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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견성에 이르는 불교의 수행법과 영적인 삶으로 이끄는 기독교의 성령 본문

영성수행 비전/명상과 기도

견성에 이르는 불교의 수행법과 영적인 삶으로 이끄는 기독교의 성령

柏道 2020. 2. 16. 21:51


견성에 이르는 불교의 수행법과 영적인 삶으로

이끄는 기독교의 성령


 

견성에 이르는 불교 수행법과 영적인 삶으로 이끄는 기독교의 성령

 

불교에서 참나를 깨닫기 위한 방편으로서 화두선, 반조선, 염불, 위빠사나와 같은 다양한 수행법들이 있다고 한다. (선문답에서 배우는 선의 지혜, 윤홍식) 그런데 이런 수행 방식들이 노리는 궁극적인 과녁은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는 생각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생각이 멈추어야만 생각 너머에 늘 존재하는 참나(true self) 또는 아트만(atman)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와 힌두교에서 가르치는 핵심 내용 중 하나는 인간의 참된 본질은 개별적인 에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독특한 양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개체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개체성을 오늘날 심리학적 용어로 에고라고 부르는데, 이 에고는 주로 생각, 감정, 오감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각은 원망, 기억, 개념 같은 것들이고, 감정은 희 노 애 락 같은 것이고, 오감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 감정, 오감이 만들어내는 개체성을 ‘나’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데, 불교에서 이러한 인식을 무명 즉 무지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나’를 구성하는 나의 생각, 감정, 오감 중에서 가장 벗어나기 어렵고,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생각’이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법은 내 안에서 쉼 없이 작동하는 생각을 멈추게 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생각을 관찰하는 일, 생각을 ‘나’와 동일시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일, 생각 너머에 생각을 바라보고 있는 순수한 알아차림을 의식하는 일,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될 수 있는 ‘생각을 멈춘 경지’가 바로 불교에서 가르치는 ‘열반’, ‘견성’, ‘깨달음’인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이르는 일은 이처럼 단순하고 쉬운 원리에 기초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오랜 세월을 수행하고도 열반에 도달하는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내 생각을 돌이켜 바라보는 수행법을 의식적으로 자주 행한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여러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는 편리하고 쉬운 처방이고, 동시에 내가 나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훌륭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가만히 관찰하는 일을 주로 행한다. 이를 통해서 내가 깨달은 바는 생각은 내가 의식적으로나 인위적으로 멈출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생각을 멈추는 방법은 교묘하게 생겨나고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는 수없이 많은 생각들을 무심하게 가만히 지켜보는 일인데, 이로서 나의 생각과 나를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

 

 

결국 사람들이 고통과 아집과 무지에 빠지게 되는 원인은 끊임없이 뿌려지고 생겨나고 자라나는 수많은 생각들을 제대로 잘라버리거나 무시하지 못해서, 마침내 그 종잡을 수 없는 생각에 끌려 다니거나, 그 생각 속에 갇혀 버리게 되는 데 있다.

 

 

따라서 일상의 삶 속에서 계속 솟아나오는 통제하기 힘든 생각들을 주시하고 알아차리면서, 가지를 치듯이 제거해버리고 평상심을 유지하는 일이 곧 깨어있음 곧 견성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견성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넘어서서, 그 모든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순수한 알아차리는 의식(철학에서 절대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의 차원으로 필요한 순간에 잠시 옮겨가는 경험이다.

 

 

기독교에서는 어떤 종류이건 간에 명상을 통해서 인간 의식의 차원을 높여 주는 수행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성령을 통해서 에고를 초월하게 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의식의 단계로 올라가게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영으로서, 성령을 통해서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실제적인 교제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자기 에고를 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불교에서 말하는 절대의식의 차원으로 올라가게 된다. 즉 성령은 곧 기독교인들이 체험하는 절대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성령을 체험한다는 것은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알아채고 이를 따르는 일을 의미한다. 이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데서 시작하고, 다음으로 마음속에서 세미하게 들리는 성령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이를 성경말씀과 신뢰할 만한 성도나 목회자의 말씀에 비추어 잘 분별한 후에 이에 순종함으로써 영의 차원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에서도 구원은 불교와 힌두교처럼 나의 생각, 감정, 오감으로부터 벗어나서, 절대의식 세계인 영의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경험과 다를 바가 없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착함과 성실과 온유와 절제(갈5:22-23)라고 가르친다. 즉 바울이 가르치는 구원은 이 땅에서 살아있는 동안 성령을 따름으로 육체의 욕망 즉 죄를 이기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고, 이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두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갈6:8)

 

 

이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에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말로써 고백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서 즉 오직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받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은 최후의 심판 때에 확실히 구원을 보증하는 보증서라고 복음을 가르치는 일은 성경말씀의 작위적인 편집이요, 왜곡으로 보인다.

 

 

그 결과로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천국 가는 티켓으로 가르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성령을 받아서, 육체의 삶을 벗어나서 성령이 이끄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길을 생략하도록 이끌어 버린 미필적 고의에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와 교인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경고하고 있는 육체의 열매를 거두었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육체가 하는 일은 분명합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음란과 우상 섬기기와 마술과 미움과 다툼과 질투와 화내기와 이기심과 편 가르기와 분열과 시기와 술 취하기와 흥청거리는 잔치와 같은 것들입니다. 전에도 경고했지만,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갈 5: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