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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티베트 불교

柏道 2020. 6. 25. 13:59

티베트 불교

최근 수정 시각: 2020-06-25 00:35:17

 

분류

 

1. 개요[편집]

티베트를 중심으로 발달한 불교의 한 종파. 주된 분포 지역은 중국(중국령 티베트 자치구 포함), 부탄, 몽골(중국령 내몽골자치구 포함), 러시아의 몇 몇 공화국(칼미크 공화국, 부랴트 공화국, 투바 공화국) 등이며, 세계 각지에서도 많이 믿는 불교 종파이다. 티베트 불교를 밀교라고 분류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티베트 불교는 대승의 현교와 밀교를 모두 포괄하므로 대승 불교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

 

1.1. 라마교?[편집]

과거 '라마교'라고 통칭되었고 현재에도 간간히 그렇게 불리나 엄밀히 말해 부정확하고 비하적인 표현이다. 라마교라는 것 자체가 라마를 섬긴다는 뜻을 내포하는데, 밀교의 영향이 강한 티베트 불교의 관습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전해주며 자신을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스승(라마)을 붓다와 하나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통칭되었던 것이다.

대승 현교(顯敎)에서도 스승을 붓다의 화신, 혹은 붓다 그 자체로 보는 견해가 있다.《화엄경》에서는 ‘모든 공덕이 선지식에 의해 생긴다’’라고 하였으며 《대고경(大鼓經, Mahabheriharaka-sutra)》[3]에서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가까워졌을 때, 아난이 매우 슬퍼하자 석가모니가 그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아 슬퍼하지 말라. 아난아 울지 말라. 나는 미래에 선지식이 되어 너희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이다."

따라서 닝마빠의 고승 빼뚤(Dza Patrul) 린뽀체의 설명처럼 현교의 견해에서도 스승은 불보(佛寶)에 해당하며 붓다 그 자체인 스승의 가르침은 법보(法寶), 스승의 권속과 제자, 도반들은 승보(僧寶)에 해당한다. 더 나아가 밀교(密敎)에서 스승의 몸(身)은 승(僧), 스승의 말씀(口)은 법(法), 스승의 마음(意)은 불(佛)로써 스승은 곧 삼보의 총합이다.

즉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티베트 불교에서 스승을 중시하는 경향은 현밀(顯密)이 발달한 인도 대승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며, 스승과 삼보께 귀의하는 인도 날란다 사원의 전통을 보전하고 있는 것이지 티베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자칫 라마교라는 단어가 인도 불교와 티베트 불교 사이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잘못 비쳐질 수 있기 때문에, 서양[4] 및 한국 학계에서도 라마교 혹은 라마불교라는 용어 대신 티베트 불교로 용어를 고치고 있다.

1.2. 인도 대승 불교의 도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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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를 정착시킨 샨타락시타,
구루 빠드마삼바와, 티송 데첸 왕 (쌈예 사원 내 벽화)


일본 티벳대표부 사무소의 게시 소남 겔젠 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티베트에 불교가 소개된 것은 3세기경 28대 하토토리넨첸(lha tho tho ri gnyan btsan) 왕 때이다. 토착 전설에 따르면 왕은 도대시마똑 육자진언과 금으로 된 탑을 선물 받고 이를 신기하게 여겨 비밀스럽게 왕궁에 모셔 공양 올렸다고 한다. 불교에 관한 기록은 7세기 송첸감포 왕(Srong btsan sgam po) (605-650) 때 부터 본격적으로 전해진다. 이후 8세기 티송데첸 왕(Khri srong lde btsan) (755–794)이 인도 날란다 사원의 승원장 샨타락쉬타(Śāntarakṣita)와 티베트에서 '제 2의 부처'라 여겨지는 밀교의 대성취자(mahasiddha) 빠드마삼바와(Padmasambhava)를 인도로부터 초빙하고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티벳에 불교가 완전히 정착하였다. 대승 불교가 번성하였던 북인도,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티벳에서는 인도로부터 유입된 정통 대승불교가 흥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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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최초의 불교 사원인 쌈예 사원


불교가 티벳에 도입되던 초기에는 당나라의 영향으로 티벳에 인도불교와 중국불교가 공존하던 시기도 있었다. 당시 티벳에는 인도불교를 수용할지 중국불교를 수용할지 여부를 두고 여러 이견이 있었다. 티송데첸 왕의 중재로 중국 북종선(北宗禪) 계열[5]의 승려인 화상[6] 마하연(摩訶衍)과 인도불교를 대표하는 논사 까말라쉴라(Kamalaśīla) (740-795)가 티벳 최초의 불교 사원인 쌈예(bSam yas)사원에서 논쟁을 벌인 끝에 까말라쉴라가 승리하면서 인도불교가 티벳에서 주류로서 확고히 자리잡았다.[7]

티베트는 인도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 중에서는 가장 후발주자이다. 하지만 티베트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7세기부터 16세기까지 약 900년 간 지속적으로 역경작업이 이루어져 현재 티베트역 경전에는 산스크리트어 원전이나 한역본에는 남아 있지 않은 후기 불교 경전들이 존재한다. 또한 티벳 문자는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역경할 목적으로 창제되었고, 티베트어역 경전은 충실한 직역이라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로 쓰인다.

왕가의 후원 하에 대대적으로 역경을 한 덕분에 티베트 불교는 설일체유부의 계율, 아비달마, 《현관장엄론》계열의 바라밀 전통, 중관과 유식의 제 논서, 불교논리학(인명학), 밀교 등 인도 대승불교의 거의 모든 전통들을 받아들여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현교, 대승밀교를 포괄하는 종합적인 교학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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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의 중흥조, 아티샤[8]


또한 히말라야를 사이에 두고 티베트와 인도를 오가며 인적 교류가 활발했다. 린첸상포(Rin chen bzang po) (958-1055)와 마르빠(Mar pa chos kyi blo gros) (1012-1097)와 같이 구법을 위해 티벳에서 인도로 넘어와 불교 문헌을 수집하고 인도인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인물들이 있었다. 반대로 인도에서 힌두교의 부흥과 이슬람의 확장을 피해 히말라야를 넘어 티벳으로 넘어온 아티샤(Atiśa Dīpaṃkara Śrījñāna) (982-1054) 같은 인도인 스승들도 있었다.

13세기에 무슬림 세력이 인도로 진출하자 큰 변화가 있었다. 무슬림은 이교도인 불교와 힌두교를 박해하였는데, 힌두교와 달리 출가 승단과 재가 신도의 구분이 명확했던 불교는 승원이 파괴되자 구심점을 상실하고 인도에서 쇠멸한다.[9] 인도 각지에 있던 불교 승가 공동체는 티베트, 네팔, 남인도로 흩어졌다. 이 때 승려 상당수가 경전을 가지고 티베트로 피신하면서 위끄라마쉴라 사원에 있던 전적(典籍)이 티베트로 옮겨져《티베트 대장경》의 기원이 된다. 때문에 티베트 불교는 인도 대승불교의 마지막 계승자로 평가받는다. 티베트 불교도들 스스로도 인도 최대 불교대학인 날란다(Nālandā)사원과 위끄라마쉴라(Vikramaśilā) 사원의 학통(學統)과 법맥(法脈)을 계승하였다고 자부한다.

 

다큐 《Indian Roots of Tibetan Buddhism》

2. 현교[편집]

2.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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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불보살의 지혜의 총체(總體)인 문수보살[10]


현교(顯敎)는 '겉으로 드러난 가르침'이란 뜻으로 언어 문자상으로 설시된 가르침이며 일반적인 소승과 대승 가르침을 뜻한다. 밀교(密敎)는 '은밀히 전수한 가르침'이란 뜻으로 다른 말로 금강승이라고 한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바른 수행과 실천을 위해 먼저 바른 견해가 세워져야 함을 강조하고, 성급하게 수행법만을 익히는 것을 매우 경계한다. 넓은 의미에서 수행을 '마음을 바꾸는 행위'라고 정의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교학 역시 수행에 포함된다. 따라서 교학과 수행을 하나로 보고 문사수(聞思修) 삼혜(三慧)를 고루 강조하는 것이 날란다 대학의 전승을 이은 티베트 불교의 특징이다. 박은정, 《티베트 불교 힘의 원천, 승가교육제도》

경전 못지 않게 논서를 중시하는 논장(論藏) 위주 불교라는 특징도 있다. 중국불교가 특정 경전을 소의경전으로 삼는 경장 위주 불교인데 비해, 티베트 불교는 여러 경전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주석을 단 논장을 주로 학습한다. 또한 '쌉쩨(과목科目, sa bcad)' 라고 하는 목차를 세세하게 달아 경론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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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닝마빠의 교학 체계를 정립한
미팜 린뽀체 (Mipham rinpoche)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과 적용은 《대승열반경》의 사의법(四依法)을 따른다.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라.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말라.
《대열반경》제6권 ‘사의법(四依法)’

19세기 닝마빠의 대학승 미팜(Mipham) 린포체는 《지혜의 검(The Sword of Wisdom)》에서 사의법(四依法)에 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미팜 린포체의 주석" 펼치기ㆍ접기】만약 당신이 다음의 견해를 얻지 못한다면 맹인이 지팡이에 기대는 것처럼 오직 명성과 말, 또는 이해하기 쉬운 것들에만 의지하여 마침내 사의법(四依法)의 이치에 어긋날 수 있다.

1.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그러므로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해탈은 가르침(정법, 正法)에서 나오지 가르치는 사람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만일 가르침이 잘 설해졌다면 누가 설하였든지 상관없다. 심지어 선서(善逝, sugata) 역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백정으로도 화현한다. 만일 대승법(大乘法)과 같은 정법의 의미와 반대되는 말을 한다면 아무리 말솜씨 좋은 사람이라도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한다. 마치 부처의 모습을 한 마라와 같이.

2.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
당신이 법을 공부하거나 사유할 때 항상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 만일 뜻을 이해했다면 어떤 식으로 설하여졌든지 모순이 없다. 만일 설하는 이가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이해했다면 그 때 비로소 각각의 단어와 표현에 대해 사유하라. 마치 코끼리를 찾은 후에 비로소 코끼리의 발자국을 찾아 나서듯이. 만일 당신이 뜻을 잘못 이해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더 많은 말들을 사유한다면, 생각이 다할 때까지 고민을 멈추지 못하겠지만, 그저 진정한 뜻에서 멀어지고 또 멀어질 뿐이다. 마치 아이들의 놀이처럼 기진맥진해진 채 끝이 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나 ‘그러나’ 같은 한 단어일지라도 맥락에서 벗어나면 끝없이 많은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당신이 그 뜻을 이해했다면 더 이상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킬 때 어리석은 이들은 손가락만 쳐다보듯이, 바보들은 말에만 집착하여 자신들은 잘 이해하였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중에는 착각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3. 불요의에 의지하지 말고 요의에 의지하라.
뜻을 파악할 때 당신은 무엇이 불요의(미요의)이고 무엇이 요의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불요의에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진정한 요의에만 의지해야 한다. 일체지자(一切知者, sarvajña)께서는 배우는 이들의 근기와 성향에 맞게 가르치셨다. 그는 사다리의 가로대들처럼 여러 단계의 승(乘)을 소개하셨다. 여덟 종류의 암시와 간접적인 가르침[11]과 같이 그는 마음에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지혜롭게 설하셨다. 만일 불요의의 가르침을 (의도와 상관 없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가르침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불요의의 가르침은 (방편으로써)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설할 수 있다.

4. 지식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에 의지하라.
만일 요의의 가르침을 수행에 적용하고자 한다면 세속의 이원적(二元的)인 마음에 의지하지 말라. 이원적인 마음은 언어와 개념들을 쫓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비이원적(非二元的)인 지혜에 의지하라. 개념적인 생각과 함께 작용하는 것이 바로 세속적인 마음이다. 세속적인 마음은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하는 대상을 포함하는 특성이 있다. 그런 식으로 주객을 나누는 이원적인 모든 생각은 그릇된 것이며 절대 진정한 현상의 본성(本性)에 다다르지 못한다. 실재든지, 비실재이든지, 실재이면서 비실재이든지, 실재도 아니고 비실재도 아니든지 그러한 개념은 어떻게 생각하든지 여전히 개념일 뿐이다. 우리가 마음에 품는 어떤 생각이든지 그것들은 마라의 지배 아래 있다.이러한 가르침은 경전에 나와 있다. 어떤 부인(否認)이나 단언(斷言)에 의해서도 개념을 다 제거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부인하거나 단언함 없이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한다면, 바로 해탈이다. 비록 주체와 객체에 대한 어떠한 집착도 없지만 스스로를 비추는 본연의 지혜가 있다. 그리고 존재와 비존재, 존재이면서 비존재,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모든 생각들이 완전히 사라진다. 이것은 최상의 원초적인 지혜(Yeshe, primodial wisdom)라고 한다.

요의는 방편법문에 의하여 개념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비개념적인 알아차림(awareness)의 지혜의 대상으로써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도 있다. 부인과 단언, 존재와 비존재와 같은 개념적인 양 극단에 얽매여있는 한 세속적인 마음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이 초월적인 지혜를 경험하는데 도달하였다면 모든 이원적인 생각은 진정되고 당신은 현상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모든 부정(否定)과 성립(成立), 또는 부인과 단언에서 벗어나 진정한 법(Dharma)의 심오함에 이르게 된다.#

2.2. 교학의 강조[편집]

서울대 안성두 교수는 《불교의 이해》에서 겔룩빠의 창시자인 쫑까빠의 견해에 의거하여, 경전의 가르침을 배우고(聞) 사유(思)하는 교학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쫑까빠는 《보리도차제광론》에서 직접적 가르침과 경전적 가르침을 상호불가결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보다 우선적인 과정은 경전의 가르침을 듣는 데 있다고 말한다. 불교에 있어서 경전의 가르침은 문혜(聞慧)와 사혜(思慧)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문혜(聞慧)와 사혜(思慧)에 의해 증득된 바로 그것이 수혜(修慧)에 의해 수습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쫑까빠는 경마의 비유를 들어 청문(聽聞)과 이에 대한 깊은 사유를 수반하는 직접적 수행은 "경주할 장소를 먼저 보여준 후에 경주하는 것과 같다." 라고 설명한다. 만일 경주할 장소가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고 경주한다면 실제 노력에 비해 소득도 크지 않을 뿐 아니라 잘못된 길로 빠질 위험이 크다.

또한 쫑까빠는 "위대한 경전의 가르침을 수행의 요체를 결여한 단순한 설명으로만 간주하고, 수행의 요체는 오직 핵심적 의미를 설하는 스승과 제자 간의 은밀한 직접적 가르침에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가르침의 단절이라는 업장을 쌓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해탈을 구하는 자들에게 있어 최고의 교설은 위대한 경전일 뿐이다.

2.3. 분석적ㆍ논리적 탐구[편집]

티베트 불교는 교학 연구에서 매우 분석적이고 회의주의적으로 접근한다는 특징이 있다. 회의주의적이라는 말에 오해가 있을 수 있어 덧붙이자면, 부처님의 말이라고 해서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금(金)을 감정하듯이 분석적으로 의심을 갖고 경전을 배우고 사유하고 수행하면서 불법의 진리를 수행자 본인이 직접 확인해가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도 법회에서 다음과 같은 경전의 어구를 즐겨 인용하며 경전을 분석하고 깊게 사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비구들과 지혜로운 이들이여, 금을 태우고 자르고 문지르듯이 나의 말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단순히 존경한다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12]


스승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이 스승에 대한 존경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다. 달라이 라마는 《달라이 라마 반야심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날란다 대학 같은 고대 인도의 사원 대학에서는 학승(學僧)이 스승의 저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전통을 발전시켰다. 스승의 저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스승을 존경하거나 공경하지 않는 행위로 간주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바수반두(Vasubandhu, 세친世親)의 제자 비묵티세나(Vimuktisena)는 스승의 유식론적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중관학파의 견해로 경전을 이해하였다. 또한 티베트에서는 19세기 닝마빠 학자인 주 미팜(Ju Mipham)의 제자 알락 담최 창(Alak Damchö Tsang)이 스승이 쓴 논전의 일부 내용에 반론을 제기한 사례가 있다. 알락 담최 창은 "스승이 훌륭하다고 해도 가르치는 내용이 정확하지 않다면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티베트 속담에 "사람은 공경하고 존경하되 그가 쓴 논서는 철저하게 분석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스승에 대한 건전한 마음가짐과 수행할 때 의지해야 할 사의법(四依法)[13]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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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승려들이 대론하는 모습


티베트 불교 교학의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경향은 대론(對論, rtsod pa)에서도 찾을 수 있다. 불교논리학에 기초한 대론은 인도의 날란다 사원에서부터 계승된 티베트 불교의 중요한 수행 방법 중 하나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대론은 설법('chad), 저술(rtsom)과 더불어 학자(paṇḍita)의 3가지 주요 활동(mkhas pa'i bya ba gsum)으로도 알려져 있다. 일찍이 불교는 석가모니 재세시 부터 외도(外道)나 불교 내부의 다른 견해를 가진 불교도들간의 대론을 통해 바른 견해를 확립해왔다.

범천스님은 《불교논리학의 향연》에서 티베트 불교의 대론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 대론은 인명자(因明者; 딱셀와; rtags gsal ba)와 발서자(發誓者; 담짜와; dam bca'ba) 간의 문답으로 진행된다. 인명자는 일어선 채로 질문하고, 발서자는 앉은 채로 대답한다.

2) 발서자는 자신의 주장을 방어하고, 인명자는 발서자의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가지 질문들을 통해 발서자를 모순으로 유도해간다.

3) 발서자가 자신이 전에 했던 주장을 뒤에 번복하면 인명자는 왼손바닥에 오른 손등을 내리치며 '차!'라고 외쳐 오류가 발견됐음을 확인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인명자의 착각일 경우 발서자는 '찰록' 또는 '차똥'이라고 말해 오류가 없음을 주장한다.

4) 궁극적으로 인명자는 발서자의 근본주장(짜외담짜; rtsa ba'i dam bca'), 즉 논쟁의 시초가 된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나아가며, 근본주장이 번복될 경우 발서자의 근본적 패배로 간주된다.

 

티베트 불교 대론법 소개 영상

2.4. 견해, 수행, 행위, 결과[편집]

동아시아 한문권 불교에서 불교 수행을 신해행증(信解行證)의 네 단계로 구분하는 것과 유사하게 티베트 불교에서도 불교 수행을 견수행과(見修行果)-견해, 수행, 행위, 결과-라는 네 가지 개념으로 구분한다.

현밀(顯密)을 막론하고 모든 불교 수행은 견해, 수행(혹은 명상), 행위(Tib. ལྟ་སྒོམ་སྤྱོད་གསུམ་, ta gom chö sum, Wyl. lta sgom spyod gsum) 세 가지로 구성되며, 견해ㆍ수행ㆍ행위를 통해 목표한 결과를 얻는다. 어떤 법문이나 혹은 종파 전체의 교리를 이해할 때도 견해, 수행, 행위, 결과의 4가지 항목으로 분석하면 전체 구조를 쉽게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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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단계마다 각기 다른 견수행과(見修行果)가 존재한다.
먼저 윤회와 인과, 무상(無常), 고(苦)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춰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성(空性)과 무아(無我)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한다.


대만 중화불학연구소(中華佛學研究所)의 란지푸(藍吉富)는 《佛教信仰的見修行果》에서 강카르(Gangkar) 린뽀체의 《貢噶上師恒河大手印直講》과 가랍 도제(Garab dorje)의 《핵심을 꿰뚫는 세 구절(Tib. ཚིག་གསུམ་གནད་བརྡེགས་, tsik sum né dek, Wyl. tshig gsum gnad brdegs)》에 대해 빼뚤(Patrul) 린뽀체가 해설한 《椎擊三要訣勝法解(Tib.མཁས་པ་ཤྲཱི་རྒྱལ་པོའི་ཁྱད་ཆོས་ཀྱི་འགྲེལ་བ་བཞུགས་སོ)》에 의거하여 견수행과(見修行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견해(view)란 법문이나 종파의 교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의미한다.

 

1) 법문의 기본 원리, 믿음의 근거, 이론 구조 등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염불 법문을 예로 든다면 법문의 근거가 되는 경론과 왜 염불이 필요한지, 염불의 정의는 무엇이고 염불의 목적은 무엇인지 등등이 견해에 해당한다.

2) 어떤 전승이나 종파의 기본 교리 구조를 말함.

수행자 개인의 견해는 이론적인 지식, 이론의 실천을 통해 얻은 지혜, 궁극적인 깨달음 등 여러 단계로 나뉠 수 있다. 또한 전승이나 종파 교리에 있어서도 수행 단계 별로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수행(meditation)은 개인적인 수행을 의미한다. 불교 수행(修行)은 홀로 있을 때 실천하는 개인적인 수행인 '수(修)'와 다른 대상 간의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행(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수행은 주로 지관 수행 같은 명상을 가리키지만 염불, 진언, 송경, 교학 수업, 무문관(無門關) 등 다른 개인적인 수행들도 넓은 의미에서 모두 수행에 포함된다.

행위(action)는 앞서 언급했듯이 타인 등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행동이나 태도,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육바라밀을 예로 들자면 선정, 지혜바라밀은 수행에 해당하고 보시, 지계, 인욕 바라밀은 행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정진바라밀은 나머지 다섯 바라밀 모두에게 적용된다.

명상 등의 수행을 통해 진전이 있다면 반드시 행위를 통해 점검하여야 한다. 즉 다른 대상 간의 관계 속에서도 선정(禪定)에서 얻은 경계를 잃지 않아야 한다.

결과(result)는 견해ㆍ수행ㆍ행위로 구성된 불교 수행을 배우고 실천하여 얻는 성과를 의미한다.

1) 각 전승과 종파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과위(果位). 성문승은 아라한, 대승의 현교(바라밀승)는 삼아승지겁 동안의 수행을 통한 성불, 밀교(금강승)은 즉신성불(卽身成佛), 선종은 견성성불(見性成佛), 정토종은 극락왕생 등등 전승과 종파마다 수행의 궁극적인 결과는 다를 수 있다.

2) 궁극적인 과위 외에 단계별로 얻는 성과. 예를 들어 성문승은 아라한 외에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등 사향사과(四向四果)가 있으며 보살승은 초지(初地)부터 십지(十地)까지의 보살지(菩薩地)가 있다.

수행의 성과는 억지로 구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바른 수행을 통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2.5. 중관 사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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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학파의 개조(開祖)인 나가르주나. [14]


티베트 불교에서는 종파를 막론하고 중관학파(中觀學派, Mādhyamika) 그 중에서도 귀류논증중관학파(歸謬論證中觀學派, Prāsaṅgika-Mādhyamika)의 견해를 가장 중시한다.

중관은 유식과 더불어 대승 불교의 양대 사상으로 일컬어진다. 한국 불교의 경우에는 고구려의 승랑(僧郞)이 중관사상에 기반한 종파인 삼론종(三論宗)의 발달에 기여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때는 원효가 삼론종 관련 논서인 《삼론종요(三論宗要)》, 《중관론종요(中觀論宗要)》, 《이제장(二諦章)》등을 저술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고려, 조선에 걸쳐 중관 관련 논서가 한 권도 저술된 적 없을 정도로 중관사상은 천 년 가까이 한국 불교에서 잊혀졌고 현대에 이르러 비로소 불교학자들에 의해 다시 연구되기 시작했다. 한국을 포함한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권에서는 중관, 유식보다 화엄(華嚴), 천태(天台) 사상이나 정토(淨土), 선(禪)사상이 각광받았다. 이와 달리 인도 고유의 논리적 사유를 요하는 중관, 인명이 발달하였다는 점이 인도-티베트 불교 교학의 특징이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인도불교의 다양한 학파 중 가장 중요한 네 가지로 소승의 설일체유부와 경량부, 대승의 유식학파와 중관학파를 언급한다. 중관학파는 다시 유식중관학파와 경량중관학파로 나누고, 경량중관학파를 논리적 관점에서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 Svātantrika-Mādhyamika)와 귀류논증파(歸謬論證派)로 나눌 수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소승보다 대승, 대승에서도 유식보다 중관, 중관에서도 자립논증보다 귀류논증이 더 정견(正見)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귀류논증중관학파의 견해에 따라 중관학파 논서 가운데에서 용수(龍樹, Nāgārjuna)의 《중론(中論, Mūlamadhyamakakārikā》, 불호(佛護, Buddhapālita)의 《불호근본중론주(佛護根本中論注, Buddhapālita- mūlamadhyamakavṛtti)》, 월칭(月稱, Candrakīrti)의 중론 주석서인 《입중론(入中論, Madhyamakāvatāra)》, 성천(聖天, Āryadeva)의 《사백론(四百論, Catuḥśataka)》을 중시한다.

티베트 불교의 중관학적 견해를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국내 자료를 몇 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중론의 열쇠》 : 14대 달라이 라마가 일반인을 위해 중관의 핵심을 간략하게 설명한 짧은 논서이다. 링크의 번역본은 먼저 곽우영이 영문에서 국문으로 번역하였고, 광성사 주지인 게쉬 소남 걀첸 스님과 김웅기가 티베트어 원문을 참고하여 교정하였다. 그 밖에 다른 한국어 번역본들도 있다.

  • 《달라이 라마의 지혜 명상》 : 샨티데와의 《입보살행론(입보리행론)》<지혜품>에 대한 14대 달라이라마의 해설서이다. 샨티데와는 <지혜품>에서 중관학파의 견해로 인도의 비(非)불교학파들과 불교의 소승, 대승의 유식학파 등 다른 학파들의 견해를 논박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겔룩과 닝마의 문헌을 기반으로 <지혜품>을 해석하였다. 그 밖에 <지혜품>에 대한 비주류적인 해석은 19세기 닝마빠의 학자 미팜 린포체가 지은 주석서 《께따까, 정화의 보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상기한 두 저서 모두 최로덴(최원철)이 번역하였다.

  • 《불교 철학의 보물꾸러미》 : 티베트 불교 강원에서 배우는 《둡타 린뽀체이 텡와(gurb mtha' rin po che'i phreng ba)》의 번역서이다. 《둡타》는 일종의 학술강요서(學術綱要書) 혹은 교리사(敎理史)라고 할 수 있다. 귀류논증중관학파의 입장에서 외도(外道)와 불교의 소승, 대승 4대 학파의 교리를 서술한 내용이 담겨 있다. 달라이 라마의 한국어 통역이었던 박은정이 번역하였다.

  • 《불경의 요의와 불요의를 분별한 선설장론》 : 겔룩빠의 창시자인 쫑까빠가 중관의 견해로 대승 경전들을 교상판석(敎相判釋)한 중요한 논서이다. 인도의 티베트 불교 대학인 IBD(Institute of Buddhist Dialectics)에서 수학한 한국인 범천스님이 번역하였다.

  • 《티베트 스승에게 듣는 연기법의 지혜》 : 쫑까빠가 연기법을 설하신 부처님을 찬탄하며 공성과 연기에 대해 논한 《연기찬탄송(rten 'brel bstod pa)》의 해설서이다. 광성사 소남 걀첸 스님이 일반인 불자들을 위해 법문한 내용을 바탕으로 지어졌다.


이 외에도 《보리도차제광론》이나 국내에 출간된 티베트 불교 교학 관련 서적은 대부분 중관학과 관련이 있다.

2.6. 불교인식론과 논리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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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론(對論)으로 외도(外道)들을 제압하는 디그나가


중관학과 더불어 불교의 인식론과 논리학에 해당하는 인명학(因明學, Hetu-vidyā)을 중시한다는 점도 티베트 불교 교학의 특징이다. 인명학은 수행체계와 견해, 사상을 익히는 데 반드시 필요한 기초일 뿐 아니라, 명상과 같은 실수행에서 얻은 깨달음이 정합적(整合的)이고 올바른 인식을 통해 얻은 깨달음인지 점검할 때도 필요하다.

한국 불교에는 과거 통일신라시대 때 원효, 원측 등이 인명학 관련 논서를 남겼지만,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인명학 전승이 사라졌다. 한국불교와 티베트불교의 차이는 인명(因明)과 밀교(密敎)에서 드러난다고도 할 수 있다. 인명과 밀교는 인도 후기대승불교 시대를 이끌었던 마차의 양 수레바퀴로 각각 진리탐구를 위한 분석적, 철학적 도구인 이론과 대승불교 유가행의 완성이다.

인명학은 디그나가(Dignāga, 480~540)와 다르마끼르띠(Dharmakīrti, 7세기)가 확립했다. 불교의 진리를 논리적으로 탐구하는 모든 과정은 인명의 범주에 포함된다. 디그나가와 다르마끼르띠는 불교의 인명논리학을 집대성하여 종(宗), 인(因), 유(喩)로 이루는 삼지작법(三支作法)을 확립했고, 이후 오지작법의 논쟁 방식이 점차 정립되었다.

《인명칠론(因明七論)⟫ 혹은 《칠부량론(七部量論, Pramanavartikadisapta-grantha-samgraha)⟫은 다르마키르티가 디그나가의 《집량론(集量論, Pramāṇa-samuccaya)⟫를 주석한 (1) ⟪양평석(量評釋, Pramāṇavārttika)⟫, (2) ⟪정량론(定量論, Pramāṇaviniścaya)⟫, (3) ⟪이적론(理滴論, Nyāyabindu)⟫ (4) ⟪인적론(因滴論, Hetubindu)⟫, (5) ⟪관계론(關系論, Saṃbandhaparīkṣā)⟫, (6) ⟪쟁리론(諍理論, Vādanyāya)⟫, (7) ⟪오타론(悟他論, Saṃtānāntarasiddhi)⟫ 등 일곱 가지 주석서를 총칭하는 말이다.
정성준, 《티베트대장경의 번역과 영향》

티베트 불교의 인식논리학과 언어철학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스위스 로잔 대학의 파스칼 위공(Pascale Hugon)이 작성한《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의 항목에 나와 있다.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참조할만한 국내 자료로는 겔룩빠 강원의 초등교육과정에서 배우는 논리학 입문서인 《뒤다(두라)(bsDus grwa)》일부를 게시 텐진 남카스님이 번역한 《논리에 이르는 신비로운 열쇠: 뒤다체계의 논리방식》와, 이와 관련된 논문인 최경진, 《티벳불교 승원의 논리학 입문서 두라(bsDus grwa)의 연구》등이 있다. 또한 겔룩빠의 학승 뺀첸 쐬남 닥빠(pan chen bsod nams grags pa)가 지은 불교논리학 개론서 《논리학-일체법을 비추는 거울(rtag rigs kyi rnam gzhag chos kun gsal b'i me long)》을 근간으로 범천스님이 재구성한 《불교논리학의 향연》도 있다.

2.7. 자비심과 보리심의 강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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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불보살의 자비의 총체인 관세음보살[15]


티베트 불교는 대승 불교로서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을 강조한다. 보리심의 원인으로는 자비심(慈悲心)과 출리심(出離心)을 들 수 있다. 자비심이란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심(慈心, metta)과 모든 중생이 고통을 여의기를 바라는 비심(悲心, karuna)을 뜻한다. 그리고 출리심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해탈을 염원하는 마음이다. 자비심과 출리심을 원인으로 하여 모든 중생을 윤회의 고통에서 구제하고자 부처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보리심을 갖게 되며, 이러한 보리심(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유정(有情)을 보리살타, 즉 보살(bodhisattva)이라고 한다.

2.7.1. 세속 보리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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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대비행(大悲行)과 중생 구제의 사업을
상징하는 따라(Tara) 보살[16]


진리를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의 두 차원으로 설명하는 이제론(二諦論)에 입각하여 보리심도 세속(世俗) 보리심(상대적 보리심, saṁvṛiti cittotpāda)승의(勝義) 보리심(절대적 보리심, paramārtha cittotpāda)으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승의 보리심이란 곧 공성(空性)을 말한다. 반야 지혜를 증득하여 공(空)과 자비가 둘이 아닌(不二) 경지, 개념을 초월한 무연자비(無緣慈悲)를 의미한다. 세속 보리심이란 공성을 아직 완전히 증득하기 전, 보살이 처음 발심하여 대승의 자량도(資糧道)에 입문할 때 자비심을 원인으로 하여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보리심이다.

일반적으로 보리심이라면 주로 세속 보리심을 뜻한다. 로종(lojong) 수행도 주로 세속 보리심을 개발하는 수행이다. 그러나 세속 보리심의 토대는 승의 보리심이며 궁극적으로 세속 보리심과 승의 보리심은 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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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타락시타의 제자이자 날란다 사원의 12대 학장
까말라쉴라(Kamalaśīla)


까말라쉴라는 《수습차제》에서 세속 보리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세속 보리심이란 연민심으로 모든 중생을 확실하게 고통에서 건져내기로 서원한 다음, '중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깨달음을 이루리라!'라고 생각하면서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보리를 염원하는 마음의 작용으로, 첫 마음을 일으키는 것(초발심初發心)이다.

세속 보리심은 또한 《보살지》의 〈계품〉에서 보여준 의궤에 따라 보살의 율의에 청정하게 머무는 스승에게서 보리심계를 받아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와 같이 세속 보리심을 일으킨 후에는 승의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한다."

《수습차제》의 설명과 같이 세속 보리심은 다시 원보리심(願菩提心)행보리심(行菩提心)으로 나눌 수 있다. 원보리심은 모든 중생을 돕기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려는 소망이다. 그리고 행보리심은 원보리심을 실제로 이루기 위해 보살계와 바라밀, 사섭법 등을 실천함을 의미한다.

원보리심과 행보리심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보살계(보리심계)를 받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불법승 삼보께 귀의하는 삼귀의계와 성문승의 별해탈계(別解脫戒)[17]를 수지한 상태에서 보살계맥을 여법히 수지하고 있는 청정한 스승에게 보살계를 받아야 한다.

티베트 불교의 보살계는 18개의 근본 계율과 46개의 보조 계율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계율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여러 경우에 걸쳐 가르친 계율이며 산스크리트어 경전에 산재해 있었다. 이를 아상가(Asaṅga), 샨티데와(Śāntideva), 짠드라고민(Candragomin) 등이 수집하여 구성한 보살계율이 지금의 티베트 불교에서 따르는 보살계이다. 대체로 《유가사지론》 〈계품〉의 보살계와 《입보살행론》, 《대승집보살학론》 의 보살계를 통합하여 구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8]

다음은 보살계를 받을 때 보리심을 발한 제자가 스승 앞에서 서원하는 의식문 중 하나이다. "나와 남의 뜻을 이루기 위해 보리심을 일으키겠습니다."는 원보리심에 해당하며, "최상의 보리심을 일으켜 일체 중생을 나의 귀한 손님으로 여기고 최고의 보살행을 하겠습니다."는 행보리심에 해당한다.

《원보리심과 행보리심 일으키기》
삼보께 제가 귀의합니다.
모든 악업을 참회하며
일체중생의 선업을 수희찬탄하고
마음에 부처의 깨달음을 지니겠습니다.

불법승 삼보에 완전한 깨달음 얻을 때까지 제가 귀의합니다.
나와 남의 뜻을 이루기 위해 보리심을 일으키겠습니다.

최상의 보리심을 일으켜 일체 중생을 나의 귀한 손님으로 여기고
최고의 보살행을 하겠습니다.
모든 중생 돕기 위해 부처 이루게 하소서.


보살계를 받은 수행자는 18개 근본 계율과 46개 보조 계율을 지키며 육바라밀과 사섭법을 배우고 실천한다. 아래는 10대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었던 게쉐 체왕 쌈둡(Geshe Tsewang Samdrup)이 보살계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한 논서인 《보살계율보만》이다.

【《보살계율보만》 펼치기 · 접기 】보살계율보만(菩薩戒律寶鬘)

체왕 쌈둡 린뽀체 (Geshe Tsewang Samdrup) 지음

불보살님들께 예경합니다.

1. 보살계 받는 방법

불보살님들께 예경하고, 정성껏 공양 올린 후, 일체중생을 위해서 모든 복덕의 보고(寶庫)인 보살계를, 보살계에 머물고 보살의 경장(經藏)에 해박하며 제자를 기를 역량을 갖춘 스승에게 청하여 받도록 한다.

2. 보살계를 호지(護持)하는 방법

보살의 경장과 주석 등에 해박한 올바른 선지식을 법답게 의지하여 보살계의 내용들을 알도록 하며, 특별히, 18근본타죄(根本墮罪)와 46악작(惡作)을 알도록 한다.

(1) 18근본타죄

1) 자찬(自讚)과 타인 비방의 타죄 : 이익과 공경 받는 것을 탐해서 자신을 칭찬하고, 공덕을 갖춘 남을 비방하는 것.

분류하면, 자찬의 타죄와 타인 비방의 타죄 두 가지가 있다.

2) 법(法)과 재물을 베풀지 않은 타죄 : 괴로운 이나 의지할 곳이 없는 이들에게 자신의 법과 재물을 줄 수 있으면서도 인색함으로 인해 주지 않는 것.

분류하면, 법을 베풀지 않은 타죄와 재물을 베풀지 않은 타죄 두 가지가 있다.

3) 참회해도 듣지 않고 꾸짖은 타죄 : 다른 이가 자신에게 용서를 비는 등 법도에 맞게 사과하는데도 듣지 않고 성난 몸짓과 말로 대응하는 것.

분류하면, 꾸짖은 타죄와 사과 받지 않은 타죄 두 가지가 있다.

4) 대승(大乘)을 버리고 유사법(類似法)을 설시(說示)한 타죄 : 보살의 경장에 대해 ‘이것은 불설(佛說)이 아니다.’라는 등으로 배척하고 유사법을 좋아하고 남에게 설시하는 것.

분류하면, 대승을 버린 타죄와 유사법을 설시한 타죄 두 가지가 있다.

5) 삼보(三寶)의 재물을 빼앗은 타죄 : 삼보에 돌아갈 물건을 자신에게 권한이 없음을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훔치거나, 남을 시켜 훔치거나, 빼앗거나, 방편을 써서 얻는 것.

분류하면, 불보, 법보, 승보의 재물을 빼앗은 타죄 세 가지가 있다.

6) 정법(正法)을 배척한 타죄 : 도(道)의 가르침을 완전히 설시(說示)한 삼승(三乘)의 경장(經藏)에 대해 ‘이것은 불설(佛說)이 아니다.’라고 비방하는 것.

분류하면, 삼승(三乘) 각각의 경장을 배척한 타죄 세 가지가 있다.

7) 승복을 빼앗은 등과 퇴속시킨 타죄 : 계율을 지니거나 지니지 않은 출가자에게 악의로써 승복을 빼앗거나 때리거나 감옥에 집어넣거나 퇴속(退俗)시키는 등의 행위.

분류하면, 승복을 빼앗은 등의 타죄와 퇴속시킨 타죄 두 가지가 있다.

8) 무간죄(無間罪)의 타죄 :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라한을 죽이거나 승단을 분열시키거나 여래(如來)의 몸에서 악의로 피를 내게 하는 등의 오무간죄.

분류하면, 오무간죄의 다섯 가지가 있다.

9) 전도견(顚倒見)을 취(取)한 타죄 : 인과(因果)나 윤회 등을 없다고 보는 것.

10) 마을 등을 파괴한 타죄 : 마을이나 도시, 지역, 국가 등을 파괴하는 것.

분류하면, 마을을 파괴한 타죄 등 네 가지가 있다.

11) 마음을 닦지 않은 이에게 공성(空性)을 설시(說示)한 타죄 : 공성을 설시할 근기가 아닌 대승(大乘)의 발심자에게 공성을 설시하여, 두려움으로 인해 발심에서 물러나 소승(小乘)의 마음을 내게 하는 것.

12) 완전한 보리(圓覺)로부터 물러나게 한 타죄 : 완전한 보리에 발심한 이에게 ‘육바라밀행과 성불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성문, 독각의 발심을 하면 윤회로부터 벗어나기가 더 쉽습니다.’라는 따위의 말을 해서 그 대상이 완전한 보리의 발심으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것.

13) 별해탈계(別解脫戒)를 배척한 타죄 : 별해탈계에 법답게 머무는 이에게 ‘별해탈계가 청정하면 뭐합니까? 원만한 보리에 발심하고 대승으로 돌아오십시오. 그리하면 삼문(三門)의 일체 악행이 소멸하게 됩니다.’라는 따위의 말을 하여, 그 대상이 별해탈계를 버리게 하는 것.

14) 소승(小乘)을 통해서는 탐진치 번뇌를 끊을 수 없다고 본 타죄 : 성문(聲聞), 독각(獨覺)의 승(乘)을 아무리 배워도 번뇌를 남김없이 끊을 수 없다고 비방하고, 성문, 독각의 깨달음으로써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는 것.

15) 전도설(顚倒說)의 타죄 : 이익과 공경을 받기 위해 대승(大乘)을 드러내고, 독송하고, 설시(說示)하면서, 자신은 이익과 공경 받는 따위를 보지 않는 대승의 수행자이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등의 말을 하거나, 공성(空性)을 설시(說示)하면서 ‘이것을 명상하십시오. 그리하여 공성을 현량(現量)으로 요해(了解)하면 저와 같이 될 것입니다.’라는 따위의 말을 해서 상대방이 그 의미를 알아듣는 것.

16) 삼보로부터의 압수물을 받아 취(取)한 타죄 : 왕이나 대신(大臣) 등이 삼보에게서 압수한 재물이나, 승단이나 비구로부터 벌칙으로 압수한 물건 등을 자신에게 바칠 때 받아 취(取)하는 것.

17) 지(止)를 배척하여 선정(禪定)을 닦는 이의 물자를 송경자(誦經者)에게 주는 타죄 : 지(止)에 집중하는 선정 수행자를 혐오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줄 물자를 가져다 송경자들에게 주는 것.

18) 보리심을 버린 타죄 : 보리심을 잃어버리는 것.

아홉 번째 전도견을 취한 타죄와, 열여덟 번째 보리심을 버린 타죄 이 두 가지는 타죄가 성립하는데 사전(四纏:네 가지 얽힘)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나머지 열여섯 가지는 사전(四纏)을 필요로 한다.

사전(四纏)이란, 1.그러한 행위를 여전히 하고자 하는 것, 2.(그러한 행위에 대해) 무참무괴(無慙無愧:부끄러움이 없는 것), 3.(그러한 행위를) 좋아하고 만족하는 것, 4.(그러한 행위를) 허물로 보지 않는 것 등이다.

네 번째에다 앞의 세 가지가 모두 갖추어지면 대전(大纏:큰 얽힘), 네 번째에 다른 두 가지나 한 가지를 더하거나 네 번째 것만 있으면 중타(中墮:중간 타락), 앞의 세 가지만 있으면 소타(小墮:작은 타락)이다. 열여섯 가지 타죄의 항목을 범해도 대전(큰 얽힘)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중타나 소타에 속하는 타죄(墮罪)이므로, 그것들은 근본타죄의 부속(部屬) 악작(惡作)이 된다. (보살계를 완전히 소실하게 되는 경우는 대전, 전도견, 보리심 방기 등 세 가지 경우이다.)

(2) 46악작

1) 삼보(三寶)에 삼문(三門)으로 공양하지 않은 악작 : 삼보에 몸으로 절, 입으로 예찬, 마음으로 신심(信心), 이러한 삼문(三門)의 공양을 하지 않고 하루가 지난 것.

2) 탐욕을 따른 악작 : 자신의 큰 욕망과, 만족할 줄 모르는 것과, 재물과 명예에 대한 탐착 등을 제지하지 않는 것.

3) 선수계자(先受戒者) 불공경의 악작 : 공경 받을 만한 공덕을 갖춘 보살 선수계자를 공경하지 않는 것.

4) 질문에 올바르게 대답하지 않은 악작 : 다른 이가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좋게 질문함에, 성냄이나 나태함으로 인해 올바르게 대답하지 않는 것.

5) 초청에 응하지 않은 악작 : 다른 이가 음식이나 의복 등을 공양하기 위해 초청함에, 아만이나, 악의, 성냄이나 나태함으로 인해 가지 않는 것.

6) 귀금속 등을 받지 않은 악작 : 시주(施主)가 금은 등의 갖가지 보배를 공양함에, 악의나 성냄이나 나태함으로 인해 받지 않는 것.

7) 법(法)을 구하는 이에게 법을 주지 않은 악작 : 법을 구하는 이에게 악의나 성냄, 질투나 나태함으로 인해 법을 주지 않는 것.

- 이 일곱 가지는 섭선법(攝善法)인 보시바라밀과 관련된 악작이다.

8) 범계자(犯戒者)들을 버린 악작 : 무간죄(無間罪)를 짓거나 근본타죄를 범한 이들에게, 그러한 이유로 악의나 성냄이나 나태함으로 인해 섭수(攝受)하지 않고 멸시하는 것.

9) 상대방의 신심을 이유로 올바로 가르치지 않은 악작 : 상대방의 마음을 붙들기 위해서, 율장의 가르침을 성문(聲聞)들과 같이 가르치지 않는 것.

10) 중생을 위한 행위가 작은 악작 : 율장에서 ‘보시 받은 옷을 열흘이 넘도록 가지고 있지 말라.’는 등의 차계(遮戒)[19]의 타죄 등을 보살이 성문(聲聞)처럼 배울 필요가 없음에도 그(성문)와 똑같이 배우는 것.

11) 자비(慈悲)를 행하지 않은 악작 : 보리심을 갖추고 보살의 율의를 법답게 배우는 이는, 다른 이를 위한 어떤 특별한 경우에 살생 등의 일곱 가지[20]가 허용되는 때가 있는데도 그러한 때에 하지 않는 것.

12) 삿된 생계(邪命)를 감수한 악작 : 궤사(詭詐)[21], 허담(虛談)[22], 현상(現相)[23], 방편연구(方便硏求)[24], 가리구리(假利求利)[25] 등의 다섯 가지 삿된 생계(五邪命) 중의 하나를 감수하고, 그것들의 대치법(對治法)에 의지하지 않는 것.

13) 지나치게 산란한 악작 : 여러 생각들을 일으켜 산란하게 장난치고 소란 피우며, 남 또한 산란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

14) 윤회 일로(一路)로 생각한 악작 : ‘보살들은 열반을 좋아하지 말고 그것(열반)을 뒤로 하며, 번뇌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번뇌)들로부터 마음을 너무 멀리하지 말지니, 삼대무량겁을 윤회하며 원만한 보리를 구해야 한다.’고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

15) 나쁜 소문의 소지를 없애지 않은 악작 : 자신에 대해 부정(不淨)한 말이나 그러한 말이 나올 조짐과, 나쁜 이야기가 생겨날 소지가 자신에게 있는데도 그것을 제거하지 않는 것.

16) 번뇌를 고쳐주지 않은 악작 : 어떤 이의 몸과 말의 악업들을 엄한 벌로 고칠 수 있음을 보면서도 단지 그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서 엄한 방편으로 고쳐주지 않는 것.

- ‘범계자들을 버리는 악작’으로부터 여기까지 아홉 가지는 지계바라밀과 관련된 악작이다.

17) 사사문법(四沙門法)을 여읜 악작 : 다른 이가 자신에게 욕하고, 성내고, 때리고, 허물을 들추어내는 등의 네 가지 행위에 대해 대항하는 것.

18) 성난 이들을 버린 악작 : 자신이 남에게 잘못 했거나 남이 했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악의나 아만, 나태함으로 인해 법도에 맞게 오해를 풀어주지 않는 것.

19) 타인의 참회를 거부하는 악작 : 다른 이가 자신에게 잘못 한 것에 대해 법도에 맞게 사과하는데도 원한이나 악의 또는 용서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인해 사과 받지 않는 것.

20) 성난 마음을 따르는 악작 : 다른 이에 대한 성난 마음에 빠지고 지니는 것을 ‘허물로 보지 않는다.’라며 감수하는 것.

- 이상은 인욕바라밀과 관련된 악작이다.

21) 공경받기 위해서 주변인들을 모은 악작 : 이익, 공경, 시봉 등을 바래서 주변 사람들을 모으는 것.

22) 나태함 등을 제거하지 않은 악작 : 잠에 탐착함과 나태함으로 인해 중야(中夜) 이외 낮과, 상반야(上半夜), 하반야(下半夜)에 잠의 안락, 마음을 방일하게 하는 안락, 잠자리에 눕는 안락 등을 감수하고, 제거하지 않는 것.

23) 탐착으로써 잡담한 악작 : 군신(君臣:정치), 도적, 여자 등의 잡스런 이야기들에 탐착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

이상 세 가지는 정진바라밀과 관련된 악작이다.

24) 삼매를 위해 행하지 않은 악작 : 마음을 집중하기를 원하는 이에게 악의나 나태함으로 인해서 삼매의 교계(敎誡)를 전수하지 않는 것.

25) 선정(禪定)의 장애를 끊지 않은 악작 : 선정에 방해가 되는 장애인 도거(掉擧:들뜸), 후회, 악의, 혼침, 욕구, 의심 중의 어느 것을 감수하고, 제거하지 않는 것.

26) 선정의 맛을 공덕으로 본 악작 : 선정의 안락을 탐하고, 그것을 향수하는 것을 공덕으로 보는 것.

이상 세 가지는 선정바라밀과 관련된 악작이다.

27) 성문승(聲聞乘)을 배척한 악작 : 성문의 경장을 듣고, 의미를 새기고, 배우는 등은 소승에는 필요하지만 보살에게는 필요 없다고 보고, 남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28) 자신의 할 일을 버리고 다른 것에 애쓴 악작 : 보살의 경장(經藏)에 애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버리고 성문(聲聞)의 경장에 애쓰는 것.

29) 애쓰지 말아야 할 외도(外道)의 논서(論書)에 애쓴 악작 : 부처님의 가르침에 애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고 외도의 논서에 애쓰는 것.

30) 애쓸 것이지만, 그것을 좋아한 악작 : 필요에 의해서 외도의 논서에 애쓸 필요가 있지만, 처음과 끝, 중간 모두 좋아하며 배우는 것.

31) 대승을 배척한 악작 : 보살의 경장 중 어느 것에 대해서, 내용이 하찮다든가, 저자(著者)가 하찮다든가, 중생에게 이익 되지 않는다는 등의 비방의 말을 하는 것.

32)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폄훼한 악작 : 아만이나 성냄으로써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폄훼하는 것.

33) 법(法)을 위해 가도록 하지 않은 악작 : 아만이나 나태함으로 인해서 설법과 법담(法談) 등을 하지 않는 것.

34) 설법자를 무시하고 글자에 의지한 악작 : 자신에게 법을 설해주는 이를 부처로 관상(觀想)하며 공경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비방하고, 설법의 의미보다 말에 의지하는 것.

이상 여덟 가지는 지혜바라밀과 관련된 악작이며, 이 서른네 가지 악작은 섭선법(攝善法)인 육바라밀과 관련된 악작이다.

35) 필요한 도움을 주지 않은 악작 : 행위의 확립, 행도(行道), 학문(學文), 허물없는 일, 물자 보존, 재계(齋戒), 잔치, 복 짓기 등의 어느 것을 도울 수 있는 때에 성냄이나 나태함으로 인해 돕지 않는 것.

36) 병자를 시중들지 않은 악작 : 병자에게 시중을 들 수 있는 때에, 성냄이나 나태함으로 인해 시중들지 않는 것.

37) 고통을 제거하도록 하지 않은 악작 : 벙어리, 귀머거리, 장애자, 길에서 지친 이, 오개(五蓋)[26]로 괴로운 자, 악의 따위의 분별로 괴로운 자, 다른 이에게 무시당해 괴로운 자 등의 일곱 가지 중에서, 성냄이나 나태함으로 인해 그 고통들을 제거할 방편을 쓰지 않는 것.

38) 방일한 이에게 이치를 보여주지 않은 악작 : 나중을 위해서 도리에 맞지 않게 나아가는 중생에게, 성냄이나 나태함으로 인해 흠 없는 이치를 적용하는 도리를 법답게 보여주지 않는 것.

39) 보답하지 않은 악작 : 자신에게 이익을 준 이에게, 악의나 나태함으로 인해 보답하지 않는 것.

40) 남의 슬픔을 제거하지 않은 악작 : 종족과 헤어지거나 물자를 손실당한 슬픔에 처한 중생에게, 악의나 나태함으로 인해 그 슬픔을 제거하도록 하지 않는 것.

41) 물자를 원하는 이에게 보시하지 않은 악작 : 음식 등을 구하는 이에게 악의나 나태함으로 인해 주지 않는 것.

42) 주변을 위해 행하지 않은 악작 : 주변인들에게 악의나 나태함으로 인해, 교계(敎誡)를 주지 않거나, 신심 있는 재가 신도들에게 법구(法具)를 법답게 구해주지 않는 것.

43) 다른 이의 마음과 화합하지 않은 악작 : 악의나 나태함으로 인해, 다른 이의 마음과 화합하지 않는 것.

44) 공덕을 칭찬하지 않은 악작 : 악의나 나태함으로 인해, 다른 이의 공덕을 칭찬하지 않거나, 훌륭하게 말한 것에 대해 수희찬탄하지 않는 것.

45) 인연에 맞춰 벌하지 않은 악작 : 기를 꺾거나, 벌책하거나, 추방해야 하는 등의 때에 번뇌나 나태함으로 인해 그렇게 하지 않는 것.

46) 신통과 위엄 등을 보이지 않은 악작 : 자신에게 신통과 갖가지 능력이 있으면서, 경외심을 갖게 하거나, 신심을 내게 하거나, 계율을 수지하지 않은 자에 대한 신봉을 끊어주어야 할 때,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이상 열두 가지는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와 관련된 악작이다.

(3) 원(願)보리심의 학처(學處)에 어긋나는 악작 : 다른 이를 법(法)과 재물로써 기를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 다른 이에게 해를 입은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편을 갈라 탐진(貪瞋)을 일으키는 것, 성현(聖賢)에 의지하지 않고 들음(聞)과 사유(思)의 행을 버리는 것, 음식과 의복 등을 이용할 때 이타(利他)의 마음으로써 하지 않거나, 모든 선행을 발심(發心)과 함께 하지 않는 것.

(4) 다른 생(生)에서도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인(因) : 네 가지 흑법(黑法)을 끊고, 네 가지 백법(白法)을 취(取)하는 것.

1) 네 가지 흑법(黑法) : 스승이나 공양 대상 등을 일부러 거짓말로 속이는 것, 다른 이가 선행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게 만드는 것, 성냄으로 인해 보살을 비방하는 것, 어떤 중생에게라도 증상심(增上心)[27]에 어긋나는 기만을 행하는 것.

2) 네 가지 백법(白法) : 모든 중생들에게 농담으로라도 일부러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자신이 성숙시킬 수 있는 중생을 소승(小乘)에 들어가지 않고 원만한 보리에 향하게 하는 것, 모든 중생들을 부처님으로 관상하고 청정상(淸淨相)을 익히는 것, 모든 중생들에게 기만 없는 정직한 마음에 머무는 것.

3. 무너진 계(戒)를 되살리는 법

대전(大纏:큰 얽힘)을 갖춘 근본타죄와 원(願)보리심의 방기, 전도견 등의 경우에는 보살계를 다시 받아야 하며, 중타(中墮:중간 타락)의 경우에는 세 명 이상의 앞에서 참회하고, 소타(小墮:작은 타락)의 경우나 46악작을 범한 경우에는 한 명 앞에서 참회하도록 하며, 그 밖의 악작은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앞에서 참회하면 가장 수승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보살님들의 앞에서 참회한다고 믿으며 불상 앞에서 참회하도록 하며, 삼귀의(三歸依), 발심(發心), 참회(懺悔), 총참(總懺), 금강심(金剛心)을 수습(修習)하고 반복 염송하는 등으로써 참회하도록 한다.

모든 참회의 경우에 사대치력(四大治力)[28]을 갖춘 채로 해야만 한다.

- 포살 등 승가의 앞에서 회개(悔改)하는 법

삼배(三拜)하고 일어나 공경심으로 합장한 채, ‘승가의 보살님들이시여, 원만히 설한 근본타죄와 악작의 항목 중에 보살의 율의에 어긋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과실을 회개하는 의식(儀式)에 마음 써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쪼그리고 앉아(우슬착지가 아님)[29] 합장하고 다음과 같이 세 번 반복해서 말한다.

“시방(十方)에 계신 모든 불보살님들과 승가의 보살님들이시여 저의 말씀을 들어주소서. 저 보살 아무개(자신의 이름을 말한다.)는, 원만히 설한 근본타죄의 항목 중에 보살의 율의에 어긋나는 과실, 이익과 공경 받는 것에 탐착하여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비방한 것과, 괴롭거나 의지할 곳 없는 이들에게 인색함으로 인해 법과 재물을 주지 않은 것과, 다른 이가 참회해도 듣지 않고 성냄으로써 꾸짖은 것과, 대승(大乘)을 버리고 유사법(類似法)을 설시(說示)한 것과, 삼보의 재물을 빼앗은 것 등 보살이 근본타죄로 인정하는 18근본타죄의 항목을 범한 소타와 중타에 속하는 타죄와, 그와 유사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과실과, 원만히 설한 악작의 항목 중에서 보살의 율의에 어긋나는 과실, 삼보에 삼문으로 공양하지 않은 것, 탐욕을 따른 것 등 46악작의 항목에 속하는 타죄와 그와 유사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과실과, 보리심의 공덕을 하루 여섯 번 기억하지 않은 것과, 원(願)보리심을 하루 여섯 번 지니지 않은 것과, 중생구제를 포기한 것과, 두 가지 자량(지혜자량, 복덕자량)을 쌓는데 애쓰지 않은 것과, 네 가지 흑법(黑法)을 끊지 않은 것과, 네 가지 백법(白法)에 의지하지 않은 것과, 율의계(律儀戒), 섭선법계(攝善法戒),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 등을 배움에 애쓰지 않은 것과, 보시 등의 육바라밀을 배움에 애쓰지 않은 것과, 사섭법(四攝法)[30]을 통해 중생을 위해 애쓰지 않은 것과, 다른 이에게 법과 재물의 보시를 위해 애써야 할 때 애쓰지 않은 것과, 다른 이가 이익을 주거나 해를 끼친 상(相)을 마음에 두었다가 차별을 한 것과, 편을 가르는 마음으로 탐착하거나 성내고, 평등심(捨)을 흩어버리는 마음을 일으킨 것과, 성현(聖賢)을 가까이 의지하지 않은 것과, 보살의 깊고 광대한 경장(經藏)을 법답게 듣고 사유하지 않은 것과, 의식주 등의 행위에 이타(利他)의 마음으로써 하지 않은 것과, 보시 등의 육바라밀을 행할 때 이타심으로써 하지 않은 것과, 다른 이의 이익을 행하고 고통을 제거하는 가행(加行)에 애쓰지 않은 것 등 요약하면, 보살의 율의에 어긋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과실을 범했으니, 저 보살 아무개(자신의 이름을 말함)의 과실들을 시방에 계신 모든 불보살님들과 승가의 보살님들의 안전(眼前)에서 실토합니다. 숨기지 않습니다. 참회합니다. 이후로는 계를 잘 수지하겠습니다. 실토하고 참회하면 안락에 머물게 되지만, 실토하지 않고 참회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 번 반복하고 나서, 아사리께서 ‘이것들을 과실로 보았습니까?’라고 물으면, 참회자들은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다시 ‘이후로는 계를 잘 수지하겠습니까?’라고 물으면, ‘법과 율의에 맞게 지성(至誠)으로 정수리에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렇게 세 번 반복하고 난 후, 아사리께서 ‘선방편(善方便)입니다.’라고 말하면, 참회자들이 ‘선재.(좋습니다.)’라고 대답한다.

4. 지계(持戒)의 공덕

단기적인 공덕으로는, 부처님들께서 자식처럼 생각하시고, 죽을 때 무량한 선근(善根)에 의해 삼악도의 두려움이 없으며, 후생에 불보살님들과 만날 것을 생각하여 큰 기쁨을 얻고, 후생에 자신과 지견과 품행이 비슷한 보살이나 그보다 나은 선지식이 계시는 곳에 나며, 지계바라밀을 완성시키는 복덕이 무한히 생기고, 후생에도 계율을 수지하게 되는 등 공덕이 무한하다고 설하셨으며, 궁극적인 공덕으로는 이에 의지해서 지계바라밀을 완성하고 위없는 깨달음으로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2.7.2. 승의 보리심[편집]

앞서 설명하였듯이 승의(勝義) 보리심은 곧 공성(空性)을 뜻한다. 공(空)은 허무주의, 단멸론과는 다르다. 반야 중관의 가르침에 따르면 일체 만법(萬法)은 상호의존하여 발생(연기, 緣起)하므로 고정불변한 실체인 자성(自性, svabhāva)이 없으며(무자성, 無自性), 이를 공(空)이라고 한다. 상호의존하여 발생하고 작용하므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견(斷見)을 여의고,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으므로 상견(常見)을 여읜 중도(中道)이다. 달리 말하면 '연기즉공(緣起卽空)'이며 '공즉연기'라고 할 수 있다.

보살은 원보리심과 행보리심의 실천을 통해 공성에 대한 지혜를 얻어 승의 보리심을 획득한다. 승의 보리심을 획득하였을 때 보살은 집착과 애씀 없이, 개념을 초월하여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진정한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이룰 수 있다.

까말라쉴라는 《수습차제》에서 승의 보리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승의 보리심이란, 세간을 벗어난 것이며 모든 희론을 여읜 것이고, 극히 밝은 것이며, 수승한 의미의 영역이다. 오염이 없는 것이며, 흔들림이 없으며 바람 없는 곳의 버터불처럼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그것의 성취는 항상 공경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샤마타와 위빠샤나의 요가를 수습하여 익숙해짐으로써 이루어진다."

2.7.3. 사무량심 수행[편집]

달라이 라마는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에서 사무량심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무량심이란 자애, 연민, 기쁨, 평등(慈悲喜捨)이란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뜻한다. 이 네 가지 마음을 무량(無量)이라고 부르는 것은 먼저 편파성이 없으므로 무량한 중생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욕계심(欲界心)의 다섯 가지 장애[31]에 의해 제한되지 않은 선정 상태이기 때문이다. 초선(初禪)을 닦은 사람이 태어나는 범천(梵天)의 이름을 따서 사무량심을 사범주(四梵住)라고도 부르는데, 범천의 존재들의 마음은 온순하다.

사무량심은 《자애경(Metta-sutta)》과 《청정도론(Visuddhimagga)》 같은 빠알리 어 경론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수행이다. 상좌부 전승에 따르면 사무량심 명상만을 할 경우 다음 생에 범천(梵天) 등의 색계(色界)에서 환생할 수 있지만, 이 명상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삼법인(三法印)의 통찰을 위한 유연하고 집중된 마음(심해탈, 心解脫)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무량심 수행은 먼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네 가지 무량심을 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명상이 익숙해지면 사랑하는 사람, 중립적인 사람, 적(원수), 일체 중생 순으로 대상을 확대한다.

대승 불교에서 사무량심은 《보살장경(Bodhisattva Piṭaka sutra)》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사무량심은 보리심의 원인이 되는 마음이기 때문에, 보리심 수행에 앞서 먼저 사무량심을 수행한다.

티베트 불교에서 사무량심을 수행할 때 사용되는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모든 중생이 행복과 행복의 원인을 갖기를 바랍니다.
모든 중생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중생이 고통 없는 행복(해탈)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중생이 가까움과 멂, 애착과 증오 없는 평등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와 ~의 원인들"이라는 구절은 특별히 자애와 연민을 일으킬 때 덧붙인다. 이는 중생들이 업(業)과 인과(因果)의 법칙을 이해하고 깨달음으로 이끄는 가르침을 이해해서, 행복을 가져오는 원인들을 만들고 고통을 가져오는 원인들을 더이상 만들지 않기를 바라는 표현이다.

또 다른 형태는 다음과 같다.

모든 중생이 평등 속에 머물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그렇게 머물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들을 그렇게 머물게 만들 것입니다. 부처님,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십시오.

모든 중생이 행복과 행복의 원인들을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그것들을 갖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들이 그것들을 갖게 만들 것입니다. 부처님,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십시오.

모든 중생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들을 갖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들이 그것들을 갖지 않게 만들 것입니다. 부처님,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십시오.

모든 중생이 좋은 세계에 환생하고 해탈의 더 없는 행복을 잃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그것들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 그들이 그것들을 떠나지 않게 만들겠습니다. 부처님,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십시오.


위의 형태는 평등을 강조하는 사무량심(捨無量心)이 처음에 언급된다. 이는 나머지 자무량심, 비무량심, 희무량심이 특정 대상에게 편파적으로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또한 위의 형태는 (1) 소망 (2) 발원 (3) 결심 (4) 요청의 네 단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후술할 보리심 수행 가운데 하나인 ‘칠종인과법’의 요약이기도 하다.

《현관장엄론》에서는 사무량심이 선정(禪定)을 수반하지 않는 이상 무량한 마음이 아니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무량심에 대한 명상은 보리심을 증장하기 위해서 행해질 수도 있고, 선정을 개발하기 위해서 행해질 수도 있다.

상좌부 전승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사무량심만 수행하면 지혜가 발현되지 않아 범천에서 환생하는 수준에 그친다. 사무량심을 일으키는 주체인 나 자신과, 사무량심의 대상인 일체 중생과, 사무량심을 일으키는 행위 세 가지 모두 상호의존적이므로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공성(空性)에 대한 지혜가 수반될 때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2.7.4. 보리심 수행[편집]

티베트 불교는 보리심을 모든 수행의 동기로 삼을 것을 강조한다. 성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해탈로 이끄는 것이 목적임을 잊지 않게 한다. 또한 보리심을 단순히 강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리심을 키우는 구체적인 수행법이 존재하는 것이 특징이다. 보리심을 훈련하는 대표적인 티베트 불교의 전승으로는 로종(lojong)이 있다. '마음 다스리기'라는 뜻의 로종에는 보리심에 익숙해지는 방법으로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무착보살의 1) 인(因)과 과(果)에 대한 일곱 가지 가르침(칠종인과법)이고, 다른 하나는 용수보살의 2) 자신과 남들을 동등하게 생각하고 교환하는 것(자타상환법)이다. 칠종인과법과 자타상환법을 반복적으로 사유하고 고찰함으로써 자신의 심성이 보리심에 가까워지도록 수행한다.

1. 칠종인과법(七種因果法)
(1) 모든 중생이 수많은 전생 가운데 우리의 부모 아니었던 적 없는 것을 인식함.
(2) 그들이 우리의 부모였을 때 베풀었던 친절에 대해서 고찰함.
(3) 그들의 친절에 보답하고 싶어함.
(4) 부모였던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람.
(5) 부모였던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람.
(6) 모든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겠다는 위대한 결심.
(7) 그 결과 모든 중생을 위해 부처의 경지를 이루겠다는 보리심을 이룸

2. 자타상환법(自他相換法)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중생들 역시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기심과 자기 집착으로 남들을 희생시키며 죄책감과 근심, 두려움을 얻게 된다. 반대로 타인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행복을 원하면 행복한 타인들로 인해 자기 자신 역시 행복해진다. 따라서 자신과 남의 입장을 바꿔 자신의 행복에서 타인의 행복으로 목표를 전환하는 것을 자타상환법이라고 한다. 자타상환법을 장애없이 행하기 위해서는 나, 나의 것이 존재한다는 아집에서 벗어나는 무아(無我)와 나와 남이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의존적이라는 연기성(緣起性)을 인지해야 한다.

 

자타상환법과 관련된 티베트 불교 특유의 자비명상으로 통렌(tonglen)이라는 것이 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눈 앞에 있다고 시각화한 다음, 사랑과 자비, 행복 등 긍정적인 에너지를 날숨에 실어보내고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에너지와 고통을 들숨을 통해 대신 흡수하는 명상법이다. 이를 통해 남과 나 사이의 분별을 없애고 자비심을 키운다. 자기가 지은 업의 과보는 자기 자신이 받는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가 원칙이기 때문에 실제로 타인의 업을 대신 받지는 않으며 자비심의 증장을 목표로 수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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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란다 사원에서 《입보살행론》을 설한 샨티데바[32]


로종과 관련된 문헌으로는 《보행왕정론(보만론)(Ratnāvalī)》, 《보살지(Bodhisattvabhūmi)》, 《입보살행론(입보리행론)(Bodhicaryāvatāra)》, 《마음을 다스리는 8가지 게송(수심팔훈, 수심팔송)(Tib. བློ་སྦྱོང་ཚིགས་རྐང་བརྒྱད་མ་, lojong tsik kang gyéma; Wyl. blo sbyong tshigs rkang brgyad ma)》, 《수심칠요(Tib. བློ་སྦྱོངས་དོན་བདུན་མ་, lojong dön dünma, Wyl. blo sbyong don bdun ma)》, 《보살행37송(Tib. རྒྱལ་སྲས་ལག་ལེན་སོ་བདུན་མ་, gyalsé laklen so dün ma, Wyl. rgyal sras lag len so bdun ma)》 등이 있다.

3. 밀교[편집]

3.1. 개요[편집]

&amp;amp;lt;img class='wiki-image' width='100%' src='//ww.namu.la/s/c6412256cb3ea5ad7339de3583c5ca3b97066eadb3ddc4e6686b1c5b953b4b9d6f76dad1bcf212c55771e5867c0c585e9aa2f54dedcd64f4b409f5791574dbb7eec25f1b6b7cb56220d783973f33010dd20429b59579488295476b9a7db358252b7c1f556db10a43eab5e5dc6ee7683d' alt='파일:90706.jpg'&amp;amp;gt;

모든 불보살의 힘(力)의 총체이자
밀승의 가르침을 전하는 금강수보살(Vajrapani)[33]


인도불교의 최종단계라고 할 수 있는 밀교는 티베트 뿐 아니라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다른 국가로 전래되었지만 지금까지 법맥이 끊기지 않고 독자적인 밀교 종단이 유지되고 있는 곳은 티베트와 일본 뿐이다.[34] 일본에는 중기 밀교까지 전해진 반면 티베트에는 후기 밀교까지 전래되었다. 밀교부에 해당하는 방대한 경전들이 존재하며 또한 티베트 불교 종파별로도 각자의 독자적인 밀교 전승과 문헌을 갖고 있다.

밀교는 다른 말로 금강승(金剛乘, vajrayana)이라고 한다. '금강'이라는 것은 매우 견고하고 단단한 것을 뜻한다. 방편과 지혜를 분리시키지 않고 합일시켜 단단하게 하기 때문에 금강승이라고 한다. 금강승은 '방편승(方便乘, upayayana)'이라고도 한다. 바라밀다승보다 많은 선교 방편들을 구족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금강승을 '과승(果乘, phalayana)'이라고도 한다. 수행자가 과로써 도를 삼기 때문이다.[35]

금강승은 밀승(密乘, guhyayana)이라 칭하기도 한다. 반드시 엄격하게 비밀을 지키면서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밀교의 가르침과 수행은 비밀로 남아있어야 하며 밀교 수행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관정이나 금강승 수행에 대해서 남에게 알리거나 자랑해서는 안된다. 자칫 자기중심주의, 오만에 빠질 수 있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밀교란 무엇인가》

불교학자이자 티베트 불교 수행자인 최로덴(최원철)은 《티벳 불교의 향기》에서 딴뜨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딴뜨라(Tantra, rGyud)라는 용어는 밀교 경전들에 근거한 수행 전통을 말한다. 딴뜨라(Tantra)라는 말의 본뜻 역시 연속(連續) 계속(繼續) 본속(本續) 밀주본속(密呪本續) 비밀본속(秘密本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티벳어로는 ‘규(rGyud, 續)'라고 하는데, 이 역시 같은 의미이다. 딴뜨라의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로 관상(觀想)의 과정들, 의례절차, 상징들의 구체적인 묘사를 통한 깊은 철학적 의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들을 활용한 수행을 통하여 의식을 전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체계화되어 있다. 즉 ‘딴뜨라’는 모든 수행 양식과 관념들 그리고 다양한 상징물들과 함께 구전 전승되고 있는 의례 의식과 광범위한 경론들을 포괄하는 말이다.

3.2. 밀교의 기원과 역사 서술 방식[편집]

3.2.1. 전통적 관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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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강불(Vajradhara)과
84명의 마하싯다(mahasiddha)[36]


중암스님이 번역하고 증주(增註)한《밀교의 성불 원리》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금강승은 석가모니불의 보신불(報身佛)[37]인 지금강불(持金剛佛, Vajradhara)에 의해 설하여졌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강불은 오종성불(五種性佛)의 덕성을 하나로 모은 대보신불(大報身佛)로 밀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부처이다. 금강승의 가르침은 무상유가의 법기(法器)로 알려진 업과지(業果地)[38]의 남섬부주 유정들을 위해서 단지 한 생애에서 성불할 수 있도록 최상의 근기를 대상으로 설한 비밀의 방편도(方便道)로 설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무상요가부 딴뜨라의 가르침은 대승 가운데 대승이며 최상승법으로 일컬어진다.

특히 이 비밀 금강승의 가르침이 남섬부주에 출현한 것은 오로지 석가모니불의 시대이며, 과거의 연등불이나 미래의 미륵불 때는 금강승의 가르침이 설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인간 수명이 100세에 불과한 오탁악세에 출현한 석가모니불의 교화 대상인 현세의 남섬부주 중생들이 금강승의 큰 연분(緣分)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오직 과거의 현전왕불(現前王佛), 현세의 석가모니불, 미래의 문수사리불[39]이란 세 분의 부처가 출현한 세 겁 때의 중생들만이 금강승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그만큼 금강승과의 인연은 매우 희유한 인연이며 숙세의 매우 큰 선근 공덕 없이는 접할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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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드마삼바와 "나처럼 여기고 보라" 불상(佛象)[40]


티베트에 최초로 밀교를 전한 밀교의 대성취자(mahasiddha)이자 아미타불(Amitabha)의 화신으로 알려진 구루 빠드마삼바와(Padmasambhava)의 전기 《빼마 까탕》에서는 밀교와 만나는 희유한 법연(法緣)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귀담아 잘 들으십시오! 티베트의 선근자들이여!

비밀진언의 금강승이 출현하는 것은 희유한 일이니,
과거의 8억 4천만의 제불여래도 설하지 않았으며,
연등불께서 법륜을 굴리실 때도 설하지 않았으며,
미래에 오시는 제불여래들도 역시 설하지 않으니,
그 유정들이 밀교의 법 그릇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과거 겁초에 겁명(劫名)을 일체장엄이라 부르는 때,
현전왕불의 가르침에 밀법이 출현하였으며,
현재불인 석가세존의 교법에 밀교가 출현하였습니다.
다시 천만 겁을 지나 겁명을 꽃 장엄이라 부르는 때,
문수사리불이 출현하여 현재와 같은 시절이 도래할 때,
그 부처님께서 지금처럼 진언밀교를 선양하게 됩니다.
이 세 겁의 유정들이 밀교의 법기가 되기 때문이며,
이 세 겁이 아닌 시절에는 금강승이 출현하지 않습니다."


최로덴은 《티벳 불교의 향기》에서 딴뜨라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딴뜨라의 수행자들은 딴뜨라 수행의 전통이 대부분 석가모니(Sakyamuni) 부처가 직접 설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개중에는 가끔씩 다른 세상(타방他方)의 부처가 설한 것도 있으며, 말이 아닌 의식 속에서 전해진 것(意傳)이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것(心傳) 등 다양한 형태로 전해진 딴뜨라들이 있다. 티벳 불교 학자들 대부분은 이러한 주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일반적으로 역사학과 관련한 현대의 분과학문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내용을 다른 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석가모니의 입멸 이후, 최소한 천 년 동안, 불교 딴뜨라들이 출현한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본다.

이렇게 석가모니 재세시와 인도에서 딴뜨라가 꽃 핀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해 티벳 역사가들 중 17세기의 유명한 역사가인 따라나타(Taranatha) 같은 이들은, 석가모니가 재세시에 직접 딴뜨라의 가르침들을 전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에 사람들의 근기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단지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전승되고 나머지는 때가 되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감추어져 있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딴뜨라의 기원에 관한 이런 식의 설명은 현대의 학자들에게 큰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수많은 딴뜨라의 경전들이 언제 어디서 누가 편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딴뜨라를 직접 수행하는 사람들의 전통에서 보면, 딴뜨라는 한번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 확실한 법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그 전통을 따라 성취를 이루었고, 지금도 그 법맥을 따라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많은 딴뜨라의 경전에는 법맥의 전수자들이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딴뜨라의 법을 전해준 증거들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3.2.2. 현대적 관점[편집]

딴뜨리즘의 기원은 분명치 않다. 과연 현 시점에서 딴뜨리즘의 기원을 명확히 규명할 수 있을지 회의를 표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을 통해 딴뜨리즘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시카고대 교수인 크리스찬 웨더마이어(Christian K. Wedemeyer)의 저서 《Making Sense of Tantric Buddhism: History, Semiology, and Transgression in the Indian Traditions》와 불교학자 이용현의 논문을 참조하여 딴뜨리즘의 기원에 대한 학계의 주장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의 기원에 대한 주장들은 대개 한 쪽이 다른 쪽에 의존하였다는 ‘빌린 모델(a borrowing model)’과 두 딴뜨라 이면에 공통적인 근원이 존재한다는 ‘기층 모델(a substratum model)’의 두 양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 특히 요기니 딴뜨라들과 샤이바 딴뜨라들의 공통적인 토대로 일종의 ‘종교적 기층’이 존재한다는 가설은 20세기의 많은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종교적 기층'이란 아리안족의 인도 아(亞)대륙 진출 이전부터 존재하던("pre-Aryan") 토착 부족의 종교와 문화를 의미한다. 비(非) 아리안계 토착 부족들은 아리안 족의 진출 이후에도 주변부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존속하였다. 이들 부족들의 문화에 담긴 여신(女神) 숭배와 주술적 요소가 점차 아리안 족의 베딕(Vedic) 전통에 유입되었고 그 결과 힌두, 불교, 자이나교 등에 딴뜨리즘이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 가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옥스퍼드대의 알렉시스 샌더슨(Alexis Sanderson)에 의해 도전받았다. 샌더슨이 ‘종교적 기층’ 가설에 의문을 품는 직접적인 이유는 ‘종교적 기층’이라는 것이 결코 지각되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추론되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데에 있었다.

샌더슨은 우리가 딴뜨라로서 지각하는 것은 항상 샤이바 딴뜨라거나 바이슈나바 딴뜨라거나 불교 딴뜨라거나 혹은 어떤 구체적인 전통에 속하는 딴뜨라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종교적 기층’ 가설은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 특히 요기니 딴뜨라들과 샤이바 딴뜨라들의 많은 공통점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전혀 설득력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샌더슨은 비록 요기니 딴뜨라들이 다양한 의례 등 그 기원에 있어서 샤이바 딴뜨라들을 상당히 모방했지만, 요기니 딴뜨라들은 불교의 딴뜨라로서 샤이바 딴뜨라들을 배척하며 훌륭하게 기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샌더슨의 이론은 루에그, 스페라, 데이비드슨 등에 의해 비판받았다. 웨더마이어 역시 힌두 샤이비즘과 불교는 정치, 경제, 문화와 사회적 공간을 공유하며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였기에 불교 딴뜨리즘이 전적으로 힌두 샤이비즘(Śaivism)으로부터 유래하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어느 쪽이 옳든 간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라뜨나까라샨띠(Ratnākaraśānti)나 아바야까라굽따(Abhayākaragupta) 등 인도의 후기 딴뜨라 불교의 위대한 학승들이 요기니 딴뜨라들의 기원을 문제 삼은 자료가 지금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딴뜨라 불교가 적절한 불교적 의미를 주는 상징주의에 의존하면서, 이교적인 요소들을 흡수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명확한 의미가 그러한 요소들에 주어지면, 그들의 불순함은 제거되고, 그들은 불교의 이상을 표현하는 강력한 상징들로 탈바꿈하였다.
이용현, 《요기니 딴뜨라들의 기원에 대한 논쟁》

불교 딴뜨리즘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들은 불교 역사의 서술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19세기 근대 서구 학자들은 인도 불교의 쇠퇴와 불교 딴뜨리즘의 등장을 결부시켜 해석했다. 그들은 불교 딴뜨리즘이 힌두 샤이비즘에서 유래하였다고 규정하고, 샤이비즘적 요소의 도입이 불교 내부의 도덕적 타락과 정체성 상실을 초래하여 인도 불교가 쇠멸하였다는 서사 구조를 고안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에는 몇 가지 심각한 결함을 내포한다. 서구 학자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셈 족 종교(Semtic religions)의 개념으로 인도 종교를 해석하였다. 그 과정에서 시바 신앙, 비슈누 신앙, 브라만 신앙 등 다양하고 복잡한 인도 내 종교와 사상, 관습들이 '힌두교'라는 단일 종교처럼 취급되었고, 종교 간의 관계도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로 묘사되었으며 여성의 가치는 평가 절하되었다.

또한 '생성-발전-번성-소멸'로 이어지는 유기체적 역사관에 익숙했던 서구 학자들에게 딴뜨리즘의 성(性)적 요소는 서양 고전(古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문명의 쇠락 징조로 해석되었다. 딴뜨리즘은 일종의 성적 타락으로 치부되어 서구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도 불교 소멸의 원인으로 채택되었다.

불교 딴뜨리즘으로 인도 불교의 쇠락을 설명하는 서술 모델(model)은 20세기 초 완전히 정립되어 서구 학계에 만연하였고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일본과 한국에도 보편화되었다.

반면 인도 학자들, 특히 벵갈 출신 학자들은 딴뜨리즘을 불교의 등장 이전부터 존재하던 원시적(原始的)인 문화적 저류(undercurrent)와 연관시키는 정반대의 모델을 내놓았다. 이들의 주장은 딴뜨리즘이 아리안족 진출 이전부터 존재하던 인도 토착 부족 문화에서 유래하였다는 기원설을 기반으로 한다.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부족 문화는 아리안족의 침공 이후에도 '종교적 기층', 혹은 '저류'를 형성하여 유지되면서 주류 종교에 유입되었다. 그 결과 기존 종교의 성격과 달리 민중 지향적, 모계 지향적인 딴뜨리즘이 등장하게 된다. 서구의 낭만적인 성향을 가진 학자들도 이러한 인도 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한편 불교학자 정성준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대승 불교의 중관, 유식 논사들은 학자이자 동시에 밀교 수행자들이었다. 《유가사지론》으로 대표되는 유가행 이론의 완성 이후 이들은 유가행의 실천을 목적으로 밀교 의궤를 창안하였다. 또한 《대일경》, 《금강정경》과 같은 밀교 경전에 주석을 달았고, 바라밀승의 수학 이후 진언승을 수학하는 대승 교단의 현밀겸수(顯密兼修)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밀교의 교리적, 실천적 정통성을 보여준다.
정성준, 《인도밀교의 성립에 나타난 후기중관파와 밀교의 교섭 고찰》

학계의 오해와 통념과는 달리 밀교는 사상적 정통성을 바탕으로 인도 불교의 쇠퇴 이후에도 티베트 불교권과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400여 년간 발전해왔다. 현대에 티베트 불교 교단의 핵심 세력이 중공의 박해를 피해 인도로 망명 온 이후에도, 티베트 불교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보전되어 전세계로 전파되었다.

3.3. 밀교와 현교의 비교[편집]

쫑까빠는 "공성에 대한 견해, 모든 유정의 존재들을 위해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발심하는 의도(보리심), 육바라밀의 수행에 있어 현교와 밀교 양자는 차이가 없다." 하고 말하였다.

현교와 밀교는 공성(空性)이라는 견해를 지향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밀법에서 말하는 공성이라는 것도 결국 대승 현교에서 말하는 공성을 말하는 것이지 더 심오한 공성을 말한다거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교와 밀교의 공통된 수행도는 곧 보리심이다. 진정한 보리심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밀교의 수행승에 들어갈 수 있다. 보리심을 갖춰야 밀교에 박학다식하고 밀교의 수행을 겸비한 자격을 갖춘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밀법의 가르침을 수행할 수 있다.

현교와 밀교 사이에 보리심과 행위인 육바라밀에 있어서는 차이가 전혀 없다. 또한 현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과위와 밀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과위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부처의 과위에 이르기 위한 방편에 있어서는 현교와 밀교가 차이가 있다. 부처님의 과위, 불과(佛果)라는 것은 법신(法身)과 색신(色身) 두 가지로 양상을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법신과 색신을 성취하는 방편에 있어서 현교와 밀교의 차이가 있다. 현교에서는 법신을 이루는 지혜와 색신을 이루는 방편을 합일하여 수행하는 법이 없지만, 밀교에는 지혜와 방편을 합일하여 수행하는 법이 있다.

밀교 수행자는 스스로를 밀교의 본존으로 관상하여 단기간에 복덕을 쌓아 중생 구제를 위한 색신을 이룬다. 동시에 관상의 대상인 본존을 공성(空性)으로 인식하는 지혜로 법신을 이룬다. 만약 본존을 공성이 아닌 실재하는 무언가로 여긴다면 단지 사견(邪見)에 불과하다. 따라서 밀교 수행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공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또한 밀교에는 본존의 관상 뿐 아니라 신체 구성요소인 기(氣, prāṇa), 기맥(氣脈, nāḍi), 맥륜(脈輪, cakra), 명점(明點, bindu) 등을 활용하여 색신을 이루는 수행법이 있다.# #

&amp;amp;lt;img class='wiki-image' width='100%' src='//ww.namu.la/s/27708d7738f98c4bebed1da96e5e3ddf00ccea0fea762071b6fbb15398d8ccbe166958ada49e9d8872cb48631f6619e567959f5e7810a2559519cc9c2befd492de2810424946c41f819474fb410deee7f577912fd6c7ba8fe71cce863f640af7' alt='파일:200px-Chakras_and_energy_channels_2_(3749594497).jpg'&amp;amp;gt;

밀교에서는 신구의(身口意) 삼밀(三密)의 수행으로
현생(現生)에서 지금의 몸으로 부처가 되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이 가능하다고 본다.


어떤 이는 밀교부를 경. 율. 논 삼장(三藏)밖의 제4장(第四藏)으로 넣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삼장 안에 섭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밀교부는 경장(經藏)안에 넣는 것이 타당하다. 밀교부 안에 있는 대부분의 교리가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가운데 정학(定學)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율장은 주로 계학을 설하였고, 경장은 주로 정학을 설하였으며, 논장에서는 주로 혜학을 설하였다. 밀교부에는 주로 삼매를 성취하는 특별한 방편을 많으므로, 방편 법문을 주로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는 밀교부를 경장의 일부에 포함시켜도 될 것이다. 쫑카파도 《밀종도차제광론(sNgags rim chen mo)》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밀교부의 특별하고 심오한 법은 삼마지(三摩地)에서 비롯된다. 계학에서는 현교와 밀교가 약간의 차이가 있고, 공성을 증득하는 혜식(慧識)을 품류(品類)로 나누어 볼 때 혜학도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현교와 밀교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정학(定學)의 지(止) 관(觀) 쌍운법(雙運法)에서 구별할 수가 있다."

3.4. 밀교의 분류[편집]

티베트의 학자이자 역사가인 부뙨(Buton)은 밀교를 소작부 혹은 사부(所作部 혹은 事部, kriya tantra), 행부(行部, charya tantra), 유가부(瑜伽部, yoga tantra), 무상유가부(無上瑜伽部, anuttarayoga tantra) 등 네 부파로 분류하였다. 밀교 네 부파는 수행의례나 방법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소작부는 외적인 의례를 수행의 중심으로 삼고, 행부는 《대일경(大日經)》을 위주로 외적인 의례와 내적인 수행을 함께 중시하며, 유가부는 《금강정경(金剛頂經)》을 중심으로 오직 내적인 수행만을 중시한다. 무상유가부의 가르침은 인도 후기 밀교에 해당하며 비교하여 설명할 것이 없다. 네 탄트라의 수행은 상응하는 근기를 가진 수행자에 근거하여 나눈 것이지,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나눈 것이 아니다.

무상요가 딴뜨라는 방편 부(父) 딴뜨라, 반야 모(母) 딴뜨라, 부ㆍ모 양 딴뜨라의 쌍입(雙入)을 설한 불이(不二) 딴뜨라로 나뉜다. 방편 부 딴뜨라에 속하는 경전은 《비밀집회 딴뜨라(Guhyasamaja tantra)》와 《야만따까 딴뜨라(Yamantaka tantra)》가 대표적이며, 반야 모 딴뜨라는 《헤바즈라 딴뜨라(Hevajra tantra)》, 《챠크라삼바라 딴뜨라(Chakrasamvara tantra)》 등이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불이 딴뜨라는 《깔라챠크라 딴뜨라(Kalachakra tantra)》가 대표적인 경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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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겔룩빠 계통의 칼라차크라 만다라

3.5. 밀교의 수행 요건[편집]

현교, 다시 말해 바라밀승은 부처의 과위를 이루는데 삼아승지겁이 걸리는 반면 밀승을 수행하면 단기간 내에 자량(資糧)[41]을 쌓아 짧게는 한 생에도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티벳망명정부 총리를 역임한 삼동(Samdhong) 린포체는 방한법회에서 현교와 밀교를 도보와 고속철도에 비유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때 도보보다 고속철도가 훨씬 빠르지만 거쳐가는 길은 같다. 마찬가지로 밀교도 현교보다 짧은 기간에 성불할 수 있지만 중간 과정을 생략함 없이 거쳐 가는 과정은 동일하다.

밀교는 이처럼 단기간에 성불할 수 있는 수승한 가르침지만 아무나 밀교를 수행할 수는 없다. 밀교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이미 현교의 수행차제를 두루 섭렵하여 근기가 성숙된 이라야 하며, 오직 불과(佛果)를 증득하고 싶다는 의욕을 앞세우거나,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수승하다고 자만하여 밀교 수행에 접근하여서는 안 된다. 또한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탈을 염원하는 출리심, 다른 중생을 위하는 자비심과 보리심이 투철하고 공성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이어야 한다. 달라이 라마는 "오늘날 사람들이 금강승(밀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차제(次弟)에 따른 수행과 보리심의 획득, 공성에 대한 이해 없이 금강승 수행을 하는 것은 외도(外道)의 수행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수행의 결과도 얻을 수 없다." 하고 강조하였다.

오오타니대 교수인 출팀 껠상(Tsultrim Kelsang)과 마사키 아키라(正木 晃)는 《티벳 밀교》에서 밀교 수행 이전에 현교 수행을 마치는 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겔룩빠의 경우 20여년 간의 현교 수행을 제대로 마친 사람만이 아무리 젊어도 30대에서 40대 정도에 밀교에 입문하게 된다. 현교가 결여된 밀교 만으로는 자칫 체험지상주의에 빠져 자신의 체험만을 절대화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석가모니가 수행을 시작하였을 때도 각지의 스승을 찾아다녔지만 모든 스승들이 저차원의 경지에만 도달해있었음에도 그것을 고차원의 경지라고 굳게 믿고 있어 석가모니를 낙담시켰다고 불전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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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정을 주는 9대 캄뚤린뽀체 (Khamtrul rinpoche)
셰둡 니마 (Shedrub Nyima)


밀교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격을 갖춘 법맥스승으로부터 관정(灌頂, Skt. abhiṣeka, Tib. wang)구전(口傳, Skt. āgama, Tib. lung), 구결(口訣, Skt. upadeśa, Tib. tri)을 받아야 한다. 관정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법을 전해주고 전해받는 밀교의 독특한 의식이다. 이 의식을 통하여 밀교에 입문하려는 사람은 스승으로부터 밀교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또한 스승의 구전(口傳)을 통해 수행법을 전수받으며 수행법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인 구결 역시 전해듣는다. 밀교 수행을 성취하려면, 현교에서 요구하는 것 이상의 더욱 큰 스승에 대한 신심이 필요하다. 관정을 주는 스승을 본존의 현현으로 믿어야 하며 만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관정이 성립되지 않는다.

관정(Abhiṣeka)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허가관정(許可灌頂, jenang)이고 다른 하나는 관정(灌頂, wang)이다. 허가관정은 말 그대로 본존에 대한 간략한 성취법이나 명상을 허가받는 관정이다. 일반적인 관정이 궁극적으로 스스로 본존의 과위를 성취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허가관정은 본존의 공덕을 이어받아 단기간에 가피를 얻는 목적이 크다. 허가관정은 2~3일 간 열리는 관정에 비해 의식이 훨씬 간소하며 관정을 받고 지켜야 할 삼매야계와 수행 의무[42]의 부담도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따라서 허가관정은 대중적으로 많이 전수되고, 한국에서 열리는 티베트 불교의 관정법회 대부분도 허가관정이다. 허가관정을 통해 밀법과 본존에 인연을 맺으며 보리심의 종자를 심고 단시간에 많은 죄업과 장애를 소멸할 수 있다. 또한 관정을 주시는 아사리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는다. #

3.6. 밀교의 계율[편집]

밀교의 계율은 싸마야(samaya, 三昧耶)라고 부른다. 밀교의 수행에서 계율을 지키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관정은 먼저 계를 받고 이를 지킬 것을 맹세한 사람에게만 수여된다. 금강승의 밀교계는 매우 엄격하고 지키기 힘들다. 아띠샤(Atisha) 존자는 본인의 삶 중에 '비구계는 조금도 어김이 없이 지켰고 보살계는 간혹 지키지 못했지만, 밀교계를 어긴 것은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이 많다.'고 하였다. 아띠샤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밀교 수행자는 소승의 별해탈계, 대승의 보살계와 금강승의 삼매야계까지 모두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일반적으로 무상요가 딴뜨라의 밀교계는 '14가지 근본 밀교계'와 '18가지 부차 밀교계'로 분류하는데, 이러한 밀교계를 어기는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원인이 된다. 부차 밀교계를 어기는 것조차 비구계를 지키지 못한 것보다 18배나 무거운 과보를 낳는다고 한다. 따라서 금강승을 수행하기 전에 반드시 밀교계를 자세히 숙지하고, 관정과 밀교계를 받은 후에는 이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러한 밀교계를 지키지 못했을 경우에는 '근본타죄(根本墮罪)'를 범했다고 한다. 근본타죄에는 스승을 모욕함, 가르침을 경시함, 함께 금강승을 수행하는 도반과의 불화, 보리심과 공성의 포기 등이 있다.
딴뜨라의 계율

3.7. 밀교의 수행법[편집]

티베트 밀교 수행은 크게 생기차제(生起次第, utpattikrama)원만차제(圓滿次第, 혹은 구경차제究竟次第, sampannakrama)라는 두 단계를 구분한다. 두 차제는 모두 깨달음의 지혜을 얻기 위한 방편이다. 생기차제에서는 본존불 수행의 관상과 진언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인(因)을 심고 원만차제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 자리에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케 해주는 법이다. 원만차제에서는 중생과 부처가 둘인 상대적인 경계를 인정치 않는 지견(知見)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방편을 빌리지 않고 본연의 절대적 진리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다.

티베트 불교 안에는 각 파마다 고유한 전승을 가진 수행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공통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수행이 본존을 관하는 본존수행, 즉 본존요가(本尊瑜伽, devatabhisamaya)이다. 시방에 본래 존재하는 불보살은 본존불인 지혜존이 되며, 자신의 몸을 수행의 대상으로 정한 불보살과 똑같은 모습으로 관상하는 것은 삼마야존, 혹은 계율존(계율의 대상인 부처)이라 부른다.

자신인 삼마야존을 선명히 관상하여 본존 만트라를 염송하고 자신이 진실로 본존불과 똑같은 부처라는 자부심(佛慢)과 신심(信心)이 확고해졌을 때, 지혜존인 본존불과 상응할 수 있고 가피를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혜존과 삼마야존이 잘 상응하여 가피가 충만해졌을 때 자타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공성의 상태에 들어가는데, 이 단계를 원만차제의 단계라 한다. 이를테면 한 가지 수행 안에 생기차제, 원만차제가 다 포함된다. 다만 원만차제 수행만 할 때는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광명의 상태로 생기차제를 대신한다.

원만차제 수행을 대표하는 법으로 까규빠의 마하무드라(대수인) 수행과 닝마빠의 족첸(대원만) 수행을 들 수 있다. 두 수행 안에는 지관(止觀)의 두 수행을 다 포함하는데, 선종의 참선과 흡사한 면도 많이 있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에서 이러한 원만차제 수행은 스승이 직접 제자에게 자성의 본모습을 보게 해주고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제자가 근기가 익지 않았을 때에는 스승이 많은 방편을 빌려서 제자에게 자성의 본모습을 인지할 수 있도록 이끈다. 설오스님 티벳불교 수행기

4. 수행 체계[편집]

티베트 불교에는 날란다 사원 전통을 계승한 특유의 불교 교육 체계가 있는데 이를 장춥람림(Jangchub lamrim), 한역으로 보리도차제(菩提道次第)라고 한다. 이름을 풀이하면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매겨진 순서'라고 할 수 있다. 불법에는 완전하고 명료하게 의미를 드러낸 요의법(了義法)과 방편으로 설한 불요의법(不了義法)이 있다. 광대한 불법의 바다에서 대소승의 요의법만을 모아 간추린 요의법의 왕이 바로 《람림》이라고 할 수 있다. 《람림》에 의지하면 대승과 소승의 가르침을 모두 아우르면서도 헤매지 않고 수행이 가능하다. 밀교의 매우 깊은 가르침에 의지하여 한 생에 깨달을 수 있는지 여부도 《람림》의 내용을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한다. 《람림》의 내용은 크게 삼사도(三士道)지관(止觀) 수행으로 구성된다.
초펠스님, 《티벳 스승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묻는다면》

4.1. 연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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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설법 중인 아띠샤


흔히 《람림》을 '아띠샤'나 '쫑까빠'와 같은 티벳의 카담파(Kadampa) 스승들이 만들었다고 여기곤 한다. 하지만 티베트 불교에서는 《람림》의 가르침이 석가모니로부터 유래했다고 본다. 대승 불교 전승에 따르면 석가모니불로부터 유래한 두 갈래 법맥이 있다. 석가모니불-미륵보살-아상가(무착)으로 이어지는 도의 광대한 실천을 중시하는 법맥(갸첸쬐규)과, 석가모니불-문수보살-나가르주나(용수)로 이어지는 공성의 심오한 견해를 중시하는 법맥(상모따규)이다.

인도의 스승 아띠샤가 전자의 법맥은 스승 '쎌링빠'로부터, 후자의 법맥은 스승 '릭빼쿠주'로부터 이어 받아 두 법맥을 통합하여《람림》이라는 하나의 큰 물결을 이루었다. 이에 관한 논서로 《보리도등론(Skt. bodhipathapradīpa; Tib. བྱང་ཆུབ་ལམ་སྒྲོན་, changchub lam drön, Wyl. byang chub lam sgron)》이 있다.

아띠샤가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였지만 이후 담고 있는 분량에 따라서 '경을 자세하고 넓게 공부한 후 경에 의지해서 수행하는 자(까담슝빠)', '람림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자(까담람림빠)', '핵심적인 내용만 골라서 수행하는 자(까담담악빠)'라고 하는 세 갈래 법맥으로 다시 나뉘었다.

이를 다시 카담빠 전승의 후계자이자 겔룩빠의 창시자 쫑까빠가 통합하여 《보리도차제광론(Tib. ལམ་རིམ་ཆེནམོ་, Wyl. lam rim chen mo)》를 저술했다. 이 외에도 《람림》과 관련한 여러 논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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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옹화궁(雍和宮)의 쫑까빠 불상[43]

4.2. 특징[편집]

《람림》의 가르침에는 네 가지 큰 이익과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이하는 경론에 의거한 게쉬 툽텐 소남스님의 설명이다.

《람림》의 네 가지 큰 이익은 다음과 같다.

1) 부처님의 일체 교설에 모순이 없음을 알게 함.
2) 일체 교설을 진정한 가르침(요의법)으로 받아들이게 함.
3) 부처님의 견해를 속히 얻게 함.
4) 일체 죄업들이 저절로 소멸됨.[44]


또한 《람림》의 세 가지 큰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현교와 밀교의 일체 내용을 모두 담고 있음

2) 마음을 다스리는 순서를 우선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실천하기 매우 쉬움.
3) 용수와 무착의 교의에 정통한 두 스승(아티샤, 쫑카파)의 비전을 보충하였기에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 특별함.

그 밖에 경론에서 말씀하신 도(道)에 어긋남이 없는 정도(正道)를 말하며, 그것에 부족함과 과함이 없고 수행 자체에 그 어떤 오류도 없다. 또한 상근기 중생만이 아니라 하근기, 중근기 등 각 근기의 모든 중생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에 《람림》은 일체 교설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다.

4.3. 스승의 중요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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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적인 제자의 전범(典範)인
제쭌 밀라레빠(Jetsun Milarepa)


《람림》에서는 스승을 도(道)의 근원이라 하였다. 스승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제자 돔뙨빠가 인도에서 온 스승 아띠샤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티베트에서는 토굴 수행 등을 많이 하는데 공덕이 이루어지는 수행자가 많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자 아티샤는 "소승과 대승의 공덕들은 다 스승에 의지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너희 티베트 수행자들은 스승에 대해 평범한 인식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덕을 이루기 어렵다."라고 말하였다.

스승을 부처로 인식하면 부처의 가피를 받고 평범한 인간으로 인식하면 평범한 가피를 얻게 된다. 절대적인 차원의 견해로 보면 모든 부처와 마찬가지로 구루 또한 동일한 불성(佛性)을 갖고 있다. 상대적인 차원의 견해에서 스승에 대한 믿음과 헌신은 외적 스승을 부처로 보는 청정한 인식을 갖게 하여 절대적 차원의 불성을 깨닫게 하는 방편이다.

우리가 잘 모르는 길을 갈 때 길을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바르게 갈 수 있는 것처럼, 깨달음을 바르게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른 스승에 의지해야 한다.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다. 따라서 바른 스승을 찾고 바르게 의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쫑카빠가 말하였다.

빼뚤(Dza Patrul) 린뽀체의《위대한 스승의 가르침(Kun bzang bla ma'i zhal lung)》에서는 스승을 의지하기 전에 스승을 관찰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스승은 세세생생 귀의해야 할 대상이고 옳고 그름을 가르쳐주는 지도자이다. 만일 신중하게 관찰하지 않고 삿된 악지식(惡知識)을 만나면 평생의 선한 자량(資糧)이 악지식에 의해 사라지고 어렵게 얻은 인간의 생(生)도 헛되이 보내게 된다.

따라서 만일 어떤 선지식을 만났다면 그를 처음에는 법우(法友)나 도반으로 여기고, 경론의 가르침에 따라 6년, 10년, 12년 이상 관찰하며 바른 선지식이라는 확신이 생기기 전까지 함부로 스승으로 섬겨서는 안된다. 그리고 만일 스승으로 섬기게 되면 스승을 범부(凡夫)로 여기거나 함부로 흠잡는 일 없이 스승에 대한 청정한 인식을 유지해야 한다.

미륵보살의 《대승장엄경론(Mahāyānasūtrālaṃkāra)》에서는 선지식의 요건을 10가지로 말하였다.


1) 계학: 자기 자신을 조복함
2) 정학: 지(止, 샤마타)
3) 혜학: 인무아(人無我)의 지혜
4) 제자보다 뛰어난 공덕
5) 이타(利他)를 좋아하는 정진력
6) 교학: 경율론 삼장에 밝음.
7) 진여의 증득: 법무아(法無我)의 지혜
8) 언변이 좋음
9) 중생에 대한 자애심: 사랑과 자비로 법을 설함
10) 반복되는 설법을 싫어하지 않는 것.


10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계정혜 삼학과 진여의 증득, 중생에 대한 자애심 등 5가지 조건을 갖춘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그마저도 찾지 못하면 두어가지 조건이라도 충족하는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성천보살의 《사백론(Catuḥśataka)》에서는 제자의 조건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치우치지 않는 마음(편견이 없음)
2) 지혜(지성)
3) 구도심(求道心)


제자는 신심과 공경심으로 신구의(身口意) 삼문(三門)을 다해 스승을 섬겨야 한다. 선지식 스승을 모시는 법은 마명(馬鳴, Aśvaghoṣa)의《사사오십송(事師五十頌, 존중(존사)오십송, 尊重(尊師)五十頌, Gurupañcaśika)》 등 여러 대승 경론이 자세히 설명했다. 스승을 의지하는 수행법이 제대로 되면, 수행의 큰 문을 연 것과 같다. 이 때부터 제대로 수행의 길을 갈 수 있다.

4.4. 귀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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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의의 대상인 삼보(三寶)를 나타낸
람림 전승의 촉싱(tshogs zhing)[45]


다음은 《보리도차제광론》에 의거한 광성사 게시 소남 걀첸 스님의 법문 <불법에 들어가는 최상의 문, 귀의>의 요약본이다.

1. 귀의의 원인

귀의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두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다.

첫째, 윤회의 두려움 : 이 생에 우리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죽으며, 죽은 뒤에는 반드시 태어나고 이 태어나는 것은 업(業)에 달려있다. 선업의 힘이 적고 악업의 힘이 크면 지옥, 아귀, 축생 등 삼악도로 간다고 생각하여 악취(惡趣)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둘째, 삼보에 대한 믿음 : 삼악도에서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힘은 오직 불법승 삼보 밖에 없다는 믿음을 가슴 깊이 일으켜야 한다. 타 종교처럼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구제하는 것과는 달리, 삼보에 의지하는 가운데 스스로 수행하여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두 가지 원인을 깊게 사유하여야 하며 말로만 귀의해서는 안된다.

2. 귀의의 대상

1) 귀의의 대상이 삼보임을 안다는 것은 불법승의 정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불보 :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일체 공덕을 갖춘 분을 이름.
법보 : 멸성제와 도성제. 멸성제는 번뇌를 제거하는 가르침이고, 도성제는 공덕을 이루는 가르침이다.
승보 : 오도(五道) 중에 견도(見道) 이상의 깨달음을 얻은 보살.

 

2) 삼보가 귀의처인 이유

첫째, 삼보 자신부터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났고
둘째, 남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편에 뛰어나고
셋째, 일체 중생에게 차별없이 평등하게 대자비를 베풀고
넷째, 자신에게 이익이 되든지 안되든지 관계없이 모두의 뜻을 성취케 하기 때문이다.

3. 귀의하는 방법

 


1) 삼보의 공덕을 알고 귀의하는 것

① 부처의 공덕에는 신(身), 구(口), 의(意), 사업(事業)의 공덕이 있다.

- 몸의 공덕 : 32상(相) 80종호(種好)
- 말의 공덕 : 60가지 음성의 특징[46]
- 마음의 공덕 : 지혜와 자비의 공덕

  • 지혜의 공덕 : 승의제와 세속제 등 모든 법을 정확히 아는 공덕

  • 자비의 공덕 : 번뇌의 악습에 묶여 있는 중생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번뇌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대자비심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공덕.

- 사업의 공덕 : 부처의 신, 구, 의, 사업이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일체 중생에게 이익되게 하는 것.

② 법의 공덕은 멸성제와 도성제의 공덕이다.
③ 승가의 공덕은 깨달음의 단계인 보살의 오도(五道) 중에서 견도(見道) 이상을 얻은 성인(聖人)들의 공덕이다.

 

2) 삼보의 차이를 알고 귀의하는 것

: 삼보 각각의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귀의하는 것. 무착이 《집학론》에서 6가지 차이[47]에 대해 말한 것을 이해해야 함.

 

3) 삼보를 인정하고 귀의하는 것

: 불보는 구제할 수 있는 법을 보여주는 분, 법보는 실제로 구제해주는 법, 승보는 구제해주는 도반으로 인식해야 함. 예를 들어 환자가 병에서 낫고자 할 때 의사와 간호사와 약에 의지하는 것처럼, 중생이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벗어날 수 있는 법을 보여준 의사 같은 불보, 실제의 약에 해당하는 법보, 환자를 간호해주는 간호사 같은 도반인 승보에 의지해야 한다.

 

4) 외도(外道)와 불도의 귀의처의 차이를 알고 귀의하는 것

: 외도와 불도의 귀의처의 차이를 이해하고서 오직 삼보만이 중생을 구제할 수 있음을 알고서 귀의하는 것.

4. 귀의하고 나서 행해야 할 것


1) 행하지 말아야 할 것 3가지

① 불보에 귀의하고서 다른 귀의처를 구하지 않는 것.
② 법보에 귀의하고서 중생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③ 승보에 귀의하고서 나쁜 벗과 어울리지 않는 것.

 

2) 행해야 할 것 6가지

① 삼보의 차이와 공덕을 기억하고서 거듭거듭 귀의하는 것.
② 이익을 생각하고서 밤낮으로 귀의하는 것.
③ 은혜가 큰 것을 생각하고서 공양 올리는 것.
④ 남을 귀의하도록 이끄는 것.
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삼보에 의지하는 것.
⑥ 어떤 경우에라도 삼보에게 귀의하는 것을 버리지 않는 것.

5. 귀의함으로써 생기는 이익

① 불자(佛子)가 되는 것.
② 모든 계율의 토대가 되는 것.
③ 과거에 쌓은 업장을 줄이고 없애는 것.
④ 큰 공덕을 쌓는 것.
⑤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것.
⑥ 사람과 귀신으로부터 해침을 당하지 않는 것.
⑦ 모든 소원들이 이루어지는 것.
⑧ 속히 성불할 수 있게 되는 것.

4.5. 마음 동기[편집]

티베트 불교에서는 수행을 하기에 앞서 출리심, 보리심 같은 마음 동기를 강조한다. 마음 동기, 즉 의도에 따라 수행결과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승법을 수행하더라도 보리심을 발하지 않고 세속적 행복을 위해 수행하면 세속법이 되고, 자기 자신만의 해탈을 위해 수행하면 소승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수행이 끝난 후 회향(廻向)[48]을 할 때도 회향의 목적과 대상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이번 생만을 위해 회향하면 회향의 공덕도 이번 생이 끝나면 사라진다. 그러나 내생을 위해 회향하면 다음 생까지 공덕이 이어지고, 더 나아가 일체 중생의 무상정등각을 위해 회향하면 일체중생이 성불할 때까지 공덕이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늘어난다.

오명불학원(五明佛学院)의 켄뽀 출트림 로죠(Tsultrim lodro) 스님은 경전에 의거하여 마음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마음 동기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세 가지 동기란 선하지 않은 동기, 무기(無記)의 동기, 선한 동기를 말한다. 먼저 선하지 않은 동기란 이번 생만을 생각하고 이번 생만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동기이다. 다시 말해 이번 생의 부, 명예, 건강, 장수 등을 얻고 장애와 고통을 피하려는 동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기 자체는 죄악이 아니지만 번뇌를 제거하지 못한 유루(有漏)의 법이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의 원인이 된다. 이번 생만을 위하는 선하지 않은 동기로 수행하면 대원만이나 마하무드라 같은 최상승법을 수행해도 세간법과 다를 바 없으며 수행의 과보도 이번 생이 끝나면 사라진다.

무기(無記)의 동기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동기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방생의 공덕과 이익을 알지 못하면서 타인을 따라 무심코 방생에 동참하는 경우가 무기의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무기의 동기를 선한 동기로 바꾸라고 권한다. 무기의 동기일지라도 선한 동기와 무기의 동기와의 차이는 선한 동기와 선하지 않은 동기와의 차이보다 훨씬 작다.

선한 동기는 삼사도(三士道), 즉 하사도(下士道), 중사도(中士道), 상사도(上士道) 세 가지로 나뉜다. 하사도는 다음 생에 인간과 천상의 삶을 누리고 지옥, 아귀, 축생 등 악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다. 선하지 않은 동기와 하사도의 차이점은 같은 유루의 행복이라도 이번 생만을 위하는 마음이 아니라 다음 생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중사도는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출리심으로 다시 말해 소승불교의 성문, 연각의 발심이다. 상사도는 나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의 해탈성불을 바라는 보리심으로 대승보살의 발심이다. 중사도와 상사도의 차이는 자비심의 대소(大小)라고 할 수 있다.

4.6. 삼사도(三士道)[편집]

《람림》에서는 대승과 소승의 가르침을 모두 취합하여 불교수행의 순서에 맞추어 하사도(下士道), 중(中)사도, 상(上)사도의 삼사도(三士道)로 정리했다.

  • 첫 단계인 하사도에서는 윤회의 세계 속에서 향상하는 것, 즉 내생에 인간계나 하늘나라와 같이 좋은 세간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방법은 남에게 많이 베풀고 계율을 잘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세속의 길이다. 구체적으로 제행무상(죽음과 무상 사유), 윤회개고(삼악취[49]의 고통), 인신난득(사람 몸 얻기 어려움)[50], 인과응보(업과의 믿음), 귀의삼보 등을 익힌다.

  • 둘째 단계인 중사도에서는 윤회의 고통을 절감하고서 해탈, 열반을 추구한다. 계, 정, 혜 삼학의 수행을 통해서 번뇌의 뿌리를 뽑는다. 아라한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전문수행자의 길이다. 구체적으로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을 익힌다.

  • 셋째 단계인 상사도에서는 불교수행이 무르익어서 해탈과 열반이 멀지 않은 수행자가, 보리심을 발하여 열반을 유예하고서 윤회 속에 머물면서 성불의 그날까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삶을 살아간다. 대승보살의 길이다. 구체적으로 육바라밀, 사섭법[51] 등을 익힌다.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를 차례대로 세간도, 나한도, 보살도라고 부를 수 있다. 혹은 인천(人天)승, 성문연각승, 보살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느 누구라도 절차에 따라 첫 단계인 하사도부터 수행하여야 한다. 하사도 수행이 완성되어야 그 다음 단계인 중사도 수행에 들어갈 수 있고, 중사도 수행이 무르익어야 그 다음 단계인 상사도를 닦을 수 있다. 중사도의 수행자는 하사도의 심성을 갖추고 있고 상사도의 수행자는 하사도와 중사도에서 익혔던 심성과 통찰 모두 그대로 갖추고 있다. 이렇게 보리도차제의 수행은 누적적(累積的)이다.
김성철, 《불교, 정확하고 명쾌하고 자유롭게 - 보리도차제》
김성철, 《Systematic Buddhology와 『보리도차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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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도를 다시 그림으로 정리하면 위와 같다.

1) 하사도

: 다음 생에 인간, 천상과 같은 선취에 태어나고 지옥, 아귀, 축생 등 악도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수행의 목표이다. 이를 위해 십선법(十善法)을 행하고 십악업(十惡業)을 멀리 한다. 하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다음 생에 세속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고, 또한 해탈성불을 목표로 하는 수행자들은 다음 생에도 팔유가[52] 십구족[53](八有暇 十具足), 즉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을 갖출 수 있다.


2) 중사도

: 아라한이 되어 개인의 해탈열반을 얻는 것이 수행의 목표이다. 하사도의 십선법을 토대로 하여 교법(敎法)인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익히고 증법(證法)인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수행하여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는다.


3) 상사도

: 부처가 되어 일체 중생을 윤회의 끝없는 고통에서 구제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이다. 하사도의 십선법, 중사도의 계정혜 삼학을 토대로 보살승을 수행한다. 보살승에는 바라밀승과 금강승 두 가지가 있다. 바라밀승(현교)의 육바라밀(六婆羅蜜) 및 사섭법(四攝法)과 금강승(밀교)의 밀법(密法)을 수행하여 지혜와 방편을 갖춤으로써 부처의 과위(果位)에 이른다.


실제로는 단계별로 수행하더라도 되도록 처음 하사도부터 보살의 보리심(菩提心)[54]을 수행 동기로 삼을 것을 권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진정한 보리심을 내기 힘들지만 단계별 수행을 통해 세속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출리심(出離心)[55]을 갖게 되면서 점차 진정한 보리심을 발하게 된다.

언뜻 생각하기엔 윤회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출리심과 일체중생을 위해 열반을 유예[56]하고 윤회계에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보리심이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나 자신이 진정으로 윤회의 고통을 인식하고 윤회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생긴 후 다른 이들을 돌아보면, 그들이 겪을 윤회의 고통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자비와 연민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된다. 즉 보리심은 달리 표현하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체 중생에 이르기까지 크나큰 자비심을 발하여 출리심을 확충(擴充)한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교뿐 아니라 기독교, 유교 등 대부분의 종교와 사상에서 보편적으로 언급하는 황금률(Golden Rule), 즉 '나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남에게도 똑같이 행하라.'는 법칙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보리도차제의 핵심 주제들을 명상할 때 쓰이는 기도문이다. 티베트 불교의 명상 중에는 선정(禪定)에 들어 특정 주제를 깊게 숙고하는 쌰르곰(shar gom)이란 명상이 있다. 광성사 소남 걀첸 스님이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보리도차제의 요지 마음에 깊이 새기기(Lam rim shar gom)》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의 화현이시며
교법(敎法)과 증법(證法), 일체 가르침의 근원이시자
모든 성스러운 승가 대중의 중심이신
직ㆍ간접의 은혜로운 바른 스승들께 귀의합니다.

거룩하신 스승들이시여!
제 마음이 항상 불법(佛法)을 향하고,
불법을 향할 때는 바른 길로만 가게 하소서.
바른 길 갈 때에도 장애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간절히 청하옵나니 가피를 내리소서.

제가 붓다의 경지 얻을 때까지
밀라레빠(Milarepa) 존자님과 선재동자(善財童子)처럼
지극한 몸과 마음으로 스승을 공경하고
스승의 모든 행을 옳은 것으로 보아
그 분의 말씀대로 쉼 없이 정진하도록 가피를 내리소서.

큰 뜻 갖춘 유가구족(有暇具足)의 이 좋은 몸
얻기엔 매우 어렵고 무너지기는 쉬우니
심오한 인과법, 참기 어려운 삼악도의 고통을 알아
마음 깊이 삼보에 귀의하게 하소서.
악업을 참회하고 선업을 법답게 행하도록 가피를 내리소서.

하사도 수행의 결과로
다음 생에 인간과 천신(天神)의 몸을 얻을지라도
번뇌를 제거하지 못하면
사바세계의 한없는 고통 피할 수 없나니
윤회의 실상을 바르게 깨달아
해탈의 핵심 방법인 보배로운 계ㆍ정ㆍ혜 삼학을
밤낮으로 쉼 없이 닦도록 가피를 내리소서.

중사도 수행의 결과로
자신의 해탈은 얻을 수 있지만
육도의 모든 중생이 나의 부모 아니었던 적 없기에
이들의 행복을 위해 저만의 해탈을 구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나와 남 평등하게 여기는 최상의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육바라밀행을 원만히 닦도록 가피를 내리소서.

이와 같이 공통적인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를 닦았기에
저 자신은 오랫동안 윤회의 고통 겪어도 괜찮지만
일체 중생을 속히 돕기 위해 더욱 더 자비심 일으키게 하소서.

지름길인 금강승에 입문하고 밀교계를 목숨 다해 지켜
오탁악세(汚濁惡世)의 짧은 생 안에 대금강지불(大金剛持佛)의 경지 속히 얻도록 가피를 내리소서.

4.7. 샤마타와 위빠샤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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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중인 14대 달라이 라마


티베트 불교에서 전승되는 기본적인 수행방법은 샤마타(shamatha)위빠샤나(vipashyana)[57], 즉 지관(止觀) 수행이다. 지관수행은 초기불교에서부터 전승된 가장 보편적인 수행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남방불교에는 위빠사나로 전승되고 있고, 대승불교에서도 유식(唯識)학파 등에서 지관수행을 설명하고 있다. 중국불교에서 지관수행은 천태(天台)에서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승지관의 전통은 티베트 불교 외에는 거의 단절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불교에서도 강원에서 지관 수행을 강조한 《대승기신론》이나 《선종영가집》 등의 논서를 배우지만, 실제 수행에서는 거의 활용되지 않고 간화선 위주로 수행한다. 따라서 한문문화권에서 대승교학은 교학의 이해로만 그치고 실천으로 증험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유식(唯識)과 중관(中觀)과 같은 교학은 수습하여 증득하지 않으면 본질을 체득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대승지관의 전통을 다시 정립하는 것은 중요하다. 대승의 정신에 입각한 지관수행은 남방의 위빠사나와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양승규, 《티벳의 지관 수행 체계 연구》

대승의 지관 수행의 목적은 인무아(人無我)뿐만 아니라 법무아(法無我)까지 포함한 공성(空性)을 증득하는 것이다. 승의(勝義)로서는 만법이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는 무자성(無自性)이지만 세속적으로는 조건에 따라 생멸하며 연기(緣起)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대승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의 실상이다.

대승의 수행자는 진제(眞諦)인 공성(空性)과 속제(俗諦)인 연기(緣起)가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의식의 분별 상으로는 각기 다른 두 가립(假立)된 법(法)인 체성일(體性一) 반체이(返體異)(ngo bogcig ldog patha dad)의 관계[58]를 비량(比量)[59] 뿐 아니라 현량(現量)[60]으로도 바르게 인식하는 견도(見道)의 단계를 거쳐 지혜와 방편을 함께 닦아 일체 중생을 위해 불과(佛果)를 성취한다.

지관 수행을 다루는 티베트 불교 논서로는 까말리쉴라의 《수습차제》, 쫑카파의 《보리도차제광론》 등이 있다. 이들 논서는 《해심밀경》과 같은 대승 경전을 바탕으로 저술되었기 때문에, 역시 대승 경전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불교의 지관 수행과 상당부분 맥락을 같이 한다. 구체적인 샤마타와 위빠샤나 수행법은 티베트 불교 내 종파와 전승마다 다르며 굉장히 다양하다. 현대에는 상좌부 불교, 선불교 등 다른 수행 전통과 결합한 명상법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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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이 뇌세포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 중인
욘게이 밍규르 린뽀체
(Yongey Myingyur Rinpoche)[61]


현교의 교학에 따른 지관수행 외에도 밀교의 생기차제나 원만차제 수행 역시 샤마타와 위빠샤나를 함께 닦는 지관쌍운(止觀雙運)의 원리를 따른다. 예를 들어 밀교 본존의 상호(相好)나 만트라의 염송에 집중하는 것은 샤마타에 해당하며 본존을 관상(觀想)할 때 물에 비친 달 그림자와 같이 고정불변한 자성(自性)이 없는 공(空)의 상태로 관(觀)하는 것은 위빠샤나에 해당한다.

밀교에는 족첸(dzog chen)이나 마하무드라(mahamudra), 대중관(mahamadhyamika)과 같이 마음을 조작하지 않고 바로 직지심체(直指心體)하여 본성에 안주하는 명상도 있다. 족첸이나 마하무드라, 대중관 등은 동아시아의 선불교, 특히 간화선 이전의 초기 선불교와 유사한 면이 있다. 닝마빠, 까귀빠 등은 자파(自派)의 직지심체 요결과 기맥(氣脈)수행이 한 생에 성불 가능한 최상승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격을 갖춘 법맥스승의 직접적인 지도와 차제(순서)에 따른 단계별 수행의 성취 없이 족첸이나 마하무드라 같은 최상승법을 익힘은 어불성설이고, 자신과 타인에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 현대에 들어서 대중에게 많은 밀법이 공개되고 족첸, 마하무드라 관련 서적도 많이 출간되었다. 하지만 책만으로 밀교, 그리고 밀교 중에서도 최상승법인 족첸, 마하무드라, 대중관, 깔라차크라(시륜금강) 등을 수행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모든 대승불교의 불법 수행이 그러하듯 이들 가르침의 성취를 위해서는 반드시 진정으로 스승과 삼보에 대한 귀의심, 출리심과 보리심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법맥을 계승한 자격 있는 스승의 직접적인 전수와 지도가 필요하고, 수행의 성취 여부는 전적으로 법맥을 통해 이어져 내려온 스승의 가피에 달렸으므로, 가르침을 주는 스승을 지극한 신심으로 대하며 헌신하지 않으면 수행의 성취가 불가능하다.

일부 상근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먼저 바른 교학적 견해를 갖추고 현교의 지관 수행과 밀교의 예비수행, 구루 요가, 본존 요가(본존 수행) 등을 순서에 따라 완벽히 성취하여 기초가 되는 토대를 탄탄히 쌓은 후에 비로소 스승에게서 관정과 가르침을 받고 족첸, 마하무드라 등의 최상승법에 입문할 수 있다.
마하무드라 수행체계 소개

4.8. 관련 문헌[편집]

아띠샤 이전에 《람림》전승에 영향을 준 문헌으로는 샨티데바의 《입보살행론(입보리행론)(Skt. Bodhicaryāvatāra)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Skt. Bhāvanākrama; Tib. སྒོམ་རིམ་, Gomrim, Wyl. sgom rim) 》등이 있다.

아티샤의 까담빠 전승은 겔룩빠뿐만 아니라 티벳의 모든 종파에 영향을 끼쳤다. 겔룩빠 외에 다른 종파들의 관련 문헌으로는 닝마빠의 《공덕보장론(Yönten Dzö, Tib. ཡོན་ཏན་མཛོད་, Wyl. yon tan mdzod)》,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Tib. ཀུན་བཟང་བླ་མའི་ཞལ་ལུང་, Kunzang Lamé Shyalung; Wyl. kun bzang bla ma'i zhal lung)》, 까규빠의 《감뽀빠의 네 가지 법(Tib. དྭགས་པོ་་ཆོས་བཞི་, Wyl. dwags po chos bzhi)》, 《해탈장엄론(Tib. དྭགས་པོ་ཐར་རྒྱན་, Dakpo Targyen; or Tib. དམ་ཆོས་ཡིད་བཞིན་གྱི་ནོར་བུ་ཐར་པ་རིན་པོ་ཆེའི་རྒྱན་, Wyl. dwags po thar rgyan, or dam chos yid bzhin nor bu rin po che'i rgyan) 》, 사캬빠의 《네 가지 집착에서 벗어남(Tib. ཞེན་པ་བཞི་བྲལ་, shyenpa shyidral, Wyl.zhen pa bzhi bral) 》, 《도과론 (道果論, Skt. mārgaphala; Tib. ལམ་འབྲས་,Wyl. lam ‘bras) 》등이 있다.

《네 가지 집착에서 벗어남》[62]

이 생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종교적인 사람(佛弟子)이 아니다.
존재의 세계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출리심(出離心)을 얻은 게 아니다.
자신의 목적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보리심(菩提心)을 얻은게 아니다.
파악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그대는 아직 지견(知見)를 얻은 게 아니다.

5. 강원의 교육과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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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다람살라의 IBD(Institute of Buddhist
Dialectics)에서 강의를 듣는 승려들의 모습


티베트 불교의 최대종파인 겔룩빠는 다른 종파보다 교학을 강조하여 전체 강원 교육과정을 수학하는 데 20여 년 정도 걸린다. 현대교육제도의 초등과정부터 대학원과정까지에 해당하는 기간을 불교 교육에 투자한다고 볼 수 있다.

겔룩빠 외의 타 종파는 강원과정을 9~10년 이상 거친다.강원과정 이후에도 승려 개인의 자율적인 교학연구는 계속 이어지며, 따라서 타 종파 승려가 겔룩빠 승려보다 교학 수준이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다. 종파 간의 교학적 견해도 대부분 일치하나 약간씩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있다.

광성사 소남 걀첸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겔룩빠의 3대 사찰인 데뿡 사원의 로셀링 강원에는 1학년부터 19학년까지 교육과정이 존재한다. 주로 《인명학(因明學)》, 《반야학(般若學)》, 《중관학(中觀學)》, 《율(律)》, 《구사론(俱舍論)》 등 5대 경전을 배우는 교육방법을 체계적으로 잘 갖추었다고 한다. 5대 경전을 주로 배우는 점은 겔룩빠뿐 아니라 다른 종파에서도 동일하다. 소남 걀첸 스님, 《티베트의 큰 강원에서 5대경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방법》

강원에 입학하기 전에는 먼저 예비과정에 들어간다. 맨 처음 출가 서원을 하며 삭발과 승복을 입고 승려로서 사원에 들어간다. 한국 불교의 행자나 원불교의 간사 과정과 비슷하며, 이때 승가의 규율과 의식, 글과 기도문 암송 등을 배우고, 사원 곳곳에서 운력(運力)을 하면서 사원 생활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친다.

모든 승려들이 강원의 전체 교육과정을 밟는 것은 아니다. 불교 박사 학위인 게셰(dge bshes)를 받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대부분 중도에 학업을 중단하거나 탈락하고 각자에 맞는 직무를 배당받아 승원의 일상 생활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5.1. 5대 경전의 학습방법과 핵심[편집]

5대경을 배울 때에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무조건 경전을 외워야 한다.
둘째, 경을 보지 않고 외우는 연습을 자주 해야 한다.
셋째, 뜻을 알기 위해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넷째, 경전에 대한 여러 해석들을 자주 보아야 한다.
다섯째, 여러 차례 토론을 통해 경의 내용을 깊이 새겨야 한다.


5대경을 포함한 불교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基) - 기본 바탕인 세속제와 진제의 이성제
도(道) - 방편의 보리심과 반야의 지혜 두 가지 방법
과(果) - 법신과 색신의 두 가지 과위(果位)


다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기(基) 즉 기본이 되는 사성제, 진속이제 등 존재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도(道) 즉 수행은 앞서 존재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현실에 맞는 오도(五道)와 십지(十地) 등 방편과 지혜의 수행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과(果) 즉 결과는 존재론과 수행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현실과 맞는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과위(果位) 즉 법신(法身), 화신(化身), 보신(報身) 등 부처의 신구의(身口意)의 공덕을 말하고 있다.

5.2. 문사수(聞思修)의 체계[편집]

티베트 불교는 공부 따로 수행 따로 없이 배움 그 자체를 수행으로 생각하고, 문사수(聞思修)를 통해 경전을 공부한다.

문(聞), 즉 배움으로써 경전의 뜻을 타력(他力)으로 대충 이해하게 만든다.
사(思), 즉 깊게 생각함으로써 경전의 뜻을 자력(自力)으로 확실하게 확신이 생기게 한다.
수(修), 즉 닦음으로써 경전의 뜻을 깊게 마음에 익히게 한다.


문(聞), 즉 배움이 부족하면 문혜(聞慧)가 부족할 수밖에 없고, 문혜(聞慧)가 부족하면 사(思), 즉 관찰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으며, 사(思)가 부족하면 사혜(思慧)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문(聞), 문혜(聞慧), 사(思), 사혜(思慧)의 바탕이 없으면 수(修), 즉 도(道) 닦는 것이 부족할 수밖에 없기에 무엇보다 제일 먼저 경전을 잘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티베트 강원의 스승들이 늘 강조한다.

이와 같이 티베트 큰 강원에서는 문사수(聞思修)의 과정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 5대 경전 등 불경과 논서들을 체계적으로 배움으로써 먼저 현교(顯敎)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얻게하며 마음에 깊게 익히도록 하고난 뒤 밀교(密敎)의 깊은 수행법을 배우고 실천 수행한다.

5.3. 기초 과정[편집]

제일 먼저 《듀라(섭류학攝類學)》를 배운다. 《듀라》는 인명학(因明學)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은 논리 이론을 최초로 배우는 과목으로, 티벳의 스승이신 차빠 최끼 생게가 경량부의 이론 방식을 접목하여 량(量)의 전반적인 의미를 요약하여 ‘듀라’라고 정하였다. <듀라>는 소논리, 중논리, 대논리 세 가지로 나뉘며, 기(基), 도(道), 과(果) 세 가지 중 주로 존재론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두 번째, 《로릭(심류학心類學)》을 배운다. 구체적인 심리학이 아닌 일반적인 마음의 종류, 가령 현량(現量), 비량(比量), 분별심(分別心), 비분별심(非分別心), 육식(六識), 심왕(心王), 심소(心所) 등을 설명한다. 또는 7종심식(七種心識) 즉 현량식(現量識), 비량식(比量識), 재결식(再決識), 사찰식(伺察識), 현이미정식(顯而未定識), 의심(疑心), 전도식(顚倒識) 등을 가르친다.

세 번째, 《딱릭(인류학因類學)》을 배운다. 진인(眞因)은 과인(果因), 자성인(自性因), 불가득인(不可得因) 세 가지로 나뉘며, 사인(似因) 또한 상위인(相違因), 부정인(不定因), 불성인(不成因) 세 가지로 나뉜다.

네 번째, 《둡타(종의宗義)》를 배운다. 종의는 학파, 교파라고도 부른다. 외도나 불교도의 견해에 따라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철학적 바탕(基), 수행방식(道), 그 결과(果) 셋에 대한 교리적 설명 방식 등을 말한다. 간략하게 고대 인도의 외도 5개 파(派)인 논의오파(論議五派; 수론파數論派, 순세파順世派, 승론파勝論派, 폐타파吠陀派, 리계파離繫派)와 불교도의 4대 학파인 유부(有部), 경량부(經量部), 유식학파(唯識學派), 중관학파(中觀學派)로 나눈다.

다섯 번째, 《살람(지도地道)》을 배운다. 보살의 십지(十地)[63]와 오도(五道)[64], 그리고 성문도, 연각도, 보살도에 대해 배운다.

이상의 과정을 배우는 데 대략 4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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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라(뒤다)》의 초급 부분과 《둡타》는 각각 《논리에 이르는 신비로운 열쇠》, 《불교 철학의 보물꾸러미》라는 제목으로 티벳대장경역경원에서 번역되었다.

5.4. 5대 경전 과정[편집]

여섯 번째, 《석량론(釋量論)》을 배운다. 석량품(釋量品) 또는 광본양학(廣本量學)이라고도 하며, 고대 인도의 법칭(法稱)보살이 지었다. 이 논서는 자리(自利), 양성립(量成立), 현전(現前)과 타리(他利) 등 4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명칠론(因明七論) 중에서 세 근본이 되는 논서이다. 《둡타(종의宗義)》를 배우고 난 뒤 대략 10년 이상 해마다 겨울철 한 달씩 스님들이 한 절에 모여 집중적으로 배우기도 한다.

일곱 번째, 《반야현관장엄론(般若現觀莊嚴論)》을 7년 동안 배운다. 미륵오론인 《현관장엄론》, 《대승장엄론》, 《중변분별론》, 《법법성분별론》, 《구경일승보성론》 중의 하나이다. 그 내용은 일체종지, 도지, 일체지, 일체오등현관, 정현관, 차제현관, 찰나오등현관과 법신 등 8가지로 보살도의 모든 수행과 부처님의 경지인 과위(果位)에 대해 설명한 미륵보살이 지은 논서이다.

여덟 번째, 《입중론(入中論)》을 3년 동안 배운다. 용수보살이 지은 《중론(中論)》의 논서인 《입중론》은 월칭보살(짠드라끼르띠)이 저술하였고, 10품으로 나뉜다. 주로 중관사상 즉 공성(空性)과 연기(緣起)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아홉 번째, 《율경근본율(律經根本律)》을 4년 동안 배운다. 인도의 율사 공덕광보살이 4부 율전의 내용을 해석한 것이다. 주로 계율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17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열 번째, 《구사론(俱舍論)》을 2년 동안 배운다. 《아비달마 구사론본송》이라고도 하며, 인도의 세친보살이 저술한 소승의 논서로 본문은 게송체이고 8품으로 나뉜다. 당나라 삼장 현장법사가 범어를 한문으로 역경하였다.

이렇게 해서 현교(顯敎)에 대해 기초과정 포함하여 거의 20년 정도 체계적으로 배운다.

5.5. 강원 과정 이후[편집]

5대 경전 등 불경과 논서들을 체계적으로 배움으로써 먼저 현교(顯敎)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얻게 하며 마음에 깊게 익히도록 한다.

강원의 전체 교육과정을 수료한 후에는 겔룩빠의 경우 불교철학박사에 해당되는 학위인 게셰(ge she), 나머지 종파에서는 불교 강백(講伯)에 해당하는 켄뽀(khen po)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 필기 시험(디규), 대론(對論) 시험(쬐규) 등을 거쳐 칭호를 받는데, 겔룩빠에서 남자 수행자는 게셰(Geshe), 여자 수행자는 게셰마(Geshema) 학위를 받는다. 타 종파에서는 켄뽀(Khenpo)란 칭호를 받는다. 게셰에도 아래서부터 도람빠(Dorampa,) 링세(Lingtse), 촉람빠(Tsorampa), 하람빠(Lharampa)의 네 단계가 있다. 게셰 학위를 얻기 위해선 약 23년, 켄뽀 자격을 얻기 위해선 약 13년이 걸린다. 그 후 밀교의 깊은 수행법을 기간 없이 평생 배우고 실천한다.

 

게셰 학위 취득을 위한 대론 시험 영상


겔룩빠에서는 게셰 학위를 취득한 후 규뙤 사원이나 규메 사원으로 대표되는 밀교 사원에 들어가 밀교 교학을 배운다. 밀교 공부와 수행은 평생 배우고 닦는다는 개념이고, 밀교 수행은 스승의 허락과 자격을 얻어야만 행할 수 있으므로, 견고한 현교의 철학적 토대를 갖춘 준비된 사람만이 밀교 수행에 들어갈 수 있다.

교학이 갖춰지지 않은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것은 '마치 손가락이 잘린 사람이 바위산을 기어오르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수행자는 산의 정상을 오를 수 있는 정확한 지도가 있어야 하고, 산을 오르다가 맞닥트릴 수 있는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철저한 교학의 토대가 필요한 이유이다. 교학을 철저하게 배우고 닦는 과정에서 이미 수행의 반은 완성된다.

6. 종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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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전(全) 티베트 불교 전승 회의 당시 사진.[65]


티베트 불교는 크게 닝마빠(རྙིང་མ་, Wyl. rnying ma, "오래된"), 싸꺄빠(ས་སྐྱ་, Wylie: sa skya, "하얀 땅"), 까규빠(བཀའ་བརྒྱུད།, Wylie: bka' brgyud, "구전 전승의"), 겔룩빠(དགེ་ལུགས་, Wyl. dge lugs, "위대한") 등 4개 종파로 나뉜다.[66]

티베트불교의 종파를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은 구파(舊派, nyingma)와 신파(新派, sarma)이다. 닝마빠(rNy-ing ma pa)는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구파(舊派) 또는 고파(古派)로 번역되는데, 기원을 따진다면 티베트의 모든 불교 종파 가운데 가운데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보다 후에 일어난 사캬, 까규, 겔룩, 조낭 등 모든 티베트의 종파들은 신파(新派)에 속한다.

구파와 신파를 나누는 기준은 경전의 번역이다. 티베트에 인도불교가 도입되던 7~8세기에 티베트의 법왕들이 후원하여 행한 번역을 구역(舊譯), 10~11세기 지방 귀족 세력이 지원하여 행한 이루어진 번역을 신역(新譯)이라 한다.

종파 간에 정치적 대립이 빈번하였지만 각 종파의 고승들은 종파를 막론하고 존경의 대상이었고, 다른 종파의 학승이 자기 종파의 교리를 배우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종파 간의 경쟁적 발전과 더불어 상호 이해와 존중이 이루어지고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이종복, 《종파로 보는 티베트 불교》

 

종파

주요 수장

경전의 번역

닝마빠(རྙིང་མ་, Wyl. rNying ma '오래된')

전통적으로 없음

구파(舊派, Nyingma)

싸꺄빠(ས་སྐྱ་, Wylie: Sa skya, '하얀 땅')

사캬 티진

신파(新派, Sarma)

까규빠(བཀའ་བརྒྱུད།, Wylie: bKa' brgyud '구전전승의')

카르마파[67]
까루 린포체

겔룩빠(དགེ་ལུགས་, Wyl. dGe lugs '위대한')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6.1. 닝마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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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마빠의 개조(開祖) 빠드마삼바와[68]


닝마(Nyingma)는 '오래된'이란 뜻으로 말 그대로 티베트 불교 중 가장 먼저 생긴 종파이다. 8세기 티송데쩬 왕은 당시 네팔에 머물고 있던 인도 날란다 사원의 승원장 샨따락쉬따(Śāntarakṣita)를 초청하면서 밀교 성취자인 빠드마삼바와(Padmasambhava)를 대동했다. 빠드마삼바와는 밀교행을 통해 티베트의 토속 종교인 뵌교의 신도뿐만 아니라 티베트의 토속신들을 제압하여 불교에 귀의하도록 이끌었다. 이에 샨따락쉬따는 왕실의 후원 하에 쌈예사(bSam yas dgon pa)를 건립하고 티베트의 첫 승단을 만들었다. 닝마빠는 이때 샨따락쉬따가 대동했던 밀교 성취자 빠드마삼바와와 그의 가르침을 그 중심으로 삼는다.

닝마빠는 까귀빠와 함께 실수행을 중시하는 종파로 알려져 있다. 교학보다 실수행을 중시하는 점은 두 종파 모두 동일하지만, 닝마는 까귀와 달리 명상보다 견해를 좀 더 강조한다. 교학을 통해 익히는 견해가 아닌, 본연의 지혜를 통해 얻는 가장 핵심적인 견해(Skt. upadeśa; Tib. མན་ངག་, mengak, Wyl. man ngag, pith instruction)를 먼저 알려준 후 그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명상하는 방식이다.

닝마빠의 전승으로는 석가모니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인 까마(kama)와 빠드마삼바와와 그의 제자들이 비장(秘藏)하고 시절인연에 따라 발견되는 전승인 뗄마(terma)[69]가 있다. 또한 독자적으로 현교와 밀교를 9개 승으로 구분한 9부승(九部乘) 체계를 갖추었다.

9부승은 크게 외(外), 내(內), 밀(密) 삼승으로 구분된다. 외승(外乘)은 곧 경승(經乘, sutrayana)에 해당하고 내승과 밀승은 속승(續乘, tantrayana)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외승(外乘)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가리킨다. 그리고 내승(內乘)혹은 외전(外傳) 딴뜨라는 사부(所作部 혹은 事部, kriya tantra), 행부(行部, charya tantra), 유가부(瑜伽部, yoga tantra)로 구성된다. 내승의 가르침은 브라만의 베다(Veda) 전통처럼 의례와 외적 청정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밀승(密乘) 혹은 내전(內傳) 딴뜨라는 마하 요가(maha yoga), 아누 요가(anu yoga), 아띠 요가(ati yoga, 혹은 maha ati yoga)로 구성된다. 마하, 아누, 아띠 요가는 신역(新譯)의 무상유가부(無上瑜伽部, anuttarayoga tantra)에 해당한다. 9부승의 최상위에 위치한 아띠 요가는 바로 닝마빠 고유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인 족첸(rdzogs chen)에 해당한다. 밀승의 가르침은 모든 현상을 청정하고 평등한 진여(眞如)로 전환시키는 강력한 방편들이다.

6.2. 사꺄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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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꺄빠의 다섯 창시자들[70]


사꺄빠는 까규빠와 마찬가지로 나로빠의 가르침에 그 기원을 두고 또한 독미 로짜와(Drokmi Lotsawa)라는 같은 스승으로부터 출발했지만, 까규빠와 다른 특징들이 있다. 사꺄빠는 쾬(Khon) 일족 자체가 종파가 된 독특한 경우이다. 회색 땅을 뜻하는 사꺄(Sa skya) 지방의 일족인 쾬 일족의 쾬 꾄촉겔뽀(Khon dkon mtshog rgyal po)를 종조로 하는 사꺄빠 역시 밀교 전통에 근거한다. 사첸 꾄촉겔뽀는 인도에서 요기 나로빠와 밀교승원인 비끄라마쉴라(Vikramaśīla)에서 공부했다고 하는 독미 로짜와로부터 헤바즈라 딴뜨라에 근거한 람데(lam ’bras) 전통을 배운다. 수행의 길과 그 결과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밀교에 바탕을 두고 논하는 람데 전통은 사꺄빠의 핵을 이루는 중심 교리이다.

사꺄빠의 다른 특징으로는 불교 논리와 중관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이다. 설명할 겔룩빠와 경쟁구도를 형성한다. 사꺄빠는 티베트 정치의 중심에 서기도 했고, 몽골의 불교 전통을 만드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원나라 때 쿠빌라이 칸의 명령으로 파스파 문자를 만든 원나라 국사 파스파도 사꺄빠 승려이다.

6.3. 까귀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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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빠 까귀의 개조(開祖) 마르빠[71]


까귀란 '구전의 전통(口傳傳統)'이라는 뜻이다. 11세기 인도의 밀교 요기 띨로빠(Tilopa)를 시조로 삼는다. 띨로빠는 나로빠(Nāropā)를 가르쳤다. 티베트인 역경사 마르빠 로짜와[72](Marpa lotsawa)는 역경사 독미 로짜와 샤꺄예쉐(Drokmi Śākya Yeshé)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인도의 날란다 사원에서 나로빠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마르빠의 가르침인 마하무드라(mahāmudrā)는 이후 밀라레빠(Mi la ras pa)를 거쳐 까귀빠로 성립되었다.

까귀빠는 명상, 구루 요가, 나로 6법과 같은 금강승 수행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까귀와 닝마는 모두 실수행을 중시하지만, 까귀는 닝마와 달리 명상을 통해 점진적으로 견해를 익히고 체험해나가는 방식을 따른다.

마르빠에게서 유래한 마르빠 까귀빠는 4대 8소 종파로 나뉘어진다. 마르빠 까귀의 초기 4대 종파는 깔마 까귀(Karma bka' brgyud), 바롬 까귀('Ba' rom bka' brgyud), 찰빠 까귀(Tsalpa Kagyü), 팍두 까귀(Pagdru Kagyü)이다.

이 중 팍두 까귀는 다시 8개의 분파로 갈라져 둑빠 까규(‘Brug pa bka' brgyud), 디꿍 까규('Bri gung bka' brgyud), 딱룽 까규(sTag lung bka' brgyud), 마르창 까귀(Martsang Kagyü), 슝셉 까귀(Shugseb Kagyü), 트로푸 까귀(Trophu Kagyü), 얌장 까귀(Yamzang Kagyü), 옐빠 까귀(Yelpa Kagyü)를 이룬다.

4대8소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종파는 깔마, 바롬, 둑빠, 디꿍, 딱룽 5개 종파들이다. 까루 린뽀체가 속한 상빠 까규(Shangs pa bka' brgyud)는 마르빠 까귀에 속하지 않는 별도의 법맥이지만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마르빠는 인도의 마이뜨리빠(mai tri pa)와 마이뜨리빠의 스승인 나로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샹빠까귀의 창시자인 케둡 큥뽀 낼죨(Kedrub Kyungpo Naljor)은 마이뜨리빠와 니구마(ni gu ma) 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니구마는 나로빠의 여자 형제 또는 배우자라고 전해진다.

6.4. 겔룩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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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룩빠의 개조(開祖) 쫑까빠[73]


겔룩빠의 종조 쫑카빠 롭상닥빠(Tshong kha pa bLo bzang grags pa)는 14세기 동북 티베트 암도의 쫑카 지방에서 태어나서 깔마빠 및 여러 종파에서 공부했는데, 특히 사꺄빠의 렌다와 쇤누로도(Red mda' ba gzhon nu blo gros)를 주 스승으로 삼았다. 이후 까담빠의 전통을 따라 엄격한 계율의 수행을 강조하면서, 불교 철학을 바탕으로 단계적인 수행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아띠샤의 《보리도등론》의 주석서인 쫑카빠의 《보리도차제광론》을 비롯한 많은 주석서 및 저서들은 그 당시까지의 철학과 수행 전통을 새롭게 해석해 내면서 티베트불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후로 까담빠의 전통은 점차로 겔룩빠의 영향 아래 들어갔다.

1대 달라이 라마는 쫑카빠의 제자 겐둔 둡빠(dGe 'dun grub pa)이다. 그러나 겐둔 둡빠는 생전에 달라이 라마라고 불린 적이 없다. 3대 달라이 라마 때 이르러 몽골의 알탄 칸에게 '달라이 라마(Dalai lama)'[74]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공식적인 겔룩빠의 종정은 달라이 라마가 아니라 겔룩빠의 본산인 간덴 (dGa' ldan)사원의 사원장 간덴 티빠(dGa' ldan khri pa)이다. 간덴 티빠는 간덴 사원 안의 싸르쩨(Shartse)와 장체(Jangtse) 두 학당의 방장(方丈)이 번갈아 가며 맡게 되는데 임기는 전통적으로 7년이다. 환생자 제도로 선정되지 않고 순수하게 개인의 능력과 학식, 덕망, 승가 내 경력 등으로 선정되는 직위이다.

6.5. 조낭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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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낭빠의 개조(開祖) 돌뽀빠


시가쩨 근처 조모낭 지역에서 번성한 조낭빠는 12세기 깔라차끄라 딴뜨라 전문 수행가인 유모 미꾜돌제(Yu mo mi bskyod rdo rje)를 중심으로 시작한다. 유모 미꾜돌제는 카쉬미르의 빤디따 찬드라나타(Candranātha)에게서 사사받았다. 후캄에 의하면 타공의 이해는 유모 미꾜돌제가 카일라쉬산(수미산)에서 깔라짜끄라 딴뜨라를 수행하는 도중 터득한 것이라고 한다. 사꺄빠에서 계를 받았던 돌뽀빠 쉐랍겔첸(Dol po pa shes rab rgyal mtshan) 대에 이르러 융성했다.

조낭빠는 쉔똥(gzhan stong), 즉 타공(他空) 사상을 내세웠다. 타공이란 모든 속제를 비롯해 다른 것에 의존해 일어난 현상들, 자아와 같은 허상은 그 자성이 공(空)하지만, 그 모든 속제의 근간이 되는 법성, 일체지, 천연의 의식, 불성, 또는 청명한 빛의 마음은 공하지 않다는 사상이다. 이후 조낭빠는 5대 달라이 라마 대에 이르러 정치적ㆍ사상적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중앙 티베트 지방에서 사라졌고 몽골과 암도 지방에서 명맥을 유지한다.

현재 14대 달라이 라마는 조낭빠를 티베트 불교의 정식 종파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달라이 라마가 속한 겔룩빠와 조낭빠의 교학적 입장은 다르다. 달라이 라마는 반야경을 요의경(了義經)으로 보는 겔룩빠의 전통적 견해에 따라 조낭빠의 타공을 부정하고, 일체법이 승의적(勝義的)인 입장에서 공(空)하다는 랑똥(rang stong), 즉 자공(自空)을 견지한다.

7. 환생자(뚤꾸) 제도[편집]

티베트 불교의 뚤꾸(Tulku)란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와 같은 존재, 혹은 높은 수준의 성취자(siddha)로서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다시 태어난 존재를 말한다. 뚤꾸는 응신(應身)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니르마나카야(nirmanakaya)의 티벳어 의역이다. 중국에서는 '살아있는 부처'란 뜻으로 '활불(活佛)'이라고 번역한다. 한국에서는 통상 '린뽀체'[75] 혹은 '환생자'라 일컫는다.

7.1. 환생자 제도의 토대[편집]

7.1.1. 불신론(佛身論)과 보살사상[편집]

티베트 불교의 환생자 출신인 뚤꾸 퇸둡(Tulku Thondup)은 그의 저서《Incarnation: The History and Mysticism of the Tulku Tradition of Tibet》에서 환생자 제도의 토대로 (1) 붓다의 삼신(三身) (2) 보리심의 서원(誓願) (3) 업(karma) (4) 환생을 언급하였다. 뚤꾸 퇸둡의 견해를 참조하여 다음과 같이 환생자 제도의 토대를 설명할 수 있다.

뚤꾸의 정의와 어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뚤꾸는 대승 불교의 불신론(佛身論)과 보살사상에서 유래하였다. 불신론(佛身論)에 따르면 부처[76]의 몸, 즉 불신(佛身)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중 이타행을 위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화현하는 불신(佛身)을 '응신' 또는 '화신'이라고 한다. 중생이 업력(業力)에 의해 불가피하게 윤회하는 것과는 달리 대승의 불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원력(願力)으로 응신을 나투어[77] 자발적인 윤회환생을 선택한다.

뚤꾸란 이러한 대승불교의 불신론, 보살사상과 스승-제자 간의 사자상승(師資相承)을 중시하는 티베트 불교의 특성이 반영되어 만들어진 티베트 불교 고유의 종교적 제도이다. 대표적인 뚤꾸로 흔히들 달라이 라마를 연상하지만, 티베트 불교의 공식적인 초대 뚤꾸는 13세기 환생한 깔마 까규빠의 법왕인 2대 까르마빠(Karmapa) 깔마 팍시(Karma Pakshi)이다. 이후 티베트 불교의 다른 종단과 티베트의 민속 종교인 뵌(Bon)교에서도 깔마 까귀빠의 환생자 제도를 차용하기 시작했다.

&lt;img class='wiki-image' width='100%' src='//ww.namu.la/s/f75df4d9d64c57ad9c77c3aba99d6d37e1729821a278dc0e1eea9b429d40281dabecac3b38b9aa34c3366b96b63fd107f06075bfd655cc0f156cdebe72fe630f89831a2b7c93ba30f64403beed21e1eb544a4fd3afb82892c2433c9f65010dea' alt='파일:Karmapa_2007_the17_01.jpg'&gt;

17대 까르마빠 오겐 틴레 도제 (orgyen Trinley Dorje)

 

7.1.2. 윤회와 업[편집]

환생자 중 대표적으로 달라이 라마를 예로 들면, 달라이 라마의 자리는 새로 후임자를 찾아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환생한 자가 그 자리를 계승하게끔 한다. 그렇다면 초대 달라이라마와 14대 달라이라마는 같은 인물일까? 둘의 몸만 다를 뿐 영혼은 같다는 설명은 불교적으로 옳지 않다. 불교에서는 영혼이나 아트만처럼 고정불변하는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설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는 무엇일까? 바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의식의 흐름'이다. 이를 상좌부 불교에서는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 대승불교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 등으로 설명하였다. 의식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불변하는 실체는 없지만 일종의 경향성은 존재한다.

즉 초대 달라이라마와 14대 달라이라마는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경향성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선대 달라이라마로부터 이어지는 경향성 중에는 선대가 쌓은 공덕(지혜와 복덕)[78]도 포함된다. 이러한 지혜와 복덕이 바로 환생자가 차기 달라이 라마의 직위에 오를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스승의 사후에 법을 전할 가장 적합한 인물이 스승의 공덕을 이어받은 스승 본인의 환생자라 보고 환생자를 찾는다.[79] 인연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고 보살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법맥의 순수한 가르침을 최대한 오염시키지 않고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 그 법맥의 창시자나 주요 스승들이 다시 환생하여 가르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환생자를 찾은 후 그에게 내재된 수승한 자질을 다시 발현시키기 위하여 환생자는 일정 기간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환생자가 교육을 받는 동안 생기는 가르침의 공백은 전생의 제자들이나 다른 스승들이 메꾼다.

7.2. 환생자 선정과 교육[편집]

스승의 사후에 전생 제자들과 다른 고승들은 후보들을 대상으로 여러 단계에 거쳐 전생에 대한 기억, 뚤꾸로서의 자질 등을 검증한 끝에 뚤꾸를 찾아낸다. 일반적으로 전생에 사용하던 물건을 찾아내거나 전생 제자를 알아보는 방식으로 뚤꾸를 찾곤 하지만 뚤꾸를 찾는 방법이 반드시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 밖의 다른 예는 다음과 같다.

- 죽기 전 유언이나 편지로 자신의 내생을 직접 밝힌다. 그들은 자신이 인간으로 환생할지 혹은 정토에 태어날지 등을 분명히 밝힌다. 심지어 어느 곳에 태어날지, 부모의 이름은 무엇인지 알려주기도 한다. 환생과 관련된 정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명시할 때도 있고 시 형식으로 암시하는 글을 남겨 해석을 요할 때도 있다

-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전생이 어떠했는지 말하고, 사원에 출가하고 싶다는 의지를 직접 밝힌다.

-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가진 비범한 지혜와 능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임에도 자신이 전생에 배운 경전을 강의한다든지, 처음 보는 경전을 한 번만 보고 외운다든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언을 외운다든지 하는 식으로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낸다.

- 다른 고승들로부터 환생자임을 인증받는다.

- 과거에 경전이나 기록에서 예언된 환생자이다.

 

뚤꾸들은 대개 전생으로부터 이어진 비범한 자질이 있지만, 잠재된 부분을 다시 발현시키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뚤꾸 역시 완벽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거나, 여러 생을 거치며 퇴락의 위험을 겪을 수 있다.[80] 이 때문에 대부분 뚤꾸는 환생 후에도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과거생에 세운 중생 구제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정진하는 과정을 거친다. 충분한 교육과 수행을 거친 후에는 본격적으로 중생 제도를 위한 전법활동을 한다.

7.3. 환생과 과학적 회의주의[편집]

티베트인들 대부분은 윤회환생을 확고히 믿는다. 반면 비불교도 중 일부, 혹은 불교도 중에서도 일부는 윤회나 환생을 믿지 않고 더 나아가 미신으로 취급하며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객관적인 검증을 배제한 채 무조건적인 불신을 보인다면 올바른 과학적 회의주의라고 할 수 없다. 현재 과학적 연구의 대상은 임사 체험 수준이고 사후 세계나 환생과 같은 대상은 본격적으로 연구된 바 없다. 즉 환생을 긍정하는 측이나 부정하는 측 모두 가설 수준이고, 양측 모두 본인의 주장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환생을 무조건 미신 취급하는 주장은 자칫 가설과 이론을 구분하는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절차를 무시하고 과학만능주의적 맹신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갖고 있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과학적으로 입증불가능한 종교적 발상을 모두 미신 취급하는 반(反)종교주의적 무신론자도 존재하지만, 과학과 종교의 영역이 서로 무관하거나 상호보완적이라 보고 과학을 연구함과 동시에 종교, 철학과 교류하는 과학자들도 많다.

티베트 불교에는 파스퇴르 연구소 소속의 분자생물학자 출신인 마티유 리카르(Mattieu Ricard) 등 과학자 출신의 승려들이 다수 있다. 또한 세계적인 뇌과학자, 신경생물학자, 인지과학자, 정신의학자, 물리학자들이 달라이 라마, 까르마빠 같은 티벳 불교 스승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와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마음과 생명 연구재단(Mind & Life institute)의 강연, 대담과 달라이라마와 과학자들의 교류를 담은 다큐 영화 등에서 티베트 불교와 과학자들간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티베트 불교 지도자들과 과학자들 간의 교류가 담긴 서적이 여러 권 출간되었다.

7.3.1. 뇌과학의 난제와 불교의 의식 개념[편집]

현대 뇌과학에서는 뇌파나 뇌 자기공명영상 등을 관찰하여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뇌의 활동으로 의식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뇌의 활동이 어떻게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의식으로 변환될 수 있는지는 아직 확정된 바 없으며 이에 대한 과학자들의 의견도 분분하다. 동국대 김성철 교수는 의식에 대한 뇌과학적 접근의 한계와 불교의 의식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진화생물학과 뇌과학 이론에 의하면 마음은 창발(emergent)한 것이다. 진화과정에서 우리의 육체, 구체적으로는 우리의 뇌에서 창발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구성적 세계관에 의하면 마음은 원래 존재하던 것이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과 뇌의 관계를 구명하고자 할 때 난관에 빠지는 이유는, 뇌에서 마음이 발생했다거나 객관 세계에서 주관성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선입견 위에서 연구하고 이론을 모색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선입견은 과거의 천동설과 같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솔직한 생각이다. 그러나 생명체의 진화과정에서 주관이 객관에 선행한다. 각 개체의 입장에서 볼 때는 촉각이나 미각, 후각과 같은 ‘근접 감각’만으로 이루어진 유일무이의 주관만 존재하다가 진화과정에서 시각과 청각이 열리면서 점차적으로 객관세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지렁이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종차(種差)를 넘어서 일관하는 마음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그 실마리를 주관에서 찾아야 한다.

불교적으로 볼 때 주관의 근원인 마음 혹은 의식은 '원래 없던 것이 몸 또는 뇌에서 새롭게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이 새로운 몸에 깃들어 뇌를 통해 다시 나타난 것'이다. 물론 불교의 의식은 영혼과 같은 변치 않는 실체가 있어서 새로운 몸에 깃든 것이 아니다. ‘찰나적으로 생멸하는 식(識)의 흐름’으로서의 마음이 새롭게 형성된 수정란에 반영된 것이다. 마치 등불이 새 심지에 옮겨 붙듯이 말이다.
김성철, 《불교와 뇌과학으로 조명한 자아와 무아》
BBS 《불교와 뇌과학으로 조명한 자아와 무아》 강연 (1부)
BBS 《불교와 뇌과학으로 조명한 자아와 무아》 강연 (2부)

의식은 연속성을 갖고 있으며 물질과 상호작용한다. 달라이 라마는 1995년 뉴욕 칼라차크라 법회에서《석량론(양평석)》과 같은 불교 논서에 의거하여 의식과 물질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마음은 과거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성을 갖는다. 지금의 생에서 전생의 마음이나 의식을 찾아갈 수 있다면, 물질계가 그러한 것처럼 마음이 갖는 연속성의 시초를 무한한 차원에까지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처음은 없다. 마음의 연속성을 계속 유지하게 해주는 환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것은 어떤 원인의 결과로 있는 것이며, 마음이나 의식도 그 직전 상황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마음과 물질은 상호 작용하지만 그 중의 어떤 하나가 서로 다른 어떤 하나의 실체가 되지는 못한다.”

즉 직전의식이 원인이 되어 다음 의식이라는 결과가 생겨나는 과정을 반복하며 의식은 끊임없이 연속되는 성질을 지닌다. 의식은 의식 자체의 연속적인 성질에 의해 발생하며 물질 만으로는 의식이 발생할 수 없다. 물질은 의식이 작용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중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이전 생의 의식이 다음 생으로 연결되는 환생 과정을 거쳐야 한다.

7.3.2. 환생과 미세의식[편집]

창발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환생을 부정하는 주장은 대체로 다음의 명제를 기반으로 한다.

1. 의식은 뇌로부터 나온다.
2. 뇌의 기능이 영구 정지하면 의식은 사라진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위의 명제가 일부만이 사실이며 다음과 같은 명제를 바탕으로 환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1. 의식은 뇌 뿐만 아니라 뇌 이외의 더욱 미세한 물질적 기반과 상호작용하며 구성된다.

2. 뇌의 기능이 영구 정지되면 의식의 거친 부분은 대부분 소멸되지만 미세물질에 기반하여 의식의 미세한 부분은 계속 존재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티베트 불교툭담(tukdam)이라고 하는 사후의 특수한 명상을 들 수 있다. 툭담에 든 고승들은 뇌의 기능정지, 심정지 등을 포함한 의학적 사망(clinical death)이 선고된 이후에도 며칠 혹은 수 주에 걸쳐 시신이 부패되거나 사후 강직이 일어나지 않고 생전처럼 시신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따뜻한 체온을 유지한다. 툭담은 비교적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며 티베트 불교권 지역인 몽골의 경우에만 지난 50여 년간 수십 차례 사례 보고가 있었다. 생전에 높은 수행의 경지에 이른 고승들은 바르도(bardo, 중음)라는 죽음과 환생 사이의 과도기에 미세의식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깊은 명상 상태에 접어들 수 있다.[81]

티베트 불교, 특히 그 중에서도 밀교 경전에서는 툭담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활동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툭담 중 겪는 갖가지 의식과 신체의 변화는 뇌의 활동만을 의식으로 보는 기존의 과학적 견해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현상은 뇌라는 기관에 의지하지 않고도 의식의 전체 혹은 일부가 유지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툭담 현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2019년에 불교학자들과 러시아 과학자들로 구성된 연구팀이 툭담에 대한 심층연구에 착수한 바 있다.
티베트 스님과 러시아 과학자, 죽음 명상 연구

불교에서는 생명체가 색(色, 물질), 수(受, 느낌), 상(想, 개념), 행(行, 의지), 식(識, 의식)이라는 오온(五蘊, 다섯 가지 무더기)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이 중 색온은 물질이고 수, 상, 행, 식은 의식 혹은 정신에 해당한다. 생명체가 죽음에 이르게 되면 색온, 수온, 상온, 행온 및 식온의 거친 부분은 소멸된다. 이는 뇌의 일부가 손상되거나 뇌사에 이르는 경우 기억이나 자의식이 훼손당하는 기존의 과학적 연구 사실과 일치한다. 의식과 상호작용하는 물질적 조건이 제한되면서 의식의 기능에도 제한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식온의 미세한 부분, 즉 미세의식은 현대과학의 에너지 혹은 파동에 가까운 미세물질과 상호작용하며 계속 유지되고, 이러한 미세의식이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발생한 수정란과 합쳐져 환생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뇌 외부에 의식이 존재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과학 이론으로는 조화 객관 환원(Orchestrated objective reduction, Orch-OR)이론이 있다. 조화 객관 환원 이론은 영국 옥스퍼드대 로우즈 볼(Rouse Ball)좌 수학 교수인 수학자이자 이론물리학자 로저 펜로즈 경(Sir Roger Penrose)과 미국 애리조나대 마취과와 심리학과 교수인 마취과 전문의 스튜어트 해머로프(Stuart Hameroff)에 의해 제기되었다.

Orch-OR 이론에서는 의식이 뉴런(neuron) 간의 연결에서 비롯한 산물이라고 보는 기존의 견해와 달리, 세포 내 소기관 중 하나인 미세소관(microtubule)에 의해 조정되는 객관 환원(OR)이라고 하는 양자 과정 메커니즘이라고 상정한다. 이들은 의식을 뇌파가 붕괴할 때마다 발생하는 양자 사건으로 정의하고 다시 의식을 전(前)의식과 의식이란 두 단계로 나눈다. Orch란 전의식의 요소들이 모여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를 이루어 일관된 구조를 이룰 때 진정한 의식이 생김을 말한다.

로저 펜로즈 경과 스튜어트 해머로프는 양자 역학으로 이러한 의식의 조화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의식은 우주의 구조처럼 계산을 뛰어넘기 때문에 양자 역학으로 설명 가능하며, 뇌세포 안의 원통형 구조물인 미세소관을 일종의 양자 컴퓨터라고 생각하여 미세소관에서 이루어지는 양자 계산이 의식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미세소관 내의 활동과 구조를 연구한 결과 양자 컴퓨터처럼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양자의 특징인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중첩성, 거리에 상관없는 얽힘성, 여러 개가 하나로 응축되는 일관성이 어떤 장소나 사람을 지칭할 때 시각, 촉각, 미각 등 다양한 요소를 하나로 통합하여 특정한 상(象)을 떠올리는 의식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뇌 기능이 멈추면 미세소관 내의 양자 정보, 즉 시공간에서의 의식은 어느 한 곳에 머물르지 않고 우주 속으로 사라져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일종의 '양자 영혼'으로 존재하며, '양자 영혼'으로 환생이나 근사체험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류 학계의 견해와 거리가 먼 이들의 주장은 초창기부터 많은 수학자, 철학자, 물리학자, 신경과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펜로즈와 해머로프 등이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또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양자 효과 연구 결과들이 등장하면서 여러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 EBS 다큐프라임 <데스> 중 Orch-OR 관련 부분 (1) EBS 다큐프라임 <데스> 중 Orch-OR 관련 부분 (2)

 

TEDx Brussels 2010 - Stuart Hammeroff - Do We Have s Quantum Soul?

7.3.3. 환생, 임사 체험에 관한 사례 연구[편집]

미세의식을 상좌부 불교에서는 재생연결식, 대승 불교의 유식학파에서는 아뢰야식, 밀교에서는 정광명 등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미세의식의 특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미세의식에는 수없는 전생동안 행한 여러 업들의 종자(種子), 즉 일종의 씨앗이 내재되어 있어 적절한 조건을 만나면 업의 과보를 맺는다. 미세의식에 기록된 과거생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을 숙명통(宿命通)이라고 하는데,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능력이다. 즉, 뇌가 손상되거나 뇌사 혹은 사망 시에 기억을 상실한다는 사실은 표층의식의 영역에만 적용되며 잠재된 미세의식의 영역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도 수행을 통해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이란 3가지 능력을 얻고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걸친 인과(因果)와 연기법(緣起法)의 이치를 알게 되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한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사례는 버지니아 대학교 정신의학 및 신경행동과학과 교수인 이안 스티븐슨(Ian Stevenson)과 그의 제자 짐 터커(Jim B. Tucker) 교수 등에 의해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있다. 이들은 전세계적으로 연구자들이 직접 탐문하여 수집한 2,500여 명의 사례를 바탕으로 과학적 회의론의 관점에서 환생의 존재여부를 연구하였다. 그들이 확인한 전생의 기억을 가진 856개 사례 중에 아이가 주장한 전생의 인물을 찾아 확인한 결과 67%가 아이가 말한 내용과 일치한 부분이 있음을 확인했다.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환생이 존재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학자의 양심을 걸고 환생의 존재를 믿는다."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전 인류의 인구 수에 비해 표본의 수가 너무 적어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사망하였으며, 그의 제자 짐 터커 교수에 의해 지속적으로 연구 중에 있다. [82] ##

환생의 주체로서 뇌나 육체 외부에 영혼 혹은 의식이 존재할 수 있는 간접적 증거로 유체 이탈이나 임사 체험 연구를 들 수 있다. 뉴욕주립대학 응급의학자 샘 파니아(Sam Parnia) 박사는 2008년 7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4년 동안 미국, 영국, 호주 등에 있는 15개 대형병원과 공동으로 대규모 실험을 벌였다. 임사체험이 환각이 아닌 실제적 의식 작용임을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파니아 박사는 수술실로 실려온 심장마비 환자 2,060명을 추적조사 하였다. 심장마비가 오면 호흡과 맥박이 정지되고 외부의 시각과 청각 등을 감지하는 뇌 전기 신호도 사라지는 등 완벽한 죽음상태와 가까워진다.

조사 결과 2,060명 가운데 330명이 심장마비를 겪고도 살아났는데, 이들에게 심층 인터뷰를 실시한 결과 9명이 사후 세계를 경험하거나 유체이탈을 한 임사체험을 했다고 증언하였다. 그 중 특히 57세 남성의 유체이탈 경험담은 당시 수술실 내부의 정황을 정확하고 세세하게 이야기했다. 파니아는 유체 이탈 상태에서 확인 가능하도록 응급실에 숫자가 쓰인 카드가 놓인 선반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응급처치가 실행된 곳이 선반이 설치된 응급실이 아니어서(...) 카드에 쓰인 숫자를 맞춘 사례는 없었다. #

이 외에도 뇌나 육체 외부에 존재하는 의식에 관한 여러 주장과 사례가 있다. 그러나 현재의 과학적 기술로는 뇌 외부의 영혼이나 의식에 대하여 연구하는데 한계가 있어 결정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돈 되는 임상 연구에 예산과 관심이 쏠리다보니 의식에 관한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든 현실적인 한계도 존재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향후 아직 연구되지 못한 영역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불러올 또다른 발견이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7.4. 도전과 위기[편집]

아래는 어떤 달라이 라마 관련 인터뷰이다.

인터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과연 15대 달라이 라마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 있다면 어떻게 선출한 것인가.'이다. 달라이 라마가 진술한 내용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작성된 무수한 성명서들과 저서들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이 글들을 통해 자신이 후계자를 둔다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 것과 2007년 중국 정권이 통과시킨 법에 대해 거론했다. 해당 법은 어떤 티베트 고승들이 환생될 것이며 환생을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지 결정할 권한을 (역설적이게도) 중국 공산당에 부여한다.인터뷰를 통해 14대 달라이 라마는 그의 이전 교학 저서들에서 언급한 교리에 대한 입장을 다시금 언급했다. 티베트와 몽골 고승 수백 명, 어쩌면 수천 명은 환생을 통해 계보를 이어간다. 달라이 라마가 거듭 언급한 바에 따르면 고승은 서거 전에 자신의 본질을 후계자에 전수할 수 있고[83], 고승 한 명이 두 사람 이상으로 환생하거나 전혀 환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전적으로 고승의 뜻에 달렸다.크리스마스에 열린 달라이 라마와의 중요 인터뷰(Bitter Winter, 2018.12.29 >마시모 인트로빈(MASSIMO INTROVIGNE) 영어 인터뷰


부연 설명이 없어 어떤 의도로 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달라이 라마의 환생이 정치적 이유로 인해 더이상 지속되기 힘든 위기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달라이 라마의 환생과는 별개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 환생자 제도도 변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다. 일부에서는 종사르 켄체 린포체(Dzongsar Jamyang Khyentse Rinpoche)의 주장[84]처럼 폐지해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환생자 제도가 본 취지대로 잘 적용되면 선거로 뽑힌 선출직 지도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신적, 도덕적 권위를 갖게 된다. 실제로 환생자는 사원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사원의 운영과 전법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교황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지도자로 손꼽히는[85] 달라이 라마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듯 많은 환생자들은 범인(凡人)이 행할 수 없는 여러 업적을 남기며 중생 구제의 사업을 충실히 이끌어왔다.

그러나 모든 제도가 그러하듯 환생자 제도에도 부작용이 존재한다. 가령 환생자의 활동이 사원의 명성과 재정 수입 증대(...)에 직결되다보니 지나치게 타이트한 교육과 전법 스케줄로 환생자를 혹사시키기는 일이 있었다. 또한 환생자의 권위를 뒷배 삼아 환생자의 친족이나 측근들이 사원 운영에 간섭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심지어 환생자의 선정 과정에서부터 이권을 노린 세력이 개입하여 종종 가짜 환생자가 등장하기도 하였고. 또한 환생자가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유폐되거나 암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거에는 특히 티벳의 봉건제도와 연계되어 더욱 문제가 많았다. 환생자 중 일부는 종교적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세속 군주로서 전쟁 등 승려로서는 관여하지 말아야 할 임무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이는 환생자 제도의 문제라기 보다는 정교합일 사회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환생자 제도와 봉건제가 오랜 시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보니 불가피하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정치적 권한을 티벳망명정부에 모두 이양하여 정교분리를 이룬 현대에는 더이상 이러한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생의 증거와 환생자들의 특출한 능력을 직접 목도하고, 굳은 신심과 헌신으로 환생자 스승을 모셔왔던 티베트인들에게 환생자 제도는 제도 이상의 큰 의미가 있다. 달라이라마가 어떠한 결정을 하더라도 환생자 제도 자체는 당분간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8. 한국 불교와의 교류[편집]

 

8.1. 인적 교류[편집]

허일범, 《한국 불교 속의 티베트불교》
한국 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교류는 신라시대에서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특히 티베트 불교를 숭앙하던 몽골의 침략 이후 고려 불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신라승 김무상(金無相, 684-762)과 티베트 사신 바상시가 만난 일화는 삼예사(寺)의 사지(寺誌)에 해당하는 《바세》에 기록되었다. 김무상은 경덕왕 13년(754) 당나라 장안에서 티베트 사신들을 만나 인도불교가 티베트에서 주류를 이룰 터인데, 훗날 티송데첸 왕이 등장하여 불교를 널리 홍포하리라 예언했다고 한다. 또한 김화상은 사신들에게 《십선경》, 《금강능단경》, 《도간경》을 전해주면서 왕의 즉위시에 사용하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훗날 김무상의 예언은 적중하여 샨타락쉬타가 인도에서 들어와서 티베트에 불법을 홍포했고, 티송데첸 왕이 즉위할 때에는 사신들이 전수받은 세 종류 경전을 독송하여 신심을 일으켰다.

혜과(惠果) 화상의 제자인 신라의 오진(悟眞)은 인도로 구법순례를 떠났다가 귀로에 티베트에서 입적하였다.

신라시대 고승 원측(圓測)의 《해심밀경소》를 법성(法成, Chos grub)이 티벳어로 번역하여 티베트 대장경에 들어갔다. 이후 원측의 저서는 티베트 불교 내에서 경전 해석의 주요한 논거가 되는 대표적인 논장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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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유식학의 대가였던 원측(圓測).
생전에 티베트를 다녀갔으며, 티베트를 거쳐

구법(求法)을 위해 인도로 향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고려 충렬왕 20년(1294) 티베트 승려 절사팔(折思八)이 티베트 경전과 법구류를 가지고 고려에 들어오고, 충숙왕 1년(1314)에는 홍약이 티베트 경전 1만 8천여 권을 고려에 전해주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충숙왕 7년(1320)에는 몽골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티베트로 들어가게 된 충선왕을 위하여 민천사(旻天寺)에서 기도법회를 열었다. KBS 역사저널 그날 충선왕 티베트로 유배를 떠나다

현재 우리나라 불교에 널리 퍼진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도 티베트의 자사태마(刺思?麻)와 사팔자(思八刺) 라마가 전한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1967년에 달라이 라마 14세가 라사판 티베트 대장경 한 질을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한 일이 있다. 이후 2009년 달라이 라마가 기부한 20만 달러 자금을 토대로 동국대에 티베트 대장경 역경불사를 하는 티벳대장경역경원이 설립되었다.

&lt;img class='wiki-image' width='100%' src='//w.namu.la/s/b9283b975f2d459bbd3b5acead175703331dcaa0b58a60171ade4c71597ff3422218ccf6a3b7b74cb667550c499d67948d5db9a932d1e453cc6a894431b73a116a323b8ef1ae439956ee114b9358898c7c989715ba1c333e8e73d36ff2cb19ca' alt='파일:20190720_002240.jpg'&gt;

송광사 방장 범일 보성(梵日 菩成) 스님은
달라이 라마와 교류하며 한국 불교와 티베트 불교
양 불교 전통의 발전적 교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8.2. 문화 교류[편집]

고려시대 이후에 편찬된 의식집들에서 진언들을 실담문자나 티베트 문자로 표기하고, 관법차제(觀法次第)와 같은 수행법에서 범자로 된 종자자(種子字)를 명상에 채용한다.

또한 사원의 건축물이나 법구류 등에서 범자나 티베트 문자로 된 진언종자들을 활용한다. 사원건축에 단청을 하고, 거기에 범자로 된 문양을 새겨 넣는 것은 티베트를 제외한 어떤 아시아 국가에도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인도나 티베트로부터 몽골 지역을 거쳐서 전파된 나가리·실담·란차·티베트·팍파문자 등은 우리 나라의 불교관련 의식집의 찬술 및 문자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육자진언(옴 마니 반메 훔) 관련 수행법은 티베트에서 저작된 《마니 카붐(Tib. མ་ཎི་བཀའ་འབུམ་, Wyl. ma Ni bka' 'bum)》의 가르침을 계승한 것으로 육자진언을 활용한 명상법이라는 특징이 있다. 《마니 카붐》은 몽골을 통하여 고려에 전래된 서적인데, 육자진언과 관련된 모든 가르침들을 총망라했다.

밀교경궤의 교설에 입각한 다면다방불(多面多方佛), 운주사에 조성된 대석합체불(大釋合體佛)과 쌍와불은 티베트 불상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괘불탱화는 티베트 불교에서 널리 쓰이는 법구이다. 흔히 티베트에서는 이것을 ‘탕카(Thang-ka)'[86]라고 부르는데, 사찰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야외에 단을 설치하고, 괘불을 봉안한 다음 법회를 열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괘불탱화가 다수 존재하고 큰 법회에서 활용한다. 오래된 괘불탱화는 국보나 보물 등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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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티벳의 괘불탱화(탕카) 법회 모습.
티벳에서는 법회 때 탕카 전용으로 지어진 거대한 벽이나 산자락에 탕카를 전시한다.


고려시대 때부터 제작된 금강저(金剛杵)와 금강령(金剛鈴)은 현대 한국불교에서는 별로 안 쓰이지만, 밀교경전에 의거한 수행법에서는 널리 쓰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하는 금강저는 티베트 계통과 당나라 계통 금강저를 응용한, 한국의 독자적인 형태인 것이 대부분이다.

고려 명종 20년(1190)에 조성된 용문사 윤장대(輪藏臺)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티베트인들의 신앙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마니륜통(摩尼輪筒)이다. 2000년대 넘어서 용문사의 윤장대와 그 형식은 다르지만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티베트의 것을 채용한 마니륜통을 제작하여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법구로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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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amp;lt;img class='wiki-image' width='100%' src='//ww.namu.la/s/1f4f7e2f0adaebcf720a96400cbe5d59550c8c2760acc8ea3daf5ef03e81d9b9d739ec5e588fbee70b8031360557721cefdf6f17b09bb2af3d53ff5e04484f9bb423b7e0acd46b0c8f5dd4da70ca06a3c2153b5f78b5cfc5e097790b6b7c2821' alt='파일:70436920.RjcLP5rL.jpg'&amp;amp;gt;

국보 제 328호 예천 용문사 윤장대(輪藏臺)와
티베트의 마니 콜로(mani khrolo).[87]

9. 지역별 보급[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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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불교 종파의 분포

 

밀교 · 티베트 불교

 

대승 불교

 

상좌부 불교

9.1. 대한민국[편집]

&amp;amp;lt;img class='wiki-image' width='100%' src='//ww.namu.la/s/2338b4615107e1e93579388abfe74aa87550f157bc24b7826b324ad2e76b4abe0c26e2d4ad155156ff9d272bb8f5a3004c22b88455bf63ba03751d80c964277ee86eb1540fde2b33470f88d59b9e8364905a4ea6acd810a3781c5f8f8a099a5d92ef4bf2923f7ebd90d57425ddc380bf' alt='파일:external/www.koreatibetcenter.com/80ea94c8_c7a5c1f6.png'&amp;amp;gt;

현대 대한민국에 들어서 부산에 '한국 티벳 불교 사원 광성사'라는 티베트 사원이 들어섰고[88] 소속된 종파는 달라이 라마가 수장으로 있는 겔룩빠(Gelukpa). 이 사원은 주지스님을 비롯하여 주재하는 승려들은 모두 티베트에서 수계하고 공부한 이들이다. 티베트인 승려 약 4~5명이 거주하고, 모두 중국의 티베트 압제를 피하여 대한민국까지 온 이들이다. 아울러, 달라이 라마의 방한 운동을 사원 측면에서 추진한다.

현재 한국 내에서 티베트 불교를 수행하는 대표적인 곳들은 다음과 같다.


이 외에 정기/비정기적인 법회와 수행모임을 개최하는 수행단체는 다음과 같다.


티베트 불교를 믿는 네팔, 몽골 이주민들을 위한 사찰도 있다. 이 중 서울네팔법당 텍첸사의 경우 한국인 불자들도 법회에 참여하고 있다.

  • 서울 네팔법당 텍첸사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

  • 동두천 네팔법당 용수사 (경기도 동두천시)

  • 몽골 간단사 서울 포교당 (서울시 중구 광희동)


티베트 불교 관련 국내 학술기관은 다음과 같다.


이외에도 불교 발전을 위해 한국의 주류 불교와 티베트 불교 사이에 교류를 하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전남 보성군의 대원사에서는 '티벳 박물관'을 세우고, 티베트 불교 승려가 보낸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티베트풍 탑을 짓기도 하였다.

9.2. 중화권 및 티베트[편집]

한반도와 일본과는 다르게 중국은 몽골 제국의 행성으로서 직접 지배를 받아서 티베트 불교가 매우 성행했다. 중국령이 된 상태인 티베트 자치구칭하이성, 쓰촨성 일부 지역을 포괄한다. 내몽골 자치구몽골인들과 신장 위구르 자치구 몽골 자치현의 오이라트인들 그리고 동북 3성의 만주족도 많이 믿는다.

티베트는 이름대로 티베트 불교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으나, 중국의 침략과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 이후 문화대혁명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현대까지 중국 내 티베트인들 대부분은 독실하게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사실상 티베트 지역의 국교. 그러나 10%정도는 티베트 고유 종교인 뵌교를 믿는다.

한족들도 티베트 불교를 상당히 많이 믿지만[89], 물론 퍼센트나 절대적 수 모두 넘사벽인 도교와 대승 불교, 기독교에 밀린다. 중국 신도들은 명목상으로는 티베트 독립에 반대하며[90] 이에 관련된 정치상황에 대해서는 절대 말을 하지 않는다. 중국 정부의 규제도 상당한 편.

베이징 지하철 2호선 용허공역의 영문 표기는 Yonghegong Lama Temple Station으로, 용허공 라마교 사원이라 표기한다.

대만에도 소수의 티베트 불교 신자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외성인인데 조상이 상술한 중국 내 티베트 불교 강세 지역들 출신인 경우가 많다. 물론 중국 공산당의 소수민족 탄압을 피해 중국 대륙에서 망명해온 티베트인, 몽골인, 만주족 등의 민족도 있다. 홍콩마카오 또한 상술한 중국 내 티베트 불교 강세 지역에서 망명해온 이들 및 그 후손들이 티베트 불교를 믿고 있다.

9.3. 네팔[편집]

석가모니의 탄생지 룸비니(Lumbini)가 네팔에 있지만, 힌두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약 80%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다. 반면 불교 인구는 9~10% 정도에 불과하다. 네팔의 불교는 크게 티베트 불교, 네와르 불교, 테라와다(상좌부) 불교로 구성된다.

네팔은 티베트와 지리적으로 인접해있고 한 때 티베트의 지배를 받았던 적도 있다. 그 영향으로 셰르파(Sherpa)족 등 티베트버마어파 언어를 쓰는 카트만두 계곡 근처 북부 고지대의 몽골리안계 소수 민족들이 티베트 불교를 주로 믿는다. 중앙의 네와르(Newar)족은 힌두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네와르 불교를 믿는다. 힌두교의 영향으로 네와르족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카스트 제도가 있다. 테라와다 불교도 소수지만 존재한다.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 인근은 성역화되어 전세계 불교 종파들이 세운 사원들이 밀집해있다.

9.4. 부탄[편집]

사실상 부탄국교이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 대신 샵둥나왕남걜(Zhabdrung Ngawang Namgyel)이 국사(國師)의 위치를 차지한다. 16세기에 티베트 불교 종파 중 둑빠 까규빠 세력이 겔룩빠의 탄압을 피해 부탄에 자리잡아 국교가 되었기 때문.

9.5. 몽골[편집]

몽골 제국 시대부터 몽골인들의 종교가 되었다.

공산주의 시대에는 독재자 허를러깅 처이발상의 주도로 극심한 탄압을 받았지만[91] 탈공산화 후 완화되었다. 간단 사원이 몽골 티베트 불교의 중심적인 사원이다.

9.6. 러시아[편집]

러시아의 아시아계 시베리아 소수민족부랴트인과 투바인, 칼미크인 등이 주로 믿는데 이들 중에서도 믿는 자들은 매우 극소수들이다. 이들은 위에 언급된 몽골과 가까운 계통의 민족들이데 이들은 대체로 19세기 말부터 믿기 시작하여서 예전 티베트 불교와는 조금 이질적이다. 칼미크인은 최고 지도자를 자체적으로 따로 뽑는다.

무신론을 강요하던 소련 시절, 칼미크인 불교 지도자들은 티베트 불교가 무신론이라고 주장했으나, 소련 정부는 티베트 불교는 무신론이 아니라면서 이슬람이나 기독교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의 박해를 가했다.[92] 당시 소련 전국에 오직 2군데 사원[93]만이 허가 하에 존치되었을 정도였다.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 정부에서 공인한 '전통 종교' 4개 중 하나로 지정되어[94] 정부 인사들과 불교 대표가 자주 만나는 등 사정이 많이 나아져 교세를 회복하고 있으며, 영미권에서 티베트 불교 신자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처럼 소수민족 외의 슬라브계 러시아인 신자도 아주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다. 그리고 러시아의 화교[95] 또한 티베트 불교 신자가 많은데 이들은 주로 동북 3성 한족의 후손이다.

9.7. 인도[편집]

힌두교를 믿는 일반 인도인은 거의 믿지 않으며, 인도 북부의 라다크, 시킴, 아루나찰프라데시 등 티베트계 지역과 중국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티베트인들이 주로 믿는다.

인도 사회에서 오랜 세월 천대를 받아온 불가촉천민 계층에서는 불교를 믿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불가촉천민이라면 티베트인 거주지에 사는 경우가 아닌 이상 티베트 불교보다는 신흥 종파인 나바야나(Navayana)를 믿는다.[96] 나바야나는 인도 독립 이후 불가촉 천민들의 지도자였던 암베드카르 박사가 수십만명의 불가촉천민, 평민과 함께 한 불교 운동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9.8. 기타 전세계[편집]

일본 불교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진 불교로 심지어 아프리카에도 절이 있다.[97] 아프리카 불교도들의 따라보살 기도 영상[98] 서양에서도 유럽[99]이나 미국[100], 중남미[101]등지에 상당한 신자들이 있을 뿐 아니라 서구 학계에서는 티베트 불교를 인도의 마지막 대승 불교의 정통 후계자로 보는 경향이 강하고[102] 중국 불교, 상좌부 불교와 함께 학자들이 많이 연구하는 종파이다.

달라이 라마(Dalai Lama), 까루 린포체(Kalu Rinpoche)[103], 딜고 켄체 린포체(Dilgo Kyentse Rinpoche)[104], 소걀 린포체(Sogyal Rinpoche)[105] 카르마파(Karmapa), 꺕제 송 린포체(Kyabje Zong Rinpoche) 등이 활발하게 포교활동을 벌이며 티베트 불교를 서방에 알렸다.

10. 기타[편집]

10.1. 초야권?[편집]

원나라 때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몽골인이 한족에게 초야권을 행사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신력건(信力建)이라는 중국의 언론인이 민담과 전설, 민간풍습을 재구성하여 추측한 주장에 불과하다. 정사(正史)인 《원사(元史)》, 《원조비사(元朝秘史)》 등에는 초야권과 관런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원나라 지배층과 결탁한 티베트 라마들 중 일부가 타락하여 민간의 아녀자를 겁탈하는 등 성적 착취를 행하였다는 정황은 찾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밀교의 교리가 악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터넷 상에는 외몽골 같은 일부 티베트 불교권 지역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승려가 초야권을 행사하여 매독(syphilis) 감염의 주 경로가 되었다는 출처 불분명한 주장이 있다. 몽골 승려에게 초야권이라는 명시적인 권리가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당시 몽골 승려들이 성적 금기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것은 사실이다.

캠브리지대 사회인류학과의 바산자브 테르비쉬(Baasanjav Terbish)는 딴뜨리즘의 성력(性力) 수행만으로는 몽골 승려들의 성생활을 설명하기 힘들다고 보았다. 딴뜨리즘의 성력 수행은 범속한 성행위와는 달리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근기를 갖춘 극소수 수행자에게만 허용된 고도의 수행 방식이기 때문이다.

테르비쉬는 딴뜨리즘 뿐만 아니라 세속 사회와의 근접성과 사원의 경제활동에도 주목하였다. 몽골의 승려들은 출산을 돕고 불임 부부의 임신을 축원하며, 결혼할 길일(吉日)을 택해주고 이혼을 허가하는 등 유목민 사회의 신체적, 성(性)적 문제에 관여하였고 일부는 성력 수행을 하며 자연스럽게 속인화(俗人化) 되었다.

또한 불교 사원들이 상업, 운송, 숙박 등 각종 경제활동에 참여하여 사원의 부가 증대함에 따라 승려들이 사유 재산을 갖는 것이 허용되었고, 사원의 부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승려가 자신의 적자(嫡子)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테르비쉬의 주장과 몽골의 매독 전염사(史)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딴뜨리즘의 성력수행이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종교적 배경 하에서 승려와 유목민 사회 간의 밀접한 관계와 사원의 경제활동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여 그 결과 승속(僧俗)의 구분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풍조 속에서 근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매독이 몽골 승려들과 그 친족들에게도 전파되었다고 여겨진다.
Baasanjav Terbish, 《Mongolian Sexuality: A Short History of the Flirtation of Power with Sex》

10.2. 밀교와 성(性)?[편집]

1. 밀교와 성(性)에 관한 오해

후기 밀교 수행법 중에는 성에너지를 이용한 수행도 있으나 이를 '저급하다', '좌도 밀교'라고 표현하는 것은 딴뜨리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과거 서구의 기독교적 편견(혹은 동양의 유교적 편견)에 해당한다. 밀교에 대한 이해가 축적된 현대에는 이미 불교의 철학적 개념에 대한 상징적,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밀교의 부모불(혹은 쌍신불, 얍윰Yab-yum)은 지혜와 방편, 혹은 현상과 공성의 합일을 상징한다. 수행에 있어서도 실제 딴뜨릭 수행자 간의 직접적인 결합 대신 관상(觀想)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을 단순히 성력의 심볼리즘 취급한다는 주장도 온당치 못하다. 밀교에서는 남녀 모두 공히 동등한 수행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며, 때로는 여성이 스승이 되어 남성 수행자를 지도하는 등 밀교 수행자로서의 여성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밀교의 계율인 사마야(samaya)에서는 여성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

불교학자 정성준은 딴뜨리즘의 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근대학자들은 힌두교의 샤끄띠파의 성을 매개로 한 성력(性力)적인 수행을 좌도밀교(左道密敎, the Left-hand path)라 지칭하여 비판하고, 이에 비해 윤리적이고 사회적 도덕성을 강조한 쉬바나 비슈뉴파 등은 우도밀교(右道密敎, the Right-hand path)라고 말하여 구분하였는데, 이는 지역적으로나 시대적으로 속성이 다른 용어를 강제로 결합시킨 말이 되며, 이러한 언어적 오류가 한국불교에도 해명되지 않은 채 답습되고 있는 것이다. 좌도밀교는 원래 ‘힌두딴뜨리즘의 샤끄띠파의 성력(性力)사상이나 그 실천체계’라고 불러야 정확한 말이 된다.

후기밀교의 한 시대에는 관상(觀想)에 의지하더라도 성적(性的) 관상을 실천하는 수행이 전통적인 비구계의 율의를 범한 것이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는데, 이와 관련한 대목이 《비밀집회딴뜨라》의 관정의식을 다룬 《제4관정의궤, Sakiptbhiekavidhi》에 전해진다. 저자는 위끄라마실라(Vikramaśilā)사의 육현문(六賢門)의 한 사람인 와기슈와라(Vāgīśvara)로 그는《비밀집회딴뜨라》의 유파인 즈냐나빠다류에 속하며, 현밀(顯密)과 계학(戒學)에 능통한 당시 인도에서 가장 번영한 사원의 학두(學頭)였다.

《제4관정의궤》에는 대론자가 “(반야와 방편의 합일을 상징한) 이근교회(二根交會)의 의식이 어찌 비구의 율의를 훼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와기슈와라는 “삼계에 태어난 인간과 제천(諸天) 등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유루(有漏)의 애착을 향수하는 것으로 탐욕을 향수하는 것은 비나야 등에서 금해지고 있는 것이지만, 삼계(三界)를 초월한 신체를 지니고, 유식(唯識)을 자성으로 하는 문수금강(文殊金剛) 등이 현현한 여성들은 그런 류가 아니다”라고 반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론자는 다시 “비나야 등에서 금지되고 있는 외적인 갈마인모(磨印母)에 대해서는 어떻게 적정(適正)하다고 할 것인가?”라고 반론하고 있다. 여기서 갈마인모란 현실세계의 육체를 가진 반야모를 가정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 와기슈와라는 “진언이취에 있어서 실재하지 않는 색 등의 일체의 사물을 자심의 현현(顯現)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꿈과 같은 문수금강을 본성으로 전변한 갈마인모들도 환(幻)과 같은 것이다. 때문에 그녀와의 성적유가를 포함한 관정을 실수(實修)한다 하더라도 청정하며, 과실이 없기 때문에 계율을 범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한다.

반면 와기슈와라 후대에 생존했던 인물로 같은 사원의 대학승(大學僧)이었던 아티샤(Atiśa)는 그의 명저인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에서 “범행자(梵行者)는 비밀과 반야의 관정을 실수해서는 안된다”라고 강조하고, 계를 범할 시 악취에 떨어지는 죄과를 받는다고 경고하고있어 와기슈와라와 반대의 입장에 있다.

같은 시대의 아브야까라굽타(Abhaykaragupta)는 《금강의 화환(Vajrāvalī)》에서 “일체가 공성이기 때문에 갈마인모도 또한 공성을 본질로 한다. 따라서 그녀와의 유가도 율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를 펴고, 반면에 " ‘결고한 진실을 신해하지 않는 비구’인 경우 갈마인모(磨印母)가 아니라 지인(智印)을 사용한다" 하여 와기슈와라와 아티샤와의 절충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청사(靑史)》에는 아브야까라굽타 자신은 위끄라마실라사의 학두로 있으면서 평생 비구의 불범계(不犯戒)를 지키며 결정코 성적 유가를 행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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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다끼니(dakini, "sky-goer") 본존인
바즈라요기니(Vajrayogini)

리치몬드(Richmond) 대 교수 미란다 쇼(Miranda Shaw)는 《열정적 깨달음》에서 딴뜨릭 불교는 대승 불교의 윤리적, 철학적 원칙을 함께하지만, 상징과 의식 분야에서 친밀감과 성(性), 젠더와 체현을 해탈의 길에 포함시키는 특징을 보인다고 하였다.

남녀가 나란히 등장하는 패턴은 남성과 여성이 착취하거나 강제하지 않고 서로 일깨워주는 관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과 숭고한 이상을 나타낸다.

여성과 여성의 가르침이 등장하고 여성의 에너지와 영적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딴뜨라 종교성의 특징이다. 딴뜨라 불교의 여성들은 격렬한 지혜의 화염 속에서 즐겁게 춤추며 태연히 번뇌의 시체를 밟는 거침없고 대담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가부장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 열정적이고 자유로우며 깨달은 여성들이었다.


2. 밀교의 성, 육체, 번뇌 개념에 관한 사상적 배경

밀교를 통해 성과 육체, 번뇌를 다룬 내용은 기존의 대승불교(顯敎)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밀교의 교리와 수행체계를 최초로 체계화한 《대일경》은 대승불교사상이 다양한 측면에서 결합된 것으로, 중관, 유식, 여래장사상이 경전에 반영되어 있다. 경전의 비로자나여래는 절대법신인 《화엄경》의 비로자나불을 계승한 것이지만 보살과 같이 공성에 머물면서 중생구호를 위해 다양한 신변을 나투는 능력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된다. 밀교의 붓다들은 열반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수용신과 육신을 통해 중생을 직접적으로 구호하는 존재들이다.

현교의 경우 중생의 세계에 드나드는 존재는 중생구제를 위해 성불을 포기한 대비천제(大悲闡提)인 대보살들로서 관세음보살이나, 보현보살, 문수보살 등이 그 예이다. 열반을 성취한 현교의 붓다는 열반이라는 절대세계에 도달한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지혜의 광명인 수용신의 범주를 넘지 않으며, 중생의 현실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은 대보살의 몫이다. 그러나 유식계의 논서를 통한 불신론(佛身論)의 전개는 붓다의 몸은 법신, 수용신, 화신의 세 가지가 있으며, 열반의 절대신이라도 삼계의 범주를 다양한 불신을 통해 넘나드는 것으로 이론화하였다.

《대일경》 이후 성립된 《금강정경》에는 중생의 의식과 우주법계의 현상세계가 오불의 속성(屬性)을 지니고, 이에 입각해 현화한다고 보는 부족사상(部族思想)을 체계적으로 설하였다. 오불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아촉불, 보생불, 무량수불, 불공성취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도 후기 밀교경전에는 경전마다 다르지만 오불의 범주에 번뇌를 포함시켜, 탐진치(貪瞋癡)와 아만(我慢), 질투(嫉妬)의 다섯 번뇌도 불성의 부족으로서 성불한 붓다에게 중생을 구호하기 위한 의지와 갈망의 대번뇌로 전변한다고 설하고 있다.

《금강정경》에 설해진 부족사상과 번뇌의 긍정은 인도 후기밀교의 성과 번뇌의 긍정이라는 대전제를 이끌어내는 핵심사상이 된다. 그러나 밀교의 긍정은 중생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성의 지혜에 입각한 불지(佛智)에 의해 조명되었을 때 비로소 대번뇌로 전화할 수 있는 것이다. 《금강정경》에서 설해진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의 수행은 일체의성취(一切義成就)보살이 육신을 사바세계에 둔 채 수용신(受用身)의 몸으로 색구경천(色究竟天)에서 일체여래의 가르침에 의해 성불한다는 내용이 설해지고 있는데, 오상성신의 증금강신(證金剛身)의 수행은 중생의 삼업(三業)의 현실을 신금강, 어금강, 의금강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그 이론적 배경은 마음의 자성을 깨닫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수행이념이 경전을 통해 형식화된 것이다.

한편 대반야경에 소속된 《반야이취분(般若理趣分)》은 공성의 지혜를 통해 정(淨)과 부정(不淨)의 분별을 초월한 보살에게 번뇌와 육체적 현실은 청정한 진여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극적인 표현을 볼 수 있는데, 같은 품은 독립적인 밀교경전으로 조직화되어 《이취경(理趣經)》으로 출현하고, 여기에는 인간의 감촉과 애욕의 수용과정을 17가지로 분류한 ‘17청정구(淸淨句)’로 표현되어 있다. 이에 대한 인도후기밀교의 주석은 17청정구를 포옹과 결합을 통해 일어나는 애락(愛樂)을 향수하는 남녀의 성교(性交)로 해석한 주석서도 존재한다.

이처럼 대승불교의 밀교화는 외교적 요소를 단기간에 수용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반야와 중관, 유식사상 등의 대승불교사상을 점진적으로 반영시켜 경전화된 과정을 여러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밀교화가 외교의 수행을 급작스럽게 받아들인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성장과정에 의해 경전화되고 출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밀교에 있어서 육체뿐만 아니라, 번뇌와 성마저도 불지(佛智)에 의해 관조할 때 현실은 실제(實際)로서 법계의 현현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연원은 연기법의 무아사상으로부터 반야, 공, 유식 등 불교사상의 전개에 따른 것으로 밀교는 딴뜨리즘에 의해 문제시 되었던 성과 번뇌를 전통적인 불교사상의 영역에서 해석한 것이다.
정성준, 《밀교와 성에 대한 이해》

유식학파의 소의경전인 《화엄경》에서는 창녀인 바수밀다(Vasumitra, 婆須蜜多/伐蘇蜜多)를 53선지식 중 하나로 소개하며 탐욕이 지혜로 바뀌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과정을 보여준다.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해탈을 얻었으니 이름은 ‘탐욕의 경계를 여읨’이다. 그들의 욕망을 따라 몸을 나타내는데, 하늘이 나를 볼 적에는 나는 천녀의 형상이 되어 광명이 훌륭하여 비길 데 없게 된다. 그와 같이 사람이나 사람 아닌 이가 볼 적에는 나도 사람과 사람 아닌 이의 여인이 되어 그들의 욕망대로 나를 보게 한다.

또한 어떤 중생이 애욕에 얽매여 나에게 오는 경우에, 내가 그에게 법을 말하면 그가 법을 듣고는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집착 없는 경계의 삼매를 얻게 된다. 어떤 중생이 잠깐만 나를 보아도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환희삼매를 얻는다. 어떤 중생이 잠깐만 나와 말하여도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걸림없는 음성삼매를 얻는다. 어떤 중생이 잠깐만 내 손목을 잡아도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모든 부처 세계에 두루 가는 삼매를 얻는다. (중략) 어떤 중생이 나를 끌어안으면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모든 중생을 거두어 주고 항상 떠나지 않는 삼매를 얻는다. 어떤 중생이 나와 입술을 한 번만 맞추면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이 모든 중생의 복덕을 늘게 하는 삼매를 얻는다. 이와 같이 나에게 가까이 하는 중생들은 모두 탐욕을 여의는 경계에 머물러 보살의 온갖 지혜가 앞에 나타나는 걸림없는 해탈에 들어간다.”

-《대방광불화엄경》<입법계품>


3. 성적 요가의 원리, 수행 자격, 금기

금강승의 성적 요가는 중관, 유식, 여래장 등 대승 불교 철학과 금강승 고유의 인체 생리학(生理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 금강승의 입문은 매우 제한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성적 요가는 극소수의 자격을 갖춘 수행자에게만 허용된다. 독신과 금욕 조항이 포함된 구족계를 수지(受持)한 출가 수행자는 성적 요가를 행할 수 없다. 또한 성적 요가 중에는 복잡하고 때로 위험할 수 있는 수행 절차를 거치며, 반드시 정해진 금기를 준수해야 한다. 달라이 라마는 1981년 하버드대에서 열린 초청법회에서 딴뜨라와 성교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달라이라마 하버드대 강의》 참조.

: 현재 미국에는 성교(性交)와 딴뜨라를 연결시켜서 성교를 수행이라 하고, 성교를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선전하는 책이나 단체들이 많습니다. 전통적인 딴뜨라의 가르침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성교의 역할이 무엇인가요? 독신생활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 사실 딴뜨라에 대해서 오해할 위험이 큽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여러 가지 단계의 의식이 있고, 가장 미세한 의식을 수행에 이용할 때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미세한 단계의 의식을 경험하는 것은 포착하기 쉬운 단계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중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미세한 의식의 힘을 실제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수행자가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포착하기 쉬운 단계의 의식을 고의적으로 제어하고 정지시킬 수 있다면 미세한 단계의 의식이 작용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미세한 의식이 작용할 뿐 아니라, 그 의식은 방심하지 않고, 예민하고, 명석합니다. 이 미세한 단계의 의식은 공성과 무아를 이해하는 지혜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수행자는 포착하기 쉬운 단계의 의식을 중단시키려고 노력해야 되고, 그러려면 백보리(白菩提)와 적보리(赤菩提)[106] 같은 근본적인 요소들을 이동시켜서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딴뜨라 수행에는 성교가 그런 식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여기서 말하는 결합은 통상적인 의미의 성교가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는 여섯 가지 근본 요소로 구성됩니다. 어떤 설명에 의하면, 그 중 세 요소는 어머니에게서 받고, 세 요소는 아버지에게서 받는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서 받는 세 요소는 뼈와 골수와 정액이고, 어머니에게서 받는 세 요소는 살과 피부와 피라고 합니다. 또 다른 설명에 의하면 여섯 가지 요소는 지, 수, 화, 풍, 맥, 명점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지구상에 태어난 인간의 물리적 육체라는 특별한 조건으로 인해서, 육체 안의 요소들에 어떤 변화가 생기면 미세한 단계의 의식의 안에 변화가 옵니다. 예를 들어 재채기를 하거나 하품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성교를 하는 동안에도 그런 의식의 변화가 잠시 일어납니다.

(붓다슈리즈냐나(Buddhaśrījñāna)에 따르면 평상시 노력을 하지 않고도 미세한 단계의 의식을 경험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 가령 깊은 잠에 들었을 때, 성적인 희열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기절했을 때, 그리고 죽음의 순간이 그런 경우들이다. 딴뜨라 수행자는 이러한 네 가지 상황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을 때 특별한 명상을 수행하여 미세하고 청명한 빛의 마음(정광명, 淨光明)을 일으킬 수 있다. 정광명은 죽음이 진행되는 동안 가장 강렬하며 그 다음 깊이 잠들었을 때, 그 다음으로 성적인 희열을 느끼는 순간의 순으로 약해진다.)

의식에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본성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의식의 변화는 성교를 하는 동안에 일어납니다. 수행자는 그것을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딴뜨라 수행에서는 성교를 방편으로 이용합니다. (이 때 수행자는 성적인 희열의 에너지를 참고 그 에너지를 방출, 즉 사정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만일 그 에너지를 붙들고 있지 못하고 흘려버리면 이는 아주 심각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욕계에 살면서 아직 욕망을 버리지 못한 어느 딴뜨라 수행자가 수행의 일부로서 고의적으로 마음에 욕망을 일으킨 다음에, 근본 요소들이 변화하고, 포착하기 쉬운 단계들의 마음 대신에 미세한 마음들이 작용하는 동안, 딴뜨라 수행자는 가장 미세한 단계의 의식을 이용해서 공성을 깨닫습니다. 하나의 의식이 두 가지의 상반된 유형(번뇌와 지혜)의 이해를 동시에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가장 미세한 의식이 공성(空性)을 깨달을 때 욕망을 일으킨 마음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맥과 기와 명점에 변화를 유발하는 집착과 욕망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은 본래적 존재가 있다는 생각(아집我執과 법집法執)입니다. 하지만 그런 욕망으로 인해 나타나게 된 미세한 마음이 공성을 깨달으면, 그 미세한 마음은 욕망을 일으키도록 도왔던 '본래적 존재를 생각하는 의식'을 없애는 치료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나무에서 생겨난 벌레가 결국은 그 나무까지 갉아먹는다는 예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수행들을 하는 사람은 공성과 무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하거나 경험을 해야 하고, 둘째로 그런 수행의 목표는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므로 수행자는 다른 중생들을 돕기 위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는 이타적인 의도를 가져야만 합니다. 공성을 이해하고 이타적인 의도를 갖지 않으면, 그런 딴뜨라 수행의 기법들이 적절하게 사용될 수가 없습니다.

무상 요가 딴뜨라의 몇몇 수행들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몸 안의 기가 중맥(中脈)으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제가 말한 육체적 변화는 주로 기가 중앙 기맥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 머물다가 사라지는 결과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강력한 방법은 목의 맥도(脉道)들을 죄는 것인데, 그 방법을 올바르게 아는 사람을 성공할 수 있지만 잘 모르는 사람은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방법들이 딴뜨라 수행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실행하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딴뜨라 수행을 밀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수행한 숙련된 스승을 만나지 못했거나 수행자가 자격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거나 딴뜨라 수행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쌓지 않았다면 딴뜨라 수행은 불가능합니다.

10.3. 승려의 결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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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 수행자 응악빠

출가 비구


닝마빠 등 티베트 불교 일부 종파에는 대승불교의 재가 수행자 전통과 히말라야 일대 요기(yogi)의 전통을 계승한 응악빠(sngags pa, 남성)/응악마(sngags ma, 여성)라는 재가 수행자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밀교 수행자로서 그들만의 특별한 계를 받고 각종 의식을 집전하며 수행에 전념하므로 일반적인 세속의 재가 불자와는 구별된다. 이들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가질 수 있다.[107] 응악빠에는 혈통을 통해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를 거쳐 이어지는 전승과 법맥의 전수를 통해 이어지는 전승 두 종류가 있다. 사캬빠의 법왕인 사캬 티진(sa skya khri 'dzin)의 직위도 쾬(Khon)족 혈통에 의해 계승되는 응악빠의 일종이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에서도 출가 수행자인 비구계(구족계)를 받은 승려인 겔롱(dge slong, 남성)/겔롱마(dge slong ma, 여성)는 결혼을 할 수 없고 성관계도 당연히 가질 수 없다. 비구계를 받은 승려는 무상요가 딴뜨라 수행 가운데 하나인 성력(性力)수행도 행할 수 없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에는 구족계를 받았음에도 결혼한 이른바 '대처승'은 없다. 만일 승려가 결혼을 원한다면 비구계를 환계(還戒)하고 환속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환생자 스승인 린뽀체들 중에도 비구계를 받지 않거나 비구계를 환계하고 환속한 후 결혼한 재가 수행자들이 있다. 그러나 쫑카빠의 개혁으로 탄생한 티베트 불교의 최대 종파인 겔룩빠에는 비구계나 사미(니)계[108]를 받은 승려, 즉 출가 수행자만 존재하며 재가 수행자는 환속한 몇몇 극소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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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마빠에는 일찍이 출가 수행자와 재가 수행자
두 전통이 공존했다.


재가자 또한 출가자와 동등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한 대승 불교에서 응악빠와 같은 재가 수행자 전통의 존재와 재가자 스승이 출가 승려를 가르치는 것은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다. 대승 불교의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보현보살 등은 재가자 출신 보살이며 티베트 불교의 빠드마삼바와, 예세 초겔, 돔뙨빠, 밀라레빠 등도 불보살의 과위를 성취한 재가자 출신의 성현으로 여겨진다.

물론 티베트 불교에서도 출가 승려는 존경의 대상이며 계율과 의식, 예법 등에 있어 출가 수행자와 재가 수행자의 구분이 있다. 그러나 복식에 있어 때로는 재가 수행자와 출가 수행자의 구분이 잘 되지 않아 개선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티벳불교의 재가 수행자는 머리를 기르고 백색 의복을 입지만, 출가 수행자는 삭발하고 사프란(saffron)색 가사를 입는다. 또한 닝마빠의 대학자 잠곤 미팜( 'Jam mgon mi pham rgya mtsho)이 지적한 바와 같이 배우자를 갖는 것이 법을 가르치고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지도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10.4. 육식?[편집]

티베트는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농경보다는 목축이 주를 이루었다. 식생활도 고기와 유제품 위주이며 여기에 밀과 보리같은 곡물과 차(茶)를 더하여 부족한 비타민 등을 보충한다. 농작물을 구하기 힘든 티베트 민족에게 육식은 불가피한 생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티베트 민족의 식습관을 두고 육식을 기피하는 동아시아 불교권의 불자들은 혹 육식이 불교의 계율을 어기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표할 때가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육식이 계율에 위배되지는 않는다. 티베트 불교에서 따르는 설일체유부 계통의 《율경근본율(Vinayasūtra) 》이나 동아시아 한문권 불교에서 따르는 법장부 계통의 《사분율(四分律)》, 상좌부 불교의 율장인 《위나야 삐따까(Vinaya Piṭaka)》등은 모두 '삼정육(三淨肉)' 과 같은 예외 사항을 만들어 육식을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 동아시아 불교권에서 육식을 금하는 것은 《범망경(梵網經)》의 대승계 때문이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는《범망경》의 대승계가 아닌 《입보살행론(Bodhisattvacaryāvatāra)》, 《대승집보살학론(Śikṣāsamuccaya)》의 대승계와 《유가사지론(Yogācārabhūmi-Śāstra)》 <계품>의 대승계를 따르는데, 여기에는 육식을 직접적으로 금하는 조항이 없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도가 삼정육을 섭취하는 것이 별해탈계나 보살계를 어기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티베트 불교에도 자발적으로 채식을 실천하는 수행자들이 있다. 과거 까담빠의 아티샤(Atisha)나 닝마빠의 샵카르(Shabkar) 같은 고승들은 평생 채식을 했다고 전해진다. 현대에는 닝마빠의 차트랄 상게(Chatral Sangye) 린뽀체, 뻬마 왕걀(Pema Wangyal) 린뽀체나 깔마 까귀빠의 17대 까르마빠(Karmapa) 오걘 틴래 도제(Orgyen Trinley Dorje), 밍규르(Mingyur) 린뽀체, 그리고 겔룩빠의 삼동(Samdhong) 린뽀체, 라마 조파(Lama Zopa) 린뽀체 등이 티베트 불교 내의 대표적인 채식주의자이다.
까르마빠의 채식 관련 법문

달라이 라마도 인도 망명 이후 완전 채식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급격한 식습관의 변화로 인해 심한 황달이 발생하는 등 건강이 악화되어 채식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후 불살생과 채식을 권장하는 법문을 여러 차례 설한 바 있다. 인도로 망명 온 티베트 난민들 중에는 달라이 라마처럼 식생활과 기후, 주거 환경 등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심한 병을 얻고 심지어 사망하기까지 하는 사례가 여럿 있었다. 지금도 망명 온 티베트 승려들의 식사 공양은 상당히 열악한 수준이다.

혹자는 밀교의 핑계를 대며 술과 고기가 허용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심각한 오해이다. 닝마빠의 대원만이나 겔룩빠의 무상요가인 깔라차크라 탄트라(Kālacakratantra)에 이르기까지 모든 밀법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육식함을 금한다. 특히 깔라차크라 탄트라에서는 육식을 엄격히 금한다. 또한 외적인 의례를 중시하는 소작(所作) 딴뜨라, 행(行) 딴뜨라에서도 관정(灌頂) 등의 의식을 치를 때 육류, 어패류, 계란, 오신채 등의 섭취를 엄격히 금한다.

밀교의 회공(會供, gaṇacakra) 때 청정과 비청정의 집착을 벗어난 '이원성의 초월(不二性, advaya)'을 목적으로 고기 등의 부정물(不淨物)을 공양물로 쓰는 경우가 있으나 후대에는 요거트, 과일즙 등의 온건한 물질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의궤는 밀교 수행의 자격과 근기를 갖춘 극소수 수행자들이 세간에서 더럽다고 여기는 것들을 이용하여 미세한 분별심을 정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는 것이지 절대 일반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이 아니다.

10.5. 복식[편집]

계를 수지한 티베트 승려는 하의로 모두 샴탑이라고 하는 붉은색 통짜 천을 두른다. 전통적인 상의를 보면 종파를 대강 구분할 수 있다. 닝마빠 울렌이라고 하는 차이나 컬러에 소매가 없는 조끼만 입으며 싸꺄빠와 까규파는 울렌 위에 뙨까라고 하는 붉은색 조끼를 덧대입는다. 그리고 겔룩빠는 울렌 대신 뙨까만 입는다. 또한 의식에 쓰는 모자가 겔룩빠는 노란색이어서 황모파(黃帽派), 나머지 닝마빠, 쌰까빠, 까규빠는 붉은 색 모자를 쓰기 때문에 홍모파(紅帽派)라고도 불린다.

[1] 1. 용수(150~250 / 龍樹 / དཔའ་མགོན་ཀླུ་སྒུབ་ /Nagarjuna) 2. 성천(170~270 / 聖天, 提婆, 聖提婆 / འཕགས་པ་ལྷ་ / Aryadeva) 3. 덕광(394-468 / 德光, 功徳賢 / ཡོན་ཏན་འོད་ /Gunaprabha) 4. 진나(480~540 / 陣那, 域龍, 大域龍 / ཕྱོགས་ཀྱི་གླང་པོ་ / Dinnaga) 5. 청변(490, 500~570 / 淸弁 / ལེགས་ལྡན་འབྱེད་ /Bhavaviveka) 6. 불호(470-540 / 佛護, / སངས་རྒྱས་སྐྱངས་ / Buddhapalita) 7. 월칭(600~650 / 月稱 / ཟླ་བ་གྲགས་ /Chandrakirti) 8. 적천(685~763 / 寂天 / རྒྱལ་སྲས་ཞི་བ་ལྷ་ /Shantideva) 9. 무착(395~470 / 無着 / ཐོགས་མེད་ / Asaga) 10. 세친(400-480 / 世親 / དབྱིག་གཉེན་ /Vasubandhu) 11. 석가광(8세기 초 / 釋迦光 / ཤཱ་ཀྱ་འོད་ /Shakyaprabha) 12. 법칭(6-7세기 / 法稱 / ཆོས་གྲགས་ /Dharmakirt) 13. 사자현(8세기 중엽 / 師子賢 / རྒྱལ་སྲས་སེང་གེ་བཟང་པོ་ / Haribhadra) 14. 성해탈군(6 세기경 ? / འཕགས་པ་རྣམ་གྲེལ་སྡེ་ /Araya Vimuktisena) 15. 적호(725~790, 728~788/ 寂護 / ཁན་ཆེན་ཞི་བ་འཚོ་ / Shantarakshita) 16. 연화계(740~795 / 蓮華戒 / པད་མའི་ངང་ཚུལ་ /Kamalashila) 17. 아티샤(1982-1054 / 燃燈吉祥智 / ཇོ་བོ་རྗེ་ / Atisha Dipankara Shrijnana)[2] 《입보살행론》과 《중론》의 게송은 각각 대승불교의 핵심인 보리심과 공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오온(五蘊)은 중생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란 다섯 가지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를 가리킨다. 달라이 라마는 아침마다《입보살행론》의 게송을 사유하며 모든 중생을 향한 자비와 보리심을 일으키고, 《중론》 게송의 '여래'를 '나'로 바꾸어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지 늘 사유한다고 한다. [3] 용수보살의 탄생을 예언한 경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불성(佛性)에 관한 10대 경전 중 하나이다.[4] 초창기 서구의 학계에서도 라마이즘(Lamaism)이라는 단어를 썼다.[5] 기존에 마하연은 북종선 계열의 선승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남종선 계열 혹은 양자 모두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수경(성제), 《티벳 불교의 쌈예 논쟁에 대한 재검토》[6] 화상(和尙)이란 승려를 높여 부르는 한자어이다.[7] 티벳 측 문헌인 《바세(sBa bshed)》와 중국 측 문헌인 《돈오대승정리결(頓悟大乘正理決)》은 쌈예 논쟁의 결과를 서로 엇갈리게 기록했다. 양측의 기록이 상반되기는 하지만, 쌈예논쟁 이후 인도불교는 티벳 지역에 확고히 자리잡게 되고 마하연의 선종은 '화상(和尙)종'이라 불리우며 배척의 대상이 된다. 선종과 유사한 점이 있는 닝마빠의 족첸이나 까규빠의 마하무드라 전승도 '화상종' 아니냐는 타 종파의 비판을 듣곤 하였다.[8] 윗 열 : 티베트 불교의 장수삼존(長壽三尊)인 백색 따라(Tara), 무량수불(Amitayus), 불정존승모(Namgyalma). 아랫 열 : (左) 아티샤의 수제자인 돔뙨빠 걀웨 중네('brom ston pa rgyal ba'i 'byung gnas), 잠발라(Jambhala), 돔뙨빠의 수제자 뽀또와 린첸 쌀(po to ba rin chen gsal)[9] 무슬림의 종교 박해는 인도 불교 쇠멸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그 외에 주로 신흥 상인계급과 왕족의 지지를 받아 민중계급에는 불교가 널리 퍼지지 못한 점, 불교의 힌두이즘화(Hinduism 化) 등 여러 가지 원인설(說)이 제기되었다.[10] 모든 번뇌를 자르는 반야이검(般若利劍)과 모든 경전 중에 가장 중요하다는 《반야경》을 기물(器物)로 가지고 있다.[11] 4종의 암시적인 가르침과 4종의 간접적인 가르침.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12] 샨타락시타(Shantarakshita)의 논서인 《진실강요(Tattvasaṃgraha)》에서 인용한 경전 어구이다. 현존하는 경전(經, sūtra)에서는 1차 출처를 찾을 수 없으나 《Śrīmahābālatantrarāja》라는 밀교 속전(續, tantra)에서는 거의 동일한 어구를 찾을 수 있다. 가르침의 비판적 수용에 관한 내용은 초기 불교 경전인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 <깔라마 경(Kalama sutta)> 등 에서도 찾을 수 있다.[13] 《대승열반경》의 <사의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현교 설명 도입부에 상술하였다.[14] 나가(Naga, 龍)에게서 용궁에 감춰진 반야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15] 본 탱화의 관세음보살은 팔이 4개인 사비(四臂)관음이다. 가운데에는 여의주, 오른손에는 수정 염주, 왼손에는 백련을 들고 있다.[16] 관세음보살이 대비(大悲)의 본체인 대비심(大悲心)을 상징한다면, 따라보살은 대비의 작용인 대비행을 상징한다. 관세음보살의 눈물에서 화현한 화신(化身) 혹은 여성 수행자의 몸으로 성불한 부처로 알려졌다. 오방불(五方佛) 중의 하나인 북방 불공성취불(不空成就佛, Amogasiddhi)의 불모(佛母)로써 불공성취불과 같은 녹색을 띈다.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는 불모(佛母)'라는 뜻의 도모(度母)로 한역되며 관련 경전도 한역 대장경에 수록되었다. 동아시아권 불자에게 친숙한 준제(准提, Cundi) 불모 보살과 동일하게 보는 경우도 있다.[17] 성문승의 계율로써 개인의 해탈을 위해 따르는 계율인지라 '별해탈계'라고 한다. 재가자가 따르는 우바새ㆍ우바이계, 출가자가 따르는 사미ㆍ사미니계, 식차마나니계, 비구ㆍ비구니계를 일컫는다.[18] 참고로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범망경》에 나오는 보살계를 따르는데, 10개 근본 계율과 48개 보조 계율이 있다.[19] 일반인들에겐 죄가 되지 않는 행위에 대해 금지한 계율.[20] 살생, 투도, 사음, 망어, 이간어(양설), 악어, 기어 등 10불선업 중의 몸과 말로 짓는 7가지 행위.[21] 공덕을 갖추고 법답게 행하는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서 공양 받는 행위.[22] 이익과 공경을 위해 달콤한 말을 앞에서 하는 행위.[23] 상대방의 물건을 얻고자 하는 의도로 그것에 대해 찬탄하는 행위.[24] 누구는 나에게 공양을 하고 누구는 안 했다는 식으로 타인을 비난하여 공양 받는 행위.[25]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것(미끼)을 주는 행위.[26] 다섯 가지 가림(장애). 도회개(掉悔蓋), 진에개(瞋恚蓋), 혼수개(昏睡蓋), 탐욕개(貪欲蓋), 의법개(疑法蓋).[27] 일체 중생을 내가 구제해야겠다는 책임감.[28] 소의대치력(所依大治力), 염환대치력(厭患大治力), 반회대치력(返回大治力), 현행대치력(現行大治力). 1. 소의대치력 : 삼귀의와 보리심을 수습(修習)하는 것. 2. 염환대치력 : 악업으로부터 이숙(異熟) 등의 삼과(三果)가 일어나는 도리를 명상하고, 자신이 지은 악업들에 대한 큰 후회를 일으키는 것. 3. 반회대치력 : 이후로는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십불선업을 단속하는 것. 4. 현행대치력 : 반야경 등의 경구를 수지, 독송 하는 것. 무아와 광명의 법성을 배우고 본래청정을 믿는 것. 백자진언 등의 특수한 다라니를, 죄업이 소멸되었다는 상징이 나타날 때까지 의식에 따라 외는 것. 부처님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불상을 조성하는 것. 부처님과 탑 등에 갖가지 공양을 올리는 것. 부처님과 대보살님들의 명호를 듣고 수지하는 것.[29] 두 다리를 똑같이 발뒤꿈치를 들고 무릎이 땅에 닿지 않게 쪼그리고 앉는 자세[30] 사섭법 : 보시섭(布施攝), 애어섭(愛語攝), 이행섭(利行攝), 동사섭(同事攝).[31] ➀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➁ 악의(vyāpāda), ➂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④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⑤ 회의적 의심(vicikichā)[32] 자신의 수행을 위해 지은 《입보살행론》을 날란다 사원의 전교생 앞에서 암송하던 중 제9장의 “모든 것은 허공과 같다(공하다)”는 구절에 이르자, 점점 높이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모습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아 암송을 끝까지 계속했다고 한다.[33] 모든 번뇌와 마라를 항복시키는 분노존(忿怒尊, krodhakaya)의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금강저, 왼손에는 갈고리를 들고 있다. 분노존의 분노는 번뇌로서의 분노가 공성(空性)의 지혜에 의하여 중생을 위한 대자비로 전환된 형태이다. 이 경우 분노는 오염을 여읜 청정하고 강력한 에너지로 작용한다.[34] 한국의 밀교는 대부분 조선 조 불교 탄압으로 인해 독자적인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현재 한국에 진각종, 총지종 등 밀교 종단이 있으나 모두 근현대에 새로 창종된 종단들이다.[35] 수행의 결과인 불과(佛果)를 수행방편으로 이용하여 수행자 자신을 밀교의 본존으로 관상하는 청정인식을 갖게 한다.[36] 지금강불의 짙은 푸른색은 허공같이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의미하고, 금강저와 금강령의 교차는 지혜와 방편의 합일을 의미한다. 84명의 마하싯다는 고대 인도의 대표적인 밀교 대성취자들이다.[37] 대승 불교의 불신론(佛身論)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은 교화 대상인 중생의 근기를 따라 화현한 화신불(化身佛)이다.[38] 업을 짓고 쌓는 힘이 왕성하고 쉽게 성숙해서, 생의 전반에 쌓은 업이 생의 후반에 익는 땅을 말한다.[39] 문수보살이 성불하여 이룬 부처[40] 구루 빠드마삼바와가 생전에 자신과 닮았다며 가피를 내리고 "이제 이 불상은 나 자신과 다름없다"고 한 불상이다. 쌈예 사원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고, 인도 시킴(Sikkim) 국왕의 모후가 찍은 사진만 전해진다.[41] 보리(菩提)와 열반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선근공덕 (善根功德)[42] 예를 들어 "진언이나 사다나(sadhana, 본존 성취의궤)를 하루에 몇 번 해야 된다."라는 식으로 관정을 준 아사리가 제자에게 숙제를 내줄 때가 있다. 만일 이때 숙제를 하기로 발원하고 약속했다면 꼭 준수해야 한다.[43] 옹화궁은 청(淸)대 티베트 불교를 신봉했던 옹정제, 건륭제 등에 의해 세워진 황실 전용 티베트 불교 사원이다. 본래 강희제 때 환관의 수장인 대내총관(大內摠管)의 자택, 넷째 황자인 윤진(옹정제)의 옹정왕부 등으로 쓰이던 건물을 사원으로 개조하였다.[44] 《람림》을 의지하면 스승에 대한 잘못된 견해나 그 죄를 사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러한 죄업이 소멸된다. 또한 무상에 대하여 배움으로써 이번 생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고,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이기심으로 생긴 죄업이 없어지고 무아를 생각함으로써 자아까지도 없애는 등 지은 죄가 저절로 소멸되는 위대함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45] 복전(福田)이란 뜻의 티베트어. 중생이 예배와 공양 등을 하여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대상이므로 복전이라 한다. 법맥과 전승마다 촉싱의 구성은 다르다.[46] 예를 들어 세간의 모든 중생이 각각 질문을 하더라도 각각의 음성으로 모든 질문에 대답하는 것 등[47] 불법승 삼보 각각의 정의를 정확하 알고 귀의하는 것의 차이, 복덕이 늘어나는 것의 차이, 부처를 잊지 않고 늘 억념(憶念)하는 것의 차이, 믿음의 차이[48] 수행, 보시와 같은 선업을 행하여 얻은 선근공덕(善根功德)을 자신이나 다른 중생을 위해 함께 하는 일을 말한다.[49] 불교의 세계관인 육도 중에 악업으로 인해 환생하는 지옥, 아귀, 축생을 지칭함[50] '맹구우목(盲龜遇木)'이란 비유에서 알 수 있듯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생은 무수히 많은 악업을 짓고 선업은 적게 행하여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기 매우 어렵고 지옥, 아귀, 축생 등 삼악도에 떨어지는 것은 쉽다. 그러니 인간으로 태어난 귀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수행정진하라는 가르침이다.[51] 사섭법(四攝法)은 다른 중생을 섭수(攝受)하는 네 가지 법을 말한다. 섭수란 자비로 거두어 보살피고 그 마음을 성숙시킴을 뜻한다. 네 가지 법이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를 일컫는다. 보시섭은 육바라밀의 보시바라밀과 같은 의미이다. 애어섭은 바라밀을 대중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행섭은 대중들이 바라밀과 같은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게 돕는 것이다. 동사섭은 본인 또한 대중들과 함께 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다.[52] 팔유가(八有暇)는 수행할 수 없는 장애로부터 벗어나 여덟 가지 여유를 갖춘 것을 말한다. (1) 지옥에 태어나지 않은 것. (2) 아귀로 태어나지 않은 것. (3)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4) 오래 사는 신(장수천, 長壽天)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5)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땅에 태어나지 않은 것. (6) 부처님의 존재를 모르는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 (7) 감각기관에 장애가 없는 것. (8) 그룻된 견해를 품지 않은 것.[53] 십구족(十具足, 혹은 십원만 十圓滿)은 수행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 열 가지를 갖추었음을 말한다. (1) 인간으로 태어난 것. (2) 불법(佛法)이 존재하는 땅에 태어난 것. (3)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는 것. (4) 오역죄(五逆罪)를 범하지 않는 것. (5) 신심을 갖춘 것. (6)부처님께서 세간에 존재하는 것. (7) 정법(正法)이 설해지고 있는 것. (8) 그 가르침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 (9) 그 가르침을 받는 것. (10) 후원자, 시주자 등 주변의 도움을 받는 것[54] 보리심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의 준말로, 자비심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나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이 모두 무상정등정각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다.[55] 고성제(苦聖諦), 즉 고고(苦苦) · 괴고(壞苦) · 행고(行苦)를 절감하고 진정으로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단순한 염세주의와는 구분하여야 한다. 진정한 출리심은 윤회의 본질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깊게 사유하고 세속적 욕망보다 해탈을 추구하는 마음이다.[56] 편의상 열반을 유예한다고 표현했지만 티베트 불교에서는 《법화경》등의 경전에 의거하여 아라한이나 벽지불도 최종적으로 보리심을 발한 보살이 되어 부처를 이룬다고 본다. 모든 중생은 동일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를 구경일승(究竟一乘)이라 한다. 이와는 달리 《해심밀경》등의 경전에 의거하여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수행자들의 종성(種性)이 각각 다르고, 한 번 얻은 과위(果位)는 바뀔 수 없다고 보는 견해를 구경삼승(究竟三乘)이라고 한다.[57] 산스크리트어이다. 빨리어로는 사마타(samatha), 위빠사나(vipassana).[58] 주로 겔룩빠에서 진제와 속제의 관계를 이런 방식으로 설명한다.[59] 추론을 통한 인식[60] 감각을 통한 직접적 지각[61] 2002년 미국 위스콘신-메디슨 대학에서 뇌신경과학자들이 자비명상(compassion meditation) 중인 밍규르 린뽀체의 EEG와 fMRI의 변화를 측정한 결과 감마파의 증대와 뇌세포 간 감마파의 동기화 증대를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밍규르 린뽀체는 이 실험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별명을 얻었다.[62] 2015년 사캬빠 법왕인 사캬티진 존자가 방한하여 직접 법문을 설하였다. 네 가지 집착에서 벗어나라 (상) 네 가지 집착에서 벗어나라 (하)[63] 환희지, 이구지, 발광지, 염혜지, 난승지, 현전지, 원행지, 부동지, 선혜지, 법운지[64] 자량도, 가행도, 견도, 수도, 무학도[65] 앞줄 좌(左)부터 닝마빠의 뒤좀(Dudjom) 린뽀체, 깔마 까귀빠의 16대 까르마빠(Karmapa), 사꺄빠의 41대 사꺄 티진(Sakya Trizin), 겔룩빠의 14대 달라이 라마(Dalai lama), 링(Ling) 린뽀체, 티장(Trizang) 린뽀체, 바쿨라(Bakula) 린뽀체.[66] 참고로 티베트어에서 빠(Pa)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닝마빠를 번역하면 '오래된(닝마) 사람(빠)'으로 티베트 불교에서 가장 오래된 종파임을 의미한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Pa'는 '파'로 표기해야 하지만 초창기 이러한 표기 때문에 '파(Pa)'가 우리말 '파(派)'로 오해되는 일이 잦자 최근에는 표기법을 무시하고 원어 발음대로 표기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티베트어는 엄연히 자음의 기식 유무를 구분하는 언어라서 베트남어처럼 된소리 표기가 허용되어야 하는데도 제대로 된 표기법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티베트어를 위한 표기법이 따로 만들어진다면 된소리가 허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상황이 비슷한 처지의 언어로는 힌디어, 산스크리트어, 고전 그리스어 등이 있다. 아무튼 논문이나 리포트는 전부 현행 표기법에 따라 거센소리로 쓰는 게 원칙이다.[67] '까마빠'로도 불린다.[68] 좌(左)로 부터 1열: 보신불 금강살타(Vajrasattva), 법신불 보현왕여래(Samantabhadra), 화신불 가랍 도제(Garab dorje). 2열: 아미타불, 백색 따라. 3열: 예세 초겔(Yeshe tsogyal), 빠드마삼바와의 적정존(寂靜尊) 구루 촉게 도제(Guru Tsokyé Dorje), 만다라와(Mandarava). 4열: 빠드마삼바와의 분노존 구루 닥뽀(Guru Dragpo), 호법존 싱하무카(Simhamukha) 5열: 샨타락시타(Shantarakshita), 티송 데첸(Trisong detsen)[69] 《티베트 사자의 서》로 알려진 《바르도 퇴돌 첸모》가 뗄마 전승에 속한다. '바르도 퇴돌 첸모'란 '중음(中陰, 죽음과 환생 사이의 시간)에서 듣는 것만으로 얻게 되는 해탈'이란 뜻이다.[70] 사꺄빠의 실질적인 성립은 꾄촉 겔뽀의 손자인 사첸 꿍가 닝뽀부터 시작된다. 지금강불 아래에 꿍가 닝뽀를 위시한 다섯 명의 사꺄빠 창시자가 있다. 1. (가운데) 사첸 꿍가 닝뽀(Sachen Kunga Nyingpo) (1092–1158) 2. (왼쪽 위) 소남 체모(Sonam Tsemo) (1142–1182) 3. (오른쪽 위) 제쭌 닥빠 갤첸(Jetsun Dragpa Gyaltsen) (1147–1216) 4. (왼쪽 아래) 사꺄 빤디따(Sakya Pandita) (1182–1251) 5. (오른쪽 아래) 도곤 최걀 팍빠(Drogön Chögyal Phagpa) (1235–1280)[71] 좌(左)로부터 1열: 틸로빠(Tilopa), 지금강불(Vajradhara). 나로빠(Naropa). 2열: 성취자(siddha) 마이뜨리빠(Maitripa), 샹빠 까귀(Shangpa Kagyu)의 창시자 케둡 큥뽀 낼죨(Kedrub Kyungpo Naljor). 3열: 밀라레빠(Milarepa), 감뽀빠(Gampopa). 4열: 깔마 까귀(Karma Kagyu)의 창시자 두숨 켄빠(Dusum Kyenpa), 팍두 까귀(Pagdru Kagyu)의 창시자 팍모 둡빠(Pagmo drupa).[72] 로짜와(lotsawa)는 '역경사' 라는 뜻의 티벳어이다. [73] 1열: 석가모니불 2열: (左) 쫑까빠의 두 수제자 1대 판첸 라마 겔찹 제(Gyaltsab Je), 케둡 제(Kedrup Je) 3열: (左) 문수보살, 문수보살의 분노존 야만따까(Yamantaka), 백색 따라.[74] '달라이'는 몽골어로 '큰 바다'라는 뜻이고 '라마'는 티벳어로 '스승'이라는 뜻이다.[75] 린뽀체(rinpoche)란 '보배로운 존재'란 뜻의 경칭이다. 보통 환생자 고승을 가리키는 경칭으로 알려졌지만, 환생자가 아닌 당대에 높은 성취를 이룬 고승에게도 쓰인다.[76] 부처와 보살에 대한 정의는 불교 내 각 종파마다 다르다. 상좌부 불교 참조.[77]화엄경》에서는 보살의 지위를 10지(地)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견도(見道)에 들어선 초지(初地)보살은 화신 100개를 나툴 수 있다고 한다. 높은 지에 오를수록 나툴 수 있는 화신의 수가 증가하여 부처는 화신을 무한하게 나툴 수 있다.[78] 지혜는 무루업(無漏業), 복덕은 유루(有漏)의 선업(善業)에 해당한다. 지혜자량은 부처의 법신을 이루며 복덕자량은 부처의 색신을 이룬다.[79] 물론 다음 생에도 환생하겠다는 스승 본인의 의지가 전제되어야 한다.[80] 보살은 수행의 과정에서 종종 삼악도나 성문, 연각의 경지로 퇴락하기도 한다. 반면에 더이상 퇴락하지 않고 깨달음을 잃지 않는 상태를 '불퇴전', '아비발치'라 한다. 구체적으로는 보살 52위 중 십주(十住)의 제 7주인 불퇴전주(不退轉住), 십지(十地)의 제 8지인 부동지(不動地) 등을 일컫는다. 진정한 불퇴전지는 제 8지인 부동지이며, 부동지에 오른 후에는 부처에 이르기까지 더이상 퇴전함 없이 향상하게 된다.[81] 바르도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변화에 대하여 다음의 서적들을 참조할 것. 《티베트 사자의 서》, 《티벳 사자의 여행 안내서》, 《바르도 성취법》, 《달라이 라마, 죽음을 말하다》, 《티베트의 지혜(삶과 죽음을 바라보는)》등[82] 국내에 출간된 환생 연구 관련 서적으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 어떤 아이들의 전생 기억에 관하여, 인간은 분명 환생한다 등이 있다.[83] 이 경우는 환생보다는 '소산(emanation)'에 해당한다.[84] https://youtu.be/lougVag8EYw[85]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794[86] 탱화의 어원이 탕카라는 설이 있다. 국내에는 화정박물관에 티베트 탕카 컬렉션이 있다.[87] 윤장대 내부에는 불경이 들어있고 마니 콜로 내부에는 진언이 들어있다. 글을 몰라 경전이나 진언을 외울 수 없어도 돌리는 것만으로 똑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법구(法具)이다. 붓다가 법륜을 돌리는 것 혹은 경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88] 부산 서구 아미동2가에 위치. 부산대학교병원과 가깝다.[89] 대체로 티베트 자치구, 내몽골 자치구, 신장 위구르 자치구, 동북 3성의 한족들이 많이 믿는다. 동북 3성의 만주족은 청나라부터 티베트 불교를 믿었으며, 만주 지역 및 일부 퉁구스계 제족들(어원커, 시버, 나나이) 중에서도 티베트 불교 신자들이 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북부 지역의 몽골인들 또한 티베트 불교를 믿기도 한다. 그 외 내몽골 자치구의 다우르족도 일부는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고 한다.[90] 이는 후술할 대만의 티베트 불교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의 티베트 지배에 찬성하는 외성인이기 때문이다. 단지 공산당이 아닌 국민당이 티베트를 지배하는 걸 원할 뿐.[91] 아이러니하게도 처이발상도 어린 시절 티베트 불교의 승려였고, 그가 죽을 때까지 쓴 이름 '처이발상'도 승려 시절에 받은 법명이었다.[92] 자세한 내용은 종교적 소수자, 타타르의 멍에 문서 참조[93] 울란우데 근처의 이볼긴스키 사원(Ivolginsky datsan)과 치타 근처의 아긴스코예 사원(Aginskoe datsan)[94] 정교회,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95] 서구권 화교들과 달리 기독교 중에서는 정교회 세가 강하고 불교 중에서는 티베트 불교 세가 강하다.[96] 상좌부 불교 문화권인 미얀마와의 접경지대에 사는 경우에는 상좌부 불교를 믿기도 한다.[97] 케냐, 남아공, 짐바브웨[98] 잘 들어보면 티벳어임을 알 수 있다. 흠좀무[99]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폴란드 등 다수의 유럽국가에 티벳불교 사원과 수행센터가 있다.[100] 유명 배우 리처드 기어, 우마 서먼이 대표적인 티베트 불교 신자다. 리처드 기어는 달라이 라마의 제자이고 한 때 출가를 결심했을 정도로 독실한 티베트 불교 신자이다. 우마 서먼의 아버지는 미국의 대표적인 티베트 불교학자인 컬럼비아(Columbia)대 교수 로버트 서먼(Robert Thurman)이다. 우마 서먼의 이름 중에 '우마(Uma)'란 퍼스트네임은 대승불교 사상인 '중관'을 뜻하는 티베트어이고 미들네임인 카루나(Karuna)는 '대비심'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이다. [101]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102] 실제로 이슬람의 침공으로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기 직전과 직후 인도의 승려들과 불경들이 전부 티벳으로 넘어갔기에 마지막 계승자로 보고, 티베트 불교 스스로도 이에 대해 자부심이 있다.[103] 이 스님의 환생자가 한국에 다녀갔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유명한 분이 아니지만 서양에서는 거의 달라이 라마와 동급으로 모셔지는 스님이다.[104]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었다.[105] 티베트 고위 승려중 처음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대표적인 저서로 《The tibetan book of living and dying》이 있다.[106]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정혈(精血)을 의미한다. 미세한 몸과 의식의 차원에서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산출하는 질료가 되므로 '보리심'이라고 한다.[107] 둑빠 까규빠의 무문관 수행자인 독덴(rtogs ldan, 남성) / 독덴마(rtogs ldan ma, 여성)는 응악빠처럼 머리를 기르고 흰색 의복을 입은 재가 수행자 복식을 취하지만 비구계를 받은 출가 수행자이다. 밀라레빠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들 독덴은 안으로는 비구계를 지키고 겉으로는 재가 수행자의 외형을 갖추었다. 이는 비구로서의 의무를 다하되 비구의 특권은 포기함을 의미한다. 이들은 12년 간의 무문관 수행을 포함하여 일생을 수행에 헌신한다.[108] 인도에서 티베트로 불교가 전해질 당시 비구니 구족계는 들어오지 않아 티베트 불교 역사상 비구니 계단(戒壇)이 존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때문에 한국, 대만, 홍콩, 베트남 등지에서 편법적으로(?) 비구니계를 받은 몇몇 티베트 불교 소속 여승들이 있었으나 아직까지 티베트 불교 교단 내부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티베트 불교의 최고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인지라 티베트 불교 내의 비구니 계단 설립은 아직 요원하다. 그러나 남자 수행자에게만 허용되던 최고 학위인 '게쉐(dge bshes)'를 여자 수행자에게도 허용하여 '게쉐마(dge bshes ma)' 학위가 수여되는 등 여자 수행자 지위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