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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대의 34 - 니르바나 본문

영성수행 비전/신지학

신지학 대의 34 - 니르바나

柏道 2025. 1. 24. 12:52

신지학 대의 34 - 니르바나

 
 
 
 
 

제 4 장

​고급계

 

 

니르바나

 

궁극적인 완성 단계에서 모든 개체 혼들은 대령大靈 속으로 녹아들어 통합된다고 종종 말해진다. 또 한편으로는 인간이 아무리 고급한 진화 단계에 오른다 해도 어떤 형태로든 개체성이 유지된다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우리 신지학도들은 때때로 이 두 견해 사이의 타협점을 찾는데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경험, 두뇌 속에 형상화시킬 수 있는 어떤 관념으로도 영광스러운 니르바나의 실재와 그것을 넘어선 차원들을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러한 초월적인 영광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나마 우리가 알고 있는 최소한의 것조차 적절한 말로 묘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개체 혼들이 대 영혼 속으로 용해된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잘못된 생각이 아닌가 한다. 모든 모나드는 근원적으로 신성 삼위일체의 한 불꽃이다. 따라서 모나드는 이미 자신이 구성 요소로 있는 그것 속에 용해될 리가 없다.

 

이보다는, 진화해 감에 따라 그 스파크가 성장하여 화염이 된다는 것이 분명 현상에 대한 보다 나은 설명일 것이다. 즉, 모나드는 신성과의 합일에 대한 의식이 점차 성장하고 로고스는 그것을 통해 자신을 더욱 많이 현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의식의 고급 차원 심지어 흔히 말하는 니르바나에 이르기까지 결코 개체성은 사라지지 않으며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위하는 힘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정도는 말할 수 있다. 니르바나에 이르기 오래 전에 ‘분리’의 관념이 완전히 사라지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에드윈 아놀드는 그러한 지복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이슬 방울이 빛나는 바다에 떨어지다.”

 

실제로 이 가장 경이로운 체험을 한 자들은 역설적으로 그 느낌이 정확히 반대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에 훨씬 가까운 표현은 차라리, ‘대양이 물방울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다!’일 것이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고, 원주는 어디에도 없는, 바다처럼 확장되는 그런 의식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실재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그것을 성취했을 때 그에게 있어서 의식은 전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을 통하여 신성한 힘과 지혜와 사랑이 빛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개별성이라는 것은 미망이며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개념 속에 내포된 가장 숭고한 속성은 아데프트의 경지와 그것을 아득히 넘어서 대 혹성 영(Planetary Spirits)(*주1)의 세계에까지 유지된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의 미약한 상상력이 미치지 못 하는 위대한 존재들이긴 하지만 그들도 분명 개체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언젠가 한번 이 고차원 계와 연결되었던 체험의 관념적 일단이나마 전달해 보고자 한다. 한 마스터가 어떤 목적을 위해 우리를 그의 고급 오라에 감싸 우리로 하여금 그를 통하여 니르바나의 영광을 알 수 있도록 해준 적이 있었다.

 

전체 우주가 살아 있는 빛의 거대한 분류(奔流)로 충만하여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넘치는 생명과 표현 불가능한 강렬한(천상의 지복보다 수만 배나 되는) 축복이 있었다. 처음에 우리는 축복 이외에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고 강렬한 빛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차츰 우리는 심지어 이 눈부신 밝음 속에도 더 밝은 지점들인, 빛으로 만들어진(거기엔 빛밖에 없기 때문에) 핵(核)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핵들을 통하여 광휘의 빛이 새어나와 다른 계나 저급 계들에서도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성질을 띠게 되었다.

 

만일 이러한 특성이 없다면 다른 계에서는 그 광휘를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점차 우리는 이들 부속 태양들이 대 초인들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은 혹성 영, 대천사, 카르마의 신, 붓다, 그리스도, 마스터들이었다. 그들을 통하여 빛과 생명이 저급계로 흘러 내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서서히 이 엄청난 실재에 익숙해져 감에따라 우리는 보다 하위의 관점에서 심지어 우리 자신 또한 우주 체계 안의 한 초점이고 우리를 통해 우리보다 훨씬 낮은 차원으로 빛과 생명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빛과 생명의 일부분이며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더 나아가 그것을 이해하고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 영광을 조금이라도 보고,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그것을 우리보다 불행한 타인들에게 반사할 수 있다. 그 빛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빛나고 있다. 그것은 유일한 실재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지로 또는 어리석은 행위로 자기를 차단시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마치 태양이 빛과 생명으로 온 세상을 두루 비추고 있지만 사람들이 동굴이나 지하에 숨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비유컨대 동굴이나 지하실의 입구에 적절히 놓여진 거울이 있다면 그것으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어느 정도만이라도 빛의 혜택을 입을 수 있게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빛을 볼 때 그것을 직접 빛을 인식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반사시킬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어떠한 말로도 그러한 체험을 제대로 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모든 체험의 인식 주체인 마음이 오래 전에 사라져야만 그러한 차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차원에서도 영(靈)을 위한 어떤 종류의 외피(sheath)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의 원자처럼 보이고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전체 세계로 보인다. 니르바나계상에 있는 각 존재는 의식의 센터이기 때문에 어떤 포지션(Position)을 가진다. 즉, 로고스의 생명의 흐름에 내재한 초점으로, 각기 떨어진 공간에 거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마치 전체 세계인 것처럼 느낀다. 따라서 그는 어디든 초점 맞출 수 있고 이 힘의 흐름이 멈추는 곳, 그 순간에 소위 외피를 입게 된다.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분명히 느낀다. 아니 훨씬 그 이상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남들과 구분할 수 있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위대한 존재들을 거의 본능적으로 정확히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은 자기가 전에 보았던 모습과 닮아서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의식을 그분들 중의 한 분에게 초점 맞추면 그는 두 차원 하위계(고급 멘탈계)의 아우고에이데스(Augoeides)를 통해 그 존재의 형상을 보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