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3 (8)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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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로 진화된 문명과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에 대해 더 이야기해주십시오. 그들이 어떤 이유로 서로를 죽이지 않는다는 사실말고 다른 어떤 점이 그들을 우리와 구별해줍니까?
그들은 공유한다.
우리도 공유해요!
아니다, 그들은 모든 걸 모두와 공유한다. 어떤 한 존재도 없이 지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 세상과 환경의 천연자원 모두를 똑같이 나누어서 모두에게 똑같이 분배한다.
어떤 국가, 어떤 집단, 어떤 문화도 자원이 발견된 그 자리를 어쩌다 보니 차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종들의 집단이 “고향”이라 부르는 행성(혹은 행성들)은 모두에게, 그 체계 속의 모든 종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실 행성이나 행성 집단 자체가 하나의 “체계”로 이해된다. 그것은 그 체계 자체에 해를 입히지 않고서도, 그중 하나를 배제하거나 학살하거나 근절할 수 있는 작은 부분이나 요소들의 묶음으로서가 아니라, 유기 체계a Whole system로 간주된다.
우리 표현으로 하면 생태계군요.
음, 그보다 더 큰 것이다. 그것은 그 행성의 천연자원과 행성 거주자간의 관계를 뜻하는 그냥 생태학이 아니다. 그것은 거주자들이 자신과, 자신들 상호간과, 환경에 대해 갖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것은 생명 있는 모든 종들의 상호관계다.
“종체계speciesystem”요!
맞다!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든다. 잘 맞는 단어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생태계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그건 정말로 종체계다. 너희 버크민스터 풀러가 인지권(인간 활동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바꿀 수 있는 생활권-옮긴이)이라 불렀던 것.
전 종체계 쪽이 더 마음에 듭니다. 더 이해하기 쉽거든요. 전 인지권이란 게 대관절 뭘 말하는지 항상 아리송했거든요.
“벅키”도 네 말을 마음에 들어한다. 그는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사태를 더 단순하고 쉽게 만드는 것이면 뭐든지 항상 마음에 들어했다.
당신은 지금 버크민스터 풀러와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이 대화를 교령회(交靈會) 모임으로 바꾸신 겁니까?
나로서는 자신을 버크민스터 풀러와 동일시했던 그 본체essence가 네 새 단어에 기뻐한다는 걸 알려줄 이유가 있었다고만 해두자.
우와, 굉장하군요. 제 말은 정말 끝내준다는 겁니다. 그걸 그냥 알 수 있다니 말입니다.
그렇다, 그건 “끝내준다”
그러니까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에서는 이 종체계가 중요한 거군요.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별 존재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정반대다. 개별 존재들이 중요하다는 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종체계에 미치는 영향을 맨 먼저 고려한다는 데서 이미 드러난다.
그 문화들은 모든 생명, 모든 존재를 최상의 수준에서 부양해준 게 종체계임을 이해한다. 따라서 종체계를 해롭게 할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은 개별 존재들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위나 영향력이나 돈 있는 개별 존재들만이 아니라, 권세나 수완을 가진 개별 존재들, 혹은 더 큰 자기 인식을 가졌다고 추정되는 개별 존재들만이 아니라 그 체계 안의 모든 존재, 모든 종들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 행성에서는 일부 종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른 종들의 필요와 요구가 종속되지 않을 수 없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아는 대로의 삶을 체험할 수 없었을 겁니다.
너희는 위태롭게도 “지금 너희가 아는 대로의 삶을” 체험하지 못할 때를 향해가고 있다. 너희가 대다수 종들의 필요를 오직 한 종의 바램에 종속시키길 고집해왔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인간종요.
그렇다. 그것도 그 종의 구성원 모두가 아니라 오직 소수만의 바램에. 그것도 최대수가 (그랬더라면 그나마 조금은 사리에 맞는다고 할 수는 있었겠지만) 아니라 극소수의 바램에.
최고 부자와 최고 권력자들 말이군요.
너희는 그들을 그렇게 불러왔다.
여기서 또 시작하시겠군요. 부자와 출세가들을 비난하는 또 한번의 장광설요.
천만에. 너희 문명은 장광설을 들을 자격이 없다. 그건 어린애들을 방안 가득 모아놓고 장광설을 늘어놓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 존재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더 이상 자신들에게 가장 이롭지 않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 지금 하는 일을-자신에게도, 서로에게도-계속해나갈 것이다. 아무리 많은 장광설로도 이런 상황을 바꿀 순 없다.
장광설로 상황을 바꿀 수 있었다면, 너희 종교는 이미 오래 전에 훨씬 더 유능해졌을 것이다.
우와! 팡! 퍽! 오늘은 모두를 상대로 항복을 받아내시는군요.
나는 전혀 그런 식으로 하고 있지 않다. 이런 간단한 관찰들이 너희를 뜨끔하게 하느냐? 그렇다면 왜 그런지 살펴봐라. 이 정도야 너희도 나도 다 알고 있다. 진리는 불편한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진리를 가져오기 위해서 왔다. 내가 영감을 준 다른 책들과 영화들과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그러하듯이.
그렇다고 사람들더러 텔레비전을 보라고 부추기고 싶지는 않은데요.
좋든 나쁘든 이제 텔레비전은 너희 사회의 모닥불이다. 너희가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쪽으로 너희를 데려가는 건 매체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건 너희가 거기에 실은 메시지다. 매체를 거부하지 마라. 언젠가 다른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너 자신이 그것을 사용할 수도 있으니.......
괜찮으시면 다시 돌아갔으면 하는데요....... 제가 여기서 했던 본래의 질문으로 되돌아가도 될까요? 전 아직도 어떻게 해서 종체계가 그 체계 안의 모든 종의 필요를 똑같이 다루면서도 잘 굴러갈 수 있는지 알고 싶거든요.
필요들은 완전히 똑같이 다뤄지지만, 그렇다고 필요 자체가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다. 그것은 비율의 문제고, 균형의 문제다.
우리가 여기서 종체계라 부르기로 했던 것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에게는, 그 체계를 창조하고 지탱하는 물질형상들로 살아남으려 할 때,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필요들이 있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은 이 점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그 체계 자체에 요구하는 이 필요들이 모두 똑같지는 않다는 점도 이해한다.
너희 종체계를 예로 들어보자.
그러죠........
너희가 “나무”와 “사람”이라 부르는 두 생물종을 예로 들면.......
듣고 있습니다.
나무가 사람과 똑같은 일상 “건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건 명백하다. 따라서 그 둘의 필요도 같지 않다. 하지만 그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 너희는 나무의 필요에도 인간이 필요와 똑같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나무의 필요 자체는 인간의 그것만큼 크지 않다. 그렇다고 너희가 살아 있는 다른 종의 필요를 무시한다면, 그건 되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앞서 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언급했던 책,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런 상황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나무는 공기 중에서 이산화탄소를 취해서, 이 대기가스의 탄소 부분을 탄수화물을 만드는 데, 다시 말해 자라는 데 이용한다.
(뿌리와 줄기, 잎, 나아가 나무가 맺는 열매와 과일들까지 포함해서, 식물은 거의 대부분이 탄수화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이에 나무는 이 가스의 산소 부분을 방출한다. 그것은 나무의 “분비물”이다.
반면에 인간 존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산소가 필요하다. 너희 대기 속에 충분히 있는 이산화탄소를 충분치 못한 산소로 바꾸는 나무가 없다면, 너희는 종으로서 생존할 수 없다.
그 대신 너희는 나무가 생존하는 데 필용한 이산화탄소를 방출한다(호흡으로 내놓는다.)
너는 그 균형을 볼 수 있겠느냐?
물론이죠. 정말 정교하군요.
고맙다. 그렇다면 이제 그 균형을 무너뜨리는 짓을 그만둬라.
하지만 우리는 나무 한 그루를 자를 때마다 나무 두 그루씩을 새로 심었습니다.
그렇겠지, 그리고 그 나무들이 너희가 베어내는 그 고목들만큼 많은 산소를 배출할 정도의 강도와 덩치로 자라는 데는 겨우 300년밖에 안 걸릴 테고.
너희 행성의 대기를 균형 잡는 능력에서, 아마존 열대우림이라 부르는 산소 제조 공장을 재건하는 데는 기껏해야 2~3000년이면 충분할 테고.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너희가 해마다 몇천 에이커씩을 개간하더라도 걱정할 것 없다.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땅을 개간해야 도살해서 먹을 양을 기를 수 있고, 양을 키우면 열대우림 국가들의 토착민들에게 더 많은 수입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게 너희 주장이다. 따라서 너희는 이 모든 게 토지를 생산적으로 만들어준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고도로 진화된 문명들에서는 종체계를 침해하는 걸 파괴적인 것으로 보지, 생산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고진재들은 종체계의 전체 필요들을 균형 잡을 방법을 발견했다. 그들이 그 체계 중 작은 일부분의 바램에만 봉사하지 않고 이렇게 하는 쪽을 선택한 건, 그 체계 자체가 무너진다면 체계 안의 어떤 종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젠장, 그건 너무나 명백한 사실 같군요. 고통스러울 만큼 명백한 사실말입니다.
앞으로 지구는 그 사실이 “명백함” 때문에 훨씬 더 고통스러워질 수 있다. 이른바 지구의 지배종이 깨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을 접수할게요. 대폭 접수할게요. 그래서 저도 그 점에서 뭔가 했으면 합니다. 하지만 제 자신이 너무 무력한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이 무척 무력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변화시키기 위해서 제가 뭘 할 수 있습니까?
네가 해야 할do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네가 될be 수 있는 건 대단히 많다.
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인간 존재들은 오랫동안 “행위”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써왔지만,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참된 변화는 언제나 “행위” 차원이 아니라 “존재”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 물론 너희는 몇몇 발견들을 했고, 기술을 발달시켰으며, 그리하여 어떤 면에서는 너희 삶을 더 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너희가 삶을 더 낫게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게다가 더 큰 원리 문제들에서 너희의 진보는 무척 느리다. 너희가 현재 직면해 있는 원리 문제들 중 상당수가 너희 행성에서 과거 몇 세기 동안 계속해서 직면해오던, 여전히 그 문제들이다. 지구는 지배종의 착취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너희의 관념이 좋은 예다.
너희가 지금 되어 있는 상태를 바꿀 때까지, 그것을 둘러싸고 너희가 취하는 행동을 바꾸지 않으리란 건 명약관화하다.
너희가 조금이라도 다르게 행동하고자 한다면, 너희는 먼저 환경 안의 모든 것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누군지에 관한 관념부터 바꿔야 한다.
그러니 그것은 의식의 문제다. 그리고 너희가 의식을 바꿀 수 있으려면, 너희는 먼저 의식을 끌어올려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 모든 것에 대해 침묵하기 그만둬라. 큰 소리로 말하고, 소란을 피우고, 문제를 제기하라. 그렇게 하면 너희의 집단의식까지도 일부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딱 한 가지 문제만 예를 들어보자. 왜 삼(대마)을 길러서 그걸 종이 만드는 데 쓰지 않느냐? 종이컵과 종이팩, 종이타월은 말할 것도 없고, 일간신문을 너희 세상에 공급하는 데만도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필요한지 알고나 있느냐?
삼은 값싸게 키울 수 있고, 손쉽게 수확할 수 있으며, 종이 만드는 데만이 아니라, 가장 질긴 밧줄과 가장 오래가는 옷감, 나아가서는 너희 행성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몇몇 치료약들을 만드는 데까지도 이용할 수 있다. 사실 마리화나(대마)는 너무나 값싸게 키울 수 있고, 너무나 손쉽게 수확할 수 있으며, 너무나 많은 놀라운 용도들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에 반대하는 어마어마한 로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세상이 거의 어디서나 자랄 수 있는 이 수수한 식물로 얼굴을 돌리게 놔뒀다가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사에서 탐욕이 어떻게 상식을 바꿔치기하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 책을 네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들이 이런 사실을 접수할 뿐 아니라, 이 책이 말해야 했던 다른 모든 것들도 접수할 수 있도록, 그리고 여전히 더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냥 페이지를 넘겨라........
그래요, 하지만 전 우울해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2권을 읽고 난 뒤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가졌다고 하듯이요. 우리가 세상을 어떤 식을 파괴하고 있는지, 아니 사실상 그걸 폭파하고 있는지 앞으로도 더 이야기하실 작정이십니까? 왜냐하면 제가 이걸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너는 고무되는 건 담당할 수 있느냐? 흥분되는 건 감당할 수 있느냐? 다른 문명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배우고 탐구하는 게 너희를 얼마나 고무하고 흥분시킬지 생각해봐라!
그 가능성들을 생각해봐라! 그 기회들을 생각해봐라! 모퉁이만 돌아서면 펼쳐질 황금빛 내일을 생각해봐라!
우리가 깨어난다면요.
너희는 깨어날 것이다! 너희는 깨어나고 있다! 패러다임이 변하고, 세상이 바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너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책이 그 일부고, 너희 또한 그 일부다. 잊지 마라, 너희는 방을 치유하려고 그 방에 있는 것이고, 공간을 정화하려고 그 공간에 있는 것이다. 너희가 여기 있을 다른 이유는 없다.
포기하지 마라! 절대 포기하지 마라! 가장 장대한 모험이 이제 막 시작되었으니!
좋습니다. 전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의 사례와 지혜로 고무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그 때문에 낙담하지 않고요.
잘했다. 바로 이런 게 현명한 선택이란 거다. 너희가 한 종으로서 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을 전제로 한다면 말이다. 너희는 그 존재들을 관찰함으로써 많은 것을 기억해낼 수 있다.
고진재들은 서로간의 연결성을 깊이 느끼면서 조화롭게 살고 있다. 그들의 행동을 좌우하는 건, 너희라면 ‘사회의 기본 지도원리’라고 불렀을, 그들의 받침 생각이다. 너희의 행동 또한 너희의 받침 생각, 즉 너희 사회의 기본 지도원리에 좌우된다.
고진재 사회의 기본 지도원리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첫 번째 지도원리는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것이다.
모든 결정과 모든 선택, 너희라면 “도덕”과 “윤리”라고 불렀을 모든 것이 이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두 번째 지도원리는 ‘하나’ 안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원리 하에서 한 종의 어떤 구성원도 단순히 뭔가를 “그가 먼저 가졌다”거나, 그것이 그의 “것”이라거나, 그것이 “모자란다”고 해서, 남이 그것을 못 갖게 할 수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그 종체계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상호의존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그 체계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유기체 종들의 상대적인 필요는 언제나 균형이 유지된다kept in balance. 그들이 그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기kept in mind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지도원리는 개인 소유 따위는 없다는 뜻입니까?
너희가 이해하는 방식으로는 없다.
고진재는 자신이 보살피는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개인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개인 소유”를 경험한다. 너희라면 “점유권의 존중”이라고 불렀을 것에 대해 고진재가 느끼는 감정을 너희 언어에서 가장 비슷하게 나타낼 수 있는 말은 관리권이다. 고진재는 관리자지, 소유자가 아니다.
“소유한다”는 말과 그 말 뒤에 깔린 너희식 개념은 고진재 문화의 일부가 아니다. 뭔가가 “개인에게 속한다”는 의미에서 “소유” 같은 건 없다. 고진재들은 소유하지 않고 보살핀다. 다시 말해 그들은 만물을 유지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돌보지만, 그것들을 소유하지는 않는다.
인간들은 소유하지만, 고진재들은 보살핀다. 이것이 너희 언어로 그 차이를 묘사할 수 있는 방식이다.
너희 역사의 초기에, 인간들은 자신이 손댄 것이면 무엇이든 자기가 가질 권리가 있다고 느꼈다. 여기에는 아내와 자식들과 토지와 그 토지에서 나오는 부들도 들어갔다. “동산(動産)”과 그 동산이 그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다른 모든 “동산” 역시 그들의 것이었다.
인간 사회는 이런 믿음의 상당 부분을 지금도 여전히 진리로 삼고 있다.
인간들은 이 “소유”라는 개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멀리서 이를 지켜본 고진재들은 이것을 너희의 “소유 강박관념”이라 불렀다.
이제 진화해감에 따라, 너희는 사실 어떤 것도-너희 배우자와 자식들은 말할 것도 없고-진짜로 소유할 수는 없음을 점점 더 많이 이해해가고 있다. 하지만 너희 중 다수는 지금도 여전히 자신이 땅을 소유할 수 있고, 땅 위에 땅 아래, 그리고 땅 위의 하늘까지 소유할 수 있다는 관념에 매달려 있다. (그렇다, 너희는 “공중권”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반면에 우주의 고진재들은 자신들이 발 딛고 있는 물질 행성이란 건 어떤 단일 존재에 의해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 물론 그들 사회의 매커니즘에 따라 보살펴야 할 땅 조각들이 개별 고진재들에게 주어질 수는 있다. 그리고 그녀가 그 땅을 훌륭히 관리한다며, 사회는 그녀가 자기 자식들에게, 또 그들은 그 자식들에게 그 땅의 관리권을 넘겨주도록 허용한다(부탁한다). 하지만 그나 그의 자식이 그 땅의 관리자로서 서투르다는 것이 드러날 때는 언제라도, 그 땅은 더 이상 그들의 보살핌을 받지 않는다.
우와! 이런 게 이 지구에서의 지도원리라면, 세상 산업의 절반이 자산(資産)을 포기해야겠군요!
그리고 세상의 생태계는 하룻밤만에 극적으로 개선될 테고.
보다시피, 고도로 진화된 문화에서는, 너희가 말하는 식의 “기업”이 이윤을 창출한답시고 토지를 약탈하도록 놔두는 일 같은 건 절대 없다. 사실 그 기업의 소유자나 그 기업의 노동자인 바로 그 사람들의 삶의 질이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피해를 입고 있음이 확실한데, 그런 속에서 무슨 이윤을 찾을 수 있겠는가?
글쎄요, 그런 피해는 몇 년이고 느껴지지 않을 수 있지만, 이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되니까요. 그래서 그걸 단기 이윤/장기 손실이라고 하는 걸 겁니다. 하지만 장기 손실을 체험할 때쯤엔 자기가 그 자리에 없을 거라면, 누가 장기 손실에 신경을 쓰겠습니까?
고도로 진화된 존재라면 신경을 쓴다. 게다가 그들은 훨씬 더 오래 산다.
얼마나 오래요?
몇배나 오래. 몇몇 고진재 사회의 존재들은 영원히, 다시 말해 그들이 육신 형상으로 남아 있기를 택하는 한 계속 산다. 따라서 고진재 사회에서는 개별 존재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가져온 장기적인 결과들을 체험할 때까지도 살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오래 살아 남을 수 있습니까?
물론 너희가 그러하듯이, 그들 역시 살아 있지 않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나는 네 말뜻을 안다. 너는 “몸을 가지고” 살아 있느냐는 뜻으로 물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몸을 가지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이게 어떻게 가능하죠?
첫째로 그들은 고기와 물과 땅을 오염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흙 속에다 화학물질들을 집어넣지 않는다. 그런 화학물질들은 식물과 동물들에게 흡수되고, 그 다음엔 그 식물과 동물들을 섭취하는 너희 몸 속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사실 고진재라면 고기를 섭취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더군다나 땅과, 동물이 먹는 식물들을 화학물질로 채움으로써, 다시 그 동물 자체를 화학물질로 가득 채운 다음, 그것을 섭취하는 일 같은 건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고진재는 정확하게 그런 행위를 자살행위로 평가한다.
따라서 고진재들은, 인간들이 하듯이 자신들의 환경과 대기와 자기 육신을 오염시키지 않는다. 너희 육신은 너희가 지금 허용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오래 “버티게” 되어 있는 장대한 창조물이다.
그리고 고진재들이 보여주는 심리행동들도 삶을 연장해주는 데 기여한다.
예를 들면요?
고진재는 걱정하는 일이 없다. 그들은 “걱정”이나 “스트레스” 같은 인간의 개념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또 고진재라면 “미워하거나” “분노하거나” “질투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고진재들은 자기 몸을 갉아먹고 망치는 체내 생화학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고진재라면 이것을 “자기 갉아먹기”라고 불렀을 것이고, 고진재라면 자신을 소모하자마다 다른 육신 존재를 섭취했을 것이다.
고진재들은 어떻게 이렇게 하죠? 인간들도 그런 식으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고진재들은 만사가 완벽함을 이해한다. 우주에는 저절로 굴러가는 과정이 있어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곤 거기에 개입하지 않는 것뿐임을. 그 과정을 이해하는 고진재로서는 절대 걱정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답한다면, 그렇다, 인간들도 이런 조절력을 가질 수 있다. 비록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힘을 가졌다는 걸 믿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 힘을 행사하지 않지만, 반면에 노력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훨씬 더 오래 산다. 화학물질들과 대기 오염이 그들을 죽이지 않아왔고, 여타 방식으로 그들이 자진해서 자신을 독살하지 않아왔다고 가정하면.
잠시만요. 우리가 “자진해서 자신을 독살한다”고요?
너희 중 일부는 그렇다.
어떻게요?
앞에서 말했듯이 너희는 독을 먹는다. 또 너희 중 일부는 독을 마시고, 너희 중 일부는 독을 피우기까지 한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에게는 그런 행동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친다. 그들로서는 왜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너희 스스로도 아는 물질들을 일부러 자기 몸 속에 집어넣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음, 우리는 어떤 걸 먹거나 마시거나 피우면 즐겁다는 걸 알거든요.
몸 속의 삶이 즐겁다는 걸 아는 고진재로서는, 그런 삶을 한정짓거나 끝내거나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음을 미리 알면서 그렇게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우리 중에는 시뻘건 고기를 양껏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염초를 피우는 게 우리 삶을 한정짓거나 끝내거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거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죠.
그렇다면 그들의 관찰기술이 무척 무딘 것이다. 그들은 예리해질 필요가 있다. 고진재라면 너희더러 그냥 주위를 둘러보라고 제안했을 것이다.
그래요, 그랬겠죠....... 우주의 고도로 진화된 사회들에서 사는 게 어떤 건지 말씀해주실 또 다른 게 있습니까?
수치스러워하지 않는다.
수치스러워하지 않는다고요?
죄의식 같은 것도 없다.
땅의 서투른 “관리인”임이 밝혀진 존재라면 어떻습니까? 당신은 좀 전에 그들은 그 땅을 그에게서 빼앗는다고 말했어요! 이건 그를 심판해서 죄를 찾아냈다는 뜻 아닙니까?
아니다. 그건 그를 관찰하여 할 수 없다는 걸 찾아냈다는 뜻이다.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에서는 할 수 없다고 밝혀진 일을 하라고 요구받는 일이 없다.
그래도 그들이 그 일을 하고 싶어하면요?
그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왜요?
이미 드러난 자신의 무능력이 그들이 그런 것을 바라지 않도록 만들 것이다. 이것은, 특정한 어떤 일을 할 능력이 없을 때 다른 사람들이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그들의 이해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결과다. 그들은 결코 이렇게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은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이고, 또 그들은 이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건 여전히 체험을 끌어가는 “자기 지속성”self preservation이 있다는 얘기군요. 지구에서처럼요!
당연히! 단 하나 다른 것은 “자기”에 대한 그들의 규정이다. 인간은 자기를 너무 협소하게 규정한다. 너희는 나 자신과 내 가족과 내 공동체라고 말한다. 고진재는 자기를 전혀 다르게 규정한다. 그녀는 자신과 가족과 공동체라고 말한다.
오직 하나뿐인 것처럼.
오직 하나뿐이다. 바로 그게 핵심이다.
이해가 갑니다.
따라서 고도로 진화된 문화에서는 예를 들면, 육아에서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을 자기 눈으로 몇 번이나 직접 확인한 존재가 자식 기르기를 고집하는 일이 절대 없다.
이 때문에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에서는 아이가 아이를 기르지 않는다. 그들은 노인들에게 자식을 길러달라고 맡긴다. 이것은 새로 태어난 아이를 생명 준 사람들에게서 떼어내고, 그들의 품안에서 뺏아서, 생판 낯선 사람에게 길러달라고 넘겨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문화들에서는 노인들이 젊은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간다. 노인들은 혼자 힘으로 살아가도록 버려지거나, 무시되거나, 마지막 운명을 다하게끔 방치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과 보살핌과 활기로 가득한 공동체의 일부로서 존경받고, 존중되고, 가까이 모셔진다.
갓난아이가 세상에 도착할 때, 노인들은 바로 그 자리에, 그 공동체와 그 가족의 심장부 깊은 곳에 함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아이를 기르는 건, 너희 사회가 이런 일은 부모더러 하게 하는 게 합당하다고 느끼는 것만큼이나 유기체로서 타당한 일이다.
차이는, 그들 역시 자기 “부모들”-그들의 언어에서 가장 근접하는 용어는 “생명 주는 이”일 것이다-이 누군지는 언제나 알고 있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그 자신도 아직 삶의 근본에 대해서 배우고 있는 존재들로부터 삶의 근본에 대해 배우도록 요구되지는 않다는 데 있다.
고진재 사회에서는 노인들이 주생활과 식생활, 아이들 보살피기만이 아니라, 배움의 과정도 조직하고 감독한다. 아이들은 지혜와 사랑, 크나큰 인내와 깊은 이해로 충만한 환경 속에서 길러진다.
그들에게 생명을 준 젊은 사람들은 대개 어딘가 다른 곳으로 나가서 도전 과제들을 만나고, 젊은 삶이 주는 그들 나름의 기쁨들을 체험한다. 혹은 그들이 선택하는 만큼 많은 시간을 자기 자식들과 함께 보내거나, 때로는 연장자 거주지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 수도 있다. “가정”환경 속에서 아이들 바로 옆에 있으면서, 아이들에게 자신들을 그 환경의 일부로 체험케 하는 식으로.
그 모두가 대단히 통일되고 일관된 체험이다. 하지만 양육을 하고 그 책임을 지는 것은 노인들이다. 그리고 종 전체의 미래에 대한 책임이 노인들에게 지워지는 만큼, 그것은 일종의 명예다. 고진재 사회들은 이 일이 젊은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수준 이상임을 인정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다. 너희 행성에서 자식들을 기르는 방법과 그것을 바꿀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할 때.
맞아요. 그리고 이번에는 그것이 어떤 식으로 운영될 수 있는지 더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되돌아가서요, 고진재는 무슨 짓을 해도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겁니까?
그렇다. 죄의식이나 수치심 따위는 본래 자기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내면화될 수 있다는 건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어쨌든 그것은 처음에는 외부에서 주어진다. 예외 없이 항상. 어떤 신성한 존재도(그리고 모든 존재가 신성하다), 자기 외부의 누군가가 자기나 자기가 하는 어떤 일을 “수치스럽거나” “죄 많은” 것을 낙인찍기 전까지는, 절대 그걸 그런 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너희 문화라고 아기가 자신의 “배변 습관”을 부끄러워하는가? 당연히 아니다. 너희가 아기더러 그래야 한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아이가 자신의 성기를 가지고 즐긴다고 해서 “죄의식”을 느끼는가? 당연히 아니다. 너희가 아이더러 죄의식을 느끼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한 문화의 진화 정도는 그것이 어떤 존재나 어떤 행동에 “수치스럽다”거나 “죄 많다”는 딱지를 얼마나 많이 붙이는가로 알 수 있다.
어떤 행동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고요? 무슨 짓을 하든 아무 죄의식도 없고요?
내가 이미 말했듯이 옳고 그른 건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걸 이해하려면 이 대화를 전체 한 덩어리로 읽어야 한다. 어떤 진술이든 문맥에서 따로 떼놓은 상태에서는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나는 1권과 2권에서 위에서 말한 지혜를 자세히 설명했다. 네가 여기서 나더러 설명해달라고 부탁한 건 우주의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이다. 이미 이 지혜를 이해하고 있는 문화들 말이다.
알겠습니다. 이 문화들이 우리 문화와 다른 점이 이런 것들말고도 또 있습니까?
많은 점에서 다르다. 그들은 경쟁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 사람이 지는 건 모두가 지는 것임을 안다. 따라서 그들은 한쪽은 “지고” 다른 쪽은 “이기는” 걸 여흥이라고 보는 터무니없는 사고방식을 아이들에게(그리고 어른으로 까지 이어지면서) 가르치는 게임이나 스포츠 같은 걸 만들어내지 않는다.
게다가 앞에서 말했듯이 그들은 모든 걸 공유한다. 남이 필요로 할 때, 단지 그것이 귀하다고 해서, 자신이 지닌 것을 내놓지 않거나 쌓아둔다는 것 역시 그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오히려 그들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공유한다.
너희 사회에서는 귀한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려 하면, 귀하다는 이유로 그것의 값이 올라간다. 이런 식으로 해서 너희는 “소유한” 것을 나누는 것이 어쨌든 너희를 부유하게 만들어주도록 보장한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 또한 귀한 것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부유해진다. 고진재와 인간의 유일한 차이점은 고진재들이 “부유함”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고진재는 “이윤을 올릴” 필요 없이 모든 것을 공짜로 나눠주는 것에서 “부유하다”고 느낀다. 사실 이런 느낌 자체가 이윤이다.
너희 문화에도 너희 행동거지를 규정하는 여러 지도원리들이 있는데, 내가 이전에 말했듯이 그중 가장 기본되는 하나가 ‘적자생존’이다.
이것을 너희의 ‘두번째 지도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너희 사회가 창조해낸 모든 것, 경제와 정치, 종교, 교육, 그리고 사회구조의 기초가 된다.
하지만 고도로 진화된 존재에게는 그 원리 자체가 모순어법이다. 그것은 자기당착에 빠져 있다. ‘우리 모두가 하나’임을 첫 번째 지도원리로 삼는 고진재로서는 “모두”가 “적응할” 때까지는 “하나”도 “적응할” 수 없다. 따라서 모두가 적응할 때까지는 “적자”도 “적응할” 수 없으니, “적자” 생존은 불가능하거나 유일하게 가능한 일이다(따라서 모순이다).
내 말을 따라오고 있느냐?
그럼요. 우린 그걸 공산주의라 부르죠.
너희 행성에서는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희생시키면서 진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모든 체제를 손쓸 수 없는 망나니 체제라고 몰아붙이면서 그것을 거부해왔다.
어떤 통치체제나 경제체제가 “모두”에게 속하는 자원을 가지고, “모두”가 창출한 이익을 “모두”에게 균등하게 분배할 것을 요구할 때, 너희는 그런 식의 통치체제가 자연질서에 어긋난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고도로 진화된 문화에서는 균등한 공유가 자연질서다.
그 사람이나 집단이 그것을 받을 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더라도요? 공동선(公同善)에 전혀 기여하지 않았더라도요?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라도요?
삶 자체가 공동선이다. 너희는 살아 있는 것 자체로 공동선에 기여하고 있다. 영혼이 물질형상으로 있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런 형상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하는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위대한 희생이다. 설사 전체가 자신을 체험으로 알고, 지금껏 ‘자신’에 대해 지녔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가장 숭고한 해석으로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고, 나아가 즐겁기까지 하다 해도.
우리가 왜 여기에 왔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요?
그 ‘집합체’를 구성하는 영혼들.
제가 졌습니다.
내가 이미 설명했듯이 오직 ‘한 영혼’, ‘한 존재’, ‘한 본체’만이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단일 본체는 우주 속의 만물, 달리 말하면 존재 전체로 자신을 “개별화한다”. 여기에는 지각 있는 모든 존재들, 즉 너희가 영혼이라 부르기로 한 것도 들어간다.
그러니까 “신”은 “존재하는” 모든 영혼입니까?
지금 존재하고 있고, 이제껏 존재했으며, 앞으로 존재할 모든 영혼.
그렇다면 신은 “집합체”입니까?
나는 그 용어를 선택했다. 그것이 너희 언어로 그 상황을 가장 가깝게 묘사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경외스런 단일 존재가 아니라 집합체라고요?
꼭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칸 밖에서” 생각하라!
양쪽 다가 신인가요? 개별 부분들의 집합체인 경외스런 단일 존재요?
훌륭하다! 아주 훌륭하다!
그럼 그 집합체는 왜 지구로 왔습니까?
1권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했듯이, 자신을 물질성으로 체험하고, 자신의 체험으로 자신을 알고, 신이 되기 위해서.
당신은 당신이 되게 하려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까?
사실 우리는 그랬다. 너희는 바로 그 때문에 창조되었다.
어떤 집합체가 인간을 창조했다고요?
번역이 바뀌기 전에 너희 성경은, “우리,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와 닮은꼴로 인간을 창조하자”로 되어 있었다.
삶이란 신이 자신을 창조하고, 그런 다음 그 창조물을 체험하는 과정이다. 이 창조과정은 영원히 계속된다. 그것은 항“시” 일어나고 있다. 상대성과 물질성은 신이 일하는 도구들이다. ‘신’이란 건 순수 에너지(너희가 영spirit이라 부르는 것)다. 이 본체가 사실 ‘성령’이다.
에너지가 물질이 되는 과정이 영을 물질성으로 육화(肉化)시킨다. 그 에너지는 말 그대로 자신의 속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자신의 파동-너희라면 진동이라 불렀을-을 바꾸는 것으로, 이렇게 한다.
전부인 것은 일부분씩 나누어 이렇게 한다. 다시 말해 전체의 부분부분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개별화된 영이 너희가 혼soul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실 존재하는 건 자신을 다시 모양짓고 다시 만드는 오직 ‘한 영혼’뿐이다. 이것을 재형성Reformation이라 부를 수도 있다. 너희 모두는 형성 중인 신Gods in Formation이다(신의 정보God's information!)
바로 이것이 너희의 기여다. 그 자체로 충분한 기여다.
이것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물질형상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너희는 이미 할 바를 다 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너희는 공동선에 기여했다. 너희는 공통된 그것이, 그 ‘한 공동 요소’가 좋은 것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너희도, 신이 하늘과 땅과 땅 위를 걸어다니는 짐승들과 공중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을 창조하시니, 그것이 대단히 좋았노라고 적지 않았느냐?
“좋음” 역시 그 대립물 없이는 체험으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기에, 너희는 좋음의 역운동, 즉 반대방향인 나쁨도 창조해냈다. 또 너희는 삶의 대립물로서 소위 죽음이라 부르는 것도 창조해냈다.
하지만 죽음은 궁극의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희가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이용하는 단순한 조작물, 발명품, 가상 체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쁨”evil의 철자를 거꾸로 적으면 “산다”live가 되는 것이다! 언어면에서 너희는 참으로 현명하여,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감춰진 지혜들을 그 속에 집어넣었다.
이 우주철학 전체를 이해할 때, 너희는 위대한 진리를 이해하게 되리니, 그러고 나면 너희는 더 이상 물질생활의 자원과 필요물을 함께 나누는 대가로 다른 존재에게 뭔가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자체로는 아름다운 거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걸 공산주의라고 부를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이 정히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 하라. 하지만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존재들의 공동체community of beings가 함께 있음being in community에 대해 알 때까지, 너희는 절대 성스런 교류를 체험할 수 없고,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할 것이다.
우주의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은 내가 여기서 설명한 것들 전부를 깊이 이해한다. 그런 문화들에서 공유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또한 어떤 필수품이 귀해질수록 점점 더 터무니없는 “갑”을 “매기겠다는” 발상 역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지극히 원시적인 사회들만이 이렇게 할 수 있고, 오직 대단히 원시적인 존재들만이 공동 필요물의 부족을 더 많은 이윤을 올릴 기회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고진재 체계는 “수요와 공급”에 끌려가지 않는다.
이것이 너희가 삶의 질과 공동선에 기여한다고 주장하는 체계의 일부다. 하지만 고도로 진화된 존재의 시각에서 본다면, 좋은 것을 공동으로 체험하지 못하게 하는 너희 체계야말로 공동선을 훼손시키고 있다.
고도로 진화된 문화의 또 하나 두드러지고 매력적인 특색은 그 문화들 안에는 “네 것”과 “내 것”을 뜻하는 어떤 말이나 소리도 없고, 그런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언어에는 개인 소유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구 언어로 말해야 할 경우라면, 그들은 약정 조항들을 이용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 약정을 적용하면, “내 차”는 “내가 지금 데리고 있는 차”가 되고, “내 배우자”나 “내 아이들”은 그 “배우자”나 “내가 지금 데리고 있는 아이들”이 된다.
너희라면 “소유권”이나 “재산”으로 불렀을 것을 묘사하는 데 있어, 너희 언어에서 가장 가까운 언어가 “지금 데리고 있는”now with이나 “마주하고 있는”in the presence of이란 표현들이다.
너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선물이 된다. 이런 게 삶의 진짜 “선물”present이다.
따라서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의 언어로는 “내 삶”이란 의미도 말할 수 없다. 오직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삶”이라는 의미로만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은 너희가 “신을 마주하고 있음”을 이야기할 때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
너희가 신을 마주할 때(너희가 서로를 마주할 때, 너희는 신을 마주하고 있다), 너희는 신의 것, 말하자면 존재하는 것의 일부를 신이 갖지 못하게 막겠다는 생각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신의 것을 신의 모든 부분과 당연히 함께 나눌 것이고, 똑같이 나눌 것이다.
이것이 모든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의 사회, 정치, 경제, 종교 구조 전체를 뒷받침해주는 영적 이해다. 이것은 삶 전체의 우주철학이다. 지구에서의 너희 체험이 일으키는 모든 불협화음은 오로지 이 우주철학을 관찰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살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19
다른 행성에 사는 존재들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신체면에서요?
네 맘대로 골라잡아라. 너희 행성에 여러 종의 생명체가 있듯이, 그곳에도 다양한 여러 존재들이 있다.
아니, 사실 그 이상이다.
우리하고 흡사해보이는 존재들도 있습니까?
물론이다. 아주 사소한 차이를 빼면 너희하고 똑같이 보이는 존재들도 있다.
그들은 어떻게 삽니까? 뭘 먹습니까? 옷은 어떻게 입고요? 대화는 어떤 식으로 합니까? 전 여기서 E.T.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싶습니다. 어서 말씀해주십시오.
네 호기심을 이해는 한다. 하지만 이 책들은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너희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대화의 목적은 너희 세상에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그냥 두어 가지만 물을게요. 게다가 그것들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입니다. 우린 여기서 뭔가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기억해낼 수 있을 겁니다.
사실 그게 좀 더 정확하다. 너희가 배워야 할 것은 없다. 너희는 ‘참된 자신’을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당신이 1권에서 멋지게 밝혀주셨죠. 그런데 다른 행성의 이 존재들은 자신이 누군지 기억합니까?
너희도 예상하겠지만, 다른 행성의 존재들이라 해도 그들이 처해 있는 진화 단계는 각기 다르다. 하지만 네가 여기서 의미하는,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 속의 존재들이라면, 그렇다, 그들은 기억해냈다.
그들은 어떻게 삽니까? 일과 여행과 의사전달에서는요?
너희 문화에서 말하는 식의 여행은 고도로 진화된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이 발달한 그들로서는 화석 연료를 사용해서 바퀴 달린 동체 속에 장착된 엔진을 돌리거나 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물질 기술들이 제공하는 것들과 더불어, 마음과 물질성 자체에 대한 이해 역시 발전되었다.
진화 차원에서 이 두 유형의 진보가 복합된 결과, 고진재들은 자신들의 몸을 마음대로 해체하고 다시 합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가장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에서는 대부분의 존재들이 그들이 선택하는 곳마다 그들이 선택할 때마다 “있을” 수 있다.
우주를 가로지르는 광년들을 포함해서요?
그렇다. 대체로 그렇다. 은하를 가로지르는 그런 “먼 거리” 여행은 돌멩이가 물을 스치면서 튀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우주라는 모체를 관통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위에서 “톡톡 뛰어다니는” 식으로. 그것의 물리학을 설명할 때 너희 언어에서 찾을 수 있는 최상의 비유가 이것이다.
그리고 너희 사회에서 말하는 식의 “일”이라면, 대다수 고진재 문화들에는 그런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행하는 과제와 활동들은 오로지 각각의 존재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고, 무엇을 자신의 가장 고귀한 표현으로 보는가에 좌우된다.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정말 굉장하겠죠. 하지만 천한 일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천한 일”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의 세계에서는 너희 사회라면 “천하다”고 규정했을 일을 되려 가장 영예롭게 여긴다. 사회가 존재하고 제기능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되어져야 하는 일상 과제들을 수행하는 고진재들은, 전체에 대한 그들의 봉사로 가장 높은 보수를 받고, 최고의 호칭으로 불리는 “일꾼들”이다. 내가 여기서 “일꾼들”에 인용부호를 단 것은, 고진재들에게는 이것이 전혀 “일”이 아닌, 자기 성취의 최고 형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소위 일이라는 자기 표현을 둘러싸고 창조해낸 발상과 체험들은 고진재 문화의 일부가 아니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은 “고역(苦役)”과 “초과근무”, “압박감” 따위의, 스스로 만들어낸 체험들을 선택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들은 “앞서거나”, “최고가 되거나” “성공하려” 하지 않는다.
고진재에게는 너희가 규정하는 식의 “성공”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다. 그것의 대리물인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그럼 고진재들은 업적이나 성취를 어떻게 체험합니까?
대부분의 인간 사회와 활동들에서-심지어는(그리고 특히) 너희 학교들에서- 그러하듯이, “경쟁”과 “이기고 짐”을 둘러싸고 정교한 가치체계를 짜냄으로써가 아니라, 한사회에서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진실로 인정함으로써.
그들은 “가치를 가져오는 일을 하는 것”을 성취로 규정한다. “가치 있든 아니든, ‘명성’과 ‘출세’를 가져오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 고진재들도 “가치관”을 가졌군요!
아, 물론이다. 하지만 대다수 인간들의 그것과는 아주 다르다. 고진재들은 전체를 이롭게 하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우리도 그래요!
그렇다, 하지만 너희는 “이로움”을 전혀 다르게 규정한다. 너희는 아이에게 삶의 최고 진리를 기억하도록 이끌거나, 사회의 영적 생활에 보탬이 되는 데서보다, 방망이를 가진 남자에게 작은 흰 공을 던지거나, 은막의 대형 스크린 위에서 누군가의 옷을 벗기는 데서 더 큰 이로움을 본다. 그래서 너희는 선생과 성직자들보다 야구선수와 연예인들을 더 많이 존경하고, 그들에게 더 많이 지불한다. 너희가 하나의 사회로서 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을 전제로 할 때, 너희는 이면에서 모든 걸 거꾸로 하고 있다.
너희는 그다지 예리한 관찰력을 발달시키지 못했다. 고진재들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what's so를 보고, “도움 되는 것” what works을 한다. 인간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대단히 많다.
고진재들은 교사나 성직자들이 “도덕적으로 옳아서” 그들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사회가 가기로 선택한 곳을 전제할 때, 그것이 “도움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하지만 가치관이 있다면, 거기도 틀림없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있을 텐데요. 그렇다면 고진재 사회에서 보유하고 유명한 쪽은 교사들이고, 가난한 쪽은 야구선수들이겠군요.
고진재 사회에는 “못 가진 자”가 없다. 너희가 다수의 사회들더러 빠지게 만든 식의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사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아무도 굶주려 죽지 않는다. 시간당 400명의 어린이들과 날마다 3만 명의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너희 행성과 달리. 인간의 노동 문화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소리 없는 절망”으로 얼룩진 삶 같은 것도 없다.
아니다, 고진재 사회에는 “빈민”이나 “영세민” 따위는 없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요?
두 가지 기본 원리를 적용하는 것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다.
충분히 있다.
고진재들은 넉넉함을 깨닫고 있으며, 넉넉함을 창조하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 만물의 상호연관성을 의식하는 고진재들은 자기 행성의 천연자원을 낭비하거나 부수지 않는다. 이것은 만인을 넉넉한 상태가 되게 하니, 따라서 “충분히 있는” 것이다.
불충분함, “넉넉치 못함”에 대한 인간의식은 모든 불안과 모든 긴장, 모든 경쟁, 모든 질투, 모든 분노, 모든 갈등, 그리고 궁극에는 너희 행성에서 벌어지는 모든 살인의 뿌리 원인이다.
여기에다 만물의 통일성보다는 분리성을 믿으려는 아집을 보탠 것, 이것이 너희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너희 역사를 비극으로 만든 원인의 90%을 차지하고, 만인에게 더 나은 상황을 가져다주려 했던 너희 노력들이 무위(無爲)로 끝나고만 원인의 90%을 차지한다.
너희가 의식의 이 두 요소를 바꾼다면, 만사가 변할 것이다.
어떻게요? 전 그렇게 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릅니다. 제게 도구를 주십시오. 그냥 진부한 의견이 아니라요.
좋다. 당연히 그래야지. 자, 여기 도구가 있다.
“인 듯이 행동하라.”
너희가 모두 하나인 듯이 행동하라. 내일부터 그냥 그런 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라. 그냥 모두를 힘들어하는 “자신”으로 보고, 공정한 기회를 원하는 “자신”으로 보라. 그냥 모두를 다른 체험을 하고 있는 “자신”으로 보라.
그렇게 해봐라. 그냥 내일부터 주위를 둘러보고 그렇게 해봐라. 모두를 새로운 눈으로 봐라.
그런 다음에는 “충분히 있는” 듯이 행동하기 시작하라. 네게 “충분한” 돈과 “충분한” 사랑과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너는 어떤 식으로 다르게 행동하겠느냐? 더 마음을 열고, 더 자유롭게, 더 균등하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겠느냐?
이거 재미있군요. 왜냐하면 우리가 천연자원을 대하는 방식이 바로 그런 거거든요. 생태론자들은 그런 태도를 비판하고요. 제 말은 우리가 “충분히 있는” 듯이 행동한다는 겁니다.
진짜로 재미있는 건, 너희가 자신을 이롭게 한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는 부족한 듯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것을 자신이 얼마나 지닐 수 있는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살핀다. 흔히 그런 것들을 사재기까지 하면서. 하지만 너희는 너희 환경과 천연자원과 생태계에 대해서는 일관되지 못하고 왔다갔다 한다. 따라서 여기서 가능한 유일한 가정은, 너희는 환경과 천연자원과 생태계가 너희를 이롭게 한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면 우리가 충분히 있는 “듯이 행동하거나”요.
아니, 너희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랬다면, 너희는 이 자원들을 좀 더 균등하게 함께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인구의 5분의 1이 전세계 자원의 5분의 4를 쓰고 있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그런 등식을 바꿀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특혜 받은 소수가 그 모든 걸 아무 생각 없이 탕진하는 것만 막을 수 있어도, 그것은 모두에게 충분히 있게 된다. 모든 사람이 자원을 현명하게 쓴다면, 소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현명치 못하게 쓸 때보다 전체로는 덜 쓰게 될 것이다.
자원을 사용하라, 하지만 낭비하지는 마라, 생태론자들이 말하는 게 이것이다.
음, 전 다시 우울합니다. 당신은 계속해서 절 우울하게 만드시는군요.
너는 이상한 사람이다. 너도 그걸 알고 있느냐? 너는 길을 잃은 데다가 네가 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에 닿을 수 있는 방법까지 잊은 채 외롭게 길을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따라와서 네게 방향을 가리켜준다. 이제 너는, 알았다! 라면서 뛸 듯이 기뻐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아니다, 너는 우울해한다.
놀랍게도.
제가 우울해하는 건 과연 우리가 이 방향으로 갈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 우리가 그걸 원하는지조차 모르겠어요. 제 눈에는 우리가 벽을 향해 곧장 뛰어들고 있는 게 보입니다. 그래서 그게 절 우울하게 하고요.
너는 관찰력을 쓰지 않고 있다. 내 눈에는 이 책을 읽으면서 환호하는 몇십만의 사람들이 보이고, 여기에 적힌 단순한 진리들을 인정하는 몇백만의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내 눈에는 너희 행성에서 맹렬한 속도로 커져가는 새로운 변화세력이 보인다. 사고체계 전체가 폐기되고, 통치방식들이 버려지고, 경제정책들이 수정되고 영적 진리들이 재검토되고 있다.
너희는 깨어나는 종이다.
이 책에 적힌 지적과 관찰들이 반드시 낙담의 근거가 될 필요는 없다. 너희가 그것들을 진리로 인정하는 것이 변화의 엔진을 몰아가는 연료가 될 수 있다면, 이것 자체가 엄청나게 고무적인 일일 수 있다.
너는 그런 변화를 불러올 대리인이다. 너는 인간들이 삶을 창조하고 체험하는 방식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한 사람이다.
어떻게요? 제가 뭘 할 수 있습니까?
다름difference이 되라. 변화가 되라.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의식과 “충분히 있다”는 의식을 스스로 구현하라.
너 자신을 바꿔라, 세상이 바뀔 것이니.
너는 자신에게 이 책과 <신과 나눈 이야기>의 모든 소재를 주었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로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신이 다시 한번 기억해낼 수 있도록.
우리는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산 적이 있군요. 그렇죠? 당신은 전에도 우리가 예전에 이런 식으로 산 적이 있다고 언급하셨습니다.
그렇다. 너희라면 고대 시기와 고대문명들이라고 불렀을 상황에서. 너희 종은 내가 여기서 묘사해온 것들 대부분을 예전에 체험했다.
이젠 제 일부가 훨씬 더 우울해지려고 하는군요. 당신 말씀은 우리가 거기에 갔다가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고 있는, 이 모든 “원 따라 돌기”의 목적은 뭡니까?
진화! 진화는 직선이 아니다.
너희는 지금 너희 고대문명들이 겪은 최악의 체험들을 피하면서, 최상의 체험들을 재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다. 그러니 이번에는 개인적 에고와 진보된 기술이 너희 사회를 파괴하게 놔두지 마라. 너희라면 그것을 다르게 해낼 수 있다. 너희 자신이 차이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너희에게 대단히 흥분되는 사실일 수 있다. 그것이 그렇게 되게끔 너희가 허락한다면.
됐습니다. 접수할게요. 나 자신더러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끔 허락했더니, 정말 흥분되는군요. 차이를 만들어내겠습니다! 더 이야기해주십시오. 전 가능한 한 많이 기억해내고 싶습니다. 우리의 진보된 고대문명들에서는 그것이 어떤 모습이었고, 지금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에게는 어떤 모습인지요. 그들은 어떻게 삽니까?
그들은 너희 세계라면 공동체라고 불렀을, 그런 형태로 모여서 산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들은 소위 “도시”나 “국가” 같은 변형판들은 포기했다.
왜요?
“도시들”이 너무 커져서 모여 사는 목적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목적을 손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집단화된 공동체 대신에 “군집한 개인들”을 만들어냈다.
그건 우리 행성에서도 그래요! 우리 소도시와 마을들, 나아가 확트인 농촌 지역들까지도 대도시들에서보다는 더 많은 “공동체” 의식이 있죠.
그렇다. 그 점에서 너희 세상과 우리가 지금 논의하는 다른 행성들은 딱 한 가지만 다르다.
그게 뭔데요?
다른 행성의 거주자들은 “무엇이 도움 되는지” 더 치밀하게 관찰하는 법을 배웠다.
반면에 우리는 도시들을 점점 더 키워가고 있고요. 그것들이 우리의 생활방식 자체를 파괴하는 걸 보면서도요.
그렇다.
심지어 우리는 자기 서열에 자부심까지 느끼죠. 한 거대도시가 우리의 대도시 서열 12위에서 10위로 올라서자, 모두들 그것을 축하할 일로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상업회의소는 그걸 선전했구요.
퇴보를 진보로 보는 것이 원시사회의 표식이다.
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죠. 그게 다시 절 우울하게 만드는군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이렇게 하지 않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의도된” 소공동체들을 다시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가 대도시들을 포기하고, 소도시나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이런 저런 선호를 갖지 않는다. 나는 그냥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항상 그러셨듯이요. 그럼 우리가 계속해서 점점 더 큰 대도시들로 이주하는 것과 관련해서 당신의 관찰은 어떤 겁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요.
너희 중 다수가 이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대도시에서 함께 집단을 이루는 것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 믿는다. 실제로는 문제를 만들어 낼 뿐인데도.
물론 대도시들에는, 작은 읍이나 마을 정도에서는 있지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서비스와 직업과 여흥들이 있다. 하지만 사실상 유해한 것들인 이런 것들을 가치 있는 걸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너희는 잘못하고 있다.
보라구요! 당신은 이 문제에서 관점을 갖고 계시잖아요! 당신은 방금 본색을 드러내셨다구요! 당신은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만일 너희가 시애틀로 가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또 시작하시는군요?-
음, 너는 계속해서 관찰을 “판단”으로, 사실에 대한 진술을 “선호”로 부르길 고집하는구나. 나는 네가 교류와 인식에서 더 큰 정확성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기에, 매번 너를 여기로 불러낼 것이다.
너희가 시애틀로 가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샌어제이를 향해 가고 있을 때, 네가 방향을 물어본 제삼자가 너더러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그른 것이냐? 그 사람은 “선호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냐?
아마 아니겠죠.
아마 아닐 거라고?
좋습니다. 아닙니다.
그럼 그는 뭘 하고 있는 거냐?
그는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죠. 우리가 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을 전제로 하면요.
훌륭하다. 너는 이해했다.
하지만 당신은 예전에도 이런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것도 되풀이 해서요. 그런데도 왜 저는 자꾸 당신을 선호를 가진 신, 판단하는 신으로 여기는 발상으로 되돌아가는 걸까요?
너희 신화가 떠받쳐온 신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할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나를 그 범주 속에 던져 넣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선호를 가졌다면, 너희로서는 만사가 더 수월해졌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너희 스스로 만사를 이해하여 너희 나름의 결론에 이를 필요가 없었을 테고, 그냥 내가 말한 대로 해야 했을 테니 말이다.
물론 내가 몇천 년 동안 뭔가를 말해왔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너희로서는 내가 뭘 말하는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너희로서는 내가 실제로 교류하던 시절에 내가 말하곤 했던 것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의지하는 것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조차도 문제인 것이, 너희의 머리카락 수만큼 많은 다양한 스승과 가르침들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너희는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가서 너희 나름의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이 미로와, 그것이 인류에게 빚어낸 비참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방안이 있습니까? 대관절 우리가 그걸 “바로잡을” 수 있기나 할까요?
“벗어날 방안”은 있고, 너희는 그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너희는 그냥 관찰 기술을 키우기만 하면 된다. 너희는 무엇이 너희에게 쓸모 있는지 더 잘 볼 줄 알아야 한다. 이런 게 “진화”다. 사실 너희는 “그것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너희는 실패할 수 없다. 그것은 그런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다.
하지만 우리는 이 행성에서의 시간을 다 써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 그것이 너희의 매개변수라면, 너희가 이 행성에서, 다시 말해 이 특정한 행성이 아직 너희를 부양하는 동안에 그것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그런 문맥 안에서라면, 너희는 서두르는 게 나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더 빨리 갈 수 있습니까? 우릴 도와주십시오.
나는 너희를 돕고 있다. 너는 이 대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좀 더 도와주십시오. 당신은 좀 전에 다른 행성의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에서는 “국가”라는 개념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소위 “민족주의” 같은 개념이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자신들의 첫 번째 지도원리에 어긋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반면에 민족주의는 우리의 두 번째 지도원리인 ‘적자생존’을 지탱해주고 있죠.
맞다.
너희는 생존과 안전을 이유로 자신들을 여러 국가들로 나누었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다.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은 국가별로 묶이길 거부한다. 그들은 그냥 한 국가만을 믿는다. 너희는 그들이 “신의 가호로 한 국가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명하군요. 그런데 그들도 “만인을 위한 자유와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까?
너희는 그러하냐?
항복.
핵심은, 모든 종족과 모든 종들이 진화하기 마련이고, 진화-무엇이 자신에게 도움 되는지를 관찰하고 그것에 행동을 맞추는 목적이 되는-는 한쪽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다른 쪽 방향에서는 멀어지기 마련이라는 데 있다. 그것은 합일을 향해 움직여가면서 분리에서 멀어진다.
이건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합일은 궁극의 진리고, “진화”는 “진리를 향해 가는 운동”의 또 다른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게는 “무엇이 너희에게 도움 되는지 관찰하고 그것에 행동을 맞춘다”는 게 왠지 우리의 지도원리 중 하나인 “적자생존”과 비슷하게 들리는데요.
그건 사실이다, 그렇지 않느냐?
그러기에 이제 “적자생존”(즉 종의 진화)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실제로는 전체 종들이 사실상 사멸해왔음을-사실 상 자멸해왔음을-“관찰할” 때가 왔다. “과정”을 “원리”로 규정함으로써.
웁. 당신이 이겼어요.
“진화”는 과정이고, 진화 추이를 이끌어가는 것이 그 과정을 지도하는 “원리”다.
네 말이 맞다. 진화는 “적자생존”이다. 바로 이것이 과정이다. 하지만 “과정”을 “원리”와 혼동하지 마라.
“진화”와 “적자생존”을 동의어로 보면서, “적자생존”을 지도원리로 주장하는 건 “진화의 지도원리는 진화”라고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지도 원리가 자신의 진화 추이를 지배할 수 있음을 알지 못하는 종이 하는 진술이다. 이런 이야기는 자신이 자신의 진화에 대해 업저버의 위치에 속해 있다고 여기는 종이 하는 진술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진화”가 특정 원리들에 따라 어딘가로 향해 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냥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종들은 “우리는 진화의 원리에 따라....... 음, 진화한다”고 선언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들은 과정과 원리를 혼동하기 때문에, 그 원리가 뭔지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반면에 진화가 과정이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지배할 수 있는 과정임을 확실히 알게 된 종들은 “과정”과 “원리”를 혼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과정을 지도하고 끌어가는 데 사용할 원리를 의식하면서 선택한다.
이것이 의식 있는 진화라고 불리는 것으로, 너희 종은 이제 막 여기에 도달했다.
우와, 이건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통찰력이군요. 그래서 당신이 바바라 막스 후버드에게 그런 책을 주셨군요! 제가 말했듯이 그녀는 실제로 그걸 <의식있는 진화>라고 불렀거든요.
물론 그녀는 그렇게 했다. 내가 그녀더러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전 그 책이 마음이 듭니다. 그럼......... E.T.에 대한 우리의 “대화”로 되돌아갔으면 하는데요. 이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은 어떤 식으로 자신들을 조직합니까? 국가별로가 아니라면요. 그들은 어떤 식으로 자신들을 통치합니까?
그들은 “진화”를 진화의 첫 번째 지도원리로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관찰에만 근거해서 원리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그냥 자신들 모두가 ‘하나’임을 관찰하고 나서, 이 첫 번째 지도원리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뒷받침하는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영적 메커니즘을 고안해냈다.
그건 어떤 “모습”입니까? 예를 들면 정부는요?
너희 중 오직 하나만이 있을 때 너희는 어떤 식으로 자신을 다스리느냐?
예? 뭐라고요?
너희 중 오직 하나만이 있을 때 너희는 어떤 식으로 너희 행동을 다스리느냐? 누가 너희 행동을 다스리느냐? 너 자신말고 누가?
아무도요. 완전히 나 혼자라면, 예를 들어 제가 무인도에 있다면, “자신말고”는 아무도 내 행동을 다스리거나 통제할 수 없죠.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먹고 입고 행동할 겁니다. 십중팔구 옷 같은 건 전혀 안 입겠죠. 배고플 때마다 먹을 거고요. 맛나고 몸에 좋다고 느끼는 거면 뭐든 먹겠죠. 그리고 하고 싶다고 느끼면 무슨 짓이든 “할” 거구요. 그중 일부는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게 뭔지에 따라 정해질 테고요.
음, 여느 때처럼 너는 자기 안에 모든 지혜를 가지고 있다. 전에도 네게 말했지만, 너는 아무것도 배울 필요가 없다. 단지 기억해내면 된다.
그럼 이게 진보된 문명의 모습이란 말입니까? 벌거벗고 뛰어다니고, 나무열매를 줍고, 카누를 조각한다고요? 흡사 야만인들처럼!
너는 누가 더 행복하리라고 생각하느냐? 누가 더 신에게 가깝다고 생각하느냐?
우리는 전에도 이 문제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 다룬 적이 있다. 단순성을 야만으로, 복잡성을 고도의 진보로 여기는 것이 원시 문화의 표식이다.
재미있는 건, 고도로 진보된 사람들은 그것을 정반대로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문화의 운동은-사실 진화의 과정 자체가- 점점 더 복잡해지는 쪽으로 나아가기 마련 아닙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여기에,
최고의 복잡성은 최고의 단순성이라는, 최고의 ‘신성한 이분법’이 있다.
체계가 “복잡할수록”, 그 디자인은 단순하기 마련이다. 사실 그것은 그 ‘단순함’으로 지극히 우아하다.
선각자는 이 점을 이해한다. 바로 이것이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이 지극히 단순하게 사는 이유고, 고도로 진화된 모든 체제들이 지극히 단순한 이유다. 고도로 진화된 통치체제, 고도로 진화된 교육체계, 고도로 진화된 경제나 종교체계, 그 모두가 우아할 만큼 지극히 단순하다.
예를 들면 고돌 진화된 통치체제에는 자치를 빼고는 사실상 아무런 통치도 들어 있지 않다.
오직 한 존재만이 참여하고 있는 듯이요. 오직 한 존재만이 관련된 듯이요.
그것이 존재하는 전부다.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이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맞다.
전 이제 이 모든 것을 함께 모으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잘 됐구나.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떠나셔야 합니까?
이 책은 너무 길어지고 있다.
20
잠깐만요! 기다려요! 지금 떠나실 순 없어요! 전 E.T.에 대해 물어볼 게 더 있어요! 그들은 언젠가 “우리를 구하러” 지구에 나타날 건가요? 우리 행성의 양극을 통제하고, 대기를 맑게 하고,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고, 기후를 조절하고, 온갖 질병들을 고칠 새로운 기술을 우리에게 전수해줌으로써, 우리더러 우리의 광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까요? 우물 안 개구리 격인 우리가 더 나은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요?
그런 일이 일어나길 너희가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고진재들”도 이것을 안다. 그들도 그런 식의 개입은, 너희를 자신들에게 종속시켜서-너희가 지금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신들이 아니라-, 자신들을 너희의 신으로 만들게 될 뿐이라는 걸 안다.
진실은, 너희는 아무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고도로 진화된 문화들에서 온 존재들이 너희에게 이해시키려 해온 것이 이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기술들을 너희와 함께 하려 한다면, 그들은 어쨌든 다른 사람의 힘과 잠재력이 아니라 너희 자신의 것을 너희가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그것들을 전수해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진재들이 너희와 몇 가지 가르침들을 함께 하려 할 때도, 그들은 어쨌든 너희가 더 큰 진리와 너희 자신의 힘과 잠재력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그것들을 전수해줄 것이다. 너희 스승들을 신으로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너무 늦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해버렸습니다.
그래, 나도 눈치챘다.
그 문제는 우리를 우리의 위대한 스승인 예수라는 사람에게로 데려가는군요. 그를 신으로 만들지 않았던 사람들도 그의 가르침이 위대하다는 건 인정했습니다.
그 가르침들은 크게 왜곡되어왔다.
예수도 이 “고진재”, 즉 고도로 진화된 존재였습니까?
너는 그가 고도로 진화되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럼요. 그리고 같은 차원에서 석가모니와 크리슈나, 모세, 바바지, 사이바바, 파라마한사 요가난다도요.
맞다. 그리고 네가 언급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많다.
저, 2권에서 당신은 예수를 비롯한 이 스승들이 “외계”에서 왔을 수 있다는 “암시”를 주셨습니다. 이곳을 방문해서, 우리에게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의 가르침과 지혜들을 나눠줬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자, 이제 나머지 신발도 벗을 때가 왔습니다. 예수는 “우주인”이었습니까?
너희 모두가 “우주인”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지금 고향이라 부르는 이 행성의 원주민이 아니다.
우리가 원주민이 아니라고요?
그렇다. 너희를 만들어낸 “유전재질”은 너희 행성에 계획적으로 심어졌다. 그것은 그냥 우연히 “나타나지” 않았다. 너희 생명을 형성한 요소들은 어떤 운 좋은 생물학적 발전 과정을 거쳐 결합된 것이 아니라, 관련 계획이 있었다. 여기에는 훨씬 더 큰 뭔가가 진행되고 있다. 너는 너희가 아는 대로의 생명이 너희 행성에 나타나도록 만드는 데 필요했던 몇십 조 가지의 생화학 반응들 모두가 어쩌다 우연히 일어났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이런 결과가 단지 뜻밖에 행복한 결과를 낳은 마구잡이 사건들의 우연한 사슬이라고 보느냐?
아뇨, 물론 아니죠. 저는 계획이, 신의 계획이 있었다는 걸 인정합니다.
잘했다. 왜냐하면 네 말이 맞기 때문이다. 그 모두가 내 발상이고, 내 계획이며, 내 과정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우주인”이란 말씀입니까?
너희가 내게 말을 건다고 상상할 때, 으레 바라보는 방향이 어느 쪽이냐?
위쪽요. 전 올려다봤습니다.
왜 내려다보지 않았느냐?
모르겠습니다. 다들 올려다보죠. “하늘”을 향해서요.
내가 거기서 올 거라고?
그럴 겁니다. 맞아요.
그것이 나를 우주인으로 만드느냐?
전 모르겠는데, 그런가요?
그리고 내가 우주인이라면, 그게 나를 신보다 못한 것으로 만드냐?
당신이 지닌 권능이라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것을 전제로 하면, 아뇨, 안 그럴 겁니다.
그리고 내가 신이라면, 그것이 나를 우주인보다 못한 것으로 만드느냐?
제 생각엔 그건 전적으로 우리의 정의에 달렸다고 봅니다.
내가 전혀 “인간”이 아니라 힘이라면, 우주 “에너지”라면, ‘우주’라면, 다시 말해 사실 ‘존재 전체’라면 어떠냐? 내가 ‘집합체’라면?
음, 그건 사실 당신이 말씀해오신 당신 모습입니다. 당신은 이 대화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럼 너는 그것을 믿느냐?
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신을 존재 전체로 여긴다는 점에서는요.
좋다. 그런데 너는 소위 “우주인”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느냐?
외계에서 온 존재들 말입니까?
그래.
예,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 항상 그렇게 믿어온 것 같거든요. 게다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 역시 그렇다고 말씀하시니, 전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면 이 “외계에서 온 존재들”은 “존재 전체”의 일부냐?
음, 물론 그렇죠.
그리고 내가 존재 전체라면, 그건 나를 우주인으로 만들지 않느냐?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런 규정이라면, 당신은 나이기도 합니다.
맞았다.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제 질문에서 한참 멀리 가고 말았습니다. 전 당신에게 예수가 우주인인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당신도 아실 거고요. 그러니까, 그는 외계에서 온 존재입니까? 아니면 여기 지구에서 태어났습니까?
네 물음은 또 다시 “이것 아니면 저것”을 전제로 한다. 칸에서 벗어나서 생각하라. “이것 아니면 저것”을 거부하고, “이것이면서 또한 저것”을 고려하라.
말하자면 예수는 지구에서 태어났지만, “우주인의 혈통”을 가졌다는 뜻입니까?
예수의 아버지가 누구였느냐?
요셉요.
그렇다. 하지만 그를 임신시킨 것은 누구라고 얘기되느냐?
그것이 무염시태(無染始胎)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죠. 그들은 대천사가 성처녀 마리아를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예수는 “성령에 의해 수태되어, 성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요.
너는 그것을 믿느냐?
거기에 대해 뭘 믿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자, 대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왔다면, 너는 그 천사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느냐?
천국에서요.
“천국에서”라고 말했느냐?
예, 천국에서요. 다른 영역에서요. 신한테서요.
알겠다. 그리고 우리는 좀 전에 신이 우주인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았느냐?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지 않죠. 우리는 신이 전체고, 우주인 역시 “전체”의 일부이기 때문에, 신이 우주인이라는 데 동의한 거죠. 우리가 신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요. 신은 전체입니다. 신은 집합체입니다.
그렇다. 그러기에 마리아를 찾아온 이 대천사는 다른 영역에서 왔다. 천계(天界)에서.
그렇습니다.
천국은 너희 내면에 있으니, 그것은 너희 자신 깊숙한 곳에 있는 영역이다.
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음, 그렇다면 우주의 내면 공간 속에 있는 영역이라고 하자.
아뇨, 전 그렇게 말하지도 않을 겁니다. 전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거든요.
그렇다면 어디서 왔느냐? 외계에서?
(한참동안 중단)
당신은 지금 말장난을 하고 계십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말이 지닌 끔찍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쓰고 있다. 사실 너희 언어의 한정된 어휘로는 묘사할 수 없거나, 너희의 한정된 현재 인식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사고방식과 개념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서기 위해서.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너희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너희에게 새로운 인식을 열어주려 하고 있다.
좋습니다. 그러니까 당신 말씀은 예수가 다른 어떤 영역에서 온 고도로 진화된 존재를 아버지로 하니까, 그는 인간이면서 또한 고진재란 겁니까?
너희 행성을 걸어다닌, 고도로 진화된 존재들은 많이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에도 많이 있다.
“우리 중에 외계인”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신문과 라디오 좌담, 텔레비전에서 했던 너희의 작업이 너희에게 꽤 효과가 컸다는 걸 알겠구나.
무슨 뜻입니까?
너희는 온갖 걸 가지고 다 센세이션을 일으키려 한다. 나는 고도로 진화된 존재를 “외계인”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예수를 “외계인”이라고 하지 않았다.
신과 관련해서 “외계인” 같은 건 없다. 지구에는 어떤 “외계인”도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다 우리 모두가 ‘하나’라면, 우리 중의 어떤 개체도 ‘하나’ 자신에게 외부인이 아니다.
우리 중 어떤 개체들은, 다시 말해 일부 개별 존재들은 다른 개체들보다 더 많이 기억한다. 기억해내는 이 과정(신과 재결합하는 과정, 혹은 다시 한번 전체인 집합체와 ‘하나’ 되는 과정)이 너희가 진화라 부르는 그 과정이다. 너희 모두가 진화하는 존재다. 너희 중 일부는 고도로 진화되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더 많이 재구성한다. 그들은 ‘자신이 참으로 누군지’안다. 예수도 그것을 알았고 그것을 선언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일을 놓고 어디 한번 말장난을 해보기로 하죠.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다 털어놓고 이야기해주마. 너희가 예수라고 부르는 그 인간의 영은 이 지구의 것이 아니었다. 그 영은 그냥 인간의 몸을 가득 채워서, 자신을 아이로서 배우게 했고 그런 다음 어른이 되어서는 스스로 깨닫게 했다. 그가 이런 일을 한 유일한 존재는 아니다. 모든 영은 “이 지구 출신이 아니다”. 모든 영혼이 다른 영역에서 와서 몸으로 들어갔다. 그렇다고 모든 영혼이 특정한 한 “생애” 안에 혼자 힘으로 깨닫는 건 아니다. 예수는 그렇게 했다. 그는 고도로 진화된 존재였다(너희 중 일부가 신이라 불러온 존재). 게다가 그는 목적을 가지고, 임무를 띠고, 너희에게 왔다.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끝없는 천벌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너희가 상상하는 식의 그런 천벌 같은 건 없다. 그의 임무는 ‘참된 자신’을 모르고 체험하지 못하는 상태로부터 너희를 구하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는 너희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그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너희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사실 너희 자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는 본보기를 보이는 것으로 앞장서고자 했다. 그가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를 따르라”고 말한 이유가 이것이다. 그는 너희 모두가 자기 “지지자”가 되라는 의미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말한 건, 너희 모두가 그를 본보기 삼아 신과 ‘하나’ 되라는 의미에서다.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그리고 너희는 내 형제다”고 말했다. 그라도 그 점을 이보다 더 잘 알아듣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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