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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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 명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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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얼나(靈我) 아트만(Atman)
맑고 깨끗하며 가없이 큰 빔이신 높은 얼님 淸淨絶大空尊靈
삼독 삼악의 (제나) 죽고파도 못 죽어 欲死毒惡猶不刑
진선미의 여의주를 찾고자 하니 求眞善美如意珠
물들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 금강의 말씀 (이루리) 不染不壞金剛經
(1957.2.15)
淸淨(청정):밝고 깨끗함.비물질의 성상(性狀) 刊 '죽일 형.
如意珠(여의주):영묘한 구슬(mani), 얼나의 상징물 染:물들일 염
壞:무너질 괴 毒惡(독악) '삼독(貪瞋痴)과 삼악(殺盜淫)
金剛 (금강 rajha) 불변 영원한 얼나의 별칭
석가가 읽은 경전은 베다경이다. 석가가 5명(五明)에 정통했다는 것은 5베다에 조예가 깊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석가는 베다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독자적인 구도의 길을 걸어 금강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으
니 석가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을 하였다. 그래서 석가도 공자의 말대로 인류의 스승이 될 자격을 얻었다.
예수와 석가의 사상은 가장 가깝다기보다는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를 말하였는데 석가는 니르바나(Nirvana)를 말하였다. 예수는 생각으로 잡은 하느님을 얼( )이
라 하여 하느님 아들이라 하였다. 석가는 얼을 다르마(Dharma, 法)라고 하여 법신(法身)이라 하였다. 예수는 아버지와 아들로 비유하였는데 석가는 니르바나가 산이라면 다르마(法)는 산에서 솟는 옹달샘이
라고 비유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석가가 읽은 베다경에도 니르바나에 해당하는 브라흐(Brahman)이 있고 다르마에 해당하는 아트만(Atman)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석가는 그 낱말을 버리고 새로
브라흐만 대신에 니르바나를, 아트만 대신에 다르마라 하였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다.
석가는 브라흐만이나 아트만에 대한 옛사람들의 생각이 모자란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파니사드에 보면 브라흐만을 만유(萬有)라 하는가 하면 아트만을 심장 속에 들어 있는 손가락 만한 것이라고 하였다. 절대성과 형이상이 유치한 단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의 사상을 버리고 새로운 낱말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석가에 앞서 베에단타 학파들이 그런대로 이미 불이일원설(不二一元說). 청정불이설(淸淨不二說), 불이불이설(不二不異說)등을 주장하었다. 류영모가 베다경에 관한 책을 읽고 이 한시를 썼다.
석가가 브라만교와 차별화를 한 것은 예수가 유대교와 차별화한 것과 같다. 예수가 이르기를 "낡은 옷에다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그러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푸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오 9 :I6 -17)고 하였다.
우파니샤드 경전에 전해 오는 아트만이나 예수의 프뉴마와 석가의 다르마는 같은 뜻으로 생각하면 된다. 류영모는 아트만에 대해서 말하기를 "만물(萬物)을 이룬 것이 하느님의 로고스( )라면 이것은
바로 참된 생각을 말한다. 로고스가 말씀이라면 생각하지 않고는 나올수가 없다.참된 생각을 예수는 얼(靈),노장은 道 석가는 법(法)이라고 하였다. '아트만'도 마찬가지다"라고 하였다. 헤르만 헤세는 이르기를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다. 이 신성을 인도인은 아트만이라 하고 증국인은 도(道)라 하며 기독교인은 얼(靈)이라고 한다. 이것은 진리의 빛으로 하느님 자체다."(헤르만 헤세 禪 -나의신앙)
맑고 깨끗하며 가없이 큰 빔이신 높은 얼님 淸淨絶大空尊靈
청정(淸淨)하다는 말은 물질(物質)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질이란 허공에 비기면 더러운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몸에서 나온 것이 참으로 더러운 것이다. 이 몸뚱이가 있는게 더러운 것이다. 그 다음에 더러운 것은 우리들의 집안이다. 판잣집이라도 가진 것은 안 가진 것보다 더 더럽다. 정신이 들자면 집을 버려야 한다. 물질이란 더러운 것이다. 물질을 차 버리고 초월해야 깨끗해진다. 하느님
을 찾는데 물질에 만족하면 안 된다."
물질이 아닌 허공은 청정하고 거룩하다. 류영모는 절대공(絶對空)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허공은 맨 처음 생명의 근원이요 일체의 근원이다. 처음도 없고 마침도 없는 하느님이다. 허공은 우리의 오관
(五官)으로 감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공은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다. 잣알 하나 깨어 보니 빈탕이라는 그따위 허공이 아니다.
단 하나의 존재인 온통 하나가 허공이다. 환상(幻像)의 물질을 색계(色界)라 한다. 유일 존재의 허공에 색계가 눈에 티끌과 같이 섞여 있다. 허공은 하느님의 맘으로 느껴진다. 허공을 석가나 장자가 얘기했는데 이것이 이단시(異端視)되었다."
존령(尊靈)이란 하느님이란 말이다. 무한 심연의 절대 허공이 영원한 생명인 성령으로 가득찼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포함한 만물이 있게 되었으니 지극히 높은 님인 것이다. 우리는 그 존령의 님을 그리
워하고 사랑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란 생령(生靈)은 이상하다. 두발로 거닐어 이상하고, 머리를 꼿꼿이 두어야 다닐 수 있으니 이상하고, 나를 생각하니 이상하고, 생각을 생각하니 이상하다. 제 여편네와
자식들 먹일 것만 생각하면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 나와 무한 영원한 존령(하느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상한 느낌이 들면서 내가 생령이라는 것을 깨닫게 마련이다. 생령을 가만히 깨닫고 보면 자기가 보잘 것없고 하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여러분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하느님 아버지와 같지 않아서 하늘에서 떨어져 여기 온 이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원대상일명(遠大上一命)을 생각하고,위로 하느님께로 올라 갈것을 일편단심해야 할 것이다."(다석어록)
삼독 삼악의 (제나) 죽고파도 못 죽어 欲死毒惡猶不刑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령의 나, 허공의 나를 모르기 때문에 탐진치 삼독의 나를 내세운다. 이 삼독의 나는 온 세상을 다 잡아먹어도 배부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삼악(三惡)은 살인. 음란, 도둑질인데
몸에서 그 짓이 나온다 하여 신업(身業)이라 한다. 신업의 근본은 의업(意業)인 삼독이다. 탐진치 이 세 가지가 독(毒)으로 뱃속 밑에서 꿈틀거려 삼악을 저지르게 된다. 이제 삼독의 나와 싸워야 한다. 이 삼독의 나를 이겨야지 남을 이기면 무엇 하나. 삼독의 제나를 이기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은 없다."(『다석어록』)
석가가 네팔의 돌산에서, 예수가 팔레스타인의 돌산에서 죽기로 고행 수도를 한 것은 삼독의 나를 죽이고 싶어서였다. 죽을 결의가 없고서는 그러한 극한의 고행을 하지 못한다. 삼독의 나로 사는 것이 아무런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참나인 하느님을 깨달은 다음에는, 짐승인 몸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데 요긴하게 쓸 심부름꾼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일할 수 있을 만큼만 돌보아 주기로 한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식색(食色)을 위주로 하는 몸생명은 거짓 생명으로 부정한다. 오로지 이 몸생명을 위해 일하다가 죽어 그만두게 된
다면 정말 서운한 일일 것이다. 이 몸뚱이는 멸망한다. 죽어야 할 것이라 죽는다." (다석어록)
진선미의 여의주를 찾고자 하니 求眞善美如意珠
진 선 미의 여의주란 참나(眞我)인 하느님 아버지를 상징한 것이다. 예수도 하느님을 구슬에 비유하였다. "하늘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는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마태오 13.45-46)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마테오 6:21))고 하였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마음의 중심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에게로 옮겨가는 것이다. 마음의 중심이 아직도 땅의 그 누구나 그 무엇에 있다면 그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시집간 색시가 마음이 친정에만 있다면 그 색시는 시집간 것이 못 된다.
사람의 마음은 진선미의 님을 그리며 좇아간다. 그런데 바른 진 ·선 ·미를 알지 못하고 유사(類似) 진 선 미에 빠지고 만다. 그것은 생명을 잘못 투자한 것이다. 생명을 잘못 투자하면 그 인생은 실패한 것이다.
류영모는 바른 진 · 선 · 미를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에는 진 · 선 · 미가 없다. 진 · 선 · 미는 영원해야 하는데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은 참 진 · 선 · 미가 아니다. 참된 진 · 선 · 미는 하늘나라에 있다.
그러나 이를 잊어버리지 말라고 이 세상에는 사이비(似而非)한 진 · 선 · 미를 둔 것이다. 하늘나라에는 이 세상에서처럼 진 · 선 · 미가 따로따로 있지 않을 것이다. 절대생명인 하느님은 진이면서, 선이면서 미다. 진 · 선 · 미가 하나다."
마하트마 간디도 같은 생각을 하였다. "참(truth,眞)은 찾지 않으면 않되는 영원한 생명이다. 미와 진은 진에 따라온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예수는 참(眞)을 찾고 드러냈다. 그러므로 예수야말로 최고의 예술
가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일지라도 그 성질이 착하지 않으면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주 못생긴 추남이지만 일생 동안 진리를 위해 힘썼기 때문에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M.K 간디 간디문집)
물들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 금강의 말씀 (이루리) 不染不壞金剛經
류영모는 이르기를 "이 세계는 단연코 참은 아니다. 참을 찾으려고 하였고 나타내려 하였다. 그러므로 글도 말도 한가지다. 말씀 가운데 사람들이 가까이 하고 외우려 한 것이 동서고금의 경전이다. 분명히
경전의 원 줄기는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현 세상에도 몇 사람은 받아 가지고 이어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정신줄이라고 한다. 성경이라는 경(經) 자는 줄기 경(莖) 자와 뜻이 같다"라
고 하였다. 경전 가운데는 몇천 년이고 몇만 년이고 없어지지 않는 말씀이 있다. 그것이 물들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 금강의 말씀이다.
예수는 선지자의 말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의 모자라는 생각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진리의 말씀이다. 진리의 말씀이 모여 경전이 된다.
인도에서는 강가(간지스)강에서 목욕하는 것이 중요한 종교의식이 되어 있다. 강가강의 더러워진 물에 목욕을 한다고 심신이 깨끗하게 되어 구원받는다는 것은 미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안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다. "강가(ganga)강은 사람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 맘속의 강에 몸을 씻지도 못하고 그 효력을 받지도 못한채남아있다."(The Ganga flows in man's heart, yet man in unable to
bath in it and remain unaffected - M.K간디 '날마다의 명상,)이 말은 옅은 생각을 깨우치는 금강의 말씀이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22. 얼나(靈我) 아트만(Atman)|작성자byunsdd71074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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