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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대의 38 - 자아와 그의 매체들 본문
신지학 대의 38 - 자아와 그의 매체들
제 5 장
자아와 그의 매체들
자아와 인성
우리들 중에는 아직도 고급 자아(higher self)와 저급 자아(lower self)의 문제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멤버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오로지 하나의 의식만이 있다고 계속 들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분명 두 개의 자아(의식)를 느끼기 때문이다. 학인들이 이 둘 사이의 진정한 관계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한다면, 자아(Ego, 고급 자아, 혼, Soul)가 육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것인지 어떤지 또는 자아와 자아 사이에는 독자성이 존재하는지의 여부에 대해 의아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저급 자아와 고급 자아의 문제는 오래된 것이다. 여러 매체들의 제한에 의해 외관상의 차이가 야기될 뿐 궁극적으로는 오로지 하나의 의식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긴 분명 어려운 일이다.
전체 의식은 고급 멘탈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아직 그것은 오로지 부분적으로만 희미하게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고급 멘탈계 상의 의식이 활동적일수록 언제나 바람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혼의 진화에 유익한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고급 자아는 자신의 일부를 저급 질료 속으로 하강시켰다.
그러나 그렇게 내려온 부분은 저급 질료 안에서 활동하는 동안 상위의 더 광대한 자아와의 연결성을 망각한 채 자신을 마치 하나의 분리된 존재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였다. 이로 인해 때로는 그 단편이 전체에 반(反)하는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신비 학도는 결코 여기에 속지 않으며 날카롭게 깨어 있는 단편의 의식을 통하여 배후의 진정한 의식에 다시 도달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자아는 육체를 통해서는 극히 부분적으로만 표현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자아가 육체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말하는 것 또한 옳은 것이 아니다.
자아를 한 입방체로, 물질계를 평평한 판자로 가정해보자. 만일 입방체를 판자 위에 얹으면 판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오로지 그 위에 닿은 입방체의 한 면만 나타난다. 이는 분명 입방체의 극히 일부분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입방체의 여러 면이 판자 위에 연속적으로 얹어지면 매우 특이한 모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입방체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확장되는 전충성(塡充性)을 가져야 함에도, 2차원 평면에서 그런 것은 결코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입방체가 평면과 접촉되어 있을 때 그 부분만 의식을 갖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보통 사람의 의식에 대한 거의 정확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의식의 현현을 통해 얻어진 결과들이 전체로서의 입방체에 이미 고유하게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나중에는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표현으로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이다.
우리가 어떤 자아를, 고급 멘탈계에서 다른 자아와 구분할 수 있는 독자성을 띤 하나의 의식적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미 어느 정도 진화된 인간의 경우에 한해서일 뿐이다. 자아가 하나의 의식적 존재가 되는 것은 그가 그룹 소울(group-soul)로부터 분리되어 별개의 존재로서 출발하는 때부터다. 그러나 그때의 의식은 매우 불명확한 본성을 갖고 있다.
종종 자아가 우리들의 두뇌에 각인해 놓은 인상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있다. 아침에 잠에서 바로 깨어난 순간이 그것이다. 잠과 깨어 있음 사이의 중간 상태에서 사람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것은 축복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에 우리는 주변의 어떤 대상물들을 의식하지 못하며 몸을 움직일 수도 없다.
때로, 몸의 뒤척임이 이 지복의 순간을 깨뜨리고 우리를 일상의 상태로 다시 내던져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순간에 가능한 오래동안 미동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상태, 즉 존재에 대한 자각 그리고 강렬한 지복에 대한 자각의 상태는 고급 멘탈계에 있는 사람들의 자아의 상태와 매우 흡사하다.
보통 사람의 자아는 천계(天界, 저급멘탈계)에서의 한 삶의 끝과 다음 화신의 시작 사이 매우 짧은 기간 동안 고급 멘탈계에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기간에 그 앞에 섬광처럼 과거와 미래가 지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전생의 모습과 다음 생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완전한 깨어 있음의 순간을 그는 이제까지 느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는 보다 완벽한 현현, 보다 철저한 활기와 생생함을 느끼기를 소망하게 되며 그러한 욕구가 그를 다시 지상에 태어나도록 충동질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인생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완전한 의식에 대한 소망이다.
이 완전한 의식은 존재계로부터 오는 모든 진동에 감응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그것을 통해 그는 완벽한 교감을 성취할 수 있다. 자아가 아직 발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 있을 때 고급 멘탈계의 힘은 실제적으로 아무런 효과도 없이 통과해 버린다. 왜냐하면 그는 이 지극히 순수한 진동에 감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 자아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비교적 조악하지만 강력한 진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거친 진동은 자아 자신의 계인 고급 멘탈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자아는 저급한 차원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의식은 먼저 가장 저급하고 농밀한 체를 입고 있을 때만 그에게 온다. 그래서 비록 물질계가 고급 멘탈계보다 훨씬 저급하고 활동범위 또한 매우 한정되어 있지만 초기 단계에서 자아는 지상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더 생생한 활력을 느낀다.
의식이 그 범위를 확장시켜 감에 따라 자아는 점진적으로 한 단계 더 고급한 질료(즉 아스트랄 질료)속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후 단계에서, 아스트랄계에서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저급 멘탈계의 질료를 통하여 자신을 표현할 수 있기 시작한다. 그의 최종 목적은 고급 멘탈계에 있는 코잘체 속에서 현재의 물질계에서처럼 완전히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을 향한 이 의식의 발전 단계들을 단순히 각 매체들을 어느 정도 이용하는 법을 익혀 아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감정을 표현할 때마다 아스트랄체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며 생각을 할 때마다 멘탈체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각 매체들을, 의식이 완전히 표현될 수 있는 독립된 체(體)로서 활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사람이 그의 아스트랄체에서 완전히 의식적일 때 그는 이미 상당한 진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아스트랄 의식과 육체 의식 사이의 간극을 메우게 될 때 그에게는 더 이상 밤과 낮이 존재하지 않으며 인생을 연속성의 단절 없이 이끌어 갈 수 있다. 또한 그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 끊어지지 않는 의식을 밤과 낮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죽음의 문과 아스트랄계에서의 삶의 끝에 이르기까지 계속 유지하기 때문이다.
아스트랄계를 통과하고 나면 더 큰 발전 단계인 천계(天界)의 의식이 그에게 열린다. 그렇게 되면 그는 매번 화신해 오는 동안 기억의 연속성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나아가 고급 멘탈계에 있는 자아의 차원으로 고양되어 완전한 의식을 성취하면 그후부터 그는 항상 모든 인생들을 기억할 수 있으며 진화의 매 시점에서 의식적으로 자신의 여러 저급체들을 인도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의 발전 단계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두 단계 사이의 베일이 찢어지는 것은 매우 빠른 과정으로 일어나며 때로는 아주 순간적이다.
아스트랄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우연히 어떤 사건이나 질병에 의해 또는 의도적으로 어떤 특수한 수련을 함으로써 현계와 아스트랄계 사이를 연결시킬 수 있다. 그때부터 그의 아스트랄 의식은 연속성을 유지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육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억 또한 완벽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하려면 오래 전부터 완벽한 의식이 아스트랄체에서 활동하고 있어야만 한다. 비록 물질계의 삶에서는 그것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다 해도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스트랄체와 멘탈체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려 기억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환희를 누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오랜 시간 동안 멘탈체를 매체로 이용하는 훈련을 꾸준히 해야 한다.
이로 유추해 보건대, 우리 물질계의 삶 안에서 자아가 전하는 어떤 지식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기 위해서는 고급 멘탈계에서 자아가 완전히 의식적이고 활동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들 중에는 그 내면의 자아가 이미 각성되었거나, 앞서 언급한 단순한 지복의 상태로부터 어느 정도 자신(자아)의 주변과 다른 자아들을 의식하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 시점에서 자아는 인생을 인도하고 자신의 계(고급 멘탈계)에 대한 관심을 갖고 거기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심지어 그때에도 그는 오로지 자신의 매우 작은 일부분만을 저급 자아(인성, personality)속으로 내려보낸다. 그렇게 발출된 단편은 자아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고급 자아의 일반적인 활동과는 다른 선상의 관심거리들에 끊임없이 얽히게 된다. 따라서 자아는 어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인성의 저급한 삶의 형태에 특별한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단계에 도달한 자아는 대개 한 마스터의 영향 하에 들어가게 된다. 실제로 자아가 자기 외부의 어떤 것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처음 느끼는 사건이 바로 마스터와의 접촉인 경우가 많다. 마스터의 영향은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그를 자기화(磁氣化)시키고 그의 진동을 마스터의 진동과 조화롭게 한다. 이를 통해 그의 발전 속도는 엄청나게 촉진된다. 그것은 마치 꽃 위에 쏟아지는 햇빛처럼 그에게 조사(照射)되고 그 영향을 받아 빠른 속도로 진화한다.
진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발전 속도가 거의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더디지만 마스터가 관심을 갖고 그를 계발시키고 그의 의지를 고무시켜 진화 과정에 참여할 때 그의 발전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리 이루어지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마스터가 자아에 부어 주는 신성한 영향의 흐름 중에서 인성(저급 자아)에 전해질 수 있는 양은 자아와 인성 사이의 연결 정도에 달려 있다. 그러나 각각의 경우마다 큰 차이가 난다. 인간의 삶은 무한한 다양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에 영적인 힘이 조사되었다 해도 인성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은 그 힘 중 일부만이다. 자아가 자신의 일부를 발출시켰지만 그것을 자기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킨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에 자아와 인성은 매우 다른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내부에 있는 자아는 인성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발출되어 나온 자신의 목적조차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인성 속에서 우리와 만나는 자아의 작은 단편은 자기 중심적인 방식과 판단을 키워 나간다.
인성(Personality)은 경험을 통해 발전하고 그것은 자아(Self)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이 진정한 발전에 수반하여 그는 대개 이름에 걸맞지 않는 많은 것을 모은다. 그는 지식을 얻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편견(이것은 진정한 지식이 아니다)을 얻는다. 그가 아데프트의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이 편견들―지식의 편견, 지식의 부재에 대한 편견, 감정과 행동의 편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될 수 없다. 그는 점진적으로 그것들이 자신의 선입견이었음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넘어서 전진해 간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깨뜨려 버려야 할 많은 제한들이 남아 있다.
얼마만큼의 영적인 힘이 인성으로 전해지는가에 대해서는 오로지 투시를 이용한 특별한 경우에만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양이 얼마이든 반드시 어느 정도는 항상 흘러 나가고 있다. 왜냐하면 저급한 것은 고급한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마치 손이 팔에 속해 있는 것처럼. 인성이 자아로부터 영적 힘을 얻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성은 그것을 스스로 수용할 수 있는 만큼만 얻게 된다. 그것은 또한 특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마스터는 종종 자아 안에 있는 특성에 작용한다. 이 특성은 인성 안에서는 매우 불분명한 상태에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그것이 실제로 현현되는 것은 매우 적다. 인성의 여러 경험들 중 오로지 자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는 것들만이 영적, 영구적 자아에 전해질 수 있는 것처럼 오로지 인성이 반응할 수 있는 충동만이 저급 자아의 해당 차원에서 표현될 수 있다.
고급 자아는 악을 배제하고 저급 자아는 선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음을 기억하라. 이 경우 우리가 선과 악을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나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직관을 통해 이런 영향의 작용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특별한 날에 우리는 인성의 어떤 특성이 아무런 외부적 원인도 없이 크게 강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원인은 종종 어떤 고급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 즉 자아 내의 해당 특성에 가해지는 자극에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과 헌신으로 충만한 자신을 발견하는데 그 원인 또한 대개 그러한 자아의 자극이다. 또는 아마도 그 순간 자아는 저급 자아에 어떤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명상 속에 있을 때 자아는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이때 우리는 자아로 하여금 우리의 저급한 문제들에 관심을 갖도록 끌어내리지 말고, 오히려 위로 상승하여 자아의 고급한 활동에 연결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기억하라, 명상은 자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아의 통로가 되도록 여러 체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것임을. 올바른 명상은 언제나 고급 자아의 영향을 끌어온다. 비록 명상시 우리의 마음이 매우 둔하고 열정이 안 생긴다 할지라도 그것의 효과는 언제나 발생한다.
만일 자아가 완전히 발전되면 그는 자신의 계(고급 멘탈계)에서 명상할 것이다. 그러나 자아의 명상이 인성의 명상과 동시에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고도로 발달된 자아는 우선 의식을 붓디계로 고양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나서 상위의 다양한 단계들을 통과해 가게 된다. 이때 저급 자아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 자아는 저급 자아가 명상할 때 자신의 일부분을 내려보낼 것이다. 비록 저급 자아의 명상이 고급 자아의 명상과 같지는 않지만. 때로 이 과정에서 자아가 인성에게 에너지를 내려보내지 못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저급 자아에게는 다소 무디고 어두운 감정이 일어난다.
인성이 마스터의 노력에 의해 얼마나 영향받는가 하는 것은 주로 다음의 두 가지에 달려 있다. 당신의 자아와 인성 사이의 연결 강도 그리고 마스터가 자아에 행하고 있는 특별한 작용이 그것이다.
이 지상의 삶에서 명상을 한다거나 영적인 주제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자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영적인 문제들에 진지하지 못한 일반 사람은 간신히 한 가닥의 실로 고급 자아와 저급 자아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경우 인성만이 모든 것이며 자아는 그에게 실제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자아는 엄연히 고급 멘탈계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는 마치 달걀 속에서 자라고 있는 병아리와 같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으로 노력해 가고 있는 사람의 경우 자아는 아주 생생하게 의식적으로 된다. 그는 자신의 껍질을 깨뜨려 활기차고 힘있는 인생을 살게 된다. 계속 전진해 나아감에 따라 우리는 개인적 의식을 자아와 합일시킬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오로지 하나의 의식만을 갖게 될 것이다. 심지어 이 지상에서도 우리는 고급 자아의 의식을 소유하여 현상계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자아와 인성 사이에 상당한 대립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고려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있다. 인성 안에 현현된 자아의 단편을 통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매우 실제적인 타입의 자아는 훨씬 더 발전된 사람의 자아보다 물질계 상에 더 많이 현현한다. 왜냐하면 고도로 진화된 사람의 자아는 그 에너지가 물질계보다는 코잘이나 붓디 차원에 거의 모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당히 발달된 자아의 경우를 볼 때 당신은 때때로 그가 몸에 대해 다소 몰인정함을 발견한다. 아다시피 자아는 인성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 취한다. 나는 흔히 자아가 참지 못하고 자신 속으로 철수해 버리는 경우들을 자주 보아 왔다. 그러나 이때 한편으로는 자아와 인성 사이에 언제나 하나의 흐름―보통 사람에게서는 불가능한―이 남겨지게 된다.
보통 사람에게 그러한 연결은 매우 미약하다. 물론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보다 발전된 단계에서 자아와 인성은 채널을 따라 끊임없이 통신한다. 자아는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대부분을 철수시켜 뒤에 자신의 매우 빈약한 표현만을 남겨 둘 수 있다. 따라서 저급 자아와 고급 자아 사이의 관계는 각 사람마다 그리고 각 발전 단계마다 다양하다 할 수 있다.
자아의 활동에 대해 말하자면, 자아는 자신의 계에서 사물에 대해 배우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자아들을 돕고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종류의 활동이 있으며 그 일을 위해 자아에게 보다 많은 힘이 필요로 한 경우가 때로 있다. 그러면 그는 잠시 동안 자신의 인성(저급 자아)을 돌보는 걸 잊게 된다. 마치 아무리 선한 사람도 때로 특별한 일에 정신이 없다 보면 기르고 있는 말이나 개에 대해 잊어버리게 되는 것과 꼭 같이 말이다.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면 인성은 큰 실수로 심각한 고통을 초래하는 어떤 어리석은 짓을 함으로써 자아에게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때로 당신은 자아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특별한 일(예를 들어 수많은 청중에게 강의하는 따위의 일)을 한 후에 에너지를 상실하고 무력감을 느낀 경우가 있을 것이다. 잠시 동안 자아는 그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힘을 초과하여 에너지를 쏟아 부었지만 일이 끝나고 난 뒤 가엾은 인성에게 탈진감을 남기며 철수해 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무력감은 다른 원인들로부터 오는 경우가 더 많다. 예를 들어 저급한 아스트랄계의 엔터티(entity)나 어떤 비인간적 존재로부터 오는 경우 등. 그리고 기쁨 또한 항상 자아의 영향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사실 인간은 힘의 유입을 수용할 수 있는 적절한 상태에 있을 때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환희는 어쩌면 조화로운 자연령들이나 기타 다른 요인에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자아와 인성 사이의 챈널은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 그것은 거의 끊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 문제가 난관에 빠지는 상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그때 필요할 경우 자아의 힘이 그것을 다시 타파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 자아와 인성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흐름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명상은, 성실히 행해졌을 때 그러한 채널을 열어 주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시켜 준다. 당신은 인성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자아를 향해 올라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라.
모든 자아는 자기 자신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는 인생과 인생의 중간 기간에 자신의 전생과 미래상을 일별한다. 이것은 잠시 동안 자아를 일깨우지만 그 후 그는 다시 잠 속에 빠져든다. 물질계 인생 동안 보통 사람들은 어느 정도 관조하고 노력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갖추고 있지만 여전히 잠과 같은 상태에 있다. 그러나 진화된 사람에게 있어 자아는 완전히 깨어 있다.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자아는 그가 할 수 있는 많은 유익한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계(고급 멘탈계)에서 생생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많은 경우 그것은 꿈꾸는 듯한 상태에 있다.
자아의 목적은 모든 계에서(심지어 물질계에서도) 완전히 활동적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만일 당신의 자아가 주로 사랑을 통해 자신을 현현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당신의 자아는 사랑이라는 특성이 인성에 의해 표현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만일 이 지상에서 매사에 강한 사랑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열심히 노력한다면 자아는 즉각적으로 더 많은 것을 인성에 내려보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 안에서 정확히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주의하여 자아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 주도록 하라. 그러면 그는 그것을 재빨리 이용할 것이다. 자아가 충분히 발달했다면 그는 고급 멘탈계에 있는 다른 자아들을 도울 수 있다. 보통 사람의 자아는 다소 식물과 같은 의식(또는 생명)을 갖고 있어서 단지 다른 자아들을 알아볼 뿐이다.
인성은 자아와 합일되지 않는 한 그(자아)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인성은 마스터를 알아 볼 수 없을지 몰라도 자아는 마스터를 알아본다. 내면적인 것들에 대한 공부, 인생을 사는 법에 대한 공부는 자아를 일깨운다. 순수한 비이기적 헌신은 고급계에 속해 있으며 자아와 관련되어 있다. 나는 인성의 경험들 자체가 자아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에센스만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한다.
자아는 세부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으며 오로지 그것들의 에센스만을 원한다. 자아는 이와 같은 분명한 목적을 위해 반드시 육체로 내려와야만 한다. 특히 천계(天界)에서의 삶 동안 자아는 인성의 경험들을 소화시키는데 깊이 전념한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작업은 어느 때고 항상 진행되고 있다.
신지학을 공부하면서 인생을 살아갈 때 당신은 자아가 감응할 수 있는 진동을 고급계로 올려 보냄으로써 그의 관심을 부르기 시작한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자아에 어필할 수 있는 것을 별로 갖고 있지 못하다. 고도의 이타적인 사랑과 헌신은 최고 아스트랄 부분계에 속하는데 그것들은 멘탈계의 상응하는 질료에 반사하여 코잘체와 접촉된다. 자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로지 비이기적 상념들만이다. 모든 저급한 상념들은 영구 원자에 영향을 미칠 뿐 자아에 미치는 것이 아니다.
코잘체 안에는 저급 상념에 상응하는 갭(gap, 간극)들이 있어서 저급 상념이 코잘체에 반영될 때 나쁜 색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갭으로써 나타난다. 즉, 저급한 이기성은 코잘체 안에 사랑 또는 자비의 부재(不在)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다가 좋은 성질이 계발될 때 그 갭은 메꾸어진다. 따라서 당신은 어떤 사람의 코잘체를 봄으로써 그에게 어떤 성격적 결함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자아가 원하는 성질을 계발하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그가 내려와서 도와줄 것이다. <길을 비추는 빛>에 씌어 있는 것처럼, 자아를 지켜보라 그리고 기다리라. 당신을 통해 그가 싸우도록 하라. 그러나 동시에 당신이 그 자아임을 결코 잊지 말라. 당신이 곧 그인 것이다. 저급한 당신이 고급한 당신에게 순종케 하라. 아무리 여러 번 쓰러졌다 해도 크게 낙심하지 말라. 왜냐하면 심지어 실패조차 어느 정도 성공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배우고 다음에 문제에 부딪칠 때 그만큼 더 현명해지기에 말이다.
우리는 지금 모든 일에 항상 성공할 수만은 없다. 비록 궁극적으로는 분명 그렇게 되겠지만. 그러나 신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최선을 다 하는 것일 뿐임을 결코 잊지 말라.
[출처] 신지학 대의 38 - 자아와 그의 매체들|작성자 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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