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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Ch 31 안식일 The Sabbath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네빌 고다드

Ch 31 안식일 The Sabbath

柏道 2022. 8. 6. 10:08

Ch 31 안식일 The Sabbath
 
 
엿새 동안은 일이 끝날 것이나,
일곱째 날에는 주에게 거룩히 쉬는 안식일이니,
 
 
여기에서의 6일은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간]에 대한 단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내적인 상태]’가 확고하게 서게 되는 ‘[정신적인 순간]’을 상징합니다.

여기에서의 일하는 6일이란
[내적인 *경험]을 말하기 때문에
[천체의 움직임]을 기초로 한 시간에 의해 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뚜렷한 정신적인 상태]를 확고히 만드는 [진정한 일]은,
[의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의 6일이란
[자신을 소망하는 모습]으로 [마음속에서 명확하게] 나타나게 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을 말합니다.

의식에서 하나의 변화가 일어나는 일은
창조의 6일 동안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구조에서 하나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천체의 움직임을 기초로 이루어지는 시간이 아닌,
[내적인 성취]에 의해 판단됩니다.

되돌아보면
인생이란 것도 살아온 시간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이 정신적인 6일의 기간도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에 의해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성취]로 판단될 수 있습니다.

창조하는 6일의 진정한 의미는 바(VAU)에 나타나 있습니다.
바(VAU)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여섯 번째 문자이고
신성한 이름인, 욧 헤 바 헤(JOD HE VAU HE)의 세 번째 문자이기도 합니다.

신의 이름인 ‘여호와’의 비밀을 앞서 설명했듯이,
바(VAU)는 못으로 박는 것, 하나로 묶는 것을 뜻합니다.

창조자는 느낌을 통하여 [자신과 창조물]을 하나로 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의 뚜렷한 느낌]을 확고히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야말로
창조를 하는 [6일을 판단]할 수 있는 [진정한 척도]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객관적인 세상과 정신적으로 분리하고
여러분 자신을 [느낌의 비밀]을 이용해서
[내적인 상태]와 [하나] 되게 하는 것이
히브리어 알파벳의 여섯 번째 문자인 바(VAU),
즉 일하는 기간이 [6일]이 하는 역할입니다.


[확고한 인상]이 [주관적인 상태]에 심어진 후에,
그 상태가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는 [일정한 간격]이 항상 존재합니다.
이 간격을 [안식일]이라 부릅니다.
안식일은 정신적인 상태가 확고하게 된 후에 찾아오는 [정신적인 휴식]이고,
일하는 6일 뒤에 찾아오는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더라.”

어떤 의식의 성공적인 수태 후에 찾아오는 이런 정신적인 휴식은
임신 기간, 즉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대상을 부화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간입니다.
[안식일]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날 것]을 위해 생긴 것이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안식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만약
[일하는 6일의 기간]을 [완성]했다면
[정신적인 휴식기간]인 [안식일]을 자동적으로 치르게 됩니다.

[6일의 기간]이 끝나지 않았다면,
다른 말로 바꾸면

[내적인 변화]가 [완성]되지 않고
[내적인 인상]이 충분히 [각인]되지 않았다면
[7번째 안식일]은 찾아올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경고]를 받습니다.
 
“만약 안식일을 지키지 못해서 하느님의 휴식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또한 약속을 받지 못할 것이더라.”
 
즉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이유는 간단하고 명백합니다.

의식 안에서
[원하는 인상]이 [각인]될 때까지는
[정신적인 휴식]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원하던 것이 지금 이미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자신에게 각인]시키지 못한다면
[계속 원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정신적인 휴식] 또는 [만족의 상태]에 있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반대로
의식 안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해서
[내적인 고요한 시간], 즉 [자신의 6일간의 기간]에서 나온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바라던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게 되어
그때부터 [안식일] 또는 [정신적인 휴식의 시간]을 [자동적으로 갖게] 됩니다.

착상의 시간이 이루어지면
임신의 기간은 따라옵니다.
사람은 [자신이 이미 얻은 것]을 더 이상 갈구하지 않습니다.
[고요함]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바라던 모습이 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에 [성공]한 후에야
[안식일]을 [휴일]로 지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일하는 6일의 [결과물]입니다.
[6일의 의미]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안식일을 단지 [육체적인 피로]를 풀기 위한 [휴식의 시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만약
의식 안에서
[원하는 인상을 각인]하는 것에 실패한다면
[과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즉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죄의 어원은 ‘missing mark 과녁에서 벗어나다’ 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내는 것에 실패]하는 것,
즉 [과녁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 상태에서는 [마음의 평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약 다가와 그대들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대들은 죄가 없을지니.”

만약
목적을 소망하고 갈구하는 욕망의 상태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인생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몫에 만족했었을 것이고
죄를 결코 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 무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6일 동안] 일을 해서, 즉 [마음의 변화]를 만들어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목표를 성취]하기 전까지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6일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자신의 [목표를 명확히] 한 다음에
[그 모습이 이미 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에 착수해 나갈 것입니다.

[의식]에 [인상]이 새겨졌을 때
[정신적인 휴식]의 [기간]이 따라옵니다.
이것은
신비가에게는 [안식일]이라 불리고,
6일의 기간 동안 [의식에 각인된 인상]은
[임신상태]를 거친 후에
[물질 세상]에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은 육신을 입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상이 현실로[ 드러나게 되는 것에 따라 깨어질 안식일은,
곧바로 또다시 인간으로 하여금 [또 다른 목표]를 갖게 하고,
[또 다시 일하는 6일의 기간]을 거치게 만들 것입니다.


사람은 잠에 드는 동안 [욕망]이란 매개체를 통해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 욕망을 실현시킬 때까지는 휴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휴식]에 들어가고 안식일을 지킬 수 있기 전에
그리고
[평화]와 두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게 하기 전에,
반드시
그는 [명사수]가 되어 [과녁]을 맞히는 비밀,
즉 [6일 동안 일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 [비밀]은
[객관적인 상태]를 떠나버리게 하고 
자신을 [주관적인 것]에 맞추는 것입니다.

이 [비밀]은
[여호와]라는 신성한 이름 안에 나타나 있고,
자신의 아들 야곱을 축복한 [이삭]의 이야기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성경의 *드라마]에 나타나 있는 것에 맞춰서
[공식을 *적용]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매일 [영적인 *표적]의 중심을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자신의 마음 안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했을 때에만
[정신적인 휴식기간]인 [안식일]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는 이야기’에는
[6일(정신적인 기간)의 일하는 시간]과
[휴식]을 취하는 [7번째 날]이 아름답게 표현되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감옥에서 누군가를 풀어주는 것이 [유대인의 관습]이었습니다. 
이때 유대인에게
강도인 바라바를 풀어주거나
구세주 예수를 풀어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외쳤습니다.

“바라바를 풀어주어라.”

그 때문에 바라바는 풀려났고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더 나아가서
구세주 예수는 [여섯 번째] 날에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일곱째] 날에 [무덤]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의 [첫째] 날에 [부활]했습니다.

여기서의 [구세주]는
여러분이 지금 [인식]하고 있는
[불만족스러운 상황]에서
‘[여러분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강도인 [바라바]는
[여러분이 소망하는 것]을
여러분에게서 빼앗아가는 ‘[여러분 자신의 현재 관념]’입니다.

여러분 [구세주] 혹은 [욕망]은
그대가 모르는 길을 갖고 있으니,
그의 길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 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스스로의 *해결책]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속박]되어 있다면
자연스럽게 [자유]에 대한 욕망이 떠오릅니다.
[속박]되어 있을 때는 [자유]가 여러분을 구원해 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구세주]입니다.


이 위대한 [부활]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구세주]를 발견한 후에
강도인 [바라바]를 풀어주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관념]을 풀어주고
여러분의 [구세주]를 십자가형에 처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미 원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식]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지금 짓누르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라바]입니다.
이런 문제로부터 여러분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구세주]입니다.

여러분의 문제나
여러분의 한계 지워진 감각으로부터
[의식을 철수]하여
[바라바]를 풀어줍니다.

바라바는 여러분이 구하고 있는 [자유를]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한계에서 벗어나 여러분이 자유롭다는 느낌을 갖고
[하나의 *뚜렷한 정신적인 상태]를 [확고히 *만들어서]
여러분의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여러분은
감각이 내놓는 증거를 거부하고
내부에서 자유의 기쁨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런 자유의 상태를 “나는 자유롭다.”, “끝났다.”
라고 외칠 수 있도록 현실처럼 느낍니다.
[내적인 상태를 확고히 하는 것], 다시 말해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는 [여섯째 날]에 일어납니다.

이 날 해가 지기 전에
여러분은 “그것은 이루어졌다.”, “끝났다.” 라는 느낌에 의해서
[확고하게 *완성]해야만 합니다.
 
[안식일] 또는 [정신적인 안식]은
이런 [내적인 앎] 뒤에 찾아옵니다.
여러분은 땅 속에 묻혀있고, 무덤에 들어가 있는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다가온 장애들이 산더미 같고,
여러분 앞에 나타나는 벽이 넘어 갈 수 없는 듯이 보일지라도,
십자가형에 처해져서 땅 속에 묻힌
여러분의 구세주(여러분이 지금 갖고 있는 내적인 확신)가
자기 자신을 [부활]시킬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정신적인 *휴식]을 겪게 될 것입니다.

[정신적인 휴식]의 기간인 [안식일]을 거행함으로써,
다시 말해
여러분이 [실제로 자유롭게] 되었다면
여러분의 것이었을 [마음의 태도]를
사실로 받아들임으로써
여러분은 주의 [약속]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육신을 입게 될 것이고,
내적인 확신은 스스로 형체 안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신이 하던 모든 일로부터 일곱째 날에 쉬시더라.”

여러분의 [의식]은
“좋다.”, “끝났다.” 는 앎 속에서 쉬고 있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면 그 날에 일이 완성되었다는 증거가
세상 속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그때에 여러분의 객관적인 감각은
그 의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빌고다드 부활. 265-27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