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조셉머피. 요한복음 14장 해설 본문
조셉머피. 요한복음 14장 해설
요한복음 14장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 집에는 많은 저택들이 있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리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내가 있는 그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가 알고 또 그 길도 너희가 아노라.” 하시니 (5) 도마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길을 알 수 있나이까?” 라고 하니 (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 (7) 만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는 너희가 그 분을 알고 또 보았느니라.” 고 하시니 (8) 빌립이 주께 말씀하시기를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소서. 그러면 만족하겠나이다.”라고 하니라. (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너희와 그처럼 오랜 시간을 있었는데 네가 나를 모르겠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그런데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라고 말하느냐? (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있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에게 하는 말들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어라. 그리하지 못하겠거든 행한 그 일들을 보고 나를 믿어라. (12)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들을 할 것이요 또 이보다 더 큰 일들을 할 것이라.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 (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그것을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라. (14) 너희가 무엇이나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우리 아버지 집에는 많은 저택이 있으니. 이 구절은 의식의 많은 상태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항상 마음의 상태 속에서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장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은 많은 꿈, 동경, 욕망, 열망, 계획, 느낌, 상상, 결핍, 감정들을 갖고 살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이다. 아침에는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던 사람이 오후에는 심술궂고 화가 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또 저녁에는 온화하고 차분해져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하루 동안 많은 저택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비록 어떤 이가 외형적으로는 궁궐 같은 집에서 살더라도 동시에적의,걱정, 공포라는 정신적 감옥속에서 살 수도 있다.진정으로 속박당하는 죄수는 마음 속에 있다. 만약 침대에 누워 있게만 되었다면 궁궐 속에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침에 일하러 갈 때 기쁜 마음으로 가는 사람은 훌륭한 마음의 저택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다. 따라서 인간의 능력도 무한하다. 인간 안에 있는 영광과 아름다움을 결코 다 표현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개념을 무한할 정도로 많이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실제로 마음의 무한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무형의 존재가 우리 안에 있고, 내부의 것을 외부로 표출시키는 우리의 드러냄은 끝이 없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면. 만약 우리가 현재의 집(한계 상태)에서 떠나려고 하면 의식 속에서 일어나 우리의 이상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상태(우리의 이상)를 확신하는 상태까지 확고히 한다면 우리가 결국 차지하게 될 장소를 준비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먼저 마음 속에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 속에서 그것을 받았다는 상태까지 도달하게 되고 외부로의 실현은 뒤따른다.
6절은 어떤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내적 의식이 건강, 자유, 평화로 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나의 나는 IAM이 바깥세상의 모든 것과 모든 현현들로 향하는 문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 나의 의식이나 인식은 실체實體이다. 왜냐하면 내가 사실이라고 느낀 것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소망의 성취가 지금 나를 속박에서 자유롭게 한다.이것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이다. 이 진리를 테스트할 수 있다. 일상생활이 조화롭고 우호적이고, 사람들이 정말 친절하다고 믿기 시작하면 나의 삶은 이런 새로운 태도로 인해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내가 믿는 그대로 나에게 이루어진다.
나는 마음의 법칙을 작동시키고 있다. 의기소침함, 그리고 실망과 외로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진리를 발견했다. 내가 세상은 좋은것이라고 믿으면 이런 태도에 맞춰서 나의 생활과 나의 세상은 좋게 변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나의 사고와 느낌이 나의 운명을 정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문제 위를 뛰어 넘어서 마음, 영혼 속에 있는 해결책에 거居할 수 있게 만든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당신 의식이 가는 곳으로 당신의 육신도 가게 된다. 의식이 가는 곳으로 손과 발이 간다. 만약 당신이“나는가난하다”고 말하면서 빈곤함을 느끼면, 당신의 의식은 가난을 더욱 끌어당긴다.그래서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욱 부유해진
다.*마태복음 25:29 참조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 이 구절은 우리 의식이 끌어당기는 것만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구절에서 나는 우리 각자의 나는 I AM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의 나는 I AM은 모든 생각의 부모이다. 빌립이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라고 말한 것은 우리의 주도적인 분위기를 불러내는 것을 의미한다.분위기나 느낌은 볼 수 없다.
당신이 내적원인의 원리를 알게 되었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 생명의 원리를 발견 했다면 그것을 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 내적 생명의 자유로운 흐름을 패배와 무기력함이 방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무엇을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결핍이나 혼란을 보게 되는지 또는 부유, 질서, 조화를 보게 되는지를 결정한다.
우리는 원리를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 결과는 볼 수 있다.
빌립은 인내를 의미하는 말 조련사이다. 오감에 의해서 받은 상像이 당신의 목표를 이루려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할 때 당신은 빌립이라고 불리는 이 마음의 자질을 불러낸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비전이 가는 대로 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즉 당신의 의식이 당신 세계에서 이루어진 것들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경험, 환경, 그리고 상태는 당신의 현재 세계 배후의 원인인 의식상태, 즉 아버지를 목격하는 아들로 표현할 수 있다.
내부의 무한한 힘을 새롭게 인식하고 현재 상태, 현재 사실을 뛰어넘어 목표에 집중한 채 하나님의 평화와 사랑, 기쁨과 행복이 지금 당신 것이라고 대담하게 주장하라. 외부세계의 양상樣相들이 당신을 겁주고 놀라게 하면, 즉시 내부의 신성으로 향한 채 당신의 목표를 지금 바로 그곳에서 선언하라. 그 어떤 것도 당신의 고양된 영혼의 기를 꺾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비록 아직 그것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당신 내부의 빛은 당신이 가는 길의 램프가 되고 당신은 신의 빛의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걱정, 시련, 재난에 둘러싸여 있을 때, 마치 욥처럼 신의 촛불이 당신 머리 위에 켜져 있다는 것을 알아 신에게 믿음을 둔다. 그러면 암흑 속을 신의 빛으로써 걸을 수 있게 된다.
나(이루어진 소망)를 본 자는 아버지(내적 분위기 또는 확신)를 보았느니라. 이 구절은 내적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12절에서 다음과 같은 진리를 듣게 된다.예수가 하는 일들을 당신도 할 것이요 이 보다 더 큰 일들을 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임을 깨닫고 이 신성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서가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가 이용했던 힘을 이 세상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사용했던 치유력은 우리 역시 사용할 수 있다. 우리도 예수의 지혜와 지성을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엄청난 잠재력을 인식해야만 한다.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전능과 하나라고 믿는 정도에 따라 우리는 그것에 상응하는 그분의 힘과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훈련과 명상, 기도와 하나님과의 영적교섭을 통해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지혜나 힘에 있어서 예수님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 있는 영광과 지혜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도 또한 무한하다. 예수님이 가장 높은 곳까지 도달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끝은 없기 때문이다. 예수, 모세, 엘리야, 부처, 그 외 다른 성인들은 의심할 것 없이 마음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고 자신이 누구인가 라는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그것을 행하리니. 우리는 소망의 본질을 가지게 될 때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실재임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의복(심리적태도)을 입어야한다. 그것이 실체가 될 때까지 이 지적 소유감의 느낌과 분위기를 지속하는 것이 소망을 이루는 비결이다. 모든 잠재력은 인간 안에 있다. 우리는 이 장에서 핵심인 절을 다루겠다.
또 내가 아버지께 기도 하겠고,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시리니 그가 너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리라. 14:16
신비스런 힘이 항상 우리의 위로자이고 구원자이다. 이 장을 쓰고 있는 도중에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경쟁자들이 나와 내 사업을 망쳐놓으려고 해.”라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그는 위로자가 내부에 있고 그와 영원히 함께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다음의 간단한 정신적 방법으로 자신의 구원자가 내부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둘(그가 말하는 소위 적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선의를 언제나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희망과 소망과 열망을 가지고 있다.그들이 평화, 일치, 사랑, 기쁨, 부유를 원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렇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기원한다.우리의 관계는 조화롭고 평화롭고 신성한 합의로 충만하다. 그들은 내가 행한 황금률에 따라 옳은 일을 하기를 원한다. 나는 지금 그들 안에 있는 신에게 인사를 한다. 마치 신이 그들을 완전하고, 정결하고, 완벽하게 보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보고 있다. 모든 것들은 잘 되었다.”
이것이 내가 그에게 전화로 주었던 기도문의 핵심이다. 나는 그에게 이런 진리를 소유하게 될 때까지 이런 느낌과 생각을 마음 깊은 곳에 두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축복하는 것을 계속한다면 마치 영혼의 정화淨化 같은 내적 해방감이 일어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평화를 느끼게 되고 마치 평화의 강이 그의 마음과 가슴에 가득 차듯이, 위로자가 올 것이란 것을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위와 같은 것을 전념을 다해서 행했고 실제로 그의 깊은 곳에서부터 신비스런 치유력이 나와서 그가 말하던 두 사람과의 관계가 완벽하고 조화롭게 해결되었다. 훌륭한 변화가 그들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그는 그의 위로자, 상담자는 자신 내부에 있다는것을 발견했다.
위로자의 의미를 설명하는 또 다른 간단한 방식은 당신의 예수를 당신의 이상 또는 소망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위로자가 오기 전에 당신의 소망은 죽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당신이 소망하는 것을 가졌다는 의식을 지닌다면 더 이상 그것을 원하지 않게 된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당신 소망을 의식 속에 두어야 한다. 만약 당신의 소망이 항상 당신 앞에 있고 미래에 있다면 결코 그것을 가질 수 없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만약 우리 의식이 미래의 상태 속에 있게 되면 우리는 현재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기도는 현재시제로만 기능한다. 확신과 평화와 평정 속에서이미 이루어진 상태를 봄으로써 소망이 현재 이루어 졌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걱정하거나 서두르거나 결과물을 미래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지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만을 알아야 한다.
진리의 영인 그를 세상은 영접 할 수 없으니 이는 세상이 그를 보지도 못하며 또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이는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안에 계실것임이라. 14:17
위로자는 물론 성스런 영 또는 완전성의 느낌, 즉 우리 이상과 하나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공포, 의심, 걱정 속에서 사는 한 외부 세계는 항상 이 진리의 영혼을 거부한다. 위로자Comforter는 신God과 동의어이다. 우주적인 것은 개인 속에 있고, 개인은 우주 속에 있다. 진리를 아는 것이 위로자를 아는 것이고 이것이 당신을 모든 억압에서 해방시켜준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그 법칙 안에 도덕은 없다.
비는 선한사람이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내린다.*마태복음 5:45
최근에 나는 어떤 로펌에서 해결책에 대해 기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해결 못한 사건이 있었고 그 문
제는 아주 넌더리난다고 말했다. 그 로펌의 한 변호사는 한 시간씩 매주 두 번 나와 상담을 했다. 이 변호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조화로운 신성한 해결책이었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반대편이 어떤 손해를 입거나, 그들의 권리를 빼앗는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에게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은 자신이 법칙을 잘못사용했기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그는 모두를 축복하는 신성하고 올바른 행동과 판단을 요구했다.
마음의법칙은 그의 목표와 소망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현실에서 일구어냈다. 그의 목표와 동기는 선한 것에 있게 되었다. 법칙은 도덕과 상관이 없다. 우리의 도덕은 우리가 법칙을 사용하는 방법과 관련이 있다.
소송에 휩싸이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어느 한쪽에서 속이고 사기를 치려한다면 그는 법칙을 오용誤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사고와 동기에 따라 법칙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의 동기는 죄책감과 옳지 않은 일을 하려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그는 법칙이 그의사고와 느낌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경험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소송에서 특정한 곳을 편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신은 실제로 자신을 고소할 수 없고 조화의 법칙과 신적인 정의가우세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는 것이다. 현재 상황이 어찌 되었든 또한 불리한 판결이 있더라도 이 법칙을 지속한다면 신은 결코 늦지 않는다. 선하고 좋은 것을 단단히 붙잡아라. 어떤 경우에도 결코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그의 것을 뺏으려고 하지말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나의 말들을 지키지 아니하느니라.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
이니라. 14:24
내가 너희에게 한말들은 영이요,생명이라. 6:63
말이란 당신의 사고와 느낌을 상징한다. 성서에서 나오는 말이란 당신의 확신, 내적 느낌, 인식을 의미한다. 아픈 사람의 완전성과 완벽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때 당신은 당신의 말을 보내서 그 사람을 치유하게 된다.*시편 107:20 참조
당신의 말이란 마음 속에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다. 그러면 당신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즉 의식의 상태가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당신의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위로자이신 성령을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시리니,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 들을 가르치시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들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14:26
성령이란 완전성이나 하나됨의 느낌을 의미한다. 완전함이란 당신의 목표와 하나가 되는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마음은
더 이상 분열되지 않고, 당신은 소망을 실현시켰기에 평화롭다. 성령이란 완전성에 대한 당신의 내적 느낌이나 이루어진
기도를 말한다. 영이라는 단어는 생명이나 느낌을 의미한다. 추론은 간단하다.내적 확신이 생긴다면 성령을 방문하는 것이
다. 사랑은 법칙을 실행하는 것이다. 당신이 갈망하는 상태에 대한 느낌으로 가득 채워질 때 법칙을 실행한 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모든 축복을 기원함으로써, 사랑과 선의로 가득 채워진다. 법칙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당신뿐만 아니라 모두를 축복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 조화를 이루었고, 온 세상과 조화를 이루었다. 선의와 평화의 영혼인 위로자를 발견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쏟아 붓고 그들을 구원과 올바른 것으로 감쌀 때 위로자는온다.
2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내가 갔다가 너희에게 다시 온다. 우리의 이상, 우리의 예수(소망)는 의식 속으로 들어
가야한다.우리가 내부에서 사실이라고 느끼는 것은 외부에서 경험하게 된다. 우리의 이상이 실현되어 객관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멀리 가야 한다. 먼저 마음속에 주입된다면 그것은 밖으로 표현된다. 이것이 갔다가 다시 오는 것이다. 설명이 너무 단순해서 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신비한 것처럼 만드는지,의아해 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심이라. 14:28 창조자는 언제나 자신의 창조물보다 위대하다는 뜻이다. 사상가는 그의 사상보다 위대하다. 예술가는 그의 작품보다 위대하다. 우리의 의식은 그 관념보다 더 위대하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 자신에 대한 관념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라. 14:29
나는현실에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본적이 있었다. 독자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수학자 듄처럼 꿈에서 어떤 사건을 보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금 마음속에서 소망을 이루게 할 수 있다. 조용히 앉아서 상상 속에서 소망하는 결과를 경험하고 결말을 보고 이루어진상태,예를 들어 집을 성공적으로 매매했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성공 등을 즐겨라. 이것은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전의 일을 본 것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본 것이다. 당신 마음의 극장인 상상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은 외부 세계에서 경험하게 된다. 이후로는 내가 너희에게 많이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오나. 그는 내 안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아니함이라. 14:30
당신은 평화 속에서 오직 좋은 것만을 듣도록 마음을 훈련시켰기에,두려운 생각이 마음에 들어오더라도 어떤 미동도 없다는 의미이다. 당신은 더 이상 인류의 대중적 암시의 희생자가 아니다. 우리는 사자 우리 안에서 오직 빛과 구원만을 보는 다
니엘처럼 되어야 한다. 세상에 나타난 모든 것들은 그것들의 배후가 되는 사고들이 없다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고
는 모든 것의 본질이 되고, 영원히 존재한다. 외부로 나타난 형태는 사고가 표현된 것이다. 감지感知하는 사람과 감지된 사물은 하나이다.
내가 지금 하나의 산을 볼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 산을 볼 수 있는 것을 보면, 우리 모두에게는 공통된 하나의 마음이 있
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식 속에서 산이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산을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사건을 접했다면 그것은 마음속에서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사건을 허용했기 때문이다.우리는 그것과의관계를 바꿔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 만약 어떤이가 조간신문을 읽고 그것이 자신을 불안하게 하도록 허용하면, 그것은 나쁜 분위기이고, 이 세상의 통치자가 그를 뒤흔들도록 허용한 것이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14:31 이 구절의 의미는 의식 속에서 일어나서 내부의 은밀한 장소로 떠나라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문 앞에 있는 거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과 금은 나에게 없으나 내가 가진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사도행전3:6
가난한 자에게 돈을 주는 것은 그 자의 결핍의식을 치료해 주지 못한다. 대신 그에게 지혜를 주고 그에게 지식을 가르치면
그는 다시 구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모두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원천임을 알고 그것을 주장할 때 끊임없는 부富가
흘러 들어온다. 가난한 자에게,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서 부유의 마음을 불러냄으로써 부유에 대한 생각을 그의 마음의 옷으로 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라. 당신은 그에게 지혜를 준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낡은 옷, 한 그릇의 스프, 또는 커피 한 잔 값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에게 진실한 것은 당신 자신에게도 진실하다는 것을 주장할 때 당신은 침상(진리)을 들고 땅위를 자유롭게 걷게된다. 걸인이 구걸하는 모습을 보지 말고 그가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을 보아라. 마치 하나님이 그를 보는 방식으로 그를 보아라. 제자들은 완벽함을 보았고 그것은 이루어졌다. 절름발이가 절뚝거리며 걷는 것을 보지 말고 그가 걷고 달리는 것을 보아라. 우리 존재의 참 모습에 눈을 떠라. 세상에서 나타난 지금의 모습은 환영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완벽하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8 우리 눈을 흐리게 하는 비늘을 떨어뜨리게 하고*사도행전 9:18 참조 세상의 근원의 진리를 주장하자.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요한일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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