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天下神器不可爲也(천하신기불가위야) 세상은 하나님의 그릇이라 사람이 어찌 할 수가 없다 본문
天下神器不可爲也(천하신기불가위야)
세상은 하나님의 그릇이라 사람이 어찌 할 수가 없다 蘧然覺
2014. 7. 27. 7:17
1.將欲取天下而爲之(장욕취천하이위지)
2.吾見其不得已(오견기부득이)
3.天下神器 不可爲也(천하신기 불가위야)
4.爲者敗之 執者失之(위자패지 집자실지)
5.故物或行 或隨(고물혹행 혹수)
6.或歔 或吹(혹허 혹취)
7.或强 或羸(혹강 혹리)
8.或載 或隳(혹재 혹휴)
9.是以聖人(시이성인)
10.去甚(거심)
11.去奢(거사)
12.去泰(거태)
(풀이편)
이 글은 老子(노자)님의 道德經(도덕경) 29章 말씀이다.
宇宙萬有(우주만유)가 다 創造主(창조주) 하나님께서 創造(창조)하여 宇宙空間(우주공간)의 無限(무한)한 빔에 벌려놓으신 하나님의 神秘(신비)하신 攝理秘密(섭리비밀)의 現象界(현상계)임을 밝히신 글이다.
성경 마태복음 15장 14절에 예수님 말씀이 있기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引導(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弟子(제자)들이 묻기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말씀 가르침을 전혀 알아 듣지를 못하는데 이게 어째서 그렇습니까 했을때
예수님이 對答(대답)하신 말씀이다.
勿論(물론) 이 말씀은 旣得權(기득권) 宗敎指導勢力(종교지도세력)의 頂點(정점)에 있는 祭祀長(제사장)과 서기관들과 律法學者(율법학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유대교의 오랜 舊習(구습)의 遺傳(유전)에 젖은 자들임을 이를 譬喩(비유)해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 말씀 가르침의 核心(핵심)인 靈性信仰(영성신앙)에 있어서는
이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完全(완전) 소경이라 얼의 눈을 뜨질 못했다는 말씀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얼의 눈을 뜨질 못했다는 말은 靈眼(영안)이 열리질 않았다는 말이다.
祖上(조상)을 이어 야훼를 하나님으로 믿고 遺傳(유전)되어온 히브리민족의 민족종교인 유대교의 慣習的(관습적)인 固定觀念(고정관념)의 舊習(구습)으로 굳어진 我執(아집)과 驕慢(교만)으로 오로지 자신의 믿음만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렸다는 식의 廢鎖的(폐쇄적)이고 獨善的(독선적)인 생각으로 걸핏하면 남을 異端(이단)으로 몰아세우고 敵對視(적대시)하는 이들이 바로 소경이고 얼눈을 뜨질 못했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12장 29절 말씀에 있기를
『사람이 먼저 强(강)한 자를 結縛(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勒奪(늑탈) 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勒奪(늑탈) 하리라 』하였다.
이 말씀도 비유의 말씀으로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인 거짓나를 강한 자로 비유한 것이고
강한 자를 결박하고 늑탈하는 자를 聖靈(성령)의 얼나로 비유하신 말씀이다.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로는 한마리의 짐승과 다름 없는 짐승 성질의 貪.嗔.痴(탐.진.치) 三毒(삼독)으로 뻗쳐 貪慾心(탐욕심)의 악마구리 화신이 되어 사는 성난 짐승과 같으니 强(강)하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고
이것을 制壓(제압)해서 때려잡고 순한 羊(양)처럼 길들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이 한길뿐이란 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로 말씀을 하신 것이다.
貪.嗔.痴.(탐.진.치) 三毒(삼독)의 짐승 성질은 人子(인자)인 참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이기고 넘어야 할 걸림돌이지
이 걸 모르고 여기에 貪溺(탐닉)하여 빠지고 짐승 성질을 부리며 즐기라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한다.
貪,嗔.痴(탐.진.치) 삼독인 貪慾心(탐욕심)의 성질을 부리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너나없이 다 아는 것은
우리 사람 속에는 하나님이 넣어주신 神格(신격)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해서 비록 종교는 없다 하더라도 다들 精神修養(정신수양)이니 道德(도덕)과 倫理(윤리) 敎育(교육)이니 人性敎育(인성교육)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바로 우리 사람 心靈(심령) 깊은 곳에 神格(신격)이 살아 있다는 것의 證據(증거)인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 말씀의 核心骨髓(핵심골수)는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는 거짓의 나고 참나를 품고있는 그릇과 같은 것이니 이걸 이기고 넘어서서 내 속에 있는 하나님 성령 씨앗의 나인 참나로 거듭나 하나님 아들된 삶을 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食(식=먹는 것)과 色(색=여색)과 物質(물질)에 미쳐서 살질 말고 하나님 말씀으로 살라는 말인 것이다.
孔子(공자)님 말씀이 論語(논어) 述而篇(술이편)에 있기를
【 不憤不啓(불분불계) 不悱不發(불비불발) 擧一隅(거일우) 不以三隅反(불이삼우반) 則不復也(즉불부야) 】라 하여
發憤忘食(발분망식)할 程度(정도)로 알려고 분발칠 않으면 열어 보여주질 않고 스스로 표현하여 나타내려고 애태우질 않으면 드러내 주지를 않고
한 모퉁이를 들어 알아챌 조짐을 주었는데도 세 모퉁이가 있음을 斟酌(짐작)으로 알아채는 반응이 없다면 다시 일러 주질 않는다 하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도리를 말씀 하신 것인데
먼저 배우는 자는 알고자 하는 마음이 懇切(간절)해서 發憤忘食(발분망식) 할 정도로 미쳐야 한다는 말이고
가르치는 자는 注入式(주입식) 교육으로 暗記(암기)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배우는 자의 創意性(창의성)을 導出(도출)해 내기위해 낌새 幾微(기미)만 얼핏 주어 스스로 깨쳐 알게 한다는 말이다.
사람은 죽을때까지 배우고 공부 해야 할 平生學生(평생학생)이란 마음으로 살아야 늘 謙遜(겸손)하게 살 수가 있는 것이다.
몸으로 살다가 工夫(공부)가 더 되면
마음으로 살게 되고
마음으로 살다가 工夫(공부)가 더 되면 精神(정신)으로 살게 되는 마음 공부를 게을리 하질 않아야 참사람인 人子(인자=君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孔子(공자)님은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일 것이다.
요한복음14장 9절서 10절 말씀에서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9: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하였다.
빌립이 예수님에게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옵소서 했을때 예수님이 대답하신 말씀이다.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 뜻을 못알아 듣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며 예수 믿고 천국 가야한다고 허튼 소리를 하는 것이다.
몸으로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血肉(혈육)의 사람이고 우리와 다르다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나신 하나님의 영적인 아들이지
하나님이 아님을 바로 알아야한다.
예수님은 지금 이 말씀에서 靈性信仰(영성신앙)인 聖靈(성령) 거듭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몸뚱이로는 다 父母(부모)의 精血(정혈)로 받아나온 物質(물질)로된 몸뚱이 사람이지만 그 몸뚱이 속 心靈(심령) 속에 받아나온 靈(영)은 하나님의 성령 씨알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나온 씨앗 영이 사람이면 너나없이 다 들어 있는데 이 씨앗 영이 하나님의 영적인 아들이 될 성령 씨앗임을 알고 깨달아서 성령으로 거듭나면 다 하나님의 영적인 참 아들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란 말이
예수님이 하나님 성령 씨알로 온전히 거듭나신 하나님의 영적아들임을 빌립이 알았다면 벌써 예수님의 성령을 보는 것으로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이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아닌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영적 존재이시지 썩어질 물질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 존재가 아님을 생각 한다면 알 수가 있는 말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은
이 宇宙(우주) 無限虛空(무한허공)의 빔 어느 한 곳도 하나님의 성령이 아니계신 곳이 없으시니 아버지 품 속안에 있다는 말이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은
내 心靈(심령) 밭에 播種(파종)된 하나님의 성령 씨앗의 참나가 있음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났으니 하나님 아버지가 곧 내 안에 있다는 말인 것이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 씨앗영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인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과 같은 脈絡(맥락)의 말씀이 佛經(불경) 金剛經(금강경)에 있기를
【 其有見我色若以音聲聽(기유견아색약이음성청) 斯爲愚邪見此人不見佛(사위우사견차인불견불) 】이라 하여
누구든지 만일 내 몸뚱이를 본 것으로 붓다를 보았다고 하거나
나의 목소리를 들은 것으로 붓다를 보았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썩어질 내 육신인 몸뚱이란 겉 껍데기를 붓다로 잘못 본 것이고 죽으면 滅(멸)하여 끊어질 내 음성을 붓다로 잘못 안 것으로 어리석은 것이니
이런 사람은 붓다를 보고서도 붓다를 보질 못한다 하였다.
붓다님의 이 말씀도
몸뚱이 붓다는 겉 껍데기로 썩어질 물질이지 붓다가 아니고
그 몸뚱이 속에 담겨있는 佛性(불성=니르바나님의靈性<영성>)이 바로 붓다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 佛性(불성)을 참나로 見性(견성)하는 大悟(대오)로 거듭난 불성이 곧 如來(여래)요 붓다라는 말인 것이다.
基督敎(기독교)도 佛敎(불교)도 다 이 말씀 뜻을 못알아 들으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이라며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예수님을 믿어야 天堂(천당) 간다는 헛소리를 하는 것이고
부처님을 하나님이라며 神(신)의 자리에 올려놓고
부처를 믿어야 極樂往生(극락왕생) 한다고 개 하품하는 실없는 소릴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게 다 예수님 말씀 가르침의 참뜻인 靈性(영성)가르침의 核心(핵심)인
성령 거듭남으로 몸나와 마음 나를 참나로 알고 살던 自我(자아)를 버리고 세상 물질 중심으로 살던 物神(물신)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精神人(정신인)인 하나님 성령 씨알의 참나로 새롭게 다시 나야 한다는 가르침의 참뜻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붓다님 말씀도 佛性(불성=성령)을 見性(견성)하여 本來面目(본래면목)의 佛性(불성)의 나가 참나이고 몸뚱이는 거푸집 겉 껍데기에 다름 아니니
그 거푸집 껍데기를 보고 붓다를 보았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한것이 아닌가.
붓다가 살아 있을 당시의 붓다 몸도 붓다가 아니라고 붓다 자신이 이렇게 알아듣기 쉽게 말해 주었는데도
자기가 죽고나면 或是(혹시) 자기 形象(형상)을 만들어놓고 偶像崇拜(우상숭배)를 할까봐 자기의 形象(형상) 같은 것은 어떤 것으로라도 절대 만들질 말라고 하시질 않았던가 말이다.
그랬는데도 그게 500년까지는 無佛像(무불상)이 지켜지다가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어느 寺刹(사찰)치고 금칠로 번쩍거리는 佛像(불상)이란 偶像(우상)이 坐定(좌정)해 있질 않는 곳이 있는가 말이다.
하다못해 巫堂(무당)의 굿방에도 佛像(불상)이 앉아있다.
丹霞燒佛(단하소불)이란 말이 있는데
丹霞(단하)란 스님이 한 消息(소식)을 얻을까하고 이절 저절을 探訪巡禮(탐방순례)를 하던중에 慧林寺(혜림사)라는 절간에 들러 大雄殿(대웅전)에 앉아 있는데 마침 한겨울이던 때라 오금이 쑤셔오고 손발이 痲痺(마비)가 오는듯이 몹씨 추워 참다못해 法堂(법당)에 座定(좌정)해 있던 금칠한 木佛(목불)을 들고나가 도끼로 패서 아궁이에 집어넣고 불을때고 있었다.
이를 늦게서야 알고서 화들짝 놀란 주지스님이 일갈하기를
야 이눔아 아무리 무식하기로서니 부처님을 아궁이에 불때는 놈이 어디있느냐며 怒發大發(노발대발) 하거늘
단하왈 木불에도 或是(혹시) 부처님의 舍利(사리)가 나오는지 보려고요 하였다.
그러자 주지스님왈
나무에 무슨 사리가 있나하는 순간 활연히 見性(견성)을 했다고 하는 말이 있기도 하다.
論語(논어) 子罕篇(자한편)에 孔子(공자)님 말씀이 있기를
【 子在川上曰(자재천상왈) 逝者如斯夫(서자여사부) 不舍晝夜(불사주야) 】라 하여
孔子(공자)님이 냇가에 있으면서 말씀하시길
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쉬질 않고 흐르는구나 하였다.
孔子(공자)님이 弟子(제자)들과 더불어 흐르는 냇물가에 서 계시면서 쉼없이 흘러가는 냇물을 보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人生(인생)이란 것도 저 흘러가는 물처럼 이 세상이란 시간을 흘러가는 일시적인 나그네 같은 存在(존재)라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 것이다.
쉼없이 흘러가는 세상이란 시간의 냇물 물줄기에 반딧불이처럼 반짝하다가 消滅(소멸)되어버리는 나그네 人生(인생)에게 주어진 生命時間(생명시간)이 너무나 所重(소중)하고 귀한 것임을 알아 몸생명을 하나님이 살리시는 동안
天生德於予(천생덕어여)를 깨쳐 알라는 幾微(기미=힌트)를 제자들에게 暗示(암시)하는 말씀일지도 모를 것이라 하겠다.
天生德於予(천생덕어여)란
하나님이 내게 속알을 낳아 주셨다인데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공자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라 할 것이다.
몸뚱이 인생으로는 너나 없이 다 나고 죽고를 저 쉼없이 흘러가는 물처럼 오는물과 가는 물이 앞다투어 흘러가듯이 生死(생사)의 攝理秩序(섭리질서)를 따라 그렇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이나 붓다님 말씀이나 孔子(공자)님 말씀은
몸뚱이 인생이란 다 겉 껍데기의 썩어질 物質(물질)로 주어진 許諾(허락)된 시간 동안을 暫時(잠시) 다녀가는 한갖 나그네 같은 지나가고 흘러가는 일시적인 거짓 존재로써 宇宙攝理秩序(우주섭리질서)의 循環(순환)고리에 따라 明滅(몀멸)하는 虛妄(허망)한 물질일뿐이라는 것을 하나같이 일깨워 주시는 진리의 말씀들인데
예수님 말씀을 따르고 붓다님 말씀을 좇고 공자님 맹자님 말씀을 높이는 사람들이 이 말씀들의 참뜻을 바로 알아 듣질 못하는 것은 다들 저들 몸뚱이 욕심으로 알아들어서 그런 것일 것이다.이런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을 들라면 아마도 바울일 것이다.
바울 자신이 스스로 예수님의 靈性信仰(영성신앙)을 否定(부정)하고
復活(부활)이니 在林(재림)이니 聖靈孕胎誕生(성령잉태탄생)이니 贖罪代贖救援(속죄대속구원)이니 하는 바울 자신이 만든 敎儀信仰(교의신앙)을
그가 써서 各敎會(각교회)에 보낸 獄中書信(옥중서신)이 新約聖經(신약성경)27券(권)중 14권이 다 바울서신으로 니케아공회에서 정경으로 策定(책정)되어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 14권이란 것이 로마서.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빌립보서.데살로니가전.후서.빌레몬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히브리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이다.
예수님 聖靈孕胎誕生說(성령잉태탄생설) 肉體復活說(육체부활설).예수재림설 十字架贖罪代贖救援說(십자가속죄대속구원설). 聖父(성부).聖子성자).聖靈(성령)의 三位一體說(삼위일체설)등
이것은 에수님 가르침의 예수님 말씀이 아니고
바울의 말이고 바울의 敎儀(교의)일뿐인 것을 알아야한다.
바울이 예수님의 영성가르침을 正面(정면)으로 否定(부정)한 바울의 말이 로마서 8장 11절에 있기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였다.
얼핏 읽으면 예수님 말씀과 같은 것같지만 이건 같은게 아니고 완전히 틀린말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한 것은
죽었던 肉身(육신)을 다시 살게 한다는 肉身復活(육신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肉身復活(육신부활)을 말씀하신 적도 없고
聖靈(성령) 거듭남으로 靈(영)의 復活(부활)을 말씀을 하신 것인데 바울은 육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말이 맞다면 마태복음 27장 26절에 기록된 말씀인
예수님의 숨이 끊어지기 바로 직전에 하신 말씀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絶叫(절규)하신 말씀이 틀린 말이 되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이렇게 몸뚱이에 연연해 하시어 이런 엉터리없는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닐 것이 확실한 것이지만
바울의 논리데로라면 앞뒤가 안맞는다는 말인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한 사람은 아예 죽은 자로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이신 걸
생각하면 바울의 이 교의가 예수님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만든 사도신경을 여기 옮겨보면
{ 全能(전능)하사 天地(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主(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聖靈(성령)으로 孕胎(잉태)하사 童貞女(동정여)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苦難(고난)을 받으사 十字架(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葬事(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全能(전능)하신 하나님 右便(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審判(심판)하러 오시리라
聖靈(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聖徒(성도)가 서로 交通(교통)하는 것과 罪(죄)를 赦(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永遠(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
여기에 ① 聖靈孕胎(성령잉태)로 童貞女(동정여) 마리아에게서 예수 聖靈誕生說(성령탄생설)이 나오고
② 죽은지 사흘만에 예수님 肉身復活說(육신부활설)이 나오고
③ 산자와 죽은 자의 最後審判說(최후심판설)이 나오고
④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예수=하나님이라는 설이 나오고
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몸이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는 몸뚱이 永生(영생)믿음설이 나온다.
이것을 교회 신도들은 예배에 앞서 다들 눈을 감은체 그냥 생각없이 무슨 呪文(주문)을 외우듯이 졸졸 입술로 고백을한다.
바울의 이 사도신경은 肉(육)은 無益(무익)하나 살리는 것은 靈(영)이니라 하신 예수님의 靈性信仰(영성신앙)의 말씀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背馳(배치=반대로 어긋남)되는 말이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한 바울의 말데로라면 지금도 바울 자신이나 예수님이 어딘가에 살아 있어야 설명이 되는 말인 것이다.
物質(물질)인 몸은 나고 죽는 것이 自然(자연)의 攝理(섭리)이고 秩序(질서)이고 하나님의 絶對眞理(절대진리)인 것임을 안다면 바울의 이 말은 바울 자신이 執着(집착)한 몸뚱이 꿈속에서한 헛소리를 현실로 錯覺(착각)한 夢遊病患者(몽유병환자)같은 幻聽(환청)이나 幻覺(환각) 같은 소리일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다는 예수님 말씀은 靈(영)의 復活(부활)을 말하는 것이지 썩을 몸뚱이인 肉身(육신)의 부활을 말한 것이 決斷(결단)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실은 가고 오는 나라가 아니고 성령으로 거듭나면 바로 거듭난 그 심령의 자리가 하나님의 聖殿(성전)이고 至聖所(지성소)이고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성령 거듭남을 肉體復活(육체부활)로 巧言令色(교언영색)의 巧妙(교묘)한 말로 바꿔치기한 사람이 바울인 것이다.
돼지에게 珍珠(진주)가 무슨 所用(소용)이며
개에게 黃金(황금)덩이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개눈엔 냄새나는 누런 똥이 황금덩어리보다 더 귀한 먹거리가 아닌가
몸뚱이를 참나로 알고 사는 사람에겐 예수님 말씀이 영으로 안풀리고 몸뚱이 욕심으로 알아 들어서 그런것이 아니겠는가
肉(육)은 無益(무익)하다는 말은 肉身(육신)이란 몸뚱이는 나고 죽어야 할 한 때의 物質(물질)이지 영원한 생명인 참생명이 아니라는 말이고
살리는 것은 靈(영)이란 말은
靈(영)이야말로 나지도않고 죽지도 않는 영원한 永生(영생)의 하나님생명인 聖靈(성령)인 그리스도라는 말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닌가
내 속 心靈(심령)의 밭에 播種(파종)해주신 하나님 성령의 씨앗 성령을 참생명의 참나로 알고 깨쳐 거듭난 사람은
이 땅에 사는 동안도 그 영으로 하나님 아들로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몸 삶을 살다가 몸이 죽어도 영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한다는 말이고
몸뚱이를 참나로 알고 몸뚱이 탐욕심만으로 물먹듯 죄만 짓고 살고 하나님 주신 성령 씨알을 버린 사람은 몸이 죽으면 영도 죽어 영원히 멸망해버린다는 말이다.
붓다님은 어버이로부터 받아나온 貪慾心(탐욕심) 덩어리의 몸나와 마음나인 利己的(이기적)인 自我(자아)를 無明(무명)이라 했고
니르바나님(하나님)으로부터 받아나온 佛性(불성=성령)의 나를 法燈明(법등명) 自燈明(자등명)이라 하여 眞理(진리)의 빛이라 하였다.
이게 무슨말인가 하면
구태어 無明(무명)인 自我(자아)에 속아 살질말고 자기 속에 있는 니르바나님의 佛性(불성)으로 깨어나라는 말인 것이다.
葬事(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몸이라면
처음부터 하나님의 權能(권능)으로 그 十字架(십자가)상에서도 死刑執行官(사형집행관)과 많은 무리들이 보는 가운데 자유하신 榮光(영광)의 빛가운데 空中(공중)에 浮揚(부양)하시어 얼마던지 하나님 권능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가 있었음에도 왜 십자가 죽음과 죽은후 부활까지사흘이란 節次(절차)가 必要(필요) 할 것이며 再臨(재림)이 필요하단 말인가.
이게 다 鬼神(귀신) 풀빵 씹어먹는 흰소리일뿐인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聖靈復活(성령부활)을 몸뚱이 부활로 알고 그걸 合理化(합리화) 하려다 보니까
童貞女(동정녀) 聖靈孕胎誕生說(성령잉태탄생설)이 만들어지고
예수님만 하나님의 독생자란 요상한 말도 만들어지고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몸이 살아났다는 肉身復活說(육신부활설)이 만들어지고
십자가에 예수가 못박혀 죽으심은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代贖(대속)의 祭物(제물)로 죽으신 것이니 이걸 믿고 받아 들이면 다 救援(구원)받아 天國(천국)간다는 贖罪代贖(속죄대속)의 救援說(구원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 속에 하나님 씨가 든 것으로는 다 하나님의 아들될 예비 아들이란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참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마다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씨앗을 참나로 깨달아 알고 거듭나야 다 하나님의 참아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게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이 걸 알아 들으라고 늘 예수님은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無限宇宙(무한우주)의 虛空(허공) 펼쳐진 宇宙萬有(우주만유)의 모든 것이 사람에서부터 모든 천체에 이르기까지 모래알 하나에서 먼지 입자 하나 물 한방울 꽃 한포기 새 한마리 박테리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질서란 그릇 안에서 쉼없이 生滅(생멸)하는 생멸의 循環(순환)고리 안에서 끊임없는 변화의 리듬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在臨(재림)은 또 무슨 재림이고 開闢(개벽)이니 先天(선천)이니 後天(후천)이니 하는 것은 또 무슨 말이고
새하늘 새땅은 또 무슨 잠꼬대란 말인가
이게 다 몰라도 너무 몰라서 하는 꿈속 말들을 현실인양 錯覺(착각)하고 하는 無知(무지)에서 나온 욕심의 말들인 것이다.
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다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일들이다.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아들되어 하나님 나라 가는 것도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하고 짐승으로 살다가 영원히 멸망하는 것도
다 사람의 自由意志(자유의지)에 맡기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사랑 이시고 섭리 이시고 진리 이심을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이 것을 못알아 듣고 선무당 굿하듯이 엉뚱한 소리들을 하고 있는 것은
다 몸뚱이에 붙은 未練(미련)을 탁 끊질 못하고 그 잘난 썩어질 몸뚱이 맛에 執着(집착)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다.
예수님 가르침을 한마디로 한다면 영원한 멸망으로 끝날 생명인 몸나와 마음 나인 자아를 벗어 던지고 영원한 생명인 성령 씨알의 얼나를 깨달아 알고 거듭나 하나님의 참아들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면 몸살림은 저절로 될만큼 된다는 것이다.마태복음 7장 13절서 14절 말씀에 있기를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滅亡(멸망)으로 引導(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狹窄(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하였다.
여기서 들어가라는 좁은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몸나와 마음 나의 自我(자아)인 짐승 성질의 몸뚱이 貪慾心(탐욕심) 덩어리인 物質(물질)의 나를 否定(부정)하여 버리고 하나님이 播種(파종)해 주신 성령 씨알의 참나인 靈我(영아)의 얼의 나로 살아가야할 삶의 入口門(입구문)이 좁고 그 길이 狹窄(협착)하다는 말이다.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신 것은
마음으로는 願(원)이나 肉身(육신)이 弱(약)하도다 하시며 제자들을 警責(경책=경계토록 꾸짖음)하신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이 저만치서 기도하는 그새를 못참고 정신놓고 졸고 있었듯이
모든 사람들이 넓은 문과 큰길인 몸뚱이 욕심으로 살아가는 佚宕(질탕)한 快樂(쾌락)과 物質(물질)의 길을 擇(택)하여
于先(우선) 보기에 쉬운 길인 그 길이 永遠(영원)한 滅亡(멸망)으로 이어진 죽음의 길임을 모르고 그리로 다들 맛도 있고 멋도 있고 짜릿도하고 간지럽기도 하고 아뜩하기도 하다면서 꾸역 꾸역 들어간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 5절 씨뿌림 비유의 말씀에서 이런 마음밭을 말씀하시길
흙이 얇은 돌짝밭이라 하여 성령의 씨앗을 파종했으나 심령 밭이 썩어질 물질에만 마음이 미쳐있어서 씨가 싹을 낼 수가 없어 금방 말라 비틀어져 죽는다는 말씀을 해놓으셨다.
마가복음 7장 21절서 23절 말씀에 있기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惡(악)한 생각 곧 淫亂(음란)과 盜賊(도적)질과 殺人(살인)과 姦淫(간음)과 貪慾(탐욕)과 惡毒(악독)과 詭譎(궤휼=속임)과 淫湯(음탕)과 흘기는 눈과 毁謗(훼방=헐뜯음)과 驕慢(교만)과 狂悖(광패=미쳐날뜀)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마음이란 몸나와 마음 나인 자아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자아의 마음으로써의 사람은 너나 없이 다 이런 죄를 짓고도 남을만큼의 罪性(죄성)이 본능으로 潛在(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살인을 했다든지 간음을 했다든지 그런 것을 두고 손가락질 하고 삿대질을 하면서 저 잘난척 할만한 그런 존재들이 못된다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5장 28절의 말씀에 여자를 보고 淫慾(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姦淫(간음)을 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임을 생각한다면 이 말씀이 사람의 마음 실상임을 알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두 種類(종류)의 사람으로 말씀 하시기를
그 하나는 人子(인자=君子=聖人)라 하셨고
人子(인자)가 아닌 사람은 그냥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다.
人子(인자)란 하나님의 성령 씨알로 거듭나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을 말함이고
그냥 사람이라고 하신 사람은 실상은 짐승으로써
몸나와 마음 나인 자아를 참나로 알고 몸뚱이의 짐승 성질로 살아가는 사람을 일컬을때 하신 말씀이다.
마가복음의 이 말씀이 자아를 참나로 알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 속 실상이 다 이렇다는 것이다.
惡(악)한 생각. 淫亂(음란).盜賊(도적)질. 殺人(살인). 奸淫(간음). 貪慾(탐욕). 惡毒(악독). 詭譎(궤휼=속임술).淫宕(음탕) 猜忌(시기=흘기는 눈의 시샘). 嫉妬(질투). 毁謗(훼방) 驕慢(교만) 狂悖(광패)
이것들이 다 貪.嗔.痴(탐.진.치)인 罪(죄)의 씨앗 種子(종자)들로
이런 죄의 종자 씨앗으로 꽈찬 마음이 죄의 誘惑(유혹)으로 늘 넘실대고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 득시글거리는 이 탐.진.치인 죄의 씨앗 종자인 짐승 성질을 말끔히 이기시고 하나님의성령인 靈性(영성)으로 거듭나신 분이 예수님이고 붓다님이신 것이다.
多夕(다석)님의 語錄(어록)에 있기를
[ 우리의 血肉(혈육)은 짐승이다.
우리는 獸性(수성=짐승 성질)인 貪.嗔.痴(탐.진.치) 三毒(삼독)에서 나왔기 때문에 탐.진.치에 빠져 허우적이고 있다.
그래서 악의 화신이 될 자질이 넘치고 있다.
이 고깃덩이인 몸은 온통 죄악 덩어리다.
깜짝 정신을 못차리면 내 속에 있는 하나님 아들을 내쫓고 이 죄악된 짐승이 차지하고만다.
그러면 말과 짓이 온통 짐승이다.
해서 사람은 얼로 깨질 않으면 멸망해버린다.
이 몸은 머지않아 멸망하고만다. ] 하였다.
마가복음 7장의 말씀을 다석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11장 11절서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天國(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였다.
이 말씀은 洗禮者(세례자) 요한이 하나님의 성령 씨알의 참나로 거듭나신 것임을 示唆(시사)하는 말이라 할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 영적인 삶인 영아인 얼나로 사는 삶이 참으로 사람의 삶임을 말하는 것으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없다고 하신 말씀에서도 영성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귀하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람의 삶인가를 예수님이 강조 하신 것인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 있는 글에
「참된 自己克復(자기극복)은 성스러운 영적인 삶을 위하여 動物的(동물적) 삶을 否定(부정)할 때에만 일어난다.
기꺼이 베푸는 사랑만큼 큰 사랑은 없다.
眞情(진정)한 삶은 곧 自己犧牲(희생)이다.」하였다.
자기극복이란 자아의 극복을 말함이고
자아란 몸나와 마음 나의 물질적 탐욕심과 이기심과 排他的(배타적)이고 自己中心的(자기중심적)인 존재를 말함이다.
이 자기 극복은 동물적 삶인 짐승 성질의 삶을 부정해야만 일어난다 하였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톨스토이는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방법론을 이렇게 말한 것이다.
克己復禮爲仁(극기복례위인) 爲仁由己(위인유기) 而由人乎哉(이유인호재)라 하여
자기 자신을 이겨 넘어서고 예를 회복 하는 것이 어짐을 이루는 것이다.
어질고 큰 사랑을 이루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신 孔子(공자)님의 말씀도 같은 말씀이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있기를
『너희가 만일 믿음이 겨자씨 한알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하였다.
믿음이 겨자씨 만큼만 있어도 산을 여기 저기로 맘대로 命(명)하여 옮길 수 있다는 이 말도 譬喩(비유)의 말씀이지 실제로 산이 옮겨지는 奇跡(기적)과 異跡(이적)을 행할 수있다는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은 믿음의 정의를 暗示的(암시적)으로 비유하여 하신 말씀으로
物質(물질)인 몸나와 그 몸나에 빌붙어 종질하며 사는 마음 나인 자아로써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聖殿(성전) 문턱이 닳도록 교회나 성당을 들락거리고 절간 寺刹(사찰)을 드나들어도 그 것이 自我(자아)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狀態(상태)에서는 그게 참믿음이 될 수도 없고 되지도 않으며 자기 몸뚱이 욕심 뒷바라지나 하는 헛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가짜 믿음의 特色(특색)은 무슨 異跡(이적)이나 奇跡(기적)같은 神通龐通(신통방통)한 것을 바라고 慇懃(은근)히 期待(기대)하는 幻覺症(환각증)이나 夢幻症(몽환증) 같은 것이 있는 것이 一般的(일반적)이라는 것이다.
무슨 信仰看證(신앙간증) 한다는 소리를 살펴보면 大槪(대개)가 이런류의 範疇(범주)에 있음을 보게된다.
그럼 참 믿음이란 무엇인가?
自我(자아)를 온전히 否定(부정)하고 自我(자아)를 十字架(십자가)로 짊어지는 것이 그 첫걸음이고
하나님 성령 씨알로 거듭나 靈我(영아)인 얼의 나를 참나로 깨달아 아는 것이 바른 믿음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리되면 믿음을 빌미로 뭘 빌고 바라는 것이 없게된다.
바라는 것이 없게 되었다는 것은 내 것을 다 내놓겠다는 것이다.
몸생명까지 십자가에 다 내 놓으신 분이 예수님이셨듯
예수님처럼 내 몸생명까지 다 내 놓겠다는 믿음이 참믿음이라는 말이다.
바울은 이걸 모르고
예수님이 人類(인류)의 罪(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인류의 죄를 代贖(대속)키 위한 贖罪祭物(속죄제물)로 드려졌다며 유대민족의 祭祀(제사)종교를 말하면서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救援(구원)받아 천국 간다는 駭怪罔測(해괴망측)한 말을 한것이다.
舊約時代(구약시대)때 히브리민족들이 祭物(제물)로 짐승을 죽여 그 피로 燔祭壇(번제단)에 올려 祭祀(제사)지내며 짐승에게 사람의 罪(죄)를 代贖(대속)케 했던 그 祭祀儀式(제사의식)의 論理(논리)를 예수님이 하나님을 생명바쳐 믿고 사랑하신 성스러운 믿음을 완전히 샤머니즘의 迷信(미신)으로 遁甲(둔갑)시킨 것이 바울의 巧妙(교묘)한 敎義(교의)인 것이다.
에수님을 죽게 만든 것은 하나님을 믿질 않는 不信者(불신자)들이 아니라
自稱(자칭)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던 그당시 유대교의 旣得權者(기득권자)들인 바리새파인과 사두개파인들인 祭祀長(제사장)과 書記官(서기관)등 당시 宗敎最高指導層(종교최고지도층)인 자들로부터 鬼神(귀신)들린 異端(이단)으로 몰려서 殘惡(잔악)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이지
인류의 죄를 代贖(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사야서나 다니엘서나 4복음서 이곳 저곳에 등장하는 메시야의 대속제물의 豫言(예언)이나 再臨(재림) 구절은 다 바울파인 아타나우스파에 의해 文脈(문맥)이 再構成(재구성)되어 揷入(삽입)되고 再編輯(재편집)되고 짜집기가 된 것들이란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교를 根本(근본)부터 통채로 否定(부정)한 것임을 알아야한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에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유대교의 大聖殿(대성전)인 예루살렘성전이 하나님을 팔아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각기 자기 잇속을 챙기는 盜賊(도적)과 强盜(강도)들로 醜惡(추악)한 貪慾心(탐욕심)으로 善(선)한 羊(양)들의 피를 빨아 자신의 財物(재물)을 불리기에 急急(급급)한 더러운 저잣거리로 썩어빠지고 腐敗(부패)했다는 말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거룩을 위장한 僞善者(위선자)들의 祭祀儀式(제사의식)의 禮拜(예배)가 겉모양은 거룩한듯하나 속은 썩어빠진 악마구리 巢窟(소굴)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아라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점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는 말은
몸나와 마음 나인 자아로 하나님을 믿겠다는 그것을 허물라는 말이고
사흘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은
이것을 깨닫는 일이 사흘이 걸리질 않는다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이 안되는 것이다.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의 안녕과 복을 바라는 자아의 마음으로 믿는 祈福信仰(기복신앙)은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탈을 뒤집어쓴 욕심 충족의 한 수단일뿐이라는 것이다.
이제 本文(본문)을 살펴보면
1.將欲取天下而爲之(장욕취천하이위지)라 하여
세상을 다 갖고자 욕심을 부려 그짓을 해보지만 이라 하였다.
被造(피조)된 被造物(피조물)인 主宰(주재)에 자기 자신을 모르고 털끝만한 智慧(지혜)가 조금 있다하여 猥濫(외람)되게도 자기 分數(분수)를 모르고 天方地軸(천방지축)으로 내노라며 나대고 들까부는 인간들의 屬性(속성)이 바로 이렇다는 말이다.
세상을 통채로라도 다 깔고 앉아 보겠다고 껄떡거리며 헛물을 켜며 貪慾心(탐욕심)의 잇빨을 부득부득 갈고있는 가소로운 것들이 인간들의 固疾病(고질병)인 傲慢(오만)과 我執(아집)에찬 驕慢(교만)과 放恣(방자)함이
滿足(만족)하고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의 불길 속에 타고 있는 虛妄(허망)한 부나방 같은 존재들인 인간들의 마음이 程度(정도)의 差異(차이)는 있지만 根源的(근원적)으론 自我中心的(자아중심적)인 利己心(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있어서 다 이렇다는 것이다.
物質(물질)인 몸뚱이로써의 삶의 시간이 저마다에게 주어진 것은 극히 짧은 시간에 不過(불과)하다.
時空間(시공간) 制限(제한)을 받질 않는 無限宇宙(무한우주)의 無限次元 (무한차원)에서 본다면 물질로 된 相對性世界(상대성세계)의 時空間(시공간)이란 참으로 無意味(무의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할 것이다.
알고 보면 내 자신의 생명조차도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서 내가 더 살고싶어도 이게 안되는 것이 아닌가.
내 것이라면 내가 내마음데로 할 수가 있어야 내 것일텐데 이게 안되는 것이라면 내게 있어도 내 것이 아닌 것이고 누군가로부터 委托(위탁)받은 것이고
被造(피조)된 것이라는 것으로 傔人(겸인)인 청지기 정도에 지나질 않는 것이 사람이란 존재인 것이다.
이걸 모르니까 내 財産(재산). 내 새끼 .내 마누라 .내 몸뚱이 .내 세상 어쩌구 하는 당토않는 헛소릴 해대는 것이 아닌가.
空手來空手去(공수래공수거)가 나의 본모습임을 안다면
조금은 謙遜(겸손)해질 수가 있고 분수에 족하여 그칠 줄을 알게되는 것이고 불평과 불만으로 부정적인 삶에서 肯定(긍정)과 만족으로 感謝(감사)하는 삶이 되질 않겠는가.
多夕(다석)님의 語錄(어록)에 있기를
[ 사람에게 第一(제일) 貴重(귀중)한 것이 生命(생명)인데 그 생명은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은 臨終(임종)을 맞았을 때 단 일초도 더 늘릴 수가 없다.
眞理(진리)도 시간도 공간도 다 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내 맘데로 할 수가 없다.
내 맘데로 할 수 없는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허튼 妄想(망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망상이 없다.
내 몸도 이 우주도 다 내 것이 아니다.
自然(자연)도 家族(가족)도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다.
一切(일체)를 내 것이 아니라고 否定(부정)해야한다.
그것을 모르면 어리석고 어리석은 것이다.
돈이니 감투니 權力(권력)이니 名譽(명예)니 하는 것도 그것을 몰라서 하는 어릿광대 짓이다.
그러니까 내 것인양 타고 앉아 있으려고 하질 말고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다.]하였다.
莊周(장주)님의 莊子(장자) 人間世篇(인긴세편)에 있기를
瞻彼闋者(첨피결자)라 하여
저 그쳐 멈춘 이를 보라 하였고
虛室生白(허실생백)이라 하여
빈집(빈맘)은 저절로 밝다 하였고
吉祥止止(길상지지)라 하여
길하고 복되기는 그치고 그침이다.하였고
夫且不止(부차부지)라 하여
저 또한 그치질 않으면 하였고
是之謂坐馳(시지위좌치)라하여
이를 일러 앉은자리에서 달리고 있다 한다 하였고
夫徇耳目內通(부순이목내통)이라 하여
대저 귀와 눈을 안으로 통하여 부리고 하였고
而外於心知(이외어심지)라 하여
마음의 하고픔을 밖으로 내친다면
鬼神將來舍(귀신장래사)라 하여
鬼神(귀신=성령)이 곧 와서 내 속에 머문다 하였다.
여기서 闋者(결자)란 그친 사람 또는 문을 닫은 사람이란 말로
몸뚱이 욕심으로 살던 마음 나를 그쳐서 물질로 내닫던 마음 문을 닫아 걸고 멈춘 사람이란 말이고
虛室(허실)이란 빈집으로
몸뚱이가 정신을 담고 있는 집이란 말로 역시 몸뚱이 욕심으로 치닫던 삶을 텅텅 비웠다는 말이고
吉祥止止(길상지지)란
몸뚱이 貪慾心(탐욕심)으로 살던 삶의 價値(가치)중심 삶을 버리고 그쳐 心靈(심령) 속 씨알 맘인 곧은마음의 良心(양심)으로 살아야 복되고 기쁜 삶이라는 말이고
夫且不止 是之謂坐馳(부차부지 시지위좌치)란
대저 그럼에도 또 그치고 멈추질 않으면
이를 일러 몸은 앉아 있어도 마음은 쉼없는 탐욕심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라한것이다.
2.吾見其不得已(오견기부득이)라 하여
얻지 못하는 것을 내가 보노라 하였다.
세상을 다 깔고 앉아 내 것으로 하고자 욕심을 부려 그짓을 해보지만 다 뜬구름을 움켜잡고 바람을쥐어 보겠다는 것 같은 허망한 짓들이라는 말이다.
莊子(장자) 人間世篇(인간세편)에 있기를
①汝不知夫螳螂乎(여부지부당랑호) ②怒其臂以當車轍(노기비이당거철)
③不知其不勝任也(부지기불승임야) ④是其才之美者也(시기재지미자야)라 하여
①그대는 저 버마재비(사마귀)란 昆蟲(곤충)을 알질 못하는가
②사마귀란 놈은 자기 팔을 뽐내며 수레앞을 막아서며 대든다
③자기가 堪當(감당) 해서 이기질 못할 것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④이것이 자신의 재주만 뛰어난 줄 알아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버마재비의 치켜든 앞발이 쇠갈퀴처럼 험악하고 무섭긴해도
이것은 같은 곤충끼리에서나 먹힐 威力(위력)일뿐이지
쇠수레 앞에서 갈퀴발을 쳐들고 사마귀가 대든다는 것은 자기분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荒唐無稽(황당무계)한 일임을 잘 아는 인간이란 존재들도 바로 이런류의 어리석기 짝이없는 짓들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장자님은 이렇게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성경 전도서 1장 첫머리에서 솔로몬이 告白(고백)하길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手苦(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有益(유익)한고
한 世代(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하였다.
인류역사상 여자에서 난자 중에 솔로몬만큼 富貴榮華(부귀영화)를 누리며 산자가 없다고들한다.
그런 솔로몬이 이런 말을 한것이다.
몸뚱이 나를 참나로 알고 그 알량한 몸뚱일 먹이고 입히고 즐기게 하면서 온갖 쾌락을 다 맛보고 누려봤지만 마지막 臨終(임종)을 당하여 죽음과 마주보게 되니 그동안 옳다하고살아왔던 삶들이 한순간에 꺼지는 물거품처럼 허망한 것임을 알았다는 말을 이렇게 한것이 아니겠는가
땅이 영원하다 했지만 땅도 물질이니 언젠가는 다 없어져버릴 것이지 영원한 것은 아니다.
영원한 것은 저 무한한 빔인 허공을 주재하시는 하나님만 영원하신 것이다.
3.天下神器不可爲也(천하신기불가위야)라 하여
세상은 하나님의 그릇인 것이라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天上天下(천상천하)를 莫論(막론)하고 이 無限宇宙(무한우주)릏 創造(창조)하신 創造主(창조주) 하나님(니르바나님)이 宇宙(우주)의 主權者(주권자)이시고 絶對不易(절대불역)의 眞理(진리)의 수레바퀴로 攝理運行(섭리운행)되는 循環秩序(순환질서)의 고리에 담겨 있는 것이 천상천하 宇宙空間(우주공간)의 모든 被造(피도)된 物質界(물질계)의 본모습이라는 말이고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神秘(신비)의 聖器(성기)라는 말이다.
太陽界(태양계)가 屬(속)해 있는 銀河宇宙(은하우주)의 直徑(직경)이 大略(대략) 10만 光年이고
一千億個(일천억개) 이상의 恒星(항성)이 있고
이 은하우주가 한번 순환하는 시간이 2억년이 걸린다하고
이런 은하계의 유한우주가 무한대로 있는 것이 이 무한우주의 모습없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빛이 1년간 내달리는 거리가 1光年(광년)인데
光速(광속)이 時速(시속) 10억 8천만 키로이니
1광년이 9조 칠천억 키로나된다.
하나의 유한우주의크기도 10만 광년 곱하기 9조 7천억 키로로
90만조 7천억 키로이니 가늠할 수가 없는 크기인데
이런 것이 무한허공에 무한한것이 우주의 빔이라하니 우주의 모든 물질은 다 먼지같은 浮遊物質(부유물질)에 지나질 않는다해도 틀린말이 아닐 것이다.
이 우주에 벌려놓은 나고 죽는 모든 물질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이지 스스로 나라고 꺼떡거리며 나설 존재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4.爲者敗之(위자패지) 執者失之(집자실지)라 하여
하는 자는 그 하는 것이 실패하고
잡은 자는 그 잡은 것을 잃게된다 하였다.
누가복음 14장 33절에서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所有(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하였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抛棄(포기)하고 버려야 예수님 말씀에 합한 제자가 된다는 말이다.
이 걸 못알아 듣고 까꾸리로 끌어 모으듯이 자꾸 자기 앞으로만 끌어 모으려고 안달들을 해대고 몸으로 살아서 永生(영생)을 누리겠다고 게 거품무는 소릴 해대니 참으로 失性(실성)하질 않고야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말이다.
자기의 모든 所有(소유)를 抛棄(포기)하고 버리란 말은
나를 위하는데 쓰질말고 남을 위하는데에 쓰라는 말인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布施(보시)하라는 말인 것이다.
자기의 모든 소유란?
그 첫째가 : 물질인 몸뚱이의 능력과 健康(건강)과 힘이고
그 둘째가 : 몸뚱이로 일군 財物(재물)이고
그 세째가 : 몸뚱이로 사는 동안의 시간인 것이다.
이 세가지를 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쌓아드고 아끼질 말고
나 아닌 또다른 나인 여러 이웃을 위해 베풀고 쓰라는 말인 것이다.
섬김을 받고자 하면 먼저 섬기라 했고
첫째가 되어 높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낮아지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爲者敗之(위자패지)란
안해야 할 것을 부득부득 하는 자는 반드시 망한다는 말이 그 참뜻이고
執者失之(집자실지)란
잡질 않고 집찯하질 말아야 할 것을 잡고 집착하는 자는 그 잡고 집착한 것을 반드시 잃는다는 것이 참뜻이다.
無條件(무조건) 하질 말고 잡질 말라는 말이 아니다.
노자님의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과도 같은 말씀이다.
안해야 할 것과 집착해서 잡질 말아야 할 것을 하질 말고 잡질 말라는 말인 것이다.
안해야 할 것과 잡질 말라는 것이란 그럼 무엇인가 하면
바로 몸나와 마음 나의 거짓나인 자아의 탐욕심에 뿌리를 둔 物慾(물욕)을 말하는 것이고
해야 할 것과 반드시 잡아야 할 것이란
내 속에 하나님이 播種(파종)해주신 하나님 성령 씨앗의 참나인 靈我(영아)의 얼나로 성령 거듭남을 말하는 것이다.
한모퉁이를 일러주면 다른 세모퉁이도 짐작으로 알아채라는 공자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이나 노자님의 말씀도 그 숨은 含意(함의)의 속 고갱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5.故物或行 或隨(고물혹행혹수)라 하여
해서 물질이란 혹은 가버리기도 하고 혹은 따라오기도 한다 하였다.
해서 物質(물질)이란 혹은 잡았는가 싶어 내 것인가 하면 내게서 가버리기도 하고
가버렸는가 하면 혹은 때론 내 생각과 무관하게 나를 따라오기도 한다 하였다.
相對世上(상대세상)의 모든 것이 相對的(상대적)이라
나고 죽고 오고 가고 있는가 싶으면 없어지고 興(흥)하고 亡(망)하고 일어섰는가 하면 자빠 넘어지고 幸福(행복)한가 싶으면 이내 不幸(불행)에 휩싸이고
健康(건강)한가 하면 곧 病魔(병마)에 시달리고
이런 것이 오르막 내리막처럼 얼키고 설켜 끊임없는 無限變化(무한변화)가 反復的(반복적)으로 循還(순환)되는 곳이 여기의 物質世界(물질세계)라는 말이다.
본디 이런 것이 물질세계의 참모습이라는 말인데 사람들은 이걸 몰라
이 물질에 迷惑(미혹)되어 執着(집착)하고 愛憎(애증)에 빠져서 물질인 썩어질 몸뚱이와 세상 물질에 넋이 나간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몸뚱이가 먹고 사는 데에 그렇게 많은 물질이 必要(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들 몸뚱이 탐욕심에 종노릇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뿐이다.
사람이 사는 것은 몸뚱이가 먹고 살자고 사는 것이 아니고 精神(정신)이 살자는 것이 아닌가.
새알이 둥지에서 부화를 하여 어미의 먹이를 받아 먹고 깃털이 자라고 날개 쭉지에 힘이 오르고 하늘을 날만큼 다 자라면 둥지를 박차고 날아 올라 둥지를 떠날 때가 오는 것이다.
사람도 이 몸뚱이라는 둥지를 버리고 정신의 나로 飛上(비상)하여 離身(이신)을 해야 하는 것이다.
몸뚱이는 물질이고 精神(정신)은 물질이 아닌 靈(영)인 것이다.
物質(물질)인 몸은 이 精神(정신)의 참나요 얼의 나인 靈(영)을 담고있는 겉 껍데기의 그릇이나 둥지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國家(국가)라면 精神(정신)이 대통령이고 몸뚱이는 머슴이라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거꾸로하여
몸뚱이가 대통령이고 精神(정신)이 卒(졸)로 되어
정신이 몸뚱이의 종질로 사는 것을 좋다하고 사는 것이다.
성경 마태복음 6장 19절서 21절 말씀에서
『財物(재물)을 땅에 쌓아 두질말고 하늘에 쌓아 두어라
中略........
너희 財物(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하였다.
이 말씀을 교회에선 獻金(헌금) 설교용으로 많이 引用(인용)하지만
이 것은 뭘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이 것은 비유의 말씀으로 善(선)한 일에 내 소유를 아낌없이 기쁜 마음으로 쓰고 布施(보시)하라는 말도 되지만
여기서 財物(재물)이란 물질인 財貨(재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精神的(정신적)인 寶貨(보화)를 말하는 것으로
인생 삶의 全目的(전목적과) 價値(가치)의 푯대를 말하는 것이다.
너희 삶의 전목적과 가치의 푯대를 땅(육신세상)에 붙박지를 말고
精神(정신)의 나라인 聖靈(성령)의 하나님 나라에 두라는 말이 이 말씀의 숨은 含意(함의)의 참뜻인 것이다.
6.或歔或吹(혹허혹취)라 하여
혹은 흐느껴 울기도 하고 혹은 악기를 불며 좋아하기도 한다 하였다.
자기 뜻데로 안된다고 해서 憤氣撑天(분기탱천)하여 사람을 怨望(원망)하고 하는ㄹ을 탓하며 속으로 잔뜩 毒(독)을 품은체 자기 욕심이 禍根(화근)의 씨앗임을 모르고 남만 탓하고 혼자 속만 끓이다가 자기 성질을 못이겨서 흐느껴 운다는 말이고
어쩌다가 자기 욕심데로 일이 술술 풀리기라도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죽 해죽 웃으며 삘릴리 삘릴리 나팔을 불어대며 세상을 다 얻기라도 한 것처럼 좋아 날뛰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一喜一悲(일희일비)로 죽끓듯이 感情起伏(감정기복)이 미친년 널뛰듯 한다는 말이다.
몸나와 마음 나인 자앙의 살림살이가 다 이렇다는 말인 것이다.
7.或强或羸(혹강혹리)라 하여
혹은 강하기도 하고 혹은 약하기도 하다 하였다.
自我9자아)의 我執(아집)으로 때론 固執不通(고집불통)으로 굳세기도 하다가
때론 형편없이 自抛自棄(자포자기)로 무너져버릴만큼 연약하기도 하다는 말이다.
8.或載或隳(혹재혹휴)라 하여
혹은 싣기도 하고 혹은 무너지기도 한다 하였다.
자아의 집착심으로 허망하게 쌓아 올리기도 하고 때론 그것이 여지없이 허물어져 風飛雹散(풍비박산)이 나기도 한다는 말이다.
4번에서 8번까지는 몸나와 마음 나인 자아로 사는 삶의 살림살이의 실상이 이렇다는 것을 드러내신 말씀이다.
9.是以聖人(시이성인)이라 하여
이래서 거룩한 사람은 이라 하였다.
聖人(성인)이란 自我(자아)가 거짓의 나임을 깨쳐 알고 하나의 個體(개체)인 자아를 버리고 無我(무아)가 되고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大我(대아)가 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精神人(정신인)인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10.去甚(거심)이라 하여
지나침을 없엔다 하였다.
지나침을 없엔다는 말은 兩極端(양극단)을 버리고 어느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中庸(중용)을 取(취)한다는 말이다.
11.去奢(거사)라 하여
겉치레를 버린다 하였다.
眞率(진솔)하고 솔직담백하여 곧이곧게 있는 그데로의 모습으로 순리에 따라 물이 낮은 곳으로만 흘러가듯 그렇게 낮고 謙遜(겸손)한 마음 ,열린 마음으로 虛勢(허세)와 僞善(위선)이 없이 살아간다는 말이다.
12.去泰(거태)라 하여
큰체를 하질 않는다 하였다.
많이 알아도 많이 아는체를 안하고
많이 가졌어도 많이 가진체를 안하고
잘났어도 잘난체를 안하고
높아도 높은티를 안내고
일이 잘 되었어도 잘된 티를 안내고
일이 못 되었어도 못된 티를 안내고
기뻐도 헤헤거려 기쁜체가 없고
슬퍼도 찔찔짜고 울고불며 슬픈티가 없고
사랑해도 사랑하는 체가 없고
미워해도 미워하는 티가 없고
그저 그러려니 물처럼 바람처럼 사는 것이
다 나 아닌 많은 다른 나의 또다른 나들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도무지 ...체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성인의 마음 씀씀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6장 27절서 28절 말씀에서
『너희는 怨讐(원수)를 사랑 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 해주고 너희를 詛呪(저주)하는 사람들을 祝福(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虐待(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라 』하고 예수님이 말씀 하신 것이 내 삶 속에서 꽃피게 하려면
聖人(성인)이 우리도 다 되어야 한다는 것을 노자님은 이렇게 밝히신 말씀이다.
老子(노자)님의 말씀에
聖人不病(성인불병) 以其病病(이기병병) 是以不病(시이불병)이라 하여
聖人(성인)은 病(병)이 없다.
그것은 病(병)을 病(병)으로 알아서 그렇다.
이래서 병이 없다 하였다.
여기서 病(병)이란 몸뚱이의 病(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自我爲主(자아위주)로 나만 옳고 바르다는 自我(자아)의 獨善的我執(독선적아집)에 굳어지고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排他的(배타적)이고 利己的(이기적)인 精神的不具(정신적불구)를 비유하신 말씀이다.
中也者天下之大本也(중야자천하지대본야)란 中庸章句(중용장구)의 말씀처럼
치우침이 없는 중용의 도를 노자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7장 3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어찌 깨닫질 못하느냐 』하신 말씀도 다 같은 脈絡(맥락)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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