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3 (9)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3 (9)
그렇다면 예수는 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외계에서 왔군요.
네 오류는 그 둘을 분리시키는 데 있다. 너는 계속해서 그 둘을 구별하려 하고 있다. 네가 인간과 신을 분리하고 구별하기를 고집하듯이. 네게 말하노니, 그 둘 사이에는 어떤 구별도 없다.
흐음, 좋습니다. 이 책을 끝내기 전에 다른 세상의 존재들에 대해 마지막으로 몇 가지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들은 뭘 입습니까? 의사전달은 어떤 식으로 합니까? 그리고 제발, 아직도 이런 걸 쓸데없는 호기심이라는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전 우리가 여기서 배울 게 있다는 걸 이미 증명했다고 생각하니까요.
좋다. 그렇다면 짧게 말하마.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에 사는 존재들은 옷을 입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요소나 상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종의 가리개를 필요로 하거나, 어떤 “신분”이나 영예를 나타내기 위해 장식물을 사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수치”나 “수줍음” 따위의 개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진재로서는, 그럴 필요가 없을 때도 너희가 왜 몸 전체를 가리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더 멋있게” 보이려고 가린다는 발상으로는 도저히 연결시키지 못할 것이다. 고진재에게는 알몸 자체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다. 따라서 고진재는 몸을 어쨌든 더 기쁘게 하거나 매력적으로 만들려고 그 위에 뭔가를 걸친다는 발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고진재들로서는 너희가 “건물”이나 “집”이라 부르는....... 상자 속에서 산다는-인생의 많은 시간을 낭비하면서-발상 역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고진재들은 자연환경 속에서 산다. 자신의 환경을 창조하고 조절하고 보살피는 고도로 진화된 문명들에서는 극히 드문 일이긴 하지만, 특별히 환경이 우호적이 아닐 때 상자 속에 머무는 경우를 빼고는.
또한 고진재들은 자신들이 환경과 ‘하나’고, 자신들이 환경과 공간 이상을 함께하고 있으며, 나아가 상호의존 관계까지도 함께 한다는 걸 이해한다. 따라서 고진재들은 너희가 자신을 부양해주는 것을 왜 해치고 파괴하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환경이 자신을 부양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너희는 관찰 기술이 대단히 한정된 존재라는 것이다.
의사전달communication과 관련해서 고진재는 너희라면 감정이라 불렀을 측면을 의사전달의 으뜸차원으로 사용한다. 고진재들은 자기 감정은 물론이고 남의 감정까지 안다. 누구도 감정을 숨기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자기 배신으로 보는 고진재들로서는, 감정을 숨기고 나서는 아무도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감정은 영혼의 언어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은 이것을 이해한다. 고진재들의 사회에서는 서로를 진실되게 아는 것이 의사교류의 목적이다. 따라서 고진재들은 너희 인간들이 “거짓말”이라 부르는 개념을 이해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다.
진실 아닌 것을 전달함으로써 바라던 것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하는 건, 고진재에게 껍데기뿐인 승리여서, 그것을 전혀 승리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고진재에게는 그것이 패배를 질질 끄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고진재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고진재들 자체가 진실이다. 그들의 전 존재가 “있는 그대로”와 “도움 되는 것” 출신이다. 고진재들은 오래 전, 아직 목소리로 의사를 전달하던 유사 이전의 시기에, 진실 아닌 것은 소용이 없다는 걸 배웠다. 너희는 너희 역사에서 아직 이것을 배우지 못했다.
너희 행성에서는 사회의 많은 것이 보안에 근거하고 있다. 너희 중 다수는 사는 데 도움이 되는 쪽이 너희가 서로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서로에게서 지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해서 보안은 너희의 사회규범, 윤리규범이 되었다. 그것은 진실로 너희의 ‘보안 규범’이다.
이것이 너희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너희의 고대문화들과 너희 원주민들은 그런 규범에 따라 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사회의 많은 개인들도 이런 행동방식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럼에도 너희 정부는 이 규범에 따라 운영되고, 너희 사업체들은 그것을 받아들였으며, 너희 관계의 다수가 그것을 반영한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거짓말들을 인정하다보니, 그들은 심지어 거짓말에 대해서까지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너희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처럼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거기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식의, ‘보안 규범’에 관한 비밀 규칙을 발달시켰다. 너희는 그렇지 않은 체까지 한다. 이 점에서 너희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당신은 예전에도 이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진실로 하고 싶다고 말하는 대로 상황을 바꾸려고 한다면, 지금 이 대화에서 반드시 “접수해야” 할 핵심 논점들, 요점들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자 한다.
따라서 나는 다시 한번 말할 것이다. 인간 문화와 고도로 진화된 문화의 차이는,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은,
1. 충분히 관찰하고
2. 진실되게 교류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도움 되는 것”을 보고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 이것은 너희 행성의 삶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개선시켜줄, 또 하나의 작지만 심오한 변화다.
그런데 이것은 도덕 문제가 아니다. 고진재 사회에는 어떤 “도덕적 의무”도 없다. 이것 역시 거짓말이 그러하듯,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개념의 하나다. 그것은 그냥 기능의 문제, 무엇이 이로운가의 문제다.
고진재들에게는 도덕이 전혀 없습니까?
너희가 이해하는 식의 도덕 같은 건 없다. 어떤 집단이 고안한 일련이 가치들에 순응해서 개인들이 살아야 한다는 식의 발상은 “도움 되는 것”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무너뜨릴 것이다. 자신에게 적절한 행동방식과 적절하지 않은 행동방식을 심판하는 궁극의 유일한 주체는 개개인이라는 그들의 이해를.
고진재 사회에서는 언제나 무엇이 도움 되는가, 무엇이 제기능을 하고, 모두를 이롭게 하는가를 중심으로 논의된다. 인간들이 말하는 “옳고 그른” 것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하지만 그게 그거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 되는 것을 “옳은 것”이라 말하고, 우리에게 소용없는 걸 “그른 것”이라고 말할 뿐이지 않습니까?
너희는 그런 꼬리표에다, 고진재들에게는 똑같이 낯선 개념들인 죄의식과 수치심을 덧붙였다. 또 너희는 그것들이 “소용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것들이 “부적절하다”고 여겨서-때로는 너희가 보기에가 아니라 “신이 보시기에”-엄청나게 많은 것들에 “그르다”는 딱지를 붙였다. 이렇게 해서 너희는 “무엇이 도움 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놓고 “실제 있는 그대로”와는 전혀 관계 없는 작의적인 규정들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인간 사회는 자기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을 “그르다”고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고진재라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어떤 공동체 속에 있든, 어떤 무리 속에 있든, 감정이 엄밀한 자각이야말로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에서 말했듯이, 고진재라면 절대 감정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 차원에서도 옳음”을 안다.
사실 고진재로서는 어떤 경우에도 감정을 숨길 수 없다. 고진재는 다른 존재들에게서 그들의 감정이 뚜렷이 실려 있는 “진동”-사실상의 파장-을 읽는다. 너희가 방안에 들어 섰을 때 이따금 “공기를 느낄” 수 있듯이, 고진재는 다른 고진재가 무엇을 생각하고 체험하는지 느낄 수 있다.
너희라면 “말”이라 불렀을 사실상의 소리내기는 있다 해도 아주 드물게만 사용된다. 고도로 진화된 모든 지각 있는 존재들 사이에서는 이런 식의 “텔레파시 교류”가 이루어진다. 사실 한 종이 진화 정도나 같은 종 안에서 구성원들간 관계의 진화 정도는 그 존재들이 감정이나 바램, 혹은 정보를 전달하는 데 “말”을 얼만큼이나 사용해야 하는가로 증명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네가 묻기 전에 대답하건대, 그렇다, 인간존재도 이런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고, 몇몇 사람들은 이미 발달시켰다. 사실 몇천 년 전에는 그것이 정상이었다. 그 이후 너희는 사실상 “소리”인 원초적 말하기를 이용해서 교류하는 수준으로 퇴보하고 말았다. 하지만 너희 중 많은 이들이 더 명확하고 더 정확하고 더 우아한 교류형태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것은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러해서, 좋아하면 통하기Caring creates communication 마련이라는 주요 진리를 역설해준다.
사실 사랑이 깊다면 말은 불필요하다. 그리고 이 공리의 역도 참이어서, 너희가 서로에게 더 많은 말을 써야 할수록, 서로를 아껴주는 데 들이는 시간은 아마 틀림없이 더 적을 것이다. 좋아하면 통하기 마련이기에.
궁극의 차원에서 모든 참된 교류는 진실에 관한 것이고, 참된 진실은 오직 사랑뿐이다. 이 때문에 사랑이 있는 곳에는 통함이 있는 것이다. 서로 잘 통하지 않는 건 사랑이 충분히 존재하지 않다는 표시다.
정말 아름답게 표현하시는군요. 아니 아름답게 교류하신다고 해야겠군요.
고맙다. 이제 고도로 진화된 사회에서의 생활방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너희라면 의도된 소(小)공동체라고 불렀을 형태로 무리를 이루어 산다. 이 무리들은 도시나 도, 국가 따위로 조직 규모를 키우지 않지만, 상호 평등의 기초 위에서 다른 무리들과 상호작용한다.
너희가 이해하는 식의 정부나 법률 따위는 없다. 대신 대개 연장자들로 구성된 평의회 혹은 원로회의가 있고, 너희 언어로 번역하면 “상호 합의”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이 상호 합이 사항들은 자각과 정직, 책임이라는 ‘삼각률’(三角律)로 모아진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은 이미 오래 전에 이런 것들을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다른 어떤 존재나 집단이 제시한 도덕체계나 영적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와 도움 되는 것을 그냥 관찰함으로써 이런 선택을 내렸다.
정말로 전쟁이나 갈등 같은 건 전혀 없습니까?
없다. 그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고진재로서는 힘으로 빼앗으려는 존재에게도 자신의 모든 걸 서슴없이 내주리란 이유에서 주로 그러하다. 삼라만상은 어쨌든 모두의 것이고,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언제라도 자신이 “내준‘ 것보다 더 많이 창조할 수 있음을 그가 알기 때문이다.
고진재 사회에는 “소유”나 “상실”의 개념이 없다. 그들은 자신이 물질 존재가 아니라 물질로 있는 존재임을 이해한다. 또한 그들은 모든 존재가 같은 근원에서 나왔고, 따라서 ‘우리 모두는 하나’임을 이해한다.
당신이 전에도 말씀하셨다는 건 알지만....... 누군가가 고진재에게 생명을 내놓으라고 위협하는데, 그래도 다툼이 없을까요?
아무런 논란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냥 자기 몸을 내려놓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너희를 위해 말 그대로 몸을 떠날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는 다 자란 존재로서 다시 한번 물질성 속으로 들어오거나, 다른 연인들이 새로 임신한 자식으로 돌아가 또 다른 몸을 창조하는 쪽을 선택한다.
물질성 속으로 다시 들어올 때 고진재들이 가장 좋아하는 방식은 후자이다. 고도로 진화된 사회들에서 새로 창조된 아이들은 누구보다 존중되고, 이들에게는 유례없는 성장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고진재들은 너희 문화가 “죽음”이라 부르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진재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산다는 것과, 그건 자신이 어떤 형상을 취하는가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몸과 환경을 보살피는 법을 배운 고진재들은 보통 한 신체로 무한히 오래 살 수 있다. 하지만 물질 법칙과 관련된 어떤 이유로 고진재의 몸이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고진재는 그냥 기꺼이 몸에서 떠나는 것으로 그것의 물질 요소를 ‘전부의 전부’에게로 되돌려 “재활용”할 수 있게 한다. (너희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이해하는 것이 이것이다.)
좀 뒤로 돌아가서요. “법률” 같은 건 없다고 말씀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삼각률”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요? 그때는 어떻게 하죠? 즉결형인가요?
아니다. 즉결형이 아니다. “재판”이나 “처벌” 같은 건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와 “도움 되는 것”을 간단히 살펴볼 뿐이다.
“있는 그대로”-그 존재가 저지른 일-가 지금으로서는 “도움 되는 것”과 불일치한다는 사실과, 집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어차피 그 개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심스럽게 설명된다. 왜냐하면 개인이 집단이고, 집단이 개인이기 때문이다. 모든 고진재들은 이 점을 아주 쉽게, 대체로 너희라면 젊은이라고 불렀을 이른 시기에 “접수한다”. 따라서 성숙한 고진재가 “도움 되지” 않는 “있는 그대로”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렇게 하면요?
그에게는 그냥 자신의 잘못을 고칠 기회가 주어진다. 그는 우선 삼각률을 써서 자신의 생각했거나 말했거나 행한 일과 관련된 모든 결과를 자각하고, 그런 다음에는 그런 결과를 자아낸 데 있어 자신의 역할을 평가하고 명시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는 개선방안이나 수정방안, 혹은 치유방안을 써서 그런 결과들을 책임질 기회가 주어진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면요?
고도로 진화된 존재라면 그렇게 하기를 절대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게 되면 그는 고도로 진화된 존재가 아닐 것이다. 네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지각 있는 존재다.
고진재는 이 모든 것들을 어디서 배웁니까? 학교에서요?
고진재 사회에는 “학교제도”가 없다. 단지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와 “도움 되는 것”을 일깨워주는 교육과정이 있을 뿐이다. 아이들은 자신을 낳은 사람이 아니라 노인들에 의해 길러진다. 그렇다고 그 과정 동안에 아이들이 굳이 자기 “부모”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부모”는 원할 때마다 얼마든지 함께 있을 수 있고, 선택하는 시간만큼 아이들과 함께 보낼 수 있다.
너희라면 “학교”라고 불렀을 것(사실 “학습 시간”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이 배워야 한다고 듣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습득하고 싶어하는 기술들을 골라 자기 나름의 “교육과정”을 설정한다. 따라서 동기부여를 최고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어서, 삶의 기술들을 쉽고 빠르고 즐겁게 습득한다.
삼각률(사실 이것들은 명문화된 “규율들”로 있는 게 아니지만, 너희 언어에서 찾아낼 수 있는 최상이 용어가 이것이다)은 어린 고진재들에게 “주입되지” 않고,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는 “어른들”의 행실을 통해서 거의 삼투방식으로 습득된다.
어른들이 정작 자기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어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행실이 본보기가 되는 너희 사회와 달리, 고진재 문화의 어른들은, 아이들이란 다른 사람들에게서 본 대로 행동하기 마련임을 이해한다.
고진재라면 자기 아이들이 하지 말았으면 하는 행동들을 되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진 장치 앞에 아이들을 여러 시간 동안 앉혀놓지 않을 것이다. 고진재로서는 그런 식의 결정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설사 한 고진재가 이렇게 했다 해도, 그런 다음 그 사진들이 자기 자식들의 갑작스런 탈선 행동과 관계가 있음을 부정하는 것 또한 그들로서는 똑같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나는 고진재 사회와 인간 사회의 차이는 사실 아주 단순한 한가지 요소, 즉 진실된 관찰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모아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려 한다.
고진재들은 자신들이 보는 모든 것을 인정한다. 반면에 다수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보는 것을 부정한다.
그들은 텔레비전이 자기 아이들을 망치고 있음을 보면서도 그것을 무시한다. 그들은 폭력과 “실패”가 “오락거리”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도, 그 모순을 부정한다. 그들은 담배가 몸을 해치는 걸 관찰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체한다. 그들은 술에 취해 자식을 학대하는 아버지와 온 가족이 그것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아무도 거기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몇천 년 넘게 자신들의 종교가 대중의 행동방식을 바꾸는 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관찰하면서도, 이 또한 부정한다. 그들은 정부들이 도와주기보다는 억압한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그것을 무시한다.
그들은 질병을 예방하는 데 재원이 10분의 1을, 질병을 관리하는 데 재원의 10분의 9를 소모하는 건강보장 제도-실제로는 질병보장 제도인-를 보면서도, 건강하게 행동하고 먹고 살 수 있게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문제에서 어떤 그럴듯한 진전도 이루지 못하는 게 이윤 동기 때문임을 부정한다.
그들은 화학약품이 든 사료를 억지로 먹여 길러진 뒤 도살당한 짐승 고기를 먹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걸 보면서도, 자신들이 보는 것을 부정한다.
그들은 그 이상을 하죠. 그들은 감히 그 주제를 논의했던 토크쇼 진행자를 고소하려고 합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예리한 통찰력으로 먹을거리를 둘러싼 이 모든 논점들을 파헤친 멋진 책이 있습니다. 존 로빈스가 쓴 <새로운 미국을 위한 식이요법>이란 책이죠.
사람들은 그런 책을 읽고서도, 그것이 좀이나마 의미 있음을 부정하고, 부정하고 또 부정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너희 종족들 다수가 부정 속에 살고 있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 모두가 관찰한, 눈이 시릴 만큼 명백한 사실들을 부정할 뿐 아니라, 자기 눈으로 관찰한 것들까지도 부정한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결국에는 자신의 진실까지 부정한다.
반면에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너희 중 일부는 이렇게 되어가고 있다-은 아무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고, “도움 되는 것”을 확실히 안다. 이런 단순한 도구들을 사용할 때, 삶은 단순해지고, “과정”은 칭송된다.
그래요. 그런데 “과정”은 어떤 식으로 작용합니까?
그 물음에 대답하자면, 예전에 이 대화에서 했던 지적을, 사실 되풀이해서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사가, 너희가 자신을 누구로 생각하는지와 너희가 무엇을 하려 하는가에 달려 있다.
평화와 기쁨과 사랑으로 사는 것이 너희의 목표라면, 폭력은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건강하게 오래 장수하는 것이 너희의 목표라면, 죽은 고기를 먹고, 세상이 다 아는 발암물질들을 피우고, 신경마비와 뇌손상을 불러오는 용액을 마시는 일 같은 건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폭력과 분노에서 벗어난 자식들을 기르는 것이 너희의 목표라면, 그들을 몇 년씩 폭력과 분노의 생생한 묘사 앞에 직접 앉혀놓는 일 같은 건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만일 너희의 목표가 지구를 돌보고 그녀의 자원을 현명하게 절약하는 것이라면, 자원들이 무한한 것처럼 행동하는 일 같은 건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만일 너희의 목표가 자애로운 신과의 관계를 찾아내고 일궈감으로써 종교가 인간사를 달라지게 하는 것이라면, 벌하고 끔찍하게 보복하는 신을 가르치는 건 작용하지 않는다. 이 역시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오직 동기motive만이전부고, 목표가 결과를 결정한다. 삶은 너희의 의도에서 비롯되고, 너희의 참된 의도는 행동으로 드러나며, 너희의 행동을 결정하는 건 너희의 참된 의도다. 삶의 모든 것이(그리고 삶 자체가) 그러하듯, 이것도 순환이다.
고진재들은 그 순환을 보지만, 인간들은 보지 못한다.
고진재들은 있는 그대로에 대처하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무시한다.
고진재들은 항상 진실을 말하지만, 인간들은 남에게만이 아니라 자신에게까지 너무 자주 거짓을 말한다.
고진재들은 하나를 말하면 말한 대로 행하지만, 인간들은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르다.
너희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안다. “시애틀로 가려고” 했는데, “샌어제이”에 와 있는 게 아닌가! 이제 너희는 자기 행동의 모순을 보면서 그걸 던져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너희는 있는 그대로와 도움 되는 것, 양쪽 다를 분명하게 보면서, 둘 사이의 괴리를 더 이상 부추기지 않으려 하고 있다.
너희는 실현의 시간을 눈 앞에 둔 깨어나는 종이다.
여기서 들은 이야기들 때문에 너희가 낙담할 필요는 없다. 새로운 체험, 더 큰 현실을 위한 토대는 이미 놓여졌고, 이 모든 것이 그냥 그것을 위한 준비에 지나기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제 문을 지나 걸어갈 준비가 되었다.
이 대화는 무엇보다 그 문을 열어 젖히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그것을 가리키기 위해서. 보이는가? 저기 있다! 진리의 빛이 그 길을 영원히 비춰줄 것이기에. 여기서 너희가 받은 것이 바로 그 진리의 빛이다.
이제 이 진리를 집어들고 그것에 따라 살아라. 이제 이 진리를 부여잡고 남들과 함께하라. 이제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한없이 더 귀히 여겨라.
이 세 권의 책-<신과 나눈 이야기> 삼부작-에서 나는 너희에게 있는 그대로를 되풀이해서 말해주었다.
더 멀리 나갈 필요는 없다. 더 많은 질문을 하거나, 더 많은 대답을 듣거나, 더 많은 호기심을 만족시키거나, 더 많은 예를 제시하거나, 더 많은 관찰을 내놓을 필요는 없다. 너희가 바라는 삶을 창조하는 데 필요한 전부가 여기에, 그토록 많은 것이 제시된 이 삼부작 속에, 이미 들어 있다.
그렇다, 너는 더 많은 질문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너는 더 많은 “하지만 만일 ~ 하면”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너는 우리가 즐겼던 이 탐구를 아직 “그만두지” 않았다. 그건 너희가 어떤 탐구도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 한없이 계속될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신과 나누는 네 대화는 그러하겠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네가 물을 수 있는 다른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 또한 여기서, 이제 완전해진 이 삼부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기에.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되풀이하고, 다시 부언하고, 같은 지혜로 몇 번이고 다시 되돌아가는 것뿐이다. 그 점에서는 이 삼부작조차 연습이다. 여기에 새로운 건 아무 것도 없다. 다만 다시 찾아간 태고의 지혜들이 있을 뿐.
거기에 다시 찾아가는 건 좋은 일이다. 그것에 다시 한번 익숙해지는 건 좋은 일이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자주 말했던 기억해내는 과정이다. 너희는 아무것도 배울 게 없다. 단지 기억해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이 삼부작을 자주 찾아가라. 그 내용들을 몇 번이고 다시 찾아봐라.
여기서 답해지지 않았다고 느끼는 질문이 떠오를 때, 그 책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라. 그러면 그 질문이 이미 답해졌음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답해지지 않았다고 느낀다면, 너 자신의 답변을 찾아라. 너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너 자신의 진실을 창조하라.
그 속에서 너는 ‘자신이 진실로 누군지’ 체험하리니.
21
가시게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 모든 면에서.
제발, 끝내기 전에 딱 두어 가지만 더 질문할게요. 마지막 마무리 질문들요.
너는 언제라도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걸 모르겠느냐? ‘영원한 지혜의 자리’로 되돌아가, 거기서 네 답변들을 찾을 수 있다는 걸?
그래요. 저도 그걸 압니다. 그리고 그게 이런 식인 것에 제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감사하고 있습니다. 삶이 이런 식으로 창조되고, 제가 그 자산을 항상 가지고 있다는 것에요. 하지만 이 대화는 제게 큰 도움이 되어왔습니다.
이건 저한테 굉장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냥 두어 가지만 마지막으로 질문하면 안 될까요?
물론 된다.
인간 세상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게 진짭니까? 인간들이 자멸-사실상의 소멸-을 걸고 불장난을 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다. 그것을 대단히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그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저항할 때, 그것은 지속되기 때문이다. 너희가 끌어안을 때만, 그것은 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시간과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잊지 마라. 너희가 상상할 수 있었던, 아니 실제로 상상했던 모든 사건들이 바로 지금, 그 ‘영원한 순간’에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성스런 찰나’이고, 너희의 자각을 앞서가는 순간이며, 빛이 너희에게 닿기도 전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것은 너희가 그것을 알기도 전에, 너희가 창조하여, 너희에게 보낸 현재 순간 present moment이다. 너희는 이것을 “선물present”이라 부른다. 사실 그것은 “선물”이다. 그것은 신이 너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너희는 지금껏 상상했던 모든 체험 중에서 너희가 지금 체험하려는 것을 선택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이제야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한정된 인식 안에서요. 이중 어떤 것도 실제로는 “진짜”가 아니죠, 그렇죠?
그렇다. 너희는 환상을 살고 있다. 이것은 대 마술쇼다. 그리고 너희는 그 속임수를 모르는 체한다. 너희 자신이 마술사인데도 말이다.
이걸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모든 걸 아주 진짜처럼 만들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제가 보고 느끼고 냄새맡고 건드리는 것들 모두가 흡사 진찌처럼 보이는 데요. 그게 “진짜”가 아니라면, 그럼 뭐가 진짭니까?
사실 너희는 자신이 쳐다보는 걸 “보는” 게 아니란 사실을 염두에 둬라.
너희 뇌는 지성의 원천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자료 처리기다. 그것은 감각이라 불리는 수신장치를 통해서 자료를 받아들이고, 그 주제와 관련된 예전 자료들에 따라 형성 중인 이 에너지를 해석한다. 뇌는 실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각한 것을 너희에게 말해준다. 이 지각에 근거해서 너희는 자신이 어떤 것의 진실을 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그것의 반밖에 모르면서도. 자신이 아는 진실을 만들어내는 건 사실 너희 자신이다.
당신과 나눈 이 대화도 다 포함해서요.
그건 가장 확실한 예다.
전 그 말씀이 “그는 신에게 말하는 게 아냐, 그는 그 모든 걸 꾸며 내고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기름을 붓는 격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온유하게 말하라. “칸 밖에서” 생각해보라고. 그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도 “이것이면서 또한 저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현재 통용되는 가치와 개념과 이해 안에서 생각하는 한, 너희는 신을 알 수 없다. 너희가 신을 알고 싶다면, 이 주제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주장하기보다는, 자신이 현재 지닌 자료가 한정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참된 명확성은 기꺼이 주목하고자 할 때만을 올 수 있다고 선언했던 베르너 에르하르트의 다음 말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 알게 되면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뭔가가.”
너희는 “신에게 말하면서” 또한 “그 모든 걸 꾸며낼” 수 있다. 그것은 그냥 가능하다.
사실 여기에 가장 장대한 진리, 너희는 만사를 꾸며내고 있다는 진리가 있다.
삶은 모든 것이 창조되는 과정이다. 신은 너희가 삶이라 부르는 순수 생자 에너지다. 이런 깨달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진리를 가져다준다.
신은 ‘과정’이다.
저는 당신이, 신은 ‘집합체’, 신은 ‘전체’라고 말씀하신 걸로 아는데요.
그렇다, 그렇게 말했다. 신은 그러하다. 동시에 신은 전체가 창조되고, 전체가 자신을 체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네게 이걸 계시한 적이 있다.
그래요, 맞아요. 당신은 제가 <당신 자신을 재창조하려면>이란 소책자를 쓰고 있을 때 그런 지혜를 주셨더랬습니다.
맞다. 그리고 이제 나는 훨씬 더 많은 청중이 받아들 수 있도록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하려 한다.
신은 ‘과정’이다.
신은 사람이나 장소나 사물이 아니다. 신은 너희가 항상 생각해왔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바로 그것이다.
다시 한번?
너희는 언제나 신이 지고의 존재Supreme Being라고 생각해왔다.
그렇습니다.
그 점에서 너희는 옳았다. 나는 바로 그것, ‘존재’다. “존재”는 과정이지, 사물이 아님을 알아둬라.
나는 지고의 ‘존재’다. 다시 말해 지고의, 쉼표, 되고 있음being이다.
나는 과정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 자체다. 나는 창조주고, 나는 나를 창조한 ‘과정’ 자체다.
너희가 하늘과 땅에서 보는 모든 것이 창조되고 있는 나다. 창조과정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 완결되지 않는다. 나는 결코 “되어지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천지만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어떤 것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에너지energy, in motion다. 지상의 속기로 너희가 “감정”E-motion이라 부르는 게 이것이다!
너희는 신의 가장 고귀한 감정이다!
너희가 뭔가를 바라볼 때, 너희는 시공간 속의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뭔가”를 보고 있는 게 아니다. 천만에! 너희는 사건을 목격하고 있다. 모든 게, 그야말로 그 모든 게 움직이고 변하고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동사인 것 같다”고 말한 사람은 버크민스터 풀러였다. 그는 옳았다.
신은 사건이다. 너희는 그 사건을 삶이라 불러왔다. 삶은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관찰할 수 있고, 알 수 있고, 예견할 수 있다. 더 많이 관찰할수록, 너희는 더 많이 알고, 그 만큼 더 많이 예견할 수 있다.
저로서는 이걸 받아들이기가 힘들군요. 전 항상 신을 불변이라 여겼거든요. 유일한 상수(常數), 부동의 동인요. 저는 이 불가해한 절대 진리 안에서 제 안식처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진리다! 유일한 불변의 진리는, 신은 언제나 변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게 진리다. 너희가 무슨 짓을 해도 이걸 바꿀 순 없다. 결코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삼라만상이 언제나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삶은 변화다. 신은 삶이다.
따라서, 신은 변화다.
하지만 저는 결코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우리에 대한 신이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데요.
너희에 대한 내 사랑도 항상 변한다. 너희 자체가 항상 변하고 있고, 나는 있는 그대로의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그대로의 너희를 사랑하려면, ‘자신’에 관한 너희의 관념이 바뀌는 데 따라 무엇이 “사랑스러운가”에 관한 내 관념도 바뀌어야 한다.
그 말씀은 제가 살인자가 되기로 작정하더라도, 당신은 제게서 사랑스러움을 찾아내시리란 뜻입니까?
우리는 이 모든 걸 전에도 이야기했다.
압니다. 하지만 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들의 세상형을 전제로 하면 부적절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너희를 언제나 사랑한다. 모든 면에서. 너희는 어떤 “면에서도”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상태로 될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를 벌하실 거죠, 그렇죠? 당신은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벌하시겠죠. 끝없는 고통 속으로 우리를 보내실 거구요. 당신 가슴 속의 사랑을 담아서, 당신이 그래야 했다는 걸 슬퍼하면서.
아니다. 나는 결코 아무것도 슬퍼하지 않는다. 내가 “해야하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대관절 누가 나더러 “그래야 하도록” 만들 수 있단 말이냐?
나는 결코 너희를 벌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너희가 이번 생이든 다른 생애든 간에,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을 때까지 자신을 벌하려 할 수는 있지만, 나는 다치거나 해 입은 적이 없고, 내-실상 너희모두인-부분을 너희가 다치게 하거나 해 입힐 수도 없으니, 나는 너희를 벌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 중 하나가 다치거나 해 입었다고 느끼길 선택한다 해도, 영원의 영역으로 되돌아왔을 때, 너희는 자신이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음을 알 것이고, 그 순간 너희는 자신에게 해를 입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용서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더 큰 계획을 이해하게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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