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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천지도(誠者天之道)'와 '성지자인지도(誠之者人之道) 본문
성자천지도(誠者天之道)'와 '성지자인지도(誠之者人之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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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의 윤리설은 중용의 근본사상인 성(誠)의 철학에 입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성은 자아실현설에서 말하는 절대아(絶對我)와도 같은 것이어서, 그 윤리설도 일종의 실현설로 볼 수 있다. 즉 인간천부(人間天賦)의 성을 다할 때 여기에 자연 도덕의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찌 그러한가? 먼저 성(性), 도(道), 교(敎) 등의 관념이 분명히 파악되어야 하겠다.
성(性)
성(性)이란 중용의 설에 의하면 천부의 성(誠)을 말한다. 즉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하였다. 즉 물(物)의 본성을 말한다. 따라서 인간이나 만물은 천지의 원리인 성(誠)을 그 본성으로 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性)을 좇아 활동하는것은 바로 도에 합하는 것이니 도덕이란 이 성(性)을 실현하는 일에 불과하다.
자사의 이른바 성(性)은 송유(宋儒)와 같이 기질과 본연으로 이분해서 본 것은 아니었으나, 이를 선천적인 경험 이상의 것으로 해석한 점은 공자의 견해를 초월하고 있다고 보겠다.
도(道)
성(性)을 좇는 것을 도라고 한다(率性之謂道). 솔성은 성이 동하는 대로 좇는다는 말이다.
무릇 성(性)이란 성(誠)의 발현이며, 그 중에 깊이 천리천도(天理天道)를 갖추고 있는 것이므로, 여기에 좇아 그 본래의 명을 행한다고 할 때, 여기에 자연히 인도가 행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용의 사상에 의하면 성(誠)은 윤리도덕일체의 연원(淵源)이기 때문에, 도덕은 곧 이것을 몸에 체득하고 행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誠)이 인간에게 나타날 때 성(性)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성(誠)의 발현인 성(性)에 따라 행동하고 행위하는 것이 바로 도가 되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는 어떻게 다른가에 주의해야 되겠다. 즉 '성자천지도(誠者天之道)'와 '성지자인지도(誠之者人之道)'의 차별점이다. 천지도(天之道) 즉 성(誠)은 만물에 편통(遍通)하는 천리천칙(天理天則)으로 광의의 도라고 본다. 인도는 협의의 도로서 이는 자기의 마음을 성(誠)되게 해서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자사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인욕이 있어서 생지안행(生知安行)의 성인이 아닌 이상, 이 마음을 성되게 노력하지 않으면 절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천도와 인도의 구분이 여기에 있다.
교(敎)
교는 도를 닦는 일이다(修道之謂敎). 주자의 주석에 따르면 도는 객관적인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예악형정(禮樂刑政) 따위를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객관적인 이 도가 성(性)에 따르면 도덕이 절로 행해지고, 또 성(誠)이 만인에 보편적으로 편재한다 하였으니, 하등 여기에 수양이나 교육이 필요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런데 중용에서는 인지도(人之道)를 설명하고 교육을 논하고 있으니 어찌 생각하면 하나의 모순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사의 성(性)에 대한 세론을 고찰하면 쉽게 판명이 된다.
자사에 의하면 성(性)에도 각기 3품(三品)이 있다. 즉 첫째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生而知) 성, 둘째는 배워서 깨달은 후(學而後) 알게 되는 성, 셋째는 곤란을 당해 깨우친 후(困而後) 점점 알게 되는 성으로 구분하다.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안행이득지자(安行而得之者), 이행이득지자(利行而得之者), 면려점행이득지자(勉勵漸行而得之者)의 삼품이다. 공자가 말한 상지(上知), 중인(中人), 하우(下愚)의 삼자와 같은 것이다. 여기서 상품은 물론 교육의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성인에게나 가능한 것이지 만인에게 다 바랄 수는 없다. 중품과 하품의 교육의 필요성은 두말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중품이나 하품자의 성은 투철하지 못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하품도 물론 교육이 가능한데 그것은 하품이라해도 성(誠)의 본성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천부의 성(性)에는 상품이나 중품이나 하등 다를 것이 없으므로 교육은 다 가능한 것이다. 다만 자사는 주자와 같이 본연과 기질의 성을 구분하여 그러므로 교육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주자에 비하면 다소 막연하게 넘기고 있다 하겠다. 그렇지만 공자가 '하우불이(下愚不移)'라고 하여 교욱의 가능을 부정한 데 비하면 자사의 인정(認定)은 진일보한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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