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제나에서 얼나로 (다석 류영모 어록) 본문
제나에서 얼나로 (다석 류영모 어록)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영적 천재 류영모 선생의 주옥 같은 깨달음의 어록 드디어 출간
20세기를 관통하며 살다 간 다석 류영모의 가슴에서는
동양과 서양이,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
사상의 옥동자가 잉태하고 자라나 꽃을 피웠다.
기독교, 불교, 유교, 노장 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어 독창적인 종교 철학의 체계를 세운 종교일원론자이자 사상가, 철학자, 교육자. 20세기 한국이 낳은 정신적인 큰 스승이자 진정한 의미의 ‘종교개혁자’로, 땅의 어버이로부터 받은 몸과 맘의 거짓된 제나(EGO)를 벗어나 우주의 주재자이자 우주정신이신 한얼님(니르바나님)이 주시는 얼나로 솟나(부활)는 길을 가리켜 보였다.
본서는 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강의한 내용의 속기록 중에서 가려뽑아 분야별로 정리한 것으로 명실공히 다석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만하다.
[출판사 서평]
동양과 서양이 만나 잉태한 “사상의 옥동자”
글: 유영일 (수필가, 번역가, 『백일 감사』의 저자)
서른 고개를 두 해쯤 앞둔 새파랗게 젊은 시절, 나는 갑자기 실업자 신세가 되는 바람에 하숙집에서 뒹굴대며 성경을 읽고 지내다가 전도서와 아가서에 심취하게 되었고, 우연히 집어든 신문 쪼가리에서 기독교 계통 출판사에서 편집사원을 모집한다는 쪽광고를 보고는 이것이 운명이다 싶어 응시하였다. 과연 그곳은 나의 운명이었다. 거기에 몸담고 있던 40여 명의 동료 편집사원 중에서 인연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까. 상대는 신학대학을 갓 졸업한 목사 후보생이었으므로 당연히 결혼의 조건은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나는 교회에 꼬박꼬박 잘 다니겠노라는 맹세를 하고서야 가까스로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는데, 물론 그 당시엔 정말로 진심이었다. 사귄 지 3개월 만에 결혼까지 해치웠으니 번갯불에 콩 볶아먹는 속도이긴 했지만.
성서대백과사전 편집자로서 기독교의 정수가 과연 무엇인지 머릿속에 열심히 물음표와 느낌표를 그려가면서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는 새내기 신랑에게, 어느 날 뜻밖의 제안이 들어온다. 편집 경력이 총 3년도 안 되는 풋내기에게, 신생 단행본 출판사의 편집장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월급이 거의 두 배에 가까웠으니, 그런 제안에 동하지 않을 가난한 가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회사 사장님의 종교가 불교라는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국내에서 선두를 다투는 단행본 출판사로 성장했지만, 당시에는 이제 막 출발하는 단계여서 모든 것이 불확실한 환경이었다. 독실한 불교인이셨던 사장님은, “머리는 늘 차갑게 비워두고, 두 손만은 바지런히 놀리라”는 고 백성욱 박사님의 말씀을 가슴의 한가운데에 담고, 금강경 독송을 위주로 하는 수행자이셨다. 그분은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 식으로 종교의 물을 들이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었지만, 그분이 뜨문뜨문 던지셨던 말씀들은 젊은 나에게 비수와도 같이 꽂혀서 세월을 두고 새김질되고 발효되어 갔던 것 같다. “오는 손님 막지 않고 가는 손님 말리지 않는다”도 그중의 하나이고,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금강경 속의 한 구절도 그분으로 인해 가슴에 새겨졌다.
어느 날엔가, 꽤 규모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출판사 서가의 한 구석에서 그분이 꺼내어 나에게 건네준 불교개론서는 사실 내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그 책을 받자마자 읽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 회사를 일년 만에 그만두고, 예전에 근무했던 출판사로 돌아가게 된다. 어린이 잡지의 편집장으로서였다.
9시에서 18시까지 발목이 묶이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나날 속에서도 내 머릿속에는 진리에 대한 갈증이 그치지 않았고, 그것은 기독교라는 울타리를 나도 모르게 뛰어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윤회의 비밀』을 읽고 나서는 비로소 진리의 물꼬가 트인 것 같은 느낌표를 안게 되었고, 불교에 대한 본격적인 탐색으로 이어졌다. 그 무렵, 한 해 전에 건네받았던 불교개론서를 펼쳐들었고, 내 머릿속에서는 지진이 일어났다.
탐색이 넓어지고 깊어질수록 예수에 대한 나의 이해도 기독교라는 도그마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전개되어지는 것이 분명했다. 예수와 석가가 가리켜 보이는 바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 두 성인이 서로 만나게 된다면 얼싸안을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것, 불교인들에게 사랑의 실천이 불충분하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수행이 불충분하다는 것 등이 체감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찾고 또 찾아서 도달해야 할 목표는 동일하다. 자기 안에 이미 내재된 신의 성품(혹은 부처님 성품)을 알아차리고 깨어나는 것. 이 지향점을 가리켜 보이는 것은 비단 기독교와 불교만이 아니다. 유교, 도교, 이슬람교 등도 다 마찬가지다. 종교다원주의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종교일원주의인 것이다. 모든 종교가 가리켜 보이는 것은 ‘하나’인 것이다.
20세기 한국이 낳은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영성 철학자인 다석 류영모는 인간으로서의 에고(몸나, 맘나), 곧 ‘제나’에서 벗어나 영이 주인이 되는 ‘얼나’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가리켜 보인 선구자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천 가지 만 가지의 말을 만들어 보아도 결국은 하나(절대)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 하나를 깨달아야 한다. 깨달으면 하나이다. 한얼님의 나가 ‘한나’, ‘하나’이다.
사람이 날마다 새롭고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얼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한얼님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는 제나(自我)가 죽어 한얼님의 얼로 눈이 뚫리고, 코가 뚫리고, 입이 뚫리고, 마음이 뚫리고, 알음알이(知)가 뚫려야 참으로 한얼님의 아들인 얼나가 엉큼엉큼 성큼성큼 자라게 된다.
우리 사람의 값어치가 무언가? 몇천 몇만 년이 걸려도 한얼님의 얼로 한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얼나라에서 떨어진 한얼님의 아들이란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한얼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일이다. …우주이시며 우주의 정신인 한얼님이 내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임을 깨닫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한얼님을 그리며 생각하면 정신이 위로 오르게 된다. 한얼님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명상이다. 기도는 내 생각이 한얼님께로 피어 올라가는 것이다. 참으로 한얼님의 뜻을 좇아 한얼님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몸삶은 덧없어도 얼삶은 영원하다.
우리 맘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 한얼님의 말숨(말씀)이 타고 있다. 그것이 거룩한 생각이다. 사람은 한얼님의 말숨이 불타는 성화로(聖火爐)이다. 이것이 현 존재이다.
다석은 한결같이 우리의 진정한 자아인 ‘얼나’, 곧 ‘한얼님’을 가리켜 보이므로, 다석 사상을 풀이한 어느 책을 읽든 똑같은 지향점을 경험하게 되겠지만, 이번에 간행된 『제나에서 얼나로: 다석 류영모 어록』은 그의 동서회통의 한얼 사상을 한 권의 책을 통해 가장 넓고 깊게 음미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를 관통하며 살다 간 그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은 불교인인가? 오케이.
당신은 그리스도인인가? 오케이.
그러나 당신이 만약 불교인이거나 그리스도인이기만 하다면,
당신은 아직 세상의 반쪽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마젤란이나 마르코 폴로가 세계일주 항해를 함으로써 비로소 세계지도가 완성되었지만, 당신이 만약 불교인이나 그리스도인에만 머문다면, 당신은 아직 정신적인 세계일주를 하지 못한 채 동양인이나 서양인으로만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3차원 위성지도(내비게이션)를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데도 평면 지도책만을 고집하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
서양과 동양이, 불교와 기독교가 만난 이후, 지구촌이 명실공히 하나가 되면서, 종교간의 활발한 교류를 넘어서서 이제는 종교에서도 진정한 통섭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독교든 불교든 동일한 달을 가리켜 보이는 손가락들이라는 것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3차원적 세상에서 내비게이션이 발명되어 보편화되었듯이, 정신계에서도 마음이 가야 할 길을 가리켜 보이는 내비게이션이 발명되었다. 아직은 그것을 활용하는 이가 적을 뿐. 기독교와 불교가 만나서 손잡고 만들어낸 정신의 내비게이션, 그것을 사용하게 된 자의 자유와 풍요로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구인에게 주어진 특혜가 아닐까.
동양이 음이라면, 서양은 양이다.
음과 양이 만나면 사랑이 싹트고 자라나 아기를 낳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20세기를 관통하며 살다 간 다석 류영모의 가슴에서는
동양과 서양이,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
사상의 옥동자가 잉태하였다. 싹이 트고 자라나 열매를 맺었다.
다석 류영모를 만나는 것은, 바로 그 열매를 향유하는 것이다.
다석의 말씀 마디마디에 오래 머물며 그 열매를 맛보고 음미하기를!
열매는 열매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미래를 위한 씨앗이 들어 있다.
그렇게 열매를 향유하고 또 씨앗을 퍼뜨려서 마침내 지구가 명실공히 하나 되기를!
그렇게 저마다의 신성(불성)으로 불이 밝혀지기를!
[저자 소개]
다석 류영모 (1890~1981)
젊어서 기독교에 입문한 이후 도그마에 물들지 않고 진리 탐구에 매진, 불교와 도교와 유교를 하나로 꿰는 “동서통합의 영성철학자”로 거듭났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대로 “20세기 최대의 사건이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다석의 가슴속에서는 동서양의 종교가 만나서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사상의 옥동자가 잉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이래 줄곧, 몸과 맘의 ‘제나(EGO)’에서 우주의 주재자이자 우주정신 자체인 ‘얼나’로 솟나(부활)는 길을 가리켜 보였다. 김교신, 함석헌, 이현필, 류달영, 김흥호 같은 ‘겨레에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최근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독창적 종교사상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
엮은이: 박영호 (1934~ )
함석헌의 글에 감명을 받고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어 오던 중, 함석헌의 스승인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마음이 꽂혀서 그 길로 제자가 되었다. 1965년 스스로 독립하라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5년간 혼자 공부한 끝에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하였으며, 팔순이 되신 다석 선생으로부터 “졸업증서 ? 마침보람”이라고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사상을 통해 얼나로 솟나는 길을 가리켜 보이는 그의 저서로는 『다석 전기』, 『노자와 다석』, 『다석 중용 강의』, 『다석 씨알 강의』, , 『공자가 사랑한 하느님』, 『잃어버린 예수: 다석 사상으로 읽는 요한복음』, 『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 다석 사상으로 풀이한 도마복음』 등이 있다.
[목차]
머리말제 맘속에서 터져나온 얼의 샘물
일러두기
1말숨(말씀), 우주에 가득 찬 얼생명
2없이 계시는 한얼님
3천지자연은 한얼님이 주신 글월
4얼나 찾기
5예수의 얼은 영원한 현재
6삶이란 사형수의 집행유예 기간
7우주의 신비, 그리고 이제 여기
8빈탕한 데(허공)
9내 속에 가장 옹근 속알, 가온찍기(「 · 」)
10기도와 예배 ―내 안의 신비를 두텁게 깊이 숨쉬기
11진정한 얼사귐
12교육: 스스로 올(理)을 타고 갈 수 있도록
13몸성히(건강)의 길
14올(理)을 타야(과학)
15제나에서 얼나로
16씨알(民)을 위하는 일
17땅은 우리의 어머니요 밥그릇
18평화를 이루려면
19그리스도교가 가리켜 보이는 것
20불교가 가리켜 보이는 것
21유교가 가리켜 보이는 것
22세 가지 독(毒)으로부터의 자유
[책 속으로]
천 가지 만 가지의 말을 만들어 보아도 결국은 하나(절대)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 하나를 깨달아야 한다. 깨달으면 하나이다. 한얼님의 나가 ‘한나’, ‘하나’이다.
(본문 중에서)
사람이 날마다 새롭고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얼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한얼님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는 제나(自我)가 죽어 한얼님의 얼로 눈이 뚫리고, 코가 뚫리고, 입이 뚫리고, 마음이 뚫리고, 알음알이(知)가 뚫려야 참으로 한얼님의 아들인 얼나가 엉큼엉큼 성큼성큼 자라게 된다.
(본문 중에서)
우리 사람의 값어치가 무언가? 몇천 몇만 년이 걸려도 한얼님의 얼로 한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얼나라에서 떨어진 한얼님의 아들이란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한얼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일이다. …우주이시며 우주의 정신인 한얼님이 내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임을 깨닫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한얼님을 그리며 생각하면 정신이 위로 오르게 된다. 한얼님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명상이다. 기도는 내 생각이 한얼님께로 피어 올라가는 것이다. 참으로 한얼님의 뜻을 좇아 한얼님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몸삶은 덧없어도 얼삶은 영원하다.
(본문 중에서)
우리 맘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 한얼님의 말숨(말씀)이 타고 있다. 그것이 거룩한 생각이다. 사람은 한얼님의 말숨이 불타는 성화로(聖火爐)이다. 이것이 현 존재이다.
(본문 중에서)
사람이 우주의 비롯인 맨첨(太初)을 잘 모른다. 우리 사람은 온통(전체)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고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라 온통(전체)으로 온전(완전)한 한얼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온통이요 온전인 한얼님을 그리워한다. 태초요 영원인 한얼님은 우리 존재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한얼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 참된 삶이요 행복한 삶이다. 우리가 여기 왜 있나? 이 까닭을 알자면 한얼님 아버지에게 들어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우리의 머리 위에 한얼님을 이고서 거룩한 생각을 피워야지 다른 생각을 할 것 없다. 한얼님을 뚜렷이 한얼님 아들로 뚜렷할 일이다. 우리 사람의 값어치가 무언가? 몇천 몇만 년이 걸려도 한얼님의 얼로 한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얼나라에서 떨어진 한얼님의 아들이란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한얼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일이다.
(본문 중에서)
한얼님을 섬기는 데는 물질이 안 든다. 한얼님이 아버지임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섬기는 것이다. 안 잊어버린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으로 곧 정신의 일이다. 우주이시며 우주의 정신인 한얼님을 내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임을 깨닫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한얼님을 그리며 생각하면 정신이 위로 오르게 된다. 한얼님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명상이다. 기도는 내 생각이 한얼님께로 피어 올라가는 것이다. 한얼님의 뜻을 좇아 한얼님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몸삶은 덧없어도 얼삶은 영원하다.
(본문 중에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영적 천재 류영모 선생의 주옥 같은 깨달음의 어록 드디어 출간
20세기를 관통하며 살다 간 다석 류영모의 가슴에서는
동양과 서양이,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
사상의 옥동자가 잉태하고 자라나 꽃을 피웠다.
기독교, 불교, 유교, 노장 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어 독창적인 종교 철학의 체계를 세운 종교일원론자이자 사상가, 철학자, 교육자. 20세기 한국이 낳은 정신적인 큰 스승이자 진정한 의미의 ‘종교개혁자’로, 땅의 어버이로부터 받은 몸과 맘의 거짓된 제나(EGO)를 벗어나 우주의 주재자이자 우주정신이신 한얼님(니르바나님)이 주시는 얼나로 솟나(부활)는 길을 가리켜 보였다.
본서는 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강의한 내용의 속기록 중에서 가려뽑아 분야별로 정리한 것으로 명실공히 다석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만하다.
[출판사 서평]
동양과 서양이 만나 잉태한 “사상의 옥동자”
글: 유영일 (수필가, 번역가, 『백일 감사』의 저자)
서른 고개를 두 해쯤 앞둔 새파랗게 젊은 시절, 나는 갑자기 실업자 신세가 되는 바람에 하숙집에서 뒹굴대며 성경을 읽고 지내다가 전도서와 아가서에 심취하게 되었고, 우연히 집어든 신문 쪼가리에서 기독교 계통 출판사에서 편집사원을 모집한다는 쪽광고를 보고는 이것이 운명이다 싶어 응시하였다. 과연 그곳은 나의 운명이었다. 거기에 몸담고 있던 40여 명의 동료 편집사원 중에서 인연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까. 상대는 신학대학을 갓 졸업한 목사 후보생이었으므로 당연히 결혼의 조건은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나는 교회에 꼬박꼬박 잘 다니겠노라는 맹세를 하고서야 가까스로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는데, 물론 그 당시엔 정말로 진심이었다. 사귄 지 3개월 만에 결혼까지 해치웠으니 번갯불에 콩 볶아먹는 속도이긴 했지만.
성서대백과사전 편집자로서 기독교의 정수가 과연 무엇인지 머릿속에 열심히 물음표와 느낌표를 그려가면서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는 새내기 신랑에게, 어느 날 뜻밖의 제안이 들어온다. 편집 경력이 총 3년도 안 되는 풋내기에게, 신생 단행본 출판사의 편집장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월급이 거의 두 배에 가까웠으니, 그런 제안에 동하지 않을 가난한 가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회사 사장님의 종교가 불교라는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국내에서 선두를 다투는 단행본 출판사로 성장했지만, 당시에는 이제 막 출발하는 단계여서 모든 것이 불확실한 환경이었다. 독실한 불교인이셨던 사장님은, “머리는 늘 차갑게 비워두고, 두 손만은 바지런히 놀리라”는 고 백성욱 박사님의 말씀을 가슴의 한가운데에 담고, 금강경 독송을 위주로 하는 수행자이셨다. 그분은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 식으로 종교의 물을 들이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었지만, 그분이 뜨문뜨문 던지셨던 말씀들은 젊은 나에게 비수와도 같이 꽂혀서 세월을 두고 새김질되고 발효되어 갔던 것 같다. “오는 손님 막지 않고 가는 손님 말리지 않는다”도 그중의 하나이고,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금강경 속의 한 구절도 그분으로 인해 가슴에 새겨졌다.
어느 날엔가, 꽤 규모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출판사 서가의 한 구석에서 그분이 꺼내어 나에게 건네준 불교개론서는 사실 내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그 책을 받자마자 읽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 회사를 일년 만에 그만두고, 예전에 근무했던 출판사로 돌아가게 된다. 어린이 잡지의 편집장으로서였다.
9시에서 18시까지 발목이 묶이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나날 속에서도 내 머릿속에는 진리에 대한 갈증이 그치지 않았고, 그것은 기독교라는 울타리를 나도 모르게 뛰어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윤회의 비밀』을 읽고 나서는 비로소 진리의 물꼬가 트인 것 같은 느낌표를 안게 되었고, 불교에 대한 본격적인 탐색으로 이어졌다. 그 무렵, 한 해 전에 건네받았던 불교개론서를 펼쳐들었고, 내 머릿속에서는 지진이 일어났다.
탐색이 넓어지고 깊어질수록 예수에 대한 나의 이해도 기독교라는 도그마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전개되어지는 것이 분명했다. 예수와 석가가 가리켜 보이는 바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 두 성인이 서로 만나게 된다면 얼싸안을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것, 불교인들에게 사랑의 실천이 불충분하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수행이 불충분하다는 것 등이 체감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찾고 또 찾아서 도달해야 할 목표는 동일하다. 자기 안에 이미 내재된 신의 성품(혹은 부처님 성품)을 알아차리고 깨어나는 것. 이 지향점을 가리켜 보이는 것은 비단 기독교와 불교만이 아니다. 유교, 도교, 이슬람교 등도 다 마찬가지다. 종교다원주의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종교일원주의인 것이다. 모든 종교가 가리켜 보이는 것은 ‘하나’인 것이다.
20세기 한국이 낳은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영성 철학자인 다석 류영모는 인간으로서의 에고(몸나, 맘나), 곧 ‘제나’에서 벗어나 영이 주인이 되는 ‘얼나’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가리켜 보인 선구자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천 가지 만 가지의 말을 만들어 보아도 결국은 하나(절대)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 하나를 깨달아야 한다. 깨달으면 하나이다. 한얼님의 나가 ‘한나’, ‘하나’이다.
사람이 날마다 새롭고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얼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한얼님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는 제나(自我)가 죽어 한얼님의 얼로 눈이 뚫리고, 코가 뚫리고, 입이 뚫리고, 마음이 뚫리고, 알음알이(知)가 뚫려야 참으로 한얼님의 아들인 얼나가 엉큼엉큼 성큼성큼 자라게 된다.
우리 사람의 값어치가 무언가? 몇천 몇만 년이 걸려도 한얼님의 얼로 한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얼나라에서 떨어진 한얼님의 아들이란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한얼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일이다. …우주이시며 우주의 정신인 한얼님이 내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임을 깨닫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한얼님을 그리며 생각하면 정신이 위로 오르게 된다. 한얼님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명상이다. 기도는 내 생각이 한얼님께로 피어 올라가는 것이다. 참으로 한얼님의 뜻을 좇아 한얼님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몸삶은 덧없어도 얼삶은 영원하다.
우리 맘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 한얼님의 말숨(말씀)이 타고 있다. 그것이 거룩한 생각이다. 사람은 한얼님의 말숨이 불타는 성화로(聖火爐)이다. 이것이 현 존재이다.
다석은 한결같이 우리의 진정한 자아인 ‘얼나’, 곧 ‘한얼님’을 가리켜 보이므로, 다석 사상을 풀이한 어느 책을 읽든 똑같은 지향점을 경험하게 되겠지만, 이번에 간행된 『제나에서 얼나로: 다석 류영모 어록』은 그의 동서회통의 한얼 사상을 한 권의 책을 통해 가장 넓고 깊게 음미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를 관통하며 살다 간 그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은 불교인인가? 오케이.
당신은 그리스도인인가? 오케이.
그러나 당신이 만약 불교인이거나 그리스도인이기만 하다면,
당신은 아직 세상의 반쪽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마젤란이나 마르코 폴로가 세계일주 항해를 함으로써 비로소 세계지도가 완성되었지만, 당신이 만약 불교인이나 그리스도인에만 머문다면, 당신은 아직 정신적인 세계일주를 하지 못한 채 동양인이나 서양인으로만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3차원 위성지도(내비게이션)를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데도 평면 지도책만을 고집하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
서양과 동양이, 불교와 기독교가 만난 이후, 지구촌이 명실공히 하나가 되면서, 종교간의 활발한 교류를 넘어서서 이제는 종교에서도 진정한 통섭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독교든 불교든 동일한 달을 가리켜 보이는 손가락들이라는 것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3차원적 세상에서 내비게이션이 발명되어 보편화되었듯이, 정신계에서도 마음이 가야 할 길을 가리켜 보이는 내비게이션이 발명되었다. 아직은 그것을 활용하는 이가 적을 뿐. 기독교와 불교가 만나서 손잡고 만들어낸 정신의 내비게이션, 그것을 사용하게 된 자의 자유와 풍요로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구인에게 주어진 특혜가 아닐까.
동양이 음이라면, 서양은 양이다.
음과 양이 만나면 사랑이 싹트고 자라나 아기를 낳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20세기를 관통하며 살다 간 다석 류영모의 가슴에서는
동양과 서양이,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
사상의 옥동자가 잉태하였다. 싹이 트고 자라나 열매를 맺었다.
다석 류영모를 만나는 것은, 바로 그 열매를 향유하는 것이다.
다석의 말씀 마디마디에 오래 머물며 그 열매를 맛보고 음미하기를!
열매는 열매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미래를 위한 씨앗이 들어 있다.
그렇게 열매를 향유하고 또 씨앗을 퍼뜨려서 마침내 지구가 명실공히 하나 되기를!
그렇게 저마다의 신성(불성)으로 불이 밝혀지기를!
[저자 소개]
다석 류영모 (1890~1981)
젊어서 기독교에 입문한 이후 도그마에 물들지 않고 진리 탐구에 매진, 불교와 도교와 유교를 하나로 꿰는 “동서통합의 영성철학자”로 거듭났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대로 “20세기 최대의 사건이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다석의 가슴속에서는 동서양의 종교가 만나서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사상의 옥동자가 잉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이래 줄곧, 몸과 맘의 ‘제나(EGO)’에서 우주의 주재자이자 우주정신 자체인 ‘얼나’로 솟나(부활)는 길을 가리켜 보였다. 김교신, 함석헌, 이현필, 류달영, 김흥호 같은 ‘겨레에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최근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독창적 종교사상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
엮은이: 박영호 (1934~ )
함석헌의 글에 감명을 받고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어 오던 중, 함석헌의 스승인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마음이 꽂혀서 그 길로 제자가 되었다. 1965년 스스로 독립하라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5년간 혼자 공부한 끝에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하였으며, 팔순이 되신 다석 선생으로부터 “졸업증서 ? 마침보람”이라고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사상을 통해 얼나로 솟나는 길을 가리켜 보이는 그의 저서로는 『다석 전기』, 『노자와 다석』, 『다석 중용 강의』, 『다석 씨알 강의』, , 『공자가 사랑한 하느님』, 『잃어버린 예수: 다석 사상으로 읽는 요한복음』, 『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 다석 사상으로 풀이한 도마복음』 등이 있다.
[목차]
머리말제 맘속에서 터져나온 얼의 샘물
일러두기
1말숨(말씀), 우주에 가득 찬 얼생명
2없이 계시는 한얼님
3천지자연은 한얼님이 주신 글월
4얼나 찾기
5예수의 얼은 영원한 현재
6삶이란 사형수의 집행유예 기간
7우주의 신비, 그리고 이제 여기
8빈탕한 데(허공)
9내 속에 가장 옹근 속알, 가온찍기(「 · 」)
10기도와 예배 ―내 안의 신비를 두텁게 깊이 숨쉬기
11진정한 얼사귐
12교육: 스스로 올(理)을 타고 갈 수 있도록
13몸성히(건강)의 길
14올(理)을 타야(과학)
15제나에서 얼나로
16씨알(民)을 위하는 일
17땅은 우리의 어머니요 밥그릇
18평화를 이루려면
19그리스도교가 가리켜 보이는 것
20불교가 가리켜 보이는 것
21유교가 가리켜 보이는 것
22세 가지 독(毒)으로부터의 자유
[책 속으로]
천 가지 만 가지의 말을 만들어 보아도 결국은 하나(절대)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 하나를 깨달아야 한다. 깨달으면 하나이다. 한얼님의 나가 ‘한나’, ‘하나’이다.
(본문 중에서)
사람이 날마다 새롭고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얼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한얼님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는 제나(自我)가 죽어 한얼님의 얼로 눈이 뚫리고, 코가 뚫리고, 입이 뚫리고, 마음이 뚫리고, 알음알이(知)가 뚫려야 참으로 한얼님의 아들인 얼나가 엉큼엉큼 성큼성큼 자라게 된다.
(본문 중에서)
우리 사람의 값어치가 무언가? 몇천 몇만 년이 걸려도 한얼님의 얼로 한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얼나라에서 떨어진 한얼님의 아들이란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한얼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일이다. …우주이시며 우주의 정신인 한얼님이 내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임을 깨닫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한얼님을 그리며 생각하면 정신이 위로 오르게 된다. 한얼님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명상이다. 기도는 내 생각이 한얼님께로 피어 올라가는 것이다. 참으로 한얼님의 뜻을 좇아 한얼님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몸삶은 덧없어도 얼삶은 영원하다.
(본문 중에서)
우리 맘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 한얼님의 말숨(말씀)이 타고 있다. 그것이 거룩한 생각이다. 사람은 한얼님의 말숨이 불타는 성화로(聖火爐)이다. 이것이 현 존재이다.
(본문 중에서)
사람이 우주의 비롯인 맨첨(太初)을 잘 모른다. 우리 사람은 온통(전체)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고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라 온통(전체)으로 온전(완전)한 한얼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온통이요 온전인 한얼님을 그리워한다. 태초요 영원인 한얼님은 우리 존재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한얼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 참된 삶이요 행복한 삶이다. 우리가 여기 왜 있나? 이 까닭을 알자면 한얼님 아버지에게 들어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우리의 머리 위에 한얼님을 이고서 거룩한 생각을 피워야지 다른 생각을 할 것 없다. 한얼님을 뚜렷이 한얼님 아들로 뚜렷할 일이다. 우리 사람의 값어치가 무언가? 몇천 몇만 년이 걸려도 한얼님의 얼로 한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얼나라에서 떨어진 한얼님의 아들이란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한얼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일이다.
(본문 중에서)
한얼님을 섬기는 데는 물질이 안 든다. 한얼님이 아버지임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섬기는 것이다. 안 잊어버린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으로 곧 정신의 일이다. 우주이시며 우주의 정신인 한얼님을 내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임을 깨닫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한얼님을 그리며 생각하면 정신이 위로 오르게 된다. 한얼님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명상이다. 기도는 내 생각이 한얼님께로 피어 올라가는 것이다. 한얼님의 뜻을 좇아 한얼님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몸삶은 덧없어도 얼삶은 영원하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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