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3 (6)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3 (6)
신이시여, 그건 실망스런 이야기군요. 왜냐하면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너무 광범하고 너무 일반적이어서 다른 어떤 물음에도 전혀 대답하지 못하거든요.
호, 그래? 그렇다면 그 물음에 대한 네 대답은 무엇이냐?
이 책들에 따르면요. 당신이 이 대화에서 말씀하시는 듯이 보이는 것에 따르면요, 전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짜 ‘나’입니다.
훌륭하다! 배웠구나! 그 말이 맞다. 너는 사랑이다. 사랑은 존재 전체다. 그래서 너희도 사랑이고 나도 사랑이다. 사랑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두려움은요?
두려움은 너희 아닌 것이다. 두려움Fear은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False Evidence Appearing Real다. 두려움은 사랑의 대립물이다. 너희는 체험으로 ‘자신인 것’을 알기 위해서 너희 현실 속에 두려움을 창조했다.
너희가 존재하는 상대계에서는 너희 아닌 것이 없다면 너희인 것도....... 없다는 게 진리다.
그래요, 그래요. 우린 이 대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수도 없이 해왔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그게 당신이 제 불평을 회피하는 걸로 보이는데요. 저는, 우리가 누구인가(사랑)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너무 광범해서 대다수 다른 물음들에 대한 대답이 되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전혀 대답이 아니라고요. 당신은 그게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하시고, 저는 그게 어떤 물음에도 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린 결혼이 자유 결혼이어야 하는가?”라는 특정한 물음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게 너한테 그러하다면, 그건 네가 사랑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들 알겠습니까? 태초 이래로 인류는 그 한 가지를 이해하려고 애써왔죠.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예, 그렇죠. 저도 압니다. 그건 비유군요.
내가 너희식 “비유”를 써서 사랑을 설명할 수 있는 몇 가지 말과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을지 한번 보자.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역시 당신이 최곱니다.
마음에 떠오르는 첫 번째 단어는 무한함이다. 사랑인 것은 한계가 없다.
저, 그건 우리가 이 주제를 시작했을 때 있었던 바로 그 자린데요. 우린 계속 원을 따라 돌고 있습니다.
도는 건 좋은 일이다. 도는 걸 나무라지 마라. 계속 돌아라. 문제를 중심으로 계속 돌아라. 돌고 되풀이해도 상관없다. 다시 찾아가고 고쳐 말해도 상관없다.
전 이따금 초조해집니다.
이따금? 그거 아주 재미있군.
좋습니다, 좋아요. 당신이 말씀하시던 거나 계속하시죠.
사랑은 무한함이다. 거기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다. 사랑은 언제나 그랬고, 언제나 그러하며, 언제나 그럴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또한 영원함always이다. 그것은 영원한 실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에 썼던 또 다른 단어인 자유로 돌아온다. 사랑이 한계 없고 영원하다면, 그렇다면 사랑은....... 자유롭다. 사랑은 완벽하게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인간현실에서 영원히 사랑하고 사랑받으려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그 사랑이 영원히 한계 없기를 갈망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며, 그것을 영원히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기를 바라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너희는 모든 사랑 체험에서 자유와 무한함과 영원함을 추구할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언제나 얻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너희는 바로 이것을 추구할 것이다. 이런 게 사랑이니, 너희는 이것을 추구할 것이다. 너희도 내면 깊은 곳에서는 이렇다는 걸 안다. 너희 자신이 사랑이고, 너희는 사랑 체험을 통해 ‘자신이 누구고 무엇인지’ 알고 체험하려 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삶을 표현하는 삶이고, 사랑을 표현하는 사랑이며, 신을 표현하는 신이다.
그러니 다음의 모든 말들이 다 동의어다. 이것들을 같은 것으로 여겨라.
신
삶
사랑
무한함
영원함
자유
이중 하나가 아닌 어떤 것도 이중에 들지 않는다.
너희는 이것들 모두이니, 너희는 조만간 이것들 모두로 자신을 체험하려 할 것이다.
“조만간”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너희가 언제 두려움을 극복하는가에 달렸다. 내가 말했듯이 두려움이란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증거다. 그것은 너희 아닌 것이다.
너희가 ‘자신 아닌 것’을 체험하길 끝냈을 때, 너희는 자신인 것을 체험하려 할 것이다.
누가 두려움을 체험하고 싶겠습니까?
아무도 체험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도록 배운다.
아이는 아무런 두려움도 체험하지 않는다. 아이는 자기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아무런 자유의 부족도 체험하지 않는다. 아이는 자기가 누구나 다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아이는 삶의 부족 역시 체험하지 않는다. 아이-와 어린애처럼 행동하는 사람들-는 자신이 영원히 살 거라고 믿고, 어떤 것도 자기를 다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는 어떤 추잡한 것도 알지 못한다. 그 아이가 어른들에게 추잡한 것을 배울 때까지는.
그래서 아이들은 벌거벗고 뛰어다니고, 아무나 껴안으면서도 전혀 대수롭잖게 여긴다. 너희 어른들이 똑같이 그렇게 할 수 있기만 했더라도.......
글쎄요, 아이들은 지순한 아름다움으로 그렇게 하죠. 어른들이 그런 지순함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죠. 어른들이 “벌거벗을” 때는 언제나 그렇고 그런 성적인 게 있는 거거든요.
그렇겠지. 그리고 물론 신은 “그렇고 그런 성적인 것”이 지순하고 자유롭게 체험되는 걸 금지했을 테고.
실제로 신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뛰어다니면서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이브가 선악과(善惡果)를 먹고 나자, 당신은 우리를 지금 상태로 있으라고 심판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고 그런 원죄를 지었으니까요.
나는 전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전 여기서 기성 종교에 충격을 좀 주려 했습니다.
가능하면 그런 건 피하도록 하라.
그래요. 그래야겠죠. 기성 종교인들은 워낙 유머감각이 없거든요.
또 시작하는구나.
죄송합니다.
내가 말하던 건........ 너희는 한 종으로서 무한하고 영원하고 자유로운 사랑을 체험하길 추구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혼제도는 영원성을 일궈내려는 너희 나름의 시도였다. 결혼제도를 가지고 너희는 평생의 반려자가 되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한하고” “자유로운” 사랑을 낳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왜 없었죠? 자유롭게 선택한 결혼이라면 그건 자유의 표현이잖습니까? 그리고 자기 배우자말고는 다른 누구와도 성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지 않겠노라고 말하는 건 한계가 아닙니다. 그건 선택입니다. 선택은 자유의 행사지. 한계가 아닙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선택인 한에서는, 그렇다.
음, 그건 그래야죠. 약속이 그랬습니다.
그렇다-그리고 문제가 시작되는 지점도 여기다.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봐라, 너희가 관계에서 아주 특별한 걸 체험하고 싶을 때가 올 수 있다.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네게 더 특별하다는 게 아니라, 만인에 대해, 그리고 삶 자체에 대해 네가 지닌 깊은 사랑을 드러내는 방식이 그 사람에게만 특이하다는 의미에서.
사실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사랑을 드러내는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너희는 어떤 두 사람에게도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지 않는다. 독창적인 피조물이자 독창적인 창조자인 너희가 창조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같이 독창적이다. 어떤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도 복제할 수 없다. 너희는 어떤 것도 복제할 수 없다. 단지 창작할 수만 있다.
너는 왜 어떤 두 눈송이도 똑같지 않은지, 그 까닭을 아느냐? 그것들이 똑같게 되는 건 그냥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창조”는 “복제”가 아니고, 창조주는 오직 창조만 할 수 있다.
이것이 어떤 두 눈송이도 같지 않고, 어떤 두 사람도 같지 않고, 어떤 두 생각도 같지 않고, 어떤 두 관계도 같지 않고, 같은 종류의 어떤 둘도 같지 않은 까닭이다.
우주와 그 속의 모든 것이 유일한 형상으로 존재하니, 그것과 정말로 똑같은 다른 건 없다.
이건 다시 신성한 이분법이군요. 모든 것이 유일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다.
맞다. 네 손의 손가락 하나하나는 다 다르지만, 그럼에도 그 모두가 같은 손이다. 네 집안의 공기는 어디나 있는 공기지만, 방방마다의 공기는 뚜렷이 다르게 느껴질 만큼 같지 않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이 ‘하나’지만, 어떤 두 사람도 똑같지 않다. 따라서 설사 너희가 그렇게 하려고 애써도 두 사람을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할 수는 없다. 그리고 사랑이란 무릇 특별한 대상에 대한 특별한 반응이니, 너희로서는 전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을 드러낼 때, 너희는 다른 사람과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너희의 생각과 말과 행동들-방응들-은 말 그대로 복제할 수 없다....... 너희가 이런 감정들을 가지는 상대방 또한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너희가 한사람과만 이런 특별한 표현을 바라는 때가 온다면, 네 표현대로 그것을 선택하라. 그것을 알리고 그것을 선언하라. 하지만 네 선언이 계속되는 네 의무가 아니라, 순간 순간 네 자유의 공표가 되게 하라. 참된 사랑은 언제나 자유롭고, 사랑이라는 공간 속에 의무는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니.
하지만 너희가 오직 특별한 한 사람과만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겠다는 자신의 결정을 결코 어길 수 없는 성스런 약속으로 여긴다면, 그 약속을 의무로 체험할 날이 올 것이고, 너희는 그 약속에 화를 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이 결정을 딱 한번만에 맺은 약속으로가 아니라 계속해서 내리는 자유로운 선택으로 여긴다면, 분노의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다음을 기억하라. 성스런 약속은 오직 하나뿐이다. 네 진리를 말하고 네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그것이다. 모든 다른 약속들은 자유의 몰수이니, 결코 성스러울 수 없다. 자유란 너희 자신이니, 너희가 자유를 몰수한다면 너희는 자신을 몰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사(聖事)가 아니다. 그것은 불경이다.
13
휘유! 아주 강경하게 말씀하시는군요.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 약속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한테 어떤 것도 약속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야긴가요?
너희들 대다수가 현재 사는 식대로의 삶이라면, 어떤 약속이든 그 약속 속에는 거짓말이 심어져 있기 마련이다. 어떤 특정한 내일에, 너희가 뭔가를 놓고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하고 싶어할지를 지금 시점에서 알 수 있다고 하는 거짓말이. 너희가 반응하는 존재로 사는 한-너희 대다수가 그려하다-, 너희는 이것을 알 수 없다. 오직 창조하는 존재로서 살 때, 그때서야 비로소 너희 약속에는 거짓말이 들어가지 않는다.
창조하는 존재는 뭔가를 놓고 미래의 어떤 순간에 자신이 어떻게 느낄지 알 수 있다. 창조하는 존재는 자신의 느낌을 체험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미래를 창조할 수 있을 때까지, 너희는 자신의 미래를 예언할 수 없고, 자신의 미래를 예언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에 관해 어떤 것도 진실되게 약속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창조하고 예언하는 사람에게도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권한과 권리는 있다. 변화는 모든 피조물의 기본권이다. 사실 그것은 “권리” 이상이다.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지만 “변화”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기에.
변화는 그냥 존재한다.
변화인 것, 이것이 너희다.
너희는 이것을 받을 수 없다. 너희 자체가 이것이다.
그런데 너희 자체가 “변화”이고, 너희에 관해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 변화이니, 너희는 언제나 똑같으리라고 진실되게 약속할 수 없다.
우주에서 불변인 건 없다는 뜻인가요? 당신 말씀은, 그 모든 창조 행위 속에서 불변인 채로 남아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까?
너희가 삶이라 부르는 과정은 재창조의 과정이다. 삶의 모든 것이 지금이라는 각각의 순간마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어떤 것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니, 완전히 동일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동일함은 불가능해도 유사함은 그렇지 않다. 변화과정이 너희가 예전에 경험한 것과 두드러지게 비슷한 판형을 만들어낸 결과가 유사함이다.
창조행위가 높은 수준의 유사함에 이르렀을 때, 너희는 그것을 동일함이라 부른다. 한정된 관점이라는 너희의 조야한 시야에서 볼 때는, 그게 맞다.
따라서 인간의 차원에서 보면 우주에는 거대한 불변성이 존재하는 듯이 보인다. 다시 말해 상황들이 비슷해 보이고, 비슷하게 행동하고, 비슷하게 반응하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너희는 여기서 일관성을 본다.
이것을 물질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고찰하고 체험할 수 있는 틀을 너희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그럼에도 너희에게 말하노니, 물질과 비물질을 합친 삶 전체의 시야에서 본다면, 불변성이라는 겉모습은 사라지고, 만사가 그것들의 참모습, 즉 끊임없이 변하는 모습 그대로로 체험될 것이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건, 그 변화들이 이따금 워낙 정교하고 워낙 미묘해서, 식별력이 떨어지는 우리 시야에서 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그것들이 같아 보인다는-때로는 완전히 똑같아 보인다는-거군요.
그렇다.
“똑같은 쌍둥이 같은 건 없다.”
맞다. 너는 그것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변성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만큼, 우리 자신을 유사한 형상으로 다시 재창조할 수도 있고요.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관계에서도 이렇게 할 수 있고요. 자신이 누군가란 차원에서, 또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는가란 차원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비록 너희 대다수는 이렇게 하기가 대단히 힘들겠지만.
우리가 방금 배웠듯이, 참된 불변성(겉모습의 불변성과 반대되는 것으로서)은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겉모습만의 동일성을 창조하려 해도 위대한 선각자가 있어야 한다.
선각자가 동일한 모습으로 자신을 보여주려면, 그는 모든 자연스런 경향을 넘어서야 한다(변화하려는 경향이 자연스런 쪽임을 잊지 마라). 사실 그라도 모든 순간에 똑같게 보여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똑같은 겉모습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할 만큼은 비슷하게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선각자”가 아니라도 항상 “똑같이” 자신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 그 사람의 행동과 외양이 원체 예측가능해서 목을 걸고 내기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압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려면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한다.
선각자는 높은 수준의 유사성(너희가 “일관성”이라 부르는 것)을 의도적으로 창조하는 사람이지만, 그 제자는 굳이 그렇게 의도하지 않고서도 일관성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특정 환경에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예컨대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어”라는 말 따위를 자주 하겠지만,
선각자라면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 사람의 반응이 탄복할 만한 결과-그들이 칭찬받을 일-를 가져오더라도, 그는 아마 “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사실 그건 저절로 된 거야.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라고 대꾸하겠지만
선각자라면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선각자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아는-완전히 말 그대로-사람이다.
그녀는 왜 그렇게 하는지도 안다.
반면에 깨달음의 차원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흔히 양쪽 다 모른다.
이게 약속을 지키기가 그렇게 힘든 이유입니까?
이건 한 가지 이유다. 내가 말했듯이, 너희가 자신의 미래를 예언할 수 있을 때까지, 너희는 어떤 것도 진실되게 약속할 수 없다.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기 힘든 두 번째 이유는, 그들 자신과, 자신들이 행한 공증(公證)이 충돌하게 된다는 데 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어떤 것을 놓고 발전시켜가는 진리가, 자신의 진리는 항상 그럴 것이라고 그들이 말했던 그것과 다르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들은 깊은 갈등을 겪는다. 어디에 따를 것인가? 내 진리에? 아니면 내 약속에?
조언을 해주신다면?
나는 전에 네게 이런 조언을 했다.
남을 배신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배신하는 것 역시 배신이긴 마찬가지다. 그것은 최고의 배신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도처에서 약속을 어기는 사태가 벌어져요! 무엇에 대한 것이든, 또 누구의 말이든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어떤 거든 간에 아무한테도 의지할 수 없을 거라구요!
호, 그래서 너는 지금까지 남들이 약속을 지키는 것에 의지해왔던 거냐? 그러고 보면 네가 그렇게 괴로워한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지.
제가 괴로워했다고 누가 그럽디까?
그럼 너는 네가 행복하던 때에 세상을 보고 행동하는 방식이 그런 거란 얘기냐?
좋습니다, 좋아요. 그래서 전 괴로워했습니다. 이따금요.
아니, 무척 많은 시간 동안. 너는 행복해야 할 온갖 이유를 다 갖고 있을 때도 자신이 괴로워하게 내버려두었다. 자신의 행복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 있을지 염려하면서!
그리고 네가 이런 염려까지 해야 했던 건, “자신의 행복을 붙잡고 있는 것”을 남들이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에 주로 의지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약속을 지키길 기대할 권리, 적어도 희망할 권리조차 없단 말입니까?
왜 너는 그런 권리를 원하려는 거냐?
남이 네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는 그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건, 혹은 같은 거지만, 그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때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네게 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혹은 무슨 이유에선가 그냥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왜 너는 굳이 그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느냐?
너는 정말로 그녀가 지키고 싶어하지 않은 합의를 그녀가 지키길 바라느냐? 너는 정말로 그들이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일들을 하도록 사람들을 강제해야 한다고 느끼느냐?
왜 너는, 그게 무슨 일이든, 또 그게 누구든,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그 일을 하도록 강제하길 바라느냐?
글쎄요, 그들이 하겠노라고 말한 것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게 놔둔다면, 나나 내 가족이 다치게 되리란 게 그 한 이유겠죠.
그러니까 상처를 피하기 위해서 상처를 입히려고 하는구나.
다른 사람더러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키라고 하는 게 어째서 그 사람을 상처 주는 건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상처받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진해서 약속을 지켰을 테니까.
그래서 약속을 한 사람에게 그냥 그것을 지키라고 요구해서 “상처주지” 말고, 제 쪽에서 상처를 감수해야 한단 말입니까? 아니면 내 아이들이나 가족이 상처 입는 걸 지켜봐야 한단 말입니까?
너는 정말로 다른 사람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강요하면, 네가 상처 입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느냐?
네게 말하노니, 남들에게 더 많은 해를 입힌 쪽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해왔던 사람들이 아니라, 말없이 집요한 삶을 살았던(즉 그들이 해야 “한다”고 느꼈던 일을 한) 사람들이었다.
누군가에게 자유를 줄 때, 너희는 위험을 제거하지, 그것을 키우지 않는다.
그렇다, 누군가가 너희에게 한 약속이나 서약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놔두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너희를 다치게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결코 너희를 해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남들에게 자유를 줄 때, 너희는 자신에게 자유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이제 너희는, 지키고 싶어하지 않는 약속을 지키라고 남에게 강요할 때 어쩔 수 없이 따라나오는 번민과 비애, 그리고 자기 위엄과 자기 가치의 손상에서 자유롭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그가 한 약속에 붙잡아두려 했던 사람이면 거의 누구나 발견하는 사실이지만, 해를 입히는 기간이 길수록 그 해악도 커지기 마련이다.
이런 견해가 사업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겁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야 세상이 어떻게 사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사업을 하는, 유일하게 분별 있는 방식이 이것이다.
지금 이 순간 너희 사회 전체에서 사업이 갖는 문제는, 그것이 힘에 근거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합법적인 힘(너희가 “법의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과 너무나도 빈번하게 사용되는 물리적인 힘(너희가 세상의 “무력”이라 부른 것)에.
너희는 아직 설득의 기술을 사용하는 법조차 배우지 못했다.
합법적인 힘-법정을 통한 “법의 폭력”-이 아니라면, 우리가 무슨 수로 사업가들에게 자신들의 계약조건을 이행하고 합의한 걸 지키라고 “설득합니까”?
너희 문화의 지금 윤리로는 아마 달리 방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 윤리가 바뀐다면, 사업체들-같은 차원에서 개인들-이 합의를 깨지 못하게 하려고 너희가 지금 쓰고 있는 그 방식은 대단히 미개한 것으로 비칠 것이다.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지금 너희는 합의들을 확실하게 지키게 하려고 폭력을 쓰고 있다. 하지만 너희의 문화 윤리가, 너희 모두가 ‘하나’라는 이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바뀔 때, 너희는 더 이상 폭력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봤다 자신을 해치는 것에 불과하니, 너희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왼손을 때리지 않을 것이다.
왼손이 당신 목을 조르더라도요?
그건 그 시점에서 또 하나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때가 되면 너희는 자신의 목을 조르지 않게 될 것이고, 얼굴에게 분풀이하려고 코를 물어뜯는 일도 없을 것이며, 합의를 깨뜨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너희의 합의 자체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너희는 다른 사람이 가치 있는 뭔가를 너희에게 줘야지만, 비로소 자신이 가진, 가치 있는 뭔가를 그에게 주기로 합의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냥 소위 답례란 걸 받기 전까지는 너희가 뭔가를 주거나 나누는 걸 망설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너희는 자동으로 주고 나누게 될 것이니, 따라서 깨뜨릴 계약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왜냐하면 계약은 상품과 서비스의 교환과 관련된 것인 반면, 너희 삶은 교환이 이루어지는가 아닌가에 상관없이 상품과 서비스를 주는 것과 관련될 것이기에.
그럼에도 너희의 구원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이런 식의 일방적인 줌에서다. 왜냐하면 너희는 신이 체험했던 것, 즉 남에게 준 것이 자신에게 주는 것이 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에. 돌아가는 것은 돌아오기 마련이다.
네게서 비롯된 모든 일이 내게로 돌아오리라.
일곱배로. 그러니 너희는 “되찾으려고”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너희는 오직 “내주는” 것만 염려하면 된다. 삶은 최상질의 가짐이 아니라 최상질의 줌을 창조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너희는 계속해서 잊고 있다forgetting. 하지만 삶은 “갖기 위한 것”for getting이 아니라 “주기 위한 것”for giving이니, 그렇게 하려면 남들을 용서해야forgiving 한다. 특히나 너희가 가지려 했던 것을 너희에게 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이런 방향 전환은 너희 문화의 내력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다. 지금 너희 문화에서는 소위 “성공”이란 걸 주로 자신이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로, 얼마나 많은 명예와 돈과 권력과 소유물들을 모았는가로 재지만, 새로운 문화에서는 남들에게 얼마나 많이 모으게 했는가로 “성공”이 재어질 것이다.
아이러니는, 남들에게 더 많이 모으게 할수록, 너희는 애쓰지 않고도 더 많이 모으리란 것이다. “약속된” 것을 서로에게 주라고 너희는 강요하는 어떤 “계약”도, 어떤 “합의”도, 또 어떤 “거래”나 “협상”이나 소송이나 재판도 없이.
미래 경제에서 너희는 일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신의 성장을 위해서 일할 것이고, 그것이 너희의 이득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너희가 참된 자신의 더 크고 더 숭고한 해석으로 되어감에 따라 물질적인 의미에서의 “이익”도 너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런 시절이 되면, 그들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했다”고 해서, 뭔가를 자신에게 주도록 강요하려고 폭력을 쓰는 것이 너희에게는 대단히 미개해보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합의를 지키지 않더라도, 너희는 그들이 그냥 자기 나름의 길을 가고, 나름의 선택을 내리며, 자신에 대한 나름의 체험을 창조하도록 놔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너희에게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든 너희는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온 곳에 더 많이” 있고, 너희가 그것을 끌어내는 출처source는 그들이 아니라 너희 자신임을 알게 될 것이기에.
우와. 알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목표지점에서 벗어난 것 같은데요. 이 모든 논의는 제가 사랑에 대해 물었던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들이 그걸 한계 없이 표현해도 좋은지 물었던 것에서요. 그리고 그게 자유결혼의 문제로 이어졌구요. 그런데 갑자기 여기 와서 우리는 목표지점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논의대상으로 삼았던 것들 모두가 관련이 있다. 이것은 소위 계몽된, 혹은 고도로 진화된 사회들에 관한 네 질문으로 가기 위한 완벽한 도입부다. 고도로 진화된 사회들에는 “결혼”도, “사업”도, 또 같은 차원에서 너희가 너희 사회를 붙들어두기 위해 창조했던 어떤 작의적인 사회 구조물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 예, 얼마 안 가면 그 문제에 이르겠군요. 어쨌든 저는 지금 여기서 이 주제를 마무리하고 싶거든요. 당신은 여기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을 하셨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그 이야기들을 종합했을 때 나올 결론이, 사람들은 대부분은 약속을 지킬 수 없으니 약속을 하지도 마라인 듯합니다. 이건 결혼제도란 배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고 말 이야기군요.
나는 네가 쓴 “제도”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결혼한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제도” 속에 있음을 체험한다.
맞아요. 그건 일종의 정신건강 제도나 형법제돕니다. 아니면 가장 가능성이 적지만, 더 큰 배움을 위한 제도거나요!
맞았다, 그거다. 그것이 바로 대다수 사람들이 결혼을 체험하는 방식이다.
저, 사실 전 당신이 농담을 하시길래 맞장구를 친 것뿐입니다. 사실 저로서는 “대다수 사람들”이라고 단언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결혼제도를 아끼고 그것을 보호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아직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는 앞의 진술을 고수할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결혼으로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낸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이 자신들에게 저지르는 짓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세계의 이혼율 통계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결혼이 없어져야 한다는 건가요?
나는 그 문제에 아무런 선호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압니다. 알아요. 관찰할 뿐이란 거죠.
훌륭하다! 너희는 끊임없이 나를 선호를 가진 신으로 만들고 싶어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이제 네가 그렇게 하길 그만두려 하니, 고맙구나.
여기서 우리는 결혼제도만 침몰시킨 게 아닙니다. 우린 종교도 침몰시켰다구요!
인류 전체가 신은 선호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했다면, 사실 종교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란 건 으레 자기 스스로 신의 선호에 대한 진술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무런 선호도 갖지 않는다면, 그럼 종교는 사기겠군요.
음, 그건 너무 매몰찬 말이다. 나라면 그걸 허구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건 그냥 너희가 만들어낸 것이다.
신은 우리가 결혼하는 쪽을 더 좋아하신다는 허구를 우리가 만들어낸 것처럼요?
그렇다. 나는 그 면에서 어느 쪽도 더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너희는 좋아한다.
왜요? 왜 우리는 결혼이 그렇게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결혼을 더 좋아할까요?
결혼은 너희의 사랑 체험 속에 “변함없음”, 즉 영원성을 가져오기 위해, 너희가 생각해낼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여자가 의지처(依支處)와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남자가 변함없는 섹스 이용권과 반려자를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하나의 사회규약이 만들어졌고, 거래가 이루어졌다. 네가 내게 이것을 주면 나는 네게 저것을 주겠노라는 거래가, 이 점에서 결혼은 사업과 흡사했다. 그래서 계약이 맺어졌고, 쌍방 모두 그 계약을 강제할 필요가 있었기에, 결혼은 신과의 “성스런 약조”이니, 그 약조를 어기는 사람들은 신에게 벌을 받으리라고 이야기되었다.
나중에 가서 이것이 들어먹히지 않자, 너희는 그것을 강제하기 위해 인간의 법률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먹히지 않았다.
소위 신의 법도, 또 인간의 법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결혼서약을 깨뜨리는 걸 막지는 못했다.
어째서요?
통상 너희가 고안한 대로의 결혼서약들은 단 하나뿐인 중요 법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법칙 말입니까?
자연법.
하지만 생명이 통일, ‘하나됨’을 표현하는 건 자연의 순리입니다. 그게 바로 제가 이 대화들에서 얻고 있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결혼은 우리가 그것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법이고요. 당신도 아실 겁니다. “신이 함께 모은 것을 인간이 흐트러뜨리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너희 대다수가 행하는 식의 결혼이 특별히 아름다운 건 아니다. 그것은 개개 인간 존재가 타고 나는 세 측면의 진실 중 두 측면을 침해한다.
다시 그 문제로 돌아가실 겁니까? 전 이제야 제가 이야기를 추수려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요.
상관없다. 다시 한번 꼭대기부터 시작하자.
‘너희’는 사랑이다.
사랑인 것은 무한하고 영원하고 자유롭다.
바로 이것이 너희고, 바로 이것이 너희의 천성이다. 너희는 날 때부터 무한하고 영원하고 자유롭다.
따라서 너희의 천성을 침해하거나, 너희의 천성을 경시하는, 인위적인 모든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철학적, 경제적, 철학적 구조물 자체가 너희 자신에게 가해지는 공격에 다름 아니니, 너희로서는 그것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너는 너희 나라를 탄생시킨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가 아니었느냐?
그런데 너희는 너희 나라에서 그 자유를 포기했고, 너희 삶에서 그것을 포기했다. 모두가 안전을 위해서라는 같은 이유에서.
살아가는 것, 삶 자체를 너무나 두려워하는 너희는,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너희 존재의 천성 자체를 포기하고 말았다.
너희가 결혼이라 부르는 그 제도는, 소위 정부라는 제도가 그러하듯, 안전을 확보하려는 너희식 시도다. 사실 서로의 행동양식을 지배하기 위해 고안된, 인위적인 사회 구조물이라는 점에서 그 둘은 형태만 다른, 같은 것이다.
맙소사, 전 그걸 한번도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전 언제나 사랑의 궁극적인 선언이 결혼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너희가 상상하는 대로의 결혼이라면, 그렇다. 하지만 너희가 고안한 대로의 결혼이라면, 그렇지 않다. 너희가 고안한 대로의 결혼은 두려움의 궁극적인 선언이다.
결혼이 너희를 사랑 속에서 무한하고 영원하고 자유롭게 해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그것은 사랑의 궁극적인 선언일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너희의 결혼은 자신의 사랑을 약속이나 보장의 수준으로 낮추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결혼은 지금 “그런 것”이 항상 그렇게 되도록 보장하려는 노력이다. 이런 보장이 필요하지 않다면, 너희는 굳이 결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 보장을 어디에 써먹는가? 첫째, 안전을 확보하는 수단으로(너희 내면의 것에서 안전을 확보하는 대신에). 그리고 둘째로, 안전을 끝내 장담할 수 없을 때, 서로를 벌하기 위한 수단으로. 깨어진 결혼 약속은 거꾸로 이제 막 개시된 소송의 논거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너희는 결혼이 아주 쓸모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이 하나같이 잘못된 이유들 때문이라 해도.
또한 결혼은 너희가 서로에게 지닌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갖지 않으리란 보장을 확보하려는 너희식 시도다. 혹은 적어도 그런 감정들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으리란 보장을.
다시 말해 성적으로.
다시 말해 성적으로.
마지막으로 너희가 고안해낸 대로의 결혼은, “이 관계는 특별하다. 나는 이 관계를 다른 모든 관계보다 우선시하겠다”고 선언하는 방식이다.
그게 뭐가 잘못입니까?
아무것도. 그건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다. 잘하고 잘못하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이 너희에게 도움이 되는가의 문제다. 무엇이 자신을 ‘참된 자신’의 다음 번 숭고한 이미지로 재창조해주는가의 문제.
만일 “이 하나의 관계,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딱 하나의 관계만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특별하다”고 말하는 존재가 ‘참된 자신’ 이라면, 결혼이라는 너희의 고안물은 완벽하게 그렇게 보장해준다. 하지만 영적 선각자로 인정받고 있거나 인정받았던 사람들 거의 다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건 흥미롭지 않느냐?
맞아요. 선각자들은 독신이기 때문이죠. 그 사람들은 섹스를 하지 않습니다.
아니다. 그것은 선각자들이 결혼이라는 너희의 지금 공안물이 끌어내려는 진술-그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에게 더 특별하다는 진술-을 진실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각자는 이런 진술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도 하지 않는 진술이다.
사실 너희가 지금 고안한 대로의 결혼서약은 대단히 신답지 못한 진술을 너희가 하도록 만든다. 신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약속이 그것인데도, 너희는 이것을 가장 성스러운 약속이라 느낀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역설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두려움을 정당화하기 위해 너희는 너희하고 똑같이 행동하는 신을 상상해냈다. 그리하여 너희는 자신의 “선택받은 민족”에게 한 신의 “약속”이니, 신과 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맺어진 계약이니를 운운한다.
너희는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한 방식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신이라는 발상을 참아내지 못하기에, 특정한 이유로 특정한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만들어낸다. 너희는 이 소설들을 종교라 일컫지만, 나는 그것을 불경스럽다 칭할 것이다. 신이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한다는 식의 모든 생각이 엉터리고, 너희더러 같은 것을 진술하라고 요구하는 모든 의식이 성사(聖事)가 아닌 신성모독이다.
아, 신이시여, 그만하십시오. 그만요! 당신은 제가 지금껏 결혼에 대해 품었던 온갖 아름다운 생각들을 죽이고 있어요! 신이 이런 이야기를 쓸 리가 없습니다. 신이라면 종교와 결혼을 절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거라구요!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가 고안해낸 방식의 종교와 결혼이다. 너는 이런 이야기가 가혹하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자신들의 두려움을 정당화하고, 서로에 대한 너희의 정신나간 대우를 합리화하려고, 신의 말을 저질로 만들었다.
계속해서 내 이름으로 서로를 제한하고, 서로를 해치고, 서로를 죽이기 위해 필요한 신의 말이라면, 너희는 그것이 어떤 말이라도 신더러 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그렇고 말고, 너희는 내 이름을 불러냈고, 내 깃발을 흔들었으며, 몇백 년 동안 십자가를 너희 전쟁터로 끌고 다녔다. 하나같이 내가 다른 사람보다 한 사람을 더 사랑한다는 증거로,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내가 너희더러 그들을 죽이라고 요구하리란 증거로.
하지만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사랑은 무한하고 내 사랑은 조건이 없다.
너희가 듣고 있을 수 없는 한 가지가 바로 이것이고, 너희가 참을 수 없는 한 진리가 바로 이것이며, 너희가 받아들일 수 없는 한 진술이 바로 이것이다. 결혼제도(너희가 고안해낸 대로의)뿐만 아니라, 너희의 종교제도와 정부제도까지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마는 그 완전한 포용성 때문에.
너희는 배척에 근거한 문화를 창조했고, 배척하는 신이라는 ‘문화 신화’로 그것을 지탱해왔다.
하지만 신의 문화는 포용에 근거하니, 신의 사랑은 모두를 포용하고, 신의 왕국은 모두를 초대한다.
그리고 이 진리가 너희가 신성모독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너희가 삶에서 창조한 모든 것이 엉터리가 되는 것이니, 너희는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의 모든 관습과 고안품들은, 그것들이 무한하고 영원하고 자유롭지 않은 그 정도만큼 엉터리다false
“옳고” “그르고” 따위가 없다면 어떻게 뭔가가 “엉터리”일 수 있습니까?
뭔가가 자신의 목적에 맞게 기능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정도만큼 엉터리다. 문이 열리고 닫히지 않을 때, 너희는 그 문을 “그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너희는 그냥 그것의 설치나 작동이 엉터리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목적에 이바지하지 않기 때문에.
너희가 삶에서, 너희 인간 사회에서 고안하는 것이 무엇이든, 인간이 되는 데 있어 너희의 목적에 기여하지 않는 것은 엉터리다. 그것은 엉터리 고안품이다.
그냥 다시 음미해보려고 물어보는 건데요. 인간이 되는 데 있어 우리의 목적이라뇨?
‘자신이 참으로 누군지’ 결정하고 선언하며, 창조하고 표현하며, 체험하고 성취하는 것.
너희가 지금껏 ‘참된 자신’에 대해 가졌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가장 숭고한 해석으로 순간순간마다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이 되는 데 있어 너희의 목적이고, 바로 이것이 삶 전체의 목적이다.
그래서, 그게 우리를 어디에 남겨놓는 겁니까? 우리는 종교를 무너뜨렸고, 결혼을 제거했고, 정부를 고발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아무 것도 무너뜨리지 않았고, 아무 것도 제거하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고발하지 않았다. 너희가 창조해낸 고안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너희가 그것을 가지고 만들어내려 했던 것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그런 상황을 묘사한다고 해서 그 고안품을 무너뜨리거나 제거하거나 탄핵하는 건 아니다.
심판과 관찰의 차이를 잊지 않도록 하라.
저, 전 여기서 당신과 논쟁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하신 것 중 많은 부분이 제게는 상당 정도 심판으로 들렸거든요.
여기서 우리는 구속하는 건 말이 지닌 끔찍한 한계다. 실제로는 쓸 수 있는 말들이 워낙 적어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다시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들이 언제나 같은 의미나 같은 종류의 생각을 전달하지 않을 때조차도.
너희는 바나나 스플리트(요리-옮긴이)를 “좋아한다”love고 말하지만, 그것이 너희가 서로를 좋아한다love고 말할 때와 같은 의미가 아닌 건 분명하다. 그러니 보다시피, 너희가 어떻게 느끼는지 묘사할 수 있는 말들이 너희 언어에는 거의 없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말해 말의 방식으로, 너와 교류하면서 나는 스스로가 그런 한계들을 체험하게 놔두었다. 따라서 이 용어들 중 일부를, 판단을 내릴 때 사용해왔던 너희로서는, 내가 그것들을 사용하면서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결론을 쉽사리 내릴 수 있으리란 점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네게 장담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이 대화 전체에 걸쳐, 나는 단지 어떻게 하면 너희가 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에 이를 수 있는지 말해주려고 해왔고, 또 너희 길을 막고 있는 게 뭔지, 다시 말해 너희가 그곳에 가는 걸 막는 게 뭔지를 가능하다면 강한 충격을 주면서 묘사하려고 해왔다.
종교와 관련해서, 너희가 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은 진실로 신을 알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곳이지만, 나는 너희 종교들이 너희를 그리로 데려가지 못하는 걸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너희 종교들은 신을 ‘위대한 수수께끼’로 만들었고, 너희가 신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두려워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종교들은 너희 행실을 거의 바꾸지 못했다. 너희는 아직도 서로를 죽이고, 서로를 비난하며, 서로를 “잘못된” 걸로 만들고 있다. 사실 너희더러 그렇게 하도록 부추겨온 것이 너희 종교들이다.
그러니 종교와 관련해서 나는 단지, 너희는 종교가 너희를 저리로 데려다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종교는 너희를 다른 데로 데려가고 있음을 관찰할 뿐이다.
이제 너희는 결혼이 너희를 영원한 지복(至福)의 땅, 혹은 적어도 어느 정도 적당한 수준의 평화와 안전과 행복으로 데려가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결혼이라는 너희의 발명품도 처음 출발할 때는, 너희가 처음 그것을 체험할 때는, 그런 대로 이런 소망을 잘 처리하는 편이다. 하지만 결혼 역시 종교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그 체험 속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점점 더 너희를 너희가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바로 그곳으로 데려간다.
결혼한 사람 거의 절반이 이혼으로 자신들의 결혼을 해체했고, 결혼한 채로 남은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절망적일 정도로 불행하다.
“지극히 복된 결합”이 너희를 쓰라림과 분노와 회한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것이 너희를 처절한 비극의 자리로 데려가는 경우 역시 적지 않다.
너희는 너희 정부들이 평화와 자유와 국내 질서를 보장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나는 너희가 고안해낸 대로의 정부들은 전혀 이렇게 하지 못함을 관찰한다. 오히려 너희 정부들은 너희를 전쟁과, 점점 확대되어가는 자유의 부족, 그리고 국내 폭동과 사변으로 데려간다.
너희가 사람들에게 똑같은 기회를 제공하는 과제를 감당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을 그냥 건강하게 먹이고 활기차게 유지하는 정도의 기본적인 문제들도 해결하지 못했다.
몇만 명이 몇 개국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는 음식들을 날마다 버리는 이 행성에서, 날마다 몇백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너희는 남은 밥을 “가진 자”에서 “못 가진 자”로 전해주는 가장 간단한 과제조차 처리하지 못한다-너희가 자원을 좀 더 평등하게 나누길 과연 원하기나 하는가라는 논쟁을 해결하지 못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이것들은 판단이 아니다. 이것들은 너희 사회를 관찰하면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왜죠? 왜 이 모양입니까? 왜 우리는 지난 몇십 년 동안 자신의 문제들을 처리하는 면에서 그다지도 지전을 보지 못했을까요?
몇십 년? 몇 세기라고 해라.
좋습니다. 몇 세기 동안요.
그것은 인간의 ‘첫번째 문화 신화’와, 거기서 따라나올 수밖에 없는 다른 모든 신화들과 관련이 있다. 신화는 윤리를 구성하고, 윤리는 태도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니, 그 신화들이 바뀔 때까지는 다른 어떤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너희의 문화 신화가 너희의 기본 본능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무슨 뜻입니까?
인간 존재는 날 때부터 악하다는 것이 너희의 ‘첫번째 문화 신화’다. 원죄의 신화가 이것이다. 이 신화는 너희의 기본 천성이 악할 뿐 아니라, 너희는 그런 식으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신화에서 따라나올 수밖에 없는 ‘두번째 문화 신화’는 “적자”만이 생존한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신화는, 너희 중에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있고, 살아남으려면 강한 쪽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너희는 동료인간을 돕기 위해 가능한 한 최선을 다 하겠지만, 자신의 생존이 문제가 된다면, 또 그럴 때는, 자신을 먼저 돌볼 것이고, 심지어 남들이 죽게 내버려두기도 하리라면서. 아니, 그 신화는 너희가 그 이상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신과 자기 가족들이 살기 위해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면, 사실 너희는 남들을-십중팔구 “약자”를-죽이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적자”로 규정할 것이라고.
너희 중 일부는 이것이 너희의 기본 본능이라고 말한다. “생존본능”이라 불리는 이 문화 신화야말로 너희의 사회윤리 중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 너희의 집단 행동 중 많은 부분을 형성해왔다.
하지만 너희의 “기본 본능”은 생존이 아니라, 공정함과 ‘하나됨’, 사랑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지각 있는 존재들sentient beings의 기본 본능이다. 그것은 너희의 세포 기억이고, 타고난 천성이어서, 너희의 ‘첫번째 문화 신화’를 뒤집는다. 너희는 본래 악하지 않다. 너희는 “원죄”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
너희의 “기본 본능”이 “생존”이었다면, 너희의 기본 천성이 “악했다면”, 너희가 떨어지는 아이나 물에 빠진 남자를 구하거나, 이런저런 사람을 이런저런 것에서 구하려고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일 같은 건 절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기본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기본 천성을 드러낼 때, 그리고 자신이 뭘 하는지 생각하지 않을 때, 너희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취하는 행동방식이 실상 이런 것이다.
그러니 너희의 “기본” 본능은 “생존”일 수 없고, 너희의 기본 천성은 당연히 “악하지” 않다. 너희의 본능과 천성은 공정함과 ‘하나됨’, 사랑이라는 너희의 본질을 반영하게 되어 있다. 이것의 사회적 의미를 살펴볼 때는 “공정함”fairness과 “평등”equality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등해지는 것, 즉 똑같아지는 것은 모든 지각 있는 존재들의 기본 본능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가 사실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기본 본능은 동일함이 아니라 독특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두 존재가 진짜로 똑같은 사회를 창조하기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진짜 평등, 다시 말해 경제와 정치와 사회면에서 “동일함”을 만들어내려는 사회 메커니즘은 가장 장대한 발상과 가장 고귀한 목적-각 존재가 자신이 지닌 가장 장대한 바램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기회를 가짐으로써, 자신을 진실로 새롭게 재창조한다는-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기회의 평등이지, 사실상의 평등이 아니다. 이 기회의 평등이 공정함이다. 반면에 외부의 힘과 법률로 만들어내는 사실상의 평등은 공정함을 자아내지 않고 그것을 배제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깨달은 존재들의 최고 목표인 참된 자기 재창조를 이룰 기회를 배제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체제가 기회의 자유를 창조하는가? 사회가 모든 개인들의 생존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해줌으로써, 어느 존재나 자기 생존보다는 자기 발달과 자기 창조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게 해주는 체제, 달리 말하면 삶-생존은 이 속에서 보장된다-이라는 참된 체계를 본뜬 체제가.
자기 생존이 문제가 아닌 계몽된 사회들이라면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충분히 있는데도, 그 구성원들 중 한명만이 고통을 겪게 놔두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런 사회들에서는 자기 이해와 최상의 상호 이해가 동일하다.
하지만 “타고난 사악함”이나 “적자생존”의 신화를 중심으로 삼는 사회로서는 어떻게 해도 이런 이해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예, 이건 알겠습니다. 이 “문화 신화” 문제는 앞선 문명들의 태도 및 윤리와 더불어 나중에 더 자세히 탐구해보고 싶은 주제이긴 하지만, 지금은 다시 한번 되돌아가서 제가 앞서 했던 질문들을 해결하고 싶습니다.
당신과 이야기를 나눌 때 어려운 점 하나는 답변들이 워낙 흥미있는 방향으로 나가는 바람에, 종종 시작한 지점이 어디였는지를 잊고 만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사랑과 그 필요조건들에 대해서요.
사랑에는 어떤 필요조건도 없다. 바로 이 점이 그것을 사랑으로 만드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너희의 사랑에 필요조건이 달려 있다면, 그것은 모조품이지, 전혀 사랑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너희에게 말해주려고 해온 게 바로 이것이다. 네가 여기서 했던 모든 질문들을 가지고 내가 열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말해온 게 이것이다.
예를 들어 결혼이란 문맥에는, 사랑은 필요로 하지 않는 서약 교환이란 게 있다. 그런데 너희는 사랑이 뭔지 모르기에, 그것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너희는 사랑이라면 결코 요구하지 않았을 것을 서로에게 약속하게 만든다.
그래서 당신은 결혼에 반대하시는군요!
나는 어떤 것에도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내가 보는 것을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너희는 내가 보는 것을 바꿀 수 있다. 너희는 “결혼”이라는 너희 사회 구조물을 다시 설계하여, 사랑이라면 결코 요구하지 않았을 것을 결혼 또한 요구하지 않게 하고, 오직 사랑만이 선언할 수 있는 것을 결혼 또한 선언하게 만들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결혼 서약을 바꾸라는 거군요.
그 이상이다. 그 서약의 근거가 되는 기대를 바꿔라. 하지만 이 기대를 바꾸기는 힘들 것이다. 그것은 너희의 문화 유산이고, 그 문화 유산은 다시 너희의 문화 신화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우린 예의 그 문화 신화로 돌아갔군요. 당신이 여기에 매달리는 이유가 뭡니까?
나는 여기서 너희에게 바른 방향을 가리켜주고 싶다. 나는 너희가 너희 사회를 데려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을 보면서, 너희를 그쪽으로 돌아서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의 말과 용어들을 찾아내고 싶다.
내가 예를 하나 들어줄까?
그래 주십시오.
사랑에 관한 너희 문화 신화들 중 하나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문화적 명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희를 화나게 만들고, 너희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큰 해악을 끼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좋지 않은 결혼에 발을 들여놓게 하고, 그런 결혼을 유지하게 하며, 온갖 종류의 관계들을 기능장애로 만들고 있다. 그런데도 이 널리 퍼진 문화 신화에 감히 도전하겠노라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희가 지침을 구하는 부모와, 너희가 감화를 구하는 성직자들과, 너희가 명확성을 구하는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은 물론이고, 너희가 지적 지도력을 구하는 작가와 예술가들까지도.
그 신화를 지속시키는 노래가 작곡되고, 이야기가 만들어지며, 영화가 제작되고, 지침이 주어지며, 기도문이 제공되고, 육아가 이루어진다. 그러고 나면 너희 모두는 그것에 따라 살도록 홀로 남겨진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너희가 아니라 그 ‘신화’다.
사랑이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렇다.
그게 아니라고요?
그렇다. 사랑은 한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하지만 당신 스스로 좀 전에 “사랑에는 어떤 필요조건도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사랑을 사랑을 만드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그것도 맞다.
글쎄요, 제게는 그 말이 꼭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라는 식으로 들리는데요.
그렇다면 너는 1권 8장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여기서 언급하는 모든 것이 거기에 설명되어 있다. 이 대화록은 순서대로 읽혀서 한 덩어리로 간주되게끔 되어 있다.
압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권을 읽지 않고 이런 이야기들과 마주친 사람들을 위해서 설명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요. 사실 솔직히 말해서 저 자신도 그 부분을 재음미하고 난 지금에서야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것 같거든요.
좋다. 자, 시작한다.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너희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참인 건 너희와 다른 모든 사람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가 남에게 해준 일이 곧 자신에게 해준 일이고, 너희가 남에게 해주지 못한 일이 곧 자신에게 해주지 못한 일이다. 남에게 좋은 것이 너희에게 좋은 것이고, 남에게 나쁜 것이 너희에게 나쁜 것이다.
이것은 가장 기본 되는 진리다. 그런데도 너희가 가장 자주 무시하는 진리 또한 이것이다.
이제 너희가 남과 관계를 맺을 때, 그 관계는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갖는다. 그 관계는 너희가 ‘참된 자신’에 관한 가장 고귀한 관념을 결정하고 선언하는 매개물, 창조하고 표현하는 매개물, 체험하고 성취하는 매개물로만 존재한다.
그런데 ‘참된 자신’이 친절하면서 사려 깊고, 자상하면서 함께 나누고, 자비로우면서 애정 깊은 사람이어서, 너희가 남들과 더불어 있을 때도 이런 것들로 있다면, 너희는 자신이 몸으로 온 바로 그 이유인 가장 장대한 체험을 자신에게 주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너희가 몸을 취한 이유다. 왜냐하면 오직 상대성의 물질계에서만 너희는 자신을 이런 것들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온 절대계에서는 앎을 이런 식으로 체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1권에서 훨씬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참된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남들이 자신을 남용하고 해치고 파괴하도록 놔두는 존재라면, 그렇다면 너희는 그것을 체험하게 해주는 행동들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진실로 친절하면서 사려 깊고, 자상하면서 함께 나누고, 자비로우면서 애정 깊은 사람이라면, 너희는 자신의 이런 존재상태를 함께하는 사람들 속에 너희 자신을 포함시킬 것이다.
사실 너희는 자신에서 출발할 것이고, 이런 문제들에 자신을 가장 먼저 집어넣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은 자신이 무엇이 되고자 하는지에 달렸다. 예를 들어 너희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하나’되고자 한다면 (즉 너희가 이미 참임을 알고 있는 개념을 체험하고자 한다면), 너희는 대단히 특별한 방식으로, 즉 자신의 ‘하나됨’을 자신이 체험하고 자신에게 증명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너희가 어떤 일들을 할 때, 너희는 다른 누군가에게 뭔가를 해주지 않고 자신에게 그 일을 해주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무엇이 되려 하든 상관없이 똑같이 사실이다. 만일 너희가 사랑이고자 한다면, 너희는 남들과 더불어 모든 걸 사랑할 것이다. 남들을 위해서for가 아니라 남들과 더불어with.
그 차이를 알아차려라. 그 뉘앙스를 포착하라. 너희는 자신을 위해서 남들과 더불어 모든 걸 사랑할 것이다. 자신과 ‘참된 자신’에 관한 너희의 가장 숭고한 관념을 실현하고 체험하기 위해서.
이런 의미에서 보면, 남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자신의 자유의사로 하는 모든 행동act이 말 그대로 그냥 그것, 즉 “연기”act일 뿐이기에. 너희는 연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역할을 설정하여 행동하고 있다. 단 너희는 체하고 있지 않다. 너희는 실제로 그것이 되고being 있다.
너희는 인간 존재being다. 그리고 너희가 어떤 존재일지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너희다.
너희의 세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온통 무대요, 사람들은 배우라.”
그는 또 “되느냐, 되지 않느냐(사느냐 죽느냐-옮긴이), 이것도 문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너 자신에게 진실되라, 그러면 밤이 낮을 따르듯, 너는 누구에게도 거짓되지 않으리니.”
너희가 자신에게 진실할 때, 너희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때, 그러고 나서 너희가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너희는 사실 자신이 “받고” 있음을 알게 되리니, 너희는 말 그대로 자신을 자신에게 되돌려주고 있다.
“남”은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너희가 다른 사람에게 진짜로 “줄” 수는 없다. 우리 모두가 ‘하나’라면, 존재하는 건 오직 자신뿐이기에.
이건 이따금 어의론적 “속임수”같이 들리는데요. 말의 의미를 바꾸기 위해 단어의 위치를 바꿔치기하는 것 말입니다.
그건 속임수가 아니라 마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미를 바꾸기 위해 단어를 바꿔치기하는 문제가 아니라, 체험을 바꾸기 위해 인식을 바꾸는 문제다.
너희의 모든 체험은 너희의 인식을 근거로 하고, 너희의 인식은 너희의 이해를 근거로 하며, 나아가 너희의 이해는 너희의 신화, 다시 말해 너희가 지금까지 들어온 것을 근거로 한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현재의 너희 문화 신화들은 너희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너희가 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너희는, 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을 자신에게 속이고 있거나, 아니면 개인과 국가와 종의 차원 모두에게 자신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고 있다.
다른 종들도 있습니까?
아 그럼, 단언하지.
좋습니다. 전 기다릴 만큼 기다려왔습니다. 그것에 관해 말해주십시오.
곧 해주지. 아주 금방. 하지만 나는 그에 앞서 너희가 어떻게 하면 소위 “결혼”이란 이 발명품을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 너희가 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으로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것을 없애지는 마라, 그것을 폐지하지는 마라, 그것을 바꿔라.
그래요. 저는, 그걸 알고 싶습니다. 저도 인간 존재가 참된 사랑을 표현할 무슨 방도가 있을지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전 대화의 이 부분을 제가 시작했던 지점에서 끝냈으면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표현에 어떤 한계를 설정해야 합니까?-사실 꼭 그래야 한다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요.
아니다. 어떤 한계도 설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너희의 결혼 서약은 바로 이 점을 진술해야 한다.
이건 정말 놀랍군요. 왜냐하면 제가 낸시와의 결혼 서약에서 진술했던 게 바로 그거거든요.
알고 있다.
낸시와 제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갑자기 결혼 서약문을 완전히 새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알고 있다.
그리고 낸시도 찬성했고요. 그녀도 우리가 “으레 해오던 식의” 결혼 서약을 교환할 수 없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앉아 새로운 결혼 서약을 만들어냈습니다. 당신 표현 방식대로라면, “문화적 명령에 도전하는” 서약을요.
그래, 너는 그랬다. 나도 아주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사실 전, 우리가 그걸 찍는 동안, 신부님이 읽으시도록 그 서약을 종이에 적어가는 동안요, 우리 두 사람 다 영감을 받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물론 너희는 그랬다!
당신 말씀은-?
너는 책을 쓸 때만 내가 네게 온다고 생각하느냐?
우와.
그렇다, 우와다.
그렇다면 너는 왜 그 결혼서약을 여기에 옮겨 적지 않느냐?
예?
자, 어서. 너한테는 그것의 복사본이 있다. 그것들을 여기에 옮겨 적어라.
저, 우린 그걸 세상 사람들하고 함께하려고 만든 게 아닌데요.
이 대화가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너는 그중 어떤 것도 세상과 함께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 어서 그것들을 옮겨 적어라.
전 그냥, “우리가 완벽한 결혼서약문을 써냈다!”고 말하는 걸로 사람들이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느닷없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가 걱정된다고?
제발, 무슨 뜻인지 아시잖습니까?
봐라, 그것이 “완벽한 결혼 서약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음, 그렇담 그렇게 하죠, 뭐.
그건 그냥 너희 행성에 사는 사람이 그렇게 과감하게 제안한 것치고는 최고다.
하느님-!
그냥 농담이다. 자, 여기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보자.
어서 시작해라. 서약을 옮겨 적어라. 내가 책임을 지마.
그리고 사람들은 그걸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건 사람들에게 우리가 여기서 말한 게 뭔지 알게 해줄 것이다. 어쨌든 넌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서약하도록 권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지 않았느냐?-사실 그건 전혀 “서약”이 아니라 결혼 선서이지만.
음, 좋습니다. 우리가 결혼할 때 낸시와 저는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영감” 덕분에요.
신부:
닐과 낸시가 오늘밤 이 자리에 선 것은, 엄숙한 약속을 하거나 성스런 서약을 교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낸시와 닐이 이 자리에선 것은 서로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을 공식화하고, 자신들의 진실을 알리고, 배우자가 되어 함께 살고 함께 성장하겠노라는 자신들의 선택을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선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내린 결정에서 우리 모두가 동감할 수 있는 진실을 느끼게 됨으로써, 그 결정을 훨씬 더 힘있게 만들기 바라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두 사람은 또한 자신들이 결합의식이 우리 모두를 가깝게 묶어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밤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밤 배우자나 연인과 함께 이곳에 오신 분들에게는 이 의식이 여러분 자신의 애정 깊은 결합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고, 그 결합에 다시 봉헌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럼 왜 결혼하는지 묻는 것에서 시작하겠습니다. 닐과 낸시는 이미 자신들 스스로 이 질문에 대답했고, 그 대답을 제게도 말해주었지만, 이제 저는 여러분 앞에서 다시 한번 묻고자 합니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그런 대답에 확신을 가지고, 자신들의 이해를 분명히 하며, 자신들이 함께한 진리를 흔들림 없이 실행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신부가 탁자에서 장미 두 송이를 집어든다.)
이건 장미 의식입니다. 이 의식을 통해 낸시와 닐은 자신들의 이해를 함께 나누고, 그 나눔을 기념할 것입니다.
자, 낸시, 그리고 닐, 당신들은 내게, 안전을 구해서 이 결혼을 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유일한 진짜 안전은 소유하거나 소유당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이 삶에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상대방이 대주길 요구하거나, 기대하거나, 심지어 바라는 데도 있지 않고,
자신이 삶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 사랑과 지혜와 통찰력과 힘과 지식과 이해와 보살핌과 자비와 강함,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내면에 있음을 아는 데 있으니,
이런 것들을 받으리라는 희망으로가 아니라 이런 선물들을 주리라는 희망으로, 상대방이 그것들을 훨씬 더 넉넉하게 가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결혼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밤 두 사람은 이 점을 흔들림 없이 확신합니까?
(두 사람, “예, 그렇습니다”라고 함께 대답한다.)
그리고 닐과 낸시, 당신들은 내게, 당신들 내면의 고귀하고 가장 좋은 것들-신과 삶과 인간과 창조력과 일에 대한 사랑을 비롯하여 자신을 온전히 대변하고 자신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모든 측면을 포함해서-을 진실되게 표현하고 솔직하게 축하하는 것에서 상대방을 어떤 식으로도 한정하거나 통제하거나 가로막거나 제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결혼을 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밤 두 사람은 이 점을 흔들림 없이 확신합니까?
(두 사람, “예, 그렇습니다”라고 함께 대답한다.)
마지막으로 낸시와 닐, 당신들은 내게, 의무를 지는 것으로가 아니라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 결혼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성장할 기회, 충분한 자기 표현의 기회, 자신의 삶을 최상의 가능성으로 끌어올릴 기회, 자신이 지금껏 자신에 대해 가졌던 모든 잘못된 생각과 유치한 발상들을 치유할 기회, 두 영혼의 영적 교섭을 통해 신과 궁극적으로 재결합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본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이것이야말로 성스런 영적 교섭이고, 관계 속에 내재된 모든 권위와 책임을 똑같이 나누고, 있을 수 있는 모든 짐을 똑같이 지고, 그 영광을 똑같이 입는 동등한 배우자로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두 사람은 이 비전vision에 함께 들어서길 원합니까?
(두 사람, “예, 그렇습니다”라고 함께 대답한다.)
이제 나는 세속적인 차원의 이해를 상징하는 이 빨간 장미를 두 사람에게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 다 육신의 형상으로, 그리고 결혼이라는 물질 구조 속에서 어떤 삶을 꾸며갈지 알고 동의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뜻에서 말입니다. 자, 이제 두 사람이 이 동의와 이해를 사랑으로 함께 나누고자 함을 상징하는 뜻으로 각자의 장미를 상대방에게 주십시오.
그럼 이제 이 하얀 장미를 잡으십시오. 그 하얀 장미는 당신들의 더 큰 이해, 당신들의 영적 본성과 영적 진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들의 실체와 최고 자아가 지닌 순수성, 그리고 당신들 머리 위에서 지금도 비추고 있고, 앞으로 항상 비출 신의 사랑이 지닌 순수성을 뜻합니다.
(신부가 줄기에 닐의 반지가 걸려 있는 장미를 낸시에게 주고, 낸시의 반지가 걸린 장미를 닐에게 준다.)
오늘 주고 받은 약속을 기억하게 해줄 기념물을 가져오셨습니까?
(두 사람, 각자 장미 줄기에서 반지를 빼내 신부에게 건네준다. 신부는 반지를 손에 들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원은 태양과 지구와 우주의 상징입니다. 원은 거룩함과 완벽함과 평화의 상징입니다. 또한 원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적 진리와, 사랑과 삶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닐과 낸시는 이것을 소유가 아닌 결합의 상징, 제한이 아닌 함께함의 상징, 포획이 아닌 포용의 상징으로 삼고자 합니다. 사랑은 소유하거나 제한될 수 없고, 영혼은 결코 사로잡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닐과 낸시, 차례로 상대방에게 주고 싶은 반지를 집으십시오.
(두 사람, 상대방의 반지를 집는다.)
닐, 제 말을 따라하십시오.
나, 닐은....... 낸시 당신에게, 내 짝이 되고, 내 연인이 되고, 내 친구가 되고, 내 처가 되어주길 청합니다. 나는 당신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당신 자신’이 누군지 명확히 기억할 때나 잊었을 때나, 당신이 사랑으로 행동할 때나 그렇지 못할 때나, 당신에게 내 가장 깊은 우정과 사랑을 줄 것을 선언합니다. 또 나는 신과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 앞에서 어떤 어둠의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아니 특별히 그런 순간들일수록, 언제나 당신 안에서 신성의 빛을 볼 것이고, 내 안에 있는 신성의 빛을 당신과 함께 나눌 것을 선언합니다.
나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우리 속의 모든 좋을 것을 함께 나누며 신의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영혼의 성스런 협력관계 속에서, 당신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신부가 낸시에게 묻는다.)
낸시, 당신은 자신의 처가 되어달라는 닐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낸시, “예, 그러겠습니다”고 대답한다.)
이번에는 낸시, 제 말을 따라하십시오.
나, 낸시는.......(낸시도 같은 서약을 한다.)
(신부가 닐에게 묻는다.)
닐, 당신은 자신의 남편이 되어달라는 낸시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닐, “예, 그러겠습니다”고 대답한다.)
그럼 두 사람 다 서로에게 건네줄 반지를 손에 쥐고 제 말을 따라 하십시오.
나는 당신과 결혼합니다......... 이제 나는 당신이 내게 준 반지를 받습니다.......(두 사람, 반지를 교환한다)...... 그리고 그것을 내 손바닥 위에 놓습니다.......(두 사람, 손바닥 위에 반지를 놓는다)......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모두가 보고 알 수 있도록.
(신부, 끝맺는다......)
우리는 오직 혼인 당사자만이 혼배성사를 서로에게 베풀 수 있고, 오직 혼인 당사자만이 그것을 축성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 교회도, 국가가 내게 준 어떤 힘도, 오직 두 사람만이 선언할 수 있고, 오직 두 영혼만이 실현할 수 있는 것을 선언할 권위를 내게 부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 낸시와 당신 닐이 당신들 가슴 속에 이미 적혀 있는 진실을 선언했고, 여기 당신 친구들과 살아 있는 ‘한영혼’이 보는 앞에서 같은 것을 증명한 지금, 우리는 당신들 스스로....... 남편과 처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을 기쁘게 지켜봅니다.
자, 이제 기도합시다.
사랑과 생명의 성령이시여,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두 영혼이 서로를 찾아냈습니다. 이제 둘의 운명은 한 무늬로 짜여질 것이고, 두 사람의 어려움과 기쁨 또한 나누어짐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닐과 낸시, 바라건대 이들의 가정이 그곳에 들어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행복의 자리가 되게 하시고, 남녀노소 모두가 서로의 만남으로 새로워지는 곳, 성장과 나눔이 이루어지는 곳, 음악과 웃음이 있는 곳, 기도와 사랑을 위한 장소가 되게 하소서.
바라건대 이 두 사람과 가까운 사람들이 이들의 아름답고 활기찬 사랑으로 풍요로워지게 하시고, 이들의 일이 세상에 봉사하는 삶의 기쁨이 되게 하시며, 이들이 지상에서 착하게 오래도록 살 수 있게 하소서.
아멘, 또 아멘.
그 당시 전 정말 뿌듯했습니다. 이런 걸 진심으로 함께 말할 누군가를 내 인생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니 전 정말 복 받은 놈입니다. 신이시여, 제게 낸시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도 알다시피, 그녀에게는 너 역시 축복의 선물이다.
그러기를 바라죠.
날 믿어라.
제가 뭘 원하는지 아십니까?
모른다. 뭘 원하느냐?
전 모든 사람들이 이런 식의 결혼선서문을 만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전 사람들이 이것을 잘라내 다듬거나 아니면 이것을 베껴서 자신들의 결혼식에서 사용했으면 합니다. 장담하지만, 아마 이혼율이 급락할 겁니다.
이런 것들을 말하기를 힘들어 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기 힘들어할 테고.
우리가 그 선서를 지킬 수 있어야 할 텐데. 여기에 그 선서문을 옮겨 적고 난 지금, 우리가 선서한 대로 살아야 하는 문제가 생겼군요.
그럼 너는 그 선서에 따라 살지 않을 작정이었느냐?
물론 그럴 작정이었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이 우리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실패하거나 비틀거린다면, 우리 관계에 무슨 일이 터지거나, 애석하게도 지금의 관계를 끝내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온갖 사람들이 다 환멸을 느끼고 말 겁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그들도 너희가 자신에게 진실됨을 알 것이다. 그들도 너희가 다시 새롭게 선택했음을 알 것이다. 내가 1권에서 말했던 걸 떠올려봐라. 관계의 기간을 그 질과 혼동하지 마라. 너는 동상(銅像)이 아니다. 낸시 역시 마찬가지고. 아무도 너희를 그 자리에 놓지 않았다. 그리고 너희 또한 자신을 그곳에 놓을 필요가 없다. 그냥 사람으로 있어라. 그냥 사람인 그대로 있어라. 앞으로 어떤 시점에서 너와 낸시가 너희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꾸고 싶다고 느낀다면, 너희에게는 그럴 수 있는 완벽한 권리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 대화 전체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가 만든 선서의 핵심이고요!
맞았다. 네가 그걸 이해하다니 기쁘구나.
그래요, 전 그 결혼 선서문이 마음에 듭니다. 그것을 여기에 적게 돼서 기쁘고요. 그건 삶을 함께 시작하는 새롭고 멋진 방법이죠. 더 이상 여자에게 “사랑하고 존경하고 복종할 것”을 약속하게 만들지 않고요. 남자들이 이런 걸 요구한 건 독선적이고 시건방지고 이기적인 짓이었습니다.
물론 네 말이 맞다.
그리고 그보다 더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건 남자들이 그런 남성 우위를 신이 정하신 바라고 주장했다는 겁니다.
이번에도 네 말이 맞다. 나는 그런 걸 정한 적이 없다.
그런데 마침내 진짜로 신에게서 영감을 받은 결혼 서약이 나왔군요. 어느 쪽도 노예나 동산(動産)으로 만들지 않는 서약, 사랑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서약, 어떤 한계도 설정하지 않고 오직 자유만을 약속하는 서약요! 모든 가슴들이 진실되게 남을 수 있는 서약 말입니다.
“자신한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서약을 지키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잖아!”라고 말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너는 여기에 대해 뭐라고 말할 테냐?
저라면 “누군가를 지배하는 것보다 자유롭게 하기가 훨씬 더 힘들다. 누군가를 지배할 때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만, 누군가를 자유롭게 할 때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말할 겁니다.
너라면 현명하게 대꾸할 수 있을 것이다.
멋진 생각이 떠올랐어요! 우린 결혼 선서에 관한 소책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결혼식날 사용할 일종의 기도책 말입니다.
작은 소책자 정도면 될 겁니다. 그 안에 결혼 선서만이 아니라 결혼식의 전 과정과 이 세 권의 대화록에서 뽑은 사랑과 관계에 대한 주요 구절들도 함께 싣는 겁니다. 또 결혼과 관련된 몇 가지 특별 기도와 명상들도 물론 싣고요. 그 책자는 당신이 결혼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걸 밝혀줄 겁니다!
전 정말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처음 한동안은 당신이 “결혼 반대론자”인 듯이 들렸거든요.
내가 어떻게 결혼에 반대할 수 있겠느냐? 우리 모두가 결혼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서로 결혼해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의 결혼식은 그 어느 결혼식보다 성대하고, 너희에게 주는 내 서약은 그 어느 서약보다 장대하다. 나는 너희를 영원히 사랑하고, 모든 것에서 너희를 자유롭게 하겠노라. 내 사랑은 결코 너희를 구속하지 않으리니, 이 때문에 너희는 결국에는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되는 자유야말로 너희의 가장 큰 바램이고, 내 가장 큰 선물이기에.
이제 너는 우주의 최고 법칙에 따라 나를 네 합법적인 배우자이자 공동 창조자로 받아들이겠느냐?
예.
그럼 이제 당신은 저를 당신의 배우자이자 공동 창조자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받아들이고 말고. 나는 언제나 그래왔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하나’고 영겁의 세월 내내 ‘하나’일 것이다. 아멘.
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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