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한국 기독교의 구원론과 불교의 열반 그리고 성령의 인도 본문
우리 시대의 믿음
한국 기독교의 구원론과 불교의 열반
그리고 성령의 인도
성령의 열매들
한국 기독교의 구원론과 불교의 열반 그리고 성령의 인도
나는 모태로부터 기독교인이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궁극적으로 내가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머리에서 그저 떠오르는 대로 말한다면 첫째 죄 사함 받고 천국 가는 것과 둘째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라고 했을 것 같다.
이런 구원관은 늘 들어왔고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내용이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함에 대한 체험과 함께, 우연하게 불교의 열반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서 구원에 대해 내가 가졌던 과거의 생각과 말들이 점차 유치해 보이게 되었다. 사실 이것들은 사람들이 보통 막연하게 가질 수 있는 세속적이고 소박한 인간 욕망의 투영이지, 성스럽게 구별되어야 하는 그런 영역의 것은 아니다.
반면에 불교에서 전파하는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는 열반이라는 것은 내세와 현세의 지복에 대한 욕망에 관한 것이 아니다. 열반은 어떤 면에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나 관찰의 결과로서 정신의 과학, 영혼의 과학에 가까워 보인다.
열반에 이른다는 것은 절대적인 관조의 상태, 아트만에 대한 명상과 몰입상태, 또는 인간의 개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에고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같은 것이다. 즉 열반의 경험 속에 들어가는 일은 어떤 신비한 엑스터시(황홀경)에 들어가는 것도, 어떤 초인간적인 능력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본질을 꿰뚫어 봄으로서 에고의 욕망으로 인해 생겨나는 불안, 두려움, 고통, 거짓,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그런 지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이 세상사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혜안, 또는 인간의 참된 본질을 보는 경험과 같은 것들은 성스럽게 구별될 수 있는 종교적 경험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천국과 현세의 복을 구하는 것은 종교적인 포장을 했을 뿐 실제로는 세속적이고 거짓된 욕망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죽어서 천국가고 이 땅에서 복 받는 길로 단순화된 한국 기독교의 구원관은 한국 땅에서 점차로 교인들에게 조차도 더 이상 공감을 일으키지 않는 그런 낡은 관념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불교의 열반이나 힌두교의 아트만 사상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절대적인 자유와 해방을 주는 경험이고 이는 성령의 체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성령의 체험은 본질적으로 죄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에고를 버리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동일시되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성령을 참된 나의 주인, 나의 주인공, 나의 본질로 받아들이는 경험으로서 불교에서 말하는 참나 또는 아트만을 찾음으로서 열반에 이르는 것과 동일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성령 체험은 먼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하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사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일이고, 이는 곧 에고가 아닌 성령이 나의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불교가 인간의 거짓되고 착오적인 자아인 에고를 부정하고, 우주적인 나(대아, 범아)의 한 부분이면서 인간 속에 개체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참나’ 또는 아트만’을 오직 나의 참된 자아 또는 주인공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기독교에서 성령만을 나의 참된 주인이요 나는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고 가르치는 것은 동일한 종류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진정한 영성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삶에서 발견한다. 나를 성령께 맡김을 통해서, 나는 나를 초월해버리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단순히 따라감으로써, 세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진실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수 십 년간 한국 교회는 성령을 주로 교회성장과 교인의 축복을 받는 신비하고 특별한 통로로서 가르쳤을 뿐이지, 기독교인이 자기의 겉 사람을 버리고, 성령으로 오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 구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영역으로서 가르치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인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경험해야 하는지를 잘 몰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우리가 성령의 말씀을 어떻게 들을 수 있고, 이것을 어떻게 분별해야만 하는 지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그 결과 십자가에서 죽음은 교회와 목사님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쳐야하는 잘못된 순종으로 오해되었다. 또한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거짓되고 허황된 세속적 욕망이 성령의 축복과 인도하심으로 포장되면서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한국 교인들은 이러한 거짓된 영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이나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쉽게 미혹되었고,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는 부패하고 타락한 길을 걸어오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성령의 역사와 인도를 교회성장과 개인의 축복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가르치신 대로, 세상의 온갖 욕망과 죄로부터 벗어나서 성령의 인도함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그런 쉽지 않은 자기 부정과 성숙의 과정임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령을 따라 사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슬리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의 욕망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므로, 여러분의 욕망대로 살 수 없게 합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면, 여러분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됩니다.(갈5:16-18)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착함과 성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지할 율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자기 육체를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었으므로,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갈5: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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