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다석 류영모 명상록 본문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1.허공과 물질은 하나로 같다. 空色一如
찾아도 하나(전체)를 못 얻는 게 물질이며 物色不得一色物
속 빈 걸 얕보다가 빈탕(허공)까지 업신여겨 空虛蔑以加虛空
있음에 아첨하고 없음을 깔보면 바보이며 諛有侮無後天痴
빈탕은 같으나 물질은 다른 게 본디 땅 재주 同空異色本地工
꽃 모양 겉 테두리는 하늘(허공)을 열어 뵈잠 花容虛廓天啓示
겉치레 말 으스대는 짓은 사람의 어줍짢은 노릇 花語虛風人妄動
간직해 온 낯 세우기 받아들임을 그만두고 服膺體面容納止
곧은 맘 반듯한 몸가짐으로 빔(허공)에 뚫린 바른 님. 直內方外中空公
(1956.12.27)
物色(물색):찾다. 得:얻을득. 色物(색물):물질,물체. 蔑:업신여길 멸
加:업신여길 가. 諛:아첨할 유. 侮:업신여길 모. 天痴(천치):바보
容:모양 용. 廓 : 둘레 곽. 虛風(허풍) : 과장된 언행. 服膺(복응) :가슴에 품고 간직함.
膺 : 가슴 응. 容納(용납) : 받아들임.
천문학자들은 1천억 개가 넘는 별을 가진 은하 우주가 1천억 개 넘게 있는 대우주를 말하고 있다.
몇십 년 전만 하여도 눈으로 겨우 6천개의 별을 헤아렸을 뿐이다.앞으로 천문학자들이 무슨 말을
할지 아무도 모른다. 대우주는 알수록 알 수 없는 신비 그 자체다. 그 가운데서도 이것만은 우리가
말할 수 있다. 대우주는 허공과 물질로 되어 있다는 것과 시간과 공간으로 무한하다는 것이다.
중심은 있어도 둘레는 없는 구(球)처럼 느낀 옛 사람들은 대우주를 일원(一圓)이라고 말했다.
천체와 물질을 포용한 단일(單一)허공 전체를 장자는 대괴(大塊)라 하였고, 맹자는 대체(大體)라
하였다. 스피노자는 전체를 대자연이라 하여 능산(能産)의 자연과 피산(被産)의 자연을 말하였다.
능산의 자연은 허공일 것이고 피산의 자연이 물질일 것이다. 노자는 허공만을 무극(無極)이라 하고
장자는 물질을 포함한 허공을 태극(太極)이라고 하였다.
예수 석가 노자 장자 공자 맹자는 전체인 대우주가 사람에게 생각을 일으키는 주체(나)와 성령
(얼)으로 충만한 것을 깨달았다. 오직 '하나의 나'이므로 존재이고, '영원한 얼'이므로 생명이다.
이와 같이 깨달은 사람들은 대우주를 아버지(하느님)라, 니르바나(Nirvana)라 하였다.
유영모는 "단 하나밖에 없는 온통 하나(전체)는 허공이다.색계(色界)는 물질계이다.
색계는 환상(幻像)이다. 나는 단일 허공을 확실히 느끼는데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느껴진다.
단일 허공에 색계가 눈에 티끌과 같이 섞여 있다 .색계에 만족을 느끼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을 찾을 생각도 못 한다. 색계는 허공에 딸려 있다.허공은 우리 오관(五官)으로 감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공은 무한하다.잣 알 하나를 깨뜨리니 속이 비었다는 그따위 허공이
아니다. 우리는 전체인 단일 허공의 존재(하느님)를 느껴야 한다. 참(眞)이란 허공밖에 없다.
물질인 있음(有)의 색계는 거짓이다."
존재하는 것은 허공인 하느님뿐이다. 불생불멸의 절대존재인 하느님 밖에는 존재하는 것이 없다.
생멸하는 상대적 존재인 색계의 물질이나 천체는 허공 속에서 별똥별처럼 나타나기 무섭게
사라진다. 별의 일생은 수백억 년이 된다 하여도 영원에 비기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색(色)은 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에서 공색일여(空色一如)인 것이다. 공(空)과 색(色)이 대등 하다는 것이 아니다.
반야심경의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이렇게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른체 우주를 논하는 것은 예수를 찾아와 예수의 말씀은 못 알아들은 채
겨우 예수의 겉옷자락을 잡는 것과 같다.깨달은 이는 우주를 보고 하느님의 존재를 느낀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현상 속에서
산 우주가 지니고 있는 생명의 율동을 느껴야 한다. 하늘로 머리를 두는 인간은 하늘을 쳐다보며
우주에서 생명(하느님)의 고동을 느끼면서 기쁨으로 살라는 것이다."
유영모는 불교에서의 색(色)의 뜻을 풀이하기를 "불교에서 색 이라면 물질을 말한다. 물질세계는
빛깔을 띠어 요망한 것이다. 물질이라는 것은 한낱 하잘 것 없는 것이다. 물질은 무서워 할 것도
애착할 것도 없다. 우리의 눈이 빛깔에 홀려 곱게 보이고 요망한 것들이 좋게 보일 때 색물(色物)
을 사랑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찾아도 하나(전체)를 못 얻는 게 물질이며 物色不得一色物
물색(物色)한다는 것은 찾는다는 말이다. 색물(色物)은 물질이나 물체를 말한다. 어떠한 색물도
개체이지 전체인 하나(一)가 아니다. 만물을 포용한 허공에서 전체를 본다.나 자신도 허공에 안겨
있는 개체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개체는 어느 것이나 전체에서 개체로 떨어진 것이다.
류영모는 "우리는 본디부터 여기에 있었던 게 아니고 어디서 떨어져 나왔다는 느낌이 내 속에 있다.
고독하고 비천한 이 곳에 낮아지고 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이렇게 타락된 느낌이 있으니까 본디의
모습으로 오르려고 한다. 어디서 떨어졌을까. 그곳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곳이 전체인 하나다"
라고 하였다.전체의 자격을 잃고 개체가 된 것이 타락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이데거가 '던져진 나
(企投)'를 알게 된 것도 같은 이치다. 전체를 잃어버린 개체의 나가 현존재다. 개체의 나가 전체의식
을 회복할 때 실존이 된다. 예수 석가는 전체의식을 회복한 실존자들이다.
류영모는 전체인 하나(하느님)를 회복하는 것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서
지나간 나의 무지를 바로 보고 잊어버린 전체를 찾아야 한다. '하나' ,이것을 찾아야 한다. 하나는
온전하다. 모든 것(개체)이 하나를 얻자(得一)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득일(得一)하나, 큰 나(大我)
속에 이것이 있다. 그러니 마침내 하느님 아버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큰 나(大我)속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알것이 있다면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로 시작해서 마침내는 하나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강박된 요구가 우리에게 있다.
대종교가, 대사상가가 믿고 말한다는 것은 다 이 하나(전체)이다."
"속 빈 걸 얕보다가 빈탕(허공)까지 업신여겨" 空虛蔑以加虛空
사람들은 가득 찬 것을 좋아하지 빈 것은 아주 싫어한다. 빈 지갑, 빈 뒤주, 빈 금고, 빈 곡간이라면 질색이다. 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없음(무소유)은 죽게 됨을 뜻한다. 그래서 빈털
터리라면 사람 대접을 못 받는다. 사람에게 빈 것을 얕보는 버릇이 생겨 저 영원한 빈탕(허공)까지
무시하게 되었다. 거지를 얕보다가 부처님을 내쫓은 것과 같다. 빈탕(허공)이 전체인 하느님 이시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석가와 장자가 허공을 말하였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이단시 하였다. 쓸데 있는
것만 찾는 사람에게는 허공이 쓸데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쓸데 있고 없고는 하늘나라까지
가 보아야 안다. 나는 절대공(絶對空)을 사모한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라야 참이다. 이 허공이 하느님이다. 허공 없이 진실이고 실존이고 어디 있는가. 우주가
허공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있음에 아첨하고 없음을 깔보면 바보이며 諛有侮無後天痴
色이 有고, 空이 無다. 있음(有)에 아첨하는 것은 色物에 아첨하는 것이고, 없음(無)을 깔보는 것은
빈탕(虛空)을 깔보는 것이다. 있음에 빠져 없음을 깔보고 나면 하느님을 모르는 바보가 된다. 60억
인류 가운데 하느님을 바로 아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하느님을 모르면 다른 것은
아무리 안다 해도 천치다. 바보인 저능아들은 오히려 천사처럼 순진해 거룩함을 느끼게 한다.
불교에서는 색(色)은 色物을 뜻하지만 유교에서는 女色을 뜻한다. 한자 色자는 남녀가 얼싸 안고 있는 꼴을 그린 상형문자다. 그래서 色慾이란 낱말이 있다. 공자는 말하기를 "내 아직 속알(얼)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 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吾未見好德如色者也-위령공편)고 하였다.
류영모는 "허공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미인처럼 좋아해야 한다"고 말 하였다. 미색을 좋아하자 미모
로 으시대고 사치로 뽐낸다.자연의 경색을 좋아하여 관광도 다니고 사진도 찍는다. 이것이 모두 有에
대한 아첨이다. 허공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을 만큼 허공을 무시한다. 허공이야
없으니 무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지 모르나 허공이야 말로 우리가 경외해야 할 모든 개체의 근원인
하느님이다. 그래도 멍청한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바로 아는 슬기로운 이가 있으니 마하트마 간디가
그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조차도 하느님을 생각하게 할 때 그것이 존재하는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르기를 "밤하늘 별들 사이에 빛나는 초생달이나 해질 무렵 붉게 물든 저녁노을
같은 아름다운 자연 풍경은 그 현상 뒤에 하느님이 계신 것을 생각나게 하는 진리적인 면이 있다.
이것들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창조했기 때문이다. 내가 일몰과 월출의 광경에서 불가사의
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때 나의 영혼은 하느님을 우러르게 된다. 나는 모든 사람이 이러한 창조물에
서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그러나 그러한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도
하느님을 명상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 얼의 활동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에게는 미로나 덫에 지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미모도 마찬가지로 때로는 정신적인 해탈에 방해가 된다"(M.K.간디-어느날 아침의 회견)라고 하였다.
석가는 아예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를 신기루와 같은 환상이나 잠속에서 꾸는 꿈이라고 하였다.(금강경
응화비진품) 이처럼 참 사람들은 오히려 있음(有)을 무시하고 없음(無)을 숭상한다. 유는 거짓이요, 無는
참이기 때문이다.
빈탕은 같으나 물질은 다른게 본디 땅 재주 同空異色本地工
허공은 無象이라 다를 까닭이 없다. 同一의 허공으로 전체다. 그런데 물질(色物)은 개체들이라 다
다르다. 사람도 모습이 다르고, 음색이 다르고, 지문이 다르다. 아마존 밀림의 보석이라 일컬어지는
아글리아스 나비는 붉고 푸른 무늬가 있는데 그 모양이 나비마다 다 다르다. 이야말로 異色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얼른보면 비슷하게 보이는 얼룩말의 무늬도 다 다르고 고래의 큰 꼬리 모양도 다 다르다. 이것은
물질의 임시 근거이기도 한 땅이 지닌 재주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천지인을 三才라 하여
우주의 기본 요소로 삼아 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 면에서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한 면만을 보고 말하는 근시안적인 견해다. 지구도 사람도 허공인 하늘과 견줄 수 있는 게 아니다.사람은 지구에 먼지처럼 붙어 있고 지구는 허공에 모래알처럼 담겨 있다.
류영모는 우리가 개체로 태어나서 너와 나로 나뉘어져 서로가 겨루고 싸우게 된 것을 슬프게 생각하였다. 우리가 할 일은 개체를 초월해 있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거듭나자는 것이다. "절대의 아버지 께서는 조금도 아쉽거나 모자란게 없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가 여기서 나와 너로 갈라져 이렇게 되었는지
모른다. 현상계의 제나(自我)라는 것은 참으로 형편없다. 재주도 힘도 아는 것도 없다. 그야말로 외롭고
홀홀하다. 이렇게 나와 너로 갈라져 나와도 서로 통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좋을텐데 잘 통하질 않는다.
이 몸뚱이라는 게 독감방과 같아 나와 너로 나뉘어 한없이 외롭다. 겨우 말이나 글로 통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서로 속알(얼)을 내 놓는 것같이 좋은 일은 없다."
꽃 모양 겉 테두리는 하늘(허공)을 열어 뵈잠 花容虛廓天啓示
불교에서 전해오는 말 가운데 拈花微 笑라는 널리 회자되는 숙어가 있다. 염화미소라는 말이 생긴
연유는 이렇다. 그날도 영취산에서 석가의 설법이 있었다. 그러나 석가는 金口의 사자후 설법 대신에
들꽃 한 송이를 들어 보였다. 많은 청중들은 석가의 손에든 꽃송이를 바라보면서 의아해 하였다.
그때 무리 가운데 제자 가섭이 빙그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가섭이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석가도
마주 미소지었다. 염화미소란 이렇게 석가와 가섭이 미소의 대화를 한 것이다. 염화미소 속에 석가와
가섭 사이에 참나를 깨닫는 줄탁(줄啄)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둘만 알았지 다른 사람은
석가가 꽃을 든 속뜻을 오늘날 까지도 모른다.
류영모는 이 수수께끼 같은 불립문자의 말씀을 시원히 풀었다. "여기에 이 꽃은 꽃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꽃밖의 허공을 보라는 것이다. 꽃과 허공이 마주치는 아름다운 곡선을 보고도 꽃만 보고,
허공은 못 보았다고 한다. 꽃 테두리 겉인 허공에는 눈길조차 주려하지 않는다. 꽃을 있게 하는 것은
허공이다. 꽃이 있는 것은 허공을 드러내 뵈자는 것이다. 요즘에는 허공이야말로 가장 다정하게 느껴
진다. 허공을 모르고 하는 것은 모두가 거짓이다. 허공은 참이다. 절대자 하느님이나, 무한대한 허공이나
맘속의 얼은 결국 하나인데 왔다갔다 하는 상대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 사람은 인정한다."
색계의 만물은 하느님의 존재를 알리는 게시판이요 네온사인이다. 그런데 달을 보라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않듯이 게시판이나 네온사인만 보았지 하느님의 존재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겉치레 말 으스대는 짓은 사람의 어줍짢은 노릇 花語虛風人妄動
花語는 주희가 쓴 말로 겉치레 말을 뜻한다. 화려한 詩語에는 화어가 많다. 내용도 없는 말인데 그럴
듯하게 꾸민 말이다. 虛風은 거짓된 허세로 으스대는 것을 말한다. 과장된 행동으로 잘난 체하는 것이다.
이런 짓은 사람의 망령된 행동으로 거짓나인 제나(자아)가 짓는 죄악의 카르마(업)이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사람이 사귀는데 얼마만큼 깊이 사귀는 것이냐 하면 皮相交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서러운 일이기도 하다. 서로가 좋으면 서로의 겉모습을 대단히
칭찬한다. 옷 입은 것을 보고 무게를 달려고 하는 것은 피상교에 지나지 않는다. 同志로서, 道伴으로서
벗을 얻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석가와 석가에게 배우고자 모인 이들,예수와 예수에게 배우고자 따른 이들 사이에 주고받은 언행은 화어허풍이 아니라 眞言誠實이었다.그들이 나눈 말머리 話頭는 하느님(니르바나)이었다.그들이 보인 사귐의 公案은 우애였다. 석가와 예수는 하느님(니르바나)의 뜻을 받아 말하고 ,뜻을 쫓아 움직였다.
류영모는 그들의 언행을 주역에 나오는 前言往行이라고 말 하였다."앞에 간 사람의 말이요 ,앞에 간 사람의 길이란 뜻으로 전언왕행이란 말이 있다.앞에 간 사람들의 언행은 영원 무한한 허공을 생각하여 우주 창조자로 공경하였다. 하느님이야 말로 성령이 충만한 大畜이다. 하늘나라에 머무는 것이 지극한 선에 머무는 止健이다. 止健大畜할 수 있는 사람은 空色一如를 알 수 있는 사람이다."
간직해 온 낯 세우기 받아들임을 그만두고 服膺體面容納止
복응은 가슴에 잊지 않는 것이고 체면은 낯 세우는 것이다. 사람이 몸으로는 짐승이라 짐승 버릇이
있다. 짐승은 적자생존을 위하여 취약점을 숨기며 힘(强力, 能力)있게 보이려고 한다. 그래야 적의
공격을 안 받고 암놈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이처럼 자기의 실력 이상으로 과시하고자 하는데서
체면 문화가 생겼다. 하물며 참나를 깨닫지 못했으면서 참나를 깨달은 성인을 모방해 자신을 내
세운다. 그러나 알맹이(얼나)없는 거짓임이 드러난다. 이것은 참나가 아니라 짐승인 제나(自我)가
분장한 거짓일 뿐이다.
류영모는 체면에 대해서 이르기를 "가족끼리도 체면치레, 동지끼리도 체면치레, 먹는데도 입는데도
일체가 체면이니 이 체면을 한번 시원하게 벗어버리고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참 인생은 없다. 세상에서 立身揚名이니 성공출세니 이런 것 다 집어치우고 진리 속에 들어가는 것
만이 참 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나(自我)의 강화를 위한 체면치레를 그만둔 예수의 맘가짐을 보자."악에 대항하지 말아라.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마태오 5:39-42)
곧은 맘 반듯한 몸가짐으로 빔(허공)에 뚫린 바른님 直內方外中空公
직내방외는 곧은 맘 반듯한 몸이란 뜻이다. 장자는 이것을 "맘 안에 (얼을)지니면 밖(몸)이 놀아나지
못한다"(內保之而外不蕩-장자 덕충부)라고 하였다.직내는 곧은 맘, 곧 정직한 맘이다.
류영모는 정직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말씀이 정직하게 살라는 것이다. 정직한 길은 옛날부터 하늘에서 주어진 길로 모든 성현들이 걸어 간 길이다. 이 길만이 마음놓고 떳떳하게 걸어갈 길이다. 모든 상대세계의 일은 툭툭 털어버리고 오로지 갈 수 있는 길은 곧은 길 뿐이다. 곧은 길만이 일체를 이기는 길이다.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길이 곧은 길이다. 우리는 우리가 얼(靈)의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정신이 정직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성령이 임했기 때문이다. 마음문을 닫는 사람은 성령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래서 예수가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 입으로 어떤 욕설을 하든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마르코복음 3:28-30)라고 하였다.성령을 거역 한다는 것은 마음을 닫고 하느님의 義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방외는 반듯한 몸, 곧 방정한 몸가짐이다. 류영모는 방정에 대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해서는 안될 일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끝까지 참아내야 한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가 막힌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것, 참을수 없는 것을 꾹 참아내야 한다.
아니 해야 될 일은 꾹 참고 지내는 게 필요하다. 이 인생, 이 세상은 그렇게 해야 하는 곳이다.
죽도록 참아야 하는 길이 우리가 지나가는 길이다"라고 하였다.
직내방외의 삶은 한 마디로 하면 짐승인 제나로는 죽고 하느님 아들인 얼나로 살라는 말이다. 제나를
임자로 하는 짐승살이를 하고서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없다.
中空은 허공인 하느님과 뚫렸다는 뜻이다. 하느님과 뚫려야 하느님의 성령이 오게 된다. 류영모는 이르
기를 "우리는 이미 정신세계에서 하느님과 연락이 끊어진지 오래다.그리하여 사람들이 이승의 짐승이
되었다. 우리들이 산다는 것이 혈육의 짐승이다. 질척질척 지저분하게 먹고 싸기만 하는 짐승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을 때 하느님 아들인 얼나로 사람이 회복된다.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의 얼생명인 참나다"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중(中)을 줄곧 뚫림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하느님
과 얼이 막히면 짐승이다.사람이 짐승이 되면 짐승 이상의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
제나로 죽고 얼나로 사는 사람이 공인이다. 공은 破私를 했다는 뜻이다. 제나가 죽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성인이란 모두가 곧 공인이다. 그러고 보면 이 나라에 공직에서 일하는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나 명실상부한 공무원일까. 憑公營私하는 공무원이 많아서 나랏 일이 잘 안 풀리고 오히려
어렵게 만든다. 참으로 공인인 성자에 대하여 류영모는 이르기를 "성인이 누구인가, 몬(물질)에
빠지고 미끄러지려는 나를, 몬(물질)을 차버리고 깨끗해 보려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위에서 내려오는
성령을 자꾸 생각하여 하느님처럼 거룩해 보자는 것이 성인이 아니겠는가. 위 없다고 말하는 자, 내
위에 누가 있으랴 하는 자는 지각이 없기로 마치 철없는 사람과 같다. 자기 머리가 가장 위인 줄만 알고
일을 저지르니 그 하는 일마다 못된 짓이 될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1.허공과 물질은 하나로 같다. 空色一如|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2. 보자 대자연(하느님)을! 觀太自然界
깜짝 사이 참나 계심을 느끼는 빈마음 瞬息實存虛空心
여느 일하는 이제라도 세상 소리를 들어야 茶飯現在觀世音
얼의 불꽃에 스스로 더러운 몸을 불살라 性焰自燒却垢肉
재앙(몸)의 씨들은 자기도 모르게 말씀을 거스른다. 禍種無妄逆福音
(1959.12.22)
茶飯(다반):예사로운 일 , 恒茶飯의 약어. 瞬:눈깜짝할 순 , 잠깐 순
瞬息(순식):눈을 한번 깜짝이거나 숨을 한 번 쉴 동안의 짧은 시간
垢 : 더러울 구. 焰 : 불꽃 염. 燒却(소각):불사르다. 無妄(무망):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류영모는 말하기를 "하느님이라는 말이 싫다면 진리라고 하자. 진리라는 말도 싫다면 자연이라고하자"라고 하였다.마하트마 간디는 하느님을 진리라고 하였고 스피노자는 하느님을 자연이라고 하였다.여기에서 태자연계라고 한것은 하느님을 말한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온통(전체)을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하나(절대)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모두가 중간에다 희망을 걸어놓고 ,거기에 맞는 진 선 미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다다르면 만족한다.그러나 예수나 석가와 같이 우주를 깊숙이 본 이는 전체요 절대인 하느님 밖에는 모든것을 거짓으로 보았다.
영원절대에 비춰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주라는 것을 아주 무생물로 취급하는 수가 많다. 생명이
없는 것으로 알고 물건 취급을 하니 우주도 퍽도 대접을 못 받는다.
그러나 대접을 받거나 못 받거나 거기에는 하느님의 성령이 가득차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汎神論같은것을 아주 싫어한다. 사물에도 성령이 있다고 하면 당장 反神論이라고 단정을 하고 내던진다.그렇게 해서는 올바르게 살 수 없다. 자기 것밖에는 모두가 틀렸다,나쁘다고 하는 것은 안 된다."
1512년 11월1일 萬聖節에 세상에 공개된 미켈란제로의 작품으로 로마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 천정화로 그려진 노인 하느님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스피노자의 말은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이 아닐수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이제는 人態神의 유치한 신관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하느님은 無形無狀하여 없이 계신다.
스피노자는 이르기를 "그 본성에서 보면 실체는 변태에 선행하여 존재한다.자연 속에는 실체와 그 변태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스피노자『에테카 정리 』1,6)라고 하였다.
자연은 靈인 본체와 物인 樣態로 되어 있는데 양태는 본체인 실체의 변태라는 것이다.이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만물을 지었다는 요한복음의 사상과 일치한다. 하느님이 體라면 말씀은 用이다. 여기에서 존재론상 명실상부한 유일신관을 볼수 있다.슈바이처는 범신론이 유일신과 상치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범신론에서 비로소 절대존재인 유일신이 드러난다.
'하느님은 곧 자연'이란 스피노자의 자연은 '참은 자연의 다스림을 받는다'(道法自然-노자 25장) 라고 한 노자의 자연과 일치한다.
R.W에머슨은 이렇게 말하였다."우주는 자연과 정신으로 이루어졌다. 자연은 정신의 상징이다." 에머슨은 스피노자의 자연을 우주라 하였다.에머슨에게는 우주가 곧 하느님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와 에머슨은 류영모처럼 허공을 말하지 않았다.
류영모는 허공을 강조 한 것이 다르다."형이하의 물건을 固有한 것으로 느끼는 것과 형이상의 허공을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이 합해진 하나(절대)가 하느님이다."
깜짝 사이 참나 계심을 느끼는 빈마음 瞬息實存虛空心
瞬息이란 글자 그대로 눈 한번 깜짝하는 동안,또는 숨 한번 쉬는 동안을 뜻하는 순간이요 찰나다.시간은 순간의 연속이다. 사람은 이 순간에 시공의 상대계를 초월하여 절대의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이것을 깨달음이라 하며 頓悟라 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날아가는 새를 화살로 쏘아 맞히듯이 곧이 곧아 神聖하고,靈明하고 영원한 나(하느님)의 한 복판을 똑바로 맞추어 참나를 깨닫는것이 가온찍기(「·」)이다. 내 맘에하느님 으로부터 온 영원한 생명의 긋(點)이 나타난 것이다. 이 가온찍기야 말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요 영원을 만나는 순간이다. 이 찰나에 영원한 생명(얼나)을 느끼지 못하면그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은 없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靈我)는 시간 공간과 무관하다".
이제까지 임자 노릇하던 제나(自我)가 거짓 나임을 알고 제나를 버린다. 그러면 맘속에 가득찼던 탐 진 치의 獸性이 없어져 맘이 빈다. 맘이 비면 하느님의 성령이 가득 찬다. 하느님의 성령이 참나다. 이것이 순간에 이루어 진다. 이렇게 거짓 나와 참나가 만나면 거짓나는 사라지고 참나의 존재는뚜렷해 진다. 이것을 하느님을 영광되게 한다는 것이다.이처럼 상대와 절대,유한과 무한이 만나는 순간이 현존재가 체험하는 실존의 순간이다.이것을 류영모는 '가온찍기'라 하였고,틸리히는 카이로스(瞬間時)라고 하였다.
틸리히는 카이로스를 '영원히 현재에서 분출해 나가는 것'을 체험하는 순간이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얼나를 깨달아서 하느님 아들이 된다. 하느님 아들인 참나와 하느님이 얼나로 하나다.얼나로는 내 생명과 하느님의 생명이 하나다.얼나와 하느님은 이어져 있다. 그리하여 유한과 무한이 내게서 이어진다. 유한과 무한이 이어진 것이 바로 실존이다. 그래서 예수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10:30)라고 하였다. 예수가 말한 나는 하느님이 보내신 성령의 얼나임을 알아야 바로 아는 것이다.
여느 일하는 이제라도 세상 소리를 들어야 茶飯現在觀世音
앞의 구절이 하느님 사랑이라면 이 구절은 이웃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이 위로 진리(얼나)를 구하는 것이라면(上求菩提) 이웃사랑은 아래로 중생을 교화시키는 것이다.(下化衆生) 모든 성인들이 이를 실천
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 다반이란 항다반사를 줄인 것이다. 항다반사란 예사로운 일,곧 늘 있는 일이란 뜻으로 평범한 일상생활을 말한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밥 먹고 똥누고 하는 이일을 얼마나 더 해보자고 애쓰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다"라고 하였다.항다반사로 인생을 보내는 것이 어이없다는 말이다.항다반사가 순조롭지 않아 살려달라는
이들이 많다.아프리카에 굶어 죽는 사람이 많더니 가까이 북한에도 굶어 죽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어려운 사람의 호소를 놓치지 않고 들어주는 이가 관세음보살이다.류영모의 말은 이웃의 항다반사에
현재의 관세음보살이 되자는 것이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정말 남의 선생 자리에 서는 이는 선지자(先知者)의 성격을 꼭 가져야 한다고 보겠다.선지자라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없다.그저 하느님이 맡겨 주신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이
다. 세상을 바로보고 생각이 나면 옳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그대로 관세음이다. 참으로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남을 도와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얼의 불꽃에 스스로 더러운 몸을 불살라 性焰自燒却垢肉
류영모는 말하기를 "미인 코에서는 콧물이 안 나오고 눈에서는 눈물이 안 나오나?그 몸에서 떨어지는 때는 때가 아닌가? 그 창자에는 똥이 없는가? 절새 미인도 알고 보면 똥자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몸이 더러운 것은 씻으면 되지만 씻어도 씻겨지지 않는 더 더러운 것이 우리 몸에 있다.몸이 지니고 있는 짐승의 성질인 삼독이 그것이다.사람은 이 몸뚱이의 삼독으로 인하여 악마가 될수도
있다.
예수는 말하기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증언. 모독과 같은 여러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마태오 15:16-20)라고 하였다. 예수는 탐진치라는 말은 안 썼으나 모든 죄악을 분류하면 삼독으로 나뉜다
이 나라 경찰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린 탈옥수 신창원도 알고보면 무리하게 삼독을 행사 한 것이다.
마음의 때(垢)인 삼독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성령(말씀)으로 불사르는 것이다."이런 때를 불살라 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性焰인 바탈 불꽃이다. 옛 스님들 가운데는 몸을 불살라 등신불이 되기도 했다지만 쓸데없는 짓이다. 자신을 참으로 불사르고 싶으면 하느님 성령인 性焰으로 수성을 불살라 聖別을 이뤄야 한다. 그것을 실천한 이가 예수나 석가 같은 성인이다.
재앙(몸)의 씨들은 자기도 모르게 말씀을 거스른다 禍種無妄逆福音
재앙의 씨앗은 말할 것도 없이 짐승 성질인 삼독이다. 사람도 몸으로는 짐승이라 이 삼독의 수성을 지녔다.우리의 선조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수성인 탐진치 삼독을 밑천으로 살아왔다. 사람이 바로 서는 유인원이 된지가 2백만 년에서 3백만 년이 된다고 한다. 류영모는 사람의 짐승성질이 인류의 원죄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끈질긴 삼독의 욕망이 없었더라면 벌써 멸종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짐승만큼도 삼독을 조절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부리다가 재앙을 부른다. 그래서 맹자가 이르기를 "하늘이 짓는 재앙은 피할수 있지만 스스로 짓는 재앙에서는 살 길이 없다"(맹자 공손추 상)고 하였다.그러나 하느님이 보내시는 성령의 불길에 짐승의 성질을 불사른 이는 삼독의 욕망에 끌려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일
따위는 없다 .재앙의 씨인 삼독을 쫓느라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른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면 멸망이다.하느님의 말씀이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속에 모시면 악한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간디-날마다의 명상) 라고 하였다.
그래서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몸으로는 다른 짐승들과 같은데,그래도 귀한 것이 하느님의 씨(얼)가 사람의 맘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하느님의 씨(얼)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높고 귀하다.사람은 분명 짐승인데 짐승의 생각을 하지 않음 이 얼로 솟나는 우리의 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란 다른 것을 직접 간접으로 잡아먹고 사는 짐승이다.
그런데 다른 짐승과는 달리 하느님의 얼이 있어 맘속을 밝혀 위로 한없이 솟나려 함이 인생의 길이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2. 보자 대자연(하느님)을! 觀太自然界|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3. 만드신 경위 創造始末
뭇 사람이란 다른게 아니라 사형수 衆生無他死刑囚
몸이 죽기까지 처형될 날만 기다려 終身有待執行日
헛되이 태어난 처음부터 판결은 선고되고 判缺宣告虛誕初
오래산다 일찍 죽는다지만 한 유예기간 猶豫期間壽夭日
(1959 12.1)
始末(시말):경위 虛 :헛될 허 待:기다릴 대 猶豫(유예):날짜를 미루다.
壽夭(수요):오래 사는 것과 일찍 죽는 것
침팬지와 사람의 유전자인(DNA)는 98%가 같다. 5백만 년 전까지는 공동 조상을 가졌으니 이상할 것이 없다. 공동조상의 유인원을 프로콘솔이라 이름 붙혔다. 지금의 침팬지들이 하루아침에 사람처럼 바로서서 걷고 ,말을 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그런데 사실은 털 없는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 1만 년 전 그와 같은 놀라운 일을 하였던 것이다. 인간이 불을 쓰기 시작한지가 50만년 전이고, 원시 농업을 한 지가 1만년 전의 일이다. 창세기에 아벨과 가인이 유목이나 농사를 하면서 天祭를 지냈다는 것은 이를 말해 준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것은 털 없는 원숭이가 하느님을 그리워하게 되었을 때부터라 할 것이다. 카시이러는 언어와 신화에서 언어와 신화는 한 뿌리에서 돋은 두 가지와 같다고 하였다. 사람이 처음으로 하느님을 그리워하게 된 흔적이 신화로 남아있고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기 위해 말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오늘날의 침팬지와 별로 다르지 않은 수준의 의사 소통만을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창세기 신화나 단군신화 같은 여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신화의 의미는 자못 깊다고 하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어린이의 생각처럼 유치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어린이가 그린 아동화와 대화가가 그린 추상화에 어딘가 상통하는 점이 있을 수 있듯이 무시할 수 없는 상징성은 지니고 있다.
창세기의 여호와(야훼) 하느님도 인태신에 지나지 않는다.
하느님을 백발노인으로 생각한 것이다. 미켈란제로가 시스티나 성전 천정화에 그린 하느님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인태신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보다 더 차원 높은 신관 향상(up lift)에 그 의미가 있다. 그런데 컴퓨터는 업그레이드(up grade)시킬줄 알면서 신관을 향상시킬 줄 모르고 있다. 신관을 향상 시킬 줄 모른다면 인류는 존재할 필요도 가치도 없는 것이다.
류영모는 창세기 신화에 대해 이르기를 "창세기에 적혀 있는대로 창조주의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 나는 하느님을 생명의 근본으로, 진리의 근본으로 믿는 것이다. 옛사람들이 천지
에 대한 시말을 생각해 본 것이 창세기다. 이건 옛사람들의 생각이다. 그 걸 오늘의 우리에게 믿으라고 해서는 통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창세기의 창조설, 프로티노스의 流出說, 스피노자의 變態說 중에서 스피노자의 변태설이 차원 높은 창조관이라 하겠다.그러나 이것은 우리 사람의 생각이고 하느님 쪽에서 생각하면 하느님이 절대유일의 존재로 계실 뿐이다.공연히 사람들이 옅은 소견으로 이러쿵저러쿵 할 뿐이다.
뭇 사람이란 다른 게 아니라 사형수 衆生無他死刑囚
예수를 진리의 자리에서 보면 하느님 아들이지만 세상의 자리에서 보면 처형된 사형수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의 낙오자들이 사형수가 되기도 하지만 선지자들이 사형수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류영모는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이미 나기 전부터 죽음이 언도되어 있는 사형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진시황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모두가 실패했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사는 동안에 지나친 욕심을 가지고 있다. 산몸으로 신선(神仙)이 되어 영생불사(永生不死)하기를 바라는가 하면 예수를 믿으면 예수가 내려와서 죽지 않고
살려서 하늘로 구름 타고 올라가기를 바라고 있는데 몸으로 죽지 않고 살 욕심 때문에 이런 것을 믿는다."(다석어록)
몸이 죽기까지 처형될 날만 기다려 終身有待執行日
사람들은 자신이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라는 것을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체하려고 애쓴다. 톨스토이는 석가의 소전기를 쓸만큼 불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참회록에는 불경에 나오
는 우화를 인용한 곳이 있다. 어떤 나그네가 인생이라는 광야를 헤매다가 고통이라는 사자를 만나 죽기살기로 도망을 쳐서 가정이라는 오래된 깊은 웅덩이 속으로 피했다. 마침 그 곳에 있는 애정이란 관목을
잡고 의지했다. 위에서는 사자가 내려다보며 울부짖고 아래를 내려다 보니 죽음이라는 용이 떨어지기만 하면 한 입에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선 배가 고팠다. 마침 옆에 쾌락이란 석청이 있어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위의 사자도 아래의 용도 다 잊어버렸다. 그런데 잡고 있는 관목 밑동을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면서 갉아먹고 있었다. 이것이 사람이 처한 절망스런 상황이다.
우주 물리학자 스터븐 호킹 때문에 세상에 알려진 루게릭병으로 죽어 간 모리슈워츠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죽게 되리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자기가 죽는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만약 자신이 죽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자기는 안 죽을 거라며 자신을 속인다. 사람이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배우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다들 잠든채로 걸어다니는 것처럼
사니까 우리는 세상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다. 그저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일만 기계적으로 하며 반쯤 졸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미치앨봄.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자로(子路)가 공자(孔子)에게 죽음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공자가 말하기를 "삶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논어』선진편)라고 하였다. 이는 공자의 말 가운데 가장 미숙한 말이다. 죽음을 알아야 삶을 알 수 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을 말한 공자가 죽음을 몰랐을 리 없다. 만용에 가까운 용기로 목숨을 가볍게 생각하는 자로의 물음이라 핀잔을 준 것 같다. 아마 안회가 같은 질문을 하였으면 그렇게 대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70살을 살았다면 70년을 죽어 온 것이다 .일 초 전에 한 일도 내가 바꿀 수 없는데 그것은 '이미 죽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죽어야 할 지를 알아야 어떻게 살 지를 안다는 것이다. 사는
것이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바로 죽을 줄을 알았기에 바로 살 줄 알았던 것이다.
벽암록에 나오는 운문(雲門)이 그의 문하생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15일 전의 일은 너희들에게 묻지 않겠다. 오늘 15일 뒤의 일에 대해서 한마디 해보라." 그러나 아무도 입을 떼는 이가 없자 운문이 스스
로 대답하기를 "나날이 좋은 날이다"(日 日是好日 -벽암록 제6칙)라고 하였다. 운문의 '나날이 좋은 날'이란 무슨 뜻일까. 세상 사람들이 좋다는 부귀영화를 버린 스님에게는 어떤 날이 좋은 날일까? 사형수
에게는 죄수복을 벗는 날이 좋은 날이듯이 나고 죽는 몸나를 떠나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얼나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수의의 몸을 벗는 날보다 기쁜날이 없다.류영모는 "죽는 날이야말로 축하할 날일지 모른다"라고 말하였다.
헛되이 태어난 처음부터 판결은 선고되고 判決宣告虛誕初
아담과 해와가 여호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형선고는 이러 하였다.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19) 류영모는 말하기를 "우리는 날 때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있다. 사형수가 교수대에서 밧줄을
목에 걸고 딛고 선 마루청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러한 형편에 우리는 서 있다.이 사실을 잊으면 쓸데없는 잡념에 시달리고 욕망에 사로잡히고 교만에 빠진다. 종당 죽음이 결정된 사형수들이 서로가 잘 났다고 다투다니 사람이란 짐승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향락을 하겠다니 요절복통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의사 안중근(安重根)은 여순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조선 왕국을 죽인 이또오(伊藤博文)를 저격하였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3분간
기도를 올린 뒤 밧줄이 안중근의 목에 걸치었다. 10시 4분에 간수가 그의 발 밑 판자를 떨어뜨리자 그의 몸이 공중에 달렸다. 10시 15분에 의사가 그의 죽음을 확인하였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데 11분도 안 걸렸다. 우리의 목에 걸린 눈에 안 보이는 밧줄을 의식하고 살아야 어리석은 사람이 안 된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사형수이기 때문이다.
오래산다 일찍 죽는다지만 한 유예기간 猶豫期間壽夭日
젊어서 죽으나 늙어서 죽으나 죽고 나면 마찬가지다. 30대에 죽은 예수와 80살에 죽은 석가가 오늘에 와서 다른 것이 무엇인가. 사형 집행을 당긴 것이나 미룬 것이나 오십보 백보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유예기간을 늘리려고 애를 쓰는가 하면 유예기간이 길다고 못견디는 이도 있다.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에게 맡겨 놓고 언제라도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날이 오늘이다'라고 할 때 '왜?' 하고 대들어서는 안 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몸은 얼마 앞서 어쩌다가 부모님의 精血로 실없이 시작했으니 조만간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몸으로는 죽기 위해 온 것이다. 자꾸 더 살자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이 몸을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게 영생이다. 날마다의 생각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하자. 참된 생각이란 죽는 연습이다.죽음을 생각하여 언제 떠나도 미련이 없도록 준비와 각오를 하면 좀더 생각을 깊이하게 된다. 인간의 몸뚱어리는 아끼고 아끼다가 거름이 될 뿐이다. 죽음의 연습이란 것은 오늘 하루하루를 참되고 아름답게 생각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나는 오늘 내 삶의 순간순간을 또박또박 참되고 아름답게 가면 마지막 끝(終命)도 참되고 아름답다."(다석어록)
전체(하느님)의 생명으로 있던 것이 전체를 잃고 개체(個體)로 떨어져 유배(流配)생활 아닌 유배생활을 하다가,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전체로 돌아가는 것이 이른바 죽음이다. 개체에게는 더없이 기쁜 날이
요 감격스런 날이다. 비록 개체로 있으면서도 전체(하느님) 의식을 회복한 것이 신앙이다. "임의 종인 죽음이 이 몸의 문 앞에 왔나이다.(줄임) 이 몸은 양손을 맞잡고 눈물로써 그를 공경하겠나이다"(타고르,
『기탄자리』)라고 한 타고르도 훌륭하지만 "나는 죽음 맛 좀 보고싶다. 그런데 그 죽음 맛을 보기 싫다는 게 뭔가. 이 몸은 내던지고 얼은 들려야 한다"는 류영모도 훌륭하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3. 만드신 경위 創造始末|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4. (하느님)상 보기 觀相
하느님은 죽지 않는다 (谷神不死)
빈 탕의 모습 장엄한데 만물은 꼴을 뵈고 空相莊嚴物現象
빛깔 모양 좋다 나쁘다간 나도 몰래 흘려 色相好惡我隱惑
눈으로 보니 흐리고 어둬 낮도깨비 나와 小見渾盲鬼出晝
얼로 보니 분명 하느님 다니는 골 大觀分明神運谷
(1901.11.4)
相:상볼상 象:형상상 隱. 숨길 은. 渾:흐릴 혼.
류영모가 이 한시를 쓰게 된 데는 숨은 얘기가 있다. 류영모는 안사람들의 일손을 덜어주자며 국민복을 지어 입은 적이 있다. 그때 염락준을 비롯한 몇몇 제자들도 따라 지어 입었다. 국민복이란 넥타이를
안 매는 양복을 말한다. 공산주의자들이 입는 레닌복을 연상하면 된다. 그리고는 일생 동안 한복을 입었다. 삭발한 머리에 무명으로 지은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천으로 된 손가방을 들고 다녔다. 손가방
에는 YMCA 연경반에서 강의할 교재가 들어 있었다. 이러한 류영모의 차림을 보고 어떤 이가 '사주 관상을 보는가' 라고 물었다. 허름하게 차린 슈바이처를 보고 '고물 장수인가?'라고 묻는 이가 있었다.
류영모는 "이왕 관상쟁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하느님 아버지의 관상을 보았다"라고 말하면서 이 한시를 교재로 강의를 하였다. 또 류영모는 말하기를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역』을 많이 배워오고 또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아는 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그래서 『주역』을 아주 미신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점치는 것을 미워한다. 보통사람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알고싶어 하는 사람일수록 영(靈)한 사람을 찾는다. 그래서 귀신 잡힌 사람을 무당이라 하여 무당을 찾는다. 이래서 사교(邪敎)도 생긴다.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도 이런 데에 흥미를 갖는 이가 아주 많다. 이들은 덜된 사람으로서 영(靈)에 통한 사람이 아니라 마(魔)에 씌인 사람이다. 우리의 진리정신을 키울 생각으로 신통(神通)을 찾으면 그것은
진리를 찾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욕심으로 얼을 찾으면 그것은 사악(邪惡)에 떨어지고 만다. 신통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문제다. 마음이 깨끗하면 성령이 되고 마음이 더러우면 악마
가 된다" 라고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고생하다 죽게 되어 있다. 창세기에는 "아담에서부터 이미 사람은 이마에 땀홀리며 고생한 뒤에 흙으로 돌아간다"(창세기 .1:17-19)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평안하게 부모의 품안에서 자라 따뜻한 이부자리에서 평생을 지내고 모두가 환영하고 모든 일이 즐거운 것만이 인생으로 알면 틀린 것이다. 나의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니 살리거나 죽
이거나 하느님 아버지께서 뜻대로 하시라고 맡기는 게 아들의 마음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살려주시는 동안 하느님을 찾아야 한다. 한 시간 동안을 살게 해주면 그 시간 동안에 하느님 아버지 당신을 찾으라
고 주신 것이다. 하느님이 나의 나인 참나(眞我)라 찾지 않을 수 없다. 우리를 살리는 동안에 하느님께 다다라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내 관상을 남에게 보아 달랄 필요가 없고 남의 관상을 내가 보아줄 필요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 속에서만 얼나를 깨닫게 된다. 예수처럼 얼나를 깨달아 하느님을 위해서 고생하고 죽을 줄 아는
지혜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석가처럼 스스로 고생을 사서 하고 고생을 즐기며 참을 드러내는 청정과 반야가 있어야 한다.
빈 탕의 모습 장엄한데 만물은 꼴을 뵈고 空相莊嚴物現象
하느님은 실체인 무(無)와 양태(樣態)인 유(有)로 되어 있다. 하느님은 무(無)와 유(有) 바꾸어 말하면 공(空)과 색(色)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유(有)는 자꾸만 바뀐다. 무(無)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체인 하느님으로는 바뀌면서도 바뀌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대우주 전체는 언제나 자기가 아니면서 자기다. 자기가 아니라는 것은 계속 변해 간다는 말이다. 계속 변하여 자기가 없어지지만 대우주는 여전히 대우주라는 것이다. 변하는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 무(無)와 변하는 유(有)의 양면을 가졌기에 전체로는 변하면서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면서 변한다. 맷돌 위짝은 돌아가지만 밑짝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맷돌이 돌아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느님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하느님 밖에 없다. 하느님 밖에서 하느님을 본다면 하느님은 공상(空相)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느님은 분명히 색(色)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인
우리가 색(色)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말할 때는 불변의 공상(空相)을 말할 수밖에 없다. 또한 색계(色界)를 거짓이라고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색계의 만물은 없다가 있어지고 있다가 없어지는 상대적 존재
이기 때문이다. 공(空)이 주(主)이고 색(色)은 종(從)이므로 종(從)인 사람은 색계를 대표하여 색(色)을 부인하고 주(主)인 공(空)을 높여야 한다. 이렇게 깨닫고 실천한 이가 예수요 석가인 것이다. 류영모의 생
각도 예수나 석가의 생각과 일치함은 놀랍지만 당연하다. 진리(하느님)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공상(空相)이야말로 참으로 장엄하다. 이 우주의 만물은 공상(空相)을 나타낸 것이다. 우주의 만물이 전부 동원해서 겨우 이 공상(空相)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붓끝 같은 물체만 보고 허공은 못 보다니 제가 좀팽이 같은 것이라서 물체밖에 못 본다."
류영모가 하느님의 얼굴이라 생각하고 공상(空相)의 관상을 보니 곡신불사(谷神不死)였다. 곡신(谷神)이란 노자(老子)가 쓴 하느님의 별칭이다. 곡(谷)자는 하늘(天)을 그린 상형문자다. 아래 입구(口)는
둥그런 하늘을 그린 것이고 위에 여덟 팔자(八)자 겹친 것은 하늘에서 빗줄기가 떨어지는 것을 그린 것이다. 곡(谷)이야말로 우주를 그린 것이다.
곡신(谷神)은 천신(天神)이다. '하느님은 죽지 않는다' (谷神不死- 『노자』 6장)가 하느님의 관상을 본 점괘다. '곡신불생불사' (谷神不生不死)인 것이다. 비롯이 있고 마침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다.
창세기 첫머리의 맨 처음이란 상대세계의 맨 처음일 뿐 하느님 자신에게는 처음도 마침도 없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언제부터 어디서 어떻게 생겨 무슨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하였
다. 유일한 존재이신 하느님은 불생불사이기 때문이다. 상대존재인 개체가 나고 죽는 것은 난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다. 개체는 있다고 할 수 없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노자(老子)는 하느님의 관상을 보고 그 신비함에 황홀(恍惚)을 체험하였다. 장자(莊子)는 하느님의 상을 보고 그 권위에 좌망(坐忘)을 체험하였다. 예수는 하느님의 상을 보고 거룩한 광영(光榮)을 체험하였다. 석가는 하느님(니르바나)의 상을 보고 기쁨의 법열(法悅)을 체험하였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색상(色相)이 없는 하느님 아버지의 공상(空相)은 햇빛보다 밝은 영광스런 모습이다. 진리(말씀)란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빛깔 모양 좋다 나쁘다간 나도 홀려 色相好惡我隱惑
공상(空相)인 하느님의 모습을 뵙고자 나온 인생인데 엉뚱하게 색상(色相)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건 엄청난 미혹(迷惑)이 아닐 수 없다. 서울역으로 손님을 맞이하러 왔다가 휘황찬란한 네온사
인의 빛깔에 홀려 손님맞이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세상을 사랑하면 몸으로 멸망한다. 진리를 따르면 얼로 살아난다"라고 류영모는 말하였다. 세상이 색상(色相)이요 진리는 하느님이다. 참 사람은 몸 살
림의 의 식 주는 간소하게 하고 맘 살림은 진선미로 풍성하게 살았다. 이것을 마하트마 간디는 진리파지를 위한 단순생활(simple life)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색신(色身)에 붙잡혀 색상(色相)에 홀리고 색계(色界)에 갇혀 짐승 노릇을 하고 있다. 그래서 류영모는 "세상에 영웅이라는 자들이 권력 금력을 잡으면 고작 호의호식(好衣好食)에 미녀(美女)를 많이 거느리는 것이 다인 줄로 생각한다. 악마의 나라를 세워 놓고 멸망해간다"(『다석어록』)라고 하였다. 중국 삼국을 통일한 진(晉)나라 무왕(武王)이 처음 임금이 되어서는 청렴한 성군(聖君)이 되겠다고 호언하더니 차차 색상(色相)에 빠져들어 1만 명의 미녀를 거느리는 색광(色狂)이 되었다. 사람들은 멸망을 자초하는 그러한 영웅을 부러워하여 그 흉내라도 내 보겠다고 눈이 시뻘겋다.
눈으로 보니 흐리고 어둬 낮도깨비 나와 小見渾盲鬼出晝
몸으로는 사람도 짐승이다. 짐승인 제나(自我)로는 자신과 새끼밖에 모른다. 짐승이 사는 목적은 오로지 새끼 치는 생식(生殖)에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달은 이는 몸이 죽는 것을 두려워할 것도 싫어할 것도 없다. 전체인 얼나(하느님)로는 죽음이 없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죽음은 없다. 그런데 죽음이 있는 줄 알고 무서워한다. 죽음
을 무서워하는 육체적 생각을 내던져야 한다."라고 하였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도깨비, 허깨비가 보인다.
그래서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일수록 미신, 잡신을 믿는다. 몇십 년 전만 하여도 집집마다 잡신이 우글거렸다. 부엌에는 부엌신, 아궁이에는 아궁이신, 뒷간에는 뒷간신, 우물에는 용왕신, 방안에 방구석신 등이 수두룩하였다. 그 신들에게 몸의 안녕을 빌어야 했다. 전체(절대) 신관이 확립되지 않은 옛사람들에게는 전세계에 공통적으로 애니머티즘(animatism), 애니미즘(animism) , 토테미즘(totemism) , 반인반동물신(半人半動物神), 인태신(人態神)으로 신관이 변천되어 왔다. 이게 다 대낮에 도깨비 나오는 얘기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달은 이는 참나인 하느님만이 존재하는 것을 안다. 하느님밖에는 어떤 존재도 없
으므로 잡귀, 잡신이 존재할수 없다.
얼로 보니 분명 하느님 다니는 골 大觀分明神運谷
몸의 눈으로 보는 것이 소견(小見)이고 맘의 얼로 생각하는 것이 대관(大觀)이다. 소견으로는 창공이 우주로만 보이지만 대관하면 우주가 하느님으로 보인다. 칸트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이 하느님의
존재를 규명하려다가 못 하였다. 우주가 그대로 하느님인 것을 몰랐다. 필립보가 예수에게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고 하였다. 예수가 대답하기를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라고 하였
다. 나는 전체인 하느님의 한 부분인 개체다. 부분이 있는 것이 전체가 있는 증거인데 무슨 증거가 따로 필요하단 말인가.
하느님인 우주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170억 년 전 우주란의 대폭발(Big Bang)로 벌어진 팽창하고 있는 유한우주(有限宇宙)와 유한우주를 감싸고 있는 무한우주(無限宇宙)가
있다 .이 무한우주가 하느님의 실체다. 무한우주 속에 유한우주가 생멸하고 있다. 무한우주 속에서 별의 불꽃놀이하는 것이 유한우주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4. (하느님)상 보기 觀相|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5. 삼독을 버린 뒤에 (니르바나의) 길을 닦는다 除三毒而後修行
하루에 한 번씩 식욕을 시험 받고 一日一試貪
일생 동안 몇 번 (아내와) 함께 해 一代幾度痴
눈동자에 성냄을 맑게 씻어버려야 眸子滌除瞋
사람이 바른말을 말할 때 人生正語時
(1957.8.25)
除 버릴 제 修 : 닦을 수. 行 : 길 행. 試 시험할 시
眸子 (모자) :눈동자. 眸 눈동자 모. 滌除(척제) :씻어 버리다.
滌: 씻을 척. 瞋 : 성낼 진 時 : 기약할 시
삼독(三毒)이란 불교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이 지닌 짐승의 성질을 말한다. 20세기에 와서 가장 영향을 끼친 사상가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사람이 지닌 탐 진 치의 수성(獸性)을 재발견한 데에 기초하여 사상을 전개한 점이다. 마르크스는 탐과 진에 기초하였고, 프로이트는 치에 근거하였다. 사람이 지닌 세 가지 독한 짐승 성질이 삼독이다.
첫째가 탐(貪)이다. 탐이란 먹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강도 짓을 하는 데까지 이른다.
둘째는 진(瞋)이다. 진이란 미워하는 데서 살인하는 데까지 이른다.
셋째는 치(痴)이다. 치란 음담패설에서 강간에까지 이른다.
동물학자들이 동물의 본성을 feeding(貪) , fighting(瞋) , sex(痴)라고 하는 것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짐승들을 얕본다 하여도 삼독을 지닌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우리의 몸은 삼독에서 나온 짐승이기 때문에 탐 ·진 ·치에 빠져 있다. 우리는 탐 진 치라는 짐승 성질을 버리고 사람 노릇 하자는 것이다. 도덕이란 탐 진 치를 벗어나는 것이다. 사람은 몸으로는 분명 짐승인데 짐승의 생각을 하지 않음이 얼 사람으로 솟나는 우리의 길이다"라고 하였다.
삼독(三毒)은 짐승들에게는 삼덕(三德)이다. 탐 · 진 · 치가 아니면 어떠한 동물도 생존할 수도 번식할 수도 없다. 사람도 오늘날까지 몇 백만 년을 버텨 온 것은 삼독의 법칙을 따랐기 때문이다. 삼독을 버리자고 한 류영모도 이것을 인정하였다. "탐·진 ·치를 삼독이라 한다.
사람이 삼악(三惡)을 저지르면 개운치 않다. 그런데 탐 진 치, 이것은 인생살이의 살림 밑천이다. 그걸로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왔고 먹고 자랐으며 또 진취적이 된다. 이게 모순인데 그대로 두어야 한다."(류영
모, 『다석일지』)
사람이 유인원(類人猿)으로 침팬지 옆에 서야 한다. 그러나 바로 서는 직립 유인원은 사람뿐이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달리 곧이 곧장 일어설 수 있는 것은 하늘에서 온 탓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은 하느님
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언제나 하늘로 머리를 두고 하늘을 사모하며 곧이 곧장 일어서서 하늘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다석어록)
사람이 직립(直立)한 지 2백만 년도 더 지난 지금으로부터 2천5백 년 전에 석가 · 노자 · 공자 · 예수가 나와서 하나같이 탐 · 진 · 치의 수성(獸性)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짐승의 한 무리에 지나지
않는 사람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삼독을 깨끗이 버리면 짐승인 몸 사람으로서는 자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짐승인 몸으로서는 죽어서 하느님 아들인 얼로 하느님 사랑을 이
루라는 것이다.
공자(孔子)는 이것을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고 하였다. 예수는 살신성인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예수가 "앙갚음하지 말아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가 주어라" (마태오 5 :39-41)라고 한 것은 한마디로 하면 살신성인인 것이다. 짐승인 제나(自我)로 죽는 살신성인에 이르지 않고는 예수의 말대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먼저 삼독을 버리기 위해 제나(自我)가 죽어야 한다. 제나는 제나가 거짓 나인 줄 스스로 알면 저절로 죽는다. 거짓 돈은 거짓 돈인 것이 폭로되면 값어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거짓 나가
죽으면 참나인 하느님이 오신다. 내 마음속에 오신 하느님이 얼나(靈我)다. 제삼독이후수행(除三毒而後修行)은 마하트마 간디가 말한 "제나가 죽을 때 얼나가 깬다"(When the ego dies, the soul awakes. -
M.K.간디. 『날마다의 명상』)와 같은 뜻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어릴 때 노릇은 짐승의 버릇이라고 한다. 사람이 어릴 때 노는 일은 모두 좋은지 나쁜지 분간하지 못한다. 이것을 분간하면 어리다고 하지 않는다. 짐승은 먹는 것, 싸우는 것,
새끼 치는 것밖에 모른다. 이승에서 배운 먹고 싸우고 싸는 못된 짐승 버릇을 끊게 하려고 하면 안 된다.하느님의 말씀을 읽게 하고 알게 해주면 스스로 자연히 끊게된다. 자연의 프로그램에는 다 방정식이 있
다. 순서가 바꿔져서 모두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사람들이 짐승 노룻 버리도록, 하느님 생각 이루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20세 전의 이 사람 일을 생각하면 참 짐승노릇 하였다는 것을 느낀다." (다석어록)
삼독을 버리고 수행을 잘하여 니르바나(Nirvana)의 대도(大道)를 이룬이가 석가 부처다. 석가가 가르친 여섯 파라밀다가 바로 '제삼독이후수행' (除三毒而後修行)을 말한 것이다. 앞의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은 삼독을 버리라는 가르침이다. 보시는 탐(貪)을 버리는 것이요, 지계는 진(瞋)를 버리는 것이요, 인욕은 치(痴)를 버리는 것이다. 뒤의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는 수행하여 니르바나에 이르는 것이다. 니르바나(하느님)를 그리는 것이 정진이요,니르바나를 품는 것이 선정이요, 니르바나를 세상에 증언하는 것이 반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식욕을 시험 받고 一日一試貪
이것은 류영모 자신이 짐승 성질과 싸운 것을 말한 것이다. 류영모는 15세에 하느님에 대한 초발심을 일으켜 서울 중앙 YMCA와 서울 연동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이때는 남이 가르쳐 주는 대로 받아들인
기독교 교리에 맹종하는 신앙이었다. 22세부터는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을 찾겠다는 자립의 신앙이었다. 52세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구경(究竟)의 신앙이었다.
52세부터 하루 한 끼씩만 먹었다. 그것은 하루에 한 번씩 식탐을 시험 받았다는 말이다. 하루에 한 끼만 먹으니 얼마나 배고팠겠는가. 식욕을 억제하느라고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식욕에 끌려가면 과식을
하게 된다. "이 사람은 하루에 한 끼 먹으니 한 번씩은 탐한다. 이 시험을 날마다 한 번씩은 당한다. 한 끼 먹기 전에는 하루에 두 끼씩 먹었다. 하루에 한 끼 먹은 지가 올해로(1960년) 한 20년 된다. 새해 2
월 18일이 꼭 20년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일중(日中)하는 것을 호기심으로 사람들이 내게 물어 본다."
(다석어록)
일생 동안 몇번 아내와 함께 해 一代幾度痴
류영모는 52세에 금욕 생활과 일일일식을 함께 시작하여 식색(食色)을 함께 끊은 것이다. 색과 달리 식은 완전히 끊으면 죽기 때문에 하느님이 맡기신 사명을 할 만큼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류영모는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은 굶는 것이라 안 먹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평생에 몇 번 어리석은 짓을 하였다는 것은 52세 이전에 부부 사이에 성생활이 있었던 것을 말한 것으로 그 결과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남녀 관계의 그것은 몇 번 당했다는 것을 본인하고 하느님만 아는 사실이니까 발표할 수 없다. 평생에 몇 번 당해서 자식을 낳았다. 나는 51세까지 범방(犯房)을 했는데 그 뒤로는 아주 끊었다. 아기 낳고
하던 일이 꼭 전생(前生)에 하던 일같이 생각된다. 정욕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사람 노릇 하려고 끊었다."(다석어록)
짐승들의 생존 목적은 종족 보존에 있다. 종족 보존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도 좋다. 류영모는 짐승인 종족이 단절되는 것이 하느님 아들인 얼나의 이상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혼인하지 않았고
석가는 출가에 앞서 낳은 외아들 라훌라도 출가시켜 석가의 혈손(血孫)은 끊어졌다. 이것이 그리스도나 붓다(Buddha)가 보여 주는 사상의 진수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영원한 생명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버리는 것뿐이다. 몸생명을 얻기 위해 얼생명을 버리는 것이 생식(生値)하는 것이다. 얼생명을 얻기 위해 몸생명을 버리는 것이 천명(天命)이다. 몸을 버리고 세상을 버리는 것이 믿음에 들어가는 것이다. 식욕, 색욕을 미워하고 버려야 한다 .우주, 세상을 미워하고 버려야 한다." (다석어록)
이 음란한 세상이 류영모의 이러한 말을 들을 까닭이 없다. 예수 · 석가의 말을 귀넘어듣고 톨스토이 ·간디의 말을 우습게 듣는 이 세상이 아니던가. 그런데 문화일보에 연재되고 출판된 다석사상 전집 7권
을 읽은 한 독자(元善基)가 1998년에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외동딸(원성원)에게 "너는 될 수 있으면 시집가지 말고 깨끗하게 살라"는 유언을 하였다.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새가 장차 죽으려 할
때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이 장차 죽으려 할 때 그 말이 착하다"(烏之將死其鳴也哀 人之將死其言也善-『논어』 태백편)라고 하였다. 여느 아버지 같았으면 너를 시집 보내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하다고 했
을 것이다. 그 아버지가 딸에게 멍에를 씌운 것으로 보이지만 그 딸이 아버지의 유언을 잊지 않는다면 시집을 가든 안 가든 하느님을 사랑하며 정결하게 살 것으로 믿는다.
눈동자에 성냄을 맑게 씻어버려야 眸子滌除瞋
삼독(三毒)인 탐 진치에서 진(瞋)을 끝으로 돌렸다. 남을 미워하지 않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식 색을 참기보다는 나은 편이다. 성을 안 내고 사는 이들은 주위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류영모는 눈동자에서 노여움을 씻어버리라고 하였다. 성을 내면 눈에 노여움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음에 살의(殺意)를 품은 이는 눈에 살기(殺氣)가 돈다는 것이다. 맹자(孟子)는 이르기를 "사람이 지닌 것에서
눈동자보다 착한 것은 없다. 눈동자는 그 나쁜 것을 감추지 못한다.
속마음이 바르면 눈동자도 빛나고 속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눈동자가 흐리다" (『맹자』이루 상편)라고 하였다. 눈동자에서 노여움이 사라지면 미운 생각이 아주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씻어내는 것은 눈동자가 아니라 속마음인 것이다.
"대자대비의 세계는 밉다 곱다고 하는 애증(愛憎)의 세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리고 남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가질 때에만 나와 남이 하나가 될 수 있다." (다석어록)
사랑이 바른말을 말할 때 人生正語時
인류 역사에 바른말을 한 사람은 옛사람으로 예수·석가요, 노자 · 장자요, 공자 · 맹자가 있었다.
현대 사람으로는 톨스토이와 마하트마 간디 · 류영모가 바른말을 하였다. 이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탐·진 치의 제나(自我)를 부정하고 하느님이 주시는 얼나로 거듭난 사람들이다.
그들의 제나가 한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얼이 한 말이라 바른말이다. 그러므로 바른말을 하려면 먼저 수성(獸性)을 지닌 짐승인 제나를 이겨야 하고 죽여야 한다. 그래서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자기(제나)
를 이기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은 없다 .남을 이기는 것은 나와 남을 죽이는 일이다. 나를 이기는 것이 승리요, 생명이다. 참을 찾아 올라가는 길이 나를 이기는 승리의 길이다. 남을 짓이기려는 사람은 개인이나 나라나 다 망한다. 일제(日帝)도 망했고 조선도 망했다." (다석어록)
눈동자에 진성(瞋性)이 이글거리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참말처럼 능숙하게 하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남을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은 거짓말을 잘하게 되어 있다. 인자하고 정직한 사람이 누구를 위해
거짓말을 하겠는가.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5. 삼독을 버린 뒤에 (니르바나의) 길을 닦는다|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6. 깨달은 이(크리스찬) 基督者
정중한 기도는 성령을 숨쉼이요 祈禱陪敦元氣息
찬송의 반주는 튼튼한 맥박의 울림 讚美伴奏健脈搏
옳고 극진한 먹거리 감사는 날로 바로 먹기 嘗義極致日正食
하늘 제사를 참 잘 밝힘은 밤에 맡기고 잠 誠克明夜歸託
(1956.12.8)
陪敦(배돈) .정중히 받들음 陪 : 모실 배. 敦 도타울 돈. 嘗 :가을 제사 상, 맛볼 상
. :하늘에 올리는 제사 체. 克明(극명) :잘 밝힘. 克 능할 극. 託 : 맡길 탁. 健 굳셀 건
(極致) :더할 수 없이
종교에서의 생명은 진리(성령)다. 종교에 진리가 살아 있으면 의식(儀式)을 초월하지만 진리가 떠나면 의식(儀式) 종교가 되어버린다. 의식 종교는 진리보다 조직이 우선한다.
예수는 진리를 말씀하시는 선생이었지 의식(儀式)을 주재하는 사제(司祭)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뒤의 기독교는 의식을 주관하는 사제의 종교로 되어버린 점이 많다. 오늘날의 여러 교회들은 요란한 예배의식으로 최면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한다. 류영모는 사찰이나 성당에 촛불 켜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예수와 석가가 다같이 진리를 설교하였지 예배의식을 주관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제사종교가
되어버린 기성 종교집회를 좋아할 리 없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예수 믿는 집회에는 안 가는데, 예수 믿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기도에 대해서나 성경에 대해서 말하라고 한다. 나는 그럴 자격도 없으니 안 한다. 소위 교회 본위의 교회주의 기독교 교인은 이 사람을 대단히 싫어하는 것으로 안다. 이 사람이 생겨먹기로 제 생각대로 하자는 것이지 억지로 어떻게 만들어서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적어도 구약과 신약은 성경으로서 오래 지나도 버릴 수 없는 정신이 담겨 있다고 본다. 신약의 말씀도 구약을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다른 종교의 경전도 다 구약성경과 같이 보아야 한다는 것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지극히 높은 데 계신 완전한 아버지께로 가자는 것이 예수의 인생관이라고 생각된다. 나도 이러한 인생관을 갖고 싶다. 이런 점에서 예수와 나와 관계가 있는 것이지 이밖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걸 신앙이라 할지 어떨지, 예수 믿는다고 할지 어떨지 나는 모른다. 예수가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린 것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믿는 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다석어록』)]이것이 류영모와 예수와의 관계다.
그러나 예수가 깨달은 얼나, 곧 하느님이 보낸 성령으로서는 예수와 류영모가 다르지 않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 보았다. 보내신 그리스도란 영원한 생명이다. 우리에게 산소가 공급되듯 성령이 공급되는 것이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줄곧 오는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그리스도)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 예수 석가에게 나타났던 영원한 생명이 나에게도 나타났으니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얼나)이 존재하는 것만은 틀림없다"라고 하였다.
기독자란 크리스천(christian)이란 말이다. 여기에서 크리스천이나 기독자는 교회 신자란 뜻이 아니라 예수가 가르쳐 준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거듭난 사람을 뜻한다. 이런 뜻에서 기독자란 불자(佛子)란 뜻
과 다르지 않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불성(佛性)이 자기에게 있음을 믿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독자의 얼나나 불성의 얼나나 한가지로 영원한 생명이다.류영모는 "영원한 생명에는
개인이란 없기 때문에 이름이 소용없다"라고 하였다.
정중한 기도는 성령을 숨쉼이요 祈禱陪敦元氣息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인 성령을 정중히 숨쉬는 것이 기도라는 말이다. 元 (원)자는 사람이 하늘을 이고 있는 형상으로 하느님을 나타내는 글자다. '氣' (기)는 공중에 날아다니는 김을 나타내는 글자다.
'息'(식)은 코(自)와 맘(心)이 합친 글자로 얼숨을 쉬는 맘의 코다. 원기식(元氣息)은 하느님의 얼을 숨쉰다는 말로 성령을 숨쉬는 것이 기도라는 뜻이다. 성령을 숨쉬되 쉬는 척만 할 것이 아니라 배돈(陪敦),곧 정중히 숨쉬어야 한다는 뜻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었다. "나더러 크리스천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기도하는 이가 크리스천이라고 말하겠다.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하면 배돈(陪敦)하게 한다. 배돈에는 정중과 조심의·뜻이 포함되
어 있다. 기도는 조심조심하여 정중히 간절간절하여 두툼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정신적인 성령의 호흡이다. 성령의 호흡인 원기식(元氣息)을 조심하여 깊이 두텁게 숨쉬는 것이다. 성령은 바로 우리의 정신적인 숨쉼이다.
성령이 우리 맘의 얼로 참나인 영원한 생명이다.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지 않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고 살았다고 할 수 없다. 이렇게 할딱할딱 숨을 쉬어야 사는 이몸은 참 생명이 아니다.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나다. 영원한 생명은 숨쉬지 않아도 끊기지 않는 얼숨이 있을 거다. 내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런 제나(自我)는 쓸데없다. 숨 안 쉬면 끊어지는 이 몸 목숨은 가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인 석가의 법신(法身) 예수의 하느님 아들은 같은 말이다." (다석어록 )
류영모는 예배 의식을 갖지 않았다. 기도나 찬송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류영모는 류영모 대로 기도와 찬송이 있었다. 예수처럼 사람들이 안 보는 데서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고 찬송을 드렸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이 사람은 여태껏 여러분과 같이 기도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찬미 또한 해 본 적이 없다. 생각한 것이 꽉 차서 하느님의 생각과 일치되어 절로 나오는 감동이 찬미가 되어야 하고 그 말이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참 생각이 여물어져 하느님과 일치되는 생각을 하게끔 되어야 찬미와 기도가 의미있는 것이지 그 밖에는 의미가 없다. 한다 하여도 거짓이 된다. 기도와 찬미를 우리네가 인사치레하
는 것같이 하고 있으나 그런 것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여 무의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찬송의 반주는 튼튼한 맥박의 을림 讚美伴奏健脈搏
태아가 어머니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리듬으로 삼아 소리 없는 감사와 찬양을 어머니께 바치듯 우주에 울리는 하느님의 심장이 뛰는 고동소리에 영원한 생명의 을동을 느끼며 그 반주에 맞춰 우리의 얼
은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우리 몸의 맥박도 따라서 차고 넘치는 기쁨으로 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더러 어떤 이가 '예수를 믿으십니까' 또 '선생님은 기도도 안 하시고 찬미도 안 하시
지요?'라고 묻는다. 찬미는 몰라서 못 하고 기도는 참선에 가까운 묵상의 기도를 한다. 나는 찬미할 줄 모르나 찬미는 표한다. 찬미는 훌륭한 것을 훌륭하다고 하는 것이다. 맥박이 뚝딱뚝딱 건강하게 뛰는
소리가 참 찬미다. 다른 것은 부러워하지 않는다."(다석어록)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면 하느님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와 찬미다.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와 찬미를 올리는 마음에는 기쁨이 넘친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은 기쁜 것이고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좇아 하느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수가 없다.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허무한 것 같아도 목에 숨을 쉬듯이 한 발자국씩 올라가면 하느님에게까지 다다를 수 있다. 몸으로 사는 삶은 무상하지만 얼로 사는 삶은 기쁨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옳고 극진한 먹거리 감사는 날로 바로 먹기 嘗義極致日正食
류영모는 이 구절을 이렇게 풀이하였다. "상(嘗)도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다. 일본 사람이 신상제(神嘗祭)라고 해서 햇곡을 올린다. 우리가 추수감사제라고 해서 햇곡을 올리는 것이 이것이다. 한 해 동안 하느님의 은덕으로 된 곡식을 이 죄가 많은 사람이 먹는데 탈나지 말라고 미리 하느님께 올리고 나서 먹는 것이다. 제(祭)에 제물을 올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몸을 바치는 대신으로 지낸다는 것이 그렇게 되
었다. 제물을 바치는 그러한 것은 하지 않아도 좋다. 오로지 마음으로 머리를 하늘에 두고 사는 것이 옳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제(祭)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을 추원(追遠)하는 것이 기도다. 우리가 예수의
지내온 일생을 생각해보면 하느님의 아들 노릇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하느님의 아들 노릇을 하는데 마지막 몸까지 희생하였다.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이 생각을 함으로써 우리가 욕심으로 먹고 마시는 것은 버려야 한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
의 희생으로 그의 살이요 피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알고 먹는 것이 성찬이다. 날마다 먹는 음식을 성찬으로 먹어야지 식욕으로 먹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상의극치일정식(嘗義極致日正食)이다. "
하늘 제사를 참 잘 밝힘은 밤에 맡기고 잠 誠克明夜歸託
체제(祭)란 옛 중국의 천자(天子), 곧 황제들이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는 것인데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의 일이었다. 그런데 체제(祭)에 대해서 공자(孔子)가 한 말은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다. 누가
공자에게 (체)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공자는 모르는 게 없다 할 만큼 박식하여 무엇을 물어도 막히는 일이 없었다. 다만 진치는 법을 물었을 때 언짢게
생각하여 대답을 하지 않았고, 농사에 대해 묻자 농부만 못하다고 하였다. 더구나 제사에 관한 일이라면 공자에게는 전문분야라고 할 수 있는데 모른다고 하였으니 (체)의 뜻을 심상치 않게 본 것이 틀림
없다. 공자는 말을 잇기를 "세상에 (체)를 말해 줄 수 있는 이라면그이에게는 나라 다스리기가 이를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의 손바닥을 가리켰다."(논어 팔일편) 공자는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군자의 사명으로 알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일이 가장 어려운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체)의 뜻을 알면 나라 다스리는 일쯤은 손을 펴
놓고 들여다보는 것처럼 쉽다고 한 것이다. 이것으로 공자가 천명(天命)을 가장 두려워한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공자를 대신해 류영모가 (체)의 뜻을 말하였다. "옛날에 백성들은 자기 조상들에게만 제사를 지냈다. 천자(天子)인 대제사장이 온 천하를 대표해서 조상(祖上) 이상의 알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체제(祭)
를 올렸다. 이것이 곧 하느님에게 들어가는 길이다. 이 체제(祭)의 뜻을 알면 천하를 다스리는데 막힐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저마다 하느님 앞에 나와서 (체)를 바쳐야 한다. 이 사람의 절대와 상대
의 만남인 가온찍기는 체제(祭)를 말한다."
류영모가 체()를 극명(克明)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기도 올리는 체제(祭)의 뜻을 자세히 밝힌다는 뜻이다. 하느님께 기도를 바르게 할 줄 아는 사람은 (체)의 뜻을 모를 리 없다. (체)의 뜻을 바르
게 안다면 밤에는 하느님께로 돌아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든다. 죽는 것도 잠든 것과 같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6. 깨달은 이(크리스찬) 基督者|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7. 얼나를 모신 마음 基督心
가고 서는 제나의 삶은 꿈 거짓헛뵘이라 自行自止夢弄幻
웃님 뜻에 살며 죽도록 밝히고 살피고 깨닫자 命生命死覺省悟
탐욕을 채우고 음란에 빠져 나를 끝장내랴 貪厭淫淪沈沒我
밥을 잊고 고디를 맵게 가져 제나를 불살라 忘食貞烈炎存吾
(1956.12.11)
弄:희롱할 롱 幻:허깨비 환. 覺:밝을 각 悟: 깨달을 오
淪:빠질륜 厭:채울염 炎 :볼태울염烈:매울열 沈: 잠길 침. 沒:다할 몰. 마칠 몰
불심(佛心)이란 말은 들어도 기독심(基督心)이란 말은 처음일 것이다. 그러나 불심이나 기독심이나 뜻은 같다. 다르마의 나를 모신 마음이 불심이듯 그리스도의 나를 모신 마음이 기독심이다. 다시 말하면
도심(道心)이고 진리심(眞理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은 몸으로는 다른 짐승들과 같은데 그래도 귀한 것이 있으니 하느님의 씨(얼)가 사람에게 깃들여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씨(얼)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귀하다.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씨(얼)가 대통령이 되고, 제나(自我, ego)가 수상이 된 내각이 조각될 때 사람에게 인격이 나타난다. 인격이란 사람의 가치다.인물(人物)의 가격(價格)이 인격이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자는 것은 그의 몸을 보고 따르자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내 속에 있는 얼인 하느님의 씨가 참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임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므로 먼저 내 속에 있는 얼나에 따라야 한다. 그 얼이 예수의 영원한 생명이요 나의 영원한 생명이다."(다석어록).
얼나를 모신 마음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지만 얼나를 모시지 못한 마음은 짐승 그대로이다. 짐승 그대로 살면서도 짐승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내가 왜 짐승이냐"면서 성을 낸다.
맹자(孟子)는 인성(人性)은 착하다고 말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오해가 있다. 맹자도 순자(苟子)와 다름없이 제나의 인성을 악하게 보았다.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새 짐승들과 다른 것은 아주 적다. (짐승과 다른 그것조차) 여느 사람들은 버리고 참 사람만 간직한다"(人之所以異禽獸者幾希 庶民去之 君子存之-『맹자』 이루하편)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는 말이
"사람이 내게 함부로 덤빌 때는 내가 사랑이 모자랐던가 아니면 예의가 모자랐던가를 살펴 고친다. 그런데도 다름이 없으면 스스로 충성 됨이 모자랐던가를 반성한다. 그래서 잘못이 없다고 생각되는데도 함부로 덤비면 이것은 새 짐승과 같은 것이다. 새 짐승을 어찌 상대 할 것이며 또 어찌 나무라겠는가"(如此則與禽獸奚擇哉 於禽獸又何難焉-맹자 이루하편)라고 하였다. 이것이 맹자가 본 제나(自我)의 인
성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짐승인 제나로 살아가고 있다고 본 맹자를 어찌 제나의 성선설을 말하였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맹자는 순자와는 달리 사람은 아주 적지만 짐승과 다른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天命)을 아는 양지(良知)라는 것이다. 그것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서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맹자는 말하기를 "사람사람마다 귀한 것(하느님의 씨)을 제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생각해 찾지를 않는다"(人人有貴於已者 不思耳- 맹자 고자 상편)라고 하였다.
예수가 말한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마태오7:7-8)라는 말도 짐승과 다른 하느님의 아들인 얼나(靈我)를 생각해서 찾으라는 말이다. 찾으면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재물이나 명예, 여인이나 자식을 구하고 찾으라는 말이 아니다. 맹자의 성선설은 얼나가 선하다는 말이지 제나가 선하다는 말이 아니다. 제나와 얼나를 가리지 못하는 이들이 잘못 안 것이다.
어떤 이가 예수에게 묻기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일을 하오리까"라고 하자 예수가 대답하기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하였다. 이 말은
하느님이 보내시는 얼나를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말이다.
일 사(事)는 섬길 사(事)이다.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그런데 맹자가 같은 말을 하였다. "마음은 얼을 기르는데 두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存其心養性 所以事天也-『맹자』진심 상편) 존기심양기성(存其心養性)하는 것이 얼나를 모신 기독심 (基督心)이다.
"가고 서는 제나의 삶은 꿈 거짓 헛뵘이라" 自行自止夢弄幻
행(行)자는 열 십자 길을 그린 상형(象形)의 글자요 지(止)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상형의 글자다. 길이 있고 발이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일생은 떠돌아다니는 부유(浮游) 인생이다. 지구
위에서만 돌아다니는 것이 모자라 달나라까지 걸어 다니고 왔다고 어깨가 으쓱하고 있지 않은가. 하느님께서는 가지 않아도 안 간 곳이 없고 서지 않아도 안 계시는 곳이 없다.
사람의 시간과 공간속에서의 몸짓은 아무리 진지하고 심각하게 하여도 모든 것이 그 순간을 지나자마자 거짓으로, 헛뵘으로 돌아가 버린다.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되었고 2백만 명이 죽었다는 한국전쟁도 지나고 나니 꿈속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니르바나니 진리니 구원이니 하는 것은 이 삶이라는 꿈을 탁 깨자는 것이다. 잠 속에서는 잠을 잔 걸 얘기 못 한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게 모두 잠꼬대다. 사람이 무슨 학설을 세우려고 하지만 그게 모두 잠 속에서 꿈을 얘기한 것이다. 그러니 그게 틀린 것이다. 깨고 나서 잠을 이야기해야 한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하지만 참으로 알면 괜찮은데 반쯤 아니까 우환이다. 이 세상이 어지럽고 괴롭게 된 것은 반쯤 깬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반쯤 선잠만 깨게 하다가 그만두려면 애초에 깨우지 말아야 한다. 인생이란 잠 깨자고 하는 건데 인생이 깨지 못하면 아무 것도 못 된다. 사상가 · 철학자란 꿈꾸는 것이다. 꿈을 단단히 꾸면 깬다. 잠 잘못 자고 꿈 잘못 꿔서 저도 그렇고 남도 괴롭힌다. 마침내 사람은 깨자는 것이다."(다석어록)
『장자』(莊子)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이제 꿈꿀 때는 그게 꿈인 것을 알지 못한다. 꿈속에서 또 그 꿈의 길흉을 점친다. 깨고 난 뒤에야 꿈인 것을 안다. 바야흐로 큰 깸이 있고서야 이 삶이 큰 꿈임
을 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 깨었다고 한다. "(장자 재물론)
"웃님 뜻에 살며 죽도록 밝히고 살피고 깨닫자" 命生命死覺省悟
류영모는 명(命)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명(命)이란 하느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날 때 '살아라'라고 한 번만 명령을 받는 게 아니라 순간 순간 숨쉴 때마다 명령을 하시는지 누가 아는가. 순간마다 보이
지 않는 손으로 시계 밥 주 듯 우리 목숨을 돌려주는지 누가 아는가. 목숨 돌아가는 것, 얼숨 쉬는 게 하느님 말씀이다." 우리는 몸의 목숨이나 맘의 얼숨이나 하느님의 뜻인 말씀에 따라 살고 죽는다. 우리는
그 본보기를 예수에서 본다. 예수는 사는 것도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았다. "나는 무슨 일이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저 하느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심판(평가)할 따름이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기 때문에 내 심판(평가)은 올바르다."(요한 5:30) 또 예수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죽었다.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죽음의)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오 26:39. 42)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 죽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인 얼생명을 받은 사람 만이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아들인 얼나를 밝히고 살피고 깨달아야 한다.예수는 멸망의 몸나에서 영생의 얼나로 옮긴다고 말하였다. 석가는 멸망의 몸나에서 영생의 얼나를 깨닫는다고 말하였다. 둘은 같은 말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 아들을 보내 주셨다(요한3:16)는 것은 하느님의 씨(요한1서 3:9)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이 몸은 짐승이다. 그러므로 짐승과 다름없이 멸망하고 만다. 그런데 하느님의 씨(얼)를 주신 게 다른 짐승과 다르다. 내 맘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 부처가 될 씨가 있어서 이것을 깨달으면 좋지 않겠는가. 성불(成佛)하는 데는 불성(佛性)을 믿어야 한다."(다석어록)
"탐욕을 채우고 음란에 빠져 나를 끝장내랴" 貪厭淫淪沈沒我
탐염 (貪厭)은 탐욕을 채운다는 뜻이다. 음륜(淫淪)은 음란에 빠진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탐 진 치 삼독(三毒) 가운데서 탐과 치만을 말하고 진(瞋)은 빠졌다. 그러나 삼독은 한 수성(獸性)이기 때문에 뿌리에서는 하나다. 탐욕 속에도 진성(瞋性)이 들어 있고 치정(痴情)에도 진성이 들어 있다. 강도나 강간을 저지르는 자체가 이미 진에(瞋恚)를 전제하고 있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삼독(三毒)의 나는 온 세상을 다 잡아먹어도 배부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온 세상을 다 잡아 먹고도 그만두는 일이 없어서 마른 콩 먹고 배 터져 죽는 소 꼴이 된다. 또 식생활보다 남녀 문제가 겉으로는 안 나타나 보여도 더 복잡하고 괴상하게 얽혀 있다. 참으로 완전히 순결한 자가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 이 성(性)에 대한 생각은 먹는데 허덕이는 사람 아니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이게 인생을 괴롭히는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를 일으킨다."(다석어록) 탐욕을 부리고 음란을 저지르면 도덕적인 파탄상태가 되어 부력을 잃은 배처럼 침몰하게 된다. 수많은 인재들 가운데 진에는 물론 탐욕과 치정을 이기지 못하여 파멸한 인격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류영모의 말대로 인생이란 죽기로 참아야 하는 이 세상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밥을 잊고 고디를 맵게 가져 제나를 불살라" 忘食貞烈炎存吾
망식(忘食)은 탐욕을 잊는다는 뜻이고 정렬(貞烈)은 음욕을 이긴다는 뜻이다. 그럴 때 하느님의 성령의 불길이 내려와 나를 불태워 성별(聖別)시켜 준다는 것이다. 류영모가 이르기를 "이 세상에서 대부분의 일은 식색(食色) 두 가지에 귀착된다. 예수 석가 톨스토이 간디는 명백히 식 색 두가지를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식색의 이 몸은 온통 죄악이다. 깜짝 정신을 못 차리면 내 맘속에 하느님 아들을 내쫒고 이 죄악의 몸이 차지한다. 몸나는 죽지만 얼나는 산다.
영생이란 몸나와는 상관이 없다. 위로부터 오는 얼나가 영생한다. 조금 다치면 아프고, 조금 일하면 피로하고, 시시하게 쉬 죽고 마는 이 몸이 무슨 생명이라 하겠는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내 맘속에서 진리의 불꽃, 말씀의 불꽃이 타오른다.사상의 나라에서는 나를 생각의 불꽃으로 불태울 때 생각이 잘 피어나도록 하느님이 성령으로 살려주신다. 이 생각의 불꽃밖에 믿을 게 없다"라고 하였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7. 얼나를 모신 마음 基督心|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8. 얼 사람 人子
하느님은 제나 없는 하나(전체)로 오직 하나 大我無我一唯一
참 하느님은 잡신이 아닌 영원이요 무한이라 眞神不神恒是恒
영원한 한 님은 오직 절대존재로 고요해 恒一唯是絶對定
시새우지 않고 바라지 않아 자유로운 님 不忮無求自由郎
(1957.8.23)
恒 : 두루할 항, 늘 항. 是 : 이시, 바로 시. 忮 :시샘할 기 郎:사나이 랑. 定 : 고요할 정.
인자(子)는 글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로 우리말의 사람과 같이 쓰인 것 같다. 이 사람이라고 하면 나 자신도 가리키고 저 사람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도 가리킨다. 예수가 나기 전에 쓰여진 다니엘서(10 :16)에 인자라는 말이 나와 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3:28)에 '사람의 아들들'이라고 복수형이 나온다. 우리말 성경에는 단수로 번역되었으나 외국어 성경들은 거의가 사람의 아들들(the sons of men)이라고 복수
로 번역되었다. 도마복음서(外經)에도 복수형 인자라는 낱말이 나온다.
하나(一)라는 말이 상대세계에 쓰일 때는 낱개의 하나지만 절대세계(전체)를 가리킬 때는 하느님이 된다. 인자(人子)도 사람으로 쓰이는 낱말이 절대의 얼나(靈我)를 가리키는 낱말로 쓰이게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人子)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없다"(요한3:13)고 하였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3장 5절 "부어 주시는 (물)성령으로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와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 제나(自我)에서 얼나(靈我)로 새로 난 얼나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얼나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
느님으로부터 온 얼(성령)만이 다시 하느님께로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류영모가 여기에서 인자(人子)라 한 것은 하느님이 보내 주시는 하느님의 얼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얼나를 참으로 깨달은 사람이다. 하느님의 얼은 지금도 줄곧 우리 마음속으로 오고 있다 .류영모는 사람
의 아들(人子)과 그리스도와 하느님 아들을 하느님이 보내신 성령인 얼나(靈我)로 생각하였다. 낱말만 다르지 실체는 하나로 본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거듭나야 사람 노릇을 바로 한다. 얼나로 깨야 한다는 것이다. 얼나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짐승새끼다. 예수가 인자(人子)라고 한 뜻은 짐승의 새끼가 아닌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다. 예수가 겸손해서 한 말이 아니다. 예수가 말한 인자(人子)란 이 땅에 있는 게 아니다. 인자(人子)는 얼이라 하늘에게 이어져 있다. 여기에 있는 이
짐승의 제나는 하느님 아들의 씨가 커갈 보금자리다."(다석어록)
하느님은 제나 없는 하나(전체)로 오직 하나" (大我無我一唯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나다' (출애급기 3:14)라고 말하였다. 하느님만이 '나다'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전체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전체의 조그마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나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소분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소아(小我)라 자아(自我)라 하고, 하느님은 대아(大我)라 진아(眞我)라 한다. 이처럼 하느님만이 유일(唯一)한 존재요, 모든 것은 하느님의 내용물에 지나지 않는 것을 분명히 안 사람은 역사적으로 몇 사람이 안 된다. 이것은 다만 하느님을 아는 것하고는 또 다르다.
동양에서는 석가와 장자가 분명하게 안 것 같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스피노자(Spinoza, 1632-1677)가 이것을 알았다. "하느님은 절대 무한의 존재다. 다시 말하면 그 각각이 영원 무한의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히 많은 속성들로 성립되는 실체(substans)를 말한다. 하느님밖에는 어떠한 실체도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생각할 수도 없다. 절대 무한의 실체는 분할되지 않는다. 실체와 변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실체는 변태에 선행하여 있다."(스피노자, 에티카-신의 정의)
류영모도 전체인 하느님을 알았다."사람은 맨 처음을 잘 모른다. 사람은 전체 완전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은 전체 완전을 그리워한다. 그것은 전체 완전이 하느님 아버지가 되어서 그렇다. 하느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 참 삶이다. 우리의 생각이 피어 넓어지면 하느님 아버지에게 다다를 수가 있다. 하느님의 소리 없는 소리를 귀 없는 맘이 듣는다.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이 사람은 느낀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뜻이 통하는 소리가 맘속에서 들린다. 하느님은 큰 나(大我)요 참나(眞我)다. 우리의 나는 거짓 나다."(다석어록)
석가는 니르바나를 큰 나(大我)라고 하였다. 이것은 니르바나가 예수가 말한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큰 나(大我)가 있으므로 니르바나라 이름한다. 큰 나는 나가 없으므로 자재(自在)한 것이다. 허공처럼 모든 곳에 두루 차 있기에 실로 볼 수 없으나 일체의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나타날 수가 있다."(대승열반경)
대아무아(大我無我)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왜냐하면 대아(大我)와 무아(無我)는 반대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대아(大我)라면 무아(無我)란 있을 수 없고 무아(無我)라면 대아(大我)가 있을 수
없다.
이 관계를 류영모는 밝히기를 "참나는 큰 나(大我)이다. 더구나 우리말로는 '한 나'라면 큰 나를 뜻한다. 이 큰 나는 얼나(靈我)로 하느님 아버지다. 큰 나(大我)에는 제나(自我)란 없다. 무아(無我)다.
제나가 죽어야 참나가 산다 .제나가 완전히 없어져야 참나다. 참나에는 사사(私事)가 없다. 불교에서도 모든 진리의 말씀은 제나를 없애라(諸法無我)는 것이다. 제나(自我)는 나서 죽는 상대적 존재인 짐승의
나를 말한다. 하느님은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라고 하였다.
짐승인 제나(自我)가 없는 얼뿐인 참나가 대아무아(大我無我)의 하나님이시다.
참 하느님은 잡신이 아닌 영원이요 무한이라 眞神不神恒是恒
사람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신(神)아닌 잡신을 신으로 받드는 우상숭배의 미신(迷信)으로 헤매었다. 모든 물체에는 정령(精靈)이 있다고 믿어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애니미즘, 특정의 동식물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토테미즘, 자연현상을 신의 움직임으로 보는 자연현상신, 사람이 가공으로 상상해 낸 상상의 신이 있다. 조상이나 유명인의 혼령을 신으로 받들기도 하였으며 예수 석가 공자 노자가 신앙의
대상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파스칼 마르틴 루터 키에르케고르 · C.G.융도 예수를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 그 앞에 절할 것은 참되신 하느님뿐이다. 종교는 사람 숭배하는 게 아니다. 하느님을 바로 하느님으로 깨닫지 못하니까 사람더러 하느님 되어달라는 게 사람을 숭배하는 이유다. 언제부터 어디서 어떻게 생겨 무슨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은 신이 아니다.
참(진리)이신 하느님은 우리가 바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하느님이 아니 다. 참이신 하느님은 없는 것 같다. 없는 것 같은 것이 하느님이다.하느님은 얼로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 가득하다." (다석어록)
영원하신 하느님이란 허공을 넘어선 성령의 하느님을 말한다. 또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예수는 바람을 영원한 생명운동으로 비유하고 있다. 성령의 바람은 범신(汎神)이다. 범신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운
동이다.큰 성령(하느님)이 계셔서 깊은 생각을 내 맘속에 들게 해 주신다. 그리하여 생각이 말씀으로 나온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씀으로 하느님을 안다. 하느님과 교통이 끊어지면 생각이 결단나서 그릇된 것을 생각하게 된다." (다석어록)
"영원한 한 님은 오직 절대존재로 고요해" 恒一唯是絶對定
칼케톤 공회의(AD. 451년)에서 인자(人子) 예수는 얼나(靈我)인 신성(神性)에서는 하느님과 같고 제나(自我)의 인성(人性)에서는 모든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이 칼케톤 선언은 옳다. 그런데 한 마디 빠뜨린
말이 있다. 예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얼나를 깨달으면 예수와 똑같은 신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협조자(보혜사)를 맞으라고 한 것은 하느님이 보내시는 진리의 성령을 참나로 맞으라는 말이었다. 류영모가 이르기를 "이 껍데기 몸으로 말하면 어쩔 수 없이 어머니 모태(母胎)에서 나왔다. 이 몸은 땅에서 나와 땅으로 간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얼은 하느님께로 간다 .하느님이 영원하면 우리의 얼나도 영원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하느님이 보내시는 성령이 우리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참나인 얼나를 깨달아 하느님 아들이 되어야 한다. 얼나 밖에 정신이 만족할 만한 것이 상대세계에는 없다. 그러므로 상대세계에 한눈 팔 겨를이 없다. 이 상대세계에 머무르지 않는 참나인 얼나를 깨달으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얼나를 깨달아 안심입명(安心立命)하는 것이 정(定)이다. 기도가 정(定)이고 정은 고요한 기도다.
"시새우지 않고 바라지 않아 자유로운 님"不 忮 無求自由郎
불기불구(不忮不求)는 논어에 있는 말이다. "헌 무명옷을 입고서 털가죽 옷을 입은 이와 함께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가 자로(子路)다. 시샘도 않고 바라지도 않으니 어찌 착하다 않겠는가."(不 忮不
求何用不臧-논어 자한편) 성경을 본 이들은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마태오 7:7-8)라는 예수 의 말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구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과 류영모의 말은 어긋나는 말이 아니다. 예수가 구하라고 한 것은 하느님에게 영원한 생명인 얼을 구하라는 말이고 류영모가 구하지 말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바라지 말고 스
스로 땀 흘려서 얻으라는 말이다. 시샘하지 않는다는 것은 남이 나보다 잘사는 것을 시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더구나 악한 사람들이 잘사는 것을 시샘해서는 안 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혹시 악을 모르고 계시지 않나 걱정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하느님은 다 잘 알고 계시니 조금도 걱정할 것 없다. 우리가 크게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모두가 다 큰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인생은 결코 악인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다석어록)
자유랑(自由郎)은 인자(人子)를 별칭한 것이다. 얼나를 참나로 깨달은 사람은 상대세계를 이긴 사람이고 죽음을 없앤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유랑이다. 예수는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얼나)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라고 하였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닫지 않고는 자유가 없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이는
부족할 것이 없고 부러워 할 것이 없다.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몸은 죽으러 온 줄 알아야 한다. 안 죽는 것은 하느님뿐이다. 하느님의 말씀뿐이다. 하느님의 얼(성령)이 내 맘에서 말씀으로 샘솟았다. 하느님의 얼생명에는 죽음은 없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육체적
생각을 내버려야 한다."(다석어록)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8. 얼 사람 人子|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9. 자 모두 나아가 돌아갈 줄을 알자 夫亦將知復
겉꾸밈의 사귐은 이미 싫증나고 징글맞아 皮肉相從厭旣飫
얼 생각은 오래 막히고 갈라져 떠나 心魂積阻支且離
깊고 깊은 크고 크신 하느님 알뜰살뜰 사랑 肫肫淵淵浩浩天
몬과 빔은 절대의 두 모습으로 같아 色色空空如如理
(1957.6.23)
復 돌아갈 복. 亦 : 모두 역. 將: 나아갈 장. 皮肉(피육) :살과 껍질, 피상.
相從(상종) :서로 의좋게 보냄. 飫 :먹기 싫어할 어. 支:흘어질 지.
心魂 :마음과 정신. 積阻(적조)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서 소식이 막힘.
肫肫(순순):정성스러운 모양 肫 :정성스러울 순 淵: 깊을연 浩:넓고클호. 理: 바를리
겉꾸밈의 사귐은 이미 싫증나고 징글맞아 皮肉相從厭旣 飫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서 인간(人間)이라고 한다. 그러니 사람은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만나면 아는 체를 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여 사람의 일이라는 뜻으로 인사(人事)라고 한다. 그런데 이 인사
가 참으로 문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를 만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무슨 인사 말씀이라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비가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말이 많으면 또한 시비가 생긴다. 이 사람은 원래 인사하기를 쑥스럽게 생각한다. 나의 성미로 말할 것 같으면 다른 것은 다 원만히 하는 편이나 이 인사 하나를 도무지 못한다. 요즘은 손잡는 인사가 버릇이 되었는데 이게 걱정이다. 제 주먹을 제가 쥐어야 한다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하거나 제 주먹을 쥐고 인사를 해야 한다.
남의 손을 잡아 흔들면 제법 가까운 것 같고 친절한 것 같으나 이게 거짓이다. 불교식의 합장 경례나 유교식의 큰절도 마음이 없으면 능청스러운 거짓이 된다. 제 주먹을 꼭 쥐는 사람들이 모여야 일이 된다."
사람의 만남은 소중한 것이다. 한 시대 한 장소에서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맹귀우목(盲龜遇木)의 기연(奇緣)이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우리의 일상 만남이 모두가 맹귀우목의 인연인 것이다. 그 소중한 만남을 싸움이나 하고 속이기나 하고 미워하기나 하면서 끝낼 수는 없다. 끝내야 할 것은 겉치레 인사만 하는 피상교(皮相交)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사귀는데 얼마만큼 깊이 사귀는 것이냐 하면 대개 겉으로만 서로 관계가 있는 피상교(皮相交)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서러운 일의 하나다. 우리가알고 싶은 것은 속 맘이다. 그러나 내가 남의 속에 들어가서 보지 못하면 피상교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가까이 지내는 부부지간 부자지간도 피상교다. 서로가 좋으면 서로 보는 얼굴 모습이 좋다고 대단히 칭찬한다. 피상을 보고 아름다움이 있느니 없느니 말하거나 아니면 옷 입는 것을 보고 사람의 무게를 달려고 한다. 이것이 다피상교다." (다석어록)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몸은 참나가 아니다. 참나를 실은 수레라고나 할까. 참나가 입은 옷이라고나 할까. 참나인 얼나가 맘속에 있다. 몸나는 거짓 나이므로 얼나를 참나라고 한다. 몸나가 겉나라 얼
나를 속나(속알)라고 한다. 얼의 나는 보이지 않지만 얼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얼나는 예수의 얼나, 하느님의 얼나와 한 생명이다. 눈은 눈 자체를 보지 못하지만 다른 것을 보므로 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얼나는 얼을 볼 수 없지만 거룩한 생각이 솟아나오니까 얼나가 있는줄 안다.참된 생각을 하는 것이 얼나가 있다는 증거다. 얼나가 없다는 것은 자기 무시요 자기 모독이다. 얼나가 있으므로 하느님이 계시는 것이다. 서로의 속알(얼나)을 내놓는 것같이 좋은 일이 없다. 동지(同志) 지기(知己)라는 게 서로 속알을 내놓는 것이다. 우리는 남의 속알인 얼은 못 보고 그저 가긴가."(다석어록)
" 얼 생각은 오래 막히고 갈라져 떠나 " 心魂積阻支且離
이 세상은 탐욕(貪慾)과 진에(瞋恚)와 치정(痴情)으로 이른바 만인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무한경쟁 시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진리에 입각한 대동정신(大同精神)이란 지리멸렬(支離滅裂)이 되었다. 류
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대동(大同)이라는 말 또는 대동주의(大同主義), 대동정의(大同正義)라는 말을 쓴다. 대동이라는 말은 하나(一)라는 뜻이다. '당연히 하나다'라는 말로서 하나는 옳고 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편이라 옳으니 위해 주고 자기편이 아니면 그르니 미워해 없애야겠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자기 주장만 옳고 다른 이는 그르니까 멸망시켜야 한다는 소견을 가지고는 대동을 찾을 수 없다. 대동이란 온통 하나가 되는 지혜다. 누구나 예외라는 것 없이 하나가 되자는 것이다. 어떻게 대동이 될 수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마침내는 하늘로 되고 하나가 된다. 모두가 하나인 하늘로 들어가야 한다 .너 나가 있는 상대세계에는 잠깐 지내다가 마침내 이것을 벗어버리고 절대자(하느님) 앞에 나서야 한다. 그래서 마침내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을 믿는다. 하느님이 정의이므로 최후의 승리를 한다는 것은 하늘에 들어간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다석어록)
우리의 정신이 나이로 막히고, 지역으로 막히고, 종족으로 막히고, 이념으로 막히고, 경제로 막히고, 종교로 막혀서는 다 함께 멸망하게 된다. 이 막힘을 뚫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얼뿐이다. 나도 하느님의 얼을 참나로 받아들이고 너도 하느님의 얼을 참나로 받아들이면 개체의 살(육신) 담벽과 관념의 맘(의식) 담벽이 저절로 허물어지고 하나임을 느낄 수 있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 얼(성령)과 얼러야 어른이다. 정신과 정신이 단단히 얼려야 정말 어른이다. 성령이 충만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얼을 빠뜨리라고 얼생명을 넣어 준 게 아니다."(다석어록)
류영모는 사람과 사람이 피육(皮肉)을 뚫고 만날 수 있는 얼나(靈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이 몸으로는 만나나 맘으로는 만나지 못하는 고독한 인생이다. 그러나 선생도 깊이 생각하고 학생
도 깊이 생각해서 서로 아무 말도 없지만 서로 마음속에 깊이 통한 곳에서 얼(靈)이라는 한점의 나에서 만난다.이 가온찍기의 참된 점만이 영원한 생명이다. 또 우(友)라는 것은 손과 손을 마주 잡고 있는
그림 글자다. 지금은 모두가 친구인양 악수를 함부로 하고 있다. 친구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하느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은 나의 형제가 될 수 있다. 우애(友愛)처럼 믿음성 있는 것은 없다. 우애의 지경을 가야 하느님을 믿었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예수는 제자들을 친구라 하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 은 없다(요한 15:13)고 하였다. 믿음으로 우애할 수 있는 벗을 이 세상에서 만나기 어렵다. 우애는 살과 털이 만나는 피상교가 아니라 얼나에서 나오는 정신과 말씀으로 하나 되는 것을 말한다. 끝으로 부부 사이에 서로가 껍데기 몸만 맡기고 서로가 좋다고들 하지만 사람의 속알이 문제다. 도무지 껍데기 몸만 맡기면 낭패다. 부부가 함께 하여 20년, 30년, 40년 지내도 자꾸 얼 생각이 새로 나와서 서로서로 보이면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삶이 될 것이다. 깊은 얼 생각을 샘물처럼 주
고 받는 부부생활은 한없고 끝없는 그 무엇을 서로가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인 얼나에서 한 생명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생각을 가지면 늘 새로운 아내 늘 새로운 남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석어록』)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과 바로 사귀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과 얼생명으로 이어져야 한다. 얼생명으로 하느님과 이어지면 하느님 아들로 돌아온다. 자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줄을 알자(夫亦將知復 ).
예수와 석가가 똑같이 말한 탕자의 비유는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탕자인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맨 처음 나온 데로 복원(復元)하는 것이다. 마침내는 집을 버리고 몸조차 버리고 나가야 한다. 지나가는 한 순간밖에 안 되는 이 세상을 버리고 간다면 섭섭하다고 하는데 그러한 바보들이 어디 있는가. 사람이 이 세상을 평생 지나가는데 마침내 참나를 찾아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끝맺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사랑으로 살면서 사랑의 본원(本元)에 들면 결코 해로운 것이 될 수 없다." (다석어록)
깊고 깊은 크고 크신 하느님 알뜰살뜰 사랑 肫肫 淵淵浩浩天
"알뜰살뜰 그 사랑, 깊고 깊은 그 깊음, 넓고 넓은 하느님이시여"(肫肫其仁 淵淵其淵 浩浩其天)는『중용』32장에 나오는 글이다. 알뜰살뜰 그 사랑(其仁)을 줄인 것이 순순(肫肫)이다. 류영모는 이 우주가
생겨나고 만물이 생겨난 것도 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땅의 어버이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자식을 낳는 사람은 없다. 마음에 없는 혼인으로 낳은 자식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
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런데 하물며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야 오죽하겠는가.
예수는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오7:9-11)라고 말하였다.
류영모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를 "어제는 공자(孔子)가 온 세상을 구원할 사랑을 인(仁)이라 하였는데, 오늘 나는 온 우주의 임자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인(仁)이라고 해 본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다만 화산(火山)이 터져서 용암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어머니가 되면 젖이 나오고 사랑이 터져 나오는 것이지 젖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터져 나온 것이 하늘과 땅 곧 우주다. 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 밑에 깔려서 이 우주가 생겨났다"고 하였다.
하느님은 깊고 깊어 알 수 없기에 신비하고, 넓고 넓어 알 수 없기에 영원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얼나로는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
으로서 사람 노릇을 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온전한 사람이라면 사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전체인 하느님 아버지를 알아야 부분인 사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다석어록)
몬과 빔은 절대의 두 모습으로 같아 色色空空如如理
이 세상에서는 물질(몬)은 물질(色)이요 허공(빔)은 허공(空)이다. 전혀 다르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리에서는 물질과 허공은 다같이 하느님의 구성요소라 다르지 않다. 물론 허공이 본(本)이요 물질이 말(末)이다. 허공에 별똥별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듯이 물질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물질은 참으로 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허공이 본체고 물질은 변태다. 모든 물체는 있다고 하면 우상(偶像)이 되지만 허공은 우상이 되지 않는다. 허공은 본디 없이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물질은 업신여겨 무시(無視)해야 바로 보는 정견(正見)이 된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9. 자 모두 나아가 돌아갈 줄을 알자 夫亦將知復|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10. 참 길은 들락날락 아니해야 人道非首鼠
참을 가까이, 색욕을 멀리함은 반비례 近道遠色反比例
참을 찾아 힘쓰기,먹기를 잊음은 진분수(관계) 發憤忘食整分數
부자됨,어질게 됨은 어긋나는 법 爲富爲仁葛藤式
여색을 좋아함,속알 좋아함은 맞지 않는 셈 好色好德矛盾籌
(1957.11.8)
首鼠(수서) :마음을 정하지 못해 쥐 머리처럼 들락날락,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發憤(발분) '마음을 단단히 먹고 힘쓰는 것. 葛藤(갈등) .어긋나는 것. 式 법 식.
矛盾(모순) :이치에 맞지 않는 것 籌:셈놓을 주
예수가 이르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마태오7:13-14)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 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 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 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마태오 6:19-21)고 하였다.
우리는 좁은 문과 넓은 문 그리고 재물을 땅에 쌓기와 하늘에 쌓기 에서 선택해야 한다. 이것을 알기 쉽게 말하면 짐승인 몸생명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 아들인 얼생명으로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얼생명으로 사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하늘나라에 재물을 쌓는 일이다. 몸생명으로 사는 것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땅에 재물을 쌓는 일이다. 예수 자신이 얼생명으로 사는 길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의 말을 따르려고 선뜻 나서지 못한다. 예수의 말대로 살자면 인생을 포기해야 될 것 같이 생각한다. 그래서 의심 많은 쥐가 쥐구멍 입구에서 나갈까 들어갈까 망설이듯이 기웃거리고 머뭇거린다. 그러나 류영모는 참을 찾아가는 사람의 길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人道非首鼠)
류영모의 소신(所信)있고 확신(確信)에 찬 말을 들어보자. 이 정도가 되어야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얼생명밖에 정신이 만족할 만한 것이라고는 상대세계에는 없다. 그러므로 상대세계에 한눈 팔 겨를이 없다. 그래서 내게는 당연히 머물러서 마음 붙일 곳이 이 세상에는 없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금강경)이다. 참 좋은 말이다. 이 상대세계는 내가 머물러 맘 붙일 데가 없으므로 이 상대세계에 머무르지 않는 참나인 얼나에 맘을 내라는 것이다. 이 말 한마디만 잘 알면 해탈할 수 있고 구원받은 지경에 갈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는 일이다. 류영모는 몸생명을 부정한 다음에 얼생명으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었다.
참을 가까이, 색욕을 멀리함은 반비례 近道遠色反比例
도(道)를 가까이하려면 색(色)을 멀리해야 하고 색을 가까이하면 도와 멀어진다는 말이다. 근도원색(近道遠色)과 호색위도(好色違道)는 반비례의 관계인 것이다. 근도(近道)는 점수(漸修)다. 점수는 돈오(頓
悟)에 이르러야 하듯 근도(近道)는 각도(覺道)에 이르러야 한다. 정자는 난자에 수정이 되어야지 수정을 이루지 못하면 가까이 온것이 무의미 하다.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아무도 나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하였다. 이 말은 예수가 각도(覺道)한 것을 보여 주는 말이다.이 번역을 다르게 옮기면 "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얼나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이다. 원색(遠色)은 단색(斷色)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짐승의 본성을 뽑아 버려야 한다. 근도(近道)는 『대학』(大學)에 나오고 원색(遠色)은 『중용』(中庸)에 나온다. "군자는 참소를 버리고 색욕을 멀리한다" (去讒遠色 -『중용』 20장)라고 하였다.
참을 찾아 힘쓰기, 먹기를 잊음은 진분수(관계) 發憤忘食整分數
구도를 위한 분발을 분모로 하고 식욕을 분자로 할 때 분발함이 세어질수록 식욕이 줄어진다는 뜻이다. 정분수는 분자보다 분모가 큰 진분수를 말한다. 발분망식(發憤忘食)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초나라 현윤 심제량이 자로에게 스승인 공자에 대한 인품을 물었다. 자로는 대답을 못 하였다. 그 말을 들은 공자가 말하기를 "너는 어찌 말하지 못했는가. 그의 사람됨은 학문을 좋아하기에 먹는 것을 잊고 학문하기를 즐겨하여 근심을 잊어 늙어 가는 줄을 모른다"(논어 술이편)라고 하였다. 여기에 앞의 원색(遠色)과 뒤의 망식(忘食)이 이어져 있다. 식색(食色)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특별히 진(瞋)이 강해 남과 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대개는 식색(食色)인 탐치(貪痴)가 문제다. 그런데 식(食)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혀(舌)의 길이가 12cm이고 색(色)의 상징인 남근의 길이가 12cm라고 한다. 12cm의 두 요물 때문에 삶의 성패가 판가름 난다.
이 두 요물을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은 잘못되었다 .삶의 법칙이 잘못되었으니 못되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삶의 법칙을 식색(食色)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짐승살이로 못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못된 것인 줄도 모르고 있다. 못된 것을 바로 잡자면 밥도
처자(妻子)도 잊어야 한다. 식색으로만 사는 것은 짐승살이다. 못된 세상을 바로 살게 하는 것이 구원이다. 구원이란 외적인 제도를 고치자는 것이 아니다. 내적인 얼생명을 바로 잡자는 것이다.
예수는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요한 6:63)고 하였다. 식색이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사는 것이다. 얼의 운동이 말씀이다. 이 땅 위에서 식색의 몸생명으로만 사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모른다. 식색의 몸이 주인 노릇을 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알 수 없다. 얼이 풍부해지면 식색은 자연히 끊게 된다.얼의 나가 참나로 영원한 생명이다. 죽는 것은 짐승인 몸뿐이요 얼은 영원히 산다. 얼은 영원한 생명으로 몸의 생사(生死)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정신이 깨어서 얼생명으로 살아야 한다."(다석어록)
"부자됨, 어질게 됨은 어긋나는 법 爲富爲仁葛藤式
공자(孔子)는 인(仁)을 중시하였는데 제자들이 인(仁)에 대해 물으면 여러가지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공자(孔子)의 인(仁)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안연(顔淵)에게는 극기복례(克己復禮)함이 인(仁)
이라고 하였고 자공에게는 박시제중(博施濟衆)함이 인(仁)이라고 하였다. 극기복례는 짐승인 제나(自我)를 죽이고 얼나로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박시제중은 하느님 아들이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깨닫는 진리를 베푸는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예수는 이 세상 사람에게 '주는 것'을 가르친 사람이다. 이 세상은 주라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줄 수가 있어야 한다. 떳떳치 못하게 무엇을 바라고 산다는 것은 차라리 이 세상에 안
나온 것만 못하다. 우주의 아버지(하느님)는 무엇을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주는 재미다.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기왕에 주려면 예수같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록 아무 것
도 없지만 이제는 주려고 산다. 내가 세상에 바라지 않는다."(다석어록) 이것이 '극기복례 박시제중'으로 어짐(仁)을 하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것은 그 반대다. 제나(自我)의 탐욕으로 맘껏 부(富)를 쌓는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돈을 모으면 자유가 있는 줄 아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영업이나 경영이 자기 몸씀이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서로의 평등을 좀먹는다. 경영을 하게 되면 이익을 추구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평생 동안 모으려고만 하게 될 것이니 자유 평등이 있을 리 없다. 돈에 매여서 사는 몸이 무슨 자유이
겠는가. 매인 생활은 우상생활이므로 매여서는 안 된다. 요즘 말하는 정상배(政商輩)의 생리다. 나도 한번 모아 보자. 그래서 떵떵거리고 잘 살아 보자. 재벌도 되고 큰 자리에도 앉아 보자는 것이다. 이따위
우상숭배는 사라져야 한다. 사람은 메이는 데가 없어야 한다. 위인불부(爲人不富)라는 말이다. 사람이 되어야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귀는 힘과 빛 때문에 사람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에
게는 정신의 힘과 얼의 빛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다석어록)
예수는 말하기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오 19:23-24)라고하였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찾아와 제 형더러 저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 라고 부탁하자 예수가 말하기를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루가 12:15)라고 하였다.
여색을 좋아함, 속알 좋아함은 맞지 않는 셈 好色好德矛盾籌
호색(好色)과 호덕(好德)의 관계를 비교하여 준 이는 공자(孔子)다. 공자가 말하기를 "그만두어야겠다. 내 아직 속알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는 것 같이 하는 이를 보지 못하였다"(已矣乎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논어 위령공편)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공자가 찾아다닌 제후왕들이 하나같이 미색(美色)은 좋아하면서 덕사(德師)인 공자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일생 진리의 실현에 힘쓴 추남(醜男) 소크라테스야말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마하트마 간디는 참으로 호덕 (好德)하는 인자(仁者)이다.
짐승인 제나(自我)의 사람은 여자를 보면 교접을 하여 제 자식을 낳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짐승들은 오로지 자기 새끼를 번식시키는 것이 생존의 목적이다. 하느님의 아들인 얼나(靈我)의 사람은 모든 사
람의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는 하느님 아들을 깨우려고 한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를 하느님의 생식(生殖)이라고 말하였다. 자신이 짐승인지 하느님의 아들인지를 알려면 자신의 마음이 여색에 더 끌리는지
덕사(德師)에 더 끌리는 지를 시험해 보면 알일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남녀가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서로 정력을 낭비하여 상대의 생명을 갉아먹으면서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세상에 죄악치고 남녀문제가 없는 것은 없다.
일체의 범죄는 남녀관계에서 비롯된다. 예수는 독신으로 살았으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일이 없다. 정신 든 사람이 어떻게 여자에게 함부로 음욕을 품을 수 있겠는가. 음욕이란 실성한 사람들이 할 짓이
다. 정신이 바로 박힌 사람은 음란에 젖을 까닭이 없다. 속살을 가리는 것이 없으면 사람은 금수만도 못한 인충류가 되고 만다. 금수는 암수가 만나 새끼를 낳으면 끝낸다. 그런데 사람은 주인 있는 여자이건
아니건 색광(色狂)에 미치면 못할 짓이 없다. 사람은 살맛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다석어록』)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10. 참 길은 들락날락 아니해야 人道非首鼠|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11. 사람의 몸은 언짢다 民身不仁
(잘난 이의) 콧대가 우뚝 솟아 창문인 눈을 덮어 鼻突擊眼窓
(참 사람의)맑은 눈동자엔 몰래 눈물이 고여 明眸釀暗洟
(하느님이) 바라고 기다리긴 진 ·선 · 미인데 企待眞善美
(사람들은) 찌꺼기 탐 진 치만 만들어내 副産貪瞋痴
(1957.1.6)
民 ' 사람 민 突 : 우뚝할 돌 擊 눈에 마주칠 격. 釀 술빛을 양 洟 : 눈물 이. 副 버금 부. 暗 몰래 암.
사람의 몸이 언짢다(民身不仁)는 말은 사람의 몸은 탐 · 진 · 치(貪 · 瞋 · 痴)의 수성(獸性)을 지닌 짐승이란 뜻이다. 짐승이 짐승의 성질인 탐 진 치로 사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이 짐승의 성질인 탐 · 진 · 치로만 살면 언짢게 생각된다. 그것은 나라고 하지만 홑 나가 아닌 것임을 드러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는 짐승인 제나(自我)와 하느님 아들인 얼나(靈我)가 함께 있다. 그 얼나는 제나의 수성(獸性)을 언짢게(不仁) 본다. 그러므로 어진 이(仁者)는 탐 · 진 · 치의 짐승 성질을 온전히 버린다 .짐승 성질을 버린 이는 비록 짐승인 몸을 갖긴 했으나 이미 짐승이 아니다. 짐승 성질이 온전히 죽은 이는 하느님 아들이다. 부처니 성자(聖者)니 하는 것도 하느님 아들이란 뜻이다. 하느님 아들인 얼나는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을 보낸 것이다. 예수는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하느님이 보내시는 성령을 받아 얼나로 하느님 아들이 되라고 말하였다. 그래야 얼나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예수가 한 말 가운데 "하느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요한 6:29)에서
'보내신 이'란 하느님의 성령인 얼나를 두고 한 말이다. 2천 년 전에 온 예수의 몸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다음 말로도 알 수 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낸 협조자(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 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 이 진리의 성령이 곧 우리의 영원한 생명인 얼나(하느님 아들)다. 오늘에 이 사람이 예수가 하느님 아들이라는 실상을
증거하는 것도 예수가 말한 진리의 성령(보혜사)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류영모는 말하였다. 불경이니 성경이니 하는 것은 맘을 죽이는 거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니 제나(自我)가 한 번 죽어야 맘이 텅 빈다. 한 번 죽은 맘이 빈탕(太空)의 맘이다. 빈 맘에 하느님 나라 니르바나 나라(얼나)를 가득 채우면 더 부족이 없다. 사람은 분명 짐승인데 짐승의 생각을 하지 않음이 얼 사람으로 솟나는 우리의 길이다. 하느님이 보내시는 성령이 우리의 얼나다."(다석어록)
그런데 이 세상에 머리를 하늘로 두고 바로 서서 걷는 사람이 60억에 이르지만 얼나를 깨달아 탐 · 진 · 치의 수성(獸性)을 온전히 버리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것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석가는 짐승으로 사는 사람은 저 땅의 흙처럼 많은데 하느님 아들(法身)로 사는 사람은 손톱 위에 얹혀지는 흙처럼 적다고 하였다. 그 비례가 오늘에도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이 세상에는 탐 · 진 · 치의 수성(獸性)을 맘껏 부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으스대면서 살고 있다. 예수는 말하기를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보를 다 아
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루가 I6:15)라고 하였다
(잘난이의) 콧대가 우뚝 솟아 창문인 눈을 덮어 鼻突擊眼窓
탐 진 치의 수성(獸性)이 절정에 이른 세상의 임금들은 한마디로 콧대가 높은 사람들이다. 천하무상(天下無上)이요 안하무인(眼下無人)이다. 제 위에 하느님도 없고 눈 아래 사람도 없다. 클레오파트라
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이 말은 영웅들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바꿔야 할 것이다.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높아진다지만
사람은 삼독(三毒)을 저지를 때마다 코가 높아진다. 그러므로 콧대 높은 사람일수록 삼독의 카르마(業)를 많이 저지른 이다. 코가 높아져서 마음의 창문인 눈을 가려버린다. 그래서 눈에 뵈는 것 없이 행동한다.
나중에는 미쳐서 스스로 하느님인 척하기까지에 이르기도 했다. 멀리 로마 황제와 가까이 일본 천황이 신(神) 노릇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에레미야는 이 세상에서 삼독을 저지르는 이들이 오히려 더 형통한 것을 하느님께 따졌다.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입니까?"(에레미야
12:1) 또 이사야는 직접 그들을 나무랐다. "(너희는 어찌하여)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이사야 3:15) 삼독의 화신이 된 지배자들은 사람들이 힘써 얻은 재물을 부당한 세금과 강요
된 뇌물로 빼앗아갔다. 사람들이 고이 기른 아들은 데려가 병사를 만들어 싸움터로 보내어 죽거나 병신이 되었고, 딸들은 끌어가 시녀로 부리거나 음란의 노리개로 삼았다.
(참 사람의)맑은 눈동자엔 몰래 눈물이 고여 明眸釀暗 洟
맹자(孟子)는 "사람을 살피는데 눈동자보다 나은 것이 없다"(存乎人者 莫良於眸子·맹자 이루 상편)고 하였고 예수는 "눈은 몸의 등불이다"(마태오 6:22)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눈은 몸의 창문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면 탐욕을 뿜어내는 눈빛, 분노가 타오르는 눈빛, 음욕이 이글거리는 눈빛이 다 드러난다. 그러나 그 마음에 하느님의 성령(얼)이 머물면 눈동자가 밝게 빛난다. 예수의 눈이, 석가의 눈이 그러한 눈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멸망의 넓은 길로 희희낙락하며 나아가는 것을 보고 몰래 눈물을 흘렸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고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루가 19:41-42)
(하느님이) 바라고 기다리긴 진 ·선 · 미인데 企待眞善美
류영모는 진 · 선 · 미에 대하여 말하기를 "미(美)는 선(善)이 있어야 미(美)다. 선(善)은 진(眞)이 있어야 선(善)이다. 이 세상에서의 미는 만지면 없어진다. 선은 자랑하면 없어진다. 이 세상엔 진 · 선 · 미가 없다. 진 · 선 · 미란 영원해야 하는데 있다가도 없고 또 없다가도 있는 것은 참 진 · 선 · 미가 아니다. 절대에서는 이 세상에서처럼 진 · 선 · 미가 따로따로 있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은 진이면서 선이면서 미다"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하느님만이 오직 참된 진 · 선 · 미라고 하였다. 예수도 같은 생각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고 묻자 예수
가 대답하기를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 이시다"(마르코 10:17-18)라고 하였다. 여기의 선(善)은 진 · 선 · 미를 내포한 것이다. 참 진 · 선 · 미는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느님만이 진 · 선 · 미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느님이 진 · 선 · 미 하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낸 성령(얼나)도 또한 진 · 선 · 미 하다. 그러므로 마하트마 간디는 이르기를 성령(얼나)의 아름다움을 본다면 밖의 아름다움은 하찮은 것으로 무색해진다"(If you see inner beauty,the outer will pale into insignificance.-M.K간디날마다의 명상』)라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 · 선 · 미를 바라고 기다린다는 말은 곧 우리가 진 · 선 · 미한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얼나로 거듭나라는 말이다. 짐승들의 사명은 종족을 이어가는 것이고 사람의 사명은 진리(얼나)를 깨달아 가는 것이라 엄연히 다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다.
(사람들은) 찌꺼기 탐 진 치만 만들어내 副産貪瞋痴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진 · 선 · 미의 얼나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부산물인 수성(獸性)의 탐 · 진 · 치만 저지르고 있다. 류영모는 말하였다 "사람이 귀한 것은 얼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이 얼이 영원한 생명인 참나다. 우리가 꼭 해야 할 것은 하느님이 주신 성령인 얼로써 몸의 욕망인 탐 · 진 · 치의 수성(獸性)을 덮어 버리는 것이다."(『다석어록』) 이 사회에는 탐 · 진 · 치의 유황불이 엄청난 세력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나라의 원수(元首)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나 서울 시청 주사 자리에 있던 사람이나 몇백억 원을 챙기고는 감옥에 드나들고 있다. 이것이 탐욕이 어떤 것 인지를 보여준다. 국회의사당의 폭력에서 학교의 폭력에 이르기까지 폭력의 힘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이것이 진에(瞋恚)의 일면을 보여준다. 가정 주부의 매춘에서 여중생의 음행에 이르기까지 음란의 비린내가 진동한다. 이것은 치정(痴情)의 일면을 보여준다. 문명의 이기를 쓴다고 문화인이 아니다. 탐 · 진 · 치에 허덕이면 야만스런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11. 사람의 몸은 언짢다 民身不仁|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12. 제나(自我)가 죽어야 얼나(靈我)가 산다 終始
배꼽 막고 숨 열리듯 참나는 제나 죽어야 비롯 封臍通鼻誠終始
잘못 본떠 (생긴) 고달프고 역겨운 거짓 나는 나서 죽어 效嚬疲厭妄始終
비롯 없고 마침도 없는 맨 처음 으뜸님 無始無終元始初
비롯 있어 마침 있는 제나는 이내 죽어 有時有終自乃終
(1956.10.20)
終 :죽을 종. 始 :처음 시. 封臍(봉제) :갓난아기의 탯줄을 끊어 봉함. 封:봉할 봉. 臍 배꼽 제.
效嚬(효빈) :남의 결점조차 좋은 것으로 알고 함부로 흥내를 냄. 效:본받을 효:嚬 찡그릴 빈.
妄:거짓 망. 疲:피곤할 피. 厭 : 싫을 염.
종시(終始)라는 말은 대학(大學)에 나온다. "몬(물질)에는 밑동과 끝이 있고 일에는 마침과 비롯이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바를 알면 곧 참에 가까울 것이다."(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義-대학 경지장) 그런데 대학을 풀이한 이들은 종시를 뒤집어서 시종으로 풀이하고 있다. 비롯이 있어야만 마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시의 바른 뜻을 모르는 소리다.
류영모는 종시(終始)의 뜻을 주자(朱子)의 '知止能得'보다 더 분명하게 말하였다. "시작했다 끝이 나는 것은 몸의 세계다. 그러나 끝을 맺고 시작하는 것은 얼의 세계다. 낳아서 죽는 것이 몸이요, 죽어서
사는 것이 얼이다. 얼은 제나(自我)가 죽어서 사는 생명이다. 형이하(形而下)에 죽고 형이상(形而上)에 사는 것이다. 단단히 인생의 결산을 하고 다시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회개(悔改)요 회심(回心)이다. 얼에는 끝이 없고 시작이 있을 뿐이다. 종시란 쉽게 말하면 상대세계를 부정해야 절대세계가 열린다는 뜻이다.
상대세계는 우리의 심안(心眼)을 가리는 비늘과 같다. 이 비늘을 떼어버리지 않고는 절대존재이신 하느님을 볼 수 없다. 류영모가 이르기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른다. 세상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만 하느님이 걸어온다.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하느님을 알고 싶은 생각을 일으켜 준다"라고 하였다. 예수 석가가 가르친 것도 바로 이것이다.
예수가 말하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한6:40)고 하였다. 마지막 날이 종(終)이고 살린다가 시(始)이다. 석가
가 말한 사성제(四聖諦)인 고집별도(苦集滅道)도 종시(終始)이다. 상대세계를 부정하면 제나(자아)가 죽는다.
제나가 죽으면 얼나(靈我)가 산다.
얼나가 사는 것은 하늘나라가 열리는 것이다. "제나가 죽어야 참나가 산다. 제나가 완전히 없어져야 참나다. 참나가 우주의 생명이요 제나의 임자다. 참나와 하느님이 하나다. 참나와 성령이 하나다.
참나와 하느님은 이어져 있다."(다석어록)
배꼽 막고 숨 열리듯 참나는 제나 죽어야 비롯 封臍通鼻誠終始
봉제통비(封臍通鼻)란 태아가 태어났을 때의 상황을 그린 것이다. 갓난 아기는 첫 울음과 함께 숨길이 열리고 탯줄은 잘라 봉한다. 이제 까지는 탯줄로 산소를 공급받다가 이제부터는 숨을 쉬어 산소를 얻는
다. 이 세상에는 의미 없는 우연이란 없다. 탯집 속 양수에서 9달 동안 보낸 것은 생물이 30억 년 동안 바다에서 진화한 것을 축소한 것이다. 이것을 요점반복(要點反復)이라고 한다. 태아가 양수 속에서 대
기 속으로 태어난 것은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 온 것이다. 원시 동물 이크시오테가가 육지로 올라 온 것이 3억6천만 년 전이다 .
바다의 생물들이 아가미로 물을 숨쉬다 육지에 올라와 땅위의 짐승이 되어 허파로 대기를 숨쉬게 된 것은 비약적인 진화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3천 년에서 2천 년 전에 또 한 번의 높은
단계의 숨쉬기가 열렸다. 이번에는 사람의 마음에서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는 얼숨이 열렸다. 얼숨이 트인 것은 형이상의 하늘나라가 열린 것이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에 하늘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
한 것이다. 또 예수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도 이것을 말한 것이다. 기도나 명상은 얼숨을 쉬는 것이다.
류영모는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는 얼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딱할딱 숨을 쉬어야 사는 생명은 참생명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면 코로 숨쉬지 않아도 끊어지지 않는 얼숨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제나(自我)는 소용이 없다. 숨 안 쉬면 끊어지는 이 목숨은 가짜 생명이다. 하느님의 성령인 말숨(말씀)을 숨쉬지 못하면 사람이라 하기 어렵다. 하느님이 보내는 성령이 얼나
인 참나다. 석가의 법신, 예수의 하느님 아들은 같은 얼나인 영원한 생명이다." (다석어록)
석가와 예수가 집을 뛰쳐나간 것은 가난해 못 살아서가 아니라 나를 몰라 속이 답답해서였다. 마치 물 속에 들어가서 숨을 못 쉬는 것처럼 죽을 것 같이 마음이 답답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
는 얼숨이 터지자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생의 모든 의문이 저절로 풀어졌기 때문이다.
성(誠)은 얼나인 참나를 말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誠)은 하느님을 말한다. 유교에서는 참(誠)은 하느님이라고 말하였다. '참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길이다. 참을 그리워하는 것이 사람의 길이다' (誠者天之道也 思誠者人之道也-맹자』 이루장 상편)라고 하였다. 이 하늘 길을 가려면 곧이 곧장 가야 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자꾸 중간에서 장애가 생긴다."(다석어록)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그리워하면서도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지 못하는 것은 제나(自我)가 살아 탐 ·진 ·치가 얼숨 쉬기를 막기 때문이다.
잘못 본떠 (생긴) 고달프고 역겨운 거짓 나는 나서 죽어 效嚬疲厭妄始終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월(越)나라 구천이 오(吳)나라 부차를 쓰러뜨리고자 미인계를 썼다. 구천은 월나라 미인 서시(西施))를 부차에게 바쳤다. 서시는 속병이 있어서 통증이 일어나면 얼굴을 찡그렸다. 서시에게 빠진 부차는 서시의 찡그리는 얼굴을 더 아름답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월나라 여인들은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고자 너도나도 서시처럼 찡그렀다. 그러나 찡그린 여인들의 모습은 더욱 꼴불견이었다. 이리하여 남의 결점을 좋은 것으로 알고 본뜨는 것을 효빈(效嚬)이라 하게 되었다. 류영모는 효빈에 대해서 말하기를 "남을 본받아 흉내 내는 것을 효빈이라 한다. 이 세상은 통히 효빈하는 세상이다.이 따위 짓을 한다면 성불(成佛)이고 구원이고 소용없다"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혼인하는 것은 분명 잘못인데 좋은 것으로 알고 너도나도 혼인하는 것을 효빈이라 하였다.
혼인하여 태어난 몸나의 삶은 거짓(妄) 나로 태어나서 고달프고 서럽게 살다가 죽는다. 류영모는 말하였다. "이 몸은 얼마 앞서 어쩌다가 어버이의 정혈(精血)로 시작되었다. 실없이 비롯되었으니 머지않아 사라진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이 몸은 참나가 아니라 거짓 나다. 그러므로 몸나가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참나인 얼나를 찾아야 한다.우리의 일은 참나를 찾는 거다. 하늘나라에는 영원한 생명인 참나가 들어간다. 가짜 생명인 몸나는 죽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짓 생명을 연명시키는 데에만 궁리
하고 골몰하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예수 ·석가는 가정에 갇혀 살지 않고 하느님의 속인 허공에서 살았다. 아기를 낳지 말아요. 세계의 장래를 위해서 자식을 낳아 잘 길러 큰 인물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렇게 맘대로 되는 세상이 아니다. 자식을 못낳는 게 불효하는 게 아니다. 무책임하게 아이 낳는 것보다 더 심한 부자(不慈)는 없다."(다석어록) 예수는 본보기로 가정을 이루지 않았
고 자식을 낳지 않았다. 가정은 음욕를 기초로 한다. 그러므로 가정을 초월하여 성령으로 된 하늘나라에 이르러야한다. 가정이란 잠시 머무는 쉼터에 지나지 않는다.
비롯 없고 마침도 없는 맨 처음 으뜸님 無始無終元始初
장자(莊子)의 말대로 여름철에만 살다 죽는 쓰르라미가 겨울철을 상상하기 어렵듯이 짧은 삶을 살다 죽는 사람이 비롯도 없고 마침도 없는 영원 무한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유식하고
영리하다는 동서양의 학자들조차도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절대존재인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하였다.
러셀은 하느님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를 따지다가 찾지 못하자 아버지 없는 하느님이 있다면 하느님 없는 우주도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무시무종의 허공인 절대존재를 모르니 그런 소리를 하게 된다. 무시무종이란 상상만도 아니고 관념만도 아니다.
사실적인 인식이고 체험적인 자각이다.영원 무한한 허공은 과학자들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고기들의 진짜 근원은 엄마 아빠 고기가 아니라 바다인 것이다. 바다가 없으면 고기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처럼 모든 천체(별)의 원시초(元始初)는 허공인 것이다. 허공이 없으면 모든 천체가 있을 수 없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 보내 주시는 하느님의 성령으로 알게 된다.
비롯 있어 마침 있는 제나는 이내 죽어 有時有終自乃終
비롯이 없어야 마침이 없지 비롯이 있으면 마침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이다. 시(始)와 태(胎)는 같은 뜻글자로 모태(母胎)에서 비롯한다는 뜻이다. 종(終)은 다 감은 실꾸리로 끝났다는 죽음을 뜻한다. 유시유종(有始有終)은 생사(生死)이다. 무시무종은 不生不滅 이다. 하느님은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절대존재이지만 사람은 나서 죽는 상대적 존재다. 사람의 몸생명은 아무리 금이야 옥이야 해도 보잘 것 없기가 성냥불이요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인 성령을 우리 맘속에 보내신다.
그 하느님의 성령이 우린의 얼생명이다. 이 얼생명은 하느님의 생명이라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불생불멸로 영원한 생명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날 세상은 나라는 것을 오관(五官)과 사지(四肢)에 한정해 버려 몸의 나밖에 모른다. 그리하여 권력을 쥐고 으스대는 자, 금력을 가지고 뽐내는 자, 명성이 높은 자, 신체가
미끈한 자를 부러워한다. 이게 다 악인의 낮을 보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싼다. 그러면 제가 잘 살거니 한다. 이게 다 꿈지럭거리며 짐승 노릇, 벌레 노롯 하는 거다. 나는 몸을 부정한다. 조금 하면 피곤해 지
치고, 조금 하면 시시하게 죽어버린다. 이러한 몸을 위해 살다가 죽어서 그만두게 된다면 정말 서운할 거다. 그저 남 먹는 것 입는 것에 빠지지 않겠다는 게 육신 생활의 전부다. 멸망의 몸나가 거짓나임을
알고 영생의 얼나로 솟나자는 인생이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12. 제나(自我)가 죽어야 얼나(靈我)가 산다 終始|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14. 끝은 첨과 같다 終如始
(남자의) 알짬이 처음 쏟아져 나올 때 精子始初出發時
여인의 몸도 비슷한 아찔함을 먼저 겪는다 母體先驗酷似險
산 것들의 마지막 끝(죽음)에 닥친 느낌은 生物最終感觸末
빛깔은 노랗고 소리는 까마득히 한 점으로 꺼져 色黃音玄幻一點
(1957.1.10)
酷似(혹사) '몹시 많음.酷 : 심할 혹. 險(험) 아찔함. 幻 없어질 환. 末 끝 말
끝은 첨과 같다(終如始)는 말은 누구보다도 소설가 헤르만 헤세가 가장 잘 알아들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말하기를 "쾌락의 몸짓이 산고로 고통을 당하는 여인이나 죽어가는 자의 표정과 어쩌면 똑같다는
사실이 통감되었다"(헤르만 헤세, 나르시스와 고르트 문트)라고 하였다.
그것은 몸의 생식(生殖)과 사망(死亡)의 고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출(日出)의 광경과 일몰(日沒)의 광경이 비슷한 것과 같다. 사람의 삶이란 서울역에서 교외선을 타는 것과 같다. 교외선은 서울역에서 출발하여 다시 서울역에 돌아온다. 사람의 생명은 없(無)에서 시작해서 없(無)에서 마침을 본다. 없(無)에서 있어지고 있(有)에서 없어지는 것이 생사(生死)이다.생(生)과 사(死)에 임한 몸의 본능적인 생리 상황에 공통성이 있다는 것을 의사들이 알아냈다 .
갓 태어난 아기와 임종에 다다른 환자는 많은 공통점을 보인다. 갓난아기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똑같이 죽음에 이른 환자도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먹여 주어야
하고, 씻겨 주어야 하고, 입혀 주어야 하고, 뒤도 치워 주어야 한다.
영국의 토인비는 치매에 걸려 정신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미국의 모리는 육체의 능력을 잃어 남의 손으로 궁둥이를 닦기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심신의
능력을 잃고서야 죽는다. 인생의 비롯과 마침은 온전히 타력(他力)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맹자도 "생명을 기르고 주검을 장사지냄에 서운함이 없는 것이 왕도(王道)의 비롯이다"(養生喪死無憾王道之
始也--『맹자』양혜왕 상편)라고 한 것이다.그러므로 내가 낳은 자녀와 나를 낳은 어버이를 버리는 것은 제 생명을 버리는 것과 같다.그런데 옛부터 사람들이 자기가 낳은 자녀는 잘 돌보지만 자기를 낳은 어버
이에게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맹자(孟子)는 "참 사람은 세상의 본보기가 되어서 그 어버이에게는 구두쇠 짓을 않는다"(君子不以天下儉其親 맹자 공손추 하)고 하였다. 어버이에게 마음을 아끼지 않으면
시간과 재물은 따라서 간다. 어버이가 세 살까지는 내 오줌 똥을 가려주었으니 품앗이로라도 어버이가 자리에 누워 오줌 똥을 못 가릴 때는 내 손으로 치워 드려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다. 이것을 어기
면 인류는 자멸할 수밖에 없다. 마하트마 간디는 말하기를 "첫째 가는 섬김은 뒤를 깨끗이 해 드리는 것이다"(The first service is latrine-cleaning)라고 하였다. 나를 낳아 기른 어버이를 돌보지 못 하고서는
정의니 자비니 말할 자격이 없다.
(남자의) 알짬이 처음 쏟아져 나올 때 精子始初出發時
사람들에게 사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 못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짐승들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모든 짐승들이 서슴없이 대답할 것이다. 짐승들이 사는 목적은 탐 · 진 · 치(貪瞋痴)의 삼독으로 종족을 보존하는 것이다. 종족을 번식시 키는 수단이 삼독 가운데 치(痴, sex)이다. 물 속에 사는 어류는 체외(體外) 수정하고 뭍에 사는 짐승들은 체내(體內) 수정을 한다. 사람도 몸으로는 짐승이라 체내 수정을 한다. 그런데 모든 짐승들은 생식(生殖)을 위해서만 교미를 하지만 사람들은 쾌락(快樂)을 목적으로 성교를 한다. 쾌락이란 방정(放精)할 때의 말초신경의 자극을 말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남녀의 정사(情事)를 쾌락이라 하지만 다 어리석은 짓이다. 남녀가 들러붙는 것처럼 좋은 게 없다고 하는데 그 꼴처럼 보기 싫은 게 없다. 다 속아서 그 짓을 하는 거지 깬 사람은
안 하는 짓이다.그 짓을 하다가 죽어도 좋다면 해도 좋다. 그 지경이면 달관(達觀)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못 봤다. 안 죽으니까하는거다. 참을수 없어서 또는 할수 없어서 했다면 좋다. 그러나 안 할 수 없는 것을 안 하고 지내는 게 삶에서 필요하다."(다석어록)
여인의 몸도 비슷한 아찔함을 먼저 겪는다 母體先驗酷似險
류영모는 육욕(肉欲)의 본질을 간지럼으로 보았다.너무나 간지러워서 미칠 지경에 이르는 것이 음욕이다. 그래서 이성(理性)을 잃고는 "내 맘 나도 물라. 내가 왜 이러지" 하고는 일을 저질러 두 번 없는
삶을 그르친다. 여자의 용색 뒤나 산고 뒤에 기진맥진하여 하늘이 돈짝만 해지는 체험이 비슷하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좋다는 것은 간질이는 것이다. 웃으면서도 죽을 지경이다. 간질이는 게 싫
으면서 웃지 않을 수 없는 게 이 세상이다. 참 기가 막힌다. 견딜 수없이 가려워서 긁어버리지 않을 수 없는데도 꼭 참는 게 있어야 한다.
아니할 수 없는 것을 아니하고 꾹 참고 지내는 게 필요하다. 이 세상을 지나가야 하는 이 인생이란 그렇게 해야 한다. 죽기로 참고 참아야 한다.이게 인욕(忍辱)이다"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구경각(究竟覺)을 이룬 52세부터 스스로도 금욕생활을 실천하면서 금욕을 주장하게 되었다. 52세 전까지는 스스로 범방(犯房)하였다고 고백하였다. 하느님의 얼로 거듭난 이는 몸의 수성(獸性)에
서 놓여나 자유(해탈)하기 때문에 삼독(三毒)인 성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석가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얼나를 깨닫지 못한 제나(自我)의 사람이 혼인하여 자녀를 낳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예수 석가의 생각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혼인을 하였더라도 될수록 부부가 떨어져 있어 자녀를 안 낳거나 적게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이미 지구에 인구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벼 백 섬을 추수했다면 종자로 쓰여지는 것은 한 말 정도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쌀을 만들어서 사람의 양식으로 제공된다. 종자로 쓰이는 것은 거둔 것의 천 분의 일이나 만분의 일이고 대부분은 사람의 양식으로 쓰여진다. 사람의 씨앗인 정(精)도 이와 마찬가지다.생식을 위한 종자로 쓰여지는 것은 극히 적은 부분이고 정의 대부분은 정신을 위해 문화창조를 위해 가치구현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쓰여져야 한다.쾌락을 위해 자기의 정력을 소모한다면 그것은 자살 행위요 자독(自瀆) 행위다. 성생활이 아니라 실성(失性)한 생활이다. 사람의 정력은 헤프게 쓰여져서는 안된다." (다석어륵)
산 것들의 마지막 끝(죽음)에 닥친 느낌은 生物最終感觸末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본능적으로 죽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생식(生殖)하는 것이다. 그래서 병에 걸리면 성욕이 없어져야 할 텐데 성욕이 더 일어나는 수가 있다.그것은 몸이 죽게 되었으니 후손을 이으려는 본능이 작용하는 것이다. 수벌은 여왕벌에게 수정을 시키고는 죽는다. 사정(射精)과 죽음이 이어져 있다. 그믐달과 초생달이 이어져 있는 것과 같다. 사마귀 수놈은 수정이 끝나면 암놈에게 잡아먹힌다.
사마귀 암놈이 지독해서 수놈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다. 후손을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하겠다는 수놈의 충정을 이루어 주는 것일 뿐이다. 메뚜기와 연어는 산란을 하고는 죽는다.
빛깔은 노랗고 소리는 까마득히 한 점으로 꺼져 色黃音玄幻一點
이것은 죽을 때의 마지막 꺼져가는 의식의 상황을 그려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여자들은 아기를 낳을 때 겪는다. 남자는 사정을 하는 것이 죽음이요, 여자는 아기를 낳는 것이 죽음이다.후손을 낳는 것은
바로 죽는 준비이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성(性)에 관해서는 괴설(怪說)이다. 톨스토이의 성관(性觀)도 괴설이다.
예수 석가도 마찬가지다. 금욕이란 분명히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니까 괴설이다. 성교(性交)라는 것은 죽어나는 것이다. 남자는 범방(犯房)하다 잘못하면 죽는다. 거기에 빠지면 죽어나는 것이다. 여자는 아기 낳다가 죽는 일이 많다."(다석어록)
여인들이 어머니로서는 강해지는 것은 목숨을 걸고 아기를 낳았기 때문일 것이다.목숨을 걸고 낳은 아기인데 어떻게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그런데 요즘에는 하문으로 아기를 낳기가 어렵다고 배를 째고 쉽게 아기를 낳는다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쉽게 얻은 아이에게 깊은 정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목숨 걸고 낳은 아기라야 목숨 걸고 기르려고 할 것이다 .류달영은 이렇게 말하였다. "한국 여성들이 자연분만을 하지 않고 제왕절개로 출산하는 비율이 65%로 세계 1위라니 참으로 부끄럽다"(진리의 벗)라
고 하였다.
사람이 죽을 때는 온 세상이 노랗고 사람의 목소리가 까마득하게 들리다가 텔레비전 화면이 한 점으로 모여 꺼지듯이 사람의 의식도 꺼진다.그때 몸의 나는 죽지만 사실은 하느님 아들을 낳는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죽음이란 아기(얼나)가 만삭이 되어 어머니 배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지구는 어머니 배나 마찬가지다. 아기가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있듯이 사람이 백 년 동안 지구에 있다가 때가
되면 지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죽으면 우리는 다시 신정(新正)을 맞아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어머니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서 생명이 충실하고 자꾸자꾸
올라가서 진리를 깨닫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암호를 해독하고 체득하여 열달이 차서 만삭공(滿朔空)이 되어야 한다."(다석어록)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14. 끝은 첨과 같다 終如始|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15. 옛 베개를 생각지 않고 내게서 새 침상을 찾아 不思舊枕求我新床
바람과 달빛이 빈방에 들어오니 風月中空房
무서운 더위 수그러지고 서늘함 세어져 恐炎柔凉剛
시인은 평안하여 시름조차 없어라 騷人保無恙
한 벌 나무 판자 침상에 누웠도다 一張木板床
(1957.9.6)
枕:베개 침. 床 :침상 상. 中 :뚫을 중. 炎:더위 염. 凉 서늘할 양. 騷人(소인) .시인.
保 :평안할 보. 恙 근심할 양. 張 :벌 장.
불사구침(不思舊枕)은 옛날 함께 베던 베개를 생각지 않겠다는 뜻으로 가정을 초월하였다는 말이다. 예수가 이르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오 8:20)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의 불사구침의 생각을 말한 것이다. 예수는 가정을 이루지 않았다. 석가는 가정을 버렀다. 그들은 가족 이상으로 사랑해야 할 영원한 님이신 하느님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류영모는 가정을 하늘나라로 뛰어오를 도약대로 삼아야지 가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정이라는 데서 살림을 하지만 세상을 지나간 뒤에 보면 빈 껍데기 살림을 가지고 실 생활로 여기고 산 것이다. 물질생활은 변화해 지나가는 것 뿐이다. 예수
석가는 가정에 갇혀 살지 않았다. 하느님의 속인 무한대(無限大)에살았다."(다석어록)
마태오복음(8장 20절)에 "머리 둘 곳조차 없다"를 일어(日語)로는 'まくら(枕)するところがない'라고 옮긴다. 베개 베고 잘 데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머리는 여인과 함께 동침(同枕)하자는 머리가 아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 머리 위에 받들어 이어야 한다.
구아신상(求我新床)은 사상의 집을 짓겠다는 뜻이다. 누에가 고치를 짓는 것은 자기가 드러누울 침상을 만드는 것이다. 예수가 이르기를 "너희는 걱정하지 말아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곳을 마련하러 간다"(요한 14:I~2)고 하였다.
예수의 이 말을 바로잡아서 류영모는 말하기를 "이세상은 거저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의 실을 뽑아 말씀의 집을 지으러 왔다. 하느님을 생각하러 왔으므로,말씀의 집을 지어야 한다. 예수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가 있을 집을 지어 놓겠다고 하였지만 가서 지어 놓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벌써 지어 놓았다"라고 하였다.
형이상의 집도 형이하의 집처럼 정신적으로 안정되게 하여 헤매지 않게 하여 준다. 그것이 예수와 류영모가 마련한 사상의 집이다. 예수의 사상이 예수의 맘속에서 나왔듯이 류영모의 사상은 류영모의 맘속에서 나왔다. 그래서 류영모는 내게서 새 침상(사상)을 찾는다고 하였다. 사상의 집을 짓는 재료는 생각의 말씀이다. 누에가 입에서 실을 뽑듯, 거미가 꽁무니에서 실을 뽑듯 말씀의 실을 뽑아야 한다. 그 말
씀의 실을 날라서 집을 지은 것이 성경이다. 류영모가 얼마나 생각을 중요시하였는가를 이 한마디로도 알 수 있다. "생각이 문제요 말씀이 문제다. 생(生)도 사(死)도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생각이
다. 사람은 진리의 생각이 문제다. 위로 올라가는 생각이 문제다. 위로 올라가는 생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참이다. 나를 통한 성령의 운동이 말씀이다. 성령은 내 마음속에서 바람처럼 불어온다. 내 생각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은 것이 말씀이다."
전구의 필라멘트에 전기가 들어와서 빛이 밝아지듯 사람의 의식(意識)에 하느님의 성령이 와서 슬기가 밝아진다. 성령으로 밝아진 슬기로운 생각이 하느님의 아들이다.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성령을 받
아 하느님 아들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 아들은 결국 하느님의 성령이라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전구의 필라멘트가 끊어지면 다른 전구로 갈아끼우면 다시 빛이 밝아진다. 개인이 죽어도 다른 개인의 의식에
다시 성령의 빛이 밝아진다. 그러므로 하느님 아들인 영원한 생명에는 개인의 제나(自我)란 없다. 부처나 그리스도는 제나(自我)의 생명이 아니다. 석가와 예수는 제나(自我)가 죽고 얼나(靈我)로 솟난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부처나 그리스도를 석가나 예수의 개인 생명과 혼동하면 큰 잘못이다.
바람과 달빛이 빈방에 들어오니 風月中空房
이 시는 1957년 9월 6일에 썼다. 그때는 장남 의상(宜相)이 1960년에 결혼하면서 지은 단층 벽돌집은 없었다. 류영모는 옛 한옥의 안방에 거처하였다. 9월 6일이면 음력으로 8윌 13일이다. 추석을 이틀 앞둔 날이라 달이 아주 밝았다. 가을 달빛이 가을 바람과 함께 류영모의 침실을 찾아들었다. 그때 아직 구기동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류영모는 긴 책상 위에 램프등을 두고 불을 밝혔다. 그러니 달빛이 유난히
더 밝았다. 1957년도의 구기동은 여느 시골과 다름이 없었다. 류영모의 집은 1천2백 평이나 되는 넓은 터에 감나무, 복숭아나무 등이 서있고 집 둘레에는 이미 고목이 된 단풍나무, 밤나무, 아카시아로 둘러
쳐 있었다.
같은 북한산록이지만 우이동 계곡에 살았던 김교신은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에 견디기 어려운 일이 적지 않으나 도시의 수십평도 못 되는 작은 집에 살면서 한 뼘도 채 못 되는 땅을 가지고 이웃집과 다투는 일도 어려운 일이다. 광활하게 살고 싶은 소원으로 말할진대 백두산 차일봉 정상에 집을 짓고, 개마고원에 화초를 심고, 동해에 양어를 하면서 만주 벌판에 채마밭을 두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신세임을 어찌할 수 없어 북한산록이나마 지계(地界)에 황지(荒地)가 남아 있고 어루만지면 초목이 자랄 수 있는 개척할 여지가 남아있는 것으로써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1937년 성서조선107호) 김교신의 기개야말로 대장부답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무서운 더위 수그러지고 서늘함 세어져 恐炎柔凉剛
추석이 가까워지자 삼복 더위도 가셔져 아침저녁으로 서늘해진 것을 그리고 있다. 류영모의 집은 북한산 비봉산록 끝자락인데 대남문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계천과 비봉에서 내려오는 계천이 만나는 삼각
언덕(지금의 구기 파출소 뒤)에 자리했다. 그리하여 계천가 나무 그늘 아래 있는 바위에 앉아 있으면 한 여름에도 더운 줄 몰랐다. 류영모가 구기동으로 처음 이사했을 때는 그곳도 경기도 땅이었다. 오랜 뒤에
서울에 편입이 되었다. 처음에는 서대문구였으나 뒤에 종로구로 바뀌었다. 류영모는 자신이 서울에 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이같이 꿈틀거리고 사는 이 세상에서 지각있는 인사라면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살지 않는다. 이 사람은 거의 70년을 서울에서 사는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싱겁기 한량없는 것이 아니겠는가.이제는 아주 진저리가 처질 지경이다."
시인은 평안하여 시름조차 없어라 騷人保無恙
소인(騷人)이란 시끄러운 사람이란 뜻인데 시(詩)를 읇는 사람을 뜻한다. 류영모는 산문보다 간결한 시(詩)를 더 좋아하였다 .일본의 우찌무라(內村鑑三)는 동양의 한시에는 사상(思想)이 없다고 하였다.
우찌무라가 문재(文才)만 있고 신앙(信仰)이 없는 글을 읽고서 한 말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김삿갓(金笠)만큼 문재를 타고난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김삿갓의 시(詩)를 읽으면 재미는 있는데 진리에 대한
말은 반 마디도 없다. 김삿갓처럼 집을 떠나 삼천리 방방곡곡을 30년 동안이나 방랑했다면 고생과 설음이 얼마였겠는가. 그런데도 인생의 의미를 캐보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산사 스님들과 만나서는
인생을 논할만 했는데 풍자와 해학의 시짓기 내기로 끝냈다. 그러나 우찌무라가 류영모의 한시를 읽었다면 한시에는 사상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류영모는 한시를 1천3백 수, 시조를 1천7백 수를 남겼으니 스스로를 소인(騷人)이라 하고도 남는다. 퇴계 이황이 1천5백 수, 다산 정약용이 2천5백 수의 시를 남겼다. 밥 먹고 시만 지었는가 할 만큼 대가들임에 틀림없다. 류영모는 만년 20년 동안에 지은 것으로 시 한수 한수마다 진리인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향기가 그윽하다.
보무양(保無恙)이란 평안하여 시름이 없다는 뜻이다. 류영모의 평소의 신조가 "몸성히 맘놓이 뜻태움이다. 몸은 병 없이 성히 가지도록 힘써야 하고, 맘은 삼독에서 놓여야 하고, 뜻은 성령의 불을 태워야 한다"이다. 류영모는 체격도 작은 편이고 체력도 약한 편인데도 91세로 장수하였다.
한 벌 나무 판자 침상에 누웠도다 一張木板床
류영모는 52세 때 구경각에 이르면서 밖으로 세 가지 변화가 있었다. 해혼(解婚)을 선언하고 금욕생활에 들어간 것과 하루 두 끼니만 먹던 것을 한 끼니로 줄인 것과, 방안에 널판을 깔고 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무릎을 꿇고 앉는 것, 한복만 입는 것 냉수 마찰을 하는 것, 늘 걸어 다니는 것 등은 이미 20대부터 해왔다.
류영모가 널판자를 침대 삼아서 자게 된 것은 척추를 곧게 하자는 건강상 이유와 죽음을 잊지 말자는 정신상의 이유 때문이었다. 류영모는 40대에 나무 전지(剪枝)를 하다가 삼각 다리가 쓰러져 척추를
다쳐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널판자 위에 자게 되었다. 공자(孔子)는 침불시(寢不尸)라 하여 송장 잠을 안 잤다는데 류영모는 바로 누워 송장 잠을 자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류영모가 널
판자 위에서 잔 것은 관 속에서 생활하는 것과 같았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죽음을 생각하여 언제 떠나도 미련이 없도록 준비와 각오를 하면 좀 더 생각을 깊이 하게 된다. 아프면 죽음을 생각하게 된
다. 아프지 않으면 죽음을 잊어버린다."(다석어록)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15. 옛 베개를 생각지 않고 내게서 새 침상을 찾아 不思舊枕求我新床|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16. 낮이나 밤이나(우러러야지) 晝夜
초승달 베개 치워져 많은 (아들) 새벽에 살핌 初月枕去多晨省
남쪽 하늘에 두성의 침상이 나와 하느님의 잠자리를 펴드려 南斗牀來一昏定
(하느님 아버지께) 혼정신성함을 일찍부터 빠뜨려 온 것 같아 昏定晨省曾缺如
술 취한 듯 살고 꿈처럼 죽는 걸 어찌 바로잡을까 醉生夢死何頓整
(1957.9.18)
初月(초월) :초승달. 晨省(신성) 새벽에 문안드림. 南斗(남두) :초저녁 남쪽하늘에 뜨는 두성(6개의 별).
昏定(혼정) '저녁 잠자리를 펴드림 牀 평상 상. 醉生夢死(취생몽사) :술에 취한 듯 살다 꿈처럼 죽어버림.
頓整(돈정) 가지런히 바로잡음. 頓:가지런할 돈. 整:가지런할 정.
류영모는 말하기를 "낮은 밝아 세상이 눈에 보여 우리의 생각이 낮아지기 때문에 낮이라고 한다.밤은 어두워 세상이 물러가고 먼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는 바람의 밤이라고 한다. 대낮처럼 밝은게 한없이 좋긴 하지만 그 대신 잊어버리는 것이 많게 된다.더구나 굉장한 것을 잊게 되는 경우가 있다.다름이 아니라 얼이신 하느님과의 정신적인 거래를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낮을 좋아하고 밤은 쉬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밤중에 저 깜박이는 별들이 영원(하느님)과 속삭이는 것을 모르고 있다"라고 하였다.
R.W.에머슨은 이렇게 말했다.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볼 때 뭇 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만일 별들이 천 년마다 하룻밤에만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좋아하고 찬미할 것인가. 그리고 수많은 세대에 걸쳐 모습을 드러냈던 하느님의 나라인 별 밤의 기억을 새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미(美)의 사절들은 밤이면 밤마다 그 모습을 나타내어 뭔가를 알려주려는 듯한 미소로 우주에 빛난다."(에머슨. 수상록 자연)
초승달 베개 치워져 않은 (아들) 새벽에 살핌 初月枕去多晨省
류영모는 말하기를 "예수는 절대의 아버지의 권한을 믿었다.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는 것이 아들의 노릇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신 그대로 이르는 것이 예수의 하는 일이었다"(『다석어록』)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예수처럼 하느님 아버지에게 효(孝)를 다하고자 하였다. 류영모는 숨질 때까지 아버지 하느님을 불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유교에서는 효를 부모에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마침내는 하
느님에게 바치는 마음이 참으로 효가 된다. 하느님 아버지께 효할 줄 알아야 사람의 아들로서 땅의 아버지에 대한 효를 할 수 있다. 효도의 실상은 하느님 아버지에게 하라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를 바로 아
는 사람은 최선의 효를 할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한 정성이 어버이에 대한 정성이 되고 만다. 이 근본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오늘날 서러움 받는 어버이들이 많다."(『다석어록』)
예로부터 효자는 저녁에는 부모님의 잠자리를 펴드린 다음 평안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올린다. 또 날이 밝으면 이른 아침에 부모님을 찾아가 밤새 평안하시었는가? 하고 살피는 아침 인사를 올린다. 늙으신
부모님이 외롭지 마시라는 자식된 도리다. 이를 혼정신성(昏定晨省)이라고 한다. 이 말은 중국 한나라 때 이루어진『예기』(禮記) 곡례편에 나온다. "무릇 남의 자식된 예절은 어버이에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저녁에는 잠자리를 펴드리고 새벽에는 안후(安候)를 살핀다"(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淸 昏定而晨省-예기 곡례편)고 하였다.
류영모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혼정신성(昏定晨省)을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혼정신성은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류영모는 하늘에 떠있는 초승달을 보고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고 주무시는 베개로 생각해 보았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과 같은 몸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류영모는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다. 류영모는 없이 계시는 하느님을 믿었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 본다. 보통 상식으로 별자리쯤은 기억할 만큼 하늘을 쳐다보아야 한다. 하늘을 자꾸 쳐다보고 그 다음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위까지 쳐다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윤극영은 낮에 하늘에 떠있는 반달을 등굽은 할머니가 차고 다니던 쪽박으로 비유하였듯이 류영모는 초저녁에 뜬 초승달을 하느님께서 베고 주무시는 경침(脛枕)으로 비유했다. 이쯤은 되어야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이 그리워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줄여져 글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승달은 뜰 때 이미 중천(中天)에 와 있기 때문에 새벽이면 벌써 서쪽으로 져서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일
어나셔서 베개를 치운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신성(晨省)의 아침 인사를 올렸는가. 새벽 기도를 바르게 올리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남쪽 하늘에 두성의 침상이 나와 南斗牀來一昏定
신성(晨省)이 있었으니 혼정(昏定)이 있어야 한다. 파스칼은 대구(對句)의 글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너무나 인위적이라는 것이다.
"말을 사용하여 억지로 대구(對句)를 만드는 이들은 균형을 잡기 위해 필요 없는 들창을 만드는 사람과 같다. 그들의 목적은 정확하게 말하려는 게 아니라 정확한 형태를 만들려는 것이다."(파스칼. 팡세 27)
파스칼은 이 세상이 음과 양으로 된 상대세계인 것을 몰랐던 것 같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는 것이 자연이듯이 대구(對句)도 자연스런 것이다. 과학에서도 음양의 법칙을 알아내어 발전을 본 것이다.
남두성(商斗星)은 북두성과는 대조되는 별이다. 북두성은 일곱 별인데 남두성은 여섯 별로 일(日)자 모양을 이루고 있어 류영모는 하느님 침상으로 비유하였다.하느님의 침상에 누가 이부자리를 펴드려
혼정(昏定)을 하였는가. 그런데 이 인류역사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혼정신성을 하도록 천효(天孝)를 다한 사람은 몇 사람 안 된다. 류영모는 하느님께 으뜸가는 효자는 예수가 아닌가? 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하느님 아버지께 효(孝)하는 길을 말하기를 "나는 하느님을 찾는데 무엇을 바라고 찾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쯤 하면 하느님께서 은혜를 주시겠지?' 이것이 아니다.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향해
무엇을 바라며 믿는 것은 섬기는 것이 안된다.죽이든 살리든 이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죽이든 살리든 간에 하느님을 따라 가는 것이 하늘에 머리를 두고 사는 사람이 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하느님 아버지께) 혼정신성함을 일찍부터 빠뜨려 온 것 같아 昏定晨省曾缺如
이 땅의 어버이에게 효성(孝誠)을 다하는 이도 없다시피 됐는데 하느님 아버지께 효도하는 이를 만나기는 어렵다. 예수의 가르침을 좇는다면서 예수처럼 하느님의 얼을 받아 얼나로 하느님 아들이 되겠다
는 사람이 없다. 자기 가족의 육체적 행복을 바라는 기복신앙이 대부분이다. 기복신앙은 외형으로는 신앙이지만 진리로는 신앙이 못 된다.
진리와는 관계없는 탐욕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인생은 고달픈 삶을 겪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갈 길은 하느님과 통하는 길 뿐이다.천명을 받들어 느낄줄 알면 성령을 받아 권능을 얻게 된다. 그것은 하느님 아들이라는 권능을 갖는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으므로 더 나아질 것이 나아져야 할것이 아닌가.아버지에게 보다 가까워져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아지는 것은 물론 정신이다. 이렇게 되는 것을 믿는 것이 종교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석어록)
술 취한 듯 살고 꿈처럼 죽는 걸 어찌 바로잡을까 醉生夢死何頓整
술 취한 듯 산다는 것은 실성 (失性)한 것을 말한다. 참나인 얼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짐승인 몸생명 의 수성에 끌려 다닌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구약 시대에도 그랬지만 예수도 이 세상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장가 시집가고, 그러다가 멸망하고 마는 데라고 하였다. 이 고깃덩이 몸은 온통 죄악이다. 깜짝 정신을 못 차리면 내 속에 있는 하느님 아들을 내쫓고 이 몸뚱이가 차지하게 된다. 그러므
로 이 짐승인 몸삶의 꿈을 탁 깨자는 것이다. 그리고는 하느님이 주신 얼생명으로 영생하는 것이다."
요즘에 사람의 이성(理性)을 마비시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문명이라는 최면과 허영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보니 진리를 따르는 이는 없고 다 가짜 문명이라는 최면
과 빛에 홀려 정신이 나간 것 같다. 이에 참으로 진실한 한 점 얼 마음으로 하느님께 제사드리고 싶은 것은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은혜로 마음속의 진리의 한점(얼)을 깨치고 나오기를 빌 뿐이다."
참나인 하느님을 모르고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것이다. 참나를 모르고 사는 삶이 참삶이 될수 없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삶은 꿈을 꾸는 것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잠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오느니 가느니 성공이니 실패니 가르치느니 배우느니 하는 게 다 잠꼬대다. 꿈이요 잠꼬대며 거짓이요 가짜이므로 꿈은 깨야 한다. 인생이란 참나를 깨닫지 못 하면 마침내 꿈만 꾸다가 마는 것이다. 꿈깨자고 하는게 바른 생각이다. 니르바나니 하늘나라니 진리니 하는 것은 이 삶이라는 꿈을 딱 깨자는 것이다. 얼나를 깨달아 영원한 생명으로 살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개인의 발자취로나 민족의 발자취로나 인류의 발자취로나 지나간 것은 모두가 꿈이다. 사라진 꿈을 주워 모아놓은 것이 역사기록이다.
꿈을 적어 놓는다고 현실이 되는 일도 없다.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이다. 사람을 폄하(貶下)해서 말하기를 똥 만드는 기계라고 하지만 꿈을 짓는 짐승이다. 꿈을 지어서 무엇에 쓴단 말인가.
그래서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땅위의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니다.인간이란 벌레가 이 우주안에 없다고 해서 어떻다는 것인가.지구도 달과 같이 생물이 없이 빤빤하게 있다고 해서 무슨 서운함이 있는가. 우주조차도 마침내 다 타버린다는 사상이 있다. 우리가 옷에 묻어 있는 먼지 하나 털어 버린다고 해서 누가 눈 하나 깜짝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인류를 털어 버린다고 해서 무엇이 서운하겠는가. 똥벌레 같은 인류지만 생각해 사상을 내놓는 것이 여느 동물과 다르다. 이 사상이 문제다." (『다석어록』)
사람이 이룩한 사상의 핵심은 하느님이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꿈의 허망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깨달은 이들만이 꿈에서 깨어난 사람들이다. 영원한 생명이
란 꿈에서 깨어난 참나를 말한다. 아직도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잠을 자고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꿈을 깬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아 하느님이 참나임을 알게 된다.
태그
취소 확인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16. 낮이나 밤이나(우러러야지) 晝夜|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17. 하느님의 소리(뜻)가 사람의 말로 天音人言
(얼나로) 나서부터 말씀이 있어 (제나의) 입 빌리고 生來有言借口能
(제나가) 죽자 입 없어 (얼나는) 성령으로 돌아가 死去無口還本音
대대로 말이 끊겼으나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남겼고 代代斷言猶遺志
세세로 말씀할 하늘 소리 담은 큰 그릇 世世欲言大畜音
(1957.11.I6)
生來(생래) 나서부터 . 借 : 빌릴 차. 還 : 돌아갈 환. 猶 :오히려유. 畜 : 쌓을 축
하느님은 전체(全體)라 대괴(大塊)요, 대체(大體)요, 대축(大畜)이다. 하느님은 정신적으로 말하면 얼(soul) 탱크요, 물질적으로 생각하면 별(star) 탱크다.얼 탱크는 곧 참의 탱크(truth tank)요,생각의 탱
크(think tank)요, 말씀의 탱크(word tank)라는 말이다. 하느님의 소리란 이것을 말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직 하느님의 뜻밖에 없다. 영원히 갈 말씀은 이 혀로 하는 말이 아니다. 입을 꽉 다물어도 뜻만 있으면 영원히 갈 말씀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소리를 받아서 귀로 들을 필요가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경전이다."(다석어록)
하느님의 얼이 지구의 지각 속에 들어 있는 라버(lava,암장)라면 사람의 입으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라버가 아니라 마그마(magma, 용암)다. 암장에는 용암과 함께 가스가 있다. 땅위로 분출되면서 가스는 공중으로 날아간다.그래서 우리는 용암만 보지 라버는 못 본다. 사람의 입으로 나온 말씀에는 이치만 있지 거룩은 볼 수 없다. 그것이 천음(天音)과 인언(人言)의 차이다. 음(音)과 언(言)의 글자의 형성은 비슷하다. 둘 다 창으로 찌르는 것을 형상화한 신(辛)과 입의 모양을 형상화한 구(口)를 합친 회의문자다. 지각을 뚫고 올라오는 암장처럼 마음을 뚫고 나오는 말씀이다. 지각을 뚫고 나오는 용암을 막을 수 없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막을 길이 없다.
류영모는 말하였다. "생각을 자꾸 하는 사람은 말을 하고 싶다. 참 말씀을 알고 참 말씀을 하려는 사람은 그 가슴 속에서 생각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사람이다." (다석어록)
(얼나로) 나서부터 말씀이 있어 (제나의) 입 빌리고 生來有言借口能
사람과 촌수가 가장 가깝다는 침팬지나 오랑우탄이 사람의 말귀를 얼마만큼은 알아들어도 말을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야말로 말 같잖은 소리를 내면서 저희끼리 집단생활을 하는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다. 사람도 5백만 년 전에는 침팬지나 고릴라와 공동 조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인류의 조상도 오늘날의 말 같은 말을 하게 된 지는 그렇게 오래 되지 않은 것 같다. 독일의 철학자 카시이러(Cassirer, I874~l945)는 "신화(神話)와 언어는 손잡고 사람의 정신적 창조와 우주에 대한 통일적인 비전이 생겨나는 저 위대한 총합을 위해서 정지(整地)하는 것이다"(카이시러,언어와 신화)라고 하였다. 카이시러는
신화와 언어가 함께 사람의 머리에 샘솟았다고 말하였다. 털 없는 원숭이의 생각에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이 일어나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을 때부터 사람다운 말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래 되어야 농경
을 시작한 1만 년 전후일 것이다.
가장 높은 깨달음에 이른 때가 2천 년 전에서 3천 년 전 사이로 그 시대에 석가 · 노자 · 공자 · 장자 · 맹자 · 예수가 나타났다. 생래(生來)란 하느님의 얼이 사람에게 나타난 것을 말한 것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참 사람은 두려운 것이 셋 있다. 하느님의 이르심을 두려워하고 큰 사람(깨달은 사람)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君子有三畏 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言 -논어 계시편)라고 하였다.
천명(天命)은 하느님의 뜻이고,대인(大人)은 하느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이고, 성인의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알리는 말씀을 뜻한다.셋이라고 했지만 결국은 하느님 말씀 하나다. 여기서 우리는 공자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심을 헤아릴 수 있다.
예수가 이르기를 "나는 너희에 대해서 할 말도 많고 판단할 것도 많지만 나를 보내신 분은 참 되시기에 나도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그대로 이 세상에 말할 뿐이다"(요한 8:26)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느님의 얼은 사람(성인)의 마음속에 임재(臨在)하여 사람의 입을 빌려서 하느님의 뜻을 사람에게 알렸다. 예수 석가는 철저히 하느님의 입 노릇을 하였다. 그런데 세상에는 제 말을 하면서 하느님의 대변인인 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이른바 거짓 선지자들이다.이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해야 한다.그들을 따르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좇는 것과 같이 위험하다.
(제나가) 죽자 입 없어 (얼나는) 성령으로 돌아가 死去無口還本音
공자(孔子)는 "속알(얼나)을 가진 이는 반드시 말씀이 있다"(有德者必有言-논어 헌문편)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하느님께서 내게 속알(얼나)를 낳으셨다"(天生德於予-논어 술이편)라고 하였다.그렇다면
속알을 가진 공자가 말이 없을 수 없다. 공자의 말씀도 하느님의 말씀인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논어를 읽으면서 공자의 말인 줄로만 안
다. 공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한 것인 줄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는 공자의 말을 바로 알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 왔다가 떠나가자 예수가 베드로에게 너도 떠나가겠느냐고 물었다.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선생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선생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선생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요한 6:68-69)라
고 하였다. 베드로는 스승인 예수가 하느님의 대변자임을 알았던 것이다.
하느님의 입 노릇을 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니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은 듣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는 미리 예수가 죽은 뒤의 일을 제자들에게 일러주었다. 나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나의 죽음으로 끝나 이제부터 너희들은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성령은 예수의 생사와 관계없이 본음(本音말씀)으로 있기 때문에 성령의 말씀을 직접 받으라는 것이다. 예수가
이르기를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 또 이르기를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간다. 그런데도 너희는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한말 때문에 모두 슬픔에 잠겨 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요한 16:5-7)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성령은 없는 곳이 없으니 가고 오는 것이 없다. 예수의 말은 스승인 내가 있으면 너희들이 나에게 의지
하려 하지만 내가 가면 너희도 하느님의 성령을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가 떠나면 너희는 더 빨리 성령을 받아 얼나를 깨닫게 된다. 그것이 정신적으로 빨리 독립하게 되어 더 낫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거무구환본음(死去無口還本音)이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하느님의 성령이 말씀이요 참나(眞我)이다. 얼나로 거듭나면 몸나의 삼독에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죽음에서 조차도 자유롭다. 하느님의 성령인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기만 하면 아버지께서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을 넉넉히 부어주신다.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소리(뜻)를 알 때 너와 나의 벽을 뚫어 통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소리인 본음(本音), 정음(正音), 복음(福音)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대대로 말이 끊겼으나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남겼고 代代斷言猶遺志
석가는 40년을 넘게 설법을 하였으나 예수는 4년도 못 되게 가르치고는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도 그들이 남긴 말씀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뚜렷하게 밝혀졌다. 예수는 말하기를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그렇다. 제 속에 있는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요한6;38-40)라고 하였다.
류영모도 톨스토이나 마하트마 간디와 같이 예수의 유지(遺志)라 할 가르침을 좇아서 참나를 깨달아 하느님 아들로 거듭났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할 일이 없어서 인간을 낸 것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을 깨닫게 하려고 인간을 내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이 나에게 계시니 나에게 사람의 사명을 주신다. 그 사명을 받아서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 나는 하느님 아들이 된 것을 느낀다.
그러므로 하느님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아마 예수도 이것을 느낀 것 같다."
세세로 말씀할 하늘 소리 담은 큰 그릇 世世欲言大畜音
류영모는 이르기를 "인류라는 것이 끊어지기 전에는 생각이 사람에게서 자꾸 나온다. 인류가 있는 동안에는 생각을 자꾸 할 것이다. 생각이 있는 것만은 확실한데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생각이 있기에 말씀을 하고, 말씀이 있기에 우리가 생각을 한다. 말씀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 같다. 말씀이 곧 하느님이다"라고 하였다.
하느님은 말씀의 얼이 가득 찬 탱크(tank)이다. 그 얼을 받아서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한다. 그 얼이 아니면 하느님을 그리워할 리가 없다.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짐승과 다름없이 하느님을 모르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얼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얼을 받아들이려면 마음이 한번 죽어 빈마음이 되어야 한다. 제나가 죽어야 성령의 얼나가 들어설 수 있다.
대축(大畜)이란 말은 주역(周易) 26번째 괘(卦)에 나온다. 산() 이 위에 있고 하늘()이 밑에 있다. 하늘이 산 속에 있다고 하여 천재산중(天在山中)이라 한다. 류영모는 이 괘(卦)를 풀이하기를 "이를
정신적으로 해석하여 우리 몸 속에 성령이 충만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예수도 하늘나라는 너희 속에 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뒤에 오는 이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할 사람이 나온다고 하였다. "내 뒤에 오는 자가 나보다 앞선 자라는 것은 이즈음 진리의 발달이 그렇다. 내가 아무리 예수를 믿는 척해도 내
말을 듣고 뒤쫓아오는 사람은 언젠가는 나를 앞설 것이다.나 역시 미완고(未完稿)를 완결짓기를 바라나 내 손으로는 할 수 없다. 내 뒤에 오는 이가 할 것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이신 참나를 찾을 때에만 존속
될 것이다." (다석어록)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17.하느님의 소리(뜻)가 사람의 말로 天音人言|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18. 사랑이 일생 순결하게 살지 못할까
人間不可無一生童貞
빔을 깊이 느끼면 거룩한 부드러움 살에 닿고 深感空膚聖柔觸
때를 깐깐히 이으면 하느님과 사랑의 입맞춤 窃承時脣神愛情
생각해 말하는 사람은 새나 짐승은 아니라 思議人間非禽獸
바탈 다해 얼 목숨을 돌이켜 순결만을 생각해 盡性復命慕童貞
(1957.2.23)
窃 깐깐할 절. 童貞(동정) :이성간의 접촉이 없는 순결. 膚 :살갗 부.
觸 닿을 촉 脣:입술 순. 禽:새 금. 獸:짐승 수. 慕 생각할 모.
류영모는 말하기를 "삶을 가진 이는 영원히 사랑을 추구해 나간다. 그 사람이 올바르게 사느냐 못 사느냐, 이 세상이 제대로 되느냐 안 되느냐는 사랑의 님을 갖느냐 못 갖느냐에 달려 있다. 하느님은 사람이 맘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님이요, 또 그에 못지 않게 사랑해 주시는 님이다"라고 하였다. 류영모가 이 시를 쓰고 이 말을 한 것은 죽는 해로 가정한 67살 때다. 류영모가 일생동안 하느님만을 사랑하며 살기로 결심한 것은 22살로 동경에서 유학할 때였다. 이 결심을 하느라 일생에서 가장 심각한 고뇌를 하였다. 그러나 결심만 하였지 뜻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돌아와 혼인을 하였다. 해혼(解婚)을 하고 금욕생활에 들어간 52살의 믿음만 되었어도 아예 혼인을 안 했을 것이다. 류영모는 장가갈 때의 마음을 이렇게 말하였다. "소자(小子)가 하느님 아버지를 사모하는데 아버지와 하나되려고 사모한다. 아버지를 닮으려고 그리나 그리는 것이 제 모습을 그리는 것밖에 안 된다. 괴로워하다 못하여 다른 무엇을 그려볼까 하고 여러가지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옳게 바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방황하여 동서남북으로 헤맨다. 말 못하는 지경에서 퍽 참고 있다가 '아이, 못 견디겠다. 장가라도 가야 되겠다' 하고 땅의 아버지를 모방해 가정을 이룬다."
류영모는 52살에 해혼(解婚)을 하고 금욕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미물색사(味物色事)에 머물지 않으려면 젊어서는 안 되고 늙어서 되는데 늙어도 젊었을 때
부터 미물색사에 몸을 담지 않겠다고 피나는 수행과 고행이 있어야 한다. 몇십 년 동안 벼르고 별러서 거의 가까운 것이 되지 젊어서는 안 된다. 우선 젊어서는 장가 갈 것이냐, 안 갈 것이냐의 기로에 선다. 결국 혼인하는데 그러면 한동안은 어떻게 하면 계집 데리고 재미 있게 사나 이렇게 된다. 그러다가 자식이 생기고 자식에게 맘이 쏠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고 그 동안에 늙어버린다."(다석어록)
류영모는 혼인한 것을 후회하는 말은 자주 하지 않았으나 한번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혼인을 하였는데 이것이 잘못이다. 이 사람 이 이 세상에 와서 그 짓 하지 않았으면 없는 것이다. 인류가 없어지
면 어떡하나 큰 일 날 줄 안다. 사람이 없으면 무슨 걱정인가." 그러나 여자에게 음욕을 일으키지 않고 살다 간 예수를 보고는 일생 동정으로 살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인격의 온전함이 능히 독신을 가능
하게 한다. 누구를 의지하거나 기대거나 하는 것이 없고 조건이 없다.거기는 영원한 평화만이 깃들인 영원한 그늘이다. 제나가 없는 마음은 남녀를 초월한다. 남녀의 바람이 자고 생각의 호수가 깊으면 그것이 니르바나다. 남녀유별 부부유별 해야지 똥과 오줌을 싸 뭉개는 어리석은 짓은 벗어나야 한다.
빔을 깊이 느끼면 거룩한 부드러움 살에 닿고 深感空膚聖柔觸
류영모는 탐 · 진 · 치의 수성(獸性)을 쫓는 이성(異性)과의 사랑을 그만두고 진 · 선 · 미(眞善美)의 영성 (靈性)으로 하느님과의 사랑을 하자는 것이다. 사람은 남녀의 피부접촉을 좋아하고 즐기지만
하느님의 몸이라 할 수 있는 허공을 깊이 느낄 때 하느님의 거룩하고 부드러운 살에 닿는 맛에는 비길 수 없다고 하였다. 하느님과의 사랑은 외설도 음란도 아니고 거룩함을 입음이다. 류영모가 빔(허공)을 깊
이 느끼기를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허공밖에 없는 이 세계에 얼나(靈我)는 허공의 아들이다. 절대의 아들이다.절대의 아들인 얼나가 참나인 것을 깨닫고 요망한 몸나에 대한 애착이 가셔지는가가
문제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올라간다. 그때가 되면 하나인 허공이 얼나를 차지할 것이고, 허공을 차지한 얼나가 될 것이다. 이러면 얼나의 아침은 분명히 밝아을 것이다"(다석어록)라고
하였다.
때를 깐깐히 이으면 하느님과 사랑의 입맞춤 窃 承時脣神愛情
시간을 깐깐히 이어간다는 것은 한석봉 어머니가 가래떡을 썰듯이 시간을 쪼개어 쓴다는 말이다. 시간의 순간 순간을 그저 넘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순간 순간에 하느님을 만난다는 뜻이다. 류영모는 이렇
게 말하였다 "한 찰나에도 영원의 살림을 살 수 있다. 이 찰나에 영원한 생명(하느님)을 느끼지 못하면 그 사람에겐 영원한 생명이 없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4차원이라고 했는데 시간을 알면 천명(天命)을 알 것이다. 시자명야(時者命也)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순간에 하느님과의 만남을 하느님과의 입맞춤이라고 하였다. 하느님과의 입맞춤의 순간이 돈오의 찰나인 것이다. 류영모가 산 날수를 셈한 것도 이러한 뜻에서였다.
류영모는 허공을 명상하면서 하느님과 살 닿음을 느꼈다. 시간을 직시(直視)하면서 하느님과의 입맞춤을 느꼈다. 이쯤 돼야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평생을 시간 ·공간 속에서 지내면서
도 시간 ·공간이 하느님인 것을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미련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인간들을 포함하여 모든 있는 것은 하느님의 내용이요 부속이라 하느님 한 분만이 존재한다. 하느님의 주권과 영역을 떠나
서 있는 것은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우리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육체적 생명으로 살기 때문이
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없는 삶은 짐승살이와 같다"(M.K.간디, 『날마다의 명상』)라고 하였다
하느님이 참나인 것을 알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 났는데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알지 못하고 짐승처럼 몸 삶에만 골몰하는 것보다 더 슬픈일이 없을 것이다.류영모른 이르기를 "사람들이 정말 모른다고 하는 하느님에 대한 영원성과 연결되어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느님이 무엇인지 모르는 일은 끝내야 한다. 하느님과 사랑을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 사랑의 정신이 나와야 참으로 하느님의 뜻이 진리의 불꽃, 말씀의 불꽃이 되어 살리어 나온다. 생각의 불꽃밖에 없다"(다석어록)라고 하였다.
생각해 말하는 사람은 새나 짐승은 아니라 思議人間非禽獸
사의(思識)란 생각하여 옳은 말을 한다는 뜻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큰 성령이신 하느님이 계셔서 깊은 생각을 내 마음속에 들게 하여 주신다. 말은 사람에게 한다. 사람과 상관하지 않으면 말은
필요 없게 된다. 따라서 사는 까닭에 말이 나오게 된다. 생각이 말씀으로 나온다. 참으로 믿으면 말씀이 나온다. 말은 하늘 마루 꼭대기에 있는 말이다. 우리는 그 말을 받아서 씀으로 하느님을 안다. 그렇게
말을 받아서 쓴다고 말씀이다.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써야 한다. 하느님과 교통이 끊어지면 생각이 결딴나서 그릇된 말을 생각하게 된다."(『다석어록』)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하는 사람은 새나 짐승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도 모르고 하느님의 말씀도 못 하면 새나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하는 이는 탐 · 진 · 치의 짐승 성질을 버렸기 때문에 비록 몸을 지녔으나 짐승이 아닌 하느님의 아들인 것이다.그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이가 예수 · 석가다.
바탈 다해 얼 목숨을 돌이켜 순결만을 생각해 盡性復命慕童貞
이 사람이 바탈과 바탕을 가리지 못할 때 스승 류영모가 가르쳐 주기를 바탈은 성(性)이고 바탕은 질(質)이라고 하였다. 바탈(性)은 하느님으로부터 얼을 받아서 한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류영모처럼 바탈을 말하기 좋아한 이로는 맹자가 있다. 맹자는 "바탈을 알면 하느님을 안다"(知其性則知天矣)고 하였다. 성(性)과 얼(靈)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진성(盡性)이란 얼나를 받들기에 맘을 다하는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은 자기의 바탈(性)을 살려낼 때 자기를 느끼게 된다. 자기의 개성(個性)이 자랄수록 오늘보다 내일 더 깊은 바탈을 느끼게 된다.자기를 더 깊이 느끼게 될수록 더 깊이 자기 바탈을 찾아서 자기 바탈을 타고 가게 된다.생각은 우리의 바탈이다. 생각을 통해서 깨달음이라는 하늘에 다다른다.생각처럼 감사한 것은 없다.생각이라는 바탈을 태우려면 마음이 놓여야 하고 마음이 놓이려면 몸이 성해야 한다.바탈은 생각이 밑천이 되어 자기의 정신을 불사르는 예술의 세계다."
복명(復命)은 몸 목숨에서 얼 목숨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물 속에서 아가미로 물을 숨쉬던 생물들이 땅위로 올라와서 허파로 공기를 숨쉰다. 이처럼 우리는 다시 한 번 비약하여 생각으로 하느님의 얼(성령)을 숨쉬게 되어야 한다. 얼숨을 쉬는 얼나는 하느님 아들로 영원한 생명이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얼숨(말숨)은 콧숨의 마지막이요 죽음 뒤의 삶이라고 할수 있다.
얼숨 쉼은 영원을 사는 것이다. 얼숨을 생각하는 것은 영원을 생각하는 것이다. 얼숨이 곧 하느님이기도 하다. 얼숨 쉬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요, 하느님을 사는 것이다. 얼숨은 우리 맘속에 타는 참의 불꽃이다. 우리 맘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 하느님의 얼숨을 숨쉬지 못하면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모동정(慕童貞)은 순결하게 사는 동정을 그린다는 뜻이다. 예수 · 석가는 동정의 성인이다. 예수 · 석가를 사모하는 것이 류영모의 삶이었다. 그리하여 스스로도 늦었지만 순결의 동정을 생각하면서 살았다.
마하트마 간디는 브라마차라를 늘 생각하였다. 브라마차라를 생각하는 것이 모동정(慕童貞)인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의 몸은 분명 짐승인데 짐승의 생각을 하지 않음이 얼사람으로 솟나는 우리의 길이다.이 틀(身) 쓴 것을 벗어버리기 전에는 못난 거다. 죽기 전에 이미 짐승의 나는 없어져야 한다. 송장이 되어 드러눕는 거다." (다석어록)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18. 사랑이 일생순결하게 살지 못할까 人間不可無一生童貞|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1 9. (하느님밖에) 다른건 없다 無他
빔일 수도, 몬일 수도 있고 다 알고 다 할 수 있어 能空能物全知能
달라지며 달라지지 않는 하나에서 둘이 나와 바뀐다 變易不易一二易
(하느님) 아버지 우뚝 계시니 본디 이와 같아 父在從本來如是
(아들인) 나, 예서 이제 맘으로 차차 (아버지를) 닮으리 吾玆今心稍肖亦
(1957.1.14)
變 : 변할 변 易 변할 역, 바뀔 역. 從 : 우뚝할 종. 玆 : 이 자.
稍 : 점점 초. 肖 : 닮을 초. 亦 · 어조사 역.
류영모는 신앙생활로 평생(91세)을 일관한 사람이다. 도중에 신앙생활에 회의를 갖는다거나 탈선한 적이 없었다. 류영모는 평생을 신앙생활로 보낸 소감을 이렇게 말하였다. "산은 오를수록 험하다. 학문도
종교도 올라갈수록 어렵다. 그것은 행(行, 체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라갈수록 기쁨이 넘친다. 이것이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다."(히브리서 11·1) 우리는 하늘나라에 못 가보았지만 하늘나라에는 기쁨이 넘칠 것이다. 산에 올라가면 곧 알 수 있다. 산에 올라가 보면 오르는데 기쁨이 넘치는 것으로 보아 하늘나라에도 기쁨이 넘치는 곳임을 알 수가 있다."
하느님을 찾아가는 신앙생활이 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는 것은 믿음이 깊어짐에 따라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몸을 지닌 사람으로서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정
상(頂上)의 지경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믿음의 정상(頂上)이 있다면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 이를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최고의 깨달음인 구경각(究竟覺)을 아눅다라삼먁삼보디(Anuttara-Samyak-Sambodhi)라고 한다. 이를 의역하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 한다. 신앙이란 주관적인 체험이라 남이 이렇다
저렇다 저울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사람의 말과 삶으로 신앙생활의 정도를 헤아릴 수는 있다. 그 사람의 말은 하느님에 대한 인식정도를 나타낸다. 그 사람의 삶은 탐 '진 '치를 여윈 정도를 드러낸다.
류영모가 구경각을 이룬 것을 나타내는 말이 적지 않은데 그 가운데 하나를 들어본다. "진리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내 뜻 없이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이다. 내 뜻 없이 볼 때 진리(하느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이 성의다. 진리(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진성(盡性)이라고도 한다. 이는 내 뜻이 없어지고, 내 고집이 없어지고, 나(我)라는 것이 없어지고. 반드시(必)가 없어진 세계다.진리(하느님)와 참나가 하나되는 세계다."(다석어록)
구경각을 이루었음을 드러내는 가장 간단한 말은 이 시제(詩題)인 무타(無他)다. 하느님밖에는 다른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절대존재인 것이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유일(唯一)한 존재인 하느님의 부속물로 있을 뿐이다. 시간도 공간도 모두가 하느님의 내용물이다. 하느님을 떠난 시간이 어디 있으며 하느님을 떠난 공간이 어디 있는가. 시간 공간 속에
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시간 공간 속에 살면서 시간 공간만 알고 하느님을 모르는 것은 마음의 얼눈(靈眼)을 뜨지 못한 탓이다. 밤이나 낮이나 우주를 내다보면서 우주로만 보고 하느님을 못 알아보는 것도
마음의 얼눈을 뜨지 못한 것이다. 시간 . 공간이나 우주도 하느님의 한 모습이다. 마음의 얼눈을 뜬 류영모는 우주를 이렇게 내다보았다 .
"그믐이나 초하룻날 밤에는 하늘에 가득한 밝은 별들을 볼 수 있다. 그때 우리 눈은 가까운 데서는 볼 것이 없다.멀리 내다보는 우리 맘에는 어떤 정신의 빛이 별빛처럼 쏟아져 온다. 그것이 진리(하느님)의 얼이다. 석가가 샛별을 보고 진리(하느님)를 깨달은 것은 그래서다."(『다석어록』)
하느님을 떠나 그밖에 존재하는 것은 없다 (We have no exitence outside and apart from god M.K.간디. -「날마다의 명상」)
빔일 수도, 몬일 수도 있고 다 알고 다 할 수 있어 能空能物全
하느님은 허공일 수도 있고 물체일 수도 있다.허공과 물체에서 허
공이 실체(實體)이고 물체는 변태(變態)이다. 스피노자의 자연신이 실
체와 양태(樣態)라 하였을 때 실체가 성령이고 양태가 물질이다. 스피
노자는 석가 장자 류영모처럼 허공을 언급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성령을 실체로 보고 물질인 양태를 성령의 변태로 봄으로써 범신(汎神
)의 유일신관(唯一神觀)에 이르렀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구경
각에 이른 것이다. 스피노자의 범신(汎神)과 예수의 영신(靈
神)이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실대로 스케치한다면 해안(海岸)이 없어 무한(無
限)하고 해저(海底)도 없는 심연(深淵)의 허공 바다에 1천억 개가 넘
는 별무리로 된 1천억 개의 별구름 덩어리가 유영(遊泳)하고 있는 모
습이다. 또 달리 비유하면 무한 심연의 중심만 있고, 둘레 없는 공
(球)안에 무수한 별들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생겼다가 사라지고 있다.
무한 심연의 허공인 하느님을 생각할 때 나라는 존재는 강진(强震)을
만난 듯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공포의 전을이 아니라 환희의
전율이다. 남녀가 처음 만나서 느끼는 감각적인 짜릿함은 비교가 안
된다.
하느님의 전지(全知)와 전능(全能)은 예로부터 하나의 화두(話頭)
가 되었다. 인간 세상은 너무도 모순투성이라 전지 전능한 하느님의
실패작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낸
것을 후회하면서 홍수로 멸망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지 전능한
하느님께는 후회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현대의 토인비조차도
하느님의 전능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칼 융은 전지(全知)를 의심하였
다. 토인비는 하느님의 전능을 못 믿어서인지 사람들의 사랑을 강조
하게 되었고, 칼 융은 사람들이 보고를 해야 신이 알게 된다는 어리석
은 소리를 하였다. 이 무한 우주, 유한 우주를 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어디 있는가. 무극 태극의 우주를 내는 것은 전지 전능이 아니고
는 불가능한 일이다.
달라지며 달라지지 않는 하나에서 둘이 나와 바뀐다 變易不易一二易
류영모는 변하지 않는 절대(絶對)의 무(無)와 변하는 상대(相對)의
유(有)를 합친 것이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하느
님 한 분뿐이다.다른 모든 것은 하느님의 부속이고 내용이기 때문이
다. "허공인 하늘과 물질인 땅(相對)을 합한 것이 하느님이다. 절대의
무(無)와 상대의 유(有)를 합한 것이 하느님이다. 절대를 무극(無極)
이라, 상대(相對)를 태극이라 한다. 태극 무극은 하나라 하나가 하느
님이다." (『다석어록』 )
무(無)는 변하지 않는데 유(有)는 변한다. 우리는 지금 변하는 유
有)가 되어 있다.그래서 변하지 않는 무(無)를 그리워한다. 무(無)
가 유(有)의 밑동이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말하였다. "자꾸 바뀌고(變
易), 자꾸 사귀고(交易),그 가운데 바뀌지 않는 불역(不易)의 생명을
가져야 한다. 바뀌는 것은 상대생명이요 바뀌지 않는 것은 절대생명
이다. 바뀌는 것은 겉나요 바뀌지 않는 것은 속나이다. 절대세계는 상
대세계를 내포(內包)하기 때문에 바뀌면서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해
야 한다. 변화하는 겉나(몸)에서 변화하지 않는 속나로 솟나면 무상
(無常)한 세계를 한결같이 여상(如常)하게 살수 있다."(다석어록)
변하지 않는 존재를 하나(一)라 하고 변하지 않는 하나(一)가 변하
는 것으로 바뀐 것을 둘(二)이라 한다. 노자(老子)는 변하면서(二) 변
하지 않는(一) 절대를 셋(三)으로 생각한 것 같다. (道生一 一生二 二
生三 三生萬物 노자 42장) 류영모는 하나에 대해 말하기를 "하나
(元一 )는 밑동(根本)이다. 또 주체(主體)로서 영(令)을 내린다. 이 영
(令)은 우리에게 직접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하
느님의 뜻으로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 하느님의 영(令)을 받고 있다. 이것이 원일령(元一令)이다.
하나(一)는 전체를 말한다. 전체의 하나는 설명할 수가 없다"라고 하
였다.
(하느님) 아버지 우뚝 계시니 본디 이와 같아 父在從本來如是
모든 것은 다 없는 것과 다름이 없고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이 계신
다. 아버지는 본디부터 이렇게 계시는 분이다. 시작도 마침도 없는 영
원한 존재다.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 한 분인데 하느님의 존재를 모르
는 사람이 많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잊은 사
람은 자기 자신을 잊은 사람이다."(He who denies the existence of
God denies his own.He who forget shimself. M.K.간
디, 날마다의 명상) 간디는 하느님의 존재를 알았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알아야 할 것을 모르면 인식
부족(認識不足)이라고 말한다. 절대자 한 분(하느님) 계시는 것을 있
느니 없느니 하고 떠드는 무식한 이 세상 사람들은 무엇이 인식부족
인지도 모르고 있다. 절대자(하느님)는 계신다. 다른 것은 다 없어도
절대자만은 계신다. 절대자는 우리가 인식하고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는 것을 누가 아느냐 하면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이 세
상이 괴롭고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걸어오신다.
절대자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알고 싶은 생각을 일으켜 준다. 절대자
가 자신이 아버지라는 것을 아들에게 알게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말
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다석어록)
(아들인) 나,예서 이제 맘으로 차차(아버지를)닮으리 吾玆今心稍肖亦
예수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
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오 5.48) 이것은 하느님의 얼을 받아
얼나로 거듭나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를 닮
는 정도가 아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하였다.하
느님으로부터 내가 받은 생명이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이니 하느님과
하나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를 드높이는 것을 '아버
지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였다. 내가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러낸
다는 것은 무엇일까.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본성(얼나)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얼나)다. 본성의 완성이 진리다. 진리를
깨쳤다는 것은 본성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가까이 하고 더 가까이 하면 나도 모르게
하느님 아버지를 닮게 된다. 하느님 아버지를 닮고 또 더 닮아가면 마
침내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되는 지경에 이른다. 하나 된다는 것은 하
느님이 참나임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제나(自我)가 죽는 것이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19. (하느님밖에) 다른건 없다 無他|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20. 먹거리 끊고서 얻은 느낍 斷食有感
음욕으로 얼리니 걸근거리는 몸 탈이라 痴後犯房貪食症
먼저 깨끗이 해 얼림 끊고 적게 먹어 맘 밝아야 齋先斷房節食明
음욕 탐욕 끊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하며 痴貪無斷滅人類
몸 깨끗, 맘 밝음을 이어가야 얼나로 구원되리 齋明有續救生靈
(1957.1.31)
有 얻을 유 痴.어리석을치,의심을품다. 犯房(범방) ·부부의동침.
齎 ' 재계할 재, 맘 씻을 재 明(명) 진리를 아는 슬기가 밝아짐
生靈(생령) :산 사람, 산 사람의 얼
예수가 사십 주야를 단식하고 나서 몹시 시장하셨을 때에 유혹하는 자의 말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고 하였다. 예수가 대답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마태오 4:4)고 하였다. 여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는 얼나(靈我)가 그렇다는 말이다. 예수의 몸나는 그 뒤로도 빵을 먹었다.그래서 마지막 제자들과의 만찬도 있었으니 빵은 내 몸의 살이요 포도주는 내몸의 피라고 하였다.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으로만 사는 얼나를 찾아야 한다.그런데 우리는 찾을 생각조차 안 한 채 날마다 몸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만 걱정하고 있을 뿐이다.
류영모의 말이 "사람은 분명 짐승인데 짐승의 생각을 하지 않음이 얼나로 솟나는 우리의 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란 태어나서 다른 것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잡아먹고 살면서도 얼이 있어 맘속을 밝혀
위로 한 없이 솟아나려 함이 인생의 길이다"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면서 사는 얼나가 있고, 세상의 먹거리를 먹고 사는 몸나가 있다. 얼나가 하느님의 성령을 왕성하게 숨쉬자면 몸의 먹거리인 빵
(밥)을 끊을줄도 알아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가 이르기를 "먹는 것보다 먹지 않는 데 더 큰 즐거움이 있다. 누가 그 진리를 체험하지 않으려 하는가. 굶주림의 고통은 지독하다고 한다. 우리가 사람이라는 존
재로 살기를 바란다면 이 고통은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M.K간디,『날마다의 명상』)라고 하였다.
이 단식유감(斷食有感)의 글을 쓰게 된 연유가 있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설날을 앞두고 어려운 살림을 비관하여 섣달 그믐날 저녁에 온 가족이 집단 자살을 했다. 그 사실이 실린 신문기사를 읽은 류영모는 단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늦게나마 그들의 아팠던 마음을 헤아려 내 아픔으로 하고자 함이었다.
이 단식유감(斷食有感)을 적어 놓은 일기장에 '맛'이라는 제목으로 원고지 10여 매 분의 산문을 써놓았다. 류영모의 일기는 한시와 시조로 되어 있지 산문은 드물다. 맛의 산문을 한시로 나타낸 것이 단식유감이다. "이 세상에 평화의 이상(理想)이 실현되지 않는 까닭은 사람이 식욕 색욕의 맛으로만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음욕으로 얼리니 걸근거리는 몸 탈이라 痴後犯房貪食症
사람도 몸으로는 완전한 짐승이다. 모든 짐승들은 탐 진 치 삼독(三毒)으로 자신의 생존과 종족 보존에 힘쓰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한다. 얼나로 거듭나지 않는 이는 삶의 목적이 짐승과 다르지 않다.
먹고 싸우고 자식 낳는 일이 전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먹거리가 목구멍을 넘어가기 전과 아이를 태어나게 하기 전에는 식사(食事)에서 생리(生理)가 방사(房事)에서 윤리(倫理)가 거의 무시된다.
맛이란 벌레의 꿈틀거리는 꼴을 그려보고 마치려는 것이다. 끝없이 추구하는 욕망이 맛 ,맛, 맛이다. 그 맛은 이상해 난 죽겠다며 생전 첨 본 단맛을 더 보겠다고 찾으니 이것이 미친 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
이 세상 맛이 이 세상 복을 막는다."(다석어록) 색욕은 식욕을 일으키고 식욕은 색욕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과색하면 과식하게 되어 있다.
먼저 깨끗이 해 얼림 끊고 적게 먹어 맘 밝아야 齋先斷房節食明
재(齋)는 심재(心齋)이다. 마음이 깨끗함이다. 장자(莊子)는 심재를 이렇게 말하였다. "오직 얼은 빔(맘)에 모인다. 빔이란 마음이 깨끗한 것이다." (唯道集虛 虛者心齋也-『장자 인간세편』) 사람의 마음이 빈 맘이 되려면 제나가 죽어야 한다. 제나(自我)가 짐승이라 제나가 죽기 전에는 삼독(三毒)이 없어지지 않는다. 류영모는 "맘이 죽어야 참나인 진리(얼나)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맘이 살아서는 안된다.맘은 죽어야 한다. 생심(生心)에 미혹하고, 사심(死心)에 본성인 불성(佛性) 영성(靈性)이 나타난다"(다석어록)라고 하였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시면 나쁜 생각도 나쁜 행동도 할 수 없게 된다." (When God is enshrined in our hearts, we can not think evil thoughts or do evil deeds. M.K.간디, 날마다의 명상)
얼나를 깨달으면 색욕과 식욕이 저절로 절제되어 단방(斷房)도 절식(節食)도 할수 있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깊이 느끼고 깊이 생각하여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밝게 하면 우리 마음속에 깨닫게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우리의 얼생명을 키워 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음욕 탐욕 끊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하며 痴貪無斷滅人類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마음에 잔뜩 하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은 안 된다.마음이 빈 맘이 돼야 한다. 빈 맘은 거기 곧 아버지 계신 데에 간 것이다. 거기와 여기는 떨어진 게 아니다. 극락이란 맘이 빈 지
경이다. 맘이 빈 지경에서 손바닥을 한 번 치면 이 사바세계가 곧 극락세계로 변한다고 화엄경에 씌어 있다." 사람은 삼독(三毒)을 지닌 짐승인 제나를 버리고 삼귀(三貴)를 지닌 하느님 아들인 얼나(靈我)
로 솟나자는 것이다. 탐진치 삼독(三毒)을 끊는다는 것은 제나(自我)를 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면 진 선 미의 삼귀(三貴)를 지닌 하느님 아들로 솟난다. 제나는 멸망의 생명이요 얼나는 영생의 생명이다.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 할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오 17:20)고 하였다. 예수가 바라는 것
은 산을 옮기라는 것이 아니다. 자리잡고 있는 산을 옮길 필요는 없다. 그런데 산을 옮기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 생명 옮기기다. 제나(自我)에서 얼나(靈我)로 옮기는 일이다. 우리는 이 생명 옮기기를 하지
않으면 일생 동안 애써 산 일이 헛일이 된다. 생명의 중심축을 제나에서 얼나로 옮겨야 한다. 이것이 예수가 말한 멸망의 몸나에서 영생의 얼나로 옮기는 것이다. (요한 5:24)
그런데 지금은 몸생명을 위해서라도 삼독을 끊어야 한다. 이 땅위에 인구 과잉으로 자멸을 가져오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자연을 정복하자는 구경 목적이 지구 위에 인간으로 가득 채우자는 것이 되었다. 이것이 이른 바 인구 폭발이다. 인구폭발은 원자폭탄보다 무섭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급한
인구문제의 해결은 순결에 있다. 이 몸은 짐승인데 우리는 짐승의 욕심을 버리고 사람 노릇하자는 게 순결이다. 이는 2천5백 년 전에 석가가 말하였다. 인구증가의 문제는 중대한 문제다"(다석어록) 요즘에 와서 슈바이처가 부르짓던 생명외경을 말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이것은 환경 파괴에서 오는 인류의 자멸을 예감한 사람들의 예지다. 그런데 환경 파괴의 근본적인 원인은 인구 과잉에 있다. 그러므로
생명존중운동은 아기 안 낳거나 덜 낳기 운동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지구의 면적과 환경으로 가장 알맞은 인구수는 1억8천만 명이라고 한다. 지금은 세계 인구가 6O억(1999년)으로 이미 정원을 30배 초과하였다. 사람이 많아 사람의 값어치가 떨어지지 않을 수 없고 사람이 넘쳐 환경이 파괴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물질문명의 비뚤어진 발전이 환경오염을 불러와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가고 있다.
몸 깨끗, 맘 밝음을 이어가야 얼나로 구원되리 齋明有續救生靈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다섯 자(尺) 몸뚱이를 보면 한심하다. 이에서 박차고 나가야 한다. 우리의 머리가 위에 달린 게 위로 솟나자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진리 되시는 하느님을 향해 머리를 두
는 것이다. 하느님이 내 머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나의 참나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머리(元首)가 되려고 한다. 으뜸(진리)이 되어야 하는데 철이 없어서 이 세상에서 머리가 되겠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다가 머리가 무거워서 감당을 못 하여 굴러 떨어진다.
주역 (周易)에도 이 세상에서 머리(지배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다. 예수도 섬기는 이가 되어야지 섬김을 받으러 하지 말라고 하였다. 석가는 세상의 머리(임금)되는 것을 그만두었다."
재명(齋明)은 제나(自我)가 죽고 얼나(靈我)로 거듭난 사람의 맘을 말한다. 이것을 마하트마 간디는 "자아(제나)가 죽을 때 영혼(얼나)이 깬다"(When the ego dies, the soul awakes. - M.K간디, 날마다의 명
상)고 하였다. 이렇게 제나로 죽고 얼나로 솟난 하느님의 아들들이 구원 받은 사람들이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20. 먹거리 끊고서 얻은 느낑 斷食有感|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21. 뜻하였으나 못 이뤄 意欲未遂
(속알) 밝히려는데 밝히지 못해 새벽에 맘 살펴 欲明未明晨省心
(천하를) 안정케 하려 해도 시대마다 안정되지 못해 欲定未定每時局
평안코자 해도 평안치 못함이 지금의 세상 사람 欲平未平當世人
화평코자 해도 화평치 못해 하늘나라 오기 바라 欲和未和臨天國
(1957.1.14)
意慾(의욕):하고자 함. 遂 :이룰 수. 定: 고요할 정. 時局(시국) :시대의 상황
當世(당세) :지금의 세상. 臨 : 임할 임
(속알) 밝히려는데 밝히지 못해 새벽에 맘 살펴 欲明未明晨省心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었다. "이 세상에는 절대 진리라는 것은 없다. 절대진리는 하늘 위에 있다. 우리는 이 절대를 좇아 올라가는 것이다. 절대가 아닌 것은 생각하지 말고 땅위의 것은 훌훌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절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의 님인 하느님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 사람의 일이다. 절대진리를 위해서는 내버릴 것은 죄다 내버려야 한다." 이 세상에 절대진리가 없다는 것은 이 세상은 캄캄한 어둠의
세상이란 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라 한다. 이 상대세계에 갇혀서는 절대진리를 찾을 길이 없다. 그런데 오직 한 길이 있으니 맘속으로 들어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생각이 하늘나라로 들어가
는 좁은 문이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자기 맘속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맘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서 자기의 속알(德)이 밝아지고 자기의 정신이 깨면 아무리 캄캄한 밤중 같은 세상을 걸어 갈지라도 길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다석어록)
마음이 빌 때만 절대존재의 빛(긋)이 우리 맘속에 밝아진다. 마음이 비려면 제나(自我)가 죽어야 한다. 장자가 상아(喪我)니 좌망(坐忘)이니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상아(喪我)란 제나(自我)가 죽었다는 뜻이다. 좌망(坐忘)이란 제나(自我)를 잊어버렸다는 뜻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제나(自我)가 한 번 죽어야 맘이 텅 빈다. 한 번 죽은 맘이 빈탕(太空)의 맘이다. 빈 맘에 하느님 나라, 니르바나 나라를 그득 채우면 더 부족이 없다."(다석어록) 빈 맘에 들어오는 하늘나라, 니르바나 나라가 하느님인 절대의 빛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말하기를 "제나(自我 ego)의 어두움은 암흑 자체보다 더 꿰뚫어보기 힘들다. 제 속에 하느님의 빛(얼나)을 가진 이는 그것으로 영원한 생명이 된다"(The darkness of egoism is more impenetrable thandarkness itself.He who has the spark of Divine in him becomes immorter on that account M.K.간디, 『날마다의 명상』)라고하였다. 마하트마 간디가 말한 하느님의 빛이, 예수가 말한 맘속의 빛(마태오 6:23)이고 석가가 말한 맘속의 등불(寂光)이다.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으로는 장자 에크하르트 타고르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거듭난 체험
을 한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영원한 생명인 얼을 빛이라 한다. 얼 자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없으니까, 설명이 안 되니까 좀 근사한 표현을 쓴다는 것이 빛이라고 한 것이다. 얼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이 빛은 햇빛이 아니고 참 빛이다. 햇빛을 떨쳐 버려야 참 빛인 얼나를 깨닫는다."(다석어록) 그런데 류영모는 속알 밝히고자 하는데도 밝혀지지 않아 새벽에 맘을 살핀다고 하였다. 새벽에 명상기도를 한다는 말이다. 류영모는 얼나를 깨달은 이다. 겸손한 마음에서 그렇게 썼다. 새벽은 하루 가운데 정신 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세상이 가장 조용한 때다. "사람이 새벽에는 높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높은 생각을 갖기 어려워진다. 낮에는 낮은 형이하의 몸살림에 빠지기 때문이다.우리는 낮은 이땅을 떠나 영원한 절대로 올라야 한다. 맨 꼭대기 절대로 가는 거다. 참 자리로 가는 것은 된 그대로 가지고 가는 거다. 새로 무엇이 되는 게 아니다."(다석어록)
(천하를) 안정케 하려 해도 시대마다 안정되지 못해 欲定未定每時局
이 땅위에는 크고 작은 싸움으로 칼부림이나 총질이 그칠 날이 없다. 공자 맹자가 살던 시대는 특별히 싸움이 심하여 춘추전국시대라 이름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춘추전국시대가 아닌 때가 거의 없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시름없이 일하고, 구경하고 다니지만 땅위에 만들어 놓은 원자탄이 다 터지면 이 지구는 순식간에 용광로가 돼버릴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무슨 안정이 있고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있다
면 참으로 배꼽 잡고 웃을 일이다. 석가는 이 세상을 불난 집으로 비유하였다. 다 낡은 큰 집에 사면에서 한꺼번에 불이 났다. 집주인은 불이 사면에서 타오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너희들 빨리
나오너라"라고 소리쳤으나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장난만 치면서 나오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집주인은 아이들이 장난감을 좋아하는 것을 아는지라 "너희들이 갖고 싶어하던 아주 드문 장난감이 여기 있는데 너희들이 빨리 와서 갖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후회하리라"고 하였다. 아이들은 장난감이라는 말을 듣고는 불난 집에서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석가는 그 불이 삼독의 불(三毒火)이라고 하였다. (법화경_ 비유품)
천하(세계)를 안정시키자면 삼독의 불을 꺼야 하는데 그 누구도 끄지 못한다. 예수 석가도 자신의 불만 껐지 세상의 불은 끄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삼독의 불덩어리들이기 때문이다. 6대주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큰 빗자루로 5대양에 쓸어 넣기 전에는 세상에 타오를 삼독의 불을 껐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세상에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람들이 나타나 세계평화를 안정
시키겠다며 오히려 삼독의 불길을 더 돋우었다.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자들이 세계평화를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그게 무슨 미친놈의 소리인가.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상대세계에서 몹쓸 삼독(三毒)을 우리로 부터 뽑아내야 한다.삼독은 우리의 원수다.이 삼독이 없으면 이 세상은 없다. 어리석은 치정이 없으면 분명히 이 세상은 계속되지 못한다.
이 세상이 계속되는 것은 그 어리석은 치정이 발동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상을 버릴만한 곳이 없어서 걱정이 아니다."(다석어록)
그러므로 이 땅위에서 공산주의 유토피아 같은 이상사회를 만든다는 따위의 말은 듣지도 말아야 한다.내가 할일은 나의 삼독과 싸우면서 신격(神格)의 얼나를 깨달아 줄기차게 하느님을 찾아 올라가는
것이다.
평안코자 해도 평안치 못함이 지금의 세상 사람 欲平未平當世人
일찍이 노자가 이르기를 "내게 큰 걱정이 있는 까닭은 내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이 없는 데 이른다면 내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노자 13장)라고 하였다. 이 몸이란 고무풍선 같고 비누거품 같으니 걱정이 안 된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실존 철학자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나침반의 자침처럼 흔들리고 있다. 그 흔들림의 정도에 따라 불안하기도 하고,초조하기도 하고,우울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고.공포에 떨기도 한다.얼마나 흔들리는 마음으로 괴로왔으면 차라리 아무런 생각이 없는 돌이 되고, 바위가 되고 싶다고 하였겠는가.
류영모는 말하기를 "사람이 언제나 평안한 것을 구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란 것은 평안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만이 평안치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도 이렇게 불평이 있어서 나왔다. 불평하면 맞대거리를 하는 것 같이 소리가 난다. 평안케 해 달라는 소리다. 이것이 기도다. 우주도 역시 불평하여 평화를 구하느라
기도를 하고 있다.
우리들은 불안을 느끼기 때문에 절대 평안한 것을 구하려고 한다. 절대 평안한 것은 우리의 본바탕인 본성(얼나)이다.우리가 잊었던 본성(얼나)을 회복해야 한다.우리 아버지(하느님)와 같은 자리, 영원한 자리를 일생을 두고 광복(光復)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일 것이다.
얼마 동안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쳐서 자꾸 올라가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부흥이다. 본성(얼나)을 회복하자는 부흥이다"라고 하였다. 하느님과 하나인 얼나를 깨닫기 전에는 마음이 평안을 얻지 못한다.
불안의 근본은 죽음이기 때문이다.죽음을 이기고 죽음을 없애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 뿐이기 때문이다.
화평코자 해도 화평치 못해 하늘나라 오기 바라 欲和未和臨天國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중략)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1.6)라고 하였다. 우리의 마음이
불안한 것은 전체(하느님)를 잃은 개체가 되어서 그렇다. 그러므로 전체인 하느님께로 돌아가기 전에는 불안을 면할 수 없다. 하느님께로 가는데는 제나(自我)로는 안된다. 제나를 버리고 하느님이 주시는
얼나로 거듭나야 한다. 그 얼나는 예수의 말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
중용(中庸)에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이 일기전을 일러서 가온(얼)이라 한다. 일어나도 모두 가온(얼)의 절제 받음을 일러서 화(和)함이라 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계中節 謂之和 - 중용1장)라고 하였다.
중용의 표현이 완벽하지 못하지만 희로애락이미발(未發)인 '중' (中)이란 제나(自我)를 넘은 얼나(靈我)라고 보아야 한다. 희로애락의 제나가 중(中)인 얼나의 제약을 받는 것이 화합이라는 것이다. 이를 중화(中和)라 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속의 속인 얼나(中)로 감정을 웬만큼 제한해서 중절(中節)해야 한다. 아무 일 없으면 평화스럽다. 이 일을 이루면 천하달도(天下達道)라 하여 세상의 일에 무엇이든지 막히는 데가 없다. 중화(中和)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변(變)이 많다. 중화를 모르면 자기 자신의 건강부터 지탱할 수 없다."(다석어록)
화평을 바라나 화평하지 못한 것은 하늘나라(얼나)가 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늘나라가 임하지 않은 것은 제나(自我)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나를 죽이는 데는 파스칼의 말처럼 "그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줄기의 수증기, 한 방울의 물도 필요없다." 제나(自我)가 거짓 나인 줄 알면 제나는 스스로 죽는다.
가짜 형사는 가짜임이 드러나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얼나를 깨달으면 십자가 위에서 숨져가면서도 마음의 화평을 잃지 않는다. 밖으로 평화의 시대가 온다느니 이상의 나라가 온다느니 하는 것은 믿을 것
이 못 된다. 밖으로 무엇이 온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류영모가 이르기를 "애당초 무엇이 오리라고 생각함이 잘못이다. 무엇이 오리라고 생각하는 데서 주의(主義)가 나온다. 예수 재림의 지상천국이니, 미륵불의 불국정토니 하고 떠든다. 오긴 뭐가 오는가? 진화니 발전이니 하는데서 속는다. 내 속에서 생명의 말씀이 나와야 한다. 생명의 말씀밖에는 믿을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21. 뜻하였으나 못 이뤄 意欲未遂|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22. 얼나(靈我) 아트만(Atman)
맑고 깨끗하며 가없이 큰 빔이신 높은 얼님 淸淨絶大空尊靈
삼독 삼악의 (제나) 죽고파도 못 죽어 欲死毒惡猶不刑
진선미의 여의주를 찾고자 하니 求眞善美如意珠
물들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 금강의 말씀 (이루리) 不染不壞金剛經
(1957.2.15)
淸淨(청정):밝고 깨끗함.비물질의 성상(性狀) 刊 '죽일 형.
如意珠(여의주):영묘한 구슬(mani), 얼나의 상징물 染:물들일 염
壞:무너질 괴 毒惡(독악) '삼독(貪瞋痴)과 삼악(殺盜淫)
金剛 (금강 rajha) 불변 영원한 얼나의 별칭
석가가 읽은 경전은 베다경이다. 석가가 5명(五明)에 정통했다는 것은 5베다에 조예가 깊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석가는 베다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독자적인 구도의 길을 걸어 금강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으
니 석가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을 하였다. 그래서 석가도 공자의 말대로 인류의 스승이 될 자격을 얻었다.
예수와 석가의 사상은 가장 가깝다기보다는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를 말하였는데 석가는 니르바나(Nirvana)를 말하였다. 예수는 생각으로 잡은 하느님을 얼( )이
라 하여 하느님 아들이라 하였다. 석가는 얼을 다르마(Dharma, 法)라고 하여 법신(法身)이라 하였다. 예수는 아버지와 아들로 비유하였는데 석가는 니르바나가 산이라면 다르마(法)는 산에서 솟는 옹달샘이
라고 비유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석가가 읽은 베다경에도 니르바나에 해당하는 브라흐(Brahman)이 있고 다르마에 해당하는 아트만(Atman)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석가는 그 낱말을 버리고 새로
브라흐만 대신에 니르바나를, 아트만 대신에 다르마라 하였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다.
석가는 브라흐만이나 아트만에 대한 옛사람들의 생각이 모자란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파니사드에 보면 브라흐만을 만유(萬有)라 하는가 하면 아트만을 심장 속에 들어 있는 손가락 만한 것이라고 하였다. 절대성과 형이상이 유치한 단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의 사상을 버리고 새로운 낱말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석가에 앞서 베에단타 학파들이 그런대로 이미 불이일원설(不二一元說). 청정불이설(淸淨不二說), 불이불이설(不二不異說)등을 주장하었다. 류영모가 베다경에 관한 책을 읽고 이 한시를 썼다.
석가가 브라만교와 차별화를 한 것은 예수가 유대교와 차별화한 것과 같다. 예수가 이르기를 "낡은 옷에다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그러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푸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오 9 :I6 -17)고 하였다.
우파니샤드 경전에 전해 오는 아트만이나 예수의 프뉴마와 석가의 다르마는 같은 뜻으로 생각하면 된다. 류영모는 아트만에 대해서 말하기를 "만물(萬物)을 이룬 것이 하느님의 로고스( )라면 이것은
바로 참된 생각을 말한다. 로고스가 말씀이라면 생각하지 않고는 나올수가 없다.참된 생각을 예수는 얼(靈),노장은 道 석가는 법(法)이라고 하였다. '아트만'도 마찬가지다"라고 하였다. 헤르만 헤세는 이르기를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다. 이 신성을 인도인은 아트만이라 하고 증국인은 도(道)라 하며 기독교인은 얼(靈)이라고 한다. 이것은 진리의 빛으로 하느님 자체다."(헤르만 헤세 禪 -나의신앙)
맑고 깨끗하며 가없이 큰 빔이신 높은 얼님 淸淨絶大空尊靈
청정(淸淨)하다는 말은 물질(物質)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질이란 허공에 비기면 더러운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몸에서 나온 것이 참으로 더러운 것이다. 이 몸뚱이가 있는게 더러운 것이다. 그 다음에 더러운 것은 우리들의 집안이다. 판잣집이라도 가진 것은 안 가진 것보다 더 더럽다. 정신이 들자면 집을 버려야 한다. 물질이란 더러운 것이다. 물질을 차 버리고 초월해야 깨끗해진다. 하느님
을 찾는데 물질에 만족하면 안 된다."
물질이 아닌 허공은 청정하고 거룩하다. 류영모는 절대공(絶對空)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허공은 맨 처음 생명의 근원이요 일체의 근원이다. 처음도 없고 마침도 없는 하느님이다. 허공은 우리의 오관
(五官)으로 감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공은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다. 잣알 하나 깨어 보니 빈탕이라는 그따위 허공이 아니다.
단 하나의 존재인 온통 하나가 허공이다. 환상(幻像)의 물질을 색계(色界)라 한다. 유일 존재의 허공에 색계가 눈에 티끌과 같이 섞여 있다. 허공은 하느님의 맘으로 느껴진다. 허공을 석가나 장자가 얘기했는데 이것이 이단시(異端視)되었다."
존령(尊靈)이란 하느님이란 말이다. 무한 심연의 절대 허공이 영원한 생명인 성령으로 가득찼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포함한 만물이 있게 되었으니 지극히 높은 님인 것이다. 우리는 그 존령의 님을 그리
워하고 사랑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란 생령(生靈)은 이상하다. 두발로 거닐어 이상하고, 머리를 꼿꼿이 두어야 다닐 수 있으니 이상하고, 나를 생각하니 이상하고, 생각을 생각하니 이상하다. 제 여편네와
자식들 먹일 것만 생각하면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 나와 무한 영원한 존령(하느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상한 느낌이 들면서 내가 생령이라는 것을 깨닫게 마련이다. 생령을 가만히 깨닫고 보면 자기가 보잘 것없고 하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여러분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하느님 아버지와 같지 않아서 하늘에서 떨어져 여기 온 이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원대상일명(遠大上一命)을 생각하고,위로 하느님께로 올라 갈것을 일편단심해야 할 것이다."(다석어록)
삼독 삼악의 (제나) 죽고파도 못 죽어 欲死毒惡猶不刑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령의 나, 허공의 나를 모르기 때문에 탐진치 삼독의 나를 내세운다. 이 삼독의 나는 온 세상을 다 잡아먹어도 배부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삼악(三惡)은 살인. 음란, 도둑질인데
몸에서 그 짓이 나온다 하여 신업(身業)이라 한다. 신업의 근본은 의업(意業)인 삼독이다. 탐진치 이 세 가지가 독(毒)으로 뱃속 밑에서 꿈틀거려 삼악을 저지르게 된다. 이제 삼독의 나와 싸워야 한다. 이 삼독의 나를 이겨야지 남을 이기면 무엇 하나. 삼독의 제나를 이기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은 없다."(『다석어록』)
석가가 네팔의 돌산에서, 예수가 팔레스타인의 돌산에서 죽기로 고행 수도를 한 것은 삼독의 나를 죽이고 싶어서였다. 죽을 결의가 없고서는 그러한 극한의 고행을 하지 못한다. 삼독의 나로 사는 것이 아무런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참나인 하느님을 깨달은 다음에는, 짐승인 몸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데 요긴하게 쓸 심부름꾼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일할 수 있을 만큼만 돌보아 주기로 한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식색(食色)을 위주로 하는 몸생명은 거짓 생명으로 부정한다. 오로지 이 몸생명을 위해 일하다가 죽어 그만두게 된
다면 정말 서운한 일일 것이다. 이 몸뚱이는 멸망한다. 죽어야 할 것이라 죽는다." (다석어록)
진선미의 여의주를 찾고자 하니 求眞善美如意珠
진 선 미의 여의주란 참나(眞我)인 하느님 아버지를 상징한 것이다. 예수도 하느님을 구슬에 비유하였다. "하늘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는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마태오 13.45-46)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마테오 6:21))고 하였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마음의 중심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에게로 옮겨가는 것이다. 마음의 중심이 아직도 땅의 그 누구나 그 무엇에 있다면 그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시집간 색시가 마음이 친정에만 있다면 그 색시는 시집간 것이 못 된다.
사람의 마음은 진선미의 님을 그리며 좇아간다. 그런데 바른 진 ·선 ·미를 알지 못하고 유사(類似) 진 선 미에 빠지고 만다. 그것은 생명을 잘못 투자한 것이다. 생명을 잘못 투자하면 그 인생은 실패한 것이다.
류영모는 바른 진 · 선 · 미를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에는 진 · 선 · 미가 없다. 진 · 선 · 미는 영원해야 하는데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은 참 진 · 선 · 미가 아니다. 참된 진 · 선 · 미는 하늘나라에 있다.
그러나 이를 잊어버리지 말라고 이 세상에는 사이비(似而非)한 진 · 선 · 미를 둔 것이다. 하늘나라에는 이 세상에서처럼 진 · 선 · 미가 따로따로 있지 않을 것이다. 절대생명인 하느님은 진이면서, 선이면서 미다. 진 · 선 · 미가 하나다."
마하트마 간디도 같은 생각을 하였다. "참(truth,眞)은 찾지 않으면 않되는 영원한 생명이다. 미와 진은 진에 따라온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예수는 참(眞)을 찾고 드러냈다. 그러므로 예수야말로 최고의 예술
가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일지라도 그 성질이 착하지 않으면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주 못생긴 추남이지만 일생 동안 진리를 위해 힘썼기 때문에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M.K 간디 간디문집)
물들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 금강의 말씀 (이루리) 不染不壞金剛經
류영모는 이르기를 "이 세계는 단연코 참은 아니다. 참을 찾으려고 하였고 나타내려 하였다. 그러므로 글도 말도 한가지다. 말씀 가운데 사람들이 가까이 하고 외우려 한 것이 동서고금의 경전이다. 분명히
경전의 원 줄기는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현 세상에도 몇 사람은 받아 가지고 이어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정신줄이라고 한다. 성경이라는 경(經) 자는 줄기 경(莖) 자와 뜻이 같다"라
고 하였다. 경전 가운데는 몇천 년이고 몇만 년이고 없어지지 않는 말씀이 있다. 그것이 물들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 금강의 말씀이다.
예수는 선지자의 말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의 모자라는 생각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진리의 말씀이다. 진리의 말씀이 모여 경전이 된다.
인도에서는 강가(간지스)강에서 목욕하는 것이 중요한 종교의식이 되어 있다. 강가강의 더러워진 물에 목욕을 한다고 심신이 깨끗하게 되어 구원받는다는 것은 미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안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다. "강가(ganga)강은 사람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 맘속의 강에 몸을 씻지도 못하고 그 효력을 받지도 못한채남아있다."(The Ganga flows in man's heart, yet man in unable to
bath in it and remain unaffected - M.K간디 '날마다의 명상,)이 말은 옅은 생각을 깨우치는 금강의 말씀이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22. 얼나(靈我) 아트만(Atman)|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23. 거짓 님에 굴하지 말자 不拜偶像(一)
어둠의 힘이 일곱 마귀를 움직이는 끈이요 暗權操縱七魔線
옷 밥 집이 멋스러운 걸 복 받은 걸로 衣食宮惠業藝色
온 세상이 꼭두각시와 배우의 무리들인지라 擧世傀儡俳優輩
나눠진 쪽정이를 기분으로 인기치레에만 虛分氣分人氣粉
(1957:1.12)
偶像(우상):신(神)이 아닌 걸 신으로 모시는 것. 偶 허수아비 우
拜굽힐 배. 七魔(칠마) :일곱 마귀. 宮 집 궁 惠業(혜업) :복된 일.
藝色(예색) :예술과빛깔이 멋스러운 去世(거세) .온세상 愧
儡(괴뢰) 허수아비 꼭두각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인생의 목적이 있다. 형이하의 짐승인 몸으로는 자식을 낳고 길러 대를 잇는 것이고 형이상의 하느님 아들인 얼로는 하느님 아버지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형이하의 사명에만 관심을 가질 뿐 형이상의 목적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런 사람들은 미안한 소리지만 짐승으로만 사는 이들이다. 어려서는 어버이를 의지하다가 젊어서는 짝을 의지하고 늙어서는 자녀를 의지해 삶을 끝낸다. 이러한 가족주의 인생은 짐승살이에 지나지 않는다. 형이상의 목적에 눈뜬 사람은 가정에만 안주할 수 없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유교에서 위(上)를 받든다는 것은 부모나 조상을 받드는 것을 말한다. 위로 조상을 받들고 아래로 권속을 거느리는 것이 인간의 본연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태극에서 음양만을 말하고 그 윗자리인 무극(無極)을 잊은 탓이다. 유교가 활발히 발전을 못 본 것은 이와 같은 근원을 잊어버리고 천상(天上.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아서다. 예수 석가는 가정에 갇혀 살지 않았다. 오직 하느님 아버지
의 아들 노릇을 하려고 하였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관을 형이하에서 형이상으로 높여나가야 한다. 인생관을 높이기 전에는 그 사회는 볼장 다 본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느님을 찾는데도 아직 지혜가 성숙하지 못하여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으로 섬기는 어이없는 일을 해 왔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보다 하느님 아닌 것을 하느님으로 섬기는 것이 더 큰 문제다."(톨스토이, 종교와 도덕) 그러다가 예수 석가에 와서 하느님을 바로 찾는 반야바라밀다(pranja paramita,하느님을 아는 지혜)가 성숙하여 하느님 아닌 것을 하느님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에서 온전히 벗어났다. 이것이 '아눗다라삼막상보디'이다. 예수 석가가 이룬 이 공로는 아무리 찬양하고 감사하여도 모자랄 것이다.
예수나 석가는 사람의 머리로 상상해 그리는 관념적인 절대자(하느님,, 니르바나)를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각자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얼을 믿으라고 하였다. 예수 석가는 스스로 체득한 하느님을 믿은 이들이다.다른 사람에게도 각자가 체득한 하느님을 믿으라고 가르쳤다.체득한 하느님이 프뉴마요,다르마인 얼이다.
이 얼이 우리 마음속에서 말씀으로 샘 솟는다.예수는 이에 이르기를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
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요한 4:13-14)라고 하였다.
어둠의 힘이 일곱 마귀를 움직이는 끈이요 暗權操縱七魔線
일곱 마귀란 예수가 한 말이다. 어떤 사람의 맘속에 들어 있던 마귀(魔鬼)가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있을 만한 곳을 찾지 못하자, 다른 마귀 일곱을 더 데리고 먼저 있던 곳으로 찾아와 머물게 되니 그 사람
의 마음이 더 비참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마태오12:43-45) 이 말은 마음의 회개를 바르고 철저히 하지 않으면 오히려 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사악하게 된다는 말이다. 처음으로 예수나 석가의 가르침을 좇
겠다고 결심할 때는 그래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듯했으나, 석가나 예수의 가르침을 바르게 배우지 못하면 나중에는 바리사이인들처럼 위선자가 된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편협하고, 과
격하고, 음란해진다. 이러한 일을 도처에서 보게 된다.
불교에서는 눈 코 귀 혀 몸 뜻(眼耳鼻舌身意)을 여섯 뿌리(六根)라 하여 단속의 대상으로 친다. 거기에 손발을 더하면 칠마(七魔) 팔마(八魔)가 된다. 이 몸을 조종(操縱)하여 악한 카르마(業)를 저지르게 하는 것이 암권(暗權)이다. 제나(自我)가 지닌 수성(獸性)이 암권의 주체다. 수성인 삼독(三毒)이 지배하는 세계는 그야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생존의 싸움을 벌인다. 가장 믿음직한 것이 그래도 가족이다. 그러나 가족이라고 믿을 수만은 없는 것이 실상이다. 대학 교수와 미국 유학생이 돈 때문에 어버이를 죽이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옛날에도 네로가 어머니를 죽이고 당 태종이 아버지
를 죽였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죽였다. 이게 암권(暗權)의 조종인 것이다.
수성인 암권은 하느님의 얼을 받아서 없앨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더구나 하느님의 얼이 있는줄도 모른다. 그리하여 큰 암권(暗權)으로 작은 암권을 다스리겠다며 세운 것이 나라(국가)다. 이것을 영국의 홉즈는 위대한 괴물(리바이어던.Great Leviathan)이라 이름하였다. 이를 사람들의 평화를 지키는 죽는 하느님(Mortal God)이라고 미화하였다. 그러나 위대한 리바이어던(국가)이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 온 것만 보아도 암권의 본색을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원숭이들이 벌이는 권력투쟁을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가정이 삼독의 소산이듯이 나라도 삼독의 소산인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삼독을 바보신(神) 모리아(Moria)라고 하였다. 모리아는 버려야 할 우상이다.
그래서 예수는 말하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요한 18:36) 또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태오6:10)라고 하였다. 이 두 말을 아울러 생각하면 예수는 짐승인 제나의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인 얼나의 사람임이 분명하다.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얼(성령)을 받아 사는 얼 나라 사람이었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얼에는 나와 나라가 다르지 않다. 얼이란 유일 절대이기 때문이다. 땅위에서 이루는 나라는 좇아갈 필요가 없다. 세상의 나라를 좇아간 것이 오늘날 이러한 나라를 만들고 말았다. 본 생명의 자리인 얼나를 세워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는 서지 않는다. 자기의 참나를 찾은 다음에는 그 참나에서 떠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영원을 붙잡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6천만 년 전 자연환경의 변화로 지구를 지배하던 공룡이 갑자기 사라지듯 21세기에는 정신환경의 변화로 국가가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얼나를 깨달아 몸이 지닌 수성(獸性)을 없앤다면
가정이나 나라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온 인류가 얼나로 한 생명을 느끼면 너와 나가 따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울타리가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제나는 쉽게 꺽이지 않는다.
옷 밥 집이 멋스러운 걸 복 받은 걸로 衣食宮惠業藝色
옷 밥 집이 호화스러우면 성공한 삶이요 축복 받은 삶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짐승인 제나(自我)의 가치관에서 나온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었다. "이 세상에 무소유로 살다간 예수 석가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바라는 것은 식색(食色)의 풍부함뿐이다. 부귀(富貴)란 식색의 사회적인 표현이다. 이 세상에서 부귀란 병 아니면 죄다. 참으로 온전한 세상이라면 부자와 귀인이 있을 리가 없다."(다석어록)
예수는 이르기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오 19:23-24)
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부(富)는 힘과 빛 때문에 사람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정신력과 얼빛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정신력과 얼빛이 힘있고 빛나야 사람이다.정신력이 없고 얼빛이 어
두워진 뒤에 부귀를 가지고 대신하려 하면 그것은 인류 멸망의 징조다"라고 하였다.
온 세상이 꼭두각시와 배우의 무리들인지라 擧世傀儡俳優輩
꼭두각시는 조종하는 사람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배우는 연출자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니 실체도 주체도 있을 수 없다. "온 세상이 직접 간접으로 암권이 조종하는 꼭두각시와 배우의 무리들"이란 말은
세상 사람 모두가 거짓 나인 제나(自我)의 사람들이란 뜻이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이제 여기의 이 나라는 제나(自我)는 거짓된 것이다. 참나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이라는 것도 거짓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껏 찾아야 할 것은 오직 참나다"라고 하였다.
주체인 얼나를 깨닫지 못하면 너나 나나 가릴것 없이 모두가 수성의 꼭두각시요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회에 온갖 유행이 전염병처럼 잘 퍼지는 것은 주체성 없이 남의 흉내만 내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었다. "재주 부리는 인형을 괴뢰(愧儡)라고 하는데,소위 지도자들의 괴뢰 노릇을 낙제생들은 못 하고 이른바 똑똑하다는 총준(聰俊)들이 한다. 꼭 돈 한가지가 없어서 그 짓을 한다. 돈 받고 힘 있는 사람들의 괴뢰 노릇을 한다. 또 백성은 깨닫는 것이 아니다. 그저 좋다면 이리 가고 저리 가고 하는 것들이다. 남이 하는 짓은 빠지지 않고 죄다 한다. 그러나 뭐가 뭔지 모르고 한다. 단순히 허영으로 다수에 따라갈 뿐이다. 뜻을 찾지 않는다. 민주(民主)가 되려면 깨달은 사람의 수효가 많아야 한다."(다석어록)
나눠진 쪽정이를 기분으로 인기치레에만 虛分氣分人氣粉
우리는 어버이에게서 받은 몸뚱이만으로는 쭉정이(짐승)에 지나지 않는다. 쭉정이가 허분(虛分)이다. 개체란 쭉정이다. 개체라도 전체의식 진리의식을 가지면 속알이 차서 충실해진다. 공자(孔子)가 말하기
를 "하느님이 내게 속알을 낳으셨다"(天生德於予-논어 술이편)라고하였다. 공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얼을 받아 허분(虛分) 아닌 충분(充分)이 되었다는 말이다. 무정란처럼 죽은 것이 아니라 얼생명을 지녔다는 말이다.
류영모는 사람들이 마땅히 택선의지(擇善意志)로 살아야 하고 진리파지(眞理把持)로 살아야 하는데도 기분(氣分)을 쫓아 사는 것이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류영모가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기분이라는 것을 가지고 사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기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대기(大氣) 가운데 사니까 그 대기의 공기가 우리 몸에 와서 접촉하는 데에 있어서 어떤 때는 좋게 느끼고 어떤 때는 언짢게 느끼는 것 같다. 그리하여 때에 따라 달라 날이 궂으면 나쁜 기분이 더 많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속이 어두위서 그렇다. 속이 밝을 것 같으면 그런 일이 없다. 제대로 제가 살것 같으면 무슨 그렇게 날이 궂었다고 기분 나쁘고 날이 개었다고 기분이 좋고 그럴 일이 어디 있는가"라고 하였다.
사람이 바라야 할 것은 하느님이 기뻐하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의 이목을 끌려고만 한다. 그리하여 사람의 이목을 많이 끌게 되면 제법 성공한 인생인 듯 스스로 인기에 도취한다. 그것은 속는 일이요 속이
는 일이다. 지난날 십여 년 동안 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의 말이 "인기란 아무 것도 아니에요, 물거품 같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석가는 성주(城主)의 아들이라 귀한 몸이었다. 석가는 비록 임금의 자리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왕자의 신분이 그의 전도생활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다고 보여진다. 거기에 비하면 예수는 시골의 무명 청년이었다. 그런데 2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예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것은 예수가 그의 맘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말씀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상의 존엄(authority)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날 세상은 나를 몸뚱이로만 알아 몸의 나밖에 모른다. 그리하여 신체가 미끈한 자를 부러워하고 인기 있는 자를 부러워한다. 이게 다 악인의 낯을 보는 것이다. 우리도 이 몸에
붙잡히면 이 짐승인 몸에 잡아 먹힌다. 이 짐승을 따르지 말고 참나인 얼나를 좇아야 한다.서로의 속알(얼)을 내놓는 것 같이 좋은 일이 없다. 동지(同志), 지기(知己)란 서로 속알을 내놓는 것이다."(다석어록)
하느님의 뜻을 내 뜻으로 하여 사는 이라야 주체성이 있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뜻 밖에서 수성(獸性)의 말만 듣고 남의 말만 들으면 괴뢰요,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종교는 자유인데 자기가 어떻게 믿든 자기가 분명한 것을 믿으면 된다.남의 말 듣고 믿으면 그게 무엇인가. 한 마리의 개가 의심이 나서 짖는데 다른 개들이 따라 짖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다석어록)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23. 거짓 님에 굴하지 말자 不拜偶像(一)|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24. 거짓 님에 굽히지 말자 不拜偶像(二)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빈 염불이고 修齋治平空念佛
'널리 베풀어 중생 건지기'는 버린 과제인가 博施濟衆廢宿題
너와 내게 얼나 있으면 바람직한 나라 有道彼我理想國
스님의 탁발에도 말법이면 얼님이 하늘에 올라 僧託末法主昇天
(1957.1.I2)
修齊治平(수제치평) : 修身 齋家 治國 平天下의 줄임
참괴스럽도록 죄악으로 점철된 인류 역사에 그래도 자랑스런 일이 있다면 짓밟혀 오기만 하던 씨알(民)이 주권을 찾아 민주정치를 이룩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바쳐야 할 씨알의 충성을 옆에서 가로챈 임금이 사라지게 된 것은 정치 못지않게 종교쪽에 큰 뜻이 있다. 신이 아니면서 신처럼 군림하던 우상(偶像)이 부서진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역사를 보면 임금(王)이 있어서 세상 사람들
을 깔고 앉아 충성을 바라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다. 사람이 사람 위에 서 있는 것이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그 뒤로 민주정치가 발달되어 지금은 밝아진 세상이다. 사람 위에 사람이 없
어졌다. 임금이 없어진 세상에, 민주정치가 시행되는 이 땅에 우스운 사람이 아직도 있는 것은 무어라 말할 수 없다. 세상에서 높은 분은 하느님 한 분밖에 안 계신다. 이것을 모르고 아직도 우스운 짓을 하고
있는 민족이야말로 마지막에 달한 우스운 민족이다."(다석어록)
이제 임금이란 우상은 없어졌는데 아직도 정치(政治)를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아는 정치우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인생의 목적이 정치를 잘 하는 데 있는 것으로 안 이의 대표자는 공자(孔子)일 것
이다. 공자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는 사람은 오로지 벼슬을 하는 데 삶의 목적이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깨뜨려야 할 정치의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마하트마 간디는 정치를 하면서도 정치가 목적이 아니고 하느님을 만나는 것(목샤, Moksha)이 목적이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거의가 세상(나라)을 잘 다스려야 된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에 가는 일을 잘 해야지 세상이나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은 기어코 헛일밖에 되지 않는다. 사
람들은 하늘에 먼저 해야 할 것을 땅에 먼저 한다. 사는 목적을 하늘에 두지 않고 이 세상에 둔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가질 목적이 없다. 이 땅에서 참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 참이지 온전한 참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진리란 없다. 절대진리는 하늘 위에 있다. 우리는 이 절대진리를 좇아 올라가는 것이다. 절대가 아닌 것은 생각하지 말고 지상의 것은 훌훌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一) 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의 님을,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이 우리의 일이다. 절대진리인 하느님을 위해서는 내버릴것은 모두 내버려야 한다."(다석어록)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빈 염불이고 修齋治平空念佛
수제치평 (修齋治平)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 齋家治國平天下)를 줄인 것이다. 이 말은 『대학』(大學)에 나온다. 몸을 닦아, 집을 가지런히,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안케 하는 것이 큰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수신(修身) 앞에도 마음을 바르게 하다(正心), 뜻을 참되게 하다(誠意), 앎에 이르다(致知), 사물에 다닥치다(格物)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격물(格物)의 해석이 가지가지다. 격물(格物)은
장자의 재물(齋物)과 같이 물질을 통해서 물질 너머의 정신을 파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유교의 말인데 그것 가지고는 몇만 년이 지나도 안 된다. 사람은 한 자리에 혼자만 오래 앉아 있으려고 하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서양은 자꾸 변하였기에
발달하였다. 나는 치국평천하가 그렇게 호락호락 될 것 같지 않다.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이 제한이 있다. 형이하에도 형이상에도 그만큼 되는 거지, 뭐든지 다 되는 법은 없다. 그것은 욕심이다."(다석어록)
그래서'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공염불로 내려왔지 그대로 실현된 적이 없다.
널리 베풀어 중생 건지기'는 버린 과제인가 博施濟衆廢宿題
어느 날 자공(子貢)이 스승 공자(孔子)에게 말하였다. "널리 씨알들에게 베풀어 뭇 사람을 건질 수 있을 것 같으면 어질다고 말하겠습니까?" 공자가 가로되 "어찌 어질다 뿐이겠는가, 틀림없이 거룩할 것이
다. 요와 순도 오히려 그걸 걱정하였다"(如能博施於民 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乎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논어 옹야편)라고 하였다.
대통령이 국빈이 되어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 반드시 장애인을 수용하는 시설을 찾아본다. 그 장애인은 그 나라에서 가장 어려운 이들이다. 가장 어려운 이를 찾아보는 것이 온 국민을 찾아보는 것과 같다. 맹자도 이르기를 "늙고서 아내 없는 홀아비, 늙고서 지아비 없는 과부, 늙고서 자식 없는 홀앗이, 어리고서 어버이 없는 외로운 아이, 이 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백성으로 얘기할 데가 없는 이들이다. 문왕이 정치를 일으켜 어짐을 베풀 때 반드시 이 네 사람들을먼저 하였다"(맹자. 양해왕 하편)고 하였다.
또 예수는 이르기를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마태오25:40-45)라고 하였다.
박시제중(博施濟衆)이 넓게 베푼다 하여 잘사는 사람에게까지 더 준다는 뜻은 아니다. 어려운 사람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쪼들리는 이에게 두루 주는 것이지 잘사는 이에
게 이어 주는 것이 아니다"(周急不繼富 논어 옹야편)고 하였다. 그런데 정치하는 이들이 박시제중(博施濟衆)이라는 제일의 과업을 내버렸다. 그래서는 나라를 잘 다스린다고 할 수 없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바로 하려고 노력했지만 바로 되지 않는 게 인간의 역사다. 실패의 역사에서 무엇을 보려나. 이 원정미정(願正未正)의 역사에 그래도 바르게 해보겠다는 이것이 우리의 길이다.그러니 정치도 반듯한 사람이 하여야 모든 것이 반듯해지는 법이다. 마음이 반듯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영원(하느님)과 마음이 끊어지고 미혹하게 된다."(다석일지)
그러나 저마다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우치는 데는 일체의 차별이 없다. 빈부,귀천,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온세상이 다 눕지 않도록 얼 생명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그렇게 일으켜 세워야 할 사람이 누구냐 말이다. 참으로 모든 사람을 다 일으켜 세우는 박시제중할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것이 나다.그런데 나부터 서지 못하고 누워 버렸으니 입명(立命)을 못하였으니 못난 나가 되고 말았다.
나가 못나면 못 보게 마련이다."(다석어록)
너와 내게 얼나 있으면 바람직한 나라 有道彼我理想國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세상에 올바름이 있으면 나타나고 올바름이 없으면 숨는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논어 태백편)고 하였다.
류영모의 모든 말의 초점은 얼이다. 그것은 예수 석가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이 시의 유도(有道)도 올바름이 있다는 것보다는 얼나가 있다로 하였다. 유도(有道)는 영성존지(靈性存持)함이다. 류영모는 이렇
게 말하였다. "몸나가 없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하느님 앞에는 얼나가 있다. 얼나가 있는, 하느님 계시는 곳이 거기(彼岸)다. 거기가 하늘나라다. 거기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거기에 가는 것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요 참나를 깨달음이다.하늘나라가 깨달음이다.자각과 천국이 둘이 아니다. 얼나와 하느님은 하나다."(다석어록) 류영모가 말하는 이상국(理想國)인 얼의 나라는 진리의 나라, 하늘나라를 말한다.
류영모는 이 땅위에는 유토피아(理想國)가 없다고 하였다. 공산주의가 이 땅 위에 공산 유토피아를 세우겠다며 온갖 죄악을 저지르는 지옥나라를 만든 것을 언짢게 생각하였다. "사람들이 툭하면 유토피아
(理想國)를 말하는데 이상세계가 오면 어떻단 말인가. 유토피아(utopia)도 상대세계일 것이고, 나고 죽는 세계이겠지. 우주 자체가 한숨인데 유토피아엔들 울음소리가 없겠는가. 한숨은 이상세계에서도 나온다. 그놈의 이상세계가 어떠한지, 그 세상 가지고 사람을 심판할만한 것이 되겠는가. 공산 유토피아 때문에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죽여도 된단 말인가."(『다석어록』)
류영모는 이 땅위에서의 유토피아를 벌(蜂)에서 보았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도 사람의 이상세계는 벌(蜂)의 사회를 닮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왕벌은 한 번 수정해서 그것을 평생 자기 속에 간직하여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무정란에서 슷벌이 나오고 유정란에서 암벌이 나온다. 숫벌은 수가 적고 암벌은 수가 많다. 암벌이일하는 일벌이다. 암벌은 결혼하는 법이 없다. 암벌은 평생 동안 정성을 다해서 꿀을 모아들이는 일에만 열중한다. 부국(富國)은 암벌의 꿈이다. 수벌은 영웅처럼 나라를 지킨다. 수벌도 결혼하지 않는다. 다만 수벌 한 마리만이 여왕벌에게 한 번 수정시킨다. 여왕벌은 한 번 정(精)을 받으면 평생 그 정(精)을 가지고 일하는 일벌을 생산해 간다.
국민은 꿀을 아껴 먹고 여왕벌에게는 좋은 꿀을 많이 먹인다. 그러면 여왕벌이 된다. 왕벌은 한 마리뿐이다. 벌 세계는 마치 정신세계와 같다. 벌 세계처럼 순수(惟情)하고 한결같은(唯一) 사회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가장 높은 이상은 모두가 얼생명으로 하나 되는 것이다. 우리가 비록 몸으로는 나와 너로 나뉘어졌지만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인 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석도(夕濤) 유형재는 서법예술사에서 뽑은 우리나라 10대 서예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일찍이 이 사람을 찾아와서 "글씨는 진리(道)를 담을 그릇인데 진리를 모르고 글씨만 쓰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글씨는 일창(一滄 兪致雄) 선생님에게 배웠는데 선생님은 아쉽게도 도(道)는 모르시는 분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말이 하도 고맙게 들려 그의 서실에서 다석사상 강좌를 열었다.(1990년~1995년) 다석사상 강좌는 이것이 역사적으로 처음인 셈이다 .그가 불혹(不惑)의 나이에 들어서는 연초서(連草書)를 쓰기에 이르렀다. 그가 일필휘지하면 붓끝이 종이 위를 떨어지지 않고 여러 글자가 한 글자인 듯 이어 쓰여진다. 마치 흑룡(黑龍)이 승천하는 것 같다. 여러 글자가 한 글자로 이어지는 연초서야말로 여러 사람이 한 얼(道)로 꿰뚫린 모습이다.
스님의 탁발에도 말법이면 얼님이 하늘에 올라 僧託末法主昇天
탁발이란 스님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동냥을 하는 것이다. 진리(法)도 상대세계에 나타난 이상 생로병사에 걸리게 된다. 진리도 나와서 알려지고 쇠퇴한다. 그것을 정법(正法), 상법(上法), 말법(末法)이
라 한다. 예수, 석가처럼 참나를 깨달은 이가 있을때가 정법시대다.
가르치기는 하되 깨달은 이가 없을 때를 말법(末法)시대라 한다. 말법시대에 깨달은 사람이 없는 것은 임자(主)인 얼(하느님 아들)이 하늘나라에 갔기 때문이다. 얼은 절대존재라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가고 오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얼이 올라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잡지(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마하트마 간디는 진리를 꼭 붙잡자는 것이다. 진리를 생각(意識)으로 꼭 잡는 것이 사탸그라하(眞理把持)이
다. 진리파지를 한 이가있으면 정법시대다. 하느님과 연락이 끊어진 시대가 말법시대이고 하느님과 연락이 이어지면 정법시대다.
정법시대에 대해서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생명의 말씀 줄을 이어오기를 온전히 했다면 지금쯤은 이상국가가 이루어졌을 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잘 이어오지를 못하여 토막난 시대가 되고 말았다. 부처가 나타난다, 예수가 다시 온다 하지만 그런분이 나타났다고 해서 사람들이 잘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한 줄기 이어 내려오는 영원한 생명의 줄을 올바르게 이어온 시대가 좋은 시대
이고 그 시대를 올바르게 지도한 이가 부처(Buddha)가 되고 그리스도가 되었던 것이다. 태초부터 이어오는 생명의 한 줄이 이어 닿는 여기가 '예'다. 예는 아들이 아버지가 되어 가는 자리다. 또 영원에서
상대세계로 떨어져 몸부림치는 곳이 예이다."(다석어록)
이돌라(Idola. 우상)에 대해서 글을 쓴 사람은 베이컨(l561~1626)이다. 과학적인 지식에 눈을 뜨면서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한 것이 우상론이다. 사람은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라는 4개 우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베이컨은 자아(自我)도 우상이요, 국가도 우상이요, 우주도 우상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므로 베이컨은 구경각에 이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신론자
란 말을 들었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24. 거짓 님에 굽히지 말자 不拜偶像(二)|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25. 거짓 님에 굽히지 말자 不拜偶像(三)
제나로는 못 얻되 얼나로 빔에 이르러 有爲不得無爲空
나아가 씨알 평안케 하면 길이 조용해 民將安之長安定
요순도 그걸 걱정하다 오히려 아쉬웠고 堯舜病諸猶有憾
공자 맹자도 부르짓다가 말 없고자 해 孔孟說破欲無言
(1957.1.12)
爲 다스릴 위,할위 得:잘할득 將 나아갈장 病:아파할병
諸 .그것 저 憾:아쉬워할 감. 設破 :자세히 밝혀 힘주어 말하다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물질세계는 분명히 참이 아닌 거짓이다. 왜냐하면 없었던 것이 생겼다가 다시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눈에 보이는 현상계는 우상(偶像)임에 틀림없다. 이 현상세
계에 붙잡히는 것은 우상에 절을 하는 것이다.이 현상세계는 환상의 신기루임을 아는 것이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없는(無) 걸로 시작해서 없는 걸로 그친다. 있다는 것도 마침내는 없는 거다. 우리가 이를 느껴야 하는데 느끼지 못하니까 좀 느껴보자는 것이 우리의 노력이다. 이 세상은 그만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땅에서 그만이라면 소극적인 것이다. 위로 가서 그만이라는 '그이만'이다. 참으로 하느님 그이뿐이다." 그러므로 불배우상의 사상으로 살겠다는 사람은 이 세상에 미련 갖지 말아야 하고 몸뚱이에 사로 잡혀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할 일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3년을 더 살든 3달을 더 살든, 3일을 더 살든, 3시간을 더 살든 그 사는 동안에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찾아야 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제각기 살겠다는 근소한 것들은 수효가 많다. 마치 구더기 같은 존재들이다. 다만 구더기와 좀 다른 것은 자꾸 원대(遠大)를 찾고 위(하느님)로 올라가겠다는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위로 올라가겠다는 정신이 없으면 우리는 구더기와 같다.위로 올라가겠다는 한 말씀을 받들고, 머리 위에 존중(尊重)한 님을 이고,무겁고 괴로운 삶을 이겨 나가야 한다.이 명령이 우리의 목숨이다.이 얼
생명을 가지고 하느님을 찾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역사를 보면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좇아가다가 도중에 그만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이어 끝까지 좇아가야 한다."(다석어록)
이 세상에는 나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는가. 류영모는 좋이 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왔으면 좋이 살아야지 나만 여기서 좋이 살면 안 된다. 한 어머니 배에 쌍둥이가 있으면 쌍둥이 하나 마저도 좋이 좋이 이 세상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는 수십억의 쌍둥이(인류)가 있지 않는가. 이 수십억의 쌍둥이가 좋이 좋이 다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 우리
의 소원이 아니겠는가. 좋이 살겠다는 이것은 하느님의 큰 뜻이다."
제나로는 못 얻되 얼나로 빔에 이르러 有爲不得無爲空
짐승인 삼독의 제나로 사람을 다스리겠다는 것은 원숭이들처럼 대접을 받으며 자기 새끼를 많이 두자는 것이라고 드바르는 "침펜지의 정치"에서 밝히고 있다. 지난날의 임금들이 우리에게 고맙기는커녕 역
겹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무위(無爲)는 하느님 아들인 얼나로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예수 석가가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보여 주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서로 예수의 좌우에 서려
고 하자, 예수가 그들을 불러서 말하였다.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태오20 :25-28) 예수가 가르친 것이 무위 (無爲)의 삶이다.
노자가 말하기를 "세상은 하느님의 그물이다. 제 맘대로 안된다"(天下神器 不可爲也- 노자29장)고 하였다. 노자도 하느님의 뜻대로 해야지 사람의 뜻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류영모가 이르기를 "영웅주의 심리로 역사에 저지른 아무개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밤낮 이 모양 이 꼴밖에 안 된다. 사람은 자기가 살았을 때에 그 사업이 완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자기 생전(生前)에 했다고 해야 좋아한다. 그러자니 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밤낮 다스린다는 정치(政治)는 불치(不治)이다. 욕속(欲速)이면 부달(不達)이다. 빨리 잘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다. 천천히 찾아가면서 가는 사람이 바른것을 찾는다. 급하게 서둘러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니까 결국에는 피까지 흘리게 된다. 그러나 끝까지 낙심하지 많고 서두르지 않으면서 꾸준히 그 길로 나가는 것이 바른 신앙인 것이다"(다석어록)라고 하였다.
나아가 씨알 평안케 하면 길이 조용해 民將安之長安定
자로가 스승인 공자에게 참 사람(君子)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하느님을 받드는 것으로써 나를 닦는다. (나아가) 나를 닦아서 남을 평안케 한다.(나아가) 나를 닦아서 씨알을 평안케 한다. 그것을 요순도 오히려 걱정하였다"(脩己以敬 脩己以安人 脩己以安百姓 堯舜其猶病諸-논어 헌문편)고 하였다. 류영모는 공자(孔子)의 이 말에서 따온 것이다. 이은 시구인 요순병저유유감(堯舜病諸猶有憾) 으로 더욱 분명하다. 공자는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이것도 정치적인 얘기임에 틀림없다. 요즘 말로 하면 치안과 복지를 잘하여 백성들이 평안히 살아갈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인 평안을 주지 못한다. 예수가 이르기를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2)라고 하였다.
여기의 나는 얼나인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영원한 생명을 깨달으면 참으로 아무런 걱정이 없다. 모든 걱정은 노자의 말대로 몸뚱이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몸이 죽어도 좋다면 아무런 걱정이 없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죽음은 없다.그런데 죽음이 있는줄 알고 무서워 한다.죽음을 무서워하는 육체적 생각을 내 던져야 한다"고 하였다.이쯤 되어야 불안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몸나로 사는 동안은 온 인류를 내 쌍둥이 형제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기본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씨알을 위함이 하느님 위함이
다. 이 소자 중에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 백성을 모른다 하면서 하느님만 섬긴다 함도, 하느님은 모르면서 백성만 위한다 함도 다 거짓이다."(다석어록)
요순도 그걸 걱정하다 오히려 아쉬웠고 堯舜病諸猶有憾
공자와 맹자는 참으로 출중한 재상감이었는데 어느 임금도 공자 맹자를 재상의 자리에 앉히지 못하였다. 공자 맹자를 참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류영모는 공·맹에 대해 말하기를 "중
국의 공 맹은 사람들의 살림을 바로잡아 보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시대에는 이에 열띤 활동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공자 맹자를 다 몰랐다. 누구를 존경하고 좇는 것이 다 제 욕심 채우려 드니까 모르게 되는 거다. 예수 석가도 바른말을 하였는데 사람들이 못 알아들었다"라고 하였다 .
공자 맹자가 정치지도자로서의 본보기로 삼은 이가 요순이다. 공자와 맹자가 다 같이 흠모하고 찬양하였다. 공자 ·맹자의 말에 의하면 요순이 이상국가를 세우기라도 한 듯이 말한다. 그런데 류영모는 그
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옛날에 이상의 시대가 있었다는 사상도 미래에 이상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사상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추측한 범위 내에서는 옛날에 좋은 때도 없었고 차차 내려오면서 언짢아졌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다. 앞으로 천국이 온다고 해도 거기서는 정신적으로 얼마나 키가 커지겠는가. 얼마나 좋은 것을 보겠는가. 무엇이 이상적으로 될 것인가. 사람이 몸뚱이를 가진 이상 그대로 바로 되리라
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이 상대성 속에서 원만한 이상적인 무엇이 일어 난다는 것은 이 사람은 믿어지지 않는다."
공자 맹자도 부르짓다가 말 없고자 해 孔孟說破欲無言
공자 맹자는 제후를 찾아다니며 정치학 강의를 한 셈이다. 그것을 유세(遊說)라고 한다. 그러나 공자 ·맹자의 정치학 강의가 너무 어려웠는지 한 제후도 그들을 등용하지 않았다. 공자가 14년 동안 이른바
주유천하를 하였으나 뜻하던 바가 물거품이 되자 뒤늦게 체념하고서 "나 말 없고자 한다"(予欲無言- 「논어」 양화편)고 하였다.
공도자가 맹자에게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생님은 말하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맹자가 대답하기를 "내 어찌 말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내가 할 수 없어서이니라"(予豈好辯哉 予不得已也-맹자 등문공 하편)라고 하였다. 맹자를 읽어보면 맹자는 말 잘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눌변에 속하였는데 맹자는 달변이었다. 그러나 맹자의 달변도 공자의 눌변과
다름없이 제후들의 소귀, 말귀에는 소용이 없었다. 맹자는 자신이 득의(得意)하지 못함은 하느님의 뜻이라며 체념하였다. 이르기를 "저 하느님이 세상을 고르게 다스리려고 하지 않아서이지, 세상을 고르게
다스리고자 한다면 오늘 이 세대에 있어서 나를 두고 또 그 누구이겠는가"(맹자 공손추 하편)라고 하였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25. 거짓 님에 굽히지 말자 不拜偶像(三)|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26. 거짓 님에 굽히지 말자 不拜偶像(四)
아침 저녁 찍어 나온 (신문) 읽어도 새 것 못 듣고 朝夕刊讀無新聞
정치 경제를 배우고 연구하나 신통치 못해 政經學究不神通
배움을 못 이루면 맹세코 돌아오지 않겠다고 學若不成誓不歸
이루면 임금인가 부끄럼조차 모르네 成則君王破廉恥
(1957.1.12)
刊: 판박을 간 誓 :맹세할 서 廉恥 : 조촐하여 부끄럼을 아는 廉:조촐할 렴. 깨끗할 렴
사람들은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류영모는 이것을 깨뜨려버려야 할 우상이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사람들이 돈을 모으면 자유가 있는 줄 아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영업이나 경영이 자기 몸뚱이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서로의 평등을 좀먹는다. 경영을 하게 되면 이익을 추구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평생 동안 모으려고만 하게 될 것이니 자유 평등이 있을 리 없다. 돈에 매여서
사는 몸이 무슨 자유냐. 매인 생활은 우상 생활이다. 그러므로 매여서는 안 된다. 매이는 데 매여지기를 바라고 매여지면 돈을 모아서 더 큰 데 매여지기를 바란다. 요즘 말하는 정상배(政商輩)의 생리다. 나도 한번 모아보자.그래서 떵떵거리고 잘살아보자. 재벌도 되고 큰 자리에도 앉아보자는 것이다. 이따위 우상숭배는 사라져야 한다. 사람은 자유로워야 한다. 매이는 데가 없어야 한다. 저녁 끼니가 없어도 천명
(天命)이면 산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다 도둑질을 해도 나는 도둑질을 않겠다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다.
자성(自誠)이면 하늘이 감동한다. 우리는 미혹몽환광(迷惑夢幻狂 )의 상태에 빠지면 안 된다. 저만 잘먹고 잘살겠다는 사람들, 권세 잡아 떵떵거리고 싶어하는 사람들, 이들의 이기적 행동은 죄악이다.
진리 아닌 데서 나온 생각이다. 크게 조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사람의 마지막엔 누구나 멸망인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성공이란 있을 수 없다. 성공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면 그것은
거짓 성공인 우상이다. "불가능이란 내 사전에 없다"고 외치던 나폴레옹의 무덤에 가서 물어보지 않아도 분명한 일이다. 나의 뜻을 이루어 성취하는 이는 한 분이 계실 뿐이다.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이시다. 사람이 하느님의 성취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예수, 석가가 가르쳐주었다. 하느님이 주시는 얼나로 솟나는 일이다.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이다.
사람이 성공하는 길은 오직 이 길뿐이다.
아침 저녁 찍어 나온 (신문) 읽어도 새 것 못 듣고 朝夕刊讀無新聞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아침에 진리(얼)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 논어 이인편)고 하였다. 아침에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고 저녁에 들으면 아침에 죽어도 좋은 들음이야말로 새들음
(新聞)이라 할 것이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이 땅위에는 새 것이 없는데도 이 땅위에서 새 것을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시간 공간을 초월한 절대존재(하느님)만이 영원히 새롭다"고 하였다. 류영모가
조석간 신문에서 새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신문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말이다. 신문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수성이 저지른 탐 진 치의 업(業) 얘기다. 그것이 새 소리가 될 리가 없다. 마하트마 간디도 이러한 말을 하였다.
"오늘날 신문을 읽기란 한가지 고역이다. 신문은 바른 소식을 주지 못한다.그런 신문을 읽지 않는다고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It is an ordeal now-a-days to read the newspapers.They do not give correct news Nothing would be lost by not reading them - M K.간디-날마다의 명상)
이규행(李揆行) 사장의 기획에 의해 문화일보에 다석사상 칼럼을 325회 연재한(1994년~1995년) 적이 있다. 그 신문을 마하트마 간디가 읽었다면 참 삶에 유익한 신문다운 신문을 보게 되었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그때 많은 독자들은 놀라운 새 소리를 읽고 깜짝깜짝 놀란다고 하였다. 그것은 신문(新聞)이 있는 신문이었다는 소리다. 그때 이 사람은 내 소리를 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류영모를 통해 온 하느님
의 소리를 전하려고 하였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나를 통한 성령의 운동이 말씀이다. 성령은 내 마음속에 바람과 같이 불어온다. 내 생각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은 것이 하느님 말씀이다"라고 하였다.
일본의 학원에서 이지메(놀림)가 극성을 부리더니 이 나라에도 학원에서의 따돌림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러면 그 사실을 보도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치유 방법을 일러주는 것이 신문이 할 일이다. 그런데 신문은 한마디도 옳은 소리를 들려주지 못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만이 고칠 수 있다. 따돌림은 학생이 지닌 수성의 장난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하는 노릇을 짐승의 버릇이라고 한다. 사람이 어릴 때 노는 일은 모두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를 분간하지 못한다. 이것을 분간하면 어리다고 하지 않는다. 짐승의 못된 버릇을 끊게 하는 데는 매를
때려서 버리게 하려면 안된다.하느님의 말씀을 읽게 하고 알게 해주면 스스로 끊게 된다."(다석어록)
정치 경제를 배우고 연구하나 신통치 못해 政經學究不神通
마하트마 간디는 말하기를 "정치 경제는 종교로부터 떨어지면 다만 묻어버릴 수밖에 없는 송장일 뿐이다"(M.K간디 :스와데시_)라고 하였다. 여기서 종교라는 말은 하느님으로 바꾸어 생각하면 된다. 하느님을 떠난 정치 경제는 멸망의 길로 달려갈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나 마르크스가 하느님을 떠나서 정치 ·경제를 해야 한다는『정치 -군주론』 『경제 -자본론』학을 세웠다.그리하여 이 세상 사람들을 더 못살게 만들었다. 류영모는 인생의 본질을 외면한 교육은 "도둑놈의 교육"이라고 하였다. 정치 경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을 떠난 정치 경제는 도둑놈의 정치 경제일 뿐이다. 마키아벨리에 의한 제국주의 정치나 마르크스에 의한 공산주의 경제가 도둑놈들의 정치경제가 아니었던가.
류영모는 학문을 하는 마음가짐을 이렇게 말하였다. "언제나 마음속에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 신비를 궁신지화하는것이 학문이다. 우리의 삶은 궁신지화(窮神知化)다.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를 더듬은 결과가 지식이다. 학문은 생활의 편리화가 아니라 알 수 없는 아버지 하느님을 궁신지화하는 것이다. 학문이 신앙이다. 지금 연구하는 것은 앞으로 백년 뒤만 되어도 더욱 밝아질 것이다. 우주의 비밀이 더 밝아
지고, 하느님의 존재가 더 밝아지고, 아버지의 영광이 더 밝아질 것이다. 이런 뜻에서 모든 학문이 다 신학이다. 학문에는 언제나 알지 못하는 세계, 신비한 세계가 남아 있게 마련이다. 어떻게 하느님에
대해 더 알 수 있을까가 나의 문제다. 인류의 문제다. 하느님의 신비를 찾는 일은 그것이 학문을 낳는 데 있다. 학문을 낳지 못하는 신앙은 미신이다." 하느님을 떠난 학문은 우상일 뿐이다.
배움을 못 이루면 맹세코 돌아오지 않겠다고 學若不成誓不歸
학문이 출세의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진리를 알고자 학문하는 사람은 없고 모두가 출세하기 위해 학문을 한다. 시골 젊은이가 서울로 가면서 내가 대학 졸업장을 손에 들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
고 맹세한다. 한국의 젊은이가 외국으로 떠나면서 박사 학위증을 손에 넣지 않으면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했다고 맹세한다. 입신 출세를 위해 굳은 결의를 보이는 자식을 믿음직하고 대견하게 본다. 그런데
류영모는 그게 아니라고 하였다. 부귀 영화를 위해 학문을 하는 것은 학문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이마에 땀흘리며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교가 사람을 괴롭히는 우상이 된지 오
래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서 공부하려는 이들이 있다. 진리를 알겠다는 호학(好學)정신이라면 훌륭하지만 대학 다녔다는 소리를 하고 싶어서라면 대학 우상숭배자에 지나지 않는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마에 땀흘리고 살아야 한다. 권력과 금력으로 호강하겠다는 것은 제가 땀흘릴 것을 남에게 대신 흘리게 해서 호강하자는 것이니 그 죄악은 여간한 것이 아니다. 대학에 들어
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시골에서 부모가 대학교에 가라고 권하여도 "무슨 말씀입니까.형편이 이런데 땅을 팔아서야 갈 수 있습니까?" 하면서 땅이나 파며 농사짓고 부모님 모시고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의 참된 주인이 될 사람들이다. 그 많은 대학이 정말 대학이라면 이렇게 죄다가 들어가서 공부하고 나올 수가 없다. 대학이 소소학도 되지 못하고, 돈만 내면 졸업장을 가질 수 있으니 그런 것이
다." (다석어록)
류영모는 인류역사에 참으로 위대한 공헌을 한 사람들 가운데는 대학을 나온 사람들보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하였다. 옛날에는 학교교육이 발달하지 못했지만 그 나름대로의 고등교육
기관이 있었는데도 예수나 공자는 전혀 제도교육을 받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가 지극히 존경하는 간디 타고르 톨스토이 헤르만 헤세 등도 대학졸업을 하지 않았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요새 신문을 보면 학비가 없어서 자살하는 사람이 있는데 대단히 고상한 것 같으나 실제로 배움의 맛 때문에 그랬는지 의심스럽다.오늘의 맛보다는 내일의 맛이 더 좋을 것으로 여기
고 대학교까지 나와 더 좋은 맛을 보려고 하는데 그만 그 길이 막히니까 목숨을 끊는 사람도 생겨남직하다.모르긴 해도 오늘날 교육한다는 사람 중에 공부를 잘해야 이 다음에 잘 먹고 잘 살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옛날에도 좋은 음식, 좋은 집, 높은 벼슬같은 것이 권학의 조건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을 맛보고 사는 걸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인생은 맛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생관을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는 볼일 다 보게 될 것이다.물욕주의가 일반적인 인생관이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루면 임금인가 부끄럼조차 모르네 成則君王破廉恥
짐승들은 수놈끼리 서로 싸워서 이기면 그 무리의 지배자가 된다. 그러나 지면 죽거나 쫓겨나거나 복종해야 한다. 사람들도 털 없는 원숭이라 이러한 짓을 몇백만 년 해왔다. 그런데 아직도 이런 치욕스런
역사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인류의 역사를 돌에 새기고 쇠에 녹여 부어 수천 년, 수만 년을 남겨 왔어도 결국 싸움하고 물어뜯은 기록들이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인류의 역사는 죄악의 역사지 그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지나간 역사는 모두 죄악뿐이오 후회할 것뿐이지 누가 감히 자기의 과거를 자랑할 수 있으랴. 어거스틴만 참회록을 쓰고 루소만 참회록을 쓸 것이 아니다. 누구
나 자기의 과거를 쓰면 다 후회요, 참회인 것이다. 지나간다는 '과'(過) 자가 본래 '허물 과'자이다.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듯 벗어버릴 것이지 영원히 보존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나라(국가)도 폭력의 산물인 그 전통을 이어온 것이다. 그래서 예수 석가는 땅의 나라를 멀리하였다. 맹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한다"(君子庖 廚也- 맹자 양혜왕 상편)고 하였지만 군자는 권력을 멀리한다. 한 자리 얻을까 하여 정치인의 둘레를 맴돌지 않는다는 말이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종교학자 신학자도 학자라면 자꾸 배운 것을 익혀야 하는데 버릇없이 감투를 좋아한다. 바람 감투를 얻어 쓰는 맛에 이 세상에 나온 보람을 느끼는 모양이다. 또 감투를 쓴 사람에게
옳은 제자도 없겠지만 은사라고 좇아 다닌다. 이러니 저러니 말 많고 유혹 많은 세상에 학자는 배운 것을 익혀야 하는 것이 그 본분이 아니겠는가.과거를 더듬고 영원(하느님)을 찾는 것을 익히는 이 맛, 이
재미는 즐거운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라(국가)라면 절대적인 것으로 아는데 그래도 톨스토이와 마하트마 간디는 그렇지 않았다. 이 말은 그들의 정신의 높이를 보여주는 말이다. "다만 정부 자체를 보존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횡포한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폭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비교적 총명하고 정의로운 사회 조직을 건설하는데 크게 공헌함에 틀림없다. "(톨스토이. 애국심과 정부) "필요하다면 국가는 세계 인류를 위해 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국가주의에 찬동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나의 국가주의 사상은 조국이 국가 조직으로 인해 자유를 얻게 되는데 있다. 그러나 인류가 존속하는데 필요하다면 모든 국
가가 망해도 좋다."( M.K.간디. 간디어록) 국가가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잘하는 길밖에 없다. 정치라는 우상을 온전히 깨뜨릴 때 민주주의가 바로 될 것이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26. 거짓 님에 굽히지 말자 不拜偶像(四)|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27. 거짓님에 굽히지 말자 不拜偶像(五)
아침에 시킨 걸 저녁에 고치는 게 법으로 다스리는 방편 朝令暮改法治方
대낮에 도깨비 나오는 정치의 내막 晝出魍魎政事情
잔재주를 끊고 이로움 버려야 효성 자애 돌아오고 絶巧棄利復孝慈
밑동을 안고 참을 품어야 하느님께 잘 뚫린다 抱朴含眞元亨利
(1957.1.12)
朝令暮改(조령모개) :아침에 명령하고 저녁에 고침. 魍魎(망량):사람 잘 속이는 도깨비.
魍:산도깨비 망. 魎:산도깨비 량 巧 :거짓 교 棄 버릴 기. 復 :돌아을 복 抱 :안을 포 朴: 밑동 박 利 좋을 리
아침에 시킨 걸 저녁에 고치는 게 법으로 다스리는 방편 (朝令暮改法治方)
공자(孔子)는 안회가 일찍 죽자 "아, 하느님이 나를 죽이는구나. 하느님이 나를 죽이는구나"(噫天喪予天喪予 -논어 선친편)라고 하면서 탄식하였다. 공자가 맹자를 만났다면 "이런, 하느님이 나를 살렸도다. 나를 살렸도다"라고 하면서 기뻐하였을 것이다. 맹자는 공자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있고서부터 이제까지 공자 같은 분이 없었다"(自有生民以來 未有孔子也- 맹자 공손추편)라고 하였다. 맹자는 공자를 정신적인 아버지로 섬겼다. 진리의 사상은 1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다 .장자는 진리를 터득한 성자(聖者) 사이에는 1만년의 세월도 아침저녁과 같다고 하였다. 맹자는 결코 자만한 사람이 아닌데도 이렇게 말하였다. "성인이 다시 나와도 반드시 내 말을 좇을 것이다."(聖人復起 必從吾言矣- 맹자 공손추편) 이 말은 헛되이 큰소리치는 것이 아니다. 맹자는 공자가 체험한 얼생명을 자신도 체험하였다. 그러니 뒤에 오는 성인도 맹자가 체험한 얼생명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류영모도 말하기를 "예수 석가에게 나타났던 영원한 생명이 나에게도 나타났으니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이 존재하는 것만은 틀림없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참 사람들은 개체는 다르지만 병원한 생명인 얼나로 꿰뚫려 있다. 류영모는 이것을 한 얼줄이라고 말하였다. "한 얼의 줄이 있다. 성경의 경자도 줄 경(經)을 쓴다. 인도에도 '스트라'라는 말이 있는데
경(經)이란 뜻으로 줄을 말한다. 이 얼(靈)의 줄, 참(誠)의 줄. 영생의 줄 말씀의 줄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다석어록) 아마 공자가 말한 하나로 꿰뚫림(一以貫之)도 이것을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얼줄의
대원칙을 내버리고 사람들이 세운 원칙이 세상 나라의 법이다. 이른바 법치주의라는 것이다. 원칙이라는 것은 한결같아야 하는데 사람의 이해(利害)에 따라 조령모개(朝令暮改)가 되고 말았다. 교육부장관이
바뀔 때마다 입시 제도가 바뀌었다. 따라서 수험생들이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이것은 인생 근본에 입각한 올바른 교육관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총선거가 다가오면 반드시 선거법을 고친다. 그러나 아
직도 부정선거가 없어졌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옛날보다는 선거가 바르게 치러질 수 있게 된 것은 선거법을 잘 고쳐서라기보다는 그만큼 민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맹자는 나라 다스리는 유형을 세 가지로 말하였다. 성지(聖之), 신지(身之), 가지(假之)가 그것이다. (맹자 진심 상편) 이것을 류영모는 설명하기를 "요순이 진리에서 순리로 다스리는 것을 성지하는 도치(道治)라 한다. 탕무가 사회적인 인의(仁義)로 정성을 다해 몸소 실천해 다스리는 것을 신지(身之)의 덕치(德治)라
한다. 관 환(管桓)이 억지 수단을 써서 힘으로 다스리는 것을 가지하는 법치라 한다.이들은 모두 어진 신하를 얻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바짝 정신을 차려 무슨 일이든지 빈틈없이 정치를 해왔다. 그런데 요새는 왜 그렇게 거짓말이 많고,꾸민 말이 많고, 선전이 많은가"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도치, 덕치는 바랄 수 없지만 법치라도 바로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잘못은 사람에게 있는데 잘못이 법에 있는 양 법만 만들고 고치니 법이 너무 많아 법 전문가라도 다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입법만 하면 나라가 잘 되는 줄 아는 법 우상숭배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른 채 육법전서를 성경처럼 받드는 법 우상숭배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대낮에 도깨비 나오는 정치의 내막 晝出魍魎政事情
류영모가 이 글을 쓰던 1957년은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던 자유당 정권 때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기가 아니면 나라가 안 된다고 생각하여 종신 대통령을 꾀하였다. 그것을 반대하는 야당과, 학생과 국민
을 억압하기 위해 온갖 일이 저질러졌다. 그야말로 대낮에 낮도깨비가 횡행하던 암흑의 시기였다. 류영모의 제자 함석헌은 월간지 「사상계」를 통해 자유당 정권에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용기로 비판하기 시
작했다. 스승 류영모의 입에서도 이런 말이 나왔다. "대통령을 죽는 날까지 하겠다면 어쩌자는 것인가. 그런 것으로 시원해 질 수는 없다. 하느님과 얼이 통해야 시원하다. 내가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는 것을
보면 내 생각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 같다. 나오기는 나에게서 나오는데 오기는 하늘에서 온다. 나오는 것은 생각이고 오는 것은 생명이다."
40년이 지난 오늘에는 많이 나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여야의 대변인 성명을 들으면 낮도깨비에 홀린 듯 얼떨떨하다. 한 가지 사실을 두고 정반대 되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상대세계이기는 하지만 너무 지나쳐 철면피하다는 느낌이 든다. 정치란 언제까지나 도깨비놀음으로 끝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크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도 정치의 연장이다"라고 했으니 기막힐 노릇이다. 아, 못난 삼독의 짐승들이여 삼독의 수성에서 놓여날 날이 그 언제인가? 그 날이 어서 오기를 빌고 또 빌어 보자.
류영모는 정치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정치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비뚤어진 것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몇천 년을 두고 바로 잡겠다는 것이 오늘날까지 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실제로 바로잡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바로잡겠다고 한 것은 모두 헛소리였다. 정치의 이상은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7 ~48)가 아니 겠는가. " (다석어록)
잔재주를 끊고 이로움 버려야 효성 자애 돌아오고 絶巧棄復孝慈
이 말은 노자에서 끌어다가 쓴 것이다. 노자의 "절인기의 민복효자 절교기리 도적무유"(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無有- 노자 19장)에서 '절인기의(絶仁棄義)'를 '절교기리'(絶巧棄利)로 바꾸어 썼다. 노나라의 계강자(季康子)가 공자(孔子)에게 정치를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다스림이란 것은 바름이다"(政者正也- 「논어」 안연편)라고 하였다. 잔재주를 끊고 이로움 좇기를 버리는 것이 바로 바름이다. 바름이란 사람이 지닌 짐승의 성질을 버리는 것이다. 예수 석가처럼 탐진치를 멀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주시는 얼나를 깨닫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하느님의 성령이란 우리를 바르게 살게 하는 힘이다. 하느님의 성령인 얼나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나라 지도자 중에는 몇 사람이나 얼나로 거
듭났는지 모르겠다. 얼나로 거듭난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 얼나로 거듭나서 하느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몸의 욕망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엄청난 욕심만 가졌기 때문에 이 나라가 아직도
이렇다"라고 하였다.
공자와 맹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바르면 백성들도 바르게 살게 된다고 하였다. 공자는 말하기를 "참으로 그 몸을 바르게 한다면 다스림에 있어서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 몸을 바르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사람들을 어떻게 바르게 하겠는가"(荀正其身矣 於從政乎何有 不能正其身 如正人何-논어 자로편)라고 하였다. 또 맹자는 "큰 사람(지도자)이 있으니 제 몸을 바르게 하고서 사람들을 바르게 하는 사
람이다"(有大人者 正已而物正者也-맹자 진심 상편)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비자나 마키아벨리는 잔재주를 부리고 실리를 챙겨 정권을 강화하라고 한다. 사자 같은 폭력과 여우 같은 교활함으로 권모술수를 부리라는 것이다. 한비자를 좋아한 진시황이 어찌 되었으며, 마키아벨리를 좋아한 히틀러가 어찌 되었는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모두가 비참하게 끝났다. 지도자들이 바르면 백성들도 감화되어 자녀들은 효성스럽게 되고 어버이들은 자애롭게 된다. 맹자 가로되
"저 참 사람이 지나가는 곳이면 감화가 되고, 머무는 곳이면 신통하여 위아래가 하늘 땅과 더불어 함께 어울린다"(맹자 진심 상편)고 하였다.
밑동을 안고 참을 품어야 하느님께 잘 뚫린다 抱朴含眞元亨利
예수가 말하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0~11))라고 하였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 포박(抱朴)이다. 내가 하느님 아버지를 안으면 아버지는 크신지라 내가 하느님 아버지 속에 안긴다.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는 것이 함진(含眞)이다. 참을 품는 것이다. 포박함진이 바로 마하트마 간디가 말한 사탸그라하, 곧 진리파지이다. 하느님께 안기고 하느님을 품어 진리파지한 이는 외로움을 모른다. 예수처럼 외롭게 살다간 이가 없지만 예수는 전혀 외로움을 몰랐다. 예수는 진리파지한 사람이라 외로울 까닭이 없다. 하느님을 품어야 하고 하느님께 안겨야 할것을 백개의 조직에 들고 천사람의 여인을 안아도 만족할 수 없다.
원형리(元亨利)는 하느님과 얼로 잘 통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류영모는 얼로 숨쉰다고 하였다. 사람은 얼숨을 쉬지 못하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인 乾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통해서 쉬지 않고 원기를 받아 마시는 것이다. 줄곧 원기를 받아 원기왕성한 정신이 건전한 정신이다. 하느님의 원기를 받아서 사
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포박은 『노자』 19장에 나오는 견소포박(見素抱朴)에서 따온 것이다. 빔(空)을 보고 하느님(얼)을 품는다는 뜻이다. 박(朴.樸)은 밑둥으로 하느님을 뜻한다. 『노자』28장에 복귀어무극(復歸於無極). 복귀어박(歸歸於樸)이 나온다. 다시 하느님에 돌아간다는 뜻이다. 박(朴,·樸)과 무극(無極)은 모두 하느님 (天道)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주역 건괘에 나온다. 소학(小學)에 붙인 주희의 제사(題辭)에 원형이정천도지상(元亨利貞 天道之常)이 있어 더욱 세상에 알려진 말이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27. 거짓님에 굽히지 말자 不拜偶像(五)|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28. 하느님 아버지만이 계심니다 父在
아버지 당신만이 아주 크신 얼이옵고 父爾絶大中
닮지 못해 작고 작은 아들이옵니다 不肖微小子
있어 있으셔 오직 하나로 계시옵고 存存唯一在
힘쓰고 힘써 이어 갈 많은 아들들이옵니다 孜孜代多仔
(1957.1.8)
爾 너 이, 뿐 이 不肖(불초)닮지 않은 微 작을 미. 孜孜(자자) :부지런히 힘쓰는.
孜: 부지런할 자. 仔 : 이길 자 여기서는 인자 存 있을 존 代: 갈아들 대
류영모는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 이르기를 "우리는 전체에서 나온 부분이다. 부분은 전체를 밝혀야 한다.부분은 전체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부분은 전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전체를 아버지라면 부분이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부분의 생명은 전체에 있다. 부분은 전체에서 떨어지면 멸망이다. 그러므로 부분은 전체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온통(전체)을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절대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다석어록)
전체를 생각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인 하느님을 없다고 하거나 모른다고 하기가 예사다. 부분의 생명체로 전체를 없다고 하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모른다고 하면 멍청한 사람이다. 전체를 모르면서 아는 체한다면 그 잘못은 더없이 크다. 예수 · 석가는 다른 이가 아니다. 전체인 하느님을 안 이다. 석가는 이르기를 "아난다야, 나의 정신적인 힘은 커서 못할 일이 없다. 또 나의 정신적인 눈은 보지 못할 곳이 없
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오직 니르바나(하느님)만을 가장 잘 알고 또 기뻐하고 있다"(대반열반경)라고 하였다. 또한 예수는 이르기를 "내가 나 자신을 높인다면 그 영광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영광을 주시는 분은 너희가 자기 하느님이라고 하는 나의 아버지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알고 있다. 내가 만일 그분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요한 8:54~55)라고 하였다. 예수와 석가는 이렇게 전체인 하느님 아버지와 유대를 확립한 성자들이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인격은 하느님 아버지와 교통할 수 있는 아들의 자격을 갖추겠다는 거기에 있다. 혈육을 가진 짐승인 우리가 개나 돼지와 다른 것은 하느님과 교통하는 얼을
가졌다는 것밖에는 없다"고 하였다.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러서 거룩한 천륜(天倫)이 회복되고 확립되었다. 이것이 극기복례이다. 이것은 예수의 지대한 공로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진리의 아버지를 찾은 것은 인류에게 역사적인 큰 경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예수가 처음인 것은 아니다. 예수가 읽었을 것으로 믿어지는 에레미야서에도 나온다. "너희가 나를 아버지라 부르며 행여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에레미야 3;19) 예수에게 직접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지만 중국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사장인 황제를 천자라 불렀다. 천자란 글자 그대로 하느님의 아들이란 뜻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노자는 하느님을 어머니로 나타냈는데 장자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이다. "여느 사람들도 특별히 하느님을 아버지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몸소 사랑한다. 그런데 하물며 뛰어난 이들이랴."(彼特以天爲父 而身猶愛之 況其卓乎 장자 대종사편)
아버지 당신만이 아주 크신 얼이옵고 父爾絶大中
예수의 하느님 아버지 관은 생각할수록 감동스럽다. 예수가 말하기를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선생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너희는 선생 소리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형제들이다.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다"(마태오23:9)라고 하였다. 이는 하느님 아들인 얼나(靈我)를 깨닫지 않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하느님이야말로 사부일체이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스승으로 배우지 않고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믿는다고 할 수 없다.
하느님만이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영원한 존재로 생멸하는 모든 상대적 존재의 근거이며 귀착이다. 그래서 절대중이라 하였다. 예수가 이르기를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한 10:29)라고 하였다. 중(中)이란 선악, 유무(有無), 생사를 초월한 절대를 말한다. 中은 절대라 아무 것도 없으면서 성령으로 가득찼다. 그래서 중용에서도 가운데란 우주의 큰 밑동이다."(中也者天下之大本也 중용 1장)라고 하였다. 유영모는 이르기를 "절대 유일을 알고 거기에 붙잡히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다.거기에 삶의 참 맛이 있다"라고 하였다.
닮지 못해 작고 작은 아들이옵니다 不肖微小子
창세기에는 "하느님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창세기 1:27)고 하였지만 그것은 사람의 바람일 뿐이다. 사람이 하느님 모습을 닮았다고 할 구석은 전혀 없다. 하느님은 얼로 자유한데 사람은 몸
에 갇혀 꼼짝 못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몬에 갇혔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참 못난 것이다.물질에 갇혀 있음은 참 못난 짓이다.이 틀(몸) 쓴 것을 벗어버리기 전에는 못난 거다."(다석어록)
번뇌하는 사람을 가엾게 생각하였는지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몸생명은 살았으되 죽은 것이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내 맘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인 하느님 아들을 믿지 않으면 이미 멸망한 것이다. 죽을 몸을 나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위로부터 난 얼생명인 하느님 아들을 알지 못하면 그게 이미 심판 받고 정죄 받고 멸망한 것이다. 얼로 거듭날 생각을 안 하고, 그것을 모르니까 이미 죽은 거다. 몸의 숨은 붙어 있지만 벌써 멸망한 거다"(다석어록)라고 하였다.
얼나로 거듭나도 아버지의 얼은 무한한데 우리의 얼은 한 긋(點)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요한 l4:28)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얼이라 예수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하였다. 예수는 이르기를 "하늘과 땅의 임자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없는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고맙습니다" (마태오
11.25)라고 하였다. 여기에 어린아이들(小子)이란 예수 자신을 포함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킨 말이다. 이러한 소자 정신은 예수가 말한 무익한 종에서 잘 드러나 있다. 예수는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가 17:10)라고 하였다.
있어 있으셔 오직 하나로 계시옵고 存存唯一在
전체인 하나(一)는 있어서 있는 것이지 누가 있게 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없게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자유하고 자존한다. 하나(一)는 없이 있는 절대존재라 하나 속에 생기는 여러 유(有)의 개체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하나로 시작해서 마침내는 하나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대종교가, 대사상가가 믿는다는 것이나 말한다는 것은 단지 하나를 구하고, 믿고, 말한다. 성인이고, 부처고, 그리스도고 도(道)를 얻어 안다는 것은 다 이 하나다. 사람이란 이처럼 하나를 구해 마지 않도록 생긴 존재다. 그래서 나는 참나인하나의 증인이다."(다석어록)
류영모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참나에 대해서 자세히 알 것 같으면 하나의 증인이다. 그 하나가 나에게 계셔 나에게 사람의 사명을 주신 이다. 그 사명을 받아서 '하나'의 아들이 된다. 하나의 아들이 된 것을 느끼므로 하나의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 내 맘에서 자꾸만 하나의 뜻이 일어난다.
힘쓰고 힘씨 이어 갈 많은 아들들 이옵니다 孜孜代多仔
사람도 몸으로는 탐 진 치로 사는 짐승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사람을 낸 하느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될수록 짐승 노릇을 그만두고 하느님이 주시는 얼생명으로 하느님 아들이 되라는 것이다. 하느님 아들은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을 깨우처준 이가 예수 · 석가이고 노자 · 장자이며 공자 · 맹자다. 20세기에 와서 틀스토이 · 마하트마 간디 · 류영모가 이를 다시 확인하여 주었다. 짐승인 제나가 거짓 나인 줄 알고 짐승 노릇을 싫어하면 하느님 아들인 얼나로 거듭난다. 얼나는 하느님의 얼이라 영원 불멸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허공으로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다. 백간짜리 집이라도 고루고루 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주 허공 그 너머의 하느님 아버지의 성령도 내 것으로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늘 스스로 반성하고 좋은 일에 전력을 다 하면 마음이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악해질 리가 없다. 악한 놈이 길지 못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늘날 입 달린
사람들은 대부분 너무 얌전해도 못쓴다 하고, 정직한 사람은 못 사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거의 세기말적이라고 하지만 그 가운데도 하느님의 아들들이 살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겉으로 나타
나지 않지만 악에 무릎을 꿇지 않고 버티고 있다. 그들이 없다면 세상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악한 세상에 무슨 하느님 아들들의 시대가 오겠느냐고 하지만 하느님 아들들의 시대는 반드시 올 것이다. 이
것을 믿지 않으면 미끄러지기 쉽다."(다석어록)
하느님 아들로 살고자 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마하트마 간디는 암살을 당했다. 미인박명이라더니 진인박복인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식색의 생활이 풍부 한 것이 참으로 행복한 것은 아니다.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이 참된 행복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르기를 "행복의 열쇠는 일체 만물을 주신 진리(하느님)를 받드는데 놓여있다"The key to happiness lies in the worship of truth, which is the giver of all things -M.K.간디. 날마다의 명상)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사랑하는 이에게는 하느님 당신의 실체를 많이 드러내 보여준다. 예수가 하느님을 잘 알고 간디가 하느님을 잘 안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다. 그들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는가. 그들이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으므로 몸나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잠시 지나갈 뿐이다.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태그
취소 확인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28. 하느님 아버지만이 계심니다 父在|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29. 그대는 못 보았는가? 해 아래 새 일이란 없다는 것을
君不見日下無新事
새 하늘과 새 땅을 찾아가자 (尋 新天新地行)
다르고 새롭고 특별한 님을 찾아 멀리 가는 길 求異新特遠征路
뛰어나게 훌륭한 님을 지레 단정하는 근시 눈 速斷殊勝近視眼
하나이며 큰 (무극), 많고 큰 (태극), 그 가운데 계심 一大多大在其中
태극에서 무극인 저 언덕(하늘나라)에 다다라야 太極無極到彼岸
(1957 .3.25)
尋: 찾을 심. 特:우뚝할 특. 특별할 특. 遠征(원정) :멀리 가는, 정벌하러 가는. 征 :갈 정
殊勝(수승) .뛰어나고 훌룹한. 殊 :다를 수 勝 : 나을 승 斷:결단할 단. 到 : 이를 도.
彼岸(피안) :저쪽 언덕 . 하늘나라.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왕 노릇 한 어른 치고 나만큼 지혜를 깨친 사람이 없다. 나만큼 인생을 깨쳐 지혜를 얻은 사람이 없다"(전도서 1:16)고 자신한 솔로몬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귀영화를 누린 다
음에야 세상 만사 헛되더라는 소리를 하였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 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줄임) 지금 있는 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이요, 지금 생긴 일은 언젠가 있었던 일이라. 하늘 아래 새 것이 있을 리 없다. 보아라. 여기 새로운 것이 있구나 하더라도 믿지 말라. 그런 일은 우리가 나기 오래 전에 이미 있었던 일이다. 지나간 나날이 기억에서 사라지듯 오는 세월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것을."(전도서 1:1-3, 1:9-11)
류영모는 '해(하늘)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을 따서 시의 제목으로 한 것이다. 솔로몬이 상대세계에서 새 것을 찾았더니 새 것이 없더라는 말이다. 상대세계의 모든 것은 새 것인가 싶으면 헌 것이 되어버린
다. 스스로 가장 지혜로운 왕이라면서 가장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다.
새로운 것을 찾으려면 절대인 하느님을 찾아야 한다. 솔로몬은 이 땅의 이성(異性)인 여인에게서 새 것을 찾은 것 같다. 남자에게 새 것은 이성(異性)인 여자다. 그래서 신랑 · 신부라 한다. 솔로몬은 새 것을
찾아 많은 신부를 맞이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어느 미련한 임금처럼 밤마다 새 여자를 맞이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소리로 솔로몬의 아내가 7백 명이요 첩이 3백 명이었다는 것이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더 해 보고 싶어 한다. 이것은 불가능에서 가능을 찾으려는 것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요리를 먹어보면 자랄 때 먹던 음식보다 더 맛있는 것이 어디 있는가. 딴 계집이 무엇이 달라서 제 아내를 두고 나쁜 그 짓을 하는가. 우리는 이와 같이 생겼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기 그릇, 옹기 가게를 보면 그 안에 들어가서 한번 맘대로 휘두르고 싶다는 것이다. 들어가서 휘들러 보면 그것이 무엇이 좋다는 것인가. 이러한 생각은 사견(邪見)이다"라고 하였다.
다르고 새롭고 특별한 님을 찾아 멀리 가는 길 求異新特遠征路
사람이 새 것을 좋아하는데 대해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새 것을 좋아한다. 새 것이란 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특별히 다른 것을 추구한다. 어릴 때는 새 것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좀 크면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다 그게 그거지 별 게 없다. 역사도 되풀이하는 것 같다. 왜 사람들이 없는 새 것을 자꾸 찾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서 고금의 정신생활을 한 사람들이 자기는 날마다
새로워졌다고들 말하고 있다. 참으로 새 것을 찾는 자는 퍽 드물다.
최신 유행에는 남에게 안 떨어지려고 열심히 찾는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찾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의지대로 움직이는 인간이 하는 일에 뜻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 땅 위에 새 것이 없는데 새 것을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다. 시간 공간을 초월한 절대존재(하느님)만이 영원히 새롭다. 그러므로 사람이 새롭게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는 눈이 뚫리고, 코가 뚫리고, 귀가 뚫리고, 입이 뚫리고, 마음이 뚫려야 한다. 얼에 뚫려야 참으로 속알이 엉큼엉큼 성큼성큼 자라게 된다."
우리가 성별이라면 남성(男性)과 여성의 남녀의 구별로만 생각한다. 그것은 작은 성별에 지나지 않는다. 큰 성별(性別)에는 나서 죽는 상대성과 첨도 끝도 있는 절대성(絶對性)이 있다. 상대성에게는 절대성만이 이성(異性)이라 할 것이다. 절대성의 님을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라 하고 석가는 니르바나라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밑뿌리 되는 영원한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에 있다. 그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님이야말로 우리가 찾는 다르고, 새롭고 우뚝한(異新特) 님이시다. 그 님은 이 상대존재로 계시지 않고 절대존재로 계신다. 절대존재를 우리는 하늘나라라한다. 이 세상(상대세계)과 다르다 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여기에 붙들려 매였으므로 영원한 그곳에 가야한다. 천원정(天遠征),이것이 바로 우리의 실상이다. 하느님께로 원정하여 가는 것이다. 영원한 하느님께로 간다. 예수 말하기를 하느님의 나라는 들이치는 이가 그리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하늘나라는 넓어 침략해도 좋다고 열어놓고 있다. 우리는 앞장서서 천국으로 쳐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인생 길은 영원한 하늘나라까지 가는 원정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목적지는 하늘나라에 있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다석어록)
뛰어나게 훌륭한 님을 지레 단정하는 근시 눈 速斷殊勝近視眼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늘 찾는다. 기량이 큰 사람은 영원 절대(하느님)에 가서야 진 선 미가 있다고 한다. 기량이 작은 사람은 작은 이 땅의 것으로 만족해 버린다. 그리하여 기량이 커감에 따라 자꾸 높은 것으로 바뀐다. 그 기량이 아주 크면 사랑의 대상을 영원 절대 (하느님)에 둔다." (다석어록)
맹자는 이르기를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를 기르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맹자 진심 상편)라고 하였다. 사람의 자식도 너무 어리면 제 아버지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 마음속의 하느님 씨가 자라지 못하면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 앞에 하느님이라면서 머리를 숙이게 된다. 이것은 한마디로 맘의 얼눈(靈眼)을 제대로 뜨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으로 속단하고 오판한 것이다. 얼눈을 뜬 장자(莊子)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 우뚝한 (절대인) 하느님을 아버지로 생각하여 몸 바쳐 사랑한다."(彼特以天爲父 而身猶愛之-장자 대종사편)
이 지구가 생긴지 46억 년이 걸려서 지금의 우리가 나오게 되었다. 우연히 생겨 멋대로 살다가 죽으라는 것이 아니다. 할 일이 있어서 우리가 나온 것이다. 그 할 일이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는 달라도 인류
전체로는 하느님이 참나임을 인식하고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엉뚱한 것을 붙잡고 하느님이라고 받들어서야 되겠는가. 허공의 몸 속에 수많은 별을 간직하시고, 처음도 끝도 없이 영원 무궁한 얼생명을
지니신 이가 하느님이시다. 이를 전체신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사람인 인태신(人態神)이나 조형된 물신(物神)을 버려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다. 사람을 하느님이라 부르지 말자. 그러나 사람은 하느님의 빛의 일부분을 지닐 수 있다."(MK.간디. 날마다의 명상)
하나이며 큰 (무극), 많고 큰 (태극), 그 가운데 계심 一大多大在其中
하나이면서 큰 것은 허공이다. 그저 허공이 아니라 중심은 있으되 가장자리가 없는 공(球)같은 무한의 허공이다. 이 일대(一大)의 허공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 허공에 유한우주가 담겨 있기 때문
이다. 이 허공을 무한우주라고 말할 수 있다. 천체(별)로 이루어진 유한우주가 팽창하자면 무한우주가 없어서는 팽창할 수가 없다. 이 무한우주인 허공만을 노자는 무극이라, 허극(虛極)이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허공에 가야 평안하다. 허공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과는 다르다. 태공이다. 일체가 거기에 담겨 있다. 모든 게 허공에 담겨 있다. 이걸 믿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다석어록) 허공 쪽에서 보면 모든 천체와 우주간 물질은 없는 것이다. 허공만이 존재한다.수많은 고기떼를 안고 있는 바다지만 바다 쪽에서 보면 바다만 있는 것이지 고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대(多大)라는 것은 무한 허공 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천체까지를 말한다. 허공은 별을 모아 놓은 곳간과 같다. 허공과 천체들을 합해서 말할 때 태극(太極)이라고 한다. 태극이 음양이라고 하는 것은 태극의 내용인 천체들이 상대성을 띄고 있어 변화한다는 뜻이다. 태극의 본체인 허공은 변할 리가 없다. 그래서 류영모가 말하기를 "태극은 하나다. 그런데 태극이 쪼개져 음양이 되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태극은 하나다. 태극은 엄연히 하나요 영원히 하나다. 하나가 쪼개지거나 벌어졌다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다. 음양으로 된 상대세계는 좋은 것 같으나 싫은 것이 상대세계다. 우리는 어떻게든지 이 상대세계에서
벗어나 하나의 세계, 절대세계(무극)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극에서 무극인 저 언덕(하늘나라)에 다다라야 太極無極到彼岸
태극과 무극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한 가지로 하느님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태극이라, 무극이라 다른 말을 쓰게 된 것은 까닭이 있다. 어느 쪽의 자리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른 것이다. 상대에서 절대를
보면 절대에 안긴 상대(만물)가 다 보여 태극이고 절대에서 상대(만물)를 보면 상대는 없고 절대(하느님)뿐인 무극이다.
우리는 나고 죽고, 있어 없어지는 상대세계를 떠나 나지 않고 죽지 않는(생사초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유무초월) 절대세계로 솟나야 한다. 그것을 석가는 저쪽 언덕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석가는 강가(간디스)강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상대세계를 차안에 비유하고 절대세계를 피안에 비유하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있다는 것도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없다는 것도 참으로 없는 것
이 아니다. 생사에 빠진 미혹과 환상에서 있느니 없느니 야단이다. 있다 없다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우리 감각이 있다 없다 하는 것뿐이다."
있다 없다 하는 것이 마음인데 맘도 영원한 것인가 하면 그렇치 않다. 맘은 생사의 제한을 받는다.몸은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인 얼뿐이다. 얼생명으로 거듭난 이는 몸이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다석어록)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29. 그대는 못 보았는가? 해 아래 새 일이란 없다는 것을 君不見日下無新事|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30. 먹기만을 꾀하면 먹거리도 모자란다 謨食未足食
- 참을 찾으면 먹거리는 저절로 넉넉하다 (謨道食自給)
맘에 (삼독) 비워 평안한 깨끗이 빈 맘 虛心燕處淨空心
맘에 (삼독) 있어 때없이 욕심이 맘 더럽혀 有心無時欲點心
이익을 꾀하다 뒤에 뉘우쳐 지는 이로움 꾀해 謨利後悔謨敗利
하늘 씨알은 하느님이 씨알 먹이심 먼저 알아 天民先知天食民
(1957.2.25)
謨:꾀할 모. 燕處(연처) 평안한 하늘나라 燕:제비 연. 淨: 깨끗할 정 點:더러울 점. 敗:질 패 自:저절로 자 給:넉넉 할급.
공자(孔子) 가로되 "참사람은 참 찾기를 꾀하지 밥 먹기를 꾀하지 않는다"(君子謨道 不謨食-논어 위령공편)라고 하였다. 이 시의 제목을 따온 원문이다. 공자의 말을 고쳐서 류영모는 "먹기만을 꾀하면 먹거리도 모자란다. 참을 찾으면 먹거리는 저절로 넉넉하다"(謨食未足食謨道食自給)고 한 것이다. 사람의 말은 한 쪽을 드러내면 다른 쪽이 숨겨지는데 서로가 보완해 주어 뜻이 분명해진다. 이 말은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오 6:33)라고 한 예수의 말과 같은 뜻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급선무가 밥에 있으면 안 된다. 우리 식구가 입고 먹어야지, 자식 입학도 시켜야지 하고 집안 일을 먼저 생각하는 이는 나라와 겨레를 사랑한다고 할 수 없다. 참으로 나라사랑이란 지금 당대만 아니라 3대, 4대까지 구차하게 지낼 각오가 있어야 한다. 사람은 욕심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농사를 짓는데 심은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함께 참여한다. 심었으니 내 것이라 할 수 없고 거두었으니 내 것이라 할 수 없다. 거저 먹고 지내겠다는 생각도 잘못이고 편안히 먹겠다는 것도 착각이다. 사람들은 무엇이나 소용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자기의 의식주가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니다. 무한한 시간 공간에서 모든 것이 다 합해 이뤄져 대어준 것을 우리는 받아서 산다. 우리는 여기에 참여해 조금 일할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다 먹고 쓰려고 해서는 안 된다."(다석어록)
예수 자신의 말대로 예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으로 3천 명,5천 명의 무리를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 이것이 참을 찾으면 먹거리는 저절로
넉넉해진다(謨道食自給)를 보여주는 얘기다. 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제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적이 일어난다. 사랑하는 가족끼리는 밥이 모자랄 때 오히려 밥이 남는다. 참을 찾는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는 먹으려 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와 류영모가 사람은 반드시 농사를 해야 한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놀고 먹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 된다. 그래서 참 사람은 백장
스님이나 바울로처럼 일하지 않고는 먹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찾는 사람들이 많으면 저절로 먹거리가 넉넉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짐승의 수성(獸性)으로만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원숭이나 침팬지 같은 유인원들에게는 반드시 힘으로 군림하는 임금이 있다. 우리 사람들도 탐 진 치의 짐승으로 사는 이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원숭이나 침팬지처럼 임금(대통령)이 있다. 모든 사람이 예수 석가처럼 짐승인 제나(自我)를 버리고 얼나로 솟나 하느님 아들로 산다면 세상의 임금(대통령)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얼나로 솟난 하느님 아들들보다 세상 나랏 일을 맡아보는 이들이 잘났다고 으스대는 동안은 우리가 짐승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본론이라는 책을 썼다. 『자본론』은 한마디로 모식(謨食)의 글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똑똑하다는 이들이 이 모식(謨食)의 글을 성경으로 받들며 배물(拜物)신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나라에서는 이들이 정권을 잡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이른바 20세기(1917년)에 나타난 공산국가다. 그들은 한동안 이 지구 위를 어지럽게 하였다. 그런데 일세기도 지나지 못한 오늘에 와서 모
식(謨食)의 나라들이 더 못살게 된 것이 역사적으로 판가름났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공산, 자유 두 사상의 시험 결과가 분명해졌다. 한국은 작은 나라인데다 단일민족이다. 한반도 한가운데를 잘라 북한에는 공산국가를 남한에는 자유민주국가를 세웠다. 5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그 시험 결과가 나온 것이다. 북한은 세계로부터 빌어먹는 거지 나라가 되었고 남한은 세계 10위 권을 넘보는 무역국이 되었다. 모식을
하려는 공산사상은 몹쓸 사상인 것이 판명되었다.
류영모가 이 한시를 쓴 것이 1957년이다. 그 무렵 류달영은 월간지 「사상계」에서 한국은 자유사상과 공산사상을 실험하는 두 시험관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류영모는 그 실험 결과를 보기도 전에 그 결과를 정확하게 예언한 것이다. 북한은 모식미족식(謨食未足食)이고 남한은 모도식자급(謨道食自給)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남한 사람들 가운데도 모도(謨道)하는 사람보다 모식(謨食)하는 사람이 더 많아 IMF 라는 경제위기를 스스로 불러들였다.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경제인은 경제인대로,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도덕 수준의 미달로 경제위기를 불러 온 것이 확인되었다. 모도(謨道)정신이 모자란 것이다. 이 겨
레에 모도정신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경제위기는 얼마든지 다시 온다.
맘에 (삼독) 비워 평안한 깨끗이 빈 맘 虛心燕處淨空心
한번 죽은 마음이 빈 맘이다. 빈 마음에 하느님 나라, 니르바나 나라를 가득 채우면 더 모자람이 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참의 고디(貞)를 가진 사람들의 나라다. 시간, 공간, 인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있는 나라
가 하늘나라이다"라고 하였다.
제나가 죽어 삼독(三毒)이 사라진 마음이 평안한 연처이다. 허심은 『노자』(老子) 3장에 나오는 "그 마음을 비우라(虛其心)"에서 따왔고, 연처는 「노자』 26장의 "평안한 곳에서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燕處超越)에서 따온 말이다. 연처란 산제비 집이다. 산제비는 외부의 침입이 없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집을 짓는다.
그러니 평안하지 않을 수 없다. 빈 맘에 하느님의 얼이 임재(臨在)하면 연처처럼 평안한 곳이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침입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산제비의 연처를 사람들은 밧줄을 타고 내려가 제비집을 들어서 요리를 해 먹는다. 이 땅위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연처'도 연처가 못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연처'는 하늘나라뿐인 것이다.
장자는 이르기를 "오직 빈 맘에 하느님의 얼이 모여든다. 빈 맘이란 맘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唯道集墟 虛者心齊也-장자 재물론)라고 하였다. 류영모의 허심연처정공심(虛心燕處淨空心)과 같은 뜻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참나로 깨닫지 못하는 것은 제나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나를 참나로 착각하고 있다. 제나의 안전과 부강을 위해 힘있는 세력밑에 들어가듯이 하느님조차 제나의 안전과 부강을 위해 이용하려하기 때문에 평생 동안 신앙생활을 해도 하느님을 바로 알지 못한다.
맘에 (삼독) 있어 때없이 욕심이 맘 더럽혀 有心無時欲點心
어떤 사람이 예수 앞에 나와 자기의 형이 아버지 유산을 다 차지했으니 형님에게 말해 자기에게도 좀 나눠주도록 해 달라고 하였다. 그말을 들은 예수는 어이가 없어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로 세웠단 말이냐.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루가 12:14-15)라고 말하였다. 예수는 무심(無心)으로 마
음이 깨끗한데 그 사람은 탐욕(貪慾)이 마음을 더럽혔다. 가리웃 유다가 예수를 팔아 넘기고자 대제사장의 하수인들을 이끌고 예수를 찾아왔다. 그때 예수는 그것을 알고도 "자, 이 사람아 어서 할 일이나 하
라"고 하자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때 예수가 말하기를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마태오 26:52)라고 하였다. 예수의 마음은 무심(無心)으
로 마음이 깨끗한데 베드로는 진에로 마음을 더럽혔다.
바리사여인들이 간음하다가 들킨 여인을 데리고 예수를 찾아왔다. 모세의 율법대로 하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야 하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자 바리사이인들은 슬슬 달아나고 간음한 여인만 남게 되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아라"(요한 8:11)라고 하였다. 예수의 마음은 무심인데 그 여인은 치정으로 마음을 더럽혔다. 공자는 의롭지 않은 재물은 뜬 구름으로 여겨 탐욕을 이기고, 나를 죽여서라도 어짐을 이루려 하여 진에를 이기고, 여색을 좋아하기보다 속알(德)을 더 좋아하여 치정을 이긴 무심의 사람이었다.
이익을 꾀하다 뒤에 뉘우쳐 지는 이로움 꾀해 謨利後悔謨敗利
공자가 이르기를 "참된 사람은 옮음에 밝고 덜된 사람은 이익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논어 이인편)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은 사물을 처리하는데 마땅히 참을 것은 참으면서 어질고 옳게 하여야 한다. 이는 우리가 상대적 존재로 여기서 한동안 지내는 것을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는 것이 어진 것이 된다. 마땅히 어질고 옮게 하는 이것만이 대동인이다.
먹을 것이 있고 남는데도 자꾸 더 모으겠다고 하는 한편 마음이 바로 서면 나눠주기도 한다. 그러니 나쁘게 가려는 마음을 참고 참아 어질고 옳게 해 나가야 사람으로서 어지간히 아버지께 가까운 자리에 갈
수 있다. 옳게 위로 올라가야 한다."
짐승으로 살다가도 하루라도 빨리 하느님 아들로 돌아서야 한다. 노자도 "돌이키는이는 얼(참)이 움직인 것이다."(反者道之動 노자 40장)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여기에 패리(敗利)라는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 썼다. 승리라는 말은 있어도 패리(敗利)라는 말을 쓴 사람은 없다. 류영모의 패리(敗利)란 무슨 뜻인가. 예수의 말에서 패리를 알 수 있다. 예수는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마태오 5:40-42)라고 하였다. 이것이 지고서 이기는 패리의 정신이다. 예수가 일부러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로 한 것도 바로 패리의 정신을 보인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이(利)를 남기려 하고 밑지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래서 음흉한 제사장이 되고 포악한 폭군이 된다. 그러한 그들이야말로 밑지는 장사를 한 사람이다. 보기에는
분명히 실패로 밑진 예수나 간디는 그 진리의 무저항 정신으로 인류 역사에 큰 이(利)를 남겼다. 천배 만배의 이를 남겼다. 우리도 그 같이 남길 것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다석어록)
하늘 씨알은 하느님이 씨알 먹이심 먼저 알아 天民先知天食民
장자가 가로되 "하느님이 기르는 것은 하느님께서 말씀을 먹임이다.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먹는다면 어찌 사람의 맘(욕심)을 쓰겠는가"(天鬻也者 天食也 旣受食於天 尤惡用人 -장자 덕충부)라고 하였다. 예수는 얼나로는 하느님이 주시는 말씀을 먹고, 몸나로는 하느님이 주시는 일용할 먹거리로 산다고 말하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몸도 하느님이 먹여 주시고 길러 주시기 때문에 있는 것뿐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삶을 살도록 하느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우리
도 밥 먹고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인생뿐 아니라 일체가 하느님에게 바쳐지기 위한 제물(祭物)이다. 사람은 몸의 제물이 아니다. 얼(靈)의 제물이다. 사람이 제물로 되는 것은 말씀이지 목숨이 아니다."(다석어록)
짐승은 종족을 보존하는 것으로 사명을 다한 것이다. 사람도 몸나로는 짐승이라 자식을 낳아 길러 대를 잇게 한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만은 아니다. 사람은 몸나에 얼나로 솟나 하느님 아들이 되어야 한다.
몸은 멸망하나 얼은 영원하다.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30. 먹기만을 꾀하면 먹거리도 모자란다 謨食未足食|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31. 위로 나 하느님 아들 되어야지 上天子
아래로 낳아 땅의 아비 되랴 下地父
차마 못 할 태어남이나 하느님 씨를 길러내야 不忍落地仁成育
옳음 좇아 하느님께 이르러 아들 의를 돌이켜 取義如天宜復之
아버지와 아들의 바른 길은 옳음에 의한 사랑 父子道理仁由義
몬과 맘은 땅 하늘로 왔다 간다 (나서 죽어) 物心來往天諸地
(1959.5.17)
不忍(불인):차마못함 仁 사람인,열매 씨 인 落地(낙지) '세상 에 태어남. 取義(취의)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림 取:가질 취 宜 :옳을 의 如 이를 여. 道理(도리) :바른 길. 由 :말미암을 유 행할 유. 復 : 회복할 복.
예수가 이르기를 "너희는 아래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요한 8:23)라고 하였다. 예수는 밤에 찾아온 유대인 관원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 3:3)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위에'와 '새로'는 그리스어로 한 낱말이다.위란 뜻 아노이다. "몸에서 나온 것은 몸이요, 얼에서 나온 것은
얼이다. 위로(새로)부터 나야 된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요한 3:6-7) 이것으로도 아래서 왔다는 것은 어버이 몸에서 태어난 몸나를 말하고 위에서 왔다는 것은 하느님의 얼에서 태어난 얼나를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천자上天子는 하느님얼로 태어난 얼나로 하느님의 아들이 되자는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얼로 태어나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하지부(下地父)는 내가 혼인하여 자식 낳아 땅의 아버지가 되지 말자는 것이다.
차마 못 할 태어남이나 하느님 씨를 길러내야 不忍落地仁成育
낙지(落地)란 새 생명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 땅에 떨어져 태어났다는 뜻이다. '불인낙지'는 차마 못 할 태어남이란 뜻이다. 어버이가 낳았고 자녀는 태어난 것이다. 세상에는 자식을 못 낳아 걱정이고 자식을 낳았다고 기뻐하는데 이 무슨 해괴한 말일까. 사람이 자식을 낳는 일은 분명히 짐승 노릇인 것이다. 짐승 같은 놈이라면 성을 내면서 자식 낳는 일이 짐승들이 하는 짓임을 모르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멸망의 생명인 몸나에서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솟난 사람은 몸생명을 산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 예수는 하느님 아들인 얼나를 깨닫지 못한 사람을 죽은 이로 보았다. 예수가 이르기를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태오 8:22)고 말하였다.
장자도 말하기를 "삶이란 붙은 혹이나 달린 사마귀다.죽음이란 부스럼을 째고 헌데를 짜는 것이다."(生爲附 贅 縣 疣 死爲決?潰癰 장자 대종사편)
그러므로 생각을 하는 참사람들은 두번 운다. 이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도 분통하여 운다.
그리고 또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도 감사하여 운다. 너무 분통하여 우는 것은 짐승으로 태어나 짐승 노릇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너무 감사하여 우는 것은 이 짐승에게 하느님 아버지를 생각할 수 있는 지혜(얼)를 주었기 때문이다.
다석사상 연구모임에 4년째 나오는 불혹의 나이에 이른 이(나효임)가 말하기를 "이따금 나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을 몹시 비참하게 느낀다. 그러나 때로는 내가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된 것을 매우 행복하게 생각한다. 나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나는 단지 조용히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은 어버이로 해서 이 땅위에 낙지를 당하였지만 자기만은 남(자식)을 낙지 시키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왕 낙지한 우리들은 무엇을 꼭 해야 할 것인가.하느님의 씨를 길러야 한다. 하느님의 씨를 기르는 것이 인성육(仁成育)이다. "누구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본성(씨)을 지녔으
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이기 때문에 도대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요한1서3:9) 우리 마음속에 보내진 하느님의 얼을 잘 파지(把持)하는 것이 하느님 아들을 성육(成育)시
키는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몇십 년 사는 것으로 그치라는 게 아니다. 정죄하여 너는 죽을 것이라 심판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몸이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못쓴다. 위로부터 난 얼생명을 믿어야 한다. 몸이 죽는다고 멸망이 아니다. 멸망할 게 멸망하고 영원한 생명의 씨는 자란다. 내 맘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인 하느님 아들을 믿지 않으면 이미 멸망한 것이다. 죽을 몸을 참나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위로부터 난 하느님 아들인 얼나를 알지 못하면 그게 이미 심판받고, 정죄받고, 멸망한 것이다. 위로부터 거듭날 생각을 안 하고 그것을 모르니까 이미 죽은 것이다. 몸의 숨은 붙어 있지만 벌써 멸망한 것이다."(다석어록)
옳음 좇아 하느님께 이르러 아들 의를 돌이켜 取義如天宜復之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
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오 6:33-34)고 하였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탐 진 치의 짐승 성질을 버리고 하느님의 진 선 미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 아들로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 된다.
(宜)자는 사당 안에 제물을 쌓아놓고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는 것을 상형한 글자다. 하느님께 기도(제사)하는 것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취의여천의복지(取義如天宜復之)는 공자(孔子)가 말한 극기복례라는 말과 뜻이 같다. 옮음을 쫓는 취의(取義)가 제나를 이기는 극기이다. 의(宜)를 회복한다(宜復)는 말이 복례다.
제나(自己)로 죽어서 얼나로 솟나는 것이 하느님 아들로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돌이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 아들 사이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희망도 생명도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의 얼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바른 길은 옳음에 의한 사랑 父子道理仁由義
류명모가 말하는 아버지와 아들은 거의가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 아들을 말한다. 이것을 땅의 아버지와 아들로 새기면 글자로는 안 틀리지만 류영모의 생각은 아니다. 류영모가 예수를 좋아한 것은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들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높은데 계신 완전한 아버지께로 가자는 게 예수의 인생관이라고생각한다. 나도 이러한 인생관을 갖고 싶다. 이런점에서 예수와 나와 관계가 있는 것이지 이 밖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걸 신앙이라 할지 어떨지 예수 믿는다고 할지 어떨지 모른다." 류영모는 예수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충성을 본받고자 하였다. 류영모는 돌아가기 얼마 전에도 "공자는 하느님 아버지와의 부자유친을 세우지 못하였는데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와 부자유친을 세웠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공자도 하느님을 지성으로 받든 사람임에 틀림없다. 공자는 말하기를 "나를 아는 이는 하느님이시다"(知我者其天乎-논어 헌문편)라고 하였다.
류영모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충성은 지극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찾는데 무엇을 바라고 찾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 복종하는 나다. 내가 이쯤 하면 하느님께서 은혜를 주시겠지, 이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향하여 무엇을 바라며 믿는 것은 섬기는 것이 안 된다. 죽이든 살리든 이것은 하느님의 하시는 일이고, 죽이든 살리든 간에 하느님을 따라 가는 것이 나의 할 일이다.
'살리거나 죽이거나 아버지 맘대로 하십시오' 하는 게 아들의 마음이다."
류영모는 이러한 아들의 충성심을 예수에게서 배운 것이다. 도리(道理)는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진리의 유대(rapport)이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순종의 믿음이다. 이것이 의(義)에 의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仁)이다.
몬과 맘은 땅 하늘로 왔다 간다 (나서 죽어) 物心來往天諸地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상대적 존재다. 제나(自아)로는 나서 죽고, 있다 없어진다는 말이다. 오기는 땅으로 떨어진 것이 가기는 하늘로 돌아간다지만 그러나 사실은 부질없이 생겼다가 하염없이 꺼진다. 그것
이 상대적 존재인 제나의 숙명이다. 그래서 석가가 말하기를 "일체의 유위법(有爲法 상대적 존재)은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 같은 것이다. 이슬 같고 또 번개와도 같은 것이다. 마땅히 이와같이
봐야한다"(금강경 32 응화비진품)고 하였다.
그러므로 석가는 가지 않고,오지 않고 또한 머물지 않는(無去無來亦無住) 절대존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니르바나이니 니르바나가 하느님이다.
니르바나가 사람에게 자기의 생명을 준 것이 다르마이다. 다르마도 니르바나와 같이 가고 오지 않는 절대생명이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佛性인 얼나는 나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다.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이 아닌 얼나(다르마)는 하늘나라(니르바나)에 들어간 것도 나온 것도 아니다. 니르바나
(하느님)가 보낸 얼은 절대라 없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갈 곳이 없고 올 곳이 없다. 따라서 머무를 곳도 없다"(無去無來亦無住)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오고 가지 않는 것으로 하느님(니르바나), 하느님 아
들(다르마)과 허공을 들었다.
몬(物)과 맘(心) 가운데 몬이 상대성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별똥 별처럼 뜻밖에 나타나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물체다. 그런데 맘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다. 여느 사람들보다 신앙을 가진 사람
들이 더 햇갈리는 소리를 한다. 그러나 맘도 상대성이라 나고 죽는다.
류영모는 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마음은 영원한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마음은 생사의 제한을 받는다. 마음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영원성 있는 영혼을 대표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도 그대로는 안 된다. 벗어버릴 것이 여간 많지 않다. 벗어버릴 것 벗어버리고 가야 한다. 마음도 멸거(滅去)하여야 한다. 그런 뒤에 즉진(卽眞)하여야 한다.마음은 없어져 죽어야 빈다. 빈맘에 하느님의 얼이 나타난다."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 아들만이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얼)은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오고 가지 않는다. "예수의 영원한 생명은 그의 몸이 아니고 그의 얼이다. 그
예수의 얼은 지금 우리에게도 보내 주신다. 예수의 얼은 줄곧 우리에게 보내 주신다. 성령이란 진리요 말씀이다. 성령을 받아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다석어록)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31. 위로 나 하느님 아들 되어야지 上天子|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32. 다 함께 제나의 죽음을 조상하자 大同弔
아직 스스로 제나 버리지 못한 이 있으면 未有自致者
반드시 몸소 제나로는 죽어야 해 必也親喪乎
모진 어려움 겪고도 아직 제나 못 버려 遭艱猶未致
반드시 스스로 제나를 죽여야 해 必也自處乎
(1959.3.1)
弔 조상할 조. 親 몸소 친. 致 버릴 치. 喪 : 죽을 상. 遭 만 날 조. 艱 어려울 간 處 : 처치할 처
대나무 장대 끝에서 걸어간다(竿頭進步)는 말이 있다. 이것은 장대를 짚고 높이뛰기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석상(石霜) 스님이 이르기를 "백 자(百尺)의 대나무 장대를 세워 놓은 끝에 올라서서 어떻게 걸어 갈 수 있을 것 같은가." 또 고덕(古德) 스님이 이르기를 "백 자의 대나무 장대 끝에 앉았다 할지라도 아직 참됨에 들어서지 못하였다. 백자의 대나무 장대 끝에서 걸어가야 온 우주에 가득 찬 전체의 나(얼
나)가 나타난다."(百尺竿頭須進步 十方世界現全身-무무관 46측)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올라서서 걸어가라는 말은 개체(個體)인 제나로는 죽으라는 말이다. 백척간두에서 걸어가면 공중을 나는 재주가 없는 이상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다. 이 말을 한 때는 비행기란 상상도 못 하던 1천 년 전의 일이다. 백척간두에 서서 걸어가는 결심으로 제나를 버리라는 말이다. 방하착을 하라는 말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이르기를 "죽음 안에 승리가 있다. 나를 버리는 것은 참된 기쁨이다. 제나가 죽을 때 얼나는 깨어난다"(There is victory in death. Renunciation is true enjoyment.When the ego dies, the soulawakes.·M K.간디 『날마다의 명상』)고 하였다.
백척간두에서 떨어져 죽는 것은 개체의 나인 제나이고 온 우주에 가득찬 전체의 나가 나타나는 것은 얼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랄 일은 모든 사람이 제나로 죽고 얼나로 솟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
서는 제나의 대동조(大同弔)야말로 얼나의 대동축(大同祝)인 것이다.
고덕이 백척간두에 서서 걸어가라는 말이나 예수가 산에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불가능에서 가능을 찾으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멸망의 생명인 제나에서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옮기는 일이 백척간두에서 걸어가는 일이요, 산을 들어 옮기는 일과 같다는 말이다. 제나에서 얼나로 옮긴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한 5:24)를 이룬 이다.
아직 스스로 제나 버리지 못한 이 있으면 未有自致者
반드시 몸소 제나로는 죽어야 해 必也親喪乎
용담지촉(龍潭紙燭)이라는 말이 있다. 선사 용담(龍潭)이 종이로 만든 초롱이라는 말이다. 중국에는 인문지리상으로 무슨 까닭이 있는지 모르지만 형이하에 강한 공맹(孔孟)이 북쪽 사람이고 형이상에 강한 노장이 남쪽 사람이다. 불교에서도 북쪽에는 교종이 성한데 반하여 남쪽에는 선종이 성하였다. 북쪽 교종에서 금강경소를 지어 널리 알려진 선사 덕산(德山)이 남쪽의 선종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깨달음을 얻는다면서 배움을 소홀히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배우지 않고 깨달을 수도 없지만 배우기만 한다고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다. 제나를 죽이지 않고는 얼나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제나가 진리를 깨닫는다고 생각하면 평생 수도를 하여도 진리인 참나(眞我)를 깨닫지 못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지식을 얻어들어 손해볼 것 없다. 그러니 얻어 두자는 생각으로 집회에 나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제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깨달아야 한다. 불경, 성경
을 보는 것은 삶을 알아보자 하는데 참고가 되는 것이다. 더도 덜도 아니다. 인생에 대한 하나의 참고서다. 나와 불경 성경의 관계가 이러하다. 불경을 열심히 읽는다고 성불이 빨리 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을 외운다고 영원한 생명을 깨닫는 것도 아니다. 불경이니, 성경이니 하는 것은 맘을 죽이자는 거다. 제나가 한번 죽어야 마음이 텅빈다. 한번 죽은 마음이 빈탕의 마음이다. 빈맘에 하느님나라, 니르바나 나라를 그득 채우면 더 부족이 없다."
덕산(德山)은 자신이 지은 금강경소를 짊어지고 남쪽으로 찾아갔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떡 파는 가게에 들렀다. 떡 파는 노파가 덕산이 지고 온 것을 보고 무엇이냐고 물었다. 덕산은 "'내가 지은 금강경소
요"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하였다.노파는 금강경소라는 말에 정색을 하고는 "스님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면 떡을 공양하겠으나 대답을 못 하면 공양을 못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덕산은 금강경에 대해서
묻는다니 자신이 만만하였다.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이라고 하였는데 스님은 점심(點心)하겠다니 어느 마음에 점찍으시렵니까?" 그 말에 덕산은 입을 열지 못하였다. 스님도 아닌 떡장사 노파에게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덕산은 그 노파의 지시대로 용담사에 머물고 있는 용담 숭신(崇信)에게로 갔다.
그 날 용담을 만난 덕산은 방장(方丈)에서 시간이 흐르는 줄 잊고 얘기를 나누었다. 밤이 늦어서야 덕산은 자기가 잘 처소로 가려고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오니 밖은 캄캄하여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어
방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러자 용담이 종이로 만든 초롱에 불을 켜서 덕산에게 건네주었다. 덕산이 초롱을 들고 문 밖으로 나서서 걸어가려고 발을 떼자 뒤에 섰던 용담이 초롱의 촛불을 불어 꺼버리니 더
캄캄하여졌다. 그때 덕산이 깨달음을 얻고 용담에게 큰절을 하였다.
촛불은 제나를 상징한다. 캄캄한 흑암은 전체다. 제나의 촛블을 꺼버리고 전체 속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나의 촛불에 집착한다. 언젠가는 꺼질 불인데 꺼뜨리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전전긍긍 안절부절이다. 우리는 생일날 생일 케이크에 나이 수만큼 촛불을 켜놓고 불어 끄는 것을 생일 축하의식으로 삼는다. 우리는 생일 케이크에 켜놓은 촛불을 끌 것이 아니라 제나의 촛불을 꺼야한다. 이것은 남이 불어서 꺼줄 수도 없다. 오직 자신이 불어서 꺼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제나의 불을 끌 때 대동조(大同弔)가 아닌 대동축(大同祝)이 될 것이다.
모진 어려움 겪고도 아직 제나 못 버려 遭艱猶未致
반드시 스스로 제나를 죽여야 해 必也自處乎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의 6천 년 역사를 샅샅이 들추며 연구하여 독특한 사관을 터득했다. 인류 역사의 목적은 신관(神觀)의 향상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람은 고난을 통해 진리되시는 하느님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가 그럴진대 개인의 생애도 마찬가지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듯한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참나인 하느님을 인식하기 위한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란 바로 정신이다. 정신이 자라는 것이 생각이다. 정신이 깨어나 피고 정신에 불이 붙어야 한다. 정신은 거저 깨어나지 않는다. 쓰라린 가난과 고초를 겪은 끝에 가서야 정신
이 깨어난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명이 이 땅위의 몸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이 영원(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어느 성인이나 어떤 경전이나 다 같다."(다석어록)
석가가, 6년 동안의 결사적인 고행 없이, 위없는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이미 고난 속에 있는 이는 고난을 감사하게 받아들여 깨달음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고난에서 좀 멀리 있는 이는
석가처럼 고난을 끌어당겨서라도 고난을 겪어내야 내 정신이 자랄 수 있다. 석가 못지 않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전혀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값진 고난을 겪으면서도 생각할 줄 몰랐다.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참선이다. 내가 스스로 생각을 높여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참되게 사는 길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인생문제에 의심이 생길 때 밤낮으로 생각해도 환히 밝아지지 않을 때가 있다. 아주 답답하고 곤란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참을 찾으려는 마음이 한결같으면 언젠가 제 가
슴속에 밝은 길이 뚫릴 것이다. 우리가 나에 대해서는 의심을 안 한다. 그런데 이 세상이 괴로울 때면 나를 의심하게 된다. 이렇게 아프고 '괴로운 이 나라는 게 뭐냐'라는 것이다. 나를 없애버리고 싶어진다. 그래서 자살도 한다. 나를 의심하다가 이 나라는 것이 참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석어록)
류영모는 반드시 스스로 거짓 나인 제나(自我)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제나를 죽이라고 말했다고 목을 매거나 독약을 먹으라는 것이 아니다. 값어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이다. 제나가 거짓 나임을 알고 쓸데없는 것임을 알면 이미 제나는 죽은 것이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얼)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요한 6:63)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이미 제나는 죽고 얼나가 산다.
류영모가 스스로 제나(自我)를 죽여버려야 한다는 것은 얼나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의 바른 말이다.
친상(親喪)하라. 자처(自處)하라고 하니 끔찍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자신도 스스로 친상하고 자처하였음을 밝혔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 목숨을 다시 얻게 될 것이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요한 10:17-l8) 이것이 친상함이요 자처함이다. 얼생명을 얻기 위하여 몸생명을 스스
로 죽이고 버린다는 말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자꾸 나아가는 것이니까 내가 죽어서 나아진다면 몸뚱이의 자살은 하지 않을지언정 정신적인 자살은 얼마든지 하여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는 것이라면 정신의
자살을 하는 그 지경이 복음도 알고 은혜도 부딪쳐 보는 것이 된다. 내가 나를 죽이고 내가 나를 낳아 가는 것이다." (다석어록)
석가의 가르침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아는 사성제(四聖諦)가 바로 스스로 제나로는 죽으라는 말이다. 괴로운 몸(苦), 모인 맘(集)을 없애는(滅) 것이 니르바나(하느님)에 이르는 길(道)이란 뜻이다. 탐 · 진 · 치의 짐승인 제나로 죽지 않고는 진 선 ·미의 하느님 아들로 솟날 수 없다.
"온 몸뚱이가 허물어지고 약아빠진 제나를 내친다.몸은 떠나고 앎은 가버리자 하느님께 뚫리어 하나 된다. 이것을 제나 잊음(坐忘)이라 한다. 하느님과 하나되면 이 누리에는 좋아할 것이 없다. 얼나가 되면
몸으로 오래 살 것 없다."(隳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同則無好也 化則無常也 - 『장자』 대종사편)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32. 다 함께 제나의 죽음을 조상하자 大同弔|작성자byunsdd71074un
다석 류영모 명상록
http://www.dasuk.or.kr/meditation
33. 너무도 고마워 쓰는 글 多謝詞
게으름을 떨치고 글 익히는 기쁨에 살고 罷倦習悅處
때로 벗이 와 즐거움을 더한다 有朋加樂時
바라기는 하느님 아들 선비가 됨인데 願爲君子儒
언짢아하지 않는 자리 기약하기 어려워 難期不慍地
(1959 .9.19)
謝:감사할사 詞 글사 罷:내칠파 處 살처 潛 : 게으를 권 慍 :성낼 온. 期 : 기약할 기. 地 : 곳 지.
22살의 류영모는 아우의 죽음으로 날벼락을 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세상에서의 희망을 버리게 되었다. 사람이 비누 거품과 같은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류영모는 1O년이 지났는데도 그때 일을 이렇
게 말하였다. "내가 22살 때 20살의 동생이 죽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세상에서는 완성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일 하나 이루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귀찮은 일은 없애자고
자꾸 노력하는데 그 일 마치면 또 거기서 새 일감이 나온다. 편리하게 승용차를 가지면 또 귀찮은 여러 가지 일이 따라온다. 나는 이 세상을 다 살아 그런지는 몰라도 이 세상에서 뭐가 된다는 것이 우습다. 이
세상에서 되는 게 무엇이 있는가. 장사가 잘 된다는 등 이따위 것이 있을지 몰라도 그러나 그게 되는 건가. 이 세상이 달라진 게 있다면 사람 수효가 많아진 것, 그리고 세상이 좁아진 것 뿐이다. 어리석은 것
들은 역시 어리석은 그대로 있고 달라지는 게 없다. 이 세계는 말자는 거다. 최초의 의지가 조금 하다가 말자고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할일은 상대적 존재가 있는 상대세계는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소극적으로 생긴 거지 자꾸 번성해 나가자고 있는 게 아니다. 마침내는 말자고 생긴 세상이다. 어떤 결과를 보자는 세상이 아니다."
그러나 류영모는 마침내 헛일밖에 안 되는 몸 살림을 하면서도 하느님 아버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엄청난 은혜로 감사하였다. "나는위에서 은혜가 쏟아지는 믿음을 갖지 않는다. 여기서 이렇게 하는 이
상 더 은혜를 바라지 않는다. 이 정도라도 할 수 있는 것도 위(하느님)로부터 오는 게 없으면 안 된다. 이걸 생각하면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이렇게 우리가 만나 이야기하는 것도 감사할 일이다. 우리가 하루
품을 내는데는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집안 식구의 수고가 있다. 오늘 이때까지 건강하게 살아온 까닭은 우리들보다 더 괴로움을 당하면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애쓴 앞서 간 사람들의 은혜 때문이다."
류영모가 감사하는 일이 따로 있다. 하느님의 얼(씨)을 받아 하느님의 아들을 기르는 일이다. "살림이 구차하여 얼의 싹이 트는지도 모르는 가운데에도 싹을 틔우려는 데 마음을 쓰며 사는 것을 자랑하고 싶
다. 나는 언제나 마음이 평안하다. 옆 사람은 알 수 없겠지만 내 마음 속에서 하느님의 씨가 싹이 트는 척만 해도 좋은데 싹이 터서 자라난 사람은 얼마나 좋겠는가. 이러한 사람만으로 온 세상이 가득하게 된
다면 이 세상이 오늘날처럼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다석어록)
게으름을 떨치고 글 익히는 기쁨에 살고 罷倦習悅處
공자는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學而不厭 誨人不倦-논어 슬이편)고 하였다. 류영모는 불권(不倦)을 파권(罷倦)이라 하였다. 공자는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논어 학이편)라고 하였다.이를 줄여서 습열(習悅)이라 하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루하루를 지성껏 살면 무상한 인생이 비상한 생명이 된다. 하루 하루를 덧없이 내버리면 인생은 허무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정성을 다하여 쉬면서 쉬지 않는 숨처럼 언제나 깨어 있는 사람은 쉬지 않으면서 쉬는 숨이며 늘 괴로우면서 언제나 기쁘다. 늘 나를 죽임으로써 내가 사는 것이 일하는 것이다.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 데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그러나 그 일이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 하며 자기 몫을 다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자기 사명을 가지고 사는 삶, 언제 죽어도 좋다고 하는 삶, 죽어서 사는 삶,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다."
유영모가 익히는(習)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 하였다. "날개 우(羽) 아래에 스스로 자(自)를 한 글자가 익힐 습(習)이다. 새 새끼가 어미 새를 본받아서 자꾸 나르는 것을 배운다. 병아리는 아마 이것을 참고
배우지 못하여 날지 못 하는 것 같다. 날개가 있어도 날기를 배워서 쓰지 않으면 날 수가 없다. 닭이란 놈은 못난 놈이다. 우리들도 익히는 것이 사는 것이 되니까 자꾸 익혀야 한다. 새 새끼처럼 자꾸 익혀
서 위로 날아 올라가도록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 석가인들 빈둥빈둥 놀면서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날마다 목숨을 걸고 힘쓰고 애쓰며 기도 명상에 힘쓴 결과로 하느님을 참나로 깨닫는 그리스도가 되고 붓다가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참 사람으로 다가온 류영모도 하루에 저녁 한 끼씩만 먹는 주림을 참았고, 하루 5시간씩 자는 졸음을 이기면서 혼자 배우고 홀로 기도한 가운데 이루어진 인격인 것이다.
때로 벗이 와 즐거움을 더한다 有朋加樂時
공자가 말한 "벗이 있어 먼데서 바야흐로 찾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않으랴."(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논어 학이편)를 줄여서 유붕가락시(有朋加樂時 )가 되었다. 류영모의 어릴 때의 벗은 우경(友鏡) 이윤영, 일해 이세정 등이다. 2O대의 벗이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崔南善) 등이다. 그리고는 제자로서 배우러 찾아온 이들이 함석헌, 김교신, 김흥호 류달영 서영훈 이정호, 류승국, 이성범, 염낙준, 김정호(金正鎬), 서완근(徐完根), 박영인 등이다. 그들은 스승 류영모를 찾아와서 북한산의 빼어난 경치에 마음이 비워지고 류영모의 놀라운 말씀으로 마음이 가득차서 돌아갔다.
증자는 말하기를 "참 사람은 글로써 벗을 만난다"(君子以友
會友 -논어 안연편)고 하였으나 류영모는 "벗은 얼로 사귀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하느님을 위해서 마음을 바치고 친구를 위해서 몸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큰 사람(大人)이다. 위(하느님)로 향하는 사람
은 친구도 자기보다 얕은 사람과 사귈 수 없다. 정신이 자기보다 높아 자기의 정신을 높여 줄 수 있는 친구를 사귀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은 얼로 사귀는 우도(友道), 우애(友愛)라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알 때 너와 나의 벽을 뚫어 통할 수 있다."
바라기는 하느님 아들 선비가 됨인데 願爲君子儒
공자(孔子)가 제자 자하(子夏)에게 이르기를 "너는 (하느님 아들인) 얼나의 선비가 되어라. (짐승인) 제나의 선비가 되지 말라"(汝爲君子儒 無爲小人儒-논어 옹야편)고 하였다. 선비라고 다 선비가 아니다. 얼나로 솟난 이가 참 선비다. 공자(孔子)는 얼나로 솟난 얼나의 군자선비였다. 그래서 공자는 "하느님이 나에게 속나(얼나)를 낳으셨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공자가 얼나로 거듭난 체험을 말한 것이다.
예수가 찾아온 유대 관원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얼)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몸)에서 나온 것은 육이요 영(얼)에서 나온 것은 영(얼)이다.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요한 3:3-6)
고 하였다. 예수가 이 말을 하기 5백 년 앞서 이미 공자는 자신이 하느님이 낳아주시는 얼나로 새로 나는 체험을 말하였다. 예수가 '몸에서 나온 것은 몸이요' 라고 한 것은 몸 사람인 어버이가 낳은 몸나는
나서 죽는 멸망의 생명이란 말이다. '얼에서 나온 것은 얼이다'라고 한 것은 얼이신 하느님이 낳은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란 말이다.
그런데 공자 뒤로 공자가 바라던 군자유는 드물고 소인유만 쏟아져 나왔다. 소인유들이 중국을 망치고 조선을 망쳤다. 유교가 부흥하려면 공자의 군자유 정신을 살리는데 있을 것이다.
류영모는 군자를 '그이'라고 하였다. 그이란 뜻은 그(하느님)를 그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군자를 그이라고 하고 싶다. 군자란 한자로는 임금의 아들이란 뜻인데 하느님 아들로 볼 수 있다. 공자(孔子)의 자(子)도 아들이다. 누구의 아들이겠는가. 하느님의 아들일 것이다.나더러 '무엇을 하고 싶은가' 라고 묻는다면 그이(君子)가 되고 싶다고 할 수 있다. "기왕에 생명을 타고난 이상은 나를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든지 바로 살겠다고 하던 그'라고 하는 소리를 나는 듣고 싶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의 그이가 있는데 두어 사람이라도 이 사람에게 '그이는 참 지금 생각해도 좋은 사람이야. 나쁜 감정은 없다'면서 그이(君子)라고 불러준다면 나는 여부없이 받겠다." (다석어록)
언짢아하지 않는 자리 기약하기 어려워 難期不慍地
여기의 불온不 慍은 공자가 말한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못해도 언짢아하지 않는다면 또한 참 사람이 아니겠는가"(人不知不 慍不亦君子乎-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불온이다. 성내지 않는다. 언짢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자가 사람들이 나를 몰라주어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라 하였으니 나도 그런 지경에 이르기를 기약하기 어려울까라는 뜻이다.
예수는 베드로가 알아주고, 석가는 가섭이 알아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류영모는 말하기를 "예수 석가를 다 몰랐다. 누구를 존경하고 좇는 것은 다 제 욕심 채우려 드니까 모르게 되는 거다. 예수 석가는 바른 말 하였는데 사람들이 못 알아 들었다"라고 하였다.공자는 스스로 말하였다.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 탓을 않으며 아래(세상) 것을 배워 위(하느님)에까지 다다랐는데 나를 알아주기는 하느님
뿐이다."(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天乎-논어 헌문편)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자는 말하기를 '나를 몰라주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몰라줄까 걱정하라.' 또 '내가 능(能)하지 못한 것을 걱정할 것이지 남이 나를 몰라주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생을 살다가 한 번도 친구가 찾아오지 않는 일이 있다. 심히 외로워 남이 나를 몰라주는구나 하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이 나를 몰라주어도 노여워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생전에
동지 하나 얻지 못하고 알아주지 못하는 데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그것 또한 군자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나 공자가 걸어온 길이 바로 이 좁은 길이었다. 세상에서는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만 나를
알아주면 그만인 것이다."(다석어록)
[출처]다석 류영모 명상록--- 33. 너무도 고마워 쓰는 글 多謝詞|작성자byunsdd71074un
'마스터와 가르침 > 다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석 류영모의 명상록- 2.보자 대자연(하느님)을! 觀太自然界 (0) | 2022.04.25 |
---|---|
다석 류영모 명상록 - 1.허공과 물질은 하나로 같다. 空色一如 (0) | 2022.04.25 |
다석 류영모 명상록 (0) | 2022.04.22 |
생각의 집, 말씀의 집, 사상의 집을 지어라- [이기상-신의 숨결] 다석 생명사상의 영성적 차원 ③ (0) | 2022.04.22 |
검(玄)은 하느님이다 (0) | 2022.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