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作爲的(작위적)으로 하는 함이 없다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본문
1.爲學日益(위학일익) 2.爲道日損(위도일손) 3.損之又損(손지우손) 4.以至於無爲(이지어무위) 5.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 6.故取天下(고취천하) 7.常以無事(상이무사) 8.及其有事(급기유사) 9.不足以取天下(부족이취천하) (풀이편) 이 글은 老子(노자)님의 道德經(도덕경) 48章(장)으로 사람의 自我中心(자아중심)의 삶과 靈我中心(영아중심)의 삶을 比較(비교)하여 참을 밝히신 말씀이다. 사람은 胎生的(태생적)으로 貪.嗔.痴(탐.진.치)란 三毒(삼독)의 獸性(수성)인 짐승성질의 遺傳因子(유전인자)를 몸뚱이의 父母(부모) 로부터 받아나온 짐승성질이 우리 사람의 몸뚱이 속에 本能(본능)으로 內在(내재)가 되어있는 것이다. 分數(분수)에 맞는 程途(정도)의 貪.嗔.痴(탐.진,치) 貪慾心(탐욕심)이 있는 것 자체는 몸뚱이 생명을 위해서는 어쩌면 必要不可結(필요불가결)한 것일 수도 있다 할 것이다. 問題(문제)는 이 것이 自身(자신)의 분수엘 아랑곳 하질않고 밑도 끋도 없이 死生決斷(사생결단)으로 貪慾心(탐욕심)을 부려 그칠 줄을 모르는데에 그 문제가 있는 것이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하늘로부터 받아나온 금쪽같이 所重(소중)한 生命時間(생명시간)을 살아가는 그 길을 흔히들 人生旅程(인생여정)이라고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人生(인생)이란 것이 나그네 여행길이라는 말이다. 아침에 돋아난 버섯이 밤에 죽는 하루살이 버섯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몸뚱이 사람으로써는 나면 반드시 죽어 썩어질 物質(물질)로 宇宙空間(우주공간)에 떠도는 한점 콩알같은 地球(지구)라는 흙구슬에 暫時(잠시) 여행나온 나그네들이라는 말로 주인공이 아니고 그저 딱 한번 다녀가는 旅行客(여행객)이라는 말이다. 젊고 健康(건강)한 몸으로 千年萬年(천년만년)을 살고싶어도 받아나온 시간이 다 저마다 限定(한정)되게 받아나온 時限附生命(시한부생명)으로 나면서 벌써 死刑宣告狀(사형선고장)을 받아들고 나그네 旅路(여로)에 오른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것엔 順序(순서)가 있는데 왜 죽는 것엔 차례가 없는 것인가 하고 땅을치며 哀痛(애통)해들 하지만 이게 다 받아나온 天命(천명)이 그것뿐인 것을 사람들이 어쩌랴 . 사람들은 여기 이 세상을 全目的(전목적)으로 생각하고 살기때문에 태어나면 다들 좋다하고 뻑쩍지근하게 잔치를 떠벌리고 죽으면 哀痛(애통)해하며 한없이 슬퍼한다. 이 세상 여기는 사람의 最終目的地(최종목적지)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며 삶의 참 목적과 목적지를 찾아가기위해 暫時(잠시) 들려 지나가는 나그네 세상일뿐인 것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이 세상이란 땅에서 나서 살다가 영원한 滅亡(멸망)으로 끝나라는게 아니고 이 세상은 사람들의 본디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게끔 나그네 길에 주어진 手段(수단)으로써의 연습같은 삶이지 이 땅에서 살고 그치라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태어났다고 좋아하고 죽었다고 울고불며 몸부림을 치진 않을 것이다. 莊子(장자)님의 大宗師篇(대종사편)글에 삶과 죽음에 대한 장주님의 말씀이 彼以生爲附贅懸疣(피이생위부췌현우)라 하여 저 산다는 삶이란 것은 덤으로 붙어있는 혹이나 사마귀라 생각하고 以死爲決환潰癰(이사위결환궤옹)이라 하여 죽음이란 것이 부스럼을 째고 곪아서 헌데를 고름을 짜 내는 것이라 생각 한다 하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참나인 靈我(영아)로 거듭난 얼나의 사람의 자리에서 보면 이 땅에서 몸뚱이로 살아가는 삶이란 것도 참삶도 아니고 몸뚱이가 죽어 없어지는 죽음이란 것도 정말 죽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몸에 혹이 생기거나 사마귀가 생기면 보기 凶(흉)하다고 수술도 하고 그것을 떼어내고 治療(치료) 할 줄은 알면서도 정작 내 심령 마음에 혹덩이와 사마귀로 들끓는 貪.嗔.痴(탐.진.치) 三毒(삼독)의 짐승성질인 貪慾心(탐욕심) 혹 덩어리는 싫어하여 없에기는커녕 그 탐욕심에 종질하며 썩어 문드러질 肉身(육신)의 病的(병적)으로 極端(극단)을 치닫는 利己心(이기심)과 貪心(탐심)을 채우고 즐기는 맛에 반은 미친듯이 살아가는 허깨비 삶임을 모른다는 말이다. 몸뚱이 생명이 죽는다는 것도 다 定(정)해진 秩序(질서)인데 이걸 順理(순리)로 받아들이질 못하고 앙탈을 부리고 醜態(추태)를 부린다는 것이다. 곪은 부스럼 腫氣(종기)를 째고 헐은 혹덩이를 짜서 썩은 고름을 빼낼 줄은 알면서 내 몸이 죽고 썩어져야 몸뚱이에 갇혀 抑壓(억압)받던 靈(영)이 풀려나 解放(해방)과 自由(자유)에 들 것인데 이걸 몰라서 죽음을 당하면 울고 불고 몸뚱이 未練(미련)을 훌훌 벗어버리질 못해 안달을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과 靈我(영아)인 얼나를 참나로 알아 거듭난 사람이 몸뚱이 生死(생사)를 두고 생각하는 觀念(관념)이 天地(천지)의 差(차)로 다른 것임을 장자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사람이면 다 저마다 말하길 나는 하늘을 우러러 보나 땅을 굽어 보아서나 良心(양심)에 한점 부끄럼 없이 바르고 올곧게 살아가는 떳떳한 사람이라고들 한결같이 말하는게 一般(일반)일 것이다. 이게 뭘 몰라도 한참을 몰라서 하는 억지소리인 것이다. 貌樣(모양) 껍데기만 사람이지 내 속에 貪.嗔.痴(탐.진.치) 짐승성질로 불타고 있다면 실은 다 짐승들인 것이지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가 사람 몸을 뒤집어쓴 한마리 짐승이라는 사실을 自認(자인)하고 정말 사람이 되고자 하고 사람이고싶다면 내 맘 속에 미친듯이 불타고 있는 짐승 성질인 獸性(수성)을 말끔히 다 죽여 없애야 할 것이다. 짐승 성질이 다 죽어 없어지면 내가 사람이 되기 싫어도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를 일러 人子(인자)라 하여 사람의 아들이라 한 것이 바로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질 않으면 모든 사람이 다 짐승이라는 말을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일 것이다. 짐승 성질을 벗어버리는 唯一(유일)한 길은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가 나가 아니고 나를 固執(고집)하는 거짓의 나란 것이고 참나인 靈我(영아)를 담고 있는 그릇이나 겉옷같은 것이지 이 몸뚱이의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의 感覺認知(감각인지)기관으로 느끼는 감각과 感情(감정)의 知覺的(지각적) 살뭉터기가 사람의 참나가 아니고 짐승 성질의 고깃덩어리로 거짓의 나란 것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인정하는 것만이 唯一不二(유일불이)한 길이라는 말이다. 佛經(불경) 般若心經(반야심경)이 摠(총)291字(자)로 된 經(경)인데 이 般若心經(반야심경)의 核心(핵심) 가르침의 골자가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살아가는 이 物質(물질)인 몸뚱이가 실은 見性(견성)하여 거듭난 얼나에 비춰보니 몸뚱이의 五蘊(오온=다섯감각의 모임)인 色.受.想.行.識(색.수.상.행.식)이 皆空(개공)으로 다 空(공=빔)하여 實相(실상)이 아니고 虛相(허상)이고 顚倒夢想(전도몽상=거꾸로 뒤집어진 꿈꿍이 생각)한 것이니 몸뚱이가 나라는 我執(아집)의 껍질을 깨트리고 참나를 見性(견성)하여 거듭나라는 것이 그 核心(핵심) 알맹이의 가르침이다. 짐승에서 사람이 된 것을 孔子(공자)님은 말씀을 하시기를 吾十有五而志于學(오십유오이지우학)이라 하여 나는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라 하였다. 여기서 배움이란 것이 다른게 아니라 바로 짐승에서 사람이 되는 人性回復(인성회복)의 工夫(공부)에 뜻을 두었다는 말인 것이다. 오늘날 地球村(지구촌)의 모든 學敎(학교)나 敎育機關(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지는 學習(학습)과 敎育(교육)은 오로지 짐승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에만 必要(필요)한 知識(지식)과 情報(정보)를 暗記(암기) 體得(체득)하는 짐승성질의 知能化(지능화)와 最大極大化(최대극대화)에 그 目的(목적) 있는 것이지 孔子(공자)님이 말씀하신 人性陶冶(인성도야)의 참된 學文(학문)의 理致(이치)는 사라진지가 이미 오래인 것이다. 三十而立(삼십이립)하여 서른살에 自立(자립)하여 스스로 섰다 하셨다. 孔子(공자)님은 사람이 되는데에 걸린 歲月(세월)이 열다섯 살에서 서른까지 장장 15년이나 걸렸다는 말이다. 짐승으로 뭉기적이며 앉아있던 것에서 不徹晝夜(불철주야)로 배움에 邁進(매진)한 결과 겨우 일어섰다는 말이지 아직은 언제 또 짐승으로 다시 곤두박질 칠질 모른다는 말이다. 四十而不惑(사십이불혹)이라 하여 마흔이 되어서야 迷惑(미혹)되질 않았다 하였다. 立(입=일어섬)에서 不惑(불혹=유혹에 넘어가질 않음)까지가 또 10년세월 동안 存心養性(존심양성)의 세월이 걸렸다는 말이다. 不惑(불혹)이란 感覺機關(감각기관)으로 認知(인지) 되고 發起(발기)하는 感情(감정)인 짐승 성질을 잘 살피고 判斷(판단)하는 일로 한점의 迷惑(미혹) 된이 없었다는 말이다. 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이라 하여 쉰살이 되어서야 천명을 알았다 하였다. 知天命(지천명)이란 하늘(하나님)이 나를 살게하신 하늘(하나님)의 뜻을 알아챘다는 말이다. 하늘(하나님)이 나를 살게하신 뜻을 알았다는 이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하늘이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참 삶의 목적을 모르고 다들 짐승으로 사는 것이고 이것을 아신 분들이야말로 예수님 말씀처럼 참으로 人子(인자)가 되어 사람으로 사는 것인 것이다. 하늘이 사람을 살리시는 뜻이 짐승 사람에서 참으로 사람의 자식인 人子(인자)로 거듭나라는 것임을 孔子(공자)님은 겨우 열다섯 살에 稀微(희미)하게나마 알았고 서른에 고작 정신적인 똥 오줌을 가리게 되었고 마흔에야 겨우 넘어지지않을 程度(정도)로 정신적인 힘(믿음)이 굳어졌고 오십이 되어서야 비로소 確實(확실)하게 알았다는 말인 것이다. 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이라 하여 예순이 되자 귀가 순해졌다 하였다. 귀가 순해졌다는 것은 무슨 말을 듣던 그 듣는 말로 因(인)해서 感情(감정)이 놀아나지 않을만큼 精神(정신)이 성큼 자랐다는 말인 것이다. 싫은 말을 들으면 발칵 血氣(혈기)를 부려 대들고 좋은 말을 들으면 해해거리며 깔깔대거나 하는 좁쌀 알갱이마냥 미주알 고주알 말이란 것에 感情(감정)이 촐삭거리는 그런 헤픈 精神(정신)의 小人輩(소인배)에서 太山(태산)처럼 굳세고 毅然(의연)한 精神人(정신인)으로 자라났다는 말인 것이다. 정신의 샘이 깊어졌다는 말이다. 물이 얕으면 흐르는 물 소리가 擾亂(요란)하지만 물이 깊으면 물 흐르는 소리가 없는 것이다. 七十而從心所欲而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이불유구)라 하여 일흔이 되니 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다 좇아해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하였다. 矩(구)는 法度(법도)로 사람으로 사는 사람의 이치를 말하는 것을 良心(양심)에 한점 거슬림이 없이 산다는 말인 것이다. 良心(양심)을 주인으로 삼고 몸나와 마음 나를 그 양심의 종으로 삼았으니 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이 양심의 법도를 어길 수가 없는 것이다.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가 주인으로 군림하고 양심이 자아에 눌려 종노릇하고 살때는 사람의 이치로 사는 것이 아니고 자아의 貪慾的利己心(탐욕적이기심)으로 짐승의 獸性(수성)인 짐승 성질법칙을 따르며 살던 짐승 시절이었다는 말이다. 孔子(공자)님은 이런 이치를 겨우 나이 열다섯에 稀微(희미)하게나마 認知(인지) 하시고 克己復禮(극기복례)에 뜻을 두시어 피나는 精進(정진)끝에 나이 칠십이 되어서야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란 짐승에서 人子(인자)인 사람의 아들이 되어 대자유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참나와 거짓나는 한마음 속에 同時(동시) 共存(공존) 하는 것이다. 正心(정심)과 直心(직심)으로 올곧고 반듯하게 양심을 좇아 사는 그 길이 내가 損害(손해)를 보는 길이라 하더라도 한점 흔들림이 없이 그데로 살 것인가 아니면 내 자신의 有益(유익)을 위해서라면 내 자신을 속이고 남을 다 속여서라도 邪惡(사악)하고 陰凶(음흉)한 마음인 曲心곡심)으로 살 것인지 이것을 選擇(선택)하는 것은 다 내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始毫釐之差終千里之繆(시호리지차종천리지류)란 말이 무엇인가?... 시작하는 처음의 털끝만한 差異(차이)가 나중엔 서로 千里間隔(천리간격)으로 어그러지게 된다는 말이다.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가 내게 걸림돌이 되어 내가 짐승으로 떨어지느냐 아니면 디딤돌이 되어 내가 人子(인자)인 참사람으로 거듭나느냐로 갈라지는 것은 다 내 자신의 選擇(선택)에 달렸다는 말로 그 차이가 처음은 터럭 끝만한 차이지만 나중엔 천리의 차이가 나는 짐승과 사람으로 갈린다는 말이다. 맘 속에 꽉차서 득시글거리고 있는 짐승 성질의 貪.嗔.痴三毒心(탐.진.치 삼독심)을 拔本塞源(발본색원)해서 뿌리를 뽑고 탐욕심의 根源(근원)을 막아 짐승 성질이 다 없어지면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짐승 사람에서 참사람인 人子(인자)로 되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 하시길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질 아니하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하였다. 거듭난다는 말은 몸나와 마음 나를 참나로 알고 살던 無明(무명)의 迷夢(미몽)에서 깨어나 하나님이 넣어주신 성령 씨앗의 靈我(영아)인 얼나를 참나로 깨쳐 精神人(정신인)으로 다시 난다는 말인 것이다. 성경 누가복음 14장 26절과 18장 29절서 30절에 예수님 말씀이 있기를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父母(부모)나 妻子(처자)나 兄弟姉妹(형제자매)나 甚至於(심지어) 自己自身(자기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弟子(제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그사람은...중략...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 하였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父母(부모)도, 妻子息(처자식)도, 兄弟姉妹(형제자매)도, 집도 ,財物(재물)도, 甚至於(심지어)는 나 자신마저도 다 버리라는 말씀인데 이걸 못알아 듣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 하고는 아무런 相關(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모.처자 형제자매와 집과 재물과 나 자신을 삶의 全目的(전목ㅈㄱ)으로 알고 孤軍憤鬪(고군분투)하며 사는 몸뚱이 중심의 사람으로써는 도무지 駭怪(해괴)한 말로 들릴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늘 예수님은 귀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일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예수님은 聖靈(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하고 썩어문드러질 物質(물질)인 몸뚱이를 참나로 알고 사는 肉身的(육신적)인 사람들을 아예 짐승으로 보셨고 또한 펄펄하게 살아서 숨을 쉬는 사람도 죽은 자라고까지 말씀을 하셨던 것을 생각해야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 세상에 살리시는 참뜻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을 사는 나그네 살이의 삶동안 몸생명을 다 불태워서라도 참나인 靈我(영아)의 얼나로 성령 거듭남을 이루어 몸 사람의 짐승 성질을 이기고 넘어 벗어버리고 人子(인자)로 하나님의 영적 아들로 다 거듭나기를 진정 바라신다는 말씀을 예수님은 이렇게 極端的(극단적)으로 말씀을 하신 것이다. 사랑의 優先順位(우선순위)를 하나님을 맨 꼭대기로 섬겨 모셔 따르고 하나님 뜻 좇아 살면서 하나님의 참아들로 거듭나는 일에 最高(최고)의 價値(가치)와 삶의 전목적을 두라는 말이지 실제로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를 遺棄(유기)하고 내동댕이치고 홀대하라는 말이 아닌 것임은 말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거듭난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 뜻을 오롯이 알아 들을 것이다. 집안 식구가 내 怨讐(원수)라는 말씀도 이와 똑같은 뜻의 말씀이다. 성령 거듭남은 各自(각자) 내 자신 心靈(심령)의 깨달음과 聖靈感化(성령감화)로 되는 것이지 내 피붙이인 부모나 친지나 자식이나 형제자매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안 식구가 더 걸림돌이라는 말이다. 父母(부모)는 몸뚱이로써 내게 몸뚱이를 주신 物質(물질)인 몸의 어버이고 하나님은 靈(영)으로써 내게 내 精神(정신)인 靈(영)을 주신 靈(영)의 아버지라는 말이다. 靈(영)이 주인이고 몸뚱이는 영을 섬기고 따라야 할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몸뚱이가 주인이고 영이 몸뚱이의 종질로 사는 거꾸로 된 삶을 참 삶으로 산다는 것을 붓다님은 顚倒夢想(전도몽상)한 삶이라고 하셨던 것도 예수님 말씀과 한치도 어긋아질 않는 똑같은 말씀인 것이다. 마가복음 3장 32절서 35절 말씀에서 『둘러 앉았던 群衆(군중)이 예수께 말하길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길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냐 ....중략..... 하나님의 ㄸㅅ을 行(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하였다. 이 말씀도 꼭 같은 뜻의 말씀이다. 몸을 낳아주신 어머니나 피를 나눈 몸뚱이 血緣(혈연)의 형제도 몸뚱이 血緣(혈연)으로 이어진 어머니고 형제이지 精神(정신)인 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이게 참 어머니가 아니고 참 형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血(혈)과 肉(육)으로 된 肉身(육신)인 몸뚱이로는 썩어질 物質(물질)이지 참이 아니고 暫時(잠시) 이 땅을 다녀갈 없어질 거짓이라는 것이고 聖靈(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靈(영)으로 새ㅗ 나야 그것이 참나요 하나라는 말이다. 佛經(불경)般若心經(반야심경)에 無色受想行識(무색수상행식)이라 하여 色受相行識(색수상행식)의 五蘊(오온)인 다섯가지 몸뚱이 感覺機能(감각기능)의 모임체인 몸뚱이가 없다고 한말이나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라 하여 여섯가지 感覺認知(감각인지)의 주체인 눈.귀.코.혀.몸.뜻(생각)이 있는 몸뚱이 기관이 없다는 말이나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향미촉법)이라 하여 여섯가지 느낌인 色(색=물질).聲(성=소리).香(향=냄새).味(미=맛).觸(촉=감촉).法(법=우주만유)이 없다는 말이나 無老死亦無老死盡(역무노사진)이라 하여 늙어 죽음도 없고 또 늙어 죽어 다함도 없다 한 말이 몸뚱이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見性成佛(견성성불)한 佛性(불성)의 靈我(영아)가 그렇다는 말이다. 몸뚱이가 참나가 아니고 불성의 나가 참나라는 말을 붓다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게 예수님 말씀과 하나로 같은 말씀인데 붓다님은 예수님보다 먼저 500년전에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만 다르다면 다른 것이다. 20세기 독일의 思想家(사상가)요 經濟學者(경제학자)로 科學的社會主義(과학적사회주의)란 맑시즘을 創始(창시)한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가 세상 종교를 批判(비판)하여 宗敎無用論(종교무용론)을 편 글을 볼작시면 《 宗敎(종교)란 困窮(곤궁)한 被造物(피조물)들의 한숨이며 無情(무정)한 세계의 感情(감정)이고 또 精神(정신)을 喪失(상실)해버린 現實(현실)의 精神(정신)이다.해서 宗敎(종교)는 民衆(민중)의 阿片(아편)이다.》하였다. 어떤면에서 본다면 마르크스의 이 말이 的中(적중)한 말일 수도 있다 할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세상의 모든 종교가 眞理(진리)는 죽었고 宗敎敎理(종교교리)와 宗敎儀式(종교의식)의 껍데기만 남았다는 말을 이렇게 표현을 했다면 맞는 말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나 불교나 예수님의 靈性(영성)가르침과 붓다님의 佛性(불성) 가르침은 없고 그저 기독교다 불교다 하는 看板(간판)만 내다 걸어놓고 靈性(영성) 가르침의 核(핵)인 성령 거듭남과 佛性(불성) 가르침의 核(핵)인 見性成佛(견성성불)은 없고 儀式宗敎(의식종교)와 祭祀宗敎(제사종교)의 敎理敎儀(교리교의)만 있는 샤머니즘의 몸뚱이 복만 바라고 비는 祈福信仰(기복신앙)만 巫堂(무당)의 굿판처럼 벌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宗敎(종교)와 信仰(신앙)의 現實(현실)이란 것이다. 信仰生活(신앙생활)의 目的(목적)과 價値(가치)가 죽으면 썩어질 몸뚱이 살림에 무슨 국물이라도 얻어 먹겠다는 쪼의 몸뚱이 慾心(욕심)을 쫓는 自我中心(자아중심)의 祈福信仰(기복신앙)에 통채로 빠져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물질적인 麻藥(마약)보다도 사람의 정신을 뿌리채 병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잘못된 信仰(신앙)에 정신이 빠지는 것일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교란 宗敎宗派(종교종파)나 制度的(제도적)인 宗敎集團(종교집단)이나 宗敎敎理(종교교리)를 만드신 일도 없고 석가 붓다님도 佛敎(불교)란 종교종파나 제도적인 종교집단이나 교리나 儀禮(의례)를 만드신 일도 없다. 예수님과 붓다님은 자신들의 몸 생명을 다 불살라가며 자신만의 絶對唯一(절대유일)의 진리를 찾는 苦行(고행)과 피나는 修行精進(수행정진)으로 거듭나시고 견성하신 절대진리의 영원한 生命根源(생명근원)의 大自由(대자유)에 드신 진리 말씀을 說破(설파)하심으로 몸뚱이에 속아서 顚倒夢想(전도몽상)한 無明(무명)의 衆生(중생)들 精神(정신) 을 일깨우고 불을 붙여 자신들이 證得(증득)한 참나로 하나같이 거듭나기만을 바라시는 大慈大悲(대자대비)하신 크신 願力(원력)에서 진리를 설파 하신 것이고 십자가에 못박혀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몸이 생다지로 죽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證據(증거)하고 말씀을 하신 것이지 다른 무엇이 아닌 것이다. 宗敎(종교)가 集團(집단)을 이루고 儀式(의식)과 儀禮(의례)를 갖춘 敎理(교리)와 敎儀(교의)가 생겨 潛定的(잠정적)인 利權(이권)의 團體(단체)가 되고 制度化(제도화)가 되고 漸漸(점점) 肥大(비대)해감에 따라 宗敎權力化(종교권력화)가 되기까지 붓다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의 알짬 核心(핵심)인 眞理生命(진리생명)은 덮이고 가리워지고 變質(변질) 된채 宗敎儀式(종교의식)과 宗敎儀禮(종교의례)와 잘못된 宗敎敎理(종교교리)만 得世(득세) 하게 되고 세상 權力(권력)과 썩어질 物質(물질)과 野合(야합) 함으로써 宗敎團體(종교단체)는 世俗化(세속화)와 權力化(권력화) 하게 되고 宗敎人(종교인)들은 어리고 純(순)한 양이 아닌 物質(물질)과 極端的利己心(극단적이기심)과 몸뚱이의 貪慾心(탐욕심)으로 暴惡(포악)해지고 狡猾(교활)하고 陰險(음험)해진 羊(양)의 탈을 뒤집어 쓴 이리떼들의 악마구리 떼들로 變質(변질)되어버린 것이 오늘날의 세상종교고 종교인들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否認(부인) 할 순 없을 것이다. 해서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같은 자들이라는 둥 겉은 말끔하게 닦으면서 그 속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찼다는 둥 羊(양)의 탈을 뒤집어 쓴 이리라는 둥 자기 눈에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에 티만 흠을 잡는다는 둥 毒蛇(독사)의 子息(자식)이라는 둥 이런 말씀을 서슴없이 하셨던 것이다. 聖經(성경)을 보고 佛經(불경)을 보고 道德經(도덕경)을 보고 莊子(장자)를 보고 四書五經(사서오경)을 보고 人類(인류)의 모든 聖賢(성현)들의 經典(경전)을 보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다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의 나를 죽이자고 보는 것이고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살자고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땅에서 먼저 사람으로 산 사람들이 붓다님이고. 예수님이고. 孔子(공자)님이고 .孟子(맹자)님이고. 老子(노자). 莊子(장자)님이고. 헨리데이빗 소로우님이고. 에크하르트님이고. 간디님이고. 톨스토이님이고 .소크라테스님이고. 柳永模(류영모)님이고 그런 것이지 우리는 다 짐승들이라 먼저 사람이 되고자 사람 된 사람들의 語錄(어록)과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닌가. 慾心(욕심)과 利己心(이기심)과 미움과 憎惡(증오)와 怨恨(원한)과 愛憎(애증)과 血氣(혈기)로 짐승 성질이 시퍼렇게 날이서 번뜩이는 갖은 貪慾心(탐욕심)의 邪惡(사악)한 칼들이 서로 칼질로 부딪히는 自我(자아)의 마음 속 아우성을 죽여보자는 것이 성경도 보고 불경도 보고 또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르크스는 宗敎(종교)의 核心宗旨(핵심종지)는 알질 못하고 사람들의 貪慾心(탐욕심)으로 변질된 종교의 廢害(폐해)만 보았기에 종교를 두고 困窮(곤궁)한 被造物(피조물)들의 한숨이고 民衆(민중)의 阿片(아편) 麻藥(마약)이다라고 까지 말했다는 것은 역시 그도 짐승의 限界(한계)를 뛰어넘질 못한 한 마리의 徹底(철저)한 짐승이었다는 사실을 자신이 證明(증명)한 꼴의 말이 된 것이라 할 것이다.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만 알고 自我(자아)의 잣대로 眞理(진리)를 재본 것이 고작 民衆(민중)의 阿片(아편)이고 困窮(곤궁)한 被造物(피조물)들의 한숨과 눈물이라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播種(파종)해주신 내 心靈(심령) 속의 하나님 씨인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나신 예수님의 말씀은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 肉身(육신)은 無益(무익)하나 살리는 것은 靈(영)이요 永遠(영원)히 永生(영생)하는 생명의 根源(근원)으로 남도 죽음도 없는 것이 바로 靈(영)이라고 말씀을 하셨고 見性成佛(견성성불)하신 붓다님은 苦.集.滅.道(고.집.멸.도)라하여 苦痛(고통)과 苦惱(고뇌)와 煩惱(번뇌)뿐인 몸나와 이것이 모여 苦惱(고뇌)의 덩어리가된 괴로움 덩어리로 마음을 통채로 삼켜버린 苦集(고집)을 滅(멸=죽임)하여 말끔히 죽이고 道(도=진리. 참나.불성의나.본래면목의 나)를 견성하고 重生(중생=거듭남)하여 거듭나라는 것을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얼나를 감싸고 있는 겉 包裝紙(포장지)에 不過(불과)한 몸뚱이 삶이란 렌즈를 通(통)해서 宗敎(종교)를 보았기때문에 包裝紙(포장지) 이야기만 한 것이고 예수님과 붓다님은 참나요 하나님 아들이요 영원한 생명인 생명의 根源(근원) 샘인 얼나의 靈眼(영안)으로 보았기때문에 絶對不變(절대불변)의 하나님 진리를 말씀을 하신 것이다. 마르크스보다 100년 앞서 살았던 데이비드 흄(1711년生<생> ㅡ 1776년 卒<졸>)이 인간의 마음을 分析(분석)한 人性論(인성론)을 볼작시면 【 나란 오로지 感覺機關(감각기관)으로부터 感知(감지)되고 認知(인지)되는 感覺(감각)의 知覺(지각)만으로 나의 存在(존재)가 있는 것이고 知覺(지각)이외의 무엇인가를 깨닫는다는 것은 결단코 있을 수가 없다. 例(예)를 들면 깊은 잠 속에 들어 나의 意識知覺(의식지각)이 없을 때는 나는 그 시간 동안은 存在(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을 할 수가 있다. 더욱이 萬若(만약) 죽음으로 因(인)해서 몸뚱이가 죽고 나의 모든 知覺意識(지각의식)이 消滅(소멸) 된다면 생각도 느낌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一切(일체)가 無(무)로 돌아간 것이니 나는 完全(완전)히 存在(존재)하지를 않는 것이다. 해서 나는 나라고 하는 것이 여러가지 知覺(지각)의 다발묶음이나 모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흄의 이 말은 사람이란 존재가 컴퓨터 하드웨어에 入力(입력)된 知覺情報(지각정보)의 다발 같은 存在(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컴퓨터에 입력된 정보가 소멸되면 남는 것이 없듯이 사람도 지각의 다발이 흩어지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으로 쉽게 말하면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 다른 무엇이 없다는 말을 이렇게 한것이다. 이것도 참으로 單細胞的(단세포적)인 發想(발상)의 말로 寒心(한심)의 極致(극치)를 드러낸 말이라 할 것이다. 몸뚱이만 알고 몸뚱이를 삶의 全目的(전목적)으로 아는 사람들의 말과 生覺(생각)은 한결같이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고 귀에 들리는 感覺認識的(감각인식적)인 것만 있는 것으로 알기때문에 눈에 보이질 않는 靈界(영계)는 無視(무시)하고 認定(인정)하질 않는 것이 特徵(특징)이라 할 것이다. 어떤 形態(형태)로든 꼴이란 形像(형상)의 模樣(모양)이 있는 宇宙萬有(우주만유)를 皆空(개공)이라 하여 다 空(공=빔)하고 하나같이 實象(실상)이 아니고 虛象(허상)이라고 하신 붓다님의 이 말씀을 이런 이들이 알아 들을 수가 없고 예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 수가 있다는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物質(물질)은 쉼없이 變化(변화)가 進行(진행)되고 있는 變化過程(변화과정)에 있어서 참의 實象(실상)이 이것이다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물질의 象(상)이라서 空(공)하고 虛象(허상)이라는 것이다. 브룩스 카베이가 쓴 <예수가 종교를 批判(비판)하다>를 볼작시면 『나는 制度化(제도화)된 宗敎 그 가운데 特(특)히 基督敎(기독교=캐톨릭과 개신교)에 대해서 매우 敵對的(적대적)인 사람들이 예수라는 歷史的(역사적)인 人物(인물)에 대해서는 종종 好感(호감)을 갖는 傾向(경향)이 있음을 主目(주목)한다. 세상의 敎會(교회)에 대해서는 批判的(비판적)이지만 隱密(은밀)하게 예수를 尊敬(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事實(사실) 나는 只今(지금)까지 예수를 尊重(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보질 못했으며 앞으로도 또 만나리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世上宗敎(세상종교)는 人間(인간)들의 內面(내면)에 감추어진 自覺的(자각적)인 罪責感(죄책감)과 두려움이란 弱點(약점)을 動力(동력)으로 統制(통제)되고 執行(집행)되는 단조로운 쳇바퀴이다. 宗敎(종교)는 우리의 발걸음을 宗敎集團(종교집단)에 잡아두기위해 敎理(교리)를 내세우고 우리를 그어놓은 敎理(교리)의 線(선)안에 가두기 위해 우리들의 罪責感(죄책감)을 巧妙(교묘)하게 이용하며 이런 規則(규칙)들에 잘 適應(적응)하질 못하는 우리들의 失敗(실패)를 想起(상기)시키기위해 儀式(의식)의 禮拜(예배)를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의 주된 使命(사명)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交感(교감)을 위해 사용하는 旣存方式(기존방식)인 贖罪代贖(속죄대속)의 祭祀儀式(제사의식)의 可憎(가증)스런 禮拜宗敎(예배종교)를 부숴버리고자 靈性信仰(영성신앙)을 說破(설파)하신 것이다. 예수는 慣習的(관습적)으로 이어져오던 代贖祭祀禮拜(대속제사예배)의 禮式(예식)과 儀式(의식)에 執着(집착)하는 종교의 샤머니즘적 祈福信仰(기복신앙)의 盲点(맹점)을 무시하고 輕蔑(경멸)했으며 그것을 除去(제거)하고 打破(타파)하기위해 자신의 길을 홀로 걸어갔다 』하였다. 브룩스 카베이가 예수의 靈性(영성) 가르침의 信仰(신앙)을 바로 알아 들었고 세상 종교의 샤머니즘적 行態(행태)를 極明(극명)하게 看破(간파)했다고 할 수 있다 할 것이다. 오늘날의 世上宗敎(세상종교)도 하나같이 거룩을 僞裝(위장)한 可憎(가증)한 것들로 썩은 내가 振動(진동)하는 自我(자아)의 貪慾心(탐욕심)에 뿌리를 둔 儀式宗敎(의식종교)와 祭祀宗敎(제사종교)로 몸뚱이 살림에 福(복)받기를 빌고 바라는 祈福信仰(기복신앙)인 샤머니즘의 宗敎行態(종교행태)로 變質(변질) 된 것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와 크게 다를바가 없다 할 것이다. 老子(노자)님의 말씀인 絶聖棄智(절성기지)처럼 宗敎(종교)가 바로 서려면 거룩한체를 끊고 거짓된 自我(자아)의 슬기를 버려야 하는 것이다. 거룩한체를 끊고 자아의 지혜를 버린다는 말은 성령 거듭남으로 자아가 완전히 죽는 無我(무아)가 된다는 말이다. 내가 누군지 알아?..하는 이 나를 내세우기 좋아하는 그 잘나빠진 자아를 싹둑 잘라 없애버리고 내가 죽으면 그 빈자리에 하나님의 성령이 臨在(임재) 하시어 하나님의 씨로 내 심령 속에 內在(내재) 되어있던 씨앗 영이 움터 나오는 성령 거듭남이 꽃으로 피어 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 많은 宗敎(종교)가 있고 그 많은 종교인들이 있지만 하나같이 自我(자아)의 有益(유익)에만 執着(집착)한 祈福信仰(기복신앙)의 늪에 빠져 허우적이며 허깨비 믿음에 醉(취)한 줄도 모르고 各種捧獻金(각종봉헌금)을 내는 것으로 제대로 된 종교인인양 錯覺(착각)하고 종교인 行勢(행세)를 하고있다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몸뚱이 慾心(욕심)에 뿌리를 둔 自我(자아)의 信仰(신앙)이라면 이게 다 自己慾心(자기욕심)으로 因(인)해 自己(자기) 스스로를 欺瞞(기만)하는 샤머니즘이지 참 믿음의 信仰(신앙)도 아니고 바른 宗敎人(종교인)도 아니라는 말이다. 問題(문제)는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否定(부정)하고 精神(정신)의 十字架(십자가)에 쾅쾅 못박아 죽이고 하나님이 내 속에 넣어주신 하나님 씨인 성령으로 거듭난 精神人(정신인)인 얼의 나로 깨달아 새로 나야 하나님의 참아들인 靈的(영적) 아들이 되는 것이고 참 믿음으로 가는 좁은문에 들어서는 것이 되는 것이다. 떼거리로 소리내어 讚頌(찬송)을 목이 터져라 부르고 慟聲(통성)으로 울먹거리며 祈禱(기도)를 하고 聖經(성경) 말씀을 본다고해서 다 하나님의 善(선)한 아들 딸들인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處刑(처형)으로 몸 생명이 죽기까지 한 맘으로 가르치신 것이 다 스스로 영아인 얼나를 깨달아 거듭나라는 靈性自覺(영성자각)의 信仰(신앙)인데 아직도 이 세상에는 儀式宗敎(의식종교)인 祭祀宗敎(제사종교)의 샤머니즘을 쫓는 物神偶象宗敎(물신우상종교)와 샤먼들이 어리석은 욕심에 貪溺(탐닉)한 無明(무명)의 蒙昧(몽매)한 信者(신자)들을 저들 먹거리로 삼아 하나님을 팔아 먹는 짓거리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참으로 哀惜(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라 할 것이다. 성경 누가복음 12장 25에서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主人(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福(복)이 있으리로다....중략...』하였다. 主人(주인)은 하나님을 비유한 말이고 종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비유하신 말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쉼없이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업하고 출세하는 세상 일과 죽고 썩어질 몸뚱이 살이로 肉味(육미) 군것질에만 깨어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 뜻을 쫓아 사는 精神(정신)의 생각에 불이 붙어 깨어 있으라는 말이다. 每瞬間(매순간) 瞬間(순간)을 깨어 있는 靈的(영적) 삶을 살고자 애쓰신 多夕(다석) 柳永模(유영모)님의 語錄(어록)을 볼작시면 『우리는 瞬間(순간)을 지나가는 存在(존재)다. 도대체 머무르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永遠(영원)한 未來(미래)와 永遠(영원)한 過去(과거) 사이에 이제 여기라는 것에 接觸(접촉)하고 있을뿐이다. 지나가는 그 한点(점)이 그것이 이제 여기인 것이다. 그 한점 한점이 永遠(영원)이란 未來(미래)를 向(향)해 가고 있다..중략..... 아무리 넓은 세상이라도 여기이고 아무리 긴 세상이라도 이제이다. 이제라는 이 点(점)이 나가는 것의 原点(원점)이고 나라는 것의 原点(원점)이다. 』하였다. 사람의 삶이란 것이 설혹 100년을 산다해도 실제 사는 것은 只今(지금) 지나가는 이 瞬間(순간)이란 한 点(점)에 지나질 않는다는 말이다. 해서 그 連續(연속)의 始發点(시발점)인 이제란 이 한 点(점)이란 瞬間(순간)에 精神(정신)이 아침 이슬처럼 玲瓏(영롱)하게 하나님 생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깨어 있는 낱동의 個體(개체)인 내 생각과 온통으로 全體(전체)이신 하나님의 성령이 맞닿아 스파크가 일어나듯이 靈的交通(영적교통)이 번쩍 일어나는 참 깸의 거듭남으로 새로 나는 한 点(점)에서 永生生命(영생생명)으로 살아 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 스파크가 일어나는 부딪치는 瞬間(순간)이 도둑같이 올 수도 있고 번개같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해서 佛家(불가)에선 문득 깨달아진다고 해서 頓悟(돈오)라고 하는 것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곧 祈禱(기도)이고 冥想(명상)이고 坐禪(좌선)이고 參禪(참선)인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날마다의 冥想(명상)>이란 語錄(어록)에서 말하길 <삶의 모든 瞬間(순간) 瞬間(순간)마다 번쩍 깨어 있지 않으면 결코 眞理(진리)를 接(접)할 수 없다>고 한 말도 같은 脈絡(맥락)의 말씀인 것이다. 성경 마태복음 25장 1절서 13절에 예수님이 천국을 譬喩(비유)하신 말씀을 하시길 『天國(천국)은 마치 燈(등잔등)을 들고 新郞(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處女(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중에 다섯은 未練(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燈(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질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 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新郞(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處女(처녀)들이 다 일어나 燈(등)을 準備(준비) 할쌔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길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不足(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新郞(신랑)이 오므로 預備(예비) 하였던 자들은 함께 婚姻(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門(문)은 닫힌지라 그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時(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하였다. 여기서 新郞(신랑)은 하나님을 비유하신 것이고 열 處女(처녀)는 新婦(신부)를 도우러 가는 신부 친구들인 도우미 들러리로써 밤에 열리는 천국 잔치인 新郞新婦(신랑신부) 婚姻(혼인) 잔치에 參席(참석)코자 등장한 인물인데 밤을 밝힐 燈(등)과 預備(예비)등기름을 잘 準備(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혼인 잔치에 참석 한 것과 등에만 기름을 채운 것만으로 족할거라 생각하고 豫備(예비)기름을 준비하질 못해 新郞(신랑)을 기다리는 동안 등에 기름이 다 타버리므로 혼인 잔치에 들러리로 참석치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를 들어 천국에 들고 못들고를 비유하신 말씀이다. 천국에 들 수 있는 성령 거듭남의 瞬間(순간)인 그 날과 그 時(시)를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이니 늘 하나님의 생각으로 불태우는 생각의 精神(정신)이란 燈(등)에 생각의 기름인 精神(정신)이 充滿(충만)한 상태로 깨어 있을 때 불현듯 하나님의 성령으로 스파크가 일어나 성령 거듭남의 때가 온다는 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로 말씀을 하신 것이다. 易經(역경)에 있기를 愼言語 節飮食(신언어 절음식)이라 하여 말을 삼가 操心(조심)하여 愼重(신중)하게 하고 먹고 마시는 음식을 節制(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하였다. 이 것은 몸나와 마음 나인 거짓나인 自我(자아)의 삶도 이러해야 그나마 반듯하게 살 수가 있따는 말이다. 사람의 自我(자아)란 것은 가야금이나 거문고나 기타같은 絃樂器(현악기)와 같아서 줄이 너무 조여 팽팽해지면 자칫 끊어지기 쉽고 소리도 쇳소리만 나고 또 너무 풀어져 느슨하게 늘어지면 소리가 맥이 풀려 힘이 없거나 아예 소리가 안나는 것처럼 適當(적당)한 조임의 緊張(긴장)과 調和(조화)가 어울어지게 하려면 感情(감정)이 욱하는데로 따발총 쏘듯이 말을 함부로 뱉을 것이 아니라 생각 속에서 익어진 생각을 말하는 신중함이 있어야 하고 음식도 눈.코.혀가 動(동)하는대로 맛에 貪着(탐착)하여 걸신 들린듯이 먹어서는 안되고 몸이 겨우 虛氣(허기)만 免(면)할 程度(정도)만으로도 足(족) 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거짓나인 몸나도 아낄려면 이렇게 마음을 써야 하는데 참나인 얼나야 말해 무엇 할 것인가 붓다님 말씀. 예수님 말씀. 老子(노자). 莊子(장자)님 말씀. 孔子(공자).孟子(맹자)님 말씀. 이것이 짐승 사람들이 참 사람이 되기 위해 먹어야 할 精神(정신)의 밥이 아닌가?..... 精神的(정신적)으로 깨어서 永遠(영원)한 깸이 되고 永遠(영원)한 精神(정신)의 밥이 되신 이들의 밥을 먹고 우리도 깨어나 밥이 되자는 것이 삶의 참 目的(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을 모르고 몸뚱이만을 위한 밥을 먹고 똥만 내놓고 산다면 제아무리 學識(학식)이 많고 財物(재물)이 넘쳐나고 權力(권력)과 名譽(명예)가 있다한들 이건 똥버러지 들이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多夕(다석) 柳永模(유영모)님의 語錄(어록)에서 말하길 『우리가 밥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恩惠(은혜)요 膳物(선물)이지 우리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 人生(인생)이 밥을 먹는 것은 무슨 資格(자격)이 있어서 먹는 것도 아니고 내 힘으로 먹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恩惠(은혜)로 수많은 사람들의 手苦(수고)와 恩德(은덕)으로 大自然(대자연)의 빛과 물과 空氣(공기)의 功勞(공로)로 주어져서 먹는 것이다. 우리도 成熟(성숙)해져 밥이 될 수 있도록 太初(태초)부터 計劃(계획) 되어져 만들어진 하나의 作品(작품)이다. 해서 우리도 밥이 되는 것이 우리의 目的(목적)이다.』하였다. 故(고) 金壽煥(김수환) 樞機卿(추기경)님도 나는 밥이다 하신 말씀도 같은 脈絡(맥락)의 말씀이다. 이제 本文(본문)을 살펴 보면 1.爲學日益(위학일익)이라 하여 배우면 나날이 앎이 더해지고라 하였다. 여기서 앎이란 相對世上(상대세상)의 枝葉的(지엽적)인 知識(지식)과 情報(정보)의 認識能力(인식능력)의 모임을 말하는 것이다. 배우면 날로 앎이 더해진다는 말은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가 앎의 情報(정보) 다발로 漸漸(점점) 굵어지고 我執(아집)이 자꾸 커지고 驕慢(교만)해지기가 쉽다는 말을 警戒(경계)하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오늘날의 學(학=배움)은 하면 할 수록 邪惡(사악)한 利己心(이기심)으로 姦巧(간교)한 謀事(모사)와 꾀만 늘고 德性(덕성)은 아예 냄새조차 맡기도 힘들게 된 것 같다. 學(학)만 그런 것도 아니고 敎(교=가르침)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敎(교)나 學(학)이나 한길로 自我(자아)인 몸나와 마음 나가 세상 살이에 써먹는 몸뚱이 중심의 學(학)과 敎(교)에 目的(목적) 촛점이 集中(집중)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다. 한마디로 해서 몸뚱이의 똥감 材料(재료)를 保障(보장)받는 먹고 살 職業(직업)과 職位(직위)란 밥그릇 장만하는데에 學(학)과 敎(교)의 목적이 致重(치중)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라 아예 德性(덕성)을 쌓는 基礎(기초)인 人性涵養(인성함양) 교육이 抹殺(말살)되어서 그런 것일 것이다. 이 땅에서 뭘 좀 안다는 사람치고 倨慢(거만)하고 驕慢(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別(별)로 없는 것도 다 이런 理致(이치)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해서 知者不言(지자불언) 不知者多言(부지자다언)이란 말이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알 것을 아는 사람은 默默(묵묵)히 말이 없고 참으로 알 것을 알질 못하는 사람은 枝葉的(지엽적)인 부스러기 앎을 안답시고 아는체를 하며 자랑하느라 나팔을 불어댄다는 것이다 . 孔子(공자)님 말씀에 學而時習(학이시습). 格物致知(격물치지)라 하여 배우고 때로 익히고 사물에 이르러 그 궁극의 이치에 닿아 안다 하였다. 이게 두 말이 한 말로 같은 뜻의 말이다. 사람은 죽는 날까지 배운다는 姿勢(자세)로 學生(학생)의 삶을 산다면 늘 한결같이 謙遜(겸손)하고 섬기는 낮은 삶을 살 수가 있다는 말씀의 뜻이 孔子(공자)님의 이 말씀에 含縮(함축)되어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다. 孔子(공자)님이 好學(호학)에 대해 말씀하신 글중에 있기를 君子(군자) 食無求飽(식무구포) 居無求安(거무구안) 敏於事而信於言(민어사이신어언) 就有而道正焉(취유이도정언) 可謂好學也已(가위호학야이)라 하여 君子(군자)는 먹는 것에서 배부름을 구함이 없어야하고 居處(거처)하여 삶에 있어서 一身(일신)의 편안함만을 구하질 않아야하고 맡은 일은 敏捷(민첩)하고 斷乎(단호)하게 하고 말을 함에는 믿음이 있어야하며 道(도)가 있는 이를 찾아나가 자신을 먼저 반듯하게 바로 곧추잡으면 가히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할만하다 하였다. 여기서 食(식).居(거).事(사).言(언)이 한마디로 몸뚱이 살림을 말한 것이다. 食(식)은 먹질 않으면 몸뚱이 생명을 유지 할 수가 없으니 먹긴 먹되 虛氣(허기)를 免(면)할 程度(정도)로 僅僅(근근)히 小食(소식)을 할 것이고 맛과 質(질)과 量(양)에 食貪(식탐)을 부려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居(거)는 몸뚱이가 寄居(기거=덧붙어 삶)하는 居處(거처)인 곳과 집이 있어야 하는데 그 곳도 暫時(잠시) 머물어 쉬다가 갈 결국은 두고 미련 없이 훌훌 떠나야 할 곳이니 몸이 거처하고 쉬는 쉼터라 생각하고 簡素(간소)하고 儉素(검소)하게 할 것이지 지나치게 꾸미거나 치레를 하질 말라는 말이다. 事(사)는 모든 일은 理致(이치)에 맞고 不偏不當(불편부당)함이 없이 公平無私(공평무사)하고 公明正大(공명정대)하게 하되 끊고 맺음을 信速(신속=믿음있고 빠르게함))히 하라는 말이다. 言(언)은 美辭麗句(미사여구)의 巧言令色(교언영색)의 꾸민 말을 할 것이 아니라 要點(요점)을 말하되 簡潔(간결)하고 穩和(온화)하게 누구나 듣는 이 쪽에서 믿어 줄 수 있는 信賴感(신뢰감)이 있는 말을 하라는 것이다. 孔子(공자)님의 이 食.居.事.言(식.거.사.언)이 곧 精神人(정신인)으로 거듭나고자 人子(인자)의 길로 가는 몸뚱이 살림으로써의 入敎(입교)의 基本(기본) 趣旨(취지)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렇게 基本素養(기본소양)의 精神(정신)을 土臺(토대)로 好學(호학)을 하게되면 저절로 道(도)로 나아가게 되고 道(도=참나 .성령)로 거듭나 天生德於予(천생덕어여)라 하여 하나님이 내게 속알(얼나=영아)을 낳아 주셨다 하는 깨침과 새로 남을 스스로 이루는 그런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孔子(공자)님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好學(호학)을 한다고 해서 다 참나를 깨닫는 것은 아닌 것이다. 세상에 내노라 하는 碩.博士(석.박사)들이 구름처럼 많아도 세상에서 날고 기는 몸뚱이로써의 꾀보는 될지언정 얼나를 깨닫질 못하는 것은 다 貪慾心(탐욕심)의 썩는 내가 풀풀나는 自我(자아=eggo)에 뿌리를 둔 學(학)과 앎이라서 그런 것이다. 2.爲道日損(위도일손)이라 하여 道(도=참.하나님. 진리.얼나)를 생각하면 날로 덜어진다 하였다. 참나요 하나님 아들이요 靈我(영아)의 精神(정신)나인 얼나를 생각하면 날로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잘못 생각하던 마음이 漸漸(점점) 엷어져 덜어지고 줄어지고 작아진다는 말이다. 自我(자아)의 我執(아집)과 我慢(아만) 傲慢(오만)과 驕慢(교만) 極端的(극단적)으로 利己的(이기적)던 貪.嗔.痴三毒(탐.진.치삼독)으로 猛烈(맹렬)하게 불타던 몸뚱이 貪慾心(탐욕심)의 불길이 漸次的(점차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사그러들기 始作(시작)한다는 말이다. 이게 모든 사람들에게 다 通(통)하는 말은 아닌 것이다. 各(각) 사람의 根氣(근기)에 따라서 天壤之差(천양지차)로 다른 것임을 붓다님은 일찍이 말씀을 하셨던 것이 아닌가. 自我(자아)의 몸나에 貪着(탐착)한 마구니 衆生(중생)들에겐 아무리 하늘 소리를 들려 주어도 虛荒(허황)한 소리로 알아듣고 마구니 새앙쥐가 생명 줄을 갉아 먹어 곧 생명 줄이 끊어져 決斷(결단)이 날 판인데도 썩어질 꿀물 방울의 달콤한 맛에 혀가 醉(취)해 녹아나듯이 몸뚱이의 末梢的(말초적) 感覺(감각)의 快樂感(쾌락감)과 맛에 貪婪(탐람)한 그 貪慾心(탐욕심)의 끈을 놓아버리질 못한다는 것이다. 다 사람들의 각기 根氣(근기)만큼들 될만큼 되는 것이지 짐승 사람에서 참으로 人子(인자)가 되어 성령으로 거듭나는 붓다님이나 .예수님.孔子(공자)님. 孟子(맹자)님.老子(노자)님 .莊子(장자)님 같은 聖人(성인)으로 새로 나는 사람을 몇천년을 두고도 이땅에서 다시 만나기 힘든 것이 다들 짐승으로들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누군데 어쩌구 하는 요 내세우고 거들먹거리길 좋아하는 自我(자아)란 생각을 뿌리채 뽑아 말끔히 던져버리고 자아에 부풀려진 헛바람이 터진 風船(풍선)에 바람이 빠지듯이 한김 남김없이 다 빠져 마음이 터엉 비어버려 아무런 바램도 없는 無我(무아)가 된 그 빈자리에 하나님 씨인 성령 씨앗의 靈(영)이 움터 참나의 싹이 돋아 나오는 것이다. 싹이 돋아 나올 수 있도록 마음 밭갈이를 하는 것을두고 莊子(장자)님은 말하기를 喪我(상아)라 하여 自我(자아)를 죽인다 하였고 坐忘(좌망)이라 하여 結跏趺坐(결가부좌)한채 앉은 자리에서 參禪(참선). 冥想(명상)으로 자아를 잊는다 하였고 心齋(심재)라 하여 마음을 씻어내어 가지런히 한다 하였다. 인도의 마하리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冥想錄(명상록)에서 <죽은 맘을 通(통)해서 atman(얼나)을 깨달을 수가 있다. 죽은 맘이란 나라고 내세우는 자아의 생각이 없는 맘이요 內面(내면)으로 向(향)해진 마음이다.> 하였고 마하트마 간디는 <날마다의 冥想錄(명상록)>에서 <자아가 죽을 때 얼나가 깨어난다.>하였다. 孟子(맹자)님 말씀에 皆由近以及遠(개유근이급원) 自易以及難(자이이급난)이란 말이 있다. 모든 것이 가까운 것으로 말미암아 먼 것까지 이르러 미치게 하고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렵고 힘든 일에까지 잘 해낼 수 있게 미치는 것이라 하였다. 내게 가깝고 가장 쉬운 것에서부터 출발을 해야하는 일의 端初(단초)가 된다는 말이다. 내게 가장 가까운 것이 그럼 무엇인가?... 바로 내가 내 자신을 살펴 나를 아는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을 살핀다는 것은 내가 나를 궁금히여겨 나를 疑心(의심)하고 客觀的(객관적)으로 남을 살피듯이 내 자신을 살핀다는 말이다. 祈禱(기도)를 하고 冥想(명상)을 하고 參禪(참선)을 하고 坐禪(좌선)을 하고 念佛(염불)을 하는 것의 根幹(근간)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3.損之又損(손지우손)이라 하여 그것을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이라 하였다. 덜고 덜고 할 그것이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라는 거짓나에 종질하는 그 마음이고 자아가 부리는 짐승 성질의 貪.嗔.痴三毒(탐.진.치삼독)의 貪慾心(탐욕심)이 그것인 것이다. 거짓나인 자아를 顚倒夢想(전도몽상)하여 참나로 알고 固執(고집)하는 썩어질 몸뚱아리의 我執(아집)을 破碎(파쇄)하여 나날이 瞬間(순간) 瞬間(순간) 버리고 또 버리라는 말이다. 붓다님은 이걸 두고 말씀 하시길 苦.集.滅.道(고.집.멸.도)라 하여 四聖諦(사성제)를 말씀 하셨다. 苦(고)는 괴론 몸의 苦通(고통)과 苦惱(고뇌)를 닦는 苦諦(고제)요 集(집)은 괴로움과 煩惱(번뇌)로움이 모인 마음을 닦는 集諦(집제)요 滅(멸)은 苦(고)와 執(집)을 죽여 없앰을 닦는 滅諦(멸제)요 道(도)는 苦.集.滅(고.집.멸)을 끝내고 佛性(불성)으로 見性成佛(견성성불)한 法身(법신)의 나인 니르바나님(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道諦(도제)인 것으로 괴론 몸과 괴롬이 모인 괴롬 덩어리의 마음을 말끔히 죽여 없애야 見性成佛(견성성불)하여 法身(법신)의 나로 거듭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 5절서 7절로 말씀 하시길 『眞實(진실)로 眞實(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聖靈(성령)으로 거듭나질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 수 없느니라 肉(육)으로 난 것은 肉(육=몸뚱이)이요 聖靈(성령)으로 난 것은 靈(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奇異(기이)히 여기지 말라 』하였다. 老子(노자)님. 붓다님. 예수님의 이 세 말씀이 서로 表現(표현)만 다르지 그 가르침의 속 알맹이는 하나같이 물질인 몸뚱이를 참나로 속아 살질 말고 하나님이 心靈(심령) 밭에 播種(파종)해주신 성령 씨앗의 영을 참나로 깨쳐 알고 거듭나는 精神人(정신인)인 얼사람이 되라는 말인 것이다. 4.以至於無爲(이지어무위)라 하여 함이 없음에 이른다 하였다. 여기서 無爲(무위=함이 없음)란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가 오로지 짐승 성질인 肉的(육적)이고 物質的(물질적)인 貪慾心(탐욕심)을 充足(충족)시키고 누리고자 하는 몸뚱이 살림에 써먹을 目的(목적)으로 배우고 익히고 習得(습득)해왔던 相對世上(상대세상)의 雜多(잡다)한 知識(지식)이나 앎이란 情報(정보)다발 나부랑이를 써먹질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앎이란 大槪(대개) 그 뿌리가 自我(자아)란 利己心에서 形成(형성) 되었기 때문에 獨善的(독선적)이고 排他的(배타적)이고 極端的(극단적)으로 利己的(이기적)이고 作爲的(작위적)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몸나와 마음 나인 거짓나인 自我(자아)에 뿌리를 두고 이루어진 頭腦(두뇌)의 앎으로 世界的(세계적)인 博士(박사)가 되고 碩學(석학)이 되었다고 해도 썩어질 物質的(물질적)인 面(면)에서는 어느 정도 人類社會(인류사회)에 功獻(공헌)을 끼칠진 몰라도 精神的(정신적)인 참의 人格(인격)을 兼備(겸비)한 人子(인자=하나님아들)가 되는데는 아무런 도움은 커녕 오히려 毒素的要素(독소적요소)가 된다는 말이다. 사람이란 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면 알 수록 知識(지식)의 情報(정보) 다발이 굵어지면 굵어질 수록 謙遜(겸손)해져야 할터인데 謙遜(겸손)은커녕 더욱 知能的(지능적)으로 姦巧(간교)하고 狡猾(교활)해지고 惡辣(악랄)해지고 殘惡(잔악)해지며 倨慢(거만)과 傲慢(오만)과 驕慢(교만)의 드센 헛바람이 터질듯이 잔뜩 부풀어져 모가지 힘줄이 뻣뻣해진채 내노라며 거들먹거리며 사는 맛에 스스로 醉(취)해 내가 세상에 최고라는 自家撞着(자가당착)의 矛盾(모순)에 빠진 것도 모르고 저 잘난듯 한껏 뻐기며 사는 것이 보통인 것이다. 알고 보면 그 앎이란게 마치 아이가 불어 내는 대롱 끝 비누방울이 虛空(허공)을 맴돌다가 금새 痕迹(흔적)도 없이 꺼져버리는 것보다도 더 虛妄(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다들 몰라서 그런 것일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얼사람의 자리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이걸 佛經(불경) 般若心經(반야심경)에선 色不異空(색불이공) 空不異色(공불이색) 色卽是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 色受想行識亦復如是(색수상행식역부여시)라 하여 색과 모양이 있는 물질이 색도 모양도 없는 텅빈 빔인 虛空(허공)과 다르질 않고 색도 모양도 없는 빔이 색과 모양이 있는 宇宙萬有物質(우주만유물질)과 다르질 않다. 꼴이 있는 것이 곧 이 빔의 虛空(허공)이고 텅빈 빔의 虛空(허공)이 곧 꼴이 있고 색이 있는 이 物質(물질)이다. 물질.느낌.생각.행함.앎 역시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5.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라 하여 함이 없다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1에서 4까지가 이루어지면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가 되어 어떤 일에도 걸림이 없이 大自由(대자유) 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自我(자아) 생각으로 損害得失(손해득실)을 따지는 利己的(이기적)인 잣대의 눈금에 따라 人爲的(인위적)으로 하는 함이 없이 하나님이 주신 성령 씨앗의 맘인 良心(양심)에 한점 부끄럼 없이 하면 무슨 일이던 못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와 똑 같은 脈絡(맥락)의 말씀을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절서 4절로 말씀 하시길 『너는 救濟(구제) 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 함이 隱密(은밀)하게 하라 隱密(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였고 또 마태복음 5장 44절서 45절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怨讐(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逼迫(핍박) 하는 자를 위하여 祈禱(기도)하라 이 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惡人(악인)과 善人(선인)에게 똑같이 비취게 하시며 비를 義(의)로운 자와 不義(불의)한 자에게도 똑같이 내리우심이니라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適示(적시)가 되어 있다. 孔子(공자)님도 이 것을 두고 말씀 하시길 從心所欲而不踰矩(종심소욕이불유구)라 하여 마음이 하고자 하는데로 다 좇아해도 법도를 넘는 일이 없게 되었다 하였다. 여기서 矩(구)는 良心(양심)의 法度(법도)를 말하는 것이지 세상이 만든 規制(규제)나 制度的(제도적)으로 明文化(명문화) 된 六法全書(육법전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法(법)은 規制(규제)와 處罰(처벌)에 目的(목적)을 둔 하찔의 법이고 良心法(양심법)은 하나님이 주신 自律的(자율적)인 법으로 최상의 법인 것이다. 붓다님은 말씀 하시길 諸行無常(제행무상) 是生滅法(시생멸법) 生滅滅己(생멸멸기) 寂滅爲樂(적멸위락)이라 하여 사람이 하는 모든 행함이 무슨 짓거리든 변하질 않는 것이 없고 늘함이 없다. 이것은 다 나고 죽는 니르바나님(하나님)의 絶對不變9절대불변)의 攝理運行秩序(섭리운행질서)의 法(법)이다. 나고 죽는 物質(물질)인 이 몸뚱이와 몸뚱이에 종질하는 마음인 自我(자아)를 죽이고 죽여 自我(자아)가 말끔히 남김 없이 다 죽어 없어진 니르바나(하나님나라)에 들어 즐거워 하리라 하였다. 이 말씀의 核心(핵심)은 自我(자아)를 버리라는 말이다. 自我(자아)란 것이 한마디로 利己的貪慾心(이기적탐욕심)으로 똘똘 뭉쳐진 貪慾(탐욕)의 덩어리이니 이것을 던져버리라는 말이다. 欲(욕=바람이나 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 곧 損(손=덜어 없앰)을 하는 것으로 자꾸 덜어내서 버린다는 말이다. 佛敎式(불교식)으로 말하면 頓悟(돈오=문듣 깨침))를 얻고자 漸修(점수=점점 닦아나감)를 한다는 말이다. 6.故取天下(고취천하)라 하여 그러므로 천하세상을 취하여 부리고 다스릴려면 이라 하였다. 7.常以無事(상이무사)라 하여 일 없음으로써 늘 항상함일 수가 있다 하였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세상 살아가는 딱 한번의 인생 살이에서 마음에서 바라고 願(원)하는데로 좇아 무슨 일을 하든지 良心(양심)에 한점 부끄럼 없이 떳떳하게 다하며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바로 무슨 일에서든 自我(자아)의 利己的(이기적)인 慾心(욕심)이 말끔히 죽어 없어진 빈마음인 참나인 얼나로 臨(임)하면 한결같이 변함 없는 늘을 이룰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된 마음에서 오른 손이 한 것을 왼 손이 모르게 된다는 것이고 원수 까지도 사랑 할 수가 있고 나를 謀陷(모함)하고 헐뜯고 逼迫(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그가 잘 되기를 祈禱(기도)해 줄 수가 있다는 말인 것이다. 8 ㅡ 9.及其有事(급기유사) 不足以取天下(부족이취천하)라 하여 그섯이 일 있음에 이르르면 세상을 부리기에는 모자란다 하였다. 여기서 取(취)는 이긴다. 다스린다는 뜻이다. 及其有事(급기유사)를 달리 말하면 세상을 사랑하면 이라는 말이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은 세상의 물질적인 삶에 빠져서 사는 俗物(속물)이라는 말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병에 重病(중병)이 든것을 좋다하고 미쳐사는 속물들이라 하나님이 주신 神格(신격)의 良心法(양심법)은 아예 痲痺(마비)가 되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질 않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이란 곳이 暫時(잠시) 지나갈 逍風(소풍)나온 것인 줄을 모르고 여기 이 세상이 마치 最終目的地(최종목적지)인양 알고 이 세상이란 것에 安住(안주)하고 살아 가는 것이 一般(일반)이다. 이 세상에서 몸뚱이로 재미가 나고 흥겹게 사는 걸로 滿足(만족)하여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찾을 이유도 겨를도 없다. 物質(물질)로 된 몸이 物質的欲望充足(물질적욕망충족)에 滿足(만족)하여 사는 것은 짐승 성질을 그데로 고스란히 가진 짐승 사람의 본능적인 俗性(속성)인 것이다. 이것 때문에 이들은 精神世界(정신세계)인 靈界(영계)의 숨겨진 永生不滅(영생불멸)의 영원한 생명인 영계의 靈命(영명)을 놓치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예수님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 이 세상은 통채로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이요 번개와 같이 잠시 스쳐 지나갈 虛相(허상)의 것임을 알고 세상을 버리고 등진채 자신의 속으로 속으로 자신의 정신 내면을 생각의 곡괭이로 캐고 또 캐들어가 끝내는 하나님이 사람의 심령 밭에 播種(파종)해 넣어 숨겨두신 하나님 성령의 絶對(절대) 씨 核(핵)인 생명근원의 靈命(영명)의 빛을 체험 하시고 自覺證得(자각증득) 하신 분들이 바로 석가 붓다님이시고 예수님인 것이다. 이분들이 참으로 人子(인자)로 사람인 것이고 聖人(성인)인 것이고 하나님의 참 아들인 것이다. 붓다님이나 예수님이 한결같이 말씀하신 가르침의 속 고갱이가 바로 물질적인 몸뚱이가 우리의 참 생명도 아니고 참나가 아니라는 말이고 하나님 성령 씨앗이 박힌 우리의 정신인 靈我(영아)인 얼의 나가 사람의 참나요 참 생명이라는 것이다. 또한 物質界(물질계)인 이 세상도 참이 아니고 다 잠시 스쳐 지나갈 화면의 映像(영상)같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해서 거짓의 나인 몸나와 마음 나의 自我(자아)를 克己(극기)하여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이 세상을 뛰쳐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몸뚱이도 이 세상이란 곳도 하나같이 貪.嗔.痴(탐.진.치) 三毒(삼독)인 貪慾心(탐욕심)의 猛烈(맹렬)한 불기로 불타고 있는 불난 집이란 것이 아닌가. 이게 다 참나를 찾으라는 말이고 영원한 생명줄을 찾아야 한다는 말인 것인데 이걸 못알아 듣고 믿음을 빌미로 썩어 문드러질 이 몸뚱이가 살동안 무슨 국물이라도 얻어먹겠다는 쪼의 믿음나부랑이들이니 이거야 참으로 웃기고 寒心(한심)한 일들이 아닌가 말이다. 내 몸 생명까지라도 다 불쏘시게로 태워서라도 내가 꼭 하나님 뜻 받들며 살겠다는 게 아니고 입만 벌리면 기도랍시고 한다는 게 뭘 달라는 건지 重言附言(중언부언)으로 울며 불며 달라는 것이 그리도 많은 건지 참으로 우습질 않은가 숨 잘 쉬고 밥 잘 먹고 똥 오줌 쑥쑥 잘 누면 몽땅 감사 充滿(충만)한 것이지 주긴 뭘 자꾸 더 주라는 것인가 말이다. 이런 이들은 입으로 마지막 숨을 몰아 쉴 힘도 버거운 지경을 맞으면 그때서야 참 기도가 무엇인질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몸 살림에 有益(유익)을 바라서 믿는 것이 아니고 거짓의 나인 몸나에 속아 사는 迷惑(미혹)을 벗어버리고 깨어나 참나인 영아의 얼나로 거듭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 합한 몸 삶을 살다가 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영생 하자는 것임을 아는 것이 참 믿음에 드는 바른 견해임을 老子(노자)님은 及其有事不足以取天下(급기유사부족이취천하)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들 자기가 넉넉히 받아나온 생명에 감사 하기는 커녕 마냥 달라고만 생떼를 부리며 기도랍시고 중언부언 하는데 나에게 禍(화)와 災殃(재앙)을 주시고 온갖 苦惱(고뇌)의 불꽃을 온몸과 마음으로 핥게 해달라고 한 헤르만 헷세의 시를 옮겨 본다. 【 하나님이시여! 내가 絶望(절망)케 해 주소서 당신에게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스스로 절망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모든 迷惑(미혹)으로 인한 슬픔의 열매를 맛보게 하시고 온갖 고뇌의 불꽃을 온 몸과 마음으로 핥게 하소서 갖은 侮辱感(모욕감)을 겪게 하여 주시옵고 내가 발전하고 성공 하는 것도 돕지 마소서 그러나 나의 自我(자아=ego)가 송두리채 부서지거든 그 때에 내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당신이 고뇌의 불꽃을 낳아 주셨다는 것을... 기꺼이 멸망하고 기꺼이 죽으려고 하나 그렇게 할 수 없음은 나는 오직 하나님 당신의 품 속에서만 죽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고집하는 이 몸 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가 뿌리채 散散(산산)히 부서지기를 懇切(간절)히 바라는 克己(극기)를 이룰 수만 있다면 어떤 苦惱(고뇌)의 불꽃으로라도 온몸이 핥아지더라도 다 받아들이겠다는 절절한 마음을 하나님께 바라는 기도의 詩(시)라 할 것이다. 이 것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참 믿음의 바른 기도가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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