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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만(Atman), 참나(True self), 성령(Holy Spirit) 그리고 구원의 길 본문
우리 시대의 믿음
아트만(Atman), 참나(True self), 성령(Holy Spirit)
그리고 구원의 길
베다와 불경의 언어인 산스크리스트어
구약 성서의 언어인 히브리어
신약성서의 언어인 그리스어
아트만(Atman), 참나(True self), 성령(Holy Spirit) 과 구원의 길
아트만(Atman)은 산스크리스트어(Sanskrit)로서 안사람(innerself), 영(soul)이라는 뜻이다. 산스크리스트어는 고대 인도어이고, 브라만교의 경전, 불교의 경전, 자이나교의 경전이 모두 산스크리스트어로 쓰였다고 한다. 우리말로 범어인 산스크리스트어는 고대 페르시아어와 유럽 언어와 유사함이 드러나면서 마침내 언어학자들에 의해 이들 언어들이 한 뿌리에서 나왔음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이들 언어를 포괄하는 인도 유럽어족 언어라는 분류 명칭이 생겨나게 하는 계기를 만든 언어가 산스크리스어였다.
고대 유럽의 독일어에서 산스크리트어인 아트만에 해당되는 단어는 숨(breath)이란 뜻을 갖고 있다고 하고, 그리스어에서는 아트만은 생기(vapor)라는 뜻과 일치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자기 자신(self) 또는 영(soul)이라는 단어와도 동의어를 이룬다고 한다.
영어 성경에서는 숨(breath)과 영(soul)이라는 단어가 인간의 실체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사용된다. 창세기 2장 7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땅의 흙으로 창조하시고 사람의 코에 숨(breath)을 불어 넣으니 살아있는 영(soul)이 되었다고 인간 창조의 과정을 단순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And the Lord God formed man of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man became a living soul.”(genesis 2:7) 즉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은 하나님의 숨(breath)으로 완성되고, 살아있는 영( living soul)이라고 불렸다고 창세기는 가르쳐주고 있다.
아트만, 참나 그리고 영이 동일한 의미를 가졌다는 사실은 힌두교와 불교의 아트만과 참나(true self)가 본질적으로 기독교의 영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힌두교와 불교가 추구하는 구원의 핵심은 아트만과 참나를 찾는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트만과 참나를 잃어버린 체, 육신과 혼을 자기 자신(self)이라고 믿고 살기에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고 힌두교와 불교는 가르치기 때문이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열반은 본질적으로 아트만, 또는 참나를 내 안에서 발견하고, 그 안에 자유자재로 거할 수 있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구원도 본질적으로 육체적인 삶(율법)으로부터 벗어나서, 영적인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밤중에 몰래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성령(Holy spirit)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사람이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랴.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3:3-7)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성령으로 거듭남을 성령의 법으로 살아가는 삶이라고 부른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죄의 본성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게 됨으로서 율법의 요구들을 완벽하게 이룰 수 있고, 따라서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것이 곧 성령의 법으로 사는 삶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를 가둔 율법에 대해 죽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문자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롬7:6)
“이렇게 하여 죄의 본성에 따라 살지 아니하고, 성령에 따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로운 요구들이 완벽히 이루어졌습니다. 죄의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죄의 본성이 바라는 일을 생각하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성령이 바라시는 일을 생각합니다. 죄의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생각은 죽음이지만,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입니다. (롬8:4-6)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죄의 본성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롬8:9)
힌두교, 불교, 기독교가 모두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구원의 본질은 인간의 참된 실체가 되는 영을 회복하여, 영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탐욕과 분노와 무지에 빠져서 자기 자신을 에고와 육체 그 자체로 생각하고, 세상의 자랑,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에 따라 이 세상 것만을 추구하며 살다가 멸망해 간다고 진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1서 2:16-17)
아트만, 참나 그리고 성령은 인간 안에 내재하시는 신의 속성이 환하게 드러나는 곳이며, 인간은 바로 아트만, 참나, 성령의 인도와 도움을 받아서 이 세상의 고통과 죄악으로부터 해방되고, 마침내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각 종교들은 가르친다.
하지만 힌두교와 불교에서 아트만과 참나를 찾는 것과 기독교에서 성령을 받는 것은 다른 언어, 다른 방식, 다른 형식을 따르고 있다.
즉 동양의 종교인 힌두교와 불교는 수세기에 걸쳐서 아트만과 참나를 깨닫게 하는 다양한 형식의 명상, 요가, 선 등을 개발해왔고 수행해왔다. 반면에 기독교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서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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