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서울의 아이히만과 기성의 장례식 본문
서울의 아이히만과 기성의 장례식
선거 승패가 나기 전에 미리 썼다. 승패가 난 뒤에 내 생각이 영향 받을까 두려워서다.
1.이번 선거의 최대 패배자는 국민(?)이다. 왜냐면 국민이 만든 대안이슈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담론계, 시민운동계, 민중운동계는 한 일이 없다. 주류 지식인 사회뿐 아니라 비주류 지식인 사회도 철저히 무력했다. 여와 야만 있었다. 주류 지식인 사회와의 인문사회철학에서의 담론투쟁이 절실하다. 이점에서 80년대의 치열한 사상투쟁이 재현되어야 한다.
2.공포와 혐오는 대안을 추구하지 않은 무사유의 결과물이다. 공포와 혐오로 갈라치기한 것은 기득권들의 조작이다. 지식인 사회는 이에 부역했다. 희망의 길로 갈라진 것이 아니다. 지식인 사회는 자신들이 기득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1980~1990년대의 지식체계의 연장을 꾀하고 있다. ‘민주가 기득권’이 되었고, 그 ‘민주를 민주화하라’는 구호를 그들은 알지 못한다. 양대 정당의 정책을 보면 당명과 후보명을 가리면 어떤 것이 어떤 당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대안이 없으니 갈라쳐 이쪽으로 당길 유일한 내용은 상대에 대한 공포와 혐오뿐이다.
3. 나는 유럽의 68혁명을 ‘한국판’으로 예비하는 기운을 감지한다. 청년층은 이번 선거에서 분열을 강요당했다. 청년층 분열의 강요는 세월호참사, 조국사태,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김용균의 죽음 등에서부터 예비되고 누적된 것이다. 이 누적치가 한계에 이르면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 그때 청년혁명이 터진다. 여야,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은 일체의 기성권위에 도전하는 그런 혁명 말이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기성의 권위에 도전하지만 질서와 방향이 없는 대혼돈의 투쟁 말이다. 혼돈은 스스로 자기질서를 창발한다. 나는 느긋이 그들을 기다릴 것이다. 일베와 클베는 갈 곳 모르는 청춘들의 괴이변이다. 다른 곳에서는 청년들이 지구마음, 다음세대를 말하고 있다. 만일 청년혁명이 터지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더 이상 자정능력을 잃고 깊은 늪에 잠길 것이다. 기성은 혁명할 능력을 상실하고 타락했다.
4. “촛불의 연장”, “촛불과 반엘리트 카르텔과의 싸움” 정신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에 내가 “광주항쟁의 정신”을 이번 선거에 특정 정당 지지의 논리에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답은 하지 않겠다. 촛불은 꺼진 것이다. 촛불대연합은 파괴된 것이다. 자신들의 담론을 촛불 혹은 멀리 동학혁명까지 올라가 빗대는 것은 역사의 무한한 확장성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담론권력화일 뿐이다. 나 자신도 그런 습성이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것을 저항 또는 해방서사라 하자. 나는 망월동 묘지에서 쓰러진 깃발을 잡는다. 내 아들, 딸들은 월드컵의 ‘붉은 악마’와 ‘지구몸짓’과 ‘노래’로 표현한다. 저항서사를 존중하지만 집단화, 전체화된 해방서사의 귄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백낙청과 문학인 1200여 명의 서명에서 기성화한 권위의 연장을 읽는다. 전염병 같은 성명서들은 주권자의 자유발언으로 존중한다. 하지만 그 성명들에는 선민의식과 은근히 하위주체가 있다. 그들은 상위지도주체다. 대상이 대의 정치인이어야지 어찌 주권자인가? “주권자의 뜻을 받들어 우리는 대의정치에 명령한다. 검찰공화국은 시대 반동적이며....수도권 과밀화의 기후악당 300만호는 지역의 소멸을 부른다....” 이렇게 쓸 수는 없었을까? 주어와 목적 대상이 뒤바뀐 성명서는 비극이었다.
5. 여야 모두 통합정부를 말한다. 명백히 이것은 사기다. 서로 어퍼컷과 발차기한 세력이 어떻게 통합정부를 하겠는가? 통합은 아마도 기성 체제 수호의 반동통합일 것이다. 반동 통합의 대표적인 구호가 500% 용적률, 300만호 주택, 코스피5만, 국민소득5만, G5다. 성장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방식이 논점이 되어야 한다. 간단한 통계를 보자. 2020년 1인당 지역총생산은 3,738만 원, 지역총소득은 3,767만 원, 1인당 개인소득은 2,120만이다. 총생산과 총소득은 법인 몫과 세금까지도 1인당으로 나눈 것이다. 개인소득은 법인 몫과, 사회보험료 등을 뺀 것이다. 비교는 소득끼리 해야 한다. 3,767만 : 2,120만 편의상 평균치로 보았을 때 2배 가량이다. 그렇다면 소득 하분위에서는 몇 배가 난다. 즉 극심한 빈부격차 해소가 민간소비와 성장을 증진시킬 유일한 해결책인 것이다. 부자가 아무리 돈을 많이 써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 국토를 부자들의 소비장소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빈부, 도농, 중앙과 지역, 학벌서열,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이 완화되는 희망의 구호가 없다면 국민통합은 사기다.
6. 정치개혁을 말한다. 정치개혁 대안으로 나온 것은 분권제 대통령, 결선투표제, 책임총리제, 위성정당 금지 등이다. 이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자. 주권이 주건자에게 확대된 내용이 있는가? 대의자들끼리의 권력배분에 그치고 있다. 1962년 박정희가 만든 정당법부터 폐지해야 한다. 미국, 이탈리아, 일본, 프랑스 등은 정당법 자체가 없다. 정치단체와 정당을 구분하는 것은 정치자금에서다.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은 전두환이 정당 무마용 떡고물로만든 것이다. 정당법과 정당국고보조는 거대 양당을 확대재생산하는 핵심 기제다. 선거법 개혁도 좋지만 정당법과 정당국고보조가 폐지되어야 한다. 정치의 핵심은 주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고 일상적으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읍면동주민자치회의 법제화, 읍면동주민참여예산편성권, 읍면동장직선제(최소추천제라도)가 부활되어야 한다. 정치는 일상적으로 감각되고 옆에 있으며,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정당법을 폐지하면 정치의 일상적 진지인 지역당이 우후죽순 출현할 것이다. 지역당의 출현은 전국당을 아래에서부터 위협할 민주핵이 된다. 그리스 시리자나 스페인 포데모스의 약진은 지역당 기반이 있어서이다.
7. 대장동사태는 부패게이트 문제가 아니다. 부동산 부패 문제는 항상 있는 문제다. 누가 부패의 주역이냐는 것은 체제의 고질병을 은폐하는 시각이다. 성남시나 투기세력이나 시장야합자일 뿐이다. 그것을 서로 정치적으로 악용했다. 지식인들은 눈을 감았다. 주택만큼은 부동산에서 제하고 국민기본권으로 논의를 발전시켰어야 옳다. 산업용지는 법에서 조성원가에 분양하도록 해놓고는 주택용지는 시장에 맡긴다. 이런 불평등이 어디 있나? 주택만큼은 환수할 개발이익 자체가 없어야 한다. 물론 시공사 정상 이윤 10%~15%(관급공사 이윤율)을 포함한 조성원가의 80%에 공급하고 차액 20%는 정부가 보조해야 한다. 임대주택은 법에 그렇게 하도록 의무화 되어 있다. 골조(설비, 외부창호 포함)만 분양하는 것만으로도 아파트값은 40%는 내려간다. 신문지를 바르고 살든 페인트민 자가로 바르고 살든 입주자 선택이다. 공공토지비축법을 적극활용해야 한다. 주택자재기술공공물류센터도 설립해야 한다. 분양택지 입찰제도도 폐지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주택값은 반에 반값이 가능하다.(35년 건축기술자의 명예를 건다.)
8. 기타 평화 등 다른 사안 평가는 생략한다.
마치는 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전범 재판장에 선 아히이만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그는 생각의 진정한 무능력자였다.” 아렌트는 말한다. “개인은 오로지 전체, 국민을 위하여 존재하는데 이것은 전체주의 기원이다.”
사람들은 국민을 위하여 정당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정당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다. 멈춰서 생각하라. 이 정당의 전체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4년 ~ 5년에 한 번 있는 선거다. 그런데 “덜 나쁘다”. “차선이다”는 논리로 주권자의 직접행동을 가로막는 전체주의는 평범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그리고 주권자의 직접행동을 양산하는 정당법 폐지 같은 것에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나는 시골이 아닌 중앙 서울에서 주권자를 학살하는 무수한 아이히만을 보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는(아이히만)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 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ㅡ이글은 강주영선생님의 글입니다 ㅡ
선거 승패가 나기 전에 미리 썼다. 승패가 난 뒤에 내 생각이 영향 받을까 두려워서다.
1.이번 선거의 최대 패배자는 국민(?)이다. 왜냐면 국민이 만든 대안이슈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담론계, 시민운동계, 민중운동계는 한 일이 없다. 주류 지식인 사회뿐 아니라 비주류 지식인 사회도 철저히 무력했다. 여와 야만 있었다. 주류 지식인 사회와의 인문사회철학에서의 담론투쟁이 절실하다. 이점에서 80년대의 치열한 사상투쟁이 재현되어야 한다.
2.공포와 혐오는 대안을 추구하지 않은 무사유의 결과물이다. 공포와 혐오로 갈라치기한 것은 기득권들의 조작이다. 지식인 사회는 이에 부역했다. 희망의 길로 갈라진 것이 아니다. 지식인 사회는 자신들이 기득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1980~1990년대의 지식체계의 연장을 꾀하고 있다. ‘민주가 기득권’이 되었고, 그 ‘민주를 민주화하라’는 구호를 그들은 알지 못한다. 양대 정당의 정책을 보면 당명과 후보명을 가리면 어떤 것이 어떤 당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대안이 없으니 갈라쳐 이쪽으로 당길 유일한 내용은 상대에 대한 공포와 혐오뿐이다.
3. 나는 유럽의 68혁명을 ‘한국판’으로 예비하는 기운을 감지한다. 청년층은 이번 선거에서 분열을 강요당했다. 청년층 분열의 강요는 세월호참사, 조국사태,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김용균의 죽음 등에서부터 예비되고 누적된 것이다. 이 누적치가 한계에 이르면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 그때 청년혁명이 터진다. 여야,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은 일체의 기성권위에 도전하는 그런 혁명 말이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기성의 권위에 도전하지만 질서와 방향이 없는 대혼돈의 투쟁 말이다. 혼돈은 스스로 자기질서를 창발한다. 나는 느긋이 그들을 기다릴 것이다. 일베와 클베는 갈 곳 모르는 청춘들의 괴이변이다. 다른 곳에서는 청년들이 지구마음, 다음세대를 말하고 있다. 만일 청년혁명이 터지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더 이상 자정능력을 잃고 깊은 늪에 잠길 것이다. 기성은 혁명할 능력을 상실하고 타락했다.
4. “촛불의 연장”, “촛불과 반엘리트 카르텔과의 싸움” 정신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만일에 내가 “광주항쟁의 정신”을 이번 선거에 특정 정당 지지의 논리에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답은 하지 않겠다. 촛불은 꺼진 것이다. 촛불대연합은 파괴된 것이다. 자신들의 담론을 촛불 혹은 멀리 동학혁명까지 올라가 빗대는 것은 역사의 무한한 확장성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담론권력화일 뿐이다. 나 자신도 그런 습성이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것을 저항 또는 해방서사라 하자. 나는 망월동 묘지에서 쓰러진 깃발을 잡는다. 내 아들, 딸들은 월드컵의 ‘붉은 악마’와 ‘지구몸짓’과 ‘노래’로 표현한다. 저항서사를 존중하지만 집단화, 전체화된 해방서사의 귄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백낙청과 문학인 1200여 명의 서명에서 기성화한 권위의 연장을 읽는다. 전염병 같은 성명서들은 주권자의 자유발언으로 존중한다. 하지만 그 성명들에는 선민의식과 은근히 하위주체가 있다. 그들은 상위지도주체다. 대상이 대의 정치인이어야지 어찌 주권자인가? “주권자의 뜻을 받들어 우리는 대의정치에 명령한다. 검찰공화국은 시대 반동적이며....수도권 과밀화의 기후악당 300만호는 지역의 소멸을 부른다....” 이렇게 쓸 수는 없었을까? 주어와 목적 대상이 뒤바뀐 성명서는 비극이었다.
5. 여야 모두 통합정부를 말한다. 명백히 이것은 사기다. 서로 어퍼컷과 발차기한 세력이 어떻게 통합정부를 하겠는가? 통합은 아마도 기성 체제 수호의 반동통합일 것이다. 반동 통합의 대표적인 구호가 500% 용적률, 300만호 주택, 코스피5만, 국민소득5만, G5다. 성장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방식이 논점이 되어야 한다. 간단한 통계를 보자. 2020년 1인당 지역총생산은 3,738만 원, 지역총소득은 3,767만 원, 1인당 개인소득은 2,120만이다. 총생산과 총소득은 법인 몫과 세금까지도 1인당으로 나눈 것이다. 개인소득은 법인 몫과, 사회보험료 등을 뺀 것이다. 비교는 소득끼리 해야 한다. 3,767만 : 2,120만 편의상 평균치로 보았을 때 2배 가량이다. 그렇다면 소득 하분위에서는 몇 배가 난다. 즉 극심한 빈부격차 해소가 민간소비와 성장을 증진시킬 유일한 해결책인 것이다. 부자가 아무리 돈을 많이 써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 국토를 부자들의 소비장소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빈부, 도농, 중앙과 지역, 학벌서열,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이 완화되는 희망의 구호가 없다면 국민통합은 사기다.
6. 정치개혁을 말한다. 정치개혁 대안으로 나온 것은 분권제 대통령, 결선투표제, 책임총리제, 위성정당 금지 등이다. 이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자. 주권이 주건자에게 확대된 내용이 있는가? 대의자들끼리의 권력배분에 그치고 있다. 1962년 박정희가 만든 정당법부터 폐지해야 한다. 미국, 이탈리아, 일본, 프랑스 등은 정당법 자체가 없다. 정치단체와 정당을 구분하는 것은 정치자금에서다.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은 전두환이 정당 무마용 떡고물로만든 것이다. 정당법과 정당국고보조는 거대 양당을 확대재생산하는 핵심 기제다. 선거법 개혁도 좋지만 정당법과 정당국고보조가 폐지되어야 한다. 정치의 핵심은 주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고 일상적으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읍면동주민자치회의 법제화, 읍면동주민참여예산편성권, 읍면동장직선제(최소추천제라도)가 부활되어야 한다. 정치는 일상적으로 감각되고 옆에 있으며,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정당법을 폐지하면 정치의 일상적 진지인 지역당이 우후죽순 출현할 것이다. 지역당의 출현은 전국당을 아래에서부터 위협할 민주핵이 된다. 그리스 시리자나 스페인 포데모스의 약진은 지역당 기반이 있어서이다.
7. 대장동사태는 부패게이트 문제가 아니다. 부동산 부패 문제는 항상 있는 문제다. 누가 부패의 주역이냐는 것은 체제의 고질병을 은폐하는 시각이다. 성남시나 투기세력이나 시장야합자일 뿐이다. 그것을 서로 정치적으로 악용했다. 지식인들은 눈을 감았다. 주택만큼은 부동산에서 제하고 국민기본권으로 논의를 발전시켰어야 옳다. 산업용지는 법에서 조성원가에 분양하도록 해놓고는 주택용지는 시장에 맡긴다. 이런 불평등이 어디 있나? 주택만큼은 환수할 개발이익 자체가 없어야 한다. 물론 시공사 정상 이윤 10%~15%(관급공사 이윤율)을 포함한 조성원가의 80%에 공급하고 차액 20%는 정부가 보조해야 한다. 임대주택은 법에 그렇게 하도록 의무화 되어 있다. 골조(설비, 외부창호 포함)만 분양하는 것만으로도 아파트값은 40%는 내려간다. 신문지를 바르고 살든 페인트민 자가로 바르고 살든 입주자 선택이다. 공공토지비축법을 적극활용해야 한다. 주택자재기술공공물류센터도 설립해야 한다. 분양택지 입찰제도도 폐지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주택값은 반에 반값이 가능하다.(35년 건축기술자의 명예를 건다.)
8. 기타 평화 등 다른 사안 평가는 생략한다.
마치는 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전범 재판장에 선 아히이만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그는 생각의 진정한 무능력자였다.” 아렌트는 말한다. “개인은 오로지 전체, 국민을 위하여 존재하는데 이것은 전체주의 기원이다.”
사람들은 국민을 위하여 정당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정당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다. 멈춰서 생각하라. 이 정당의 전체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4년 ~ 5년에 한 번 있는 선거다. 그런데 “덜 나쁘다”. “차선이다”는 논리로 주권자의 직접행동을 가로막는 전체주의는 평범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그리고 주권자의 직접행동을 양산하는 정당법 폐지 같은 것에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나는 시골이 아닌 중앙 서울에서 주권자를 학살하는 무수한 아이히만을 보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는(아이히만)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 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ㅡ이글은 강주영선생님의 글입니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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