 활동한다면 '카르마'의 활동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카르마'의 활동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것을 신의 섭리이고, 복잡하여 알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자는 '카르마'의 활동은 맹목적인 숙명의 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자는 단순한 우연이며 운명을 지배하는 신이나 악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카르마'의 모든 작용을 그 정당한 원인으로 돌려 줄 수 있다면, 이와 같은 무지는 반드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신비, 또는 자신이 풀어보려고 하지 않는 인생의 수수께끼 앞에서 당혹하게 서있기만 하면서 우리들을 먹어 들어오는 스핑크스(Sphinx)를 욕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인생에는 진정, 이승이나 저승에서나 자신이 저질러 놓은 결과(結果)였지, 우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원인없이 생겨난 불행이나, 불운한 날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 ······ 카르마의 법칙은 윤회의 법칙과 떨어질 수 없도록 밀접하게 짜여져(織) 있습니다. ○ ······ 이 교의(This doctrine)만이 선과 악의 신비로운 문제를 우리에게 설명할 수 있고, 또 인생의 두려운 것과 외관상의 분명한 부정을 감수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이 가르침 뿐입니다. 이와 같은 확신 이외에는 인생의 불공평에 반발하는 우리들의 정의감을 진정시킬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고상한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고 출생이나 재산, 지성이나, 능력의 불공평함을 보게 되며, 또 환자나 방탕자가 정중하게 대우를 받는 것을, 단순히 갑부(甲富)의 아들로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이웃사람은 지성도 있고 덕도 높아 무엇을 보더라도 그 사람보다 우월함에도 불구하고 가난 속에서 살고, 무상하게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을 보면, 무실(無實)한 고통을 해소해 주지 못함을 한탄하고, 자신의 고뇌에 귀가 울리고, 가슴이 아파도 고통을 구할 수가 없어서 얼굴을 돌리게 됩니다. 인생이나 사람들을 저주하고, 또 자신들의 창조주라고 생각하고 있던 신을 저주(呪)하지 못하게 해 주는 것은 '카르마'의 귀중한 지식 뿐 입니다. ······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이 법칙은 누구도 예정(predestination)하지 못합니다. 이 법칙은 태초부터 영구히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자체가 영원(永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행위(Act)도 영원과 동등할 수 없고, 이 법칙은 행위한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 자체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법칙은 사람을 익사(溺死)시키는 파도가 아니며, 대양(大洋)의 동작을 다스리는 비인격적 행위의 법칙하에 자의(恣意)로 자신을 던지는 난파자(難破者)의 개인적 행위가 사람을 익사(溺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카르마'는 아무 기도(企圖)를 하지 않고 만들지도 않습니다. 원인을 심고 만드는 것은 인간입니다. 그리고 '카르마'의 법칙은 그 결과를 조절합니다. 그러나 그 조절은 어떤 행위가 아닌 보편적인 조화를 이루려는 것이며, 이것은 억지로 휘어진 나무가지가 그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려고 하는 원칙 그것입니다. 만약 그 큰 나무가지(大枝)를 자연의 위치에서 구부려 보려고 하다가 팔(腕)이 그 반동에 의하여 탈구(脫臼)되었다면 우리들은 팔을 탈구(脫臼)시킨 것이 나무가지라고 말할 것입니까? 혹은 자신이 분해서 고통을 자초하였다고 말할 것입니까? '카르마'는··· 신교(Monotheist)를 믿는 무리들이 발명한 신(神)처럼 결코 개인적이고 지적인 자유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카르마'는 인간을 골려주려고 일부러 그 명령을 비밀로 해두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신비를 탐구하는 자를 벌하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그러한 복잡한 길을 연구나 명상(瞑想)으로 명확하게 하고, 휘어지고 어두운 길에 빛을 밝히는 사람은 인생의 미궁(迷宮)에 방황하는 인간 동지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카르마는 현현세계(顯現世界)에서 절대적, 영원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유일한 절대, 유일한 영원 및 항존(恒存)하는 원인이므로 '카르마'를 믿는 자들은 무신론자나, 유물론, 숙명론자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카르마'는 불가지(不可知)와는 같은 것이고 '카르마'는 현상계(現象界) 안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결과에 있어서 불가지(不可知)의 것을 위한 양상이기 때문입니다. (S. D. 2권 IP 643~4, II 303~4, 304~6)··· 또다른 유능한 신지학도 저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신지학의 목적」P. 시네트 부인 P10~14) ······ 모든 사람들은 일상 생활 속에서 자신의 행위나 생각(마음)으로 선이나 악이나 '카르마'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과거생애의 행위나 욕망에 의하여 초래하게 된 '카르마'를 이승에서 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선천적인 병이라고 해서 괴로움을 받는 것은 전생에서 그 사람들이 만들어낸 원인 때문에 불가피한 결과에서 온 것이라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이와 같은 병(病)의 유전적인 것과 과거 생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할런지 모르겠으나, 진정한 인간인 자아 즉, 개성의 혼적, 기원은 육체의 부모와는 관계가 없고, 재생할 때에 전생의 생활에서 그 자아의 둘레에 진을 치고 있는 상태를 보아 자신의 특성을 발달시키는데 (선과 악) 가장 적절한 집안에 자신이 운반되어 흘러와서 인연이 맺어진다고 생각해야 가장 알맞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카르마'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면,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더욱 높고, 보다 좋은 생활 방법의 길로 인도되고, 도움을 주도록 잘 계산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행위 뿐 아니라 생각도 선과 악으로 나누어져 우리들의 미래에 영향을 주도록 주변의 일들이 따라 일어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작의(作意), 부작의(不作意)의 죄가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자신에 관한 것으로 한정된다면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한 '카르마'의 결과는 대단한 것이 못됩니다. 인생에서의 모든 생각과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 선이나 악이나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미래의 행복이나 진전(進展)에 절대 필요한 정의, 도덕성 및 비이기성 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미 저지른 죄, 마음에 나타난 나쁜 생각은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후회(後悔)해도 미래에 나타나는 그 결과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진정 마음 속에서 회개한다면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가 그 본인이나 타인을 이미 발생한 원인의 결과에서 구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 결과는 그 사람의 이승이나 내세(來世)에 반드시 그에게 닥쳐올 것입니다. 'J.H. 코넬리'(J.H. Conelly)씨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러한 교의를 바탕으로 한 종교의 신자들은 그러한 교의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짧은 한 번의 지상 생애 동안 일어나는 우연한 일들로 결정된다고 하는 교의를 즐겁게 비교(比較)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교의에 의하면, 사람은 지상에서 사는 동안 '나무가 쓰러지듯이 누워 있으라'고 하는 약속에 환호하며 자신의 부정 행위를 깨달았을 때의 가장 큰 희망은 대신속죄(代身贖罪)라는 교의이며, 장노교 신앙고백에 의하면 그것조차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신의 법에 의하면 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어떤 사람이나 천사들은 영원한 삶이 예정되고 다른 자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숙명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정된 천사들이나 사람들은 특정적으로 변동할 수 없게 지정되어 있어서 그들의 수(數)는 증가나 감소가 불가능합니다. ·········· 신은 영광에 이르는 자를 선발했으므로 여타(余他)는 '크리스트'(Christ)가 부르거나 아들로 삼기나 구하거나, 깨끗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신은 나머지 인류로 즐거워 합니다. 거역할 수 없는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신은 자신의 피조물(被造物)에게 그의 절대적인 힘의 영광을 위하여 자의(恣意)로 자비를 베풀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하며 그의 영광스러운 정의를 칭송하기 위하여 인간의 죄악에 불명예(不名譽)나 벌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 유능한 변호자 '코넬리'가 한 말입니다. 우리 누구라도 다음의 명사 한구절을 인용하는 것 이상으로 이 문제를 잘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 봅시다. 「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에 나온 '카르마'에 대한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의 설명이 훌륭하고 우미(優美)하므로 여기에 재현합니다. 그러나 모두 인용하기에는 너무 긴 것이라 일부만 합니다. "'카르마'는 '영'의 총지(總知)이고 '영'(靈)이 했던 일은 '카르마'에 의한 것이며, 생각이다. 아(我 ; Self)인 '카르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횡사(橫糸)를 걸치고 보이지 않는 행위의 종사(從糸)를 얻었다. ······ 시작 이전(以前)이고, 끝이 없으며 영원한 공간과 같이 확실한 보증과 같이 선으로 움직이는 신성한 힘을 설정하여 그 법칙만으로 유지한다 ······ . '카르마'는 누구에게나 비난받지 않고 '카르마'를 방해하는 자는 잃고 돕는 자는 이(利)를 얻는다. 감추어진 선(善)은 평화와 지복으로 보(報)하고, 감추어진 악은 고통으로 벌한다. ······ '카르마'는 어디서든지 보고, 모든 것에도 주목한다. 바른 일들을 하라. ······ 그러면 보(報)를 받으리! 악을 행한다면 공평한 응보가 행해 질 것이다. 비록 더딜지라도. ······ '카르마'는 노하는 것, 용서하는 것도 모르며, 아주 진실로서 바르게 재보고, 완전무결한 저울로서 양을 정한다. ······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재판은 내일이거나 아니면 더 오랜 훗날이다. ······ 정의로 나아가는 법칙은 이러하다. 언젠가 방향을 바꾸거나 정지하는 일은 없다. ······ 그의 마음은 사랑이고, 그의 결과는 평화와 달콤한 성취이다. 따르라 ······." 이상으로 '카르마' 즉, 응보의 법칙에 대하여 신지학적 이해와 기독교의 가르침을 비교하여 보십시요. 신을 무정한 악마로 만들고, 우둔한 독단 때문에 '선발된 자'만을 구해주고 다른 자는 영원한 지옥으로 가는 운명이라는 가르침 보다는 철학적이 아닙니까? 말해 보십시요.
문 : 네,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을 대체로 알겠습니다만 '카르마'의 작용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말씀해 주십시요.
답 :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승의 생활과 환경은 과거의 행위와 직결된 결과라는 것은 우리들은 확신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성자도, 선각자도 아닌 우리들은 '카르마' 법칙의 작용을 자세히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문 : 달관적 성자라면 재조정하는 '카르마'의 경과를 자세히 끝까지 따라 갈 수가 있을까요?
답 : 물론 됩니다. '알고 있는 분들'은 누구나, 모든 사람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힘에 의하여 그렇게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는 분들'이란?
문 :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들이 우리들에도 해당되는 것입니까?
답 : 네, 지금 말한 그대로 이승에서 혼적 통찰력과 투시력의 정점(頂點)에 이르는 사람 외는 모두가 같은 제한을 받는 시력(視力)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만일 무언가가 달랐어야 한다면 달라졌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인지(認知)할 뿐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그 상태일 뿐이며,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빢에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 : 그와 같은 생각은 우리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답 : 그것은 아주 반대가 되는 생각입니다. 응보라고 말하는 정의의 법칙을 믿지 않는다면 인간은 더욱 살벌한 기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어른과 같이, 아이들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엄한 죄는 견디어 냅니다만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벌은 조그만 욕설이나 비난일지라도 원망합니다. '카르마'를 믿는 것은 이승에서 자신의 운명을 달게 받게 하는 것으로 최고의 이유가 되고, 또 다음의 생에서 보다 좋게 되려고 하는 노력의 가장 강력한 유인(誘因)입니다. 만약 우리들의 운명은 엄격한 법칙 외에 다른 일의 결과라던가 또, 그 운명이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의 조종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카르마'의 두 가지 뜻이 정말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문 : 당신은 지금 '카르마'의 법칙에 지배되고 있는, 이런 윤회의 체계는 이성, 정의, 도덕심이 따르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동정이나 연민(憐憫)의 정같은, 다른 얌전한 고운 성질을 많이 희생시키고, 인간, 정묘한 본능을 더 딱딱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답 : 그것은 겉보기 뿐이고,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다른 사람에게 그에 상당하는 불행을 안겨주지 않는 한, 자신이 받아야 할 상(賞)이나 벌을 더 많거나 적게할 수 없습니다. 자비에 의하여 벌을 면할 수 있게 하는 법칙은 구하는 것 보다, 더 많은 불행을 가져 오고, 감사 보다 더 많은 원망과 저주를 초래할 것입니다. 또한, 만약 결과를 생기게 하는 원인을 만들어도 우리들은 '카르마'의 법칙을 관리하지 않고 법칙 스스로가 관리한다는 것을 염두해 주십시요. 또 무엇보다도 '데봐챤'의 상태에서는 바른 자비와 동정이 풍성(豊盛)하게 나타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문 : '달관자'(達觀者 ; Adeft)는 우리들 일반의 무지한 것과는 아주 틀린 것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달관자'(Adeft)들은 윤회나 죽은 후의 상태 등을 잘 알고 있습니까?
답 : 네, 그렇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훈련했으나 그들만이 완벽하게, 그런 능력을 계발(啓發)하여 우리들이 논한 다양한 영혼적 경지에 도달하였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아데프트'들은 세대를 바꾸어가며, 존재나, 생과 사, 윤회의 신비를 연구하여 왔으며 그리고 그 연구한 사실을 차례로 일부분씩 가르쳐 주어 왔습니다.
문 : '아데프트'를 만드는 것이 신지학의 목적입니까?
답 : 신지학은 인류를 귀환하는 도중에 있는 신으로부터 내려오는 방사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길의 더 나아간 위치에서 그 성취를 위하여 수회(數回)의 생을 바친 사람들이 '달관자'(Adeft)라고 하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생 만으로 비밀과학의 '달관자'(Adeft)가 된 적은 지금까지 없기 때문입니다. 의식적인 목적을 가지고 필요한 훈련(공부)을 시작하면서부터 여러 생(生)이 걸리는 것입니다. 신지학협회 안에는 여러 생(生) 전에 이 빛을 향한, 아주 힘든 일을 시작한 사람이 많이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이승의 인격적인 환영(幻影) 때문에 혹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더욱 진보하는 기회를 잃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비교(occultism)와, 보다 고상한 인생에 대한 억제 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고는 있으나, 너무나 개인적이고 사견에 집착한 나머지, 혹은 세속적 생활의 기만적 허상(虛像)에 매료되고, 일시적 환락에 빠진 나머지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아직, 일상생활에서의 실제적 의무하에서 달관 상태와 같은 아주 먼 결과를 목표로 하는 것은 부적당하며, 동기로 하는 것도 아주 효과가 없습니다.
문 : 그러면, 신지학협회에 들어가는 것은 무슨 목적입니까?
답 : 많은 사람들은 신지학의 가르침을 교조적인 종교의 가르침 보다는 진실하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인간 의무의 최고의 이상을 이루어 보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과 지식, 맹신과 합리적 신앙의 차이
문 : 그 사람들은 신지학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믿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달관자'의 일원(한 사람)은 아니므로 그들은 당신이 말하는 가르침을 맹신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보통 종교와 어떻게 틀립니까?
답 : 다른 모든 점에서 다른 것처럼, 이점에서도 다릅니다. 당신들이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 특히 기독교의 교의에 관한 한 그것은 진정한 맹신입니다만,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지식, 즉 자연의 사실에 대하여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을 논리적으로 귀결시킨 것입니다. 당신들의 교의는 해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자로부터 한 번 넘겨 받은 증언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들의 교의는 성자들의 불변하는 증언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반 기독교 신학은 인간이 신의 창조물이며 육체, 혼, 영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세 가지는 모두가 인간의 전체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본질적인 것이며, 농밀한 형체를 가진 이 세상의 육체적 존재에서나, 에텔(Ether) 형태화한 부활 후의 상태에서도 이런 구성을 갖추어야 영원히 존재하며, 타인이나 신과도 구별이 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신지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인간은 알려지지 않은 것(Unknowu)의 방사(Emanation), 즉 언제나 존재하고 무한한 것인 신성한 본질에서 방사된 것이고, 환영(幻影)입니다. 인간 안에서 혼만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며 그 혼도 우주 혼(Universal Spirit)과 완전히 재통합(統一)하는 순간 그에서 분리되었던 개별성은 상실되는 것입니다.(끝나는 것)
문 : 개별성조차 상실한다면 그것은 절멸하는 것이 아닙니까?
답 : 그렇지는 않습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분리된 개별성에 관한 것이지, 보편적 개별성(Universal individuality)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보편적 개별성이란 전체로 화(化)하는 부분과 같은 것입니다. 이슬(露)방울은 증발하지 않아도 바다물이 되는 것입니다. 태아에서 노인이 되었다고 육체 인간이 절멸합니까? 우리들이 무한히 작은 의식과 개별성을 보편적, 무한 의식보다 더 높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도대체 악마 같은 교만이 아니겠습니까?
문 : 그러면 실제에 있어 인간이란 것은 없고 혼만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답 : 그것은 틀립니다. 혼과 물질의 결합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더 확실히 말하자면 혼과 물질이란 일체이므로 보편적으로 현현된 실질의 두 개의 반대 극입니다. 혼이 현현(顯現)하고 있는 실질의 가장 작은 분자가 분화의 결과인, 어떤 형체에 붙어있는 한에는 혼은 혼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질 권리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맹신입니다.
문 : 영원한 원리 즉, 혼이 그저 물질을 통해 연변(軟變)한다고 당신이 말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고, 지식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답 :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영원이며 유일한 원리, 영이 물질로써 나타나는 것은 일시적이고 망령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문 : 그렇습니까? 그러면 이것은 지식에 근거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지, 신앙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군요?
답 : 그렇습니다. 지금 나는 당신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신앙은 일종의 정신병 같은 것이며, 진정한 신앙, 말하자면 '그리스'인들이 '피스티스'(Pistis)라고 말하는 것은 '지식'에 근거한 신념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이 육체적 또는 혼적 감각의 증거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 어떤 뜻입니까?
답 : 귀하가 알고 싶은 것이 이 두 가지의 차이라면, 교회의 권위에 근거하는 신앙과 자신의 혼적 직감에 근거한 신념과의 사이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문 : 어떻게 차이가 있습니까?
답 : 한쪽은 인간을 속이려고 하는 미신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신념이며 직감입니다. '알렉산더 와일더'(Alexander Wilder) 교수는 그의 저서「엘레시우스의 신비(Eleusinian Mysteries)」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모독의 원인은 무지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바르게 이해못한 것을 보고 조소한다.······ 이 세상의 저류(低流 ; Undercurrent)는 하나의 종점(골인)으로 향하고 있으며, 인간의 맹신 속에는 거의 무한한 힘 즉, 모든 것이 존재의 가장 높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신성한 신앙이 있다." 권위적 교조(敎條)에만 맹신을 국한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물질상 그런 힘의 길이를 결코 측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힘은 외면에 빨리 고착(固着)하여 그것을 다스리는 본질이 작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개인적인 판단을 하는 권리를 주장해야 하지만, 감히 그렇게 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 : 인격적 부(父), 통치자, 우주의 지배자로서의 신격을 당신이 거부하는 것은 그 '직감'이라고 하는 것 때문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영구히 알 수 없는(不可知)원리를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맹목적 자각만이 우주, 사고하는 인간 및 기타 물질계에 내재(內在)하는 모든 불가사의한 것이 어떤 이지력(理智力)이 없더라도 모든 부분이 놀랍게 현명(賢明)한 질서로 성장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그 조그마한 부분이나 물질적 외부 표현에서 틀릴 수 있고 그런 착오(錯誤)는 때때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내적 원인이나 결과가 잘못되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나, 유물론자나 기독교도 혹은 어느 근대철학자보다도 고대인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훨씬 도리에 알맞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고대인의 저술가들도 잔인과 자비란 것은 유한한 감정이 아니므로, 무한한 신의 속성으로 할 수 있다고 주장한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신들은 모두가 유한합니다.「법륜(Wheel of the law)」이라고 하는 책의 저자인 '샴인'(Siamese)은 기독교의 신에 대하여 우리들과 같은 견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책 25장에 다음과 같이 쓰여져있습니다. "······ 불교도는 인간의 성질과 속성을 초월하는 숭고한 신 즉, 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정숙함 속에서 조용한 휴식, 사랑, 미움, 질투를 초월한 완전한 신의 존재를 믿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신을 기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신의 노(怒)여움을 두려워해서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존경의 염(念) 때문에 신을 욕되게, 낮추어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 불교도는 인간의 성질이나 속성을 가지는 선, 사랑, 미움, 노여움을 나타내는 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독교의 선교사나 '마호메트' 교도(敎徒)나, 브라만이나 유태인이 말하는 신은, 불교도 기준에 의하면 보통 선인(善人) 보다 이하의 것이다."
문 : 신앙과 신념을 비교하니, 자신이 인간으로서 무력함과 비굴함을 느끼고, 자신을 유혹에서 지키고 생활을 도우며, 죄를 용서해 주는 하늘의 아버지가 있다고 믿는 기독교도의 신앙이, 불교도나 베단타파나, 신지학도의 냉담하고 거의 숙명론적 신념보다 좋은 것이 아닙니까?
답 : 우리들의 신념을 '신앙'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십시요. 그러면 때때로 생겨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이번에는 내가 물어보겠습니다. 신앙과 신념을 비교한다면 엄한 논리와 이성에 근거하지 않는 한, 신념일지라도 단순한 인간의 권위 즉, 영웅숭배에 근거하는 신앙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의 '신념'은 2 + 2 = 4라고 하는 수학적 원리와 같은 논리적인 힘이 있습니다. 당신들의 신앙은 감성적인 여성의 논리와 같습니다. '투루게네프(Tourgenyeff)'는 이와 같은 여성에게는 2 + 2 가 양초 한 개를 덤으로 붙여 5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들의 신앙은 정의와 논리의 모든 견해를 파괴 할뿐 아니라, 잘 분석해 보면 인간의 도덕적 파멸을 이끌고, 인류의 진보를 저지(沮止)하고, 힘을 정의로 하여 인류의 반을 '아벨'을 죽인 '카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문 :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답 : 속죄의 교의(Doctrine of Atonement)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믿고 있는 위험한 독단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당신들의 교의는 신이나 인간의 법에 위반하는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인류를 구하기 위해 '예수'가 자신을 희생시켜주었다고 믿기만 한다면, 그 피가 모든 죄를 씻어 준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는 20년 동안 이것에 반대해 왔습니다. 1875년에 쓴「아이시스 언베일드」(Isis Unveiled)의 일절(2권 542항)에 주의하여 주십시요. 이러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우리들이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자비는 한이 없고 계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지독한 것이라도 그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앞질러 지불한 '예수'의 피의 대가로서(1000배나 나쁜 것이라도) 벗어날 수 없는 죄란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가 늦어도 상관없습니다. 범죄자가 이승의 마지막날인 최후의 일분 전에라도 고백을 창백한 입술로 했다면 천국에 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와 같이 십자가(十字架)를 매고 처형되었던 도적이 그렇게(천국에 갔으니) 되었으므로 다른 죄인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기독교 교회의 목사의 개설입니다." 19세기경 이런 모순에 있던 시대의 상태하에서 영국의 인기있는 설교자들이 국민의 머리 속에 넣어 준 가설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떤것으로 되어 가겠습니까?
문 : 그것은 기독교도를 불교도나 브라만(Brahmin)보다 나은 것으로 하기 위하여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요?
답 :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든 교육을 받은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육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오래 전에 이런 독단에 의한 신앙을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그런 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가르침 보다 더 수월하게 모든 죄의 입구로 안내 될 것입니다. 또 한번「아이시스」(2권 542-543항)를 인용하겠습니다. "······ 만약 우리들이 교의의 조그만 둘레에서 벗어나 모든 부분이 정교하게 조성된 균형(均衡)을 유지하고 있는 전체인 우주를 생각한다면, 모든 건전한 논리나, 약간의 정의감조차도 이러한 대신 속죄(Vicarious Atonement)에 대하여 반감을 품게 될 것입니다. 가령, 죄인이 자신에게만 죄를 범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면, 또 마음으로부터 후회하고 과거의 죄를 사라지게 할 수가 있다면, 인간의 기억 뿐 아니라 최고의 신(神) 중에서 지고자(至高者)라도 없애버릴 수 없는 기록(記錄)에서 그 죄를 면하도록 할 수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러한 독단을 이해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같은 인간에게 나쁜 짓을 하고, 죽이고, 사회의 균형(均衡)을 깨고, 물리의 자연질서를 혼란하게 했는데, 그 원인은 비겁했거나, 기대했거나, 강제되었거나, 불문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셨으므로, 자신이 흘리게 한 다른 사람의 피가 씻겨져서 없어져 버린다고 믿기만 한다면, 죄를 용서받을 수가 있다는 것은 말도 안돼는 소리입니다. 가령, 그것이 용서받는다고 해도 죄에서 온 결과가 없어질 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원인의 결과는 원인의 범위에 한정되지 않으며, 죄의 결과는 범죄자와 피해자에 한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쁜 행위와 똑같이 선행(善行)에도 모두 그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조용한 수면(水面)에 돌을 던진 결과를 보는 것과 같이 확실한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는 많이 있으나 지금까지 생각해낸 예 중에서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므로 설명해 봅니다. 던진(投) 것이 큰 것이면 큰대로, 작은 것이면 작은 대로 대소(大小)에 따라 그 파문은 큰 것이 되기도 하고 작은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돌(小石), 그것보다 미소(微小)한 모래(砂)알도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동요는 표면에 보이는 것 뿐이 아닙니다.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바닥까지 모든 방향으로 물방울은 물을 밀고 나갑니다. 끝내는 사방의 기슭까지, 바닥까지 그 힘은 영향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물 위의 공기(空氣)도 움직이고, 이런 동요는 물리학자 말에 의하면 영구히 공간에서 공간으로 가고 층에서 층으로 올라갑니다. 물질에 주어진 충격은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결코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죄나 선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위는 일시적인지 모르겠지만, 그 결과는 영원한 것입니다. 한 번 돌을 못(池)에 던져 놓고, 그 돌을 손으로 주워내고, 파문을 되돌아오게 하고, 소모된 힘을 다시 회수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이전 상태로 하여 돌을 던진 행위를 아무 흔적이 없도록 할 수가 있고, 마지막에는 그런 기록에 그런 것들이 생긴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게 할 수가 있다면, 그때 우리들은 그런 속죄의 효능에 대하여 기독교도의 의견을 인내로서 들을 수가 있겠지요······ 또, 그렇게 되면 '카르마'의 법칙을 믿는 것을 그만두겠지요.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두 가지의 가르침 중에서 어느 것이 신성한 정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가 또 어느 쪽이 단순한 인간의 증거나 논리에 합리적인 것인가, 전세계로 하여금 정하도록 합시다.
문 : 그러나, 몇 백만의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믿고 행복해 합니다.
답 : 그 사람들의 사고력은 아주 감상벽(感傷癖)에 지배되고 있습니다. 진정한 박애주의자나, 애타주의자는 결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꿈 정도가 아니고, 인간지성의 악몽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했는가를 보십시요, 그리고 기독교국 보다 범죄가 쉽게 범해지거나 그 수가 많은 이교(異敎)의 나라가 있는지 그 이름을 들어보십시요, 구라파의 여러 나라들이 범한 소름끼치는 범죄의 긴 기록을 보십시요, 또 신교와 성서를 중하게 여기는 미국을 보십시요, 미국에서는 입옥중(入獄中)에 개종한 사람의 수가 공적인 신앙 부흥 대회나 설교에서 개종한 수보다 훨씬 많습니다. 기독교의 정의(?)의 대차원장(質借元帳)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보십시요, 피투성이를 한 살인자가 색욕, 복수, 식욕, 광신 또는 단순한 피에 굶주린 짐승(獸的)처럼 갈망의 악마에 빠져들어,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거나 하였는데, 그 많은 희생자들이, 회개하거나, 예수를 불러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립니다. 이와같이 죽음을 당한 피해자는 죄많은 상태로 지옥으로 갑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신학의 논리대로 죄의 대소에 따라 업보를 받습니다. 그렇지만, 살인한 자는 반대로 인간의 정의에 의하여 옥에 들어가면 감상적인 기독교 선교사들이 울어주기도 해주며, 개심이라 하는 매력있는 말을 입에 담고, 예수의 구(救)함을 받은 자로서 교수대에 갑니다. 살인자가 아니였다면 이 사람은 기도를 받을 수 없었고, 구해질 수 없고, 용서받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실히 말하자면 그 사람은 사람을 죽인 것이 참 잘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인 것으로 영원의 행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피해자, 그의 가족이나 그 사람을 의지하고 지냈던 사람들, 친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에게 보상하는 정의는 없는 것일까? 이 피해자에게 나쁜 짓을 한 자는 '갈보리'(Calvary; 그리스도가 못박힌 언덕)의 '성한 도적놈'이 되어 옆에 앉아서, 영구히 축복받는데, 피해받아 죽은 이 사람들은 이승에서나 죽은 후에도 고통을 받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교역자들은 겸손하게도 깊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아이시스 언베일드 2권 543항) 왜 신지학도가 천국에서나 지상에서나 만인에게 정의롭기를 믿고 바라며, '카르마'를 믿는가, 왜 기독교 교의를 거부하는지 당신은 이제 알겠습니까?
문 : 그러면 인간의 궁극의 운명은 신이 지배하고 있는 천국이 아니고, 물질이 그 본래의 요소, 즉 혼으로 차츰 변질하는 것입니까?
답 : 그 궁극의 '목표'에로 자연계의 모든 것이 향하고 있습니다.
문 : 당신들 중에 '혼의 물질로의 강하(降下)'를 악으로 생각하고, 윤회를 비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답 :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견습이라는 시간을 단축하겠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순수한 악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이 지식과 지혜를 얻어내는 경험을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혼적 성질이 필요한 것은 혼적 행복 외의 것으로는 결코 있을 수가 없다고 가르치는 경험,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들은 인생에서 생겨나는 고뇌, 고통, 여러 가지 쓸모없는 선망에 괴로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위안과 보다 좋은 미래의 희망을 가져다 주는 영적(靈的) 지식을 구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장해를 받아오면서 감사했던 신지학협회의 과거 14년간의 실제 성취해 온 것을 감안한다면, 장해가 없는 20세기의 지도자가 해낼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요. 만약 신지학협회가 다음 100년 간을 살아남고, 그 사명과 원래의 동기에 충실하다면, 21세기의 세상은 지금에 비하여 천국이 된다고 단언하는 것은 너무 내 지나친 낙관일까요, 한 번 말씀하여 보십시요.
제12장 실천적 신지학에 대하여
의무
문 : 모두가 함께 영구적인 평화를 얻을 수 없다면, 왜 재생이 필요한 것입니까?
답 :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려면, 인생의 경험을 통하는 것 외에 어떠한 방법도 없으며, 대부분의 경험은 고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고통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기쁨이나 쾌락은 우리들에게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고 일시적인 욕구이며, 그런 욕구에는 지속적인 권태가 따를 뿐 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보다 더 높은 성질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항구적인 것을 살아있는 동안에 찾아내는데 실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구는 영구 생활에 대비하는 것이니, 인간의 생활에서는 절박한 과제가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문 : 그러한 자연적 결과란 것은 어떤 수단을 쓰거나, 인생을 그만 두고자 하는 욕구가 되지 않겠습니까?
답 : 만약, 그 욕구란 것을 '자살'의 뜻으로 말하셨다면, 나는 확실히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결과는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불건전한 뇌의 병 때문이거나 대단한 유물적 사고 방식 때문일 것입니다. 자살은 가장 나쁜 범죄이고, 그 결과는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세상을 떠나야하겠다고 희망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영적 존재에 도달하려는 욕구로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자연적 욕구라고 나는 하겠습니다. 자살은 자신의 현재 입장과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포기하는 것으로 그러한 것은 새로운 '카르마'를 만들어 주는 것이 됩니다.
문 : 물질계에서 행위의 만족을 줄 수없다면, 왜 같은 행위가 되는 업무를 절대로 끝까지 다하지 않으면 안됩니까?
답 : 우리의 철학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의무를 다하는 목적은 개인적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즉 정의를 위하여 옳은 일을 하는 것이지, 그런 행동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갖다 준다고 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행복 혹은 만족은 업무수행의 결과 수반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족(행복)이 업무수행의 동기는 아니고 또 그래서는 안됩니다.
문 : 신지학에서는 정확히 '업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신지학에서 말하는 업무는 '예수'와 그 제자들이 설득한 기독교도의 의무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당신은 예수나 제자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답 : 당신은 틀렸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기독교도의 업무'는 기독교 시대 훨씬 이전에 위대한 도덕적 및 종교적 개혁자가 모두 가르쳐 준 것이었습니다. 옛날의 모든 위대하고 고상하며, 영웅적 이상은 우리들의 시간처럼 설교단에서만 논해진 것이 아니라, 때로는 모든 나라에서 실행한 것이었습니다. 불교개혁의 역사에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영웅적이며, 비이기적 행위가 많이 있습니다. "서로가 자애를 가지고 모두 하나의 마음이 되라. 형제 같이 사랑하고 도우고 생각하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한 자에 대하여 욕으로 갚지 말고, 축복하라."라고 하는 것은 '베드로'(Peter)가 태어나기 수세기 전에 실제로 불타의 신도들이 실행한 일입니다. 기독교의 논리는 훌륭한 것이나, 그것을 다른 종교가 이미 기독교 이전에 의무로서 가르쳐 온 것은 확실합니다.
문 : 당신은 일반적으로 '의무'를 어떻게 정의하나요?
답 : 의무란 것은 인류, 우리들의 친구, 동네 사람, 가족들을 위한 것으로, 특히 우리들 자신보다 가난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의무는 살아있는 동안에 갚지 않으면, 다음의 화신을 영적인 지불 불능자나 도덕적 파산자로 만드는 부채입니다. 신지학은 의무의 정수입니다.
문 : 기독교도 바르게 이해하고 실행하면 그대로입니다.
답 :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말로만 하는 종교가 아니었다면, 신지학은 기독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독교는 말로만 끝나는 논리에 불과합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의무를 실행하는 사람, 또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또 자신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만족하면서 의무를 수행하려는 사람은 더욱 적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애자들이 언제나 가장 소중히 하고 있는 것은······, 덕에 경의를 나타내고 그것에 보답하는 것에 찬동하는 세상의 목소리입니다. 근대 윤리는 읽어서 아름답고, 그것에 대한 의논을 들어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결국, 우리들은 신지학의 의무를 어떻게 이해하고 '카르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당신이 묻는다면, 우리들의 의무는 생명의 잔(杯)이 어떤 것으로 채워져 있더라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불평을 말하지 않고 마실 것이며, 생명의 장미꽃을 꺾어 다른 사람에게 그 향기를 바치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고, 만약 그 향기가 누구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며 낙을 얻을 수가 있다면 주어버리고, 자신은 가시만으로 만족 하는 것이라고 나는 답하겠습니다.
문 : 그것은 대단히 막연합니다. 당신들은 기독교도 이상으로 어떤 것을 하십니까?
답 : 전력을 다하여 이타적(利他的)인 활동을 하는 회원들도 있습니다만, 우리 신지학협회의 회원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근대 기독교보다 신지학의 사람들이 얼마나 좋은 일을 더 인도(引導)하느냐 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의도(意圖)하거나 말하는 것보다는 행동, 그것도 강력한 활동이 필요하다고 나는 말합니다. 가장 세속적이며 이기적이고 무정한 사람들이나, 아주 깊숙한 마음 속의 악인일지라도, 자신이 '크리스찬'이라고 말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지학도의 경우는 '카라일'(Carlyle)이 "입문의 목적은 행동이며, 아무리 고상한 것이라도 단순한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 자명한 이치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일상 생활에서 이런 진리를 모범으로 하여 행동하고 있지 않으면 신지학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선언은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진리가 아름답고 멋진 것으로 들려오고, 덕이나 의무가 실행되지 않고 큰 소리로 들려오면, 사해 과실(보기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나 손에 잡으면 그 자리에서 연기가 나고, 재가 되어 버리는 전설적인 과실)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공염불(空念佛)은 모든 악덕 중 가장 나쁜 것으로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선교(Preotestant)의 나라, 영국이 그 가장 현저한 특례입니다.
문 : 인류 일반에게 '당연히 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답 : 인종, 피부 색, 사회적 태생, 태생의 차별을 하지 않고, 만인에게 공평한 권리를 완전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문 : 어떤 때 이와 같은 당연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답 : 한 사람의 인간이나, 한 나라이거나, 다른 것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침해했을 때입니다. 자기 자신이 바라고 있는 것과 같은 공평한 친절, 배려 및 자애를 나타내지 못할 때도 그렇습니다. 국민적 이기주의의 격렬한 주장 속에서 세워져 있습니다. 프랑스의 속담에 "그런 주인에 그런 하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국책이 국책이면, 국민도 국민이다."라고 더불어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문 : 당신들은 정치에 관계하십니까?
답 : 협회로서는 정치에 관계하는 것은 조심성 있게 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말하지요. 인간의 성질을 개선하지 않는 한 정치개혁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은 헌 술병에 새로운 '술'을 넣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진정한 의무가 무엇이라는 것을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도록 사람들을 느끼게 하고, 인정시키면 먼 옛날부터 권력의 남용이나 인간적, 사회적 이기주의에 근거한 국가 체계의 모든 불공평한 법률은 없어질 것입니다. 화단의 풀을 뿌리에서 뽑지 않고 지상의 줄기만 자르는 것은 어리석은 정원사나 하는 일일 것입니다. 머리 속에 옛날과 같은 이기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지속적 정치개혁은 결코 성취할 수 없습니다.
신지학 협회와 정치 개혁과의 관계
문 : 신지학협회는 정치 조직이 아닌가요?
답 : 당연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지학협회는 최고의 의미에서 국제적인 조직입니다. 협회의 회원은 인류의 개선이라는 유일한 목적에 협력하며 일하는 모든 인종, 신앙, 사상의 남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협회로서는 국가적, 정당적 정치에는 절대로 참가하지 않습니다.
문 : 왜 그렇습니까?
답 : 지금 말한대로 국제적인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행위는 필연적으로 그 시대나 개인의 특이성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로 바뀌어져야 하지 않습니까? 신지학협회의 회원은 신지학도로서 당연히 협회의 원칙을 승인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협회에 가입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회원들은 모든 문제에서 의견이 일치 할 수는 없습니다. 협회로서 회원 전체의 공통의 것, 즉, 신지학 자체와 관계없는 것은 함께 실행해 갈 수가 없습니다. 개인으로서는 신지학의 원칙에 위반하지 않고 협회에 손상을 주지 않는 한, 정치적 사상이나 행위는 완전히 각자의 자유입니다.
문 : 그러나 신지학협회는 지금 바로 직면하고 있는 사회 문제를 아주 멀리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답 : 신지학 협회의 원칙이라고 하는 것부터, 대부분의 회원들이 그렇지 않은 사회 문제를 멀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제일 첫째로 가장 건전하고 가장 과학적인 생리학적 법률의 실시만으로 인간의 정신적, 영적 진보가 될 수 있다면 이와 같은 법률이 일반에게 실행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은, 이런 진보를 위해 힘쓰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입니다. 불행하게도 구미 여러 나라 국민의 대부분은 사회 상태 때문에 그들의 육체나 영이 적법한 훈련을 받기가 불가능하고, 그것으로 심신의 발달이 저지(沮止)되고 있는 것을 신지학도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훈련과 발달은 신지학의 확실한 목적의 하나이고, 신지학 협회는 이런 방향에서 상당한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완전히 의견이 같으며 그런 사람들과 완전히 조화가 되어 있습니다.
문 : 그러면 '진실의 노력'이란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어떤 사회개혁가도 자기 자신의 만능약(萬能藥)을 가지고 있으며, 모두 자신의 만능약이야말로 인류를 개선하고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답 : 바로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만족할 수 있는 사회 사업을 거의 달성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만능약의 대부분은 진정한 지도원칙이 없고 확실하게 그것들 모두를 하나로 결합하는 원칙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귀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협력하는 것보다 마음에 품고 있다고 공언(公言)하고, 대목적(大目的)을 위한 것 보다는 유감스럽게도 많은 경우에 거꾸로 자신의 명예와 보수를 위하여 서로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문 : 그러면 사회 협력을 증진하며 사회 개선을 실천하려면 신지학의 원칙을 어떻게 응용해야 좋겠습니까?
답 : 신지학의 원칙을 간단히 생각해 봅시다. 말하자면 보편적인 동일과 인과의 법칙, 인간의 단결, '카르마'의 법칙, 윤회 등입니다. 이것들은 인류를 하나의 가족으로, 하나의 보편적 동포애로 결합시키는 연쇄사슬(鋃)의 네 개의 환입니다.
문 : 어떻게 해서 그렇습니까?
답 : 현재의 사회 상태에서 특히 소위 문명국에서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이 불행, 빈곤, 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실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육체 상태는 비참하고 정신적, 영적 능력은 거의가 동면 상태(冬眠狀態)에 있습니다. 한편, 사회의 반대쪽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빈곤한 사람들에게는 눈을 돌리지 않고 무관심한 생활을 하고, 물질적인 사치와 이기적인 쾌락을 마음껏 즐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삶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고 양쪽 모두가 그와 같은 삶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결과로서, 한쪽에서의 사회적 의무를 소홀히 해 다른 쪽의 진보를 저지(沮止)하는데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모두 진정한 과학과 같이, 사회적으로도 보편적인 인과관계의 법칙은 진리로서 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인과율(因果律)은 그 논리적 결과로서 필연적인, 신지학에서 강조하는 인류 단결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의 행위가 만 사람의 생활에 반응(反應)을 나타낸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적 개념이기도 하므로, 진정한 인류 단결이란 인류의 향상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형제이며 자매가 되고, 그 정신을 실행함으로써 비로소 단결은 달성될 수 있습니다. 모든 신지학도가 가르쳐 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개인의 생활 안에서 실행하도록 의무가 부과된 기본적인 신지학 원칙의 하나는, 각자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살고, 사람들 각자가 사람들을 위하여 인생을 살아간다고 하는 작용이야말로 상호 작용이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동포정신입니다.
문 : 그것은 모두 일반적 원칙으로서 대단히 좋습니다만 어떻게 하면 구체적으로 적용 될 수 있을까요?
답 : 당신이 말하는 인간사회의 구체적 사실이란 것을 잠시 돌아봅시다. 일반 서민 생활 뿐 아니라, 중류나 상류의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지금 가장 강하다고 생각되는 이기심, 무관심, 잔인한 상태가 아닌 정의와 친절과 사랑이 넘치는, 좀 더 건전하고 고상한 상태와 비교해 봅시다. 인류 안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모두가 그 뿌리는 인간의 성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질은 원인과 결과가 끝나는 것이 없는 연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조건은 현재 및 과거뿐 아니고 미래에도 해당됩니다. 이기심, 무관심, 잔악은 결국 인류를 절망시키는 것으로 신지학도로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보란 것은 고상한 성찰을 발달시킴으로써 비로소 달성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유기체의 환경을 바꾸는 것으로 그 유기체를 바꾸고 개량할 수가 있으며, 진정한 진화를 가져다 줍니다. 그것을 가장 정밀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인간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지학도는 모두가 전력을 다해 가난한 사람들의 상태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현명하고 충분한 생각 아래 노력과 도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 해방을 위하여, 또 현재는 아직 인간관계에 관하여 의무를 게을리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무감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문 : 그렇지만 사회적 노력이 현명한가 아닌가는 누가 정하는 것입니까?
답 : 어떤 개인이나 한 단체가 이 점에 대하여 확고한 규칙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나 상당한 부분을 당연히 개인의 판단에 맏겨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일반적인 시험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즉, 제안(提案)되고 있는 어떤 행동, 신지학의 목적이 진정한 동포애의 실현을 추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진정한 신지학도에게 이러한 시험법을 적용시킨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한편, 이 방법에 만족한다면 그 사람은 그 방법을 여론으로 만들어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정신적, 물질적 개량(改良)의 근본에 있는 공적, 사적인 의무 보다 더 고상한 개념을 융화(融化)시켜 비로소 달성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의 모든 경우에 신지학도 자신은 영적 행위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자신의 개인적 일상 생활에서 자신의 친구들을 갱생(更生)시킬 수 있는 높은 영적인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문 : 그런데, 왜 신지학도가 그렇게 해야 합니까? 신지학도 모두가 당신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카르마'에 의하여 조건이 주어져 있을 것이며 또한 '카르마'는 특정 방향으로 당연히 작용할 것이 아닙니까?
답 : 내가 지금까지 강조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이런 '카르마'의 법칙입니다. 개인은 인류와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류도 개인에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발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만 '카르마'의 법칙은 만인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발달을 도와주는 경우, 신지학도는 그 사람들의 '카르마' 성취를 도와주는 것이 될 뿐 아니라, 더 엄밀한 의미에서는 자신의 '카르마'도 성취시키고 있습니다. 신지학도가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과 같이 그 구성 요소가 되는 인류의 발달입니다. 또, 자신 안에 있는 최고의 것에 감응할 때마다, 자기 자신 뿐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전진을 빠르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지학도는 자신의 행위에 의하여 인류가 다음에 더욱 더 높은 계(界)에 이르게 되는 것을 유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 : 이것은 당신이 말하는 제4원리 윤회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답 : 대단히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의 현세(現世)가 전세(前世)에 남은 배아(胚芽 ; 식물의 눈)에서 성장해 온 어느 성질의 발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법칙은 미래에도 해당하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인과 관계에 단순히 현재 뿐 아니고 과거, 미래에도 있다고 하는 생각을 이해 할 수 있다면, 현세의 모든 행동의 의미가 이해될 것이고,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그 행동의 진정한 관계를 알게 될 것입니다. 비굴한 이기적인 행위는 모두가 우리들의 전진을 저지하고 퇴보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상한 생각과 비이기적인 행위는 모두가 보다 더 높고 빛나는 계층으로 향하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만약 현세가 모든 것의 전부라고 한다면 많은 일이 진정으로 가련하고 서글픈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음의 생애가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승에서는 먼 저쪽에 자리잡고 있는 궁전에 이기적으로 혼자 가려고 하지 말고 동료들과 손잡고, 같이 황금의 문을 지나가도록 이승을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희생에 대하여
문 :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신지학의 최고 표준입니까?
답 : 아니요, 더 훨씬 높은 것이 있습니다.
문 : 그것은 무엇입니까?
답 : 자기 자신이 얻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이 주는 것, 즉 자기 희생입니다. 이와 같은 자기 희생이야말로 역사 속에 있는 불타나, 복음서 안에 있는 나사렛 '예수'와 같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교사 및 대사들의 독특한 특징이었습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다음 세대 사람들의 존경과 감사를 영구히 받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자기 희생과 정의를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이며 후일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되어버릴 뿐이고 해로운 것조차 간혹 생겨날 것입니다. 신지학의 기본적인 규칙인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의입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자기 정당화가 아니고, 집단적 인류 안의 한 단원으로서 보는 자신에 대한 정의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당되는 정의를 자신에게도 해당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희생해도 결과에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되지 못한다면 희생해도 안됩니다.
문 : 예를 들어, 좀 더 확실하게 설명해 주십시요.
답 : 역사 상에는 많은 예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돕는 실제적인 선행을 위하여 자기 희생하는 것을, 신지학에서는 "이교도(異敎徒)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구한다."와 같은 종교적인 생각을 자기 희생보다 훨씬 높이 평가합니다. 하와이의 모르가이에서 나병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치료해 주기 위하여 전생애를 바친 30세의 청년 다미엔 신부(Eaterh Damien)는 18년간 환자들과 같이 생활하다가 결국은 그 병에 감염되어 죽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그의 죽음이 결코 가치없는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몇 천 명의 비참하고 불쌍한 환자들을 안심시켜 주고 그 나름의 행복을 주었습니다. 그는 환자들에게 정신적, 육체적인 위안(慰安)을 주었습니다. 그는 인간 고통의 기록에 예외가 없는 어두운 방안에서 절망적인 존재에 한 줄기 빛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신지학도였습니다. 그에 대한 추억은 영구히 우리들의 기록에 전해질 것입니다. 우리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 가련한 벨기의 승려는 성실하기는 하지만 소득이 없는 허명(虛名)을 찾아 태평양의 남양군도나 중국에서 생애를 바친 우둔한 선교사들 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들 선교사들은 무엇을 성취하였습니까? 어떤 선교사의 경우에는 아직 진리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갔습니다. 중국의 경우는 어떤 가르침에 비하여 조금도 떨어지지 않게 훌륭한 종교 철학체계를 가지고 있는 국민들에게 간 것입니다. 중국 사람은 공자나 기타 성자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더라도, 거기에 대등한 매우 훌륭한 철학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선교사들이 몇몇은 무책임한 식인종이나 야만인의 희생자가 되어 죽어 갔으며, 또 몇몇은 군중의 광신이나 미움의 희생이 되어 죽어 갔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 선교사들이 런던의 '화이트 체플'(White chapel) 빈민가 즉, 밝은 문명의 자비 아래 있으면서 부패하고 병에 걸려 있는 곳에 가 있었으며, 진정으로 좋은 일을 했고, 보다 가치있는 대목적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우리들은 말할 것입니다.
문 :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답 : 물론, 생각하지 않겠지요, 그들은 틀린 신념에 의해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책임한 야만인의 몸에 세례를 함으로써 그 야만인의 혼을 지옥에서 구한다고 선교사는 생각합니다. 신교는 자신의 순교자를 잊어버리고, 구교는 자기 몸에 번식한 기생충을 위하여 40년간이나, 자신의 육체를 희생한 라푸로브(Labreo)와 같은 사람들을 미화하고 그 동상(銅像)을 세웁니다. 만약 우리들이 그런 것을 한다면 진정한 실천성이 있었던 성자 '다미엔'(Damien) 신부의 상을 세울 것입니다. 그리고 신지학의 영웅, 불타나 그리스도처럼 자비와 자기희생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규범으로서 그의 생각을 불후(不朽)한 것으로 할 것입니다.
문 : 그러면 당신은 자기 희생이 의무라고 생각합니까?
답 : 생각합니다. 그리고 애타주의는 자신을 발달시키기 위한 불가분의 것으로 그 의무를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분별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자신이 살아남는 것 보다도 확실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자신은 굶어 죽어야 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안락을 희생해야 합니다. 또 가령 사람들의 힘으로 일할 수 없는 경우라면 그 사람들을 위하여 일해 주는 것은 사람의 의무입니다. 이기적으로 혼자 가지면 자기에게만 소득이 되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사람의 의무입니다. 신지학은 자기 희생을 가르치고 있으나 경솔하게 소용없는 희생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즉 광신을 정상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문 :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그러한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까?
답 : 우리들의 가르침을 현명하게 실질적인 문제에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들의 높은 이성, 영적 직감력, 도덕감을 따르며 우리의 자아인 양심의 조용하고 조그만 소리(The still small voice)의 지령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조그만 소리는 여호와(Jehova)의 지진진(地震振)이나 뇌명(雷鳴)보다도 큰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문 : 이와 같은 것들이 일반인류를 대하는 우리들의 의무라고 한다면 우리들의 주위 환경에 대한 의무는 어떤 것입니까?
답 : 같은 것이지만 거기에 더하여 가족들에게 매여지는 특별한 책임에서 생기는 의무가 있습니다.
문 : 그렇다면 신지학 회원은 가족으로부터 서서히 떨어져나온다고 하는 것이 거짓말입니까?
답 : 다른 많은 풍설처럼, 그것은 한계가 없는 중상입니다. 신지학의 제일의무는 모든 사람들, 또 특히 자신이 확실히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즉, 결혼함으로써 따르는 자발적인 책임을 지는 경우와 운명에 의하여 정해져 있는 양친이나 근친자에 대한 의무도 있습니다.
문 : 신지학도 자신에 대한 의무는 무엇입니까?
답 : 고급아를 통하여 지금의 자아를 통제하고 정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적, 도덕적으로 자기 자신을 정화하고 자기 자신의 양심의 심판 외에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겁내지 않는 것입니다. 또 결코 무슨 일이든지 결말을 보지 않고 중도에서 그만두지 말것이며, 하는 일이 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면 공공연하고 대담하게 행하고, 만약 틀린 것이라 생각되면 결코 그것에 손을 대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의 '에픽테투스'(Epictetus)의 현명한 격언을 생각하고 신지학도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바보같이 세간에서 돌아가는 근거없는 비난에 사로잡혀 자신의 의무를 게을리 하지 말라. 그들의 비난은 당신의 힘에 외치는 것이 아니므로 조금도 걱정 말라."
문 : 그러나 가령 신지학협회의 어느 회원이 '자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 애타(愛他)를 실천하려고 해도, 너무 바쁘거나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도와줄 수 없다고 주장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 어떤 구실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적당한 장소에서 분수에 맞는 의무를 다하면 인간은 이승에서 자신을 채무자(債務者)로 만들 수 있다"고 어느 영국의 작가가 말했습니다. 목이 마른 나그네에게 한 잔의 냉수는 시간을 늦추어 지불할 수가 있는 열 번의 회식보다는 훨씬 고상한 것이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신지학도가 될 수 없으나 협회의 회원이 될 수는 있습니다. 실천적 신지학도가 되어 달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규칙같은 것은 없습니다.
문 : 그렇다면 그들은 왜 협회에 입회합니까?
답 : 그것은 입회하는 사람이 제일 잘 알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설사 세상 사람 모두가 반대하더라도 한 사람의 앞 일을 판단할 권리는 우리들에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소리에 관한 한, 여론(Vox populi)은 신의 목소리(Vox dei)가 아니면 언제나 편견, 이기적 동기의 소리이고 대부분의 경우 단순히 기분 나는대로 좋다 나쁘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들의 의무는 미래를 위하여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좋은 씨인가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씨를 뿌려야 하는가 왜, 우리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면 안되나 하고 물어볼 처지는 못됩니다. 미래의 수익(收益)은 우리들 자신의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선(慈善)에 대하여
문 : 당신들 신지학도는 자선에 대하여 기독교의 의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 어떤 자선을 말하고 있습니까? 마음의 자선입니까? 또는 물질계에서의 실제적 자선입니까?
문 : 실제적인 자선입니다. 당신의 보편적 동포애(同胞愛)가 뜻하는 것에는 마음의 자선도 들어있겠지요.
답 : 그러면 당신은 '산상의 수훈'을 '예수'가 가르쳐 준 계명(戒銘)을 실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문 : 그렇습니다.
답 : 그러면 왜 그 가르침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말합니까? 당신들의 구세주는 그 이론을 설교하고 실천했는데, 오늘의 '그리스도' 교도는 자신의 인생에서 그것을 실행하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문 : 그렇지만, 자선을 행하면서 인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답 : 네, 큰 부자가 있어 돈으로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신의 옷을 훔친 헐벗고 춥고 굶어 죽어가는 도적놈에게 자신의 오바를 벗어주는 박애주의적 기독교도가 누구인지 지적해 보시요. 혹은 왼뺨을 때린 사람에게 오른뺨을 내밀고 화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말해 보시요.
문 : 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시대와 환경도 변하였습니다. '예수'는 비유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답 : 그러면, 불타고 있는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도 비유로서 한 말이란 것을 이해하도록 당신들의 교회는 왜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기독교의 가장 유명한 설교자들이 사실상 지금 당신이 해석한 것처럼, '산상의 수훈'을 비유로서 말한 것이라 이해했다면, 왜 지옥의 불과 석면(石棉)같이 불타지 않는, 혼의 물질적 고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입니까? 한쪽이 가정된 말이면 다른 한쪽도 그럴 것입니다. 만약 지옥의 불이 문자 그대로 진짜라면, 산상의 수훈(垂訓)은 '그리스도'의 가르침 모두를 문자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톨스토이' 백(伯)이나 많은 신지학도와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습니다만, 보편적인 것이라 그 고상한 가르침대로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런 것으로 인생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아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는다면 더 많은 선남선녀가 그와 같이 실행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을 실행하는 사람을 정신병원으로 입원시키는 당신들의 법률은 어떻게 기독교적일 수 있습니까!
문 : 그러나 매년, 사적, 공적 자선에 몇 백만 '파운드'를 쓰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답 : 알고 있습니다. 빈곤한 자가 받기 전에 그 반은 착복당하고, 그 나머지는 게으름뱅이로서 일을 하지 않고 놀고 먹는 프로급 거지들 손으로 넘어가고, 진짜 헐벗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빛좋은 개살구가 됩니다. '런던' 동부의 빈민가에 많은 자선을 했더니, 그 첫째 결과로 나타난 것이 그 빈민가의 집세가 2% 가량 올랐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습니까?
문 :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답 : 집단적인 것이 아니고 개인적인 자선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대승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즉, "배고픈 자의 입에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음식을 넣어주지 말라" "그대의 옆집사람(第三者)의 그림자를 그대 자신과 그대가 주려고 하는 상대 사이에 넣지 말라." 또 "가난한 자에게 돈을 주거나 승(僧)에게 음식을 줄 때, 하인을 시키지 말고 자신이 직접 주라. 그대의 돈에 감사하는 마음이 감하여지며, 그대의 음식맛이 변하지 않도록."
문 : 그렇지만, 이것을 실제에 어떻게 응용할 수가 있을까요?
답 : 신지학의 자선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개인적인 노력을 말합니다. 개인적인 자선과 개인적 친절이라야 합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복지를 위한 개인적 관심이며 그들의 고통이나 빈곤에 대한 개인적인 동정, 배려, 조력이라야 합니다. 우리들 신지학도는 설사 돈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손이나 조직을 통해 돈을 주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접촉하여 동정해 주는 것이 그 돈의 천배 힘을 주는 효과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것은 육체의 굶주림보다 '영'을 구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감사란 것은 감사를 느끼게 하는 사람 보다 느끼는 사람에게 훨씬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몇 백만 '파운드'는 어디에서 감사, 또는 그것으로 인한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돈이 많은 부자에 대한 빈민들의 증오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무정부주의나 무질서의 집단을 성장시키는 데서 볼 수 있습니까? 착취제도의 희생물이 된 수많은 여성 근로자, 그날 그날 생계 때문에 길거리로 나서야 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감사의 마음이 울어나겠습니까?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이 구빈원(救貧院)에 감사하겠습니까? 위험하고 형편없는 집에서 병약한 아이들을 기르는 사람들이 고마움을 느끼겠습니까? 다만 그런 집을 가진, 인색한 고리대금업자 주머니로 돈이 들어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선량하거나, 자선가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기부한 수백만 파운드의 돈은 구제받아야할 사람들의 손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불에 타는 지옥의 저주(咀呪)로 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국가적 카르마의 생성'이라고 하며, 그 결과는 무서운 것이 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신지학
문 : 당신은 신지학이 근대 생활의 현실적이고, 불리한 조건 하에서 여러 가지 악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답 : 우리들이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신지학도가 일상의 생활 때문에 일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면 반드시 큰 도움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당신들의 가르침은 대단히 심원하고 어려워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답 : 당신은 한 가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즉 당신들의 대단히 자만하고 있는 근대교육이야말로 신지학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마음은 복잡한 관념이나 선입관으로 꽉 차 있어서 진리에 대한 자연의 직감력이나 인식력이 작용하지 못합니다. '카르마'나 '윤회'라고 하는 광대한 진리를 인간에게 이해시키는데 형이상학이나 면상(免狀)은 필요가 없습니다. 수백 수천만에 이르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불교도나 힌두교도를 보십시요. 그들에게는 '카르마'와 '윤회'를 신뢰할 수 있는 현실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부자연스런 쪽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위하여 대신 죽어 주었기 때문에 자신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가르쳐 주더라도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정의감을 짓밟아버리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교도들은 '카르마' 즉, 그들이 정당하게 죄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불평을 말하지 않고 신념을 가지고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들은 도덕적 이상은 실행하지 않고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구미 제국에서는 불평불만과 치열한 생존경쟁이 있습니다.
문 : 당신이 대단히 자랑하는 만족은 노력하는 동기와 그 실행을 배제하여 발달을 정지시키고 말았습니다.
답 : 우리들 신지학도는 당신들이 자만하고 있는 진보나 문명이 유독하고 치명적인 '가스'를 품어내는 골짜기의 마화(魔火)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기심, 범죄, 부도덕, 상상할 수 없는 악이 당신들이 진보의 시대라고 하는 판도라의 상자(Pandora's box)에서 불행한 인류를 괴롭히며, 당신들의 물질문명 성장에 발맞추어 가는 것을 우리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댓가를 지불하려면 차라리 몇 시대 동안 정치적 노예 형태로 지낸 결과이기는 하나 활발치 못한 불교 쪽이 나은 편입니다.
문 : 그렇다면 당신들이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형이상학과 신비주의 같은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답 : 실용적인 지도나 지원을 필요로 하는 일반 사람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육을 받은 사람들, 즉 사람들의 지도자에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나 행동 양식은 언제인가 일반 사람들에게 미치게 되는 것이니까요. 지적 교육을 받은 사람이 맹목적 신앙을 믿어 지적 자살을 하게 되는 것을 피하려면 철학이란 수단에 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이해하려면, 비교의 가르침이 아니라도, 적어도 엄격하고 논리적인 포괄성(抱括性)을 가지고 수미일관(首尾一貫)된 동양적 교훈의 철학에 동화하는 것 뿐입니다. 신념은 열의를 만들어 냅니다. 리튼(Bulwer Lytton)은 "열의는 성실의 특질이며 열의 없이는 진리의 승리를 얻어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에머슨'(Emerson)은 "세계 연대기 안의 어떤 위대한 운동도 열의의 승리이다."고 진실에 대해 말했습니다. 동양의 가르침과 같이 장대하고 수미일관하며 논리적이고 포괄적인 철학보다 더 이와 같은 열의를 생겨나도록 하는 것이 있습니까?
문 : 그러나 신지학은 많은 적이 있고 매일 새로운 반대자가 나옵니다.
답 : 그것이야말로 신지학의 본질적인 우수성과 가치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서운 것을 싫어하는, 반면에 위험이 없고 평범하며 아무 소용없는 것은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다.
문 : 언젠가 이와 같은 열의가 일반 사람들에게 주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답 : 기대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역사는 일반 사람이 열성으로 불교를 받아들였음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불교도에 주어진 논리적 철학의 실제적 영향은 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하여 그들 사이에 범죄율이 훨씬 적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범죄와 부도덕의 가장 큰 온상을 뿌리 뽑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은 행위의 결과에서 도망할 수가 있다는 터무니 없는 교리의 신념을 뿌리뽑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 번만 모든 법칙 중 가장 큰 법칙인 '카르마'와 '윤회'의 가르침을 배우면 인간 본질의 존엄한 것을 자신 속에서 느낄 뿐 아니라, 사람들은 육체적 위험을 피하려는 것 같이 악을 피하게 됩니다.
회원들은 어떻게 하여 협회를 돕는가?
문 : 당신들의 회원이 어떻게 하여 그런 일들을 도와주도록 하고 있습니까?
답 : 첫째 다른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을 가르쳐 줄 수 있도록 신지학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신지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신지학이 아닌가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설명합니다. 모든 기회가 있을 때는 그렇게 합니다. 또 이 문제에 대하여 오해를 없애주고 흥미를 넓히도록 해 줍니다. 세째는, 돈이 없을 때 책을 사서 그런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또 빌려 보기도 하며, 그들의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네째는, 힘이 있는 한, 모든 합법적 방법으로 부정한 것들의 중상에서 협회를 지키는 것입니다. 다섯째, 이러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에서 규범이 되는 것입니다.
문 : 우리들은 당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런 책을 보아도 인류에게 도움을 주는데, 큰 힘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자선이 아닙니다.
답 :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고, 명백하게 하며, 그들이 막연하게 느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진리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며 사고의 영양을 주는 양서는 실질적인 선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당신이 실제적인 자선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즉, 인간 동지의 육체에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하지만, 우리들은 할 수 있는 한 그런 일도 합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가난하여 협회의 여러 비용을 지불할 돈이 없습니다. 협회를 위해 일하는 우리들은 모두 노동을 봉사로서 하며 꼭 필요한 경우에만 돈을 냅니다. 보통 자선 기금은 공공 단체에 기부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직접 기부합니다. 신지학도가 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인격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신지학도로서 하지 못하는 것
문 : 협회는 신지학도에 대하여 금지 사항 같은 것이 있습니까?
답 : 그러한 규칙은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실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조직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적용은 회원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금세기 인간의 마음 상태는, 만약 우리들이 그와 같은 사항을 말한다면 오히려 신지학 협회에 들어올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참다운 신지학과는 상응하지 않으나 열심히 노력하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는 매체, 즉, 신지학협회와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문 : 신지학이란 큰 바다 속에서 가장 위험한 암초가 무엇인가 말씀해 줄 수 없습니까?
답 : 암초라고 아주 좋은 표현을 했습니다. 정직하고 열성있는 회원이 자신의 신지학 카누(Canoe ; 조각배)를 그와 같은 암초에 부딪쳐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경우가 간간히 생겼을 때 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일을 피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입니다. 가령 신지학의 적극적 의무를 훑어보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조항의 일들이 있습니다. 협회에 대하여 무고한 사실을 회원이나 협회 이외의 사람들에게 나쁘게 말하거나, 중상하는 것을 들었을 때 신지학도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문 : 들은 것이 진정한 것일 때, 또는 진정한 것인지 잘 판단이 안 섰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답 : 그런 때는 그 주장의 근거를 찾아서, 공평하게 양쪽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항의나 비난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부정할 수 없는 근거를 얻을 때까지 나쁜 것을 믿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 :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답 :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관용, 자선, 인종(忍從)으로 죄를 범하고 있는 동포를 용서하고, 틀린 자들에게는 할 수 있는 한, 형벌에 처하도록 지도해 주어야 하며, 신지학도는 언제나 그것이 인간의 단점과 약점에서 오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문 : 그럴 때 아주 용서해 줍니까?
답 : 어느 경우에서나 특히 자기 자신이 죄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에는 용서 해 주어야 합니다.
문 : 그러나 용서해줌으로써 자기 자신이 상하거나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답 : 자신의 의무, 말하자면 양심과 고급 본질(自我)이 시키는 것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충분히 숙고한 다음의 일입니다. 정의는 어떤 살아 있는 것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며, 정의는 또한 죄를 범한 자를 내버려 두고서 누구인가를 상하게 하는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문 : 다른 금지적인 법칙은 어떤 것입니까?
답 : 신지학도는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정말로 좋은 일을 하지 않고 태만이나, 불성실한 삶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신지학도라면 설령, 인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을 못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작은 수의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고, 그것으로서 신지학 운동의 진흥을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문 : 그것에는 보통이 넘는 성실이 필여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주 어려운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답 : 그렇다면, 그와 같은 사람은 처음부터 신지학협회에 입회하지 않는 쪽이 났습니다. 헌신이나, 시간이나, 일이나, 금전 등 누구에게도 그가 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문 : 다음은 무엇입니까?
답 : 협회를 위하여 회원은 신지학을 연구하는데 자신의 개인적인 진보나, 숙달에 마음을 쓰지 말고 자신의 힘이 미치는 한, 애타적인 일을 한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신지학 활동의 중하(重荷)와 책임 전부를 약간의 헌신적 일 정도로 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회원이든지 공동의 일들은, 자신이 해낼 수 있을 정도까지 해야 한다는 의무를 가지고 모든 수단을 다해 도와야 합니다.
문 :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답 : 신지학도는 단체로서 자신의 협회에 대한 명예보다도 자신의 허영이나 감정을 중요시하면 안됩니다. 협회를 희생하는 사람 또 다른 사람의 명성을 자신의 개인적 허영이나 세속적, 이익, 교만 등의 제물로 쓰는 사람은 협회에서 추방하여야 합니다. 한쪽 다리가 병에 걸리면 전신의 병이 되는 것입니다.
문 :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주고 신지학을 설득하는 것이 각 회원의 의무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자신은 잘 모르기 때문에 가르쳐 줄 수 없다고 변명하고 소홀히 넘어갈 권리는 어느 회원도 못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그 사람은 자신보다 더 모르는 사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가르쳐 보면 비로소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무지에서 벗어나려고 해야 하기 때문 입니다.
문 : 그러면 이러한 신지학 의무의 금지 사항 중 주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답 :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할 각오를 언제나 가지고 있을 것, 이웃 사람들의 노력의 가치를 모른 체 하지 말고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칭찬하여 줄 것, 결코 뒷구멍에서 다른 사람을 험담하거나 중상을 하지 말 것, 다른 사람에게 반대할 일이 있을 때는 정면으로 바라보고 말할 것, 다른 사람의 나쁜 말을 들어도 사람들에게 옮기지 말 것, 때때로 자신에 대하여 중상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에게 복수심(復讐心)을 가지지 말 것, 등입니다.
문 : 그러나 사람을 똑바로 보고 진정한 말을 한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똑바로 대면하여 불쾌한 사실 때문에 비난당하여 기분이 나빠 탈퇴하고, 협회의 가장 큰 적이 된 신지학협회의 회원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답 : 그런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나 쓸모없는 사람이나 탈퇴한 사람은 모두가 무서운 적이 되었습니다.
문 :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답 : 대략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처음에 협회에 열심히 헌신함으로써 아낌없는 대찬사를 해 주었는데, 이러한 타락자는 자신의 행동과 과거를 잘 모르는, 자신의 무지 때문에 속고 있었던 피해자란 것을 말로서 변호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책임을 협회의 일반회원이나 특히 지도자에게 넘겨 버립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못 생긴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고 자신의 추상(醜像) 때문에 거울을 땅바닥에 던져 버렸다는 옛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문 : 그러나 어떻게 해서 이런 사람들이 협회를 반대하게 됩니까?
답 : 대부분의 경우, 어떤 형태로나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서 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말하는 것이 충고나 결정적인 것인데, 권위있는 것으로 채택되지 않고, 또 그들의 천국에 종사하는 것보다 오히려 지옥의 왕이 되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무엇이든지 사람들로부터 믿음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예로써 잘난척하는 어느 사람이 협회의 모든 사람들을 협회 외에 있는 신지학도에게까지 비난하여 명예를 훼손했습니다. 그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 다른 회원들은 비신지학적이라고 구실을 삼아 모두를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들 모두 (특히 창립자까지) 사기꾼이라고 말하고, 이유도 될 수 없는 이유로 탈퇴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협회의 큰 부문의 장이 되어보겠다고 모든 수단을 다하여 음모한 끝에 그 사람을 회원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알고 협회의 창립자에게 대항했습니다. 창립자의 한사람에게 자신을 부문의 장으로 시켜주지 않는다고 기회있을 때마다 항쟁하여 창립자들의 가장 골치거리의 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손상된 자존심의 한 예에 불과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흑마술을 행하는 것을 바랬으며 실제로 했습니다. 즉, 협회에 헌신하는 척하고, 신지학 가르침의 미덕을 지키는 것처럼 하며, 다른 회원들에게 부당한 심리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못하게 한 즉, 그 사람은 협회와 절연(絶緣)하고 지금은 불행하게도 지도자들을 중상하고 거짓말을 꾸며서 자신을 속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의 명성을 떨어뜨리고 협회를 분열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문 : 그러한 인물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답 : 그 사람들은 '카르마'에게 맡겨 둘 수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이 그렇게 한다고 이쪽 사람도 나쁜 짓을 해도 좋다는 이치(理致)는 없습니다.
문 :그러나 중상이나, 뒷구멍의 험담과, 정당한 비판 사이의 경계선을 어디쯤으로 합니까? 친구나 이웃 사람과 교제하고 있는 사람이 위험하다고 알면 경고하는 것이 사람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답 : 말하지 않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상할 위험이 있을 때 살짝, 그 사람에게 말해 위험을 피하게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것이나, 거짓말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은 결코 넓게 퍼지도록 하면 안됩니다. 만약 그 잘못을 범한 사람만에 해당되고 다른 사람 누구에게도 해가 없는 것이라면 그 사람을 '카르마'의 결과로 처리되기를 바라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것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십시오. 그러나 만약 당신의 신중함과 침묵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위험을 따르게 한다면 어떤 희생이 있어도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아네슬리(Annesly)씨는 "결과를 돌보지 말고 의무를 생각하라"고 부르짖는 경우도 때에 따라 있습니다.
문 : 내가 생각하기에는 당신이 이와 같은 '금언(金言)'을 실행하기는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답 :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초기의 기독교도들과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신지학도가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요!"라고 비꼬아 하는 말에는 언제나 부정한 그늘이 있습니다.
문 : 험담, 중상, 다툼이란 점에서 신지학협회가 기독교 교회보다 더 할 것도 덜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대체로 협회는 동포애를 위한 것인가 듣고 싶습니다.
답 :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보잘 것 없는 표본이며, 주의 깊게 정리하고 재조직할 때까지는 다른 단체와 틀린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성질은 신지학협회의 안이나 밖에서도 같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회원들은 성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겨우 좋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낙상하기 쉬운 죄인들입니다. 거기에 우리들의 '동포애'를 인정받는 공식 관계가 아니고, 말하자면 사법권의 범위 밖에 있습니다. 거기에다 혼돈한 상태이므로 다른 어느 단체보다도 부당하게 싫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협회의 이상을 실행하지 못한 회원들이 탈퇴하여, 동정과 보호를 받기 위하여 협회의 적들에게 눈을 돌려서 시달리고 있던 적들의 귀에 자신들의 미움과 원망을 쏟아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신지학협회에 대하여 어떤 이불진(理不盡)인 비난을 해도, 그들은 우리의 적들로부터 지지(支持)의 동의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므로 탈퇴자는 똑바로 협회를 공격하고, 충실하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 자신의 노여움에 부딛치곤 합니다. 사람들은 해한 사람을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받은 친절을 원수로 돌려 주었으니, 이제는 세상과 자기 자신의 양심 앞에 정신이 나간 것처럼 자기의 정상화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싫어하는 협회에 대한 비난을 곧 받아들일 것이며 양심은 ······ 그들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했으니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습니다.
문 : 당신의 신분을 나는 부러워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답 : 부러워할 것이 못됩니다. 그렇지만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나 창립자들이 전력을 다해 일을 계속하고 있는 협회와 그 철학의 배후에 무엇인가 대단히 고상하고, 대단히 진실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은 협회를 위해 모든 형태를 위해 모든 위안, 모든 이 세상과의 번영과 성공, 또 자신의 명성까지도 ······ 또한 명예까지도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서는 끊임없는 오명(汚名), 망은(忘恩), 그리고 선의 노력에 대한 오해를 받고 사방팔방(四方八方)으로부터 공격을 받습니다. 자신들의 일을 지금 하지 않으면 당장 모든 책임에서 해방되고 더 이상 공격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문 : 그런 인내(忍耐)는 놀라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 당신들은 그런 일을 계속하는지 불가사의 합니다.
답 :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고 창립자가 죽더라도, 협회 원래의 계획대로 인류를 위하여 우리들의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뒤를 이을 삶의 품위 있고 헌신적인 사람을 이미 발견했습니다. 이런 사람의 덕으로 다음 세대의 인류에게는 평화의 길이 조금씩 평안하게 좀 더 넓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생은 모두 좋은 결과를 낳게 되고, 그 사람들의 자기희생을 가치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협회의 중요한 기본적인 목적은 사람들의 마음에 종자를 뿌리고, 거기에서 싹이 나오고 더 좋은 환경 아래서 지금보다 훨씬 큰 행복을 대중에게 주도록 건전한 개혁을 태동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제13장 신지학 협회에 대한 오해
신지학과 금욕주의
문 : 신지학의 규칙에는 전회원에게 채식주의, 독신주의, 엄격한 금욕주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와 같은 것에 대하여 요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와 같은 것에 대하여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확실히 말씀하여 주십시요.
답 : 우리들의 규칙은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지학협회의 회원 누구에게나, 어떤 방법으로 금욕자가 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이익되게끔 하느라고 자기 자신의 생활에 있어서 비이기적이라야 한다는 것이 당신이 금욕이라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문 : 그러나 당신들의 회원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엄격한 채식주의자이고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공언(公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당신들 협회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에서 일하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답 : 우리들의 회원 중에 착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앞에서 말한 바 있는 비교 부문 회원이므로 그것은 당연합니다.
문 : 그러면 그 비교 부문에서는 금욕적 수행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답 : 아니요, 우리들의 비교 부문에서는 금욕을 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면 일반적인 금욕주의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들의 견해를 당신에게 설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채식주의 등에 대하여 이해를 잘 할 것으로 봅니다.
문 : 네, 계속 말씀을 해 주십시요.
답 :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지학의 진정한 학도가 되어 협회의 일꾼으로 활동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들의 교훈을 이해적으로 배우는 것 보다 실천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하여 진리를 알고자하며 또, 맹목적이거나 우연한 것이 아니라 효과적이고, 현명하게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지혜, 또는 힘을 얻을 목적으로 비교 부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도들은 언젠가는 비교 부문의 공부에 들어가게 됩니다.
문 : 그러나, '금욕적 수행'은 그 비교 부문에서 조차 의무로 하고 있지 않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답 : 의무는 아닙니다만, 회원들은 비교 부문을 배우는 데는 첫째로 몸, 즉 육체라고 하는 형체(形體), 육체와 진정한 인간(혼)과의 관계에 대하여 올바른 개념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질이 이런 두 양상 사이의 상호 작용임을 회원들은 확실히 설명 받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안에 있는 인간이 밖에 있는 모양, 즉, 육체보다 훨씬 안에 있는 인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얼마 지나면 확실하게 납득(納得)하게 됩니다. 맹목적이거나, 지성이 없는 금욕주의는 아무 소용없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말하자면 내가 앞서 말한 성 라브로(Labro)의 행위와 같은 것이며, 또는 아주 잔혹(殘酷)하고 무서운 방법으로 몸을 자르고, 태우고 고통받는 인도의 탁발승(托鉢僧)이나, 밀림에서 살면서 고행하는 자들의 행법은 이기적입니다. 즉, 자신의 의지력을 발달시킬 목적으로 하는 고행에 불과하고, 진정한 영적, 즉 신지학적 진보에 도움이 되는 목적에는 아주 무익(無益)한 것입니다.
문 : 알겠습니다. 당신은 도덕적인 금욕주의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군요. 그것은 어느 목적을 위한 수단이고, 그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안에 있는 인간의 성질과의 완전한 균형(均衡)을 이루어, 모든 육체적 격정(激情)이나 욕망을 가진 육체에서 완전히 승리하려는 것이지요.
답 :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수단은 맹목적이거나 또 바보같이 쓰는 것이 아니고 지적이고 현명하게 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큰 경쟁을 위하여 훈련하고 준비하는 운동선수 같이 꾸준히 노력해야 하고,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많이 먹고 병에 걸리는 사람이 돼서는 안됩니다.
문 :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을 대략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실행하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가령 채식주의는 어떻습니까?
답 : 아무리 잘 조리해도 동물의 고기에는 원래의 동물 조직의 특징이 남아 있다고 독일의 위대한 과학자 한 사람이 증명했습니다. 그것은 그만두고라도 누구나 자신이 무슨 고기를 먹고 있는지, 그 맛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한 발짝 더 나가 동물의 고기를 먹고 소화한다면, 그 고기에서 온 동물의 성질이 생리적으로 자신에게 전해지는 것을 증명합니다. 더우기 '비교' 과학은 학도들에게 육식으로 인한 동물화 효과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증명합니다. 즉 큰 동물일수록 그 동물효과가 강하고, 다음은 조류(鳥類)이며, 어류(魚類)와 냉혈동물(冷血動物)이 가장 작으나 채식은 그런 효과가 전혀 없습니다.
문 : 그러면, 전연 먹지 않는 쪽이 좋습니까?
답 : 만약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물론 먹지 않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실제는 살기 위하여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진정한 학도들은 뇌나 몸에 가장 영향이 없고 짐이 되지 않으면서 직감력, 내적인 능력이나 힘의 발달을 방해하거나, 늦추게 하는 영향이 가장 적은 것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문 : 그러면 일반 채식주의자가 말하고 있는 논리를 모두 찬성하는 것은 아니군요?
답 :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이 의논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빈약하며 아주 허위에 근거하고 있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들이 말하는 것에도 바른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도 육식을 하는 경우, 특히 통조림 한 고기를 먹는 경우 여러 가지 병에 걸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문제에 대하여 완전히 논하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걸리므로 다른 문제로 옮겨 갑시다.
문 : 하나 더 물어 봅시다. 비교 부문의 회원들이 병에 걸리면 먹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답 : 좋은 의사의 충고를 받습니다. 우리들은 결코 이점에 대하여 엄격하게 의무를 두지 않습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들은 이성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고, 결코 광신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어야 하겠습니다. 만약 병에 결리거나 오랜 습관 때문에 아무리 해도 육식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면 어떻게 먹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조금 진보를 늦추어지게 하는 것 뿐입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순수한 육체적 작용이나 기능 보다는 인간의 생각이나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욕망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문 : 그러면 술에 있어서도 먹지 말라고 충고할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답 : 주류는 육보다도 도덕적, 영적 성장에 나쁜 것입니다. 알콜은 모든 인간의 심령 상태에 직접 확실하게 대단히 유해한 작용을 합니다. 내적인 힘의 발달을 저해하는 점에서는 음주보다도, 더 파괴적인 것이 '해쉬시'(Hashish)나 '아편'(阿片), 그외의 그와 비슷한 약을 습관적으로 쓰는 것들입니다.
신지학과 결혼
문 : 또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비교 부문의 회원은 결혼해야 합니까? 또는 독신으로 있어야 합니까.
답 : 그것은 사람에 따라서 다릅니다. 만약 당신이 이승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설사, 착하고 열심인 신지학도로서 우리들의 대목적을 위하여 일할 사람이라면 세상살이에 미련을 없애버리고, 하나의 일 즉, 진리를 알고 다른 사람을 도우는 것만 바라고 모든 다른 것은 원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바라는 소원이나 희망하는 환경을 바라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면 허전함을 달래보려고 결혼하는 사람도 많은데, 결혼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닥쳐와도 상관없다고 느끼는 사람이면 구태여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필경 당신은 우리들이 아주 결혼을 반대하는 정도로 바보같은 광신자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오히려 실천적 비교에 적합한 아주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결혼은 부도덕이 아니기 때문에 유일의 치료법입니다.
문 : 그러면 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을 때는 비교(秘敎)의 지식이나 힘을 얻을 수가 없습니까?
답 : 생리적인 질문에 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하고 충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답을 나는 하겠습니다. 그것을 도덕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두 사람의 주인 밑에서 일할 수가 있습니까? 결코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비교(秘敎)를 추구하는 것과 배우자를 돌봐야 하는 양쪽에 주의를 나누는 것은 똑같은 이치가 됩니다. 두 가지를 해보려고 하면 반드시 양쪽 모두 잘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실천적 비교(Occuitism)는 장난 삼아 하는 일이 아니고 아주 위험한 연구입니다. 생명을 걸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먼저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각오가 없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교 부문의 회원 모두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나는 오직 최고의 목표에 도달하겠다는 제자의 길에 들어가는 결의를 한 사람만이 해당될 뿐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비교부문에 들어와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내세(來世)에 진정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이승에서 준비하고 있는 초심자들에 불과 합니다.
신지학과 교육
문 : 당신은 서구에 현존하는 종교의 부적절함, 그리고 지금 인기가 있는 유물철학도 어느 정도 타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또 당신의 강력한 논점의 하나는 서구의 대도시에는 불행과 가난함이 너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과 지성의 보급에 따라 이러한 것들을 구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일들이 행해져 왔고, 또, 지금은 행해지고 있는 것을 당신은 인정하지요.
답 : 미래의 세대는 그와 같은 '지성의 보급'을 감사하지 않을 것이며, 지금의 교육 방법은 가난과 굶주린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문 : 그러나 우리들에게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대중 교육은 이제 시작된 것입니다.
답 : 대중 교육을 지금까지 하지 않고 있었다면 기독교는 15세기 이래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기독교도 즉, 기독교에 따르는 교회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육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문 : 그렇습니다.
답 : 계속해서 말하겠습니다. 우리들 신지학도가 깊이 느끼는 문제를 당신이 주었습니다. 그래서 좀더, 말하겠습니다. 빈민(貧民)촌에서 자라나고, 판자집 속에서 놀고 거침없이 난폭한 말과 몸가짐을 하며 살고 있는 어린아이들이, 그림이나 깨끗한 꽃으로 장식되고 밝고 깨끗한 학교를 다닌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좋다고 나도 인정합니다. 학교에서 깨끗한 것과 얌전한 버릇을 배우고 노래를 부르며 노는 것을 알게 되고, 지성에 눈을 뜨게 완구(장난감)를 주고, 손가락으로 물건을 다루는 것을 연습하고, 꾸짓는 것이 아니고 웃음으로 말을 나누고, 더러운 욕설이 아닌, 가볍게 주의를 받습니다. 이같은 모든 것은 어린 아이들을 인간답게 하고 뇌가 좋아지며 지적, 도덕적, 영향에 민감하게 합니다. 이와같은 학교 교육을 이상적이라고는 할 수는 없으나 가정에 비교하면 천국입니다. 그리고 학교는 차츰 가정에 영향을 줍니다. 이것은 많은 국립 초등학교의 실태입니다만, 당신들의 교육제도는 가장 나쁘다고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문 :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계속 말씀해주십시요.
답 " 근대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마음을 바른 방향으로 가지도록 발전시키고,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카르마'로서 정해져 있는 인생살이의 무거운 짐을 가벼운 몸가짐으로 극복해 가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며, 의지를 강하게 가지도록 하고 이웃 사람을 사랑하고, 서로 도우는 동포애를 갖도록 가르쳐서 이런 것이 일상 생활에 활용되도록 아이들의 성격을 훈련하고 형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의심할 수 없는 진정한 교육의 목적입니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교육학자들은 모두 이것을 인정하며 교육의 진정한 목적에 대하여 대단히 잘난 척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활동의 실제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모든 젊은이들, 소년, 젊은 학교 선생들까지도 "근대 교육의 목적은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다."고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이런 제도는 바른 경쟁심을 발달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질투와 부러움,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젊은 사람들 사이에 생기게 하고 진정한 마음가짐이 없어지며 명예와 보수를 위한 투쟁 ······ 격렬한 이기심에 기초한 인생을 위한 훈련입니다.
문 : 그런 점에서는 말씀하신 대로라고 생각합니다.
답 : 근대의 소년이나 청년이 겁내고 있는 그 시험은 무엇입니까? 시험은 당신들의 학교 교육의 결과를 표로 하기 위한 분류법 밖에 되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시험이란 근대 과학적 방법은, 지력을 가진 동물로 하여금 인류에 실제로 적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은 지성이란 뇌를 구성하는 물질의 기계적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근대 교육은 거의 기계적인 즉, 지성의 조성을 위한 일종의 자동 기계와 같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시험이 만들어 내는 교육은 단순히 육체적 기억의 훈련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험을 조금만 경험하면 알게 됩니다. 언젠가 당신들의 학교는 모두가 이와 같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시고나 추리력의 진정하고 건전한 양성에 관한 평가는 모두가 경쟁시험 결과에 의하여 판단해야 하는 한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학교 훈련에서는 성격의 형성, 특히 도덕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들의 근대 교육제도는 소위 과학지식 즉,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줄곧 모든 사람은 실제의 예나, 경험, 그리고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그렇게 머리 속에 심어졌습니다. 그래서 끝내는 '자아' 즉, 저급인 인격적 동물과 인생의 최지상(最至上) 목적이란 생각을 자신의 마음에서 없앨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당신들이 인정하는 앞으로의 불행, 범죄, 이기주의 등 모든 것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몇 차례 말했지만 이기주의야말로 인류의 저주이고, 인생의 모든 불행과 범죄를 만들어 내는 뿌리입니다. 이와 같은 이기주의의 온상(溫床)은 당신들의 학교 교육입니다.
문 : 일반론으로서는 모두가 대단히 좋습니다. 두세 가지 알고 싶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을 개선하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답 : 좋습니다. 당신이 만족할 수 있도록 말을 해 봅시다. 학교 조직에는 세 가지 큰 구별이 있습니다. 즉, 국립 초등학교, 중산계급의 학교, 상류계급을 위한 전료제(全療劑)의 사립 중ㆍ고교, 대단히 지나친 상업적인 것으로부터, 이상주의적 고전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고, 그 중간적인 것도 있습니다. 실제로 상업적인 학교는 근대적인 자를 만들고, 오랜 전통적인 학교는 초등학교 교사들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그 무거운 체제를 반영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쉽사리 과학적, 물질적, 상업적인 것이, 쇠퇴(衰退)하는 정통적이고 고전적인 것 대신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맥락(脈絡)의 교육 목적은 19세기의 지고자(至高者)인 '돈'에 있습니다. 배금주의자들의 '에너지'는 모두 '돈'에 집중되어 있고 따라서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은 기계적인 지성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은 한 뭉치가 된 군부대 꼴이 됩니다. 그 부대는 무지(靈性 없는)하고 단순한 대중을 사냥하도록 훈련되어 있습니다. 대중은 자신보다 강한 동포에게 흡혈(吸血) 당하면서 살아가도록 운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훈련은 신지학에 역행하는 것이며 기독교에도 위반됩니다. 이런 교육이 직접적으로 산출하는 것은 돈벌이 하는 기계이며, 양심이 없는 이기적 인간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동료를 잡아먹도록 가장 잘 계획된 훈련을 받아서 자신보다 약한 동포의 무식을 이용하는 동물입니다.
문 : 그렇지만 우리들의 훌륭한 공립학교에서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답 :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정말입니다. 비록 형태(形態)는 다를지라도 생동하는 정신은 같습니다. 이튼(Eton)이나 해로(Harrow)가 과학자나 신학자를 배출했다 할지라도 비신학적이고 비기독교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문 : 당신이 '이튼'이나 '해로'를 상업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답 : 그렇습니다. 고전적 제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존경 할만한 것이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성공을 거두고도 있습니다. 공립학교에서는 지적 교육 뿐 아니라 사회교육도 어느 정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공립 학교는 지금도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족이나 유복한 양친 밑에서 자란 바보같은 아이들은 그러한 학교에 들어가서 '혈통 좋은' 계급이나 부자 계급의 젊은 사람들을 알게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입학하는데 대경쟁이 있습니다. 부유한 계급이 많아지고 가난하지만 영리한 아이들은 여유있는 장학금으로 공립학교에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장학금으로 대학에도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문 : 그런 견해에 의하면 돈 가진 부유한 '바보들'은 가난한 자들 보다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신조를 믿는 상류계급의 사람들은 그 교의를 실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방법을 써서 부적당한 자를 적당한 자 대신으로 대치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돈을 뇌물로 주어 가장 좋은 교사들을 영리한 학생들로부터 빼내어, 태어날 때부터 부적당한 자신들의 자손이 과외수업을 받도록 만듭니다. 결국 그러한 자손은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는 직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문 : 그것 모두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 이것은 모든 청소년들에게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성질이나 능력은 생각하지 않고, 부모의 기대대로 해 보려고 하는 유해한 제도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보적인 학습의 낙원은 가련한 어린 지원자들을 대부분 육아원에서 똑바로 신사가 되는 예비교(豫備敎)에 들어 가도록 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물질적 지성(Materio intellectual) 공장의 노동자인 교사들에게 묶여 라틴어의 초보나 역사의 연대표 등과 얽히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 그 아이가 천재의 기질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면, 카라일(Carlyle)이 '쓸모없는 사어'(Dead vocables)라고 말한 '롤러'(Roller)에 의하여 그 소질은 급속(急速)히 짜내집니다.
문 : 그러나 아이들은 '쓸모없는 사어(死語)'외에 무엇인가 배울 것이고, 또 신지학협회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신지학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을 많이 배울 것입니다.
답 : 별로 배우지 않습니다. 역사를 에를 들어 말한다면, 다른 나라 국민에 대해서는 철통같은 자물쇠가 잠긴 편견을 심어주는 지시밖에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대기에서는 국민적 증오(憎惡)와 파에 대한 갈증(渴症)으로 물들게 될 것입니다.
문 : 그 외에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답 : 보통, 역사 외에 소위 성서(聖書)의 사실(Biblical facts)이라고 하는, 지상적으로 선정한 과목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모든 지성이 제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억의 연습이고, 교사가 묻는 '왜'는 상황에 의한 '왜'이지, 이유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 : 그렇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도 회의론자(懷疑論者)나 무신론자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씀한 것으로 나는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렇게 비난하시는 학교에서 훈련된 사람들도 자신의 생각을 추리하는 것을 배우고 있을 것입니다.
답 : 그렇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교육제도에 의한 것이 아니고 건전한 반동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들 협회에서는 어떤 종교의 맹신자 보다는 회의론자(懷疑論者)를 좋아하고, 무신론자를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회의론자라면 마음은 언제나 진리에 대하여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태양이 '박쥐'를 눈멀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 종교적 맹신자를 맹인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들의 동료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들, 말하자면 가장 진리를 사랑하고 박애하면서 정직한 사람은 회의론자(인격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였고, 지금도 그러한 사람이 많이 동료가 됩니다. 그러나 소년이나 소녀들에게는 자유스러운 사고가 없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조기 교육이 왜곡(歪曲)되고 구겨진 마음을 안겨주었기 때문일 것이고, 적정하고 건전한 교육제도는 논리적이며, 날카로운 생각을 엄하게 훈련하여 대단히 활발하고 자유스러운 사고를 생기게 하는 것이지, 맹목적인 신앙을 갖게 하면 안됩니다. 아이들에게 일요일에는 성서의 기적을 믿으라고 명하고, 평일의 6 시간씩은, 기적같은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가르쳐 주고 있으니, 아이들의 추리 능력은 왜곡되지 않고 무슨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문 :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답 : 만약 우리들에게 돈이 있다면, 굶주림 때문에 읽고 쓰기를 배우는 사람보다, 무엇인가 다른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학교를 세우고 싶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자립의 정신, 모든 사람들에 대한 애타주의(愛他主義), 상호부조, 그리고 더욱 중요한, 스스로 생각하고 추론하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아주 기계적인 암기는 최소한도로 하고, 내적 감각, 잠재능력을 발달 시키는데 시간을 많이 써야 합니다.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의 인격으로 보고 그 아이의 특별한 소질이 완전하고 자연스럽게 발달할 수 있도록 힘을 잘 조화하여 균형있게 발달하도록 교육하는 노력을 우리들은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적인 자유, 도덕적인 자유, 모든 면에서 편견없이 전체적으로 비이기적이고 자유스러운 남녀를 만들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진정한 신지학적 교육에 의하여 이 모든 것을 얻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신지학 협회에 대하여 그처럼 많은 편견이 있는가
문 : 만일 신지학이 당신이 말하는 반만이라도 된다면 훌륭한 것인데 왜, 맹렬하게 미움을 받고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그것이 문제입니다.
답 :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협회 창설 이래 얼마나 많은 강한 적을 만들어 왔는지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지금 말한 것처럼, 만약 신지학 운동이 많은 근대적 유형 중의 하나로써 무해하게 일시적으로 있다가 사라질 것이라면, 지금가지 그 전의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조소(嘲笑)를 당하고 그리고 계속 남을 수가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신지학은 이 시대의 가장 진접(眞)한 운동이며, 그러므로 현재의 사회악 뿐 아니라 옛날부터 내려오고 있는 잘못된 편견이나 사기(詐欺) 같은 존재들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악은 상류 계급이나, 그것을 흉내내고 있는 중류 계급들의 유복한 자들을 배부르게 하고, 행복하게 지내면서 몇 백만의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搾取)하여 굶주리게 합니다. 그들이 신지학의 진정한 성질을 알면, 신지학에 진정한 관찰력과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집요하게 박해하는가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문 : 소수의 사람들이 신지학 운동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신지학의 목적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만일 신지학이 선으로만 인도하는 것이라면, 그와 같은 소수 사람들에게 냉혹하다 할 정도의 무서운 비난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답 :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협회가 생긴지 9년, 10년 사이의 반대자들은 강력하다거나 위험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3, 4년 사이에 우리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강력하고, 위험합니다. 이 사람들은 신지학에 대하여 말하지도 않고, 쓰지도 않으며 설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그들의 바보같은 꼭두각시 뒤에서 작용합니다. 그들이 대부분의 회원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협회의 창립자나 보호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이유 때문에 지금은 그 이름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문 : 그 사람들은 협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까, 당신만 알고 있습니까?
답 : 나는 그들을 알고 있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나는 그들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문 : 무엇 때문에 언제부터 심령주의자들이 당신을 미워하고 있습니까?
답 : 협회가 생길 때부터입니다. 신지학 협회는 단체로서 사자의 영과의 교통을 믿지 않고 소위 '영들'은 대부분의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인격 즉, 영들의 껍데기(魂殼) '아스트랄류'형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게되자 심령주의자들은 우리들, 특히 창립자들을 무섭게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 미움은 미국 심령주의 조직 모두가 모든 종류의 중상을 끊임없이 하고 신지학의 가르침을 바보같이 설전(說戰)으로 표현함으로써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몇 년이나 우리들을 박해하고 비난하고 바보라고 욕설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1875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신지학협회가 뉴욕에서 인도로 옮겨지자 그곳에서 영국 심령주의자와 불란서 심령주의자가 가세하였습니다.
문 : 신지학의 교의의 주된 경향은 오늘 날의 모든 형태의 종교에 큰 적이 되고 있는 유물주의에 반대하는 것인데 왜 목사들은 당신들에게 적의를 가지는 것입니까?
답 : 목사들은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반대자이다."라고 하는 일반 원칙에서 우리들에게 반대하는 것입니다. 신지학은 특정 종파에 가담하는 일이 없으므로 어디서나 똑같이 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선교사들이 기독교에 개종하지 않는 교양 있는 바라문들이 많이 협회에 입회하는 것을 보고 우리들을 미워하고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반 목사들의 미움과 달리 신지학협회에는 많은 목사들이나 2-3의 승정(僧正)들도 가입해 있습니다.
신지학 협회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문 : 그 사람들을 위대한 선각자(Adept)나 연금술사라고 들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시네트(Sinnette)씨의「'오컬트'(Occult) 세계」라는 책에 쓰여져 있는 것처럼 은을 금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면, 마음대로 여러 가지 종류의 기적을 창조하고 원하는 대로 '금'을 만들어 주어 창립자들과 협회의 안락을 지탱할 수 있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답 : 그들은 '기적클럽'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협회가 생긴 목적의 하나는, 사람들의 노력과 장점을 살려서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능력의 발달을 도와주는 것이며, 또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어떤 현상을 일어나게 하는 것처럼 '금'을 만들어낸다고 하면, 회원이나 지망자들에게 또하나의 강한 유혹이 될런지 모르겠으나, 신지학은 '금'으로 살 수 있는 학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협회를 위하여 일하고 있는 회원들은 협회에서나, 누구로부터도 월급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문 : 그러면 당신들의 요원들은 전혀 급료가 없습니까?
답 :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먹거나 마시거나 입어야 합니다. 협회의 일로 자신의 시간을 모두 바쳐 생활의 길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본부에서 생활의 필수품을 주고 있습니다. 그 필수품은 참으로 조잡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지금은 협회 중상 덕분에 구라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협회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몇 사람 회원에게는 보수를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모두 바치고, 직장을 그만 두고 직장에서의 보수의 절반으로 일을 하겠다고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 : 그러기 위하여 기금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답 : 좀, 여유가 있는 회원들이 돈을 내 놓기도 합니다. 신지학은 투기(投機)나 '금'을 만들어 내지 않으며, 그런 사람은 회원으로 있을 가치가 없습니다.
문 : 그러나 당신은 자신의 책이나 잡지, 기타, 간행물로 돈벌이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답 : 잡지 중에서 신지학도(Theosophist)만이 이익이 있습니다. 그 이익은 공표한 수지(收支)에 나와 있는 것처럼 매년 협회에 인도합니다. 루시퍼(Lucifer)는 조금씩 돈이 들어가는 쪽이 됩니다. 기독교를 믿는 서점이나 철도 서점의 보이콧 덕분에 아직 유지비가 나오지 않습니다. 프랑스의 로터스(Lotus)와 뉴욕의 패스(Path) 등은 아직 수지가 맞지 않고 '런던 신지학 출판사에서 발행되는 책에서는 소득이 생기면 협회에 보내고 있습니다.
문 : 그러면 '마하트마'(Mahatma, 성인)들에 대하여 말을 좀 해 주십시요. 우습고 믿어지지 않는, 알 수 없는 종류의 말이 흘러나오고 있어 어느 것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답 : 당신은 그들을 우습다(Ridiculous)고 해도 괜찮습니다.
제14장 신지학의 마하트마(초인)들
그들은 '빛의 영들'인가,
또는 '암흑의 영들'인가?
문 : 말하자면 당신들이 '대사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은 '위대한 영들'이라고 말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의 초상적(超常的)인 존재라고 말하며, 그외 사람들은 가공의 사람 '가공인(架空人)'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답 : 어느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 아무 것도 모르는 자가 '마하트마'는 하나의 남성의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한 생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나,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듣고 결코 '마하트마'되시는 분의 진정한 개념을 알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첫째, '마하트마' 어른들은 우리들과 같이 태어났으며 또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인간으로 죽어야 할 운명을 가지고 살아 계시는 분들입니다.
문 : 그것을 알 수 없어도 그분들 중에 어느 사람은 1000년이나 나이가 된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답 : 우리들은 사람들의 소문을 부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그것이 맞다고 우기는데, 도리가 없습니다. 바보 같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므두셀라(창세기 5장 27절)'는 969살까지 살았다고 하는 말을 나는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믿을 수 없는 말이라서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불경한 이단자라고 욕을 먹었습니다.
문 : 그러면 정말로 '마하트마' 어른들은 보통 인간보다 수명이 긴 것은 사실입니까?
답 : 무엇을 보통의 수명이라 말하는 것입니까? 약 190세의 '멕시코' 사람의 일들에 관하여 '란센드'라 하는 의학잡지에서 읽은 것이 기억납니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이나 '아데프트'이거나, 창세기의 '므두셀라'의 나이에 비하여 반 정도라도 살았다는 사람의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어느 '아데프트'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보통의 나이보다 훨씬 오랫동안 살고 있으나 그것에는 아무 기적적인 것은 없습니다. 오랫동안 살겠다고 생각하는 '아데프트'는 거의 없습니다.
문 : '마하트마'라고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단순히 '위대한 혼'이라는 것입니다. 즉, 도덕적 고양(高揚)과 지적 성취를 통털어서 위대하다고 말한 의미입니다. '알렉산더'에게 대(大 ; 마하)칭호를 붙이는데 그것은 전장의 승자이고, 그것보다 위대한 정복을 대자연의 비밀 속에서 성취하신 분들을 왜 대(大 ; 마하)를 붙여서 부를 수가 없겠습니까? 그리고 '마하트마'라고 하는 말은 인도의 말로서 아주 옛날 말입니다.
문 : 왜, 당신들은 그런 사람들을 '대사'(마스터)라고 부릅니까?
답 : 그분들은 우리들의 대스승이므로 '대사'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은 그분들로부터 신지학의 진리를 모두 얻었습니다. 설사 어떤 사람들은 불충분하게 그 진리를 표현하지 못했다거나, 어떤 사람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들은 대사 어른들을 '이니쉬에이트'라고 말합니다만, 이분들은 대단히 박학하고 그 이상으로 그 신성함과 위대한 것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확실히 세속의 소동(騷動)이나 투쟁에서 떨어져 있습니다만, 보통 말하는 은자(隱者)는 아닙니다.
문 : 그러나, 그렇게 사회에서 멀리하고 있는 것은 이기적이 아닙니까?
답 : 어디가 이기적입니까? 신지학협회의 오늘까지의 경험에서, 세상에서는 대사 어른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그의 가르침을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대사들은 서구에서 떨어져 있으니, 자신들의 나라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대중들과 같이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문 : 당신은 대사 어른들에게는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답 : 앞에서 말했지만 우리들은 초자연적인 것은 아무 것도 믿지 않습니다. 만약 '에디슨'이 200년 전에 살아 있어서 축음기(蓄音機)를 발명했다면 아마 '에디슨'은 축음기와 같이 불태워졌을 것이며, 악마의 요술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대사님들이 쓰는 힘은, 모든 인간들 속에 잠재해 있는 가능한 것을 발전시킨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힘이 있다는 것을 요즘에 이르러서 과학에서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문 : 그와 같은 대사들이 신지학의 저자들 중에 몇 사람을 시켜서 전부는 아닐지라도, 신지학 책의 많은 부문에서 대사들이 말한 것을 받아 쓴 것이 사실입니까?
답 : 어떤 것은 그렇습니다. 어느 곳은 말씀한 그대로 받아 쓴 것이고, 대사 어른은 대사분들의 '아이디어'를 말씀해 주시고, 쓰는 것은 저자들의 자유에 맡기고 있었습니다.
문 : 그러나 그 자체가 기적적입니다. 실제로 기적입니다. 어떻게 하여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답 : 당신은 크게 잘못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에서도 멀지 않아서 당신의 논의에 반박할 것입니다. 기적이란 것은 초자연적인 것이라야 하는데, 자연의 법칙을 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근대과학이 인지한 '기적'의 여러 가지 중에 최면술이 있습니다. 그 힘의 한 면은 '암시'로서 알려져 있고, 하나의 생각의 전달이며, 육체의 어떤 병을 치료하는데 쓰여져 성공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몸체가 가깝게 접촉하는 것처럼, 한사람의 마음과 다른 한 사람의 마음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과학의 세계가 인정하지 않고 지낼 수 없을 때가 멀지 않습니다. 두 개의 마음이 공명(共鳴)하여 관련(關連)하게 되어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기관이 자력적, 전기적으로 상호 응답하도록 조화가 되면 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생각을 보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촉(觸)할 수가 없으며, 거리는 마음과 그 대상에서 떨어진 것이 되어 있지 못하나 두 개의 마음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차이가 되는 것은 내적 상태가 서로 틀린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상태의 틀린 것에서 극복할 수 있다면 아무리 거리가 멀어졌어도 생각을 보낼 수 있으므로 기적 아닌 것으로 됩니다.
문 : 그러나, 최면술은 그와 같은 기적적이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답 : 아니요, 하고 있습니다. 최면술사가 피술자의 유기체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이나 말을 표현하도록 피술자의 뇌에 영향을 줄 수 잇는 것은 확인 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에 의한 현상이 나오는 수는 아주 작으나 멀지 않아서, 그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이 좀더 과학적으로 확인된다면, 이와 같은 현상(現狀)이 얼마나 널리 퍼질지 단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최면술의 초보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와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면, 사이킥적,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아데프트'는, 지금 당신의 제한되어 있는 지식에서 '기적'이라고 보고있는 것들이 행하여져도 아무런 이의(異議)가 없게 되어 버릴 것입니다.
문 : 그렇다면 왜, 지금의 의사들이 실험해 보고, 그렇게 행해 보지 않습니까?
답 : 왜냐하면 첫째로, 그들은 '사이킥'과 영적인 비밀과 법척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는 '아데프트'가 아닙니다. 그들은 물질의 좁은 영역 밖으로 나오는 것을 겁먹고 있는 유물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와 같은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그들은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 :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까?
답 : 먼저 자신들의 머리 속에 있는 유물주의의 찌꺼기를 깨끗이 씻어내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문 : 그것은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데프트'들은 많은 신지학도들에 영감을 주고 자신이 말하는 것을 쓰도록 할게 아닙니까?
답 : 아니요, 틀립니다. 그것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의 경우 뿐입니다. 그와 같은 것을 하는 것은 특별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암흑 동포단(어둠 속의 형제들이나 '둑파'들이라고 우리들은 말한다)은 파렴치하지만 실력을 지니고 있는 '아데프트'는 쉽게 해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위를 구속하는 영적인 법칙은 없으므로, 이와 같은 소위 '마법사'는 사람의 마음을 거리낌없이 통어(統御)하여 자신의 나쁜 힘으로 대상의 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따르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대사 어른은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못합니다. 한 번 흑마술(黑魔術)에 빠져들어가면 불사의 자아를 완전히 지배할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상대가 되는 사람의 자유 의지에 전혀 방해를 주지 않고, 그 상대되는 사람의 육체적, '사이킥'적 성질만이 일을 하도록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틀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사 어른과 '사이킥' 관계를 이루고, 완전한 신뢰와 헌신에서 도움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즉, 조건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 사람이 아니면, 대사 어른의 생각을 전해 받을 때 상대되는 사람은 무겁고 혼탁한 '오라' 때문에 대단히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와 같은 문제를 취급할 곳이 못 됩니다. 그 힘이 있다고 하면 그 힘이 지배하는 지성이 있어야 하고 또 힘을 전해 받고 하는 의식적 존재가 있다고만 말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흑마술에 조심하라는 것 뿐입니다.
문 : '흑마술'이란 대체 어떤 것입니까?
답 : '사이킥'의 힘을 악용 또는 자연의 비밀을 악용한다는 것입니다. 즉, '오컬티즘'의 힘을, 이기적이고 죄를 짓는 것에 써먹고 있는 것이며, '암시'의 힘을 이용하여 피술자를 도둑질하게 하고 살인하도록 하는 최면술사 같은 것을 나는 흑마술사라고 말합니다. '파리'의 '그라운세라' 박사와 유명한 회춘법(回春法), 즉 사람의 피에 동물의 분비액을 주입한다는 기분 나쁜 방법 때문에 요즘 의학자에 논란이 심한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진정 무의식의 흑마술입니다.
문 : 그러나 마법 등에 있어서는 중세의 신앙에 가까운 것입니다. 법에서도 그런 것은 믿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답 : 그것은 법률의 문제일 뿐입니다. 식별력이 없으므로 재판관은 몇 차례씩 틀린 결론으로 죄를 범했습니다. 마술이란 말은 미신적인 감이 생겨서 당신을 겁먹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법률은 내가 말하고 있는 최면술의 악용을 범하지 않고 있습니까? 프랑스, 독일에서는 이미 벌을 정했지만, 그것이 마술의 범죄에 벌을 주었다고 하면 분개하면서 부정할 것입니다. 의사들이나, 메스메르술사들에 의한 '암시'의 힘에서 온 효력에 대하여 당신이 현실로 믿는다면, 나쁜 생각의 동기에서 쓴 힘도 똑같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 힘의 악용을 인정한다면 마술을 당신도 믿는 것으로 됩니다. 선(善)일 때만이 믿고 악의 경우에는 믿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대조(對照) 할 수가 있는 밤이나 어둠이나, 악이 없다고 한다면 낮이나 빛이나, 선(善)도 당신의 의식 속에서 나타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문 : 그렇지만 당신이 위대한 '사이킥'의 힘이나, 마술의 힘이라 말하는 것을 믿으면서 마술에 대한 말을 하면 웃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답 : 그것이 무엇을 입증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비논리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문제입니다. 우리들은 보다 신성한 '아데프트'들의 존재를 알고 또, 나쁜 불결한 '아데프트'들 즉, '둑파'들이 존재하는 것을 믿습니다.
문 : 그러면 대사 어른이 계신다면 왜 여러 대중 앞에 나와서 '블라바츠키' 여사나, 협회에 대하여 수없이 공격하는 것들에 대하여 반박을 하지 않습니까?
답 : 무슨 공격 말입니까?
문 : 대사 어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둥, 그들은 '허깨비'이고 여우 소리를 내는'마하트마'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그녀를 비판하고 상처를 주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답 : 그러한 비난이 왜 그녀에게 실제로 상처를 줄 수가 있습니까? 대사 어른이 존재한다고 말해서 재산이나, 명예를 얻은 적이 있습니까? 그녀는 모욕과, 욕설이나 중상을 받은 것 뿐이며, 만약 그녀가 훨씬 이전에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을 배우지 않았다면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대체로 그러한 비난(非難)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오히려 그런 것에 관하여 경의(敬意)를 표하거나, 만약 그녀를 그렇게 비난하는 우둔한 자들이 자신의 맹목적인 미움에 열중해 있지 않았다면, 말을하기 이전에 생각을 고쳤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대사 어른들을 만들어 냈다고 가정한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됩니다. 즉, 그녀가 지금까지 신지학의 책에 쓴 철학의 모두를 그녀가 발명한 것으로 되고「비밀불교」의 재료가 된 편지의 수기자(手記者)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씨크릿 독트린」안에 있는 가르침도 모두가 그녀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됩니다.「씨크릿 독트린」이란 책을 만약 세상에서 공정하게 다룬다면, 과학설에서 빠져있는 요소를 많이 보강하고 있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향후 100년이 지나면 과학은 실제로 그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비난자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블라바츠키' 여사는 그녀 자신이 말하는 것을 믿는 수백 명의 사람들(많은 영리한 사람이나 과학자를 합쳐서) 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들 모두를 기만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말하는 것이 진짜라면 '블라바츠키' 여사는 몇 사람의 '마하트마'들을 한 뭉치로 묶어 놓은 것이 됩니다. 소위 '마하트마'의 편지 안에는 문체가 아주 다른 것이 많이 있는데, 그녀의 비방자들은 전부를 그녀가 쓴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 : 그것은 소문 그대로입니다. '사이킥' 연구협회(SPR)의 보고에서 그 이름을 후세에 전달할 만합니다. 당대에는 누구도 그와 겨눌 수 없는 숙련된 '술사'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것은 그녀에게는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답 : 그것이 사실이고, 또 편견에서의 광신적인 유물론자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비난이 들려와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을런지 모르겠으나, 실제에 있어서 그녀는 개인적으로는 그와 같은 것은 모두 경멸하고 있고, 대사 어른들은 그저 웃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거듭 말합니다.
문 : 그러나 그녀의 적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입증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답 : 그들이 한 것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판사나 배심원이나 검찰관을 임명한다면 그렇게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또래나, 우리들의 적이 동조할 뿐이지 누가 그것을 믿습니까?
문 : 'SPR'은 문제를 조사하기 위하여 대표를 인도에 보내지 않았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결론에서 대표인 청년이 행한 조회 같은 것이나 검증을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그 청년의 보고서를 읽어본 변호사는 나의 친구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이렇게 바보같고 모순 투성이며 근거가 없는 '가설'에 꽉 차 있는 것은 못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중대한 혐의(嫌疑)가 됩니까?
문 : 그렇지만 보고서는 협회에 큰 해를 주었습니다. 왜, '블라바츠키' 여사는 적어도 법정에 나와서 자신의 올바른 것을 입증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답 : 첫째로, 신지학도는 모든 개인적 모욕에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 그녀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협회나 '블라바츠키' 여사가 그러한 사기에 돈을 써야 할 이유가 못됩니다. 끝으로 협회나 '블라바츠키' 여사가 자신들의 주의(主義)에서 진실이 아니라는 말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문 : 말씀을 잘 하십니다. 만약 그녀가 깨끗이 모든 것을 논박했을 때 진정 신지학을 위하여 좋았을 것이라고 당신은 생각하지 않습니까?
답 : 좋았을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가령 그전부터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국의 부심원이나 판사가 '사이킥' 현상의 진실성을 인정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거기에 그들은 노서아(露西亞)의 간첩이나, 무신론과 불신심 등으로 우리들에게 대항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중상을 생각해 보면 법정에서 결과는 자명해질 것입니다. '사이킥' 연구자들은 이러한 모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우리들을 앞에 놓고, 우리들을 희생시키고 자신들이 도움을 받겠다는 비겁한 수단을 택했습니다.
문 : SPR은 지금 '마하트마'들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하트마'들은 블라바츠키 여사의 머리에서 만들어 낸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답 : 그녀가 이러한 우둔한 일을 하려고 생각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간에 그러한 말들에 대해서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사람들이 대사 어른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블라바츠키' 여사는 늘 말합니다. 대사 어른의 이름과, 장대한 이상이 지금과 같은 파렴치에 정복당하는 것보다, 대사 어른이 '블라바츠키' 여사의 뇌에 회백질(灰白質)이란 '마하트마'의 나라에서만 계시는 것으로 되어, 말하자면, 그녀 자신의 안에 있는 의식의 깊숙한 곳에서 그녀가 펼쳐 보인 것이라고 사람들이 진정 믿어주는 것이 훨씬 좋다고 '블라바츠키' 여사는 공공연(公共然)하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그녀가 사람들이 대사의 존재를 의심해 분개하고 항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증명하려고, 논박하려고도 별로 노력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좋을대로 생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문 : 그러면, 틀림없이 대사 어른들이 계십니까?
답 : 우리들은 계신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나 어떤 신지학도들이나, 탈퇴회원 조차 대사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증거를 전혀 알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에 대해 '블라바츠키' 여사는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만약 그녀가 대사 어른을 생각하낸 것으로 만들어 내었다면, 그와 같은 철학에서는 아주 작은 수의 사람들밖에 얻어내지 못한 실제적인 지식도 그녀가 만들어 낸 것으로 됩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녀 자신의 설 자리가 어디입니까? 대사 어른이 계시거나 안 계시거나 아무 상관 없습니다. 좌우간, 그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가 없게 됩니다. 만약 대사 어른이 깨우쳐 주신 생각이나 지식이 원리적으로 좋은 것이고, 평균적인 지성보다 높은 지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받아 들여진다면 왜, 이 문제로서 이러쿵 저러쿵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녀가 사기꾼이라고 하는 것이 증명되지 못하고 언제까지라도 심리 중입니다. 그렇지만, 누가 생각해 낸 것이든 '대사 어른'에게 가르침 받은 철학에 한 번 이해되면 가장 훌륭한, 가장 유익한 철학의 하나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것입니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적들에게 자신이「새」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자신이 공작이 날개를 펴고 있는 장엄함이 되는 것을 피한 것입니다.
문 : '리타'라는 협회의 사람들 중에는 현명하고 좋은 사람들이 있는데 많은 착오가 생기는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답 : 대사 어른은 협회나 창립자에게도 지도한 적은 없습니다. 대사 어른 중에서 협회를 지도해 주겠다고 하신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대사어른은 그저 지켜주고 보존해 주는 것 뿐입니다. 이것은 어떤 클럽이 생겨도 협회에 손해를 줄 수가 없고, 안(內)에서 오는 갈등이나 밖(外)에서 오는 무서운 공격으로써 협회를 넘어뜨릴 수가 없는 사실로 충분히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대사 어른은 현재보다 미래를 염두해 두고 계십니다. 잘못한 일이 발생될 때마다 지혜가 더해져 옵니다. 신약성서에서 주인이 5백원(단돈)이라는 돈을 주고 하인을 내보냈습니다. 주인은 어떻게 하면「돈」을 곱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하인은 받아서 보관하기 위해 돈을 땅에 묻어두는 어리석은 하인도 있었으나, 그것을 못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경험과 장점에 의하여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훨씬 높은 '대사 어른' 즉 성령에 의하여 자신들은 지도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기독교회는 옛날부터 많이 틀린 것이 있었고, 피비린내 나는 범죄를 많이 범하고 있습니다. 가설적인 것인데도 성령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버리는 기독교도는 드문 것입니다. 누군가 성령을 본 사람도 없고, 그리고 성령이 교회를 지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기독교회의 역사는 명백히 성령의 지도를 받는다고 주장하는 모순이 있습니다. 인간은 틀리고 착오가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신성한 이름과 말을 잘못 쓰는 것
문 : 그러면 들은 바에 의하면 신지학 저자 중 많은 사람들이, '대사어른'의 영감을 받았거나 대사 어른을 보았다, 그리고 서로 말을 해 보았다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까?
답 : 사실일런지도 모릅니다. 또 사실이 아닐런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어떻게 내가 구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입증 책임은 저자에 있습니다. 아주 적은 수의 저자는 확실히 거짓을 말하고 있었고, 또 이러한 영감을 자만할 때 환각이 생기기도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저자)은 진짜 위대한 '아데프트'로부터 영감을 받았습니다. 나무는 그 과실을 보고 그것이 좋다, 나쁘다, 판단합니다. 신지학도가 쓴 것이나 말한 것으로, 할 것이 아니고 그 저자의 행동을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모든 신지학의 책은 저자가 주장하는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그 내용의 가치에 의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문 : 그렇다면 '블라바츠키' 여사 자신의 저작 가령「씨크릿 독트린」에도 그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까?
답 : 물론입니다. 그녀는 서문에 대사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공표한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녀가 근간에 쓴 것에는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가장 훌륭한 신지학도이면 '대사 어른'의 이름이 결코 신지학의 책에 나오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외도 있습니다만, 그런 책은 많은 것에서 불완전했으며, 확실히 틀린 것이 있습니다. '대사 어른' 중에서 두 분의 이름이 모독되어 있습니다. 이 두 분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 영매는 거의 없습니다. 상업 목적의 속임수의 협회는 모두가 우리들의 '대사 어른'의 지도를 받는다고 큰소리로 말 합니다. 빈욕이나 허영이나 무책임한 영매 성질에서 나오게 되는 이와 같은 짓들을 하는 사람들의 죄는 많고 또 무거운 것입니다. 힘이나 지식이나 영적 진리의 비밀은 아무 가치가 없고, 황금에 눈이 팔려 있어서 협회에 돈을 뺏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가장 나쁜 것은 '오컬티즘'의 신성한 이름과, 그것을 지키는 신성한 분들이 이와 같은 불결한 것에 끌려들여서 더러운 동기와, 부도덕한 수단에서 더러워졌습니다. 이와 같은 가짜나, 사기꾼들 때문에 불명예나 나쁜 평판을 가져오고, 몇 수명의 사람이 진리의 길로 들어오지 않게 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만, 지금도 열심히 일하는 신지학도는 모두가 이러한 신성한 이름을, 사실들을, 여러 대중 앞에서 말했다는 것을 마음 속깊이 후회해야 하며, 믿을 수 있는 헌신적인 동지들만이 그 비밀을 지키도록 해 주기를 진심으로 부탁하는 바입니다.
문 : 근래에 와서 대사의 이름은 종종 듣지만 요즘에 와서는 '대사 어른'이란 말은 사람들로부터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답 : 그렇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알아낸 것이나 들은 것을 빨리 알리거나 출판하지 않고 침묵이라는 현명한 방법을 택했다면, 이러한 모욕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약 14년 전, 신지학협회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심령계의 '영'들 이야기뿐이였습니다. '영'들의 이야기는 어디서나, 누구든지 말하고 있었으나 살아계시는 '아데프트'들이나 '마하트마'들 또는 '대사 어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꿈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파라십자'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없고, 또 '오컬티즘'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생각하는 것이였습니다. 지금은 아주 딴판이 되었습니다. 불행한 것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처음 말하게 되고 동양의 '아데프트'들이나 '대사 어른'들이 계신 것과, '오컬트'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처음 알린 것이 우리들 신지학도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이름이 일반적인 것으로 되었습니다. 신성하기 짝이 없는 분의 이름이나, 사실에 대한 모독의 결과는, 말하자면, '카르마'가 지금, 우리들 앞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런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으나 그 뿌리는 모두가 신지학협회와 그 창립자들이 그 방면에 자극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적은 우리들의 실수 때문에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르침에 반대하고 있는 가장 최근 '아데프트'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그 이전에 쓴 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명백한 거짓말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쓴 사람과 그에게 허위의 생각을 가지도록 한 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필자 자신이 너무 무지하여 그런 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쓸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넣어준 자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고, 지성이 발달한 자일수록 집념이 깊고 파렴치합니다. 이와 같은 가짜 '아데프트'는 한 사람이 아니고 몇 명 있습니다. 신지학 협회를 파괴할 도구로써 쓰여진 '아데프트들'의 계열은 12년간에 '엔마하 데이친 부리덴' 여사가 쓴「예술매직」과「영의 나라」안에 '루이'라 하는 자칭 '아데프트'에서 시작하여 지금, 신지학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심령주의자들이 쓴 책 중에「이집트의 빛」의 자칭 '아데프트'인 저자로서 끝내고 있습니다.〈H.P.B〉문집 1권 466~7P 올코트의 옛 일기집 1권 12장 참조) 그러나 이미 우리들의 경솔한 곳에서, 저질러 놓은 일들은 슬퍼해도 소용없습니다. 우리들이 경험한 것들에 조금이라도 빨리 용서를 받아 많은 사람이 대사로 가는 길이 쉽게 열릴 수 있게끔 해 주시도록 참고 기다려 보는 것 뿐입니다. 대사 어른의 이름 아래 지금, 여러 곳에서 많은 죄가 새로 생겨나고, 범해지는 것이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문 : '루이'는 '아데프트'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답 : 우리들은 누구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비난하는 것을 상대에게 주고자 합니다.「예술매직」등의 심령주의의 저자가 이와 같은 '아데프트'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그 여사가 과거 수년간에 우리들이나, 신지학에 대하여 말하거나, 쓴 것에서 나온 비난보다는, 우리들이 말한 것이 훨씬 적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신비적인 '미션'이 나오는 엄숙한 장면에 '아데프트'라고 말하는 분이 영국의 '그리니치'에서 로수경(卿)의 망원경을 통하여 영들을 보는 장면의 것들을 읽으며 유령의 나라 제1장 133p 나는 그 '아데프트'의 과학적 지식(영적 능력)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느낍니다. 그 책 안에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보고 있었던 망원경은 실제 있어서 '아일랜드의 하손수타운'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거기에서 옮겨진 일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스승 제자들도 간혹, 틀린 것들이 있는 것이나, 이것은 그와 같은 실수치고는 너무 심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대사어른'의 가르침을 지금 파괴해 보려고 하는 것은 이런 '아데프트'들 입니다.
문 " 이것에 대하여 귀하가 느끼는 심정을 알겠으며,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말씀하시고 또 설명하신 생각 안에 내가 몇 가지 질문하고 싶은 문제가 있습니다.
답 :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답하겠습니다.
결론
신지학 협회의 미래
문 : 신지학의 미래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하고 있습니까?
답 : 신지학도의 학문에 대하여 말한다면, 신지학이란 것은 과거의 무수(無數)한 주기 중 언제나 존재해 온 것이며 미래에도 무궁하게 존재할 것이라고 답합니다. 신지학이란 것은 영원한 진리란 뜻도 됩니다.
문 : 아니요, 나는 신지학협회의 전도를 듣고 싶어한 것입니다.
답 : 협회의 미래는, 지금까지의 모든 지도자들과 창업자들이 죽은 후, 일을 계속해 비이기와 열의로써 헌신의 정도가 끝까지, 그들이 가지는 지식과 지혜의 깊이에 달려 있습니다.
문 : 멤버들이 이기적이지 않고 헌신적이라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들의 지식이 다른 특성과 같이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나와 있는 책들이나, 지금도 끊임없이 쓰고 있는 것들로서 충분하지 않습니까?
답 " 비교의 기술적인 지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물론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는 하나, 그것보다도 협회의 지도적인 후계자가 편견이 없고 냉철한 판단력을 가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지학협회의 시도는 결국에 실패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어떤 종파의 교의를 만들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살아있는 진리라야만 주어질 수 있는 활력을 모르게 되어 버리고 말 가능성입니다. 우리들 멤버들은 모두 어느 종파에 속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자라났으며 또 그 사람들 모두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신들의 세대의 세상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판단이 흐려지고, 무의식으로 그러한 영향을 받고 있어서 편견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만약 이와 같은 환경적 편견을 극복해 자유를 얻어 나올 수 있도록 된다면 또, 어린시절에 일찌기 그것을 알고 우리들 가르침을 받아 그러한 것들의 미로(迷路)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협회는 많은 발전이 계속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시들어서 죽은 잔해만이 남을 것입니다.
문 : 그러나 그러한 위험을 넘어서 방지할 수 있다면?
답 : 그때 협회는 오랜 세월 계속 살아남을 것입니다. 종교, 의무, 박애에 대하여 관대하고 고상한 사상을 가지고, 사고력과 지성을 겸비한 많은 사람들이 협회를 서서히 변화시켜서 그 사람들에게 심어들어가서, 서서히 착실하게 교의나 독단에 사회적, 계급적, 편견에 철퇴를 내리고 두동강을 내어 협회는 인종적, 국민적 반감의 울타리를 부수고 모든 인간의 동포애를 실현 해내는 길을 열게 할 것입니다. 근대인이 도달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과 철학을 통해 서구인은 동양을 이해하고, 그 진화를 알게 될 것이며 서구적인 징후가 보이기 시작한 미국 속에서의 경쟁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는 평화의 우애가 반영될 것입니다.
문 : 정말 대단한 비젼이군요! 그러나 불과 100년 동안에 이러한 것이 모두 성취할 수 있다고 당신은 생각하십니까?
답 :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각 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은 내가 말한 것처럼 '대사 어른'들에 의하여 대단히 명확한 방법으로 인류의 영적인 진화를 도우려고 시도합니다. 각 세기의 끝머리에서 영성(신비주의라는 것이 좋다면 그렇게 말하세요)의 유출과 격변이 생겨납니다. 세상에는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 '대사 어른'의 대리로서 나타나서 많고 적은 '오컬트' 지식을 가르쳐 줍니다. 만약 당신이 알고 싶다면 상세한 역사의 기록이 있는 한, 세기마다 이러한 운동이 있었다는 것을 추적할 수가 있습니다.
문 : 그것이 신지학협회의 미래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답 : 우리들 협회가 생겨나 19세기에 시도한 것이 전보다 잘 되어 20세기쯤에 이루어져 협회는 잘 조직되고, 활발하고, 생산적인 단체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의 정신 상태는 이 가르침이 넓어져가면서 정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말하고 있는 사람들과 편견과 독단적 환영(幻影)같은 것도 조금씩 정화될 것입니다. 그뿐이 아니고 손쉽게 사서 볼 수 있는 책들이 많이 나와서, 그 다음에 새로운 진리를 전하는 사람을 환영할 수 있는 단체가 생길 것입니다. 새로운 진리를 전하는 이 사람은 자신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나오는 진리를 표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말이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조직이 준비되어 있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조직은 단순한 기계적, 물질적 장해나 곤란을 그의 길에서 덜어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회가 주어진 사람은 어느 정도의 일을 해 내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요.
번역을 끝내고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왜 만물의 영장인가? 인간은 다른 동물이 가지고 있지 않은 사고력, 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물과 다른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한 뇌(腦)를 가지고 있어도 그 뿌리의 원초(原初)인 신의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오늘과 같은 물질문화를 이루어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도 무한한 인류의 진화발달을 기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숨어 계시고 인간으로서는 볼 수 없고 알수없는, 오직 유일한 우주신(우주주인)이, 마음(宇宙心)의 끝이 없는 사랑으로 인간의 지성이 계발되도록 노력하여 주시는 덕택이며, 우주신은 처음부터 이러한 목적으로 인간에게 뇌를 주었고, 우주심은 우주속의 구석 구석까지 편만(遍滿)하여 있고, 그의 지혜(智慧)는 끝이 없이 인간에게 내려 보내시고 있다.
이러한 지혜를 우리들은 신지라고 하며, 이런 공부를 하는 것을 신지학이라고, 우리들 인간이 이름 붙여 말한다. 신지학은 어떤 의미나 해설을 하여 설명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으로, 고대부터 금기(禁忌)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지혜는 인간이 가지게 된 지성의 뿌리, 바로 그것이다. 신지는 어느 종교나 단체의 전유물(專有物)이 될수 없고, 신지에서 나오는 신지학은 인간 모두의 공유물(公有物)로서 누구든지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도와주기 때문에,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된 종교의 창시자(創始者)에 의하여 인간세상의 여러개의 종교가 탄생하였다. 그들 창시자는 위대한 인류의 지도자였으며, 또 오늘에 와서는 종교보다도 각종 전문부문 지혜를 많이 내려서 과학자를 탄생시켜, 인류의 진보 발달에 획기적 역할을 하여 지도자로서 존경 받게하고 있다. 이러한 인물을 우리들은 신지학의 영웅이라 말한다.
또 앞으로도 우주가 존속(存續)하는 동안 인류사회에서는 더 많은 신지학의 영웅들이 탄생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신지학을 알고싶어 하는 사람에게, 신의 지혜의 뿌리를 공부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신지학의 열쇠」를 읽어 보도록 권한다.「신지학의 열쇠」의 저자 '블라바츠키'는 신지학 초보자를 위하여 문답식으로 알기 쉽게,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도록 썼다.
무지(無知)한 사람들에게 신지학을 알리고자「신지학 입문」에 이어, 이번에는「신지학의 열쇠」를 내놓았다. 앞으로도 방대한 신지학 서적에서 골라,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책을 신지학도를 위하여 발간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처음 영문 원서(原書)를 번역의뢰(依賴)하였던 바, 철학적이고 어려운 고대(古代) 말이 있어 번역할 수 없다고 거절을 당하였다. 그래서 국제 신지학 협회 일본롯지의 다나카(田中)회장에게 부탁하여 일본에서 발간 준비중이던 일본어 원고 사본을 얻어서 틈틈이 번역하여 협회의 교재를 쓰고 있던 중에, 지금 시중에 판매하고 있는「신지학입문 및 대사의 발밑에 엎드려」를 번역하여주신 김순민선생께서 영문원서와 대조하여 많은 점검(點檢)을 하여 주셔서 이책을 시중에 내어 놓게 되었다.
'블라바츠키' 저자가 말한대로 이 책은 "신지학의 문을 여는 것"이다. 신지학은 무엇이며, 신지학 협회는 무엇이고, 신지학도들은 무엇을 어떻게 실천하는가를 잘 설명하여, 초보자의 이해를 도와주는 책이다. 더욱 깊숙한 곳까지 연구하여보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신지학의 많은 책 중에서「씨크릿 독트린」「월드안 이수쓰」AㆍP 씨넷트 저서「마하트마의 편지」등을 읽어보도록 권하지만, 신지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분은 어려운 이론체계의 학자가 되는 것보다, 인간의 그 본질을 알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어가야 하느냐는 데에 그 초점을 맞추고, 전체적인 면을 파악하여 가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우주에는 지혜(知慧)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본이 선(善)에서 나오며, 우주가 존속하는한 계속 인간에게 흘러 내려 올 것이며, 거기에는 '마하트마'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신지학도 여러분도 빠른 템포로 '마하트마'가 되어 다음 세계(世界)에서는 지혜를 인간에게 내려보내는 일들에 참가하는 역할을 하여주시기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들 신지학에서는 어떤 특정한 신(神)을 내세우는 종교적 교의는 맹목적인 것으로 부정하며, 신과 인간이 같다는 신인동형론(神人同形說)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것을 멸시한다. 영원(永遠)의 진리, 진실만을 신지학도는 추구하는 것이다. 때문에 신지학도가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대사의 발밑에 엎드려」 저서에서 나와있는 '식별력'이다. 이러한 '식별력'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가능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것을 확증(確證)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사고력을 동원하여 궁극(窮極)의 진실을 파악하려는 것이 신지학도들의 일이다. 그리하여 알아낸 영지(英知)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지고(至高)한 것이며, 그 영지는 만물에게 사랑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야하며, 이기적으로 악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신지의 열쇠가 도덕적인 사람에게 주어지도록, 진리를 널리 알리고 악용을 방지하는 것도 신지학도의 의무이다. 끝으로, 이 책을 출판하는 데 협조하여 주신 일본 신지학 협회 회장 다나카 에미고(田中恵美子)여사 및 번역에 협조 감수하여 주신 김민순 선생에게 감사하며, 또 교정(校正)에 참여하여 주신 분 및 여러가지 충고 및 출판에 물심양면으로 협조한 신지학 회원 여러분에게 이 지면을 통하여 거듭 감사한다는 뜻을 표한다.
국제 신지학 협회 한국롯지 임 길 영
1. 암모니우스와 그 제자들을 유추학자(類推學者; Analog)라고 말하고도 있다. 와일더 교수(Alexander Wilder)는 그의 저서 "절충 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유추학자들은 모든 신성한 전설이나 그 해설, 신화나 신비한 일을 유추 및 합치(合致)의 원칙에 의하여 설명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외체(육신체)에서 일어났다고 유추되는 일들을 인간혼의 표현작용 및 경험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신플라톤파라고도 불린다. 신지학 또는 절충 신지학체계는 일반적으로 3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되어 있으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os)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기원은 훨씬 이전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초기의 이집트 승려 포트 아문(Pot Amun)에서 그 체계가 인유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와일더 교수는 '포트 아문'이라고 하는 이들은 고부도어이며, 지혜의 신 '아문'에게 종사하는 사람이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2. 신지학은 '브라함, 베더 및 신성한 지식'과 같은 뜻이다. 절충 신지학의 목적은 세 개로 나누어진다. ① 하나의 절대자(不可知者), 초월적 실상, 모든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근원(根源)인 무한한 본질을 믿는 것. ② 인간의 영원불사성(不死性)을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주의 발산(發散)이며, 동일한 본질이기 때문이다. ③ 신의 기적(Theurgy), 또는 '신성의 작용, 혹은 신들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 Theurgy라는 말은, '신들'을 뜻하는 'theoi'와 '일'을 뜻하는 'ergein'이라는 희랍어에서 온 것이다. 이 용어는 매우 오래된 것이나, 비의(秘儀)와 용어이기 때문에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신비적 신앙(Mystic Belief)이다. 즉, 인간이 원시적·청정(淸淨)한 상태로 되돌아가면 인간은 신들을 움직여 신성한 비의를 전수받을 수 있고, 때로는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 신을 볼 수도 있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현재 심령주의라고 하는 것의 초월적인 면이다. 그러나 대중의 오해와 남용(濫用)때문에, 이것은 마술로 간주되었고 일반적으로 금하는 바가 되었다. 이암블리쿠스(Iamblichus)의, 희곡적 신의 재통 관행(慣行)으로, 아직도 일부 현대 유태 신비철학 사이에서는 의식적 마술로서 남아있다. 현대 신지학은 이런 종류의 마술이나 강령술(降靈術)을, 위험한 것으로서, 기피 또는 배척한다. 진실하고 신성한 신의 창조성은 거의 초인적인 순수성과 성스러운 생활을 요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영매(靈媒)나 검은 마술로 격하된다. 암모니우스 사카스(A. Saccas)의 직제자(直弟子)로서, "신의 가르침을 받은 자"(Theodidastos)라고 일컬어지던 플로티누스(Plotinus)와 그의 추종자 폴퓌리(Porphyry)는, 처음에 신의 기적(Theurgy)에 반대했으나, 결국은 "이암블리쿠스'의 감화를 받아 납득하게 되었다. '이암블리쿠스'는 자신의 스승인 아바몬(Abammon)이라는 유명한 이집트 승려의 이름으로「신비」란 책을 써서 냈다. 암모니우스는 기독교인 양친 사이에 태어나서 어린시절부터 독단적인 심령주의적 기독교에 반대하고 신플라톤학자가 되어, 야콥 뵈메(J.Bohme)나 그 외에 다른 위대한 예언자나 신비자들과 같이, 꿈이나 비전(Vision)에 나타나는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디오디다토스(Theodidaktos)', 즉, '신의 가르침을 받은 자'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는 모든 체계의 종교를 조화시키고, 같은 줄기를 가진 하나에서 나온 것임을
3. 유태교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창시된 것은 필라멜피우스크 왕 치하에서였고, 그때부터 희랍의 학자들은 '바빌론 랍비' 학교의 위험한 경쟁자가 되었다.「절충철학」의 저자는 이에 대하여 매우 적절하게 말하고 있다. 불교, 베단타 및 마기 등의 철학은 그 시대의 희랍 철학과 함께 상술되어 있다. 사려깊은 사람들이 논쟁을 그쳐야 하고 다양한 교의중에서 하나의 체계를 추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파네누스(Panaenus)와 아테나고라스(Athnagoras)및 클레멘트(Clement)는 플라톤의 철학에 완전히 정통했고, 동양의 세 철학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와일더 저, 동서 4P)
4. 모세임(Mosheim)은 암모니우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뿐 아니라, 여러 야만국의 모든 철학자들도 본질적인 점에서는 서로가 완전히 같다는 것을 생각하고, 암모니우스는 여러 교파의 다양한 교의가 같은 뿌리에서 나와 같은 목적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자기의 책임이라고 하였다. 에딘버러 백과사전의 암모니우스 필자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현대 신지학도의 신념에 대하여 서술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데오디닥토스(Theodidaktos)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주 및 신에 관한, 이집트에서 받아들여진 교의(그 비의는 인도의 것이었다)를 채용하여, 우주와 신성은 일체로서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세계의 영원성에 관해서는 …… 그리고 일반의 사람들은 나라의 법칙과 자연의 지시에 따라야 살아갈 수가 있고 현자는 명상으로 마음을 높여야 한다는, 도덕적 원리의 체계를 설정하였다.'"(와일더 저, 동서 5P)
5. 「신플라톤학파와 알케미」의 저자 A. 와일더 박사는 영적 사진술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혼"은 미래, 과거 및 현재의 사실이나 생겨난 일들을 기록하는 '카메라'이며, '마음'은 차츰 그러한 것을 의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제한이 있는 이 세상의 하루를 초월하면, 모든 것이 하루(一日)가 되고 하나의 상태로서 시간과 공간의 구별이 없다. 과거나 미래나 현재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죽음은 이 세상의 마지막 법열(法悅)이다. 그러면 혼은 육체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리고 혼의 더 고상한 부분은, 고급의 성질과 합일하고, 고급의 존재와 지혜 및 예지능력(豫知能力)을 같이 하는 자가 된다. 신비가들에게는 진짜의 신지학이란 것은 티아나(Tyana)의 '아폴로니우스'가 설명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즉, 나는 현재와 미래를 깨끗한 거울에서 반드시 확실히 볼 수가 있다. 현자는 지구의 수증기나 공기의 부패를 가리지 않아도 사건들을 예견할 수가 있다. '테오이', 즉 신들은 미래를 보고, 보통의 사람은 현세를 보고, 성자는 지금 막 생겨날 일을 볼 수가 있다."(15P) 그가 말하는 성자들의 신지학은, "신의 나라는 자신의 육에 있다."고 하는 단언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6. 소속회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지학협회의 어느 특정한 지부에 입회한 회원이고 무소속 회원이란 협회에 관계를 갖고 있는 회원으로서 인도의 본부에서 회원증서를 받고 있으나 특정 지부나 롯지에 관계가 없는 회원을 말한다.
7. 위와 같은 경우 이 세상에 내려오는 것은 죽은 자의 영혼(spirit)이 아니고 청정된 영적 혼으로 올라가 살아잇는 사람의 영(soul)들이다. 실상은 상승이나 하강이 없고, 영매의 상태가 변화한 것이다. 영매의 체는 마비 또는 망아(trance)의 상태에서 영적 자아가 그러한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고 육체를 갖지 않는 영과의 사이에 영적으로 서로 잡아당기는 힘이 일어났을 경우 꿈속에서 종종 일어나는 것과 같이 그들 둘은 서로 통신이 될 수 있다. 영매적인 성질과 감수성이 없는 성질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즉 영매에서 해방된 영은 망아(忘我 ; trance)에 들어간 육체의 수동적 기관(器官 ; 五官)을 통하여 말하거나 의사대로 행동하거나 쓰도록 영향을 주는 기회(機會)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자아는 육체에서 분리된 실제의 생각을 육체가 잠자는 동안에 자아(Ego)가 사랑하던 사람이나 죽은 사람과 교신을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자신의 생각과 같이 하도록 인간의 말로서 마치 산울림처럼 반복시킬 수가 있다. 그러나 극히 적극적인 사람의 수동성이나 감수성이 없는 기관은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육체가 수면 중, 사랑하고 있던 죽은 사람들과 자아가 자유롭게 어울리지 못하는 인간은 거의 없다. 그러나 능동성과 육체와 뇌의 비감수성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그 사람은 기억 속에 회상하지 않고 극히 아득한 꿈같은 것으로 사라진다.
8. 이집트인, 그리스인, 로마인과 같은 위대한 문화적 국민의 비의는 승려의 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되어 왔다. 그러나 장미십자회원(十字會員 ; Rosicrucian)조차도 반은 미치광이 반은 불량배였다. 장미십자회에 관한 여러 가지 저술이 있다; 2-3년 전에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초심자가 연금술(Alchemy)이나, 배화철학자나, 일반의 신비주의의 문제의 대비밀과 또는 신성의 비밀을 알고 있는 그노시스(Gnosis) 교도라고 말하며 큰 소리치고 있다. 그러나 옛부터 이집트, 인도, 칼데아(Chaldes) 아라비아 등의 비의 제자(Hierophants)들은 그리스나 구미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나 성자들과 같이 지혜의 신성과학의 이름 아래 많은 모든 지식을 포함시켜 왔다고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예술과 과학의 근본을 본질적으로 신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비의를 가장 신성하다고 생각했고 또 에레우시스(Eleusis) 비의를 비전받은 바 있는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Clemens Alexandrinus)는 "그 교의는 인간은 모든 지식의 구극(究極)을 포함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플라톤과 클레멘스는 둘이 모두가 불량자이고 바보였을까?
9. 세리는 당시 많은 도적이나 소매치기와 같이 생각되었다. 유태인들 사이에서는 세리란 명칭이나 직업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사원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마태복음 18장 7절에는 이교도와 세리를 같은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세리란 인도 그리고 기타 영국의 속령(屬領)에서 일하는 영국인 관리와 같은 지위를 가진 ‘로마’의 세금수금원에 불과한 것이었다.
10. 중세기의 끝 무렵 도덕적인 영향력으로 노예제도는 구라파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유럽사회에 뻗어있던 도덕의 힘을 누르고 인류가 지금까지 거의 알지 못했던 악의 무리를 지상에 풀어주는 두 가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인간을 상품으로 하는 거래이다. 사람이 많은 미개의 해안으로의 첫 항해였다. 그곳에서는 인간이 예사로 상품화되었다. 또 하나는 노동력을 수입하기만 하면 번쩍이는 부의 금광을 개척할 수 있는 신천지의 발견이었다. 400년 동안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나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아프리카’의 해안에서 잡혀 외국 상인들에게 팔아 넘겨진 것이다. 그들은 무서운 중앙 항해(노예 무역으로 아프리카 서안과 서인도 제도로 연결되는 항해)동안에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을 한 곳에 둔 갑판 아래서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공평한 역사학자 반크로프트(Barncroft)에 의하면 325만인 중 25만인은 그 파멸적인 항해에서 죽어 바다에 던져졌다. 남은 자는 표현할 수 없는 광산, 사탕수수 밭의 농부로서 고통스러운 노동을 하는데 팔렸다. 이런 큰 죄의 책임은 기독교회에 있다.「가장 신성한 삼위일체의 이름 아래서」스페인정부(로마카톨릭)는 50만 인간의 매각을 허가하는 책약을 10회 이상 체결하였다. 1562년 존 호킨스 경(Sir John Hawkins)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 그것을 신성한 예수의 이름을 붙여놓은 배로 운반하여 서인도 제도에 판다는 악마적인 사명을 가지고 풀항하였다. 또한 신교를 믿는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런 비인간적 상행위에 처음 시작한 영국인의 성공에 대하여 “쇠사슬로 잡아맨 독특한 피부색의 반무아인 다른 말로 한다면 수갑을 찬 니그로 노예”의 그림이 있는 귀족 문장을 주어 그의 공을 칭송하였다.「십자가(十字架)의 정복」회의론 저널(Agnostic Journasl)에서
11. 기타의 부문이라는 것은 동종학도(同宗學徒)들로서 구성되어 있는 지부 또는 롯지, 혹은 요즘 ‘인 파티버스(In Partibus)라고 과장하며 부르는 지부 등을 뜻함.
12. 아인 소프(Ain Soph) 무한, 무제한, 자연 안에 있으며 자연과 같이 있는 비존재, 그러하나 비존재(A being)는 아니다.
13. 활동하지 않는 영원한 원리가 어떻게 발산할 수 있겠는가? 베단타(Vedanta)의 파라브라흠(Parabrahm)은 전혀 이러한 것들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칼데아 카발라(Chaldean Kabala)의 아인 소프(Ain Soph)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모든 것의 마하만반타라(Mahamanvantara) 대우주현현기(大宇宙顯現期) 즉 새로운 생명주기(New life cycle)의 시초마다 언제나 감추어져 있다. 이해불능한 하나의 원리(Principle)로부터 적극적이고 창조적 힘(로고스)을 유출(To emanate) 시키려는 영원하며 주기적인 법칙이다.
14. 아누기타(Anugita)라는 책에는 같은 교리(Doctrine)가 꽉 채워져 있다.
15. 크리스찬 사이언스 등의 ‘부정파’란 것은 치료사들의 새로운 파로서 영은 고통도 없고 병도 없으며, 환자가 자신이 부정하는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즉 영 이외의 일절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모든 병이 낫는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종류의 자기 최면술이다.
16. 불타는 이니쉬에이션(비전)을 받은 제자 아난다(Ananda)가 침묵한 이유를 물었을 때 단순명쾌한 답을 했다. 올덴버그(Oldenburg)는 이 대화를 삼유타니카야(Samyutta Nikaya)에서 다음과 같이 대하고 있다. 아난다(Ananda)야, 가령 방랑승 봐챠코타(Vacchagotta)가 “혼이 있습니까?”라고 물어 왔을 적에 “있다”고 답하였다면 영속성을 믿고 있는 ‘사마나(Samanas) 소문들과 바라문’들의 학설을 확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또, 방랑승 봐챠코타가 “혼은 없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내가 ”없다“고 답했다면 혼의 절멸을 믿는 자들의 학설을 확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봐챠코타가 ”혼이 있습니까?“ 물었을 때 ”있다“고 답했다면 모든 존재(Ahamma)는 무아(Non ego)라고 하는 지식을 그 속에서 일으키게 하는 점이 그의 목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혼이 없다“라고 답했다면 그를 더욱 당혹하게 만들어 ”나의 혼은 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냐? 그러나 지금은 없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고타마’ 불타는 대중을 곤란으로 몰아넣게 한다. 이와 같이 어려운 형이상학적 가르침은 말하지 않고 둔 것을 알 수가 있다. 불타가 말한 것은 인간적인 일시적인 자아와 불멸의 혼, 인간의 영적 아(Ego)에 그 빛을 발하는 고급의 자아와는 틀린다는 의미의다.
17. 우주는 우주 외곽 지대에 무한영원이라 하는 주관적 우주가 존재한다. 우리들이 살고있는 객관적 우주(宇宙)는 우주 외곽 속에 있으며 이것들을 통털어서 우주라고 해야 한다. 우주는 두 개의 상대성을 지니고 있는 거대한 힘의 대결장이라고 형이상학으로 말할 수가 있다. 외곽의 주관적 우주는 암흑이며 무한이며, 광대한 무한함은 극치 그것이고 영하 수천도의 냉각을 동반한 무서운 수축의 힘을 지니고 내부의 우리 우주(宇宙的)를 밀어붙이고 있다. 내부의 우주는 물질(에텔)로서 꽉 차 있고 상대적으로 뜨거운 열기로 팽창을 계속하는 힘으로 외각으로 밀어나가고 있다. 두 개의 힘이 부딪치는 교우지대는 혁신을 유발하여 각종 에너지를 생산하면서 팽창이 계속되고 이것은 대자연의 법칙 속에서 존재한다고 형이상학으로 표현한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현 우주는 낮의 우주로서 팽창주기적 160억년의 중간정도에 있는 과정이고, 앞으로 80~100억년이 경과하면 팽창의 힘은 한계에 달하여 외각으로부터 수축된 수축의 힘에 밀리기 시작하며 밤의 우주가 시작되고 우리들의 내부 우주의 물질은 하나의 원자물질로 용화되고 조그만 하나의 은하계 정도로 수축의 힘에 말려졌을 때 수축의 힘을 압도하면서 팽창의 힘이 득세하기 시작하면 우주의 낮이 시작되고 팽창의 힘은 대폭발과 함께 수축의 힘을 압도하면서 다시 우주의 낮이 시작되고 팽창은 또다시 160억년 정도 계속된다. 이것은 대자연의 거대하고 심원한 유일의 대법칙이며 이것을 우리들은 우주의 주기라고 한다. 또 맹목적으로 인간들은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 부른다. 지금까지의 것은 저자와 관계없는 역자의 이론임을 부언한다. 저자의 이론에 합리성을 더하고자 한 것이며 저자와 관계 없으나 저자도 「씨크릿 독트린」에서 이와 거의 같은 주장을 한 것으로 안다.
18. 시네트(Sinnett)씨의 비전 불교(Esoteric Buddhism)에는 (4), (5), (6)을 각각 동물혼, 인간혼, 영적혼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같은 말이다. 그 책에는 원리(Principle) 본에 번호가 붙어 있으나 엄밀히 말한다면 무용한 것이다. 이중의 모나드(Atma-Buddhi)만은 제6, 제7이라는 최고번호로서 생각해도 좋다. 다른 원리(Principle)는 모두 그 사람 안에서 우세한 원리가 제일이며, 수위(首位)가 된다고 생각해야 하므로 일반적으로 번호를 붙여서 정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고급 지성(마나스 즉 제5)이 다른 것보다 우세하고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가장 동물적 본능을 나타내는 동물혼(Kama Rupa)이 지배적이다.
19. 파우로는 플라톤의 ‘누우스’를 영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영은 실질인 것이나 부디(Buddhi)를 말하는 것이지 ‘아트마’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트마(Atma)’는 어떤 경우에도 철학적으로 실질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인간의 여러 원리 속에 ‘아트마’를 넣는 것은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실제에 있어서 아트마는 인간이 아니고 보편적, 절대적 원리이며 부디(Buddhi)는 혼과 영은 그를 전하는 운반용기(Carrier)이다.
20. ‘푸르타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플라톤’과 ‘피타고라스’는 혼을 이성적(Noetic)과 비이성적(아그노이아 ; Agnoia)인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이성적인 혼의 부분은 영원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을 뽑아낸 부분(아그노이아)은 사멸한다.(테프라치오 푸이 로소후오라무 4권 4장 17절) 근대어의 아그노스틱(agnostic ; 불가지론)은 같은 어원을 가진 아그노시스(agnosis)에서 온 것이다. 이 말을 만들어낸 헉슬리(Huxley)는 자신의 위대한 지성을 무엇 때문에 죽는 “이성을 뽑아버린 손”이라고 말했을까? 이것은 근대 유물론자의 지나친 겸양의 마음에서였을까?
21. 생명과 자손의 부여자가 되는 여호와(Jehovah)와 달의 관계와 생식에 관한 달의 영향을 알고 있는 ‘카발라학자들(Kabalist)’은 일부 점성학자들과 같이, 이 점을 이해 할 것이다.
22. 프로셀피나(Proserpina) 또는 페르세포나(Persephona)는 이 경우 사후의 카르마를 뜻한다. 이 ‘카르마’는 고급 원리에서 저급 원질과 분리를 조절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카마로카’에 잠시 동안 머무르는 네페쉬(Nephesh) 즉, 동물생명의 호흡(Breath)을 고급복합자아(Higher compound ego)에 분리시켜 고급 복합 자아가 지복의 상태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23. 붕괴할 때까지 ‘카마로카’에 머무르고 있는 저급 본질에서 고급인 영적 본질이 분리하기까지.
24. 이성적(Rational)이라는 말의 어원으로 보면 “영원한 지혜에서 발산되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25. 비이성적인 것이라는 것은 우주심(Universal mind), ‘마인드’의 순수한 발산으로서 우리들의 물질계에서는 이 자체의 개별적 이성을 가지는 것이 못된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달(月)이 태양에서 빛을 빌리고, 지구로부터 생명을 빌리고 있는 것처럼 부디(Buddhi)는 아트만으로부터 지혜의 빛을 받고 마나스로부터 이성적 특성을 얻는다. 그 자체는 동질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26. 지게스의 반지(Ring of Gyges) : 위험한 능력의 비유, 지게스는 끼면 자신의 몸이 보이지 않게 되는 반지를 입수(入手), 칸다우레스(Candaules) 왕을 살해하고 그의 왕후()와 결혼한 고대 리디아(Lydia) 사람.
27. 플라톤 서(書) ‘피에돈(Platonic Phaed)’에서 올림피오도루스(Olympiodorus)는 다음돠 같이 말하고 있다. “공상은 우리들의 지적 개념에 방해가 된다. 따라서 우리들이 신의 영감을 받아서 흥분하고 있을 때 만약 공상이 들어온다면, 감동적 에너지는 정지하고 만다. 왜냐하면 감동(Enthusiasm)과 황홀(Ecstacy)은 서로 상반하기 때문이다. 영은 공상이 없어도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고 질문하면 우리들의 영이 보편적 개념을 인식함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을 증명한다고 답한다. 따라서 영은 공상과 관계없는 인식을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공상은 마치 항해자를 거센 바람이 따라 가듯이 영의 에너지에 수행하는 것이다.
28. 즉 육체, 생명, 정욕과 기타의 동물적 본능 및 모든 인간의 ‘아스트랄’ 망각(Astral eidolon ; 사고, 즉 우리 마음의 눈으로 지각하거나, 객관적으로 육체와는 별도로 지각되기도 함). 이와 같은 제원리를 우리들은 각각 스툴라 샤리라(Sthula sarira), 프라나(Prana), 카마루파(Kamarupa), 링가 샤리라(Linga sarira) 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29. 신지학협회의 창립자이며, 회장인 H. S. 올코트(Olcott)에 의한 이 가르침의 정확성은 남방불교의 법전(法典)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수라파다사와 칼레지방의 고승이며 ‘콜롬보’의 ‘우이차타야’ 대학의 학장인 수만카라씨가 확증하고 있다.
30. ‘불교문답’에서 ‘올코트’ 대령은 비교철학의 논리에서 이와 같은 구별을 하지 않는 동양학자들의 잘못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느껴서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하고 있다. “어떤 존재의 애욕에 의하여 의집(擬集)하는 구성분자의 이 세상에서의 연속적 현현(顯現)은, 즉 태어나기 위하여 내려오는 여러 인격의 한 계열(系列)이다. 탄생할 때마다 인격은 그전의 생애나 다음의 생애에서의 인격과 다른 것이다. ‘카르마’의 영자자(影姿者)가 되어 지금은 성자, 이 다음은 치자(恥者), 또 다음 그 다음의 탄생의 실끈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다른 모습의 가면을 쓰게 된다. 이것을 오히려 그것들에 자신을 반영한다하는 설명이 더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격은 언제나 변화되어도 수많은 인격을 연결하여 엮어나가는 실(糸)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 실(糸)만은 똑같은 것이고 결코 다른 실로 변질하거나 바뀌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이것만은 개별적이며 개성적 생명파동(波動)이고 이것은 ‘에텔’을 통하여 진출하는 광파(光波)나 열파(熱波)가 그 발동적 원천(Dynamic source)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그 생명 파동은 열반(熱波), 즉 자연의 주관적인 면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의 실(糸)은 ‘카르마’의 충동과 ‘탄하’(Tanha ; 생존에 대한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창조적인 지도를 받아 자연의 객관적인 면에 진출하고 많은 주기적(周期的) 변화를 거쳐서 열반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리스 데이비즈(Rhys Davids)는 개개의 인쇄를 따라서 인격에서 인격으로 전해져 가는 것을 성격(Dharacter) 또는 행상(行狀 ; Doing)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격은 단순한 형이상학적인 추상물이 아니고 개인의 지적특성 및 도덕적 경향의 총계이므로 만약 우리들의 앞에서 말한 생명파(生命波)를 개성이라 생각하며 또 연속되는 탄생의 하나 하나를 개별적인 인격으로 생각한다면 리스 데이비즈(Rhys Davids)가 말하는 “신비라고 말하는 비상수단(非常手段)”(불교 101항)의 필요성을 배제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불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완전한 개인은 불타(佛陀)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불타는 아주 작은 양의 초자연적인 혼입물 조차 없는 인류로서 드물게 핀 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불타가 되려고 하면 무수한 세대((asankheyyas ; 아승지(阿僧祗))와 십만주기(拾萬周期 ; 劫)(파우스빌(Fausboell)과 리스 데이비즈(Rhys Davids) 공저 불타탄생논답13항))를 거쳐야 하고, 길고 긴
31. 혼은 인격아(Personal self)와 대조되는 혼적(Spiritual) 자아이다. 학도는 이 혼적자아(Ego)를 아트마(Atma)이며, 우리 안에 있는 신이며, 우주영혼(Universal Spirit)과 끊을 수 없는 보다 높은 고급아(Highr self)와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32. 마하트(Mahat) 즉, 우주심(宇宙心 ; Universal mind)은 ‘마나스’의 원천(源泉)이다. 마나스는 심(心) 즉, 인간의 마음이다. ‘마나스’는 또한 크쉐트라즈나(Kshetrajna) 즉, 육체화한 혼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철학에 의하면 이것은 마나사 푸트라(Manasa putras) 또는 우주심의 아들들(Sons of the universal mind)이기 때문이고 이들은 우리들 회(回 ; In our Round)에서 제3근원인종(第三根種人間; Third race mankind)으로 화신(化身)하여 생각하는 사람 즉 ‘마누’(Manu)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 화신하는 영구한 혼적 자아 즉, 개별성은 ‘마나스’이고 우리들의 여러 가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격은 그 외부적인 가면에 불과하다.
33. ‘마하트’ 즉 우주심()宇宙心은 마나스의 뿌리이다. 마나스란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마하트’ 즉 마음이다. 마나스는 크쉐트라즈나(Kshetrajna), 말하자면 육체 화신(化身)한 영(靈)라고도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철학에 의하면 우리들의 제4라운드의 제3근원인종(根第三種人種)이 인간으로 화신하면서 생각하는 인간, 즉 ‘마누’를 창조하였다. 그것보다 만들어 낸 것은 마나사 푸트라(Manasa Putra), 즉 ‘우주심’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화신(化身)하는 영구적 영적자아(自我), 즉 개성은 마나스이고, 우리들의 여러 상(相)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인격은 그의 외부적 가면(假面)에 불과하다.
34. “알아라 나는 그대에게 충고하나니 어떤 색정을 가지고 여자를 보는 자는 이미 마음 속으로 간음하였다.”(마태복음 5장 28절)
35. 타락한 천사들이란 잔혹하고 불합리한 교의는 「원래의 ‘카르마’적 죄」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비의(Secret Doctrine)의 2권에 설명되어 있다. 우리들의 자아는 모두가 사고력이 있고 이성을 가진 것으로(마나사 푸트라(Manasa Putras)), 인간으로서나 다른 형체로서도 전의 생명 주기(만반타라)에 살았으며, 그 ‘카르마’로써 이 주기에 인간으로 화신한 것이다. 비의 안에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고 있다. 카르마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늦어서(혹은 힌두교가 말하는 쿠마라들과 기독교의 전설에서 부천사 ‘미카엘’로서 ‘태어나는 것을 모반(謀反) 한다.’ 때문에) 꼭 알맞은 때에 화신하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예정되어 있던 몸체는 더러워졌다.(Skokas of d쿄무 8-9절 참조) 여기에서 무감각인 형체의 원죄와 자아들의 죄(罪)란 것이 나왔다. 지옥에 던져진 모반을 일으킨 천사들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부정(不淨)한 물질의 체, 즉 육체에 가려져 있는 청정(淸淨)한 영들 또는 자아들의 일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36. 본 장과 후속장의 어느 부분은 루시퍼(Lucifer) 지(誌)의 1889년 1월호(3권)에 “사후의 신비에 관한 대화”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는 것이었다. 그 논문에는 서명이 없어서 마치 편집자가 쓴 것처럼 서명이 있으나 그것은 필자가 쓴 것이다.
37. ‘이스와라’는 현현한 신, 브라흐마(Brahma)의 집합적 의식이다. 즉 말하자면 많은 디안 초한(Host of dhyan chohans)들(SD 참조)의 집합적 의식이다. 그리고 프라그나(Pragna)는 그들의 개별적 지혜가 된다.
38. 타이자시(Taijasi)란 것은 ‘부디’와 합체(合體)한 결과 ‘빛나는 것’이란 뜻이다. 즉, 신성한 영의 빛으로 비추어진 인간영(마나스)이다. 따라서 ‘마나스 타이자시’는 빛나는 마음 영의 빛으로 비춰진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부디 마나스’는 신성한 것에 인간 지성과 자의식을 가미한 것으로 계시이다.
39. 어떤 신지학자는 ‘부당한 고통’이란 표현에 이의를 달고 있으나 이것은 대사들이 쓰는 말로서 ‘부당’하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앞에서 말한 그대로이다. 신지학 출판협회의 팜플렛 6호의 어느 문장에 같은 취지를 전하려고 쓴 것이 있으나 루시퍼(Lucifer)지에서 비난을 받았다. 그것은 서투른 표현이므로 비난 받기 쉬우나, 진정한 뜻에서 사람들은 엄격히 말해 자신의 ‘카르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행한 일 때문에 고통을 받는 수가 많은데 그러한 고통은 보상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40. 그렇지만 이런 이송(移送)의 길이는 육체를 벗어버린 자아의 이전(以前) 인격(Expersonality)의 영혼성 정도(Degree of spirituality)에 따른 생활이 극히 영적이었던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송은 단계적이기는 하나 아주 빠른 것이다. 물질적인 것에 치우쳐 있던 사람의 경우는 그 시간이 아주 길다. 이 고급아(高級我)는 ‘아트마’이며 ‘시넷트’씨가 말한대로 물질화 불가(不可 ; Nonmaterializable)이다. 분만 아니라 이것은 어떤 환경에 있거나 비록 최고의 혼적 자각이 되더라도 결코 객관적인 것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아트마’ 즉, 고급아는 참다운 ‘브라흐마’(Brahma), 절대자인 것에 틀림없으며 그것과 구별 될 수 없다. 삼매의 시간에 선각자(Initiate)의 고급혼적 의식은 전부 하나의 본질 즉, ‘아트마’(Atman)에 흡수되며 따라서 그것과 일체가 되어 그 인식에서는 객관적인 것은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어느 신지학도는 ‘Self’(아)와 ‘Ego’(자아)라는 말을 동의어로 쓰고 ‘Self’라고 하는 말을 인간의 고급개성 또는 인격적인 자 혹은 자아를 연상해 쓰는 습관이 있다. 그렇지만 ‘Self’라고 말하는 것은 유일한 보편적 아(One Universal Self) 이외에 적용하면 안된다. 거기서 혼란이 생기는 것이다. 마나스 즉, 인체(因體 ; Causal body)에 대하여 말한다면 ‘부디’의 광휘(光輝)와 결합시켰을 때 고급자아(高級自我 ; Higher ego)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결코 고급아(Higher Self)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부디’ 즉, 혼적 영(Spiritual soul)이라도 Self(我 · 나)는 아니고 ‘我 · 나’의 매체(媒體 ; Vehicle of self)에 불과하다. 다른 모든 이들(Selves)은 예컨대 ‘개성아’나 ‘인격아’와 같이 성격이나 특징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넣어서 써야지 그대로 ‘我 · 나’라고 말하거나 써서는 안된다. 이와 같이 ‘고급아’에 대한 아주 훌륭한 논문에서 이런 ‘Self’라고 하는 말은 제6원리 즉, ‘부디’에 적용되고 있다.(물론 마나스와 결부되어 사용된다. 왜냐하면 마나스와의 결부없이는 사고의 원리 또는 혼적 영의 요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Self라고 하는 말은 오해가 생기게 된다. “아이들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제6본질을 얻을 수 없고 말하자면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카르마’를 일으키는 도덕적 책임을 가지는 존재가 아니다”고 말하는 것은 ‘고급아’(Higher self)의 듯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급아’가 어느 인간
41. “형이상학 용어를 바꾸어 놓는 것”이란 것을 여기서 동양 용어의 표현을 영역하여 바꾸어 놓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영어에는 이와 같은 말이 없었으므로 신지학도는 모두 자신의 사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말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일정한 전문어를 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사료된다.
42. Hermas Paster의「Similitude」의 5장 6절.
43. 「조하르」라고 하는 책의 창세기 주석 11장 10절 「조하르」(Zohar)는 13세기에 스페인에서 많이 이용된 유태신비교의 경전(經典).
44. 「제2시력」이라고 하는 책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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