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2 (5)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2 (5)
제안이십니까? 아니면 그럴 계획이십니까?
아이들이 삶을 처음 출발할 때부터, 몸의 지극히 자연스런 기능과 관계된 것들을 수치스럽고 잘못된 것으로 가르치길 그만두어라. 너희 아이들에게 성적인 것이라면 뭐든지 감춰야 한다고 여기게 하지 마라. 너희 아이들이 너희의 낭만을 보고 관찰할 수 있게 하라. 너희가 껴안고 만지고 부드럽게 애무하는 걸 그들에게 보여줘라. 즉 자기 부모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을 몸으로 드러내는 건 지극히 당연하고 지극히 멋진 일임을 그들이 보게 하라. (그 많은 가정들이 이렇게 간단한 교훈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는 걸 알면 너희도 놀랄 것이다.)
너희 아이들이 자신들의 성적 느낌과 호기심과 욕구들을 맞아들이기 시작할 때, 자신에 대한 이 새롭고도 확산적인 체험을, 죄와 수치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과 찬양으로 연결시킬 수 있게 해줘라.
그리고 제발 너희 몸을 아이들이 못 보게 감추는 짓을 그만두어라. 뒷마당의 풀장이나 캠핑 간 시골 개울에서 너희가 맨몸으로 헤엄치는 걸 아이들이 보더라도 개의치 마라. 옷을 걸치지 않고 침실에서 욕실까지 걸어가는 너희 모습을 아이들이 곁눈질한다고 해서 놀라 기절할 필요는 없다. 설사 아무 사심이 없다 해도, 나름의 성적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서 너희를 소개받을 기회를 아이들에게서 감추고 차단하고 잠궈버리려는 그런 광적인 의무감을 버려라. 부모들이 자신들을 성과 무관한 듯이 그려보이게 되면, 아이들은 자기 부모들이 그런 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도 이런 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란 건 누구나 자기 부모를 흉내내기 마련이니. (언젠가 너희는 임상의에게서 다 자란 자식이 자기 부모들도 실제로 “그 짓을 한다”고 상상하면서 말할 수 없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이제 그 임상의 환자가 된 이 어른 아이의 마음은 그런 상상을 하면서 당연히 분노와 죄의식과 수치심으로 가득찬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당연히 “그 짓을 하길” 바라기에. 그래서 그는 자신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집어내지를 못한다.)
그러니 너희 아이들과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섹스를 놓고 우스갯소리를 하라. 그들에게 그들의 성욕을 축하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인정해주며, 일깨워주고, 보여줘라. 바로 이것이 너희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너희는 아이들이 태어난 첫날부터 이렇게 하고 있다. 그들이 너희에게서 받는, 맨 처음 키스와 맨 처음 포옹과 맨 처음 접촉을 가지고. 또 너희가 서로 주고 받는 키스와 포옹과 접촉을 그들이 맨 처음 보는 것으로.
고맙습니다. 고마와요. 저는 속으로 당신이 이 주제를 좀 온건하게 다뤄졌으면 하고 바랐거든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특별히 성행위를 아이들에게 소개하고 설명하거나, 아이들과 논의하려면, 언제가 적당합니까?
때가 되면 그 애들이 너희에게 말해줄 것이다. 너희가 진실로 아이들을 지켜보고 아이들 말에 귀 기울인다면, 어느 아이나 실수없이 그때를 분명하게 보여줄 것이기에. 사실 그것은 찾아올 때마다 더 늘어난다. 그것은 더 커져서 도착할 것이고, 너희는 찾아올 때마다 더 커진 아이들의 성욕을 나이에 맞게 다루는 적절한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 스스로 아무 흠이 없다면, 너희 자신의 “미완성 사업”(성행위를 말한다-옮긴이)을 이 모든 점에서 잘 마무리했다면 말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까?
그것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하라. 세미나에 등록하고, 임상의를 만나보고, 모임에 참여하고,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명상하고, 서로를 발견하라. 무엇보다도 서로를 다시 남자와 여자로서 발견하라. 너희 자신의 성욕을 찾아내고, 거기에 다시 가보고, 그것을 되찾고, 그것을 개간하라. 그것을 축하하고,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받아들여라.
너희 자신의 성욕을 기뻐하며 받아들여라. 그러면 너희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성욕을 받아들이도록 허용하고 복돋을 수 있을 것이니.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이들에 대한 염려는 놔두고, 인간의 성행위라는 큰 주제로 돌아가서,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습니다. 주제넘은 데다 경박하다고까지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이걸 묻지 않고는 도저히 이 대화를 끝낼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래, 변명은 그만하고 그냥 물어보기나 하라.
좋습니다. “과도한” 섹스라고 할 만한 경우가 있습니까?
없다. 물론 없다. 하지만 섹스에 대한 욕구가 과도한 경우는 있다.
내 제안은 이렇다.
'모든 것을 즐겨라.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마라.'
사람도 포함해서요?
사람도 포함해서. 아니, 특히나 사람을 포함해서. 누구를 필요로 하는 건 관계를 무너뜨리는 가장 빠른 길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데요.
그렇다면 그걸 그만둬라. 대신 필요하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어하라-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네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힘과 능력이야말로 네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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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습니다. 이제 넘어가도 좋습니다. 당신은 삶의 사회적 측면들에 대해 이야기해주겠노라고 약속하셨지요. 게다가 당신이 미국에 대해 언급하고 난 뒤로는 한시바삐 이런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래, 그렇게 하자. 나는 이 2권을 너희 행성이 직면한 비개인적인 주제들에 할애하려 한다. 거기서 너희 자식들의 교육보다 더 큰 주제는 없다.
우리가 그다지 잘해내지 못하고 있군요. 그렇죠?....... 당신이 그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자, 물론 모든 건 상대적이다. 너희가 하려 한다고 말하는 것에 비춰보며, 그렇다, 상대적으로 너희는 그것을 잘해내지 못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들, 내가 이 논의에 포함시켰고 이 문서 속에 자리잡게 했던 것들 모두를 이런 문맥 속에서 해석하도록 하라. 나는 “옮음”이나 “그름”, “선”이나 “악”을 심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단지 너희가 하려 한다고 말하는 것에 비추어 그것의 상대적인 효율성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알고 있습니다.
너는 안다고 말하는구나. 하지만 심판한다는 이유로 네가 나를 비난하는 때가 오리라는 걸 알고 있다. 심지어 이 대화가 끝나기 전에도.
저는 결코 당신을 그런 식으로 비난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더 잘 압니다.
“더 잘 아는” 것이 과거에 인간 종족이 나를 심판하는 신으로 규정하는 걸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제 경우는 막아줄 겁니다.
두고 보도록 하자.
당신은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렇다. 나는 너희 대다수가 교육의 의미와 목적과 기능을 잘못 이해해왔음을 관찰하고 있다. 교육이 밟아나가야 할 가장 좋은 과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건 엄청난 진술이군요.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인간 종족의 대부분이 교육의 의미와 목적과 기능을 지식을 전하는 것, 즉 누군가를 교육하는 걸 그에게 지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대게는 특정한 가족과 씨족과 부족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축적한 지식을. 하지만 교육은 지식과 별 관계가 없다.
뭐라고요? 절 놀리시는군요.
사실이다.
그럼 뭐가 교육과 관계가 있습니까?
지혜가.
지혜요?
그렇다.
좋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그 차이가 뭐죠?
지혜는 응용된 지식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이들에게 지식을 주려고 애쓰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지혜를 주려는 겁니다.
무엇보다, 어떤 것을 주려고 “애쓰지” 마라. 그냥 그것을 하라. 둘째로, 지혜에 치우쳐 지식을 무시하지 마라. 그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반대로, 지식에 치우쳐 지혜를 무시하지 마라. 이 역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교육을 죽일 것이다. 너희 행성에서는 그것이 교육을 죽이고 있다.
우리가 지식에 치우쳐 지혜를 무시한다고요?
대체로 그렇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데요?
너희는 아이들에게 생각하는 법 대신에 생각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제발 설명해주십시오.
당연히 그래야겠지. 너희는 아이들에게 지식을 줄 때, 그들에게 생각할 것을 말해준다. 즉 그들이 알기로 되어있는 것, 그들이 사실이라고 이해해주기 바라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준다.
너희 아이들에게 지혜를 줄 때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혹은 무엇이 사실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그들 나름의 진실에 이를 수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하지만 지식이 없다면 지혜도 있을 수 없죠.
동의한다. 그래서 내가 지혜에 치우쳐 지식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일정 정도의 지식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져야 한다. 이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가능하면 지식을 줄여라. 지식의 양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아이 스스로 발견하도록 만들어라. 지식은 잃어버리지만 지혜는 절대 잊지 않는 법이니.
그러면 학교에서는 되도록 적게 가르쳐야 한다는 겁니까?
너희 학교들은 강조점을 옮겨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교들은 지혜에는 이렇다 할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주로 지식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많은 부모들이 비판적 사고와 문제 해결력과 논리 수업을 위험스럽게 여기면서, 그런 과목들을 교과과정에서 빼버리고 싶어한다. 부모들이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지키려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자기 나름의 비판적 사고과정을 발달시키도록 허용받을 때, 아이들은 대체로 자기 부모들의 도덕과 규범과 생활방식 전체에서 벗어나기 마련이기에.
너희는 너희 생활방식을 지키려고, 아이의 능력이 아니라 기억력 발달에 중심을 두는 교육제도를 수립하여, 아이들에게 그들 나름의 진리를 발견하고 창조할 능력을 주기보다는, 사실과 허구들-각각의 사회가 자신에 대해 설정한 허구들-을 기억하도록 가르친다.
아이의 기억보다는 능력과 재능skills을 발달시키길 요구하는 프로그램 같은 건, 아이가 뭘 배워야 할지는 자신들이 더 잘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깨끗하게 경멸당하고 만다. 하지만 너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온 것은 너희 세상을 무지에서 멀어지게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을 무지 쪽으로 끌고 가고 있다.
우리 학교들이 허구를 가르치진 않습니다. 사실을 가르치긴 해도요.
지금 너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너희가 아이들에게 그러하듯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한다고요?
두말하면 잔소리. 아무 역사책이나 집어들고 읽어보라. 너희 역사를 적은 사람들은 자기 아이들이 특정한 관점에서 세상을 보길 원했다. 더 넓은 시각으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해석을 넓히려는 모든 시도는 비웃음을 받았고, “수정주의”라는 이름을 얻었다, 너희의 참모습을 아이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면, 너희는 아이들에게 너희의 과거를 사실대로 말할 수 없다.
너희 사회에서 대부분의 역사는 소위 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 남성이라는 부류의 관점에서 적혀졌다. 여성이나 흑인 같은 소수 집단들이 “이봐, 잠깐 기다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게 아니냐. 당신들은 여기에서 굉장히 큰 부분을 빠뜨렸어.”라고 말하면, 너희는 굽실거리거나 고함을 지르면서, 그 “수정주의자들”이 너희 교과서를 바꾸지 못하게 막아달라고 요구한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그 일이 실제로 어떻게 벌어졌는지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너희가 아이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너희가 그 일을 어떻게 너희의 관점에서 정당화시켰는가이다. 내가 예를 하나 들어줄까?
그래주십시오.
미국에서는 일본의 두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한 너희 나라의 결정, 몇십만명이 죽거나 부상당한 그 결정과 관련해 알아야 할 모든 사실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 아니, 너희는 너희가 보는 대로의 사실들과 너희가 보여주고 싶은 사실들만을 아이들에게 준다.
행여 이 관점과 다른 관점-이 경우에는 일본의 관점-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라도 일어날 양이면, 너희는 비명을 지르고 격분하고 욕설을 퍼붓고 고함지르고 펄쩍펄쩍 뛰면서, 학교는 이 중대 사건의 역사를 개괄할 때 감히 그런 자료를 제시할 엄두조차 내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러니 너희가 가르치는 건 전혀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이다.
역사란 건 본래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정확하고 완전한 설명이다. 반면에 정치는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일어난 일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각이기 마련이다.
역사는 밝히지만, 정치는 정당화한다. 역사는 벗기고 모든 것을 말하지만, 정치는 덮고 오직 한 면만을 말한다.
정치가들은 사실대로 쓰여진 역사를 싫어한다. 그리고 사실대로 쓰여진 역사 역시 정치가들을 그다지 좋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너희가 지금 입고 있는 건 ‘벌거벗은 임금님의 새옷’에 지나지 않으니, 결국 너희 아이들은 너희를 샅샅이 보고 말 것이다. 비판적으로 생각하도록 배운 아이들은 너희 역사를 살펴보고는 이렇게 말한 테지. “맙소사, 우리 부모와 어른들은 얼마나 자신들을 속여왔는가!” 너희는 이런 일을 참을 수 없다. 그래서 너희는 그들 사이에서 그런 싹이 트지 못하게 잘라버린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기본의 기본이 되는 사실조차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너희는 아이들이 너희가 쥐어주는 사실들만 갖길 원한다.
제 생각엔 당신이 여기서 과장하는 듯 싶습니다. 이 논쟁을 좀 너무 멀리까지 가져간 게 아닌가 싶은데요.
정말로 그럴까? 너희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은 삶의 가장 기본되는 사실조차 아이들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사람 몸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벌써 제정신이 아니다. 지금 너희에게는 에이즈가 어떻게 감염되는지, 혹은 그것에 감염되는 걸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들에게 말해줄 계획이 없다. 물론 특정한 관점에서 에이즈를 피하는 법을 말해주는 것은 빼고. 그러고 나면,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그냥 사실을 제공하고, 그들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건? 그건 분명히 아니다.
아이들은 이런 일들을 혼자 힘으로 판단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적절한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너는 최근에 너희 세상을 살펴본 적이 있느냐?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그게 바로 과거에 너희가 너희 아이들을 지도해온 결과다.
아니요. 그건 우리가 그들을 잘못 지도해온 결과입니다. 요즘 세상이 썩어빠진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많은 점에서 그건 사실이지만, 그건 우리가 아이들에게 옛 가치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아이들이 “새로 유행하는” 그따위 온갖 잡동사니들을 배우도록 내버려뒀기 때문입니다.
너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구나. 그렇지?
당신이 말이 맞습니다. 전 진짜로 그렇게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따위 쓰레기 같은 “비관적 사고”를 우리 아이들에게 먹이는 대신에, 그들을 그냥 읽기와 쓰기와 셈에만 머무르게 했다면, 우린 지금 훨씬 더 나았을 겁니다. 만일 우리가 소위 “성교육”이란 걸 학교수업과 각자의 가정 내로만 국한시켰다면, 우리는 십대들이 아기들 갖고, 17살밖에 안된 미혼모가 사회복지기금을 신청하고, 세상이 미쳐 날뛰는 걸 보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만일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서 자기들 나름의 도덕규범들을 창조하게 하지 않고, 그들에게 우리의 도덕규범에 따라 살도록 요구했더라면, 우리는 한 때는 강하고 생기 넘치던 이 나라를 예전의 자기 모습이나 흉내내고 있는 초라한 모조품으로 만들진 않았을 거라구요.
알겠다.
그리고 한가지만 더요. 거기 서서 제게, 우리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했던 일이 어떻게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 돌변하게 되는가 하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도 마십시오. 우린 전쟁을 끝냈습니다. 신의 도움으로요. 우린 수천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양쪽 진영 다에서요. 그건 전쟁이 치러야 했던 댓가였습니다. 아무도 그런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겠다.
그래요. 아시겠죠? 당신은 흡사 자유주의자 빨갱이 공산당 잔당들같군요. 당신은 우리 역사를 고쳐쓰고 싶어합니다. 좋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아주 존재의 뿌리에서부터 바꾸고 싶어하는군요. 그렇다면 자유주의자인 당신들 마음대로 하십시오. 세상을 뒤집어엎고, 당신들식의 퇴폐적인 사회를 창조하고, 부를 재분배하십시오. 인민과 그 쓰레기 같은 작자들 모두에게 권력을 나눠주십시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우리 마음을 흔들진 못할 겁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과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가치로요, 그게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거라구요!
이제 다 했는가?
예. 그렇습니다. 제가 한 게 어땠습니까?
아주 좋았다. 정말 잘했다.
한 이삼년 라디오 토크쇼를 진행하다 보니 이런 이야기가 쉽게 나오는군요.
그게 바로 너희 행성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냐?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미국만 그런 게 아닙니다. 제 말은 나라 이름과 전쟁 이름만 바꿔 넣으면 된다는 겁니다. 역사상 어떤 시기, 어떤 나라, 어떤 군사 공격이든 집어넣어 보십시오. 전혀 상관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거든요. 모두들 틀린 건 상대방 쪽이라는 걸 압니다. 히로시마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십시오. 대신 베들린을 집어넣으십시오. 아니면 보스니아를 넣든지요.
쓸만했던 건 옛가치라는 것도 모두들 알죠. 지금 세상은 지옥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도요. 미국에서만이 아니고 세계 전체에서요. 세계 모든 곳에서 옛가치로 돌아가고 민족주의로 돌아가자는 외침과 고함이 일고 있습니다.
나도 그렇다는 걸 안다.
그리고 제가 좀 전에 말했던 것들은 그런 감정과 그런 관심, 그런 분노들을 확실하게 표현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잘했다. 하마터면 나도 설득당할 뻔했다.
그랬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진짜로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야기 하실 작정입니까?
나라면 이렇게 묻겠다. 너희가 정말로 30년 전, 40년 전, 50년 전이 더 좋았다고 생각하느냐고? 나라면 기억이란 건 시력이 별로 좋지 않다고 말하겠다. 너희는 좋았던 일들만을 기억하고, 가장 나빴던 일들은 잊어버린다. 하지만 속지마라. 좀 비판적으로 사고하라. 남들이 너희가 생각해주길 바라는 것들만 기억하지 말고.
우리의 예로 돌아가보면, 너희는 정말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는 게 절대로 필요했다고 생각하느냐? 너의 미국 역사학자들은 실제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쓴 여러 보고서들, 일본천황은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전에 이미 전쟁을 끝내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를 비밀리에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고 말하는 여러 보고서들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하는 데 있어 진주만 폭격에 대한 복수심이 어느 정도 작용한 건 아닌가? 그리고 너희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불가피한 일로 인정한다면, 두 번째 폭탄을 떨어뜨린 것도 불가피한 일이었는가?
물론 이 모든 것에서 너희의 설명이 정확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 모든 일이 미국의 관점대로 일어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 논의의 주제가 아니다. 여기서의 주제는 너희 교육제도가 이런 문제를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비판적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너는 예컨대 아이오와주에 있는 한 사회연구소나 역사선생이 학생들에게 내가 위에서 말한 질문들을 던지고, 그 문제를 깊이 있게 검토하고 탐구한 다음 자기들 나름의 결론을 끌어내도록 학생들을 이끌고 격려했다면, 그 연구소나 선생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이 가느냐?
바로 이것이 문제다! 너희는 아이들이 나름의 결론을 끌어내길 원치 않는다. 너희는 그들도 너희가 도달한 결론과 똑같은 결론에 이르길 원한다. 그래서 너희는 그 결론이 너희에게 가져다 준 실수를 되풀이하게 만드는 운명을 아이들에게 지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옛가치와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해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했던 주장들은 어떻게 하고요? 십대 출산율과 십대 미혼모의 믿기지 않는 급속한 상승은요? 또 우리 세상이 미쳐날뛰는 건요?
너희 세상은 미쳐날뛰어 왔다. 나는 그 점에 기꺼이 동의한다. 하지만 너희 세상이 미쳐날뛰어 온 건 너희가 너희 학교들더러 가르치도록 허용했던 것들 때문이 아니다. 세상이 미쳐날뛰어 온 건 건 너희가 학생들더러 가르치도록 허용하지 않았던 것들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학교들이 존재하는 것은 오직 사랑뿐임을 가르치도록 허용하지 않았고, 너희 학교들이 조건 없는 사랑을 이야기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맙소사! 우리는 우리 종교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맞는 말이다. 또 너희는 너희 자식들이 자신과, 자신의 몸과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와, 경이로운 자신의 성적 자아를 찬양하는 것을 배우도록 허용하지도 않겠지. 또 너희는 너희 아이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육체에 깃든 영적 존재로서 자신을 알도록 허용하지도 않을 테고, 더우기나 너희는 너희 아이들을 육체 속에 들어간 영혼으로 다루지도 않을 것이다.
성(性)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고, 자유롭게 논의하고, 즐겁게 설명하고 체험하는 사회들에서는 사실상 성범죄라는 게 없고, 예기치 못한 나이에 출산하는 일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또 “사생아”나 원치 않는 출산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고도로 진화한 사회들에서는 모든 출산이 축복이며, 모든 어머니들과 모든 아이들이 사회의 보살핌을 받는다. 사실 그런 사회라면 그렇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역사가 강자와 권력자들의 시각으로 기울지 않은 사회들에서는 과거의 잘못은 드러내놓고 인정되고,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래서 명백히 자기 파괴적인 행위들은 한번으로 충분하다.
단순히 기억해야 할 사실들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와 문제 해결력과 살아가는 재능을 가르치는 사회들에서는, 과거의 소위 “정당한” 행동들조차 집중적인 점검을 받는다. 어떤 것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그런 식으로 되죠?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예를 들어봅시다. 단순히 사실이 아니라 살아가는 재능을 가르치는 학교 제도라면 히로시마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에 어떤 식으로 접근한다는 겁니까?
너희 교사들은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학생들에게 정확하게 설명해주려 할 것이다. 그들은 그 사건을 몰고 온 모든 사실들-사실들 전부-를 포함시키려 할 것이다. 교사들은 그 충돌의 양쪽 당사자들 입장에 선 역사가들의 시각을 검토하면서, 어떤 것에나 하나 이상의 관점이 있기 마련임을 깨달을 것이고, 그러고 나면 그들은 그 문제와 관련된 사실을 암기하라고 학생들에게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들은 학생들에게 문제를 내놓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 이제 너희들은 이 사건에 관한 모든 걸 들었다. 너희는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또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일어났던 일 전부를 알고 있다. 우리는 너희에게 이 사건에 대해 우리가 수집할 수 있었던 모든 ‘지식’을 너희에게 주었다. 이제 이 ‘지식’에서 너희는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는가? 만일 너희가 그 당시에 직면했던 문제들과 그 당시에는 원자폭탄 투하로 해결했던 문제들을 풀어야 할 사람으로 뽑힌다면, 너희는 어떤 식으로 그 문제들을 풀겠는가?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겠는가?”
아, 그럼요. 그런 건 쉬운 일이죠. 그런 식이라면 말입니다. 말하자면 지나고 나서라면, 누구라도 답안을 낼 수 있기 마련이죠. 누구라도 그 사람들 어깨 너머로 쑥 훑어보고는 “나 같으면 다르게 했을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럼 왜 너희들은 하지 않느냐?
뭐라고요?
왜 너희들은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왜 너희들은 어깨 너머로 쓱 훑어보고, 너희 과거에서 배워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느냐? 내가 그 까닭을 말해주지. 너희 아이들에게 너희 과거를 살펴보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도록 허용한다면, 아니 교육의 일부로 그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다면, 그것은 너희가 일을 처리해온 방식에 그들이 다른 의견을 가질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아이들은 너희와 의견을 달리 할 것이다. 너희는 단지 그런 불일치가 학교에서 너무 많이 허용되지 않게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리로 나서야 한다. 피켓을 흔들고, 소집영장을 찢고, 브레지어와 깃발을 불태운다. 그들은 너희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것, 너희가 보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면 뭐든지 한다. 젊은이들은 계속해서 너희에게 비명을 질러왔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거라구!” 하지만 너희는 듣지 않는다. 너희는 듣고 싶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너희는 그들이 수업에서 얻는 사실들을 비판적으로 생각하도록 복돋우고 싶지도 않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냥 그렇게 받아들여, 여기에 들어와서 우리가 지금껏 잘못했다고 말하지 마, 그냥 우리가 옳은 걸로 받아들여.
이것이 너희가 아이들을 교육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너희가 교육이라고 불러온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와 이 세상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건 젊은이들과 제정신이 아닌 그들의 얼빠진 자유주의 사상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세상을 멸망의 나락으로 몰아가며, 가치지향적인 우리 문화를 파괴하고, 너 하고 싶은 대로, “기분내키는 대로” 하라는 바꿔버린 건 그들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방식 자체를 끝장낼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도덕관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요.
사실 젊은이들은 너희의 생활방식을 파괴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항상 그렇게 해왔다. 너희가 할 일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기를 죽이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복돋우는 것이다.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쪽은 젊은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너희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너희의 오존층을 고갈시키는 쪽은 젊은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전세계의 열악한 공장들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은 젊은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너희를 죽을 지경으로 만드는 세금을 거둬다가 그 돈을 전쟁과 전쟁도구 비용으로 쓰는 것은 젊은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너희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약자와 짓밟힌 자들의 문제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이 가진 이 행성에서 날마다 몇백명씩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게 내버려두는 쪽은 젊은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너희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속임수와 조작의 정치판에 몰두하는 쪽은 젊은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성적으로 억압받고, 자신의 몸을 부끄러워하고 당황스러워하면서, 이 수치심과 당혹감을 자기 자식들에게 전해주는 쪽은 젊은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너희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힘이 정의”라고 말하는 가치체계와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세상을 세운 쪽은 젊은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너희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니 너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너희에게 간청하고 있다.
하지만 폭력적인 쪽은 젊은 사람들이라구요! 폭력조직에 가담해서 서로 죽이는 쪽도요! 법과 질서에다 대고 콧방귀를 뀌는 쪽도 젊은이들이고요. 어떤 질서든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 것도 젊은이들입니다!
너희가 세상을 바꾸려는 젊은이들의 고함과 탄원을 듣지 않고 눈길조차 주지 않을 때, 그들이 자기네 대의(大義)가 지고 있음을 알 때, 즉 어떻게 하든 너희나 너희 방식이 이기도록 만들 것임을 알 때, 결코 어리석지 않은 젊은이들은 그 다음으로 훌륭한 일을 할 것이다. 그들은 너희를 이길 수 없다면 너희에게 가담할 것이다.
젊은이들은 행동으로 너희에게 가담해왔다. 그들이 폭력적이라면, 그것은 너희가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물질적이라면, 그것은 너희가 물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쳐날뛴다면, 그것은 너희가 미쳐날뛰기 때문이다. 그들이 섹스를 가지고 농간을 부리고, 무책임하고 수치스럽게 섹스를 이용한다면, 그것은 너희가 똑같은 짓을 하는 걸 그들이 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과 기성세대 간의 유일한 차이점은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드러내놓고 한다는 것뿐이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행동을 감춘다.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이 못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모든 걸 보고 있다. 어떤 것도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은 기성세대의 위선을 보고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바꾸려고 한다. 하지만 노력해도 실패하고 나면 그들은 그것을 모방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걸 안다. 물론 이 점에서 그들은 잘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한번도 다른 식으로 배우지 못했다. 그들은 기성세대가 해온 일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도록 허용받은 적이 없다. 그들에게 허용된 것은 오로지 그것을 기억하는 것뿐이었다.
결국 너희는 너희가 기억하는memorize 것을 기념한다 memorialize.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을 어떤 식으로 교육해야 합니까?
먼저, 그들을 영혼으로 다루도록 하여라. 그들은 육신 속으로 들어가는 영혼이다. 이것은 영혼이 하기에 쉬운 일이 아니고, 영혼이 익숙해지기에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대단히 갑갑하고 답답한 일이다. 그래서 갑자기 그토록 제한 당하는 것에 아기는 울음으로 항의한다. 이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을 이해하라. 그리고 너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아이들에게 “무제한”의 느낌을 갖게 하라.
그 다음에는, 친절하고 조심스럽게 너희가 창조한 세상을 그들에게 소개하도록 하라. 그들의 기억은행 속에 집어넣는 것들에 십분 신경을 쓰라. 말하자면 조심하도록 하라. 아이들은 보고 체험하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왜 아기들이 자궁을 빠져나온 순간에 너희는 그들을 찰싹 때리는가? 정말로 너희는 이렇게 해야만 그들의 엔진이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거냐? 또 왜 너희는 아기들이 자신들의 존재 전체로 느껴온 유일한 생명형태인 자기 엄마들에게서 떨어져나오고 나면, 금방 그들 사이를 떼어놓는가? 그 갓난아기가 자신에게 생명을 준 존재의 편안함과 안정감을 체험하는 그 잠깐 동안만이라도, 아기의 키와 몸무게를 재고, 그 몸을 눌러보고 찔러보는 걸 참으면 안되는가?
왜 너희는 아이가 접하는 초기 아미지들 중에 폭력이 이미지가 들어가도록 내버려두는가? 누가 이렇게 하는 것이 너희 아이들에게 좋다고 말했는가? 그리고 왜 사랑의 이미지는 감추느냐?
왜 너희는 너희 몸을 아이들에게서 가리고, 그들에게도 자신을 즐기는 방식으로 몸을 만져서는 절대 안된다고 이야기하여, 아이들이 자신의 몸과 몸의 기능들을 부끄럽고 당혹스럽게 여기도록 가르치는가? 그렇다면 너희는 그들에게 즐거움에 관해서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느냐? 또 몸에 관해서는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느냐?
왜 너희는 경쟁이 허용되고 조장되며, “최고”가 되고 “최대”로 배우면 상을 받고, “성취”에 등급이 매겨지고,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는 걸 거의 두고 보지 못하는 학교에 아이들을 가게 하는가?
왜 너희는 아이들에게 운동과 음악과 예술의 기쁨과 옛날이야기의 신비와 삶의 경이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가? 왜 너희는 아이들에게 부자연스러운 것을 집어넣는 대신에,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자연스러운 것을 끄집어내려 하지 않는가?
어째서 너희는 규칙과 기억된 제도와, 그 방식들로는 전혀 진화할 수 없음이 이미 분명해졌는데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사회적 결론들 대신에, 아이들이 그들 나름의 직관과 그들 내면 깊은 곳의 앎이라는 도구들을 써서 논리와 비판적 사고와 문제 해결력과 창작을 배우도록 놔두지 않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제가 아니라 개념들을 가르치도록 하라.
다음 세 가지 ‘핵심개념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교육과정을 고안하라.
자각 awareness
정직 honesty
책임 responsibility
아주 어릴 때부터 너희 아이들에게 이 개념들을 가르쳐 마지막 날까지 이 교육과정을 전체를 다 밟게 하고, 너희의 교육 방식 전체를 이 개념들 위에 자리잡게 하여, 모든 가르침들이 그 뿌리에서 나오게 하라.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내 말은 너희가 가르치는 모든 것이 이 개념들에서 나오리란 뜻이다.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읽기, 쓰기, 셈은 어떤 식으로 가르치게 되는 겁니까?
읽기라면 최초의 입문서에서 고급 독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야기와 줄거리와 주제들이 이 핵심개념들을 중심으로 삼을 것이다. 즉 그것들은 자각의 이야기, 정직에 관한 이야기, 책임에 대한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이런 읽기 책들을 읽으면서, 너희 아이들은 이 개념들을 소개받고, 이 개념들을 주입받으며, 이 개념들에 젖어들 것이다.
쓰기 과제 역시 마찬가지로 이 핵심개념들을 중심으로 삼을 것이다. 아이의 자기표현 능력이 자람에 따라, 그 개념들에 따른 다른 부대 개념들도 더불어 포함될 것이고.
셈하는 기술조차도 이 틀내에서 배우게 될 것이다. 산수와 수학은 추상이 아니라 이 우주에서의 삶을 살기 위한, 가장 기본되는 도구들이다. 셈하는 기술에 대한 모든 가르침은 핵심개념들과 파생물들로 관심을 끌어가고, 그것들에 초점을 둠으로써, 더 넓은 인생체험 속에서 자리매김될 것이다.
여기서 “파생물들”이라는 건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너희 대중매체들이 유행시킨 표현대로 하면, 속편(續編)이라는 것이다. 본질상 사실을 가르치는 현 교육과정의 주체들을 대신하여 교육방식 전체가 이 속편들에 토대를 둘 수 있다.
예를 들면요?
자, 우리 상상을 해보자. 네가 살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개념들로 어떤 것들이 있느냐?
음....... 저로서는....... 정직요. 당신이 말했듯이요.
그래, 계속해봐라. 그건 ‘핵심개념’의 하나다.
그리고, 음....... 공평함요. 이건 제게 중요한 개념입니다.
좋다. 다른 건?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거요. 이것도 제게 중요하긴 한데, 그걸 어떻게 개념으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계속하라. 그냥 생각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둬라.
더불어 사는 것. 인내하는 것. 남을 해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을 동등한 존재로 보는 것. 이것들은 모두 제가 제 아이들에게 가르쳤으면 하는 것들입니다.
좋다. 아주 잘했다! 계속 하라.
또....... 자신을 믿는 것. 이건 훌륭한 가치죠. 그리고 또....... 잠깐, 잠깐만요....... 생각이 나려 해요. 음....... 예, 인간답게 처신하는 거요. 그겁니다. 전 그런 걸 인간답게 처신하는 거라고 말하는데....... 달리 더 좋은 개념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거든요. 어쨌든 그건 사람이 살면서 자신을 끌어가고 남들과 남들이 택하는 행로를 존중하는 태도와 연관된 것입니다.
그건 좋은 소재이다. 그 모두가 좋은 소재이다. 너는 지금 그것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것들 말고도 모든 아이들이 깊이 이해해야 하는 여러 다른 개념들이 있다. 그들이 완전한 인간 존재로 진화하고 성장하려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너희 학교들에서는 이런 것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것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이런 것들은 삶이 가장 중요한 것들이지만, 너희는 그것들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 너희는 정직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가르치지 않는다. 너희는 책임감을 갖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가르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알아채고 그들의 행로를 존중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가르치지 않는다.
너희는 이런 일들을 가르치는 게 부모에게 달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모들은 고작해야 자신들이 전달받은 것을 전해줄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죄는 아들을 찾아가기 마련이니, 너희는 너희 부모가 너희를 가르치던 것과 똑같은 소재로 너희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요?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내가 여기서 이미 여러번 했던 말이지만 최근에 세상 돌아가는 걸 살펴본 적이 있느냐?
당신은 계속해서 우리를 거기로 데려가고 있군요. 계속해서 우리더러 그것을 살펴보게 만들고 있어요. 하지만 그 모든 게 우리 잘못은 아닙니다. 우리 것이 아닌 세상 부분들 때문에 우리가 비난받을 순 없다구요.
그건 비난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인류가 내려왔고, 지금도 내리고 있는 선택에 대해서 너희가 책임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책임을 진다는 거냐?
하지만, 우리가 그 모두를 책임질 순 없다구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그 모두를 기꺼이 책임지기 전까지는, 너희는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
너희는, 그렇게 했고 그렇게 하고 있는 건 그들이라는 말만 하고 있을 순 없고, 그들이 그것을 바로잡기만 해도!라는 말만 되뇌고 있을 순 없다. 월트 켈리의 만화 주인공 포고가 했던 멋진 대사를 기억해내고, 절대 그것을 잊지 마라.
“우리는 적과 마주쳤는데, 그들은 우리였다.”
우리는 몇백년 동안 같은 실수를 되풀이해왔군요. 그렇지요.......
내 아들아, 몇천년 동안이다. 너희는 몇천년 동안 같은 실수를 되풀이해왔다. 인류는 가장 기본 본능들에서 혈거인(穴居人) 시대보다 별로 진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을 바꾸려는 모든 시도는 경멸을 받았고, 너희의 가치를 세밀히 살펴보고 때로는 그것들의 구조를 다시 짜려는 모든 도전은 처음에는 두려움과, 그 다음에는 분노와 맞닥뜨려야 했다. 이제 학교들에서 고상한 개념들을 실제로 가르키자는 발상이 나에게서 나왔으니, 오, 이런, 우리는 지금 살얼음을 밟고 서 있는 셈일세, 그려.
하지만 고도로 진화된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개념들, 이 개념들이 뜻하는 바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는 겁니다. 당신이 이런 것들을 교과과정 속에 넣으려고 한다면 부모들은 들고 일어날 겁니다. 그들은 당신이 “가치들”을 가르치고 있다, 학교가 그런 것들을 가르치는 곳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틀렸다! 다시 한번 인간 종족으로서 너희가 하려한다고 말하는 것, 즉 더 나은 세상을 세우는 것에 비춰볼 때 틀린 쪽은 그들이다. 학교야말로 그런 것들을 가르치기에 딱 좋은 곳이다. 학교는 부모들의 편견에서 벗어나 있고, 부모들의 선입견에서 떨어져 있다는, 정확히 그 이유 때문에. 너희는 부모에서 자식으로 가치들을 전해온 결과가 너희 행성을 어떤 꼴로 만들었는지 보지 못했는가? 지금 너희 행성은 궁지에 몰려 있다.
너희는 문명화된 사회의 가장 기본되는 개념들조차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는 폭력 없이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모르고,
너희는 두려움 없이 사는 법을 모르며,
너희는 조건 없이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이것들은 기본 중의 기본인 사리분별들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것들을 시행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그 충분한 이해에 접근조차 못하고 있다. 몇백만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궁지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습니까?
있다! 너희 학교들에! 너희 아이들의 교육에! 너희의 희망은 다음 세대와 다음번에 있다! 하지만 먼저 너희가 아이들을 예전 방식들에 빠뜨리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그런 방식들에. 그것들은 너희가 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으로 너희를 데려다주지 않았다. 이런데도 너희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너희가 가게 될 곳은 지금 향해 가고 있는 바로 그곳이 될 것이다.
그러니 멈춰라! 돌아서라! 둘러앉아 생각을 모아라. 너희가 인간으로서 지금껏 자신들에 대해 가졌던 전망 중에서 가장 거창한 전망의 가장 위대한 해석만을 만들어내라. 그리고 나서 그런 전망을 단단하게 붙들어줄 가치와 개념들을 잡아서, 그것들을 너희 학교들에서 가르쳐라.
이런 강좌들이 왜 안되는가.......
*권력 이해
*평화로운 갈등 해결론
*애정 관계의 요소들
*사람됨과 자기 창조
*몸, 마음, 영혼의 작동방식
*창조하는 법
*자신을 찬양하고 남들을 존중하는 법
*즐거운 성표현
*공평함
*관용
*다양성과 유사성
*경제 윤리
*의식과 마음의 창조력
*자각과 깨어남
*정직과 책임
*가시성(可視性)과 투명성
*과학과 영성(靈性)
이 중 상당수는 우리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사회과학이라고 하죠.
나는 한 학기짜리 강좌에서 이틀밖에 걸리지 않는 한 단원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는 건 이런 것들이 각기 독립된 강좌가 되고, 너희 학교의 교육과정을 지금 가르치는 식의, 주로 사실에 토대를 둔 교육과정에서 가치에 토대를 둔 교육과정으로 전면 개편하라는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건 지금 너희가 날짜와 사실과 통계들을 놓고 그러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너희 아이들의 가치관을 형성할 핵심 개념들과 이론 구조들에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라는 것이다.
너희 은하계와 너희 우주의 고도로 진화된 사회들에서는 (이 사회들에 대해서는 3권에서 훨씬 더 자세히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삶에 필요한 개념들을 배운다. 그런 사회들에서는 소위 “사실”이란 것들은 훨씬 덜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들은 훨씬 더 나이가 들고 나서야 배운다.
너희는 너희 행성에, 유치원을 졸업하기도 전에 읽는 법을 배운 꼬맹이 조니가 자기 형을 무는 걸 그만두는 법은 여전히 익히지 못한 사회를 창조했다. 그리고 수지는 플래쉬 카드와 기계적 암기로 이전보다 더 낮은 학년에서 구구단은 줄줄 외우게 되었지만, 자기 몸에 대해 부끄럽거나 당황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다.
지금은 너희 학교들은 무엇보다 대답을 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학교의 최우선 역할을 질문하는 데 두었더라면 훨씬 더 유익했을 텐데 말이다. 정직하다, 책임진다, 혹은 “공평하다”는 게 무슨 뜻인가,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점에서 2+2=4란 무슨 뜻인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묻는데. 고도로 진화된 사회들은 모든 아이들이 자기 스스로 그 대답을 찾아내고 창조하게끔 복돋운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되면 혼란이 온다구요!
너희가 지금 살고 있는 비(非)혼란 상황에 반대되는 것으로 말이지.......
좋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되면 더 큰 혼란을 가져올 거라고하죠.
나는 지금 너희가 이런 것들에 대해 배우거나 판단했던 것들 일체를 학교가 너희 자식들과 함께 해서는 안된다고 제안하는 게 아니다. 전혀 반대다. 오히려 예전에 어른들이 배우고 발견하고 판단하고 선택했던 것들 전부를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학교가 그들에게 봉사하는 길이다. 그렇게 되면 학생들은 이 모두가 어떤 식으로 굴러왔는지 관찰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너희 학교들에서는 이런 자료들을 ‘옳은 것’으로서 학생들에게 제시한다. 실제로는 자료들은 그냥 그것, 자료로만 제공되어야 하는데도.
‘과거 자료’가 ‘현재 진실’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전 시기나 이전 체험에서 나온 자료는 언제나 새로운 질문의 근거로 쓰여야 하고, 오직 새로운 질문의 근거로만 쓰여야 한다. 보물은 언제나 대답이 아니라 질문 속에 있기 마련이니.
그리고 질문들은 항상 같아야 한다. 우리가 너희에게 보여준 이 과거 자료에 관해 너희는 동의하는가, 아니면 의견을 달리하는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언제나 이것이 중심 질문이고, 언제나 이것이 초점이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제 아이들이 이 질문에 자기 부모의 가치를 적용하리란 건 명약관화하다. 부모는 아이들의 가치체계를 창조하는 데 있어 계속해서 강력한 역할, 명백히 최우선 역할을 할 것이다. 학교의 취지와 목적은 가장 어린 나이에서부터 공식교육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이 그런 가치들을 탐구하고 그것들을 사용하고 적용하고 작동시키게 복돋우는 것, 그렇다, 그것들을 문제삼도록 복돋우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가치를 문제삼길 원하지 않는 부모는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매개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당신이 묘사하는 그런 학교가 있길 바랍니다. 정말로요!
이 모델에 접근하려고 애쓰는 몇몇 학교들이 있다.
있다고요?
그렇다. 루돌프 스타이너Rudolph Steiner란 사람의 저서들을 읽어봐라. 그가 발전시킬 월도르프 스쿨Waldorf School의 방법들을 연구해봐라.
저, 그 학교들이라면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건 광고입니까?
이건 관찰이다.
제가 월도르프 스쿨을 잘 안다는 걸 당신이 아셨기 때문이군요. 그 사실을 알고 계셨지요?
물론 나도 알고 있었다. 네 삶의 모든 것이 이 순간을 네게 가져오는 데 기여했다. 나는 이 책을 시작할 때 비로소 너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나는 네 모든 만남과 체험들을 매개로 오랫동안 너와 이야기를 나눠왔다.
당신은 월도르프 스쿨이 최고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다. 나는 그것이 쓸만한 보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너희가 인간으로서 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 너희가 하고 싶다고 주장하는 것, 너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나는 그것을 교육이 어떻게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지혜”에 초점을 두는 방식으로 시행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 비록 너희 행성과 너희 사회에는 그런 예들이 드물긴 하지만, 내가 열거할 수 있는 여러 예들 중 하나로 말하는 것이다.
사실 그건 제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는 모델입니다. 월도르프 스쿨과 다른 학교들 간에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간단한 예이긴 하지만, 그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줄 겁니다.
월도르프 스쿨에서는 초등학교 학습체험의 전 과정 동안에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단계를 밟아나갑니다. 왜냐하면 전학년에 걸쳐 아이들이 같은 교사를 담임으로 갖기 때문이죠. 이 선생에서 저 선생으로 바꾸지 않고요. 당신은 여기서 형성되는 유대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 가치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교사들은 마치 자기 자식인 양 아이를 잘 알게 됩니다. 아이는 다수의 전통적인 학교들에서는 존재한다고도 생각지 않던 마음의 문을 연 교사들과 신뢰와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전체 학년이 끝나고 나면 교사는 다시 1학년 담임으로 되돌아갑니다. 또 다른 그룹의 아이들과 함께 전학년 교육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밟아나가는 거죠. 그래서 아무리 헌신적인 월도르프 교사라도 재직 중에 과정을 밟아나가는 아이들은 겨우 네다섯 그룹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교사는 그 아이들에게 전통적인 학교 환경에서는 불가능한 수준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교육모델은 그런 식의 틀 속에서 함께 나누는 인간관계의 유대감과 사랑이 교사가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사실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걸 인정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집 밖에 있지만, 홈스쿨(집에서 교과과정을 밟을 수 있게 허용된 미국의 교육제도-옮긴이)과 비슷합니다.
그렇다. 그건 좋은 모델이다.
이것말고도 다른 좋은 모델들이 있습니까?
그렇다. 너희 행성에서는 교육과 관련하여 약간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느리다. 지향성을 지닌 목표인 재능 키우기에 초점을 두는 교육과정을 공립학교들에서 실시하려는 시도조차도 엄청난 저항에 부딪혀 왔다. 사람들은 그것을 위험스럽거나 효과적이지 않다고 여긴다. 그들은 아이들이 사실들을 배우길 원한다. 그럼에도 약간의 성공 사례들은 있다. 하지만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무척 많다.
교육은 인간 체험 중에서 너희가 인간존재로서 추구한다고 말하는 것에 비추어 분해수리 방법을 어느 정도 적용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
그런데 저는 정치판도 좀은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렴.
10
이 순간을 기다려왔습니다. 이건 당신이 2권은 지구 범위에서 세계적인 문제들을 다루게 되리라고 제게 말했을 때, 제가 짐작했던 것 이상이군요. 그러니 너무 초보적인 질문같아 보이긴 하지만, 제가 당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는 것으로 인간 정치에 대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자격이 없거나 가치가 없는 질문은 없다. 질문도 사람과 비슷하다.
좋은 말씀이십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자기 나라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외정책을 실시하는 게 나쁜 겁니까?
아니다. 첫째로, 내 관점에서는 어떤 것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너희가 그 용어를 어떤 식으로 쓰는지 이해하니, 그 용어의 너희식 문맥에서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나쁘다”는 용어를 “너희가 되려는 존재라는 관점에서 보아 너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겠다. 이것이 지금껏 내가 너와 이야기할 때 “좋다” “나쁘다”는 용어를 써온 방식이다. 그것은 항상 이런 문맥에서만 사용된다. 사실 ‘좋거나 나쁜 것’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래서 그런 문맥관계에서 보면, 아니다. 대외정책들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나쁜 건 그렇게 하지 않는 듯이 가장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렇게 가장한다. 그들은 실제로는 일련의 이유들 때문에 행동을 취하거나 취하지 않았으면서도, 그 근거로는 다른 일련의 이유들을 제시한다.
왜죠? 왜 대다수 국가들이 그렇게 하는 겁니까?
대다수 대외정책들의 진짜 이유를 이해하게 되면, 국민들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으리란 걸 정부가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의 정부라도 마찬가지다. 의도적으로 국민을 현혹시키지 않는 정부는 거의 없다. 사기는 정부의 일부이다. 정부가 자신의 결정은 국민을 위해서라고 그들을 납득시키지 않는다면, 지금 자신들을 다스리는 방식대로 다스려지길 원할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기에. 아니 아예 다스림 자체를 원할 국민도 거의 없을 것이기에.
사실 이런 걸 믿게 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정부의 어리석음은 대다수 국민들 눈에 확연이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국민의 충성을 붙들어두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해야 한다. 정부란 충분히 배짱좋게, 그리고 충분히 오랫동안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은 “진실”이 된다는 공리(公理)의 정확성을 완벽하게 그려내는 초상화가이다.
권력을 쥔 자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었는지 절대 국민들이 알게 하지 않는다. 또 자신들이 지금껏 해왔고 앞으로 하려는 일이 그 자리를 지키는 일뿐이란 것도.
진실과 정치는 섞이지 않으며 섞일 수도 없다. 정치란 건 바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말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만을 말하는 기술이며, 그것을 오직 옳은 것으로만 말하는 기술이기에.
모든 정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정치술이라는 게 심리술이라는 데 있다. 정치는 사람들의 심리를 대단히 노골적으로 알아챈다. 그것은 사람들이란 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임을 간단하게 눈치챈다. 그러니 정치란 것은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가 곧 너희의 이익임을 너희에게 믿게 만드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는 무엇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 알고 있다. 정부가 국민에게 뭔가를 주는 정책을 짜내는 데 그토록 능수능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래 정부는 대단히 한정된 역할만을 가졌다. 정부의 목적은 단순히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제공하는” 일을 더했다. 정부가 국민의 보호자일 뿐 아니라 국민의 제공자가 되기 시작했을 때, 정부는 사회를 유지하지 않고 그것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부란 건 그냥 국민이 원하는 일을 할 뿐이지 않습니까? 정부는 단지 체계를 제공할 뿐이지 않습니까? 사회적 범위에서 사람들이 자활(自活)하게끔 해주는 체계를요. 예를 들면 우리 미국에서는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개인의 자유, 기회의 중요성, 어린이의 존엄성에 대단히 큰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법률들을 만들고, 또 그런 정책들을 세우도록 정부에 요구해왔습니다. 그들이 정년이 지나고서도 인간으로서 존엄을 유지할 수 있도록요. 또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취업기회와 주택취득 기회를 보장하는 법들을 만들고, 그런 정책들을 요구하죠. 우리와 다른 사람들,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들까지 포함해서요. 그리고 우리는 아동노동법을 근간으로 하여, 한 주(州)의 어린이들이 그 주의 노예가 되지 않고, 아이가 있는 모든 가정이 존엄을 잃지 않는 기본 의식주생활을 꾸려갈 수 있게 해주는 정책들도 요구합니다.
그런 법률들은 너희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사람들을 부양할 때, 너희는 그들의 가장 위대한 존엄을 빼앗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그들 스스로 자활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그들의 능력과 창조성, 집중력의 발위라는 존엄을. 이것은 반드시 잡아야 하는 섬세한 균형점이다. 너희 국민은 오로지 한 극단에서 다른 한 극단으로 가는 것만을 아는 듯 싶다. 너희는 정부가 국민을 위해 “몽땅 다 해주기”를 바라거나, 내일 당장이라도 정부 정책들을 몽땅 다 폐기하고, 법률들을 몽땅 다 지워버리고 싶어한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좋은” 신임장을 지닌(혹은 “나쁜” 신임장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으레 가장 좋은 삶의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에서, 스스로 자활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습니다. 지주는 대가족에게 토지를 빌려주지 않고, 회사는 여자를 고용하지 않으며, 정의는 너무 자주 신분의 부산물일 뿐이고, 예방차원의 의료혜택은 충분한 수입을 가진 사람들만으로 제한되고, 여타 온갖 불평등과 차별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자신을 부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마련이죠.
그래서 정부가 국민의 양심을 대신해야 한다는 말이냐?
아니요. 정부 자체가 겉으로 드러난 국민의 양심입니다. 사람들이 사회의 질병을 바로잡으려 애쓰고, 그것을 바라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는 건 정부를 통해서입니다.
흔히 그렇다고들 하지. 하지만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너희는 사람들에게 숨쉴 기회를 보장해주려던 법 때문에 너희 스스로가 질식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도덕을 법률로 정할 수는 없고, 평등을 명령할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은 집단의식의 강요가 아니라, 집단의식의 변화이다.
행위(와 모든 법률과 모든 정부 정책)는 ‘존재상태’에서 나와야 하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참된 반영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법률들은 당연히 우리 자신을 반영하죠! 법들은 모두에게 “이것이 현재 미국의 상태라구. 이것이 바로 미국인들이지.”라고 말하지요.
아마 최상의 경우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너희 법률이란 건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권력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상태를 선언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소수의 엘리트”가 법으로 “무지한 다수”를 가르친다는 거군요.
바로 그거다.
그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만일 우리 중에 똑똑하고 잘난 소수의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기꺼이 사회와 세상의 문제들을 검토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그건 다수를 돕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그 소수의 동기에 따라 다르고, 그 동기의 명확성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다수들 스스로 자신들을 다스리게 놔두는 것보다 더 “다수”에게 봉사하는 건 없다.
무정부주의로군요. 그렇게 해서는 아무 일도 안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정부가 끊임없이 너희에게 말해준다면, 너희는 성장하여 위대해질 수 없다.
정부-제가 말하는 정부는 우리 자신을 다스리도록 우리가 선택해온 법이란 뜻입니다-란 건 한 사회의 위대성(혹은 그 위대성의 결여)를 반영하니, 위대한 사회일수록 위대한 법들을 통과시키기 마련이죠.
그리고 아주 소주의 법들만을, 위대한 사회라면 극소수의 법들밖에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짜로 아무 법도 없는 사회는 “힘이 정의”인 미개 사회입니다. 법이란 건 놀이터를 평평하게 골라, 그 힘의 강약에 관계없이 진실로 옳은 것이 지배할 수 있게 하려는 인간의 시도입니다. 우리가 서로 동의하는 규약들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나는 아무런 행동 규약도, 아무런 동의도 없는 세상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의 동의와 규약들이 자기 이익self-interest에 대한 더 수준높은 이해와 더 위대한 규정에 근거하기를 제안하고 있다.
대개의 법률들이 실제로 이야기하는 내용이란 건 너희 중에 가장 권력 있는 자들이 기득권으로 지니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흡연문제 한 가지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지금 법률은 특정 종류의 식물인 삼(대마)을 기르거나 쓸 수 없다고 말한다. 정부가 말하는 바로는 그것이 너희에게 나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정부가 다른 종류의 식물인 담배를 기르거나 쓰는 건 전혀 괜찮다고 말한다. 그것이 너희에게 좋아서가 아니다(사실 정부 자신도 담배는 나쁘다고 말한다). 추측컨대 너희가 항상 그렇게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앞의 식물은 불법인데, 뒤의 식물은 그렇지 않은 진짜 이유는 건강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경제와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권력과.
그러니 너희 법률들은 너희 사회가 생각하는 자신, 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게 아니다. 너희 법률들이 반영하는 건 권력이 어디에 있는 가이다.
공평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모순이 아주 명백한 상황을 예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상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반대다. 대개가 그러하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뭡니까?
그 본성상 제한을 뜻하기 마련인 법률을 최대한 적게 가지는 것.
앞의 식물이 불법화된 이유는 오직 표면에서만 건강과 연관되어 있다. 진실은, 법으로 보호받는 담배나 알코올이 중독성이 있거나 건강을 해치치 않는다면, 앞의 식물 역시 똑같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허용되지 않는가? 그 이유는 그 식물을 재배하도록 허용한다면, 세상의 목면 재배업자들과 나일론과 레이온 제조업자들, 그리고 목재 가공업자들 중 절반이 직장을 잃고 말 것이라는 데 있다.
삼은 너희 행성에서 가장 쓸모 많고, 가장 강하고, 가장 질기며, 가장 오래 가는 물질 중 하나일 수 있다. 너희는 그보다 더 좋은 섬유를 옷감으로 생산할 수 없으며, 그보다 더 강한 재질을 밧줄로 생산할 수 없고, 그보다 더 쉽게 재배하고 쉽게 수확할 수 있는 원료를 펄프로 생산할 수 없다. 너희는 전세계 삼림이 점점 줄고 있다는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려고 해마다 수십만 그루의 나무를 자른다. 삼이라면 한 그루의 나무도 자르지 않고, 너희에게 수백만부의 신문들을 재고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사실 그것은 10분의 1밖에 안되는 비용으로 그 많은 자원들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적 같은 식물, 덧붙이며 놀라운 약효까지 지닌 이 기적 같은 식물을 재배하도록 허용한다면 누군가가 손해를 본다. 바로 이것이 족쇄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너희 나라에서 대마초가 불법인 이유이다.
너희가 전기자동차를 대량 생산하거나, 비용이 적당하면서도 질 좋은 의료보장 제도를 실시하거나, 모든 가정에서 태양열 난방과 태양열 동력을 사용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너희가 이 모두들 만들 수 있는 자금과 기술을 갖춘 건 이미 한참 전의 일이다. 그런데도 왜 너희는 그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자, 그렇게 했을 때 손해볼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라. 거기에서 답을 찾아낼 것이다.
이것이 너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는 ‘위대한 사회’냐? 자칫 공동선(共同善)을 고려하기라도 하나는 날엔, 발에 채이고 절규하면서 질질 끌려가야 하는 사회가? 자칫 공동선이나 집단의 선이 언급되기라도 하는 날엔, 하나같이 ‘공산주의!’라고 비명을 지르는 사회가? 너희 사회에서는 다수의 선을 고려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엄청난 이윤을 안겨주지 않을 때, 다수의 선은 대체로 무시되고 만다.
이것은 너희 나라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해당되는 것이다. 결국 인류가 직면한 기본 문제는 과연 인류의 최고 이익, 공동 이익이 사리사욕을 대신할 수 있는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희 미국에서는 법을 통해서 공동의 이익, 최상의 이익을 고려하고자 해왔다. 하지만 너희는 비참하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너희 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한데도, 유아 사망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왜 그럴까? 가난한 사람들이 질 좋은 산전산후 의료를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며, 너희 사회가 이윤을 쫓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너희의 비참한 실패들 중 단지 한가지 예로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다른 선진국들보다 너희 나라의 유아들이 더 높은 비율로 죽어간다는 사실이 너희를 심히 괴롭혀야 하는데도,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한 사회로서 너희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가 여실히 증명된다. 다른 나라들은 병자와 빈민들, 노인과 허약자들을 부양한다. 하지만 너희는 자산가들과 세력가와 상류층 사람들을 부양한다. 은퇴한 미국인들의 85%가 빈곤하게 살고 있다. 이 노인들 중 상당수와 대부분의 하층민들이 그 지역 병원응급실을 자신들의 “주치의”로 쓰고 있다.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만 진료를 받고, 예방 차원의 건강유지 의료는 사실상 전혀 받지 못하면서 말이다.
너도 알다시피, 쓸 돈이 없는 사람들한테서는 이윤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쓸모를 다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너희의 위대한 사회다-
당신은 안 좋은 쪽으로만 보여주시는군요. 그래도 미국은 지구상의 어떤 나라보다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국내만이 아니라 국외에서도요.
미국은 많은 일을 해왔다. 이것은 눈에 뛸 만큼 사실이다. 하지만 너는 국민총생산량으로 따지면, 미국이 내놓은 대외원조의 비율이 다른 여는 소국들보다 더 작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너무 자화자찬에 빠지기 전에, 너희는 주위 세계를 한번쯤 둘러봐야 하리라는 게 문제의 초점이다. 왜냐하면 너희 세계가 불운한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 이 정도라면, 너희 모두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이기에.
너희는 낭비적이고 퇴폐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 너희는 사실상 너희가 만드는 모든 것 속에 너희 기술자들이 “계획된 폐품화”라고 부르는 성질을 심어왔다. 차값은 세배나 올랐지만 차 수명은 오히려 3분의 1로 줄었다. 옷들은 열 번만 입고 나면 해어진다. 너희는 식품들이 선반 위에서 더 오래 머물도록 화학약품들을 식품들 속에 넣는다. 실상 그것이 너희가 지구에 머무는 시간을 더 줄이는 것을 뜻할지라도 말이다. 우스꽝스런 노력의 대가로 스포츠팀들이 추잡한 봉급을 지불할 수 있게끔 너희가 지원하고 고무하는 동안에도, 너희를 죽이는 질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내려고 싸우는 교사와 성직자와 연구자들은 돈을 구걸하러 다녀야 한다. 너희 가게와 식당과 가정들은 날마다 전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먹여살릴 수 있는 음식을 버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너희에 대한 기소가 아니라, 그냥 관찰일 뿐이다. 그리고 미국에만 해당되는 일도 아니다. 마음을 병들게 하는 이같은 태도들은 이미 세계 전역으로 퍼져 있다.
힘 없는 사람들은 전세계 어디서나 그저 살아 있기 위해서 납작 엎드려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으면 안되지만, 권력을 쥔 소수는 거대한 돈뭉치를 지키고 늘려가면서, 비단요에서 자고, 아침이면 금으로 만든 욕실 손잡이를 돌린다. 피골이 상접하도록 여윈 아이가 흐느끼는 엄마 품에서 죽어갈 때,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란 자들은 원조물자가 굶주리는 대중에게 가는 걸 막는 정치 부패에 몰두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바꿀 힘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이 보이지만, 기실 진실은 힘이 문제가 아니라, 누구도 그럴 의지를 갖지 않은 것 같다는 데 있다.
그러니 상황은 항상 이대로일 것이다. 남들의 곤경을 자신의 곤경으로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한.
우리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거죠? 어째서 우리는 이런 잔혹행위들을 날마다 보면서 그것들이 계속되도록 놔두는 걸까요?
너희가 마음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지구 행성 전체가 의식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너희는 서로를 보살필 것인지까지도 결정해야 한다.
너무 감상적인 질문같긴 하지만, 왜 우리는 자기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걸까요?
너희는 너희 가족을 사랑하고 있다. 단지 너희 가족이 누구인지에 대해 대단히 제한된 시야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너희는 자신을 인간 가족의 일부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 가족의 문제는 너희 문제가 아니다.
우리 지구인들의 세계관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너희가 그 세계관을 어떤 세계관으로 바꾸려고 하는지에 달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가 고통과 괴로움을 대폭 줄일 수 있습니까?
너희 사이의 모든 분리를 없애는 것으로. 새로운 세계상을 건설하는 것으로. 그것을 새로운 사고틀 안에 붙잡아두는 것으로
어떤 사고틀 말입니까?
지금의 세계관과 완전히 결별하게 될 사고틀.
지금의 너희는 지정학적인 의미에서 세계를 각자 주권을 가진 채 서로 독립된 민족국가들의 집합으로 본다.
이 독립된 민족국가들이 내부문제는 대체로 전체 집단의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들이 전체 집단(혹은 그 집단에서 가장 힘 있는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미치기 전까지는.
전체 집단은 강대국 집단의 기득권에 따라 개별 국가들의 상황과 조건에 반응한다. 만일 강대국 집단의 구성원 중에서 어느 누구도 잃을 게 없다면, 설령 개별 국가에서는 생지옥으로 떨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해마다 몇천명씩이 굶어죽고, 몇백명씩이 내전으로 죽어가며, 폭군들이 농촌지역을 약탈하고, 독재자들과 그들의 무장한 하수인들이 약탈하고 노략질하고 살해하며, 체제가 인간의 기본권을 박탈하더라도, 나머지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그건 “내부문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너희의 이해관계가 위협받고, 너희의 투자와 안전과 삶의 질이 위태로워지기라도 하면, 너희는 너희 나라의 힘을 결집시키고, 너희 뒤의 세계를 결집시키려 애쓰면서, 천사들도 밟기를 두려워하는 그곳으로 쳐들어가리라.
그러고 나면 너희는 ‘배짱좋은 거짓말’을 한다. 너희가 그렇게 한 것은 세상의 압박받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박애주의 정신에서였노라고. 하지만 진실은 너희는 단지 너희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는 데 있다.
이해관계가 없는 곳에는 너희가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정치기구들은 자기 이해에 따라 움직인다는 거군요. 다른 새로운 것은요?
너희가 세상을 바꾸고자 하면, 뭔가가 새로워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너희는 다른 사람의 이해를 자신의 이해로 여기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너희의 세계 현실을 새로 건설하고 그에 따라 너희 자신을 다스릴 때만 가능해질 것이다.
지금 세계정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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