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3 (7)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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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들을 읽는 제 마음은 경외심과 감사함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식으로 저와 함께 여기에 계셔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와 함께 여기에 계셔주셔서 고맙습니다. 몇백만의 사람들이 이 대화록을 읽었고, 앞으로도 몇백만의 사람들이 읽을 테니까요. 당신이 우리 가슴에 오신 것은 숨이 막힐 만큼 엄청난 축복을 저희에게 주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이들이여, 나는 언제나 너희 가슴속에 있었다. 다만 이젠 너희가 거기서 나를 실제로 느낄 수 있다니 기쁘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었다. 나는 너희를 떠난 적이 없다. 내가 너희고 너희가 나다. 우리가 서로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기에.
잠시만요! 이건 기시감(旣視感)처럼 느껴지는군요.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가 앞에서도 똑같이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랬다. 12장 첫 부분을 읽어봐라. 다만 이번에는 그 말들이 처음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
기시감이 진짜라면, 근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따금 어떤 일을 진짜로 “다시 한번” 체험하면서 거기서 더 많은 의미를 얻어낼 수 있다면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전 그게 바로 이따금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요!
좋았어. 또 한번 잘했다. 너는 새로운 광범한 이해로 워낙 빠르고 민첩하게 옮아가고 있어서, 이젠 겁이 날 정도다.
정말로요-? 그런데, 당신하고 논의해야 할 심각한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알고 있다. 시작해봐라.
영혼은 언제 몸과 결합합니까?
네 생각에는 언제일 것 같으냐?
영혼이 그렇게 하기로 선택할 때요.
좋았어.
하지만 사람들은 좀 더 분명한 대답을 원합니다. 그들은 생명이 언제 시작되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그들이 아는 대로의 생명 말입니다.
이해한다.
그러니까 그 신호가 뭐냐는 거죠. 그게 자궁에서 몸이 빠져 나오는 출산 때입니까? 아니면 생명의 물질 요소들이 결합하는 수정 때입니까?
생명은 끝이 없으니, 시작도 없다. 생명은 그냥 확장하여 새로운 형상을 창조할 뿐이다.
그건 60년대에 유행하던 달궈진 용암 램프 속의 끈적이 같은 것에 틀림없군요. 그 끈적이 구슬들은 크고 둥그렇고 물렁물렁한 공들 모양으로 바닥에 누워 있다가, 열을 받으면 솟아오르면서 잘게 나눠져 새로운 구슬 모양을 이룹니다. 솟아오르면서 스스로 모양을 이루는거죠. 그러다가 꼭대기에 이르면 자기들끼리 이리저리 합쳐지면서 한꺼번에 콰르르 떨어져 내립니다. 그래서 다시 큰 구슬들 모양을 이루었다가 처음부터 또 시작하는 겁니다. 그 공 안에 “새” 구슬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모두가 같은 것이죠. 새로운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같은 거요. 워낙 변화무쌍해서 누구라고 그걸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홀딱 빠지고 말죠.
그건 멋진 비유다. 영혼 또한 그러하다. 사실 ‘존재 전체’인 한 영혼은 작고 작은 부분들로 자신들의 모습을 바꾼다. 모든 “부분들”이 처음부터 존재했기에, 어떤 “새로운” 부분도 없다. 다른 부분들“처럼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지만, 실제로는 항상 존재했던 전체의 부분들이 있을 뿐이다.
존 오즈본이 작곡하고 직접 불렀던 멋진 팝송 중에 “신이 우리 중 하나라면 어쩌지? 우리처럼 그냥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면?”이라고 묻는 가사가 있습니다. 전 그녀한테 가서 이 부분을 “신이 우리 중 하나라면 어쩌지? 우리처럼 그냥 끈적이 구슬이라면?”으로 바꾸라고 할 참입니다.
하! 그거 아주 괜찮다. 너도 알다시피 그녀가 부른 그 재기 발랄한 노래는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내가 자기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신보다는 인간 종족에 대한 흥미 있는 논평이시군요. 우리가 신을 우리 중 하나로 빗대는 걸 불경스럽다고 여긴다면, 그건 우리에 대해 뭘 말해주는 겁니까?
그러게, 뭘 말해주지?
하지만 당신은 “우리 중 하나”입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거고요. 그러니 존이 옳았던 거죠.
당연히 그녀는 옳았다. 참으로 옳았다.
제 질문으로 돌아가고 싶은데요. 우리가 아는 대로의 생명이 언제 시작되는지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영혼이 어떤 지점에서 몸으로 들어가는지요?
영혼은 몸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영혼이 몸을 감싼다. 내가 전에 말했던 걸 기억하느냐? 몸은 영혼의 집이 아니다. 그 반대다.
만물이 항상 살아 있다. “죽음” 같은 건 없다. 그런 존재 상태는 없다.
‘항상 살아 있는 것’은 자신을 그냥 새로운 형상, 새로운 물질형상으로 모양짓고, 그 형상을 살아 있는 에너지, 생명 에너지로 가득 채운다, 끝없이.
너희가 생명이라 일컫는 것이 ‘나’라는I AM에너지라면, 생명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생명은 결코 끝나지 않거늘, 어떻게 생명이 시작되는 지점이 있을 수 있겠느냐?
제발,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제가 어디로 가려는지 아시잖습니까?
그래, 안다. 너는 나를 낙태 논쟁 속에 밀어 넣고 싶어한다.
예, 그래요! 인정해요! 어차피 신을 여기에 모셨으니, 그 기념비적인 질문을 해볼 기회가 아니냐는 게 제 생각이거든요. 제발,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 겁니까?
그 답변은 워낙 기념비적이어서 너로서는 듣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절 다시 시험해보십시오.
그것은 결코 시작하지 않는다. 생명은 끝나지 않으니, “시작하지도” 않는다. 너희가 생물학의 전문 영역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건, 사람들이 처신해야 할 방식을 말하는, 소위 “신의 법률”이란 것에 따라 “규칙”을 만들어내고, 그런 다음에는 그런 식으로 처신하지 않는 사람들을 벌할 수 있기 위해서다.
그게 뭐가 잘못입니까? 그건 우리가 병원 주차장에서 의사들을 죽여도 벌받지 않게 해줄 겁니다.
그래, 이해한다. 너희는 지금까지 줄곧 나와, 너희가 내 법률이라고 선언한 것을 온갖 상황에 대한 정당화로 이용해먹었다.
오, 그러지 마시고요. 임신중절은 살인이라고 왜 그냥 말씀하시지 않는 겁니까?
너희는 누구도, 또 어떤 것도 죽일 수 없다.
그래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그것의 “개체화”를 끝낼 수 있다구요. 우리식 언어로 하면 그건 살인이구요.
특정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내 일부가 동의하지 않는데, 그것이 그런 식으로 개별 자신을 표현해가는 과정을 너희가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말은, 신의 의지를 거스르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과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신의 의지-이것을 너희의 의지라고 읽어라-가 드러나서 표현된 것이다.
나는 이 대화에서 너희의 의지가 내 의지라고 말했다. 그건 우리 중 오직 하나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이란 완벽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신의 의지다. 만일 어떤 일이 신의 의지를 거스르면서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일어날 수 없다. 신이라는 존재의 정의 자체에서, 이미 그것은 일어날 수 없다. 너는 한 영혼이 다른 영혼을 대신해서 어쨌든 뭔가를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느냐? 너는 개개인으로서 너희가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느냐? 그런 식의 믿음은 너희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관념을 근거로 해서만 나올 수 있다.
너는 신이 원하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너희가 삶에 뭔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느냐? 그런 식의 믿음은 너희와 내가 분리되어 있다는 관념을 근거로 해서만 나올 수 있다.
두 관념 모두 틀렸다.
우주가 동의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너희의 믿음은 심히 건방진 것이다.
너희가 여기서 논하는 것은 강대한 권능이거늘, 너희 중 일부는 자신이 가장 강대한 권능보다 더 강대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너희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너희가 가장 강대한 권능보다 덜 강대한 것도 아니다.
너희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가장 강대한 권능 자체다. 그러니 그 권능이 너희와 함께 있게 하라!
당사자의 허락 없이는 어느 누구도 죽일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지금껏 살해당한 사람들 모두가 어느 정도 고차원에서 보면 살해당하는 데 동의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든 걸 세속적인 의미로 살피고 생각하고 있는 너로서는 이중 어떤 것도 이치에 닿지 않을 것이다.
전 “세속전인 의미”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지상에요!
네게 말하노니, 너희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지, 이 세상 출신이 아니다.”
그럼 세속의 내 현실은 전혀 현실이 아니란 겁니까?
너는 진짜로 그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했느냐?
전 모르겠습니다.
너는 한번도, “여기에는 더 큰 뭔가가 있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느냐?
음, 그래요. 당연히 해봐죠.
지금 진행되는 게 이런 것이다. 나는 그것을 네게 설명하는 중이고.
좋습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추측컨대, 저는 지금 밖으로 나가서 아무라도 죽일 수 있는 거군요. 만약 그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어쨌든 전 그렇게 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사실 인류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너희가 이 문제를 가지고 그토록 힘들어하면서도, 돌아서는 어쨌든 그것이 참인 듯이 행동한다는 점이다.
아니 더 나쁘게 말하면, 너희는 사람들의 의지에 반(反)에서 그들을 죽이고 있다. 마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당연히 그건 중요하죠! 그건 그냥 우리가 뭘 더 중요시하고 싶은가일 뿐입니다. 이해가 안되십니까? 우리 인간이 누군가를 죽이는 순간에,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맙소사,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건 경솔하신 겁니다. 그건 그냥 우리가 뭘 더 중요시하고 싶은가의 문제일 뿐입니다.
알겠다. 그래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의지에 반해 그들을 죽여도 상관없다는 걸 쉽게 받아들이는 거구나. 너희는 벌 받지 않고 이렇게 할 수 있다. 그건 너희가 잘못된 쪽은 그들의 의지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전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않는다고? 너희 중 일부가 얼마나 위선적인지 보여주마. 너희는 예컨대 전쟁이나 사형집행에서처럼 그들의-혹은 낙태병원 주차장에서처럼 의사의-죽음을 원할 충분하고도 훌륭한 이유가 있는 한, 그들의 의지에 반해서 그들을 죽여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죽음을 원할 충분하고도 훌륭한 이유가 있다고 느끼더라도, 너희는 그가 죽도록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살 방조”니, 그렇게 하는 건 잘못이다!
당신은 절 놀리고 계시는군요.
아니다. 너희가 날 놀리고 있다. 너희는 누군가의 의지에 반해 그를 죽여도 내가 용서하리라 말하고,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그를 죽이면 내가 심판하리라 말한다.
이건 광기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 광기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런 광기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들이라 주장하기까지 한다. 너희는 착실한 사람들이고, 그들은 그냥 문제아들이라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종류의 뒤틀린 논리로 삶 전체를 구성하고, 신학들을 완성한다.
전 그걸 전혀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는데요.
너희에게 말하노니, 모든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살펴볼 때가 왔다. 지금은 너희가 개인으로서도 사회로서도 다시 태어날 때다. 이제 너희는 너희 세상을 다시 창조해야 한다. 너희의 광기로 그것을 무너뜨리기 전에.
이제 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우리는 모두 ‘하나’다.
우리 중에 오직 ‘하나’만이 있다.
너희는 나와 떨어져 있지 않고, 너희 서로 간에도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우리는 서로 협력해서 하고 있다. 우리의 현실은 공동으로 창조된 현실이다. 너희가 임신을 중단하는 건 우리가 임신을 중단하는 것이다. 너희의 의지가 곧 내 의지다.
신성의 어떤 개별 측면도 신성의 다른 측면들을 지배할 수 없다. 한 영혼이 다른 영혼의 의지를 거스르면서 그것에 영향을 미치기란 불가능하다. 어떤 희생자도, 어떤 악인도 없다.
너희의 제한된 시야로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너희에게 그건 그런 거라고 말하고 있다.
뭔가가 되거나, 뭔가를 하거나, 뭔가를 갖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다. 즉 ‘자신이 누구인가’를 직접 진술하는 것으로서만. 만일 개인과 사회 차원에서의 ‘자신’이 너희가 되고자 선택하고 바라는 자신이라면, 아무것도 바꿀 이유가 없다. 하지만 너희가 가져야 할 더 장대한 체험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면, 지금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신성의 표현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그 진리 속으로 옮아가라.
우리 모두는 공동 창조자들이니, 우리 전체 중 일부가 가고 싶어하는 길을 남들에게도 보여주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우리 전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너희는, 너희가 창조하고 싶어하는 삶을 논증하고, 네 예를 따르도록 남들을 초대하는 안내자일 수 있다. 나아가 너는 “나는 생명이고 길이니, 나를 따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심하라. 그런 진술을 했다고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들도 있으니.
감사합니다. 경고하신 것에 유의할게요. 되도록 자세를 낮추겠습니다.
나는 네가 그렇게 잘 해내고 있다는 걸 안다.
글쎄요, 자신이 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말할 때, 자세를 낮추고 있기는 쉬운 일이 아니죠.
남들이 그걸 알아버렸을 때라면.
그러기에 제가 일을 다물고 있었더라면 더 나았을 겁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좀 늦었다.
음, 그게 누구 잘못입니까?
네가 뭘 말하려는지 알겠다.
괜찮습니다. 당신을 용서할게요.
네가 나를 용서한다고?
예.
네가 어떻게 나를 용서할 수 있느냐?
당신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전 당신이 왜 제게 와서 이 대화를 시작했는지 이해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진 연유를 이해한다면, 그 일이 일으키거나 만들어내는 온갖 번잡함도 용서할 수 있는 거구요.
흐음, 그런데 이건 재미있군. 네가 신도 너만큼 장대한 존재라고 여길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항복!
너희는 나와 특이한 관계를 맺고 있다. 어떤 면에서 너희는 자신이 결코 나만큼 장대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내가 너희만큼 장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재미있지 않느냐?
흥미진진하군요.
그건 너희가, 우리가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너희는 이런 망상들에서 벗어날 것이다.
너희 문화-“아기” 문화이고 사실 원시 문화인-와 우주에서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 사이의 주요한 차이점이 이것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의 모든 지각 있는 존재들은 자신들과 너희가 “신”이라 부르는 존재 사이에 어떤 분리도 없다고 확신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또한 자신과 남들 사이에 어떤 분리도 없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자신이 전체를 각자 개별적으로 체험하고 있음을 안다.
아, 잘 됐군요. 이제 당신은 우주의 고도로 진화된 사회 속으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전 지금까지 이걸 기다려왔습니다.
그렇다. 나도 우리가 그걸 탐구해볼 시간이 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잠시만 앞의 낙태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서 당신이 말씀하시는 건, 영혼의 의지를 거스르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으니 사람을 죽여도 괜찮다는 건 아니죠? 그렇죠? 당신은 낙태를 용서하거나, 이 문제에서 우리에게 “탈출구”를 주는 건 아니죠? 안 그렇습니까?
내가 전쟁을 용서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듯이, 나는 낙태를 용서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내가 자신들이 싸우는 전쟁은 용서하고, 자기 적들이 싸우는 전쟁은 심판할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민족이 다 “신은 자기편”이라고 믿는다. 모든 주의(主義) 역시 그렇게 가정한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 아니면 적어도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이 사실이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너는 왜 모든 창조물들이 하나같이 신을 자기편이라고 믿는지 아느냐? 실제로 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조물들은 이것을 직관으로 안다.
이것은 그냥 “너희를 위한 너희의 의지는 너희를 위한 내 의지다”를 다른 식으로 말한 것이다. 그렇게 하는 건 그냥 “나는 너희에게 오직 자유의지만을 주었다”를 또 다른 식으로 말한 것이다.
자유의지를 특정한 방식으로 행사하는 것이 벌을 불러온다면, 자유의지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자유의지를 우롱하고, 자유의지를 모조품으로 만든다.
그러니 낙태를 하든, 전쟁을 하든, 차를 사든, 그따위 사람과 결혼을 하든, 섹스를 하든, 섹스를 하지 않든, “본분을 다하든”, “본분을 다하지” 않든, 그런 것들에 옳거나 그른 건 없다.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너희 모두는 계속해서 자신을 규정해가고 있다. 너희의 모든 행동이 자기 규정의 행동이다.
너희가 자신을 창조한 방식을 기뻐한다면, 그것이 너희에게 이바지한다면, 너희는 계속 그런 식으로 해나갈 것이다. 반면에 그렇지 않다면, 너희는 그렇게 하는 걸 그만둘 것이다. 이런 게 진화다.
이 과정이 느린 것은 너희가 진화하는 동안 무엇이 진짜로 자신에게 이바지하는가에 대한 관념을 계속해서 바꾸고, “기쁨”에 대한 개념을 계속해서 바꾸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에 말했던 것, 한 사람이나 사회가 무엇을 “즐거움”이라 부른지에 따라 그 존재나 사회가 얼마나 높이 진화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던 걸 떠올려보라. 나는 여기에 덧붙여, 그 존재나 사회가 무엇을 자신에게 이바지한다고 선언하는지에 따라서도 그 진화 정도를 알 수 있다고 말하려 한다.
전쟁에 나서고 다른 존재들을 죽이는 것이 너희에게 이바지한다면, 너희는 그렇게 할 것이다. 임신을 중단하는 것이 너희에게 이바지한다면, 너희는 그렇게 할 것이다. 너희가 진화함에 따라 바뀌는 것은 오직 무엇이 자신에게 이바지하는가에 관한 관념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너희가 시애틀로 가려고 한다면, 샌어제이 쪽으로 가는 것은 너희에게 이바지하지 않을 것이다. 샌어제이로 가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게 아니라, 그냥 너희에게 이바지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가 무엇을 하려 하는가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의 문제가 된다. 너희 삶 전체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특정 순간들마다에서, 삶 전체를 창조하는 건 결국 삶의 순간순간들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이 너희가 1권이라 부르게 된, 성스런 우리 대화의 초반부에서 아주 자세히 다루어져 있다. 내가 여기서 그것을 되풀이하는 건 네가 그것을 상기시켜줘야 할 것 같아서다.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낙태 문제를 물을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따라서 너희가 낙태를 시키려 하든, 담배를 피우려 하든, 고기를 구워먹으려 하든, 아니면 교통사고로 사람을 치어 죽이려 하든, 말하자면 큰 문제든 작은 문제든, 중요한 선택이든 사소한 선택이든, 너희가 고려해야 할 문제는 딱 하나뿐이다. 즉 이것이 ‘참된 나’인가? 이것이 내가 지금 되려고 선택하는 존재인가? 라는 물음.
그리고 어떤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건 없음을 이해하라. 모든 것에는 귀결이 있고, 그 귀결은 자신이 누구고 무엇인가다.
너희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낙태 문제에 대한 너희의 답변이고, 그것이 전쟁 문제에 대한 너희의 답변이며, 그것이 흡연 문제에 대한 너희의 답변이고, 그리고 그것이 고기 먹는 문제와 너희가 지금껏 저질렀던 행위들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너희의 답변이다.
모든 행동이 자기규정의 행동이다. 너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이게 나다”를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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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나는 너희에게 ‘자신이 누구고 누가 되기를 선택하는가’라는 이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그것이 너희 체험의 색조를 정할 뿐 아니라, 내 체험의 성격도 창조한다는 점에서.
너희는 살아오면서 줄곧 신이 너희를 창조했다고 들어왔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와서 말하노니, 너희 쪽이 신을 창조하고 있다.
이것이 너희의 이해를 크게 뒤바꾸리란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너희가 여기에 하러 온 진짜 과제를 시작하고자 한다면, 너희는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너희와 내가, 종사하고 있는 성스런 과업이고, 우리가 걷는 신성한 지반이다.
이것은 행로다.
순간순간마다 신은 너희에게서, 너희로서, 너희로 하여 자신을 표현한다. 너희는 언제나 신을 이 순간 어떤 모습으로 창조할지 선택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너희에게서 그 선택권을 빼앗지도,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너희를 벌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너희가 이 문제들에서 아무 지침없이 있는 건 아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너희 안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너희에게 말해주는 내면 안내체계가 심어져 있다. 이것은 언제나 너희에게 가장 고귀한 선택을 이야기하고, 너희 앞에 가장 장대한 전망을 제시하는 내면의 목소리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그 목소리에 유의하고 그 전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뿐이다.
또 나는 너희 역사 전체에 걸쳐 너희에게 스승들을 보내주었다. 내 사자들은 날마다 때마다 크나큰 기쁨에 대해 말하는 기쁜 소식을 너희에게 가져다주었다.
성스런 경전들이 쓰여졌고, 성스런 삶들이 살아졌다. 너희와 나는 ‘하나’라는 이 영원한 진리를 너희가 알 수 있도록.
이제 다시 나는 너희에게 경전들을 보내고-그중 하나는 지금 너희 손에 쥐어져 있다-, 이제 다시 나는 너희에게 신의 말을 전하려는 사자들을 보낸다.
너희는 이 말들에 귀 기울이려느냐? 이 사자들의 말대로 따르려느냐? 그들 중 한 사람이 되려느냐?
이것은 굉장한 물음이고, 엄청난 초대며, 영광스런 결정이다. 온 세상이 너희의 선언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삶을 사는 것으로 그것을 선언한다.
너희가 자신의 가장 고귀한 관념들로 올라서지 않고서는, 인류 역시 절대로 자신의 가장 저급한 생각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너희를 통해, 너희로서 표현된 그런 관념들이 인간 체험의 다음 수준을 위한 형판(型版))을 창조하고, 무대를 놓아주며, 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생명이요 길이니, 세상이 너희를 따를 것이다. 너희는 이 문제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너희가 아무런 자유 선택권도 갖지 못하는 유일한 문제가 이것이다. 그것은 그냥 본래 그런 식이다. 세상은 그냥 너희 자신에 관한 너희의 관념을 따를 뿐이다. 세상은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먼저 자신에 관한 자신의 생각이 오고, 그 뒤를 이어 외부 세상의 물질 표현이 따라나온다.
너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창조하고, 너희는 자신이 창조하는 것이 되며, 너희는 자신이 되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너희는 자신이 표현하는 것을 체험하고, 자신이 체험하는 것이 너희인 것이며, 너희는 자신인 것을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그 순환은 완결된다.
사실 너희가 종사하는 성스런 과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제야 마침내 너희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너희더러 이것을 알게 해준 건 너희 자신이고, 너희더러 이것에 신경 쓰게 해준 것도 너희 자신이다. 너희는 이제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이 참으로 누군지’ 신경 쓰고 있다 이제야 마침내 너희는 그림 전체를 본다.
보라, 너희는 나다.
너희는 신을 규정하고 있다.
내가 내 축복받은 일부인 너희를 물질형상 속으로 들여보낸 것은, 내가 개념으로 나 자신이라고 아는 그 모든 것이 체험으로도 나 자신임을 알기 위해서였다. 삶은 신이 개념을 체험으로 바꾸는 도구로 존재한다. 삶은 또한 너희가 나와 같은 일을 할 수 있게 하려고 존재한다. 너희가 신, 직접 이렇게 하고 있는 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단일 순간마다 나 자신을 재창조하길 원한다. 나는 내가 지금껏 ‘나 자신’에 관해 가졌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가장 숭고한 해석을 체험하길 원한다. 그리하여 나는 너희를 창조했다. 너희가 나를 재창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것은 우리의 성스런 과업이고,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며, 우리가 존재하는 바로 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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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들을 읽는 제 마음은 경외심과 고마움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식으로 저와 함께 여기에 있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와 함께 여기에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 너희가 날 위해 여기에 있어줘서 고맙다.
두세 가지 정도만 더 질문했으면 하는데요. 그 “진화된 존재들”과 관련해서요. 저로서는 그래야만 이 대화를 끝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내 사랑하는 이여, 이 대화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고, 네가 그래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신과 나누는 네 대화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게다가 네가 그 일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걸로 봐서, 그 대화는 얼마 안가 우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모든 좋은 대화는 결국 우정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니, 신과 나눈 네 대화도 얼마 안가 신과의 우정을 낳을 것이다.
저도 그렇게 느낍니다. 사실 전 우리가 이미 친구가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이, 우정도 보살피고 부채질하고 자라도록 놔두면, 마침내 영적 교섭을 낳기 마련이니, 너는 신과 영적으로 교섭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느끼고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화는 계속되는 겁니까?
그렇다. 영원히.
그럼 전 이 책의 말미에 가서 당신에게 잘 가시라고 말할 필요가 없겠군요.
너는 절대 잘 가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너는 그냥 안녕하시냐고 인사하면 된다.
당신은 참으로 경이로우십니다. 당신도 그걸 아십니까? 당신은 그냥 경이로우십니다.
그리고 너도 그렇다. 내 아들아, 너도 그렇다.
온 세상의 내 자식들 모두가 그러하듯이.
당신은 “온 세상에” 자식들을 가지고 계십니까?
물론이다.
아뇨, 말 그대로 온 세상 말입니다. 다른 행성에도 생명체가 있습니까? 우주의 다른 곳에도 당신 자식들이 있습니까?
그것도 물론이다.
그 문명들은 우리보다 진보된 문명입니까?
그중 일부는, 그렇다.
어떤 점에서요?
모든 점에서. 기술에서, 정치에서, 사회에서, 영성에서, 물질에서, 그리고 심리에서.
예를 들면, 비교하려는 너희의 끈덕진 취향과 뭔가를 “낫고 못하고”나, “높고 낮고”나, “좋고 나쁘고”로 특징지어야하는 너희의 줄기찬 필요는 너희가 이원론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 분리주의에 얼마나 깊이 잠겨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더 진보된 문명들에서는 이런 모습들을 찾을 수 없습니까? 그리고 이원론이란 건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한 사회가 얼마나 이원론적으로 사고하는지가 그 사회의 진보 수준을 반영한다. 그 사회의 진화 정도를 증명해주는 것은 분리가 아니라 합일로 나아가는 운동이다.
왜요? 왜 합일이 그런 잣대가 되는 겁니까?
합일이 진리기 때문이다. 분리는 환상이다. 한 사회가 자신을 분리되었다고 보는 한, 분리된 단위들의 집합이나 계열로 보는 한, 그 사회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너희 행성에서의 모든 삶은 분리주의 위에 세워져 있고,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
너희는 자신들이 분리된 가족이나 씨족들이고, 그것들이 모여서 분리된 지역이나 주를 이루며, 다시 그것들이 합쳐져 민족이나 국가를 이루고, 또 다시 그것들이 합쳐져 분리된 세상, 즉 분리된 행성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너희는 너희 세상이 우주에서 생명이 사는 유일한 세상이라 여기고, 너희 민족이 지상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 여기며, 너희 지역이 그 나라에서 최고 지역이라 여기고, 너희 가족이 그 지역에서 가장 멋진 가족이라 여긴다.
마지막으로 너희는 자신이 가족 중에서 제일 낫다고 생각한다.
아, 물론 너희는 전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너희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듯이 행동한다.
하지만 너희의 진짜 생각은 너희의 사회적 결정과 정치적 결론, 종교적 결의, 경제적 선택, 그리고 친구에서 신념체계, 나아가 신인 나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놓고 내리는 너희의 선별selection들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너희는 나와 너무나 분리된 듯이 느끼고 있어서, 내가 너희에게 말조차 걸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너희는 자기 체험의 진실성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너희는 너희와 내가 ‘하나’임을 체험하지만, 그것을 믿기를 거부한다. 이렇게 해서 너희는 서로에게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진실에서도 분리된다.
어떻게 자신의 진리에서 분리될 수 있습니까?
그것을 무시하는 것으로, 그것을 보고도 부정하는 것으로, 아니면 그래야 하리라는 자신의 선입관에 맞추기 위해 그것을 바꾸고, 뒤틀고, 왜곡하는 것으로.
내가 여기서 출발점으로 삼았던 질문을 한번 봐라. 너는 다른 행성들에도 생명체가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내가 “물론”이라고 말한 것은 그 증거가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너희가 그런 걸 묻는다는 사실 자체가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다.
자, 이것이 “자신의 진실에서 분리될” 수 있는 방법이다. 도저히 놓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정면으로, 제 눈으로 진실을 보고 나서도 자신이 보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기서의 매커니즘은 부정이다. 그리고 자기 부정만큼 교활한 부정은 없다.
너희는 평생을 ‘참된 자신’을 부정하는 데 보냈다.
너희가 설령 덜 개인적인 문제들, 오존층의 고갈이나 원시림의 강탈, 끔찍한 아동학대 같은 문제들만으로 너희의 부정을 제한했다 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슬픈 일이었겠지만, 그러나 너희는 주변에서 보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너희는 너희 내면에서 보는 것들까지 모조리 부정하기 전에는 결코 편히 쉬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내면에서 선과 자비를 보지만, 그것을 부정한다. 너희는 자신의 내면에서 지혜를 보지만, 그것을 부정한다. 너희는 자신의 내면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지만, 그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너희는 자신의 내면에서 신을 보고 체험하지만, 그 또한 부정한다.
너희는 너희 내면에 내가 있음을, 즉 내가 너희임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너희는 당연하고도 명백한 내 자리를 부정한다.
저는 당신을 부정하지 않았고 부정하지 않습니다.
너는 네가 신임을 인정하느냐?
음, 그런식으로 말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 봐라. 이제 네게 말하노니,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정하리라.”
너는 바로 그런 네 생각들로 너를 부정할 것이고,
바로 그런 네 말들로 나를 부정할 것이며,
바로 그런 네 행동들로 나를 부정할 것이다.
너희는 내가 너희 속에 너희와 함께 있고, 우리가 하나임을 가슴으로 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부정한다.
아 물론, 내가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너희에게서 떨어져서, 저 멀리 어딘가에. 내가 더 멀리 있다고 여기면 여길수록, 너희는 자신의 진실에서 점점 더 멀어져간다.
너희 행성의 천연자원의 고갈에서부터 그 많은 수의 가정들에서 자행되는 아동학대에 이르기까지, 삶의 다른 많은 것들에서 그러하듯, 너희는 그것을 보지만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왜죠?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보면서도 믿지 않는 걸까요?
환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환상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그것을 꿰뚫어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환상이 계속되려면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신성한 이분법’이다.
내가 되기를 너희가 계속 추구하려면, 너희는 나를 부정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너희가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되어 있는 것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니, 이 때문에 부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쓸모 있는 도구다.
그것이 더 이상 그렇지 않을 때까지.
선각자는 부정이, 환상을 계속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안다. 반면에 인정은 이제 환상을 끝내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인정과 선언과 드러냄demonstration, 이것이 신을 향해 가는 세 단계다. ‘자신이 참으로 누구고 무엇인지’를 인정하고, 온 세상이 다 듣도록 그것을 선언하며, 모든 면에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자기 선언 뒤에는 언제나 드러냄이 뒤따른다. 너희는 자신이 신임을 드러낼 것이다. 지금도 너희는 너희 자신이라 여기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너희 삶 전체가 그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너희가 가장 큰 도전을 만나게 되는 것이 이 드러냄에서다. 너희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멈추자마자, 남들이 너희를 부정할 것이기에.
너희가 신과 ‘하나됨’을 선언하자마자, 남들은 너희가 사탄과 손잡았다고 선언할 것이고,
너희가 최고의 진리를 설교하자마자, 남들은 너희가 최악의 신성모독을 설교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깨달음을 차분히 드러낸 모든 선각자들이 그러했듯이, 너희 역시 숭배되면서 모욕당하고, 떠받들리면서 짓밟히고, 추앙되면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너희로서야 그 순환이 끝나겠지만, 여전히 환상 속에서 사는 사람들로서는 너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를 것이기에.
그런데 저한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혼란스럽고요. 전 당신이 거기에 뭔가 “게임”이란 게 존재하려면 환상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신 걸로 생각했는데요. “게임”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걸로요.
그렇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실제로도 그러하다. 게임은 계속된다. 너희 중 한두 사람이 환상의 순환을 끝냈다고 해서, 그것이 게임을 끝내지는 않기 때문이다-너희에게도, 그리고 다른 놀이꾼들에게도.
전부 다가 다시 ‘하나’될 때까지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아니, 그때도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전부가 전부와 재합일하는 그 성스런 순간에 ‘나-우리-너희’는, 그 환희가 너무나도 장대하고 너무나도 강렬해서 말 그대로 기쁨으로 터져버릴 것이고, 희열로 폭발할 것이기에, 그리하여 그 순환은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다.
내 아들아, 그것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게임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게임이 삶 자체이고, 삶이 바로 ‘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음에 이르러 모든 앎을 이룬 개별 요소, 아니 당신 표현대로 “전체의 부분”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그런 선각자는 그 순환의 자기 부분만이 완료되었음을 안다. 그녀는 자신의 환상 체험만이 끝났다는 것을 안다.
이제 선각자는 웃음을 터트린다. 그녀는 마스터 플랜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순환이 완결되어도 그 게임은 계속되리란 걸, 그 체험은 계속되리란 걸 안다. 그러고 나면 선각자는 이제 자신이 그 체험 속에서 할 수 있는 역할까지 안다. 선각자의 역할은 다른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각자는 계속해서 그 놀이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그는 환상임을 알기에 환상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선각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과 즐거움에 들어맞을 때 이따금 이렇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자신의 깨달음을 선언하고 드러내니, 남들은 그를 신/여신이라 부르리라.
너희 종 전체가 깨달음으로 인도되어 그것을 이뤄낸다면, 전체로서 너희 종(너희 종은 하나의 통일체이기에)은 시간과 공간 속을 마음대로 옮아다닐 것이고(너희는 물질 법칙들을 이해했듯이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될 것이다.)
너희는 다른 종과 다른 문명들에 속한 이들 또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게 도와주려 할 것이다.
다른 종과 다른 문명들이 지금 우리에게 하듯이요?
맞았다. 바로 그거다.
그리고 전 우주의 모든 종이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에야-
-아니면, 내가 표현하듯이 내 모두가 ‘하나됨’을 알았을 때에야-
-그 순환의 이 부분은 끝날 것이다.
네가 슬기롭게 표현했구나. 순환 자체는 절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순환의 이 부분이 끝나는 것이 바로 순환 자체이기에!
야호! 근사하다!
너는 이해했다!
그러니 그렇다, 다른 행성들에도 생명체가 있다. 그리고 그렇다, 그중 다수가 너희보다 더 진보되어 있다.
어떤 점에서요? 당신은 사실 이 문제에는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다, 나는 했다. 나는 모든 점에서라고 말했다. 기술과 정치와 사회와 영성과 물질과 심리에서.
아, 그랬군요. 하지만 예를 좀 들어주십시오. 그런 진술은 너무 광범위해서 저한테는 의미가 없습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네 진실을 사랑한다. 누구나가 다 신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신이 말하는 게 의미 없다고 대놓고 단언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바로 그것, 너는 바로 그런 올바른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건 물론 네가 옳기 때문이다. 너는 내게 도전할 수 있고, 내게 맞설 수 있고, 네가 원하는 만큼 많이 내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나는 거기에 대해 매도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축복을 내릴 수 있다. 내가 여기서 이 대화를 가지고 그러하듯이. 이건 축복받은 사건이 아니냐?
예, 이건 축복받은 사건입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책은 몇백만의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지금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나도 그건 안다. 그 모두가 “마스터 플랜”의 일부다. 너희가 선각자가 되게 하려는 계획의 일부.
당신은 이 삼부작이 큰 성공을 거두리란 걸 처음부터 알고 계셨죠. 그렇죠?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너는 그것을 그렇게 성공시킨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손에 넣을 나름의 방법들을 찾아내도록 만든 게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이 자료를 찾아올 모든 사람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한사람한사람이 어떤 이유로 왔는지도 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이제 문제는 그들이 다시 또 나를 부정하는가뿐이다.
그 문제가 당신에게 중요합니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내 자식들 모두가 언젠가는 내게 돌아올 것이다. 그것은 그럴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그럴 것인가의 문제다. 따라서 그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러니 들을 귀를 가진 자들은 모두 듣게 하라.
그러죠. 그런데 우리는 다른 행성에 사는 생명체들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지구의 생명체보다 어떤 점에서 그토록 많이 진보했는지 예를 들어주시려던 참이었고요.
기술에서 다른 문명들 대다수가 너희보다 훨씬 앞서 있다. 너희보다 뒤쳐진 문명들도 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대다수가 너희보다 훨씬 앞서 있다.
어떤 점에서요? 예를 하나 들어주십시오.
좋다. 날씨를 예로 들자. 너희는 날씨를 조절하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을 정확히 예견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너희는 그것의 변덕에 지배된다. 하지만 다른 대다수 세상들은 그렇지 않다. 다른 행성들에 사는 존재들은, 예를 들면 일정 지역의 기온을 조절할 수 있다.
그들이 그럴 수 있다고요? 전 어떤 행성의 기온은 자기 태양과의 거리라든가 기압 따위들이 복합되어 만들어진 결과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런 것들이 매개변수를 확정한다. 그러나 그 매개변수들 안에서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어떤 식으로요?
환경을 조절하는 것으로. 대기 속에 특정 조건들을 만들어내거나 만들어내지 않는 것으로.
너도 알다시피, 그것은 태양과 어떤 위치 관계에 있는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태양과 자신 사이에 무엇을 두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너희는 너희 대기 속에 가장 위험한 것들을 집어넣고, 가장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빼버렸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것을 부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너희들 대다수가 이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너희 중 가장 섬세한 마음들이 너희가 입고 있는 피해를 의심할 여지없이 밝혀줄 때조차도 너희는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너희는 그 섬세한 마음들을 미쳤다고 일컬으면서 너희가 더 잘 안다고 말한다.
아니면 너희는 이 지혜로운 사람들이 다른 속셈을 가지고 있고, 자기 관점을 공식화시키려 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속셈을 가진 쪽은 너희고, 자기 관점을 공식화하려는 쪽도 너희며, 자신의 특별한 이익을 지키고 있는 쪽도 너희다.
너희의 주요한 관심은 언제나 너희 자신이다. 아무리 과학적이고, 아무리 증명 가능하고, 아무리 긴박한 증거라 해도, 그것이 너희의 사리사욕을 침해한다면, 너희는 그것을 부정할 것이다.
그건 너무 가혹한 판결이군요. 전 그게 사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이제 너는 신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셈이냐?
음, 전 그걸 그런 식을 말하려던 게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너는 너희 국가들이 탄화불소(프레온가스-옮긴이)로 대기를 오염시키는 짓을 그만두기로 동의하는 데만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아느냐?
예.......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다. 너는 그것이 왜 오래 걸렸다고 생각하느냐? 아니 놔둬라, 내가 말해주마. 그것이 그렇게 오래 걸린 건, 오염을 중단하면 많은 대기업들이 엄청난 돈을 손해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렇게 오래 걸린 건,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편리함을 손해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렇게 오래 걸린 건,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과 많은 나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현상태로, 지금 유지되고 있는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그 증거를 부정하려 애썼기 때문이다. 아니, 부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더 많은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피부암의 발생 비율이 심상찮을 정도로 높아지고, 기온이 상승하여 빙하와 눈이 녹기 시작하고, 해수온도가 올라가고, 호수와 강이 범람하기 시작하고서였다.
고상한 마음들이 오래 전부터 너희 앞에 놓아둔 진실을 너희가 그나마 보기 시작한 것은 너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서였다.
자기 이익이 뭐가 잘못입니까? 전 당신이 1권에서 자기 이익이 출발점이라고 하신 걸로 아는데요.
그렇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행성의 문화와 사회들은 “자기 이익”을 너희 세상보다 훨씬 넓게 규정한다. 깨달은 존재들은 한 사람들 다치게 하는 것이 다수를 다치게 하는 것이고, 소수를 이롭게 하는 것이 다수를 이롭게 할 수밖에 없음을, 아니 결국에는 아무도 이롭게 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너희 행성에서는 그것이 정반대다. 한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쯤이야 다수에 의해 무시되고, 소수를 이롭게 하는 것쯤이야 다수에 의해 부정된다.
이것은 자기 이익에 대하 너희의 규정이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다. 고작 자기 개인, 그리고 그걸 넘어서면 자기 가족, 그것도 자기 분부대로 따르는 가족들에게나 간신히 이를 정도로.
그렇다, 나는 1권에서, 어떤 관계에서나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일을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이 자신에게 최고로 이로운지 알 때, 자신과 남이 ‘하나’이니, 너희는 그것이 남들에게도 최고로 이로운 것임을 알게 되리라고도 말했다.
자신과 모든 남들이 ‘하나’다. 이것은 아직 너희가 이르지 못한 앎의 수준이다.
네가 진보된 기술에 대해 물으니, 내가 말해주마. 너희는 진보된 사고방식 없이는 어떤 진보된 기술도 이로운 방식으로 가질 수 없다.
사고방식의 진보 없는 기술의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 서거(逝去)를 가져온다.
너희는 너희 행성에서 이미 이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이제 얼마 안 있어 너희는 그것을 다시 체험하려 하고 있다.
무슨 말씀입니까?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말은 예전에 너희 행성에서, 지금 너희가 서서히 올라서고 있는 높이까지-실제로는 그 높이를 넘어서-이른 적이 있다는 이야기다. 너희는 지금 존재하는 것보다 더 진보된 문명을 지구에 건설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멸했다.
그것은 자멸했을 뿐 아니라 다른 것들까지 거의 다 파멸시켰다.
이렇게 된 건 그 문명이, 자신이 발달시킨 그 기술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기술의 진보가 영성의 진화를 훨씬 앞선 탓에, 그 문명은 기술을 자신의 신으로 삼기에 이르렀고, 사람들은 기술과, 기술이 만들고 가져다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숭배했다. 그래서 그들은 고삐 풀린 기술이 가져다준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고삐 풀린 재난이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자기들 세상을 끝장냈다.
이런 일들이 여기, 이 지구에서 일어났다는 겁니까?
그렇다.
잃어버린 도시 아틀란티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레뮤리아도요? 뮤 대륙도요?
그 또한 너희 신화의 일부다.
그렇다면 그게 사실이었군요! 우리가 예전에 이런 수준에 달했다는 게!
아, 내 친구여, 그 수준을 넘어서. 그 수준을 훨씬 넘어서.
그리고 우리는 자멸했군요.
왜 그렇게 놀라느냐? 너희는 지금도 똑같이 하고 있다.
그건 저도 압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중단할 수 있을까요?
이 주제에 바쳐진 책들은 많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들을 무시하고 있지만.
그중 하나라도 제목을 말해주십시오. 우린 무시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약속할게요.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을 읽어라.
톰 하트만이 쓴 거군요. 그래요! 전 그 책을 좋아해요.
잘 됐구나. 이 사자(使者)는 영감을 받았다. 세상이 이 책을 주목하게 하라.
그럴께요. 그렇게 할께요.
그 책에는 앞의 네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모든 것들이 들어 있다. 내가 네게 그 책을 다시 쓰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책은 너희 고향인 지구를 위태롭게 하는 여러 측면들과 너희가 멸망을 중단시킬 수 있는 방안들을 요약하고 있다.
인류가 이 행성에서 저질러온 일들이 그만큼 문제가 많다는 거겠죠. 사실 당신은 이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 줄곧 우리 종은 “원시적”이라고 묘사하셨죠. 당신이 처음 그런 언급을 하고 난 이후로, 전 비원시적인 문명에서 사는 건 어떤 건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셨죠? 우주에는 그런 사회나 문화들이 많다고요.
그렇다.
얼마나 많습니까?
아주 많다.
몇십 개요? 몇백 개요?
몇만 개.
몇만 개요? 몇만 개나 되는 진보된 문명들이 있다고요?
그렇다. 하지만 너희보다 더 원시적인 문화들도 있다.
한 사회를 “원시적”이라거나 “진보적”이라고 구분하는 다른 어떤 표식이 있습니까?
그 사회가 자신이 지닌 가장 높은 이해를 얼마나 실제로 행하는가의 정도.
이것은 너희가 무엇을 믿는가에 따라 다르다. 너희는 그 사회의 이해가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 그 사회를 원시적이라 부르고 진보적이라 불러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들을 실제로 행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높은 이해라도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답은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런 식의 이해라면 위험하다.
퇴보를 진보로 칭하는 것이 원시사회의 표식이다. 너희 사회는 앞으로 가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너희 세상의 많은 것들이 오늘날보다 70년 전에 더 많은 자비를 증명했다.
이걸 듣기 힘들어할 사람들도 있겠군요. 당신은 자신이 판단하지 않는 신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자신들이 판단당하고 있으며, 이 책 곳곳에서 잘못된 걸로 규정되고 있다고 느낄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앞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었다. 너희가 시애틀로 가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샌어제이로 차를 몰고 가고 있을 때, 너희가 방향을 물어본 그 사람이, 너희는 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에 닿지 못할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냐?
우리를 “원시적”이라고 부르는 건 단순히 방향으로 가리켜주는 것하고 다릅니다. 원시적이라는 용어 자체가 비하하는 말입니다.
호, 정말? 하지만 너희는 “원시” 미술에 정말 탄복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원시”성 덕분에 감칠맛나는 음악들도 많이 있다. 물론 그런 여자들이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당신은 사태를 뒤집으려고 말장난을 하고 계십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단지 네게 “원시적”이란 용어가 반드시 비하어는 아니란 걸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걸 그렇게 만드는 건 너희 판단이다. “원시적”이란 그냥 서술어일 뿐이다. 그것은 그냥 말 그대로 어떤 것이 발달의 초기 단계에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것은 그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옳고 그름”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를 보태는 건 너희다.
나는 여기서 “너희를 잘못된 걸로 규정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너희 문화를 원시적이라 서술했을 뿐이다. 너희가 원시적인 것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있을 때, 오직 그때만 그것은 잘못된 것으로 “들릴” 것이다.
나로서는 전혀 그런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
평가는 판단이 아니다. 그건 그냥 있는 그대로에 대한 관찰이다.
나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고 싶다. 나는 너희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너희를 바라볼 때, 나는 오직 아름다움과 경이만을 본다.
원시 미술을 볼 때 그렇듯이요.
맞다. 나는 너희의 멜로디를 듣고 오직 흥분만을 느낀다.
원시 음악을 들을 때처럼요.
너는 이해하고 있다. 나는 너희 중에게서, 너희가 “원시적 관능성”을 가진 남자나 여자에게서 느끼는 것과 같은 에너지를 느낀다. 그리고 너희처럼 나도 흥분한다.
너희와 나에게 진실인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나를 정떨어지게 하지 않는다. 너희는 나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너희는 나를 실망시키지도 않는다.
너희는 나를 흥분시킨다!
나는 새로운 가능성들에 흥분하고, 이제 다가올 새로운 체험에 흥분한다. 나는 너희 속에서 새로운 모험들로 깨어나고, 새로운 수준의 장대함으로 옮아가는 자극으로 깨어난다.
천만에, 너희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너희는 나를 짜릿하게 한다! 나는 너희의 경이로움에 짜릿해진다. 너희는 자신들이 인간 발달의 정점에 있다고 여기지만, 내가 말하노니 너희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너희는 자신의 장려함을 이제야 체험하기 시작했다!
너희의 가장 장대한 관념들은 아직 체험되지 않았고, 너희의 가장 장대한 전망들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다려라! 보라! 주목하라! 너희가 만개할 날들이 가까이 왔으니, 줄기는 튼튼하게 자랐고, 꽃잎은 금방이라도 펼쳐질 듯하다. 그리하여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는 땅을 가득 채울 것이고, 너희는 이제 신들의 정원에서 너희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17
바로 이게 제가 듣고 싶었던 겁니다. 이게 제가 여기 와서 체험하려던 거라구요! 비하가 아니라 격려요!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너희는 결코 비하당하지 않는다. 신은 결코 너희를 판단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른 건 없다”고 말하고, 우리를 절대 심판하지 않으리라 선언하는 신이라는 이 사고방식을 “접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 네 마음을 정해라! 너는 처음엔 내가 너희를 판단한고 말하더니, 이번에는 내가 그렇지 않다고 낭패스러워한다.
압니다. 알아요. 그건 몹시 헷갈리는 겁니다. 우린 정말 무척....... 복잡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판단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그걸 원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그게 없으면 길을 잃을 것처럼 느낍니다. 그리고 당신이 앞서 두 권을 책에서 말씀하셨듯이, “나는 결코 너희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 우린 그걸 믿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말에 거의 화까지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판단하지 않고 벌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우리더러 올바른 인생길을 걸어가게 해주겠냐면서요. 하늘에 “정의”가 없다면, 누가 땅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의를 없애겠냐는 거죠.
왜 너희는 소위 “불의”를 하늘이 고쳐주리라 기대하느냐? 비는 하늘에서 내리지 않느냐?
그렇죠.
자,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가리지 않고 누구의 머리 위에나 똑같이 내린다.
하지만, “복수는 나의 것이다, 고 주께서 말씀하셨다”는요?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너희 중 하나가 그것을 꾸며냈고, 나머지 너희는 그것을 믿었다.
“정의”란 너희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나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체험하는 것이다. 정의는 행동이지, 행동에 대한 처벌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사회의 문제는 먼저 “정의를 행하지” 않고, “부담함”이 벌어지고 나서야 “정의”를 구한다는 거군요.
바로 맞혔다! 네가 정통으로 알아맞혔다!
정의는 행동이지, 반응이 아니다.
그러니 “사후”에 이런저런 하늘의 정의를 강요함으로써, 어쨌든 “ 끝에 가서는 모든 걸 바로 잡아주길” 내게 기대하지 마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사후”after-life란 건 없다. 단지 삶life만이 있을 뿐이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너희가 개인과 사회로서 삶을 체험하고 창조하는 방식 자체가 너희가 생각하는 바 그대로를 증명해준다.
그리고 당신은 이 점에서 인류를 별로 진화하지 못했다고 보시는 거고요. 그렇죠? 그럼 진화 전체를 미식축구장에 놓는다면 우리는 어디쯤에 있는 겁니까?
12야드 선에.(미식 축구에서 자기편 골 영역에서 상대편 골 영역까지의 거리는 100야드-옮긴이)
농담이시겠죠?
아니다.
우리가 진화의 12야드 선에 있다고요?
봐라, 너희는 이번 세기에만도 6야드에서 12야드까지 나갔다.
득점을 기록할 기회가 좀이라도 있습니까?
물론이다. 너희가 다시 공을 헛잡지 않는다면.
다시라뇨?
내가 말했듯이, 너희 문명이 이런 벼랑 끝에 선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것을 새겨듣는 건 너희에게 사활을 건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때 너희가 너희 행성에서 발달시킨 기술은 그것을 책임있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었다. 너희는 인류사에서 다시 한번 같은 지점으로 다가가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는 건 생사를 다룰 만큼 중요한 문제다.
지금의 너희 기술은, 그것을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는 너희 능력을 능가하는 지점으로 육박하고 있다. 너희 사회는 바야흐로 기술의 산물이 되려 하고 있다. 기술이 사회의 산물이 되지 않고.
한 사회가 자기 기술의 산물이 될 때, 그 사회는 자멸한다.
왜 그렇습니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그렇지. 핵심 문제는 기술과 우주철학cosmology, 모든 생명의 우주철학 사이에 균형을 잡는 것이다.
“모든 생명의 우주철학”이란 걸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간단하게 표현하면, 그건 만사가 작동하는 방식, 다시 말해 체계 혹은 ‘과정’이다.
알다시피 “나를 화나게 하는 방법”이 있다.
저도 그런게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리고 역설은, 일단 너희가 그 방식을 헤아리고 나면, 일단 너희가 우주의 작동방식을 점점 더 많이 이해하기 시작하고 나면, 너희는 파멸을 불러올 위험을 더 많이 감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무지가 오히려 축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주는 그 자체가 기술이다. 그것은 최고의 기술이다. 그것은 완벽하게 작동한다. 완전히 혼자 힘으로. 하지만 너희가 거기에 끼어들어 우주 원칙들과 법칙들에 쓸데없이 간섭하기 시작하면, 너희는 그 법칙들을 어길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그리고 그건 40야드의 벌칙(미식축구에서 반칙을 범했을 때 내리는 벌칙의 한 종류-옮긴이)이다.
홈팀을 위한 주요한 역전이군요.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우리 연맹에서 탈퇴하는 겁니까?
너희는 거기에 가까워지고 있다. 오직 너희만이 너희 연맹에서 탈퇴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다. 너희는 행동으로 그것을 결정할 것이다. 예를 들어 너희는 이제 자신들을 천당으로 날려보낼 수도 있을 만큼 원자에너지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그래요,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할 것 같지는 않는데요. 우리는 그보다는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제할 겁니다.
정말로? 너희는 대량파괴 무기들을 양산하는 짓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얼마 안가 그것들은 세상을 그 무기들에 대한 담보로 잡거나, 시험삼아 세상을 파괴하려는 누군가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너희는 애들에게 성냥을 주고 있으면서도 얘들이 그곳을 몽땅 다 태우는 일만은 없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너희 자신들조차 그 성냥을 사용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해결책은 명백하다. 아이들에게서 성냥을 뺏고, 그 다음엔 너희 자신의 성냥도 던져버려라.
하지만 원시 사회가 자진해서 무장해제하길 기대하는 건 무리죠. 그나마 우리가 유일하게 오래 붙들고 있는 해결책인 핵폐기도 그래서 불가능한 것 같고요.
핵실험을 중지하는 것에서조차 합의를 못하는 걸 보면, 우리도 참 유별나게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종족인 것 같군요.
설령 너희가 핵 광기로 자살하지 않는다 해도, 너희는 환경 자살로 세상을 파멸시킬 것이다. 너희는 너희 고향인 지구의 생태계를 해체시키고 있으면서도, 줄기차게 자신들을 그렇게 하지 않노라고 말한다.
이 정도로도 충분치 않은지, 너희는 생명 자체의 생화학에 어설프게 손을 대, 무성생식을 시키고 유전공학 작업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너희는 이것이 너희 종에게 은혜가 될 만큼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너희는 그것을 사상 최대의 재난으로 만들 위험성을 키워가고 있다. 조심하지 않으면 너희는 핵 위협과 환경 위협을 애들 장난처럼 보이게 만들 것이다.
본래 너희 몸이 하기로 되어 있는 기능을 대신하는 약들을 발달시킨 탓에, 너희는 너희 종 전체를 나가떨어지게 할 독성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저항력이 강한 바이러스를 창조하고 말았다.
당신 말씀을 들으니 좀 겁이 나는군요. 그러면 전멸입니까? 게임이 끝나는 겁니까?
아니다. 하지만 그건 10분 4(미식 축구에서 쿼터백이 서 있는 위치-옮긴이)다. 이제는 아베마리아를 던질 차례니, 쿼터백은 빈자리에서 공을 받을 사람을 찾고 있다.
너희는 비어 있느냐? 너희는 이걸 받을 수 있느냐?
나는 쿼터백이고, 지난번에 내가 너희를 쳐다봤을 때, 너희는 나와 같은 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같은 편이냐?
전 딱 한 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요. 다른 팀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하나’임을 무시하는 모든 생각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모든 관념, 그리고 우리가 합쳐져 있지 않다고 선언하는 모든 행동들이 상대팀이다. “상대 팀”은 실재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너희 현실의 일부다. 너희가 그것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너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너희에게 봉사하려고 만들어진 기술이 너희를 죽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제 귀에는 사람들이, “하지만 혼자 힘으로야 도리가 없잖아?”라고 말하는 게 들립니다.
그들은 “혼자 힘으로야 도리가 없잖아?”라는 태도를 내버리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이미 너희에게 말했다. 이 주제를 다룬 몇백 권의 책들이 있다고, 그 책들을 무시하길 그만둬라. 그 책들을 읽어라. 그 책들의 내용을 행동에 옮겨라. 다른 사람들이 그 책들에 눈뜨게 하라. 혁명을 시작하라. 그것을 진화 혁명an evolution revolution으로 만들어라.
그건 오래 전부터 되어오던 일 아닙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진화 과정은 물론 언제나 계속되어왔다. 하지만 그 과정은 지금 새로이 휘어지고 있다. 여기 새 모퉁이가 있다. 이제 너희는 자신들이 진화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어떻게 진화하는지도, 이제 너희는 진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알고, 그 과정을 통해 너희 현실이 창조된다는 걸 안다.
예전의 너희는 너희 종의 진화에서 업저버에 불과했지만, 이제 너희는 의식적인 참여자다.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힘과, 만물과 자신의 상호관계, 그리고 영적 존재로서 자신들의 참된 정체성을 깨달아가고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공간에서부터 살면서, 특별한 결과와 바람직한 결말, 의도된 체험을 일으키고 낳는 원리들을 연습하고 있다.
이것은 진실로 진화 혁명이다. 왜냐하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체험의 질을 의식하면서 창조하고, ‘참된 자신’을 즉각 표현하고, ‘되려 하는 자신’을 재빨리 드러내는 일을 의식하면서 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을 그토록 결정적인 시기로 만드는 것이 이 때문이고, 지금이 중차대한 순간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너희의 지금 기록된 역사에서 처음으로(물론 인간 체험으로는 처음이 아니지만), 너희는 기술과 그것이 너희 세상 전체를 파멸시키게 만드는 사용법에 대한 이해, 둘 다를 가지고 있다. 너희는 실제로 너희 자신을 멸종시킬 수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바바라 막스 후버드가 <의식있는 진화>에서 했던 지적들과 똑같군요.
그렇다. 그리고 그 지적들은 사실이다.
그 책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전 문명들의 끔찍한 결과들을 피하면서 진실로 땅 위에 천국을 세울 수 있을지에 관해 경이로운 전망들을 제시해줍니다. 독자를 단숨에 휘어잡는 책이죠. 그러고 보니 당신이 영감을 준 게 틀림없군요!
바바라라면 내가 거기에 관계했다고 말할지도 모르지.......
당신은 앞에서 몇백 명의 저자들, 많은 사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노라고 말씀하셨댔죠? 우리가 알아둬야 할 다른 책들이 있습니까?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기에는 너무 많다. 왜 네가 직접 찾아보지 않느냐? 그런 다음에는 특별히 네 마음을 끄는 책들의 목록을 따로 만들어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라.
나는 태초 이래로 저자와 시인과 극작가들을 통해 이야기 해왔다. 나는 지나온 세월 내내 노래가사와 그림과 조각 형상과 인간 가슴의 모든 박동 속에 내 진실을 놓았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다가올 세월에도 그리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장 익숙한 길을 따라 지혜로 오기 마련이고, 신의 사자들은 누구나 지극히 단순한 순간들에서 진리를 끌어내어, 지극히 단순한 방식으로 그것을 남들과 함께 하기 마련이다.
네가 그런 사자다. 이제 나가서 네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가장 고귀한 진리 속에서 함께 살라고 말하라. 자신들의 지혜를 함께 나누고, 자신들의 사랑을 더불어 체험하게 하라. 그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있을 수 있도록.
그러고 나면 너희 사회 역시 우리가 이야기해왔던 그런 사회들처럼 승격한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와 우주의 다른 곳에 있는 고도로 진화된 문명간의 주요한 차이점은 우리가 지닌, 이런 분리 관념이군요.
그렇다. 진보한 문명의 ‘첫번째 지도원리’는 합일이다. ‘하나임’과 모든 생명의 신성불가침에 대한 인정. 그래서 승격한 사회들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종들의 다른 개체가 원하지 않는데 그 생명을 고의로 빼앗는 일이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요?
어떤 상황에서도.
설사 공격을 당하더라도요?
그런 사회나 그런 종 내부에서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종 내부는 아니겠지만, 외부에서 오는 공격이라면요?
다른 종이 고도로 진화된 종을 공격한다면, 공격하는 쪽은 당연히 덜 진화된 종일 것이다. 사실 공격하는 쪽은 언제나 원시 존재이기 마련이다. 진화된 존재라면 절대 다른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을 터이니.
그렇군요.
공격당하는 한 종이 상대방을 죽이게 되는 경우는 그 공격받는 존재가 참된 자신을 잊었을 때말고는 없다.
그 존재가 자기 육신, 즉 자신의 물질형상을 자신으로 여긴다면,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자를 죽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끝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 존재가, 자신은 자기 몸이 아님을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다면, 그는 절대로 상대방의 육신 존재를 끝내지 않을 것이다. 그로서는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니, 그는 그냥 자신의 육신을 내려놓고 비육신의 자기 체험으로 옮아갈 것이다.
오비 완 케노비처럼!
그래, 맞다. 소위 “공상과학소설”의 작가들이 너희에게 대진리를 보여주는 일은 자주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만요. 이건 1권에서 말씀하신 내용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 같은데요.
그게 뭐냐?
1권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남용할 때, 남용이 계속되도록 놔두는 게 결코 좋은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1권에서는 사랑으로 행동할 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중에 자신을 포함시키라고도 하셨고요. 그리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공격을 멈추기 위해 필요한 일이면 뭐든 하라는 식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게다가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전쟁을 해도 괜찮다고까지요. 직접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독재자들이 제멋대로 활개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만, 독재자임을 그만두게 하려면 거꾸로 그들에게 독재를 행사해야 한다.”
또 그 책에서는 “신처럼 되는 것이 순교자가 되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희생자가 되는 걸 뜻하지 않는 건 더 말할 나위도 없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은 절대 다른 존재의 육신 삶을 끝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진술들이 어떻게 서로 병존할 수 있습니까?
1권의 그 부분을 다시 읽어라. 꼼꼼하게
거기서의 내 대답들은 네가 설정한 문맥 안에서, 네 질문의 문맥 속에서 주어졌으니, 오로지 그 안에서만 고려되어야 한다.
1권 211쪽 아래쪽의 네가 이야기하는 부분을 읽어봐라. 거기서 너는 깨달음의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지 않는 자신의 현상태를 인정한다. 너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쉽게 상처받는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을 전제로 해서 너는 상처받고 고통 주는 이런 체험들에 어떻게 대응하는 게 최선인지 물었다.
내 대답은 오직 이런 문맥 안에서만 받아들여져야 한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네가 상처받지 않을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오비 완 케노비처럼 너도, 누가 널 “죽이려” 해도 아무 고통도 체험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내가 지금 서술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도달한 깨달음의 수준이 이런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사는 존재들은 ‘자신들이 누구’고 누구가 아닌지 아주 잘 안다. 그들 중 한명을 “고통 받거나 상처받게” 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적어도 그들의 육신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으로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너희가 그들의 육신을 굳이 해치게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들은 그냥 몸에서 빠져나와 그것을 너희가 갖도록 남겨놓을 것이다.
내가 1권에서 네 말에 대해 두 번째로 지적했던 점은, 네가 ‘자신이 누군지’ 잊어버렸기 때문에 남들의 말과 행동에 그런 식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런 게 성장과정의 일부고 진화과정의 일부라고.
그러고 나서 나는, 그 전체 성장과정 동안 “너희는 지금 수준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지금의 이해수준, 지금의 의지수준, 지금의 기억수준에서”라는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내가 거기서 이야기한 다른 모든 것들도 이런 문맥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심지어 나는 214쪽에서, “이 논의의 목적에 맞추어 너희가 아직도 영혼의 일을 지향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너희는 아직도 ‘참된 자신’을 깨달으려(“실현시키려”) 애쓰는 중이다”고까지 말했다.
1권에서 내가 한 답변들은 ‘참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들의 사회라는 문맥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네가 그런 질문들을 한 게 아니다. 너는 여기서 내게 우주의 고도로 진화된 사회들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니 지금의 주제만이 아니라 우리가 여기서 다루게 될 다른 모든 화제들과 관련해서도, 다른 문화에 대한 이런 설명들은 너희 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보지 않는 게 너희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판단도 없으며, 너희가 더 진화된 존재처럼 행동하지 않더라도-반응하지 않더라도- 비난하거나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이야기한 것은, 우주의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이 화가 나서 다른 지각 있는 존재를 “죽이는”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다. 첫째, 그들은 분노를 체험하지 않을 것이고, 둘째, 그들은 다른 존재의 허락 없이 그 존재의 육신체험을 끝내지 않을 것이며, 셋째, 네 특별한 관심에 특별히 답해준다면, 그들은 자기 사회나 자기 종들 아닌 것들로부터 “공격당한다”고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공격당한다”고 느끼려면 누군가가 자신에게서 뭔가를, 생명이든, 가족이든, 자유든, 재산이든, 아니면 소유물이든, 하여튼 자신의 뭔가를 빼앗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하지만 고도로 진화된 존재로서는 이런 체험을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는 힘으로 빼앗을 태세가 되어 있을 만큼 너희가 그토록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설령 그것이 그 진화된 존재의 육신 삶을 희생하는 것이라 해도, 그것을 그냥 너희에게 줄 것이다. 왜냐하면 진화된 존재는 자신이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창조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을 모르는 덜 진화된 존재에게 그녀가 그 모든 걸 내어 주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따라서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은 순교자가 아니다. 어떤 “독재자”의 희생자가 아닌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은 이런 상태를 넘어서 있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는 자신이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창조할 수 있다는 걸 잘 알뿐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는 행복해지거나 생존하는 데 그중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안다. 그는, 자기 외부의 어떤 것도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으며, 본래의 “자신”은 물질적인 것과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이해한다.
하지만 덜 진화된 존재와 종들이 이 점을 언제나 잘 아는 건 아니다.
마지막으로 고도로 진화된 존재는 자신과 자신을 공격하는 자가 ‘하나’임을 이해한다. 그녀는 그 공격자를 자신의 상처받은 부분으로 본다. 그 상황에서 그녀의 역할은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하나 속의 전체’가 자신을 다시 참 모습으로 알 수 있도록.
그녀에게는 자신이 지닌 전부를 내주는 것이 네게 아스피린을 주는 것과 같을 것이다.
우와, 굉장한 사고방식이군요. 굉장한 이해예요! 그런데 당신이 말한 것 중에서 물어볼 게 있는데요. 당신은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이-
이제부터 “고진제”라고 줄여서 말하자. 그 명칭은 반복해서 쓰기에는 너무 길다.
좋습니다. 당신은 “고진제들”이 다른 존재의 허락 없이는 그 존재의 육신체험을 끝내지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자신의 물질 삶을 끝내도 좋다고 허락합니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을 양식으로 제공할 수도 있다. 아니면 전쟁을 멈추게 하는 따위의 다른 어떤 필요에 봉사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우리 문화들에서도 먹거나 가죽을 얻으려 할 때, 그 영혼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서는 어떤 동물도 죽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도 이런 거군요.
그렇다. 이것이 너희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방식이다. 그들은 이런 식의 교류를 갖지 않고서는 꽃 한송이, 약초 한 뿌리, 풀 한 포기도 꺾으려 하지 않았다. 사실 너희 토착문화들 모두가 그러했다. 웃기는 건 너희가 그런 부족과 문화들을 “원시적”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오 맙소사, 괜찮은지 물어보지 않고서는 무 하나도 뽑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너는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네가 물은 건 “고진재들”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럼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입니까?
여느 종족, 여느 종들이 그렇듯이 일부는 그렇고, 일부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개개인의 문제다. 하지만 하나의 문화로서 그들은 대단히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그들 체험의 상당 부분을 알려주는 그 ‘문화 신화’들은 대단히 승격된 것이었다. 하지만 너희는 그들에게 그 문화 신화들을 너희 것과 섞도록 강요했다.
잠깐만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 황인종들은 야만인이었어요! 우리가 그들을 몇만 명씩 죽이고 나머지를 소위 보호지역이라는 담 없는 감옥 속에 집어넣어야 했던 이유가 거기 있다고요! 그래요, 우린 지금도 그들의 성지(聖地)를 뺏아서 거기다 골프장을 세웁니다. 우린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의 성지를 신성시할 테고, 자신들의 문화를 기억해낼 것이며, 자신들의 예배를 거행할지 모르니까요. 우린 그렇게 하도록 놔둘 수 없습니다.
상상이 간다.
아뇨, 진짜라구요. 우리가 그들의 문화를 접수해 없애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우리 문화에 충격을 가했을 거라구요!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상처받았겠습니까?
우리는 대지와 하늘을 존경했을 테고, 강을 오염시키길 거부했겠죠. 그랬더라면 우리 산업이 설 자리가 어디겠습니까!
아마 사람들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지금도 여전히 벌거벗고 돌아다니고, 강에서 목욕하고, 땅에 의지해 살고 있겠죠. 고층빌딩과 콘도미니엄과 방갈로들 속에 북적대고 살면서 아스팔트 밀림 속으로 출근하는 대신에 말입니다.
맙소사, 십중팔구 지금도 여전히 텔레비전 대신에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태고적 지혜의 가르침을 귀담아 듣고 있겠죠. 우린 전혀 발전하지 못했을 거라구요.
그나마 다행히도, 너희는 자신에게 뭐가 좋은지 알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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