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요한복음 14장 6절서 12절 말씀 稽考(계고) 본문
요한복음 14장 6절서 12절 말씀 稽考(계고) 蘧然覺
2015. 5. 19. 10:48
『6절:예수께서 말씀 하시길 내가 곧 길이요 眞理(진리)요 生命(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절: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절: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절:예수께서 말씀 하시길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절: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니라
11절: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2절: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6절 말씀에서 12절 말씀까지가 무슨 말인가하면
예수님 자신을 밝히신 말씀이면서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밝히신 말씀이며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드러내신 말이기도 하며 우리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譬喩(비유)로 밝히신 말씀이며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로 이어져 하나님 아들이 되어 영생 생명을 얻어 하나님 아버지 나라에 들어가는 救援(구원)의 方策(방책)을 밝히신 말씀이다.
6절 말씀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 어떤 존재의 사람인지를 밝힌 말씀이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正道(정도)를 摘示(적시)하신 말씀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6절 前半部(전반부)의 말씀이 예수님 자신의 正體性(정체성)을 밝히신 말씀인데
예수님의 이 말씀의 참뜻을 바로 알질 못했기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이라며
예수님을 믿어야 하늘나라에 드는 유일한 길이라는 예수님 말씀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駭怪(해괴)한 論理(논리)로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變質(변질)시키고 歪曲(왜곡)시켜버린 것이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바울의 敎儀敎理信仰(교의교리신앙)에 갇히는 病痛(병통)에 빠진 것이 昨今(작금)의 그리스도교의 현실인 것이다.
6절에서 예수님이 말한 <내가> 를 몸뚱이 예수를 말하는 것으로 알아 들었기때문에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못알아 듣게 된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한 <내가>라고 하신 예수의 <내가>는 바로
마태복음 8장 20절 말씀에 나오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을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人子<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씀에서의 人子(인자)를 말하는 것이다.
人子(인자)는 사람인자에 아들자자니까 사람의 아들이란 말이다.
우리도 다 사람의 아들이니 人子(인자)가 아닌가싶지만
예수님 말씀의 뜻은 그게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아들인 하늘천자 아들자자를 써서 天子(천자=하나님 아들)라 하질 않고 인자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질 아니하면 겉模樣(모양)은 사람이라도 사람의 껍질인 인두껍을 뒤집어쓴 짐승수(獸)자에 새끼자(子)자로 된 獸子(수자)로 짐승새끼라는 말이고
하나님 성령을 참나로 깨쳐 알고 거듭난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참으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人子(인자)라고 말씀을 하신 것임을 알아야함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指稱(지칭)한 人子(인자)란 말은
몸사람으로써의 예수는 목수 요셉과 마리아란 몸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獸子(수자)로써 짐승 성질을 본능적으로 가진 짐승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고보니 본디부터 자신의 心靈(심령)밭에 播種(파종)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의 씨가 있는 참나의 靈我(영아=얼나)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된 것이고
참나인 영아를 찾고나니 그동안 참나로 알고 살았던 몸나와 마음 나의 自我(자아=ego)가 거짓의 나임을 알게되고
그 거짓의 나가 바로 짐승 성질의 利己的(이기적)이고 貪慾的(탐욕적)이고 排他的(배타적)이고 攻擊的(공격적)이며 狂的(광적)으로 自己中心的(자기중심적)인 執着(집착)과 慾望(욕망)에 종질하고 사는 짐승 새끼인 獸子(수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 것이다.
닭의 알이 깨트려지고 병아리가 부화되어 나오듯이
거짓의 나인 자아의 껍질을 破碎(파쇄)하여 몸사람에서 영적인 사람인 하나님의 성령으로 새롭게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났다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人子(인자)라는 말씀의 참뜻을 바로 알질 못하면 성경 말씀이 통채로 소귀에 經(경) 읽기가 되고마는 것이다.
예수님은 聖靈(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하고 몸뚱이 나와 마음나를 참나로 알고 사는 사람들을 짐승새끼라고 말한 것만이 아니고 아예 죽은 자들이라고까지 말씀을 하신 것이 마태복음 8장 22절에 있기를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葬事(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던 한 청년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다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을때 예수님이 그 청년에게 하신 말씀이다.
뒤에 나오는 죽은 자들은 바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남이 없는 몸사람으로써의 自我(자아)가 시퍼런 칼날처럼 참나로 살아있는 사람으로써 하나님 성령 씨의 참나될 씨가 자신의 心靈(심령) 밭에 하나님께서 播種(파종)시켜주셔서 자신 속에 있음을 모르고 오로지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고 感覺(감각)되어지고 느낌과 생각이 있는 자신의 몸뚱이 形像(형상)만이 자기라며 인식하고 살아가는 자를 몸뚱이는 비록 살아 있지만 예수님은 영이 죽은 자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고
앞에 나오는 죽은 자는 몸뚱이 생명까지 죽은 자를 말씀을 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잘났다며 한껏 뻐기며 기고만장으로 거들먹거리지만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이들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했다면
이게 다 죽은 송장들이 꿈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죽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葬禮(장례)를 치르질 말라는 것이 아니고
부모님 장례 치르는 일보다 더 먼저 해야 할 것이 내가 짐승새끼에서 人子(인자)가 되는 길인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나고 새로 나는 聖靈回復(성령회복)의 復活(부활)이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로 말씀을 하신 것임을 알아 들을 줄을 알아야 함이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생각하면
이게 듣는 귀가 있는 귀 있는 자에 속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 20절의 人子(인자)와 22절 말씀의 죽은 자들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와같이 알아 듣질 못한다면
아무리 교회 성전문턱이 닳아빠지도록 들락거리고 성경 66권을 달달 외운다 해도 헛다니고 헛보는 것이 되는 것은 다들 저들 我執(아집)과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의 自我(자아)인 거짓나의 慾心(욕심)에 종질하는 비뚤어진 믿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自我(자아)의 내가 없어지고 온전히 죽어져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내가 되고 人子(인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 뜻을 모르고서야 어찌 아버지께 가는 길에 바로 들어섰다고 할 것인가
바울의 교의신앙에서 만들어진 聖父(성부).聖子(성자).聖靈(성령)의 三位一體說(삼위일체설)의 하나님도 어떻게 생각하면 말의 遊戱(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하나님은 無限宇宙萬有(무한우주만유)를 攝理運行菅掌(섭리운행관장) 하시는 絶對存在(절대존재)로 靈(영)이신 神(신)이지 相對存在(상대존재)인 個體(개체)의 人格神(인격신)으로 끌어내린 것이 곧 성부.성자.성령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괴이한 삼위로 쪼개놓은 하나님이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절대는 하나라야지 쪼개져서 둘이 되거나 셋이 된다면 이것은 상대로 변질이 된거짓이지 절대가 아닌 것이다.
굳이 말한다면 삼위일체의 존재는 바로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 그렇다 할 것이다.
한 사람을 셋으로 달리 말하면 身我(신아=몸나).心我(심아=마음나나 혼의나) .靈我(영아=정신의 나)
이렇게 삼위로 일체가 된 것이 사람이다.
身我(몸뚱이나)와 心我(마음의나)가 곧 自我(자아=ego)로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고 고집하는 自我(자아)인 것인데 예수님은 이 自我(자아)를 참나라고 생각하고 자아에 종질하고 사는 사람을 사람이 아닌 獸子(수자)라 하여 짐승의 새끼라 하신 것일뿐만 아니라 아예 죽은 자들이라고 까지 말씀을 하신 것을 알아야 함이다.
자아말고 사람의 心靈(심령) 밭에 하나님의 성령 씨앗이 근원적으로 播種(파종)되어있는 靈我(영아)가 있는데
그 영아가 참나이고 하나님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걸 깨쳐 알고 새로 거듭난 사람을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고 몸나와 마음 나인 자아의 나는 이 영아를 담고있는 그릇이나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 겉 껍데기나 벗어버릴 허물같은 것이라는 게 예수님의 말씀이신 것이다.
예수님 자기만 하나님의 아들인게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 참나를 찾은자는 예수님 자기처럼 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이 것을 못알아 듣고 예수님만 하나님의 성령으로 孕胎(잉태)하여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하나님이 肉身化(육신화)된 하나님의 독생자이고 또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신앙이 아닌가.
사실상 絶對存在(절대존재)는 본디 이름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로지 絶對唯一(절대유일)의 하나밖에 없으니까 무슨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을 것인가
相對存在(상대존재)인 인간들이야 낱둥의 同一形像(동일형상)의 個體(개체)가 지금 지구촌엔 70억명이나 넘게 있으니까 저마다 다들 이름이란 名牌(명패)와 號稱(호칭)이 있어야 하는게 당연하지만 말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자 그것이 바로 절대유일한 하나님이 아니신가
하나님이라 해도 좋고 한님이라 해도 좋고 한울님이라 해도 좋고 니르바나라 해도 좋고 상제라 해도 좋고 그저 神(신=god) 이라해도 좋다.
참고로 하나님에대한 호칭을 살펴볼작시면
①라틴어로 deus(데우스)가 신을 지칭하던 용어인데
이게 영어로 영역된 것이 곧 god(갇)이다.
②아람어로elwi(엘뤼)가 하나님이란 말인데
el(엘)은 신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의 단어이고 wi(위)는 나의라는 소유격 접미사로써 elwi가 나의 신이시여 또는 나의 하나님이란 말이다.
이말은 마태복음 27장 46절에서 나오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예수님이 마지막 말씀을 하셨다는 그 엘리이다.
③yaheweh(여호와 또는 야훼)는 히브리어로 유대민족들이 구약시대때 유대인의 민족신으로 부르던 하나님의 명칭이었다.
④adonai(아도나이=주인 되신 하나님)
⑤elohim(엘로힘=하나님)
⑥elshaddai(엘샤다이=하나님)
⑦yaheweh jireh(여호와 이레=예비의 하나님)
⑧ " rapha(여호와 라파=치료의 하나님)
⑨ " nissi(여호와 니시=승리의 하나님)
⑩ " shalom( 여호와 샬롬=평강의 하나님)
⑪ " sabaoth(여호와 샤바오트=만군의 하나님)
⑫ " roi(여호와 로이=부자 되신 하나님)
⑬ " sidkeru(여호와 싣케루=공의의 하나님)
⑭ " shammah(여호와 삼마=함께하는 하나님)
⑮el elyon(엘 엘리온=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16) el kanna(엘 칸나=질투의 하나님)
(17) el mekoddishkem(엘 메카도쉬캠=거룩하신 하나님)
이것 말고도
이슬람교를 創始(창시)한 마호멧(무함마드)은 하나님을 이슬람어로 알라라 했고
東洋圈(동양권)에선 하나님을 칭하기를
붓다가 하나님을 산스크리트어(梵語=범어)로 nirvana(니르바나)라고 했는데
이게 중국에 들어와 소리나는데로 漢譯(한역) 한 것이 涅槃那(열반나)이고
뜻으로 意譯(의역)한 것이 滅度(멸도). 寂滅(적멸). 圓寂(원적).無爲(무위). 無生(무생) 뭐 이런 것들이다.
붓다 死後(사후) 붓다가 가르쳐준 니르바나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질 않고
붓다를 니르바나의 자리에 올려 놓은 것은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님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은 것과 하나도 다른게 없기로는 매일반이다.
불교도 오늘날처럼 병든 불교 절름발이 불교가 된 것이나 그리스도교에 예수님의 온전한 가르침이 없고 바울의 교의교리 신앙에 陷沒變質(함몰변질)되어 다시 祭祀宗敎(제사종교). 儀式宗敎(의식종교).代贖宗敎(대속종교)로 떨어진 것도 다 이런 類(류)에서 그 痼疾病痛(고질병통)의 원인이 있는 것임이 아니겠는가
老子(노자)님과 莊子(장자)님은 하나님을 道(도)다 眞帝(진제)다 하였고
孔子(공자)님과 孟子(맹자)님은 그냥 天(천)이다 天帝(천제)다 하였고
우리 檀君聖祖(단군성조)께서는 桓因(환인=천상을 지배하는 하나님)이라 했고
天道敎(천도교)에선 三神上帝(삼신상제)라고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어쩌면 지구촌의 사람 숫자만큼이나 다양 할지도 모를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라 부르질 않고 그저 아버지라고만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더 적절한 최고의 호칭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겉 껍데기요 거짓의 나인 몸의 아비나 어미는 물질로 된 거짓의 몸뚱이의 어버이고
참나되는 하나님 성령 씨를 심령 밭에 심어주신 靈父(영부=영의 아버지)가 참 아버지라는 말씀이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참뜻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12장 48절서 50절 말씀에 예수님의 이런 靈性信仰(영성신앙)에서 말씀하신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 아버지와 몸의 부모인 땅의 어버이에대한 생각이 확실하게 천명하여 드러내고 있는 것이 이 말씀인 것이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데로 행하는 자가 내 兄弟(형제)요 姉妹(자매)요 母親(모친)이니라 』하셨다.
예수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서 곧 열릴 자신의 宗敎裁判(종교재판)을 앞둔 싯점에서 예수에게 逮捕(체포)명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님이 세베대의 집 문앞에서 고별설교를 하고있는 장소로 찾아왔을때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는 베드로의 귓속말을 전해 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조차 이 말씀의 참뜻을 전혀 엉뚱하게 알아듣고
예수님만 하나님의 聖靈(성령)으로 마리아의 腹中子宮(복중자궁)에 孕胎(잉태)되어 태어난 하나님의 獨生子(독생자)이고 예수가 곧 하나님이고 예수를 믿어야 아버지께 가고 救援(구원)받아 天國(천국)간다며 예술 믿으면 천국 안믿으면 地獄(지옥)을 간다는 恐喝脅迫(공갈협박)쪼의 막말 懸垂幕(현수막)이 저잣거리 입구나 대로변의 商街周邊(상가주변)이나 電鐵驛入口(전철역입구)의 거리에 펄럭이고 나팔을 불어대는 소리로 騷音公害水準(소음공해수준)의 擴聲機(확성기) 나팔이 시끄럽기만 한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이란 二分法的(이분법적) 宣敎(선교)와 傳道(전도)의 樣態(양태)라 할 것이다.
天國(천국=하늘나라)에 간다 했으면 天獄(천옥=하늘 감옥)에 간다해야 맞을 것 같은데 地獄(지옥)엘 간다는 것이다.
그 잘난 몸뚱이가 살고있는 여기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 성령은 모르겠고 그저 저 몸뚱이 탐욕심에만 똥벌레처럼 빌붙어내 몸뚱이 남의 몸뚱이 파먹는 맛과 멋의재미로만 살아가는 한마리 짐승의 새끼로 살아 가느냐에 따라서 바로 천국도 될 수 있고 지옥도 될 수 있는 곳이 여기 이 땅이란 세상인데 무슨 또 지옥을간다는 것인지 말이다.
오로지 자신의 心靈(심령) 밭에 하나님이 播種(파종) 하여주신 하나님 아들이 될 하나님 聖靈(성령) 씨를 참나로 움틔우고 싹을 틔워내어 하나님의 사랑을 꽃피워내는 성령의 거듭남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靈性信仰(영성신앙)의 核心(핵심)을 말씀하신 것이 마태복음 14장 6절의 예수님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데로만 하면 예수님만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다 예수님 자신과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참나로 이제껏 몸뚱이 나인 몸살이만이 참나의 삶인 것으로 알고 무섭게 執着(집착)했던 짐승성질의 거짓나를 훌훌 벗어버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못알아듣는 것인지
아니면 몸맛이 꿀맛이라 그 미련의 끈을 차마 못놓는 것인지
그래서 알면서도 몸욕심으로 뭔가 더 축복받고 자꾸 더 받고싶어서 달라는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 아닌가
몸뚱이마저 몽땅 버리고 죽이고 벗어버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궁극적인 가르치심이신 것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에서의 나도 예수 자신을 믿어야만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면 누구나 다 자신의 심령 밭에 파종되어 있는 하나님의 성령 씨로 거듭나 참나를 찾은 영아의 나인 얼의 나를 말하는 것이고
자신이 찾은 참나가 곧 貪.瞋.癡(탐.진.치) 三毒(삼독)의 極端的利己心(극단적이기심)만으로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執着(집착)하며 짐승 사람의 貪慾心(탐욕심) 덩어리인 거짓나를 벗어버리고 人子(인자)인 하나님 아들이 되는 唯一不二(유일불이)한 길이라는 것이고
그 길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따르고 섬기며 하나님 뜻을 행함으로 살아가는 진리의 삶이란 말이고
이렇게 사는 진리의 삶이 다시는 남도 죽음도 없는 영원한 생명인 永生生命(영생생명)에 이르러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는 말인 것이지
十字架(십자가)에 못박혀
내 罪(죄)를 代贖(대속) 하시기위해서 나 대신 죽으셨다는
예수를 믿어야 하나님 나라에 救援(구원)받아 들어간다는 바울의 교리에 의해서 말하는 祭祀宗敎儀式(제사종교의식)에서 나온 贖罪代贖救援說(속죄대속구원설)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에 든다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確然(확연)히 알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한 길. 진리. 생명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삶의 價値(가치)와 目的(목적)과 삶의 理由(이유)를 말씀하신 것이고
이것을 하고 안하고는 다 사람 各人(각인)의 自由意志選擇(자유의지선택)에 하나님이 맡기신 것임을 예수님이 일깨워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을 比喩(비유)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성령이 茫茫大海(망망대해)와 같은 바다라고 했을때
하나님의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靈我(영아)인 얼나의 나는 하늘에서 떨어져 바닷물에 하나로 합쳐지는 빗물 방울 한 방울의 물방울 한 방울과 같다 할 것이다.
하늘 높은 곳에서 한 방울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여 바닷물 해면에 닿기 직전까지가 個體(개체)로써의 한 방울의 물방울 이었지만 바다 표면에 닿는 瞬間(순간) 그 물방울은 바닷물과 하나로 融合(융합)되어 一通(일통)이 되고 바로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
본디 이 물방울은 宇宙虛空(우주허공)의 하늘 어딘가에서 생겼던 것이 아니고 바다에서 蒸發(증발)된 水蒸氣(수증기)가 水素(수소)와 酸素(산소)로 分化(분화)되어 無限宇宙虛空(무한우주허공)에 한점 티같이 펼쳐진 有限宇宙(유한우주)의 허공 大氣圈(대기권)에서 分布(분포)되어 있던 것이 대기류의 운동에의해 化學反應作用(화학반응작용)으로 산소분자 둘과 수소분자 하나의 結合(결합)으로 물이 생성되어 다시 자신의 本鄕(본향)이었던 지구의 바다로 重力作用(중력작용)에의해 還元(환원)된 것인 것이다.
7절 말씀의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하였다 』에서의
나를 알았더면의 나도 몸뚱이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靈我(영아)인 예수님의 얼나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예수의 얼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안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는 聖靈(성령)으로 靈的存在(영적존재)이시고 예수가 거듭났다는 얼나의 영은 바로 하나님이 예수의 심령 밭에 播種(파종)해주신 하나님 아버지 성령의 씨이기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 말은 내 속에 심기워있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 참나로 하나님의 영적 아들로 성령의 아들로 새로 나야만 하나님 아버지를 안다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이면 다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다 그렇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보았다는 말은
성령으로 거듭난 이후에야 참으로 하나님이 내 영의 아버지임을 깨달아 알게되고 또 영안으로 아버지와 내가 하나임을 目睹(목도=눈으로 봄)한다는 말인 것이다.
金剛經(금강경)에 붓다님의 말씀에도 이와 똑같은 脈絡(맥락)의 말씀이 있기를
基有見我色(기유견아색) 若以音聲聽(약이음성청) 斯爲愚邪見(사위우사견)
此人不見佛(차인불견불)이라 하여
누구든지 만일 나의 몸뚱이를 보고 붓다를 보았다고 한다든지 나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붓다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썪고 없어질 내 몸뚱이 육신을 붓다로 잘못 알아보는 것이고 죽으면 멸하여 끊어질 내 음성을 붓다의 음성으로 잘못아는 어리석고 마구니같은 짓이니라 이런 사람은 죽기까지 붓다를 볼 수가 없다 하였다.
여기서의 佛(불)은 산스크리트어의 buddha(붓다)를 한자로 音譯(음역)을 한 것인데 붓다의 뜻은 깨닫다 . 깨달음또는깨달은 이가 그 뜻이다
붓다님이 말한 見性成佛(견성성불)에서의 佛性(불성)이란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과 같은 말인 것이다.
성령을 舊約(구약)에선 고대 그리스어로 ruah(루아흐)로 나오고 新約(신약)에서는 pneuma(프뉴마=영어로는 holy spirit)로 나오는데
붓다님의 견성성불이란 말이 예수님의 성령 거듭남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의 말씀인 것이다.
붓다님 말씀의 참뜻을 바로 새겨 들어야 하는데 그렇질 못한 것도 오늘날 예수님 말씀을 못알아 드드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
살아 숨쉬는 붓다의 肉身(육신)
그것은 고타마 싯달타의 육신으로 붓다를 담고있는 겉 껍질인 몸뚱이 그릇인 것이지
오줌 누고 똥 누고 밥먹고 잠자고 쉬 아프고하는 그 몸뚱이가 붓다 자신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붓다 자신인 것에 우리는 정신이 화들짝 깨야 할 것이다.
8절 말씀의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에서
빌립은 예수님이 6절서 7절로 하신 영적 말씀을 전혀 못알아듣고
아버지를 보여주면 하나님 아버지를 믿겠다고 한 것이다.
빌립이 보겠다고 한 것은 빌립 자신의 몸뚱이 눈인 자기 肉眼(육안)으로 봐야 믿겠다고 몸뚱이에붙은 소리를 하고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영이시라 썩고 없어질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상대성존재가 아니고 절대존재임을 모르고 눈으로 보겠다고 하는 形而下(형이하)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달라진게 없다.
하나님을 만났다느니 예수님을 보았다느니하며 거꾸로 쳐박힌 꿈꿍이 헛소리들을 하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내 심령 속에 심어진 하나님 성령의 씨영으로 거듭남으로서만이 영으로 하나가 될때 그 영으로 깨달아 알게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못알아듣고 몸뚱이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관원이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왔을때 니고데모가 말하길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으며 두번째 다시 어머니 모태로 들어갔다가 날 수 있느냐고 했었던 것처럼 빌립의 말이나 니고데모의 말이나 둘다 똑같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영적 말씀을 전혀 못알아듣고 몸뚱이 사람으로써의 엉뚱한 말만 하고있는 것으로는 한치도 틀림이 없이 똑같은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한 몸뚱이를 절대적인 참나로 알고 사는 몸뚱이 사람들은 빌립과 니고데모같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하겠다.
그래서 예수님은 틈날때마다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던 것이다.
肉眼(육안=몸눈)과 肉耳(육이=몸귀)가 아니고
靈眼(영안)이 떠지고 靈耳(영이=영적귀)가 뚫려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몸눈과 몸귀로 보고 듣는 것을 마음으로 生覺(생각)하고 判斷(판단)하는 것만을 참으로 알고 認識(인식)하는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가 온전히 죽어지고 영으로 거듭난 성령의 참나를 證得(증득)해야 영안이 떠지고 영적 귀가 열려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있다는 말인 것이다.
요한복음 3장 6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있기를
『肉(육=몸)으로 난 것은 肉(육)이요 聖靈(성령=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난 것은 靈(영)이니』 하였고
요한복음 3장 63절에선
『살리는 것은 靈(영)이니 肉(육)은 無益(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靈(영=하나님의 성령 씨영)이요 生命(생명=영생생명)이라 』하였다.
요한복음의 이 말씀이 바로 몸뚱이 肉身(육신)인 어버이 肉身(육신)의 精(정)과 血(혈)로 난 내 몸뚱이 육신은 본디 없었던 것이 생겨났다가 몸 생명의 생명 불이 다 타고나면 생명 불이 꺼지고 불타서 한 줌의 재와 各種元素(각종원소)로 還元(환원)되어 無限宇宙虛空(무한우주허공)의 본디 저들 자리로 흩어져버릴 것으로써 참생명도 아니고 참나도 아니라는 말이고
하나님 성령의 씨를 참나로 거듭난 영은 영생하는 하나님의 근원생명의 씨영이니 나고 죽음이 없는 참생명으로 영생 할 참생명이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몸나를 거짓의 나로 否定(부정)하고 自我(자아)가 완전히 죽어 더 이상 肉身所慾(육신소욕)의 삶을 살질않는 無我(무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데
사람들은 이걸 못알아 듣고 빌립과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같은 엉뚱한 몸뚱이 생각과 몸뚱이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예수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기로는 똑같다 할 것이다.
물과 聖靈(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에서의 물로 거듭난다는 말은 무엇인가?
물은 모든 生命體(생명체)의 根元生命(근원생명)으로 근원생명의 本質的(본질적) 要素(요소)인 것이다.
요한복음 4장 14절 말씀에서 물에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기를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며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였다.
야곱의 우물에 물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이 목이 말라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을때 사마리아 여인은 그당시 유대인들로부터 사람 취급도 못받고 賤視(천시)받던 사마리아 사람인 자기에게 어찌 물을 달라고 하는냐고 했을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이라고 한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내가의 내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시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참나를 깨달으신 예수의 靈我(영아)인 얼의 예수를 말함이고
주는 물에서의 물은 바로 하나님의 진리 말씀인 聖靈(성령)의 生水(생수)요
영생생명을 상징하는 말인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길러 오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며 역시 몸뚱이 욕심에서 나오는 形而下(형이하)의 물을 예수에게 달라고 한 것이고
예수님은
形而上(형이상)의 永生生命(영생생명)의 生水(생수)인 하나님의 眞理(진리) 말씀을 하신 것이라
서로의 대화가 根本的(근본적)으로 될 수가 없는 것을 이 말씀에서 볼 수가 있는 것은
빌립이나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이나 똑같이 形而下(형이하)인 몸뚱이에붙은 肉身所慾(육신소욕)의 소리만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할 것이다.
9절 말씀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전혀 알아듣질 못하는 빌립이 안타까워서 하시는 말씀이다.
마음이 사람에게 있지만 그 마음을 몸뚱이의 눈으로 볼 수가 없고 그가 하는 말을 듣는 것으로 그 마음의 大綱(대강)을 알 수 있는 것이듯
몸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을 자기 몸눈으로 보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빌립의 말로 빌립에게 한 예수님의 말씀은 소귀에 經(경)을 읽어준 牛耳讀經(우이독경)의 情況(정황)과 같은 결과가 되고만 것이다.
이건 오늘을 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 水準(수준)도 거의 빌립의 程度(정도)를 넘질 못하고 있는 것은 별반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
하나님은 보자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라면 그것은 상대성 존재이지 하나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의 몸는으로 볼 수 있는 생명존재 중에 가장 靈妙(영묘)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람이지 사람을 凌駕(능가)하는 존재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萬物之靈長(만물지영장)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상대성 존재로서는 사람이 최고 꼭대기에 있다는 말인 것이다.
사람의 屬性(속성)이 六根(육근)이요 六門(육문)이요 六入(육입)이요 六處(육처)인 眼(안).耳(이).鼻(비).舌(설).身(신).意(의)의 感覺機官(감각기관)으로 認知(인지)된 感覺情報(감각정보)와 感情(감정)을 믿고자 하는 몸뚱이 중심의 意識(의식)인 알음알이에만 참이라고 執着(집착)하는 我執(아집)이 있기때문에 이 我執(아집)의 無明(무명)에 갇혀있는 빌립이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오죽 보고싶었으면 사람들이 佛像(불상)을 만들고 예수像(상)을 만들고 마리아像(상)을 만들어놓고 聖殿(성전)을 들며 날며 그 偶像(우상) 앞에서 절을하고 祈禱(기도)를 하겠는가 말이다.
하다못해 念珠(염주)를 符籍(부적)처럼 몸에 지니질 않나
十字架(십자가) 형틀을 符信(부신)처럼 목에 걸고 다니질 않나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나야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는 예수님 말씀은 아랑곳 없다하고 예수님처럼 몸 생명을 다바쳐서라도 성령으로 거듭날 생각을 않는 것은 이게다 몸뚱이를 참나로 속아 알고 사는 짐승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믿음의 실상들이라서 그런 것이다.
10절 말씀의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無限宇宙虛空(무한우주허공)에 聖靈(성령)의 生氣(생기)요 生命(생명)의 根元(근원)인 永生生命(영생생명)으로 아니계신 곳이 없이 두루 遍在(편재)하여 꽉 차 계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니 그 품 속이 바로 아버지의 품 안이니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이고
내 心靈(심령) 밭에 하나님 성령의 생기요 영생생명의 씨인 하나님 성령의 씨가 播種(파종)되어 있으니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이 말씀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든 사람도 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예수님 말씀과 같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알게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예수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몸뚱이 예수의 自我(자아)가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성령 씨로 거듭나 참나가 되고 하나님 아들이 된 영아인 얼의 예수가 하나님 성령의 聖靈感應感化(성령감응감화)로 저절로 하나님의 말씀이 몸뚱이 예수의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는 말인 것이다.
예수의 몸뚱이 입은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는 하나님의 나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이것은 굳이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붓다도 그렇고 老子(노자).莊子(장자)도 그렇고 孔子(공자). 孟子(맹자)도 그렇고
소크라테스. 톨스토이.에크하르트. 헨리데이빗 소로우. 간디. 류영모님도 그렇고 다 그런 것이라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 해도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되질 못했다면 그가 세상적으로 아무리 이름난 성직자라 할지라도 그것은 다 세상적이고 몸뚱이 모양만 사람꼴을 한 가라지들이고 울리는 꾕과리들일뿐이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으로 사람 아들인 알곡의 人子(인자)가 아니고 獸子(짐승수. 새끼자)인 짐승 새끼요 하나님을 팔아 몸뚱이 살림궁리 하기에 바쁜 마구니들인 것에 지나질 않는 것일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유대교의 旣得權(기득권) 宗敎指導者(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두고 말씀 하시길
소경이다. 毒蛇(독사)의 子息(자식)이다. 灰漆(회칠)한 무덤이다라고 대놓고 말씀하시질 않았던가
지금 이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하고 自我(자아)인 몸뚱이 나와 마음나를 참나로 알고 몸뚱이 慾心(욕심)으로 살아가는 헛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이들은 다 회칠을 한 무덤같이 속에는 썩어문드러진 屍身(시신)에 욕심의 구더리들만 바글바글 우글거리는데
그 겉은 가증스런 믿음의 鬪具투구와 甲胄(갑주)라며 大理石(대리석)과 花崗巖(화강암) 같은 그럴싸한 衣裳(의상)을 채려입고 분칠을 한 얼굴에 微笑(미소)를 머금고 거룩한체를 하지만 그들의 미소와 그럴듯한 몸짓은 다 몸뚱이 貪慾心(탐욕심)으로 불타는 마구니의 姦巧(간교)한 칼날 같은 속마음의 이빨을 숨기기위한 僞裝(위장)된 겉모습일뿐임을 꿰뚫어 볼 줄을 알아야 함이다.
요한복음 12장 24절서 25절 말씀에
『24절: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데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25절: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 하느니라 』하였다.
여기서 한 알의 밀 알이 사람을 比喩(비유)한 말이고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사람으로 났다는 말이고
죽지 아니하면이란 몸나를 참나로 固執(고집)하며 몸뚱이에 죽기까지 종질하며 사는 어리석음을 말함이고
한 알 그대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날 줄을 모른다는 말이고
죽으면이란 몸나와 마음나인 自我(자아)가 참나인 하나님의 성령 씨를 담고 있는 한갖 겉 껍질임을 알아
그 껍질을 깨트려 破碎(파쇄)하여 自我(자아)를 滅我(멸아=자아죽임)시켜서 더이상 몸뚱이에 종질을 하질않고 하나님의 아들된 자리로 回復(회복)한다는 말이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본디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몸뚱이가 이 세상에서 머물어 사는 동안 利他的(이타적=남에게 이익됨을 줌)인 사랑을 躬行實踐(궁행실천=몸으로 직접 행하여 드러냄)하는 삶을 산다는 말인 것이다.
하물며 땅에 떨어진 밀 알 하나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밀 알의 딱딱한 겉 껍질 皮膜(피막)으로써 밀 알의 속생명을 保護(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겉 껍질이 자기가 밀 알의 참 생명이라고 고집하고 썩질 않는다면 밀 알 껍질 속의 밀의 참생명은 움터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씨앗의 理致(이치)와 攝理(섭리)가 다 이렇듯이 사람도 씨앗의 겉 껍질에 該當(해당)하는 겉사람과 씨알의 참생명에 속하는 속사람으로 되어있다는 게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겉사람이란 것이 바로 몸나와 마음나인 自我(자아)의 사람이고
속사람이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 씨가 들어있는 靈性(영성)인 靈我(영아)로 얼나의 사람이란 말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가
예수님의 이 靈性信仰(영성신앙) 의 核心(핵심) 말씀을 못알아듣고 헛된 몸뚱이 믿음 생활에 빠지는 것이 다 저들 겉사람인 몸뚱이 나와 마음나인 肉身所欲(육신소욕=몸뚱이 욕망만 바람)의 跌宕(질탕=방탕함)한 맛과 멋의 快樂(쾌락)과 는지러운 末梢的感覺(말초적감각)을 참살이로 알고 그 겉 껍질에 不過(불과)한 거짓의 自我(자아)에 奴隸(노예=종)가 되어 몸뚱이에 종질하고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사는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예수님은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 알이 썩지 않는 것에 비유하여 깨우쳐 주실려고 말씀을 하셨는데도 전혀 못알아 듣는 것이다.
25절 말씀의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에서
자기 생명이란 사람들이 그토록 愛之重之(애지중지)하는 겉 껍데기인 몸뚱이 自我(자아)의 肉身生命(육신생명)을 말하는 것이고
잃어버릴 것이란
그 몸껍데기 속 심령에 하나님이 넣어주신 하나님 씨인 성령의 영생생명이 몸뚱이 貪慾心(탐욕심)의 불길에 타서 消滅(소멸) 되어 잃어진다는 말인 것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保存(보존)하느니라에서
자기 생명도 肉身生命(육신생명)을 말하는 것이고
자신의 육신생명이 참생명인 永生生命(영생생명)이 아니고 暫時(잠시) 일었다가 금새 꺼져버리는 물거품같은 거짓 생명임을 豁然(활연)히 깨쳐 알고 이 몸생명에 執着(집착)하던 我執(아집)을 미워하고 싫어하여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면 영생생명에 들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는 말인 것이다.
이 말씀의 核心骨者(핵심골자)는 자기의 몸생명을 愛着(애착)하여 사랑하질 말고 미워하라는 것이다.
내 몸을 미워하라는 게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겉 껍데기요 거짓의 나인 自我(자아)가 참나인 것으로 迷惑(미혹)하고 錯覺(착각)하여 그 몸나에 執着(집착)하는 我執(아집)으로 極端的利己心(극단적이기심)에 홀리고 미쳐 살지를 말라는 것이지
그렇다고 내 몸을 故意(고의)로 虐待(학대) 하거나 自害(자해)하거나 自殺(자살)를 하라는 말로 알아 듣는다면 이런 어거지가 없을 것이다.
몸도 씨앗의 겉 껍질같은 것이지만 그 겉 껍질이 껍질 속 생명을 움틔우고 싹을 내어 온전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그 밑거름으로 씨 생명의 먹이 役轄(역할)을 堪當(감당) 할만큼 까지는 아끼고 지켜야 할 것임에는 너무나 소중하고 당연 할 것이라 할 것이다.
삶의 全目的(전목적)과 價値(가치)와 理由(이유)는 참나의 생명인 하나님이 주신 씨 생명을 움틔우고 키우는데 둘 것이지 몸뚱이 살이와 몸뚱이 생명은 이 씨 생명을 키워내는 거름정도로 적당히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2559년 전에 살다가신 석가 붓다님은
日中食(일중식)이라 하여 손수 托鉢(탁발)하시어 하루에 한끼만 먹기를 54년을 하셨지만 50도 살기 어려웠던 그런 시대였지만 붓다님은 무려 83세까지 강건하게 몸뚱이 삶을 사셨던 것을 본다면 어쩌면 지금 우리가 먹는 一日三食(일일삼식)이나 거기다 間食(간식)에 새참까지 온갖 것을 챙겨먹는 食文化生活(식문화생활)이 오히려 몸 생명에 거슬리는 일이라 할 것이다.
몸 생명을 가장 적당히 사랑한 사람 중에 붓다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것을 따라 실천하신 분들이 어찌 한 둘만이 있겠는가마는 우리 나라에도 多夕(다석)柳永模(유영모)님이란 분이 여기에 우뚝 들어가시는 분중에 크신 한 분이시다.
그 사람의 식생활만 살펴봐도 내노라하는 성직자들이나 성도들의 신앙 정도의 참과 거짓의 무게를 어느정도 斟酌(짐작) 해볼 수 있다 할 것이다.
11절 말씀의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래도 못믿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에서
전반부는 10절 말씀을 다시 강권적으로 강조하는 말씀인데
이것을 旣得權(기득권)의 制度圈(제도권) 종교지도급 인물들로 구성된 니케아 공의회에서 바울파인 아리우스파의 강력한 입김의 작용으로 聖父(성부) 聖子( 성자 ) 聖靈(성령)이란 三位一體說(삼위일체설)을 確定(확정)짓게 한 結定的(결정적)인 根據(근거)를 提供(제공)하는 말씀으로 解釋(해석)되고 받아들여졌던 端初(단초)가 되었던 것인데
그당시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을 예수님이 하고자 하신 말씀의 뜻하고는 너무나 터무니 없이 다른 엉뚱한 자기들의 해석으로 받아들인 결과가 이러했던 것이다.
그들이 이런 해석을 했다는 것은 역시 그들중 어느 한사람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없었고 몸뚱이의 머리로만 신앙 생활을 하는 철저한 몸뚱이 짐승 성질만이 드센 한마리의 짐승 새끼들이 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病痛(병통)의 싹이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할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말씀의 참뜻은 바로 앞절인 10절 말씀에서 다 말했으니 그만하고
나를 믿으라에서의 믿으라는 것은 예수님 속에서 하나님 성령이 예수의 영아를 感化感應(감화감응) 시켜서 예수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라는 말이지 몸뚱이 예수 자기를 하나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닌 것이다.
더불어서 너희들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너희 속에 있는 하나님 성령의 感動感化(감동감화)로 저절로 알게 될 것이지만 그렇질 못하고 몸나와 마음 나를 참나로 알고 사는 너희들 몸뚱이의 貪慾心(탐욕심)에 執着(집착)하는 그 我執(아집) 때문에 하나님이 내 입을 빌어 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못알아 듣는 것이 너무나도 哀痛(애통)하고 답답하다는 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多夕(다석)님의 語錄(어록)에 있기를
『우리의 몸뚱이는 妖妄(요망)한 것이라 스스로가 採薪(채신)을 갖추어야 참나인 얼나에 이른다.
몸나를 採薪(채신)하여 犧牲(희생) 함으로써 몸나의 어둠이 가시고 얼나의 아침이 온다.
이 것이 窮極(궁극)의 믿음으로 가는 길이다.』하였다.
여기서 採薪(채신)은 캘채字(자)에 섶신字(자)로 文字(문자) 그대로는
불쏘시개로 불땔 땔감을 캔다는 말이나
이 것을 意譯(의역=뜻으로 풀음)을 하면
채신을 갖춘다는 말은 먼 眼目(안목)으로 根元的(근원적)인 處身(처신)을 한다는 말로써
달리 말하면 몸나는 얼나를 참나로 깨달아 알기 까지 얼의 나로 거듭나는 땔깜 몫으로 犧牲祭物(희생제물)의 역할을 해야 할 불쏘시개 程度(정도)로 알아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몸을 참나로 알던 顚倒夢想(전도몽상=거꾸로 뒤집어진 헛 꿈꿍이 생각) 에서 탁 깨어나
몸뚱이에 종노릇하며 살던 몸뚱이 貪慾心(탐욕심)으로 는질대는 어둠의 시궁창같은 삶에서 참나인 얼나에 몸뚱이가 땔깜으로 쓰여지는 해 떠오르는 밝은 아침처럼 환한 精神(정신)의 불을 밝히는 아침이 온다는 말인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몸을 받아서 이 세상이란 곳에 나와 딱 한번 살고 가는 지나가는 나그네의 존재로써의 삶에서 어떤 目的(목적)과 價値(가치)와 理由(이유)로 살 것이고 내게 生命(생명) 준 絶對存在(절대존재)가 바라는 뜻데로 살 것인지에대한 所命意識(소명의식)과 참 삶의 指針(지침)을 말씀하신 것이라 하겠다.
대롱 끝에서 아이가 불어내는 입바람으로 동그랗게 五色玲瓏(오색영롱)한 무지개 빛으로 부풀어 올라 暫時(잠시) 虛空(허공)을 떠오르던 비누방울이 금새 거져 消滅(소멸)되어버리듯 이처럼 잠시 번쩍하고 끝나고 말 몸뚱이 自我(자아)인 거짓의 나에 홀리고 홀려 滅亡生命(멸망생명)인 그 몸뚱이의 感覺(감각)과 感情(감정)의 짜릿한 快感(쾌감)의 遊戱(유희)에 깜박 속아 종노릇하며 썩어문드러질 물질에 휘감겨 똥버러지처럼 陰險(음험)하고 컴컴한 어둠의 삶을 살다가 끝낼 것인지
아니면 그 몸뚱이 속 心靈(심령) 밭에 臨在(임재)해 계신 하나님의 씨 성령의 얼나로 깨어나 참나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 성령 感化(감화)로 거짓의 나인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종으로 부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환한 빛으로 밝혀 나가는 永生生命(영생생명)으로 살 것인지를 사람이면 다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多夕(다석)님은 이렇게 말씀하신게 아니겠는가
12절 말씀의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에서의
나를 믿는 자란 말은 성령으로 거듭난 靈我(영아)인 얼예수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믿는 자를 말하는 것이지 몸뚱이 예수 자신을 神(신)으로 믿으라는 類(류)의 말이 아니고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란 말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 자신과 같이 다 같은 하나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다는 말이고
이 보다 더 큰 것도 한다는 말은
예수 자신의 몸껍질이 죽어진 이후에라도 예수 자신을 凌駕(능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크신 아들이 성령 거듭남으로 이땅에 나타날 수도 있다는 暗示的(암시적=넌지시 깨우쳐 줌)인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과 같은 脈絡(맥락)의 孔子(공자)님 말씀이 論語(논어) 子罕(자한)편에 있기를
「後生可畏(후생가외) 焉知來者之不如今也(언지래자지불여금야)
四十五十而無聞焉(사십오십무문언) 斯亦不足已(사역부족이)」라 하여
뒤에 태어날 이들이 두렵다. 우리 뒤를 이어 오는 사람들이 지금 우리만 못할 것을 어찌 알 것인가
그러나 마흔살이 되고 쉰살이 되어도 듣는 귀가 열리질 않아 못알아 듣는다면
이것 또한 두려울 것이 없다 하였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3절서 18절에 있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써서 보낸 서신의 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再臨(재림)이 나와 있는데 이건 바울의 말이지 예수님은 자기 입으로 자신이 이 땅에 다시 再臨(재림)한다고 말한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한다.
데살전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하나님의 성령에 대한 말씀을 조금더 살펴보면
요한복음 4장 24절에 예수님 말씀이 있기를
『하나님은 靈(영)이시니 禮拜(예배)하는 자가 神靈(신령)과 眞情(진정)으로 예배 할찌니라 』하였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분명히 영이시라 聖靈(성령=거룩한 영)이라 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생각 하기를 이 땅의 몸뚱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생각 하듯이 人格神(인격신)이나 人性神(인성신)으로 생각 하려고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데서부터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이게 왜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자기 心靈(심령) 밭에 하나님의 씨인 하나님 성령의 靈(영)씨가 하나님 아들될 참나의 種子(종자)로 하나님이 播種(파종) 해주셨는데 이걸 모르고 자신의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기때문에 몸뚱이 중심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인식하는 肉身所欲(육신소욕)의 貪慾心(탐욕심)에서 始作(시작)되는 形而下的(형이하적)인 믿음에 뿌리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도 받는 그릇에 따라 고여지는 빗물의 양이 다르듯이
성령으로 거듭난 심령의 靈我(영아)인 얼나로 예수님 말슴을 받는 것과
성령 거듭남은 모르겠고 오로지 몸나와 마음 나인 자아의 머리로만 육신소욕의 잣대로 알량한 앎과 所見(소견)으로 말씀을 칼질하며 받는 것과는 서로가 하늘과 땅차이로 懸隔(현격)한 天壤懸隔(천양현격)으로 極(극)과 極(극)으로 다르다 할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신 것은 靈(영)적인 아버지란 뜻에서 靈父(영부)를 말씀 하신 것이지
몸뚱이 아비인 肉父(육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어머니를 바로 앞에 두고도 여자여 누가 내 어머니란 말이냐라고 하신분이 바로 예수님이 아니시던가
찬송을 부르고 단체로 눈을 감고 누군가 앞에서 대표로 呪文(주문)을 외듯이 틀에박힌 美辭麗句(미사여구)를 총 동원하여 기도를 하고 또 痛聲(통성)으로 울듯이 뭘 容恕(용서)해달라 罪(죄)를 赦(사)해달라 聖靈(성령)을 주시옵소서 하며 울먹이며 무슨 催眠(최면)걸린 사람마냥 샤머니즘적인 행태와 어떤 儀禮型式(의례형식)으로 一律的(일룰적)으로 짜여진 禮拜儀式(예배의식)으로 敬虔(경건)의 모양과 형식만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참된 영적 예배와는 거리가 있다 할 것이다.
예수님이 기도 하실때는 사랑하던 제자들도 저만치 멀리 두시고 혼자 외진 곳에 가셔서
조용히 영적인 묵상 기도를 하셨던 것이 아닌가.
믿음 생활을 한다는 것은 바로 내 心靈田(심령) 밭에 하나님이 播種(파종)해주신 하나님의 씨 성령 種子(종자)를 움틔우고 꽃 피우고 열매 맺기까지 그 영아인 얼나로 소스라치듯 깨어나는데에 그 첫걸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아버지께 갈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시고자 성령에대해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49절 말씀에선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오 』하시어 성령을 불에 비유를 하셨고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선
『밀 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데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여 성령을 밀알에 비율 하셨고
요한복음 12장 46절에선
『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어둠 속에서 살지 않게 하려함이라 』하여 성령을 빛으로 비유를 하셨고
요한복음 3장 14절에선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여 성령을 물에 비유를 하셨고
요한복음 3장 8절에선
『바람이 任意(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질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하여 성령을 바람에 비유를 하셨고
마태복음 8장 5절서 11절에선
『씨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바위 위에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중략...
이 비유에서 말하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여 성령을 씨에 비유를 하셨다.
이처럼 불.밀알.빛. 물.바람.씨 이것은 다 하나같이 사람들이 알아 들으라고 하나님의 성령을 비유로 하신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이고 성령이고 생명이고 사랑이신 영적존재이면서 無限宇宙(무한우주)를 主宰攝理運行管掌(주재섭리운행관장) 하시는 절대의 영이신 것이다.
해서 오로지 神靈(신령)과 眞情(진정)의 영적예배를 드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신 것이다.
데살전 14절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하였다.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잠꼬대인가 말이다.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말은 예수의 죽은 몸뚱이가 다시 復活(부활)하여 살았다는 말이 바울의 말이고
영원히 이젠 죽지도 않고 영생하는 變化(변화)된 肉身(육신)으로 復活(부활)하여 하늘로 올라 갔다는 말인데
이 것을 바울은 믿는다고 한 것이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 것을 믿으라고 강권하는 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온다고 했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란 예수가 내 죄때문에 十字架(십자가) 刑(형)틀에 못박혀 代贖祭物(대속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 나를 救援(구원)코자 한 하나님의 豫備(예비)되고 作定(작정)된 거룩한 일이 었음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살다가 죽은 사람들을 잔다고 한 것같고
이들을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과 함께 데리고 이 땅에 오신다고 하고선
16절에선
『주께서 죽은 聖徒(성도)들을 일어나라고 號令(호령)하고 미가엘 天使長(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죽은 성도들을 일으켜 살려서 친히 하늘로 좇아 降臨(강림)한다 』고 하며 하나님은 빠지고 하나님의 나팔만 나온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가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 있는 자는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휴거) 올라져서 空中(공중)에서 주를 迎接(영접)한다고 하였고
그래서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된다고 했다.
이게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 서신의 내용인대 이게 성경 정경으로 끼게된 전말은 지난 앞글들에서 적었으니 여기선 더 적질 않는다.
바울 서신의 이 말들은 예수님의 靈性信仰(영성신앙)의 가르침 하고는 하늘과 땅차이로 완전히 다른 것이고 예수님 말씀가르침 하고는 정반대로 틀린 잠꼬대같은 말인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한 復活(부활)은 성령 거듭남의 영적 부활이지 죽고 썩어진 몸뚱이가 忽然(홀연)히 變化(변화)된 육신으로 부활 한다는 몸뚱이 부활이 아닌데 바울은 이 것을 엉뚱하게도 몸뚱이 부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말데로라면 하나님도 변화된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란 말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은 영이시라 하셨는데 말이다.
바울의 이 말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나질 못하고 몸뚱이를 참나로 알고 몸뚱이 탐욕심의 찌꺼기에 집착하여 누구보다도 더 利己的我執(이기적아집)의 催眠(최면)에 걸린 幻覺症(환각증)이나 精神分裂錯亂症(정신분열착란증)의 重症患者(중증환자)에 속하는 한 마리 짐승 이었지 人子(인자)가 되질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의 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랬으니까 예수님의 영성신앙을 따르던 성도들을 쥐잡듯이 索出(색출)하여 몰아 잡아 죽여댔으니 영성신앙의 성도들은 다들 지하로 숨어 들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新約(신약) 27권 중에 14권이 다 바울의 서신으로 되어 있으니 이게 바울 경전이고 바울교인 것이지 무슨 얼어죽을 예수님의 그리스도교라 하겠는가 말이다.
가라지가 아무리 많다해도 알곡을 거두지 가라지가 알곡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질 않는가
언젠가는 가라지는 다 불에 태워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진리 말씀이 비록 歪曲(왜곡)되고 變質(변질)되고 뒤틀려진 엉뚱한 요소가 끼어 들었다 하더라도 예수님 말씀의 뼈대 骨格(골격)이 되는 말씀이 단지 몇 %만 있다 하더라도 이 것은 거룩한 성경임에는 누구도 否認(부인) 할 수가 없는 성경인 것이 아니겠는가
舊約時代(구약시대) 히브리민족이 崇拜(숭배)하고믿었던 여호와 또는 야훼라고 불렀던 여호와 하나님은 히브리민족이 믿었던 유대인의 민족신의 샤머니즘적 하나님으로 懲罰(징벌)과 審判(심판)과 嫉妬(질투)로 앙갚음을 하는 무섭고 두려운 恐怖(공포)의 하나님이고 君臨(군림)하는 하나님이 었다면
예수님이 말한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사랑 그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다니엘서나 이사야서나 요한계시록에서 나와있는 것처럼 終末(종말)을 審判(심판)으로 惡辣(악랄)하게 콩마당에 콩打作(타작) 하듯이 그렇게 지구 네 모퉁이를 넷 天使(천사)들이 움켜 잡아쥐고 四方(사방)의 바람을 붙잡기를 하나님의 印(인)을 가진 자가 이스라엘 열두지파에서 選別(선별)한 14만 4천인의 이마에 印(인)치기가 끝날때까지 바람을 잡고 있다가 印(인)침이 끝나면 그들 14만 4천인은 천년왕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토록 變化(변화)된 육신을 입은체 살게되고 나머지는 다 싹 쓸어 영원히 滅亡(멸망)시켜버린다는 默示錄(묵시록)의 啓示(계시)처럼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임을 알아야 한다 할 것이다.
요한 계시록은 요한이 밧모섬에 갇혀 유배생활을 할 적에 이사야서를 읽다가잠든 중에 꿈을 꾼 이야기를 적어놓은 꿈이야기인 것을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7장 15절서 18절의 예수님 말씀에
『15절: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羊(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擄掠(노략)질하는 이리라
16절: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葡萄(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無花果(무화과)를 따겠느냐
17절:이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절: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하였다.
이게 나무와 열매를 比喩(비유)로 들어 성령으로 거듭나고 못남을 말한 것이기도 하고
審判(심판)과 終末(종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고 안들고를 자신의 意志選擇(의지선택)에 따라 사람 스스로가 하는 것에서 결정되어 지도록 사람에게 自由選擇(자유선택)의 意志(의지)를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셨다는 말인 것이다.
다니엘서나 이사야서나 계시록이나 이런 것들은 어쩌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반드시 거듭나야만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 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마다 기필코 이루어 낼 수 있게 하기위해서 劇藥處方箋(극약처방전) 水準(수준)의 啓示(계시)가 그 目的(목적)이라면 充分(충분)한 價値(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나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 아들된 진리의 자리에서 보면 이런 것들은 다 마구니 수준의 가라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終末(종말)이나 審判(심판)을 비유로는 하셨지만 직접 말씀한 일이 없는 것이다.
比喩(비유)로 말씀하신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성전이 주춧돌 하나도 남김없이 破壞(파괴)가 될 것이며 요한 계시록의 축소판 같은 마지막 때의 비유가 말씀으로 예수님 말씀이 나오는데
솔로몬이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낡고 허물어진 것을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의 歡心(환심)을 얻고자 10년간에 걸쳐서 再建(재건)하여 雄壯(웅장)한 規模(규모)의 聖殿建物(성전건물)로 완성이 되었지만 그 성전이 로마군에 의하여 파괴가 되리라는 종말론적인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이 요한이 擴大解釋(확대해석)하여 계시록을 쓰게된 실마리의 단초가
되었을지도 모를일이라 할 것이다.
예수님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 하셨던 공생애 기간 동안의 말씀이 녹음이 되었거나 바로 그 즉시 기록되고 저술이 되었던 것이 아니고 들은 말씀이 직제자에서 다음 제자로 口傳(구전)되고 구전되던 것을 더러는 직제자들이 기억을 더듬어 파피루스에 틈틈이 적어 두었던 것을 여기 저기서 聚合(취합)하여 퍼즐을 맞추듯이 만들어진 것이 마태. 마가.누가.요한이 썼다는 4복음서에 나오는 것이 그 전부인 것이다.
이 4복음서에 기록된 말씀들도 4복음이 서로 다르게 기술이 되어있고
예수님 당시 예수님 말씀 그데로 토시 하나 다름없이 그 즉시 著述(저술)이 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 死後(사후)에 예수님 제자들인 마태.마가.누가.요한이란 사도 저술자들의 기억 속에서 저술자들의 생각이 알게 모르게 融合(융합)되어 再誕生(재탄생)이 되었고 이 것들이 많은 세월 동안 여러 筆寫者(필사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또 약간씩의 誤謬(오류)와 改作(개작)이 揷入(삽입)되고 하였던 것을 堪案(감안)한다면 유일한 4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을 默想(묵상)함에 있어서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알길은 오로지 예수님처럼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아들이 되고 참나인 얼나의 人子(인자)가 되어 하나님 성령과 하나이고 예수님 성령과 하나로 내 얼나의 성령과 서로 하나로 같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만나고 소통하는 성령교통의 靈通(영통) 말고는 달리 무슨 길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아들이 된 人子(인자)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것이고
그렇질 못하고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사는 我執(아집)에 묶인 짐승 사람의 입에서는 몸나의 욕심과 아름알이에 끄달린 나머지 荒唐無稽(황당무계)한 마구니의 토악질하는 게우는 짐승의 소리가 나오는 것이라 할 것이다.
헨리데이빗 소로우의 일기에
『사람보다 위대한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처절한 孤獨(고독)이 필요한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의 몸껍데기를 뒤집어쓴채 자신의 有益(유익)앞에선 짐승보다 못한 醜雜(추잡)하고 卑劣(비열)하고 極惡無道(극악무도)하고 破廉恥(파렴치)하고 稚拙(치졸)하고 惡辣(악랄)한 헛껍데기 인생살이를 벗어 던지고 영원한 자유에 들어 아무런 걸림이 없이 바람처럼 물처럼 그렇게 걸림없는 대자유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인생 통채로가 외로움의 茫茫大海(망망대해)에 풍덩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몸뚱이 인생살이가 極深(극심)하게 孤獨(고독)해야만이
내가 무엇이고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窮極的(궁극적)으로 省察(성찰)하게 되는 마음의 심지에 생각의 불이 붙는다는 말인 것이다.
精神(정신)의 심지에 불이 붙는다는 말은
생각을 태우고 또 태우고 끊임없는 생각의 精進(정진)에 불꽃이 타오른다는 말인 것이다.
생각의 정진에 불꽃이 타오른다는 말은
하나님 생각으로 생각을 불태우는데에 정신을 集中(집중)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祈禱(기도)요 冥想(명상)이요 參禪(참선)이요 坐禪(좌선)인 것이다.
예수님이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극심한 고독 속에서 얼나를 찾기에 생각의 불꽃을 피워 올리라는 말인 것이다.
볼록렌즈 촛점에 햇빛이 하나로 모아졌을때 불꽃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나님 생각이란 한 생각에 沒入(몰입)하여 불꽃이 솟을때까지 생각을 불태우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불태우는 것은 마치 鑛山(광산)에서 캐낸 鑛石(광석)을 鎔鑛爐(용광로)에 넣어 녹이고 製鍊(제련)을 거쳐 各種鑛物質(각종광물질)을 抽出(추출)해내는 것과도 같다 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心靈(심령) 밭에 播種(파종)해주신 참 생명의 씨인 하나님 聖靈(성령)의 씨성령의 靈我(영아)인 얼나를 찾는데에 삶의 全目的(전목적)과 價値(가치)와 理由(이유)를 附與(부여)해주신 하나님의 攝理(섭리)를 좇아서 몸을 받아 나온 사람 짐승들이 해야 할 最急先務(최급선무)가 바로 自我(자아)를 否定(부정)하고 참나를 찾아 하나님 아들 자리를 回復(회복)하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에 생각을 불태우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儒敎經典(유교경전)인 四書五經(사서오경)의 大學(대학)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에
大學之道(대학지도) 在明明德(재명명덕) 在親民(재친민) 在止於至善(재지어지선)이란 것이 나오는데
글자 그데로의 直譯(직역)은
대학의 도는 明德(명덕)을 밝힘에 있고 백성을 사랑함에 있고 善(선)에 이르러 그침에 있다지만
이 것을 뜻으로 풀면
사람이 배우는 것의 目的(목적)과 方法(방법)이 明德(명덕)을 오롯이 밝혀 드러냄이 그 첫번째이고
그 밝아진 明德(명덕)으로라야만 치우침이 없이 公平(공평)하고 公明正大(공명정대)하게 百姓(백성)을 사랑 할 수 있다는 것이 둘째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라야 지극한 善(선)의 境地(경지)에 이르고 머물러 그칠 수가 있다는 말인 것이다.
孔子(공자)님이 여기서 말한 明德(명덕)이란 것이 바로 하늘로부터 받아나온 天稟(천품)의 본성품인 조물주의 씨로써 사람의 심령 밭에 들어와 있는 속알성품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 말씀의 聖靈(성령)과 붓다님 말씀의 佛性(불성)과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孔子(공자)님의 이 말씀도 먼저 자신의 心靈(심령) 밭에 받아나온 명덕의 나인 참나를 밝혀 찾는 것이 사람의 가장 時急(시급)하고 重(중)한 工夫(공부)의 참목적이고 마지막 목적이란 것을 대학의 書頭(서두)에서 밝히신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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