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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만, 참나에 대한 명상과 성령의 인도 본문
우리 시대의 믿음
아트만, 참나에 대한 명상과 성령의 인도
아트만, 참나에 대한 명상과 성령의 인도
불교의 참나(true self)와 힌두교의 아트만(Atman)의 개념에 대해서 듣고, 그것의 실체를 체험적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참나 또는 아트만( 이 둘은 실제로 동일한 개념의 다른 명칭일 뿐이다.)에 대한 의식적인 각성은 어느 사이에 일상적인 나의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일상에서 참나와 아트만을 찾는 행위는 힌두교와 불교에서 가르치는 명상 수행의 핵심으로 알고 있으니, 나는 불교 또는 힌두교의 명상법을 일상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이 같은 명상이 나의 내면에서 어떤 충돌이나 모순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성령의 체험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아트만과 참나를 경험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에고로부터 벗어나서 우주적인 대아와 접촉하는 일이다. 그 접촉의 방법은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 감정, 오감을 가만히 관찰하는 일이다.
바로 그 때 나의 생각, 감정, 오감으로부터 조금씩 거리를 두는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어느 순간에 어떤 ‘나’라는 확실한 주체가 내 안의 에고를 객관적으로 가만히 관찰하고 있음을 순간적으로 의식하게 된다. 바로 이 어떤 ‘나’라는 주체가 바로 참나 또는 아트만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관찰되어지는 한 개인의 생각, 감정, 오감이 일어나고 있는 마음은 에고라고 불리는 것이 된다.
내면의 관찰을 통해 도달한 참나 또는 아트만은 에고의 생각과 감정을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은 채, 한 발짝 떨어져서 구경만 하고 있는데, 이로서 그 생각들과 감정들은 나를 지배하거나 나를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다니는 힘을 상실해 버리고, 잠깐이면 곧 지나가버리는 것, 또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최선이 아니거나 옳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에 거부되어야만 하는 것들로 그 위상이 떨어져 버리게 된다.
즉 참나와 아트만은 생존과 이기심을 우선시하는 에고의 관점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자연적인 성향을 버리게 하고, 대아라고 부르는 우주적이고 양심적인 ‘나’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초월적인 시각을 준다.
왜냐하면 참나와 아트만은 나와 너를 구별하지 않고, 신 또는 우주와 합일되어 있는 텅 빈 각성으로서 모든 인간을 나의 형제처럼 여기는 보편적인 양심이라는 자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가장 올바르고 가장 적절한 삶의 방식을 가르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트만과 참나를 명상하게 되면서,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알고 믿고 있는 성령의 관점에서 이 같은 일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는 구약 시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소수의 예언자와 선지자들만이 체험했던 것이다. 성령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가르치시고, 성령을 받을 것을 가르치신 이는 예수님이시고, 마침내 성령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오순절인 성령강림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먼저 성령이 내려오셨고,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함께 율법이 지배했던 구약 성경의 시대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배하는 신약 성경 시대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렇다면 성령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는데, 이는 ‘돕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성령이 오시면 그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도 가르치셨다.
사도 바울은 여러 서신에서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성령은 어떤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할 때 받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죄와 율법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고, 성령의 뜻을 따라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둔다고 가르치고 있다. (갈6:8)
이후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교부들은 성령을 성부(하나님)와 성자(예수님)와 동일한 삼위일체로서 고백하였고, 이는 또한 기독교 교리의 중심이 된다.
이것이 성경이나 설교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이 성령에 대해서 배우고 알게 되는 일반적인 내용들이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어떤 이론적인 개념으로 배우지 않고, 오히려 성경말씀, 예언, 방언, 방언의 해석, 기도와 같은 체험 속에 성령이 늘 역사하고 있다고 배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신비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인도함은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특히 성령의 인도를 가장하는 거짓 영의 속임수가 엄연히 존재하고, 자기 욕심에 이끌려 자기 욕망을 성령의 것으로 가장하는 자들도 많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을 잘 알지 못한 경우에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거짓 영에 속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르치는 것을 대체로 조심스러워하고, 특히 예언이나 신비한 경험이 동반한 성령 체험이라 불리는 것들은 속기 쉬운 위험스러운 것으로 보고, 금하기까지 하는데, 성령체험이라는 것이 아주 미묘하고 그 진위를 구분하기 어려운 영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교회의 조심스런 태도는 아주 당연한 것이다.
사실 나 자신도 성령의 체험을 신비적인 경험으로 체험하고자 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나의 이성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성경 말씀에 대한 묵상과 일상적인 기도를 통해서만 성령의 인도를 받고자 할 뿐, 그 경계를 넘지 않으려 한다.
따라서 나에게 성령 체험은 일상적으로 말씀을 읽고 듣는 일이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이다. 특별히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의 에고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일이며, 나에게 없는 지혜와 용기와 믿음을 구하는 일이다. 즉 기도는 ‘자연적인 나’라고 할 수 있는 에고를 부정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구하는 일이 된다.
이 같은 성령은 불교와 힌두교의 아트만처럼 나의 에고를 부정하며,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일을 한다. 이처럼 에고를 부정하게 하고, 진리를 가르치고 따르게 한다는 면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은 아트만에 대한 깨달음이 만들어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불교와 힌두교에서 아트만에 대한 명상은 나로 하여금 나에 대한 관조라는 명상을 통해서 아트만 또는 참나를 깨우치게 하고, 이는 곧 나로 하여금 이기적인 에고에 빠지지 않고 절대적인 참나 또는 아트만의 관점에서 세상을 살아가도록 이끈다.
반면에 기독교에서 ‘나’라는 에고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해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나의 마음속으로 오셔서, 나의 주인이 되어 사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나의 삶을 하나님의 진리와 구원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에 믿는 자가 할 일은 성령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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