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2 (3) 본문
당신은 우리가 선택을 통해서 당신에게 오길 바라기 때문이지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당신에게 가는 게 아니라요. 당신은 천국과 지옥을 세워 선택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그냥 한 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요.
너희가 어떻게 이런 관념에 이르렀는지 알겠다. 이건 바로 내가 너희 세계 속에 설정한 방식이다. 그래서 너희는 내 세계도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너희 현실에서는 ‘좋은 것’이 ‘나쁜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너희는 내 현실도 똑같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있는 곳에는 어떤 “나쁜” 것도, 어떤 ‘악’도 없다. ‘모든 것인 전체’, ‘하나’가 있을 뿐이고, 이에 대한 ‘깨달음’, ‘체험’만이 있을 뿐이다.
내 세계는 ‘절대계’이다. 그곳에서는 ‘하나’가 ‘다른 하나’와의 관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하지 않고 존재한다.
내 세계는 ‘존재 전체’가 ‘사랑’인 곳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상에서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한 것에 대한 귀결consequence은 전혀 없는 겁니까?
아하, 그래도 귀결은 있다. 네 주위를 둘러봐라.
제 말은, 죽은 다음에요.
“죽음”이란 건 없다. 삶은 영원히 영원히 계속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너희는 단지 형태를 바꿀 뿐이다.
좋습니다. 당신 표현대로, 우리가 “형태를 바꾼” 다음에요.
너희가 형태를 바꾸고 나면 귀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앎’만이 있을 뿐이다.
귀결이란 상대성의 요소여서, 일직선의 “시간”과 연속되는 사건들에 좌우되기 때문에, ‘절대성’ 속에는 있을 곳이 없다. ‘절대계’에는 귀결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 영역에는 평온과 기쁨과 사랑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 영역에서 너희는 마침내 ‘좋은 소식’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의 “악마”는 존재하지 않으며, 너희는 언제나 자신이 그럴 거라고 생각해왔던 존재, 선과 사랑임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는 너희의 관념은 광기(狂氣)의 외부세계, 심판과 비난의 외부세계에서 온 것이어서, 너희가 광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그 세계에서 남들은 너희를 심판했고, 그들의 판단에 따라 너희는 자신을 심판했다.
이제 너희는 신이 너희를 심판하길 원하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는 신이란 걸 이해하지 못하는 너희는 길을 잃고 헤맨다.
너희의 신학은 너희 자신을 다시 찾으려는 너희식 시도이다.
당신은 우리 신학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시는군요. 하지만 ‘보상’과 ‘처벌’ 체계 없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신학이 과연 있을까요?
그건 오로지 너희가 삶의 목적을, 따라서 신학의 기초를 무엇으로 인식하는가에 달려 있다.
삶이란 걸 하나의 시험, 시련, 너희가 “가치” 있는지 알아보고, 너희 역량을 시험하는 시기로 믿는다면, 그때부터 너희 신학은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삶이란 걸 하나의 기회, 너희가 가치 있음을(그리고 항상 그래왔음을) 발견하는, 즉 기억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믿는다면, 그때부터 너희 신학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것이다.
너희가 주목과 숭배와 감사와 애정을 요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죽이기도 하는, 자기애로 가득찬 신을 믿는다면, 그때부터 너희 신학들은 함께 합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너희가 자기애나 욕구가 없는 신, 단지 모든 것의 원천이고 모든 지혜와 사랑의 토대인 신을 믿는다면, 그때부터 너희 신학은 산산히 흩어진다.
너희가 자신의 사랑으로 질투하고, 자신의 분노로 격노하는 복수심 많은 신을 신이라고 믿는다면, 그때부터 너희 신학은 완벽해진다.
하지만 너희가 그녀 자신의 사랑 속에서 기뻐하고, 그녀 자신의 법열(法悅)로 열광하는, 온화한 신을 신이라고 믿는다면, 그때부터 너희 신학은 쓸모없어진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삶의 목적은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목적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너희는 신을 기쁘게 하며, 또한 그녀를 영광스럽게 한다.
왜 자꾸 “그녀”라고 말씀하시니까? 당신은 여자입니까?
나는 “그”도 “그녀”도 아니다. 내가 종종 여성대명사를 사용하는 건 편협한 너희 사고방식에서 너희를 뒤흔들어 떼어내고자 함이다.
신을 한 가지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너희는 다른 건 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면, 그건 크나큰 잘못이 되리니.
히틀러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천국에 갔다.
지옥은 없다. 따라서 천국말고 그가 갈 수 있는 다른 곳은 없다.
그의 행동들은 너희가 잘못mistake이라고 할 만한 것들, 즉 진화되지 않은 존재의 행동들이다. 그러나 잘못을 유죄 판결로 벌줄 수는 없다. 그것은 교정할 기회, 진화할 기회를 제시하는 것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히틀러로 인해 죽은 사람들에게 히틀러가 저지른 잘못이 어떤 해악이나 손상을 입힌 건 아니다. 그 영혼들은 번데기에서 부화하는 나비처럼 지상의 속박에서 풀려났다.
뒤에 남은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건 단지 그 영혼들이 들어선 기쁨의 상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죽음을 체험해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죽음은 시기상조였으며, 따라서 어느 정도 “잘못되었다”는 너희 주장에는, 예정되지 않은 때에 이 우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한다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 우주에서는 모든 일이 완벽하다. 신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한번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다.
너희가 모든 것에서, 너희가 동의하는 것들만이 아니라, (아마도 특히나) 너희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에서까지 완전한 완벽성을 볼 때, 너희는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물론 저는 이 모든 걸 알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1권에서 계속 다뤘던 문제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1권을 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 책 앞부분에서 미리 이해의 토대를 닦아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앞서의 질의응답들을 끌어들였던 건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앞으로 나가기 전에, 우리 인간존재들이 창조한 그 복잡미묘한 신학들에 대해 그냥 조금만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예컨대 저는 어렸을 때 제가 죄인이라고 배웠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고, 그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는 없으며, 우리는 그런 식으로 태어났다고요. 우리는 죄를 지고 태어났다고 말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개념이구나.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네게 그 사실을 믿게 했는가?
그 사람들은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했지요. 그들은 4등급, 5등급, 6등급의 교리문답에서, 물론 우리 자신은 아무 죄를 짓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실 아기들은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었고, 우리는 그들의 후손이기에 그들의 죄 많은 천성만이 아니라 그들의 죄까지 물려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아담과 이브는 금지된 열매를 먹고 ‘선과 악의 지식’을 함께 했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자식들과 후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에게서 떼어질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영혼에 이 “원죄”를 지닌 채 세상에 태어납니다. 우리 모두가 그 죄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제 추측이지만, 우리에게 ‘자유선택권’이 주어진 건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담과 이브와 같은 짓을 저지르고 신의 뜻을 어길 것인지, 아니며 “나쁜 짓을 하려는” 우리의 타고난 천성을 극복하여 세상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옳은 일을 할지를 결정하는 ‘자유선택권’요.
그래서 너희가 “나쁜” 짓을 하면?
그러면 당신은 우리를 지옥에 보냅니다.
내가 그런다고?
예.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요.
알겠다.
만일 우리가 잘못했다고 하면, ‘완벽하게 회개하는 행동’을 하면, 당신은 우리를 모든 고통까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지옥’에서는 구해줍니다. 그래도 우리는 얼마 동안은 ‘연옥’에 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죄를 말끔히 씻어내기 위해서요.
“연옥”에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러야 하느냐?
경우에 따라 다르죠. 우리는 우리 죄들을 태워 없애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게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란 겁니다. 우리가 짊어진 죄가 많을수록 그것들을 태워 없애는 데 더 긴 시간이 들테니, 그만큼 우리는 더 오래 거기에 머물겠죠. 이런 게 제가 들은 내용입니다.
이해가 간다.
하지만 우린 적어도 지옥에는 안 갈 겁니다. 지옥에는 한번 가면 영원히 있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 죽는다면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겠지만요.
용서받지 못할 죄?
용서받을 수 있는 가벼운 죄에 반대되는 거죠. 우리가 우리 영혼에 가벼운 죄들만을 낙인찍고 죽는다면, 우리는 ‘연옥’가지만 가죠. 하지만 무거운 죄를 지으면 곧장 지옥으로 보내지고 맙니다.
내게 지금 이야기한 여러 가지 범주의 죄들을 예로 들어줄 수 있겠느냐?
그럼요. 용서받지 못할 죄는 중대한 죄입니다. ‘대죄(大罪)들’ 이지요. ‘신학상의 중범죄’들 말입니다. 살인, 강간, 강도 같은 것들이지요.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다소 가벼운 죄들입니다. ‘신학상의 경범죄’들인 셈이지요. ‘일요일’에 교회에 빠진다든지 하는 게 용서받을 수 있는 죄입니다. 또 예전에는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것도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잠깐만! 너희의 이 신은 금요일에 고기를 먹으면 너희를 ‘연옥’으로 보내느냐?
예.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60년대 초 이후로는 아니지요. 하지만 60년대 초 이전의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화가 미칠 겁니다.
정말이냐?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60년대 초에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이 “죄”가 더 이상 죄가 아니게 되었느냐?
교황이 그건 더 이상 죄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알겠다. 그러니까 너희의 이 신은 자신을 숭배하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라고 너희에게 강요한단 말이지? 징벌의 고통을 가지고?
예, 미사에 참석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그리고 고해하지 않으면, 자신의 영혼에 그 죄를 그대로 낙인찍은 채 죽으면, 그때도 연옥에 가게 됩니다.
하지만-어린애라면? 신의 사랑이 베풀어지는 이 모든“규칙들”을 모르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라면 어떻게 하느냐?
음, 만일 아이가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기 전에 죽는다면, 그 아이는 ‘고성소’Limbo(‘변방’이라는 뜻-옮긴이)로 가게 됩니다.
어디로 가게 된다고?
고성소(古聖所)요. 그곳은 벌받는 곳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천국도 아닙니다. 그곳은....... 말하자면....... 그냥 변방입니다. 신과 함께 있을 수는 없지만 그렇더라도 적어도 “악마에게 가야” 하는 건 아니란 뜻입니다.
하지만 왜 그 예쁘고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신과 함께 있을 수 없느냐? 아이들은 아무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그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잘못이 없고 무구한 아기라 해도, 아니 그 문제에서는 어느 누구라 해도 천국에 가려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태어나면 곧바로 잽싸게 세례를 받게 하는 게 중요하지요.
누가 네게 이런 이야기들을 해주었느냐?
신이요. 자신의 교회를 통해서요.
어떤 교회?
물론 ‘신성로마 가톨릭교회’지요. 이것이야말로 신의 교회입니다. 사실 가톨릭 신자인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다른 종교의 교회에 참석하더라도, 그것은 죄이지요.
교회에 가지 않는 게 죄라더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교회에 가는 것도 죄입니다.
“잘못된”교회라는 게 뭐냐?
‘로마가톨릭’이 아닌 모든 교회요. 잘못된 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아도 안되고, 잘못된 교회에서는 결혼식을 올려도 안됩니다. 그리고 잘못된 교회 행사에 참석해서도 안됩니다. 제가 이 사실을 안 건, 젊었을 때 부모님과 함께 친구 결혼식에 가려 했을 때입니다. 사실 저는 그 결혼식에서 신랑 들러리를 서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녀들이 제게 말하길, 그 결혼식은 잘못된 교회에서 치루는 것이니 그 초대를 받아들여선 안된다고 하더군요.
너는 그들 말대로 따랐느냐?
수녀들요? 아뇨. 저는 하느님 당신이 우리 교회에 나타나시는 것과 똑같이 다른 교회에도 기꺼이 나타나시리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갔지요. 저는 턱시도를 입고 그 성역에 당당히 서 있었습니다. 아주 기분이 좋았지요.
잘했다. 자, 이제 한번 보자. 우리에게는 천국과 지옥과 연옥과 고성소와 용서받지 못할 죄와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있구나. 이것말고 또 다른 게 있느냐?
그러니까 견진성사가 있고, 성찬식이 있고, 고해가 있습니다. 또 구마식(驅麻式)이 있고, ‘종부성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하라-
-‘수호성인’(聖人)과 성스러운 ‘금욕주간’Holy Days of Obligation이 있습니다-
모든 날이 다 축복받았고, 시시각각이 다 성스럽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스러운 순간’이다.
그렇긴 합니다만, ‘금욕주간’ 같은 날들은 진짜 성스러운 날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날에도 교회를 가야 합니다.
여기서 또 다시 그 “해야 한다”를 만나는군. 그런데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건 죄죠.
그래서 너희는 지옥에 가는군.
아니요, 만일 그 죄를 그대로 영혼에 지닌 채 죽게 되면 우리는 ‘연옥’에 갑니다. ‘고해’를 하러 가는 게 좋은 이유가 이겁니다. 정말로 가능한 한 자주요. 주일마다 가는 사람들도 있고, 날마다 가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런 식으로 하면 과거를 청산할 수 있거든요. 어쩌다 갑자기 죽는 일이 있어도 깨끗한 상태를 지닐 수 있게.......
우와-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는 이야기군.
그렇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신에 대한 두려움을 우리에게 심어주는 것, 그게 종교의 목적입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옳은 일을 하고 유혹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흠, 그런데 가령 너희가 고해 사이에 “죄”를 지었는데, 사고 같은 걸 당해서 죽게 되면?
그건 괜찮습니다. 전혀 겁날 게 없습니다. 그냥 ‘완벽한 회개법’을 만드는 겁니다. “천주여, 나는 많은 죄를 지었나이다....... 그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하심을 비나이다.......”
알았다, 알았다-그만하면 됐다.
그런데 잠깐만요. 이건 그냥 세상 종교들 중 단 하나일 뿐입니다. 당신은 다른 종교들은 살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니, 나는 감을 잡았다.
사람들이 제가 자기네 신앙을 조롱하기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길 바랍니다.
너는 실제로 누구도 조롱하지 않고 있다. 그냥 현실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지. 너희 미국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그런 식으로 말했지. 사람들이 “해리! 그들을 지옥에 보내줘!” Give them hell(‘혼내줘’라는 뜻-옮긴이)하고 외치면, 그는 “나는 그들을 지옥에 보내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인용할 뿐입니다. 그러면 지옥처럼 느껴지죠.”라고 말하곤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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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완전히 옆길로 새버렸군요. 시간에서 출발해서 조직된 종교 이야기로 끝을 맺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군. 하지만 신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본디 그렇다. 대화를 한정짓기가 힘들지.
3장에서 당신이 이야기한 논지들을 제가 요약할 수 있을지 한번 보겠습니다.
*이 시간말고는 어떤 시간도 없고, 이 순간말고는 어떤 순간도 없다.
*시간은 연속체가 아니다. 그것은 “오르락 내리락”하는 틀, 서로 위 아래로 포개진 채 동“시”에 일어나거나 발생하는 “순간들”이나 “사건들”을 지닌 틀 속에 존재하는 ‘상대성’의 한 측면이다.
*우리는 주로 잠자면서 시간-무(無)시간-전(全)시간의 이 영역 속에 있는 현실들 사이를 끊임없이 여행한다. “기시감”은 우리가 이걸 알아차리는 한가지 방식이다.
*지금껏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은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영혼의 “나이”라는 개념은, 사실은 “시간” 길이가 아니라 자각 수준과 관계가 있다.
*어떤 죄악도 없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틀렸다”는 건 상대 체험에 근거하여 정신이 설정한 개념이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우리는 규칙들을 만들어낸다. 그것들을 우리의 ‘지금 현실’에 맞도록 바꿔가면서.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진화하는 존재가 되려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래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히틀러는 천국으로 갔다(!)
*일어나는 모든 일, 모든 것이 신의 의지이다. 그 안에는 태풍과 회오리바람과 지진들만이 아니라, 히틀러도 들어간다. 깨달음의 비밀은 모든 사건들 뒤에 있는 목적을 아는 것이다.
*죽고 난 후의 “처벌” 같은 건 없다. 귀결이란 건 ‘절대계’가 아닌 ‘상대 체험’에서만 존재한다.
*인간의 신학은 존재하지도 않는 광기의 신을 설명하려는 인류의 제정신이 아닌 시도이다.
*인간의 신학이 의미 있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과연 아무 의미도 없는 신을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
어떻습니까? 달리 요약하실 게 있으십니까?
아주 훌륭하다.
됐습니다. 제게는 지금 산더미처럼 많은 질문거리들이 있으니까요. 예컨대 10번째와 11번째 진술은 좀 더 확실하게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히틀러는 왜 천국에 갔습니까? (당신이 앞에서 이 점을 설명하려 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저는 좀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건들 뒤에 있는 목적이란 게 무엇입니까? 또 이 ‘더 위대한 목적’이 히틀러나 다른 독재자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겁니까?
먼저 ‘목적’으로 가보자.
모든 사건, 모든 체험들의 목적은 기회를 창조하는 데 있다. 사건과 체험들은 ‘기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들을 “악마의 작품”이니, “신이 내린 벌”이니, “하늘이 주신 상”이니, 혹은 그 중간의 어떤 것으로 판단하는 건 잘못이다. 그것들은 단순히 ‘사건들’이고 ‘체험들’이며, 벌어진 일들일 뿐이다.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건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고, 반응한다는 뜻이다.
사건과 체험들은 너 개인이나 너희 집단이 의식을 매개로 하여 너희에게로 끌어온 기회들이다. 체험을 창조하는 것이 의식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가 지금 보여주는 것보다 더 높은 의식을 가진 존재이니, 너희는 의식을 끌어올리면서, ‘자신’을 창조하고 체험하는 도구로 쓰려고 이런 기회들을 자신에게로 끌어온다.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내 의지이기에, 나는 너희가 그것을 위해 창조하려는 사건이나 체험이면 무엇이든 너희에게로 끌어가게 해준다.
이 ‘우주 게임’에는 다른 배우들도 수시로 너희에게 가담한다. 그 배역이 ‘짧은 만남’이든, ‘주변인물’이든, ‘한때의 팀원’이든, ‘오랜 동안의 상호작용자’이든, ‘친척과 가족’이든, ‘몹시 사랑하는 사람’이든, ‘인생길의 동반자’이든.
영혼들을 너희에게 끌어오는 건 너희 자신이고, 너희를 그들에게 끌어가는 건 그들 자신이다. 그것은 양쪽의 선택과 바램들을 함께 표현하면서 공동으로 창조하는 체험이다.
누군가가 우연히 너희에게 오는 일은 없으며,
우연의 일치 따위는 절대 없다.
어떤 일도 마구잡이로 일어나지 않으니,
삶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너희는 너희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끌어오듯이, 사건들도 끌어온다. 행성 차원에서의 대규모 체험과 발전들은 집단의식의 결과이다. 그것들은 전체로서 집단group이 선택하고 바란 결과가 전체로서 너희 집단에게 끌어온 것들이다.
“너희 집단”이란 게 무슨 뜻입니까?
집단의식Group consciousness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엄청나게 강력하여, 자칫하면 자주 개인의식을 압도하고 만다. 따라서 이 행성에서 겪는 너희의 사회적 인생 체험이 조화롭기를 바란다면, 너희는 어디를 가든, 어떤 일을 하든, 언제나 집단의식을 창조하려고 애써야 한다.
만일 네가 그 집단의식으로 너 자신의 의식을 반영하지 못하는 집단에 속해 있는데, 당분간은 그 집단의식을 효과적으로 바꿀 수 없다면, 그때는 그 집단을 떠나는 것이 현명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 집단이 너를 이끌어갈 것이다. 그 집단은 네가 원하는 곳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것이다.
만일 네 의식과 합치하는 의식을 가진 집단을 찾을 수 없다면, 그때는 스스로 한 집단의 발단이 되도록 하라. 비슷한 의식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네게로 끌려올 것이다.
너희 행성에 지속적이고 의미 있는 변화들이 일어나게 하려면, 개인과 소집단들이 대집단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마침내는 가장 큰 집단인 인류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한다.
너희 세상과 그것이 처한 상황은 거기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결합된 전체의식을 반영한다.
네 주위를 돌아보면 알겠지만 해야 할 일들이 무척 많다. 물론 지금 그대로의 세상에 네가 만족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너희 행성의 대다수 사람들이 지금 그대로의 세상에 만족하고 있으니, 세상이 바뀌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동등함보다는 차별이 대우받는 세상, 불일치가 갈등과 전쟁으로 해결되는 세상에 만족하고, 대다수 사람들이 가장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 세상, “힘이 정의인 세상”, 경쟁이 요구되는 세상, 이기는 것을 최고선이라 부르는 세상에 만족하고 있다.
그 체제가 “패배자들”까지 함께 양산해낸다 해도 하는 수 없다. 너희 자신이 그 패배자들 속에 끼이지 않는 한.
설령 그 모형model이, “나쁘다”는 판결을 받은 탓에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과, “패배자”인 탓에 굶주리고 집 없이 지내야 하는 사람들과, “강하지” 못한 탓에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양산해낸다 하더라도, 대다수 사람들은 지금대로의 세상에 만족하고 있다.
너희 행성의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건 “나쁘다”고 규정한다. 특히 종교의 차이는 용납되지 않으며, 사회, 경제, 문화의 허다한 차이들 역시 그러하다.
하층계급에 대한 착취는, 이런 착취를 받기 전에 그 희생자들이 처했던 상태에 비하면, 지금 그들이 얼마나 더 잘 살게 되었는가라는 상층계급의 자화자찬식 선언으로 정당화되니, 이렇게 해서 상층계급은, 한 사람을 진실로 공평하게 만드는 문제는 단순히 끔직한 상황을 쥐꼬리만큼 더 낫게 만들고, 그 거래에서 추잡한 이윤을 취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람들 전체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에 있음을 무시할 수 있다.
너희 행성의 대다수 사람들이 누군가가 현재 굴러가는 것과 다른 종류의 체제를 제안하기라도 하면, 그것을 비웃는다. 경쟁하고 죽이고 “승리자가 전리품을 갖는” 따위의 행위들이 자신들의 문명을 위대하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은 심지어 그 외에 다른 어떤 자연스런 길도 있을 수 없다고 여긴다. 즉, 이런 식으로 처신하는 건 인간의 천성이니, 다른 식으로 행동한다면 인간을 성공으로 몰아가는 내면의 힘을 죽이리라고 여기는 것이다. (아무도 “무엇에서 성공하려는지” 묻는 사람은 없다.)
진실로 계몽된 존재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너희 행성에 사는 대다수 사람들이 이런 철학을 믿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이 고통받는 대중과 소수에 대한 억압, 하층계급의 분노, 자신이나 자신의 직계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생존욕구에 무심하다.
대다수 사람들이 오직 자기 삶의 질을 높이는 데만 열중하고 있기에, 자신들이 지구를, 자신들에게 ‘생명’을 준 바로 그 행성을 파괴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놀랍게도 그들은 단기간의 이익이 장기간의 손실을 만들어낼 수 있고, 실상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란 사실을 관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멀리 보지 못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공동선(公同善)이라든가, 세계 일국주의라든가, 모든 창조물과의 분리가 아니라 그것과의 통일로서 존재하는 신이라든가 하는 개념을 가진 집단의식을 두려워한다.
통일로 끌어가는 모든 것에 대한 이같은 공포와 ‘분리시키는 모든 것’에 대한 너희 행성의 예찬이 바로 분열과 부조화와 불일치를 만들어내는 원인이다. 그럼에도 너희는 자신의 체험에서 배울 능력조차 없는 듯, 그런 행동들을 계속함으로써 계속 같은 결과들을 빚어낸다.
고통이 계속 용납되는 건 너희가 남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리는 무관심과 그릇된 우월감을 기르지만, 통일은 자비와 참된 평등을 낳기 마련이니.
너희 행성에서 일어나고 있고, 지난 3,000년 동안 반복해서 일어났던 사건들은 내가 앞서 말했듯이, “너희 집단”, 너희 행성의 전제 집단이 지닌 ‘집단의식’의 반영이다.
그것의 의식 수준은 미개하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흐으음.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본래 질문에서 뒷걸음질친 것 같은데요.
전혀 그렇지 않다. 너는 히틀러에 대해서 물었다. 너희가 ‘히틀러 체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집단의식 덕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히틀러가 한 집단-이 경우에는 그의 국민들-을 조종했던 건, 그 교활하면서도 능수능란한 수사(修辭) 덕분이었노라고 말하고 싶어하지만, 이것은 편리하게도 그 모든 비난을 히틀러의 발 밑에만 던지는 격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원하는 바로 그 위치에.
하지만 몇백만명의 협력과 지지와 자발적인 복종이 없었더라면, 히틀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게르만인이라고 부르는 그 2차 집단은 당연히 유태인 대학살에 대해 엄청난 무게의 책임을 느껴야 한다. 마찬가지로 소위 인류라는 더 큰 집단 역시 어느 정도 그렇게 해야 한다. 설령 그들이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쳐도, 그들은 가장 차가운 마음을 가진 고립주의자들조차 더 이상 무시해버릴 수 없을 만큼 독일에서의 고통이 광범하게 확산될 때까지도, 그것을 무심하고 냉담하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너희도 알다시피, 나찌운동 성장에 비옥한 토양이 되었던 건 패거리 의식collective consciousness 이다. 히틀러는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이지, 그가 그 순간을 창조한 건 아니다.
이것의 교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속해서 분리와 우월성에 대해 떠들어대는 집단의식은 대중이 동정을 잃게 만드니, 동정을 잃게 되면 그 다음엔 당연히 양심을 잃기 마련이다.
완고한 민족주의에 뿌리를 둔 패거리 개념은 남들의 곤경은 무시하면서도, 자기네 곤경에 대해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책임지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복수와 “교정”과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나찌식 해결책, 즉 그것을 “교정하려는” 시도였다.
‘히틀러 체험’이 끔찍함은 그가 인류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류가 그에게 그렇게 하도록 용납했다는 사실에 있고,
그 체험의 경악스러움은 히틀러가 나섰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섰다는 사실에도 있으며,
그 체험의 부끄러움은 히틀러가 몇백만의 유태인들을 죽였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히틀러가 제지당하기 전에 몇백만이 유태인들이 죽어야 했다는 사실에도 있다.
그리하여 ‘히틀러 체험’의 목적은 인류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역사를 통틀어 주목할 만한 선생들을 모셔왔으니, 그들 모두는 ‘참된 자신’을 기억하게 해주는 특별한 기회들을 너희에게 제공했다. 이 선생들은 너희에게 인간 잠재력의 최고치와 최저치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생생하고 숨막히는 예들을 통해, 인간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일 수 있는지, 그런 체험을 겪으면서 인간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기존의식 상태대로라면 너희 중 다수가 갈 수 있고 가게 될 곳이 어디인지 보여주었다.
잊지 마라, 의식만이 전부이고, 너희의 체험을 창조하는 건 의식이다. 집단의식은 워낙 강력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결과를 빚을 수도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추한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 선택은 언제나 너희 것이다.
만일 네가 너희 집단의 의식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바꾸려고 노력하라.
남들의 의식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너 자신이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만일 네 본보기로 충분하지 않다면 너 자신의 집단을 형성하라. 너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체험하기를 원하는 의식의 발단이 되어라. 네가 그렇게 할 때 그들은 그런 의식을 체험하리니.
그것은 너와 더불어 시작된다. ‘모든 것’이, ‘모든 일’이.
너는 세상을 바꾸길 원하느냐? 그렇다면 먼저 너 자신의 세계 속에 있는 것들을 바꾸어라.
히틀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금쪽 같은 기회를 너희에게 주었다. ‘히틀러 체험’은 ‘그리스도 체험’처럼, 그것이 너희 자신에 대해 어떤 의미와 진리를 너희에게 드러내는가라는 면에서 심오하다. 하지만 히틀러든, 징기스칸이라든, 하레 크리슈나든, 아틸라 훈(5세기 훈족의 왕-옮긴이)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든, 이같은 사회적 자각은 그들에 대한 너희의 기억이 살아 있을 때만 살아 있을 것이다.
유태인들이 대학살 기념비를 세우고 너희에게 그것을 절대 잊지 말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희들 누구에게나 히틀러가 약간씩은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오직 정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유슈비츠에서든 운디드 니(미국 인디언 대학살이 자행된 곳-옮긴이)에서든, 한 민족을 지워버리는 것은 한 사람을 지워버리는 것이다Wiping out a people is wiping out a people.
그래서 히틀러를 우리에게 보내신 겁니까? 우리에게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끔찍함,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최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교훈을 주시려고요?
내가 히틀러를 너희에게 보낸 것이 아니다. 히틀러는 너희가 창조했다. 그는 너희의 ‘패거리 의식’ 속에서 나타났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 체험의 교훈이다.
‘히틀러 체험’을 창조한 것은 “우리” 대 “그들”, “우리” 와 “그들”이라는 분리와 차별과 우월의식이다.
‘그리스도 체험’을 창조한 것은 “네 것”/“내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라는 ‘신성한 형제애’와 통일과 ‘하나됨’의 의식이다.
고통이 “너희 것”일 뿐 아니라 “우리 것”이기도 할 때, 기쁨이 “내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것”이기도 할 때, 그리하여 삶의 체험 전체가 ‘우리 것’이 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삶의 체험 전체the whole는 진실로 말 그대로 온전한a whole ‘삶의 체험’이 된다.
왜 히틀러는 천국에 갔습니까?
히틀러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그냥 그가 했던 일을 했을 뿐이다. 꽤 여러 해 동안 몇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가 “옳다”고 생각했다는 걸 다시 상기해보라. 그러할 때 어찌 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네가 미친 사상을 퍼뜨렸는데, 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네게 동조했다고 치자. 그러면 너는 자신이 그렇게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마침내 히틀러가 “잘못했다”고 결정했다.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은 ‘히틀러 체험’과 관련해서 ‘자신들이 누구이고’, ‘자신들이 어떤 존재가 되려는지’에 대해 새로운 평가를 내린 것이다.
기준자를 치켜든 건 그였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자아상을 재고 한정할 수 있도록 매개변수, 경계선을 설정했다. 그리스도 역시 같은 일을 했다. 그 스펙트럼의 다른 쪽 끝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 있었고, 또 다른 히틀러들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또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항상 경계하라. 네가 사람들 사이를 걸어다닐 때조차도 높은 의식을 가진 사람과 낮은 의식을 가진 사람, 양쪽 다가 너희 사이를 걷고 있으니. 자, 너는 어떤 의식과 사귀려느냐?
저는 아직도 어떻게 히틀러가 천국에 갈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자신이 한 일로 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첫째,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이해하고, 공포가 아니라 기쁨임을 이해하라. 그것은 막 내림이 아니라 막 올림이다.
너희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삶이 끝나는 순간일 것이다.
그것은 삶이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되기 때문이다. 너무나 장대하고, 평화와 지혜와 기쁨이 너무나 가득하여, 설명하기 어렵고 너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그러므로 너희가 이해해야 할 첫 번째 것은, 내가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히틀러는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는 고통을 입힌 것이 아니라 고통을 끝냈다.
“인생은 고해다”고 말한 사람은 부처였다. 부처는 옳았다.
하지만 제가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해도, 히틀러는 자신이 실제로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나쁜 일을 한다고 여겼다구요!
아니다. 그는 자신이 “나쁜” 일을 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자기 국민들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다.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각자의 세상형에서 보면, “잘못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네가 히틀러는 미친 행동을 했고, 자신이 미쳤다는 걸 줄곧 알고 있었던 걸로 여긴다면, 너는 인간 체험이 얼마나 복잡한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히틀러는 자기 국민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국민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 사건의 광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나라 국민들 대다수가 그에게 동조했다는 데!
너희는 히틀러가 “잘못했다”고 선언했다. 좋다. 이렇게 해서 너희는 자신을 규정하게 되었고,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으니, 좋다. 하지만 너희에게 이런 것 보여주었다고 해서 히틀러를 비난하지는 마라.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이다.
너희는 뜨거움 없이 차가움을 알 수 없고, 아래 없이 위를 알 수 없으며, 오른쪽 없이 왼쪽을 알 수 없다. 이 사람은 비난하고 저 사람은 축복하지 마라. 그렇게 하는 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십세기 동안 사람들은 아담과 이브를 비난해왔다. 그들은 ‘원죄’ Original Sin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들어왔다. 하지만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것은 ‘원축복’Original Blessing이었다. 선악에 대한 지식을 함께 한 이 사건이 없었다면, 너희는 그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지 않았겠는가! 실제로 소위 ‘아담의 타락’ 이전에는 이 두 가지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악”도 없었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영원한 완벽의 상태로 존재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낙원이었다. 하지만 너희는 그것이 낙원임을 알지 못했고, 그것을 완벽으로 체험할 수 없었다. 그것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 이래도 너희는 아담과 이브를 비난하겠느냐? 아니면 그들에게 감사하겠느냐?
그리고 말해 보라, 히틀러를 내가 어찌 대해야 하겠느냐?
내가 이르노니, 신의 사랑과 신의 자비와 신의 지혜와 신의 용서와 신의 의도와 신의 목적은 가장 극악한 범죄와 가장 극악한 범죄자들까지 포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다.
네가 이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너는 이제 막 자신이 무엇을 찾으러 이곳에 왔는지 배웠다.
5
당신은 1권에서 2권에서는 시간과 공간, 사랑과 전쟁, 선과 악, 가장 뛰어난 세계 정치질서 같은 넓은 주제들에 대해 설명해주겠노라고 약속하셨지요. 또 인간의 성(性) 체험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겠노라고 하셨고요.
그렇다, 나는 그 모든 걸 약속했다.
1권에서는 주로 개인적인 관심거리들, 개인의 삶에 대해 다루어야 했다. 그리고 이 2권은 이 행성에서 너희 집단의 삶을 다루고, 3권은 가장 넓은 진리들인 영혼의 우주론, 영혼의 영상 전체, 영혼의 여행을 가지고 이 3부작을 끝맺는다. 이것들을 하나로 합친 것은, 너희 신발을 묶는 것에서 우주에 대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해 현 시점에서 내가 주는 최상의 충고와 정보들이다.
시간에 대해 말씀하시려던 건 다 하신 겁니까?
너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건 모두 말했다.
시간은 없다. 모든 것은 동시에 존재하며, 모든 사건은 동시에 일어난다.
이 책은 지금 쓰여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쓰여지고 있듯이 그것은 이미 쓰여졌다. 그것은 이미 존재한다. 사실 너희는 바로 여기에서, 즉 이미 존재하는 책에서 이 모든 정보를 얻고 있다. 너희는 단지 그것에 형태를 주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내가 대답해주리라”의 말뜻이다.
시간에 대한 이런 정보는........ 저, 굉장히 재미있긴 하지만, 다소 비전(秘典)적인 것 같습니다. 그것을 과연 실제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시간을 진실로 이해할 때, 너희는 상대계의 현실 속에서 훨씬 더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현실에서 시간은 불변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운동, 흐름으로 체험된다.
움직이는 쪽은 시간이 아니라 너희다. 시간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오직 ‘한순간’ 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너희 역시 이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진실로 장엄하거나 의미 있는 일이 너희 삶에서 일어날 때, 흔히 너희는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그리고 너희 또한 정지할 때, 너희는 자주 삶의 결정적인 순간들 중 하나를 체험한다.
저로서는 이걸 믿기가 어렵군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너희 과학이 이미 이것을 수학으로 밝혀냈다. 만일 너희가 우주선을 타고 아주 빠른 속도로 충분히 멀리까지 난다면, 너희는 지구를 향해 빙 돌아와 자신이 이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걸 밝혀주는 공식이 이미 세워진 바 있다.
이것은 시간이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너희가 이동해가는 어떤 장(場)-이 경우에는 지구 우주선을 타고-임을 증명한다.
너희는 일년이 되려면 365“일”이 걸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루”란 건 어떤 것이냐? 너희는 너희 우주선이 그 축을 중심으로 완전히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하루”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참으로 제멋대로 그렇게 규정했다는 사실도 덧붙여두자.
그런데 너희는 어떻게 해서 그것이 회전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너희는 그것이 움직이는 걸 느낄 수도 없다!) 너희는 하늘에서 태양이라는 하나의 준거점을 잡았다. 그러고 나서 너희는 그 우주선에서 자신이 있는 쪽이 태양을 마주보다가, 태양에서 벗어나 다시 태양을 마주보기까지 만 “하루”가 걸린다고 말한다.
너희는 이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었다. 다시 한번 참으로 제멋대로. 그냥 쉽게 “10”이나, 아니면 “73”으로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다음으로 너희는 각각의 “시간”을 “분”으로 나누었다. 너희는 각 시간 단위들을 소위 “분”이라는 60개의 소 단위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고 각각의 분들 역시 소위 “초”라고 하는 60개의 미세 단위들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느 날 너희는 지구가 돌 뿐만 아니라 날기도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너희는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돌면서 우주를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너희는 지구가 태양 둘레를 한바퀴 돌려면 365번의 자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계산해냈다. 너희가 일“년”이라 부르는 건 이 지구 회전 수자이다.
그런데 너희가 일“년”을 일“년”보다는 작고 “하루”보다는 큰 단위들로 나누려 하자, 일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너희는 “주”와 “월”을 만들어내, 모든 해가 똑같은 수의 달들을 갖도록 했다. 하지만 모든 달이 똑같은 수의 날들을 갖게 할 수는 없었다.
짝수인 달수(12)로 홀수인 날수(365)를 나눌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냥 몇몇 달들은 다른 달들보다 더 많은 날들을 갖는 걸로 해버렸다!
너희는 일년을 나누는 분모로 12라는 수를 고수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 수는 너희가 관찰한 바로는, 일“년” 동안의 ‘달의 공전’ 수자였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의 공간 사건들, 즉 지구의 공전과 자전, 달의 공전을 조화시키기 위해 너희가 한 일은, 단지 각 “달”에 들어가는 “날”수를 조정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 방안조차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너희의 이 초기 발명들은 너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 쌓기”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는 4년마다 한번씩 온하루를 더 가져야 하는 해들을 두기로 했다! 너희는 이것을 ‘튀는 해’Leap Year(윤년-옮긴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놓고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실제로는 너희가 살고 있는 틀 자체가 그런 식이다. 시간에 대한 내 설명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너희는 더 긴 “시간” 경과를 재기 위한 기준으로 “년대”와 “세기”(재미있는 건 이번에는 12단위가 아니라 10단위가 그 기준이라는 점이다.)도 창조해냈다. 이번에도 역시 제멋대로. 하지만 이 모든 것과 더불어 너희가 실제로 하는 일은 단지 공간을 통과하는 운동을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해내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보다시피, “지나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소위 우주라는 정지된 장(場) 속에서 빙빙 돌면서 장을 통과해가는 물체이다. 결국 “시간”이란 건 운동을 계산하는 너희 방식일뿐이다!
과학자들은 이 연관관계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서, “시공간 연속체”Space-Time Continuum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너희의 아인슈타인 박사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시간이 머리 속의 구조물, 상관성의 개념임을 깨달았다. “시간”은 물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과 관련된 것이었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면-사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지구가 태양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10억년 전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린다. 망라해야 할 “우주”가 더 커지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에 일어난 이 모든 공전 사건들은 1492년에 걸린 것보다 더 많은 분과 시와 날과 주와 달과 해와 년대와 세기들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하루”가 하루가 아닐 때는 언제이고, “일년”이 일년이 아닐 때는 언제인가?)
이제 고도로 견강부회된 너희의 새 시간도구가 이 “시간” 괴리를 기록함으로써, 해마다 전세계 시계들은 가만히 앉아 있지 않으려는 우주에 적응하기 위해 조정된다. 이것이 소위 그리니치 표준시Greenwich Mean Time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우주를 가지고 거짓말쟁이로 만들기 때문에 “비열하다”mean.
아인슈타인은, 움직이는 것이 시간이 아니라 일정한 가속도로 우주 속을 통과해가는 자신이라면, 시간을 “바꾸기” 위해서 그가 해야 할 일이란 오직 물체 사이의 공간량(量)을 바꾸는 것, 즉 자신이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 사이의 우주를 통과하는 속도의 비율만 바꾸면 된다는 사실을 이론화했다.
이것이 오늘날 시간과 공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너희의 이해를 넓혀준, 그의 ‘일반 상대성 이론’ 이다.
이제 너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공간 속을 지나는 긴 여행을 하고 돌아왔을 때, 지구 위에 사는 네 친구들은 30살을 더 먹겠지만, 왜 너는 겨우 10살밖에 더 안 먹게 되는지! 네가 멀리 갈수록, 시공간 연속체는 더 많이 휠 것이고, 네가 떠날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네가 돌아왔을 때도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발견할 기회는 줄어든다는 걸!
하지만 “미래”의 어느 땐가 지구에 사는 과학자들이 자신들을 더 빨리 추진해갈 방법을 발달시킨다면, 그들은 우주를 “속이고”, 지구에서의 “실제 시간”과 동시에 머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돌아왔을 때, 지구에서도 우주선에서 지나간 시간과 똑같은 시간만이 지나갔음을 발견할 것이다.
훨씬 더 빨리 추진해갈 수 있다면, 단언컨대 그는 이륙하기 전의 지구로 되돌아올 수 있다! 말하자면 지구에서의 시간이 우주선에서의 시간보다 더 느리게 가는 것이다. 너는 네 시간으로 십년만에 지구에 돌아왔는데, 지구는 그 동안에 겨우 4살밖에 “먹지” 않았다! 그보다 더 속도를 높이면 우주에서의 십년이 지구에서의 십분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주라는 천 속에 있는 “주름”을 만났다고 하자.(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그런 “주름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그들이 옳았다!) 너희는 갑자기 무한소(無限小)의 한 “순간”에 “공간”을 가로질러 추진된다. 그같은 시공간 형상은 글자 그대로 되돌아간 “시간” 속으로 너희를 “내동댕이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너희 머리 속에서 지어낸 것만 빼고,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일어난 모든 일과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그것을 관찰할 수 있는가 아닌가는 단지 너희의 관점, 즉 너희의 “공간 위치”에 달렸을 뿐이다.
만일 네가 내 위치에 있다면 너는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당장!
이해하겠느냐?
우와! 이제야 알아들을 것 같습니다. 이론 차원에서는요.
좋다. 나는 여기서 아이들도 알아들을 만큼 지극히 단순하게 설명했다. 내 설명이 훌륭한 과학을 만들지 못하겠지만, 훌륭한 이해를 낳을 순 있을 것이다.
바로 지금도 물질 대상들은 속도면에서 제한되어 있지만, 비(非)물질 대상들, 내 생각....... 내 영혼.......은 이론상으로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에테르 속을 지나갈 수 있겠군요.
맞다! 바로 그거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종종 꿈이라든가 육체를 떠난 심령 체험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제 너는 기시감을 이해하고 있다. 전에도 그곳에 있었던 것 같다는 사실을!
하지만.......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난 일이라면, 제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것은 운명 예정론인가요?
절대 아니다! 그런 회원권은 절대 구입하지 마라! 그건 사실이 아니다. 사실 이 “무대장치”는 너희를 도와주게 되어 있다. 너희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언제나 자유의지와 완전한 선택의 지점에 있다.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혹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해봐달라고 하는 것)은 원하는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너희의 능력을 제한하기는커녕, 오히려 높여준다.
어떻게요? 설명을 해주십시오.
만일 네 마음에 들지 않는 미래의 사건이나 체험을 “본다면”, 그것을 선택하지 마라! 다시 선택하라! 다른 걸 골라라!
원하지 않는 결말을 피할 수 있도록 네 행동을 바꾸거나 변경하라.
하지만 이미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네게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은! 너는 ‘시공간 연속체’ 속에서 그것의 발생을 의식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지점에 있다. 너는 그것이 “일어났음”을 “알지” 못한다. 너는 네 미래를 “기억해내지” 않았다.
(이 잊어버림이 모든 시간의 비밀이다. 그 덕분에 너희는 삶이라는 위대한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자.)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자신의 미래를 “기억하지” 못하기에, 그것은 “네게”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일은 그것이 “체험될” 때만 “일어나고”, 모든 일은 그것을 “알” 때만 “체험된다”.
이제 네 “미래”를 흘낏 일별하는, 한 찰라 “알게 되는” 축복을 받았다고 해보자. 그때 일어나는 일은 네 영혼, 즉 너의 비(非)물질 부분이 그냥 ‘시공간 연속체’ 위의 다른 지점으로 급히 달려가서 그 순간이나 그 사건의 일부 잉여 에너지, 일부 이미지나 인상을 가져오는 것이다.
너는 이것들을 “느낄” 수 있다. 아니면 때로는 형이상학적 재능을 발달시킨 다른 사람이 네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이런 이미지와 에너지들을 “느끼거나” “보기도” 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느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것에서 떨어져라! 그냥 그것에서 멀어져라! 그 순간 너는 자신의 체험을 바꾸게 되며, 네가 내쉬는 모든 숨은 구원의 한숨이 된다.
잠깐만요! 잠깐마 안 ㄴ-.
자, 이제 너는 들을 준비가 되었으니, 자신이 ‘시공간 연속체’의 모든 수준level에서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너희 영혼은 ‘항상 존재했고’, ‘항상 존재하며’, ‘앞으로도 항상 존재할지니’. 끝없이 그러할지니, 아멘.
제가 하나 이상의 장소에 “존재”한다구요?
물론이다! 너는 모든 곳에, 그리고 항상 존재한다.
미래에도 “제”가 있고, 과거에도 “제”가 있습니까?
자, 우리가 이제 막 힘들여 이해했듯이, “미래”와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들을 너희가 지금껏 써왔던 식으로 쓰면, 그렇다.
하나 이상의 제가 있습니까?
너는 단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존재다.
그래서 “지금” 존재하는 “제”가, 그의his “미래”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걸 바꾼다면, 미래 속에 존재하는 저는 그걸 더 이상 자기 체험의 일부로 가지지 않는 겁니까?
본질상으로는 그렇다. 모자이크 전체가 변한다. 하지만 그는he 자신에게 주어진 그 체험을 잃지 않는다. 단지 그는 “네”가 그것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구원받고, 행복해할 뿐이다.
하지만 “과거” 속의 “저”는 이것을 여전히 “체험해야” 하니, 그는 여전히 그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는 게 아닙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물론 “너”는 “그”를 도와줄 수 있다.
도울 수 있다고요?
그렇다. 첫째, 네 앞의 “네”가 체험한 것을 바꿈으로써, 네 뒤의 “너”는 그것을 전혀 체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너희 영혼은 이런 장치를 써서 진화한다.
같은 방식으로 미래의 너는 미래의 그 자신에게서 도움을 받아, 그가 하지 않은 것을 네가 피할 수 있게 도와준다.
내 말을 알아들었느냐?
예. 흥미있군요. 하지만 지금 저는 다른 걸 질문하고 싶습니다. 과거 삶이라면요? 만일 제가 “과거”에도 “미래”에도 언제나 “저”였다면, 어떻게 과거 삶에서 제가 다른 누구, 다른 어떤 사람일 수 있습니까?
너희는 같은 “시간”에 하나 이상의 체험을 할 수 있고, 너희 자신을 원하는 만큼 많은 여러 가지 “자신들”로 나눌 수 있는, ‘신성한 존재’이다.
내가 좀 전에 설명했듯이, 너희는 “같은 삶”을 몇 번이고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다. 또한 너희는 그 ‘연속체’ 위의 다른 “시간들”에서 다른 삶들을 살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네가 너인 동안에도, 너는 또한 다른 “시간들”과 다른 “장소들”에 있는 다른 “자신들”일 수 있고, 또한 다른 “자신들”이었다.
맙소사! 이건 갈수록 “얽히고 설키는”군요.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사실 겨우 표면을 긁어보았을 뿐이다.
이것만 알아두어라. 너희는 한계를 모르는 ‘신성한 비율’Divine Proportion의 존재다. 너희의 일부는 현재 체험되고 있는 너희 자신으로서 자신을 아는 쪽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너희 ‘존재’의 한계인 것은 결코 아니다. 비록 너희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왜요?
너희는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이 삶에서 자신에게 부여한 일을 할 수 없다.
자신에게 부여한 일이란 게 어떤 거죠? 전에 말씀해주시긴 했지만, 다시 한번 설명해주십시오. “지금”, “여기”에서요.
너희는 ‘참된 자신’이 되고,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판단하기 위해, 즉 ‘참된 자신’을 선택하고 창조하며, 자신에 대한 지금 관념을 체험하고 실현하기 위해, ‘삶’ 전체, 여러 삶 전체를 사용하고 있다.
너희는 자기표현 과정을 매개로 하여, 자신을 창조하고 자신을 실현하는 ‘영원한 순간’ 속에 있다.
너희는 지금껏 자신에 대해 지녔던 ‘가장 위대한 전망’을 ‘가장 웅대한 해석’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너희 삶의 사람들과 사건들과 환경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였다.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이 과정은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여러 층(層)의 과정이다. 그 모든 것이 여러 수준에서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다.
너희의 일직선 현실에서 너희는 체험을 과거나 현재나 미래 중의 하나로 본다. 너희는 자신이 한번의 삶을 갖는다고 생각하거나, 설령 여러번의 삶이라 해도 당연히 한 때에 딱 한 가지씩만 갖는 걸로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란 게 없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면 너희는 모든 “삶들”을 한꺼번에 가지지 않겠느냐!
실제로 너희는 그렇다!
너희는 이번 삶, 현재 실현되고 있는 삶을 너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 모두 한꺼번에 살고 있다! 미래의 사건에 대해 “기묘한 예감”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 너희를 그 사건에서 돌아서게 만들 만큼 강력한 예감을?
너희 언어로는 이것을 전조(前兆)라고 부른다. 내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너희의 “미래” 속에서 이제 막 체험한 어떤 일에 대해 너희가 갑작스럽게 지니게 된 단순한 자각일 뿐이다.
“미래”의 너희가 “이봐, 이건 조금도 즐겁지 않아. 이건 하지 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순간, 너희는 너희가 “과거 삶들”이라고 부르는 다른 삶들도 살고 있다. 설령 너희가 그것들을 너희 “과거” 속에 존재했던 것으로 체험하고(너희가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체험한다면), 또 그렇게 해도 전혀 무방하다 할지라도, 만일 너희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완전히 자각한다면, 너희로서는 삶이라는 이 멋진 게임을 즐기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제시된 이런 식의 묘사조차도 너희에게 그런 자각을 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그 “게임”은 끝날 것이다! 그 ‘과정’은, 이 단계에서 너희가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지금 상태로 그 ‘과정’이 완결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니 그 ‘과정’을 축복하고, 그것을 자비로운 창조주의 가장 큰 선물로 받아들여라. 그 ‘과정’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평화와 지혜와 기쁨으로 그것을 겪어가라. 그 ‘과정’을 이용하여, 그것을 너희가 견뎌야 하는 어떤 것에서, 모든 시간 중에서 가장 장대한 체험인 너희의 ‘신성한 자기’ 실현을 창조하는 도구가 될 어떤 것으로 변형시켜라.
어떻게요? 어떻게 해야 가장 잘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삶의 모든 비밀들을 벗기려고 이 귀중한 순간들, 너희의 지금 현실을 낭비하지 마라.
그 비밀들은 까닭 있는 비밀들이다. 너희 신을 증거불충분으로 석방해주고, 너희의 ‘지금 순간’을 가장 고귀한 목적인 ‘참된 자신’을 창조하고 표현하는 데 사용하라.
‘자신이 누구인지’, 되고자 원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결정하고, 그런 다음 그렇게 되기 위해서 너희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도록 하라.
내가 시간에 대해 이야기해준 것을 너희의 제한된 이해 속에서 너희의 가장 ‘장대한 이성’이라는 건축물을 올려 놓을 뼈대로 사용하라.
만일 “미래‘에 대해 영감이 떠오른다면, 그것을 존중하라. 만일 어떤 ”과거 삶’에 대해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것이 너희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알아보라. 쉽사리 그것을 무시하지 마라. 무엇보다도, 너희의 신성한 자아를 창조하고 드러내고 표현하고 체험할 수 있는 길을,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리고 어느 때보다 더 큰 영광 속에서 알게 된다면, 그 길을 따라라.
그리고 너희가 이전에 청했기에, 길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이 책을 쓰는 것도 네 청함의 한 표식이다. 왜냐하면 열린 마음과 열린 가슴, 기꺼이 알고자 하는 영혼이 없었더라면, 네가 바로 지금 바로 네 눈 앞에서 그것을 쓸 수는 없을 것이기에.
지금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들 역시 이 책을 창조했기 때문이니,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지금 어떻게 이 책을 체험할 수 있겠느냐?
모든 사람이 지금 체험하고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지금 체험되고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있다. 나는 만인이기에.
너는 여기서 대칭을 찾을 수 있겠느냐? 너는 ‘완벽’을 보고 있느냐?
다음과 같은 단 하나의 진리 속에 그 모든 것이 포함된다.
우리 중에 오직 하나만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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