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2 (6) 본문

영성수행 비전/신과 나눈이야기

신과 나눈 이야기 2 (6)

柏道 2018. 2. 7. 12:06


신과 나눈 이야기 2 (6)



지금 세계정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11

 

당신은 2권에서는 지구가 당면한 지정학적인 문제들(1권에서 다룬, 원래가 개인적인 주제들과 반대되는 것으로)을 다루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당신이 이런 논쟁으로 들어가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구요!

 

이제 세상은 자신을 속이길 그만두고 깨어 일어나, 인류의 유일한 문제는 사랑의 부족에 있음을 깨달을 때가 왔다.

사랑은 참음을 낳고, 참음은 평화를 낳는다. 그러나 참지 못함은 전쟁을 일으키고, 참기 힘든 상황을 무심히 방관한다.

사랑은 무심할 수 없다. 사랑은 무심함이 무엇인지 모른다.

인류 전체에게 사랑과 관심을 갖는 가장 빠른 길은 인류 전체를 너희 가족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 전체를 너희 가족으로 보는 가장 빠른 길은 너희 자신을 분리시키길 그만두는 것이다. 지금 너희 세계를 이루고 있는 민족국가들이 모두가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우리에게는 국제연합이 있습니다.

 

힘 없고 무기력한 기구였지. 그 기구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완전히 개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아마 힘들고 귀찮은 일일 것이다.

 

좋습니다-그럼 당신이 제안하는 건 뭡니까?

 

나는 제안을 갖고 있지는 않다. 나는 단지 관찰 결과를 제시할 뿐이다. 이 대화에서는 너희의 새로운 선택이 무엇인지 내게 말해주면, 나는 그것을 구현할 방법을 놓고 관찰한 결과를 제시한다. 현대 너희 행성에서 벌어지는, 국민과 국가간의 관계에 관련해서, 너는 지금 무엇을 선택하려 하느냐?

 

당신 표현을 빌릴게요. 제 뜻대로 할 수 있다면, 저는 우리가 인류 전체에게 사랑과 관심을 갖는쪽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런 선택을 전제로 하여, 나는 개개 민족국가들 세계문제에서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세계 자원을 동일한 비율로 배당받는 새로운 세계정치 공동체를 이뤄내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관찰한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가진 나라들이 자신의 주권과 부와 자원을 못가진 나라들에게 주지 않을 테니까요. 게다가 따지고 보면, 그 나라들이 왜 그래야 하죠?

 

그렇게 하는 것이 그 나라들에게 가장 이롭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로서도 확신할 수 없고요.

 

너희 국가경제에 해마다 몇십억 달러 보탤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너희 나라를 가장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가난한 사람을 재우고, 노인들을 안심시키고, 모두를 위해 더 나은 의료를 제공하고, 인간다운 생활수준을 조성하는 데 쓸 돈을 보탤 수 있다면 말이다.

 

사실, 미국에도 국가가 부자와 중산층 납세자들을 희생시켜서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죠. 나라는 계속해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범죄는 나라 전역에서 들끓고, 인플레이션은 국민들의 생활비 저축분까지 뺏아가고, 실업률은 수직으로 상승하고, 정부는 갈수록 더 비대해지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콘돔을 주고 받는 판에 말입니다.

 

너는 라디오 토크쇼에서처럼 말하는 구나.

 

대다수 미국인들의 관심거리는 이런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시야가 좁은 것이다. 너는 일년이면 몇십억 달러, 한달이면 맻백만 달러, 한 주면 몇십만 달러, 그리고 하루라고 해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액수의 돈을 너희 체제 속으로 도로 부을 수 있다면....... 만일 너희가 이 돈을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가난한 사람을 재우고, 노인들을 안심시키고, 모두에게 의료복지와 인간다운 생활을 제공하는 데 쓸 수 있다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범죄의 원인은 영원히 사라지리란 걸 모르겠느냐? 너는 그 돈을 너희 경제 속에 도로 쏟아 부을 때, 새로운 직업들이 버섯처럼 번지리란 걸 모르겠느냐? 너희 정부는 할 일이 줄어서 되려 축소될 수도 있다는 걸?

 

그 중에 일부는 가능할 수도 있겠군요....... 저는 정부가 축소되리란 건 상상도 못하겠거든요....... 그렇다 해도 이 몇백, 몇십억 달러가 어디서 나온다는 말입니까? 당신의 신()세계정부가 부과한 세금에서요? “자신의 두 발로 서려고는 하지 않고 돈만 쫓아다닐 사람들에게 주려고, 열심히 일해서 사람들에게서 더 많이 거둬서요?

 

그것이 네가 그 문제의 틀을 짜는 방식이냐?

 

아니요. 하지만 이건 대다수 사람들이 그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저는 공평하게 그들의 관점도 표현해주고 싶은 겁니다.

 

,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지금 당장은 선로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으니. 하지만 나도 나도 나중에 그 문제로 돌아오길 원한다.

 

좋습니다.

 

그런데 너는 이 새로운 돈들이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었다. , 그 돈들이 굳이 신()세계공동체가 새로 신설한 세금에서 나와야 하는 건 아니다(비록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 즉 시민 개개인들은 계몽된 통치 하에서 사회 전체의 필요를 조달하기 위해 수입의 10%를 내놓고 싶어할 테지만). 또 그것들이 지역정부(지금의 민족국가 정부를 말한다-옮긴이)들이 새로이 부과한 세금들에서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단언하건대, 일부 지역정부들은 세금을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너희는 단지 너희 세계관을 개조하는 것으로, 더 단순하게는 너희의 세계정치 구도를 다시 재정리하는 것으로 이런 횡재를 통째로 얻을 수 있다.

 

어떻게요?

 

그 돈을 건물방호 체계와 공격용 무기들에서 건져내는 것으로.

 

, 알았다! 당신은 우리가 군대를 철폐하길 원하시는군요.

 

너희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길 원한다.

하지만 군대를 철폐하지는 말고, 그냥 규모만 줄여라-과감하게. 너희가 군대를 필요로 하는 유일한 이유는 지역내 질서유지밖에 없을 것이니, 너희는 전쟁과 전쟁 준비를 위한 무기, 즉 대량살상용 공격무기와 방어무기의 구입에 드는 비용을 과감하게 줄이는 동시에, 지역 경찰력을 강화할 수 있다-너희가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해마다 예산평성 시기가 오면 할 수 없다고 아우성치던 그 일을.

 

첫째, 제 생각으로는 그렇게 해서 절약할 수 있는 액수가 과장된 것 같고요. 둘째로, 제가 보기에 당신은 자기방어 능력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절대 확신시키지 못할 겁니다.

 

액수 문제를 살펴보자. 현재(우리가 이 글을 쓰고 있는 1994325) 세계의 국가들이 군사 목적으로 쓰는 돈은 연간 약 1조 달러에 달한다. 즉 세계 전체로 보면 1분마다 백만달러씩을 쓰고 있는 셈이다.

현재 군사비를 많이 쓰는 나라들일수록 그만큼 많은 돈을 내가 위에서 말한 우선순위들에게 재배정할 수 있을 것이니, 크고 부유한 나라들일수록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들을 가장 이롭게 한다고 여길 것이다-물론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말이다. 하지만 크고 부유한 나라들일수록, 그들을 부러워하면서 그들이 지닌 것을 갖기 원하는 나라들이 침입해오거나 공격해올까봐 두려워하기 마련이니, 무방비로 지낸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위협을 없앨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1.누구도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원하거나 요구하지 않고, 모두가 인간답게 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 세계의 부와 자원 모두를 세상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2. 전쟁의 필요성과 나아가 그 가능성까지도 완전히 없애기 위해, 이견을 조정할 체제를 창조하는 것.

 

아마 어느 나라 국민도 이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은 이미 이렇게 해왔다.

 

그래왔다고요?

 

그렇다. 지금 너희 세상에는 정확히 이런 종류의 정치질서 속에서 진행되는 거대한 실험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 실험을 미합중국 연방이라고 부르지.

 

비참하게 실패하는 중이라고 당신이 말했잖습니까?

 

사실 그렇다. 성공이라고 하기에는 미국이 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 (앞서 약속했다시피 나는 이 점과 현재 이것을 가로막고 있는 태도들에 대해서는 뒤에서 이야기할 작정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진행 중인 최상의 실험이다.

말하자면, 미국은 원스턴 처질이 말한 식대로이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체제다-다른 체제들을 모두 제외하면.”

너희 나라는 개별 주()들 간에 느슨한 동맹 관계를 취하면서도, 그 주들을 하나의 중앙정부에 복종하는 응집력 있는 집단으로 묶는 데 성공한 첫 번째 사례이다.

그 당시만 해도 어느 주도 이렇게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각 주들은 자신들 각자의 위대성을 잃을까 두려워하면서, 또 그같은 결합이 자신들을 가장 이롭게 하지 않으리라고 주장하면서,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 당시에 이 개별 주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하게 알아두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주들은 이 느슨한 동맹에 함께 가입하긴 했지만, 사실상의 미연방 정부도, 따라서 주들이 동의했던 연합헌장’(미국독립전쟁을 수행한 13개주 연합체인 대륙회의가 1777년 제정한 미국 최초의 헌법-옮긴이)을 시행할 힘도 존재하지 않았다.

주들은 각자 자기 나름으로 대외문제들을 처리했고, 무역 및 여타 문제들을 놓고 프랑스, 스페인, 영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과 여러 건의 개별 협정들을 체결하기도 했다. 또한 주들 서로 간에도 무역을 했는데, ‘연합헌장으로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주들에서 들어오는 상품들에 관세를 부과하는 주들도 있었다. 마치 그 상품들이 바다 건너에서 오기라도 한 것처럼! 상인들은 자기 상품들을 사거나 팔려면 항구에서 관세를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그같은 세금징수를 금지하는 명문화된 협약에도 불구하고, 실상 중앙정부란 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주들은 다른 주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자신들의 의용군을 정규군으로 간주했으며, 9개 주는 해군까지 소유하던 터라, “나를 짓밟지 마시오가 연방에 속한 모든 주들의 공식 표어가 될 판이었다.

심지어 반 이상의 주들이 독자적으로 화폐를 찍어냈다. (역시 불법이라는 사실에 연합전체가 동의했음에도!)

결국 너희의 본래 주들은 연합헌장밑에 함께 결합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오늘날 독립국가들이 하는 방식 꼭 그대로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들도 자기 연합의 협약들(화폐를 찍을 권위를 연방의회에만 주는 따위의)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협약들을 강행하고, 이 협약들에 엄중한 강제조항들을 달 수 있는 중앙정부를 창설하여, 그 권위에 굴복하는 데는 완강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몇몇 진보적인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그같은 새로운 연방을 만들게 되면, 잃을 것보다 얻을 것이 더 많다는 걸 확신시켰다.

그들은, 더 이상 주마다 다른 주의 상품들에 세금을 매기지 않을 것이니, 상인들은 밑천을 줄이면서도 이윤을 늘릴 수 있고,

또 더 이상 개별 주들이 다른 주들의 공격에서 자신을 방어하려고 자원을 낭비하지 않아도 될 테니, 주정부들은 재정을 줄이면서도 정말로 국민을 도울 수 있는 정책과 공공사업들을 더 많이 시행할 수 있으며,

주들끼리 서로 싸우지 않고 협력한다면, 국민들도 더 많은 평온과 안전과 번영을 누릴 수 있으니,

각자의 위대성을 잃기는커녕 각 주들은 훨씬 더 위대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이런 주장들 그대로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만일 전세계 160개국이 하나의 통일연방으로 결합할 수 있다면, 지금의 160개 민족국가들에게도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은 전쟁의 종식을 뜻할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래도 불화(不和)는 있을 텐데요.

 

인간들이 외부의 것들에 집착하는 한, 그 말이 맞다. 진실로 전쟁을 없애고, 불안과 동요의 모든 체험을 없앨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영적(靈的)인 해결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탐구하는 건 지정학적인 해결책이다.

사실 비결은 그 두 가지를 함께 겸하는 것이다. 일상의 체험을 바꾸려면, 실제생활 속에서 영적 진실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는 불화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니, 네 말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이나 살인이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캘리포니아 주와 오리건 주가 수로(水路)문제를 놓고 전쟁을 벌이는가? 메릴랜드 주와 버지니아 주가 어업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는가? 위스콘신 주와 일리노이 주, 오하이오 주와 매사추세츠 주는?

 

아니요.

 

그렇다면 왜 그렇지 않는가? 그들 사이에서도 논쟁과 불화는 있어왔지 않느냐?

 

그렇군요. 계속 있어왔던 것 같군요.

 

그렇다고 장담해도 좋다. 하지만 이 개별 주들은 주들 공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특정한 법률과 특정한 절충안을 지키기로 자발적으로 합의했다-그것은 그냥 자발적인 합의였다. 다른 한편에서 각 주의 독자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별개의 법령들을 제정할 권리를 보유하면서.

그리고 연방법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거나, 단순히 어느 한 주가 그 법을 어긴 것 때문에 주들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그 문제는....... 분쟁을 해결하도록 권위를 부여받은 (주들이 권위를 부여한) 연방법원의 관할로 넘어갔다.

그래서 만일 기존의 법률로는 재판을 통해 그 문제에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내놓을 선례나 방법을 제공하지 못할 때는, 해당 주들과 그 주민들은 자신들의 대표를 중앙정부에 보내 만족할 만한 환경이나, 적어도 합리적인 절충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법률에 대한 합의를 얻어내려고 애쓴다.

이것이 너희 연방이 움직이는 방식이다. 법률체계와 그 법들을 해석하도록 너희가 권한을 준 연방법원 제도와, 그리고 필요하다면 무장된 경찰력을 빌려서라도 연방법원의 결정을 강행할 수 있게 하는 사법권 체계가.

비록 더 이상 이 제도들을 개선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 정치 조합은 200년이상 실제로 운용되어왔다!

이와 똑같은 처방전이 민족 국가들 간에도 효과를 보리라는 걸 의심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그토록 간단한 일이라면, 왜 여지껏 시도조차 되지 않았겠습니까?

 

시도되었다. 너희의 국제연맹은 초기 시도였고, 국제연합은 최근 시도이다.

하지만 하나는 실패했고, 다른 하나는 오직 최소한으로만 유효하다. 미국의 초기 13개주 연방처럼, 국제연합의 회원국들(특히 강대국들)도 새로운 틀짜기로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더 많을까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권세가들이 만인을 위해 삶의 질을 높이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더 관심을 갖기 때문이라는 데 있다. “가진 자들은 그같은 세계연방이 필시 못가진 자들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제시하리란 걸 안다. 하지만 가진 자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 하나 포기할 마음이 없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토록 오랫동안 투쟁해서 손에 넣은 걸 지키고 싶어하는 게 불합리한 겁니까?

 

첫째, 지금 배고프고 목마르고 잠잘 곳 없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준다고 해서, 반드시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를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지적했다시피, 너희가 해야 할 일은 해마다 전세계 군사비로 낭비하는 연간 1,000,000,000,000 달러의 돈을 박애주의 용도로 돌리는 것, 딱 하 가지뿐이다. 그러면 너희는 따로 1원 한 장 더 쓰는 일 없이, 또 어떤 재산도 소유자를 바꾸는 일 없이,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물론 전쟁과 전쟁도구들로 이윤을 올리는 다국적 복합기업들은, 그런 기업의 직원들과 세상의 갈등의식에서 자신들의 부를 끌어내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손해를 보게 되리란 주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너희가 부의 원천을 잘못된 자리에 놓았기misplaced 때문이 아닐까? 생존하기 위해서 분쟁으로 사는 세상에 의존해야 한다면, 이런 의존이야말로 왜 너희 세계가 지속적인 평화 구조를 창조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하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개인이든 국가든 너희가 그토록 오랫동안 투쟁에서 손에 넣은 걸 지키고 싶어하는 건 불합리하지 않다는 것이다. 너희가 외부세계의식 출신이라면.

 

, 뭐라고요?

 

만일 너희가 삶의 가장 큰 행복을 외부세계’, 즉 너희 바깥에 있는 물질세계에서 얻는 체험에서만 찾아낸다면, 개인이든 국가든 행복해지자면 너희는 당연히 쌓아둔 것들 중 단 1온스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못가진사람들이 자신의 불행을 물질의 부족에서 찾는 한, 그들 역시 같은 함정 속에 갇힐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너희가 가진 것을 원할 것이고, 너희는 계속해서 나누길 거절할 것이다.

내가 앞에서 진실로 전쟁을 없애고, 불안과 동요의 모든 체험을 없앨 방법이 있다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영적인 해결이다.

그래서 모든 지정학적인 문제들은 모든 개인적 문제들이 그러하듯이 결국 영적인 문제로 귀착된다.

삶의 모든 것은 영적이기에, 삶의 문제들 역시 영적 토대에 서 있고, 따라서 영적으로 해결된다.

너희 행성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건 한 쪽이 원하는 것을 다른 쪽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이 때문에 한 쪽은 다른 한 쪽이 원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갈등은 잘못 자리잡은 욕구에서 생긴다.

세상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지속될 수 있는 평화는 내적 평화뿐이다.

각자가 자기 내면에서 평화를 발견하게 하라. 너희가 내면의 평화를 발견할 때, 너희는 없이 지낼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그냥 너희가 더 이상 외부세계의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필요로 하지 않음은 위대한 자유다. 그것은 우선, 너희를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한다. 너희가 갖지 못할 뭔가가 존재한다는 두려움, 잃게 될 뭔가를 지니고 있다는 두려움, 어떤 것 없이는 행복하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에서.

둘째로, “필요로 하지 않음은 너희를 분노에서 자유롭게 한다. 분노는 선언된 두려움이다. 그러니 두려워 할 일이 없다면, 분노할 일도 없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도 너희는 화내지 않을 것이다. 너희의 원함은 필요가 아니라 단순히 선호(選好)에 지나지 않기에, 그러니 너희는 그것을 갖지 못할 가능성 때문에 두려워하는 일이 없고, 따라서 화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너희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들이 한다 해도 너희는 화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어떤 특정한 일을 하거나 하지 않는 걸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니, 따라서 화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너희는 누군가의 친절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그가 불친절하다고 해서 화내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누군가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그가 너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화내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누가 너희에게 잔혹하거나 해를 입히거나 손해를 입히려 해도 화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 처신하는 걸 필요로 하지 않고, 그들이 너희를 해칠 수 없음을 너희가 확신할 것이기에.

너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누가 너희 생명을 가져가려 해도 화내지 않을 것이다.

너희에게 두려움이 사라지면, 나머지 것들도 사라질 수 있으니, 너희는 화내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내면의 직관으로 너희가 창조했던 모든 것을 다시 창조할 수 있음을 알 것이다. 아니 더 중요한 것으로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 것이다.

너희가 내면의 평화를 발견할 때, 어떤 사람이나 장소나 물건이나, 조건이나 환경이나 상황의 있고 없음은 너희 마음 상태의 창조자일 수 없고, 너희 존재 체험의 원인일 수 없다.

이것이 너희가 몸의 전부를 거부한다는 뜻은 아니다. 천만에, 너희는 지금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방식으로 너희 육신과 육신의 기쁨 속에서 완전해짐을 체험할 것이다.

하지만 몸의 일에 대한 너희의 몰두는 강제적이지 않고 자발적일 것이니, 너희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몸의 감각을 체험할 것이다. 행복을 느끼거나 슬픔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도록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선택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고 발견하는 이 간단한 한 가지 변화를 모두가 이뤄낼 때, 전쟁은 완전히 끝나고, 갈등은 사라지며, 부당함은 차단되고, 세상에는 영원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필요하거나 가능한 다른 공식은 없다. 세계 평화는 개인의 일이다!

필요한 것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의식의 변화이다.

 

배고플 때 어떻게 내면의 평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목마를 때 어떻게 평정의 자리에 머물 수 있고, 눈비에 젖어 잠잘 곳이 없을 때 어떻게 고요히 있을 수 있습니까? 또 사랑하는 사람들이 까닭없이 죽어갈 때 어떻게 화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그토록 시적으로 말씀하시지만, 시가 현실입니까? 그 시가 빵 한 조각이 없어서 무섭게 여윈 자기 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이디오피아의 어머니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마을을 약탈하는 군대를 막으려다 자기 몸을 뚫고 들어오는 총알을 느껴야 하는 중앙아메리카 남자에게는요? 그리고 깡패들에게 여덟 번이나 강간당한 브루클린 여자에게 당신의 시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혹은 일요일 아침, 테러리스트가 교회에 설치한 폭탄으로 온몸이 갈가리 찢겨나간 아일랜드의 여섯 가족에게는요?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너희에게 말하노니, 모든 것에 완벽이 있다. 그 완벽을 보고자 노력하라. 이것이 내가 말하는 의식의 변화이다.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말고, 모든 것을 원하며, 드러낼 것을 선택하다.

네 느낌을 느끼고, 네 울음을 울며, 네 웃음을 웃고, 네 진실을 존중하라. 하지만 모든 감정이 다하고 나면, 고요히 있으면서 내가 신임을 깨달아라.

달리 말해, 엄청난 비극의 한가운데서 그 과정의 영광을 보라. 너희가 가슴을 뚫는 총알로 죽어가고, 깡패에게 강간을 당하는 동안에도.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신의 의식으로 옮아간다면 이렇게 할 수 있다.

물론 너희가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너희가 그 순간을 얼마나 체험하고 싶어하는가에 달려 있다.

엄청난 비극의 순간에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영혼 깊숙이 내려가기란 항상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 비극을 너희가 전혀 통제하지 못할 때, 너희는 저절로 이렇게 한다.

너는 차를 타고 달리다가 뜻하지 않게 다리 아래로 떨어졌던 사람과 이야기해본 적이 있느냐? 혹은 자기 코 앞에 총이 겨눠졌던 사람이나 물에 빠져죽을 뻔한 사람과는? 그들 다수가 시간이 멈춘 상태에서, 기묘한 평온에 잠겨, 아무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니.” 이것이 비극을 직면한 사람들에게 읊어야 할 시이다. 나는 너희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너희의 빛이 되고, 너희의 가장 암울한 시기에 너희의 위안이 되며, 너희의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너희의 힘이 될 것이다. 그러니 믿음을 가져라! 나는 너희의 목자이니, 너희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풀밭에 누일 것이며, 너희를 조용한 물가로 데려갈 것이다.

나는 너희의 영혼을 되찾아줄 것이며, 내 이름을 걸고 너희를 올바른 길로 이끌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의 그림자’ Shadow of Death 계곡을 지나간다 하더라도, 너희는 어떤 악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니, 내 지팡이와 내 막대가 너희를 평안케 할 것이다.

나는 네 적들의 면전에서 네 앞에 식탁을 차리고 있다. 나는 네 머리에 향유를 발라줄 것이고, 네 컵은 넘쳐흐를 것이다.

단언하노니, 선과 자비가 평생 너희를 따를 것이고, 너희는 내 집과 내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12

 

굉장하군요. 당신이 말한 건 정말 굉장할 뿐입니다. 저도 세상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믿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죠.

 

이 책이 그렇게 되도록 도와줄 것이다. 너도 그렇게 하는 걸 돕고 있다. 따라서 집단의식을 일으키는 데 너도 어떤 역할을, 너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이제 주제를 바꿔도 될까요? 제 생각엔 앞서 당신에게 공평하게 표현해주고 싶다고 말했던 그 견해, 그같은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중요할 것 같거든요.

제가 지금 언급하는 견해, 많은 사람들이 지닌 견해란, 가난한 사람들은 이미 받을 만큼 받아왔으니, 가난한 사람들을 더 많이 먹여 살리려고 부자들에게 세금을 매기는 것, 사실 열심히 일해 해냈다는 이유로 그들을 벌주는 짓은 그만두어야 한다는 견해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본래 그들이 가난하길 원해서 가난하다고 믿지요. 대부분이 자신을 끌어올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자신을 책임지기보다는 정부의 젖꼭지나 빨려 한다고요.

많은 사람들이 부의 재분배, 공유는 사회주의의 죄악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만인의 노력 전체를 담보로 인간의 기본 존엄을 보장하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악마적 기원을 갖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공산당선언에 나오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구절에서 찾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책임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관념이 냉정하고 무자비하다는 비판을 받으면, 그들은 기회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온다는 주장에서 도피처를 구하죠. 그들은, 애초부터 불리함을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자신들이 해낼 수 있다면다른 사람들도 해낼 수 있다. 그러니 누군가가 해내지 못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그 사람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너는 그게 감사할 줄 모르는 건방진 생각이라고 느끼는구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느끼십니까?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아무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런 생각이든 다른 어떤 생각이든, 생각과 관련해서 의미 있는 질문은 딱 한 가지뿐이다. 그런 생각을 지니는 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자신이 누구이고’ ‘자신이 추구하는 존재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 생각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세상을 살펴볼 때, 물어야 할 질문이다. 이런 생각을 지니는 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가?

내가 관찰하기로는, 소위 불리함을 안고 태어난 사람들, 아니 집단들은 존재한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주 높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는 누구도 불리하지 않은것 역시 사실이다. 개개 영혼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에 딱 맞는 사람과 사건과 환경을 자기 스스로 창조하기 마련이기에.

너희는 모든 것을 선택한다. 너희 부모와 국적과 재진입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비슷하게, 너희는 살아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자신을 참된 자신으로 깨닫기 위해서 사람과 사건과 환경들을 선택하고 창조한다. 현재 너희가 원하는, 정확하고 올바르고 완벽한 기회들을 끌어오게끔 고안된 사람과 사건과 환경들을.

달리 말하면, 영혼이 이루려는 바의 관점에서 보면, 누구도 불리하지 않다”. 예컨대 영혼은 자신이 이미 시작한 일을 이루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장애가 있는 몸으로 일하거나 억압적인 사회나 심한 정치경제적 긴장이 있는 곳에서 일하길 원할 수도 있다.

그러니 너희는 설령 물질적인 의미에서는 불리함에 직면한 사람이라도, 형이상학적으로 그런 것들이 사실상 올바르고 완벽한 조건임을 알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게 현실에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는 불리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까? 아니면 참으로 그들이 원하는 바로 그 곳에 있으니, “자신들의 업보를 해결하도록내버려두어야 합니까?

 

그것은 대단히 좋은 질문이고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먼저 너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신에 대해 판단한 것들의 반영임을 기억하라.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진술, 되고자 하는 자신을 결정하는 창조 행위임을. 나는 계속해서 이 측면으로 돌아가리니, 이것이야말로 너희가 이곳에서 하고 있는 유일한 일이며, 너희가 꾀하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영혼이 진행시키는 일, 다른 일정은 없다. 너희는 참된 자신이 되려 하고, ‘참된 자신을 체험하려 하며, 그것을 창조하려 하고 있다. 너희는 지금이라는 모든 순간마다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

이제 이런 문맥 속에서, 너희 세계에서 관찰되는 식의 상대적인 용어로, 소위 불리해보이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 너희가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저 상황과 관련해서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떤 존재가 되려 하는가?

달리 말해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나, 너희가 남과 만났을 때는 나는 여기서 무엇을 바라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내가 여기서 하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내 말을 알아듣겠는가? 너희의 첫 번째 질문은 언제나, 나는 역시 무엇을 바라는가여야 한다. 다른 사람이 여기서 무엇을 바라는가가 아니라.

 

이건 인간관계를 진행시키는 방식에 관해 제가 지금껏 받아본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통찰이군요. 제가 지금껏 배워왔던 것들 전부와 충돌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알고 있다. 하지만 너희 인간관계들이 그토록 엉망진창인 건, 너희가 언제나 상대방이 원하고 남들이 바라는 것을 알아내려 애쓰기 때문이다. 너희가 진실로 원하는 것 대신에 말이다. 그러고 나면 너희는 그것을 상대방에게 줄지 말지 결정하게 되는데 먼저 살펴보고 나서 결정한다. 너희가 보기에 상대방에게서 바랄 것이 전혀 없다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할 으뜸가는 이유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니, 너희는 거의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반면에 너희가 바라거나 바랄지도 모르는 뭔가가 상대방에게 있는 걸 보게 되면, 너희의 자기생존 양태가 잽싸게 자리를 차고 들어앉아, 너희는 상대방이 바라는 것을 주려고 애쓰게 된다.

그리고 나면 너희는 그렇게 한 것에 화를 낸다. 특히나 상대방이 너희가 바라는 것을 결국 주지 않을 때는.

나는 너와 거래하겠다는 이 게임에서 너희는 대단히 섬세한 균형을 잡는다. 네가 내 필요를 채워주면 나도 네 필요를 채워주겠다는 식의 균형을

하지만 개인 관계들만이 아니라 국가 관계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인간관계의 목적은 이런 것들과는 전혀 무관하다. 너희가 사람이나 장소나 사물과 신성한 관계를 맺는 목적은 그들이 바라거나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내는 데 있지 않고, 성장하고 너희가 바라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너희가 필요로 하거나 바라는 것을 알아내는 데 있다.

이것이 내가 다른 것들과 관계를 창조한 이유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너희는 진공 속에, 허공 속에, 너희의 고향인 영원한 전체속에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속에서 너희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너희는 전체속에서 그냥 존재할 뿐, 자신의 을 특정한 어떤 것으로 체험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자신을 새로이 창조하고 체험 속에서 깨닫는방법을 생각해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을 너희에게 줌으로써.

1.상대성-너희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특정한 뭔가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체계.

2.망각-상대성이란 건 단순히 속임수일 뿐, 사실은 너희가 그 모든 것임을 모르도록 자신을 기꺼이 새까만 망각에 맡기는 과정

3.의식-완전한 자각에 도달할 때까지 성장해가는 존재상태. 그러고 나서 너희가 의식을 새로운 한계로, 무한으로 펼칠 때, 너희는 살아 있는 참된신이 되고, 너희 현실을 창조하고 체험하며, 말하자면 그 현실을 확장하고 개발하며, 그 현실을 바꾸고 개조하게 될 것이다.

이 패러다임에서는 의식이 전부다.

참된 자각을 뜻하는 의식은 모든 진리의 토대이고, 따라서 모든 참된 영성(靈性)의 토대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뭘 뜻하는 겁니까? 당신은 우리가 자신이 누구인지기억해낼 수 있도록 하려고, 먼저 우리가 자신이 누구인지잊게 만드신 겁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너희가 자신되고자 하는 자신을 창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신이 되려는 신의 행위이다. 그것은 내가 되려는 나다-너희를 통해서!

이것이 모든 삶의 목적이다.

너희를 통해서, 나는 내가 누구이고 무엇이지체험한다.

너희가 없다면, 나는 그것을 알 수는 있지만 체험할 수는 없다.

앎과 체험은 다른 것이다. 나는 항상 체험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사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너희를 통해서.

 

우리는 여기서 본래의 질문을 놓치고 만 것 같군요.

 

신을 한 가지 주제에만 묶어두기는 힘들지. 나는 확장하는 편이다.

자 어디, 우리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보자.

, 그렇군-불운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였지.

첫째, 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판단하라.

둘째, 만일 자신을 원조도움사랑자비배려로서 체험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그런 것들이 가장 잘 될 수 있을지 자세히 살펴보라.

그리고 그런 것들이 되는 자신의 능력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상태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깨달아라.

사실 그들을 혼자 내버려두거나, 그들에게 자조(自助)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때때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최상의 방법이자 너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일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잔치이다. 인생은 잡다한 뷔페 요리 같은 것이니, 너희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이라는 큰 접시 하나를 줄 수 있다.

너희가 어떤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그를 깨어나게 만드는 것, 그에게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기억하게 만드는 것임을 기억하라. 이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때로는 밀거나 당기거나 살짝 찌르는 것 같은 약간의 도움으로....... 그리고 때로는 너희가 개입하거나 간섭하는 일 없이, 그의 진로를 달리게 하고, 그의 길을 따르게 하며, 그의 두 발로 걷도록 만들겠다는 결정만으로, (부모라면 누구나 이런 선택에 대해 알고 있으며, 날마다 그것을 놓고 고민한다.)

너희가 불운한 사람들에게 도움될 기회를 갖는다는 건, 그들을 다시 마음쓰게 하는 것re-mind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자신에 대해 새로운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 역시 그들에 대해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너희가 그들을 불운한 사람으로 보는 한, 그들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예수의 위대한 선물은, 그가 모든 사람을 그들의 참모습대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는 겉모습대로 받아들이길 거부했고, 사람들 스스로가 믿는 그들의 모습을 믿지 않았다. 그는 항상 더 고귀하게 생각했으며, 남들도 항상 그렇게 하도록 권했다.

하지만 그는 남들이 선택하려는 지점도 존중했다. 그는 자신의 고귀한 관념을 받아들이도록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권유로서 내놓았을 뿐이다.

또한 그는 자비를 가지고 대했다. 그래서 남들이 자신들을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보는 쪽을 택했을 때, 잘못된 평가를 내렸다고 해서 그들 거절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현실을 사랑하도록 놔두었으며, 나아가 그들이 자신들의 선택을 연출해내게끔 그들을 사랑으로 거들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 자신 아님을 지나는 길임을 예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불완전한 길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따라서 그것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길 역시 완벽하다고 보았기에, 누구나 그들이 원하는 꼭 그대로의 존재상태로 있을 수 있게 받쳐주었다.

그래서 예수에게 도움을 청한 사람은 누구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누구도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준 도움이 그 사람의 충만되고 진실한 바램을 받쳐주는지 언제나 조심스럽게 살폈다.

예수는 순수하게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다음 단계로 올라설 채비를 거짓 없이 보여주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었다. 그는 자신을 하나의 예로서 제시하여-그리고 그것은 옳았다-, 그들이 다른 걸 할 수 없다면 자신을 믿도록 그들의 용기를 복돋웠다. 그는 말했다. 길을 잃게 하지 않겠노라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으니, 오늘날까지도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청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다. 지금도 그의 영혼은 온전히 깨어나려 하고 온전히 내() 속에 살아 있으려는 사람들을 깨우는 일을 하고 있기에.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었다. 그러기에 그는 독선을 거부했으며, 하늘에 있는 그의 아버지가 그런 것처럼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았다.

완벽한 사람에 대한 예수의 견해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청하는 꼭 그대로의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도움의 종류를 그들에게 이야기해주고 나서.

그는 한번도 남을 돕기를 거부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희가 뿌린 씨는 너희가 거두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단순히 자신이 주고자 하는 도움이 아니라 사람들이 청한 도움을 그들에게 준다면, 그들이 받을 준비가 된 수준에서 그들에게 권능을 부여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것이 모든 위대한 선각자들, 과거에 너희 행성을 걸었던 이들과 지금 걷고 있는 이들의 방법이다.

 

저는 지금 몹시 혼란스럽습니다. 그렇다면 도움을 주는 것이 오히려 권능을 빼앗게 되는 경우는 언제입니까? 그것이 다른 사람의 성장을 돕지 않고 오히려 방해하게 되는 때는요?

 

너희의 도움이 신속한 자립이 아니라 계속적인 의존을 가져오는 방식으로 제공될 때.

너희가 자비를 명분으로 하여,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고 너희에게 의존하기 시작하도록 놔둘 때.

이것은 자비가 아니라 강제이다. 그런 종류의 도움은 진실로 강제라는 동력 엔진에 시동을 거는 것이기에. 그런데 여기서 이 차이는 대단히 미묘해서, 때때로 너희는 자신이 시동을 걸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너희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그냥 다른 사람을 도울 뿐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단지 너희 자신의 자부심만 키우는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남들의 너희에게 의존하도록 놔두면 놔두는 만큼, 그것은 그들이 너희를 힘 있는 존재로 만들도록 놔두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너희는 당연히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도움은 약자(弱子)을 유혹하는 최음제이다.

목표는 약한 사람이 더 약해지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약한 사람이 강해지도록 돕는 데 있다.

정부가 주도하는 많은 복지정책들이 지닌 문제가 이것이다. 그 정책들도 주로 뒤의 방식이 아니라 앞의 방식으로 일한다. 정부 정책이란 건 자기 지속성을 갖기 마련이니, 지원하려는 사람들을 돕는 만큼이나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이 그 정책들의 목적일 수 있다.

모든 정부 지원에 한계가 있다면, 국민들은 정말로 필요할 때 도움을 받더라도, 그 도움에 중독되어 그것을 자신의 자립과 맞바꾸지 않게 될 것이다.

정부는 도움이 힘인 걸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정부가 비난받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제공하는 이유이다. 정부가 돕는 사람들의 수가 많을수록 정부를 돕는 사람들의 수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정부가 부양하는 사람들이 정부를 부양한다.

 

그렇다면 부의 재분배는 없어야겠군요. 공산당 선언은 사탄의 짓이고요.

 

물론 사탄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나는 네 말뜻을 이해한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주장 뒤에 깔린 사상은 사악하지 않다. 그것은 아름답다. 그것은 그냥 너희는 너희 형제의 파수꾼이라는 속담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추해질 수 있는 것은 이 아름다운 사상을 실행하는 방식이다.

공유는 정부가 강요하는 칙령이 아니라 생활방식이어야 한다. 공유는 강제가 아니라 자발성이어야 한다.

 

하지만-여기서부터 다시 가는 겁니다!-최상의 정부일 때는, 정부 자체가 곧 국민입니다. 그리고 정부정책 자체가 국민이 생활방식으로서 공유하는 장치에 지나지 않구요. 제가 주장하려는 건 사람들은 정치체제를 거치면서 집단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가진 자들못가진 자들과 나누지 않는다는 걸 지켜보았고, 역사도 그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농민들은 러시아 귀족들이 부를 공유하기를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무한정 기다릴 수도 있었겠죠. 주로 농민들의 고된 노동에서 나오고, 거기에서 늘어난 그 부를 공유하기를요. 하지만 농민들에게는 계속해서 토지를 경작하여 토지귀족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 자극제로서, 겨우 먹고 살 만큼이 주어졌습니다. 의존관계란 바로 이런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부가 지금껏 발명한 어떤 것보다도 더 착취적이고 더 추악한, 네가 날 도울 때만 나도 널 돕겠다는 식의 구도가 아닙니까?

러시아 농민들은 이런 추악함에 대항해 일어섰습니다. 그리하여 가진 자들이 자진해서 못가진 자들에게 주는 일은 없다는 인민의 좌절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보장한 정부가 탄생한 것입니다.

굶주린 군중들이 누더기를 입고 그녀의 창문 밑으로 모여들었을 때, 금무늬가 새겨진 욕조 속에서 보석 박힌 받침 위에 머리를 대고 느긋하게 누워 수입 포도를 먹던 마리 앙토와네트는 이렇게 말했죠. “저 사람들에게 케이크를 먹게 해!”라고요.

짓밟힌 자들이 참을 수 없었던 태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혁명을 일으키고 소위 억압적인 정부를 창조해낸 조건입니다.

부자에게서 뺏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정부는 억압적이라고 하지만,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정부는 자제한다고 하니까요.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멕시코 농민들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부유하고 권력 있는 엘리트들인 2, 30개 가문들이 글자 그대로 멕시코를 경영하는(그 나라는 거의가 그들 것이니까요!) 동안에, 이삼천만에 달하는 농민들은 절대빈곤 속에서 산다는 이야기를 들을 겁니다. 그래서 농민들은 1993-94년에 봉기했지요. 그 엘리트 정부에게 최소한이나마 인간답게 생활할 수단을 인민들이 마련하게끔 도와줄 정부의 의무를 강제로라도 깨우쳐주려고요. 엘리트 정부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정부는 다릅니다.

인간이 기본 천성이 이기심에 좌절하고 분노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국민의 정부 아닙니까? 또 정부 정책이란 건 인간이 스스로 교정하길 내키지 않아 하니, 그 교정방안으로 만들어진 것이잖습니까?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바로 공정 주택법fair housing laws과 아동노동에 관한 법률, 부양자녀를 지닌 어머니들을 위한 지원정책들의 발단이잖습니까?

그 가족들이 노인들에게 제공하려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것을 제공하려는 정부의 시도야말로 사회안정이 아닙니까?

정부통제에 대한 우리의 증오를, 통제받지 않으면 절대 기꺼이 하는 법이 없는 우리의 천성과 무슨 수로 조화시킨단 말입니까?

정부가 그 추잡한 부자 탄광주들에게 추잡한 탄광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도록 요구하기 전까지 탄광노동자들이 일한 환경은 끔찍했습니다. 왜 탄광주들이 자진해서 그렇게 하지 않은 줄 아십니까? 그렇게 하면 이윤이 줄어드니까요! 그리고 부자들은 이윤을 끌어내고 늘리기 위해서라면 위태로운 광산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죽어가도 신경쓰지 않죠.

정부가 최저임금제를 실시하기 전까지 기업들이 미숙련 노동자들에게 지불한 건 그야말로 노예 임금이었습니다. “옛날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기업들은 일자리를 주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쨌든 위험을 감수하는 쪽은 누구인가? 노동자들? 천만에! 투자가들, 소유주들이 모든 위험을 감수한다구! 그러니 최대치의 보상을 받아야 하는 건 당연히 그들이라구!”

자본가들이 의존하는 노동의 소유자인 노동자를 인간답게 대우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누구나 공산주의자로 몰립니다.

피부색 때문에 주택 구입을 제한당해선 안된다고 여기는 사람은 누구나 사회주의자로 몰리고요.

단지 잘못된 성()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고용기회나 승진을 거부당해선 안된다고 여기는 사람은 누구나 급진적 여권주의자로 몰리죠.

그리고 사회의 권력자들이 스스로 해결하길 악착같이 거부하는 이런 문제들을 행여 정부가 선출된 대표자들을 통해 해결하려고 움직이기라도 하면, 그런 정부들은 억압적이라고 비난받죠!(부언하면, 정부가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절대 이렇게 비난하지 않습니다. 자진해서 돕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만이 이렇게 하죠.)

의료복지 문제에서보다 이것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예는 없습니다. 1992년에 미국대통령과 그의 부인은 몇백만명의 미국인들이 예방 차원의 진료를 전혀 받지 못하는 건 부당하며 부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때문에 전문 의료기관과 보험회사들까지 분란 속으로 끌어들인 의료복지 논쟁이 시작되었지요.

하지만 진짜 문제는 행정부가 제시한 복안과 사기업들이 제기한 복안 중에서 어느 쪽의 해결책이 더 나은가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왜 사기업들은 진작에 자신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는가입니다.

제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사기업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죠. 기업들은 이윤을 쫓아갔고요.

오로지 이윤, 이윤, 이윤이었죠.

그러니까 제가 말하려 하는 요지는 이렇습니다.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비난하고 울부짖고 불평할 수 있겠죠. 하지만 명백한 진실은 사적 부분이 제시하지 않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쪽은 정부란 겁니다.

또한 정부가 국민의 바램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국민이 정부를 지배하는 한-미국 국민들이 어느 정도 그렇듯이요-, 정부는 사회적 질병들에 대해 계속해서 해결책을 만들어내고 그것의 시행을 요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유하거나 권력을 갖지 못한 쪽이 국민의 다수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사회가 자발적으로 주려 하지 않는 것들을 자신들의 힘으로 입법화할 테니까요.

정부가 불평등에 대해 거의 혹은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건 다수의 국민이 정부를 통제하지 않는 그런 나라들뿐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느 정도가 너무 과한 정부이고, 어느 정도가 너무 모자라는 정부인가, 우리가 그 균형점을 어디에서 어떻게 잡는가라는 거죠.

 

호오! 네가 이렇게까지 멀리 나가다니! 이 정도면 우리책 두 권 중 어디 하나에 네가 의원석을 지닐 만하군.

 

, 당신이 이 책은 인간 가족이 직면한 세계적 문제들에 대해 다루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제 보기엔 제가 큰 놈을 때려눕혔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 아주 웅변적이었고. 토인비에서 제프슨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지난 몇백년 동안 그 문제를 풀려고 애써왔다.

 

좋습니다. 그럼 당신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뒤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좀 지난 분야를 복습해봐야 할 것이다.

 

계속하십시오. 저한테는 그걸 다시 한번 더 듣는 게 필요할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내게는 아무 해결책도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자. 이것은 내가 이 중 어떤 것도 문제상황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고, 나는 그에 관해 아무런 선호(選好)도 없다. 내가 여기에서 표현하는 것은 관찰할 수 있는 것, 누구라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좋습니다. 당신은 아무런 해결책도 가지지 않았고, 어떤 선호도 없습니다. 그럼 당신이 관찰하는 것을 제게 말해주시겠습니까?

 

나는 세상이 완전한 해결책을 제공할 정부체계를 아직은 감당할 수 없음을 보고 있다. 비록 미국 정부가 그 중 가깝게 접근하긴 했지만.

()과 공평함은 도덕 문제지, 정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어려움이 있다.

정부란 건 선을 명령하고 공평함을 보장하려는 인간의 시도이다. 하지만 선이 탄생하는 곳은 딱 한 곳뿐이니, 인간의 가슴 속이 그곳이고, 공평함을 개념화할 수 있는 곳도 딱 한 곳뿐이니, 인간의 정신(마음) 속이 그곳이며, 진실로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곳도 딱 한 곳뿐이니, 인간의 영혼 속이 그곳이다. 인간의 영혼은 곧 사랑이기에.

너희가 도덕을 입법할 수는 없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법을 통과시킬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원을 따라 돌고 있다. 이전에 우리가 이 모든 문제들을 다룰 때 그러했듯이. 그럼에도 논의하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도록 계속 노력하라. 우리가 같은 분야를 두 번 세 번 포괄한다 해도 상관없다. 여기서의 시도는 그것의 밑바닥에 닿기 위한 것이다. 즉 너희가 지금 어느 정도로 그것을 창조하고 싶어하는지 깨닫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전에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할게요. 법이란 건 단지 도덕개념을 성문화하려는 인간의 시도에 지나지 않는 겁니까? “입법이란 건 단지 옳음그름에 관한 우리의 결합된 동의에 지나지 않는 겁니까?

 

그렇다. 그리고 너희 같은 미개사회에서는 특정의 시민법들, 규칙과 규제들이 필요하다. (미개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그런 법률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모두가 스스로 알아서 규제하기 때문에.) 너희 사회는 지금도 여전히 대단히 기본되는 질문들을 너희에게 들이대고 있다. 거리 모퉁이에서 계속 진행하기 전에 일단 멈출 건가? 정해진 값대로 사고 팔 건가? 서로를 대하는 방법에 제한을 둘 건가? 하는 따위의 질문들을.

하지만 실제로는 온세상 사람들이 사랑의 법칙을 그냥 따르기만 해도, 살인과 협박과 사기를 금하고, 심지어는 빨간불에서 주행을 금하는 이런 기본적인 법률들조차 필요가 없을 것이고, 너희 역시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법칙이란 신의 율법이다.

필요한 것은 의식의 성장이지, 정부의 성장이 아니다.

 

당신 말씀은 우리가 그냥 십계명만 따른다면, 다 잘 될 거란 뜻이군요.

 

십계명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보려면 1권을 찾아봐라.) 신의 율법은 결코 율법이 아니다. 너희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마지막 진술을 믿지 못할 겁니다.

 

그 사람들에게 1권을 읽게 하라. 그 책이 완벽하게 설명해줄 것이다.

 

이게 당신이 이 세상을 위해 제안하는 것입니까? 완전한 무정부상태요?

 

나는 아무것도 제안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쓸모가 있는지 관찰하고 있을 뿐이고, 관찰할 수 있는 것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아니다, 나는 정부와 규칙과 규제와 어떤 종류의 한계지음도 없는 그런 무정부 상태를 쓸모 있는 것으로 관찰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배열은 오직 앞선 존재들에게만 현실적이다. 나는 인간 존재가 그렇다고 관찰하지 않는다.

따라서 너희 종족이 당연히 옳은 것을 당연히 하게 되는 지점으로 진화할 때까지는, 일정 수준의 통제는 계속 필요할 것이다.

너희는 그 과도기 동안에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현명하다. 하지만 좀 전에 네가 제기한 문제는 너무 분명해서 논박할 여지가 없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재량에 맡겨지면 옳은일을 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왜 정부가 그토록 많은 규칙과 규제들을 사람들에게 지우는가가 아니라, 왜 정부는 그렇게 해야 하는가에 있다.

그 대답은 너희의 분리의식과 관계가 있다.

 

우리 자신들을 서로 분리된 존재로 본다는 사실을 말하는군요?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라는 이야기이고, 이건 우리가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개인의 위대성을 발휘할 힘을 우리에게서 빼앗는 것 아닙니까? 제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니, 그럼 공산당선언이 옳았군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내가 이미 얘기했듯이 대단히 고상한 사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자비하게 강행될 때, 그 고상함은 퇴색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가 지닌 어려움이다. 견해가 아니라 그 실행이.

 

그런 견해는 기본적인 인간성에 대립하기 때문에 강제로 실행되어야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네가 바로 맞혔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천성이다. 작업이 필요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당신이 말씀하셨던 의식변화를 이루기 위해서요?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또 다시 쳇바퀴를 돌고 있군요. 집단의식은 개인을 무력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 자세히 살펴보자. 이 행성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기본 욕구가 충족된다면, 인간 집단이 인간답게 살 수 있어 유치한 수준의 생존투쟁을 피할 수 있다면, 모든 인류가 좀 더 고상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겠는가?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 과연 개인의 위대성을 억누르는 것이냐?

게다가 개인의 영광을 위해 과연 우주의 존엄성까지 희생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개인의 영광이라면, 그렇게 해서 얻는 영광은 과연 어떤 종류의 영광인가?

나는 너희 행성에 모두가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은 자원을 놓아두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마다 몇천명씩이 굶어죽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해마다 몇백명씩이 걸인이 되고, 몇백만명이 기본 생존권을 달라고 절규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을 끝장낼 종류의 도움은 힘을 빼앗는 식의 도움이 아니다.

하지만 너희 부자들이 굶주리고 집 없는 사람들의 힘을 빼앗고 싶지 않으니, 자신들은 그들을 돕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너희 부자들은 위선자들이다. 남들은 죽어가는데 그들만 잘 산다면, 누구도 진실로 잘 사는것이 아니기에.

한 사회의 진화 정도는 그 사회가 자신의 구성원 중 가장 못한 사람들을 얼마나 잘 대우하는가로 잴 수 있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남을 돕는 것과 해치는 것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기란 어렵다.

 

내놓을 만한 무슨 지침 같은 게 있습니까?

 

불확실할 때는 틀리는 한이 있어도 언제나 자비 편에 서는 게 대강의 지침일 수 있다.

그리고 너희가 남을 돕고 있는지 해치고 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은, 그 동료가 네 도움을 받고 나서 더 자랐는가, 아니면 줄었는가? 그들이 더 커졌는가, 아니면 더 작아졌는가? 더 유능해졌는가, 아니면 무능해졌는가?이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뭐든지 다 준다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일해서 그것을 얻으려는 경우는 대폭 줄어들 거란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왜 굳이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을 얻기 위해서 일해야 하는가? 그냥 모든 걸 얻기 위해 일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왜 꼭 일해서 얻으려는 그것이 전부가 아닌 어느 특정의 것이어야 하는가?

인간의 기본 생존권은 만인의 타고 난 권리가 아닌가? 아니 권리여야 하지 않는가?

누구든 최저 수준 이상을, 즉 더 많은 음식과 더 큰 집과 더 좋은 의복을 추구하고 싶다면, 그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하지만 과연 기껏 생존하기 위해 투쟁해야 할까?-모두가 먹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존재하는 행성에서.

이것이 바로 인류가 직면한 중심 화두(話頭)이다.

과제는 만인을 평등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인간다운 기본 생존을 보장해주는 데 있다. 그런 다음 각자가 그 지점에서 출발하여 자신들이 더 많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그런 기회가 주어져도 그걸 붙잡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주장도 있죠.

 

그들이 정확하게 관찰했다. 그래서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에게 제시된 기회를 붙잡지 않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또 다른 기회, 또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할 의무를 지는가?

 

아니요.

 

내가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아마 너희는 영원히 지옥을 헤매게 되지 않겠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신의 세계에서 자비는 끝이 없고, 사랑은 그침이 없고, 인내는 다함이 없다. 오직 인간 세상에서만 선이 한정된다.

내 세계에서 선은 무한하다.

 

우리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더라도.

 

너희는 언제나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가 당신의 선함을 당신 면전에 도로 집어던진다 해도.

 

그럴수록 특히 더 그래야 한다.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네 왼 뺨마져 돌려대고,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주어라.”[마태오 5:39-41]) 너희가 내 선함을 내 면전에 도로 던질 때(여담이지만, 인간 종족은 몇천년 동안 신에게 이렇게 해왔다), 나는 너희가 그냥 오해하고 있을 뿐임을 안다. 너희는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너희의 실수는 사악함이 아니라 단지 무지에서 비롯되었기에, 나는 그것을 용서한다.

 

하지만 본래 사악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천성 자체가 나쁜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가 네게 그런 이야기를 했느냐?

 

제 스스로 관찰한 겁니다.

 

그렇다면 너는 꿰뚫어보지 못한 것이다. 전에 네게 말했던 적이 있다. 그 사람의 세상형에서 볼 때,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달리 말하면 누구나 주어진 순간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을 하고 있다.

누구든 간에 그 사람의 행동 전체는 손에 쥔 자료의 달려 있다.

나는 앞에서 의식이 전부라고 말했다. 무엇을 깨닫고 있고, 무엇을 알고 있는지가.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공격하고, 해치고, 위협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래도 나쁘지 않다고요?

 

내가 전에 말했다시피, 모든 공격은 도와달라는 외침이다.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덧붙이면 너희 정부들까지 포함하여-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잘못 자리잡은 생각 때문에 그런 일을 한다.

나는 이미 이 책에서 이 문제에 대한 수준 높은 해결책이 어떤 것인지 대가 설명했다. 그냥 아무것도 원하지 마라. 선호는 갖되, 욕구는 절대 갖지 마라.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존재 상태이다. 그것은 선각자들의 자리이다.

그러나 지정학적인 차원에서, 왜 너희는 모두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의 세계가 되어 함께 일하지 않는가?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인간 역사가 몇천년이나 지난 지금, 너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이것이냐?

진실은, 너희는 거의 진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너희는 여전히 만인이 자신을 위해존재하는 미개한 심리상태에서 움직이고 있다.

너희는 지구를 약탈하고, 지구 자원을 강탈하며, 지구 사람들을 착취한다. 그러고는 이렇게까지 하는 데 대해 너희와 견해를 달리 하는 사람들을 과격파라 부르면서, 그들의 시민권을 체계적으로 박탈한다.

너희는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한다. 그것은 너희가 다른 식으로는 유지할 수 없는 생활양식을 발달시켜 왔기 때문이다.

너희는 해마다 몇백만 에이커의 나무들을 잘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신문을 받아볼 수 없다. 너희는 몇마일의 두께로 너희 행성을 감싸고 있는 오존층을 고갈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헤어스프레이를 가질 수 없다. 너희는 너희의 강과 개울들을 돌이킬 수 없게 오염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너희는 더 크고 더 좋고 더 많은 것을 제공하는 산업을 지닐 수 없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중에 가장 못한 사람들, 즉 가장 불리한 사람들과 가장 못 배운 사람들, 가장 덜 깨인 사람들을 착취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너희는 지금껏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그리고 불필요한) 사치를 누리면서 최상층의 인간 등급으로 살 수 없다. 마지막으로 너희는 자신이 이렇게 하고 있는 걸 부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너희는 자신과 더불어 살 수 없다.

너희한테서는 다른 사람들도 소박하게 살 수 있도록 소박하게 살려는심성을 찾을 수 없다. 자동차에 붙이는 지혜의 스티커 따위는 너희한테 너무 소박하다. 그것은 너무 소박해서 청할 필요가 없고, 너무 소박해서 줄 필요가 없다. 어차피 너희가 그토록 힘들어 일한 건 지금 지닌 것을 얻기 위해서였다! 너희는 그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설사 나머지 인류가-너희 손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말라 비틀어진 바나나라도 얻으려고 고심하게 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너희는 생존하기 위해서, “성공하기위해서, 해야 할 일을 했다-그리고 그들도 똑같이 할 수 있다. 결국 누구나 자신을 위하기 마련 아닌가?

 

이런 진창에서 벗어날 무슨 묘안이 있습니까?

 

그렇다. 다시 한번 이야기해줄까? 의식을 바꾸어라.

정부 차원의 행동이나 정치수단으로는 인류를 역병들게 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너희는 몇천년 동안 그렇게 하려고 애써왔지만 허사였다.

필요한 변화는 오직 인간 심성이 바뀌는 것뿐이다.

 

필요한 변화라는 걸 한 마디로 말해주시겠습니까?

 

나는 이미 여러번 말해주었다.

너희는 신을 너희와 분리된 존재로 보고, 너희 각자를 서로 분리된 존재로 보는 걸 그만두어야 한다.

이 우주의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궁극의 진리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만물은 애초에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돌이킬 수 없게 서로 의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삶 전체라는 직물 속으로 짜넣어진다.

모든 정부, 모든 정치가 이 진리에 토대를 두어야 하고, 모든 법률이 이 진리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이것이 너희 종족이 품을 수 있는 미래의 희망, 너희 행성이 지닐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당신이 1권에서 말한 사랑의 법칙은 어떻습니까?

 

사랑은 모든 걸 주지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너희 종족의 모든 이가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을 때, 너희가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너희가 뭔가 요구하는 건 오직 다른 누군가가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움켜쥐길 그만둬라!

 

우리 모두가 한꺼번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건 아무 쓸모도 없을 텐데요.

 

사실 필요한 것은 세계 의식global conscionsness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런 의식이 생기겠는가? 누군가가 시작해야 한다.

여기에 너를 위한 기회가 있다.

네가 이 새로운 의식의 발단이 될 수 있다.

네가 영감(靈感)이 될 수 있다.

사실 너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

 

제가 그래야 한다고요?

 

여기에 너말고 누가 있느냐?

 

13

 

제가 어떻게 시작할 수 있습니까?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되, 세상을 다치게 하지 말고, 건설하려고 애쓰되, 파괴하지 마라.

내 백성을 집으로 데려오라.

 

어떻게요?

 

네 예()를 밝게 비추는 것으로, 오직 신성(神性)만을 추구하고, 오직 진리만을 말하고, 오직 사랑으로만 행동하라.

이제부터 영원히 사랑의 법칙에 따라 살도록 하라. 모든 걸 주되, 아무것도 요구하지 마라.

세속성을 피해가라.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지 마라.

()를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가르쳐라.

네 삶의 모든 순간이 사랑의 분출이 되게 하라.

모든 순간을, 가장 고귀한 생각을 생각하고, 가장 고귀한 말을 말하고, 가장 고귀한 행동을 행하는 데 써라. 그 속에서 네 신성한 자신을 찬양하고, 그리하여 또한 나를 찬양하라.

네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를 주어 이 땅에 평화가 오게 하라.

평화로워져라.

모든 순간에 전체와 모든 사람과 모든 장소와 모든 사물과 너희 신성한 연결을 느끼고 표현하라.

모든 환경을 감싸안고, 모든 잘못을 네 것으로 하며, 모든 기쁨을 함께 나누고, 모든 신비를 응시하며, 모든 이의 입장에 서고, 모든 죄지음(너 자신의 것까지 포함하여)을 용서하며, 모든 가슴을 치유하고, 모든 이의 진실을 존중하며, 모든 이의 신을 경배하고, 모든 이의 권리를 지키며, 모든 이의 생존권을 보존하고, 모든 이의 이로움을 추구하며, 모든 이의 필요를 제공하고, 모든 이의 가장 큰 재능을 선물하며, 모든 이의 축복을 일으키고, 모든 이의 미래가 확고한 신의 사랑 속에서 안전함을 선언하라.

네 내면에 존재하는 가장 고귀한 진실의 살아 숨쉬는 본보기가 되라.

자신에 대해 겸손하게 말하라. 남들이 네 가장 고귀한 진실을 허풍으로 잘못 받아들이지 않도록.

부드럽게 말하라. 남들이 네가 단지 주의를 기울여주기만 요구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온화하게 말하라. 모두가 사랑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터놓고 말하라. 누구도 네가 뭔가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솔직히 말하라. 누구도 너를 오해하지 않도록.

자주 말하라. 네 말이 참으로 실행될 수 있도록.

존중하면서 말하라. 누구도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사랑으로 말하라. 모든 음절이 치유하는 힘을 갖도록.

입을 열어 말할 때마다 나에 대해 말하라.

네 삶이 은혜가 되게 하라. 그리고 항상 기억하라. 너희는 은혜임을!

네 삶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네가 그 삶 속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되도록 하라. 네가 은혜가 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너희는 언제나 은혜일 수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언제나 은혜이기에-하지만 때때로 너희 자신이 모를 수는 있다.)

누군가 예기치 않게 네 삶 속으로 들어올 때, 그 사람이 네게서 받았던 은혜를 찾아보라.

 

참으로 경이롭게 표현하시는군요.

 

너는 네게 온 사람이 왜 나 아닌 다른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네게 이르노니, 지금까지 네게 왔던 모든 사람이 네게서 선물을 받았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그들은 네게 한가지 은혜를 주었다. 네가 자신을 체험하고 실현해보라는 은혜를.

너희가 이 간단한 진리를 이해할 때, 너희가 이것을 깨달을 때, 너희는 가장 위대한 다음 진리를 이해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오직 천사만을 보내주었다.

 

 

14

 

헷갈리는군요. 잠시만 다시 뒤로 돌아가도 됩니까? 좀 모순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거든요. 전 당신이, 우리가 남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도움은 종종 그들을 혼자 내버려두는 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걸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반드시 그 사람을 도와주라는 말씀도 하시는 것 같군요. 이 두가지 진술은 서로 어긋나는 것 같은데요.

 

그 문제에 대해 너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명확히 해주마.

다른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식의 도움은 일체 제공하지 마라. 절대 너희 쪽에서 필요하다고 여기는 도움을 제공하겠다고 나서지 마라.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람이나 국민에게 너희가 제공해야 하는 것들 전부를 알려줘라-그런 다음에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귀를 기울여라. 즉 그들이 무엇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아보라.

그들이 원하는 도움을 제공하라. 그 사람이나 그 국민이 그냥 내버려두길 원한다고 말하거나 그것을 행동으로 드러낼 때는, 너희가 주고 싶은 도움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을 내버려두는 것이 너희가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은혜일 수 있다.

설사 나중에 가서 그들이 다른 걸 원하거나 바라더라도, 너희는 그것을 주는 게 너희 일인지 아닌지 짐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게 너희 일이라면, 그것을 주어라.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어떤 것도 주지 않도록 하라. 무력하게 만든다는 건 의존을 조장하거나 의존을 낳는 것을 말한다.

사실 남을 힘 있게 만들면서도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진실로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의 곤경을 철저히 무시한다면 그건 올바른 대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무 적게 하는 것도 너무 많이 하는 것만큼이나 그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너희가 더 높은 의식을 갖자면, 형제자매의 극심한 곤경을 고의로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들이 자업자득으로 고생하게내버려두는 게 너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은혜라고 주장하면서. 이같은 태도는 최고의 정당화이자 오만이다. 이것은 단지 너희의 팔짱끼고 있기를 정당화시켜줄 뿐이다.

나는 다시 한번 예수의 생애와 그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하겠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말한 사람은 예수였기에. (예수-옮긴이)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리니,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아, 나와서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재워주었기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혀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고,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느니라.

이에 그들이 내게 물을 것이라. 주여, 저희가 언제 주의 주린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언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재워드렸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나이까?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못한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라.(마태오 2531-40-옮긴이)

이것이 내 진리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대를 통틀어 여전히 유효하다.

 

15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시죠?

 

알고 있다. 나도 너를 사랑한다.

 

16

 

어차피 이 책에서는 1권에서 탐구하기 시작했던 삶의 개인적 요소들을 재음미하면서, 행성 범위에서 더 큰 삶의 측면들을 논의하고 있던 터이니, 환경에 대해서 좀 물어보고 싶습니다.

 

네가 알고 싶은 게 무엇이냐?

 

일부 환경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진짜로 지구가 멸망하는 중입니까? 아니면 이런 사람들은 단순히 삐딱한 시야를 가진 과격파거나, 자유주의 공산당 빨갱이들이거나, 버클리대를 졸업하고도 마약이나 흡입하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 겁니까?

 

두 질문 다에 그렇다가 내 대답이다.

 

-???

 

그냥 장난이었다. 좋다. 첫 번째 질문의 대답은 그렇다이고, 두 번째 질문은 아니다이다.

 

그럼 오존층이 고갈되고 있는 겁니까? 열대우림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요?

 

그렇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뚜렷한 사안들하고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너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들이 있다.

 

더 자세히 말해주십시오.

 

예를 너희 행성에서는 빠른 속도로 토양이 줄어들고 있다. 다시 말해 곡물을 재배하기에 적합한 토양이 떨어져 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된 건, 토양을 복원하자면 시간이 걸리는데, 너희 기업농들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쉬지 않고 생산해낼 땅을 원하기에, 계절에 따라 경작지를 번갈아 사용하던 옛 농사법을 포기하거나 축소하고 있다. 그리고는 토양의 복원력을 보상하기 위해 작물이 더 빨리 자라게 하는 화학제품인 농약을 땅에 들이붓는다. 하지만 모든 일에 그러하듯이 이 경우에도, 너희는 어머니인 자연을 대신할 인공제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 자연이 제공하는 것을 비슷하게나마 대신 제공할 수 있는 인공제품을.

그 결과 일부 지역에서는 자양분이 담긴 쓸만한 상층토(上層土)라고는 이삼인치에 불과할 정도로 토양이 부식되고 있다. 달리 말해, 너희는 갈수록 자양분이 더 적은 토양에서 더 많은 곡물을 재배하고 있는 것이다. 철분도 없고, 미네랄도 없으며, 통상 흙에서 제공된다고 여기던 어떤 것도 없다. 더 나쁜 것은, 토양을 복원하려는 필사적인 시도로 땅에 들이부었던 화학약품들로 가득찬 음식물들을 너희가 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기간에 몸에 뚜렷한 해를 끼치지는 않더라도, 결국에 가서 너희는 이 잔류 화학약품들이 몸에 백해무익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퍼할 것이다.

경작지의 빈번한 갈아엎기로 인한 토양부식이라는 이 문제가 널리 알려진 문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경작 가능 토지의 급속한 축소가 다음번에 유행시킬 대의명분을 찾고 있는 여피 yuppie 환경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환상은 아니다.

어느 지질학자나 붙잡고 물어보라. 그러면 그에 관해 넘칠만큼 들을 것이니, 그것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심각한 현상이어서, 재난을 초래할 정도의 문제이다.

이것은 너희 어머니이자 모든 생명을 주는 지구를 위태롭게 하고 고갈시키는 허다한 방식들 중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는 지구의 필요와 그것의 자연스런 과정을 완전히 무시한다.

너희는 너희 욕망을 만족시키고, 당장의(그리고 대체로 부풀려진) 너희 필요들을 충족시키고, 더 크고 더 좋고 더 많은 것을 쫓는 인간의 무한한 갈증을 식힐 때 말고는, 너희 행성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너희 역시 한 생물종으로서 충분함이 정녕코 충분해질 때가 언제일지 자문해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환경주의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까요? 왜 우리는 그들의 경고에 무심할까요?

 

너희 행성의 생활양식과 삶의 질에 영향을 주는 진실로 중요한 모든 문제들에서처럼, 이 문제에도 쉽게 분간할 수 있는 원형이 있으니, 너희는 이미 그 질문에 완벽하게 대답하는 신조어(新造語)를 주조해낸 바 있다. “돈의 자취를 쫓아라.”

 

그처럼 강력하고 교활한 측면과 싸워야 할 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꿈이라도 꾸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하다. 돈을 제거하라.

 

돈을 제거하라고요?

 

그렇다. 아니면 하다못해 그것의 불투명성이라도 제거하라.

 

이해가 안되는군요.

 

사람들은 부끄럽거나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들을 숨기기 마련이다. 너희 대다수가 자신의 성행위를 숨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너희 대다수가 자신의 돈을 숨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너희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너희는 재산문제가 대단히 사적인 문제라고 여긴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만일 모두가 모두의 금전 상황에 대해서 모조리 다 알게되면, 너희 나라와 너희 행성에는 여지껏 한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심한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인간사의 운영에서 공평함과 평등, 솔직함과 선()에 대한 참된 우선시(優先視)는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을 터이고.

지금의 경제에서 공평함이나 평등, 솔직함이나 공동선을 가져오기란 불가능하다. 돈을 감추는 게 너무 쉽기 때문이다. 너희는 받은 돈을 실제로, 다시 말해 물질적으로 감출 수 있다. 또한 창의적인 회계사들이라면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 기업의 돈을 숨기거나” “사라지게할 수 있다.

돈을 숨길 수 있기 때문에, 누구도 남들이 정확히 얼마를 갖고 있는지, 혹은 그들이 그걸 가지고 뭘 하는지 알 방도가 없다. 눈속임은 말할 것도 없고 과다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업들은 똑같은 일을 해도 전혀 다른 액수의 임금의 지급할 수 있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는 연봉 57천불짜리의 일거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연봉 42천불짜리 일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한 쪽에게 더 많이 주는 것은 앞의 직원이 뒤의 직원에겐 없는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뭔데요?

 

자지.

 

맙소사!

 

그렇다. 정말 맙소사이다.

 

하지만 그건 당신이 이해를 못하신 겁니다. 페니스를 가지는 건 앞의 직원을 뒤의 직원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들어주거든요. 더 재치있고, 더 솜씨 좋고, 그리고 확실히 더 능력 있게요.

 

흐으음. 그게 너희를 그런 식으로 만든다는 걸 깜빡했구나. 그게 능력에서 그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걸 말이다.

 

그럼요. 당신이 그걸 모른다는 게 오히려 놀랍군요. 이 행성 사람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인데요.

 

이 문제는 여기서 그만두는 게 좋겠다. 안 그랬다가는 사람들이 우리가 진짜로 그런 줄 알 것이다.

 

당신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우리는 그래요! 우리 지구 사람들은요. 이게 바로 여성들이 로마 카톨릭교나 몰몬교의 신부가 될 수 없고,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에 설 수 없으며, 포츈지가 선정하는 500대 기업의 최고 책임자나 여객기 기장의 지위에 올라가지 못하는 까닭이죠. -

 

그렇다. 우리는 논점에 이르렀다. 그리고 내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만일 모든 돈거래가 투명해진다면, 어쨌든 임금 차별 같은 건 무사히 넘어가기가 훨씬 더 어려워지리란 점이다. 어떤 기업이나 직원 전체의 봉급 일체를 강제로 발표해야 할 때, 지구상의 모든 일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있겠느냐? 특정 직급들의 급여 수준이 아니라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실제 보수를 발표해야 한다면 말이다.

 

, 배후에서 양쪽을 들쑤셔 어부지리를취하는 이은 없어지겠죠.

 

그렇지.

 

그리고 모르는 게 약이다도 없어질 거구요.

 

그렇지.

 

그리고 이봐, 여자 한명 쓰는 데 2/3 값이면 되는데, 왜 더 많이 줘야 하지?”도 사라지겠지요.

 

-

 

그리고 비위 맞추기라든지 상사에게 아부하기, “잘 나가는 자리라든지, 사내(社內) 정치 같은 것들도 없어지겠죠. 그리고-

 

그러고도 아주 많은 것들이 일터와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돈의 자취를 벗기는 간단한 조치 하나로.

생각해보라. 만일 너희 모두가 각자가 지닌 돈의 액수와, 너희 산업체와 기업과 그 임원들의 실소득액만이 아니라, 각 개인과 기업들이 가진 돈을 어떻게 쓰는지까지 정확하게 안다면, 이것만으로도 상황이 바뀌지 않겠는가?

네 생각에는 상황이 어떤 식으로 바뀔 것 같으냐?

확실한 건,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일들이 진행되는지 안다면, 그들은 그 중 90%는 참아내지 못하리란 사실이다. 사회는 엄청난 불균등 상태인 부의 분배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부를 얻는 방식이나 더 많이 얻기 위해서 그 부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전혀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들이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자세하고 신속하게 알려진다면.

합당한 행동을 양산하는 데 있어 공공의 점검이라는 빛을 쬐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은 없다. 소위 너희의 양지법’ Sunshine Laws이라는 것이 너희 정치체계와 통치체계의 가공할 추잡함을 일부나마 청소하는 데 그토록 큰 역할을 해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공청회와 공개 청문회는 20년대와 30년대, 40년대, 50년대에 너희 시의회와 교육위원회와 지역구들만이 아니라 주정부들에서까지 횡행하던 밀실놀음들을 제거할 만큼 큰 역할을 했다.

이젠 너희 행성에서 이루어지는 상품과 서비스의 보수를 다루는 방식에도 약간의 양지를 가져올 때가 되었다.

 

당신이 제안하는 건 어떤 겁니까?

 

이것은 제안이 아니다. 이것은 도전이다. 나는 너희에게 너희의 모든 돈, 너희 모든 지폐와 동전과 주()의 통화를 내던지고 다시 시작할 테면 해보라고 도전한다. 널리 공개되고 완전히 투명하고 금방 추적되고 완벽하게 책임지는 국제통화제도를 발달시키고, 남들에게 봉사한 서비스와 생산한 생산물에 대해서는 채권Credits, 사용한 서비스와 소비한 생산물에 대해서는 채무Debits를 받는 세계공용보수체계’Worldwide Compensation System를 세울 테면 세워보라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투자수익과 상속재산, 시합 상금, 봉급과 임금, 사례금과 사은금 따위의 모든 것이 이 채권 채무 방식에 근거할 것이다. 그래서 이 외에 달리 유통할 수 있는 통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채권없이는 아무 것도 구입하지 못할 것이고, 모든 사람의 채권 채무 제표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될 것이다.

그 사람의 은행거래 내역을 알려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노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체계는 그런 시나리오에 접근한다. 사람들은 지금 너에 관해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거나, 적어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은 단지 서로에 관해서만이 아니다. 너희는 매사를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너희는 기업들이 얼마를 대금으로 지불하고 얼마를 쓰는지도, 각 항목별 가격만이 아니라 각 항목별 비용이 얼마이지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기업들이 모든 가격표에 가격과 그것의 비용이라는 두 가지 금액을 기입해야 한다면, 기업들이 어떻게 할지 상상할 수 있겠느냐? 당연히 가격이 내리지 않겠는가? 경쟁이 심해질 테니 공정거래를 부추기지 않겠는가? 너희는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 새로운 세계공용 보수체계하에서 채무와 채권의 이동은 즉석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완전히 투명할 것이다. 즉 누구든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언제라도 다른 사람이나 단체의 회계를 감사(監査)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도 비밀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며, 어떤 것도 사적이지 않게 될 것이다.

세계공용 보수체계는 그같은 공제를 자발적으로 요구하는 사람들의 수입에서 매년 전체 소득액의 10%를 공제할 것이다. 소득세나, 신고서류나, 공제 계산서나, “도피처만들기나, 애매하게 꾸미기 같은 건 일체 없다! 왜냐하면 모든 내역들이 공개될 것이고,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누가 전체의 공동선을 위해 10%을 내놓는지, 그리고 누가 내놓지 않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자발적인 공제금은 국민들이 투표로 결정한 모든 정부 정책과 공공사업을 지원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그 체계 전체가 지극히 단순하고, 지극히 투명할 것이다.

 

세상은 절대 그런 일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너는 그 이유도 아느냐? 그 이유는 그런 체계에서는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을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왜 너희는 일을 그런 식으로 하고 싶어할까? 내가 그 까닭을 말해주지. 그것은 너희가 현재 유리함우세함최대한의 이용과 소위 적자생존에 근거하여 상호작용하는 사회제도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인의 생존과 만인의 평등한 이익과 만인을 위핸 행복한 삶의 제공이 너희 사회의 주요 목적과 목표가 될 때(진실로 계몽된 모든 사회들이 그러하듯이), 보안과 은밀한 거래와 탁자 밑 조작과 감출 수 있는 화폐에 대한 너희의 필요도 사라질 것이다.

너는 그런 제도를 시행하는 것이 정도가 덜한 불공정과 불평등은 말할 것도 없고, 좋았던 구식 부정부패들을 얼마나 많이 제거할지 실감할 수 있겠느냐?

여기서의 비결, 여기서의 슬로건은 투명성visibility이다.

 

우와, 굉장한 발상이군요. 굉장한 생각입니다. 화폐 운영의 완전무결한 투명성이라, 사실 저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계속해서 그것이 틀리는이유, 그것이 괜찮지않은 이유를 찾아내려고 애써봤지만, 하나도 찾을 수가 없군요.

 

물론 너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너는 아무것도 숨길 게 없으니. 하지만 그냥 끄트머리 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조치와 모든 구입, 모든 판매, 모든 거래, 모든 기업 행위와 판매가 책정과 임금 협상, 그 밖의 다른 모든 결정들을 점검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이 세상의 돈 많고 권력있는 자들이 어떻게 할지, 얼마나 비명을 지를지 상상이 가지 않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공정함을 양산하는 데 투명성보다 더 바른 것은 없다.

투명성이란 단지 진리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으니,

진리를 알라, 그러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정부와 기업과 권력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그 진리가, 그 명백하고도 단순한 진리가, 자신들이 고안해낸 정치 경제 사회 제도-그 제도가 어떤 것이든-의 토대가 되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계몽된 사회에는 비밀이란 게 없다. 그런 사회에서는 누구나 남들이 얼마나 가지고 있으며, 얼마나 벌고, 임금과 세금과 연금으로 얼마를 지불하는지, 다른 기업들이 어느 만큼 청구하고 사고 파는지, 얼마나 많은 양을 얼마 만큼의 이윤으로 그렇게 하는지, 모두 알고 있다. 그야말로 모든 것.

너는 왜 이것이 계몽된 사회에서만 가능한 줄 아느냐? 계몽된 사회들에서는 아무도 다른 누군가를 희생하여 뭔가를 얻거나 뭔가를 가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대단히 과격한 생활방식이군요.

 

그렇다. 미개 사회라면 그것이 과격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계몽된 사회라면 그것은 지극히 타당한 생활방식으로 보일 것이다.

 

저는 이 투명성이라는 개념에 마음이 끌리는데요. 이 개념을 화폐 영역 너머로까지 확장할 수 있습니까? 이 개념이 우리의 개인적 인간 관계들에서도 슬로건이 될 수 있을까요?

 

누구나 그렇게 되길 바랄 테지.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요.

 

대개는 그렇지 않다. 너희 행성에서는 아직도 그렇지 않다.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숨겨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왜죠? 그건 뭘 두고 하시는 이야기인가요?

 

개인 관계에서(그리고 사실 다른 모든 관계에서도) 그것은 상실한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을 잃거나 얻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관계당사자 모두가 모든 걸 다 아는 관계야말로 최상의 인간 관계이며, 당연히 최상의 남녀관계이다. 투명성이 슬로건일 뿐 아니라 유일한 단어이고, 그냥 어떤 비밀도 없는 이런 관계들에서는, 제지당하거나 가려지거나 채색되거나 숨겨지거나 기만당하는 일이 없다. 빠뜨리거나 말하지 않는 일도 없다. 어림짐작하거나 꾸미는 일도 없으며, 어느 누구도 어지럽게 춤추거나머리 속으로 계산하거나남을 눈부시게 하지않는다.

 

하지만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안다면-

 

잠깐만. 이건은 정신적 사생활을 전혀 갖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사적인 과정을 밟아갈 안전한 공간을 전혀 갖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이것은 단지 너희가 다른 사람과 교제할 때는 마음을 열고 솔직해지고, 말할 때는 진리를 말하며,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걸 알 때는 결코 진실을 유보하지 말라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두 번 다시 거짓말하거나, 감추거나, 말이나 마음으로 조작하거나, 너희의 진실을 비틀어 대다수 인간 교류의 특징인 또 다른 수많은 뒤틀림으로 만들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실토하고, 있는 그대로 말하며, 그들에게 에누리 없이 주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개인들이 모든 자료를 갖도록 보장해주고, 그들이 어떤 주제에 관해서 알아야할 모든 것을 알도록 보장해주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공평함과 공개성과, 그리고 말하자면....... 투명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단편적인 생각들과, 모든 사적인 두려움들, 모든 어두운 기억들, 모든 스쳐가는 판단이나 견해나 반응들까지 토론과 검토 대상으로 탁자 위로 올라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건 투명성이 아니다. 이렇게 하는 건 정신 이상이다. 이렇게 하는 건 너희를 미치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건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직선적이고, 공개적이고, 솔직하고, 완벽한 교류이다. 그럼에도 그런 수준에서조차 이것은 주목할 만한 개념이고 거의 시도된 적이 없는 개념이다.

 

그 부분을 다시 한번 말씀해주십시오.

 

그럼에도 그런 수준에서조차 이것은 주목할 만한 개념이고, 거의 시도된 적이 없는 개념이다.

 

당신이 버라이어티쇼에 나가셨어야 했는데.

 

농담하는 것이냐? 나는 거기에 있다.

 

그런데 진지하게 말하면, 이건 굉장한 발상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회 전체가 투명성의 원칙을 중심으로 세워지는 겁니다. 당신은 그것이 잘 되리라고 확신하십니까?

 

내가 말하노니, 세상 질병의 반이 내일이면 사라질 것이다. 세상 근심의 반과 세상 갈등의 반과 세상 분노의 반과, 세상 좌절의 반이.......

아 참, 처음에는 분노와 좌절이 찾아올 것이다. 이건 확실하다. 얼마나 자주 보통사람들이 깽깽이 바이올린처럼 놀림감이 되고, 처분할 수 있는 상품처럼 이용되고, 조작당하고, 거짓말에 속고, 철저하게 사기당해왔는지 마침내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좌절과 분노가 일어날 것이기에.

하지만 투명성60일 안에 그 대부분을 청소할 것이다. 깨끗이 없앨 것이다.

다시 한번 너를 초대하노니, 다음 것들을 그냥 한번 생각해보라.

네 생각엔 너희가 이런 식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더 이상 어떤 비밀도 없고 완전무결한 투명함만이 존재하는 삶을?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왜 할 수 없는가?

너희가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감추는 것은 대관절 어떤 것이고,

너희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사실이 아닌 것은 대관절 어떤 것이며,

너희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사실인 것은 대관절 어떤 것이냐?

생략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저지른 그런 거짓말들이 너희 세상을 너희가 진실로 원하는 곳으로 만들었느냐? 침묵과 비밀 유지로 이루어지는 조작(시장이나 특정 상황이나 혹은 단순히 어떤 개인에 대한 조작)이 진실로 우리를 이롭게 해주었느냐? “프라이버시라는 게 과연 우리 정부와 기업과 개인들의 삶이 잘 되도록 해주었느냐?

만일 모두가 뭐든지 다 알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이어나겠느냐?

이제 여기에 하나의 역설이 있다. 너는 이것이 너희가 신과의 첫 번째 만남을 두려워하는 것과 똑같다는 걸 모르겠느냐? 너는 너희가 재즈 연주가 끝나고, 게임이 끝나고, 탭댄스가 끝나고, 새도우 복싱이 끝나고, 크고 작은 기만들의 길고 긴 자취가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는 걸 지금껏 두려워해왔다는 걸 정말 모르겠느냐?

하지만 좋은 소식은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고, 겁먹을 까닭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무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너희를 틀렸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너희를 영원히 타오르는 지옥불에 던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로마가톨릭 교도라 해도-아니다. 너희는 연옥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몰몬교도라 해도-아니다, 너희는 가장 높은 하늘에 닿을 수 없는 가장 낮은 하늘에 영원히 갇혀 있지 않을 것이다. 파멸의 자식으로 낙인찍혀 미지의 계()로 영원히 추방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 그만해도 알아들을 것이다. 너희 각자는 나름의 특정한 신학 틀 내에서 신이 주는 최악의 벌이라는 어떤 관념, 개념들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이런 말을 너희에게 하기는 싫지만-왜냐하면 너희가 그 모든 드라마들을 즐긴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럼에도 말하노니....... 그냥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너희는 죽는 순간 너희의 삶이 완전히 투명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때라야, 비로소 삶을 사는 동안에도 그것이 완전히 투명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있지. 그래도 그렇게 하진 않겠지? 그래서 너희가 출발하도록 도와주는 공식이 여기에 있다. 이 책의 맨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진리를 말하는 다섯단계를 다시 음미해보라. 날마다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말하며, 진리에 따라 살아라. 너 자신과 네가 그 삶에 접촉하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이렇게 하라.

그런 다음 벗을 준비를 하라. 투명성을 맞을 준비를 하라.

 

겁나는군요. 정말 겁납니다.

 


'영성수행 비전 > 신과 나눈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과 나눈 이야기 2 (8)  (0) 2018.02.07
신과 나눈 이야기 2 (7)  (0) 2018.02.07
신과 나눈 이야기 2 (5)  (0) 2018.02.07
신과 나눈 이야기 2 (4)  (0) 2018.02.07
신과 나눈 이야기 2 (3)  (0) 2018.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