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2장 본문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2장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제2장
1. 방법
"마이스터 에카르트,
사람들이 열심히 하느님을 찾는 일에 그렇게도 느린 까닭은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어떤 것을 찾고 있는데 그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하면 시큰둥한
마음으로 괴로워하며 찾는다. 그러나 그 자취를 보게 되면 생기를 띠며
즐겁고 열심한 마음으로 찾아 나서게 된다. 불을 찾는 사람은 열기를 느낄 때 힘을 되찾고 기뻐하며 열성적으로 그 열기가 나는 곳을 찾는다.
하느님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감미로움을 전혀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맥이 풀리지만, 신성의 감미로움을 알고 나면 즐겁게 하느님을
찾게 된다."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하느님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그분을 찾다가 지쳐버린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가 비판받는 것 중 한 가지는 하느님을 찾아가는
뚜렷한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양으로, 불교나 힌두교로 가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에카르트는 이를 직시하여 문제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좋은 지향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기
위하여, 그리고 영원한 탄생을 받기 위하여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그는 영원한 탄생이 다음과 같다고 말한다.
"쉬는 것, 행복하게 되기를 배우는 것, 걱정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
"이 탄생이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평화 중에 있어야 하고 세상의 분심거리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과 조화를 이루어 일치해야 한다."
세상에서 물러남으로써 (이것은 자신을 고립시키거나 세상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 지혜롭게 될 만큼 마음을 비우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영혼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고 잠잠하며 활동이 없다. 영혼의 '능력들', 곧 지성. 기억. 의지나 감각 능력들은 영혼의 본질에서 나오지만 끊임 없이
활동하며 소용돌이치고 있다. 반면 그 본질은 고요하다.
우리는 대개 감각을 통하여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서 지식을 얻는다.
그러나 영원한 탄생은 내면에서 솟아나오며 인식의 과정에 역행한다.
우리는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인식하므로 때로 그것을 '무지'라고 한다.
날마다 우리는 이성의 능력을 사용하며 살아간다.
'내 일생 동안 매일 해가 떴으므로 내일도 해가 뜨리라는 추측은 타당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따라 계획을 세운다. 이성은 생존에 대한 사고와 밀접하고 외부 세계에서 오는 지각할 수 있는 표상들과 관계하며 거기에서부터
가능한 모든 감각과 유형을 만든다. 우리는 하느님까지 이런 식으로,
다시 말해 우리가 분석할 수 있고 양과 질로 구분할 수 있는 하나의 유형으로, 하나의 '존재'로 격하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를 구분할 수 없으며, 하느님은 무를 초월해서 그리고 무 이전에 계신 분이다.
이성적 사고는 하느님을 비껴 지나갈 뿐이며 상상으로 어떤 것을 꾸며놓고
'이것이 분명 하느님이다'라고 주장할 뿐이다.
영원한 탄생은 '자신의 본성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하느님의
형상을 밝게 드러내는'사람에게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버리고 떠나 있음'의 과정으로 영혼의 능력, 곧 지성. 기억, 의지, 감각을 잊음으로써 '하느님을 기다리기 위한' 자유와 고요에 도달함을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 준비해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도록 내버려두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모든 분심을 버리고 떠남으로써 우리는 주의를 집중시킬 준비를 한다.
이것은 마치 강을 깊게 만듦으로써 물살을 강하게 만들듯이 이성을 초월하여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는 힘을 마련한다.
내버려둠은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분산시키는 모든 것을 제거한다.
이것이 성자가 탄생하는 '잠재적 수용'의 상태에 이르기 위한 첫걸음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정신이 자유롭게 되고 육신의 긴장이 풀리며 감각의 요구들이 고요해질 때 우리는 단 하나의 유일한 모상 안에서 하느님을 뵙는다.
2. 영원한 탄생 - 쉼, 행복하게 되기를 배움
우리가 쉬는 것은 성부 하느님께서 영원 안에서 끊임 없이 낳으시는 영원한 탄생이 현재 인간 본성 안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영원한 탄생이 언제나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더라도 내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3. 준비
영원한 탄생이 이루어질 영혼은 완전히 순수해야 하며 온화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어야 한다.
오감을 통해 수많은 피조물을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 안에 머물며 영혼의 절정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 영혼의 자리다. 그보다 못한 곳이라면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4. 침묵
...침묵은 영혼의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부분, 곧 영혼의 근저요 본질에 자리하고 있다. 침묵 한가운데는 어떤 피조물이나 표상도 없으며 침묵 속에 있는 영혼은 활동이나 이해도 없기 때문에 영혼 자신이나 다른 피조물에 대한
표상을 모른다.
영혼이 성취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영혼의 능력으로 성취한다.
지성으로 이해하고 그 기억력으로 기억한다.
또 영혼은 그 의지로 사랑한다.
영혼은 영혼의 능력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지,
영혼의 본질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다.
외부 활동은 모두 어떤 감각기관과 연결되어 있다.
시력은 눈을 통해서만 작용하며, 만일 눈이 없다면 영혼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다른 감각기관도 마찬가지다. 그 기능은 언제나 이런저런 감각기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영혼의 본질에는 활동이 없다.
영혼이 활동하는데 사용하는 기능은 본질의 근저에서 나오지만 영혼의 실제 근저에는 고요가 있다. 오직 여기에 쉼이 있고 탄생을 위한 장소가 있다.
이 탄생 안에서 성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그 말씀은 본성적으로 아무런 감각기관이 없이 오직 하느님의 본질만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대단한 노력 없이는 아무도 영원한 탄생을 경험할 수 없다.
마음이 사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한 아무도 이탄생에 이를 수 없다.
그리고 탄생은 모든 감각을 물리치고 끊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큰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는 탄생을 이룰 수 없다.
5. 생각을 멈추고 시간을 초월할 때 정신은 고요하게 된다.
영원한 탄생은 지금과 여기를 초월한다.
'여기'는 장소를 말하고 '지금'은 시간을 말한다.
이 탄생은 영원 안에서 일어난다.
어떤 낱말 하나가 처음 내 정신에 떠오를 때 그것은 파악할 수 없고 불가사의하지만 내 생각 안에서 형태를 취하면 참된 말이 된다.
후에 내 입으로 소리내어 발설하면 내부에 있는 말이 외부로 표현된다.
그러나 영원하신 말씀은 영혼의 가장 내면이요 가장 순수한 곳에서,
곧 영혼의 이성적 본성의 절정에서 발설되며
거기서 영원한 탄생이 이루어진다.
그대가 이 고귀한 탄생을 발견한다면 참으로 여러가지 것을 그만두고
출발점으로, 그대가 나온 그 근저로 돌아갈 것이다.
영혼의 능력과 그 작용들, 곧 기억. 이해. 의지는 다수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 모두는 그대를 분산시킨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 모두에서 떠나야 한다.
감각적 인식과 상상, 또한 그대 자신을 발견하여 소유하려는 그대 안의
모든 것에서 떠나야 한다. 그 후에야 영원한 탄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나를 믿으라.
6. 하느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
밖에서 찾지도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쓰지도 말라
이제 영원한 탄생에 대하여 의문이 생길 것이다.
이 탄생이 하느님과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외부에서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것 안에서 발견되는가,
선하고 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진술 안에서 찾을 수 있는가?
아니면 신성을 알 수 있는 지성으로 발견 할 수 있는가?
영원한 탄생은 이런 것들 안에서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다.
비록 선하고 하느님과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외부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것에서는 영원한 탄생을 발견할 수 없다.
이 탄생이 참으로 밝은 빛을 내려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에게서 솟아나와야 한다.
그리고 모든 기능은 그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목적에 도움이 되도록 그대 자신의 활동을 정지해야 한다.
이 일이 이루어지려면 하느님만이 일하셔야 하고 그대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대가 자신의 의지와 인식을 진정으로 벗어나는 그곳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지식과 의지로 들어와 밝은 빛을 내신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는 곳에서 그대의 지식은 소용없고 유지되지도 못한다.
그대의 이성이 하느님의 지식만큼 커질 수 있다고 상상하지 말라.
하느님은 그대 안에서 어떤 자연적인 빛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만큼 밝게
하느님의 빛을 내신다. 자연적인 빛은 완전히 빛을 읽고 사라져야 한다.
그럴 때 하느님은 빛을 내시고 또한 그분의 빛 안에서 그대가 잃었던 것을
천배나 갚아주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새로운 형태에 담겨 있을 것이다.
사람은 한 가지 사물의 이유를 알게 되면 즉시 그것에 싫증을 내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선다.
그는 늘 무언가를 알고자 하므로 언제나 변화무쌍하다.
그 영혼에게 항구한 것은 그가 계속 추구하고 있는 지식에 대해
그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7. 영원한 탄생은 계속되는 계시
하느님은 어떻게 계속하여 인간 안에 탄생하시는가?
어떤 사람이 그의 본성 안에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하느님의 형상을
찾아 숨김없이 드러낼 때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이 가시화된다.
탄생은 계시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성자께서 성부를 아버지로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상이 인간 안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날수록 하느님은
더 분명하게 그 안에서 탄생하신다. 인간 안에서 하느님의 영원한 탄생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분의 형상이 온전히 계시된다는 의미다.
...이 사람은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탄생하고 있다.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탄생할 수 있는가?
인간 안에 있는 이 형상을 드러냄으로써 그는 하느님을 닮게 된다.
인간의 형상은 모든 면에서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더 닮게 될수록 그는 하느님과 더욱 일치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탄생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 안에서 찬란히 빛나는 이상적 인간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8. 버리고 떠남
지금까지 묶이고 구속되어 있던 영혼의 모든 능력이 완전히 자유롭게 되고 수동적이 될 때, 그리고 정신이 침묵하고 감각이 더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때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서 탄생하심을 그대는 알아야 한다.
9. 이 탄생은 언제 일어나는가?
이 탄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가, 아니면 준비가 될 때,
곧 사람이 모든 것을 잊고 이 탄생을 의식하며 노력할 때만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가?
...육신 안의 영혼은 끊임없는 하느님의 시선과 열정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은 때로 영혼에게서 물러나신다.
그래서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다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10. 준비
"나는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한다."
이 구절은, 지금 여기서 일어났으며 또 여전히 영혼의 깊은 곳,
외부의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진 영혼의 근저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는
영원한 탄생과 연관지어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내적 탄생을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일에 대해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11. 걱정하지 말라
도성에는 담이 쳐져 있고 그 안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영혼도 그러해야 한다.
그 영혼은 외부의 불안으로부터 안전해야 하고 그 힘이 내부로 모여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그대 안에서 일하시게 하라.
일을 그분께 맡겨드리고 그분이 본성에 따라 일하든지 본성을 초월하여
일하시든지 걱정하지 말라. (마음의 평온을 잃지 말라.) 본성도 은총도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그대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하는지
그분이 일하시는 데 무엇이 적합한지 거기에 마음을 쓰는 것이
그대의 일이겠는가? 자신이 마땅히 되어야 할 그런 사람이 되려면
현재의 모습을 버려야 한다.
12. 내맡김
우리 자신을 알고 우리의 뿌리를 하느님 안에 내리기 위해서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하느님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때 인간은 묵묵히 따르며 저항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내맡기는 동안 인간은 수동적이 된다. 어디에서나 평온한 사람은 하느님을 모실 만하다.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현존하며, 자신의 내면에서 피조물이 고요하게 된 사람 안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낳으신다.
영혼이 더 많이 마음을 가라앉힐수록 그 영혼은 덜 흐트러지며,
더 많이 집중할수록 그 시야는 더욱 넓어진다.
13. 훈련
우리는 집착 없이 행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은 사람이 어떤 행위나 육신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하느님은 훈련된 사람에게 언제나 현존하시고 명백히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데 이를 위해서는 특히 두 가지가 요구된다.
첫째, 그 사람이 자신 안에 집중하고 있어 그 마음이 외부사물의 표상에서
벗어나 있고 외부 사물은 그에게 외계의 것으로서 그와는 전혀 다르며,
그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그와 관련되거나 그 안에 들어가는 일이 전혀 없어야 한다.
둘째, 정신자체가 만들어 내는 것과 관념, 그리고 외부 사물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개념이나 표상 또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에 마음을 내어줌으로써 자신을 분산시켜 다수성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의 모든 능력이 내면을 향하여 자신의 내적 자아를 마주하도록 훈련해야 한다.
여기서 영혼은 영혼의 능력사이에서 이리저리 흩어지고
각각의 능력이 취하는 행위로 분산된다.
시각 능력은 눈으로, 청각능력은 귀로, 미각 능력은 혀로 흩어진다.
이렇게 분산된 능력은 불완전하고 내적 능력은 혀로 흩어진다.
이렇게 분산된 능력은 불완전하고 내적 활동을 하기에 약하다.
그러므로 내적 활동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그 모든 능력을
흩어진 사물로부터 하나의 내적 행위로 모아들어야 한다.
격정이 필연적으로 정신에 순종하는 때는 언제인가? 나의 대답은 이렇다.
정신이 하느님께 고정되고 거기 머무를 때 감각은 정신에 순종하게 된다.
바늘을 자석에 붙이고 그 바늘에 다른 바늘을 다시 붙이는 식으로 계속하여 자석에 바늘 네 개를 붙일 때처럼 말이다.
첫번째 바늘이 자석에 붙어 있는 한 다른 바늘도 그 바늘에 붙어 있겠지만,
첫번째 바늘이 떨어지면 다른 바늘들도 모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정신이 하느님께 고정되어 있을 때는 감각도 그렇게 되겠지만
정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면 격정도 벗어나 제멋대로 될 것이다.
유일하고 무한한 불멸의 진리를 깨닫고 아는 데 능력을 집중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물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의 온 정신과 기억을
집중시켜야 한다.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 그 근저로 정신을 기울여라.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활동을 그만두어야 한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하여 무지해져야 한다.
성인은 단순한 하나의 표상으로 하느님을 보며 그 표상을 통하여 모든 것을 식별한다. 하느님 자신도 당신을 그렇게 보며 사물에서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리실 필요가 없다. 우리 앞에 거울이 하나 있고 이 거울로 단 하나의 표상을 봄으로써 모든 사물을 보고 알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행위도 지식도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우리는 한 사물에서 다른사물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한 가지 사물에만
마음을 쓸 수 있을 뿐이다. 그대로 따라 향할 수밖에 없다.
영혼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에 함께해야 하며 거기에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능력이 행하는 것은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한다.
14. 자기 비움과 사물을 버림
자신을 비움으로써, 다시 말해 단지 뒤따라갈 뿐 이 어둠과 무지 속에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그대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자신을 비우고 사물에 대하여 무지해질수록 그대는 여기에 가깝게 될 것이다. 영혼이 모든 수식을 벗어버리다면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며 하느님은 자신을 남김없이 그 영혼에게 내어주실 것이다.
영혼이 자신의 베일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그 베일이 아무리 얇다 하더라도 그 영혼은 하느님을 뵙지 못한다.
영혼과 육신 사이에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이 머리카락 두께만큼 얇다 하더라도 실제적 합일을 가로막게 된다. 영에는 어떤 것도 섞여 있지 말아야 한다. 누가 내 겉옷에 무엇을 매달거나 붙인다면 나는 그 덧붙인 것도 입는 셈이다. 내가 밖으로 나가면 나에게 붙어 있는 것도 나와 함께 가게 된다.
무엇에도 머물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하늘과 땅이
무너질지라도 그는 움직이지 않는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버린 사람에게 백배로 갚아주신다.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그는 백배의 보상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만약 그가 버리는 과정에서 이미 버린 것과 동일한 것을 다시 얻게 되어
결국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하느님의 본성은 무(無)를 통해서 가장 잘 알 수 있다.
어떻게 무를 통해서 알 수 있을까? 모든것을 버림으로써 가능하다.
세상을 거부한 덕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내가 하느님을 직접 뵙고자 한다면 덕도 버려야 한다.
덕을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덕은 본래 내가 타고난 것이므로
초월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마음이 어떤 것과도 접촉하지 않을 때 비로소 하느님과 만나게 된다.
15. 다수성을 벗어남
우리는 어떻게 해야 완전히 단순해질 수 있는가?
사물과 자신을 떠나고 자신의 정신을 알고 영혼이 지닌 능력의 활동을
- 가장 중요한 능력인 이해의 활동을 제외하고 - 알게 됨으로써이다.
이해의 활동에 대해서는 오직 하느님께 맡겨라.
수동적 영혼은 모든 것을 내어놓아 하느님께서 방해받지 않고 활동하시도록 내맡긴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영혼 안에 당신의 완전한 모상을 낳고 영혼을 당신과 같아지게 하신다. 그때 영혼은 그분과 함께 이해하고 그분과 함께 사랑하게 된다. 이것이 완성이다.
이제까지 묶여 있고 구속되어 있던 우리 영혼의 모든 능력이 완전히
자유롭게 될 때, (그리고 수동적이 될 때) 정신이 고요해지고 감각이
더이상 우리를 방해하지 않게 될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탄생하신다.
16.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자신과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 안에서 무에 이른 사람에 대해
나는 또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사람은 가장 낮은 위치를 차지하며,
하느님은 자신을 비워 온전히 그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신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느님과 같아질 수 없다.
하느님의 영원하신 진리로 분명히 말한다.
낮아지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그 모든 능력과 함께 모두 쏟아
부어주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내맡김으로써 가장 낮은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생명, 당신의 존재, 당신의 본성, 당신의 완전한
신성을 비워주신다.
그러므로 하려고만 한다면 하느님과 온 우주가 그대의 것이 된다.
그대 자신과 사물을 버리고, 그대의 개성이라는 옷을 벗고 그대의 신성을
입는다면 말이다.
그대는 그리스도가 되고 하느님이 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영원하신 말씀께서 취하지 않으실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영원하신 말씀은 개성을 취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것을 모두 벗어버리고
단시 인간 본래의 모습만 남겨두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절대적 자기 포기가 필요하다.
듣는 이와 그가 들은 것은 영원하신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된다.
모든 사물 안에 있는 한 가지 질료를 아는 사람은 흔들림 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질료는 형상에 종속되며, 형상이 없이는 질료도 없고 질료가 없는 형상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질료가 없는 형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질료는 형상과 결합하고 각각의 형상 안에서 분리되지 않은 전체로 존재한다. 형상 그 자체는 무가 되므로 어떤 것도 움직이게 할 수 없다.
그리고 질료는 전혀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형상이나 질료를 움직여지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시간 안에서의 대상이 없는 것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과 모든 사물과 온갖 이기심을 완전히 비워내고,
완전한 믿음과 사랑으로 하느님께 결합되어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겼다면
그대 안에서 태어난 모든 것은 그것이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간에 더 이상 그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대가 자신을 내맡긴 하느님께 속하게 된다.
나는 하느님께 당신 자신을 주시기를 청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정화시키고 비워주시기를 청한다.
내가 비워지면 하느님은 당신의 본성상
당신 자신을 나에게 주시게 되어 있다.
17. 처녀인 부인
나는 때때로 천사가 마리아에게 했던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라는 말을 생각한다.
나 역시 그렇게 은총으로 가득 채워지지 않는다면 마리아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나 역시 성자를 낳지 않는다면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신 것이 나에게 무슨 득이 되겠는가? "우리 주님이
어떤 마을로 가셨는데 부인인 어떤 처녀가 맞아들였다." 이 말에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처녀여야 한다. 처녀란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처럼 다른 표상들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태어나서 이성적 생활을 시작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처럼 표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미 많은 것과 그에 대한 다양한 표상을 알고 있는데 말이다.
어떻게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나의 대답은 이렇다.
인간이 생각한 모든 형상과 하느님 안에 존재하는 모든 형상을 내 안에
지닐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성적 능력을 내가 가지고 있다면,
또 내가 형상 안의 어떤 성질도 가지지 않고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과거에서든 미래에서든 소유하려 하지 않으면서 현재 하느님의 의지 안에서 완전히 자유롭고 영원히 그러하다면, 나는 참으로 처녀로서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처럼 형상의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마음속에서
생각해 보라.
처녀는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한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 영혼은 '부인'이 되어야 한다. '부인'은 영혼의 가장 고귀한 호칭이며 처녀보다도 더 고귀하다.
인간이 하느님을 자신 안에 맞아들이는 것은 좋은 일이며 그렇게 맞아들일 때 그는 처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 하느님께는 더 좋은 일이다.
하느님 은총에 대해 감사하는 길을 열매를 맺는 것이며,
따라서 성부의 마음 안에 다시 예수를 낳는 영원한 탄생 속에서 영혼은
부인이 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마리아가 먼저 영적으로 하느님을 낳지
않았다면 결코 하느님은 육신으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떤 여인이 그리스도께 당신을 낳은 모태는 복되다고 말씀드렸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를 낳은 모태만 복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복됩니다." 마리아에게서 육신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처녀, 곧 선한 영혼 안에서 영적으로 탄생하는 것이 하느님께는 더욱 가치있는 일이다.
애착에서 해방된 처녀인 부인은 자신에게나 하느님께나 똑같이 가까이 있다. 그 부인은 많은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보다 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다.
부인인 쳐녀는 매일 열매를 맺는다. 그것은 곧 하느님의 탄생인데
매일 그녀는 가장 고귀한 근저에서 수백 배, 수천 배, 아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부께서 당신의 영원하신 말씀을 낳으시는
그 근저에서 처녀인 부인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부의 마음에서 나오는 빛이신 예수께서는 -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그분은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오는 '빛이며 광채'이시다 - 그 부인과 함께 계시며
부인인 처녀는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가 되어 성부의 마음 안에 있는
순수한 빛으로 예수와 함께 빛난다.
18. 겸손
하느님을 뵙기 위해서는 높은 열망이 필요하다.
뜨거운 갈망과 자기를 낮추는 겸손은 기적을 이룬다.
맹세하거니와 하느님은 전능하지만 열렬한 갈망을 지닌 겸손한 영혼을
물리치지는 못하신다. 내가 하느님을 지배하거나 내 뜻에 그분을 굴복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의지와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따르면 "현재의 내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현재의 나를 버려야 한다." 이것은
겸손으로 이루어진다. 성 그레고리오는 "자신을 낮추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을 주는 것은 없다"고 한다.
사람은 모든 일에서 의지를 하느님께 향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아무런 염려 없이 내가 옳은지 그른지 의혹을 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 붓질 하나하나를 모두 미리 계획해야 한다면 그는 전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만일 어떤 곳에 가기 위해 발을 어떻게
디뎌야 할지 정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곳에 결코 다다를 수 없다.
그대의 원칙을 따르며 계속 나아가라.
그러면 올바른 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며 그것이 길이다.
참된 겸손의 증거는 칭찬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기뻐하는 것이다.
진리를 만나고 자신 안에서 진리를 목격하면 기쁨을 느끼지만
또한 자신이 행하지 않은 것 때문에 그 기쁨을 두려워하게 된다.
나 자신을 낳출 때 하느님은 높아지며, 내가 자신을 더 많이 낮출수록 하느님을 더 높이 찬양하는 것이 되고, 그분을 더 높이 찬양할수록 그분은 더욱
부드럽고 감미롭게 당신의 은총을 부어주신다. 높은 데일수록 물은 더 쉽게, 더 순조롭게 흐르기 때문이다. 나의 비천함 위에 하느님이 어떻게 현양되는지를 이렇게 입증하는 바이다. 곧 내가 자신을 낮출수록 하느님은 내위에
더 높이 올라가신다. 골짜기가 깊을수록 산이 높다. 마찬가지로 내가 자신을 낮출수록 하느님은 더 높아지며 더 쉽게 그리고 더 잘 당신의 신성을 부어주신다. 그러므로 나는 자신을 낮춤으로써 하느님을 현양한다.
하느님이 어떻게 사람이 스스로 낮추도록 만드실 수 있는가?
이것은 마치 인간의 무가 하느님의 현양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복음서에서도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야 현양된다. 이 말은 인간이 자신을 낮추는 것과
현양되는 것이 별개라는 말이 아니다.
최고의 현양은 겸손의 가장 밑바닥에 있다는 뜻이다.
영혼이 겸손해지는 만큼,
그래서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기를 비운 만큼
성령이 영혼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성령은 그가 찾을 수 있는 빈 공간을 모두 가득 채운다.
19. 고요함
전환과 변화로는 어디도 이르지 못한다.
우리는 멈춤으로써 앞으로 나아간다. 영혼은 하느님 안에 고요히 머물러야 한다. 하느님이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실 수 없는 것은 영혼 안에서는 모든 사물이 내적.외적 한계를 지닌 척도에 의해 다스려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일에는 한계가 없으며 무한하다. 흐르는 물에는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없다. 물이 맑고 고요해야 거기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다.
하느님의 가장 고귀한 첫번째 활동은 움직임이 없는 거룩한 쉼이다.
쉼을 만드신 분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다.
하느님이 움직이지 않는 분이 아니라면 움직임이 없는 것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움직이는 것은 쉼에서 시작하여 움직이며,
움직이는 사물은 반드시 쉬려고 한다"고 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가능한 한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언제 인간이 움직이지 않는가? 어떤 것도 영혼을 혼란시키지 않을 때,
영혼이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으며 기뻐할 수도 없고 슬퍼할 수도 없을 때 영혼은 움직이지 않는다. 영혼은 어떤 피조물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을 때 조급해하지 않게 된다. 그뿐 아니라 피조물의 형상에 머무는 것은 영혼에게 지옥과 같은 고통이다. 하느님의 형상 없는 형상 외에 다른 것에서는 영혼이 쉼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것 안에서 안식을 추구하였다."
...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만든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안식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본성적으로 그렇게 열렬히 찾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또 안식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동요하는 영혼이 찾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다시 한번
안식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말씀은 영혼 안에 감추어져 있고 눈에 띄지 않으며 우리 시야 바깥에 있다.
우리가 듣는 것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소리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소리는 멈추어야 하고 침묵이,완전한 고요가 지배해야 한다. 움직임의 마지막은 쉼이다.
지적 통찰력은 완전히 쉬는 일이 없다.
정신적 작용에는 외부 사물에서 영혼으로 향하는 어떤 움직임이 있고,
그러한 움직임 덕분에 이 사물의 형상이 영혼 안에 들어와 상을 이루게 된다. 그러한 움직임은 영혼의 존재(is-ness)안에 정신적 운동을 일으키고
사물의 실제 존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 움직임의 범위는
더이상 쉬지 않는 의지로 확대된다. 쉼이란 무엇인가?
성 아우구스티노는 움직임이 완전히 없는 것.
곧 육신과 영혼이 자기 본성을 잃어버린 것이 쉼이라고 하였다.
20. 감각
어떤 학자들은 영혼이 오직 심장 안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일부 저명한 학자들도 그런 오류를 범한다.
영혼은 전체적이며 나누어지지 않는 것으로서 발에도 있고 눈에도 있으며
동시에 육신의 각 지체 안에 있다.
나는 눈으로 들을 수 없고 귀로 볼 수도 없다.
오감의 다른 능력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영혼은 모든 지체 안에 온전히 존재한다.
오감은 영혼이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며,
또한 이 길을 통하여 세계가 영혼 안으로 들어온다.
시각은 두 눈보다 더 월등하며 하늘과 땅보다 더 광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 능력은 눈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그것을 영혼 안으로 옮겨간다. "주님의 손이 그와 함께 있다." '주님의 손'은 성령을 말한다.
여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활동은 손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손은 팔과 하나이고 또한 육신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심장에서 시작해서 사지로 퍼져 나가며 손으로 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혼은 주로 심장에 있으며 심장에는 능력의 주된 원천이 있다. 육신에서 분리된 영혼은 지성도 의지도 소유하지 못하다.
그러한 영혼은 말하는 능력도 지니지 못한다.
사실 그 영혼은 자신의 근저 안에, 뿌리 안에 그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지니지 못한 것이다. 영혼은 흩어진 사물들을 모음으로써
육신 안에서 정화된다. 오감이 모아질 때 영혼은 모든 것을 하나로
종합해 주는 공통 감각을 갖게 된다.
내 입이, 내 귀가 하늘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입과 귀가 하늘과 유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 베르나르도는 "내 눈은 하늘처럼 둥글고 맑으며 몸 안에서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고,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는 것을 참지 못한다"고 말한다.
내 눈이 벽에 있는 그림을 보려면 그 그림이 공기를 통과해야 하고
더 엷고 미세한 형태로 내 상상 속에 탄생하여 나에게 동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속성을 영혼이 소유해야 한다.
그리고 이 비유는 비록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죄란 영혼에게
낯선 것이기 때문에 영혼이 죄를 거부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하느님이 영혼에게 낯선 것이라면 영혼은 하느님을 전혀 소유하지 않을 것이다. 눈이 지각하는 것은 수단을 통하여 표상으로 눈에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한 수단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만일 천사가 다른 천사를 보거나 하느님께서 만드신 어떤 것을 본다면
그 천사는 어떤 수단을 통해서 볼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하느님만큼은 직접적으로 본다.
영혼이 일깨워지고 지혜의 관념이 영혼 안에 새겨지는 것은
오직 감각을 통해서다.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노는 영혼이 모든 지식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으며, 외부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그 지식을
일깨우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 오감으로 사는 사람은 이러한 양식(糧食)을 결코 알지 못한다.
영혼은 나누어지지 않으며, 각 지체 안에 온전하게 들어 있다.
눈이 보고 있는 곳에서 귀는 듣지 못한다.
청각과 시각은 정신 안에서 다루어진다.
빛은 눈에게 색에 대한 감각을 주는 반면 영혼은 영혼의 결함 때문에
그러한 감각을 지니지 못한다. 영혼이 그 색감을 받아들어야 한다면
그 색감에 살아 있는 모든 외부 감각은 천사가 불러일으켜야 한다.
천사는 영혼의 상부에 색감을 새겨넣어 준다.
21. 공통 감각
육신에서 분리된 영혼은 지성도 의지도 소유하지 못한다.
그러한 영혼은 말하는 능력도 지니지 못한다.
사실 영혼은 자신의 근저 안에, 뿌리 안에 그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지니고 있지 못한 것이다.
영혼은 흩어진 사물을 모음으로써 육신 안에서 정화된다.
오감이 모아졌을 때 영혼은 공통 감각을 갖게 되는데,
공통 감각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로 종합된다.
한 스승이 말하기를, 현재를 향해 시간을 건너면서 영혼의 각 능력은
그 기능 자체를 넘어서게 된다고 말한다.
오감의 기능은 공통 감각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한편 공통 감각은 무의 형상 안에서 형상 없는 능력이 되어 사라진다.
22. 감각을 넘어
스승이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영혼의 절정을 이루는 곳,
다시 말해 이름이 없는 곳이요 모든 사물이 자리하고 있는 그 곳을
눈이나 귀가 감지하지 못하게 하신다.
" 무엇인가를 보는 사람은 하느님을 보지 못한다고 스승은 말한다.
[출처]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2장|작성자 곡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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