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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 명상록 - 1.허공과 물질은 하나로 같다. 空色一如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다석 류영모 명상록 - 1.허공과 물질은 하나로 같다. 空色一如

柏道 2022. 4. 25. 14:44

다석 류영모 명상록

 

1.허공과 물질은 하나로 같다. 空色一如

찾아도 하나(전체)를 못 얻는 게 물질이며 物色不得一色物
속 빈 걸 얕보다가 빈탕(허공)까지 업신여겨 空虛蔑以加虛空
있음에 아첨하고 없음을 깔보면 바보이며 諛有侮無後天痴
빈탕은 같으나 물질은 다른 게 본디 땅 재주 同空異色本地工
꽃 모양 겉 테두리는 하늘(허공)을 열어 뵈잠 花容虛廓天啓示
겉치레 말 으스대는 짓은 사람의 어줍짢은 노릇 花語虛風人妄動
간직해 온 낯 세우기 받아들임을 그만두고 服膺體面容納止
곧은 맘 반듯한 몸가짐으로 빔(허공)에 뚫린 바른 님. 直內方外中空公
(1956.12.27)

物色(물색):찾다. 得:얻을득. 色物(색물):물질,물체. 蔑:업신여길 멸
加:업신여길 가. 諛:아첨할 유. 侮:업신여길 모. 天痴(천치):바보
容:모양 용. 廓 : 둘레 곽. 虛風(허풍) : 과장된 언행. 服膺(복응) :가슴에 품고 간직함.
膺 : 가슴 응. 容納(용납) : 받아들임.

 

천문학자들은 1천억 개가 넘는 별을 가진 은하 우주가 1천억 개 넘게 있는 대우주를 말하고 있다. 몇십 년 전만 하여도 눈으로 겨우 6천개의 별을 헤아렸을 뿐이다.앞으로 천문학자들이 무슨 말을할지 아무도 모른다. 대우주는 알수록 알 수 없는 신비 그 자체다. 그 가운데서도 이것만은 우리가 말할 수 있다. 대우주는 허공과 물질로 되어 있다는 것과 시간과 공간으로 무한하다는 것이다. 중심은 있어도 둘레는 없는 구(球)처럼 느낀 옛 사람들은 대우주를 일원(一圓)이라고 말했다. 천체와 물질을 포용한 단일(單一)허공 전체를 장자는 대괴(大塊)라 하였고, 맹자는 대체(大體)라하였다. 스피노자는 전체를 대자연이라 하여 능산(能産)의 자연과 피산(被産)의 자연을 말하였다. 능산의 자연은 허공일 것이고 피산의 자연이 물질일 것이다. 노자는 허공만을 무극(無極)이라 하고 장자는 물질을 포함한 허공을 태극(太極)이라고 하였다.
예수 석가 노자 장자 공자 맹자는 전체인 대우주가 사람에게 생각을 일으키는 주체(나)와 성령(얼)으로 충만한 것을 깨달았다. 오직 '하나의 나'이므로 존재이고, '영원한 얼'이므로 생명이다. 이와 같이 깨달은 사람들은 대우주를 아버지(하느님)라, 니르바나(Nirvana)라 하였다.

유영모는 "단 하나밖에 없는 온통 하나(전체)는 허공이다.색계(色界)는 물질계이다. 색계는 환상(幻像)이다. 나는 단일 허공을 확실히 느끼는데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느껴진다. 단일 허공에 색계가 눈에 티끌과 같이 섞여 있다 .색계에 만족을 느끼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을 찾을 생각도 못 한다. 색계는 허공에 딸려 있다.허공은 우리 오관(五官)으로 감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공은 무한하다.잣 알 하나를 깨뜨리니 속이 비었다는 그따위 허공이 아니다. 우리는 전체인 단일 허공의 존재(하느님)를 느껴야 한다. 참(眞)이란 허공밖에 없다. 물질인 있음(有)의 색계는 거짓이다." 존재하는 것은 허공인 하느님뿐이다. 불생불멸의 절대존재인 하느님 밖에는 존재하는 것이 없다. 생멸하는 상대적 존재인 색계의 물질이나 천체는 허공 속에서 별똥별처럼 나타나기 무섭게 사라진다. 별의 일생은 수백억 년이 된다 하여도 영원에 비기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색(色)은 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에서 공색일여(空色一如)인 것이다. 공(空)과 색(色)이 대등 하다는 것이 아니다. 반야심경의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이렇게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른체 우주를 논하는 것은 예수를 찾아와 예수의 말씀은 못 알아들은 채 우 예수의 겉옷자락을 잡는 것과 같다.깨달은 이는 우주를 보고 하느님의 존재를 느낀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현상 속에서  우주가 지니고 있는 생명의 율동을 느껴야 한다. 하늘로 머리를 두는 인간은 하늘을 쳐다보며 주에서 생명(하느님)의 고동을 느끼면서 기쁨으로 살라는 것이다." 영모는 불교에서의 색(色)의 뜻을 풀이하기를 "불교에서 색 이라면 물질을 말한다. 물질세계는 깔을 띠어 요망한 것이다. 물질이라는 것은 한낱 하잘 것 없는 것이다. 물질은 무서워 할 것도 착할 것도 없다. 우리의 눈이 빛깔에 홀려 곱게 보이고 요망한 것들이 좋게 보일 때 색물(色物)
을 사랑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찾아도 하나(전체)를 못 얻는 게 물질이며 物色不得一色物 물색(物色)한다는 것은 찾는다는 말이다. 색물(色物)은 물질이나 물체를 말한다. 어떠한 색물도 체이지 전체인 하나(一)가 아니다. 만물을 포용한 허공에서 전체를 본다.나 자신도 허공에 안겨있는 개체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개체는 어느 것이나 전체에서 개체로 떨어진 것이다. 영모는 "우리는 본디부터 여기에 있었던 게 아니고 어디서 떨어져 나왔다는 느낌이 내 속에 있다. 독하고 비천한 이 곳에 낮아지고 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이렇게 타락된 느낌이 있으니까 본디의 습으로 오르려고 한다. 어디서 떨어졌을까. 그곳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곳이 전체인 하나다" 고 하였다.전체의 자격을 잃고 개체가 된 것이 타락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이데거가 '던져진 나(企投)'를 알게 된 것도 같은 이치다. 전체를 잃어버린 개체의 나가 현존재다. 개체의 나가 전체의식을 회복할 때 실존이 된다. 예수 석가는 전체의식을 회복한 실존자들이다. 류영모는 전체인 하나(하느님)를 회복하는 것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서 지나간 나의 무지를 바로 보고 잊어버린 전체를 찾아야 한다. '하나' ,이것을 찾아야 한다. 하나는 온전하다. 모든 것(개체)이 하나를 얻자(得一)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득일(得一)하나, 큰 나(大我) 속에 이것이 있다. 그러니 마침내 하느님 아버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큰 나(大我)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알것이 있다면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로 시작해서 마침내는 하나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강박된 요구가 우리에게 있다. 대종교가, 대사상가가 믿고 말한다는 것은 다 이 하나(전체)이다."

"속 빈 걸 얕보다가 빈탕(허공)까지 업신여겨" 空虛蔑以加虛空 사람들은 가득 찬 것을 좋아하지 빈 것은 아주 싫어한다. 빈 지갑, 빈 뒤주, 빈 금고, 빈 곡간이라면 질색이다. 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없음(무소유)은 죽게 됨을 뜻한다. 그래서 빈털터리라면 사람 대접을 못 받는다. 사람에게 빈 것을 얕보는 버릇이 생겨 저 영원한 빈탕(허공)까지 무시하게 되었다. 거지를 얕보다가 부처님을 내쫓은 것과 같다. 빈탕(허공)이 전체인 하느님 이시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석가와 장자가 허공을 말하였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이단시 하였다. 쓸데 있는 것만 찾는 사람에게는 허공이 쓸데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쓸데 있고 없고는 하늘나라까지 가 보아야 안다. 나는 절대공(絶對空)을 사모한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라야 참이다. 이 허공이 하느님이다. 허공 없이 진실이고 실존이고 어디 있는가. 우주가 허공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있음에 아첨하고 없음을 깔보면 바보이며 諛有侮無後天痴

色이 有고, 空이 無다. 있음(有)에 아첨하는 것은 色物에 아첨하는 것이고, 없음(無)을 깔보는 것은 빈탕(虛空)을 깔보는 것이다. 있음에 빠져 없음을 깔보고 나면 하느님을 모르는 바보가 된다. 60억 인류 가운데 하느님을 바로 아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하느님을 모르면 다른 것은 아무리 안다 해도 천치다. 바보인 저능아들은 오히려 천사처럼 순진해 거룩함을 느끼게 한다. 불교에서는 색(色)은 色物을 뜻하지만 유교에서는 女色을 뜻한다. 한자 色자는 남녀가 얼싸 안고 있는 꼴을 그린 상형문자다. 그래서 色慾이란 낱말이 있다. 공자는 말하기를 "내 아직 속알(얼)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 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吾未見好德如色者也-위령공편)고 하였다. 류영모는 "허공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미인처럼 좋아해야 한다"고 말 하였다. 미색을 좋아하자 미모로 으시대고 사치로 뽐낸다.자연의 경색을 좋아하여 관광도 다니고 사진도 찍는다. 이것이 모두 有에 대한 아첨이다. 허공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을 만큼 허공을 무시한다. 허공이야 없으니 무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지 모르나 허공이야 말로 우리가 경외해야 할 모든 개체의 근원인 하느님이다. 그래도 멍청한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바로 아는 슬기로운 이가 있으니 마하트마 간디가 그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조차도 하느님을 생각하게 할 때 그것이 존재하는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르기를 "밤하늘 별들 사이에 빛나는 초생달이나 해질 무렵 붉게 물든 저녁노을 같은 아름다운 자연 풍경은 그 현상 뒤에 하느님이 계신 것을 생각나게 하는 진리적인 면이 있다. 이것들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창조했기 때문이다. 내가 일몰과 월출의 광경에서 불가사의 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때 나의 영혼은 하느님을 우러르게 된다. 나는 모든 사람이 이러한 창조물에 서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그러나 그러한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도 하느님을 명상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 얼의 활동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에게는 미로나 덫에 지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미모도 마찬가지로 때로는 정신적인 해탈에 방해가 된다"(M.K.간디-어느날 아침의 회견)라고 하였다. 석가는 아예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를 신기루와 같은 환상이나 잠속에서 꾸는 꿈이라고 하였다.(금강경응화비진품) 이처럼 참 사람들은 오히려 있음(有)을 무시하고 없음(無)을 숭상한다. 유는 거짓이요, 無는 참이기 때문이다.

빈탕은 같으나 물질은 다른게 본디 땅 재주 同空異色本地工

허공은 無象이라 다를 까닭이 없다. 同一의 허공으로 전체다. 그런데 물질(色物)은 개체들이라 다다르다. 사람도 모습이 다르고, 음색이 다르고, 지문이 다르다. 아마존 밀림의 보석이라 일컬어지는 아글리아스 나비는 붉고 푸른 무늬가 있는데 그 모양이 나비마다 다 다르다. 이야말로 異色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얼른보면 비슷하게 보이는 얼룩말의 무늬도 다 다르고 고래의 큰 꼬리 모양도 다 다르다. 이것은 물질의 임시 근거이기도 한 땅이 지닌 재주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천지인을 三才라 하여 우주의 기본 요소로 삼아 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 면에서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한 면만을 보고 말하는 근시안적인 견해다. 지구도 사람도 허공인 하늘과 견줄 수 있는 게 아니다.사람은 지구에 먼지처럼 붙어 있고 지구는 허공에 모래알처럼 담겨 있다.


류영모는 우리가 개체로 태어나서 너와 나로 나뉘어져 서로가 겨루고 싸우게 된 것을 슬프게 생각하였다. 우리가 할 일은 개체를 초월해 있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거듭나자는 것이다. "절대의 아버지 께서는 조금도 아쉽거나 모자란게 없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가 여기서 나와 너로 갈라져 이렇게 되었는지 모른다. 현상계의 제나(自我)라는 것은 참으로 형편없다. 재주도 힘도 아는 것도 없다. 그야말로 외롭고 홀홀하다. 이렇게 나와 너로 갈라져 나와도 서로 통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좋을텐데 잘 통하질 않는다. 이 몸뚱이라는 게 독감방과 같아 나와 너로 나뉘어 한없이 외롭다. 겨우 말이나 글로 통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서로 속알(얼)을 내 놓는 것같이 좋은 일은 없다."

꽃 모양 겉 테두리는 하늘(허공)을 열어 뵈잠 花容虛廓天啓示

불교에서 전해오는 말 가운데 拈花微 笑라는 널리 회자되는 숙어가 있다. 염화미소라는 말이 생긴 연유는 이렇다. 그날도 영취산에서 석가의 설법이 있었다. 그러나 석가는 金口의 사자후 설법 대신에 들꽃 한 송이를 들어 보였다. 많은 청중들은 석가의 손에든 꽃송이를 바라보면서 의아해 하였다. 그때 무리 가운데 제자 가섭이 빙그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가섭이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석가도 마주 미소지었다. 염화미소란 이렇게 석가와 가섭이 미소의 대화를 한 것이다. 염화미소 속에 석가와 가섭 사이에 참나를 깨닫는 줄탁(줄啄)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둘만 알았지 다른 사람은
석가가 꽃을 든 속뜻을 오늘날 까지도 모른다.


류영모는 이 수수께끼 같은 불립문자의 말씀을 시원히 풀었다. "여기에 이 꽃은 꽃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꽃밖의 허공을 보라는 것이다. 꽃과 허공이 마주치는 아름다운 곡선을 보고도 꽃만 보고, 허공은 못 보았다고 한다. 꽃 테두리 겉인 허공에는 눈길조차 주려하지 않는다. 꽃을 있게 하는 것은 허공이다. 꽃이 있는 것은 허공을 드러내 뵈자는 것이다. 요즘에는 허공이야말로 가장 다정하게 느껴진다. 허공을 모르고 하는 것은 모두가 거짓이다. 허공은 참이다. 절대자 하느님이나, 무한대한 허공이나 맘속의 얼은 결국 하나인데 왔다갔다 하는 상대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 사람은 인정한다."
색계의 만물은 하느님의 존재를 알리는 게시판이요 네온사인이다. 그런데 달을 보라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않듯이 게시판이나 네온사인만 보았지 하느님의 존재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겉치레 말 으스대는 짓은 사람의 어줍짢은 노릇 花語虛風人妄動

花語는 주희가 쓴 말로 겉치레 말을 뜻한다. 화려한 詩語에는 화어가 많다. 내용도 없는 말인데 그럴 듯하게 꾸민 말이다. 虛風은 거짓된 허세로 으스대는 것을 말한다. 과장된 행동으로 잘난 체하는 것이다. 이런 짓은 사람의 망령된 행동으로 거짓나인 제나(자아)가 짓는 죄악의 카르마(업)이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사람이 사귀는데 얼마만큼 깊이 사귀는 것이냐 하면 皮相交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서러운 일이기도 하다. 서로가 좋으면 서로의 겉모습을 대단히 칭찬한다. 옷 입은 것을 보고 무게를 달려고 하는 것은 피상교에 지나지 않는다. 同志로서, 道伴으로서
벗을 얻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석가와 석가에게 배우고자 모인 이들,예수와 예수에게 배우고자 따른 이들 사이에 주고받은 언행은 화어허풍이 아니라 眞言誠實이었다.그들이 나눈 말머리 話頭는 하느님(니르바나)이었다.그들이 보인 사귐의 公案은 우애였다. 석가와 예수는 하느님(니르바나)의 뜻을 받아 말하고 ,뜻을 쫓아 움직였다. 류영모는 그들의 언행을 주역에 나오는 前言往行이라고 말 하였다."앞에 간 사람의 말이요 ,앞에 간 사람의 길이란 뜻으로 전언왕행이란 말이 있다.앞에 간 사람들의 언행은 영원 무한한 허공을 생각하여 우주 창조자로 공경하였다. 하느님이야 말로 성령이 충만한 大畜이다. 하늘나라에 머무는 것이 지극한 선에 머무는 止健이다. 止健大畜할 수 있는 사람은 空色一如를 알 수 있는 사람이다."

간직해 온 낯 세우기 받아들임을 그만두고 服膺體面容納止

복응은 가슴에 잊지 않는 것이고 체면은 낯 세우는 것이다. 사람이 몸으로는 짐승이라 짐승 버릇이 있다. 짐승은 적자생존을 위하여 취약점을 숨기며 힘(强力, 能力)있게 보이려고 한다. 그래야 적의 공격을 안 받고 암놈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이처럼 자기의 실력 이상으로 과시하고자 하는데서 체면 문화가 생겼다. 하물며 참나를 깨닫지 못했으면서 참나를 깨달은 성인을 모방해 자신을 내세운다. 그러나 알맹이(얼나)없는 거짓임이 드러난다. 이것은 참나가 아니라 짐승인 제나(自我)가 분장한 거짓일 뿐이다. 류영모는 체면에 대해서 이르기를 "가족끼리도 체면치레, 동지끼리도 체면치레, 먹는데도 입는데도 일체가 체면이니 이 체면을 한번 시원하게 벗어버리고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참 인생은 없다. 세상에서 立身揚名이니 성공출세니 이런 것 다 집어치우고 진리 속에 들어가는 것만이 참 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나(自我)의 강화를 위한 체면치레를 그만둔 예수의 맘가짐을 보자."악에 대항하지 말아라.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마태오 5:39-42)

곧은 맘 반듯한 몸가짐으로 빔(허공)에 뚫린 바른님 直內方外中空公

직내방외는 곧은 맘 반듯한 몸이란 뜻이다. 장자는 이것을 "맘 안에 (얼을)지니면 밖(몸)이 놀아나지 못한다"(內保之而外不蕩-장자 덕충부)라고 하였다.직내는 곧은 맘, 곧 정직한 맘이다. 류영모는 정직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말씀이 정직하게 살라는 것이다. 정직한 길은 옛날부터 하늘에서 주어진 길로 모든 성현들이 걸어 간 길이다. 이 길만이 마음놓고 떳떳하게 걸어갈 길이다. 모든 상대세계의 일은 툭툭 털어버리고 오로지 갈 수 있는 길은 곧은 길 뿐이다. 곧은 길만이 일체를 이기는 길이다.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길이 곧은 길이다. 우리는 우리가 얼(靈)의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정신이 정직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성령이 임했기 때문이다. 마음문을 닫는 사람은 성령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래서 예수가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 입으로 어떤 욕설을 하든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마르코복음 3:28-30)라고 하였다.성령을 거역 한다는 것은 마음을 닫고 하느님의 義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방외는 반듯한 몸, 곧 방정한 몸가짐이다. 류영모는 방정에 대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해서는 안될 일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끝까지 참아내야 한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가 막힌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것, 참을수 없는 것을 꾹 참아내야 한다. 아니 해야 될 일은 꾹 참고 지내는 게 필요하다. 이 인생, 이 세상은 그렇게 해야 하는 곳이다.
죽도록 참아야 하는 길이 우리가 지나가는 길이다"라고 하였다. 직내방외의 삶은 한 마디로 하면 짐승인 제나로는 죽고 하느님 아들인 얼나로 살라는 말이다. 제나를 임자로 하는 짐승살이를 하고서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없다.


中空은 허공인 하느님과 뚫렸다는 뜻이다. 하느님과 뚫려야 하느님의 성령이 오게 된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우리는 이미 정신세계에서 하느님과 연락이 끊어진지 오래다.그리하여 사람들이 이승의 짐승이되었다. 우리들이 산다는 것이 혈육의 짐승이다. 질척질척 지저분하게 먹고 싸기만 하는 짐승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을 때 하느님 아들인 얼나로 사람이 회복된다.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의 얼생명인 참나다"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중(中)을 줄곧 뚫림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하느님과 얼이 막히면 짐승이다.사람이 짐승이 되면 짐승 이상의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 제나로 죽고 얼나로 사는 사람이 공인이다. 공은 破私를 했다는 뜻이다. 제나가 죽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성인이란 모두가 곧 공인이다. 그러고 보면 이 나라에 공직에서 일하는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나 명실상부한 공무원일까. 憑公營私하는 공무원이 많아서 나랏 일이 잘 안 풀리고 오히려 어렵게 만든다. 참으로 공인인 성자에 대하여 류영모는 이르기를 "성인이 누구인가, 몬(물질)에 빠지고 미끄러지려는 나를, 몬(물질)을 차버리고 깨끗해 보려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위에서 내려오는 성령을 자꾸 생각하여 하느님처럼 거룩해 보자는 것이 성인이 아니겠는가. 위 없다고 말하는 자, 내 위에 누가 있으랴 하는 자는 지각이 없기로 마치 철없는 사람과 같다. 자기 머리가 가장 위인 줄만 알고 일을 저지르니 그 하는 일마다 못된 짓이 될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1.허공과 물질은 하나로 같다. 空色一如|작성자byunsdd71074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