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2 (4)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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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대해 말해주십시오.
공간은 드러난....... 시간이다.
사실 공간, 다시 말해 그 속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순수한 “빈” 공간 같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어떤 것이다. “가장 빈” 공간조차도 수증기로 가득차 있다. 너무나 엷고, 저 멀리 무한한 영역 너머로까지 뻗어나가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수증기로.
그리고 그 수증기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 존재하는 건 에너지, 순수에너지이다. 이것은 진동, 즉 떨림으로 드러나며, 특정 진동수로 이루어지는 ‘전체’의 운동으로 나타난다.
보이지 않는 “에너지”는 “물질을 함께” 묶는 “공간”이다.
너희의 일직선 시간 모델을 써서 설명하면, 한때 우주의 모든 물질들은 하나의 미세한 알갱이로 응축되어 있었다. 지금 존재하는 식의 물질을 밀도 높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너희로서는 이 알갱이의 밀도성(密度性)을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지금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이 공간이다. 모든 “고체”는 2%의 딱딱한 “물질”과 98%의 “공기”로 되어 있다! 게다가 물체들 속에 있는 소립자들 사이의 공간은 어마어마하다. 그것은 마치 밤하늘에 보이는 천체들 사이의 거리와 같다. 그럼에도 너희는 이 물체들을 딱딱하다고 말한다.
사실 한때 우주 전체는 “딱딱했다”. 물질 분자들 사이에는 사실상 어떤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물질들이 자신에게서 “공간”을 제거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공간”이 사라지고 나자, 그 물질은 바늘 끝보다 더 작은 영역만을 차지하게 되었다.
실제로 어떤 물질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간” 이전에 하나의 “시간”이 있었다. 너희가 반(反)물질이라고 불렀을, 가장 순수한 ‘최고의 진동에너지’ 형태만이 존재하던 시간이.
이것은 시간 “전의” 시간, 너희가 아는 대로의 물질 우주가 존재하기 전의 시간이었다. 어떤 것도 물질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낙원, 즉 “천국”이라 여긴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matter(물질-옮긴이)도 없었기에”.
(지금의 너희 언어에서 뭔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될 때 “무슨 일인가What's the matter?”라고 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태초에 순수에너지-나(神)!-는 아주 빠른 속도로 진동하여 물질을 형성했다. 이 우주의 모든 물질을!
너희들 역시 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다. 사실 너희는 날마다 그렇게 하고 있다. 너희 생각들은 순수한 진동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물질들을 창조할 수 있으며 창조하고 있다! 만일 너희 중 충분히 많은 사람이 같은 생각을 지니면 너희는 물질 우주의 부분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나아가 그것들을 창조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대해서는 1권에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지금 우주는 팽창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계속 영원히 팽창하는 겁니까?
아니다. 그 팽창을 몰아가는 에너지가 다 없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대신하여 사물들을 함께 묶는 에너지들이 모든 것을 다시 “함께 뒤로” 끌어당길 것이다.
우주가 수축할 거란 말씀입니까?
그렇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제자리로 돌아 간다”! 그러면 너희는 다시 한번 낙원을 가질 것이다. 아무 물질도 없고 오직 에너지만이 있는 낙원을.
달리 말하면-나를!
결국 그 모두가 내게로 돌아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모두가 이것으로 돌아오리라”는 구절의 기원이다.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군요!
물질형태로는 그렇다. 하지만 너희는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너희가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다. 너희는 존재 자체이기에.
우주가 “무너지고” 나면 그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 과정 전체가 또 다시 시작된다! 또 다른 소위 ‘대폭발’Big Bang이 있을 것이며, 또 다른 우주가 태어날 것이다.
그것은 팽창하고 수축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것은 다시 한번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다음 다시, 또 다시....... 영원히 오래오래. 끝없이.
이것은 신의 들숨과 날숨이다.
저, 또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모든 것이 아주 재미있긴 하지만, 제 일상생활과는 별 관련이 없군요.
내가 말했다시피, 우주의 가장 심오한 수수께끼들을 푸는데 과도하게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건 아마도 너희 삶을 가장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 ‘광대한 과정’에 대한, 이런 단순한 평신도식 비유와 묘사들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도 있다.
그게 어떤 건데요?
삶 자체를 포함하여 모든 것은 순환한다는 이해 같은 것.
우주의 삶을 이해하게 되면, 너희는 너희 내면에 있는 우주의 삶을 이해할 수도 있다.
삶은 주기로 순환한다. 모든 것이 순환한다. 모든 것이. 이 점을 이해할 때, 너희는 그 ‘과정’을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많이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주기로 순환한다. 삶에는 타고난 리듬이 있으며, 모든 것이 그 리듬에 따라 움직인다. 모든 것이 그 흐름대로 따라간다. 그래서 “모든 것에는 철이 있으며, 하늘 아래 모든 ‘목적’에는 때가 있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자는 현명하다. 나아가 이것을 이용할 줄 아는 자는 슬기롭다.
여자들만큼 삶의 리듬을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여자들은 자신들의 삶 전체를 리듬에 따라 산다. 그들은 삶 자체의 리듬 속에 서 있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잘 “그 흐름을 따라 갈” 수 있다. 남자들은 그 흐름을 밀고 당기고 거부하고 이끌고 싶어한다. 여자들은 그 흐름을 체험한다. 그러고 나서는 조화로워지고자 그것을 본뜬다.
여자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의 선율을 듣는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녀는 삶이 끌고 당기고 미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달릴 때와 쉴 때, 웃을 때와 울 때, 잡을 때와 보낼 때를 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얌전하게 자신의 육체에서 떠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 떠남에 저항한다. 여자들은 자신의 몸 속에 있을 때도 그 몸을 좀 더 얌전하게 다룬다. 남자들은 자신의 몸을 겁나게 다룬다. 남자들이 삶을 다루는 방식도 이와 같다.
물론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일반론이다. 나는 그냥 지금까지는 어떤 식이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가장 넓은 의미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너희가 삶을 살펴본다면, 자신이 보고 있고 보아왔던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너희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한다면, 너희는 이 일반론 속에서 진리를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절 우울하게 하는군요. 마치 여자들이 더 우월한 존재인 듯이 느끼게 만들거든요. 그들이 남자들보다 “좋은 자질”을 더 많이 갖고 있는 걸로요.
삶이라는 그 영광스런 리듬의 일부로 음과 양이 있다. “존재”의 한 측면이 다른 측면보다 “더 완벽하거나 더 낫지는” 않다. 두 측면 모두 단순히 그냥 그것, 측면들일 뿐이며, 멋지게도 그냥 그것일 뿐이다.
남자들이 신성(神性)의 또 다른 반영을 표현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을 여자들도 똑같이 부러움의 눈길로 쳐다본다.
그럼에도 남자가 되는 것은 너희의 바탕을 시험하는 것, 너희의 시련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너희가 충분히 오랫동안 남자로 있었다면, 즉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충분히 고통받고, 자신의 창조물이 가져다 준 재난으로 충분히 상처입고, 자신의 행동을 멈출 만큼-공격성을 이성으로, 경멸을 동정으로, 항상 이김을 누구도 지지 않음으로 바꿀 만큼-충분히 남들을 해쳤다면, 너희는 여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너희가 힘은 “정의”가 아니라는 것, 강함은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함께 하는 힘이라는 것, 절대권력은 남들에게 절대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임을 깨달을 때, 또 너희가 이런 것들을 이해한다면, 비로소 너희는 여자의 육신을 입을 자격을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마침내 그녀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기에.
그러면 여자가 남자보다 더 낫군요.
아니다! “나은” 것이 아니다-그것과는 다르다! 그런 식의 판단을 하는 것은 너희이다. 객관 현실에서는 더 “낫거나” 더 “못한”일 같은 건 없다. 오직 존재하는 것과 너희가 되고자 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뜨거움이 차가움보다 더 낫지 않고, 위가 아래보다 더 낫지 않다. 이것은 내가 전에 다룬 주제이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보다 더 “나은 건” 절대 아니다. 그것은 그냥 존재하는 그대로일 뿐이다. 너희가 그냥 너희이듯이.
그럼에도 너희 중의 누구도 제한받거나 더 한정되지 않으니, 너희는 자신이 되고자 원하는 것이 될 수 있고, 자신이 체험하고자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 전생들에서 그랬듯이, 이번 생에서도, 다음 생에서도, 혹은 그 다음 생에서도, 너희 각자는 언제나 선택하고 있다. 너희 각자는 그 모든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희 각자 속에 남자와 여자가 있다. 표현하고 체험하는 것이 너희를 기쁘게 해주는, 그런 너희의 측면을 표현하고 체험하라.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너희 각자에게 열려 있음을 알아두어라.
다른 주제로 넘어가고 싶지가 않군요. 이 남성-여성 패러다임에 좀 더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지난번 책의 끝부분에서 이 이중성의 성적 측면 전체를 훨씬 더 상세하게 다루겠노라고 약속하셨지요.
그랬지-내 생각에도 지금이 우리가, 즉 너와 내가 ‘성’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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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양(兩) 성을 창조하셨습니까? 이것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생각해낸 유일한 방법인가요? 우리는 성행위라고 하는 이 엄청난 체험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수치로 다루지 마라-이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죄로도, 두려움으로도 다루지 마라.
수치는 미덕이 아니고, 죄는 선(善)이 아니며, 두려움은 존중이 아니기에.
그리고 욕망은 열정이 아니니 욕망으로 다루지 말고, 포기는 자유가 아니니 포기로 다루지 말며, 공격성은 간절함이 아니니 공격성으로 다루지 마라.
그리고 당연히 통제하고 억누르고 지배하려는 생각으로 다루지 마라. 이것들은 ‘사랑’과 전혀 다르니.
자, 그런데....... 단순히 신체의 만족을 위해 섹스를 사용해도 괜찮을까? 놀랍게도 대답은 그렇다이다. “신체의 만족”이란 그냥 ‘자기 사랑’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기에.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신체의 만족에도 나쁜 딱지가 붙어왔다. 섹스에 그토록 많은 죄가 붙어다니는 주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희는 신체를 만족시키기 위해 신체에 강렬한 만족을 주는 것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듣는다! 이것이 명백히 모순임은 너희에게도 분명하지만, 너희는 그 결론을 가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다. 그래서 너희는 섹스를 하는 동안과 한 다음에, 섹스를 기분좋게 느낀 것에 죄의식을 느끼기만 하면, 적어도 그 섹스는 괜찮아지는 걸로 결정했다.
이것은, 내가 여기서 이름을 들지는 않겠지만, 너희 모두가 잘 아는 유명한 가수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자기 노래들을 부른 대가로 몇백만 달러를 받게 된 그녀는 자신의 믿을 수 없는 성공과 그 성공이 가져다준 부에 대해 소감을 이야기해달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일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거의 죄의식까지 느낍니다.”
여기서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만일 그것이 너희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 일을 하는 대가로 돈까지 받는 건 절대 안된다. 사람들은 무한한 기쁨이 아니라, 싫어하는 일이나 적어도 힘든 일을 해서 돈을 벌기 마련이니!
그래서 세상이 주는 메시지는 이렇다. 그것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그것을 즐겨도 좋다!
너희가 좋게 느끼는 어떤 것을 나쁘게 느끼려 할 때, 그리고 그렇게 해서 자신을 신....... 무엇이든 너희가 좋게 느끼길 바라지 않는다고 여기는 신과 화해시키려 할 때, 자주 사용하는 것이 죄의식이다.
특히 너희는 육체의 기쁨을 좋게 느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너희 할머니들이 속삭이면서 이야기했듯이) “섹스.......”라면 절대로 안된다.
그런데 좋은 소식이 있다. 섹스를 사랑해도 좋다!
또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좋다!
사실상 이것은 명령이다.
너희가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섹스(또는 다른 어떤 것)에 탐닉하는 것이다. 하지만 섹스와 사랑에 빠지는 거라면 “괜찮다”!
다음 구절을 하루에 10번씩 외워라.
나는 섹스를 사랑한다.
다음 구절을 하루에 10번씩 외워라.
나는 돈을 사랑한다.
이제 진짜 힘든 걸 원하는가? 그렇다면 다음 구절을 10번씩 외워라.
나는 나를 사랑한다.
너희가 사랑한다고 여기지 않는 다른 것들도 여기에 있다. 그것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라.
권력
영광
명성
성공
승리
더 원하는가? 다음 일들을 해보라. 이것들을 사랑한다면 너희는 정말로 죄의식을 느끼리라.
남들의 아첨
더 나아지기
더 많이 갖기
방법 알기
이유 알기
이만하면 충분한가? 잠깐만! 여기 최고의 죄가 있다. 너희는 자신이,
신을 안다
고 느끼면 틀림없이 최고의 죄의식을 느끼리라.
어떤가, 재미있지 않은가? 너희 삶 전체를 통틀어 너희는,
자신이 가장 많이 원하는 것
에 죄의식을 느끼도록 길들여져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바라는 것들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그것들에 대한 너희의 사랑이 그것들을 너희에게로 끌어오리니.
이것들은 모두 삶이 재료들이다. 그것들을 사랑할 때, 너희는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바란다고 선언할 때, 너희는 삶이 마땅히 제공해야 할 모든 좋은 것들을 택하겠노라고 공표하는 것이다.
그러니 섹스를, 너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섹스를 선택하라! 그리고 권력을, 너희가 모아들일 수 있는 모든 권력을 선택하라! 그리고 명성을, 너희가 잡을 수 있는 모든 명성을 선택하라! 또 성공을, 너희가 이룰 수 있는 모든 성공을 선택하라! 그리고 승리를, 너희가 체험할 수 있는 모든 승리를 선택하라!
하지만 사랑 대신에 섹스를 택하지 말고, 사랑에 대한 축하로 섹스를 선택하라.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을 택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권력을 택하라. 그 자체가 목적인 명성을 택하지 말고, 더 큰 목적을 이룰 수단으로 명성을 택하라. 남들의 희생을 댓가로 한 성공을 택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도구로 성공을 택하라. 그리고 온갖 희생을 다 치른 승리를 택하지 말고, 남들을 전혀 희생시키지 않는 승리, 나아가 그들에게도 이득이 되는 승리를 택하라.
나아가 남들의 아첨을 선택하라.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을 너희가 아첨으로 흠뻑 적실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존재로 여겨라!
나아가 더 나아지길 선택하라. 하지만 남들보다 더 나아지지 말고, 이전의 자신보다 더 나아지도록 하라.
나아가 더 많이 갖길 선택하라. 하지만 오직 더 많이 주기 위해서만 그렇게 하라.
그 다음엔, 그렇다, “방법을 알고 이유를 알길” 선택하라. 그리하여 모든 지식을 남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온갖 수단을 다해 ‘신을 알길’ 선택하라. 아니, 사실 ‘이것을 가장 먼저 선택하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를 수 있도록.
너희는 평생 동안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좋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으면 줄 수도 없다.
자기 만족이 그토록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고,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추하게 들리게 된 것이 그토록 불행한 일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기 만족이 남을 희생한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것은 남들의 욕구를 무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삶이란 게 반드시 자신의 욕구를 무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자신에게 넉넉한 즐거움을 주어라. 그러면 너희는 남들에게 줄 넉넉한 기쁨을 가지리니.
힌두교의 섹스 선각자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너희 중 일부가 사실상 죄라고 하는 자위(自慰)를 그들이 장려하는 건 그 때문이다.
자위요? 오, 맙소사! 드디어 그 마지막 한계에까지 손을 뻗치셨군요. 어떻게 신인 당신이 그런 문제를 집어들 수 있습니까? 아니, 어떻게 당신이 그것을 입 밖에 낼 수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신이 보냈을 것이라고 여기는 이 메시지에서 말입니다.
알았다. 너는 자위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내리고 있구나.
아니, 저는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많은 독자들은 그럴 겁니다. 게다가 저는 우리가 이 책을 만드는 건 다른 사람들이 읽게 하기 위해서라고 당신이 말씀하신 것으로 알았는데요.
그렇다.
그런데 왜 당신은 일부러 그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겁니까?
나는 누구도 “일부러 기분 나쁘게” 만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기분 나빠” 하든 안하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그런데 너는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만들지 않고서, 우리가 솔직하고도 공공연하게 인간의 성행위를 이야기하는 게 과연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멀리 갈 건 없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이 자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 책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을 준비가 된 문제에 대해서만 신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한정된다면, 이 책은 아주 얇아질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신이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이 그렇게 되려면 통상 2,000년은 걸릴 것이다.
좋습니다. 계속하십시오. 이제야 충격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것 같군요.
좋다. 내가 이 인생체험(어쨌든 너희 모두가 그렇게 몰두 했으면서도, 누구도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 체험)을 이용하는 건 단지 더 큰 목표를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더 큰 목표를 다시 한번 적어보자. 자신에게 넉넉한 즐거움을 주어라, 그러면 너희는 남들에게 줄 넉넉한 즐거움을 가지리니.
소위 탄트라식 섹스-부언하자면 이것은 대단히 고상한 성적(性的) 표현 형식이다-의 스승들은 섹스에 대한 갈증으로 섹스를 하게 되면, 네 짝을 즐겁게 해줄 능력과, 기쁨에 찬 상태로 더 오래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체험할 능력은 오히려 크게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후자야말로 인간이 성행위를 체험하는 대단히 고상한 이유이다.
그래서 탄트라의 연인들은 흔히 서로를 즐겁게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즐겁게 한다. 이것은 빈번히 서로의 눈 앞에서, 그리고 대개는 상대방의 고무와 도움과 사랑에 찬 안내를 받으면서 이루어진다. 그렇게 해서 최초의 갈등을 식히고 났을 때에야, 비로소 두 사람은 더 깊은 갈증, 즉 더 오랜 결합으로 희열에 이르고자 하는 갈증을 멋들어지게 충족시킬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 이 공동의 자기 즐김, 즉 자위는 성행위가 자신을 충분히 표현했을 때 느끼게 되는 기쁨과 쾌활함과 사랑스러움의 당당한 일부이다. 그것은 여러 부분들 중 하나이다. 너희가 삽입, 혹은 교접이라고 부르는 체험은 그들의 2시간에 걸친 사랑 행위 끝에 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너희들 대다수에 그것은 20분 동안의 힘든 운동 중에서 거의 유일한 목표나 다름없다. 그것도 운이 좋아야 20분이다!
저는 이 책이 섹스 교본으로 바뀌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성행위와 그것의 가장 경이롭고 유익한 표현방식에 대해 더 많이 배울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설명하려는 것은 더 큰 목표다. 자신이 더 많은 즐거움을 가질수록, 너희는 남들에게 더 많은 즐거움을 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더 많은 권력의 즐거움을 가질수록, 너는 더 많은 권력을 남들과 함께 할 수 있다. 명성과 부와 영광과 성공처럼 너희를 기분좋게 만드는 다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 내가 보기에 이제는 왜 특정의 것이 너희를 “기분좋게” 만드는지 살펴볼 때가 된 것 같은데.......
좋아요. 전 두 손 들었습니다. 왜인가요?
“기분좋은 것”은 영혼이 “이게 나야!”라고 외치는 방식이다.
너는 선생이 출석부라는 것을 들고 출석을 확인할 때, 네 이름을 부르면 “여기요”here하고 대답해야 하는 교실에 있어본 적이 있느냐?
그럼요.
그러니까, “기분좋은 것”은 영혼이 “여기요”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기분좋은 일을 한다”는 이런 관념을 통째로 경멸하고 있다. 그들은 이것이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이르노니, 이것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다!
물론 네가 어떤 것을 “기분 좋다”고 하는지, 다시 말해 네게는 어떤 종류의 체험이 기분좋게 느껴지는지에 많은 것이 좌우된다. 그런데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정으로는 어떤 종류의 진화도 이룰 수 없다. 만일 너희가 진화한다면, 그것은 너희가 아는 “기분좋은” 것을 자신에게 부정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런 즐거움을 부여하여, 거기서 훨씬 더 뛰어난 뭔가를 찾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너희가 한번도 “더 못한” 것을 맛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더 뛰어난”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종교는 너희더러 자신의 말을 믿으라고 했을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모든 종교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영성(靈性)은 언제나 성공할 것이다. 종교는 너희에게 남들의 체험에서 배우라고 요구하지만, 영성은 너희에게 자신의 것을 찾으라고 재촉한다.
종교는 영성을 감당할 수 없다. 종교는 영성을 참아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성은 그 결론이 특정한 종교가 아닌 것으로 너희를 데려갈 것이고, 이미 알려진 어떤 종교도 이것을 참아내지 못할 것이기에.
종교는 남들의 생각을 탐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너희를 부추기지만, 영성은 남들의 생각을 내던지고 자신의 생각을 따라잡도록 너희를 이끈다.
“기분좋은 것”은 자신의 방금 생각이 진리이고, 방금 말이 지혜이며, 방금 행동이 사랑임을 자기 스스로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너희가 얼마나 멀리 진보했는지 알려면, 얼마나 높이 진화했는지 재어보려면, 자신을 “기분좋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된다.
하지만 기분좋은 것을 부정하거나, 그것에서 물러서는 것으로 자신의 진화를 몰아세우지 마라. 더 멀리 더 빨리 진화하려 하지 마라.
자기 부정은 자기 파멸일 뿐이니.
그리고 자기 조절은 자기 부정이 아님도 알아두어라.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는 것은 자신에 관한 나름의 판단에 근거하여,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겠다는 능동적인 선택이다. 자신을 남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사람으로 선언할 때, 그들에게서 훔치거나 빼앗지 않겠다는 결정, 강탈하고 약탈하지 않겠다는 결정은 “자기 부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자기 선언이다. 무엇이 그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가가 그 사람의 진화 정도를 재는 척도가 된다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무책임하게 행동하고, 남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곤경이나 고통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처신하는 게 너희를 기분좋게 만든다면, 너희는 그다지 많이 진화하진 못했다.
여기서의 열쇠는 자각이다. 그리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런 자각을 일궈내고 넓혀가는 것이 너희 가정과 공동체에 속한 어른들의 과제이다. 그것은 신의 사자가 해야 할 직무가 모든 사람 사이에서 자각을 넓혀, 한 사람에게 한 일이 모두에게 한 일이 되고, 한 사람을 위해 한 일이 모두를 위해 한 일임을 이해하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이기에.
너희가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사실에서 출발할 때,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기분좋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니, 소위 “무책임한 행위”는 사라진다. 진화하는 존재가 삶을 체험하려는 것은 이런 제한 범위 내에서이며, 내가 너희더러 삶이 제공해야 할 모든 것을 가지도록 허락하라고 말한 것도 이런 제한 범위 내에서이다. 그러면 너희는 삶이 지금껏 너희가 상상해온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함을 볼 것이니.
너희는 자신이 체험하는 존재이다. 너희는 자신이 표현하는 것을 체험하고, 자신이 표현해야 하는 것을 표현하며, 자신에게 허용하는 것을 가진다.
정말 마음에 드는군요. 하지만 다시 애초의 질문으로 되돌아가면 안될까요?
그렇게 하자. 내가 양성(兩性)을 창조한 것은 내가 만물에-이 우주 전체에!-“음”과 “양”을 둔 이유와 같다. 그들은, 즉 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건 음과 양의 일부이다. 그것들은 너희 세계 속에서 음과 양의 가장 뛰어나고 생생한 표현이다.
그것들은 여러 물질 형태들 중 하나로서....... 형태상으로, 이미 음과 양이다.
음과 양, 여기와 저기....... 이것과 저것....... 위와 아래, 더위와 추위, 크고 작음, 빠름과 느림-물질과 반물질.......
너희가 아는 대로의 삶을 체험하자면 이 모든 것이 다 필요하다.
우리가 이 성에너지라는 걸 가장 잘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랑으로 표현하고, 공개적으로 표현하며,
재미있게 표현하고, 즐겁게 표현하라.
멋지게, 열정적으로, 거룩하게, 낭만적으로 표현하라.
또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창조적으로 표현하며, 태연하게 표현하고, 관능적으로 표현하라.
그리고 물론 자주 표현하라.
인간의 성행위를 정당하게 해주는 유일한 목적은 오직 생식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쓸데없는 말이다. 생식은 대다수 성체험의 논리적인 사전의도가 아니라 행복의 여파에 지나지 않는다. 오로지 아기를 만들기 위해 섹스한다는 발상은 유치하고, 마지막 아기를 배고 나면 당연히 섹스도 그만두어야 한다는 추론은 유치한 것보다 더 나쁘다. 그것은 인간의 천성, 즉 내가 너희에게 준 천성에 어긋난다.
성 표현은 삶의 모든 것에 기름을 붓는 영원한 끌어당김의 과정과 율동적인 에너지 흐름이 가져오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나는 우주 전체에 걸쳐 자신의 신호를 전달하는 에너지를 만물 속에 심어놓았다. 사람, 동물, 바위, 나무, 즉 모든 물체들이 무선송신기처럼 에너지를 내보낸다.
너 역시 지금 이 순간에도 네 존재의 중심에서부터 사방팔방으로 에너지를 내보내고-발산하고-있다. 너 자신인 이 에너지는 물결 모양으로 이루며 밖으로 퍼져나간다. 그 에너지는 너를 남겨둔 채 벽을 뚫고 산을 넘고 달을 지나 ‘영원’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멈추지 않는다.
네가 지금껏 가졌던 모든 생각들이 이 에너지를 물들인다. (네가 누군가를 생각할 때, 만일 그 사람이 충분히 예민하다면, 그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네가 지금껏 뱉아낸 모든 말들이 그 에너지를 모양짓고, 네가 지금껏 행한 모든 행동들이 그 에너지에 영향을 미친다.
네가 발산하는 에너지의 진동과 속도와 파장과 진동수는 네 생각과 기분과 감정과 말과 행동에 따라 계속해서 바뀌고 변한다.
“좋은 파장을 내보내라”는 속담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건 맞는 말이다. 아주 정확하다!
그리고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누구나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너희들 사이의 “허공”인 에테르는 에너지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너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복잡한 융단무늬를 그려내는 얽고 얽힌 개개 “진동들”의 ‘바탕’ Matrix이다,
이 직물이 너희가 살아가는 결합된 에너지 영역이다. 그것은 강력하여 너희를 비롯하여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너희가 속한 영역 속으로 새로이 들어오는 진동에 영향을 받을 때, 너희는 새로 창조된 “진동들”을 내보낸다. 그리고 이 진동들은 다시 그 바탕 속에 보태져 바탕의 모습을 바꾼다. 이것은 다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에너지 영역에 영향을 마치고, 그들이 내보내는 진동에 영향을 주고, 그 바탕에 영향을 주어, 다시 너희에게 영향을 준다.......
너희는 이것이 순전히 그냥 환상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속의 공기가 너무 두터워서 칼로 자를 수도 있는” 방에 걸어 들어가본 적이 있는가?
혹은 같은 시기에 같은 문제를 연구하는 두 과학자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지구의 정반대쪽에서 상대방을 전혀 모르는 채로 연구했는데, 갑자기 똑같은 해결책을 동시에-하지만 서로 문관하게-만나게 되는 두 과학자 이야기를?
이런 것들은 흔한 일들로, 그 바탕이 좀 더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사건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특정 제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는 결합된 현행 에너지 영역인 그 바탕은 하나의 강력한 진동이다. 그것은 물체와 사건에 직접 충격을 주고, 영향을 미치며, 그것들을 창조할 수 있다.
(“단 두세 사람이도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마태오 18:20])
너희의 대중심리학은 이 에너지 바탕을 “집단의식”이라고 불러왔다. 그것은 너희 행성 위의 모든 것, 전쟁의 전망과 평화의 가능성, 지구 차원의 재난이나 행성의 평온, 질병의 확산이나 세계 복지 따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또 미치고 있다.
그 모든 것이 의식의 결과다.
너희 개인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특정의 사건들과 조건들 역시 마찬가지고.
정말 굉장하군요. 그런데 그게 섹스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참아라. 지금 그쪽으로 가는 중이다.
세상 전체가 항상 에너지를 교환하고 있다.
네 에너지는 계속해서 밖으로 밀고 나가면서 다른 모든 것을 건드린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과 다른 모든 사람들은 너를 건드린다. 그런데 이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난다. 너와 다른 모든 것들 사이의 중간쯤에 있는 어떤 지점에서 그 에너지들이 만나는 것이다.
좀 더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한 방에 같이 있는 두 사람을 머리 속에 그려보라. 그들은 그 방의 양쪽 구석에 떨어져 있다. 그들을 톰과 메리라고 부르자.
이제 톰 개인의 에너지는 360도 원을 그리면서 우주 속으로 톰에 관한 신호를 내보낸다. 그 에너지 물결 중의 일부가 메리를 친다.
그 사이 메리 역시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리고 그 중의 일부가 톰을 치고.
그런데 이 에너지들은 너희가 상상도 못할 방식으로 서로 만난다. 그것들은 톰과 메리 사이의 중간쯤에서 만난다.
여기서 그 에너지들은 합쳐져(여기서 이 에너지들은 물질 현상, 즉 재고 느낄 수 있는 것임을 잊지 마라) “토메리”라고 부를 새로운 결합 에너지를 형성한다. 그것은 톰과 메리가 결합된 에너지이다.
톰과 메리의 입장이라면 틀림없이 이 에너지를 ‘우리의 사이Between 몸체’라고 불렀을 것이다. 사실 그 말이 꼭 맞는다. 그것은 두 사람이 연결되고, 두 사람이 계속해서 그것으로 흘러들어가는 에너지를 공급하며, 그 바탕 내에 항상 존재하는 끈, 혹은 줄 , 혹은 송유관을 따라 그 두 “후원자”에게 에너지를 돌려보내는 에너지 몸체이다. (사실은 이 “송유관”이 바탕이다.)
이 “토메리” 체험은 톰과 메리의 진실이다. 두 사람은 이 ‘성스러운 교섭’에 이끌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송유관을 따라 그 ‘사이 몸체’, ‘합쳐진 하나’, ‘축복된 결합’이 주는 감미로운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톰과 메리는 서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 바탕 속에서 진행되는 것을 물질적인 방식으로 느낄 수 있다. 두 사람은 다급하게 이 체험으로 끌려간다. 그들은 서로에게 더 가까이 가길 원한다! 동시에!
그런데 이때 그들의 “훈련”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세상은 속도를 늦추고, 그 감정을 불신하고, “다짐”을 경계하고, 뒤로 물러서게끔 그들을 훈련시켰다.
하지만 영혼은....... “토메리”를 알고 싶다-지금 당장!
다행히 두 사람은 운이 좋아서, 자신들의 두려움을 옆으로 밀쳐내고, 존재하는 건 오직 사랑뿐임을 믿을 만큼 충분히 자유롭다.
이제 그들, 이 두 사람은 되돌이킬 수 없게 ‘사이 몸체’로 끌려간다. ‘토메리’는 형이상학적으로는 이미 체험된 존재이기에, 톰과 메리는 그것을 물질로서 체험하길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더 가까이 다가설 것이다. 하지만 서로에게 닿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연히 그 장면을 본 사람에게는 그런 식으로 보일 테지만, 실제로 그 두 사람이 닿고자 하는 것은 ‘토메리’이다. 그들은 그들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신성한 결합’의 지점에 이르려는 것이다. 자신들은 하나이고 ‘하나됨’이 어떤 것인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 지점에.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체험하고 있는 이 “느낌” 쪽으로 다가간다. 그들 사이의 간격이 좁혀지고, 그들이 “그 끈을 줄여”감에 따라, 그 두 사람이 ‘토메리’에게 보내는 에너지는 더 짧은 거리만을 움직이게 되고, 따라서 더 강렬해진다.
그들은 계속 더 가까워진다. 거리가 짦아질수록 강도는 더 커진다. 그들은 더 가까워지고, 강도는 다시 한번 높아진다.
이제 그들은 겨우 두세 걸음을 남기고 서 있다. 그들의 ‘사이 몸체’는 무서운 속도로 진동하면서 뜨겁게 타오른다. ‘토메리’와의 가고 오는 “연결”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에너지 이전(移轉)으로 더 두터워지고 더 넓어지며 더 밝아진다. 그 두 사람은 소위 “갈망으로 달아오른” 상태가 된다. 사실 그렇다!
그들은 다시 더 가까이 다가간다.
이제, 그들은 서로 닿는다.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흥분과 격렬함이 인다. 드디어 접촉하는 순간, 그들은 ‘토메리’의 에너지 전체, ‘결합된 존재’의 빽빽하고 진하게 통합된 실체 전체를 느낀다.
자신의 감각을 최대치로 열어놓는다면, 너희는 접촉할 때의 찌릿함으로 이 정교하고 웅장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그 “찌릿함”은 종종 너희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간다. 혹은 접촉 지점에서의 열기로 느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너희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주로 너희의 에너지 중심인 회음부lower chakra 깊숙이 집중되는 열기로.
그것은 특히 그곳에서 강렬하게 “달아오를”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톰과 메리는 소위 서로를 향해 “욕정”을 갖는다!
이제 두 사람은 끌어안게 되고, 거리는 더 한층 좁혀진다. 이제 톰과 메리와 토메리, 셋 다가 거의 같은 공간을 차지한다. 톰과 메리는 자신들 사이에 있는 토메리를 느낄 수 있고, 더욱 더 가까워지길 원하기에, 글자 그대로 토메리에게 녹아들게 된다. 물질 형태에서 토메리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 안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을 창조했다. 이 순간에 톰과 메리의 몸은 기꺼이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톰의 몸은 글자 그대로 메리 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고, 메리의 몸은 글자 그대로 톰을 자신 속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짜릿함과 달아오름은 이제 격렬함을 넘어선다. 그것은.......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두 사람의 육체가 결합하고, 톰과 메리와 토메리는 ‘하나’가 된다. 살 속에서.
에너지는 여전히 그들 사이를 흐른다. 다급하고 격정으로.
그들은 신음소리를 뱉고 온몸을 움직인다. 그들은 서로를 충분히 가질 수 없고, 서로를 충분히 합칠 수 없다. 그들은 더 가까워지려 한다. 가까이. 가까이.
그들은 글자 그대로 폭발하고, 그들의 육체 전체가 경련한다. 그 진동은 그들의 발끝까지 파문을 흘러보낸다. 이 하나됨의 폭발에서 그들의 삶의 ‘본질’이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체험’인 신과 여신, 알파와 오메가, 전체와 무를 알게 된다.
물질화학 현상들도 일어난다. 둘은 ‘하나’가 되었으며, 종종 둘에서 제 삼의 실체가 물질형태를 취하고 창조된다.
그리하여 그들의 살 중의 살이고, 그들의 피 중의 피인 ‘토메리’의 형상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글자 그대로 생명을 창조했다!
그러기에 내가 너희는 신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제가 지금껏 인간의 성행위에 대해 들어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사군요.
너희는 아름다움을 보고자 바라는 곳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아름다움을 보기를 두려워하는 곳에서 추함을 보리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이제 막 이야기한 것을 추함으로 보았는지 안다면 너도 놀랄 것이다.
아니요. 놀라지 않습니다. 저는 세상이 섹스 주위에 얼마나 많은 두려움과 추함을 놓아왔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많은 질문거리들을 제게 던지시는군요.
내가 여기 있는 건 그것들에 대답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네가 그 질문거리들을 내게 던지기 전에 잠시만 더 내 독백을 계속할 수 있게 해다오.
예, 물론이지요.
내가 방금 묘사한 이....... 춤, 내가 설명했던 이 에너지 상호작용은 항상 일어나고 있다-모든 것 속에서, 모든 것과 더불어.
‘황금빛’처럼 발산되는 너희의 에너지는 끊임없이 다른 모든 것과 다른 모든 사람과 상호작용한다. 그 에너지는 거리가 가까울수록 더 진해지고, 멀어질수록 더 옅어지지만, 그럼에도 너희가 어떤 것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너희와 존재하는 다른 모든 사람, 장소, 물체 사이에는 어떤 지점이 있다. 두 에너지가 만나서 훨씬 더 엷지만, 그러나 똑같이 실재하는 제 삼의 에너지 단위를 형성하는 지점이.
지구 위의, 그리고 우주 속의 모든 사람과 사물이 전(全)방향으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이 에너지는 너희의 가장 강력한 컴퓨터로도 분석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유형으로 교차하면서 다른 모든 에너지들과 섞인다.
이 에너지는 소위 물질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 사이를 달려가면서 교차하고 섞이고 얽히면서 물질성을 함께 묶어준다.
이것이 내가 말했던 바탕이다. 너희가, 때로는 개인들이 창조하기도 하지만 대게는 대중의식이 만들어낸 신호들, 즉 메시지와 의도와 치유를 비롯한 여러 물질 효과들을 서로에게 보내는 것은 이 바탕을 따라서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 에너지들은 내가 설명했듯이 서로에게 이끌린다. 이것을 ‘끌어당김의 법칙’the Law of Attraction이라고 한다. 이 법칙에서 ‘비슷한 것끼리는 서로 끌어당긴다.’
‘비슷한 생각은 바탕을 따라서 비슷한 생각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이 비슷한 에너지들이 충분히 많이 “떼를 이루면”, 말하자면 그들의 진동이 무거워지면, 그것들은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 그 중 일부는 ‘물질’이 된다.
생각은 물질 형태를 창조해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것을 생각할 때, 그들의 생각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아진다.
(“우리가 너를 위해 기도하마”가 그토록 강력한 진술이 되는 게 이 때문이다. 통합된 기도의 강력한 효력에 대해서는 책 한 권을 다 채우고도 남을 만큼 많은 증언들이 있다.)
거꾸로 기도답지 않은 생각들도 “결과들”을 창조할 수 있다. 말하자면 세계적인 범위로 존재하는 두려움이나 분노나 결핍이나 부족함 따위의 의식은 그런 체험을 창조할 수 있다. 지구 전체에 걸쳐서든, 그런 집단 관념이 가장 강한 일정 지역 내에서든,
예를 들어 지구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오랫동안 자신을 “신의 이름으로 나눌 수 없는indivisible, 만인의 자유와 정의”를 구현하는 국가로 생각해왔다. 이 나라가 지구상에서 가장 번영한 국가가 된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또한 이 나라가 자신이 그토록 힘들여 창조해온 모든 것을 점차 잃어 가는 것 역시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이제 자신의 비전을 잃은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신의 이름으로 나눌 수 없는”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통일성’, ‘하나됨’이라는 ‘보편진리’를 표현한다. 그것은 대단히 부수기 어려운 ‘바탕’이다. 하지만 그 ‘바탕’은 이미 약해지고 있다. 이 나라에서 종교의 자유는 종교적 편협함과 다를 바 없는 종교적 정당성이 되고 말았고, 개인의 책임이 사라지자 개인의 자유 역시 거의 사라져버렸다.
개인의 책임이란 관념은 “누구나 혼자 힘으로”란 뜻으로 왜곡되고 말았으니, 이 새로운 철학은 자신이 소박한 개인주의라는 초기 미국의 옛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미국의 비전vision과 꿈이 뿌리내리고 있던 개인 책임의 본래 의미는 자신의 가장 심오한 취지와 가장 고상한 표현을 ‘형제애’라는 개념 속에 두고 있었다.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모두가 자기 생존을 위해 투쟁한 데 있지 않고, 만인의 생존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모두가 받아들인 데 있었다.
미국은 굶주린 자에게 등 돌리지 않고, 곤궁한 자에게 안된다고 말하지 않으며, 지치고 헐벗은 자에게 팔 벌리고, 자신의 풍요를 전세계와 함께 하던 나라였다.
하지만 미국이 위대해질수록 미국인은 탐욕스러워졌다. 모두는 아니라 해도 다수가 그러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가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게 되자, 더욱 더 많이 갖고자 했다. 하지만 더욱 더 많이 가지려면 딱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다른 누군가를 더욱 더 적게 갖도록 하는 것.
미국의 특성이 위대함에서 탐욕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가장 못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의 여지도 점점 줄어들었다. 운 나쁜 사람들은 더 많이 갖지 못하는 게 그들 “자신의 저주받은 잘못” 때문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어쨌든 미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운 나쁜 사람들만 빼고는 어느 누구도, 미국의 기회란 건 제도적으로 이미 트랙 안쪽에 서 있는 사람들만으로 한정된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특정 피부색이나 특정 성(性)을 가진 여러 소수집단들은 대부분이 이 트랙 안에 포함되지 못했다.
또한 미국인들은 국제관계에서도 거만해졌다. 지구 전체에 걸쳐 몇백만명이 굶주리고 있는 판에, 미국인들은 전세계 국민들을 먹여살릴 수도 있을 만큼 많은 식량을 날마다 낭비했다. 미국이 일부 나라들에 관대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의 대외정책은 점점 더 자신의 투자이익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미국은 그렇게 하는 것이 미국에 도움이 될 때만 다른 나라들을 도왔다. (즉 그렇게 하는 것이 미국의 권력구조나, 미국의 최상층 엘리트 집단이나, 그 엘리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집단 재산을 보호하는 군사기구에 도움이 될 때만.)
미국을 세운 이상인 형제애는 부식당하고 말았다. 이제 “네 형제들의 파수꾼”이 되라는 식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미대국(美大國)주의라는 새로운 상표와 부딪히게 되었다. 즉 자기 것을 붙들고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할 줄 아는 빈틈없는 정신을 뜻하는 말이자, 운 나쁜 사람들 중 감히 자신들의 공정한 몫을 요구하고 자신들의 불만을 시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신랄한 말이 되어 버린 미대국주의라는 새로운 상표와.
개인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저야 한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미국과 너희 세상이 진실로 잘 굴러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든 사람이 기꺼이 전체로서 너희 모두에 대해 책임을 지고자 할 때뿐이다.
그러니까 집단적인 의식은 집단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거군요.
바로 맞혔다. 이것은 너희의 기록된 역사 전체에 걸쳐서 수도 없이 증명되어왔다.
바탕은 자신을 자신 속으로 끌어당긴다. 너희 과학자들이 소위 ‘블랙홀’ 현상으로 설명하는 것과 똑같이. 그것은 비슷한 에너지를 비슷한 에너지 쪽으로 끌고 가며, 나아가 물체들까지도 서로 끌어당기게 한다.
그때 이 물체들은 서로 반발해야, 즉 서로 멀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영원히 서로 합쳐져서, 사실상 자신들의 지금 모습을 잃고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될 것이기에.
의식있는 모든 존재는 이 사실을 직관으로 알고 있어서, 자신이 다른 모든 존재들과 맺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영원한 녹아듦’에서 물러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다른 모든 존재들 속으로 녹아들어가 ‘영원한 하나됨’을 체험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떨어져 있으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다시 이 상태를 향해 이끌린다.
이 밀물과 썰물의 “왕복”운동은 우주와 우주 속에 있는 만물의 기본리듬이다. 이것이 섹스sex, 즉 ‘에너지의 협동교환’the Synergistic Energy Exchange이다.
너희는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서로(그리고 그 바탕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결합하는 쪽으로 이끌려간다. 그러다가 ‘결합의 순간’이 되면, 그 ‘결합’에서 떨어지려는 의식적인 선택으로 너희는 서로 반발한다. 그 ‘결합’을 체험할 수 있도록, 그 ‘결합’에서 자유롭게 남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너희가 일단 그 ‘결합’의 일부가 되고 거기에 계속 머무른다면, 너희는 더 이상 ‘분리’를 알지 못할 것이기에 그것을 통일로서 인식할 수도 없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신이 자신을 ‘그 모든 것’으로 알려면 신은 자신을 ‘그 모든 것’이 아닌 것으로 알아야 한다.
너희와 우주의 다른 모든 에너지 단위들에서 신은 자신을 ‘전체의 부분들’로 인식한다. 그렇게 해서 신은 ‘자신의 체험’으로 자신을 ‘완전한 전체’All in All로서 인식할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주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나 아님을 체험함으로써만 나임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나 아닌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신성한 이분법을 보고, 그리하여 ’나는 나다‘라는 진술을 만난다.
이제 내가 말했듯이 이 자연스런 밀물과 썰물, 우주의 이 자연스런 리듬은 너희 현실에서 생명을 창조하는 바로 그 운동을 포함하여 삶의 모든 것을 상징한다.
어떤 절박한 힘에 쫓기기라도 하듯 너희는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오로지 결국 서로 떨어져나오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한번 서로를 향해 절박하게 달려들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한번 떨어져 나오고, 또 다시 한번 굶주린 듯 열정적이고 절박하게 완전한 결합을 추구하기 위해서.
너희 육체는 모이고-헤치고, 모이고-헤치고, 모이고-헤치며 춤춘다. 그 운동은 워낙 기본적이고 워낙 본능적이어서 의도적으로 행동하려는 의식적인 자각을 거의 갖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보면 너희는 자동으로 바뀐다. 누구도 너희 육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그냥 그렇게 한다-삶 전체를 건 절박성으로.
이것은 삶 자체이다. 자신을 생명 자체로 표현하는.
이것은 삶 자체이다. 자기 체험이라는 가슴 속에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삶 전체가 그런 리듬에 따라 움직인다. 사실 삶 전체가 리듬이다.
그리하여 삶 전체가 그 온화한 신의 리듬, 생명 주기라고 부르는 것들로 물든다.
그런 주기에 따라 곡식들이 자라고, 계절들이 왔다 간다. 그 주기에 따라 행성들은 자전하고 공전하며, 태양들은 밖으로 폭발하고 안으로 폭발하며implode 다시 밖으로 폭발한다. 우주들은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그 모든 것이, 그 전부가 주기에 따라, 리듬에 맞춰, ‘전체’인 신/여신의 주파수와 조화하는 진동 속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신은 ‘전체’이고 여신은 전부이며, 그 외에 다른 것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예전에 존재했고, 지금 존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모든 것이 끝없는 너희 세계이기에.
아멘.
8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재미있는 건, 당신은 언제나 대답보다 더 많은 질문거리들을 남겨주신다는 겁니다. 이제 저는 섹스만이 아니라 정치에 대해서도 물을 겁니다.
그건 항상 그 모양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 너희가 지금껏 정치에서 해 온 일은 오로지-
잠깐만요! 당신은 지금 외설스럽다란 말을 쓰려고 하셨죠? 그렇죠?
그래, 그렇다. 나는 너희에게 충격을 좀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잠깐, 잠깐요! 그만두세요! 신은 그런 말은 안 쓰기로 되어 있다구요!
그럼 너희는 왜 쓰느냐?
우리도 대부분 쓰지 않습니다.
그 지옥은 너희도 쓰지 않는다는 거지?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쓰지 않죠!
아, 참. 너희는 신을 화나게 하지 않으려면 신을 두려워해야 하지.
그런데 누가 그렇게 말하더냐? 그래봤자 결국은 간단한 말 한 마디에 불과한 것에 내가 화를 낼 거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희 중 일부가 격정의 최고조에서 위대한 섹스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말을 너희가 또한 최고의 모욕으로도 쓴다는 사실이 재미있지 않느냐? 이것이 너희가 성행위를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말해주는 게 아니겠느냐?
제 생각엔 당신이 혼동하신 것 같습니다. 정말로 낭만적이고 멋진 성적 순간을 표현하려 할 때 사람들이 그런 말을 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요.
호오, 정말로? 너는 최근에 다른 사람들의 침실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느냐?
아니요. 당신는요?
나는 모든 침실 속에 들어가 있다. 항상.
그게 우리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아야 할텐데.......
뭐라고? 너는 지금 신 앞에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너희가 침실에서 벌인다고 말하는 것이냐-?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지켜보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죠. 하물며 신이라면 더 그렇구요.
하지만 어떤 문화들에서는, 예를 들면 폴리네시아의 일부 원주민들은 완전히 드러내놓고 사랑을 나눈다.
그래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정도 수준의 자유를 누릴 만큼 진보하지 않았지요. 사실 대부분은 그런 식의 행동을 퇴보로, 미개하고 이교도적인 상태로 퇴보한 걸로 여깁니다.
너희가 “이교도”라고 부르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참으로 삶을 존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강간이란 게 뭔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 사회에는 사실상 살인 따위는 없다. 너희 사회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인간 기능인 섹스는 덮개 밑에 감춰버리고, 삶을 죽일 때는 돌연 태도를 일변하여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행동한다. 바로 이런 게 외설이다!
섹스를 얼마나 더럽고 부끄러운 금기로 만들었는지, 너희는 그것을 하는 것조차 창피해한다!
천만에요. 그 사람들은 섹스에 대해 다른 예의를 갖는 것 뿐입니다. 그들로서는 더 고상하다고까지 할 예의를요. 그들은 그것을 두 사람 사이의 내밀한 부분으로 여깁니다. 그것을 두 사람 관계의 신성한 부분으로 여기니까요.
내밀하지 않다고 해서 신성하지 않은 건 아니니, 인류의 가장 신성한 의식들 대두분이 드러내놓고 치러졌다.
내밀함이 신성함은 아니니, 너희가 저지른 죄악의 행동들 대부분이 내밀하게 이루어졌다. 너희가 드러내놓고 과시하고자 남겨두는 것은 최상의 행동들뿐이다.
이것은 섹스를 드러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내밀함이 반드시 신성함은 아니며, 공개성이 너희에게서 신성함을 빼앗지도 않으리라는 경고에 지나지 않는다.
예의에 관해서 말하면, 이 한 마디 말과 이 말 뒤에 놓인 행동 모형이야말로, 벌주는 신이라는 발상만 빼면, 남자와 여자의 가장 큰 기쁨을 억누른 데 있어, 그 직무를 완수한 인간의 다른 어떤 구조물보다 더 큰 역할을 해왔다.
당신은 예의라는 걸 믿지 않으시는군요.
“예의”에서 문제는 누군가가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이것을 다른 누군가가 너희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설정한 기준에 따라, 너희의 행동이 제한받고 지시받고 규정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모든 문제들에서 그렇듯이, 성행위의 문제에서도 그것은 단순한 “한계지음” 이상일 수 있다. 그것은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
나로서는 한 남자나 여자가 어떤 걸 체험하고 싶어하면서도, 그들이 꿈꾸고 상상해왔던 것이 “예의 기준”에 어긋날까봐 움츠려드는 경우보다 더 슬픈 일은 생각할 수 없다!
잘 보라. 그들이 그 일을 하지 않는 건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단지 “예의”를 어기기 때문이다.
성행위의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것에서, 단지 다른 누군가의 예의 기준에 어긋난다는 이유만으로 뭔가를 못하게 되는 일이 결코 없게 하라.
내 차 뒷유리에 스티커를 붙인다면 나는 이렇게 쓸 것이다.
예의를 어겨라
나라면 분명히 이런 표어를 침실마다 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것입니다. 만일 거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예의”는 “옳고 그름”이라는 너희의 상대적 가치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사람을 죽이는 게 “나쁘다”는 사실에는 너희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벌거벗고 빗속을 달린다고 해서 그게 “나쁜 일”인가? 이웃의 아내를 취하는 게 “나쁘다”는 사실에는 너희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특별히 감칠 맛 나게 자기 아내를 “취하거나” 자기 아내더러 자신을 “취하게” 한다고 해서 그게 “나쁜 일”인가?
“예의”란 건 법률상의 제한과는 별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무엇을 “적절하다”고 여기는가라는 더 단순한 문제와 관계된 경우가 많다.
“적절한” 처신이 반드시 너희에게 언제나 “최상의 즐거움”을 주는 행동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너희에게 최대의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는 행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행위로 돌아가서요. 그러면 당신은 당사들이나 관련인들이 서로 동의하는 한 어떤 행동도 용납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게 삶의 모든 것에 적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냐?
하지만 우리는 영향받을 관련인들이 누가 될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영향을 받을지도-
너희는 그 문제에 예민해야 한다. 그 문제를 민감하게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너희가 정말로 알 수 없고 추측할 수 없는 경우라면, 너희는 ‘사랑’ 쪽으로 치우쳐야한다.
‘모든’ 결정을 내릴 때 중심되는 질문은 “사랑은 지금 무엇을 하려 하는가?”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영향받거나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
만일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너희는 그 사람을 해칠 수 있거나 해칠 것 같은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궁금증이나 의문이 남는다면, 너희는 그 문제를 명확히 이해하게 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볼모”로 붙들 수도 있다는 뜻인데요.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고 해봐야, 그렇고 그런 일은 자신들을 “해칠” 수 있으니, 당신의 행동은 제한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일 테니까요.
오로지 자신만이 자신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다. 너는 자신의 행동을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을 것들만으로 제한하고 싶지 않은가?
하지만 만일 당신 자신이 어떤 일을 하지 않아서 손해를 본다고 느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러면 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네 진실을 말해야 한다. 네가 어떤 일을 하지 않아서 상처입고 실망하고 위축되어 있다는 것과, 너는 그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 그렇게 해도 좋다는 동의를 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을.
너는 반드시 그런 동의를 얻어내고자 노력해야 한다. 타협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모두가 이길 수 있는 방식으로 일을 풀어나가도록 하라.
하지만 그런 방식을 찾을 수 없다면요?
그렇다면 나는 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할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배신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배신하는 것
역시
배신이긴
마찬가지다
그것은
‘최고의 배신’이다
너희의 셰익스피어는 이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너 자신에게 진실되려면,
밤이 낮을 따르듯, 자신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그러면 너는 누구에게도
거짓되지 않으리니.
하지만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는” 사람은 대단히 이기적인 인간이 되고 맙니다. 이런 걸 주장하시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너는 그 사람이 항상 소위 “이기적인 선택”을 하리라 가정한다. 하지만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간은 가장 고귀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나아가 또 하나 일러두노니.
‘가장 고귀한 선택’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돕는 선택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가장 먼저 내세워야 한다는 거군요.
천만에, 너희는 항상 자신을 가장 먼저 내세워야 한다! 그렇게 되면 너희는 자신이 하려는 바나 체험하려는 바에 따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너희의 목적이, 너희 삶의 목적이 대단히 고상하다면, 너희의 선택 역시 그러할 것이다.
자신을 가장 먼저 내세운다는 게, 너희가 말하는 식으로 “이기적”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는 뜻이다.
당신은 꽤 넓은 토대를 인간사의 지침으로 놓으셨군요.
최대의 성장은 최대의 자유를 행사할 때만 이루어진다. 아니,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
만일 너희 모두가 다른 누군가의 규칙을 따르고 있다면, 너희는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복종하고 있을 뿐이다.
너희의 설정과는 반대로 내가 너희에게서 원하는 것은 복종이 아니다. 복종은 성장이 아니니, 내가 바라는 것은 성장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장하지” 않으면, 당신은 우리를 지옥으로 던질 겁니까?
틀렸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1권에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리는 3권에서도 꽤 깊이 그 문제를 논의하게 될 것이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펼쳐놓은 이 넓은 제한 범위들 내에서 우리가 섹스 문제에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몇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발사!
만일 섹스가 그토록 멋진 인간 체험이라면, 많은 영혼의 스승들이 금욕을 설교한 건 왜입니까? 그리고 많은 선각자들이 명백히 독신이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 중 다수가 단촐한 삶을 산 것으로 묘사된 까닭은 하나같이 똑같다. 높은 이해수준으로 진화한 사람들은 육체의 욕구가 정신과 영혼의 욕구와 균형잡히게 만든다.
너희는 3중의 존재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을 육체로서 체험한다. 30세가 넘으면 정신조차도 잊혀진다. 아무도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으며, 아무도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 아무도 가르치지 않고, 아무도 배우지 않는다. 정신은 잊혀지고, 양분은 공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커지지 않는다. 새로운 투입은 없고, 요구되는 산출은 최소한으로 그친다. 양분을 공급받지 못한 정신은 깨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가라앉고 둔해진다. 너희는 정신을 떼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온갖 걸 다 한다. 텔레비전, 영화, 선정적인 싸구려 책자들. 모슨 일을 하든 생각하지 마라! 생각하지는 마라!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은 육체 수준에서 삶을 산다. 몸에 양분을 주고, 몸에 옷을 입히고, 몸에 “물자”를 댄다. 대다수 사람들이 몇 년이 가도 좋은 책-그들이 뭔가 배울 게 있는 책이란 뜻이다-한 권을 읽지 않는다. 하지만 그 주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라면 달달 외울 수 있다. 여기에는 뭔가 놀랄 만큼 슬픈 것이 있다.
진실은, 대다수 사람들은 생각하길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는 지도자를 뽑고, 그런 정부를 지지하고, 그런 종교를 받아들인다.
“날 편하게 해줘. 뭘 해야 할지 말해달라구.”
이것이 대다수 사람들이 원하는 바다. 나는 어디에 앉아야 하지? 언제 일어서야 하지? 경례는 어떻게 해야 하지? 돈은 언제 내야 하지? 너는 내가 뭘 하길 원하지?
규칙은 뭐지? 내가 지켜야 할 경계선은 어디지? 나에게 말해줘, 말해달라구. 그렇게 할테니 누가 그냥 말만 해줘!
그러고 나면 그들은 넌더리를 내며 환멸을 느낀다. 그들은 모든 규칙을 다 따랐고, 지시받은 대로 행동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던 거지? 그게 못쓰게 된 게 언제지? 그게 왜 떨어져나갔지?
그것은 너희가 지금껏 가진 창조 도구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 도구인 정신을 포기했던 순간에 떨어져나갔다.
이제 다시 네 정신과 친해질 때가 왔다. 정신과 벗이 되어라. 정신은 무척 외로워하고 있으니. 정신에 양분을 주어라. 정신은 무척 굶주려있으니.
너희 중 일부,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육체와 정신을 지닌 존재임을 이해한다. 이들은 자신의 정신을 잘 대우해왔다. 하지만 정신과 정신의 일을 존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능력의 십분의 일을 이상으로 정신을 쓸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너희의 정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안다면, 너희는 정신의 경이로움과 권능과 함께 하길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
이제 자신의 삶을 육체와 정신 사이에서 균형잡게 만드는 사람의 수를 소문자에 비유한다면, 자신을 육체와 정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3중의 존재로 보는 사람의 수는 그야말로 극소문자이다.
그럼에도 너희는 3중의 존재이다. 너희는 너희의 육체 이상이고, 정신을 가진 육체 이상이다.
너희는 자신의 영혼에 영양을 주고 있는가? 아니, 영혼이 있음을 눈치라도 채고 있는가? 너희는 그것을 치료하는가, 상처주는가? 너희는 그것이 자라게 하는가, 시들게 하는가? 그것이 늘어나게 하는가, 줄어들게 하는가?
너희 영혼도 너희 정신만큼이나 외로워하는가? 아니면 훨씬 더 버림받고 있는가? 너희 영혼의 드러남을 마지막으로 느꼈던 때는 언제인가? 네가 마지막으로 기쁨에 넘쳐서 울던 때는? 시를 썼던 건? 음악을 만든 건? 비 속에서 춤춘 건? 파이를 구은 건? 뭐든 그렸던 건? 부서진 걸 고친 건? 아기에게 뽀뽀한 건? 네 뺨에 고양이를 문지른 건? 언덕 위로 소풍간 건? 홀딱 벗고 헤엄친 건? 동틀 때 걸어본 건? 하모니카를 불어본 건?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눠본 건? 해변에서 숲에서....... 몇시간 동안 사랑을 나눠본 건? 자연을 벗한 건? 신을 찾아본 건?
홀로 조용히 앉아서 네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마지막으로 걸어본 건 또 언제였는가? 그리고 네가 네 영혼에게 안녕 하고 마지막으로 인사해본 건 언제였는가?
한 면만을 가진 존재로 살 때, 너희는 돈과 섹스와 권력과 재산과 물질 자극과 만족과 안정과 명성과 소득 같은 육체의 문제들에만 깊이 빠질 것이다.
두 면을 가진 존재로 살 때, 너희는 사귐과 창조성,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발상의 자극, 새로운 목표와 새로운 도전의 설정, 개인의 성장 같은 정신의 문제들을 포괄하는 쪽으로 관심 범위를 넓힐 것이다.
3중의 존재로 살 때, 너희는 마침내 자신과 균형을 취할 것이다. 이제 너희의 관심 중에는 영혼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 신과의 관계, 진화하는 길, 영혼의 성장, 궁극의 운명 같은 영혼의 문제들이 포함될 것이다.
더 높은 의식상태로 진화할수록, 너희는 자기 존재의 모든 측면을 충분히 실현해가게 된다.
하지만 진화가 자신의 일부 측면들만을 위하고 다른 측면들을 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초첨을 넓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한 측면에서만 거의 전적으로 몰두하는 데서 벗어나 모든 측면들에 진심에서 우러난 사랑과 이해를 보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스승들이 섹스를 완전히 그만두라고 주장한 겁니까?
그들은 사람들이 균현을 취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쉽게 조절하기에는, 균형을 취하기에는, 성에너지와 여타 속세 체험들을 둘러싼 에너지들이 너무 강력하다고 믿었다. 그들은 금욕이 영적 진화의 단지 한가지 가능한 결과가 아니라, 영적 진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높은 곳까지 진화했던 몇몇 사람들도 “섹스를 포기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포기한다”는 말이 흔히 쓰는 고전적인 의미라면, 그렇지 않다. 그것은 여전히 원하긴 하지만 “가져서 좋을 게 없음”을 아는 어떤 걸 억지로 놓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단순히 풀어줌, 두 번째 후식거리에서 몸을 돌릴 때처럼 그것에서 벗어나는 동작이다. 두 번째 후식이 나빠서가 아니며, 그것에 네 마음에 들지 않아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훌륭한 후식이지만, 다만 너는 이미 충분히 먹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섹스에 대한 몰두를 내려놓을 수 있을 때, 너희는 때로는 섹스를 원할 수도 있고, 그러다 다시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이 “충분히 먹었는지” 전혀 판단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너희 존재의 다른 체험들과 균형을 취하면서 이것을 항상 체험하길 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그래도 전혀 상관없다. 성적인 적극성이 성적인 소극성보다 깨달음이 약하거나 영적(靈的)으로 덜 진화된 것은 아니다.
깨달음과 진화가 너희더러 내려놓게 만드는 것은 섹스에 대한 집착과 그것을 체험하려는 뿌리깊은 욕구와 충동적인 행동들이다.
그렇게 되면 돈과 권력과 안정과 재산 따위의 다른 육체 체험들에 열중하는 것 역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너희의 참된 이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사라져서도 안된다. 삶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건 내가 창조한 그 ‘과정’에 감사하는 것이고, 삶이나 삶이 주는 기쁨 중 어떤 것-설사 가장 기본적이고 물질적인 기쁨이라 해도-을 경멸하는 건 나, 창조주를 경멸하는 것이다.
내 창조물을 불결하다고 부를 때, 너희는 나를 무엇이라 부르겠는가? 하지만 너희가 내 창조물을 신성하다고 할 때, 너희는 그 체험과 더불어 나까지도 신성하게 한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경멸받을 어떤 것도 창조하지 않았다. 게다가 너희의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생각이 그렇게 만들지 않는 한 어떤 것도 “악”이 아니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섹스에 대한 또 다른 질문들이 떠올랐습니다. 마지막 질문들요. 서로가 동의하는 성인들끼리의 섹스라면 어떤 종류의 섹스라도 괜찮은 겁니까?
그렇다.
제 말은 “변태적인” 섹스라도 괜찮냐는 겁니다. 사랑 없는 섹스라도요? 동성애자들의 섹스라도요?
먼저, 다시 한번 명확히 해둘 것은 신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기에 앉아서 이 행동은 선이라 부르고, 저 행동은 악이라 부르면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게 아니다.
(너도 알다시피, 이 문제에 대해서는 1권에서 꽤 길게 다루었다.)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진화로 가는 길’에서 무엇이 너희에게 도움이 되고 무엇이 해로운가라는 문맥 속에서.
하지만 가장 진화한 영혼들이 동의한, 대강의 기본되는 지침은 있으니,
남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은 절대 급속한 진화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이 그 첫째가는 지침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지침도 있다.
즉 상대방의 동의와 허락이 없다면 그 사람과 관련된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
이제 네가 방금 질문했던 것들을 이 지침들의 문맥 속에서 생각해보자.
“변태적인” 섹스? 자, 그것이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고, 모든 사람의 동의를 받아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할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
사랑 없는 섹스? “섹스 자체”를 위한 섹스는 시간이 시작된 이래로 계속해서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나는 이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가득 모인 곳으로 들어가, “여기 있는 사람 중에 한번이라도 깊은 사랑, 지속적인 사랑, 전념하는 사랑, 변치 않는 사랑이 아닌 관계에서 섹스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말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단지 이것만 말해두자. 어떤 것이든 사랑이 없는 것은 여신에게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 아니다.
그것이 사랑 없는 섹스든, 사랑 없는 스파게티든, 사랑 없는 고기완자든 간에, 너희가 사랑 없이 그 잔치를 준비하고 그것을 먹었다면, 너희는 그 체험의 가장 경이로운 부분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을 놓치는 게 잘못인가? 여기서 다시, “잘못되었다”는 건 그리 적절한 용어가 아닐지 모른다. “불리하다”가 더 가까운 말일 수 있다. 너희가 최대한 빨리 더 높은 영적 존재로 진화하길 바란다고 치면.
동성 간의 섹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동성 간의 성행위에 반대한다고 말해주거나, 그런 반대를 실행에 옮겨주길 바란다. 하지만 나는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고 너희가 내리는 어떤 다른 선택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온갖 것에 대해 온갖 종류의 가치 판단들을 내리고 싶어하지만,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오히려 그 잔치를 망치는 편이다. 나는 그런 판단들에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특히 자신들의 판단이 내게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지금 이런 걸 본다. 사람들이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은 권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의 법칙에도 어긋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놀랍게도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경을 그 근거로 들이댔다. 그들이 동성애를 둘러싼 문제들에서조차 그 근거로 성경을 내세웠듯이.
다른 인종인 남녀끼리 결혼으로 결합해도 괜찮다는 말씀인가요?
그 질문은 어리석다. 물론 확신을 가지고 “안된다”가 그 대답이라고 믿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동성애에 대한 질문들도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겁니까?
네가 판단해라.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아니 어떤 것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않는다. 내가 판단해주길 너희가 바란다는 건 안다. 그렇게 되면 너희의 삶이 훨씬 더 편해지겠지. 판단할 일도, 힘겨운 소명도 없을 터이니, 만사가 너희를 위해 결정되어 있을 것이고, 따르는 것 말고는 너희가 할 일이 없을 터이니. 어쨌든 창조성이나 자기 강화란 면에서는 그리 대단한 삶은 아니겠지만, 그렇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스트레스도 없지 않은가?
섹스와 아이들에 대해서 몇 가지 묻고 싶은데요. 아이들에게 인생 체험으로 성행위를 인식하게 해주려면 어느 정도의 나이가 적당합니까?
아이들은 삶을 출발할 때부터 자신들을 성적 존재로서, 말하자면 인간 존재로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너희 행성의 많은 부모들은 굳이 애를 써서 아이들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든다. 아기의 손이 “나쁜 곳”으로 가기라도 할라치면, 너희는 당장 그 손을 치워버린다. 또 어린 아이가 순진무구한 즐거움으로 자신의 몸에서 자기 기쁨의 순간들을 발견하기 시작할 때, 너희는 그것에 공포로 반응한다. 그리고는 그 공포를 너희 아이에게로 옮겨준다. 아이는 이상하게 생각한다. 내가 뭘 했길래? 내가 어쨌길래? 엄마가 화났어. 내가 어떻게 했길래?
너희 인간 종족에게 있어 그 문제는 항상 너희 자식들에게 섹스를 언제 소개할까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성적 존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게끔 요구하는 걸 언제 그만둘까의 문제였다. 12살에서 17살 사이의 어딘가에서, 너희는 이제 그 싸움을 포기하고, 기본적으로는 “좋다, 이제 너희는 자신에게 성적인 부분이 있고, 그걸로 할 성적인 일이 있음을 알아채도 좋다”는 취지를 전한다. (당연히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너희는 이런 일들을 놓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쯤이면 그 대가는 이미 치러졌다. 너희 아이들은 무려 10년 넘게 자기 몸의 그 부분을 부끄러워하라는 세례를 받아왔다. 그 중 일부는 그 부분들의 적절한 명칭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은 “지지”에서 “네 아랫도리”에 이르기까지, 그냥 간단하게 “음경”이나 “질”이라고 말하는 걸 피하기 위해, 너희가 머리를 짜내 발명한 온갖 말들을 들어왔다.
그리하여 몸의 그 부분들과 관계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 숨기고 말하지 말며 부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백해졌기에, 너희 아이들은 이제 몸의 그 부분에서 진행되는 일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사춘기 속으로 폭발해 들어간다. 그들은 전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이 비길 데 없이 새롭고도 절박한 욕구들에 대한 그들은 반응은 당연히 어설프다-그렇다고 적절치 않은 건 아니지만.
이런 과정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내가 관찰하기로는 너희 자식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아이들이 단지 성적 금기와 억제와 짐스러운 “저당잡힘”을 풀고자, 일부러 그 굴레를 지고 성인으로서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계몽된 사회들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자신들의 본성 자체에서 기쁨을 찾아내기 시작할 때, 절대 기를 죽이거나 꾸짖거나 “바로잡아주지” 않는다. 또한 부모가 자신들의 성행위를, 즉 성적 존재로서 부모의 정체성을 특별히 회피하거나 반드시 감추지도 않는다. 부모의 나체이든, 아이의 나체이든, 혹은 형제자매의 나체이든 간에, 모든 나체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연스럽고, 그 자체로 경이로우며,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또 그렇게 다루어진다.
성적 기능들 또한 완전히 자연스럽고, 그 자체로 경이로우며,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또 그렇게 다루어진다.
몇몇 사회에서는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 앞에서 완전히 드러내놓고 짝짓기를 한다. 사실 아이들에게 성적인 사랑 표현의 아름다움과 경이와 순수한 기쁨과 완전한 당연성을 느끼게 하는 데 있어, 무엇이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느냐? 부모란 건 행동에서 끊임없이 “옳음”과 “그름”의 본보기가 되는 존재여서, 아이들은 자기 부모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보면서, 온갖 것들에 대해 자기 부모들이 보내는 미묘하거나 분명한 신호들을 잡아내기 마련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너희라면 이런 사회들을 “이교도적”이고 “미개하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사회들에서는 사실 강간처럼 욕정으로 인한 범죄란 게 없고, 매춘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웃음거리가 되며, 성적 제한이나 성기능 장애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지금 당장 너희 사회더러 그런 공개성을 받아들이라고 권하지는 않겠다(그건 틀림없이 가장 비정상인 경우를 뺀 모든 상황에서 너무 심한 문화적 모욕을 줄 것이기에). 하지만 이제 너희 행성의 소위 현대문명들이 너희 사회의 성적 표현과 체험들 전체를 둘러싸고, 번번이 그것들을 규정하고 나서는 억압과 죄의식과 수치심을 끝장내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할 때가 분명히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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