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지학회] 다양한 오컬트 주제 본문
[신지학회] 다양한 오컬트 주제
목 차
신지학의 몇 가지 원리들
오컬티즘이란 - 수바 로우
어떻게 신지학을 공부할 것인가 - 로버트 보웬
신이란 무엇인가? - K. H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 G. R. S. 미드
세가지 근본원리
삶의 중요한 질문들
어느 힌두 제자의 일기
신지학의 몇 가지 원리들
● 고대의 지혜는 우리 자신들뿐만 아니라, 삶의 목적, 자연과 우주 가장 높은 신과 같은 원리들 그리고 지구 상에서의 유사 이전의 인간의 긴 역사들에 대한 깊고 거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계속해서 그럴 것이다. 신지학은 19세기 말에 블라바츠키 여사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가져온 고대의 지식의 한 부분으로 티벳에 있는 그녀의 스승들이 가르쳐 준 것이다.
● 우주에 있는 만물은 무한하며 하나이고 영원하며 알 수 없는 근원에서 나왔다. 현현한 존재로 일정 기간 있다가 그 근원으로 다시 돌아간다.
● 우주 자체는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살아 있으며 지성을 가지고 있고 의식하며 신성하다. 자연의 법칙들은 지성적인 힘들의 결과이다.
● 카르마의 법칙은 우주 전체에 걸쳐 작용하며 모든 단계에서 작용해서 정의와 균형 그리고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
● 우리는 계속 해서 윤회한다. 일단 인간의 단계에 들어서면 동물의 형태로 퇴행하지 않는다.
● 카르마의 법칙은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계속해서 윤회하는 삶들에 작용한다. 카르마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쁨과 슬픔의 원인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 주기의 법칙은 모든 단계에서 근본적인 구조이다. 두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윤회가 그 한 가지 이고, 우주가 현현 한 후에 다시 원래의 근원으로 돌아가더라고 계속해서 살아 있다는 것이다.
● 유추와 상응(대응)은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이다. 이것은 헤르메스의 격언인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As above, so below)”를 넒은 의미로 설명한 것이다.
● 진화는 웅장한 스케일로 모든 생명에 적용된다.
● 혼은 물질 세계에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혼은 경험하고 배운다. 그래서 원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긴 여정의 순례를 가게 된다. 이것 또한 주기적인 패턴을 따르게 된다.
● 이런 진화는 경험과 자기 의식 그리고 계속해서 커져 가는 완성을 성취하게 된다. 진화는 물질계, 멘탈계, 영적인 계 모든 계에서 일어난다.
● 작은 유리한 변화들이 점진적으로 쌓여서 이루어지는 “적자생존”은 “종의 기원”을 설명하지 못한다. 종의 기원은 지성적인 설계에 기원한다.
● 인류는 레무리아와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오랜 기간동안 중요한 진화를 경험했다.
● 인간은 물질적인 단계에서부터 순수한 영적인 단계까지 망라하는 칠중 구조이다.
● 높은 세계에서 생각들은 물체이다. 모든 생각과 행동은 우리들과 주위에 영향을 주고 카르마의 결과를 갖는다.
● 이 중에서 상위 3계는 “상위 자아”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것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윤회하는 것으로 경험들과 교훈들 그리고 미덕들을 축적한다. 하위계들은 “하위 자아”를 구성하며 윤회한 삶을 사는 동안 상위 자아가 사용하는 도구이다.
● 죽음의 순간에 우리는 육체를 벗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그것은 개개인들마다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를 구성하던 하위 측면들을 벗어버리고 윤회하는 자아는 다음 생이 시작되기까지 자신이 얻은 오랜 기간의 자비로운 휴식을 시작한다.
● 우리들이 사는 동안에 순간순간의 욕구들과 욕망들을 충족하려다 보니까 자기 중심적인 일상 생활 속에서 종종 영적인 본성이 흐릿해지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진심으로 강력한 열망을 가지고 추구한다면 영적인 자아는 언제든지 우리들을 안내하기 위해 항상 거기에 있다.
● 우리들의 상위 자아에 다다를 수 있다.
양심의 조용하고 작은 소리를 듣거나,
상위 자아에서 오는 꿈들을 메모하거나,
직관을 계발하거나,
명상을 하거나,
지혜 종교(Wisdom-Religion)의 원리들을 공부하거나,
대자연과 우리들을 일치시키거나,
더 위대한 선을 위해서 행동하거나,
우리들 일상 생활의 사건들을 주의 깊게 읽거나,
● 대자연에서 형제애는 하나의 사실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성질들 중에서 최고의 영적인 구성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이다. 우리들은 하나의 불기둥에서 나온 불꽃들이다. 우리들은 한 손에 있는 손가락들이다. 우리들은 다른 단계들에서도 하나이다.
● 우리들은 다음 것들을 이해해야 한다.
인류나 세계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들은 일상 생활 속에서 형제애, 박애주의, 자비를 강조해야 한다.
자신의 상위 자아를 알려고 정진해야 한다.
안내 규칙으로써 만물의 대아로써 그리고 만물의 대아를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
● 세계의 종교들은 거대한 나무의 가지들이며 그 나무의 본줄기는 한 때는 보편적인 지혜 종교이다. 종교들은 하나의 거대한 강의 지류들이다.
● 신화는 종종 상징의 형태로 이런 지식을 전해준다.
● 주기적으로 진화 단계 속에 있는 우리들을 돕기 위해서 위대한 스승들이 온다. 그들은 그 나무의 또 다른 가지를 만들 수도 있다.
● 인류의 잠재력은 무한하며 모든 존재는 한층 더 웅장한 세계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우리들 모두는 그 속에 있으며 우리들은 하나다.
오컬티즘이란 - 수바 로우(Subba Row)
고대 오컬티즘과 현대 오컬티즘과는 차이가 없습니다. 진정한 오컬티즘은 그 사용하는 용어가 시대에 따라 달라도 같은 원리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오컬티즘이란 우주에 두루 걸쳐서 자연의 법칙들의 작용과 그 적용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설명을 제시하는 과학 아니 오히려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 가르침들은 고대 이건 현대 이건 과학에서 증명된 모든 사실들과 반드시 일치해야 합니다. 그것은 역사의 모든 사실들 혹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더 깊이 있게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신화들과 인간이 우주와 갖는 관계도 설명해야 합니다.
사실 그것은 우주의 기원, 운명 그리고 힘들과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과학입니다.
현대 과학과 오컬트 과학 사이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전자(현대 과학)는 물질과 힘이 나타난 가장 낮은 세계에서 제한되고 분리된 상태에서 물질과 힘을 이용하는 반면, 오컬트 과학은 자연적인 상태 속에 있는 자연의 힘들과 물질들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컬티스트는 어떤 열이나 전기를 만들어 내고자 할 때 더 높고 영적인 형태의 엘리멘트들로서 자연의 보이지 않는 힘들을 사용합니다. 반면에 과학자들은 빛이나 물과 같은 물질들에 의존하는데 실험을 수행하기 전에 그것들이 가장 낮은 물질계에 있기 때문에 우선 그것들을 분리해서 소위 초기 물질(primary substance)로 만듭니다.
오컬티스트는 자연을 하나의 통일성으로 보고, 모든 다양성은 통일성이 다양한 계에 나타난 것이며, 그 세계를 지각하는 가는 그 사람의 발전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만물에 침투해 있는 하나의 법칙은 진화에 의한 발전이며, 모든 진화의 원래 근원인 신성한 로고스에 이르기까지 거의 무한한 정도로 다양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거의 무한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존재의 형태들과 방식들이 절대적으로 원래의 통일성 속에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마치 얼음이 물로 혹은 물이 얼음으로 바뀔 수 있듯이, 물질의 모든 형태들은 상호 변환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기적이라는 생각을 일축하면서 진화한 사람은 행동하고 지각하는 추가적인 능력들을 성취해서 엘리멘트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연과 그 법칙들은 하나라고 믿으면서 그 법칙들에 반하는 모든 행동은 저항하는 힘들을 만나게 되고 그래서 그 힘들에 의해서 파괴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신성을 성취하고자 하는 진화한 사람들은 자연과 함께 일하는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훈련시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되면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최고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 변함없는 자비심을 가지고 행동하도록 만듭니다. 왜냐하면 선이란 것은 하나의 법칙과 조화를 이루며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컬티즘은 다른 가르침에서 제시하지 않는 올바른 행위를 해야 하는 이성적인 구속력을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오컬티즘은 윤리를 미신이 아니라 우주 법칙으로 승격시키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연과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만물에 침투해 있는 동일한 하나의 생명이 자신 속에서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양심” 속에서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길을 안내해 주는 빛인 상위 수준의 지각 능력이라는 보석을 발견하게 되고 한편 의지대로 무한한 성장과 확장이 가능한 힘을 인식하게 됩니다.
신조나 행동 강령들이 보편적인 진리를 부분적으로 나타내듯이 모든 신화들은 자연의 법칙들과 힘들을 그림처럼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오래 된 것들을 직관적으로 공부함으로써 오컬트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은 그 순수한 상태로 태고 적부터 스승에서 제자로 전해져 왔으며 제자가 그 지식을 오용하거나 잘못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때까지 전해주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악용되지 않도록 경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악한 성향이 있거나 무지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엄청난 해가 오기 때문입니다.
생각 읽기, 싸이코메트리, 투시, 메즈머리즘 및 심령술 등과 같이 현재 일어나는 실험들을 보면 뜻밖의 힘들과 재능들이 인간 속에 잠재해 있다는 것을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컬티스트의 “경이들”은 과학적 수양과 그런 힘들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성취해서 얻은 것입니다.
비밀의 지혜는 고대 시대 모든 철학들과 종교들 예들 들면 인도나 이집트 혹은 칼데아의 종교들이건 그것들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흔적들은 모든 시대와 모든 나라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실재가 단 한 명의 권위로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 제자들과 스승들은 지구에 인류가 출현한 이후 계속해서 끊어지지 않는 연결고리를 이루었고 오늘날의 단체는 수 천년 전의 모습 그대로 이며 또한 수 천년 후의 모습 그대로 일 것입니다. 지난 수 백년 동안 보다 오늘 날 일반 대중의 마음 속에서 더 많은 각성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어떤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년에 어떤 날이 밤보다 낮이 길듯이 지혜의 신성한 빛도 다른 주기 때 보다 어떤 주기 때는 더 광범위하게 번져나갑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층 더 밝은 빛이 떴습니다. 그러나 그 빛은 빛나길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관심을 가질 것이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을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잘못 나타내서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은 단지 어둠일 뿐이라고 설득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 Word, January 1905
어떻게 신지학을 공부할 것인가(How to Study Theosophy) - 로버트 보웬
서문
블라바츠키 여사가 생을 마감할 무렵에 행한 가르침들을 정리한 이 기록은 이미 여러 저널에 여러 차례 실린 바 있다. 이 기록은 로버트 보웬(Robert Bowen)이 정리한 것이다. 그는 블라바츠키 여사의 클럽에 가담했던 나이 많은 해군이었는데, 씨크릿 독트린(The Secret Doctrine)을 공부하기 위해 학생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하여 끊임없이 블라바츠키 여사에게 질문하였다.
그는 그녀가 답한 것들을 주의 깊게 기록하였고, 후에 그녀에게 들려준 다음, 그가 그녀의 뜻을 오해 없이 제대로 기록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이 기록들은 나중에 그 당시 더블린 신지학회 회원이었던 그의 아들 고(故) P.G.B. 보웬(Bowen)대위에 의해서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이 기록은 처음에 Theosophy in Ireland 1932년 1-3월 호에 실렸는데 이는 이 기록이 쓰여진 후 40년이 조금 넘은 때였다. 그 이후 더블린 신지학회 안에서 뼈를 깎는 조사들이 이어졌지만 다른 어떤 유사한 자료도 햇빛을 보는 데는 실패하였다.
보웬 기록이 갖는 가치는 그것이 비단 씨크릿 독트린을 연구하는 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지학의 연구에 적용되는 원리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데 있다. 신지학에 관한 어떤 설명도 전 우주의 그림을 반드시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말이나 설명 또는 상대적 가치를 초월하는 진리(Truth)를 경험하면서 생기는 2차적인 패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지학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향한 길을 보여줄 뿐이다.
이 기준에 의하면, 신지학에 관한 어떤 설명이나 권위도, 그것이 과학적 사실이나 원리와 정확히 일치하는지 또는 다른 사람이 설명하는 신지학의 내용과 일치하는지에 따라 판단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지학에 관한 어떤 설명도, 그것이 강한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형식이나 패턴을 넘어 오컬트 또는 숨은 실재(reality)를 추구하는 학생으로 하여금 깊은 경험을 갖도록 이끄는데 그 가치를 두어야 한다. 이 기록에서 되풀이하여 지적하는 또 하나의 충고는, 어떤 신지학적인 가르침이건 충분히 이해하려면 우주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돕기 위하여 블라바츠키 여사는 학생은 세가지 근본 명제(Three fundamental propositions)를 깊이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하였다. 이 세가지 근본 명제는 씨크릿 독트린 서문에 나와있는데 여러분들이 참조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이 책의 말미에 재수록하였다.
H. S.
The Secret Doctrine과 그의 연구
H.P.B. (블라바츠키 여사)는 지난 주에 씨크릿 독트린에 관한 사항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아직 내 마음 속에 기억이 생생한 동안, 여사의 말을 잘 정리하여 안전하게 종이 위에 기록해 놓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녀가 혼잣말로 되뇌듯이, 이 기록은 지금부터 30년 또는 40년 후에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쓰일 지도 모른다.
우선, 씨크릿 독트린의 내용은 오컬트 형제단(Occult Brotherhood)의 상위 회원들에게 알려진 비전 가르침(Esoteric Doctrine)의 조그만 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 내용은 앞으로 올 세기에 이 세상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적혀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 말은 곧 질문을 야기시켰으며 그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여기서 세상이라는 것은 개인의 본성 속에 사는 인간(Man living in the Personal Nature)을 의미한다. 이 세상, 즉,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은 두 권의 SD(Secret Doctrine) 안에서 그가 최대한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이해할 것이며, 그 이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는 제자도 이 세상이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발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형태(form)는, 아무리 조야한 것일지라도, 그 안에 창조자(creator)의 이미지를 숨기고 있다. 저자의 책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애매모호하게 적혀 있더라도 그 안에는 저자의 지식의 숨은 이미지가 담겨 있다. 이 말에 비추어 볼 때, SD는 HPB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아니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이 그녀 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왔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HPB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겠다.
게다가 그녀 자신이 다른 사람이 그 안에서 그녀 스스로도 모르는 지식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암시하였다. 내 자신이 그녀 스스로도 모르는 지식을 그녀의 글 안에서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야말로 얼마나 가슴 벅찬 것인가! 그녀는 이 아이디어에 대해 누누이 강조하였다. X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HPB의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음에 틀림없어. 아마도 이 말은, 내 생각이지만, 그녀가 자신의 지식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Y와 Z는 나처럼 그녀가 의미하는 바를 더 잘 이해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우리 보고 그녀가 최후의 권위를 갖는 것처럼 그녀에게, 또한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매달리지 말 것이며, 오히려 우리들 자신의 지식을 넓힘으로써 스스로에게 의존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기록에 대한 추후 노트: 내가 옳았다. 내가 이것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더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인정해주는 미소를 자아내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저자의 싸인) 로버트 보웬>
마침내 우리는 HPB로 하여금 SD를 공부하는 올바른 방법에 대해 설명하도록 할 수 있었다. 아직 내 기억이 생생한 동안 그것을 적어 놓는다. 그녀는 말하기를, SD를 다른 책을 읽듯이 처음부터 차례로 읽어내려 가는 것은 결국엔 혼란만 야기할 것이다. 설령 몇 년이 걸리더라도, 우선은 서문에 있는 세 가지 근본 원리(Three Fundamental Principles)를 어느 정도는 이해해야 한다.
그 다음 제1권 (제1부)의 요약(Summing Up)에 번호가 매겨진 요점정리(Recapitulation)를 읽고, 그런 후에 제2권의 예비 노트(Preliminary Notes)와 결론(Conclusion)을 읽는 것이 좋다.
HPB는 인종(人種, Races)과 아인종(亞人種, Sub-Races)이 나타나는 시기에 관련된 (결론부분의) 가르침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 대하여 확신하는 것 같았다. 다른 것보다 더 분명하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미래에 오는(coming) 인종이라는 것은 없다. 그녀는 말한다: 오는 것(Coming)도 없고 가는 것(Passing)도 없으며, 오직 영원한 되어가는 것(Becoming) 뿐이다. 제4근원인종은 아직도 살아있다. 제3, 제2, 제1근원인종도 그러하다 --- 즉, 현 세상의 물질계에 그들의 현현이 존재한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제6아인종도 지금 여기에 있으며, 제6근원인종, 제7근원인종, 그리고 다음 라운드(Round)의 사람들까지도 여기에 있다. 이 점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Disciples), 형제(Brothers) 및 초인(Adepts)들이 일상적인 제5아인종 사람들일 수는 없다. 인종은 진화의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의심의 여지없이 이렇게 말한다:
인류 전체에 관한 한, 제6아인종이 되기까지는 아직도 수백 년(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이 남아있다. HPB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상당히 불편해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새 인종(New Race)이 이미 이 세상에 왔다는 생각 때문에 발생할 지도 모를 위험과 환상을 암시하였다.
그녀에 의하면, 인류 전체적으로 하나의 아인종이 지속되는 기간은 항성년(Sidereal Year --- 지구의 축이 회전하는 기간으로 약 25,000년이다)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새 인종이 나타나려면 아직도 상당한 기간이 남아있다.
지난 3주 동안 SD 공부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더 이상 잊어버리기 전에 잘 정리하여 기록해 놓아야 하겠다. 그녀는 근본원리에 대하여 더욱 많은 설명을 하였다. 그녀는 말한다:
누구든지 SD로부터 우주의 구성에 대한 만족할 만한 그림을 얻을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오히려 그 공부로부터 혼란만 얻을 것이다. SD는 존재에 대한 마지막 판결을 내리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고, 진리로 이끄는 길을 보여주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다. 그녀는 이 말을 여러 번 반복하였다.
그녀는 말했다:
누군가가 우리 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가서 SD를 해석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정말로 쓸모없는 일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설령 그들이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진리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한 조각의 말라버린 통속적인 해석뿐이다.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고정된 아이디어에 스스로를 못박는 것이다. 반면에 진리는 우리가 형성 또는 표현하는 어떤 아이디어도 초월하는 것이다. 통속적인 해석도 다 괜찮으며, 그것이 초심자들에게 방향타로서의 역할만 하고 그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그녀는 비난하지 않는다.
현재의 신지학 회원들이나 미래에 회원이 될 사람들 중에서 많은 이들은 아마도 통속적인 개념의 범위를 넘어서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높은 수준까지 발전할 것이며,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녀는 SD를 접근하는 데 다음과 같은 올바른 방법을 제시한다.
SD를 접할 때 존재의 최종 진리를 얻겠다는 희망은 아예 갖지 말아라.
그저 진리를 향하여 얼마나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져라. 다른 공부에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마음을 갈고 닦는 방법을 SD 공부 안에서 발견하도록 하라.
다음의 규칙을 지키도록 하라:
SD 안에서 무엇을 공부하든, SD가 전달하려는 관념의 근거로서, 다음의 개념들을 단단히 마음에 새겨두어라:
⒜ 모든 존재는 근본적으로 하나(The Fundamental Unity of All Existence).
여기서 하나(unity)라는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하나라는 개념ㅡ예를 들면, 국가 또는 군대가 통합되었다(united); 이 행성은 자기력(磁氣力) 등에 의해서 다른 행성과 같이 움직인다ㅡ과는 다른 것이다. 이 가르침은 이러한 의미가 아니다. 존재는 하나(One Thing)이며, 여러 가지를 함께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오로지 한 존재(One Being)만 있다.
존재는 양(陽, positive)과 음(陰, negative)의 두 측면이 있다. 양은 영(Spirit) 혹은 의식(Consciousness)이다. 음은 질료(Substance)로서 의식의 대상이다. 존재는 그 원초(primary)의 현현에서 절대(Absolute)이다. 절대이므로 그 바깥에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전체 존재(All-Being)이다. 그것은 나눌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절대가 아닐 것이다. 한 부분을 분리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절대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즉시 그 자체와 분리된 것 사이에 비교(Comparison)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교는 어떤 절대라는 개념과도 양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근본적인 한 존재(One Existence), 또는 절대 존재(Absolute Being)는 모든 형태에서 실재(實在, Reality)일 수 밖에 없다.
이 메세지의 의미는 내게는 분명하였지만, 롯지의 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이해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HPB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지학은 생각할 수 있는 사람, 또는 스스로를 생각하도록 이끌 수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 정신적인 건달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최근에 그녀는 좀 부드러워진 셈이다. 보통 수준의 학생들을 그녀는 똥대가리(Dumskulls)라고 부르곤 했었다.
원자(Atom), 사람(Man), 신(God)은 각각 별도로, 그리고 집합적으로, 궁극적으로는 절대 존재이다. 즉, 진정한 개체성(Real Individuality)이다. 이 아이디어야말로 항상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있어서 SD를 공부할 때 일어나는 모든 개념의 기초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흔들리는 순간(복잡한 비전철학(秘傳哲學, Esoteric Philosophy)을 연구할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 쉽다), 분리(分離, Separation)의 개념이 지배하게 되고, 공부는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 명심해야 할 두 번째 개념은 죽은 물질은 없다(There is No Dead Matter)는 것이다.
개개의 원자까지도 살아있다. 각 원자는 근본적으로 절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천사들이나 엘리멘탈이 물 속의 숭어처럼 뛰어 노는 에테르(Ether)의 공간(spaces) 또는 아카샤(Akasha)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상식적인 생각이다. 물질의 모든 원자는, 그것이 어느 차원에 있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생명(Life)이다.
⒞ 명심해야 할 세 번째 개념은 사람은 소우주(Man is the Microcosm)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는 천상의 모든 하이어라키(Hierarchies of the Heaven)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대우주(Macrocosm)도 없고 소우주도 없으며 오직 유일 존재(One Existence)만이 있다는 것이 진리이다. 크다거나 작다는 것은 오직 제한된 의식 안에서만 구분되는 것이다.
⒟ 명심해야 할 마지막 네 번째 개념은 다음의 위대한 연금술 공리(the Great Hermetic Axiom) 안에 담겨 있다. 이것은 다른 것들을 요약하고 종합하는 것이다.
안(Inner)에서 그러하듯이 바깥(Outer)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큰(Great) 것이 그러하듯이 작은(Small) 것도 마찬가지이다;
위(Above)에서 그러하듯이 아래(Below)에서도 그러하다:
단지 하나의 생명과 법칙(One Life and Law)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이다. 신의 영역(Divine Economy) 안에서는, 아무 것도 안에 없으며 아무 것도 바깥에 없다; 아무 것도 크지 않으며 아무 것도 작지 않다; 아무 것도 높지 않으며 아무 것도 낮지 않다.
SD 안에서 무엇을 배우건, 위의 기초적인 개념들과 연결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종의 정신적인 훈련일 것이라고 내가 말하자, HPB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말하기를) 처음부터 너무 욕심을 내어 스스로를 미치광이로 만드는 바보가 되어서는 안된다.
뇌는 깨어있는 의식의 도구이다. 의식이 마음에 어떤 그림을 그려내건, 그것은 뇌의 원자들이 변화하는 것이며 파괴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지적 활동은 뇌 안의 잘 길들여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며, 갑작스러운 조정이나 파괴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정신적인 노력은 뭔가 아주 다른 것ㅡ새로운 뇌의 경로를 파내는 것, 또는 뇌의 원자(삶)들의 배열을 뒤바꿔 놓는 것ㅡ을 필요로 한다. 만약 분별없이 억지로 행한다면, 뇌에 물리적인 손상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을 (그녀는 말하기를) 인도 사람들은 즈나나 요가(Jnana Yoga)라고 부른다. 즈나나 요가에 진전이 이루어지면 어떤 개념들이 떠오르는데, 이들을 의식할 수는 있으나 어떤 종류의 정신적 그림으로도 표현하거나 형상화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개념들은 정신적 그림으로 형성된다. 이 때야말로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로 발견된 놀라운 그림들이 실재(reality)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버리면 안된다. 그것은 그렇지 않다. 계속 정진하게 되면, 한 때 흠모했던 그림이 점차 무디어지고 불만족스럽게 되며, 점점 흐려져서 마침내 사라져 버린다. 이 때가 또한 위험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자신을 지탱해 줄 어떤 개념도 사라지고, 매달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버려진 그림을 다시 소생시키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실한 학생은 관계치 아니하고 계속 정진할 것이며, 곧 형태 없는 미광(微光, gleam)이 비춰오고, 때가 되면 지난 번 것보다 더 크고 더 아름다운 그림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학생은 어떤 그림도 진리(Truth) 그 자체를 나타낼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최후의 그림도 앞의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점차 무디어지고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지속되어, 학생은 마침내 정신과 그림들을 초월하여, 무형의 세계(the World of No Form)에 들어가 살게 될 것이다. 사실 모든 형태는 이 무형의 한 면을 반영할 뿐이다.
SD를 공부하는 진실한 학생은 즈나나 요기(요가수행자)이며, 이 요가의 길은 서양의 학생이 걸어야 할 진리의 길이다. SD가 쓰여진 이유는 바로 그 길에 이정표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추후 노트: 나는 그녀의 가르침에 대한 위의 기록을 HPB에게 읽어주고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물었다. 그녀는 도대체 말로 제대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나를 얼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동시에 미소를 지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고 그녀 자신보다도 더 잘 했다고 말했다.]
나는 왜 내가 이 일을 하는지 놀라고 있다. 이 글은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나는 실제 나이로 HPB보다 20년이나 연상이건만, 그녀 앞에서는 어린애같이 느껴지기만 한다. 그녀는 2년 전에 만났을 때보다 많이 변했다. 그 어려운 병을 앓고 있으면서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그녀는 어딘가 다르고 육체와 정신의 영역을 넘어서 있다고 믿을 것이다.
특히 그녀의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이후 만난 몇 번의 모임에서, 우리는 보다 높은 다른 차원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그녀의 말을 육체적인 귀로 듣는다기 보다는, 느끼고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X도 어제 저녁 거의 같은 말을 하였다.
Robert Bowen,
CMDR. R.N.
19 April, 1891
세가지 근본 명제(The Three Fundamental Propositions)
SD의 서문(Proem)에서
I. 모든 곳에 존재하고(Omnipresent), 영원하며(Eternal), 끝이 없고(Boundless), 변하지 않는(Immutable) 원리(Principle).
이에 대해서는 어떤 억측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를 표현하거나 비유하려 하는 경우, 그 내용은 왜소해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 만두캬(Mandukya, 옴이라는 말을 다룬 우파니샤드<고대 인도의 힌두교 철학책>)의 말대로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개념을 일반 독자에게 좀 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모든 현현되고 조건 지어진 존재 이전에 하나의 절대 실재(one Absolute Reality)가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이 무한의 영원한 원인(the Infinite and Eternal Cause)ㅡ현 유럽의 철학에서 무의식(Unconscious) 및 알 수 없는(Unknowable)이라고 희미하게 정의된ㅡ은 존재하는 모든 것 또는 존재할 모든 것의 뿌리 없는 뿌리(the Rootless Root)이다.
그것은 물론 어떤 속성(attribute)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현현된 유한한 존재와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그것은 존재(Being)라기 보다는 있음 그 자체(Be-ness)ㅡ산스크리트 어로는 Satㅡ이며, 모든 생각과 억측을 초월한다.
이 있음 그 자체는 SD 안에서 두 가지 면에서 상징화하였다. 하나는 절대적인 추상공간(absolute Abstract Space)으로서, 순수한 주관성(subjectivity)을 나타내며, 어떤 인간의 개념도 그것을 빼놓을 수 없으며, 누구도 그것 없이 생각할 수 없다. 또 하나는 절대적인 추상운동(absolute Abstract Motion)으로서 조건화되지 않은 의식(Unconditioned Consciousness)을 나타낸다.
서양의 사상가들도, 변화 없이는 의식을 인지할 수 없고, 운동(motion)은 그 핵심적인 특징인 변화를 가장 잘 상징한다고 말해왔다. 유일실재(the one Reality)의 이 측면은 큰 숨결(Great Breath)이라는 용어로 상징되기도 한다. 이 상징은 너무도 생생하여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따라서 SD의 첫번째 근본 공리(Axiom)는 이 형이상학적인 하나의 절대 있음 그 자체(One Absolute Be-ness)ㅡ신학의 삼위일체처럼 유한한 지성으로 상징되는ㅡ이다.
II. 끝이 없는 영역으로서의 우주 전체(the Universe in toto)의 영겁성(eternity);
현현하는 별(Manifesting Stars) 및 영원의 불꽃(Sparks of Eternity)이라고 불리는, 주기적으로 끊임없이 현현하고 사라지는 무수한 우주의 놀이터. 드잔의 서(Book of Dzyan)에서 말하듯이, 순례자의 영겁은 자존(自存, Self-Existence)의 눈 깜빡임과 같다. 세상의 출현과 사라짐은 밀물과 썰물의 정기적인 교차와 같다.
SD의 이 두 번째 표현은 물리학이 자연의 모든 영역에서 관찰하고 기록한, 주기성 법칙(law of periodicity)의 절대적인 보편성을 보여준다. 낮과 밤, 삶과 죽음, 잠과 깸과 같은 교차는 너무도 흔한 사실이고, 완전하게 보편적이며, 예외가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 절대적인 우주 법칙의 하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III. 모든 혼은 근본적으로 우주의 전체혼(the Universal Over-Soul)과 동일하다(Identity)는 원리.
우주의 전체혼은 미지의 뿌리(the Unknown Root)의 한 측면이다. 전 기간 동안 주기(Cyclic) 및 카르마(Karmic) 법칙에 따라서, 육화(Incarnation) 또는 필연(Necessity)의 주기를 통하여 개개의 혼ㅡ전체혼의 한 불꽃ㅡ이 의무적으로 걸어야 하는 순례. 다시 말하면, 우주의 제6원리(the Universal Sixth Principle)ㅡ또는 전체혼ㅡ의 순수 본질에서 비롯된 불꽃이 (a) 현현 기간 [(만반타라, Manvantara), 휴식(프랄라야, pralaya) 사이의 현현의 기간으로서 브라흐마의 하루ㅡ4,320,000,000 태양년에 해당한다ㅡ를 지칭한다. 만반타라(Manvantara)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①prakritika manvantara – 우주 만반타라, ②saurya manvantara – 태양의 만반타라, ③bhaumika manvantara – 지구의 만반타라, ④paurusha manvantara – 인간의 만반타라] 동안 현상계에 있는 모든 원소 형태를 두루 거치고, (b) 처음에는 자연적 충동에 의해서 그리고 나중에는 스스로 유도하고 고안해 낸 노력에 의하되 카르마에 의해 균형을 잡으며 개체성(individuality, Higher or Divine Ego를 지칭함)을 획득함으로써, 모든 수준의 지성을 통하여 상승ㅡ가장 낮은 것에서부터 가장 높은 정신(Manas)에 이르기까지, 광물과 식물에서부터 가장 신성한 대천사(Dhyani-Buddha)에 이르기까지ㅡ하기 전에는, 순전히 영적인 부디(Buddhi, Divine Soul)가 독립적으로 의식적인 존재를 취할 수 없다.
긴 세월동안 재생과 윤회를 거쳐 개인적인 노력과 공덕으로 쌓은 자아(Ego, 비전철학에서는 두가 지 Ego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개인적이고 죽는 personality이고, 다른 하나는 신적이고 불멸하는 Individuality이다)에 의한 특권이나 특별한 선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비전철학(秘傳哲學, Esoteric Philosophy)의 주축이 되는 가르침이다.
A. P. 씨네트(Sinnett)에게 보낸 대스승의 편지들에서
신이란 무엇인가? - “지혜의 대스승의 관점”
10번 편지 – 씨네트 씨 글씨체로 기록되었으며(편집자) 씨네트 씨에게 보내어진 대스승들의 편지에 나옴
NOTES BY K.H
흄(Hume)이 쓴 “신(GOD)”이라는 글의 서문에 나오는 오컬트 철학에 대한 설명을 하는 글의 서문으로 쓰려고 하였음.
1881~? 82 에 심라(Simla)에서 수신
우리 자신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철학도 신을 믿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대문자 G로 시작하는 대명사를 믿지 않는다. 우리 철학은 홉스(Hobbes)가 정의한 분야에 속한다. 그것은 원인들에 의한 결과들의 과학이고, 결과들에 의한 원인들의 과학이다. 그리고 베이컨이 정의하듯이, 그것은 제일원리에서 추론된 사물들에 관한 과학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원리를 인정하기 전에 우리는 알아야 하고 심지어 그것의 가능성을 인정할 권리도 없다. 지난 10월 당신의 모든 설명은 단지 논쟁을 위해서 인정한 한 가지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의 지식이 태양계에까지만 제한되어 있다고 당신은 들었다. 그러므로 철학자라는 이름이 가치 있기를 원하는 철학자들로서 우리는 태양계 너머에 소위 지고의 전지전능한 지성적인 존재를 인정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다. 그러나 만약 그런 존재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지 않고, 자연 법칙의 일정불변성이 그 한계들에서 깨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 가능성이 매우 적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방향으로 그리고 태양계에 관해서 불가지론을 가장 강력하게 부인한다. 우리의 가르침에는 어떤 협상이란 것이 없다. 우리의 가르침은 인정하지 않거나 부인한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은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학자들로서 불교도들로서 신(God)을 부인한다. 행성 생명들과 영적인 생명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태양계 속에는 인격적 혹은 비인격적 신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파라브라흠(Parabrahm)은 신이 아니라 절대적 불변의 법칙이고, 이쉬바라(Iswar)는 아비디야(Avidya)와 마야(Maya)의 결과, 즉 거대한 환영에 바탕을 둔 무지의 결과이다. “신(God)”이란 말은 인간이 결과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숭배하거나 두려워하는 그 결과들의 미지의 원인을 지칭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장하고 우리가 주장하는 것(원인과 원인들에 대한 지식)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 뒤에는 신 혹은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신에 대한 개념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개념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획득한 개념이고, 그리고 신학과 한 가지만 공통점이 있다---즉 우리들은 무한자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한하고 제한이 없는 공간, 기간(duration) 그리고 운동(motion)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현상들을 물질적, 자연적, 감각적으로 알려진 원인으로 돌리는 반면, 신학자들은 그것들을 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불가해한 미지의 원인들로 돌린다. 신학자들의 신(God)은 홀바흐(d'Holbach) 남작이 말한 단순한 상상 속의 힘, 즉 결코 현현된 적이 없는 힘이다. 우리의 주된 목표는 인류를 이런 악몽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미덕을 가르쳐서 신학의 목발에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 의지해서 삶을 걸어가도록 하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신학이라는 목발은 수 많은 세월 동안 거의 모든 인류를 비참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를 범신론적(pantheistic)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불가지론(agnostic)은 결코 아니다. 만약 사람들이 기꺼이 신(God)을 받아들이고 영원 속에서 불변의 무의식적인 “유일 생명(ONE LIFE)”으로 여긴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또 다른 거대한 잘못된 명칭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한(infinite) 이라는 단어는 경계(bound)라는 개념을 제외하는 부정적인 표현이다. 독립적이고 편재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 외부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다; 자신의 외부에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허공까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물질이 있을 수 있는 여지가 어디 있을까? 현현한 우주가 제한적이지만, 그 현현한 우주의 물질이 있을 공간이 어디 있는 것일까? 만약 유신론자가 생각하는 신이 진공, 공간 혹은 물질인지 묻는다면, 그는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은 물질이 아니지만 물질을 침투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의 생명(One Life)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 또한 그것은 침투해 있다고, 아니 그것은 모든 물질 원자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에 상응하는 것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물질의 모든 속성들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물질적이고, 물질 그 자체이다. 어떻게 지성이 비지성(non-intelligence)에서 뿜어져 나올 수 있을까 하고 그대가 계속 물었다. 어떻게 고도로 지성적인 인류가, 이성의 맨 꼭대기인 인간이, 맹목적이고 비지성적인 법칙 혹은 힘에서 진화해 나올 수 있을까? 그러나 한번 우리가 이런 선을 따라서 계속 생각한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만약 절대 지혜(absolute Wisdom)가 사고하는 지성적인 존재라면, 만약 절대 지혜가 우주의 지배자이거나 창조자라면, 어떻게 그 절대 지혜에서 선천적으로 바보들이나 비이성적인 동물들과 다른 창조물들이 진화해서 혹은 창조되어 나올까? 클라크(Clarke) 박사가 신성(Divinity)의 존재를 증명하는 조사에서 말했다. “눈을 만든 신(God)은 볼 수 없을까? 귀를 만든 신은 들을 수 없을까?” 그러나 이런 방식의 사고에 의하면, 신이 바보를 창조하는 것을 보면 신(God)은 바보이거나, 많은 비이성적인 존재들과 도덕적인 괴물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신도 비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 우리는 아드바이타 신봉자(Adwaitee)가 아니지만, 하나의 생명(one life)에 관한 가르침은 그들의 파라브라흠(Parabrahm)에 대한 가르침과 동일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철학적인 생각을 가진 아드바이타 신봉자는 자신을 불가지론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파라브라흠 이자 보편 생명과 혼이 모든 면에서 똑같다(대우주가 소우주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과 분리된 신은 존재하지 않고, 어떤 존재 없이 창조자도 없다는 것을 안다. 영지(gnosis)를 찾은 후에는 그것에 등을 돌려서 불가지론자가 될 수 없다.
… 만약 최고의 디얀 쵸한들(Dyan Chohans)도 망상 하에서 잘못을 하기 쉽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러면 우리들에게는 진정한 실재가 없을 것이고, 오컬트 과학은 신과 같은 거대한 괴물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모르는 것을 부인하는 모순이 있다면, 그것을 미지의 법칙들로 돌리는 것도 한층 더 사치스러운 일일 것이다.
논리학에 따르면 “무(nothing)”는 모든 것이 진정으로 부인되는 것이며 아무 것도 진정으로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한 무” 혹은 “유한한 무”라는 개념은 용어상 상호모순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에 의하면, “신, 자존자(self existent being)는 가장 단순하고 변하지 않으며 불멸의 존재이다; 신은 우리가 물질에서 보는 특질들, 부분, 형체, 운동, 가분성 등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모든 것들은 당연히 그리고 명백히 그 자체의 개념 속에서 유한함을 암시하고 완전한 무한성(complete infinity)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6세기에 경배 대상인 그 신은 인간이 어떤 판단을 정할 수 있는 그런 특질을 모두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 이것은 상호 모순되지 않지만 우리가 아무 것도 단언할 수 없는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 사리판단을 할 수 있고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끔찍하고 잔인하다고 부르는 그런 불완전한 특질들을 완전하다고 부르지 않는다면, 그들의 성경인 요한계시록에서 신에게 쌓아 올린 모든 도덕적인 인식들을 파괴해 버릴 것이다. 오히려 미신을 가진 대중들을 위해서 쓰여진 불교의 경전들을 읽어본 사람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호화스럽게 굽실거리며 숭배하고, 성경의 많은 곳에서 상호 모순되는 그런 불완전함을 가진 그 천상의 폭군에게서 볼 수 있는 어리석고 잔인하며 불공정하고 앙심을 품은 그런 데몬(demon)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그대들의 신학은 산산조각으로 파괴하는 것 밖에 없는 신학의 신을 창조해냈다. 그대들의 교회는 자신의 자식들을 잡아먹는 신화에 나오는 사투르누스(Saturn)이다.
보편 정신(Universal Mind)---얼핏 보기에 다음과 같은 모순되는 이유 때문에 틀림없이 우리가 비난을 받을 것이다. 1) 우리는 사고하고 의식하는 신(God)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런 신은 제한되어 있거나 변할 수 있어서 유한하기 때문이다. 2) 만약 그런 신이 물질이 없는 영원 불변의 독립적인 존재라면 그러면 그것은 어떤 존재가 아니라 불변의 맹목적인 원리, 법칙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우리가 디얀들(Dyans) 혹은 행성영들(Planetaries)ㅡ또한 영(spirits)들이다ㅡ을 믿으며, 그 존재들에게 보편적인 정신(universal mind)을 부여한다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다.
그 이유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우리는 무한하고 영원한 우주 속에서 두 개의 무한하고 영원하며 편재하는 존재들이 있을 수 있다는 터무니 없는 진술을 부정한다.
(2) 우리가 아는 물질(Matter)은 영원하다.1 즉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a) 왜냐하면 물질은 대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b) 왜냐하면 스스로 사라질 수 없고 파괴할 수 없는 그것은 반드시 존재하고 그러므로 시작이 있을 수 없고 끝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c) 왜냐하면 무수한 세월 동안 축적된 경험과 과학의 경험이 물질은 그 자신의 독특한 에너지로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고, 어떤 원자도 절대적인 휴지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래서 그것은 항상 존재했었음에 틀림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물질들은 언제나 변하는 형태와 조합들 그리고 특질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원리 혹은 요소는 절대적으로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이다.
(3) 신(God)에 관하여, 그 누구도 본적이 없기 때문에, 만약 그가 혹은 그것이 이 무궁하고 영원한 물질, 에너지 그리고 운동의 바로 그 본질이자 본성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를 영원하다고 혹은 무한하다고 혹은 자존한다(self existing)고 여길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a) 우리가 철저하게 잘 알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물질의 특질들과 특성들 속에는 그가 존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고, (b) 만약 그가 혹은 그것이 그 물질의 일부분이라면 그가 의존하고 있는 그것의 지배자이자 배후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터무니 없기 때문이며, (c) 만약 신이 물질과는 독립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순수영ㅡ우주 밖에 있는 신성ㅡ이라면, 그런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인정하더라도 순전히 비물질적인 영이 지성적이고 의식적인 지배자 일리 없고, 신학에서 그에게 부여한 어떤 특질들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그런 신은 단지 맹목적인 힘에 불과하다고 답할 것이다. 디얀 쵸한(Dyan Chohan)들 속에서 보여지는 지성은 그들을 구성하는 물질들이 보이지 않거나 가늠할 수 없더라도 조직화되어 살아있는 존재에 속하는 능력이다. 지성은 사고를 필요로 한다; 사고하기 위해서 개념들이 있어야 한다; 개념들은 물리적, 물질적인 감각들을 가정하는데, 어떻게 물질적인 것이 순수 영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생각이 물질의 속성일 리 없다고 반대한다면, 그 이유를 물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런 가정에 답할 수 없는 증거를 우리는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신학자가 말하는 신이 만물의 창조주이기 때문에ㅡ물질에 생각의 능력을 부여하므로ㅡ그의 신을 막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물을 것이다; 그리고 신이 그렇게 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며 하나의 신비라고 대답했을 때, 물질이 영과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 영(spirit) 혹은 신의 생각이 물질을 창조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이유가 무엇인지 듣기를 강력하게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정신의 신비 앞에 굴욕을 당한 채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많은 세월 이전에 그 신비를 풀었기 때문이다. 신학 이론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의식 상태들은 두뇌에 있는 분자들이 결집함으로써 만들어진다는 자동기계 이론(automaton theory)도 거부한다; 또한 의식에 의해서 분자 운동이 만들어진다는 다른 가설도 무시한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우리는 많이 조롱 받은 플로지스톤(phlogiston)2을 믿으며, 어떤 자연철학자들이 부르는 “니소스(nisus)”, 하나의 물체가 다른 물체에게 미치는 영속적이며 보통 감각들로 감지할 수 없는 운동 혹은 노력ㅡ불활성 물질의 고동, 생명ㅡ을 믿는다. 행성영(Planetary spirits)들의 육체들은 프리스틀리(Priestley)와 다른 사람들이 ‘플로지스톤’이라고 부른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즉, 가장 높은 일곱 번째 상태 속에 있는 본질인데, 그것은 최고로 순수한 디얀(Dyans)들의 유기체들을 구성하는 물질을 형성하고,3 가장 낮은 조잡한 형태는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단계의 행성들의 덮개로서 역할을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물질(MATTER)만을 믿는다. 우리는 보이는 성질로서 물질을 믿고 영속적인 운동을 하는 비가시적인 전능의 편재하는 프로테우스(Proteus)인 생명을 믿으며, 자연은 거대한 전체이므로 자연의 밖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은 그 자신으로부터 물질을 끌어온다. 밸링거(Bellinger)가 맞게 말했듯이, “운동(motion)은 필연적으로 물질의 본질에서 흘러나오는 존재의 한 방식이다; 그 물질은 자신의 독특한 에너지들에 의해서 움직인다; 그 운동은 그 자신 속에 내재하는 힘에서 기인한다; 운동과 그 결과 나오는 현상의 다양성은 원래 태초의 물질 속에서 발견되는 조합들과 특질들의 속성의 다양성에서 나오고,” 자연은 그 태초의 물질의 집합이며, 칸트의 형이상학에 대해서 티벳의 야크 마부보다도 과학은 더 모른다.
그러면 물질의 존재는 하나의 사실이다; 운동의 존재도 또 다른 사실이고, 그들의 자존(self existence)과 영원성 혹은 불멸성도 세 번째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의 존재(Being)로서 순수영(pure spirit)의 개념은 무엇이라고 부르건 불가능한 생각이고, 하나의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악에 대한 우리의 생각.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선(good)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희생 되는 사람에게는 악은 존재한다. 그것은 두 가지 원인들에서 나오고, 그것은 자연 속에서 선 이상도 아닌 독립적인 원인이다. 대자연에는 선이나 악이 없다; 대자연이 생명과 기쁨을 주거나 고통과 죽음을 보낼 때 단지 불변의 법칙들을 따를 뿐이고, 자신이 창조한 것을 파괴한다. 대자연은 모든 독에 대한 해독제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고통에 대한 보상이 그녀의 법칙들이다. 새에게 먹힌 나방은 그 새가 되고, 동물에게 잡아 먹힌 작은 새는 더 높은 형태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만물의 영원한 적합성이자 필연적인 법칙이기 때문에, 그것을 대자연 속에 있는 악(Evil in Nature)이라고 부를 수 없다. 진정한 악은 인간의 지성에서 나오고 그 기원은 대자연과 분리되어 사고하는 인간에게 전적으로 달려있다. 그래서 인류만이 악의 진정한 근원이다. 악은 선의 과장(誇張)이고,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의 자손이다. 아주 깊게 생각해보면, 죽음(악이 아니라 필연적인 법칙이다)과 예상치 못한 일(미래에 그 보상을 항상 준다)을 제외하고 크건 작건 모든 악의 근원은 인간의 행동 속에 있고, 인간의 지성은 대자연 속에서 인간을 자유행위자로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질병들을 만들어낸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자연의 경제 속에서 인간의 임무와 운명은 노령에 의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사고를 제외하고 야만인도 야생 동물도 질병으로 죽지 않는다. 음식과 성적인 관계 그리고 주류는 모두 삶에서 자연스럽게 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하면 정신적 육체적인 질병과 고통을 가져오고, 육체적인 질병과 고통은 미래 세대들에게 최대의 악으로 전달될 것이다.
명예와 부를 획득함으로써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락과 행복을 얻고자 하는 욕망과 야망은 칭송할 만한 자연스러운 감정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을 잔인한 폭군과 수전노, 이기적인 자기중심주의자로 변형시킬 때, 그 사람 주위에 있는 사람들, 국가 및 개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면 이런 모든 것, 식량, 부, 야망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 천 가지의 다른 것들이 풍부하건 부족하건 악의 원인이자 근원이 된다. 대식가와 난봉꾼, 그리고 폭군이 되면 인류의 고통과 질병들의 시조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없으면, 굶을 것이고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업신여겨질 것이며, 대부분의 동료들은 당신의 삶 전체를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비난할 것은 자연이나 가상의 신이 아니라, 이기심으로 비도덕적으로 변한 인간의 성질이다. 이 몇 마디 말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라; 생각할 수 있는 악의 모든 원인을 계산해보고 시초까지 추적해보라. 그러면 악의 문제의 3분의 1은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자연적인 악들에 대해서 감안한 후에, 인류를 쫓아 다니는 악들의 3분의 2의 주된 원인이 되는ㅡ그 원인이 하나의 힘이 된 이후ㅡ최대의 악을 지적할 것이다. 그것이 어떤 형태건 어느 나라에서건 바로 종교이다. 그것은 바로 사제들과 교회들의 성직 계급이다; 인간이 신성하다고 여긴 것이 바로 그 환영들 속이고, 인류를 거의 압도해버린 거대한 저주인 많은 악들의 근원을 끝까지 찾아서 밝혀내야 한다.
무지가 여러 가지 신들(Gods)을 만들었고 교활함이 이런 기회를 이용하였다. 인도, 기독교, 이슬람 그리고 유대교 및 주물숭배(Fetichism)를 보라. 이런 신들을 공포스러운 신으로 만든 것이 바로 사제들의 사기이다; 인간을 이기적이고 편견이 많은 사람으로 만든 것이 바로 종교이고, 자기 종파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인류를 혐오하는 광신자로 만든 것도 종교이다. 인류를 구제한다는 핑계로 소수의 사람들이 인류의 3분의 2를 그들의 노예로 만든 것도 바로 신과 여러 신들에 대한 믿음이다. 만약 그의 신이나 신들이 범죄를 요구한다면 인간은 어떤 종류의 악이든 그것을 언제든지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인간은 교활한 성직자들의 비참한 노예이자 환영의 신(God)의 자발적인 희생양이다. 아일랜드, 이탈리아 혹은 슬라보니아의 농부는 성직자와 사제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굶주리고 가족들이 헐벗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지난 2천 년 동안 인도는 카스트 제도의 무게에 눌려 고통 받았고, 브라만들만 살찌웠다. 그리고 이제 예수와 모하메드의 추종자들도 그들의 신화들의 영광과 이름으로 서로의 목을 베고 있다. 인류가 진리와 윤리 그리고 보편 자비의 이름으로 가짜 신들의 제단을 파괴할 때까지 인류의 전체 고통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만약 우리도 사원들을 가지고 있고, 승려들이 있으며, 그 승려들이 자선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를 부정한다면, 그것들은 서구의 종교들과 공통적이지만 이름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우리의 사원에는 숭배하는 단일 신이나 여러 신들이 없고, 단지 이제까지 살았던 가장 신성한 인간으로서 가장 위대한 분들에 대한 가장 신성한 기억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승려들이 신성한 대스승께서 세우신 승려들의 공동체를 기리기 위해서 평신도들이 주는 음식을 받으러 세상 밖으로 나가면, 수 만 명까지 달하는 평신도들이 오히려 승가(Samgha:승려들의 공동체)에 의해서 먹여지고 돌봐진다. 승가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우리의 승려들은 음식을 받지만 결코 돈을 받지 않는다. 악의 근원이 설파되고 사람들에게 인상을 주는 곳이 바로 그런 사원들이다. 사원에서 사람들은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배우고, 인과관계의 고리(12연기(nidana))가 고통의 근원과 파괴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준다.
마하박가(Mahavagga)를 읽어보고 완전하게 깨달은 분(Fully Enlightened one)이 첫 번째 칸다카(Khandhaka)에서 말씀하신 것의 진리와 영감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라.
그것을 여기에 번역해 본다.4
“신성한 부처께서 네로비가라(Nerovigara) 강변에 있는 우르벨라(Uruvella)에 도착하셨을 때, 인과관계의 고리에 정신을 집중한 지 일곱 번째 되는 날에 정각자(Sambuddha)가 되신 후 보리수 아래에서 쉬고 계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지(Ignorance)에서 삼중구조 성질의 삼카라(samkharas)가 생겨난다---생각, 말, 육체의 생산. 삼카라에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에서 이름(name)과 형태(form)가 일어나고, 이것에서 여섯 가지 영역(region)들이 생겨난다(여섯 가지 감각들로 일곱 번째가 깨달은 자의 특질이다); 이것들로부터 접촉이, 접촉으로부터 감각이 일어난다; 이것으로부터 갈증(욕망 혹은 카마, 탄하(tanha))이, 갈증으로부터 집착, 존재, 탄생, 노년 그리고 죽음, 슬픔, 통곡, 고통, 낙담 그리고 자포자기가 온다. 무지를 파괴함으로써 삼카라를 파괴하고, 의식, 이름, 형태, 여섯 영역, 접촉, 감각, 갈증, 집착(이기심), 존재, 탄생, 노년, 죽음, 슬픔, 통곡, 고통, 낙담 그리고 자포자기가 파괴된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전체를 멈추는 것이다.
이것을 아시고 신성한 분께서 준엄한 말씀을 하셨다. “사물의 진정한 본성이 명상하는 승려(Bikshu)에게 명확해질 때, 그 때 모든 의심들이 사라진다. 이제 그는 그 본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원인을 배웠기 때문이다. 무지에서 모든 악들이 생겨난다. 지식으로 이런 고통 전체를 멈추게 된다. 그리고 명상하는 브라흐마나(Brahmana)는 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태양처럼 서서 마라(Mara)의 대군들을 물리친다.”
여기서의 명상은 영적인 힘들 중에서 가장 높은 초인간적(초자연적이 아닌)인 특질들 혹은 아라한의 지위(arhatship)를 의미한다.
1882년 9월 28일 심라(Simla)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As Above So Below
- G R S 미드(Mead)
위에는 천국, 아래에도 천국; 위에는 별들, 아래에도 별들;
위에 있는 모든 것은 또한 이렇게 아래에도 있다; 이것을 이해하라 그러면 축복을 받으리라.
ㅡ 커쳐, 프로드롬(Kircher, Prodrom. Copt., pp 193 and 275)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ㅡ이 말은 “위대한 말”이고, 신성한 구절이며, 지혜의 말이고, 금언이며, 신비한 공식이고, 근본적인 법칙이다ㅡ혹은 양날의 검으로, 이전에 그것을 다루는 신중한 훈련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다면, 심각한 해를 주는 말이다.
이 유명한 “말”이 헤르메스 전통에서 유래되었는지 아닌지 의문을 가지고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생각 자체만큼이나 오래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 깔려 있는 사상은 어떤 다른 불멸의 사상보다도 더 자주 뒤죽박죽 되어버렸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는 사물들의 수없이 많은 모습들을 단 하나의 진리로 요약하는 진정한 이성의 바탕인 유추의 법칙이라는 광대한 사상을 의심할 여지 없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에서 다양함으로 되어가는 신비ㅡ하나 속에 있는 모든 것, 모든 것 속에 있는 하나ㅡ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 이것은 부주의한 생각이나 어떤 운 좋은 추측 혹은 시간 때우기 위해 인위적으로 교환하는 글을 통해서는 얻을 수가 없다. 만약 진리가 진실로 알려져야 한다면, 논쟁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사용할 때, 십중팔구는 처음부터 질문을 회피해서 결국 처음 시작한 곳에서 끝나고, 그리스도 말씀에 반대되는 주장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다루는 주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말 속에 숨겨져 있는 영원한 진리를 이해해서 모든 주제들을 환하게 밝히는 대신에,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덧없고 거짓된 명제로 변형시켰다: “아래에서처럼, 위에서도”. 진실로 악마는 신의 그림자이다(Deus, verily, inversus est demon). 그리고 빚을 갚아야 할 악마가 있다. 그러나 운 좋게도 비논리의 시대에서 심지어 이것 속에도 어느 정도의 보상이 있다; 왜냐하면 모든 신비 세계가 알고 있듯이, 악마는 단지 신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심지어 현대 사상의 줄기에서도, 점점 실질적인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원리들과 원칙들 속에서도, 우리의 영원한 금언이 꺼꾸로 서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최근의 신학과 철학 속에서도 인간이 우주의 척도라는 고대의 사상이 강력하게 되살아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을 실용주의 라는 개념으로 부르건 “달콤하게 들리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건 모두 마찬가지이다. “아래에서처럼, 위에서도.” 사실 이렇게 뒤바뀌는 것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렇게 뒤집힌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심지어 명철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우주를 이렇게 인격화시키고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최고의 그림자를 외부 세계 사물들의 모습이라는 무한한 스크린 위로 내던지는 것이 훌륭한 연습이 아니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진실로 이런 모든 것들, 세계들, 태양계들, 원소들, 공간들, 무한함 그리고 시간과 시간 없음과 같은 것들과 동질이 아닐까?
그러나 사물을 이렇게 보는 방법은 신비주의 초보자에게는 일반적으로 성가신 일이 아니다. “아래”에 대해서 알려진 약간의 사실에 매혹되고, 그가 알아차리게 된 놀라운 사건에 감탄하면서, 그것에 무게를 두고, 어떤 특정한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과장하며, 마침내 온통 뒤죽박죽인 “아래에서처럼”을 영원한 “위에서처럼”으로 혼동하면서 진리에 도달했다고 마음 속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만약 그가 진정으로 그 “아래”에 도달했다면, 자신의 우주 속으로 눈부시게 들어온 그 외로운 아래뿐만 아니라, 같은 부류의 다른 모든 “아래”를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철학화 하는 대신에 평범하게 돌아가보자. 물질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한 측정과 관찰 그리고 근대 과학의 기계적인 기술로 요약된 어느 정도의 명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 영역을 넘어서면 미지수가 있다고 한다; “보고 있는” 신비가에게 미지수는 없다. 단지 무한한 일련의 섬세하고 미묘한 감각들이 있을 뿐이다. 과학자들이 공정한 방법으로 이런 정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인상들의 성질을 조사하고 격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제는 모든 지적인 독자들이 알고 있다.
신지학을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에게 그렇게 강렬한 흥미를 자아내는 이 영역에서 “위에서처럼”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말할 수 있을까? 그럼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먼저 물질계를 넘어서는 단계, 즉 심령계 혹은 아스트랄계를 보자. 이 계는 물질계와 연속되어 있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두 상태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있는가? 동쪽은 동쪽이고, 서쪽은 서쪽이다. 아스트랄은 아스트랄이고, 물질은 물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단지 감각적으로 아니면 이성적으로 구분이 가능한 것일까?
제일 먼저 부딪히는 어려움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감각이 아무리 예민하다 하더라도, 아무리 최고로 “명확하게 보는”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똑같이 볼 수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명확하게 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많은 노력을 하더라도 설명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물질적인 용어들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다. “아스트랄”계에 쓰여진 모든 것이 물질계의 미묘한 단계라는 것 이외에 일반 독자들에게 어떤 다른 인상도 남기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마도 투시가가 자신의 두뇌 의식 속으로 기록한 그 인상들을 설명할 때, 그는 그것들을 번역해서 자신의 의식이 제공할 수 있는 형태들, 즉 물리적인 형태들로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심령계와 물질계 사이에는 고정된 심연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인상들은 심령계에서 물질계로 넘어올 수가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런 인상들은 그것 자체의 성질상 이 세계로 원래 그대로 넘어올 수가 없다. 그것들은 옷을 입어야만 한다.
이제 만약 이것이 진실이고 대자연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그러면 아스트랄계의 바로 그 성질은 넘을 수 없는 심연 때문에 물질계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다: “동쪽은 동쪽, 서쪽은 서쪽이다.” 그러나 진정 그것이 맞는 것일까? 지금까지 그 심연을 완벽하게 넘을 수 있는 사람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때문일까? 아니면 심지어 그 심연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식 속에 있는 그 심연을 넘을 수 없어서 그 의식의 연속성을 따라올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심지어 물질계에서 아스트랄계로 의식이 지속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곳으로 가야지 그것이 여기로 올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물질계 속에서 아스트랄계를 정확하게 기록할 수 없다. 그 이미지를 원형 그대로 정확하게 재생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원형이 이미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도 혹은 질적인 차이가 무엇일까? 진짜 아스트랄은 물질과 어떻게 다른가? 소위 물질의 “4차원” 상태에 관하여 추측해서 어떤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이것은 엄청 어려운 주제이다. 그리고 가장 바깥 부분을 제외하고 깊이 들어가지 않을 것을 제안한다. 사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현재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2차원과 3차원 그리고 3차원과 4차원간의 이런 모든 유추들은 명백하게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는 오류라는 것이다. 바로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가 이 경우이다. 2차원의 공간 그리고 2차원의 존재들이 그 속에서 살고 움직이고 있다는 쓸데없는 가정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표면은 하나의 생각이지, 의식할 수 있는 세계의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서 표면을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정신적인 개념이지, 느낄 수 있는 실재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고, 맛을 볼 수도 없으며,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만질 수도 없다. 2차원 존재들은 우리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이자 절대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를 의식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표면이라고 불려지는 절대적인 개념에서 그 자체의 관점은 있을 수 없고, 단지 다른 관점에서만 있을 것이다. 심지어 가장 원시적인 촉각도 2차원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건드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차원의 존재들이 2차원 존재들의 의식 속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고 일련의 3차원 현상들로부터 4차원을 만드는 것이 무척 악순환이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런 방식으로는 4차원에 도달할 수가 없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은 매우 다른 방법이어서, 3차원에서 나와서 어느 차원으로 들어갈지 누가 알겠는가? 2차원 속으로 혹은 모든 차원 속으로 누가 알겠는가?
하여튼 후기 플라톤 학파는 흥미롭게도 “아스트랄”을 “계(plane)”라고 불렀다; 그들은 소위 칼데아 신탁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영(spirit)과 계(plane)를 더럽혀서 굳어지게 하지 마라.” 여기서 근대 신지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대응시키면, “영”은 “에테르(etheric)”를, “계”는 “아스트랄”을 의미한다. 프세르스(Psellus)가 말하길, “칼데아인들은 혼을 두 가지 옷으로 치장했다: 하나는 감각 있는 체로부터 만들어진 생기 있는 것(the spirituous)이고, 다른 하나는 “계(the plane)”라고 부르는 빛나고 미묘하며 만질 수 없는 것이다.” [오르페우스(Orpheus) p. 283 참조]
이것보다 높은 것이 “선(lines)”과 “점(points)”이다. 이 모든 것이 아마도 정신의 영역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물질적인 것과 비교해서 순수한 의미의 “아스트랄”은 무엇일까? 순수한 아스트랄에서는 사물들이 어떻게 보일까? “여기 아래에서” 아스트랄 속에 있는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 얘기할 때마다 우리는 물질계의 언어로 얘기해야만 한다. 그 다른 것이란 무엇을 구성하는 것일까? 그 다른 것이라는 것을 물질 속에 있는 심연 혹은 어떤 갭(gap)으로 여기고 구분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자연은 건너뛰지 않는다(nature does not leap)”; 또한 “자연은 진공을 혐오한다(she abhors a vacuum)” 등등의 말처럼, 이런 갭은 터무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물질에는 어떤 연속성이 있을 것이라는 불가피한 직관을 가지고 장막의 또 다른 면과 맞닥뜨린다. 만약 인간을 공간 속으로 추진시켜서 들여보낼 수 있다면, 공기와 원소들 속에 순서대로 그의 여러 매개체들을 남겨놓을 것이다. 반면에 그의 혼은 마지막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그것이 이 우주에서 어디이든 혹은 어느 곳이든 어느 지점에서건 그 자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가능하더라도, 근대 신지학을 공부한 학생들에게 익숙한 원자의 그림처럼, 우주 물질(cosmic stuff)이 계속해서 자기자신 속으로 감아 올리는 것을 힘의 체계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으로 본다면, 그 개념이 매우 번뜩이는 생각이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면 우파니샤드에 있는 구절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카페트처럼 말려진 하늘”에 의해서 만물이 여기 아래에서 굳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위(above)”는 “아래(below)” 속으로 말려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과정을 따라갈 수만 있다면, 아마도 이 구절에 깔려 있는 진리를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슈베따슈바따라 우파니샤드(shvetâshvataropanishat)의 저자처럼 비꼬는 의미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카페트처럼 하늘을 말아 올릴 때, 그 때가 되면(그 때 비로소) 인간이 신을 모르더라도 슬픔의 끝이 있게 될 것이다.”(슈베따슈바따라 우파니샤드, vi, 20) 그 때가 되면 아마도 그들은 신이 되어있을 것이다.
[참고: 궁극 원자의 그림]
사실 모든 과학적인 사고의 바탕에는 물질의 이런 연속성을 토대를 두고 있다; 그것은 영원하고 지속적인 변형, 그러나 어떤 갑작스러운 도약이 아닌 질서정연한 진화 그리고 어떤 기적 혹은 원인 없는, 즉흥적인 놀라움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언젠가는 아스트랄에서 물질로의 직선 “하강(descent)”이 인류의 발명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통제될 것이고, 심령적인 관점에서 심지어 가장 희망이 없는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조차도 아스트랄계가 보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모든 심령적인 조사를 손상시키는 인류의 관찰 오류들이 배제될 것이다. 마치 인류의 천재성으로 이미 고안된 놀랍도록 섬세한 도구들로 물리적인 관찰 오류들을 제거하는 것처럼 기적적으로 인류의 관찰 오류들을 없애게 될 것이다.
현재의 추측의 주요 전제에서 이것이 바로 따라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에 나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이 기계에 달려 있을까? 그렇다면 진정 기계에서 신이 나오는 것이다.(Dei ex mchinis)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위에서처럼, 아래에서도”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왜, 이것인가: 만약 분별 있는 세계가 단계적으로 상승한다면, 정상적인 감각들로 우리에게 익숙한 조잡한 상태에서 물질의 섬세한 정도를 지나서 결국에는 도달하게 된다. 아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무엇에 도달한다는 것인가? 어디서 시작한다는 것인가? 그 문제의 진실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더라도 물질의 용어로 생각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형이상학자가 아닌 어떤 신비가 입장에서 “언제나 항상 얇은” 그 생각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보자. 옛날의 형이상학에서 자연(physis)은 되어가는(becoming) 장(field), 즉 본성(natura)인 모든 자연을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위로 얼마나 많은 단계들이 있을까? 일단 일곱 단계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위(above)”는 아마도 매우 모호할 것이고, 내부에서 외부로 나오는 일종의 “구형의(spherical)” “원조(原條,primitive streak)”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원조이고 아마도 물리적인 발생학에서 처음 나타난 원조와는 다를 것이다. 어쩌면 상응하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상응은 물질의 많은 단계들을 통해서 추적해가야 한다; 물질 바로 다음 단계에서 이미 정상적인 감각들에 영향을 받는 물질들에게 힘 혹은 에너지로서 작용한다. 바로 여기 처음부터 우리는 아스트랄 “미지수(x)에 직면하고, 물질의 형태와 같은 방식이라기 보다 물질과 비교해서 어쩌면 “힘들의 체계”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만약 이 관점이 순전히 물질적인 형상화와 상징주의에 의한 아스트랄에 대한 해석보다 한 단계 더 실재(reality)에 근접한다면---그렇다면 구형(spherical)의 원조(原條:primitive streak) 단계의 성질은 무엇일까; 이미 첫 번째 동떨어진 단계부터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앴을 때?
왜냐하면 서로 거리 상의 차이만 있는 일련의 거울들 위로 단순하게 물질의 그림을 던짐으로써 확실하게 더 많이 나아가지 못한다. 하여튼 깊이 생각하는 정신으로 볼 때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가 그것들에 대해서 물리적인 대화를 나눌 때 그것에 대한 경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섬세한 감각들만큼이나 꽤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감각과 이성이라는 겉으로 보기에 영원히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서 결정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는 것을 이해해 두자; 진실로 이 신성한 결혼의 영원한 배우자들을 분리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 거의 부적절하고 형편없다는 개인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꼴사나울 뿐만 아니라 신성모독이다---아마도 심지어 성령에 대한 죄이다. 아니다. 모든 합일들 중에서 가장 친밀한 합일 속에서 손을 잡고 그들은 영원히 함께 가야 한다. 그들의 공통 근원인 진정한 인간(true Man)을 낳으면서.
여전히 우리의 정신 앞에 그 의문을 계속해서 놓아 두는 것이 유리하다: 무엇이 원형(prototype)이고; 무엇이 패러다임(paradigm)인가; 무엇이 로고스(logos), 이성(reason)인가; 생각(idea)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면 모든 동물들과 비교해서 동물 그 자체인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autozôon)는 무엇인가; 모든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언제나 “같은 것”은 무엇인가?
의식적인 추론 속에서 태어난 서구세계의 철학화의 근저에 깔려 있는 사물들에 대한 직관은ㅡ피타고라스 시대부터 그 이후 계속ㅡ실체(noumenal)를 현상(phenomenal)이나 감각보다 우위에 놓으면서 온다---정신을 혼보다 우위에 놓는다. 순수한 정신의 특징은, 정신은 다른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보고”, 자신을 언제나 “본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진리의 계(plane)”이다---패러다임들이나 견해들 그리고 만물들의 이성들이 어디에 있건. 그리고 여기서 “어디”라는 것은 공간의 장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런 것들의 영원한 원인이고 그것들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스스로 조건 지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지고한 테마에 대해서 글쓰길 시도한다는 것이 너무 어렵고 너무 길어서 할 수 없다.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한 가지가 있다; 즉 용어들을 부주의하게 의식이라고 해석하는 것이고, 스탈로(Stallo)가 “생각들의 구상화(reification of ideas)”라고 부르는 습관 속으로 너무 깊이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당신의 생각을 구상화 혹은 구체화할 때, 그것이 중력이건 원자가(atomicity)이건 혹은 진동(vibration)이건, 당신은 그 그림자만 얻는 것이고 실질(substance)를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근저에 깔려 있는 진리 혹은 실체(noumenon)를 얻는 게 아니라 현상, 외형을 얻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짧은 글에서도 같은 단어들을 완전히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을 이미 볼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과 감각의 신성한 결혼에 대해서 말할 때, 힌두 철학의 아트만(atman)인 “대아(Self)”를 나타내는 의미의 “그 정신(the mind)”과 다른 의미로 “정신(mind)”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단어들을 사용하더라도ㅡ그리고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이런 말들에 대해서 싸울 만큼 어리석을까?ㅡ사물들의 “이성(reasons)”를 드러내 보이는 그 “시력(sight)”이, 사물들의 형태가 아무리 섬세하고 아름답고 웅장한 형태라도, 사물들의 감각적인 형태들을 보는 그 “시력(sight)” 보다 훨씬 고귀하고 신성하다는 것은 올바른 정신에서 보면 지울 수 없는 위치이다. 그리고 사물들의 “이성”을 본다고 말할 때, 어떤 설명이나 공식 혹은 추상개념을 지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여기서 “이성”은 로고스(logos)를 의미한다---사물들의 “이성”들을 “본다”라고 할 때, 우리는 모든 사물들 속에서 “자아들(selves)”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아들은 우리들 존재의 진정한 기반이기 때문이고, 우리를 구성하고 우리 속에 있는 바로 그것, 그(Him)와 친척인 로고스(Logos), “신의 자식들(Sons of God)”이기 때문이다.
“위에서처럼, 아래에서도.” 그렇다면 “위(above)”라는 것은 어떤 공간도 방향도 차원도 그리고 시간도 없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위(above)”가 “아래(below)”보다 더 우월한 것인가? 바로 여기가 정신이 멈추는 곳이고, 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다. 영원(Eternity)은 시간(Time)보다 위대한가? 아니면 시간이 영원보다 더 강력한가? 물론 많은 학파들에서 이전에 말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진짜 그럴까? 우리가 혹시 그 반대 영역에 있지는 않을까? 어떤 것도 다른 것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똑같이 동등하게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여전히 말로만 말하는 영역 속에 있다. 다시 한번 진실로 악마는 신의 그림자 라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말로도 그것을 그(Him) 혹은 그것(That)이라고 부를 수 없다. 또한 중성의 호칭도 남성의 호칭만큼이나 부적합하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만 경배되어야 한다.” 그대가 위인 것처럼, 그대는 또한 아래이다; 그대가 그대 속에 있는 것처럼, 그대는 또한 인간(Man) 속에 있다; 그대 자신이 그대 속에 있듯이, 그대의 인간도 그대 속에 있다---지금 그리고 영원히.
신지학 출판사 아디야르(Adyar), 첸나이(마드라스) 인도
세가지 근본원리(The Three Fundamental Principles) - 번역 강구영
The Secret Doctrine (by H.P. Blavatsky) 은 세가지 근본 원리를 확립하였다. 신지학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이 몇 가지 기본 개념들을 명료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과거에 존재하였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들의 근본원인(Cause)인 유일무한원리(One Infinite Principle)가 있다. 이 원인인 자신(Self)은 모든 공간에 존재하며, 우리들은 그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없고 변화하지 않는 바로 그것(THAT)이다. 우리가 인지하고 알고 경험하는 모든 것 뒤에는 바로 이 통합된 하나의 자신(One undivided Self)이 있다. 감각기관을 통하여 보고 알거나 또는 경험하는 것들 이외의 것을 인지하고 알고 경험하는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은 바로 이 유일자신(One Self)이고, 하나의 의식(Consciousness)이며,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고, 모든 존재 안에 있는 능력이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형제애(Brotherhood)ㅡ인간 이상의 모든 존재와 인간 이하의 모든 존재를 하나로 결속하는 끈ㅡ의 기반이 있는 것이다.
둘째, 두번째 원리, 즉 법(Law)은 카르마(Karma)라고 불리운다. 이것은 자연(Nature) 안에 존재하는 되풀이되는 순환 법칙으로서 깨진 균형을 회복하려는 끊임없는 흐름이다. 카르마는 우리의 도덕성에 적용되는 법칙이다. 그것은 윤리적인 인과법칙이고, 정의(justice)와 상벌의 법칙이며, 탄생과 재탄생(rebirth)의 원인이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단지 원인에 따라 발생하는 결과이고, 작용과 반작용이며, 모든 생각과 행동의 결과이다. 카르마는 문자상으로 행위(action)를 의미한다. 신지학에서는 우주를 지성을 가진 전체(an intelligent whole)로 본다. 따라서 우주 안에서의 모든 움직임은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이며 이 결과는 또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동하고, 좋건 나쁘건 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며, 우리들이 필연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는 반응은 결국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원인들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절대정의의 개념과 자유의지의 핵심도 여기서 도출된다. 카르마와 관련된 또 다른 순환법칙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환생(Reincarnation)이다.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들은 혼(soul), 정신(mind), 및 영(spirit)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진화무대인 이 지구상에 신체를 빌어서 거듭 태어난다. 인간은 인간존재의 법칙에 따라서 이 지구상에서 진화를 완성해야 한다. 각각의 삶 안에서 각자는 하나의 인격(personality)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영겁의 전체를 통하여 우리 자신 안에 있으며, 우리의 이름이나 모습 또는 기억과는 독립된 하나의 정체성(identity)을 느끼는 개인(individual)이다.
셋째, 우주의 모든 존재는 인식의 낮은 단계로부터 출발하여 보다 높은 개체화(individualization)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 세번째 원리이다. 인류보다 상위에 있는 존재들은 인류의 단계를 거쳐 지나갔다.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 무한한 우주 안에서 진화는 결코 멈출 수 없다. 누가 어느 시점에서 어느 수준의 단계에 도달했건 언제나 더 높은 가능성이 그 너머에 열려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경험, 즉 삶과 그 안에 있을 수 있는 객체(object)를 볼 때, 우리 스스로 바라는 것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연(Nature)이 우리에게 의도하는 모든 것들을 이루기에는 한 삶은 너무나 짧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경험의 규모와 다양성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다. 자연 안에 존재하는 진화하는 모든 형태의 지성(intelligence)은 과거에 사람이었거나 현재 사람이거나 앞으로 사람이 될 것이다.
삶의 중요한 질문들 - 번역 강구영
우리는 삶 중에서 때때로 다음과 같은 물음을 갖게 된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삶이 몹시 괴로울 때에는 또한 다음의 물음을 갖는다: “삶은 그저 우연인가? 세상은 공정한가? 신은 존재하는가?”
세상의 위대한 종교들은 위의 질문들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답을 주며, 현대의 과학 이론들도 몇몇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이 답변들에 대하여 완전하게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답들이 우리의 머리를 만족시키더라도 때로는 가슴에 와 닿지 않으며, 가슴을 울리는 답변들이라도 마음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종교나 철학 그리고 과학이 제시하는 답변들에도 불구하고, 보다 논리적이고 감명을 받을 수 있는 해결책을 찾는 이들이 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은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신지학은 매우 오래된 개념이다. 신지학 내용의 일부는 고대 세계의 종교와 철학에서 발견된다. 또 다른 내용들은 과거와 현재의 과학적 발견으로부터 온다. 신지학은 계시 또는 도그마로서 제시되는 것이 아니다. 신지학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철저한 심사와 숙고의 대상이다. 그러면, 신지학의 주요한 개념들을 살펴보자.
첫째, 우주는 그저 자연의 힘이 우연히 작용하는 장소는 아니라는 점이다. 우주가 생성된 이후의 모든 사건은 우주에 내재한 어떤 법칙들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 이 법칙들은 우주의식(宇宙意識, Universal Consciousness)의 표현이다. 전자(電子, electron)에서 가장 큰 별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안에 의식이 깃들어 있다.
이 근본적인 실재(實在, Reality)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기 때문에, 현자나 성인들은 그것을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신(神, God)” 이라 불렀고, 어떤 사람들은 “법(法, Law)”이라고 불렀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조물주(造物主,Great Architect)” 또는 “진화(進化, Evolution)”라고 불렀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특성이나 경험에 따라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 의식을 어떻게 간주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편의상 여기서는 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둘째, 신의 본질, 즉 근본 실재는 모든 사람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썩어 없어질 육체가 아니다. 이 육체는 우리가 잠시 동안 입고 있다가 벗어버릴 의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불멸의 혼(souls)이다. 신의 완전성은 우리 안에도 들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깨닫기 전에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성(神性, divine nature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의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의 탄생은 마치 대장간이나 실험실에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 거기서 우리는 일과 경험을 통하여 서서히 우리의 능력을 펼쳐 나간다. 그러나 한 생애 만으로는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을 실현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되풀이하여 육화(肉化, incarnate)한다.
우리는 생명을 받아 태어나서 자라며, 활동하고, 일을 끝낸 후 돌아간다. 여기서 돌아간다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 이후의 휴식기간 동안, 우리가 계획했지만 이루지는 못했던 기쁨을 맛보면서 우리는 성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 순화되고, 더욱 강해지고, 더욱 현명하게 되어 다시 탄생한다. 그래서 생각과 느낌과 행동에서 한 단계 올라 간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환생(還生, reincarnation)의 싸이클이다. 우리의 삶과 활동을 통하여 우리는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한다.
우리는 이타심(利他心,altruism) 또는 이기심(利己心, selfishness)의 발로에 의해서 선을 행하기도 하고 악을 행하기도 한다. 우리가 악을 행하면 우주의 조화를 깨뜨리게 되며, 우리는 그 조화를 다시 회복시켜야만 한다. 우리가 행한 악은 선행으로 갚아야 한다. 한편 우리의 선행은 더욱 큰 선행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이러한 씨를 심고 거두는 과정, 원인과 결과의 과정을 카르마(Karma)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가져오는 재조정의 법칙이다.
모든 혼은 신성을 가졌으므로 모든 혼은 평등하다. 젊은 혼도 있고 나이 많은 혼도 있으나 모두가 형제요 자매이다. 탄생, 능력 및 환경의 차이, 그리고 인종, 종파, 성, 계급의 차이, 또한 선함과 악함의 차이 등 각 사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남자와 여자는 불가분의 “형제 관계 (brotherhood)”를 이룬다. 우리 모두는, 지위가 높건 낮건, 무식하건 현명하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도움으로써 더욱 성장한다. “형제관계”는 성장의 우주법칙이다.
이 “형제관계”는 사람은 물론 , 동물, 새, 어류, 식물, 산, 바다 등 모든 존재에까지 확대된다. 우리는 모든 존재와의 일치를 통하여 성장한다. 우리 안에 신성이 잠재해 있듯이 모든 존재 안에도 신성이 잠재해 있다. 이 신성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내재한 신이 그 아름다움을 발현하게 된다.
두 가지 영원한 신비가 있는데 하나는 신의 신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신비이다. 신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선함, 거룩함, 진실함 및 아름다움은 우리 안에도 내재한다. 종교, 철학, 과학, 예술, 상업, 산업, 및 자선행위는 모두가 신성이 그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간에게) 하강하는 채널이다. 우리 인간은 이 다양한 형태의 활동에 관련된 능력과 미덕을 쌓음으로써 인간성이 신성으로 고양된다.
신지는 신의 지혜를 의미한다. 그것은 신 또는 우주심(宇宙心, Universal Mind)의 모든 행동 양식과 관계가 있다. 우리가 갖고 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은 “진화라는 신의 계획”을 이해함으로써 어느 정도 찾아진다. 이는 모든 혼이 유산으로 갖고 있는 삶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애정을 배울 때에만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신의 지혜의 활동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지혜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어느 힌두 제자5의 일기6
1886년 6월 [도(The Path)]
마지막 순례이기를 희망하면서, 12월에 그는 베나레스(바라나시)에 도착했습니다. 완전히 서로 다른 언어인 타밀어와 마라티어가 혼합된 이 이상한 사본을 판독할 수 있는 것이 힘든 만큼 또한 단순한 충동인지 혹은 실제 안내에 의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가 인도의 많은 성지들을 순례하였다는 것을 이 사본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종교적인 성향을 가진 평범한 힌두인이었다면, 공과를 얻기 위해서 이런 순례들을 했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심지어 베다(Vedas)의 화려한 구속들을 넘어섰기 때문에, 그가 어떤 이유들 때문에 이런 여행들을 했는지 우리는 진실로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오래 전부터 이 사본들을 보관해오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알릴 때가 무르익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그것들을 받았을 때, 그는 이미 이 바쁜 세상에서 훨씬 더 바쁜 데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 없이 단편 이야기를 출판할 수 있는 자유를 당신에게 드리는 바입니다. 아시듯이, 이분들은 자신들에 대한 세세한 설명들이 떠돌아 다니지 않도록 하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제자들이기 때문에, 기회가 있건 없건 자신들이 제자라는 것을 세상에 선언하는 유명한 오컬트 과학의 교수들이 하는 방식과는 반대로,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제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 * * 성스러운 갠지스강의 홍수가 흐르는 근처에 서있는 이 고요한 사원들을 이전에 두 번 본적이 있었다. 그것들은 변하지 않았지만, 내 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던가!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 나(I)는 변하지 않고, 단지 둘러싸고 있는 베일만이 찢어 없어지거나 혹은 실재를 한층 더 가까이 두껍게 감싸고 있다. * * * 쿠날라(Kunala)의 가르침을 듣는 특권을 이용하기 시작한지 이제 7개월이 된다. 이전에 그를 보러 올 때마다 매번, 달랠 수 없는 운명이 나를 물리쳤다. 우리가 하지 않을 때 하도록 강요하는, 나를 막은 것이 바로 카르마, 정당한 법칙이었다. 그때 내가 멈칫해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갔다면, 이번 생에서 내 운명은 봉인되었을 것이다 --- 그러면 그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분 속에 있는 침묵이 나의 안녕에 대한 흥미를 상실한 것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단지 그 똑같은 카르마가 간섭을 막았다는 것을 알아서, 나는 매우 행복했다. 그분을 처음 본 후 그분은 겉으로 보이는 그분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리고 나서 짧은 시간 안에 느낌이 자라 믿음으로 된 것이 너무 강력해서 네 다섯 번은 그분 발 밑에 무릎을 꿇고 그분 자신을 보여줄 것을 간청할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상당히 순수하지 않고 그런 비밀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 쓸모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침묵을 지키고 있다면 그분이 내가 가치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나에게 털어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분이 그 환영의 형태를 취했던 어떤 위대한 힌두 초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서 이런 어려움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그가 여러 부분에 있는 다양한 친척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는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이것 때문에 그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환영(illusion)을 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친척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있고, 그가 거기에도 갔다 왔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되었다. * * * 쿠날라에 대한 처음 생각, 즉 그가 어떤 위대한 인도 초인이라는 생각이 맞았다. 비록 내가 가치가 없고, 아마도 이번 생에서는 그분들과 어울릴 만한 가치가 없더라도, 이 주제에 대하여 — — 이후 지속적으로 그분과 얘기했다. 내 성향은 항상 이런 방향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은퇴해서 헌신에 전념한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나는 종종 쿠날라에게 이런 의도를 표현하였다. 그래서 이 철학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만이 이 세상에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물었다: 거기서 혼자 무엇을 할 것인가? 내 목적을 얻는 대신에, 나를 안내해줄 사람 없이 아마도 정글에 혼자 남겨진 채 미쳐버릴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 또한 정글로 들어감으로써 초인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나는 어리석었다; 그리고 만약 진정 나의 목적을 얻기를 원했다면 내가 만났던 많은 선한 사람들과 그들을 통한 개혁 속에서 일해야 한다. 그리고 감히 어떤 다른 이름들을 언급할 수 없는 고귀한 분들이 나에 대하여 만족하신다면 이 바쁜 세상으로부터 나를 불러서 개인적으로 가르쳤을 텐데. 그리고 내가 그 고귀한 분들의 이름들과 주소를 알려달라고 어리석게도 여러 번 요청했을 때 그가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형제들 중에 한 분이 말하길, 그대가 너무 나를 찾기에, 마지막으로 한번만, 나는 그분들에 대한 정보를 줄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만나는 힌두인들에게 그들이 그 문제에 대하여 아는지 계속해서 물어보면 그들에 대하여 들을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그 고귀한 분들 중에 한 분이 그대 가는 길에 나타나서 그대는 그분을 모르지만 그대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말해줄 것이다.’ 이것들은 명령이었고 나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쿠날라만을 통해서 나의 목적이 실현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 * *
“그래서 나는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 한 두 명에게 물어봤고, 그들 중에 한 명이 그런 사람 두 세 명을 보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 생각했던 ‘라자 요기들’이 아니었다. 또한 베나레스에 여러 번 나타났었던 어떤 사람에 대하여 들었지만, 그가 어디 사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그가 말했다. 나의 실망은 점점 더 쓰라렸다. 그러나 나는 초인들이 인도에 살고 있고 우리들 사이에서 여전히 찾을 수 있다는 확고한 확신을 결코 잃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다른 나라들에도 몇 분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쿠날라가 왜 그들에게 갔었을까. * * * 비쉬뉴라마로부터 온 편지로, 그가 어떤 분(X)이7 베나레스에 살고 있고, 스와미지 K가 그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들 때문인지 스와미지 K에게 직접 말할 수가 없었고, 그가 어떤 분(X)을 알고 있는지 물었을 때 그가 대답했다: “설혹 여기에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그런 사람은 알려지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경우에 얼버무리며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베나레스로 간다는 모든 기대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나의 의무의 일부분을 하고 있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닐라칸트(Nilakant)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이 안내해 주셨듯이 내가 그에 대하여 무엇을 아는지 그리고 또한 나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가 알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내가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아직 나에 대하여 그가 모르도록 했고, 나 자신도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당신으로부터 깨달음을 기대하면서, 등등.” * * * 다음 날 닐라칸트가 여기에 갑자기 왔고 나는 그와 함께 스와지미 K를 만났다. 그리고 놀랍게도 K가 X 를 한 번 언급하면서 그를 잘 안다고 그리고 종종 그를 보러 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를 거기에 데려가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막 우리가 가려는데, 다른 시대에 쿤날라에게 봉사했었던 영국인 장교 한 명이 도착했다. 그는 어떻게 X 에 대하여 들었고 오는 것을 허락 받았다. 그렇게 카르마는 복잡하다. 유럽식 교육을 받은 그가 우리 삶들의 앞 뒤, 지금 과거 그리고 미래에 서로 엮여 있는 카르마의 가르침을 반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도 가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X 와의 면담에서, 나는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를 떠났다. 다음 날 X 가 우리를 보러 왔다. 그는 결코 자기자신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이 육체(this body)”라고 말한다. 그가 처음에는 어떤 고행자(Fakir) 육체 속에 있었는데, 그가 바랏푸르(Bhurtpore) 요새를 지나가는 사이 총을 맞아서 그의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가 육체를 바꿔야 해서 지금 그가 들어가 있는 다른 육체를 선택해야 했다고 그가 말했다. 그 당시 7살 정도 된 아이가 죽어가고 있어서, 그래서 육체의 죽음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이 고행자는 그 육체로 들어갔고 그 이후부터 그것을 자신의 육체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그는 보이는 모습 그대로 그가 아니다. 고행자로서 그는 요가 과학을 65년 동안 연구했지만, 그가 불구가 되어서 그 연구가 멈췄으며 그가 수행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 다른 육체를 선택했다. 현재 육체 속에서 그는 53살이고, 결과적으로 내면의 X는 118살이 된다. * * * 밤에 그가 쿠날라와 말하는 것을 들었고, 그들이 똑 같은 구루(스승), 겉으로 보기에는 40살처럼 보이지만 약 300살이 되는 매우 위대한 초인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8 그분은 몇 세기가 지나면 크샤트리랴(Kshatriya)9 육체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인도를 위해서 어떤 위대한 일들을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
“어제는 우리 선조들이 여기에 남긴 거대하고 특이한 사원들을 보기 위해서 쿠날라와 함께 갔다. 어떤 것들은 폐허 속에 있고, 다른 것들은 시간의 폐물을 보여주고만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아버지와 함께 처음 순례에서 그 건물들을 보았을 때, 내가 결코 보지 못한 의미들을 집어내는 쿠날라와 함께 있으면서 이제 이 건물들에 대한 음미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 * * * * *
여기 있는 사본의 상당 부분이 그에게 의미하는 실마리들을 제공하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저자에 의해서 분명히 변형되었다. 약간의 노력을 기울이면 그것을 풀어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변형된 부분들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그의 의도를 존중하는 것이다. 비밀과 관련 있는 문제들 혹은 최소한 한번 봐서는 이해되지 못하는 것들과 관련 있는 어떤 문제들을 받아 써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떤 신뢰를 깨지 않은 채 그것의 작은 부분을 쉽게 작성할 것이다.
이전에 베라레스의 신성한 도시에 왔었고, 단지 종교적인 순례의 한 장소로 보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때 그가 보기에 그 유명한 사원들은 단지 사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쿠날라의 가르침 하에서 전체 단지에 있는 모든 고대 건물들이 고대 종교의 상징들을 불멸의 돌 속에 넣어둘 목적으로 세워졌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당시 보편적으로 알려진 진리들에 무지한 나라들이 일어나거나, 혹은 어둠이 인간의 지성을 뒤덮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시대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 기울지 않을 때 이 사원들이 만들어졌지만, 그때는 일반 사람들과 통치자들에게 잘 알려진 많은 초인들이 있었다고 쿠날라가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아직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서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런 곳으로 몰리지 않았고, 사원들에서 살았다. 그리고 일시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동안에 그들은 지구 상에 어떤 통치권보다 훨씬 더 위대한 도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10 그리고 그들은 어둠의 시대의 무거운 영향력으로 인해서 인간이 심지어 그런 존재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거나, 혹은 내 것(mine) 당신 것(thine)이라는 물질적인 권리들에 바탕을 둔 가르침들을 제외하고 어떤 다른 가르침이 간직되어왔다는 것을 망각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약 가르침이 단순히 종이나 파피루스 혹은 양피지에 남겨졌다면, 그것들은 식물성 혹은 동물성 세포막 성질상 부패하기 때문에 쉽게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돌은 수 십 세기 동안 지속된다. 그래서 여기 저기에 있던 진정한 마하 라자들(Maha Rajahs)11인 이런 초인들이 미래 인종들이 가르침들을 해독할 수 있는 상징적인 장식들을 가진 형태로 사원들을 세우도록 했다. 이 속에서는 위대한 지혜가 분명하다. 왜냐하면 당시 통용되는 언어로 된 문장들로 그것들을 조각했었다면 언어도 변하기 때문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만약 쐐기돌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이집트 상형문자의 경우처럼 뒤죽박죽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가 말한다; 그러나 그것 자체도 잃어버릴 수 있거나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바뀔 수도 있다. 상징 밑에 있는 아이디어들은 그것이 어떤 언어일지라도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징은 영구적으로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연 그 자체 속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에 이 부분에 대하여 쿠날라가 그 당시 사용된 언어는 산스크리트어가 아니고 지금은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훨씬 더 오래된 언어라고 그에게 말했다고 썼다.
사본에 있는 분리된 문장에서 쿠날라가 인도의 또 다른 지역에 아주 오래 전에 세워졌으며 이제는 볼 수 있는 신기한 건물에 대하여 언급했다고 흐리게 쓰여있다. 그것을 가지고 현명하게 세워진 구조물과 그렇지 않은 구조물의 차이를 그가 설명했다. 이 건물은 찬달라(Chandala)12의 두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는 기괴한 일로 부자가 되었다. 라자(왕)는 점성가를 통해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에 대하여 들었고, 다음 날 그가 본 첫 번째 사람에게 엄청난 양의 많은 돈을 주어야 한다고 들었다. 사실은 그들이 이른 시간에 나타날 의도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다음 날 보통 때처럼 이른 시기에 왕이 일어났고 창 밖을 보았으며 이 찬달라를 보았다. 점성가들과 보좌관 그리고 가난한 청소부를 그에게 불렀고, 그는 청소부에게 엄청난 양의 많은 많은 돈을 주었다. 그리고 그 찬달라는 이 돈을 가지고 네 가지 구석에서 늘어 떨어지는 거대한 하나의 암석 줄기로 된 화강암 건물을 세웠다. 그 상징성은 운명의 사슬의 변화였다; 즉, 가난한 하위 카스트에서 고위의 부유한 카스트로의 변화. 이런 이야기 없이 그 건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원 위에 조각된 상징들뿐만 아니라 결합 부분인 사원의 상징들은 어떤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지식이나 이야기가 필요 없다. 이것이 쿠날라가 그에게 말한 것을 받아 적은 것의 요점이다. 그는 또한 이런 상징은 가르침들과 우주론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성 요소, 영적 물질적 구성요소의 법칙들까지로 확장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의 설명은 사본의 변형된 수수께끼 같은 부분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계속해서 말한다:
* * *”어제 일몰 직후 쿠날라와 X 가 말하는 동안, 쿠날라가 갑자기 비정상적인 상태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약 10분 후에 상당히 많은 양의 말바(malwa) 꽃이 천장에서 떨어졌다.
“지금 나는 --- 로 가서 그가 하도록 명한 일을 해야 한다. 내 의무는 분명하지만, 내가 그것을 적절하게 수행할지 내가 어떻게 알까? * * * 내가 거기 가서 일을 끝내고 여기로 돌아오려고 준비할 때, 방랑하는 고행자를 만났고 그가 카르리(Karli)로 가는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는 지 물었다. 그에게 가르쳐주었는데, 그리고 나서 그가 나의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질문들을 나에게 했다: 또한 그는 얼굴에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었으며, 그의 질문들 중에 몇 가지는 베나레스를 떠나기 전에 쿠날라가 비밀을 지킬 것을 명한 몇 가지를 그에게 말하도록 만드는 그런 질문이었다. 표면 상으로 그 질문들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묻는 성질이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신중하지 않았다만 그 명령을 어길뻔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떠났다: “그대는 나를 모르지만 우리는 다시 만날 수도 있다.” * * * 지난 밤 돌아왔고 X만 만났다. 그리고 그 고행자와의 일화를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그런 것들을 말했던 사람은 그 고행자의 육체를 사용하는 다름 아닌 쿠날라 자신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그 고행자를 다시 보게 된다면 그는 그대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그가 한 질문들을 다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당시 일시적으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 종종 그런 일을 하는 쿠날라가 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쿠날라에게 그런 질문들을 하는 것이 이상하게 꺼려져서 그에게 그런 경우에 쿠날라가 진짜로 그 고행자의 육체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 물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진짜 고행자 개성 속으로 들어갔는지를 묻는 것이면 대답은 아니다 이고, 쿠날라가 그 고행자의 감각들을 압도해서 자신의 감각들로 대체했는지 묻는 것이면 그 대답은 그렇다 이다고 X가 대답했다; 내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하였다. * * * 나는 빈 육체를 들어가거나 주인이 있는 육체를 사용하는 과정을 보게 되어 어제 운이 좋았다. 두 가지 경우에 같았다는 것을 알았고, 부트(Bhut)13가 똑 같은 길을 통해서 우리나라(인도)의 불행한 여성들의 감각들 혹은 육체를 지배한다는 정보를 받았다. 그것들이 종종 그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또한 부트가 사로잡은 사람의 육체의 일부분, 예를 들면 팔이나 손 같은 일부분만을 소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그 팔이나 손과 관련 있는 두뇌의 그 부분에 영향을 줌으로써 그렇게 한다; 같은 방식으로 언어의 다른 기관과 혀도 그렇게 한다. 나는 쿠날라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사람도 실험으로 내 육체를 사용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쿠날라와는 완전히 안전하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다시 들어가도록 할뿐만 아니라 어떤 다른 이방인이나 사람 혹은 간다르바14가 그를 쫓아서 들어오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 로 가서 그가 * *. 그것은 내가 갑자기 나와서 자유를 갖는 느낌이었다. 그가 내 옆에 있었고 처음에는 그가 이제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볼 것을 가리켰고, 거기 매트 위에 겉으로 보기에 무의식 상태인 내 육체를 보았다. 내가 * * * 보았을 때, 내 자신의 육체가 눈을 떠서 일어났다. 그때 그것은 나보다 힘이 센 것이었다. 왜냐하면 쿠날라의 생명을 불어넣는 힘이 그것을 움직이고 지시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심지어 나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자성적인 영향력에 이끌린 아스트랄 형상들이 그 주위로 오락가락하고 움직였다. 그것들은 귀속말로 속삭이거나 같은 길을 통해서 들어가려고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허사였다! 그들은 쿠날라의 공기 혹은 주위환경에 의해서 짓눌려서 쫓아진 것처럼 보였다. 사마디 상태에 있는 그를 보길 기대하면서 그가 있는 곳으로 돌렸을 때,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혹은 기껏 해봐야 그의 힘 일부분이 빠져 나간 것처럼 * * *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내 자신으로 돌아왔다. 감촉으로 그 매트가 차갑게 느껴졌고, 부트들은 사라졌으며, 쿠날라가 나에게 일어나라고 했다.
그가 --- 와 --- 가 보통 살고 있는 --- 산으로 가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심지어 처음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의 자성적인 공기가 나에게 많은 혜택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보통 한 곳에 멈추지 않고, 항상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 다닌다. 그러나 그들은 인도의 북부지역에 있는 바드리나스(Bhadrinath) 근처에 있는 어떤 장소에서 매년 어떤 날에 함께 만난다. 인도의 아들들이 점점 더 사악해짐에 따라서, 그 초인들이 점점 더 히말라야로, 북쪽으로 물러나고 있다고 나를 환기시켰다. * * * 쿠날라와 항상 함께 있는 나에게 이것이 엄청 중요하다. 그리고 X도 내가 항상 느꼈던 똑 같은 것을 말한다. 내내 나는 이전 생에서 한때 그를 가장 잘 따르는 겸손한 제자였다고 강력하게 느꼈고 여전히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나의 모든 희망과 미래 계획들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산간지역으로 여행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즉, 웅대한 구조가 세워진 주요 토대인 나의 신념(믿음)을 강화시키는 도움이 되었다. * * * 유럽에서 만든 작은 등이 매달려 있는 라마링가(Ramalinga) 구내 끝을 걸어서 지나갈 때, 한 점 바람도 없었는데, 그 등이 세 번이나 약해졌었다.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쿠날라와 X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빛이 갑자기 완전히 꺼졌다. 그리고 멈췄을 때, 수십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존경하는 쿠날라의 목소리가 나에게 말했고, 그가 거기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시간 동안 우리는 말했다; 그리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좋은 충고를 주었다 --- 항상 이렇게 내가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을 때 나는 실제 중대한 순간에 도움을 받는다 --- 그리고 나를 축복해주었고 그는 가버렸다.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감히 볼 수가 없었다. 그 대화에서 빛이 약해지는 것에 대하여 말했고 설명해줄 것을 원했다. 그러나 그나 말하길 나는 그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면서 그것을 알고 싶다고 말했다: 첫째, 그가 그것을 했거나, 둘째, 어떤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해서 했다고. 그가 대답했다. 심지어 어떤 다른 사람이 그것을 했다 하더라도, 다른 요기의 정신 속에서 욕망을 보지 못한다면 어떤 요기도 어떤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no Yogee will do a thing unless he sees the desire in another Yogee's mind.).15 이 구절의 중요성 때문에 누가 그것을 했는지, 그 자신인지 혹은 엘리멘탈인지 혹은 다른 사람이 그랬는지, 알고자 하는 모든 것이 정신에서 몰아내졌다. 왜냐하면 누가 그런 법칙들이 작용하도록 만들었는지 아는 것보다 그런 것을 지배하는 법칙들의 일부분을 아는 것이 나에게는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연의 어떤 맹목적인 연속적인 것들도 똑같은 법칙에 따라서 자연력이 계속 효력을 갖도록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연이 그것을 했다는 지식은 어떤 중요한 지식이 아니다.
“이 신성한 철학을 쿠날라와 이미 한 번은 공부했다고 항상 느꼈고 여전히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전생에 나는 그의 가장 충실하고 겸손한 제자였음에 틀림없다고 느낀다. 이것이 하나의 사실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그를 만난 것과 어떤 특별한 혹은 놀랄만한 상황이 연결되지 않지만,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내 속에서 만들어진 그 느낌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희망과 계획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고, 몇몇 브라만 친구들이 이전에 상의 없이 같은 것을 나에게 말할 때 특히 이 세상에 어떤 것도 그에 대한 나의 확신을 흔들 수가 없다. * * *
“어제는 거대한 두르가(Durga) 축제에 갔었다. 그리고 남녀 노소의 거대한 군중들 속에서 쿠날라의 친구들을 찾는 데 거의 하루 종일을 보냈다. 왜냐하면 한번은 쿠날라가 그 친구들이 내 근처에 있지 않다고 결코 확신하지 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아마도 내 인내를 시험하기 위해서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하면서 강가에 있는 카트에 서 있을 때, 나이 들고 겉으로 보기에 노쇠한 힌두 고행자가 내 소매를 잡아 당기면서 말했다: ‘어느 누군가를 만나기를 기대하지 말고, 그들이 당신에게 말한다면 대답할 준비를 항상 하고 있으시오; 바수데바(Vasudeva)를 따르는 위대한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당신 자신 밖을 바라보는 것이 현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면을 보시오.’
“이것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왜냐하면 그가 나에게 구걸하고나 어떤 것을 물어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기 전에, 그는 한 그룹의 사람들과 섞여서 몇 걸음을 가더니 이내 그를 찾지 못했다: 그가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 교훈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내일 나는 I____ 로 돌아간다.
“지난 주 일은 육체적인 의미에서 진실로 매우 지치는 것이었고 특히 어제 저녁 일이 그랬다. 그리고 어제 밤 늦게까지 일을 계속한 후에 매트에 누웠을 때 곧바로 잠들어버렸다. 몇 시간을 잤다. 깜짝 놀라서 깨어보니 완전히 혼자 있었고 정글 속에서 끔찍하게 울부짖는 자칼 소리가 방해했다. 달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유럽식 모양을 한 집 창을 활짝 열기 위해서 창가로 걸어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잠이 달아났다는 것을 알고, 그 야자수 나뭇잎들 위해서 다시 시작했다. 시작하자 곧바로, 노크 소리가 들렸고 문을 열었다. 바로 거기에 쿠날라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뻤다. 다시 한 번 이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다.
“’터번을 쓰고 같이 가자.’ 그가 말했고 돌아서 가버렸다.
“샌달을 신고 터번을 쓴 후에, 서둘러 그를 쫓아갔다. 스승이 나보다 멀리 가버려서 어떤 황금 같은 기회를 잃게 될까 봐 서둘러 쫓아갔다.
“그가 정글 속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로 들어갔다. 멀리서 자칼 소리가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 망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여우 박쥐가 여기 저기서 부스럭거렸다. 한편 깜짝 놀란 뱀이 나뭇잎 위로 서둘러 가면서 가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스승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에 내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가 마침내 나무들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에 왔다. 그리고 구부려서 잔디 속으로 손을 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서 매우 신기하게 고안된 계단으로 가는 입구가 거기 있었다. 계단들은 땅 속으로 내려 갔다. 그가 내려 갔고 나도 따라갈 수 밖에 없다. 문이 닫혔지만 어둡지 않았다. 많은 빛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 그때는 관심을 갖지 않았고 지금은 말할 수도 없다. 우리가 어릴 때 순례자들이 태양은 없지만 아주 많은 빛이 있는 데바들의 땅으로 순례자들이 내려간 오래된 이야기를 생각나게 했다.
“계단 바닥에는 통로가 있었다. 여기서 사람들을 봤지만 그들은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고 그들의 눈이 나를 향해서 있지만 나를 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쿠날라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고 끝으로 걸어갔다. 거기에 방 하나가 있었고, 그 방 안에는 쿠날라 처럼 많은 웅대한 사람들이 경외감을 자아내는 두 분을 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 한 분이 저 끝에 앉아있었다.
* * * * * * * *
[여기에 해독할 수 없는 혼란스럽게 많은 상징들과 암호들이 있다. 그리고 심지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더라도, 스스로 자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 방에서 일어난 것을 본인 나름 대로 기억해서 받아 쓴 것이라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을 평범하게 읽어도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의미를 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유 때문에 그것은 상당히 단편적이다. 예를 들면, 의식 혹은 계(plane)를 구분하는 일종의 기호를 보게 된다; 그것이 의식, 생명 혹은 엘리멘탈 생명의 상태인지 혹은 계인지 모른다. 그리고 각각의 구분에는 동물들 혹은 아스트랄계의 거주자들 혹은 어떤 다른 것들, 심지어 생각들만을 나타내는 상형문자들이 있다. 그래서 그가 돌아온 지점부터 계속 얘기할 것이다.]
“한 번 더 그 통로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계단들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나는 다시 문 앞에 있었다. 내가 나갔을 때 그대로였다. 그리고 내가 내려 놓은 테이블 위에서 야자수 잎들을 발견하였고, 그것과 함께 쿠날라가 쓴 메모가 있었다. 그 메모는 이렇다:
“’닐라칸트(Nilkant) --- 그대가 방금 본 것들에 대하여 너무 깊게 생각하려고 하지 마라. 가르침이 그대의 가슴 속 깊이 가라앉도록 하라. 그러면 그것들이 그대의 과실이 될 것이다. 내일 그대를 볼 것이다.’ * * * *
“심지어 우리가 --- 로 갔지만 많은 날을 쿠날라와 같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계속해야 하는지 북돋아 주는 말이나 좋은 충고를 거의 주지 않았다. 그는 그것에 대하여 내가 내 자신의 길을 걷도록 놓아두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맞다고 나도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개개인이 분별력이나 강인함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밤 중 혼자 있을 때 우리가 대화를 나눈 그 순간들이 행복했다. 아그로우샤다 파락샤이(Agroushada Parakshai)의 말들이 상당히 맞다는 것을 발견했다:
“’수드라들이 움막 아래에서 개처럼 자는 동안, 바이샤가 쌓고 있는 보물들에 대하여 꿈을 꾸는 동안, 라자가 여인들 사이에서 자는 동안, 잘 들어라. 바로 이 순간이 육체의 지배 하에 있지 않은 정의로운 사람이 과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는 때이다.’16
“한 밤중은 분명히 독특한 성질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제 영국 사람 책을 흘깃 보았을 때 심지어 반 야만인들도 그 시간을 “마법이 횡행하는 한밤중(witching hour)”으로 말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마력 있는(witching)”은 마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 * *
“어제 저녁에는 B — 에 있는 숙박소에서 멈췄지만, 그곳이 다 찼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날 밤은 현관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한번 더 쿠날라와 함께 어떤 사람들을 방문하는 축복받았다; 내가 존경하는, 그리고 나를 축복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그의 친구들.
“모두가 조용해졌을 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다로 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약 45분 정도 걸었고, 마치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들어갔다. 처음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물이 있지만, 길이 거기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앞에 있고 내가 뒤를 따르고 그렇게 약 7분을 걸었다. 그리고 나서 작은 섬에 왔다. 거기에는 하나의 작은 건물이 있고 그 위에는 삼각 빛이 있다. 해변으로부터 그 섬은 푸른 수풀로 우거진 고립된 지점처럼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하나만 있다. 그리고 안에 있는 사람이 길을 안내해주지 않으면 누구도 그 입구를 찾을 수 없다. 섬에서 어떤 건물 앞에 오기까지 어느 정도 공간을 돌아서 가야만 했다. 앞에는 작은 정원이 있다. 그리고 땅밑 지하 방에 있던 사람들 중에 한 명으로 내가 알아본 쿠날라의 다른 친구가 똑 같은 눈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쿠날라가 앉았고 나는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우리는 한 시간 정도 머물렀고 그곳의 일부분을 보았다. 엄청 쾌적한 곳이었다! 그리고 안에는 그가 다른 곳에서 움직여 다녀야 할 때 그의 육체를 남겨 두는 작은 방이 있다. 얼마나 매력적인 장소인가! 그리고 장미과 다양한 꽃들의 상당히 기분 좋은 향기! 그런 장소를 자주 방문하고 싶은데! 그러나 그런 한가한 꿈 속이나 일종의 그런 탐욕에 빠질 수가 없다. 그곳 주인이 내 머리에 축복하는 손을 얻었고, 우리는 숙박소로 돌아왔으며, 빛을 보지 못하고 혹은 미래의 위대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감각의 대상들에 너무 단단하게 집착되어 있어서 비애 속에 묶여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들과 몸부림들이 가득한 내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모두가 우리의 형제들이고 나는 전체(All) 속에 있으면서 전체(All)인 진정한 대아(Real Self)의 일인 스승의 일을 하려고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다.”
“지하 방에서 돌아온 직후 받은 그 메시지를 훑어보고 있었다. 거기서 내가 본 것에 대하여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그 가르침들이 가슴 속으로 깊이 가라앉도록 하라는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우리가 발전하는 데 영국 대학 교수들이 말하듯이, 훨씬 덜 종합적인 기계로서 육체 두뇌가 받은 것을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 휴식을 가져야 하는 시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진실로 맞지 않을까---진실일까? 반면에 동시에 진정한 두뇌---영적 두뇌 라고 말할 수도 있다---가 머리로부터 단절된 모든 생각의 흐름들을 바쁘게 수행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전체 아시아로 소개되고 있듯이, 요즘 아주 많이 듣는 근대 과학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는 완전하게 일관된 것이다.
“그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쿠날라와 이 지하 방으로 같이 가서, 거기서 가장 유익하고 엄숙한 것들을 보고 들었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 왔고, 그것들 모든 것에 대하여 어리둥절해 하기 시작하고,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모든 것을 정리할 목적으로 내 정신 속에서 빙빙 돌고 계속 돌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어리둥절해 하는 것을 멈추고, 내가 본 모든 것이 가슴 속 깊이 가라 앉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쿠날라의 메모로 중단했다. 나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을 존경하고, 결코 부주의하게 사용하지 않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것이 나의 “가슴(heart)” 속으로 깊게 가라앉도록 하라고 말할 때, 나의 사고하는 부분---정신---을 언급하는 같은 문장에서 왜 그는 나의 가슴과 정신을 분리하려고 하고 가슴에 더 크고 위대한 힘을 주려고 하는가.”
“하여튼, 나는 그의 명령에 복종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내가 본 것과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했다. 며칠 후 어느 날 오후에 비쉬뉴 푸라나(Vishnu Purana)에서 언급된 어떤 에피소드에 대하여 숙고하면서 내가 지나가고 있던 어떤 오래된 집을 쳐다보았고 그 현관 위에 있는 기괴한 장치를 자세히 보기 위해서 멈춰 섰다; 이렇게 했을 때, 너무나 기쁘게도, 마치 그 장치 혹은 그 집 혹은 그 상황 자체가 비록 사소한 것이지만, 지하 방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의 통로를 열어서, 모든 것이 이젠 명확해졌고, 아주 잘 증명되고 충분하게 설명된 명제처럼 그 결론을 생생하게 보여준 것처럼 보였다. 그 장면과 가르침들에 대하여 생각을 거둬들였기 때문에 아마도 낭비된 것처럼 보였던 그 며칠을 많은 찬사를 보내는 두뇌가 게으르게 보내는 동안 영적인 인간이 뒤얽힌 타래를 푸는 데 엄청 이롭게 사용하였다는 것을 이젠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다. 그 즉시 지식과 함께 섬광이 왔다.17 그러나 이런 번쩍임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두뇌와 그 주인에게 가지고 일할 재료를 주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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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막 쉬려고 할 때, 쿠날라의 목소리가 밖에서 나를 불렀고 그 즉시 거기로 갔다. 나를 꾸준하게 바라보면서 그가 말했다: ‘우리는 너를 보길 원한다,’ 그리고 그가 말했을 때 서서히 그가 변하거나 사라지거나 혹은 경외감을 불어넣는 얼굴과 눈을 가진 다른 사람의 형태 속으로 흡수되었다. 그 형태는 얼핏 보기에 쿠날라의 육체 물질에서 일어났다. 동일한 순간에 두 명의 다른 사람이 티벳인 의상을 입고서 거기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 한 명이 내가 나온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그분들의 목적을 몰라서, 그분들께 말했다: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묻지 않고 그대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있는 곳에 그대로 서 있으라”고 그분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육체 밖으로 나오는 것 같은 매우 즐거운 감흥을 느꼈다. 그것과 지금 누워있게 된 것 사이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지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특이한 장소에 있었던 것을 보았다. 그곳은---산맥 기슭에 있는---윗부분이었다. 바로 맞은 편에 두 개의 가옥만 있었고, 어떤 다른 사람이 거주한다는 어떤 표시도 없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두루가(Durga) 축제 때 본 나이 든 수행자가 나왔다. 그러나 그는 너무 많이 변했지만 같은 사람이었다. 그때는 너무 나이가 들었고 역겨웠는데, 지금은 너무 젊고 빛나고 아름답다. 그는 나를 보고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결코 어떤 사람을 보길 기대하지 말고, 그들이 당신에게 말한다면 항상 대답할 준비를 하라; 바수데바(Vasudeva)의 위대한 신봉자들이 자기자신 밖을 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오히려 내면을 보아라.”
“가련한 수행자의 바로 그 말들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를 따라오라고 지시했다.
“약 반 마일 정도의 짧은 거리를 간 후에, 우리는 --- 산맥 밑에 있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지하 통로로 갔다. 그 길은 매우 위험하다; 억눌린 물의 온갖 분노 속에서 --- 강이 밑으로 흐르고 지나가는 길에 자연스러운 둑길이 있다; 한 번에 딱 한 사람만이 거기로 갈 수 있고 한 걸음 잘못 딛게 되면 그 여행자의 운명을 봉인하게 될 것이다. 이 둑길뿐만 아니라 가로질러 가야 할 몇 개의 지하통로가 더 있다. 이 지하통로를 지나서 상당한 거리를 걸어간 후에 L----K에 있는 열린 평원과 맞닥뜨렸다. 거기에는 수 천년 된 거대하고 엄청 큰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 앞에는 거대한 이집트 타오(Tau)가 있다. 그 건물은 피라미드 형태로 만들어진 일곱 개의 거대한 기둥들 위에 세워져 있다. 출입구 문은 거대한 삼각형의 아치가 있고, 그 안에는 다양한 부문들이 있다. 그 건물은 너무 커서 내 생각에 2만명은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몇몇 방들을 보여주었다.
“이곳이 --- 등급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입문을 받기 위해서 들어가서 필요한 기간 머무르기 위한 중심지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는 앞에 안내자와 함께 거대한 홀로 들어갔다. 그는 형상은 젊었지만 그의 눈은 엄청난 세월의 시선을 가졌다. 이 장소의 웅장함과 고요함이 경외감을 불러 일으킨다. 중심에 제단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인 사람들의 모든 영향력, 지식, 의도 그리고 힘들을 집중하는 곳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최고 높은 분이 차지하는 좌석 혹은 장소 혹은 왕좌 주위에는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분으로부터 발산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광채로 구성된 설명할 수 없는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왕좌 주위는 화려하지 않고, 그 자리 자체도 장식되어 있지 않았다---그 모든 웅장함은 거기 앉아 있는 그분에서 발산하여 나오는 오라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 머리 위 공기 중에 세 개의 금빛 삼각형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한다---그렇다. 그것들은 거기 있었고 영감을 받은 근원을 표시하는, 지상에 속하지 않는 광휘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들이나 그 장소를 스며들고 있는 그 빛도 어떤 기계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내 위를 보았을 때 다른 사람들도 하나의 삼각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고, 어떤 사람은 두 개를 가지고 있었으며, 모두가 독특하고 빛나는 빛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많은 상징들이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가 기억하고 싶은 입문의 요점들을 적어 놓고자 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우리 직관에게 남겨놓아야만 한다. 아마도 우리 자신이 미래의 경험 속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 * * *
“14일이다. 입문 장소에서 있던 그날 밤의 사건들로 인해서 나는 많은 걱정을 했다. 그것은 꿈이었을까?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모두 상상으로 만들었을까? 여러 날 동안 내 마음 뒤에서 날아다닌 것이 이런 질문들이었다. 쿠날라는 그 주제를 말하지 않았고 나도 질문할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이 오더라도 그 해결책이 나에게 올 걸이라고 혹은 자발적으로 주워질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고 진리와 거짓 그리고 환영을 구분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지식의 세계로 올라갈 수 없다면, 이 모든 가르침들과 모든 상징들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만약 이 미심쩍어 하는 의심을, 무지의 굴레를 잘라낼 수 없다면, 그것은 이런 의심들 너머에 있는 그 세계로 내가 올라가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 * * 하루 종일 안정을 재빠르게 파괴하는 것들인 정신의 하늘을 쫓아다닌 후에 지난 밤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나의 귀로 이런 말들이 떨어졌다:
“’걱정은 지식의 적이다; 그것은 베일처럼 혼의 눈 앞에서 떨어진다; 그것을 품으면 그 베일이 점점 더 두껍게 되기만 한다; 그것을 버리면 진리의 태양이 흐린 베일을 소멸시켜 버릴 것이다.’
“그 진리를 인정하면서; 모든 근심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금지가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승의 목소리였고, 그 말 자체가 스스로 명령하는 성질인 그의 지혜 속에 있는 확신감 때문에 내가 그 가르침에 완전하게 의지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결심이 만들어지자마자, 내 얼굴 위로 어떤 것이 떨어졌고 나는 것을 손으로 즉시 잡았다. 등을 켜보니까 잘 아는 글씨로 된 메모가 있었다. 그것을 열어보니까,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닐라칸트(Nilakant).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실재였고, 그대의 깨어 있는 의식이 거기서 일어났던 더 많은 것을 간직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을 실재로서 회고해보아라.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환경이라도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을, 교훈을 끌어내라. 그대의 영적인 진보는 종종 그대 자신이 알지 못한 채 진행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라. 많은 장애물 중에서 두 가지가 걱정(anxiety)과 이기심(selfishness)이다. 걱정은 거칠고 쓰라린 격렬한 물질에서 만들어진 장벽이다. 이기심은 기억의 모체를 태워버릴 불 같은 어둠이다. 그래서 만족이라는 평화로운 고요함과 자선이라는 활기를 주는 비인 다른 기억에 영향을 주게 된다.’”18 * * * * *
[여기서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여행에 대한 단순한 메모나 다양한 작은 문제들에 대한 메모는 생략한다. 아마도 흥미로운 것이 아닐 것이다.]
“지난 달 V--- 근처 언덕을 가로질러 가는 통로에서, 처음에는 곡식 저장소 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버려진 어떤 건물을 조사하는 것에 거부할 수 없게 이끌렸다. 그것은 출입구나 창문, 열린 것이 없는 사각형의 돌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외부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볼 때, 그것은 어떤 오래된 건물이나 탑, 관문의 토대를 이루었던 것의 잔해였을 것이다. 쿠날라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그것을 조사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장소에 대하여 나의 생각이 어떤지 물어봤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단단한 것처럼 보였더라도, 아마도 속이 텅 빈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속이 비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요기들이 깊은 트랜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한 때 만들어진 장소들 중에 하나이다. 제자가 사용하면 그의 스승이 그것을 보살펴서 아무도 침입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초인이 보이지 않는 형태 속에서 여행하는 동안 그의 육체를 놓아둘 목적으로 그것을 사용하고자 할 때는 제자의 스승이 있을 때처럼 안전한 다른 보호 수단을 종종 사용한다. 그럼 거기에 지금은 어떤 육체도 없겠네요 라고 내가 말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지 마라. 어쩌면 거기에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브라만 요기와 불교 요기의 자비심에 대하여 말하면서 우리는 계속 여행을 했다.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진 제자들 속에서 어떤 차이를 볼 수가 없다. 모두가 진리를 추구한다. 길은 다르지만 모두의 목표는 여전히 비슷하다.”
* * * "세 번 반복되었다: '시간은 위대한 자아 속에서 만물을 성숙시키고 녹인다. 그러나 시간 그 자체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 그는 베다(Veda)를 아는 자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세 번 반복되는 것으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가?
“거기에는 세 개 신성한 사당이 있다. 문 위에는 잠시 전에 본 어떤 그림이 있다. 그리고 잠시 동안 불처럼 빛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정신에 고정하니까, 그 윤곽이 점점 더 커졌다가, 문지방을 지나갔을 때 사라졌다. 그 안에서 그 이미지가 눈 앞에 다시 왔다. 나를 꾀어내려는 것처럼, 그것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것은 각인된 채로 여전히 있고, 내 자신의 비평에 그것 스스로 나타내는 것처럼 생명과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분석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사라지고, 내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그런 존재들에게 무례할까 두려워할 때,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처럼 다시 돌아왔다. 그것을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중심에 작은 점이 있는 인간의 심장---불꽃이 확장하고 심장이 사라진다---깊은 고동이 나를 지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즉시 독자성(identity)이 혼란스러워진다. 내 자신을 움켜잡는다; 거대한 불의 공간으로 증가된 불꽃을 가지고 심장이 다시 나타난다. 다시 한 번 그 깊은 움직임; 그리고 소리; 그것들이 사라진다. 이 모든 것이 그림 속에 있는 건가? 그렇다! 왜냐하면 그 그림 속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지성이 있을 수 있다. 첫 번째 티벳 여행에서 본 그 그림과 유사하다. 그곳에서 살아 있는 달이 떠올라서 시야를 가로질러 지나간다.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니다, 나중이 아니다. 그것은 현관에 있었다. 다시 모든 것을 침투하는 소리. 그것은 마치 강처럼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그것이 멈췄다---소리 없는 소리.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그림; 여기 프라나바(Pranava)19가 있다. 그러나 심장과 프라나바 사이에 화살이 준비된 채, 사용하기 위해서 팽팽하게 매어진 웅장한 활이 있다. 다음에 프라나바가 위에 있는 사당이 있는데, 그것은 열쇠나 열쇠 구멍이 없이 굳게 닫혀져 있다. 그 측면에 인간의 격정에 대한 상징들이 있다. 그 사당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진리를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또 다른 문? 다시 사당이. 그것이 또 열리고 밝게 번쩍이는 또 다른 것이 거기서 보인다. 심장처럼 그것은 스스로 나와 하나가 된다. 그것에 다가가고자 하는 거역할 수 없는 욕망이 내 속에서 생기고, 그것이 전체 그림을 흡수한다.
“브라흐만의 사당을 뚫고 나아가라; 스승의 가르침을 사용하여라.”20
[여기서 어떤 사람을 훈계하려는 어떤 연결고리가 없다. 그리고 아마도 자기 스스로 독백으로 말했거나 어떤 목소리가 그에게 말한 것이다.
메모 속에서 찢어져 공간이 크게 생겨서 여기서 끝내야만 한다. 아마도 그의 실재 내면의 삶에서 그가 보거나 했던 것들을 더 이상 메모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만약 그가 이 마지막 부분이 나타내는 부분까지 진보하여 갔다면 그가 어떤 사실들에 대한 보고서나 회고한 것들을 적어놓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 여러분도 확실히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말할 수가 없다. 어쩌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들었을 수도 있거나 그럴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여러분에게 흥미롭지 않은 그의 매일 매일의 가족 생활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있다: 대화들을 기록한 것; 세상사의 문제들; 돈에 대한 것과 약속, 여행 그리고 친구들과의 만남에 대한 것들. 그것들은 그가 사람들과 정해진 그의 일을 하면서 내내 살아가고 있으며, 근심으로 괴로워하고 가족에 의해서 위안을 받고 가족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들 모두를 제외하였다. 왜냐하면 어쩌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흥미를 줄 수도 있지만, M---과의 만남이라고 시작된 부분과 마지막에 있는 이 놀라운 장면---그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우리가 상상만 할 수 있다---을 나타낸 시기와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 것만 제시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빼 놓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 상징 속에서 충분하게 이해할 수 없는 아주 많은 부분을 제외할 필요가 있었다. 솔직히 그 암호의 문을 열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소유하는 데 어떤 방해가 없었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애매함을 세련되게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이 나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듯이, 서로서로에게 경의를 표하고 브라희만의 마지막 사당에 경의를 표하자; 옴, 하리, 옴!(Om, hari, Om!)]
출처: 다음 신지학 카페
1. 여기서 물질(Matter)은 우리가 과학적으로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의미의 그런 물질이 아닌 추상적인 개념이다. - 역자주
2. Theosophist 9월호에 게재된 “힘(force)이란 무엇이고 물질(matter)이란 무엇인가?” 참고.
3. 여전히 너무 미묘하고 감지할 수 없어서 과학에서는 그것을 에너지(energy)와 힘(force)이라고 부른다.
4. 초기불교의 언어인 팔리어로 기록된 불교 경전인 팔리삼장(Pali Tipitaka)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장, 승려들이 지켜야 할 규칙인 율장, 경장에 대한 해설인 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칸다카는 승단 생활에서의 규칙을 얘기한 것으로, 크게 대품(마하박가)과 소품(Cullavagga)로 이루어져 있다.
5. 첼라(Chela)의 의미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에 대답으로 여기서 그것은 초인의 받아들여진 제자를 의미한다고 답한다. 일반적으로 그 말은 제자(Disciple)를 의미한다.
6. 이 일기의 원본을 우리가 보관하고 있다. 이 문제를 전달한 친구가 몇 줄의 도입을 전하고 있다. - 편집자.
7. 이 이름을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8. 여기에 특이한 점이 있다. 즉, 칼료스트로(Cagliostro) 백작과 생 제르망 백작 및 다른 초인들에 대한 모든 설명이 겉으로 보이는 나이 40살을 제시한다. - 편집자.
9. 인도의 전사 계급. - 편집자.
10. 멕시코에 있는 고대 아즈텍 문명 속에는 사제 체계가 매우 많았다. 전체 구조의 우두머리에는 두 명의 고위 승려가 있는데, 그들이 하위직에 있었을 때인 이전 행동에서 나타난 그들의 자질에 의해서 선출된다. 그들은 통치자들 보다는 낮지만 위엄이라는 면에서는 통치자와 동등하였다. 그리고 통치자는 사적인 중요 문제들에 대하여 그들로부터 조언을 받지 않은 채 행동하지 않았다. Sahagun Hist. de Nueva Espana, lib. 2; lib. 3 cap. 9- Torq. Mon. Ind. lib. 8 cap 20; lib. 9, cap. 3, 56; cited by Prescott in vol. 1, Conq. Mex. p. 66). – [편집자]
11. 왕 혹은 통치자 – [펀집자]
12. 청소부 같은 하위 카스트 사람. 그런 건물을 지금은 인도의 비자푸르(Bijapur)에서 볼 수 있다. – [편집자]
13. 사람을 사로잡는 아스트랄 껍질. 힌두인들을 그것들을 죽은 사람들의 유해로 간주한다. – [편집자]
14. 자연령 혹은 엘리멘탈 – [편집자]
15. 이 문장은 엄청 중요하다. 서구 사람은 원인들을 추구하는 것보다, 효과들, 사람 그리고 권위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즐거워한다. 마치 많은 신지학도들이 블라바츠키 여사가 어떤 현상을 만들어내는 데 지배하는 법칙들이나 원인들을 찾는 대신에, 그분이 언제 어디서 어떤 마법을 했는지 알고자 하듯이. 여기 이탤릭체로 쓰여진 문장 속에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많은 것에 대한 실마리가 있다. – [편집자]
16. 아그로우샤다 파락샤이(Agroushada Parakshai) 2권 23번째 대화 참조 - [편집자]
17. 태양 속에 철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그런 광기의 순간에 과학자에게 드러났듯이, 이런 생각의 번뜩임(flashes)은 심지어 과학계에서도 알려지지 않았다; 에디슨은 이렇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 편집자.
18. 야곱 뵈메(Jacob Boehme)가 “뼈와 모든 같은 육체 속으로 영을 회복시키게 만드는 원리인 자연의 거칠고 쓰라린 괴로움”에 대하여 말한다. 여기서 스승이 운 좋은 제자에게 영적인 세계와 멘탈계에서 거칠고 쓰라린 근심은 우리 앞에 베일을 세워서 우리가 기억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말한다. 그는 일상적인 기억 너머에 있는 다른 기억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계발의 모든 과정은 과거의 기억을 다시 가져오는 과정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여기서 말한 것의 정확함과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순수한 불교 가르침과 타락된 형태의 가르침 속에서 발견되는 가르침이다 - 편집자.
19. 그 신비한 음절인 옴(OM) - 편집자.
20. 여기서 분명히 우파니샤드에 대한 참조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지막 사당에 도달할 때까지 모든 사당을 깨고 들어가라는 스승의 지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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